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소설은 일반인이 거북해 할수 내용이 담겨 있을수 있습니다. BDSM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되돌아가기를 누르기를 바랍니다.
포스트 속의 남자...쇼콜라
0.
‘넌 가서 네 방의 포스터나 껴안고 살아. 나한테 필요한건 진짜 여자야.’
“나쁜자식!”
서은은 핸드백을 벽에 내던졌다. 쩔그랑 소리가 나며 가방이 바닥에 떨어짖고 립스틱과 껌 등이 흩어졌다.
“망할자식. 개새끼.”
원룸 아파트 안에 그녀는 혼자였다. 벽에 붙어 있는 포스트만이 덩그러니 그녀를 맞아준다. 원망스럽게 포스터를 쳐다보다가 그녀는 결국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나쁜 놈.”
흐느끼며 그녀는 침실로 다가가 풀썩 주저앉았다. 양다리를 걸친 걸로도 모자라서 그걸 내 탓인 양 지껄여? 내가 뭘 어쨌는데? 같이 안잔게 그렇게 큰 죄야? 결혼하기 전까지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일어나는 게 사고인데, 그런 건 결혼하고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그래서 기다렸다. 남들이 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꿋꿋하게 신념을 지켰다.
그래, 신념을 지킨 덕에 남자를 잃었지, 그녀는 떨리는 미소를 짓다가 결국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치대 본과1학년 때부터 사귄 사이니까 벌써 8년이었다. 같은 과에서 내내 공인된 커플이었고, 졸업하고 그가 군의관을 갔다 올 동안에도 그녀는 기다렸다. 그런데 기다린 결과가 이거다.
“교수 딸? 그래, 성골이다 이거지. 잘났어. 진짜 잘났어.”
그녀가 뭐 그리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교수라든지 병원을 갖고 계신 건 아니었지만 그녀도 그 인간과 똑같이 공부해서 같은 학교 같은과 나와서 좋은 병원에 취직해서 잘 다니고 있다. 아무리 출세가 좋다지만 그런걸 이용해서 어떻게 해 볼 생각까지 해야 할 만큼 세상이 각박한가? 원래 그런건가?
“넌 그러지마.”
그녀가 고개를 들고 포스터를 보았다. 포스터 안의 남자는 언제나처럼 먼곳을 바라보고 있다. 주머니에 손을 곶고 비스듬히 선 채 담배를 물고 먼 곳을 바라보는 그 모습은 늘 그녀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넌 그러면 안 돼.”
일어나서 그녀가 벽으로 다가가 포스터에 이마를 기댔다. 눈물이 뺨을 타고 머무르다가 옷 앞자락에 툭 떨어졌다.
“너 같은 남자가 있으면 좋겠어.”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쉬어지지않고, 몸이 달아오르는 느낌. 살아있는 남자친구보다 훨씬 더 근사한 포스터 속의 남자. 이름도 모르고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그저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한 옷 광고 속의 남자. 하지만 누군가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을 주기가 더 쉬웠다. 한낱 탤런트 지망생이라든지 혹은 쇼 프로그램에 나와서 떠벌떠벌 하는 살아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포스터 속에 있는 그녀만의 남자니까.
“네가 제일 좋아.”
포스터에 양손을 대고서 그녀는 뺨을 기댔다. 눈물은 어느새 멈추었다. 눈을 감아도 담배를 문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린 듯한 턱선, 아련한 눈매, 짧은 머리, 소년 같으면서도 너무나 성숙해보이는 얼굴.
심장이 천천히 느려졌다. 머릿속에서 냉정하게 돌아서던 남자친구의 모습 대신 포스터 속의 그가 손을 내미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를 어루만지고, 그 아련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기울이고, 다시 어루만지고, 안아주고, 만지고, 키스하고, 다시 온몸을 쓰다듬는 모습.
몸이 달아오르고 호흡이 조금 가빠졌다. 가슴이 뭉치고 다리 사이가 뻐근해지는 느낌에 그녀는 벽에 몸을 조금 더 누르고 침을 삼켰다. 그의 손이 닿으면, 스다듬으며, 긴 손가락이 그녀의 피부 위에서 춤을 추면....
서은은 몸을 떨며 눈을 떴다. 아랫배가 묵직하니 아프고 다리사이는 화끈거렸다. 심장이 쿵쿵대며 뛰고 있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는 뺨을 문질렀다.
“미쳤나봐.”
고개를 흔들며 그녀는 포스터에서 돌아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왜 이러고 있는 건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의 핸드백을 주워들며 어설프게 움직였다.
포스터 속의 남자는 말없이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1.
“어머, 어머, 어머.”
서은의 심장이 미친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초대 손님 중 한 명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식은땀이 이마와 등에 좍 배어들었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고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준비 됐지?”
친구의 오빠인 프로그램PD가 그녀를 툭 쳤다. 서은은 침을 꿀꺽 삼킨 다음 그를 돌아보았다.
“저기, 저 사람 누구야?”
“누구?”
“저기 서 있는 키 큰 남자.”
PD는 자신이 들고 있던 대본을 내려다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는 애야. 모델인가 본데, 누가 펑크내서 대타로 쓰는 거야. 그렇게 유명한 애는 아닐 걸? 괜찮긴 한데 TV화면에 받기엔 너무 좀 전체적으로 커.”
그래, 컸다. 최소한 185는 훌쩍 넘겠다. 서은은 멍하니 남자를 모았다.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포스터 속의 남자.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다가 그녀 쪽을 보았다. 서은은 황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홱 돌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왜 이러지? 남자한테 이런 적은 한번도 없는데. 물론 다른 남자는 그녀의 방에서 은밀한 모든 걸 다 본적이 없으니까.
“아냐,아냐,아냐, 그건 포스터라고. 저 사람이 아니냐.”
“무슨 문제 있어?”
PD가 옆에서 묻자 서은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간다. 저 쪽에서 소개해 줄 거야.‘백치과 이서은 선생님모시고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때 나가면 돼. 알겠지? 나머지는 아까 연습한 대로만 하면 되고. 생방이니까 다시 가는거 없어. 실수하면 알아서 얼버무려야 돼.”
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만하게 나왔는데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목덜미의 털이 바싹 곤드서고 등은 식은땀으로 차가웠다.
“처음 아니잖아. 긴장 좀 풀어.”
“오늘따라 좀 긴장돼네”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쇼 프로그램은 계속 진행되고 있고, 마침내 MC가 그녀를 소개했다. 무대구석에서 진행요원이 객석을 향해 박수치라는 표시를 했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서은은 웃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무대로 걸어나갔다.
“반갑습니다. 선생님. 요즘 치아 미백이 유행하고 있는데요. 치아 미백이라는게 어떤건지 우선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연습한 대로 서은은 카메라를 쳐다보며 전문가답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행히 병원에 오는 수십명의 환자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해 본 터라 어렵지 않게 술술 말이 나왔다. 뭐, 시선을 포스터 속의 남자에게 두지 않은 덕택도 있지만.
“그럼 치아 미백을 할때는 어떤식으로 하는 건가요?”
“네, 그건 사진을 보면서 설명해 드릴게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면 돼. 모니터에 사진이 나오자 서은은 빠르게 처치법에 대해서 설명했다. MC들은 적당한 순간에 아 하는 감탄사라든지 그렇군요 하는 이야기를 했고, 그조금 긴장이 풀려서 그녀도 가볍게 환자사레 이야기를 하며 미소를 지울수 있었다.
“그럼 우리 게스트 분들의 치아 상태는 어떤지 점검이 가능할까요?“
연습때 없던 이야기에 그녀가 눈을 깜박이며 PD를 보았다. 카메라 옆에 있던 PD가 계속 하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서은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간단하게 점검정도는 할수 있죠. 물론 자세한 검사는 볍원에서 받으셔야 되자만요.”
“저희가 여기 세트를 준비해 뒀거든요. 어느 분이 한 번 해 보시겠어요?”
눈에 익은 탤런트 두 사람과 개그맨 한 명, 그리고 포스터 속의 남자. 앞의 세 사람은 뭐라고 조잘조잘 떠들고 있는데 그 남자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뺨과 목덜미가 붉어지는 느낌에 서은은 다른 게스트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았었다. 심장이 펄떡거린다.
“저요.”
세 사람이 떠들고 있을때 갑자기 그 남자가 손을 들어올렸다. MC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고수민씨. 이쪽으로 와서 앉아 보세요. 선생님?”
남자가 게스트 자리에서 나와서 걸오고 있었다. 움직인다. 그녀의 꿈에서처럼 우아하게 걸어와서 점점 가까워지다가 마침내 바로 앞에서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
“선생님?”
남자는 의자에 기대 앉아 있었다. 카메라가 어느새 앞까지 다가와 있다. MC가 카메라에는 보이지 않게 그녀의 등을 쿡 찔렀다. 서은은 헛기침을 하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아, 네. 한번 볼까요?”
포스터 속에선 어두컴컴해서인지 뚜렷하지 않았는데, 남자의 눈은 외국인처럼 속눈썹이 길고 짙었다. 까만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쳐다조고 있다. 처음 포스터를 보는 순간부터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린 듯한 턱선은 손으로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완벽했고, 의자 팔걸이에 올려져 있는 남자의 손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처럼 길고 예뻤다.
여성적이면서도 지극히 남성적인. 그 앞뒤 맞지 않는 말이 이 남자에게는 딱 맞았다.
“이 해 보시겠어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면서도 서은은 전문가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입만 보는거야. 허구헌날 하는 일이잖아. 입만 봐.
하지만 입도 위험했다. 선명한 입술은 튼 자국하나 없이 매끈하고 이를 드러내느라 웃는 것처럼 양옆으로 벌어져 있었다.보이는 것처럼 부드러울까? 만져보면 과연 어던 느낌이....
갑자기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치 관찰하는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 그냥 의사를 쳐다보는 눈빛일지도 모르지. 모르겠다. 그저 가슴이 쿵쿵거리고 진땀이 나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미러를 들고서 재빨리 그의 이를 점검했다. 정신 차려. 금방 끝난다니까.
손에 닿는 그의 피부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손이 파르르 떨리자 그녀는 그것을 숨기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아, 해 보세요.”
남자는 얌전히 그녀의 말에 따랐다. 마스크를 하지 않았느데 남자에거서는 구취도 전혀 나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다행스럽지 않은가? 차라리 입냄새가 풀풀 났으면 환상이 깨졌을 텐데. 그럼 이렇게 가슴이 뛰고 진땀이 안 날 거고, 정신도 집중될거고.
“음, 치열이 아주 고르고 상태가 좋네요. 흡연 안 하시죠? 굉장히 관리도 잘 되어 있어요.”
그녀는 간신히 아무말이나 떠들었다. MC와 게스트들이 뭐라고 질문을 했고, 생각은 나지 않지만 그녀는 어떻게인가 간신히 대답을 했다. 내내 남자는 의자에 누워 있다가 마침내 일어났고, 그녀의 시간도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MC와 인사를 나눈 다음 그녀는 지정된 방향으로 무대에서 내려왔다. PD가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좀 긴장했었나 보네. 뭐 어쨌든 잘 했어. 내가 아까 저걸 잊어버리고 말 안 해줘서 미칠 뻔했는데 잘 넘겼고.”
“응, 그래. 나야 뭐 병원 선전 되고 뭐, 내가 더 고맙지.”
“그래. 가 봐라. 나중에 지윤이한테 전화아라고 그럴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근처에 놔뒀던 가방을 챙긴 다음 서은은 스튜디오를 나왔다. 복도에 나오니 갑자기 안도의 한숨이 푹 나왔다.
“아, 세상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포스터 속의 남자를 진짜로 만날 일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저, 그저 그 남자는 그녀의 상상 속의 남자일 뿐이었다. 짜증나게 굴지 않고, 일만 한다고 그년를 비난하지도 않고, 그녀가 말하는 모든걸 말없이 들어주고 말로 할 수 없는 욕구들을 꿈속에서 풀어주는 존재. 소녀들의 이상형, 그런 거였다.
그런데 그 남자가 진짜 살아서 그녀를 쳐다보다니. 심장 속도가 열 배쯤 빨라지는 느낌이다. 물론 그 남자는 아무 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가 좀 덜 떨어졌다고 생각했겠지. 혹시라도 그녀가 자기 포스터를 보면서 별별 생각을 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흥분해서 펄펄 뛰지 않을까?
“바보, 멍청이.”
고개를 흔들며 그녀는 방속국을 나섰다.
오늘의 마지막 환자다. 기지개를 편 다음 사무실에서 나와 검진대에 누워 있는 환자의 앞에 다가가던 서은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고수민.
어떻게 한 번 들은 이름이 잊혀지지도 않나 몰라. 어쩌면 그 이래로 포스터를 볼때마다 그의 이름을 생각한 탓인지도 모른다. 고수민. 포스터 속의 남자에게 이름이 생겼다.
물론 그녀의 집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 속에서 그는 여전히 담배를 문 채 먼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헐렁한 검은색 후드티에 짙은색 청바지를 입고 비스듬하게 서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남든다. 뭘 보고 있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초연한 얼굴로, 아련한 눈으로 누굴보고 있는걸까?
지금 그 까만 눈동자는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스크를 하고 있는게 그렇게 다행스러울수가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옆에 놓인 차트를 집어들며 그녀는 태연한 척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치아 검진 좀 받고 스켈링 하려고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침을 끌꺽 삼키고 서은은 차트를 내려놓은 다음 미러를 집어들었다. 간호사가 옆에서 자동장치를 느르자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그의 몸이 거의 누운 자세가 되었다.
라이트를 켜며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부드럽고 흠 없는 피부는 마치 그림 같다. 어떻게 남자가 이렇게 예쁠 수 있을까? 아니 예쁘다는 말은 틀렸다. 잘생겼다? 단순히 그 말로도 표현 할 수가 없다. 그냥 하염없이 보고 있어도 좋을것 같은 얼굴.
그의 눈이 그녀를 향하는 순간 그녀는 재빨리 팔걸이 쪽으로시선을 돌린 다음 미러를 들어올렸다.
“아 하세요.”
그의 치아는 며칠전 방송 때 본 것과 똑같았다. 하얗고 고르다. 교정을 한 흔적도 없었다. 장갑을 껴서 오늘은 손에 닿는 그의 피부를 느낄 수가 없었다. 어쩐지 아쉬운 기분에 그녀는 치아를 샅샅이 살피고서 마지못해 미러를 내려놓고 차트를 보는 척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별 문제 없으시고요. 스켈링 안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언제 마지막으로 하셨어요?”
“여름에요.”
“그럼 안 하셔도 돼요. 다음에 하세요. 몇 달 더 있다가.”
그녀는 일어나서 장갑을 벗고 마스크를 벗으며 간호사에게 나머지를 맡긴 다음 사무실로 향했다. 어쩌다 이 병원에 온 걸까? 혹시 그녀가 있는 걸 알고 왔나?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 말 같은 소릴해. 어쩌다 우연히 들른 거겠지. 그녀는 한 숨을 삼키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가운을 벗고 책상위를 정리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기 선생님, 환자분이 이거 전해달라고 그러시는데요.”
간호사가 그녀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서은은 눈을 깜박이고서 쪽지를 받아든 다음 머뭇거리다가 펼쳤다.
저녁 같이 할래요?
그녀는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고 서 있다가 간호사를 보았다. 간호사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생님 고수민씨랑 아는 사이세요?”
“어, 음, 저번에 방송갔을때 만났어요. 뭐라고 해요?”
간호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별 말은 안하고 쪽지 전해주고 대답 좀 전해달라고 그러던데요.”
종이를 마닞작거리고 있다가 서은은 별 것 아닌 양 지나가듯 슬쩍 물었다.
“조간호사 저 사람알아요? 탤런트예요?”
“어머, 아뇨. 선생님 그것도 모르고 그럼 보셨어요? 하긴, 아직 유명하진 않으니까. 모델이에요. 패션모델. 요즈음 막 뜨는 중인가 보더라구요. 아직 어리니까 뭐.”
서은은 눈을 깜박였다.
“어려요? 몇 살인데?”
“스무살 좀 넘었나 그럴 걸요? 보기엔 안 그래 보이죠?”
간호사가 낄낄 웃고는 한 손을 흔들었다. 서은은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스무살? 열 살이나 어리다. 세상에. 지금껏 난 그럼 열 살이나 어린애를 보고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이런 꿈 저런 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책상에 머리를 박고 싶었다. 차라리 70먹은 숀 코네리나 폴 뉴먼을 상대로 야한 상상을 했다면 넘어가지. 스무 살? 스무 살!
자신도 모르게 종이를 구기고 멍하니 서 있다가 간호사의 목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선생님, 그래서 어떡해요? 뭐라고 할까요?”
“그게...”
그렇다고 그냥 보낼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최소한 왜 왔는지 정도는 들어봐야 하지 않나? 그녀는 책상 모서리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좀 기다리라고 할래요? 그리고 나 지금 퇴근할 테니까 정리하고 갈 수 있죠?”
“아, 네.”
간호사는 진짜 그녀가 스무 살짜리 패션모델과 데이트를 하는 건가 싶은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다가 머뭇머뭇 사무실을 나갔다. 서은은 종이를 구겨 쥔 채 의자에 풀썩 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스무 살? 아 맙소사. 스물다섯만 넘었어도 조금 저 진지하게 생각해 봤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무 살이라니, 도데체 무슨 이야기를 하지? 내가 아는 사람중에서 가장 어린후배가 몇 살이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스물다섯 이하는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재킷을 입고 숄더백을 챙겨 깨에 걸치고서 밖으로 나오자 간호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대기실엔 수민 혼자 있었다. 벽에 걸린 신문가시를 보다가 그가 몸을 돌렸다.
“음, 저기, 오래 기다렸어요?”
“별로요”
그가 어깨를 살짝 으쓱하고서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느릿하게 펴져서 처음부터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미소였다. 서은의 심장이 다시 쿵 소리를 냈다. 포스터 속의 그는 웃고 있지 않았었는데. 미소는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까만 눈동자까지 반짝이는 것 같다.
“어, 나 여기 있는 거 알고 왔어요?”
“PD님한테 물어봤죠. 병원 어디냐고 했더니 잘 가르쳐 주시던데요.”
그가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의 뒤에 서서 팔로 그녀의 옆을 스쳐 문을 열자 왠지 너무 친밀한 느낌이 들어서 다시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만 좀 해! 사람을 앞에 두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네가 미쳤구나.
소리없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 그녀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팔을 살짝 잡았다.
“차, 지하에 대놨어요.”
“차 있어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자 그가 의하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서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의 능력을 의심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스무 살짜리가 무슨 차람.
“아니 그게 ,저기, 어려서 아직 없는 줄 알았거든요.”
“스물셋이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차도 못 몰 정도의 나이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스물셋. 그러니까 스물이 아니라 스물셋이었구나. 하지만 그녀에 비하면 어리긴 매한가지다. 서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재미있다는 듯 수민이 그린 듯한 눈썹을 다시금 치켜올렸다.
“선생님 나이는 몇인데 그렇게 나이 든 척 구시죠?”
“여자나이는 묻는게 아닌데.”
그녀가 투덜거리자 그가 씩 웄었다.
“전 양성평등주의자라서요.”
“서른이에요.”
“보기보다 많네. 스튜디오에서 봤을때 무슨 의사가 저헐게 어리나 했죠.”
흔한친찬이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디. 서은은 어깨를 으쓱이고서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층수가 변하는 동안 그녀는 그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옆으로 보니 어쩐지 포스터 속의 그 모습과 확실히 닮았다. 하지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은 왠지 다른 사람 같았다. 어쩌면 그녀가 한 가지 모습네 너무 익숙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정신 차려. 이건 네 환상이 아니야. 실재 상황이라고. 넌 이 남자를 몰라.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 그를 다라 엘리베이커에서 내리며 물었다.
“그런데 나 왜 찾아온 거예요?”
“저녁 같이 먹으려고요. 그 날 촬영 금방 끝났는데, 나와보니까 벌써 가고 없더라구요. 기다릴 줄 알았는데.”
뭐? 서은은 인상을 찌푸리고 그를 보았다. 그는 무심하게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평범한 중형 승용차의 문을 열고 있었다. 외제 고급 스포츠카 같은 거였다면 안 탔을지도 모르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국산차라는 사실에 어쩐지 마음이 좀 놓였다.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멘 다음 그녀는 그를 힐금 보았다. 이러면 안 되는건가? 너무 쉽게 따라나온 건 지도 모른다. 너무 오래 환상을 갖고 있었는지 현실과 영 매치가 되지 않았다.
“기다릴 줄 알았다니? 무슨 말이에요?”
시동을 걸고서 그가 그녀를 힐끗 보았다. 짙은 눈매가 예쁘게 가늘어진다.
“스튜디오에서 보고 느낌이.....아니었어요?”
“무슨 느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혹시 들킨 건 아니겠지? 넋을 빼고 쳐다보고 있던 걸 들켰다든지? 아냐, 절대 안돼. 그러면 가까운 도로에 달려가 버스 앞에 확 뛰어 들테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겁에 질린 얼굴오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다시 어깨를 으쓱이고는 의자에 기대 운전대를 잡았다.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에서 빠져나왔다.
“아니에요. 그나저나 내 이름 알아요?”
“고수민씨 .맞죠?”
“음. 이서은씨죠?”
서은은 고개를 그덕였다. 차는 가볍게 도로를 달려간다. 조수석 앞에 매달려 있는 조그만 액세서리 인형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에 그녀는 가만히 의자에 기댄 채 아판 쳐다보았다.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모르는 남자와 저녁을 먹으러 간다. 도대체 왜? 그냥 거절할 걸 그랬나?
“어, 저기, 어디로 가는 거에요?”
“본뽀스또 갈까 했는데 싫어요? 친구들하고 자주가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이거든요.”
“음 괜찮아요.”
계산은 내가 해야 되나? 그녀는 한참 고민하다가 다시금 물렀다.
“진짜로 왜 나 찾아왔어요? 그냥 , 저지, 스튜디오에서 한 번 본 것뿐이잖아요. 혹시 치과의사 필요해요? 치아 상태 괜찮던데.”
그가 그녀를 힐끔 보았다. 붉은 입술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그냥 그쪽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 두죠.”
서은은 눈만 깜박였다. 그냥 그족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 둬?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마음에 든다는 거야, 안 든다는거야?
차는 여전히 압구정동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서은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2.
저녁식사는 굉장히 어색했다. 주위 테이블에서는 사람들이 웅성웅성 잘도 웃고 떠드는데 그녀와 수민은 조용하기만 했다.
“어, 모델이라면서요?”
“몰랐던 것처럼 말하네요.”
“몰랐어요. 우리 간호사가 말해줘서 아까 알았어요.”
그녀의 대답에 수민의 입가에서 미소가 조금 사라지고 대신 눈썹이 비뚜릅하게 올라갔다. 왠지 미안해져서 스파게티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다시 그녀는 그를 힐끔 보았다. 그는 시선을 돌린채 물만 마시고 있다. 물잔을 든 모습이 CF의 한 장면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도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았다.
한참이나 다시 침묵이 흐르고,리조또를 마저 먹고 수민이 그녀를 보았다.
“근처에 아는 클럽이 있는데 춤추러 갈래요?”
춤? 이 나이에? 압구정동의 클럽에서? 체면은 둘째치고 그녀는 클럽 같은데 가 본 적이 없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구석에서 눈치만 살필 게 뻔했다. 그를 따라온게 실수라는 생각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클럽 괜찮아요. DJ도 괜찮고, 음악도 괜찮고 애들도 괜찮고,”
아, 그렇겠지. 그녀는 한숨을 삼키고 반이나 남은 스파게티를 포크로 휘휘 젓다가 결국 포기했다. 맛은 있지만 영 넘어가질 않았다.
종종 같은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남자가 그녀에게 접근하면 혹시 매력을 느끼는 건가 생각하는 것. 실상은 무언가 그녀에게 바라는 게 있거나 부탁 할 게 있는 경우인데.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를 다른 누군가와 착각ㄹ했거나 그녀에게 돈이 좀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경우. 8년 사귄 남자친구한테도 차이는 마당에 도대체 스물세 살짜리가 어떻게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겠는가? 뭘 착각한 거지.
어쩌면 쉬운 상대가 아닐까 싶어서 접근한 건지도 모른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같이 잠 한 번 안 잔다고 욕을 먹은 게 두 달전일인가? 두 잘 사이에 사람이 바귀었을 리 없지. 나이 서른인데도 그녀는 여전히 싱글에다가 숫처녀였다. 친구들도 고개를 흔드는 일이었다.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경험 삼아 한 번 해 봐도 좋아, 그렇게 들 설득하곤 했다. 하지만 학생때는 너무 바빳고 지금은 .....상대가 없다.
하고픈 의욕도 없다. 뭐 그리 좋아서? 남자친구와 키스도 그리 굉장한 경험은 아니었다. 섹스 역시 마찬가지겠지. 차라리 로맨틱한 영화를 보며 상상을 하는편이 훨씬 근사하잖아. 결혼하고 나면 뭐 어쩔수 없지만 그 전에 괜히 실망부터 하고 싶진 않았다. 값싼 기분도 들 것 같고.
‘진짜 근사하고 솜씨 좋은 남자를 찾아서 한 번 해보라니가. 좋아. 몸 건겅 정신 건강에도 다 좋고.’
친구가 그렇게 말한 적도 있지만 그녀는 그냥 포스터를 바라보며 상상에 빠져드는 쪽이 더 좋았다.
실제로 그 상대를 만나니까 이렇게 실망하잖아. 그녀는 수민을 힐끔보았다.
“같이 가요. 어차피 잠깐 가야 되거든요. 만날 사람이 있어서. 잠깐만 들렀다가 바래다줄게요.”
“택시 타면 돼요.”
“집 여기서 별로 안 멀다면서요? 데려다 줄게요.”
별수 없이 서은은 고개를 그덕였다. 괜히 더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예의는 얼어죽을. 그냥 집에 갈 걸.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벽 한 구석에 서서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입장료를 내면 주는 음료수를 들려준 다음 수민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뭐 대단한 기재를 했던 것도 아니다. 10년쯤전에 ,대학교 1,2학년 시절 미팅 때 충분히 겪어본 일이다.
못 생겻다고는 결코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그녀는 남자에게 인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종종 짝을 지어서 나오면 그녀의 상대가 된 남자애는 급한 일이 있다고 금방 사라지곤 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면 쌍쌍이 갈라진 다른 친구들이랑 만아서는 셋, 혹은 넷이서 논다는 거였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그녀가 바로 미팅 자리의 ‘폭탄’ 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쾌하게 이야기를 잘 하는 건 아니지. 그건 그녀도 인정했다. 특출나게 예쁜것도 아니고, 상냥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수줍음도 탄다. 혼자 딴 생각을 하다가 상대의 이야기를 못 듣는 경우도 있다.
“폭탄이 될 요소는 충분이 갖췄네.”
벽에 기댄 채 그녀는 피식웄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근처에서는 비키니에 가까운 옷차림을 한 몸매 좋은 여자들이 무아지경에 빠진 듯 머리를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화려한 옷차림의 남자들 역시 비슷하게 화려한 여자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웃고 떠든다. 눈부신 조면, 음악, 영화 속에 엑스트라로 들어와 있는 기분.
남자친구와 헤이진 이후 종종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자기 인생을 살고 있는게 아니라 남의 인생에 엑스트라로 들어와 있는 기분.
“집에 가야겠다.”
최소한 포스터 속의 남자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선택권이 있는건 아니지만. 음료수를 몇 모금더 마신 다음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수민을 발견했다.
키가 큰 탓인지 아니면 그녀가 그의 얼굴에 익숙해져 버린 탓인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그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재킷이 하얀색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긴 머리를 흔들며 웃는 여자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CF에 나올것 처럼 고개와 몸을 가볍게 흔들며 유연하게 춤을 춘다. 뭐라고 입을 움직이는데 뭐라고 하는 지는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가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옆 얼굴과 목선이 사이키델릭한 조명 아래서 그림처럼 보인다. 스틸사진처럼.
왜 따라왔을까? 난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스물다섯이 넘었다면 진지하게 생각해? 네가 공주병이 단단히 걸렸구나. 하지만 근사했다. 살아 움직이는 그녀의 환상. 몇 초 더 보고 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아직 음료수도 남았으니까.
음료수 잔을 멍하니 흔들며 그녀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여자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몸을 빙그르르 돌리고 섹시하게 움직이고, 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띤 채 몸을 흔들었다. 커다랗고 긴 몸이 비스듬히 움직이고. 고개를 돌리던 그가 그녀 쪽을 보았다. 아마도 그녀가 보이진 않았으리라. 주위의 키 큰 사람들속에 푹 파묻힌 데다가 그녀 근처엔 조명도 없었다. 조명이 있다한들 이 빛나는 애들 속에서 칙칙한 아줌마가 보이기나 하겠어? 그녀는 속으로 이죽거리며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음료수를 마셨다. 과연 그녀를 못 본 듯 그가 다시 파트너를 쳐다본다.
빈 잔을 근처 아무데나 내려놓고 그녀는 몸을 돌렸다. 커다란 숄더백을 어깨에 멘 채 그녀는 출구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다리가 무거웠다.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어디 숨어버리고 싶었다.
집에 가면 포스터를 떼버릴까 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며 그녀는 피식 웃었다. 아니, 아마 못 그럴 것이다. 아쉬우니까,그것마저 없으면 집이 얼마나 삭막하겠는가.환상에 잠기는 게 불법도 아닌데, 외로운 인생에 그런 낙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클럽에서 나오니 시끄러웠던 음악 때문에 아직도 귀가 웅웅 울렸다. 양쪽 귀를 손으로 문지른 다음 차가운 바람 속에서 한숨을 내쉬고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큰길에 나가야 택시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집에 가서 씻고 잘생긴 휴 잭맨이 나오는 근사한 로맨스 영화를 보자. 오늘 일은 잊어버리는 거야. 어차피 재가 또 오진 않을 테니까.
“무슨 생각을 했나 몰라. 나 같은 사람을 찾아오게.”
그녀는 기운 빠진 미소를 짓고서 터벅터벅 걸었다. 왠지 가슴이 좀 아팠다. 부모님 말씀대로 선이라도 봐야 하는 건지 모른다. 나름대로 맞선 시장에선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던데.
옆에 있어 줄 누군가가 필요해. 손 댈 수 없는 포스터 속의 남자말고 진짜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달래주고, 같이 웃어 줄 누군가가.
“이서은씨!”
그녀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클럽 입구에서 수민이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가만히 서 있자 그가 성큼성큼 걸어오며 짧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몇 번 긁어 올렸다.
“어디 가요? 말도 안 하고.”
“저기, 바쁜 것 같아서 그냥 먼저 가려고요.”
그녀가 어색하게 그의 어깨 너머를 응시하며 말했다. 수민이 조금 더 인상을 찌푸렸다.
“데려다 준다고 했잖아요. 빨리 가야 되면 말을 하지 그랬어요? 와요. 데려다 줄게요.”
“아니, 안그래도 돼요. 그냥 택시 타고 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요. 금방 가거든요. 친구들이 있는 것 같던데 들어가요. 나 갈게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수민은 웃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 했다.
“저기요. 내가 혼자 둬서 화났어요?”
물론 화가 났다. 그에게가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 이런 데까지 따라오다니 너무 바보 같아서. 서은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 한참 빤히 쳐다보다가 나갔잖아요. 그래서 화난줄 알았는데. 화가 났으면 왜 화가 났는지 말을 해야지, 그냥 쳐다보면서 알아주기만 바라고 있으면 아무도 안 알아줘요. 아무리 강아지처럼 불쌍하게 하고 있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 안 하면 어떻게 알겠어?”
강아지처럼 불쌍하게? 명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보였나? 혀 내밀고 불쌍하게 애걸하는 강아지처럼?
내가 왜! 장사 잘 되는 유명한 치과에서 근무하지, 이럭저럭 강남에 집도 있지, 심심할 때면 놀아주는 독신인 친구들도 충분하다. 남자가 좀 없긴 하지만 그걸 대신할 환상도 얼마든지 있고, 그런 그녀가 왜 불쌍하단 말인가! 분노가 얼굴을 화끈 물들였다. 주먹을 꼭 쥔 채 그녀는 차분해지려고 심호흡을 몇 번 한 다음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나 화 안 났었거든요. 지금은 화가 났지만. 어쨌든 그거 댁하고 상관없으니까 신경 끊어도 돼요, 고수민씨. 들어가서 댁 친구들하고 놀아요. 애당초 왜 날 찾아왔는지 모르겠는데, 어쟀든 보니까 고수민씨도 나한테 별로 뭐 하고 싶은 이야기도 없는 것 같고, 그러니까 나 갈래요. 이 치료할 거 있으면 다음에 와요. 됐죠, 오케이? 정리 끝?”
그가 잠깐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손으로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방긋 웃었다. 분홍빛 입술이 완벽한 활 모양을 그린다.
“내내 뭐가 좀 이상하다 했는데 이제 알겠다.”
“뭘요?”
“서은씨, 연내 별로 안 해 봤죠?”
그녀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어쩐지 온갖 종류의 미움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부르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게 도대체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돌아서서 쿵쿵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민이 더 빨랐다. 그가 그녀의 팔을 잡고 솜씨 좋게 돌려세운 다음 양어깨를 쥐고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랑 눈 독바로 못 마주치면서.”
아, 맙소사. 사실이었다. 그를 똑바로 보려고 하면 얼굴이 붉어졌다. 포스터 속의 그가 생각나고, 그와 관련된 온갖 상상들이 떠올라서 도저히 눈을 마주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내 은근슬쩍 눈길을 피하고 있었는데 들켰을 줄이야. 마음 속의 미움은 이제 수치심으로 변해서 그녀의 온 피부를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되게 귀엽네. 처음엔 그렇게 안 봤는데.”
입술을 깨문 채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그는 어깨를 꼭 잡은 채 그저 알수 없는 얼굴로 웃기만 했다. 얼굴이 점점 더 달아올라서 그녀가 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놔요!”
“싫은데.”
“저리 가라니까!”
그의 한손이 어깨에서 그녀의 목 뒤쪽으로 향했다. 커다랗고 약간 거친 손이 그녀의 머리를 잡고, 다른 손은 어깨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물러날 새도 없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덮었다.
저항하려던 마음은 햇살 아래의 안개처럼 스르륵 흩어졌다. 강제로 덮친 것 치고 그의 입술은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그녀의 어깨와 머리를 단단하게 잡고 있는 손과는 달리 그녀의 입술을 어르고 달래며 열어달라고 설득하는 그의 혀는 촉촉하고 상냥했고. 그 대조적인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머리가 아예 돌아가지 않았다. 귓가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느낌이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스치고 빨아들였다. 보들보들하고 촉촉한 혀가 그 부분을 쓰다듬고 맛보는가 싶더니 시험하듯 몇 번 깨문다. 그녀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머리를 잡은 손이 그녀의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고, 아랫입술을 놓아주고 그의 혀가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쌉싸름한 맥주 맛이 그녀의 혀를 자극하고, 그의 혀는 입안의 여린 살을 건드리며 희롱했다. 능숙하게 움직이는 그의 혀 앞에서 그녀의 혀는 주춤거리다 그와 맞닿을때마다 온몸이 떨림을 전달했다.
“내밀어 봐. 응? 조금만.”
그가 나직하게 속삭이며 다시 혀를 움직였다. 머리 뒤를 감싸고 있던 손이 앞으로 돌아 나와 그녀의 뺨을 감싸고 엄지손가락이 턱을 누르며 입을 더욱 벌렸다. 몽롱한 상태로 그녀가 그의 혀를 따라 혀를 움직이자 만족스러운 듯 그가 신음소리를 냈다. 그의 입이 그녀의 혀를 귀한 음식인 양 핥고 빨아들였다. 그녀의 손이 그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낯선 신음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애원하는 듯 한 흐느낌. 그녀는 눈을 떴다.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건 그녀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온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따끔거렸다. 다리 사이가 잦어드는 느낌이다. 키스만으로 이렇게 달아오른 건 처음 이었다. 그래서 겁이 났다.
“싫어. 싫어!”
그녀가 물러나려고 하자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등 뒤를 타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 번쩍 들어올렸고, 길고 튼튼한 다리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다리 사이 예민한 부분이 자극되는 느낌에 그녀가 날카롭게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관찰하는 것처럼 까만 눈이 그녀의 얼굴을 살핀다. 짙은 색의 입술은 젖어 있고 입가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하, 하지 마, 하지.......”
"미치겠네. 진짜 서른 살 맞아?“
뭔가 화를 내든지 해야 하는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온몸의 감각이 과잉부하 상태였다. 머릿속이 핑핑 돌고 숨조차 쉴 수가 없다.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가더니 그녀의 다리 사이를 자극하던 긴 허벅지가 사라졌다. 그녀는 흐느끼며 몸을 떨었다.
죽어버리고 싶어. 창피하고, 수치스럽고, 그런데도 기분이 너무 좋아서 죽어버리고 싶어.
고개를 숙인 채 그녀가 훌쩍였다. 커다란 손이 지나치리만큼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쓰다듬고 젖은 눈가를 닦아주었다.
“괜찮아. 쉿. 차고 가자. 가까운 호텔이 있어. 가서.......”
서은이 번쩍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그의 얼굴도 약간 상기되어 있다. 긴 손가락이 그의 뺨을 따라 내려오다가 젖은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의 눈이 어둡게 반짝였다.
“얼른 가자. 나도 못 참겠어.”
“이, 이 나쁜 자식!”
아직 팔에 걸려 있던 숄더백으로 그녀가 그의 배를 후려쳤다. 그가 헉하고 뒤로 물러섰다.
“이 나쁜......”
흐느끼며 서 있던 그녀가 홱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가능한 빨리 그의 근처에서 떠나고 싶었다. 그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몸이 떨리고, 몸 안이 떨리고, 모든 게 다 떨렸다.
간신히 골목 근처를 배회하던 택시를 발견하고 그녀가 손을 흔든 다음 재빨리 올라탔다. 택시 기사가 그녀를 힐긋 보았다.
“삼성동이요.”
차가 출발한 다음에야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서 소리 죽여 울었다.
집에 오자마자 포스터를 떼서 쭉쭉 찢어버리려고 했었다. 정말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순간까지 그러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들어와서 포스터를 보는 순간 다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네 잘못이 아닌데.”
포스터 속의 남자는 살아있는 진짜 고수민과는 달랐다. 포스터 속의 남자는....그녀의 환상속의 연인이었다. 친구이고, 애인이고, 모든 것이었다. 안아주는 팔, 체온만 없을뿐이지 최고의 상대였다.
하지만 진짜 고수민은 그저 야아치쓰레기다. 그녀를 하룻밤 어떻게 해보려던 버릇없는 남자애일 뿐.
“너무 끔찍해.”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도 침대에 기대앉아 한참 울다가 마침내 그녀가 휴지를 뽑아들고 코를 팽 풀었다. 포스터 속의 그는 여전히 아련하니 먼 곳을 보고있다.
“정말로 끔찍했어. 너 정말 너무했다구.”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진 다음 그녀는 이불을 덮고 침대에 안전하게 누웠다. 침대 옆의 스탠드를 끄고 나니 어둠 속에 잠겼다.
한숨을 내쉬고서 그녀는 이불 안으로 조금 더 파고 들었다.옆으로 몸을 웅크린 채 그녀는 눈을 감았다. 우느라 지쳤는지 잠은 금개 찾아왔다.
‘내밀어 봐 조금만.’
이번엔 그녀의 혀를 요구하는게 아니었다. 긴 손가락이 예민한 피부를 쓰다듬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바삭 달아오른 젖가슴이 그의 손길에 환호를 지른다.
‘조금만.’
쉰 듯 한 목소리. 열정과 열기로 가득한 목소리. 뜨겁던 눈동자. 가슴 끄트머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그녀는 숨이 헐떡이며 몸을 젖혔다.
‘조금만.“
온 몸이 짜릿짜릿하고 후끈거렸다. 숨을 쉬기가 힘들다. 그녀의 몸을 돌리고서 숨을 헐떡였다,그의 손이 그녀의 온몸을 쓰다듬는다. 간지럽고 따끔거리고 참을 수가 없다. 그녀는 흐느끼며 그의 손길을 가다렸다. 조금 더 강하게, 세게, 확실하게. 하지만 그는 스치듯 그녀를 어루만질뿐이다. 장난치는 것처럼. 달아오른 피부가 비명을 지른다. 너무 뜨겁다. 다리 사이가 젖어드는 게 느겨졌다. 여성의 핵심이 고동쳤다.
‘조금만.’
그의 붉은 입술이 그녀를 쓰다듬고 아래로 내려간다. 하지만 스칠 듯 스치지 않으며 그녀를 괴롭히기만 할 뿐이다. 제발, 제발, 그녀는 울면서 애원했다. 그를 붙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그리고....
와장창 소리에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쿵거리고 있었다. 온몸이 축축하다. 피부는 개미들이 깨물고 있는 것처럼 따끔따끔했고, 팬티가 젖어 있는 것도 느껴졌다. 얼굴이 화끈 달아 올라서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직 어두웠다. 침대 옆 테이블에 있던 시계와 책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맙소사.”
그녀는 무릎을 구부려 가슴에 대고 껴안았다, 온몸이 아팠다. 뭘 바라는지 알수가 없지만 그녀의 몸은 무언가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아니, 뭔지 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뿐이었다. 창피했다.
“정말 싫어.”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서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포스터를 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친구들의 말처럼 너무 쌓이만 둬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욱신거리는 그녀의 몸은 누군가의 손길을 갈망하고 있었다. 특정한 누군가의 손길을 .그의 손길을.
3.
“이선생, 나 먼저 점심 먹으러 나갔다 올게.”
“네, 다녀오세요.”
원장이 서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친구와 함께 병원을 나갔다. 다른 의사 한명이 30분 후부터 점심시간이고 그녀의 점심시간은 순번에 따라 마지막이었다.
1시반이 되어서야 그녀는 병원에서 나왔다. 간호사들과 같이 나와서 먹거나 배달시켜 먹는 경우도 있지만 오늘따라 바람도 쐬고 싶고 사람 구경도 하고 싶었다. 아픈 사람만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새 기분이 축 쳐지곤 했다.
오늘은 더더욱 그랬다. 밤새 잠을 설친 탓인지도 모른다. 아침에는 결국 포스터를 한참이나노려보고 있다가 출근했다.
잘못한 사람을 따지자면 나겠지.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걸음을 옮기다가 누군가가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힐끔 보고 옆으로 조금 비켰다. 하지만 상대 역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고개를 숙인 채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수고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으나 상대 역시 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고개를 들었다가 그녀는 입을 딱 벌렸다. 수민이 그녀를 내려더보며 그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에 그녀는 시선을 홱 돌리고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으나 수민은 여유롭게 그녀를 따라왔다.
“아는 척도 안할 셈이에요?”
돌아보지 않고서 그녀는 구두 소리를 딱딱 내며 빠르게 걸었다.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깜박거리고 있다. 하지만 미처 건너기 전에 불은 빨간색으로 바뀌고 차들이 휙휙 지나가기 시작했다. 어절수 없이 그녀는 보도에 서서 신호등만 노려보았다. 수민이 옆으로 다가왔다.
“점심 늦게 먹네요. 12시부터 기다렸는데.”
자신도 모르게 그를 돌아보다가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신호등을 노려보았다. 12시부터 기다리다니, 왜? 어제 하던 거 마저 끝내려고?
빈정거리려고 한 생각이었지만 오히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붉은 입술, 긴 손가락, 다리 사이를 누지르던 단단한 허벅지.....
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듣고 싶었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난 저 남자한테 관심 없어! 그저 저 사람이 우연히 내 방 포스터 속의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 그건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그저 얼굴만 똑같은 다른 사람이라고!
“이서은씨, 그렇게 딱딱하게 굴다가 평생 노처녀 신세 못 벗어나요.”
머리 꼭대기에서 뭔가가 폭발했다. 그녀가 그를 향해 홱 돌아섰다.
“당신이 도대체 뭔데 나한테 이러니 저러니야? 남이야 노처녀로 살든 말든 신경 끊으시죠! 저리 꺼지라고!”
“말버릇도 험하지. 대낮인데다가 회사원들이 기득한 길거리 한가운데서 내가 명망높은 의사산생을 덮치면 난리가 나겠죠?”
서은은 눈을 깜박였다. 그의 말이 천천히 달아오른 머릿속에 들어와서 뇌를 통과했다. 경계경보가 머릿속을 울리고, 꼭 쥐고 있던 주먹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가 입을 반쯤 벌리다 도로 다물었다. 수민이 싱긋 웃었다.
“조용히 따라와요. 점심 사 줄테니까.”
“나한테 도대체 왜 이래요? 나 좀 그냥 놔 두면 안 돼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수민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대꾸했다.
“안 되겠는데요. 남의 흥미를 끈 자기가 잘못이지, 뭐, 얼른와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하지만 여기서 반항하다가 정말로 그가 길거리 한가운데서 다시 키스할것 같아서 그녀는 발을 질질 끌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몇 걸음 사람들 속을 걷던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손이 일 때문에 거칠어진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가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자 그가 힐끗 돌아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얼른 오라니까.”
얼굴을 붉히며 그녀는 시선을 돌리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근처에 있는 중국집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조그만 룸에서 런치세트를 주문한 다음 그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를 응시했다,
“연애 얼마나 해 봤어요?”
“내 연애 생활에 대해서 고수민씨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요.”
그녀는 위엄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그를 똑바로 보지도 못하는데 위엄이 있을 리 없었다. 양손을 무릎 위에서 쥐었다 폈다 하며 서은은 어떻게 하면 좀 더 우아하게 이 상황을 해결하고 빠져나갈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 두 번 했으려나? 설마 전혀 못 해본 건 아니죠?“
화가 솟구쳐서 그를 노려보려 했지만 미소를 그리고 있는 입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황급히 도로 시선을 내렸다.
“나 참, 요즈음은 열일곱 애들도 당신보다는 뻔뻔해. 나 좀 쳐다볼래요? 나 그렇게 이상하게 생기지 않았거든.”
“이상하거나 뭐 그래서 그런거 아니에요.”
놀라서 서은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자 화가 부르르 나서 도로 고개를 숙이고 눈앞의 젓가락만 노려보았다. 수민이 낄낄 웃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 같은 사람 처음 봐.”
“그거 참 안 됐네요.”
“그래서 갖고 싶어.”
그녀의 심장이 쿵 소리를 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여전히 웃고 있긴 하지만 그의 눈은 어두웠고 뺨 부근은 붉었다. 흥분한 것처럼.
“나랑 하고 싶죠?”
그녀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얼굴이 점점 더 달아오르는데 그에게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숨이 점점 가빠졌다. 그의 손이 테이블을 넘어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손가락 끝이 마치 깃털처럼 그녀를 쓰다듬었다.
“얼굴에 써 있는데, 뭐. 나도 싫지 않아.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당신은 전혀 모르는것 같아.”
얼굴이 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간신히 침을 삼키고서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그의 손이 재빨리 그녀의 뺨을 잡았다.
“처음이야?”
“이런, 이런 이야기 더 안 할거에요. 대낮에 무슨 이런 이런...”
“대낮이든 한밤이든 뭐가 다른데? 최소한 난 호텔에서 잠깐 쉬어가자는 식으로는 안해. 하고 싶으면 하고 솔직하게 밝힌다고. 그게 낫지 않아요? 속을 걱정은 안해도 되잖아.”
“그런 거 관심 없어요!”
소리를 지르고서야 서은은 당황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룸의 문은 닫혀 있어서 남들의 시선까지 받지 않아도 되었다.
“진짜? 그럼 왜 나 똑바로 못 쳐다보는데? 왜 날 보면 그렇게 얼굴이 붉어지는데?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겠다. 좀 솔직해 봐요. 아무리 경험이 없다 해도 이제 스스로를 알 나이는 됐잖아.”
“그래요. 나 나이 많아. 그런데 왜 자꾸 나한테 그러는 거에요? 당신 나이에 맞는 사람이랑 놀면 되잔하. 그래 열일곱. 열입곱 난 애들도 나보다 낫다며? 그런 애들이랑 놀아요. 왜 나한테 이래요?”
그녀가 침가지 튀기며 화를 내고 있는데 그는 그저 나른하니 웃기만 할뿐이었다. 뺨에 닿은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게 묘하게 재미있거든.”
할말을 잃고 그녀는 입만 반쯤 벌린채 그를 쳐더보았다. 그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살빡 손가락으로 턱을 치켜 올려 입을 닫아주었다. 때마침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종업원이 음식을 서빙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드근거리고 이마에 진땀이 배었다.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하고 싶냐니. 결혼 전엔 안 한다고 해서 남자친구한테도 채였던 나야! 그런데 웬 엉뚱한 어린애가 나타나서 같이 자자고? 말도 안돼. 내가 그런 걸 받아들일 것 같아?
하지만 솔직히, 정말로 솔직히 말하면 받아들이고 싶었다. 친구들은 이미 다 아는 ‘그것’이 어떤 건지 알고 싶고, 해 보고 싶었다. 뒷일을 생각 할 필요가 없다면 기꺼이 받아들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서웠다. 뭔가 잘못될까 봐, 맞는 상대가 아닐까봐, 부모님이 이실까봐, 나중에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날까봐.
모험은 싫었다. 평생 한 번도 모험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와서 7살이나 어린 남자애랑 그런 모험을 하고 싶진 않았다. 종업원이 나가자 그녀는 시선을 내리깐 채 고개를 흔들었다.
“고수민씨가 무슨 말 하는지 난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저기, 그런 건....”
목소리가 쉰것처럼 갈라졌고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그를 외면한 채 그녀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런 건 결혼한 다음에 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구식이라고 말해도 상관없어요. 어쨌든 그런 게 잘못되었을때 손해 보는건 늘 여자니까. 그래서 괜한 일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냥 나 좀 내버려둬요. 기꺼이 같이 놀겠다는 여자들이랑 놀아요. 나 나이도 많고, 그렇게 예쁜 것도 아니고, 뭐 그리 말을 잘 하거나 재미있는것도 아니잖아요. 나도 그거 잘 알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좀 내버려둬요.”
“결혼은 언제 할 건데?”
젓가락을 들고서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집어먹으며 그가 물었다. 서은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 화흫 꾹 눌러 앉힌 다음 조용히 대답했다.
“적당한 사람 만나면요.”
“그럴줄 알았지. 아무 계획도 없으면서 그냥 기다리기만 하니까 그 나이 먹도록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는거 아냐.”
젓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그가 뻔뻔하게 말했다.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거만하기 이를 데가 없다. 겨우 23년 산 자기가 나보다 뭘 더 그렇게 많이 안다고 충고야?
“미안하지만 나도 남자친구 있었어요. 결혼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판에 날 차고 다른 여자랑 결혼하더군요, 세상이 그런거죠. 그 사람이랑 자기라도 했으면 얼마나 비참하겠어?”
그녀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뭐, 그 사람이랑 결혼까지 이야기를 한 건 아니지만 , 어쨌든 그녀는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수민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서 요리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안 잤다고 덜 비참한가?”
아, 그의 말은 꽤 아팠다. 가슴 한가운데를 정통으로 찌르는 느낌이었다. 그래, 비참하기는 매한가지였을 지지 모르지.
“최소한 위엄은 남았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떨렸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존심이란 거 연애할 때 그리 좋은 동반자는 아니지. 어쨌든 남자랑 깨졌으니까 지금은 싱글 맞잖아. 나랑 하는 데 문제도리건 아무것도 없네. 안 그래요?”
“안 한다고 했잖아요! 귀 먹었어요?”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고서 한숨을 푹 내쉬더니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기묘하게 진지한 표정에 그녀는 숨을 들이키고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진짜 이런 말까진 안하려고 했는데, 자꾸만 팩팩거리니까 하나만 말해 주죠.”
“뭘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수민은 양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며 말했다.
“결혼까지 생각한 남자 어쩌고 하는데, 솔직히 그 남자는 그런 생각 전혀 안 했을 걸. 당신하고 같은 수준의 숙맥이 아니라면. 내가 보기에 당신은 말이지, 연애 경험이 전혀 없어서 아직도 왕자님이 와서 잠을 깨워주기만 바라는 슬리핑 뷰티야. 그게 열입곱 같으면 괜찮을 텐데, 당신 경우엔 문제가 뭐냐 하면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세상을 알 만큼 아니까 욕구는 쌓여 가는데, 그게 그 비현실적인 연애에 대한 상상이랑 충돌하는거야.”
서은이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있는 동안 그가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섹스가 그렇게 장미꽃 휘날리고 반짝반짝하는 그런거라고 생각하지, 아직도? 웃기지마. 섹스는 질펀하고 지저분하고 노골적이고 인간의 욕구 중에서 가장 동물적인 거야. 결혼 첫날밤에 예쁜 잠옷 입고 침대에 어여쁘게 누워서 남편이 뽀뽀하고 황새가 아기를 물어다주는 그런 게 아니라고. 결혼 첫날밤에 처음 섹스를 하면 아프고 힘들어서 신혼여행도 제대로 못 다녀. 그게 현실이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할 말이 아무것도 더오르지 않았다, 서은은 그저 멍하니 앉아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흠 잡을데 없는 완벽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저 남자는 그녀가 매일 밤 이야기를 늘어놓고 꿈을 말하던 상대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주고 환상속에서 그녀를 안아주고 소중하게 쓰다듬어 주던 상대였다. 남자친구가 잔혹하게 걷어찼을 때 그녀를 달래준 연인이었다.
그런데 현실의 그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서 그녀가 비현실적이라고, 섹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만 넉은 머저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여기 있어야 하지? 섹스에 대해 이나이까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룻밤 자자는 걸 거절한다고 그녀가 왜 비보 멍청이 취급을 받아야 하자? 분명히 세상엔 그녀 같은 여자를 아껴주는 남자도 있르거다. 그런데 왜 그녀는 이런 남자들만 만나서 욕을 먹고 잔인한 소릴 들어야 하는거야? 분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다. 무릎 위에서 주먹을 꼭 움켜쥔 채로 그녀는 숨을 참으며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었다. 뱃속이 떨리고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코가 막히고 얼굴이 뜨거웠다.
“아, 젠장.”
그가 벌떡 일어나서 테이블을 빙 돌아오더니 그녀를 끌어당겼다. 어금니를 꽉 문채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그녀는 몸에 힘을 주고 저항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양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자기 배 쪽으로 끌어당겨 기대게 만들었다. 눈물이 툭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울라고 한 소리 아니야. 울지마 . 다그치려던 게 아니라고. 그냥 현실을 좀 보라는 거야. 당신 귀여워. 귀엽고 꽤 예쁜데다가 잘 나가는 치과 의사잖아. 남자 같은건 손가락으로 부려야지. 그렇게 어린애처럼 눈 가리고 귀 막고 왕자님이 올 날만 기다리고 있으면 안 된다고. 그러다가 진짜 쓰레기 같은 놈한테 걸려서 신세 망치는 거야 알아?”
대답 대신 그녀는 주먹으로 그의 옆구리를 때렸다. 그가 헉 소리를 냈지만 머리를 누르고 있는 손에서는 힘이 빠지지 않았다. 눈물이 그의 셔츠 앞자락을 적셨고 그의 한숨 소리가 그녀의 귀에 와 닿았다. 그가 몸을 조금 구부려 그녀의 머리를 파로 감싸안았다.
“울지마, 응? 알았어. 그런 소리 안 할게. 그러니까 울지마.”
“나, 나......”
코를 훌쩍이며 그녀가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목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꺽꺽거렸다.
“응, 왜?”
그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럽게 물었다. 그녀는 그에게 얼굴을 묻은 채 간신히 말했다.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 아니잖아. 같이 안 자는 게 무슨 범죄인 것도 아니잖아, 나한테 왜 그러는데?”
“그래, 범죄 아니야. 범죄라고 안 했어. 그냥, 그래, 젠장.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됐지? 하고 싶어. 당신이랑. 잘 해 줄게. 진짜로 절대 후회 안하게 잘 해 줄게.응?”
조금 나았다. 최소한 같이 자고 싶다면 그 정도의 애원은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아무리 그녀 같은 ‘숙맥’ 이라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할테지만, 하고 싶다고 말하는 건 분명히 사실일테니까.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때까지 그는 가만히 안고만 있었다. 그녀의 흐느낌이 낮아지자 그가 무릎을 구부리고서 그녀의 의자옆에 앉아 얼굴을 보았다. 뺨을 손으로 문질러 닦고서 그녀는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눈을 낮추었다.
“강요는 안 할게. 하지만 나랑 사귀면 진짜 잘 해 줄수 있어. 나 그냥 당신이랑 한 번 해 보고 싶어서 이러는거 아니야. 당신이랑 사귀고 싶어. 계속 만나고, 데이트하고, 키스하고, 같이 자고 싶어.”
서은이 눈을 깜박였다. 수민은 조금도 웃지 않은 채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서 말했다.
“당신 환상에 내가 다 맞춰줄수는 없어. 당신 스스로는 인정 안하는거 같지만 당신 상당히 쌓여 있는 상태고, 그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어. 하지만 동화처럼 예쁜건 아니야. 섹스는 그런 게 아니라고. 제일 본능적인 거야. 나 지금 미리 경고 하는거야. 알겠어?”
그가 그녀의 얼굴을 놓아주고 일어나서 가슴 앞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저 멍하니 하얀 종이를 쳐다보았다.
“거기 내 핸드폰 번호있어. 딱 사흘 기다릴거야. 사흘안에 나한테 전화해서 어떻게 할 건지 말해줘. 사흘 지나도록 연락이 없으면 그냥 당신 숲에 틀어박혀 왕자를 가장한 변태 시체강제범이 올때까지 잠만 자는 걸로 알마먹을게. 하지만 나한테 연락하면,나랑 계속 만나기로 하면......”
그의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워졌다. 마치 애무하듯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진짜로 잘 해 줄게. 당신이 상상도 못했던 걸 보여주고. 가르쳐 줄게. 진심이야.”
그가 몸을 돌렸다. 음식을 고스란히 놔둔 채 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서은은 기다렸다. 식사도 안 끝났는데 그가 가 버렸을 리 없다. 하지만 5분, 10분간 기다려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갔다는 게 분명해지자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명함을 집어 들었다. 이름 석자만 박혀 있는 아래로 핸드폰 번호가 쓰여있다.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명함이었다.
온몸이 다시 떨리자 그녀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서 떠돌았고, 몸이 은근하게 뜨거워지고 있었다. 재킷 안에 명함을 집어넣는 내내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진짜로 잘 해 줄게’
“아, 세상에.”
그녀는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댔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겁이 났다. 눈을 가린채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한 발 내딛는 순간 다시는 되돌아올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남들은 이미 다 가 있는 곳이지. 그녀가 눈을 떴다. 테이블 위의 음식은 이미 식어버렸고, 그녀의 점심시간도 거의 다끝나버린 상태였다. 병원에 돌아가서 다시 또 앞으로 10년이상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을 해야 한다. 흥분도, 놀라움도, 새로음도 없는 생활. 매일 똑같은 일상.
‘나한테 필요한 건 진짜 여자야.’
남자친구는 그렇게 말했었지만 수민은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다만 그녀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고 말했을 뿐이다.
고개를 흔들며 그녀는 재킷을 들고 일어났다. 아직은 결정 할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생각을 해봐야 한다. 그녀에겐 72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4.
새신부도 첫날밤 그녀만큼 긴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만큼 엄청난 준비를 하지도 않을 거고.
수민이 제시한 사흘의 마지막 날은 토요일이었다. 게다가 운 좋게 그녀의 근무가 없는 토요일이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서은은 백화점에 가서 새 속옷세트를 구입하고, 그 김에 캐미솔과 잠옷까지 전부 구입했다. 매장 직원이 결혼 준비하냐고 물었을때는 얼굴이 다 붉어질 지경이었다.
집에 돌아온 다음엔 뒷간이나 들여서 목욕을 했다. 몸의 털도 정리하고 바디 로션도 구석구석 바르고 손발톱까지 정리해서 새로 매니큐어를 칠했다. 쪼글쪼글해졌던 피부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레이스가 달린 얇은 새 속옷을 입은 다음 그녀는 떨리는 한숨을 내 쉬고 침대에 앉아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수민의 번호를 누르는 내내 손이 떨렸다, 수화기를 꼭 잡고서 그녀는 통화 대기음에 귀를 기울이며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예,고수민입니다.”
그의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리자 목덜미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이 저절로 포스터를 향했다. 나른란 자세로 서 있는 그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를 채웠다.
“여보세요?”
“아, 저기,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서 이상하게 흘러나왔다. 잠시 저쪽에서 침묵이 흘렀다. 서은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저기, 저 이서은인데.....”
“알아요.”
그의목소리는 왠지 무뚝뚝하게 들렸다. 너무 늦게 전화한 건가? 마음이 바뀌었나? 갑자기 불안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저기, 저.......”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기만 하자 그가 선선히 도와주었다.
“결정했어요?”
“어, 그게, 네.......”
심장이 두근거렸다. 속옷만 입고 있어서인지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것 같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용기 좀 내 봐! 그녀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저기, 결정했어요. 나, 저기.......”
“지금 어디에요?”
“어, 지. 집이요.”
“주소 가르쳐 줘요.”
그녀가 주소를 말하자 전화가 곧장 끊겼다. 뚜뚜 소리가 들리는 수화기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도로 내려놓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옷을 입고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30분쯤 후 벨이 울렸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서 그녀가 현관으로 나가서 바깥을 보았다. 까만 재킷을 입은 수민이 현관에 서 있다. 그녀는 말없이 문을 열고 그를 보았다.
수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냥 성큼 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닫은 다음 곧장 그녀를 끌어당길 뿐이었다. 그를 위해서 입은 예쁜원피스도 곱게 빗어 내린 머리도. 티 안나게 열심히 한 화장도 아무 소용없었다. 그저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순간 모든 걸 잊어버렸다.
그의 입은 마치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물고, 입안을 자기 것인양 멋대로 휘젓고 맛본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이 그녀의 몸을 뒤로 기울이며 얇은 원피스 아래 솟아 있는 가슴을 덮었다. 그녀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쉿. 가만히 있어.”
그가 그녀의 입술에 대고 속삭이며 손을 움직였다. 언제나 덩치에 비해 너무 커서 옷맵시가 나지 않는다고 싫어했던 가슴이 지금 그의 손에는 딱 맞는 것 같았다. 그가 전체적인 모양을 가늠하는 것처럼 쓰다듬고 살짝 주물렀다. 젖꼭지가 단단하게 뭉치며 아랫배까지 짜릿한 느낌이 전해진다. 그녀는 그의 입에 대고 숨을 헐떡이며 그의 옷을 움켜잡았다. 그가 너무 커서 뒤로 젖혀진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젠장.”
그가 갑자기 그녀의 입안을 찔러대고 있던 혀를 빼내고 뒤로 물러났다. 허리를 안고 있던 팔도,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도 떨어졌다.
“안으로 들어가. 침대로 . 당장.”
주춤거리며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돌아서면 왠지 안 될 것 같았다. 경계하듯 그녀는 그를 보며 천천히 뒤로 걸어갔고 그는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그녀를 따라 걸어 들어왔다.
침대 바로 앞에서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어색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입술이 욱신거렸고 다리사이가 뜨거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수가 없다.
수민이 간단히 문제를 해결했다. 그녀를 안은 채 그대로 침대로 넘어지며 다시 입술을 겹친다. 뜨거운 입이 그녀를 강탈하고, 무거은 그의 몸이 그녀의 몸을 고스란히 짓눌렀다. 단단한 남자의 몸이 완벽하게 느껴지자 그녀의 온몸이 환영의 노래를 불러대는 게 느껴졌다.
혀로 그녀의 입안을 핥고 이로 아랫입술을 아플 정도로 깨물어대며 그가 손을 아래로 내려 침대와 그녀의 몸 사이로 밀어 넣었다. 동그란 엉덩이를 감싸는가 싶더니 치맛자락이 위로 당겨 올라간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는 침대 모서리에 걸쳐져 있는 그녀의 다리사이로 들어와 양옆으로 단호하게 벌렸다.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그녀가 몸을 꿈틀거렸다. 그의 손은 어느새 치맛자락을 엉덩이 위까지 잡아 올린 다음 팬티위로 엉덩이를 주물렀다. 긴 손가락이 천 아래로 들어가 맨살을 쓰다듬는다. 그녀의 몸이 휘어지고 그에게 닿아 있는 다리 사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숨을 헐떡대며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너무 빠르다. 결심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좀 더 천천히 진행될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녀의 몸은 그에게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가슴은 생리 할때처럼 묵직하게 뭉쳤고 아랫배에서는 인정하고 싶지않은 열기가 일었다. 다리사이의 에민한 부분은 그가 줄수 있는 열기를 갈구하며 두근거렸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턱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손으로는 팬티 안족을 어루만지며 그가 입으로 원피스 목선 근처를 더듬으며 뜨거운 키스를 남겼다. 원형으로 패인 원피스 목선을 따라 그는 자잘하게 키스를 뿌리고서 이로 옷을 조금 더 끌어내렸다.
“아, 수, 수민씨, 그, 거긴.......”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엉덩이 사이로 파고 들며 틈새를 따라 움직였다. 위험한 부분에서 잠깐 움직이던 손가락은 다시 아래로 내려가다가 욱신거리는 여성의 샘을 건드렸다. 이미 그녀의 몸은 촉촉하게 젖은 상태였다.
그가 이로 원피스 위로 그녀의 가슴을 물자 그녀가 몸을 휘며 비명을 질렀다. 얇은 천을 적시고 그가 끝부분을 자근자근 깨물자 온몸으로 짜릿한 감각이 타고 흘렀다. 그의 손가락이 닿아 있는 여성의 입구는 바싹 조여들며 달콤한 꿀을 흘렸다,
그가 젖은 천위로 입김을 불자 그녀의 몸이 발작적으로 떨렸다. 그녀를 괴롭히려고 작정을 한 듯 혀로 다시 천을 적신 다음 그가 이를 사용했다. 예민한 살점이 잔인하게 자극당해 아플정도로 곤두선다. 그녀가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아, 그만 , 그러지 말아요......”
“뭘? 이거? 아니면 이거?”
그가 이로 가슴을 좀 더 세게 깨물자 그녀가 헐떡거리며 몸을 휘었다. 그의 손가락 역시 여성의 입구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그녀를 괴롭혔다.
“싫어, 시, 싫어.”
“진짜 싫어? 그만 둘까?”
그가 엉덩이에서 손을 빼자 갑자기 하체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칭얼거리며 다리를 움직여 그의 허리를 감쌌다.뭔가가 필요했다. 뭔가가 지독하게 필요하다.
자유로워진 그의 손이 그녀의 목 뒤로 돌아가서 원피스 지퍼를 찾아냈다. 지퍼를 내리고 원피스를 어깨 아래로 끌어내린 다음 벗기는 대신 그는 그녀의 팔 부근에 그대로 걸쳐놓고 드러난 가슴을 보았다. 레몬색 레이스 브라는 대단히 얇아서 거의 브라로서의 기능은 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의 가슴을 아주 섹시하게 보이게 했다, 광대뼈 주위가 붉어지고 그의 눈이 어둡게 반짝였다.
“언제 그모양 없는 의사 가운아래 이것만 입혀서 내보낼거야. 언젠가 꼭.”
맙소사. 속옷만 입고서 가운을 걸친다는 생각에 그녀의 얼굴이 새발개졌다, 팔을 들어올리려고 했지만 내리다 만 원피스에 걸려서 팔을 움직일수가 없었다. 그녀가 팔을 빼려고 바둥거리자 그가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눌렀다.
“가만히 있어.”
그의 오른손이 쇄골을 지나 가슴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왼쪽가슴은 그의 입으로 인해 젖어 있었고 여전히 욱신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브라 아래로 피고들어 예민해진 살점을 건드리자 그녀의 몸이 다시 휘어졌다.
“수, 수민씨......”
“응?”
그의 목소리는 반쯤 멍했다. 손가락이 다시 움직이며 끄트머리를 스쳤다.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다리 사이가 계속해서 젖어들었다.
“아, 제발.....”
그녀가 애원했다. 그의 다른 손이 브라의 앞걸쇠로 움직여서 가볍게 풀었다. 얇은 컵이 가슴 양쪽으로 흘러내리고 아무도 본 적 없는 그녀의 가슴이 그의 눈앞에 진수성찬처럼 드러 났다. 그녀가 숨을 쉴때마다 풍만한 가슴이 위로 솟아올랐다가 도로 가라앉는다. 그의열기 어린 눈빛에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가슴위로 입김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그의 입술이 닿았다, 그녀의 목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입이 살짝 젖꼭지를 맛보는가 싳더니 끝부분을 통째로 물고서 강하게 빨기 시작했다. 한 번 빨아 당길때마다 그녀의 온몸이 발끝까지 짜릿하게울렸다. 그녀가 흐느끼며 팔을 들어올리다가 다시 한 번 옷에 걸려서 실패했다. 옷을 팔 아래로 내리고 싶었지만 그의 몸이 그녀를 누르도 있어서 움직일수도 없었다.
그의 입은 거칠게 그녀의 가슴을 빨았다. 마치 젖먹이 아기처럼 끝없이 계속해서 예민한 살점을 빨고 깨문다. 가슴 끝부분이 아프다 못해 감각이 없어질 무렵이 되었을때 그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오른쪽 가슴에도 마찬가지의 세례를 퍼부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이마에는 온통 땀이 배었다.
“수민씨, 하악, 수민씨, 그만, 그만!”
마침내 그의 혀가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젖꼭지를 핥고서 놓아주었다. 그녀는 숨만 헐떡거리며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녀의 다리는 그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욱신거리는 다리 사이에서는 그의몸이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손이 재빨리 원피스 치마가 뭉쳐 있는 그녀의 허리를 지나 팬티로 향했다, 브라와 한 세트인 팬티 역시 반쯤 비치는 소재로 되어 있었고, 지금은 그녀의 흥분 상태를 어실히 보여 주듯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가 양손으로 팬티를 내리며 허리에 감긴 그녀의 다리를 풀었다. 값비싼 팬티는 그녀의 허벅지를 지나 종아리를 타고 내려오다가 마침내 허공을 날아 바닥에 안착했다. 차가운 공기가 닿자 그녀의 뜨거운 다리 사이가 조여들었고 아랫배는 무언가를 갈구하며 계속해서 둔한 통증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다리 사이에 닿았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안 돼!”
“돼.”
그가 날카롭게 말하고서 그녀의 다리를 양옆으로 벌렸다.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그녀가 손으로 그 부분을 가리려 하자 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팔을 뒤로 묶어버릴 거야.”
뭐? 그녀가 눈을 번쩍 뜨고 그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붉었고 그린 듯한 눈매는 흥분 때문인지 가늘어져 있었다. 어느새 벗었는지 재킷은 바닥에 떨어져 있고 셔츠는 그녀 때문에 구깃구깃했다. 까만 바지 지퍼 부분이 위로 솟구쳐 있는게 뚜렷하게 보였다.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질주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다리사이를 쓰다듬고서 사이로 파고 들었다. 소중한 부분을 덮고 있는 장막을 살짝 벌리자 여성의 핵심이 욱신거리며 주목을 요했다, 말없는 애원을 알아들은것처럼 그가 손가락으로 부푼 살점을 거늗리자 그녀가 몸을 떨며 비명을 질렀다.
“너무 오래동안 쌓아두니까 그렇지. 가끔은 풀어줘야 한다고.”
그가 마치 환자를 진단하는 의사처럼 말하고서 손가락을 다시금 움직였다.모든 감각이 집중되어 있는 핵심이 그의 손길에 폭발하듯 반응했다, 머릿속이 빙빙 돌고 숨도 쉴수가 없었다. 서은은 헐떡거리며 그에게 애원하고 눈물을 흘렸다.
“못 참겠어. 이상해! 몸이 이상해, 수민씨.....아, 그만, 참을 수가 없어!”
“괜찬아. 몇 번을 폭발하든 내가 다 받아줄게. 겁내지 말고 느껴. 느껴보라고. 얼마나 좋은지.”
그의 손이 무자비하게 움직이며 그녀의 핵심을 자극했다.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고 살짝 비틀고 손톱으로 긁는다. 그녀의 몸이 조여 들며 아무도 건드린 적없는 여성의 입구에서는 끊임없이 흥분의 증거가 흘러내렸다. 틈새를 타고 흐르는 그 뜨거운 액체에 그녀는 엉덩이를 들어올리며 거부하려고 했다. 창피하면서도 어떻게 억우를 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나도 노련하고, 너무나 냉정했다.
“그만 해. 수민씨, 그마안!”
“더, 더 느껴 봐. 끝까지 가고 ,다시 가는거야. 내가 진짜 당신을 가질때면 당신이 흥분으로 거의 정신이 나가 있어야 돼. 그래야 아픈 걸 못 느낄거야.”
아픈 걸 못 느낀다고? 지금 이렇게 온몸이 아픈데? 텅 빈 그녀의 여성이 그를 갈구하며 비명을 지르는데?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비명을 질렀다.
“싫어! 싫어!”
엄지손가락으로 여전히 달아오른 핵심을 쓰다듬으며 그의 손가락이 연신 수축하며 꿀을 흘리고 있는 여성의 입구를 짤렀다. 아랫배 안쪽이 당기는가 싶더니 뜨거운 열기가 소용돌이쳤다. 그녀가 엉덩이를 들어올리자 그의 손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서은은 비명을 질렀다.
“쉿! 진짜 야생 고양이 같네. 누가 들으면 강도라도 든 줄 알겠어.”
그의 목소리에는 흥분과 함께 웃음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거기 신경 여유가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안으로 파고 들었다 빠져나가고, 다시 파고 든다. 다른손은 그녀의 허벅지를 벌린채 꽉 눌러 고정시키고 있었다,
아프면서도 너무나도 시원해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아랫배에서 소용돌이치던 열기가 점점 위로 올라오다가 마침내 폭발했다. 그녀가 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손은 침대 시트를 꽉 틀어쥐었고 벌어진 다리는 그의 허벅지를 조였다.
“그래 잘 했어. 아주 잘 했어. 한번 더. 응?”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이 좀 더 깊이 파고 들고, 예민해진 핵심부를 누르는 엄지는 더욱 거칠어졌다. 그의 입이 간신히 느낌이 돌아오고 있는 젖꼭지를 다시 덮고서 빨자 그녀의 세상은 다시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었다. 처음 경험하는 감각의 열풍에 그녀는 완전히 사로잡혔다, 빠져나갈수가 없다. 수민은 너무나, 너무나도 강력했다. 그의 입이 움직일때마다, 손이 움직일때마다 그녀의 세상은 부서졌다가 다시 재창조되었다,
마침내 그의 뜨거운 남성이 닿았을 때 그녀는 지쳐서 반응도 할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양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더 넓게 벌렸고 손가락이 여성을 덮은 장막을 완전히 젖혔다, 커다란 막대기 같은 그의 몸이 그녀의 여성을 파고들자 처음엔 둔탁하던 통증이 점점 강해졌다. 그녀가 숨을 들이키며 피하려는 듯 몸을 젖히자 그가 고개를 숙이고 날카롭게 그녀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 조금만 참아 봐.”
생전 처음 그녀의 여성이 한계까지 벌어졌다. 안으로 파고드는 커다란 남성을 감싸고서 좁은 통로가 밀려난다. 통로를 가득 채우고 있던 애액이 흘러넘치며 그녀의 허벅지를 적시고 그의 남성이 들어오기 쉽도록 길을 터 주었다.
도망치고 싶은 것처럼 그녀는 계속해서 엉덩이를 들어올렸다가 내렸다. 하지만 도망은 커녕 그의 침입이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마치 몸 안으로 커다란 통나무가 들어오는 느낌에 그녀는 숨을 헐떡거렸다.
“아파, 수민씨!”
“알아. 미안해. 처음엔 어쩔 수가 없어. 나도 노력라고 있는데.....”
그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대리석으로 만든 예술품 같은 목선이 드러나자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몸은 여전히 셔츠로 덮여 있었다. 셔츠를 벗기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은 시트를 움켜쥔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몸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 젠장!”
그가 확 안으로 밀고 들어오자 그녀의 비명은 커졌다. 난생처음 당하는 침입, 늘어나서 아플 정도인 여성의 통로, 그리고 몸 안에서 고동치는 그의 남성.
너무나도 기묘한 느낌에 그녀가 다시 흐느끼며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그의 손이 멍이 들 정도로 단단히 엉덩이를 붙잡았다.
“가만히 있어!”
하지만 움직이고 있는 건 그였다. 앞으로 뒤로, 다시 앞으로 뒤로. 몸을 찌른 통나무 같은 그의 남성이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온다.
다시 들어올때마다 더 깊이 찔러대는 것 같다. 몸 안 깊숙한 곳에서 움직이는 그의 일부를 느끼며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너무나도 은밀한 느낌이다. 이런 거, 이런 걸 느끼고서 어떻게 예전처럼 살 수가 있지? 못 할 것 같아. 절대, 절대로 못 할 것 같아.
그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그의 손은 그녀의 엉덩이를 침대 모서리에서 한껏 들어올렸고 그녀의 다리는 그의 허리를 감았다. 그가 움직일때마다 부푼 핵심이 그의 남성에 닿아서 짜릿한 감각을 전달했다.
“아,아, 앗, 아!”
그가 파고들때마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마치 리듬을 탄 노래처럼 그녀의 비명이 작은 집안을 꽉 채우고, 헐떡이는 그들의 숨소리만이 배경음악처럼 흘렀다, 그가 파고들때마다 통로 안쪽이 자극되고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하악! 아. 악!”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과연 이런 쾌감을 겪고도 살아남을 수가 있을까? 아니, 안 될 것 같아. 이대로 점점 더 위로 솟구치다가 결국 산산조각 나서 죽어버릴것만 같았다. 겁이 나서 그녀가 발버둥을 쳤고 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의 움직임이 더 빨라지고, 아랫배 안쪽이 점점 더 조여들다가 마침내......폭발했다.
그녀가 울부짖었다, 수민이 더 빠르게, 더 깊이 파고들다가 상처 입은 동물처럼 으르렁거리며 그녀의 위로 쓰러졌다. 그의 남성이 더욱 부푸는 것 같다가 천천히 그녀의 통로 안에서 줄어든다.
그녀가 떨리는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피곤 했다. 온몸이 축축하고 아프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다리 사이에는 감각이 없었고 그녀의 위에 늘어진 그의 몸은 무겁고 뜨거웠다.
가쁘게 숨만 헐떡거리다가 그녀는 결국 잠이 들고 말았다.
5.
“이상해.”
“뭐가?”
그의 손이 나른하게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서은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러고 있는 거.”
“흐음.”
수민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문질렀다. 작은 욕실 안은 김으로 가득 차 있었고 욕조 안에는 뜨거운 물이 찰랑거렸다.
서은은 수민에게 등을 대고 기대 있었다. 그의 긴 다리가 그녀의 몸 양쪽으로 구부러져 있고, 그녀는 무릎을 세우고 서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손은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다가 가끔 배를 문지르곤 했고, 엉덩이 아래 그의 남성은 어느새 딱딱해져 있었다.
“정말로 이런 걸 결혼하고서 해야 하는거라고 생각했어.”
“어린애. 그럼 도대체 성인 남녀가 만나서 뭘 할 거라고 생각했어? 손 붙잡고 쳐다만 보고 있을까?
“누가 어린애인지 모르겠네. 내가 7살이나 많은거 알아?”
그녀가 눈을 흘겼으나 그는 조금도 무섭지 않다는 듯 그녀의 목덜미를 핥았다. 그녀가 움찔하자 그가 낄낄 웃었다.
“나이만 많으면 뭐해. 이렇게 어린애 같은데.”
“학교 다니고 공부하느라 바빠서 그런 데 신경을 못썼을 뿐이야.”
그녀가 투덜거렸다. 수민은 그저 웃으며 그녀의 허리에 양팔을 감고 조금 더 편하게 자세를 고쳤다.
엉덩이는 아직도 욱신거렸다. 그가 하도 세게 잡아서 그런지 모른다. 확인해 봐야겠지만 아무래도 멍이 들것 같았다. 다리사이도 아팠다. 확실히 그가 말한 대로 신혼첫날밤 첫경험을 한다면 신혼여행 기간 내내 제대로 돌아다니긴 힘들 것 같다.
그의 말이 다 옮다면 도대체 그녀는 지금껏 뭘 하고 살았던 걸까? 물론 여전히 아무하고나 이런 경험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쩌면 전 남자친구에게 이 정도는 허락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왜 그 사람한테는 이럴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그 사람이 키스했을땐 그저 비위생적이라는 생각만 들었던 반면 왜 수민이 키스하면 세상이 빙빙 도는 걸까? 솜씨가 좋아서?
“방송국에서 당신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그가 갑자기 나직하게 말했다. 그녀가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수민의 손은 부드럽게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당신이 날 꼬시는 줄 알았어. 얼굴은 자구만 빨개지지. 눈도 잘 못 마주치지. 아무리 봐도 나한테 반한것 같아서 방송 끝나고 당연히 당신이 기다릴 줄 알았어.”
그렇게 티가 났나? 그녀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그는 그저 무심하게 계속 그녀의 배를 어루만진 뿐이었다.
“그런데 나오니까 없잖아. 내가 착각했나 싶어서 좀 분하기도 하고, 왠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당신 병원에 찾아갔던 거야. 그런제 정작 당신은 간호사가 말해줘서 내가 누군지 알았다고 하질 않나, 좀 김이 샜어.”
“어, 미안해.....”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사과하자 그가 나직하게 웃었다.
“아니 뭐 내가 유명한 모델인 것도 아닌데 당연한 일이지. 보아하니 당신 그런데 별로 관심도 없는것 같고. 그냥 내가 착각했다는 사실이 좀 짜증났던 것 뿐이야. 그런데 어쨌든 말이야, 그럼 왜 방송국에서 날보고 얼굴이 빨개진 거야? 당신 첫눈에 반할 타입은 아니잖아.”
“날 되게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고 힐끔 돌아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얼굴에 휜히 드러나, 어디 가서 사기 당하기 딱 좋은 타입이라고.”
“지금껏 사기 당한 적은 없어. 뭐.”
그녀가 입술을 비죽이자 그의 손이 위로 올라와 아직도 예민한 젖가슴을 감쌌다. 그녀가 낮게 숨을 들이켰다.
“못 되게 굴면 혼내줄 거야.”
그의 손가락이 젖꼭지를 살짝 비틀자 그녀가 그의 위에서 꿈틀거리며 흐느끼듯 신음했다. 그는 계속 손가락을 움직이며 그녀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빨리 대답해 봐. 왜 날 보고 얼굴이 빨개진 건데? 원래 나 알고 있었어?”
“아니, 아냐. 안돼, 말 못 해.”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가 그녀의 환상의 연인이었다는 걸. 그것도 포스터 한 장 보면서 남자친구 대신 그를 생각하고, 밤마다 그에게 하룰 일과를 털어놨다는걸. 안 돼. 그런 소리 못 해. 절대 못 해.
“진짜 말 안 해?”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고개만 흔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빨갛게 된 젖꼭지를 앞뒤로 문지르다가 비틀고 잡아당겼다. 그녀가 힉 소리를 내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지 마.”
“그럼 말을 해.”
“안 돼, 못 해!”
“못하는게 아니라 안 하는 거잖아.”
그의 목소리는 나른했다. 마치 하루 종일이라도 이러고 있을 수 있다는 듯 그는 계속해서 그녀의 젖꼭지를 괴롭혔다. 그녀는 그의 팔목에 손톱을 박고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러지 마, 수민씨. 이러면, 아, 아직도 아프단 말이야. 그만!”
“다시 하면 더 아플 걸. 내가 참을성을 잃고 넣어버리기 전에 빨리 털어놔.”
그가 양다리로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서 한 손을 내려 여성의 입구를 건드렸다. 첫 침입의 후유증으로 아직 예민하게 부어 있던 통로에 손가락이 파고들자 그녀가 나직한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수민씨,아파!”
“그래. 그러니까 빨리 말해.”
손가락 하나가 부드럽게 통로를 따라 안팎으로 움직였다. 손가락 하나정도는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았지만, 예민한 부분에 가해지는 자극은 마치 백만 볼트의 전류에 감전되는 것 같은 수준이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목덜미에 진땀이 흘렀다. 그의 다른 손은 여전히 가슴을 움켜쥐고서 젖꼭지를 희롱하고 있다.
“그게, 그게.... 안돼는데, 너무, 아, 창피하단 말이야......”
“뭐가 그렇게 창피한데? 놀리지 않을테니까 얼른 말해. 나 점점 참을성이 사라지고 있어. 봐.”
그가 몸을 살짝 움직이자 단단해진 남성이 그녀의 엉덩이를 찌렀다. 안 돼, 그가 다시 들어오면 정말로 지독하게 아플것이다.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따끔거리는데.
“그게, 나, 나한테 포스터가 하나 있는데......”
손가락이 다리 사이의 살점을 문지르자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포스터라, 어떤 포스터?”
그가 무심한 어조로 귓가에 속삭였다. 눈을 질끈 감은 채 그녀가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 그, 그게, 옷 광고 같은데, 수민씨가 담배를 물고.....하악, 그만, 제발!”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통로에서 빠져나왔다. 가슴 위의 손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지만 최소한 젖꼭지를 더 이상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가 태연하게 다리 사이에 넣었던 손을 입으로 가져가서 손가락을 핥았다. 그녀의 호흡이 더욱 가빠졌고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담배를 문 포스터라. 담배.......아, 뭔지 알겠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서 그는 왠지 좀 나이 들어 보였다.
“그거 꽤 된 광고인데. 3년쯤 됐나? 그런 건 왜 갖고 있어?”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봤는데 너무, 음, 느낌이 좋아서......”
길거리에서 포스터를 뗀 건 난생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아서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심장이 아직도 두근대고 있고 다리 사이는 불이 붙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가만히 그녀를 다시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만들고 따뜻한 물을 손으로 퍼서 그녀의 쇄골위로 부었다.
“그 광고 완전히 망했었지. 그게 마음에 들었다니 의외네. 그래서 날 알아본 거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녀의 몸에 장난치듯 물을 끼얹고 있던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만 갖고서 얼굴을 붉힐 리가 없지. 다른 게 있어. 혹시 그 포스처 보고 나한테 반해 있었던 거야?”
그녀의 몸이 굳어졌다. 맙소사, 안 돼. 하지만 이미 눈치챈 듯 수민은 나직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맙소사. 진짜 보면 볼수록 사춘기 소녀라니까, 이서은 . 어쩌자고 그런 포스처를 보고 반해? 그래, 그래서 실제 인물을 보니까 어때? 영 아니야? 실망했어?”
그녀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포스터 속의 남자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상상하던 남자가 아니었다. 성격도 다르고 하는 짓도 전혀 다르다. 환상 속의 남자는 그녀에게 섹스를 하자고 다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제 인물 고수민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다. 아직 잘은 모르지만 최소한 그는 솔직했다. 그리고 섹스를 한 다음에도 그냥 가버리지 않고 이렇게 그녀를 안고 이야기를 나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뭐 그녀를 놀리는 게 재미있는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친구들이 가끔 섹스만 하고 홀랑 가버리는 남자를 조심하라고 했던 걸 떠올리면 그렇게 나쁜 타입 같지는 않았다.
“잘 모르겠어, 정말로.”
그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뒤에서 수민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자기 분야에서 꽤 이름도 있는 사람이 이런면이 있어서는 사춘기 여자애들 수준이라는 게 참 이해가 안 가. 뭐 그래서 귀엽긴 하지만.”
그가 그녀의 관자놀이 부근에 입술을 눌렀다. 그녀는 눈을 감고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너무나 부드럽고 대단히 상냥했다. 어쩌면 이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지도 모른다. 그래, 친구들 말대로 요즘 세상에 결혼할 때 처녀를 바라는 남자는 .....있으려나?
몰라, 어쨌든 이제 선을 넘었으니까 나도 즐길 수 있는 만큼 즐길거야. 수민 역시 기꺼이 협력해 줄 자세고. 그녀는 가만히 그에게 기댄 채 따스한 물의 느낌을 즐겼디.
하지만 수민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평온을 조각냈다.
“반지 몇 호 껴?”
잘하는 짓인가 몰라. 간단한 미백 시술을 끝내고 간호사에게 뒷일을 맡기고 일어나며 서은은 인상늘 찌푸렸다. 왠지 너무 급하게 서두르는 것 같았다. 옛날에는 사귀기 전에도 2년이나 알고 자냈고, 반지를 끼기까지 1년도 넘게 사귀었는데.
“아우.....”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니 허리와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간호사가 그녀를 힐끔 쳐다보자 서은은 재빨리 허리를 짚고 있던 손을 내리고 태연한 척 걸으려고 노력했다. 이틀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아플 줄은 몰랐다. 사무실에 돌아온 다음에야 간신히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기댔다. 앉고 설 때마다 남한테 말하기 힘든 부분이 아팠다.
“도대체가 학교에서 배운 건 하나 쓸모가 없다니까.”
인체의 뼈며 근육에 대해서 달달 외우면 뭘 하나, 실제로는 하나 소용이 없는데, 어제도 종일 침대에 누워서 보냈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것 같았다.
수민은 일요일은 오히려 바쁘다면서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두 번인가 전화를 했고, 그녀가 계속 침대에 있다고 말하자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렸다.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부터 근무하는 날은 밤 10시까지 근무하고 온전 근무인 날은 6시 퇴근이었다. 가운을 벗고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간호사가 노크를 했다.
“손님 오셨는데요.”
간호사의 뒤로 수민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서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 네, 가 봐요.”
간호사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 사람을 보다가 사라졌다. 수민이 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몸 괜찮아?”
서은은 어깨만 으쓱였다.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수민이 책상 옆에 서 있는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어깨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방긋 웃으며 입술을 내렸다.
가벼운 키스였다. 입술과 입술만 맞닿는 가벼운 입맞춤. 한 번 , 두 번, 각도를 바꾸어서 세 번, 혀로 살짝 핥으며 네 번, 다섯 번. 감질나는 움직임에 그녀가 낮게 소리를 내며 그를 향해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밀었다. 그의 혀와 마주치고 마치 장난치듯 위아래로 움직이며 핥는다. 그러나 그녀의 혀를 살짝 입안으로 끌어들여 빨았다.그녀의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가 입술을 뗄 무렵 그녀는 이미 반쯤 취해 있었다. 그에게서는 커피와 박하, 그리고 남자의 맛이 났다. 그녀가 비틀거리자 어깨를 감싼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조심. 그렇게 좋았어?”
그녀의 얼굴이 빨개지자 그가 다시금 나른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여 이번에는 목덜미에 쪽 소리가 나게 키스를 했다. 그녀의 손이 그의 어깨를 때렸다.
“그만! 누가 들어오면 어떡해?”
“뭐, 어때. 그나저나 다 끝났지? 나가자.”
가방을 들고서 그녀는 다른의사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다음 병원을 나왔다. 간호사와 동료의들의 눈길이 따가운 걸 보니 아무래도 내일 집중 추궁을 당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연애는 안 하느냐고 가끔 동료의들이 묻곤 하는 터였다.
“차 없어?”
수민이 그녀와 함께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서은은 어깨를 으쓱였다.
“집하고 가까우니까 그냥 오는 게 더 편해. 아침엔 차도 많이 밀리고.”
“그것도 그렇겠네.”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자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올라탔다.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물론 남자 차에 타는 것도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재빨리 운전석에 올라탄 수민이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서은의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그녀의 목 뒤로 넘어가는가 싶더니 안전벨트를 재빨리 매 주었다. 그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가슴을 스치자 온몸이 달아오르고 아직도 욱신거리는 다리사이가 젖어드는 느낌에 서은은 숨을 참고 눈을 내리깔았다. 정말 바보 같아. 그녀는 자기 안전벨트를 매고 운전대를 잡는 수민을 힐끗 보며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아직도 몸이 아픈데 도대체 어떻게 또 그런 걸 할 생각을 하는거야? 수민씨는 전혀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수민이 차에 시동을 걸고 주차장에서 빼내자 그녀는 힐끔 그를 보았다.
“어디로 가?”
“나 이따가 9시에 백화점에서 VIP고객 대상 패션 쇼하는데 가야 되거든. 같이 가도 되고, 아니면 저녁 먹고서 집에 데려다 줄게.”
“패션 쇼?”
“뭐 간단한 거야. 오래 안 걸려. 주 행사는 아니고 간단한 거거든 .갈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패션 쇼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볼 기회도 없고 관심도 별로 없는 탓이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서 그들은 조금 떨어져 있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백화점에서는 일일이 고객들의 명단을 확인한 다음 들여보냈고, 다행히 서은은 패션 쇼 스텝으로 허가를 받고 입장 할수 있었다.
“뭐 사고 싶은거 있는지 봐. 지금은 VIP 고객만 살수 있는데. 나중에라도 사면 되니까 반지 봐 놔.”
“나 반지 싼 것도 괜찮은데.”
그녀가 어색하게 말하자 수민이 씩 웃었다.
“비싼 거 보라고 말 한적은 없어. 나 가난해. 치과의사 같은 줄 알아?”
서은이 볼을 부풀리며 그를 노려보자 그가 낄낄대고는 한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쓰다듬고서 성큼성큼 다른 패션 쇼 관계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목덜미가 짜릿짜릿해서 그녀는 손으로 살짝 그가 만졌던 부분을 문질렀다.
손님은 꽤 많았다. VIP 라는 게 어느 정도나 구입하는 사람을 말하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다들 드냥 평범해 보였다. 대단히 치장한 사람들도 아니고, 나이대도 다양했다. 대부분 여자들이긴 했지만 간혹 남자들도 보인다.
패션 쇼는 백화점 특별행사장에서 열렸다. 한쪽 옆에 놓인 뷔페 테이블에서 간단한 음식을 집어먹으며 서은은 30분 가량 VIP 특별 할인 상품들도 구경하고 사람들도 구경했다.9시가 되자 음악이 울리더니 사회자가 나와서 패션 쇼의 시작을 알렸다.
“2005년 스프링/서머 시즌 스페셜입니다.”
서은이 본 패션 쇼라고는 가끔 케이블 TV 채널을 돌리다가 본 것 정도였다. 여자들이 기묘한 옷을 입고 나와서 한 바퀴 돌고 다시 들어가는 것. 하지만 직접보니 전혀 달랐다. 화려한 조명이 번쩍이고, 음악에 맞추어 모델들이 우아하게 걸어나와 옷을 보여준다. 반짝거리는 화장, 근사한 머리스타일,그리고 펄럭거리는 멋진 옷들 . 목선이 깊이 패이고 허벅지가 반이나 드러나는 옷을 입어도 모델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당당하게 걸었다. 어쩐지 굉장히 멋져서 서은은 한참이나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녀는 한번도 몸매가 그렇게 드러나는 옷을 입어 본 적이 없었고, 조금만 붙는 옷을 입어도 속옷 선이라든지 옆구리와 팔뚝에 붙은 살들이 신경 쓰이곤 했다.
저런 옷을 입으면 수민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모델리니까 저런 근사한 여자들을 많이 봤을 것이다. 그녀 자신이 저런 옷을 입으면 아마도 우습다고 생각하겠지? 그녀는 번쩍거리는 조명 속에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구깃구깃해진 정장은 몸매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뭐, 그는 이미 그녀의 몸을 보긴했다. 하지만 그때는 뭐랄까, 너무 다급했으니까. 목욕도 같이 하긴 했지만, 어, 그때도.... 봤나? 이상하게도 그의 몸을 본 기억은 나지 않았다. 너무 정신이 엇었던 것 같다. 기억나는 건 그가 주었던 그 세상이 흔들거리는 듯 한 쾌감과 짜릿함, 아랫배가 당기는 느낌뿐.
갑자기 그녀의 시선이 무대로 향했다. 청바지에 가슴 가운데까지 풀린 셔츠를 입고서 성큼성큼 걸어나오는 것은 수민이었다. 머리는 뒤로 빗어 넘기고 반짝이라도 뿌렸는지 조명 아래서 빛이 났다. 미소 없는 얼굴로 포스터 속의 그 모습과 꼭 닮았다. 걸어올 때마다 셔츠깃이 흔들리며 그의 가슴선이 드러났다. 약간 패인 가운데 부분과 탄탄한 근육이 감질나게 보인다. 그녀의 심장이 쿵쿵대기 시작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그가 몸을 살짝 기울이고 서 있다가 돌아서서 걸어갔다. 딱 붙는 청바지가 그의 엉덩이를 완벽하게 감싸고 있다. 저 엉덩이를 그녀가 다리로 감쌌었다. 그리고 그의 남성이 그녀의 안으로..........
갑자기 더워져서 그녀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구석으로 더 물러났다. 남들이 쳐다볼까 봐 무서웠다.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이런 데서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어쩌면 그의 말대로 욕구가 쌓여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난 토요일에 다 풀었잖아? 아닌가? 도대체 몇 번쯤 해야 그런 욕구가 다 풀리는 건데? 학교에서 그런 건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의대생들은 배우나?
음악이 바뀌더니 모델들의 의상도 스타일이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래도 정장 스타일에 가까웠는데 이제는 해변가에서 입을 법한 얇은 원피스와 수영복 같은 것들이다. 여자들의 가슴선이 강조되고, 남자들은 상체를 드러내고 헐렁한 반바지나 수영복을 입고 나왔다.
수민이 반바지만 입고 나타났을때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오, 맙소사. 근처에 있는 다른 사람들 눈을 죄다 가리고 싶었다. 보지 마! 내 거야! 널찍한 어깨에 아까 전에는 감질나게만 보여주었던 팽팽한 가슴이 이제는 조명 아래 완벽하게 드러난다. 불빛이 그의 몸을 금빛으로 비추었고, 까만 반바지 스타일의 수영복 아래로 그의 남성의 윤곽이 약간 보이는 것도 같았다. 아니면 그녀의 지나친 상상력이 발동한 건지도 모른다.
숨이 가빠졌다. 무대위로 기어올라가서 그를 만지고 싶었다. 그녀는 침이 고이는 입을 꾹 다물고 참으려고 노력했다.
그 다음 번에 나올때는 하와이안 스타일의 셔츠를 걸치고 정장 타입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셔츠는 잠그지 않아서 역시나 가슴이 드러났다.왜 난 그를 만지지 않았었지? 그러고 보니 처음 할때는 그가 채 옷도 다 벗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 목욕할때는? 그가 그녀를 뒤에서 안고 있어서 제대로 볼 여유가 없었다. 봐야한다고 생각도 안 했었다. 그때는...
만지고 싶었다. 맛보고 싶었다. 손으로 찔러보고 싶고 할퀴어보고 싶었다. 벽에 기대서서 그녀는 힘겹게 침을 삼켰다. 머리가 핑핑도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패션 쇼가 끝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패션 쇼 담당자가 나와서 인사를 하고,모델들도 인사를 한 다음 들어갔다. 조명이 도로 밝아지자 눈이 부셔서 잠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비틀거리다가 그녀는 간신히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칸막이 안에 안전하게 들어간 다음에야 그녀는 신음을 내뱉었다. 젖은 팬티가 느껴지자 벽에 머리를 박고 싶었다.
“나 진짜 이상한 가봐.”
어떻게 단지 그의 가슴을 봤다고 해서 이렇게 흥분할 수가 있지? 말도 안 돼. 무슨, 무슨 야한 걸 봤다면 몰라. 야한 영화라든지 뭐 그런거. 어떻게 평범한 패션 쇼 같은 걸 보면서 이렇게 흥분 할 수가 있단 말이야! 스스로가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다리 사이에서 축축한 게 느껴지자 급속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옷을 내리고 떨리는 손으로 휴지를 뜯어 몸을 닦고서 그녀는 혐오감에 눈을 질끈 감고 휴지를 버린 다음 변기에 물을 내리고 옷을 바로 잡았다. 절대로, 절대로 아무한테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수민에게는 특히 더!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할수 있단 말인가? 아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잠시 떨림이 가라앉을때까지 기다린 다음 그녀는 화장실에서 나와 손을 씻고서 밖으로나갔다. 아직도 사람들이 웅성웅성 백화점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집에 가고 싶어져서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민은 언제 나올까? 모델들끼리 뒤풀이 같은거라도 있는거 아닌가, 혹시?
다행스럽게도 금방 수민이 나타났다. 얼굴은 씻은 것 같았으나 머리는 아직도 뒤로 빗어 넘긴 모양 그대로였고 반짝이도 그대로 붙어있다. 제대로 샤워를 해야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최소한 옷은 올 때 입었던 긴 정장이다. 당연한 일인가?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피곤해? 구경 재미없었어?”
수민이 큰 봉투를 들고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재미있었어. 그냥, 저기, 서 있는 거 좀 피곤해서.”
거짓말.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비웃는 것 같았으나 그녀는 꾹 눌러버렸다, 그럼 뭐라고 할까? 벗고 나오는 거 보니까 흥분되어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다고? 그런 소릴 어떻게 해!
“가자. 난 다 끝났으니까.”
“그냥 가면 돼? 인사나 뭐......”
“다 했어. 가면 돼.”
그가 그녀의 어깨에 한 팔을 둘렀다. 무심한 팔이 그녀의 가슴 윗부분을 스치는 순간 그녀의 온몸이 눈에 띄게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대로 멈춰 섰다. 가슴부터 아랫배까지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반응을 눈치 챈 듯 그가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왜?”
그녀는 시선을 내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리 사이가 화끈거렸고 젖은 팬티가 역력하게 느껴졌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고개조차 들 수가 없다. 갑자기 수민이 그녀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혹시.....흥분했어?”
얼굴이 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더욱 숙이고서 발끝만 노려보았다. 왜 조금 참지 못하고서 그렇게 반응을 보여서는! 창피해서 쥐구멍이 있으면 파고 들어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진짜 그런가 보네. 왜, 무대에서 내가 너무 섹시했어?”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그녀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자 그가 다른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강제로 들어올렸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의 손가락이 단단히 턱을 잡았다.
“나 봐. 그러고 눈을 피하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잖아.”
“안 돼, 하지 마.”
그녀가 나직하게 애원하며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수민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확실히 말해 봐. 진짜 흥분 한 거야?”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도저히 그의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몸이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졌다. 그를 똑바로 보면 당장 어떻게 해 달라고 애원할 것만 같았다.
“차로 가자.”
그가 그녀의 턱을 놔주고 어깨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간신히 숨을 내수고서 바닥을 쳐다보며 그의 옆에서 종종걸음을 쳤다. 지하 주차장은 한산했다. VIP 고객들만 초대한 거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직원들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수민은 뒷자석에 가방을 던져놓고 운전석에 올라탄 다음 주저주저 서 있는 그녀를 보았다.
“빨리 타.”
서은은 입술을 깨문 채 차에 올랐다. 여전히 그와 시선을 맞출수가 없었다. 이제 어떡하지? 뭐라고 말하지? 어색히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그저 무릎 위에서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자 수민이 그녀의 어깨를 잡더니 자신을 마주보도록 몸을 돌렸다. 놀란 그녀의 눈이 잠깐 그를 향했다가 도로 아래로 내려갔다.
“말해 봐, 응?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알아볼거야.”
그의한 손이 그녀의 허벅지에 놓이자 뜨거운 온기가 전달되었다. 그의 몸에서도 온통 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패션 쇼라는 게 상당히 힘든 일이든지 아니면 그 역시 흥분한 건지 모른다. 그녀의 눈이 천천히 그를 향했다가 그의 열기 어린 표정을 보자 용기를 잃고 도로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진짜 말 안 해?”
“아니, 아무 것도 아닌데......”
그녀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싸며 고개를 돌렸다. 수민이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그녀의 허리에 한 팔을 감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그녀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기어가 무릎을 찔렀다.
“자초한 일이야, 이서은. 말 안 하면 내가 직접 알아본다고 했지?”
“아, 수민씨, 무슨!”
몸이 들리는 느낌에 그녀가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다른 손이 그녀의 바지 안으로 파고 들어가더니 팬티 안쪽을 습격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 수민씨, 그러지 마! 수민씨, 누가 보면......”
“아무도 안 봐. 안엔 아직 한 시간쯤 더 있어야 끝나. 나와도 여긴 구석자리라서 아무도 안 와.”
“하, 하지만, 하지.....앗!”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팬티 안으로 파고 들어간 그의 손가락이 살짝 달아올라 있던 그녀의 핵심을 건드렸다. 눈을 꼭 감으며 그녀가 그의 손가락을 피하려고 몸을 들어올렸으나 오히려 그가 접근하기만 좋게 만들어주었을 뿐이다.
“젖었네.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응? 혹시 나 말고 뭐 다른 거 있었어? 다른 놈 보고 그런 거 아니지? 빨리 대답해.”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핵심을 문질렀다. 앞뒤로, 양옆, 살짝, 세게, 변화를 주어가며 원을 그렸다가 중심부를 정확하게 누른다.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아니, 아냐, 수민씨가.....악, 아, 안 돼, 거긴, 아, 수민씨.......”
그의 손가락 하나가 그녀의 통로 입구에서 원을 그린다. 축축한 액체가 그의 손을 적시자 그가 그녀의 목에 입술을 대고 미소를 지었다.
“아, 이건 확실하게 나 때문이네. 그렇지?”
“수민씨가 너무, 너무, 거기, 무대에서, 너무, 하앙, 안 돼.”
“너무 뭐? 정확하게 말을 해.”
그의 손가락이 춤을 춘다. 통로 안쪽으로 살짝 들어왔다가 나가고, 다시 들어왔다가 나가며 그녀의 굶주림을 증폭시킨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그의 어깨에 손톱을 박았다.
“수민씨....아, 그러지말고, 흐응, 아, 그러지 마, 더 좀 더........”
“좀 더? 요구가 세졌어. 이서은양.”
그의 목소리에 웃음이 어렸으나 그걸 알아챌 여유가 없었다, 그에게서는 화장품 냄새와 땀냄새가 풍겼다. 그의 독특한 향기가 그녀의 코를 가득 채운다. 몸 안이 수축되며 여성의 통로에서 애액이 더욱 많이 흐른다. 그의 손은 정확하게 그녀의 흥분 정도를 가늠하고 있었다. 창피하면서도 머리가 핑핑 돌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수민씨이, 그만 해, 여기선 안돼, 그만......”
“그럼 그냥 뺄까? 그만 할까?”
그의 손가락이 통로에서 빠져나가자 완전히 몸이 텅빈 기분이었다. 달아올라 예민해진 살점을 미끌미끌해진 손가락으로 다시 한번 문지르며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만 해?”
“몰라, 모르겠어. 몸이 자꾸.....이상해. 자꾸만, 응, 멈추지가..........”
허리에 감긴 그의 팔에 의지한 채 그녀가 몸을 휘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꼭 쥐자 열기와 더불어 짜릿한 감각이 온몸 구석구석을 찔렀다. 그의 손이ㅣ 한 번, 두 번 그부분을 주물렀다. 흥분한 핵심부가 그의 손바닥에 문질러지고, 여성은 조여들었다가 풀리며 계속 꿀물을 쏟아냈다.
“수민씨......”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느꼈다. 그는 몇 번 더 주무른 다음 천천히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손을 빼냈다. 느릿하게 살점이 쓸리는 느낌에 그녀가 헐떡였다, 그가 허스키하게 웃었다.
“귀여워 죽겠어.”
손을 뺀 다음 축축한 흔적을 보자 그의 눈이 뜨겁게 변했다. 허벅지가 계속 떨려서 그녀는 다리를 꼭 붙이려고 노력했다. 가슴 끄트머리가 욱신거렸고 머릿속도 혼란스러웠다.
“창피해 하지마. 내가 당신을 달아오르게 만든 게 그렇게 창피해?”
무릎 사이에 손을 끼우고 허벅지를 꼭 붙인 채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수민이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럼?”
“나 혼자 너무......수민씨가 아무것도 안 해도......이러니까 너무 창피하잖아.”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는 데다가 기어 들어갔다. 수민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무릎 사이에서 그녀의 손을 빼내서 자신의 몸으로 잡아당겼다. 그의 뜨겁게 달아오른 남성이 느껴지자 그녀의 눈이 커졌다.
“당신 혼자? 나는 아닌 것같아?”
“하,하지만 아까 전에 패션 쇼 할때부터 난......”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손바닥 아래서 그의 몸이 꿈틀거리는 것 같다. 바지 아래로도 그의 열기가 뚜렷하게 느껴진다. 조금은 무섭기도 하지만, 대단히 매혹적이었다. 그녀의 손이 살짝 움직이자 그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흥분한 듯 뺨이 붉어진다. 그를 바라보던 그녀의 가슴이 쿵쿵거렸다. 그가 그녀에게 반응을 보이고 있는게 좋았다.
“난 아까 병원에 당신 데리러 갔을때부터 이랬어. 옷 갈아입어야 되는데 몸이 이러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알아? 다들 다급하게 갈아입고 있는데 나 혼자서 쩔쩔매다가 몇 번이나 혼났어. 그러니까 각오하고 있어. 집에 가서 이 욕구가 풀릴 때까지 할 거니까.”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서 그가 자세를 조금 고친 다음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몸 아직 아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프긴 하지만, 흥분으로 인한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다시 그녀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는 걸 느끼고 싶어서 온몸이 바싹 달아오르고 있다. 그가 시동을 걸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끽 소리를 내며 앞으로 튀어나간다.
“수민씨?”
“응.”
그녀의 목소리는 바들바들 떨렸다.
“빨리 가.”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수민의 눈이 번뜩였다. 차가 주차장에서 쏜살같이 빠져 나갔다.
6.
수민이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흥분은 조금 가라앉은 상태였다. 수민의 집을 구경한다는 생각에 호기심이 발동한 탓인지도 몰랐다.
수민 역시 조금 차분해진 듯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가방을 소파에 던져 놓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샤워 좀 하고 나올테니까 기다려.”
“여기 혼자 살아?”
그의 집은 꽤 넓은 빌라 꼭대기 층이었다. 서은의 월급을 바득바득 모아도 사기 힘들것 같은 집이었다.
“설마, 친구랑 같이 살아.”
“친구?”
그녀가 긴장한 듯 주위를 둘러보자 그가 씩 웃었다.
“여행가고 없어. 걱정마 편하게 있어.”
그가 셔츠를 벗으며 방으로 걸어갔다. 하얀 셔츠가 그의 몸에서 떨어져나가고 그의 등이 그녀의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나자 그녀가 숨을 삼켰다. 팔이 움직이자 어깨와 견갑골이 움직이고, 등 근육이 물결치듯 따라 움직인다. 가라앉는가 싶던 흥분이 순식간에 치솟자 그녀는 양팔로 자신의 몸을 껴안고 고개를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거실 소파에 풀썩 주저앉아 이마의 땀을 문질러 닦았다. 화장이 번지든 말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다 번졌을 것이다.
거실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탁자와 편안하고 감촉 좋은 가죽소파, 대형 PDP TV 있었고 한쪽 옆으로는 오디오 세트가 놓여 있었다. CD 수납장에는 수많은 CD들이 줄지어 꽂혀 있었고, 조화가 꽂힌 작은 꽃병이 장식으로 놓여 있었다.
아무리 봐도 남자 둘이 사는 집이라고 하기엔 너무 깔끔하고 예쁘다. 그녀는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같이 사는 사람이 여자는 아니겠지. 여자랑 같이 살면서 그녀를 여기 데려왔을 리는 없다........그렇지? 아닌가? 생각해 보면 잘모르는 여자한테 키스하고, 그 여자랑 간단히 자고, 사귀자고 하는 그런 게 쉽게 나올리 없다. 경험이 많다는건 둘째치고 혹시나 질이 나쁜게 아닐까?
“하지만 잔인하게 굴지도 않았고....”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고 무릎을 껴안은 채 소파에 동그마니 앉아서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뭐 바람기가 많다면야 모르겠지만, 질이 나쁜 남자가 섹스할 때 그녀의 즐거음을 챙기고, 착실하게 콘돔을 사용하고, 반지 이야기까지 꺼내지는 않겠지. 패션 쇼하는데도 데리고 가고.
“아으! 모르겠어, 정말.”
그녀는 고개를 흔듷었다. 정말로 모르겠다. 너무 깊이만 빠지지 말자. 혹시라도 그가 돈 같은 걸 요구하는 제비라면 그때가서 차버리면 된다. 섹스하는 장면을 촬영하자는 다위의 말을 하거나 카메라라도 꺼내면 쫓아내면 되고, 어쨌든 섹스는 그녀의 기대 이상으로 좋으니까.
그의 손가락이 몸안으로 들어오던 게 떠오르자 그녀의 몸이 다시 달아올랐다. 무릎사이에 고개를 묻고서 그녀는 신음을 삼켰다. 정말이지 이건 발정난 고양이 수준이다. 아무리 30년 동안 안 했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반응해도 되는 건가? 정상맞나?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앞을 잠그지 않은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수민이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방에서 나온다. 방에 욕실이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짧은 머리가 고슴도치처럼 곤두서서 지금은 꼭 대학학생처럼 보였다. 잘 생긴 대학학생.
내가 대학학생때 저 사람이 몇 살이지? 서은은 인상을 찌푸리고 계산 해보았다. 내가 열일곱이라 치면 열 살.....초등학교3학년? 그녀가 신음을 내뱉으며 소파쿠션으로 얼굴을 가리자 수민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서 머리카락을 흔들어 차가운 물을 튀겼다. 그녀가 꺅 소리를 지르며 그를 보았다.
“흥분 좀 가라앉히시죠. 의사 선생님.”
그가 씩 웃고서 수건을 아무렇게나 옆에 있던 1인용소파에 던진 다음 몸을 돌렸다.
“와인 있는데 줄까? 마실래?”
어떻게든 시간을 끌기 위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굶주린 노처녀처럼 당장 그를 붙잡고 침대로 뒤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좀 품위를 지키고 싶었다. 그에게 놀림 받고 싶지도 않았다. 좀 더 주도권을 잡고 싶었다.
수민은 와인병과 잔 한 개만을 들고 돌아왔다. 무릎을 천천히 내리고서 그녀는 옆에 앉는 그를 보았다. 그가 솜씨 좋게 스크류로 와인마개를 딴 다음 잔에 와인을 따랐다. 금색의 화이트 와인이었다.
“수민씨는 안 마셔?”
“마실거야.”
그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와인을 한모금 마신다음 그를 보았다. 오인은 꿀처럼 달콤했다.
“맜있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미소가 좀 더 깊어졌다. 짙은 눈매가 살짝 가늘어 지며 마치 춘화에 나올것처럼 섹시하게 변했다.
“이번엔 입에 그냥 물고 있어 삼키지 말고.”
그녀의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잔을 든 손이 떨렸다. 그가 보고 있는 앞에서 그녀는 천천히 한모금을 들이키고서 입에 문 채 가만히 있었다. 수민이 그녀의 손에서 잔을 받아들고는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갖다댄다. 천천히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와인이 그녀의 입술 양옆을 따라 가늘게 흘러내렸고, 그의 혀는 입안의 와인을 꽃의 꿀인 양 핥고 맛보았다. 그녀가 나직하게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는 입안의 와인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핥아먹은 다음 입가와 턱으로 흘러내린 것까지 핥았다. 뭉쳤을 게 분명한 화장이 문득 떠올랐으나 수민은 개의치 않는것 같았다. 그의 혀는 그녀의 피부 위에서 불같은 흔적을 남기고 아래로 내려갔다.
아랫배와 허벅지 윗부분이 축축한 느낌에 그녀는 문득 아래를 보았다. 수민의 손에 들려있던 잔이 쏟아져서 그녀의 몸을 적시고 있었다. 깜짝놀라서 그녀가 그를 밀아냈다.
“tHE아졌어! 어머, 어떡해.”
“비싼 옷이야?”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잔을 옆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닌데, 병원에 입고 가는 유니폼 같은 옷이라서. 이계절에 입을 만한 다른 정장이 없거든.”
“사, 내가 도와줄게. 이 옷은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아.”
서은이 인상을 찡그리고 그를 보았다. 그는 그저 빙긋이 웃고는 그녀의 블라우스를 멋대로 벗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기, 아직, 저기, 소파인데......”
“젖었잖아. 벗어야지.”
맞는 말이긴 하지만 왠지 목덜미가 따끔거리는 느낌이었다. 그에게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물론 다른 의도가 있겠지! 방금 전에 그녀의 입에서 와인을 받아먹은 사람인데. 수민의 능숙한 손이 재빨리 블라우스를 벗기고 슈미즈를 위로 올렸다. 배까지 젖어 있다. 끈끈한 느낌에 그녀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으나 다음 순간 그가 몸을 숙이고서 그녀의 배를 핥자 얼굴이 새하애졌다가 새빨갛게 돌변했다.
“수, 수민씨!”
“달아.”
그가 그녀의 배에 대고 속삭이며 더 아래로 혀를 움직였다. 그의 양손이 그녀의 다리를 잡아당겨 자신의 어깨에 걸치자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소파에 드러누운 채 그녀는 자신의 배위에서 움직이는 그의 새카만 젖은 머리를 쳐다 보았다. 삼장이 쿵쿵대고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타는 듯 뜨거웠다.
“수민씨, 잠깐만, 여긴 너무 밝고.....”
그녀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의 손이 그녀의 바지 단추를 풀고서 아래로 내려 재빨리 벗겨버린다. 아까 전 패션 쇼와 주차장에서의 일로 아직 젖어 있는 팬티가 그의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나자 그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허벅지 윗부분도 와인으로 끈적끈적 하다.
“여기도 쏟아졌던가?”
그가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허벅지 위로 혀를 움직였다. 뜨겁고 축축한 그의 흔적이 허벅지에 그림처럼 남는다. 윗부분을 핥던 그가 안쪽으로 혀를 옮겼다.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그의머리가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지독하게 야한 영화처럼 느껴져서 그녀는 숨이 헐떡이며 눈을 감았다.
“아, 여기야말로 제일 많이 쏟아진 부분인가 보네.”
그의 혀가 잦은 팬티 한가운데 닿는 순간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양손이 그의 머리를 쥐었다.
“그, 그러지 마!”
“왜? 내가 깨끗하게 해 줄게.”
“수민씨, 그건 너무......”
말을 다 긑내지도 못하고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들어올리고, 그의 혀는 팬티를 적시고 젖은 부분을 맛보고 있었다. 그녀의 엉덩이가 움찔거리고 그녀의 손이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움켜쥐었다.
“수민씨, 아, 수민씨, 그만, 거긴,그만,너무.......”
머리가 빙빙 돈다. 너무 좋으면서도 그래서 너무 창피했다. 자신이 너무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짜릿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왠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의 손가락이 팬티를 옆으로 밀어내고 그녀의 여성을 드러내자 그녀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수민씨, 그, 그러면......”
그가 손으로 그녀의 여성을 덮고 있는 꽃잎을 벌리자 달아오른 핵심부에 차가운 바람이 닿았다. 그녀가 몸을 떨며 그의 머리카락을 더욱 꼭 쥐었다.
“그러지 마......”
불행히도 그는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팬티가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걸려서 아프게 살을 누른다, 그의 손가락은 여성의 장막을 한껏 젖혔고, 입술이 부어오른 핵심을 문질렀다. 그녀의 엉덩이가 위로 들려 올라갔다.
“수민씨이!”
그녀가 흐느끼듯 소리치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는 손에 힘을 빼지 않은 채 도톰한 살점을 혀로 핥다가 이로 살짝 깨물었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가 그 부분에 대고 나직하게 웃었다,
“목소리도 어지간히 커. 다른 때는 그렇게 안크면서.”
“안 돼, 이상해, 하지마 ,자꾸, 아!”
그의 손가락 하나가 아래로 내려가더니 젖어있는 통로를 어루만졌다. 혀는 뜨겁게 살점을 눌렀다가 느릿느릿 핥고, 입술이 부드럽게 그 부분을 감싸고 꿀물이라도 찾는 것처럼 쪽 빨아들였다. 그녀가 힉 하고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흔들었다. 상체가 소파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는 자동적으로 그녀를 따라 움직이며 허벅지 안쪽으로 더욱 얼굴을 깊숙하게 묻었다.
“아, 흐응, 앗, 거기 만지지 마, 안 돼, 싫어.”
그녀가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좀 더 위로 들어올리자 그의 손가락이 기회를 잡은 듯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녀가 길고 나지막한 비명을 내질렀다. 긴 손가락이 통로 안쪽으로 들어가 내벽을 살짝 문지른다. 촉촉한 샘이 순식간에 흘러넘치며 그의 침입을 반겼다.
“달아. 와인보다 더 달아. 당신처럼 맛있는 여자 처음이야. 미치겠어.”
그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더깊이 파고드는가 싶더니 몸이 더 벌어지며 손가락 하나가 더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숨을 내뱉고 이를 악물었다. 벌써 아프기 시작했지만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너무 좋다. 세상이 빙빙 도는 것처럼 느껴지고, 뱃속이 울렁거렸다. 꼭 토할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면 다른 어딘가가 폭발 할 것 같은 느낌.
그가 손가락을 점점 더 빠르게 앞뒤로 움직였다. 넣었다 빼고, 다시 깊이 밀어 넣는다. 눈을 깜박거리며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목에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멀게만 보이는 수민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곤두선 머리카락 때문에 꼭 싸움이라도 하고 있는 대학학생 같아 보였다. 손가락이 더욱 깊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몸안의 어딘가를 건드렸다. 순간 그녀의 온몸이 폭발했다. 그녀가 죽을 듯한 비명을 지르며 팔을 허우적거렸다. 테이블에 거세게 손목이 부딪쳤지만 그것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그저 이 쾌감 때문에 죽을 것만 같았다. 숨도 쉴수가 없다. 뇌가 잘못된것 같다. 세상이 빨갛다. 눈앞이 하얗다.
“거기 잡아.”
“응?”
그녀가 제대로 반응도 하기전에 그가 그녀의 상체를 안아 올리더니 소파 앞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뒤집었다. 상체는 테이블 위에, 하체는 소파 그의 무릎위에 놓인 채 그녀는 엎드린 자세로 그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호흡은 거칠었고 머릿속은 몽롱했다. 그의 손이 재빨리 그녀의 팬티를 벗겨냈다.
“수, 수민씨? 뭐......”
“무릎 대고,테이블 잡아.”
“응?”
그녀의 무릎이 그의 다리 양옆으로 벌어진 채 소파 끄뜨머리에 닿았다. 발은 소파 등받이에 닿는다.무릎까지 오는 스타킹 때문에 가죽소파는 미끌미끌하게 느껴졌다. 하얀 엉덩이를 내려다보는 그의 입가에 주름이 살짝 패였다가 사라졌다. 마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그가 미간을 한것 찌푸린 채 그녀의 엉덩이 위에 한 손을 올렸다.
“미칠것 같아. 금방 터질 것 같아. 나, 나 이렇게 미치게 하고 싶었던 적 한 번도 없었어. 전부 당신 탓이야, 이서은.”
무슨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더듬더듬 테이블 끝을 잡고서 그녀가 그를 향해 엉덩이를 내밀었다. 자신의 자세가 어떤모습인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피부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너무나 좋았다.
엉덩이를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등을 타고 올라가다가 슈미즈 아래로 브라를 끌렀다. 헐렁하게 브래지어가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얇은 슈미즈가 곤두선 젖꼭지에 스치자 그녀가 몸을 떨며 테이블에 몸을 댔다. 차가운 유리가 달아오른 젖가슴을 식혀주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가 슈미즈를 가슴 위로 밀어 올리자 이제 차가운 유리는 오히려 그녀의 가슴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먹고싶어. 커다란 복숭아 같아.”
“응? 아, 악! 수민씨!”
그의 이가 그녀의 엉덩이를 깨물었다, 아, 맙소사. 아팠다. 누군가가 찬물을 확 끼얹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픈 부분에 뜨겁고 축축한 그의 혀가 닿자 다시금 온몸이 녹아 내렸다.
“당신 잘못이야. 너무 귀여워.”
어디가? 그녀가 귀엽다고, 그녀 때문에 미치겠다고 했던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이 남자만은 그녀를 보고 미치겠다고, 너무 귀엽다고 말한다. 하고 싶어 죽을 것 같다고 한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저................
“장난 그만 쳐, 수민씨.............나, 나......................”
그녀가 그를 향해 엉덩이를 밀며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차가운 유리에 닿자 미끄러지는 젖꼭지는 그의 손길을 갈망하고 있고, 여전히 움찔거리며 유혹의 꿀을 흘리고 있는 그녀의 여성은 그의 몸을 갈구하고 있다. 그의 단단한 남성이 안으로 파고들어서 지난번처럼 환상적인 느낌을 남겨주기를.
그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짙은 눈이 가늘어지고, 입가가 팽팽해졌다. 한 손을 자신의 바지로 내린 그가 재빨리 허리춤을 풀더니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그의 커다란 남성을 꺼냈다. 그녀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기대하는 것처럼 여성이 조여들었다.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지자 그녀가 눈을 감고서 테이블에 바싹 엎드린 채 엉덩이를 좀 더 밀었다.
“아, 그래, 지금, 응, 지금.”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커다란 양손으로 잡고서 한것 벌리자 그녀가 몸을 떨며 신음했다. 여성의 입구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왔다갔다하는가 싶더니 갑자기그가 그녀의 안으로 한껏 파고들렀다.
머릿속이 하애졌다. 눈앞에 새카맣게 변했다. 온몸이 꿰둟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파, 아파! 수민씨, 아파! 하지마!”
그녀의 비명은 이번엔 진짜였다. 그저 놀라서, 혹은 당황해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너무너무 아팠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다. 그녀가 테이블을 움켜잡은 채 헐떡대며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아파!”
어느 새 눈물이 그녀의 뺨을 뒤덮었다. 언제 울기 시작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맙소사, 그가 움직일 때마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움직이지 마! 그러지마! 아프단 말이야, 수민씨, 너무 아파!”
“젠장, 잠깐만. 잠깐만 참아 봐, 빼야 뭘 어떻게.........젠장!”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잡은 채 뒤로 빼다가 마치 뭔가 이상한 듯 도로 안으로 파고든다. 그녀가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지르자 엉덩이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빼고 있어! 제발, 서은아. 가만히, 조금만 참아 봐. 젠장, 미안해. 내가 좀 더 살살 했어야 했는데, 나도 이럴 줄은 몰랐어. 조금만 참고, 긴장 풀어 봐. 응? 제발.”
그는 마치 애원하듯 말하며 조심조심 몸을 빼고 있었다. 흐느껴 울면서 그녀는 다리에서 힘을 빼려고 노력했지만 너무 아프면 흔히 그렇듯 온몸이 초긴장 상태였다. 근육 하나하나까지 다 굳어져서 이렇게 영영 마네킹처럼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거기다가 죽도록 아프다. 처음에도 이렇게 아프지 않았는데 어째서 두 번째가 더 아픈거지? 혹시 나 앞으로 다시는 못 하는 거 아냐? 어디가 잘못된 거 아닐까? 여자들 중에는 가끔 비정상적으로 통로가 좁아서 성행위를 못 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내가 그런 부류인 거 아닐까? 그럼 어덕해? 다시는 못 해? 그런 나 어떡하는데!
그의 몸이 간신히 빠져나갔다. 그녀는 그대로 엎드린 채 누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엉엉 울기만 했다. 아프고, 억울하고, 알 수가 없었다. 아까 전까지는 분명히 기분이 좋아서 날아갈 것 같았는데, 지금은 도대체 왜 이런 거지?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더 천천히 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들어올리더니 소파에 앉힌다. 그녀가 엉덩이를 홱 앞으로 내밀며 비명을 질렀다. 소파에 닿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아팠다. 생살에 소금을 문지르는 느낌이다. 그가 움질하더니 그녀를 안은 채 머뭇거리다가 결국 자신의 허벅지 위 조심조심 앉히고는 꼭 끌어안았다.
“미안해. 많이 아팠어? 지금도 아파? 피 나?”
아무 대답도 않고서 그녀는 그저 그의 가슴에 기대고 눈물을 쏟았다. 그가 이렇게 사과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문제인데 왜 그가 사과를 하는 거지?
“정말로 미안해. 나 이렇게 아픈 건 줄 몰랐어. 당신 처음에 괜찮길래 당연히 이번에도 괜찮을 줄 알고.......거기다가 나 너무 흥분해서, 급해서, 빨리 넣어야 할 것 같아서......정말로 미안해, 나 용서해 줘, 응? 서은아.”
그녀는 그의 가슴에 대고 고개를 흔들었다. 셔츠가 열려있어서 그의 맨가슴이 뺨에 닿았다. 매끄럽고 따뜻하고 단단한 게 정말로 느낌이 좋았다. 잃고 싶지 않았다. 다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내가 문젠가 봐. 안 하고 있어서 몰랐던 거야. 나 문제가 있나 봐. 어떡하지? 미안해 수민씨. 그런데 너무 아파서 어쩔수가 없었어. 그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내 몸이 문제가 있는 거면 어떡해? 다시는 못할 지도 몰라. 저번엔 괜찮았었는데 왜 그렇지? 나 하고 싶었는데, 진짜 수민씨랑 하고 싶어서 아까부터 계속 기다렸는데. 다시는 못 하면 어떻게 해!”
잠시 수민은 그녀를 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코를 훌쩍이며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러니까 친구들의 충고를 들어 진작 해 봤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지도 빨리 알았을 거고, 그러면 수술을 하든 뭘 하든 더 빨리 조용히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지금 수민과 이런 창피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되고, 바보, 멍청이, 이러니까 늦되었다는 소리나 듣는 거다. 나이를 서른이나 먹어서는 도대체!
갑자기 수민의 가슴이 흔들렸다. 그가 떨고 있는 걸까?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서 코를 훌쩍이며 그녀가 그를 조심조심 올려다보았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에 닿아있는 몸은 여전히 어딘가 찢어진 것처럼 아팠지만 그래도 아까 전보다는 조금 덜 아프다. 그저 둔중한 통증이 계속 몸을 괴롭힐 따름이었다.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보는 순간 그의 입에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슴에서부터 울려나오는 웃음소리에 그녀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를 품에 감싸안은 채로 그가 소파에 기대며 미친 듯이 웃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에게 애원조로 사과하던 사람과는 정반대 같다.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나? 그녀는 아무 반응도 못하고서 그저 그를 보기만 했다.
“아, 맙소사. 이서은, 순진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당신 어디가 잘못도니 게 아니라, 내가 잘 못한 거야. 앞뒤가 완전히 바구ㅣ었다고.”
그녀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기만 하자 그의 웃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여전히 뭇음 딘 얼굴을 하고서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젖은 뺨을 스다듬었다.
“이제 겨우 한 번 했잔아. 이틀밖에 안 됐다구. 몸이 적응하려면 더 천천히 조심해서 했어야 했는데 내가 발정난 말처럼 그냥 막 달려들었으니까 당연히 아프지. 날 탓해야지 도대체 왜 당신이 이상한 거라고 말하는데? 하여튼 큰일이야. 이렇게 순진해서 이 험한 세상 30년 동안 어떻게 살았어?”
서은은 눈을 깜박거렸다. 그런 건가? 그가 갑자기 넣어서 아팠던 거야? 하지만 저번엔? 저번엔 안 그랬었나? 모르겠다. 그냥..............모르겠다.
“책엔 그런 말 없었는데.”
“무슨 책?”
그녀는 자신이 무슨 소릴 했는지 개닫고 얼굴을 붉혔다. 수민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음, 저기, 그냥 내가 보는, 저기, 소설책들.”
“여자들이 흔히 보는 그런 거겠지. 뻔하지. 내 친구들 몇 명도 그런 거 보더라. 그런데거긴 안 나와?”
그녀의 얼굴은 이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몸이 여전히 아프긴 하지만 지금은 당황해서 우선 그를 피하고 싶었다. 그녀가 그의 허벅지에서 내려가려고 하자 그가 재빨리 양손을 그녀의 등 뒤에서 깍지끼고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흘러내려 배 근처까지 내려와 있는 브래지어도 신경쓰이고, 슈미즈 아래 고스란히 비치는 젖가슴도 신경이 쓰여서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옷을 추스르려고 하자 그는 재빨리 한 손으로 브래지어를 확 잡아당겨 슈미즈 밖으로 벗겨내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수, 수민씨!”
“대답이나 하시죠, 의사 선생님. 아니, 할 것도 없지. 안 나오니까 그런 소릴 했겠지. 우리 순진한 바보.”
화를 내야 하는데 화낼 기운이 없었다. 게다가 그가 고개를 기울여 부드럽게 그녀의 젖은 뺨에 키스하고 핥아주는데 도대체 왜 화를 내겠는가.
“운동하는 거랑 똑같아. 처음에 열심히 하면 며칠이나 근육이 당기잖아. 그 때 지나치게 하면 근육이 경련을 일으킨다든지 자칫하면 다치기도 하지. 그러니까 처음 운동을 시작하면 계속해서 꾸준히, 강도를 조절해서 적당히 부드럽게 해 줘야 돼. 당신 몸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늘어난 게 처음이니까 적응이 될 때까지 계속 부드럽게, 꾸준히 해 줘야 되는데 내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넣으니까 아팠던 거야, 알겠어?”
그의 한손은 어느새 그녀의 다리 사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여전히 축축하게 젖어 있는 부분을 그가 쓰다듬자 그녀가 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모, 몰랐어.”
“이젠 알았지? 그러니까 중요한 건 천천히, 이건 내가 해애 되는 거니까 됐고, 그리고 꾸준히, 알겠어? 꾸준히 계속 그 부분을 늘려서 내가 넣어도 아프지 않고 잘 받아들일수 있게 만들어야 돼. 그러려면 계속 늘려줘야겠지, 안 그래?”
그가 히죽 웃고서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문지른다.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계속 늘려주다니, 그 부분을, 그게 무슨 뜻이지? 그러니까.............
“계속 해야 된다는 뜻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기어 들어가는 듯했다. 수민의 미소가 나른해졌다. 다리 사이를 쓰다듬던 그의 손가락이 아직도 아픈통로 주위로 위험할 정도로 근접하자 그녀의 몸이 자동적으로 음찔했다. 그가 재빨리 손을 그녀의 엉덩이 쪽으로 옮겼다.
“나중에, 오늘은 안 되고, 피나는 것 같진 않아?”
잠시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고 다리 사이의 느낌에 집중했다. 아나,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아직도 뭉툭한 바늘 여러 개로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간신히 좀 나아지고 있긴 하다.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네.”
그가 그녀의 가슴 가운데 이마를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른하던 미소는 사라지고 조금 피곤해 보인다. 그의 몸은 여전히 단단하게 솟아서 그녀의 허벅지를 찌르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벌어진 셔츠 사이로 그의 몸을 응시했다. 매끄러운 몸은 지나치게 근육질이지 않으면서도 단단하고 보기 좋게 모양이 잡혀 있었다. 셔츠 끄트머리가 남성의 작은 갈색 젖꼭지를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다가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살짝살짝 감질나게 드러낸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쓰다듬다가 그가 고개를 들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땠다.
“그, 그냥, 엊그제는 못 봐서..............”
“만져도 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지금은 안 되겠다. 당신이 만지면 하고 싶어질 것 같아. 그런데 하면 안 되니까.”
그가 나직하면서도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는 떨리는 한숨을 내쉬고서 손을 내렸다.왠지 바보 같아졌다. 웃음이 피식 새어나왔다.
“나 너무 아무 것도 몰라서 미안해, 수민씨.”
“모르는 게 잘못은 아니지만...도대체 왜 그렇게 몰라? 친구들이랑 그런 이야기 안 해? 결혼한 친구들도 있을 거 아냐.”
그가 그녀를 독바로 쳐다보았다. 언제 봐도 매혹적인 짙은 속눈썹이 뺨에 그늘을 드리운다. 그린 듯한 눈은 너무나 예뻐서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간 침을 질질 흘릴까 봐 걱정될 정도였다.
“나 외동딸이거든. 부모님이 좀 늦게 낳으셔서 굉장히 애지중지 자랐어. 그런데다가 부모님이 나이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음, 그러니까, 성교육 쪽엔 그냥 ‘모르는게 약’, 뭐 그런 식으로 자랐거든.”
그녀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그래도 최소한 해명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TV라든지 다른 매체를 통해 그럭저럭 알만큼은 알았다. 단지 세세한 것들을 모를 뿐이었다.
“중대학학교 때도 친구들이랑 그런 이야기 할 일은 별로 없었어. 있잖아, 난 대학학교 때까지도 결혼하기 전에 그, 음, 같이 자는 건 불법인 줄 알았어. 진짜로. 뉴스에서 사창가 단속 같은 이야기 나오면 그런 게 왜 있는 건지 이해가 안가고, 그런데 가는 남자들은 전부 다 변태들이라고만 생각했어. 대학에 간 다음에야 연인들끼리 같이 자는 게 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그래도 왠지 그런 걸 하는 애들은 좀, 음,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생각했어. 게다가 대학 다니는 내내 부모님이랑 같이 살았거든. 난 당연히 그럴 일이 없었지.”
“남자 친구 있었다며, 결혼하려고 했던.”
서은은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수그렸다.
“본과 1, 2 학년 지날 즈음 하니까 나도 이제 뭐가 뭔지 대강 알게 됐는데, 그래도 자라는 내내 들어온게 어디 가겠어? 남자 친구가 키스하는 것까지는 참겠는데, 그 이상 진도 나가는 건 못 참겠더라구. 결혼도 안 했는데 그런 짓을 하는 건 왠지 행실 나쁜 여자가 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음, 그런 걸 좀 더 쉽게 허용해주는 여자를 찾은 거겠지.”
“그럼 나랑은? 그 반발작용이야?”
그가 그녀의 귓가를 살짝 혀로 핥고서 속삭였다. 그녀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야. 그게.......수민씨랑은 왠지 별로 이상하지가 않아. 포스터로 계속 봐와서 그런가?”
잠시 그녀의 귓바퀴를 따라 혀를움직이던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혹시 포스터 보면서 마스터베이션 한 적 있어?”
마스.......뭐? 오, 세상에. 그녀가 홱 고개를 들고 새빨개진 얼굴로 그를 모았다.
“그, 그런 적 없어!”
“이서은, 그건 불법이 아니야. 남이 날 즐겁게 만들어주지 못해서 내가 직접 하는데 그게 뭐 어때서?”
“하, 하지만, 하지만, 여자는 ,음, 혼자 하는 게, 좀..........”
수민 놀리는 듯한 미소가 어렸다. 그의 붉어진 입술이 위로 반달처럼 곡선을 그린다.
“안 해 보셨다는 말이로구만. 그럼 당연히 장남감도 하나도 없겠네.”
“장난감?”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걸 팔아? 진짜로? 무슨 이상한 포르노에나 나오는 거 아니고?”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못 구하는게 어디있어. 내가 사 줄까?”
그녀의 얼굴은 이제 지나치게 익어서 물러지기 직전인 토마토처럼 시뻘개져 있었다. 그녀가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피,필요 없어! 말도 안돼! 그런게 왜 필요해?”
“자기 성욕을 그렇게 무시하고 억누를 건 없어. 정상적이고 건강한 적령기 남녀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게 성욕이라구, 자기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거 이젠 알 거 아냐?”
“아, 알지만, 그래도 그런 건..........”
수민이 식 웃었다.
“너무 진도가 빠르다. 그거야?”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민이 그녀의 귀 뒤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넘겨주고서 부드럽게 키스했다.
“알았어. 어쨌든 지금 그런 것까지 말할 처지는 못 되지. 중요한 건 당신 몸을 적응시키는 일이니까. 좀 쉬었다가 이번 부말쯤 다시 시도해 볼까?”
이번 주말? 하지만 그럼 일주일이나 남은 건데........그녀의 얼굴에 실망한 빛이 뚜렷하게 드러났는지 그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좋아, 좋아. 너무 길지? 나도 그래. 좀 당겨보자. 내일은 무리고, 모레나 글피쯤. 준비 될 것 같아?”
그녀가 수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양팔로 감싸고서 번쩍 안아들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서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꽉 잡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자고 새벽에 가. 데려다 줄게.”
“여기서? 수민씨랑 같이?”
“응, 왜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어쩐지 이상했다. 결혼 전에 이런 건 안 된다는 그녀의 결심을 꺾어버린 것만 해도 아직 적응하는 중인데, 이젠 잠까지 같이 잔다고? 이건 정말 너무 많이 진도를 나가는 거였다.
“아직 아플 거 아냐, 지금 집에 보내면 나도 밤새 걱정할 거야. 잠을 제대로 못 자면 피부가 얼마나 안 좋은지는 알아? 난 몸이 재산인 사람이야. 그러나 나 좀 편하게 해 줘.”
그가 씩 웃으며 그녀를 구슬렸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새벽에 집에 데려다 줘야 해. 꼭.”
7.
부무님이 서른을 맞이한 그녀에게 빨리 결혼하기를 종용하시는 건 아니었다. 물론 가끔씩 사귀는 사람 없냐고 전화해서 물어보시곤 했지만 자기 일도 있고 생활도 있으니까 정말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날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괜찮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하지만 남자와 섹스를 하고 있다는 걸 아시면 아마도 놀라실 것이다. 부모님에게 있어서 그녀는 여전히 어린 딸일 뿐이었다. 그런 건 결혼하고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게 대학 초년 시절 부모님이 해 주신 유일한 성교육이었다. 지나친 순진함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은 적도 여러번이었지만 그런 류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학과 공부를 하면서 신체에 대한 지식은 좀 쌓았는지 몰라도 결국 중요한 건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출근 준비를 하다가 포스터를 쳐다보고 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결혼이라. 아니 물론 수민을 결혼 상대로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맙소사, 어쨌든 요즘 세상에 같이 한번 잤다고 해서 다들 결혼하는 게 아니라는 건 그녀도 지금쯤은 잘 알고 있었다. 친구중에서는 아이를 지운 적이 있는 애도 있었다. 뭐, 그 이야기를 듣고는 갑자기 걔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건 차마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기준이 너무나도 달라서 그녀로서는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지금 수민과 이런저런 야한 일을 하고 있어도 여전히 그랬다. 이런 걸 하면 당연히 결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만약 이대로 헤어지면, 그러면 우리가 한 일은 다 뭐가 되는거지? 그냥 사귀는 사람끼리 손잡는 정도랑 똑같은 거야?
“모르겠어, 정말로.”
그녀는 고개를 흔들고서 스타킹을 마저 신은 다음 치마를 입었다. 간밤에 수민은 그녀를 안고서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남자든 여자든 가끔은 적당히 파트너를 만나 풀어줘야 하는 거라고 말했다. 솔직히 일곱 살이나 어린 그에게 성교육을 받고 있다는 기분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또 그와 하고 있는 일이 그저 단순히 ‘동물적 욕구ㅠ를 해소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문제는 내가 그 사람을 잘 모른다는 거지.”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긴, 그를 안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가 뭘 좋아하는지, 어던 음식을 잘 먹는지, 쉴때는 뭘 하는지조차 모른다. 최소한 그런것 정도는 알아야 되는 거 아닌가? 처음에 그녀에게 사귀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 음식점에서.
관 둬. 출근해야 돼. 옷을 바로잡고 그녀는 거울을 보았다.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얼굴이 좀 환해 보인다. 친구들은 섹스를 하고 나면 호르몬 분비가 제 주기를 찾아서 피부가 좋아진다고 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 말을 믿은 적이 없었는데, 어쩌면 진짜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미쳐. 그만 좀 해.”
자기머리를 쥐어박은 다음 포스터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녀는 재킷을 집어들고 나섰다.
수민은 점심때쯤 전화를 했다.
“아픈 건 좀 어때?”
사무실에 혼자 있는데도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에 그녀는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괜찮아. 수민씨는?”
“난 안 아픈데.”
그가 낄낄거렸다. 서은은 입술릉 내밀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뜻이 아니라 뭐 하고 있냐구.”
“아, 친구들이랑 만날 일이 있어서.”
전화를 통해서 어쩐지 영어는 아닌 듯한 외국어가 들려온다. 그녀가 인상을 조금 더 찌푸렸다.
“외국인 친구?”
“어, 뭐 외국인도 있고 아닌 애들도 있고. 저녁에 몇 시에 퇴근해?”
“6시.”
“데리러 갈게. 병원 주차장에 차 대 놓고 기다릴테니까 끝나면 전화해.”
핸드폰을 내려놓고서 서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국인 친구라, 그녀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하긴, 모델 중엔 외국인들도 있겠지. 홈쇼핑에 나오는 외국인 여자 속옷 모델들 많잖아.
갑자기 언뜻 불안감이 들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질투였다. 그런 늘씬한 외국인 여자들을 만나보면 역시 실수했다는 생각이 드는 거 아닐까? 그녀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나이까지 많은 여자랑 만나느니 차라리 예쁘고 어린 여자애들을 만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사무실 한쪽 벽에 있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어중간한 길이의 까만머리는 포니테일로 꼭꼭 묶었고 앞머리는 적당히 나이에 맞게 단정하게 옆으로 넘긴 모양새다. 아침에만 해도 얼굴이 좀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출근해서 몇 시간 일하고 나니까 도로 창백하고 피곤해 보이는 전형적인 의사 얼굴이다. 그나마 계속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환자들은 이렇게 뱀파이어 같은 얼굴인 줄 모를 테지. 화장은 좋게 말하면 보통이고 나쁘게 말히면 하나마나한 수준이었다. 안 할수 없어서 하긴 하지만 솜씨가 느는 건 영 느낄 수가 없다. 거기다가 옷은? 그러고 보니 어제 수민이 그녀에게 옷이 안 어울린다고 했던 게 떨올랐다. 오늘은 매일 입고 오던 정장을 어제 그가 망쳐놓는 바람에 잘 안 입던 치마와 블라우스를 꺼냈는데, 계절에도 맞지 않고 모양도 너무 유행에 뒤떨어진 것 같았다.
“도대체 왜 난 패션감각 하나도 없는거지?”
돈이 없는 건 아닌데, 백화점에 가면 가격표가 무서워서라기보다 뭘 어떻게 골라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제대로 옷을 살수가 없었다. 좀 센스가 있는 친구들을 꼬드겨서 함께 백화점에 가도 결국 한두 바퀴 돌다 보면 그녀가 먼저 지쳐서 친구에게 아무거나 사서 가자고 애원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점원들이 그녀를 위아래로 갈아보는 듯한 느낌도 싫어서 요즘은 홈쇼핑으로 옷을 주문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친구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뭔가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수민 때문이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해서. 나이 서른이면 좀 멋지게 꾸미고 다닐때도 되었다. 꾸미는 데에는 신경도 쓸 수 없던 치대 시절이 긑나자 친구들은 얼굴주름을 없앤다고 성형외과까지 가지를 않나, 화장품 하나조차 세심하게 골라 쓰는데 그녀는 운동을 꾸준히 하기를 하나, 화장품을 잘 골라서 스길하나, 무엇 하나 외모에 신경 쓰는 게 없었다.
“헛살았지, 이서은.”
고개를 흔들며 그녀는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서 앉았다.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나니 간호사가 노크를 하고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선생님, 여기 차트요. 2번하고 4번에 환자 대기중이고요.”
“저기, 정간호사.”
20대 초반의 간호사가 그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네?”
“어디 머리 잘 하는데 있는지 알아요? 머리를 좀 다듬어야겠는데 원래 가던 미장원이 영 아닌 것 같아서.”
원래 가던 미장원이라는 것도 애당초 없었지만 서은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잠시 입술을 오므리고 생각하던 젊은 간호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가는 디자이너 선생님 명함 드릴께요. 거기 싸고 괜찮아요. 압구정동인데 괜찮으시죠?”
서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간호사가 차트를 놓고 나갔다가 잠시후 다시 돌아와서 책상 끄트머리에 명함을 내려놓았다.
“제가 소개해서 왔다고 말씀하세요. 뭐 값을 깎아주는 건 아니겠지만 좀 더 잘 해 줄 지도 모르거든요. 저 거기 단골이라서.”
그녀가 방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정간호사가 몇 살이더라? 아마 수민과 비슷한 나이 또래일 것이다. 저 나이의 여자애들은 저렇게 화사하고 예뻐 보이는구나. 갑자기 10년쯤 더 나이를 먹은 기분으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런 건 아무 때나 부탁하세요.”
간호사가 사무실을 나갔다. 가운을 걸치고 나가려던 그녀가 잠깐 명함을 집어들고 앞뒤로 뒤집어보았다. 디자이너 선생님이라, 예전엔 그냥 미용사라고 불렀는데, 세상 참 많이 좋아졌으니까.
“이러니까 내가 초특급 보수파 우두머리 소릴 듣지.”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을 되뇌며 그녀는 혐오감 어린 한숨을 푹 내쉬고 차트를 들고 사무실에서 나갔다.
수민은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 옆에 기대서서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그를 보자 서은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 식으로 기다려 주는 남자는 처음이라서 그런 지도 모른다.
아니, 아예 남자와 이런 식으로 연애하는 자체가 처음이지, 예전 남자친구를 떠올리고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쩌면 그녀가 진짜 바보였는지도 모른다. 화이트 데이에 선물이라고는 츄파춥스 한 개 주는 걸 남자친구라고 믿고 있었으니.
“일 잘 했어?”
그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빙긋 웃얶다.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역시나 옆에 서니 그가 얼마나 큰지 느껴졌다. 고개를 기울이자 짧은 앞머리가 이마를 살짝 스친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고는 그녀가 그의 표정을 주저주저 쳐다보았다. 그가 빙그레 웃자 어쩐지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런 거 마음대로 해도 괜찮은 거구나. 그렇지?
“운동 갔다가 곧장 와서 머리가 좀 뻗쳤어. 이상해?”
“그게 이상하면 난 무슨 쓰레기장 뒤지다 나온 사람 같게?”
서은이 툴툴대자 그가 낄낄거리며 그녀의 어깨를 꽉 안은 다음 차문을 열어주었다. 어쩐지 공주가 된 기분으로 차에 타고서 그녀는 차를 돌아 운전석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았다.
“친구들이랑 있다가 운동 갔다가 오는 거야?”
“그 사이에 잠간 학원도 좀 갔다가 뭐 그랬지.”
“무슨 학원?”
그가 시동을 걸고서 주차장을 빠져나깟다. 서은은 눈을 반짜깅며 그를 보았다. 학원이라, 그녀가 그 나이 때 다닌 건 영어 학원 정도였다. 그나마 본과 올라가면서 그도 때려치웠지만.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아, 뭐 이것 저것.”
그가 얼버무리고서는 그녀를 돌아보고 빙긋 웃었다.
“저녁 어떡할까? 간단한 거 먹을까 아니면 집에 가서 밥 먹을래?”
집? 그의 집을 떠올리자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어제 일이 고스란히 떠오른 탓이었다. 수민이 낄낄거리며 기어에 올리고 있던 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 것도 안 할게. 아직 몸도 안 좋을 텐데, 뭘.”
그렇게까지 안 좋은 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또 뭔가 한다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기, 수민씨 집에 밥 있어? 아니면 우리 집 가도 되는데.”
“그럴까?”
그가 차선을 바꾸고서는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했다. 서은이 그를 힐끔 보았다.
“우리 집 가는 길 외워?”
“겨우 지난 토요일에 갔었잖아. 당연히 외우지. 집 예쁘더라, 아!”
그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그녀가 눈을 깜박였다. 수민이 그녀를 돌아보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 백화점에서 반지 보라고 했는데, 봤어?”
“어............잊어버렸어.”
맙소사, 어제 백화점 갔던 것도 기억이 아른아른하다. 엄청나게 오래 전 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수민은 마음에 안 드는 듯 미간을 좀 더 찌푸렸다.
“주말에 사자, 그럼. 이번 주말부터 백화점 세일 기간이니까 잘 됐네,”
잘 된 건가? 아직도 반지에 대해서 그녀는 마음을 정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수민이 싫은 건 아니다. 다만 너무 빠르게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서 겁이 났다. 이 모든 게 그냥 한 순간의 꿈이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는 금세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경비원에게 방문증을 받어 차에 붙인 다음 두 사람은 아파트로 올라갔다.
“저기, 집 좀 지저분해. 아침에 정신이 없어서.”
그녀가 황급히 먼저 들어가서는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옷가지들을 욕실 빨래바구니에 던지고서 침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수민은 느릿하게 뒤를 따라 들어와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득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깨닫고서 서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에게 말을 하는 것과 진짜 그의 포스터를 붙여놓은 것과는 전혀 별개의 일이다. 맙소사, 십대도 아니고 그가 어떻게 생각하겠어? 얼른 Ep! 그녀는 침대를 정리하다 말고 후다닥 벽으로 달려가서 포스터를 떼기 시작했다.
"어, 그거 내 포스터야? 어딜 떼? 그냥 둬, 그냥.“
그가 그녀의 뒤로 다가와서는 장난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등을 돌린채 그녀는 황급히 포스터를 떼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손은 훨씬 크고 튼튼했다.
“하지 마! 수민씨! 그냥 좀...............너무 창피하단 말이야!”
“탤런트나 영화배우 사진 붙여놓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데 뭐 어때. 내 포스터잖아, 괜찮아.”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대고 낄낄거리며 손에 힘을 주다가 갑자기 한 손으로 그녀의 양손목을 한꺼번에 잡았다. 갑작스럽게 그가 그녀의 팔목을 더 위로 당기자 그녀의 눈이 동그레졌다.
“아................”
왼손은 그녀의 팔을 머리 위로 벽에 대고 고정시키고 있고, 그의 오른손은 천천히 그녀의 옆구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다가 치마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블라우스를 빼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막혔다. 그의 얼굴에 예의 그 나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배, 배 안고파? 밥 먹어야..............”
“밥보다 이거 더 좋아. 당신이.”
블라우스 안으로 들어간 손이 배를 어루만진 다음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따뜻한 손이 닿는 부분마다 피부가 살아나는 것처럼 따끔따끔거렸다. 후아, 그를 밀어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느낌이 너무 좋았다, 게다가 그가 팔을 잡고 있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추행범도 아닌데 발로 밟거나 걷어찰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리고, 그리고.................좋은 걸. 몸을 바르르 떨며 그녀가 눈을 감았다.
“나한테 기대 봐. 응, 그렇게. 좀 더.”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녀가 고개를 젖혀 그의 가슴에 기댄 채 등을 활모양으로 휘었다. 젖가슴이 앞으로 나오며 그의 손을 애태우게 기다리고 있다. 긴 손가락이 느릿느릿 블라우스 아래서 춤을 추다가 브래지어 아랫부분을 가슴 위로 밀어 올렸다. 어느새 약간 곤드선 젖꼭지 위로 실크 불라우스가 보들보들하게 스친다. 그녀의 목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가 킬킬 웃었다.
“좋아?”
다 알면서 도대체 왜 묻는 거지? 꼭 창피하게 그녀가 직접 말해야 하나? 그녀는 눈을 질끔 감은 채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의 손에 가슴을 밀어붙이고 만져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아, 맙소사. 나 왜 이러지? 너무 밝히는 거 아닐까? 다른 애들도 다 나처럼 이런가? 친구들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물론 지금은 말고. 지금은 우선 그가 어떻게든 해 줬으면 싶었다.
“말로 해 봐, 어서, 어떻게 해 줄까?”
“아, 안 돼, 수민씨. 밥 먹는다고.....온 거잖아. 이러려고 온 게............”
“끝까지는 안 가. 당신 그럴 상태도 아니고. 하지만 맛만 보는 건 괜찮잖아.”
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팔목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차라리 그게 기뻤다. 따끔거리는 젖꼭지에서 정신이 분산되니까. 온몸의 피가 마치 가슴으로 몰리는 것 같다. 간지럽고 뜨겁고, 참을 수가 없다.
“마, 만져 줘, 수민씨. 만져 줘, 거기, 응?”
그녀가 엉덩이를 그에게 대고 문지르며 숨을 헐떡였다, 제길, 너무 하고 싶었다. 토요일에 그랬던 것 처첨 뜨겁고 커다란 그의 몸이 그녀를 채워주기를 너무나도 바랐다. 어제 그렇게 아팠던 건 어느새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저 뜨거운 열기만이 기억날뿐이었다.
“만져 줘? 이렇게?”
그의 손가락이 브래지어 아래로 튀어나온 젖꼭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그녀가 발작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고 신음을 내질렀다.
“조, 조금 더 세게, 조금만 더!”
“흐음, 이정도로는 성에 안 차? 그럼 안 되지. 너무 야한데, 이서은씨.”
그가 짖궂게 속삭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그녀의 엉덩이를 누르고, 등에는 뜨거운 그의 몸이 닿아있고, 바로 앞에는 싸늘한 벽이 서있다. 그의 손가락이 젖꼭지 끄트머리를 잡고서 약간 비틀었다. 가슴에서 다리 사이로 순식간에 열기가 전달된다. 뜨겁고 축축한 열기가 팬티를 적시자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심장이 너무 빠른 속도로 쿵쿵거린다.
“나, 나 정말로, 너무, 밝히나 봐, 수민씨, 나 어떡하지?”
숨을 헐떡거리며 그녀가 더듬더듬 말했다. 하지만 좋아서 참을 수가 없다. 그의 손가락 느낌이 너무 좋았다. 반대편 가슴이 그의 주위를 끌고 싶어하며 단단히 뭉쳤다. 그는 여전히 젖꼭지를 비틀고 잡아당기다가 앞뒤로 쓰다듬을 뿐이었다.
“밝히는 게 어때서? 아무하고나 한다는 것도 아니잖아. 우리 사이에서만 그러면 돼. 나한테만 흥분하면 돼.”
“하지만 수민씨가 이렇게 건드리기만 해도.......으응.................아!”
“건드리기만 해도 젖어? 응?”
짖궂어, 정말!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눈을 더욱 꼭 감았다. 차마 눈으로 볼수가 없다. 너무 야하고 너무 당황스러워서 현실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혼자 있을 때라면 비밀로 하고 엄어갈 수 있지만 그의 앞에서 이렇게 반응하면 다음데 도대체 어떻게 그의 얼굴을 본단 말인가.
“난 좋은데, 내가 당신을 이만큼이나 흥분시켰다는 의미잖아. 나 때문에 당신이 이렇게 쉽게 반응한다는 거 너무 좋아. 너무 마음에 들어. 이대로 끝까지 가버리면 어때? 밥맛이 좋아질 지도 몰라.”
그가 킬킬거리며 그녀의 목덜미에 살짝 이를 세웠다. 잘근거리는 그의 장난스러운 동작이 그녀의 온몸에 계속해서 파직파직 전류를 흘리는 느낌이다. 손가락이 젖꼭지를 아플 정도로 잡아당기다가 놓아준다. 왼손은 여전히 그녀의 팔을 머리 위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오른손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치마와 팬티스타킹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녀가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몸을 더욱 휘어 그에게 기댔다.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뜨거워. 확실하게 흥분했네. 빳빳하게 섰어. 꽤 커진 것 같은데, 그렇지?”
그가 그녀의 핵심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계속해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의 손, 그의 말,두 배의 흥분감이 그녀를 휘감고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든다. 흘러내린 꿀이 그의 손을 적시고 얆은 면을 흠뻑 젖게 만들었다.
“빨고 싶어. 여기 이거. 여길 빠니까 고양이처럼 앙탈을 부리며 소리 를 지르던데. 옛날에 고양이를 키웠는데, 가끔 심술부리고 삐질때 꼭 당신 같았어. 모른척 고개 돌리고 지나가다가는 멀찍이 떨어져서 내 동태를 살피지. 내가 다가가면 고개를 홱 돌렸다가도 쓰다듬어주지 않으면 실망해서는 도로 화내는 거야. 닥 당신 같아.”
그의 손가락이 부은 살점을 잡고서 살살 문지르다가 살짝 잡아당겼다. 그녀가 꺅 소리를 질렀다. 후들거리는 무릎이 체중을 유지 못하고 무너지는 순간 그의허벅지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와 벽에 고정시켜 버린다. 머리위로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도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장난감 인형처럼, 혹은 붙들린 노예처럼 그녀는 벽에 고정된 채 그의 손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어서. 어서 느껴봐. 얼른.”
손가락 하나로 계속 그 부분을 문지르며 그가 다른 두 손가락으로 여성의 입구를 살짝 벌리더니 느릿느릿 집어넣었다. 그녀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픈가? 아니, 아프진 않았다. 그의 몸이 갑작스럽게 들어왔을 때와는 다르다. 손가락은 천천히 한 마디 전진했다가 반 마디 물러나고, 다시 한 마디 반이 들어왔다가 반 마디 물러나는 식이다. 손가락이 들어올때마다 통로를 따라 흘러내리는 샘이 더더욱 불어났다. 그가 나직하게 속삭인다.
“가뭄이 들면 당신을 대신 쓰면 될 거야. 이렇게 출렁거리는 걸. 이런데도 빡빡해서 걱정돼. 다시 할때는 당신이 안 아플지 진짜 걱정이야.”
“아니, 아냐, 안 아파, 수민씨, 제발.........”
“지금은 안 돼. 지금은 이걸로 만족해.”
그의 손가락이 끝까지 파고든다. 엄지손가락으로 잠시 도톰한 부위만 스다듬고 있던 그가 천천히 손가락을 앞뒤로 음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리듬에 맞춰 숨을 헐떡이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 역시 그녀의 움직임과 보조를 맞추어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 다시 넣는다. 안에서 뭔가가 무럭무럭 자라는가 싶더니 그녀를 삼킬 듯 커져간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고 불덩어리는 더욱 거대하게 자라서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다. 그녀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팔을 붙든 그의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느껴져? 내가 느껴져? 갈 것 같아?”
그가 계속해서 거친 목소리로 묻는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기만 해서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에 대고 계속해서 엉덩이를 흔들며 그녀가 노래 같은 신음을 흘렸다. 손가락이 깊숙이 파고들 때마다 몸 안쪽이 짜릿하다.
“하늘 끝까지 올라가 봐. 당신이 폭발하는 걸 보고 싶어. 당신 비명을 듣고 싶고, 절정에 도달해서 내 손에 쾌감을 쏟아내는 걸 느끼고 싶어. 어서, 어서!”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통로를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었다. 헐떡거리는 자신의 숨소리와 그의 거칠어진 목소리, 몸 안팎을 오가는 손가락이 만드는 묘한 소리가 그녀의 귀를 꽉 채웠다. 가슴이 답답하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모든 게 전부 다 현란한 만화경처럼..........
박살났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등을 기대고 늘어졌다. 몸에서 무언가가 질퍽하니 흘러내려 그의 손을 적시는 게 느껴졌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더 이상 그녀를 지탱해주지 못하고 꺾여버렸다. 다행히 바닥으로 미끄러지는 대신 팔을 잡은 그의 손과 다리에 있는 그의 허벅지 덕에 그녀는 그에게 기대고 있을 수 있었다.
천천히 손을 그녀의 팬티 안쪽에서 뺀 다음 수민이 자신의 젖은 손을 보았다. 뺨에 닿은 그의 입술이 미소를 그리는 게 느겨졌다.
“안 한다고 했으면서”
그녀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수민이 씩 웃었다.
“넣지는 않았잖아. 하지만 어제 말한 대로 당신 그 부분은 자꾸 늘려줘야 해. 그러려면 계속 뭔가 해 줘야 한다고.”
그녀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기운은 하나도 없는데 어째서 얼굴만 붉어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가 그녀를 살짝 일으켜주고 팔을 놓자 그녀는 겨우겨우 균형을 잡고 섰다. 아직 팬티는 뜨거웠지만 몸이 더 뜨거워서 차갑게만 느껴졌다. 속옷이랑 옷을 갈아입어야 할 텐데. 하지만 원룸 아파트에서 옷을 가아입을 곳이라고는 화장실밖에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호흡이 좀 가라 앉자 그녀가 몸을 뗐다. 그 때 수민의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점심을 제대로 안 먹었던가 봐.”
그가 피식 웃으며 그녀를 돌려세웠다. 서은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그의 시선을 피한 채 그를 돌라 주방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수민이 그녀를 잡고서 꼭 끌어안았다.
“창피해 하지마. 당신이 그러면 내가 뭔가 잘못한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아. 싫었어?”
아니, 오히려 너무 좋아서 창피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아까 말했던 대로 아무하고나 그런 건 아닌데. 그러니까 창피해 할 필요가 없는 걸까? 잘 모르겠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고서 가만히 있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너무.......내가 자꾸 야한 생각만 하고 야한 것만 바라는 것 같아서 창피해.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아서. 하지만 수민씨 생각만 하면 자꾸만......”
“야한 생각이 뭐 어때서? 그렇다고 지나가는 사람을 닾치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당신은 생각이 들어도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도 아니고, 가끔은 행동을 좀 해 봐도 돼. 길거리에서 남자를 고를 필요는 없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 대쉬해 볼 수도 있는거라고. 잘 되면 같이 잘 수도 있고.”
문득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나 말고는.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절대로, 절대로 다른 놈한테 눈길도 주지마. 알겠지?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야한 거, 내가 다 해 줄수 있어. 그러니까 절대로 다른 놈 쳐다보면 안 돼. 약속이야.”
“설령 내가 쳐다본다고 뭐 누가 나한테 다가오기라도 할까 봐? 그런 이상한 사람은 수민씨 뿐이야.”
그녀가 입술을 비죽 내밀고 그를 돌아보았으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인상을 더욱 찌푸릴 뿐이었다.
“당신 귀여워, 정말이야. 이상한 병신 하나 만나서 데는 바람에 겁을 먹고 있어서 그렇지,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발치에 드러누울 남자 여럿 있을 걸. 나한테야 이득이지만...........”
수민이 한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그녀도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는 수민씨도 사실 처음 같이 저녁 먹었던 날 나 별로 마음에 안 들어했던 거 알아. 사실 그래놓고는 왜 수민씨가 나 따라나왔었는지 잘 모르겠어.”
수민이 잛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고는 찌푸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먼저 대쉬했잖아. 그래도 의심이야?”
“응. 사실 수민씨 정도면 그 때 클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무여자나 고를 수가 있잖아. 나보다, 음, 더 예쁘고, 저기, 더 어린애로.”
“어린앤 싫어. 덜 떨어지고 촌스럽고 멍청해.”
덜 떨어진 거나 멍청한 거나. 하지만 촌스럽다는 말은 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 옷을 한 번 내려다 본 다음 서은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랑 그런 데 있는 애들이랑 누가 더 촌스러운데?”
“걔네들 한테는 당신한테 있는, 그, 뭐랄까, 그런 게 없어! 내 말 믿어. 당신이 옷차림이 좀 이래서 그런 거지, 훨씬, 백 배는 낫다고.”
빈말이겠지만 그래도 진심인것처럼 그녀를 똑바로 보고 격하게 말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서은은 한숨을 삼키고서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알았어. 어쨌든 밥 차려줄게.”
그녀를 빤히 응시하던 수민이 고개를 흔들며 돌아섰다.
“안 믿으면 뭐 나만 좋지, 그런...............”
갑자기 그의 말이 뚝 끊겼다. 문득 그가 포스터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서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런, 저거 뗀다고 해 놓고선 삼천포로 빠지는 바람에 잊어버렸잖아!
“저기, 그거 떼려고......................”
그녀가 스쳐 지나가려는데 그가 그녀의 팔을 덜컥 잡았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손길에 그녀가 움찔했다.
“내 포스터라고 그랬던 거, 저거 이야기였어?”
그의 눈은 포스터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서은은 눈을 깜박이고 포스터를 돌아 본 다음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똑같은 턱선, 똑같은 눈매, 포스터 속에서 막 튀어 나온 것 같은 그가 그녀의 앞에 서 있다. 왠지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응, 응. 저거.”
“언제 구했어?”
“어.........2년쯤 됐나? 많이 낡았지?”
그녀가 팔을 잡아 빼려 했지만 그는 잡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처럼 그저 꽉 붙들고 있을 뿐이다. 쳐다도 보지 않는다. 포스터만 응시할 뿐이다. 왠지 이상한 느낌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저거 마음에 안 드는 포스터였어?”
불현듯 정신을 차린 것처럼 그가 그녀를 퍼뜩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팔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재빨리 손을 뗐다. 욱신거리는 손목을 다른 손으로 살살 문지르며 그녀가 그를 보았다.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새카만 눈썹과 눈동자가 도드라지게 눈에 뛴다.
“저거, 나, 어, 일이 생각났어. 미안해. 나 지금 가야 돼.”
그가 홱 돌아서서 문으로 향했다. 멍하니 서은은 그의 뒷모습만 쳐다보았다. 뭐가 문제지? 포스터를 다시 돌아본 다음 그녀는 현관에서 다급하게 신발을 신는 그에게 다가갔다.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그가 식탁 옆에 내려놓았던 재킷만 들어올려 건냈다.
재킷을 받아들고 팔에 겇친 채로 그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눈만 번뜩인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화가 난 것도 같고, 조금은 울고 싶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왜? 이해할 수가 없다.알 수가 없다.
“전화할게, 응?”
서은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반쯤 내밀다가 갑자기 툭 떨어드리고는 화난 표정으로 나가버렸다.
“남자는 도대체 이해를 못 하겠어.”
닫힌 문을 쳐다보며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고 중얼거렸다. 하긴,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인지도 모르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다가 문득 벽에 걸린 포스터를 보았다. 언제나처럼 담배를 물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가 비스듬하니 서 있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노려보다가 그녀는 모서리의 스카치테이프를 살살 긁어내서 조심조심 포스터를 뗀 다음 침대 밑에 집어넣고 한숨을 내쉬었다.
8.
몇 년 만에 머리를 손질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짧아져서 시원하기도 하고 가볍기도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손질할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다. 몇 번이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서은은 버스 정류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벌써 주말이다. 그 동안 수민은 딱 두 번 전화를 걸었다. 어째서일까? 포스터를 보고 가 버린 다음부터는 마치 정이 떨어진 것 같았다.
그녀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어쩌면 떨어진 건지도 모르지. 그런 거나 보고서 환상을 품는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나 진짜 바보다.”
한 손으로 패셔너블하지만 불편하게 자꾸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녀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완전히 속아넘어간 모양이다.
“몇 번 가지고 놀고 나니까 이제 지겨워진 모양이네. 그런 건가.”
스스로가 너무 바보같아서 화가 난다거나 가슴이 아픈 게 아니라 그저 웃음이 나왔다. 우와, 이러자고 지금껏 아무하고도 관계를 안 가졌던 건가? 차라리 전 남자친구랑 미리 자는 편이 나았겠다. 수민씨가 말했던 것처럼, 안 했다고 해서 가슴이 덜 아픈 것도 아니니까.
그럼 수민씨랑은? 했으니까 그냥 그걸로 만족스러운 건가?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쌍쌍이 팔짱을 낀 사람들이 지나간다. 근사하고 늘씬한 여자들이 어깨가 드러나는 멋진 옷을 입고는 남자들과 웃으며 지나가고 있다.
‘걔네들한테는 당신한테 있는, 그, 뭐랄까, 그런 게 없어! 내 말 믿어.’
“거짓말쟁이”
나직하게 내밷고서 그녀는 핸드백을 어깨로 추켜올린 다음 씩씩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 남들 다 아는 거 나도 알게 됐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야. 결혼 할 때 남편이 물어보면? 그럼 앚아주 나쁜 경험을 했다고 눈물 몇 바울 떨구면서 말하지, 뭐. 내가 못할 줄 알아? 숙맥일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라구,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아니, 그런 걸 물어보는 남자 따위랑은 결혼 같은 거 안 해. 나도 스스로를 존중할 줄 아는 현대 여성이라고.
“젠장, 나이가 서른이야!”
버럭 소리를 지른 다음에야 그녀는 지나가며 자신을 힐끔거리는 사람들을 깨닫고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한숨을 내쉬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가 문득 길 건너편의 대형 피트니스 클럽에서 눈에 익은 남자가 나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집중해서 쳐다보았다. 지나가는 차들 때문에 자꾸만 가려지지만 저 키나 덩치, 머리모양이 아무래도............
수민이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가 곧장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몸이 화끈 더워졌다가 차가워지고,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당장 길을 건너가서 왜 연락 잘 안 했냐고 물어봐? 헤어지고 싶은 거냐고, 한 번 했으니 이제 재미가 없어졌냐고 다그쳐? 아니, 그건 너무 자존심이 상한다. 매달리는 것 같잖아. 그냥 스쳐 가는 척 우연히 만난 척하고서 인사만 하고 지나가? 그래서 그가 붙잡지 않으면 그걸로 끝난 거라고 생각해야 되나?
아냐, 아냐. 그냥 모른 척하는 편이 나아. 그냥 안 보는 편이 나아. 그러면 차라리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전화가 울릴 때마다 기대하긴 했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직접적으로 가슴 아픈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함께 있는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보고 싶었다. 예전에 클럽에서 본 것처럼 늘씬한 미녀일까? 역시 거짓말을 해서 나랑 한 번 자고 싶었던 거야? 반지 이야기 같은 것도 전부 다 날 꼬시기 위한 사기였던 거야? 그냥 그랬던 거야?
버스 정류장 옆의 횡단보도에 서서 그녀는 같은 방향으로 걸어오는 그를 보았다. 누군가와 함께 있긴 있는데 사람들과 도로의 차들로 자꾸만 가려져서 누군지 확인할 수가 없다. 심장이 고통스럽게 욱신거리며 쿵쿵 가슴을 때렸다.
문득 횡단보도 건너편을 지나가던 그가 고개를 들고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날 보는 건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알아보지 못할 거야.
알아보지 못할 거야.............
그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순간 드러났다. 까만 옷을 입은 남자다. 얼굴은 정확히 알아 볼수 없지만 수민만큼이나 키가 큰 남자였다. 갑자기 가슴속에 꽉 메여있던 덩어리가 스르르 녹았다. 여자가 아니다. 여자랑 같이 있던 건 아니었다. 최소한.
그렇다고 해서 너랑 계속 만날 거라는 뜻도 아니잖아, 안 그래? 가슴 한 구석의 심술궂은 부분이 속삭였다. 수민씨는 어려. 얼마든지 너보다 괜찮은 여자들을 만날 수 있다고, 게다가 모델이잔아. 그럴 기회도 많아. 언제까지 나이 들고 별 볼일 없는 널 만나고 있을 것 같아? 시간 문제야. 차라리 지금 헤어지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네 인생에도 더 나을 거고.
파란 불이 켜지고 주위 사람들이 길을 건너간다. 사람들 속에서 툭툭 이리저리 밀쳐지며 그녀는 눈물을 삼켰다. 그를 좋아하는 걸까? 뭘 아는데? 단지 몇 번 귀엽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걸로 충분해? 아무 것도 모르잖아. 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잖아.
“하지만.........같이 있으면 알게 될 기회가 있잖아. 지금 헤어져버리면...........”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럴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저 한 순간의 일탈로 평생 가슴에만 남을 것이다. 침대 밑의 포스터와 함께.
그가 올때를 대비해서 침대 시트도 예쁜 걸로 바꾸고, 늦게 퇴근하는 날도 집안 청소 열심히 했었는데, 속옷도 예쁜걸로 골라 입었는데
친구들은 처음 연애하는 십대 같다고 말 할것이다.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단계를 거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그러고 싶었는데. 데이트를 하고, 웃고 떠들고, 예쁜 속옷을 보여주고, 그에게 사랑 받고 싶었다. 다시 귀엽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이렇게 나이 먹은 주제에.
“여기서 뭐해?”
그녀가 눈을 깜박이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수민이, 목깃을 풀어헤친 반팔 티셔츠에 까만 면바지를 입고 자연스럽게 머리를 넘긴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그게, 그냥 지나가는 중인데, 수민씬............”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렇게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했는데 눈물이 툭 굴러 떨어졌다. 이 바보,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그녀가 홱 돌아섰다.
“저기, 저기, 나 바쁜 일이 있어서. 미안해, 수민씨 보고 놀라서. 그냥, 미안해. 얼른 도로 가던 데 가.”
“무슨 소리야? 머린 언제 잘랐어? 내가 데리고 가서 잘라주려고 했는데. 왜 그래? 피곤한 일 있어?”
그가 그녀의 팔을 잡고서 끌어당겼다. 한 손으로 눈을 문지르고서야 그녀는 마스카라가 번졌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는 짜증스러운 신음을 억눌렀다.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지만 이제는 갑자기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자기가 뭔데 멋대로 전화하다 안 하다 그러면서 사람 속을 뒤집는 거지? 왜 멋대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냐고!
“교활해.”
그녀가 홱 돌아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수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뭐?”
“교활하다고. 멋대로 남의 인생에 뛰어들어서는 이런저런 거나 가르쳐 놓고서. 일주일도 안돼서 정 떨어졌으니 연락 끊는 거야? 원래 그렇게 제멋대로야? 좋아, 그럼 나도 필요 없어. 나도 즐길 만큼 즐겼으니까 그냥 깔끔하게 헤어져. 왜 사람을 갖고 놀아? 헤어지고 싶으면 차라리 그렇게 쌈박하게 말하면 되잖아.”
“누가........누가 헤어지고 싶대? 누가? 내가? 왜 그런 소릴 하는데? 내가 언제 헤어지자고 했는데?”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눈물이 고여 있는 눈을 다시 문질러 닦고서 서은은 가능한 한 무서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갑자기 우리 집에서 나가버리더니 연락 안 한 이유가 뭔데?”
“했잖아! 어제도 했고 그 전날도 했고. 당신도 아무 말 안 했잖아.”
“당연하잖아! 그럼 정 떨어진 거냐고 전화로 물어봐?”
“누가 정이 떨어져? 그냥 잠깐 좀 바빴단 말이야!”
“왜 바쁜데? 클럽에 가서 여자 만나느라?”
갑자기 수민의 표정이 변했다. 그가 그녀의 팔을 놓고 팔짱을 끼더니 그녀를 한 참 쳐다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질투해? 내가 연락 안 해서 겁났어?”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런 소리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게다가 사람 많은 압구정도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사생활에 데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으니, 미쳤나 보다. 그녀가 돌아서서 도망치려고 하는데 그가 재빨리 그녀를 뒤에서 붙잡아 자기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못 놔주지. 이렇게 친절하게 내 눈앞에 나타나 주셨는데. 며칠간 참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이젠 안 되겠어. 당신을 가져야겠어.”
그녀의 귓가에 대고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하고 다리 사이가 뻐근해졌다. 아, 세상에. 그의 말만 들어도 온몸이 달아오른다. 기대감으로 젖가슴이 묵직해졌다.
야한 것도 괜찮다고 그는 말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창피하기만 했다. 고개를 저으며 그녀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싫어, 저리 가. 수민씨랑 얘기 안해. 필요 없어.”
“거짓말쟁이. 내가 보고 싶었으면 왜 당신은 먼저 연락 안 하는데? 이서은 약았어.”
그, 그런가? 그녀가 먼저 연락할 수도 있는 건가? 하지만 왠지 그녀가 먼저 연락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가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바쁠수도 있고....... 문자 메시지라도 보내 볼 걸 그랬나?
어쩐지 미안한 마음에 그녀가 발버둥치던 걸 멈추었다. 수민도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그녀를 놓으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갑자기 힘을 주고 그녀를 꼭 안았다. 그녀가 돌아보려고 하는데 그의 한손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 서은은 놀라서 눈 위에 덮인 그의 손을 붙잡았다.
“수민씨? 왜 그래?”
“뭐 하는 거야, 고수민? 누구야?”
낯선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꼭 눌렀다. 허리에 감긴 팔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여자친구. 신경 꺼.”
“어떻게 신경을 끄냐? 우리 막내가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구경 좀 하자. 응?”
웃음기 섞인 목소리. 막내? 그의 형인가? 형이 있나 보네. 궁금해서 온몸이 뒤틀릴 지경인데도 수민은 손을 치우지 않았다. 그의 형 앞에서 그를 망신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발뒤꿈치로 그의 발을 꾹 밟았다.
수민이 나직하게 윽 소리를 내더니 경고조로 눈을 가리고 있던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빨리 꺼져, 좀! 나 바쁘니까.”
“너무하다. 우리 밤비노. 형님은 가슴이 아파. 이따 늦을 거니, 그럼?”
“안 들어갈 거니까 제발 좀 꺼져!”
“안보는 사이에 입버릇만 험해져서는. 그럼 나중에 연락할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때쯤에야 그가 그녀를 놓아주었다. 서은은 인상을 찌푸리고 그를 돌아보았으나 그의 표정이 하도 울그락불그락해서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을 깨달은 듯 그가 애써 표정을 바꾸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기서 만난 김에 백화점에라도 갈까? 아니면 점심? 어느 쪽이 좋아?”
“형제가 몇이야, 수민씨는?”
수민은 잠시 눈을 깜바깅다가 고개를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도 그에게 손을 잡힌 채 옆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 걸었다.
“형이 둘 있어.”
“우와, 그럼 삼형제냐? 좋겠다. 난 형제 있는 애들이 늘 부럽던데. 싸웠다 어쩐다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재미있잖아.”
“글쎄.”
그의 목소리가 하도 퉁명스러워서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슬쩍 올려다보았을 때 그는 다시 평소처럼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의 일주일만에 보니까 좋네. 당장이라도......덮치고 싶어.”
그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기울이더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젠 거기 안 아프지?”
‘거기’ 가 어딘지 깨닫자 그녀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도대체 이 남자는 말을 해야 할 장소를 못 가린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혹시나 들었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녀가 그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
“뭐 어때? 간단히 먹을 거 사서 당신 집에 가자.”
“제멋대로야, 정말.”
“그래서 내가 좋은 거 아니야?”
그가 히죽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대답대신 그녀는 다시 그의 옆구리만 세게 때렸다. 수민은 낄낄대며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응, 흐응, 그만 해, 수민씨, 그만..............나 더 못 하겠어. 아!”
그녀의 종아리에 힘이 바삭 들어갔다. 그가 고개를 기울이더니 그녀의 종아리에 입을 맞추고서 살짝 깨물었다.
“좀 더. 조금만 참아 봐! 할 수 있어. 엉덩이 좀 더 들어.”
“아, 못 해. 못 하겠어!”
그의 어깨 위에 걸쳐져 있는 그녀의 다리는 마치 지나치게 운동을 했을 때처럼 욱신거렸다. 손으로 그녀의 한 쪽 다리를 잡고서 다른 손은 그녀의 머리 옆으로 침대를 짚고 그가 계속해서 앞뒤로 허리를 움직였다. 들려 올라간 그녀의 엉덩이는 그가 들어왔다 나갈때마다 박자를 맞추어 들석인다. 힘아라고는 남아 있지 않는데 그 부분만 알아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뱃속이 바싹 조여들더니 지난 몇 시간 동안 수십 번은 맛보았을 감각이 솟구치기 시작했다.여성이 그의 몸을 꼭 조이자 그가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땀에 젖은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그녀가 그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지난 몇 시간 동안 겨우 두 번째이긴 하지만, 시간만 따지면 내내였다. 그는 지치지도 않고 그녀의 몸을 탐했고, 그녀에게도 그의 몸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온몸,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키스하고 핥고 깨물었고, 키스마크가 뭔지 알려준다면서 그녀의 가슴에 세군데나 자국을 남겨놓고 만족스러운 듯 낄낄거렸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손과 입으로 내내 괴롭히고, 흘러넘친 그녀의 정수가 다리 사이부터 허벅지까지 완전히 적시고 나서야 만족한 듯 얼굴을 뗐다. 열에 들뜬 그녀가 거의 울면서 그에게 애원하자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을 시켰다. 그의 몸에 콘돔을 끼우는 것. 단단하게 일어선 그의 남성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팍까지 붉어지는 그녀가 그 부분에 손까지 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날 만져보고 싶지 않아? 그는 그녀를 어르고 꼬시고 결국엔 그녀 내부의 욕망에 무릎 굻게 만들었다. 손 끝에 닿는 그의 몸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했고, 책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보는 건 난생 처음인 남자의 몸은 너무나도 신기했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결국 킬킬대자 그 역시 낄낄거리고서는 그녀의 손에서 콘돔을 빠앗아 재빨리 착용하고서 그녀의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저번 같지는 않았다. 그는 너무나도 느리게 안으로 진입하다가 뒤로 빠지고, 다시 안으로 진입하다가 뒤로 빠졌다. 수십번, 마치 수백 번처럼 느껴지는 움직임에 그녀가 다리를 바둥거리다가 그의 허리를 감싸고서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들어올려 그를 맞아들였다. 그는 신음하고 땀을 흘리고 주름살이 패일 만큼 얼굴을 찌푸렸으나 속력을 높이지는 않았다. 결국 그녀가 다시금 애원에 애원을 거듭하고, 참다못해 손으로 그의 남성을 잡고 안으로 끌어들이는 순간 그 역시 포기하고 말았다.
그게 첫 번째였다. 그리고 두 사람 다 깜박 잠이 들었다가 20분쯤 후에 깨서는 두 번째를 시작했다. 물론 수민이 먼저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도 조금 더 망설임 없는 손길로 그를 만졌다. 단단한 가슴,근육이 물결치듯 움직이는 등, 그리고 만지는 느낌이 너무나도 좋은 그의 엉덩이. 허벅지에서 한참 동안 손을 떼지 못하자 그가 낄낄대며 그녀에게 변태라고 말했고, 토라진 그녀가 입술을 쭉 내밀고 돌아눕자 재빨리 엎드리게 만들고 한참이나 그녀의 엉덩이 위에서 장난을 쳤다.
이번엔 아까보다는 조금 빨랐다. 새 콘돔을 끼고서 양손으로 그녀의 무릎 아래를 잡은 다음 그녀의 다리를 한껏 들어올려 그의 어깨에 걸친 다음 그가 몇 번의 움직임으로 그녀의 안을 파고들었다. 조금 아프긴 했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꽤 기분 좋은 아픔이었다. 나 변태가 맞긴 맞나 봐, 그녀는 속으로 생각하며 그에게 움직임을 맞추었다.
하지만 그건 거의 한 시간 전 일인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10여분 밖에 안 된 건지도 모른다. 남자의, 음, 그 상태는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는 정말로 지치지도 않는 듯 계속해서 그녀의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두 번 절정에 올랐고, 또 두 번 정도 절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눈앞이 하얘지는 쾌감을 맛보았다.
“수민씨이......나, 이제, 이제는 더는 못 하겠어, 그만.........”
“당신은 가만히 있으면 돼. 이게 다 앞으로를 위해서 당신 몸을 늘려좋기 위한 연습이라까.”
그가 웃으며 말하려 했지만 그 역시 참는 게 꽤나 고통스러운 듯 미간이 찌푸려져 있고, 다리가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어서 그녀의 몸은 그의 공격 앞에 완전히 무력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욱신욱신 조여드는 아랫배의 느낌에 그녀가 눈을 감고 신음했다.
“안 돼, 이제, 나................”
그녀의 팔이 그의 목을 감고 끌어당겼다, 그가 양손으로 그녀의 무릎을 잡고서 어깨에서 내리며 자신의 몸 양쪽으로 벌린 다음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얼굴은 뜨겁고 축축했으며 머리까지 푹 젖어 있었다. 다른 남자에게서 나는 땀냄새는 역겹기만 했는데 그의 땀냄새는 어째서인지 중독될 것처럼 좋기만 하다. 숨을 들이키며 그녀는 몸의 긴장을 풀려고 했으나 몸은 제멋대로 부글거리다가 결국 폭발했다. 다리 사이에서 다시 한 번 사랑의 결실이 흘러내리는것을 느끼고 그녀가 애처롭게 흐느꼈다.
“당신이 느낄 때마다 너무 좋아. 좋아서 미칠 것 같아. 당신이 치고야, 내가 지금껏 만났던 어떤 여자애들보다도 당신이 훨씬 좋아. 훨씬, 훨씬..............”
그가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그녀의 안으로 거칠게 파고들었다. 그녀가 헉 하고 몸을 휘는 순간 그가 으르렁거리며 절정에 올랐다. 그의 몸이 그녀의 안에서 절정에 오르는 느낌은 대단히 기묘했다. 좁은 통로 안에서 더욱 커지는 것 같은 남성, 예민해진 내벽을 문지르는 라텍스의 질감, 그리고 긴장이 풀리며 그녀의 위로 늘어지는 그의 무거운 몸, 그녀가 팔로 그를 끌러안은 채 눈을 감고서 헐떡이며 호흡을 골랐다.
“이대로 있고 싶어, 젠장.”
그가 투덜거리며 그녀의 품에서 떨어졌다.ha에서 그가 빠져나가는 느낌에 그녀가 바르르 떨었다. 여전히 뜨거운 그의 눈길이 그녀의 몸을 흝다가 다리 사이에 멎었다.
“이런 생각 전에 해 본 적 없는데..............”
그가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지친 얼굴로 그녀가 그를 쳐다보았다.
“응?”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방탕하게 벌어져 있는 그녀의 다리 안쪽에 쪽 하고 키스한 다음 그가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햐T다. 걸어갈 때마다 근사하게 움직이는 그의 등과 엉덩이 근육을 보며 그녀가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고 간신히 다리를 오므렸다.
그가 돌아올 무렵 그녀는 어떻게 간신히 이불까지 덮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옆으로 올라와서는 팔베개를 해주었다. 남의, 아니 그의 팔베개를 하고 있으면 왠지 굉장히 기뻤다. 그의 어깨에 편안하게 고개를 기대고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포스터 뗐네.”
그가 문득 말을 하는 바람에 그녀가 눈을 떴다. 침대 맞은편 벽에 포스터를 붙였던 자리가 하얗게 되어 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수민씨 가고 나서 곧장.”
“왜?”
그녀는 눈을 깜박이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이젠 더 필요 없으니까.”
“내가 있어서?”
그녀가 얼굴을 약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풀어지며 나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종이조각보다 내가 훨씬낫지? 진짜 내가?”
얼굴이 더 빨개지는 느낌에 그녀가 주먹으로 그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꼭 말로 시키는 이유가 뭐야?”
“말로 들으면 좋으니까. 머릿속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말로 해야 알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창피하단 말야. 그녀는 눈을 흘기고서 다시 그에게 기댔다. 잠깐 그녀의 어깨만 어루만지고 있다가 그가 조용히 말했다.
“정말로 난 잘 모르겠어. 말을 안 하면 몰라. 물론 섹스하는 동안엔 당신 반응을 알 수가 있지만, 그래도 당신이 싫다고 자꾸 그러면 내가 뭘 잘못 생각하는게 아닌가 싶단 말이야. 그래서 계속 물어볼 수밖에 없어. 당신이 사실은 좋다고 말할때까지.”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원래 여자는 싫다고 하고, 남자는 상대의 반응을 알아서 읽어야 되는게......
당연히 아니지. 서은은 인상을 찡그렸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말 안 해도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생각일까?
한숨을 내쉬고 그녀가 그의 어깨에 고개를 좀 더 편안하게 기댔다. 어깨에 닿아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 느낌이 너무 좋다. 가물가물 잠이 들 듯 말 듯 한데 갑자기 그가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전화 자주 안 해서 미안해. 형이 오는 바람에 내내 바빴어."
눈을 문지르고서 그녀가 그를 보았다.
"형이랑 사는 거였어? 그 집에서?"
"응."
"뭐 하는데 이런 시기에 여행을 갔다 와, 수민 씨 형은?"
그가 살짝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녀를 좀 더 꼭 안았다.
"외국에서 공부해. 지금은 잠깐 들어온 거야."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럼 여행이 아니잖아."
대답을 피하는 것처럼 그가 다시 어깨를 으쓱인다. 그녀가 몸을 굴려서 엎드리고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수민이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서은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 수민 씨? 왜 그래?"
"그런 거 없어."
"그런데 왜 눈을 피해? 날더러 눈 피한다고 뭐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그가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를 쳐다보았으나 금방 도로 눈길을 돌리고는 나직하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녀가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왜 그래, 왜?"
"형이 당신 보는 거 싫어! 쓸데없이 집적거릴까 봐."
서은은 눈을 깜박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수민의 얼굴이 붉어지고 인상이 험악해졌다.
"어머, 수민 씨, 기분은 참 좋은데, 음, 수민 씨 형이 도대체 날 왜 집적거리겠어? 생각을 해 봐. 수민 씨도 나 처음 만나러 온 날 안 좋아했잖아. 내가 무슨 퀸카인 양 대접해 주는 거 좋긴 한데, 사실 쓸데없는 걱정이야."
"쓸데없지 않아. 솔직히 처음에 좀 실망했던 거 사실이지만, 금방, 아주 금방 당신이 특별하다는 거 알았다고. 나 같은 놈이 그런 걸 알 정도면 형은 더 빨리 알 거야."
그가 부루퉁하니 말했다. 서은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응시하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형은 지금 무슨 공부해?"
"그건 왜? 우리 형한테 관심 있어?"
"수민 씨 형이잖아. 큰 형이야, 둘째 형이야?"
"둘째 형은 전문연구요원으로 수원에 연구소에 있어. 아까 그건 큰 형."
그러고 보면 수민도 아직 군대는 안 갔을 것이다. 그의 쇄골 부근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녀가 고개를 기울여 그를 보았다.
"큰 형이랑 몇 살 차이인데?"
"8살."
"와, 많이 차이나네. 그럼...... 나보다 나이 많네?"
그녀가 반색을 하자 그가 인상을 조금 더 찌푸리고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래서 뭐, 나이 많은 남자한테 가고 싶어?"
이번엔 서은이 인상을 찡그리고 그를 아플 정도로 쿡 찔렀다.
"도대체 왜 그래? 내가 언제 수민 씨 형한테 관심 있다고 그랬어?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이야. 왜 자꾸만 쓸데없는 소리 하고 그래? 나 그렇게 바람둥이 아니야."
그녀의 화난 얼굴을 쳐다보다가 그가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꼭 조이고 있던 팔에서 힘이 조금 빠진다. 그녀가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난 참 이해가 안 가. 수민 씨가 왜 그러는지. 나야 뭐, 수민 씨 주변의 여자들이 예쁘고 늘씬하고 그럴 테니까 질투할 수밖에 없지만, 내 주위에 있는 거라고는 배 나온 치과의사들 뿐인데,그나마도 걔네들도 나 싫어하다구. 뭐 나도 치과의사 따윈 싫지만.“
“당신은 자기가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제 눈에 안경이라더니.”
그녀의 말에 그가 킥킥 웃고서 그녀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고는 앞뒤로 천천히 움직여 자신의 몸으로 그녀의 가슴을 자극했다. 아까 내내 그에게 시달려 아직도 욱신거리는 끄트머리가 쓸리자 그녀가 나직한 비명을 지르고 그의 어깨를 때렸다.
“하지 마! 지금은 못 하겠다니까.”
“알았어, 알았어.”
“섹스광이야, 수민씬.”
그녀가 눈을 흘겼으나 그는 예의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안은 채 돌아누울 뿐이었다.
“당신한테만 그래.”
거짓말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널찍한 가슴이 너무 기분 좋아서 그녀는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잠이 들었다.
9.
"괜찮아, 예쁘다니까."
"이상해."
서은은 몇 번이나 목이 깊이 패이고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잡아당겼다. 수민이 아무리 예쁘다고 말해 줘도 허사였다. 왠지 꼭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아줌마가 된 기분이다. 돼지 목의 진주랄까. 돈을 얼마를 주고 산 옷인데.
수민과의 쇼핑은 거의 고문이었다. 여자친구들하고 와도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은데. 그는 백화점을 몇 차례 돌고, 길거리로 나와서 길거리 옷가게들까지 싹 훑었다. 그러는 내내 그녀의 옷을 고른 건 그였다. 처음에 그녀가 두어 번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자 그는 10초쯤 비판적인 눈길로 보더니 그 다음부터 아예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아, 가끔 주긴 했다. 그가 고른 두 개의 치마 중에서 좀 더 마음에 드는 것. 그녀가 하나를 고르면 그는 반대쪽 걸로 사라고 했다. 사악하긴!
도대체 왜 남의 옷을 고르는 걸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하는지 그녀가 묻자 그는 간단하고도 확실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웃어버리고 말았다.
"고르긴 내가 고르고 돈은 남이 내잖아."
마침내 쇼핑을 끝낸 다음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골라준 하늘하늘한 꽃무늬 시폰 원피스를 입고 생전 처음 신는 7센티가 넘는 굽의 하이힐을 신고 길을 지나가니까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남들이 다 그녀를 쳐다보고 '안 어울리게 무슨 짓이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동시에 또 왠지 자신감이 생긴 듯한 기분도 들었다.
뭐, 7센티 높은 곳에서 그를 쳐다보는 것은 좋았다. 눈높이가 조금 다르다. 미묘한 차이였지만 대학에 들어간 이래 내내 멋 부릴 새도 없이 낮은 굽의 신발만 신고 다녔던 그녀에게는 뚜렷하게 느껴졌다.
"잠깐만 어디 좀 들렀다가 밥 먹으러 가자. 나 친구한테 받을 게 좀 있거든."
"어디?"
"친구들이랑 자주 가는 카페 있어."
카페는 한산한 골목에 있는 주택을 개조한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봄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날씨 탓인지 정원 테이블에도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안쪽으로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담배 연기에 그녀는 곧장 인상을 찌푸렸으나 수민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누군가를 발견한 듯 곧장 걸어갔다.
그에게 손을 흔드는 외국인을 보는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민은 성큼성큼 외국인에게로 다가가서 영어도 아닌 말로 빠르게 떠들기 시작했다. 본토인 같은 그의 발음에 그녀의 눈이 더 커졌다. 까만 머리의 외국인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뭐라고 말했고, 수민이 하하 웃으며 그녀를 잡아당겼다.
"이쪽은 토니오야. 이탈리아에서 왔고."
서은이 어색하게 영어로 인사를 하자 토니오가 킥킥 웃으며 꽤 유창한 영어로 인사를 했다. 다행스럽게도 영어는 졸업 전 몇 번 교수님을 따라갔던 학회 탓에 익혀둬서 능숙하진 않아도 의사소통은 되는 정도였다.
이야기를 두어 마디 하고 있으니 주위에서 다른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전부 수민의 모델 친구들인 듯 비슷비슷하게 큰 키에 늘씬한 체형을 한 데다 근사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여자도 두엇 나타나서 수민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어느새 테이블 주위에는 대여섯 명 가량의 사람들이 모였다.
한국어와 영어가 섞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어딘가 묘했지만 다들 아무렇지 않게 잘도 이야기를 나눈다. 토니오 역시 이런 분위기에 익숙한 듯 가끔 서투른 한국어를 쓰곤 했다.
"그런데 직업이 뭐예요?"
여자 한 명이 그녀를 쳐다보고 물었다. 수민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걸 보니 이십 대 초반인 모양인데 키는 그녀보다 머리 하나 더 있을 것 같았고 몸무게는 아무래도 비슷할 것 같은 불쾌한 예감이 들었다.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속으로 한숨을 쉬고서 그녀가 살짝 웃었다.
"치과의사예요."
"우와, 치과의사! 거기 가면 혹시 싸게 해 주나요? 저 미백 해야 되는데."
남자 하나가 반색을 하며 묻는다. 수민이 옆에서 킬킬 웃었다.
"안 그래도 서은이네 치과 미백 전문이야. TV에도 나왔어, 저번에."
"이야, 저기요, 그거 비싸요? 하면 진짜 깨끗해져요?"
갑자기 와글와글 진료 상담 시간이 되어버렸다. 사실 종종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외국엔 이런 식으로 상담해도 상담료를 따로 받는다던데. 속으로 피식 웃고서 그녀는 TV에서 설명할 때처럼 차근차근 이야기를 했다. 최소한 늘 하는 일을 하면 긴장은 덜 하게 되는 법이다. 심지어는 토니오까지도 서투른 한국어로 미백에 대해 물어보았다. 수민은 그녀가 자랑스러운 듯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친구들을 둘러본다. 이럴 때면 그가 아직 어리다는 기분이 좀 들었다.
차를 주문한 다음 다들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모두들 서은에게 수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가 처음에 얼마나 서투른 모델이었는지,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무슨 나쁜 짓을 하고 다녔는지. 상투적인 이십 대 초반이 저지를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많이 웃었고 대학 졸업 이후 사회에 나와 만난 그 어떤 사람들하고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의 관심이 그녀에게서 조금 멀어져 두세 명씩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고, 수민이 토니오와 아마도 이탈리아 어로 빠르게 떠들기 시작하자 그녀는 잠시 실례한다고 말하고서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거울 안의 그녀는 상기된 얼굴에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즐거워 본 게 얼마만이지? 사실 수민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을 때는 좀 겁이 나기도 했다. 스무 살 초반의 아이들을 도대체 어떻게 대하면 좋지? 하지만 그 애들은 이미 어른이었고, 대화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어쩌면 일찍 사회에 나온 애들이라서 그럴 지도 모른다. 그녀는 한참이나 학교에 있었고.
손을 씻고 살짝 화장을 고치고 있는데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수민 친구들 중 두 명의 여자애 중 하나가 나타났다. 자리에 앉은 이래 그녀에게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던 아이였다. 친근한 여자애 쪽보다 더 말라서 예쁘다기보다는 비 맞은 치와와 같다는 생각이 드는 타입이었으나 차마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아까 이름을 못 들었는데......"
"권혜민이에요."
여자아이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본 다음 왠지 모르지만 코웃음을 친 것 같았다. 내가 잘못 들었나? 서은은 립스틱을 새로 바르며 힐끔 여자아이를 보았다. 손을 씻는 척하는데 그야말로 '척'인 것 같았다. 그럼 도대체 왜 화장실에 온 거야? 어쩐지 기분이 나빠서 그녀는 재빨리 립스틱을 수정한 다음 핸드백에 도로 집어넣었다.
종이타월에 손을 닦고 있는데 여자아이가 거울로 그녀를 보았다.
"수민 오빠랑 언제부터 사귀었어요?"
그녀가 눈을 깜박이며 아이를 보았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아이의 얼굴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진하게 화장으로 덮여 있었고, 아이라인 끄트머리를 길게 그려서 마치 여우처럼 보였다.
"음, 얼마 안 됐어요."
얼마나 됐지? 안 지는 2주 정도? 같이 잔 게 1주일? 맙소사, 엄청나게 진도가 빨랐구나. 생각해 보니 정말 황당할 정도였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고서 그녀는 종이타월을 버리고서 문으로 걸어갔다. 하이힐이 또각또각 소리를 낸다.
"오빠 여자들 오래 안 가는 거 알죠?"
서은이 멈춰 서서 여자아이를 돌아보았다. 혜민은 거울에서 등을 돌리고 이제 완전히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서은이 물었다.
"수민 씨 좋아해요?"
혜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머나, 세상에. 잠시 서은은 자신도 저런 시절이 있나 생각해 보았다. 아니 뭐, 수민을 처음 봤을 때 눈도 못 마주쳤던 건 사실이지만 그거야 포스터 때문에 그랬던 거고, 저렇게 누굴 좋아한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어진 적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저렇게 순진한 식으로는.
"지금은 오빠가 호기심에 저러고 있는 거지, 절대 오래 안 가요. 미리 경고해주는 거예요."
경고 좋아하시네. 그 소리 듣고 떨어지라는 뜻이면서. 정말로 저 말을 듣고서 어머나 세상에 하고서 도망가길 바라는 걸까? 진짜 궁금해서 그녀는 혜민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 말 수민 씨한테 해도 돼요?"
혜민의 얼굴이 더욱 새빨개지고, 안 그래도 여우같던 눈이 이제는 구미호처럼 변했다.
"어디 해 봐요! 오빠가 누구 말을 믿는지. 그렇게 자존심도 없어요? 그런 거나 말하게?"
"아니, 자존심은 있는데 구태여 그런 걸 숨겨야 된다는 생각은 안 들어서."
이상하다. 몇 년 전 같으면 그녀도 저런 소릴 듣고 감히 남자에게 전할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고자질하는 것 같고, 또 자존심도 상하니까. 하지만 지금 저런 소릴 듣고 보니 자존심 상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딱히 그 동안 저런 일을 여러 번 겪은 것도 아닌데.
이게 연륜인가? 갑자기 그 생각이 들자 굉장히 어른이 된 듯한 뿌듯함을 느끼며 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그렇게 발톱 세우지 말고, 수민 씨가 좋으면 알아서 좋다는 표현을 해요. 그럼 수민 씨가 선택하겠지, 뭐. 결혼한 것도 아니고 그냥 좀 만나는 사이인데 그렇게 날 떨궈내려고 노력 안 해도 돼요. 혜민 씨는 젊고, 모델이라서 예쁘고 뭐 그렇잖아. 괜히 그렇게 표독 떨지 말고 좀 더 상냥하게 대하는 게 남자들한테 인기를 얻지 않겠어요?"
조금도 화내지 않고 부드럽게 말하는 자기 자신을 속으로 칭찬하며 서은이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그 때 혜민이 소리를 질렀다.
"너만 오빠랑 잔 줄 알아? 나도 자 봤어! 그거 대단한 거 아니야. 그거 갖고 재지 마!"
아, 이건 좀 불쾌하다. 상당히 불쾌하다. 싸움이 이제 땅바닥으로 떨어진 셈이었다. 흙투성이가 되고픈 마음은 없기에 그녀가 한숨을 짧게 내쉬고 아이를 돌아보았다. 키는 크지만, 화장은 거의 전투에 나가는 원시 부족처럼 했지만, 그래도 아이는 아이였다.
"저기, 사귀지도 않는 남자랑 잔 거 자랑하면 좋아요? 나 같으면 그렇게 남들 다 듣게 큰소리로 말하진 않을 것 같은데."
"사귀진 않아도 우리, 우린 역사가 깊은 관계야! 모델 스쿨 때부터 알았다구!"
그래봤자 길어야 3, 4년이다. 나이가 몇인데.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서 서은은 위엄을 담아 찬찬히 그녀를 보았다.
"알았으니까 그런 이야긴 수민 씨한테 해요, 나 붙잡고 뒤에서 하지 말고. 수민 씨한테 좋아한다고 말해 보든지. 애꿎은 나한테 그래봐야 나 아무 말도 못 해 줘요. 수민 씨랑 그만 만날 생각도 없고. 알겠죠?"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녀는 화장실에서 나왔다. 닫힌 문안에서 야악 하는 까마귀 같은 비명소리가 들린다. 눈을 굴리고 그녀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수민이 자동적으로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서 끌어당겼다. 토니오가 그녀를 힐끔 보더니 수민에게 낄낄거리며 뭐라고 말했다. 서은이 궁금한 눈으로 수민을 보았다. 그녀의 눈길을 느꼈는지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고서 씩 웃었다.
"뭐라고 했는지 궁금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고개를 기울이고 귓가에 속삭였다.
"한국 여자들 중에서 당신 같은 여자 더 있으면 소개해 달래. 귀엽대."
허어, 그 말은 영 안 믿어진다. 이탈리아라고 하면 미남미녀들이 모인 곳으로 유명하지 않던가? 그녀가 의심어린 눈으로 그와 토니오를 번갈아 보자 그가 토니오에게 영어로 말했다. 토니오 역시 어딘가 능글맞게 웃더니 영어로 그녀와 닮은 친구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말했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걸 보고 수민이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옆으로 꼭 끌어안았다.
자리로 돌아오던 혜민과 눈이 마주친 건 그 때였다. 새빨갛게 독이 오른 얼굴로 그녀를 노려본 다음 혜민이 자리에 놔두었던 가방을 집어들고 홱 나가버렸다. 앉아있던 남자애들 중 하나가 그녀를 따라가고, 다른 사람들은 잠깐 놀란 얼굴로 보다가 다시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간다.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드는 걸 서은은 꾹 억눌렀다. 도대체 그녀가 미안해야 할 이유가 뭔데? 먼저 성질을 건드린 건 그 '꼬마'였다.
카페에서 나와 햇빛 비치는 길을 걸어 백화점 주차장에 대 놓은 차를 찾으러 가는 동안 그녀는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그에게 물었다.
"전에, 나랑 수민 씨 또래 여자애들하고는 좀 다르다고 했잖아. 그거 무슨 뜻이었어?"
수민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여러 가지. 아니, 전부 다 달라. 당신이 훠얼씬 더 귀엽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가 그녀를 꼭 안는다. 서은은 몸을 움츠려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다음 눈을 흘겼다.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야."
"나도 진지했는데. 훨씬 귀엽다는 거."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고 팔짱을 낀 채 쳐다보자 그가 양손을 들어올렸다. 입가의 미소가 조금 사라졌다.
천천히 다시 걸음을 옮기며 대답을 생각하는 듯하던 그가 마침내 조용히 말했다.
"글쎄. 그러니까 뭐랄까, 내 나이 또래 여자애들은, 그냥 애들이야. 미래에 대한 생각도 별로 없고, 자기가 뭘 하는지도 잘 몰라. 그냥 겉멋만 들어서는 멋있어 보이는 건 다 따라하고, 진짜 자기가 누군지도 잘 모르지. 거짓말을 하고, 폼을 잡고, 독특한 척하지만 사실은 남을 따라하는 거야. 쿨하면서도 열정적으로 보이겠다는 게 걔네들의 사고방식이지. 그게 말이 돼? 쿨 앤 핫이라니."
그녀의 손을 잡은 채 한 걸음 정도 앞서서 걸어가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홱 돌아보았다.
"사실 나도 몇 번 노력해 봤어. 그런데 잘 안 돼. 걔네들은 멋있는 거 좋아하고 근사한 거 좋아하거든. 그런데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거, 근사하다고 생각하는 거랑은 뭔가 달라. 저기, 걔네들은 와인 마시는 게 굉장히 우아하고 멋지다고 생각해. 그런데 난 맥주나 와인이나 똑같이 마시거든."
"어, 저기, 나도 와인이 우아하고 멋진 거라고 생각하는데."
서은의 말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이 그러는 거랑은 달라. 와인을 차려놓으면 뭔가 대단한 일이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뭐 프로포즈라도 하려고 그런다고 착각해. 아니 뭐, 기념 좋지. 기념은 좋은데, 오버해 버린단 말이야. 게다가 좋아하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단지 유행이라고 해서 따라하려고 하고, 아는 척해. 난 그게 진짜 질색이야. 젠장, 샤넬이 디자이너 이름이라는 것도 모르는 애들하고는 이야기하기 싫어."
"저기, 나도 몰랐는데."
수민이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서은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보았다.
"진짜 몰랐어?"
"응. 그냥 화장품 상표인 줄 알고 있었는데."
잠깐 그녀의 손만 잡고 있던 그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상관없어. 최소한 말이지, 당신은 몰랐다는 거 인정하잖아. 아주 쉽게. 그런데 걔네는 안 그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거야. 몰랐다고 해도 그거 뭐 죽을 만큼 자존심 상할 것도 아니잖아. 요즘 유행하는 패션 아이템 안 들었다고 아무도 체포 안 해. 그런데 그런 데만 목숨을 걸어. 스스로에게 솔직하지가 못해. 그게 싫어."
"나더러도 솔직하지 못하다고 그랬었잖아."
"응, 당신도 가끔 그렇지. 하지만 당신의 경우는 성적인 부분만 그렇고, 그것도 뭐 몇 번 찌르면 금방 솔직하게 다 털어놓잖아. 눈물 뚝뚝 흘리면서."
그가 씩 웃자 그녀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찔린 부분을 아프기라도 한 양 한 손으로 문지르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실, 결정적으로, 걔네도 나 싫어해."
서은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뭐?"
"걔네도 나 싫어한다고."
그가 차분하게 다시 말했다. 서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를 쳐다보았다.
"말도 안 돼."
"진짜야. 몇 번 사귀었는데 전부 다 차였어. 겨우 두세 달 만에. 애들이 나보고 진짜 속 빈 강정이라고 그랬다니까."
서은은 그가 진실을 말하는 건지 한참 쳐다본 끝에 진실이라고 결론짓고서 의아해져서 물었다.
"왜 헤어지재?"
"내가 부담스럽대. 거기다가 나랑은 취향이 안 맞대. 난 잘 한다고 하는데, 그게 굉장히 속박하는 것 같고 귀찮다나 봐."
그가 빙긋 웃었다. 눈까지는 미치지 않는 미소였다. 서은은 영 알 수가 없어서 인상을 찡그리고 그를 보았다.
"수민 씨가 혹시 모델 하는 여자애들만 만나서 그런 거 아니야? 난, 음, 그 쪽 업계는 잘 모르긴 한데 그럴 수도 있잖아. 다른 쪽에 있는 보통 여자애들을 만나보면......"
“마찬가지야. 오히려 패션업계 외부에 있는 애들은 내가 옷 차려입고 자기네보다 피부 관리 잘하고 그러는 걸 이해를 못 해. 남자가 무슨 피부 관리를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무슨 운동도 그렇게 매일 가냐고 타박하다가 결국 헤어졌어.”
“그건 수민씨의 재산이잖아. 피부도, 몸매도.”
그가 씩 웃으며 그녀를 덥썩 끌어안았다.
“그래서 당신이 좋아. 아무렇지 않게 그런 걸 이해하거든.”
아니, 당연한 거 아닌가? 물론 그녀도 자신보다 그의 피부가 더 좋은게 질투나긴 했지만, 그건 어디가지나 질투일 뿐이지 글어내릴 차원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스무 살이라면? 그녀는 죽어라 학교에서 피골이 상접하도록 공부하고 있는데 남자친구가 모델이랍시고 운동 다녀 몸매 만들고 피부 관리하러가고 그러면 조금쯤은 괴롭히고 싶지 않을까?
아니, 뭐, 그건 지금도 그래. 이해한다고 해서 질투가 안 나는 건 아니지.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침에 그녀가 다리털 갂을 때 쓰는 소형면도기로 깔끔하게 면도를 해서 얼굴이 보들보들했다.
“저기 근데 수민씨 피부 관리 어디서 받아? 거기 괜찮으면 나도 받아볼까?”
수민이 낄낄거렸다.
“안 돼. 당신 더 예뻐졌다간 다른 놈이 낚아채 갈지도 몰라. 아까 토니오 그 자식도 당신한테 집적대려고 해서 중간에서 막느라고 얼마나 짜증났는데.”
“수민씨 자꾸 그런 소리 하면 나 조만간 공주병 결려.”
“당신이 공주 되면 난 자동으로 왕자 되는 거지. 뭐, 공주가 거지랑 사귀는 거 봤어?”
그는 태연하게 말하고서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은은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말은 엄청 잘 해.”
“아, 걔네들은 그것도 싫대.”
그가 힐끗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하는 말은 이해가 안 간대. 유머 감각도 없고.”
서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그녀에게 윙크를 하고서 계속해서 백화점을 향해 걸어갔다.
백화점에서 산 반지는 이상하리만큼 반짝거렸다. 돈이 꽤 되긴 했지만 서로 반반씩 내서 그런지 별로 부담은 없었다. 오히려 예전 남자친구 때보다 훨씬 기분이 앗다. 그 때는 당시 처지로서 꽤 비싼 돈을 주고 남자친구가 해 온 반지라서 볼 때마다 한편으로 가슴이 무거웠다. 헤어지며 그가 반지를 돌려달라고 해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걸 아직도 갖고 있었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며칠이나 고민했을 것이다.
병원에 나가니 동료의사들이 그녀의 바닞를 보고 휘파람을 불렀다.
“새 남자 생겼어? 한동안 인상쓰고 다니더니.”
그녀의 학교 선배이기도 한 동료 의사의 말에 그녀가 안상을 찡그렸다.
“인상 쓰고 다닌 적 없어요.”
“무슨 소리. 인상을 완전히 이렇게 해서 다녔으면서. 누구, 같은 적종?”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요. 예술가에요.”
말을 하고 보니 왠지 우스워서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선배의 눈이 커다래졌다.
“예술가? 화가, 피아니스트, 뭐 그런 거?”
“비슷해요.”
“이야, 독특하네. 내 주위에서 그런 사람이랑 사귀는 거 이선생 뿐이야. 유명한 사람이야?”
“앞으로 유명해 질거예요.”
그녀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서 대답했다. 선배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녀를 보다가 혀를 끌끌 찼다.
“콩깍지가 완전히 쓰인 상태구나.”
“네, 그런 가 봐요.”
바보처럼 킬킬 웃고서 그녀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하루가 너무나 상쾌하게 시작하고 있다.
수민의 하루 일과는 패션 쇼가 없을 때는 대강 비슷했다. 오전에 외국어 카페에서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룹 스터디를 하고, 낮엔 모델 스쿨에 갔다가 오후에 운동하러 가고, 저녁엔 그녀의 퇴근시간에 맞추어 데리러 왔다. 두 사람은 같이 저녁을 먹고서 가끔은 영화를 보러 가거나 수민의 꼬드김에 넘어가 클럽 같은 델 갔다. 물론 그런 데도 수민이 아는 사람 천지였다.
혜민과는 그 이래로 두어 번 마주쳤지만 그녀는 이를 드러내며 서은을 쏘아보기만 할 뿐 옆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서은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남자를 차지하겠어? 착한 척하고 남자 옆에 붙어서 귀에 독을 쏟아 부어야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같이 잔다는 점을 제외하면 수민과의 관계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이상할 정도였다. 원래 다 이런 건가?
“난 있지, 같이 자고 나면 뭔가가 굉장히 달라지는 건 줄 알았어.”
치대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 하영과 수정을 만난 자리에서 서은이 조용히 털어놓았다. 하영과 수정은 마주보며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그녀를 보았다.
“네가 드디어 어른이 됐구나, 이서은.”
그녀가 노려보자 둘 다 킥킥거리고 웃었다.
“뭐 어쨌든 네가 좋으면 그만인 거지. 그나저나 진짜 괜찮은 남잔가 보다? 네가 결국엔 마음을 바꿔 같이 잔 걸 보니가.”
서은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가? 사실 처음엔 꼭 괜찮은 사람이라서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그냥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나 사실은 밀어붙이는 데 약한가 봐.”
“흐응, 그건 아니다. 야, 정환이 오빠가 얼마나 그래도 너 꿈쩍도 안 했었잖아.”
“아, 그러고 보니까 정환이 오빠 결혼한다던데......”
하영이 문득 말을 꺼내고서야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서은이 눈썹을 치며올리고서 한 손을 흔들었다.
“상관없어. 이미 끝난 사람인데, 뭐.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좀 화났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도 안 들어.”
서은이 다시 인상을 찌푸리고 두 사람을 보았다.
“내가 좀 심한가? 그래도 기본으로 한달은 슬퍼해 주는게 예의라며?”
“야, 야. 우리 나이에 기본 한 달 할 게 뭐 있냐? 빨리, 빨리 새남자 찾아야지. 그런데 너 한 달은 더 됐잖아.”
“어...........정환 오빠랑 헤어진 지는 벌써 4,5개월 되어가네.”
수민과 만난지는 두 달이 되어가고. 벌써 그렇게 됐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오므렸다. 수정이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근데 괜찮은 거야? 되게 확신이 없어 보여. 그 남자가 너 좋다고 쫓아다녀서 시작한거야?”
“그건 좀......아닌 거 같아. 수민씨가 누굴 쫓아다닐 타입은 아니거든.”
“그래도 뭐, 어쨌든 그 남자가 먼저 사귀자고 했었다며.”
“그렇긴 한데............”
서은은 어깨만 으쓱였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현재 상황에 두 사람 다 만족하니까 그걸로 된 거 아닌기? 포스터와의 관련까지 시시콜콜하게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건 두 사람만의 비밀로 해두자.
“봐, 봐, 또 멍청하게 웃는다. 어우, 왕재수. 너만 남자 생겼다 이거지?”
두 사람이 그녀를 타박하며 팔을 때렸다. 서은이 킥킥대며 뒤로 물러나다가 핸드폰이 울리자 재빨리 받았다. 두 여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의 통화에 귀를 기울였다. 수민이었다.
“약속 아직 안 끝났어?”
“어, 응. 조금 더 있을 것 같은데. 어디야?”
“나 운동 끝나고 나오는 길이지. 데리러 갈까?”
잠시 서은은 친구들을 보았다. 수민씨를 보여줘야 하나? 친구들은 새 남자친구가 생기면 늘 데리고 나와서 인사를 시켜주곤 했었다. 머뭇거리다가 그녀가 몸을 살짝 돌리고 핸드폰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저기, 나 친구들 있는데 괜찮아?”
수민이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들이 남자 데려오지 말래?”
“아니, 그건 아닌데.............”
“갈게. 15분 정도면 도착 할 거야.”
핸드폰을 닫고서 그녀가 친구들을 보았다. 친구들의 눈이 반짝거린다.
“온대? 온대?”
그녀가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자 두 여자가 낄낄거리며 공모의 미소를 교환했다. 서은이 인상을 찌푸리고 두 사람의 코 앞에 대고 손가락을 흔들었다.
“수민씨 괴롭히지 마. 귀찮게 굴지도 말고.”
“되게 과보호하네. 알았어, 알았어.”
“우리가 뭐 그렇게 나쁜사람이라고 괴롭히지 말래? 우리가 뭘 했다고!”
두 사람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고서 최근의 업계 소식으로 말을 돌리자 똑같이 치과의사인 두 사람도 한숨을 내쉬며 요즘의 상황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흐르고 흘러 같은 병원에 있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에 대해 한참 욕을 하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수민이 친구들 뒤에 서서 그녀를 쳐다보며 싱긋웃고 있다. 서은이 입을 딱 다물자 수정과 하영도 뒤를 돌아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녕하세요?”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지 두 친구가 어물어물 인사를 했다. 수민이 자동적으로 서은의 옆에 와서 앉으며 그녀를 보았다.
“저녁은 ?”
“아직 안 먹었는데, 수민씨는?”
“나도 아직 안 먹었지.”
친구들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제야 서은은 정신을 차리고 세 사람을 소개했다. 수민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엷은 미소를 지은 채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같이 식사하러 가실래요? 근처에 친구가 아르바이트 하는 가게가 있는데, 음식 맛이 괜찮아요.”
“어, 저희야 좋죠.”
하영과 수정이 눈을 빛내며 좋아한다. 서은은 왠지 불길한 예감에 행동 조심하란 의미로 그들을 한 번 노려봐 준 다음 수민을 따라 일어섰다.
식사하는 내내 수민은 모델업계의 재미있는 이야기, 그리고 잘 아는 연예인들에 대한 에피소드를 말해주며 세 여자를 즐겁게 했다. 가게도 최근에 생긴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음식이 괜찮은 데다가 친구라는 아르바이트생이 꽤나 신경 써 주어서 여러 모로 좋았다. 남자친구 때문에 어깨가 으슥해진다는 건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좋았다. 콧대가 하늘까지 치솟는 느낌이었다.
잠시 수민이 친구와 이야기 좀 하고 오겠다며 일어났다. 세 여자의 눈길이 전부 느긋하게 바 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으로 향했다가 되돌아왔다. 수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귀엽네.”
“그러게.”
서은이 바보처럼 해죽해죽 웃고만 있자 하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연하지? 몇 살차이야?”
“눈에 띄어?”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고 묻자 수정이 눈을 굴렸다.
“야, 아무리 그래도 젊어서 피부가 팽팽한 거랑 단지 동안이라서 팽팽한 거랑은 이야기가 다르지, 젊은 티가 물씬물씬 나는구만, 뭘, 몇 살 차이?”
서은이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다.
“일곱 살.”
수정과 하영이 입을 딱 벌리고 그녀를 응시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하영이었다.
“우와, 이 날강도 봐라. 어디서 일곱 살이나 어린 남자애랑..........야, 진짜 날강도다, 너.”
서은이 고개만 끄덕였다. 창피할 일은 아니지만 친구들이 저렇게 경악한 듯 반응하니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뭐가 어때서? 범죄도 아니잖아. 어쨌든 둘 다 성인이고, 수민도 충분히 사화 경험 있는 남자다. 아이가 아니라구!
“그런데 모델이라며. 그럼 대학은? 군대는?”
서은이 인상만 찌푸린 채 대답 대신 팔짱을 끼자 하영과 수정이 알 수 없는 시선을 교환했다. 잠시 테이블에 침묵이 흘렀다.
“난 대학학교만 나온 사람하고 만난다는 건 생각도 안 해 봤었는데.”
수정이 중얼거렸다. 서은이 코웃음을 쳤다.
“세상 참 좁게 산다, 너.”
“아니, 그도 그렇잖아.”
수정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그녀를 보았다.
“우리 처지를 생각해봐. 주위에 널린 건 죄다 치과의사들이고, 그게 아니라도 그 사람들한테 소개받아 만나다 보면 다 대학 나온 사람들이잖아. 좋든 나쁘든 어쨌든 대학은 나왔다구. 게다가 거의 비슷비슷한 분야에서 일하고. 내가 만나 본 사람중에서 가장 독특한 업계에 있었던 건 환자로 온 경찰 정도야. 그러니까 당연히 대학학교만 나온 사람에 대해선 생각도 안 하지.”
“게다가 일곱 살이나 연하라며. 진지하긴 진지해?”
하영이 인상을 찡그린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서은이 얼굴에 짜증이 어리는 걸 알아챘는지 그녀가 재빨리 덧붙였다.
“내 말은 , 그냥 잠깐 특이하니까 만난다거나, 혹은 네가 돈이 좀 있어 보이니까 달라붙는 거 아니냐고. 나 패션모델이 돈 잘 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못 들었어. 아니면 뭐 집에 재산이 좀 있는 거야? 하는 거 보니까 있는 집 애 같긴 하다만.”
“자꾸 애 애 그럴거야? 수민씨 애 아니야. 너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다 애니? 스수 살 넘었고, 일찌감치 사회에 나와서 자기 일 하는 사람이야. 말 왜 그렇게해?”
서은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하영이 움찔하며 수정을 돌아보았다. 수정이 어깨를 으쓱이고서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조용히 말했다.
“그냥 너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야. 아니 뭐 나이차가 많아도 남자가 이미 자리가 집힌 사람이라면야 별로 반대 안 하지. 그런데 너무 어리잖아, 아직. 우리 스물 셋 때 뭐 하고 있었니? 본과 가서 허덕이고 있던 때 아냐. 그 때 생각해 봐. 진짜 어렸잖아. 저 사람 고수민씨? 저 사람이 딱 그 나이라구. 생각 잘 해 봐”
친구들의 걱정이 완전히 어긋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날강도부터 시작해서 돈을 노리고 남자가 붙었다는 따위의 소리를 차례로 듣자 얼굴이 벌개지도록 화가 났다. 진짜 얘네가 친구들 맞아? 잘 되길 바라야 되는 거 아니야?
“너희들 진짜 너무한다. 방금 전까지 이야기 잘 해 놓고 수민씨 잠깐 없는 사이에 그런 소리나 해? 진짜 심하다, 응? 너희 그러는 거 아니야. 나도 뭐 수민씨가 조건이 그렇게 좋다고는 말 안 하는데, 너희가 잘 아는 것도 아니잖아. 왜 함부로 말해?”
“아니, 서은아, 그런 게 아니라 우린................”
“됐어. 나 갈래. 너희 그런 생각 하는 거 뻔히 알면서 수민씨랑 웃고 떠드는 거 보기 싫어. 나중에 연락하든지 하자.”
그녀가 핸드백을 들고 일어났다. 수정과 하영은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바로 가서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수민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수민의 친구가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다음 돌아서서 하던 일로 돌아간다. 수민이 몸을 기울이고 원래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왜?”
“아니, 이제 가자고. 피곤해. 먼저 간다고 애들한테 그랬어.”
수민이 잠시 눈썹을 치켜올린 채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언제 가져왔는지 계산서를 카운터에 내민다. 서은이 인쌍을 찌푸리고 있다가 그를 쿡 찔렀다.
“내가 낼게. 내 친구들이잖아.”
“됐어. 내가 중간에 끼었으니까 내가 살게. 한 번쯤 이런 것도 해야 점수를 얻지.”
그가 빙긋 웃었다. 서은은 화를 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런다고 뭐 쟤네들이 당신 좋게 생각해 줄 줄 알아? 쟤네는 당신이 대학 안 다니고 어리다는것 때문에 완전히 바보 취급 해!
그가 계산하는 모습으로 보며 서은은 문득 한숨을 삼켰다. 그녀의 눈에는 그가 어려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얼굴만 보면 물론 어려 보일 테지. 하지만 하는 행동, 말, 그 어떤 것도 그녀의 스물 셋 때를 떠올리게 만들진 않았다. 그는 훨씬 더 어른 같았고, 그녀와 동년배 같았다. 이른 사회 생활이 그를 빨리 성숙하게 만든 걸까?
“가자.”
그가 빙긋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녀의 살아있는 포스터 속 남자. 포스터가 없었더라도 그녀는 이 사람에게 끌렸을까? 아마도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상상했던 포스터 속의 인물과는 전혀 다르니까. 수민은 그저 지금 이대로.........................................가장 좋았다.
10.
수민이 늦는다. 연락도 없이 늦을 사람이 아닌데. 서은은 인상을 찌푸리고 핸드폰을 보았다. 10시가 넘었는데 아직까지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이선생, 나 퇴근할 건데 아직 퇴근 안 해?”
원장이 노크를 하고서 뭄을 열고 그녀를 보았다. 서은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조금 더 있다가 가려고요. 제가 정리하고 갈게요.”
“그럼 그렇게 해.”
원장이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문이 닫히는 걸 보고서 그녀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전화를 할까 싶다가도 그가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하고 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전화를 못 받을 상황이라면 미리미리 꺼두니까 상관말고 전화하라고 그는 말했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10분쯤 있으니 간호사들까지 퇴근한다고 인사를 하고 나갔다. 서은은 사무실 안을 왔다갔다하다가 진료실로 나가서 의자들을 만지작거리고 구석에 놓인 화분들을 건드리며 초조함을 억눌렀다.
10시 반쯤 되었을 때 병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깜박이고 그녀는 재빨리 문으로 달려갔다. 뮤리문 밖에 피곤한 얼굴의 수민이 서 있었다.
“전화 왜 안 받어?”
그가 안으로 들어서며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서은이 눈을 깜박였다.
“전화? 안 왔는..........어머, 사무실에 그냥 뒀나 봐. 진동으로 해 놓고.”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며 미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수민은 뭐라고 할 것처럼 인상을 쓰고 그녀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한 손으로 짧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니야. 내가 더 일찍 연락 못 했는데 뭐. 됐어.”
그가 대기실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문을 도로 잠근 다음 그녀가 고개를 기울여 그를 보았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그는 피곤해 보였다.
“오늘 뭐 힘든일 있었어?”
“응.”
그르렁거리는 소리로 그가 눈도 드지 않고 대꾸했다.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그의 옆에 앉았다. 수민이 무거운 듯 팔을 들어올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는 꼭 끌어당겼다. 만족스러운 한숨을 살짝 내쉬고 그녀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많이 힘들었어?”
“빌어먹을 개새끼, 진짜 모가지를 따 버리고 싶었는데 참았어.”
수민이 이런 식으로 욕하는 건 처음 듣는 터라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게 나빴어? 오늘 다음 달에 있을 패션 쇼 처음 연습하러 가는 거라고 했잖아.”
“디자이너 놈이 개새끼야.”
그가 날카롭게 말하고는 눈을 번쩍 뜨고 그녀를 보았다. 까만 눈에 어린 좌절감과 분노에 조금 겁이 날 정도였다.
“자기가 쓰겠다고 뽑아 놓고서는 왜 난리야? 옷 입은 테가 마음에 안 든다, 걷는 폼이 어색하다, 자세가 옷을 돋보이게 해 주지 못한다, 왜? 아예 생긴 것도 마음에 안 든다고 하지. 갖은 뻘소리는 다 하더니 결국 한다는 소리가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라고? 웃기고 있네. 그 새끼가 날 뽑은 이유는 그냥 성질 부릴 사람이 없으니까 동네북이나 되라고 뽑은 거라니까. 씹새끼. 자기가 되게 잘난 줄 알아. 그 따위 디자인 실력 갖고 별 거지같은 짓은 골라 하고 있어.”
어깨에 드른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서은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솔직히 그녀가 패션업계에 대해 뭘 알겠는가? 기껏해야 대기실에 비치해놓은 패션잡지 몇 권 읽은 것 정도다. 거기에 모델들의 고충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서 화내고 왔어?”
그녀의 말에 그가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보았다.
“내가 어떻게 화를 내? 난 완전히 밑바닥 말단인데. 뭐라고 지껄이든 그냥 네네 죄송합니다, 죽여주세요, 그러다 왔지. 아, 씨팔, 앞으로 한 달이나 어떻게 버티지? 미쳐버릴 것 같아.”
한참 분노 어린 말을 내뱉던 그가 갑자기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동적으로 그녀는 손을 들어 짧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가 긴장을 조금 풀고 그녀 쪽으로 늘어지는 게 느껴지자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괜찮아. 그 사람도 수민씨가 열심히 하려고 한다는 거 알아줄 거야.”
“그럴까?”
그는 대단히 회의적인 어조였다. 서은이 킥킥 웃었다.
“모르면 뭐, 나중에 같이 욕하지 뭐. 그런 놈은 디자인 업계에서 생매장을 당해야 된다고 하는 거야. 내가 그 사람 옷 산 다음에 너무너무 그리다고 가게 앞에 버려버리고 인터넷에 막 욕하고 다닐까?”
그가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댄 채 피식 웃었다. 기분이 조금 더 좋아졌다. 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면서 그녀가 재불재불 그 날 낮에 있던 이상한 환자들, 마음에 안 드는 동료의사들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수민이 점차 긴장을 더 푸는 게 느껴졌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고서 그녀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욕해서 미안해. 늦은 것도 미안하고.”
“괜찮아. 수민씨가 뭐 놀다 늦은 것도 아니고, 일하다 늦은 거잖아.”
“일은 무슨. 완전히 욕만 먹다 온데다가 난 뭐................................”
그가 고개를 돌리고 소파에 기댔다. 잠시 말없이 허공만 바라보던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가끔 내가 잘 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워. 차라리 다른 걸 알아보는 게 나을지도 몰라. 이쪽에 재능이 없는데 내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건지도.”
서은은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본과 1, 2 학년때 그녀도 그런 고민을 지독하게 많이 했었다. 배우는 건 힘들고, 손이 아프도록 와이어를 휘다 보면 부러지기 일쑤고, 석고는 맨날 깨지고 다른 친구들은 예쁜 옷 입고 데이트하러 다니고. 왜 난 바보처럼 이러고 있는 걸까, 왜 남들은 잘 하는데 나만 이 모양일까, 허구한날 고민했었다.
지나보니 다 추억이고, 나름대로 그녀가 치의학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 때는 정말로 힘들었다. 수민도 그런 상황을 맞이 한 것 같았다. 힘들게 노력하다가 벽에 부딪친 상태.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게 좋더라? 그의 기분을 낫게 하려면 뭘하면 좋을까?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으나 그녀는 재빨리 지워버렸다. 안 돼, 그건 절대 못 해. 다른 거, 다른 걸 생각해 보자. 하지만 그걸 하면 수민씨가 좋아할 것 같은데..................수민씨를 위해서라면 할 수가 있지 않겠어?
아니, 그건 못 해. 그건 너무..................
하지만 아무도 없잖아. 병원은 완전히 비었다구. 아무도 모를거야, 수민씨밖엔. 수민씨가 지금껏 해 준 걸 생각하면 그 정도도 못 해 줘?
그녀는 가만히 수민을 보았다. 그는 소파에 기댄 채 다시 눈을 감고 있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끝에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키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기 수민씨, 잠깐 안으로 들어올래? 진료실로.”
그는 눈을 뜨고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나 치료할 이 없는데.”
“잠깐이면 돼. 저기, 음,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거든.”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결국 일어났다. 그녀는 문이 잠긴 걸 확인한 다음 안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진료실에는 진료용 의자 네 개가 있었다. 의자에 붙어 있는 조명을 전부 켠 다음 그녀가 형광등을 끄자 수민은 잠시 이해가 안 가는 얼굴이었다.
“여기 잠깐만 앉아 있어. 사무실에 들어오면 안 돼. 금방 나올게.”
수민은 진료용 의자에 비스듬히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침을 꿀꺽 삼키고서 서은은 사무실로 화다닥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심장이 쿵쿵거린다. 머리로 피가 쏠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걸 할 수가 있을까? 아무리 수민씨밖에 없다지만, 혹시 블라인드 바같으로 보이면 어떡하지? 물론 5층에 있는 데다가 건너편 건물은 한참 떨어져 있으니 보일 리가 없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아니면 갑자기 누가 찾아온다든지, 혹시 감시 카메라가.............
“감시 카메라가 어디 있어, 여기? 정신차려, 이서은.”
그녀는 양손으로 뺨을 살짝 두드린 다음 심호흡을 하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가 진료용 가운을 걸치고 나오자 수민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미백이라도 공짜로 해 줄 거야?”
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서은은 자신만만하게 그를 향해 걸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운을 걸치니까 갑자기 자신감이 생긴 느낌이었다. 어쩌면 여기가 그녀의 공간이라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그녀는 손바닥처럼 잘 아는 곳이고, 수민은 모르는 곳이니까.
그녀가 다가가자 점점 수민의 얼굴에 어려 있던 장난스러운 미소가 사라지고 광대뼈 부근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호흡이 살짝 빨라지고 눈에 열기가 어렸다. 한 번도 가운의 브이넥이 이렇게 깊게 패여 있는 줄은 알아채지 못했었다. 브이넥 끄트머리는 젖가슴 가운데까지 내려왔고 움직일 때마다 차가운 공기에 바싹 곤두선 젖꼭지에 천이 스쳤다. 마치 그가 어루만질 때처럼 끄트머리가 짜릿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의 앞에 서자 수민이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가운 목선을 살짝 만졌다. 그녀가 재빨리 몸을 뒤로 빼며 그의 손을 찰싹 때렸다.
“안 돼. 환자는 가만히 누워 있어야지.”
그의 눈이 확 타오르는 것 같다. 그녀가 새침한 미소를 지으며 위에 달린 조명을 조절해서 그를 비추었다.
“자, 어디가 아파서 오셨죠?”
얼굴은 달아오르고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런데도 왠지 짜릿했다. 그녀가, 이서은이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친구들이 매일 꽉 막혔다고, 나이에 안 어울린다고 놀려대던 그 이서은이 지금 알몸에 가운만 걸치고 일터에서 남자를 희롱하고 있다. 우와, 세상에, 심장이 점점 더 빨리 뛰는 느낌이었다.
“여기가 아픈 것 같은 데요, 선생님.”
수민은 태연하게 장단을 맞추며 그녀의 손을 잡고서 자신의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손 아래서 그의 몸이 단단하게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바싹 마르는 입술을 핥은 다음 미소를 지었다. 요부처럼 보이길 바랐으나 입가가 떨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음, 여긴 비뇨기과가 이닌데요. 하지만 시간도 늦었으니까 제가 할수 있는 일이 있을지 어디 볼까요?”
심장이 더 빠르게 쿵쿵거렸다. 수민은 새카만 눈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처음 여기 누웠을 때가 떠올랐다. 그녀를 찾아왔던 그 날. 그의 치아를 보면서 엉뚱한 생각만 했던 그 날.
지금은 그 날 생각했던 모든 걸 마음 껏 할 수 있다. 그렇지? 물론 그 날 뭐 대단한 걸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지금은 온갖 대단한 것, 야한 것들을 할 수있다.
심장이 더욱 빨리 뛰었다. 의자 다리 쪽으로 가서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의 허리띠를 풀고 바지 단추를 열었다. 지퍼부분이 불룩하게 솟아 있는 것을 보자 목이 조여들고 입안까지 바싹 말랐다. 손도 떨린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지퍼를 내렸다.
“와, 심각하네요. 엄청나게 커졌어요.”
이게 내가 하는 소리 맞어? 그녀 스스로도 논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녀 자신이 그런 야한 소리를 하면서 그의 몸을 불빛 아래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벗기기 좋도록 하체를 살짝 들어주었다.
남자의 몸이란 이상하게 생겼다고 예전에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를 보고 있으면 머리가 그저 빙빙 돌았다. 심장이 쾅쾅거리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손에 땀이 밴다. 어째서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겼을 텐데 이 사람 것만 이렇게 근사하게 보이는 걸까? 다들 비슷비슷한 크기라고 그러던데 이 사람만 이렇게 커다래 보일까? 이것도 다 콩깍지 탓인가?
조심스럽게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곤두선 남성을 쓰다듬었다. 그가 의자 손잡이를 꽉 움켜쥐는 게 보인다. 그녀가 슬쩍 시건을 조금 더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뜨거운 눈으로 그녀만 응시하고 있었다. 흥분한 듯 얼굴이 더 붉어져 있다.
“자, 이제 어떻게 하실 거죠, 의사 선생님?”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거칠었다.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생각에 쾌감이 솟구쳤다. 이번엔 늘 그렇듯 그사 모든 걸 아라서 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뭔가 하는 거다. 그를 위해서. 처음엔 단지 우울해하는 그의 신경을 분산시키는게 목적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그녀처럼 머리가 터져 나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절정에 도달하게 하는 게 목표가 되었다.
“글쎄요. 우선 어떤 상태인지 촉진을 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의 눈이 번쩍이는 걸 보자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그녀가 양손으로 천천히 그의 남성을 쓰다듬었다. 그의 몸이 의자 위에서 약간 들석이고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몸은 단단하고 뜨겁고 부드러웠다. 아니, 약간 거칠거칠하기도 했다. 그게 그녀의 몸안에 들어오는 것의 정체였다. 그녀를 그토록 쾌감에 젖게 하고, 가끔은 아프게도 만드는 그것. 끄트머리에서 축축한 액체가 느껴지자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남자도 먼저............나와”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그저 손잡이만 죽어라 움켜쥔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조심조심 손가락을 문질러 본 다음 천천히 새침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두툼한 일부에 그것을 문질렀다. 그의 몸이 가늘게 떨린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위로 타고 올라가다가 남성 뿌리 부분에 자리한 묵직한 주머니로 향했다. 이 부분을 만져보는 건 처음이다. 매일 그녀는 수동적으로 그에게 받기만 했으니까. 그가 그녀의 몸을 샅샅이 아는 만큼 그녀고 그의 몸을 샅샅이 알고 싶었다. 아니, 알아낼 것이다.
“신기해.”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거친 털 안의 그의 몸을 어루만지자 그가 허리를 휘며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지고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이런 기분 때문에 그가 늘 그녀룰 당황하게 만들면서까지 그녀의 뭄을 구석구석 만지고 입 맞추는 지도 모른다. 그럼 그녀도..................
몸을 기울여 그의 남성 안 쪽에 입을 맞추자 그가 마침내 신음을 터뜨렸다. 손잡이를 잡고 있던 그의 한 손이 그녀의 머리를 붙잡았다.
“조, 좀 더, 제대로 해 봐. 어서!”
이럴 생각까진 아니었는데. 하지만 그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손으로는 안쪽을 쓰다듬으며 그녀가 혀로 긴 막대기처럼 솟구친 그의 몸을 살짝 핥았다. 그가 숨을 헐떡였다.
“맙소사, 간지럽고, 뜨겁고, 아! 끝에, 좀 더 끝에, 그래, 거길..............”
촉촉한 방울이 맺혀 있는 끝부분을 핥으니 혀가 아릴 정도로 짠맛이 느껴졌다. 그의 온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그녀가 살짝 그를 올려다 본 다음 끄크머리를 입안으로 빨아 당겼다.
“서은아!, 아, 세게, 좀 더 세게! 서은아!”
사탕을 빨듯 그녀가 그의 몸을 빨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살짝, 그러다 점점 더 열렬하게. 그녀가 입안으로 그를 빨아들일 때마다 그가 의자 위에서 들석거리며 격하게 몸을 움직였다. 마치 그녀의 압안 깊숙한 곳까지 침범하려는 듯한 느낌이다.
아직 그럴 정도로 용감하진 않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려 하자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세게 붙잡고 늘렀다. 놀라서 입을 벌리는 순간 그의 몸이 입안으로 더 깊이 들어왔다.
"조금 더, 응? 서은아, 제발. 좀 더 세게, 조금만 더, 입안에 하진 않을게, 그냥, 조금만............“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그가 그녀에게 애원했다. 이렇게까지 애원하는데 조금 더 못 하겠어?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있는 줄도 몰랐던 그녀의 대담한 일부가 그녀를 설득했다. 수민씨가 좋아하잖아. 해 줘 버려, 까짓 거, 뭐 어때?
하지만 좀....................창피한데.
하! 가운만 달랑 입고 나와서는 애교를 부린 쪽이 누군데? 웃기는 소리.
사실 그랬다. 결국 그녀는 대담한 일부에게 넘어가 버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서 쓰다듬다가 몸 쪽으로 눌러대길 반복하고, 그 때마다 그녀는 혀로 그의 몸을 쓸고 입으로 강하게 빨았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지만 너무 자연스러웠다. 커더란 사탕을 빨아먹는 거랑 왠지 비슷하다. 아니면 길쭉한 아이스바나.
“좀 더, 세게, 그래, 그래! 더, 더 깊이!”그가 거칠게 소리칠 때마다 그녀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그를 더 깊이 받아들이는 건 무리였다. 벌써 숨이 막히려고 한다. 그의 몸이 입안에서 더 커지는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목이 메였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그의 손을 떨쳐내고 간신히 입술을 떼고 숨을 헐떡였다. 그가 눈을 깜박이며 간신히 정신을 차린 듯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끙 소리를 내며 의자에 기댔다.
“아, 젠장.”
“기분................나빴어?”
그녀가 손등으로 입술을 살짝 잒으며 그를 보았다. 생각보다 별로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요즘 어린애들이 그녀보다 훨씬 잘 할 지도 모르지. 갑자기 자신감이 팍 죽어버렸다. 의사용 조그만 의자에 앉아 그녀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아직 치료가 제대로 안 끝났어, 의사 아가씨. 어떡할 거야? 더 성나게 만들어 놨잖아.”
그가 거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한 손이 천천히 내려가 자신의 젖은 남성을 어루만지자 그녀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저건 너무, 너무................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세상에, 너무, 아, 흥분되어서 가만히 있는데도 다리 사이가 젖어들었다, 팬티도 벗었는데. 가운에 묻으면 안 되는데!
“단추 풀어.”
그가 여전히 손으로 자신의 몸을 만지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의 손이 자신의 가슴 가운데를 덮었다.
“나, 나?”
“그래, 당신. 그 가운 단추 풀어. 위에서 두 개만.”
위에서 두 개? 그렇게 하면............그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수민의 그린 듯한 눈이 가늘어졌다.
“얼른.”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첫 번째 단추를 풀었다. 심장이 가슴이래서 펄떡거리는게 보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음 단추. 가운이 벌어지며 부푼가슴둔덕이 살짝 드러났다.
“가운 밖으로 가슴을 꺼내 봐.”
뺨이 타는 것 같다. 자신감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주도권도 그에게 도로 넘어갔다. 그녀는 그의 멸령에 얌전하게 따르는 하녀가 된 느낌이었다.
“그건 너무....................”
“얼른 해, 이서은. 안 그러면 나 지금 가 버려서 여기다 뿌릴 지도 몰라.”
그가 손으로 자신의 남성 끝부분을 살짝 쓰다듬으며 말하자 그녀가 놀라서 입을 반쯤 벌렸다.
“그럼 안 돼! 그러면 그거 다 어떻게.................”
“그러니까 빨리 해.”
입술을 깨문 채 난감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그녀가 결국 한숨을 내쉬고서 그에게 눈을 흘겼다.
“변태.”
“그럼 변태 애인은 뭐가 되는데?”
그가 거칠게 킬킬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입술을 깨문 채로 어색하게 가운을 벌리다가 가슴 봉우리가 드러나기 직전에 멈추고 그를 보았다. 그의 눈은 보일 듯 말 듯한 젖꼭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뜸들이지 마, 이서은. 나 지금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보여주면............. 더 금방 가는 거 아니야?”
“보여주면 다른 생각을 하느라 신경이 분산되지. 하지만 지금은 여기밖에 신경이 안 쓰이니까.”
그의 손이 다시 에로틱하게 자신의 몸을 어루만진다. 눈을 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쳐다보고 있는 것도 창피했다. 입술을 꼭 깨문 채로 그녀가 간신히 가운을 젖혔다. 그가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 속으로 드러난 도톰한 꼭지가 조그만 앵두처럼 톡 솟아올라 있다.
“이리 와, 위로 올라 와.”
그가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셔츠도 그대로 입고 있고, 바지도 그저 허벅지 아랫부분에 걸려 있는 채 로지 중요한 부분만 드러내고 있는 그가 우스워 보여야 할 것 같은데, 마치 아주 고급스러운 예술 영화에 나올 것 같이 근사해 보인다. 머리 위의 조명까지도.
그녀가 주춤거리며 그에게 다가가 위로 올라갔다. 의자에 잠시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다행스럽게도 금방 조용해졌다. 그의 허벅지 양쪽으로 다리를 벌리고 그녀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그의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점을 백퍼센트 이용하기로 한 것처럼 그가 한 손을 뻗어 의자 스위치를 눌렀다. 등받이가 위로 올라오며 그의 상체 역시 위로 올라왔다. 그의 입술이 젖꼭지 바로 앞까지 근접하자 그녀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처음도 아닌데 늘 할 때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가 아기처럼 그녀의 가슴을 빠는 건 어쩐지 굉장히 은밀했다.
한 손으로 그녀의 오른쪽 가슴을 어루만지며 그가 왼쪽 가슴을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그녀가 그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끄트머리만 살짝, 그녀가 몸을 떨며 고개를 흔들었다.
“수, 수민씨, 아................”
“나한테 장난친 벌이야.”
그의 손 역시 그녀의 가슴을 간지러울 정도로 살살 쓰다듬기만 한다. 혀가 끄트머리를 스치고, 이가 살짝 할퀴는가 싶더니 다시 부드럽게 빨아들인다. 손가락은 도톰하게 솟구친 앵두알을 살짝 튕기고는 주변에 원을 그리다가 다시 정점을 쓰다듬었다.
“수민씨, 그러지 말고, 아니, 제대로..........”
“나한테도 이렇게 했잖아. 얼마나 괴로운지 당신도 느껴 봐.”
안 돼, 아, 안 돼. 그의 손이 가운을 잡아당겨 어깨 아래로 내리고서는 가슴을 완전히 드러냈다. 양손으로 그의 팔을 잡은 채, 다리 사이로는 뜨겁게 젖은 그의 남성을 느끼며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몸을 젖혔다. 그녀의 한쪽 팔을 잡고서 그는 여전히 그녀의 양가슴을 만족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여리게 애무할 뿐이었다. 그녀가 몸을 떨며 신음했다. 우는 듯한, 혹은 고양이가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듯한 가는 교성이 계속해서 고요한 진료실을 채운다. 몸 안쪽이 바싹 조여들고 이미 겪어본 여성의 문은 두근거리며 그의 침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 수민씨. 장난 안 칠게, 응? 시키는 대로 다 할테니까 제발.....................”
“정말로?”
그가 혀로 다시 젖꼭지를 부드럽게 핥으며 물었다. 그녀가 격렬하게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방긋 웃으며 입술을 뗐다. 오른쪽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며 둥근 복숭아 같은 가슴을 꼭 움켜쥐었다. 그녀가 몸을 뒤로 휘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낮게 소리쳤다.
“좀 더, 좀 더! 수민씨!”
“이렇게?”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탄탄한 반죽을 꼭꼭 주물러 모양이라도 만들려는 것처럼 그가 그녀의 가슴을 힘주어 리드미컬하게 주물렀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몸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응, 응, 아, 하앙................”
“그 소리 진짜 귀여워. 너무 귀여워서 계속 그렇게 소리내고 있도록 만들고 싶어.”
그의 다른 손이 반대편 가슴을 감싸고 같이 주무르기 시작했다. 가슴을 꼭 움켜쥐고 가운데로 모아 깊은 굴곡을 만들었다가 반대편으로 밀었다가 다시 꼭 주무른다. 달아오른 젖꼭지는 그의 손바닥 한가운데 계속 쓸려 아랫배로 자극을 전달하고, 머릿속은 따끔거리는 가슴의 느낌으로 핑 돌았다.
“아, 악!”
그가 아플정도로 힘을 주는 순간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잠시 그녀는 자신의 것인 줄 알았으나 다음 순간 그가 그녀에게서 손을 떼며 낮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젠장. 미안, 참을 수가 없었어.”
그녀가 눈을 깜박이고서 간신히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허벅지 안쪽에 닿는 그의 남성은 아까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아니, 물론 지금도 단단하지만 아까 전보다는 조금 덜했다.
“약간 흘려버렸어.”
그의 말뜻을 이해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양손으로 뺨을 감싸고서 그녀는 시선을 피할 곳을 찾았다. 그가 낮게 웃으며 그녀의 턱 밑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왜 나보다 당신이 더 당황하는데?”
“그, 그게, 그거야..........”
대답할 말을 찾는데 실패하자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모르겠어.”
“환자를 한 번 바꿔볼까? 난 늘 의사노릇을 한번 해 보고싶었어.”
그가 재빨리 그녀의 나머지 단추를 푼 다음 팔 아래로 소매를 빼냈다. 그리고는 당황한 그녀를 옆에 세우고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옷도 재빠르게 벗었다. 알몸으로 진료실에 서서 그녀는 양팔로 가슴과 다리 사이를 가리고 주위를 불안하게 둘러보았다. 허벅지에서 흘러내리는 그의 결정체가 기묘하게 느껴졌다.
“누우시죠, 아가씨.”
그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 옆에 서서 등받이를 톡톡 두드렸다. 서은이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아, 아무 것도 안 입고?”
“물론이지. 이제부터 당신을 진찰할 거라구.”
그녀가 여전히 가슴과 다리 사이를 가린 채 서 있기만 하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싫어?”
“아니, 저기, 수민씨, 있잖아..........약간, 그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을 넘어선 거 같아.”
그녀가 기어 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말 했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 알몸으로 진료 의자에 누워서 그의 앞에 모든 걸 드러내는 건 너무..........
“아까 전에 시키는 대로 다 한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지?”
그가 낮은 목소리로 협박하듯 말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문 채 시선을 내렸다.
“이서은.”
그의 목소리가 경고조로 변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고서 어색하게 의자에 올라갔다. 팔로는 여전히 중요한 부분을 가린 상태였다. 지금 그녀의 몸에 남아 있는 거라고는 오로지 까만 구두뿐이었다.
“어디 차례로 볼까요? 환자분께선 아무래도 얼굴도 빨갛고 호흡도 불규칙한 게 뭔가 중요한 병이 있으신 것 같은데.”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고 쳐다보자 그는 그저 느긋하게 웃을 뿐이었다. 단추를 잠가서 다행히 정신 산란해지는 그의 몸은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뭐랄까, 그에겐 의사가운도 꽤 잘 어울렸다. 사이즈는 안 맞지만 그래도 꽤나 근사하다. 의사가운을 입고 근사해 보이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열이 있나 어디 한 번 볼까요?”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댔다. 부드러운 키스에 그녀의 눈이 저절로 감겼다.
“여기도. 그리고 여기도.”
눈가, 코, 입술 양옆, 턱, 그는 차례로 도장이라도 찍듯 그녀의 얼굴에 키스를 남겼다. 어느새 그녀의 손이 그의 얼굴을 감쌌고 그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 위에서 닿을 듯 말 듯 움직이는 중이었다.
갑자기 그가 격렬하게 키스했다. 입술을 거칠게 누르고 문지르고 입안을 자기 것인 양 맛보고, 입술을 아플정도로 깨문다. 그녀가 몸을 떨며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끌어당겼다.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의 진한 맛이, 거칠고 격렬한 움직임이 좋았다. 마치 그녀의 몸 안에 파고드는 그의 남성처럼 멋대로 움직이는 혀도.
그가 입술을 떼자 그녀는 한참동안 물에 빠졌던 사람처럼 숨을 들이켰다. 요란한 소리가 나자 그가 킥킥 웃으며 그녀의 턱 근처를 깨물었다. 그의 손은 아직 욱신거리는 가슴을 스쳐 배를 잠시 어루만지다가 다리로 향했다, 그녀의 예상처럼 곧장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대신 그가 한족 허벅지를 스다듬다가 재빨리 다리를 끌어당겨 손잡이 위에 걸쳤다. 그녀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다른 다리도 손잡이 위로 올라갔다.
“수, 수민씨. 이건 너무.............”
“가만히 있어.”
그가 스위치를 눌렀는지 의자 등받이가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팔을 허우적대자 그가 재빨리 한 손으로 양 팔목을 붙잡았다. 의자가 움직임을 멈추자 그가 그녀의 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다음 얌전히 놓아주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묶어버린다. 진짜야.”
그의 눈길이 드러난 다리 사이로 향했다. 그가 긴 팔을 뻗어 조명을 살짝 움직이자 그녀의 그 부분에 빛이 정확히 닿았다. 그녀가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그 부분이 달아오르는 게 흥분해서인지 아니면 빛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여기 내가 남긴 게 있는데.”
그의 손이 아직 허벅지에 묻어 있는 자신의 흔적을 닦아내더니 입고 있는 가운에 태연하게 닦았다.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수, 수민씨! 내일도 입어야 되는데!”
“내일 종일 내 생각을 하게 될 거야. 걱정마, 겉보기엔 티 안 나.”
“하지만..............”
“쉿. 이제 진찰을 해야지.”
진찰? 그가 의자를 끌어당겨 손잡이 옆쪽에 앉더니 그녀의 다리 사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완전히 벌어진 틈새로 가장 예민한 살점과 비밀스러운 여성의 입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가 손가락으로 살점을 살짝 건드리자 그녀가 신음을 흘렸다.
“부은 걸 보니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죠, 환자분?”
“수민씨이..................”
그녀가 다리를 오므리려고 하자 그가 양손으로 허벅지를 붙잡고 더 넓게 벌렸다.
“거기다가 빨갛게 충혈됐어. 그리고 그 아래로..........아, 이런. 뭔가가 흐르고 있는데, 이게 뭘까요?”
“수민씨!”
그의 손가락이 여성의 입구에서 흘러나오는 꿀물을 살짝 흝었다. 그녀의 엉덩이가 의자 위에서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가 젖은 손가락을 혀로 핥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3초 정도 정지해버린 느낌이었다.
“이런, 산 사람의 몸에서 굴이 흘러나온다는 건 믿을 수가 없는데. 제대로 맛을 한 번 봐야 평가할 수 이쎅T지.”
“수민씨!”
그녀의 비명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는 곧장 고개를 숙이며 양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 들어올렸다. 그의 입이 노풀되어 있는 여성을 공격하자 그녀는 이제 노골적으로 숨을 헐떡이고 비명을 지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이가 여린 살을 깨물고 혀는 통로 안쪽을 공격한다. 마치 한 방울도 빼놓지 않으려는 듯 그는 그녀의 꿀을 전부 다 핥았다. 아랫배가 당기고 온몸이 짜릿거린다. 그녀가 의자 위에서 고개를 흔들며 양손으로 그의 머리를 붙잡고 엉덩이를 위아래로 들석였다.
“수민씨, 그만, 안 돼, 제발 그만, 아, 하악!”
혀 대신 손가락이 안쪽으로 파고드는 순간 그녀가 온몸을 휘며 비명을 내질렀다. 별이 주위에서 쏟아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하나의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나더니 혀가 채 들어오지 못한 통로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손가락이 나왔다 들어갈 때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 쾌감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채 몇 초되기도 전에 그녀의 온몸이 부르르 떨리며 애액이 그의 손을 적셨다.
“최고야, 당신은 .정말 최고야.”
손가락으로 예민한 정점을 살짝 비틀며 그가 속삭였다. 그녀는 흐느끼며 그의 손길을 피하려 했다.
“안 되지, 그러면.”
삐걱거리는 소리에 그녀가· 눈을 떴다. 그가 의자위로 올라오더니 어느새 다시 단단해진 남성을 한 손으로 잡았다.
“갖고싶어?”
그녀가 눈을 질끔 감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이 정도로 만족할 수가 없다. 그가 깊숙한 안쪽까지 들어와서 완벽하게 채워줘야 모든 게 완벽해질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내가 콘돔이 없다는 거야.”
그녀가 눈을 번쩍 덨다. 그의 눈은 어두웠다. 한 손이 계속해서 자기 몸을 위아래로 쓰다듬고 있다.
“넣고서 마지막에 빼는 게 좋아,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을까?”
아무리 마지막에 뺀다 해도 위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차라리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하지만, 그건 알지만, 그래도 그를 느끼고 싶었다. 몸 안에서 고동치는 그의 일부를 느끼고 싶고, 부풀어올랐다가 가라앉는 그 묘한 감각을 다시 맛보고 싶었다.
“마지막에 정말.........뺄 수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의 여성 역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가 다른 손으로 그녀의 여성 입구를 살짝 벌렸다. 그녀가 고개를 젖히며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확신 없어. 그냥 버틸 지도 몰라.”
그의 목소리는 유감으로 가득했다. 솔직하긴 하지, 최소한, 그녀는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고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계속 그녀의 입구에서 움직이고 있는 한 무리였다.
“대신 그럼 가슴에 해도 돼?”
그녀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가슴과 그의 일부를 번갈아 보며 그녀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슴?”
“이런 거.”
그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한쪽 젖꼭지에서 다른 쪽까지 입술을 옮기며 축축하게 젹셨다. 그녀가 숨을 헐떡일 무렵 그는 입술을 떼고서 의자 위쪽으로 자리를 조금 옮겼다. 정확히는 그녀의 배 위, 옆구리 양쪽으로 무릎을 대고서. 그의 남성은 정확히 그녀의 젖가슴 사이에 놓인 상태였다. 빳빳하게 곤두선 끄트머리가 그녀의 턱과 입술을 스쳤다.
“손으로 가슴을 가운데로 모아 봐, 그래, 그렇게.”
그의 남성이 가슴 사이에 살짝 끼자 그의 얼굴에 남성적인 미소가 어렸다. 얼굴은 붉은기가 더 짙어졌다.
“당신, 가슴이 커서 이게 되는구나.”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가 손을 떼려는 순간 재빨리 그가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눌렀다. 가슴 계곡이 더욱 깊어지고 그의 남성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하는 거야, 이렇게...............”
그가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자 그의 거친 남성이 그녀의 젖가슴 안쪽에 마찰된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그가 앞으로 밀때마다 둥글고 뜨거운 남겅의 끝부분이 그녀의 턱과 입술을 스쳤다. 그녀가 살짝 혀를 내밀어 끄트머리를 핥자 그가 격하게 몸을 떨었다.
“그래, 더! 더 해 줘!”
그가 앞으로 전진할 때마다 그녀는 그의 몸을 핥았고, 뒤로 빠지면 가슴을 꾹 눌러 그를 압박했다. 그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남성이 더욱 부푸는 것 같다. 그녀가 몸을 휘며 가슴에 좀 더 확실히 닿도록 만들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뒤로 젖히자 마치 포효하는 호랑이처럼 보였다. 숨을 헐떡거리며 그녀는 그를 응시했다.
“이제 조금만, 얼마 안 남았어.............이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빠르게 중얼거리던 그가 갑자기 몸을 뒤로 확 뺐다. 다음 순간 그녀의 젖가슴 위로 뜨거운 액체가 쏟아졌다. 그녀가 힉 하고 숨을 헐떡였다. 통통한 둔덕, 곤두선 젖꼭지, 쇄골 위로 그가 남긴 하얀 흔적이 끈적하니 흐른다. 그녀가 눈을 깜박이며 배 위로 내려앉는 그를 응시했다. 여전히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그는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가슴 위의 액체를 살짝 만진 다음 그녀가 눈을 깜박거렸다. 맙소사, 내가 무슨 일을 한 거지? 이게, 이래도 되나? 괜찮은 건가? 마치 불법적인 일을 한 기분이었다. 너무 야해서 머릿속으로 차마 되새기기조차 힘들다.
“당신이 최고야, 서은씨.”
그가 간신히 그녀의 배 위에서 일어나며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수민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에 키스한 다음 속삭였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해 줄게.”
그가 느긋하게 가운만 걸친 채 사무실로 들어가는 문 옆 세면대로 걸어가더니 수건을 집어들었다. 물소리가 들린 다음 그가 다시 느긋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땀에, 그리고 그의 정수에 젖은 채 그녀는 의자 위에 그대로 누워만 있었다.
“이대로 내 거라고 전시하고 싶어. 아니면 사진이라 찍어놓고 싶어.”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는 느린 미소를 지은 다음 천천히 그녀의 가슴을 닦아주었다. 쇄골, 젖가슴 위를 차례로, 그리고 예민한 젖꼭지는 일부러 공을 들여 세심하게 닦는다. 피부가 깨끗해지자 그가 고개를 기울여 젖꼭지를 살짝 빨았다. 그녀가 헉 하고 숨을 들이키자 그가 씩 웃었다.
“마무리.”
“수민씨!”
그녀가 손을 들어 그를 때렸지만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동작이었다. 수건을 옆의 탁자에 올려놓고서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와, 내일부터 과연 당신 근무 어떻게 할까 모르겠어. 생각날 텐데, 응?”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싱긋 웃었다.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분명히 그럴테지.
“환자 볼 때마다 마스크 하니까.”
그녀의 변명 같은 말에 그가 킬킬 웃었다.
“마스크 아래로는 흥분한 의사다 이거지? 왠지 또 새로운 게 생각나는데.”
“안 돼. 이제 집에 가.”
그녀가 다리를 내리고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최소한 반대하진 않았다.
“집에 가서 콘돔 갖고 제대로 하자. 어때, 좋지?”
그녀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서 그가 가운을 벗고 바닥에 떨궈놓은 옷을 주워입기 시작했다. 가운을 받아든 다음 그녀는 아까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리고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내일 이 가운 어떻게 입지? 빨아올 시간도 없는데.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듯 그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보았다.
“꼭 이거 입어, 내일. 그리고 나 없는 동안에 내 생각 해. 알겠어?”
그녀가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옷을 마저 입었다. 그래,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모를 거다 그러니까 뭐 어때? 그녀가 그의 흥분의 증거가 묻어 있는 가운을 입든 말든 누가 뭐라겠어?
아무래도 지나치게 성적으로 분방해지는 것 같아, 이서은. 머릿속의 이성이 속삭였다.하지만 그녀는 가뿐하게 무시했다. 좋은데 어떡해? 이게 훨씬 좋은걸.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11.
“기분 되게 이상하다.”
팩이 끝나고 나서 일어나며 서은이 옆에 있던 수민을 힐끔 보며 말했다. 그가 낄낄 웃으며 일어났다.
“뭐가?”
“아니, 그냥.”
피부 손질을 받아보겠다고 생각한 건 오래됐지만 남자랑 같이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녀보다 훨씬 그런 데 밝은 남자한테 소개받아 할 줄은.
“기분 어떠셨어요?”
피부관리사가 그녀를 보고서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수민이 끼어들었다.
“영양팩도 해 준 거 맞지?”
“어머, 날 뭘로 보는 거야? 해 준다고 했으면 다 해 준다구. 수분까지 다 했어. 너무한다, 너. 날 의심하고.”
수민과 굉장히 친해 보이는 관리사는 왠지 모르지만 몇 번이나 서은을 흝어보았다. 어딘가 재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서은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가 수민과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표정을 폈다. 근사한 피부관리까지 했는데 인상 쓰다 주름이라도 생기면 말짱 헛거다.
“다음 번엔 어깨랑 등관리까지 해야겠다. 이 사람 어깨랑 등이 아프다고 종종 그러거든, 직업병이야.”
“직업이 뭔데요?”
여자가 그녀를 돌아보고 방긋 웃으며 물었다. 정말로 상냥하다기보다는 직업적인 미소 같았다. 하지만 뭐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서은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치과의사예요.”
“어머, 그러세요? 대단하다. 저희 가게에도 치과의사 하시는 분들 몇 명 오세요. 제 고객 중에도 두 분 있는데, 두 분 다 나이가 꽤 많으시거든요. 그런데 이서은씨는 치과의사처럼 안보여요. 너무 젊어서.”
저게 지금 날 놀리는 거야, 아니면 진심이야? 왠지 모르게 그녀의 나이를 강조하는 듯한 느김이 들어서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서은은 조심스럽게 가운을 여미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수민도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2주 있다가 와서 한 번 더 받을래? 여자친구분이랑?”
여자는 마치 자기 것인양 수민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물었다. 서은의 눈살이 저절로 더 찌푸려졌다. 수민의 단골 가게라고 해서 오긴 했지만 아무래도 다음엔 다른 데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 한번 찾아볼까?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피부관리사는 여전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건네주는 녹차를 홀짝이며 서은은 수민을 보았다. 피부가 매끈매끈해 보이는게 확실히 근사하다. 하지만 아까 옷을 갈아입으며 거울을 보니 그녀 자신은 그냥 그래 보였다. 맨날 보는 똑같은 얼굴.
“괜찮아?”
수민이 그녀의 어깨를 안으며 물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응, 처음 해서 그냥 좀 이상한가 봐. 얼굴도 되게 좀 번질번질해진 것 같고.”
“어머, 번질번질이 아니에요. 이서은씨 피부가 원래 굉장히 건조하신 편이라서 집중관리가 필요해서 그런 게예요. 수민이 봐서 무료로 팩도 해 드렸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서운하다.”
말꼬리를 길게 끌며 여자가 비반하듯 말했다. 서은은 눈을 굴리고 싶은 걸 참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여튼 난 번들번들하게 느껴지는데.
수민이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어 보더니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네. 보들보들해. 뭐 원래도 괜찮지만, 아무래도 영양분 좀 주입하면 더 좋잖아. 요즘 피곤하다면서.”
그가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한 번 콩 기댄 다음 똑바로 섰다.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리던 서은의 눈에 피부관리사의 표정이 들어왔다. 마치 우습다는 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녀가 채 확인하기도 전에 다시 아까전의 그 직업적인 미소로 되돌아갔다.
“그럼 다음 예약 일자 잡을까요? 수민이 넌 2주 있다가?”
“응.”
두 사람이 날짜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며 서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를 보았다. 이상하다. 어쩌면 그녀의 자의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왠지 그 여자가 그녀를 같잖게 생각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이도 들만큼 들어서 젊은 남자 끼고 다닌다 이건가? 웃겨, 정말. 내가 누구랑 사귀든 댁이 무슨 상관이야? 부러우면 댁도 사귀시지?
예약을 잡고 있는 수민을 내버려두고 그녀는 먼저 피부관리실을 나왔다. 바람이 길거리를 스치고 그녀를 홱 덮쳤다가 사라진다. 한숨을 푹 내쉬고 그녀는 문가에 기대섰다.
“나 왜 이러지?”
친구들과 만난 이래 신경이 바싹 곤두서 있는 느낌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개 그녀와 수민의 나이차를 은근히 비꼬는 말처럼 느껴지고, 누가 쳐다만 봐도 그녀가 너무 나이가 많다고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의식 과잉이야, 이서은. 아무도 너 안 쳐다봐.”
“누가? 난 쳐다보고 있는데.”
막 밖으로 나오던 수민이 그녀의 아깨를 안으며 방긋 웃었다. 서은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나, 그냥 혼잣말이었어.”
“왜 그래? 요즘 며칠이나 계속 기분 나빠 보여. 아직 그거 할 때 안 됐잖아.”
서은이 이를 드러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 생리주기까지 좀 기억하지 마. 창피해!”
“뭐가 어때서.”
그는 태연하게 어깨를 들썩이고는 그녀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하긴, 그가 뭘 잘못하는 것도 아닌데 뭐라고 하겠는가.
“수민씨 거기 자주 가?”
“피부관리실? 응. 다닌지 한 4개월 되어가나? 괜찮아. 수진이 옆집누나 친절하고. 잘 하지 않아? 별로였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서은은 한 손으로 뺨을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학 졸업한 직후 두어 번 길거리에서 공짜로 해 준다는 말에 넘어가서 가 본 피부관리실과는 다르게 여기서는 그녀의 피부가 죽도록 나쁘니까 몇 백만원짜리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느니 하며 귀찮게 굴지 않았다. 물론 수민이 같이 가서 그런 걸수도 있고, 혹은 돈을 내고 받은 거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 여자가 싫은걸. 그녀가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고서 속으로 이죽거렸다. 싫은 건 싫은 거야. 어쩔수 없어. 아무리 잘해도 그 여자한텐 다시 안 받아. 불쾌해, 흥. 속으로 욕을 하면서 타박타박 걸어가던 그녀는 문득 수민이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마음에 안 들었어? 다른 데로 소개해 줄까?”
그녀가 눈을 깜박였다. 수민은 진심으로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하여튼 사소한데 너무 신경 쓴다니까. 그녀가 그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괜찮았어. 처음 해봐서 좀 기분이 이상해서 그래. 진짜 괜찮아.”
“그럼 다음 번에도 같이 갈거야?”
난감한 얼굴로 그를 쳐더보다가 그녀는 재빨리 머릿속에 떠오른 변명을 늘어놓았다.
“수민씬 요즘 패션 쇼 준비 때문에 일주일에 두 번씩도 가잖아. 난 그렇게는 못 가지. 한달에 한번 정도 가면 되려나?”
“나도 평소엔 이렇게 안 해. 이번에는 그 개, 음, 그 망할놈 때문에 그런거고, 트집이란 트집은 죄다 잡으니까 어떻게 할 수가 있어야지.”
짜증스러운 듯 혀를 차고서 그가 걸음을 옮겼다. 서은은 고개를 기울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계속 그렇게 안 좋아?”
“지금은 그냥 그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고 노력하고 있거든. 그리고 쇼 담당자는 따로 있고. 괜찮아지려니 하고 있어.”
그가 주머니에 손을 꽂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그녀를 보고 싱긋 웃었다.
“최소한 하루하루 시간은 지나가잖아.”
“수민씬 언제부터 모델이 되고 싶었어? 대체로 요즘 애들은 탤런트 같은거 좋아하지, 모델은 좀 아니지않아?”
수민은 잠시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있다가 엷게 웃었다.
“탤런트도 나쁘지 않지 뭐. 해볼까 싶기도 한데,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선생님도 그러시고, 그런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
탤런트? 헤에. 그러니까 친구들의 말처럼 그가 그렇게 생각이 없는건 아니다.그렇지? 아닌가?
역시 아무래도 탤런트가 되고 싶다고 하면 철든 십대 어린애 같은 느낌이 든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철이 들면 다들 조금 더 현실적인 직업을 찾게 마련이다. 탤런트라니, 그런건 연줄이 없으면 절대 안되는거 아니었나?
“어쨌든 아는게 모델일뿐이니까 지금은 다른걸 할지말지 아직 결정 안했어. 서은씬 편하겠다.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치과의사가 된다고 결정나는 거잖아.”
서은이 인상을 찌푸렸다.
“꼭 그런건 아니야. 그만 두는 애들도 있고, 또 들어간 다음에 전공 결정도 하니까.”
“치과의사가 뭐, 전공을 정해봐야 치과의사 아닌가? 의사는 성형외과니 내과니 그런게 있어도.”
그녀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수민씬 잘 모르잖아. 우리도 힘든거 많아. 공부는 얼마나 힘든지 알아? 게다가 들어가고 나서도 모르는 사람들은 수민씨처럼 그런식으로 말하지, 신경쓸것 이것저것 많지,뭐하나 잘못하면 이건 사람이 달인 문제라 당장 난리난다구. 수민씬 무대에서 좀 비틀거렸다고 큰일날거 없지만, 난 손이 흔들려서 이를 잘못 갈아내기라도 하면 진짜 큰일 나.”
“이서은, 말 좀 너무한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서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서은 역시 찌푸린 얼굴로 그를 보았다.
“수민씨가 먼저 그런 식으로 말했잖아.”
“내가 뭘? 치과의사라 직업좋다, 그 소리밖에 더했어? 괜히 당신이 이상하게 받아들인거잖아.”
서은은 기가 막힌 얼굴로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이상하게 받아들였다고? 애당초 말을 이상하게 한건 수민쪽이었다. 잠시 그를 쳐다보기만하던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됐어. 수민씨야 어리니까 어쩔수 없지. 아직 아무것도 모르잖아.”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더니 홱 끌어당겼다. 그녀가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지금 뭐라고 그랬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사실이잖아, 수민씨 어린거. 내가 틀린말 했어?”
그녀가 입술을 비죽이며 쏘아붙이자 수민의 얼굴이 더욱 벌개졌다.
“그래서 뭐? 지금까지 아무말도 안하더니 왜 갑자기 그러는데? 뭐가 문제야? 몇 살 어려서 그게 뭐? 그래서 내가 당신한테 못해준거 있어?”
갑자기 그가 격하게 소리치자 서은이 눈을 깜박였다. 그가 화내길 바란간 아니었다. 그저, 그저, 그러니까, 말하자면.............
좀 신경질이 났던것 뿐이다. 그가 그녀의 직업을 갖고 뭐라고 하는게, 친구들이 그녀에게 뭐라고 했던게, 피부관리사가 그녀를 재듯이 흝어보던게.
그래서 괜히 아무것도 하지않은 수민에게 화풀이를 했을 뿐이었다. 그게 좀 지나쳤던 모양이다. 더럭 겁이 나자 그녀는 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리고 시선을 돌렸다.
“그게 아니라....그냥, 그러니까, 내 직업갖고 뭐라고 하지말라는 것뿐이야. 수민씨가 먼저 괜히 치과의사는 돼게 편한것처럼 그렇게 말했잖아! 세상일 편한게 어디있어? 나도 힘들고 짜증날 때 많아. 환자보는거 쉬운거 아니란 말이야.”
“그런식으로 말한거 아니었어. 서은씨는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어쨌든 선택의 폭이 줄어든거잖아. 그냥 그래서 부럽다는 거였어. 그걸 갖고 뭘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이는데?”
소리를 지르던 수민은 제풀에 지친듯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흔들었다. 찌푸려져 있던 눈가와 입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 참. 나한테 어리다 그러는 당신은 뭐 어른처럼 구는줄 알아? 철 좀 들어, 이서은.”
그의 말대로 정말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걸 인정할 수가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고 혀를 낼름 내밀었다.
“어리면 좋지 뭐. 이 나이에 어려보인다는 소리 듣는게 쉬운일인줄 알아?”
“왜? 아까 수진이 옆집누나도 엄청 어려보인다고 그러더만. 몇 살이냐고 나한테 물어보더라.”
어느새 다시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서 그가 걸음을 옮겼다. 그의 허리에 한 팔을 두르고 그녀도 종종걸음으로 그와 보조를 맞추었다.
“피부가 어디가 푸석푸석해. 당신이? 보송보송 좋기만 한데. 내친구들 중에도 당신처럼 피부좋은 사람 별로 없어.”
“거짓말쟁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푹 찌르고 그녀는 계속 걸음만 옮겼다. 하지만 얼굴에 어느새 피어오르는 미소만은 억누를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화내고 있었으???서 지금은 또 히죽거린다니, 정말로 스스로가 바보가 된기분이었다.
“쇼 할때 올거지?”
그가 느긋한 어조로 물었다. 그녀가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언젠데?”
“다음달 첫째 토요일 저녁때.”
“응, 갈게.”
잠깐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가 고개를 기울이고 그녀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번엔 보고 흥분하면 안 돼. 달래줄 시간이 없다고. 이번건 큰건이라서 잘 해야 된단 말이야. 그러니까 나 자극하지마, 알겠어?“
그녀가 입을 반쯤 벌리고 그를 쳐다보다가 양손으로 그의 가슴을 팡팡 내리쳤다.
“뭐야, 그게 내 잘못인가? 수민씨가.........너무, 그게, 그러니까 그렇지! 게다가 난 수민씨 자극한 적 없어!”
“가운만 입고 병원놀이 한건 어디의 누구더라?”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수민이 킬킬 웃으며 그녀를 품에 덥썩 안고서 게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그녀가 계속 주먹으로 그를 때리려고 했지만 그가 워낙 꼭 안고 있어서 어쩔수가 없었다.
“진짜 못됐어, 수민씨.”
“그러는 당신은 엄청 야하고, 안 그래, 이서은씨?”
대답대신 그녀는 그의 옆구리를 꼭 꼬집었다. 그가 장난스럽게 아얏 소리를 냈지만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단단한 근육을 파고들다가 천천히 스다듬었다. 그의 몸은 정말로 근사했다.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자리한 근육, 그런것처럼 근사한 골격, 널찍한 가슴과 따스한 피부. 생각만해도 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그녀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얼른 가자. 나 이따가 또 연습 때문에 가야 돼.”
그래, 연습. 목까지 치미는 투덜거림을 삼키고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조금은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야할때였다.
하지만 솔직히 조금은 아쉬웠다.
호텔에서 열린 패션쇼무대는 생각보다 꽤 컸다. 지난번 백화점 패션쇼와는 차원이 다른것 같다. 앞으로 튀어나온 무대의 양쪽으로 의자가 쭉 놓여있고, 벌써 사람들이 분주하게 들어와서 적당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녀도 중간쯤 자리를 잡은 다음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메라가 번쩍거리고 여기저기 TV에서 자주 본 탤런트들이 오가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한달간 수민은 내내 이 쇼에 최선을 다했다. 솔직히 모델업계에 대한 책을 두어권 보긴 했지만 여전히 문외한인 그녀로서는 무슨 패션쇼 하나에 그렇게 연습을 많아 하나 싶었지만 그건 결국 치아 땜질하나 하는데 뭐 그리 많이 배우나 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똑같은 것이려니 하기로 했다. 어쨌든 막판이 되자 수민은 지쳐서 그녀에게 밤에 전화만 하고는 자기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조금 서운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두어 번 오전 근무가 없는 날 얼굴을 보니 정말로 쉬어야 할 얼굴이라서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어제 그제는 연락조차 못했다. 수민이 문자메세지를 보내긴 했지만 그게 전부여서 오늘은 언제 끝나나 초조하기만 했다. 곷을 사올까 생각도 했지만 모델에게 곷을 주는건 패션관련 케이블TV에서 본 것 같아서 관두고 말았다.
“어, 옆집누나.”
수민의 친구들 세명이 그녀의 옆으로 조르르 다가와 인사를 했다. 서은 역시 방긋 으며 그들을 맞았다. 최소한 혜민은 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수민이 보셨어요?”
그녀의 옆에 앉으며 재석이 물었다. 그녀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니, 뒤엔 스텝들 밖에 못 들어가잖아.”
“잠깐 들어갔다 올 수 있어요. 아는 사람들 있거든요. 갔다올래요? 수민이가 좋아할텐데.”
화장하고 준비하고 있을 수민의 모습을 본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녀는 결국 고개를 흔들었다.
“방해될지도 몰라. 나중에 보면 돼는데, 뭐.”
“그럼 그러세요. 박원희 선생님 성격 장난 아니라서 외부인 들어온거 알면 싫어하실수도 있으니까.”
수민이 그렇게 욕을 해대던 디자이너 이름이 박원희였다. 잡지에서 본 사진으로는 작달막한 데다가 꼭 게이스럽게 생긴 남자였지만 부인에 자식까지 있는 스트레이트라고 수민이 딱 잘라 말했었다.
“수민씨 엄청 고생하던데. 이번 쇼 때문에.”
“박산생님 고수민 싫어해요. 이번에 쓴 거 순전히 학원에 정선생님이 막 추천해서 그런 걸걸요. 하여튼 고수민 운도 좋아. 정선생남 눈에 딱 들어가지고.”
이름이 생각 안나는 다른남자아이가 재석의 옆에서 조잘거렸다. 의아한 그녀의 표정을 알아챈 듯 재석이 파ㄹ꿈치로 말을 하던 소년을 툭 쳤지만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서 그저 마주 주먹을 날릴뿐이었다.
“뭐? 내가 틀린 말 했냐? 정선생님이 저 자식 편애하는 거 사실이 잖아. 지네 형 잘 나간다고.........”
“야, 야, 그만 좀 해라.”
반대편에 앉아 있던 석진이 말하던 소년의 뒤통수를 철썩 소리가 나게 쳤다. 앞에 앉아 있던 사람 두어명이 그들을 돌아보자 세 소년은 눈치가 보이는지 자세를 바로잡았다.마치 장난치는 대학생들 같다. 뭐 대학학교 졸업한 거 몇 년되지도 않은 애들이지. 그녀는 멍하니 생각했다. 수민의 친구들인데도 이 아이들은 그저 ‘아이’ 로 보이는 반면 수민은 어른으로 보이는 이유가 뭘까? 그녀가 콩까지가 쓰여서?
“엊그제 송주환 만나서 들었는데, 쟤네 형 지금 들어와 있다더라. 디자이너 선생님들이 전부 한 번 쓰고 난리라던데. 박선생님도 그래서 썼을 거라는 말도 있어. 동생 좀 써주면 한 번 어떻게 해 줄까 싶어서.”
계속 수민의 큰형 이야기야?“
“”옆집누나 만나봤어요? 수현이 형이랑 수민이랑 되게 닮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름이 고수현이구나. 모른다고 하는 건 왠지 그랬다. 벌써 수민과 만나고 닜는게 석달인데 모른다는 건 창피하지 않은가?
그 동안 다른건 굉장히 많이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가족이야기는 안 했다. 아버지가 신문사 해외 특파원이라서 외국에 계신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그나마도 어디인지는 못들었다. 그런걸 물으려고 하면 꼭 수민이 엉뚱한 짓을 해서 그녀의 정신을 돌려놓은 탓이었다. 대부분은 물론 애한짓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그 형이 뭘한다는거지? 유학가 있는데 지금 잠깐 들어왔다더니 벌써 몇 달째다. 그녀는 세 소년의 이야기에 귀를 바싹 기울였다.
“어쨌든 그렇게 닮았으니 뭐. 게다가 숨니이도 경력이 벌써 몇 년이야? 저 지식 한창때 군대만 안 갔다왔어도 지금쯤 훨씬 더 인정받을 지도 모르잖아.”
“한창때 군대를 간놈이 이상한 거지, 뭐. 대학 가자마자 군대부터 가는 놈이 어디 있냐? 나 같으면 어떻게든 빠져볼텐데.”
“방법있냐? 있음 나도 하겠다.”
소년들이 낄낄거렸다. 눈을 깜박이며 방금 들은 이야기를 곱씹던 서은은 재석의 팔을 살짝 건드리고서 나직하게 물었다.
“수민씨 군대 갔다왔어?”
“옆집누나 몰랐어요? 쟤 작년 8월에 제대했잖아요. 그래서 지금 1년도 안돼서 선생님이 자주 워킹에서 군대 물이 덜빠졌다고 뭐라고 그러세요. 겨울 내내 장난아니게 노력했다니까요.”
군대에 갔다왔다 이거지? 그런데 왜 난 몰랐지?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고서 앞사람의 등를 노려보았다. 하긴, 물어본적이 없으니 말 안 했겠지. 그런 이야기까지는 안 했으니까. 하지만........................
“대학은?”
“대학이 뭐요?”
대학에 다니느냐고 물어볼수는 없는 이링다. 그렇지? 그것도 모른다면 얘네들이 그녀와 수민의 관계를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하겠는가?
“아니, 그게, 언제 복학하려는 건지 알아?”
다행스럽게도 재석은 그녀의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죠, 뭐. 이 일잘 되면 그냥 계속하지 않을까요? 애당초 대학가고싶어서 간것도 아니고, 형이랑 엄나가 가라고 해서 간거니까. 일이 잘 되면 형있는데로 도로 나가지 않겠어요? 쟤 원래 이탈리아에 살았잖아요.”
이탈리아?
이탈리아라고?
아니 뭐 이상한 건 아니다. 그때 토니오와 그렇게 말을 잘 하던걸 보고 이미 깨달았어야 했다. 하지만 물어봐야지 하고는 잊어버렸고, 그후로는 그가 외국어를 하는 걸 들을 일이 없었다.
맙소사. 나 사실 수민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나 봐. 전혀. 아무것도. 중요한 건 하나도!
세 소년이 떠드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그녀는 멍하니 무대만 쳐다보았다. 객석의 사람들이 왔다갔다하고 카메라가 몇 번 더 플래시를 터뜨린다. 조명이 살짝 어두워지고,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소년들이 쿡쿡 서로를 찔렀다.
“시작한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여전히 계속 웅성거린다. 카메라도 산만하게 플래시를 터뜨리고, 뒤쪽에서는 어디서 나왔는지 방송용 카메라가 돌아가고있다.
서은은 멍하니 무대만 쳐다보았다. 잠시후 모델들이 차례로 힘차게 걸어나와 긴 다리와 근사한 옷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서 홱 돌아서 다시 들어간다. 길거리에서라면 정신이 나갔나 싶을 정도로 진한 화장에 외계인 같은 머리모양, 하늘거리는 옷을 걸치고서도 그들은 전부 대단히 자신만만했다.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원피스, 드레스, 절대 보통 사람들은 입을 일이 없을 듯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들이 차례로 나오고 그 다음엔 남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양복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나오다 세 번째에 수민이 등장 했다.
마치 1920년대 배경의 영화에 나올것처럼 그는 비스듬히 중절모를 쓰고 양복을 입고 있었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무대 앞쪽까지 걸어온 다음 사람들을 한번 보고 몸을 돌린다. 표정이며 자세가 굉장히.........포스터 속의 바로 그 모습처럼 보여서 순간적으로 그녀는 움찔했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몸이 차가워졌다가 곧장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안 돼, 그만 둬. 지금 난 저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엄청난 사실을 발견했다구. 그런 상황에 어떻게 또 야한 생각을 할 수가 있어? 말도 안돼!
하지만 저 가늘어진 눈이 객석 끄트머리 어딘가를 바라보는 거 봐. 기울어진 모자챙으로 드리운 그늘하며 주머니에 한손을 찌르고 살짝 몸을 비틀어 선 모습. 어떻게 가슴이 안 뛸수가 있어?
“그럼 스트레이트가 아닌거지.”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남성적인 매력을 알아볼수 있는 성적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저 모습에 가슴이 뛰게 마련이다. 아랫배가 지근거리는것 같은 부작용은 뭐, 사람 나름이겠지.
“여기 있었네.”
갑자기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예감에 뒤를 돌아본 서은은 혜민이 새초롬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걸 보고 한숨을 삼켰다. 이런 제길, 얘는 또 왜 왔담.
“늦었네. 빨리 앉아.”
하필이면 재수없게 꼭 이럴때 근처에 빈자리까지 있다. 다른데는 빈자리가 보이지도 않는데. 서은은 속으로 욕설을 웅얼거리며 그녀 쪽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혜민은 노골작으로 그녀를 무시하고서 세 소년을 보았다.
“수민이 오빠 어땠어? 나왔어?”
“방금 들어갔어. 좀 긴장한 거 같더라.”
전혀 몰랐는데. 서은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왜 나보다 얘네들이 더 수민씨에 대해 많이 아는거지?
“아이 참, 오빠 보려고 빨리 오려고 서둘렀는데, 길이 하도 밀려서,짜증나.”
곧이어 세 사람이 무대에 나오고 있는 모델들의 워킹이며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자 서은은 완전히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어차피 음악이며 카메라소리 때문에 이야기를 나눌만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넷이 머리를 맞대고 속닥거리고 있는데 그녀 혼자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 것도 왠지 바보처럼 느껴졌다.
잘모르는 세계에 있다는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수민과 계속 함께 있고 싶다면 좀 더 모델업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는데 수민은 그녀가 물어도 대답을 피하기만 한다. 모델 일에 대해 물으면 그런 건 알아서 뭐 할거냐고 웃으며 화제를 돌릴뿐이었다. 수민과 수민의 친구들을 제외하면 그녀 주위에서 그런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장 가까운게 방송국 쇼 프로그램PD정도다. 하지만 TV의 쇼 프로와 패션 쇼는 전혀 다르지 안하는가.
내탓이 아니야. 순전히 수민씨가 비밀스럽게 그는 탓이야. 도대체 스물셋살짜리가 왜 그렇게 비밀이 많아? 왜 그렇게 자기일에는 입이 무겁냐고. 원래 친한 사람앞에서는 기분 나쁜일이라든지 재미난 일 같은건 조잘조잘 떠들고 싶은게 사람심리 아니야?
“정말이지............”
혜민이 힐끔 여우처럼 눈꼬리로 그녀를 보았다.
“언니 혼자 뭐라고 중얼중얼하는 게예요? 이런데서 시끄럽게 굴지말아요. 촌스러워요.”
서은은 눈을 굴리고 싶른 것을 참고서 그저 눈썹만 치켜올렸다. 먼저 말을 꺼낸건 본인이면서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드는지 혜민이 입술을 오므리고 그녀를 노려보다 다시 홱 고개를 돌렸다. 사이에 끼어있던 재석이 미안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양손을 모으고 비는 시늉을 한 다음 혜민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남자애들을 완전히 거느리고 사는구나. 저런 애들이 꼭 있다. 그녀의 동기중에도 그런 애가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애의 주변에는 늘 뒤치다꺼리를 해 주는 남자애들이 네다섯은 꼭 있었다. 여자애가 무슨짓을 하든 그애들이 전부 다 받아주고 남들이 화내는 걸 막아주곤 했다. 몇 번정도 그녀는 걔네들이 어떻게 남자애들을 그렇게 하인처럼 부리는지 알고 싶어서 친해지려고 노력했었다. 위경련이 일어날저도로 스트레스를 받고서 결국 포기하곤 했지만.
수민이 전에 했던말도 그런거였을까? 그녀정도면 남자를 손가락으로 부려야 한다고 한 말. 하지만 어떻게 남을 손가락으로 부릴수 있는건지 그녀는 나이 서른이 되도록 알 수가 없었다.
무대에 다시 수민이 나오는 순간 그녀는 곧장 알아차렸다. 옆에서 남자애들이 속닥거리고 혜민이 나직하게 rI아 소리를 질렀다.
“오빠 오늘 진짜 간지난다. 뭐하나도 긴장 한거 안 같네. 저 봐, 무대간지 끝내주잖아.”
“몸간지가 좋으니까 그렇지. 어쨌든 저 자식 몸 하나는 타고났잖아.”
“박선생님 오늘 신경 엄청 섰나부다. 어쨌든 오늘 카메라 삘은 환상이겠네.”
서은은 솔직히 옆에 앉은 이아들의 이야기를 반밖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간지가 도대체 눠야? 카메라 삘? 뭔가 그녀가 모르는 전문용어인지도 모른다. 눈으로는 무대위의 수민을 보면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혜민이 못 듣도록 재석에게로 몸을 기울이고 조그맣게 물었다.
“저기, 간지가 뭐야?”
“간지가 뭐냐뇨? 옆집누나 간지 몰라요? 간지나는거.”
간지럼 타는것도 아니고 간지가 뭔지 도대체 내가 어떻게 알아?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업계 용어 같은거야?”
재석이 옆을 보고 풋 웃었다. 다른 남자아이들도 키득 웃고 혜민이 기가 막히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언니 간지도 몰라요? 그럼 간지나는 거 뭐라고 해요?”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달리 어떻게 말하냐, 이 멍청이 계집애야? 확 쏘아붙이고 싶은 걸 참고서 그녀는 방긋 웃었다.
“내가 원래 좀 그런데 느리거든, 그런데 간지난다는게 그러니까 도대체 어느나라 말이야? 우리말이야?”
웃고있던 남자이이들이 갑자기 서로를 마주보았다. 석진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답이라도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어색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어. 우리말은 아닌것 같은데.”
“일본말 아닌가? 아마 그럴걸?”
“야, 일본말에 간지난다는 말이 어디있냐? 그런거 없어. 나 일본어 배우잖어.”
세 남자아이들이 열심히 토론을 벌인다. 이렇게 될 줄 몰랐었는지 혜민이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뭐야, 오빠들 그것도 몰라?”
“넌 알어?”
“간지난다는 게 간지나는 거지, 그걸 왜 다른 말로 찾아? 사과보고 다르게 부르라는 사람 없잖아, 옷간지, 무대간지 그런 거 어떻게 다르게 말해? 당연히 우리말이지.”
아무래도 나중에 수민에게 물어보든지 아니면 인터넷이라도 찾아보는 편이 낫겠다고 결론내리며 서은은 무대를 보았다. 아까와는 다른 스타일의 양복을 입고 머리는 바싹 곤드세운 수민의 모습은 마치 마피아처럼 보였다. 총 하나만 들면 고전과 현대를 뒤섞어 놓은 새로운 스타일의 마피아의 모델로 나서도 될 것이다.
상상력이 지나친가? 돌아서 들어가는 그를 보며 그녀가 나직하게 한숨지었다. 다리 사이가 조여들고 머릿속에서는 총을 든 그가 그녀에게 옷을 벗으라고 강요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포스터 속에서처럼 비뚜름하게 담배를 물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한 손에 느긋하게 총을 들고서 그녀를 보는 거다. 사로잡힌 포로인 그녀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가 시키는대로 옷을 벗고, 그러면 그는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다가 마침내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덮치는.........
“나중에 가르쳐 줄게요, 옆집누나. 우리도 좀 뭐가 안 맞는 것 같아. 서로 말 생각하는게 다르네.”
재석이 그녀를 보고 말했다. 그녀가 흠짓하며 그를 보자 재석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랐어요?”
“어, 아니. 아니야. 그래, 나중에 알려줘. 아니면 수민씨한테 물어보지 뭐.”
한 손을 미친 듯이 두근대는 가슴위에 올리고서 그녀가 간신히 말했다. 목소리가 정상적으로 나오는 게 다행이다. 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이제 머릿속으로 완전히 영화를 찍는구나. 미쳐, 미쳐.
세 번째로 나왔을 때도 수민은 아까 전 스타일과 다르긴 해도 어쨌든 여전히 마피아스러운 양복차림이었다. 머릿속에서는 다시 새로운 영화가 돌아가고 있다. 마피아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끌려간 그녀의 앞에 나타난 수민. 그녀에게 그의 노리개가 될것을 강요하고 그녀는 반항하지만 그의 매력에 결국 무너져서 그가 원하는 대로 다리를 벌리고..................
“한국에 마피아가 어디 있어?”
나직하게 중얼거리고서 혐오감에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생각이 떠오르나 몰라. 나 진짜 변태 맞나 봐. 정신과 상담이라도 필요한거 이날까? 섹스 중독 아냐?
하지만 수민외의 사람과는 손도 맞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분명 그런 건 아니다. 차라리 고수민 중독이라면 모를까.
쇼의 피날레를 장식한 건 유명한 남자 탤런트와 외국인 여자모델이었다. 저 사람보다 수민씨가 훨씬 멋진데. 속으로 툴툴거리며 그녀는 마침내 등장란 디자이너에게 예의상 박수를 쳤다. 수민을 괴롭힌 걸 생각하면 박수같은건 치고 싶지 않았지만 남들 다 치고 있는데 안 치면 너무 눈에 띌까봐 별 수 없었다. 혹시 박수를 안치고 있는데 저 사람이 날 보기라도 해 봐. 그리고 내가 수민씨랑 사귄다는 걸 알아 봐. 앞으로 계속 수민씨를 미워할거 아냐?
하지만 수민씨 형 때문에 자리를 내준거라고 했잖아. 수민씨형을 쓰고 싶어서. 수민씨 형도 모델이었나? 모델도 유학을 가나? 이탈리아에 무슨 유명한 모델 학교라도 있나? 그녀가 아는 외국의 모델 비슷한 업계관련학교는 뉴욕의 파슨스뿐인데, 그나마 파슨스는 디자인스쿨이니 모델이 가진 않을 것이다. 모델들과 디자이너가 인사를 하고 나자 쇼가 끝났다. 객석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삼삼오오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서은도 일어섰다. 재석이 그녀를 툭툭쳤다.
“옆집누나도 같이 갈래요? 아마 뒤풀이 압구정에서 할거 같은데. 수민이랑 따로 만나기로 했어요?”
“응, 수민씨가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어.”
“그럼 우리 먼저 갈게요.”
하지만 뒤에서 곧장 혜민이 제동을 걸었다.
“나도 수민이 오빠 기다렸다가 같이 갈래. 나 수민 오빠한테 할 말 있어.”
할 말? 어째 오늘따라 혜민이 머리며 옷이며 엄청나게 신경쓰고 온 게 이제야 눈에 띄었다. 갈게 풀어헤쳐 다리미로 꾹꾹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찰랑거리는 생머리에 그녀의 길다란 몸을 적당히 보완해주는 중간 길이의 치마, 얇고 하늘거리는 꽃무늬 블라우스, 저번에 전투 화장에 비해 오늘은 화장도 꽤나 내추럴하게 했다.
불안감이 슬그머니 그녀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저번에 자신만만하게 할 말 있으면 수민에게 직접하라고 했던 게 부메랑이 되어 그녀의 가슴으로 되돌아왔다.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릴했지? 가만 뒀으면 말이나 못했을 텐데. 설마 그래도 고백하려는 건 아닐테지?
“야, 네가 뭐 할말이 있어? 나중에 해. 어차피 수민이도 거기로 올 거아냐. 선배님들 다 거기 가니까 못 빠질거야. 나중에 해. 가자.”
재석이 잡아끌었으나 혜민이 하이힐 뒷굽을 바닥에 꾹 박고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나 수민오빠한테 할 말 있다니까. 오빠랑 상관없잖아. 놔 둬, 좀!”
“야, 옆집누나도 있는데 네가 왜 그래? 시끄러우니까 빨리 가자. 석진아, 호영아.”
재석이 다른 두 남자애들에게 고개짓을 했다. 석진은 껄끄러운 얼굴로 혜민의 등을 쿡쿡 찔렀고 호영은 짜증난다는 듯 한 걸음 옆에서 혜민을 노려볼 뿐이었다.
“됐어. 먼저들 가. 수민씨 나오는거 보고 간다는데 뭐, 같이 있을게.”
결국 서은이 끼어들었다. 석진과 호영은 한숨 돌린 얼굴로 인사만 남기고 먼저 나가고 재석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와 혜민을 번갈아 보았다.
“진짜 괜찮아요, 옆집누나? 귀찮은데 일부러 그러는거 아니에요?”
당연히 귀찮지! 하지만 그냥 뒀다가는 누군가가 혜민을 한 대 때리는게 아닌가 싶은 분위기라 어쩔수가 없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어느새 쇼장을 거의 다 빠져나갔고 방송용 카메라 몇 대를 정리하느라 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무대 담당자들도 나와서 어떻게 무대를 정리할지 논의하는 것 같았다.
“됐어. 가 봐. 나중에 수민씨랑 가던지 할게.”
재석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불안한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본다. 서은은 그저 손만 살짝 흔들어주고 도로 의자에 앉았다. 뒤쪽부터 직원들이 의자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혜민은 선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길쭉한 전봇대가 옆에 서 있는 느낌이다.
“잘난 척 하지마요. 내가 오빠한테 얘기 다 하고도 어디 그렇게 잘난 척 할수 있는지 보자구.”
“좀 앉지 그러니? 올려다보려니까 목이 아프다.”
혜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 키 큰데 보태준거 있어? 괜히 지랄이야.”
“수민씨 욕하는거 싫어해.”
혜민은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수민 오빠 욕 얼마나 잘 하는데. 삼개 국어로 할 수 있어.”
정말 그런가? 그가 욕하는 걸 들은 건 처음 저 디자이너와 일했던 날 병원이세 뿐이었다. 그가 너무 괴로워해서 그녀가 가운만 입고 쇼를 벌렸던 날. 그 다음날은 종일 몸이 달아서 결국 퇴근하자마자 차에서 수민에게 앙탈을 부리다 울어버렸다. 수민은 쏜살같이 차를 몰아 그녀의 집으로 향했고, 두 사람은 저녁도 못 먹고 일부터 치렀다. 나중에 수민이 그 날 속도 카메라에 걸렸다며 투덜거렸고, 서은은 그의 벌금을 대신 내주었다.
엉뚱한 생각에 멍하니 미소짓고 있던 그녀는 혜민의 여우같은 눈빛을 느끼고서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수민씨 여자들 앞에서 절대 욕 안해. 혜민씨 수민씨가 욕하는거 들은 적 있어?”
혜민이 반쯤 입을 벌렸다가 꼭 다물었다. 노려보는 눈에 점점 더 독기가 오른다. 들어 본 적 있는 모양이네. 속으로 서은은 만족스럽게 웃었다.하지만 혜민의 다음 말에 그녀의 웃음은 싹 지워졌다.
“어디 언제까지 그렇게 웃나 보자. 오빠랑 나랑 3주 있다가 발리 갔다오면 댁은 그 날로 끝이야. 나 이번엔 오빠 안 놓쳐, 어디 두고 보자구.”
3주 있다 발리를 가? 이 계집애랑? 그런 소린 들은 적이 없었다! 서은이 눈만 깜박이고 있자 혜민이 새침한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꼈다.
“어머, 오빠가 말 안 했나 보네. 하긴 댁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런 일정까지 말해주겠어? 우리 둘이 같이 발리 가. 화보 촬영이긴 한데 거의 뭐 휴가야. 바닷가고. 아, 엄청근사 할것 같아. 수민오빠 수영복 입음 진짜 멋있는데.”
평생 서은은 자신이 폭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맞서 싸워야 할 경우에도 가끔은 피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혜민의 저 긴 머리채를 휘어잡고 앞뒤로 잡아당기며 욕설을 퍼붓고 싶었다. 네가 뭔데 남의 남자를 가로채서 같이 외국엘 간대? 가만 둘 줄 알아? 수민씨 몸에 손가락이라도, 아니 눈길만 줘도 눈알을 파버릴거야!
하지만 차마 그런 소린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단 말인가, 그나마도 수민에 대해 아는게 거의 없는 그녀가. 그가 대학에 다닌다는 것도 몰랐었는데! 큰형이 모델을 한다는 것도.
아무리 생각해도 수민에게 따져야 할 게 꽤 많은것 같았다. 만족스러운 듯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짓는 혜민을 내버려두고 서은은 텅 빈 무대를 노려보았다. 사람들이 장식을 떼어내고 정리를 시작하고 있다. 수민도 정리하고 나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그 동안 그에게 어떤식으로, 뭐라고 물을 건지 생각해 놓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자면 우선 마피아 수민의 환상부터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소리없이 신음을 흘리며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12.
"나 수민 씨한테 물어볼 거 있어."
집에 들어서자마자 핸드백을 식탁 위로 홱 던지고 서은이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몇 잔 걸친 술 때문에 얼굴이 붉어져 있는 수민이 그녀를 보고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물어 봐."
아, 정말. 왜 저렇게 섹시한 건데? 옷을 다 입고 있는 남자는 저렇게 섹시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퍼지기만 하면 그녀는 햇살 아래의 눈사람처럼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여성이 꼭 조여드는 느낌에 그녀는 허벅지를 꼭 붙이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안 돼, 지금은 안 돼. 꼭 물어봐야 해. 패션 쇼부터 뒤풀이까지 몇 시간 동안 내내 되뇌고 있었단 말이다.
"수민 씨 대학 다녀?"
전혀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수민이 인상을 찌푸리고 신발을 벗은 다음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오면 집이 갑자기 반으로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너무 큰 탓일 수도 있고, 그의 존재감 자체가 커서일 수도 있었다.
"응. 왜?"
난 안 다니는 줄 알았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무시당하는 기분을 느낄까 봐 그녀는 말을 바꾸었다.
"한 번도 말 안 했잖아. 군대도 갔다왔다며?"
"어, 작년에 제대했어. 군대는 뭐, 다들 가는 거잖아."
"그렇게 빨리 갔다오진 않는다구. 왜 나한테 한 번도 말 안 했어?"
"뭐, 대학? 군대? 그런 거 뭐 하러 얘기해? 지금은 노는데."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서 재킷을 벗어 식탁 의자에 걸쳐놓은 다음 넥타이를 풀었다. 서은이 발을 쿵쿵 바닥에 구르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난 학교 얘기 자주 하는데 난 수민 씨가 어느 학교 다니는 지도 모르잖아.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 안 해?"
"할 말이 별로 없으니까 그렇지. 난 당신처럼 뭐 그리 좋은 학교 나온 것도 아니고, 그냥 허접한 학교 허접한 과에 이름만 걸어놓고 딱 한 학기 다니다 휴학했어. 그걸 뭐 하러 광고해?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낫지."
"하지만, 하지만 그럼 수민 씨네 형은?"
수민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짜증난 듯한 얼굴로 그가 넥타이를 홱 침대에 던지고서 그녀를 응시했다.
"우리 형이 뭐?"
"수민 씨네 큰 형 모델이라면서? 난 수민 씨가 큰 형 유학 가 있다고 그래서 그냥 무슨 공부하는 줄 알았단 말이야. 같은 일 하면 왜 한 번도 말 안 했어? 맨날 그런 거 물어보면 말만 돌리고. 왜 그래?"
"내가 왜 형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우리 형이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야?"
그가 거칠게 소리쳤다. 서은이 눈을 깜박였다. 형이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무슨 상관이냐고? 그녀는 그럼 그의 가족과 아무 상관도 없는 건가? 그냥 수민 혼자하고만 상관 있는 거야?
그냥 잠깐 장난치기 위한 용도인 거야? 가족과 관련되면 그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알 필요도 없는 존재인 거야?
침을 꿀꺽 삼키고서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수민은 이제 뜯어버릴 것처럼 와이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매끄러운 가슴이 드러나자 그녀의 심장이 자동적으로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으나 머릿속은 왠지 차가웠다. 다시 침을 삼키고 그녀는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난, 난 있지, 수민 씨, 수민 씨한테 관련된 거라면 뭐든 알고 싶어. 난 우리 가족 이야기도 하고 그러잖아. 그런 게 사귀는 거 아니야?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다 나누는 거. 그런데 수민 씬 늘 그런 이야기만 하면 다른 데로 말을 돌리든지 아니면 화를 내. 왜 그러는데? 난 그런 이야기 들으면 안 돼? 그럴 만큼 중요하지 않아?"
"아, 젠장.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우리 새엄마 아버지 이탈리아에 계신다고 말했었잖아. 큰 형도 거기 있고 작은 형은 연구소 가 있고. 그거면 된 거 아니야? 어차피 볼 일도 없는 사람들인데 당신한테 뭐 하러 얘기해? 그런 거 말해 봐야 아무 소용없잖아. 내가 중요한 거지 우리 식구들이 중요해, 당신한텐? 왜 가족 이야기에 그렇게 집착해? 내 이야긴 다 하잖아. 내가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거, 하고 싶은 거 그런 게 더 중요한 거 아니야?"
"그래, 중요하지! 그럼 수민 씬 뭐가 하고 싶은데? 그건 나한테 말할 수 있어?"
그녀가 마침내 소리를 질렀다. 수민이 당황한 듯 눈을 깜박였다.
"어...... 모델 하잖아."
"그래, 그거 하지. 그런데 모델 이야기 물어봐도 맨날 말 다른 데로 돌리잖아. 나랑 상관도 없는 분야인데 알아서 뭐 하냐고. 별로 재미있는 것도 없다고. 그럼 나한테 어쩌라는 거야? 이 이야기도 하기 싫다, 저 이야기도 하기 싫다. 난 수민 씨한테 그냥 섹스나 하는 그런 존재야?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 하나 훈련시켜서 야하게 만드는 게 수민 씨 취미야?"
잠시 어색하던 수민의 표정이 곧장 날카로워졌다. 그가 와이셔츠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진 다음 허리띠를 풀며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조그만 원룸 안에서는 달리 피할 곳도 없었고,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서 그녀는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아직 충분하지 않지, 그것도. 한참 멀었다고, 이서은."
"싫어, 저리 가! 안 할 거야! 수민 씨 진짜 싫어!"
"그래? 진짜 그런지 어디 볼까?"
그의 목소리가 낮고 음침해졌다. 서은은 양손을 그의 가슴에 대고 힘껏 밀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에 오히려 그녀의 온몸이 짜릿하게 달아오를 뿐이다. 스스로가 싫어서 그녀는 다시 그를 밀었다. 수민은 밀려나기는커녕 한 손으로 그녀의 양 손목을 잡고 다른 손을 치마 아래로 밀어 넣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흔들며 물러나려 했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싫어하는 것치곤 반응이 희한하네. 싫어하는 사람한테 이렇게 반응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스타킹과 팬티를 사이에 두고도 그녀의 젖은 여성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의 손가락이 틈새를 누르며 앞뒤로 움직이자 그녀의 몸이 움찔거렸다.
"안 돼, 싫어. 하지 마! 수민 씨 정말......"
"정말 뭐? 반응하는 쪽이 나쁜 거 아냐? 화났으면 반응을 말아야지."
그가 가볍게 손을 움직여 그녀를 돌려세웠다. 침대를 보며 그에게 등을 댄 자세로 그녀는 숨을 삼켰다. 그가 그녀의 등을 세게 밀어 침대 위로 몸을 굽히게 만든다. 피하려고 했지만 그의 몸은 그녀보다 훨씬 크고 단단하고 강했다.
"이러지 마, 수민 씨! 진짜 안 할 거야. 정말이야! 이런 식으로 자꾸 말 피하려고 하지 마. 맨날 이러잖아!"
"그러니까 싫으면 싫다는 반응을 보여 봐. 진짜 싫어하면 안 해."
치마를 허리 위로 올리고서 그가 스타킹과 팬티를 한꺼번에 무릎 아래까지 내렸다. 그녀가 놀라서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자 그가 한 팔로 등을 꼭 눌러 침대에서 꼼짝 못 하게 만들고는 다른 손으로 드러난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진짜 싫어하면 안 해. 싫어하는 사람한테 강요하진 않는다구. 그건 폭행이야. 하지만 당신은 말만 그러지 싫어하는 게 아니잖아. 안 그래?"
"정말 싫어! 내 말도 좀 들어 줘, 수민 씨. 정말로...... 앗!"
그의 손이 침대 모서리에 걸쳐진 그녀의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긴 손가락이 살짝 젖어있는 여성의 입구에 원을 그린다. 그녀는 다리를 모으며 반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너무 노련하고, 그녀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알았다.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틈새를 문지른 다음 젖은 손을 더 안쪽으로 움직여 부풀기 시작한 예민한 살점의 양옆을 슬쩍슬쩍 건드렸다. 움찔거리며 그녀가 침대 위의 이불을 꽉 움켜잡았다. 아랫배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고인다. 안 돼, 참아야 돼, 반응하면...... 하지만 늦었다. 뜨거운 액체가 통로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지자 그녀가 나직하게 흐느꼈다.
"수민 씨...... 우리 얘길 해야 돼. 제발. 이러지 마, 응?"
"무슨 얘기? 당신이랑 나, 우리 둘밖에 중요한 건 없다구. 그걸 모르는 건 당신이야."
그녀의 옆에 태연하게 앉아서 마치 매일 보는 것인 양 그는 침대에 반만 걸쳐져 있는 그녀의 몸 위에 기대고 등을 누른 채 계속 손을 움직였다. 조그만 살점이 그의 주목을 바라며 욱신거리기 시작했고 안쪽의 살갗은 전부 예민하게 달아올랐다. 몸이 저절로 수축되는 걸 느끼고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불만 꼭 틀어쥐었다.
"싫어?"
수민의 목소리에는 오만함이 어려 있었다. 반응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녀의 몸이 일으키는 반응은 그녀보다도 그가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안쪽을 문지르고 손가락으로는 욱신거리는 정점을 톡톡 치며 그가 악기를 연주하듯 그녀의 몸을 갖고 논다. 그녀의 호흡이 점점 더 빨라지고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안 돼, 제발, 조금만 참아 봐. 제발!
하지만 이미 늦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강하게 압박하는 그의 손바닥에 꿀물을 쏟아낸다. 그의 만족스러운 신음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거칠게 헐떡였다.
"참으려고 하지 마. 당신이 자꾸 참으려고 하면 난 더 괴롭히고 싶어. 그냥 느끼는 대로 표현해."
그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손을 떼고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그녀는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가 옆에서 옷을 벗는 소리가 들리고, 금세 그가 침대 아래 앉아서 그녀의 다리에 걸쳐져 있는 스타킹과 팬티를 마저 벗겨내고 치마도 벗겼다. 그의 뜨거운 몸이 닿자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흐느꼈다.
"거 봐. 좋아하는 거 알고 있다구. 당신이 그러는 게 너무 귀여워.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수민 씨, 이제 그만하고......"
"농담해? 이제 시작인데."
그가 그녀의 상체를 자신의 품으로 안아 올리고 블라우스 단추를 재빨리 풀어 벗겼다. 브래지어도 풀어서 바닥에 던진 다음 그녀를 안은 채 그가 침대 위로올라와 머리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등을 대고 안긴 상태였다. 그녀가 움찔거리자 그가 허리를 잡고서 자신의 허벅지 위에 그녀를 앉혔다. 이제 그의 남성은 그녀의 등 아랫부분에 닿았고 그녀의 몸은 뒤로 30도쯤 기울어져 그의 가슴에 기댄 채로였다. 마치 단단하고 뜨거운 비치 의자에 드러누운 것 같은 자세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무릎을 넣어 그가 다리를 벌리자 그녀의 몸이 더 뒤로 넘어갔다. 그녀가 나직하게 비명을 지르며 균형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양 팔목을 붙잡자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반쯤 드러눕다시피 한 자세로 그녀가 고개를 젖혀 그를 올려다보았다.
"수민 씨? 뭐하려고......"
"이러면 전부 다 잘 보이거든."
그의 얼굴에 예의 그 나른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심장을 미친 듯이 두근거리게 만드는 미소.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그 미소. 저절로 몸이 젖어들고 가슴 끄트머리가 단단해지게 만드는 그 미소. 그녀의 숨결이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자, 저 앞에 카메라가 있다고 생각해 봐. 귀여운 당신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을까, 응? 봐."
그가 한 손을 뻗어 그녀의 벌어진 다리 사이를 더듬다가 소중한 부분을 살짝 덮고 있는 꽃잎을 손가락으로 벌렸다. 그가 달구어놓은 비밀스러운 여성의 정점이 고스란히 눈앞에 드러나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러지 마, 수민 씨! 너무...... 창피하단 말이야."
"왜? 우리 둘뿐인데. 다른 사람한테 보여줄 생각은 전혀 없어. 하지만 만약에 이렇게 귀여운 당신이 포르노 배우로 데뷔한다고 생각해 봐.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드러내고서 그 귀여운 신음소리를 내는 거야. 어서."
그의 엄지손가락이 드러난 정점을 쓰다듬자 그녀는 그의 위에서 몸을 휘며 헐떡거렸다. 그가 한 말로 인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상상력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카메라가 돌아가고, 그의 위에 누운 그녀가 방탕하게 다리를 벌리고 자신을 드러낸 채 허리를 움직이는...... 아, 마피아인 그가 그녀에게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달아오르는 상상이었다. 남들이 묻는다면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수민 씨, 흐응, 응, 하지 마...... 안 돼, 그건. 그러지 마......"
"아, 반항하는 히로인이로군. 사실은 좋아하면서. 진짜로 당신이 주연한 포르노가 나오면 아마 모든 남자들이 휴지를 찾느라 난리가 날 거야."
그가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뺨에 입술을 문지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한 손은 여전히 팔목을 잡고 있고, 다른 손은 노골적으로 벌어진 다리 사이에서 마법을 부리고 있다. 손가락 한 마디가 여성의 안쪽으로 파고들자 그녀가 헉 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손가락은 그녀의 몸 바로 안쪽에서 느릿하게 원을 그리며 여성의 입구를 살짝 벌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당신 몸이 카메라에 클로즈업 되는 걸 생각해 봐. 이렇게 젖은 채로. 조금만 있으면 금방 움찔대면서 달콤한 꿀을 흘릴 테지. 봐, 내 손에 벌써 이렇게 묻었어. 여기도 이렇게 부었고. 너무 예민해."
손가락을 도로 빼고서 그가 빨갛게 부은 살점을 살짝 손가락으로 문지른 다음 손을 천천히 위로 올렸다. 축축한 손가락이 그녀의 배에 궤적을 남긴다. 그녀가 움찔거리며 다리를 오므리려고 노력했으나 그의 무릎은 단단히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가로막고 공간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 크고 부드럽고 묵직해서 만지면 너무 기분이 좋아."
그가 손으로 그녀의 오른쪽 가슴을 아래서부터 감쌌다. 달아오른 젖가슴이 그의 손안에 묵직하게 얹히고, 그의 엄지가 바싹 곤두선 젖꼭지를 쓰다듬었다.
"빨아줄까?"
그가 그녀의 귓가를 혀로 살짝 핥으며 속삭였다. 떨리는 숨을 내쉬며 그녀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몸을 구부려 그녀의 젖꼭지를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느릿하게 혀가 그녀의 볼록한 살점을 쓸고 이가 젖가슴을 살며시 깨문다. 그의 무릎 양옆에 놓인 그녀의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어느새 풀려난 그녀의 팔은 위로 올라가 그의 목을 껴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손으로 계속 젖가슴 아랫부분을 주무르며 그가 반대편 손을 다시 다리 사이로 내렸다. 긴 손가락이 어느 새 조여든 여성의 입구를 지나 안으로 파고들자 그녀가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낮게 비명을 질렀다.
"수민 씨, 아, 수민 씨! 안 돼, 나 못 해, 아!"
대답 대신 그는 젖꼭지를 아플 정도로 깨물기만 했다. 그녀가 흐느끼며 엉덩이를 들어올렸고 그의 무릎이 그녀의 다리를 더 넓게 벌렸다. 손가락 하나가 안팎으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슬그머니 하나 더 안으로 파고들려고 한다. 좁은 입구가 벌어지며 몸 안이 빡빡하게 채워졌다. 손가락이 천천히, 그러다 점점 속력을 높여가며 움직였다. 예민한 통로가 연신 자극당하자 방어라도 하듯 계속해서 애액이 흘렀다.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박자를 맞추어 그가 가슴을 빨았고, 그 때마다 그녀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아, 앗, 앗, 수민 씨, 그만, 악, 아앙, 아!"
엄지손가락이 정점을 쓰다듬고 꼭 누르는 순간 그녀가 폭발했다. 그의 손가락을 타고 샘이 흘러넘치고, 그녀의 몸이 그의 위에서 휘어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젖가슴을 강하게 빨고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술은 살짝 부어 있고 눈은 초점이 흐릿하고 새카맸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다.
"너무 예뻐."
그가 가슴 아래쪽을 주무르던 손을 위로 올려 그녀의 턱을 잡고 위로 들어올렸다. 고개를 젖히고 그의 가슴에 기댄 채 그녀가 눈을 깜박였다.
"몽롱하게 날 쳐다보는 당신 눈, 빨개진 얼굴, 멍한 표정, 할딱거리는 입술, 전부 다 너무 예뻐. 젠장, 아무한테도 안 보여줄 거야. 절대 못 보여주지. 다른 자식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 죄다 당신을 덮치지 못해 난리가 날 거라고. 그 꼴은 못 봐. 당신은 내 거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 안쪽까지 전부 다."
그의 손가락이 더 깊이 파고들자 그녀가 눈을 감으며 비명을 질렀다. 턱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안 돼, 날 봐. 날 보라고. 절정에 오른 당신을 보고 싶어. 당신 눈을 보고 싶단 말이야."
"안 돼, 못 하겠어. 수민 씨, 나, 도저히......"
그의 손가락이 그녀를 한껏 벌리고 또 다른 손가락이 파고든다. 몸을 빡빡하게 채우는 느낌에 그녀가 길게 신음했고 수민 역시 신음소리를 냈다.
"너무 조여. 너무 뜨겁고. 너무...... 젠장, 너무 좋아."
그가 그녀의 벌어진 입술을 덮쳤다. 혀와 혀가 얽히고 그가 저녁에 마셨던 맥주의 씁쓸한 맛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마치 찌를 듯 혀를 움직이며 그가 그녀의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녀가 그의 입에 대고 숨을 헐떡였다.
"느껴 봐, 어서. 다시 가 봐. 당신의 그 달콤한 꿀을 흘려 봐. 더, 더 많이!"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의 손가락 움직임에 맞추어 엉덩이를 움직이며 그녀가 신음했다. 그의 표정은 거칠었고 눈은 그야말로 우주보다도 새카만 것 같다. 그녀의 몸을 파고드는 손가락들은 길고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그가 통로 안을 채우고서 손가락을 꿈틀거리자 그녀가 꺅 소리를 지르며 다리를 들어올리고서 허우적거렸다. 너무나 강렬한 감각에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대로 넘어가면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아앗, 악, 아, 아악, 수민 씨, 학, 하악, 아아, 아악!"
몸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아니, 머리가 폭발하는 것 같다. 양손으로 그의 목을 감고 손톱을 세운 채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그녀의 몸 깊숙이 손가락을 밀어 넣은 채로 그녀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이마와 가슴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눈앞이 무지개색으로 빛난다.
헐떡거리며 기대 있는 그녀를 잠시 안고 있던 그가 손가락을 빼자 그녀가 몸을 꿈틀거리며 다시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그가 그르렁거리는 소리로 웃었다.
"조금만 더 참아 봐. 아직 안 끝났어."
아? 그녀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가 무릎을 내리고서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아 몸을 조금 들어올리는가 싶더니 홱 돌려 눕혔다. 무릎을 대고 침대에 엎드린 상태로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수민 씨?"
"가만 있어."
그가 침대 옆으로 손을 뻗어 콘돔을 들었다. 그의 커다란 남성이 하얀 막에 싸이는 걸 보며 그녀가 침을 삼켰다. 욱신욱신 아픈데도 몸은 다시 조여들며 뜨거운 꿀을 흘렸다. 기대감에 심장이 쿵쿵거린다.
"수민 씨, 나 너무 힘든데......"
"한 번만 더 참아. 한 번 더. 날 위해서 해 줘, 응?"
맙소사, 그가 저런 식으로 애원하면 뭐든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애원은 아니다. 차라리 명령에 가깝지. 하지만 그녀의 몸은 다시 달아오르고 있었다. 젖꼭지가 따끔거리고 손가락으로 이미 침범 당했던 몸 안쪽이 예민하게 조여들었다.
"엉덩이 조금만 더 들어. 그래. 다리 더 벌리고."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서 틈새를 벌렸다. 몸이 벌어지며 통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느낌에 그녀는 눈을 감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창피하면서도 그를 기쁘게 해 준다는 사실에 짜릿했다.
그의 혀가 통로를 스치자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양손으로 베개를 움켜잡았다.
"너무 좋아."
그가 속삭이자 뜨거운 입김이 예민한 살갗 위에 닿는다. 부드러운 혀가 욱신대는 살점을 핥고 온통 젖어있는 통로를 맛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엉덩이가 저절로 박자를 맞추어 움직이고,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몸을 양쪽으로 더욱 넓게 벌렸다.
"너무 좋아. 달아. 매일 이러고 싶어. 그 동안 당신 맛을 못 봐서 미치는 줄 알았어. 빌어먹을. 아, 진짜 좋아."
그는 마치 그녀를 전부 먹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혀는 계속해서 그녀를 고문하고, 엉덩이를 움직일 때마다 침대 시트에 가슴이 스쳐 온몸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베개에 대고 흐느끼자 그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올렸다. 잠시 후 그의 남성이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자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수민 씨, 나, 아, 나...... 아, 악!"
그가 끝까지 안으로 파고드는 순간 그녀는 곧장 다시 절정에 올랐다. 거대한 그의 몸이 그녀의 몸 깊숙한 곳까지 채우는 느낌은 언제나 신비할 정도로 은밀하고 짜릿했다. 베개를 움켜쥔 채 그녀가 숨을 헐떡이는 사이 그는 그녀의 등으로 몸을 기울이고서 양손으로 젖가슴을 잡았다.
"쉬잇, 조금만 더. 조금 더. 엉덩이 들어, 그래, 조금만 더 움직여 봐. 얼른."
대답할 기운도 없어서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으나 그는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남성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가슴을 움켜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이 젖꼭지를 잡아 빼며 거칠게 젖가슴을 주무르고 그의 남성은 반쯤 빠져나갔다가 다시 안으로 파고들고, 다시 나갔다가 강하게 안으로 돌격한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살과 살이 부딪치는 에로틱한 소리가 그녀의 귀를 채웠고 뜨거운 액체가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흘러내렸다. 젖가슴을 쥔 손에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가자 그녀가 결국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수민 씨이!"
"그래, 그래, 좀 더, 거의 다 됐어, 거의......"
그 역시 동물처럼 울부짖으며 절정에 올랐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그녀는 침대에 쓰러졌고 수민은 그녀를 안은 채 위로 늘어졌다. 등에 닿은 그의 단단한 가슴이 들먹이는 게 느껴진다.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그녀는 그가 몸을 빼기도 전에 잠이 들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창문이 훤하다. 온몸이 뻐근하고 욱신거려서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서 평화롭게 자고 있는 수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자고 있으면 그는 완전히 소년처럼 보였다. 매끈한 얼굴, 수염도 거의 없는 턱, 구겨진 짧은 머리, 분홍빛 입술. 손을 들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을 건드렸다. 그가 잠결에 혀로 입술을 축이고서 고개를 기울인다. 엄지손가락으로 그녀는 다시 그의 입술을 건드리고서 이번엔 살짝 쓰다듬어 보았다. 매끄럽고 부드럽고 따뜻하다.
뭐가 문제일까? 왜 이 사람은 그녀에게 마음을 안 여는 걸까? 아니, 마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애당초 그녀에게 할당해 놓은 한계선이 거기까지인지도. 가족은 열외, 개인적인 문제도 열외. 그저 그녀와는 즐기기 위하여 만나는 것.
스물셋은 그런 나이일지도 모른다. 인생을 즐기고, 더 많은 가능성을 탐색해 보는 시기. 하지만 그녀는 그럴 시기가 지났다. 그녀는 이미 틀에 잡힌 인생에 안주하는 중이었고, 손을 뻗어서 닿을 정도의 모험만 즐기는 수준이었다. 아, 물론 틀을 깨고 뛰쳐나가 대단한 모험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만큼 용감하지 않았다. 수민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나이 서른에 할 만한 모든 모험은 다 한 기분이었다.
그의 곤두선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우울해졌다. 어쩌면 이대로는 오래 못 갈지도 몰라. 피차 생각하는 게 다르고, 바라보는 곳이 다르니까. 솔직히 친구들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수민은 그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게 아닐지도. 아니, 스스로는 진지하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그녀 입장에서 생각하는 진지함과는 다른 거겠지.
"뭐야, 자는 사람을 계속 구경하고 있고."
수민이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자다 깨서 그런지 그는 온통 따뜻했다. 온기에 폭 감싸인 채 그녀가 한숨을 내쉬자 그가 긴 속눈썹 아래로 살짝 눈을 뜨고 그녀를 보았다.
"왜?"
그녀는 고개만 흔들고 그의 가슴에 기댔다.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까? 그는 언제쯤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고 떠날까? 아니면 그녀가 먼저 그를 포기하게 될까?
"수민 씬 나한테 가족 이야기 하는 거 싫어?"
그녀가 나직하게 물었다. 수민의 몸이 살짝 굳어지고 반쯤 감겨 있던 그의 눈이 완전히 뜨였다. 그녀를 감싼 채 그가 반대편 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길게 기지개를 폈다. 온몸이 쭉 늘어나는 모습이 마치 표범 같아서 그녀는 잠시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남자 몸이 이렇게 근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
몸을 늘어뜨리고서 그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른 다음 그녀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가족 이야기에 집착하는데? 어제 얘기 다 끝난 거 아니었어? 말했잖아. 당신이랑 내가 중요한 거지, 우리 가족이 중요한 거 아니라고. 가족이 그렇게 중요해? 내가 뭐 이상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을까 봐? 아니면 내가 당신한테 안 어울리는 수준일까 봐? 그래서 그래?"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녀가 한숨을 내쉬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 이불을 끌어당기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언짢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럼 뭔데?"
"궁금하니까! 수민 씬 나에 대해 안 궁금해? 우리 부모님 어떤 분인지,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 어릴 때 꿈은 뭐였는지 그런 거."
"그런 거 안 궁금해! 당신은 지금 여기 있는 이서은이잖아. 당신이 예전에 내가 모르던 시절에 어땠는지 알게 뭐야? 내가 같이 없던 시절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뭘 좋아했는지 그런 거 신경 써서 뭐 해? 차라리 지금 당신을 아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니야?"
서은이 입술을 깨물고서 이불을 홱 잡아당겨 몸을 좀 더 확실히 덮었다. 수민은 짜증나는 얼굴로 손으로 목 뒤를 북북 긁고는 벌떡 일어났다. 탄탄한 등과 엉덩이를 보자 갑자기 심장이 쿵쿵거려서 그녀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었다. 넌 어떻게 이럴 때도 그런 생각만 드니? 지금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야 할 때라고!
"수민 씨, 그러지 말고 생각 좀 해 보면 안 돼? 사람이 어디 돌에서 툭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지금 이런 사람이 된 데는 과거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잖아. 난 수민 씨의 옛날 모습도 알고 싶고, 어떻게 지금 그런 모습이 되었으며 앞으로 뭘 하고 싶은 지도 알고 싶어."
"귀찮아, 진짜. 그런 거 딱 질색이라고."
그가 그녀를 홱 돌아보며 악문 잇새로 내뱉었다. 그녀가 창백해진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과거는 무슨 얼어죽을 과거야? 그런 거 필요 없어!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내가 지금 여기 있고 당신도 여기 있고, 우리 둘 다 서로 좋아하고 잘 지내는데 그 이상 뭐가 중요하다는 거야? 당신이 계속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아, 몰라. 젠장. 마음대로 해.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어차피 난 며칠 있다가 해외 로케 있어서 나갈 거니까 혼자 생각 많이 해 봐!"
그가 욕실로 쿵쿵거리며 걸어갔다. 서은은 대꾸도 못 하고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귀찮아, 질색이야? 과거 이야기가, 가족 이야기가? 그녀의 예전에 대해선 알고 싶지도 않다고? 왜?
그런 게 연애 아니야? 서로에 대해서 더 잘 알고, 모르던 시절에 대해 조금은 아쉬워하고, 함께 있을 미래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그런 거. 결혼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잖아. 그냥 서로......
당연히 함께 할 미래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보는 정도. 희망을 가져보는 정도. 그건데.
너무 어린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수민의 미래에는 그녀가 안 들어있는 지도. 그런 생각까지는 안 하는 건지도. 언제든 괜찮은 여자가 나타나면 갈아탈 수 있는 '현재'만 있는 건지도.
"뭐야, 이 바보!"
갑자기 화가 나서 그녀가 베개를 확 욕실 문 쪽으로 집어던졌다. 베개는 침대 바깥 1미터 지점 정도에서 툭 떨어졌다. 내가 뭐, 내가 뭐 빌 줄 알아? 같이 있어달라고 무릎 꿇고 매달릴 줄 아냐고. 필요 없어! 다 필요 없다고.
이불을 잡아당겨 몸에 단단히 두르고서 그녀가 일어서다가 비명을 삼키며 도로 주저앉았다. 몸이 너무 아팠다. 다리 사이가 욱신거려서 걷기가 힘들 지경이다. 입술을 깨물고 잠시 앉아 있다가 그녀는 다시 일어섰다. 젠장, 남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자긴 아무렇지 않게 씻는다 이거지. 거기다 그녀한테 적반하장으로 화까지 내고. 점점 더 열이 받는다.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간신히 그녀는 욕실로 걸어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 세면대 앞에서 이를 닦고 있던 그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래, 마음대로 해, 고수민! 나라고 뭐 싫다는 사람 졸라서 대답 얻어내는 게 좋은 줄 알아? 말하기 싫으면 관둬! 나도 말 안 할 거니까. 해외 나간다고? 그래, 나가서 새파랗게 어리고 귀엽고 가족 이야기 같은 거 안 물어보고 하룻밤 즐기는 데 만족하는 여자애들이랑 잘 놀아 봐. 아, 권혜민이 그러더라. 이번에 갔다오면 당신하고 나 사이 확실하게 끝내 놓겠다고. 끝낼 것도 없어, 내가 그냥 준다 그래. 나한테 말하기 싫은 것도 많고, 나한테 말하는 것도 귀찮다는 당신이니까 물어보는 거 없이 자기 이야기만 조잘조잘 떠들 그런 여자애한테 가라고!"
그녀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동안 그는 칫솔을 문 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녀에게 놀란 얼굴이었다. 놀라라지. 난 뭐 성질 없어서 그 동안 참은 줄 알아? 언젠가는 얘기해 줄 거라고, 자기 입으로 말해줄 거라고 믿었기에 입 다물고 있었을 뿐이야. 그녀가 침을 삼키고서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귀찮고 질색인데 왜 나랑 같이 있었어? 섹스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야? 그거 참 다행이다, 나한테 당신이 원하는 것도 있어서. 그런데 있지, 난 그거 이제 싫어. 당신한테 휘둘리기도 싫고, 당신처럼 인생 편하게 모험하면서 못 살아. 내 나이가 서른이라구. 난 친구들하고 만나면 옛날이야기 하는 게 더 쉬운 나이란 말이야! 당신처럼 옛날이야기 해서 뭐해, 그게 아니라 전엔 이랬는데, 저랬는데 그런 이야기만 나와. 알아? 모를 테지, 당신은 그러고 안 살 테니까. 그런데 난 그러고 살아. 어쩌겠어, 당신 말대로 이게 난데. 나이 서른 먹어서는 친구들 다 말리는데 스물 갓 넘은 당신한테 빠져있는 나라구. 그런데 이제 나도 당신한테 이렇게 휘둘리지 않을래. 못 하겠어! 자기 이야기 한 마디 안 하는 사람한테 날더러 어쩌라고? 스물이든 서른이든 마흔이든 자기 가족 이야기 하나 안 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계속 만나? 못 하겠어! 그러니까 가서 가족 이야기 안 캐묻는 사람 찾아. 난 못 하니까. 나가라구!"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그녀는 변기 위에 놓여 있던 플라스틱 여행용 샴푸를 집어던졌다. 그가 재빨리 손을 들어 그것을 잡았지만 그녀가 계속해서 린스통이며 빗을 집어던지자 팔로 막다가 마침내 칫솔을 입에서 빼고 양치액을 뱉은 다음 그녀를 응시했다.
"왜 그래? 그만 해, 이서은. 당신 지금 너무 흥분했어."
"흥분했다고? 흥분하는 게 뭔지 알기나 해? 당신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당신을 보고 있느니 그냥 옛날처럼 포스터나 붙여놓고 말겠어. 포스터가 말을 안 하는 건 이해나 가지. 다른 건 잘도 떠들면서...... 나가, 나가!"
"서은아!"
그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한 손으로 이불을 붙잡은 채 그녀가 발버둥을 쳤지만 그는 너무도 간단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서은아, 그만 해. 그만 하라고. 당신 진짜 너무 흥분했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해. 내가 나갈게. 하지만 당신 화나게 만들려고 그랬던 거 아니야. 그냥......"
그가 다급하게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녀가 한 손으로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힘을 주고서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잘못했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고. 그러니까 이러지 마. 나보고 나가라고 하지 마, 응? 절대, 절대......"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천천히 손에서 힘을 뺐다. 그녀에게 닿아 있는 그의 가슴이 쿵쿵 울리고 그녀를 붙든 그의 팔이 파르르 떨렸다.
"절대 헤어지자고 하지 마. 내가 당신보다 어리다는 거 나도 알아. 잘 안다고! 당신 친구들이 나 안 좋아했다는 것도 알아. 노력할게. 아직, 아직은 좀 어렵지만 노력할게. 우리 가족 이야기도 조만간 해 줄게, 응? 그러니까 나보고 나가라고 하지 마."
갑자기 그의 행동이 백팔십도 바뀐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심장이 천천히 녹아 내렸다. 가슴을 꽉 막고 있던 덩어리 같은 것이 조금씩 사라지고 숨쉬기가 편해졌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미워, 수민 씨."
눈을 감고 그녀가 울먹이듯 중얼거렸다. 그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 응? 조금만."
"난 시간이 많지 않아, 수민 씨."
"당신 그렇게 늙지 않았어. 노인네 같은 소리 그만 해."
그의 목소리가 다시 퉁명스러워졌으나 그녀가 몸을 떼려 하자 팔에 힘을 꽉 주고 놓아주지 않았다. 서은은 한숨만 내쉬었다. 그가 나직하게 뭐라고 웅얼거렸다. 입에서 치약 맛이 나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녀가 킥 하고 웃자 그의 몸에서 긴장이 조금 풀렸다.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목 뒤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시간을 좀 줘."
13.
수민이 촬영을 떠나버리자 어쩐지 굉장히 쓸쓸해졌다. 수민과 만난 이후로는 친구들과의 연락도 뜸해진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제일 친한 친그들과 수민 문제로 싸웠으니 먼저 연락할 마음이 도저히 나질 않았다,
뭐 그렇다고 수민과의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시간을 달라고 한 이래 발리로 떠나기 전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그저 예전과 똑같이 돌아가 버렸다. 하루하루의 재미난 일을 떠들고, 같이 식사하고, 같이 자고. 몇 번쯤 마치 부부가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런 말을 하면 수민이 또 귀찮다거나 질색이라고 말할것 같아서 그녀는 꾹 눌러 삼켰다. 다시 싸우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혜민 같은 여자애와 같이 여행을 가는데.
물론 다른 모델도 많다고 그가 말했다. 혜민은 그저 엑스트라 정도고, 더 비중 있는 여자 모델들이 많다고, 그 말을 들으며 그녀가 안심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코웃음을 치며 서은은 밥을 마저 먹고서 재빠르게 설거지를 마쳤다.
“마음에 안 들어, 정말로.”
그녀가 툴툴거리며 침대에 앉아 TV를 켰다. 물론 그가 다른 여자를 힐끔거릴 거라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역시 젊고 혈기 왕성한 남자였다. 근사하고 늘씬한 여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일테지.
물론 그는 매일 저녁 전화를 걸었다. 국제 통화료가 얼마나 나오겠느냐고 그녀가 야단을 하면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녀도 그의 전화를 받으며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벌써 일주일도 넘었잖아.”
입술을 비죽 내밀고 그녀는 TV채널만 괜히 이리저리 돌렸다. 출발한 지는 이제 겨우 닷새였지만 그 전에 짐을 싸고 일정 의논하고 뭐 그런다면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떠났던 것이다. 배웅을 가고 싶었지만 새벽에 출발하는 바람에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그에게만 의존하게 되었을까? 하영과 수정이 아니라도 친구는 더 있는데, 좀 더 친구들과 만나고 사교 관계를 넓혀야 한다. 수민하고만 매일 붙어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친구들과 만나면 남자 이야기가 나오는 건 당연했고, 또 누군가가 그녀에게 엉뚱한 짓을 한다느니, 수민이 금방 다른 여자를 만나 떠날 거라느니 하는 소리를 하면 그때는 뛰어들어 얼굴에 손톱자국이라도 내려고 덤빌지 모른다. 친구들 앞에서 나이도 어린 남자아이한테 홀딱 빠진 자존심 없는 계집애 소리를 들을 일을 만드느니 그냥 혼자 있는 편이 나았다.
“한 5년만 더 빨리 태어나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TV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드라마가 하고 있고, 집은 지나치리만큼 조용했다. 수민이 있으면 조용하지 않은데, 그는 매일 친구들 이야기며 일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곤 했다. 잠시 그의 이야기들를 떠롤리던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쩌면 그가 자기 일에 대해 그렇게 침묵을 지켰던 것도 아닌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와서 알 게 뭐람, 그가 옆에 없는데.
“정말 정말 정말. 출장 같은 거 가는 직업 너무 싫다.”
베개로 침대를 쿵쿵 내리치며 그녀는 토라진 어린애처럼 투덜러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잘 알지만 너무 심심하고 외롭고 서운해서 어쩔수가 없었다. 그가 옆에 있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모양이었다.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 그녀는 쏜살같이 몸을 뻗어 수화기를 잡았다.
“네, 여보세요?”
“나야.”
수민의 즐거운 듯한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달음박질쳤다. 수화기를 귀에 꼭 대고서 그녀가 침대 머리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응, 촬영 잘 했어?”
“여기 날씨가 오늘 영 아니라서 제대로 못 했어. 조금 더 걸리려나 봐. 일정이 자꾸 지연되네. 뭐 이렇게 찍을게 많은지, 원.”
“그냥 화보 촬영이라고 안 했어?”
“어, 화보 촬영도 있고 또 뭐.....”
그가 기묘하게 말을 흐리며 웃었다. 이상한 느낌에 서은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다시 수민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미소를 짓고 말았다.
“다음엔 우리 둘이 오자, 여기 꽤 좋다. 바다도 파란 게 진짜 좋아. 물도 따뜻하고.”
“되게 들뜬어조네. 완전히 휴가 기분인가 봐.”
베개를 한손으로 껴안고 그녀가 쿡쿡 웃었다. 수민 역시 낄낄거리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지만 역시 당신이 없으니까 별로야. 귀여운 비키니를 입혀 놓으면 진짜 근사할 텐데.”
비키니?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나 그런거 입어 본 적 없어. 비키니는 커녕 수영복 입어 본 게 몇 년쯤 된 것 같은데.”
“거 봐. 비키니 하나 사둬. 나중에 같이 어디 가자.발 리가 안돼면 제주도라도.”
그녀가 끙 소리를 내며 고민하고 있자 눈치 챈 듯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문젠데? 난 이미 볼 만큼 다 봤는데.”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아! 비키니 같은 거 입으면 남들한테도 민폐고.....”
“민폐? 누가 민폐래? 어떤 자식이 그런 소릴 해? 내가 다 밟아놓을 테니까 걱정마.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니까, 내 말 못 믿어?”
“어떻게 믿겠어? 시력에 문제가 있는게 분명한데.”
그녀의 이죽거리는 말에 그가 다시 웃었다. 그녀 역시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와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만큼아니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였다.
“저기, 언제쯤 집에 와?”
“글세, 아직 잘 모르겠어. 한 열흘쯤 더 걸리지 않을까 싶어.”
열흘? 무슨 화보촬영이 그렇게 오래 걸려? 원래 옷 화보 촬영 같은 건 길어도 한 이틀 하면 되는거 아닌가?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그녀가 화보 촬영 같은 걸 알 리 없으니 딱 집어 말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옷 갈아입으며 사진 몇 장 찍는게 그렇게 2, 3주 씩 걸린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기 수민씨, 옷 화보라고 하지 않았었어?”
“어? 어, 응. 그렇게 말했지. 왜?”
음.......하긴, 본인에게 직업 진짜냐고 묻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었다. 차라리 달리 어떻게 알아보면 모를까. 친구들을 다 수소문해 보면 패션업계에 손이 닿는 애가 하나쯤 있으리라. 그런데다가 물어보는 편이 낫지.
“아니야. 되게 오래 걸린다 싶어서. 난 그런 촬영은 금방 끝나는 줄 알았거든.”
“평소라면 그런데 이번엔 좀 일이 많아서 그래. 걱정마. 맨날 전화할테니까.”
“그렇게 매일 안 해도 돼! 전화비 너무 많이 나오잖아. 페이 받아서 전화비에 다 쓸 생각이야? 그러지 마.”
“당신은 나한테 전화 안 하잖아. 그럼 서은씨가 해.”
“촬영하고 있으면 어떡해? 방해되잖아.”
“그건 그렇네. 알았어. 하여튼 나 끊어야겠다.”
전화기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의 귀가 예민하게 곤두섰다. 뭐라고 하는 거야? 누구야? 권혜민 그 계집앤가? 아닌 것 같은데.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가 그를 불러대고 있다. 수민씨, 얼른 와. 감독님이 찾으셔.아우, 수민씨 몸 진짜 간지난다.
망할 놈의 간지. 그게 무슨 뜻인지 여전히 알아내지 못했다. 인터넷을 뒤져봐도 여기저기‘간지난다’는 말은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써 있는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문맥상 멋있다, 근사하다 정도가 아닐까 축측할 뿐이었다.
“수민씨, 저기......”
“응?”
뒤로는 여전히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랑 통화해? 여자야? 여자친구? 예뻐? 모델이야?
잠시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그녀가 간신히 말할 용기를 냈는데 수민이 먼저 재빠르게 말해 버렸다.
“진짜 가야겠다. 내일 전화할게.”
전화가 끊어졌다. 천천히 수화기를 내리며 그녀가 찌푸린 얼굴로 응시했다,
“수민씨 바보.”
기다리고 있다고, 당신이 없어서 좀 외롭다고 말하려고 했었는데. 아니, 좀이 아니라 많이.보고 싶다고.
“바보 멍청이.”
잠시 침대에 뚱하니 앉아 있던 그녀가 혹시 옆에 누가 있기라도 한 듯 주위를 둘러본 다음 슬그머니 침대 아래로 손을 내렸다. 팔을 길게 뻗자 둥글게 말아놓은 종이가 손에 잡힌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 그녀는 포스터를 슬쩍 꺼낸 다음 고정해놓은 종이를 풀고서 길게 펼쳤다. 종이 안의 그는 예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포스터를 침대 위에 길게 펼쳐놓은 다음 양 무릎을 가슴에 껴안고서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담배를 물고 비스듬히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수민. 어째서 저렇게 어린나이에 저렇게 공허해 보이는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아, 지금도 가끔씩 짓곤한다. 그녀가 안 본다고 생각할 때. 하지만 그럴 때면 그녀도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원래 그 시절은 그런 나이니까.
십대 시절이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들 하지만 이십 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진짜 힘들고 머리 아프고 괴롭운 건 이십 대다. 사회에는 나가야 하고, 뭘하면 좋을지 알 수 없고, 세상엔 오로지 나만 뒤떨어져 있는 것 같은 시기. 친구도 적도 모두 다 무언가를 바라보며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는데 나 혼자 남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뭘 해야 하나 고민하는 시절.
그의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고, 도와주고 싶고, 같이 걸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가족이야기도 듣고 싶었던 건데. 돌아오면 뭔가 말해 줄까? 일은 어땠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건지 말해 주려나? 손끝으로 포스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그녀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가 아닌 먼 곳을 바라보는 얼굴.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계속 같이 있고 싶어. 당신이랑. 뭐라고 해도 세상에서 가장 나를 들뜨게 하고 가슴 두근거리게 만드는 당신이랑, 벌써부터 내일 그의 전화가 기다려졌다.
그러나 전화는 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사흘이나 전화를 하지 않는다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큰맘 먹고 그녀는 직접 전화를 해 봤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답신이 들리자 온몸이 힘이 죽 빠졌다.
“뭐야, 배터리 충전을 해야지. 그러려면 해외까지 핸드폰을 왜 가져가?”
투덜거리며 그녀는 그가 적어 준 호텔을 뒤져보았다. 호텔까지 연락을 하는 건 좀 우습긴 했지만 그냥 연락처라도 찾아두고 싶었다. 그래야 계속 연락이 안오면 정말로 연락이라도 해 보지.
인터넷에서 간신히 호텔의 연락처를 알아냈지만 어차피 그가 몇 호실에 묵는지도 모르는 터라 전화를 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녁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그녀는 연락을 기다렸으나 이상하게 그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포스터를 제자리에 붙여놓고서 저녁 내내 그의 얼굴만 노려보다가 그녀는 잠자리에 들었다.
일주일이나 연락이 없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내내 선배와 원장의 눈총을 받으며 인상을 쓰고 신경질을 부리다가 마침내 퇴근해서 집에 온 다음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서 전화기를 들고 호텔번호를 눌렀다.
호텔에서는 손님이 어디 묵는지 가르쳐 주는 게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뭔가 타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억양 강한 동남아식 영어로 대답이 들려왔다.
“미스터 고는 체크아웃 하셨는데요.”
체크아웃? 체크아웃이라니, 그럼 어딜 갔는데? 고맙다고 말을 하고서 전화를 끊으며 그녀는 침대에 주저앉았다. 귀국 중인가? 그래서 연락이 안 되나? 하지만 그럼 왜 오기전에 전화 한 번 안 했을까?
“배터리가 다 됐는데 충전할 기회가 없었나 보지. 어쩌면 집에 왔을지도 몰라. 너무 피곤해서, 금방 도착해서....”
중얼중얼 수화기를 노려보던 그녀가 재빨리 도로 전화를 집어들고서 수민의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막판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전화 한 번 걸 새도 없이 일 한 다음 지금쯤 집에 돌아와 있을 지도. 그녀를 곧 놀라게 해 주려고 그러는 건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런 거라면 고수민, 가만 안 둘거야! 사람을 이렇게 신경쓰이게 만들고!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그녀의 심장도 박자를 맞추어 쿵쿵거렸다. 정말로 집에 왔을까?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발리에 츠나미가 있었던 게 얼마인데, 설마 또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을 리는 없어. 지진? 아냐, 아냐, 뉴스에 아무 것도 안 나왔다구, 게다가 호텔에서 전화를 받았잖아!
“사랑의 도피?
“미쳤어,미쳤어, 이서은. 도데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사랑의 도피라니 누가 누구......”
“여보세요?”
전화기에서 남자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이었다. 수민씨다. 거의 일주일만에 수민의 목소리를 듣는거였다. 머리가 폭발하는 것 같고 숨이 안쉬어진다. 온뭄이 부들부들 떨려서 침대에 몸이 죽 녹아버릴 것 같다.
“여보세요?”
수민이 다시 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막 말을 하려고 하는데 수화기 뒤편으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나 다 씻었어, 자기야.”
나 다 씻었어.자기야? 누, 누구더러 자기야래? 누가 누구의 자긴데?
수화기를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다음에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도데체 내가 왜 수화기를 내려놓은거지?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도 모자란 판에?
“아냐, 말도 안돼. 수민씨 그럴 사람아니야. 이럴때 착각해서 혼자 오해하고 오버하는 게 ???로 비극의 시작이야.”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는 포스터를 노려보았다.
“당연히 이럴때는 맞대면을 하고서 따져야 되는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수민씨?”
그럼, 그럼,. 혼자서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녀는 황급히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돌아와 제대로 싯지도 않은 터라 좀 그렇긴 하지만 옷을 제대로 입고 화장을 좀 고치면 못 볼 정도는 아닐 것이다. 흐트러진 부분은 .... 수민씨를 너무 걱정하느라 그랬다고 하지, 뭐.
거울 앞에서 모습을 확인한 다음 그녀는 한 바퀴 빙 돌아본 다음 향수를 살짝뿌렸다. 일이 일이다 보니 그런지 수민은 그런 부분에도 꽤 예민했다. 오랜만에 보는데 비록 샘플이긴 하지만 그가 준걸 뿌리고 싶었다.
오랜만에 안 몰던 차를 모니 도로가 지나치게 빽빽해 보였다. 간신히 수민의 빌라 앞까지 도착했을 땐 신경이 곤드설 대로 곤두선 상태였다. 쿵쿵대는 가슴을 한 손으로 누르고서 그녀는 수민의 집까지 계단을 올라갔다.
벨을 누르자 안에서 금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누구긴 누구겠어, 댁이 연락도 안 한 ‘여자 친구’ 지. 손에 긴 반지를 잠시 노려본 다음 그녀가 다시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남자가 다시 외친다. 그녀도 맞받아 소리쳐 주었다.
“나야. 문 좀 열어 줘.”
“나?”
“서은이라고! 그 새 목소리도 잊었어?”
퉁명스럽게 말하며 그녀가 다시 심술궂게 벨을 딩동딩동 눌러댔다.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드리고서 문이 벌컥 열렸다.
“어떻게 돌아오고서 연락도 안 할 수가....어머?”
그녀가 눈을 깜박였다.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분명 수민만큼 크고 그와 거의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머리가 목덜미까지 길었다. 얼굴 역시 수민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보인다. 최소한 5년쯤 뒤의 수민이라고 하면 될까? 조금 연륜이 붙은 수민의 모습.
“어.......저기.....”
“수민이 찾아요?”
남자가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서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수민 특유의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어머, 똑같잖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서 그녀는 고개만 열심히 끄덕거렸다.
“그 녀석 아직 해외 촬영 가서 안 왔는데. 누구라고 전해줄까요?”
“어, 그, 저기, 언제 오는지 혹시 아세요? 연락이 안 돼서.....”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는 데다가 기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바보, 멍청이. 나이를 서른이나 먹어서는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빨리 고개 들고 똑바로 해. 넌 수민씨 말대로 잘 나가는 전문직 여성에다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고. 절대 밑질 거 없어. 고개 들고!
간신히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뭔가를 깨달았다.
“수민씨 형 되시는 분.....맞죠?”
“네. 혹시 그쪽은 이서은씨인가요?”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수민씨가 말했어요?”
남자가 씩 웃었다.
“뭐 대강 아는 방법이 있다고 해 두죠. 수민이 없지만 잠깐 들어와요.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되나?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안쪽을 슬쩍 보았다.
“저기.....손님 있으신 거 아니세요?”
“아아, 아까 전화했다가 그냥 끊은게 서은씨구나.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내 고막 나가면 책임질래요?”
남자가 낄낄거리며 말한다. 무너가 수민보다 훨씬 능글능글한 말투에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 으나 차마 그의 앞에 대고 느끼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수민의 형인데. 이름을 들었었는데 뭐더라?
“손님이랄 것도 없어요. 잠깐 들어와서 기다리는 동안 보내면 되지, 뭐.”
“네? 아뇨. 제가 가?게요. 수민씨가 온 줄 알고 착각하고 온 거거든요. 여자친구랑 같이 계셔야.....”
“여자친구요? 에이,설마.”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피식 웃더니 문을 좀 더 열었다. 어째야 되는 거야? 난감한 상태로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서 그는 안으로 들어가더니 방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목소리가 잘 안 들리지만 여자의 대답하는 목소리는 그야말로 요란하게 들렸다.
“뭐? 왜? 여기까지 오라고 해 놓고서 왜 가래? 어우, 싫어. 나 수현씨랑 있으려고 왔는데 왜 다른년이 와서 지릴인데? 걔 쫓아내!”
이런, 저런 여자와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싸우고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최소한 지켜야 할 품위라는게 있었다. 서은이 슬그머니 거실에서 문 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수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당장 안 나가면 다시 내 근처에도 못 올 줄 알아.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운 좋게 여겨야지. 내가 노늘 한가하지 않았다면 애당초 부르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빨리 옷 챙겨 입고 나가서 다시 나 한가해질때까지 기다리든지, 아니면 그냥 이걸로 영영 차오하자고.”
근사하게 굴러가는 차오(Clao) 발음에 서은은 뒤에서 눈만 굴렸다. 아, 그래. 이탈리아 유학생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도대체 전공이 뭐야? 모델?
여자가 뭐라고 요란을 떨었으나 그가 문을 쾅 닫자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수현은 그저 씩 웃으며 서은을 돌아보았다.
“자, 5분 안에 나갈거예요. 걱정 말고 거기 앉아요. 커피? 에스프레소 있는데.”
“어, 아뇨. 그냥, 저기, 물이나 주스 같은 거 한 잔 주세요.”
“아, 치과의사라고 그랬나? 커피가 이에 안 좋아요?”
“좋을거야 없지만 그렇다고 커피 한잔 마신다고 이가 으르르 빠지는 건 아니고, 그냥 제가 커피를 별로 안 마셔요.”
최소한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그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부엌으로 가서 달그락거리는 소리흫 내더니 주스 한 잔과 물 한잔을 들고 왔다. 조심스럽게 잔을 받아들어 한 모금 나시는데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늘씬한 여자가 사나운 얼굴을 하고서 튀어나오다가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어디서 굴러먹던 망할 계집애가......”
그 뒤로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나지막한 목소리였으나 아마도 욕일 게 분명했다. 뭐 상대가 수민이라면 머리채를 잡고 싸울 용의도 있지만 상대가 다르니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녀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려고 노력했다.
여자가 현관문을 쾅하고 닫고 나가는 동안 수현은 그야말로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태연하게 물을 홀짝이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사라지자 그가 빙그레 웃으며 서은을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하지만 손님이 올 줄은 몰라서.”
“여자친구 아니었나 봐요?”
“아, 그냥 이래저래 주운 여자.”
여자가 물건이냐, 줍게? 남 같으면 뒤통수를 확 후려쳤겠지만 상대는 하필 수민의 형이었다. 그녀가 잘 보여둬야 하는 상대. 수민에게는 가족 이야기를 들을 수 없으니 그 형에게서라도 들어야하지 않겠는가.
아, 물론 조금 불안하긴 했다. 남자와 단둘이, 그것도 그 남자 집에 있으니 편안하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 하지만 아무리 여자를 밝힌다 해도 동생과 ‘지금 현재’ 사귀고 있는 여자를 덮친다면 그건 패륜이지.
아닌가?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상관없는 건가? 주스 잔을 든 채로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 되게 심각한 고민 하나봐요?”
그가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서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화들짝 놀라서 그녀가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잠깐 딴 생각을 좀 했어요. 그런데 수민씨 아직 귀국 안 했다고요?”
“내가 아는 한은요. 아니면 뭐 다른 연락이라도 받았어요.,우리 귀여운 밤비노한테?”
우웩, 왜 수민씨가 형 이야긴 안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아, 속으로 생각하며 그녀는 겉으로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호텔로 전화한 이야기는 안 하는편이 좋겠지.
“아뇨, 저기, 전화가 계속 안 되길래 걱정이 돼서 집으로 전화했더니 남자가 받길래요. 목소리가 비슷해서 수민씬 줄 알고.....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대답 대신 수현은 빤히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어색하게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리자 그가 나직하게 키득웃었다.
“서른 살 먹은 치과의사라고 하기에 대강 그렇고 그런 이미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짜 의외네. 누리 밤비노가 눈은 있다니까.”
어.....칭찬인가? 별로 기분 좋은 말은 아니라서 그녀는 그저 시선을 돌린채 가만히 있다가 주스 잔을 내려놓았다.
“저기, 제가 너무 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한데 일어나 볼게요. 괜히 수민씨도 없는데 여기 있는 것도 좀 그렇고요.”
“아, 괜찮아요. 하나도 귀찮지 않으니까. 오히려 까리나가 가 버린면 나 혼자 심심하거든요.”
서은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그렇게 외국어 섞어 쓰면 남들이 좋아하나요?”
잠시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화를 내거나 어리둥절하거나 둘 중 하나일거라고 생각하던 그녀는 조금 놀라서 소파 뒤로 움찔 물러나 앉았다.
“야, 생각보다는 세네. 하긴, 그 나이 먹은 직장인이 얼굴만큼 순진하면 그건 곤란하겠지.”
“제 어디가 그렇게 순진해 보여요?”
그 말은 꽤 불쾌했다. 좋게 생각하면 좋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저 남자의 입에서 나온다는 사실 잩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수현이 수민과 똑같이 그린 듯한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전부 다. 특히나 멋쩍어서 눈 못 맞추는 게.”
으으으으으. 그녀는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도대체 난 왜 이모양인 거야? 저런 괴상한 남자하고는 얼마든지 눈 맞출수 있잖아. 잘생긴 리마리오라고 생각하는거야!
하지만 수민과 똑같은 얼굴로 그녀를 보고 웃는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나마도 수민을 못 본지 2주가 넘어가는 판국엔, 자칫하다 얼굴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몸이 동하기라도 하면 창피해서 수민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요즈음은 포스터만 보고도 몸이 달아오르는 상황인데.
수민씨, 이디 간거야? 왜 안오는거야?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녀는 주스 잔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죄송하지만 가 볼게요.”
“아, 그냥 보냈다가 나중에 민이한테 들키면 지금보다 열 배는 더 미움 받을거야. 잠깐만. 수민이 옛날사진 보여줄까요?”
그녀가 홱 그를 쳐다보았다. 만약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강아지처럼 흔들어댔을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을 본 수현이 낄낄 웃었다.
“잠깐 거기 앉아 있어 봐요. 앨범 꺼내올테니까.”
방으로 사라지는 수현을 보며 그녀는 도로 소파에 앉았다. 심장이 두근반 세근 반 뛴다. 수민의 어린 시절모습? 도대체 어땠을까? 어떤 모습일까? 기대가 되어서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었다.
“이런 사소한 거에 이렇게 기뻐하지 않아도 되잖아.”
나직하게 그녀가 투덜거렸다. 왠지 자신이 바보 같았다. 이런 건 수민이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저런 느끼하기 짝이 없는 형이 아니라. 수민의 등 뒤에서 그의 가족에 대한 걸 캐묻고 싶지도 않았다. 나중에 그가 화라도 내면 어떡해? 직접 물어봤을때도 그렇게 화를 냈는데.
그냥 집에 갈까? 하지만 수민의 옛날 사진이라니, 유혹이 너무 강했다.
“자, 여기 수민이 옛날에 모델 할 때 찍은 사진 모음집.”
집이여, 안녕. 수민씨 미안. 하지만 수민의 모델 할 때 모습이라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느 새 양손을 꼭 모으고 그녀는 눈을 빛내며 앨범을 쳐다보고 있었다. 수현이 페이지를 넘겼다. 긴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소녀가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모습이 나왔다. 서은이 눈을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여동생도 있으세요?”
그가 씩 웃었다.
“이거 민이. 그녀석 리케오(Liceo) 시절에 여성복 모델 했거든요.”
후아아. 그녀는 입을 딱 벌리고 다시 사진을 보았다. 긴 머리에 살짝 숙인 고개, 드레스 목선 위로 드러난 쇄골. 어딜 보나 어여쁜 소녀지만 분명히 턱이라든지 코, 눈 같은 부분은 수민과 꼭 닮아 있었다.
“진, 진짜요? 진짜 수민씨 여성복 모델 했어요? 남자가 여자 못 모델도 해요?”
“남자애들은 여자보다 가끔 옷선이 더 잘 살거든. 아주 가끔 해요. 민이도 너무 금방 커서 한 2년도 못했지, 아마. 민이 키가 180 넘고 어깨까지 떡 벌어지고나니까 새어머니가 굉장히 실망하시더라고. 더 이상 여성복 모델로 쓰기 힘들다고.”
수현이 낄낄거렸다. 사진을 쳐다보며 입에 고이는 침만 삼키고 있던 서은이 문득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새어머니가 모델로 쓰셨어요?”
그가 웃음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서은은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재빨리 사진으로 시선을 내렸다. 수현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무릎 위ㅔ 팔을 걸친 채 그녀를 보았다.
“민이가 집안 이야기 별로 안 했나 보죠?”
“아, 아무래도 다른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요.”
얼버무리려고 뭇었지만 역시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만은 어쩔수가 없었다. 사귄 지 석 달이 넘었는데 그의 가족들이 뭘 하는지도 모른다니, 정말이지 창피해서 말도 꺼내기 힘들 정도였다. 스무 살 어린애들 연애도 아니고.
아니지, 수민씨는 스물 셋밖에 안 됐잖아. 나만 나이 들었을 뿐이지. 문득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걸 깨닫고 그녀는 열심히 사진을 쳐다보는 척했다.
“저기, 이거 말고 또 여성복 모델 한 사진 더 있나요?”
“남기면 더 있어요. 마음대로 봐요.”
정말로 사진은 여러 장이었다. 대체로 화려한 드레스 류가 많았지만 가끔 드물게 남성복을 입은 것도 있었다. 어느 새 다시 발갛게 웃으며 그녀는 열심히 사진을 하나하나 구경했다.
가끔 수민과 수현이 같이 나온 사진도 있었다. 나이차가 한참 나는데도 두 사람은 마치 쌍둥이처럼 닮았다. 그녀는 힐끔 수현을 보았다. 그는 동물원의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를 쳐다보는 주이었다.
“수민씨랑 굉장히 닮으셨네요. 나이 차가 꽤 많이 나는 걸로 아는데.”
“옛날 사진 꺼내놓으면 새어머니도 헷갈려 해요. 그래서 사진에 년도를 종종 써좋죠. 거기도 아마 써 있을걸?”
정말로 사진 아랫부분에 자그마하게 년도가 써 있었다. 이건 그러니까 수민씨가 18살 무렵이고, 이건 그거보다 어릴때. 년도와 비교해가며 그녀는 다시 키득거리며 사진을 보았다.
앨범을 거의 끝까지 넘겼을 무렵 사진 한 장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대단히 친숙한 각도에 친숙한 모습.
그녀의 집에 있는 포스터 사진이었다. 담배를 문 수민이 비스듬히 서 있는 장면. 하지만 포스터와는 각도가 조금 달랐다. 아마도 같은 촬영때 찍은 다른 사진이 아닌가 시었다. 얼굴을 붉히며 키득거리던 그녀는 문득 사진의 년도를 보고는 웃음을 멈추었다.
1994?
농담이겠지. 94년이면 도대체 수민씨 나이가 몇인데. 열 살 좀 넘었을땐가? 말이 안 되잖아.
“이거 잘못 써 있는것 같은데요.”
그녀가 수현을 쳐다보았다.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뭄을 기울여 사진을 보더니 인상을 반쯤 찌푸리고는 웃었다.
“제대로 된 거 맞아요. 그거 내 사진인데. 민이랑 헷갈렸구나?”
“네?”
잠시 그녀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가 앨범 비닐 아래서 시잔을 꺼내 자신의 얼굴 옆에 갖다대고 얼굴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자, 이 각도. 뭐 10년도 넘은 옛날사진이긴 하지만 나라니까. 무슨 옷 모델 했던 건데 그리 유명하진 않았어요. 무엇보다도 말이지, 사진에 담배를 넣으니까 당연히 안 되지. 이 광고는 거의 뭐 평가 제로였어.”
“아니, 하지만 그게.....”
말도 안돼. 수민은 그런 말을 한 적 없었다. 포스터를 보고도 아무말도........
‘내 포스터라고 그랬던 거, 저거 이야기였어?’
그리고 나서 그는 한동안 그녀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길을 지나가다가 만났을때 그녀가 수현을 보고 못하게 하려고 눈을 가리기까지 했었고. 포스터를 떼어버린 걸 보고 굉장히 기뻐했었지.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왜 그가 그런 거짓말을 했던 걸까? 왜 자기 사진인 양 굴었던 거지? 왜 그녀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걸까? 그건 형 사진이라고, 다른 사람이라고. 그가 아니라고.....
“아,세상에.”
갑자기 자신이 얼마나 바보짓을 했는지 서은은 깨닫기 시작했다. 수민에게 포스터 때문에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해 놓고서, 그래서 사귀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수민이 그 포스터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 기분이 어땠을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 포스터를 보며 배실배실 좋아하고 있는데, 그는 도대체 어떤 기분으로 그걸 보고 있었을까? 바보처럼 2차원 속의 인물이나 보며 홀딱 빠져있는 그녀를 그는 어떤 마음으로 안아 주었던 걸까?
진심이긴 했던 걸까? 그래서 차마 말을 못 했던 걸까, 아니면 말할 가치를 못 느껴서 안 했던 걸까?
“어이, 이봐요. 이서은씨? 무슨일 있어요?”
그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수현이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흔들고서 그녀가 일어났다. 조금 더 여기 앉아 있다가는 그에게 소리를 질러버릴 것 같았다. 왜 감리 수민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냐고.
그게 수현 잘못도 아닌데.
“저기, 그런데, 그게 94년 사진이면...... 나 그거 2년전에 길거리에 붙어있던 포스터 봤는데요.”
수현이 한쪽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결국 그 사진의 권리는 그쪽 회사에 있는거니까 시즌마다 권리만 갱신하면 다시 쓰는 건 자기네 자유죠. 나도 연락 받고 오케이 했던 것 같고. 어, 음, 그래 .했던 것 같아. 공돈 들어오면 좋지 싶어서. 그런데 가려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핸드백을 챙겼다. 그가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그 사진에 관심 많네요. 하지만 좀 너무한다. 사귀는 사이라면서 민아랑 날 구분 못 하는거 심하지 않나?”
그녀가 그를 홱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있었다.
“어, 새어머니도 구분 못 하신다면서요!”
“새어머니야 그냥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지. 설마 진짜 자기 자식 구분을 못 하겠어요?”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리고 문으로 향했다. 그가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오다가 갑자기 귓가에 입김을 훅 불었다. 그녀가 거의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가 낄낄거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야, 귀가 약하구나. 이러면 재미있지. 진짜 재미있어.”
갑자기 불안감이 그녀의 등을 타고 슬금슬금 기어올랐다. 왠지 위험한 분위기다. 빨리 이 집에서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수민이 아니라 그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갔어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가 입김을 불었던 귀를 한 손으로 막은 채 그녀가 도로 일어나서 후다닥 문으로 향했으나 수현이 훨씬 빨랐다. 그녀의 팔을 붙잡고서 홱 끌어당기더니 그가 그녀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거의 코끝이 닿을 정도였다.
“당신 말이지, 그나이 먹었으면 철이 좀 들어야지.”
“네?”
예상치 못했던 말에 그녀가 눈을 깜박였다. 수현의 미소는 이제 빈정거리는 듯한 냉소였다.
“나이를 서른이나 먹었으면 철 좀 들라고. 겨우 스물세 살 먹은 우리 민이 쫓아다니지 말고. 뭐 하는 짓이야. 그게? 그 녀석 아직 한참 창창해. 댁은 그야말로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아줌마 아냐. 민이랑 지금 결혼이라도 할 셈이야? 그 녀석 아직 결혼하려면 멀었어. 이제 인생 시작하는 애야. 근처에서 얼쩡대지 말고 좀 꺼지라고.”
심장이 쿵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온몸이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고 눈앞이 그저 하앴다. 수현의 말은 차갑게 그녀의 가슴을 파고든다.
“아니면 뭐 섹스 상대가 필요 해? 그런 건 나도 해 줄수 있어. 댁, 뭐, 보아하니 그리 이상하지 않고, 꽤 귀여운 구석도 있거든. 아니면 내 친구들 소개해 줄 수도 있고. 섹스 잘 하는 애들 충분히 많거든. 나도 여자들한테 딱히 불평 들어본 적 없고. 민이도 없겠다, 지금 한 번 맛 좀 보여줄까? 해 보고 나면 민이보다 내가 낫다 싶을 걸?”
더러워. 불결해. 그가 잡고 있는 팔목이 마치 썩어 들어가는 느낌이다. 어떻게 사람한테 대고 이런 소릴 할 수가 있지? 그것도 동생이 만나고 있는 여자한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면 이런 소릴 면전에서 할 수가 없어. 말도 안 돼. 진짜 쓰레기라든지 양아치들이나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 보통 사람이라면....
하지만 그녀의 친구들조차도 그랬다. 너 날강도다, 네가 돈이 좀 있어 보이니까 달라붙는 거 아니야? 뭐 그런 소리들. 누구나 서른이나 먹은 여자가 스물세 살밖에 안된 남자와 만나면 그런 말을 하는건가? 돈으로 적당히 꼬셨다든지, 단지 섹스가 필요해서 그런 거라든지.
모르겠어. 난 그런 거 전혀 모르겠어. 수민씨조차도 나한테 현실과 이상을 구분 못 한다고 그랬었지만, 그래서 현실이 뭔데? 다들 섹스 때문에 돈 내고 상대를 찾는 그게 현실인 거야? 내가 이상한 거야?
“고민할거 없어. 그냥 한 번 해 보고 나서 결정해.”
수현이 고개를 숙이는 순간 서은이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반항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쉽게 그녀의 팔을 놔주었다. 숨을 헐떡이며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무서웠다. 이대로 그가 덮치면 그녀는 꼼짝없이 당하는 셈이었다. 경찰에 신고할 수 있을까? 누가봐도 ‘댁은 못 생기고 나이 많은 노처녀고 저쪽은 잘생긴 모델인데 저런 사람이 왜 폭행을 하겠어?’ 같은 소리를 할게 뻔한데?
“당신 같은 사람이 형이니까.......그러니까 수민씨가 가족 얘기를 못 한 거겠지.”
그녀가 떨리는 웃음을 지으며 빈정거렸다. 수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
“당신 같은 쓰레기가 형이라서 수민씨가 당신 이야기도 꺼내기 싫어한 게 분명해! 수민씨 걱정을 해서 날 떼어버리려고 하면 이해하지만, 뭐? 수민씨보다 당신이 나아? 야, 이쓰레기 자식아. 그러고도 네가 형이야? 동생이 만나는 여자한테까지 손 뻗치고 싶니? 그게 자랑거리야? 이 망할 놈아!”
소리를 지르니까 왠지 점점 용기가 생겼다. 까짓 거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속시원하게 욕이라도 해 주면 기분이 좋아질지 모른다. 수현의 얼굴이 일그러지는걸 보면서도 그녀는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물룬 문쪽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민씨가 이거 알면 참 좋아하겠다. 뭐, 수민씨가 싫어할까 봐 잠깐 있다가 가라고? 이 새빨간 거짓말쟁이야, 너 같은 거 형이라고 뒀으니 수민씨가 참 불쌍해. 댁 부모님도 불쌍하고. 저런 거 장남이라고 믿고 계시겠지? 어이고, 걱정이다, 걱정.”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기 시작했다. 여자한테 이런 소릴 들어본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알 게 뭐람, 먼저 건드린 건 저 자식이었다. 나이는 뭐 헛먹은 줄 알아? 대학 다니며 재수 없는 인턴 레지들 욕 안 해 본줄 알아?
“그렇게 쫓아다닌다고 민이랑 결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애 장래 망치지 말고 꺼져!”
“수민씨 장래는 수민씨가 결정하지 댁이 왜 감 놔라 배 와라야? 수민씨가 날 싫다고 하면 얼마든지 헤어질 거야. 하지만 그러기 전에 댁이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 나보고 순진해 보인다 어쩐다 하는데 내가 뭐 그렇게 바보인줄 알아? 그따위로 햡박한다고 넘어갈 것 같아? 왜 이러셔, 나도 제대로 된 직장 다니는 멀쩡한 사회인이야. 그런 협박에 넘어갈 만큼 어린애 아니라고.”
허리에 손을 얹고서 그녀가 당당하게 이죽거렸다, 수현은 이제 머리끝까지 화가 뻗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른한 미소며 유혹적인 웃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짙은 눈꼬리가 위쪽으로 여우처럼 빧쳤다.
“당신 말이지 민이한테 꽤나 자신 있는 모양인데 착각하지마. 내가 장담하는데 그 녀석이 먼저 당신 꼬셨지? 그래서 우쭐한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그 녀석이 원래부터 연상을 좋아해.”
그가 팔짱을 끼고서 느긋하게 엉덩이를 기대고 그녀를 응시했다. 서은이 눈을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뭐?
“옛날부터 원래 연상한테 인기가 많았던 데다가 여자한테 어떻게 하면 되는지 나나 원이한테 교육을 잘받아서 잘 알거든. 원래 그런 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들한테는 해 봤자 소용도 없는 짓이라서 연상의 여자들이 더 잘 넘어오게 마련이지. 거기다가 댁은 나이답지않게 연애 경험도 별로 없어서 그 녀석 밀어붙이지도 않을테니 자기마름대로 테크닉을 다 써 볼수 있을거고. 딱 맞는 대상이자, 그녀석이 한번 갖고 놀기엔.”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이마에 식은 땀이 배는 느낌이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그저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승세를 탔다는 걸 알아챘는지 수현이 씩 웃었다.
“그게 오래 갈 것 같아? 그 녀석도 나이를 먹는다고. 나이를 먹고 나면 당연히 댁보다 젊은 여자애들이 마음에 들게 마련이야. 그 녀석이 나이 먹는 동안 댁도 나이 들 거고, 그 녀석이 나이 서른쯤 되어서 진짜 정착하고 뭐 그런 걸 생각할 즈음엔 댁은 마흔이 다 됐을 거라고. 주름살에다가 펑퍼짐한 엉덩이에 애낳아 키우기에도좀 늦었지. 거기다가 온갖 트집이란 트집은 다 잡을 거고. 미쳤다고 그런 여자를 고르겠어? 당연히 뭐 하나만 해 줘도 좋아하고 방방 뛰는 순진하고 어린 여자애를 찾겠지. 나만 해도 그런 여자 고르라고 충고할 거고. 뭐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어. 이번에 뮤직비디오 찍고 나면 분명히 어디PD하나쯤은 접근 할걸. 그러면 그 녀석 자리 잡는 거 시간 문제고, 방송국 가보면 댁 같은 여자 널려서 별 특별한 데도 없다는 거 금방 알게 될 거야.”
뮤직 비디오를 찍어?
“뮤직비디오?”
그녀가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 수현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수민과 똑같은 얼굴로 경멸조의 미소를 짓는 건 굉장히 가슴이 아팠다. 송곳으로 후벼파는 것만 같았다.
“그 이야기도 안 한모양이지? 그럼 그 녀석이 도대체 왜 발리까지 갔다고 생각했는데?”
“옷.......화보 촬영 한다고.......”
“그따위 건 사나흘도 안걸려. 도대체 사귀는 사이 맞긴 해? 혹시 민이는 아무 생각없는데 댁이 혼자서 쫓아다니는거 아니야? 아무래도 그런 느낌인데. 민이 그 녀석이 좋아하는 여자한테 그렇게 신경 안 쓸 애가 아니거든.”
모르겠어. 왜 말 안 했을까? 왜 연락을 안 하는 걸까? 왜....... 그녀가 그를 생각하는 만큼 그는 그녀를 생각해 주지 않는 걸까? 그녀는 늘 그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하는데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해 주지 않는다. 가족 이야기라든지 장래 이야기 같은 걸 제외하면 전부 다 말해 준다고 자위하려고 해도 사실 그가 해주는 거라고는 친구들 이야기라든지 모델 일, 그나마도 예전에 모델 일 할 때 우스웠던 일들 정도였다. 그가 해 준 이야기 중 가장 개인적이었던 이야기는 지난 번 패션 쇼의 디자이너가 싫어 미치겠다고 했던 그것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너무 기뻐서 직장에서 한밤중에 의사 가운만 입고 별별 짓을 다 했지.
바보멍청이.
친구들 말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고 있는 거고 그녀 혼자만......
아니야,아니야. 최소한 수민이 직접 그렇게 말할때까진 믿어줘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그가 자기 입으로 그녀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다고 맣할 때까진. 그는 늘 우왕좌왕하는 그녀를 붙잡아주고 세상에서 가장 예쁜여자인 것처럼 느끼게 해 주었다. 최소한 그를 믿어주는 게 그녀의 의무가 아닐까?
“엿이나 드시지. 동생의 마음도 안 맏는 망할 형님.”
그녀가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며 혀를 낼름 내밀자 수현은 잠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재빨리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고서 그녀가 그를 노려보았다.
“댁이 뭐라고 하든 난 수민씨를 믿어. 수민씨가 자기입으로 나한테 나랑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할때까진 난 수민씨 옆에 있을거야. 그리고 당신 말이지......”
현관문을 열면서 그녀가 말을 이었다.
“턱살이랑 뱃살이나 축 늘어져 버려라!”
다시 한번 혀를 내밀고서 그녀는 밖으로 나가 문을 쾅 닫았다. 얼마나 세게 닫았는지 벽이 다 흔들린다 싶을 정도였다. 그녀의 마지막 말에 그가 보여준 황당해하는 표정에 기분이 조금 좋아져서 그녀는 낄낄거리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하지만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자 수현이 말한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떠올랐다. 뮤직비디오 촬영, 수민의 연상 취향, 막 인생을 시작하는 그에게 도움이라곤 안 되는 그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벽에 붙여놓았던 포스터를 떼서 그녀는 죽죽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어쩌자고 이런 환상으로 삼았던 걸까? 아맂도 못하는 사람인데. 그,저 얼굴 하나만 있는 그림일 뿐인데. 바보, 멍청이.
“이러니까 철 들라는 소리나 듣지. 이 나이를 먹어서.”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았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동 응답기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수민은 전화하지 안았다. 발리에서는 떠나버렸다.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그녀에게 싫증이 나가라도 한 걸까?
“제발 빨리 돌아와 줘, 수민씨.”
침대에 걸터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서 그녀가 나직하게 흐느꼈다. 이대로라면 정말이지 수현이 의도한 대로 그를 의심하고 불안해 할것만 같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어린애가 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가슴은 굉장히 아팠다.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그로 인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14.
“차오, 덴티스타.”
의자 위에 누워 있는 환자를 보는 순간 서은은 잠시 클립보드로 후려칠까 아니면 돌아서서 사무실로 들어갈까 고민했다. 수현이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고 간호사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서은이 수민과 만난다는 건 병원에서는 그리 비밀도 아니었다. 어짼든 그가 종종 데리러 오곤 했으니까. 그러니 수민과 꼭 닮은 사람이 찾아왔다는 사실에 다들 호기심을 느끼고 있겠지.
빌어먹을 작자 같으니. 남의 병원까지 어떻게 알아낸 거야?
“무슨 일로 오셨죠?”
그녀가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그가 빙그레 웃었다.
“치아 검사하러요. 의사선생님.”
“이 하세요.”
인사도 없이 그녀가 날카롭게 말하자 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선생님 너무 냉정하다. 그래서야 환자들이 다 도망가지 않겠어요?”
“이 히세요.”
수민이 계속 전화를 안 해서 신경도 곤두서 있는 판에 수민의 닮은 꼴인 데다가 심술보는 놀부 뺨치는 이 인간을 계속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포스터를 찢은 정도로는 도저히 만족이 안된다. 수민을 봐야 했다.
도대체 어디 가 있는거야, 고수민!
“이 하세요.”
기계적으로 그녀는 치아를 검사한 다음 미러를 내려놓았다.
“별 이상 없고 스켈링 마지막으로 한 지 6개월 넘으셨다면 한 번 해 주셔야 할 것 같네요. 담배를 피우면 치석이 더 빨리 끼거든요.”
“끊은 지 한 석 달 됐는데 티가 나나 보죠?”
그가 여전히 빙글거리며 물었다.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서 그녀는 간호사에게 눈짓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수현이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았다.
“점심 같이 어때요?”
그녀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수민이 병원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를 음식점에 데려갔던 날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온갖 험한 말은 다 하는 것 같다가 결국 엔 잘 해 주겠다면서 사귀자고 했던 그날.
그때의 그는 진심인 것 같았는데. 아니 그 이후로도 계속 정말로 그녀가 예쁘다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왜 전화 안하는 거야, 수민씨?
“죄송합니다. 바빠서요.”
그녀가 그의 손을 떨쳐내고서 몸을 돌렸다. 수현이 그녀의 뒤에 대고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민이가 전화했었는데.”
마스크를 벗다말고 그녀가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수민씨가......”
말을 하다말고 그녀는 간호사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며 옆에서 다른 환자를 진료하고 있던 동료 의사의 눈길을 보고서 입을 다물고 잠시 기다리다가 간호사를 보았다.
“고수현씨 다 끝나면 내 사무실로 안내해 줘요.”
수현이 뒤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다. 그녀는 부글거리는 화를 억누르고서 사무실로 들어가서 가운을 벗고 의자에 풀썩 앉았다.
수민에 대한 정보를 인질 삼아 그녀를 조종하는 건 정말이지 불쾌했다. 하지만 그가 아니면 수민의 소식을 알아봐 줄 사람이 없다. 그녀는 수민의 친구들 연락처도 하나도 몰랐다. 수민의 친구들이 잘 간다는 압구정동 카페에 두어 번 나가봤지만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못하고 혼자 시간만 죽이다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니 이제 수현 말고는 기댈 곳이 없다.
잠시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수현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순간적으로 수민이 그녀를 데리러 오던 게 떠올랐다.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고서 그녀에게 키스하던 그.
심장이 멎어버린 기분이다. 아니, 심장을 잃어버린 기분이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
아냐, 정신 차려. 수민씬 돌아올거야. 아마, 아마 그 뮤직비디오 촬영이 좀 늦어지는 거겠지. 어디 다른 데서 촬영을 하고 있는데 시간이 걸리는 걸 거야. 단지 그거야.
“의사 사무실이 이렇게 생겼구나. 생각보다 작네.”
수현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여분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서은은 그를 뚱하니 쳐다보다가 물었다.
“수민씨가 언제 전화했어요?”
“어젯밤에.”
내 애기 물어보던가요?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 그거였지만 그걸 물으면 저 망할 작자가 그녀를 괴롭히기만 하고 대답은 안 해 줄 것 같았다. 빙빙 돌려가며 물어야 하나?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잘 지낸대요?”
“아직은. 조만간 머리끝까지 성질을 내면서 돌아올 게 분명하긴한데.”
그가 슬쩍 그녀를 위아래로 보더니 예의 그 사람 속 긁어놓는 미소를 지었다.
“민이 어디 있는지 모르죠?”
알면 내가 댁 같은 인간을 왜 상대하고 있겠어? 차마 화를 낼 수는 없겠지만 아슬아슬한 범위까지 분노가 치솟고 있었다.
탕탕 소리를 내며 책상 위의 책과 논문들을 정리한 다음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남의 성질이나 긁어보려고 온 거라면 그냥 가 주실래요? 나도 나쁜 사람이거든요.”
“누군 한가해서 이러고 있는 줄 아나, 이서은씨?”
그가 미소를 싹 지우고서 한쪽다리를 꼬았다. 그러고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민이 집에 갔어요. 부모님이 부르셔서.”
집? 부모님? 그러니까......
“이탈리아요?”
“밀라노. 우리 부모님 뭐 하시는 지도 모르죠?”
아픈 곳만 골라서 찌르는 인간이다. 입술을 꼭 깨물고서 그녀는 아무 표정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수민이 그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은 게 그녀에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었는지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런 게 드러나지 않을 리 없다.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거봐. 아무리 민이가 가볍게 만난다 해도 자기 가족 이야기도 안 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이쯤에서 포기하고 다른 데로 눈 돌리면 어때요? 나 괜찮다니까.”
“그러는 댁은 뭐 그렇게 여자랑 진지하게 사귈 건가요? 그것도 아니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쯤 낮아져 있었다. 책상 위의 노문을 멍한 눈으로 응시하며 그녀는 종이의 각을 맞추는 데 목숨이라도 달린 양 논문만 정리했다.
“그래도 난 가족 이야기 정도는 해 줄수 있는데.”
그가 방긋 웃으며 그녀를 쳐더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내가 수민씨랑 만나고 말고 하는 건 나랑 수민씨 문제잖아요. 댁이 왜 자꾸만 끼어 드는 거에요? 이러든 저러든 수민씨랑 내가 만나야 끝날 일이잖아요. 내가 여기서 뭐 헤어진다 어쩐다 말한다 해서 결정나는 거 아니잖아요?”
“결정이 더 빨라질수는 있지. 어쨌든 민이는 조만간 댁한테는 연락 못해요. 새어머니가 난리니까.”
서은의 얼굴이 굳어졌다. 수현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식 웃었다.
“새어머니가 아셨거든. 어쩌면 아예 여기 다 정리하고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실 지도 모르지.”
“우리 일을 아셨다고요?”
그녀가 눈을 깜박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새어머니라도 스물 셋 난 아들이 서른 먹은 여자랑 만나고 있다는 걸 알면 경악하시는 게 정상 아닌가? 혼자 뒀다가 쓸데없는 일 저지르느니 차라리 같이 있자고 그러고 계실 걸.”
아, 그런 건가. 그녀가 다시 멍하니 눈문을 쳐다보았다. 물론 그녀도 이해는 했다.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 해도 갓 스물 넘은 자식이 훨씬 나이 많은 여자랑 만난다는 걸 알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다리를 똑 부러뜨려 방안에 가둬놓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나쁜 건 아니잖아. 뭐가 빠져서? 나이가 좀 많다는 걸 제외하면 직업도 괜찮고, 외모도 뭐 그러저럭 못 봐 줄 정도는 아니고, 성격도 좋은 편이다. 젠장, 그녀의 부모님이 저 말을 들으시면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가실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녀도 다리를 부러뜨려 방안에 가둬놓으시겠지만.
양쪽에게 다 도움이 안 되는 관계일지도 모른다. 누가 들어도 찬성하지 않는 관계.
“나이차가 크다는 거 말고는 그렇게 나쁠것도 없잖아요.”
마치 변명이라도 히듯 그녀가 중얼거렸다. 수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니 뭐 민이가 한 다섯 살만 더 먹었어도 그렇게 반대가 심하진 않겠지, 하지만 민이는 이제 스물 셋이란 말이야. 당신은 조만간 결혼을 생각 할 나이고. 우리 부모님, 아직 위로 아들이 둘이나 더 있는데 막내부터 장가들일 생각은 없으실 거라고.”
“결혼한다고 한 적은 없어요!”
“그럼 결혼 안 하고 그냥 노는 건가? 그것도 그것대로 나쁘지. 이서은씨 당신 부모님도 안 좋아하실걸? 안 그래요?”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니까. 아무리 네 인생은 네가 살아야지 라고 부모님이 말씀하신다 해도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 당장 집에 와서 맞선이라도 보라고 하실 것이다. 그녀가 눈을 문질렀다. 바싹 마른 눈이 욱신욱신 아프다. 수현이 계속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건 알고 있지만 도저히 반응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말했지만 어쨌든 수민씨가 돌아와야 해결되는 문제잖아요.”
“아예 안 돌아오고 끝내는 방법도 있지. 댁이랑 내가 사귄다고 하면 간단히 끝나는 거잖아요?”
그녀는 눈을 질끔 감았다 떴다.
“그런 짓은 안해요. 최소한 솔직하게 하고 끝내야 되지 않겠어요?”
“솔직하면 뭐 좋은가? 나이차 때문에 안 되겠다는 거나 다른 남자생겨서 안 되겠다는 거나 뭐.”
“게다가 유학 가 있다고 들었는데. 댁은 안 나가요?”
“나? 나도 곧 가야죠. 그러니까 간단히 끝나는 관계, 뭐 이렇게 하면 되는 거지.”
슬슬 다시 성질이 치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나는 엉덩이 가벼운 여자로 만들고? 꺼져요, 제발. 남 괴롭히지말고. 수민씨 돌아오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진짜 헤어지긴 헤어질 거에요? 질질 끌지 말라고. 내가 이렇게 나서서 말해주는 것도 이서은씨 당신이 불쌍해서 그러는 거니까.”
“내 어디가 불쌍한데요?”
그녀가 눈을 치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보아하니 그다지 연애도 안 해본 것 같고, 딱히 남자 꼬시는 방법을 아는 것 같지도 않고. 분명히 이번에도 우리 민이가 다그쳐서 넘어간 거 같은데, 넘어가고 나니까 또 남자 생겨도 좋고 그런 걸로 보이거든.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당신한테 필요한 건 그냥 남자지, 우리 민이가 아니다 이거야. 그러니 괜히 사방에서 반대하는 어린 남자애 만나지 말고 나 같은 사람 만나서 적당히 즐기며 연애의 도나 틔우라는 거지.”
“당장 여기서 나가주시죠, 고수현씨”
그녀가 벌덕 일어나서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눈이 욱신거리는 게 더 심해지고, 머리까지 지끈거린다. 얼굴은 화끈거리고, 목이 쓰라렸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참고 있느라 그런거겠지.
수현은 태연하게 일어나서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수민과 거의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
“이만큼 경고했으니까 당신 말대로 알아서 처리해요. 스스로 잘 생각해 봐도 아마 민이랑은 안 되겠다는 거 알거야. 그러니까 가능한 한 피차 상처 없도록 적당히 잘 헤어지라고. 남자를 포기시키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다른남자가 생겼다고 하는 건데 도대체 왜 버티는지 모르겠네.”
“나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그가 양손을 들어올리며 빙글빙글 웃었다.
“알았어요. 나가줄테니까 성질 그만 부려요. 그럼 잘 지내요, 의사 아가씨.”
그가 사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는 손에 잡히는 펜을 내던졌다, 펜이 틱 소리를 내며 문에 부딪쳤다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마치내 눈물이 핑 돌았다.
수민이 헤어지자고 하면 헤어질 텐데 도대체 왜 옆에서 끼어들어 난린데? 물론 그녀가 그의 앞날에 현재로서는 그리 도움이 안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뭐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도 아니고, 기다려 달라고 한다면 기다릴 자신도 있는데. 이상한 어린 여자애들보다 그녀가 더 나은 거 아닌가? 오히려 그녀 입장에서 볼때 그가 더 격이 떨어지는거 아닌........
“이렇게 생각하니까 헤어지라는 소릴 듣는 거야, 이서은,”
그녀가 이마를 문지르며 풀썩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웃었다. 눈물이 눈꼬리에서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 그녀는 책상 위로 엎드렸다. 노크소리가 들리고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선생님, 혼자요.”
“금방 나갈게.”
하지만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3, 4분도 넘게 걸렸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고서 그녀는 일어았다. 연애 생활이 어떻게 돌아가든 일은 해야 한다. 이게 그녀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거니까.
그렇지?
전화는 한밤중에 걸려왔다. 잠이 안와서 뒤척거리고 있던 그녀는 부스스 일어나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여보세요?”
“서은씨? 나야.”
잠시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수민씨?”
“목소리가 왜 그래? 전화 며칠씩이나 못해서 미안해. 좀 바쁜일이 있어서. 나 금요일에 비행기 타거든. 토요일 낮에 도착할거야.”
그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너무나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인생은 그 며칠 사이에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바로 그의 형 때문에. 그리고 수민 자신 때문에.
왜 나한테 포스터 얘긴 안 했어? 왜 나한테 뮤직비디오 촬영 얘기 안했어? 왜 나한테 집에 간다고 말 안 했어?
“지금 어디야, 수민씨? 계속 발리에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아마도 잡음 때문에 잘 알아들을수 없을 것이다. 수화기를 꼭 쥔 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 어, 그게, 아니. 지금은, 저기, 다른 데 있어. 한 번 옮겼거든. 어쨌든 내일 밤에 도찰할거야. 내가 도착해서 전화할게, 응? 곧장 당신한테 가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토요일 저녁에 만나자. 괜찮지? 선물도 좀 샀거든.”
칭찬을 듣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그가 웃었다. 눈물이 핑 돌아서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수화기를 바싹 귀에 갖다댔다.
“알았어. 저기, 비행기 타기전에 또 전화해야 돼. 계속 걱정했단 말이야.”
마치 떼쓰는 듯한 그녀의 말에 그가 조금 놀랐는지 아무말도 안 하다가 헛기침을 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해. 촬영하다가 발리에서 핸드폰을 물에 떨어뜨렸거든. 그래서 기계가 갔어. 그냥 전화로 하자니까 돈도 많이 들고 그래서, 많이 걱정했어?”
대답 대신 그녀는 고개만 끄덕였다.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울고만 싶었다. 내가 다섯 살만 어렸다면. 당신이 다섯 살만 많았더라면. 그럼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래도 누군가가 반대했을까?
“나 끊어야 되거든. 저기, 서은아.”
그의 목소리도 무거웠다. 집에서 무슨 말이라도 들은 걸까? 부모님이 뭐라고 하셨을까? 그녀로 인해 그가 괴로워하는 건 싫었다. 그가 부모님 앞에서 그녀를 옹호해 주길 바라는 것보다 그가 괜히 부모님과 싸우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강하다는 게 우스웠지만, 정말로 그랬다.
“있잖아 나 할 말 있거든. 저기, 어, 많이 피곤하지 않으면 토요일에 공항으로 나오면 안돼?”
그녀가 눈을 깜박였다. 눈물이 저도 모르게 툭 굴러 떨어졌지만 다행히 더 이상 줄줄 흐르진 않았다.
“공항에?”
목소리가 잠겨 있었으나 다행히 그는 눈치 못 챈 모양이었다.
“어, 토요일 2시 15분 도착 예정인데. 편명도 불러줄까? 지금 비행기 표 갖고 있거든.”
토요일 2시. 못 나갈 건 없지만...... 갑자기 그가 굉장히 보고 싶어졌다. 조금 몸을 일으키고서 그녀는 전화 옆에 있는 종이와 펜을 재빨리 찾았다.
“응, 불러줘.”
“아니, 바쁘면 안 나와도 되고. 나 혼자 집에 갔다가 저녁에 만나도 되는데.”
“아냐, 안 바빠. 불러 줘.”
말로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그도 꽤 기쁜 듯 편명을 불러주었다. 시간과 비행기를 받아 적은 다음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수민씨,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어? 뭔데?”
“오면 저기, 수민씨 가족 이야기말인데, 해 줄 거야?”
그는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 안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삐 소리가 났다. 계속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협탁에 놓여 있는 시계에 고정되어 있었다. 10초, 20초.
그녀가 짧게 웃었다.
“돈 많이 나오겠다. 수민씨. 끊어. 나중에 토요일에 봐.”
“응? 서은아, 저기, 내가 뭐 숨기는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가 다급하게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그저 웃고서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괜찮아, 수민씨 . 토요일에 봐.”
작별인사를 하고서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수민은 그녀가 화나지 않아서 안도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심장은 화를 내지도 못할 정도로 욱신거리고 있었다.
“포스터 괜히 찢었나 봐.”
텅 빈 벽을 보며 그녀가 우울하게 웃었다. 최소한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며 위로 받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더는 남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처음에는 포스터 때문에 수민을 보았고, 이제는 수민 때문에 포스터를 볼수 없다니 어쩐지 우스워서 그녀는 킥킥거리다가 눈을 깜박였다.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바보같아.”
베개에 얼굴을 묻고 그녀는 나직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것들이 엉망이다. 그를 만나지 말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친구들 말이, 수현의 말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다 옳은 건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도움이 안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민이 보고싶었다. 남들이 뭐라든 그에게 안겨서 온기를 느끼고 싶었고,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것처럼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베개를 팡팡 내리치며 그녀는 누구랄 것도 없이 생각나는 사람 전부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밤새 눈물을 쏟았다.
15.
공항에 누군가를 마중 나가는 건 처음이었다. 도착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온 서은은 출구에서 서성거리며 비행기 도착 알림판을 응시했다. 수민이 가르쳐준 비행기는 로마발이었고, 도착 시간이 10분이 넘게 지연되었다.
마침내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을때는 지쳐서 바닥에 무너질 지경이었다. 긴장되고 걱정되고 그가 어떤 얼굴로 나올까 신경이 쓰여서 간밤에도 내내 잠을 못 잔 탓이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우르르 나오는 승객들 사이에서 그녀는 열심히 수민을 찾았다. 남자들이 보일때마다 심장이 쿵쿵거렸지만 걷는 모양만 봐도 즉시 그가 아니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몇 번을 그러다가 마침내 심장이 지쳐서 쿵쿵대지도 못할 무렵에야 수민이 짐가방 하나를 덜렁 메고서 걸어나오는 게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얼굴을 빛내며 손을 흔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수민의 얼굴에 환한미소가 어리는가 싶더니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서 난간 너머로 손을 내밀어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당신 얼굴을 못 보니까 밥맛이 다 없더라고.”
맙소사, 그의 온기가 그녀를 감싸자 온몸이 달아오르고 젖가슴이 묵직해지는 느낌이다. 다리 사이도 바싹 조여든다. 그녀는 소리 없이 숨을 들이키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거야?”
가능한 한 장난스럽게 그녀가 그의 어깨를 때렸다. 손이 떨렸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한 듯 빙긋 웃으며 그녀를 내려놓은 다음 난간을 훌쩍 넘어서 그녀의 앞에 섰다. 주위 사람들이 그들을 힐끔거렸지만 서은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진짜 수민이 그녀의 앞에 있다. 그것도 웃으면서.
“아, 진짜 좋다. 정말로 좋아.”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서 그가 숨을 깊게 들이켰다. 양손으로 그의 머리를 껴안고서 그녀 역시 숨을 들이켰다. 그의 독특한 향이 몸 가득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몸이 달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마름이 가라앉는다. 너무 오랫동안 고민하고 걱정만 했었다.
“가자, 얼른. 비행기 너무 피곤해. 다리 좀 쭉 뻗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서 상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와 보조를 맞추어 걷느라 그녀도 바쁘게 발을 움직이며 슬쩍 물었다.
“밀라노에서부터는 직항이 없나 봐? 아니면 로마에 있었어?”
“직항이 없어서 로마에서 갈아탔........”
그가 거의 펄쩍 뛰다시피 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그녀가 생긋 웃었다. 웃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가 그렇게 펄쩍 뛰는 걸 보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알았어?”
“아니 뭐, 내가 좀 천리안이 있거든.”
“빨리 말해, 이서은! 어떻게 알았냐고! 혹시......”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너무 과하게 반응하는 그를 보니 오내지 가슴이 아팠다. 여전히 그녀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을 걸까?
“우선 집에 가. 선물 샀다고 그랬잖아. 나 선물 받아 본지 되게 오래 됐어. 뭐 샀어?”
어린애처럼 조르는 그녀의 말에 그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금새 그는 주도권을 잡고서 절대 안 가르쳐 줄 거라며 느릿한 미소를 지었다.
공항버스를 타고서 좀 자라고 권했다. 간단한 해결책을 알아낸 듯 그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3분도 안 돼 잠이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마음이 편한가 몰라.”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저헐게 입까지 절리고 자다가 침 흘리겠다. 하지만 그가 침 흘리는 모습을 못 본거소 아니고, 솔직히 대학시절 도서과에서 침 질질 흘리며 자던 남자애들보다야 수민의 모습이 훨씬 더 귀여웠다.
누군가는 징그럽고 누군가는 귀엽다니, 도대체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앞으로 또 이런 모습이 귀여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수민이 잘 생겨서 그런 느낌이 드는 걸까? 고수현씨가 이렇게 침을 흘리며 자도 귀여울까?
잠깐 상상을 해 본 다음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rm 사람이 침을 흘리며 자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서른 살 먹은 수민이 침 흘리며 자는 모습이 더 쉽게 연상될 것 같았다.
차가 부릉거리며 달리는 내내 그녀는 가만히 그의 온기를 즐겼다. 앞으로는 이럴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를 떠나보내야 하는데.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를 보니 점점 더 왜 자신이 고수현 따위에게 휘둘려야 하는지 알 수 없어졌다. 두 사람이 연애를 하는 게 뭐 어때서? 수민의 말대로 결국 두 사람이 중요한거 아닌가? 가족들은 그 다음 문제다.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하면 그만이다. 수민이 설마 그녀 때문에 인생을 못 즐긴다든지 하는 일은 없겠지. 안그래?
차가 정류장에 거의 다다르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수민을 콕콕 찔렀다.
“수민씨. 다 왔어.”
“어, 벌써?”
그가 고개를 들고서 기지재를 펴다가 문득 깨달은 것처럼 입가를 문지르더니 시뻘개진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 침 흘렸어?”
“뭘 새삼스럽게.”
그녀가 눈을 굴리자 그는 여전히 시뻘겋게 달아오은 얼굴로 눈길을 피했다. 어머, 귀여워라. 그러고 보면 언제나 주도권을 잡은 건 그였기에 그가 이렇게 당황한 모습은 처음 보는 smRladljT다. 왠지 재미있어져서 그녀가 키득 웃으며 주위를 살짝 둘러본 다음 그의 입가에 입술을 눌렀다.
“괜찮아.”
“안 괜찮아. 이미지 다운이라고.”
투덜거리며 그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은 다음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버스에서 내렸다. 그녀가 킥킥거리며 그의 팔짱을 끼고 옆에 기대자 그는 머뭇거리다가 팔을 두르고서 그녀를 옆구리에 꼭 안았다.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미처 대비도 않고 있던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물러났으나 그는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고서 곧장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입을 완전히 차지하고 혀를 안쪽 깊숙이 밀어 넣었다.
“수민씨, 잠깐만, 잠깐.....”
“못 기다려.”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살짝 입술을 떼고 그녀를 응시했다. 너무나 가까이 있는 그의 얼굴, 그의 열기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똑바로 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내내 참느라고 죽을 것 같았어. 당신한테 전화 못 한 이유가 그거야. 목소리를 들으면 하고 싶을 것 같아서. 엊그제도 그랬어. 전화하면서 계속, 망할, 계속 몸이 반응해서.......”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덮고 옷 위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숨을 들이키며 그를 향해 몸을 휘었다. 그녀도 오랜만이었다. 굉장히. 그와 만나기 시작한 이래로 일주일에 서너 번씩 했는데 그가 거의 한 달 가까이 떠나 있었으니 갑작스럽게 기운이 다 빠질 정도였다. 병원사람들까지도 그녀에게 무슨 일 있냐고 물을 정도였으니까.
“수민씨, 아, 나 너무......수민씨 좀 쉬어야......아!”
그의 다른 손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내려가 치마를 들어올리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팔윗부분을 붙잡았고 다리는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다.
“수민씨, 수민...............하앗!”
그의 손가락이 곧장 그녀의 팬티 아랫부분을 젖히고 몸 안으로 파고들자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가 재빨리 가슴을 만지던 손을 뒤로 돌려 그녀의 몸을 받치고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녀의 여성이 조여들며 천천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다리에서 힘이 빠지고 뱃속이 울렁거렸다.
“그만, 나, 아아!”
그녀가 바닥으로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그 역시 무릎을 굽혔다. 허벅지를 벌린 채 그녀가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고개를 젖혔고 그의 입술이 드러난 목덜미를 타고 내려간다.
“미치는 줄 알았어, 정말로, 갖고 싶었어. 어딜 가든 당신을 더려가고 싶어. 아니 , 당신 옆에서 떠나기가 싫어. 계속계속 갖고싶어. 당신만 생각났어.”
“나, 나도, 수민씨, 당신이 계속........흐응, 아, 안 돼, 그건, 악!”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몸안 예민한 부분을 슬쩍 어루만지더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하게 문질렀다. 그녀의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여성의 통로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그녀가 헐떡거리며 울음 섞인 신음을 흘리는 동안 그는 그녀의 스웨터를 밀어 올리고 브라까지 잦힌 다음 입술을 옮겼다.
날카로운 이가 가슴을 깨물고, 다리 사이의 손가락이 안쪽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순간 그녀가 절정에 올랐다. 짜릿한 감각이 온몸을 흔들고 누가 질렀는지 모를 비명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그가 천천히 손을 빼자 그녀가 숨을 헐떡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흐려진 눈앞에 마치 악마처럼 상체를 세우고 서 있는 그가 보였다. 천천히 젖은 손가락을 혀로 핥는 그가. 견딜수 없어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가 나직하게 웃었다.
“안 돼, 그러면. 눈 떠.”
젖은 손가락이 허벅지 바깥쪽을 쓰다듬더니 위로 올라가 팬티를 잡고 다리 아래로 벗겼다. 종아리 안쪽에 그의 입술이 축축한 궤적을 남기고서 위로 올라간다. 이미 젖은 다리 사이가 기대감에 쿵쿵거렸다. 그녀가 무릎을 들어올리며 그가 접근하기 좋게 허벅지를 더욱 벌렸다.
마침내 그의 혀가 그녀의 정점에 닿자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수민씨! 아, 아, 수민씨, 그거보다, 당신이 어서...........당신 몸이 내 안에..............하앗.............”
아니, 솔직히 이것도 좋았다. 그의 뜨거운 혀가 그녀의 살을 가르고 안쪽으로 파고들어 온통 맛보는 것이, 그의 흔적을 남기고 그녀의 흘러넘친 샘으로 자신을 축이는게.
그의 혀가 여성의 입구에서 움직이다가 안쪽으로 파고들자 그녀가 엉덩이를 들어올리며 숨을 들이켰다. 그의 손이 허벅지를 잡고서 위아래로 어루만지다가 위로 향했다. 다시 허공으로 붕 뜨는 느낌에 그녀가 헐떡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실망감에 그녀가 눈을 뜨자 셔츠를 벗고 있는 수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지 앞부분도 이미 불룩해져 있다.
그의 달아오른 얼굴을 보자 몸이 더욱 뜨거워졌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어쩐지 대담해진 기분으로 그의 바지 지퍼로 손을 뻗었다. 단단한 부분에 손가락이 닿자 그가 몸을 움찔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붉어진 얼굴이 너무나도 귀엽다. 그녀의 손가락이 슬금슬금 지퍼를 따라 위아래로 움직였다.
“거기, 만져 줘. 당신을 느끼고 싶어.”
그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마치 애원하는 듯한 어조에 그녀의 기분은 점점 더 둥실 떠올랐다. 마약을 하면 이런 기분일까? 마치 무언가에 완전히 취해버린 기분으로 그녀가 그의 팬티를 내리고서 단단히 솟구친 남성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이 움직일때 마다 그가 고문당하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녀가 단단한 기둥을 양손으로 꽉쥐자 그가 거친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몸을 위아래로 천천히 쓰디듬은 다음 슬그머니 힘을 주어 주물렀다.
그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숨을 헐떡였다.
“더 세게, 더, 좀 더..............아 그래!”
병원에서 딱 한번 이렇게 그를 만진 적이 있었다. 그가 그녀의 기슴에 대고서 떠올리는 것조차 창피한 그일 을 했을때. 하지만 그 이래로는 그녀가 자진해서 이렇게 그를 만진 적이 없었다. 그는 늘 그녀에게 해 주는데.
오늘은 그녀가 그에게 무언가 해 주고 싶었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광대뼈 부근이 더욱 붉어졌다.
“서은아?”
그의 목소리는 그의 것이 아닌 것처럼 낮고 거칠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어 그의 남성 끄트머리를 핥았다. 그의 몸이 격하게 흔들렸다.
“아, 그건, 핫, 으, 으아................”
그의 맛이 난다. 그의 향기보다 훨씬 진한 그의 맛이 그녀의 세포까지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아, 맙소사. 저번보다 훨씬 좋다. 저번엔 너무 당황해서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의 몸 아랫부분을 손으로 잡고서 그녀가 그를 입으로 품고 혀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단단한 기둥을 핥고, 끄트머리를 혀로 어르고서 전체를 입안 깊숙이 빨라들인다. 그가 움찔거리며 허리를 움직였다. 양손이 그녀의 머리를 잡아고 그의 몸이 목안까지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간다. 마치 그녀의 여성을 공격할대처럼 그가 허리를 움직이며 그녀의 입에 몸을 넣었다 뺐다 움직였다.
입술이 아프고 입안엔 온통 그의 맛이 배어들었으나 이번에는 그녀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전부를 맛보고 싶었고, 그에게도 그녀가 느꼈던 것만큼의 쾌감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설령 그들이 헤어지더라도 그가 절대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양손을 그의 허리 뒤로 돌려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엉덩이를 감싸고 그녀가 입을 더욱 벌리고 그를 받아들였다.
“너무, 하아, 너무 좋아. 뜨겁고............너무 깊이까지............아, 서은아, 나 위험 해, 나..........”
그의 몸이 더욱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힘껏 그를 애무했다. 혀로, 입으로, 입술로. 그의 몸이 그녀의 입 안팎으로 움직일때 마다 입술이 쓸려서 감각이 마비될 정도였지만 그래도 머출 수가 없었다.
“아, 앗, 아아!”
그가 거칠게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입안에 자신을 쏟아냈다. 뜨겁고 짠 그의 정수가 그녀의 혀를 타고 목으로 넘어간다.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삼키고는 그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를 악문 채 그녀의 머리를 양손으로 꼭 움켜쥐고 입을 떼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몸이 움찔거리던 것을 멈추었다. 그를 여전히 입안에 머금은 채 그녀가 고개만 들어 그를 보았다. 그가 천천히 손에서 힘을 빼고 그녀의 머리를 놓아주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입에서 빼자 마치 실처럼 그가 남긴 사랑의 액체가 길게 늘어진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럴 것까지 없었는데.”
그는 어느새 셔츠를 벗은 상태였다. 바닷가에서 몸을 태웠는지 더욱 탄탄해 보이는 구릿빛 피부에 그녀의 눈길이 멎었다. 단단하게 곤두선 남성의 젖꼭지 역시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나, 수민씨를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 뭘............앗!”
그가 고개를 젖히며 헐떡였다. 그녀의 이가 단단한 젖꼭지를 살짝 깨물고, 다른 손이 반대편 젖꼭지를 어루만지고 손끝으로 튕기자 그의 온몸이 번개를 맞은 듯 떨린다.
“서은아, 도대체..........당신 오늘.............으, 읏.”
당신에게도 내 흔적을 남기고 싶어. 다른 여자를 만나게 되어도 날 앚지 못하게 하고싶어.날................
그녀가 문득 눈을 깜박였다. 뭐야, 나 이미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왜? 둘이면 괜찮다고 했었잖아. 우리 둘만 좋으면 괜찮을 거라고.................모르겠다. 정말로 그것만으로 괜찮을까?
“서은아, 으, 좀 더 세게.....................”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눌렀다. 그녀가 자동적으로 그의 젖꼭지를 핥고서 가슴 아랫부분에 입술을 대고 힘껏 빨자 그가 거친 신음을 흘렸다. 빨갛게 자국이 남은 자리를 다시 혀로 핥은 다음 그녀가 입술을 조금 내려 다시 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또 다시.
입술에 아무감각도 느껴지지 않을 즈음 고개를 들어 그의 가슴을 내려다보고는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그의 가슴 여기저기에 붉은 키스마크가 남아 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잡고서 자신의 위로 올렸다. 허벅지에 다시 단단하게 일어선 그의 남성이 닿는다.
“넣어 줘............”
그가 벌겋게 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속삭였다. 그의 애원을 들어줄 수 있는 입장이라는 것은 마치 최음제처럼 그녀의 온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녀가 손을 내려 그를 잡고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안으로 이끌었다. 그가 허리를 들어올리며 거칠게 헐떡였다. 그의 굵은 몸이 안으로 파고들자 그녀 역시 고양이 같은 신음소리를 냈다.
천천히, 조금씩 그가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양 무릎을 허리옆에 댄 채 그녀가 조심스럽게 몸을 내리다가 마침내 그가 완전히 안으로 들어오자 고개를 젖히고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완전히 꽉 차 버린 느낌이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움직여........어서!”
그가 거칠게 외치며 그녀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의 남성이 몸 안을 찌르는 느낌에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몸을 뒤로 젖혔다.
“아읏, 수민씨, 잠깐만, 아, 아앗!”
그녀의 aah이 저절로 위아래로 들썩인다. 여성을 파고드는 그의 몸은 너무 크고 단단하고 뜨거웠다. 그가 파고들 때마다 그녀의 뱃속이 꽉 차는 것 같았다. 몸을 뒤로 휜 채 그녀가 엉덩이를 움직였고, 그가 거친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비명을 흘리며 엉덩이를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 역시 그녀에게 맞추어 허리를 들어얼리며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들은 그녀의 젖꼭지를 돌리고 잡아당기고 괴롭힌다. 아랫배 안쪽이 점점 뜨거워지다가 폭발하는 듯한 느낌에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수민씨, 나 못하겠어, 나, 아, 하악!”
“조금만, 조금 , 지금, 지금!”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녀의 몸이뒤로 넘어가며 몸안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그가 그녀의 안에 뜨겁게 자신을 쏟아냈다. 그녀가 뒤로 고개를 젖힌 채 거칠에숨을 몰아 쉬었고 그 역시 그녀를 붙잡은 채 헐떡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그녀의 몸을 앞으로 끌어당겨 자신의 위로 안았다. 그의 가슴에 고개를 기댄 채 그녀는 r의 몸이 수축하는 느김을 즐기다가 번쩍 눈을 덨다.
“수, 수민씨! 콘돔!”
“약 먹잖아?”
그가 별 일 아니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목소리는 쉰 듯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래도.............”
“잠깐 가만히 좀 있어. 여운을 즐길 줄 모르면 사랑받지 못한다구.”
그가 툴툴거리며 그녀를 다시 꼭 껴안았다. 가슴위로 뭉친 옷가지와 여전히 몸 안에 자리잡고 있는 그의 일부 때문에 좀 불편했지만 그녀는 그냥 가만히 그에게 기댔다.
“있잖아, 수민씨.”
잠시 그의 심장 소리만 듣고있던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왜?”
“내가 임신하면 수민씨 어떻게 할 거야?”
“액 먹고 있잖아. 요즘 약 좋아.”
그걸 어떻게 아는데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엉뚱한 곳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것이다. 그녀가 잛은 한숨을 내쉬며 아까 전 그의 가슴에 만든 흔적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어쨌든 만약에 말이야.”
“만약이라고 해도 애라니, 아직 좀 너무 먼 이야기 같다구.”
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웅얼거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잠시 움직임을 머추었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움직였다.
“음, 아무래도 그렇지? 남자들은 별로 생각 안해 보잖아.”
“응, 그렇다고 주위에 벌써 애 아빠 된 녀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사고 친 녀석이 있는데 여자가 알아서 처리한 모야이더라구. 별로 그 자식이 신용이 안 갔나봐. 처음엔 펄펄 뛰더니 혼자 처리한 거 알고는 또 그거대로 펄펄 뛰는 게 웃겨서 말이지.”
그가 킬킬거렸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동그라미만 그리며 침욱을 지켰다. 그래, 수민에게 있어서는 그저 먼 세상 이야기일지 모른다. 대학 시절 그녀에게도 아이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으니까. 하자만 지금은 아니었다. 특히 그의 몸이 아직 그녀의 안에 뜨겁게 남아있는 상황에서는.
남자들은 좋아하는 여자가 생겨도 아이는 생각해보지 않는걸까? 여자들은 한 번쯤은 생각하잖아. 그 사람과 나의 아이. 물론 아이를 안 갖겠다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남자친구가 있을 때는 한번쯤 아이가 어떤 모습일까 말해보곤 했었다. 물론 그러고서 곧장 ‘말 안 듣고 버릇없고 귀찮아서 싫어’ 같은 소리를 덧붙이지만.
“수민씬 아이 별로 안 갖고 싶어?”
“글세. 아직 뭐..........”
잠시 그가 고민하는 듯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한 10년쯤은 더 있어야 되지 않을까. 애를 낳으려면 그래도 자리가 좀 잡혀야 되는데, 자리 잡히려면 그 정도 걸리지 않겠어? 그러고 나서 뭐 낳아도 괜찮겠다 싶으면 낳는 거지. 사실 지금은 뭐 그렇게 꼭 갖고 싶진 않거든.”
10년.
그러면 그녀의 나이는 마흔이다. 애를 못 낳을 나이는 아니지만 좀 어렵울 때지.맙소사, 일찍 결혼한 친구들 중에는 애 돌이 지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마흔?
아니 물론 그 때 수민의 옆에 있는게 그녀일 거라는 보장도 없는 법이다. 한창때인 삼십대 초반의 남자가 마흔 먹은 여자에게 무슨 흥미가 있겠어? 가슴이 욱신거렸다. 너무, 머무 많이 안 맞는다. 그가 5년만 빨리 태어났더라면 . 그녀가 5살만 어렸더라면. 세상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수현의 말이 맞았다. 수민은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한 창때의 청년이고, 그녀는 이제 정착할 사람을 찾을 나이였다. 바라보고 있는 게 너무 다르다.
하지만 조금만 더. 하루만 더, 일주일만 더. 그정도 시간이 인생 전체에서 뭐 그리 크겠어? 조금만 더 여유를 줘.
“그런데 수민씨, 밀라노엔 왜 갔어?”
“응?”
그의 온몸이 그녀의 아래서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의 가슴에 남은 자국만 응시했다.
“수민씨 집에 전화하니까 밀라노에 있다고 그러더라구. 전화 받은 분이 형님이지?”
“ 그 인간이 말했어? 그걸 진짜............”
수민이 일어날 듯 몸을 들썩이며 이를 갈았으나 그녀가 꼼짝도 하지 않자 몸에서 힘을 빼고 한숨을 쉬었다.
“그냥 좀........일정이 그렇게 됐어. 일이 좀 꼬여서. 다른 일이 겹쳤거든.”
“다른 거 뭐? 다른 화보 촬영 같은 거 있었어?”
어, 응, 뭐 그 비슷한 거.“
“부모님 이탈리아에 사신다면서 .부모님 안 뵙고 왔어?”
그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를 안은 채 일어났다. 그녀가 눈을 깜박이는 동안 그는 그녀의 옷을 마저 벗기고 자신의 바지도 벗은 다음 그녀를 안아들고 침대로 가서 누웠다.
이불아래로 그녀를 끌어안고 그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아무 신경 쓰지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이 알아서 하는 게 아니야, 수민씨. 하지만 그녀를 꼭 안고서 다짐하듯 말하는 그에게 차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촬영은 잘 됐어? 일은 잘 될 것 같아?”
뮤직비디오는? 그건 뭔데? 어떻게 된 건데? 무슨 내용인데? 당신은 무슨 역할인데?
“그럭저럭. 잠이나 자. 비행기를 하도 오래 탔더니 나도 피로가 안풀려.”
그가 기지개를 켜고서 그녀를 안은 채 눈을 감았다. 그의 숨소리가 차분해진 다음에야 그녀는 꼬물꼬물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든 얼굴은 언제나 소년 같다. 귀엽고, 아무 걱정도 없는 얼굴.
그녀는 눈을 감고서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지금은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일, 해가 뜨면 생각 해 보자. 지금은 그저 그의 품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옆집누나 진짜 오랜만이네요. 그 동안 어디 있었어요? 수민이 없다고 옆집누나까지 안 보이고. 너무하잖아요.”
재석이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고서 옆에 앉았다.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니, 내가 올 때는 한 번도 안 보이더니.”
“어, 그랬어요? 그나저나 수민이는요?”
그녀는 어깨를 으슥였다.
“어디 좀 들렀다 온다고 늦는대. 먼저 가 있으래.”
수민과 친구들이 모이는 카페는 오늘은 어쩐 일인지 붐볐다. 수민을 찾겠다고 친구들이라도 알아본다고 그녀 혼자 왔을 때는 텅텅 비어있던 곳인데. 혹시 그녀가 모르는 집결 시간이라도 있는걸까?
“아, 수민이 뮤비 나온거 봤어요? 벌써 나올 줄 몰랐는데 인터넷에 클립이 돌더라구요.”
그녀가 고개만 흔들자 재석이 씩 웄었다.
“그럴줄 알았지. 내가 구워왔어요. 쨘! 저쪽에 컴퓨터 있는데 볼래요?”
“응”
수민이 오면 절대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재석을 따라 카페 한쪽에 있는 컴퓨터 앞으로 향했다. 재석이 시디를 넣고 플레이를 시키자 곧 모니터에 플레이어가 뜨고 화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스피커가 없어서 소리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화면만은 선명했다. 20초 정도의 광고용 클립이었지만 수민의 모습 역시 뚜렷하게 나왔다. 이건............
“수민씨가 주연이네.”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재석이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몰랐어요? 그 자식 이거 케스팅 되고부터 내내 잘 할까 어쩔까 고민하느라 입에 달고 살았는데.”
요즘 유행에 따라 뮤직비디오도 스토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클라이막스처럼 수민과 여주인공이 껴안는 부분에서 클립이 끝나고 노래 제목인 듯한 글자가 은은하게 떠올랐다가 화면이 어두워졌다, 재석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수민이가 그런 얘기 안 해요?”
“어? 아니, 수민씨 아무래도 이번 촬영 가기 전에 고민이 많았으니까. 게다가 집안 일도 있고.”
“아. 그런 그렇죠. 그자식 탤런트 하려고 계속 저러는데 집에서는 그런 거 할 바에야 그냥 이태리로 오라고 하고 있으니. 수현이 형도 아마 그것 때문에 계속 여기 있는 걸 걸요? 수현이 형 만났어요?”
그녀는 고개만 끄덕였다. 재석이 재불재불 계속해서 떠든다.
“수현이 형 사람 좋죠. 게다가 이태리에서도 꽤 뜨는 디자이너인가 봐요. 진짜 부럽다니까. 형한테 한 번 찍혀서 무대에 올랐으면 진짜 소원이 없겠는데. 수민인 뭐 지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오를 수 있으니 사실 속 편하죠....제가 이런 이야기 했다는 거 그 자식한테 말하지 마세요.”
서은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말 할 수없는 이야기들이다. 수민은 이런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나도 해 주지 않으니까. 그녀가 이미 안다는 걸 알면 또 화를 낼 것 같고.
왠지 앉아 있기가 싫어졌다. 친구들보다도 그녀는 수민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그저 그와 잠을 자고, 전혀 의미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그걸로 끝.
매일 매일.
점점 더 지쳐 가는 기분이다. 그가 돌아온 이래 두 사람만 서로 좋아하면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세뇌를 하고 있었지만 그가 그녀의 질문을 회피할 때마다 자꾸 앙금이 쌓여갔다. 그렇다고 그에게 돌려서 말한다거나 하는 것고 아니었다. 대놓고 물어봐도 그는 그저 침묵만 지키거나 화를 내거나 혹은 시간을 달라고 애원할 뿐이었다.
피곤해.
“어, 수민이다.”
재석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혜민과 무슨 이야기를 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던 수민이 그녀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재석이 손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야, 네 뮤비 옆집누나 보여주고 있었어. 너 아직 안 보여줬다며.”
수민의 표정이 변하는 게 보였다. 서은은 그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수민이 혜민을 거의 뿌리치다시피 하고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웃으려고 노력했다.
“뮤직비디오 멌있더라, 수민씨.”
“무슨 , 무.............”
그가 재석을 홱 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네가 보여줬어? 누가 보여주래, 이 자식아!”
“야, 야, 뭘? 왜? 옆집누나 보여주면 안 되냐? 무슨 뭐 시사회 있는 것고 아닐텐데 클립 도는 거 좀 보여주면 어떠냐?”
“야 이 자식아, 그건................”
“내가 보면 안 되는 거지.”
서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수민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커졌다가 가늘어졌다. 재석은 뒤에서 이해가 안 가는 얼굴로 욕설을 웅얼거렸고 혜민은 궁금한 얼굴로 그들을 응시하고 있다.
“됐어. 수민씨. 이재 그만 하자.”
“뭘?”
일어나는 그녀를 보며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다가 다급하게 컴퓨터 쪽을 가리켰다.
“그건, 그저 진짜 별 거 아니야. 진짜 아무 것도 아니고, 나온 것도 좀 영 별로야. 그렇지? 그래서 안 보여주고 싶었던 거라고! 그냥 그런 거야.”
재석이 인상을 찡그리고서 혜민 쪽으로 몸을 기울여 뭐라고 속닥거린다. 혜민 역시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서은은 한숨을 내쉬고서 수민을 보았다.
“우리 그만 만나, 수민씨.”
수민은 잠시 아무말도 않고 그저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 역시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저 그린 듯 짙은 눈, 부드러운 입술, 매끄러운 턱선, 그리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까만 눈동자를 이제 다시는 못 본다. 앞으로 다시는 . 아, 그래, 저 뮤직비디오를 어디서 구하면 볼수 있겠지.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손내밀고 그녀를 안아주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그냥 모든 걸 감내하고 그의 옆에 남을 수도 있었다. 그가 그녀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이제는 지쳐 버렸다. 그녀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그에게. 남들 앞에서 초라해지는 스스로에게.
“왜, 왜? 왜? 왜 갑자기 그러는데? 저거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잖아. 원하면 다 보여줄게. 끝까지 전부 다 보여줄게! 근데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되게 별로란 말이야. 그래서 화난 거야? 영 별로라서? 그럴까 봐 안보여주려고 했던 건데.........”
“그런 거 아니라는 거 알잖아.”
짧게 한숨을 쉬고서 그녀가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정말이지 피곤하다. 그냥 집에 가서 침대 속에 파고들어 일주일쯤 잠만 자고 싶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잠만 자면 기분이 나아질 지도 모른다.
“그럼 왜 그러는데? 내가 뭐 잘못했어? 아무말 안 했었잖아! 왜 갑자기 그래? 내가 뭘 잘못했으면 고칠게, 응? 왜 그래?”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서 격렬하게 외쳤다. 정말로 진심인 듯한 얼굴을 그녀는 멍하니 응시했다. 아니, 진심인 ‘듯한’ 게 아니라 그는 진심이다. 정말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거야.
그가 잘못했다고 말할수 있을까? 그는 그저 자기 방식대로 살았던 건데 내가 거기 맞출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친구들보다도 개인적인 일을 모르는 애인이라니, 그건 어떻게 생각하됴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납득한다 해도 이제는 더 참고 싶지 안았다.
“그만 해, 수민씨.”
그녀의 날카로운 어조에 그가 움찔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그녀가 한숨을 쉬고 그를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나 지금까지 계속 기다렸어. 언젠가 수민씨가 마음을 터놓고 나한테 모든 이야기를 다 해 줄 날을 기다렸다고. 자기입으로 그랬었잖아. 시간을 달라고. 그래서 줬어. 그런데 이게 뭐야? 계절이 변하도록 당신은 그저 가다리라고만 하거나 아니면 화를 내지. 난 당신이 뭘 하고 싶어하는 지도 몰라. 당신 가족이 뭘하는 지도 몰라! 당신에 대해서 내가 아는거라고는 그저............”
침대에서 뭘 어떻게 하는지 뿐이지. 하지만 그런 말을 차마 친구들이 다 있는 곳에서 할 수는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그녀는 돌아서서 가게를 나갔다. 그가 다급하게 그녀를 따라나와 팔을 붙들었다.
“제발 이러지 마, 제발! 좋아, 좋다구 .물어봐, 뭐든지. 다 대답해 줄게, 응? 지금 다 물어 봐!”
“왜 포스터 이야기 안 했어?”
그가 입도 다물지 모산 채 눈을 껌벅였다. 서은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흔들며 뒷걸음질을 쳤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나도 참 바보 같지. 그 포스터 때문에 수민씨를 알게 됐는데, 결국은 수민씨 때문에 그거 찢어버렸어. 수민씨가 아니라는 걸 알고 나니까 도저히 볼 수가 없었어. 보고 싶지도 않았고. 그런 걸 수민씨라고 생각 해온 내가 너무 바보같았거든. 하지만 진짜 수민씨가 누군지 나 잘 모르겠어. 수민씨가 뭘 생각하는지, 뭘 하고 싶어하는지, 그런 거 나 한테 말해 준 적 한번도 없잖아. 수민씨의 과거도, 미래도, 아무것도 몰라. 현재조차도 수민씨가 선택적으로 알려주는 것만 알지. 난 도대체 수민씨의 뭐야? 침대용 인형?”
가게 입구에 수민의 친구들이 우르르 모여서 쳐다보고 있었지만 말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수민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무슨 그런 소릴 하는 거야? 내가 말을 안 했던 건 그냥, 그냥 그러니까, 그게 별거 아니라서 그랬던 것뿐이야. 뮤직비디오 같은 거 찍는다고 말해봤자. 그거 뭐, 젠장, 창피하잖아! 영 아니게 나오고 인기도 없고 그러면 당신 보기도 그렇고. 그러느니 차라리 말을 안하는게 낫지!”
“그런 거 말하고, 잘 안되면 같이 위로하고 위안하고 그러는 게 사귀는 거 아니야?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거야?”
그녀의 말에는 힘이 없었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양손을 들어올리다가 도로 내리고서 어깨를 들썩였다.
“미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앞으로 다 말하면 되잖아, 응? 말할게. 말해 줄게. 그러니까 이러지 마. 뮤비 찍은거 보여줄게. 다 찍은 거 받았거든, 응? 보여주면 되잖아. 그리고, 어, 그리고 발리에서 화보 찍은 것도 보여줄게. 당신 그거 보고 싶다고 했었지? 보여줄게. 그 전에 찍은 것도 있는데 그것도 보여주고.”
울고 싶었다. 쏟아진 물을 주워담으려고 애를 쓰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게 안타깝고 가슴이 아팠다.너무 늦어버렸다. 이제와서 그가 모든걸 말한다고 해서 예전으로 돌아갈수 있을까? 그를 받아들일 수있을까?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다시 물러났다. 그가 한 걸음 다가왔으나 그녀가 손을 들어올리자 그 자리에 멈춰섰다.
“미안해, 수민씨. 난 못 하겠어. 모르겠어. 이젠 정멀로 못참겠어. 미안해!”
그녀가 몸을 돌리고서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것 같지도 않다. 코를 훌쩍이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그녀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앞에 선 누군가에게 부딫쳤다.
고개를 들고 상대를 보는 순간 그녀가 당황해서 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남자는 태연하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서 수민을 향해 말했다.
“어떻게 되어가나 하고 와 봤더니 마침내 이렇게 됐네?”
“넌 왜 여기 온 거야?”
수민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수현이 성질 좋게 웃으며 서은의 어깨에 한 팔을 감았다.
“내여자 챙기러.”
“누가 네 여자야? 씨팔, 그거 놓고 안 꺼져?”
“형님한테 말하는 거 하고는. 한국에 몇 년 들어온 사이에 그렇게 말버릇까지 망가지고. 참 요즘 한국애들 큰일이야.”
“그 손 안 치워? 이서은, 빨리 그 자식 밀어 내!”
수민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른다. 수현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녀는 양손으로 눈을 가린 채 그저 흐느끼기만 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둘이서 뭘하든 알아서 하라지. 형제 싸움은 내버려두고 그녀는 집에 가서 침대에 들어가 펑펑 울고만 싶었다. 다 울고 나서는 수민의 뮤직비디오를 구해서 봐야지. 그의 모습을 보며 다시 우는 거다. 잘 나온 장면은 캡쳐해서 프린터해서 침대 옆에 붙여놓고.
옛날처럼 돌아가는 거다. 벽에 붙여놓은 사진을 보며 하루 일상을 털어놓고 위안 받던 어린애 같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 포스터 이야기 한 것도 너지? 누가 그런 거 다 떠들랬어? 서은이 안 놔?”
“진정해. 여자 마음이 바뀌는 게 하루 이틀일도 아니잖아. 거다가 넌 아직 어려. 서은씨는 나이가 서른이고. 이제 슬슬 정착할 남자를 찾을때지, 너처럼 갈길 한참 남은 어린애랑 어울릴 때가 아니라고. 알아?”
“이서은, 말해, 당자! 그 자식이 좋은거야, 진짜로? 그 자식한테 갈 거야? 서은아!”
수민이 소리를 질러댄다.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아서 그녀가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눈물은 계속 뚝뚝 떨어지기만 했다. 왜 우는지도 알수가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듣고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 좀 해, 고수민!”
수현이 그녀를 양팔로 감싸며 마침내 날카롭게 소리쳤다. 수민이 입을 딱 다물었다.
“너도 생각이 있으면 여자 좀 괴롭히지 마. 내가 아무렇게나 대해 놓고선 지금와서 다시 돌아가길 바래? 어린애 같은 짓 작작해라. 철 좀 들어! 그만 만나자고 하면 그 정도에서 손들고 보내주라고. 그게 진짜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야.”
“네가 지금 나한테 예의 어쩌고 할 입장이야? 여자를 사방에 뿌리고 다니는 주제에!”
“다 정리했어. 이제 서은시만 만날꺼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은은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틀어놓은 수도꼭지처럼 눈물은 계속 흘러내리고 있다.
“서은아, 진짜야? 정말로 저 자식이랑 만나? 그런거야?”
수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수현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꾹 눌렀다. 지금 그렇다고 말하면 수민은 아마도 그녀를 포기할 것이다. 포기? 아예 걷어차 버리겠지. 그게 수민에게도 좋을 것이다. 좀 더 어울리는 괜찮은 여자애를 만나서 좀 더 쉽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위로도 받고, 좋은 일은 함께 기뻐하고 그럴 수 있겠지. 앞으로.
반면 그녀응 그냥 ....................예전처럼 살겠지.
고개를 흔들고 싶었다. 아니라고, 수현이 그들을 갈라놓으려고 그러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 이야기도 안 해도 좋으니까 옆에 있어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 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혜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저 창녀 같은 년이!”
그녀가 흠칫 했으나 수현의 손이 그녀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 수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수현이 차분하게 말했다.
“넌 가서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든 뭘하든 알아서 해. 그리고 이 달 말에 집에 가서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되는거 잊지 말고. 알겠어?”
그가 그녀를 끌어당기고서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인 채 그녀도 걸음을 옮겼다. 몸이 부글 부들 떨리고 눈물은 계속 흘러내린다. 수현의 손은 아플 정도로 어깨를 꼭 쥐고 있었다. 까불지 말라는 걸까? 돌아서서 수민에게 달려갈까 봐?
아니, 안 그럴것이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옆에서 수현이 발레 파킹 담당에게 차를 빼 달라고 말하는 게 들렸으나 여전히 고개를 들수가 없었다. 마침내 차가 나오자 그녀는그저 조수석에 올라타고서 고개를 숙였다.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가 마침내 출발하는 순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창 바로 옆으로 수민이 스쳐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망연한 표정이 그녀의 머릿속에 마치 끌로 새긴 것처럼 순식간에 각인되었다.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처럼.
16.
“여어.”
서은은 눈을 깜박이고서 병원 건물 입구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짜증과 무력감이 빙글빙글 소용돌이치다가 결국 포기 상태로 돌입하고 말랐다.
“왜 또 왔어요? 이탈리아 안 가요?”
“곧 가야지. 그렇게 냉담하게 굴지 말아요. 정말, 이래봬도 이탈리아 돌아가면 여가가 줄 서서 기다리는 몸이라고.”
수현이 빙글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온다. 건물을 나오자마자 후텁지근한 바람이 짜증스럽게 그녀를 히감는다. 짧아진 머리를 아무렇게나 긁어올리고서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살 더 빠졌네. 그거보다 더 빠지면 쓰러지겠는데.”
그가 한 걸음 뒤에서 껄렁하게 말했다.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남이야 쓰러지거나 말거나.”
“의사가 그렇게 비실비실하면 치료를 어떻게 해? 환자가 불안하잖아요.”
그녀는 어깨를 으슥했다. 그래도 최근엔 좀 먹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몇 번이나 원장 선생님에게 혼이 난 탓이기도 하고, 그녀 스스로도 이러다간 잘리겠다는 위기감이 든 탓이었다.
수민과 헤어지고 난후 처음 며칠간은 정말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갑갑하기만 하고 심장을 누가 압축기에 넣고 꾹 누르는 것처럼 아팠다. 눈물은 어디가 고장난 것처럼 계속 흘러내렸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 나가서도 어떻게 일을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녀의 소식을 듣고서 전화해서는 괜찮을 거라고, 더 좋은 남자를 소개해 주겠다는 말을 잘도 해댔다. 그럴때마다 그녀는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두어 번 그러고 나자 친구들도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친구들이 잘못 한건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그런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뿐이었다. 연락처를 어덯게 알았는지 재석이 두어 번 전화를 걸어서 그녀에게 수민과 화해하라고 말을 했으나 그녀가 울기만 하자 결국 미안하다면서 전화를 귾었다.
그렇게 한 달이 훌쩍 지나버렸다. 지난 번 남자 친구때는 한 달도 슬퍼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 변화가 없다. 물론 눈물을 좀 덜 흘리게 되었고, 좋든 싫든 끼니때가 되면 먹을 걸 입안으로 우겨 넣고 있다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거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지금도 뮤직비디오를 보면 눈물이 나고, 수현을 협박하다시피 해서 구한 수민의 화보집을 보면 가슴이 엔다.
“민이 밀라노 갔어요. 어제.”
“아..................”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수현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어쨌든 새어머니가 오라고 계속 그러셨으니까. 여기서 텔런트의 가능성이 있으면야 뭐 계속 있겠는데, 아직 아무 련락도 없고. 매니지먼트에서는 두어번 연락이 왔는데, 그나마 그것도 그리 큰 데가 아니라서 별로 끌리지 않는 모양이에요. 차라리 그 쪽 가서 모델 수업이나 받는게 나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아직 장래가 불확실한 나이니까.”
그래, 그런 나이지. 수민은 .반면 그녀는 이미 자리 잡혀있는 나이 곽 찬 여자고. 며칠 전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새엄마가 드디어 선 볼 생각 없냐고 물으셨다. 물론 강요하시는건 아니지만 놓치기 아까운 자리가 들어왔다면서 사귀는 사람 dqjt다면 연습 삼아 한 번 보면 어떻겐 냐고 꼬드기셨다. 그녀는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수민씨, 괜찮아요?”
그녀가 나직하게 물었다. 수현은 어깨를 으쑤였다.
“뭐 나하곤 말도 안 하니까. 한 빕에 산다 뿐이지 남남이랄까?
그녀는 고개만 끄덕였다.사실 그녀가 그에 대해 물어야 할 이유도 더는 없었다. 헤어지면 남이라는데.수민은 어쩌면 그녀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을찌도 모르겟는데 그녀 혼자서 왜 이러고 있는 걸까?
하지만 만약 생각을 한다면? 그녀만큼 그도 괴로워하고 있다면?
“뭐어쨌든 밀라노 가면 옛날친구들도 있고 할 테니까 괜찮아지겠지. 서은씨도 더 신경 안써도 될거에요. 나도 내일 모레 출국할 거고.“
“수현씨도 가요?”
그녀가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의외의 반응인 듯 씩 웃었다.
“아, 왜요? 드디어 나한테 마음이 생겼나? 이런, 좀 늦었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그마저 가 버리면 이제 정말로 수민과의 연은 끝나는 것이다. 그와의 생활화경이 전혀 다르니 이제 다시는 소식조차 못 들을지 모른다. 몇몇친구들 처럼 전 애인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봤다거나 할 일도 없었다. 수민은 그 나이 또래답지 않게 그런 걸 싫어해서 그 흔한 홈피나 블로그 하나 없었으니까.
정말로 헤어지는 거구나. 정말 나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구나. 그녀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수현 역시 그녀를 따라왔다.
“나 솔직히 지금도 좀 이해가 안되는데, 정말로 민이가 그렇게 좋았어요? 생각하는 방식이 아예 다르잖아. 나만 해도 그 녀석 너무 어리다 싶을 때가 수백번인데.”
“댁은 형이잖아요.난 남이고. 게다가 수민씬 다른 그 나이또래 남자애들보다 훨씬 성수하니까.”
“그런가?”
수현은 영 이해가 안 가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서은은 멍하니 앞쪽을 응시했다. 해가 너무나 길다. 수민과 걸었던 길거리는 온통 녹음으로 뒤덮여 이제는 다른 세상처럼 보인다. 여름도 끝날때가 다 됐으니 금게 저 이파리들이 다 떨어지겠지.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것이다. 수민도 어디선가 나이를 한 살 먹을 거고.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경험을 쌓아가며 어른이 되겠지.
아니, 그는 이미 어른이었다.다만 좀 더 많은 경험을 쌓게 되겠지.
“저기.................”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수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입안에서 빙빙 도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수민씨한테 나 그렇게 양다리 걸치는 그런 타입 아니라고 말해 줘요. 수민씨가 돌아온다면 나 기다릴수 있다고 전해 줘요. 몇 년이든 괜찮으니까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정말로?
모르겠다. 그저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라니, 꼴도 보기 싫었다. 화보집 속의, 뮤직비디오 속의 수민만이 그녀의 전부였다.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걸어오던 수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정말이지, 내 딴엔 잘 한다고 그런 건데 둘이 다 그 모양 그 꼴을 하고 있으니까 완전히 무슨 범죄자가 된 기분이야. 새어머니까지 애를 왜 그 꼴로 만들어놨냐고 타박이시고.”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보았다. 수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민이, 출국하면서 한 달 만에 처음으로 나한테 말 걸었어요.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밀라노에 오지 말라고, 다 정리하고 여기서 당신이랑 있으라고 그러더라구요. 당신 울리면 죽여버릴거라고, 형이고 뭐고 진짜 죽여버릴 거라면서.”
그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귀여운 막내였는데 어저다 그렇게 난폭한 녀석이 됐나몰라. 정말이지 마음이 아프다니까.”
서은의 마음은 반대로 날개를 단 듯 훨훨 날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금세 현실이 날개를 뚝 브러뜨리고 그녀의 마음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녀가 고개를 수그리고 중얼거렸다.
“어쨌든 수민씨한테 내가 별 도음도 안되는 것 같고, 수민씨도 나 그렇게 의지하지도 않았으니까 잘 되긴 애당초 그른 사이였죠.”
‘저기 이서은씨.“
그가 그녀의 어깨를 주먹으로 노크하 듯 툭툭쳤다.
“혹시 말인데, 본인이 스무 살 때 어땠는지 생각나요?”
“공부하느라 바빳는데요.”
그녀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그가 킬킬 웃고는 몸을 쭉 펴고 머리 위로 양손을 들어올렸다.
“나는 말이지, 그 시절에 모델을 했어요. 새어머니가 디자인하는 걸 어깨 너머로 보고 자랐고, 새어머니도 가까이에 쉽게 쓸수 있는 모델이 셋이나 있었으니 편하셨지. 수원이는 일찌감치 그런 거 안한다고 빠졌지만 민이도 나도 별로 싫어하지 안아서.”
그녀가 힐끔 그를 보았다. 그는 앞쪽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날이 하루하루 갈수록 그게 참, 내가 이걸 계속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싶고, 모델은 수명이 실지 않아요. 성공하기도 힘들고, 몸매가 된다고, 연줄 좀 있다고 쉽게 성공할 수 있는게 아니거든. 운도 따라야 하고 뭐 그 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되죠. 그런게 그게 싫더라고. 그러기도 싫고, 귀찮고, 달리 뭘 할수 있나 생각해 봤는데 아무 것도 생각 안 나고, 사방에 불평을 쏟아놓고 싶은데, 내 입장에서 불평을 하면 그건 완전히 배부른 어린애의 오만이거든. 그래서 불평도 못 했어요. 뭣도 모르는 어린애가 되긴 실헜으니까.”
그가 걸음을 멈추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걸음을 멈추었다. 수현의 표정은 꽤 진지했다.
“내가 민이 이야기를 할 입장은 못 되고, 두 사람 관계에 그리 뭐 찬성하는 것도 아니긴 한데, 어쨌든 이거 하나는 알아두라는 거에요. 누구든 어린애 취급을 받고 싶진 않아. 특히 상대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직업도 좋고 자리까지 잡혀 있어서 어느 모로 보나 비교가 될 땐 더더욱 그렇지. 그럴 때 자기 일의 힘들고 어려운 거 불평할 수 있는 상대는 같은 직종에 있는,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 녀석이 당신 한테 아무 말 안 한다고 해서 너무 그렇게 토라지고 화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거에요. 그런 식으로 하면 싸우기밖에 더 하겠어?”
“그럼 뭐 끝도 없이 기다리라고요? 그건 못 해요. 나도 지쳤고,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된 거잖아요.”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탈 버스가 잠깐 멈춰서 사람들을 싣고는 우르르 달려가 버렸다.
“수민씨 원망하는 건 아니에요. 결국 내가 그만큼 의지가 못 됐다는 거니까. 나한테 그런 이야기 하면 어린애로 보일까 봐 겁이 났다는 거잖아요. 어떡해, 내가? 어린애 같지 않으니까 걱정말고 이야기하라고 꼬실까요? 그것도 우습잖아. 수민씨가 이야기해 주길 기다리는 건 너무 힘들고,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결국 우리 둘 다 안 앉았던 거겠죠.”
“그렇게 생각을 하면 그러고 비썩 말라서 바람결에 날아갈 것 같은 꼴로 하지 말던가. 민이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옆에서 보고 있으면 내가 진짜 죽일 놈이 된 것 같아서 아주 속이 쓰려. 나도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라구요. 나 참.”
그가 혀를 차고서 툴툴대며 걸음을 빨리 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의 길다란 뒷모습을 보았다. 뭐 처음엔 그를 싫어했지만,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이나었다. 동생에게 꼬이는 파리를 떼어내는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역시 가슴은 아팠다. 뭐라 해도 가슴이 아팠다. 한 번도 그를 어린애로 생각했던 적은 없는데. 그는 늘 그렇게 느꼈던 걸까? 그래서 그녀의 앞에서는 어른 스러운퍽 하려고 계속 거만하게 굴었던 거고? 왜 그녀에게 좀 더 많은 걸 보여주지 않았던 걸까? 왜?
그녀가 고개를 흔들고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모르겠다. 어차피 끝난 마당에 이런 생각은 그만 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낫겠지. 수현의 말대로 이보다 더 마르면 정망 볼썽 사나워질테니까. 간만에 만난 친구들 역시 말은 안해도 서로 힐끔거리는 게 엄청 심한 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좀 더 먹고 기운을 내자. 그리고...........가능하면 집에 있는 와보집도 정리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를 보고 있으면 가슴만 아플텐데.
“아직은 안 돼. 아직은. 아직은 그렇게는 못 해.”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그녀에게 남아있는 건 2차원 속의 그 사람 뿐이니까.“
시간이 얼마나 잘 흐르는지 생각하면 놀랄 정도였다. 은행잎이 샛노랗게 물든 것을 깨닫고 서은은 문득 발을 멈추었다. 매일매일 병원에 나가고 저녁 근무까지 하고 그런 다음 집에 가서 쓰러져 자거나 가금 TV를 보거나 혹은 긑없이 화보집만 응시한다. 요즈음은 종종 친구들을 만나가도 했지만 남자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 소개팅 이야기가 나오면 그저 웃으며 필요 없다고 넘긴다.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짧은 길을 걸으며 그녀는 주위의 나무들을 둘러보았다. 은행잎이 팔갈거리며 떨아진다. 이파리와 함께 시간도 흐른다.
그런데 그녀의 감정만은 변하지 않는다. 보고싶어, 보고싶어, 보고싶어.
수현이 한번 전화를 해서 밀라노에 돌아왔다고 말했었다, 별 일 없고, 수민도 한동안 같이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고는 잘 지내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걸로 끝. 그리고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얼마나 더 이렇게 괴로워해야 돨까? 얼마나 더 오래 보고싶어해야 할까? 언제쯤 잊을 수 있을까? 친구들은 그녀가 연애를 별로 안 봐서, 면역력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계속 주장했다. 다른 남자를 만나면 금방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새남자를 소개 시켜 준다고.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른 남자 따윈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남자와 수민과 했던 것 같은 은밀한 일을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구역질이 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파트 안에 들어가자 썰렁했다. 어느 새 난방기를 꺼낼 때가 되어 가는 모양이다. 싯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침대 이불 아래로 기어 들어가 그녀는 TV를 켰다. TV는 요즘 늘 케이블의 패션 체널에 맞추어져 있었다, 패션 쇼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예전에 수민이 했던 쇼가 떠오르곤 해서 좋았다. 뭐 대체로 TV에서 보여주는 건 해외 패션 쇼뿐이었지만.
자동적으로 손이 침대 옆 서랍안에 넣어둔 화보집으로 향했다. 이불위에 와보집을 펼쳐놓고서 그녀가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화보집이라기보다는 정확히는 옷 카달로그였지만 어쨌든 수민이 있는 ‘화보집’ 이라는 게 그녀의 견해였다.
여름용 짧은 셔츠, 반바지를 입고 해변에 있는 사진들, 뭔가 컨셉이 있어 보이는 포즈. 볼 때마다 왠지 그와 함께 해변에 있는 기분이다.
“같이 발리에 가자고 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서 그녀는 피식 웃었다. 발리는 커녕 그와 함께 여름조차 지내지 못했다. 그와 함께 서울을 벗어나 본 적도 없었다. 그들의 관계는 그녀의 아파트, 몇몇 카페들, 패션 쇼 무대정도가 전부였다. 이제와서 아무리 좋은 곳을 간다해도 그가 없으면 의미가 없었다. 아무 것도 흥이 나지 않았다.
눈물이 흘러내리자 그녀는 재빨리 화보집을 옆으로 치웠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라서 이제는 DLRTNRGt다. 최소한 화보집에 눈물자국을 남길 수는 없는 일이니까. 협탁에서 크리넥스를 뽑아들고 눈물을 닦은 다음 침대 아래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서 코를 훌쩍인 다음 그녀는 TV를 쳐다보다가 눈을 깜박였다. 무대 위로 걸어나오고 있는 건..................
“수현씨?”
그녀가 침대 앞쪽으로 바삭 다가가서 TV를 빤히 쳐다보았다. 모델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저 얼굴은 분명 수현이었다. 수민보다는 나이가 들었고, 표정이 예전의 바로 그 포스터와 똑같다. 어딘가 동허해 보이는 표정.
지금은 분명하게 구분이 된다. 왜 저 얼굴을 수민이라고 새각했던 걸까? 설령 그가 수민만큼 젊다 해도 분명히 차이가 날 것이다. 이제야 깨닫다니 나도 참 바보야.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웃었다.
“근데 왜 수현씨가 저기 나오는 거야?”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는 쇼를 열심히 보았다. 무슨 쇼인지 관심을 안 기울인 터라 도대체 어느 브랜드에서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화면 위족에 브랜드가 서있는데 그녀는 전혀 모르는 브랜드였다.
평소처럼 이런저런 브랜드의 패션 쇼를 짜깁기 한게 아니라 오늘은 어째서인지 한 브랜드의 쇼를 계속 보여주고 있다. 계속해서 모델들이 근사한 옷을 입고 나오고, 환상적인 눈꽃이 떨어지며 피날레를 장식한 것은...........
하얀 옷을 입은 수민과 까만머리의 백인 여자 모델이었다.
하얀 옷을 빼입은 두 사람은 너무나도 근사하게 어울린다. 가끔 연예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앙드레 김의 패션 쇼에 나온 탤런트보다도 훨씬 멋졌다. 서은은 멍하니 카메라가 수민의 얼굴을 잡는 것을 보았다. 수현과는 다르다. 훨씬, 훨씬 근사하다. 살짝 미소를 딘 입술, 그림에 나올 듯한 눈, 주위를 둘러보는 시선. 두 남녀는 정확하게 대칭을 어루며 움직였고, 마침내 손을 붙잡고서 수민이 여자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서은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억눌렀다. 그의 입가에 도는 미소도, 여자 모델이 그를 쳐다보는 눈길도, 모든 것이 미치도록 싫었다. 그는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의 사람이었다. 지금은 저런 곳에서 저런 엉뚱한 여자와 있어도 그는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좋다고, 가장 예쁘다고 말해주던 사람이었다.!
“뭐야, 뭐. 뭐야, 고수민. 아무리 일이라도, 아무리.............”
물론 연기겠지. 모델도 무대위에서는 결국 연기자니까. 하지만 그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지금 그가 다른 여자에게 웃어주는 걸 보는 건 지독하게 고통스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TV화면에 손을 내밀어 그녀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금세 화면이 바뀌고 뒤돌아 들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나왔지만 그녀의 손은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를 되찾아오고 싶었다. 다시 그를 껴안고 좋아한다고 말하고 샆었다. 그를................
갑자기 화면이 바뀌고 중년의 예쁜여자가 마이크 앞에 대고 말을 한다. 억양이 강한 한국어였다,
“네, 이번에는 동야풍을 주제로 삼아 봤어요. 지금 유럽에서는 동양풍이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고, 올해도 계속 그 유행이 지속될 것 같아요. 특히 이쪽에서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rHO 높죠. 한국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신비로운 나라로만 인식되고 있거든요. 뭐 그런 걸 제 디자인에 접목시켰다고 할까요. 어쨌든 저로서는 한국을 주제로 삼는 건 편한 일이니까요.”
얼굴 아래‘ 디자이너 이사벨라 서(한국명 서정화)’ 라는 자막이 떴다.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아무리 봐도 저 얼굴은 수민, 수현 형제와 대단히 닮아 있었다. 마치 그들의 얼굴에 주름살을 조금 더하고 살짝 여성스럽게 변형시킨 것 같다고 할까.“
“아.”
저게 바로 수민씨 새어머니로구나. 수현에게 디자이너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뭔가 저렇게 인터뷰를 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인 줄은 몰랐었다. 인터뷰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드님께서도 이번에 드 라 에띠에르 이런 브랜드는 없습니다.(작가 주)................에 디자이너로 들어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새어머니로서 자식의 디자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직은 풋내기인 걸요. 한 참 더 커야죠.”
웃는 모습이 굉장히 상냥하면서도 우아해 보이는 사람이다. 서은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정말로 만야게 수민과의 관계가 잘 되어서 저 분을 만나게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녀를 반겨 주셨을까? 아니면 아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존재라고 박대하셨을까?
멍하니 부모님과의 상견례를 떠올리다가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나 바보아냐? 도대체 어째서.................
“하긴. 우리 새엄마 아빠라고 뭐 수민씨를 그리 달갑게 받아들이실리도 없고.”
그녀가 서글프게 웃었다. 하지만 수민이 정말로 그녀를 좋아하고 옆에 있겠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부모님의 반대도, 친구들의 충고도 전부 다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설득하고 또 설득하고 그러면 언젠가는 받아들여 줄 테지. 수민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아이같은 데가 있긴 하지만 열심히 살고 있고, 그리고 그녀를 너무나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니까.
“자꾸 생각하니까 보고 싶잖아, 바보야.”
그녀가 다시 눈물이 고인 눈가를 문질러 닦고서 어색하게 웃으며 알어났다. 바보짓 그만 하고 화보집 치우고 시간이 남으면 청소라도 해야지. 집 청소를 언제 했는지 생각이 안 난다. 아니, 엊그제 했던가? 머릿속에 제대로 기억이 남질 안아서 뭘 언제 했는지 알 수가 없다.
화보집을 덮어 침대 옆 서랍에 도로 집어넣고 쓰레기통을 비우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한숨을 내 쉬고 목을 가다듬은 다음 그녀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서은씨?”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린데.....갑자기 그녀가 반색을 했다.
“수현씨? 어쩐일이세요? 밀라노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잠깐 들어왔어요. 저기 내일 퇴근하고 바쁘지 안으면 내가 뭐 보여줄게 있는데. 만날 수 있을까요?”
보여줄거라니? 잠시 그녀가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민씨한테 무슨 일 있는거 아니죠?”
이를테면 예쁜 이탈리아 모델과 사귀고 있다거나.........하지만 수현은 그저 나직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 녀석한테 무슨 일이 있겠어요? 나올거죠?”
“저기, 뭔데요? 딱히 뭐 중요한 거 아니면 그냥, 저기, 안 봐도 될 것 같은데.”
그녀가 어색하게 말하자 수현이 흠 하고 소리를 내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민이랑 관련된 거긴 한데. 정말로 관심 없어요?”
관심이 너무 많으니까 문제지! 수현을 만나서 수민의 이야기를 또 들으면 도대체 헤어진 보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수민은 저렇게나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 그게, 저기, 그러니까.............”
역시 변명할 말이 없다. 자꾸 댁을 만나면 수민씨 생각이 나서 싫어요, 라고 말하자니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고. 그녀가 마침내 한숨을 내쉬며 웅얼거렸다.
“알았어요. 그럼 어디서 만날까요?”
“주소 불러줄게요. 여기로 좀 올래요, 7시까지?”
그가 압구정동 어딘가의 주소를 불러주고는 찾아오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주소를 받아 적은 다음 지나가는 척 슬그머니 물었다.
“최근에 혹시 어머님 무대에 모델로 섰나요?”
“아, 민이랑 같이 나온 거죠? 어떻게 알아요? 잡지에 나왔나?”
“아뇨. 케이블 TV에서 우연히 봤어요.”
그녀가 힐끔 TV를 보았다. 인터뷰는 끝나고 어느 새 통판 상품광고를 하고 있다. 한숨을 삼키고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수민씨 좋아 보이던데.”
“내일 이야기해요. 지금은 끊어야겠네. 내일 봐요, 그럼. 시간 딱 맞춰서 와요. 너무 빨리 오지 말고. 알겠죠?”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로 늦지 말라고 말하지 않나? 빨리 오지 말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람? 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하여튼 이상한 사람이야.”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수화기를 응시하며 툴툴거렸다.
17.
날씨가 오늘따라 어둡고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수현이 불러준 주소 앞에 차를 세우고서 그녀는 재빨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구석진 건물 지하에 있는 스튜디오는 도대체 뭘 하는 곳인지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사진관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옷가게였던 것 같기도 한데 하여튼 지금은 비어있는 것 같다. 바깥에서 안쪽을 한참이나 살피다가 그녀는 헛기침을 하고서 노크를 했다.
“저기....................”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린다. 인상을 찌푸리고서 그녀는 조심조심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컴컴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네. 수현씨 안 왔나?
“수현씨?”
“안으로 들어와요.”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옆에 전등 스위치가 있었지만 고장이 났는지 켜지지 않는다.
“어디 있어요?”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도 거의 없다. 하지만 다행히 안쪽 방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더금더듬 안쪽 방의 빛을 따라 전진하다가 뭔가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인상을 찡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람 몸통 같은 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을 뻔했지만 금세 마네킹 몸통이라는 걸 깨닫고는 그녀가 이마를 닦았다.
도대체 왜 이런 데로 부른 거야? 뭘 보여주려고?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가 불이 켜진 방의 문을 밀고서 들어갔다.
“수현씨, 도대체 왜...................”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잡고 입을 막았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발버둥을 쳤으나 허리를 안고 입을 막은 팔과 손은 너무 단단하고 튼튼했다. 밧줄보다도 더 세게 그녀를 조인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손톱을 남자의 팔에 박았다.
“이야, 젠장.”
익숙한 못소리. 수현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뭘 하려고? 왜 이러는 거야? 이사람 혹시 원래 변태였나? 말 폭행하려는 건가? 그렇게 해서 수민씨한테서 완전히 떼어놓으려고?
안 돼, 싫어. 그렇게는 못 해! 안 된단 말이야!
“가만히 있어. 이서은!”
아니, 수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귓가에서 뜨겁게 숨을 몰아쉬는 이 사람은 수현이 아니었다!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헷갈린 거지? 수현이 아니다. 이 사람은...........................
수민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귓가에 닿는 나직하고 거친 목소리. 그녀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입을 막은 손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럼 제발 좀 손톱으로 찍지 마. 몸에 상처 나면 안돼.”
아아, 그래, 그의 몸은 재산이니까. 키스 마크를 남기는 것도 사실 대단한 일이었다. 일이 잡히면 그의 침대에서도 그녀가 너무 난폭해지지 않도록 굉장히 신중을 기했다. 아니 아예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진을 빼서 그의 몸에 손을 대지도 못 할 정도로 만들어 놓곤 했었지.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는지 그가 그녀의 몸을 번쩍 든 채 매트리스 위로 데려갔다. 하얀 천이 덮여 있는 매트리스는 푹신푹신했고 매트리스 위쪽으로는 뭔가 끈 같은 게 매달려 있었다. 매트리스 주위로 촛불이 줄지어 서서 불꽃을 일렁이고 있다.
그녀를 매트리스 위에 내려놓자마자 그가 팔을 붙잡아 위쪽의 끈으로 묶었다. 그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다시 발버등을 치기 시작했다.
“수민씨? 수민씨, 무슨..........왜 이러는 거야?”
“가만히 있어.”
그가 그녀의 팔목을 묶은 다음 하이힐을 벗기고 스타킹을 내린다. 그녀가 다시 발을 버둥거리자 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그녀가 숨을 헐덕이며 그를 돌아보려고 했다.
“수민씨!”
“가만히 있으라고, 나 할 말이 많으니까.”
거미줄 같은 스타킹이 바닥으러 떨어지는 게 보인다. 그의 손이 드러난 종아리를 쓰다듬다가 위로 올라가 허벅지 뒤쪽을 부드럽게 쓸었다. 치마가 앙덩이 위쪽에 뭉쳐 있고 팔이 당겨져서 욱신욱신 아프다. 자세를 조금 편하게 하려고 그녀가 꿈틀거리자 그의 손이 허벅지 위쪽의 맨살을 찰싹 때렸다. 아프진 않았지만 뭔가, 약간 좀. 말하자면 창피하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했다.
“나한테 거짓말한 거 있지?”
그의 손이 방금 때린 부분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얀 시트에 대고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빨리 실토해. 그럼 좀 봐 줄테니까.”
“어, 없어. 거짓말 같은 거...................”
“진짜?”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무슨 거짓말? 왜 갑자기 나타나서는 이렇게 엉뚱하게.......그의 손이 팬티 고무줄 아래로 들어가 조그만 천을 아래로 내리자 그녀가 숨을 헐덕이며 몸을 비틀었으나 묶여 있는 팔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하얀 팬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엉덩이에 조명 탓인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아니면 그의 손이 근처에 있는 건가? 그녀는 돌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자세가 너무 불편했다.
“거짓말쟁이.”
그의 손이 엉덩이를 스다듬다가 찰싹 때렸다. 그녀가 날카롭게 숨을 들이키고서 소리를 질렀다.
“수미씨! 왜 이래? 놔 줘. 이러지 말고 말로 해!:”
“말로 해 봤자 또 거짓말 할 거잖아.”
또 다시 커다란 손이 엉덩이를 내리치자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발버등을 쳤다.
“하지 마! 이러지 말라고, 수민씨! 도대체 무슨 짓이야? 이건 폭행이라구!”
“상관없어.”
그의 나직한 대꾸에 그녀의 온몸이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수민이 설마 그녀를 다치게 할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무서웠다.
“수민씨, 이러지 마. 정말로 하지마 , 나 무서워.”
“그럼 나는? 당신을 만나는 내내 당신이 포스터 속의 남자가 내가 아니라는 걸 알아버릴까 봐 난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그걸 알자마자 당신이 날 버릴까봐.”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엉덩이 위에 있던 그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살과 살이 맞닿는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작은 방을 울린다. 그녀가 흠짓하며 묶여 있는 손을 꼭 음켜쥐었다. 엉덩이가 화끈거리고 열기가 옴몸으로 퍼지는 느낌이었다. 일렁거리는 촛불리 그림자를 드리우고, 조그만 방은 영화 속 세트처럼 느껴졌다. 아니면 다른 세상처럼, 한 발 내딛는 순간 미치 포르노 영화 속으로 들어와 버린 기분이었다.
“수민씨 제발....................”
“당신을 아프게 할 수도 있어. 그렇게 날 아프게 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여성의 입구를 살짝 쓰다듬자 온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녀가 헐떡거리며 다리를 꼭 붙이자 다른 손이 다시 엉덩이를 내리쳤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뭔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게 엉덩이에 닿았다. 그의 입술인가? 촉촉한 무언가가 화끈거리는 살갗을 쓸었다.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 당신이 행복해진다면 내 손으로 그 망할 자식을 꽁꽁 묶어서 당신하테 주려고 했었어. 정말이야.”
그의 입김이 엉덩이 위로 느껴진다. 손가락이 다시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서 움직이다가 조그만 살점을 건드렸다. 그녀의 몸이 바로 반응을 보이자 그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녀는 헐떡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오랜만이다. 온몸이 그를 갈구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당신은 이렇게 마르고.........밥은 제대로 먹은 거야? 얼굴도 그렇고 몸도 , 여기도.”
따뜻하면서 살짝 거친 무언가가 그녀의 엉덩이를 쓸었다. 그녀는 뒤로 돌아보려고 노력했으나 보이는 거라고는 그녀의 위로 기울어진 그의 커다란 몸뿐이었다.
“수민씨............”
그녀의 목소리가 흐느끼듯 울렸다. 그의 혀가 다시 엉덩이를 적셨다. 그녀가 몸을 비틀며 숨을 몰아쉬었고, 묶인 팔근육이 욱신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수민씨, 팔이 너무 아파.”
그가 곧장 그녀의 위로 몸을 뻗어 팔의 위치를 조금 바꾸어 주었다. 근육이 당기는 건 최소한 줄어들었으나 풀어주지는 않았다. 그를 보고 싶은데, 그녀가 고개를 흔들u 애원하듯 말했다.
“풀어 줘. 수민씨 보고싶어, 제발 좀 풀어 줘!”
“안 돼. 거짓말쟁이는 벌을 받아야 돼. 왜 나한테 그런 거짓말을 한 거야? 왜 나랑 허어지려고 한 건데? 내가 보고 싶었다고 그러면서 왜 그런 끔찍한 거짓말을 해서 날 그렇게 비참하게 만든 건데? 말해 봐. 이해가 가면 풀어줄 테니까.”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가는 걸 어떻게 그를 이해시키겠는가? 아, 물론 그녀에겐 이유가 있었다. 있긴 하지만 그는 분명 이해 못 할 것이다. 아니 이해할까? 그녀가 입술을 적시고 간신히 말했다.
“수민씬 나한테 아무 것도 의논하지 않으니까. 의지하지도 않고, 말해주지도 않고, 나 몇 번이나 물어봤었잖아. 하지만 수민씨가 유일하게 자기 일에 대해서 나한테 말해줬던 건 그 변태 같이 당신 괴롭히던 디자이너뿐이었어. 나 그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서 수민씨 달랠 수 있는건 뭐든 하고 싶었는데, 그 이후로 한 번도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고, 뮤직비디오 찍는 것도 나한테 말 안하고, 집에 간 것까지도 나한테 말 안 했잖아! 나만 거짓말 했어? 수민씨는 수도 없이 했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다가 마지막에는 찢어질 듯 카랑카랑해졌다. 수민의 손이 다리 사이에서 움직이다가 잠깐 멈추었다. 하지만 그녀가 화를 가라앉히기도 전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그만 해, 수민씨! 하지 마!”
“왜? 싫어?”
“싫어. 싫어서 죽겠어! 수민씨가 미워서 죽겠다구!”
그녀가 훌쩍거리기 시작하자 수민이 손을 뗐다. 눈물이 보이기 싫어서 그녀는 화장이 번질 것도 무시한 채 시트에 얼굴을 눌렀다.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그녀가 얼마나 약한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의 커다란 몸이 그녀의 우리 올라오는가 싶더니 묵직하게 그녀를 눌렀다. 그녀가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입술이 귓가에 부드럽게 닿았다.
“난 당신이 좋아. 뭐라고 해도 당신이 좋아. 당신을 사랑해. 절대 안 놔 줄거야. 앞으로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죄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거야. 당신은 거짓말쟁이니까.”
“거짓말 아니야! 정말로 수민씨가 싫어.”
“정말?”
“정멀이야!”
“정말로 그럼 나 갈까?”
충동적으로 그러라고 소리를 지르려던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가 이대로 가버리면, 그러면 그녀는 다시 또 화보집이나 들여다보고 케이블 TV나 보는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그의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눈물이 주륵 흘러내리자 그녀가 고개를 다시 시트에 파묻었다.
“수민씨 정말 나빠. 정말로 나빠.”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녀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무슨 짓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그가 그녀의 옆에 있는 게 더 좋았다. 아니, 무슨 말을 ‘안 하든’ 간에. 그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어차피 당신이 뭐라고 말하든 안 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래도 당신이 있어달라고 해서 좋아. 정말로.”
“혼자 잘 지냈으면서.”
그녀가 투덜거리듯 내뱉자 그가 그녀의 목덜미를 경고하듯 살짝 깨물었다.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다시 한 번 나한테 그런 짓 했다간 , 다른 남자니 뭐니 했다간 그 자식 한테 돌을 매달아 한강에다 던져버리고 당신은 이탈리아 시골구석으로 데려가서 앉지도 못할 만큼 엉덩이를 때려주고 내 침대에 꽁꽁 묶어놓을 거야. 알겠어?”
“수민씨한텐 다른 여자 많잖아. 패션 쇼 모델들! 필요없어. 저리 가!”
“당신이 그 쇼 봤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걸 내 여자로 착가할 정도라면 곤란해. 무엇보다도 난 당신 말고 다른 여자는 은쟁반에 올려 내 앞에 갖다바친다 해도 조금도 동하지 않는다구.”
“수민씬 어려. 분명 금방이라도 다른 여자한태...........악!”
그의 손이 이번엔 꽤 아프게 엉덩이를 내리쳤다. 그녀가 헐떡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카락이 얼굴 양쪽으로 흩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의 손가락이 엉덩이 틈새로 내려가 여성의 입구를 습격한다. 아직 채 젖지 않은 몸이 타는 듯 아파오자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수민씨!”
“당신 몸은 정직하지. 아직 동하지 않았다 싶으면 이렇게 아프니까, 하지만 말이지, 건드리면 동하게 되어 있어.남자든 여자든 똑같아. 봐, 반응한다구.”
그의 엄지손가락이 예민한 신경이 모여 있는 핵심을 쓰다듬고 문지르자 그녀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녀의 목에서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오고, 손바닥에 땀이 차서 축축해진다. 그의 손가락이 이쪽 한 번, 저쪽 한 번 하는 식으로 셈세하게 여성의 핵심을 애무하자 점차 그의 손가락으로 채워져 있는 여성이 부드러워지며 젖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설령 몸이 반응 한다 해도 이대로 하고 싶어, 당신? 이대로 내가 파고들어서 해 버리는거 , 좋아?”
“싫어. 하지 마, 수민씨! 정말로 싫단 말이야!”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그는 느릿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응, 나도 싫어. 남자라고 해서 아무 여자하고나 하고 싶은 건 아니라고, 알아? 당신이랑 똑같아, 나도, 섹시한 여자 보면 반응할수는 있지. 하지만 그런 여자들하고 하고 싶진 않아.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런 섹시한 옷을 입은 당신이라든지, 아니, 푸대자루를 두르고 있어도 오로지 당신뿐이야.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 다른 여자한테는 조금도 마음이 움지깅지 않아. 하지만 당신을 보믐 순간 몸이 서서 가라앉질 않아. 내가 당신의 이상형이건 아니건 이젠 상관 안 해. 당신은 내 거야. 그때 방송국에세 당신이 날 쳐다보고 얼굴을 붉힌 이래로 당신은 내 거였어. 앞으로 어떤 자식이 나타나도 당신 못 줘. 당신은 내 거야. 무조건 내 거라고.”
그의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허벅지 안쪽이 떨리고 여성이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오르며 축축해졌다. 아랫배가 당기고 무언가가 흐르는 게 느껴지자 그녀가 떨리는 한숨을 내뱉었다.
“수민씨.................안 돼. 싫어. 그만 해!”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의 말이, 그의 손이 그녀를 사방에서 공격하고 있었다.
“서은아, 나도 내가 잘못한 거 알아. 당신한테 좀 더 많은 얘길 했어야 했는데 못 했어. 할 수가 없었다구. 아해해 줘. 당신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면 왠지 어린애가 되는 기분이었어. 아무것도 못 하고 불평만 늘어넣는 거 같았다고, 나도 말하고 싶었어. 당신이 잘 될 거라고 말하는 거 듣고 싶었고. 하지만 성공한 다음에 말하고 싶었어. 뮤직비디오도 평가가 좀 좋으면 그 다음에 자랑스럽게 내놓고 싶었고. 비밀로 했다가 쟌 하고 놀라게 해 주면 당신이 얼마나 날 대단하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만 했었어. 그래서 촬영이 잘 안되고 그러는 동안에도 아무 말 할 수가 없었어. 입을 열면 불평만 나올테니까. 멋진 것만 보여주고 싶은데.”
“멋지지 않아도............좋아했을거야. 수민씨가 하는 거라면.”
그녀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몸 안의 손가락이 천천히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가 신음을 억눌렀다. 통로가 충분히 젖어들었는지 그의 손이 매끄럽게 움직이며 그녀를 자극했다.
“알아, 하지만 내가 싫었어. 당신한테 근사한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가든. 나도 당신에게 어울릴 만큼 능력있고 괜찮은 놈이라는 거 보여주고 싶었어. 주위에서 자꾸 당신하고 내가 안 어울린다고,당신은 TV에도 나오는 유명한 치과의사고, 난 아직 직업도 제대로 없는 어린애라고 강조하는 게 너무 싫었어.”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보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문지르며 그가 손가락을 더욱 깊이 밀어 넣는다. 그녀가 낮게 비명을 지르며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안 돼, 못 참겠어. 너무 오랜만이라서............
“하지만 이젠 다 상관 없어. 자기들 마음대로 떠들라고 그래. 당신이 우너하는 거 뭐든 말해줄게. 당신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어린애든 지골로든 뭘로 취급받아도 상관없어.”
“나, 난 수민씨 그런 trl으로 생각한 적, 아, 없는데, 아 앗, 아, 난 한 번도.............”
말을 이을 수가 없다. 몸을 휘감고 뱃속을 휘젓는 감각이 너무나 강렬했다. 그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고, 어느 순간 하나가 더 늘어났다. 두 개의 손가락이 몸을 파고들자 그녀가 짧고 높은 비명을 지르며 폭발했다.
“수민씨!”
바싹 말라버렸던 그녀의 몸이 우기를 맞은 것처럼 사랑의 결실을 솓아낸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여성을 벌리고서 시트 위로 꿀물을 쏟아냈다. 그녀가 앞뒤로 몸을 문지르며 그의 손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맥박이 고동치는 작은 살점을 그의 엄지에 문지르기 위해서. 그는 장난치듯 손가락을 살짝 뒤로 뺏다가 그녀의 몸을 꼭 물렀다. 젖은 손바닥이 그녀의 다리 사이 전체를 느릿느릿 문지른다.
“이 느낌이 그리웠어. 당신이 나한테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절대, 젠장, 절대 다른 놈한테 못 줘. 절대로. 앞으로 50년이든 60년이든 당신은 내 옆에 있어야 돼. 나한테만 이렇게 반응해야 된다고, 알겠어?”
50년? 60년? 흐릿한 머리로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말을 아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야, 마치 결혼이라도 하자는 것 같잖아. 수민씬 아직 어린데. 결혼을 생각할 만한 나이가 아니라구. 자기입으로 그랬었잖아. 실감이 안 난다고.
아니 그건 아이 이야기였던가? 하지만 아이나 결혼이나 거기서 거긴데.
“움직이지마. 다칠지도 모르니까.”
그가 몸을 들어올리더니 매트리스 옆에서 뭔가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눈을 깜박이며 까만 것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했으나 선뜩한 것이 엉덩이 위쪽에 닿는 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가만히 있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선뜩한 물체가 점차 등을 타고 올라가자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설마.................
“수민씨, 뭐 하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감으로 가득했다. 수민이 몸을 기울여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하고서는 계속해서 물체를 움직였다. 물체가 움직일때마다 옷이 양옆으로 벌어지는 것 같다. 아니, 같은게 아니라 정말로 벌어지고 있다! 그녀가 등을 구부리며 피하려 하자 그가 혀를 쯧쯧찼다.
“진짜 다친다고, 움직이지 마.”
“수민씨, 뭐 하는 거야! 나 옷 없어. 그러지 마, 안 돼!”
“괜찮아. 여기서 안 내보낼거니까.”
뭐? 하지만 반항할 새도 없이 커다란 가위는 그녀의 얇은 면재킷과 블라우스를 한꺼번에 잘라내 버렸다. 팔까지 죽 자른 다음 그가 망가진 천을 옆으로 아무렇게나 내치고 브래지어도 끈을 잘라내 벗겨 버렸다. 이제 그녀는 완전한 알몸으로 팔을 묶인 채 엎드린 상태였다.
헐떡거리며 그녀는 꼼짝도 않고 그의 다음 움직임을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철컹소리가 나는 게 가위를 바닥에 내던진 모양이었다.
“말랐어, 정말로.”
당신 탓이야!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여서 도대체 뭐가 뭔지 알수가 없었다. 거기다 그를 다시 만나고, 그가 그녀를 원한다는 기쁨까지.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슴 옆쪽부터 허리까지 쓸어내리다가 마른 정도를 가늠하는 듯 허리를 양손으로 잡았다.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앞으로는 내가 옆에서 계속 먹여줄 거야. 제대로 먹는지 확실하게 체크할 거라고.”
“수민씨, 이제 이거 풀어 줘, 이러지 말고 말로 해.”
“말로 할 거 없어. 난 다 했으니까. 고수현이 다 불었어. 당신 자기랑 아무 상관없다고. 아니 애당초 그 자식한테서 당신을 빼앗아랴겠다고 내가 먼저 생각한거야. 당신은 그 자식한테 안 어울려. 뭐, 세상에는 나나 그 자식보다 당신한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겠지. 하지만 누구도, 세상 그 어떤 자식도 나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진 못해. 알겠어? 당신이 이렇게 예쁘고 귀엽다는 건 내가 제일 먼저 발견한 거야. 그러니까 뒤늦게 당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깨달은 멍청이들한테 내 줄수는 없어. 당신은 내 거야.”
그의 입술이 그녀의 등 아랫부분에 닿았다가 천천히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몸 앞부분으로 움직여 시트에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는 그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몸을 뒤로 젖히며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혀가 견갑골 근처를 핥고서 위로 계속해서 올라간다.
“내 거야. 전부 다. 알겠어?”
“아니, 몰라. 수민씬 자기 마음대로야. 멋대로라고. 자기 혼자서 말하기 싫다고 결정하고 화내고 떼쓰고, 이젠 자기 마음대로 날 가지겠다 그러고. 난 뭐 수민씨 마음대로 되는 인햐이야? 장난감이야?”
그의 손이 가슴을 쥐고 어르기 시작하자 그녀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울린다.
“아니, 내 마누라.”
놀라서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의 DQL술이 목덜미에 닿았다가 귓가로 올라오고 가슴을 주무르고 쓰다듬던 한 손이 위로 올라와 그녀의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순간 그 뜨거운 짜릿함에 그녀는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의 입술은 부드럽지 않았다. 자기 것을 차지하는 것처럼 거칠고 격렬하게 그녀의 입술을 문지르고, 혀는 안으로 파고들어 그녀를 맛보았다. 그녀의 혀 역시 그의 혀를 밀어내려는 듯 격하게 움직이며 그와 보조를 맞추었다.
마침내 그가 입술을 뗐을땐 두 사람 다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드디어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수민씨 말랐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어딘지 슬픈 듯한 미소를 짓고는 그녀의 어께에 이마를 댔다.
“응, 당신이 그 자식이랑 있는 거 생각나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고.”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화를 내고 싶었지만 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팠던 만큼 그 역시 아팠던 모양이다. 그녀는 그가 잘 지내고 있을 줄 알았다. 그녀 따윈 하루 이틀 자존심이 상해서 화를 냈을 뿐이지 금방 잊었을 거라고. 패션 쇼도 했잖아.
“그러고서 쇼를 어떻게 했어? 안 힘들었어?”
“힘들었어. 하지만 내가 할수 있는 건 해야 되니까. 그리고 당산을 되찾아야 했으니까.”
그가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다시 입을 맞추고는 가슴을 주무르던 손으로 젖꼭지를 잡아당기다가 살짝 비틀었다. 여린 살점을 고문하는 손길이 그녀가 그의 입에 대고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찔거렸다.
“내 거야. 얼른 말해, 내 거라고.”
그랴도 될까? 문득 겁이 났다. 말하는 순간 그와 다시는 떨어질 수 없게 될것이다. 부모님이, 친구들이 다 반대할게 분명한데.
그런 반대쯤이야 얼나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그랬었잖아, 네가. 문제는 수민씨지 네가 아니라고 주장했었잖아. 이제와서 물러서는 거야? 다시 수민씨를 잃을 거야? 그래도 좋아?
“빨리 말해.”
그의 손가락이 젖꼭지를 비틀며 앞쪽으로 잡아당기자 그녀가 몸을 휘며 헐떡거렸다.
“나, 난.......................”
수민씨 거야.
수민씬 내 거고.
다신 안 떨어질거야. 다시 이렇게 고통스럽고 싶지 않아. 수민씨가 좋아. 누가 뭐라고 하든 수민씨가 좋아.
“나랑 결혼할 거지, 수민씨?”
그가 만들어내는 감각에 짓눌린 채로 그녀가 고통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몸이 뜨겁고 여성이 다시금 조여들며 그를 원하고 있다. 그를 갖고 싶어서 온몸이 울부짖고 있다. 그래도 알아야만 했다. 그가 다시 그녀를 밀어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 했다.
“그랬으면 좋겠어?”
“그, 그런다고 했잖아, 마누라라고......................흐윽!”
그가 그녀의 엉덩이에 대고 부푼 자신의 몸을 문지르자 그녀가 숨을 허떡였다. 뜨겁고 단단한 그의 일부가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배를 지나 여전히 젖어 있는 다리 사이로 향했다.
“착하게 굴면. 아주 아주 착하게 내 말을 잘 듣는다고 약속해야 돼. 내가 시키는 건 뭐든 하겠다고 해야 결혼해 줄거야.”
“마, 말도 안..................하앗!”
그의 손가락이 재빨리 다리 사이의 살점을 문지르며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손가락이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간지럽고 따끔거리는 몸 안의 욕구를 해소하려고 그녀의 엉덩이 역시 자동적으로 위아래로 움직였다. 움직일때마다 그의 단단한 몸이 엉덩이 윗부분에 스치며 더 뜨거운 감각을 자아냈다.
“얼른 약속해. 내 거라고, 다른 남자 따윈 상대도 안할 거라고, 다시는 거짓말 안 할 거라고. 내 말만 듣고, 남들이 뭐라든 절대로 신경 안 쓸 거라고,빨리.”
“안 돼, 아, 수민씨.........거기, 그렇게, 응, 하아, 더 깊이 넣아 줘, 더, 당신 몸으로...............”
“약속 안하면 안 해 줘. 아무 것도 안 해 줄거야. 어서 약속해. 내 게 되겠다고 빨리 약속해.”
그의 손가락이 점점 더 빨리 움직인다. 아랫배를 뒤흔드는 감각이 점점 커지며 몸 안으로 퍼지다가 머리까지 올라온다. 머릿속이 몽롱해지고 눈앞의 촛불들리 흐릿해지다가 점점 커지는 느낌이다. 몸이, 머리가, 온 세상이 흔들린다.
“수민씨이, 아앗, 나 안 돼, 넣어 줘, 아, 제발!”
하지만 절정의 직전에 그가 손가락을 홱 빼 버렸다. 그녀가 흐느끼며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수민씨, 제발!”
“빨리 약속해. 어서!”
그가 다그치듯 으르렁거렸다. 가슴을 애무하던 손이 뒤로 움직이더니 그녀의 엉덩이를 다시 내리쳤다. 따끔한 감각이 곧장 다리 사이의 예민한 부분까지 퍼지고, 여성의 입구가 욱신거리며 뜨거운 꿀물이 흘러내렸다,
“아, 하, 할게, 뭐든지. 수민씨가 원하는 거 뭐든지! 말 잘 들을게, 다른 남자 같은 거 필요없어. 수민씨면 돼. 수민씨가 좋아, 좋아한다 말이야!”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헐떡거렸다. 그녀로 인해 젖은 그의 손이 틈새를 문지르고서 피가 몰려 부어오른 살점을 앞뒤로 무닞른 다음 다시 안으로 파고 들었다. 허리띠를 푸는지 금속이 철그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허벅지 뒤에 뜨겁고 단단한 것이 닿자 그녀가 엉덩이를 더욱 들어올렸다.
“어서 수민씨, 지금 얼른!”
“내 거야”
그가 격하게 으르렁거리며 양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서 위로 더 높이 들어올린 다움 엉덩이 아래쪽을 한 차례 더 때렸다. 따끔한 감각에 저절로 여성이 조여들고 애액이 흘렀다. 창피한 것 따윈 이제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가 이 욕구를 해결해주기만 한다면 뭐든 할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그가 곧장 움직임을 멈추었다. 엉덩이를 잡은 그의 손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
“아파?”
그가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빨리 하지 않으면 정말로 아플 거야. 정말이라구! 얼른 움직여, 이 바보 멍청이!”
그녀의 욕설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다시 안으로 파고드는 순간 그의 웃음도, 그녀의 고함도 전부 다 거친 신음으로 변했다. 그가 단단한 남성을 움직일때마다 두 사람 다 숨을 헐떡이며 신음했다. MRSU가 묶여 있는 손을 꼭 주먹 쥔 채 온몸을 긴장시켰고, 그 역시 그녀의 엉덩이를 꽉 움켜잡은 채 힘껏 그녀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좋아.........너무 좋아, 젠장. 당신이 제일이야. 당신이 제일 좋아. 당신 말고 다른 여자 따윈 하나도 필요 없어. 사랑해. 사랑해, 젠장!”
그의 말이 점점 더 난폭해지고, 그의 움직임이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거의 완전히 몸을 빼냈다 다시 끝까지 밀어 넣고, 다시 빼냈다가 밀어 넣는다. 거칠게 문질러지는 그녀의 내벽은 그의 주위로 조여들었다가 풀어지며 아픔인지 쾌감인지 모를 감각을 그녀의 온몸으로 전덜했다. 그가 안으로 파고들때마다 그녀의 몸이 매트리스에 눌리며 무거워진 젖가슴이 시트에 쓸렸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면 그가 몸을 빼고, 다시 들어오면 그녀가 또 다시 비명을 질렀다. 끊임없는 순환, 끝없는 쾌감, 빙빙 도는 세상.
숨을 쉴 수가 없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현실이라고는 오로지 타오르는 촛불과 그녀의 안을 파고드는 그의 몸뿐이다. 그의 손가락이 위험할 정도로 그녀의 엉덩이 사이로 접근했고, 그의 거친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를 달구었다.
“수민씨, 수민씨, 아, 아, 아악, 나, 아, 그만, 아, 정신이 하나도, 흐윽, 그만, 하악!”
그의 움직임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는다. 조금도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몸이 아픙로 계속 밀리고, 매트리스가 바닥에서 흔들거리고, 시트가 구겨졌다. 젖가슴이 흔들리고, 끈이 팔목에 파고들며 부드러운 살에 상처를 냈다. 그가 상체를 젖히고서 그녀의 안으로 깊이 파고들자 그녀가 커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모리가 어지럽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세상이, 온 세상이...................
그녀의 주위로 폭발하는 느낌이다. 그녀가 젖은 얼굴로 시트 위로 쓰려졌고, 곧이어 수민 역시 거친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의 안에 뜨거운 절정의 결과물을 흘렸다.
“수민씨 바보 멍청이.”
아픈 팔목을 문지르며 그녀가 웅얼거렸다.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시트를 몸 위로 덮고서 수민은 얼굴을 문질렀다.
“시끄러워. 이제 당신은 나랑 결혼하기 전에 아무데도 못 가.”
서은은 잠시 팔목만 문지르고 있었다. 매트리스 위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나자 수민이 그녀의 팔을 홱 끌어당겨서 산처 난 팔목을 조심스럽게 문질러주기 시작했다.
“수민씨 부모님이 뭐라고 하지 않으실까?”
그녀가 나직하게 묻자 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우리 부모님이 왜?”
“아니........내가 나이도 훨씬 많고, 좀, 음, 그렇잖아.”
수민이 코웃음을 쳤으나 손길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난 당신 부모님이 훨씬 더 걱정이야. 인사드리러 갔다가 나 쫓겨나는 거 아냐?”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쫓겨나면 그냥 나갈거야, 수민씨?”
“미쳤어? 당신도 데리고 나가야지.”
그녀가 킥킥 웃고는 팔꿈치로 그를 쿡 찔렀다.
“빌어야지 무슨 소리야, 수민씨가 나 이렇게 만든 거잖아. 완전히 타락했다니까. 봐, 이거, 끈에 묶여 가지고......아후.”
그녀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느릿하게 웃고서는 그녀의 몸을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그녀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심장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온다.
잠시 가만히 있던 그녀가 고개를 홱 들고 그를 보았다.
“그런데 여기 어디야? 여기 있어도 돼? 여기 무슨 가게 아니야?”
“이탈리아 가기전에 새엄마가 하시던 가게 자리인데 지금은 비워놨어. 근데 위에는 가게들 있거든, 어쩌면 당신 목소리 다 들었을 지도 모르겠는데.”
그가 나른하게 그녀의 귓가에 대고서 말하자 그녀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그의 가슴을 찰싹 내리쳤다. 그가 가짜 티가 역력한 아야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대고 얼굴을 문질렀다.
“너무해. 나 이래봬도 연약하다구.”
“누가 거짓말쟁이인가 몰라, 어쨌든......언제 다시 이탈리아 가?”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를 보았다.
“이탈리아에 왜 가?”
“다시 가야 되는 거 아니야? 모델 일도 있을 거고.........”
그가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촛불이 일렁거리며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 표정이 기묘해 보였다.
“내가 가면 당신은 어쩔 건데?”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그의 가슴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입술이 비죽 튀어나와 있다.
“모르겠어. 병원 그만 두고 따라가는 것도 좀....싫어. 나도 일하고 싶단 말이야. 하지만 이탈리아 어도 모르고 거기 가서 일하는 것도 어려울 거 같고.”
그녀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수민이 그녀의 한쪽어깨를 쓰다듬으며 가만히 있다가 물었다.
“그래도 내가 가자고 하면 길 거야?”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고서 1, 2분 가량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나야 갔다가 다시 돌아와도 자리를 잡을 수 있지만, 수민씬 지금 배우고 자리를 잡아야 되는 입장이니까.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들고서 그를 독바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줘애 돼. 내 일까지 포기하고 수민씨 따라가는 거니까 그 정도는 해 줄거지?”
“뭐 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어루만진다. 그녀는 한참동안 인상을 찡그린 채 가만히 있다가 슬그머니 미소를 드리웠다.
“다름 번엔 수민씨가 묶이는 거야.”
“어, 그건 좀.............”
그가 난감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눈썹을 침켜올리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잠깐 천장을 쳐다보고, 반이나 탄 촛불을 보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들을 본 다음 마침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알수 없는 웃음이 슬그머니 퍼진다.
“그냥 내가 이탈리아 안 가는 건 어떨까?”
“뭐? 왜? 그럼 여기서 뭐 하려고?”
그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그가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뭐야. 사람 그렇게 무시하기냐, 이서은? 여기서도 할 일 있어.”
그가 양팔을 들어 팔베개를 하고서 크게 숨을 들이킨 다음 천천히 말했다.
“조연이긴 한데, 드라마에 나와보라는 제안을 받았거든.”
“진짜?”
그녀가 몸을 일으키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좀 학원에서 연기 공부한 정도 밖엔 없지만, 어쨌든 시작은 누구나 그런 거니까. 열심히 하면 다음 번에 좀 더 좋은 역을 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여하간 시작은 해 보려고.”
“수민씨 모델 학원 다닌거 아니었어?”
“연기 학원도 같이 다녔는데........얘기 안 했었나?”
그가 마치 그녀가 잊어버렸다는 양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녀가 옆구리를 세게 꼬집었다.
“말 안 했잖아! 또 말 안 한 거있으면 지금 빨리 털어놓는게 신상에 좋을 걸.”
그녀의 으름장에 그가 양손을 들어올렸다.
“이제 없어, 진짜로 없어. 우리 집 이야기는 고수현이 다 했다며 이제 진짜로 없어.”
“내가 도대체 왜 수현씨한테그런 이야기를 들어야 돼? 당신이 해 줬어야지. 그사람 앞에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알아? 게다가 포스터 일도 그렇고 수민씨 바보, 바보, 바보.”
“안기기까지 했던 주제에 겨우 그거 갖고 창피하기는.”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녀 역시 코웃음을 쳤다.
“수민씨 질투 해?”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고 그녀가 움찔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고함을 지르려는 것 같다가 생각을 바꾼 듯 크게 숨을 들이쉬고서 천천히 말했다.
“당연하잖아.”
서은의 얼굴 역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인정하니까 오내지 창피했다. 질투해야 하는 건 사실 그녀인데, 사실 수현은 그저 수민과 그녀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척 해던 거고, 수민의 주위에는 정말로 그를 탐내는 예쁜 여자들이 우르르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건 나야, 온갖 장애물이 첩첩이 쌍여 있는데도 그는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맣라고 있잔아.
그녀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배시시 밝아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수민도 한숨을 내쉬고서 그녀를 끌어당겨 꼭 안았다.
“사랑해. 좀 믿어 줘.”
“믿어. 그저 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것 뿐이야. 수민씬 예쁜 여자들이 가득한 데서 일하고, 난 금방 주름살도 막 생길거고 꾸미는 것도 잘 못 하고................”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 수민씨. 내가 바보 같아서.”
“아니, 그럴 땐 그냥 솔직히 말해 줘. 그럼 나도 다 말해 줄게. 자존심 내세우고 말 안 하고 그러다가 우리 이렇게 된 거잖아. 앞으로는 전부 다 솔직히 말하자, 응? 그러고 말이지. 이거 하난 의심하지마. 난 진짜로 세상에서 당신이 가장 예뻐. 눈이 삐었다고 해도 좋아. 그냥, 이 세상 전부를 뒤져봐도 당신보다 더 예쁜 여자는 없어. 정말이야.”
그녀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킥킥 웃었다.
“수민씬 정말로 눈이 삐었어.”
“괜찮아. 눈 같은 건 당신 줄게. 난 당신을 통째로 갖고.”
그녀가 킥킥거리며 그에게 팔을 둘렀다. 수민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에 필 로 그
“이번 영화에서도 코믹한 역할을 맡으셨는데, 멜로물 같은 걸 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괜찮은 영화라면야 무슨 역이든 좋죠.”
“부부 사이가 너무 좋아서 멜로물을 안한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그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집사람이 그런 걸로 질투할 만큼 그렇게 비죽거라는 성격은 아니에요. 오히려 좀 멋있는 역을 맡아보라고 그러는데요, 뭐.”
“내가 언제 그랬담, 사기꾼.”
그녀가 TV화면에 커다랗게 클로즈업 된 수민의 얼굴을 보며 눈을 흘겼다. 어쩐지 나날이 사기만 늘어가는 것 같다. 아니면 수현을 닮아 가는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정말이지 막고 싶은데.
옹알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TV앞에서 일어나 소파 근처에 놓여 있는 요람으로 다가갔다. 울타리처럼 생긴 난간을 붙잡고 아이가 반쯤 일어나 있다.
“깼어. 우리공주님? 어째 아빠 목소리만 들으면 반응을 하니.”
그녀가 아기를 안아 올렸다. 아직 6개월밖에 안 된 딸은 여전히 이상할 정도로 가벼웠다. 아니 이 조그만 존재가 그녀와 수민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이상한거겠지.
결혼한 지 벌써 3년째였다. 물론 그들의 결혼은 쉽지 않았다. 수민의 부모님은 의외일 정도로 쉽게 그녀를 받아들이셨지만 문제는 그녀의 부모님이었다. 7살연하, 거기다 직업도 분명치 않은 소위 ‘백수’를 쉽게 외동딸의 남편감으로 받아들이실 리 만무했다. 분노, 눈물, 애원, 기타 등등의 온갖 작전을 벌이셨으나 그녀는 꿋꿋하게 버텼고 수민 역시 매번 머리를 조아려 가며 매달렸다. 결국 첫 번째 영화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다음에야 부모님은 결혼을 허락하셨다. 매니저는 이제 막 뜨기 시작한 배우의 앞날 어쩌고 하며 가로막으려 했지만 수민이 다 때려치우겠다고 협박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 이래로 벌써 수민이 찍은 영화가 네편이었다. 결혼 전 했던 드라마는 딱히 평가랄 것도 없을 만큼 단역이었지만, 그 덕택에 얻은 영화 배역을 잘 소화하고는 곧장 다음 영화에서 주연 자리를 따냈고 그 후 벌써 세 번째 주연작이었다. 결혼할 무렵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상당히 망가지는 코미디물이었으나 수민은 신시할 정도로 잘 해냈다.
뭐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다. 꽃미남 배우 어쩌고 하는 애들보다 훨씬 더 근사하고 멋진 만큼 멜로물을 하면 금세 여자들이 줄줄이 따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래도 솔직히는 여자애들이 집 앞에서 진을 치는 꼴을 보느니 그냥 저런 연예 프로그램에서 ‘연기 잘 하는 배우’ 로 불리는 편이 더 좋았다. 게다가 기혼이라는 것도 인기에 영향을 미칠 거고.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 그녀가 딸 은성을 안고서 현관문을 열었다. 케이크 산자를 든 수민을 보고 그녀가 방긋 웃었다. 은성이 옹알거리는 소리를 낸다.
“왔어, 수민씨?”
“어. 우리 딸내미 일어나 있었네?”
그가 그녀에게 케이크 상자를 넘기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은성은 다시 뭐라고 옹알거리더니 인상을 찡그린다. 케이크 상자를 부엌에 갖다 놓고 오는 사이 아이는 벌써 울음을 터뜨린 상태였다. 수민이 쩔쩔매며 아이를 어르고 있다.
서은이 피식 웃으며 도로 아이를 받았다. 수민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왜 나만 안으면 그러나 몰라. 그냥 있을땐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안타까운 정도를 넘어서 거의 원망 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그를 보고 그녀가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수민씨가 맨날 없으니까 그렇지. 6개월 동안 얼마나 집에 있었어? 그러니까 아빨 못 알아보지.”
“내 탓이 아니잖아. 일 때문에 어떡해.”
안방으로 향하며 그가 투덜거렸다. 그녀가 훌쩍거리는 아기를 토닥이며 그의 뒤를 따라가TEk. 문 근처에서 멈춘 그가 얼굴이 나오고 있는 TV를 보더니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런 거 좀 보지 마.”
“어머, 어머, 무슨 소리야? 내가 맨날 그런 걸 틀어놓으니까 얘가 그래도 아빠 목소리라도 알아듣는 거라고. 봐, 당신 목소리에 반응한다니까.”
“나한테도 좀 안겨 봐, 은성아. 아빠 싫어? 응, 응?”
그가 몸을 기울이고 아이의 목덜미를 손으로 간질였다. 아기가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키득거리며 몸을 꼬고 웃자 그의 표정이 얼빠진 팔불출처럼 변했다. 그녀는 속으로 낄낄 웃었다.
임신을 했을 때만 해도 영 미지근한 반응을 보여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수민이었지만 배가 불러올수록 관심이 늘어나더니 어느새 초음파 시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며 같이 촬영하는 배우며 스텝들에게 보여주고 자랑을 하지를 않나, 태동이 시작되자 그녀의 배에서 손을 뗄 생각을 안 해서 아주 귀찮을 정도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니 더 했다. 한창 영화를 찍느라 옆에 못 있으니까 쉴때마다 전화를 해서 아이 숨소리라도 들려달라고 해서 그녀를 귀찮게 만들었다.
아이를 싫어한다 어쩐다 해도 정작 낳으면 반응이 다르다더니 수민이 딱 그랬다. 반면 시댁에서는 그녀가 임신했을때부터 기뻐하더니 손녀가 태어나자 너무나도 좋아해서 그녀를 기쁘게 만들었다. 너무 좋아서 얼이 빠진 수민 대신 수현이 간단하게 말했다.
“아들을 셋이나 키우셨으니 이제 여자애를 보고 싶으실 만도 하지.”
물론 그러는 수현 역시 심심하면 이탈리아에서 조카딸을 위한 선물을 보내곤 했다. 결혼할 무렵에는 엄청난 사실을 밝혀서 그녀를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우리 부모님, 사실 새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다섯 살이 많아요.”
그런 주제에 도대체 왜 수민과 그녀 사이를 방해하려고 한 거냐고 그녀가 따지자 그는 그저 실실 웃으며 대답을 피할 뿐이었다. 심술쟁이, 그게 그녀의 결론이었다. 아니면 브라더 콤플렉스든지. 둘 중 하나겠지.
어쨌든 결혼해서 대전에 자리를 잡은 수민의 작은 형만 빼면 모든 시댁 일가가 이탈리아에 있는 터라 별로 귀찮을 일도 없었다. 시부모님도 오시면 그녀를 예뻐라 하시고 손녀 역시 버릇이 없어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귀여워하시니 아무 문제도 없었고, 귀여움 받고 사는 걸 보고서 그녀의 부모님도 걱정을 더셨다.
“그나저나 영화 끝나도 너무 일이 많다, 그치? 저번보다 더 많은 것 같아.”
그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가며 그녀가 말했다.수민이 재킷을 벗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일의 일부인 셈 쳐야지. 토크쇼 같은 것도 결국 영화 광고의 일종이니까. 귀찮아도 별수 있나.”
“그래도 촬영 끝난 게 언젠데 쉴 시간이 없잖아. 그러고 나면 금방 또 다음 영화 들어가야 되고, 전엔 영화배우는 영화 끝나면 계속 노는 줄만 알았는데.”
버둥거리는 아이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그녀가 투덜거렸다. 수민이 재킷을 옷걸이에 걸면서 그녀를 돌아보고는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왕비님께서 혼자 외로우셨던 모양이네, 그렇지?”
옷걸이를 옷장에 걸고 나서 그가 느릿하게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허리 뒤로 양팔을 둘러 안았다.
“그런 거야?”
“천만에요. 나한테는 이게 있거든.”
그녀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의 손을 떼고는 그를 반대편으로 빙 돌렸다. 잠시 그의 몸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그가 홱 그녀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서은! 내가 저 짓 좀 하지 말랬지!”
“왜? 어때서?”
그가 그야말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의 영화포스터를 돌아본 다음 다시 그녀를 보았다. 안방 옷장 옆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영화포스터는 그가 조금 전 못 봤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눈에 띄었다.
“빨리 떼!"
“싫어. 얼마나 어렵게 구했는데. 요즘 길거리에서 포스터 떼다가 걸리면 뭐라고 그런단 말이야. 얼마나 창피한디 알아? 몰래 떼서 도망쳤단 말야.”
“떼라니까. 안 그러면 내가 뗀다?”
그녀가 입을 반쯤 벌리고 그를 노려보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허리에 양손을 올렸다.
“떼기만 해봐. 당장 별거야. 은성이 데리고 밀라노로 가 버릴 거야. 어머님한테 가 있으면 좋아라 하실 걸.”
그가 험악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도로 푹 내뱉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도대체 왜 저런 걸 붙여놓는 거야? 실물이 있는데.”
그녀가 입술을 비죽 내밀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걸핏하면 로케다 뭐다 해서 집에 없잖아. 집에 있을 때도 다른 사람들 만나야 된다, 아니면 오늘처럼 TV 무슨 프로 촬영 가야 된다 그래서 나가고, 변함 없이 내 옆에 있어주는 건 포스터 속의 당신뿐인 걸.”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얼굴로 그녀가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머리카락을 몇 번 더 쓸어 넘기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포기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저건 좀......내가 내 집에 들어와서 내얼굴이나 보고 있어야겠어? 당신 얼굴이면 또 몰라.”
“난 좋은데. 당신이 없을 때도 옆에 있는 것 같으니까.”
그녀의 얼굴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발뒷꿈치를 들고서 양손을 그의 어깨에 올린 다음 그녀가 낮막하게 속삭였다.
“혼자 있을때 당신을 보면서 하고 싶거든.”
수민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스쳐갔다. 그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며 여전히 너무나 예쁜 눈매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양손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진짜야?”
그녀가 나직하게 웃으며 그에게 팔을 감고 끌어당겼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누르고, 한 팔이 허리에 감기며 그녀의 몸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수민씨 로케 가고 없는 내내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아?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거라고는 당신 포스터뿐이란 말이야. 내 얘기 들어주고, 은성이 한밤중에 울면 달래는 내내 보고, 병원에서 속상한 일 있을 때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상대..................아!”
그의 이가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을 깨물자 그녀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허리에 감긴 그의 손이 엉덩이 윗부분을 쓰다듬는다.
“남편이 아니라 포스터 같은 게 더 중요하다니. 아무래도 좀 맞아야 될 것 같지, 이서은?”
그의 혀가 목덜미를 적시며 천천히 턱을 타고 입술로 올라왔다. 그녀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며 그를 맞아들였다. 혀와 혀가 얽히고 뜨겁고 진한 그의 맛이 느껴졌다. 그녀의 숨결이 빨라지고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로.........당신이 없으면 혼자 너무.......보고싶단 말이야.”
“미안, 하지만 어쩔 수가 없잖아. 당신도 일이 있고.......나도 데리고 가고 싶어. 당신이 은성이만큼 조그마하면 배낭에 넣어서 들고 다니고 싶다고.”
그의 손이 헐렁한 실내복 바지 안으로 파고들어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흐느끼는 듯한 신음 소리를 내며 그의 얼굴을 더욱 끌어당기고 그의 혀를 빨았다. 그의 숨소리가 가칠어지고 손가락이 다리 사이를 파고든다. 발가락이 휘어지고 허벅지 안쪽에 힘이 들어갔다.
“수민씨.......하아, 응, 좀 더.............”
“쉿. 은성이 깨.”
아이는 어느 새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다. 한손으로 다리 사이를 더듬으며 그가 다른 손을 웃옷 안으로 밀어 넣어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아이를 낳고서 묵직해진 가슴이 그의 손을 가득 채운다. 끄트머리가 쓸리자 그녀가 움찔히며 그의 셔츠를 움켜잡았다.
“거긴, 아, 하앗...........”
“이리와.”
그가 슬그머니 그녀를 끌고서 방을 나간 다음 문을 닫았다. 거실에는 여전히 TV가 켜져 있었고 베란다엔 하늘하늘한 커튼이 드리워 있었다. 그가 그녀를 소파 쪽으로 데려가다가 소파 뒤쪽 등받이 앞에서 멈춰 그녀의 티셔츠를 위로 올렸다. 젖을 먹이느라 브라를 안 하고 있던 탓에 맨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슬슬 젖을 뗄 때 된 거 아니야?”
“아직, 요즘은 조금 더 오래 먹인다고........수민씨!”
그의 입술이 가슴에 닿자 그녀가 낮게 소리를 질렀다. 그가 예민한 가슴을 깨물고서 강하게 빨자 젖이 흘러나온다.
“아직 은성이 안 먹였는데.........아, 아, 아앗!”
“처음도 아니잖아.”
그가 도톰한 젖꼭지를 핥으며 중얼거렸다. 하긴, 아이를 낳은 후 한동안 관계를 가질 수 없을 때 그는 종종 그녀의 가슴을 탐했다. 은성이는 그리 까다로운 아이도 아닌데다가 아이가 먹고 나서도 꽤나 많은 젖이 남는 편이었다. 뭐 전부 수민의 차지였지만, 어릴때 모유를 못 먹은 탓으라며 그는 능글능글하게 말하곤 했다.
“아, 하앙, 응.............”
그의 머리를 안은 채 그녀가 소파에 기대 몸을 휘었다. 부푼 가슴이 그의 입에 더욱 밀착되고 강하게 빨아들일 때마다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손으로 반대 편 가슴을 어루만지며 그가 다른 손을 다리 사이로 내려 바지를 끌어당기고는 맨살을 드러냈다. 혀와 입술은 계속해서 그녀를 자극하고 고문한다.
“아, 아, 응, 아! 더 수민씨, 좀 더, 더 깊이...................”
그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다른 손까지 내려서 그녀의 바지와 팬티를 완전히 아래로 밀어내고 그녀의 몸을 소파 등받이 위로 밀었다. 그녀는 다리를 움직여 종아리에 걸려 있던 옷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그의 몸 양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 숨을 헐떡였다. 그의 손가락이 달아오른 여성의 입구로 움직여 재빠르게 그녀를 자극했다. 몸이 저절로 젖어들자 그녀가 고개를 젖히고 몸을 떨었다.
“수민씨, 아, 빨리, 빨리!”
가슴을 깨물고 빨고 핥으며 그가 한손으로 자신의 바지를 푼 다음 다급하게 몸을 해방시켰다. 단단히 곤두선 남성이 허벅지 안쪽에 닿자 그녀가 손을 내려 그를 잡고 손에 힘을 주어 앞뒤로 쓸었다. 그의 목에서 그르렁거리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얼른.............”
그녀가 손으로 그의 몸을 끌어당겨 자신의 입구에 맞추었다. 그가 허리를 움직여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며 강하게 그녀의 가슴을 빨자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언제나그와 있으면 온통 짜릿하고 세상이 무지갯빛으로 기득 차는 느낌이었다.
그가 가슴을 놓아주고 입술을 위로 천천히 올리다가 마침내 그녀의 입을 차지했다. 뜨겁고 달콤한 맛이 나는 그의 입술을 맛보며 그녀가 몸을 떨었다. 너무나 은밀한 감각.아무리 해도 싫증나지 않는다. 아니, 할 때마다 더욱 그와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너무나도 핸복하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도니 기분. 그가 그녀의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느리고 부드럽다. 마치 그녀의 몸 안까지 쓰다듬는 것처럼, 그녀의 뺨을 쓰다듬고 머리를 감싸는 그의 손처럼. 그녀가 그의 입안으로 혀를 들이말고서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가 낮게 신음하며 고개를 기울여 그녀를 더욱 깊이 받아들이며 아래로는 그녀의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음, 응, 더, 좀 더 빨리. 수민씨...................”
“싫어. 포스터 같은 걸 붙여놓은 벌이야.”
그가 낮고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느리게 몸을 움직인다. 그녀가 몸을 꼭 조이며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고서 끌어당겼지만 그는 속도를 높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감질나는 움직임으로 그녀를 괴롭힐 뿐이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수민씨, 수민............”
갑자기 안방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두 사람 다 움직임을 멈추었다. 울음소리가 사그라들지 않고 요란하게 집안을 울리기 시작하자 수민이 좌절감 어린 신음을 내밭으며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아, 젠장.”
“수민씨가 느릿느릿 진을 빼니까 그렇지. 바보.”
그녀가 그를 밀어냈다. 다리 사이에서 그의 일부가 빠져나가는 느낌은 언제나처럼 짜릿했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재빨리 옷을 주워 입은 다음 그녀가 안방으로 들어가서 은성을 안아 올렸다.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면서도 아이는 목소리만 높여서 앙알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 심술쟁이가 될 것 같단말이야. 새엄마를 닮았나?”
어느새 옷을 추스린 수민 역시 은성을 달래고 있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를 지르고 있던 은성이 그의 얼굴을 보자 조그만 얼굴을 찡그렸다가는 입맛을 다시고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어느개 수민의 얼굴에 헤벌쭉한 미소가 어린 걸 보고서 그녀가 웃음을 삼켰다. 그가 긴 손가락으로 아이의 턱을 간질이자 아이가 까르륵 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중에 마저 하자. 애부터 재우고.”
그가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계속 손가락을 움직여 아이를 달랬다. 그녀는 달아오른 얼굴로 은성을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시선이 그의 포스터에 닿았다.코미디 영화라고는 해도 포스터의 그는 너무나도 근사했다. 옛날의 그 포스터보다도 훨씬 더.
아니, 근사한건 그녀의 옆에 서있는 이 남자였다. 포스터는 누구나 갖고 있고, 누구든 그걸보며 환상을 꿈꿀수 있지만 진짜를 가질수 있는 건 오직 그녀뿐이다. 환상속에서 걸어나온 그녀만의 남자.
“수민씨?”
그가 여전히 아이를 어르며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
“뭐야, 쑥스럽게, 그럼 저 포스터 떼도 돼?”
“절대 안돼. 그랬다간 별거야.”
“심술쟁이. 은성아, 너희 새엄마는 엄청 심술쟁이다.”
“누가 로케가서 전화 안통 안하래? 전화하면 애만 찾지. 절대 못떼!”
“이서은 좀 봐 줘. 저거 보고 있으면 진짜 창피하다니까.”
“싫어!”
“이서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녀만의 모델. 그녀만의 남자.
(끝)
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포스터속의남자.txt
오전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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