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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문현주]운명그리고....txt

#아래 소설은 일반인이 거북해 할수 내용이 담겨 있을수 있습니다. BDSM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되돌아가기를 누르기를 바랍니다.

1장 시작


10월의 하늘은 너무 높고 푸르다. 이렇게 푸른 하늘을 보면 그 하늘이 먹음은 눈물 같아 같
이 슬퍼져 버린다.
높은 하늘 위로, 더 그 위로 태양이 있었다. 태양은 푸른 하늘의 슬픔을 가려 주려고 많은
햇살들을 내려 보
냈지만 그 슬픔을 가려주지 못했다.
특히……. 오늘처럼……. 지독히도 파란하늘 일 때는…….차라리 그 햇살을 가려 마음껏 슬
픔을 느끼고 싶었
다.
태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작은 손바닥으로 큰 태양이 가려질리 없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보고 싶었다. 그
러나 무심한 햇살은 손가락 사이 작은 틈으로 삐져나와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모자에 가려
진 얼굴도 도달 할
수 있다는 듯이 따사로운 한줄기가 얼굴에 닿았다.
그래도…….
햇살이 닿아도…….
슬픈 건 마찬가지 였다.



편안하게 적당히 흔들리는 차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다가 무심히 내다본 차창 밖으로 그녀
를 닮은 여자가 서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그 모습. 우울할 때면 버릇처럼 손을 뻗어 태양을 가리던 그 모습.

[김기사 차 세워!]

운전사는 급하게 갓길로 차를 세웠다. 보던 서류도 던져버리고 밖으로 달려 나갔지만 그 짧
은 순간에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5년이다.
지독히도 그를 괴롭히던 시간들이 흘렀건만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했다. 너무도 지독한
배신이었다. 그의
모든 것을 허물어버리는 지독한 배신이었다. 아직도 그 배신에 대한 분노가 온몸을 떨게 만
든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한번만이라도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2장 기억


도화는 기숙사로 들어섰다가 다시 급하게 발길을 돌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늘처럼 우울한
날엔 아무도 없는
그 삭막한 기숙에서 혼자 덩그러니 내 던져진 것 같은 차가움 속에 있고 싶지 않았다. 도서
관이라는 데도 별
로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그곳엔 사람이 있었다.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들이…….
어디서 읽었더라…….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이 모두 다르다고…….
만약 이 세 개가
모두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아마도 그에게 가장 달려가고 싶겠지.
그 다음 하고 싶은 것은…….
아픈 기억이 너무 많은 이곳을 떠나는 일이겠지.
이렇게 도서관 계단에 앉을 때면 그가 너무도 그리워진다.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던 남자.
그…….
정 우혁
아직도 왜 그가 그 많은 좋은 시설을 놔두고 시립도서관에 나와 공부를 했는지 알 수가 없
다. 어쩌면 우리가
만나기 위해……. 그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운명 같은 건지도…….



그녀는 벌써 한 시간도 넘게 같은 문제를 가지고 끙끙대고 있었다. 수학엔 너무도 약했다.
언제나 수능에서
점수를 깎아 먹고 있는 수학. 이렇게 저렇게 해 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길게 한숨
을 내쉬고 밖으로
나왔다. 커피라도 한잔 마셔야지 이대로는 도저히 답답해 공부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고3. 이 지겨운 시간이 올 한해로 끝나길 바랄 뿐이다.
한잔의 커피를 음미하듯 모두 마시고 아쉬운 빈 잔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서야 다시 열람
실로 돌아왔다. 그
런 그녀의 연습장에는 한 시간도 넘게 끙끙대며 풀어도 풀리지 않던 문제가 깔끔하게 군더
더기 없이 풀려져
있었다. 얼굴을 들어 열람실 안을 둘러보았다. 이런 문제를 풀어줄 만한 자신의 친구나 혹은
그 비슷한 또래
의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였을까…….
누군지 찾지는 못했지만 만족스럽게 풀려진 해답을 보고 입가에 미소가 돌았고 그녀는 다시
편안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 대단한 집중력 때문에 그녀는 그녀를 보는 강렬한 시선도 느끼지 못하고 있
었다.

12시 퇴실을 알리는 벨소리…….가방을 챙겨 어깨에 메다가 손에 들려진 단어장이 그만 바
닥으로 떨어지고 말
았다. 그녀보다 더 먼저 손을 뻗는 옆자리의 남자. 작은 예쁜 글씨체로 빼곡히 적힌 영어단
어장. 저 작고 예쁜
글씨로 편지를 받아 본다면 정말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그가 내민 단어장을 받아든 그녀는 그 남자를 한번보고는 붉어진 얼굴로 종종걸음을 치며
도망치듯 나가고
있었다.



3장 만남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기전 그는 좀더 쉽게 수업에 따라가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학교 도서관으로 가면 더 편할지 모르지만 그곳에 가게 되면 그를 알고 있는 많은
동기들과 선후배들
때문에 공부하는 시간보다 술을 마시며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택한 곳…….
시립도서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옆자리 소녀는 조금 전부터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처음엔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렸지만 왠지 점점 그 한숨소리가 그의 귀엔 ''도와주세요!' 처
럼 들렸다. 바보같
이……. 그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한 것뿐이지. 한 시간 넘게 한숨과 함께 연습장에 긁적이
던 그녀가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녀가 나간 자리엔 연습장에 풀리지 않는 문제가 어떤 선을 그어 놓은 것처럼 같은 지점에
서 멈추어 있었다.
우혁은 피식 웃으면 그의 영역을 지나 그녀의 영역으로 손을 뻗어 연습장을 가져다 단숨에
풀어 보기 좋게
정리를 해 놓았다.
잠시 후 자리에 돌아온 그녀는 연습장을 보더니 열람실을 한바퀴 둘러보고는 고개를 갸우
뚱할 뿐 다시 자신
의 세계로 돌아가 버린 듯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 몇 시간씩 움직이지도 않고 집중할 수 있는 거지? 작고 여려 보
이는 그녀가
대단해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바로 옆자리에서 옆얼굴의 점이 몇 개 인지까지 다 셀 수
있을 정도로 뚫어
지게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자신의 일에 빠져들 수 있다니.
이 소녀가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도 깊이 빠져들까…….
그의 엉뚱한 상상에 우혁은 빙긋이 웃었다. 공부하러 도서관에 와서는 여자 얼굴이나 쳐다
보고 이상한 상상이
나 하고 있다니…….
그래도 이 소녀는 그의 눈길을 너무 끌고 있다.
퇴실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우연히 떨어뜨린 단어장을 집어 주는 순간에 잠깐 얼굴을 붉
힐 뿐 그녀는 그런
그의 존재를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달려 나가 버렸다.
12시가 넘어서 일까? 도서관을 내려가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자신이 가져온 차든 혹은 자
신을 데리러 온 차
에 몸을 싣고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녀는 벌써 혼자서 저만치 아래 걸어가고 있었다. 서둘러
차에 시동을 걸고
그녀가 걸어가고 있는 그곳에 차를 세웠다.

[타세요. 정류장까지 태워다 드리죠.]

그녀는 낯선 남자의 제의에 깜짝 놀랐지만 그가 조금 전 자신에게 단어장을 건네준 그 라
는 걸 확인하고 약
간은 안심하는 눈빛을 보였지만 고개는 아니라는 듯 흔들고 있었다. 우혁은 차에서 내려 그
런 그녀를 거칠게
태웠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그의 눈치만 보는 그녀…….

'난 부잣집 딸도 아닌데……. 설마 겁탈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런 허접한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누가 '나 나쁜 놈'이라고 얼굴에 붙이고 다니는 것
도 아니고.
겁에 질려 있는 그녀를 안심시키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어 그냥 입
을 다물고 있었다.
그게 더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정류장에 차를 세우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시간에 거길 걸어가는 건 위험해. 실제로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기도 하고. 내가 무슨
말하는지 알지?]
도화는 그의 말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내리면 되니?]

또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놀랬다면 미안해. 하지만……. 네 안전을 위해서 그런 거니까 너무 날 이상하게 보진 마라.]
또 끄덕인다.

[잘 가!]

그제야 눈치를 보며 차에서 내렸다. 그가 손을 흔들자 그녀도 무의식중에 손을 흔들다가
깜짝 놀란 듯 얼른
손을 내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피식 웃음을 흘리고 자리를 떠났다.




4장 연인


우혁은 일요일이 기다려졌다. 언제나 그녀는 일요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와서 앉았다.
혹시나 다른 자리에
앉을 까 하는 괜한 걱정에 그녀가 앉을 때까지도 앉지 못하고 있다가 그녀가 앉은 것 확인
하고서야 안심하듯
그 옆자리에 앉았다.
한번도 고개를 들지 않는 그녀…….
일요일이 기다려지면서 그 어린 소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변태가 같아 마음이 무거웠지
만……. 그녀에게 점
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더 이상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가 올 때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그의 향기……. 향수일까? 아니 코롱? 그만
의 향기가 아련하
게 풍기고 그리고 나면 그는 언제가 같은 자리에 앉는다. 그러면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려 들
키지 않기 위해 더욱 더 고개를 숙였다.
그는…….짝사랑 한번도 못해보고 지나가는 아쉬운 대학시절 마지막으로 만난 그녀의 왕자
였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실까 하는 생각에 밖으로 나가 뽑아든 종이컵을 들고 계단에 앉았다. 이
렇게 높은 곳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것도 이곳 도서관이 가진 장점 중에 하나였다. 반짝이는 불은 빛은
움직이는 자동차.
하얗게 움직이지 않는 빛은 집
[커피 마시니?]

옆자리 남자가 그녀의 옆에 그녀와 같은 종이컵을 들고 앉았다.

[네]
[너, 수학 못하지?]

그녀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그 때…….]

그가 피식 웃었다. 도화는 그의 그 멋진 웃음에 한눈에 홀딱 빠져들고 말았다. 가슴이 설렌
다. 자꾸만 그의 얼
굴을 바라보고 싶다.
그런 그녀의 마을을 들킬까봐 괜한 종이컵만 만지작거렸다.

[고마웠어요. 그 문제……. 모의고사에 나왔거든요. 다행히……. 풀었어요.] [그래? 잘 됐네.]

사랑스럽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거구나…….
수줍은 듯 약간 숙인 고개……. 성냥개비를 올려놓아도 될 것 같은 길게 말려 올라간 속
눈 섶. 고집스럽게
다물어 있는 입술. 그녀의 얼굴 중에 그 입술이 가장 맘에 들었다.
그가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그녀의 귀에 꼽아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은 그의 귀
에…….그가 그 음악
을 들려준 그 순간부터 그는 그녀의 운명이 되어버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이야. 잘 들어봐. 여행스케치의 운명이야…….]

♡ 이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 너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다.
황무지 같은 이 세상에 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렇게 넓은 세상 한 가운데 그댈 만난 건 나 역시 기쁨이야 가시나무 같은 내 맘에 그댈
만나지 못했
다면.

힘겨웠던 지난날을 견딜 순 없어
어딘가에 한줌의 흙으로 묻혀 있었겠지
바라보고 있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아직 내게 말은 안 했지만

내가 살아있는
살아 숨쉬는
이유…….


5년이 지났지만 그가 들려준 그는, 그 노랫말 가사처럼 내가 살아갈 이유가 되어 있었다.



5장 재회


오래 간만에 과외 없는 날 학교 앞에 과 친구 생일로 모여 술을 마셨다. 친구가 좋아하는
음악 CD를 생일 선
물로 사주고 오래간만의 여유로 그녀의 기분도 어느 정도 들떠 있었다.

[너 오늘 머리 안 감았지?]
[왜?]
[모자 쓰고 오면 여자 애들 뻔하지 뭐.]

동기가 놀리 듯 그녀에게 말했다.

[아니야 그런 거…….]

예리하기는……. 모자 아래로 그녀는 피식 웃고 말았다.
술잔이 비기가 무섭게 채워주고……. 약간의 술이 들어가자 그녀의 기분도 적당히 들떠있었
다. 누군가 날카로
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수다도 떨고……. 허무개그며……. CC
에 대한 뒷이야기
며…….
잠깐 화장실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그런데 여기 화장실은 왜 이렇게 먼 거야? 복도 끝까
지 가는 동안에도
어떤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손을 씻고 홍조가 띤 걸러 봐서 술기운
이 올라오는 것 같
아 찬물로 세수도 했다.
하지만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엄청난 힘에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미처 정
신을 차리기도 전에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 왔다. 정신을 차
리고 누군지 봐야
했다. 왜 그런지 상황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그녀 앞에 서 있는 그를 보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얼어붙듯이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
고 그가 한 발자국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뒷걸음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은 차
갑고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조를 것처럼 보였다.
차가운 벽이 등에 닿자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음을 알고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
작했다.

[죽을 때까지 내 눈에 띄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의 목소리의 섬뜩함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의 마음은 두 가지 상반된 감정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자신이 겪어야 했던 고통만큼
돌려주고 싶다는 것
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녀를 안아주고 싶다는 …….
그녀가 한 무리의 학생들과 들어서는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고 이젠 소녀에게 여인
으로 성숙해져 가
는 그녀를 보고 아직도 두근거리는 자신을 경멸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저렇게 맑게 웃을 수
있는지……. 아직
도 맑고 순수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화가 났다.
그녀의 저 천진한 얼굴 뒤에 가려진 가면 같은 더러움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터져 나올 것
같은 분노를 억누
르기조차 힘들었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이자 모자 때문에 얼굴이 가려져 버렸다. 우혁은 신경질
적으로 모자를 벗
겨냈다. 그러자 긴 생머리가 찰랑거리며 그녀의 어깨위로 흘러 내려. 순간 훅- 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어디에
도 소녀 같은 앳된 모습은 없었다. 대신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그에게 쏟아 졌다. 그의 심
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겁에 질린 그녀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 갔다. 쓰러질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벽에 기대고 서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

[아직도 같은 짓을 하고 있진 않겠지?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말이야…….]
그의 손이 턱에 닿자 비명이 새어 나올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미안해요. 여기 있는 줄 몰랐어요. 갈게요……. 눈에 띄지 않게…….]
겨우 겨우 힘을 짜내 그에게 말을 했다. 하지만 5년 만에 본 그의 달라진 모습에서 도화는
눈을 뗄 수가 없었
다.
차갑다. 그의 몸 전체에서 냉기가 흐르는 듯 했다.

[그래 그래야지……. ]

그렇게 말을 하고 있지만 그는 그녀가 가도록 비켜줄 태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억울한 생각도 들어. 너에게 들인 돈만큼 즐기지 못해서 말이야……. 안 그
래?]
우혁이 그녀의 목선을 따라 귓불을 간질거리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허리
에 팔을 둘러 쓰러지지 않게 그에게 가까이 끌어당겨, 매달리다 시피 겨우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 그의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그의 분노를 이해했다. 아마 그녀라면 그보다 더 했을지 몰랐다. 어떤 말
로도 그에게 준 상
처를 아물게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자 그는 아찔한 감촉에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다시 한번 그녀의 입
술을 느끼고 싶었
고 따스한 그녀를 안아보고 싶었다.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키스를 했지만 그는 이내 후회하
고 말았다. 작은 흐
느낌과 함께 그녀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보고 말았던 것이다.

'네가 왜 우는 거야? 정작 울고 싶은 건 난데……. 네가 왜? 너 처럼 잔인한 여자는 울 자
격도 없어'
[가. 더 이상 내 눈앞에 나타나지마. 한번 만 더 내 눈에 띄는 날엔 나도 어떻게 할지 모르
니까]
그녀는 비틀거리며 어떻게 그곳을 나왔는지 모르게 밖으로 나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
어서 나와 어디를
향해 어떻게 가고 있는 지도 모른 채 무작정 걷기만 했다.



6장

그녀의 지독한 슬픔은 고2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평범했지만 단란했던 가정. 대학에서 학
생들을 가르치시던
아버지가 새어머니와 여행도중 사소로 돌아가시면서 그녀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나
뿐인 남동생…….
소아암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불쌍한 남동생……. 부모님의 사망소
식에 놀라 쓰러져
서야 소아암을 발견하게 되었다.
잠시나마 행복했던 그와의 기억. 하지만 그 행복을 도화는 유원이의 목숨과 바꿔야 했다.

[학생의 동생이 아프다는 소릴 들었네]

두둑한 하얀 봉투가 그녀의 앞에 마치 거지에게 적선을 하듯 툭- 던져졌다.

[빠른 시일 내에 수술하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더군……. 이 돈이면 수술하고 요양까지 충분
할 거야]
그와 헤어져 주는 조건으로 내밀어진 동생의 수술비…….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그녀의 선
택은 너무도 뻔함을
누구도 알 수 있었다.

[우혁이 한 테는 학생이 돈을 요구한 걸로 말 할 거야. 언론에 알리겠다고 협박했다고. 그래
야 아마 쉽게 포기
할 테니…….]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녀는 그의 기억 속에 탐욕스런 악녀로 기억될 것이다. 사람
을 무시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는 정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좁아터진 그녀의 집에 더 이상은 있고 싶
지 않은 진절머리
치는 모습이었다.

용서해 줘요. 용서해 줘요.
당신도 소중하지만 내 동생 유원은 내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에요. 살리고 싶어요. 살게 하고
싶어요.


이제 막 겨울로 접어드는 날씨는 밤이 되자 더욱더 쌀쌀했다. 불어오는 찬바람에 으스스 몸
을 떨며 도서관 계
단의 마지막 계단을 내려선 순간 그녀에게 다가선 커다란 검은 그림자 때문에 기절할 것 같
은 공포감을 느꼈
다. 그가 이곳엔 왜……. 어떻게 여기까지……. 그의 눈은 마치 먹이를 발견한 동물처럼 천
천히 하지만 정확하
게 한발 한발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도망쳐야 해'

그녀의 이성이 끊임없이 소리 치고 있었지만 움직이지 못하고 그가 다가오는 모습만 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
[기…….기숙사 통금시간이에요]
[잠깐이면 되]
[여기서…….]
[사람들에게 창피 당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따라와]
그의 말은 명령이었고 그녀는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 시피 차에 탔다. 잠깐이면 된다던 그
는 1시간이 넘도록
어딘 가로 차를 몰고 갔고 굳게 다문 입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적한 외길을 따라 산기슭에 도착하자 별장 같은 집이 한 채 보였다. 리모콘으로 대문을
열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그가 먼저 내리고 그녀가 있는 곳의 문을 열어 주었다.

[내려]

그녀는 내리지 않았다.

[내려!]

그가 소리를 지르자 하는 수 없이 내렸지만 그녀에게 밀려오는 두려움에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통증을
느낄 만큼 그녀의 팔을 움켜쥐고 끌다시피 집안으로 들어서 불을 키자 누군가가 늘 깨끗하
게 정리하는지 잘
정돈이 되 있었지만 오늘 올 거라는 생각은 못했는지 집안은 그녀의 기분만큼이나 싸늘하니
추웠다.

[앉아]

그가 소파를 가리키자 얌전하게 시키는 대로했다. 술을 두 잔 따라 그녀에게 내밀었다. 말
없이 받긴 했지만
마실 생각은 없다. 두려움과 추위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곧 있으면 따뜻해 질 거야. ]

그의 목소리는 약간 부드러워져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차다. 말없이 창가에서 술만 들이키
고 있는 그……. 하
지만 유리에 그의 표정하나, 하나가 비쳤고 그 또한 유리에 비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예전의 소년 같은 부드러운 이미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남자다움이 전체
적으로 몸에 배어
있었다. 경영자로서의 위엄도……. 이젠 전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그의 다정한 말 한
마디를 기대할 수
없으리라…….지치고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 안식처럼 쉴 수도 없으리라…….
우혁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녀가 비켜 앉는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짜증이 나
는지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그에게 잡아끌었다. 예전의 그는 이렇게 거칠지 않았어. 늘 내 의견을 존중해
주었고 내가 싫다
면 하지 않았어. 내게 뭘 원하는 거지…….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순진한 척……. 순수한 척……. 맑은 영혼을 소유한 척……. 그런 눈
을 하지 말란 말이
야. 네가 왜 아직도 그런 눈을 가지고 있는 거야? 너처럼 영악한 여자가 왜 아직도 그런 눈
을 가지고 있느냐
고?
[값을 치르는 거야.]
[네?]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몰라 그녀는 멍청하게 네? 소리만 할뿐이었다.

[네 몸으로 갚아. ]



7장


차가운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은 아까보다도 더 창백하게 변했다. 이러다 쓰러지는 게 아닌
가 싶을 정도로 얼
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네 협박에 못 이겨 아버지가 돈을 줬을지 모르지만 난 너에게 돈을 주면서 까지 언론에 감
추어야만 할 일을
한 적이 없어.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고작 키스 몇 번에 그 정도 돈이라면 세상 어느 남자
가 여자와 사귈 수
있을까? 안 그래…….] [그……. 그건 좋은…….방법이 아니에요]

그의 말이 가진 의미에 충격을 받았고, 그가 이렇게 잔인할 정도로 차갑게 변해버렸다는
것에 이중의 충격이
그녀를 덮쳐왔다. 그는 절대 이런 사람이 아니야……. 얼마나 따뜻했는데……. 얼마나 다정
했는데…….

[방법은 내가 정해]

하지만 그녀의 그런 아련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미소만 흘릴 뿐 그의 목소리는 잔인
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어루만지다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입술에 격정적인 입맞춤을 했
다. 긴장으로 딱딱하
게 굳어버린 몸이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집요하고 천천히 급
할 것 없다는 태도
로 끈질기게 그녀가 입술을 열기를 기다렸다.
이럴 수 없다고 이래선 안 된다고…….마음속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서서히 그에게
모든 걸 허락하고
있었다. 따뜻한 그의 입술에 오랜만에 느끼는 그를 향한 갈증도……. 그토록 보고 싶지만 감
추며 참을 수밖에
없었던 그리움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를 밀어내려고 가슴에 있던 그녀의 손이 어느새 목
에 둘러져 있었다.
내가 다가갈 수 없는 그 라면……. 그가 다가 왔을 때 모든 걸 주자.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
하는지……. 내 사
랑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그녀가 더 이상의 반항을 포기하는 듯 긴장으로 굳어졌던 몸에서 어느덧 열기가 느껴졌다.
그를 거부하던 움
직임은 어느새 그가 그녀를 원하는 만큼의 격정적인 움직임이 되어 그의 몸에 감겨오고 있
었다. 꼭 다물고 절
대 벌리지 않을 것 같던 그녀의 입술도 어느새 그의 혀를 받아 들여 거친 숨을 몰아쉬며 탐
하고 있었다.
그녀를 향한 욕망으로 뜨거워진 가슴에 가늘고 차가운 손가락이 닿자 마른 가지에 불을 당
기듯 뜨거움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허래 아래로 참을 수 없는 묵직함이 느껴진다. 그의 손은 어느새 셔츠
속으로 밀고 들어
와 따뜻한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한때는 그녀가 그의 아이를 낳고 집안 가득 그녀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치는 때를 상상
한 적도 있었다. 하
지만 그건 정말 오래 전의 일이었다. 배신의 그 순간 그의 기억에선 그 많은 미래에 대한
행복했던 상상은 모
두 사라져 버리고 그의 벼 마디마디에 고통이 스며와 죽을 것만 같은 지옥 같은 시간을 보
냈다. 눈앞에 있다
면 죽여서라도 그의 곁에 두고 싶을 만큼 분노와 사랑이 엇갈리고 있었다.
그 시절……. 암담한 시간이 지나 겨우 중심을 잡고 서 있는 그에게 다시 그녀가 나타났다.
상처만 가득 남기고 사라졌던 그녀가 이젠 그의 품안에 있다. 벌을 주는 듯한 그의 태도에
화를 내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고 그를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자연스럽게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전에 많은 남자들을 상대했기 때문은 아
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그의 심장이 질투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그녀를 다루던 몸짓도 거칠어 졌다. 배
려가고는 눈곱만큼
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칠어지고 있었다.
가슴을 움켜쥐는 손에 힘이 들어가 그녀의 얼굴에서 아픔을 읽을 수 있었고 입술을 탐하는
거친 동작에서 그
녀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새 풀렸는지 그녀의 셔츠 앞자락은 열려 속옷이 드러나 있었고 이제는 바지에까지 손이
내려가 있었다.

[안돼요.]

그는 단지……. 그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몸을 원했던 것이다. 복수심에……. 그녀
가 아파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고통을 주기 위해…….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설득력을 잃었다. 그녀의 바지가 힘없이 벗겨졌고 우혁은 그
녀를 침대에 눕혔
다. 마지막 애원의 눈빛을 그에게 보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도화는 눈을 감았
다.
우혁은 자신의 옷도 모두 벗어 던지고 그녀의 곁에 누었다. 맨살에 닿은 그녀의 느낌에 신
음소리가 저절로 새
어나왔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 움찔 놀라는 몸짓도 그를 자극했다, 그를 밀어내고
자 움직이는 그녀
의 몸짓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제력은 이미 그에게서 멀어져 갔고 그의 이성은 그
녀를 갖고 싶다고
만 외치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몸 안으로 밀고 들어갔을 때 날카로운 비명이 그를 놀라게 했고, 그녀의 얼굴
은 이미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의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을 본 우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가 그녀
를 아프게 했다. 그
녀에게 자신이 겪은 고통만큼 느끼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의 아픈 얼굴을 보니 그의 마음
이 더 아파오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 때문에 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욱 그녀를 세게 끌어안을 뿐 어쩌지 못하
고 있었다. 지금 멈
추기엔 그가 느끼고 있는 온몸의 쾌락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절정의 순간처럼 모든 게
폭발하자 우혁은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키는 게 보였다. 다른
남자들에 의해 성
에 눈 떴을 거라는 질투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녀가 보여준 순결한 몸짓에 강한 만족감이
온몸에 퍼져 갔다.
그녀에게 자신이 처음이었다. 그 사실이 위로가 될까…….
그가 그녀에게 느꼈던 배신감과 고통을 잊게 만들어 줄 만큼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어김없었다. 우혁은
울고 있는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주고 싶었지만 복수심에 그러지 못했다. 혼자서 울게 내버
려두고 나가 버렸
다. 그가 나간 뒤 서럽게 우는소리가 들렸지만 우혁은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방문을 열어 보았다. 혼자서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외로워 보이는 저 가녀린 어깨를 감싸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사실은 못 견디게 보고 싶었
다고 ....



8장


창 밖이 부옇게 밝아 올 때까지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옷가지를 챙겨 입고 집을 둘러보
아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차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론 간 걸까. 찬물에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집
앞으로 강이 흐르
고 있었다.
그는 그녀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마지막 헤어지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잊혀
지지 않았다. 술에
잔뜩 취해 자신에게 지옥에나 떨어져 버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그의 모습…….하지
만 이제 와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많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또다시 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늘 누군가의 짐이 되고 있는 듯한 부담감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
었고 그것에서 그
녀는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혼자 남겨지게 돼버리자 그녀는 허탈감에 한동안
아무 것도 할 수 가
없었다. 단 둘뿐이었던 가족. 동생마저 수술 도중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의 마지막 희망도
사라져 버렸던 것
이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완벽하게 혼자였던 것이다.
그 사실이 못 견
디게 싫었다.
두려웠다. 혼자라는 게……. 자꾸만 그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슬펐
다.
인기척에 서서히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그를 뒤돌아보는 그녀의 눈이 너무나 슬퍼 가슴이 저렸다. 절대 저 눈빛에 넘어 가면 안
돼. 또다시 속을 수
없어. 하지만 슬픈 그녀의 눈빛에 이끌려 그는 그녀를 가슴에 따뜻하게 안아 줄 수밖에 없
었다. 깊은 한숨이
그에게서 나왔다. 왜……. 이 여자는 날 아프게 하는 것일까.
그도, 그녀도 어제와 달리 어느 정도 냉정을 찾은 듯 보였다.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럭저럭…….]
[자세히 이야기 해 봐. 유원이는?]

유원이의 안부를 묻자 눈물이 쏟아 질 것 같았지만 그에게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로 결심
한 이상 그녀는 동
생의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유원이는 그를 친형처럼 잘 따랐는데……. 그도 유원이에
게 참 잘해주었는
데…….

[군대 갔어요]

유원아 미안해…….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거 너는 이해하겠지.

[그래서 기숙사에 있었군. 난 아파트라도 사서 둘이 지낼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군대에 갔으
면 유원이도 이제
어른이 다 되었겠군.
그런데 왜 아직 4학년 인거야? 제대로 라면 이미 졸업했었어야 할 텐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
어요]
[그래……. 사정이라…….]

두 손을 꼭 쥐고 있는 그녀는 5년 전 그때보다 너무 어두워져 있었다.



9장

꿈같은 1주일을 보내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동안 이젠 정말 그와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마
평생 못 볼지도…….
그는 그녀에게 감정이 담긴 태도로 대하지 않았다. 마치 섹스이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이…….

[솔직히 좀 화가나. 너처럼 나쁜 여자가 이렇게 지내고 있다는 게……. 그 돈이었다면 이렇
게 기숙사에서 지내
지 않고도 편히 지낼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그의 아버지에게 받은 많은 돈은 동생의 수술비로 다 써버렸다고 말 할 수 없었다.
기숙사 앞에 내려놓으며 우혁은 알 수 없는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

[잘 가세요]
[도화야...]

그녀는 그의 부름을 듣지 못한 것처럼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몸도 마음도 너무도
지쳐버린 그녀에
겐 지금 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녀를 기다린 건 1주일간의 무단 외박으로 인한 기숙사 퇴실 통보서였다.
그리고 과외자리마저 오지 않아도 된다는... 메모...지금 그녀에게 일어나도 있는 많은 일들
이 그녀의 삶에 대
한 의지를 갉아 먹고 있었다.
지쳤다.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죽은 사람처럼 하루 종일 잠만 잤다. 1주일 만에 나
타난 그녀에 대해
다들 걱정의 말을 건넸고 그녀는 개인적인 급한 사정이 있었다고 대답할 뿐 다른 말은 없었
다. 교수님도 한번
의 결석도 지각도 없었던 그녀의 무단결석에 상당히 걱정을 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지금 편하게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짐을 옮길 수 있는 새로운 거처를 찾아야 했다. 학
교 근처의 고시원
은 이미 자리가 다 차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 지 몰라 불편하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 얻게 되
었다.
하지만 짐을 옮기고 걱정하는 룸메이트에게 이별을 고하고 혼자 고시원 한 평 남짓한 방안
에 남겨져 버리자
심한 무력감에 빠져 버렸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자꾸만 잠을 자고 싶었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무력감이
그녀의 남은 인내
심마저 조금씩 야금, 야금 갉아 먹어가고 있었다. 삶에 대한 희망도……. 모조리…….

[민석아! 어디 가는 가니?]
[어 가다가 내 동생 좀 태우고 가게. 좀 전에 전화 왔거든. 학교라고 가는 길에 태워 달라
고] [혜영이?
어느 학교 다니는데?]

민석의 말에 우혁은 어쩌면 도화를 만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젖었다.
그녀를 보내고 한번도 연락하지 못했다. 아니 무슨 말로 그녀에게 연락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부르는 소리에도 차갑게 돌아서던 그녀…….일주일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그녀와
같이 있었지만 그
녀는 그에게 화를 내지도 불평을 하지도 않았다.
마치 감정 없는 인형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왜 ……. 차라리 거칠게 행동
하는 자기에게 소리
라도 지르는 게 더 나을 거 같았다. 하지만 그녀를 안고 있을 때는 모든 것을 잊게 되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쓰다듬을 때마다 행복했고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평생을 지낼 수는 없었다. 그도 회사에 돌아가야 했고
그녀도 학교로 돌아
가야 했다. 결코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강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밤새 괴롭
히며 나쁜 여자고
험한 소리로 해대도 묵묵히 듣기만 하던 그녀…….

그녀를 보내기 전날 그는 이제 그에게 빚진 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을 건넸다. 이대로 헤
어지면 다시는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을 위해서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혹시 아이가 생긴다면…….아이라고…….
수술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잔인한 말을 해도 그녀는 묵묵히 듣
기만 했다. 이제 정
말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듯이. 강제로 가지려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지만
너무도 그녀를 원했고 지금도 원하고 있다.

[경영학과라고?]

혜영이 우혁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며 차에 올랐다.

[응. 왜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혹시 서도화라고……. 아니?]
[미스미스테리? 알지. 경상 대에서 그 선배 모르면 간첩인데…….] [미스터리……. 왜 그렇게
불러?]

민석이 호기심이 생기는지 동생에게 물었다.

[좀 묘한 선배야. 소문엔 고3때 만 해도 전국 탑 10에 드는 수재라고 주위에서 기대를 많이
했었데. 그런데 수
능도 안보고 졸업하면서 연락이 끊어졌다는데 갑자기 그 다음 해에 우리 과 입학을 했고,
물론 과수석으로.
기숙사에 4년째 지내는데 방학해도 집에도 안 내려가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가족이야기도
안하고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고 소개팅 미팅도 안하고……. 과모임에도 별루 안나오고……. 만나는
사람도 없고…….
그 선배를 아는 사람이라고는 대학학교 동창들뿐이거든. 그런다고 평판이 나쁜 건 아니야.
후배들에게 잘해주거든. 특히 시험기간엔 그 선배 찾아다니기 바빠 귀찮게 해도 짜증 안내
고 잘 가르쳐주거
든. 나한테도 예상문제 찝어 주기도 했는데 100%였어. 그런데 얼마 전 무단결석 1주일 하
더니 기숙사에서도
강제퇴실 당하고 과외자리도 잘리고 어디로 이사 간 거 같은데 ……. 잘 모르겠어. 그 선배
도서관에 가면 만
날 수 있는데 요 며칠 도서관에서도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그런지 추측 소문이 많아.
부모가 이혼해서
집에 안가는 거다. 이런 것도 있는데 선배 부모가 둘 다 교수래 두 분다 외국에 계서서 못
만나는 거다. 두
분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혼자다. 그 중 정확한 건 하나도 없어. 교수님들이 개인적으로
잘 아는 것 같던데…….
추측에 외국에 부모님이 계신 것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들 해. 우연히 교수님이 선배 부모
님이야기를 같이 하
는 것 들었다고 했거든. 전에 우리학교에서도 근무했었다고 하던데…….내가 아는 건 거기까
지야. 그래도 가장
확실하게 내가 아는 건 그 선배 때문에 목 매다는 남자들이 여럿 있다는 거지. 남자 친구가
있어 보이지도 않
던데 왜 안 사귀는 거지. 눈이 너무 높아서 그런가…….내가 보기에 진짜 킹카도 있는데
……. 정말 미스테리한
선배야]

우혁의 마음이 무거웠다. 왜……. 그녀가 왜 그렇게 지내는 거지? 부모님은……. 동생
은……. 그러고 보니 우
혁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부모님이 무얼 하시는지도……. 그저 아는 거라
고는 정말 사이가
좋은 남동생이 하나 있다는 것 뿐…….



10장


우혁은 신부름 센터에 그녀의 거처를 수소문 해달라고 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는지 알아야
했다. 자신이 없었던 걸까……. 민석에게 같이 가달라고 부탁하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밤 길
무서워 같이 가
달라고 말하는 어린애 같았다. 고시원 방문 앞에 서서도 불길함과 불안함 때문에 그대로 돌
아서고 싶었다. 민
석이 없었다면 아마 그냥 가버렸을 것이다.

노크
대답이 없었다.

[없나?]

민석이 다시 한번 노크를 하다가 문을 열었다.

[어 있네……. 자나봐…….]

'문도 안 잠그고 자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하지만 자는 사람의 얼굴치고는 지나치게 창백했다. 불길함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민석아 차에 시동 걸어.]
[뭐?]
[빨리]

민석은 왜 오자마자 차에 시동을 걸라고 하는지 이해 못하겠다는 얼굴로 우혁을 보았지만
그가 그녀가 덥고
있던 이불을 제치는 걸 보는 순간 서둘러 달려 내려갔다.

'도화야 내가 왔어. 눈을 떠 봐. 내가 이렇게 네 곁에 있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 손수건으로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게 단단히 묶고 가장 가
까운 종합병원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아직 숨을 쉬고는 있었지만 보장은 못한다는 절망적인 말을 듣고 우혁
은 죽을 것만 같은
고통에 시달렸다.
'내가 그렇게 네게 견디기 힘들만큼의 존재였니? 나 때문에 이렇게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
던 거야?'
그녀를 잃을 뻔했다는 고통이 그를 견디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 자신이 그녀를 이렇게
궁지로 몰아갔는
지 모른다. 그녀의 의식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그에게 담당의사 사무실로 와주었으면 하는
연락을 받았다.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지만 오해하지 마시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무슨…….혹시
몸에 다른 이
상이라도?]

그는 혹시 그녀가 임신이라도 한 건 아닌가 아는 의심이 들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간호사가 진료기록카드를 가지고 왔는데 전에도 한
번 비슷한 일로 그
러니까 자살기도로 입원한 적이 있어서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게 어떨지 권해드리는 겁니다.]
우혁은 믿지 못하게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모르셨군요.]
[언제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기록카드를 꼼꼼하게 보고 다시 말을 시작했다.

[5년 전에요. 비슷한 시기인데요……. 12월이면……. 혹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을 만한 일
이 어린 시절에 있
었던 건 아닙니까?] [아뇨. 아니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녀를 본지가 하도 오랜만이라.
그땐 활발했었는
데…….] [깨어나면 정신과 치료를 받도록 하세요. 저대로 두면 언제 또 같은 일을 하게 될
지 모르니까요]
우혁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병실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자신과 아버지를 협
박해 돈을 뜯어가
서는 결국 한 짓이 자살기도라고…….잘 먹고 잘 쓰고 살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왜…….
손목이 따끔거렸다. 아프다. 왜 아직도 살아 있는 걸까? 부모님도 동생도 그렇게 쉽게 내 곁
을 떠나갔는데 왜
나는 그들 결에 가기가 이렇게 어려운 걸까……. 천정에서 그리고 영양주사로 그리고 의자
에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피곤한 듯 의자에 기대어 잠깐 잠든 듯 했다.
그가 왜 이곳에 있을까…….
설마 그가 날 여기로 데려온 건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면…….
우혁은 지난 며칠 동안의 시간이 악몽 같았다. 한숨도 못 자고 그녀 곁을 지키는 것보다
그녀에 대한 죄책감
과 미안함이 더 그를 지치게 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부비며 눈을 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고 벌떡 일어나 다가갔다.

[괜찮아?]
[왜 그랬어요?]

'왜 그랬냐니 뭘? 왜 널 괴롭혔냐구?'

그녀는 모든 원망의 시선을 담아 그에게 보내고 있었다.

[미안.]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난 쉬고 싶었어요. 편하게…….]

그는 자신을 괴롭힌 그를 원망하는 걸로 알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 했었는데 그녀는 지금
목숨을 살려 낸걸
원망하고 있었다.

[그렇게 바보 같은 짓으로 쉬려고 했다는 건 말이 안 돼. 난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해.]
그녀는 말이 없었다. '가서 오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듯 했다. 우혁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
갔다.

늦은 밤이 되자 우혁이 왔다

[내일이면 퇴원해도 된다고 했어]

우혁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집에 가세요]

자신을 밀어내려는 그녀가 미웠다. 아니 처음부터 마음에 없었는지도 모르지.

[네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여기 있어야 겠어.] [제발……. 가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우혁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노려보다가 세게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마음이 무거워…….그
가 왜 그녀의 주위
에서 맴도는지……. 그녀에게 원한 건 단순한 섹스뿐이었는데 ……. 자신과 같은 여자들은
언제든지 원하면
안을 수 있을 텐데……. 그에게 예전과 같은 감정을 기대하지도 그가 부드럽게 대해 주는
걸 기대하지도 않았
다.

그러지 마세요. 기대하게 되니까……. 자꾸 당신에게 기대고 싶어지니까…….
작은 눈물 한 방울이 소리 없이 볼을 스치고 흘렀다.



11장


간호사가 혈압과 체온을 제기 위해 병실로 들어섰다.

[다 정상이에요. 그런데 왜 보호자분 밖에서 불편하게 앉아 계세요?] [네?]
[키 크고 블루블색 양복입고 계신 분 보호자 아니에요?] [밖에 있어요?]
[예 여긴 보호자 침대도 있으니까 그곳에서 자면 되는데……. ]
간호사가 나가자 도화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많은 피가 그녀의 몸에서 빠져 나가선지 심한
현기증에 잠시 그
대로 앉아 있었다. 차츰 괜찮아 지자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보았다. 그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벽에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가버린 줄 알았는데……. 저렇게 피곤에 지친 얼굴을 하고서 왜 불편한 병원 의자에 앉아
있는 거지…….

도화는 그를 깨워 가라고 해야 할지 아니며 보호자 침대에서 자라고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아마 가지
않은 걸 보면 깨워서 가라고 해도 가지 않겠지…….
도화는 그의 팔에 살며시 손을 데었다. 그가 깜짝 놀란 듯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그녀
가 뒤로 밀려 비틀
거렸다. 그가 재빨리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지 않았다면 바닥에 넘어졌을 것이다.

[왜 나온 거야?]

그가 화난 듯 물었다. 허리에 그의 팔의 느낌이 부담이 됐지만 그걸 가지고 뭐라고 불평할
상황이 아니었다.

[간호사가 ……. 안가고 여기 있다고 해서…….] [병원 밖으로 내 쫓으려고?]

그는 아직도 화가 나 있어 보였다.

[아뇨. 집에 안 갈 거면 보호자 침대에서 자라는 말을 하려고 왔어요]
아직 움직이는 게 무리였는지 그녀의 얼굴에서 다시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심한 현기증
이 그녀로 하여금
그에게 기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도화는 그의 넓은 어깨에 이마를 대고 현기증이 사
라지기만을 기다렸
다.

[아직 움직이는 건 무리야]

우혁은 그녀를 안아다 침대에 눕혔다. 상태가 좋지 않은지 그녀는 별 말 없이 그가 하는 대
로 내버려두었다.

[고마워요. 그만 쉬세요.]

그녀는 그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 누었다.

우혁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그녀 말대로 보호자 침
대에 누웠다. 그녀
가 곁에 있다는 안정감이 지난 며칠간의 긴장과 피곤으로 지친 그를 금세 잠이 들게 만들었
다.
그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다. 많이 피곤했었나 보다 저렇게 금세 잠이 든 걸 보니……. 그
를 돌아보니 양복
재킷은 대충 의자에 걸어두고 이불도 없는 침대에 한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잠들어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혹시나 해서 장을 열어보니 여분의 이불이 있는 게 보여 그가 깨지 않도록 이
불을 덮어 주고 스
탠드만 남겨놓고 불도 꺼주었다. 한기가 들었었는지 그녀가 이불을 덥어주자 목까지 끌어
올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이마로 내려왔다. 무심결에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얼마나 이렇게 하고 싶었는지……. 그의 눈, 그의 코, 그의 입술……. 이렇게 가까이에서
만져 볼 수 있다
니…….그가 뒤척이자 그녀는 놀라서 얼른 자신의 침대로 되돌아 왔다.


회사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그는 새벽에 잠에서 깨는 것이 몸에 뱄다. 처음엔 아침에 일어나
는 것이 고문에 가
까웠지만 지금은 알람이 없이도 저절로 눈이 떠졌다. 하지만 낯선 환경이 눈에 들어오자 잠
시 어리둥절했다.

'아 여긴 병원이지…….'

언제 그랬는지 그는 이불까지 덥고 자고 있었고 병실의 불도 잠자기 알맞은 정도로 불이
꺼져있었다. 간호사
가 이렇게 해 주었을 리는 없고……. 그녀가 그가 잠든 사이 이불을 덮어 주었던 것 같다.
그래 그녀는 자상
했지…….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잠들어 있는 그녀에게 가까이 갔다.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었
다.

'편하게 누어서 자지 왜 엎드려서 자는 거야?'

그녀를 편하게 돌려 눕히자 신음에 가까운 중얼거림이 들렸다.

"안돼 가지마. 유원아. 나 혼자 있기 싫어…….유원아 제발."
꿈속에서 동생을 군대에 보내는지 그녀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겨우 군대 가는 것 가지고 영원히 헤어지는 사람 같군.

그런 생각이 들자 두 남매가 얼마나 각별했는지가 떠올랐다. 마치 옆집누나를 새엄마처럼 따르던
유원이……. 고 1
이라고 하기엔 작고 외소 했던 체격…….지금은 좀 컸을까……. 보고 싶군. 널 미워하고 싶
은데 그렇게 되지
않으니…….왜 이런 모습으로 있는 거야? 네가 조금 더 잘 살고 있다면 미워하기가 더 편했
을 거야. 이런 꼴
이 뭐야…….
그는 일부러 그녀의 부모의 연락처를 찾지 않았다. 자신들의 딸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을
알면 어떤 부모도
충격 받지 않을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손목의 흉터는 없어지지 않으니 언젠가는 알게 되겠
지만…….
하지만 왜 그녀는 죽으려고 같은 짓을 두 번이나 했을까?


12장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오랜만에 맑은 정신이었다. 하지만 그가 없는 텅 빈 침대를 보니 허
전함이 몰려 왔다.
점심때가 거의 다되어 그가 병실에 나타났다 .쇼핑백을 불쑥 내밀었다.

[갈아입어. 퇴원할거야. 네 옷은 왜 입을 수 없는 지 알지?]
그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그녀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밖에 나가 있었다. 5분쯤 지나
그가 다시 들어왔
다.

[나가도 되겠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나오라는 듯이 문을 열었다. 그와 조금 떨어져 걸으며 혼자
있어야 하는 썰렁한
독서실을 생각하니 비참해 졌다. 다시 혼자가 되어야 해. 혼자...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
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우혁이 근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는
것도 알지 못했다.
밖으로 나오자 눈부신 햇살 때문에 그녀는 현기증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힘들어 많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이 의자가 보였다.

[잠깐만 나한테 기대고 일어서 봐]

.그가 시키는 대로 팔에 기대로 일어서자 가까운 의자에 그녀를 앉게 했다.

[기다려 차 가지고 올 테니까]

그는 얼른 그녀를 쉬게 해주어야 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차를 가지고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부축해 뒷 자석에 앉게 하고 조심스럽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차에 타자마자 도화는 넓은 뒷좌석에 눕고 말았다. 그의 차는 그녀가 있는 독서실로 향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거에요?]

그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더 물어봤자 대답해 주
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얼마 뒤 고급스러워 보이는 빌라 앞에 차를
멈추었다.

[내 집이야. 당분간 여기서 지내]
[그건...]
[이미 네 짐은 옮겨 다 놨어. 며칠 간 만이야. 네 몸이 좋아질 때까지. 그러면 그땐 나간
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해]

우혁은 그녀를 부축해 자신의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50대 쯤으로 보
이는 아주머니가 문
을 열어주었다.

[어서 오세요.]
[방은요?]
[예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

그녀의 안내로 들어간 방은 너무나 아담하고 아늑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그녀의 방
처럼...

[누워 있어. 회복될 때까지 많이 자는 게 좋다고 했으니까.... 난 다시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해. 필요한 게 있으
면 아줌마한테 말하고... 내가 올 때까지 괜찮겠지?]
[네]
[그래... 쉬고 있어]

그가 나가려고 하자 도화는 그를 불렀다.

[저기요...]
[왜?]
[고마워요]

우혁은 그녀의 말에 고개만 까딱하고 방에서 나갔다.

'고마워 도화야. 살아줘서'

그가 나가자 아줌마가 따뜻한 우유 한잔을 들고 왔다.

[이거 한잔 마셔요]
[고마워요]

따뜻한 우유를 마시자 온몸에 온기가 퍼지는 듯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에
꿈도 꾸지 않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우혁은 다른 때보다 조금 일찍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걱정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녀
가 자신의 집에 있다는 사실이 묘한 떨림으로 전해 졌다. 집에 들어서자 마자 그녀의 상태
를 물었다.

[자고 있어요.]
[얼마나요?]
[집에 와서 계속요. 병원은 아무래도 안 편했을 거에요.] [당분간 부탁드릴께요. 잘 해주세
요]
[네. 걱정 마세요]

우혁은 그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주 편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보니 아직
도 어린애 같았다.
그냥 그대로 자도록 내버려둘까 하다가 점심때도 우유만 한잔 먹고 잠들었다는 말에 깨우기
로 했다.

[도화야]

그의 목소리가 잠결에 다정하게 들렸다. 하지만 졸려... 더 자고 싶어...그녀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독서실
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가 생각이 나 더럭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도화야]

그가 거칠게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조금만 더 자구요...]

잠에 취한 그녀의 목소리에 그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나왔다.

[저녁 먹고 자. 아무 것도 안 먹고 잠만 자면 기운 떨어져... 일어나..]
그녀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다. 사랑스럽다. 매일 아침 그녀와 함께 눈을 뜬다면, 사랑스
런 몸을 안고 눈을
뜬다면 얼마나 좋은 기분일까...

[몇 시에요?]
[7시 좀 지났어]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학교 가기 싫은 어린애 같은 표정이었다.

[꼭 학교 가라고 깨우는 새엄마 같아요]

비슷한 생각을 했군..
그녀는 일어나기 싫다는 얼굴로 부시시 일어났다. 조금 전엔 피곤해서 둘러볼 여유도 없이
잠들었었는데 지금
보니 고시원에 있던 그녀의 책과 다른 물건들도 모두 이 방에 있었다.

[부모님께는 ... 연락 안 했어. 걱정하실 것 같아서..]
부모님...내가 연락할 부모님이 계셨던가...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 졌다.

[고마워요.]
[가자..]
[왜...]
[응?]

우혁은 나가려다 말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게 이러는 거죠? 보기도 싫을 텐데... 영원히 안보고 살고 싶을 텐데요...날 내버려 두었으
면 그럴 수 있었을
텐데... ] [상습적이니? 목숨가지고 장난치는 거? 다음부터 죽고 싶으면 한번에 확실하게 끝
내는 걸로 해 두
번씩이나 주변 사람들 귀찮게 하지 말고]

우혁은 절대 그렇게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왜 죽으려고까지 했는지... 유원는 어쩌
려고 그런 짓을 했
는지...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는데...그의 독설에 그녀는 놀란 얼굴로 보고 있었
다.
아마 충격이었겠지...

[네... 다음엔... 그러죠]
우혁은 울컥치미는 걸 꾹 참고 있었다.

[다음엔 그러겠다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걸 지금.. ]
그가 화가 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무섭게 노려보는 그의 얼굴... 그의 손이 위로 치켜
올려지자 그녀는
눈을 감아 버렸다.
하지만 기다리는 고통은 없었다. 부들부들 떨며 눈을 떴을 때 그의 올려진 손은 주먹을 쥐
고 있었다.

[한번만 더 내 앞에서 그 따위로 말하면 그땐 내가 죽여주겠어]
획-- 돌아서서 그가 나가버리자 긴장이 풀려 다시 침대위로 누워버렸다 떨리는 마음을 진
정시키고 부엌으로
가자 그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여기서 빨리 나가고 싶겠지. 그러려면 잘먹고 기운 차려 그래야 나갈 수 있으니까]
그는 변했다. 저렇게 차갑지 않았는데... 자상했는데... 마음 상할 말들은 조심스럽게 돌려서
하고... 무엇이 필
요한지 늘 챙겨주었는데...그의 신경을 더 이상 거스르지 않으려고 그녀는 저녁을 먹기 시작
했다. 많이 먹으려
고 했지만 음식이 받지 않았다.
하지만... 억지로 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우혁은 서재로 들어가 버렸고 그녀는 울렁거림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
려가 버렸다. 문을
잠그고 저녁식사 동안 먹은걸 모두 쏟아 내고 말았다.

[학생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아줌마가 걱정이 되었는지 화장실까지 따라와 문 앞에 있었다. 물로 입을 행구고 되도록 괜
찮은 얼굴로 문을
열고 나왔다. 그도 아줌마의 소리를 듣고 나왔는지 문 앞에 서있었다.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어요]
[죽을 끓일 것 그랬나 보네. 이를 어째...]
[아니에요 아줌마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우혁은 자꾸 신경 쓰이게 하는 그녀에게 화가 났는지 다시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아줌마 미안해요. 저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얼굴 좀 봐 핏기도 없고 식은땀까지...]
[저 좀 누워 있을께요. 설걷이 도와드리고 싶었는데..]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가서 누워]

그녀는 비실비실 방으로 돌아왔다. 아줌마가 꿀물을 가지고 들어와 그 물로 약을 먹었다. 약
에 수면제가 들어
있나 ... 왜 이렇게 졸음이 쏟아지지...
약을 먹고 얼굴 좋아지는 걸보고 아줌마는 부억으로 돌아갔다.

[도화는요?]

우혁은 커피를 컵에 따르며 물었다.

[약 먹고 잠들었어요]
[도화... 잣죽 좋아 하니까 내일 아침엔 그걸로 해주세요] [예.]

우혁은 그녀의 방문을 한번 열어보고 다시 서재로 돌아갔다.



13장

2틀 정도 지나자 그녀는 생각보다 빨리 회복이 되어 가고 있었다. 퇴근해서 돌아오면 아줌
마와 둘이 부엌에서
이야기하면서 저녁을 준비하는 소리도 들리고 저녁 먹은 뒤엔 항상 설걷이를 도와주는 모습
이 보기 좋으면서
도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마치 목에 뭔가가 걸린 것처럼 답답함이 느껴졌다. 퇴근 후 집에
오는 게 요즘처럼
즐거웠던 적이 있던가... 집에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즐거운건 지 몰랐
다. 그를 기다리는
지는 잘 모르지만... 만약 그녀가 자신의 아기를 않고 매일 이렇게 기다려 준다면... 돌처럼
무거운 것이 그의
심장을 짖누르고 있었다.
집에 오면 웃으면 인사하는 그녀... 같이 저녁을 먹고, 뉴스를 보고... 잘 때는 잘 자라는 인
사도 하고... 아침엔
잘 다녀오라는 인사도하고... 그녀와 앞으로 영원히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에서도 한 두
번씩 전화를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받는 것도 좋았다. 조금씩 명랑해지는 그녀를 보
는 것도 즐거웠다.
마치 5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거실에서 신문을 읽는 척하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엿듣기도 했다.

[맨 날 미안해. 아픈 사람한테..]
[이제 안 아파요. 겨우 설걷이 가지고.. 울엄만 설걷이 하는 걸 무지 싫어했거든요. 그래서
초등학교때 부터 제
가 많이 했어요.
설걷이는 전문가에요]
[하는 걸 보니 아주 아무지게 잘하네... 그래 부모님은 뭐하셔?]
그 질문에 귀를 쫑긋 세웠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커피 끓일까요?]

라며 화재를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도화는 그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커피를 마시
고 그는 그녀를 물
끄러미 보았다.

[입에 안 맞아요? 기억하는 대로 탔는데...]

그녀가 자신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 기뻤다.

[아니야. 맛있어.]
[다행이에요]
[빈혈은 좀 어때?]
[이젠 괜찮아요]

신세진걸 갚겠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집에만 있는 거 답답하지 않아?]
[괜찮아요. 내일쯤 학교에 한번 가보려구요]
[왜?]
[저두 취직 해야죠. 추천서도 알아보고.. 이사 할 데도 알아보고...] [이사는... 급한 거 아니
니까 천천히
해]
[네...]

도화는 부엌으로 되돌아갔다. 마치 피난처 인냥...

[자네한테 연락이 안 되서 얼마 곤란했는지 아나 그 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죄송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좋은 소식인데 그냥 가르쳐 주기 아까와...내가 알려주면 자네가 거하게 한턱 사야 할것 같
은데.,.]
지도교수인 그가 이렇게 까지 말하는 걸 보니 그녀가 기대해도 좋은 만한 것 같았다.

[뭔데요 교수님...?]
[학교에서 매년 2명씩 유학을 보내는 데 그곳에 내가 자네를 추천했거든. 자넨 대학학교
때 국제 수학올림피
아드에서 수상한 경력도 있고 대학 졸업성적도 좋아서 이번 유학생으로 자네가 뽑혔어. 어
때? 이만하면 좋은
소식이지?]
환하게 웃어주는 지도교수의 얼굴만큼 그녀의 얼굴도 기쁨으로 밝아졌다.

[정말이에요? 정말 제가 합격했어요?]

그녀는 뜻하지 않은 이 행운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이런 기회가 생길 줄이야...

[그럼. 자네처럼 학교성적도 좋고... 빠지는 게 없는데... 합격하는 건 당연하지. 결정된 곳이
없다면 옥스포드에
서 자네를 받아주겠다는 군. 거긴 자네 아버지와 내가 공부한 곳이야. ] [옥스포드라구요?
꿈같아요. 믿
을 수가 없어요.] [빨리 받아들여. 준비하려면 바쁘니까... 자네 아버지와의 우정을 생각해서
내가 학기 시작하
기 두 달 동안 랭귀지스쿨에 다닐 수 있도록 신청해 놓았으니까 12월말에는 출발해야 해]
[그렇게 빨리
요?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준비할 것도 많을 텐데요.] [비자랑 여러 가지는 연락이 안
되는 동안 미리 해
두었으니까 여기 인터뷰날짜에 가서 인터뷰하고 발급 받으면 되고. 옥스포드에 성적증명서
랑 생활기록부 모두
다 보내 놨어. 그러니까 자네는 서둘러 비행기 예악하고 가져갈 물건 미리 보내고 준비물
같은 것 사기만 하
면 되.]
[2주밖에 안 남았는데... 교수님 너무 고맙습니다.] [가서 열심히 하기나 해. 박사까지 해서
여기서 교편
잡을 생각도해보고...자네 돌아올 때 내가 자리를 만련해 보도록 할거니까...
학교에서 보내는 주는 거니까 남들보다는 유리할 거야. ] [열심히 할께요. 정말 열심히 해서
...]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힘든 일 많았다는 거 알지만 그건 그만 생각하고 앞으로 일만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아 해.
그래야 네 부모님
도 하늘나라에서 마음 편히 계실테니까...]
[예. 그럴께요. 정말 열심히 살께요]

학교를 나서는 그녀는 새로운 희망에 얼굴이 밝아 있었다. 서점에 들러 영어 서적도 좀 사
고, 혹시 필요할지
모를 전공서적도 한 두 가지 샀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벌써 저녁 9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집에 초인종을 누르자 그가 화가 난 얼굴로 벌컥 열어 깜짝 놀랐다.

[어디 갔었어?]

잔뜩 화가 나서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어제... 학교에 간다고...]

그의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것 같아 그녀는 괜히 주눅이 들었다.

[이 시간까지 학교에 있었던 건 아니겠지?]
[서점에도 들르고...]
[다음엔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해 기다리게 하지 말고]
우혁이 찬바람이 쌩쌩 나게 돌아서서 가버렸다. 그러자 아줌마가 다가와 소근거리는 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했
다.

[이제 오면 어떻게 해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저녁 내내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학교에
전화 해보고... 사방
으로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얼른 가서 미안하다고 해..]
[우혁씨가요?..]
[그래... 어디 길거리에서 쓰러진 건 아닌가 하고 얼마나 걱정을 하는지...]
솔직히 우혁은 그가 내 뱉은 독설대로 자신이 찾지 못하는 곳에 가서 죽으려는 건 아닌지
내내 불안에 시달
렸다. 그러다 찬바람에 빨개진 볼에 책을 한아름 들고 좋은 일이 있었는지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녀를 보자
화가 났었다. 자신의 걱정과 달리 어디서 즐기다 왔는지...

도화는 그가 있는 서재로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그가 의자에 앉아 왜 왔냐는 얼굴로 쳐다
보았다.

[미안해요. 기다릴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사실 지난 5년간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늦어도, 어딜 가도 전화를 해둘
필요도 미리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기다릴 거라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됐어. 신경 쓰지마]

그녀는 나가지 않고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정말 미안해요.]

그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체온을 느
끼고 심장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그녀가 그의 곁에 살아있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그녀가 말하는 미안하다는 의미는 오늘일 만이 아니라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곧 다가올
이별에 대해 그녀는
또 한번 미안해하고 있었다.

[걱정 되서 죽을 것만 같았어. 정말 어디 숨어버린 건 아닌지, 또 죽으려고 한 건 아닌지...
넌 왜 이렇게 내
속을 뒤집어 놓는 거야... ]
[미안해요...]

우혁은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를 힘껏 안았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했어요. 그럼 이렇게 힘들지 않을 텐데... 아마 평생 나는 당신
에게 준 상처 때문
에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나한테 잘해주지 마세요. 또 아프게 할지 몰라요. 나는 우혁씨 힘들게만 할 거에요]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 미워하면서 너무나 그리워할 수 밖에 없
었던 그녀였기 때문
에 ...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그런 건 다음에... 다음에 생각하고 싶었다.


14장

다음 날 퇴근해서 돌아온 그는 그녀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가지고 다녀.]
[하지만...]
[다음에 또 걱정하게 만들지 말고 가지고 다녀. ]
그래... 어차피 열 흘 뒤면 떠날 건데... 그때가지만이라도 그가 하라는 대로하자. 지난 5년
동안 해주고 싶었던
모든 것을 해주고 떠나자.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에게 모두 주고
가자. 하나도 남김
없이 주고 떠나자. 그리고 그에 대한 기억은 모두 여기에 남겨두고 새로운 기억만 만들자...
다 보상해 줄 수
는 없지만... 좋은 기억 한가지만이라도 남기자...

[네... 고마워요]

도화는 망설이듯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러자 우혁은 할 말 있냐는 듯이 그녀를 보았다.

[저... 내일 바빠요?]
[무슨 일 있어?]
[우리 밖에서 저녁 먹으면 안 되요?]
[그러고 싶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토요일이니까 1시 까진 집에 올께 준비하고 있어 그럼]
그녀의 제안에 설레는 건 그였다. 늘 데이트다운 데이트 한번 못해보고 도서관에서 커피타
임에만 시간을 가졌
던 것이 아쉬웠었다.
고3이었던 그녀에게 부담주지 않으려고...

[저..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그러자 그녀가 생긋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심장이 두근거려 설레는 마음을 들킬 것 만 같
았다.

[내일 계획은 내가 한번 세워 볼께요.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줄 거죠?] [무리한 것만 아니
면...]
[아마 맘에 들거에요..]

우혁은 혼자 남게 되자 오랜만에 편안하게 웃어보았다. 꾸미지 않은 자연스런 미소로.. 마
치 소풍가지 전날의
어린이처럼 들뜨는 자신을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퇴근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빨리 옷 갈아입고 나와요 시간 없어요]
그는 오랜만에 케주얼로 갈아입었다. 도화는 그런 그를 보자 5년 전 그를 보는 듯 했다. 도
화가 만족스런 미
소를 짓자 우혁의 마음이 편해졌다.

[음... 그렇게 입으니까 5살은 어려 보이는데요?]
우혁이 그녀의 손을 잡자 도화는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빌라에서 나와 차가
있는 곳으로 가려
하자 도화는 그의 팔을 잡았다.

[데이트 하면서 차는 왜 가져가요? 지하철 타고 가요] [하지만 추을텐데...]
[누가요? 우혁씨요?]
[아니 네가...]
[난 안 추워요]

하지만 그녀의 옷을 보는 순간 그렇게 보온이 잘 되는 옷 같지는 않았다. 제대로 된 따뜻
한 옷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붐비는 지하철에서 그녀를 안다시피 하고 서서 그녀에게 나
는 그녀만의 향을
맡으며 그녀만 알고 있는 목적지로 향했다. 종로에서 내리더니 그의 손을 잡았다. 어쩌면 이
렇게 부드러울까...
그녀의 작은 손은 그의 손안에 속 들어왔다.

[어디 가는데?]
[영화 보러요. 영화는 내가 정했어요. 불만 없죠?]
우혁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입구에서 표를 사지 않고 다른 곳
에서 찾는 것을 보
고 조금 의아해했다.

[인터넷으로 예매했어요. 문명을 이용 해야죠]

그 덕분에 기다리지 않고서도 편하게 영화를 보고 팝콘하나로 둘이 나눠먹고... 이렇게 평범
한 것들을 왜 그녀
와는 못해봤을까...
어두운 극장 안에서 그녀는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싸며 어깨에 기대어 왔다. 영화의 내
용은 하나도 기억하
지 못할 정도로 그녀와 함께 있다는 편안함과 안도감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었다.영화
를 보고 나오자 그
가 갈 곳이 있다며 그녀를 택시에 태웠다.

[오늘은 내가 하자는 대로하기로 했잖아요?]
[그전에 한가지만 더 하고. 오래 안 걸릴 거야]
택시는 백화점 앞에서 섰고 그녀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갔다.

[뭐하려구요? 살 거 있어요?]
[네 코트 하나만 사자. 이대로는 추워서 감기 걸릴 거야. 선물이야. ]
그의 말에 마음이 상했는지 그녀는 아무 말 없었다.

[네가 다시 아프기라도 하면.... 감기 걸릴지도 몰라. 아직 완전히 회복 된 것도 아니고... 그
리고 사주고 싶어.
뭐든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사주고 싶다구. 알아? 그러니까 이것만 내 말대로
해]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도화는 그가 하자는 대로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와 그녀가 고르는
스타일이 너무 틀
려 한참들 돌며 티격태격 할 뿐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난 따뜻하고 실용적인 것을 살 거에요]
[네가 말하는 것들은 대학학생들이나 입는 거야] [밖에 나가보세요. 대학학생 아닌 사람도
많이 입어요]
그녀에 고집에 그는 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후드코트를 샀다. 떡볶이 단추에...그러고 있
으니 정말 몇 살은
더 어려 보였다.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은 택배로 집으로 보내 달라고 하고 두 사람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젠 뭘 할건데?]
[일정을 좀 변경해야 할 거 같아요. 우리 밥 먹으러 가요]
그녀가 데려간 곳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전부터 남자친구랑 이런데 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 동안 없었어?]
[아뇨 너무 많아서 누구랑 와야할지 결정을 못했거든요]
새침하게 말하는 그녀가 귀여웠다.

[우혁씨는요?]

그 질문에 좀 찔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도화만큼 사랑한 여자는 없었다.

[나도 물론 많았지. 하지만 난 셀 수는 있어]

그의 말에 두 사람은 서로의 뻔한 거짓말에 속아주는 척 웃음을 지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지만 둘 다 충
분히 배가 불렀다.

[이젠 뭘 하지?]
[술 마셔요]
[아직 안 되.]
[아빠처럼 말하지 말아요. 난 술을 마실거에요. 싫으면 안 해도 되요]
조금은 토란 진 듯 말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그가 할 것라는 걸 알 고 있는 듯 했다.
그녀가 간 곳은 그의 빌라 근처의 포장마차들 중의 하나였다.

[술 마시고 지하철 안타도 되니까 좋죠?]
[탁월한 선택이야.]

숯불로 직접 안주도 구워먹는 생각보다 괜찮은 포장마차였다.

[유원이 한테는 연락 자주와?]

그의 질문에 당황하는 얼굴이었다.

[언제 제대하는데? 곧 크리스마스인데 휴가는 안 나오나?] [그... 그게... 아직 멀었어요. 휴가
는 아무 말
없는 거 보니까 안 나오나봐요] [그럼 우리가 성탄절에 면회나 한번 갈까? 궁금해. 그녀석이
벌써 군대를 가
다니...] [다음에요...갔다가 눈이라도 많이 오면 힘드니까...] [그래...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학교 다니고... 뭐 그냥 그렇게요]
[부모님은? 그때도 지방에 계시다고 했잖아. 지금도 그래?] [네...]
[집에 잘 안 내려가나?]
[공부하느라...]
[대학원에 갈려고 그렇게 열심 하는 거야?]
[대학원은... 좋은데 취직하려면 성적이라도 좋아 야죠] [우리회사로 와. 내가 힘써주지..]

농담처럼 말했지만 정말 그녀가 그랬으면 했다. 우혁씨 회사로 가면 당신 아버님과 마주치
겠죠. 그러면 난 그
분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또 한번 잘못을 빌어야 할 거에요

[말도 안 되는 말인 거 아시죠?]
[탐나는 인제야]
[내가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 지도 모르면서...]
우혁은 순간 혜영이 말해주었다는 걸 이야기 할 뻔했다. 만약 그랬다면 그녀는 부담스러워
하겠지...

[넌 대학학교 때도 공부 잘했잖아. 아마 대학 때도 마찬가지겠지.. 한가지만 묻자 5년 전
그 땐 왜 죽으려고
했는지 말 해줘]
안주를 집으려던 그녀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지난 일이에요. 좋은 일도 아니구요. 알 필요 없어요] [아니 알아야겠어. 그때 죽고 싶었던
사람은 나였
으니까. 니가 그랬다는 게 이해가 안 될 뿐이야] [그냥 이유 없어요. 충동이었어요. 그 나이
때는 누구나 한번
쯤 생각해 보는 거니까..] [너 내게 감추는 것 있지?]
[없어요]
[아니 있어. 말해봐]
[없어요]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우혁은 한숨을 내쉬고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겠다는 얼
굴을 했다. 순간의
어색함이 지나가고 둘은 적당히 좋은 기분으로 집까지 걸어왔다.

[그런데 왜 나와서 살아요?]

우혁은 도와의 일로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져 경제적으로 자금이 생기자 독립했다는 말을 하
고 싶지 않았다.

[혼자 사는 게 편하잖아.]
[하지만... 우혁씨는...]
[형이 아버지랑 살고 있어. 나까지 있으면 형수가 부담이 더 클 거야]
집으로 돌아와서 그녀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왔지만 우혁은 그녀에게 가
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전달되었는지 아직 물기가 촉촉이 남아있는 얼굴을 하고 그녀가
그의 방문을 열었
다. 믿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그녀를 응시하는 그에게 다가와 그녀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
고 앉아 떨리는 입
술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과... 같이 있고 싶어요.]



15장

[내가 당신 곁에 있어도 되나요? 긴 밤 외롭지 않게, 혼자라는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당신
곁에 있어도 되나
요? ]
푸른 눈물을 떨굴 것처럼 젖은 눈으로 우혁을 어루만지듯 보고 있었다.

[내가... 나처럼 나쁜 여자가... 당신 곁에...] [쉬------ 아무 말 하지마. 내 곁에 있을 수 있
는 사람은
언제나 너 뿐이었어. 처음부터... ]
그의 따스한 몸이 그녀를 앉자 떨림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녀의 손이 대담하게 먼저 그
의 셔츠의 단추에
손을 대자 우혁의 몸이 한순간에 용암 속으로 떨어진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를 미치게 만드는 욕망이 그녀의 가운에 손을 대자 도화는 그의 손을 막았다.

[오늘은... 제가 당신을 갖고 싶어요. 내 것이 되 주세요]
그녀의 대담한 말에 적지 않게 우혁을 놀라게 만들었지만 새로운 흥분이 그의 온몸을 휘감
았다. 그녀가... 그
를 원한다.
셔츠의 단추를 모두 풀러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그의 팔에서 소매를 빼 그의 몸에서 벗겨내
바닥에 소리 없이
내려놓고 그녀의 두 손을 대고 살포시 밀어 그를 침대에 눕혔다. 그의 위에서 그를 내려다
보는 그녀의 머리카
락이 목과 얼굴을 간질이며 참을 수 없는 욕망에 부채질 하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그녀를
끌어안기 위해 손
을 뻗었지만 그녀는 그런 그의 손에 손가락 사이사이 자신의 손가락을 끼우며 움직이지 못
하게 만들었다.

[아직은... 아니에요]

그녀의 입술이 가슴에 닿는다. 불에 덴 것처럼 뜨겁기만 했다. 신음이 작은 입 속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튀
어 나왔다. 그의 작은 유두에도 긴장으로 불쑥이는 근육에도 심장이 벌떡이는 가슴에도 그
녀의 입술이 닿았
다. 입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 그의 작고 앙증맞은 배꼽에 닿아 혀끗으로 장난치듯 간질였
다.
자신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각지를 끼었던 손을 빼내 그의 벨트에 가져
다 대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옷을 벗겨내자 태초의 모습으로 그녀를 마주보게 되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당신이 내 사람이었다는 게 너무 행복해요]
과거형...그녀의 말이 과거형이었다는 걸 지나친 흥분으로 우혁은 깨닫지 못했다. 모든 옷가
지가 그에게서 떨
어져 나가자 우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빙 돌아 그녀를 침대 눕히고 두 사람 사이를 가로
막는 가운을 벗겨
냈다.

[너의 아름다움에 눈이 먼 사람은 나야.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
우혁은 그녀의 온몸 구석 구석에 키스를 했다. 부드러운 가슴에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입술
에도, 그가 정복했
던 그만이 정복할 수 있는 그곳에도... 그녀의 탄성과 그를 원하는 몸짓에 우혁은 서서히 그
녀의 안으로 움직
였으며 맞춤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만들만큼 완벽한 두 사람의 결합에 환희의 몸을 떨었다.

[사랑해. 네가 나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더라도 난 널 사랑할 수밖에 없어. 이젠... 내게서 도
망가지마. 네가 원
하는 건 뭐든지 해 줄 거니까... 내 사랑을 의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 영원히 널 사
랑하는 것에 변함
없을 테니까...]
당신의 불행은 나를 사랑하면서 시작됐어요. 미안해요 우혁씨.. 나중에 오랜 시간이 지나
날 용서하게 되면...
내 사랑만큼은 진실이었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16장


[이것 봐요 예쁘죠?]

초록색 네잎 클로버가 수놓아져 있는 핸드폰 줄을 우혁에게 내밀었다.

[뭔데?]
[보고도 몰라요? 네잎 클로버.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핸드폰 줘봐요]
우혁이 핸드폰을 꺼내들자 도화는 그걸 가져다가 줄을 대롱대롱 메달아 주었다.

[예쁜데...]
[내가 직접 만든 거에요. 나중에 지저분해지면 떼어 네세요]
그녀가 돌려준 핸드폰에 매달린 클로버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이게 행운을 가져다 줄까...

[요즘 바빠보이던데...]
[집도 알아보고, 취직자리도 알아봤어요. 내일쯤 나가려고 해요]
폭탄 같은 그녀의 말에 우혁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왜... 나가려고 하는데... 여기서 지내도 상관없어] [우리 모두에게 좋지 않아요. 우혁씨 아버
님이 아시기
라도 하면...] [아버진 여기 오지 않아.
[그래도 언제까지 여기서 지낼 순 없어요]
[빌어 먹을...]

우혁은 화가 난 행동으로 옷을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는 왜 자신에게서 멀어지려고
만 하는 것일까....
그가 나가고 도화도 자신의 방에 포장된 짐들을 보며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버
렸다. 갈곳이 없어
빌라 뒤편에 있는 놀이터의 그네에 대롱대롱 매달려 이틀 앞으로 다가온 출국에 마음이 무
겁기만 했다. 헤어
지고 싶지 않다. 이대로 그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저녁이 되면 언제나 웃으며 들어와 보고싶다는 말과 함께 힘껏 안아주는 그와 함께 이대로
행복에 젖어 살고
싶었다. 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욕심부리지 말자. 나에게 허락된 것은 여기까지야. 그만해.
두 사람 다 힘들어
질 뿐이야.
많은 시간이 흐른 뒤 그와 지낼 남은 이틀을 위해 눈물을 지우며 일어섰다. 집으로 들어서
려는 그녀에게 우혁
의 집앞에서 이야기하는 몇몇의 목소리가 들려와 걸음을 멈추었다.

[이렇게 말도 없이 와도 되?]
[애인도 없는 노총각 크리스마스 이브에 구해주러 왔는데 어때? 어차피 혼자 있을 텐데...]
친구들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도화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내려왔다 .그들이 갈 때 가진 들
어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혁은 갑작스럽게 몰려온 친구들 때문에 당황했지만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그녀를 친
구들에게 소개시키고 아버지가 반대하더라도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녀의 방문을
열었을 때 단단하
게 포장된 물건들만 덩그러니 놓여있고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당황했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의 책상 위에서 울리고 있었다. 지갑도 그대로 였다. 도대
체 어딜 간 거지?
민석이 그런 그의 태도를 보고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거 같았다

[혹시... 여기서 지냈던 거야?]
[응. 찾아봐야겠어]
[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결혼할거야. ]
[그 정도야?]
[그래. 결혼할거야. 그녀와]

민석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짐작으로만 우혁을 한때 힘들게 만들었던 여자였던 것일 거
라고 생각은 했었
지만 설마 그녀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애들 적당히 설득해서 다른 데로 데려갈게 . 장소 정해지면 연락할거니까 오든지 알아서
해]
밖으로 나가는 그에게 민석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이미 뛰어나가는 우혁의 귀
에는 들리 지 않았
다. 추운데 도대체 어디 가서 뭘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놀이터에서 그네
에 앉아 있는 그녀
를 발견했다. 씩씩대는 그를 보고 놀란 그녀가 일어섰다.


[여긴 어떻게...]
[왜 나와 있지?]
[친구들이... 온 것 같아서.. 내가 있으면 곤란할까봐 그랬어요] [갈 때까지 여기서 얼어죽을
작정이었어?
가자 소개시켜 줄게] [싫어요]
[뭐가 싫은데?]
[당신도 내가 싫듯이 나도 당신 삶에 더 이상 얽히는 게 싫어요. 당신 볼 때마다 내가 나
쁜 여자라는게 자꾸
떠올라요. 그걸 잊고 살고 싶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이러지 마세요. 어차피 우리 오래갈 사
이도 아니었잖아요]
[누구 맘대로? 우리 이대로 끝날 거라고 누가 그래?] [만약 그렇지 않으면요? 어떡케
할 건데요? 결혼이
라도 할건가요?] [그래]

그의 말에 그녀는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뭐라고요?]
[너와 결혼할거야. 날 힘들게 하고 내게 고통 준 것 두고 두고 복수할거라고 됐어?]
그의 말에 갑자기 그녀가 웃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웃어버리다니... 엉망이 된 청혼이었다.
이렇게 이런 식으
로 말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다른 식으로 하세요. 당신 인생까지 망치지 말고.]
그녀는 냉정했다. 그에게 대한 사랑이 없는 걸까? 정말 그녀는 자신에게...

[당신은 섹스파트너 그 이상은 아니었어요]

우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뺨을 때렸다. 순간...그런 자신에게 놀라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
지만 그녀가 거칠
게 그를 뿌리쳤다.

[내일 나가겠어요]
[안돼]
[당신 허락 필요 없어요]

그녀는 냉정히 돌아서서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밤새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우혁은
날이 밝아서 까지 거실에 앉아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가 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그가 이곳
에 없는 사람인 냥 쳐다보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짐들을 정리하는 듯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17장

집을 나가 그녀가 한 일은 비행기 표의 날짜는 앞당기는 거였다 다행히 캔슬 된 표가 있어
쉽게 구할수가 있
었다. 내일이면 그녀는 영국에 가 있을 것이다. 다시는 그를 만날 일도 그의 아버지와 한 약
속을 어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거실에 서 있는 그에게 인사도 없이 나왔다. 이미 짐들을 부쳤던 터라 그리 짐이 많지는 않
았다. 오늘 그녀가
할 일은 부모님과 동생이 있는 공원묘지에 갔다 오는 것이었다.

[미안해요. 새엄마 아빠. 하지만 꼭... 꼭... 다시 와서 인사드릴게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미안해요. 유원아 누
나 미워하지마... 지금은 옆집누나가 할 수 있는 마지막 길이야. 더 이상 힘들고 싶지 않아. 이
젠 나만 생각할 거
야]
우혁은 그녀가 가늘 걸 보기만 했다.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술독에 빠져 버린 것처럼 떡이
되도록 마셨다. 자
신을 또 다시 버리고 떠난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그녀가 가버렸다
는 사실이... 자신을 단순한 섹스파트너 그 이상은 아니라고 차갑게 잘라 말하던 그녀가 떠
나 버렸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그 사실도... 지난 며칠간 그는 희망에 들떠 있었는데... 그녀가 보
여준 사랑스런 모
습들에... 그게 다 거짓인거야? 아니야... 그럴리 없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리 없이
계속... 다음날까
지도 그는 술병을 들고 집에만 쳐박혀 있었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고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우혁을 한심하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었
다.
독재자...
그의 아버지였다.

[못난 자식..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냐?]
그가 대꾸하기도 전에 또다시 문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그의 큰형이었다.

[그만하세요 아버지. 우혁이 내버려두세요]

큰아들의 갑작스런 출연에 놀라기도 했지만 한번도 자신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던 아들이
그에게 소리지르는
것에 더 놀랐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버릇없이. 네 눈엔 우혁이 저놈 꼴이 좋아 보여 그렇게 말하는
거냐?]
하지만 그의 아버지에게 맞서는 아들 우진 또한 이번 만큼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가 서 있었다.

[한번이면 됐어요. 한번으로 족하다구요. 저랑 우성이 정략 결혼시키고도 모자라 우혁이까지
그러려고 하는 거
에요? 불행한 결혼생활은 우리 둘만으로 충분해요 우혁이 까지 그렇게 만들지 마시란
말씀입니다. ]
[아니 이녀석이...]
[우혁이가 그녀와 결혼하겠다면 제가 그렇게 해 줄 겁니다.]
술에 취해 정신이 없긴 했지만 그 둘의 대화를 듣고 있다보니 우혁이 집으로 도화를 데려
와 같이 있었다는
걸 두 사람은 진작에 알았던 것 같았다.

[너 지금 애비한테...]

정회장은 분노로 말조차 제대로 나오고 있지 않았다.

[이번엔 무엇으로 그 애를 쫓아 보내셨나요? 또 돈 쥐어주며 우혁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셨나요?]
'잠깐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누가 누구에게 돈을 줘서 보냈다고?'
우혁의 머리가 혼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우혁이가 행복해 보이나요? 저 꼴을 보세요 저런 모습 지난 5년으로 충분해
요. 제발 그만 하세
요] [너... 너...]

우혁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그의 형인 우진을 쳐다보았다.

[형... 그게 무슨 소리야? 돈은 줘서 보내다니...] [이젠 너도 제대로 알아야 해. 니가 더 이상
그녀를 포
기할 수 없다면 지켜라. 그런 나약한 모습 보이지 말고. 돈을 요구하고 협박한 적은 없었어]
[그만해]

우혁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지만 우진은 그만두지 않았다.

[그 애 동생이 아팠고 그 애가 고아라는 걸 알고 수술비를 대주겠다는 조건으로 너에게서
떠나라고 한 거야!]
[협박이라고 했잖아. 나와의 관계를 언론에 알리겠다고 협박해서 그래서 돈을 줬다고
했잖아? 그게 사실이 아
니란 말이야?] [그건 아버지가 지어낸 말이야]
[아니 그녀도 내게 그렇게 말했어. 그렇게 말했다구] [정신차려. 그녀는 동생 때문에 정신이
없었어. 알
아? 그리고 그렇게 그 여자를 몰라? 돈을 요구할 여자로 보여?]
자신의 동생의 순진함을 호되게 꾸짖고 있었다.

[고아라니... 동생이 아프다고? 유원이가?]
[설마 몰랐던 건 아니겠지... 너 정말...]

우진은 정말로 동생이 아무 것도 몰랐다는 사실에 더 분노했다. 그녀... 어리지만 현명해 보
이던 그녀는 정말
우혁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화가... 고아였다고...]
[그래 고2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었어. 그리고 너랑 헤어지고 동생도 수술 도중에 죽었다.]
우혁의 눈은 충격으로 커졌다. 우혁이가...죽었다니...그럼... 그녀는...

[더 이상 너 혼자 힘든 것처럼 어리석게 굴지 말고 그녀를 찾아. 네가 널 보호해 줄 거니까
아버지가 네게 더
이상 손대지 못하게 할거야]

우진의 아버지는 이제 포기한 얼굴이었다. 그녀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어디서 찾아야 하
지... 갑자기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그 동안 잘 못 알고 있던 사실로 그녀를 괴롭혔던 일들이 하나 둘씩 떠올
랐다. 그리고 왜 그
녀가 세상을 버리려고 했는지도 ... 퍼즐의 조각들이 완벽하게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를
찾아야 했다 자신
의 잘못을 용서를 빌어야 했다.
자신은 너무나, 너무나 그녀를 사랑해서 그녀에게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고 말해
야 했다. 그래 핸드
폰... 하지만 핸드폰은 그녀가 있었던 방에서 울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녀를 찾을 만한
아무 것도 그는 가
지고 있지 않았다. 아 학교... 취직 때문에 학교에 들를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 갔을 때 이미
다들 퇴근하고 없
었다. 안절부절 못 하면서 그는 하루를 보내고 학과사무실 문이 열리기도 전부터 와서 기다
리고 있었다.

[서도화 학생 연락처를 알고 싶은데요...]
[잠깐만요...]

조교가 컴퓨터로 찾는 동안 우혁은 초조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알려준 주소는 전에
있던 고시원이었
다.
[그것 말고는...다른 건 없습니까?]
[없어요. 아 교수님... ]

그때 교수라고 하는 인자해 보이는 얼굴을 한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누구?...]

조교에게 묻는 것 같았다.

[도화 찾아오신 분인데... 연락처를 알고 싶다고 해서요. 하지만 여긴 예전 연락처 밖에 없
어서요.] [도
화? 왜? 어떻게 되는데요?]
[가족입니다.]
[가족? 내가 알기로는 가족은 없는데...자네는 누군지 모르겠군] [알고 계시면 말씀해 주십
쇼]

그는 아주 믿음직스러워 보였고 눈에는 간절함 마져 있었다. 알려주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얼굴이었
다. 그는 우혁을 자신의 연구실로 안내해 맞주 앉아 있었다.

[어떤 사인지 다시 물어봐도 되겠나? 아 오해는 말게 난 그 애 아버지 친구였어. 그러니 지
금 아버지가 안 계
신 그 앨 대신해서 묻는 거네]
[도화랑... 결혼할겁니다. ]
[그런 자네가 그 애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른단 말이야?] [오해가 있었습니다. 제가 오해했
었다는 걸 이
제서야 그 많은 걸 알게 됐다는 걸 알려줘야 합니다. 이대로 헤어질 수 없어요]
아마 두 사람 아주 힘들었었던 것을 그의 고뇌에 가득찬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안타깝지만 당분간 만나기는 어려울 거야. 지금 서울에 없으니까!]
그는 그녀가 지방에 내려가서 서울에 없는 거라는 소리로 이해했다. .

[그럼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영국에 있네]
[왜 그녀가 영국에 갔습니까?]

영국이라니... 그렇게 먼 곳에... 그런 곳에 갈 거면서 자신에게 한번의 눈치도 없었다니...그
녀에게 정말 그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존재였단 말인가?

[학교추천으로 간 거야. 짧아야 5년이고 길면 10년은 있어야 할거야. 그러니...] [영국 어디에
있습니까?]

그곳이 어디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당황했다.

[설마 거기까지 가려는 건...]
[갈 겁니다. 가야됩니다. ]

그는 우혁의 결심이 대단한 걸 알고 그녀가 있는 학교와 숙소가지 자세히 알려 주었다.



18장

[형 영국에 다녀와야 겠어. 그녀가 영국에 있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지만 정말 그는 막막했다.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야?]
[장학생으로 유학을 갔어.]
[머리 하나는 진짜 좋구나. 데려올 자신 있어?] [아니... 만약 돌아오라면 그녀에게 또 많은
걸 포기하라
는 소리겠지... 유학... 하고싶었던 공부였을 텐데...]
우혁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녀가 모든 오해가 풀렸고 그래서 그녀와 진정으로 결혼을 원하
는 그가 가도 그 모
든 걸 포기하고 그를 따라 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럼 가지마.]
[하지만.. 또 이렇게 헤어지면...아니 이대로 헤어질 수 없어. 어떻게 해야 하지]
두 손으로 괴로운 듯 얼굴을 부볐다.

[한, 두 달만 기다려라. 그쪽에서 네가 일할 수 있도록 자리를 알아 볼 테니까 ] 우진의 말
에 우혁은 고
마움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다.

[형... 정말 고마워]
[난 너 만이라도 제대로 된 가정을 꾸미고 살길 바랄 뿐이야. 그리고... 그녀는 아마 널 훌륭
한 경영자로 만들
어 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여기서 준비 잘 해서 가. 내가 도
와 줄께]

매일 아침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깨어났다. 하지만 눈을 뜨면 아직도 적응되지 못한
낯선 방안에 그녀
혼자 뿐이었다. 이곳에 온지 석 달째... 랭귀지스쿨도 끝나고 이제 막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와 지낸
짧은 시간동안에 익숙해져 혼자서 눈을 뜨는 게 서글펐다. 빗 바랜 청바지에 긴머리를 늘어
뜨리고 그가 사준
따뜻한 코트를 입고 등에는 섹을 매며 집을 나섰다. 학교 가는 길은 이제 막 봄으로 접어드
는 따스함에 화창
했다 .문득 길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가득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습관처럼
손을 뻗어 태양을
가렸다. 햇살은 어김없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희망은 햇살 같은 거
야.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
오는 햇살처럼 언제 어디서나 있는 거야.
그리고 가만히 그녀의 배를 두 손을 감쌌다.

'아가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새엄마에게 말해도 되. 너를 위해서 뭐든지 해 줄 거니까'
아기는 그녀가 힘들다는 걸 아는지 입덧도 하지 않고 있었다.

'따듯하지? 아빠가 사준 코트야. 아빠가 계셨다면 분명 기뻐하셨을 거야. 하지만 우리 둘이
씩씩하게 살자. 그
래서 나중에 우리 둘 다 멋진 사람이 되서 아빠 앞에 자랑스런 모습을 보여주자'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키고 도화는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강의실로 향했다.

한 남자가 차안에서 그런 그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

그녀에게 선배가 엽서 하나를 건네주었다.
한국인 유학생 파티(상부상조합시다)

이렇게 적힌 엽서였다. 아마 얼마 안 되는 동양인들 중에서 특히 한국인들끼리 서로 어려
운 점이 많아 서로
알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이런 모임은 아마 그녀에게 많은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장소는 유학생 집
중에 하나인지 어떤 식당이나 호프집 이름이 아니었다.
엽서를 건네준 선배는 이곳을 잘 모르면 수업이 끝난 후 만나서 같이 가도 좋다고 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옷들 중에 조금은 편안해 보이는 면티와 그 위에 니트를 입었다.
약속장소에 가면서 선배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영국은 물가가 비싼 나라중의 하
나라 유학 오는 사
람들도 적고 또 옥스포드의 혹독한 생존경쟁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
다. 그래서 그나마
적은 유학생들이 졸업이나 학위를 마치고 가는 사람들이 몇 명 안 된다고 텖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그녀도 그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벌써 그녀는 우혁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많이 약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외로움에 울게 되고 밤에 잠이 들 때면 다정하게 안아주던 그가 생각이
나 울게 되었다. 울
보가 되 버린 것 같았다.

그는 아마 그녀가 영국에 와 있는 것조차 모를 것이다. 그에게 단순한 섹스파트너 이상은
아니었다는 심한 모
욕적인 말까지 하고 온 뒤라 더더욱 그녀에 대한 증오가 커졌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와 그녀는 살아가할
아니 속한 사회가 달랐다. 그는 화려한 상류층의 손가락에 꼽히는 그룹을 가진 회장의 아들
이었다. 일명 재벌
2세였다. 그런 그와 그녀가 과연 어울릴 수 있을까... 어림없는 이야기였다. 동화에서나 가능
한 이야기지... 신
데렐라와 왕자처럼...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계모조차도 없었다. 이곳에서 그들이 도착한 집
은 생각보다 크고
좋았다. 영국에서도 부촌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한 집이었다.

[꽤나 부잣집 아들인가 보네. 아마 최고경영자과정을 밟으러 왔겠지? 누군 돈 많아서 유학
와서 까지 이런 집
에 살고... 세상 불공평하지 않아?]
[네 그래요...]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정말로 불공평하다는 말의 의미를 그가 알고 하는 걸까라는 생각
을 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은 생각보다 넓었고 일층을 모두 파티장으로 개방한 듯 모든 방문이
열려 있었다. 하
지만 2층으로 가는 계단은 허리쯤 오는 기둥을 만들어 막아 놓았다. 아마 개인적인 공간이
라 그렇게 했겠지.
이런 집에 살면서 유학 오는 사람은 정말 누굴까? 혼자서 이 집에 살까? 아니면 결혼해
서... 이 정도 집이면
결혼해서 같이 온 경우겠지... 혼자 살기엔 너무 크니까...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사오십
명은 족히 되 보
였다. 도시에 있는 유학생들은 전부 다 모인 것 같았다. 이런 파티는 딱히 주체가 있는 것
도 아니고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다들 아는 얼굴들끼리 아름아름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게 다였다.
다들 이 집의 주인이 누구인지가 궁금한 것 같았다. 그녀도 궁금해 오가는 이야기에 주목했
지만 알고 있는 사
람이 없는 듯 누구라고 거명 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날 수록 그녀는 지루함으로 참을 수
없었다. 살짝 집밖
으로 나오니 집 뒤로 마당도 넓고 수영장도 있었다.
아직 초겨울이라 물은 없었지만 처음 생각보다 호화로운 집인 것만은 확실했다.
의자가 보였다. 일부러 그곳에 갔다 놓은 것 같은 의자...텅 빈 수영장을 바라보며 그녀는 생
각에 잠겼다. 지금
그는 뭘 하고 있을까... 자기에 대한 생각은 다 잊고 아마 회사 일에 바쁘겠지... 바람이 그녀
의 머리카락을 살
짝 흔들고 지나갔다.
순간 아련하게 익숙한 향기가 스쳐 그녀의 심장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19장 (완결)

무의식중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너무 민감해졌어. 바보 같이. 그가 이곳에 있을 리 없는데...'
밀려오는 실망감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 바보, 바보, 보...................... 보고싶다. '
얼굴을 가렸던 두 손위로 다른 손이 겹쳐지는 걸 느끼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힘을
주고 있었기 때문
에 그녀는 일어서지도 손을 잡아 빼지도 못했다 그러나 힘에 눌려서가 아니라 그녀의 손등
에 닿는 익숙한 느
낌 때문에 더더욱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뒤로 느껴지는 그리운 목소리에 더더
욱...

[혼자 있는 걸 즐기면 안 되. 점점 더 외로움에 익숙해질 뿐이니까]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리는 듯 했다.

'지금 꿈을 꾸는 거야. 너무나 그리워해서... 너무 보고 싶어서... 지금 환청을 듣는 거야.'
[이렇게 멀리 도망가면 내가 못 찾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난 네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어]
그는 그녀를 누르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어주었다. 도화는 마치 느린 영화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어서 뒤
를 돌아보았다. 지난 두 달 남짓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하고 그리워하던 그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녀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고 소리내어 울 것만 같아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눈물은 그
녀의 바램과 달리
하염없이 흘렀고 손으로 가린 입에서도 흐느낌 소리가 새어 나왔다 .

우혁은 그런 그녀를 말없이 않아 주었다. 버려졌던 자신보다 이렇게 떠나올 밖에 없었던
그녀가 몇 배는 더
힘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5년 동안도...

[이젠 네가 우는 일이 없도록 해 줄 거야.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할거니까]
그의 체온이 느껴졌고 그의 심장소리도 들렸다. 그는 정말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왜 왔어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는 묻고 있었다.

[사랑하니까... ]
[나... 난 당신 사랑하지 않아요]

우혁은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더 가슴에 가까이 끌어안았다.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되. 다 알고 왔어. 네가 나에게서 떠난 이유도 유원이에 대해서도... 내
가 너의 가족이 되
고 싶어. ]
도화는 유원이 일까지 알고 왔다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미안해. 그런 줄도 모르고 화만 내서...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꼭 바보가 된 기분이야]
우혁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왜 혼자서 그 많은 짐을 다 지려고 하는 거야? 이젠 내가 다 질 테니까... 내 품에서 쉬어.
이젠 너 하나쯤은
얼마든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으니까...]

그의 말에 도화는 피식 웃었다.

[이제 웃는 거야?]

우혁은 그녀의 매끄러운 볼을 쓰다듬었다.

[하나만 책임 질 수 있어요? 하나 더 책임지면 안 되요?] [무슨? ...]

의아하게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밝아지고 있었다.

[설마... ]

그녀의 배를 지긋이 내려다보는 그를 향해 도화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사랑해. 도화야]

그녀를 안고 한바퀴 빙 돌고는 우혁은 무릎을 구부리고 그녀의 배를 향해 눈 높이를 맞췄
다.

[아가야. 아빠야... 오랜만이지? 아빠가 새엄마랑 오래오래 같이 살려고 조금 늦게 왔어. 용서
해 줄 거지?]
그런 우혁을 보면서 도화는 벌써 자신에게 향하던 사랑을 아기에게 빼앗긴 기분이 들어 질
투심이 생겼다. 하
지만... 이젠 그가 그녀와 아기의 곁에 있을 것이다.



20장 (뒷이야기)

우혁과 도화의 앞에 앉아 있는 정회장 부부 앞에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다만 우혁을 꼭
닮은 아들 쌍둥이
가 '할아버지, 할머니..'하며 매달리는 재롱에 허허 하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하늘아...]

정회장이 큰아이를 불렀다. 그러자 할머니 품에 있던 하늘이가 [네]하며 대답했다. 정회장
품에 있던 바다가
입술을 삐죽였다.

[할아버지 바보. 난 바다에요 바다]
[인석들 왜 옷은 똑 같이 입혀 놨누? 헷갈려서... 참...]
그렇게 말하는 정회장의 얼굴은 한없이 부드럽기만 했다. 이제 5살을... 넘긴 아이들은 처음
본 할아버지, 할머
니가 좋기만 한 모양이었다.

[공부 끝나면 들어 오거라. 여기는 다른 사람이 해도 충분하니까... 며느리 너도..]
정회장의 입에서 며느리란 소리가 나오자 도화는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정회장은 쑥스
러운 듯 헛기침을
한번 했다.

[공부를 아주 잘한다고 네 담당교수가 그러더구나... 올해 박사학위가 끝나다고...] [네...]
[내가 네 시아비 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젠 나두 이렇게 이쁜 손주들 재롱 봐
가면서 지내고 싶
구나. ]
우혁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들어와서 우혁이 일 도우면서 같이 회사를 경영해 보는 건 어떠냐?]
정회장은 그 동안의 일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 그녀를 보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정회장 부부를 배웅하기 위해 두 사람은 처음 정회장 부부를 맞이하던
불안함과 달리 편
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 하늘이 뭐 갖고 싶누?]
[하늘이 아니야. 나 바다야]

바다는 자꾸 자신을 하늘이라 부르는 할아버지에게 드디어 톨아진 듯 손을 뿌리치고 아빠
의 다리 뒤로 숨었
다.

[흠... 미안하구나. 녀석. 다음엔 옷 똑 같은 것 입히지 마라. 어디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있어
야지...]
정회장은 똑 같이 생긴 귀여운 손자를 번갈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거라 이 시아비 살 날도 그리 오래지 않으니까...] [예 아버님]

정회장은 도화를 따스함을 담아 보았다.

[그 아버님 소리 참 듣기 좋구나. ]

정회장 부부가 떠나는 걸 확인하고 돌아오는 동안 도화는 그를 처음 보던 그때를 떠올리며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감사를 하고 있었다.


[당신 운명이란 말 알아요?]
[왜?]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나서요. 기억해요? 그 도서관에서 저에게 들려줬던 노래...] [그럼...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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