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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이지영-이태리의살바체3.txt

마땅히 희진이 가져야 할 몫이었다.

길들여진 사람은 희진이 아닌 자신이었고,

무대에서 마지막에 내려온 사람도 희진이 아닌 자신이었지만 완전한 패배였다는 것은 바뀌지 않았다.

아무튼 이곳에서의 일은 끝났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한쪽 가슴을 묵직하게 만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정리하는 것 뿐…


'사랑이라는 감정은 정말 유치해. 난 지옥에 있더라도 진 당신은 자유롭길 바라니까.

맘껏 날라. 그리고 내 눈엔 다시 띄지 마 '


소파에서 눈을 감고 있던 살바체가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서울 풍경을 한번 쳐다본 살바체는 예전 자신이 희진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의 지젤 진… 당신은 가장 중요한 왜라는 질문을 하지 못하는 군.

가장 처음에 해야 할 '왜'라는 질문이 뭔지 알아? 왜… 내 눈에 띄었는가.'


살바체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정말 멍청한 말이었다.

이젠 자신의 눈에 띈 희진도, 예술품에 소장가치라 생각하며 무조건 가지려고만 했던 자신도 살바체는 싫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지옥에 던져둔 희진을 미워할 수도 없었다.


'이제 정말 끝이다.'


살바체는 희진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결심을 했다.

완벽하게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면 살바체는 놓아버리기로 했다.

그러나 완벽이라는 것은 현실에선 가능하지 않았다.

살바체는 차르르 커튼을 치고 빛을 차단시키고 몸을 돌렸다.

힘 있는 동작으로 몸을 돌린 살바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Royal suite room을 나섰다.


* * *


'헉, 헉'


한 여자가 택시에서 내려서자마자 서울 로얄 호텔로 뛰어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데스크에 앉아 있는 안내인에게 여자가 급한 어조로 물었다.


“살바체 프란트씨 어디에 묵고 있나요?”

“로얄 쉬위트 룸에 묶고 계십니다.”

“고마워요.”


여자가 코너를 돌아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지고 난 뒤, 옆에 있던 호텔 직원이 안내했던 여자직원에게 말했다.


“그분 방금 체크아웃 안했나?”

“아직 내려오시지 않았어요.”

“길이 엇갈릴 수도 있잖겠어? 곧 내려오실 거니까 홀에서 기다리시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


여자 직원이 그제야 엘리베이터 쪽으로 간 여자를 쫏아 데스크에서 나와 빨리 걸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여자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다가서려는 순간 호텔 여자직원은 놀란 얼굴로 멈춰서야 했다.


'짝!!'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서 데스크에서 방금 물었던 여자 분과 잘생긴 외국인이 서 있었고,

여자가 홀이 울리도록 큰 소리 나게 남자의 뺨을 쳐버리고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여자 직원은 그 모습에 가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 * *


구경꾼이 많다는 건 희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바심 내며 엘리베이터가 내여 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순간 살바체를 보았다.

거기다 벨 보이가 여행용 가방을 끌고 있지 않은가…!

순간 희진은 화가 치솟아 본능적으로 살바체의 뺨을 쳐버렸다.

살바체 역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희진이 서 있자 놀랐고, 화난 표정 역시 놀라웠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날라드는 희진의 손을 피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니 지금 이 순간 맞은 후에도 살바체는 믿을 수 없어하는 눈으로 희진을 보고 있었다.

희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쁜 자식! 너 혼자 그렇게 가고 나면 난 뭔데? 동정하는 거야?

이제 놓아 주겠다 유세부리고 자유 주면 내가 고맙습니다 할 줄 알았어?

내 목숨 왔다 갔다 네 손에 쥐었다 폈다 하니까 재밌었겠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떠날 수 있을 만큼 재미 다 봤겠지! 이 나쁜 놈아!”


살바체는 희진이 큰소리치며 말하는 표정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그리고 희진이 무작정 소리치고 날 뛰고 삿대질 하는 손을 끌어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옆에서 벨 보이는 나가지도 못하고 눈치보고 있어야 했다.


“놔! 이 빌어먹을 자식아!”


희진이 반항하며 거칠게 굴었지만,

살바체는 들은 척도 안하고 구경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 차단시켰다.

그리고 거칠게 반항하며 욕을 퍼붓는 희진을 엘리베이터 벽으로 밀고 씩씩대는 희진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진. 알아듣게 말해.”

“!"


희진은 놀란 눈으로 살바체를 쳐다봤다.

너무 흥분하고 분한 마음에 지금껏 한국말로 퍼부어 댄 것이었다.


'젠장. 바보 같이…!'


“무슨 말을 했는지 다시 말해봐. 듣고 싶군.”


희진을 벽 사이에 가두고 살바체는 얄미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희진은 붉어지는 볼과 거칠어지는 숨을 안보이려고 살바체를 외면하고 말했다.


“재밌나 보죠? 이러는 내가 우스운가 보군요?”

“우습지 않아. 그저 신기해.”


희진이 이 말에 살바체를 힐끗 보고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손 자국난 볼이나 보고 말하죠. 여자에게 맞고 웃음이 잘도 나오겠어요.”


살바체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자신의 볼을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내려왔던 엘리베이터 버튼을 다시 눌러 위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어, 어디 가는 거예요?”

“날 보러 온거 아닌가?”

“맞아요.”


희진이 살바체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자 살바체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지어졌다.


'더 쳐야 했어. 더 세게 더 힘껏 칠걸…'


희진은 얄미운 살바체의 얼굴을 보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살바체는 희진의 손목을 잡고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빨리 이 여자가 자신에게 온 이유를 알고 싶었다.

궁금함에 저절로 희진을 잡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방금까지 다시 희진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포기했던 마음에 작은 희망이 생겨났다.


'땡'


살바체는 희진을 보지 않고 무작정 팔을 끌고 다시 로얄 스위트 룸 안으로 들어갔다.

벨 보이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짐을 어찌해야 하는지 고심하고 있는 사이 순식간에 문은 닫히고 말았다.


'찰칵'


문이 닫히는 소리에 희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그토록 도망치려던 살바체에게 자신이 걸어 들어온 게 깨달아졌다.

이런 자신이 바보 같았지만 이해도 안 되었지만, 무작정 화가 나서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이대로 엇갈려 살바체가 한국을 떠났다 해도, 희진은 그를 만나 따지기 위해 이태리로 따라 갔을 것이었다.

화병에 죽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막상 살바체에게 욕하고 때리고 할 말 못 할 말 다 하고 나니 둘이 남은 지금이 두려워 졌다.

왜 여기 로얄 스위트 룸 안에 둘이 서 있게 된 것인지…

그러나 뒤늦은 후회는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살바체의 손은 희진의 두려운 마음을 읽고 턱을 들어 눈을 바라보게 하고 있었다.


“웃지 말아요. 살바체 프란트. 난 그저 따지러 온 거니까.”

“좋아. 말해봐. 나도 궁금하던 차였어. 통역관이 있었으면 좋았을 뻔 했어.”


희진이 붉어진 볼을 숨기고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

힘이 잔뜩 들어간 희진의 어깨를 보며 살바체가 바로 걸어가 찬 얼음에 물을 따라 희진에게 주었다.

희진은 고맙다는 말도 생략하고 물을 받았다.

순간 두 사람의 손끝이 맞닿았고 움찔한 희진을 느끼며 살바체가 한걸음 물러나 섰다.


“…….”


살바체는 천천히 물을 들이키는 희진의 열에 들뜬 얼굴을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희진은 물을 들이키며 대답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뭘 말하려고 온 거냐면….”


우선 희진은 서두를 꺼내 놓고 말을 흐렸다.

살바체가 소파 등받이에 엉덩이를 걸치고 경청할 준비가 되었다는 표정으로 희진의 대답을 기다리며 침묵했다.


“좋아요. 말하죠.”


희진은 컵을 바 위에 소리 나게 올려놓고 살바체를 향해 천천히 시간을 끌며 돌아섰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살바체를 쳐다보며 물었다.


“내게 자유를 준 이유가 뭐죠? 게임에서 졌다는 유치한 말은 믿지 않아요.”

“진심이었어. 어제 한 말은 하나도 빠짐없이 말이야.”


살바체가 담담하게 말했다. 희진은 정말 살바체가 진정으로 한 말임을 깨달았다.

속으로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희진은 다시 꿈틀 꿈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죠? 왜 그런 결심을 한 거죠? 당신이 두려워서 떠는 내가 불쌍해서?!

아니면 이제 와서 내게 했던 일들이 미안해지기라도 했나요?! 이유를 말해요 프란트 살바체!

사람을 때려 놓고 짓밟아놓고 이유 없이 이제 안 때릴게 하면 되는 건가요?

맞은 사람은 뭐죠? 지금 이러는 거 하나도 고맙지 않아요. 어차피 내게 있던 자유였어요.

이유를 말해요! 살바체 프란트! 왜 갑자기 이러는 건지!”


희진의 앙칼진 목소리에 살바체의 얼굴이 어두워 졌다.

살바체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얼굴을 하고 희진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유를 말해 달라… 어떻게 이유를 말할 수가 있겠어.

진… 처음부터 당신과 내가 만난 건 운명이었어.

당신을 놔주는 이유도 '왜'라는 질문의 답도 거기에 있어.”


살바체의 진지한 목소리와 표정에도 희진은

말도 안 되는 운명이라는 말을 갖다 붙여 살바체가 이 순간을 모면하려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 더 화가 나 소리쳤다.


“하! 지금 그걸 이유라고 말하는 건가요? 운명?! 운명이라고요?!

개수작 부리지 말아요! 살바체 프란트! 당신은 날 처음 보자마자 나의 지젤, 고양이라고

멋대로 부르면서 예술품의 동물취급하고 가지고 놀았어요!

날 짓밟았고 내 자유를 빼앗았고, 날 미치게 만들었어요.

내 순결, 내 자존심도 갈가리 찢어놓고 당신은 모른 척 했죠! 그런데 그게 운명이었다고요?!

그 한마디면 모든 이유가 될 거라 생각했나요?

내게 적선하듯 살려주고 자유를 주고 뒤 돌아서면 모든 게 끝 날거라고 생각 했나요?!”


희진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뚝뚝 떨어지는 희진의 눈물이 아프게 살바체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희진은 그러나 눈을 깜빡이지 않고 앉아 있는 살바체를 노려보았다.

참고 있던 아픔이 밖으로 튀어 나왔다.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진…”


살바체가 의자에서 일어서자 희진이 움찔하며 뒷걸음치려고 했다.

살바체는 우는 희진의 눈을 보며 한걸음씩 조심스럽게 다가가 희진의 어깨를 한손으로 보듬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희진이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

맺혀있던 눈물이 또르르 크게 굴러 떨어졌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살바체를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그냥 이게 끝이라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난 퇴장할 수 있어도, 당신은 끝까지 무대를 지켜야만 해요.'


희진은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것은 자신이 아닌 카르멘의 목소리였다.

기로 살았던 그 카르멘은 또 하나의 자신으로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혼자 퇴장하고 그는 지옥에 남겨져야 마땅했다. 그게 처음부터 생각했던 카르멘의 복수였다.

집착과 소유욕에 몸부림치며 자신을 끝까지 잊지 못하고 괴로워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멋대로 퇴장하겠다니,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홀가분하게 돌아서겠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의 지젤… 울지 마.”


살바체의 손이 희진의 눈 밑을 쓸었다.

계속 넘쳐흐르는 눈물은 손으로 닦아도 계속 넘쳐흐르고 있었다.

살바체는 손을 치우고 입술로 희진의 볼을 다시 훔쳤다. 희진은 밀납 인형처럼 눈을 깜빡이며 서 있었다.


“그만 울어.”


살바체가 낮은 저음으로 희진을 달래며 손을 끌어 자신의 가슴에 안았다.

희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바체는 자신에게 저주를 퍼붓는 희진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가 죽어요. 살바체 프란트. 절대 용서하지 않아요.

날 아프게 하고 짓밟은 거 다 갚아 줄 거예요. 그 때 동안 당신은 무대에 남아 있어야 해요.

멋대로 내려오면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

“그래.”


살바체가 희진의 머리를 쓸며 귓가에 속삭여 대답했다.


“난 자유로워도 당신은 자유로우면 안돼요.

난 행복해도 당신은 절대 행복하면 안 되고, 난 천국이어도 당신은 지옥에 있어야 하고,

난 기뻐도 당신은 죽을 만큼 고통 받고 아파야하고,

난…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당신은 날 사랑해야 해요.”

“그래…”


살바체는 떨리는 어깨를 보듬어 자신에게 안겨 있는 희진에게 계속 그래 라고 대답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살바체의 충혈 된 눈이 깊은 바다 빛을 했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입술이 약속을 하듯 겹쳐졌다.

다급하게 찾는 두 사람의 입술은 서로의 얼굴과 서로의 체온에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진… 나의 진“


살바체의 뜨거운 입술이 희진의 눈물 맺은 눈가와 볼을 타고 목선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희진 역시 은빛금발의 머리에 손을 넣고 살바체의 숨결과 향기를 반겨 안았다.

살바체가 희진의 엉덩이를 받쳐 들어 안으며 입술을 때지 않고 큰 침대가 있는 열려진 침실로 들어갔다.

등 뒤로 물컹하고 물침대의 부드러움이 느껴졌지만 희진은 살바체의 목을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서로의 옷을 벗겨내는 손길이 빨라졌다. 조금, 조금만 더 살 내음, 서로의 체온이 더 부딪쳐 지길 바랬다.

느끼고 또 느껴도 부족할 것 같았다.

살바체의 손이 희진의 몸을 더듬고 차츰 드러나는 옷 사이에 가슴을 찾아내 입에 담았다.


“하아“


저절로 희진은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목을 뒤로 꺾어 느낌을 따라 눈을 감았다.

꿈틀거리는 살바체의 근육과 살바체가 주는 온기, 따뜻함, 짜릿한 감각이 계속 파도를 타고 온몸을 훑었다.

모든 옷을 벗어던진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확인하며 만지고 또 만졌다.

살바체의 단단한 가슴과 탄탄한 팔뚝, 힘을 줄때마다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근육들을 어루만지며

희진은 살바체가 자신에게 더 몸을 밀착시키길 바랐다.

뜸을 들이고 손과 입술만으로 애를 태우는 살바체가 못 마땅해 희진이 손으로 그의 팔을 잡고 재촉했다.

살바체는 희진의 몸을 더듬으며 희진이 준비되어 아픔이 없길 바랐다.

너무 자신이 단단해 희진이 아플 것 같아서였다.


“하아… 빨리.”


희진이 재촉하는 목소리는 살바체의 이성을 순식간에 날려 버렸다.

희진의 다리 사이로 살바체는 힘을 주고 단번에 희진의 몸에 자신을 묻었다.


“하 ㅡ "


긴 신음이 살바체의 목에서 터져 나왔고 희진은 아픔에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살바체가 눈을 뜨고 희진의 손을 잡은 채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희진의 안에 자신을 묻고 나면 현재라는 공간은 의미를 잃었다.

천천히 희진의 눈을 보며 살바체는 움직였다. 등 근육이 살바체의 몸짓과 함께 꿈틀 거렸다.

희진은 살바체의 손을 놓고 대신 등을 끌어안으며 살바체의 탄탄한 엉덩이를 다른 손으로 바짝 잡아 당겼다.

더 가깝게 깊게 들어와 갈증을 씻어 줬으면 싶었다.

살바체의 손이 희진의 머리를 끌어안았고 두 사람의 몸이 딱 한 몸인 것처럼 밀착되었다.


“하아“


살바체가 희진의 숨소리도 아깝다는 듯 급하게 희진의 신음을 막았다.

입술을 열어 희진의 입안에서 자신의 혀로 맘껏 사랑을 했다.

살바체의 움직임이 점차 빠른 템포로 속도를 빨리해오자 희진은 숨을 참지 못해 헐떡이게 되었다.

달콤한 감각의 물결을 타고 갈증이나 물을 찾는 다급함 같이,

두 사람의 몸이 긴박함을 더해갔다.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 느낌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참지 못해 터뜨리고 싶으면서도 두 사람은 참고 또 참으며 서로의 느낌을 공유했다.


“읔…진“


한계에 다다른 살바체가 참지 못해 신음을 흘렸다.

희진은 마지막으로 가는 살바체의 여정에 동참했다.

클라이막스에 올라 절정에 치달았다.

희진의 입에서 마지막 신음이 터져 나올 때,

살바체가 희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덮으며 절정에 떠는 희진을 품에 끌어안았다.



포근하고 좋았다.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희진은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등 뒤로 살바체의 따뜻한 몸의 체온이 느껴졌다. 자신을 안고 팔을 베게 해준 살바체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밖은 어두워져 저녁을 알려 왔지만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만족한 숨소리가 고양이처럼 저절로 목을 타고 흘러 나왔다.

희진은 호기심을 느끼고 천천히 몸을 돌려 자고 있는 살바체를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문을 열어둔 거실에서 불빛이 세어 들어오고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당신을 보면 꼭 그려보고 싶다고 했을 거예요. '


이태리 사람들이 왜 살바체에게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름다운 얼굴… 각지고 남성적이면서도 어떻게 동시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

희진은 자면서도 자신의 한손을 잡고 있는 살바체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치우고

살바체의 흘러내린 은빛금발의 머리카락을 이마에서 쓸어 올렸다.

잘 다듬어진 눈썹, 긴 속눈썹과 매력적인 입술 선까지…

희진은 기억에 담듯이 살바체의 얼굴을 차근차근 뚫어지게 쳐다보며 손을 움직였다.


“살바체 프란트… 날 사랑하나요?”


희진이 속삭여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을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건넸다.

처음으로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멋지고 잘생긴 남자였구나 다시 느꼈다고나 할까…


'헉!'


갑작스럽게 희진의 조용하게 속삭이는 말에 대답하듯이 살바체가 희진을 확 끌어안았다.

희진은 살바체의 가슴에 꽉 안겨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살바체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 왔다.


“사랑해. 나의 진“


'쿵, 쿵'


막상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으니 가슴이 뛰어올라 목까지 차왔다.

다행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게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진. 당신은?”


잠결처럼 꿈결처럼 살바체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달콤하고 섹시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안겨 있는 희진에게선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희진은 당황하고 놀라워서 대답을 못했을 뿐 아니라 아직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도 혼란스러웠다.

희진을 안고 있는 살바체의 눈에 빛이 점차 소멸해 갔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당신은 날 사랑해야 돼요.'


살바체는 어두운 눈빛을 감추고 품에 안겨 있는 희진의 턱을 들어 흔들리는 희진의 눈빛을 보았다.

희미한 미소가 그려지는 살바체의 얼굴에 희진이 눈을 감았다. 살바체의 입술이 다시 희진에게 내려앉았다.

비록 입술은 달콤하게 희진의 입술에 닿아있고, 희진의 부드러운 손길이 자신에게 있었지만,

살바체의 가슴엔 칼로 그려지는 아픈 선이 새겨지고 있었다.


* * *


캄캄했다.

눈을 떠서 본 것은 캄캄한 어둠…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 희진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스르르 목까지 잘 덮여 있던 하얀 시트가 희진이 일어나 앉자 얼마 지나지 않은

사랑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들어내고 있었다.

시트를 떨리는 손으로 잡고 있는 희진의 가슴 선과 목선,

쇄골 근처로 살바체가 뿌리고 간 사랑의 흔적들이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앉아 있는 희진의 눈이 흔들렸다.

아무것도 없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 살바체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살바체 프란트…?'



무대에서 기다리겠어. [6장]


황량한 큰 더블침대 위 자신만 혼자 앉아 있었다.

숨을 가늘게 내쉬는 희진의 숨소리가 조금씩 크게 들썩이며 커져갔다.

옆에 스탠드를 키는 희진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찰칵'


파스텔 톤의 불빛이 방안을 밝혀 왔지만, 어디에도 살바체 프란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가 이곳에 있었던 게 꿈인 것처럼, 그의 채취도 사라진 듯 했다.


'아니, 그럴 리 없어. 날 사랑한다고 분명히 말한 사람이 이렇게 말 한마디 없이 떠날리 없어.'


흔들리는 눈동자로 희진은 부정하며 시트를 가슴에 부여잡고 천천히 일어나 닫힌 문을 열었다.

환하게 밝은 빛이 거실에서 빠져나와 잠깐 희진이 눈이 부셔 눈을 깜박였다.

거실에서도 살바체의 존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헉, 헉 '


가쁜 숨을 참기가 힘이 들어, 희진이 소파를 짚고 섰다.

또 당했다는 생각이 깊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살바체 프란트… 또 날 가지고 놀았군요. 또 거짓말 이었던 거야.”


처음부터 이렇게 떠날 생각이었던 것이다.

살바체의 머릿속에 자신은 처음부터 없었던 게 분명했다.


'용서하지 않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이번엔 내 몸 뿐 아니라, 내 마음 까지 짓밟았으니 절대 용서하지 못해요.

떠날 때 쉬운 여자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겠죠.

처음부터 너무 쉽게 걸려든 날 비웃었겠죠. 제 발로 찾아온 나이니 무척 재미있었겠죠.'


후드득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자신이 살바체 때문에 울고 있다는 게 싫었다.

절대 울지 않으리라. 다신 절대 당신 때문에 울거나 하진 않을 거야.

입술을 깨물고 또 깨물지만, 아픈 가슴의 상처가 계속 후벼 파는 느낌에 서 있기도 힘들었다.

주르르 시트를 잡고 희진이 주저앉았다.


'사랑해. 나의 진'


처음으로 '나의 지젤' 이 아닌, '나의 진' … 이름을 불러준 살바체 라서 믿었었다.

그저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느끼면서 후회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믿고 싶다는 생각 간절했는데… 다신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겠다 다짐해 놓고,

이렇게 가버 릴 수는 없는 거였다.


“나쁜 놈. 나쁜 자식…'


희진의 입에서 계속 살바체를 욕하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주저앉으며 울고 있는 희진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살바체가 로얄 위스위 룸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났지만,

희진 자신의 몸 구석구석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떠났음을…


* * *


2시간 전 살바체는 희진을 팔베개 해주고 부드러운 어깨를 쓰다듬고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살바체의 가는 손이 부드러운 희진의 피부 곡선을 따라 쓸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살바체의 마음은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역시 현실에서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살바체는 희진의 잠이 들어 한숨 쉬듯 내쉬는 숨소리에 눈을 감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희진을 납치해 이태리로 도망치고 싶었다.

반항하고 싫다고 도리질 치더라도 끌고 가 자신만의 세계에 다시 집어 던져 넣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한다 말해 줄때까지 완벽해 질 때까지 가둬두고 사랑을 주고…

살바체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머리를 흔들었다.

희진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존심을 굽히고 자신에게 사랑한다 말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멋지고 자존심이 남다르고, 남자보다 결단력이 빠른 여자인 것을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음…"


팔을 빼는 기척을 느낀 희진이 음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살바체는 그런 희진이 아무 걱정 없이 잠이 더 깊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 침대에서 걸어 나와 벗어둔 옷을 챙겨 입었다.


'이번 무대는 당신이 이겼어. 진… 하지만 다음 무대에선 반드시 이겨 보이지.'


옷을 다 챙겨 입은 살바체는 희진의 아름다운 여체를 보고 시트가 내려와 보이는 우윳빛 살결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흘러내린 시트를 다시 목까지 잘 덮어준 살바체는 한참 시선을 때지 못하다 뒤 돌아 섰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끝까지 가볼 생각이야. 지금 당신을 잊지 못하고 사랑을 움켜쥐고 있다면,

난 당신 말대로 자유롭지도 행복 할 수도 없는 지옥 속에 있겠지.

시간 시간이 죽을만큼 아프고, 괴롭겠지. 당신을 사랑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말이야.

그렇지만 그게 어디까지 갈까? '


살바체는 뒤 돌아서 문을 열고 나갔다.

아까와 달리 생동감 있는 얼굴이었다.

다시 살아 꿈틀댔다.

살바체의 눈이 반짝이며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까와는 다른 '희망'이 보였다.

화내고 여기까지 달려온 희진… 비록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지만, 희진의 행동에서 어쩌면… 이란 생각을 했었다.

다시 게임을 시작할 동기로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살바체가 거실에 있는 전화기를 들고 말했다.


“체크아웃 하겠습니다.”


로얄 스위트 룸 거실에서 나온 살바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벨보이와 함께 체크 아웃하기 위해 잠시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살바체 프란트씨. 체크아웃 하시겠습니까?”

“지금 방에 제 여자가 자고 있습니다. 깨우지 말고 푹 잘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여직원이 살바체의 말에 싱긋 웃고 체크아웃 하기 위해 컴퓨터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힐끗 살바체의 메모지를 들고 힘 있게 글자를 쓰는 모습을 보며 가슴을 두근거리고 새침하게 앉아 있었다.

종이를 잘 접은 살바체가 메모지를 호텔이름이 찍힌 봉투에 넣고 여자직원에게 전해주며 말했다.


“최 희진 그녀의 이름입니다. 내려오면 꼭 전해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살바체 프란트씨.”


살바체가 부탁한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눈을 맞추자 여자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벨 보이를 옆에 두고 힘 있는 당당함을 지닌 탄탄한 어깨를 돌려 조금씩 멀어지는 살바체를 보며

여자직원은 눈을 때지 못하고 한참 넋이 나가 서 있었다.


'진짜 멋진 분이다. 이 여자 분은 얼마나 행복할까?'


여자직원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순간 호기심에 여자직원은 주위를 힐끔 보며 메모지를 꺼냈다.

다른 사람이 훔쳐본 걸 안다면 모가지가 날아갈 일이었지만, 진한 호기심에 여자직원은 참지 못했다.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의 일만으로도 호기심을 유발시키기엔 충분했다.


“어머!”


외마디 비명을 지른 여자의 눈에 다시 감동받은 눈이 서렸다.


[무대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어. -살바체 프란트]


* * *


혜수는 아무 말 없이 집에서 내어준 차만 들고 있는 시원을 보고 눈치를 살폈다.

이곳에 마주 앉아 있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시원은 다른 생각에 잠긴 듯 차만 바라보다 입가로 가져가고 있었다.

혜수는 비록 시원과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의무감으로 자신의 집에 들락거리고 있다는 것도 너무 잘았다.

하지만 이렇게 상심한 표정의 시원을 보고 한마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오빠. 무슨 일 있어요?”

“어? 아니.”


아니 하면서도 시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혜수가 그런 시원을 보고 자신도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슬쩍 시원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기로 하셨어요? 희진 언니랑…”

“…….”

“전 되도록이면 빨리 결정했으면 좋겠어요.

파혼한 후 곧바로 미국에서 공부 다시 시작해 보려고요. 그러니 이렇게 찾아오실 필요 없으세요. “


시원이 끄덕이고 있었지만, 자신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 일이고,

망설이고 또 망설이며 어렵게 꺼낸 말이었는데 시원이 건성으로 듣자 혜수는 화가 났다.


“오빠!”

“잘 들었어. 그렇게 하도록 해.

어렵게 시작한 공부 나 때문에 때려친 게 미안했는데 잘 댔다.”

“…….”


혜수가 이런 시원에게 더 없는 모욕을 받은 느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 일어서 자신을 노려보는 혜수를 보고 시원이 놀란 눈빛으로 혜수를 응시했다.


“그게 다예요? 시원오빠! 그게 다냐고요. 그 한마디가 단가요?”

“…?”

“진짜… 진짜 화나요. 저. 마지막 순간까지 오빠 머릿속엔 희진언니 생각밖에 없군요.

제가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군요. 그래도 관심 있는 척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네?”

“앉아. 화내지 말고“


시원이 혜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혜수는 씩씩대면서도 자리에 앉아 시원의 말을 기다렸다.


“솔직히 혼란스럽다.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가 뒤죽박죽이다.

잠깐 나에게 시간을 줄 수 없어? 너까지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그… 그게 무슨 말 이예요?”

“잠깐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말이야.”

“하… 그때도 아니면요. 저보고 두 번이나 실망하라는 건가요?

아뇨. 전 싫어요. 못해요. 어렵게 결심한 일이예요. 마음 아파서 찢어지고 그러는 거안할래요. 저“


시원이 다시 일어서서 말 다했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지나쳐 가버리려는 혜수의 팔목을 탁 붙잡았다.

무조건 혜수의 입술을 찾아 가졌다.


“읍!”


예전엔 여자의 대한 관념이 뚜렷했다.

손쉽게 가질 여자와 특별한 여자로 구분지어 지고 깨끗하다 생각했다.


'넌 어디에 속하지?'


어쩌면 희진에게 단번에 거절당한 상처에 혜수를 이용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화기가 가라앉지 않고 희진의 대한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이 여자 역시 자신 없으면 못 산다 하던 여자가 아닌가?

그런데 자신을 거부한다는 사실이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처음엔 반항하던 혜수는 깊이 들어오는 시원의 입술과 혀를 느끼며 서서히 힘이 빠져 눈을 감았다.

이 순간 시원이 누구를 생각하며 자신의 입술을 훔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혜수는 그저 아무생각 없이 첫 키스를 시원에게 주고 있었다.


* * *


희진은 로얄 스위트 룸에서 나와 어깨에 힘을 주었다.

살바체에 대한 독한 마음을 품고, 배신당한 만큼, 아니 그 전보다 더 희진은 독하게 살아야지 다짐했다.

다신 살바체를 보지 않을 것이다. 머리에서 완전히 비워버릴 것이다.

희진은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홀로 내려갔다.


“저기, 최 희진씨죠?”

“네. 그런데요.”


데스크를 지나치는 중 오전에 보았던 직원이 희진을 부르고 있었다.

희진이 여자직원이 내미는 호텔이름이 찍힌 봉투를 건네받고 뭐냐는 시선으로 직원을 응시했다.


“살바체 프란트씨가 최희진씨에게 전해주라고 주신 겁니다. 읽어보세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여자직원을 보며 희진이 떨리는 눈으로 봉투를 열고

살바체의 힘 있게 쓴 글씨를 쳐다보았다.


“!”


여자직원은 희진이 감동받는 표정을 조만간 볼 거라 생각하며 뿌듯한 마음으로 희진을 쳐다보았지만,

희진의 표정은 놀랐다가 다시 조소가 담긴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기절까지 바라진 않았지만 어떻게 저런 내용의 쪽지를 받고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하긴 그런 남자를 잡으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갰지.'


희진이 이런 생각을 하는 직원에게 고맙다는 말로 속삭여 말하고 곧바로 몸을 돌렸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희진의 눈이 창가로 향했다.


'오래 기다려야 할 거예요. 살바체 프란트.

내가 이 쪽지를 받으면 곧장 당신에게 날아갈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죠.

이걸로 충분해요. 당신의 대한 복수는… '


차라리 말을 하고 얼굴을 보고 갔다면 희진이 이런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

쪽지를 남기고 간 살바체였지만, 희진의 눈빛은 살벌했다.


'그래요. 그렇게 기다려요.

무대에서 끝까지 내려오지 말고 내 세계도 침범하지 말고 그냥 그렇게 서서 기다려 보라고요!'


그러면서도 희진은 쪽지를 향해 눈을 돌렸다.

자신의 손에 힘을 주어 심하게 구겨진 쪽지는 자신의 마음 마냥 구겨져 있는 모습이었다.

희진의 머릿속에 '왜'라는 질문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서 살바체 프란트의 대한 생각을 완전히 비워버릴 생각이었다.


'그래. 무대에서 기다리다 주저앉던지, 지쳐 죽던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 * *


'짝!'


아침에 나가 저녁 늦게 새벽이 되어가는 시간 들어온 희진이었다.

온 집안이 희진의 걱정에 잠도 못자고 뜬 눈으로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희진이 잘못된 게 아닌가 문화부장관인 희진의 아버지와 혁진 역시 안절부절 하며

사람을 풀고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 변고 없이 멀쩡하게 들어선 희진을 보니 맥이 탁 풀리고 지금까지 걱정했던 조바심이

화로 폭발하고 말았다.


“지금 네가 뭐하는 짓이냐!

집안사람들을 총동원시켜 이 꼴로 만들고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큰 소리 치길 싫어하시는 희진의 아버지가 이렇게 큰 소리를 치는 것은 평생에 몇 번 꼽을까 한 일이었다.

거기다 손찌검이라니…

웬만한 일에서는 침착하게 화날 일도 화내지 않고 낮은 저음으로 대신하고는 했던 분이었다.


희진이 죽었다는 말에도 소리 한번 크게 내신 적이 없는 분이 아닌가…

그런데 이 날 얼마 나 마음을 졸이셨는지 말 속에 모든 게 다 드러나 있었다.


“죄송해요. 아빠“

“어디가 있었던 거냐?”

“…….”

“이 시간까지 뭐하다 들어온 거냐 묻잖아!”


희진의 새어머니가 노발대발하는 희진의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말렸다.


“그만하세요. 이렇게 무사히 왔으면 된 거 아니에요?”

“이때 까지 너 하나 때문에 몇 명의 사람들이 널 찾아 밤잠을 설쳤는지 아는 게냐 모르는 게냐?

입이 있으면 말을 해봐라! 최 희진!”

“… 이제 걱정 안하셔도 돼요. 아버지. 다신 불미스러운 일은 없을 테니까.

경호원도 다 치워 주세요. 내일 부터 연습하러 가야하니까요.”


식구들이 희진의 담담한 말투를 들으며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혁진이 곧바로 희진의 팔을 잡아당기고 물었다.


“너 뭐 알고 있는 거야? 밖에 나가서 무슨 일 있었던 거지?”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끝났다는 것만 알아.

나 때문에 돈 낭비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번에 파리로 떠날 생각이에요.”

“희진아!!”


희진의 아버지가 말도 못하고 계속 딱 부러지게 말하는 희진을 보고만 있었다.

희진의 새어머니가 희진을 말리며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저 아버지. 이제 제 앞가림 정도는 할 나이예요. 꼭 발레리나로 파리 무대에 서고 싶었어요.

그게 저의 꿈이었던 거 아버지도 잘 알고 계실 거예요. “

“…….”


희진의 고집스런 눈이 곧장 아버지의 시선과 공중에서 얽혔다.

아버지의 말없이 희진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며, 혁진이 곧바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안됩니다. 아버지. 말리세요. 희진이 못 가게 하셔야 합니다.

저번 이태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이번엔 제가 싫습니다. 아버지!”

“오빠… 이번엔 오빠가 말려도 소용없어.

아니, 무대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저 가요.

아버지도 말리셔도 소용없고 가둬놔도 소용없으실 거예요. 제 고집 아시죠?”

“여보… 말려요. 안돼요. 여보!”


희진의 표정엔 죽기를 각오한 오기와 고집이 잔뜩 들어차 있었다.

이를 악물고 버티고 서 있는 희진을 보고 희진의 아버지는 한참을 쳐다보고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넌 가족도 보이지 않는 거냐?”

“보여요. 하지만 전 제가 더 중요해요.

그 동안 마음고생 하신 거 너무 잘 알고 있어요. 죄송하고 또 죄송할 뿐이에요.

그렇지만 이번만 참아주세요. 저 이번에 안보내시면 제 영혼이 죽을 거예요.

인형처럼 사는 거 원하세요?”


으드득 희진의 아버지의 입에서 화를 잔뜩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를 닮아 저리 고집이 세누…

혁진도 자신을 닮긴 했지만 자신이 하는 말에 단 한 번도 고집부리며 반항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희진… 저 딸아이만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 하고자 하면 물불을 안 가리고 덤비는 애였다.

이거다 싶으면 죽기 살기로 덤비고 지기 싫어하는 아이였다.


“아버지. 저 아버지 닮았어요. 이 고집 아버지가 물려주신 거잖아요.”


희진이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언제 자신의 머릿속까지 들어갔다 나간 것이냐는 희진 아버지의 표정에 희진이 설핏 웃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자신을 닮아 저리 고집이 센 것을…

죽을 지도 모르는 사지로 다시 저 아이가 간다는데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파리에 내 친한 놈이 대사관에 자리 하나 차지하고 있다.

부탁해 놓을 테니 거서 침거해라. 아니면 갈 생각 하지 말고!”

“아버지!”

“여보!”


희진이 알겠다는 말을 하고 아버지의 올라가라는 말에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곧이어 식구들의 반대의 목소리가 희진의 아버지를 향해 쏟아졌다.


“어쩌자고…. 여보… 안돼요. 절대 전 희진이 못 보내요.”

“아버지. 새어머니 말이 맞습니다.”

“네 동생이다. 네가 믿지 않으면 누가 믿을 것이냐.

서울에 들어와서 마음고생 어지간히 했지 않냐.

잠시 바람을 쐬고 지가 하고 싶은 일 맘껏 하고 오면 되는 것이지. 걱정할 것 없다.

준비 철저히 시켜 보내면 되니까. “


할 말 다 했다는 표정으로 희진의 아버지는 울고 있는 희진의 새어머니와 함께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아 있는 혁진은 희진이 올라간 위층을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의 고집… 자신도 꺽을 수 없는 것인가?

끝내 밖에 나가 뭘 하고 온 것인지 말도 하지 않고 교묘히 말을 돌려 지 고집대로 밀고 나가는 수완도

자신보다 좋은 희진이었다.

또 말 하라고 아무리 다그쳐 물어도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안하면 화를 낸 자신만 바보가 되어 버리고는 했다.

한숨을 깊이 내쉰 혁진은 머리가 아파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 누가 저 앨 이길까'



남는 자와 떠나는 자[7장]


이주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희진은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 연락도 하고, 파리로 갈 준비도 하고, 예전처럼 바쁘게 생활했다.

집 식구들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우울한 표정이 말끔히 가신 희진을 보고 속이 터졌지만 참고 있었다.

희진의 말대로 경호원을 치우진 않았지만 아직까지 신변에 위험이 되는 일이 발견되진 않았다.

어떻게 아느냐고 혁진이 몇 번이나 다그쳐 물었지만 희진은 입을 꾹 다물고 그냥 안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본인이 말도 안하는 데야 혁진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또 파리로 가는 거니? 희진아?”

“응. 그럴 거야.”

“아니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파리야.

계집애 온지 한참이라면서 연락한번 안하고 말이지. 너 정말 못 된 거 알지?”


친구들의 말에 희진이 웃으며 미안하다고 말하며 가장 좋은 술을 시켰다.

다섯 명의 여자들이 앉아 있는 술자리는 뻐쩍 지근하고, 시끄러웠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희진을 닮은 여자들의 집단이니 bar 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두말 할 필요가 없었다.


“아… 이제 지났으니까 내가 하는 말인데.”


대학학교 때 부터 단짝 친구인 현정이 희진을 보고 술이 조금 취해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서두를 꺼냈다.

이미 지난 일인데 뭐 어떠냐는 시선으로 눈짓을 하는 친구들의 따가운 표정도 외면하고 현정은 희진에게 말했다.


“너 전 약혼자 시원. 권 시원 말이야. 잘 끝낸 거야.”

“왜?”


희진이 피식 웃으며 현정이와 친구들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이제 와 아무느낌 없다는 표정의 희진의 얼굴엔 그저 호기심이 조금 어려 있을 뿐이었기에,

현정이 용기를 얻었는지 희진에게 몸을 숙여오며 말했다.


“너 전에 약혼자 권 시원이 너랑 약혼하고 나서 얼마나 말이 많았는지 알아?

넌 발레 한다고 이태리로 가 있어서 몰랐겠지만, 양 소영이라고 너 알지?”

“어.”

“그 여자애가 …”


한참 말하는 현정이를 보고 누군가를 발견한 한 친구가 현정이의 팔을 끌고 가만히 있으라는 눈짓을 했다.

희진은 대충 현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있었다.

서두만 꺼내도 한눈에 무슨 일인지는 알만큼 눈치는 있는 희진이었다.

친구들의 눈을 따라 간 곳에서 희진은 그 동안 못 봤던 혜수를 볼 수 있었다.

여자 친구들과 함께 앉은 혜수의 얼굴에 전에 보이지 않던 그늘이 져 있는 것 같아

희진이 쳐다보고 이마를 찡그렸다.


“휴. 혜수 저애도 저애다. 권 시원이랑 약혼하고 저 빠진 살 좀 봐라. “

“니들 그러지마. 남자들 다 그렇지. 깨끗한 남자가 몇 명이나 되겠어. 안 그래?

술이나 마셔.”

“야. 넌 화도 안나?”

“괜히 시끄럽게 굴지 마.

나랑 시원 씨가 약혼했던 것도 너희들 말고 몇 명 알지 못하는 일이고, 혜수는 내 사촌동생이야.

화가 날것도 없고 난 아무렇지도 않아.”


희진이 다시 피식 웃고 술을 따라 마셨다.


“이게 이별주가 될지도 모른다. 기분 깨지 말고 얼른 마시기나 해“


당사자가 시큰둥하니 친구들도 재미없긴 매한가지였다.

다시 왁자지껄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이었다.

희진은 힐끔 술을 마시며 혜수 쪽을 쳐다봤다.

친구들이 웃고 있는 사이에 낀 혜수의 낯빛은 어둡고 캄캄했다.


“어머! 웬일이야. 오늘 무슨 날이야?”


현정이의 말에 다시 친구들이 몽땅 입구 쪽을 쳐다보고 입을 벌렸다.

양 소영이 튀는 옷을 입고 도도한 포즈로 입장하듯 걸어들어 오고 있었다.

옆에는 새로 사귄 남자가 끼어 있었기에 친구들의 표정은 웃긴다 재밌다 는 표정들이었다.

혜수와 정반대 어두운 곳에 앉아 있는 희진이었기에 두 사람은 희진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후후, 이 바닥이 좁긴 좁지.”

“재밌어 진다. 야~”


쿡쿡 거리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희진은 웃지 않았다.

잠시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양 소영이 혜수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꿈틀.

희진의 이마에 열 받은 표시가 새겨졌다.

배신이라면 배신이었고, 저번에 일로도 아직 혜수의 대한 마음이 좋진 않았지만

양 소영이 여자가 혜수에게 다가가 한눈에도 빈정거리는 모습은 희진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희진이 술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친구들이 호기심이 잔뜩 있는 얼굴로 희진을 따라 시선을 고정시켰다.

희진이 그 쪽으로 걸어가자 소영이 혜수에게 하는 말이 고스란히 희진의 귀로 파고들었다.


“시원 씨가 잘해주니? 근데 왜 얼굴이 그 모양일까? 안 돼 보인다? 저번보다?”

“상관할 일 아니잖아요.”


혜수가 입을 꾹 다물고 양 소영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소영은 괘심하다는 표정으로 혜수에게 친한 척 팔을 두르며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시원 씨랑 나랑… 몇 번이나 잠자리를 같이 했는지 아니?

내가 몇 번이나 시원 씨 꺼 입에 담았는지 알아? 후후….

너처럼 숙맥이 시원 씨를 감당할 수 있을까? 만족이나 할까 몰라.”

“…….”


혜수의 술잔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첫 키스를 빼앗고 자신을 팽개치고 가버린 후 아무 연락도 없는 시원이었다.

속이 뒤집히고 상상을 안 하려고 하지만 시원의 것을 입에 담고 있는 혜수를 생각하니 구역질이 밀려오고 있었다.

순간 벌떡 일어나려는 혜수는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희진의 목소리에 굳었다.


“아주 자랑이다. 양 소영. 아직도 남의 남자 가로채는 버릇은 여전한가 보네?”


깜짝 놀란 양 소영이 허리를 돌려 희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죽었다고 들었던 희진이 살아 있는 것에 소영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 분명 죽…죽었다고“

“쿡. 그러게 천국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보이니? 내가?

너 놀라는 표정 보니 반갑네.

시원 씨 너와 잤다는 거 모르는 사람 없는것 이제 보니 너 입에서 나온 거구나?

그렇게 떠들고 다니고 싶어? 여자의 대한 자존심도 없어?

하긴 네가 애초부터 언제 자존심이 있던 앤가. 그런데…

왜 시원 씨가 네가 아니고 우리 혜수를 택했을까?

너 꼬락서니를 봐. 그럼 대답이 있을 테니까.”

“너…너!”


이를 갈면서도 화가 나 소영이 희진을 쳐다보며 분을 토했다.

희진이 피식 웃으며 눈썹을 올리고 소영에게 말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버릇… 이제 좀 고치지?”


소영은 화가 나 참을 수 없었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눈이 너무 많았기에 먼저 창피함이 뼛속 깊이 파고들었다.

하나 같이 당해도 싸다는 시선이었기에 소영은 이를 갈며 남자도 두고 바를 나가 버렸다.


“언니…”


혜수가 뒤 돌아서려는 희진을 보고 불러 세웠다. 희진이 혜수를 보고 뒤돌아서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그 바보 같은 성격 고치지 않으면 시원 씨 잡기 힘들어.

나 이번에 파리 간다. 일생의 단 한번이야. 후회하지 말고 잘 선택해.”


희진이 자기 할 말만 하고는 혜수를 쳐다보고 진심을 담아 충고하고는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에게 걸어갔다.

현정이 함박웃음을 짓고 당당하게 걸어오는 희진을 반겼다.


“야~ 진짜“

“이 현정. 한마디도 하지 마."


희진이 단호하게 말하고 술을 따라 마시자, 현정이 입을 꾹 다물었다.


'무대에서 기다리겠어.'


후회하지 말고 잘 선택해…. 라니, 자신이 누구에게 충고 할 정도의 자격이 있는 걸까?


'최 희진. 정신 차려. 생각하지 않기로 했잖아?'


다시 술을 따라 연거푸 들이키는 희진을 보고, 친구들이 자기들 끼리 시선을 교환하고 이해의 표정을 지었다.

말은 안 해도 희진도 괴로운 게 분명하다는 시선들이었다.


* *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희진이 파리로 떠났다니요? “

[희진이 고집 누가 말리겠어. 하겠다는데… 아버지마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어.]


혁진의 말에 시원은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곧이어 나온 혁진의 말은 시원의 사고를 정지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무도 말을 안 해준 모양이군.

희진이 자네에게 고맙다는 말 전해달라고 했어. 그래서 전화 한 거네.]

“…. 아, 아직 위험한 거 아닙니까?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파리라는 겁니까?”

[그래. 나도 그렇게 말했지. 아무래도 이태리에서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일이 있는 듯해.

아버지도 굳이 묻지 않고 덮는 눈치시니, 내가 나서서 물어 볼 수도 없고 말이야.

묻는다고 해서 말 할 희진도 아니라는 것 자네도 알거야.

아무튼 위험은 그 사고 이후 없었다고 해도 우리로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지….

다행히 각별한 아버님 친구 분이 그 쪽에 대사로 있다 고해서 그 쪽만 믿고 있어.

조만간 아버지 허락받고 내가 들어갔다 올 생각이야.]


시원이 잠시 수화기를 귀에서 때어내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허탈함… 아직 아버지와 약조한 시간이 5일 남아있었다.

지금까지 계속 갈팡질팡… 자신의 마음도 자신이 알 수 없는 답답함의 연속이었다.

그저 혼란스럽고 모든 게 뒤죽박죽인 기분이었기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일에만 매달리고 있던 시원이었다.

그런데 희진이 파리로 갔다는 말이 자신의 머리를 크게 때려 시원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 언제 같습니까?”

[방금 막 출발했네.]

-탁


혁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원은 수화기를 놓고 코트를 낚아채 바로 실장실을 나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서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희진이 자신을 거부하는 이유, 분명 다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태리에서의 일도 자신은 들을 권리가 있지 않은가?

거기다 예전 희진과 돌아온 희진의 태도는 낯설기도 하고 차갑기도 했다.


'최 희진. 이대로 갈 수 없어. 말 하고 가. 이 꺼림칙한 기분 다 지워버리고 가라고!'


오기 일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잡고 싶은 핑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시원은 계속해서 생각했다. 자신은 알 권리가 있다. 알 권리가…


[파리 행 샤를 드골 에어프랑스항공을 타고 가실 손님께서는 속히 탑승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원이 인천공항에 들어서자 곧바로 알리는 항공안내에 시원은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며 시원은 사람들을 재치고, 희진을 찾아 빨리 눈을 굴렸다.

빨리 뛰어온 만큼 손에 땀이 차고, 가슴이 뛰었지만 시원은 쉬지 않고 게이트 앞에까지 도착했다.


“!”


그러나 시원은 그 자리에 멈춰서야 했다.

혜수였다.

혜수가 희진과 함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포옹하며 희진을 배웅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 혜수가 분명했다.

시원의 땀이 찬 손은 주먹이 쥐어졌다.


'언제까지 자신과 희진 사이를 농락하고 가로 막을 거냐. 최 혜수.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혜수를 노려보는 시원의 눈이 무섭게 일렁였다.

동시에 희진과 포옹하던 혜수가 시원을 발견하고 몸을 굳혔다.

두 눈이 마주치고, 혜수의 몸이 굳어있는 걸 느낀 희진이 뒤를 돌아 시원을 보았다.

시원은 혜수를 지나치며 희진의 손목을 단번에 움켜잡았다.


“진. 얘기 좀 해.”


희진은 시원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고 입술을 깨물고 있는 혜수를 바라보며 시원에게 말했다.


“지금 시원 씨가 잡을 사람은 내가 아니고 혜수예요.

난 어차피 이제 과거의 여자고, 난 발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알죠?

더 이상 시원 씨가 나에 대해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날 살려준 걸로 이제 모든 인연은 끝내기로 하죠. 고마웠어요. 시원 씨.”


시원은 기가 차다는 눈으로 살짝 웃고 조금의 서운함도 없는 표정의 희진을 보며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고 있었다.


“말해봐. 도대체 이태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돌아온 후에 변한건지 말이야.”


시원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그제야 희진이 조금 떨리는 눈을 하고 시원을 쳐다보았다.

시원의 눈이 곧바로 희진을 꿰뚫을 것처럼 쳐다보며 시선을 놓지 않고 있었다.


“….하등 시원 씨에게 도움이 안 되는 일이예요.

과거를 그냥 묻어두고 싶은 마음이고, 시원 씨와 전 인연이 아니었다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

“하! 난 최소한 최 희진과 내가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동료인줄 알았어.

서로의 대한 신뢰가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 말해봐.

내게 한번이라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 본적은 있었나?”


희진이 시원의 말에 똑바로 시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건 시원 씨도 알고 있는 대답이군요.

시원 씨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겐 최소한의 신뢰와 믿음만이 있었을 뿐이에요.

굳이 사랑을 원한다면 가까운데서 찾길 바라요. 안 잡을 건가요?”


희진이 눈으로 시원을 보며 물었다.

혜수가 뒤돌아 걸어가며 울고 있었기에 시원은 갈등하며 희진을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희진의 눈에 자신은 없었다.

시원은 그 사실을 그 짧은 시간 안에 깨달았다.

천근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시원이 희진에게서 몸을 돌려 공항을 나가기 시작했다.

희진이 시원의 허탈한 걸음을 쳐다보고 있을 줄 알고 있었지만,

자존심에 뒤 돌아 보지도 잘 다녀오라는 말도 건네지 않고 시원은 걸었다.

인천공항의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가던 시원은 혜수가 택시를 잡는 곳에 멍하니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제길!”


시원이 혜수에게 걸어가 팔을 잡았다.

놀라 헉 소리를 내는 혜수를 데리고 걸어가며 시원이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 * *


-파리 (Paris)


저녁 8시 희진은 대사관으로 가지 않고 가장 가까운 최고급 호텔 CRILLON로 들어섰다.

파리… 어쩐지 공기부터 틀리다는 생각에 희진이 호텔에 커텐을 치고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화려한 레온사인에 에펠탑이 오색으로 반짝이며 이곳이 파리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희진은 곧장 짐을 대충 정리하고 샹젤리제거리로 향했다.

저녁이 되어 개선문에 조명등이 켜져 웅장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


희진은 샹젤리제거리를 오랜만에 밝아진 얼굴로 줄지어선 가계들을 구경하며,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간단한 주스와 함께 식사를 해결했다.

그저 이렇게 파리 사람들과 섞여 걷는 것만으로도 파리사람이 된 듯 행복했다.

예전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당시에도, 희진은 밀라노 거리를 먼저 구경하고 이곳저곳 짬을 내 돌아다니고는 했었다.

희진은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에 있었던 때를 회상하다 살바체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얼굴을 굳히며 일어섰다.

생각하지 않기로 했지만, 이렇게 때때로 불쑥 찾아드는 살바체의 얼굴이 희진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는 했다.


'쪽지 한 장 놓고 가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나요?

당장 기뻐서 달려갈 줄 알았나요? 하…천만에요. 살바체 프란트… 난 절대 가지 않아.'


같은 유럽 안…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사람들의 모습이 그와도 어딘지 비슷한 모습이 많이 보였다.


'그래. 살바체의 새어머니 헤지나가 프랑스 인이었어.'


희진은 개선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다시 살바체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머리를 저었다.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개선문 전망대에서 바라본 샹젤리에 거리는 안보면 평생 후회할 만큼 장관이었다.

희진은 기지개를 켜고 몸을 빼며 방긋 미소 지었다.

파리 사람들이 자신의 흑조 오딜을 바라보고 열광할 것이었다.

벌써부터 사람들의 갈채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백조의 호수 3막 오딜의 32회전 푸에테(Fouette)…

희진은 자신이 푸에테를 도는 모습을 상상 했다.

바로 그 32회전의 푸에테를 이곳 파리 발레전용극장인 오페라 갸르니에(L'Opera Garnier)에서 하게 될 것이었다.

2000명의 관중이 자신을 바라보며 환호할 것이었다.

한참, 뿌듯한 미소를 짓던 희진의 눈이 한 공간에 멈춰 흐릿하게 변했다.

무대에서가 아닌, 바로 '교황의 섬' 살바체 앞에서 돌았던 푸에테를 희진은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가오던 살바체의 눈동자…

다시 한 번 믿기지 않는 다는 표정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오던 살바체의 모습과

어지러운 중에도 살바체와 돌면서 마주쳤던 그 눈빛…

자신을 움켜잡았을 때, 놀랐던 가슴…

희진의 심장이 다시 쿵쿵 소리를 내며 뜀박질 했다.

다른 관광객들이 11시 마감으로 개선문을 내려가는 중이었지만,

희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날리고 서 있었다.



-다음 장에서...차이코프스키 - 교향곡 제6번 나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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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 공주완결소설②〃

번호: 227

제목: 이태리의 살바체(4막-마지막 게임)

글쓴이: 지영공주V

조회: 425

날짜: 2005/03/07




##수정인물이름수정. 명칭수정. 오타수정. 문법수정. 내용수정 (틀린곳은 꼬리말로...)##


※4막-마지막 게임※





새로운 사람들[1장]



-이탈리아 밀라노 (Italy Milano)


이탈리아 밀라노 '체르니' 호텔에 개관식.

유명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인 가운데 살바체는 가운데 앉아 밝은 조명등이 밝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살바체는 턱 선을 여유롭게 만지며 호텔경영을 맡고 있는 죠슈아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에어컨디셔너, 위성 텔레비전, 직통전화, 미니 바, 개인 컴퓨터 시설이 모두 갖추어져 있을 뿐 아니라,

밀라노의 역사적인 거리에 있는 전통 가옥들로 둘러싸인 전통 이탈리안 양식으로 지어

조화를 이루어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객실 수는 92개이며, 엘리베이터가 3개 운영될 예정이며, 외국 국빈을 모시는데도 소홀함이 없을 것입니다.”

“…….”


수고했다는 한마디도 죠슈아가 말하는 동안 고개도 한번 끄덕이지 않는 살바체였다.

죠슈아는 진땀을 흘리며 6개월이란 시간동안 자신이 전 생애를 걸고 만들어낸 걸작이 불이 켜지길 기다렸다.


'탁!'


푸른색의 조명등과 함께 호텔안 모든 불이 단 한 번에 켜졌다.

사람들의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장관이라는 표정으로 터져 나왔다.

살바체만이 일어서서 박수하는 사람들 속에 앉아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어디 마음에 안 드시는 곳이라도…”


죠슈아가 떨리는 마음으로 살바체의 생각하는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제야 살바체의 청색의 눈이 곧바로 죠슈아를 향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 잘 지어났군. 100년 후에도 끄떡없도록 지었겠지?”

“예? 무, 물론입니다.”


전에 체르니호텔을 짓기 위해 5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에 비하면 6개월이란 무척 짧은 시간 이었다.

터무니없는 시간임에도 불과하고 살바체의 표정은 당연하다는 눈빛이었다.


“그래.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그제야 살바체가 죠슈아의 어깨를 두들기고 사람들과 함께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죠슈아는 진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살바체를 따라다니며 일일이 7층의 건물을 하나씩 돌아 설명을 했다.


“예약상황은 어떤가?”

“좋습니다. 3/2정도가 예약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


살바체가 7층까지 돌아본 후, 죠수아를 보며 말했다.


“마지막까지 그럼 수고해.”

“개관식 축하 파티가 있습니다만, 참석 안하실 생각이십니까?”


살바체가 오고 안 오고에 따라서 개관식이 주목을 더 받을 수 있기에

죠슈아는 필사적인 눈으로 살바체를 잡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살바체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죠슈아의 어깨를 다시 한 번 힘주어 잡고

모든 일이 끝났다는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있었다.


“살바체 프란트님!”


죠슈아의 잡는 말도 무색하게 곧바로 살바체의 옆에 서 있는 무표정한 경호원비서에 의해 자동으로 문은 닫히고 말았다.

허탈한 표정으로 죠슈아는 뒤에 중요인사들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며 재빨리 표정을 감추었다.

살바체는 '체르니'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로비로 나가는 중이었다.

곧이어 로비를 나가던 살바체의 걸음이 멈추었다.

앞서 들어오며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웃고 서 있는 사람은 분명 알 체논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야.”

“돌아온 지 언제인데 소식한 장 없는 건가. 통 연락이 되어야 말이지.”

“…….”

“자. 내가 누구를 데려왔나 보라고. “


순간 살바체에 눈에 극히 드문 감탄사가 터졌다.


“젠느?!”

“살바체 프란트! 정말 오랜 만이예요. 그렇죠?”


흐뭇한 표정으로 서 있는 체논을 두고,

살바체는 젠느를 꽉 안고 넓은 '체르니' 호텔 안 중앙에서 빙그레 한 바퀴 돌렸다.

젠느라는 아름다운 이태리여인은 현 이태리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조카이기도 했다.

세개의 민영 방송을 소유하고 있는 세계적인 갑부이기도 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힘은 살바체 역시 무시 못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지난 3년 유학으로 만나지 못한 것을 빼고는 체논과 의기투합해 허물없이 좋아하는

단 한명의 여인이기도 했다.


“하하하. 그만 좋아하지. 살바체. 너무하는 군. 난보이지도 않는 건가?”

“도대체 언제 이탈리아로 돌아 온거지? 그래. 영국에서는 어땠어.”

“좋았어요. 물론 거기서도 살바체의 악명은 익히 들었고 말이죠.”


두 사람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체논이 이마를 짚으며 살바체 프란트와 젠느 베를루스코니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제발. 사람 이목을 보라고. 여기서 나가는 게 급선무야.”


살바체가 체논의 말에 웃으며 젠느의 손을 잡아 대기해 있는 자신의 차로 이끌었다.

체논이 고개를 저으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 투덜거렸다.


* * *


-파리 (Paris)


“진!”


파리의 요람 시테 섬에 위치하는 노틀담 성당 안 '장미의 창'이라는 스탠드글라스가

고운 햇살을 통해 성당 안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희진은 안으로 희진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겔체르 파벨를 보며 어서 오라는 손짓으로 마주 손을 흔들었다.


“뭐하고 있었어요? 설마 곱추 카지모도를 상상하며 집시 에스멜라다가 된 상상을 한 건 아니겠죠?”


희진은 활짝 웃으며 자신 옆에서 웃고 서 있는 금발의 겔체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요? 그럼 안 되나요?”

“그럼요! 당연히 안 되죠. 나의 오딜 이잖아요.

꼽추 카지모도에게 빼앗긴다면 왕자로서 위신이 서지 않는다고요.”

“쿡쿡… 겔체르. 내 오딜이란 말은 맞지 않아요. 당신에겐 오데트가 있으니까요.”

“오데트가 오딜이고, 오딜이 오데트 아니었나요? 하하 농담이었어요.

물론 오데트를 맡은 레냐니도 아름답고 무척 잘하는 발레리나라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진이 연기한 오딜을 사람들이 본다면 그냥 단 한 번에 저처럼 마음을 빼앗기고 말걸요.”

“고마와요. 그런 칭찬을 지그프리트 왕자님에게 들으니 정말 황홀하네요.”


희진이 농담이 섞인 목소리로 발레리노 겔체르에게 말했다.

겔체르는 그런 희진의 초롱초롱한 검은 눈을 보며 다정하게 손을 잡고 노틀담 성당을 나와 물었다.


“뤽상부르 공원에 가서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고 들어갈까요?”

“차 한 잔 사주겠다는 말이 바로 그거였나 보군요.”

“하하. 물론 그건 아니었지만, 왠지 진이 그걸 더 좋아할 것 같아서 말이죠.”

“맞아요.”


희진은 두말하지 않고 겔체르와 함께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이동해

파리학생들의 데이트 코스이기도 한 뤽상부르 공원 벤치에 앉아 겔체르가 뽑아오는 따뜻한 커피를 받았다.


“떨리고 걱정되는 것 같아서요. 처음에 모두들 그랬거든요.

오딜을 맡은 동양여자 무척 연습 벌레이고 사귀기 싶지 않다고 말이죠.”

“그랬나요?”

“이제야 다들 진이 긴장해서 그런 걸 눈치 챈 모양이에요. 반성한 눈치이니 용서해 주세요.”

“쿡, 걱정 말아요. 겔체르. 내 잘못도 있으니까요.”


희진의 쾌활한 대답에 겔체르가 금발을 흔들며 하하하 통쾌하게 웃었다.

희진은 겔체르의 에메랄드의 눈과 금발을 보며 누군가를 생각하듯 잠시 눈을 흐렸다.


“이제 조금 후면 떨어지겠군요. 정말 아쉽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거란 생각이예요.

좀 더 친해 질 기회가 있었음 싶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겠죠?”

“아직… 공연 후에 일정은 정하지 않았어요. “

“콜을 받지 않았나요?”


희진이 잠시 뜸을 들이고 겔체르에게 말했다.


“받았어요. 하지만 한 곳에 머물러 있기엔 제가 너무 부족하니까요. “

“너무 겸손한 것 같은데요?”


겔체르가 찡끗하며 희진에게 웃어 보였다.

희진은 겔체르를 보고 한숨을 쉬며 지나가는 연인들을 쳐다보고 잔을 들어 마셨다.


“저기…진“

“네?”

“난 이번 공연이 끝난 후에 이탈리아로 무대를 옮길 생각이에요.

생각 있으면 이탈리아에서 생활할 생각은 없어요?”


희진은 대답 없이 싱긋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겔체르는 나중에 대답을 듣기로 하고 희진을 쳐다보다 자신도 커피의 향기를 코끝으로 음미하며 한 모금 입에 담았다.

자연스럽게 겔체르의 시선이 희진에게 다았다.

긴 머리를 돌돌 말아 올려 희진의 목선이 그대로 살아나 여성스러움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 눈은 착 가라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꼭 한번은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


겔체르는 희진의 말 없는 모습에 작은 소리로 부탁하고 시선을 거뒀다.


* * *


-로마 (Roma)


아침 햇살 사이로 흰 커튼이 바람의 미풍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이탈리아 전형의 큰 침대 위 흰 시트 사이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땀을 흘리고 있는 살바체의 모습은 고통에 젖어 안쓰러운 땀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무척 힘겨운 몸짓으로 뒤척이던 살바체가 누군가를 불러 세우려는 입 모양으로 말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진!”


순간 벌떡 일어선 살바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확인했다.

너무 생생한 느낌이었다.

손에 잡힐 듯한 희진이 서서히 멀어지며 자신을 경멸하는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하면 손을 뻗어 그 오해의 눈빛을 풀어주고 안아줄 수 있었는데,

희진은 그대로 등을 돌려 황급히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 달려가 버렸다.


“…….”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이 소실되었다.

다시는 희진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신을 잠식했다.

처음에 가졌던 희망조차도 지금은 희박하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젠장. 내게 이런 인내심이 있었다니“


말 그대로 자신에게 이런 인내심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살바체는 자기 자신이 믿겨지지 않았다.

이런 꿈을 꾸고 일어날 때면 살바체는 다시 한 번 그 인내심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느끼고는 했다.


'진 당신이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어. 날 지옥에 던져 넣은 후 다시 건져 줄 사람도 당신이라는 걸 말이야.'


침대에서 일어난 살바체의 눈은 언제 괴로운 눈빛을 했었는가 싶을 정도로 말끔히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눈부신 탄탄한 몸으로 살바체는 침대에서 일어나 곧장 욕실로 향해 차가운 물에 자신을 넣고, 눈을 감았다.

아침에 하는 차가운 생수욕은 하루를 시작하는데 이젠 없어서는 안 될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가운을 입으며 간단한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고 내려놓았던 살바체는

갑자기 들려오는 여자의 음성에 몸을 돌렸다.


“살바체. 오랜만에 멋진 당신 몸매를 보게 되다니 일찍 온 보람이 있는데요?”


맑은 눈으로 자신을 짓궂게 쳐다보는 여자는 젠느 베를루스코니였다.

일요일 아침미사를 보기위해 젠느가 살바체를 데리고 가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


“젠느. 갑자기 불쑥 나타나는 버릇은 여전하군.”

“후후, 그럼요. 빨리 준비해요.

유명인사가 미사 시간에 늦어 헐레벌떡 성 베드로 성당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재밌겠지만,

전 그런 사진에서 제외되고 싶으니까 말이죠.”


살바체가 미사에 입기위해 미얀이 마련해둔 옷을 걸쳐 입으며, 젠느에게 말했다.


“아직 시간이 넉넉한 걸로 아는데, 내가 데리러 갈 생각이었거든.”

“영국에서 신사들을 너무 많이 만났더니, 건방진 이탈리아 남자들이 무척 그립더군요.

공주처럼 떠받들어지는데 진력이 났어요. “


살바체가 탄탄한 어깨에 흰 와이셔츠를 껴입으며 쿡쿡 웃음을 터트리고 젠느에게 말했다.


“젠느. 당신이 공주대접을 받았다니… 내 눈으로 보지 못해 아쉬워.”

“환경에 따라 왈가닥도 달라질 수 있는 거라고요. 나도 내숭에 대해 많이 배워왔고 말이죠.”

“기대해 보지.”


젠느가 곧바로 와이셔츠를 껴입는 살바체에게 들고 있던 마이를 와이프인 냥 껴입혀 주었다.

살바체의 눈과 입술에 장난기어린 감정이 스며들었다.

젠느가 그 눈을 보고 눈을 흘기며 다 입혀준 뒤 어깨를 탁탁 치고 아들에게 말하듯 살바체에게 말했다.


“다 되었어요. 이제 가도록 하죠.”

“앞장서지. 공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인 젠느는 웨이브진 검은 머리를 도도하게 흔들고 먼저 앞서 나갔다.

살바체가 쿡쿡 웃으며 젠느와 함께 길을 서둘렀다.


* * *


-파리 (Paris)


1875년 나폴레옹 3세 때 건축된 오페라 가르니에 (L'Opera Garnier).

오늘 이곳에서 '백조의 호수' 발레가 공연될 예정이었다.

많은 귀빈들과 사람들이 독특한 의상과 품위 있는 옷들을 입고 청장에 샤갈그림의 장식을 감탄하고 쳐다보며

안으로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떨려요?”

“네.”

“나도 떨려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건 알죠.

오늘 우리 공연이 엄청난 성공을 할 거라는 것. 또 오딜이 가장 돋보일 거라는 것도“

“하나 도움이 되지 않는군요. 겔체르. 더 떨려요.”


겔체르는 항상 당당하고 강한 여성인 희진이 관객석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흔들리는 눈빛을 하자

사랑스럽다는 생각에 희진의 볼에 입을 맞추고 곧장 떨어졌다.


“행운을 빌어요.”


도망치듯 가버리는 겔체르를 보며 희진은 눈웃음을 지었다가 다시 어두운 시선을 했다.

어딘지 모르게 저 해맑은 웃음은 살바체를 닮아 있었다.

부드러운 성격과 남을 배려하는 성격은 닮지 않았지만,

가끔 해맑게 웃는 모습이나 옆모습을 보면 살바체를 떠올리게 했다.

살바체와 한국에서의 그 날도 석 달이란 시간이 지나 있었다.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 속에 희진은 겔체르가 말했던 것처럼 연습과 발레에만 전념하고

다른 것은 일절 생각하기를 거부했었다.

하지만, 겔체르를 바라보고 문뜩 살바체의 모습과 비교하며 닮은 곳을 찾는 자신을 돌아보고

희진은 그 동안의 노력이 허사였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겠다는 쪽지하나 달랑 두고, 3개월 동안 소식도 없는 살바체가 아닌가?

희진은 문득 그 생각을 하며 분개했다가 갑자기 머리에 강한 충격을 먹었다.


'뭐야. 그럼 소식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야?'


희진은 화난 표정을 했다가 혼자 허탈한 표정을 다시 했다.

그래. 어차피 인정해야 할 일이었다.

그 동안 살바체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는 암시, 어쩌면 자신을 찾는 살바체의 어떤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 아마 여기 와 있을지도…'


희진의 심장이 다시 두근두근 뛰기 시작한 것은 그 때였다.

하나 둘 사람들이 자리를 매우고 있는 모습을 보며 희진의 심장이 한 없이 높이 뜀박질했다.

분명 어디에선가 자신의 소식을 접하고 있을 살바체 프란트 였다.

다시 다가올 기회는 오늘 같은 날이 아닌가? 희진의 눈빛이 반짝이며 생기있게 빛이 났다.


“진~! 언제까지 관객석만 쳐다보고 있을 거야?!“


어이없는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단장의 따가운 눈총에 희진이

죄송한 표정을 지으며 관객석을 쳐다보던 눈을 돌렸다.



오딜[2장]


백조의 호수 1막의 무대가 올랐다.

겔체르 파벨이 지그프리트 왕자 옷을 입고 먼저 무대로 뛰어 들어갔다.

우레 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마을 축제를 나간 지그프리트 왕자는 광대와 호위들과 함께

마을 처녀들과 춤을 추며 뜨거운 무대에 열기를 돋웠다.

희진은 무대를 긴장해 쳐다보며 빠르게 다음 장면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동료 발레리나 레냐니의 어깨를 잠깐 잡았다 놓으며 눈으로 격려했다.

지그프리트 왕자가 사냥을 떠나기 직전 1막을 마치자 처녀 역을 맡은 단원들이 뛰어 들어와

곧바로 흰 백조의 튀튀로 갈아입어 무대 뒤도 엉망이 되었다.

이제 2막 중반… 무대는 바뀌어 어슴푸레한 달빛이 비치는 호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희진은 떨리는 가슴으로 3막이 오르길 기다리고 간단한 클래스를 하며 초조한 가슴을 진정시켰다.

발레리나 레냐니는 백조가 깃털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 목을 둥글게 돌리는 움직임과

접혀있는 날개처럼 양쪽으로 팔을 굽히는 동작, 날개 치는 듯한 가슴, 날개 끝이 파르르 떨리는 섬세한 움직임,

다리의 물방울을 톡톡 털어내는 모습 등 백조의 동작에서 응용한 동작을 풍부하고 아름답게 잘 표현해 내고 있었다.

백조 오네트와는 반대로 요염하고 강한 흑조 오딜 역을 희진은 해내야만 했다.

흑조 오딜은 백조보다 더 힘들고 더 고난위도의 동작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흑조 오딜을 하는 발레리나 역시

스타급의 프로여야만 했다.


“진! 준비해!”


관장이 클래스를 하고 있는 희진에게 소리쳤다.

희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3막이 올라 자신이 나갈 때를 떨리는 가슴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슬쩍 관객석으로 시선이 가던 희진이 눈을 빛내고 다시 무대를 쳐다보며 뛰어 들어갔다.

사람들이 무대에 오른 흑조를 보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제 곧 32회전 푸에테의 화려한 테크닉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진은 머릿속에 있는 모든 것을 비워 그 동안 연습한 기량과 연기력을 발산해 손과 발끝 그리고 몸동작에 신경 써 움직였다.

힘 있는 매혹적이고 도발적인 희진의 움직임에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지크프리트왕자까지 오딜에게서 시선을 때지 못했다.


'이제!'


사람들의 숨죽인 기침소리가 들릴 만큼 장내가 조용해 졌다.

푸에테 도중 박수를 치는 것은 금물이었다.

푸에테를 하다 박수소리에 균형 감각이 깨질 수도 있기 때문에 객석은 조용하게 숨을 죽이고

희진의 섬세하면서 강한 환상 같은 회전을 보며 박수를 치고 싶은 마음을 뒤로 미루고

오딜을 연기하는 동양인 발레리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10, 20…. 30,31,32!'


완벽한 32회전 푸에테를 마치자, 휘파람 소리와 우레보다 큰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오페라 가르니에 (L'Opera Garnier)가 뜨겁게 달구어졌다.

가장 큰 고비를 넘긴 희진이 날아오를 것 같은 마음으로 다시 눈을 빛내며 남은 연기에 열중했다.


* * *


-로마 (Roma)


희진이 푸에테를 돌고 있을 그 시간.

살바체는 친구 체논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말이 없이 착 가라앉아 있는 살바체의 눈치를 슬쩍 보며 체논이 술잔을 음미하는 포즈를 하고 살바체에게 물었다.


“대부가 그러더군. 요즘 그 소문이 사실이냐고 말이야.”

“그래서?”

“뭐 내가 알 수가 있나. 자네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간 것도 아니고,

이봐.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나도 대부와 너 사이에서 눈치 보는 거 지겨운 몸이니까.”


체논이 이왕 말 나온 김에 확실하게 묻겠다는 표정으로 술잔을 내려놓고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대부와는“

“뭐가?”

“몰라서 묻나? 지금 그 여자 하나 때문에 대부와 너 사이가 틀어진 거라 생각하기엔 미심적은 군데가 한군데가 아니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살바체는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으로 술잔을 들고 빙글 천천히 돌리며 말이 없었다.

체논이 답답해하고 있다는 것을 살바체 역시 알고 있었지만,

양자인 체논에게 굳이 자신이 친아들이라 밝혀 같은 지옥에 두고 싶진 않았다.


“정말 말 안 할 건가?”

“내 여자를 죽이려고 했어.”

“단지 그 뿐이라는 말이야?”

“그래. 뭐가 더 필요하지?”


살바체가 아무런 표정 없이 도리어 이렇게 물어오자 체논은 할 말이 없어졌다.

뭔가 있는데 말을 안 하니 알 도리는 없고, 그렇다고 대부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체논은 답답하지만, 우선 앞에 있는 술을 들이켜 화를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혼자인데?”


체논이 지나가는 말투로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살바체에게 물었다.


“데리러 갔던 거 아니었나? 한국으로 날아갈 정도라면 분명 무언가 건져 왔을 거라 생각했지.

천하에 살바체 프란트가 그냥 돌아오다니. 혹시 퇴짜라도 맞은 거야?”

“쿡쿡. 정확해.”

“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체논이 웃음기 있는 살바체의 표정을 보았다.

그러나 다시 그늘져 오는 살바체의 눈에서 슬픈 눈빛을 찾아내고 체논이 다시 술을 들이켰다.


“말해봐. 이제 어쩔 생각인가? 넋 놓고 앉아 있다고 일이 해결되진 않아.”

“알고 있어. 지금은 그냥 놔두게. 언론이야 떠들어대라고 해. 나에겐 그게 더 유리하니까“

“참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요즘 자네 머리를 좀 빠개보고 싶어진다고. 아나?”

“후후“


체논이 화난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살바체에게 이를 갈며 말했다.


“그 재수 없는 웃음소리도 집어치우라고“

“체논“

“…….”


체논이 살바체가 자신을 이름을 부르는데도 화난 척하며 술잔만 쳐다보고 입을 닫았다.

그러나 살바체는 체논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혼자 말하듯 독백을 했다.


“진은 알까?”

“뭘?”


체논이 그런 살바체의 눈빛이 다른 어떤 것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느끼며 안쓰러워 한마디 보탰다.


“아직 무대에서 자신이 내려가지 않았다는 것, 아직 우리의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

아직 승자가 완전하게 가려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현재도 진행 중이라는 것.”

“참나… 자네 취했군.”

“그래. 하지만 오늘은 좀 취해도 되겠지? 자 한잔 더 하지.”


살바체가 체논의 빈 술잔에 독한 술을 따라주며 자신 역시 가득 따르고 건배하자는 눈을 하며 잔을 높이 들었다.

체논은 뜬금없는 살바체의 행동에 계속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진의 성공적인 파리공연을 위하여“


살바체가 그 말과 함께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체논은 살바체의 표정을 보며 술잔을 마시지도 놔두지도 못하고 잠깐 멍해졌다.

살바체가 안 먹냐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니,

그제야 체논이 정신을 차리고 단숨에 술잔을 비고 내려놓고는 이를 가는 소리로 살바체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빌어먹을 여자는 어쩔 생각이지?”

“내 여자 욕하지 마. 네가 아니었다면 단번에 죽여 버렸을 거다.”


살바체의 눈빛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반짝 빛을 내며 무섭게 일렁였다.

체논 역시 많지 않은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그 여자 어쩔 생각이냐고 물었다.”

“…….”


살바체가 체논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벌떡 소파에서 일어나 어두운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쳐

창문을 활짝 열고 술기운에 뜨거운 얼굴을 식혔다.


“이번 게임의 승자는 말이야. 체논. 바로 이 인내심이 약한 자가 지는 게임이지.

벌써 내 인내심은 바닥을 치고 있어. “

“네가 이렇게 낭만주의였는지는 몰랐어. 좋아. 좋다고.

인내심이 바닥이면 데려오면 되겠네. 예전처럼 납치라도 해달라면 내가 해주지. 어때?”


체논이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살바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은근하게 제의했다.

그러나 살바체는 뒤 돌아 그런 체논을 응시하고 슬쩍 입가의 한끝을 올리고 말했다.


“그럼 내가 진다고. 이 게임의 승패는 누가 달려가고 누가 달려오느냐 하는 것이니까.”


* * *


-파리 (Paris)


“결혼날짜를 잡았다니 축하해. 혜수야. 그래. 공연은 대성공이었어.

글쎄… 아직 뭐라고 말하긴 일러. 어떻게 할지 이제 정해봐야겠지.

어디 조용한데 여행이라도 갈까 생각 중이야.”


혜수의 결혼소식이 공연이 끝나자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전해졌다.

한 달 후 결혼한다는 시원인데도 희진의 눈빛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이했다.

혜수와 희진은 서로 시원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곧이어 꽃을 한 아름 안고 있는 겔체르 파벨이 희진을 찾아 안으로 들어와 꽃다발을 희진에게 떠 안겼다.


“진. 당신 거예요. 오늘 마지막까지 정말 잘해냈어요.”

“고마워요. 겔체르. 당신 역시 내가 본 지그프리트 어떤 왕자보다 힘이 넘치는 진짜 왕자였어요.”

“하하, 그 말 진심이길 바랍니다. 진.”


잠시 두 사람의 정적이 흐르자, 진은 겔체르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하는 겔체르가

방금 무대에서 힘 있게 연기하던 지그프리트 왕자였다고는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진. 옷 갈아입고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저번 일에 대해 상의도 할겸“

“쿡, 미안해요. 겔체르. 그건 다음에 해야겠어요.

오늘 마지막 공연을 보러 오신 대사님 식구 분들과 벌써 선약이 되어 있거든요.”

“아, 그렇군요.”


아쉬워하는 눈빛의 겔체르 였지만, 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보내고 의자에 털썩 꽃을 안고 앉았다.

하나하나 꽃 속의 있는 메모지를 찾아보지만, 어디에도 메모지 한 장 보이질 않았다.


'살바체 프란트…'


진에 눈에 분노가 깊이 새겨졌다.

설마 설마하며 했는데 공연을 하는 시즌동안 단 한 번도 살바체는 오지 않았다.

아니, 마지막 이 날은 분명 확신하고 있었는데… 오늘도, 살바체의 모습은 없었다.


'그래요. 확실히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았군요. 거기서 죽었나 보군요!'


희진이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흑조의 튀튀와 머리장식을 빼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사람들이 축하해 주고, 열광해 주고, 칭찬해 주는데도, 살바체 때문에 기뻐할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이 이 사람 하나 때문에 이런 기분이 들어야 하는지, 희진은 그것조차 맘에 안 들어 화가 나 버렸다.

모든 게 살바체의 탓인 것 같고, 모든 게 살바체 때문인 것 같았다.


'난 기회를 주었어요. 살바체 프란트. 당신이 기회를 저버린 거야.

다시 생각하는 나 자신도 수용하고 받아 들였는데, 당신은 끝까지 날 실망시키고 마는군요.

그래요 그 지옥 속에 평생 갇혀 지내라고요. 다신…다신…'


생각하지 않겠다 다짐하며 앞에 거울을 응시하는 희진 이었지만,

실망해 있는 눈은 분명 살바체를 생각하는 눈동자였다.

희진은 곧바로 코트를 걸쳐 입고 만류하는 사람들을 피해 밖으로 나와 버렸다.

싸늘한 파리의 공기에도 희진은 추운지도 몰랐다.


'날 잊은 거야. 나와 한 약속도 잊어버리고 무대에서 내려와 버린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는 4개월 동안 아무 연락도 없을 수가 없어.

그 쪽지도 날 놀리려고 했던 수작이 분명하다고!'


호텔에서 눈을 뜨고 없었던 살바체에게 분했던 감정이 고스란히 다시 살아나 화를 돋웠다.

그때 쪽지로 인해 접어두었던 감정이 다시 폭발해 피가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걷고 또 걸으면서 희진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저절로 분해서 눈물마저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앞을 눈물 때문에 잘 보고 걷지 못했던 희진이 장신의 행인에게 어깨를 부딪쳐 휘청하고 몸을 갸우뚱 했다.


“Vous n'avez rien mademoiselle? (아가씨 괜찮아요?) “


잡지가 나열된 갑판 대에서 장사를 하는 할아버지가 프랑스어로 희진에게 물어왔다.

희진이 그 할아버지를 힐끗 쳐다보고 감사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이며 괜찮다는 말을 프랑스어로 속삭였다.

그때, 갑판 대에 세워둔 신문이 나열된 곳을 힐끗 지나치던 희진의 눈에 유럽잡지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살바체 프란트?!'


뜻밖의 곳에서 살바체를 발견한 희진이 유럽잡지를 집어 들고 앞면에 실린

기사의 페이지를 넘겨 쳐다보고 그대로 읽어 내렸다.


[세계적인 갑부와 프란트 家 만남 - 아름다운 피앙세가 될 세계적인 갑부의 조카인 젠느

베를루스코니와 살바체 프란트가 나란히 성 바오로성당으로 들어서는 모습이다.]


희진은 강하게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해졌다.

그저 멍하니 그 유럽잡지책을 들고 한참을 미동도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차츰, 차츰… 바들바들 손이 떨려오고 오한이 든 것처럼 온몸으로 떨림이 눈에 보이도록 번져갔다.

살바체가 세계적인 갑부의 조카라는 여자와 성 바오로 성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최근 사진이었다.

살바체의 팔에는 자연스럽게 그 여자의 손이 끼워져 있었고, 두 사람은 사랑이 긷든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희진은 살바체의 웃고 있는 표정을 보고 '하'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남들 앞에선 잘 웃지 않고 웃어봐야 냉소가 다인 남자가 아닌가?!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살바체가 저런 식으로 웃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꾸미지 않은 진짜 즐거워하는 웃음이 살바체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희진은 심한 배신감이 뼈속 깊이 자신 안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살바체 프란트 나쁜 자식!!”


희진은 대로변인데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잡지책을 구겨 살바체의 얼굴인 것처럼 짓이겼다.


“아악!”


흑조 오딜이 파리 한 복판에서 악에 바친 새의 울음처럼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 * *


'사랑해. 진'

'나의 진'

'무대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어.'


희진은 대사님 식구들과의 약속도 미루고 무조건 보이는 호텔에 들어가 터질 것 같은 속을

진정 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밤을 꼬박 새워 얻은 것이라고는 화병에 돋는 미열뿐이었다.

장시간 긴 시즌으로 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고, 자연히 몸살까지 겹쳐 몸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그런데도 몸은 쉴 생각도 없이 눈은 감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화가나 뒤척이고 신경질 적으로 내지르는 '헉, 헉' 하는 숨소리가 계속 방안을 맴돌았다.

나중엔 지치면 흐어엉하고 분해서 눈물도 쏟아졌다.

이렇게 자신이 심약하고 바보 같은 여자였나 싶었지만 질투라는 강한 감정은 열정적인 희진을 가만두지 않았다.


'하! 질투? 질투라고?! 질투해서 화나는 게 아니야. 그 개자식이 약속을 어겼잖아.

행복하지도, 천국에도 있지 않고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겠다 말해놓고 희희낙락하고 있잖아!'


희진은 자신의 감정이 질투에서 유발한 화병이라는 것을 부인했다.

자존심이라는 것이 그것을 기어코 인정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희진의 자존심은 무너져 내릴 테니까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거의 24시간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희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눈에 각오가 서려 앞에 살바체가 있다면 그 눈빛 하나 만으로 죽일 수도 있을 눈빛이었다.


'누구 맘대로! 멋대로 무대에서 내려온단 말이야.

가만 안 둬. 절대 행복하게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여기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 누워 있어 보았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러는 건 자신만 손해였다. 차라리 앞에 서서 당당히 따져 주리라…!


* * *


-로마 (Roma)


이태리 로마 프란트 家 저택 서재에 앉아 있는 살바체는 뚫어지게 전화기만 노려보며 소식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살바체의 손에 희진의 공연 성공소식의 파리 신문이 들려 있었다.


[아가씨가 사라지셨습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인터뷰도 뿌리치고 나간 희진이 지금 이틀이 지난 후에도 여태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오페라 갸르니에(L'Opera Garnier) 안에 있을 거라 믿고 있던 부하들이 그녀를 놓쳐버린 것이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누구와 만났는지 세세히 보고를 받는 살바체였으니

희진보다는 그 기다림이 조금 나았다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공연이 끝난 후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는 진 때문에 살바체의 오장육부가 타들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서 뭐하는 거죠? 날 바람 맞추다니.”


젠느가 밖에 바람을 안고 들어와 살바체를 쳐다보고 말했다.

그러나 젠느의 목소리엔 약간 삐졌다는 투만 섞여 있었다.

살바체가 자신 쪽은 쳐다보지 않고 신문만 움켜잡고 있자 젠느가 삐졌던 마음을 풀고

살바체 앞으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 여자. 무슨 문제 있나요?”

“사라졌어.”


젠느의 얼굴이 놀라 눈이 커지고 입에서 '어머'라는 걱정스런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것보라는 시선으로 살바체를 내려 보는 젠느가 말했다.


“그러게 내가 안 된다고 했죠? 여자는 섬세해서 그런 방법으론 통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요?

지금이라도 파리로 쫓아가 보는 게 어때요? “


살바체가 그제야 젠느를 바라보고 마치 젠느가 진인 것처럼 따져 물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방법이 있겠어? 납치를 해도, 가둬두고 애정을 쏟아도,

소유욕의 집착도 부려보고 날 지옥에 던져두고 간 그녀를 용서도 해보고,

심지어 내 마음까지 전부 고백도 해봤어. 젠장.

이 살바체 프란트가 처음으로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진의 마음 하나 얻어 보려고 같은 애를 쓰는데,

이 여자는 죽을 위기에 있으면서도 날 찾지 않았다고.

말해봐. 그럼 내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따지고 들듯 무섭게 눈을 이글거리는 살바체를 보고 젠느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들고 있는 백을 내려놓고 말했다.


“기다리고 자극을 주었는데도 오지 않으면 어쩔 건데요?

난 날 사랑하는 남자가 나를 두고 다른 여자와 약혼한다고 한다면

정강이를 있는 힘껏 걷어차 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을 거예요.

내 생각엔 살바체. 그 여자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조차 의심스럽군요.”

“젠느…”


살바체는 자신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을 기어코 끄집어내 자신의 가슴을 쑤셔대는 젠느를

원망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한숨처럼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젠느는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깜빡 깜빡 불이 들었다 나갔다 하는 전화기를 쳐다보며 젠느가 살바체의 주위를 환기 시켰다.


“전화나 받아요. 당신이 기다“


'찰칵'


젠느는 자신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를 들어 말을 듣는 살바체를 쳐다보며 어이없는 얼굴로 피식 미소 짓고,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살바체를 지켜보았다.

그늘졌던 살바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온 건 그때였다.

전화를 끊은 살바체가 어린애처럼 젠느를 쳐다보며 해맑게 웃었다.


“진이 로마행 비행기를 타고 오는 중이라는 군“


기뻐하는 살바체를 보고 젠느가 허탈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강이를 예쁘게도 차주러 오나 보네요.”


* * *


로마로 가는 비행기 안.

희진은 자신 옆에서 계속 도란도란 말을 걸어오는 겔체르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고

좌석에 몸을 눕히고 얼굴을 돌려 컴컴한 하늘을 응시했다.

희진은 그 날 호텔에서 나와 겔체르의 일정을 묻고 함께 이탈리아로 가자는 말을 했다.

물론, 이탈리아에서 전에 공연을 함께 했던 분들을 만나러 갈 생각이라는 핑계를 댔다.

하긴 그 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에 가서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야 하긴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살바체였다.

자신이 이탈리아 로마로 간다면 분명 그의 귀에 들어갈 것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죠? 내가 다시 이 땅을 밟지 않을 거라 생각 했나요?

그래. 내 앞에서도 행복한 표정으로 미소 지을 수 있는지 두고 보죠.

약혼? 하, 약혼이라고요? 그래요. 한번 내 앞에서 해보라고요.

이판사판 당신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 말테니까'


희진이 눈빛이 살기를 띄고 잔인해 졌다.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로 예약해 두었어요.

전 오늘 하루만 묵고 내일 친구네 집으로 갈 생각이에요. 짐을 풀고 밥부터 먹을까요? 배고프죠?”


희진은 아무 말 없이 겔체르를 보지 않고 창밖만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진은 겔체르가 자신을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희진은 어제 그를 만나 약속을 하며 선을 두고 친구로 지내고 싶다 말했다.

겔체르 역시 흔쾌히 승낙했다.

그는 쿨 한 남자였고, 이해심이 많은 남자였다.

누구와는 차원부터 달랐다.



살바체는 파리 행 비행기가 착륙해 로마에 도착하며 내려앉는 모습을 지켜보며 차에서 내려섰다.

공항 안으로 들어가는 살바체의 표정이 밝았다.

살바체는 진을 보고 말해 줄 생각이었다.


'여기 온 순간 당신은 이번 게임에서 진거야. 진. 이번엔 내가 승자야'


이렇게 말해주고 화를 내는 진의 모습을 보며 호탕하게 웃고 안아줄 생각이었다.

거부하고 화를 내더라도 꼭 안고 절대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살바체. 안절부절 하는 당신이라니. 비행기를 탔다고 하니 도착은 분명 할 거고,

십대처럼 이러는 거 우습고 재밌고 신선하긴 하지만 제발 식사도중 포크 들고 웃음 흘리지 말라고요.”


살바체에게 실소를 터트리며 젠느가 점심식사도중 살바체를 나무라며 말했었다.

곁으로 시중들며 지나치던 미얀 역시 젠느에 말에 동의한 듯 쿡쿡 거리며 웃었다.


“미얀. 얼음 넣어서 시원한 물 한잔 가져다 드려.

난 속 시원하게 그 아가씨가 이 남자의 정강이를 시원하게 차 버렸으면 좋겠어.”

“어머. 젠느 아가씨. 그럼 아프실 텐데요.”

“휴. 미얀. 물이나 가서 가져와요.”


동문서답하는 미얀을 보고 젠느가 손 사레를 치고 우아하게 식사를 끝내고는 살바체에게 짓궂게 충고했다.


“꼭 그녀를 데려오도록 해요. 이제 나도 그만 해방되어서 연애 좀 실컷 하게.”

“후후“


살바체가 공항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힐끔 거리며 살바체를 쳐다보고 알아보는 눈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살바체는 그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게이트에서 희진이 나타나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진 다 왔어요.”


진의 안전벨트를 풀어주며 겔체르가 친절하게 희진의 기분을 살폈다.

도착하기 전부터 가라앉은 희진의 표정엔 비장함이 깃들어 있었다.


“고마워요. 겔체르“


희진이 비행기에서 내려 게이트로 가는 동안 겔체르는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희진의 어깨에 손을 대지 않고

보호하는 몸짓으로 걸어 나갔다.

며칠사이 더 수척해진 희진은 보기에도 무리해 좀 쉬어야 할 듯 보였다.

저절로 안쓰러운 마음에 기사도 정신인 겔체르가 희진을 자연스럽게 걱정하는 마음에서 스스럼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로 나가기 전 겔체르가 희진에게 농담조로 말을 걸었다.


“이태리에서 세 가지 주의해야 할 게 있어요.”

“예술, 쇼핑, 남자 말인가요?”

“휴, 너무 유명한 말이었나 보군요. 아깝다.

꼭 내가 가장 먼저 말해주고 싶었는데 말이죠.”

“후후“


한결 가벼워 보이는 희진의 얼굴에 겔체르 역시 환하게 미소 지었다.



“!”


살바체의 눈이 일렁이며 무섭게 불타 올랐다.

희진의 어깨에 손을 올린 남자는 프랑스 오페라 갸르니에(L'Opera Garnier)에서 함께 공연했던 발레리노가 분명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입구부터 나타나 웃으며 걷는 모습에 살바체는 이를 갈았다.

너무나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주위사람들의 시선까지 빼앗고 있었다.

속이 끓어올라 더는 그 모습을 지켜보기 싫은 살바체는 곧바로 몸을 돌려 차로 돌아가 버렸다.


“하!”


어이없는 살바체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정지된 차 안에서 신음처럼 내뱉어졌다.

언제나 예측불허.

감조차 잡지 못하게 하는 여자였다.

사탕을 빼앗기고 분통터지는 애의 심정처럼 살바체는 주체할 수 없이 화가 치솟았다.

자동차 손잡이를 계속 잡고 있는 살바체의 팔뚝에 깊은 힘줄이 솟아났다.

소유욕을 동반한 짙은 질투가 살바체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자신에게 오고 있다 확신하고 있던 살바체는 진한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진! 날 미치게 만드는 여자 같으니라고!'



다시 시작된 운명[3장]


“그 여자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는 게 사실이냐?”


알페르노가 체논이 들어서자 인상을 쓰며 물었다.

체논이 웃음을 참는 얼굴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젠느와 함께 살바체를 보고 온 체논은 재밌어하는 얼굴이었다.


“왜 웃고 서 있는 거냐?”

“하하, 정말 궁금해요. 천하의 살바체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여자가 말입니다.

질투에 미쳐버린 살바체라니… 젠느까지 고개를 젓더군요.

당해도 싸다고 말입니다. 머리 쓰다 자기가 당했으니…하하하하“


체논의 말에도 알페르노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 여자 때문에 살바체와 자신이 이렇게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고 말았고,

가장 중요한 '교황의 섬'까지 내 팽개치지 않았는가!

다시 돌아와 살바체의 인생을 휘저어 놓을게 분명한 여자였다.

한국에서 혼자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고 여자를 이젠 잊은 거라 생각한 알페르노였다.

거기다 젠느와 약혼설이 돌자 속으로 잘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던 알페르노였기에 여자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페르노는 웃고 있는 체논이 보기 싫어 몸을 돌리고 바에 들어가 술을 따랐다.


“한번 만나볼 생각입니다. 도대체 어떤 여자인지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군요.”

“…….”


알페르노의 아무 말 없는 모습을 신경도 쓰지 않고 체논은 계획을 세우느라 눈을 빛냈다.


* * *


- 밀라노 (Milano)


“세상에! 진!”


밀라노에 온 희진은 자신을 반기는 단장 아르한과 함께 공연했던 단원들을 쳐다보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죽었다 믿고 있던 희진이 살아 돌아왔으니 유령을 본 것처럼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은 엄청났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희진은 묻는 그들에게 식구들에게 했던 대답을 고스란히 했다.

폭파사건이 있던 날 자신을 여행을 떠났었다고, 돌아와 보니 다 죽은 줄 알고 있더라고 말했다.


“아! 그래서 캐비닛의 있던 물건도 진이 정리해 갔던 거군.

우린 괜히 그것도 모르고 말이야.”


단장인 아르한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희진은 아르한의 말에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이럴게 아니라 우리끼리 축하파티라도 해야지. 자. 모두 연습 끝내자고. 진이 낸다니까.”

“단장님. 전 그런 말 하지 않았어요.”


희진이 싱긋 웃었다. 아르한이 희진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당연히 내야지. 안 그래?”


웃음바다가 된 연습실에서 희진 역시 웃었다.

그때 밀라노 지젤에서 상대역이었던 발레리노 포체가 들어와 희진을 발견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진? 진! 정말 진이야?! “


장소를 옮겨 떠들썩한 주점으로 모인 사람들이 진에게 계속 물음표를 던졌다.

희진은 천천히 지금까지의 일을 정리해 대답했다.


“정말 그럼 파리에서 오딜 역을 완벽하게 소화했다는 발레리나가 진이였단 말이야?

우린 이름이 같은 사람인가 했었다고. 죽었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러셨겠네요.”

“진. 그 시원이란 약혼자와는 잘 되어가는 거야?”


포체의 질문에 그제야 사람들이 손뼉을 쳐가며 궁금한 눈을 잔뜩 했다.

희진이 어떻게 시원을 아느냐는 눈빛으로 어리둥절해 그들을 쳐다보자, 포체가 대신 대답했다.


“그 친구가 진을 찾아다니면서 묻고 다녔어. 그런 애절함도 없었지. 안 그래요?”

“맞아. 그 사람은 진이 죽지 않았다고 믿는 단 한사람이었어. 어떻게 되었어? 그 후에?”


희진이 그들의 말에 잠깐 시원을 생각하는지 말이 없다가 조용히 담담하게 입을 때고는 말했다.


“그 사람 다른 여자와 결혼해요.”

“헉!”

“뭐야?!”


놀라는 사람들은 더 묻고 싶었지만, 희진에게 더 물어보면 상처가 될 것 같아 입을 닫고 궁금함을 묻었다.

다시 왁자지껄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며 희진 역시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얘기를 나눴다.



희진은 사람들과 헤어진 뒤 밀라노의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사르데냐 섬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 날 처럼 비가 오는 날씨가 아닌 상쾌한 날이었다.

아침부터 서둘러 배를 탔기에, 사르데냐 섬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

희진은 코트를 꼭 동여매고 갑판에 올라 그때를 생각했다.

헬리콥터 소리를 들었을 때, 또 살바체가 화물칸을 열겠다고 소리쳤을 때,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순간이었다.

탈출할 때 탔던 그 배의 화물 함이 파리행이 아니었다면 희진 지금까지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파리에 도착해 화물 함을 열었던 프랑스 사람들의 어리둥절하고 놀래하던 눈빛이 생각나 희진에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지금에 와서는 이렇게 웃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옷감대신 보상은 해주었지만, 입을 닫아 주기로 약속하고 도와주었던 그 사람들이 지금도 참 고마운 희진이었다.

희진은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사르데냐 섬에 도착했다.

전에 시원의 시계를 맡겨 두었던 그 시계방으로 찾아 들어간 희진은

고마운 아저씨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바세론 콘티탄틴 1972시계를 돌려받았다.

간단한 차를 대접받은 희진은 전에 받았던 돈보다 더 얹져 주려고 했지만,

푸덕한 아저씨는 희진의 답례를 거절했다.

희진은 바세론 콘티탄틴 1972 시계를 찾아 나와 만지작거리며 항구에 서 있었다.

멀리 보이는 '교황의 섬' ….

지금 바로 저곳에 살바체가 있을까?


'살바체 프란트…'


희진은 교황의 섬을 한참 바라보다 배가 온 것을 보고 배에 올라 갑판에 섰다.

천천히 멀어지는 사르데냐 섬, 섬이 보이지 않는 곳에 오자 시계를 쥐고 있던 손에 희진이 힘을 뺐다.


'퐁'


반짝이며 힘없이 바다 밑으로 내려가는 바세론 콘티탄틴 1972의 시계는 끝내 시야에서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시원 씨. 이것으로 모든 게 과거에 묻히겠죠? 행복하길 바랄게요. 혜수와.'


희진이 고개를 들고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눈을 감았다.

그때 자유를 갈망하며 무서움에 떨던 그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자유를 거머쥐고 승리했으니까… 이제야 그 자유가 실감이 났다.

더 이상 살바체가 무섭지도 않았다. 이제 희진은 당당히 맞설 수 있었다.


'살바체 프란트. 내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당신 얼굴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네요.'


삼일동안 연락이 없는 살바체였다.

분명 자신이 이태리에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살바체였다.

또,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희진은 바람을 등지고 서서 생각했다.

다시 쓸쓸해지고 바람이 차게 느껴져 와 희진의 마음을 싸늘하게 바꾸어 놓고 있었다.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살바체에게 따져야겠다는 용기가 사그라지고 있었다.


'이제 진짜 내가 아무 존재도 아니라는 말인가요?'



저녁 조금 늦은 시간.

희진은 로마 호텔에 도착해 한 장의 금박을 두른 초대장을 프론트에서 건네받았다.

방으로 올라간 희진은 침대에 앉아 초대장을 꺼내 보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자선 파티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금박으로 또박 또박 정갈하게 적힌 이태리어는 밑에 약도와 시간을 첨부해 놓고 있었다.

초대장을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어디에도 다른 메시지는 적혀있지 않았다.

희진이 이마를 매만지며 초대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신이 로마 이 호텔에 묵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초대장을 보냈을 사람들을 죽 생각해 보았다.

겔체르? 아니면 단장님 아르한이?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 * *


로마 천사의 성 (Castel S. Angelo).

아름다운 천사의 성 입구로 인사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었다.

살바체 프란트와 젠느 베를루스코니, 거기다 체논까지 천사의 성으로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세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흡족하게 만드는 강한 매력이 있었다.


“웃어. 살바체.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너나 맘껏 웃으라고. 도대체 왜 오기 싫은 사람을 데리고 온 거야.

체논과 함께 와도 되었을 자리 아니었나?”


인상을 쓰고 술잔만 쳐다보며 빈정거리는 살바체를 보고 이제 이용할 가치가 떨어졌다는 거냐는 표정으로

젠느가 살바체를 흘기고는 체논의 팔에 자신의 손을 끼어 넣고 말했다.


“내 할일도 이제 끝났어요. 그렇죠? 체논?”

“물론이야. 젠느. 항상 우릴 위해서는 몸을 아끼지 않는군.”

“당연하죠. 의리가 있지.”


새침하게 말하는 젠느의 귀여운 표정에 체논이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젠느의 볼을 꼬집었다.

젠느가 살바체를 힐끔 쳐다보던 눈을 체논에게 돌리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내 볼에 수난을 주면 살바체를 데리고 나가 버릴 거라고요.”

“아, 귀여워서 그랬지. 우리 막내 아가씨가 이렇게 컸나 하고“

“참나. 내가 젖먹이 애로 보이나 보죠?”

“내 눈엔 항상 그렇다고.”


투탁 거리며 살바체에게 떨어져 대화를 나누며 걷던 두 사람이 한 곳에 일러 멈췄다.

젠느가 체논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 아가씨에겐 분명 보낸 거 맞죠? 오겠죠?”

“물론.”

“당신은 온다에 걸 건가요? 난 안 온다에 걸려고 하는데.”

“내기하자는 거야?”

“못할 것도 없죠. 내 생각엔 그 진이라는 아가씨가 살바체보다 위로 보이거든요.”

“하하. 지켜보자고.”


그러나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말이 끝나 입구를 눈여겨보던 젠느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체논의 어깨를 툭툭 치고 들어서는

미모의 동양여자를 바라보며 말했기 때문이었다.


“저 여자가 살바체의 진이라는데 천유로 걸겠어요.”

“하하. 젠느. 당신은 벌써 내기에서 진거 아닌가? 그건 그렇고 정말 굉장한 여자인데.”

“그렇죠? 이제 살바체가 발견하고 놀라는 표정이나 우린 고경하자고요. 호호“


희진의 가슴이 쿵쾅 쿵쾅 정신없이 뛰어대고 있었다.

무턱대고 파티에 맞는 옷과 머리를 준비하며 하루를 소비하고 오긴 했지만,

누가 부른지도 모른 채, 달려온 자신이 한심스러워 자꾸 뒤돌아서고 싶었다.


“scusi ….”


자신의 옆에서 옷을 받아 들어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파티도우미에게 희진이 코트를 벗어 주고 이제 기회가 없음을 실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별수 없이 고개를 빳빳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누군가 초대했으니 곧 나타날 거라 생각하며 희진이 장내를 쳐다보며 아는 사람을 찾았다.


'살바체 프란트?!'


살바체를 발견한 희진이 놀라 숨을 멈췄다.

멈춰있던 가슴이 잠시 후에는 더 걷잡을 수 없이 뛰어댔다.

검은 연미복 차림의 살바체의 표정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가서 저 남자의 시선을 자신에게 향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조건 희진이 살바체를 향해 걸어갔다.

살바체는 희진이 자신에게 걸어오는 것도 모르고 술잔만 쳐다보며 그늘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바체 프란트. 날 보라고요. '


자잘한 아이보리색의 꽃무늬가 긷든 긴 드레스를 사르륵 소리와 함께 잡고 걸으며

살바체가 자신을 쳐다보는 순간을 기다리는 희진은 한순간도 그에게서 눈을 때지 않고 걸었다.

순간 익숙한 향기를 느낀 걸까? 아니면 시선을 느낀 걸까? 살바체가 내려있던 눈을 들었다.

곧바로 희진의 눈이 청색의 살바체의 눈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믿을 수 없어하며 반짝이는 청색의 눈동자.

그러나 서서히 맹수의 상처받은 남자의 눈을 하며 색이 짙어가는 살바체의 눈동자는 도리어 희진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


멈춰선 희진은 도리어 그 눈동자에 자신이 더 놀란 눈을 했다.

살바체의 짙은 청색의 눈이 희진의 눈을 직시하는 그 순간이 희진은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길게 느껴졌다.


'뭐야? 왜 온 거지?'


살바체의 눈이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격 없는 여자가 못 올 데를 온 것처럼,

살바체 프란트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스쳐 지나는 모습에 희진은 정신이 아찔해 졌다.

살바체가 전에 베란다에서처럼 기대고 있던 벽에서 일어서자 희진이 움찔하고 눈을 움직여 한걸음 물러섰다.

살바체를 보자마자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에,

희진은 당황되고 있었다.

그저 살바체가 하는 행동에 따라 맞붙어 줄 자신만 있었다.

하지만, 저런 시선은… 정말 저런 시선일 거라고는…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분노하고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얼굴을 돌려버리고 자리를 피하는 살바체 일거라고는…

가슴이 내려앉아 서 있기도 힘들었다.

무슨 말을 해서라도 붙잡아야 했지만 멀어지는 살바체를 보며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머리가 하얗게 비어졌다.

그 자리에 충격에 빠져 정지해 서 있는 희진을 두고 살바체는 체논과 젠느에게 걸어갔다.

두 손이 꽉 쥐어지고, 발걸음도 희진과 한걸음씩 멀어질수록 힘이 들었지만, 살바체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에게 항상 가식으로 밖에 웃어주지 않았던 희진이었다.

얼마만큼 그 웃는 모습을 가지고 싶어 했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희진의 카나리아 '아리아'를 죽인 이유도 그 웃음이 탐이 나고 질투가나 못 견뎌서 이었음을…

그 웃음을 나에게만 보여줘. 라는 자신의 몸부림이었음을 희진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하물며 그 희멀건 발레리노에게 보이던 그 웃음이라니…!

자신에게 오는 중이라 확신하고 있던 살바체였기에 그 배신의 감정은 더 깊은 것이었다.

더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행동을 어떻게 표현하란 말인가! 이제 오는 쪽은 그녀여야 했다.

자신이 아닌 희진이어야 했다.

자신의 인내심도 이제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젠느. 당신이지?”


살바체의 불타는 눈이 곧장 젠느에게 향했다.

젠느가 살바체의 화난 눈동자에 잡혀 처음으로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체논이 젠느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살바체의 주의를 돌렸다.


“나야.”


'퍽!'


“살바체!”


체논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가고 몸이 휘청하고 중심을 잃었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일어서는 체논을 향해 살바체가 이를 갈며 조용히 읊조렸다.


“네가 뭔데 내 인생에 간섭해.”


살바체가 그 말 한마디를 하고 무섭게 체논을 노려보며 놀라 비명을 내질렀던 사람들을 가로 질러 밖으로 나가버렸다.

젠느가 살바체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체논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는 빠르게 속삭여 말했다.


“체논. 당신이 저 아가씨 데리고 와요. 난 살바체를 쫓아가 보겠어요.”

“그래. 그러라고.”


체논이 젠느가 황급히 살바체를 쫓아 나가는 모습을 보며,

당황한 모습으로 살바체가 나간 곳을 쳐다보는 동양의 여자를 쳐다봤다.

사서 고생하고 맞기까지 했으니 체논의 기분은 엉망이었다.


'젠장. 되게 아프군.'


살바체의 돌발행동에 희진의 머리가 멍해졌다.

게다가 살바체가 나가며 희진 쪽으로는 시선을 한 번도 돌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희진은 헉 , 헉 쉬어지는 숨을 간신히 참고 서 있었다.

순간 살바체가 나가는 곳을 쳐다보던 희진 옆으로 사진에서 보았던 검은 머리에 아름다운 이태리 여인이

안타까운 눈빛을 하고 곧장 따라 나갔다.

자신에겐 따라 나갈 아무런 자격도 없는데, 그 여인은 당당히 살바체의 뒤를 쫓아 달려가고 있었다.

파티장이 아수라장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힐끔 힐끔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들인 것 같아 희진은 그 곳에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빨리 나가고 싶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나갈 수가 없었지만 마음은 벌써 밖을 향하고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때던 희진이었다.

그때, 누군가 희진의 팔을 잡고 확 돌리며 급하게 말을 했다.


“자, 잠깐. 잠깐.”


급히 달려온 표정의 잘생긴 이태리남자는 강한 인상의 남자였다.

희진의 눈을 보고 씩 미소 짓는 남자를 보며 희진이 눈을 깜빡였다.

방금 전의 충격으로 희진의 시선이 흐트러져 있는데도, 남자는 희진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난 체논이오. 살바체 프란트의 친구지.”

“…….”

“따라오라고.”


희진은 자신을 힘 있게 끌고 밖으로 데려나가는 체논의 뒷모습을 보며 놀란 눈을 했다.

누군지도 모르고 따라가도 좋은지, 저 말만 믿고 가자는 데로 가도 되는 건지 그런 생각을 할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고

무조건 체논은 희진의 팔을 끌고 자신이 직접 차에 올라 희진을 옆자리에 태웠다.


“어, 어디 가는 거죠? 내리겠어요.”


문이 닫히는 소리에 희진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체논에게 따져 물었다.

체논은 아무 말도 없이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가냐고요!”

“당신이 진이지? 살바체를 저렇게 그냥 둘 생각인가?”


건방진 얼굴로 씩 웃어 보이기까지 하는 체논을 보며 희진은 말을 잃었다.

그의 뻔뻔함은 살바체를 능가하고 있었다.


“상관없어요. 살바체의 약혼녀가 잘 해 주겠죠!”

“그래? 뭐 그렇기도 하겠지. 약혼녀니까…

지금쯤 한참 아름다운 젠느 베를루스코니의 옷을 벗기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녀의 탐스런 우윳빛 가슴을 쥐어 잡고 격렬하게“

“그만해요. 그 딴소리 듣고 싶지 않으니까.”

“잘 해준다는 게 그런 뜻 아닌가? 여자와 남자가 만나서 할 거라고는 그거밖에 없잖아?”


희진이 기가 차 체논을 보고 이를 갈며 말했다.


“당신. 저질이군요.”

“후후, 맞아. 그렇지만 사실 그렇잖아?

젠느 베를루스코니의 그 몸매를 보라고. 그 탐스러운 가슴하며,

그 촉촉한 흑색의 머리카락… 어떤 남자가 거부할 수 있겠어?”

“내. 려. 주. 세. 요“


희진이 당장이라도 뛰어내릴 것처럼 차 손잡이를 잡고 한 글자씩 또박 또박 뱉어 냈다.

체논은 아픈 입가를 어루만지며, 자신이 희진을 너무 놀렸나 하는 생각을 하고 농담을 집어 치웠다.


“끝장내러 안갈 건가?”

“뭐, 뭐라고요?”

“따지러 안 갈 거냐고. 살바체에게 할 말 많을 것 같은데. 할 말 없다면 내려주지.”

“…….”


희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체논의 말 때문에 계속 머릿속에 그 영상이 왔다 갔다 하는 증상이 일어났다.

지독한 분노와 파리에서 울며 생각했던 다짐들이 새록새록 한 가지씩 생각나 희진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보기만 하면 따져 주리라. 당당하게 고개를 들리라.

체논이 이런 희진의 조금씩 일렁이는 눈빛을 보고 재밌어하는 눈빛을 한다는 것도 모르고, 희진이 체논에게 말했다.


“왜 이러는 거죠? “

“왜겠어? “

“…….”


체논이 따가운 희진의 시선을 느끼면서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이 여자 발끈하는 모습, 망아지 같은 게 귀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곧이어 터진 희진의 대답에 체논은 말 그대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젠느랑 여자와 관련 있군요. 당신과“

“뭐? 하하하하. 쿠쿡…. 맞아. 잘 아는군. 바로 그거야.

그 젠느 베를루스코니가 사실은 내 앤이거든.”


희진이 웃고만 있는 체논을 보며 의심쩍은 표정을 짓자, 곧바로 체논이 수긍했다.

그리고 다시 목을 가다듬으며 희진에게 물었다.


“어쩔 생각이지? 가서 정강이를 차줄 건가?”

“…모르겠어요.”


가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 희진을 보며,

체논이 의미 있게 미소 짓고 창가로 생각하는 모습으로 몸을 돌린 희진을 힐끗 눈여겨보았다.


'내 몫까지 가서 살바체의 정강이를 힘껏 차주라고 그래야 젠느도 기뻐할 것 아닌가?'


* * *


'꽝!'


살바체의 방문이 꽝 소리와 함께 무섭게 닫혔다.

저택이 통째로 흔들리는 느낌에 미얀이 손을 잡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젠느가 급하게 문을 두들기며 살바체를 소리쳐 불렀다.


“살바체! 이 문 열어요! 당신 이러는 거 어린애 같아요.

생전 처음 보는 거라 재밌기는 한데 이러지 말고 문 열어보라고요“

[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날 가지고 노니까 재밌었겠어.]


젠느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문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두들기던 손을 손잡이로 가져가 돌렸다.

곧장 열리는 문에 젠느가 창가에 서 있는 살바체에게 걸어가 크게 소리쳤다.


“정말 끔찍하게 고집스럽군요! 살바체 프란트! 이렇게 꽉 막힌 사람이었어요?

항상 다른 사람들 앞에서 냉소 짓던 당신은 다른 사람이었나 보군요! “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나가“

“살바체!”


살바체가 고집스럽게 열려 있지도 않은 창가를 응시하고 뒤 돌아 움직이지 않았다.

젠느가 살바체의 등짝만 뚫어지게 노려보다 몸을 돌리며 말했다.


“뭘 잘했다고 그러는지 참. 난 진이 불쌍해요.

어떻게 저런 인간을 사랑해서 초대장을 받고 설마하며 달려왔을까?…

그런데 냉대나 당하고 말이죠.”

“예?”


미얀이 문 앞에서 안절부절 하다 진이라는 말에 놀란 눈을 크게 하고 말했다.


“정…정말요? 정말 주인님이 냉대 하셨어요?”

“그래. 미얀. 이 남자가 그랬어.”

“주…주인님 왜 그러셨어요.”


울먹울먹 이는 미얀을 보며 젠느가 다가가 토닥이고 내려 보내고는

다시 살바체의 방으로 들어와 살바체의 등을 쳐다보며 말했다.


“좋아요. 살바체. 내가 주제넘었어요. 용서해요.”


젠느가 슬쩍 살바체에게 말했다.

여전히 요지부동 움직임이 없는 살바체의 힘 있는 등을 보고 젠느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뒤를 돌아 나가려고 할 때

살바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은 날 사랑하지 않아.”

“뭐라고요?”

“내가 그녀의 행적을 놓쳤을 것 같아? 순간순간 내게 오지 않을까

화가 나는 그 순간에도 난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어.

그런데도 진은 내게 오지 않았어. 그저 지난 일을 정리하러 이태리에 온 거였지.”

“그걸 어떻게 알죠?”


살바체가 몸을 서서히 돌려 아프고 상처받은 눈으로 젠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은 밀라노에서 '다빈치'공연단의 사람들을 만난 후 사르데냐 섬으로 갔었어.

거기서 교황의 섬까지 한 시간 거리도 되지 않은 짧은 거리임에도 진은 가지 않았어.

아니 뒤도 돌아보지 않았지.”

“그…그걸“

“내가 보고 있었으니까….”

“…!”


고스란히 아픔을 드러낸 살바체의 눈이 너무 슬퍼보여서, 젠느까지 눈물을 글썽였다.

모르는 사람에 끼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을 살바체를 생각하자,

걷잡을 수 없이 안쓰러워지고 오늘 그의 행동도 충분히 납득이 되어 젠느는 미안해 졌다.

젠느가 천천히 걸어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살바체의

물기로 빛나는 청색의 눈을 바라보며 어깨를 안으며 토닥였다.


“그랬군요. 그랬어.”

“젠느….조금만 다가가면 바로 한손으로 거머쥘 수 있는 거리에 있음에도 난 움직일 수 없었어.

진이 내게 와주길 바랬어.

조금만 기다리면 나에게 올 거라 생각하며 진을 보고 있었지만 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어. “

“미안해요. 내가 몰랐어요.”


* * *


'끼이익~'


체논의 차가 프렌트 家 정문 앞에 세워졌다.

체논이 차에서 내려서 저택을 올려다보는 희진을 바라보고 말했다.


“안 들어갈 건가?”

“들어가요.”


씩씩하게 대답하는 희진을 차에서 내려주고,

체논이 정문에서 집사의 인사를 받으며 살바체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살바체 프란트는?”

“방에 계십니다. 아가씨와…”


집사가 희진 쪽을 힐끔 쳐다보고 깍듯하게 체논에게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체논이 희진의 팔을 잡고 안내하며 말했다.


“확실하게 복수해 주라고.”


체논이 희진의 각오가 서린 눈을 응시하며 즐거운 마음을 숨겼다.



죄의식[4장]


“확실하게 복수해 주라고“


체논이 희진에게 실실 웃으며 말했지만, 희진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앞만을 응시했다.

푹신한 카펫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서는 체논과 희진의 걸음은 평이했다.

희진은 고개를 당당히 들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집사의 싸늘한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을 때, 살바체의 시선과 겹쳐보였지만,

희진은 더 당당한 시선을 하고 집사를 외면했다.

살바체가 이태리의 교황에 로마의 황제라 할지라도 자신이 주눅들 이유 따윈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쳐다볼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그에게 자신이 죄인일 이유 따윈 없었다.

희진은 자신의 속에서 불끈거리는 화를 접어두고 손을 꼭 쥐었다.

말해줄 생각이었다.

살바체는 자신에게 자유를 주러 서울로 왔었지만, 희진은 살바체에게 자유를 거두어 가기위해 이태리로 온 것이었다.

멋대로 무대에서 내려가는 것 따윈 용납할 수 없었다.

신이 없는 곳에서 멋대로 웃는 모습도 용납할 수 없고, 그 머릿속에 자신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 또한 용납할 수 없었다.


'난 당신을 용서하지 않았어요.

내가 무대에서 내려오라고 할 때까지 당신은 거기 서 있어야하고, 지옥 속에서 날 찾아 울부짖어야 해요.

다시 지옥으로 끄집어 당길 내가 미웠겠죠.

그래서 그렇게 쳐다봤던 거겠죠? 하지만 절대로 당신이 편하도록 내버려두진 않을 거예요.

필요하다면 함께 지옥 에 있더라도 당신을 자유롭게 하진 않을 거니까'


희진의 눈빛이 빛이 날 때, 체논이 살바체의 방문 앞에 서서 문을 열려고 섰다.

희진은 한걸음 물러서 문을 쳐다보고 열리길 기다렸다.


'쿵. 쿵 …!'


문이 열린 순간 쿵쿵 울려대던 심장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문을 연 체논역시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살바체 프란트…?!'


희진의 동공이 크게 확대대고 앞에 있는 광경에 숨을 멈췄다.

살바체 프란트와 젠느 베를루스코니가 창가에 서서 서로를 안고 있었다.

젠느 베를루스코니의 작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살바체의 은빛금발이 뚜렷하게 희진의 눈에 들어왔고,

젠느 베를루스코니의 손이 살바체의 넓은 등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희진의 속에서 울컥울컥 뜨거운 뭔가가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이면 금방이라도 터질 눈물이 앞을 가려왔지만,

희진은 참고 또 참으며 그들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나의 진. 사랑해'


왜 그 순간 살바체가 자신에게 속삭였던 그 말이 멀어지며 들려오는지…

희진은 심한 배신감에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오기로 버텨냈다.

입술을 깨물고 사람이 들어온 지도 모르는 두 사람을 향해 싸늘한 한 마디를 뱉어냈다.


“떨어져.”


1초도 그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화들짝 놀라 떨어지는 두 사람을 보면서도 희진의 얼굴엔 만족감을 찾을 수 없었다.

굳게 싸늘한 희진의 시선이 곧바로 살바체의 놀란 시선과 부딪쳤다.

믿을 수 없어하는 살바체의 눈을 보면서 희진은 뚜벅 뚜벅 걸어가 살바체 앞에 섰다.


“저…그게“


젠느가 다가오는 희진을 보며 급히 살바체를 변명해 주려고 했지만,

곧바로 희진의 손이 살바체의 얼굴로 향하자 말이 끊겨 소리 없는 비명이 되었다.


'짝!'


살바체의 얼굴이 돌아갈 정도의 큰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다시 돌아오는 살바체의 얼굴을 향해 희진은 다시 손을 올려 쳐버렸다.


'짜아악!'


체논이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희진의 손이 올라갈 때 재빨리 다가가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살바체가 눈으로 저지하고 희진의 세번째 뺨을 치는데도 가만히 맞았다.


'짜악!'


“진!”


젠느가 희진을 향해 이름을 불렀지만, 희진의 머릿속엔 젠느의 목소리 따윈 없었다.

상처받은 얼굴의 살바체의 얼굴만이 자신의 눈에 가득할 뿐이었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한 희진의 손은 매서웠다.

네 번째의 손이 다시 올라갈 때, 재빨리 젠느가 살바체와 희진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이러지 말아요.”


희진의 얼굴을 쳐다보는 젠느의 표정이 애처로웠지만, 희진은 젠느를 보고 더 화가 치밀었다.

살바체 앞을 가로막은 여자를 할 수만 있다면 머리라도 잡아 팽개쳐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희진이 비키라고 말하려고 할 때, 그보다 빨리 살바체가 젠느를 옆으로 치우고 말했다.


“비켜. 그냥 놔둬. 마음이 풀릴 때까지 때릴 수 있을 만큼 때려.

다신 기회 같은 것 주지 않을 테니까.”

“죽여 버리겠어.”

“좋아. 당장 총이라도 가져다주지. 그걸 원하나?”

“못할 거라 생각해요?”


희진의 눈과 살바체의 눈이 정면으로 부딪쳐 서로를 쳐다봤다.

살바체가 희진을 향해 한걸음 다가가 말했다.


“좋아. 이대로 우리 막이 끝나는 것도 좋은 생각이야.

당신이 날 총으로 쏴 죽이는 것으로 우리의 전쟁도 끝이 나겠지.

지옥 속에 있는 것도, 당신생각에 미쳐있는 나도 이젠 지겨우니까.

원한다면 해주지. 당신이 원하는 결말이 이거라면 말이야.”

“웃기지 말아요. 살바체 프란트. 당신에겐 어떤 식으로든 자유 따윈 주진 않을 거예요.

죽어요? 누구 맘대로 죽는다는 거죠? 내게 상처주고 날 괴롭힌 게 그걸로 다 씻어진다 생각했나요?

멋대로 행동하지 말아요. 당신은 당신거가 아닌 바로 내거니까!”


희진은 자신이 말해놓고 놀란 표정을 짓고 말을 그쳤다.

너무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어 버린 게 실수였다.

살바체의 얼굴에 믿기 힘든 표정이 스쳐지나갔고,

방안의 있는 다른 사람들 까지 그대로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용한 고요가 방안에 흘렀다.


“…진. 그게… 당신 진심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희진은 아차 하는 마음으로 곧장 마음을 숨기고 살바체의 시선을 외면했다.

자신에게 한걸음 더 다가서는 살바체를 보며 희진이 곧장 등을 돌려 나가려는데,

곧바로 희진의 팔이 살바체에 의해 잡혔다.


“놔!”


희진의 거센 저항에도 살바체는 희진의 손을 꽉 잡고 대신 체논과 젠느에게 말했다.


“나가줘.”


'두 근, 두 근'


걷잡을 수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아차, 하는 사이 사자 굴에 들어온 것이라는 게 그제야 깨달아졌다.

젠느가 살바체가 희진을 잡은 모습을 힐끔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체논을 데리고 나가며 문을 닫았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심장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크게 희진에게 들려왔다.

살바체가 희진을 뒤에서 잡은 모습으로 얼굴을 희진의 어깨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시…말해줘. 진“


살바체는 애원하는 목소리로 희진에게 사정했다.

그러나 곧바로 들리는 희진의 싸늘한 목소리는 다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절망으로 살바체를 몰아넣었다.


“그 더러운 손 놔요. 살바체 프란트.”


희진이 거칠게 반항하며 벗어나려고 이를 악물었지만,

살바체는 희진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더 이상 이런 실랑이는 지겨웠다. 진심이 알고 싶었다.


'젠장!'


살바체가 희진을 거칠게 뒤를 돌려놓고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몸을 흔들며 말했다.


“또 도망칠 생각인가? 또 숨을 생각이야?!”

“하…”


희진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짧게 혀를 차며 살바체를 그제야 쳐다보았다.

무슨 같잖은 소리냐는 말이 희진의 표정에 고스란히 박혀있었다.


“비겁하군. 언제나 당당하던 진 당신이 이렇게 꼬리를 내리고 먼저 도망치다니 말이야.

이제 게임의 승자는 당신이 아니라 내가 된 건가? 말해봐. 당신이 졌다고 그럼 보내 줄 테니까.”

“난 다시 게임을 한다고 말한 적 없어요. 웃기는 소리하지 말고 이손 놔요. 살바체 프란트“

“아니. 우린 게임을 했었어. 누가 먼저 기다림에 지쳐 달려오는지에 대한 게임.

당신은 몰랐겠지만 난 알고 있었어. 나 자신에게 말했지. 당신이 내게 달려온다면

내게도 희망이 있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 진. 당신이 날 용서해 줄 거라는 희망!”


살바체의 말은 단어 하나하나 애절하면서 명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희진이 살바체를 보며 흔들리는 마음을 느끼고 눈을 돌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만두죠.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들어!”


희진의 몸이 살바체에 의해 다시 몸이 강하게 흔들렸다.

희진을 통째로 흔들리게 만들기라도 할 것처럼 흔들던 살바체가 희진의 얼굴을 붙잡고 말했다.


“날 얼마큼 흔들어놔야 그만 두겠어.

이런 빌어먹을 실랑이를 도대체 언제까지 할 거지?

당신 말대로 내가 지옥 같은 무대 위에서 언제까지 가슴을 쥐어뜯고 서있어야

직성이 풀리겠어?! 이제 그만둬. 날 잔인하게 만들지 말고 그만두란 말이야!”

“….벌써 포기했던 거 아니었나요?”


희진의 공허한 눈이 살바체를 향했다.

살바체는 희진의 충격이 엄청나게 컸었다 는데 자신이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대로 희진을 둔다면 그는 다신 희진을 갖지 못하리라.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갰다는 생각에 살바체는 희진을 거꾸로 뒤집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침대로 다가갔다.

가둬두고 또, 가둬두고 과거를 반복하는 일이 있더라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다.

살바체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실감, 좌절감, 지옥 같은 감정 속에 더 살고 싶지 않았다.


“놔! 놓으라고요!”


거꾸로 매달려 희진이 살바체의 등을 팡팡 쳐대고 저항했다.

살바체는 희진이 그러던지 말든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희진을 침대에 털썩 내려놨다.


“이게 무슨 짓이죠?! 당신이 원하는 여자에게 가요. 내게 이러지 말고! “

“좋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어떤 여자를 데려올까?

흑인? 백인? 동양인? 원한다면 당신 보는 앞에서 뒹굴러주지.

벌거벗고 노예처럼 당신 발밑에서 신음소릴 요란하게 내어주지.

그걸 원해? 원한다면 해주겠어! 단, 당신은 여기 있어야해.

내 옆에. 내 안에.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고 여기 있어야해!”

“…당신…미쳤군요.”

“그래. 미쳐가. 당신 때문에 미쳐간다고. 날 미치게 만드는 여자가 바로 당신이야.

날 미치게 만들고 뒤 흔드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살바체는 백지처럼 차가운 희진의 눈동자를 보고 눈물이 날 것 같은 좌절감을 느꼈다.

서서 희진을 쳐다보던 살바체가 눈을 문지르며 화가 나려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따끔 따끔 눈이 아려와 살바체를 못살게 굴고 있었다.


“진…진…모르겠어?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어. 당신이 날 이렇게 길들였어.

미친 사람처럼 당신만 보고 당신만 생각하게 만들었어.

차라리 이 따위로 내 가슴을 도려낼 거면 내 머리에 차라리 방아쇠를 당기고 가.

이 머리통을 부서트리고, 이 가슴을 산산 조각내고 가란 말이야!”


머리와 가슴을 탕탕 쳐대는 살바체의 모습은 이성을 잃은 남자의 모습이었다.

희진은 그 모습에도 믿을 수 없어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본 모습을 그대로 믿는 희진의 눈을 계속 싸늘하기만 했다.


“하, 그래서 약혼을 하는 군요.

그래서 멋대로 무대에서 내려오고 내 앞에서 여자를 안고 있었군요.

이러는 거 뭐죠? 언제까지 날 가지고 놀건 가요?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고 말했나요?

날 사랑한다고 말했나요? 웃기지 말아요. 살바체 프란트.

당신은 무대에서 내려 왔어. 날 버려두고 다른 여자와 웃었고, 다른 여자를 안았어.

그런데도 이런 연극 계속 하는 이유가 뭔가요?! “

“진!!”

“소리치지 말아요. 내 앞에서 소리치지 말라고요!

진이라고 부르지도 말아요.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당신에게 일러주기 위해서 온 것뿐이에요.

평생 혼자이겠다는 약속 지키라고 온 거예요! 당신 내가 용서하지 않았다는 거 말해주러 온 거라고요!”


살바체는 말이 통하지 않는 희진을 향해 무조건 무의식적으로 행동해 버렸다.

자신을 쳐대고 밀어내고 발버둥 치며 때려도 살바체는 강제로 희진의 입을 막아버렸다.


“읍!”


희진이 거칠게 반항하며 살바체를 밀어냈지만,

살바체는 희진의 얼굴을 붙잡고 희진의 입을 강제로 열어 안을 속속들이 파헤치며 희진에게 자신의 속을 알릴 작정을 했다.

애절하면서 강렬한 살바체의 깊은 키스에 희진은 숨이 막혀오고 가슴이 뛰어 턱까지 차왔다.

밀어내려는 힘을 줄수록 살바체의 힘은 더 거세지기만 했다.

어느덧 반항을 멈춘 희진을 느끼고 그제야 살바체가 희진의 입술에서 떨어져

얼굴을 들고 희진의 얼굴을 붙잡아 두고는 말했다.


“기다렸어. 당신이 오길… 모르겠어? 당신이 화를 내고 내게 달려 와주길 기다렸어.”

“…!”

“말해줘…진“

“….뭘 말이죠?”


당황한 희진이 살바체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살바체가 희진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내려 보며 말했다.


“날 사랑한다고.”

“!”


희진의 눈이 자신의 눈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살바체의 눈을 보며 동공이 크게 확대되어 흔들렸다.

자신의 속마음까지 모조리 집어낼 청색의 깊은 살바체의 눈동자가 그대로 희진의 영혼까지 끄집어 낼 것만 같았다.

희진이 살바체를 거칠게 밀어내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살바체는 희진이 침대에서 일어나 아무 말도 없이 탁자 쪽으로 걸어가 짚으며 숨을 고르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 미동도 없이 서 있던 희진이… 살바체가 인내심을 잃고 다가서려고 일어서려고 할 때,

갑자기 눈물이 어린 눈으로 살바체를 고집스럽게 쳐다보고 말했다.


“난 그런 말할 이유 없어요.

설령 당신을 사랑한다고 해도 당신은 내게서 그런 말 들을 자격 같은 거 없어요. 알아요?!”

“….왜지?”


살바체의 눈이 희진을 향했다.

진지한 살바체의 눈이 희진에게 상처 받은 것처럼 빛이 사그라지는 모습을 희진은 지켜보며 또박 또박 대답했다.


“그 동안 나한테 했던 일들을 생각해봐요. 살바체 프란트.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내게 상처주고 모른척하고 가둬두었던 지난 과거가 다 사라질 거라 생각하나요?

당신은 날 사랑한다 말해놓고 쪽지 한장 두고 사라졌어요.

그런데도 내가 당신을 사랑할 거라 생각하나요? 파리에서 당신의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죠.

그런데 내가 당신을 사랑할 거라 생각해요?!

오늘…오늘 그런 모습을 보고도 내가…내가 당신을 사랑할 거라 생각해요?!”


살바체가 희진의 말을 하나하나 새겨들으며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희진의 앞에 서서 희진이 탁자에 기대질 때까지 다가섰다.

희진의 가냘픈 다리가 살바체의 다리와 얽히고 살바체의 손이 희진의 부드러운 볼을 향해 다가갔다.

조용한 살바체의 음성이 희진을 감쌌다.


“그래. 알겠어. 울지 마.”


조용히 희진의 볼을 쓸어내리는 살바체의 손이 따뜻했다.


“울지 않아요. 당신 때문에 울지 않아. 울지 않는다고…”


살바체가 희진의 얼굴을 가슴에 대게하고 등을 쓰다듬으며 꼭 안았다.

살바체가 희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말했다.


“기다렸군.”

“… 나쁜 자식. 알면서도 오지 않았죠.

내가 기다리는 거 뻔히 알면서 오지 않은 거겠죠. 말했잖아요. 약속도 했잖아요.

그런데도 당신은 그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어요. “

“아니, 어기지 않았어. 진… 당신만 생각했고, 당신만 원했고, 당신만 기다렸어.

나의 진, 나의 지젤. 나의 고양이… 나의 오딜을 말이야.”

“흐읔…. “


희진은 어처구니없는 바보 같은 자신을 욕하면서도 밀려드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나의 오딜이라는 살바체의 그럴듯한 변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희진은 살바체의 따뜻한 품에서 울어버렸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이, 그를 기다리며 흘렸던 감정이 하나도 빠짐없이 눈물로 떨어져 나갔다.


“진. 당신이 어디서 뭘 하고 어디에 있는지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어?

단 한순간도 몰랐던 적이 없었다면 믿을까?

그 빌어먹을 당신 파트너의 행적까지 내가 다 파악하고 있다면 날 미워할 건가?

진. 당신은 단 한순간도 내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어.

절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니까. 내가 당신 것이듯 당신역시 내거니까.”

“…게임이라는 말이… 그 뜻이었군요.”

“그래. 이제 알겠어? 당신은 이제 내게 온 거야. 더 이상 내게 게임을 걸지 마.

더는 용납하지 않을 거니까. 또 벗어나려고도 하지 마. 포기해. 진. 당신은 진거야.”


희진이 가만히 살바체의 가슴에서 그의 말을 들으며 속삭였다.


“항상 멋대로 군요. 살바체 프란트.”


살바체는 희진의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희진을 탁자에 올려놓고 옆에 있는

도자기의 장식들을 전부 밑으로 쓸어내려 버렸다.


'쨍그랑!'


밑으로 내동그라진 물건들이 서로 부딪치고 깨져 바닥이 엉망이 되었다.

살바체는 우는 희진의 얼굴을 붙잡고 천천히 입술을 내려 눈물을 핥아 내고,

가늘게 떨리는 희진의 눈에 키스하며 간절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이제 그만… 게임을 끝내 진.'


살바체의 몸짓과 키스가 온몸으로 희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더 이상 화내지 말고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자신에게 완전하게 맡겨달라고 애원했다.

희진의 눈이 스르르 풀리고 곧 살바체만의 마력에 빠져버렸다.

거칠게 흘러내리던 눈물도 언제 진정이 되었는지 쿵, 쿵 강하고 느린 박자로 심장소리만

요란하게 자신의 귀를 때릴 뿐이었다.

살바체는 저항하지 않는 희진을 느끼고 얼굴을 내려 희진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으며 올리고

희진의 살결을 따라 입을 맞추어 나갔다.


“진…진…”


살바체의 가는 손이 희진의 드러난 허벅지의 살결을 쓸어내리고 곧 입술이 따라 붙었다.

희진은 살바체의 강렬한 구애에 눈이 감기고 차츰 호흡이 가빠졌다.

살바체의 손이 뜨겁고 그의 입술이 닿는 곳에 불이 붙었다.


“하아…”


살바체의 손이 허벅지의 살을 따라 쓸어 올라오며 치마가 함께 올라와 희진의 부드러운 살의 감각을 깨웠다.

희진의 손이 살바체의 머리를 들어 올려 은빛금발의 찰랑거리는 머리를 쓸고

그의 이마와 볼,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호흡을 같이했다.

차츰 살바체의 손이 희진의 얇은 천을 끌어내리고 자신의 바지와 셔츠를 거칠게 풀어 내린

살바체의 아름다운 육체가 드러났다.

희진은 살바체의 가슴을 손으로 만지고 그의 살결에 취해 버렸다.

서로가 서로를 만지는 그들의 손길이 빨라지고, 함께 한 순간을 만끽하는 작은 탄성들이 두 사람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살바체는 희진의 허리를 잡아 자신에게 더 가까이 잡아당기며 자리를 잡고 희진의 얼굴을 살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하읔…”


희진의 긴 신음소리와 살바체의 거친 신음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오고 잠깐의 정지된 상태로

살바체가 희진의 머리를 들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사랑해. 진“


살바체의 속삭인 말 한마디에 희진이 아픔에 우는지, 살바체의 말에 우는지 모를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려냈다.

곧바로 살바체가 희진의 눈에 입을 맞추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조금씩 천천히 살바체가 몸을 움직여 희진의 표정을 살피는 살바체의 표정이 애처로웠다.

드레스의 한쪽이 흘러내려와 희진의 아담한 가슴을 드러내고, 동시에 살바체의 입술이 가슴을 찾아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가지며 두 사람의 애절한 몸짓은 침대로 이어져 끝나지 않고 계속 되었다.



프란트 家 응접실안.

젠느와 체논은 함께 미얀의 가져다 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체논의 재밌어하는 표정은 계속 얼굴에 빙글 빙글 떠돌고 있었다.

젠느가 체논의 표정을 보고 흘겨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체논. 일이 잘못되길 바라는 걸로 보여요.”

“설마… 살바체가 그 여자에게 아무 힘도 내지 못하는 걸 보니 재밌어서 말이야.

천하에 살바체가… 동양여자에게… 하하하하“

“…지금 웃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살바체가 진과 잘못되면 그 후에 우리에게 화를 낼 거란 생각은 안 해요?”


거짓말처럼 체논의 웃음이 정지했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처지가 그제야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진을 데려온 것은 자신이니 살바체가 자신에게 화를 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음… 우린 그만 일어나는 게 어떨까?”

“휴, 체논…”


그때, 미얀이 응접실로 안절부절 하는 모습으로 들어와 체논과 젠느에게 말했다.


“지금 주인님 방에서 물건 깨지는 소리가…!”

“…“


미얀의 말에 체논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천천히 일어서는 체논을 보며 젠느가 말했다.


“지금 돌아가면 나중일이 궁금하지 않겠어요? 나중에 나한테 물어봐야 소용없어요.

절대 안 가르쳐 줄 테니까.”

“젠느…!”

“저…저기….”


체논은 젠느를 노려보고 난처한 표정으로 이마를 만지고 있었고,

미얀은 응접실에서 두 사람을 보며 안절부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젠느는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 * *


불이 켜져 환한 방안,

살바체는 희진의 부드러운 허벅지의 선을 따라 조금씩 손을 쓸어 올리며 흰 시트에서 가는 선을 드러나게 만들었다.

희진의 눈을 바라보는 살바체의 눈빛이 뜨거웠다.

희진은 숨을 거칠게 내쉬며 살바체의 반짝이는 청색의 눈에 잡혀 눈을 돌리지 못했다.

자신이 주는 조금의 감각까지 희진의 얼굴에서 찾겠다는 표정으로 살바체는 희진의 몸을 쓸고,
자신의 몸을 움직이며 희진의 움찔하는 표정까지 쳐다보고 미소 지었다.

몇 번인지 모를 절정의 오르가즘이 찾아 들었지만, 살바체는 만족을 모르고 희진의 몸을 가만히 두지 않고 있었다.

천천히 사랑을 나누는 살바체의 몸짓은 조심스러우면서도 감각적이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감각의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희진의 눈을 보는 살바체의 눈도 점차 빛을 잃고 갈증에 몸부림쳐졌다.

속도를 빨리해 살바체가 희진에게 몸을 숙이고 희진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달려갔다.


“사랑해. 진“


살바체의 사랑한다는 고백은 계속해서 희진의 귀를 때리고,

살바체의 몸짓도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더 강렬해졌다.

희진은 살바체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몸을 꽉 끌어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부족해. 진… 부족하다고'


계속 살바체의 몸이 희진에게 더 보채는 것처럼 움직이며 갈증에 불을 태우고 희진이 견딜 수 없을 지경으로

몰아 붙여가고 있었지만, 살바체는 부족하다는 말을 몸으로 표현하며 끝내 자신의 절정을 뒤로 미뤄두고 동작을 멈췄다.


“진…말 해줘. 떠나지 않겠다고“

“…!”


고집스런 살바체의 표정이 억지로 절정을 가둬둔 자신 때문에 괴로워 고통스런 표정을 했다.

그러나 살바체의 표정은 단호하게 희진의 눈동자를 향하고 있었다.


“나와 함께 있어줘.”


살바체가 희진에게 부탁했다.


이렇게 자신의 몸 안에 있는 것처럼,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 말했다.

희진이 살바체의 강렬한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 넘어갈 듯한 절정이 기다리는 막바지에서 이런 부탁을 하는 살바체를 거절하기란

희진에게 역부족인 유혹이었다.

살바체는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참으며 희진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자신을 쏟아내며

마지막 절정을 희진의 몸에 터트렸다.



해가 어느덧 떠올라 새벽을 알리며 로마의 잠을 깨우고 있었다.

어두운 방안 .

고풍스런 더블 침대 위 시트를 반쯤 감고 희진을 꼭 감싸 안고 있는 살바체는 모처럼의 단잠에 푹 빠져있었다.

얼굴에도 반가운 평온함이 스며들어 있어, 고른 숨을 남겨 놓았다.

희진은 살바체의 몸을 느끼며 자고 있지 않은 눈을 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살바체가 깰까봐 조심스런 희진은 살바체의 손을 편하게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섰다.

푹신한 카펫의 감촉을 맨발로 느끼며 조심스럽게 몇 걸음 발을 딛던 희진이 거칠게 나오는

신음소리가 내뱉어 지는 것을 입으로 막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읔…”


살바체가 아까 자기를 떨어뜨려 깨진 파편이 희진의 발바닥에 살짝 꽂혀지고 말았다.

우선 잘 보이는 욕실로 가야했다.

희진은 발을 조심해서 다친 부분을 딛지 않고 불을 키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피가 흐르는 발바닥을 욕실바닥에 주저앉아 쳐다보는 희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파서 흐르는 눈물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이 욕실바닥으로 떨어졌다.


“흐읔…"


아팠다. 발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견딜 수 없이 아파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살바체의 애절한 눈빛 그 몸짓이 무슨 말을 하며 자신을 만지는지,

그 속삭이는 말들이 다 무엇인지 자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랑'


그토록 미뤄두고 보고도 안본 척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 말을 살바체는

하고 또 하고 자신에게 수십 번을 말하며 애걸했었다.


“바보같이…”


너무 바보 같은 살바체 프란트…!

내가 당신 손에 놀아나고 있다고 했나요? 내가 당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나요?

내가 당신을 용서하지 못해서 사랑한다 말하지 못한다고 했나요?

희진은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바보라고, 당신이 나에게 속은 거라고,

완벽한 내 연기에 당신이 속아 넘어간 거라고. 지금도 당신은 나에게 속고 있는 거라고.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나 역시 알고 있었노라고….

그렇게 말한다면 살바체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다.

잔인한 여자라고 욕을 해댈지도 모르고, 웃으며 그랬냐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자신이 살바체와 자신까지도 철저히 속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페르노를 유혹하고 살바체의 표정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상처받고 고통에 젖어 하는 살바체를 보며 언제부터인지 가슴까지 아파서 어쩔 줄 몰랐었던 그때부터,

제레미를 죽일 걸 알면서도 일부러 살바체를 도발해 죽이게 만들고 아파하는 그 뒷모습까지 지켜보며,

잔인하게 자신과 살바체를 더 몰아붙였던 일이…

바로 약해지는 자기 자신을 벌주기 위함임을 살바체가 알리가 없는 그때부터 희진은 살바체를 사랑했었다.

잔인하게 만들고 자신마저 잔인해지면 그 감정을 속이는 게 쉬웠다.

더 독해지려고 마음먹고 더 상처주려고 마음먹고 실행에 옮기면서 희진은

살바체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에게도 깊은 상처를 주고 벌을 주었다.

마음이 가지 않는 육체적 관계가 정열적이고 화려할리는 없었다.

희진은 살바체와 몸을 섞을 때에 연기라는 이유를 대며 자신의 정열과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살바체를 안았다.

살바체가 미쳐갔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집착과 소유욕에 몸부림쳤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날 잔인하게 만들지 마. 진]


제레미를 죽인 다음날 살바체가 자신의 허리를 안고 말했던 그 말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희진은 교황의 섬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언제든 기회는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실행하는 것은 쉬웠다.

그런데도 하지 않은 것은 살바체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래. 이렇게 잘난 남자가 나 때문에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 거 그게 좋았어.'


잔인하게 만들지 말아달라는 살바체의 애원이 아니었다면 희진은 끝까지 살바체를 미워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고

잔인하게 자신의 손에서 노는 살바체를 지금도 즐겼을지도 몰랐다.

사랑하면서도 그런 사랑을 받는 다는 게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켰다면 자신은 미친 여자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도발하면 도발하는 데로, 말 한마디에도 여지없이 무너지는 살바체를 보며

가슴이 아프면서도 날 이만큼 원하고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만족했었다.

거기다 자신은 끝까지 그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일기장을 두고 가 버렸다.

지옥 속에서 헤맬 살바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여지없이 무너질 거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인생에서 자신이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않고 떠난다는 게 자존심 상했다.

될 수 있다면 죽을 때까지 지옥 속에 있어도,

자신을 원망하며 미워하고 증오하더라도 끝까지 살바체의 머릿속에 남고 싶었다.

그게 살바체가 자신에게 준 사랑이었고, 자신 또한 그 사랑을 되갚아 준 것이었다.


'이런… 내게 자격이 있나요?'


희진이 오열하며 다리를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올리고 울어버렸다.

흐어엉 하고 우는 희진의 목소리가 좁은 욕실을 울려왔지만, 희진은 그치지 못했다.

수십 번 자신에게 사랑한다 말하면서 아직도 자신의 사랑을 구걸하는 살바체를 보니,

너무나 가슴이 아파 무너져 내렸다.

사랑한다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하는 이 이기적인 여자의 마음을 도려내고 싶었지만,

굳은 자존심이 그 한마디를 막고 있었다.

살바체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희진을 에워싸고 있었다. 마음이 답답해서 눈물이 나고, 속상해서 눈물이 났다.


'용서를 구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나라고요.

당신을 지옥 속에 던져두고 집착에 소유욕을 불러일으킨 나를 어떻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거죠?

당신을 속이기만 한 날 어떻게 사랑 한다 수십 번 말할 수가 있는 거죠?

당신이 잔인해지는 모습을 즐긴 내게 어떻게 그런 눈빛으로 쳐다볼 수 있는 거죠?'


“흐읔“


거침없는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이제와 살바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이 희진을 에워싸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살바체가 어둠을 등지고 서서 희진을 내려 보며 놀란 표정을 했다.


“진?!”


주저앉아 울고 있는 희진을 향해 살바체가 곧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아

희진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애처롭게 살폈다.


“왜 그래?”

“아파요.”


희진의 단 한마디에 살바체가 사색이 된 얼굴로 희진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다

희진의 내려간 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욕실바닥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보고 살바체가 얼른 희진의 다리를 끌어당겨 자신에게로 가져갔다.


“젠장! 치웠어야 했는데! 많이 아파?”

“아파요.”


반복된 단어에 살바체가 희진의 울고 있는 얼굴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희진은 자신을 번쩍 안아들고 욕실을 나가 침대로 조심스럽게 눕혀주고 부산스럽게 서랍을 뒤지고 욕실로 들어가

붕대를 찾아 나오는 살바체를 쳐다보았다.


“의사를 불러야 갰어.”

“…….”

“아니, 미얀을 불러서 바닥부터 치우라고 해야겠군. 아니, 방을 먼저 옮겨야 갰어.”


자신의 발에 붕대를 감으며 살바체답지 않게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고

희진이 다시 거칠게 넘겨오는 숨과 함께 밀려드는 눈물을 참고 살바체의 얼굴을 향해 손을 들어 뺨을 쓰다듬었다.


“그만… 자고 싶어요. 살바체 프란트. 부산한건 아침으로 미뤄도 되겠죠?”

“…. 그래. 괜찮겠어?”


붕대를 다 감은 살바체가 그제야 희진의 표정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소중한 것을 보듬듯 희진을 끌어안고 눕혀주고 살바체의 입술이 희진의 이마에 가만히 닿았다 떨어졌다.


'당신을 절대 놔주지 않을 거예요. 살바체 프란트'


자신이 잠들길 기다리며 등을 쓸어주는 살바체를 느끼며 희진이 눈을 감았다.



어제와 다른 오늘[5장]


로마 구식 아파트 안. 두 명의 남자가 한 아파트 앞에서 총을 숨기고 망을 보고 있었다.

가운데 서 있는 남자가 망을 보고 있는 한 남자의 고개 끄덕임에 발을 날려 문을 '꽝!'하고 열어젖혔다.

여기저기 흩어진 물건들이 안에 있던 사람이 허겁지겁 도망쳤다는 증거로 남아 있었다.

세 남자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난장판인 거실을 둘러보고 여기 저기 문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예상대로 안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도망친 흔적만이 곳곳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젠장! 이 쥐새끼 같은 자식!”

“어쩌지? 본국으로 날라 버린 것 아닌가?”

“할 수 없지. 우리 돈을 때먹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나 두고 보자고“


허탈한 표정으로 이를 갈며 나가는 세 남자의 등 뒤로 요트가 그려진 반쯤 찢어진 달력이

열려진 베란다의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같은 시각 서울 인천공항.

이태리제 가죽점퍼차림에 지훈이 공항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익숙한 친구의 얼굴을 본 석수가 지훈을 발견하고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반겼다.


“이야. 이게 얼마만이냐?”

“그래. 자~식. 지훈이 너 그래도 이태리 공기 좀 마시더니 얼굴 좋아 보인다.“

“좋긴… 이제 뭐 먹고 살까 걱정이구만.”

“뭐 시간 많으니 천천히 생각해라.”


배꼽친구 석수의 차를 신세지고 기분 좋게 이런저런 말을 하던 지훈이 석수가 차에 노래를 틀자,

얼굴을 굳히고 서울로 들어가는 경치를 쳐다보았다.


'후후. 지금쯤 허탕치고 발을 동동 구르시고 계시겠군.

시발. 단 한번만 행운이 따라 줬어도, 이 꼴은 안 되었을 텐데….운도 없지.'


석수는 기분 좋은 얼굴로 운전하며 돌아와 좋은가보다 생각하며 지훈에게 말했다.


“저번에 신세졌던 시원이가 너 돌아온다고 했더니 꼭 신세한번 갚는다고 보자고 그러더라.

오늘 시간 괜찮지?”

“어. 맘대로. 쿠쿡, 시원이 잘 지내냐?”

“하하하. 그럼 이제 조금 있음 결혼한다.”

“그래?”


지훈이 시원이 얘기에 눈을 빛내고 다시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울한 시선을 하는 지훈인 것도 모르고 석수는 그저 기분 좋아 웃고 있을 뿐이었다.


* * *


살바체는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는 편안한 얼굴로 눈을 떠 자신 안에 안겨 자고 있는 희진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쌔근거리며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희진을 한참 동안 팔을 베고 내려다보는 살바체의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계속 뿌려져 있었다.

가늘게 숨을 내쉬다가 깊게 내쉬는 희진의 숨소리에도 웃음이 나오고, 잠깐 뒤척이며

코끝을 찡그리는 모습에도 살바체는 웃음이 나왔다.

굵게 웨이브 져 흘러내린 희진의 머리를 옆으로 쓸어주고 살바체는 한참 동안 팔을 괴고

감상하며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새로운 아침, 어제와는 다른 오늘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한 아침은 늦은 정오가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희진이 눈을 뜨자마자 살바체는 희진을 안아들고 옆방으로 옮겨 놓았고,

괜찮다고 말하는 희진의 항의를 무시하고 의사를 불러 발을 진찰하게 했다.

물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라는 의사의 말에 살바체가 직접 욕조에 물을 받아 희진의 목욕을 도왔고,

아픈 다리로 발을 딛지 않게 조심시켰다.


“이렇게 절뚝거리니까…”


옛날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간 것 같다는 말을 하려다, 희진이 입을 닫았다.

살바체가 흰 가운을 입은 희진의 다리와 허리를 받쳐 들고 안으며 씩 웃어 보였다.


“그래. 알아. 완전히 날 용서하지 못했다는 것.

앞으로 내 옆에 있을 시간이 많을 테니 차차 용서받을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용서할 사람이 내가 아니라, 꼭 당신인 것처럼 말하는 군요.


희진이 가볍게 흘기며 살바체와 함께 침대에 걸터앉았지만,

살바체가 보지 않을 때 얼굴에 어둠이 끼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아직도 용서받지 못했다 자책하는 살바체를 보면서도 용서한다는 말 한마디 던져주질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먼저 용서하지도 못하면서, 살바체를 용서한다는 말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모든 과거를 이대로 묻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이기적이고 거짓으로 뭉친 사랑받지 못할 여자라는 것을 살바체가 알게 하고 싶지 않은 욕심이 생겨버렸다.


'그래. 내거니까. 내 남자니까. 내 맘대로 하면 되는 거야.'


* * *


-서울 (Seoul)


시원은 벌써 2차에서 3차로 이어지는 술자리에 앉아 있었다.

석수와 지훈은 시원의 조용한 성격을 알아 자기들끼리 떠들며 술자리를 만들었다.

가끔씩 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것 말고 시원은 말없이 술을 마시며 친구들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그래. 요트사서 떵떵거리며 지중해를 여행한다고 자랑 하더니만, 어찌 댔냐?”

“사기야 샀지. 얼마못가 반값도 못 받고 똥값에 넘겨버렸지만… 제길“

“왜?”

“왜긴. 그 빌어먹을 서류가 뭐 그리 복잡해.

난 요트만 사면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고. 귀찮아서 팔아치워 버렸다.”

“쿡쿡. 네가 그럼 그렇지. 시원아.

암튼 이놈이 예전부터 뭐 일만 저질렀다하면 대형 사고다.

대학학교 때 이놈만 보면 담임이 아주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잖냐.“

“후후“


시원이 석수와 지훈의 빈 잔에 양주를 따라주고 웃기만 했다.

뒤이어 룸으로 들어오는 여자들을 반겨 안는 석수와 지훈은 저마다 여자 하나씩 끼고 앉아 술에 절어 들어갔다.

시원의 파트너는 말없이 자신에게 관심도 없고 술만 따라 주는 데로 마시는 시원을 보며 군침만 흘리고 있었다.

다른 두 사람과 달리 어딘가 분위기부터 틀린 남자였다.


“아, 빼지 말고 이리와 봐라. 역시 살결은 우리나라 여자들이 최고라니까“

“아유. 오빠~”


지훈이 여자와 노는 모습을 힐끔 쳐다보는 시원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이제 슬슬 일어날 때가 된 모양이었다.

술값을 낼 요량으로 일어서려는 시원을 보고 석수가 막으며 술 한 잔을 따르고 시원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결혼 축하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찾던 여자 못 잡고 다른 여자냐? 후회 없겠어?”


그동안 시원의 희진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일을 빠짐없이 다 알고 있는 석수였다.

그래서 이해가 안 되었지만 상처가 될까봐 밀어두고 물어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시원은 그러나 억지로 생각하지 않았던 희진의 대한 일을 끄집어내는 석수가

못 마땅해 술을 비워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다. 나 먼저 가봐야 갰다.”

“야~ 자식. 뭐 벌써 일어나. 같이 나가지.”


시원이 피식 웃고, 석수에게 지훈을 힐끔 고갯짓하며 말했다.


“저 녀석 취 했나 본데. 네가 수고 좀 해라. 대리운전 부탁해 놓을 테니“

“그래. 알았다. 걱정 말고 들어가.”


석수의 등을 한번 치고 부탁한다는 몸짓을 하며 시원이 뒤돌아 룸을 나가려고 손잡이를 잡는 순간,

지훈이 나가는 시원을 향해 말했다.


“야~ 권 시원! 이태리에서도 개폼 다 잡더니 여기서는 더하네 자~식.

야! 내가 물로 보여? 나 안취했어. 인마~ 이 부잣집 냄새나는 놈아.

그 치만, 너 그거 알아야해. 내가 네 생명 건져준 거야. 너 그거 알아야 한다고!”

“?”


시원이 지훈의 말에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몸을 돌려 쳐다봤다.

잔뜩 인상을 쓴 시원을 보고 석수가 저 자식 취했다고 말리려고 하는데, 지훈의 말은 계속 되었다.


“마피아의 여자 들쑤시고 다녀봐야 죽기밖에 더해?

너 내가 중간에서 막아주지 안 않으면 죽었어. 인마. 그 놈들이 어떤 놈들인데…당연하지!”

“마피아의…여자?”


석수역시 놀란 표정으로 지훈을 응시했다.

서서히 싸늘하게 굳어가는 시원의 표정을 보면서도 지훈은 여자를 무릎에 올려두고

방패막이 라도 되는 것처럼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래. 그 여자. 네가 찾던 여자 말이다. “

“너… 지훈이 너 뭔가 알고 있었어?”


석수마저 지훈을 가늘게 떠 쳐다보고 캐물었다.

시원이 지훈을 노려보며 예전 이태리에서의 일을 생각했다.

뭔가 뒤가 이상하다 생각했었다.

알아보려고 하는 일 마다 누군가 아는 것처럼 다음 날이면 감촉같이 사라지거나 없어졌던 일.


“알다 뿐이야? 내가 중간에서 저 자식 살려줬다니까. 나 아니었음 저 자식 총알받이였어.

그 여자 엄청난 거물하나 문 모양인데, 한 수백 번은 말해주고 싶었다.

돌아가. 죽고 싶냐? 돌아가. 인마. 큭큭“


술에 취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말이 많아진 지훈은 자신이 커다란 실수를 하고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시원이 다가가 멱살을 잡아 벽에 붙이는데도 지훈의 표정은 태연했다.


“너지? 누구야?! 너한테 그 딴일 시킨 놈이 누구냐고!”

“말했잖아. 마피아라고.”

“시원아. 이 자식 취했다. 나중에 머리 말짱해 지면 다시 묻자.

지금 해봐야 진짜인지 구분도 안 돼. 내가 날 세면 차분히 다시 물어보고 전화주마. “


석수의 말림에 시원이 지훈의 멱살을 놓고 벌레 보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인간 말 종 새끼.”


싸늘하게 뒤 돌아서는 시원이 다시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가려는데

지훈이 석수가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시원을 향해 걸어가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 새끼야! 나 인간 말 종이다. 그래도 너 보단 나.

마피아랑 놀아난 여자에게 차인 네 놈 보단 낮다고 병신 새끼야.

지 여자를 마피아한테 빼앗기고, 질질 울면서 찾아다닌 네 놈보다 내가 휠 낮다. 개 새끼야.”

“악!!”


'퍽! ‘


석수의 말리는 모습에도 기어코 지훈은 시원에게 뺨을 강타당하고 소파에 푹 꼬꾸라졌다.

세게 쳐 아픈 주먹을 문지르며 시원이 눈을 빛내고 한 번 더 발로 지훈의 배를 걷어찼다.

여자들이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나갔지만 시원은 노려보고 더 말해보라는 표정으로

지훈의 멱살을 잡고 바로 세웠다.


“으읔…”


석수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시원에게 말했다.


“술 취한 놈이다. 그 말 다 믿지 마. 이태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나.

괜히 너한테 화풀이 하는 거다. 시원아.”

“아냐. 이 자식 다 알아. 전부다 듣고 말겠어. 여길 다 때려 닫는 일이 있어도.

전에 있었던 일 빠짐없이 다 듣고 말겠다고. 일어나!! 자식아!”


바로 탁자에 있는 얼음이 든 찬물을 지훈에게 끼얹져 버리는 시원의 눈이 무섭게 분노로 불탔다.

석수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룸의 소란에 안으로 떡대들을 두 명 끌고 들어온 웨이터가 난처한 표정으로 룸 안을

휘휘 쳐다보며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고 있었다.

석수가 웨이터를 향해 오라는 손짓하고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나 형사니까. 괜히 소란피울 것 없어.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 네!”


* * *


-로마 (Roma)


“살바체 프란트. 그만 쳐다보고 식사나 하는 게 어때요?”


카네스트라토 푸글리제 치즈와 소스가 곁들여진 송아지 룰라드, 양고기 커틀렛이 먹기 좋게 식탁에 차려졌고,

가볍고 신선한 레드와인이 레드 빛을 내며 예쁜 클라스 잔에 담겨 있었다.

살바체는 그러나 식사는 상관없이 식탁에 앉아 자신의 턱을 쓸며 감상하는 느긋한 표정으로

희진의 먹는 모습만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희진이 그런 살바체를 향해 쳐다보지 않고 음식을 잘라 입으로 가져가며 핀잔 섞인 말을 했지만,

살바체는 듣는 척도 안하고 레드와인을 가볍게 입으로 가져갔다.


“먹지도 않고 배가 부르다는 말 이해가 가.

그렇게 새침하게 앉아 있는 표정만 봐도 말이야.”

“새침하게?”


희진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살바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 희진을 향해 따뜻한 표정을 지으며 살바체가 말했다.


“그래. 재밌어. 이젠 보기만 해도 속을 알 것 같아.”


유유히 레드 와인 잔을 내려놓고 희진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마주 보며

살바체가 개구쟁이같이 눈썹을 찡긋하고 조금 더 희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도도한 척하는 그 표정 말이야.

내가 보는데도 모른 척 하며 음식을 가져가는 그 모습. 재밌고 귀여워.”

“살바체 프란트. 내 속이 다 보인다 해도 이건 모를 걸요.

이 포크가 당신 얼굴로 향해 던져지기 일보직전 이라는 건요.”

“하하하. 이젠 데스데의 초상화가 아닌, 내 얼굴인 모양이군.”


살바체의 농담 한마디에 희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과거의 한 장면이 다시 둘 사이에 얼굴을 내밀었다.

희진이 포크를 룰라드에 가져가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꾸미며 살바체에게 물었다.


“그 초상화 진짜였죠?”

“아니. 가짜야.”


살바체가 곧바로 희진에게 말했다.

그러나 가짜라는 살바체의 확실한 거짓말에도 희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살바체가 한숨을 쉬며 희진을 향해 손끝을 뻗어 내려져 있는 얼굴을 턱을 들어 들어올리고, 눈을 맞추며 말했다.


“어제는 지나갔어. 오늘 부터는 다를 거야.

그러니까 진… 그런 표정 내 앞에선 다시 짓지 마.”


희진은 살바체의 진지한 얼굴과 눈빛에 말을 잃었다.

따뜻한 표정으로 희진의 볼을 엄지로 쓸고 손을 아쉽게 거두어들이며

살바체가 그제야 잊고 있던 포크를 들어 식사를 했다.

살바체의 표정엔 어떤 그늘도 없이 평온했다. 희진 역시 말없이 포크질을 했다.


“진. 저녁에 거리로 산책이나 할까?”

“!”


희진이 포크질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살바체를 쳐다봤다.

무척 간단한 제의였지만, 희진은 놀랍기만 했다. 살바체의 머리에서 저런 생각이 나왔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했다.


“후후, 알고 있어. 내가 그런 평범한 데이트 신청을 하게 되리라고는 나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당신이 없을 때, 갑자기 차 밖으로 지나치는 연인들이 부럽더라고. “


식사를 하며 단 한 번도 희진을 보지 않으면서 살바체가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빠르게 대답했다.

희진이 쑥스러워하는 살바체라는 것을 깨닫고 울컥하고 밀려드는 감동을 뒤로하며

살바체에게 자신도 아무렇지 않은 척 꾸미며 대답했다.


“저기… '로마의 휴일'에서 137계단을 오르면 트리니타 데이몬티 교회가 있고…

건축가 베르니니의 부친이 바로크 양식으로 만든 조각배 분수가 있다는…

거기 가보고 싶었어요.”

“하하. 스페인광장을? 이번엔 오딜이 아닌, 오드리 헵번이 되보고 싶은 건가?”


희진이 유쾌하게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는 살바체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설마 당신이 그레고리 펙 처럼 멋지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아니, 더 잘났다고 생각해.”

“하, 뭐라고요? 정말 못 말리겠군요. 살바체 프란트.“


처음 살바체와 식사를 하는 것처럼 희진은 가슴이 떨렸다.

이렇게 유쾌하고 행복한 식사를 살바체와 하고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이제 어쩌면 살바체의 말처럼 어제와는 다른 오늘인지도 몰랐다.

시작은 비슷했지만, 끝은 달랐다. 더 이상 안의 있는 말을 외곡하고 거짓말하며

상처 입히지 않아도 된다는 게 행복했다.

희진은 이제 끝을 향해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다. 다시 평범하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살바체의 표정을 보고,

아무 근심도 없는 새 출발만이 존재한다는 게 가슴 떨리고 기뻤다.

살바체가 다시 희진에게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진. 그만 쳐다보고 식사해.”


쿡쿡 웃는 살바체의 기분 좋은 목 울림소리를 들으며 희진이 살바체를 흘겨보고

다시 새침한 표정으로 송아지고기를 포크로 쿡 찍었다.


* * *


날이 어둑해지는 저녁.

희진은 살바체가 사람을 시켜 호텔에서 가져온 가방에서 가장 편한 청바지와 아이보리색 니트를 걸쳐 입고,

얇은 분홍색의 손으로 뜬 가디건을 걸쳐 입었다.

살바체 역시 편한 옷차림으로 방으로 들어서며 희진의 옷차림에 쿡쿡 웃었다.


“아무리 봐도 오드리 헵번의 옷차림은 아닌데. “

“그런 옷차림을 하고 눈에 띄고 싶진 않으니까요.”


살바체가 희진을 보고 빙긋 웃고 손을 내밀었다.

희진은 살바체의 손을 내려 보며 처음 손을 잡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손을 마주 잡았다.

자연스럽게 살바체가 그런 희진의 손을 잡아 자신의 허리에 두르게 하고 희진의 어깨를 가볍게 쥐며 방을 나갔다.


“발 괜찮아?”

“좋아요. 하루 지나니까 따끔거리는 것도 없어졌어요.”

“그래도 오래 걷는 건 안되니까 무리하지 말자고.”


희진과 함께 긴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가던 살바체는 올라오고 있는 미얀과 마주쳤다.

빙그레 웃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 희진이 잠깐 멈춰 섰다.


“차가 대기해 있다는 말씀 드리려고 올라가고 있었답니다.”

“미얀. 저기…”


희진이 난처해하며 살바체에게 한걸음 떨어져 다가서자,

미얀이 맑게 웃으며 희진에게 말했다.


“다시 뵙게 되어서 너무 좋아요. 아가씨.

긴 이야기는 나중에 시간이 많겠죠? 예전처럼 이요.”

“미안해요. 미얀.”

“돌아오신 걸로 되었어요. 정말이에요.”


미얀의 말에 희진이 더 낮이 뜨거워 졌다. 차라리 화난 모습이면 풀어주려고 노력이라도 하겠지만,

저리 환하게 웃고 있으니 더 죄를 지은 사람이 난처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가지.”


살바체가 그런 희진의 손을 잡아 계단으로 데려갔다.

미얀이 따라나서 나가는 두 사람을 배웅하고 검은 차에 올라타 사라질 때 까지 서 있었다.


“미얀. 당신이 부른 거 맞죠? 나 때문인가요?”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하지?”


차가 스페인광장으로 이동할 때, 희진이 살바체에게 물었다.

그러나 살바체는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희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교황의 섬. 미얀이 떠날 수 있을 리 없죠.

선조 때부터 지켜오던 저택이라고 했어요. 아닌가요?”

“맞아. 진. 그것보다 오늘 뭘 하고 싶은지 말해봐.”


희진은 말을 돌리는 살바체를 보며,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생각을 했다.

불편해하지 않게 하나라도 배려하는 살바체의 행동에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그래서 말을 돌리는 살바체를 거들어 주었다.


“오드리 헵번이라고 했으니까, 진실의 입에 손이라도 넣어볼까요?

아니면, 트레비분수에 동전을 넣고 소원을 말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

“좋아. 그럼 진실의 입에 손을 넣을 때 날 사랑한다 말해보고 넣어 보는 건 어떨까?”


살바체가 장난 반 진담반이 섞인 표정으로 희진의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희진이 살바체의 표정을 보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응수했다.


“내 손이 절단나길 바라는군요.”

“하하하하.

그것보다 그 진실의 입이 어떤 용도로 쓰였었는지 안다면 절대 손을 넣거나 하진 않을걸.”

“뭐였죠?”

“후후, 추정이긴 하지만, BC 4세기경에 하수관 마개로 쓰였다고 해.”


희진이 황당한 표정을 재밌게 쳐다보고 살바체가 하하하 소리 내 웃었다.

로마의 휴일에서 나왔던 그 아름다운 부조물이 하수관 마개로 활용되었었다니…

'진실의 입'이라는 이름이 아깝다고나 할까.


“벌써 다 온 모양이야. 내릴까?”


운전사가 열어주는 차에서 내려 두 사람은 둥근모양의 탑이 보이는 스페인광장 앞에 내려섰다.

살바체가 다시 희진에게 손을 내밀고 희진의 손을 잡아 어깨를 잡고 걸으며 말했다.


“한 가지 더 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뭐죠?”


희진이 궁금함에 바로 묻자, 살바체가 우뚝 멈춰 서서 희진의 어깨를 잡고 내려다 봤다.

진지한 살바체의 표정을 보며 희진이 놀란 표정으로 살바체를 응시했다.

장난기 하나 없는 깊은 사파이어 빛 눈동자로 살바체의 얼굴이 가로등에 가려

음영을 지으며 희진에게 내려오고 있었다.

희진은 가만히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살바체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사람이 많은 공간에서 나누는 프렌치 키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떨림을 선사했다.


“바로 이거였어.”


희진의 입술을 쓸어주는 살바체의 엄지와 장난기 어린 눈동자를 그제야 희진이 쳐다보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희진의 표정을 보고 다시 하하하 웃는 살바체의 표정이 천사처럼 부드러웠다.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군요. 살바체 프란트'


희진의 손을 잡고 한걸음 먼저 걸어가는 살바체의 단단한 등을 바라보며, 희진은 다시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자. 여기가 바로 스페인광장이지. 저 계단에 앉아 있다 갈까?”

“아뇨. 걷는 게 좋겠어요.”


살바체가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희진의 표정을 보고, 손을 잡아끌어 자신에게 바짝 붙였다.

그리고 편한 미소를 짓고 내려다보며 희진에게 말했다.


“불편해 할 필요 없어. 많은 사람들에 섞여 흔하디흔한 관광객으로 보일 테니까 말이야.”

“훗, 그레고리 펙보다 잘났다는 대답을 해놓고 잘도 상황에 따라 틀려지네요.”


살바체는 희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기분 좋게 웃었다.

계단을 오르며 살바체는 희진의 편안해진 얼굴에 안도했다.

이렇게 손을 잡고 걷고 싶다는 말을 그저 남들이 부럽다는 말로 때웠지만,

그 빌어먹을 자식과 파리를 손잡고 다닌 희진의 사진을 보고나서 질투가 났기 때문이었다.


“진. 파리보다는 로마가 더 아름답지 않나?”

“글쎄요.”


쿡쿡거리며 웃고 있는 희진을 내려다보고 살바체가 희진의 어깨를 잡은 팔에 힘을 한번주고 강조하듯 말했다.


“안되겠군. 하수관 마개에 손을 넣게 해야지.”

“살바체 프란트. 유치한 거 알아요?”

“상관없어. 더 유치해 질수도 있지. 보여줄까?”

“하하하!”


번쩍 희진을 들고 살바체가 얼마 남지 않은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희진의 웃음소리가 스페인광장에 울려 퍼졌다.


* * *


-서울 (Seoul)


강남 단람 주점 룸.

완전히 나가떨어진 지훈이 시체처럼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고,

술을 연거푸 들이켜고 있는 시원은 석수의 말을 듣고 있었다.


“너 이제 결혼해야 할 것 아니냐. 지난 일에 연연 하지마라.”


맞은 후 엉망이 된 얼굴로 술에 취해 자고 있는 지훈을 보는 석수의 눈도 차가왔다.

이태리에 간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훈은 예전의 석수가 알던 그 지훈이 아닌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설사 저 자식 말이 다 사실이라고 치자. 이미 끝난 일 아니냐?

이제 와서 화를 내봐야 너만 우스운 꼴 나는 거다.”

“하하하. 우스운 꼴?”


시원이 큰 클라스 잔에 술을 가득 따라 들어 보리차처럼 들이키며

탁하고 큰 소리로 탁자에 내려놓고 석수를 쳐다봤다.


“벌써 우스운 꼴 난지는 오래지. 저 자식 말대로 미친놈처럼 찾아다녔어.

살아있다고 믿었던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는 최선을 다했다.

난 진이 돌아온 후에도 과거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실종된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내게 준건 싸늘한 시선, 아무것도 없더군.

요만큼의 후회도 없이 떠나는 여자를 보고 내게 남은 건 오기뿐이더라.

하, 그래 그 잘난 오기. 그 오기하나로 버티고 있는 거다.”

“시원아…”

“화가나. 시발. 자존심상해. 진의 눈이 날 어떻게 봤는지 알아?

다른 여자와 약혼한 남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어.

모든 이유가 전부 나 때문인 줄 알았다. 이렇게 만 든 건 전부 내 탓이다.

자업자득이다. 자책했어. 그런데! 뭐라고?! “


석수가 피곤한 눈가를 만지며 시원에게 말했다.


“그래서 어쩌려고. 이성적인 놈이잖아. 너. “

“하하. 이성적? 그래. 이성적이기 때문에 이러는 거다.

내 인생의 오점은 최 희진 하나뿐이야. 지금껏 내 인생에서 오점은 단 한 점도 만들지 않고 계획 있게 진행했었다.

그 여자 때문에 내 인생이 더럽혀 졌어. 알아?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저 자식 말이 사실인지 내 귀로 똑똑히 듣고 말겠어.

그렇지 않고는 화병에 뒤지고 말거다.

뭐 때문에 날 걷어차 버린 건지 이유를 똑똑히 듣고 그 냉정한 눈을 뒤 흔들어 놓고 말겠다고!”

“야!”


바로 일어서는 시원을 보고, 석수가 손을 들어 막으려고 했다.

이대로 나가면 단단히 일을 치를 기세였다. 하지만 시원은 거칠게 석수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너 말대로 나 이성적인 놈이야. 내 인생의 오점은 단 하나로 충분하다.

하지만 이유는 들어야겠어.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 생각한 내가 미친놈이었는지 알아봐야 갰다고!”

“권 시원!!”


시원은 곧바로 석수를 뿌리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석수는 그런 시원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한숨을 쉬며,

아직도 널브러져 코까지 골고 자고 있는 지훈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나도 너란 놈을 친구로 둬야 하는지 이성적 판단을 좀 해봐야 갰다. “


* * *


-로마 (Roma)


트레비분수가 있는 콜로나 광장.

희진과 살바체는 사람들에게 비켜서 돌계단에 한 칸씩 차이를 두고 앉아 있었다.

살바체는 뒤에서 희진을 안고 사람들의 지나치는 모습과 연인들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져 넣는 모습을 보고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희진과 함께 아무런 걱정 없이 그저 이 상태로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행복이 느껴져 살바체를 기쁘게 했다.


“저 트레비분수를 무려 30년 동안이나 지었다니,

그 시대 사람들은 참 인내심이 대단해요. 하지만,

그렇게 공들였으니 아직까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거겠지만 말이에요. 우린 동전 안 던져요?”

“쿡…동전이 없어.”

“거짓말. 좋아요. 나한테 동전이 있어요. 내가 줄게요.”


살바체의 숨이 자꾸만 목덜미를 간질이고,

살바체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희진이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쑥스러워 일어나려는 핑계를 댔다.

하지만, 살바체는 희진의 손을 잡아 다시 앉히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필요 없어. 우린 안 던질 거니까.”

“왜죠?”

“더 이상 소원이 없어. 진. 나의 지젤이 옆에 있으니까.”


희진이 살바체의 장난스런 눈을 보고 할 말을 찾지 못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 남자.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데 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발은 괜찮아?”

“괜찮아요.”


희진이 말을 돌리는 살바체를 한번 흘기고 다시 주저앉으며 말했다.

살바체는 그런 희진을 향해 한 계단 내려와 앉으며 희진의 발을 끌어당겼다.


“살바체 프란트!”

“봐봐. 눈으로 봐야 안심이 되겠어.”

“여기 사람 많아요. 하지 말아요. 괜찮아요. 괜찮다니까요“


기어코 살바체는 만류하는 희진의 발을 끌어당겨 양말을 벗기고 맨발을 살펴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은 것 같지가 않아. 이거 봐. 거짓말한 사람은 내가 아닌 당신이군.”

“…….”


주저앉아 한쪽 무릎을 굻고 심각하게 자신의 맨발을 쳐다보는 살바체의 모습에 희진이 쳐다보고 얼굴을 굳혔다.

서서히 살바체의 긴 손가락이 희진의 맨발의 닿는 감촉과 바람에 맨살이 닿는 감촉이

희진을 다시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그만…갈까?”


살바체가 희진의 발을 잡은 채로 희진의 눈동자를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가슴이 두근거려 희진이 고개만 끄덕였다.

살바체의 눈이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보이고 있었다.

당신을 원해.

확실하게 박혀있는 살바체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빨리 가요.”


트레비분수를 지나쳐 대기하고 있는 차로 가는 살바체와 희진은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차가 보이는 지점에 들어서 두 사람의 발이 누구 할 것 없이 빨라져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차를 타자마자 곧바로 살바체의 입술이 희진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숨 막힐 듯한 키스에 붕 뜬 듯한 기분을 느끼며 희진은 살바체의 목을 끌어당기고,

살바체도 희진의 볼을 마주 잡아 진한 키스를 했다.

희진과 살바체가 탄 검은 차량이 Roma의 아름다운 거리를 힘차게 내달렸다.



-다음 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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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 공주완결소설②〃

번호: 228

제목: 이태리의 살바체(4막-마지막 게임)(完)

글쓴이: 지영공주V

조회: 496

날짜: 2005/03/07




##수정인물이름수정. 명칭수정. 오타수정. 문법수정. 내용수정 (틀린곳은 꼬리말로...)##


-※4-마지막게임※





공식커플이 되다. [6장]


“이렇게 쳐들어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요. 체논.”


그 날 살바체와 희진의 싸움이 길어지자, 기다리다 지친 두 사람은 늦은 저녁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4일이 지나도록 살바체에겐 아무 연락도 없고 소식한 자 없으니 궁금함에 못 견딘

체논이 젠느에게 함께 가보자 연락을 해 왔던 것이다.

살바체의 저택으로 향하면서 젠느가 실실 웃고 있는 체논을 흘기며 말했다.

그러나 체논은 빙그레 웃으며 맞받아 쳤다.


“무슨 소리. 나보다 더 궁금하다는 빛이 얼굴에 가득한데. 그렇지?”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이렇게 불쑥 가서 뭐라고 한단 말이죠?”

“뭐 내일 미사에 갈건 지 물어보는 것도 좋은 핑계고,

또 어차피 우리가 그만큼 도와 줬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지. 안 그래?”

“참, 편할 대로 생각하는 군요. 체논.”


젠느가 가볍게 체논을 흘겨보고 차 창문으로 얼굴을 돌렸다.

빙글거리며 웃는 체논이 며칠 전 희진을 생각하고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살바체가 당당하고 멋진 여자라고 하더니, 첫 인상과는 다르게 정말 묘한 매력이 있는 여자였다.

살바체가 여자에게 뺨을 맞다니… 하하하 오래살고 볼 일이었다.


“사일동안 심심했던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나 보네요.”


젠느가 혼자만의 생각에 싱글싱글 거리는 체논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곧 차가 프란트 家 저택에 도착했다.

체논이 젠느와 함께 저택에서 내려서 입구에서 집사의 마중을 받았다.


“어서 오십시오. 젠느아가씨. 알 체논님.”

“어디 있지?”


체논의 질문에 집사가 나선형 계단 위 2층을 눈짓하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벌써 하하하 웃는 살바체의 목소리가 저택을 강하게 울렸다.


“?!”


체논의 젠느가 서로를 바라보고 같이 소리가 울린 쪽을 응시했다.


“가서 오셨다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깍듯한 집사의 말에 체논이 손으로 되었다는 손짓을 하고 젠느의 어깨를 밀어 함께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살살 2층으로 옮기는 그들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선물상자를 풀기 직전의 모습처럼 왜 자신들이 설레고 재밌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얼마 만에 맑게 웃는 살바체의 웃음소리였는지 반가운 마음이 컸기에 직접 얼굴이 보고 싶었다.


“후후…”

“!”


체논과 젠느가 휴게실 방문에서 정지해 희진과 살바체의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긴 소파에 보이는 것은 오직 살바체의 긴 발과 여자의 작은 발이었고,

비스듬히 누워 좁은 공간에서 서로를 안고 스크린에 나오고 있는 '로마의 휴일'을 관람하고 있었다.

두런두런 영화를 보며 즐거운 건지, 얘기를 나누느라 즐거운 건지,

연신 살바체는 웃고 있었고, 간간히 여자의 웃음소리도 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린 그냥 가죠…?”


조그만 목소리로 젠느가 두 사람을 방해하지 말자는 뜻으로 체논에게 말했지만,

체논의 눈엔 벌써 장난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거… 우리가 방해가 되었군.”


방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큰 소리로 떠드는 체논을 흘겨보고 젠느가 자신의 이마를 만지며 화들짝 놀라

일어나는 두 사람을 향해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요. 약속도 없이 왔네요.”


젠느가 급히 희진에게 말했지만, 벌써 난처한 표정과 붉어진 희진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살바체는 당연하다는 듯이 희진의 어깨를 끌어당겨 자신 쪽으로 바짝 붙여 서서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방해라는 걸 알긴 아는 거야?”

“후후. 당연하지. 안 그래 젠느?”

“몰라요. 나한테 묻지 말라고요.”


살바체의 손이 희진의 어깨를 당당하게 끌어당기고 있었지만,

희진은 세 사람의 대화 속에 자신은 이방인이 된 것 같아 난처했다.

세 사람에게는 자신이 없는 그들만의 공간이 있었다.


“우리 저번에 통성명도 못했죠?

미안해요. 그땐 제가 초면에 실수를 했어요. 용서해 줄래요? 진?”

“네?… 아, 네“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살바체는 저에게 오빠나 다름없어요.

아니, 오빠보다는 동생 쪽에 가깝군요. 남자들 있잖아요. 나이 먹어도 철없는 거. 그렇죠?”

“뭐야?”


젠느는 두 남자가 자신을 노려보던 말든 희진을 향해 상냥하게 웃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희진은 젠느의 희고 고운 손을 보고 웃어버렸다.

함께 잡은 여자들의 손으로 이상기류가 흘러들어갔다.


“난 젠느 베를루스코니라고 해요. 사실 난 진이라는 이름밖에 몰라요.”

“최 희진입니다. 그냥 진이라고 불러요.”

“그래요. 진“


벌써 친해져버린 두 여자를 보며 살바체는 흐뭇하게 웃고 있었고,

체논은 젠느의 민첩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희진은 지금까지 들어서서 자신 쪽으로는 시선한번 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체논은 좀 심술이 나기도 했다.


“난…”


체논이 은근슬쩍 자신도 소개하며 손을 내밀려고 하는데,

젠느가 재빨리 희진의 손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살바체에게서 벗어나게 하고는 말했다.


“이쪽은 신경 쓸 거 없어요. 알다시피 방해꾼이니까 말이죠.

우리 차 한 잔 같이해요. 저도 친구가 없거든요.

솔직히 지성, 미모, 돈 딸리는 게 없는데도 여자친구가 없어요. 이상하죠?

친하게 지내요. 진.”

“훗, 그래요.”


응접실 쪽으로 희진과 함께 나란히 걸어 나가자, 살바체가 재빨리 따라 나가려고 했다.

젠느가 갑자기 뒤돌아 그런 살바체에게 말했다.


“진하고 저만 비밀얘기가 좀 있으니까 남자들 끼리 할 얘기해요.

체논에게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그렇죠? 살바체?”

“그렇군. 후후“


젠느가 은근슬쩍 모든 걸 체논에게 떠 맞기고 자신은 희진을 데리고 유유히 방을 나갔다.

남아있는 체논만 두 여자의 등을 보며 벙찐 표정을 지어야 했다.

무서운 게 여자라더니… 정말 그 말이 딱 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하며 이마를 만지며 돌아서는 살바체를 보고 체논이 움찔 장난스럽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 * *


“뭐라고요? 정말 체논이 그렇게 말했단 말이죠?! 진. 알아둘게 있어요.

절대 체논과 전 아무관계도 아니에요. 트럭으로 갖다 줘도 싫다고요.

급하게 진을 데리고 오느라 농담한 걸 거예요. 정말이라고요.”

“그래요?”


희진이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호들갑스럽게 아니라고 말하는 젠느를 재밌게 쳐다보고 웃었다.

몇 분 동안 얘기해 본 젠느는 자신의 상상과는 달리, 소탈하고 남자 같은 시원한 성격의 당찬 여성이었다.


“그래요. 믿죠? 세상에… 나와 체논이라니… 꿈에도 싫어요.

그가 얼마나 바람둥이인지, 살바체는 겉으로만 그래 보이지만,

체논은 겉으로 안 그래 보여도 속은 엄청난 난봉꾼이라 고요.

절대 체논을 믿어서는 안 돼요.

어렸을 때부터 체논에게 살바체와 내가 얼마나 당했는지 알아요? 사람 놀리고 놀래 키는데 천부적이라고요.”

“쿡쿡…세 사람이 어렸을 때 부터 친했나 보군요.”

“네. 그런 거 있죠? 살바체는 어렸을 때부터 고아처럼 컸고, 체논도 마찬가지였고,

저 역시 아빠와 새엄마가 전부 정치 쪽으로 바쁘니 고아처럼 큰 거나 다름없었어요.

자연히 친해질 수밖에 없었죠. 그렇지만 안 좋은 것도 많았어요.

나에게 친해지며 다가오는 여자친구들이 전부 목적이…알죠?”

“하하하하“


희진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크게 웃었다.

젠느가 말도 말라는 소리를 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 두 사람과 사귄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이젠 지겹지도 않아요.

내가 아주 그런 일엔 진저리가 난다니까요. 이젠 해방이죠. 호호. “

“다른 생각은 해본 적 없나요?”


희진의 직선적인 물음에 젠느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그런데 이젠 뭐라고 할까. 두 사람이 곁에 있는 게 좋아요.

이런 식으로 평생 함께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요.

친구는 영원하지만, 연인으로 지내다 깨지고 나면 다시 얼굴보기 껄끄러워지고 말잖아요?

지금 관계는 돈을 주고도 살수가 없어요. 뭐가 더 중요한지 그 정도는 알 만큼 컸죠.”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희진이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하지만 젠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희진을 웃겼다.


“내가요? 아니면 두 사람이요?”

“하하하하“


세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잘났다는 자신감인 것 같았다.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저마다 다른 매력이 있는…

희진은 자신감 있는 얼굴로 차를 들어 마시는 젠느의 아름답지만 선이 큰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종교가 어떻게 되죠? 진?”

“저요?”

“네.”


갑작스런 젠느의 질문에 진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말했다.


“음… 한국에 있을 땐 기독교였지만, 이곳 이태리에 있으면서 세례를 받았어요. “

“세례명이 뭔데요?”

“마리아.”

“재밌어요. 살바체의 세례명이 요한이거든요. 요한과 마리아라니…훗훗“


신기해하는 젠느를 보고 희진이 피식 웃었다.

세례명으로 가장 흔한 이름이 요셉과 마리아였다.


“난 성경 중에서 아가서를 가장 좋아해요. 솔로몬이 엄청난 바람둥이였다는 건 잘 알죠?

하지만, 그 사랑의 시를 보고 사랑하지 않을 여자들이 있을까요?

아가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이 이거예요.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아가서 1장 15절이군요.”

“어머! 아는군요?!”


희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젠느에게 답가를 하듯 말했다.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으리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오! 진~ 정말 대단해요. 좋아요. 그럼 아무문제 없이 내일 미사에 갈수 있겠어요.”


희진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젠느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일 나와 살바체와 같이 미사에 가요.

체논은 미사에 사람이 많아서 싫어하지만, 제가 꼬셔볼 수 있을 거예요. 정말 잘 되었어요.”

“저, 저기…”


희진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젠느를 말려보려고 말을 꺼냈지만, 좋아하는 표정을 보고 말을 쉽게 열수가 없었다.

그때, 남자들이 응접실로 들어와 좋아하고 있는 젠느를 보며 물었다.


“뭐 좋은 일이 있나?”

“살바체! 내일 미사에 진이 같이 가기로 했어요.

우리 네 사람 내일 미사에 함께 갈 수 있게 되었다고요. 체논.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이번엔 빠질 수 없으니까.


엄하게 얼굴을 찌푸리는 체논을 노려보고 빼도 박지 못하게 젠느가 못을 박았다.

희진은 살바체의 환해지는 얼굴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게 정말이야?”


희진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살바체는 보지도 않고 희진을 번쩍 안아들었다.


“정말 잘 되었어. 잘 생각했어. 함께 미사에 가고 싶었어. 뜻밖에 선물이야. 진“


살바체가 희진의 볼에 재빨리 키스하고 환하게 웃었다.

거절할 기회를 잃은 희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체논만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웃고 있는 살바체와 젠느를 노려볼 뿐이었고,

희진은 세 사람을 보며, 젠느가 체논보다 위에 있다는 걸 실감했다.

어렸을 때 체논에게 당했다는 말은 자기변명일게 분명했다.


“호호. 그럼 전 내일 미사 준비를 해야 갰어요. 내일 만나요. 진.”


거절의 기회를 완전히 몰살시킬 요량으로 젠느가 서둘러 체논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어 넣고 뒤돌아서서 나갔다.

살바체는 그런 두 사람에게 대충인사하며 희진을 웃으며 내려다보고 물었다.


“성 베드로 성당에 함께 들어서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어? 진?”

“몰라요.”


퉁명한 희진의 대답을 들으며 살바체가 하하하 웃었다.


“공식적인 연인이 된다는 말이지. “

“…끙“


희진이 작은 소리로 고개를 숙이고 끙 소리를 냈지만,

살바체는 좋아 웃느라 신경 쓰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지도 몰랐다.


“내일 입고 나갈 옷을 사러 나갈까? 미얀! 차 대기시켜.”

“살바체 프란트! 옷은 필“

“안 돼. 내일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면 좋겠어. 사랑해. 진“


희진은 살바체가 턱을 들어 키스하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할 수 없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현실과 맞설 수밖에는…


* * *


-밀라노 (Milano)


밀라노 말펜사 공항.

시원은 프랑스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서 곧바로 희진의 행적을 쫓아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 도착했다.

희진이 파리 한국대사관 사저에는 이태리에 일 관계로 파트너인 겔체르 파벨과 떠났다가

곧장 한국으로 간다고 했다고 한다.

아직 한국으로 가지 않았냐는 걱정스런 대사님의 말에 시원이 인상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두 번째로 희진을 좇아 이태리에 온 시원이었다.

이미 '사랑'이라는 단어는 심한 집착을 동반한 남자의 자존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네가 뭔데 날 이 따위로 바보로 만들어. '


돌아온 후에 연습실에서의 싸늘한 희진의 태도, 영빈관에서의 자신의 고백 후에 희진의 시니컬한 반응,

거기다 공항에서의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눈빛, 그 모든 것들이 시원에게 남자의 자존심의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훈의 말은 그 상처를 고스란히 배신감으로 뒤바꾸어 버렸다.

이 따위로 자신을 가지고 논 희진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죽을 뻔 했으면서도 다시 이태리로 돌아온 이유가 뭐란 말인가?!

시원은 이태리라는 대사님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이번만은 도망치지 못할 거다.'


시원은 밀라노에서 가장 좋다는 일등급호텔로 들어서며 이곳이 예전에 '체르니' 호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이 가장 좋은 호텔이라는 택시운전기사의 말이었다.

운전기사의 말대로 '체르니' 호텔은 전 사고와는 달리 깨끗하게 이태리식으로 완공되어 새건 물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모든 게 최신식으로 뒤바뀐 모습은 밖이나 안이나 최고임을 자랑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시원이 카운터에서 방을 잡고 벨 보이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복도를 따라 걷던 시원이 자리에서 멈춰 섰다.


“저 초상화들은 뭡니까?”

“아, 이 곳 호텔의 주인인 프란트 家 초상화 들입니다.

맨 앞에 있는 분이 바로 마지막 프란트 家 이곳 호텔 주인이신 살바체 프란트 님의 초상화죠.”

“…….”


시원이 한참 그 사진 같은 초상화를 보며 어딘지 낮이 익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서 봤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보던 시원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벨보이와 함께 복도를 걸었다.


“프란트 家 가 보유한 자산이 얼마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태리의 사업과, 예술, 정치 쪽으로도 말입니다.”

“마피아 쪽도 말입니까?”


시원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벨보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시원의 뒤로 다가와 바짝 붙으며 속삭였다.


“그건 겉으로 드러내선 안 되는 일입니다.

절대로 다른 곳에서는 크게 떠들어서도 안 되죠.

프란트 家의 대한 자부심은 이태리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집니다.”


시원이 다시 피식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 벨 보이에게 팁을 건넸다.

짐을 풀기도 전, 시원은 먼저 전 희진의 파트너였던 포체에게 전화를 걸었다.


“희진이 거기에 갔었군요. 그럼 지금은…”


일주일 전 왔었다는 포체의 말에 시원이 눈을 빛냈다.

그리고 다음 포체의 말에 시원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공이 크게 확대됐다.


“그…그게 사실입니까?”


전화기로 대답을 듣자마자 시원이 호텔 룸을 나와 지나가는 호텔직원을 붙잡았다.


“오늘 신문 어디 있습니까? 오늘 신문!”


잠깐 기다리라며 직원이 신문을 가지러 간 사이 시원이 안절부절 하는 모습으로 그 직원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새 신문을 들고 오는 직원에게 지폐를 하나 건네고 시원이 바로 신문을 급하게 넘기고, 그대로 굳었다.


'진!'


포체의 말대로 성 베드로 성당으로 들어서는 동양여자에 대한 기사가 크게 보도되어 있었다.

이태리어를 모르는 시원이 곧바로 다시 지나치려는 직원을 잡아두고 읽어 달라 부탁했다.

그 남자직원이 머리를 긁적이고 그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살바체 프란트와 함께 이날 성 베드로 성당으로 들어선 동양여인은 반 년 전 이태리

'지젤' 역으로 극찬을 받았던 한국인 최 희진양으로 밝혀졌다.

살바체 프란트를 첫눈에 반하게 한 '지젤'로 최 희진양은 그 동안 몰래 살바체 프란트와

교분을 쌓아갔고, 비로소 이번 로마를 방문함으로서 살바체 프란트와 잦은 만남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에서 공연한 백조의 호수에서 오딜 역을 맡아

극찬을 받기도 한 최 희진양이 젠느 베를루스코니도 잡지 못한 살바체 프란트를 잡을 수

있을지 모든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남자직원의 말을 들으며 시원의 눈이 점차 불꽃이 일렁이며 커졌다.

손을 거머쥔 시원의 손이 배신감에 흔들렸다.



돌아온 옛 주인 [7장]


응접실에서 밝은 얼굴로 차를 혼자 마시고 있는 희진은 이틀 전 미사를 드리던 때를 생각하고 혼자 미소 짓고 있었다.

브라만테가 묵시록에 나오는 천상 예루살렘을 본떠 만들었다는 성 베드로 성당은 미켈란젤로의 숨결과 베르니니,

마데르노에 이은 거장들의 손길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2만7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의 성 베드로 성당 입구로 살바체와 함께 들어서며 압도 되었던

그 두근거림이 아직도 희진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그 많은 관중들의 시선을 받으며 살바체의 명성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지만,

희진은 고개를 당당히 들고 성 베드로 성당으로 들어섰었다.

살바체는 그 많은 사람들 안에서도 희진을 사랑하는 것을 거리낌 없이 들어냈고,

체논과 젠느 역시 자신들의 공간에 희진을 허물없이 껴주었다.

이방인처럼 느껴지지 않게 배려했고, 희진은 어느 때보다 마음깊이 미사에 감동하고 후회 없이 돌아올 수 있었다.


'큰일이야.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벌써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것 같아.

일주일 만에 다른 세상이 되어버렸어.'


그래. 일주일 만에 모든 게 변해 버렸다.

사람들의 시선, 언론의 주목 받는 것 보다 더 변하고 익숙해져 버린 것은 희진 자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당연한 듯 살바체와 미소 짓고 눈을 마주치고,

사랑에 익숙해져 버려 살바체 앞에서 내지르는 고성의 신음소리도 하나 부끄럽지 않게 되어버렸고,

이젠 눈만 마주쳐도 살바체가 무엇을 원하는지 훤히 알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랑해. 진' 이라는 살바체의 부드러운 음성이 이젠 당연하게 느껴졌다.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은 이젠 살바체가 아닌 희진 자신이 되고 말았다.


“휴 ㅡ.”


어제 젠느의 말대로 자신과 살바체의 관계가 유럽전역에 퍼졌을 것이었다.

아버지가 있는 한국으로 소식이 전해지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니, 벌써 귀에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희진은 그러나 미사에 가기 전, 마음을 단단히 먹었었다.

살바체를 온전히 가지기 위해 거쳐야 할 일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일을 불사해서라도 설득해서 넘어서고 말 작정이었다.

이제 절대 살바체 옆에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가 서 있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동안 살바체 때문에 아프고 떨어져 있었던 동안 괴로웠던 마음을 보상 받으려면 아직도 멀었다.

평생을 함께 해도 모자랐다.


“아가씨. 차 더 내올까요?”


희진이 식은 커피 잔을 쳐다보고 생각만 하고 있는 모습에 미얀이 웃으며 희진에게 물었다.

희진이 고개를 저으며 미얀에게 말했다.


“미얀. 우리 오랜만에 둘이네요. 그렇죠? 여기 좀 앉아 봐요.”

“에에… 안 되는데“

“왜요?”


힐끔 자신을 보고 다시 응접실 문 쪽을 응시하는 미얀의 표정이 이상했다.

희진이 고개를 갸웃하고 미얀을 쳐다봤다.


“여긴 교황의 섬 같지가 않아요.

거기선 제 맘이었지만, 여기선… 집사님이 총괄 하세요.

거기다, 주인님이 저만 찾으시니까 절 싫어하신다고요.”

“쿡쿡…“


미얀이 주눅이 잔뜩 든 얼굴로 울상을 하고 있었다.

재밌는 미얀의 표정에 희진이 웃을 지으며 미얀에게 어서 앉으라는 뜻으로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


“내가 책임질게요. 걱정 말아요.”

“하, 하지만…”


쭈뼛 쭈뼛 희진의 곁으로 엉덩이를 들이밀며 앉을 듯 말 듯 하던 미얀이

갑자기 들리는 집사의 말에 화들짝 놀라 정자세를 취했다.


“진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응접실로 들어선 집사의 무표정한 눈이 미얀을 쳐다보고 희진을 보며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희진은 그런 집사와 미얀을 보고 웃음이 나왔지만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이라는 말에 물었다.


“누가 말이죠?”


이곳에서 자신을 찾는 사람이 누구지? 벌써 집에서 알고 찾아온 것인가?

아니면 '체르니' 발레단 사람 중 한명인가?

희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집사의 말을 기다렸다가 나오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권 시원이라는 분입니다.”

“네?!”


희진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집사를 믿을 수 없어하며 쳐다보는 희진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당연하다는 당당한 얼굴로 희진을 쳐다보며 집사의 안내로 응접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희진은 그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의 슬로우비디오처럼 천천히 자신의 눈앞에 그려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떨고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시원의 모습은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희진을 향해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쳐다보는 시원의 입술은 일자로 다물어져 굳은 의지를 품고 있었고,

눈에선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희진은 떨리는 몸으로 서 있으면서 한차례 오한이 휙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현실이 아니었으면 싶었지만,

시원이 희진과 조금 떨어져 입을 열었을 때, 곧 현실이라는 것을 희진은 깨달아야 했다.


“오랜만이야. 진“


한 글자씩 말로 내뱉는 시원의 말투엔 진한 배신감이 노골적으로 들어나 있었다.

희진은 눈앞이 캄캄해 지는 것을 느꼈지만 당당하게 서 있으려고 노력했다.

자꾸만 떨리는 입술을 희진은 꼭 깨물고, 시원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반갑다는 말… 해야 하나요?”


희진의 말에 피식 시원이 안 좋은 얼굴로 입술 끝을 올렸다.

이태리제의 품위 있는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올리고 있는 희진의 모습은

깔끔하고 여성스러우면서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시원은 저 가는 목을 조이고 싶다.

저 뻔뻔한 얼굴을 쥐어흔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 추측, 사진… 그 어떤 것보다 현실에서 본 희진은 시원에게 더한 배신감을 주었다.

당연하다는 듯 안주인 역할을 하는 희진. 다른 남자의 여자로 안주하고 있는…

그것도 이태리남자의 여자가 된 희진을 본 시원은 당장 총이라도 있으면 쏴죽일 만큼 화가 났다.


“이제 그 웃기는 얼굴 그만 치우고,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지 그래?

웃기는 변명은 그만 두고 말이야.”

“변명이 필요한가요?”

“하하하. 뻔뻔한 최 희진. 내가 온 이유를 모르겠다 발뺌하진 않겠지?

언제나 솔직하고 당당한 게 매력 아니었던가? “


희진은 시원이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걸 눈을 보며 깨달았다.

옆에 서 듣고 있는 미얀과 집사가 경악되어 한국말로 말하고 있는 동양 남자의 입술과 희진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기에

희진은 알아듣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상황을 살피고 있는 그들을 응접실에서 내보냈다.


“미얀 나와 잘 아는 손님이니까 그만 나가봐도 좋아요.”


미얀과 집사가 응접실을 나가고 난 후 희진은 노려보고 있는 시원과 둘만 남았다.

앞 의자를 권하는 희진의 손끝이 떨렸지만 희진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시원에게 말했다.


“우선 거기 앉아요. 시원 씨. 혜수는 어떻게 두고 혼자죠?”


희진의 말에 시원이 입술 끝을 올리고 권하는 희진을 무시하고 앉으려는 희진의 팔을 대신 낚아채 거머쥐었다.


“아…”


팔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꽉 희진의 팔목을 움켜쥔 시원의 눈이 희진을 직시했다.


“네가 혜수이름을 들먹일 정도로 뻔뻔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 언제부터였지?

이태리 놈과 눈이 맞은 게 언제부터였어? 이탈리아에 온 직후부터였나?

내가 미치도록 찾아 헤맬 동안 죽은 척 하며 그 놈과 희희낙락 재미있었겠어.

돈 많고 잘생기고 명성에, 외국남자니 혹 했겠지. 내가 결혼한다니 아주 좋았겠어.

이제 살판났으니 신문에도 대문짝만하게 실려도 상관없다 생각했나? 왜?

내가 정곡을 찌르니 겁이 나나? 말 잘하는 최 희진 아니었어?”

“아파요. 이 손 놔요.”

“내가 잡은 이 손만 아파? 내 자존심은 산산이 조각나서 어디로 흩어졌는지 알 수가 없어.

매달리고 또 매달리고 목매는 내가 웃겼겠지?

이해심 많은 언니인척 혜수에게 날 떠넘기며 아주 신이 났었겠지?

집에서 조차 살아 돌아온 막내딸이라고 아주 당연한 듯 행동했지?

너의 그 가식을 모두에게 말해 줄 생각이야. 당신 딸 알고 보니 전부 쇼였더군.

납치? 웃기지도 않아. 죽었다는 것도 다 위장이었고, 우릴 다 속여 넘긴 거야.

너희 아버지 표정 어떨지 벌써 부터 기대가대. “


희진은 시원이 잔인한 음성으로 하나하나 열거할 때 마다 눈을 깜빡이다 아버지라는 말에 사색이 되었다.

시원이 그런 희진의 표정을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비웃고 있었다.


“이러지 말아요. 시원 씨.”


희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시원을 올려다보며 부탁했다.

제발 아버지가 알게 하면 안 된다.

아버지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은 살바체 곁에 영원히 있을 수 없다.

희진은 그 생각으로 시원에게 말했지만,

시원은 희진의 이 한마디에 모든 걸 인정한 거라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넌 다르다고 생각했어. 발에 치이는 게 여자지만 너 하나만은 다르다 생각했어.

지훈이가 말하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넘어갔겠지? 그 남자 뭐가 더 좋아? 밤일을 잘해?

나보다 더 잘생겨서? 부? 아니면 그 놈 옆에서 이태리인들에게 환호를 받으니 좋던가?”


한걸음씩 희진의 팔을 잡고 벽으로 위협하듯 시원이 몰아갔다.

희진은 시원의 눈을 보며, 뒷걸음쳐 벽이 닿을 만큼 물러서 마침내 쿵하고 벽에 등을 부딪쳤다.

시원의 손이 희진의 턱을 거머쥐며 대답을 재촉했다.


“말해봐. 이태리 놈에게 어디까지 내주고 여기 안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거지?

난 한 번도 제대로 만지지도 못한 널 그 놈은 수십 번 수어차례 널 만지고 가졌겠지?

구역질이나. 네 몸에서 이태리 놈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

“원…원하는 게 뭐죠?”


시원은 떨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고 울지도 않는 희진의 눈을 들여다보고 잔인하게 웃었다.

어떻게 복수할까 생각하는 시원의 눈은 더 잔인했다.


“넌 이대로 한국으로 나와 돌아가야 할 거야.

그리고 내가 혜수와 결혼하는 꼴을 지켜봐야 할 거고.

평생 내가 입을 열지 않게 조심시켜야 할 거야. 그래. 그게 좋겠어.

네가 잘하면 집안에서 시켜주는 정략결혼을 눈뜨고 지켜봐 줄 수도 있어.”


희진은 시원의 잔인한 대답에 서서히 눈이 살아났다.

깊은 자존심이 시원의 말에 활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쥐고 흔들려는 권 시원. 절대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여기서 이기지 못하면 지옥이었다. 희진은 시원을 쳐다보고 앙칼지게 대답했다.


“웃기지 말아요. 난 그렇게 살지 않아요. 난 잘못한 게 없어요.

모든 걸 안다는 듯이 날 판단하지 말아요. 당신은 아는 게 개뿔도 없어.”

“하…. 하하 하하하“


희진의 말에 시원이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끝까지 발뺌하고 오기를 들여 내는 희진을 보며 시원은 순간 즐거움을 느꼈다.

바동바동 살려고 바득치는 희진을 보고 있으니 자존심의 상처가 아무는 느낌이었다.


“너무 뻔한 거짓말을 하는군. 내가 아는 데로 말해주지.

그러고 나서도 발뺌하는지 두고 보자고. 넌 죽은척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그 남자를 만났어.

내가 기억을 못할 거라 생각 했겠지만, 영빈관 파티에서 본 기억이 나더군.

그 남자가 한국에 왔었지? 그리고 넌 내 고백에도 콧방귀 끼고 그 남자를 쫓아 간 거야.

파리에서 이태리로. 눈을 속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겠지.

내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얼씨구나 곧바로 이태리로 돌아와 이젠 폭로해도 상관없다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었겠지?

내가 언제까지 네 손에 놀아 날거라 생각했어? 다 된 밥에 코가 빠졌으니 속이 상하신가?”


희진은 앞이 캄캄했다.

시원의 말이 전부 사실과 다르다고 해도,

그 과정과 추측은 희진이 아니라고 반박할 아무런 여지도 주지 않고 있었다.

시원이 그런 희진의 눈에서 단념을 읽어내고 마지막으로 약속을 받아내려고 다가서려고 할 때,

곧이어 두 사람의 뒤로 한 남자의 힘찬 음성이 응접실 공기를 갈랐다.


“권 시원. 내 여자에게서 물러나.”


스르르, 희진은 살바체의 목소리에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시원역시 그 목소리에 놀란 표정을 하고 희진의 손을 놓고 앞에 서 있는 이태리 남자를 향해 천천히 돌아 응시했다.

살바체의 담담한 눈과, 시원의 자신의 이름을 듣고 믿을 수 없어하는 눈이 마주쳤다.

한걸음씩 자신을 향해 뚜벅 뚜벅 걸어오는 살바체의 걸음걸이는 단호하면서도 숨소리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시원이 다가오는 살바체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지?”


살바체가 시원을 쳐다보고 시원의 뒤에 동공이 풀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희진을 끌어당겨
자신 쪽으로 이끌며 대답했다.


“난 너처럼 멍청하지 않아서 적을 잘 알고 있지.”


시원이 그 대답에 살바체를 노려보며 서 있었지만, 이미 살바체의 눈은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자신 옆으로 이끈 희진의 흐릿한 동공을 보며 살바체가 인상을 쓰고 희진의 볼을 가만히 감싸 쥐어 눈을 마주치게 했다.

희진의 흐릿한 눈이 살바체의 확신에 찬 눈과 마주쳤다.


'걱정하지 마. 진. 아무 걱정도 할 필요 없어.'


살바체의 눈이 희진의 눈을 응시하며 말하고 있었다.

희진의 눈에 서서히 물기가 들어차는 것을 지켜보며 살바체가 그제야 자신을 노려보며

입을 일자로 굳히고 있는 시원을 향해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곧 연락을 하도록 하지. 오늘은 그만 돌아가. 집사. 차 대기시켜 손님을 모셔다 드리도록.”


살바체는 모든 용무가 시원에게선 끝났다는 포즈를 취하고 오직 희진만을 바라보며,

응접실 밖으로 이끌며 어깨를 끌어안고 데려갔다.

자연스럽게 희진의 머리가 살바체에게 기대진 모습을 시원은 손을 거머쥐고 속수무책으로 지켜 볼 뿐이었다.

곧이어 응접실로 들어선 무표정한 집사의 말이 시원의 귀를 때렸다.


“나가시죠. 차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 * *


희진은 창가에 서서 시원이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원이 화를 내는 이유를 희진은 알고 있었다.

시원과 약혼한 기간 동안 시원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 희진이었다.

냉철하고, 자신이 하는 일, 자신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살바체를 만나지 않았다면 시원과 결혼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었다.

결혼하기 전에 그의 행실이 어떠했던지, 결혼 한 후에 가정에만 충실할 남자라는 것을 희진은 잘 알고 있었다.


'진. 남자는 말이야. 하루마다 정액이 쌓이고, 그걸 매일 똑같이 분출하고 싶은 욕구를 가져.

결혼을 함으로서 남자는 한 여자에게 안주할 수가 있는 거지. 신체적 조건은 모두가 똑같아.

살면서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건 책임감과 믿음이야. 내가 당신을 다르게 보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난 당신이 다른 여자와 다르다고 생각해.

내가 당신을 믿듯이 날 믿어준다면 우리 결혼생활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행복할 거라 생각해.

난 당신의 발레리나 생활을 전적으로 밀어줄 생각이야. 끝까지 책임지고 행복하게 해주겠어.'


희진은 시원이 자신이 이태리로 떠나기 전 했던 말들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다 기억하고 있었다.

권 시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바로, 성공에 대한 집착과 명예욕 정도였다. 하지만, 남자에게 그런 게 흠이 되던가….


"진. 괜찮아?"


자신에게 뒤돌아 서 있는 희진의 가녀린 뒷모습을 보며 살바체가 희진의 어깨를 가만히 보듬고 물었다.

희진은 살바체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시원 씨가 어떻게 나올지 솔직히 두려워요. 두렵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죠.

그렇게 화를 내는 시원 씨는 처음 보았어요. 아니, 내가 두려운 건…."


희진이 말을 멈추었다.


'당신을 잃는 거예요….'


가족이냐. 살바체냐. 희진은 그런 기로에 서지 않길 바랐다.

시원이 그렇게 말했지만, 이성이 돌아온다면 그런 선택을 강요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추측이었다. 지금 현재 희진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진…."


살바체가 희진의 어깨를 붙잡아 자신을 보게 돌려놓고 얼굴을 들게 했다.

확신에 찬 살바체의 얼굴이 희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렵게 잡았어. 다신 절대 놓치지 않아."

"…."


살바체의 눈에 짙은 소유욕이 들어났다.

남자의 본성이 꿈틀 꿈틀 살바체의 눈에서 살아 숨 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바체의 손이 희진의 어깨의 천을 옆으로 끌어당겨 한쪽 아담한 가슴을 드러나게 만들었다.

희진의 가슴을 내려다보는 살바체의 욕망이 일고 있는 눈을 쳐다보며 희진이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정신없이 뛰어댔지만, 살바체의 손을 피하거나 물러서거나 하지 않았다.

거칠게 가슴을 한손으로 쥐고 희진에게 천천히 눈을 맞추는 살바체의 눈빛이 어두운 청색의 빛을 했다.


"본 주인이 돌아와 내 귀여운 고양이를 돌려 달라 고해도, 이미 당신은 내게 길들여졌어.

다시 내게 희망과 행복을 주고 돌아서려고 한다면 당신은 내 머리통을 부수고 가야할거야.

절대 두 번이나 잃는 바보짓은 안 해. 이 가슴속에 내가 없다고 해도.

평생 당신 미움만 받고 용서받지 못해도 좋아."


희진은 살바체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을 쥐고 있는 살바체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짙은 소유욕에 상처를 드러내는 살바체를 보고 희진은 아픔을 참아냈다.

살바체의 말은 가슴 한쪽을 아리게 만들었지만,

가슴 한편 시원의 등장에 질투에 소유욕을 드러내는 살바체를 보며 희진은 기쁨을 느꼈다.

희진의 반짝이며 살아나는 눈빛을 보며 살바체가 가슴을 쥐고 있는 손을 피고 얼굴을 내려

희진의 가슴으로 이동해 다정하게 가슴언덕에 키스했다.

작은 상체기의 자국이 남은 희진의 가슴으로 얼굴을 내리는 살바체의 머리카락을 희진이 가만히 쓸었다.

다른 한손으로 희진의 옷의 숨은 가슴을 만지는 살바체의 손길이 다정해지고,

희진의 한쪽 가슴의 정점을 깊숙이 빨아 당기는 살바체는 만족을 모르는 어린애 같았다.


"하아…."


참을 수 없는 느낌에 희진이 거칠게 숨을 내쉬자, 번쩍 살바체가 희진을 안아들고 침대로가 그대로 내려놨다.

서로의 옷을 벗겨내는 손길이 빨라졌다.


* * *


호텔 룸에 도착하자마자 시원이 거칠게 마이를 벗어 소파에 팽개쳤다.

자신과는 격이 다르다는 몸짓을 하는 살바체를 보며 시원의 자존심이 뭉개져 처참히 구겨졌다.


'난 너처럼 멍청하지 않아서 적을 잘 알고 있지.'


살바체의 침착하고 담담한 그 말은 도리어 시원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벌써 자신이 1점 아니 반은 지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처음 파리로 날아갈 때만 해도, 시원은 설마하며 희진에게 이유를 물어야 갰다만 생각했었다.

지훈의 말은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이 찾을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그동안 찜찜하게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그 이유를 들어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런데, 파리에서 이태리로 갔다는 말과,

이태리에 도착하자마자 살바체라는 남자의 여자가 된 희진의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지훈의 말이 다 사실이었다니…!


"젠장!"


그렇게 길길이 날뛰고 희진을 협박했던 일을 지금 에와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칼은 뽑아진 후였고, 이미 뽑은 이상 어쩔 수 없는 대결이었다.

살바체라는 이태리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는 몰라도,

자신도 자존심 하나는 남다른 사람이었다. 이렇게 지고 있지는 않으리라.


* * *


로마 제노바(GENOVA)호텔.

살바체를 태운 검은 차량 세대가 호텔 앞에 섰다.

살바체를 알아보고 긴장하며 호텔 앞으로 나온 제노바호텔 직원들과 관계자에게 가장 좋은 응접실로 안내받고

살바체는 시원이 내려오길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살바체는 먼저 구비되어있는 바로 다가가 브랜디 잔에 브랜디를 반쯤 따라

소파에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브랜디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잠시 후, 익숙한 얼굴의 동양남자가 살바체를 쳐다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살바체는 하나 남은 브랜디 잔을 시원 쪽으로 가져다주고 브랜디를 반쯤 따라 주며 말했다.


"들어."

"…."


시원은 자신과 달리 긴장기하나 없는 안색으로 브랜디 잔을 손으로 감싸 쥐고 빙글 돌리고

술을 즐기고 있는 살바체의 근심하나 없는 얼굴을 노려보며 브랜디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렸을 때부터 난 가지지 못할 게 없었어. 말만 하면 전부 다 가질 수 있었지.

부모 없이 돈과 명예만 가지고 살았어. 난 그렇게 교육받으며 자랐고, 당연하게 생각했지.

삶이 무료해 본적 있나? 아무 재미도 없고, 산다는 것 자체가 재미없어지는…."

"…."


웃기지도 않는 말이라는 듯, 시원이 피식 웃으며 브랜디 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지 자랑이군. 하는 시원의 표정이 싸늘했다.


"진을 본 순간 가져야겠단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무조건 가졌지.

주인이 있건 없건 상관이 없었어. 난 그렇게 교육받고 자랐으니까. "


순간 브랜디 잔을 내려놓은 시원의 눈빛이 사나와졌다.

주인이 있건 없건 상관없었다는 말에 죽일 듯 살바체를 노려보는 시원의 눈이 매서웠다.


"그래. 그렇게 노려보니 확실히 진과 많이 닮았어.

처음에 진도 날 그렇게 노려봤지. 내가 여기 왜 왔을 거라 생각하지?"

"네 걸 지키러 온 거 아닌가?"


시원의 이갈듯 내뱉는 그 말에 살바체가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의 분에 못 이겨 화가 잔뜩 든 눈에도 살바체는 웃음을 그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똑똑하군.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건가?

맞아. 이제 진은 확실히 내 여자가 되었어. 그리고 난 너에게 보상을 하기 위해 온 거야.

네 것을 범한 죄로 말이야."

"…!"


살바체가 싸늘한 눈으로 시원을 응시하며 소파에 얹져 둔 서류 봉투를 시원에게 던졌다.

시원은 자신에게 진의 대한 보상을 하겠다는 살바체를 노려보며 웃긴다는 얼굴로 입술 끝을 올렸다.


"보상?! 이봐. 난 보상을 원해서 온 게 아니야. 내가 그런 속물로 보이나?"

"살펴보고 말하는 게 좋을 텐데…."


살바체가 담담한 얼굴로 말하며 시원의 빈 브랜디 잔에 브랜디를 반쯤 더 따라 주었다.

시원이 살바체를 응시하다 서류봉투를 들어 앞 페이지에 놀란 눈을 했다.


"이…. 이건!"

"ANG반도체, 이탈리아의 지사에 60%의 지분. 한국 서울 본점의 35%의 지분이지.

이걸 손에 쥔다는 게 뭘 뜻하는지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살바체의 말에 시원이 믿을 수 없어하는 눈으로 살바체를 쳐다봤다.

ANG반도체, 혜수의 오빠인 수혁이 사장으로 있는….

혜성그룹의 핵심이기도 한 ANG 반도체의 지분이었다.

이 정도의 지분이면 수혁을 밀어내고 사장으로 앉을 수도 있는 지분이었다.

한마디로 수혁의 말을 시원이 들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아니, 자신의 목을 잡고 있는 아버지나, 수혁, 그리고 집안의 말에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데로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걸! 어떻게?!"


시원의 경악된 목소리에도 살바체는 이마를 매만지며 아무 말이 없었다.

시원은 살바체의 눈을 쳐다보며 서서히 깨달았다.

전에 자신이 돌아가기 전 흔들렸던 재정상태. 외국자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게 이 남자의 짓이었단 말인가?


"이탈리아 지분 60%는 원래 내 소유라 손쉬웠고, 한국 지분은... 네가 생각한 그대로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건 진을 포기하기 때문에 주는 게 아닌 내가 보상의 의미로 주는 거야.

내 여자를 소중하게 생각해 줘서 고맙다는….

그리고 정식으로 사과하지. 진을 빼앗아서 미안하네."

"......."


시원은 살바체의 말에도 아직 쇼크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분과 살바체를 쳐다보는 시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식으로 자신에게 사과하는 살바체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어이없어. 도대체 여자하나의 값어치가"

"권 시원. 내 앞에서 실수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가 프란트의 이름을 달고 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진 때문이니까.

너에겐 네 자존심의 상처보다 못한 존재라 해도, 내겐 내 목숨보다 소중한 여자니까."


살바체가 처음으로 적의를 들어내며 시원을 노려봤다.

자신을 노려보는 청색의 깊은 눈을 보며 시원이 말을 잃었다. 자존심….

그 잘난 남자의 자존심 하나에 목숨 거는 남자가 있나하면, 여자 하나에 목숨 거는 남자도 있다.

살바체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희진에게 손을 댄다면 너의 그 잘난 자존심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뭉개 버리겠다.

시원은 살바체의 눈을 보며 그 경고를 똑똑히 들었다.



고백, 그리고 분노 [8장]


'꽝!'


전화기를 내려놓는 알페르노의 눈이 분노로 일렁였다.

그냥 지켜보자 했더니 이 여자가 죽으려고 작정을 했다.

살바체의 옆에 있어선 절대로 안 될 여자였다. 벌써 '체르니'호텔부터, '교황의 섬' 거기다 이탈리아의 있는 반도체 회사까지,

통째로 그 여자 하나 때문에 날아가 버리지 않았는가…!

살바체의 비서로 심어놓은 자신의 심복에게 보고를 들은 알페르노는 심하게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미사에 그 동양 여자를 성 베드로 성당으로 데려가고 있는 살바체를 보고 이를 갈고 있던 알페르노였다.

그런데 불의 불을 댄 격으로 자신이 전에 넘겨준 지분과 반도체 회사까지 통째로 넘어갔다는 말에

알페르노의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고 말았다.


"이 여자가 끝까지!"


살바체와 이간질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뻔뻔하게 이태리로 돌아오고,
거기다 떳떳하게 성 베드로 성당으로 들어서다니…!

'교황의 섬' 그걸 포기하는 게 어떤 말인지, 살바체가 모를 리 없었다.

그것은 바로 프란트 家 이름을 버리겠다는 말이었다.

그 동양여자의 목숨 하나로 바꾸겠다는 말이었다.

형식적으로 아직 이름을 버리지 않고 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자신은 프란트 家 이름을 버리겠다는 말이었다.

프란트라는 이름을 주기 위해 자신이 어떻게 지금껏 살아 왔는데,

마피아의 대부로 살면서 그 이름을 지켜주기 위해 얼마큼 노력을 해왔는데…!

그 여자가 모든 걸 망쳐버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죽이리라…! 알페르노의 눈빛이 살기로 번뜩였다.


* * *


희진은 살바체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얇은 실크로 된 보라색의 슬립을 입은 희진은 부드러운 실크 이불 감촉을 느끼면서도,

불편한 얼굴로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고 자고 있어'


살바체가 희진에게 이렇게 말한 이유가 시원을 만나기 위해서라는 걸 희진은 알고 있었다.

지금쯤 시원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을지….

직접 부딪치는 것보다 기다리는 게 더 지치고 속을 들끓게 했다.

전에 꿈속처럼 시원이 살바체에게 총을 들이대거나 하진 않겠지?

그건 자신의 죄책감에서 나온 꿈일 뿐이었지만, 자꾸 꿈의 영상이 희진을 괴롭히고 있었다.

왜 총을 겨누는 시원을 향해 살바체에게 몸을 던져 막았던 것인지, 이젠 그 이유가 분명하게 보였다.


'살바체 프란트. 당신을 믿어요. 그렇지만 왜 시원보다도 당신이 더 걱정이 되는 걸까요?

쉽게 당하지 않을 남자라는 걸 너무 뻔히 아는데도 말이에요.'


그때, 복도를 걷는 힘찬 남자의 구두소리가 들려왔다.

희진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서 맨발로 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확 열어 재꼈다.

얇은 슬립을 입은 희진의 몸매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며 살바체가 한쪽 눈썹을 올리고 희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희진은 그 모습을 보니 그제야 안도가 되어 숨이 고르게 쉬어졌다.


"걱정했나?"


피식 웃고 서 있는 살바체를 쳐다보고 희진이 뒤를 돌아 살바체에게 길을 내어주고 말했다.


"걱정은 무슨…."

"쿡쿡. "


얇은 슬립의 가는 줄을 희진의 작은 어깨에서 천천히 끌어내리며 살바체가 뒤에서

희진의 어깨에 입술을 가져가 댔다.

희진은 살바체의 부드러운 입술 감촉을 느끼며 몸을 훑고 지나가는 작은 떨림에 눈을 감았다.

어깨에서 부드럽게 닿는 살바체의 은빛금발에서 밖의 공기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하나씩…. 하나씩 무너트릴 거야.

말해봐. 한국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게 나을까. 아니면 부르는 게 좋을까?"

"그…. 그게"


살바체가 입술을 찍던 것을 멈추고,

희진을 자신 쪽으로 돌려놓고 흘러내려 가슴언덕을 반쯤 드러난 희진의 몸을 쳐다보며 말했다.

살바체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면서 희진은 살바체의 입술을 흔들리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결혼 할 생각이야. 평생 내 옆에서 묶어둘 구실로 가장 적당하잖아?"

"살바체 프란트. 자신의 의사만 말하다니…. 최후통첩인가요?"


희진의 떨리는 목소리에 살바체가 희진의 눈을 쳐다보고 짙어지는 진심이 깔린 눈으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묻지 않아. 묻고 싶지 않아."

"내가 거절할까봐 겁이 나나요?"

"그래."

"승낙할 수도 있어요."


희진이 장난스런 눈빛으로 살바체의 진지한 눈을 바라보며 살바체의 와이셔츠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살바체는 그런 희진의 눈을 바라보면서도 흔들림 없는 눈으로 희진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묻는다면 당신은 승낙만 해야만 해. 할 수도가 아니라."

"그래야 하나요?"

"물론."


살바체의 눈이 자신의 와이셔츠를 끌어내리고 탄탄한 가슴의 굴곡을 손으로 더듬는 희진의 눈을 향했다.

조금씩 살바체의 가슴이 박자를 빨리하고 숨이 거칠어지는 걸 희진이 만족스럽게 쳐다보며

살바체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좋아요. 물어봐요."


준비되었다는 눈빛으로 살바체를 올려다보는 희진의 눈빛을 보면서 살바체가 말했다.


"싫어."


말이 끝나자마자 살바체의 짙은 소유욕이 긷든 거친 입술이 희진의 입술을 거칠게 비집고 들어왔다.


* * *


-서울 (Seoul)


서울 한국은행. 금고 담장 자와 면담을 하고 시원이 손을 내미는 중년의 남자와 손을 마주 잡았다.

일을 끝마친 시원은 만족스런 얼굴을 하고 한국은행을 나와 자신의 차로가 운전석에 앉았다.


'아직은 구조조정을 할 때가 아니지.'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가 시원을 즐겁게 했다.

자신의 생애에 이보다 더 큰 권력을 손에 쥐어 본적이 있던가…!

알게 모르게 시원은 혜수의 오빠인 수혁을 경계하고 있었다.

조금씩 커지는 ANG반도체 회사가 신경이 쓰이기도 했었다.

어차피 혜성그룹의 후기사장은 자신이 되겠지만, 수혁이 ANG반도체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계속 시원을 쥐고 흔들려고 할 게 분명했다.

거기다 이제 매제가 되는 자신이 아닌가?

혜수를 알게 모르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는 느낌을 받았던 이유도 거기 있었다.

이젠 어떤 것도 무섭지 않은 권력이 자신에 손에 있었다.

어쩌면 먼 훗날 이 지분을 받은 것을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몰랐다.

자신의 자존심을 팔고 받은 지분.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쥐고 흔들었던 여자를 팔고 받은 지분이 후회스러울 날이 곧 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시원은 지금은 후회하지 않았다.


'살바체 프란트. 내가 언젠가 당신 위에 서 주지. 당신도 곧 후회할 날이 올 거야.'


시원은 눈빛을 빛내고 전화기를 들어 혜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번 울리는 전화에 곧바로 들려오는 혜수의 목소리에 시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틀 후면 내 신부가 되는 여자와 오랜만에 식사나 할까하고 전화했어. 나 와.

20분후면 집 앞으로 데리러 갈 수 있겠어….

내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혜수 넌 날 아직 잘 몰라.

... 좋아. 준비해. 가고 싶은데 있나?"


삶이란 마음먹기에 달렸다.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기회를 잡느냐는 바로 자기 자신의 판단에 달렸다.


* * *


-로마 (Roma)


성 베드로 성당에서의 동행이후,

살바체와 희진을 초대하는 초대장이 여러 곳에서 오기는 했지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자선파티는 무시할 수 없었다.

거기다 3일 후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해 놓은 희진은 살바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나 혼자 다녀오겠어요. 식구들에게 불쑥 당신 내보이고 허락해 달라 말하고 싶지 않아요.

아마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 귀에 내 이야기가 들어가 있겠죠?

아무 말씀 없으신 거 보면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요. "

"보내고 싶지 않아. 같이 가."

"내가 또 도망치는 거라 생각해요? 살바체 프란트.

설사 그렇다 해도 당신이 이번엔 날 놔줄 것 같지도 않아요.

난 내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어요. 비겁하게 당신 뒤에 숨고 싶지 않아요. "


희진의 또렷한 눈을 보며 살바체가 한참동안 말이 없이 쳐다만 보았다.

고집이 잔뜩 들어찬 희진의 눈을 보며 살바체는 막아봐야 소용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못을 박아두는 걸 잊지 않았다.


"갔다가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찾으러 가겠어. 일주일…. 딱 일주일이야. 진"

"좋아요. 일주일"


갑자기 한국으로 들어가 외국남자,

그것도 이태리남자와 결혼하겠다 말하는데 한 달도 아닌 일주일을 받아놓고 희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문화부장관의 고지식한 분인 희진의 아버지가 자신의 결혼을 반대하던지,

그렇지 않던지 희진은 일주일 동안 모든 일을 끝내고 다시 돌아올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 고비일 거라 생각했다. 살바체를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가지는데 마지막고비….


"너무 아름다우세요. 아가씨."


아름다운 긴 목선을 그대로 들어나게 만든 흐린 분홍색의 실크 시폰 드레스의 각진 선이

희진의 아름다움을 맘껏 살려내고 있었다.

미얀이 곁에 서서 촉촉해진 눈동자로 꿈에 그리듯이 희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미얀. 고마워요."

"주인님이 요즘처럼 즐거워 보이시고, 평화롭게 보이신 적이 없었어요.

그 말은 제가 드려야 한다고요."

"그…. 그가 많이 힘들었나요?"


거울을 보며 희진이 지나가는 말투로 머리를 매만지고 미얀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힘들게 묻고 있는 말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말도 마세요. '교황의 섬'에선 정말 아슬 아슬 하셨어요.

매일 한 달은 술만 드시고 지내시고, 교황의 섬사람들이 전부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어요.

전…. 전의 주인님처럼 되실까봐 걱정이 되었어요…."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희진이 강한어투로 미얀에게 말했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희진은 강한어투로 반박하며 떨쳐내고 싶었다.


"맞아요. 아가씨말씀처럼. 주인님은 나약한 분이 아니셨어요.

그렇기에 아가씨를 이렇게 지켜내신 거구요."

"지…. 지켜 냈다고요?"


희진이 미얀을 향해 서서히 몸을 돌리고 생각하는 눈으로 미얀을 응시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미얀의 얼굴은 당당했다.

자신의 주인을 향한 강한 믿음이 미얀의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아가씨가 돌아가신 후에, 알페르노님에게 주인님이 무섭게 화를 내셨었어요.

그리고 '교황의 섬'을 알페르노님에게 주신 후에 저에게 말씀하셨죠.

아가씨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요. 말씀은 안하셨지만 미안한 눈치셨어요.

하지만 전 후회하지 않아요. 어차피 '교황의 섬'이나 이곳이나 모시는 분은 살바체 프란트님 이니까요."

"!"


희진이 당당하게 말하는 미얀의 긍지가 들어찬 얼굴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미얀이 말하는 말이 무엇인지 희진이 다시 천천히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그…. 그러니까 살바체 프란트가 날 살리기 위해 '교황의 섬'을 알페르노에게 주었다는 건가요? "


희진의 믿을 수 없어하는 눈을 보고 미얀이 다시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대답했다.


"네. 분명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진을 살리기 위해 어쩔수 없었다. 라고요."

"…."


희진은 멍하게 미얀을 쳐다보며 말을 잃었다.

전에 서울 베란다에서 살바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그제야 생각났다.


'날 지옥에 가게 만든 일기장은 나뿐만이 아니라 알페르노에게도 같은 길로 인도했지.

그의 분노가 클 거라 당신은 생각하지 못했겠지.

진, 당신의 머릿속엔 내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만이 존재했을 테니까….

이제 안심해도 좋아. 내 말대로 당신은 이제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해도 되는 자유를 얻었으니까.'


그때, 살바체의 말을 그냥 듣고 있었지만,

폭파사고를 일으킨 사람이 살바체가 아닌 알페르노였다는 걸 깨달았었다.

그러나 '교황의 섬'까지 주고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달려왔을 거라고는….

방울방울 희진의 눈에서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가만히 서서 생각하는 희진의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아가씨!"

"미얀….저, 저기 살바체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전해줄래요? 나…. 잠시 혼자 있을게요."


미얀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희진의 등에 떠밀려 밖으로 나갔다.

희진이 그대로 문을 잠그고 손잡이를 잡으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흐읔…."


한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가슴 깊숙이 나오는 설움을 토해내며 희진이 눈물을 쏟았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죄책감도 한꺼번에 그 설움에 밀물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살바체 프란트….'


교황의 섬이 살바체에게 어떤 의미인지 희진은 잘 알고 있었다.

사르데냐 섬의 공장들을 돌아보고, 섬을 돌아보고, 교황의 섬을 말을 타고 돌아보며,

자랑스러워하던 살바체의 얼굴. 설명하며 감돌던 그 화사하게 피었던 웃음들….

희진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살바체에게 '교황의 섬'을 빼앗았고, 이름을 빼앗았고, 부모를 빼앗았고, 핏줄을 빼앗았고…. 그의 긍지를 빼앗았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희진은 손잡이를 잡은 손을 스르르 놓고 바닥에 그대로 엎드려 소리 나지 않게 흐느끼며 통곡했다.

그동안 도대체 어떻게 나한테 웃어줄 수 있었죠?

사랑 한다 어떻게 말 할 수 있었죠?

이제야 당신에게 뭘 빼앗았는지 깨달은 내게….

사랑한다 말 한마디 해주지 않는 나를 향해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지을 수가 있었죠?

이제야 깨달았어. 이제야 깨달았다고요.

당신에게 내가 뭔 짓을 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고!


"흐으읔…."


이깟 자존심이 뭐가 그리 중요해서, 당신에게 사랑한다 말 한마디 못했을까요.

난 내 욕심만 채웠군요.

당신을 소유 하겠다 마음먹고 당신에게 상처만 주고 자존심을 내세워 당신 피를 말렸군요.

어쩌면 좋죠? 살바체 프란트! 어쩌면 좋아요….

당신이 내 순결을 빼앗은 벌로 난 당신 영혼을 빼앗았군요…!

무슨 마음을 먹고 당신이 살고 있는지, 날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나만 생각했군요!

아주 잠깐의 내 그늘도 살피는 당신에게 난 당신의 크나큰 상처도 보지 않고 눈을 가리고 있었군요…!


'어떻게 해요…. 어떡해….'


희진은 목 놓아 울지도 못하고 눈과 입을 틀어막고 엎드려 어깨를 들썩였다.


'똑, 똑'


그때 문을 두들기며 살바체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진. 문 열어.]


'쾅! 쾅!'


“….”


살바체가 아무 반응 없는 문 앞에서 문을 급기야 쾅쾅 두드렸다.


[진. 문 열어. 이 문 열라고. ]


희진은 살바체의 걱정스런 목소리와 잠긴 말소리를 들으며 문손잡이를 등 뒤에서 잡고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 문을 열고 지금 살바체의 얼굴을 본다면 마음에도 없이 살바체에게 화를 내버릴것 같았다.


'왜 그랬어요! 나 같은 거 죽던 말든 상관하지말지…! 왜 요!!'


쾅쾅 쳐대는 살바체의 힘에 희진의 문에 기댄 몸이 쿵쿵 흔들렸다.

겨우 헐떡이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희진이 손잡이를 살짝 돌려 잠긴 문을 열자마자 바로 들어오는 살바체를 피해

욕실로 들어가 다시 문을 잠갔다.

등 뒤로 살바체가 희진을 잡으려고 빨리 걷는 느낌을 받았지만 희진은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문을 걸어 잠갔다.


[휴, 진…. 숨바꼭질 하자는 건가? ]


한발자국 차이로 희진을 잡지 못한 살바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희진은 문을 사이에 두고 살바체에게 말했다.


"화….화장이 지워졌지 뭐예요. 세수하고 금방 나가겠어요."

[잠깐 문 열어봐.]

"지금 내 얼굴 괴물 같아. 싫어요."


한참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희진은 살바체가 안심하고 돌아간 거라 생각하고 물을 틀고 욕조거울을 응시했다.

정말 엉망이 된 얼굴이 화장으로 번져 있었다.


"정말….괴물 같아."


눈물이 잔뜩 고인 눈을 물을 첨벙첨벙 깨끗이 닦아내며 희진이 다시 고개를 들고 욕조거울을 쳐다보며 말했다.


"살바체 프란트에게 말해.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야? 못본 척 언제까지 할 거야?

너 이렇게 이기적인 여자였어? 용기가 없어도 해. 아파도 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널 죽여 버릴 거야. 용서해 달라고 빌어. 넌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해."


거울 안에 있는 여자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것처럼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더 이상 살바체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어차피 살바체의 인생에서 걸어 나오기란 틀렸다.

이젠 그에게 자신이 전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처음 의도보다 더 잔인하게 희진은 그에게 복수를 했고,

이제 복수가 아닌 다른 뭔가를 해줄 때가 왔다.

욕실 거울에서 눈을 돌리고 희진이 욕실 문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가 그 자세로 굳었다.

살바체가 미동도 없이 숨소리도 없이 욕실 문 앞에 희진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희진을 내려다보는 살바체는 희진에게서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표정으로 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왜…."


희진이 덥석 살바체의 가슴에 안겼다.

꼭 살바체를 끌어안고 희진이 살바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자신을 안긴 적이 없던 희진이었다.

희진의 돌발행동에 살바체는 적지 않게 놀랐다.

한편으론 걱정, 한편으론 기쁘고,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자신의 가슴에 기대 눈을 꼭 감고 숨을 고르게 쉬고 있는

희진을 보고 살바체는 입을 열지 않고 손으로 가슴으로 감싸 안고 꽉 힘을 주었다.


"살바체 프란트….나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어렵게 꺼내는 희진의 말에 살바체가 긴장을 했다.

왠지 듣고 싶지 않았다. 또 행복을 주고 빼앗으려는 게 아닌지, 걱정부터 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나중에…."

"나중에 언제?"

"글쎄…. 내가 마음에 준비가 되면"


* * *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자선 파티장.

젠느 베를루스코니는 파티장 안으로 들어서는 희진과 살바체를 보며 반갑게 다가갔다.

벌써 살바체를 알아본 파티장안에서는 사람들이 술렁이고 있었다.


"어서 와요. 진."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젠느"

"무슨 소리예요. 이제 자격이 충분한 것 아니겠어요?

머지않아 프란트 家 여자가 될 거잖아요?"


희진이 붉어진 얼굴로 살바체를 쳐다봤다. 도대체 어느 틈에 젠느에게 그 사실을 말했을까?


"후후, 진. 그렇게 살바체 쳐다보지 말아요. 죄 진 것도 없이 눈치보는 게 안쓰럽네요.

결혼하게 되었다는 걸 모든 사람이 다 알걸요."

"체논은 왔나?"

"저기요."

"진을 부탁해."


빠르게 자신의 이마에 키스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는 살바체를 보고 희진이 살바체의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다

싱긋 웃으며 살바체를 다 안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는 젠느에게 물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안다는 거죠?"

"훗훗…. 저 귀여운 사람. 벌써 교황청에 서류를 제출했더군요. 결혼 허락서 말 이예요.

잘하면 교황님 주체아래 결혼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확정된 건 성 베드로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게 될 거라는 거예요."

"….제, 제가요?"

"그럼 여기 진 말고 다른 사람 있나요?"


파티 장 정면 체논과 다른 남자들과 웃고 있는 살바체를 보고 희진이 믿기지 않는 눈을 했다.

벌써부터 가슴이 뛰어 대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성 베드로 성당 그 곳에서 결혼을 하게 된다니….

빠르게 해치울 것처럼 말하던 살바체가 결혼을 그렇게 크게 치룰 생각을 하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진. 오늘 정말 아름답군요! 살바체를 부러워하는 남자들이 정말 많겠어요.

우리 오늘 재밌게 놀자고요."


희진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어놓고 젠느는 파티 내내 희진의 곁에서 사람들을 소개해 주고,

파티에 희진을 자연스럽게 끼어 넣어 주었다.

어떤 여자들은 동양여자인 희진이 살바체의 여자가 되는데 부족하다 생각하는 눈들도 있었고,

부럽다는 시선을 하며 인사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희진은 살바체가 왜 자신을 젠느에게 맡긴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가끔씩 살바체의 따뜻한 시선이 자신의 오고 있는 것을 느끼며 희진은 줄곧 사람들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진. 언제나 생각했지만, 정말 전 진이 맘에 들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한국에 들어가서 꼭 좋은 소식 가지고 돌아와요.

살바체가 얼마큼 대단한 남자인지 설득할 수 있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제공해 줄게요.

스크랩 해놓은 게 집에 잔뜩 있다고요."

"그래요. 꼭 보고 싶네요. 내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남자인지. "

"오! 세상에. 갑자기 질투가 나려고 해요."


희진의 당찬 대답에 젠느가 '하하하' 웃었다.

곧이어 빠른 교향곡의 무곡이 파티 장에 흘러나왔다. 여자와 남자들이 정열적인 성격답게

곧 서둘러 나와 파티 장을 매웠다.

희진은 그 들의 모습을 보며, 이탈리아라는 것을 세삼 깨달았다.


"진"


언제 다가왔는지 살바체가 희진의 어깨를 잡고 불렀다.

깜짝 놀란 진이 뒤를 돌아 살바체를 쳐다봤다.


"춤출까?"

"살바체 프란트! 웬일 이예요? 당신이 파티 장에서 춤을 다 신청하고…! "

"…."


희진은 젠느의 말소리에도 살바체의 진한 눈동자에 사로잡혀 말을 잃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손을 내밀고 있는 살바체의 눈은 줄곧 희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희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살바체의 손을 잡았다.

'두 근, 두 근' 정신없이 뛰어대는 가슴으로 희진이 살바체와 함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춤을 추기 위해 섰다.


"떨려요."

"나의 지젤. 진. 떨 것 없어. 당신은 뭐든 잘 해낼 테니까."


희진은 살바체와 춤을 추며 지금까지 함께 추었던 어떤 발레리노와 발레를 하는 것보다 살바체에게 빠져들었다.

흡족한 표정으로 그들을 응시하고 있는 젠느에게 체논이 다가와 말했다.


"춤출까? 젠느?"

"싫어요. 저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려요. 그렇죠?"

"대리만족은 그만하고, 이제 젠느도 남자를 찾아봐야지.

저기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남자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호호. 체논. 당신 뒤나 보고 말하라고요. "


그러나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파티 장 중앙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춤을 추고 있는 희진과 살바체에게서 눈을 때지 못했다.


"이제 살바체에게도 가족이 생기는 군요."

"섭섭한 일이지."

"그래요. 조금은 그러네요."


* * *


"아니, 안 돼. 그 여자 한국에서 일을 내면 분명 살바체는 날 가장 먼저 의심할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전에 끝내야해."

"네."


알페르노가 피곤하다는 눈빛으로 이마를 매만졌다.

프란트 家 그 이름과 긍지를 버리게 만든 희진을 알페르노는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아도 그것만은 절대 버리게 만들면 안 되었다.


'넌 프란트 家 사람이다. 그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 해.'


알페르노는 살바체가 어렸을 때부터 그 긍지를 심어주고, 프란트 家의 주인으로 키워내는데 온 정성을 다 기울였었다.

그건 죽은 헤지나와 살보네의 대한 죄책감이기도 했지만 살바체에게 프란트의 이름을 달게 해주고 싶은 욕심이기도 했다.


'넌 당연히 프란트의 이름을 달아야 한다. 그게 네 운명이고, 그게 나의 바램이며,

또한 죽은 헤지나와 살보네의 대한 죗값이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이름을 너에게 끝까지 달게 할 의무가 있어!

그 여자는 죗값을 치루는 거다. 날 원망하지 마라.'


알페르노는 눈빛을 굳히고 앞에 앉은 이탈리아 남자에게 말했다.


"알아본 남자는 어떤 남자냐."

"자식이 백혈병으로 투명중이고, 수술로 인해 돈이 필요한 자입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하겠답니다. 제가 연락 할테니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래. 돈을 반쯤 쥐어주고, 계획이 잡히는 데로 실행에 옮겨라.

대신, 절대 살바체를 다치게 해선 안 된다. 꼭 여자가 혼자 있을 때 기회를 노려라.

또 이 여자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일을 분명히 끝내야 한다."

"알겠습니다. 대부."


일어나는 검은 양복의 이태리남자를 보며 알페르노가 물었다.


"체논은 모르고 있겠지?"

"지시하신대로 비밀로 했습니다."

"좋아. 체논이 알아서 좋을 게 없다. 눈치 채지 않도록 조심해."

"네. 대부"


알페르노가 수하가 나가는 모습을 쳐다보고 바로 다가가 큰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무섭게 일렁이는 눈빛으로 알페르노가 술을 벌컥 벌컥 들이켰다.


'결혼?! 감히 프란트의 이름을 동양인이 넘보다니…! 용서할 수 없어. 어울리지 않는 일이야.'


* * *


굵게 웨이브 져 흘러내린 검은 머리를 빗질하며 희진은 화장대에 앉아 습관적으로 손을 놀렸다.

희진의 눈이 초점은 맞지 않고 무언가를 생각하며 그늘이 져 있었다.

한 번도 고백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말해줄 결심을 하고 나니 입이 근질거리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말하고 나면 날 멀리하면 어떡하지?

이런 여자, 나쁜 여자 때문에 그동안 잃은 게 너무 많다고 날 미워하면 어떡하지?'


희진은 살바체에게 모든 걸 고백하고 싶었다.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그냥 그렇게 모든 걸 내 보이고 싶었다.

살바체를 자신이 믿듯이, 자신도 그에게 믿음을 주고 싶었다.

욕실 쪽에서 살바체가 목욕을 끝내고 물을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몸을 닦고 검은 삼각팬티 차림으로 젖은 머리에 수건으로 털면서 살바체가 나와

앉아 있는 희진을 쳐다보며 걸어왔다.

희진의 눈이 거울을 통해 살바체의 허리곡선과 탄탄한 가슴과 복부로 향했다.

한쪽 눈썹을 올리고 걸어온 살바체가 희진의 눈을 들여다보며 희진의 어깨를 뒤에서 잡으며 말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진."

"왜요?"


희진의 눈이 살바체의 눈과 거울을 통해 부딪쳤다.

피식 웃는 살바체가 희진의 머리에 코끝으로 비비며 대답했다.


"그 눈빛하나 만으로도 불끈 서 버리니까."

"살바체 프란트!"

"하하하하"


행복한 살바체의 웃음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는 희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희진의 머리에 진한 키스를 하고 돌아서 살바체가 침대에 앉아 머리를 털며 말했다.


"내일 잠깐 돌아봐야 할 일이 있어. 오후 늦게는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래요. 잘 되었어요. 저도 내일 한국으로 들고 갈 선물을 좀 살 생각이었거든요."

"기다렸다 나랑 같이 가지?"

"아뇨. 혼자 돌아봐도 충분해요. 당신이 내 뒤를 따라다니며 쇼핑할 만큼 한가하진 않으니까."

"쿡쿡. 말을 돌려 말하는 군."


희진의 요지를 정확히 파악한 살바체가 짓궂은 얼굴로 희진을 쳐다봤다.

희진이 더 한층 붉어진 얼굴로 살바체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요. 사실 다른 사람 눈총 받으면서 물건사고 싶지 않아요."

"날 거부하는 여자는 세상에 당신 밖에 없어."

"그거 잘 되었네요."

"왜?"

"특별하잖아요?"

"하하하하"


다시 머리를 털며 살바체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진. 당신은 언제나 내게 특별한 여자야."


희진이 브러시를 내려두고 살바체를 향해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갔다.

웃고 있던 살바체가 희진의 다가오는 모습에 조금 긴장을 했다.

희진의 얼굴에 낀 그림자를 보며 살바체가 웃음을 멈췄다.


"나…. 할 말이 있어요."


희진이 살바체가 앉아 있는 침대 맡에 꿇고 앉아 살바체의 무릎에 얼굴을 기댔다.

살바체가 당황한 표정으로 희진의 모습을 내려다보다, 가만히 희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었다.


"그, 그동안 속여 왔어요. 당신을 속이고, 내 자신을 속였어요."


희진의 말에 살바체의 손이 딱 정지했다.

희진은 살바체가 숨까지 정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살바체가 희진을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희진이 완강히 거부하고 살바체의 굳어 있는 표정을 보며 말했다.


"들어 야해요. 나 오늘 얘기하지 않으면 평생 숨기고 살지도 몰라요. "

"쓸데없어. 과거는 묻어둬. 앞으로 일만 생각해.

과거를 자꾸 끄집어내 상처 받는 당신을 보면 내가 죽고 싶어. 알겠어?"


살바체가 기어이 희진을 밀어내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희진은 살바체의 굳어있는 근육들과 숨을 거칠게 내쉬며 들썩이는 어깨를 보며 자신 역시 일어서 살바체에게 말했다.


"죄책감을 가질 사람은 살바체 프란트. 당신이 아니라 나예요!

듣고 싶지 않겠죠. 그렇지만 끝까지 들어줘요. 나 이런 말 하는 거 하나 쉽지 않아요.

그 동안 숨겨왔던 만큼 이렇게 내 속마음 내보이는 거 너무 힘들어요. "

"그럼 하지 마!"


살바체가 갑자기 뒤돌아 희진에게 말했다.

가늘게 어깨까지 떨면서 고집스럽게 눈물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희진을 보며 살바체는 가슴이 아팠다.

자신 때문에 또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구나. 또 과거를 끄집어내 갈등하는 구나…!

살바체는 희진이 가끔씩 보이는 슬픈 눈빛과 그림자를 보며 그동안 자신을 자책했었다.

기어이 터지고 마는 구나. 살바체는 더 이상 희진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만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흰 가운을 거칠게 집어 들고 살바체가 걸쳐 입으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희진은 곧바로 살바체를 향해 걸어가려다 문 밖으로 사라지려는 살바체를 보고

옆에 있는 꽃병을 들어 살바체의 발치에 던져버렸다.


'쨍그랑!'


그 소리에 놀란 살바체가 희진을 향해 믿을 수 없어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희진이 기어이 눈물을 흘리며 살바체를 노려봤다.

희진의 눈에 고집이 꽉 들어차 있는 것을 보며 살바체가 한걸음에 다가와 희진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무슨 짓이야!"

"당신 앞에서 등을 보이고 꽁무니 빼고 싶은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나예요!

또 상처 받을까봐 뒤 돌아 도망가는 당신 쳐다보는 내 마음은 더 찢어지고 아파요!

언제까지 날 받기만 하는 멍청한 여자로 만들 건데요?!"

"…."

"당신이 이렇게 나가버리면 나 또 혼자 죄책감에 빠져야 하잖아요….

이제 그만 아프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잖아요. 나도 주고 싶은데 줄 수가 없잖아요! "

"…진?"


살바체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신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진의 마음이 살바체에게 진하게 전해졌다.

상처받을까봐 도망치고 싶던 마음이 기대로 부풀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손에 잡힐 것 같아, 살바체가 희진의 떨리는 얼굴만 쳐다봤다.


"사랑해요. 이제 속이고 싶지 않아. 나도, 당신도 이제 더 속일 자신 없어요.

사랑하는데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않는 것 이제 지쳤어요.

죄책감에 행복할 순간에 아픈 것도 지겹고, 당신을 쳐다볼 때 마다 미안해지는 것도 지겨워요. "

"진!"


살바체가 희진의 외침에 밝아진 얼굴로 희진을 꽉 끌어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희진이 살바체를 거부하고 고개를 급하게 휘휘 저었다.


"아뇨. 지금은 날 안아주지 말아요. 그렇게 쉽게 안아주면 나 또 말할 수 없어요."

"아니,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해."

"놔요. 놔! 이 바보 같은 살바체 프란트! 놓으란 말이에요!"


씩씩대는 희진을 할 수 없이 놓아주고 살바체가 자신을 노려보는 희진을 쳐다봤다.

저 속에 무슨 할 말이 많아서 저렇게 아픈 표정을 하는지

그냥 꽉 안아주고 달래주고 싶은데 희진은 거부하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당신을 얼마나 속이고 있었는지 아나요?!

'교황의 섬'에서 부터 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더 일부러 잔인하게 군거였어요.

그리고 제레미도 내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당신을 시험했어요.

나에게 빠져서 거부하지 못하는 당신 보면서 내가 느낀 건 쾌감이었어요!

말 한마디에도 무너지는 당신 보면서 즐거웠어요. 아프면서도 행복했어요.

일기장 두고 가면서도 죄책감 같은 거 하나 느끼지 않았어요.

당신이 날 생각하고 죽일 것처럼 배신감 느낄 걸 알면서도 난 날 죽을 때까지 생각할 당신 생각하면서

죄책감 같은 거 집어 치워버렸어요.

내게 사랑 하냐고 묻는 당신 보면서도 난 알고 있으면서도 내 맘을 들여다보길 거부했어요.

죄책감 느끼는 게 싫어서. 자존심 상해서. 정말 멍청하고 저주스러워 이런 내 자신을 죽이고 싶어요.

정말… 정말…. 미치게 싫어. 용, 용서해 달라는 말도 못하겠어요. 염치가 없어서….

이런 나 용서하지 못하겠죠? 나도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데, 이해 할 수 없는데"


살바체가 주절주절 길어지는 희진의 말에 확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꽉 안았다.

반항하며 몸부림치는 희진을 꼼짝도 못하게, 거부하고 또 거부해도 꽉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그만해….그만"

"…흐읔…."

"그러지마. 일부러 자신의 맘 들여다보면서 생채기 내지마. 칼로 긋지 마.

당신은 어쩔 수 없었어.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모든 게 내 잘못이야.

당신 잘못이 아니야. 시작은 내가 했어. 상처도 내가 받아. 그만해. 그만…."

"'교황의 섬'도…."

"진…. 잃은 건 아까와 하지 마. 그 딴 섬 같은 건 100개라도 넘겨 줄 수 있어.

당신을 잃는 것 보다 그게 더 나아. 대신 난 당신과 살 거야. 절대 놓치지 않아.

다신 이딴 일로 자신을 괴롭히지 마. 지난 일 후회하지 않아.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당신에게 이런 고백은 받을 생각도 못했을 테니까."

"…."


살바체는 희진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머리를 묻었다.

이제 온전히 자신에게 와준 희진을 느끼며 살바체는 미움보다도 고마움을 느꼈다.

"사랑해. 진"



아침 햇살에 희진이 눈이 부셔 살바체의 가슴으로 꼼지락거리며 파고들었다.

살바체는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작은 여체를 느끼며 한층 힘을 주고 안았다.

잠결에도 살바체는 희진의 이마에 작은 키스를 남겼다.

두 사람의 얼굴은 단하나의 근심도 없는 완벽한 행복만이 있었다.

잠시 후, 살바체는 끙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잠에 빠져도 희진의 몸을 느낀 남성이 서서히 눈을 떠

잠들어 있는 살바체를 깨워댔다.

그렇게 수없이 가지고 또 가져도 이놈은 지칠 줄을 몰랐다.

희진의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만 봐도 이놈은 살바체보다 먼저 요동치고는 했다.

피식 웃고 있는 살바체가 잠든 희진을 어떻게 깨울까 행복한 고민에 들어갔다.

희진의 흘러내린 웨이브진 검은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는 살바체의 손이 다정했다.


'내가 그동안 당신을 얼마나 속이고 있었는지 아나요?!

'교황의 섬'에서 부터 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더 일부러 잔인하게 군거였어요.'


어제 외쳐대던 희진의 그 말이 순간 생각나 살바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땐 희진이 주는 말 한마디에 무너지고 또 무너졌었다.

자꾸 잔인하게 몰아붙이는 희진을 보면서 자신도 괴로워 더 잔인해졌다.

제레미를 죽인 게 지금도 한쪽 가슴이 싸늘하게 아파오고는 했다.

특히 '교황의 섬'에서 제레미의 새끼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오면서 느꼈던 그 아픔은 미안함이었다.

살바체는 교황의 섬에서 단 하나, 제레미의 새끼들만을 빼왔다.


'그래. 그땐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왜 당신이 그랬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아.

왜 그동안 그렇게 날 거부했는지 이해가 가.

당신은 자존심이 강한 여자니까 날 사랑하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을 테지. 인정하는 게 힘들었을 거야.

그런데도 당신은 인정해버리고 모든 걸 털어놔 버리는군.

당신은 절대 잔인한 여자가 못돼. 순진하고 귀여운 여자지.

다른 여자였다면 그 마음 끝까지 외면하고 말았을 거야. 당신은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희진을 내려다보는 살바체의 눈빛이 따뜻해 졌다.

부드럽게 희진의 볼과 목선을 따라 살바체가 뽀얀 희진의 살을 만지며 쳐다봤다.


"으음…."


살바체의 손길을 느끼고 희진이 음 소리를 냈다.

조금 더 살바체는 희진의 가슴 쪽으로 손을 내렸다.

탄탄한 희진의 가슴은 옆으로 누워 있었지만, 하나 쳐지지 않고 살바체의 손을 따라 탄력 있게 잡혔다.

엄지로 살짝 정점을 쓰는 살바체의 손길을 따라 살바체의 입술에도 즐거운 미소가 자리 잡혔다.


"흐음…."


파르르 떠는 희진의 몸을 보며 살바체가 더 깊어진 얼굴로 희진의 가슴 쪽으로 머리를 이동해 가슴에 키스했다.

살살 어루만지고 키스하며 희진의 몸을 불태웠다.

희진이 꿈결에 살바체의 몸을 느끼며 은빛금발에 머리에 손을 넣고 쓸었다.

어느덧 희진을 밑으로 두고 살바체가 희진의 몸 위로 올라가 입술로 희진의 작지만 오독한 코에 키스했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살바체를 보며 희진이 그제야 눈을 뜨고 살바체의 따뜻한 눈을 응시했다.


"아침 마다 이렇게 깨우는 거 습관인가요? 살바체 프란트?"

"맞아."

"어제 저녁으로는 모자랐나 보군요."


희진이 짓궂은 눈으로 살바체를 쳐다보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맞아. 언제나 목마르고…. 언제나 모자라고, 언제나 만족할 수 없지."

"…."


말할 때마다 살바체의 탄탄한 몸이 희진의 아래로 향하며 입을 맞추었다.

희진은 가늘게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할 말도 잃었다.

가슴, 배… 배꼽… 아래로, 아래로….


"하아…."


살바체의 입김을 아래에서 받으며 희진이 몸을 떨며 몸을 비틀었다.

가만히 자신의 허벅지를 잡은 살바체의 손 때문에 희진은 살바체가 주는 느낌을 고스란히 느끼며 거친 숨을 삼켜야 했다.


'죽을 것 같아….'


희진이 눈을 꼭 감고 손으로 거칠게 자신이 베고 있는 흰 베개를 부여잡았다.

견딜 수 없는 쾌감을 몇 번이나 스쳐지나가도 살바체는 만족을 몰랐다.

희진이 거칠게 살바체의 손을 부여잡고 도리질 쳤다.

숨이 넘어갈 듯한 희진을 향해 천천히 올라오며 살바체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핥았다.

살바체의 머리를 끌어당겨 희진이 거세게 살바체의 입술에 남은 자신의 잔해를 남김없이 없앴다.

야릇하게 남은 자신의 향기에 희진의 볼이 자연스럽게 붉어졌다.


"쿡쿡"


희진을 내려다보며 살바체가 웃으며 희진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살며시 밀고 들어오는 살바체의 남성을 느끼며 희진이 살바체의 탄탄한 등을 꽉 끌어안았다.


"내가 들어갈 때마다 아플까봐 걱정이 돼."

"아파요. 그렇지만 참을 만하죠. 이젠 익숙해 졌나봐…."

"하하. 조금만 익숙해져. 진…. 많이 익숙해 지는 건 내가 바라지 않아."

"그, 그건 내가 … 하아. 할 말 이예…요"


자신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움직이는 살바체를 느끼며 희진이 말끝을 흐렸다.

살바체 역시 희진이 자신에게 받는 느낌에 희진의 머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다가오는 말 못할 느낌에 살바체와 희진은 몸으로 사랑을 나누고, 얘기했다.

이제 두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사랑은 온전히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교통사고 [9장]


로마 Via Nazionale. 유명 백화점과 큰 상점이 줄지어 있는 곳이었다.

희진은 오랜만에 혼자 백화점 안을 돌아다니며,핸드백과 여러 가지 수공예품, 가죽세공품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희진은 살바체에게 떨어져 있는 동안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선물을 하나 해주고 싶었다.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의 증표이기도 하고, 자신의 남자라는 것을 증명해 줄 무언가를 주고 싶은 욕심이기도 했다.

살바체가 함께 있으면 눈에 띄기도 했지만,

뭔가 혼자 결정해 살바체에게 주고 싶은 생각에 살바체의 동행을 거절했었다.


'뭘 사줘야 하지?'


그동안 자신은 살바체에게 받은 게 너무 많았지만, 한 가지도 선물하지 못했다는 게 미안했다.

저절로 백화점 안을 구경하는 희진의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입술에 행복한 웃음이 피어났다.

이태리 쇼핑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걸 희진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외국인 일 경우는 소매치기에 주요대상이 되었다.

이곳 소매치기들은 걸리면 사과를 했다. 희진은 백을 조심해서 들고 다니며 주위를 경계했다.

한 보석상에 들린 희진은 아름답게 장식이 된 넥타이핀을 보고 하나 들어올렸다.


"잘 고르셨어요. 이번에 새로 디자인된 신제품이랍니다."

"사파이어군요."

"값이 비싸긴 하지만, 수공업 한 100% 진품이죠."

"오팔로 된 이것과 같은 건 없나요?"


희진의 말에 남자 점원이 웃으며 다른 디자인을 꺼내 보였다.

오팔…. 살바체의 탄생석이었다. 흰 빛깔에 오묘한 빛을 내뿜는 오팔….

희진은 오팔로 넥타이핀을 고른 이유를 살바체가 알까? 하는 눈으로 웃었다.


'당신을 소유하고 싶습니다.'


넥타이핀을 선물하는 이유를 살바체가 물어본다면 그렇게 대답해야지.

희진은 빙그레 웃으며 점원에게 정성스럽게 싸달라고 주문하고 넥타이핀을 받아들고

다른 쇼핑백과 함께 가지고 백화점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핸드폰이 희진의 백에서 울려왔다.


"네."

[진. 어디야?]

"왜요?"

[끝났어. 지금 그 근처야. 안에서 기다려.]

"아뇨. 저도 이제 나갈 참이었어요. 차 기다리며 서 있을게요."

[그래. 5분이면 될 거야.]

"좋아요."


희진이 피식 웃고 전화를 끊었다.

그새를 못 참고 일을 빨리도 끝마쳤구나. 하는 희진의 얼굴이 행복으로 넘쳤다.

발을 빨리하고 희진이 백화점을 나와 Via Nazionale 거리로 나왔다.

몇 개 되지 않는 쇼핑백을 들어 보이고, 희진이 건너편에서 자신을 보고 내려서는 살바체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살바체 역시 그런 희진을 보고 빙그레 웃고 지나가는 차를 보며 차도로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반쯤 도로를 건너는 살바체를 보며 희진 역시 도로에서 내려와 한걸음 서 있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넥타이핀을 건네줄 생각을 하는 희진의 얼굴이 행복으로 빛이 났다.

그런 희진을 마주 바라보며 힘찬 걸음으로 도로를 건너던 살바체는 갑자기 싸늘한 느낌에 시선을 돌렸다.

백화점에 주차해 있던 한 이태리차가 희진을 향해 급주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진!"


살바체의 거친 외침에 희진이 그제야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차를 보고 경악한 시선을 했다.

순간 무언가에 부딪치는 느낌과 희진을 밀치는 살바체를 동시에 느끼며 희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끼이이이익!!'

'꽝!!'


Via Nazionale에 거리를 걷고 있던 사람들이 정지해 사고현장을 쳐다보며 비명을 질렀다.

희진과 살바체는 동시에 쓰러져 거리에 나뒹굴었다.

희진의 들고 있던 쇼핑백 역시 공기 중으로 흩어져 안에 있는 물건을 도로에 흩뿌려 놓았다.

의식을 잃은 두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이태리어로 소리쳤다.

가로등을 한쪽 귀퉁이로 들이받은 문제의 차안에서도 핸들에 머리를 박고 정신을 잃은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앰뷸런스의 시끄러운 소음이 거리를 잠시 후, 꽉 매우기 시작했다.


* * *


로마 , 게멜리 병원(Gemelli Hospital).

교통사고가 난지 5분도 안되어 살바체의 비서에게 그 소식을 전해들은 체논이 젠느와 함께 게멜리 병원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벌떼같이 몰려든 기자들 사이를 뚫고

수하와 경호원과 함께 희진과 살바체가 나란히 누워 있다는 병실 문 앞에 섰다.

호흡을 가다듬은 두 사람이 문 앞에 경호원을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가 한참 진찰중인 의사와 간호사들 사이에서

희진과 살바체를 찾아냈다.


"살바체! 진!"


희진과 살바체를 부르는 젠느의 목소리가 떨렸다.

체논이 진찰하고 있는 의사를 방해하지 말라는 눈짓을 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젠느를 말렸다.

결혼을 앞두고 행복해 하는 두 사람에게 이게 무슨 일인가!

그러나 생각보다 외상이 없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체논은 나오지 않았던 숨을 쉬었다.


"어떻습니까?"

"뚜렷한 외상은 보이지 않고 있지만, 정확한 것은 정밀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생명엔 지장이 없어 보입니다."

"휴…."

"아…."


다시 깊은 한숨을 쉰 젠느와 체논은 다행이라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의사에게 말했다.


"그런데 왜 아직 일어나지 못하는 겁니까?"

"그게, 살바체 프란트씨는 방금까지 눈을 뜨시고 여자 분의 생사를 아시고 난 뒤,

안정제에 취해 잠이 드셨습니다."

"그, 그럼 진은?"


젠느의 물음에 의사가 담담한 말투로 젠느에게 말했다.


"음, 부딪치신 게 머리 부분이라 기절하신 것 같습니다.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아무튼 두 분을 정밀검사한 뒤에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선생님."


젠느가 응급처치 중인 간호사 사이로 가 두 사람의 침대 앞에 서서 기도하듯 손을 거머쥐었다.

이렇게 다행히 큰 사고였을 일이 잘 넘어간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살바체가 무사하다는 것도 다행이었지만, 희진이 살아 있다는 게 더 다행스럽다 생각하고 있는 젠느였다.

만약 살바체가 깨어나 희진이 죽었거나 큰일이라도 났다는 걸 알면 무슨 의미로 삶을 살아가겠는가…!

살바체가 그 정신에도 깨어나 희진이 살아 있는지 의사에게 물었다는 말에 젠느는 가슴이 뭉클해 졌다.


"정말 다행이에요…. 이렇게 두 사람을 잃었다면 나도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 잠깐 여기 있어. 난 알아볼 일이 있으니까."

"그래요. 체논."


체논이 젠느가 모르게 눈을 무섭게 살기를 띄우고 병실을 나갔다.

운전기사에게 가고 있는 체논의 뒤로 그의 수하 두 명이 검은 양복을 입고 따랐다.

도대체 어떤 놈이 간이 크게도 살바체를 건드렸는지,

살바체가 깨어나 묻기 전에 체논은 모든 정황을 다 파악해야 갰단 생각을 했다.

아무리 우연으로 일어난 사고라고는 하나,

그 수많은 사람이 있는 거리에서 오직 희진과 살바체에게 그런 우연이 일어났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거기다 그 지역은 차가 복잡해,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했다.

문제의 병실 앞에서 선 체논이 힘 있게 병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운전기사는 떨리는 눈으로 머리에 피가 뭍은 붕대를 감고 체논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두 사람은 눈도 못 뜨고 있는데, 넌 잘도 눈을 뜨고 있군.

언제까지 그 눈이 떠 있나 두고 보자.'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중년의 남자를 보며 체논이 부하에게 문을 지키게 하고 천천히 다가섰다.


* * *


살바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안정제의 약효가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번쩍 눈을 뜬 살바체는 자신 옆에 있어야 할 희진이 없는 것을 보며,

지끈 거리는 머리를 문지르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작은 타박상과 팔이 시큰거리는 것 빼고는 아무 문제도 자신에겐 없어보였다.

하지만, 옆에 있어야 할 희진이 없었기에 살바체는 먼저 희진을 찾아야 갰단 생각을 하고

링거에서 바늘을 빼내고 병실문의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핑 도는 약효의 어지럼증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지만, 살바체는 무리하게 발을 움직이며 간호사를 찾았다.


"!"


밖에 대기하고 있던 한 여자간호사가 살바체가 몸을 휘청하고 병실을 나오는 것을 목격하고

놀란 세된 비명을 지르며 얼른 부축하며 말했다.


"아직 무리 세요. 누워 계셔야 합니다."

"…내 여자는? 진은?!"

"지금 의식이 아직 없으셔서 다른 방에서 정밀검사 중이십니다.

좀만 기다리시면 다시 오실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가보겠어."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발을 때려는 살바체의 힘을 억지로 막으며

여자간호사가 다른 사람을 불렀다. 그리고 살바체를 보며 빠르게 말했다.


"다른 여자 분이 동행하셨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잠시 후면 이리 오신다고요."

"…."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살바체는 막무가내였다.

직접 희진을 눈으로 봐야 안정이 될 것 같았다.

아까 눈을 감기 전 희진을 보았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려 살바체는 진정이 되질 않았다.


"살바체! 뭐하는 거야?!"


체논이 경호원을 대동하고 살바체와 간호사들의 실강이중 나타났다.

급히 간호사들을 물리치고 체논이 살바체를 부축해 병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체논. 진은?! 괜찮아?"

"진짜…. 말이 안 나오게 황당해. 괜찮아. 괜찮다고. 들어가자니까"

"진이 내 눈앞에서 차에 치였어. 너 같으면 진정이 되겠어?!"

"이봐. 차에 친 건 진 혼자만이 아니야. 너도 함께였어. 너 덕분에 진은 무사해.

그러니 진정하라고."


체논의 말에 그제야 살바체의 얼굴에 수긍하는 빛이 떠올랐다.

체논은 언제나 현실에 밝은 놈이었다. 이런 일에 거짓말 할 놈이 아니다.

그제야 체논과 함께 살바체는 병실에 들어가 앉았다.


"누워."

"나둬. 필요 없어."


간호사가 재빨리 들어와 살바체의 손에 다시 주사바늘을 꽂기 위해 다가섰다.

그러나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는 살바체의 눈빛은 아까와 다르게 또렷해지고 있었다.


"누구야. 진을 치은 놈이…. 알아봤겠지?"

"물론. 멀쩡히 살아 있으니 알아봤지. "

"죽여 버리겠어!"


벌떡 일어나는 살바체 때문에 간호사가 놀라 바늘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울상이 되었다.

다시 간호사가 바늘을 가지러 나간사이, 체논이 그런 살바체를 보며 말했다.


"우연한 사고야 그냥 묻어."

"뭐?! 하, 체논. 지금 우연이라고 했어? 이봐. 내가 뛰어 드니 그 놈은 핸들을 꺾었어.

거기다 주차해 있다 노골적으로 달려들었어. 분명 사주한 놈이 있을 거야. 진을 노린 거라고!"

"사주한 놈은 없어. 내 말을 믿어!"

"웃기지마!"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한참 할 때, 간호사와 함께 희진의 간이침대를 끌고 오는 젠느가 들어섰다.

화들짝 놀란 모습으로 두 사람을 보는 젠느의 시선이 흔들렸다.

살바체가 곧장 희진에게 다가가 침대에서 희진의 얼굴을 살폈다.

백지처럼 생기가 없는 얼굴이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진…."


살바체가 애절하게 진을 불렀지만, 진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왜, 왜 아직 못 깨어나는 거지?"

"잠깐 깨어났었어요. 당신을 걱정하더군요. 살바체 이름을 불렀어요. 걱정 말아요.

이제 괜찮을 테니까…. 그것보다 더 걱정인건…."


젠느가 입술을 깨물고 지금 말해야 할지 안해야 할지를 속으로 결정했다.

지금 살바체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풀풀 살기를 눈에 담고 있는 살바체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하는 젠느의 눈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자칫하면 한 생명이 위험할 뻔 했다. 지금도 위험하다. 라는 말을 해야 하는 젠느의 표정은 어두웠다.


"뭐야?"


간호사들이 희진을 침대에 올려두고 나간 후, 살바체가 희진의 가는 손을 잡고 젠느를 쳐다보며 물었다.

체논 역시 궁금한 표정으로 이마를 접고 젠느를 응시하고 있었다.


"진은 임신 중이었어요. 이제 2주가 조금 안되었다는 군요.

자칫하면 애를 잃을 뻔 했어요. 사실, 지금도…."

"......!"

"!"


두 사람의 경악하는 표정을 보며, 젠느가 말끝을 흐렸다.

이런 소식을 전해야 하는 자신이 싫었다.


"위, 위험하다는 군요. 좀 더 상황을 지켜보자고 하네요."

"젠장!"


살바체가 괴로운 표정으로 희진의 잡고 있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가늘게 떨고 있는 살바체의 어깨를 체논과 젠느는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희진의 몸에 몸을 묻으면서도 한 번도 살바체는 2세의 대한 생각은 해보지 않았었다.

어떻게 이렇게 바보스러울 수가…!

2주가 다 되어가도록 어떻게 몰랐을 수가…!

살바체는 자신을 자책하며 눈물을 흘렸다.

만약 이 아이를 잃는다면 희진이 자신을 원망할 거라는 생각에 앞이 캄캄해져 왔다.

어떻게 얻은 사랑이고, 어떻게 얻은 행복인데…. 거기다 아이까지…!

살바체는 눈물이 어린 흔들리는 눈으로 살기를 띄고 벌떡 일어나 체논의 멱살부터 잡았다.


"말해! 알고 있지?! 누구야?! 어떤 놈이야?!"

"........"

"네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게 되어있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놈을 잡고 말아. 지금 말해! 말하지 않으면 너와도 인연을 끊겠어! "

"살바체 프란트!"


젠느가 멱살을 잡고 울부짖는 살바체를 말려보려고 했지만, 체논은 말이 없었고,

살바체는 그런 체논을 죽일 듯 노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체논의 눈을 보고 서서히 살바체의 눈에 믿을 수 없어하는 눈빛이 떠올랐다.


"알페르노? 하하하. 그래. 그렇지. 그 동안 잊고 있었어.

그 영감이 진을 못마땅해 하고 죽이려고 했다는 걸.

한번 했던 일, 두 번 못할 것도 없지. 그냥 두고 보지 않아."

"두고 보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거야! 대부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래! 내 여잘 죽이려고 했어! 그것도 두 번이나!

내게 '교황의 섬'까지 요구하며 내 인생을 쥐고 흔들었던 그 영감이 이번엔 내 자식까지 죽이려고 하고 있어.

그런데 내가 가만히 있겠어?! "


체논이 거칠게 밖으로 나가려는 살바체의 팔을 붙들고 말했다.


"대부는 네 자식까지 있는지 몰랐어.

알았다면 절대 이런 일은 하지 않았을 거다. 거기다, 지금까지 우릴 키워주신 분이야.

잘 설득해. 그 수밖에 없어."

"체논. 넌 몰라. 나와 그 영감탱이의 일을 넌 모른다고! 입 닥쳐.

너까지 미워하고 싶지 않다. 젠느. 미안하지만 진의 곁에 있어줘. 금방 돌아올 테니…."


분노에 사로잡힌 살바체는 자신이 환자라는 것도 잊고 밖으로 나갔다.

정신만으로 똑바로 걷고 달려 나가는 살바체를 간호사들도 이번엔 잡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프란트 家의 마지막 비밀 [10장]


살바체가 알페르노에게 분노하며 뛰어오는 그 순간, 알페르노는 소파에 앉아 소리를 치며 격분하고 있었다.


"뭐라고! 무슨 일을 그 따위로 처리를 해! 살바체는?! 그 딴 여자 같은 건 상관없어!

살바체가 잘못되면 다 죽은 거야. 니들 깡그리 다 갈아버리겠단 말이다!"


여자를 치게 하려다, 살바체까지 함께 사고를 당했다는 말에 알페르노는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자신 때문에 죽게 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알페르노는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수하의 차분한 말에 그제야 알페르노가 한숨을 쉬며 숨을 돌렸다.


"처리? 처리는 네가 알아서해. 그 놈 딸 수술이나 시켜. 그거면 만족할 놈이니까.

대신 입은? 체논이? ……. 그래. 알았다.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멍청한 놈!"


수화기를 꽝 내려놓는 알페르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마를 만지는 알페르노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체논의 귀에 들어갔다면 지금쯤 살바체도 알 가망성이 높았다.

자신을 그렇지 않아도 보지 않으려고 하는 놈인데…. 그러나 다시 든 생각에 알페르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럴 이유가 없지.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은혜를 그 여자 때문에 이름까지 버린 놈.

여자 때문에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놈. 내가 이렇게 주눅들 이유가 없다.

넌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자식이야. 그건 변하지 않는 피다. 빠져나가려고 해도 엄연히 나갈 수 없는 피란 말이다.'


소파를 서성이는 알페르노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살기가 돋았다 왔다 갔다 했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서재에 달려 있는 바로 이동해 술을 찾으려던 알페르노는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발을 정지했다.


'꽝!'


생각보다 빨리 알페르노의 서재로 살바체가 흰 와이셔츠에 한쪽 팔을 걷어 올린

병실 안에서의 그 모습 그대로 들어섰다.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며 다가오는 살바체를 알페르노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순간,

살바체는 다가와 알페르노의 멱살을 잡아챘다.


"다시 건드리면 죽여 버리겠다고 말했어! 당신이 내 아버지라고 해도 말이야!"

"…아버지라는 걸 인정하는 거냐?"

"웃기지마. 당신이 뭔 짓을 했는지 알아?! 내 여자만 아니고 내 자식까지 위험하게 만들었어!

절대 용서하지 않아! 알겠어?!"


'퍽!'


살바체의 주먹이 순식간에 알페르노의 얼굴을 강타했다.

알페르노가 꼬꾸라져 바닥에 주저 않아 쓰러졌지만, 살바체의 말에 아픈지도 모르고 있었다.

큰 충격을 받은 알페르노의 눈이 살바체를 응시하고 말했다.


"그..그게 무슨 소리냐. 네 자식?"

"그래! 진…. 내 자식을 임신하고 있었어. 당신이 내 아버지라면 절대 일으켜선 안 되는 일 아니었나?!

이젠 지겨워. 당신 손에 놀아나는 것도 지겹고, 이 이태리의 생활도 지겨워.

프란트 이름을 달고 사는 것 자체가 지겹다고!"


쇼크 상태에 빠진 알페르노의 눈을 보면서도 살바체는 죽일 것 같이 알페르노를 노려보며

거칠게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힘없이 딸려 들어 올려지는 노인을 보면서 살바체의 시선도 괴로움에 흔들렸다.


"원하는 데로 해주겠어! 다 버려주겠어! 이 이름. 다 당신이 가지고 꺼져!

대신 내 여자 다신 죽일 생각 같은 거 하지 마! 다시. 다시 그랬다간…!"


흔들리며 초점이 없는 알페르노의 눈을 보고 살바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알페르노를 바닥에 내 팽개쳤다.

힘 있게 돌아서는 살바체의 등을 보며 알페르노가 소리쳤다.


"어쩔 생각이냐! 이놈!"

"이태리를 떠나겠어. 당신 눈에서 모든 걸 치워주지.

진이 안정되는 데로 여길 떠나 외국으로 가겠어. 다신 평생 날 볼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알페르노."


모든 걸 접겠다는 단호한 살바체의 담담한 말을 들으며 알페르노는 살바체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 번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는 살바체에게 이젠 더 이상 자신에게

기회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된다.

알페르노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살바체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자신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가려는 살바체를 보며, 알페르노는 모든 체면을 날려 버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나가는 살바체의 다리를 잡았다.


"이대로 가지마라. 내 말을 듣고 가. 아버지가 아니라면 네 친구로서 한번만 다시 봐."

"필요 없어. 당신을 가장 사랑했어. 단 하나의 가족이고, 가장 의지했던 한 사람이었어.

그런데 알페르노. 당신은 내 모든 걸 죽이려고 했어.

진을 죽이고, 내 자식을 죽이고, 날 죽이려고 했어. 다신용서 안 해."


거칠게 자신을 밀어내는 살바체를 보며, 필사적으로 알페르노는 다시 매달렸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살바체는 자신의 희망이었고,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였다.

삶의 전부였고, 모든 걸 살바체 때문에 이루려고 노력했었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이대로 보내 자신역시 죽을 수는 없었다.


"잘못했다. 다신 안 그러마. 다신 네 여자 손 안 된다. "

"놔!"

"아, 아직 할 말이 있다. 이 말을 꼭 해야 해! 프란트 家에 대한 마지막 비밀이다.

이 말만 듣고 가. 다신 잡지 않을 테니!"


살바체가 알페르노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가슴 한쪽이 알페르노의 비굴한 모습을 보며 뭉클뭉클 아픔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자고 한 게 아니었다.

언제나 당당한 알페르노의 모습에서 이런 힘없는 노인의 모습을 보니, 살바체는 흔들리는 연민에 말을 잃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한 남자,

마피아의 대부인 알페르노가 자신 발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며, 살바체는 밀려든 화를 접고 말했다.


"일어서! 그 따위로 비굴하게 굴지 말고 일어서라고!"


살바체의 젖어 분노에 떨고 있는 눈을 보며 알페르노는 휘청하는 몸을 일으켰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앞이 캄캄한 알페르노였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영영 자신에게 어떤 기회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을 한다고 이해해 줄까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평생 가슴에 품고 살수만은 없었다.

이왕 다 들어난 것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살바체는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아들이 아닌가. 자신을 나쁜 놈이라 더 욕을 하고 안 본다 해도,

프란트 家 이름을 버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앉아라. 긴 얘기다."

"…."


살바체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알페르노가 휘청거리며 앉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알페르노를 노려봤다.

더 이상 자신이 모르는 또 어떤 비밀이 숨어있단 말인가.

듣고 싶지 않았지만, 알페르노의 처절한 눈은 살바체를 미련 없이 나가고 싶은 마음을 다시 한 번 붙잡았다.


"무슨 소리를 하던지 빨리하는 게 좋을 거야.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니까."


아무 말도 없이 생각을 정리하는 표정으로 한숨만 내쉬는 알페르노에게 살바체가 낮게 읊조렸다.


"그래. 알았다…. 내가 어찌 살아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너에게 말해준적이 있지?

뒷골목생활을 견뎌내며 내가 여기까지 올라온 건 전부 널 위해서였다.

프란트 이름을 지켜 주기위해 싸웠다. 그 이름 하나가 내 인생을 바꿔 놨다."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지? 동정이라도 살 생각이라면"

"아니! 끝까지 들어. 내게 프란트라는 이름이 중요한 이유를 말해 줄 테니 끝까지 들어."


살바체는 거칠게 오르락 거리는 자신의 가슴을 진정시키며 초인적으로 알페르노를 응시하고 눈에 힘을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저 말이었다.


'넌 프란트 家다. 유일한 프란트 家의 후손이다. 긍지를 가져라.'


긍지? 무슨 긍지를 가지라는 말인가?!

피도 섞이지 않은 가짜인 나에게 무슨 긍지가 있단 말인가!

살바체의 눈이 붉게 충혈 되고, 알페르노를 응시하는 눈에 불이 일었다.

그러나 조용히 알페르노를 응시하며 초인적인 힘으로 자신을 눌렀다.


"네게 한 번도 내 부모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지? 내 새어머니는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던 집시피를 가진 여자였다.

천 하디 천한 여자였다. 하지만, 새어머니가 사랑한 남자는 이태리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였다.

정열적이던 새어머니는 단 하룻밤의 상대인 것을 알면서도 남자에게 마음을 주고 나를 가졌다.

임신한 걸 숨기고 뒷골목으로 숨어들어 새어머니는 몸을 팔면서 나를 키웠다.

임신한 걸 안다면 남자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라는 걸 새어머니는 알고 계셨던 거다. "


알페르노의 얼굴에 물기가 어린 것은 그때부터였다.

새어머니를 생각하는 알페르노는 지금 어렸을 때 소년이었고, 새어머니를 사랑한 한 아들의 처절한 모습이었다.

말을 끊는 알페르노를 보며 살바체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알페르노의 새어머니의 대한 얘기를 살바체는 담담하게 듣고 있었다.


"얼마못가 새어머니는 뒷골목에서 생활하는 남자들에게 얻어맞아 생을 달리하셨다.

난 당시 10살의 소년이었고 세상이 증오스럽고 아버지가 증오스러웠다.

그래서 난 힘을 키우려고 이를 악물었다. 복수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 세상, 그리고 아버지에게…. 그러나 내가 힘을 얻었을 땐 아버지란 사람은 죽고 없었고,

그의 아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접근했지.

친구인척 갖은 아양을 떨고 일부러 죽을 위기에서 구해주기도 했다. "

"그, 그게"

"그래 맞아. 살보네. 프란트 살보네였지.

살보네의 아버지가 내 새어머니를 죽게 만든 사람이다. "

"!"


듣고 있는 살바체는 몽롱한 시선으로 알페르노를 응시했다.

너무 황당한 말을 들은 후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후유증이 찾아와

한참동안 살바체는 알페르노를 흔들리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서, 설마. 알페르노가 살보네를 일부러?"

"아니! 그렇지 않아.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동안 하늘은 무심하지 않다 생각했다.

살보네가 프랑스에서 데려온 헤지나를 나 역시 마음에 두어버렸고,

옆에서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증오심은 하루가 갈수록 커져갔었다.

헤지나가 아니었다면 진작 그놈 곁을 떠났을 거다.

하지만, 헤지나의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안아달라는 헤지나를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복수라 생각했다.

내 새어머니를 아내가 있음에도 안았던 살보네 아버지의 대한 복수…!

헤지나를 안고 또 안으면서 난 살보네에게 복수를 한 거다.

그렇게 내 자신을 정당화해 버렸다. 정당한 복수라고 말이다."

"…."


살바체는 알페르노의 말을 들으며 눈을 치웠다.

자신의 새어머니 헤지나를 어떤 마음으로 안았을지 금방 손에 잡힐 듯 영상이 떠올랐다.

알페르노는 살바체를 쳐다보지 못하고 괴로운 마음으로 얼굴을 양손에 묻었다.

그리고 독백하듯 못 다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하지만, 살보네가 헤지나와 함께 죽었을 때, 난 그 친구에게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헤지나를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했을 그 친구에게 난 말 못할 죄책감을 느꼈다.

복수의 끝은 너무나 허망했다. 결국 난 혼자 남았다.

친구도 가고 사랑도 가고 말았고, 남은 건 내 자식뿐이었다. 생각했다.

살보네와 헤지나를 위해 살보네의 자식으로 널 키우겠다.

내 자식이 아닌 두 사람의 사랑으로 이룬 아들로 키우겠다.

평생 나 같은 뒷골목의 마피아 같은 놈의 아들이 아닌, 정당한 프란트 家 이름을 가지고 살게 해 주겠다.

난 그게 두 사람에게 속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

"…."


살바체는 알페르노의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과거에 괴로워하는 늙은 남자의 영혼을 보았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키우고,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지내고 있는 알페르노.

왜 그토록 자신에게 프란트 家의 이름을 지켜주려고 했는지 이젠 알 것 같았다.

왜 그토록 희진을 반대했는지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던져버릴 정도로 사랑하는 여자가 남자에게 얼마큼 위험한 존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순간 파멸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희진을 죽이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그 이유는 알겠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일 수는 없다.

살바체는 다 들었다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담담한 시선의 살바체가 아무 말도 없이 소파에서 일어나자, 알페르노가 눈물이 젖은 얼굴로 살바체를 응시했다.


"난 과거 프란트 家 남자들처럼 바보 같은 일을 되풀이 하지 않아.

내 여자와 내 자식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 다시 한 번 내 여자를 손 대지마. 알페르노."

" …살바체. 날 다신 안 봐도 용서하지 못해도 좋다.

다만 프란트 家 이름은 버리지 말아다오. 내 자식이 아니라고 해도 좋다.

살보네와 헤지나의 자식이다 믿고 살아도 좋다. 그러나 그 피는 거부하지 말아다오.

넌 프란트 家의 당당한 후손이다."

"…."


살바체가 굳어 서 있는 모습을 보며, 알페르노는 사력을 다해 애원했다.

자신을 향해 서서히 돌아서는 살바체를 쳐다보며 알페르노는 눈으로도 애원했다.

그리고 끝내 알페르노는 살바체가 뒤돌아 자신을 보며 긍정의 표시로 눈을 깜빡이는 것을 지켜 볼 수 있었다.

다시 힘 있게 나가는 살바체를 쳐다보며, 알페르노는 순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무너졌다.

복수, 과거, 죄책감…. 모든 게 한순간에 드러났다 다시 알페르노의 몸속으로 잠식해 들어갔다.

어두운 과거는 자신이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놓아주지 않겠지만,

살바체는 당당하게 살아갈 거라는데 알페르노는 위안을 얻었다.

이것으로 모든 과거도 종지부를 찍었다.


* * *


캄캄한 어둠속에서 희진은 눈을 뜨고 빛을 응시했다.

잠깐씩 눈을 떠 무언가를 말했던 기억은 있었지만, 또렷이 기억나는 일은 없었다.

사고 나기 전 자신을 밀쳤던 살바체만 기억이 났다.


"살바체 프란트…."


희진은 조용히 말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려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지만, 희진은 사력을 다해 몸을 일으키고 병실 안을 쳐다봤다.


"…젠느?"


그제야 잠깐 눈을 떴을 때 자신을 부르던 젠느의 목소리가 기억이 났다.

자신에게 괜찮다 속삭이던 목소리는 바로 젠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는 젠느만이 있을 뿐, 병실어디에도 살바체는 없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한 희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신을 밀치고 큰일이 난 게 아닐까?

바보 같이 자신의 목숨도 상관없이 그 순간 뛰어든 살바체가 미웠다.


'나 대신 죽었어봐. 나 놔두고 죽었어봐. 용서 안 해. 용서 안한다고…!'


희진의 말을 들은 것처럼, 그때 문이 열리며 살바체가 병실 안으로 힘없이 들어섰다.

급히 젖어드는 희진의 눈을 보고 살바체가 놀란 눈으로 한걸음에 다가와 희진을 꽉 끌어안았다.


"바보 같이…. 바보같이 다신 그러지 말아요.

나대신 죽으면 절대 용서 안 해요.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그래."

"없어서…. 눈 떠보니 없어서 놀랬어요. 다신 내 눈 앞에서 사라지지 말아요.

어디 있었죠? 내가 이렇게 아파서 누워 있는데 어디 갔던 거죠?"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누워."

"만날 말 뿐이야. 만날 말 뿐이고 날 화나게 해. 나쁜 자식.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요.

나 화났어. 미안하다는 말 너무 쉽게 하잖아요. 미안하다는 말 내가 해야 하는데….

매일 매일 내가 말해야 하는데…. 할 말 없게 만들고 있어…."


횡설수설하며 울고 있는 희진의 눈을 보며 살바체가 미소 짓고 희진의 눈을 엄지로 쓸었다.

다시 자신의 으로 파고드는 희진을 꽉 끌어안으며 살바체가 '후후'하고 웃었다.


"웃음이 나와요? "

"화났다가 울었다가…. 한 가지만 해. 진. 아기가지면 전부 그런가?"

"누, 누가 아기를 가졌다고…."


희진이 놀란 얼굴로 말을 하다 살바체에게서 화들짝 떨어져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을 쳐다보며 웃고 있는 살바체를 보며, 희진의 눈에 다시 맺혀있던 눈물이 떨어졌다.


"나, 나요?"


살바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진이 놀란 눈으로 눈을 더 크게 하고 숨을 헉하고 들여 마셨다.


"조심해야 한대. 유산할 수도 있으니 각별히 신경 써야 한대. 그러니 누워."

"당신 아이를…. 내가?"

"그럼 누구 아이겠어. 나 말고 다른 남자를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살바체의 짓궂은 농담에 희진이 멍한 표정이 되어서 소리쳤다.


"살바체 프란트!"


희진의 말에 살바체가 '하하하'웃으며 희진을 끌어당겨 안고 등을 토닥였다.

여전히 놀란 눈의 희진이었지만, 살바체의 다음 말에 눈을 감았다.


"기뻐. 진이 내 아이를 가졌다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 사랑해. 진….

무사해 줘서 고맙고. 아이를 잃지 않고 무사히 품고 있어줘서 고마워.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살바체…."


희진은 살바체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뛰어대는 걸 느꼈다.

그제야 희진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에게 뭔가를 줄 수 있다는 것.

오팔의 넥타이핀보다도 더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는 게 기뻤다.

자신 역시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나도, 나도 기뻐요."


그때 꼭 서로를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젠느가 이마를 만지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아, 자는 척하기 힘들어 졌어요. 미안해요. 계속해요."


쑥스러운 표정으로 젠느가 일어나 병실을 나가려는 모습을 보고, 살바체가 진을 침대에 눕혔다.

희진이 나가는 젠느에게 고맙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돌아선 젠느가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살바체 프란트. 당신도 환자라는 것 기억하죠? 어서 누우라고요.

정말 피곤하고 가슴 뛴 하루였어."


기진맥진한 젠느가 두 사람을 보고 밝게 웃으며 나가고 난 뒤, 어색한 침묵이 병실 안을 매웠다.

희진은 괜히 붉어진 얼굴로 흰 벽을 응시했고,

살바체는 그런 희진의 얼굴을 보며, 얼굴에 흘러내린 희진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치워줬다.


"살바체. 누우라잖아요. 젠느가…."


간신히 말을 하는 희진의 얼굴을 보고 살바체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처음으로 희진이 살바체 프란트라는 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성을 빼고 살바체만 불렀다는 것을

두 사람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눕지도 않고 희진의 손을 끌어당겨 잡는 살바체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기가 서려있었다.



가족 [11장]


서울, 평창동 희진의 집으로 문화부장관을 태운 검은 다이너스티가 서서히 정차했다.

문화부장관이 차에서 내려서자, 곧바로 운전사가 뒤따라 내려 들어가시라는 포즈로 인사를 취했다.

순간 문화부장관이 뒤따라 들어오는 투스카니 은색의 차량을 보며 그 자리에 정지했다.

자신의 아들인 혁진의 차였다.

혁진 역시 차를 천천히 집 앞에 세우고 운전사에게 주차를 맡기며 아버지에게 다가섰다.


"이제 들어오십니까? "

"들어가자."

"네."


어딘지 자신의 아버지인 문화부장관의 표정이 굳어있는 것 같아 혁진이 아버지 눈치를 보며

함께 새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들어오세요."

"어디 연락 온대는 없었어?"


문화부장관의 말에 희진의 새어머니인 장 여사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남편이 무엇을 걱정하며 묻는 것인지 뻔히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젓는 표정이 어두웠다.


"흠흠... 혁진이 너 나 좀 보거라."

"네."


혁진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아버지를 따라 서재로 들어섰다.

한참 말문을 열지 못한 채 책상에 앉아 다른 생각에 빠져계신 아버지를 보며 혁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내 안 좋은 소문을 듣고 왔다. 아무래도 희진. 그것이 이태리에 가 있는 것 같다."

"네?!"

"내 잘 알고 지내는 친구 놈이 이걸 전해주더라. 봐라."


아까부터 뭔가를 들고 계신 아버지를 보면서 이상하다 생각은 했지만,

이태리어로 써 있는 무언가가 무엇인지 자세히 본 혁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태리 시사 잡지책으로 보이는 그것의 앞표지에 떡하니 웃고 있는 사람은 분명 희진이 분명했다.


"아, 아버지!"

"잘 봐라. 희진이 맞느냐?"


혁진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묻는 아버지의 의도를 혁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자기 자식을 못 알아보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믿지 못하겠으니 다시 물어 보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애가 왜 여기 가 있는 겁니까? 그리고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입니까?

혜수 결혼식 때문에 늦게 들어오는 거라 생각했는데….이게 어찌된 겁니까?"


잡지를 들고 답답해 말하는 아들을 보며 희진의 아버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파리에 있는 대사관 친구에게 희진이 이태리의 일이 있어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기절초풍했지만 그냥 딸을 믿고 있을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또, 그때부터 장관은 아무도 모르게 속을 끓고 있기까지 해야 했다.

이제나 저제나 연락을 기다리며 살았는데….

혜수의 결혼식만 지나면 들어오겠지.

아무 탈 없이 무사하게 다시 웃으며 집으로 돌아오겠지.

그런데, 이제 와서 뒤통수를 맞은 기분에 문화부장관은 어이가 없어 딸에 대한 실망감에 기운이 빠졌다.


' 아버지. 그래서 제가 보내지 말자 하지 않았습니까?'


혁진 역시 아버지에게 이렇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상심에 젖어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제가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아니다. 내 저번에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아무 내색도 할 수 없었다만,

이번에는 이탈리아 외교단에 끼어 함께 가겠다 말했다. 너도 그리 알고 채비해라."

"아, 아버지가 직접이요?"

"그래. 내 눈으로 봐야겠다. 내 눈으로 봐야겠어!"


책상을 내리치는 자신의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혁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막내딸이라 애지중지 그래도 가장 자유롭게 키운 딸이었다.

그 믿음이 오죽 했을까…. 가장 예뻐했던 딸이 이번엔 사고를 쳐도 엄청난 사고를 쳐버린 것이다.


"준비하겠습니다."


혁진은 담담하게 말하고 잡지책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이태리어를 잘 알고 있는 친구에게 물어볼 참이었다.

도대체 옆에 서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꼭 알아내겠다는 심사로 혁진이 눈을 빛냈다.


* * *


'똑, 똑'


혜수는 '발리'로 삼일동안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계속 일에 빠져있는 시원에게

따뜻한 녹차를 가져다주려고 서재를 두들겼다.


"들어와."


혜수가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도 모르고 시원은 컴퓨터를 보며 일 할 때 마다 쓰는 반 테 안경을 올리고 있었다.


"차 드세요."

"그래. 고마워."


그제야, 시원이 혜수를 보고 미소 짓고 녹차향이 향긋한 차를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아직도 컴퓨터안의 일을 쳐다보는 시원의 눈을 보며, 혜수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저렇게 일하는 모습,

심각한 얼굴표정을 보면 혜수는 이제 온전히 시원이 자신의 사람이 되었다는 뿌듯한 행복이 밀려오고는 했다.

저번 무단여행을 다녀온 뒤로는 희진언니는 말끔히 잊은 듯해서, 혜수는 적잖이 마음을 쓸고 있었다.

일에 몰두해 시간도 아깝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지만,

자신에겐 언제나 따뜻한 표정과 남편으로서의 의무는 다 하고 있는 시원이었다.


"아직 멀었어요?"

"왜…. 내가 필요한가?"


시원이 컴퓨터를 들여다보다 혜수를 쳐다보며 짓궂게 물었다.

혜수가 직선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는 시원을 보며 가슴이 뛰어와 얼굴을 붉혔다.


"아, 아뇨. 먼저 잘게요. 오빠."


뒤돌아서 쟁반을 들고 나가려는 혜수의 손을

시원이 덥석 잡아 자신의 무릎에 혜수를 앉히고 얼굴을 어깨에 묻었다.


"혜수야. 넌 내가 어디가 그리 좋니?"

"갑, 갑자기 그건 왜요?"

"그냥, 궁금해서."

"저도 그냥 다요. 그냥 오빠니까…. 이유 같은 건 몰라요. 그냥 좋지."

"후후후"


혜수를 뒤에서 앉은 시원은 혜수의 정직한 대답에 웃었다.

그래. 자신에겐 어쩌면 혜수 같은 순수한 여자가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지.

계산에 능하지도 않고, 약삭빠르지도 않고…. 언제나 한결같은 여자니까 넌.


"올라가자."

"방해했어요?"

"아니. 갑자기 일보다 네가 더 갖고 싶어졌어."

"오빠!"


시원이 혜수의 한쪽 손을 잡고 컴퓨터를 저장하고 모니터를 껐다.

손목을 잡은 혜수의 손이 파르르 떠는 것을 느끼며 시원이 모른 척 혜수를 돌아보고 말했다.


"난 빨리 자식이 가지고 싶다. 날 닮은 아기 말고, 널 닮은 아기로."

"…."


혜수의 붉어져가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시원이 혜수의 손을 잡고 발을 재촉했다.


* * *


-로마 (Roma)


"안정기에 접어드시려면 석 달은 병원에 입원을 시키셔야 합니다.

성관계도 안정기까지는 금물입니다."

"…네."


희진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살바체를 쳐다보고 속으로 웃으며 의사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의사가 살바체에게 인사하고 나간 뒤, 살바체가 희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웃음이 나오나? 석 달이나 병원신세라니…. 우리 결혼도 미뤄야 하잖아."

"살바체. 당신이 싫은 이윤 그게 아니잖아요? "


살바체가 희진의 앞 의자에 앉아 희진의 손에 자신의 손을 깍지 껴잡으며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나에 대해 이제 모르는 게 없군."

"얼굴에 다 쓰여 있어요. 억. 울. 하. 다"

"이런 진. 내가 억울한 건 그게 아니라고."

"그럼요?"


살바체가 희진에게 조금 자신을 숙여 보이며 희진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에게 벌써부터 진을 빼앗긴 기분이야.

미리말해두지만, 아무리 우리 자식이 예쁘더라도 나 보다 더 좋아하진 말아달라고."

"당신처럼 질투가 많은 남자는 처음이에요. 살바체 프란트."

"나도 마찬가지야. 내 자신이 이렇게 유치한 남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어."


희진이 조금 상체를 일으켜 살바체의 입술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하나도 유치하지 않아요. 유쾌하니까. 음.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더 해봐요."

"환자복을 입고 유혹하는 여자는 세상에 당신 밖에 없어. 진…."


천천히 자신의 입술로 다가오는 살바체의 잘생긴 입술을 내려다보며 희진이 감미로운 그의 키스에 눈을 감았다.

촉촉한 살바체의 키스는 두 사람을 다시 들뜨게 만들었다.

희진을 꼭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희진의 입술을 탐닉하던 살바체를

희진이 갑자기 탁 때어내고 짓궂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쿡쿡…. 살바체. 이젠 좀 솔직해 지셨나요?"

"젠장. 조금만 더 달라고. 진"

"하하하하"


서로 장난치는 두 사람은 사람이 들어서는 것도 모르고 웃고 있었다.

그때, 병실 문 앞에서 이런 두 사람을 향해 못 말린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체논이 말했다.


"이봐. 살바체 프란트. 너의 그 카리스마는 어디 간 거냐?"

"쿡쿡…."


체논과 젠느가 두 사람을 쳐다보고 웃고 있는 것을 보며

그제야 살바체가 두 사람을 향해 희진을 덮치다 말고 말했다.


"카리스마도 진의 유혹에 넘어가 자취를 감추었지."

"어서들 오세요."


젠느가 살바체가 넘겨주는 의자에 앉으며 희진을 빙그레 웃고 내려다보았다.

한층 아기를 가진 뒤 생기가 넘치는 진의 얼굴이 밝게 빛나 보였다.


"좋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진. 의사는 뭐라고 해요? "

"3개월 동안은 입원신세야. 자주 와서 진하고 친구가 되어주라고. 젠느"

"그건 당연하죠. 살바체. 하지만, 3개월이라니…. 세상에. 그럼 결혼식은요?

미뤄야 하는 건가요? 성 베드로 성당에서 들어서는 진의 아름다운 모습을 꼭 보고 싶었는데

정말 아쉽잖아요. 거기다…. 3개월 후엔 배도 나오기 시작할 텐데."


자신보다 더 안타까워하며 호들갑을 떠는 젠느를 향해, 희진이 웃어 보이며 손을 잡았다.

살바체 역시 젠느가 걱정하는 이유가 무척 안타깝고 속상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신부,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게 해주고 싶었는데….

희진이 아쉬워 할까봐 그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뇨. 전 좋아요. 결혼이라는 건 마음으로 맹세하는 거잖아요?

난 내가 한 일에 책임을 지고 싶어요.

부모님 속 썩이고 가장 좋은데서 세상 남부럽지 않게 결혼하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 했었어요.

저 벌 받은 건지도 모르죠. 하지만 우리 아기를 위해서라면 그런 벌쯤은 달게 받겠어요."


세 사람은 감동받은 얼굴로 희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희진이 쑥스러워 다른 곳을 쳐다보며 흠흠, 거리는 소리를 냈다.

살바체의 뜨거운 시선이 그 중에서 가장 낮을 뜨겁게 했다.


"후후, 그 말에 동감입니다. 살바체가 그 맘에 반만 좀 닮았으면 좋겠군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체논의 말에 즉시 살바체가 희진의 눈을 피해 조그맣게 이태리어로 따져 물었다.

체논이 눈으로 싱긋 웃으며 두 여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살바체에게 눈짓을 하고는 희진의 병실을 나갔다.


"받아."


살바체가 나오자마자, 체논이 가지고 있던 봉투를 살바체에게 내밀었다.

살바체가 뭐냐는 시선으로 체논을 향해 눈짓으로 물었다.


"'교황의 섬'"

"필요 없어. 갔다 줘. 그런 섬쯤 백 개라도 살 능력 있어. "


말 다했다는 표정으로 살바체가 인상을 쓰고 다시 병실 문 손잡이를 잡았다.

체논이 바로 살바체의 팔목을 잡고 말했다.


"나도 얘기 들었다. 난 솔직히 네가 질투난다.

예전부터 너에게만 특별한 분이라 의심이 되기는 했지만, 사실이라니 놀라기도 했고….

하지만 난 대부가 내 아버지라 생각해. 이번 일은 이걸로 용서해 드려라. 질투가 나신 거다.

널 진에게 빼앗긴 질투가 나신거야. 나이가 먹으면 애가 되는 거다.

대부라고 해도 그건 똑같아. 거기다 평생 우리 때문에 외롭게 사신 분 아니냐? "

"너 나 잘해."

"살바체 프란트!"


다시 들어가려는 살바체의 팔을 거칠게 잡고 체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살바체의 눈은 고집스러웠다.


"이 말 전하라고 했다. 네가 네 이름을 버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가지길 바라신다는 말. 받아. "


체논과 서류를 노려본 살바체가 거칠게 서류를 받고 체논을 향해 말했다.


"약속한 거니 받겠어. 하지만, 내 아이와 진을 죽이려고 한 일은 용서 못해.

더 이상 내 앞에서 알페르노 예긴 꺼내지마. "

"…."


체논을 거들떠도 안보고 병실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살바체 프란트의 등을 쳐다보며,

체논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자식. 넌 그래도 아버지라도 살아 계시니 복 받은 거다."


* * *


다빈치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는 리무진을 보며,

혁진과 문화부장관인 희진의 아버지는 그저 이탈리아에서 마련한 차려니 생각했다.

소수의 외교사절단이라 그리 주목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이탈리아의 대접이 엄청났다.

다빈치 공항에서 쉬리톤 로마 호텔로 옮겨가는 동안만 경호원이 10명이 넘게 따라 붙었고,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인사하는 직원들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항상 가는 곳마다 이리 윤택합니까? 아버지?"

"그, 글쎄. 이번엔 좀 특별하구나."

"문화부장관님. 이건 계획보다 더 오버한 듯 한데요…."

"그렇지?"


국빈대접. 말 그대로 국빈대접이었다.

호텔에서 가장 좋은 국빈들이 묶는 방으로 들어서며 문화부장관은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루에 한국 돈으로 400만원은 줘야 묶을 수 있는 방이었으니, 그 호화스러움은 말로 표현이 안 되는 일이었다.

세세하게 모든 게 최고로 대접이 되어지고,

하루 동안 스케줄의 따라 옮겨질 때마다, 외교단은 극직한 대접과 설명을 들었다.


"저기 보시는 40층의 웅장한 빌딩이 이탈리아에서 세 번째 빌딩인 '펠리스' 빌딩입니다.

'프란트 家'가 보유하고 있는 재산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가장 높이 손 꼽히는 게 바로 저 빌딩입니다. 묶고 계신 그 호텔뿐만이 아니라,

로마, 밀라노, 베네치아, 주요 도시에 호텔들을 하나씩 또는 두개씩 소유하고 있고,

선박, 수출, 반도체, 차, 보이는 모든 것에 프란트 家의 이름이 빠지지 않을 겁니다."


리무진에서 외교단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는 안내원의 말을 들으며, 혁진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프란트…. 프란트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건데….'


계속 지나치는 로마의 원형경기장의 모습이나 성 베드로 성당,

여러 가지 조형물에 대한 설명을 줄기차게 해 나가는 여자의 생생한 얼굴을 보며 혁진이 그 의문을 접어 버렸다.

차가 드디어 바티칸을 지나 총리와 면담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만난 문화부장관은 자신에게 인사를 청하는 큰 손을 보며 반갑게 마주 잡았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리님."

"아, 무슨 말씀입니까? 저번 한국에서 우리 외교단이 신세를 졌지 않습니까?"

"하하하, 저희가 많이 모자랐습니다. 극진하게 대접해 드리지 못한 게 못내 죄송해집니다."

"하하, 솔직히 이번엔 개인감정이 들어갔습니다.

제가 아끼는 자식 같은 사람이 꼭 자신이 대접해 드리고 싶다 말해서 말입니다.

제가 칭찬을 받으니 좀 미안해지는군요."


희진의 아버지는 총리께서 하는 말을 자신이 귀가 어두워 잘못 해석한 게 아닌가 하며,

뚫어지게 총리의 얼굴을 쳐다봤다.

곁에 있는 혁진과 다른 외교단 역시 자신과 비슷한 얼굴을 한 모양을 보고서야

잘 이해를 한 모양이다 생각하고 문화부장관이 총리에게 물었다.


"개인감정이라니. 그게 누구입니까?"

"아, 곧 개인적으로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회담을 끝내고 말입니다. "


문화부장관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자연스럽게 회담으로 넘어가는 총리에게 더 물을 수가 없어 궁금함을 뒤로 미루고 회담에 참여했다.

잠시 후, 회담이 끝낸 후 총리가 문화부장관인 희진의 아버지에게 남아 달라 청했다.

혁진과 함께 자리를 지킨 문화부장관의 어리둥절한 얼굴이 총리를 향할 때,

회담장으로 한 은빛금발의 이태리 남자가 들어섰다.


"!"

"헉! "


총리가 두 사람의 놀란 표정에도 빙그레 웃으며 회담장으로 들어선 살바체를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


"살바체 프란트. 프란트 家의 유일한 상족자고,

이태리에서 없으면 안 될 인물입니다. 자네가 만나고 싶다고 하신 분들이 이분들이 맞지?"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총리님."

"그럼…. 전 직무가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이태리에서의 시간이 되 시길 바랍니다. "


놀란 눈으로 총리에게 인사를 하는 두 사람을 기분 좋게 웃으며 보고는 살바체의 등을 두들기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회담장을 나갔다.


"갑자기 이렇게 놀래 켜 드려 죄송합니다."


밝은 청색의 힘 있는 이태리 남자의 정확한 영어발음을 들으며,

혁진과 문화부장관의 표정이 굳었다.


* * *


로마 , 게멜리 병원(Gemelli Hospital).

희진은 지루한 하루를 보내며 살바체에게 속으로 욕을 퍼붓고 있었다.

이틀 동안 뭐가 그리 바쁜지 자리를 자주 비워 희진을 화나게 했다.


"금방 오실 거예요. 아가씨. 오실 때 아가씨가 드시고 싶다던...뭐더라…."

"만두요."

"네. 만두. 그거 한국음식점에서 사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맞아요. 미얀. 요즘은 나 같지가 않아요. 감정이 수십 번씩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

툭하면 울고 서럽고…. "


미얀이 이해하겠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희진에게 말했다.


"가족이 보고 싶으신가 봐요."

"그래요. 그게 걱정이야…."

"연락해 보세요. 설마 우리 주인님을 거절하시기라도 하겠어요?"

"휴, 미얀….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우리 아버지 고집이 얼마나 세신데요.

내가 누굴 닮았다고 생각해요?"


미얀이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더 힘껏 끄덕이며 수긍했다.


"음…. 힘드시겠네요."

"미얀. 하나도 위로 안 되는 거 알죠?"

"이거나 드셔 보세요. 민두 기다리다가 저녁도 안 드셨잖아요?"

"미얀. 민두가 아니라 만두라니까요."


희진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오렌지를 까서 건네주는 미얀의 손에서 오렌지조각을 받았다.

상큼한 오렌지를 입안에 넣어 먹으면서도 희진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미안…. 너무 늦었지?"


희진이 세 개 째 미얀이 건네는 오렌지를 입안에 넣을 때, 살바체가 병실로 들어와 희진에게 만두를 건넸다.

희진은 살바체가 가져온 만두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얼른 받아 열었다.


"이거…. 김치만두 맞아요?"

"그래. 그걸 찾느라 로마를 다 뒤지고 다녔어."


희진은 살바체에게 고맙다는 말도 잊고 일류 호텔 로고가 적힌 보온된 만두의 뚜껑부터 열어 안을 살폈다.


"오! 맞아요. 후후. 맛있겠다. "

"어서 드세요. 아가씨."


자신보다도 만두를 더 반기는 희진에게 살바체는 서운한 표정도 짓지 않고 윗옷을 벗어 미얀에게 넘겼다.

하루의 긴장감과 피곤함에 살바체가 병실 안 소파에 앉아 이마를 문질렀다.

맛있게 입안에 음식을 넣고 있는 희진의 밝은 얼굴을 보며, 살바체는 뛰어다닌 보람을 찾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었죠? 요즘 바빠요?"


자신을 보지 않고 희진이 말하고 있었지만, 서운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 희진의 노력이 영력했다.

살바체가 피식 웃으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희진 옆으로 옮겨 앉아

희진의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고 말했다.


"며칠만 있으면 괜찮아 질 거야. 진. 오늘은 뭐했어?"

"오늘 젠느가 오후에 다녀가고, '다빈치' 발레단 사람들이 왔었죠.

한참 정신없이 있다가 의사선생님께 쫓겨났지만, 난 괜찮은데…. 봐요. 이렇게 잘 먹잖아요?"

"그래. 조만간 퇴원할 수 있을 거야. 조금만 참아."

"할 수 없죠. 우리 아기를 위해 선데. 미얀…. 만두가 좀 짜요. 거기 물 좀 줄래요?"


살바체는 희진이 음식을 먹는 걸 지켜보며 앉아 있던 침대에 몸을 눕히고 희진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진. 거의 다 받은 허락이었는데, 이틀 동안 당신아버지와 함께 다니면서 신임을 얻었다 생각했는데,

어제에 이어 당신 오빠라는 사람에게 한대를 또 맞았어.

우리 사고 소식을 오늘이야 알았거든. 앞이 캄캄해 지더군. 당신을 보겠다 화를 내시는데….

말리는 동안 식은땀을 흘렸어. 당신 식구들 정말 대단해.

그렇게 불같은 사람들은 처음이야. 누군가에 비유를 맞춰 본 것도 태어나 처음이었어.

당신 상태를 말씀드리고 겨우 진정을 시켰지.

하지만,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보시겠다 하셔. 당신 앞에서 화를 내거나 하진 않으시겠지?

내게서 당신을 빼앗아 가거나 하진 않으시겠지?'


희진은 살바체가 자신의 뒤에서 머리를 매만지는 것을 느꼈다.

미얀이 조금 붉어져 오는 희진의 얼굴을 보며, 흐뭇하게 두 사람의 상반된 얼굴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 * *


호텔 로얄 스위트 룸 거실.

말없이 아버지에게 술을 따라주는 혁진은 생각에 빠진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며 자신의 잔에도 술을 잔뜩 따랐다.


"네 보기엔 어떠냐."

"능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둘 다."


혁진이 따라놓은 술잔을 들이키며 아버지의 말에 대답했다.


"경제적인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사람도 그만하면 남자답긴 합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벌써 저희가 말릴 단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버지도 술잔을 단번에 들이키며 격정어린 얼굴로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괘심한 것!"

"어쩌실 생각이세요? 아버지….용서 하시고 받아들이실 겁니까?"

"…."

"제 생각에는 아버지. 전에 희진이 죽다 살아 돌아온 것도, 서울에서의 일도,

또 갑자기 희진이 파리로 가겠다 말했던 것도 전부 저 남자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그렇게 물었는데도 아무 대답도 안했던 건 저 남자를 지켜주기 위해서 아니었을까요?"


문화부장관, 희진의 아버지 역시 짐작하고 있던 일이기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숨을 내쉬는 얼굴엔 수심이 잔뜩 베어 나오고 있었다.


"이 남자 때문에 죽다 살아나고 그 동안 희진이 마음고생 한 걸 생각하면

죽도록 패놔도 속이 시원하지 않습니다. 교통사고에 결혼도 하지 않고 임신부터 시키다니…."

"혁진아. 내일 너만 가 보거라.

갑자기 내 얼굴을 보면 희진이 그 놈 말대로 일이라도 칠까 겁이 나는구나.

내 돌아가 네 어미에게 또 뭐라고 하누…."


혁진은 아버지의 말에서 반쯤 두 사람을 용서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는데, 그 대쪽 같은 아버지도 희진에게는 두 손 두 발 다 드신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 동안 물신양면 자신들에게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견딘 살바체 프란트에게 두 손 드신 것일지도….


"알겠습니다. 아버지."


* * *


"뭐라고요? 오빠가 지금 와 있다고요?"


동그랗게 질려 있는 희진의 얼굴을 보며, 살바체가 희진의 손을 잡으며 진정하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동안 말을 하지 않아서 미안해. 나 혼자 여기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일을 추진했어.

마음을 풀어드리고 허락을 받고 싶었지만, 나도 확신하진 못하겠어. 당신 아버지는 호텔에 남아 계셔. "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도 없었죠?

모든 걸 마음대로 해버리는 게 어디 있어요. 나도 지금껏 고민 중이었는데….

그럼 지금껏 당신 바빴던 이유가 그거였어요? “


지금껏 속으로 앓고 있던 일을 또 살바체가 짊어지고 일을 추진했다는 말에 희진은 화가 났다.

또 자신을 제쳐 두고 혼자 발버둥 쳤을 살바체를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진. 진정해. 어쩔 수 없었던 것 알잖아. "

"그래요.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화가 나요. 살바체. 또 나 때문에 죄인이 되었겠죠.

아빠가 뭐라고 했어요? 또 오빠는 당신에게 뭐라고 퍼부었죠? "


자신에게 젖은 얼굴로 화난 표정과 안타까운 표정을 교차하는 희진의 얼굴을 보며,

살바체가 희진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쩔쩔매보기는 처음이었어. 하지만 그 기분 나쁘지 않았어. 정말이야.

당신을 평생 내 곁에 둘 수 있다면 이런 고난쯤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어.

그러니까 미안해 할 필요 없어."

"멋대로 생각하지 말아요. 난 미안해하는 게 아니라 화가 난거라고요."

"그래. 알았어. 훗훗…. 오빤 안 만날 생각이야?"


희진이 살바체를 밀어내고 고집스런 눈으로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나야죠."


살바체가 희진의 이마에 재빨리 입을 맞추고 병실 문 밖으로 나가 서 있는 인상을 구기며 서 있는 혁진에게 말했다.


"진이 만나겠답니다."

"…."


혁진은 병실 앞에서 서서 기다리며, 벌써 자신이 희진에게서 타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이태리 남자를 자신의 친 오빠보다 더 믿고 있다는 사실에 혁진은 벌써부터 허탈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심호흡을 하고 혁진이 희진이 기다리고 있는 병실 문을 열고 크고 넓은 병실에서 희진을 찾아내고 눈을 맞췄다.


"…."

"…."


말이 없이 혁진의 혼란스러운 눈과 희진의 담담한 눈동자가 서로를 보며 마주쳤다.

혁진은 희진의 눈에 서린 고집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퍼부어 대려던 말들이 하나도 그 고집스런 눈에 막혀 나가질 않고 있었다.


"너 내 동생 맞아?"


겨우 혁진이 내 뱉은 말은 이거였다.

희진이 혁진의 기가 찬 말에 그제야 전의를 불태웠던 눈을 풀고 오빠를 보고 말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오빠. 서울로 같이 가자라던가, 안 된다는 말은 듣지 않을 거야.

내 마지막 고집이야. 오빠가 져줘. "

"아버지, 새어머니는 어쩔 거야. 승낙도 받지 않고 이렇게 일 저질러 버리고

네 고집대로 하겠다 말하면 그게 끝나는 일이냐?"

"그러니까 오빠가 설득해 달라고. 내가 서울에 갈 수 있었다면 벌써 집에 가 있었을 거야.

가서 확실하게 내 의사를 밝혔을 거라고. 하지만 난 지금 저 사람 아기를 가지고 있어.

이기적 이지만 어쩔 수 없어. 내 아기가 더 소중하니까. 저 사람이 더 소중하니까.

오빠에게 부탁할게."


혁진은 말도 못하고 입을 벌린 채 희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딱 부러지게 말하는 희진의 눈엔 확신이 꽉 들어차 있었다.

저 사람을 믿는다. 자신을 믿는다. 잘 살 수 있다.


"좋아. 다른 건 다 괜찮아.

이태리 사람에 능력 있고 너 사랑하고 너에 대해 헌신적인 사람인 것 다 괜찮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일 생각해봐. 저 남자 때문에 죽을 뻔하고,

네가 원하던 발레도 포기하고 이렇게 병원에만 갇혀 있어야 하잖아.

위험한 인물이야. 그게 마음에 안 든다."

"오빠….저 사람 나 없으면 죽어. 위험한 것 알기 때문에 옆에 있어주려는 거야.

내 목숨 보다 사랑하니까 옆에 있어주려는 거야.

내 인생에서 발레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 될 거라 생각해 보지 않았어.

그런데 내 전부였던 발레보다 더 사랑하게 되어 버렸어.

발레를 놓치더라도 저 남자는 놓치고 싶지 않아졌어. "

"희진아…."


혁진은 희진의 애원하는 눈동자를 보며 더 설득해 보려는 입을 닫았다.

사랑을 알아버린 동생의 눈은 이제 자신이 말릴 범위를 지나쳐 있었다.

한숨을 내쉰 혁진은 희진을 끌어 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그 동안 가족과 떨어져 마음 고생했을 동생의 마음을 오빠의 품으로 보듬어 안았다.

희진이 그제야 속으로 떨었던 마음을 드러내고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오빠… 항상 철부지라 오빠가 힘들어."

"알고 있으니 다행이다."

"알지? 내가 항상 오빠 편이었던 거…. 오빤 내편. 난 오빠 편…."

"알았다. 그래. 알았어."


어렸을 때부터 두 사람은 그랬다.

어렵고 힘들고 거짓말해야 할 때 꼭 서로를 감싸고 남매의 돈독한 우정은 커서도 남아 있었다.


"새엄마한테 말 잘 전해줘요."

"아버지는?"

"아버지는 이해해 주실 거야. 나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니까."



희진의 말대로 '쉬리톤 로마' 호텔 로얄 스위트 룸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차를

앞에 놓고 있는 아버지는 혁진을 보자마자 이렇게 물을 뿐이었다.


"애는 괜찮더냐? 의사는 만나 봤냐? 아기는 건강하다더냐?"

"아버지…."

"됐다. 네 얼굴 보니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 것 같으니….

오늘 저녁 비행기로 돌아가자. 채비하거 라."

"희진이 안 보고 가실 겁니까?"

"잘 있다는데 됐다. "


혁진은 호텔 룸에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눈을 때지 못했다.

고이고이 기른 딸을 타향에 놔두고 가는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 답답하실까….

한참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혁진은 아버지가 들어간 방문에서 시선을 때지 않았다.



교황의 섬[12장]


정확히 예정보다 빠른 2개월 반 만에 희진은 지겨운 병원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희진의 성격에 병원에서 아기만을 위한 시간을 가진 것은 엄청난 인내력과 모성애를 키운 일이었다.

살바체 역시 2개월을 희진의 곁에서 병원생활과 밖의 일을 번갈아 해야 했지만,

피곤하다는 말 한번 하지 않고 잘 견뎠다.

'교황의 섬'으로 가는 두 사람의 얼굴은 헬리콥터를 비추는 햇살보다 더 밝았다.

근 8개월 만에 '교황의 섬'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희진의 얼굴에 기쁨이 넘쳤다.

이곳을 떠났을 땐 다시 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다시 보게 된 일이 꿈만 같았다.


"진. 도착하기 전에 할 말이 있어."

"뭐죠?"


희진의 어깨를 보듬어 안고 살바체가 헬기가 착륙하기 직전 희진에게 말했다.


"가면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놀라지 말라고."

"뭐예요? 그냥 놀라지 말라는 말만 하면 내가 놀라지 않아야 한다는 거예요?

뭔지 말해야 놀라지 않던지 말든지 하죠."


희진의 뚱한 말을 들으면서도 살바체는 웃기만 할 뿐 말을 하지 않았다.


"살바체 프란트!"

"그냥 놀라지마. 명령이야."

"하! 지금 해보자는 거죠? 그렇죠? "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을 외면하고 웃기만 하는 살바체의 얄미운 표정을 보며, 희진은 눈을 흘겼다.

벌써 헬기는 착륙할 장소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헬기장까지 마중을 나온 미얀이 손을 흔들며 그들을 마중 나와 있었다.


"준비는?"


살바체의 단 한마디에 미얀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웃기만 했다.

희진이 아무 말도 못하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있어…. 하면서도 뭔지를 모르겠는 게 문제였다.

어제 젠느 역시 자신에게 뭔가 할 말이 잔뜩 있는 표정으로 웃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았는가.

살바체의 옆구리를 꼬집어볼까. 토라진 척 해볼까….

희진은 살바체와 차에 오르면서 궁리에 들어갔다.


"좀만 참아. 대신 놀라지 말아야 해. 약속해."


희진의 속마음을 전부 다 안다는 표정으로 살바체가 운전을 하며 희진에게 재차 당부했다.

희진이 뽀로 뚱한 표정으로 살바체를 외면하고 지나가는 교황의 섬 풍경을 쳐다보는 척 했다.

가슴이 부풀어 터 질 것 같았다.

지나치는 잔디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펼쳐져 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곧 저택이 한 눈에 들여다보이는 곳에 도착할 때, 희진이 놀라 입을 벌리고 창문에 더 고개를 들이 밀었다.


"살바체 프란트! “


희진의 외침에 살바체가 하하하 웃었다.

벌써 '교황의 저택'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교황의 섬 주민들뿐만 아니라, '다빈치' 발레단 사람들과, 파리에서 함께 했던 동료들과, 체논, 젠느….

모든 사람들이 희진과 살바체를 기다리며 웃고 서 있었다.


"헉! 어, 새엄마?!"


희진은 거의 다 도착할 무렵 자신의 한국의 있는 식구들이 전부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희진을 돌아보며 살바체가 차를 세우기 전 희진에게 말했다.


"오늘…. 나와 결혼해. 진. 바로 이곳에서"

"살바체 프란트. 언제나 멋대로 군요."


살바체가 차를 세우고 희진의 눈물이 흐르는 눈을 바라보고 얼굴을 끌어당겨 자신의 얼굴과 가까이하고는 말했다.


"알고 있지? 거절은 안 된다는 것"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 놓고, 빠져 나갈 구멍이나 주고 말하시죠."

"후후후."


살바체는 희진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앞문이 열리며 환호하는 사람들 때문에 기회를 잃었다.

곧이어 가족에게 달려가는 희진의 뒷모습을 보며 살바체는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띄웠다.



"젠느. 정말 얄미워요. 알죠? 내 결혼식도 모르고 있었다니…. 친구에서 제명해 버릴 거예요."

"아, 미안해요. 진…. 살바체가 신신당부한 거 알죠. 거기다 나도 한몫 크게 거들었죠.

준비하는 동안 행복했어요. 정말 아름다워요. 진…. 드레스 잘 골랐죠?"


눈부시게 빛나는 흰색의 웨딩드레스.

희진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올려주고 있는 미얀 역시 젠느 옆에 서서 웃고 있었다.

세상에 자신보다 행복한 여자는 없을 것 같았다.


'살바체. 당신은 끝까지 절 당황스럽게 하는 군요.'


준비를 끝마친 신부를 데리고 젠느가 신부 들러리로 희진과 함께 식장으로 나갔다.

교황의 섬 넓은 잔디 한 부분에 흰색으로 꾸며진 눈부신 식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모든 게 완벽하게 갖추어진 눈꽃처럼 흰 장미와 흰 레이스로 햇빛을 받은 모든 게 빛이 나고 있었다.

물론 그 중에서 희진의 웨딩드레스가 가장 빛이 나고 아름다웠다.

신부가 걸어 나오는 모습을 숨죽여 보는 사람들의 작은 탄성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희진은 자신을 기다리며 단상 앞에 서 있는 은빛금발의 잘생긴 자신의 남편이 될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쳐다보고 웃고 서 있는 살바체의 모습은 언젠가 자신이 말했던 가브리엘 천사의 모습보다 더 아름다웠다.

눈에 확신에 찬 모습으로 자신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살바체와 눈을 맞추며,

희진은 천천히 단상을 걸어 나가려고 했다.


"잠깐. 진 뭐 잊은 것 없어요?"


젠느의 말에 희진이 멍청한 얼굴을 했다.

아…!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아빠를….


"날 내버려 두고 가려고 했느냐?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아빠. 죄송해요…."


희진이 웃으며 자신의 아버지의 팔에 손을 끼어 넣었다.

아주 천천히 단상으로 걸어가는 아버지의 발걸음을 따라 걸으며

희진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속삭이며 말하는 말을 들었다.


"난 잘 모르겠다만, 네 새엄마 말이 저 자식 인물이 반반해서 속 태울 거라고 하더라.

그러니, 구박이라도 하거든 언제든지 한국으로 도망오너라. 내 혼 줄을 내줄 것이다."

"아빠…. 고마워요."


희진이 젖어드는 얼굴로 아버지에게 속삭였다.

천천히 살바체에게 걸어가며 희진의 아버지는 희진의 손을 토닥토닥 거렸다.


"잘 부탁하네."

"고맙습니다."


희진을 넘겨받은 살바체가 희진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온 것보다, 잠깐 여기까지 걸어오는 당신 발이 더 느리게 느껴졌어.

누군가 중간에서 채 갈까봐 겁이 나더라고."

"살바체 프란트. 그럴 사람은 여기 당신 말고 아무도 없어요."


하하하 웃는 살바체의 얼굴이 햇빛아래 빛이 났다.

교황청에서 온 주교의 결혼 서약 식을 하기 위해, 두 사람은 눈부신 흰 카펫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람들의 숨죽인 숨소리는 곧 환호성과 함께 기쁨이 되어 쏟아졌다.


* * *


'꺄르르~'


희진의 웃음소리가 살바체의 웃음소리와 뒤섞이고 예전 희진의 방으로 들어간 살바체는

아름다운 흰 침대에 조심스럽게 안고 있던 희진을 내려놓고 말했다.


"이제 완전히 나의 지젤을 묶어 둔건가?"

"후후. 완전히는 두고 봐야 알겠죠? 아직 확신하지 말라고요. 살바체."


웃음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희진의 예쁜 여성스런 얼굴을 보며,

살바체가 끙 소리를 내며 희진의 입술을 촉촉이 음미했다.


"진…. 나 2개월이 훨씬 넘도록 쳐다만 봐야 했던 거 알지? "

"그랬나요?"

"진…."


놀리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짓궂은 희진의 표정을 보고 살바체가 희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참으려고 성급해 지지 않으려고 노력해 봤지만, 이젠 통제 불능.

자기 혼자 날 뛰고 있었다.


"죽을 것 같아."

"쿡쿡…."


희진이 살바체의 흰 연미복의 재킷을 끌어당기고 살바체의 귓가에 유혹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비밀이 있는데 말이죠…. 어쩌죠?"

"뭔데?"

"그게 말이죠…. 오늘 의사선생님이 당부하시길, 성교는 아기를 낳을 때까진 자제하라더군요."

"뭐, 뭐야?!"


벌떡 몸을 일으키고 자신의 신부를 내려다보는 살바체의 얼굴이 급속하게 굳었다.

희진이 분통을 참지 못하는 살바체의 얼굴을 보며 행복하게 웃으며 자신 역시 몸을 일으켰다.


"우린 첫날밤을 보내야해. 이건 말도 안 돼."

"어쩔 수 없어요. 당신 자식을 위한 거잖아요? 나도 억울하긴 하지만….

우리 아기를 위해서 라면 참을 수 있어요."

"난 못 참아."


당당하게 살바체가 말하며 희진에게 달려들었다.

희진이 하하하 웃으며 살바체의 품에서 달아났다.

침대 끝에서 희진을 덮치는데 성공한 살바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희진을 품에 꼭 안고 말했다.


"거짓말 이지?"

"아뇨. 진짜예요. 오늘 그래서 내가 뭘 했는지 알아요?"

"뭘 했지?"

"보여 줄까요?"

"…!"


희진이 의미심장한 유혹하는 눈빛으로 살바체를 쳐다보고 어깨를 밀어 자신이 살바체의 위로 올라가

연미복의 단추를 하나씩 끌며 말했다.


"젠느 말로는 계속 하다보면 는다고 하더군요.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죠.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희진이 쿡쿡 웃으며 살바체의 바지에 손을 대고 단추와 지퍼를 열고 살바체를 뜨거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제야 희진이 하려는 의도를 파악한 살바체가 경악한 시선을 했다.


"진!"

"살바체 프란트. 명령인데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안 있으면 꽉 물어버리는 수가 있다고요."

"…허억"


살아 꿈틀 거리는 살바체의 분신을 들어내며 희진이 한쪽 눈썹을 찡끗하며 올리고,

살바체의 흐음...하는 신음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내렸다.


"도, 도대체, 이,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진"

"병원에 없는 게 없더군요. 미얀도 나 때문에 많이 배웠을 걸요. 쿡쿡…."

"제, 제길"

"살바체 프란트. 마지막 경고예요. 입 다물어요."


* * *


-사르데냐 섬 (sardinia island)


"아아악!"


초긴장 상태의 무거운 기운과, 간절한 기운이 '교황의 섬' 을 잠식하고 있었다.

벌써 6시간째의 진통이 희진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살바체 역시 희진의 떨리는 작은 어깨를 자신에게 기대게 하고 희진의 손을 꼭 부여 잡아주고 있었다.

희진이 소리치고 악 소리를 지를 때마다 살바체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저절로 흘러 내렸다.


"진. 힘내…. 절대 나 혼자 두고 죽으면 안 돼. 나도 같이 죽어 버릴 테니까."

"으읔…. 죽긴 누가 죽는다고 그래요. 그 딴 소리 할 거면 나가요."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힘내란 말이야. 젠장."

"살바체 프란트! 욕하지 마요. 아기가, 아기가 듣는다고요!"


의사와 세 명의 간호사가 두 사람의 사투를 보며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속으로 웃고 있었다.

장장 6시간 두 사람은 티격태격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서로 손을 마주잡은 손은 떨어지지 않고 진통과 함께 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아악!"

"머리가 보입니다. 좀만 더!!"

"이 놈의 자식. 나오면 죽여 버리겠어. 젠장!"

"살바체 프란트! 아악!!"

"으에에엥!!"


드디어, '교황의 저택'에 29년 만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큰소리로 울려 퍼졌다.

살바체의 안도의 숨소리와 희진의 숨찬 숨소리가 방안에 행복한 웃음소리와 겹쳐졌다.


"수고 했어. 진…. 정말 잘 해냈어."

"살바체. 어영부영 넘기려고 하지 마요. 죽여 버린다니…!

어떻게 살려고 애쓰며 나오려고 하는 애에게 아버지란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알았어. 괜찮아?"

"괜찮지 않아요. 힘들어…."


자신의 어깨에 축져져 기대는 희진을 내려다보며 살바체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를 치우고 입을 맞췄다.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 상태인데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 그저 잘 치러냈다는 기쁨에 빠져 있었다.


"아들 이예요. 보세요."


간호사가 건네는 방금 씻긴 아기를 내려다보며 두 사람의 표정이 경이롭게 반짝였다.


"오~ 세상에. 방금 태어난 아기가 이렇게 예쁜 건 처음이에요."


간호사의 말에 희진이 살바체를 올려다보았다.

살바체는 꼼지락 거리는 아이의 조그맣게 눈을 뜨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미소 짓고 있었다.

희진이 힘들어 목이 잔뜩 쉰 목소리로 살바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말이 없어요? "

"그냥. 그냥 신기해."

"나도 그래요. 봐 봐요. 여기…. 머리카락은 검고 이목구비는 당신 닮은 것 같아요. 그렇죠?"

"그래."


아기에게서 눈을 때지 못하는 살바체를 보며 희진이 미소 지었다.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하는 살바체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고 있다는 걸

희진은 그에게 기대 알고 있었다.

차츰 차츰 살바체의 눈에 눈물이 어려오고 있었다.

희진이 간호사에게 아기를 건네받아 조심히 들고 말했다.


"죄송하지만, 치료는 조금 후에 해도 될까요?"


의사와 간호사가 밖으로 잠시 나간 후에 희진이 살바체의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축하해요…. 살바체 프란트. 아버지가 된 거"

"당신을… 만난 건 내 일생에 가장 큰 행운이야…. 사랑해. 진"


살바체는 뒤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희진을 끌어안으며 눈물을 터트렸다.













Epilogue



-밀라노 (Milano)


'몬체크루소'극장.

살바체는 가장 높은 의자에 앉아 무대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는

지젤의 아름다운 동작에 호흡을 정지하고 푹 빠져 있었다.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지젤의 매력적인 몸짓에 따라 들렸다가 사라졌다 박수소리로 이어졌다.


'내 눈은 정확해. 당신은 100년에 한번 날까 말까한 '지젤'이 분명해'


경퀘한 박자에 맞춰 고난도의 발레기술을 선보이는 희진의 모습은

어떤 발레리나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지젤을 선보이고 있었다.

마지막 2막의 끝으로 '지젤'이 끝이 났을 때 '몬체크루소' 극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Brava!"

"Wonderful. Brava!"


환하게 웃으며 걸어 나와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는 희진에게로 아름다운 장미가 무대로 던져져 넘쳐나고 있었다.


"잘 봐. 나만의 지젤이란다."

"… 어마"

"그래. 맞아. 너만의 새엄마고, 나만의 아내지. 후후"


살바체는 귀빈석에서 일어서 아들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발레리나 '지젤'을 보기위해 경호원의 경호를 받으며 걸어갔다.

문 앞에서 한 다발의 장미를 자신의 아들에게 건네주며 살바체가 아들의 검은머리를 쓸어주었다.

살바체의 아들 '살바체 프란트 jr'가 아버지의 얼굴을 깊은 청색의 눈동자로 올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곧이어 분장실 문을 연 살바체는 다른 사람들과 섞여 안고 행복해 하는 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둘러 살바체를 본 사람들이 희진을 놔두고 포옹하고 밖으로 나갔다.


"어마!"

"어서와~ 새엄마 아들~"

"난보이지도 않는 건가?"


살바체가 희진을 향해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와 볼에 키스하며 말했다.


"오늘 아름다웠어. 역시 나만의 지젤이 더 좋지만 말이야."

"난 항상 당신만의 지젤이잖아요? 그렇지만 오늘은 우리 아들만의 지젤이고 싶네요.

장미 꽃 가져온 사람은 우리 아들이니까요. 고맙다. 주니어."

"헤헤…."


그때, 분장실 문이 열리며 한 사람 굳어 서서 세 사람을 응시했다.


"어서 오세요. 알페르노. 기다리고 있었어요."


희진이 반갑게 살바체의 굳어 있는 표정을 외면하고 알페르노의 팔에 자신의 손을 끼어놓고 살바체에게 데려갔다.

굳어 서 있는 알페르노의 표정은 곤욕감과 함께 힘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주니어. 이리와. 할아버지시란다."

"진!"

"살바체 프란트. 이제 인정할 때도 된 거 아닌가요?

우리 주니어가 보고 있다고요. 주니어. 인사해야지."


희진에게 다가와 알페르노를 응시하는 조그만 2살의 꼬마 애를 바라보며

알페르노가 무릎을 구부려 시선을 맞추고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살바체 프란트 쮸니어여."

"훗훗…. 잘 컸구나…. 잘 컸어…. 잘 생겼구나. 이놈"


가칠한 손으로 자신의 볼을 만지는데도 주니어는 가만히 젖어드는 노인의 눈을 똘망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희진이 굳어 서 있는 살바체에게 다가가 말했다.


"제가 초대 했어요. 살바체. 오늘 화해하고 들어와요. 알았죠?

화해하지 않고 들어오면 날 만지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진…."

"부탁이에요. 살바체 프란트…. 사랑해요. 알죠?

나 발레단 식구들과 회식이 있으니까 그만 나가볼게요."


자신에게 빠르게 말하고 뒤돌아서는 지젤을 보며, 살바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전히 눈시울을 붉히며 자신의 아들에게 시선을 때지 못하는 알페르노를 쳐다보고 살바체가 말했다.


"식사나 같이 해. 시간이 난다면…."


쑥스러운 표정의 살바체를 쳐다보며, 알페르노가 몸을 일으키고 살바체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 잘 가는 곳이 있다. 무심한 놈. 거기로 가자."

"좋아."


앞장서는 알페르노는 고사리 같은 주니어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살바체가 그 모습에 젖어드는 자신의 눈을 감추고 뒤를 따랐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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