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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쇼콜라-러브써치펌1.txt

#아래 소설은 일반인이 거북해 할수 내용이 담겨 있을수 있습니다. BDSM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되돌아가기를 누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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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가: 애플그린 (casino92@hanmail.net)
창작실: 30대plant.1
제 목: 러브써치 펌
편 수:1-49(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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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SEARCH FIRM

1.


- 그걸 왜 내가 해야 되는데?


재원은 지금 자신의 사무실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할아버지의 말을 전하는 사촌형 정원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 할아버지 명령이라니까........우리 노회장님 깊은 뜻을 몰라서 그러냐?



- 몰라! 내가 왜 거기 일에 나서야 하는데! 그렇게 중요한 브레인이면 정통부 본부장이 나서면 되는 거 아냐? 내가
왜 남에 밭에 가서 밭을 매줘야 하거야? 도대체!



그는 이제 서서히 열이 오른다.

해외 지사에서 돌아 온지 이제 1년. 처음 노 회장이 그를 불러들이면서 현재 그가 맡고 있는 디지털 &미디어 사업
본부를 맡길 때는 그에게 핵심 사업인 정보 통신 사업부는 넘보지 말라는 의중을 감추지 않았었다.

그래놓고 지금에 와 그 쪽 사업부의 핵심 브레인 유출을 막으라니.......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처사였다.



- 정 재원 본부장 님! 남의 밭이 될지 자기 밭이 될지는 아직 더 두고 봐야 하는 거 아냐?



- 무슨 소리야?



정원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에 재원은 저 능글능글한 구렁이 같은 사촌 형의 속셈을 간파 해보려 눈을 가늘게 뜬다.




- 7월에 정기 이사회 있는 거 알지? 아마 고위 임원급 인사이동도 그때 회의 안건에 올라갈걸! 그럼 앞으로 석 달
남았는데........노회장님이 뭘 원하시고 지금 이런 일을 너한테 맡기시는 건지 대충 짐작해야 하지 않아?



그래! 정기이사회! 그리고 인사이동! 잠시 잊고 있었던 사항이다. 저녁에 있는 수연과의 약속 때문에 그는 마음이
심란해져 있었다.

그 때문에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재원은 머릿속으로 재빨리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해 본다.

인사이동과 핵심 브레인 유출 방지! 할아버지는 그가 정보통신 사업부로 고개를 들이밀 근거를 마련해주기 위해
기회를 주려는 셈인 것 같았다. 거기다 그 곳의 조짐을 엿 볼 수 있는 틈 까지 주려는........



- 그럼 형 얘기는 할아버지가 나한테 정통 쪽을 맡기시려고 그러신다는 말이야?



재원은 돌리지 않고 직접 물었다. 간단한 얘기를 이렇게 빙빙 돌려대는 사촌형의 속셈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태도였다.



- 알아서 생각해라. 그 만큼 힌트를 줬으니.......너 머리 좋잖아! 그 머리가 내린 판단이면 믿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에다 이제 슬그머니 재원을 떠보려고 까지 한다. 재원은 차가운 웃음을 사촌형을 향해 흘려보낸다. 어리다고
얕보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서 말이다.016 *11 5325

- 알았어. 될 수 있는 대로 빠른 시간 내에 처리 하겠다고 말씀 드려줘. 그리고 직접 말씀 하시지 않고 형을
보내셨을 때는 그만큼 기밀을 유지 하고 싶으셨던 거 같으니까 앞으로 진행 되는 사항도 형한테 보고 할게.



그리고는 정원이 원하는 말을 잊지 않는다.

잠시 후, 재원은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있던 몸을 일으킨다.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사촌형에게
그만 돌아가 달라는 고개 짓을 해 보인다.

정원은 알았다는 손짓을 해보이며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서 일어나 문을 항해 걸어간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재원의 몸을 훑어본다.



- 너.......옷차림 좀 바꾸면 안 되겠냐? 아무리 뉴욕에서 온지 얼마 안됐다고 해도.......그런 차림은........아무튼
신경 좀 써라!



마지막으로 던진 그 말! 불같은 성격의 재원에 심기를 건드리려는 의도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냥 넘어 가지
않는다.




- 난 형처럼 늙지 않았어. 형이나 나이보다 늙어 보이지 않게 신경 쓰지 그래!




그러자 사촌 정원은 싸가지 없는 말버릇은 여전하군! 하는 표정으로 문을 닫고 나가 버린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대고 한 뭉치의 서류가 날라들어 문에 부딪히며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 저 능구렁이 자식!

할아버지가 왜 저 속이 시커먼 사촌형을 통해 이런 일을 전달하게 시켰는지 원망스러워 화가 났다.

사촌 형제들 가운데 누구보다는 자신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정원의 속내를 모를 리 없는 노인네가 말이다.




재원은 책상 뒤로 돌아가 자리에 앉으며 전화기 버튼을 신경질 적으로 누른다.



- 박 부장 올라오라 그래!


그리고는 푹신한 듀얼백 의자에 몸을 묻으며 어디서부터 들추어 나가야 할지 생각을 해본다.

브레인 유출을 막는 일은 얼핏 보기엔 간단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의외로 속을 헤집어 보면 경쟁사와의 관계가 얽힌
민감 사항 인 것이다.

그 만큼 섣부른 접근은 금물 인 일이었다. 그러자면 우선 그 대상이 된 브레인과 그를 데려가려는 경쟁사가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느 줄을 통해서 들어온 말인지를 조사하는 게 순서였다.

골치가 아프다. 저녁 때 수연을 찾아가야 할 정말 끔찍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녀에게 가서 선물을 전해주고 같이 식사를 해야 하고 그리고 그녀를 집에까지 바래다 줘야 할 일들이 마치
중세시대 죄수가 족쇄를 차고 물이 찬 지하 감옥으로 끌려 들어가는 그런 그림을 눈앞에 펼쳐지게 했다.



- 부르셨습니까. 본부장 님.



얼마 후,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선 박 부장 때문에 재원은 더욱 기분이 언짢아 졌다.


- 노크 할 줄 몰라?



- 아 네! 죄송합니다.



저 싸가지가 오늘은 또 왜 저래? 박 팀장은 인상을 벅벅 쓰고 앉아 나이도 한 참 위엔 자신에게 반말을 해대는
재원의 앞에 허리를 숙이고 눈치를 살핀다.




- 지금 하는 일 미뤄 두고 이것부터 알아 봐요.




재원이 책상 서랍에서 얇은 황토색 서류 봉투를 꺼내어 책상 위로 던졌다.



- .......뭡니까?




- 그걸 왜 물어봐요? 박 부장이 직접 보라고 지금 서류 주는 거 아닙니까!



- 아.......네.



- 오늘 바로 검토 하고, 닷새 안으로 조사해서 직접 내 E- 메일로 보내요. 박 부장 외에 다른 사람한테 새어나가게
하지 말구.



- 닷.......새요?



- 두 번 얘기 안합니다. 나가 보세요.



그는 멀뚱히 서 있는 박 부장을 보지도 않고 손목을 까닥 거려 나가라는 신호를 해 보인다.



- 네. 알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하고 나오면서도 박 부장은 이제 스물아홉 밖에 되지 않은 이 정 재원이란 싸가지 없는 본부장에게
속으로 욕을 퍼 붓는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문 밖에 있던 재원의 비서실 직원 셋 모두가 안 됐다는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2.


- 헤라야. 이 거라도 하고 해. 얘! 진 헤라.



언니 헤림이 부르지만 헤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화분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엎어진 흙을
쓸어 담고 있었다.




- 얘 옷에 흙 다 묻어. 이거라도 두르고 하라니까.



- 놔둬! 고양이 쥐 생각 해주는 척 하지 말고.



- 야.......미안해. 네가 모처 럼에 너의 그 소중한 휴가를 빼앗은 건 알겠는데.......어쩌
니. 내일 당장 웨딩 쇼에 내보내야 할 부케가 덜 준비 됐는데.



- 언니 제자들 뒀다 뭐하려고? 삶아 먹을 거야?




빈티 나는 폼으로 앉아 흙을 파던 헤라가 언니를 째려보며 투덜댄다.



- 걔네들은 나 도와야지. 네가 부케를 만들 줄 아는 것도 아니고........하지만 이 화분들은 손 볼 수 있잖아. 적당히
가지만 잘라주면 되니까.......



정말 불쌍해 보이는 헤라 옆에 앉으며 헤림은 동생의 어깨를 미안한 마음으로 다독 거렸다.

그래도 헤라는 화가 난다. 근 6개월 만에 겨우 3일 받은 휴가의 첫날을 친구들과의 약속도 펑크 낸 채, 언니의
꽃집에 그것도 비몽사몽간에 끌려나와 내일 웨딩 쇼에서 쓸 화분에 묻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중 이었다.



- 아아. 몰라. 우선 이 흙이나 치우고.......지저분하면 더 정신없어.


흙을 치우고 깨진 화분 조각을 치우는데, 가게 바깥쪽에서 주인을 찾는 남자 목소리가 난다.



- 네........잠깐만 기다리세요.



언니 헤림이 일어나 나가고, 헤라는 흙을 옮긴 화분을 맨손으로 누르며 언니가 두고 간 흰색 앞치마를 둘렀다.
거울을 보니 꼭 정육점 주인 같은 모습이다.

아무렇게나 질끈 묶어 뒤통수에 매달린 머리 하며 세수도 못하고 나와 푸석한 얼굴.......정말 싫다.

그녀는 흙 묻은 손을 앞치마에 대충 문질러 닦고 족히 10킬로그램은 나감직한 스파디필룸을 들어 끙끙거리며
가게의 안쪽에서 밖으로 나왔다.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탓에 가게 안으로 붉은 기운이 몰려 들어와 있다.
그 곳에 언니가 빨간 찔레 장미로 꽃다발을 만들고 그 맞은편에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고급스런, 뭐 브랜드가 명품 쯤 되어 보이는 스카이 블루에 보라색 잎 새 문양이 들어간 셔츠와 진한
색 헐렁한 면바지를 차려 입은 남자는 상당히 세련돼 보였다.

그런 남자를 보자 헤라는 지금 자신의 목골이 더 처참하게 느껴져 화분으로 얼굴을 가리고 종종걸음을 치며
걸어갔다.

그리고 화분을 손질하는 테이블에 화분을 힘겹게 내려놓는 순간, ‘빠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그 것이 놓여진 자리에
조금 푹신한 느낌이 든다.



- 뭐야? 누가 여기에 뭐 올려놨어?



화분의 밑에 깔린 물체가 무언인지 확인하려 헤라는 허리를 숙였다.
남자의 옷만큼이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정색 가죽 가방.......그리고 이어 들리는 목소리.



- 야! 너 눈 없어?



나보고 하는 소린가? 헤라는 허리를 숙인채로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봤다.



- 뭘 봐! 그 화분이나 치우지.



그 남자! 꽃다발을 사려고 언니 앞에 서 있던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초면부터 웬 반말지거리?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눈을 내려 깔고 미간에 주름을 잡아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잘 생겼다.



- 이 밑에 있는 물건이 그쪽 거예요?


하지만 잘 생겼건 못생겼건 그녀에게 남자는 다 똑 같았다. 헤라는 허리를 펴고 몸을 세워 남자와 마주 선다.



- 화분이나 치우라고 했어.


한 쪽 손은 바지에 찔러 넣고 비뜨름하게 서서 이어지는 반말! 그러나 헤라는 그가 시키는
데로 우선 화분을 치웠다.

그러자 남자는 테이블 위에 놓인 그 고급스런 가죽 가방을 열어
안에 있는 물건을 꺼냈다.



- 만약 모니터 액정이 나갔으면 각오해!

그리고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협박 비슷한 어조로 말 한다.

황당한 노릇 이었지만 지금 문제는 물건의 상태였기 때문에 헤라는 이번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모니터가 열리고 남자의 미간이 다시 한번 찌푸려진다. 회색을 보여야 할 액정이 불행이도 가운데가 금이 가고 검정
먹물이 새어 나온 것처럼 변해 있었다.



- 제기랄!



그가 욕설을 내뱉으며 거칠게 노트북의 모니터를 닫아버린다.

헤라는 그의 거친 손동작에 잠시 몸을 움찔 했다. 가까이서 보니 키가 그녀보다 한 뼘 반 이상은 더 커 보여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 왜 왜 이런 걸 이렇게 아무데나 올려놔요?



하지만 남자의 체격에 주눅 들지 않으려고 그녀는 턱을 들어 따지듯 물었다.
거기에다 괜히 미안 하단 말이나 먼저 했다가는 옴팡 뒤집어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또 뭐야?

하지만 상대의 입장은 다른 법. 재원은 어디로 보나 아르바이트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의 반응에 열이 뻗힌다.

이럴 땐 보통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얌전한 고양이처럼 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지금 이 태도는 뭐란 말이야?


- 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눈 없어? 폼으로 달고 다녀?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며 재원은 그녀를 발끝에서 머리끝 까지 훑어 봤다.

지저분한 앞치마에 인생 포기한 여자 마냥 묶어놓은 머리 하며 화장품 살 돈도 없는지 푸석한 얼굴, 여자의 미덕은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그에게 그녀는 겉모습만으로도 짜증나게 만드는 여자였다.



- 배상해!

간단하게 말했다. 사정을 봐줘 야할 가치를 못 느낀다.

혹시라도 옆에서 놀란 토끼 같은 눈을 하고 서 있는, 연상 같지만 조금쯤은 매력 있어 보이는 여자였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이 알바 생은 아니다.



- 뭐요? 배상?......자기 물건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고 아무데나 내팽겨 친게 누군데! 지금 나보고 배상 하라 그
말이에요?



배상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여자는 펄쩍 뛴다. 그럴 줄 알았다.



- 남의 물건 부쉈으면 배상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냐? 너 바보냐? 설마~ 그런 상식도 없는 저능아야? 아~ 하고
다니는 꼴 보니 그렇긴 한가 보구나. 정상이라면 이렇게 하고 나다닐 생각은 못하지. 더구나 꽃 파는 곳에서.




그는 미안한 표정 하나 짓지 않고 따져드는 이 알바를 밟아 버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점점 흥분 하고
있었다.

수연을 만나러 가야 하는 일만도 짜증이 나는데 그녀에게 갖다 주라 새어머니로부터 명령 받은 노트북 까지 망가진
일이 그의 더러운 성질을 건드린 것이다.



- 뭐? 너 지금.......저능아라고 그랬니?



헤라는 너무 기가 막혀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뭐 이런 거지발싸개 같은 자식이 다 있어? 아무리 내가 자기 노트북에 흠을 아니 상처를 냈기로 처음 보는
여자한테 저능아라니!


- 상식 밖의 인간은 너야! 어디서 그 따위로 배웠니? 초면에 여자한테 반말지거리에 욕까지 하라고
그러디? 보아하니 강남 졸부 아들 쯤 되는 모양인데 너 네 동네 에서는 다 그러냐?
이 멍청한 자식아!



그래! 너도 막말 듣고 더 열 올라 봐라 어디.......그녀는 자기처럼 기 막혀 하는 재원에게 쏘아 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그 오만하고 싸가지 없는 얼굴을 향해 턱을 더 치켜들었다.


졸부 아들 이라........거기다 멍청한 자식? 그는 픽 하니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참았다.

천하의 정 재원이 겨우 알바 생에게 졸부 아들이라는 소리에 자신이 욕을 했다고 똑같이 멍청한 자식이라는
욕을 듣다니.......하지만 굳이 바로 잡을 필요성은 없는 일인지라 그는 무시했다.

그러나 재원은 여자의 속셈만은 그냥 넘어 가기 싫어졌다. 보기랑은 다르게 영악한 구석이 있는 여자다. 뭐 나쁜
쪽으로.

그래서 그는 입에 비웃음을 물고 그녀를 바라본다.



- 오호라~ 날 열 받게 해서 한대 치게 만들 속셈 인가 본데! 그 정도 가지고 내가 널 치겠냐? 어디 더 해봐라.
내가 널 칠 때까지.



차라리 여자가 날, 치게 만드는 편이 빠르겠다 싶어 그는 더 막나가는 말을 한다.



- 아.......죄송합니다. 손님. 흥분은 서로에게 다 이로울 것이 없으니 그만 마음 가라앉히시고요......... 배상은
최대한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드릴 테니 우선.......



다음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어쩔 줄 몰라 식은땀만 흘리고 있던 연상의 여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언니 헤림이 드디어 중재에 나선다. 본래 중재하는 일은 헤라가 전문 이었지만 오늘만은 예외인 날 이었다.



- 배상은 무슨!



헤라는 언니를 향해 낮게 소리 지른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배상이라니 더구나 저런 싸가지한테.



- 너! 입 다물어라. 알바.



재원은 점점 더 열이 뻗는다. 도무지 말이 통 할 것 같은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여자였다.

하지만 좀 전부터 반짝 반짝 빛나는 여자의 눈만은 묘하게도 재원을 시선을 붙들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손님 죄송합니다.



헤림은 씩씩대며 분을 삼키지 못하는 헤라의 옆구리를 질벅거리며 잠자코 있으라는 눈짓을 해 보낸다.



- 그럼.......전액 다 배상해 드려야 하는 걸까요?



최대한 애처로운 눈빛을 보재며 헤림은 친절한 미소 또한 잊지 않았다. 제발 다 배상하란 말만은 말길.......



- 당연 하죠. 전액 모두.



하지만 그에게서 나온 말은.......



- 그 그럼 도대체 얼마나........?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침을 꿀꺽 삼키며 묻는다.

바보 같은 언니! 저러니 형부라는 놈한테 맨 날 사기나 당하지.......물러 터져서.......헤라는 답답하기만 언니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우선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올 액수가 궁금해져 참고 있었다.



- 정확히 출고가 삼백 육십팔만 천 육백 삼십 원! 시가는 오백만원이 넘지만 난 시가로 구입하지 않았으니까
출고가로 배상해 줘요.

허걱! 삼백 육십팔만........지금 장난 하나? 노트북이 값나가는 물건이라는 건 대한 민국 국민이 다 아는 사실
이지만 이건 해도 너무 한다.



- 이봐요. 아저씨 삼백 육십 만원이 뉘 집 애 이름 이니? 그걸 내가 왜 다 물어? 그쪽 잘못은 절대 인정
안하겠다는 얘기야? 그렇게 비싼 걸 왜 아무데나 놓느냐고. 그게 그쪽 실수 아니야?



헤라는 몇 초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하고 그 말도 안 되는 액수에 다시 발끈해, 재원의 심기를 더욱 건드렸다.

그렇지만 그는 더 이상의 흥분은 이 말이 통하지 않는 알바와의 대화에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더구나 수연과의 약속 시간은 이미 십 분 이나 지나 있었다.




- 됐습니다. 오늘은 제가 시간이 없으니 여기서 관두고 곧 내용 증명을 보내겠습니다. 이곳으로요. 하지만 이틀
정도 여유를 드리지요. 그 안에 배상을 할 건지 법적 절차로 들어 갈 것인지 결정시켜 주십시오, 이 알바한테.

그는 결국 비즈니스 적으로 이 일을 처리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말한 액수에 더욱 겁먹은 눈이 되어 있는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알바는 허리에 손을 얹고 다시 입을 열었다.



- 내용 증명? 그래 한번 보내 보시지. 나도 같이 보내 줄 테니까.




도무지가 끝 까지 한 마디도지지 않는 여자다. 도대체 저런 몰골 어디에서 이런 용기가 나오는 건지 재원은 화가
나기보다는 갑자기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 하는 것을 느꼈다.



- 야! 알바! 너 나한테 꼬박 꼬박 대꾸하는 그 용기는 가상한데. 누울 자리인지 아닌지나 제대로 보고서 다리
뻗어라. 잘 못하면 그 다리 내가 콱 밟아 버리는 수가 있거든!




그는 입 꼬리에 장난스런 웃음을 걸며 이 신데렐라 몰골을 한 여자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는 뒤 돌아섰다.

뭐야? 지금 비웃는 거야? 헤라는 이 싸가지 라고는 눈을 뒤집고 봐도 보이지 않을 건방진 남자의 웃음에 자존심이
상한다.

순간 뒤에서 그녀가 재원을 정강이를 걷어찼다.



- 너 자꾸 알바! 알바! 할래? 알바라고 얕보는 거야 뭐야?



다리를 쥐며 껑충 껑충 뛰는 재원을 보며 헤라는 아차 하는 후회를 하지만 벌써 엎질러진 물이었다.



- 이게 진짜!




남자의 손이 올라가고 헤라는 순간 본능적으로 눈을 꼭 감고 몸을 움츠렸다.

그의 손을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살며시 눈을 떠 그를 올려다봤다. 올라가 있던 손이 스르르 내려가며
남자의 입에 또 한번 웃음이 걸려 있었다.

어이없다는 웃음!

그 웃음 뒤로 그는 정말 내용증명을 보낼 셈인지 언니의 명함에 그녀의 이름을 받아 적었다. 그리고는



- 너........조심해라!



라며 눈가에 웃음을 담고 말한 뒤 가게를 나갔다.





4.





- 너도 참! 왜 그놈에 성질은 나이가 먹어도 죽질 않니?

남자가 나가고 헤림은 동생을 향해 나무란다. 딸만 셋인 집안 에서 막내인 그녀는 유치원 시절부터 항상 남자
아이들과 싸우고 다기 일수였다.

한번은 초등학교에 가서는 어떤 남자 아이가 헤라가 무서워 학교를 나오지 않는 다 말한 아이가 있을 정도였으니까.



- 마지막에 내가 걷어 찬 건 나도 잘 못이라는 거 아는데! 그 자식이 말도 안 되는 액수를 대니까 화가 나서.......



- 너 가 돈 때문에 그런 거야? 남자가 너 무시 했다고 그런 거잖아. 세상 사람들이 다 네게 얼마나 잘 난 여잔 줄
알아 줘야 직성이 풀리니? 그러지 않아도 너 잘나가는 헤더 헌터 라는 건 우리 주변에 알 사람은 다 알아.




- 그런 거 아니래 잖아. 내가 뭐 잘난 척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들은 줄 알아!



- 그럼.......네가 당연히 먼저 사과 했어야 할일을 왜 그랬는데?



왜? 지금 와 생각해보니....... 자기가 어째서 그렇게 처음부터 뻣뻣하게 굴었는지 헤라도 이해가 가지 않는 사실
이었다.

만약 처음부터 고개 숙이고 나갔더라면 절반 보상쯤에서 합의를 볼 수도 있었을 일인데 말이다.



- 몰라.........몰라, 다 언니 때문 이야. 왜 쉬는 사람 불러내 가지고 사고를 치게 만들어!



테이블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헤라는 신경질 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다.



- 그래~ 다 못난 언니 탓이다. 정말........



- 진 선생님!



문이 열리며 가게 옆에 붙어 있는 온실에서 부케를 만들던 헤림의 제자 중 하나가 그녀를 부르러 와 헤라와 헤림의
대화가 끊어졌다.



- 잠깐 와 주세요.




그리고 헤림을 데리고 온실로 사라진다.

언니가 가고 어둠이 밀려들긴 시작한 가게 안에 혼자 앉아 있자니 점점 현실로 닥친 돈 문제가 머리를 파고들었다.



- 아아, 정말 미치겠네. 삼백 육십이라니........



생돈 삼백 육십! 그녀는 앞뒤 생각 없이 그 싸가지 없는 남자에게 대어들은 자신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좀 전 자신과 같이 사고를 친 스파디필룸의 가지를 솎아 내며 헤라는 한달 봉급의 절반 이상이 통째로 날라 갈
일을 생각하며 한숨을 쉰다.

아무리 연봉 육천의 익큐티브 서치 펌이기는 하지만 월급에서 사백만원 가까이 되는 돈이 나가게 되면,

집세와 적금 그리고 새엄마에게 매달 드리는 생활비를 주고 나면 한달을 고스란히 손가락만 빨고 살 처지에 놓인
것이다.



- 하~ 진짜로.......이 놈에 성질머리!



한숨을 쉬며 스스로 머리를 한대 쥐어박고 있는 사이, 핸드폰이 울린다.



- 어. 연주니?



- 뭐해? 아직도 화분 손질 하고 있어?



전화기 너머 연주의 목소리가 또랑또랑 한 것이 수상하다.



- 그래........



- 그러면 내일도 해야 하니?



- 아니. 다행히도 내일은 자유다. 왜? 어차피 휴가 계획은 다 망쳤는데.



- 그건 잊어버리고! 있잖아. 너........ 전에 다니던 휘트니스 클럽 너무 멀지 않아?



- 이사 한지 얼마 안 되서 아직 질 않아서 잘 몰라.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



- 응! 그냥 나도 몸 좀 만들어 보려고. 그래서 며칠 좀 알아보고 다녔는데 마침 마음에 드는 데가 너 새로 이사 간
데서 가까운 것 같더라. 그러니까 같이 다니면 어떨까 하고 말이야.



세상에서 몸 움직이는 일을 제일 귀찮아하는 연주가 운동을 하겠다니........솔직히 헤라는 믿기지 않는 얘기였다.



- 아아. 그래........그래서?




- 오늘 저녁 때 가서 등록 하고 내일 아침부터 다니자고, 어때?




이렇게 서두르다니.......분명 운동 외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뻔하다. 전화상이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눈이
안광을 내 뿜고 있는 것은 거의 확실 했다.

어차피 한번 옮기는 것도 기분 전환 되고 좋겠다 싶었던 차인데 별 생각 없이 헤라는 알았노라 대답을 저녁에 만날
약속을 한 후 전화를 끊었다.








- 늦어서 미안. 사고가 좀 있어서.

수연의 연구소 근처 카페엔 이미 그녀가 먼저 와 차를 마시며 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관념
하나는 철저한 여자다.




- 정말 인가봐. 재원 씨가 늦을 때가 다 있고. 무슨 사고야? 차 사고는 아니죠?
그 비싼 차 받고 등 터질 사람이 불쌍하니까 될 수 있으면 접촉 사고 같은 거는 내지 마요.

차갑고 딱딱하기라면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여자가 오늘은 무슨 바람인지 나긋나긋 콧소리 까지 내고
있었다. 불길 하다.
노트북 때문인가?

- 내 걱정이 아니고 다른 사람 걱정이 먼저네. 차 사고라 생각 했으면 나한테 몸이 괜찮은지를 먼저 물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눈치 없는 여자지만 정말 이 정도 되면 화가 내야 마땅하나 그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웃음.

- 뭐 다행스럽게도 차 사고는 아냐......... 근데 수연 씨한테 안 좋은 사고야.

다음 순간 그는 표정을 바꾸어 계면쩍은 얼굴로 수연의 앞에 노트북을 내 밀었다. 겉모양은 멀쩡했지만 모니터를
열어본 그녀의 얼굴은 그야말로 처참 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 이게 뭐야........어쩌다 이런 거야?

- 그게.......내가 실수를 좀 해서,그렇게 됐어. 미안해. 다음에 언제 회사로 와. 같은 모델로 준비해 놓을게.
그러니까 오늘은 이 꽃다발로만 축하 하자. 저녁 맛있는 거 사줄게.

좀전의 그녀에 대한 답답함을 누르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수연을 다독이며 제발 까탈스러운 그녀가 예스라고
대답 해주길 속으로 간절히 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여기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린다면 그는 새어머니에게 불려가 한나절 이상을 잔소리에 시달릴
것이다. 일부러 그랬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 내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데.......그래서 연구도 다 밀어 놓고 이렇게 나온 건데.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수연은 중얼 거렸다.

- 나.......저녁 먹을 기분 아냐. 재원 씨. 연구소로 들어갈래요.

- 하~ 수연 씨! 노트북 때문에 저녁 약속을 취소하는 건........

- 미안! 어머님께는 내가 죄송하다고 전화 드릴게. 저녁은 먹을 걸로 해요. 우리

아 진짜! 우리 새엄마한테 전화는 왜 하니? 연구소로 그냥 들어가면 끝나는 거지. 알고서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둔해 터진 건지 아직까지도 파악이 되지 않는 여자였다.

그녀는 그 감각 떨어지는 요상한 파랑색 가죽 가방을 어깨에 들쳐 메며 자리를 일어섰다.
어차피 잡아 봐야 소용없을 일 ........카페를 나가는 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재원은 머리를 테이블 위로
떨어트리고 긴 한숨을 쉰다.

- 와........~ 진짜로 짜증나는 하루네. 정 정원 그 인간이 다녀간 하루가 이렇게 재수 없을 줄이야.........미치겠다.
정말!

그의 혼잣말에 서빙을 보던 알바 생 하나가 흘끔거리며 재원의 얼굴을 훔쳐본다. 기분이 더럽기는 했지만 여자들의
저런 시선쯤이야 눈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질리게 받아 온 터라 그는 별 상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을 훔쳐보는 여자를 보자 그는 문득 꽃집에서의 알바가 머리에 떠올랐다. 사실 지금의 이 사태에 그녀도
일조를 한 셈이니 생각이 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뭔가 달랐다. 설명 할 수는 없지만 뭔가가....... 이것도 불길 하다.


5.

집으로 돌아온 헤라는 몸 여기저기 들어가 꺼끌 거리는 흙을 털어 내기위해 먼저 샤워를 했다.
머리를 정성스레 감고 샤워를 마치고 물기를 닦아낸 몸에 물푸레 향이 나는 샤워 스킨 까지 뿌리는 일로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화장대 앞에 앉아 드라이를 하며 연주와의 약속을 준비 했다. 웨이브가 거의 없이 끝부분에만 살짝 남아
있는 웨이브를 살려 머리를 빗고 엉덩이까지 치렁이는 그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한 가닥으로 묵어 늘어트린다.

어떻게 보면 테니스 선수 같은 헤어스타일 이기는 했지만 운동하러 가는 여자가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나풀거리는 것처럼 꼴불견 인 일이 없다고 그녀는 항상 생각했다.


- 여기 지하 주차장도 괜찮지?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연주는 약간 들떠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장이 170이나 되는 그녀는 약간
마르고 여윈 소위 말하는 가냘픈 체구를 가진 친구 였다. 거기다 하얀 피부에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어 꼭
마네킹 같다고나 할까? 하여간 그랬다.

- 이 연주. 너 어째 영 수상하다. 갑자기 운동 하겠다고 나서는 폼이나 이상하게 들 떠 있는 얼굴 하며.......무슨
다른 꿍꿍 이가 있는 거 아냐?

헤라는 엘리베이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그녀에게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 얘는 내가 무슨! 그런 거 없어. 그냥 네가 부러워서 나도 몸 짱 이나 한번 되 볼까 하고 그러는 거야.

약간 당황한 빛을 보이기는 했으나 연주는 금새 가볍게 그녀의 의구심을 잠재웠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연주는 헤라의 몸을 훑어본다. 자신 보다 키는 좀 작았지만 균형 잡히고 탄탄한 엉덩이와 가슴, 거기다
근육이 늘씬 하게 자리 잡은 다리와 팔........옷 속에 숨어 있지만 그래도 숨겨지지 않는 그녀의 완벽한 바디라인!
그 게 부러워서 이러는 게........ 반 정도만 사실 이다!

헤라의 생각처럼 그녀의 속셈은 역시 다른 곳에 있었다.

- 어라! 주차장 층층 마다 서네.

엘리베이터가 지하 4층에서부터 층층마다 서고 있었다. 그러나 타는 사람은 한 사람씩 그렇게 해서 좁은 승강기
안은 다섯 명의 사람이 비교적 넉넉한 공간에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VIP 전용 주차장이라 써 있는 지하 1층에서도 승강기가 서고 남자 하나가 올라 탔다.

순간 연주의 눈이 안광을 발하는 사실을 헤라는 놓치지 않았다.

방금 전 탄 남자! 연주의 목표물 이다.

헤라는 승강기 맨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기 위해 고개를 기웃 거렸다. 청바지에 하늘 색 셔츠를 입고 있는
뒷모습이 영 낯설지만은 않은 남자였지만, VIP 전용 주차장에서 탄 남자를 그녀가 알 턱은........ 없었다.

- 내리자.

5층의 안내 데스크에서 서둘러 내린 연주는 가자마자 바로 접수를 시작했다.

- 뭐니? 알아보러 온 거 아니었어?

- 알아 본건 어제 라고 했잖아. 올라오면서 여기로 결정 했어.

- 참! 너도 속 보인다. 진짜.

헤라가 웃음을 치며 열심히 회원 카드를 작성 하는 그녀를 신기한 물건이라도 보는 듯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카드 작성에 너무 성의를 다 한 나머지 친구가 자신의 꿍꿍이를 눈치 챈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최고의 남자를 꿰어 차 결혼을 하는 것이 지상 최대의 목표인 친구였다.

연주를 따라 헤라는 회원 신청을 하고 카드를 작성 했다. 한달 강습료가 전에 다니던 곳 보다 5만원이나 비쌌지만
시설이나 모든 면에서 그 값어치를 한다는 연주의 꼬임에 무리를 해버린 것이다.

- 지금 시작 하자. 헤라야. 라커 룸 열쇠 받아 왔지?

시설이나 한번 둘러보고 가려는 헤라의 팔을 연주가 라커룸 쪽으로 잡아끈다.

- 야~ 나 피곤해서 오늘은 싫어.

그녀에게 잡힌 손을 빼며 헤라가 말했지만 연주는 들은 척도하지 않고는 라커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는 수 없이 헤라도 따라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다. 허리가 짧은 하얀색 반팔 면 티와 프러시안 블루의 허벅지 중간
정도를 덮는 좀 짧은 반바지 그리고 흰색양말과 흰색 운동화.......쓰던 물건 그대로 가지고 왔다.

- 헤라야. 이거 어떻게 입는 거야?

라커의 맞은편에서 옷을 갈아입던 연주가 핑크색의 손바닥만한 크기의 쫄쫄이 탑을 들고 왔다.

- 이렇게 작은 게 들어가나?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옷을 집어 들어 심각한 표정으로 헤라에게 물었다.

- 아~ 정말!

헤라는 고개를 절래 흔들며 전혀 운동에는 관심이 없는 친구의 등을 떠밀어 그녀가 준비해 온 운동복중 제일 편해
보이는 긴 바지의 트레이닝복과 역시 핑크색의 면 티를 골라 입혔다.

- 어딨지?

장비가 즐비한 헬스장으로 나온 연주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아마 그 VIP 주차장에서 본 남자를 찾는 모양 이었다.

300평 남짓한 대형 헬스장의 공간에는 30~40명의 남녀가 골고루 섞여 각자의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눈에
남자가 쉽게 눈에 띄지는 않는 것 같았다.

- 워밍업부터 하자. 이런 데선 따로 가르쳐 주는 사람 없어. 그러니까 그냥 나 따라 다니면서 해.

젯밥에만 관심 있는 연주를 끌고 가장 끝 쪽에 있는 트레드밀(러닝머신)의 옆으로 서서 몸을 풀기 시작 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머신을 달리는 남자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쏠린다.

헤라의 멋진 바디라인에 감탄을 하는 남자. 연주의 서구적 미모에 눈을 떼지 못하는 남자 등 두 가지 종류의 시선이
말이다.

그러나 연주는 다른 남자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고, 헤라는 본래 남자를 좋아 하지 않기 때문에 별 의식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라가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닌, 좋아 하지 않는 다는 얘기다.



수연에게 바람 아닌 바람을 맞고서, 재원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도 기분이 찜찜해져 운동이나 하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아침마다 다니는 집 근처의 휘트니스 클럽으로 왔다.

반바지와 반팔 티로 갈아입고 스쿼시나 한 게임 할까 하다가 맘을 바꾸어 헬스장으로 들어 왔다.

- 오셨습니까.

관장이 다가와 먼저 그에게 인사를 건넨다.

- 네.

재원은 짧게 대답을 하고는 주뼛거리는 관장을 남겨두고 트레드 밀 쪽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보니 뛰고 있는 남자들의 고개가 모두 왼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웃기는 군! 다들 뭐야?
그들의 시선을 따라 재원의 눈도 움직였다.

왼쪽 제일 끝에 있는 두 여자! 남자들의 시선에 종착점은 그곳 이었다.

겨우 여자들 때문에 운동을 저렇게 하나! 한심한 인간들.......그는 그들을 비웃었다.
그렇지만 얼마지 않아 그는 거두어 들였던 시선을 다시 그녀들에게 옮겨야만 했다.

머리 모양도 다르고 옷도 다르지만.......두 여자 중 눈에 확 들어오는 여자는! 몇 시간 전의 그 알바!
재원은 아까 그녀에게 걷어차인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며 한쪽 입 꼬리를 올려 웃는다.

오라! 너 잘 걸렸다.


헤라는 바닥에 누워 다리를 펴고 한쪽 다리를 올렸다 폈다하는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옆에 같이 누운 연주는 누워서도 고개를 돌려가며 주변을 두리번댄다.

하여간 목표에 대한 집착력만은 대단한 애다. 저런 정신으로 공부를 좀 했으면 지금 보다 훨 좋은 직장에 다닐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내가 지금 그런 걱정 하고 있을 때인가?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 삼백 육십이라는 숫자가 눈앞을
아른거리는데 무슨 다른 생각을.......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니니! 대책을!

분명 그 남자가 내용증명을 보내기 전에 이틀 여유를 준다고 했다. 이틀! 하지만 그럼 뭐하나.......법적으로 할 건지
그냥 물을 건지 생각하라는 건데.

정녕 고스란히 다 물어줄 수밖에 없는 건가?
여기에 까지 생각을 하자 이젠 더 생각하고 말 것도 없다 싶어졌다.

- 헤라야!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그 VIP 전용 주차장에서 탄 남자가 내가 어제 찍은 남자 같거든!


연주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지만 헤라는 아무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속으로 혀를 차며 다시 운동에 집중을 하려던 찰나에 왼쪽 정강이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진다.
누가 그녀의 다리를 차고 지나간 것이다.


- 아야! 뭐예요?


헤라는 상체를 일으켜 자신의 다리를 걷어차고 지나간 상대를 올려다봤다.


- 이런 이런! 미안. 그러게 왜 아무데나 몸을 놓고 그러나!



전혀 미안 하지 않은 말투의 남자가 그녀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남자의 털이 북슬북슬한 다리를 지나 검정색 반바지, 그리고 하늘색 카라가 달린 하얀색 티셔츠에서
그의 얼굴로 이르렀다.


- 헉!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헤라를 향해 남자가 야비하게 웃는다.



- 어디 멍이라도 들면 나한테 와. 저쪽에서 운동 하고 있을 테니까. 난 누구랑 달라서 내가 잘못 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 하지 않거든.



그리고는 몸을 돌려 가는 것 같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보고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한다.


- 아 참참! 그러고 보니 비긴 거잖아, 그러니까 멍들거나 부러져도 배상은 안 되겠다. 너도 아까 내 다리
걷어찼으니까 이제 우린 공평해 진거야.


아직도 그 야비한 웃음을 지우지 않고 더군다나 그녀에게 윙크 까지 곁들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6.




- 우리?


헤라의 속도 모르고 연주는 두 사람을 우리! 라 칭하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어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친구를 향해 묻는다.



- 진 헤라! 너 저 사람하고 무슨 일 있었어? 아는 사이야?



- ........


- 헤라야. 너 저 남자 어떻게 아는 남자야? 응?



눈 높은 연주의 눈에 한눈에 필이 꽂힌 남자를 친구인 헤라가 알고 있는 기미가 보이자 연주는 탄성을 지르고 싶은
걸 참느라 혼이 났다.

키는 훤칠하니 족히 180은 넘을 테고, 얼굴은 귀티가 흐르는데다가 조금 건방져 보이기까지 하는데 물론 잘 생겼다.

체격도 적당히 운동으로 다져져 연주는 그를 보자마자 그 가슴팍에 뛰어 들고 싶다는 낮 뜨거운 생각까지 품을
정도였다.

거기에 어제 본 바로는 이 클럽의 사장도 그에게 굽실거리는 걸고 봐서 돈도 꽤 있는 것 같았고, 더구나 오늘은
VIP주차장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어제 물색해놓은 그녀의 목표물 이었다.

어디로 보나 절대 놓칠 수 없는 남자.



- 둘이 아무 사이 아니지? 너 남자 싫어하잖아. 응?



- 입 다물고 있지 못할래? 이 연주!




하지만 그런 연주의 생각을 알 일이 없는 헤라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향해 낮게 소리 질렀다.

좀 괜찮아 보이는 남자만 보면 물불 못 가리는 친구가 그녀는 귀찮았던 것이다. 거기다 오늘 처음 와 막 정을 붙여
보려는 곳에서 저런 인간을 다시 마주친 것이 더 불쾌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영 재수 없는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쩜 지금 가서 아까 일을 사과 하면 삼백 육십이,
백팔 십이나 이백 정도로 마무리 지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든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문지르며 생각을 한다. 자존심 구기고 한 번 부딪혀봐?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는 걸 눈치 챈 재원은 머신의 속도를 늦추고 걷기 시작 했다.

꽃 집 알바인줄만 알았는데.......몸을 보니 운동을 꽤 한 것도 같고, 이런 고급 휘트니스 클럽을 드나들기엔 다른
직업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다른 직업을 생각하자니 순간적으로 수영 강사나 혹은 재즈 댄스 강사? 등의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그는 곧 고개를 흔들어 그 영상을 지웠다.

몸매로 보건데 그렇게 전문적으로 운동을 한 여자는 아니었다. 전문적으로 운동을 한 여자에 비해 그녀의 근육은
훨씬 여성스러웠고.......인정하기 싫지만 육감적 이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좀 전 다른 남자들이 그녀를 향해 던진 시선에 욕을 한 자신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니.......우스웠다.



- 멍청한 놈!



자신에게 하는 중얼거림에 왼쪽에서 뛰고 있는 퉁퉁하고 미련스럽게 생긴 남자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역시나
건방진 얼굴로 그를 무시한다.

근데 저 여자는 왜 쳐다보기만 하고 안 오는 거야? 그리고 재원은 어느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연주 너 잠깐만 여기 있어.



헤라는 그의 오른쪽 옆 머신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드디어 결심을 굳혀 그가 뛰고 있는 트레드밀로 발걸음을
무겁게 옮겼다.



그가 유리된 앞쪽 벽으로 시선을 두고 시속 5킬로미터로 걷고 있었다. 슬금슬금 그의 왼쪽 편 머신에 올라선
헤라도 속도를 5킬로미터로 맞추고 호흡을 맞추어 걷기 시작 한다.

1~2분 정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녀도 얼굴을 앞으로 향한 채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속력을 올려
뛰기 시작 하자 헤라도 같이 속력을 올려 뛰었다.

그가 흘낏 헤라의 얼굴을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이번엔 장난스런 웃음을 입에 걸고 다시 속력을 올려
15킬로미터에 맞추며 제법 빠르게 뛰는 것이 아닌가~



- 나한테 할말 있지?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헤라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의 속력과 같이 맞춘다.



- 할말 있으면 얼른 하지 그래?...... 그렇게 나랑 맞춰서 뛰다가는 말이 안나올걸?




여전히 슬슬 흘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고서 약을 올리는 것 같기도 하다.



- 댁이나 잘 조절해서 뛰어요. 내 걱정 말고.




헤라는 그의 약 올리는 것 같은 말투와 웃음에 저도 모르게 퉁명스레 대꾸해 버렸다.

이런! 젠장. 저 싸가지 페이스에 또 말려들었네.

평소 같아선 누구의 페이스에도 말려들지 않는 그녀가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의 페이스에 자꾸만 말려들고 있었다.




- 아~ 이봐 알바!.......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 하면 원하는 걸 얻지 못할 텐데. 좀 더 상냥하게 말 하는 법을
배우지 그래?




그렇게 말하는 재원은 점점 재미가 있어지고 있다. 머릿속의 생각을 표정에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내는 그녀의
얼굴을 관찰하는 일이 말이다.

지금만 같아도 그녀가 왜 자신의 옆으로 와 굳이 뛰는지 그는 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독심술가라서가
아니고 여자의 얼굴에 제발 우리 협상 좀 해요 하고 써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녀의 몸을 가까이에서 감상 하는 것은 더 할 수 없는 묘미였다. 지금까지 항상 여자에 대해 그다지 흥미를
가져 보지 못했었는데 이 여자는 어느 모로 보나 재미있다.

노트북을 화분으로 깔아 부숴버린 그 순간부터 그는 재미있어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몰랐겠지만........




-내가.......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그녀는 그와 같은 속도로 뛰면서도 전혀 힘들어하지 않고 있었다.



- 글쎄?....... 왜 내가 안다고 생각하지?




- 방금 그랬잖아요.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거라고....... 그 말은 내가 그쪽한테 뭔가를 바란다는 걸 안다는 뜻
아니었어요?



- 그랬나?



재원은 좀더 그녀를 약 올리고 싶어졌다. 이번에도 아까처럼 펄펄 뛰며 화를 낼 것인지 아님 다른 어떤 행동을 취
할 것인지에 따라 그의 그녀에 대한 관심의 정도가 달라질 것이다.



- 사람 복장 터지게 만드는데 타고난 사람이군요. 그쪽 이란 사람!

아직 펄펄 뛰지는 않고 있지만 그녀의 말투는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재원은 머신의 속도를 20 킬로미터로
만들어 속력을 내어 뛴다.

마지막 3분 정도는 항상 이렇게 전력으로 뛰는 것이 그의 코스였다.그녀도 속력을 높인다. 지는 걸 싫어하는
여자라는 걸 그는 여기서 간파 한다.

3분간의 전력 질주.......재원이 먼저 머신을 멈추고 내려오고서 1분 정도 후에 그녀도 숨을 헐떡이며 기계에서
내려왔다.


- 하~하~



재원이 허리를 숙여 손으로 무릎을 짚고는 가쁜 숨을 몰아쉰다.



- 뭐든.......끝까지....... 안 지려고 드냐? 알바!


- 그 쪽한테.......내....... 성격 파악해....... 달라고 안했어요.


헤라도 숨을 헐떡이며 그의 말에 대꾸 한다. 말 끝 마다 알바! 알바! 정말 얄미워 죽을 지경 이었지만 그녀는 말을
삼킨다.

그나저나 어떻게 말을 꺼낼까? 어차피 다 눈치 채고 있는 것 같은데 그냥 안면몰수 하고 반만 깎아 달라고
말해봐? 하지만 그러기엔 넘 자존심 상한다.

뭐 좀 정당한 대가를 치루고 깎는 방법이 없을까?

헤라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파악해 보려 노력한다. 직업 정신을 살려서 말이다.
그가 그녀의 제의에 응할 법한 일 뭔가를 찾아내기 위해.......



- 입이 붙어 버렸어? 왜 조용해?



- 생각 좀 하느라 그래요. 그러니까 입 좀 다물고 있을래요?



또 날카로운 말이 저도 모르게 나왔다. 아아, 정말 미치겠다. 이 남자한테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 마다 후회 하고
있다. 지금.


- 좋아좋아. 어디 한번 열심히 생각해봐. 시간은 충분 하니까.......대신 내 구미가 당길 만한 협상안을 내 놓길
바래.......실망 시키지 말란 말이야.


이 남자 나한테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걸까?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헤라는 의문이 들었다. 오늘 처음 만난 그것도
욕지거리를 하며 싸운 상대끼리 뭘 바란단 말이지?

내 일방적인 사과를 원하는 건가?


그리고 같은 순간 재원은 아차! 한다. 방금 자신이 한말에 다소 무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어떤 의미를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자기가 그녀에게 어떠한 기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버린 결과가 된 셈이었다.


- 제안 하나 하죠.


하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이 여자가 도대체 어떻게 나올 것인지.......


근데 이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주인 여자가 준 명함에 여자 이름이 같이 적혀 있었는데 사장과 비슷한.......

아! 그러고 보니 이 여자는 사장의 동생 정도 되는 가보다. 성과 이름이 비슷했던 것이.


- 나도 정당한 대가를 치루고 그쪽한테 원하는 걸 얻어 내고 싶어요. 공짜는 싫으니까.



진 뭐였는데.......헤림? 헤리? 헤나? 헤라?......그래....... 진 헤라였다. 진해라도 아닌 진 헤라.......한번도 수연 외에
다른 여자 이름을 기억해 본적이 없는 재원 이였지만 용케도 헤라의 이름은 기억을 해냈다.



- 그래?


그는 짧게 되물으며? 팔짱을 끼고 머신에 몸을 기대어 거만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 봤다.

진 헤라.......공짜는 싫다! 그럼 어떤 대가를 치룬 다는 말이야?......설마 오늘 밤을 화끈 하게라도 보내주겠다는.......

재원은 음흉한 기대를 해본다.



- 게임 해요. 스쿼시 할 줄 알죠?


그러나 이어지는 그녀의 한 마디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실망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게 한다.



- 스쿼시?


어쨌든 몸으로 때우겠다는 의미로는 비슷하군. 재원은 씁쓸한 웃음을 지우며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으로
손가락을 까닥 거렸다.

그녀는 잠시 영문을 몰라 하는 얼굴을 하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주춤주춤 다가왔다.


- 그럼 최대한 빨리 끝내자구. 랠리 포인트로 한 게임만 말이야. 체력을 아껴둬야 쟎아!


다가온 그녀의 귀에 대고 그가 속삭인다.

헤라는 갑자기 친근하게 귀에 대고 속삭이는 이 남자의 태도나 말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 섰다.

재원이 그런 그녀의 행동이 우스웠는지 말없이 빙그레 웃는다.

또 비웃는 거야? 아님 날 갖고 놀 셈인가?
체력을 아껴두자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를 정도로 그녀는 아둔하지 않았다.

그는 유혹하고 있었다.........마음 같아선 정강이가 아니라 중요한 부분을 발로 차주고 싶었지만 지금 발목 잡힌
사람은 자신이었으므로 그녀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 지금 시작 하죠. 15분 후에 밑에서 만나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하고 헤라는 재원을 쏘아 봤다.



- OK 좋아!


그의 순순한 동의에 그녀는 냉정하게 몸을 돌려 준비를 하러 간다.


그런 헤라의 냉정함과 달리, 라커룸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재원은 자신의 손으로 입을 가린다.

내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스물아홉 해를 살아오면서 먼저 여자를 유혹하는 말을 하기는 처음 이었다.

언제나 그에게 있어 유혹은 여자들의 몫 이였는데, 오늘 그는 저 미천한 알바를 자신의 침대로 끌어 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개인 라커룸으로 돌아가 재원은 운동화를 갈아 신고 손목 보호대를 하며 좀 전 자신을 쏘아 보던 헤라의
눈을 생각한다.

영민한 눈. 꽃집에서 싸울 때부터 그는 그녀의 반짝 이는 눈에 시선이 붙들려 있던 일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밤 데리고 놀 상대로는 조금 아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그는 그만 생각을 접는다.




7)

헤라와 연주는 먼저 지하 1층에 위치한 스쿼시 센터로 내려가 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리는 와중에도 연주는 계속 그에 대한 질문 공세를 하고 있었지만 헤라는 입도 벙긋 하지 않고 라켓을 들고
워밍업을 하고 있다.



- 기지배야! 진짜 너 암 말도 안할래? 나 궁금해서 돌아가시기 일보 직전 이란 말야~
말 좀 해봐.......제발!



이제는 아예 우는 소리를 내며 그녀는 헤라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인생을 걸게 될지도 모르는 남자와 친구가 게임을 하다니.......스쿼시를 할 줄만 알면 낚아채고 싶은
기회였지만 운동에 젬병인 연주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일 이었다.



- 오래 기다렸어?



헤라를 향해 걸어오는 재원이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은 하지 않고 전의를 불태우는 눈빛만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리고 헤라와는 달리 연주는 그와 눈이 라도 맞추기 위해 그의 눈높이로 까치발을 뛰어 보는 노력을 하지만 그는
전혀 그녀에게 스치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직원 한명이 정중하게 유리문을 열고 그에게 허리를 굽히자 그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며 헤라에게 턱을 까닥여
안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했다.

잰 뭘 먹고 저렇게 대책 없이 시건방진 거야? 위에서는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부르더니 이제는 아예 그 손가락
움직이는 것조차는 귀찮아서 턱 짓으로 사람을 불러!

헤라는 약이 바짝 바짝 올라 코트에 들어오자마자 공을 튕겨 정면의 벽을 쳤다.



- 서버는 알바 네가 먼저 해라!



여자라고 선심 쓰겠다는 거야? 웃기셔!



- 됐어요. 라켓 돌려요.



- 그럼 알바 네가 불리 할 텐데........



여전히 빙글빙글 웃는 저 면상을 공으로 가격해 주고 싶었지만 참는다.

그녀가 이길 것이므로 왜냐면 그녀는 대학교 때까지 테니스 선수였으며 스쿼시 경력은 10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체력전으로만 가지 않는다면 상대가 남자라고 결과가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 흥!



그녀는 코웃음을 치고는 앞면 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첫 번째 서브 권자는 그녀였다.

그녀의 서브는 정확히 앞 벽면의 컷 라인과 아웃 라인 사이의 중간을 맞춘다. 재원은 그 서브를 받는 순간 헤라가
자신보다 훨씬 앞선 실력을 갖추고 있단 걸 알아 차렸다.



- 좋은데?



재원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을 한다.



- 좀 더 지나면....... 그 소리 한걸 후회 할 거예요.



그녀가 그의 공을 받으며 그의 말 또한 맞받아 쳤다. 정말 무엇 하나 지기 싫어하는 여자인건 틀림이 없군!

다시 그녀가 친 공이 옆 벽면의 맞고 튕겨나가 앞 벽면을 치고 그에게고 돌아온다. 완벽한
보스트 까지 구사를 하고 있었다.



- 글쎄.......



헤라의 공을 리턴 시키며 그는 흘낏 그녀를 훔쳐봤다. 묶여 있어도 허리까지 치렁이는, 웨이브가 거의 풀린
머리카락이 그녀가 라켓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에 날렸다.

저 모습에 정신 못 차린 남자가 한둘이 아니겠구만!......그리고 혀를 내두르다가 그녀의 공을 리턴 시키지 못했다.

재원이 한 점 먼저 실점을 한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주거니 받거니 5분 이상 양보 없는 리턴이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은 그가 서브권을 찾아온다.

그녀는 아직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재원도 아직은 거뜬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자신이 그깟 노트북 하나 때문에 무슨 얼빠진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 서브 안 해요?........ 시간 끌지 말아요.



그가 공을 들고, 잠깐 그런 회의감에 빠져 있는 사이 그녀의 가시 돋친 한마디가 여지없이 날아든다.



- 나 그렇게 치사한 인간 아냐. 여자를 상대로 수 써 가며 게임 할 정도로.



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 그래요? 첫 인상으로 봐서는 자기 밑에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 같던데. 게임에서는 얕은 수를 안
쓴단 말이죠?


그녀의 솔직한 말에 재원은 피식 하는 바람 새는 웃음을 웃는다.

뭐....... 여자들뿐 아니라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 별 상관 않고 살아오기는 했지만 그녀가 그렇게
봤다니.......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실망스럽기도 했다.




- 내 밑에.......가 사람이 아니면 우리나라 인구 거의 다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럼 되나? 그건 나도
바라는 바가 아니지!



라며 그는 힘껏 정면의 벽을 향해 서브를 한다.

하마터면 헤라는 그의 서브를 놓칠 뻔 했다. 역시 남자인데다 실력도 만만치 않아 생각보다 힘든 상대라는 걸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우리나라 인구 거의 다 라? 자기가 그렇게 잘난 사람이란 뜻으로 하는 말이야?

처음으로 이 싸가지 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는 좀처럼 서브권을 내주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체력이 달려 그에게 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헤라는
들었다.

그가 백핸드로 그녀의 공을 다시 리턴 시키고 헤라는 발리(볼이 바닥에 이르기전에 공중에서 치는 방법) 로 그의
공을 받아 쳤다.

하지만 그 공격도 별로 먹혀들지 않고 재원도 역시 발리로 응수를 한다.

열심히 헤라의 공을 받으면서도 재원은 계속해서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지금 내가 도대체 무얼 하는 거야? 회사에 산적한 과제는 산더미에다가 할아버지한테 받은 명령까지 덤으로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데.......쓸데 이 여자나 침대로 끌어들일 수작이나 펴고 있다니.......낮선 자신의 모습이
싫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라켓을 바닥에 던지며 그대로 주저 않는다. 사실 숨이 턱까지 차와 가슴이 뻐근해지는 고통이 올라오고
있기도 했다.

- 하~ 하·~ 뭐.......예요? 아직.......포인트가......7.......점이나 남았다구요.



바닥에 주저앉은 그를 향해 헤라도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라켓을 줍지도 않고 유리문으로 걸어간다.



- 이봐요? 지금 뭐야?


헤라는 그를 향해 소리 쳤다.



- 됐어.......나 이제 하기 싫어 졌거든. 그러니까 노트북.......사건은.......애초부터 없었던 일로 치자........



재원은 등 뒤의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거친 숨을 다스리며 말한다.

저 자식이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배상 해내라 난리 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없던 일고 치자니.......그녀는 그의
저의를 생각해 보려 애쓴다.



- 갑자기 왜 그래요? 왜 인심을 쓰냐고요!



- 그냥.......귀찮아져서. 내가 게임에서 이긴다 해도 나한테 별로 득 될 일도 없고.......너야 이기 면야 뭔가를
챙기겠지만 난.......챙길게 없거든.



확실히 그 건 그의 말이 옳았다. 남자의 승부욕을 부추겨 그에게 노트북 값의 절반을 깍아 내려는 자신의 의도를
훤히 알고 있는 그에게는 별로 매력이 없는 게임 일수도 있었다.



- 그럼.......내가 뭘 걸면 이 게임을 끝 까지 할래요?



그녀는 이미 원하는 것을 그로부터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정당한 대가를 제대로 치루지 못하고 얻어내는
것이나, 여자라는 이유로 그가 봐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대책 없이 무덤을 팠다.

하지만 정말이지 어정쩡한 페미니스트 행세를 하려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하! 이 여자. 진짜 구제 불능이네!

재원은 원하는 것 이상으로 해주겠다는 데도 끝 까지 게임을 몰고 가려는 이 여자를 지친 눈으로 바라본다. 아직도
전의를 상실 하지 않은 저 눈동자.......하며.......



- 너한테 내가 뭔가 원하는 게 있다고 생각하고 하는 소리야? 지금.



- 아까는 분명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요.



- 그래?



저 여자가 정말 겁도 없네. 아니면 원래 그런 물에서 노는 여자인가?



- 내가 너한테 원하는 게 한 가지 밖에 더 있겠어? 모든 남자들이 네 몸에서 시선을 못 때는 이유랑 별 다를 바
없는데 나도.



재원은 톡 까놓고 얘기 했다. 두 번 볼 사이도 아닌데 속물이라 욕하는 것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녀는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아니 어쩜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일이었는지 기꺼이 그의 제의를 수락한다.



- 그래요. 그럼. 처음부터 좀 불공평한 거래라 찜찜했는데 이제 완전히 공평해 졌네요.



- 좋아.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야.



- 그쪽 이야 말로.



마주 선 재원과 헤라는 기싸움이라도 하는 양 서로에게 눈을 응시하는 시선을 비키지 않는다.

유리벽 밖에서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연주는 서로를 노려다 보는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는 환상을 보았다.




8)

재원은 정말로 죽을힘을 다해 그녀의 공을 받아 쳤다. 태어나서 무언가에 이렇게 숨이 턱까지 차올라 호흡이 콱
하니 막힐 정도로 땀을 흘리며 이기려고 기를 쓴 적은, 회사 일 외에는 처음 있는 일 이었다.

그냥 이기고 싶었다. 이겨서 그녀와 밤은 보내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었지만 그 이유보다는
게임 자체로 그녀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보다 한 수 위 실력의 여자에게 졌다고 해서 자존심을 다친다거나 할 정도로 가부장적인 남자도 아니었거니와
그렇게 꽉 막힌 남자는 아니라고 그는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닌가 보다.


코트의 유리벽 밖 벤치에 앉아 두 사람의 게임을 보고 있는 직원 하나가 연주의 주변을 맴돈다. 그녀의 미모에 반해
어떻게 말이나 한번 부쳐 볼까하는 뻔한 남자 중 하나였다.

그녀는 모른 척 새침한 표정으로 그를 무시하고 있다.



- 저 분하고 친하세요?



이윽고 직원이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서서 입을 뗀다.



- 누구요? 여자요?



- 아니요. 두 분은 친구 사이신 거 알구요. 지금 같이 게임 하시는 정 재원 이사님 잘 아시냐구요.



- 네네?



어눌한 목소리로 직원은 그를 이사님이라 칭하고 있었다. 연주는 안면을 바꾸고 직원을 올려다본다. 정 재원
이사라.......혹시 이 클럽 주주 정도 되나?



- 글쎄요.......뭐 친하다면 친할 수도 있는.......



- 그래요? 그러시구나. 이사님이 본래는 아무 랑도 게임 같은 거 안 하시거든요. 우리 클럽에 나오신지 1년 정도
되셨는데 지금까지 한번도 없던 일이라 신기해서 물어 본거에요.



- 아.......네.



연주는 벤치를 지키고 있는 소득이 생기는 것 같아 기뻤지만 이왕이면 그에 대해서 다 자세한 사항들을 알고
싶었다.



- 그럼 혹시 세분 다 친구 분 이세요?



- 네? 네네.......친구.......죠. 친구. 호호.



친구냐 묻는 직원의 질문에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조금은 의도한.



- 그럼. 언제 적 친구세요? 제가 알기론 대학교 다니실 때 미국으로 유학 가셔셔 그 쪽에서 쭉 공부 하신 걸로
아는데. 대학 친구신가?........같이 코넬 대학 나오셨어요?

미국? 코넬 대학? 뭐야 도대체. 재벌이라도 되는 거야?

그녀는 직원의 말에 긴장 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재벌이라도 된다면.......꿈이 이루어지려는 것이 아닐까?



- 꽤 많이 알고 계시네요.



- 당연 하죠. 저희 클럽 최고의 VIP 이신데요.



클럽 최고의 VIP ? 그럼 여기 이사는 아니라는 얘기네.



- 이렇게 큰 휘트니스 클럽에 저 정도 VIP 가 한 사람 뿐 인가요? 더 많을 것 같은데.



직원을 떠 본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느 회사의 이사인지 알고 싶었다.



- 무슨 말씀을.......그렇게 겸손 하게. GH그룹 이사에, GH 전자 사업부 본부장이시면 저희 로서는 여기 아니면
어디서 만나 뵙기나 하겠어요! 거기다.......남자가 봐도 멋지잖아요. 한가지.......흠이 있다면 있지만.......



허걱! GH 그룹........! 상상도 하지 못한 얘기였다.
그녀는 유리벽 안의 친구 헤라와 재원에게로 눈을 돌린다.

그렇다면 헤라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이때까지의 분위기로 봐서는 둘이 서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분명 뭔가가 있었다.

직원은 연주가 묻지 않아도 술술 잘도 떠든다. 그가 어떤 운동을 제일 좋아하는지. 또 하루 30분 이상은 꼭
스쿼시를 친다는 것, 운동 후에는 주로 이온 음료수 보다는 물을 마시는 것 등등을 말이다.



- 그럼.......좀 전에 말한 그 흠이란 뭔지. 친구로서 솔직히 좀 궁금하네요.



그렇게 술술 잘도 그에 대해 말하는 직원은 정작 그녀가 젤로 궁금한 그의 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었다. 분명
그가 말하던 중에 한 가지 흠이 있다고 했었는데 .......



- 아! 그거요. 친구 분 이사라면서요. 친구 분한테 그런 얘기를 어떻게 해요?



얼래? 왜 이제 와서 발뺌이야? 내가 뭐 지가 흉이라도 봤다고 일러 바칠까봐 몸 사리는 거야?
그러지 말고 말하란 말야. 그 흠이 뭔지.......혹시 이혼남이라도 되니? 아니면 게이야?



- 어때요? 친구의 흠이 뭔지 나도 궁금해요. 뭐 정 말하기 그러면 우리끼리의 비밀 하나 만드는 셈 치면 되잖아요.
그죠?



연주는 생글생글 상냥한 웃음과 유혹적인 입술로 그를 달랜다. 그러자 직원은 그녀의 우리끼리 비밀이라는 말에
혹에 주섬주섬 웃음을 주으며 말한다.



- 그냥.......저희 직원들끼리 하는 얘기인데요......막말로 싸가지가 없다는.......하하 아니 없으시다는 뭐 그게
흠이라면 흠이죠.



겨우 그거였어? 싸가지 없다는? 별 꼴이야. 니네 도 저 정도 되봐라 싸가지 있게 생겼나.......



- 아네.......그거야 매력이라면 매력 일수도 있는데요. 뭘.......호호호



연주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가 유부남이나 뭐 이혼남 내지는 게이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었다.





재원과 헤라는 30분 째 코트를 뛰어 다니고 있다. 15점에 먼저 도달하는 사람이 이기는 랠리 방식에서 현재 두
사람의 스코어는....... 14-14 동점 이었다.



- 14 all 이야.......네가 리시버니까.......선택.......해!



재원이 그녀에게 세트를 선택하라 한다.

1

4올이다. 세트 원을 선택 하면 이대로는 틀림없이 저 남자에게 진다. 하지만 세트 투를 선택 한다 해도 17점
까지는 체력이 버티지 못 할 것 같다.

어떻게 하지? 아아. 난 도대체 왜 무덤을 판 거니.......미치겠다. 정말!



- .......세트 원.



어쨌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떠나버린 기차였다.

헤라는 차라리 체력이 견디는 쪽을 선택한다. 이 이상 힘을 빼는 건 앞으로 몇 시간이 될지 모르는 그와의 약속에서
재원을 상대하기에 무리수라는 판단을 내려서 였다.



- 좋아. 간다.


그의 서브로 마지막 1점을 향해 출발 했다. 힘겹게 겨우 그의 서브를 받았지만 리시브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두 번 세 번의 리턴이 이루어지고 그녀는 아까 그에게 차인 다리에 약간의 통증이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통증에 정신을 빼앗긴 단 1초 사이에 그녀는 결국 공을 놓친다.



- 와아! 하~~~~~하~~~~~~~



웃는 건지 숨을 몰아쉬는 건지 하여간 그도 헤라와 같이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워 곧 끊어질 것만 같은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목욕을 하고 얼굴과 머리는 불에 대인 것처럼 뜨거웠다.



- 내가....... 이겼어 알바.





이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이 아닌 내 힘으로 이겼다.
재원은 차가운 바닥에 누워 숨을 고르며, 돈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여자를 얻게 된 일에 대해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데리고 다니던 여자들이나 같이 밤을 보낸 여자들 모두 따지고 보면 그가 얻어낸 것들이 아닌 돈 아니면
그의 명성이나 얼굴 뭐 그런 것들로 노력 없이 이루어진 것들 뿐 이었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그를 들뜨고 가슴 벅차게 하고 있었다.



- 아직........ 게임 안....... 끝 난 거예요. 한 게임이....... 최소한 3세트 인거 몰라요? 이제 겨우 1세트를 마친 것
뿐 이라구요.



그러나 그녀가 그의 감동에 찬 물을 요란하게 끼얹는다.
재원은 누운 몸을 서서히 일으켜 앉아 머리를 맞대고 누어있던 그녀를 내려다 봤다.



- 야.......너.......배짱이냐 미련한 거냐? 지금 네가....... 여기서 더 한다고 이길 수 있을 거 같애?....... 그럴 것
같았으면....... 아까 14올에서....... 세트 투를 선택 하지! 왜 이제 와서 딴........ 소리 하는 거야?


지독한 여자다. 하지만 그런 만큼 재원을 이 미천한 알바를 더욱 갖고 싶어졌다.


- 잘....... 생각해. 자꾸만 우기면.......노트북 일 없었던 걸로 하자는 말도 취소 시켜 버릴 테니까.......칼자루는
아직도 내가 쥐고 있다는 거 알지!?



제길! 그러니까 이제 그만 졌다는 걸 시인하라구. 어떻게 이긴 게임인데.......실력이 딸리는데도 죽을힘을 다해서
따낸 게임이란 말이야.


- 이제야.......본색을 드러내는 군요.



재원의 협박에 헤라도 몸을 일으킨다.

그래 더 이상 일을 꼬이게 만들지 말고 여기서 그만 두자. 진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 되기 전에 말이다.



- 난 본색 같은 거 숨긴 적 없는데. 더구나 남자들의 본색 이라는 게 숨긴다고 숨겨지기나 하는 건가?


- 그 본색 말구요.


그녀가 퉁명스럽게 내어 뱉었지만 그는 더 이상 대꾸 하지 않고 앉은 몸을 일으킨다.



- 일어나. 나가자.


그리고는 유리문을 열고 그녀가 따라 나오길 기다리지도 않고선 먼저 나가 버린다.

헤라는 눈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결심을 하기위해 자신을 다스린다.

괜찮아. 페어플레이 정신에 입각해서 졌다는 걸 인정하자. 인정하구.

저 싸가지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지켜야한다? 지켜야해?....... 정말? 아앙.......난 아직 버진 이란 말이야!

울 새엄마가 알면 복장 터져 돌아가실 일이다. 무슨 옷 벗기 게임을 한 것도 아니고 게임에 져서 남자와 자러 가야
하다니........으아!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헤라도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밖으로 나왔건만 연주는 헤라에게는 눈길조차도 주지 않고 오직 재원에게 말을 붙일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 차 가져 왔냐?


수건으로 대충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재원이 헤라에게 물었다.


- 아니.......요 친구 차, 타고 왔어요.



- 네.......제 차요. 제 차 타고 왔어요.



헤라의 말끝에 연주가 얼른 따라 붙는다. 그러나 여전히 재원은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한다.



- 그럼 샤워는 하지 말고 옷만 갈아입고 나와. 지하 1층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샤워 하고 가면 안돼요?



- 안돼! 싫어. 여자들 샤워 하는 거 기다리려면 늙어 죽는 기분이 들거든.



그래~ 얼마나 샤워하는 여자를 많이 기다려 봤으면 저렇게 경험에 충실한 말을 할 수 있겠니! 안 봐도 훤하다.

재원이 먼저 스쿼시 센터를 나가고 헤라는 잠시 벤치에 앉아 머리를 굴려 본다.



- 뭐니? 둘이 어디 가는 거야? 너 저 사람 누군지 알아? 응?



하지만 연주의 이어지는 질문에 그녀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 연주야 너 먼저 가. 난 저 싸가지 하고 볼일이 좀 남았거든.



- 야.......뭐야? 나도 따라 가면 안돼? 응? 같이 가자. 너 남자랑 둘이 어디 가본 적 없잖아. 왜 새삼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니! 안 하던 짓 하면 황천 간다는 소리 못 들었어? 같이 가자 헤라야.



벌써 일어서 걸어 나가는 헤라의 팔에 매달린 연주가 사정 한다.

얘가 진짜 왜 이래? 어린애처럼. 매달리는 연주를 보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헤라는 잠시 뿐이다.

그녀의 머리는 순식간에 자신의 버진을 앗아갈 재원에게 가 있었다.



- 이 가방만 네가 가져가. 내일 내가 너 네 집으로 가서 찾아갈 테니까.


헤라는 옷을 넣어온 가방에서 지갑만을 빼서 손에 쥐고는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가방을 연주에게 주었다.



- 어디에 뭐 하러 가는지 정말 얘기 안 해 줄 거야?


- 나중에 얘기 할게. 나 간다.

더 이상 연주가 물어대기 전에 그녀는 라커룸을 빠져 나왔다. 그녀의 말대로 남자랑 데이트 한번 해보지 않은
그녀다.

왜? 그런 걸해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필요도 전혀 못 느꼈으니까. 그렇다고 레즈비언이냐고? 천만에 말씀. 그건
절대 아니다.







9)

- 타!

지하 1층 주차장의 엘리베이터 앞에 그가 차를 세우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차는 벤츠 C클래스 컴팩트
세단이었다.

으흥! 최신형 벤츠를 타고 다닌단 말이지? 있는 집 자식이긴 한가 보군!
남자들이 관심 있는 건 죄다 꾀어 차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는 차에 대해서도 웬만큼은 알고 있었다.

- 가까운 데로 가요. 빨리 샤워 하고 싶으니까.

조수석으로 오르며 헤라는 가능한 한 긴장하지 않은 척 하려고 노력했다.
강남이니까 여관도 많고 모텔도 많다. 그럼 있어 보이는 인간 이니까 여관으로는 가지 않겠지? 하지만 그래도
모른다. 아아 난 여관에서 첫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그녀는 현재 상황의 모든 게 불안했다.

-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요........ 여관은 싫어요. 최소한 무궁화 세 개 이상짜리 호텔로 가줘요.

그리고 결국은 우스꽝스런 주문을 하고 말았다.

- 여관이 어때서? 많이 가봤나?

물론 재원은 한번도 여관을 가본적이 없었다. TV에서 가끔 보기는 했는데 그렇게 끔찍한 곳은 아니었다는 기억이
든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그녀는 그 곳에 가봤다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이라 여겨야 하는지 그는 조금 햇갈린다.

그러나 곧 그는 헤라에 대해 깊은 생각은 그만 두기로 마음먹는다. 어차피 노트북을 부수었다는 미끼로 하룻밤 즐길
여자에 불과할 뿐 이었으니까.

그의 차가 들어가는 곳은 삼성동의 그 높다란 빌딩 숲 사이에서도 어쩔 수 없이 눈에 띄는 “인터.......”호텔 이었다.
무궁화가 다섯 개짜리인 특 1급 호텔인 그곳.

그가 정문에서 차를 세우자 도어맨이 조수석의 문을 연다. 헤라는 주뼛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 네가 좋은 곳으로 오자고 해서 오기는 했는데.......알바 너 차림새가 좀 여기랑 격이 안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냐?

재원의 말에 그녀가 그를 노려본다.

- 그딴 게 어딨어요? 자러 온 사람이 옷차림이 무슨 상관이람!

그리고는 당당하게 그를 앞질러 호텔 문 안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들어서는 순간 헤라는 역시 기가 죽고 만다.

너무도 고급스런 호화판 인테리어와 늦은 시간 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호텔 라운지에 앉아 있는 비즈니스 정장을 한
외국인들과 프론트 직원들의 식선이 그녀에게 꽂혀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말이지만 그녀의 차림은 회색 트레이닝복에 하늘색 스티커즈를 신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땀에 얼룩진
꼬질 거리는 얼굴과 별 다를 바 없는 처지의 머리스타일....... 오늘 하루가 그녀에겐 지옥에서의 영원 같았다.

- 어이! 정 재원. 니가 이 시간에 이런 델 웬일이냐?

그때 그녀의 정면에서 젊고 좀 놀게 생긴 남자가 여자와 팔짱을 끼고 나오면서 그녀의 뒤 누군가에게 아는 채를
한다.

헤라는 무의식 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 했다.
저 날라리 같은 남자가 부른 정 재원이란 이름의 주인은 저 싸가지 였구나!
무언의 눈인사를 나누는 그를 보며 그녀는 그의 이름이 정 재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려 한다.

- 야.......모른 척 하고 가라. 피차에.......

재원은 친구 윤석의 어깨를 치며 한 마디 던지고는 그냥 지나쳤다. 호텔에서 여자를 끼고 마주치는 일은 좀처럼
없었는데....... 괜히 난처한 생각이 들었다.

- 유유상종이라더니.......이런 걸 두고 하는 말 이구만!

그녀의 옆을 지나는데 그녀가 작은 소리고 중얼거린다. 그러나 재원은 픽 하는 웃음을 웃고는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프론트에서 숙박계를 작성하고 열쇠를 받아 그가 앞장선다. 호텔 정문을 들어설 땐 그렇게도 당당하게 걷던 그녀의
걸음은 어느새 주춤주춤하는 걸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재원이 살핀 그녀는 앞으로 모은 손을 계속 꼼지락거린다. 하지만 재원은 못 본 척 외면 한다.

- 들어와.

그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지만 헤라는 복도를 두리번거리며 여전히 주뼛 거렸다.

- 너 선수 아니었어? 왜 그렇게 얼어 있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보기에도 그녀는 선수 같이 보이진 않았다. 선수라면 저런 차림을 하고 호텔로 가자는
소리는 안했을 테니까.


- 얼긴 누가 얼어요. 누구 덕에 샤워도 못 하고 나와서 땀이 다 식으니까 추워서 그러는 것 뿐 이에요.

버진을 주는 것만도 억울한데 거기다 이 나이 먹도록 처음이라고 얕보이기까지 하는 건 더 싫다는 생각에 그녀는
이런 일에 익숙하게 보이려 거짓말을 했다.

- 얼른 샤워해 그럼! 내가 나중에 할 테니까........아니면 같이 할래?

그가 땀에 젖은 위통을 벗어 던지며 그녀를 마주보지 않은 채로 묻는다.

뭐? 같이 뭘 하자구? 아직 남자의 벗은 몸 한번 제대로 본적 없는 여자한테 뭘 같이해? 저거 변태 아냐?

헤라는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겉모습으로는 멀쩡한 남자들이 변태이거나 연쇄 살인범이 많다는 걸 어디선가
본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 아니요.......난 좀 피곤해서 잠깐 누워 있을 테니까 먼저 씻어요. 승자한테 그 정도는 베풀어 줘야 지요. 먼저
씻으세요. 먼저.......

어쩐지 상냥해진 것 같은 그녀의 말투에 재원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는 땀 때문에 찝찝한 몸이 더
급했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먼저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면, 그는 따라 들어가 그녀를 덮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의
말대로 먼저 샤워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막 옷을 벗고 물을 틀려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 아 새엄마! 네.......

수연 씨가 전화 했어요? 네.......그렇게 됐어요.......아니 집 아냐.

네.......내일 저녁....... 웨딩 쇼?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에요?

.......6시.......알았어요. 시간 비워둘게.

.......곧 들어갈 거예요....... 네 술 안 마셔.

.......응 끊어요.

늦은 시간.......새엄마의 전화. 흔한 일은 아니었다.
호텔에서 친구와 마주치질 않나 그녀와의 섹스를 기대하며 샤워를 하는데 새엄마에게서 전화가 오질 않나.......
정말이지 뭔가 석연치 않은 흐름 이었다.

하지만 어렵게 얻은 기회다. 여자 하나를 안기위해 이렇게 몇 시간을 공을 들였는데........석연치 않은 기운을 뒤로
하고 그는 샤워를 시작한다.

헤라는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 혹시 그가 변태이거나 혹은 노트북 사건이 애시 당초부터 사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그녀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안돼! 이건.......아냐.

시계를 봤다. 12시가 다 되어 가고 있다. 지하철은 끊어 졌을 테고.......지갑을 열어 금전 사정을 체크한다. 달랑 천
원짜리 한 장........현금 카드도, 신용 카드도 다 집에 놓고 왔다. 라커룸에 카드 같은 것들을 넣어 놓기 찜찜해서
말이다.

어쩌지? 연주한테 전화 할까? 데리러 오라고? 근데.......핸드폰이? 맞다. 연주한테 준 가방에 그냥 넣어 놓고 잊고
있었다. 뭐야.......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 거야! 하루 죙일!

그럼 그의 핸드폰은? 재원이 벗어놓은 옷 사이를 뒤졌지만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나오기 전에 도망치기로 결심한 이상 그녀는 가야만 했다. 어쩌지? 불안한 마음으로 생각을 하니
제대로 된 생각이 나올 리가 없다.

- 아! 그러면 되지!

그녀는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의 벗어놓은 옷가지 속에 있는 검정색 가죽지갑을 꺼낸다.

- 만 원짜리 한 장만 빌리는 거야. 딱 한 장만. 그리구 내일 클럽에 맡기면 되는 거라구.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그녀는 주문을 걸 듯 중얼거렸다.
그의 지갑을 열고 만 원 짜리를 찾는다.

- 뭐야? 돈은 없고 왜 죄다 수표만 있는 거야? 십만 원짜리 랑.......백만 원 짜리.......쟤 뭐하는 인간인데 돈을
이렇게 많이.......

헤라는 그의 지갑 속을 뒤지며 본래의 목적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다 욕실에서 샤워기를 내려놓는 딸가닥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수표 한 장을 뺐다.

그래.......우선 십만 원짜리 한 장만 빌리자. 설마 십만 원 가지고 경찰에 도난신고 같은거 하겠어? 맞아.......이렇게
수표가 많은데.......금방 알아차리지도 못 할 거야.

그리고 다음엔 침대에서 살금살금 내려와 뒤꿈치를 들고 진짜 도둑처럼 호텔 방을 빠져 나왔다. 그래도 하루 종일
재수가 옴 붙었던 일에 비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그녀는 호텔을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연주는 재원의 차를 미행해 호텔 앞에 차를 세우고 망연 실한 얼굴로 호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이 시간에.......이런 데 올 일은 딱 한 가지! 그것 밖에 더 있냐. 하.......진 헤라 너 뭐니? 그 10년 동안이 다
내숭이었어? 이렇게 큰 거 한방 먹일 려고?......아후! 미치겠네........흑흑흑

핸들에 턱을 괴고 팔을 늘어뜨린 그녀는 자기가 찜해 놓은 왕 킹카 중에 킹카와 헤라가 호텔에서 할일을 떠 올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지고 있다. 헤라! 저기 택시를 타려고 정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헤라 였다.


- 야.......헤라야. 타

연주다. 연주가 어떻게 여길........택시를 기다리는데 눈에 익은 흰색 소타나가 그녀의 앞에 서고 연주가 얼굴을
내민다.

- 너.......어떻게 온 거야?

놀라 물으면서도 그녀는 연신 뒤를 확인하며 연주의 차 조수석 문을 열고 얼른 올라탄다.

- 빨리 가!

그리고 그가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헤라는 연주에게 빨리 가라 재촉을 했다.
차가 출발하고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우선.......다음 일이야 어찌 됐든 한 고비는 넘겼다고 생각을 한다.



욕실 문을 여는 순간 재원은 방안의 공기가 왠지 좀 썰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 불길한데.......이봐! 알바? 야.......

역시 ........없다. 뭔가 석연치 않았던 기분이 이거였구나!

- 도망 간 거야?

숨어 있다면 그의 이 말에 펄쩍 뛰며 나올 그녀라 생각 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는 쓴 웃음을 웃는다. 어째 그녀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여자다.


10)

“ 승리자여!~ 승리자여~전화 받아요~무슨 일이든~승리하는 당신~~~~~~~~~”

핸드폰 벨소리에 헤라는 무거운 눈꺼풀을 뜬다.

- 네........

- 아직도 자니? 너 어제 핸드폰은 왜 안 받았어? 집 전화도 안받고.

- 어.......그렇게 됐어.......아침부터 왜.......?

아직 잠이 다 깨지도 않았지만 작은 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아프게 파 고 들었다.

- 이따가 4시 까지 코엑스로 와. 언니가 일 손 모지라데.

- 무슨 소리야.......? 어제 하루만 시간 내주면 된다고 했었는데.......

분명 그녀의 3일 휴가 중 하루만 투자해 달라고 그랬었는데 이제 와서 또 무슨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하는 건지
잠결인지라 그녀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 너네 형부가.......아휴 ! 속 터져. 또 새벽에 날랐 댄다. 부산으로. 그것도 어제 가게 하루 매상 고스란히 털어서
친구들이랑 바다낚시 간다고.

작은 언니 헤미의 부아를 삼키는 목소리에 헤라는 잠이 확 하니 달아나 버린다.

- 또?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형부는 몰라?

- 모를 리 있니?.......하여간에 그렇게 됐으니까 너가 형부대신 해야 할일이 있을 거야.
4시다 코엑스.

그리고 작은 언니는 전화를 끊었다.

헤라는 큰언니 헤림이나 새엄마나 어쩜 그렇게 남자에게 이용만 당하고 사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그녀의 아버지라는
사람도 평생 새엄마 등골만 휘게 만들고 바람돌이 행세나 하고 다니더니 큰 형부도 별반 다를 것 없이 언니 등만 쳐
먹고 산다.

거기다 한량에.......지가 무슨 시인이랍시고 김삿갓 노릇까지 하고 다닌다.

- 제대로 된 휴가는.........정말 물 건너갔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자신이 새벽녘에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쓰러져 자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 아.......정말 되는 일 하나 없는 휴가네.

목욕도 하지 못해 몸 여기저기가 간질 거렸다. 그래서 아침밥보다는 샤워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옷을 벗는다.
그런데 트레이닝복 상의 주머니에서 뭔가 종이 같은 것이 만져 졌다.

아! 그 수표. 연주의 차를 타고 오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반이 접혀진 수표를 꺼낸다.

그리고 수표만으로 두텁게 채워져 묵직했던 그의 지갑을 떠올렸다.
얼마나 부자길래 지갑에 그런 것들만 넣어다니냐........이름이 정 재원이라......했던 것 같은데. 유명한 사람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무의식적으로 접혀진 수표를 핀다.
근데! 뭐 뭐야? ........
자신의 손에 쥐어진 종이쪼가리의 색이 노란색이 아닌 하늘 색! 놀란 심장이 밖으로 튀어 나올 것 같은 기세로
펄떡인다.

.십만 원 짜리가 아니잖아.......백만 원?

너무 벌벌 떤 나머지 앞에 있던 십만 원짜리 수표를 꺼낸 다는 것이 손이 잘못 움직인 모양 이었다.

큰일이다.!!!! 정말 도둑으로 몰리는 건 시간문제라는 생각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그러나 재원의 생각은 달랐다.
역시 배짱 있는 여자네! 호텔에서 몰래 도망치는 것도 모자라서 백만 원 씩이나 훔쳐 가다니.......
하긴. 어차피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어제 그의 지갑엔 백만 원짜리 수표 외에 다른 돈은 없었으니까.

회사에 출근해서 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점심을 먹을 때나 커피를 마실 때나 헤라의 생각이 재원은 그녀
생각에 저도 모르게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못하고 있다.

- 너 무슨 좋은 일 있니?

그리고 새엄마를 에스코트 하고 웨딩 쇼에 참석하러 가는 차 안에서도 그는 계속 빙글거리고 있었다.

- 아니.......좋은 일은. 무슨.......

- 그래? 그래도 다행이구나! 기분이 좋아 보여서. 사실 너한테 얘기는 안했다만 수연이도 오기로 했어. 미리 말하면
네가 안 온다고 할까봐 그랬는데.......괜찮지?

아들의 눈치를 살피며 새엄마가 말했지만 역시나 재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 새엄마! 나.......진짜 걔는 아냐!

그리고 정말로 싫은 얼굴로 새엄마를 향해 말한다. 사실 정말 싫었다. 서울의 모 대학 총장의 딸이라는 것 때문에
새엄마가 그녀를 자신의 상대로 밀고 있다는 건 알지만.......그녀는 아니다. 더구나 그는 아직 결혼 같은 걸 하고
싶지도 않았다.

- 그런 소리 마라. 널 정략결혼의 희생양에서 빼내려는 새엄마의 노력이야. 그리고 그 적당한 짝으로는 수연이 만한
애도 없어.

- 정략 결혼도 싫고. 그냥 결혼도 아직 전혀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 재원아.......철없는 소리 그만해라. 너 정씨 집안 장남이야. 니가 빨리 가야 할아버지께서도 네 앞길도 열어 주실
거 아니니. 안 그래?

그러나 새엄마는 물러서질 않고 그를 설득하려 했다. 재원은 말없이 시선을 차 창밖으로 옮긴다.

그가 얼굴을 돌리자 새엄마는 한숨을 한번 쉬고는 오늘은 더 이상 아들을 다그치지 않기로 한다.

그들의 차가 코엑스의 지하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가고 기사가 차를 세우는 동안도 그는 차 창 밖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차가 많다. 사람도 많다. 헌데.......저 멀리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 검은색의, 웨이브가 거의 풀린,
엉덩이까지 치렁이는 긴 머리의 여자가 재원의 눈을 확 잡아당긴다.

알바? 저런 스타일의 여자는 그다지 흔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거의 그녀가 헤라라 확신을 했다. 머리카락
뿐 아니라 멀리서도 눈을 끄는 몸매를 드러낸 청바지의 여자는 틀림없이 그녀였다.




- 진 헤라.......너 이렇게 늦으면 어떻게 해? 쇼 시작하기 30 분전에 오는 스텝이 어딨어?

그녀가 무대 뒤편으로 들어서자마자 언니 헤림이 소리를 친다.

- 내가 왜 스텝이야? 언니 지금 양심이나 있니?

소리치는 언니를 향해 헤라는 무거운 목소리로 대꾸 했다. 그녀는 화낼 기운도 없었다.

- 알았어 그러니까 얼른 이 꽃들 준비나 시켜줘, 모델들한테 드레스에 맞는 부케 챙겨서 주고 부케 거꾸로 들지
않게 쥐어 주고.......네가 할일 대충 알지?

- .......잔소리할거면 나간다.......

형부 대신 언니 뒤치다꺼리를 한두 번 한 것도 아닌데, 언니가 뻔히 아는 얘기를 하자 헤라는 여전히
목소리만큼이나 무거운 눈으로 언니를 바라봤다.

- 그래. 그래 네 비위 안 건들게.

그러자 헤라의 성질을 아는 언니는 바로 잔소리를 구만 두고 무대 뒤를 나간다.

오는 길에 클럽에 들려 백만 원짜리 그 하늘색 수표를 흰 편지 봉투에 넣어 호텔에서 기억해둔 그의 이름을 적은
다음 프론트 여직원에게 맡겨 두었다. 다행히 여직원은 그를 알았고 틀림없이 그에게 전달 될 거라 다짐을 받아
놓고 이곳으로 달려온 그녀는.......지쳐 있었다.

언니의 쇼가 제일 처음이니까.......그녀가 이곳에 있어야 할 시간은 길어야 앞으로 한 시간 가량 이다. 그 시간만
버티자 스스로를 위로 하며 헤라는 할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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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가: 애플그린 (casino92@hanmail.net)

창작실: 30대 plant.1

제 목: 러브써치 펌

편 수: 1-49(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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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수연이 벌써 와 있었네?

관람석의 맨 앞 VIP석엔 그녀가 먼저 와 앉아 있었다. 수연도 재원도 서로들 별로 반갑지 않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 오늘은 연구소 쉬는 날이지?

새엄마가 특유의 상냥함으로 그녀에게 묻지만 그녀는 늘 그렇듯이 시큰둥하니 네 하는 짧은 대답을 했다.

- 여기서 마음에 드는 드레스 봐둬라. 수연아. 그럼 재원이가 결혼식 때 그거 해 줄 거야.
그치?

그러나 새엄마는 수연의 그런 태도에 아랑곳없이 두 사람의 생각과는 다른 너무도 앞선 생각을 말한다.

재원은 짜증이 나는 얼굴로 수연과 새엄마에게서 시선을 떼어 리허설 중인 무대 위를 바라본다.

모델들.......물론 다 미인이겠지만 재원의 눈을 잡아끌지는 못 했다. 대신 그의 눈은 무대 아래 다른 곳들로
옮겨갔다. 방금 밑에서 본 그녀를 찾는다.

뭐 꼭 코엑스에 그녀가 왔다고 해서 이 곳에 오리란 법은 없지만 그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그녀의 모습
비슷한 사람이라도 있는지 계속 두리번거렸다.



- 헤라야 잠깐 이리 좀 나와 봐.

무대 위에 나가있던 언니가 그녀를 부른다.

- 왜?

- 여기.......못 질이 좀 잘못 돼 있거든! 부케 끈이 긴 게 몇 개 있어서 여기에 걸릴 수도 있어 그러니까 니가 잘
지켜보다가 안 걸리게 좀 도와줘야해.

무대의 시작 부분에 튀어 나온 못이 문제였다. 헤라는 알았노라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나 무대위에서서 관람석
쪽을 내려다본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미 다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 재원아.......재원아?

새엄마가 부르고 있었지만 재원의 시선은 무대의 제일 안쪽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는 여자에게 못 박혀 있었다.
역시 주차장에서 본 여자는 헤라가 맞았다.

진 헤라.......거기 숨어 있었구나!

그는 그녀에게 못 박은 식선을 떼지 않고 그녀가 무대 뒤로 사라질 때가지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 재원 씨!

수연의 조금 높아진 언성에 그가 무대로부터 시선을 옮겼다.

- 뭘 그렇게 넋 놓고 보길래 불러도 몰라요?

- 아......미안! 잠시 뭣 좀 생각 하느라고.........

그가 대충 얼버무린다. 그리고 팸플릿을 펴고 순서를 확인한다. 그녀의 언니에게서 받은 명함의 이름으로 차례를
확인하고 재원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새엄마는 그런 그가 웬일로 쇼에 관심을 다 가지나 싶어 내심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저녁 스케줄을
얘기 한다.

- 저녁 식사는 청담동에 가서 하자. 수연이가 마침 오늘시간도 많고.......너도 별 스케줄 없으니까

- 저 방금 스케줄 생겼어요. 어제 마무리 짓지 못 한 일이 있어서.

하지만 재원은 새엄마의 말을 자르며 자리를 일어선다.

기다려.......알바! 어제 진 빛 을 갚아 줄 테니까. 재원은 입가에 도는 승리의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 쇼 방금 시작 했는데 어질 가니?

입 언저리에 웃음마저 머금고 일어서는 아들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그가 평상시와는 다르다는 걸 눈치 챈다.

- 중요한 일이에요. 다시 안 올지도 모르니까 먼저 들어가세요.

그리고 시선마저도 무대 저 뒤쪽 어딘가에 두고 있는 그가 허리를 숙여 뒤로 사라지는 모습을 새엄마는 심상치 않다
생각 했다.



- 조심조심 해요. 거기 안 걸리게.......

이제 두 명만 더 내보내면 할일은 대충 끝나고 쉴 수가 있다 생각하니 긴장이 풀린다. 지난 20분간의 정신없음과
혼란을 겪으며 헤라는 정말 이런 일은 싫다고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그러는 1~2분 사이에 다시 모델들이 들어오고 그녀는 마지막 두개의 부케를 각각의 모델들에게 들려 내보낸다.

- 휴~~~~~~

한숨을 한번 몰아쉬고 잠시 의자에 기대어 앉는다.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소리가 뒤엉켜 시끄러웠다. 언니의 쇼는
끝이지만 쇼 전체가 끝나려면 아직 30분 정도가 더 있어야 한다.

그 사이에 헤라는 조용한 곳에 가서 눈이라도 감고 있다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의자를 일어서 비상구 문이 보이는
쪽을 향해 걸었다.

아.......머리야. 피곤해 죽겠네.......
라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 당겨 비상구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누누구? 강도야?

- 뭣 뭐예요? 강도?

끌려 들어간 그녀는 몸을 돌려 반사적으로 잡히지 않은 다른 손의 주먹이 나갔다. 그러나 상대는 그녀의 주먹을
피하고 대신 그녀의 양팔을 잡아 벽에 대고 누른다.

- 강도라니.......그런 섭섭한 말을 하면 쓰나.

어제 하루 사이 귀에 익어버린 목소리! 정 재원?

조금 어두컴컴한 곳에서 정신을 차리고 올려다본 남자는 역시 그였다.
어제와는 다르게 회색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그는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 놀랐잖아요. 뭐 하는 짓이에요. 이거 안 놔요?

- 놓으면! 도망가려고?....... 그렇게는 못하지 한번은 당해도 두 번은 안 속는다고. 아무리 바보래도 말이야.

- 어 어젠 미안해요. 처음부터 계획 된 건 아니었어요.

- 흐음~ 그래?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힌다. 아마 순간 하늘 위의 구름 속에서 천만 볼트의 전류가 지나갔을 것이다.

- 그럼.......순전히 순간적으로 그런 거라 그거야?

- 그래요.......약속 지킬려고 했는데.......

- .......했는데?

뭐라고 하니........버진이라 아까워서 그랬다고? 사실대로 말하자니 우스워질 건 뻔 했고 그녀는 할말을 찾고 있었다.

- 했는데.......뭐야? 다음 말을 해야지!

그녀의 양 손목을 잡고 있는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화가 난 건가? 뭐 화를 낸다 해도 뭐라 할 수는 없다.
당연 한 결과니까.

- 게임....... 이었잖아요. 게임 이었는데 너무 쉽게 가져 버리면 재미없으니까......그래서 그랬어요.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 것을.......이 남자 앞에서 그녀는 매번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 무덤 파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 쉽게......?
이 여자가 지금 쉽게 라고 그랬어? 하~ 내가 얼마나 힘들이고 공들인 결과 였는데.......쉽게라.......거기다 재미없을
까봐! 장난 하자는 거야 지금?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수작을 거는 일일 수도 있다는 얘기인데....... 재원은 전혀 헛다리를
집는다.

- 그래요.......쉽게. 그쪽이야 여자랑 한번 자는 일 따위야 늘 상 하는 일이니까

- 누가 늘 상 하는데? 날 두고 하는 말이야?

- 그럼 여기에 다른 누가 또 있나요? 그 쪽 하고 나 뿐이잖아요.

이 여자는 내가 아무여자하고나 매일 파트너를 바꿔가며 자는 남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재원은 헤라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눈이 크고 쌍꺼풀이 얇은 그리고 눈 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간.......고집쟁이 눈을 하고 있는 여자였다. 이런
눈이라면 나에 대한 편견을 쉽게 바꾸지 않을 성격이군.

- 그래.......그렇다고 치고. 문제는 그게 아니잖아. 어떻게 할 거야? 우리의 거래가 성사 되길 난 바라고 있는데.
치사하게 이제 와서 딴 소리 하자는 건 아닐 테고.

- 누가요! 누가 딴 소리를 한다구. 난 그렇게 한 입으로 두말 하는 사람 아니에요.

역시나 그녀를 약 올리면 재원이 원하는 대답이 나온다는 걸 그는 다시 한번 확인 했다.

- 그러면 약속 지켜!

- 알았어요. 지켜요 지켜.

- 언제? 난 그날이 오늘이라도 되길 바라는데.......

- 오 오늘은.......안돼요. 지금 들어가서 언니랑 다른 스텝들 하고 뒤풀이 가야 하니까.

- 그게 나랑 무슨 상관 인데? 내가 그런 이유 때문에 포기해야 해?

- ........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재원의 빙글거리는 눈만 ?어 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재원은 그녀의 다른 말을 기다리며 스멀스멀 코 속으로 스며드는 그녀의 향기에 정신이 아득해 졌다. 어제와 같은
물푸레 향기........

- 그럼.......오늘은 이걸로 내가 양보를.......하지!

그의 흐려진 두 눈이 그녀의 입술에 머무는가 싶더니 그녀가 눈치를 채고 얼굴을 돌릴 틈도 없이 입술을 겹쳐 왔다.

헤라의 두 팔과 몸이 재원에 의해 벽에 눌린 채로 그녀는 키스를 당하고 있었다.
거칠게 입술을 무는, 그녀를 제압하고 싶어 하는 재원의 심리가 헤라에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녀가 입술을 벌리지 않자 그가 입술을 떼고 그녀를 내려다본다.

- 순순히 협조 하는 게 어때? 그래야 적어도, 오늘이라는 시간만이라도 벌수 있을 텐데.

맞는 말이다. 그의 요구 중 적어도 이것만이라도 들어줘야 될 것 같았다. 내가 버틴다고 이대로 물러날 남자는 결코
아니다. 어제 본 바로는.......

그가 다시 입술을 겹쳐 온다. 이번엔 더 천천히 조금은 부드럽게.......헤라는 몇 초간 망설이는 것 같더니 곧 입술을
열어 그의 입술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재원의 혀가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오자 헤라는 흠칫 놀란다. 솔직히 그와의 키스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비상구 문을 열고 들어 올 것만도 같았고 이렇게 깊은 키스도 처음 인지라 어색 했다.

그러자 바로, 그녀의 어색함을 눈치 챘는지 그가 입술을 뗀다.

- 너.......몇 살이냐?

- 알아서 뭐 하게요?

그녀의 토라진 얼굴에 그가 픽 하니 웃는다.

- 지금까지 내가 키스 해본 여자 중에서 제일루 못 한다. 너!

- 그게 아니고 자길 싫어하는 여자하고 해본 적이 없는 거 아니에요?

못한 다는 말에 역시나 자존심이 상한 헤라는 고무공처럼 튀어 올랐다.
그리고 재원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 음.......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서툰 건 사실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볼 일 다 봤다는 듯이 이제까지 잡아 누르고 있던 헤라의 팔을 놓아 준다.
그의 입술에 헤라의 오렌지 색 립스틱 자욱이 남아 있었지만 그는 닦아 내지 않는다. 헤라는 말을 해줄까 싶다가
지가 모르면 어쩔 수 없지.......밖에 나가서 망신 좀 당해 봐라 하는 마음으로 모른 척 했다. 내 키스가
서툴다니.......복수다.

- ........그건 인정 하냐? 아무 말 없게.

- ........

- 좋아. 오늘은 여기서 물러나고

갑자기 재원은 하던 말을 멈추고 머리에 번뜩이는 생각 하나를 붙잡는다.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

- 너 내일 저녁 때 보자!

- 내일요? 내 일은.......안돼요.

내일은 망쳐버린 내 마지막 휴가란 말이야. 휴가 3일 내내 내가 싸가지 널 봐야 겠니!
헤라는 속으로 외치며 절대로 만만치 않은 재원을 노려봤다.

- 안돼? 알바 너 진짜! 배짱 하나는 두둑 하다. 하지만 배짱으로 버틸 일이 있고 아닐 일이 있지.......내 지갑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 가지간걸 잊어버리는 일은 그럴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백만 원! 수표 얘기가 나오자 헤라는 이번에야 말로 꼼짝 없이 그에게 걸려들었다는 걸 알아 차렸다.

- 그건! 클럽 프론트에 고스란히 갖다 맡겨 놨어요.

그러나 일단 변명은 해본다.

- 그래도 어쩌냐? 난 이미 도난 신고를 해 버렸는걸! 네 이름도 아는 데로 말했고.......말야.

- 뭐.......요?

아! 정말 시궁창에 쳐 박혀 버린 기분이다. 아니 수렁에 빠진 기분인가? 하여간 뭐든 간에 하늘이 노래지는 건
마찬 가지다.

- 그러니까 만나........그럼 너랑 얘기해봐서, 얘기가 잘되면 경찰서 가서 도난 신고 한거 없었던 일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 어때? 및지는 장사는 안 될 것 같지 않냐?

저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는 면상으로 자신의 주먹이 날아가는 상상을 하며 해라는 마지막 힘을 다해 말한다.

- 안 만난 다고는 안했잖아요.......내일이 안 된다는 거지........모레. 모레 저녁 때 만나요. 그럼 되잖아요.

코너에 몰린 어린 복서 같은 얼굴로 말하는 그녀를 보자 재원은 지금 생각난 이 재미있는 게임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그러지 뭐! 그럼 모레 보자.......근데 핸드폰 좀 줘봐!

헤라는 뻔한 이유를 묻지 않고 순순히 자신의 핸드폰을 내 밀었다. 그가 그녀의 핸드폰으로 자신의 번호를 찍고
자기의 핸드폰에 그녀의 번호가 뜨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녀의 손에 핸드폰을 돌려준다.

그 일련의 동작들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헤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 모레 보자!

그가 먼저 등을 보이며 비상구 문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 문득 발걸음을 멈춘 그가 헤라를 돌아보며 그녀의
차림새를 아래위로 훑는다.

- 이쁘게 하고 나와라! 모레 말야.

그리고는 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재원이 비상구 문을 닫고 한발 짝을 떼어 놓기가 무섭게 어떤 여자와 몸이 부딪힐 뻔 했다.

- 어머! 죄송합니다.

그리고 여자가 먼저 사과를 했지만 그는 여자의 얼굴에 흘낏 눈짓만 한번 줄뿐 그녀의 사과를 무시한다.
그러나 순간 여자의 얼굴에 비친 묘한 웃음........뭐지? 그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오른쪽 바로 옆의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보고 손을 씻으러 세면기 앞에 선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비상구 앞에서 마주친 여자의
웃음의 의미를 깨달았다.

입술과 입가에 번진 오렌지색 립스틱.......
한번도 립스틱을 지우지 않은 여자와 키스를 해보지 않은 그의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 진 헤라.......만만치 안구나 너! 그래.......모레 보자. 이 빚은 그때 갚아 줄 테니까.

키스 후, 그의 입 언저리를 맴돌던 헤라의 시선을 떠올리며 재원은 중얼 거렸다.



12)

- 박 부장.......왜 여태껏 소식이 없어요?

- 네?

오늘도 재원 앞에 공손히 손을 모으고 허리를 약간 굽히고 있는 박 부장은 그가 무슨 소식을 말하는 것인지
파악하지 못한 얼굴로 서 있다.

- 며칠 전에 준 서류 건 말이에요.

컴퓨터를 두들기던 손을 멈추고 재원이 박 부장의 얼굴을 마주본다.

- 아.......네. 그 건은 닷새라고 하셔셔....... 아직은 3일 밖에 안 지났습니다만.

- 닷새 안에 라고 그랬지요. 닷새 지나서가 아니고.

재원은 어떻게 이런 사람이 부장까지 승진을 했는지! 라는 의문을 가지고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 죄 죄송합니다. 시정 하겠습니다.

- 다 조사 되지 않았어도 지금 메일로 올려요. 더 조사 된 건 그때 가서 봅시다.


박 부장이 대답을 하고 방을 나간 후, 재원은 핸드폰을 꺼내어 들여다보며 생각을 한다.
일 생각이 아니고 헤라와의 게임 생각.

처음 생각은 재즈 클럽이나 그런 곳으로 그녀를 불러낼 예정 이었지만 생각해보니, 오늘은 일명 ‘로열 블루 클럽’의
모임이 있는 날 이었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재계에서 제법 순위 안에 드는 같은 또래들이 모이는 일종의 친목 모임 비슷한 것 이었다. 말이
친목이지 사실은 서로를 탐색하기 위한 탐색전의 성격이 더 짙은 모임 이다.

그런 모임이지만 멤버들이 주로 남자들이다 보니, 어차피 거기에 오는 여자들 중엔 재벌가의 사람이 아닌, 노는
애들 중 잘나가는 여자들도 들랑거린다. 그러니 그녀를 데리고 간다고 해서 이상한 눈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아직도 헤라를 좀 노는 여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면서도 그제 코엑스에서 만나 저장해둔 그녀의 번호를 처음 누르며 그는 긴장하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 별~

신호가 한참이나 울린 뒤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

- .......

누구인지 모르고 전화를 받은 걸까? 그녀는 말이 없다.
만약 그녀가 그의 번호를 저장해 두었다면 전화를 받기 전에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았을 것이다.

- 나가 누구신지요? 장난 전화 하신 거면 추적 들어가기 전에 재빨리 끊으시구요. 잘 못 거신 거면 그냥 사과
하시고 끊으시면 됩니다.

그러나 사무적인 목소리로 그녀는 전화의 상대가 누구인지 모를 뿐 아니라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재원은 살짝 화가 나려 한다. 감히 내 번호를 그냥 지웠어?

- 나라고. 오늘 저녁 약속 제대로 하려고 전화 했는데. 모르겠냐?

- 네?

이제야 생각이 난건지 네? 라 되묻는 그녀의 말투에 생각이 묻어났다.
설마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건 아니겠지?

- 아.......네. 미안해요. 지금 좀 바빠서 목소리를 못 알아들었네요.

너만 바쁘냐? 넌 더 바쁜 사람이야.......

- 바쁘다니.......네가 무슨 일로 바쁘냐?

- 그런 건 피차간에 알 필요 없으니까 약속 장소하고 시간이나 말하고 끊으시죠.

여느때나 다름없이 퉁명스런 말투였다. 이렇게 늘 같은 말투를 유지하기도 힘들 법 한데 참으로 한결 같다.

- 7시 반까지 압구정 선대 백화점 명품관으로 앞으로 나와.

- 7시 반은.......일이 그때 까지 끝날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가보기로 노력은 하겠는데요. 늦으면 좀 기다려요.
뭐.......그냥 가주면 더 좋고.

- 너.......너무 노골적이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헤라가 드러내놓고 오늘 약속이 무마되길 바라는 것 같아 재원이 한 마디 날린다. 오늘 만나는 이유를 그녀가
깨닫기를 바라고서 말이다.

- 아아.......알아요. 잊지 않았어요. 어쨌든 클럽에서 돈은 돌려받은 거죠? 어제 확인 했어야 했는데.......

- 물론. 거기 여직원이 너 같지는 않아서. 무사히 받았어.

- 그래요. 나 도둑이에요. 아니까 그 얘긴 그만 하구요. 더 할말 없죠? 방금 말했다시피 내가 좀 바빠서 끊어도
될까요?

퉁명스런 것도 모자라서 빨리 끊지 못해 안달을 하는 그녀의 말에 재원은 코웃음을 치며 늦지나 말라고 경고를 한
후, 그녀가 끊기 전에 먼저 전화를 끊는다.

1분도 안되는 전화 통하에서 그는 열이 올랐다.

“ E-메일이 도착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순간, 재원의 컴퓨터가 메일 도착을 알린다. 그는 이제 회사를 나설 때 까지 헤라를 잊고 일에
몰두 할 것이다.




재원이 먼저 전화를 끊자 헤라도 전화기에 대고 ‘흥’ 하는 콧바람을 내고는 다시 컴퓨터모니터를 훑는다.
거지같은 휴가 3일을 마치고 회사로 출근한 첫날. 벌써 한달 째 끌고 있는 대어의 인터뷰 계획이 확정되고 있었다.

- 헤라 씨. 고 석준 이 인터뷰 확정 됐지?

- 네.......겨우요.

그녀는 컴퓨터에 눈을 둔 채 대답 했다.

- 걔는 왜 그렇게 튕기는 거야? MTN에서 그렇게 지목만 하지 않았어도 그냥 확 없었던 일로 해버렸으면
좋겠구만.......안 그래?

그렇게 묻는 과장이 열을 받았는지 그녀에게 주려던 커피를 자신이 마셔 버린다.

고 석준.......MTN 사에서 비밀리에 접촉을 원하는 인물이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그에게 접근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터뷰 일정을 잡는데 만 한달이라니. 과장이 화가 날 만도 하다.

대부분 이런 식으로 어느 한 사람을 지목해서 중재를 원하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는데. 이상하게도 MTN 측은
자신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헤라의 회사에 일을 맡겼다.

- 사실요 과장님. 이일 난 좀 찝찝해요.

헤라는 마우스에서 손을 떼어 과장의 손에서 커피를 빼앗는다. 그리고 의자를 돌려 앉으며 다리를 꼬고 눈을 가늘게
뜬다. 심각한 생각에 빠질 때의 그녀의 버릇이다.

- GH 전자에서 고 석준을 고스란히 빼앗길 것 같지는 않단 말이죠. 그러니까 MTN 측에서도 트러블이 생기는 걸
막아 보려고 우리를 내세우는 거구요.

그녀의 추리에 과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생각 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꼬아진 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 잘 못하면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일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네요.




그러나 헤라는 생각에 빠져들어 과장의 눈을 인식 하지 못한다. 하긴 늘 상 있는 일이므로 새삼 의식 하고 말 것도
없는 일이긴 했다.

어쨌든 어렵사리 고 석준과의 인터뷰를 이번 주 금요일로 잡았으므로 그녀는 거기에 따른 MTN 과의 계약서 준비에
전념을 해야 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재원과의 방금 전 통화내용을 그새 잊어버리고는, 이번 일 때문에 회사나 자신에게 피해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골똘하게 생각에 잠긴다.



추적추적 봄비가 온다.
재원은 우산을 받쳐 들고 벌써 30분 째 헤라를 기다리고 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그녀에게 그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물론 늦을 지도 모른다고는 그녀가 이미 경고는 했지만 비도 오는데.......정말 짜증난다.

거기에다 이제는 정말이지 누가 칼자루를 지고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이다. 분명 자신이 쥐고 있다 믿고
있던 칼자루 인데.......그녀의 행동은 그게 아니었다.

그건 아마도. 종족 보존 불변의 법칙!

성에 대한 선택권이 암컷에게 있는 한 구애의 춤은 수컷이 춰야만 하는 자연의 섭리가 자신에게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아.......그는 이 빗속에서 30분 째 여자를 기다리는 것에 비참한 기분마저 들었다.

손목 위에서 다이아몬드가 번쩍이는 ‘오메가 워치 씨 마스터’를 재차 노려보며 그는 시간을 확인 한다. 8시
10분.......

그리고 구두 밑에 고인 물을 바라보면서 인내심을 키우는데, 검정색의 심플한 하이힐 두 짝이 그의 발 앞에 선다.

- 미안해요. 하지만 늦을 거라고 얘기 했으니까 암말 말아줬으면 하네요.

고개를 들어 보니 퉁명스런 목소리와 비슷한 얼굴을 한 헤라가 서 있었다.

내리는 비에 끝이 살짝 젖어 늘어뜨린 긴 머리는 지난번과 같았지만, 오늘의 옷차림은 검정색의 단추가 없는 심플한
시폰 블라우스에 같은 소재로 된, 바람에 나풀거리는 흰색 스커트.......전체적으로 심플! 그 자체지만
세련된........파티에 가는 걸 알고 온 옷차림새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는 매혹을 넘어서 고혹적이기까지 했다. 처음 봤을 때의 그 알바 와 같은 사람이라 절대 보여지지
않는다. 반짝이는 저 눈을 제외 하면.......

이 순간이 재원에겐....... 무대 위에서 구애춤의 서막이 시작되기 위한 커튼이 오르는 결정적 순간 이었다.

- 안가요?

넋을 잃고 있는 재원을 향해 그녀가 물었다.

- 어.......그래.

뭐냐! 정 재원.......니가 언제부터 여자 옷차림에 동요 했다고.

나란히 각자의 우산을 쓰고 백화점 뒤 쪽으로 걸어갔다. 걸으면서 재원은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 즉 자꾸만 그녀를
의식하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만이야 오늘까지만 만난다. 그럼 끝이야. 라 주문을 건다.



밖도 어두워지고 재즈 바 안도 어두웠다.

헤라가 한번도 와 본적 없는 고급 바 안에는 60~70 여명 정도의 남녀가 섞여 어울리고 있었으며, 간간이 정장을
한 남자 웨이터들이 그들 사이를 지나며 음료수 혹은 술잔들을 건네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그냥 재즈 바가 아니라 무슨 파티나 모임 같은 인상이 드는 그런 자리라는 걸 그녀는 알아챈다.

이건 또 뭐니? 정 재원!

- 여긴 뭐예요?

웨이터가 나르는 쟁반 위에서 마티니 잔을 두개 들어 헤라에게 건네는 재원을 보며 그녀가 의미심장한 얼굴을 한다.

- 뭔지 알아야 할 필요 있어? 별 생각 없는 모임 이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러나 그는 무성의한 대답을 하고 있다.

신경 쓰지 말라고? 너 같으면 이렇게 심상치 않은 사람들만 모인 곳에 와서 무감각해 질수 있겠니?

- 굉장한 사람들만 모인 것 같은데.......신경 쓰여요.

특히 남자들.......어두웠지만 입고 있는 옷들이나.......모든 게 여간 사치스러운 게 아닌 걸로 봐서 이들은 무슨 특수
집단 같았다. 뭐 좀 요란한 치장을 한 여자들도 몇몇 섞여 있기는 했지만 그녀들은 남자들에 비하면.......오히려
검소해 보인다.



- 앉아.

그녀가 직업 정신에 입각하여 사람들을 분석하려 하고 있을 때 재원이 넓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그녀를 부른다.

재즈 바 안은 옅은 담배 연기와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는 소리, 그리고 재즈 피아노의 선율이 한데 어울려 나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헤라는 이 심상치 않은 남자들의 분위기에 불안해하며 옆에 앉은 재원의 옷차림도 갑자기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 시작 할까?

그리고 재원이 바 안의 어딘가에 시선이 머무는 걸 확인하는 순간 헤라는 재빨리 그를 살핀다.

핀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얇은 흰색 남방에 노타이. 겉옷은 검정색의 캐주얼 슈트를 입고 있는데 손목에는 아르마니
상표가 붙어 있었으며, 또 그 손목에 찬 시계의 푸른색 시계 판에는 열두 개의 다이아가 박혀 있고 그 안의 로고는
오메가 라 써 있었다.

잠시 몸을 뒤로 하고 그를 다시 한번 전체적으로 훑어본다. 말끔한 검정색 슈트를 입고 있었지만 그는 어딘가
퇴폐적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거기에 수염이 약간 돋아난 턱과 거뭇한 콧수염이 그가 더 위험스런 남자로 보이게
했다.

- 안에 있는 남자들 중 네 맘에 드는 사람 하나만 골라 봐.

뭐? 남자를 골라?

그렇게 재원을 살피며 불안해지고 있는 헤라에게 그의 말은 그녀의 괴상한 상상에 불을 붙였다.

- 왜요?

겁먹은 목소리가 그에게도 전해 졌을까? 헤라는 안에 있는 남자들을 둘러보며 이들 모두가
캣파이팅이나 머드레슬링을 즐기는 변태가 아닐까 하는 그야말로 엉뚱한 상상을 한다.

가끔 영화 같은데서 보던 파티 복 차림을 한 남녀가 그런 게임들을 보면서 흥분하고 열광하는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

- 오늘 게임은 그거야. 네가 고른 남자한테서 백만 원만 받아오는 거.

이 얘긴 또 뭐야? 너도 같은 변태니? 그녀가 그런 괴상한 상상을 하는 이상 재원이 하는 모든 말이 정상적으로
들릴 리가 없었다. 물론 그가 제안한 게임이 정상적이지도 않았지만.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헤라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면 노려본다.

- 왜? 하기 싫어? 그럴 상황이 아닐텐데

- 아아. 알아요 알아. 내 상황이 어떤지.......하지만 여기 있는 남자들은 뭐랄까.......왠지 위험해 보여요. 다른데
가서 하면 안돼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다급하게 들렸다. 재원은 그런 그녀가 조금 이상해 보였지만 이런 파티가 낯선 그녀가 겁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그냥 넘긴다.

- 안돼. 여긴 내 홈인걸! 유리한 고지를 놔두고 옮긴다는 건 말이 안 되지.

홈!!!!! 그럴 줄 알았어. 어떻게 하지? 그냥 경찰서에 같이 가서 돈은 돌려 줬으니까 이 사람이 잘못
안거라고........설명하면.......아냐! 아냐. 경찰에서 절도는 그렇게 넘어가지는 문제가 아니야. 그럼.......해야 해? 이
게임을?

갑자기 고개를 절래 흔드는 헤라가 재원은 좀 불안했다. 그러나 그때 마침 맞은편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송 석훈과
눈이 마주친 그는 그 쪽으로 정신이 쏠린다.

나이는 재원보다 두 살 위인 그는 MTN 송 학철 회장의 차남이며 현재 MTN네트워크의 상무 이사이고 뉴욕에서
같이 공부를 했다. 그러나 결코 친할 수 없는 라이벌이며 서로에 대한 갖고 있는 감정도 좋지만은 안은 상대 였다.

- 골....... 랐어요. 저 사람!

헤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찍었다. 이왕 해야 하는 게임이라면 그리고 목적을 달성하기위해서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남자가 더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 눈이 마주치고 있는 남자. 송 석훈을 지목 했다.

- 헤~.......? 진심이야?

뭐야........누군지 알고서 지목하는 거야? 어떻게 골라도 딱 지편이 되어줄 사람을 고르니?
재원은 그녀가 가리키는 석훈을 바라보다 다시 헤라의 얼굴을 살핀다.

- 저 남자로 하면 되죠?

그녀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석훈을 아는 얼굴은 아닌 것 같다.

- 네 맘이니까 뭐. 잘해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잘해보라 말했지만 솔직히 마음 내키지는 않는다. 하필 저 녀석
이라니.......

그런 그의 마음을 알리 없는 헤라는 결심을 굳히고 마음을 다잡아 자리를 일어선다.

어떻게 백만 원이란 돈을 처음 만나는 남자로부터 받아낸단 말이지? 그것도 변태 일지도 모르는
남자에게서.......내가 남자를 이렇게 까지 싫어하는 줄은 몰랐는데.......아아 세상남자들 모두가 변태로
보이다니........제 정신이 아냐!

- 안녕하세요.

마음을 숨기며 그녀는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 음.......안녕.

나이는 서른 정도 되어보였고 목소리는 생각보다 느끼하다. 웃음을 띤 얼굴이 괜찮게 생기기는 했지만 눈이
흐려있는 것이 술이 좀 취한 것 같이 보였다.

- 재원이랑 같이 왔어요?

그를 알고 있다. 홈이라더니.......

- 네.

- 그래요? 별일이네. 이 모임에 여자를 데리고 나타난 적은 없었는데.


중요한건 그게 아니야. 이 사람아.......내가 당신으로부터 돈을 받아 내는 게 우선이라고.

- 저도 뭐........같이 오고 싶어 온 사람은 아니에요.

-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 그냥.......저 사람이 혼자가긴 심심하다고 하길래 잠깐.

그러다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아냐 이런 말을 할 게 아니고 이 남자를 일단 유혹해야 하는 거 아냐? 아니면 사실대로 말하고 돈을 좀 내게 주는
척이라도 하라고 할까?
재빨리 계산을 해보지만 그러기엔 이 남자를 믿을 수가 없었다.

- 심심해요? 여기가?

- 네........

묻는 남자의 표정에 얼핏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웃음이 지난다.


재원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석훈의 웃는 얼굴과 헤라의 조금 어색한 웃음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송 석훈은 워낙에 플레이보이에다가 스캔들도 끊이지 않는 재가에서 알아주는 꾼! 이었다.그래서 인지 어쩐지
자꾸만 불안해 진다.

- 재원이 녀석이 우리한테서 눈을 떼지 못하네요.

- .......그래요?

남자가 재원을 쳐다보며 다시 좀 전과 같은 기분 나쁜 미소를 입에 건다.
헤라도 그의 시선을 따라 재원을 바라봤다. 멀리서 바라보는 그가 지금 앞에 있는 남자에 비하니 왠지 믿음직해
보이는 건........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날 여기로 등 떠민 게 누군데.

- 많이 심심한가 보네요. 당신한테서 눈을 못 떼는 것 보니.

남자가 술잔을 입에 가져 며 말했지만 헤라는 계속 해서 밀려드는 이상한 상상을 가라앉히기 위해 칵테일 바의
왼쪽 천장으로 달린 조그만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화면에 소리 없이 나타난 그림은 공교롭게도 온몸에 머드를 칠하고 지저분한 액체 위에서 뒹구는 거구의
남자들 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그렇게 떨쳐 버리려 노력하던 장면이 그녀의 눈을 덮친 것이다.

아아.......제길! 왜 하필 이런 때 저런 장면이 보이는 거야? 정말 무서워 죽겠네.

헤라는 시선을 다시 마주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주었다. 눈이 마주치고 남자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침을 흘리고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영상이 겹쳐지고 있었다.

- 진 헤라.......뭐 하냐? 빨리 끝내고 오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재원은 석훈의 점점 더 짙어지는 웃음이 그가 그녀를 탐내기 시작 했다는 걸
눈치 챘다.

당연하다. 그의 눈도 눈인데.......저 여자가 탐이 나지 않을 리가 없겠지! 더구나 나랑 같이 온 여자가 자기에게
접근을 해왔으니.......!!!!!

- 저기요.......

헤라가 입을 여는 순간 남자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손가락을 댄다.

- 아! 하하하. 왜 왜 그러세요?


흠칫 몸을 뒤로 물러서며 그의 손을 살짝 뿌리쳐 본다.

이 남자 뭐야!!!!! 아직 유혹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왜 이러는 거야?

- 왜 라니........여긴 파티야.......그것도 술 마시고 진창 빠져서 노는. 어차피 재원이 녀석이랑 노는 것 보다는 나랑
노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나한테 온 거 아녔어?


석훈의 손이 그녀의 입술에 닿은 것을 본 재원은 순간 머리에 핏대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 재원.......침착해. 흥분하지 마라. 흥분 할일도 아니고. 네가 시킨 일인데 뭘.......저 정도도 예상 못했었냐!
그는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려 다시 한번 마티니를 한 모금 입에 문다.


- 아! 재원이가 보고 있어서 그래?

그녀가 자신의 손을 뿌리치자 남자는 다시 한번 재원에게 흘낏 시선을 주더니 묻는다.
말하는 그의 입에선 진한 위스키 향이 났다.

-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

아냐. 상대를 잘 못 짚은 거 같아. 이 남자는 저 정 재원이란 인간한테 뭔가 꼬인 게 있는 것 같은데........잘못
했다가는 이거야말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 나겠어.

헤라는 정신을 차리고 냉철한 판단을 해보려 노력 했다. 그리고 차라리 재원과 경찰서로 가서 정신병자 소리를 듣는
한 이 있더라도 사실대로 설명을 하고 선처를 부탁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 어머! 재원 씨가 절 부르네요. 죄송해요. 그만 일어날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얼른 이 자리를 빠져 나갈 행동을 옮긴다.

최대한 상냥한 미소와 함께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스리며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는 순간 남자의 팔이 뻗어 나와 그
손이 그녀의 가슴께로 향한다. 순간 헤라의 주먹이 앞뒤사정 가릴 것도 없이 그의 얼굴로 나가버렸다.

그녀가 또 사고를 친 것이다. 그는 다만 그녀의 어깨에 묻은 하얀 실밥하나를 발견하고 떼어 주려던 것 뿐 이었는데,
그 친절함이 그를 여자의 주먹에 맞고 바닥에 뻗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재원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난 이 사건에, 실소를 머금고 잠시 망연히 앉아 있는다.

- 실.......실밥이 묻어 있길.......래.......

그가 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그녀에게 중얼 거렸다.

뭐? 시.......실밥?
헤라는 자신의 왼쪽 어깨에 붙은 실밥을 내려다보고 다시 누워 있는 남자를 내려다 봤다.
두 사람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남자를 부축하여 일으킨다.

어 어떻게........해!!!!! 정말! 미치겠네.
그녀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얼어있는 사이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 틈으로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당긴다.

재원 이었다. 다음 순간 남자가 천천히 일어나고 주변이 소란스러워 지는 틈을 타 헤라는 재원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뛰어 나올 수가 있었다.

13)sbs

- 아~~~하하하~~~~ ~~~~ ~~~~

밖으로 나와 한참을 달려가다 멈추어선 재원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쟤네 뭐야? 하는 눈으로 바라봤지만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 야.........하하하 너! 진짜 재밌다. 하하하하~~~·~~~~

재미있니? 너 재미라고 그랬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헤라는 숨을 헐떡이며 웃고 있는 그를 노려봤다. 그리고 그가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뿌리 친다.

- 이봐요.......이제 장난 그만 쳐요. 그쪽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왠지 지금 화가 나 가든요. 계속
놀림당하고 있는 기분 이라구요.

- 맞아! 너 놀림당하고 있는 거!

- 뭐요?

- 아 아냐. 농담이고.........하하하 눈물이 다 나네!

헤라의 화가 난 얼굴에도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 나 집에 가야하거든요. 그 쪽이 말한 이 말도 안 되는 게임은요

- 가자! 저녁 먹으면서 얘기해.

그가 아직도 눈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헤라의 손을 잡아끈다. 그녀는 재원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손을 비틀어보지만
그럴수록 그의 손엔 힘이 더 들어갈 뿐 이었다.

어휴~ 정말 저 뒤통수나 한대 때렸으면 속이라도 풀릴 텐데!!!!!
재원에 손에 끌려가며 헤라는 주먹을 올렸다 내렸다 를 되풀이 한다.

- 어디가요?

- 저녁 먹자니까.......

- 그쪽 노는 물 보니까 어디 고급 음식점 같은데 갈 모양인데요. 난 그런 취향 아니거든요.

- 일식집 가려고 했는데.......싫어?
- 난 회 안 먹어요.

- 그래?

그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 돌아봤다. 그녀는 여태 화가 난 얼굴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귀여운데.......!!

- 그럼.......네가 가고 싶은 데로 가자.

- 정말요?

그녀가 약간 놀란 얼굴로 되묻자 재원은 어깨를 한번 들썩여 보인다.

- 그럼 이 손 좀 놓을래요? 우리 사이에.......손잡고 다니는 건 웃기잖아요.

그녀의 말에 재원은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봤다.
손은 언제 잡은 거지.........?
그리고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손을 놓는다.

어머! 웬 놀란 척? 내 손에 뭐라도 묻었니? 아님 순진한 척 하는 거야? 웃겨!!!!!

- 가요. 낚지 볶음 잘 하는 데가 있는데 그거 먹을 거예요.

그의 이상한 행동에 더 기분이 상해버린 헤라는 재원을 스쳐지나 앞장을 선다.

골목 몇 개를 돌고 돌아 “ 여자만”이라 써있는 빨간색의 간판이 달려진 식당으로 들어갔다

- 뭐 먹을래요? 낚지? 아니면 오징어?

메뉴는 두 가지 뿐 이었다. 낚지나 오징어나 그게 그거지! 라 생각한 재원은 네가 알아서 해. 라 말하고는 식당
안을 두리번거렸다.

큰 음식점 이었지만, 소란스럽고 상위에 설치된 철판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음식냄새와 연기는 조금 메케하게
느껴졌다.

- 이런데 처음 와 봐요?

컵에 물을 따르며 두리번거리는 재원을 향해 헤라가 물었다.

- 뭘 묻냐........보이는 대로지.......
- 그래요........

잠시 침묵이 생겨났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마도 헤라는 백만 원권 수표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고 재원은 그녀에게 반응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생각을
하는, 서로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생긴 침묵 이었을 것이다.

- 경찰!

- 수표 얘기는 말야.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 먼저 얘기해요.

헤라는 그의 얘기가 궁금했다. 수표라니.......!

- 수표 가져갔던 일........사실 신고 같은 것 안했어.

뭐........신고를 안했어......?

- 정말이에요?

- 어. 근데.......네가 그날 코엑스에서, 게임이라고.......너무 쉽게 가지면 재미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바람에 좀
심술이 나서 그래서 널 좀 골탕 먹이려고 했는데.......

재원은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그만 그녀와의 게임을 끝맺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 골탕은 내가 먹었네.......네가 친 남자가 누군지나 아냐?

그 남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건가? 헤라는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고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 하~ 알아서 뭐 하냐! 너랑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대신 내가 좀 곤욕을 치러야겠지만........내가 벌린 판
이니까. 수습도 내가 해야겠지.

그의 말을 들으며 헤라는 이 남자 얼굴에 그늘이 생기는 것 같다........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 주문한 낚지 볶음이 철판에 뿌려졌다. 양배추와 양파 낚지 그리고 떡볶이 등등이 철판에 하나 가득 푸짐하게
보이는 것이 헤라는 입에 침이 고였다.

- 먹어요.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요. 당신은 수습할 능력은 있어 보이네요. 그러니까
걱정 말고 배부터 채우자구요.

그 남자가 혹시 이 사람의 상사라도 되는 건가?
조금 침울해진 재원의 얼굴을 보자 헤라는 그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맛있겠네.......매운 건 잘 못 먹지만. 먹고 죽어보지 뭘.

- 무슨 남자가 매운 것도 못 먹어요? 술 먹는 남자들 보면 매운 음식 많이 찾던데.

- 난 술 별로 안 마셔!

그가 젓가락을 집어 들어 철판에서 몸을 웅크리기 시작한 낚지를 건드려 본다. 그리고 꿈틀 꿈틀 몸을 뒤트는
녀석을 신기하다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재원을 헤라는 처음으로 유심히 관찰한다.

깔끔하지만 세련되게 잘려진 머리카락과 역시나 세련된 얼굴, 그냥 잘 생겼다는 표현보다는 그 편이 더 어울린다.
특히 얇은 속 쌍꺼풀이 진 눈이 그랬다.

그리고........180 이쪽저쪽 될 것 같은 키와 제대로 운동이 된 그것역시 세련되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건장한 몸과,
깨끗하고 고운 그러나 고집이 세게 생긴 손과 손톱.......귀하게 자란 사람이라는 느낌이 팍팍 풍기는 이 사람!

누구지? 이름은 안다. 정 재원. 그러나 정 재원이 정말 누구인지는 모른다.

- 그만 봐라! 손 떨려서 젓가락질도 안 되니까.......

자신을 관찰하는 헤라의 눈을 의식했는지 그가 철판에 눈을 둔 채로 퉁명스레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 헤라는 얼굴에 웃음을 걸고 너스레를 떤다.

- 저 같은 미천한 것이 본다고 손을 다 떠시고 혹시 수전증이 갑작스레 발병하셨나이까?

- 너.......!

그가 젓가락을 그녀에게 들이밀며 위협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의 움직임에 주름 한 올 없는 검정색 슈트 팔 부분이 조여지며 단정한 옷에 드디어 주름이 생겼다. 그러자 헤라는
갑자기 그가 진짜 사람으로 느껴졌다.

이제까지는........그에게서 사람의 온기를 느껴 본적이 없는 것 같았는데.......지금은 왠지.......그랬다.

하긴.......알게 된지 얼마나 됐다고.......

- 우리 술 한 잔 할래요?

별로 술을 안 마신다는 그에게 술을 하자니 어쩐지 또 그녀가 일을 만드는 것 같다.

- 왜?

- 우리 서로 풀게 있잖아요. 그쪽 노트북서부터.......오늘 일까지. 그런 껄끄러운 일을 풀때는 술이 들어가야지요.
안 그래요?

무언가 계산을 하고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정말로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그가 우울해 보여서 말이다.

하지만 재원은 저 영민한 여자가 왜 갑자기 술을 마시자하는지 그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지금까지로 봐서는 가끔은 괴상한 일도 곧잘 벌릴 것 같은 여자지만!

그녀가 소주 한 병을 주문한다.
능숙한 솜씨로 그의 잔을 채우고 자신의 잔도 채운다. 그 다음, 소주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오늘의 그녀 차림과는
다르게 쭈욱~ 원 샷으로 잔을 비웠다.

- 잘 마시네. 자주 마시나봐.

자연스럽게 잔을 비우는 그녀를 보며 재원은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처음엔 정말 재수 없기 짝이 없는 알바 생이었고, 그 몇 시간 뒤는 남자를 자극하는 플레이보이지의 모델이었고,
다음 순간엔 남자 못지않은 여신 아르테미스.......그리고 오늘은....... 빗속에서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 안 마셔요?

술잔만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재원을 헤라가 상에 올린 팔에 턱을 괴며 바라본다.

- 너나 마셔라. 난 아까 좀 마셨어.

지금 술을 마시면 그녀를 그냥 보내주지 못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원은 그녀의 권유를 사양했다.

- 아깝게.......

그녀가 그의 잔을 가져다 입에 털어 넣는다. 무슨 냉수라도 되는 양, 한잔 씩 한잔 씩 입에 소주를 쏟아 붓는
그녀를 재원은 좀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 아~~~~~그러고 보니, 아까 거기서 나도 마티니를 두잔 이나 마셨네!

문득 생각이 난 듯 그녀가 중얼 거렸다.

얘가 왜이래? 혀가 꼬인 것 같은데!
재원은 불길 했다. 그녀가 아무래도 과음을 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 너 괜찮냐?

- 글쎄.......사실은 내 주량이 소주 반병이거든! 근데 지금 남아 있는 소주는?

병을 거꾸로 들어 그녀가 확인을 한다. 병에 술이 반이라도 남아 있다면 쿨쿨 쏟아져야 했지만 그 속에서 떨어지는
것은 병아리 눈물 한 방울!

혼자서 한 병을 다 마셔버린 거다.

- 너 정말 주량이 소주 반병이야? 야! 진 헤라!.......야!

순간 상에 엎드려 눈을 감아 버리는 그녀!!!!!!!!!!!

아! 정말...........재원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난처해했다.

그러나 시간은 벌써 11시를 지나있었다.
그녀의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찾는다. 가족 누구에게라도 연락을 해서 집이라도 알아내면 될 것이라 생각을 했지만
그녀의 핸드폰은 방전 상태였다....... 그래서 아까 전화를 받지 않았었나 보다.

- 진 헤라.......이봐. 일어나 봐! 자냐?

- ........

깨워 보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하........수가 없다.

식당 주인에게 잠시 그녀를 부탁하고 재원은 차를 가지러 갔다. 그러나 식당 앞 골목은 차가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좁아 그녀를 식당에서부터 업어 100미터 가량 걸어가야만 했으며
제법 굵은 비가 아직도 내리고 있어 그 비도 고스란히 맞아야만 했다.

그녀를 뒷좌석에 눕히고 재원은 운전석에 앉아 젖어버린 슈트의 상의를 벗고서 운전을 한다. 월요일이라서 인지
차가 제법 막혔다.

그리고 재원의 차가 그의 아파트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한번도 깨지 않고 잘도 자고 있었다.

- 야.......일어나. 힘들어서 너 도저히 못 업겠거든! 좀 일어나봐. 야!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헤라를 다시 한번 깨워 봤지만 여전히 인사불성 이었다.


침대에 그녀를 눕히고 재원은 한숨을 돌린다. 그러다 생각이 난다. 그녀의 언니에게 받은 명함! 그는 지갑을 찾으려
무심코 몸을 뒤지다가 슈트의 상의를 차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그러나 다시 주차장까지 가서 지갑과 옷을 가져오자니 귀찮았다. 몸도 피곤했고.......더 솔직해 지자면 그녀를
보내주고 싶지가 않은 것이 그의 진심 이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안을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내고 싶지는 않다.

한 마리 외로운 늑대가 그 뇌 속에서 도파민을 분비하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도 모른 채 순진한 얼굴로 잠이 든
그녀!

재원은 자신의 옷처럼 비에 젖어 버린 그녀의 옷을 떨리는 손으로 하나씩 벗겨 나갔다.
상의를 벗기고 다음은 스커트, 그리고 스타킹과 슬립 까지.......하지만 속옷까지는 도저히 벗길 엄두가 나지 않아,
그만 그녀의 몸에 이불을 덮어 버렸다.

천하의 정 재원이가 술에 취해 잠든 여자의 옷을 벗겨 주다니.......그 동안 그에게 매달렸던 여자들이 본다면
콧방귀조차도 끼지 않을 일이었다.

- 잘 자라. 내일 아침에 깨서 기절이나 하지 말고.

하긴.......혹시 모른다. 그녀에게 이런 일은 허다한 일일지도.......그러나 만약 아니라면 그녀는 날 믿었던 걸까? 술
취한 여자를 덮치지 않으리라는.......모를 일이다.


14)
속이 불편하다.......왜 이러지?

헤라는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잠에서 깼다. 울렁거리는 속을 참아보려 몸을 뒤척여보지만 아무래도 화장실로 가는
편이 낫겠다 싶어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어디니? 낮선 가구와 낮선 벽지와 하여간 다 낮선 곳에서 그녀는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기억을 더듬으며 살금살금 침대를 빠져 나와 방문을 열어본다. 거실.......고급스러운.......유럽식 조명과 가구들이
낮은 불빛아래에서도 빛을 내고 있었다.

그와 낙지를 먹으러 갔고 거기서 소주를 마셨던 일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그다음 어디부터 인가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여긴 정 재원의 집인가?

그의 집이라는 생각이 들자 헤라는 몸이 굳어져 버렸고 곧 자신이 속옷 차림 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하지만
밀려오는 구토 때문에 그녀는 화장실을 찾아 헤매야만 했다.

입을 틀어막고 방문 몇 개를 열어본 끝에 화장실을 찾았다.

우웨엑! 먹은 게 다 나오려는지 계속되는 구토에 머리가 울리고 힘이 빠진다.

아아.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왜 안마시던 소주는 시켜서 혼자 다 마셔버린 건지 그녀도 스스로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 재원이란 남자와 같이만 있으면 그녀는 평소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진 헤라.......넌 남자 혐오증 환자 아니었어?

구토가 진정 되고 그녀는 세면기에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화장이 번진 얼굴은 지저분했다. 세수를 대충하고
입도 몇 번이나 헹구어 냈지만 칫솔질을 하지 않아 입안은 여전히 위액 냄새가 남아 있었다.

욕실 문을 열고 쳐진 몸을 끌고 나온다.

- 괜찮냐?

- ........

문 앞에 재원이 서 있었다.

- 내 꼴이 괜찮아 보여요?

- 아니.......

- 그런데 뭘 물어요.......

그녀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을 하면서 낯선 상황에서 마주한 재원을 훔쳐봤다.
그는 편해 보이는 흰색 바지와 흰색 티를 입고 있었는데 헤라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는뭘 입어도 세련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 저기.......너 뭣 좀 입을 거라도 줄까?

어느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재원이 물었다. 헤라는 팬티와 브래지어 차림인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여름날 해변 에서 여자들이 하는 차림이랑 다를 바 없지 않나?

- 난 괜찮아요. 비키니 입고 있는 거라 생각하죠. 뭐.

그렇게 말을 해놓고는 그녀는 주방으로 간다.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생수 병을 하나 집어
들어 그 가는 목으로 꿀꺽 꿀꺽 마신다.

- 이거라도 입어라. 난 안 괜찮으니까.

그녀가 생수 병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그가 하얀 색 니트 하나를 가져와 그녀의 몸에 던진다.

흐음.......안 괜찮다.......라. 덮칠 수도 있겠다는 뜻이로군!
그걸 알았으면 이제 겁이 날만도 한데 헤라는 겁먹지 않았다. 대신에 승리감 이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 감정이
생겨나고 있었다.

-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그가 누워 있는 거실의 소파로 갔다. 재원은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려 하지만 그녀가 같은 공간에 있는 한, 잠을
자는 일은 포기해야 할 일 이었다.

- 뭘?

눈을 감고 그녀를 보지 않으려 노력 한다.

- 그쪽 말에요. 혹시 전생에 여자였다는 얘기 들은 적 없어요?

새벽에 일어나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아니면.......페로몬을 충분히 배출해 내지 못하는 것일지도.......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왜 페로몬을 쏘지 못하는데!

- 너 내가 남자로 안 보인다는 얘기가 하고 싶은 거냐?

- 아니.......아니요. 그런 얘기는 아니고.

재원은 눈을 뜨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헤라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녀는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 표정에 재원은 화가 난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자신이 누워 있던 소파위로 넘어트렸다.

그녀의 다리를 깔고 앉아 양팔로 몸을 지탱하며 엎드려 헤라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두 눈은 몽롱해 보여 더
유혹적 이었다.

-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지난번 그 약속을 지켜야 하나요?

당황한 표정 하나 없이 그녀가 물어 왔다. 며칠 동안 요리조리 잘도 피하기만 하던 그녀의 이 반응은 오히려 재원을
당황 시켰다.

그는 헤라를 노려본다. 그녀가 먼저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이라도 기다리기라도 하는 건지 입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재원은 그 입술의 유혹을 견뎌내지 못하고 천천히 입술을 겹친다. 솟아오르는 욕망을 억누르며 서두르지 않고
조심스레 그녀의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런데 이게 뭐니? 키스를 해도 가슴을 더듬어도 그녀는 전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싫든 좋든 간에 본능적으로
어떤 반응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게 없는 것이다.

그는 입술을 떼고 그녀의 볼을 살짝 때려 본다.

- 야! 진 헤라.

역시 반응이 없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새근새근 하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가슴 또한 규칙적인
리듬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들썩이고 있었다.

- .......자는 거냐?

- ........

- 나 참!

그는 헛힘 빠지는 웃음을 웃으며 헤라의 몸 위에서 내려 왔다.

이 신 새벽에 헤라 앞에서 재원의 카리스마는 거침없이 침몰하고 있었다.


15)

- 헤라 씨. 오늘 고 석준 하고 인터뷰 있는 날이지?

- 네.......지금 나갈 거예요.

-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

- 시간이 없다고 해서 GH 네트워크 연구소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인터뷰 있는 날만 하고 나오는 정장의 스커트 주름을 펴며 그녀는 고 석준 이란 이름을 되 뇌 이고 있었다.

굉장히 낯익은 이름인데.......물론 지난 한달 동안 그녀를 고민에 빠트린 이름 이기는 하지만 그 뿐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저 다녀올게요. 부장님. 인터뷰 마치고 바로 퇴근 할 수도 있어요. 괜찮죠?

사무실 문을 나서며 그녀가 소리치자 부장은 고개를 끄덕인다. 헤라의 상사에 대한 예의가 부족한 건 이미 직원들
모두가 포기 하고 있는 일이기에 다들 그녀가 문 앞에서 소리를 질러대도 그러려니 하고들 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좌 측 통로의 임원실에서 민 대표와 외부손님 한사람이 나온다.

- 안녕 하십니까.

헤라는 고개를 까닥여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다른 직원들 같았으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외부 손님 때문에 그나마 그녀는 상사에게 고개라도 까닥여 인사를 한 것이다.

- 아.......인사해요. 진 해라 씨. 이 분이 MTN 네트워크 송 석훈 상무 님 이십니다.

MTN의 상무? 고 석준 건의 실질적 지휘자 인가?
민 대표가 고 석준의 일을 맡고 있는 헤라를 알아보고 인사를 시킨다.

- 안녕 하십니까 진 헤라입니다. 고 석준 씨 건을 제가 맡고 있습니다.

그녀는 똑 부러지는 어조로 조금 고집이 있어 보이는 석훈에게 인사를 했다.

- 네. 반가워요.

그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지만 헤라는 못 본 척 시치미를 뗐다.

매너 없이 어디 남자가 먼저 악수를.......!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고 석훈이 멋쩍은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민 대표도 당황해 하고 있었지만 헤라는
엘리베이터 문짝만 바라보고 있었다.

- 저기.......혹시 전에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석훈이 묻는다. 헤라는 얼굴을 돌려 그를 쳐다봤다. 원래가 남자 얼굴을 잘 보고 다니지도
않고 기억해 두지도 않는 편이라 그녀는 그가 이런 식으로 여자에게 접근 하는 남자인가 ? 하는 생각을 했다.

워낙에 그런 남자들이 많았으니까........

- 글쎄요. 죄송합니다만 전 별로 기억이

하지만, 아!!!!!!! 기억이 납니다요. 그다! 며칠 전 재원과 그 이상한 모임에서 내 주먹에 맞고 대자로 뻗어버린!

- 기억이 안 나는데요.

헤라는 얼른 다시 엘리베이터의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발 더는 기억해내지 말아라........너 그날 술 취했었잖아.......으으~~~~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고 세 사람은 같이 승강기에 탔다.

날 다 알아 본 건가?
헤라는 다행히 오늘은 비즈니스 정장에 머리도 깔끔하게 빗어 올리고 온 상태가 그날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
있었다.

- 워낙에 눈에 띠시는 분이라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요.

그가 다시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말한다.

- 분명.......가까운 시일 안에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 그렇다면 혹시 회사에 오셨을 때 마주쳤을 수도 있었겠네요.

그가 조금 끈질기게 구는데도 헤라가 대답이 없자 듣다 못한 민 상무가 나선다.
하지만 석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헤라는 손바닥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뭐야? 왜 쫄아! 진 헤라 너 답지 않게. 그날은.......저 사람이 너무
오버 해서 그렇게 된 거야! 누가 실밥 같은 거 떼어 달랬나!

1층에서 문이 열리고 헤라는 민 대표와 송 석훈을 약간 앞질러 로비를 걸어 나갔다.
그리고 문 앞에 이르러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재빨리 몸을 돌려 문을 민다.

그때 석훈이 다시 그녀의 뒤에 대고 말한다.

- 재원 이한테 안부 전해 줘요. 그날.......일 잊지 않겠다고.

헉!!!!!!! 이런.

헤라는 뒤를 돌아보고 그를 향해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도 만면에 여유 있는 미소를 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헤라는 어째 등 뒤로 소름이 돋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밀던 문을 더 힘껏 밀어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아! 정신없어.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시점에서 왜 이르는 거야? 불길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회사 근처에 세워 놓은 차를 가지러 가다 헤라는 문득 걸음을 멈춘다.

그럼! 저 사람이 MTN 네트워크 상무면? 저 사람이 친구 이름 부르듯이 재원이라 부르는 정재원은 .......뭐야?

곤욕을 치러야 한다 길래 상사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부하직원 이름을 저렇게 부르지는 않는다. 더구나
안부를 전해 달라는 건 같이 일하는 사이는 아니라는 말인데!

도대체 뭐야?


그녀는 재원과 석훈으로 인해 어수선한 머리를 가지고 약속 장소로 이동을 했다.

경기도 여주 까지 내려와 연구소를 찾자니 지리를 몰라 계속 헤매다가 약속시간을 5분 정도 남기고서 간신히 약속
장소인 “아인슈타인”, 커피 숍 이름치고는 괴상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파일에서 본 사진과 같은 얼굴을 찾으러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그녀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인다.

안경을 쓰고 머리모양이 단정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고 석준!

- 안녕 하세요. 먼저 와 계셨네요.

헤라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가 잠시 주저하는 손짓을 해보이다 그녀의 손을 잡고 웃는다.

- 네.......전 궁금 한건 못 참는 성격이라서.......

뭐가 궁금하다는 말이야? 그렇게 튕기더니 벌써 연봉부터 궁금해졌다는 말은 아니겠지?

- 뭐가 그렇게 궁금하셨는지 모르겠네요.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신 분이.......

의자에 앉으며 헤라는 직업정신에 입각에 최대한 친절히 그의 말을 받았다. 끝을 좀 꼬기는 했지만......그래도 그가
애를 태운 것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 그래요?

- 네........

이상한 침묵이 생겼다.
석준의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에 헤라는 잠시 기분 나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여느 때처럼 남자들의 그런
시선을 무시하자는 생각을 한다.

왜 그렇게 사람 얼굴을 쳐다보는 건데?

- 나.......못 알아보겠어? 난 한눈에 알아보겠던데.......워낙에 눈에 띠는 사람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밖에서 걸어 올 때부터 알겠던데.

응? 이건 또 뭐야? 오늘은 참 눈에 띤 다는 소리도 자주 듣네........이 사람도 아는 사람 이었나?

-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 처음에 전화 받고서 동명이인인가 했었거든. 근데 얼굴 보니까 진 헤라 맞는데! 명지 대학교 3학년 2반. 난
학생회장 3학년 6반 고 석준.

안경 너머의 눈이 웃으며 그녀의 기억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명지 대학교.......십년하고도 일년 더한 과거의
사람인데.......기억이 가물가물 하다가 순간 형광등이 들어오듯 그의 어린 얼굴이 떠오른다.

아.......그래 고 석 준.......학생회장 이었던, 나랑 석 달 사귄 그.......고 석준! 내 처음이자 마지막 남자 친구!!!!!!

- 이런.......미안! 어쩐지 이름이 너무 익어서.......나도 이상하다고 생각 했었는데.

- 다행이다. 기억 하는 구나!

왠지 그가 안심하는 얼굴을 해보여 해라는 더욱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 처음엔 정말로 만날 생각이 없었는데.......네가 2주 전엔가 전화 했을 때는 정말 더는 궁금해서 못 참겠더라.
정말 너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팍팍 들어서 말이야.

- 그래.......니가 미국으로 갔다는 얘기는 얼핏 들은 적이 있었는데 NASA 에 있었을 줄은 나도 미처 생각 못했었어.

정말로 의외의 만남 이었다. 이 사람을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될 줄 이야. 가끔 생각이 나기도 했던 유일한
남자였는데.......
그리고 지나간 얘기들을 한 시간 정도 마주보며 얘기했다. 즐겁게.......부담 없이.

하지만 얘기가 일 얘기로 돌아가자 헤라는 약간 긴장이 됐다.

석준의 말로는 MTN 측에서 자신을 탐내는 이유가 단순 스카우트 제의 같지가 않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인터뷰를 계속 미뤄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건 헤라도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었던 일인지라 그녀도 부정을 할 수는
없었다.

- 더구나.......우리 회사 측에서도 이미 눈치를 챈 것 같아.

- 왜? 무슨 기미가 보여?

- 음.......사실은 모레 누가 좀 만나자고 해서.......그러기로 했는데. 높은 사람이 날 갑자기 보자는 이유가 그게
아닐까 싶어.

- 높은 사람 누구?

- 우리 회사가 3개로 된 본부 체제 인건 알지? 난 현재 네트워크 소속이거든. 근데 미디어 사업 본부장이 날
만나자고 하는 걸고 봐서는 아마 본사에서 어떤 지시가 있지 않았을까 싶어. 이번 건을 알고서 말이야.

-.......그래.

헤라는 골몰히 생각에 잠긴다. 어째 맡을 때부터 영 걸리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석준의 얘기를 듣고 나니 더 그렇다.
더구나.......아까 회사에서 만난 그 송 석훈 상무라는 사람은.......

- 아. 칙칙해 졌네. 오랜만에 너 만나서 기분 되게 좋았었는데 말야.

- 원래 일 이란 게 그렇잖니.......뭐가 하나 되려면 골치 아파지고 우울한 생각 많이 해야 하고.......

헤라는 동창이기도하고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좋아한 이성인 석준과 마주 앉아 있자니 조금 마음이 심난 해
지고 있었다.

- 사실은 너랑 저녁 먹자고 하고 싶은데.......오늘은 일이 좀 밀려서 지금 들어가 봐야해.
다음에 전화 하면 그때라고 꼭 먹어 줄 거지?

편안한 웃음을 보내며 그는 진심으로 부탁을 하고 있었다.

- 그래.......아마 네가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하게 될 거야.

- 일 때문이겠지?

그가 조금 서운한 얼굴을 한다.

- 꼭 그렇겠니?.......어째든 그 쪽엔 아직 확실한 얘기 해놓지 않을게. 네가 그 본부장 인가 하는 사람 만나고 나면
다시 얘기하자.

헤라는 그의 질문을 피해가며 일 얘기로 일단락을 지었다.
그리고 못내 서운해 하는 그를 연구소로 먼저 들여보내고 다시 서울로 출발을 했다.





16)

- 어우! 본부장님 왜 또 퇴근 안하시니?

- 그러게요. 지난주엔 회사 계신 날보다 안 계신 날이 더 많더니.......이번 주엔 내내 사무실에만 처박혀서........

- 가끔 저러시더라.......뭐야~~~우린 언제 퇴근 하라고.

- 그러게요. 성격만 좀 좋아도 가서 먼저 퇴근 하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기라도 하겠는데.

재원의 비서실 여직원 둘은 7시가 넘도록 그가 사무실을 지키고 있자 자신들도 퇴근 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기도록
가지 못하고 있는 사실에 몸이 닳고 있었다.

- 아! 우리 본부장님이 정말 싸가지만 쬐금 있으면 완벽한 남잔데 말이야.

- 응. 그렇기는 하죠. 잘생긴 건 기본이고, 돈 많죠. 집안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고........일도 그만 하면 회장님께
인정받는 것도 같고.

- 맞아 거기다 카리스마 같은.......싸가진 없는 것에서 나오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녀들이 자신들의 상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동안 윤석이 들어와 그녀들의 대화를 잘랐다.

- 그만해요. 정 본부장 들으면 진짜로 자기가 잘 난줄 알고 더 싸가지 없게 굴겠네......,

- 어머! 안녕 하세요.

- 안에.......있죠?

-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본부장님 신화 그룹 신 윤석 실장님 오셨는데요.

자신을 반갑게 맞는 그녀들에게 윤석은 윙크를 한번 해보이고 재원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물론 그를 반기는
이유가 자신이 그녀들의 본부장을 사무실 밖으로 끌어낼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런 것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재원은 컴퓨터의 모니터에 눈을 못 박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퇴근 안하냐?

- 응.......다 끝났어. 골치 아픈 건이 좀 있어서. 넌 웬일이냐?

그는 아직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 하고 있었다.

- 어.......나 오늘 휘트니스 한번씩 돌고 있었거든. 지금 논현동점에 가는 길이었는데 가는 길에 너랑 같이 가려고.

- 그래........왜?

그가 눈을 들어 윤석을 바라봤다. 녀석이 웬 바람인가하는 눈으로.

- 헤~~~~뭐 좀 요상한 소문이 내 귀에 들어와서 말이야. 확인 좀 해보려고.

- 무슨?

- 네 소문 인데........어떤 여자가 너한테 작업 건다는.......

- 그런 여자가 한 둘 이었냐? 새삼스럽게 왜 그래!

재원은 그런 일이야 늘 있는 일이었므로 친구의 반응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졌다.

- 아니........여자 가 작업 거는 것보다 네가 거기에 응해준다는 소문이 날 더 궁금하게 만드는 거지. 어떤 여자
길래........여자 보기를 돌 같이 하는 네가 그러는가 싶어서.

그가 윤석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 한다. 저 자식 무슨 소리야?

-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 에이~ 뭐야 왜 모른 척 하는 건데? 정 재원. 너 그날 인터XXXX호텔에서 마주 쳤을 때. 그때 그 여자 아냐?

호텔? 아~~~~~! 헤라를 두고 하는 소리 구만! 근데 벌써 그런 소문이 났단 말이야?
그녀와는 클럽에서 만나던 첫날 딱 한번 스쿼시를 치고 그 다음엔 그곳에서 한번도 마주 친일이 없었는데.......참
소문이란!

- 병신! 헛소리 그만 해라. 어디서 그런 소문은 주서 듣고 와기지고 날 떠보겠다는 거야?

- 뭐야~~~ 그냥 근거 없는 소문이라고 말하려는 거야?

- .......

재원은 윤석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작업을 건 쪽은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인데 헤라가 작업을
걸었다니.......왠지 이런 소문에조차 자신이 가진 돈과 배경이 사실을 왜곡 시키는 것 같아 그는 우울해지려 하고
있었다.

- 야! 정 재원....... 너 내말 깔래?

재원이 대답을 않고 컴퓨터를 끄고 일어나자 윤석이 그를 다그쳤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책상에 시선을 두고
있다 표정이 없는 얼굴을 들어 친구를 쳐다본다.

- 먼저 작업 건 사람은.......나야. 됐냐?

- 뭐 뭐?

윤석은 놀랜 마음을 속으로 감추며 방금 재원이 한 말을 다시 곱씹어 봤다.

먼저 작업 건 사람은 자기라........그가 아는 한 이제까지 재원은 어떤 여자에게도 먼저 접근 한 적이 없는 놈이다.
물론 오는 여자를 구지 막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쉽싸리 여자를 받아 주고 더구나 호텔 까지 데려가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먼저 작업을 걸고 거기다 그 사실을 바로 잡기까지 하다니........

녀석이 변한건가? 윤석은 사무실을 나서는 재원을 등을 바라보며 앞으로 재미있는 일을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집 근처 큰 길에 이르자 시간은 7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 이었지만 석준을 만나 먹은
아이스크림이 아직 꺼지지 않고 있어 저녁은 우유 한개 정도로 만족 해야지 싶었다.

그녀는 휘트니스 클럽으로 향했다. 복잡한 머리를 정리 하려면 땀을 흘리면서 하는 편이 머리회전이 더 잘되는
그녀였다.

석준의 일을 생각하며 옷을 갈아입고 나와 바이크에 올라탔다.

MTN 의 저의 가 무얼까........만약 브레인만 빼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더 있다면 석준이 다칠 것은
분명한 일이며, 나 또한 그리 좋은 경력이 되지는 못할 터인데.......회사에는 무슨 이득이 생기는 걸까? 민 대표와
그 송 석훈 상무라는 사람이 직접 접촉 하는 걸로 봐서 회사와도 뭔가가 있을 것만 같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송 석훈 상무........그를 생각하자 재원이 떠올랐다.

그는........안 왔나? 지난주 그의 집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그러고 나서.......오늘
까지 한번도 만나지지 않았었는데.

바이크를 열심히 구르며 헤라는 헬스장 안을 한번 둘러본다.

- 나 찾아?

갑작스런 목소리에 놀라 헤라가 얼굴을 돌리자 그가 그녀 옆의 바이크에 올라타고 있었다.

- 도끼 병이야.......하여간.

헤라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정면 천장에 달린 TV를 본다. 그러다 재원의 옆에 친구처럼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자신을 흘끔거리는 걸 본 그녀는 아예 말문을 닫아 버렸다.

- 집....... 좀 치우고 가지 그랬냐?

말없이 페달만 구르는 헤라를 향해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 말은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별로 적정한
선정은 아니었다.

-.......

- 집 치우는 아주머니가 여자 스타킹 때문에 놀랐을 텐데. 그거라도 치우고 가지.

- ........

정말 속 터진다. 일부러 이러는 거야?
저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구! 옆에 친구도 데려와 놓고 꼭 지금 저런 소리를 해야 돼?

그가 하는 말에 대꾸 할 가치도 느끼지 않았지만 헤라는 친구로 보이는 사람 앞에서 자신이 자기 집에서 자고
갔다는 얘기를 그가 왜 하는지 화가 났다.

- 저녁 먹을래?

그러나 그는 눈치가 없는 건지 모른 척 하는 것인지 계속 말을 걸어왔다.

- 그날 아침이나 먹었냐? 밤새 꿱꿱대다가 잠들어서 속도 안 좋았을 텐데. 아침 못 챙겨준 대신 오늘 저녁 살게.
나가자.


그녀가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데도 그는 계속 해서 물어 대고 있었다.

헤라는 점점 더 열이 뻗힌다. 내가 밤새 꿱꿱 댔다고? 도대체 그 얘기를 지금 왜 하는데? 네가 헤픈 여자 데리고
놀았다고 네 친구한테 자랑 하고 싶어서 그러니?

- 야.......알바

그가 다시 무언가 말을 하려 하자 헤라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에게 낮은 소리로 윽박 질렀다.

- 입 다물지 못해요. 한 마디만 더 하면 그 입을 꿰매 버릴 테니까 조용히 해요.

그리고는 바이크에서 내려와 빠른 걸음으로 스테퍼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재원은 잠시 사이를 두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바이크에서 내려 옆에 있는 윤석 에게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저 여자는 뭐야? 그리고 이 자식은 왜 반응이 저래?
거기다 집에 까지 데리고 갔었던 거야? 정 재원이가?

윤석은 헤라를 따라 자리를 옮기는 재원을 보며 아까 재미있는 일을 볼 것 같다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리고 뉴욕에서 쭉 같이 공부를 한 그는 재원이 하이스쿨 시절 첫 사랑에 실패한 이후로는 여자는 거들떠도 안
보던 녀석이라는 걸 잊지 않고 있었다.


- 왜 그래? 화났냐?

일주일 만에 만난 그녀가 화난 표정을 누그러뜨리지 못 하는 것을 보자 재원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건지 생각을
해봤지만 짐작 가는 데가 없었다.

- .......

- 까마귀 고기 먹고 말하는 법을 까먹기라도 했냐? 왜이래?

그도 이제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테퍼를 신경질 적으로 밟아 대던 그녀가 재원을 노려본다.

- 날 뭘 로 보는 거예요?

- 뭘 로 보다니? 무슨 소리야?

자신은 이제까지 그녀를 대하던 것과 별 다를 것이 없이 대했는데 그녀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그는
영문을 알지 못했다.

- 내가 그날 그쪽한테........관두지요. 날 뭘 로 보던 상관없는 사람끼리 우습네요.

- 말을 왜 하다 말아? 얘기 해봐 왜 이러는지 알고 싶어.

말을 끊고 스테퍼에서 내려오는 그녀를 붙들었다. 순간 그녀의 팔을 잡은 그의 손이 백만 볼트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찌릿 하는 아픔이 느껴져 재원은 잡은 헤라의 팔을 얼른 놓아 버렸다.

- 왜 그런 게 알고 싶어요?

그녀가 그의 눈을 정면으로 올려다보며 화가나 으르렁거린다. 처음 꽃집에서 만나 싸우던 때와는 조금 다른 눈빛을
띠고 있었다.

- 그건.......

- 거봐요. 역시 할말이 없지요? 누굴 뭐!!!!! 취급 해놓고 당연히 할말이 없겠지요.

- 뭐.......라니? 내가 뭘 어쨌다구.

- 아아. 듣기 싫구요. 더 이상 쫓아오지나 말아요.

그러며 그녀는 그를 남겨 두고 아예 헬스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재원은 한숨을 한번 쉬고는 그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재원을 향해 윤석이 웃음을 흘리며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툭 친다.

- 얌마! 너 아무리 연애 해본지가 오래 됐다구 해도.......참 한심해서 못 보겠다.

- 연애는 무슨! 헛소리 하지 말랬지.

재빨리도 받아친다. 윤석에 눈에는 그런 친구가 귀엽기만 하다.

- 재원아.......여기가 미국이냐? 아무리 거기 물 먹다 온지 1년 밖에 안됐어도 그렇게 여기 상황 파악이 안돼?

- 뭐가?

여전히 눈은 헤라가 사라진 쪽에 두고 재원이 퉁명스럽게 묻는다.

- 야.......여긴 한국이야. 여자들이 그렇게 성에 대해 자유로운 나라가 못 된다고. 그런데.......바로 옆에다 날
두고서, 치우고 가지 그랬냐는 둥, 스타킹이 어쩌고저쩌고.......저 여자가 설사 함부로 노는 여자라고 해도 그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 알아들었냐?

그래.......문화적 차이였다. 미국에서 십년이 더 넘는 세월을 살아온 그와 그녀와의 생각의 Gap, 즉 틈이 있었던
것이다.

- 그냥 데리고 놀 여자 아니었으면 지금 가서 바로 사과해라. 설명도하고.

- 정말.......그래서 화 난거 확실해?

이 자식 진짜 심각한데! 윤석은 확인을 받으려 다시 묻는 재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가 장난을 치고 있지 않다는
걸 확실하게 알게 됐다.

- 내가 아는 상식상의 여자들은 그렇다. 얼른 가서 확인 해봐.

그리고 재원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는 막 옷을 갈아입고 로비를 나서다 재원의 전화를 받고 어쩔 수 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내가 진 빛이 있으니까.......참는다. 하지만.......그 빛 확 청산에 버릴까? 두 가지다? 아 근데.......정말
오늘은 계속 꼬이네!

- 오래 기다렸어?

문 앞에 서있는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그의 얼굴은 조금 긴장 한 듯 보였다.

- 쓸데없는 거 묻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요. 뭐예요? 가는 사람 붙들고.

빛이 있으니까 라고 생각하며 그가 한 행동에 대해 그냥 넘어 가려했지만 헤라는 그만 잊어버리고 만다.

- 저기.......미안해. 아까 내가 한말은.......널 그런 여자 취급해서 그런 게 아니야. 사실.......

그가 얼굴을 붉힌다.
어머! 이 남자 왜이래? 지금 사과 하는 거야? 근데 왜 얼굴색이 저러니?

- 사실은 뭐요?

그의 당황하는 꼴을 재미있어하며 그녀가 다그친다.

- 사실은 내가 미국에서 좀 오래 살았거든. 그래서........여기 여자들 생각을 잘 몰랐어. 난 그냥 거기는 그런 게
별로 흠이 될 일이 아니니까.......그래서

흐음!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라 생각할줄 알았지? 웃기지마! 내가 바보야. 처음부터 사람을 그런 식으로
유혹한 게 누군데.......날 헤픈 여자로 보지 않고서는 그럴 수 있었어? 하지만.........그 제의를 수락한 건........나다.

정말.......이 남자하고는.......

- 알았어요. 잘 이해는 안가지만.......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보죠.

- 아.......그래. 그럼 이제 저녁 먹으러 갈래?

그가 주뼛거리며 그녀에게 다시 저녁 식사 제의를 했다.

- 뭐예요? 정말 저녁 뿐 이에요?

- 어? ........글쎄.......

재원은 어쩐지 자신이 쥐고 있던 칼자루가 그녀에게 완전히 넘어 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5)

- 중식집이야. 설마 중국 음식도 안 먹는다는 소린 안 하겠지?

신사동의 커다란 차이니스 레스토랑의 문 앞에서 재원이 물었다. 그 옆에는 윤석이 동석을 하고 있다.

- 안 먹으면요? 다른 데로 가게요?

- 미쳤냐! 배고파 죽겠는데........안 먹겠다면 넌 굶는 거지.

- 웃겨. 먼저 먹으러 오자고 한 사람이 누군데 이래요?

- 그래서........싫다는 거야?

- .......아뇨. 들어가요.


토닥토닥 말다툼을 하는 두 사람을 보며 윤석은 기가 찬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두 사람은 이곳으로 오는 차 안에서부터 쭉 그를 도끼자루 취급 하고
있었다.

- 뭐 먹을래?

재원이 헤라를 향해 먼저 물었다.

- 제일 비싼 거요. 음.......바다 가재와 마늘 소스, 자연송이와 새우볶음 그리고 삼선 누룽지탕, 또 북경 오리.

- 지금 시키는 것 요리야........그 걸 누가 다 먹으려고 그러냐?

- 시키는 사람 맘이죠. 딴지 걸 거면 뭐 먹을 거냐고 왜 물었어요? 알아서 주문하시지.


그녀는 아직 화가 덜 풀렸는지 계속 퉁퉁대고 있었다. 하지만 재원이 적당히 비위를 맞추어주면 괜찮을 것도
같았는데 그는 그걸 하지 못하고 있다.


- 야.......그래도 적당히 시켜야지. 니가 그거 시켜서 혼자 다 먹을 거야?

- 왜 혼자 먹어요. 그쪽도 있고 친구도 있는데?

- 그럼 나 보고 지금 네가 주문한거 먹으라는 거야?

- 왜요? 내가 주문 한거엔 독이라도 들어있을 거 같애요? 왜 못 먹어요?

끝도 없이 말 같지도 않는 얘기들로 싸우는 두 사람을 보다 못한 윤석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 나 도끼 자루 아니야. 근데 지금 내 몸에서 썩는 내가 난다. 재원아 .......

헤라와 재원은 말을 멈추고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윤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 헤라씨 하고 너 하고 신선놀음 아닌 놀음에 내가 도끼자루가 되서 썩는 느낌 이라 그 말이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고 제대로 된 주문이나 하지들 그래.......

그는 팔짱을 끼고 앉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제법 인상을 쓰고 말했다. 그리고 그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헤라와 재원은 일단 말다툼을 멈추었다.

주문은 헤라가 원한대로 모두 이루어 졌다. 물론 그녀는 심통을 부리려고 해본 주문이었지만 재원은 다섯 가지 요리
모두를 주문 해버렸다.

결국 음식은 3분의 1도 먹지 못하고 남아 버렸지만 재원은 헤라에게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와 윤석이 화장실에 가고 헤라는 테이블에 혼자 남겨 지자 재원의 자리에 놓인 계산서를 살짝 뒤집어 봤다.

이게 뭐야? 삼십.......칠 만원? 하~ 거기다 서비스 차지가 10% 따로 라고 돼있네........
바가지 제대로 씌운 건가? 하지만........너무 낭비다. 이렇게나 비싼 음식을 이렇게나 많이 남겼으니.......

헤라는 웨이트리스를 불러 남은 음식을 포장해 달라 부탁 했다.

그리고 계산을 하기위해 재원과 밖으로 나가자 종업원이 음식을 두개의 쇼핑백에 나누어 그들에게 건넸다. 음식
외에 또 뭐가 들었는지 무게가 제법 나가 재원과 윤석이 그 것들을 받아 들었다.

- 아까워서 내가 포장해 달라고 했어요. 궁상맞아 보이는 건 알지만.......내가 주문 한거니까 내가 책임질게요.

어쩐지 그가 싫어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녀도 모르게 변명을 해버렸다. 그러나 재원은 아무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그의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을 헤라는 했다.

- 난.......여기서 택시 타고 간다. 재원이 넌 헤라 씨 휘트니스 까지 태워다 드려라.
갑니다. 언제 또 뵙죠.

그에게서 건강한 미소를 가진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은 헤라가 윤석의 인사에 가볍게 목례를 했다.

재원의 옆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며 그녀가 묻는다.

- 저 사람 이름은 뭐예요?

재원이 그녀를 돌아보다 다시 앞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 내 친구 이름이 왜 궁금해?

- 저 사람은 내 이름을 아는데 나는 모르니까 불공평하잖아요.

그걸 말이라고 묻니.......사람이 사람 이름 궁금한데 이유가 꼭 있어야해? 앙~~~~피곤한 사람이야. 내가 어쩌다
이 사람하고 엮여서.......

그는 친구의 이름을 알려주고 싶지 않은지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사실 이제야 깨닫고 있는 일이지만 헤라는
재원에 대해 자꾸만 알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의 친구 이름도 묻는 것이었는데 이 남자는 딴 생각을 하는 것 같다.

- 집하고 클럽 하고 가까워?

조금 긴 시간의 틈 사이를 깨고 그나 먼저 입을 연다.

- 걸어서 15분 정도.

- 그럼 집에 까지 태워다 줄까?....... 싫으면 클럽에 가서 네 차 가지고 가든지.

집에 데려다 준다고?
헤라는 운전을 하는 재원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사이가 된 거지?

그러나 거절 하고 싶지가 않다.

- 그렇게 해줘요. 어차피 오늘은 운전을 많이 해서하기 싫던 참 이었으니까.

- .......

그녀가 가르쳐 주는 대로 30분을 오니, 휘트니스의 뒤쪽으로 여러 동의 빌라들이 밀집한 곳에 이르렀다.

새집 같군! 이런 동네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재원의 생각은 그랬다.

- 여기에요.

- .......

그녀가 음식이 담긴 쇼핑 백 두개를 양손에 들고 내린다. 재원도 그녀를 따라 민첩하게 차에서 내렸다.

- 줘! 내가 들어다 줄게.

잉?........속이 들여다보이는 소리.

- 왜? 안 무거워? 달라니까 뭘 그렇게 소 닭 보듯 보냐?

- 소 닭 보듯 하는 게 아니라 너무 속이 보여서 그래요.

- 속 보여? 내가 투명 인간이냐.......속이 보이게.

-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하는 거예요? 썰렁 하게. 차라리 솔직히 말하지 그래요. 나 좀 니네 집이 들여놔 달라고.

- 그래 그러지 뭐.......... 나 너 네 집에 들어가고 싶어.

- 흥!! 당신한테 진 빛만 없어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지만........좋아요. 들어와요.

헤라는 이왕 약속대로 할 거면 그의 집보다는 자신의 집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 .......좋아.

한편, 재원은 자기가 정말 늑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숨기지 않고 그녀에게 욕망을 드러내놓는
점이나........지금 자신의 입속에 고이는 침이 마치 그녀를 집어 삼키기 위해 입맛을 다시는 진짠 늑대........

하지만 여~엉 싫은 느낌만은 아니었다. 동물적 본능을 나쁘다고만은 할 수가 없으니까........



깨끗한 집.......방은 두 칸뿐인 투 룸 이었다.

- 이런 집이 투 룸 이라는 거군!

그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태어나서 이렇게 조그만 집에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데서 그걸 하다가는 옆집에 소리가 다 들리지 않을까? 그는 조금 얇아 보이는 벽에 귀를 대 본다.

그러나 옆집에서는 그가 상상하는 삐걱 내지는 허걱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 지금.......뭐해요?

- 아.......그냥. 집이 좀 부실해 보여서.

- 아~ 그래요? 당신 집처럼 삐까뻔쩍 하리라고 상상이라도 했었나 보죠? 그런데 어째요 집이 이렇게 누추하고
보잘 것 없어서. 지금이라도 가고 싶으면 가세요. 쌍수 들고 환영이니까.

그녀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심통 맞은 웃음을 짓는다.

이 여자 아직도 꼬여 있네. 오늘은 다른 날 보다 심하다.

- 아냐! 맘에 들어 앞으로도 맨 날 오고 싶을 정도로 정감이 있는 집이야. 촌스런 인테리어도 그렇고 유치한 무늬의
팬티가 굴러다니는 네 침대도 그렇고 아주 좋아.......됐냐?

그가 말하는 유치한 무늬의 팬티란 말에 헤라는 메뚜기처럼 침대로 뛰어 올라, 분홍 바탕에 흰색 고양이가 그려진
자신의 팬티를 집어 손안에 말아 쥐었다.

- 그런 거나 보고. 저질이야.

- 보란 듯이 널려 있는 걸 어떻게 안보냐? 평소에 잘 치우고 다니던가.......

- 난 그쪽처럼 청소해주는 아줌마가 없어서 그래요. 나도 그런 사람 있으면 그쪽 집처럼 항상 깨끗할 수 있다구요.

억울하다 듯이 말하는 그녀! 하지만 재원은 침대에 요염한 자태로 누워 있는 헤라가 자신을 유혹한다는 생각만이 들
뿐 이었다.

-.........

- 왜.......왜 그래요?

재원의 눈빛이 그야말로 까만색으로 번쩍 번쩍 빛이 나고 있었다.

아~~~~·미치겠네. 너 지금 내 본능을 실험 하냐? 난 언제나 페로몬을 정상적으로 분출 하고 있어.........그래서
지금 네가 이러는 거야?

아이보리색 정장의 타이트한 스커트가 조금 올라간 것이, 헤라의 탄탄한 허벅지가 정말로 그에게 어서 덮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오늘은....... 약속 지킬래?

자제력을 발휘하기 위해 자신을 억누르는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 앉아 있었다.

- 야 약속이요?.........!

그녀는 그의 약속이라는 말에 올게 왔구나! 싶어 눈을 질끈 감아 버린다.

잠시 후 자신의 침대가 한쪽으로 기우는 느낌이 들었다. 재원의 무게가 침대에 실리고 그의 양 팔이 그녀를 그 안에
가두었다.

- 키스........해도 돼?

뭘 묻니.......

- 그쪽이 늘 하던 방식대로 해요. 난 상관없으니까.

그 말은 곧 이건 어디까지나 협의에 의한 관계니 감정을 개입 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은 뜻 이었다.

하지만 재원은 지금 이 순간 그런 말 따위는 안중 에도 없다. 남자란 그런 법. 수컷 동물이 물불 안 가리고 암컷을
차지하기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일도 바로 이런 남자들의 본능과 다를 법이 없다.

물론.......마음이 동행을 해준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 내 방식대로........

그가 그녀가 한 말을 중얼거리며 드디어 입술을 겹쳐 왔다. 그녀의 입술은 지난 번 보다 더 따뜻하고 축축하게 그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재원의 입술이 닿자 헤라는 어깨가 움찔 했다. 남자의 손만 스쳐도 기겁을 해대던 자신이 지난번 코엑스 에서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입술을 밀쳐 내지 않는 일이 신기 했다.

아마도 그래서 그녀는 재원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던 것이리라.
헤라는 그의 집요한 키스에 저절로 입술을 열고 그의 혀를 받아 들였다. 그러자 정신이 점차로 몽롱해 진다.

그녀는 갑자기 그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번도 남자를 원해 본적 없었던 그녀의 몸이, 27년 만에야
처음으로 본능에 충실한 말을 하고 있다.


- 나.......그쪽 갖고 싶어!


헤라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시키는 대로 말을 해버렸다. 그러나 아직은 그 말이 실수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녀의 말에 더욱 자극을 받은 재원의 손이 그녀의 하늘색 셔츠를 들추고 능숙하게 가슴을 향했다. 여전히 키스를
퍼부어대던 그가 잠시 입술을 떼어 흥분에 들뜬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자그맣게 속삭인다.

- 줄게.......네가 원하는 건 모두 다........다 줄 거야.

뭐? 무슨 소리야? 정 재원! 너.......미쳤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원과 헤라는 반쯤 나사가 풀려있던 정신이 다시 조여지는 것을 느끼며 키스를 하던
입이 동시에 떨어졌다.

헤라는 그의 입술에 묻은 자신의 오렌지 색 립스틱에 시선이 가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만 그의 가슴을 밀어 침대
밑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 자 잠깐만요.

- 아아.......그래 나도 자 잠깐.

저 남자가 방금 뭐라 그랬니? 아냐 잘못 들은 걸 거야.......맞아. 하지만.......이건 아닌데.......내가 무슨 말을
했길래 저 남자 가 그런 말을.......그래.......갖고 싶다고.......저 남자를 갖고 싶다고! 뭐?

어째서 그런 낮 짝 뜨거워지는 말을?

두 사람 다 서로가 내 뱉은 말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헤라는 머리를 굴린다. 엉뚱한 쪽으로 그 머리가 안 굴러가길 바라지만........글세.

내가 왜 저 남자에게 그런 말을 ? 내 안에 변화가 일어난 걸까? 그럼 반가워 해야하나? 하지만 모르겠다.
그렇지만 알고 싶다. 내가 왜 이러는지.......

- 옷이 불편해.......벗고 제대로 하자.

무슨.......비즈니스라도 하는 것 같은 말투! 역시 내 버진을 이런 식으로 내어줄 수는 없어.

난 남자가 싫었다. 그들이 내게 보내는 감탄의 눈빛도, 간혹 스치는 손길에도 소름이 돋았다. 가끔 만나던 남자들이
어김없이 음흉한 눈길을 보내 올 때마다 난 구역질까지 해야만 했다. 헌데.......왜 이 남자만 예외지?

- 버 벗어요?

- 그럼.......옷 입고 할래?

그는 조금 전 자신이 한말에 대한 충격에서 빠져 나와 벌인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어쨌든 지금 그는 차오르는
욕구를 먼저 해결하는 일이 우선 이었으니까. 모든 수컷들이 그렇듯........

- 내가 벗겨줘? 지난번처럼?

- 아 아뇨.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녀가 정장의 재킷을 벗고 셔츠의 단추를 따는 동안 재원도 입고 있는 검정 재킷과 흰색 차이나 카라의 셔츠를
벗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외면하고 옷을 벗고 있는 풍경이 헤라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가 않는다.

- 저기요........우리 게임 한번만 더해요.

얼라리어! 이건 또 무슨 소리니?

- 뭐?

재원이 벗던 셔츠를 팔에 걸고서 저 여자가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라는 얼굴로 돌아봤다.

- 그러니까 지난번 스쿼시를 한 세트라고 치구요. 한 세트 더 하자 그 말이에요.

- 그래서? 너와 내가 얻어지는 게 뭔데?

- 난 시간을 벌고. 그 쪽은.......지금 하려던 걸 미루는 대신에 노트북 값 물어줄게요.


정말 희한한 여자네.......진작 그런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심해.

- 시간? 왜 네가 시간을 벌어야 하는지 난 모르겠는데.......그리고 난 돈은 필요 없어.
.......네가 어째서 시간이 필요한지 말해주고, 돈 대신 내가 원하는 다른 것을 주겠다면 그 게임 한번 생각해 보기는
하지.

-.......사실.......

그래 이건 사실 대고 밝혀두고 해도 하자. 그가 날 헤픈 여자로 보는 게 싫은 건 인정해야해!

- 사실은 나.......처음이에요.

- 처음이라니.......밑도 끝도 없이 뭐가 처음이라는 말인데?

눈치 없는 작자 같으니라고.......이런 상황에서 처음이 무슨 뜻이겠니?

- 그러니까 난....... 아직 V. I. R. G. I. N. 이라구요.

- 철자로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 미국 물 오래먹었다고 자랑 할 때는 언제고 철자로 말한다고 못 알아들어요?

헤라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얼굴은 붉게 물들고 어린 계집아이 같은 표정으로 침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Virgin! 처녀........라고?

- 아하! 그래? 그런 걸 잘도 공개적으로 떠드는 구나!

- 뭐요? 기껏 용기내서 말해 줬더니.......그래서요. 설마 부담스러워졌어요?

헤라가 목소리를 높인다.

- 아니!!!!! 네 계획대로 널 갖고 싶은 욕구가 더 팍팍 솟아오른다. 왜!

따라서 재원의 음성도 높아졌다.

그래.......이 여자는 역시 고 단수다. 자기가 처녀라는 걸 밝혀서 내가 더 달아오르길 바라는 거야. 그래서 게임에
끌어들여 결국에 자기가 이기고 날 차버리려는.......!!!!!!

재원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남자란.......왜 저렇게 동물적으로만 생각의 시동이 걸리는 것일까? 그러다
엔진에 불이 붙여야만 그제 서야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는 걸까?


- 그래요. 하여간 난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리고......

그리고 그를 알 시간도 필요하다. 내 몸이 왜 이 남자만을 예외를 인정하는지 알 필요도 있고.......하지만 헤라는 이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 그래! 네 말대로 하자 . 난 아쉽게도 아직 버진인 여자를 안아 본적은 없거든.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다른 또 한
가지를 들어주는 건 확실히 해!

- 뭘요? 내가 걸 수 있는 것은 다 건 것 같은데....... 돈은 필요 없다면서요.

- .......그 건. 게임이 끝난 뒤에 생각해 보지. 그때 내가 말하는 게 어떤 것이든 넌 들어주는 거야. 맞지?

재원이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봤다.

정복욕이 이글이글거리는 숫 사자 같은 눈으로.........핫 아닌가? 그가 사자면 난 암사자가 되는 건가? 으으~~~~~
동물적이 되는 건 역시 싫다. 하지만 그건.......대 자연의 섭리야!

- 네.

- 무슨 게임으로 할래? 참고로 넌 한번도 나랑 게임에서 이긴 일이 없다. 두 번 다 말야.

- 잔말 말아요.........

그가 새삼 그녀의 패배를 각인 시키자 헤라는 자존심이 상했다. 별것도 아닌 일에 그에게 자존심을 걸어 무덤을
팠던 그녀.......이건만!


- 생각해 둔거 없어? 또 즉흥적으로 나온 소리니?

- 있어요.

- 말해봐!

- 페인트 볼 게임 해요.......어때요?

- 너랑 나랑 둘이서?

- 아뇨. 팀 만들어요. 정원은 3명이나 4명 정도로.

- 그래.......또 그런 엉뚱한 얘기가 나올 줄 알았지.

- 뭐가 엉뚱하단 말예요? 당신이 나한테 시킨, 뭐 남자 꾀기 같은 것 보다는 훨씬 건전하고 정당한 게임이에요.
스포츠 맨 십에 입각한.

그녀는 정말 진지한 얼굴이 되어 그에게 게임의 정당성을 얘기했다.

- 후~~~~~~그래 알았어. 그럼 언제 할 거야?

- 주말이요. 이번 주 주말. 주중에는 그쪽이나 나나 시간이 없으니까.

- 그래.......


그때 헤라의 핸드폰이 시끄럽도록 “전화 받으세요”를 외쳐댔다. 모르는 번호인데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엔
받는다.

- 여보세요. 진 헤라입니다.

- 헤라니? 나야. 석준이.

석준? 이 시간에 무슨 일일까?

- 놀랬지? 너무 늦게 전화해서.

- 아. 그래 석준아........


석준? 남자 아냐........거기다 누구랑 이름도 같네!
재원은 지금 온 전화가 남자에게서 왔다는 걸 알자 돌아서서 전화를 받는 그녀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 왜 그새 무슨 일 생겼니?

헤라는 걱정이 됐다. 그의 스카우트 건은 아무래도 찝찝한 일이었으니까.

- 아니. 일은.......그냥 네 목소리 한 번 더 듣고 싶어서 했어.오랜만에 만나서 제대로 얘기도 못해보고 헤어진 게
마음에 걸려서 말야.

- 너두 참.

- 그래. 잘자.......그리고 나 주말에 시간 비워 놔도 돼지?

- 주 주말?.......글쎄.

난처하다 주말엔 재원과 벌써 약속이.......하지만 석준도 만나야 하는데........몇 초간 갈등을 하던 그녀에게
머리에서 반짝이는 별이 있었으니.......그건 바로.

- 그래 좋아. 그때 내가 전화 할게.

게임에 석준을 데려가는 것이다.

-와아! 데이트 신청 성공이네. 전화화길 잘했다. 좀 망설이다 한건데.

뭘.......내가 고맙지! 석준아.......고마워 정말!!!!!!! 내 주변에 지금 이 남자를 빼면 남자라고 너뿐 이거든........우리
팀에 너 같은 머리 좋은 남자가 끼면 내가 더 유리해질거야. 흐흐흐~~~~~~~~

- 후후후! 그래 그럼 끊을게 잘 자.

- 응. 너도 잘 자라 헤라야.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 후후후? 버진은 웃음도 그렇게 웃냐?

전화를 끊자마자 그가 바로 시비를 걸어왔다.

- 남이야. 어떻게 웃든!.......안가요?

- 갈 거야.

그는 어느새 벗어놓았던 옷을 제대로 다 입고 있었다.

- 가요. 얼른. 나 자야 되니까.

그는 그녀의 말을 순순히 따라 뒤돌아서 문으로 향하는 것 같더니 어느 틈엔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입술에 거친
키스를 해대고 있었다.

거친 키스가 서서히 부드러워 지고 헤라는 그 키스에 무릎의 힘이 빠져나가 그의 목에 팔을 둘러 매달려 있었다.

그가 입술을 떼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 이런....... 법이 어딨어요.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해 들어오는 게.......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헤라는 심술궂은 말을 한다.

- 넌.......키스 하면서 지금 공격 들어 갈 테니, 방어 준비 하고 기다리세요. 라고 말하니? 어쨌든 너도 즐겼잖아.
그럼 된 거 아냐?

- .......이거나 놔요.

재원이 감고 있는 팔을 풀며 헤라는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 그래도........너 머리는 좋구나! 키스 실력이 많이 향상 됐어. 처음엔 진짜 낙제 점수였는데.

- 시끄러워요. 이젠 정말 가기나 해요.

- 헤~~~ 그럼 간다. 진짜로........

그가 문을 열고 그리고 닫히는 소리가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렸다. 그리고.........20초 쯤 지나서 인가?

- 진.......헤라. 너........너.......

뒤 돌아보니 연주와 헤미 언니가 문을 열고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16)

- 너너 너 뭐야? 저 남자가 여기 왜 왔다 가는 거야? 그것도 이 야심한 밤에!!!!!!

연주가 입에 거품을 물고 물었다. 눈은 너무 놀란 나머지 눈썹과 같이 치켜 올라가 있었고 그 작은 콧구멍에서는
보이진 않지만 뜨거운 김이 나오고 있었을 것이다.

- 흥분 하지 마. 그냥.......하여간 그냥 볼일이 좀 있어서 왔었어.

별일 아니라는 듯 얼버무리며 헤라는 두 사람을 남겨두고 안으로 들어와 음식이 든 쇼핑백을 열었다.

- 그건 뭐니?

헤미 언니가 어느새 다가와 그녀가 껴내는 음식들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 음식. 중국집에 가서 저녁 먹었는데 넘 많이 시키는 바람에 먹은 것보다 더 많이 남아버려서 포장해 왔어.
먹을래? 아직 따뜻한데.

- 몇 사람이서 먹었는데 이렇게 많이 남았어?

- 세 명!

- 뭐? 셋이서 요리를 일곱 까지나 시켰단 말이야?

- 일곱이라니.......다섯 가지 일 텐데?

헤미 언니의 일곱이라는 말에 헤라는 식탁에 꺼내어 놓은 음식들은 다시 한번 둘러 봤다.
식당에서 없던 요리 두 가지가 더 들어있었다.

뭐야........이 남자! 더 시켜서 넣은 거야?........이것이 배려인가.......아니면 날 더 골탕 먹이려는
속셈인가.......그녀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재원은 새벽 2시가 훨씬 넘었지만 아직 컴퓨터를 끄지 못하고 있었다.
박 부장에게서 온 메일을 확인 중인데.......뭔가 석연치가 않다.

MTN에서 왜 직접 고 석준이를 대시 하지 않고 ‘에이 밀리언’사에 일을 맡긴 것인지 그 점이 이상하다.

더구나 에이밀리언에서 석준을 담당하고 있는 헤드 헌터의 신상조차 비밀이라는 사실은 더욱 의심을 부추기고
있었다.

내일은 고 석 준을 직접 만나기로 한 날이다. 그에게서 무슨 말이든 들을 수나 있을까? 아니면 다짐을 받아내야
하는 건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헤라에 의해 몸이 닳아 늑대가 된 것 같았던 재원은 이젠 자신이 할아버지의 도마 위에 오른
생선이 된 기분이 들었다.

뭐냐.......도대체.......설마 MTN에서 기술을 노리고 그에게 접근을 하는 것이라면! 일이 커진다.

그렇게 되면 그룹의 주목이 한꺼번에 나한테 쏟아질 테고, 그럼.......만약에 일이 틀어지기라고 한다면 그 잘못은
옴팡 내가 뒤집어쓴다는 시나리오가 나온다.

정 정원! 형이 노린 게......... 이거야?







- 일부러 이곳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 아닙니다.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한 건데........신경 쓰지 마십시오.

재원과 석준은 연구소 앞 커피숍에 마주 앉아 인사를 나누고 있다.

재원의 상상처럼 석준은 한 눈에 봐도 머리가 좋아 보이는 영재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고 약삭빠르다 거나 음흉해
보이는 인상은 갖고 있지는 않았다.

-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스카우트 제의에 합의 하셨습니까?

재원이 물었다. 그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 정 본부장님께서 절 보자 하셨을 때부터 예상하고 나온 질문 이지만........그래도 당황스럽습니다. 그렇지만
질문에 대답을 드리자면.......아직 보류중 입니다만.

- 그렇습니까? 고 석준 씨는 우리 GH 통신에서 키운 걸로 압니다만 계약 기간은 만료 되었더군요. 그런데도 보류
중 이라는 얘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 그건.......아직 확실한 그 무엇도 없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미안한 얼굴이 된 석준은 재원의 심기를 살폈다.

또래가 비슷해 보이는 이 사람.........GH 그룹 회장의 장손! 표정은 거만하지만 자신을 대하는 그의 말투는
겸손하다고 그는 생각 했다.

- 그럼 언제 쯤 고 석준 씨의 의사가 결정이 나는 겁니까?

- 그건........제 일을 맡고 있는 서치 펌(헤드헌터)과 몇 번 더 만나 본 후에 결정이 날 것 같습니다.

- 그래요? 좋습니다. 그럼 그 후에 한 번 더 시간을 만들어 봅시다.

- 네.

- 그럼.

그리고 잠시 후, 짧게 인사를 마치고 재원과 석준을 자리를 일어섰다.




격전의 토요일.......


- 무주로 와요. 난 지금 친구 둘 하고 출발 하거든요.

- 꼭두새벽부터 그 일로 전화 한거야?

- 그럼 어떻게 해요? 찾아가서 말 할까요?

- 우리 집으로 와. 나랑 같이 가.

아침 7시. 헤라는 재원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그에게 출발을 알렸다. 그래야 어느 한쪽이 기다리거나 하지
않고 제 시간에 만나게임을 치룰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아직 침대 안에 있는 모양이었다.

- 왜요? 그럼 더 불편하잖아요.

- 잔말 말고 와. 네가 안 오면 난 오늘 게임 취소해 버릴 거니까.

- 정말!!!!!!!

- 기다린다. 빨리 와. 예약 시간 안 놓치려면.

그 말을 끝으로 재원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리자 헤라는 급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운다.

우씨! 이 인간이 정말. 좋게 봐줄 래야 봐줄 데가 있어야지.

그리고는 연주와 석준에게 전화를 걸어 각각 무주리조트 정문 앞에서 2시까지 보기로 약속을 변경을 하고 재원의
집으로 차를 돌렸다.

한번 와본 아파트지만 워낙에 유명한 아파트 이므로 헤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 삐리릭~~~~~~~”

젠장 벨 소리도 괴상하네. 주인 닮았나!!!!!!

“ 삐리리리리릭~~~~~~~”

왜 안나오는 거야?
헤라가 신경질 적으로 벨을 세 번이나 누른 후에야 잠금장치를 푸는 소리가 났다.

- 야........나도 옷은 입고 나와 될 거 아냐? 방정맞게 눌러대냐 벨을.....

그는 파자마 바람에 셔츠의 윗 단추를 채우며 문을 열었다.

- 뭐야 아직 세수도 안했어요?

- 들어와.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가게.

그녀가 방방 뜨기 일보 직전 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몸짓으로 집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 지금 커피 같은 게 목으로 넘어가요?

- 안 넘어 갈건 또 뭔데?

커피 물을 올리며 그는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 내가 타줄 테니까 얼른 가서 씻고 나오지 못해요?

보다 못한 헤라가 그의 손에서 티스푼을 빼앗는다. 그러나 재원은 빙글 빙글 웃으면 그런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 나 샤워 했어. 머리도 말리고.......

- 그럼 왜 여지 껏 옷도 안 입고 있어요?

- 니가 모닝 키스 해준 다음 입으려고.

태연하게 키스를 해달라는 그를 보며 헤라는 기겁을 했다.

- 뭐 뭐라는 거에요? 지금?

- 모닝 키스 기다리고 있었다고.......그래서 오라고 한거야.

- 내가 왜 그쪽한테 그런 걸 해줘야 하는데요?

- 안 해주면 내가 널. 지금. 여기서. 자빠트릴 거니까. 그렇게 해도 넌 할말 없잖아?

지 지금 이 남자가 뭐라 그러는 거야?

- 갑자기 왜 그래요? 우리 약속 한거 잊었어요?

- 약속? 내가 언제 그런 걸 했는데.......생각해보자 뭐.......그러자 이렇게 말만 했지 약속한단 말은 안했는데.

여전히 빙글거리며 그는 헤라에게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헤라는 그의 팔에서 빠져 나오려 버둥거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 두 번 다 내가 먼저 했으니까 이번엔 니가 먼저 해라.

- 누가 한대요?

그녀는 버둥거리기를 포기하고 그를 노려봤다. 여기서 힘을 빼면 무주에 가서 제대로 게임을 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게임에 집착한 나머지 전 후를 구분 하지 못하는 그녀였다.

- 얌전해 졌네! 이젠 키스 해줄래?

도대체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입술 부딪히기를 좋아하는 거야? 미국에 살다 와서 그런 건가?

- 난......,그런 거 먼저 해본 적 없어요.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줄도 모른다구요.

그녀가 심통 맞은 표정으로 얘기 했다.

- 이런 이런.......며칠 전에 잘한다고 칭찬 한번 해주었더니.......그새 딴 소리 하네. 넌 복습도 모르냐?

- 누구랑 그런 걸 복습해요?

그에 말에 그녀가 기가 찬 듯 대꾸 했다. 재원도 말해 놓고 보지 어쩐지 그말에 어패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나 외에 딴 놈이랑 하는 건.......안되지!

- 아......아니 그러니까 지금 복습 아니 니가 먼저 하는 예습 하자고.

- 왜 해야 하는데요!!!!!!

이젠 아예 그의 눈을 마주 하지도 않고 고개를 돌리고 신경질 적으로 쏘아 붙였다. 재원은 그런 그녀가 갈수록
귀엽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콩깍지가 씌인 것이다.

- 나중을 위해........네가 나랑 한 약속을 지키게 되면 난 그게 더 좋거든.......여자가 적극적으로 리드해 주는 거.

- 벼 변태!!!!!

숫처녀에게 할 소리니? 뭐 리드? 웃기셔.........누가 지랑 하기나 한데?
그의 진한 농담에 그녀는 오늘 게임에서 반드시 이기리라 다짐을 한다.


- 하긴. 내가 변태 같기는 하다 . 요즘 들어서 말이야. 너 같은 여자하고 한번 하자고 이렇게 매달려 대는 걸로
봐서 충분히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 너도 그렇지?

-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만하고 이 팔이나 풀어줘요. 숨 막혀.

- 원하는 걸 줘야지........아님.......내가 갖던가.

말을 마치며 그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세 번째 키스.........

그의 입에서 치약 맛이 난다. 상큼한 레몬 향도........다음엔 그 향과 함께 부드러운 혀가 그녀의 입속을 핥는다.
치아와 혀를 감아 돌아 그녀의 몸에서 힘을 앗아가고 있었다.

- 그만.......그만해요........ 재원 씨.......

그에게서 억지로 입술을 때면 헤라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 ........그래. 그게 낫겠군.

재원도 섣불리 그녀를 건드린 걸 후회하고 있었다.




17)



무주의 페인트 볼 게임 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도 넘어 서였다.

그녀와 재원을 제외한 게임 맴버 4명 각자가 각자의 차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두 사람이 오자
어색한 자리를 만들었다.

재원과 헤라가 차에서 내리고 재원과 석준의 눈이 마주 쳤다. 그리고 수연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 석준 씨........?

- 아......수연 씨가 여긴.......

그리고 석준이 헤라의 등위에 서있는 재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려하자 재원이 살짝 손을 들어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물론 재원도 헤라와 통화를 하던 석준 이란 이름이 이 고 석 준 이라는 의외의 일이였다.

헤라가 석준과 연주 쪽으로 걸어가 그 들과 합류 한다.

- 얼른 가서 시작하죠. 날도 꾸물거리는데.....

헤라는 재원이 데리고 온 수연이 왠지 모르게 신경 쓰였지만 일단은 게임 예약 시간이 임박 했으므로 일단
리조트의 안으로 들어갔다.





- 예? 왜요?


게임 조교와 대화를 나누던 헤라의 언성이 올라갔다.


- 예약 시간이 4시면 적어도 3시까지는 오셨어야죠. 하도 안 오시길래 기다리다가 다른 팀 먼저 들여보냈습니다.


아~ 정말.......그러게 일찍 오려고 했는데 저 인간 땜에!!!!! 헤라는 재원을 노려봤다. 그리고는 한 숨을 쉬며
조교에게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고 물었다.

- 정 오늘 게임을 하셔야 겠다면........7시부터 야간 침투전은 비어 있는데.......그건 어떠세요?

그러자 조교가 다음 게임에 대한 제안을 했다.

- 해병 캠프 서바이벌 전 인데요. 상대팀의 목표지점만 타격 하면 되는 게임입니다. 어두워서 스릴도 있고 괜찮을
텐데요.


헤라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주 까지 오는데 만도 걸린 시간하며 다시 멤버들을 다른 날에 모은 다는 건 가능
할 것 같지도 않았다.

- 좋아요. 그 시간에 해주세요.

그녀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대답을 했지만 모두들 별 관심 없는 시큰둥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석준 만 빼고. 그는 주말의 데이트가 이런 장소가 될 줄도 몰랐고......그녀가 게임에 집착하는 이상한 모습에 좀
얼이 나가있는 상태였다.


- 그 쪽 때문에 일이 꼬인 거니까 딴 말 말아요.

헤라가 재원에게 다가가 낮게 윽박질렀다. 그리고 그런 헤라를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는 석준을 향해 어색
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가 석준에게 보내는 야릇한 웃음을 보자 재원은 괜히 심통이 돋으려 한다.
그래서 그는 짓궂은 말 한마디를 꺼낸다.

- 그러게 네가 모닝 키스

하지만 헤라의 재빠른 손의 그이 입에서 모닝 키스 이야기가 나오자 그 입을 막아 버렸다.

- 입에 뭐가 묻었네요.......아까 휴게소에서 입도 제대로 안 닦고 왔나 봐요.

마주 서있던 네 사람의 시선이 그녀의 괴상한 행동에 황당한 눈들을 하고 있었다.

- 헤라야.....실례야. 남의 입에 왜 손을 대니? 재원 씨 기분 나쁘겠다.

이제까지 야무진 입을 꼭 다물고 있던 연주가 헤라의 우스운 행동에 핀잔을 줬다.

헤라........너 그 사람이 누군 줄 알고!!!!!!!....... 아냐 알지도 몰라. 진 헤 라가 누군데? 하지만........그럼 왜 저런
멍청한 행동을 하는 거지? 아아.......헛갈리네. 진짜!


연주는 헤라가 남성 혐오증이 있으면서도 재원과 자꾸만 만나고 다니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구나 재원은 헤라를 좋아하는 눈치까지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두 사람 사이가 감이 잡히지 않고 있었다.


- 너 손이나 씻었냐? 아까 휴게실에서 화장실 다녀왔잖아.

재원이 그녀의 손을 떼어 내며 빙글빙글 웃는다. 약 오르지! 하는 표정으로.......하지만........정말 유치원 수준의
대화가 아닐 수 없다.

- 유치하게.......그걸 지금 공격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녀가지지 않고 대꾸 한다.

- 공격은 무슨 아직 게임은 시작도 안 했는데......난 그냥 네가 아까 배가 부글거린다고 말 하던 게 생각이 나서
그랬어.

- 내가 언제!!!!!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뭐야 우!!!! 정말. 그는 헤라를 약 올리기로 작정 한 사람 같았다.

자기가 그에게 잡혀 있는 게임만 아니더라도 당장 그만두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어쩌랴.......처음부터 계속
스스로 파고 있는 무덤인걸!


- 아.......진짜 두 사람 또 시작이네. 만날 때마다 맨 날 그렇게 서로 긁어 대면서 왜 만나는지 모르겠네.......혹시
그쪽은 알아요?


게임장 사무실에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을 지켜보던 윤석이 드디어 끼어들었다. 그리고 공주 풍으로 차려 입고 온
연주에게 말을 건다.

얜 뭐야? 푼수야?........웃기는 차림을 하고 왔네! 윤석의 연주에 대한 소감이다.


- 제가 알기론 만나는 게 아니고 계약에 따른 관계로 알고 있는데요.


그녀가 조금 도도하게 대답을 했다. 윤석이 코웃음을 친다. 계약 이라........재원은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여자를 옭아매려 하다니.......확실히 재원다운 행동은 아니었다.


석준은 재원과 토닥거리는 헤라의 곁에 근접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서 뿐 만이 아니라 헤라가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는 것 같아서 였다.

그래도 서로에게 첫 사랑이라면 첫 사랑 이었을 사이인데........너무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꾸역 꾸역 3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게임에 임박한 시간이 됐다.

게임장에 도착해 남자들은 세미 오토 건을 여자들은 조금 더 성능이 좋은 디지털 오토 건을 골랐다.

그리고 미라이트와 야간 조준 레이져 포이트, 거치 형 조명 등등.......장비들을 갖추고 8시 쯤 되어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게임이 시작 됐다.

헤라 팀의 진지는 타이어 진지였다. 그리고 재원의 진지는 산길을 따라 얼마나 가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붉은 깃발이
꽂힌 목표 지점을 공격해 정복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서로에게 가는 길에 전사 하게 된다면........그 사람은 게임에서 빠진다.

- 야 연주! 너 차림이 그게 뭐니? 소풍 왔어?

헤라는 조교가 준 군복을 거부 하고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와 흰색 진 나팔바지를 입은 연주가 영 못마땅했다.

- 스타일이야. 내 스타일.

그러나 연주는 별 상관없다는 투로 말한다.

- 그래가지고 게임이나 제대로 하겠니? 산길인데다 나무도 많은데 옷이라도 찢어지면 어쩔 거야?

- 난 천천히 걸어갈게. 그럼 괜찮겠지 뭐. 어차피 이기든 지든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잖아?


하~ 헤라는 연주의 대답에 속이 터졌다. 친구가 원래 누구랑 맞먹게 싸가지가 없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
이었지만 정말 해도 너무 한다 싶은 것이다.


어두운 산길에 발밑은 미끈거리고 거치적거리는 나무도 많아 재원의 지점을 찾아가는 일은 만만치가 않았다.

더구나 바람이 나뭇잎에 스치는 소리에도 혹시 그들이 아닐까 긴장이 됐다. 연주는 초반부터 벌써 뒤쳐져 있었고
믿을 사람이라고는 석준 밖에 없다.

그는 학생회장 시절에도 리더십 있고 친절한 학생 이었다. 그리고 꼼꼼한.......그러나 오늘의 그는 별로 나서지
않는다.

모든 걸 헤라가 하는 대로 두고만 보고 있었다. 작전을 세울 때도.......말이다.

- 저기........너 그 사람 누군지 알아? 혹시?

풀숲에 몸을 숨겨 전진 하던 그가 앞서 가는 헤라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 누구? 재원 씨 말하는 거야?

뒤 돌아 보지 않고 그녀가 되물었다.

- 어?.......응.

그녀가 재원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말하는데 석준은 다소 놀라고 있었다.


- 글쎄. 네가 뭘 아느냐고 묻는 건지는 모르겠는데.......이름은 알아.

- 이름만? 직업이나 뭐 그런 것도 모르고?

- 알아야 해?

- 아! 뭐 이런데 게임까지 하러 올 정도면 그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그가 헤라의 질문에 적당해 얼버무린다.

- 그런 거 안 묻는 사이야. 그 사람하고 난.


사이........그럼 어쨌든 무슨 일이 있는 관계는 관계군!

석준은 재원과 헤라의 관계가 이상스레 엉키어들 것 같은 예감에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아까 재원은 그녀에게 자신을 아는 척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비록 손짓이었지만 표정으로 알 수가
있었다.

“ 사사삭”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나고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석준의 옷에 페인트 볼이 터져
그의 가슴 중앙을 흘러 내리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무튀튀한 색 이었다.

헤라는 이미 전사해버린 석준을 남겨두고 재빨리 키 작은 나무가 무성한 숲 안쪽으로 몸을 숨기며 살금살금
뛰어갔다.


누굴까? 아이 정말!!!!! 고 석 준 잔소리만 하다가 그새 죽어버리면 어떻하니??

보나마나 연주도 발각되어 떨어져 나갈 테고, 그녀는 정말이지 기운이 빠져 버리는 것 같았다.

숨죽여 숨어 있자니 다리가 저리다. 근데? 이건! 물이 떨어진다. 불길하게 꾸물거렸던 하늘이 드디어 비를 뿌리는
것 이었다.

“ 하~ 미치겠네.”

나무기둥에 기대어 앉으며 중얼거린다. 솔직히 아군도 하나 없이 혼자서 재원의 진지를 찾아나 갈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미치지 마. 그럼 나랑 한 약속 어떻게 지킬래?”

“ 꺅~아........읍!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놀라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는 사람은! 재원 이었다.

“ 쉿! 소리 지르지 마. 윤석 이랑 수연이가 근처에 있다고.”

헤라는 그에게 입을 틀어 막힌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 실은 윤석 이랑 내기를 하나 했거든! 그 녀석이 당신 친구. 이름이 뭐지?”

그가 헤라의 입을 막은 손을 풀며 속삭인다.

“ 여 연주요?”

“ 그래 하여간. 그 친구를 녀석이 잡느냐 못 잡느냐 하는 내기지.”

고글 속으로 보이는 그의 눈은 사뭇 진지해 보였다. 아니 사실 어두워서 그의 눈 빛 따위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 연주가 잡히면 어떻게 되는 데요?”

“ 몰라서 물어?”


헤라의 질문에 그가 고개를 갸우뚱 한다.


“ 당연히 너 네 팀이 지는 거지! 네 남자 친구는 나한테 사살 됐고. 넌 내 포로잖아.”

그녀는 그제야 자기가 이번 게임에 또 져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하지만.......내 돈을 위해서는 당신 친구가 안 잡히는 편이 낫겠지.”

재원이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 그러나 거기서 헤라는 한줄기 희망을 봤다.

“ 연주가 잡히면 당신 돈 얼마가 없어지는데요?”

“ 백만 원. 별로 작은 돈은 아니지?”

힉! 내기에 백만 원 씩이나? 도대체 이 인간은 뭐야?

“ 근데.......난 돈 보다 네가 나한테 한 약속을 받아 내는 게 더 좋으니 녀석이 네 친구를 잡길 바라야겠다.”

“ 그럼 지금 쏴요. 그럼 되잖아.”

헤라는 다시 희망의 빛이 꺼져버리는 걸 느끼며 나무에 몸을 기대어 그에게 쌀쌀 맞게 말한다.

그러자 그가 나무에 기댄 그녀를 내려다보며 페인트 건을 겨눈다.


“ 준비 됐냐? 곧 전사 할 텐데 소감이 어때?”


약 올리는 데는 도가 튼 인간! 정말이지 헤라는 약이 올라 죽을 지경 이었다. 그리고 입술을 뾰족 내밀며 눈을 감아
버린다.

“ 쏴요. 소감 따위 묻지 말고.”

“ 흐음~ 준비 됐다 그거로군!”

철퍼덕거리며 옷에 튈 물감의 느낌에 대비하며 그녀는 눈을 질끈 감는다. 하지만 기다리던 그 소름끼침 대신이
그녀가 느낀 건 그의 따뜻한 가슴이었다.

재원이 그녀의 등을 꼬~옥 껴안은 것이다. 그리고 이어 들리는 여자의 심통 맞은 목소리.

“ 재원 씨 뭐야? 지금 자살 한거야? 포로랑 둘이?”

헤라는 그의 품에서 살며시 눈을 떴다.

“ 에이! 그렇게 갑자기 수연 씨가 나타나니까.......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여 버렸잖아.”

재원이 여전히 그녀를 안은 채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수연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하며 헤라를 한번 훑어본다.

“ 국제적십자사에서 상 받겠군요. 포로를 위해 희생 하시다니!”

그러며 재원을 향해 빈정거린다. 그는 답답한 고글을 벗으며 수연을 향해 웃어 보였다.

“ 윤석이 녀석 그 여자는 잡았어?”

미안한 웃음을 걸며 수연 에게 그가 물었지만 수연은 그냥 발길을 돌려 버린다.

“ 수연 씨! 잡았냐니까?”

그가 다시 소리쳐 묻자 그녀는 마지못해 ‘아직요’ 하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원래가 무신경한 성격의 수연
이지만 지금 재원의 태도는 못 마땅하기 그지없었다.

결혼 하게 될지도 모르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안고 있는 꼴 이라니! 하며.


“ 못 잡았다네. 그나저나 나도 죽어 버렸네. 누구 덕에.”

장난스런 웃음을 지으며 얼떨떨해 있는 헤라는 내려다 본 재원은 그녀의 얼굴에 눈을 박아 버렸다.

웬일인지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뭐야? 왜 그러는데?”

재원이 묻는다.

“ 당신.......차라리 당신 손에 전사하는 게 나았어. 저 여자한테 맞긴 정말 기분 더러웠다고.”

뭐? 이 여자 지금 뭐라는 거야?

“ 왜? 죽는 건 매 한가진데.”

바짝 마주 선 재원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린 그녀는 억울한 듯이 하는 말이 재원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어차피 당신하고의 약속 때문에 하는 게임이잖아. 근데.......상관도 없는 여자 손에 죽는 게 싫다고.”

어린애 같이 눈에 눈물을 걸고 그녀는 투덜거리고 있었다.
재원은 웃음이 났다. 그녀가 너무나 귀여워서 말이다.

“ 야! 진 헤라. 너 질투 하냐?”

“ 질투는 무슨! 착각은 자유 셔, 정말!”

그녀가 눈에 걸어둔 눈물을 툭 떨구며 야멸차게 대꾸한다. 그러나 재원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하더니 그녀의 얼굴을 잡아들어 자신을 향하게 했다.
그리고 그 다음 표정만큼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재원은 말했다.

“ 너. 나랑 사귈래? 이 따위 약속 같은 거에 얽매이지 말고, 나랑 정말로 사귀는 거 어때?”





18.


사귀자구?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재원의 진지한 사귀자는 말에 헤라는 그 큰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는 재원의 얼굴이 종이장이라도 되는 듯
뚫어지게 바라봤다.



“ 뭐야? 싫다든지 좋다든지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인내심이 길지 않은 재원은 그녀에게 대답을 다그쳤다.



“ 사귀면.........지금이랑 뭐가 달라지는 건가요?”


여전히 멀뚱한 눈을 한 그녀가 대답대신에 질문을 했다. 재원은 그녀를 내려다보던 눈을 들어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 솔직히 말해?”



그리고 또 심각해진 표정을 하고 그녀를 다시 내려다본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서서히 젖기 시작한 그의 몸에서
시큼한 땀 냄새가 풍겨났지만 헤라는 왠지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 당연히 솔직히 말해야지요. 본능엔 솔직하면서.”



땀 냄새 나는 그의 옷에 몰래 코를 갖다대며 그녀는 남자들에게서 나는 땀 냄새가 왠지 여자하고는 다르다는
사실에 머리는 갸웃하고 있었다.


“ 음.......사귀게 되면 제일 좋은 건, 내가 더 이상 너의 억지스런 게임에 끌려 다니지 않고 널 안을 수 있다는 거.
그게 제일 좋지!”



페로몬.......혹시 이 남자가 지금 나한테 페로몬을 쏘아 대고 있어서 이 시큼한 냄새가 좋아지고 있는 걸까? 그녀는
재원의 대답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엉뚱한 방향으로 또 다시 생각이 튀어 가고 있었다.



“ 야! 넌 물어 놓고 듣지도 않냐?”



급기야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박고 냄새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는 그녀에게 재원이 한 소리를 한다.



“ 들었어요. 제일 좋은 건.......”



하지만 들었다고 말하던 그녀는 곧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묻는다.



“ 제일 좋은 건, 뭐라고 그랬어요?”



재원이 한 숨이 나왔다. 자신이 왜 도대체! 이 무디디 무딘 여자를 놓지 못하고 있는 건지 새삼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 진 헤 라. 너.......내가 남자로 보이기나 하냐?”



그녀가 그의 가슴에 박았던 이마를 들어 그를 올려다본다.


“ 그건 왜요? 그쪽이 남자 아니고 여자였어요?”



“ 당근! 남자지. 근데 네 행동은 말야........도무지 그게 아닌 거 같거든. 아니지 혹시 너 남자 아냐? 혹시
트렌스젠더냐?”



자신의 몸에 붙어 있는 그녀를 떼어 내며 그가 과장된 말투로 물었다.



“ 무슨! 트렌스 뭐요? 트렌스젠더? ”


그러자 역시 그녀는 발끈 했다. 사실 재원은 그녀의 이런 발끈함이 재미있어 자꾸만 그녀에게 헛소리를 하게 되고
있었다.




“ 아냐? 아니면 증거를 보여줘. 그럼 믿어주지.”



“ 증거요? 증거는 지난번 그쪽 집에서 잔 날 봤잖아요. 내 옷을 벗긴 게 누군데 새삼 증거를 대라는 거예요?”



“ 난 그날 네 속옷만 봤어. 다른 건 전혀 보지 못 했다구.”



재원은 살짝쿵 거짓말을 한다. 그날 그녀의 가슴도 더듬어 보고 브레지어를 들춰 보기도 했지만 분명 헤라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 그래서? 그래서 지금.”



“ 그래~ 지금. 어차피 네가 이 게임에서도 진 것 같으니까 약속 지키는 셈 치고, 증거도 보여 주는 건. 어때?”


그리고 곧 바로 그녀를 유혹 한다.

이미 어둠이 깔려 버린 산중에는 어디선가 대장 늑대의 암컷 무리를 불러들이는 울부짖음이 헤라의 귀를 울리고
있었다.

물론 환청이다. 재원이 내뿜는 페로몬과 체취에 취해버린 그녀의 환청!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 훈련장에서 비추어 드는 옅은 조명에 헤라의 멍한 표정이 재원의 눈에 들어왔다.


“ 특급 호텔에서도 도망쳐 나온.......나한테....... 이런 산 속에서....... 그 것도 풀밭에서 하자는....... 거예요?”


그녀가 드문드문 저항 아닌 저항의 말을 했지만 재원은 이미 그녀의 귀와 목에 그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고 있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아직은 아닌데. 하지만, 그렇지만, 도저히 이 인간을 밀어 낼수가 없다!

그리고 결국, 헤라는 이성의 꼬리가 자취를 감추는 것을 느끼며 그의 입술에 몸을 맡겨버린다.


“ 침대가 없어서.......싫어? 하지만 그건.......고정 관념이야.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서로를 가질 수 있는 건
인간이나 동물이나 모두가 누려야 되는 자유야.”


재원은 아직 몸 뒤로 나무를 붙들고 엉거주춤 서 있는 그녀의 귀에 대고 조금 낮게 속삭여 본다. 너무나 긴장하고
있는 헤라의 긴장을 조금이라도 풀어주려는 의도였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헤라의 입술을 정복하고 나무를 집고 서 있던 왼 손으로 그녀의 군용 조끼 지퍼를 내린다.
그리고 청색 남방의 단추를 조급한 손놀림으로 풀어헤쳐 브래지어 틈사이로 손을 집어넣는다.

탄탄하고 풍만한 그녀의 가슴이 손에 쥐어 지자. 재원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어떤 여자를 만지면서도
느껴보지 못한 희열이 그의 온몸을 지배해 버린 것이다.

그건 아마도 갖고자 열망했던 것을 갖게 되려는 순간에 느끼는 남자의 정복욕!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는 생각 했다.


“ 긴장 하지 마!......네가 너무 힘을 주고 있으니까 바지 사이로 손이 안 들어가잖아.”


그러나 너무나 긴장을 하고 서툰 그녀의 근육들 덕에 헤라의 엉덩이로 손을 집어넣던 재원의 손이 그녀의 허리춤에
끼어 버린다.

“ 바지 단추는 폼이에요? 그걸.......하~ 풀면 되잖아요.”


재원의 손을 잡아 빼내며 헤라는 투덜거렸다. 얼른 필이 올라 올 때 해치우려고 했는데 그가 분위기를 깬다는
생각에 잠시나마 짜증이 돌았던 것이다.


“ 짜증내지마. 잘 할게.”


그러나 그는 헤라의 퉁명스런 말에 애교 섞인 말투와 표정으로 그녀를 달랬다.

아무리 무뚝뚝한 남자라 해도, 고지를 눈앞에 둔 순간엔 주인을 향해 순종의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가 되는 것은
천하의 이치였던 것이다.


그녀의 바지 속으로 다른 손을 집어넣는데 성공한 재원은 자신의 애무에 단단히 서버린 그녀의 유두에 입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풍만한 가슴에 비해 크기가 작은 그녀의 유두를 그가 빨아들이자 헤라의 입에서 조그만 탄성이 흘러
나왔다.


그녀의 신음에 그녀의 유두처럼 단단해 질대로 단단해진 그의 무기가 장전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 진 헤 라.......너, 나 말고 다른 놈이랑 이러면, 가만 안 둬, 알았어?”


그런 다음 순간엔.......장전을 준비한 무기는 그에게 불타는 소유욕내지는 독점욕 까지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 특히”


그러나.......하늘도 무심하신지라! 오늘도 재원과 헤라의 불타오르던 본능은 어처구니없게 막을 내려야하는 상황을
맞아야만 했다.



“ 아! 이런 미안. 미안해. 재원아.”



재원의 등 뒤에서 들리는 윤석의 별로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 그리고 동시에 헤라의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후레쉬
불 빛!



“ 제기랄!”



재원은 낮은 욕설을 뱉으며 황급히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던 얼굴을 들고, 헤라의 풀어진 남방의 깃을 여미어 그녀를
품에 안는다. 무방비 상태로 후레쉬 불빛에 노출된 그녀의 몸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 야 이 자식아! 그 불이나 좀 치우고 미안하다고 해라~!”



그리고 신경질이 섞인 목소리로 윤석에게 소리친다.



“ 아이고! 진짜로 미안.”




하지만 윤석은 이번엔 웃음까지 걸린 목소리를 내며 능청을 떨었다.



“ 화끈한 시간 방해해서 정말 미안하다만, 긴급 상황이 발생해서 어쩔 수 없었어.헤라 씨 도 정말 미안해요~~~.”



그렇지만 긴급 상황 이라는 그의 말에 재원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되물었다.



“ 긴급이라니? 무슨 소리야?”



“ 아! 글쎄, 내가 잡기로 했던 그 연주 씨 말야.......행방불명 이다. 헤라 씨는 너랑 같이 있다는 소리 수진 씨한테
들었고, 석준 씨도 벌써 내려왔는데, 밑에 모이기로 한 시간이 1시간이나 지나도록 안 오니.......긴급 상황
아닐까?”



그의 얘기인 즉, 연주 가 산에서 길을 잃었다는 소리 같았다.

그 말을 듣자, 재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윤석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기고 있던 헤라는 그의 페로몬에 취해
몽롱했던 정신이 확! 하니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연주! 아~ 어쩐지.........처음부터 따라온다고 떼 쓸 때 말렸어야 하는데!!!!

운동이라면 어느 것 하나 가리지 않고 고개와 팔을 동시에 휘저으며 안하려고 하던 그녀가 이상스레 오늘의 페인트
볼 게임에는 목숨을 걸고 따라오려는 것이 마음에 걸리든 헤라였다.




“ 지금 조교 둘이랑 같이 찾고 있거든. 뭐 산이 크지도 않고 낮으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너무 걱정들은
말고! 대신 비 오는데, 좀 참았다가 나중에 하던 일은 다시 마무리하심이.”




“ 됐어. 자식아! 얼른 너 가던 길이나 가.”




윤석의 말을 자른 재원은 자신의 품에서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 봤다. 곧 후레쉬 불빛이 다른 곳으로
방향이 틀어지고 윤석이 풀을 헤치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가 헤라를 품에서 떼어 냈다.




“ 춥다.......비도 굵어지고.”




그리고 연주 걱정에 침울해진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재원은 헤라의 남방 단추를 하나 씩 하나 씩 아쉬움이 가시지
않은 손길로 채운다.




“연주. 아무 일 없겠죠?”



단추를 채우는 재원의 손을 잡으며 그녀가 중얼 거렸다.

잔뜩 생각에 빠져 있는 얼굴이 되어 그를 올려다 본 그 눈동자엔 그녀답지 않은 겁 이 서린 눈을 하고 있었다.
어두웠지만 재원은 틀림없이 그러리란 생각을 했다.




“ 당연하지! 이런 작은 산에서 무슨. 걱정하지 마. 삼사십 분이면 찾아 낼 거야. 틀림 업이.”



“ 아~ 어쩐지. 따라 온다고 우길 때부터 불길 하더니.”



그가 위로를 해보지만 그녀는 우는 소리를 낸다.

겉으로 보기엔 헤라와 그다지 친한 친구로 보이지는 않아 별 신경을 쓰지 않던 연주였는데, 울먹이는 그녀를 보며
재원은 연주의 생김새를 떠 올려 보려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떠오르지 않았다. 헤라와 같이 있는 동안엔 그녀 외에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였으므로
당연한 결과였다.

헤라의 벨트를 채우고 조끼의 지퍼를 올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말짱한 옷차림으로 그녀를 되돌려놓은 재원은
후~ 하는 한숨을 내쉰다.




“ 오늘도 실패다. 진 헤 라.”




그녀의 양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 다음에......다음 기회에 꼭 약속 지킬 거예요.”




고개를 발밑으로 떨구며 헤라가 작은 소리로 대꾸 했다. 오늘은 정말로 약속을 지키고 싶었는데 하는 어쩔 수 없는
후회를 그녀는 재원에게 굳이 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점점 솔직해지고 대담하게 재원을 향해 큐핏의 화살을 날려 보내고 있었지만 헤라는 인식하지 못
하고 있었다.




“ 사귀는 거.......승낙 하는 거지? 뭐 그런다고 해도 매일 만나지는 못 하겠지만, 지금 상태 보다는 나아질 것
같아서 그러는데. 대답 좀 해라. 응?”




대신 발밑의 흙으로 발장난을 치던 그녀는 애원에 가까운 재원의 사귀자는 말에 가슴이 울렁댄다.

사귄다! 는 것. 석준과 중 3 때 잠깐 이후로는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거기다 재원은 헤라의 아버지 같은 졸부의 아들. 아마도 말이다. 그리고........바람둥이 같았고, 회사에 다니는
월급쟁이라고는 했지만 씀씀이도 헤픈! 그녀가 남자를 싫어하게 된 결정적 조건을 두루 갖춘 인물 인데!

그래도 그녀는 지금도 풍겨나고 있는 그의 체취가 너무도 좋아져 버려, 계속해서 재원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을
속일 수가 없었다.




“ 사귀면.......그 뿐 인거죠? 결혼 하자거나 뭐 그런 생각은 안하는 거. 맞죠? 그렇다고 약속 해주면 사귈게요.”




재원의 품에 다시 파고들며 헤라는 멍해진 목소리고 물었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그의 허리를 껴안는다.

땀 냄새! 역시나 엉뚱하게도 그녀는 재원의 몸에서 나는 그의 시큼한 땀 냄새에 15년 이상의 솔로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있었다.




“ 네가........원한다면 좋아. 약속해 줄게!”




재원이 그녀를 안은 팔에 가득 힘을 주며 씁쓸한 얼굴로 승낙을 한다. 이 여자는 왜? 하는 의문을 품으면서!


19.

칠 흙 같은 어둠이 깔린 으스스 산속을 헤매던 연주는 소매의 레이스가 찢겨진 사실도 모르고 무조건 앞을 향해
걷고만 있었다.

하지만 걷는 것도 이제 곧 한계. 그녀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자존심상 꾹 눌러 참고 있는 중이다.

분명 재원 씨를 보고 그냥 따라 온 건데~~~~~보이라는 사람은 안보이고 왜 시커멓고 무서운 나무만 보이냐구~
씨!

그러나 소리는 내지않았지만 방울 방울진 눈물이 빗물과 함께 그녀의 하얀 볼을 타고 내린다.

지가 무슨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비련의 공주라도 되는 양, 그녀는 넘어져 있는 나무이 그루터기에 앉아 손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 아! 진짜. 이런데 앉아 있으면 어떻게 해요?”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하나 없이 난데없이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 연주는 그가 재원이길 바라며 처연한 표정으로
눈 안에 눈물을 가득 걸고서 남자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눈 안 가득 들어오는 얼굴은 재원의 그 스마트 하고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 덩치가 곰만 하고 대학학생 같은
머리에 어둠 속에 눈만 반짝이는........윤석 이었다. 더불어 강렬한 후레쉬 불빛이 그녀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 뭐예요. 울었어요?”


잠시 실망한 눈이 된 연주에게 그는 대뜸 연주의 얼굴을 보자마자 한쪽 눈썹과 눈을 찡그리며 못 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 울긴요......그저 빗물이 좀 얼굴을 어지럽히네요.”


그러나 연주는 윤석이 재원의 친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불쾌한 그의 태도에도 다소곳한 표정과 목소리로 위장을
한다.


“ 얼른 일어나요. 다들 밑에서 기다리니까. 연주 씨 찾느라 얼마나 고생들 한줄 알아요?”



윤석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콧방귀를 끼며 손을 내민다. 다음 순간, 그녀가 살며시 손목을 꺽어 그의 손을 잡자 그
손을 거칠게 잡아 당겨 그녀의 몸을 일으켰다.



“ 아~ 아야!”



이어지는 연주의 비명!!!! 그는 설상가상의 뜻을 그제야 절감하며 비명과 동시에 주저앉은 연주의 옆으로 무릎을
굽혀 앉는다.






조교 실 앞에선 석준과 수연이 커다란 드럼통 안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앉아 아직 산에서 내려오지 않은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연은 헤라와 같이 있을 재원이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왠지 신경이 쓰이고 있었고, 석준은 헤라와 재원의 관계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생각을 하느라 연주의 실종 에는 별 관심들을 두지 않고 있었다.


“ 이제 내려 와요?”


수연의 목소리가 들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재원과 헤라와 와 있었다.



“ 음. 연주 씨는 찾았어?”



불 곁으로 온 재원이 수연을 향해 묻고, 헤라는 재원의 옆에 서서 오렌지색으로 타오르는 불 속에 눈을 주고 있었다.



“ 아뇨. 아직.......근데 정말 멍청한 여자네요. 이런 데까지 와서 남자들한테 짐이 되다니.”


재원의 물음에 대답을 하며 그녀는 헤라를 향해 말을 했다. 싸움을 걸려는 것인지......수연의 눈빛이 매서워 져
있었다.



“ 사람이 다 같은 순 없지.”



재원은 그런 수연의 말을 적당히 받아치며 혹시나 헤라가 그녀의 말에 열 받아 방방 뛰지나 않을까 흘낏
살펴봤지만 그녀는 조용히 불타는 장작더미에만 정신이 쏠려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저렇게 골똘히 하는 걸까? 그는 헤라의 아름다운 옆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에 손을 댄다.

하지만 그래도 헤라는 아무런 반응이 없이‘타다닥’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길에서 얼굴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묶여졌던 머리가 거의 풀리고 비에 젖어 있는 머리였지만 장작불의 붉은 빛에 반사된 그녀의 머리카락은 반짝 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 재원 씨.”


재원은 수연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로 헤라의 얼굴 구석구석에 넋을 놓았다. 한국적이면서도 이국적이고
그러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얼굴!



“ 정 재 원 씨! 안 들려요?”



심장이 녹아드는 것만 같기도 하고 타오르는 저 붉은 장작더미 속에 그 심장이 같이 타오르는 것만 같기도 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황스런 이 감정에 그는 입술을 깨문다.



“ 세 번째 불러요. 재원 씨.”



이를 앙다물고 암고양이 소리를 내는 수연의 목소리에 재원은 놓았던 정신을 불러들인다.


“ 어. 그래? 근데 왜 불렀어?”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수연의 얼굴로 시선을 돌리며 그가 무심한 투로 물었다.

사실 그녀는 재원과의 혼사 얘기가 오가던 지난 6개월 내내 줄 곧 그 와의 만남이 귀찮게 생각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황당한 그 앞에서 황당한 행동들도 보이곤 했었는데,

또,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여자들에게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재원도 그녀와 마찬가지 일거라 생각하려던 참
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늘 헤라를 대하는 그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인 동시에 수연의 여자로써의 질투심을
유발 시켜 버린 것이다.




“ 안에 가서 커피 좀 가져다주세요.”



그래서 그녀는 심술을 부려본다. 물론 싸가지 없기로는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지만. 일단 한번 부딪혀
보기로 했다.




“ 뭐? 수진 씨. 지금 그 말 나보고 하는 소리야?”




하지만 반응은 역시나 다.




“ 네. 이런 곳에선 남자 들이 그런 거 정도는 다 해주지 않나요?”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진은 아니었다. 헤라처럼 몸으로 남자와 맞 짱 뜨는 식은 아니었지만 늘 남자들에게
떠받들려 살아오던 그녀였다.

말하자면 연주와 비슷한 공주 과. 그러나 (智)지를 겸비하고 있는 그녀! 수연은 헤라에게 만만치 않은 적수였던
것이다.



“ 하~ 수진 씨답지 않은데 오늘은.......! 나한테 대접을 다 받으려고 하고 말야.”


처음엔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치던 그가 의외라는 눈빛을 보내며 더는 긴 말은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100미터 쯤 떨어진 조교들의 사무실로 커피를 가지러 걸어가고 있었다. 석준도 슬며시 일어나 재원의 뒤를
따랐다.



수연의 옆에 앉아 있던 헤라는 재원에게 당당히 심부름을 시키는 그녀를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아까 산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느끼던 거지만, 그녀가 재원의 친구라는 느낌은 어디에서도 받을 수가 없다.

그럼 도대체 무슨 관계지?



“ 재원 씨 하고는 어떻게 되는 사이에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헤라는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수연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했다.

그러자 두 여자의 시선이 마주치는 중간지점에서 푸른 불똥이 사방으로 튄다.



“ 어떻게 되는 사이 냐니........어떻게 만났냐고 묻는 건가요? 아니면 무슨 관계냐고 묻는 건가요?”



헤라는 매서운 수연의 눈을 노려보며 그녀가 묻는 의도를 다시 물었다.



“ 둘 다 묻는 거예요. 보아하니 두 사람 관계가 영 미심적어서.”



그녀는 굳이 묻는 의도를 숨기려 들지는 않았지만 헤라는 오히려 그 점이 더 기분이 상한다.

그렇다면........헤라가 쉽싸리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주긴 틀렸다는 얘기였다.



“ 미심적다! 표현이 좀 그러네요. 우리가 불륜도 아니고 남자 여자사이가 미심적다는 표현은 유부남 유부녀들한테나
쓰는 거 같은데”



말 꼬리를 잡는다. 좀 치사한 생각은 들었지만 헤라는 그녀가 얄밉고 못 마땅해지려는 찰나 였으므로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 그러는 댁은 저 남자랑 무슨 사이신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뭐........결혼 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이라고 해두지요.”



매서운 눈에 거만까지 곁들여 장식한 수연이 무표정 하지만 어때? 이건 몰랐지? 하는 얼굴로 당당하게 대답을 한다.


그리고 같은 순간, 헤라는 결혼 할지도 모르는 사이! 라는 그녀의 대답에 심장이 쿵 하니 뱃속 저 밑바닥으로 쑤셔
박히는 느낌을 받는다.




“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6 개월째 혼담이 진행 중인 사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핏대가 오르는 헤라의 얼굴을 본 것인지 눈에 주름까지 잡으며 웃음을 띤 그녀의 목소리는 당당을 지나쳐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 그러니 제가 미심쩍다는 표현을 쓴 게 그리 부적절한 단어의 선택은 아니겠죠!”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수연의 한 타! 홈런은 아니래도 안타 정도의 효과는 있었다.

조금 전 사귀기로 합의를 본 재원에게 약혼녀가 있었다니! 물론, 결혼 같은 건 생각지 말자는 약속을 자신이
받아내고 마음먹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열이 오르는 건.......?



“ 그랬군요. 재원 씨가 저한테 수작 거는 걸로 봐서는 여자 보는 눈이 높은 줄 알았는데.......생각보다 별로네요.”


헤라는 수연의 그 안타를 아웃 시켜버리고 싶었지만 파울 볼 정도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재원에 대한 정보가 턱
없이 부족한 그녀였기 때문이다.



“ 수작 거는 남자에게 결혼 할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됐으니, 정상적인 여자라면 피해 가겠지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일러두고 싶은 건, 그쪽이 어떤 집안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재원 씨 집안 하고는 별로 안
어울려요.”


뭐? 집안? 하~ 졸부들은 졸부들끼리 결혼해야 하나보지? 근데! 저 고고한 척 하는 건 도대체 뭐야?

수연의 말에 열 받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지막 일러두기는 헤라의 인내심에 종착역 알리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조교 두 명과 윤석이 연주를 업고 그들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이고 그녀가 헤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연주의 안전을 확인한 헤라는 더는 수연의 옆에 앉아있지 못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열 받아! 열 받아 죽을 거 같아! 결혼 할 여자를 왜 여기에 데리고 온 거야? 나랑 한번 해보려고 그 대가로
게임하러 온 주제에.......결혼 할 여자가 같이 나타나는 게 도대체 양심이나 있는 거냐구! 씨이~

수연 앞에서 참고 있던 화가 머리로 뻗히고......그녀는 어느새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 어디가? 지금 커피 가지고 가는데.”


조교 사무실로 가는 길에 양손에 커피를 들고 오는 재원과 마주 쳤지만 헤라는 그냥 지나 치려 한다.


“ 야......뭐야 어디 가는 거냐고?”

그가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을 그냥 지나쳐 버리는 헤라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채고 그녀를 잡기 위해 들고
있던 커피를 바닥에 내던진다. 그리고 다급히 그녀의 팔목을 잡아 당겼다.

그의 강한 팔 힘에 그녀는 가던 길을 가지 못하고 등을 보인채로 멈추어 선다.



“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마치 무슨 일인지 알고서 묻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엔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자 헤라는 그 목소리에 더더욱
화가 난다.


“ 알면서 뭘 물어요?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웬 일로 그렇게 내 말에 순순히 응해주는 가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내가 요구하는 대로 딴 지 안 걸고서! 애초부터 그럴 생각으로 나한테 그랬던 거라구.”


다다다다! 그녀는 총알처럼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앞뒤도 잘 맞지 않는 말들을 말이다.



“ 후~ 화 내지 말고, 알아듣게 좀 얘기 해봐. 지금 네가 하는 말 도통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거든.
그러니까....... 이리 좀 와봐.”




재원은 흥분할 대로 흥분한 그녀를 달래려 손을 잡아끌어 어스름한 곳으로 데려갔다.



“ 왜 못 알아들어요? 양심상 켕기는 거야? 그래서 피하고 싶어?”


하지만 몇 발자국 따라오지도 않은 헤라는 재원의 손을 세차게 뿌리 쳐 버렸다.



“ 네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 같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지금 상황은 정말이지.......나도 화가 난다. 진
헤 라.”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헤라의 화를 받아내는 재원은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겨우 부드러워지기 시작한 그녀와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적반하장이야 정말! 관.두.시.죠. 정 재 원씨.”



그러나 그녀는 이미 성질이 날 대로 나 버린 상황 이었기에 재원의 노력 따위는 눈에 차지도 않았다.

바지에 손을 찌르고 멀리 윤석과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향하던 재원이 한숨을 쉰다. 그리고 헤라는 막 조교
사무실에서 나오는 석준에게로 걸어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 그녀는 낮에 재원의 아파트에 자신의 차를 두고 왔기에 지금은 석준의 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석준도 아무 말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가 만약 무슨 말을 걸어온다 해도 그녀는 말하고 싶은 기분이 절대 아니었다.

그렇기에 어색하게 차를 타고 집에 왔고, 내리면서 잘가 라는 인사만으로 석준과의 13년 만이 해후는 끝이 난다.



일요일인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뜬 시간은 9시를 조금 넘긴 시간. 둘째 언니 혜미의 전화를 받고 무거운 눈을 떴다.



“ 아직도 자니? ”


헤미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 응.......”



“ 그만 잠 깨고. 얼른 차가지고 새엄마 집으로 와.”



“ 왜.......휴일 날 아침부터.”



“ 글쎄 오라면 와. 형부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언제나 전후 사정 설명 없이 자기 필요한 것만 얘기하는 헤미는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 나 피곤해. 뭔지는 모르지만 큰언니랑 새엄마랑 셋이서 해결하면 안돼?”



아직도 잠을 떨치지 못한 헤라는 사정을 해보지만 헤미는 우리 집에서 차 있는 사람은 너 뿐이라며 올 것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 강요를 10분 동안 졸면서 들은 그녀는 결국에는 손을 들고 두 시간 이내로 가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화장도 하지 못하고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상태로 헤라는 재원의 아파트로 자신의 차를 가지러 간다.


택시로 15분 거리인 그의 아파트로 가면서 그녀는 어제 밤새, 재원이 보고 싶어 몸을 뒤척인 기억을 떠올렸다.


그렇게 싸우고 석준의 차를 타고서 오는 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가
괘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약혼녀랑 같이 와서.......사귀자는 말을 한 것에 대한!



택시에서 내려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가지러 내려갔다. 그녀의 흰색 소나타 옆으로 재원의
은회색 BMW 가 우연치 않게도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차를 보는 순간, 그 차가 마치 재원이라도 되는 듯 그녀는 차의 매끄러운 보닛 위를 스르르, 겁도
없이 매만진다.


“ 위잉위잉 삑삑삑!!!!!위잉위잉.”



에그머니나! 이건.......또!!!!!

겁도 없이 주인도 아닌 주재에 최고급차를 만진 대가가 이런 식으로 나타난 것이다.........삽시간에 지하주차장 안은
재원의 BMW가 내는 경보기 음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메아리쳐 댄다.

그리고 본능만이 유일한 무기인 헤라는 마침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내리던 여자 하나가
그녀를 수상쩍어 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자연스러움을 가장하기 위해 아무 층이나 버튼을 누르고 얌전히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

더불어 여자를 향해 굳어진 미소까지 띠우면서.

그러나 저 요란한 경보기 음은 그칠 줄을 모르고 있었다.


“ 후~. 무슨 경보기가 살짝 만지기만 했는데 저렇게 시끄럽게 울려대는 거야? 하여간 차나 주인이나 싸가지 없는
건 막상막하라니까.”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자 헤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투덜거린다. 하지만 그녀가 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

부드럽게 초고속으로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땡! 하는 맑은 벨 소리와 문이 열리고 최고급, 고층 아파트의 황금색
문에 붙은 숫자가 보이자 그녀는 순식간에 울상이 되어 버렸다.



2317호.......정말 무지하게 우연스럽게도 그녀가 아무번호나 누른다고 누른 층수가 재원의 층수 인 것이었다.

40층의 아파트에 각 하나의 라인마다 있는 엘리베이터가 40:1의 확률을 뚫고 헤라를 재원의 집 앞에 내려준
것이다.


“아~아 정말. 왜 승강기 까지 날 시험에 들게 하는 거야.”

재원의 집 현관문에 머리를 기댄 헤라는 진짜로 울고 싶어졌다. 이젠 아까보다 더 보고 싶다. 어제저녁 까지 같이
있었지만.......그렇게 싸우고 헤어져서 인지 아니면 그 망할 놈의 페로몬 때문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너무 그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헤라는 자기 합리화를 시작한다.

결혼할 여자가 있으면 어때! 이미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여자를 재끼고 결혼하자고 할 것도 아닌데!
사귀는 게 불륜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보고 싶으면 만나면 되는 거야. 그럼 되는 거지 암. 그렇고 말구!

합리화가 간단히 논리적으로 정리가 되자 그녀는 긴장을 풀기 위해 한숨을 크게 내쉬고 현관문에 달린 벨을 딱 세
번 누른다.

10초? 20초? 30초?를 기다렸다. 하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없는 걸까? 혹시.....그 약혼녀라는 여자하고
그 여자 집에?

뭐 이런 자식이!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왔냐? 들어와.”


그리고 재원의 목소리. 헤라는 금방까지 질투로 몸이 끓어오르던 기운이 스르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앞서
들어가는 재원의 뒤를 주뼛주뼛 따라 들어갔다.


“ 자고 있었어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는 재원을 보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 응.......”



잠이 덜 깼는지 재원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생수 병의 뚜껑을 그새 닫고 있었다. 그런 재원을 헤라는 잠깐
동안이지만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의 하나하나를 뜯어보기 시작한다.

밤사이 그의 얼굴에 꺼칠한 수염이 돋아나 있었다. 그 잘생기고 스마트한 얼굴이 그래서인지 오늘은 섹시해 보이고
더 남자 다와 보인다.

거기에 급하게 입었는지 옷은 흰색의 트레이닝 바지만 걸치고 상의는 맨몸이었으며 머리는 아직 헝클어진 그대로의
모습 이었다.

지금까지 본 그의 모습 중 헤라는 현재의 모습이 젤로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한다.


“ 그만 봐.......넌 툭하면 사람을 그렇게 뜯어보더라. 그것도 꼭 상대방이 무방비 일때.”


재원이 잠이 섞인 느릿느릿한 말투로 그녀의 뚫어질 듯한 눈을 나무랐다.


“ 내 눈가지고 내가 본다는데. 참견 말아요.”



“ 하여간.......무슨 말을 못해. 아직도 화 안 풀린 거야?”



그녀가 마음과는 다르게 톡 쏘는 말을 내뱉었지만 그는 별 상관 않는 것처럼 보였다.



“ 이리 와봐.”



1분 정도? 시간을 둔 그가 여태껏 현관 앞서 뻘죽하게 서 있는 헤라를 손짓으로 부른다. 거실의 하얀 양가죽
소파에 몸을 묻으며 말이다.

“ 제발! 나 피곤하고 기운 없어......그러니까 실랑이 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좀 할래?”


그의 손짓에도 꼼작 않고 서 있는 그녀에게 재원이 무척이나 지친 표정으로 웬일인지 부탁을 한다.

그래! 그가 보고 싶어서 벨을 눌러놓고. 또 이렇게 싸우게 되면 안온만도 못하게 된 일이다.

수연인가 하는 여자가 뭐건! 난 밤새 저 남자가 너무나 보고 싶었으니까.......더는 엉뚱한 짓은 말자.


그녀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 한 다음 재원에게로 다가갔다.



“ 여기로 와. 앉아봐.”



다가온 그녀의 손목을 잡아 재원은 그녀를 무릎 위에 앉힌다. 그리고 그 긴 머리카락 사이의 가는 등에 얼굴을 묻고
허리를 꽉! 껴안았다.



“ 어제.......왜 그렇게 화 낸 거냐?



팔 안 가득 퍼지는 그녀의 감촉에 재원은 가볍게 가슴이 뛰고........그래서 행복했다.


“ .......”



“ 말해봐. 오해가 있었으면 풀고, 아니면 변명이라도 하게.”


그 행복감으로 인해 그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에게 변명이란 것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하고 싶었다.


“ .......”




“ 나.......새벽까지 일하다가 들어왔거든. 근데 일 끝나고 들어와서 자려고 하니까, 네가 어제 무주에서 그렇게 화를
내고 가버린 생각이 자꾸만 나서.......솔직히 잠은 한숨도 못 잤어. 그러니까 이제 남은 휴일이라도 잠 잘 수 있게
얘기 좀 해라. 응?”



말이 없는 그녀의 등에 여전히 얼굴을 묻은 채 재원은 중얼 거렸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헤라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긋한 샴푸냄새가 피로로 인해 멍해진 머리를 더욱 혼미하게 만든다.



“ 그 여자요. 수연인가 하는 여자!”



“ 수연 씨?”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연다. 근데 수진이가 왜?



“ .......그 여자가 날 좀 갈구더라 구요. 왜 그랬을 까요?”



수연이가 헤라를 갈구다니.......왜 그랬지? 헤라가 그 이유를 묻지만 재원도 이유를 알지 못 했다.

어제 그녀를 무주에 데려간 건 재원의 모친이 데이트 날을 잡아 놓고 두 사람이 데이트를 약속대로 하는지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나 그나 피차 서로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외형적으로라도 만남을 유지하고 있었고, 만나면 딱히 할일도
없었으므로 재원은 별 생각 없이 그녀를 무주로 데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곳에서 헤라에게 사귀자는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터였다.


“ 글쎄. 너 정도는 아니지만 수연 씨도 좀 황당한 여자긴 하지. 그래서 나도 그 속은 모르겠는데......”



“ 그래요? 내가 보기엔 그 여자가 그 쪽을 좋아하는 것 같던데. 아닌가?”



날 떠보려는 거야?

어쩐지 헤라의 묘한 어감에 재원은 그녀의 등에 묻었던 얼굴을 들고 그녀를 돌려 앉힌다.
두 사람은 그의 무릎위에서 마주보고 앉는 꼴을 하고 있었다.



“ 정말로 궁금한 게 뭐야? 너 답지 않게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물어.”



그와 마주 앉은 그녀는 양 볼에서 귀 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얼굴로 재원을 바라보고 있다.

귀여워! 후후후~


하지만 헤라의 그런 얼굴을 보니 재원은 그녀가 뭘 궁금해 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한다. 보나마나 또 엉뚱하거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을 거란 짐작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자세부터 바꾸면 안 돼요? 이건.......이건 꼭 무슨 애로 영화 같은 그런 포즈잖아.”

뾰족 내민 입술 사이로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 음.......그럼 눕자.”



재원의 생각에 이렇게 무릎위에 앉혀놓고 마주 않는 것도 꽤 기분이 좋은 일이었지만 그녀가 어색해 하므로 그는
기분 좋음을 기꺼이 포기했다.

내가 이렇게 맘 좋은 놈이었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 누 눕다니......”



그는 소파의 등받이 쪽으로 모로 누며 당황해 하는 헤라를 그 옆으로 눕힌다. 그리고 팔배개를 만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에 턱을 묻고 허리를 껴안았다.


포근한 헤라의 감촉이 재원을 안심하게 만든다. 그리고 계속해서 몽롱했던 정신에 졸음이 쏟아져 오고 있었다.



“ 졸려.......”



나지막한 소리로 그가 중얼거리고 두근거리는 헤라의 가슴과는 상관없이 곧 재원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


꺼끄러운 수염이 머리를 꼭꼭 찌르는 느낌이 헤라는 낯설었지만 자신의 허리를 두르고 있는 그의 팔의 무게감과
그의 품에서 나는 냄새가 그녀를 재원과 똑같이 행복하게 만들었다.


헤라는 그가 깨지 않게 살며시 돌아누워 재원의 자는 얼굴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의 가슴에 조심조심
손가락을 가져가 봤다.


그리고 너무나 잘 생긴, 약간은 길고 그리고 두께가 보기 좋은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적당히 그을리고 길게 뻗은
그의 상체 근육들 하나하나를 더듬어 봤다.


좋아해! 재원 씨의 냄새 뿐 아니라 모두 모두를 좋아해!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인정하자 헤라는 눈물이 났다. 왜 왜 일까? 왜 눈물이 나지? 내가 남자를 좋아하게
되다니.......그래서 그런 거야?





20.


그의 품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다 가슴이 쿵 하니 내려앉는 건! 헤미 언니와의 전화.

두 시간 내로 새엄마 집으로 가겠다고 해 놓고서 차를 가지러와 재원의 품에서 한 시간 이나 자고 있었던 것이다.

미치겠네. 이 남자하고만 있으면 뭐든 다 꼬여버리기만 하는 거지!


헤라는 재원이 자신의 허리에 두른 팔을 살짝 들어 내려놓고 그의 품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한번 들어가 본적 있는
그의 침실로 가 이불을 가지고 나와 재원을 덮어준다.

더 있고 싶었다. 곁에 누워서 그의 맨살의 감촉을 더 느끼고 그 살 냄새를 질리도록 맡아보고 잘생긴 입술에 키스해
주고 싶었지만, 헤미 언니의 강압적인 목소리가 그녀의 욕망을 누르는 프레스(압축기)역할을 하고 있었다.

결국 헤라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재원에 대한 욕망을 지우고 그의 집을 나선다.









“ 너! 진 헤 라. 지금이 두 시간 내야? 지금이 11시냐고!”


새엄마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헤미 언니가 도끼눈을 하고 그녀를 째려봤다. 새엄마와 헤림 언니는 거실을 낮은 탁자 앞에
마주 앉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어쨌든 왔잖아. 근데 뭐야? 형부가 또 왜?”



성질 더러운 헤미를 직접 상대하는 것보다는 새엄마나 헤림이 훨씬 수월한 상대였으므로 헤라는 현관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헤미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27평의 조그만 서민 아파트엔 새엄마와 헤림과 형부 그리고 5살배기 조카 지민이. 이렇게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 왔니? 앉아라.”



새엄마는 기운이 다 빠져버린 목소리로 막내 헤라를 맞는다. 눈은 울었는지 퉁퉁 부어있었다.

불안하다!!!!! 예전에 아빠가 말썽을 일으키던 그때처럼 헤라는 엄습해 오는 불길함에 조금전까지 재원의 품에서
행복했던 기분이 싸~악하니 달아나 버리고 있었다.



“ 뭔데?”


그리고 묻고 싶지 않았지만 묻는다. 무슨 일인지.



“ 형부 군산에 있는데 데리러 가야해. 헤림 언니하고 너 하고.”



헤미가 가시 돋친 목소리로 얘기를 한다.



“ 왜? 2주 전인가? 그때 언니 코엑스에서 행사 있던 날, 형부 부산에 낚시 갔다고 하지 않았어? 설마 그때 가서
아직 안 온 거야?”



군산으로 형부를 데리러 가야 한다는 말에 그녀는 앞뒤 정황을 파악하려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 헤라야.....흑흑!”


드디어 새엄마가 울기 시작하고 헤림은 두 손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헤라는 헤미를 돌아본다. 설명을 제대로 해줄
사람은 그래도 헤미 밖에 없었던 것이다.



“ 형부가 대형 사고 쳤어.”


“ 무슨 말이야? 하는 일도 없이 집에서 빈둥거리는 형부가 어떻게 사고를 쳐?”



“ 원래 빈둥거리는 족속들이 사고 칠 시간은 더 많은 법이야. 아빠는 안 그랬니?”


“ 하여간.......하여간에 그 사고 내용이 뭔데?”


“ 어떤 사기꾼 년이 지가 강남에 큰 학원하나 차릴 건데 돈이 모자란다며 형부한테 투자하라고 그랬는데, 그 멍청한
새끼가 글쎄 새엄마하고 언니 몰래 이 집 담보로 팔천만원이나 융자받고 그것도 모자라서 언니 카드 빼내서 카드로
4천만 원이나 현금 서비스 받았단다.”



헤라는 헤미의 요점만 간단한 설명에 아연실색해 버렸다.

얘기인 즉신 1억 5천만 원짜리 이아파트가 빛에 다 날라 가고 새엄마와 헤림 언니와 어린 조카가 길바닥에 나 앉게
생겼다는 그런 이야기였던 것이다.



“ 그 그래서? 그래서?”



헤라가 어질어질한 머리를 만지며 헤미에게 다음을 묻는다.



“ 그래서는 뭐! 우선 형부 데려다가 그 사기꾼 년이 누군지 알아내고 형사사건으로나 민사상으로나 고소라도 할 수
있으면 하고, 차압 부칠 재산이라도 있으면 붙여서 몇 푼이라도 받아내는 게 최선이지! 그리고 형부가 끌어들인
다른 사람들 어떻게 다독여 보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헤미가 대충 해결방안에 대해 모색을 해보는 것 같았지만 사기 사건이 그렇듯 피해자는
곧 가해자로 둔갑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 그런 인간.......데려와서 뭐해?”



헤라가 낮게 읊조린다. 아빠나 형부나 어떻게 하나같이 자신의 주변에 있는 남자들은 한심하기 짝이 없고
무능력하고 ,어리석고 이기적인지.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



“ 데려와야 어떤 식으로든 일이 마무리 되니까.”



성질이 더럽기는 하지만 헤미는 세 자매 중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 얼른 언니랑 다녀와. 군산역에서 기다리기로 했으니까.”



헤림을 일으키고 헤라의 등을 떠밀며 헤미가 일을 서두른다. 새엄마는 곱지만 살 이라곤 없는 마른 얼굴에 가득
수심을 걸고 문을 나서는 세 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신없이 열흘이 갔다. 헤미가 일하는 변호사 사무실을 하루에 한 차례 이상씩 왔다 갔다 하고, 사기혐의로 영등포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고 있는 형부를 큰언니 헤림을 데리고 면회 다니기를 5일!

헤라는 퇴근 시간 전부터 녹초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가 점점 비관되기 시작한다.

사춘기 시절부터 끊이지 않는 집안의 문제들.......경제적 압박! 자신의 힘으로 겨우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그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헤어나는 가 싶었는데, 또 다시 시작이다.



“ 헤라 씨. 모레 민 대표님이랑 MTN네트워크 송 석훈 상무랑 저녁 약속 있는 거 안 잊었지?”



책상에 엎드려 긴 팔을 축 늘어트린 그녀를 향해 과장이 묻는다. 인터뷰가 없이 종일 사무실 안에 있던 그녀는
아이보리색 면바지에 하늘색 줄 무늬가 있는 면 남방 차림이었다.

그리고 몸을 감추는 그녀의 차림새에 과장은 오늘은 그녀의 훌륭한 몸매를 감상하지 못해 아쉽다는 눈길로 그나마
조금이라도 몸의 윤곽이 들어나 보이는 그녀의 등줄기를 훑어본다.



“ 네........7시 반에 퇴근하고 과장님이랑 같이 가면되죠?”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녀가 되묻는다.



“ 그래요. 그리고 그날은 옷차림에 신경 좀 쓰고.”



옷차림에 신경? 헤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과장을 돌아다본다. 그녀의 뒷모습에 눈을 누고 있던 과장이 얼른
시선을 옮기지만 헤라는 눈을 가늘게 내려뜬 채 그를 노려봤다. 가뜩이나 비참하고 더러워지려는 그녀의 기분을
그가 건드린 것이다.



“ 신경을 쓰라니요? 어떻게 신경을 쓰라는 말인가요? 과장님.”



“ 뭐.....흠. 그러니까 그 날은 송 석 훈 상무님도 오시고 하니까 오늘처럼 그런 애들 같은 차림은 하지 마라 뭐
그런 말이지. 노려보지 마. 헤라 씨. 거 가뜩이나 큰 눈으로 그렇게 보면 무섭다구.”



그러니까 송 석 훈 이한테 잘 보일만한 옷차림을 하라.......그 말이겠지! 차~ 내가 접대부야? 4년 동안 죽어라 모은
돈을 하루아침에 남에 입에 홀딱 다 틀어넣어 버리게 생겼는데 회사에서 날 접대부 취급하겠다는 거야? 봐라 어디.
그날 어떻게 하고 오는지!




“ 모레는 인터뷰도 없는 날인데.......신경 쓰라시면 써보죠. 뭐!”




그녀는 과장의 저 성희롱 적 발언에 대해 코웃음을 치며 훗날을 도모한다. 하지만 과장은 왠지 자신의 입 실수에
그냥 넘어가는 헤라가 불안해 보였다.




가방을 챙겨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내일은 헤미가 일하는 변호사 사무실에 한 번 더 다녀와야 하고......그리고 이번 연말에나 만기가 되는 적금을
해약하러 가야했다. 또 모레는 지금 혼자 사는 그녀의 집 전세금을 빼야 한다. 그렇게라도 해서 우선 은행을
막고........아!!!! 헤라는 진짜로 비참했다.




“ 승리자여~~~오늘도 내일도 승리하는~~~R R R.”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길에 휴대폰이 울린다.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기도 귀찮아 그냥 전화를 받았다.



“ 진 헤 라입니다.”



“ 나.”



재원 씨? 아! 맞아.......그러고 보니 열흘 만에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였다.



“ 아~ 네.”




“ 아! 네? 너 지금 아. 네. 라고 그랬냐?”




그런데 어째 그의 목소리가 화가 난 것 같았다.




“ .......?”




“ 일요일 날 그렇게 나 잠든 사이에 가버리고서, 전화해도 받지도 않고, 하지도 않고, 도대체 뭐야? 그리고서 지금
아 네? 그 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느리지만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재원의 목소리에 헤라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친다.

바보! 바보! 몇 번인가 그의 번호가 부재중으로 뜨기는 했었는데, 입력을 해놓지 않은지라 이름이 뜨지 않아 확인
전화조차도 해보지 않았던 것 이다. 그 망할 형부 놈 때문에.




“ 미안해요. 며칠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요.”




헤라는 순순히 사과를 했다. 싸가지 없는 그가 지난 열흘 동안, 사귀기로 한 여자에게서 바람을 맞은 기분으로
지내며 열 받았을 일을 생각을 하니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싶었다.





“ 넌! 맨 날, 너만 바쁜 척 하더라. 나도 바쁜 몸이야. 그런 내가 열흘 동안 전화를 몇 번이나 한줄 알아? 하루에
세통씩 서른 번도 넘게 했어.”



그러나 재원의 잔소리는 계속 되고 있었다. 헤라는 크게 한숨을 한번 내쉰다.



“ 그래서 어쩌라구요? 그렇게 몇 십번 전화 해댄 덕에 지금 나랑 통화하고 있잖아요!”



결국 곱지 못한 말이 나와 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녀가 놓인 비참한 상황이 그녀를 짜증나게
만들어버렸다.

사실 재원의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물에 빠진 솜방망이 같은 몸을 침대에
뉘일 때마다 그의 입술 감촉이 되살아났고 그의 체취가 그리웠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를 만나게 되면 형부나 아빠의 모습과 겹쳐 보여 그가 싫어 질까봐, 헤라는 재원을
만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아이구! 그래 고마워서 돌아가시겠다. 삼십 번 전화한 끝에 겨우 한번이라도 통화 할 수 있어서.”



“ 미안! 신경질 부려서 미안해요. 내가 좀 그래요. 지금.”




그렇지만 역시 너무 보고 싶다. 만약에 위로라도 받을 수 있다면 받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헤라는 다시
사과를 한다.




“ .......어디야? 데리러 갈게.”



재원이 그녀의 사과에 아직은 성이 가시지 않았지만 한풀 꺾인 목소리로 그녀의 위치를 묻는다.




“ 회사에요.”





“ 그러니까 그 회사 위치가 어디냐구?”




“ 됐어요. 나 역삼동에 있는 카르푸에 갈 거거든요. 집에 먹을 게 다 떨어져서. 거기에서 만나요. 30분 정도 후에.”




“ 역삼동 카르푸? 그게 뭔데?”





카르푸를 몰라? 도대체 외계에서 온 생명체인가? 지난번 낙지 집에 가서도 그런데 처 와본다고 하고선.......

헤라는 잠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가뜩이나 복잡한 머리에 더 이상 다른 것들을 생각할 용량의 한계를 느낀
지라, 다른 말은 빼고 그에게 카르푸로 오는 길을 대충 설명 했다.



“ 알았어. 20분 안으로 갈 거니까 기다리게 하지 마.”



설명을 다 들은 그가 먼저 전화를 뚝 끊어버린다. 하~ 좀팽이 연락 좀 안됐다고 화 나 내고.





지난 열흘 동안 재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현재 재원이 맡고 있는 디지털&미디어 사업본부의 연구기관 회계감사 때문에, 연구비 사용실적의 관련근거를
마련하고, 자체감사 자료와 회계사 감사 자료를 맞추는 일을 무주에서 돌아오던 그 밤부터 어제까지 거의 매일 밤을
세워가며 마친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하루에 꼬박 세 번씩 헤라에게 전화를 하고, 이틀이 지나도 연락이 되지 않자 불안해진 그는
일하던 중간에 회사를 나와 그녀의 집 근처를 네 번이나 어슬렁 거렸다. 하지만 어찌 그리 빌라들이 다 똑같이
생겨먹었는지! 결국 그녀의 집을 찾지 못했다.



“ 어디야?”



카르푸의 주차장에 정확히 20분 만에 도착한 그가 주차를 시킨 후, 전화를 걸어 헤라가 어디쯤 왔는지 확인을 한다.



“ 다 왔어요. 정문에서 만나요.”




그녀도 벌써 도착을 한 것인지 전화기 너머로 차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재원도 전화기를 든 채로 차에서 내린다.




“ 정문이 어딘데?”



오는 방법에서부터 일일이 그녀에게 다 물어보려니 화가 나기도 했지만 잠시 후면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기대로 올라오려는 화를 누르고 있었다.




“ 흐응~ 보여요. 재원 씨. 오른쪽 오른쪽 봐요. 여기~”




전화기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메아리치고 오른쪽을 돌아보니 5미터 쯤 앞에 헤라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재원이 휴대폰을 접고 그녀를 향해 조급한 발걸음을 옮겼다.




“ 운이 좋네. 주차장에서 바로 만나구요.”




그녀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재원을 올려다본다. 헐렁한 청바지에 회색 면 티를 입고 검정색 재킷을 걸친 그는
오늘도 섹시 그 자체였으며 뭘 입어도 럭셔리 자체였다.

헤라는 순간 현재의 자신의 처지가 다시금 되새겨 지며 위화감이 생긴다.





“ 너 뭐야? 사람 도는 거 보고 싶어?”




재원은 헤라의 웃는 얼굴을 향해 험상궂은 표정으로 그 손목을 잡고 목소리를 낮게 깐다.



“ 재원 씨?”




화가 난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았다.




“ 그렇게 연락이 안 되면 내가 걱정 할 거란 생각 못했어? 어린애야?”




“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사정이 좀 있었어요.”




“ 무슨 사정. 열흘 동안 사람 피 말려 놨으면 그 사정 얘기나 한번 해봐.”






그가 이렇게 까지 화를 내는 게 그녀는 조름 당황스러웠지만 같이 화를 내지는 않는다.




“ 나중에, 나중에 정리 좀 되면 말 할게요. 그러니까 화 그만 내고 우리 들어가요.”




그리고는 재원에게 잡힌 팔목을 잡아 빼 그의 손을 잡았다. 오늘 상황까지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잘못을 한
것이므로 그를 달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여전히 굳어진 표정을 풀지 못하고는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녀에게 별 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끌려간다.


주차장에서 식품매장으로 내려가는 무빙워크에 올랐다. 헤라는 자신의 손을 잡은 재원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그가 지난 열흘 동안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걸 그녀는 비로소 알게 됐다.




“ 장 봐가지고 그 쪽 집으로 갈래요? 좀 늦기는 하겠지만 저녁 해줄게.”




사과하는 뜻으로 저녁을 해준다면 그의 화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질까 하고 말을 건네 본다.

재원이 곁눈질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무언가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맘대로 해’ 하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대답을 했다.




“ 좋으면 좋다고 할 것이지. 아닌 척은!”




헤라가 빙그레 입가에 웃음을 지며 중얼거린다. 정말이지! 형부의 일이 터지고 간만에 조금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 수연이 벌써 왔네? 항상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오는구나! 좋은 버릇이야.”




재원의 모친은 수연을 맞으며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지난 6개월 내내 어딘지 뚱하기만 했던 그녀가 오늘은
무슨 일인지 먼저 전화를 하고, 거기에 재원의 집에 가져다줄 음식들을 자신이 가져다준다고 나선 것이다.




“ 고맙다. 수연아. 아줌마라도 보내면 되는데, 오늘 내일 큰 손님 치를 일이 두 번이나 있어서 내보낼 시간이 안나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네가 자청해서 가준다니 정말 안심이다.”




“ 별 걸요. 어머님. 제가 요샌 연구가 좀 한가해져서 시간이 생겨서 그래요.”




“ 그래? 다행이구나. 그럼 이제 우리 재원이랑 자주 좀 만나고 해. 걔가 좀 무뚝뚝해서 그렇지 그래도 좋은 애잖니.
내 아들이라 하는 말은 아니지만.”




“ 네.”




“ 민 총장님 안녕하시지? 한 달 전에 뵙고 못 뵀는데.”




“ 그럼요. 언제나처럼 힘이 넘치시죠. 최근에 논문도 발표 하시고 연세답지 않으세요.”




“ 어머! 정말? 그래~ 그래서 내가 총장님을 존경하지. 늘 한결 같으시거든. 교수시절이나 총장이 되신 지금이나.
학자로써의 프라이드를 버리지 않는 분이시잖아.”




재원의 모친은 과장되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만족스런 시선으로 수연을 바라본다.

정말! 좀 감이 떨어지는 아이긴 하지만 그래도 재원이 짝으로는 더 없이 마음에 드는 아이야!

그리고 유행에 뒤떨어진 수연의 정장에 한번 눈길을 준 후 다시 좀 전의 큰 웃음을 웃어 보였다.




“ 그럼 이만 일어날게요. 새어머니. 재원 씨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가봐야지요.”


구겨진 옷매무새를 고치며 그녀가 일어서자 재원 모친도 같이 일어선다.



“ 그래! 언제 한번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식사 하자 재원이랑.”



“ 네. 안녕히 계세요.”


대문 앞에서 그녀를 배웅하고 돌아선 모친은 수연의 마음이 아들에게로 향한다 싶은 지금, 약혼이라도 해놓자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말해봐.”



장 봐온 것들을 냉장고에 집어넣는 헤라를 뒤에서 지켜보며 그가 말한다.




“ 뭘요?”




“ 일이 있었다며. 무슨 일인지 말해보란 말이야.”




“ 집안일이에요. 내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 그래도 네가 정신없어서 날 걱정하게 만들었으니까 난 알고 싶어. 그러니까 말해.”

말하지 않으려는 그녀를 재원은 다그쳤다. 만나면서부터 그녀가 자신을 달래려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난
열흘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도저히 알고 싶어 더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싫어요. 좋은 일도 아니고 나쁜 일이야. 말 하고 싶지 않아요.”



“ 난 알고 싶은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는 사람이야. 억지로 알아내기 전에 네 입으로 말해.”



그러나 그녀는 고집을 부린다. 재원도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 우리가 사귀기로 한건 사실이지만요. 서로의 사생활까지 일일이 간섭하는 건 싫어요. 나 그런 거 부담스러워서
못한단 말이야. 재원 씨가 자꾸 내 일들 하나하나 알려고 들면 서로 피곤해지지 않을까요? 나도 재원 씨한테 묻고
싶은 것들 있지만 안 묻잖아.”




헤라는 선을 긋는다. 그어야 했다. 그와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그냥 ‘엔조이(enjoy)’라고 자신에게 먼저 경계선을
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 네가 나한테 궁금한 것 물어. 대답할게. 그러고 나서 너도 말해. 그러면 되는 거야?”



그런데도 재원은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엔조이(enjoy) 라는 건 그녀만의 생각인 것인지 그는 다시 묻는다.


냉장고에 물건을 대충 집어넣은 그녀가 허리를 일으키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재원을 올려다 봤다.

진지한 눈. 재원의 눈은 진지했다. 사귀자는 말을 하던 그 순간처럼.



“ 싫어. 안 물을래. 그러니까 재원 씨도 이제 그만 포기해요.”



잠시 틈을 두고 헤라는 그의 시선으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 왜? 왜 그렇게 말하기가 싫은 건데?”



그녀의 등 뒤에 대고 그가 조금 높아진 목소리고 물는다. 갑자기 너무나 진진해진 두 사람의 분위기에 헤라는
적응이 되지 않고 있었다.



“ 쪽 팔려서 그래요. 우리 집안일인데 하도 창피해서 말하기가 싫다고. 됐어?”



목이 메는 소리로 그녀는 웅얼거린다. 방금 전까지는 그의 얼굴을 보고 행복했었는데 자꾸만 열흘 동안의 일을
캐묻는 그로 인해 그녀는 감정이 격해져 오고 있었다.



“ 뭐가 쪽팔려?”



그러지 않아도 그녀는 비참해 질대로 비참해져가는 자신의 처지나 가족들의 처지를 잠시만이라도 떨쳐내려
노력하고 있었는데 그의 물음이 자꾸만 그걸 상기시켜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 몰라. 말하기 싫댔잖아요.”



결국엔 그녀의 눈물 한 방울이 주루룩 볼을 따라 흘러내리고 재원은 말이 없어졌다.


강한 척, 센 척 하는 그녀가 재원 앞에서 벌써 두 번째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냉장고에 붙은 인터넷 액정의 푸른
화면으로 고개를 돌린 헤라가 코를 훌쩍인다.



“ 알았어. 말 하지 마.”



그녀의 눈물에 자신의 궁금증을 포기한 재원이 그녀 앞으로 다가와 허리에 손을 두르고 헤라의 몸을 잡아 당겼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아직 훌쩍임을 멈추지 못한 그녀를 그가 자신의 몸에 밀착시키며 이기적인 그를 작은
것부터 자꾸만 포기하고 멈추게 만드는 그녀의 힘이 무얼까 생각을 해본다.



“ 허엉~~~어엉엉~~~~어엉~~~.”



그러나 품안에서 목 놓아 울음을 터트리는 그녀 덕에 재원은 생각이 멈추어지고, 그녀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당황스럽기만 했다. 우는 여자를 안고 있기란 처음인 그였다.



“ 도울게. 내가 도와 줄일 없어? 힘들면 말해 뭐든 해 줄 테니까.”



재원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그대로 얘길 했다. 물론 도와준다고 해봐야
돈으로 밖에 해주지 못하겠지만 그것이라도 그녀가 원한다면 기꺼이 해주겠다는 마음 이었다.



“ .......됐어. 어느 정도는 정리가 돼가요. 다만........ 더는 묻지마. 비참해 죽을 지경이니까.”



그녀가 재원의 가슴에 얹었던 손을 내려 그의 허리를 안으며 대답을 한다.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그녀는 그의
가슴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마치 그곳에서 무슨 위로라도 찾으려는 듯이.

헤라의 눈물이 그의 옷깃을 혼건 하게 적신다.



“ 삑삑삑 띠리리릭~~~~ 철컥.”



“ 무슨 소리에요?”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기계음과, 곧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 글쎄.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더구나 현관문의 비밀 번호까지 알고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은 그의 모친이나 일하는 아줌마 정도.......하지만 이런
시간에 오지 않는다.



“ 재원 씨? 안에 있어요?”



신발을 벗는 소리가 나고 여자의 목소리가 주방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누구 같이 있어요? 밖에 신발이.”



수연? 재원은 황당한 생각이 들었지만 얼굴에 나타내지는 않았다.



“ 수연 씨가 어떻게 왔어?”



재원이 자신의 허리에 두른 팔을 빼내려는 헤라의 팔을 잡으며 수연을 향해 무감정한 소리를 냈다.



“ 어머님이.......음식 좀 갖다 주라고하셔서, 그래서 왔어요.”



두 사람의 안고 있는 모습을 본 수연은 약간이지만 표정이 굳어져 있었고 눈은 무주에서 보다 더 날카로워 지고
있었다.



“이 시간에? 수연 씨가 그런 부탁으로 내 집엘 왔단 말이야?”



무주에서부터 조금씩 달라져가는 그녀의 태도와 지금 이 상황이 재원은 슬슬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 네. 새어머니 부탁이신데 어떻게 거절을 하겠어요? 당연히 와야지요. 그런데 저런 손님이 와 있을 줄은 미처 듣지
못했네요. 아님 어머님도 모르고 계셨거나.”



식탁위의 음식을 싼 포장을 풀며 그녀는 능숙하게 냉장고를 찾아 그곳에 음식을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련의 가지런한 동작들이 헤라의 눈엔 그녀가 재원의 집에 처음 온 것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약혼녀라더니.......!

헤라가 그의 몸에서 떨어지려 몸을 살짝 뒤튼다. 그녀는 좀 전의 비참함은 그새 잊고 수연으로 인해 약이 오르고
있었다.




“ 그뿐이야? 심부름?”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자 재원은 식탁위로 한 손을 집어 비스름한 자세로 선다. 그의 얼굴 또한 수연
못지않게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아뇨. 할 얘기도 있어요. 부모님께도 말씀 드려야겠지만 재원 씨한테 먼저 얘기하는 게 순서 인 것 같아서 그
얘기도 할 거예요.”



이번엔 수연이 재원의 뒤로 서있는 헤라에게 정면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 눈은 내가 약혼자야! 하는 말을
무언으로 다시 한번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역시나 조금 엉뚱하게도 수연의 기대와는 반대로 그녀의 그 눈이 잠시나마 뒤로 주춤하게 했던 헤라에게
투지를 불러일으킨다.



“ 나중에 하세요. 재원 씨랑 나랑은 방금 하다만 일이 있어서 지금 그거 마무리 져야 하거든요.”


재원의 허리에 다시 팔을 두르고 그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운 헤라가 수연이 보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보란 듯이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쳐 버렸다.


딱~ 벌어진 수연의 입! 재원은 놀라움으로 헤라의 키스를 받으면서도 눈으로는 수연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재밌는데! 재원은 즐기고 있었다. 헤라의 수연에 대한 반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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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가: 애플그린 (casino92@hanmali.net)
창작실 : 30대plant.1
제 목: 러브써치 펌.
연재편수: 1-49(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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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진 헤 라.......장난 그만해라.”



하지만 마냥 재미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수연은 모친이 보낸 여자다. 너무 함부로 대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원이 헤라를 입술을 떼어내며 웃음을 흘린다. 그녀는 샐쭉한 표정이 되어 그런 그를 흘겨본다.



“ 무슨 소리에요. 난 맨 날 방해받는 거 지겨워 죽겠어 정말. 무주에선 재원 씨 친구가 방해 하더니, 오늘은 친구도
아니고.”



그런 다음 과장된 몸짓과 과장된 말투로 재원과 자신이 어떤 관계임을 수연에게 암시하려 든다. 사귀기로 합의는
본 상태이긴 했지만 사실은 아무관계도 아니면서.

그리고 이번엔, 싸늘한 얼굴을 수연을 향해 돌리며 이건 어때? 복수다. 하는 표정을 해 보였다.

그야말로 두 여자간의 요상한 기싸움이 2회전에 들어서는 순간 이다.

수연은 헤라와 맞추던 눈을 들어 재원을 향한다.


“ 오늘은 그냥 가죠. 하지만 재원 씨! 이젠 주변 정리 하세요. 내가 당신하고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다른
여자는 용납이 안 되겠어요.”



뜨악! 금방 무주에서의 일에 복수한 것이라 생각했는데........수연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물론 재원도 수연이 자신의 집에 온 것부터 방금 그 말까지. 황당의 연속임은 부정 할 길이 없었지만, 8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은 그다.


감정을 감추는 것 따위엔 이미 능숙해 질대로 능숙해져 있었다.



“ 수연 씨가 오늘은 날 놀래 키기로 작정을 한 날 이었나보군!”



“ 놀랄 일인가요? 왜요? 어차피 결혼을 목적에 두고 그동안 우리가 만나 온 것 아니었어요?”



수연은 오히려 자신이 놀란 표정을 해보이며 그를 향해 되묻는다. 그러자 재원은 그런 그녀에게 피식 하는 바람
빠진 웃음을 웃었다.



“ 이봐요. 민 수 연 씨.”



그가 막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찰나.......그의 휴대폰이 울리고 재원은 잠시 망설이는 둣 싶더니 이내 전화를 받으러
거실을 지나 서재로 가 버렸다.

주방에 남겨진 두 여자!

헤라도 수연도 표정을 감추기 위해 서로를 외면하고 있었다.



[ 새엄마........네 왔어요.]



재원의 모친이다.



[ 마침 네가 집에 있었구나. 너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간다고 해서 대접도 제대로 못해서 보냈다. 나가서 차라도 한잔
같이 마시고 보내라. 알았지?]



무뚝뚝한 아들의 성격을 아는지라 모친은 당부를 한다.




[ 늦은 시간에 차는 무슨.......다음에요.]



[ 너도 참 그렇게 뭘 몰라서 어쩌니? 여자는 말이야.]



[ 새엄마.......나중에 말씀하세요. 지금 좀 그렇거든요?]




[ 후~ 그래. 네가 열흘 동안이나 감사 때문에 잠도 못자고 일한 걸 알면서.......미안하다. 하지만, 수연이 그냥
보내지는 말아라. 부탁이야.]



[.......]



그러나 재원은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재원이 너....... 모레가 무슨 날인지는 잊지 않았지?]



잦아드는 모친의 목소리에 재원은 책상에 놓인 캘린더를 본다.
모레?.......모레면 26일.......음력으로는 4월 12일........아.......아!



[ 설마.......잊고 있었니? 별일이구나! 미국에 있을 때도 잊지 않고 있던 네가.]



그래.......잊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점심시간에 시간 내서 다녀올게요. 새엄마는 오지 마세요.]



[ 아니야. 같이 가자.]



[ 됐어요. 혼자 갈래요.]



[ 고집부리는 구나. 난 괜찮아. 신경 쓰지 마라. 네가 미국에 있는 18년 동안 쭉 해온 일이야. 새삼스레 아플 것도
없어.]



고집을 부리는 건 모친 이었다.



[네. 그럼 1시까지 제가 모시러 갈게요. 그때 봬요.]



[ 그래. 참.......그리고 수연이 잘 보내라. 주차장까지라도 바래다주고.]




거듭 수연에 대한 당부를 한 모친이 전화를 끊었다.



[.......]




그러나 재원의 생각은 수연도 헤라도 아닌 26일. 모레에 가 있었다.

휴대폰을 접고 다시 책상위의 캘린더에 빨간색으로 작게 표기된 ‘26일’을 한동안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5월 26일! 올 해는 음력 4월 12일 이 그날 에 닿았다. 언제나 화사하고 청명하기만한 5월. 그러나 재원에겐 그
음력 4월 12일을 전 후로 한 얼마간은 항상 힘든 시간들이 된다.




캘린더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어 그는 주방으로 갔다. 헤라는 식탁 옆으로 수연은 냉장고 옆으로 각자 다른 곳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 수연 씨........지금 가. 나 굉장히 피곤하거든.”



방금 전 헤라를 향해 웃음을 흘리던 얼굴이 사라지고, 주방으로 들어오는 기둥에 기대어 선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 그래요. 열흘 동안 잠도 못자고 일했다니, 그럴 만도 하겠죠. 갈게요 그럼.”




가라는 재원의 말에 수연은 토를 달지 않는다. 유행이 지난 정장처럼 별단 다를 것 없는 가방을 어깨에 멘 수연이
주방을 나간다.



“ 참.......내가 아까 한 말. 잊지 마세요.어머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릴 거니까.”



그리고 현관에 서서 문을 연채로 말한다. 재원에게 아마도 강조를 하는 것이리라. 자신의 의사를.



“ ........”



그는 대답이 없었고 수연은 대답이 필요치 않았는지 그냥 나가버린다.



그렇게 그녀가 가고, 한동안 뜻 모를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헤라는 가야 할지 어떨지 고민 중 이었고, 그녀의
눈에 비친 재원은 어딘가 조금 멍 한 것 같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내심 재원이 수연과 자신을 다르게 대하고 있다는 기대 내지는 약간의 믿음을 갖고 있는 터라
좀 더 그에 곁에 있고 싶었다.



“ 너도 가라.”



하지만 얼마 후, 침묵을 깨고 재원이 뱉은 말은 헤라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트리고 있었다.



“ 먼저 전화해서 보자고 한 사람은 그쪽 인데....... 지금 나보고 가라고 했어요?”



무너지는 기대! 헤라는 따지고 들었다.



“ 피곤하다고 했잖아. 널 침대로 끌어들이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어. 그러니까 가!”




그가 날카롭고 신경질 적으로 말한다.

침대로.......그럼 애초부터 날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헤라는 재원의 말에 무릎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처음엔 그렇게 시작했어도.......그런 게 아닌 줄 알았다. 더구나 사귀자고 했을 때부터는 그런 목적만이 아니라 뭔가
다른 뭐가 있을지 모른다고. 아냐! 무슨 생각을 enjoy 라고 선을 정한건 너야!! 그렇지만........!


약혼녀! 그래 수연인가 그 여자 때문에 날 자기 집에 들여놓은걸 그 여자가 봐서?

재원의 말 과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헤라는 1분도 안되는 시간동안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 나, 잘 거야. 가라.”



그녀가 혼란스러움에 눈동자를 굴리는 사이, 그녀를 주방에 남겨둔 재원은 쿵쿵거리며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다.



“ 뭐야? 저 자식이 사람을 갖고 노는 거야?”



닫혀 진 침실 문을 노려보며 헤라는 중얼 거렸다. 만약 그렇게라도 지껄이지 않으며 그의 침실 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가 그의 목을 조를 것 같은 기분 들었기 때문이다.


더 비참하다. 만나서 위로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니 민 수연 이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위로
받고 있다고 생각 했었는데.......그런데 결과적으로 저 왕 싸가지가 더 비참함의 나락으로 밀어버린 버렸다. 날.......


그런 생각을 하며, 손에 얼굴을 묻고 비참함의 정도를 가늠하던 헤라는 일부러 요란한 발소리 내며 거실을 지나와,
현관문을 있는 힘을 다해 열고 쾅 소리가 나도록 그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아주 조금, 조금 눈물을 흘렸다.



침대에 누운 재원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몰려드는 피로와는 관계없이 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복잡했다. 미국에 있던 18년 뿐 아니라, 훨씬 그 전부터인 지난 21년간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 4월 12일
이었다. 왜 잊었을까? 그는 곰곰이 생각을 정리해 본다.

그러자 답은 바로 나왔다.

헤라 때문이다, 지난 열흘 뿐 아니라 그녀를 만난 3주 전부터 솔직히 정신의 반은 일에, 나머지 반은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는 건 인정해야만 했다.

그 덕에 12일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 바보 같은.”


그는 스스로를 욕했다. 여자 때문에 정신을 놓아버린 자신을,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차라리 그대로 잊고 있었다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들었다.

괴로우니까........너무도 생생하게 남아서, 지금도 그 기억이 한동안 그를 괴롭힐 테니까.



[ 자냐? 술 한 잔 할래?]


잠자기를 포기한 재원이 윤석에게 전화를 했다.



[ 자지는 않는데.......또 시작이냐?]



전화를 받는 그가 한숨을 짓는다.



[ 잔말 말고 나와. 술 마시자.]




그러나 재원은 친구의 한숨을 무시한다.



[ 어째! 올해는 잔인한 5월을 네가 그냥 넘어가나 했다.]



[ 지금 나와. 압구정 거기로.]




무작정 나오라 우기고 재원은 전화를 끊는다.

미국에서도 5월이면 늘 같이 술을 진창 마셔주던 녀석이었기에 틀림없이 오리란 걸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며 그는 잠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서 쫓아 보낸 헤라를 떠올렸다.

힘든 일이 있다고 했는데.......그만 12일을 잊고 있었던 죄책감으로 인해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됐다.


그러자 그의 머리가 또 다시 얽혀든다. 음력 12일 아니, 모레 26일과 죄책감. 헤라와 걱정. 그리고 더하기 민 수
연의 오늘 행동.

다른 어느 해보다도 복잡 했다.






화창했다. 5월의 날씨가 늘 그렇듯이 기온도 적당했고 바람도 상쾌했으며 하늘도 맑았다.
재원은 그의 모친과 함께 야트막한 산을 오르고 있다.

경기도 안성에 위치하고 있는 해주 鄭(정)씨의 집성촌.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야산에 자리 잡은 문중의 묘와
납골당.

먼저 커다란 세 개의 봉분 앞에 재원과 모친은 손을 모으고 섰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모친은 절을 올리지 않고 늘 이렇게 기도와 묵념으로 성묘를 시작했다.



“ 됐다. 명절도 아니고 조상님들께는 인사만 하자.”



묵념을 마친 모친이 봉분의 아랫 쪽으로 위치한 납골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재원도 무거운 발걸음으로 따라간다.

그리고 납골당에 이르러 묘석에 새겨진 이름 중 ‘ 이 영 란’ 이란 이름을 만지며 모친이 먼저 왔다는 인사를 건넸다.



“ 재원이 왔어. 그동안은 쭉 전화만 했었는데.......작년 여름에 한국을 들어와서 올해 처음 온 거야.”



이어 산 사람에게 하듯 말을 건다.




“ 대학교 가기 전에 보고 오래만이지? 이젠 매년 올 거야. 그러니 그동안 서운했던 것 풀어 영란 씨.”



조용한 그러나 회한이 담긴 목소리였다. 재원은 그런 모친 옆에 묵묵히 말을 아끼고 서 있는다.



“ 너도 무슨 말 좀 하지 그러니? 네 목소리 듣고 싶을 거야.”



묵묵한 재원에게 말을 해보라 권하지만 그는 앞에 모은 손에 힘을 주고 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 재원아?”



“ 할 말.......없어요. 그냥 인사나 하지요. 뭐”



모친의 부탁에도 그는 별 말을 하지 않고 묘석의 이름에 손을 한번 대본다.



“ 애도 참. 이해해 영란 씨. 재원이가 지 아버지를 닮아서 여간 무뚝뚝한게 아냐. 잘 알겠지만........”



그의 어색한 행동에 무안해하며 모친은 사과를 했다.


그리고 10 분 정도, 납골당 주변의 잡초를 몇 가닥 뽑고 모친과 재원은 산을 내려왔다.










송 석 훈 상무와 민 대표와의 저녁 약속이 있는 오늘! 헤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눈썹을 치켜 올리고
만족한 미소를 보낸다.



“ 야! 헤라. 너 투 잡스(two jobs) 족 하기로 정한거야? 아무리 우리 가 누구 땜시 있는 돈 없는 돈 다 날렸어도, 널
그런 곳으로 내몰지는 않은 것 같은데?”




형부의 빚을 청산 하기위해 자취하던 집의 보증금을 뺀 헤미가 그제부터 헤라의 투 룸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가 헤라의 요란뻑적지근한 옷차림과 화장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묻는다.



“ 미쳤어? 그런 거 아냐.”



아직 부스스한 머리에 입에는 칫솔을 물고 자신을 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헤미를 향해 헤라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 그럼 뭐야? 빨간색 반짝이 쫄 원피스에, 빨간 립스틱, 그리고 밤무대 가수들이나 귀에 달만한 그 검정색 링
귀걸이, 거기에 검정색 그물 스타킹이라니! 내 상식으로는 절대 회사에 출근하는 워킹우먼 차림은 아니라고 봐. 난.”



그녀의 차림 하나하나를 꼬집어 말하며 헤미는 다시 한번 그 차림이 얼마나 괴상한지 감상을 하는 듯 했다.



“ 상관 하지 마. 오늘 본 떼를 보여줄 인물이 있어서 그래. 여자 직원을 접대부 취급 하면 회사 이미지가 얼마나
실추가 되는 건지 직접 보여 줄 거야.”


언니 헤미가 무슨 말을 하던 헤라는 이미 결심을 했다. 화풀이 그녀는 그렇게 과장과 회사에 화풀이를 하려는
계획인 것이다.

지질이도 한심한 형부와, 속물인 과장 그리고 재원까지 포함해서 자신을 화나게 한 남자들에게 말이다.

뭐 그리, 썩 훌륭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엉뚱한 일 벌이는 게 취미인 그녀에겐 꽤 괜찮은 생각 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외부 근무가 있다고 적당히 핑계를 대고 헤라는 오후 6시를 넘겨 회사로 들어갔다. 오늘 저녁 약속에 중요한
인물인 그녀가 늦게나 사무실에 나타나자 과장은 속이 탔던 모양이다.

그녀가 투명한 사무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가 달려와 맞는다. 하지만 헤라의 차림새를 본 그는 우뚝
멈추어 선채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 어때요? 과장님. 신경 쓰라고 하셔서 돈 좀 들였는데!”



그녀가 슈퍼모델 포즈를 취하며 농염한 표정으로 망연자실한 과장을 바라본다.



“ 아하~ 헤라 씨. 머 멋져. 멋진데......”



사실 과장이 말한 차림새가 뭔지는 그녀도 알고 있다. 비즈니스 정장. 그러나 몸매를 드러내는 조금 야한 그런
정장차림을 원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남자 직원들은 고객을 접대 할 때 그런 차림새를 요구 받지 않는다.

그럼 왜? 어째서? 여직원에게는 노골적으로 그런 요구를 한단 말인가?




“ 멋져요? 감사합니다. 과장님. 신경 쓰고 돈 들인 보람이 있네요. 약속은 7시 반 이죠? 서초동.”



과장의 당황한 얼굴을 보자 헤라는 승리를 예감 했다.



“ 어 어.....응.”



“ 그럼 지금 출발해요. 퇴근 시간이니까 막힐 거야.”




그리고 승리의 예감에 취해 다른 직원들의 시선을 한 몸으로 받으며 그녀는 다시 사무실을 나간다. 시선쯤이야......

타고난 몸인데다 운동으로 가꾸어진 몸 때문에 대학교 시절부터 사람들의 시선엔 익숙한 그녀였다.

그러나 결코 그런 시선들을 즐긴 적은 없다. 물론 이젠 거의 무시하고 다니지만.







“ 늦었다. 대표님 하고 송 상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겠는데!”



약속시간을 한 시간 이상 남겨두고 출발을 했지만 과장과 헤라는 도심의 복잡한 교통을 제대로 헤쳐 나오지 못하고
그만 약속보다 늦어버렸다.

서둘러 강남의 최고급 술집으로 들어온 시각은 7시 40분. 그러나 식은땀을 흘리는 과장과는 달리 헤라는 여유
작작 이다.



“ 대표님 좀 늦었습니다.”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넓고 화려한 장식의 bar를 가로질러 홀 안쪽의 룸으로 들어갔다.



“ 아니야. 우리도 방금 왔어. 어서와요. 진 대리.”



민 대표와 송 석훈이 벌써 잔에 술을 채우고 두 사람을 맞았다.



“ 안녕 하십니까?”



헤라가 톤을 잔뜩 높인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석훈은 요란하기 짝이 없는 헤라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번 훑어
본 후 고개를 까닥여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 오늘은 컨셉이 뭔가요? 진 헤라 씨.”



그리고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컨셉? 웬 컨셉?




“ 지난 번 날 치던 모임에선 오드리 햅번 같더니 오늘은.......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단란 주점 컨셉 입니까?”



그녀가 대답이 없자 석훈이 다 알겠다는 웃음을 지으며 정곡을 찔렀다. 물론 그의 이런 반응은 헤라가 바라던 바
다!




“ 네. 특별히 우리 과장님의 요청이 있으셔서 제가 신경 좀 썼습니다.”



“ 그래요? 풋~ 이상한 요청을 하는 상사구만.”



석훈이 과장에게 흘낏 눈길을 주며 한심하다 투로 말했다. 물론 이건 당연한 결과 .재벌의 ?은 총수가 보기엔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직원이었다. 과장은.




“ 송 상무님 잠깐 실례합니다.”



그리고 바로, 석훈의 비웃음에 땀을 흘리던 민 대표가 드디어 과장의 옆구리를 찔러 그를 룸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오호호호호호!!!!! 헤라는 그 모습에 쾌지 지른다.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던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더 철저히 망가져
주는 것!

어차피 ‘석준의 건’은 맘에 걸리던 차 다. 송 석 훈 이, 믿을 수 없는 그녀와 상사를 보고 의뢰를 철회한다면 그녀가
바라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 그럼 비즈니스 얘길 해볼까?”



“ 네. 하시지요.”



“ 내 판단에 헤라 씨는 머리가 좋은 여자요.”



비즈니스의 서두를 그가 칭찬으로 시작을 한다. 돈과 권력이 있는 인물들은 남의 칭찬에 인색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헤라는 의례적인 미소를 보냈다.



“ 그럼.......고 석 준 건을 의뢰하는 우리 MTN의 의도가 뭔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듯 싶은데 어떤가요?”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대던 그가 다리를 꼬고 거만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모임에서의 그 와는 사뭇 다른
느낌 이었다. 위험하다고나 할까?



“ 매우 직접적으로 표현을 하시는 군요.”



헤라도 헤드 헌터 중에선 고참 이었고 뛰어난 프로였다. 위험한 눈을 한 그에게 당황하는 빛은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 비즈니스란 그런 거요. 특히 이런 일은.......더 확실하게 얘기 하지요. 우린 고 석 준과 TDMA 기술을 원합니다.



'TDMA'! 주파수 분할 다중 접속 방식, 또는 부호 분할 다중 접속 방식! 휴대폰 통신에 사용되는 첨단 기술 이었다.



“ 전 써치 입니다. 산업 스파이가 아니라요. 그런 일이 불법 이란 건, 저보다 더 잘 아실 분 아니십니까?



역시나 그녀와 석준의 불길한 예상은 들어맞았고, 헤라는 가벼운 기분으로 석훈을 떼어낼 계획이 오산임을 불과 몇
마디도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 절감하게 됐다.



“ 대가는 충분히 돌아 갈 겁니다. 고 석 준 이나 헤라 씨한테나.”




그리고 곧 그는 유혹적인 제안을 했다. 회사 뿐 아니라 그녀 개인에게도 이득이 돌아 갈 거라는.
내 현제의 경제적 상황을 알고서 하는 제안 일까? 헤라는 진지한 눈으로 석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위험한 거래.......


석훈은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을 놓치지 않고 입가에 묘한 웃음을 건다.








“ 그만 마셔. 재원아 임마!”



“ 아직 안취했어. 걱정 하지 마.”



“ 자식아. 다니엘을 스트레이트로 여덟 잔이나 마시고 안취했다는 게 말이 돼?”



“ 한계는 열다섯 잔이야. 작년에 5월에 기록 갱신 했잖아. 잊었어?”



혀가 꼬이진 않았지만 이미 눈은 흐려져 있었다. 평소엔 술을 입에도 안대는 녀석은 5월만 되면 술에 절어 사는
날이 보름이다.

물론 윤석은 그 이유를 안다. 허나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일 이었다.



“ 가자. 9 시가 넘었어. 내일 출근해야 잖아. 미국 보다 여긴, 널 지켜보는 눈이 많으니까 결근 같은 건 별로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지?”


그가 재원을 다독인다. 그제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펐고.......안성을 다녀온 오늘도 조금만 더 마신다면
그렇게 될 것 같았다.



“ 두 잔만 더.......필름은 안 끊겨도....... 잠 잘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최소한 두 잔은....... 더 마셔야 돼.”



어깨를 잡아 자신을 일으키려는 윤석의 손을 뿌리치며 그가 바텐더에게 잔을 내밀었다. 윤석은 잠시 손을 놓고 그런
재원을 뒤에서 지켜본다.



“ 좋아. 딱 두잔 이다. 나 화장실 다녀오는 동안 두 잔만 비우고 있어.”



그리고 전화를 하기위해 윤석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맑아져 오는 정신! 다니엘의 뜨거운 액체가 벌써 여덟 잔이나 목으로 넘어갔지만 재원은 점점 정신이 똘망해져 가고
있었다.

이 영 란.......매년 5월마다 그 이름을 잊으려 술을 마시지만 한번도 지워지지 않는 이름!



“ 씨발! 날 놔줘 제발!”



지워지지 않는 이름과 기억 때문에 재원은 낮은 욕지거리를 한다. 앞에 있던 바텐더가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 뭘 봐? 욕 하는 거 처음 봐?”


그러자 그가 매서운 눈으로 바텐더를 노려본다.......한국에선 욕도 맘대로 못해 젠장!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무거운 머리를 들어 윤석을 찾기 위해 담배 연기가 가득한 bar 안을 둘러봤다.
여자들.......남자들.......뒤 엉켜 웃고 떠들고.......소란스러웠다.

그 소란스러움에, 헤라....... 재원은 헤라를 떠 올린다. 그저께 그렇게 보내 놓고 전화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가
먼저 전화를 하지 않을 테고.


그러나 곧 이런 날도 그녀를 떨쳐 버리지 못하다니 하며 그는 픽하니 자조가 섞인 웃음을 웃고는 황금색의
다니엘을 입에 가려 목을 들었다.


순간, 그의 눈을 스치는 모습. 역시나 얘네 둘이 뭐가 되긴 되려는지 취할 대로 취한 재원의 눈에 띤 긴 웨이브
머리칼과 늘씬하고 황홀한 몸매의 여자.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새빨간 힐을 신은........요상스런, 꼭 술집 여자 같은 옷차림이었지만 분명 그의 눈엔 그녀가
헤라였다.

홀을 가로질러 세 명의 남자들과 걸어 나가는 그녀를 본 재원은 흐려진 눈에 힘을 주며
헤라가 나가는 방향을 눈 여겨 본다.

그는 뭐에 홀린 듯 그녀를 따라 시선을 이동하고,



“ 계산 해!”



팔에 힘을 주어 몸을 가누며 자리를 일어섰다. 지갑에서 서둘러 십만 원짜리 수표 서너 장을 꺼내어 내 던지고 그
길로 문 밖으로 사라지는 헤라를 향해 걷는다.



bar의 주차장으로 향하는 그녀의 뒤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따라간 재원은 건물의 벽에 기대어 서서 헤라가
확실한지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있었다.

세 명의 남자들이 각자 대리운전 하는 차를 타고 먼저 출발을 하고 그녀가 좀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 하나와 몇
마디 나누더니 남자가 먼저 주차장을 나갔다.

이윽고, 그녀가 혼자가 되자 재원이 비틀거리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 진 헤 라........너 진짜 직업이 이거였나?”










등 뒤에서 들리는 남자의 갑작스런 목소리에 헤라는 소스라치듯 놀라 차에 꼽던 키를 놓쳐버렸다.

열쇠를 주울 정신도 없이 다급히 뒤를 돌아본 헤라는 어둠 속에서 진한 술 냄새를 풍기고 서 있는 남자를 정신을
집중해 쳐다봤다.
정 재 원?.......어라 이 남자가 왜?



“ 잘 어울리네.......역시 몸이 되니까 뭘 입어도 훌륭하군. 근데.......2차는 안 나가냐?”



술집의 주차장에서 만난 재원의 모습에 헤라는 잠깐 동안이지만 당황스러웠다. 거기에 옷 차림 또한 신경이 쓰인다.



“ 댁이 무슨 상관이에요? 내 직업이 뭐든.”



그러나 이내 그제 그의 집에서의 일이 생각나고, 그녀는 그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다시 차로 돌아섰다.



“ 그래.......상관없지. 근데.......! 내가 오늘 좀 기분이 그렇거든! 그래서....... 그러는데........ 나랑 같이 있을래?
돈은 얼마든지 줄게. 좀 전에 같이 있던 남자들 보다 더 많이.”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며 그가 드문드문 얘길 했다. 하지만 헤라는 싸늘한 얼굴을 돌려 재원을 정면으로 마주
하고 선다.

웃기지도 않아. 집에서 그렇게 쫓아낼 때는 언제고, 이젠 싸구려 창녀 취급까지 하려고 들어? 라는 생각이 들
뿐.......그가 어떤 상태인지 살펴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 됐어요. 정 재 원 씨. 댁이 얼마나 돈이 남아도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다른 여자나 알아보시죠.”



그리고 다시 냉정하게 돌아서 차 문을 연다.



“ 기다려.......가지 마 진 헤라.”




차 문을 열고 몸을 들이미는 그녀의 손을 재원이 잡아챈다. 헤라는 귀찮은 듯 그런 그의 손을 뿌리쳐 보려 하지만
잔뜩 힘을 주고 그녀의 손을 잡은 재원의 손은 쉽게 내쳐지지 않았다.



“ 뭐예요?”



그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며 그를 돌아 봤다.



“ 가지마.......부탁이야. 오늘만 옆에 있어주라.”




희미한 주차장 불빛에 드러난 재원의 눈은 별 하나 없는 밤보다 더 어두웠지만 그 속엔 간절함이 들어 있었다.



“ 그냥 옆에만.......있어줘 응?”



쓰러지듯 그녀의 차로 몸을 기대어서는 재원이 헤라의 어깨를 껴안으며 낮은 소리로 중얼 거렸다.

순간, 그녀는 재원의 지금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된다.

늘 자신감이 넘치는 눈은 너무도 흐려져 있었고, 항상 정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흐트러진 차림을 보인 적이 없던
그였는데.......지금은 말끔한 정장차림인데도 불구하고 모습은 마치, 호되게 실연이라도 당한, 그런 사람 같았다.



23.



헤라는 재원의 무거운 몸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근육으로 잘 다듬어진 몸과 180이 약간 넘는 키의 그는 아무리
그녀라도 버거운 무게였던 것이다.



“ 이봐요? 정신 차려.”



자신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몸을 늘어트려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재원을 일으키며 그녀는 주변을 둘러본다.
누가 없나? 너무 무거워!


“ 재원 씨. 자는 거야?”




“ 아니.......”



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몸을 가누지 못 했다. 그녀는 어깨에 걸쳐진 그의 팔을 들어 몸을 떼어내 다시
차에 기대어 서게 만든다.



“ 뭐예요. 이렇게 잔뜩 취해서. 혼자 온 거야? 집에 데려다 줄 사람 없어요?”



“ 무슨 상관이야?........ 네가....... 같이 갈 건데.”

차에 몸에 기댄 채 취한 눈을 들어 헤라를 바라보던 재원은 그녀가 당연히 같이 갈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 누가요? 웃기셔 정말. 다른 여자 찾아보라고 했죠?



그러나 정말로 심상치 않은 그의 모습에도 헤라의 화는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모든 여자가 그렇듯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남자에게 관대하기란 어려운 법이니까.



“ 후~ 아까 팁 많이 받았나보네........더 많이 준다는데도 튕기고.”



그가 답답함이 올라오는지 긴 한숨을 뱉으며 바지 뒷주머니를 더듬기 시작했다. 헤라는 옆에 서서 팔짱을 낀 채로
흐물거리는 재원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다.

‘어디서부터 날 보고 따라 온 거지? 남자들 어쩌구 하는 걸로 봐서는 주차장 전에서부터 본 모양인데.......송 상무를
보지 못한 건가?’

그리고 잠깐 사이로 그와 석훈이 마주치지 않은 것에 대해 그녀는 이상하게도 안도 하고 있었다.



“ 야.......이거 다 줄게. 가자 우리 집에.”



흐물거리던 동작으로 뭘 하나 했더니 그는 지갑을 꺼내 그 속에서 수표 한 다발을 집어 그녀에게 들이 밀었다.

얼핏 보기에 십만 원 권과 백마 원 권이 섞여있는 게 꽤 돼는 액수 같다.


“ 차~ 정 재 원 씨........취하시긴 많이 취하신 모양인데요. 나 그쪽 돈 필요 없거든요! 그러니까 강도라도
나타나서 귀하신 돈 낚아채기 전에 도로 넣으시는 게 어때요?”



한 푼이라도 아쉬운 그녀였지만 그의 돈에 침을 흘릴 만큼은 자존심이 무너지지 않은 헤라다. 거기다 계속해서
자신을 술집 잡부 취급하는 그가 그녀는 얄미웠다. 비록 취중이기는 하지만.



“ 왜? 적어?.......좋아. 그럼 카드라도 줄까? 보자........현금 서비스 젤~루 많이 되는게.......”



주접! 진짜 주접떨고 있네! 지갑과 돈을 한손에 움켜쥐고, 그가 이번엔 여러 장의 카드를 뒤지고 있었다.



“ 후~ 정말!”




얼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입으로 불어 날려 보내며 그녀는 재원을 노려보다 못해 째려 보고 있다.


그때 두 사람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나고 이어 재원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얌마! 너 여기 있었어? 말도 없이 나가버리면 어떻게 해?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윤석 이다. 헤라는 이곳에서 그를 만난 게 이렇게 반가울 줄은 미처 몰랐었다.



“ 헤라 씨?”



그리고 그도 헤라를 바로 알아보고는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 안녕 하세요? 윤석 씨.”



“ 네. 근데 여긴 어쩐 일루.”



윤석이 헤라의 빨간 쫄 원피스와 빨간 힐 그리고 빨간 립스틱에 차례로 시선을 주며 놀란 얼굴을 하고 고개를
갸우뚱 한다.

그녀의 차림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헤라는 그의 그런 얼굴에 멋쩍은 미소를 보내며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여줬다. 묻지 말라는 뜻이다.



“ 이 사람 왜 이래요? 완전히 갔네요. 맛이!”


그런 다음 재원을 턱 짓으로 가리키며 그에게 물었다. 아마도 같이 술을 마시러 온 사람이니 알지 싶었던 것이다.



“ 아~ 놔둬요. 이 자식 원래 요맘때쯤 되면 자주 이래요.”



지갑을 뒤적이다 바닥에 내려앉은 재원을 일으키며 윤석은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을 했다.



“ 집에 가는 길이에요? 술 마셨으면 태워다 줄게요. 같이 타요.”


친절한 그는 친구 뿐 아니라 그녀에게 까지 배려를 해주려 하고 있었다.



“ 그래도 돼요?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운전 하긴 좀 그렇던 참인데. 대리운전 부르기도 그렇고.”



여자가 술을 마시고 대리운전을 부르는 일은 위험하긴 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하철을 타고 갈까 생각을 하던
중이었지만 솔직히 이런 차림으로는 지하철도 만만치 않게 위험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윤석이 태워다 준다는 말이 헤라는 몹시 반가웠다.



“ 아아~ 그래. 저 여자 어차피 나랑 우리 집에 같이 갈 거니까 같이 태워.”



그러나 헤라의 대답에 이어지는 재원의 말은 그녀의 마음에서 좀 전의 반가움을 사라지게 만든다.




“ 어.......그런 거예요?”


윤석이 진짜냐는 눈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헤라는 똥 씹은 얼굴이 되어 아니라는 고개를 저어보였지만 재원이
취중인데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있는 통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가자. 진 헤 라.”



재원이 그녀의 손을 잡고 윤석의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움직임에 비해 정신은 그래도 덜 나간 모양인지 그는
정확히 친구의 차를 찾아 그 옆에 선다.

윤석이 먼저 뒷좌석의 문을 열고 재원을 태웠다. 헤라는 조수석에 타려했지만 그가 손을 놓지 않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재원과 같이 뒷좌석에 몸을 싣는다.



“ 재원이 집에 먼저 갈게요. 여기선 거기다 더 가까우니까.”



윤석이 시동을 걸며 양해를 구했다. 정말이지 재원과는 정말 성격이 많아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헤라는 든다.



“ 네. 그러세요. 이 사람 너무 취해서 차 오래 타지도 못 할 것 같아요.”



“ 그저께 보다는 덜 마셨는데, 빈속에 마셔서 그런 가 빨리 취했네요. 본래도 술이 세지는 않은 녀석이지만요.




“ 그저께도 이렇게 진창 마셔댔단 말이에요?”



윤석의 설명에 그녀가 기가 차다는 물었다. 재원은 좌석 뒤로 목을 넘기고 아무런 말이 없다.



“ 아~ 네........”



백미러로 재원이 헤라의 손을 놓지 않은 걸 본 윤석이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한다.
처음 헤라를 본 클럽에서도 그랬고, 지난번 무주에서도, 그는 재원이 헤라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다 잡으며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다. 헤라에게 부탁을 하기 위해서다.



“ 재원이 자요?”



어려운 혹은 욱 하는 성질이 있어 보이는 그녀에게 말을 떼기 위해 운을 띠운다.




“ 글쎄요. 자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흘낏 재원의 얼굴을 살피던 그녀가 모르겠다는 투로 대답을 했다. 윤석은 틀림없이 헤라도 그에 대한 감정이 그리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판단 아래 드디어 본론을 꺼낸다.



“ 저기요.......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는데요.”




망설이는 어투에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을 백미러로 확인한 그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 오늘 재원이랑 같이 있어주시면 안돼요? 저 자식이 지금 좀 많이 힘들거든요. 분명히 집에 혼자 두면 잠 안
온답시고 집에 있는 술 몽땅 다 축 낼 텐데.......쟤 그러면 곤란해져요.”


가능한 한 공손하게 그리고 오해하지 않도록 윤석은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다. 그러나 헤라는 비뜨름한 시선으로
그의 뒤통수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 답이 없었다.



“ 내일 출근도 해야하고.......또, 쟤 비서들이”



“ 나 안자. 그러니까 실없는 소리 그만 지껄이고 입 닫아라. 윤석아.”



대답이 없는 헤라에게 뭔가 더 그녀가 재원의 곁에 있어야할 타당한 이유를 대려는 윤석을 향해 자는 줄 알았던
재원이 입을 열었다.


“ 자식! 취했으면 좀 자빠져 자라. 어째 넌 취해도 잠이 없냐?”



“ 시끄러. 운전이나 잘해.”



눈을 뜨지 않고 제법 또박또박 말을 하는 재원을 헤라는 가만히 들여다본다. 분명 오늘 이 남자가 이상하긴 하다.

취한 것처럼 횡설수설 하더니 또 갑자기 말짱한 척 하기도 하고,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밸런스를 잃은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재원의 집에 도착 할 때까지 세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석은 그 대로, 재원은 재원대로,
헤라는 헤라대로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 다 왔어.”



재원의 아파트 로비 앞에서 차를 세운 윤석이 운전석에서 내려 뒷문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안에
재원이 옆으로 몸을 쓰러트려 헤라의 팔을 잡아당기며 눈을 마주 했다.



“ 같이........ 내려.”



앞뒤로 아무 수식어도 없는 ‘같이 내려’ 라는 간단한 한 마디였으나 그 말의 절실함은 헤라에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 알았어요.”



그의 팔을 잡아 부축을 하며 헤라는 작게 대답을 한다. 그가 이렇게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인지까지는 말해 주길
바라지 않았지만 간절함이 담긴 말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 제가 데리고 올라갈게요. 윤석 씨는 먼저 돌아가세요.”



달아오르는 얼굴이 어둠에 묻혀 보이질 않길 기도하며 헤라는 윤석을 먼저 보냈다. 그리고 여전히 비틀비틀 하는
무거운 재원의 몸을 부축해 겨우 그의 집으로 들어오기까지 10분 이나 걸렸다.

거실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욕실로 들어간다. 혹시 속이 불편해서 그런가 하고 헤라도 그의 뒤를 따라 욕실로
들어갔다.


하얀색의 무광택 타일로 뒤덮인 욕실은 처음 그의 집에 업혀 들어와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고 있었다.

재원은 세면기에 한 손을 집고 서서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 투명한 사각의 유리로 되어 있는 샤워 부스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 뭐예요? 옷은 벗고 샤워 해야지.”



놀란 헤라가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가는 재원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그가 몸을 돌려 그녀를 내려다본다.


희미한 주차장의 불빛에서보다 그의 눈은 맑아 보였다.



“ 넥타이 먼저 풀어요.”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왠지 당혹해지는 그녀는 넥타이를 풀기에 정신을 집중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넥타이는 쉬이 풀려지지 않았다.



“ 너 타이........ 처음 풀러보냐?........ 왜 이렇게......... 더뎌?”



부스의 오른쪽 벽면에 몸을 의지하고 선 그가 천천히 별 의미 없는 말을 했다.



“ 말 했지요. 나 아직 버진 이라고. 그새 잊었어요? 그런 내가 그쪽 말고 다른 어떤 남자의 넥타이를 언제 풀어
봤겠어요?”


아직 그제의 일에 기분이 풀리지 않은 헤라는 퉁명스레 그의 말을 받았다.



“ 오늘 네 옷차림이나.......이런저런 정황으로 봐서는........버진이라는 네 말은 도저히 신뢰가 가지 않는다.”



“ 믿든지 말든지.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재킷이라도 좀 벗어 봐요. 아님 여기서 나가던가.”


그의 목에 걸린 타이의 매듭을 풀기에도 벅찬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고만 있는 그가 원망스러워 진다.

투명한 유리의 샤워부스 안은 어느새, 그녀와 재원이 내뿜는 숨에 하얗게 김이 서려 있었고 공기는 덥고 습해져
있었다.

그런데 문득, 재원의 손이 샤워기의 물 조절 손잡이로 가는가 싶더니 헤라가 말릴 틈도 없이 이내 미지근한 물이
그녀와 재원을 향해 쏟아져 내린다.



“ 재원 씨!!!!!!!!”



“ 시원하다. 지금 너무 더웠잖아. 그래서 틀었어.”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운 그가 헤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정말로 시원하다는 듯 말을 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쏟아지는 물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는다.

그리고 재원도 젖기는 마찬가지, 언제나처럼 세련되게 손질되었던 그의 머리카락도 물에 젖어 주저앉아 있었다.



“ 너.......이쁘다. 정말.”



얼굴에 달라붙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을 세워 치워주던 그가 황홀한 표정으로 말을 한다.

그의 눈빛과 그의 칭찬에 헤라는 가슴이 떨려 왔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다니던, 그래서 무감각해진 이쁘다는 말이, 재원의 입을 통해서 나오자 넥타이를 푸르던
손끝까지 저릿해질 정도로 그녀는 기뻤다.



“ 말 안 해도 알아요.”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헤라는 그 칭찬이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말한다.



“ 그래.......그렇겠지.”



재원이 낮게 웅얼거리며 아직 자신의 넥타이를 붙잡고 있는 그녀의 팔을 사이에 두고 두 팔을 올려 그 커다란
손바닥으로 헤라의 얼굴을 감싼다.

그리고 쏟아지는 샤워기의 물을 맞으며 그녀의 입술에 달콤하고 한 없이 부드러운 키스를 시작했다.

진한 술 냄새가 그의 입을 통해 그녀에게로 전해져 왔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역하게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넥타이를 쥔 손에 힘을 주어 그를 잡아당기고 발꿈치를 살짝 들어 그의 입맞춤에 응한다.

얼굴을 감싸던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껴안고 몸을 밀착시켜 왔다. 샤워기의 물줄기는 점점 차가와 져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몸은 반대로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격렬해진 키스! 그가 좀 전보다 더 강하고 힘 있게 그녀를 안으면서 거칠어진 키스로 그녀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그의 혀와 입술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탐닉하고 살며시 물자 헤라는 아찔해지는 정신에 무릎에서 힘이 빠져 버렸다.

그로인해 여전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재원에게 매달려 버리자 그는 샤워부스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재원이 입술을 떼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 풋~ 하는 작은 실소를 터트렸다.



“ 마스카라가 다 흘러 내렸어. 귀신 같애.”



계속해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에 헤라의 화장이 번질 대로 번지고 지저분하게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 그러는 그쪽은요. 내 립스틱을 통째로 먹은 거 같애.”



그녀도 실소를 터트리며 그의 입가에 번진 빨간 립스틱 자국을 손으로 문대 지운다.



“ 내가 네 립스틱을 입에 묻힌 게 한 두 번이냐? 매번 키스 할 때마다 그랬는데.”



재원은 그녀에게 처음으로 강제 키스를 하던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헤라는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손을 모아 받아 대충 세수를 한다. 어차피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메이크업 클린징
용품이 있을 리는 만무고, 번진 화장을 그대로 놔두자니 우스울 것 같았다.



“ 옷도 벗어........젖어버렸잖아.”



재원은 세수를 하는 헤라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더는 참을 수 없는 그녀에 대한 욕망에 빨간색의 헤라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 그 원피스의 뒤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어깨에서부터 벗겨 나간다.



24.


매끄러운 헤라의 어깨가 물로 인해 차가와져 있었다. 술기운에 몸에서 열이 오르는 재원에게 그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은 그의 입술이 저절로 그녀의 어깨를 물게 만들었다.

차갑고 부드럽고 그리고 수돗물의 염소 맛이 나는 그녀의 어깨에서 목으로 그녀의 귓불까지 그는 서둘지 않고
키스를 해나갔다.

사실 헤라 앞에서는 취하지안은 척 정신만은 멀쩡 한척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는 안다.

자신의 이성은 술집에서 그녀를 쫓아 나온 그 순간부터 이미 바닥이 나 있었고, 감성은 우울과 번민 그리고 원초적
욕망과 죄책감이 뒤 섞인 그래서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라는 걸 말이다.



“ 자 잠깐. 잠깐요.”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또 그 놈의 잠깐!




“ 뭐야! 나, 취했어. 네가 무슨 핑계 아니 어떤 제안을 해도 이번엔.......멈추지 못해.”



어깨까지만 내려져 있던 그녀의 그 빨간 원피스를 밑으로 내리려 애쓰며 재원이 짜증이 나 못 참겠다는 투로
말했다.



“ 그제도.......술 펐다면서요. 안 피곤해요?”



헤라가 그의 입술을 피하려 고개를 돌려대며 핑계를 찾으려 노력 한다.



“ 피곤해. 그래도 널 ”




“ 그제는 피곤하다고, 날, 침대로 끌어들일 생각이 없다고 그랬잖아요.”



그녀가 그제의 일을 얘기한다. 그리고 그건 재원도 마음에 걸려 하고 있는 일인 건 사실 이었지만, 그에겐 지금
그녀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두 사람의 상황을 피해가려하는 의도로 보이고 있었다.



“ 말끝까지 들어. 피곤하겠지만, 취했다고 했지! 취하면 피곤 따위는 느껴지지 않아.”



더 이상은 그녀에게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지난 한달 간 충분히 휘둘릴 대로 휘둘린 그 였다.



“ 그럼 내가 피곤해요. 너무 피곤해서 그쪽하고 할 마음이 사라졌어. 그럼 돼요?”



헤라가 재원의 몸을 억지로 떼어 내며 그를 쏘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엔 그녀도 그와 똑같이 지금 원하고
있다는 게 쓰여 있었다.



“ 네 눈은.......그렇지 않은데.......다니엘을 열 잔이나 마셨지만 그래도 보여. 네 진심 정도는.”



재원은 두 팔로 욕실의 바닥을 짚어 몸을 뒤로 의지하여 좀 떨어진 시선으로 헤라의 눈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그 도톰하고 유혹적인 입술을 살며시 깨문다.



“ 사실은.........”



기어들어가는 헤라의 목소리. 물줄기가 바닥에 꽂히는 소리가 따가왔다.


“ 사실은 마법에........걸려 있는 중이란 말예요.”




그녀가 ‘.......중이에요 ’ 라 말했지만 좀 전부터 물소리가 유난스레 크게 들려오던 재원에겐 앞의 중요한 말은
잘려버리고 나중 말만 귀에 들어왔다.




“ 뭐라고? 무슨 중이라고?”




그래서 그는 다시 묻는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번엔 저 여자가 무슨 말로 자신의 욕망을 잠재울 것인지 귀를 세우고
있었다.



“ 마법.Magic! 몰라요? 그거에 걸렸다구요.”



“ 뭐? 무슨 소리야? 네가 무슨 공주라도 돼? 갑자기 Magic에 왜 걸리는데? 난 카퍼필드도 아니고 간달프도 아냐,
Wizardry(남자마법사)가 아니라고 ......... 널 마법에 건 적이 없어.”




허나, 귀만 세우면 무슨 소용인가........그녀가 말하는 단어의 쓰임새를 모르는 것을! 그리고 모두가 그가 너무
오랫동안 미국 물을 먹어서 인걸.

헤라는 재원에게 생리란 단어를 도무지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돌려쓰는 표현을 알아듣지 못하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 Have a little visitor ”
생리중 이에요.



그래서 그녀는 대학 시절 Toic 공부를 하며 외워 둔 예문 하나를 가까스로 기억해내 그에게 말했다. 발음상 그가
알아듣기나 할까 걱정 하면서.




“ 야.......난, 네 콩글리쉬를....... 알아들을 정도로 다국어에 능통하지 못하거든, 그러니까........ 내 생각에서 그런
괴상한 발음으로 영어로 말하지 말고........그냥 우리말로, 우리말로 할래?”




그녀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재원은 헤라의 그 짧은 영어문장의 발음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취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혹시 반복해 들어서 알아들을 수 있었겠지만 재원은 지금 그렇게 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다.

한 참 흥분이 오르는 중이었는데.......이미 여러 번 그랬던 것처럼 또 중단이 되자 그는 화가 나려는 참 이었다.

바닥이 난 이성을 끌어 모아 인내심을 발휘해 그녀의 말을 기다린다. 이젠 찬물이 되어버린 물줄기 아래서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은 채로 달아오른 열기를 식혀버리는 샘이 되고 있었다.



“ 멍청이!”



그렇지만 그 열기가 식거나 말거나 헤라는 그가 원망스럽다.

여자의 육체가 남자들의 눈요기나 되어주고, 혹은 밥을 채워 넣고 노동을 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설레고,
달아오르고, 열정을 품게 해준 다는 사실을 알려준 남자가 술이 취한체로 자신을 안으려 하는 것에 그녀는 상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생리 중이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원해도 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오늘 그를 거부하는 이유는 앞의
얘기가 절대적 이다. 취한 그와는 하기는 싫다. 죽어도! 몸과는 달리 헤라의 마음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 멍청이? 야.......내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네 영어는 아무도 못 알아들어.”



멍청이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는 재원은 웃기지도 않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무슨 거부의 이유를
댄다 해도 핑계로 들릴 것쯤이라는 건 그녀도 이미 간파하고 있는 터다.



“ 생리 중 이라구요. M E N S E S .”



그러나 방법이 없지 않은가.......오늘은 절대로 신체적 현상으로 그 것이 불가한 날인 걸!
헤라는 단어로 말하지 않고 언젠가 처럼 철자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말해 줬다.




“ 아항~ 참 네~ 이젠 웃음도 안나오네.......”




그녀의 말을 가만히 생각을 해보던 그가, 두개나 되는 감탄사를 섞어 자신의 어이없음을 표현 한다.







“ 같이만 있어달라고 그랬잖아요. 그래놓고 먼저 이런 게 누군데.......”



궁시렁 거리는 그녀를 허탈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재원은 바닥으로부터 몸을 일으키기 위해 벽에 손을 집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일어서는 데만 몇 분이 걸렸다. 이런 몸으로......! 그는 불거진 아랫도리를 책망하며 헤라를
남겨 두고 샤워 부스를 나왔다.

욕실에서 물이 흐르는 옷을 벗어 던지고 팬티만으로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오기를 기다린다. 비록 그의
아래는 실망을 하고 있었지만 재원은 그녀가 옆에 같이 누워주길 바라고 있었다.




“ 자요?”




열어놓은 침실 문 앞에서 그녀가 묻는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그냥 가버릴까? 불안했다. 언제나 혼자였는데, 새삼
그녀가 가버릴까 그는 초조해 하고 있었다.




“ No........”



“ 그럼 갈아입을 옷 좀 줘 봐요. 이렇게 젖은 채로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 할 테고, 젖은 옷은 벗고 싶으니까.”



“ Wall closet 열어서 아무거나 꺼내 입어.”




술이 깬다. 취했을 때도 말짱했다 생각했던 정신이 아주 정상으로 돌아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속은.......쓰리고 아팠다.




“ wall closet 가 뭔데요? 혹시 저 벽장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도 자꾸만 영어가 나온다........습관이란 무서운 거다.




“ 그래.”




눈도 감고 움직임도 없이 침대에 엎어진 채로 그는 대답을 하고 있었다. 헤라는 벽장문을 열고 입을 만한 옷을
찾아보지만.......그녀가 입을 만한 것이라곤 하얗게 세탁되어 차곡차곡 접혀 쌓여있는 면 티들이 전부였다.

브래지어까지 다 젖어, 저 얇은 면 티 한 장만 입는다면 그게 표시 날 텐데 하는 별 쓸데없는 걱정을 하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그의 티를 꺼내어 입는다.

그리고 욕실로 다시 가 핸드백에서 ‘탐폰’을 꺼냈다. (음~다음 절차는 알아서 상상 하시길.)

팬티까지 몽땅 젖었는데.......생리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욕실을 나와선 여기저기 헤메고 다니다 세탁실을 간신히 찾아 세탁기 안에 그 빨간 원피스와 슬립 그리고 속옷
까지 몽땅 넣고 세제를 넣는다.

얼른 건조까지 시켜서 입고 돌아가야겠다는 계산으로 세탁기 앞을 지키고 서 있는데, 한기로 인해 몸이 으실으실
떨려 왔다.




“ 옆에라도 있어준다며.......여기서 뭐하는 거야?”



어느 틈엔가 재원이 하얀 색 트레이닝 바지만 걸치고 그녀의 뒤에 와 있다. 그리고 헤라가 뒤 돌아 보자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침실로 들어간다.



“ 피곤하다. 누워.”




이불을 들추고 재원이 그녀가 먼저 침대로 들어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헤라는 면 티 외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이 -팬티조차도- 굉장히 신경 쓰였지만 추웠다. 너무너무.


망할! 고급 아파트가 왜 이리 추운거야!!!!



“ 같이 누울 거예요?”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녀는 설마 하고 묻는다. 하지도 못 할 텐데.......
그렇지만 재원은 대답 없이 그녀의 설마를 깨고 침대의 반대편으로 돌아가 그녀의 옆으로 들어와 아까처럼 엎어져
누웠다.
재원이 거리를 두고 누워있었기 때문에 몸이 닿지는 않았지만 이불을 통해서 온기는 전해져 오고 있었다.

헤라는 긴장이 됐다. 그가 자신의 가슴도 더듬어 보고 무주에서는 좀 더 진한 애무까지도 받아 봤는데도 어쩐지 한
침대에 누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심장이 두근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몸이 떨려 왔다. 다리를 오므리고 등을 굽혀 엄습하는 한기를 떨쳐 내보려 하지만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 왜 그래?”




엎어져 누워 침대의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가 옆으로 돌아누우며 헤라의 몸을 살짝 건드렸다.



“ 그냥.......이불 속에 있는데도 왠지 추워서.”




그녀는 찬물을 오래 맞아 체온이 내려가 그런 것이라 여겼다.




“ 기다려.......난방 틀게.”



그런데 생리통이 오려는 걸까?.......머리도 점점 무거지고 있다. 잠이 온다. 옆에 있는 재원이 신경 쓰여 미치겠는데
잠이 왔다. 정말 말도 안 되게.



깜빡 잠이 들었었다. 4월 12일을 사이에 둔 몇 주간을 늘 그렇게 보냈듯이, 잠을 자지 못 할 거라 각오하고
있었는데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6시간이나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잔 것이다........그녀의 위력인가? 재원은 다른 사람 몸 하나가 더 들어갈 정도의
간격을 두고 누워 있는 헤라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하~......하~.......”



그런데.......어쩐 일인지 그녀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게 들렸다.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던 것이다.



“ 헤라. 진 헤 라. 눈 좀 떠봐. 응?



재원은 재빨리 옆으로 다가가 돌아누워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몸을 바로 눕혔다. 식은땀? 이마에서
만져지는 물기는 땀 인 것 같았다.



“ 어디가 아파? 말 좀 해봐.”



눈꺼풀이 무거운 듯 헤라는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열이 나나? 그가 손으로 그녀의 땀에 젖은 이마를
짚어보지만 잘 모르겠다.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래서 그는 좀더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 목덜미로 손을 가져가 본다. 이마와 똑같이 땀이 흐르는 그녀의 목덜미!
뜨거웠다. 등도.......가슴도.




“ 헤라야. 눈 좀 떠봐. 너 열 많이 나. 응?”


열이 나는 것을 확인하자 그는 정신이 확 들며 혹 헤라가 정신을 잃지는 안을까 하는 불안감에 그녀의 볼을 살짝
두들겨 봤다.




“ 아아.......알아요.”


그러나 다행히도 작게나마 말을 한다.


“ 어디가 아픈지 말할래?....... 병원에 가자.”


열이 너무 심했으므로 그는 병원으로 가야한다고 판단을 내렸다.


“ 병원은.......무슨.......열 좀 나는 거 가지고....... 해열제.......좀 줘요.”


하지만 그녀는 피식하는 낮은 웃음을 웃으며 그의 품에 파고들 뿐,병원은 생각도 않는 것 같았다.


“ 그런 거 없어. 그러니까 병원 가자.


“ 싫어. 나, 병원 안가........ 안가요. 가자고 하지 마.”



그리고는 어린아이처럼 병원에 가기를 무서워하는 듯 칭얼대는 소리를 냈다.



“ 그럼 계속 이렇게 아플래? 열이 심하잖아. 그냥 두면.”



“ 병원가면....... 더 아파질 것 같아서 그래요....... 아냐 더 아파. 그러니까 그만 해.”



그러다 결국에는 그의 말을 막으며 그녀는 재원의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그의
체온이라도 빼앗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어떡해야할까.......그는 해결 방안을 모색 했다. 병원에 가지 않으려는 그녀의 열을 떨어트릴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던 것이다.

재원은 타인을 돌봐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보살핌은 받아 봤지만, 누군가를 책임지거나 지켜줘 본적이 없는
그런 그였다.

경험이 없으니.......책에서 본 지식을 찾아내야 했다.



“ 그래.......그럼, 원시적인 방법 밖에 없겠다.”



미국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보이스카웃에서 교육받은 내용. 상식적인 내용이지만 한번도 실행에 옮길 기회가
없었던 그에게는 기억하고 있는 것조차 신기한 내용 이었다.

주방으로 가 물을 받을 만한 커다란 그릇을 찾아 미지근한 물을 받았다. 그리고 욕실에서 깨끗한 타월 한 장을
꺼내어 들고 침실로 돌아와 침대 옆에 놓는다.



“ 이렇게 해봐.”


이불을 돌돌 말고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는 헤라의 바로 뉘였다. 그런 다음 그녀의 몸에 헐렁하게 걸쳐져 있는
자신의 티를 걷어 올려 벗기려 했다.



“ 뭐.......뭐하는 거예요?”



올려진 티를 손으로 끌어 내리며 그녀가 재원의 손을 만류한다.




“ 병원에 안 간다니. 이 방법 밖에 없잖아.”



물에 적신 타월을 들어 보이며 그가 다시 그녀의 옷을 들춘다. 헤라는 아픈 중에도 기겁을 했다. 지금 이 티를 벗게
되면 완존히!!!!! 알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시 싫어.”



“ 왜? 그럼 아파서 쓰러질래? 그렇게 해서 병원으로 실려 가고 싶어?”



“ 창피하다구! 속옷도, 쿨럭! 쿨럭! 안 입었단 말이야. 쿨럭!”



하지만 이젠 기침까지 해대는 그녀를 재원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열이 더 오르면 기침은 지금보다 훨씬 심해질
것이고, 그럼........



“ 야........나 이미 볼 것 다 봤어. 네 가슴도 만져 봤고, 거기에 입술도 대봤고. 네 엉덩이도 더듬어 봤어, 그런
사이에 뭐가 창피하다는 거야?”



어쨌든 그는 마음먹은 일을 할 것이다. 물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 열을 내려놓고 그녀가 편히 잠이 든
모습을 봐야만 했다.



“ 아~ 재원 씨.”



결심이 선 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지 말을 할 때마다 이마를 찌푸리는 그녀의 팔을 들어 티를 벗기고 물수건으로
그녀의 뜨거운 몸을 식혀간다.

처음엔 10 분 간격으로 3번을 닦고, 다음엔 30분 간격으로 3번을 닦았다. 그러자 헤라의 숨 소리가 한결
부드러워 지고 서서히 잠이 드는 것 같았다. 시간은 새벽 다섯 시 반.

그녀가 완전히 잠이 들기 전에 재원은 한 번 더 그녀의 몸을 식혀 줄 요량으로 다시 물수건을 들어 발끝에서부터
닦기 시작했다.

길고 가는 종아리를 지나 탄탄하고 늘씬하게 뻗은 허벅지, 그리고 잠이 들면서도 수줍게 손을 모아 가리고 있는
그녀의 은밀한 곳과 일자형의 나사 모양을 하고 있는 배꼽, 터질 듯 탱탱하고 풍만한, 그녀의 몸 중 제일로 시선을
가게 만드는 젖가슴.......재원은 천천히 그녀를 감상해 나갔다.

그녀가 제정신이라면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일을 그는 하고 있었던 것이다. 쭉쭉 빵빵 미녀들은 얼마든지 안아 봤다.
그러나 이렇게 감탄의 눈을 하고 그녀들을 본적은 맹세코 단 한번도 없었다.

뭘까? 지금 이런 내 행동은 .......뭐지?
음력 4월 12일의 죄책감은 어디로 가고, 어째서 난 이 여자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걸까?

12일의 혼란대신 재원에겐 다른 혼란이 물갈이를 하고 있었다.




울리는 벨 소리에 재원은 눈을 떴다. 침대 아래에서 헤라의 옆에 머리를 두고 그는 잠이 들었었다.

그리고 반복해 울리는 벨소리.......
손에는 아직 젖은 타월을 든 채로 불편한 잠자리에 뻐근해진 목을 주무르며 현관을 향했다.

아침의 방문자가 누구인지 인터폰의 화면으로 확인도 하기 전에 어느새 문은 열리고 들어선 사람은 그의 모친이다.



“ 집에 있었구나?”



모친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재원을 바라본다.



“ 네. 새엄마. 근데 아침부터 웬 일이세요?”



놀라긴 재원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연락도 없이 아침시간에 들어 닥치는 모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아침 이라니.......얘가! 지금이 11시야. 회사에 전화 했다가 아직도 출근 안했다기에 휴대폰 해도 안 받고 해서,
어미가 걱정 되서 온 것 아니니!”




“ 아!......그러세요.......”



거실 벽에 걸린 시계가 11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6시나 되어 다시 잠이든 그가 지금을 이른 아침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친은 상의도 걸치지 않고 트레이닝 바지만 걸친 채 로 손에는 젖은 수건을 들고 멍 하니 서 있는 아들이 다른
때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에게 들어오라는 소리도 하지 않고 현관엔 빨간 색의 힐이 놓여져
있기까지........



“ 혹시.......여자랑 같이 있었니?”



모친은 아들이기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재원이 당황하는 표정을 역력히 나타냈다. 하지만
평소에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아들의 표정에, 오히려 더 당황하는 쪽은 모친이었다.



“ 아아.......그게,.......네!”


그가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며 이마를 긁적였다.

뭔가 변명을 하려다 말고 모친의 질문에 수긍을 하는 아들. 그녀는 걱정이 된다. 여자와 밤을 보내느라 회사까지
늦고, 더욱이 지금 그의 모습은 어딘가........정신이 나간 듯도 했다. 하여간 달랐다. 뭔가가.


한편, 벨 소리에 재원과 같이 눈을 뜬 헤라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귀를 쫑긋 하고 방문자가 누구인지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설마.......그 민 수 연 인가하는 여우는 아니겠지? 이불을 둘러 알몸을 감추고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에 귀를
갖다 댄다.

아직 이마에 미지근한 열이 감지되고는 있었지만 새벽처럼 오한이 들고 머리가 쑤시지는 않는 그녀였다.

누굴까?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나이가 느껴지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 재원아.......네가 여자랑 같이 있다고 하니, 어미가 들어가지는 않으마. 헌데! 밖에서 데리고 노는 건 상관하지
않았잖니? 미국에 있을 때도 네가 여자문제 같은 건 한번도 일으킨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널 믿기는
한다마는........”


어미? 그럼.......새엄마라고? 방문자가 재원의 모친이라는 사실을 알자, 그녀는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 아무 여자나 집에 끌어 들이지는 마라. 술집에서 만난 여자든, 아니면 오가다 만난 여자든.......네 지위와 위치에
맞는 여자를 상대해야지. 여기 놓은 구두를 보아하니 너한테 어울리는 여자는 아닌 것 같다. 맞니?”



그런데 그의 모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헤라의 머리꼭지를 돌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여자나 라고? 거기에
술집에서 만난 여자? 또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

마치 방 안에 있는 그녀가 헤픈 여자 혹은 화대를 받기라도 하는 여자가 되는 듯 말을 하고 있었다. 화대를 받는
여자란.......쉽게 말해 창녀다.

하여간에 어제는 아들이 그녀를 술집잡부 취급을 하더니, 이젠 모친이 그녀를 거리의 여자 취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대답은 하지 마라. 다만, 어제 안성에 다녀와서 수연이를 만났는데. 걔가 그러더구나! 너 하고.”



재원의 모친이 또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다는 걸 헤라는 알고는 있었지만 이미 그 푸르륵하는 성질머리가 밖으로
모습을 나타낸 이상 그런 말을 듣고 가만있을 그녀가 아니지 않은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그녀는 알몸에 이불을 두른 그 상태로 거실을 지나 현관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재원의
옆에 선다.



“ 야.......너.”



“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방안에서 가만히 듣고 있자니........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서 풀어드리려
나왔습니다.”



놀라 뒤로 넘어가기 일보직전인 그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그녀는 자신의 새엄마보다 좀더 연배가 위인 듯한 품위가
넘치고, 명품으로 몸을 감싼 재원의 모친과 당당하게 눈을 마주 했다.

모친은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이 당당이 넘치다 못해, 전투적으로까지 보이는 여자를 재빨리 관찰하기 시작한다.

아들의 이불로 몸을 감은 그녀는 치렁한 머린 물인지 땀 인지에 젖어 있었고 얼굴은 붉어져 있었으며 피부는 너무
희지도 검지도 않은 것이, 한눈에도 무척이나 건강해 보이는 여자였다.

뭐 물론 퇴폐적으로 보이는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인상이 그리 나쁜 여자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역시 아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 단정 짓는다.



“ 전.......아무 여자 나가 아닙니다. 더욱이 이 사람과는 술집이나 오가다 만난 사이도 아니구요.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는........ 저도 잘은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얼마 전부터 사귀기로 약속한 사이이긴 합니다. 그러니
절 염가 세일하셔서 하자있는 물건 취급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헤라는 자신을 관찰하는 그의 모친에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또박또박 천천히 야무진 표정을 하고 재원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을 했다.



염가 세일이라.......! 옆에 선 재원은, 수건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기막히다는 웃음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당연히 기막힌 상황이다. 남자 집에서 자던 여자가 옷도 걸치지 않고 알몸에 이불만 두른 상태로 뛰어 나와 남자의
모친과 독대를 하려드는 것 자체가 다른 여자들은 가히 상상도 하지 않을 일이 아니던가........


아아~~~ 진 헤 라.......너 정말!



“ 새엄마.......제가 회사 나가서 전화 드릴게요.”



아무리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재원은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드러내놓고 기막힘을 표하지 않는 모친이
속내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가기에, 모친의 등을 가볍게 밀어 현관 밖으로 나왔다.



“ 사정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너무 괘념치 마시구요.”



재원은 엘리베이터의 내려감 버튼을 누르며 모친을 다독이려 하고 있었다.



“ 사귄다는 건.......상관 안하마. 우선은 말이야. 하지만 수연이가 너 하고 결혼하겠단다.”



모친은 아들의 얼굴을 진지함 그 이상의 표정으로 바라보며 그의 말을 자른다.




“ 난 그 애가 좋다. 재원아. 명운 대 민 총장님 장녀니.......집안도 적당하고. 네가 기업간의 정략결혼에 희생되지
않게 하려고 내가 노력 한거.......너 알지? 여자집이 우리 집안과 굳이 비슷해야 할 필요는 없어. 그런 상대를
찾으려면 찾기도 힘들겠지만 난 웬만 한집 여식이 좋다.”



“ ........ ”



“ 그동안은 수연이가 결혼 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서둘지 않았다만.......이젠 서둘러야겠다. 할아버지께서
무슨 다른 일을 벌이시기 전에.......그러니까, 여자들......정리 하거라.”



여자들! 재원에겐 여자들이란 없었다. 여자라면.......헤라가 있긴 했지만 정리라니! 그것도 먼 후일의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결혼을 서둘기 위해서. 그는 착잡해 진다.



“ 땡!”


맑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 .......가세요.”



그 문이 열리고 안으로 모친은 태운 재원은 별 말 없이 그녀를 배웅 했다. 대답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도 대답할
어떤 마음도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관문을 다시 열고 거실로 들어온 재원의 눈에 띤 헤라는 아직도 이불을 두른 채로 소파위에 웅크리고 앉아 TV를
틀어 놓고 있었다.



“ 진 헤 라.......아픈 건 좀 괜찮냐?”


들고 있던 수건을 한켠으로 던져 놓으며 재원은 퉁퉁 부어있는 그녀에게로 갔다. 리모콘을 신경질적으로 눌러대던
그녀가 그를 올려다본다.



“ 마마보이에요? 그쪽 새어머니가 날 이상하게 말하면 뭐라 변명이라도 해줘야 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제법 기운이 났는지 카랑카랑 하는 본래의 목소리로 돌아온 그녀가 대뜸 쏘아댔다.



“ 내가 왜!........누가 너보고 그러구 다니래?”


그녀의 기분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재원은 골치가 아프다. 솔직히 그녀의 직업이 의심 가는 것도
사실이었고.


“ 왜 라니요? 그걸 몰라서 물어요?”



“ 나도 확신이 서지 않는 일에 어떻게 무슨 변명을 하는데?”


주방으로 들어가며 그가 귀찮은 듯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 확신이라니요? 무슨 확신이요? 설마.......어제 그 흐물거리며 돈 다발 꺼내서 내민 게 진심이었던 거예요?”



“ 흐물거리진 않았어. 단지 좀 취했을 뿐이었잖아.”



“ 딴 소리 말구요. 날 술집잡부 취급한 게 취해서가 아니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거냐구요!.”



“ 뭘 묻냐? 그런 옷 림에! 남자들하고 같이 술집에서 나오는 여자를! 그럼 달리 뭐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응?”




“ 그건 날 모르는 사람들이나 가령 그쪽 어머님 같은 경우는 그럴 수도 있지만요. 재원 씨가 날 몰라서 그런 생각을
해요?”



주방에서 얼굴도 내밀지 않은 상태로 화가 난 듯 다그치는 재원을 향해 헤라도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재원은 말이 없다.

잠시 후, 재원이 커피 잔을 손에 들고 주방의 기둥에 몸을 기댄 서며 다시 입을 연다.



“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진 헤 라. 네 이름하고, 휴대폰 번호, 그리고 네가 일하던 꽃가게 이름. 그 세 가지
내가 아는 전부야. 그 세 가지를 가지고 내가 널 어떻게 알아? 직업도 모르고, 네 가족 사항도 몰라. 집도 모르고
나이도 몰라!......정말 중요한건 단 한 가지도 알지 못 한다구.”



진실! 재원과 헤라의 현재 관계에 대해 명확히 해줄 진실을 그가 말 하고 있었다.



“ 안 물었잖아요. 재원 씨가 모른다고 한 것 중 어느 한 가지도 나한테 물어 본적이 없잖아.”


이제야 그와의 관계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절감한 그녀는 존심 상하게도 가슴이 아팠다.

민 수 연!!!! 그 여우가 지가 약혼녀라고 당당히 선언할 만큼 재원과 자신의 사이가 정말로 별것 아니라는 진실을
어리석게도 그의 말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었다.



“ 그저께 네가 집안일 이라며 우울해 하던 날, 물었어. 무슨 일인지. 그때.......너.......말 안했잖아. 쪽팔린다고.”




“ 그건!”



“ 됐어. 관두자.......나 출근해야 돼.”



재원이 그날 일을 마음에 꽁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서로가 집안에 대해 털어 놓는 사이가 아니라
생각했었고.......그래서 창피해서 말하기 싫었는데.

그는.......서운했던 가 보다. 헤라가 그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이, 그녀도 재원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고
싶지 않아서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아침은 알아서 먹어라. 냉장고에 음식 많으니까.”



욕실로 들어가며 그는 헤라에게 눈도 주지 않고 말을 했다.

출근.......재원이 출근하고......난? 뭘 해야하나.......?난. 난! 으아악!!!!!!!! 세상에나! 오후 12시를 넘어가고 있는
시계바늘을 보며 그녀도 기겁을 한다.

그녀야 말로 벌써 일찍이 출근을 했어야 했다. 어제 송 상무와 만나 한 얘기들을 민 대 표에게 보고 해야 했고,
다시 석준을 만나야 할 일들이.......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씻지도 않았고, 자신의 집에 있지도 않았다.


아 이런! 젠장할.

헤라는 젠장을 연발하며 뛰듯이 일어나 세탁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구겨진 속옷을 꿰고 보기도 싫은 그 빨간
원피스를 급하게 입고는 핸드백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이 망할 놈의 핸드백이 도무지 눈에 뜨이지가 않는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어제의 동선을 하나하나
그려본다. 젖은 옷을 갈이입고.......그리고 탐폰을 갈러! 욕실! 핸드백을 욕실에 놓고 나왔던 것이다.



“ 문 열어 봐요.”



물줄기 소리가 요란히 떨어지는 욕실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마음이 급한 헤라는 손잡이를
돌린다. 잠기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는 앞뒤 생각 없이 벌커덩 문을 열었다.

핫 실수! 아냐 실수인가? 샤워 부스의 문을 열어놓고 샤워를 하던 재원의 알몸이 적나라하게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



“ 야! 너 뭐하는 거야?”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몸에 눈이 박힌 헤라를 향해 재원이 소리를 쳤다. 그런데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 안 나갈래? 그러고 계속 서 있을 거야?”


재원이 몸을 돌려 그녀에게 등을 보이며 인상을 쓴다.



“ 왜........ 나가요!‘ 충격! 동영상’을 돈도 안들이고 주민번호 인증도 안하고서 감상하게 됐는데. 새벽에는 그쪽이
실컷 했으니까 이젠 내 차례잖아.”



헤라는 그의 단단한 엉덩이 부근에서 눈을 떼지 않고 억양이 없는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재원의 몸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심장이 벌렁대서 그녀는 현기증이 나고 있었다.

뭐 정작 중요한 곳은 보지 못했지만 남자의 몸을, 그것도 저렇게 근사한 몸을 실제로 보긴 처음인 그녀였다.



“ 그래? 그럼.......제대로 봐야지.”



현기증으로 눈을 깜빡이는 사이 재원이 짖궂은 얼굴로 그녀를 향해 다시 돌아 선다. 샤워부스의 문 양 사이에 팔을
집고서 느긋한 포즈로 말이다.



“ 아!!!!!!!”



그의 무기! 남자의 무기가 그녀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 헤라는 풋~ 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무너지는 남자의 자존심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이다. 뭐 알 길이나 있겠는가! 남자들이 그런 일로 상처 받는 다는
사실을.



“ 뭐 뭐야? 왜 웃어?”



재원의 이마에 시퍼런 어둠이 드리워졌다. 그러나 헤라는 손목을 까닥거리며 미안하다는 시늉을 한 뒤, 묻는다.



“ 꼭! 잡풀이 우거진 풀밭을 기어가는 애벌레 같이 생겼네요. 다른 남자들도 다 그래요?”



한껏 톤을 높인 그녀의 목소리가 욕실에 메아리 쳤다. 그녀의 웃음에 처음엔 재원도 움찔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지금 그의 얼굴엔 헤라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묘한 미소가 돌고 있었다.

왜 웃는 거야? 기분 나쁘게........

그의 미소에 그녀는 변기위에 놓인 핸드백을 들고 팩 하니 돌아서 욕실을 나와 버렸다.

몇 초 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집안은 조용해 졌다. 그리고 재원은 확신한다. 그녀가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곧잘 이상한 일을 벌이기는 해도, 거짓말 따위를 하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25.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헤라는 아직도 얼굴이 벌게진 채 재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재원을
생각한다기보다는 그 몸을 생각하고 있다는 게 정확히 이야기다.

남자가......그렇게 생겼구나! 비현실적인 성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나라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20 중반을 갓
넘긴 그녀도 생전 처음 보는 성인남자의 누드와 그것의 충격에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정신이 멍 한 상태였다.

그와 심각하게 말다툼한 일은 까마득하게 잊고 말이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그녀는 열쇠를 들어 현관문을 열려
한다.

그런데 열쇠가 헛돌아가는 것이 누군가 집에 있는 모양이었다.




“ 헤라 왔니?”


새엄마와 지민이가 와 있었다. 짐을 정리하는 중 인 것 같았다.


“ 새엄마! 이삿짐센터 부르면 되는데 뭘.”



헤라는 어질러진 방안으로 폴짝폴짝 토끼걸음을 치며 안으로 들어온다. 그녀의 책과 CD 같은 것들을 끈으로 묶어
상자 안에 포장을 하던 새엄마가 그런 그녀를 올려다봤다.



“ 집, 모레까지 비워줘야 한다며, 이렇게 하나도 준비 안하고 어떻게 하려고 그려?”



“ 사람 부르면 한 두 시간이면 끝날 일이야. 엄만 사서 고생을 해? 그만 둬. 지민이 까지 데리고 와서.”



작은 옷장 문을 연 헤라는 시원해 보이는 프러시안 블루의 정장을 꺼내며 새엄마를 말려 보지만 엄만 짐을 묶는 데만
열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세수하는 일을 잊은 걸 생각해낸 그녀는 욕실을 뛰어 들어가 세수를 하고 땀과 물에 쩔은 머리카락을
서둘러 감고 나온다.

화장대에 엉거주춤 앉아 드라이기로 요란한 소리를 내는 그녀를 새엄마는 그제여사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친구 집들이가 있어서 거기서 밤새 놀다 왔어요.”



그녀는 새엄마가 무슨 질문인가를 하기 전에 미리 선수를 친다. 눈치가 빠르지 않은 새엄마 였지만 그녀의 외박을 그냥
넘어 갈 새엄마는 아니었다.



“ 그랬어?........근디, 이 짐들은 다 어쩔거냐? 지민이 방을 치운다고 해도 헤미 짐도 있고 네 것 까지 다
들여놓기엔 그 방이 너무 좁을 텐디.”



서울 생활 30년이 다 되가는 새엄마는 아직도 고향 사투리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지 새엄마와 말을 할
때면 아직 젊은 얼굴과는 다르게, 헤라는 외할머니와 얘길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 글쎄........침대 같은 건, 버리고 화장대 하고 옷장만 이라도 가져가야지?”



그리고 요즘 새엄마는 부쩍 지쳐 보였다. 하긴 왜 아니겠는가......남편에 이어 맏사위라는 작자까지 그 지경인데!

다시 우울 모드 진입! 재원과 있을 땐 이 뒤숭숭한 집안 일 따위는 모두 잊고 있었는데.......그건 그때뿐 그녀
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대충 피부화장에 립스틱만 바른 헤라는 좀 전 꺼내놓은 정장을 갈아입고 새엄마와 지민에게는 ‘갈게’라는 짧은
인사만을 남기며 집을 나섰다.

우울을 떨쳐야 했다. 중요한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헤라였다.





“ MTN에서 대놓고 너한테 그렇게 말했단 말이야?”



“ 그 쪽이야 뭐....... 원하는 바를 확실히 해야 하는 입장 이니까.”



“ 그럼.......네 생각은 어때? 내가 어떻게 해야 겠니?”



송 석 훈과의 얘기를 들은 석준은 헤라에게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에 대해 묻는다. 하지만 그 건 그녀가
선택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 너나 나나 앞으로가 달린 일이야. 그렇지만 난 석준이 널 괜한 사탕발림으로 꼬드길 생각은 없어. 위험한 일이고
잘못 되면 우리 둘 다에게 치명적인 일이잖아.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 이제 그 쪽의 의도를 확실히
알았으니까.”



선택은 전적으로 석준의 몫 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각자에게 길이 있고 그 길을 가기위해 선택은 필수다. 그리고
선택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남에게 맡길 일이 아니다.



“ 어려운 일이다. 내 결정이 너한테 까지 영향이 미친다는 게 더더욱!”


석준은 레모네이드가 담긴 미끈한 유리컵을 그 속에 든 얼음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흔들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그의 마음이 그런 소리를 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헤라는 했다.

이 중요한 일을 위해 집안의 우울을 떨쳐내려 노력했는데.......어쩐지 두 가지 일은 연결고리를 걸고 있는 고장 난
승용차와 트럭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긴, 그녀를 지금의 비참한 경제적 난황에서 구해줄 빛이, 지금 이 일기도 하니까 그런 느낌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 우리.......나이트 갈래?”



심난한 마음에 흔들리는 투명한 노란 액체에 시선을 주던 그녀에게 석준이 뜬금없이 나이트 클럽에 가잔 소릴 했다.



“ 갑자기 웬?”



“ 그냥! 아니 그냥은 아니고. 우리 수학여행 갔을 땐가? 그때 네가 춤을 추던 생각이 나서, 한참 ‘뉴키즈 온더
블록’이 인기를 얻었던 것 같은데 그때 너 ‘스텝바이 스텝’인가 하는 노래에 맞추어서 정말 멋있었잖아.”



그리고 또 다시 뜬금없이 대학 시절 얘기를 꺼냈다. 석준에게 기억된 그녀는 그런 존재 였다. 답답한 공부에 지친
그에게 일탈의 기회를 줄 것만 같았던 그런.



“ 내가? 그랬었나?........별로 기억이 안 나는데.”



하지만 헤라는 그다지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 일이었다.

공부는 뒷전 이었고 무조건 주변의 아이들과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던 그런 시절이라서 그녀에게 석준이 기억하고
있는 일이란 그다지 특별한 것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가자! 내가 오늘 쏠게.”



6시를 조금 넘긴 손목의 시계를 확인 한 그가 먼저 일어선다. 헤라는 아직도 나이트클럽에 종종 드나들긴 했다.
남들처럼 부킹이 목적인 아니고 오로지 춤을 추고 에너지를 발산하기위한 수단으로서의 목적으로.

하지만 오늘은 왠지 걸린다.









“ 본부장님. 잠깐만요.”



박 부장이 화가 난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재원을 따라 나가며 그를 부른다.



“ 뭐야? 다른 할 말이 남았어요?”



“ 제가 ‘에이밀리언’으로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서 뭐라도 좀 쥐어준다면 얘기가 될 것 같기도 하니까요.
본부장님께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신다면.”



시간을 더 달라는, 무능한 것인지 아님 아군이 아닌 적군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 박 부장을 내려보며 재원은 속이
타고 있었다.



“ 됐습니다. 내가 직접 알아 볼 테니.......박 부장은 손떼요.”



처음부터 그럴 것을 .......후회막급이다. 시험대 위에 오른 자신이 남의 손을 빌어 일을 처리하려 했던 것을 그는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고 석 준과 연접 하는 써치 펌을 찾아내는 것이 이렇게 애를 먹일 줄 몰랐기에 저지른 실수 였다.

뒤 따르는 박 부장을 무시 한 채로 회사를 나서려는 재원을 이번엔 비서가 부른다.



“ 본 부장님. 가희동 사모님께서 방금 연락 하셨는데요. 오늘 본가로 잠시 들르시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 왜? 무슨 일인지는 말씀 안하셨나?”


“ 네. 그런 말씀은 없으셨고, 다만 7시 전엔 도착 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 알았어. 다른 저녁 스케줄 없지?”



무슨 일일까? 혹 아침의 일 때문일까?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하며 그는 혹시 잊은 스케줄이 있는지 확인을 한다.



“ 네. 없습니다.”



비서의 대답을 듣고 재원은 문을 박차고 나간다. 그리고 하나같이 밑에 있는 직원 모두가 맘에 들지 않는 다는
불평을 속으로 퍼부으면서 그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MTN의 속셈은 뻔 했다. 석준을 팀장으로 하는 연구팀에서 하는 프로젝트는 두 가지. TDMA 와
CDMA 듀플랙서 개발 관련 프로젝트! 핵심 중 핵심인 기술들 이다.

그런 프로젝트의 책임자를 빼가려는 목적은 당연히 기술을 노린 것! 고 석 준이 맘만 먹는 다면 그와 MTN 이 그
기술의 몇 부분을 빼돌리는 건 시간문제 인 것이다.

하지만 MTN을 저지 할 수 있을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써치 펌을 통해 접근해오는 그들이 그 사실을 인정
할리도 만무고.......방법은 고 석 준을 연접하는 담당 써치를 찾아 어떠한 조건이든 제시해 석준의 스카웃 자체를
무마 시키는 것! 그것이 최선 이었다.


회계 감사는 코앞이었고, 할아버지의 시험대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래서 일까? 헤라.......재원은 그녀가 보고 싶다. 너무도 단순 명쾌해 심각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그녀가 지금 그의 숨통을 트여 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 늦지 않았구나! 어서 들어와라.”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터질 듯한 그를 맞는 모친은 환한 얼굴 이었다. 그리고 드넓은 집안은 구석구석 벅적거리고
있었다.



“ 간단한 모임이야. 오랜만에 네 옆집누나도 오고해서 사촌들까지만 모았어.”



소란스런 분위기에 미간을 찌푸리는 아들에게 모친은 귓속말로 재빨리 설명을 해준다. 가족 모임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아들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러들인 일에 모친은 미안해하고 있었다.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재원은 거실 한가운데 소파에 앉아 음식을 끄적인다. 할아버지께는 간단한 인사만 했고 세
쌍의 작은 아버지 내외나 고모들 내외에게는 따로이 인사 없이 앉아 있었다.



“ 재원. 오랜만이군.” 사촌 형 정원이 와인 잔을 들고 그의 옆으로 앉는다.



“ 어때. 잘돼가?”


교만한 웃음을 띠고 거만한 눈 꼬리에 힘을 준 정원은 재원의 못마땅한 표정에서 어떤 정보라도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 아직 보고 없었잖아. 그럼 그다지 잘 돼가지 못한 다는 걸 알면서 뭘 물어?”



끼적거리던 포크를 손에서 놓은 재원이 물 컵에 손을 가져간다. 그리고 저 만치 멀리서 그를 보고 있는 또 다른
사촌 형제들과 눈이 마주쳤다.

나이로 따지자면 사촌 형제들 중 제일 막내인 재원이었지만, GH 그룹의 장손인 그였다. 그렇기에 사촌 형제들은
철이 들기도 전부터 라이벌 이었지 결코 가족은 될 수 없는 존재들 이었다.

그룹의 명예 총수인 할아버지의 이번 시험대를 그가 통과한다면 앞으로 그룹의 지배구조가 어떻게 달라질지 그들은
나름대로 짐작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 여지껏 그러고 있단 말야? 그래도 뭔가 진행사항이 있을 거 아냐! ”



“ 없어. 아직 없으니까 형은 잠자코 있어 줄래? 뭔가가 진행되면 보고 하지 말래도 할테니까, 긁지마.”



재원은 이제 점점 신경에 날이 곤두서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모임이 정말로 싫다. 쓸데없이 감정의 소모전을
일으키는 이런 시간들 속에 있는 것은 무가치한 일이었다.


“ 드르르르륵”



정원이 뭔가 다른 말을 또 꺼내려 할 때 마침 재원의 휴대폰이 몸을 떨어댔다. 그는 재빨리 정원의 옆에서 일어나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가로 갔다.



[ 윤석이?]



전화기 반대편에서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묻힌 윤석의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안 들려. 좀 조용한데 가서 얘기해 봐.]



재원은 창문을 문을 열고 정원을 향해 난 발코니로 나간다. 잔디에서 축축하게 젖은 흙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 이젠 들려? 화장실로 왔는데 ]



[ 그래. 이제 좀 들린다. 근데 거기 어디야? 뭐가 그렇게 쿵쿵거리는 거냐?]



재원은 언짢은 자리를 피하게 해준 윤석의 전화에 감사하며 물었다.




[ 여기 XX호텔 나이트 클럽이야. 알지? 영동대교 건너서 바로 있는.]




[ 글쎄. 그런데 그건 왜?]




[ 너 지금 여기로 안 올래? ]




[ 나 가희동에 와 있어. 무슨 일인데? ]



[ 그래? 그럼 빠져나오기 힘든거야?]




[ 힘들지야 않겠지만, 좀 그렇긴 하지. 가족 모임인데.......빠지고 클럽에 간다는 건 좀 우습잖아. 내가 애들도
아니고.]




[ 그러냐? 흐음~ 그렇단 말이지!]




[ 왜 그래? 사람 궁금하게 왜 말을 후려?]




[ 뭐 별건 아니고. 난 부킹이나 좀 해보려고 왔는데........물이 진짜 좋거든. 야! 기집애들 다 빵빵하고, 예쁘고
그런데........그런데 그 중에 헤라 씨가 있다.]



재원을 떠보려는 말투! 그리고 약이라도 올리려는 듯 윤석의 어감은 미묘한 흔들림으로 그 끝을 높이고 있었다.



[ 방금.......헤라라고 했냐? ]



하지만 친구의 말투가 그러거나 말거나 재원의 귀에 꽂히는 말은 헤라라는 이름 뿐 이었다.


[ 응. 와! 춤 진짜 끝내주게 추더라. 클럽 안에 있는 새끼들이 다 뻑 간 거 알지! 지난번 무주에서 그 친구랑 같이
온 모양인데. 다른 놈들이 하도 집적대서 그 친구 혼자 감당이 안 되는 것 같더라. ]




[ ........ ]




[ 어때? 올래? 네가 안 오면 집적대는 놈들 그 친구 혼자 어떻게 도저히 못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냐?]




윤석은 재원에게 그물을 치고 있었다. 친구 녀석의 감정 상태가 어떤지 그는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 보고하지
않아도 될 상황을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 야.......재원아! 얌마? ]




[ 정확히 어디야? 클럽 이름하고 위치 제대로 말해 봐.]



재원은 낮고 위험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윤석은 괜한 짓 한 게 아닌가 하는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가 아직 담소가 한참인 가족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현관을 나서려 하는 찰나, 고종 사촌 하나가 다가왔다.


“ 너 어제 외숙모님하고 안성에 다녀왔다며?”


재원은 나이차이가 열 살이나 위인 그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 야.......양심도 없냐? 거길 외숙모님아랑 같이 다녀오게?



안성은 문중의 조상 모두가 묻혀 있는 곳이다. 그런 그곳에 모친과 함께 다녀온 일을 그가 어째서 트집을 잡는 지
재원은 알고 있었지만, 그 속셈정도는 역시 뻔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재원 이었다.



“ .......나이 값이나 하시오. 길재 형님. 아무리 그딴 소리 지껄여도 이 집안 장손이 나란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말이야.”



그러기에 그는 고종사촌의 얼굴은 상대도 하지 않고, 그 나이에 어린 사촌에게 유치한 상처나 내려 하는 사촌을 한
마디로 뭉개 버린다.

그리고 그 길로, 사촌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는지 허옇게 변했는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족애 따위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그 거지같은 가족모임을 빠져 나왔다.



재원은 헤라에게 가는 이 길에 그녀만을 생각하려 애 쓰고 있다. 자신을 라이벌로만 여기고 그런 식으로만 대하는,
모친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의 생각에서 벗어나려.......그리고 오늘 또 그 존재를 인정해야하는 이름‘ 이 영 란’을
지우려....... 그는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물이 좋다는 강남XX호텔의 나이트클럽, 재원의 벤츠 C클래스가 그 앞에 서자 웨이터 둘이
경쟁이라도 하는 듯 그에게로 뛰어 왔다.



“ 신 윤 석이 찾는데.......어디 있는지 알죠?”



그가 윤석의 이름을 대자 둘 중 키가 더 작은 웨이터가 반가움을 감추지 않고 그를 클럽 안으로 안내 했다.

척 보기만 해도 몇 십만 원을 호가 할 것 같은 세련된 헐렁한 청바지에 하늘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명품 셔츠를
입고 번쩍이는 명품 시계를 한 눈엔 알아본 여자들의 시선이 재원을 쫓았다.



“ 어!!!!! 너 날라 왔냐? 어떻게 가희동에서 여기까지 20 분 만에 주파를 한거야?”



그를 보자마자 윤석이 커다란 덩치를 일으키며 그를 맞는다. 하지만 쿵쾅대는 음악소리에 윤석의 말은 거의
들리지가 않았다.



“ 어딨어?”



재원이 윤석의 귀에 대고 소리친다. 그러자 그는 다 알겠다는 웃음을 지며 눈으로 스테이지 중앙을 가리킨다.

남색인지 검정색인지 하여간 현란한 조명에 정확히 구분이 안가는 타이트 하고 조금은 길이가 짧은 정장 스커트에
흰색 남방을 입은 헤라가 주변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조명 못지않은 현란하고 유연한 동작으로 그
매혹적이고 환상적인 몸을 흔들고 있었다.

허리까지 닿는 긴 머리가 출렁이고 무아지경에 이른 표정으로 귀가 터질 듯 울려대는 음악에 몸을 맡긴 그녀는
삼바를 추는 정열적인 그라우나의 검은 날개를 가진 브라질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 보이냐? 여기 있는 새끼들 전부. 헤라 씨한테 눈을 못 떼!”


그녀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어둡고 심상치 않은 눈빛을 한 재원이 자리에 몸을 앉혔다. 가히 기록적인 시간으로
이곳까지 달려온 그의 반응 치고는 좀 이상한 행동 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술잔에 얼음을 채우고 위스키를 부은 그는 등을 의자에 기대며 천천히 술을 들이킨다. 눈은 아직
헤라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표정엔 감추지 못한 뜨거운 무언가가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그 뜨거움은 그리 밝아 보이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테크노 댄스곡과 라틴 댄스곡 등 세 곡이 끝나고 끈적거리고 느린 음악이 나오자 스테이지 위에서 광란의 몸짓을
해대던 사람들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헤라도 재원의 시선을 알지도 못한 채로 그와 5미터쯤 떨어진 벽 쪽의 자리로 가 앉았다. 같은 테이블엔 윤석이
말한 대로 고 석 준이 앉아 있었고 고 석 준 의 옆자리엔 연주가 앉아 있었다.



“ 아~ 저 왕공주도 같이 왔더라. 셋이 굉장히 친해 보이던데. 알고 있었냐?”



윤석은 일부러 연주의 동행은 말하지 않았다. 그래야 재원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올 것이라 계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원은 그녀에게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술잔만 비운다. 5월의 우울함을 그가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
윤석은 그가 딴 곳으로 정신을 주길 바랐다.

즉 헤라에게로. 그래서 그물을 치고 그를 불러낸 것인데.......질투라는 그물에 걸려들어 그 우울함을 날려 보내길
바라고 말이다.

남자 서넛이 그녀의 테이블로 접근했다. 그 중 가장 눈에 틔는 녀석!



“ 어라~ 저 자식 XX 건설 그 망나니 아니냐?”



윤석이 먼저 헤라의 손목을 잡는 녀석을 알아 봤다. 그리고 주변엔 있는 똘마니 친구들 두명이 헤라에게 손을 대는
녀석을 제지하기위해 일어서는 석준 옆에 앉는다.


“ 뭐야? 저 자식.......헤라 씨한테 눈독들이고 있었던 모양이네.”



윤석은 흘끔 재원의 반응을 살핀다. 그의 눈은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번뜩이고 있었다.

실랑이를 벌이는 헤라와 XX건설의 망나니는 무조건 헤라의 손목을 잡아끌고 있었고 석준과 연주는 다른 두
똘마니들에 의해 제지 되고 있었다.
그러다, 계속 해서 자신의 손목을 억지로 잡아끄는 XX의 망나니를 향해 드디어! 역시나! 헤라의 손이 그 뺨을
후려친다.

그 파워! 맞아보진 않았지만 헤라의 파워를 아는 재원은 명도의 망나니 뺨이 얼마나 얼얼할지 상상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거기서 마무리 될 리는 없었고, 뺨을 맞은 망나니는 헤라를 거칠게 잡아끌고 다른 한손에 주먹을 쥐어
그녀를 향해 올린다.

그리고 거기까지 지켜보고만 있던 재원이 의자에서 일어나 그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 손 놔! 새끼야.”



올려진 망나니의 팔을 붙들고 재원이 낮게 그러나 무서운 눈을 하고 말했다. 일명 ‘로얄 블루 클럽’의 같은 회원인
망나니가 재원을 알아보지 못 할리 없었다.

그러나 그도 재원 못지않은 싸가지!



“ 상관하지 마슈. 여긴 내 홈그라운드야.”



헤라의 팔목에 하얗게 되도록 손에 힘을 주고 있는 녀석은 턱을 들어올리며 건방을 떨었다.


“ 덤비냐? 이 여잔 내 여자야. 그러니까 말로 할 때 손떼라.”



그리고 그녀는 재원이 어떻게 이곳에 와 있는지 놀라느라 두 사람의 대화는 들리지도 않고 있었다.




“ 내가 먼저 찜 했어. 나중에 와서 무슨 소리야?”




“ 이 난장판에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내 여자라는 얘기야. 새끼야. 못 알아들어?”




“ .........재원 씨.”



짧게 오고가는 대화. 망나니 녀석은 재원의 이름을 부르는 헤라를 돌아보며 현 상황을 파악해보려 하고 있었지만
이미 술이 오를 만큼 올라있는 녀석은 쉬이 물러나지 않는다.




“ 당신 여잔데! 왜 이런 놀자 판에 다른 자식이랑 오냐?”



그리고 말을 꼰다. 그 말이 재원을 더욱 열 받게 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녀석은 지껄이고 만 것이다.



“ 그게! 나도 지금 열 받고 있는 일이거든. 근데 네 녀석이 다시 한번 확인 시켜주니까 나 확 돌아 버리겠는
것.......아냐?”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재원의 주먹이 녀석의 명치를 가차 없이 쳐버렸다. 윤석은 어둡게 빛나던 재원의 눈이 불안하던
이유를 알았다.

재원은 이미 이곳에 오기 전, 가희동에서부터 기분이 상해있었던 것이다.

망나니 녀석이 헤라의 잡고 있던 손목을 놓고 배를 움켜쥔다. 헤라는 입만 벌리고 놀란 눈으로 재원과 배를 움켜진
녀석을 번갈아 보며 당황해 하고 있었다. 재원이 그녀의 손을 거칠게 잡아 발길을 돌린다.

하지만 한대 맞고 물러설 XX건설의 망나니가 아니었다. 돌아선 재원을 향해 녀석이 달라 들고 순식간에 테이블
위는 난장판이 됐다.

헤라는 윤석에게 어떻게 좀 말려 보라며 그를 떠밀었지만 그는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술에 잔뜩 취한
그 망나니 녀석은 재원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헌데 이상하게도 윤석 뿐 아니라 다른 누구도 그 두 사람을 말리는
이가 없었다.



“ 헉~~~헉~~~~이봐 황태자 양반!~~~~자기 여자면........단속 잘해. 쿨럭~쿨럭~”



재원이 망나니 녀석의 깔고 앉아 휘두르던 쥐먹을 공중에서 멈추자 녀석이 터진 입으로 말을 했다.



“ 하~~~~하~~~입 다물어. 진짜 죽여 버리기 전에.”



그러자 재원도 녀석처럼 숨을 몰아쉬며 성이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로 녀석을 협박한다.



“ 가자 임마! 니들 때문에 여기 분위기 썰렁해 지기 일보직전 이다.”


윤석은 주먹이 멈춘 그의 팔을 잡아당겨 일으킨 다음 망나니 녀석도 같이 일으켜 세웠다.



“ 스캔들 된다. 니들 이러는 거! 그러니 이제 각자 갈 길로 나가는 거야. 너도 알아들었지? 재원이 더 건드려봐야
너만 손해나. 주둥이 다물고 가만있어라.”



아직 씩씩거리는 숨을 내쉬는 망나니 녀석에게 으름장을 놓은 윤석은 재원의 등을 떠민다. 그리고 헤라에게도 따라
나오라는 눈짓을 했다.

나이트클럽 밖으로 나온 세 사람은 아직 클럽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대기 중인 사람들을 뚫고 나와 호텔 건물
맞은편 인도의 턱에 걸터앉았다.


헤라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앞뒤 상황 그 무엇도 파악이 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재원의
입가에 흐르는 피가 신경 쓰일 뿐 이었다.



“ 어디 봐요. 입술이 터졌어.”



재원의 얼굴을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고 손가락으로 그의 터진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 그렇게 치고 박고 할 필요는 없었잖아. 왜 그랬어요? 도대체.”



그리고 동생을 나무라듯 그를 나무랐다.



“ 네가 이딴 곳에 와서 그렇게 까불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 없었어.”


하지만 꾸중을 듣는 재원은 퉁퉁맞은 소리로 그녀를 탓한다.



“ 나 혼자서도 해결 할 수 있었어요. 재원 씨가 그렇게 껴들지 않아도.”



그 망나니 녀석이 어떤 족속인지 알 턱이 없는 헤라가 그의 말을 받아 쳤다. 눈은 여전히 재원의 그 잘난 얼굴에
상처가 난걸 속상해 하면서 말이다.



“ 그 새끼, 네 힘으로 감당 할 수 있는 놈이 아냐. 물정이나 알고 그딴 소리해라. 진 헤 라.”


“ 잔소리 그만 하구요.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윤석 씨랑 같이 온 거였어요?”



그녀는 클럽에 들어서자마자 사실은 윤석을 봤다. 하지만 다른 남자랑 온 이상 아는 척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인사를 하지 않고 그냥 즐기고 있었다.



“ 아냐.......난 이런데서 안 놀아.”



바닥에 피가 고인 침을 뱉으며 그가 중얼댔다. 재원의 심사가 어긋나 있는 거라 확신한 그녀는 오늘 그의 행동이
전혀 그답지 않다 생각했다.

불끈거리는 성미의 그 이긴 하지만 언제나 이성적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재원이라는 걸 헤라는 안다.

몇 번이나 그가 원하는 그 곳까지 갈 기회가 있었지만 헤라가 갖은 핑계를 대 거부 할 때마다 본능까지 통제하는,
이성이 감성을 압도 할 수 있는 그런 남자라 그녀는 재원을 평가 하고 있었다.




“ 그럼 어떻게 온 거예요?”



“ 열 받아서 왔다. 내 여자를 다른 놈들이 집적거린다고 그러기에. 머리꼭지가 확 하니 돌아버려서 집안 모임도
재껴두고 달려 왔어. 됐냐?”



아까 클럽 안에서처럼 그는 헤라를 자기 여자라 말하고 있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부는, 하지만 지나가는 차가
매연을 뿜어내며 가는 길바닥에 주저앉은 그가 시선은 바닥에 준채로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 내가.......재원 씨 여자 에요?”



묘한 설렘이 헤라의 가슴에 파도를 일렁인다. 소유! 그가 자신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는 그 말에 그녀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소유란.......행복과 불행의 엇갈림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을 이기적이게 만드는 감정인 동시에 헌신하게 만드는 그런
감정이라고 헤라는 믿고 있었다.

그리고 특별한 사람에게만 가질 수 있는 그런 감정의 한 형태라고.




26.




“ 연주 씨.......우리 작전이 성공인 것 같지? 뭐 약간의 불상사가 있기는 했지만 별로 다치지는 않았으니까.
성공인거야. 그치!?”



윤석의 말을 들으며 연주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길 건너편 인도에 쭈그려 앉아 있는 헤라와 재원을 보고 있었다.



“ 네. 그런 것 같네요.”



저녁을 먹고 있을 때 헤라로부터 전화를 받고 나가던 연주는 차에 시동을 거는 차에 윤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무주에서 그녀를 업고 내려왔던 그에게 연주가 감사의 표시로 언제한번 밥을 사겠다고 얘길 했었는데,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던 윤석이 먼저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헤라와 석준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합석 하면 어떻겠느냐는 연주에 제의에 그는 기꺼이 승낙을 했고, 헤라와
석준 보다 먼저 만난 윤석이 요즘 재원이 우울한데 헤라를 만나면 밝아지는 것 같다며 장난 아닌 장난을 꾸미는
그의 계획에 연주가 동참 했던 것이다.

물론 연주의 의도는 재원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한 동참 이었지만 그녀는 지금 죽 쑤어서 개한테 준 기분이 되어
있었다.



“ 헤라 씨 술 별로 안 했지?”


써 놓은 죽을 아까운 듯 바라보고 있는 연주에게 윤석이 다시 묻는다.



“ 음~ 별로 안 했을 걸요. 왜요?”



“ 그럼 재원이랑 같이 보내게. 우린 석준 씨랑 같이 다른데 가서 한잔 씩 더 하고. 어때?”


그의 제안에 연주도 석준도 대답을 하지 않았고 윤석은 그런 두 사람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석준은 재원과 헤라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끌리고 있다는 것에 질투 반 걱정 반이 섞여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옮기지 못했다.

재원이 만약 헤라가 자신을 MTN과 이어주려는 헤드헌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어떻게 될지,

그리고 헤라는 그의 이적을 막으려 하는 GH 그룹 내의 간부가 재원이란 걸 알게 된다면! 정말이지.......모든 사실을
움켜쥐고 있는 자신이 어떤 처신을 해야 할지 석준은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처신.......오늘 그에게는 두 가지 일에 대한 처신을 정해야 할 일이 생겨 버린 것이다.



“ 가요 그럼........”



연주가 윤석의 팔을 끌어 차를 세워둔 주차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헤라는 친구다.......초등학교 때부터 항상 왕따였던 그녀의 곁을, 대학교 대학학교 까지 같이 다니며 친구라는
자리를 지켜준 진짜 단 하나의 친구!

그러나 자신의 지적이고 청초한 미모를 따라오지 못한다 생각하는데, 어째서인지 늘 남자들의 관심을 받는 건 헤라!
그래서 은근히 질투하는 그런 친구!

경쟁심을 느끼면서도 그녀가 행복해 지길 바라는 친구! 연주와 헤라는 그런 친구였다.

하지만.......정말 걱정은, 재원이라는 저 남자가 헤라는 도저히 넘볼 수 있는 그런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두 사람이 아무리 사랑해도 신분 아니아니, 세상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그의 집안과 헤게모니라는 단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그녀의 집안은 차이가 나도 너무 심하게 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가 없었다.


차라리.......자기였다면.......현역 구청장인 아버지와 비록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기는 했지만 그래도 돈이라도 있는
집! 영양인 자기였다면.......일말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을 왜! 왜? 어찌 하야! 저 정 재원 이란 인간이 진 헤 라
에게 센세이션이 맺혀 버린 것인지 연주는 맘속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자신의 여자냐고 묻는 헤라의 얼굴을 바로보지 못한 재원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들을 집어 지나가는 차를
향해 던지고 있었다.

지금 던지는 돌멩이처럼, 장난으로 시작한 그녀와의 만남이 자꾸만 이어지고 사귀자는 말을 해버리고.......그리고
이젠 단순히 그녀의 육체만을 원하는 것이 아닌 그녀의 마음을 원하고 있는 자신이 재원은 당황스러웠다.

어떤 여자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생각도 노력도 해보지 않고 살아온 그다. 마음을 꼭꼭 닫은 채로 열정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일상의 모든 것들을 내팽개쳐버리게 만드는, 일상의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 열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던 그는 마음을 닫아 두었었다.



“ 일어나요. 집에 가야지........재원 씨 어제도 잠 거의 못 잤잖아요. 나 때문에.”



그럼에도.......그녀가 그 마음을 열고 싶게 만든다. 그래서 그녀를 마음속에 들여놓고 한번도 드러내지 않은 열정을
그녀에게 쏟아버리고 싶게 하고 있었다.



“ 너.......내가 사귀자고 했을 때, 그때........그렇게 하자고 대답한 거! 네가 날 좋아한다고....... 그래서 너도
사귀자는데 동의 한거라고....... 그렇게 믿어도 되냐?”


재원은 확인이 필요했다. 마음을 연다면 그녀가 그 속으로 발을 들여놔 줄 것인지! 한번도 누군가에게 그런 일을
원한적도 허락한 적도 없는 그였기에 두려웠고 그래서 확인을 하고 싶었다.



“ 만약에.......그런 맘 없이, 그냥, 그냥 즐기자고, 심심했으니까 만나보는 것도 괜찮다고 그런 생각에서 동의 한
거라면.”



하지만 재원은 이런 자신이 정말 우스웠다. 이거야말로 그녀에게 매달리는 꼴이 아닌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그가!
직업도 집안도 나이도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에게.......좋아해 달라고 조르는 꼴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 재원 씨답지 않네. 오늘은 정말!”



그도 그렇게 꺼내놓은 얘기에 마무리 할만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차에 마침 헤라가 말을 끊었다.



“ 왕 싸가지 정 재 원 은 어디가고, 길 잃은 강아지 같은 말을 하고 있어요?”



건방지고.......하늘아래 자기만 사람인 양 굴던 그가........헤라에게 마음을 청하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안다.



“ 됐어. 못 들은 걸로 해. 일어나 가자.”



그녀가 대답을 피하자 재원도 말을 맺는다. 그가 걸터앉아 있던 인도에서 일어나 헤라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순간........현기증이 난 그녀. 비틀! 했다.




“ 뭐야? 어지러워?”



재빠른 동작으로 헤라의 어깨를 잡아 쓰러지려는 그녀를 부축한 재원이 걱정이 잔뜩 베인 말투를 한다.




“ 으응~ 조금.......아무래도 행사 중이라 그런가 봐요. 거기다 어젠 열도 있었고......”



“ 아아.”



이번엔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인지 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재원과 헤라가 몸을 돌려 영동대교 쪽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길, 클럽에서 광란의 몸짓을 마친 사람들이 각자 짝을 지어 나온다.

나이트클럽이 있는 그 호텔로 들어가는 서두른 코스를 밟는 커플도 있었고, 단란주점이나 노래방 같은 곳으로
2차를 가는 절차를 밟는 커플들도 있었다. 그리고 부킹에 성공하지 못한 외로운 이들도 그들끼리 어디론 가로 간다.


오늘도 술을 마신 재원은 대리운전을 불렀다. 그의 벤츠 C 클래스 앞에 서서 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 오늘은 푹 좀 자라.......오늘 새벽까지 열이 오르락내리락 한 사람이.......그렇게 광란의 발작을 해대니 어지러운
거 아냐!”



그리고 차에 몸을 기대어 서있던 재원은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헤라에게 퉁명스런 걱정을 던졌다.



“ 남이사! 그게 내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에요. 상관 마.”




“ 어떻게 상관 안 해? 네가 아프면 고달픈 건 난데.”




“ 내가 아픈데 왜 그쪽이 고달파요? 내가 맨 날 간호해 달랬어요?”




“ 말을 못 알아들어.......걱정 되잖아. 만나지도 못하고.”




퉁퉁대고 있었지만 재원은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매끈하고 아름다운 선의 벤츠 C클래스에 기대 선 그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헤라는 이 최고급 승용차보다 그가 훨씬
품위 있고 격조 있는 남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사람.......절대 졸부의 아들 따위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냥 평범한 회사원 일리는 없고, 뭘 하는 사람일까? 벤처
기업의 CEO 쯤 되는 건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재원의 직업이 궁금해진다. 물어볼까? 물어봐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사이인데 그녀는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유는.......그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면! 그녀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솔직히 헤라는 겁이 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음악의 소음이 있었지만 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재원과 치고받던 녀석이 그를 황태자 라 칭하던 소리를!


대리운전 기사가 오고 재원과 헤라의 그의 차 뒷좌석에 같이 몸을 실었다. 그는 좀 전부터 오른 손을 주무르고 있다.



“ 아파요? 이리 줘봐.”



클럽에서의 주먹다짐으로 인해 그의 주먹 어딘가가 엇 나기라도 했다면 헤라는 석준과 나이트클럽에 온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 아야! 아파.......누르지 말라구.”




정말로 아픈지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오른손을 빼버린다. 주먹질을 해본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할 만큼 그는 싸움과는 담을 쌓고 산 사람이다.

뭐든 말로.......혹은 돈으로 다 해결을 보지! 폭력은 쓰지 않는 주의였다. 그런 재원이 순간 눈이 돌아가 주먹을
휘둘려 버린 것이다.

헤라의 휴대폰이 울리자 재원이 못마땅한 눈초리를 한다.



[ 어! 석준 이구나.]



[ 어디니? 집에 가는 길이야?]



[ 응. 넌 연주랑 같이 있어? ]



[ 연주랑 윤석 씨랑 한잔 씩 더 하러 왔어.]



[ 그렇구나! 일찍 들어가. 넘 많이 마시지 말고.]



[ 그래 알았어. 근데......너 혹시 지금 그 사람하고 같이 있니? 정 재 원......]




[ 어?.......어.]




[ 음........그래. 조심해서 들어가고, 내일 다시전화 할게. 며칠 안에 또 보자.]



[ 알았어. 전화 할게. 음.......끊어.]



석준과 잠깐의 통화 동안 재원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상당히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란 건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헤라는
석준과의 통화를 간단히 끝내려 노력을 했다.



“ 야.......이제부터, 만날 때마다 하나씩만 묻자. 너무 한꺼번엔 물으면 기억하기도 나쁘고 그러니까. 너랑 나랑
각자에게 서로에 대해 한가지씩만 질문 하는 거야. 어때?”


갑자기 그가.......무슨 계산에서인지 제안을 한다. 헤라와 재원이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늘 마치 무슨
비즈니스라도 하는 듯이 타협하고 협상을 하고 있었다.



“ ........ ”



그러나 헤라는 주차장에서부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그의
제안에 대답 없이 재원을 자세히 보기 위해 그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다.

어떤 여자의 시선이든 한번에 휘어잡을 수 있는 그 잘난 얼굴에 난, 입술의 검붉은 딱지와 살짝 부어오른 단정한
왼쪽 턱.......

그리고 숱이 많은 오른쪽 눈썹 속에 난 0.5 미리 가량의 상처.......말끔하고 세련된 그의 얼굴과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상처들이 거만하고 싸가지 없는 그에게 이상스럽게도 무척이나 잘 어울리고 있었다.




“ 무안해! 또 그렇게 쳐다보지 너!”



그가 자신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예전의 몇 번처럼 또 다시 자신의 얼굴을 뜯어보는 시선에 불편함을
느끼며 툴툴거린다.




“ 여기.......찢어 졌어. 상처 남겠다.”




그러나 헤라는 그의 말은 여전히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눈썹 속에 난 상처에 손가락을 대본다. 그리고는 그 위에
살짝 콩 입술을 가져다 댔다.


보드랍고 따뜻한 그녀의 입술에 눈썹에 닿자 재원은 움찔 한다. 몇 번 인가의 진한 키스를 나눠 본
그녀였지만.......지금 건 느낌이 달랐다.

운전을 하던 대리운전 기사가 백미러로 힐끔거리며 두 사람을 훔쳐보고 있지만 헤라는 그런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시하고 있는 것인지! 재원의 얼굴에서 시선도 손도 떼지 않고 그의 가지런한 눈썹을
쓰다듬고 있었다.




“ 너.......내가 너한테 묻는 거 싫어? 너에 대해서 알려고 드는 게 부담스러워서 피하려고 이러는 거야?”




아니.......재원의 생각은 틀렸다. 헤라는 자신에 대해 그에게 말하는 것이 두렵지도 싫지도 않다. 뭐 쪽팔리는
일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딱히 숨길만한 일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얘기를 하면 그녀도 그만큼 재원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런데.......알고 싶지않다. 왠지 어마어마할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드는 그의 집안. 배경. 그의 학벌, 그리고 정 재 원 이란 남자 자체!

알게 되면 주눅 들고 졸아들어 그 곁에 있지 못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고 있었다.



“ 집에 들어가면서 약 좀 사가요. 상처에 바르는 연고하고, 얼음찜질 팩.”



동문서답을 한다. 그가 어떻게 생각을 하던 우선은 피하고 싶었다. 재원에 대해 알게 되는 일을 미루고 싶었다.



불어난 턱을 만지는 헤라의 차가와진 손을 잡아 내리며 재원은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눈과 마주하려 애쓴다.



“ 날 봐. 너 답지 않게 시선 따위 피하지 말고, 나 랑 눈 좀 맞춰봐. 진 헤 라.”



그리고 그녀의 시선을 붙들려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플 정도로!



“ 진지하게 그러지 말아요. 부담스러워. 어차피 시작부터가 우린 진지라곤 눈곱만큼도 없었잖아. 게다가 재원
씨한테는 민 수 연이라는 여자도 있고.”



아프게 잡혀진 손을 비틀어 빼내며 헤라는 부드럽게 달리는 벤츠의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으며 그녀는 그 마음이 얼굴에 나타날까봐 표정을 숨긴다.

둘 사이에 처음으로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이 오랜 시간 흘렀다.


헤라는 잠실의 새엄마 집으로 왔다. 새엄마가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이미 다 가지고 잠실로 옮겼다기에 그녀는 내일 이면
비워줄 역삼동 집엔 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 집.......옮긴 거야?”



그녀가 내리고 재원이 따라 내리며 아파트 안을 휘 하니 돌아본다. 지어진지 20년이 넘은 아파트엔 아름드리의
커다란 플라타너스와 느티나무가 상쾌한 밤공기를 내 뿜고 있었다.



“ 으음.......그렇게 됐어요. 새엄마 집이야. 여긴.”



손에 든 가방 끈을 손톱으로 긁으면서 헤라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연두색 셀로판지를 씌워놓은 것 같은
플라타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부어오른 왼쪽 턱처럼 역시 살짝 붉어진 재원의 손등에 다시 한번 눈을 준 헤라는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싶은 욕망을 누르며 잠시 그와 마주서 있는다.

차 안에서부터의 침묵처럼.......이렇게 서로가 어색해보기 또한 처음이었다. 하물며 처음 만나 대판 싸우던 날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 들어가라. 내일 전화 할게.”



그러면서도 오래된 연인처럼 그는 익숙하게 내일 전화 한다 말을 했다. 헤라는 보일 듯 말 듯 한 웃음을 남기고
재원에게 먼저 등을 보였다.

아파트 건물의 입구로 들어설 때 쯤 등 뒤에서 그의 차가 부드러운 엔진 소리를 내고 그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 후~~”


한숨을 크게 한번 쉰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고 그녀는 올라탔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휴대폰이 또 울린다.
현재 시각은 11시 반. 늦은 시간인데 이름이 뜨지 않는 번호는 재원의 번호가 아니었다.



[ 네. 진 헤 라입니다.]



[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MTN 송 석 훈입니다.]



송 상무?



[ 아.......네 송 상무 님! 이런 시간에 무슨 일로?]




[ 자고 있었나요? 그렇담 실례 했어요.]



[ 아뇨. 아직 잠자리에 들지는 않았습니다만, 늦기는 했네요.]




[ 하하! 미안해요. 다시 사과 하죠.]




[ 네. 그런데.......용건이.]



11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서고 헤라는 그 안에서 내려 아파트의 복도를 쭉 걸어간다. 멀리 롯데 월드의 관람차
불빛이 아스라이 보이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 혹시 내일 오후에 스케줄이 어떤지 물으려구요.]



내 스케줄을? 헤라는 그의 의도가 뭔지 생각을 해보지만 이렇다 할 만하게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 제 스케줄은 왜 물으시나요?]



그녀는 성격답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 내일 점심시간 이후를 나한테 좀 내줬으면 하구요.]



그도 굳이 말을 돌리지 않았다.




[ 무슨 일 때문인지 먼저 알면 안 될까요?]



경계해야 했다. 그는 위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데이트 신청! 그냥 그렇게 말해 두죠. 어때요? 안되겠어요?]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송 상무와 난 엄연한 비즈니스 상의 관계이며 그는 의뢰인이고 난
수주자다. 그런 사이에 데이트란.......도대체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헤라는 머리가 빙빙 돈다.



[ 내일 오후 12 이후로 한 번 더 전화를 주시겠습니까? 스케줄은 확인을 해봐야하기 때문에 지금 바로 대답을 해들
릴 수가 없는데요.]


시간이 필요 했다. 물론 석훈도 그녀의 의도를 안다.



[ 좋아요. 그럼 정확히 12시 20 분에 다시 전화 하겠습니다.]



[ 네. 기다리지요.]



[ 그럼.]




전화를 끊고 헤라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새엄마의 집 앞 복도에 한참을 서 있었다.

송 석 훈! 우리나라에서 재벌 순위 10 안에 드는 MTN 그룹의 상무이사! 그런 지위의 그와 재원이 확실하게 친구는
아니지만, 서로가 아는 사이인건 분명 했다.

그저 얼굴만 아는 사이가 아니라.......무언지 경쟁심 내지는 서로를 탐색하는 것 같기도 한.......그런 느낌이 드는
관계. 그렇다는 건, 재원 역시 송 석 훈 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공식, 물론 공식이다. 어디까지나.......추측 짐작 이란 말이다. 졸부도 싫고 백수건달도 싫지만........감당 할 수 없는
남자는 정말이지 젠장 이다.

심각하게 생각지 말자! 그가 뭐건 간에 심각해지지 말자 오늘처럼! 내가 매사에 이렇게 심각하게 굴었다면 난 벌써
여기 11층에서 열두 번도 더 몸을 날렸을 것이다.

진 헤 라 넌 인생을 심각하게 살지 말고, 낙천적으로 살기고 결심 했잖니! 벌써 12살 때부터........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새엄마의 집으로 들어갔다.





26.


“ 왔니? 늦었네.”



문을 열어주며 그녀를 맞은 사람은 큰언니 헤림 이었다. 불과 2주 사이에 살이 몇 킬로그램이 빠졌는지 언니의
얼굴은 볼이 푹 패여 수척이란 말로는 표현이 다 되지 않는 몰골 이었다.



“ 아직 다들 안 잤어?”



구두를 벗고 거실로 들어서며 헤라는 거실의 낮은 탁자에 모여 앉아 있는 가족들을 둘러 봤다.

새엄마에게 시선이 먼저가고 그 무릎에 앉아있는 조카 지민과 헤미 그리고.......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 형부?
가 같이 앉아 있었다.

순간 헤라의 오만상이 찌푸려지고 꼭 다문 입술 사이로 욕이 세어 나온다.



“ 지랄.”



그녀는 인사도 없이 현관 옆의 문간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적어도 한 달간은 지내야 할 방 안에 들어선
그녀는 다시 한번 욕지거리가 나와 버렸다.


“ 어후! 젠장!”



헤미의 짐과 헤라의 짐으로 가득 차 버린 그 방은 몸 하나 제대로 뉘일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핸드백을
신경질 적으로 집어 던지고 거실로 쿵쿵거리며 나온다.



“ 도대체 잠은 어디서 자라는 거야?”



그리고는 소리를 쳐댄다.



“ 소리치지 마. 잠은 거실에서 자면 돼.”



“ 거실에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집안에 남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저 형부라는 사람이 떡 하니 버티고
있는데! 거실에서 있는 대로 다 껴입고 그 것도 바닥에서 헤미 언니랑 부딪히며 잠을 자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큰 언니 헤림의 거실에서 자라는 말에 열이 뻗힐 대로 뻗힌 그녀는 고래고개 소리를 질러 댔다.



“ 그럼 어떻게 해? 형부 보고 거실에서 자라고 하고 너랑 헤미가 우리 방에서 잘래?”



물론 그것도 싫었다. 좁은 방에서 다 큰 여자 셋이 올망졸망 몸을 부디끼며 어떻게 잠을 잔단 말인가! 하지만 헤림
언니의 말 속엔 형부를 거실로 내몰 수는 없다는 어감이 섞여 있는 지라 헤라는 더욱 기가 막히고 열이 솟았다.



“ 도대체 왜 벌써 나온 거야? 유치장에서 형무소로 옮긴다고 하지 않았어?”



헤라는 형부가 어떻게 해서 집에 와 있는지부터 알아야 된다고 생각이 들어 소리지를 기를멈추고 물었다.



“ 보석금 내고 빼 왔어. 고소한 사람들 설득해서 고소 취하 시킬 수도 있을 것 같고, 일부라도 변재 하면 집행
유예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헤미 언니가 설명을 한다. 보석금? 그건 만약 형부가 벌금형이라도 받게 되면 그대로 날라가 버리는 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변재를 해 집행유예를 받는다 해도 변재금 또한 헤라나 헤미의 돈이 되는 것이었다.



“ 누가 맘대로? 나한테는 상의도 하지 않고, 왜 다 자기들 맘대로 보석금 내고 저 사람을 데려 왔는데?”



4년 동안 모은 돈 모두를 날리고 빈털터리가 된 그녀는 자신이 왜 형부의 보석금을 내주고 변재를 해주어야 하는지
도무지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 헤라야.......우선 사람은 빼 내고 봐야지. 어디 거가 사람이 있을 데냐?




새엄마가 그녀를 다독거리려 한마디 한다. 그러나 이미 헤라는 가슴이 쿵쾅거리며 흥분을 누르기엔 너무나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 다 똑같애.......그렇게 당하고도 언제나 똑같애. 그럴 가치가 있는 인간과 가치가 없는 인간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 말이 심해. 진 헤 라.”



큰 언니 헤림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헤라를 마주하며 화가 난 듯 낮게 읊조렸다.



“ 언니가 지금 나한테 화를 낼 처지라고 생각해?”



“ 네 돈.......갚아, 전부 갚을 거니까 더 이상은 말 함부로 하지 마.”




“ 하~ 8천만 원을 어떻게 갚을 건데? 무슨 재주로! 몇 년 안에? 난 몇 년 동안 이러고 살아야 하는데? 응?”



“ 어쨌든 갚으면 되잖아!”



“ 돈 달라고 안했어. 내가 원하는 건 저런 쓸모없는 인간이 우리 가족들 앞에서 사라져 주는 거라고. 자기 죄 값을
치르고 정신 차릴 때 까지 보지 않고 사는 것! 내가 원하는 건 그거라고!”



큰 언니의 돈 갚는 다는 소리에 그녀는 하지 않아도 될 말! 하지만 정말 그녀가 원하는 말을 해버렸다.



“ 이 못된 계집애!”



그리고 이어 날라 온 큰 언니 헤림의 손바닥! 철썩! 하는, 다른 가족 모두의 심장을 바닥으로 고꾸라트리는 소리가
거실 안에 울렸다.




“ 당신! 왜 이래?”



그러자 형부가 나서 언니의 손을 붙잡았다. 죄 인 이기에 묵묵히 헤라의 망발을 듣고만 있던 형부였다.



“ 허~ 그래 부부일심동체! 웃겨 정말! 새엄마나 큰 언니나 그렇게 해서 신세를 다 망쳐라! 근데 헤미 언니나 내
신세까지 부스럼 만드는 건 이젠 좀 그만 둬 줄래!?”



언니에게 맞은 뺨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픈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남편이란 존재가 뭔데.......이런
상황에서 그 편을 든단 말인지.......헤라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흥분으로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짐이 가득한 문간방으로 들어가 아무 쇼핑백이나 하나를 비워 그 속에
자신의 정장 두어 벌과 옷가지 몇 개를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 어디 가는겨? 지금이 몇 시인디?”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헤라에게 새엄마가 달려와 나가려는 그녀를 말린다.




“ 난.......저 사람하고 한 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아. 근데.......언니가 저 사람 없이는 못 살겠다니. 내가 나가야지.
저사람 하고 똑같은 아빠 꼴도 보기 싫어서 스무 살에 독립한 나야. 근데.......근데.......갈게 새엄마.”




그녀는 나오려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새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문을 나섰다. 반목! 가족들 간의 반목이 가슴을
짓누른다.

차도 이미 팔아 버렸고.......어디로 가야할지 생각하던 헤라는 연주에게 전화를 했다. 큰 길로 나와 택시 승강장에
앉아서 두 번 세 번 전화를 해보지만 연주는 받지 않는다.





“ 연주야 그만 마셔.”



석준이 연주를 말려보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다. 무엇에 열이 받았는지 그 가녀린 얼굴에 험상궂은 인상을 긋고
술잔을 노려보다 원샷을 하기 10잔 째!

그리고 그런 그녀를 윤석은 빙긋한 웃음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 연주 씨하고는 언제 때부터 아는 사이에요?”




그러다 윤석이 석준에게 물어왔다. 그의 잔에 술을 채우며 한쪽 팔을 테이블에 기대어 비스듬하게 앉은 그는
석준과는 달리 여유로와 보였다.


“ 대학교 동창이에요. 헤라랑 다 같이.”



“ 아~ 그랬구나. 근데 헤라 씨랑 더 친해 보이던데. 착각 인가?”




“ 아무래도.......헤라하고는 잠깐 이지만........사귀었었거든요.”




사귀었다는 그 말에 윤석이 잠깐이지만 의외라는 눈을 해보였다. 하지만 석준은 그 의미를 알수는 없었다.




“ 그랬군요.”



“ 그나저나.......헤라는 정 재 원 본부장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던데. 두 사람 얼마나 가까운 사인지
혹시 아세요?”




그리고 석준이 하는 말에 윤석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 몰라요? 재원이가....... GH 그룹 후계자 라는 걸 모른단 말이에요? 헤라 씨가?”




“ 네. 윤석 씨야 말로 모르셨어요? 전 아시는 줄 알았는데.......본부장님이랑 헤라를 밀어주시는 게 그래서 인줄
알았는데.”




윤석은 머리다 텅 비는 듯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가 보기엔 재원도 헤라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것 같기는
했지만 헤라는 재원이를 알고 있을 거라고 당연히 그럴 것이라 그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아니요.......당연히 아는 줄 알았지요.”



윤석이 따라놓은 술잔을 비우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얼굴을 했다.




“ 정 본부장님이 .......헤라를 진지하게 대하는 건가요?”



석준은 잔을 만지작거리며 윤석에게 물었다. 윤석은 생각하던 얼굴을 돌려 질문을 하는 그를 진지하게 바라봤다.




“ 헤라 씨 아직도 좋아해요?”




“ .......글쎄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잘은 모르겠어요.”




“ 그렇다면 감정 발전시키지 말아요. 석준 씨.”



윤석의 말에 석준이 왜 냐는 눈을 해보였다.



“ 재원이, 석준 씨 상대가 아니라는 건 알죠? 거기다 지금까지는 내 느낌이지만요. 그 자식 헤라 씨한테 굉장히
진지해요. 녀석이 그러는 거 나 처음 보거든요. 여자 앞에서 당황하고 생각해주고 하는 것!”



그가 석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말을 하고 있어서 석준은 그 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 그래요.......하지만 그런 식으로 서로에 대해 모르고 계속해서 만난다는 일이 그다지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생각은 안 드는군요.”



의미심장한 석준의 말에 윤석이 다른 무슨 말을 물으려는 순간 연주가 윤석의 어깨를 붙잡고 일어선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으며 구역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 우~우 웩~”




정말이지! 왕 공주 연주는 윤석 앞에서 또 스타일을 팍팍 구기려던 참을 맞고 있었다.



“ 연주 씨. 뭐야? 토할 것 같애요?”



윤석의 팔에 매달리는 연주에게 그는 다급히 묻는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깨를 부축해 웨스턴 바의
작은 뒷문으로 나간다.




“ 우~우~우~웨엑~~~~~~”



나오기가 무섭게 그녀는 입에서 냄새나는 물과 안주를 줄줄줄 쏟아내고 있었다. 윤석은 코를 틀어막고 그런 연주의
등을 두들겼다.

야~ 진짜! 여자는 얼굴만 보고 판단해선 절대로 안 된다니까!

한 손으로는 등을 두들기고 다른 손으로는 코를 틀어막고 그는 별이 몇 개 보이지않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헤라는 지금 20분 째, 재원의 아파트 현관문 밖에 우두커니 서 있는다.

연주는 전화를 열통이 넘게 해도 받지를 않았고, 이 시간에 다른 친구 집에는 갈 엄두도 서지 않았다. 다들
부모님과 함께 살거나 아님 일찍이 결혼을 해버린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재원의 집으로 오다니. 어찌어찌 택시를 타고 그의 집으로 왔건만 벨을 누를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가.

아냐! 이렇게 망설이는 건 진 헤 라 네 모습이 아냐! 이렇게 스무 번을 되 뇌인 끝에 그녀는 드디어 그 방정맞은
소리를 내는 벨을 눌렀다.


12시 40분을 막 넘어가려는 손목의 시계 초침을 확인하며 재원이 자다나 나올 때를 대비해 느긋이 기다리려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뜻 밖에도 문은 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바로 열려버렸다.



“ 뭐냐? 너 집에 내려준 거 아니었어? 분명 새엄마 집이라고.”



그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헤라를 바라보며 얼굴이나 말과는 반대고 문 옆으로 몸을 비켜서 그녀가 들어오는 길을
만들어주었다.

한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을 다른 손에는 핸드백을 든 그녀가 어기적어기적 집안으로 들어왔다.



“ 이 짐은 뭐야? 너 가출 했냐?”



문을 잠그고 헤라의 손에 든 짐을 받아 들던 재원이 또 다시 묻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 나! 이 집에서 20일만 살게 해줘.”



재원의 눈과 정면으로 눈을 맞추며 그녀가 부탁 같으면서도 절대로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말투를 했다.



“ 허~ 야! 헤라.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정말 집 나온 거야?”




“ 응! 도저히 꼴 보기 싫은 얼간이 하나가 있어서 그 집에 있을 수가 없게 됐거든. 전에 살던 집은 그 얼간이 덕에
전세금 빼버렸고, 지금 수중에 집을 얻을만한 돈이 없어. 그러니까 이번 달 월급 받을 때 까지만....... 있게 해줘요.”



절망 비슷한 그런 감정이 가득 담긴 눈을 하고 헤라는 재원에게 간단한 정황을 설명 하고 있었다.



“ 그래.......?”




그는 헤라의 왼쪽 뺨에 아직 살짝이 남아 있는 벌건 손자국에 눈을 주며 그녀의 상황을 정리해보려 했다.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입술을 댓 발이나 내밀고 서 있는 그녀의 팔을 잡아 당겨 가슴에 안았다.




“ 무슨 일인지 더 정확히 물어도 너.......말 안 해 줄 거지?”




헤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원의 품에선 오늘도 상쾌한 비누향이 난다. 그리고 자란 턱 수염은 꺼끌 거렸다.

가라앉는다. 화나고, 비참하고, 뒤틀릴 것만 같던 가슴이 그의 팔 안에서 평안을 되찾고 있었다. 다음엔, 마음이
가라앉아 그녀의 배가 공복을 알린다.




“ 배고파요.”



그러고 보니.......클럽에서 술 두어 잔과 안주 삼아 먹은 과일과 골뱅이 소면 무침 몇 가닥이 오늘 저녁 그녀가 먹은
전부였다.



“ 저녁 안 먹었어?”



그녀를 품에서 떼어내며 그가 묻는다.



“ 응. 아까 재원 씨 와서 치고받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 내 핑계 대지마. 내가 소란피운데 몇 분이나 된다고.”



“ 몰라. 하여간 배도 고프고 속도 느글 거려요. 혹시 라면 있어요?”



라면이라~ 없다. 그는 라면을 거의 먹은 기억이 없었다. 15살에 미국에 건너가 한국 유학생들과 자주 접촉이
있기는 했지만.......가정부를 두고 사촌들과 같이 공부를 한 그에겐 라면 같은 것을 먹을 기회란 별로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라면을 찾지 않는다.



“ 아마.......없을 걸! 혹시 너 라면으로 해장 하냐?”



“ 으음~ 그런 편이죠. 근데 정말 없단 말이야? 라면 없는 집이 어딨어? 찾아봐요. 먹어야 한다구요.”



헤라는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막내인 그녀는 언니들과 새엄마에게 응석을 부리며 자랐듯이 재원에게도 어리광을
부린다.



“ 새벽 한 시인데. 라면을 먹겠단 말이야? 지금?”



“ 배고픈데 잠이 오겠어요? 절대 못자!”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허기진 표정으로 최대한 불쌍한 눈을 그 에게 해보였다. 뭐 그것이 재원에게 먹힐지
안 먹힐지 자신은 없었지만, 먹고 싶은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먹어야하는 성격이었기에 포기 할 수가 없었다.



“아아! 알았어. 그러니까 그런 새끼 고양이 같은 눈은 치워라.”



재원이 승복을 한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아 손을 흔들어 대며 헤라의 애처로운 눈을 외면이라도 해야겠다는
것처럼.



“ 편의점에 가면 팔지? 무슨 라면 사오면 되는 건데?”



그리고 서재로 들어가 지갑을 들고 나온다.



“ 너구리! 얼큰한 맛!”



헤라는 폴짝이며 일어나 재원의 팔에 다정스레 팔짱을 낀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지어본적 없는 애교가 철철
넘쳐나는 웃음을 흘리며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너무도 단순한! 별것 아닌 일에 자신의 중요한 것을 걸고 덤비는 것, 만큼이나 작은 것에 행복해 하는 그녀를 보며
재원은 가슴 중앙으로 묵직한 통증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 너구리?...... 무슨 라면 이름이 그러냐!”



자신에 팔에 매달리는 헤라의 팔을 무뚝뚝하게 떼어내며 그는 라면을 사러 나간다. 흰 새벽에........그깟 라면
하나를 사러 천하의 정 재 원이가 말이다.


재원이 나가고 헤라는 라면을 먹을 기대에 부풀어 다시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러다 문득 소파의 탁자 위에 놓인
위스키 병과 술잔, 그리고.......얼음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술을 마시던 중 이었나보다.......윤석이 한 말이 떠오른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도 잠이 오지
않는다고 집에 가서 또 술을 마실 거라던.......5월이면 늘 그런다는.

예전에 낚지 집에서 그는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그런 그가.......5월이면 이렇게 곤죽이 되도록
계속해서 술을 마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뭘까? 헤라는 알고 싶지만 묻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은........아무것도 재원에 대해 들려오는 모든 것에 귀를 막고 지낼 것이라 그녀는 다짐 했다.

그리고 소파에 묻은 몸을 일으켜 탁자 위에 놓인 술병과 잔과 얼음을 주방으로 가지고 들어와 치우고 헤라는
싱크대를 뒤져 냄비를 찾아낸다.

고급스런 냄비는 반짝 반짝 윤이 나도록 잘 닦여져 있었다. 새엄마가 벌써 20년 째 쓰고 있는 닳고 닳은 냄비와
자기도 모르게 비교를 하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냉장고 옆의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역시나 반짝이는 가스 오븐에 냄비를 얹어 제일 작은 불을 켰다.

멍하니 식탁 의자에 앉아 재원을 기다렸다. 어울리지 않게 비닐봉지에 라면 몇 개를 넣어 터덜거리며 들고 걸어올
그를 생각하니 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라면과 그를 기다리다 식탁에 얼굴을 묻고 헤라는 깜박 졸았나 보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눈을 뜬 그녀 앞에
재원이 서 있었다.




“ 남은 라면 심부름 시켜놓고 너는 자고 있었던 거야?”



입가에 흐른 침을 얼른 손등으로 훔쳐내는 헤라를 보며 재원이 눈을 흘긴다. 저럴 때의 그는 영락없이 철부지
대학학생 같았다.




“ 그러게 누가 이렇게 오래 걸리래? 얼른 줘요 끓이게.”



그녀는 식탁 의자에 서 일어나며 그의 손에서 비닐봉지를 빼앗았다. 그러자 재원이 다시 봉지를 낚아챈다.



“ 끓여줄게. 앉아 있어.”



졸고 있던 그녀가 라면을 끓이게 놔두고 싶지 않은 재원은 이것 역시나 처음으로 라면을 끓여볼 결심을 했다.



“에헤? 라면.......끓여본 적이나 있어요?”



그러자 헤라가 못미덥다는 말투로 물이 끓는 냄비 뚜껑을 어설픈 동작으로 여는 재원에게 다가갔다.


“ 물 끓으면 라면 넣고 스프 넣으면 되잖아. 할 줄 알고 모르고가 있냐?”



재원은 젓가락을 들어 라면 두개를 꾹꾹 누른 후, 스프를 넣는다. 그리고 냄비의 뚜껑을 닫으려 하자



“ 이봐 이봐! 이럴 줄 알았어. 계란도 안 넣은 라면은 왜 먹어요? 계란 없어?”



라며 그의 손에서 젓가락을 빼앗았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어 계란을 찾았지만 달랑 한 개 밖에 없었다.



“ 뭐야.......부자가 계란도 없이 살아요?”



냉장고 사정이야 어떻든 관심 없는 재원은 별 시덥지 안은 걸!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라면과 계란이 적당히 꼬들꼬들 익고 헤라는 행주를 찾아 냄비 채 식탁으로 옮긴다.



“ 그릇에 덜어먹으면 식어져서 맛없어요. 그냥 먹어.”



그러면서 젓가락과 숟가락 각각 두개를 들고 와 재원의 옆에 앉았다. 이마를 맞대고 헤라와 재원은 후루룩 소리를
내어가며 면발을 입에 넣는다.

뜨거운 국물도 한 숟가락씩 떠먹고....... 그러다 문득 꼭 부부 같다는 생각이 순간 헤라는 들기도 했지만 고개를
저어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떨어냈다.


“ 아후~ 매워! 입도 따갑고.”



몇 젓가락 먹던 재원이 후~ 하는 입김을 내 뱉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 맵긴! 지난번 그 낙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 몰라. 어쨌든 입안이 아파서 못 먹겠어.”



그는 젓가락을 놓으며 물을 들이킨다. 헤라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일어서려는 재원의 팔을 잡아 앉히고 그의
입술을 들여다본다.



“ 입 좀 벌려 봐요.”



“ 왜? 귀찮아.”



자신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대고 입술을 만지는 헤라의 손을 피해 고개를 돌리던 그를 헤라는 다시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마주 했다.



“ 입 좀 벌려 보래두요.”



“ 에이! 정말.”



재원은 귀찮아 면서도 결국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입을 벌렸다. 헤라는 찢어진 입술의 안쪽을 살핀다. 왼쪽 송곳니
옆으로 살점이 새끼손톱 반만 한 크기로 떨어져 나가 있는 것이 보였다.



“ 이러니 아프지! 입술만 터진 게 아니고 입안도 찢어졌어.”



속상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헤라는 픽하니 바람 새는 웃음을 짓는 재원을 흘겨봤다.



“ 괜찮아. 하루 이틀이면 나을 걸 뭘!”


자신의 입술에 얹혀진 헤라의 손가락을 치워내며 그가 다시 의자에서 일어섰다. 재원은 그녀의 손이 얼굴이나 몸에
닿을 때마다 꿈틀거리는 본능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중 이었다.



“ 아이스크림 없어요?”


냉동실 문을 열며 그녀는 속을 뒤진다.



“ 내가 알기론 없는데.......난 사다놓은 기억이 없거든.”



그녀의 아찔한 뒷모습에 눈을 둔 재원은 ‘정신 차려 임마’하는 경고를 스스로에게 해대며 건성으로 대답을 한다.



“ 뭘! 있구만! 비록 녹차 아이스크림 이지만.”


헤라가 녹차 아이스크림 한통을 손에 들어 흔들어 보이며 반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재원 씨 취향이야? 녹차 아이스크림?”



“ 아니! 난 모르는 일인데.......뭐지?”



그녀가 들고 있는 녹차 아이스크림은 재원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일하는 아줌마가 사다 놓았을 리는
없고.......새엄마가? 하지만 그의 모친은 그가 아이스크림을 그다지 좋아 하지 않는 다는걸 알고 있으므로 아닐
것이다.



“ 뭐면 어때요? 이리와 앉아봐요.”



헤라는 식탁으로 아이스크림을 가져가 재원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해 보인다.



“ 얼음찜질 대신 아이스크림 찜질이야. 매운 것 먹고 나서 아이스크림 먹으면 따가운 것도 금방 가라앉아요,”



그리고는 재원의 입에 아이스크림을 한 숟가락 떠서 넣어 준다. 흐뭇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그녀도 한 숟가락
떠서 자신의 입속으로 가져간다.

아랫입술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는 그녀의 유혹적인 행동에 재원은 참아오던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 헤라의
입술에 기습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겹쳐버렸다.

아이스크림으로 인해 차가와진 그녀의 입술 감촉에 재원은 터진 입술과 입안이 아픈 것 따위는 느끼지 못하고 점점
더 깊숙이 그녀의 입 속으로 혀를 집어넣고 있었다.

순간.......그는 머리와 마음이 동시에 속삭이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랑해.......사랑해.......사랑해.......“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그 말을 되 뇌이며 재원은 그녀의 혀가 자신의 입속으로 조금 씩 조금씩 수줍게
들어오는 것을 음미한다.


헤라는 눈을 떴다. 키스 할 때의 재원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해서였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표정 대신에 그의 감고
있는 눈!

속눈썹이 길거라 생각했었는데.......생각보다 길지는 않았고 숱이 많고 길이가 가지런했다. 그리고 가늘고 매끄럽게
쭉 뻗은 속 쌍꺼풀 선이....... 예뻤다.

입술을 누르고 있던 그의 입술에서 힘이 빠져 나감과 동시에 재원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가 헤라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하는 소리가 나도록 치고 그 바람에 그녀는 의자 위에서 기우뚱 거렸다.



“ 뭐야~? 키스 할 맛 떨어지게! 너 키스 할 때 눈 뜨고 있는 여자가 젤 루 밥맛 인거 몰라?”


식탁의 의자에서 일어나며 그는 툴툴댄다. 뭐 물론 키스를 하면서 눈을 뜨고 있는 행위가 분위기 망치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궁금한 걸 어쩌랴.......만날 때 마다 꼭 한번씩은 키스를 해대는 그의 표정이 정말 알고 싶을 것을!



“ 그렇다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치면 어떻게 해요? 넘어 질 뻔 했잖아! 남자가 별걸 다 가지고 삐지고 그래!”



“ 됐어. 잔소리 하지 말고 이거나 먹어.”



그녀의 불평을 일축하며 그가 싱크대 위의 라면이 들어 있던 비닐봉지에서 손바닥만한 종이 상자 하나를 꺼내
식탁위로 던진다.



“ 아까 안았을 때 보니까 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더라. 괜히 이 밤중에 다시 나 도 닦을 일 하게 만들지 말고,
먹고 자.”



해열제......! 편의점에서 해열제도 같이 사온 모양 이었다. 무신경하고 무뚝뚝한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무주에서부터?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전부터? 재원은 처음의 느낌과는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 씻고 자라.......난 매일 아침 8시 쯤 일어나거든. 너도 그때 쯤 이면 되냐?”



“ 어.......응.”




“ 좋아. 아침은 각자 알아서 먹기고, 난 잘 안 먹으니까! 욕실은 두개니까 네가 거실에 있는 욕실을 써. 그리고 잠은
네가 소파에서 자. 주인이 침대를 내주는 일은 없는 것 알지?”



간단한 룰을 설명한다. 20일간 그의 집에서 함께 있는 것을 허락 받은 샘 이었다.




“ 좋아요......그리구, 고마워.”



그녀가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자 재원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헤라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멍 하니 창 밖의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새엄마나 언니가 수십 통은 해댔을 전화가
생각이 났고 핸드백 속의 휴대폰을 꺼냈다.

음.......역시 새엄마와 언니들의 전화가 30통도 넘게 와 있었고, 문자도 음성 메시지도 각 5개 6개나 들어와 있었다.

이게 뭐니~ 진 헤 라!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스물일곱이나 먹은 다 큰 처녀가 ........하지만 그 인간이랑은 1분
1초도 얼굴 맞대기 싫어!

그러면서도 그녀는 새엄마의 집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 나.......새엄마!........응 친구네 집이야. 그렇게 하고 나와서 미안해! 아니........당분간 신세 좀 지다가........응. 이번
달 월급 타면 월세라도 구하려고.........싫어! 형부랑은 절대 같이 못 살아........알았어요. 응. 내일은 받을게!
네.......끊어 새엄마!]



걱정에 걱정! 노심초사를 하는 새엄마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헤라는 빨리 전화를 끊었다. 더 오래 통화를 하다가는
새엄마의 걱정에 설득당해 집으로 들어갈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 이었다.

그런 저런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머리를 비우고, 기지개를 한번 켜고 하품을 한번 하고 그녀는
서서히 몰려오는 졸음에 소파의 팔걸이에 팔베개를 만들어 잠에 빠져 든다.



재원은 서재에서 노트북을 펴 놓고 헤라를 머리에서 떨어내기 위해 박 과장이 보내온 메일을 확인 중이었다.

MTN 측의 이번 고 석 준 스카우트 건의 책임자는 송 석 훈 상무라는 정보를 입수 했습니다. 송 상무가 거의
매일 에이밀리언 민 중호 대표라는 사람과 접촉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송 상무 에게 사람을 붙여 놓을 까요?


송 석 훈! 어쩐지 지난 달 모임에서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고는 있었던 것 같다. 절대
만만치 않은 상대인데.......내가 이번 고 석 준 건을 맡은 걸 이미 알고 있는 걸까?

그룹 내에서도 정원 형과 그 수행비서, 할아버지.......박 부장과 나정도 밖에 모르는 일을 송 석 훈이 벌써 알고
있다면.......분명 내부의 적이 있다는 말이 되는 건데!

그는 꺼끌거리는 코 밑을 문지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머리가 무겁다. 헤라가 오기 전에 마신 술 때문 인 것 같다. 게다가 XX건설 망나니의 주먹제법 셌기에 입안과 턱도
아직 아프고.......그 자식을 친 주먹도 욱신거린다.

재원은 침실로 가기위해 서재를 나왔다.

아~~·진짜로!

소파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스타킹도 벗지 않고 화장도 지우지 않고 정장 스커트 그대로.......잠들어 있는 그녀!

재원은 침실의 벽장을 뒤져 얇은 이불 하나를 꺼내 그녀를 덮어 줬다. 그리고 잠이 들대로 들어 버린 헤라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보고는 쓴 웃음을 한번 웃은 뒤.......잠을 청하기 위해 자신의 침대 속으로 몸을 뉜다.





28.



꿈을 꾼다. 푸르다 못해 감청색을 띤 니스의 바다가 보이고........! 해안의 암갈색 절벽위의 도로를 달리는 차,
그리고.......그 절벽 위에 버려져 울고 있는 열 살배기 사내아이가 있었다.

열 살배기 사내아이에겐 너무도 높고 그 밑의 바다가 까마득하게만 보이던.......그래서 그 아래로 흩어져 날리는
붉고 검은 꽃잎에 손조차 뻗히지 못했던.......!



“ 재원 씨. 안 일어나?”



가슴을 아리는 통증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뜨자 헤라의 얼굴이 보였다.



“ 여덟시면 기상이라면서요. 지금 여덟시 하고 이십오 분인데 안 일어날 거야?”



재원은 가물가물 들려오는 그녀의 말소리를 들으며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니스의 꿈을 꿨다. 한동안 나타나지
않는 꿈 이었는데.......웬 일일까?




“ 난 지금 나가야 돼! 지하철 타고 가려면 지금도 좀 늦었거든요. 재원 씨 아침은 안 먹는대서 커피만 내려
놨는데......재원 씨?”



재원은 아직도 눈앞에서 출렁이는 감청색 바닷물에 정신이 얼른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 어......응! 알았어.”



“ 잠 깨는데 오래도 걸리네........거 참! 나, 가요.”



헤라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에게 한 마디 던지고 몸을 돌릴 때 그가 그녀를 부른다.




“ 오늘 점심 때 전화 한다고, 점심 같이 먹어.”



막 잠에서 깨어나 갈라진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이제야 좀 잠이 달아난 듯 그는 부스스 해진 머리를 긁적이며
헤라에게 점심 약속을 하려 한다.

헤라는 반가운 기색을 얼굴에 번지게 놔두며‘좋아요’ 라는 대답이 나오려는 목 뒤끝을 잡아 당겨 말을 삼킨다. 송
석 훈과의 점심 약속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 어쩌지? 나 점심 선약 있는데.......”



무슨 약속이든 깨지거나 늦추어지는 걸 싫어하는 그녀는 자신이 약속을 어기는 일 또한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석훈과의 약속을 미루기는 싫었다.



“ 선약?.......네가 그런 것도 있냐? 알았어. 그럼 저녁 같이 먹어.7시쯤 전화 한다. 꼭 받아.”




그 긴팔을 공중으로 들어 기지개를 켜던 그가 헤라의 선약이라는 말에 우습다는 눈을 하다가는 약속을 다시
저녁으로 잡는다.

그녀는 재원이 그러거나 말거나 이젠 별 상관 않기로 했다. 열 받아 봤자 언제나 손해 보는 건 자신이었으므로
비능률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네.......받을게.”




그래도 떨떠름한 반응만은 숨길 수가 없어 성의 없는 대답을 하고 그의 침실을 나왔다. 그리고 사실 석훈과 약속의
찝찝함이 그녀의 신경을 은근히 압박하고 있던 터라 헤라는 마음이 뒤숭숭 하다.

그렇지만 어디 그 것 뿐이랴.......찝찝함이.......집 안 일에서부터.......!!!!! 석준의 스카우트 건 까지. 기타 등등
그녀를 괴롭히는 일들이!








“ 클럽에서? XX건설 막내랑?”



“ 네! 몇 대 주고 받은 모양입니다. 큰 불상사는 없었지만 정 본부장이 주먹을 휘두르다니 지난 일 년 동안 지켜본
바로는 통 없던 일이라서.”




“ 이유는? 계기가 있었을 것 아냐. XX 건설 막내면 우리 모임 맴버인데, 더구나 정 재 원이 성격에 술 먹다 시비
붙은 건 아닐 테고.”




“ 여자 때문 이었다고 그러던데요. XX의 막내가 어떤 여자 하나를 집적댔는데 정 본부장이 그걸 보고 와서 먼저
쳤다는 그런 얘기였습니다.”




“ 여자? 정 재 원이가.......여자 때문에 주먹을 휘둘렀단 말이야?”




석훈은 무덤덤하게 등 뒤에서 받던 비서의 보고에 갑자기 의자를 돌린다.




“ 네.......분명 그렇게 들었습니다.”



“ 여자가 있단 얘긴 지금까지 없었잖아.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부동자세로 서 있는 수행 비서를 향해 그는 질타의 눈길을 보냈다. 비서는 그 눈빛에 약간 기가 눌리기는 했지만,
곧 정신을 수습한다.



“ 사 생활 부분 까지 아직 깊이 파고들고 있지 않던 터라.......그래서.”



“ 쓸데없는 변명은 입만 아파. 애초부터 사생활을 살피라고 시켰던 일이야. 그런데 지금 그 소리는......! 도대체
무슨 시키고 있었던 건지 내가 우습군. 이 비서.”




“ 죄송합니다. 시정 하겠습니다.”




“ 이제부터 사람 하나 더 늘려서 24시간 살펴. 그리고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보고서로 작성해서 내 개인
메일로 올려. 알았나?”




지난 일년 간 재원의 사생활엔 이렇다 할 큰 변화를 찾아내지 못 한 것이 부실한 수하 덕분이란 사실에 석훈은
어금니를 문다.



“ 네.”


이 비서가 사무실을 나가고 석훈은 재원의 생각을 일단 접고, 컴퓨터의 신상명세서다시 눈을 박는다.


성명: 진 헤라.

생년 월일: 1978년 6월17일 생.

본적: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65 번지.


가족 관계: 모친 ‘성 재 경’ 하에 ‘진 헤림’, ‘진 헤미’ 언니 둘과 큰 형부 ‘ 박 준호’와 조카
‘박 지민.’

부친 ‘진 영 묵’ 경기도 모 알콜중독센터 장기입원 중.


재정 상태: 심각.


현 주 소: 역삼동 2동 648-7 XX 빌라 203호.


집 전화 번호: 없음.



직장동료 및 주변 인 관계: xxxxxxx.........특별한 관계없음.


취미 및 특기: 모든 운동.




헤라의 신상에 대한 조사 결과를 일주일 전부터 벌써 열 번도 넘게 훑어보고 있는 그다.

물론, 이번 고 석 준 일에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석훈은 ‘로열 블루 클럽’의 모임에서 그녀를 본 순간부터
자신의 내부에서 설명하기에 뭔가가 부족한 알 수 없는 관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함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호기심이든 아니면 재원에 대한 투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간에 그는 그 안에서 몸을 트는 관심의 정체를
확인을 해야 했다.

그리고 석훈은 의자를 툭툭 두들기며 혼자만의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늘 깔끔하고 어떨 땐 근엄하기까지 한 정장차림의 그가, 오늘 아침 가벼운 야외 복 차림을 하고 회사에 나오자
석훈의 비서들은 놀란 눈을 했다.



“ 나 지금 나가면 그대로 퇴근해요.”



그리고 오전 11시 40분을 조금 앞두고 너무도 일찍 사무실을 나서는 그를 비서들은 더욱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네. 진 헤라입니다.]



[ 정확히 12시 20분이예요. 생각해 봤어요?]



송 석훈 1분도 틀리지 않고 전화를 했다.



[ .......네. 제가 지금 송 상무님 계신 곳으로 가면되는 건가요?]




헤라는 석훈이 자신을 개인적으로 만나려는 의도를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비즈니스로 얽혀 있는 이상 그와의
만남을 굳이 피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 그렇게 해주면, 나야 좋지요.]



[어디 계신가요?]


[ 내려와요. 지금 헤라 씨 사무실 빌딩 정문 앞 입니다.]



조금 놀랍다. 이건 뭐지? 마중 까지 왔다는 건가?



[ 알겠습니다. 하지만 과장님께 보고 드리려면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는데.......]



[ 괜찮아요. 천천히 해요.]



[ 네.]



그녀는 전화를 끊고 발을 굴러 의자를 이리저리 돌리며 볼펜을 문다. 뭐지? 뭐가 있는 것 같은데.......지난번
술집에서의 얘기 때문에 이런 느낌이 드는 건가? 꼭 비즈니스만은 아닌 다른 게 있는 것 같은데.......이상해!



뒤가 구린 것 하고는 다른 냄새가 풍기고 있었지만 그 냄새의 정체를 구분 짓기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그녀는 석훈과의 오늘 만남에 의미를 알지 못했다.




“ 어서와요.”


그녀가 정문 앞에 모습을 나타내자 눈부시게 세차를 해 번쩍 번쩍 빛이 나는 검은색의 리무진에서 기사가 내려
문을 열어준다.

헤라가 푹신하고 안락한 뒷좌석 의자에 몸을 앉히자 석훈이 반가운 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의 눈에는 그의
웃음은 느물거리는 것이 기름 덜 빠진 삼겹살을 먹는 기분이 들 뿐 이었다.



“ 안녕 하세요. 그제 보고 또 뵙네요.”



그러나 고객에게 그런 느낌이 든다고 표를 낼 수는 없는 일. 헤라는 그 웃음을 ‘그러려니 ’하는 도를 닦는 심정으로
넘긴다.



“ 그런가요? 난 좀 더 오래된 줄 알았는데.”



창문을 열고 그 문으로 바람이 들어오게 만든 석훈이 그녀의 차림새를 한번 훑어본다.



“ 왜 그러세요? 제 차림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 아니 아니요. 좋아요.”



그녀는 오늘 스커트 정장을 하지 않고 감청색에 가는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정장 바지와 칠부길이 소매의 잔잔한 꽃
무니가 들어간 옅은 하늘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셔츠의 단추 세 개를 풀어 놓은 사이로 가슴의 계곡이 보일까 헤라는 신경을 쓰며 석훈이 보내는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셔츠의 깃이 날린다. 헤라는 벌어지는 셔츠 깃을 손으로 가슴에 밀착 시키며 애꿎은
창문을 노려봤다.



“ 사실은 오늘 점심 먹고서, 클레이 사격 하러 가려고 하는데. 어때요? 해 봤어요?”




“ 클레이 사격이요? ”




“ 왜요? 안 해봤나요? 모든 운동에 능하다고 하길래 내 맘대로 스케줄 잡아 놓은 건데.”



뭐야! 나에 대해 조사를 한 건가? 아니면 그냥, 과장이 쓸데없는 소리를 나불댄 거야?




“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이라 해 볼 기회가 없었는데요.”



“ 그럼, 오늘 배워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그의 말대로 이미 그곳으로 가는 것은 결정이 된 듯 했고, 헤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석훈은 몸을 붙여 앉지는 않았지만 헤라의 손으로 한 뼘 밖에 떨어져 앉아 있지 않은 그에게서 헤라는 거부감이
생긴다.

그녀는 남자와 같이 앉아 있는 것 자체에 몸에 두드러기가 돋을 정도로 싫어하는 여자다. 뭐! 재원은 예외에
들어서버렸지만 아직 다른 남자들에겐 여전했다.

슬금슬금 오른쪽 차 문 쪽으로 몸을 이동 시키는 헤라를 석훈이 다시금 거만해진 눈으로 바라본다.

내가 무슨 짓 했냐?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를 남자로 대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므로 자신이 조금 여자로써 방어적으로 군다하어라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테니까.



“ 아메리카 트랩으로 정 했어요. 그게 제일 쉬우니까.”



경기도 화성의 3만 여평에 이르는 종합 사격장은 5월말인데도 급작스레 기온이 올라간 탓인지 녹음이 짙어져
있었다.

통제관의 동행 하에 트랩용 엽총을 석훈과 헤라가 각각 한 자루씩 들고 옷을 갖추어 입었다. 사격용 조끼와 고글을
쓰고 귀마개를 착용 하고는 넓은 사격장 안으로 들어갔다.

석훈이 총을 가운데를 꺾어서 재껴 실탄 두개를 장전한다. 헤라도 좀 전 간단히 받은 교육 내용을 떠올리며 장전을
했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의 왼쪽 앞으로부터 붉은 색 피전이 날아오고 석훈의 총은 정확히 목표물을 산산이 조각낸다.

쩌렁쩌렁한 소리가 반대편 산을 울리고 그의 몸이 총의 반동으로 인해 조금 흔들렸지만 익숙한 솜씨였다.



“ 한발 씩 번갈아 가며 해요. 총 25발. 누가 이기는지 내기 할래요?”


색깔이 있는 고글을 쓰고 있는 상태라 그의 눈을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는 헤라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그녀를 많이 알고 있는 듯 했다.



“ 불리한 게임은 안 해요. 송 상무님은 클레이 사격에 능숙하신 분이구. 전 처음인데.......적수가 될까요? 당연히
아니죠.”



그녀는 상한 기분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뒷조사라니.......내가 무슨 범죄자야!




“ 아하~ 그런 거군요. 난 동료들과 운동으로 내기 하는 걸 즐긴 다기에 그런 건데. 미안해요.......후훗! 대신 그
미안함의 뜻으로 내가 제대로 가르쳐 줄게요.”



그는 능청을 떨며 헤라의 등 뒤로 돌아가 그녀의 총개머리 판을 오른쪽 어깨에 올리고 왼손을 잡아 총의 뒤쪽
몸체를 잡게 했다.



“오른손은 방아쇠에 올려요.”



뒤에서 헤라를 껴안아 자세를 잡아주는 석훈의 행동에 드디어 그녀의 온몸과 얼굴에 솜털을 비롯해 털이란 털은
모두 곤두서기 시작했다.

석훈이 교관도 대동하지 않고 통제관만 데리고 나온 이유를 헤라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날아오는
피전에 정신을 집중 하려 애쓴다.

그리고 쩌렁한 총성과 함께 헤라의 하얀색 피전 역시 공중에서 산산이 조각이 난다.



“ 상무님.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조각이나 바닥에 떨어진 피전에서 시선을 돌려 그녀는 석훈을 마주 본다. 그리고 통제관이 잠시 몸을 뒤로 돌려 두
사람을 볼 수 없는 순간에 그녀는 총구를 석훈의 가슴을 향해 들여댄다.



“ 팡!!!!!!”


그녀가 입으로 총소리를 냈다. 하지만 방아쇠에 있던 왼손가락은 다른 곳에 둔 상태였다.



“ 전 남자가 몸에 손대는 거 죽는 것 보다 더 싫어하거든요. 상대가 누구든! 그러니 애초부터 오늘 계획에 절
어떻게 해보시려 했던 거라면 사격장에 데려 오신 건, 상무님이 실수 하신 거예요.”



그에게 겨누어진 총을 거두어, 다시 다음에 날아오는 피전으로 향하고 한 번 더 쩌렁한 총소리를 울려 피전을
박살낸 헤라는 멍 하니 서 있는 석훈에게 입 꼬리를 올려 보였다.

석훈은 순간 이었지만 긴장으로 굳어진 목에서 침이 꼴깍하는 소리를 내며 넘어가는 것을 경험했다.



“ 당신! 만만치 않은 여자군. 하지만 당신이 그럴수록 이쪽은 더 재미있어 지는 거 알아?”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그런 헤라에게 더욱 강한 호기심과 정복욕을 느끼고 있었다. 재원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같은 길을 가려 하는 것이다. 하여간에 남자란!

하지만!!!!!!헤라의 반응은 다를 것이다.



“ 어린아이처럼 재미로 지렁이를 밟으시나요? 근데 어쩌죠? 전 지렁이도 아니고 더구나 밟히면 꿈틀거리는 걸로
그치지 않고 물거나 할퀼 수도 있는데.”
“ 좋아. 각오하지! 그렇지만 앞으로는 오늘처럼 섣부른 신체접촉 시도는 하지 않을 테니.......당분간은 안심해요.”



비웃음인지 여유로움인지 석훈은 고글을 재끼고 그녀를 향해 크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문득 그 얼굴에서 재원의
얼굴이 스치는 건 웬일일까?

그녀는 표정이 굳어져 입을 다물어 버린다.










재원은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서류들에 파 묻혀 시계를 본다. 7시.....0..헤라와의 저녁 약속을 자신이 먼저
해버렸는데 일은 아직 두어 시간은 더 해야 끝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고민을 하던 그는 그녀를 회사로 불러들이기고 결정한다.

아무것도 말해주지도, 묻지도 않는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자신이 누구인지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알려줄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면 조금 더 빠른 시간 안에 헤라도 그녀 자신에 대해 말해 줄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섰던
것이다.



단축 다이얼 0을 누르고 신호가 일곱 번 쯤 가자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 나야. 지금 어디 있어?]




[ 회사 근처요.]




[ 그래? 회사가 어딘데?]




[ 종각 ]



짧은 단답형 의 대답. 이제까지의 그녀와는 다른 석연치 않은 느낌의 태도였다. 어쩐지 조금 수상하다.



[ 그래! 가깝네. 그럼 종로 5가 지하철 역 앞으로 와서 나한테 다시 전화 할래?]


하지만 재원은 왜 그러는지 따져 묻지 않는다. 알려고 들면 들수록 껍데기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구석이 있는
그녀라는 걸 재원은 깨닫고 있는 중 이였기 때문이다.



[ 응]



그리고 다시 한 마디의 대답이 이어지고는 뚝!......... 끊어졌다. 그는 정말로 전화가 끊긴 것인지 휴대폰의 폴더를
들여다 보다 고개를 꺄우뚱 하며 전화기를 접는다.

왜이래? 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요 며칠 사이 분명 헤라의 주변에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지만 그녀는 말해
주지 않는다. 알려고 들면 야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재원은 그런 식으로 그녀에 대해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신뢰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취하는 행동이지 사랑한다고 느끼고 있는 여자에게 취할 행동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서류를 뒤적이던 손에서 펜을 내려놓고 그는 인터폰을 누른다.



“ 도시락 2인분만 준비해 줄래?”


“ 네? 2인분이요?”



전화기 너머 비서의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7시가 넘도록 퇴근하지 않은 상사가 도시락을 주문해
달라니.......그녀들의 얼굴에 시커먼 먹구름이 드리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 응. 그리고 도시락 오면 받아주고서 퇴근들 해. 난 더 있다가 갈 거니까.”



그런 비서들의 마음을 재원은 알 리가 없었지만 헤라와 편안히 사무실에서 있기 위해서는 그녀들이 없는 편이 나을
거란 생각을 하고 그는 퇴근을 지시 했다.



“ 네. 본부장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비서의 목소리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고 언제나처럼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 그럼.......오늘 감사 했습니다.”



헤라는 종각의 페스트 푸드점 앞에서 석훈의 차를 내리며 의례적인 인사를 했다. 흑심을 품든 뭐든 간에 고객은
고객이었으므로 갖추어야 할 예의란 게 있으니 말이다.




“ 감사는 무슨! 빈말 하지 말아요. 안 어울린다는 거 아니까.”



차창을 내린 그가 얼굴 전체에 여유를 보이며 불편해 하는 기색이 역력 했던 그녀의 정곡을 찌른다.



“ 아아~ 그러세요?”



헤라는 제발 그가 어서 빨리 이 번쩍이는 리무진을 타고 사라줘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비야낭 거렸다.


“ 아까 전화.......굉장히 무뚝뚝하게 받던데. 남자였나요?”



헌데 이 남자! 갈 생각은 않고 상관없는 일을 묻는다. 헤라는 버릇대로 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입 바람을 불어
날려 보냈다. 열 받고 있는 다시 표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사 생활입니다. 관여 하실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재원의 전화.......석훈과 재원이 아는 사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그 옆에서 재원의 전화를 받는 일이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그녀는 전화의 상대가 누구인지 석훈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말을 아끼고 대답만 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이 그에게는 남자를 경계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기는 모양 이었다.



“ 사생활.......하지만 나도 곧 헤라 씨의 사생활에 관여가 되게 될 거예요.”
쌀쌀맞기만 한 헤라의 태도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한다.



“ 하~”



그리고 그녀는 석훈의 그런 행동에 콧방귀를 끼지만 그는 바이 바이 라는 손짓을 남기고 그녀에게 웃음을 날려
보낸 뒤 리무진을 타고 꽉 막힌 종각의 차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거슬려~ 아무리 고객 이지만 그것도 거물 고객이지만 거슬려! 나하고 석준 이한테 불법을 돈으로 유도하는 것도
그렇고 모두 다 거슬려! 저 인간은!

속으로 투덜투덜 석훈에 대해 생각을 하며 그녀는 몸 여기저기를 긁어 대고 있었다.







종로 5가 역에 도착해 재원에게 두 번이나 전화를 한 끝에 그 큰 빌딩을 우습게도 겨우겨우 찾았고, 그가 회사에
다닌다고는 했었지만 GH전자에 근무하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던 그녀는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빌딩 사옥에
들어서자 괜스레 가슴이 뜨끔 거렸다.


19층.......무슨 사무실이 19층에 있어? 빌딩 전체가 다 GH사가 쓰는 것 같은데, 사원들 근무를 꼭대기 층 까지
올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는 이상한 회사야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재원에게 다시
전화를 한다.



[ 나. 19 층인데.......사무실 문이 복도에 한개 밖에 없어. 본부장 실 이라고! 지금 장난치는 거죠?]



19층의 복도에 선 헤라는 인기척 하나 없는 반짝 반짝 윤이 나는 대리석 바닥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목덜미가
서늘해지고 있었다.



[ 제대로 왔네, 그 문 열고 들어와. 다 퇴근 하고 나 혼자니까.]



헤라는 본부장 실이라 써 붙인 금빛 반짝이는 팻말을 노려보다 손잡이를 살짝 돌려본다.

빼꼼히 열고 고개를 들이밀어 보지만 빨강 색 카펫이 깔린 5평 정도의 사무실엔 벽 쪽으로 두개의 책상이 있고
주인은 없었다.

발을 하나 들여놓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문의 오른 편으로 다시 문 하나가 더 보인다.




“ 뭐해?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그리고 헤라가 그 문에 다가 서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재원의 목소리가 날아 들어왔다.



“ 우왓! 깜짝이야.”



헤라는 뒷걸음질을 치며 작은 비명을 지른다.




“ 왜 놀래? 여기가 무슨 놀이동산 귀신에 집이라도 되냐?”



흰색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네이비 색 정장 바지를 입은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말끔했다.



“ 이리 들어와.”



놀라서 가슴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그가 자신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다. 문 맞은 편으로 커다란 창이
있었고 창 앞으로 업무용의 쉬크한 책상이 있다.

그 책상 앞으로는 회의용으로 보이는 의자 4개와 긴 탁자가 있었고, 또 옆으로는 냉장고도 있었다. 바닥엔
페루문양이 있는 사이잘 카펫이 깔려 있다.

이 정도의 사무실 이라면.......하는 절대 기준에 의한 판단을 내리려던 헤라는 생각을 멈춘다. 눈을 감고 이 공간의
다소 호화로운 시설들을 머리에서 몰아내려 가벼운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 왜 그래? 무서웠어? 회사에 아무도 없어서?”




다정한 목소리 그가 전에 없던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등 뒤에서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아마도 놀래 보이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한 동작 이라 헤라는 생각 했다.




“ 응......조금 으스스 했어요. 복도가.”



“ 그래.......마중 나가 주고 싶었지만, 보시다시피 일이 산더미라.”



재원이 그녀의 목덜미를 간질이며 듣기 좋은 낮은 소리로 말을 한다.

낮에 석훈의 몸이 닿았을 땐 온몸의 털이 곤두섰던 그녀의 몸은 등 뒤에서 재원의 체온을 느끼자 신비하리 만치
기분 좋고 나른한 긴장과 묘한 전율이 혈액을 타고 온몸을 돌아다니는 느낌이 든다.



“ 밥 먹자. 도시락 사다 놨어.”



그러나 곧 재원이 주는 느낌을 즐기고 있던 헤라에게서 팔을 푼 그가 회의용 탁자 위의 도시락을 가리킨다.

은근히 실망이 된 그녀는 실망함을 티 내지 않으려 고개를 빳빳이 들고 도시락 곁으로다가 섰다.



“ 왜 그래? 목 아퍼? 굳어 보인다.”



빙글거리는 웃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지금 기분을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그가 탁자 위에 기대어 앉았다.

도시락 뚜껑을 열고 먹음직스런 반찬이 7 가지나 되는, 일식집 회 초밥 도시락 보다 비싸 보이는 도시락을
그녀에게 내 밀었다.



“ 그래도 배고픈 게 우선이지.......나 무지 배고프걸랑!”



그리고는 입가에 기다란 미소를 만든다.



“ 먼저 먹지 그랬어요?”



그리고 그 미소에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그 눈이 더더욱 얄미워진 헤라는 입을 삐죽거렸다. 진짜 얄미워
죽겠어! 송 석 훈 그 인간은 느글거리긴 해도 얄밉지는 않은데.....이 인간은!!!!!



“ 같이 먹자고 저녁 약속 해놓고 먼저 먹는 법도 있냐?”




도시락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어 헤라에게 건네주며 그는 여전히 빙글거리고 있었다.

헤라는 재원의 맞은편으로 와 도시락에 젓가락을 댄다. 그때!!!! 등 한 가운데를 찌를 듯 간질이는 간지러움에 몸을
뒤트는 그녀!




“ 또 왜 그래? 내가 지금 왜 그러냐는 질문을 몇 번 한줄 아냐?”



한쪽 눈썹을 찡그린 그가 오만상을 쓰고 상체를 뒤틀어대는 그녀를 향해 투덜거렸다.




“ 간지러워서 그래! 손 도 안 닿고 아까부터 여기저기 간지러워 죽겠단 말이야.”



투덜거리는 재원에게 여전히 입술을 삐죽대며 헤라는 젓가락을 놓는다. 그리고는 배와 손이 닿지 않는 등을 참을성
없는 손짓으로 긁기 시작 했다.



“ 피부병이야?”



그가 엉덩이를 주춤주춤 뒤로 빼며 눈을 가늘게 뜬다.




“ 웃겨! 안 옮아. 두드러기란 말이야.”



더 얄미워! 얄미워 미치겠어. 남은 간지러워 미치겠는데 지 몸이나 사리고! 남자가 뭐 저래?




“ 두드러기? 뭐 잘 못 먹었냐? 웬 두드러기야?”




두드러기란 말에 그가 다소 안심 했다는 얼굴로 탁자위에 걸 터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 그럴 일이 있었어. 먹는 거랑은 관련 없는 문제고, 내 고질병이에요.”




팔이 닿지 않는 등을 긁으려 애쓰며 그녀는 다가서는 재원을 눈만 올려 바라본다. 그가 헤라의 등 뒤로 와 셔츠를
걷어 올렸다.



“ 뭐하는 거에요?”



“ 손도 안 닿으면서...... 긁어 주려고 그런다 왜!”




당황해 하며 올려진 셔츠를 잡아 내리려는 그녀의 손을 제지하며 그는 헤라의 브레지어 호크를 풀었다.

브래지어 끈을 중심으로 아래 위에 재원의 손바닥만한 넓이의 두드러기가 작게 솟아 있었다.



“ 진짜 두드러기네.”



그가 손가락을 세워 손톱이 닿지 않게 해 그녀의 등을 문지른다. 간지러움이 해소되는 시원한 보다는 그 손이 원을
그리며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짜릿함에 헤라는 두드러기의 간지러움을 잊을 수 있었다.



“ 그럼 내가 거짓말해요?”



“ 흐음~ 음식 때문은 아니라며.......두드러기가 왜 난거야?”



“ 있어요.”



“ 그러니까 그 있는 게 뭐냐고. 넌 꼭 여러 번 묻게 만들더라!”



그래.......내가 생각해도 저 남자가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을 해준 일이 없는 것 같다! 헤라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석훈의 이름은 입에 담지 말아야지 하며 입을 연다.



“ 남자...... 남자 손이 몸에 조금이라도 닿고 나면.......가끔 이래요. 아니 거의 대부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처럼 들리게 하려 노력하며 헤라는 어깨를 들썩해 보였다. 하지만 재원의 반응은.......그는
등을 문질러 주던 손을 멈추고 목소리가 낮아진다.




“ 그 말은.......오늘 어떤 놈이 널 만졌다는 얘기야?”




에그머니!!!! 차라리 말하지 말걸! 해줘야 될 말은 입 다물고, 엉뚱한 오해를 살 소리만 한 것이라는 걸 뒤 늦게
깨달은 그녀는 자신의 말을 수습하려 몸을 돌렸다.

사귀는 여자가 다른 남자의 손이 탔다는 걸 반길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나도 참!




“ 아니. 만진 건 아니고, 난 스치기만 해도 그렇거든. 그냥 스친 거예요. 아주 잠깐.”



삐죽거리던 입을 제자리에 놓고 재원의 표정을 살핀다. 그런데 그는 목소리와는 달리 웃고 있었다.




“ 너.......내가 널 만진 건 열 번도 넘는 것 같은데, 그동안 한번도 그런 적 없었잖아. 맞아?”



아아~ 그래.......이 남자가 자신은 예외라는 걸 눈치 챈 거구나! 하긴 그건 바보래도 금방 알거다. 지금 내 말을
들었더라면!



“ 으응 뭐 재원 씨는 예외긴 하더라구.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시 몸을 돌려 그에게로 등을 향한 헤라는 도시락 위에 놓인 젓가락을 들며 밥알을 센다. 왠지 창피했다.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솔직히 몸이 제 멋대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데 말이다.




“ 그렇군! 에헤~”



뒤에서 들리는 낮은 웃음, 그리고 다음 순간 두드러기가 난 자리에 와 닿는 뜨거운 입술!



“ 그럼.......두드러기 치료 방법은 내 손길이 더 낫겠네~”



그녀의 척추 등줄기를 따라 뜨거운 입술을 옮기며 그가 중얼 거렸다. 재원의 손이 헤라의 셔츠 속으로 파고들어
허리를 감는가 싶더니 풀어진 브래지어를 들추고 가슴을 감싸 쥔다.

그의 축축한 입술이 민감한 등을 애무하고 부드러운 손길은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젖가슴을 쥐고 있었다.



“ 근데........이젠 좀 조심할래?.......한번 만 더 네 몸에 다른 놈 손이 닿았다는 소리 들리면 나 그 자식 찾아내서
죽여 버릴지도.......모르거든!”



웃음이 섞인 말이었지만 진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헤라는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들고 있었다.



“ 으응.......조심 할게.”



이런 순간 마다 그녀는 재원 앞에서 순한 양이 되어버리고 있었다. 발톱을 세우고 다가오는 남자를 방어하고
공격하려는 모습은 사라져 버린다.

재원이 헤라의 얼굴을 돌려 입술을 정복 한다. 어젯밤의 키스와는 농도가 다른 집요하고 깊고 뜨거운 키스.

재원의 손이 그녀의 민감하고도 작은 그곳을 능숙하게 애무 할 때마다 헤라는 숨을 죽이고 정신과 육체가 완벽하게
맞물려 그의 손아래 입술아래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 나........오늘은 정말로 재원 씨 갖고 싶어.”



흐려진 두 눈을 떠 재원의 육감적 입술에 시선을 둔 그녀가 수줍게 속삭였다.




“ 넌........아직 날 가질 준비가 안 돼 있어. 진 헤라.”




하지만 그는 애무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헤라가 알아듣기엔 너무도 의미가 많이 담긴 말을 하고 있었다.



“ 무슨......?”




“ 내 첫 경험은 우리나이로 17살 때야.......난 미국에서 자랐으니까.”



29.



“ .......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녀는 재원의 말을 자르지 않고 계속 되는 애무에 정신을 놓치 않으려 본능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 넌 몇 살이지?”



“ 스물......일곱.”



“ 그래.......스물일곱 이었군.......!


사랑하는 여자의 나이를 이제야 알게 되는 군! 하는 자조가 묻어나는 말투로 그는 중얼 거렸다. 그러면서 그녀의 귀
속으로 뜨거운 혀와 입술을 가져다 댄 재원은 지각이 흐려져 가는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 난 너보다 10년은 빨리 여자를 알았어.......그리고........셀 수도 없이 많이 내 본능을 쏟아 붓고 다녔지.......본능!
알겠니? 내 의지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할 수 밖에 없는.......남자들은 그렇게 해! 사랑하지 않아도 여자를
않을 수 있는 이유가.......할 수밖에 없으니까 야......”


자신의 손과 입술 아래에서 몸을 떨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그의 애무를 받아들이는 무지한 그녀에게
그는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것의 의미를.......



“ 그런데.......할 수 밖에 없으니까 때로는 여자를 사기도 하고, 육체적으로 끌리는 여자를 꼬드기기도 해.......”


“ .......음”



“ 하지만 그런 관계에서 그걸 하는 건 말이야! 쾌락의 한계가 있다.”



재원의 손이 그녀의 바지 벨트를 풀고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언제나 자신의 애무에 즉각적인 반응을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엔 망설이고 겁을 내는 그녀.......당연한 일이란 걸,
아는 재원은 이젠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녀에게 가고 싶었다.

지금까지 숨바꼭질을 해오던 두 사람, 항상 헤라가 숨고 재원은 술래였다. 하지만 오늘은 재원이 숨는다.


“ 단지.......쾌락이야. 아무것도 없는........충만감이나 혹은 감동의 파도 따위가 밀려들지 않는 다는 말이지........ 넌
남자를 모르고 또 내 몸을 이해하지 못해 아직 까지는.”



“ 재 재원 씨.......거긴!”




그래서 그는 스스로의 욕망은 접어두고 그녀에게 깨우쳐 주려 한다. 그가 숨는다.

바지 사이로 들어가 속옷을 파고든 그의 손이 그녀의 태초의 장소에 도달하자 헤라는 그의 손을 잡고 당황함을
드러냈다.



“ 첫 경험은 고통이야........난 너한테 그런 아무것도 없는 고통의 경험을 주기 싫어.”



재원은 손을 멈추지 않고 말을 잇는다. 그녀가 자신의 진심을 알아듣길 바라면서 말이다.



“ 무지한 너에게.......오늘은 한 가지만 가르쳐 줄게.”



“ 뭐 뭘?”



흐리지만 그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을 뒤틀어 등 뒤에서 자신을 안고 있는 재원의 눈을 들여다본다.




“ 절정!”




그리고 5분간.......헤라의 뇌에서부터 발끝까지 그녀는 완벽하게 아무런 생각을, 논리도 감정도 가질 수 없었다.
남아있는 것은 감각!

오직 그가 가져다주는 이제껏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발견 하고.......환희에떠는 솔직한 꾸밈이 없는 몸이
있을 뿐 이었다.


입술을 깨무는 그녀를 위해 재원은 다시 키스를 시작했다. 키스를 통해 알리고 싶었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하게 장난으로 시작해 진지하게 다가온 사랑을 그녀가
알아주길 바라며 그는 깊은 애정을 담아 정성껏 키스를 하고 또 했다. 그녀의 절정이 멈추고 그녀의 지각이 돌아올
때까지.......



“ 재.......원 씨?”



입술을 떼고, 그녀의 태초에서 그의 손이 빠져나가고, 작은 시간의 여울을 건너.......헤라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 왜?”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그가 짧은 대답을 한다.




“ 나.......재원 씨가 한 말들 사실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남자의 손에서 감당할 수 없는 흥분을 경험한 그녀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영화 연인에서 ‘제인 마치’가 ‘양 가 휘’에게 받은 차 속에서의 첫 경험........아마도 지금의 경험이 그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성적 경험에 무지한 스물일곱의 그녀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 풋~ 그래........? 하지만 상관없어. 시간이 지나면.......네 마음이 나와 같아진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서두르지 마! 진 헤 라.”



하지만 어떻게 생각을 하던, 그의 말은 어려웠다. 그녀가 모르는 세계, 이제 막 입문이 시작되는 세계에 대한
재원의 설명은 조금 난해 했다.

충만감! 감동의 파도! 그런 말들의 의미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물론 국어 사전적으로는 이해가 갔지만 아마도 그런
뜻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두 가지는 알 수가 있었다. 그가 섹스에 대해 제법 진지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신과의 관계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굳이 한 가지 더! 느낀 게 있다면 그는 굉장히 자유롭고.......또 감성적인 남자라는 사실!

무뚝뚝한 말을 내 뱉고 건방지고 때로는 싸가지도 없지만.......그건 밖으로 드러나는 일부분 일 뿐 그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그녀가 그를 좋아한 다는 것! 아니 어쩌면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헤라는 방금 전의 일로 인해 재원에 대해서도,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많은 것들을
깨닫고 있었다.



“ 부끄러워하지 마. 우린 둘 다 성인이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네가 지금 한 경험은 다른 나라에서는 벌써
10대 때 다들 하는 경험이니까 창피 해 할 일이 전혀 아니라고 본다 난.”



생각에 빠져 책상위의 도시락에서 흐른 물기를 손가락으로 끼적대는 그녀에게 재원이 다정하게 말해 왔다.

그리고 그녀의 셔츠 속으로 다시 손을 집어넣어 브래지어 호크를 채운다. 구겨진 셔츠를 펴주고 바지의 지퍼를
올리고 벨트를 채워주는 그의 손길엔 사랑이 느껴졌다.

사랑.......행복해야할 감정의 느낌에서 문득 불안함을 느낀 그녀는 그의 사무실 문에 들어서면서부터 외면하고
있었던 현재의 진실이 눈에 들어온다.

창문 앞의 커다란 책상 위에 놓여진 명패! ‘본부장 정 재 원’투명한 아크릴 판에 검정색 명조체로 굵게 쓰여 진
직함과 이름! 그걸 보자,

결과가 한눈에 보이는 그의 사랑을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 인정해야 할지 갑자기 슬픈 기분이 들었다.

처음 경험해보는 전희에 감정으로 예민해지고 출렁이는 파도처럼 변덕스러워 져있던 그녀는 방금 전까지 누린
육체의 환희는 사라지고 침울해 지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마음이 아파왔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몸이 거부하지 않는 남자가.......하필!

고이는 눈물! 싫다. 어떻게 끝내야 할지 정해진 사랑을 하는 건 그녀의 인생에선 용납하기 힘든 일 이었다.
사랑하지 않을 거다.......절대!



“ 울어? 왜? 내가 널 억지로 범한 것도 아니고, 네가 원해서 그것도 난 내 욕망을 짓눌러가면서.”


“ 입 다물어. 정 재 원.”


눈물이 흐르는 그녀의 볼을 보며 재원이 의아함과 황당함으로 우는 이유를 물어 왔지만 헤라는 말을 잘라 버렸다.

사귀는 조건으로 결혼 같은 이야기는 꺼내지 말자는 조건에 그가 순순히 동의한 이유를 알 것 같은, 헤라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이해하면서도.......화가 났다!

역시 그는 대범하다.......결혼은 결혼! 연애는 연애.......정확히 구분 짓는 남자야......아냐! 이건 대범 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야. 그냥 현실적이고 계산이 정확한 이해타산이 빠른 것 뿐 이야!

그의 입장에 대해 정리를 해보려 논리를 세워본다.



“ 너 원래 이렇게 잘 우는 여자였냐? 처음엔 겁도 없이 용감무쌍하게 나한테 덤벼들더니 요새는 툭 하면
눈물바람이네~”



재원이 헤라의 손을 잡아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문지른다. 말은 퉁명스레 우는 그녀를 질타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영문도 모른 채 헤라를 위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왜! 우는 여자 싫어? 그럼 차 버려 그럼 되잖아. 어차피 그쪽한테 차인 여자야 길거리에 널렸을 텐데. 나 하나 더
늘린다고 천벌이 더 빨리 오기야 하겠니?”



그의 마음 씀에 그녀는 억지소리를 한다.



“ 갑자기 왜 이래? 나 바람둥이 아니라고 했지! 길거리에 나한테 차인 여자가 널리지도 않았고, 난, 너 차버리고
싶은 생각 눈곱만큼도 없어.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당연히 재원은 황당하다. 그래서 그는 언성이 높아져 버렸다. 차버리다니.......어째서?



“ 그쪽 정도 능력이면 나정도 여자 후리는 거야 일도 아닐 것 아냐.......괜히 너무 잘해 주지 마! 그러다 내가
정말로 들러붙어서 안 떨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민 수 연인가 하는 여자한테 뭐라 그럴 건데? 또 그쪽
새어머니는......”



수연과 모친의 얘기까지 나오자 그는 오늘 그녀를 이곳으로 부른 것이 아직 너무 이른 일 이었음을 알게 됐다.



“ 헤라야.......그건!”



“ 그렇게 다정하게 내 이름 부르지도 마! 그리고 지금부터 도시락 먹는 일 빼고는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마. 지금
내 눈물을 그칠 수 있게 할 수 있는 건 그 것 뿐이야.”


다시 재원의 말을 자르고 자신의 할말을 마친 그녀는 젓가락을 들어 식어버린 도시락을 먹기 시작 했다.

사랑한다고 말해버릴까? 그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꾸역꾸역 밥을 입에 넣는 헤라를 보며 갈등한다.

만약 지금 고백해버리면 어쩜 그녀는 도망가 버릴지도 모른다.

사귀자고 했을 때부터 그녀는 얽매이고 싶지 않아했고.......지금은 그의 배경에 부담스러워 하고 질려하고 있는 것
같은 그녀였기에 섣부른 고백은 약이 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들었다.



“ 좋아........우선 먹자.”



7첩 반상을 맛있는 줄도 모르고 먹었다. 그래도 도시락 하나를 뚝딱 비운 그녀는 젓가락을 놓고 물을 찾는다.



“ 기다려.......가져다줄게.”




헤라보다 먹는 속도가 느린 재원은 먹던 숟가락을 놓고 물을 가지러 냉장고로 일어선다. 헤라가 그의 뒤를 따라와
그를 재끼고 냉장고 문을 벌컥 세차게 열어 제쳤다.



“ 내가 아무 행동도 하지 말랬지요!”



“ 심술 부리지마. 물 갖다 주는 정도가 뭘!”



“ 언제부터 나한테 이렇게 친절해 지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무시하고 싸가지 없게 굴란 말이야.
나도 이젠 익숙해 져서 그게 편해.”



물병을 집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먼저 손에 물병을 잡은 헤라는 신경질 적으로 뚜껑을 따 병째로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 그만 화 풀어........나 내일부터 며칠간은 집에 못 들어갈지도 몰라.......일이 너무 많아서 삼사 일은 여기서
밤새야 한다구. 그러니까 싸우지 말자 우리 응?!”


재원은 헤라를 달래기 위해 그녀의 물병을 받아 탁자 위에 놓고 다시 품에 안았다. 안은 팔에 가득히 힘을 주고
이마에 미안함이 베인 키스를 한다.



“ 잘됐네.......혼자 있으면 편하지 뭐.”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이마의 키스를 받은 헤라는 일부러 더 퉁퉁거린다. 그의 애정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면
아마도 갈수록 더욱 많은 것을 그로부터 원하게 될 것이라는 걸 그녀는 알 고 있었다.



“ 그래~ 편하게 홀딱 벗고 춤을 추던 잠을 자던 네 맘대로 해라. 단 다른 놈만 내 집에 끌어 들이지 마.”



이런이런~ 결국 재원은 헤라의 페이스에 넘어간다. 그 울컥하는 성격이 어디가랴! 잘 나가다 그녀의 ‘잘됐네’
라는 한 마디에 그새 말을 꼬아 버린 그는 그녀를 안았던 팔을 거칠게 푼다.

삼사일을 보지 못할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 시간들을 어떻게 견딜까 하는 생각을 하던 그에게 그녀의
잘됐네는 심사를 뒤틀기 충분한 말 이었다.

하지만 헤라는 받아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바라던 바다! 그가 그냥 이렇게, 너무 잘해주지 말고 오히려
방금처럼 말을 꼬고 무뚝뚝하게 굴길 원했다.

그래야 했다. 그녀는 가질 수 없는 것에 집착하고 욕심 부리는 여자가 아니다.

불안하기만 했던 어린시절을 보상받는 식으로, 그냥! 제발!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길 소원하는 헤라였다. 그러기 위해
집착과 욕심은 금물!

재원은.......욕심이다. 그것도 너무 과한 욕심!













“ 상무님 요새 좀 이상해지신 거 알아요?”



침대 베게에 등을 기대어앉아 담배 한 개비를 불 도 붙이지 않고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는 석훈을 향해 현영이
묻는다.



“ 뭐가 이상해? 난 지극히 정상이야.......다른 놈들 다 그러는 것처럼 지가 데리고 일하는 비서랑 이렇게 매일
호텔에 드나드는.......그렇고 그런 놈! 넌.......그런 내가 달라보이냐?”




“ 네.......요즘 감정의 기복이 심해 보이세요. 뭐랄까? 예전엔 좀더 냉정하고 사리분별 확실하시고 뭔가 일 외에
다른 생각의 여지가 낄 틈이 없어 보였는데요.......음~ 지금은 안 그러신 것 같다 그 말이죠.”



“ 날 너무 잘 아는 체 하는 거 아냐? 생각보다 나 복잡한 놈이야. 오 비서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머릿속에
잡생각이 가득한 인간!”



침대에서 내려온 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선다.



“ 이곳에서 보는 겨울 한강은 어떤 게 보이는 줄 알아?”


뜬금없이 그가 현영에게 묻는다. 하지만 그녀가 이 호텔에 석훈과 같이 드나들기 시작한건 올 3월부터였다.



“ 여긴 상류지역이라 겨울엔 거의 항상 살얼음이 껴있어.......그래서 밤엔 말이야. 저 다리 기둥이 가로등 빛 때문에
얼음위로 아무런 출렁임이 없이 비쳐들거든.......그럼 그게 꼭 그리스에 있는 고대신전의 기둥같이 보여. 투명하고
차갑고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는 강물에 녹아든 오래된 기둥.......”



확실히 달라진, 석훈의 외로워 보이는 등을 바라보던 현영이 그의 뒤로 다가가 허리를 안는다.



“ 그런데요?”



“ 살얼음이 풀리면 그 기둥은 사라진다........오래돼 보이고 세월이 묻은 기둥이........근데........내 기억이란 놈은
너무 단단해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도 풀려 흘러가 버리지 않는다. 그대로 있어. 신전의 기둥처럼 차라리
허물어져 내리기라도 하면 나을 텐데. 한강의 기둥과 신전의 기둥 두 가지 단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를 않아.”




“ 단점이 없는 건 좋은 거 아니에요?”




“ 글쎄.......때로는 아닐 수도 있지. 적어도 내가 갖고 있는 한 가지 기억에 대해서는.”




그가 허리에 감긴 현영의 손을 풀며 탁자 위에 놓인 재떨이에 몇 모금 빨지 않은 담배를 비며 끈다.

그녀는 그런 석훈을 지켜보는 일 외엔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너무 다가온다 싶은 여자는 바로 잘라버리는 그런
남자다.

그녀 외에도 그가 기분에 따라 만나는 여자 둘 셋이 더 있다는 건 그녀들의 전화를 받는 현영이 잘 알고
있었고.......평균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전화하는 여자들은 바뀌었다.

그렇기에 현영은 그의 잠자리 파트너가 되는 일 외에는 그의 어떤 일에도 끼어들지 않는다.

지금처럼 가끔 너무나 외로워 보이는 등을 그가 보여도 그녀는 위로하려 들지도 않고 이유를 캐지도 않았다. 그게
석훈의 곁에 오래 머물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똑똑한 그녀는 알고 있었다.



“ 먼저 가. 난 여기서 자고 갈 거야.”


그는 오늘도 집에 들어가지 않을 모양이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버리는 석훈의 모습에 끝까지 눈을 주다 한번도
돌아봐주지 않고 문을 닫아버리는 그를 향해 낮은 욕지거리를 해봤다.

그리고는 이내 픽 하니 실소를 한다. 뭘 바라니.......

주섬주섬 옷을 꿰어 입고 오늘 밤도 그녀는 혼자서 호텔을 나섰다.







그 그저께 밤. 그러니까 삼일 전 밤 재원의 사무실에서 그와 같이 집으로 돌아와,

재원은 소파에서 헤라는 침대에서 각자 잠을 잔 후. 오늘 까지 그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말했던 대로 일이 바쁜지 그에게선 전화 한통 오지 않는다. 그녀도 전화 하지 않았다. 집착하지 않기 위해, 그에게
뭔가를 바라지 않기 위해 그렇게 했다.

퇴근 후 동료 들이 볼링이나 몇 게임 하러 가자고 침울해하는 그녀를 끌었지만, 사람들 속에 섞여 웃고 떠들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은 그녀는 재원의 아파트에서 혼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 오랜만에 휘트니스 클럽으로
향했다.

물론 그 전에 새엄마에게 잘 지내고 있다는 전화도 잊지 않았다.

오랜만에 하는 운동이니만큼 정성을 다해 스트레칭을 했다. 대퇴골 안쪽과 허리 스트레칭에 중점을 두고 다치기
쉬운 아킬레스건과 손목, 어깨 삼각근 까지 골고루 신경을 써 몸을 늘린다.

8시를 넘긴, 저녁 식사 시간 이후라서 인지 운동을 하는 사람은 적었다.

그리고 여러 날 만에 와서 인지 낯 선 얼굴을 코치도 보인다. 정성스런 스트레칭을 마치고 막 바이크에 올라타 발을
구르려는 그녀에게로 그 낯 선 코치가 다가온다.



“ 안녕 하세요? 처음 뵙네요.”


바디빌더 인지 상체 근육 전체가 울룩불룩 요란스럽게도 올라와 있는 남자였다. 척 보기에도 헤라는 그에게
거부감이 금방 생겼다.



“ 네.”



“ 오늘 등록 하신 회원이신가요?”



“ 아뇨. 한달 좀 넘었는데요.”



“ 아! 그래요? 전 이곳에 온지 열흘 정도 됐어요. 그동안 한번도 뵙지 못한 분이라서 처음 오신 줄 알았네요.”



그녀가 바이크 앞 천장에 매달린 TV에 눈을 두고 있었지만 남자는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옆에서 있었다.



“ 몸을 보니 운동을 꽤 하신 것 같은데.......뭘 주로 하세요?”



얜 뭐야? 왜 이리 치근덕대냐? 짜증나게!



능글능글한 목소리로 ( 그녀는 재원과 석준, 윤석을 제외한 모든 남자의 목소리가 그렇게 들린다.) 자꾸만 말을
거는 남자에게 안중에도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당체가 눈치도 없는지 이젠 그녀의 바이크 손잡이에 손
까지 얹는다.



“ 잡다하게 다 해요.”



헤라가 마지못해 퉁명스럽게 대꾸해줬다.



“ 그러시군요. 그런데 바이크 자세는 어째 불편해 보이시네요.”



어쩌구 어째? 쳇~ 본론은 그거구만! 헤라가 남자의 본심을 알고 그를 내려다 봤다. 그때, 그는 만면에 친절함이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허리와 엉치 부분에 손을 얹어 자세를 교정 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녀를 잘 모르는 코치마다 이런 멍청한 짓을 한번 씩은 꼭 저지르지만 곧 그녀의 주먹에 나가떨어진 일이 다반
수였다.

그러니 이 남자라고 예외 일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느낌 남 이었다.


“ 뭐! 이런~”


“ 퍽!”


이번에도 헤라의 왼 주먹은 남자를 향해 날라 가고 그의 턱이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녀의 주먹 힘에 의해 뒷걸음질로 몇 발 주춤한 남자가 이제야 말이지만 그 실 가닥 같은 가는 눈을 크게 뜨려
노력하며 뻥 진 눈으로 헤라를 올려다봤다.



“ 어디다 손을!”



인상이 험악해 지며 그녀를 노려보는 남자를 향해 헤라의 주먹에 다시 한번 힘이 들어 가고 있던 찰나.



“ 아~~~헤라 씨. 헤라 씨 미안 미안!”



그녀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윤석 이었다.




“ 미안해요. 정말!......그리고 김 실장님은 코치 데리고 가서 재교육 시키세요.”



그가 사과를 했다. 그 커다란 덩치로 그녀와 남자 사이를 막아서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 다른
남자에게 명령을 한다.



“ 헤라 씨?”


맞은 턱을 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자를 쏘아 보고 있던 헤라는 윤석이 다시 한번 부르는 소리에 그의 존재를
인식 했다.



“ 아! 네.......”



자주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막상 윤석 앞에서 주먹을 휘두른 모습을 보인 헤라는 겸연쩍은 생각이
들었지만.......불쾌한 기분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 재원이가 헤라 씨 전화기가 꺼져 있다고 혹시 여기 있는지 봐달라고 해서 올라왔는데.......그 자식 쪽 집게네요.”



그런 그녀의 기분을 환기라도 시켜주려는 듯 윤석은 재원의 소식을 전했다.



“ 재원 씨가요?”



그의 의도는 적중했고, 재원이 전화 했었다는 말을 들은 헤라는 방금 전의 헤프닝은 까맣게 잊고 반가움을 숨기지
못한다.



“ 네.......하지만 여기서 주먹다짐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을 걸요.”



그러나 이내 웃음을 머금은 윤석은 방금 전 일을 상기 시킨다. 그녀는 어깨를 한번 으쓱 해보이 걸로 그의 말을
받고는, 바이크에서 내려와 헬스장의 창가에 있는 검은색의 플라스틱 벤치로 가 그와 나란히 앉았다.



“ 걱정 마요....... 헤라 씨 그러는 거 이상하게 생각안하니까.”



그가 캔 음료수 두 병을 갖다 주는 직원에게 눈인사를 하며 다 안다는 듯 말했다.



“ 연주 씨가 얘기해 줬어요. 남자 알러지 있다고, 두드러기 나고 그런다면서요?”



의자 등받이로 팔을 올리고 다리를 꼬아 편안한 자세를 만든 윤석의 요점은 지금 말은 아니고, 무언가 그녀에게
다른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 연주가 윤석 씨한테 그런 얘기도 해요?”


헤라는 그가 건네준 차가운 캔을 만지작거리며 그와 눈을 마주 하지 않는다. 재원에게 전화가 왔다는 그의 말에
콩콩콩 뛰어대는 가슴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 그냥 어쩌다 술 한잔 나누다 보니 그런 얘기가 오갔어요.”



“ 네.......”



“ 참! 재원이가 헤라 씨 혹 여기 있으면 기다리라고 전해 달랬는데 이리로 온다고. 잊을 뻔 했네.”



어색하게 웃으며 윤석이 음료수를 들이킨다.

빠른 비트의 힙합인지 아니면 라틴곡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팝이 헬스장 안에서 작게 울리고 간간이 트래드밀의
반복적 소음과 스텝퍼의 탁탁 하는 소음이 음악소리의 리듬을 타고 있었다.



“ 헤라 씨!”



물방울이 맺힌 캔을 이리저리 돌리며 어색한 침묵을 만들던 윤석이 그녀의 이름을 진지하게 불렀다.



“ 말해요. 아까부터 저한테 할말 있는 것 같던데.”



“ 재원이.......어떻게 생각해요? 내 말은 좋은 놈이냐 나쁜 놈이냐를 묻는 게 아니고요. 그 녀석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 같은 걸 세울 그런 생각이 있냐는 거예요.”



헤라는 심각한 말투로 거기다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윤석의 얼굴을 잠깐이지만 바로 본다. 그리고 이내 다시
시선을 내렸다.

지난번 술집 주차장에서 만나 같이 차를 타고 올 때도 느낀 거지만, 그는 재원을 많이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자고.......건강하고.......능력 있는 친구를 왜 그가 걱정을 하는지 헤라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불빛이 반짝이는 야경을 등진 창가에, 나란히 의자 한 칸 간격을 두고 앉은 그녀와 윤석은 서로를 보지 않고 차가운
음료수 캔을 만지작거리는 같은 동작을 하고 있었다.




“ 글쎄요. 그런 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내려 차가운 캔에 좀 전 휘두른 주먹을 식히기 시작한다.



“ 그럼.......재원이에 대해 얼마나 알아요?”



가장 얘기 나누고 싶지 않은 부분을 그가 꺼낸다.



“ 알아야 해요?”



“ 그 말은.......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네요. 알 필요가 없다는 건지,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인지. 어떤
거예요?”



“ 재원 씨 배경에 대해서 라면.......알 필요도 알고 싶지도 않다는 말이고요. 그 남자 자체에 관해서라면 둘 다
아니에요.”



헤라는 피식 하고 웃어 보이며 캔 뚜껑을 딴다. 허리를 굽혀 무릎에 양 팔꿈치를 댄 상태로 그녀는 윤석을 여전히
마주하지 않는다.



“ 그렇다는 건.......재원이 하고는 연애만 한다는 그런 뜻이군요.”



정확하게 알아 맞춘다. 헤라의 지금 마음을.




“ ....... ”



“ 근데 어쩌죠? 그 녀석 여자 그렇게 가볍게 사귀는 타입 아닌데. 내가 보기에 재원이가 헤라 씨랑 사귀자고 먼저
말했다는 건, 이미 마음을 거의 다 줬다는 얘기에요. 미국에서도 지금까지 한번도 여자한테 먼저 사귀자거나 그런
적 없었던 놈이거든요. 물론 먼저 유혹한적도 없어요. 그러기 전엔 여자들이 한 발 앞서 달려들었으니까.”


곤혹함이 잔뜩 서려있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헤라는 허리를 펴 그를 마주 봤다. 하지만 그는
예상과는 달리 곤혹함 보다는 다소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 난요.......지금까지 그다지 편하게 살지 못했어요. 그래서 내 손에 쥐어지지 않는 것과 쥐어질 만한 것을 구분 할
줄 알죠. 또.......구분 하고나면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도 알아요.”



그녀는 진심을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 난 사람에겐 진심 외에는 통하는 게 없으니까 말이다.



“ 재원 씨는.......저한테 과한 사람이에요.”



윤석은 잠시 할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고 조금 먼 거리 맞은편의 정수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 그러니까.......앞으로의 계획 같은 건”




“ 헤라 씨가 겁먹는 거 당연해요. 수월치 않겠지요. 아마 집안이나 주변에선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라고
얼토당토않은 일이라 뜯어 말리겠지만........그래도 헤라 씨는 그러면 안돼요.”



그녀의 말을 막아서며 윤석의 어조는 강경해 지고 있었다. 헤라는 왜? 왜? 내가 그러면 안되는데요? 하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말을 삼킨다.




“ 재원이.......상처 많은 애 에요. 아직 그 녀석이 헤라 씨한테 어느 정도까지 지 마음을 보여 줬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뭔가 아주 중요한 말을 그가 하려는 순간에 누군가의 발이 두 사람 앞에 서고 헤라의 손에서 음료수 캔을
빼앗아 든다.



“ 뭐야? 둘이 심각하게.”



다음 순간, 헤라의 손에서 빠져나간 음료수는 꼴깍 소리를 내며 재원의 목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 벌써 왔냐? 가희동에 들러서 온다며.”



윤석이 음료수를 넘기는 재원을 올려다보고 놀란 듯 말한다.



“ 들러서 할아버지만 뵙고 왔어. 피곤해서.......”



“ 어........응.”



“ 근데 둘이 뭐냐? 멀리서 보니까 제법 심각해 보이던데. 무슨 일 있었어?”



재원을 보고도 입을 다물고 있는 헤라와 놀란 눈을 한 윤석을 번갈아 보며 그가 한쪽 눈을 찡그린다.

웬일인지 옅은 핑크색 셔츠에 사선으로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금색과 분홍색이 섞인 타이까지 맨 그는 오늘도
럭셔리 자체였다.

거부할 수 없는 그의 수많은 매력 중 하나!



“ 아~ 별일 아냐. 신참 코치 하나가 헤라 씨한테 집적대다가.......알지? 한대 퍽!”



윤석이 주먹을 휙 하는 소리가 나도록 날리며 헤라 흉내를 냈다.

그러자 재원은 아하~ 하는 소리를 내며 상상이 간다는 표정을 한다. 예전에 석훈을 때려 눕혔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헌데, 그 표정이 어찌나 멋지고 잘생겨 보이던지, 방금 전 까지 윤석과의 심각한 대화를 잊은 채 그녀는 삼일 만에
보는 재원의 얼굴에 넋을 놓고 있었다.

언제나 심각한 모든 일을 재원으로 인해 잘도 잊는 그녀.......오늘도 그랬다.



“ 가자!”



넋이 나가 자신의 얼굴에 눈을 박고 있는 헤라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재원이 길을 재촉 한다.

1분 1초라도 빨리 그녀와 단둘이 되고 싶었다. 지난 삼일 간 정신없이 막바지 회계 감사에 ?기면서도 30분
간격으로 그의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던 그녀였다.

마련해 놓은 감사 자료의 근거를 다시 한번 점검 하고 수정 하는 복잡한 과정 속에서 도저히 떨쳐지지 않는 헤라의
얼굴에 재원은 힘겨운 사투를 벌려야 했었다. 사랑이 이렇게 까지 마음뿐 아니라 뇌 까지도 지배하는 줄은 그도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었다.



“ 간다.......전화 할게.”



윤석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재원은 그녀를 여성용 라커룸 안으로 집어넣고 그 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다.

5분 쯤 후, 이미 밤 9시를 넘긴 시간 이지만 아직 남아 있던 여자 대여섯 명과 함께 섞여 나오는 헤라의 손목을
얼른 낚아챈 그가 빠른 걸음으로 헬스장을 나간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VIP 전용 주차장으로 내려와 그녀를 차에 태웠다. 헤라는 묵묵히 그가 하는 대로 따랐다.



“ 나 좀 봐!”



운전석에 올라앉은 재원이 문을 닫자마자 몸을 돌려 헤라를 마주했다. 그녀도 시키는 대로 몸을 돌려 그를 마주한다.

그의 눈이 번뜩이며 기쁜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헤라의 얼굴을 감싸 쥐고, 손 안의 그녀를 한참이나 보고 또 본다.




“ 안 반가워? 삼일 만 이잖아.”



“ 반가워.......오랜만에 보니까.”



“ 근데.......말투가 그게 뭐야? 좀 더 다정하게 말해주면 안돼?”




“ 내가 언제는 재원 씨한테 그렇게 굴었어?”




“ 그럼 지금부터 그렇게 해. 내가 그러길 바라니까.”




“ 왜 그래야 되는데? 이유를 대봐 그럼 그렇게 할게.”




“ 이유가 어딨어? 그냥 바라면 바라는 거지.”




“ 싫어. 내가 재원 씨 노예도 아니고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건 타당치 않아.”




“ 시키는 거 아냐. 바라는 거지. 말은 똑바로 하자 우리!”




“ 그게 그거 아니야?”



“ 달라.......바라는 건 부탁하는 거야. 시키는 건 명령하는 거고.”



“ 그럼 지금 재원 씨가 나한테 부탁 하는 거란 말이야?”




“ 그래.......부탁이야. 지난 삼일 간 참고 견딘 내 노고에 대한 너의 치하를 바라는 거야.”



“ 뭘.......참고 견뎠는데?”




재원과 헤라는 지난 삼일 간 쌓아둔 말을 한순간에 다 하는 것처럼 숨도 쉬지 않고 서로의 말에 대답하고 물었다.

그리고 끝으로 그녀가 재원에게 뭘 참고 견디었는지에 대해 묻자 그의 깨끗하고 단정한 얼굴이 빙그레 기분 좋은
웃음을 웃는다.


“ 이렇게 마주 하고 싶고....... 같이 밥 먹고 싶고....... 게임 하고 싶고....... 다투고 싶고.......보고
싶고.......목소리가 듣고 싶고.......만지고 싶고.......키스하고 싶은 너랑 할 수 있는 모든 것! 그걸 참고 견뎠어.”



낮고 그윽한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재원의 차 앞으로 다른 차 한대가 지나가면서 얼굴을 가까이 마주 대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노골 적인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관여치 않는다.



“ 이 정도면.......내 부탁 들어 줄 수 있지?”



자신의 손안에 든 헤라의 얼굴에 다정한 눈과 다정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그 다정함을 도저히 거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점령하고.

그 순간 헤라는 모든 걸 잊는다. 그의 그 엄청난 배경도.......모친도, 민 수 연도, 그리고 절대 사랑하지
말아야겠다던 다짐 따위도 다 잊어버린다.


“ 응.......나도 보고 싶었어. 아주아주 많이.......그래서 밤에 조금 울었더랬는데.......재원 씨가 없으니까 운다고
구박하는 사람이 없어서.......사실은 울지 않으려고 밤마다 라면 끓여먹고 자버려서 나.......몸무게가 1.5 킬로나
늘어났어요.”


그리고는 술술술 그가 원하는 말들을 작은 목소리로 쏟아낸다.


라면.......그 라면과 몸무게 얘기에 재원이 낮고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 그래도.......나 만큼은 아니었을 걸!”




30.




“ 많이 피곤해 보여. 삼일 동안 거의 못 잔 거야?”



재원의 코밑의 거뭇하게 자라난 수염에 손가락을 댄 헤라가 걱정이 담긴 말을 했다.


“ 사무실 소파에서 두세 시간 씩은 잤어.”



그가 코밑을 만지는 헤라의 손가락을 잡아 입을 맞추었다. 피곤으로 거칠어진 그의 입술의 느낌이 수염처럼 까칠
거린다.



“ 근데 어쩌냐........피곤해도 라면이 먹고 싶은데. 저녁 아직 안 먹었거든.”




“ 9시가 넘었는데 여지껏 안 먹었단 말예요?”



“ 음.......가희동 집에 들렀다 오는 바람에 그럴 시간이 없었어.”




“ 시간이 없긴........먹고 오지 그랬어.”




“ 말했잖아. 하고 싶은 것 중 한 가지! 너랑 밥 먹는 거.”




그가 다시 웃는다. 오늘의 그는 연신 벙글거리고 평소에 비해하고 하고 싶은 말을 아끼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러지마! 이러지마! 재원 씨! 그녀는 재원이 거는 주술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헛된 노력 이다.


“ 라면 집 맛있는데 알아.......지금 갈래?”



그리고 이내, 그가 쏘아 보내는 사랑의 눈빛에 쥐고 있던 마음을 놓아버린다.




“ 물론이지! 가자.......근데 그전에 키스 한번 하고 가면 안 될까? 네 입술이 너무너무 그리웠거든.”



“ 배고픈 게 먼저 아냐? 식욕이 우선일 텐데.”



“ NO, 성욕이 우선이지! 몰라? 무인도 얘기. 아사 직전 까지 식욕은 나중이야.”



“ 으이그~ 정말 못 말려.”



헤라가 다가오려는 그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낸다. 하지만 재원은 그 기분 좋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당긴다.



“ 똑 똑 똑!”



차의 앞 유리를 두들기는 소리.......




“ 참으셔! 재원 군.”



윤석 이었다. 재원이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이 앉은 쪽의 차창 유리를 내린다.




“ 뭐냐? ”




“ 미안! 매번 방해해서. 그런데 꼭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윤석이 내린 차창으로 얼굴을 들이밀어 헤라의 힐끔거린다. 그녀는 그런 윤석을 외면하고 있었다. 아까의 대화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 음~ 나 내일 제주도 출장 가거든. 아침 비행기로 갔다가 월요일 아침에 올 건데.......두 사람 같이 갈래? 연주
씨도 같이 가기로 했는데, 어때?”



“ 제주도?”



주말을 이용한 제주도 여행 이라니! 헤라는 뜻밖의 제안에, 외면했던 윤석의 얼굴을 돌아봤다.



“ 응! 비행기 표는 얼마든지 확보 할 수 있어.”



“ 뭐 그건 걱정도 안 해. 하지만.......갈래?”
재원이 그녀를 돌아보며 묻는다. 헤라는 윤석의 의도가 못내 의심스러웠지만 재원과 여행이라니.......하는 기쁜
속마음에 단박에 거절을 하지는 못했다.




“ 글쎄.”



“ 30분 줄게. 그 안에 결정해서 전화 해줘.”



“ 알았어. 바로 전화 할게.”



윤석이 차창을 집고 있던 손을 떼며 허리를 일으키기 전, 헤라와 눈을 맞추어 반짝하니 그 두 눈을 빛낸다.

뭘까.......윤석의 그 눈은 지난번 나이트클럽에서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 어디로 가면 돼? 맛있는 라면 집.”



재원이 차에 시동을 걸며 물었다. 키스는 생략 인가 보다. 누구 덕에.......



“ 주공공이 극장 뒨데.......그 극장 알아요? 세븐일레븐 뒤로 가면‘ #레드 ’ 라고 괜찮은 집 있어.”



헤라는 윤석의 뒷모습에 눈을 주며 재원의 질문에 대답한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도 같은데 속을 모르겠다.
어쩌면 친구 간에 그런 것도 닮았는지, 아! 그리고 보니 이제야 생각났는데.......재원과 만날 첫날 그
인터XXXX호텔에서 만난 친구가 윤석 이었다. 그래서 아마 그때 유유상종 이라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헤라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나온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아직 복잡하기만 한 도로로 뛰어든 재원의 차는 차와 차 사이를 잘도 삐지고 다닌 끝에 정확히
6분 만에 ‘#라면’ 집 앞에 차를 세웠다.



“ 재원 씨가 나한테 올 때마다 윤석 씨가 날아 왔냐고 묻는 의미를 알겠어.”



안전띠를 풀며 헤라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는다. 이제까지 딱 세 번, 그의 차를 타 봤지만 오늘 같은 곡예 운전은
처음 이었다.



“ 피곤한 날만 그래. 다른 때는 점잖게 운전 한다구. 속단하지 마.”



오른쪽 눈으로 그녀에게 난데없는 윙크를 날려 보낸 그가 차의 시동을 끄며 한 번 더 난데없이.......... 그녀의
입술에.......... 기습 키스를 한다.

갑작스레 부딪힌 입술에 그녀는 이 까지 얼얼한 느낌이 들었지만, 재원은 느리고 감미롭게 혀를 들이밀어 깊은
숨으로 헤라의 혀를 빨아 들였다.

그리고 헤라의 혀가 그의 혀에 반응을 주자 재원은 그녀의 뒷머리에 손을 받혀 입술을 누르는 힘을 조절한다. 그의
침은 끈적이지도 않고 맛이 달고 묽었다.

........올 때와는 다르게 천천히 여유롭게 그 혀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마무리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걸로
그는 끝을 맺는다. 물린 아랫입술이 간지러웠다.

욕정이 아닌.......농밀한 애정과 존중의 뜻을 느낄 수 있는 이제까지의 키스 중 최고의 키스!

그 키스에 헤라는 고인 침이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흔들리는 시선으로 재원의 눈동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어떻게.......!



“ 라면 먹기 전에 해야지! 먹고 나면.......음~ 며칠 전 집에서의 일이 안 잊혀진다.”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재원은 농담 반 진담 반섞인 말을 하고 빙긋 웃어 보였다.



“ 뭐야? 왜 넋이 나가서 그래? 내 키스가 그렇게 훌륭했어?”



“ 바람둥이!”



헤라는 웃는 재원을 남겨 두고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냥 바람둥이의 키스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애정과 존중을 담은 키스라 는 것을 부정하고, 플레이보이 이기에 그런 키스를 가장 한 것이라 그렇게 믿으려
애쓰려 했다.




“ 내 참! 나 바람둥이 아니라니까.......몇 번을 얘기해!”




빨간 간판의 라면 집 문을 밀고 들어서며 재원이 낮게 중얼거렸지만 그녀는 모른 척 빈 테이블을 찾아 앉는다.


10시 가 다된 시간 이지만 20평 남짓한 공간 안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주로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또래의
남자들과 직장인을 보이는 몇몇 무리들이었다.



“ 메뉴 골라요.”



그녀가 빨강 색의 플라스틱 아크릴 판으로 만들어진 메뉴판을 들이민다. 재원은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이름의
메뉴들을 보며 난처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씨락면, 청춘짬뽕, 깜제비, 라보떼, 유부남, 빨면, 샘치......25년전, 기타 등등’



“ 하나같이 괴상한 이름뿐 이네. 뭘 먹어야 되는 거야?”



헤라가 재원에 의해 성의 세계에 막 입문을 시작한 것처럼 그도 이제 그녀에 의해 라면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
시점 이었다.

그러기에 그도 헤라의 조언과 가르침이 필요했다. 식욕을 충족시킬 라면의 종류를 고르기 위해서 말이다.



“ 뭐.......늦은 시간이고........재원 씨가 해장할 일도 없고 하니까. 깔끔한 게 좋겠네요. 맵고 맛이 좀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하고 우리나라라면 고유 맛이 살아 있는 메뉴.”



청회색의 투명한 유리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괸 그녀가 메뉴를 내려다본다. 뒤로 늘어트려 하나로 땋은 긴 머리가
왼쪽 어깨로 넘어와 있었다.

볼록하고 시원한 이마에 흘러내린 앞 머리카락이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작게 흔들린다. 그리고 생각을 할 때마다
입 꼬리를 올리는 버릇이 있는 그녀의 오른 볼에 패 인 보조개는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관찰하던 재원의 심장이 가볍게 설렌다. 십대시절 롤러코스터를 타고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밑으로 떨어지길 고대하고 있던 그 순간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당장이라고 꽉 껴안고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재원에게 헤라는 예쁘고, 보기만 해도 닳을까 아깝게 느껴질 정도로
소중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이 여자를 이렇게 사랑하게 됐을까? 하는 생각에 찡 해오는 코끝을 그는
쥐었다 놓는다.



“ ‘25년 전’ 으로 먹어요. 그냥 라면에 김 가루 얹은 건데.......젤 루 부담 없을 것 같아.”


메뉴 고르기에 고민을 하던 그녀가 드디어 주문을 하고 라면을 기다린다.



“ 목말라.”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가 물 가져다 먹는 일이 셀프 서비스인 라면 집인지라, 물을 가지러 일어서려 하자
재원이 가볍게 제지 하며 먼저 일어선다.



“ 내가 가져다줄게.”



그는 좀 전부터 헤라를 힐끔거리는 대학생 패거리들에게 신경이 쓰이던 참 이었다.

그제야 보게 된 사실 이지만, 그녀는 무릎 바로 위에까지 오는 길이의 핑크색 면 스커트와 흰색의 조깅 슈즈를 신고
있었는데.......그 아찔한 각선미가 어찌나 시선을 끄는지 정수기가 있는 홀의 앞쪽으로 가는 재원 자신마저도 그녀의
다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야! 말 그대로 쭉쭉빵빵이지 않냐? 몸짱 이야! 진정한 몸짱!”



“ 다리만 죽이는 게 아니고.......위에는.......젖통은 더 죽인다.”



양손에 컵을 들고 물을 받고 있던 재원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패거리들의 말소리에 어금니에 힘을 준다.



“ 같이 들어온 사람이 있었냐? 지금은 혼자네!”



그들은 헤라의 그 몸짱, 얼짱에 정신이 나가 식당에 함께 들어선 상대는 아예 눈에 두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패거리들 중 한 녀석이 헤라에게 음흉한 눈길을 준 상태로(재원의 상상임) 다리 한 짝을 테이블 밖으로 내놓고 덜덜
흔들고 있다. 거기다 녀석의 신발은 불량스럽게도 슬리퍼였다.

재원은 그 흔들리는 발에 시선을 고정 시키고 앞으로 걸어간다.



“ 아악! 뭐예요?”



그의 검정색 스니커즈가 녀석의 발 위를 꾸~욱! 느긋이 지나가고 바로 약간은 소란스런 비명이 났다.




“ 이런 미안!........미안. 그러게 남에 다리 신경 끄고 네 다리나 잘 간수하지 그랬습니까?”



그가 반말과 존대를 희한하게 섞어가며 말을 비꼬았다.

다음 순간 녀석이 인상을 쓰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재원이 헤라의 테이블에 물 컵을 내려놓는 걸 보고는 아~
하는 표정으로 도로 엉덩이를 얌전히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 이번이 두 번째야. 또 주먹이 나갈 뻔 했다구! 아마도 너랑, 이런 데에 몇 번만 더 다니다가는 내가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아.”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그는 아직도 이쪽을 노려다 보는 녀석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 하~신경 꺼요. 저런 애들이 어디 한 둘이야? 난 초월 했으니까 재원 씨도 얼른 적응 하는게 좋아요. 일일이 신경
쓰고 예민해 지다가는 자기 손해야.”



그러나 표정이 굳어져 질투로 불타오르는 재원의 반응에 헤라는 손목을 위 아래로 까닥거리며 우습지도 않다는
소리를 했다.

이 몸이 늙어지면 사라질 시선들.......즐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기엔 그녀는 이미 달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원은 별 일 아니라는 얼굴로 물을 들여 마시는 그녀의 목을 보며 그 건강하고 긴 목으로 넘어가는 물에게조차도
질투를 느꼈다.

암~ 중증이다.

재원의 소유욕은 날이 가면 갈수록, 박새가 깊은 산중으로 날아 들어가 집을 짓지만 아무리 가장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결국엔 나뭇가지 하나밖에 소유 할 수 없다는 그런 비유를 무색 하게 할 정도가 될 것이다.

소유에 대해 어떤 짧은 시에서는 그랬다. ‘너를 이 수첩에 꾹꾹 눌러 담을 수만 있다면.......마치
꽃잎처럼......’이라고.

지금 이 순간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다른 남자들의 시선으로부터 격리시켜 놓고 싶었다.

열정과 소유.......상관관계에 있지만 소유를 뺀 열정은 행복할 것이라는 걸 재원은 안다.......그러나 그는 지금의
헤라가 자신만의 그녀가 아닌 것 같은 기분! 이 이타적인 감정에 빠져 잠시 허우적대고 있었다.








“ 어머! 뭐니? 이런 라면 집 앞에 웬 벤츠야? ”



“ 그러게.......모르는 우리가 봐도 최신형 벤츠구만!”



헤림가 헤미는 라면 집을 벌써 오늘 하루만 다섯 군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중 마지막 방문지가 이곳‘ #
라면’집 이었다.

그녀들이 문을 열고 벽이 온통 오렌지색으로 장식된 홀로 들어선다. 카페 분위기의 내부엔 젊은 사람들 일색이다.
뭐 라면 집이 다 그렇지만 말이다.



“ 여기 괜찮다. 근데 인테리어 비가 좀 많이 들지 않을까?”



“ 그만큼 본전 뽑겠지. 강남만 아니면 이정도 인테리어 해도 얼추 우리가 갖고 있는 돈하고 맞아 들어갈지도 몰라.”




“ 그래? 그런 계산이 되는 거야?”



입구 쪽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으며 두 사람은 가게내의 손님 부류를 살펴보기 위해 앉아있는 사람들을
둘러본다.

그때, 딱 걸렸어~! 가게 안쪽으로 몸을 향하고 앉아 있던 헤미의 눈에 들어온 그녀! 동생 헤라가 웬? 정말 웬?
남자와 라면 빨을 열심히 빨고 있는 게 아니겠어!



“ 언니.......헤라 찾았어.”



“ 뭐? 뭐?”



헤미의 시선의 종착지로 허리를 비튼 헤림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헤라가 남자랑! 그것도 야심한 이 시간에! 저렇게 다정히! 웃음까지 눈에 걸고! 거기다 남자가 헤라의 입가에 묻은
김? 아무튼 까만 점 딱지 같은 것은 떼어주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 제 무늬만 헤라 아냐?”



“ 아니 맞아. 저런 몸이 어디 흔하기나 해?”



“ 근데 왜 쟤가 남자랑 저러고 있냐? 말이 돼?”



“ 돼! 저 남자.......나 세 번 째보는 거야.”



“ 으잉? 뭐라고?”



“ 지난번 코엑스에서도 봤고, 한 달 전 쯤 인가........헤라 집 앞에서도 마주쳤고. 분명 그 남자야.”




헤미의 송곳 같은 시선이 남자의 뒤통수를, 그리고 입고 있는 옷들과 손목의 번쩍이는 시계를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헤림은 도저히 눈앞의 광경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헤라가! 우리 막내의 고질병이! 하며 어떻게 된 상태인지 감이
잡히지 않고 있었다.

헤미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나 헤라 네 쪽으로 다가 갔다.




“ 헤라야~”



어금니를 문 상냥을 가장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다. 이 목소리.......!




“ 아......! 여긴 어쩐 일이야?”



라면을 먹는 재원에게 정신을 놓고 있던 그녀는 언니들의 출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귓가를 울리는 으르렁거림!

허나 그녀는 당황해 하지 않는다. 이유는? 이제까지 언제나 언니들에게 물주 노릇을 해주던 헤라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만큼 가족에게 헌신을 했고 그렇기에 늘 당당했다. 가출을 한, 현 상태 에서도.



“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젓가락을 놓고 먹던 일을 멈춘 재원을 향해 헤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가 헤라와 헤미를 번갈아 보다 막 헤미의
옆으로 와 선 헤림과 눈이 마주치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선다.



“ 아~ 안녕하세요.”



재원이 헤미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헤림을 알아본 것이다.



“ 어머! 그........그 노트북? 노트북 맞죠!”



“ 네.......맞습니다.”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대답을 했다. 하지만 재원은 속으로 내심 반갑다. 그녀의 자매들을 이런 식
으로나마 만나게 된 일이 잘된 일이라 여기고 있는 차였다.



“ 그랬군요........정말! 의외네요. 그날은 둘이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대더니!”



마치 노트북의 그 날을 머리 속에 재생이라도 시켜보는 듯 헤림은 생각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 같이 앉으시겠어요?”



샐쭉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는 헤라를 돌아보던 재원이 두 언니들에게 자리를 청했다.

풋~ 진짜 가출을 하긴 한 모양이군! 그는 헤라의 삐진 얼굴을 보며 속으로 웃는다.

언니들의 반응으로 보나 지금의 그녀를 보나.......이제 두 사람의 며칠간의 동거가 막을 내림을 그는 깨닫고 있었다.

그녀들은 그리 수다스럽지는 않았다. 대신 요점만 물어왔다. 사귀고 있는 건지! 언제부터 만났는지! 하는 그런
것들........겉모습은 헤라와 닮아있었지만 성격들은 제각각 이라 재원은 생각을 했다.

헤림은 첫인상 그대로 매력 적이고 차분했으며........헤미는 조금 직접적이고 차가와 보였지만 정감이 가는
성격이었다.



“ 택시타고 갈 거예요.”



재원의 벤츠 앞에 선 헤라는 고집을 부린다. 언니들은 좀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차 놔두고 왜 택시야? 말도 안돼!”



“ 싫어. 택시타고 갈래.”



발치에 서 있는 언니들을 불안한 몸짓으로 바라보던 헤라는 뒷짐을 지고 발장난을 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 됐어. 내 차로 가. 어차피 너 바래다주는 길에 같이 들 타고 가는 건데. 웃겨.”



“ 싫대두. 우리 언니들 이런 고급차에 익숙한 사람들 아냐. 불편할 거야.”



그녀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달았다. 재원은 헤라의 진심을 헤아려 보려 하지만 머리 속에 드는 생각은 그녀가
여전히 숨으려든다는 답답한 진실 뿐 이다.



“ 언니들이, 나랑 인사 한 게 부담스러워서 그래?”



그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순간 심각해지는 분위기!

헤라는 이젠 그의 집으로 함께 가지 못하고 새엄마의 집으로 돌아가는 마당에 이렇게 별것 아닌 일로 싸우듯
헤어지는 게 마음에 걸린다.



“ 아니야. 그런 거.......재원 씨 많이 피곤하잖아. 입술도 다 터서 꺼칠거리고. 걱정돼서.......조금이라도 더 일찍
돌아가서 쉬라 그 소리야.”



그녀는 입가에 편안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살며시 재원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의 품에 파고들어 그 청결한 비누 향을 맡아보고 싶고,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을 느껴보고 싶고, 팔
안 가득 들어오는 그의 허리를 안고 싶은 마음이 가슴을 메우지만 그녀는 그 마음을 접는다.



“ 정말이야.......그래서 그래.”


그녀는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며 눈을 들어 재원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인다. 왠지 불안 해 하는 것 같은 그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 좋아~ 이번만 내가 양보 한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아니야. 특히 널 혼자 택시 태워 보내는 일 따위는 절대 안할
거니까 오늘처럼 고집 부릴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 알았어?”



그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헤라에게 다짐을 받아냈다. 같이 다녀도 옥수수 엮이듯 엮이어드는 딴 놈들의 시선
때문에 골치가 아플 지경인데 밤에 혼자 택시를 태워 보낸 다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헤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재원은 큰 길까지 같이 걸어 나가 그녀와 언니들을 택시에 태워 먼저 보냈다.

그리고 차로 돌아온 시간은 그로부터 20분 후. 차에 오르자마자 핸즈프리에 걸려 있던 휴대폰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울려댄다.



[ 네. 새엄마? ]



[ 왜 이리 전화를 안 받니?]



[ 죄송해요. 차에 놓고 내렸었어요.]



[ 피곤하다고 일찍 간 애가, 여태 집에 안 들어가고 뭐 한거니?]



모친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재원은 그저 낮게 웃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 그래 .......용건만 말하마. 재원이 네가 글피 월요일에 할아버지 모시고 미국 지사에 좀 다녀와야겠다.]



미국지사에? 갑자기 그것도 할아버지가 왜?



[ 무슨 일인데요? 이렇게 갑자기]



[ 에미가 그걸 어찌 알겠니? 하여간에 너 집에서 나가고 바로 직후부터 윤 비서가 계속 전화 했는데 통화가 안
된다 길래 내가 하는 거야.]



[ 네.......그럼 윤 비서랑은 내일 통화하면 되겠네요.]




[ 그래........어쨌든 여권이랑 비자는 윤 비서가 알아서 준비할 테고, 넌 글피부터 열흘간 출장 가는 걸로 처리하고
준비나 하라 할아버지 그러셨어.]




갑작스런 미국 출장이라니.......그것도 할아버지와 동반으로! 재원은 찝찝한 마음을 가누며 모친과의 통화를 마쳤다.

혹시 GDR 발생 소문이 나돌던데! 그것 때문인가?

차에 시동도 걸지 않고 그는 얼마 전부터 돌던 DR 발행에 대한 소문을 추측해 본다.


“RRRR.....RRRRR”


그러다 다시 울리는 휴대폰 벨 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원이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 나야. 뭐냐? 30분 안으로 전화 하랬더니.]



윤석이다.



[ 미안! 정신이 그랬다.]



[ 어째? 갈 거지?]




제주도.......재원은 헤라의 망설이는 표정을 보고 가야할지 말지의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방금 모친과의
통화로 그는 그 망설임을 접는다.

열흘이나 못 보는데! 하는 아쉬움과 불안감에 그는 이 주말만이라도 온전히 그녀와 모든 시간을 보내보고 싶은
욕심이 든 것이다.



[ 당연하지! 몇 시 비행기냐?]



[ 아침 9시 반. 김포 공항이니까 별루 힘들진 않을 거다. 늦지 마. 다음 비행기 좌석은 미리 확보 안 해 놨어.]



[ 알았어. 임마! 내일 보자.]



그리고 전화를 다시 또 끊고 재원은 핸들에 팔을 얹어 턱을 괸다. 하~ 정말 내가 왜 이러지.......! 미친놈
같잖아........

말도 안돼는 질투를 하고, 소유하려 들고, 불안에 떠는 꼴이.......우스워! 그렇지만.......그래도........지금이 좋다.

그는 피곤한 눈을 문지르고 휴대폰을 들어 0 번을 길게 눌렀다.








[ 음. 나에요.]




[ 어디쯤 이야?]



[ 아직 강변도로야. 벌써 집에 들어갔어요?]



[ 아니.......나도 아직.]



[ 뭐예요? 일부러 택시타고 가주는 건데.]



[ 알았어. 지금 들어가. 근데.......내일 아침 8시 까지 제주도 갈 준비 하고 있어. 데리러 갈 거니까.]


제주도! 잊고 있었다. 언니들 땜에. 하지만 가야할까? 물론 가고 싶어. 그치만......



[ 글쎄.......난 아직 더 생각해 봐야 겠는데요.]



[ 생각은 무슨! 우리 둘이만 가는 것도 아니고, 네 친구 연주 인가 하는 사람하고 윤석이도 같이 가는 거니까
언니들도 허락할 거야. 잘 얘기 하고 내일 일찍 일어나. 끊는다.]



[ 재 재원 씨]



그는 헤라가 다른 어떤 핑계를 대기도 전에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그녀는 달리는 택시의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하고싶은대로 해! 진 헤 라.......연애잖아! 연애는 그런 거야. 마음 가는대로 하는 것! 하고 자신의 얼굴을 향해
가만히 중얼거린다.


잠실의 27평 아파트로 돌아온 그녀를 새엄마는 안타까운 얼굴로.......그리고 형부는 미안한 얼굴로 맞았다.

헤라는 그런 두 사람을 제치고 조카 지민이를 품에 안아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려 한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두
언니의 재원에 대한 보고에 새엄마나 형부는 그녀를 어색한 분위기에 몰아넣을 여지가 생기지 않았다.



“ 돈 많은 사람이야. 새엄마. 지난번 얘네 집 앞에서 봤을 땐 분명 BMW 8시리즈 이었었거든! 근데 오늘은 벤츠
더라구! 그런 차가 두 대나 있을 정도면 확실히 보통 부자는 아냐. 맞지? 맞지? 진 헤 라!”



헤미의 통찰력에 감복을 하긴 했지만 헤라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흔든다.



“ 그 사람! 너한테 완전히 뿅 갔더라. 아주 푹 절었어. 눈만 봐도 알아. 잡아 무조건 잡는 거야.”




윤석 씨는 그랬다. 그녀의 가족들이 ‘바위에 계란 치는 격’이라며 절대 재원과의 교제를 뜯어말릴 거라고.......그러나
그건! 어느 정도 뭘 아는 사람들의 상식의 자대인 것이다.

재원을 단순히 부잣집 도련님 정도로만 아는 언니들에겐.......오히려 그는 수렁에 빠진 그녀의 가족들을 건져줄 밧줄
내지는 그 밧줄을 끌어 줄 힘 좋은 트랙터 인 샘 이었다.



“ 말 같지 않은 소리 마. 그냥 연애만 하는 거야. 난.......절대로 결혼 따위 안하니까 다들 꿈 깨셔”



짐이 산더미처럼 쌓인 지민이의 방으로 들어가며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2박 3일의 여행 짐을 챙기려는
것이다.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허락 같은 건 필요도 없겠다. 아니 만약 헤라가 재원과의 여행에 가지 않는다고 하면 주먹이
날아들지도 모르는 그런 분위기다.



“ 또 저런 철딱서니 없는 소리! 야 계집애야! 부자 남편을 아무나 갖는 건줄 알아? 너도 언니 짝 나고 싶어?”



헤미가 꽥 하니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바보들! 그 사람이 그렇게 쉬운 남자인줄 알아? 나 같은 건 감히 찍어다 붙일 수도 없는 상대라구! 차라리 처음
생각처럼 졸부쯤이나 됐으면 훨씬 좋았을 것을!


헤라는 입술을 신경질 적으로 뜯으며 널 부러진 상자안의 짐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다시금
비참함이 그녀의 허를 찌른다.

꼼꼼하게 화장품과 옷가지와 휴대폰 충전기까지 챙긴 그녀는, 어느새 새벽 1시를 넘긴 시계 바늘을 보며 잠자리를
만들기 위해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서 그런 그녀를 기다리는 눈은 기대를 안은 헤림과 강압적인 시선의 헤미 그리고 심지어 형부까지도 낯짝도
두껍게 시리 들뜬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새엄마만이 근심이 서린 눈으로 헤라를 바라볼 뿐 이었다.

그놈의 벤츠하고 BMW가 문제야!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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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애플그린(casino92@hanmail.net)

창작실: 30대 plant.1

제목: 러브써치 펌.

편수: 1-49(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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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열시나 되서야 일어난 석훈은 밤새 켜둔 노트북에서 메일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음을 들었다.

덩그러니 혼자 사는 50 여 평의 빌라는 뜨거워지기 시작한 6월의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지만 썰렁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들을 그다지 상관치 않고 거실의 유리탁자 위에 놓인 노트북으로 다가가 메일을 연다. 한 손에
모닝커피를 들고 남은 왼손으로 마우스를 놀린다.

요점만 간단한 메일.......그러나 내용을 확인 하던 석훈의 커피 잔을 든 손이 딸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유리탁자위에 놓였다.

재원이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아침 비행기로........미국에서부터 베스트 프렌드인 신화그룹의 신 윤 석과!

그리고 항공권으로 확인된 다른 동행 두 명과. 한 사람은 그의 관심 밖의 여자였고 맨 끝에 기재된 또 하나의
이름은 진 헤 라!

진 헤라?.......와 정 재 원? 석훈은 지난 달 모임에서의 두 사람이 분위기를 기억해 내려 애쓰며 자신과 재원
그리고 헤라와의 구도를 잡아 본다.

뭐야? 묘하군!.......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까지 발전한 거라면........지금 상태를 알고서나 그러는 건가?

진 헤 라가.......고 석 준의 써치 라는 걸 재원이가 아는 거야? 아니면.......진 헤라가 재원이 이번일의 담당인 걸
아는 건가?

뭐 그렇거나 말거나 내가 상관 할 바는 아니지만........그는 자신이 찍은 여자를 재원이가 데리고 논다는 건 역시!
안 좋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번 건에서 그녀가 재원에게 넘어간다면 물 먹는 것 또한......... 자신이란 걸 깨달았다.

이런 이런! 한가하게 주말을 방에서 뒹굴다간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겠는 걸!

계산이 거기에 이르자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의 커다란 창가로 선 그는 결심을 한다.

세 사람의 묘하디. 묘한 관계 상태의 전말을 파악한 석훈은 목을 좌우로 꺾어 '투둑'하는 소리를 냈다. 거기에
무표정하고 그러나 날이 선 눈은 음침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한다.



[ 음. 지금 바로 제주도로 가는 항공권 준비해 줘........신화 파라다이스 골프 클럽도 예약 해 놓고 숙소도 그
호텔로 잡아. 응........좋아.]








비행기에서 이륙 직후부터 재원은 멀미를 시작했다. 그 덕에 창가엔 헤라가 앉고, 두 사람의 뒤엔 윤석과 연주가
앉아 있었다.



" 괜찮아요?"


헤라가 눈을 감고 목을 뒤로 젖혀 불편한 속을 달래고 있는 재원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 이놈에 비행기는 통 적응이 안돼!......... 한 시간 정도라 참아보려고 약을 안 먹었더니.......더 하네~"



아무래도 며칠 동안 쌓인 피로가 그의 멀미를 부추기고 있는 것 같았다.



" 그러게 무리해서 제주도는 왜 가요! 그냥 집에서 쉬지."



" 집에 있어도........ 제대로 못 쉬어."



" 뭐가 그렇게 바쁜데?"



" 후~ 나야........늘 바쁘신 몸이지! 원하는 데가 많아서."



" 잘났어. 정말!"



몸을 혹사 시키는 재원에게 속이 상한 헤라는 고운 말을 하지 못하고 틱틱대 버렸다.



" 우.......욱. 역시 속이.......안 좋아."




그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좌석벨트를 푼다. 그리고 급하게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윤석과 연주가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동안에 헤라도 좌석의 벨트를 풀고 재원을 뒤 따라 갔다.

승무원 하나가 다가와 재원의 상태를 물었지만 그녀는 닫쳐진 화장실 문에 귀를 대고 있을 뿐 그가 어떤지는 알
길이 없었다.



" 똑 똑"



" 재원 씨......."



얼마 후,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화장실 문이 열렸지만 재원은 나오질 않는다. 헤라가 열려진 문을 빼꼼히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비좁은 기내의 화장실 세면대 위에 양손을 집고 몸을 의지한 그가 거울로 그녀의 얼굴을 본다. 재원의 몸 하나
만으로도 화장실은 꽉 찬 느낌이 들었다.



" 토했어?"



" 아.......아니, 이럴 줄 알고 아침을 안 먹어서........ 위액만 나오네."



거울 속의 그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런 재원은 처음이다. 그리고 늘 제대로 손질 되어 있던 세련된 머리카락도
오늘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는지, 부드럽게 그의 이마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소년처럼 순순해 보인다. 섹시하고 도시적이고 어떤 날은 조금 날카롭게도 느껴졌던 얼굴이 지금은
그녀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어리광 부리는 사내 아이 같았다. 거뭇하게 길어진 수염을 제외하면 말이다.



" 불쌍해!"



좁은 화장실을 비집고 들어간 헤라가 재원의 옆으로 간신히 몸을 세우고는 아직도 힘겨운 모습으로 세면대 위에
몸을 의지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 헤~ 태어나서 그런 소리는 너한테 처음 들어본다."



" 그래요? 난........많이 들어봤는데."



문득 아빠를 떠올리며 대학교 시절을 생각했다.




" 슬픈 눈이다 너! 뭐가 슬프니?"




재원이 화장실 벽에 몸과 머리를 기댄다.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 그냥.......옛날 일이 좀 생각나서."



자신을 바라보는 언제부터인가 변하기 시작한 그의 다정한 눈을 피하며 그녀는 말을 얼버무렸다. 아빠의
얘기.......세상에서 제일 하고 싶지 않은 얘기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재원이 헤라의 얼굴에 손을 가져가 그녀의 턱을 든다.



" 나랑 말 할 때는 눈을 피하지마. 네가 자꾸 내 눈을 피하면 난.......네가 눈을 피하는 그 횟수의 배만큼 불안이
커진단 말이야."



멀미 때문이었을까?
그의 말대로 재원의 눈엔 뭔지 모를 불안함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창으로 비스듬히 비쳐드는 햇살에 흑갈색의
홍채가 투명하고 서늘하게 보였다.



" 안아줘. 지금 네가 안아주면 힘이 좀 날 것 같다."



그가 헤라의 팔을 당긴다. 그녀는 벽에 기대 선 재원의 가슴으로 몸을 밀착시켜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와 그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혈액이 그의 몸 구석구석에 온기를 전달하고 그를 숨쉬게
한다는 생각을 하자, 그 심장 소리를 어느 날 엔가 듣지 못하게 되는 날이 있다면!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 에어컨이 너무 센가봐. 재원 씨 품이 너무 따뜻하다."



" 그럼........ 착륙 할 때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그가 결말이 뻔한 농을 했다. 헤라는 헤헤 하는 웃음소리를 내며 그의 등을 문지른다.



" 아~ 쏠려.......등 문지르지 마. 다시 울렁거려."



그가 힘없는 몸을 헤라의 어깨에 의지하며 괴로운 숨소리를 냈다.



" 으응.......미안!"



화장실은 깨끗했지만.......너무 좁았다. 재원의 다리와 변기 사이에 낀 그녀의 다리가 저려온다.

그때 재원의 손이 그녀의 얇은 면 티를 들추고 그녀의 맨살을 보듬었다. 따뜻하고 땀에 젖은 커다란 손이 허리를
맴돌다 바지 사이 엉덩이 쪽으로 들어갔다.



" 화 화장실에서.......역시 변태야!"



화들짝한 헤라는 재원의 손을 억지로 잡아 뺀다.



" 안 해! 그냥 촉감이라도 정신을 집중 시키면 몸이 좀 덜 괴로울까 하고 생각해낸 방책이야."



그의 변명은 그럴 듯 했지만, 헤라는 동요치 않는다. 밖에 분명히 승무원이 지키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불안하기까지 했다.



" 그만 나가! 둘이 화장실 들어가서 뭐 하나! 사람들이 이상한 생각하겠어."



" 무서워? 화장실에서 첫 경험을 하게 될까봐?"



" 하나도 안 웃기니까 실없는 소리 그만 하고 나가시지요. 정 재 원 씨!"



헤라는 그의 가슴을 밀치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그 문 밖엔 승무원이 아니라 연주가 심통 맞은 얼굴로 서
있었다.



" 뭐 뭐해?"



"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진 헤 라."



연주의 얼굴 표정이 어찌나 진지했는지 헤라는 그녀가 자신의 감시 역으로 따라 온 것 인가? 라는 착각을
순간이지만 했다.



" 됐어! 얘가 왜 이래?"



하지만 연주의 맘을 알 턱이 없는 헤라는 그녀의 이상한 행동에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자리로 돌아갔다.

뒤이어 나온 재원마저도 문 앞에서 꼼짝 않고 서있는 연주에겐 단 한번의 흘김조차도 주지 않고 그 눈은 헤라의
꽁무니를 쫓고 있었다.



" 괜찮냐?"



자리로 돌아가던 재원에게 윤석이 다가와 묻는다.



" 아~ 괜찮을 리가 있냐. 죽을 맛이다."



재원이 비행기 멀미를 하는 사실을 잘 아는 윤석은 안됐다는 뜻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헤라에게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가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한 그는 아직 화장실 문 앞에 멍 하니 서 있는 연주에게로 다가가 헤~ 하는 작은 웃음을
웃으며 그녀의 등을 꾹~ 하고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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