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소설은 일반인이 거북해 할수 내용이 담겨 있을수 있습니다. BDSM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되돌아가기를 누르기를 바랍니다.
나진은 소름이 돋은 몸을 타월로 감싸고 덜 닦인 물기를 뚝뚝 떨어뜨리며 목욕탕에서 나왔
다. 3월이면 봄의 문턱에 들어선 때인데 아직 날씨는 따뜻해지지 않았는지 추위로 몸이 떨
리고 있었다. 단발머리나 자그마한 체구를 보면 누구나 나진을 13살 짜리 소녀로 보지만 실
제 그녀의 나이는 22살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매끈한 곡선이 돋보이는 몸매뿐이다. 뺨
은 방금 뜨거운 물로 샤워했다는 것을 말해주듯 장미빛으로 변해 있었다.
전화벨은 나진이 몸의 물기를 닦고 있을 때 울려왔다. 바닥에 떨어진 물기를 의식하면서 발
끝을 들고 조심스럽게 거실로 뛰어나왔다. 전화는 그 순간도 못기다리겠다는 듯 울려댔다.
"알았다구. 그만 울려대라."
나진은 물기 때문에 수화기를 귀에 살짝 댔다.
"여보세요?"
"나진이니? 엄만데 서류를 깜빡 잊고 왔지 뭐니. 가운데 농 두 번째
서랍을 열면 누런 봉투가 있을거야. 그것 좀 빨리 가져다 줬으면 좋겠다."
"알았어요. 금방 갈께요."
"석준이는 유치원에 갔고?"
"네. 밥 먹기 싫다고 하길래 토스트를 구워줬어요. 새엄마. 석준이 옷 좀 사야 겠어요. 작년에
산 옷이 전부 작아져 버렸거든요."
"그래. 조금 있다 보자."
"네."
나진은 다시 목욕탕으로 뛰어 들어가 몸의 물기를 닦고 걸어 놓은 옷을 입었다. 자신의 몸
을 닦았던 타월을 들고는 바닥에 떨어진 물까지 말끔하게 닦고는 세탁기에 던져 놓았다.
나진의 친새어머니는 나진이 11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 원래 심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나진
을 낳는 것은 무리였으나 하늘의 선물인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해서 낳은 아이가 나
진이다. 그 후 더욱 건강이 악화되어 누워있다 시피 살아온 세월이 11년. 나진은 새엄마의 죽
음에 슬퍼하기보다는 새엄마의 오랜 고통의 끝에 오히려 마음을 놓았다. 어린아이가 느끼는
감정치고는 조숙한 편이었다. 나진은 난산에다 2개월 일찍 태어난 미숙아여서 태어나면서부
터 몸이 약했다. 특별히 아픈 곳은 없지만 체중은 대학교3학년 이후 조금도 늘지 않아 아버
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결국 대학학교 3학년 2학기 때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자주 쓰러지
자 자퇴까지 생각하게 되었지만 나진의 주장으로 무사히 졸업은 했다. 병원에서는 안정적인
생활과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결국 대학진학은 포기하고 집에서 요양을 하면서 집안 살
림을 돌보게 된 것이다.
지금의 새어머니는 나진이 13살 때 아버지의 재혼으로 들어온 새새엄마이다. 그녀는 나진이 어
렸을 때부터 다니던 소아과의 간호원이었다. 새엄마가 돌아가시고 2년 후 그녀가 새새엄마의 후
보로 소개되었을 때 별다른 반감이 없었던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워낙 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이 해서 새새엄마도 나진에 대해서는 잘 알고 귀여워 해 주었다. 4년 전 18살
의 여름날.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새새엄마는 아버지의 출판사를 물려받아 경영의
일선에 뛰어들었다. 때문에 이제6살인 남동생 석준이를 돌보는 일과 집안 살림은 전부 나진
이 떠맡게 되었으나 불평은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
지 못하게 해서 불만이었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즐거움이었다.
나진은 안방으로 들어가 새새엄마가 일러준 장소에서 봉투를 찾았다.
석준이는 유치원이 끝나면 바로 영어학원으로 직행이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느긋한 마
음이 들어 집에 돌아올 때 시장을 들릴 생각으로 작게 접혀진 시장가방을 들었다. 나진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시장을 보는 때였다. 평소에는 주말에 세 식구가 오붓하게 시장을 보
고는 시식코너에서 배를 채웠지만 가끔은 혼자서 시장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진은 누런색 면바지와 분홍스웨터를 입고 위에는 검은색의 코트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머리카락이 젖어 있어 바깥 공기에 닿자 싸늘함에 몸을 움추렸지만 빠른 발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했다. 젖은 머리는 자연의 품에서 말리는 것이 최고이다. 정류장은 집에서 5분정
도 떨어진 거리이고 회사까지는 세 정거장만 가면 된다. 지금의 집을 구한 이유는 새새엄마가
일을 시작하면서 될 수 있는 한 집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위해 가까운 거리를 찾다가 얻은
아파트이다. 28평의 집은 여자 둘과 꼬마 사내아이가 살기에 큰 것 같지만 석준이가 자라는
속도를 생각해 볼 때 이제 곧 집이 꽉 차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여자아이보다는 남자아이
가 부산스럽고 덩치도 크니 당연한 것이다.
나진은 서류 봉투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버스에서 내려 회색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심부름으로 오셨군요."
경비실에 있는 아저씨는 아버지가 사업을 확장하게 되면서 이 건물로 옮길 때 고용된 사람
이다. 나이는 60대 초반인데 아버지를 따라 이곳으로 놀러 오거나 심부름으로 오게 되면 딸
기맛 사탕을 하나씩 손에 쥐어주었다. 나진의 나이, 이제 22살인데도 아저씨는 작은 방에서
사탕을 가져와 손에 쥐어줬다.
나진은 기분 좋게 손을 흔들고는 얼굴 가득 밝은 마음이 드러나는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
터에 올랐다.
건물은 10층 짜리인데 8층을 사무실로 쓰고 있다. 나진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8층에서 내려
세 갈래로 나누어진 복도에서 정면의 길로 나가 왼쪽으로 돌아서 「사장실」이라고 쓰인 방
에 노크했다. 사무실이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사무실이고 왼쪽으로
가면 화장실이 나온다. 사장실을 밖에 따로 마련한 이유는 사무실 안에 같이 마련되어 있으
면 직원들이 불편해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나진은 노크를 하자마자 들어오라는 말도 듣지 않고 웃음을 지으며 문을 열었다.
"나진이가 왔구나."
머리를 틀어 올린 새새엄마가 어색한 태도로 나진을 맞이했다. 책상 앞 쇼파에는 손님이 앉아
있어 나진은 당황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손님이 계신지 몰랐어요."
붉어진 얼굴로 손님에게 사과를 하고 새새엄마에게 얼른 봉투를 내밀었다. 자신의 예의없는
행동 때문에 새엄마가 곤란해 질까봐 빨리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새새엄마는 봉투를 받아들면
서 나진을 붙잡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님에게 소개를 시켰다.
"기억하시죠? 나진입니다. 뭐하니? 인사해야지."
평소 새엄마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녀는 사업상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진을 소개한 적이 없
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에게서 나진을 떨어뜨려 놓고 싶어했다. 새새엄마는 자신이 만나
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형편없는 인간들이라서 나진에게 충격을 줄까봐 그러는 거라고 했
다.
쇼파에 앉아 있던 남자는 거만하게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군요."
나진은 그의 손끝을 잡는 둥 마는 둥 하고 얼른 손을 내렸다.
숱많은 머리를 뒤로 넘기고 넓은 이마에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내려와 있어 손으로 그것
을 뒤로 넘겨주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검은 눈동자는 새까만 눈썹과 어우러져 매서운 이미
지를 심기에 적절했고 미소를 짓고 있는 건지 비웃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입술은 붉었다.
비둘기색의 양복은 주름하나 없이 깔끔했고 붉은 넥타이는 그의 강한 인상을 돋보이게 했
다.
"정성그룹의 차재준 사장님을 기억하겠지?"
나진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귀까지 빨개져서 재준의 반질거리는 구두에 시선을 두었다.
사실은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새새엄마나 그의 말로 미루어 초면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데
어디에서 만났는지는 영 오리무중이다. 이처럼 강렬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진의 기억
에 남아있을 법했다. 게다가 나진은 많은 사람들과 접촉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만난
사람은 기억하고 있었다. 정성그룹은 잘 알고 있다. 워낙 유명한 회사라서 모르는 사람이 있
다면 갓난아기뿐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신문에서도 꽤나 떠들었던 정성 그룹의 새로운 사
장 이야기가 떠올랐다. 서른 두 살의 나이로 파격 승진을 해서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인
물이자 매스컴을 피하는 비밀스러운 인물. 외에도 천재 수완가, 아기 때부터 사업능력을 보
였다는 둥 별별 말이 따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유명한 사람은 만난 적이 있다니.
나진은 차마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 할 수 없어 잠자코 있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
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그 때는 경향이 없어서 감사하다는 말씀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나진아, 어서."
새새엄마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라고 눈짓을 했다.
무엇이 감사하다는 걸까.
나진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하려 했다.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인입니다. 저와는 상관없으니 이런 식의 인사는 부담스럽군
요."
재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새새엄마는 흠칫거렸지만 얼굴엔 미소가 만발했다.
나진은 그 미소가 간사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준의 말은 조금도 배려나 겸손이 아닌
말 그대로 자신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듣고 있는 나진으로서도 자존심
이 꿈틀거렸는데 새새엄마는 오죽할까 싶었다. 차재준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도 나이로 따지
면 새새엄마보다 아래이다. 그런데도 그의 대단한 명성 때문에 새새엄마는 꼼짝도 못하고 그의
기분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언젠가 새새엄마는 경영이라는 것을 하면서 출근할 때 내장을
다 빼놓고 간다는 끔찍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진은 그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새엄마. 저는 그만 가볼께요."
나진은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점심을 같이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나진은 그의 얼굴을 봤다.
당연히 받아들 일거라는 오만한 표정은 정중한 물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저는.."
"물론이죠. 나진아 가서 먹도록 해. 집에 들어가면 차려 먹기도 귀찮잖아."
새새엄마의 얼굴은 지나치게 환했다.
나진은 차마 그 얼굴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낯선 사람과 같이 무엇을 먹으면 중압감이나 부
담으로 인해 꼭 체하고 마는데,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새새엄마는 될 수 있는 한 그런 기회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번에는 그와 안면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안심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진은 괴로운 표정이 떠오르지 않게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재준은 당연하다는 듯이 앞서서 문을 열어 주었다.
같이 갈거라고 생각한 새새엄마는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새엄마는요?"
무의식적으로 큰 목소리가 나왔다. 새새엄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새엄마는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거짓말!
나진은 외치고 싶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가죠."
재준은 새새엄마를 무시하고 손목시계를 보며 재촉했다.
그렇게 바쁘다면 못하러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는 건지 나진은 불쾌한 기분으로 닫혀지는
문틈의 새새엄마를 응시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앞에 피자 헛이 있어요."
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천하의 잘난 남자가 점심으로 피자를 먹자고 하다니 예상외이다.
뭔가 풀코스로 나오는 음식을 생각하면서 거북해졌는데 어이없었다.
하지만 막상 주문한 피자가 나오자 나진은 풀코스의 요리가 더 좋지 않았을까 여겨졌다.
피자의 기름기 넘치는 냄새와 생김새는 벌써부터 나진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나진이
밖에서 먹을 수 있는 거라고는 밥과 찌개와 해물이 전부이다. 그 외의 것은 집에서 손수 만
들어 먹는 것이 아니면 탈이 나도 단단히 났다.
재준은 웃양복을 벗어 옆에 가지런히 두고 가장 큰 조각을 나진의 접시에 올려 주었다. 그
로서는 나진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난 피자를 제일 좋아해요. 하지만 혼자와서 먹은 적은 없습니다. 익숙하지 않다고나 할까
요? 다른 음식들은 안그런데 유독 피자만큼은 혼자서 먹기가 어색하거든요."
아마 피자가 먹고 싶었는데 마침 나진이 나타났나 보다. 그의 말투를 보자면 자신이 피자를
먹고 싶지 않았으면 너를 초대하지 않았을 거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는 피자 한 조각을 손에 들고 맛있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재준이 너무 맛있게 먹어서 나
진도 먹을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조각을 내어서 입에 넣었다. 당장 뱉어내고 싶지만 대충 씹어 삼켜 버렸다. 식도를 통
해 내려가는 기름덩어리를 느끼면서 나진은 얼른 콜라를 마셨다.
재준은 말없이 피자를 먹으면서 나진이 눈치채지 않게 그녀를 살폈다.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나진은 자신을 기억하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자신의 인상이 강해서 한
번 만난 사람들을 모두 자신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기억속에서 말끔해 지워져 본 적이
없는 재준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 때는 경황이 없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태연하게 생각하려 했지만 눈앞에 있는 나진은
재준과 같이 앉아서 먹는 것이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태도를 하고 있었다. 괘씸했다.
"그 때 이후로 조금도 자라지 않았나 보군요."
일부러 나진의 기억에 없는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골려 주고 싶었다.
역시나 재준의 기대대로 나진은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나진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 때가 어느 때를 말하는 건지 짐작도 할 수 없으니 적당히 할 말이 없었다. 차츰 침묵이
견딜 수 없는 마음의 짐으로 느껴지던 때에 대화의 화제가 생겼는데 잘 하면 이야기를 한다
는 명목으로 징그럽게 보이기까지 하는 피자를 먹지 않아도 된다.
"체중은 많이 불었는 걸요."
나진은 대화를 통해 그 때의 상황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가 이때 즈음이죠? "
나진은 우선 시기쪽으로 유도했다. 계절을 말하지 않은 것은 그의 대답에 따라 적당히 둘러
댈 수 있기 위해서 이다.
"좋은 날이었죠. 머리 스타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군요."
재준은 그 날의 나진이 떠오르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나진은 애매한 대답에 더욱 오리무중으로 떨어졌다.
좋은 날이라는 대답으로는 시기를 알수 없었다. 머리 스타일이 지금과 똑같았다고 하는데
나진은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단발머리였다.
재준은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며 정보를 알아내려는 나진의 모습에 통쾌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많이 변한 것 같나요?"
오이피클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나진이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기대가 되었다.
재준은 나올 수 있는 나진의 다음 행동을 예상했다.
a. 기억을 못 한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사과한다.
b. 넘겨짚어 적당히 대답한다.
c. 이도 저도 아닌 화제로 돌려버린다.
재준은 이 중 나진은 b를 선택할 거라 여겼다. 잠깐 동안의 태도로 미루어 가능성이 높다.
재준은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짜릿한 순간을 즐길 준비를 했다.
나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스스로는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나요?"
의자 등받이에 등을 대고 편안 자세로 있던 재준이 몸을 앞으로 했다.
그가 예상했던 대답과는 차이가 컸다. 적어도 '글쎄요. 많이 변한 것 같지는 않네요'나 '느
낌상으로는 변한 것 같아요'등 애매모호한 대답이 나오리라 여겼는데, 나진은 되물으면서
그녀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고 가고 있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만 빼면 똑같죠. 제 자신이 변해야 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으니
까요."
나진은 물끄러미 피자 팬으로 눈길이 쏠렸다. 아직 커다란 조각이 많이 남아 있다.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접시에 있는 피자를 억지로 쑤셔 넣었지만 더는 무리이다. 한입이라도 더 먹으
면 재준이 피자를 싫
어하게 만들 수 있는 사태를 벌일지도 모른다. 아마 재준 뿐만 아니라 이 순간 이 곳에 있
는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게 될 거다.
나진은 콜라로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렸다.
재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 조각을 나진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나진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
다.
"우리의 첫만남은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는데 오늘 다시 만나니 새로운 면을 알 것 같군
요."
차재준의 사전에 패배란 없다. 그는 다시 공을 나진에게 던졌다. 확실히 새로운 면이 있었
다. 나진은 도전적이다. 그것을 즐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고 싶어하는 얼굴의 도전을 받은 이상 물러날 수는 없다.
나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리하게 새로운 한 조각에 입을 댄 것이 문제였다. 나진은
앞 뒤 가릴 것 없이 화장실로 뛰어갔다. 상대방에게 무슨 말을 하고 와야 했지만 입을 벌리
면 그대로 먹은 것을 확인하게 될까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재준은 멍청한 얼굴로 화장실로 뛰어가는 나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재준은 상황판단을 위해 자신의 말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피자를 관찰하기도 했지만 그의
두뇌는 이해불능의 경보를 울려댔다. 예상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정나진이라는 여자는 화장실
이 무척 급했다는 사실이다.
많은 여자들과 어울려 봤지만 이처럼 무례하게 화장실로 뛰어가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는 침착해지려고 애를 쓰면서 담배를 꺼냈다.
"손님. 죄송하지만 여기서는 금연입니다."
상냥한 점원의 미소를 쏘아보면서 재준은 도로 담배를 집어넣었다.
나진이 자리로 돌아온 것은 1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한 마디 해 주리라 벼루었던 재준은
하얗게 변한 나진의 얼굴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속이 안 좋았어요."
나진은 힘없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재준은 아무래도 나진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속이 안 좋았다면 배가 아프다는 말인가?
"약을 사가지고 올까요?"
나진이 거절할 거라 여기면서도 재준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래 주시겠어요? 체했을 때 먹는 약이면 되요. 그리고 위를 보호하는 약도요. 다시 속이
울렁거려요."
나진은 다시 화장실로 뛰어갔다.
주변의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준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재준은 황당한 마음으로 지갑을 꺼냈다.
"손님, 도와드릴까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한 점원이 모든 시켜달라는 얼굴로 물었다.
"약을 사야하는데 근처에 약국이 있을까요?"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 건물을 알려줬다.
재준은 달려나가 쉽게 약국을 발견하고 약을 사들고 다시 피자 헛으로 돌아왔다. 나진은 벌
써 나와 몸을 구부리고 자리에 앉아 점원의 걱정스러운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나진과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되어서 재준의 품으로 뛰어들어 티를 틀어쥐며 쓰러지던 나진의 연
약한 모습이 스치자 긴장이 되었다.
나진은 살며시 얼굴을 들었다.
재준은 약봉투에서 파란색 알약 두 알과 흰색 반쪽짜리 약을 나진의 입에 넣어주고 콜라가
아니라 물을 마시게 했다.
그리고 작은 포장의 약을 뜯어 빨아먹게 했다.
나진은 재준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아마 그는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한 것을 후회하
면서 화가 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재준이 옆에 앉아 나진의 고개를 자신 쪽
으로 기대게 했을 때 나진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꺼져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으면 미리 말하지 그랬어요."
재준의 목소리에 노여움이 실려 있었다. 그는 나진의 몸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자신에게 화
가 났다.
그러나 나진은 소동을 부린 자신 탓이라고 여겼다.
"아픈데는 없었어요. 그런데 피...자 때문에.."
"피자?"
"피자를 먹으면 언제나 속이 안좋아지거든요."
나진은 언제까지나 이대로 기대고 있을 순 없다고 생각하면서 억지로 천근 만근이 되는 몸
을 일으키려 했는데 재준의 억센 손이 그러지 못하게 했다.
"바보로군. 입은 뒀다 뭐에 쓸 생각인가요? 진작에 말을 했으면 다른 것을 먹었을 거 아닙
니까?"
재준은 나진쪽을 향하려고 고개를 돌리다가 뺨에 그녀의 촉촉한 머리카락이 닿았다. 달콤한
향기도 맡을 수 있었다.
나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이제 괜찮아 졌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
그는 나진을 옆구리에 끼다시피 부축했다.
밖의 바람을 쐬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주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픔은 사라진 것 같았다.
재준은 굳이 집까지 바래다주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나진을 억지로 데려다 주었다. 처음에
는 그녀가 인사치레로 하는 소리라고 여겼으나 집에 도착할 때까지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것을 알고는 진심으로 거절한 것을 깨달았다. 재준으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여지
껏 여자들 쪽에서 애를 태워하며 바래다주는 것만 아니라 집안까지 끌어들이고 싶어했었다.
나진에게 자신은 그렇게도 매력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자존심보다는 마음을 찌르고 있었
다.
나중에 새새엄마가 지친 얼굴로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나진은 조심스럽게 낮의 일을 이야기했
다.
새새엄마의 얼굴이 놀라움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다 그 사람 잘못이예요. 뭘 먹겠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걸로 정
해버린 걸요. 그리고 모처럼의 산책을 망쳐버렸어요. 전 바람과 햇빛을 받고 싶었다구요. 푹
신한 의자에만 앉으면 멀미가 나는 것도 내 탓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의 차는 좋긴
하더군요."
나진은 건방진 그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가 약을 사다주고 옆에 기대게 했을
때는 다정하고 자상해서 아버지같은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새새엄마에게 자신의 느낌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성 그룹의 사장님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요?"
새새엄마는 옷을 갈아입다가 멍하니 나진을 내려다 봤다.
"설마 기억을 못하는 건 아니겠지?"
나진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말도 안돼. 아버지 친구분의 아들이야. 그리고 네가 16살 때 널 응급실로 데리고 가준 생명
의 은인이기도 하지. 또 차재준은....."
뒷말은 흐지부지한 중얼거림으로 들려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진은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16살 가을. 나진은 아버지를 만나러 사무실로 가던 중이었
다. 사실 그 전에 걸린 감기가 다 낳지 않아 몸이 좋지 않았지만 당시 새새엄마는 석준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고 있
던 때라 집안은 어수선했다. 어린 마음에서인지 아버지의 재혼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동생이 태어나니 마음 한구석에 친새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그런 마음은 동생
과 새새엄마를 거부하게 만들어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게 했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기가 무
섭게 아버지에게로 갔던 건데 어둑어둑 한 날씨가 결국 비를 뿌리면서 일이 생긴 것이다.
다른 생각에 잠겨 한 정거장을 더 가서 내린 나진은 걸어 갈 수 있다는 무모한 생각으로 비
를 맞으며 갔던 것이다. 덜덜 떨리는 추위가 심장을 얼릴 것 같으면서 멀리에서 새엄마의 모
습이 웃고 있었다. 그리운 새엄마! 언제나 누워만 있던 새엄마는 나진이가 끓여
주는 죽을 눈물로 먹었었다. 새엄마의 모습을 따라 잡으려고 애를 쓰면서 누군가의 품으로 쓰
러졌다. 눈을 떠보니 병원 응급식이었는데, 아버지와 아버지의 죽마고우인 아저씨, 그리고
또 한 명의 남자.
그래! 그 남자가 바로 차재준이었군.
흐릿하게 보이는 영상이여서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던 거다. 아픈 환자가 눈을 이렇게
저렇게 떠가며 사람을 물끄러미 볼 필요는 없으니 보긴 봤으되 기억을 못하는 것은 당연하
다.
"내 말을 듣고 있니?"
새새엄마가 불편한 기색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 사람의 기분을 거스리는 짓은 하지 말아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너를 도와주기도 했으
니까 정중하게 굴고 하라는 대로하면 돼."
"먹기 싫은 걸 먹으면 어떻게 되는 지 새엄마도 아시면서."
나진은 그가 자신을 도와준 것은 사실이지만 특별하게 대접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너도 이제는 성인이야.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사에 대해 몰라서는 안된다. 사
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해서는 안돼. 그렇게 이기주의자로 지내면 누가 네 옆에 남아
있겠니? 싫어하는 것도 먹
다보면 익숙해 지는 법이야. 네 아버지는 널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건강이 좋아지지 않는
거라고."
나진은 충격으로 몸이 굳어졌다. 한번도 새새엄마가 이런 식으로 나무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새새엄마의 말은 모두 맞는 소리이다. 그래서 충격이 더욱 컸다.
새새엄마는 나진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고는 금방 후회의 빛을 띠었다.
"미안하다. 요즘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 하여튼 차재준군에 대해서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줘야 한다. 알았지?"
다짐을 받는 듯한 태도여서 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재준은 바로 다음 날 전화를 걸어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또 점심을 같이 먹자는 제안이
었다. 전날 새새엄마의 당부도 있고 해서 나진은 승낙했다. 이번에는 스스로가 메뉴를 결정하
지 않고 나진에게 물었다.
"해장국을 잘 먹어요."
재준은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젊은 여성이 해장국을 좋아한다는 것이 그리 믿어지지 않았다. 물론 모든 여성이 싫어할 리
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아는 여성들은 가게앞을 지나기만 해도 고개를 돌리며 싫어하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한
여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저게 피로 만든다는 걸 알면서도 먹을 수 있을까요?"
솔직히 재준 자신도 해장국은 좋아하지 않지만 나진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 막상 한 숟갈
뜨고 보니 나쁘지는 않았다.
"사과하고 싶어요."
"피자이야기라면 이미 잊었습니다. 그때는 제 잘못이 컸으니까요. 여
성분의 기호를 알았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재준은 전혀 미안한 기색없이 말했다.
나진은 그가 얄미웠지만 말을 계속 이었다.
"그 이야기가 아니예요. 실은 아저씨에 대해 기억하지 못했어요."
재준은 나진의 이야기를 들으며 얼굴빛이 변했다.
나진은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고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새엄마에게 이야기를 듣고 알았어요. 저의 생명의 은인이세요.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세히
볼 수가 없었어요. 이해해 주시겠죠?"
나진은 빨개진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가 자신의 사과를 받아들이기를 기다렸다.
"아저씨...라고?"
나진은 그의 작은 목소리에 말을 못알아 들었다.
"뭐라고 하셨나요?'
"내가 아저씨로 보일 만큼 나이가 들어 보이나요? 하긴 나진양에 비하면 나이가 많긴하죠.
올해 22살이죠?"
재준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가 흘끗 나진을 봤다. 나진이 눈썹을 모으고 담배를 바라보
고 있었다.
"담배를 피워도 될까요? 보아하니 여기선 실내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것 같은데."
정중하게 물었으니 상대방도 한 걸음 물러나 주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나진을 봤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재준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 담배를 집어넣었다.
이 여자를 만난 건 지금이 세 번째 이지만 만날 때 마다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여자? 재준은 순간 찔금했다. 자그마한 체구에 6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하나도 없어
학생처럼 보이는 소녀를 여자라고 생각하다니 스스로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
방은 자신을 아저씨라
고 부르는 10년이나 차이가 나는 풋내기인 것이다.
"그럼 뭐라고 호칭해야 하나요? 친구도 아닌데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삼촌이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나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상당히 귀여운 모습이었다.
재준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떠올랐다.
"오빠는 어떨까?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오빠라고 부르잖아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건넨 말에 나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아저씨라고 부를래요. 오빠라는 말은 간지러워서 못하겠거든요. 기분만 나쁘시지 않다
면 그렇게 부를께요, 네?"
재준은 맥이 빠졌다.
"그냥 재준씨라고 부르는 게 낫겠네요."
무심히 한 말에 나진이 경직된 것 같았다.
나진은 자신의 반응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재준씨'라는 단어에 가슴이 뛰면서 피가 빠르게 순환하는 것 같았다. 언젠가 영화에서 연인
들이 '아무개씨'라는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자극과 같은 것
이었다.
정말로 그를 그렇게 불러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는 나진은 재준의 묵인하에 아저씨라는 호
칭을 허락받아 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몇 번의 만남을 더 가지면서 속으로는 '재준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는 오만하고 건방졌지만 한없이 다정하고 나진을 소중하게 대해줬다.
어느 날 나진은 초조하게 집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새새엄마의 귀가를 기다렸다. 열쇠로 현관
문을 열리는 소리가 나고 새새엄마가 들어오자 나진은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어갔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리고 얼굴에
는 열이 있어 뺨이 붉어져 있었다. 새새엄마는 무슨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낮에 사무실로
차재준이 찾아왔던 것이다.
그녀는 흥분되어 있는 나진을 방으로 끌고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렸다.
"새엄마. 어떻게 하면 좋아요. 아저씨가, 아저씨가..나한테 반지를 줬어요. 결,결혼하고 싶대요."
새새엄마는 기쁨으로 입이 벌어졌다.
"알고 있어. 오늘 오후에 찾아와서 너와의 결혼 문제를 상의했단다."
나진은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대답은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결
혼 문제로 상의를 하다니, 이것은 무슨 소리인가!
"될 수 있는 한 빨리 하고 싶다는구나. 그래도 이것저것 준비할 것들이 있으니까 3개월은
걸리겠지? 집은 이미 봐 뒀대. 식장도 어디로 할지 정했으니 날짜만 잡으면 된다고.... 아니,
왜 그런 얼굴이니? 좋지 않아? 차재준이라면 신랑감 후보 1위야. 능력도 있고 재산도 있겠
다 넌 팔자가 핀 거지."
나진은 주저앉아 무릎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를 좋아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프로포즈를 받았을 때에는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새새엄마가 말한 것들 때문이었다. 좋
은 집의 규수들이 줄을 지어 목을 매는 사람에게 자기처럼 하찮은 존재가 어울릴 리 없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재준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도 같이 먹지 못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과
사랑은 별개의 감정이 아니던가. 그에 대한 감정이 단순한 좋아함인지 사랑인지 혼란스러웠
다. 결혼을 망설이는 또 한가지 이유는 바로 이 순간 때문이었다. 자신의 대답같은 것은 필
요도 없다는 듯이 새엄마와 만나 계획을 세워 둔 것이다. 반발심이 생겼다.
"난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요."
새새엄마가 불안한 얼굴로 나진의 손을 거세게 잡아 당겼다.
"무슨 말이니? 설....마 거절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요. 거절할 거예요. 모든 것을 제멋대로 결정하는 사람과 어떻게 결혼 할 수 있겠어요?
난 로버트인가요? 그가 정해놓은 대로 행동하고 따라야 하다니, 난 노예가 아니라고요!"
나진의 울부짖음에 새새엄마가 팔을 흔들어 댔다. 목소리가 작아졌다. 마치 거실에서 텔레비젼
에 열중인 석준이가 들어서는 안되는 듯이 몸을 굽혔다.
"넌 결혼 해야만 한다. 언제까지 네 뒤치닥거리를 해 줄 순 없어. 나중에 더 좋은 남자가 나
타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나를 보렴. 너랑 석준이를 먹여 살리려고 애쓰고 있는게 안보
이니?"
나진은 새새엄마에게 섭섭했다. 자기딴에는 몫을 한다고 집안 살림을 돌봐 왔는데 그것들은
다 소용없는 것이었던 것이다.
"제가 직장을 얻을께요. 아르바이트라도 할 테니까.."
새새엄마는 절규의 가까운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의 두 눈은 불안과 공포로 싸여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나진은 자신이 상처를 준 것이라는 생각에 괴로워 두 팔로 새새엄마를 안았다.
"난 너무 무섭단다. 나진아. 아무래도 너한테 말해야 겠구나."
새새엄마는 고통으로 얼룩진 눈으로 나진을 바라봤다.
나진의 마음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세운 출판사가 무척이나 어렵단다. 사실 꽤 오래된 거야. 그동안 빛도 많이 지고
애를 썼지만 정말 힘들어."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한번도 그런 낌새를 낸 적이 없어 눈치조차 채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부터 어려웠었어. 얼마전에 재준군이 온 것도 그 때문이었지. 재준군
의 아버지는 너의 아버지와 상당히 친해서 꼭 도와주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이번에 정성
그룹에서 나오는 매거진을 우리한테 맡기기로 한거다. 그걸 상의하는데 네가 왔던거야. 우리
는 재준군의 아버지한테 많은 빛이 있지. 6년 전 네가 심하게 아팠던 날, 재준군의 아버지인
차현진씨는 출판사의 부도문제로 도움을 주러 왔었어. 그런데 네가 쓰러져서 재준군이 응급
실에서 연락을 해 왔지. 차현진씨는 너를 보고 불쌍하게 생각해서 부도를 막아주기로 했어.
그런데 네 아버지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지. 꼭 돈을 갚겠다면서 무엇이든지 담보
로 하라고 했어. 차현진씨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강경한 태도 때문에 너를 담
보로 하겠다고 했단다. 당시에는 농담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다음날......"
새새엄마는 나진의 상태를 살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계약서를 작성해 왔단다. 기한을 10년으로 했지. 만약 돈을 갚지 못할 경우 너를
딸로서 포기하고 넘겨주겠다고..."
새새엄마가 참지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지만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손으로 틀어막았다.
나진은 이것이 충격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었다.
"나를 담보로....아버지가......다른 것도 있었잖아요. 아파트도 있고.."
가까스로 입을 열어 나온 소리였다.
"이미 은행에 담보로 잡혀 있단다. 우린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알거지야. 지금까지 버텨온
것만도 다행이지.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 정성 그룹에서 발간하는 매거진만 확실하다면 빛도
다 갚을 수 있고 걱정 없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결혼만 하면.."
"내가 결혼하지 않으면 일을 주지 않겠대요?"
나진은 기가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친아버지가 자신을 판 것만으로도 세상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알수 있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 네가 거절한다고 해도 4년 뒤면 넌 그의 것이 되는거야."
"아저씨는 그렇지 않을 거예요. 아저씨랑 한 계약이니 차재준이라는 사람과는 무관하다구
요."
나진은 숨이 차올랐다.
"차현진씨는 지금 외국에 있단다. 유산상속도 이미 끝났고 모든 권리를 자식들에게 남겨주
고 떠난 거야. 자식은 남매가 있는데 너에 대한 권리도 재준군한테 넘어갔다."
"그걸 어떻게 알죠?"
"재준군이 서류를 가져왔어. 결혼을 하면 서류는 파기하겠다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자신에게는 결혼을 거절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그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결혼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권리를 주장하면서 적당히 상대하다가 버리지 않고 결혼해 줘서.
"나진아. 부탁이다. 제발 그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마렴.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하는 거야. 그
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영화도 그가 좋아하는 것만 보고, 식성도 고치면 되는거야. 생각보
다 간단해. 그렇게만 해주면 너도 편하고 여러 사람들도 편하게 된다. 석준이를 생각해 보
렴. 이제 겨우6살인데 험한 꼴을 당하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니?"
나진이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 새새엄마는 석준이를 들먹이며 눈물로 애원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한순간의 혼란은 사라지고 멍청하니 어둠속에서 천장을 응시했다. 쓰러지
면서 기억상실증에 걸리기를 바랬는데 오히려 들은 이야기들은 뚜렷해 졌다.
누군가가 어둠속에서 나진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이었다.
"정신이 들어요? 전화를 했더니 어머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재준은 별다른 표정없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진은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었다. 자신을 담보물로 잡고 있는 주인님의 얼굴. 주인님은 어
째서 자신에게 청혼을 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살짝 열린 방문으로 새새엄마의 그림자
가 보였다. 그녀는 나진이 쓸데없는 행동을 할까봐 걱정하고 있다.
정신을 잃기 전 새새엄마의 말들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나진은 돌아눕는 것을 빌미로 그에게서 손을 뺐다. 그래도 재준은 개의치 않아 하는 듯했다.
이제 나진은 그에 대한 감정에 의문이 생겼다. 그를 좋아하는 것은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자
신을 보호해 준다는
느낌으로 친오빠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결혼이란 단순히 함께 사는 것을 넘어 육체적인 관
계도 필요한 것이다. 나진은 두 눈을 질금 감아버렸다.
"결혼 준비는 다 나한테 맡겨요. 나진양은 평소랑 똑같은 생활을 하면 되는거예요. 알았죠?"
그 말에 감사하기는커녕 울컥 화가 솟았다. 재준은 언제나 명령을 하는 것이다. 모든 자기
멋대로 정하고 사람들에게 명령만 하는 생활을 하다보니 익숙해 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진
은 재준의 부하 직원이 아니다.
나진의 눈에서 분함의 눈물이 흘렀다. 부하 직원은 아니지만 그 보다 한참이나 밑인 인간도
아닌 담보물인 것이다. 그런 주제에 무슨 불평을 한단 말인가.
재준은 나진이 울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만 돌아가겠다며 나가 버렸다.
새새엄마는 밖에까지 나가 그를 배웅하고는 나진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절대로 불행하지는 않을 거야. 너를 아껴주잖니."
'담보물로서 겠지요.'
나진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진은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단지 약간의 심리적 부담감이 작용한 탓이었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몸이 약한
대신 천성적으로 타고난 낙천성은 육체의 약함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는 것이었다.
나진은 자신의 반항심이나 불쾌함은 접어두고 어린 석준이와 아버지가 애써 지켜온 출판사
만 생각하기로 했다. 아버지의 자존심이 자식까지 내놓게 만들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만
한다. 이미 세상에 없는 아버지를 탓해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다.
새새엄마는 나진이 사실을 알고 역효과로 비뚤게 나가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지만 나진은 평소
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재준과 만나면 자연스럽게 계약의 내용이 머릿속을 맴돌면서 자
신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나진은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말할 수 없었다. 행여 재준의 뜻에 거슬려 일이 잘
못된다면 집은 풍지박살이 나고 말 것이다.
나진은 오직 재준이 원하는 것만 했다. 영화를 보기로 했을 때 원래 나진이 좋아하는 것은
아무생각없이 웃을 수 있는 코메디물이지만 재준이 좋아하는 컬트영화를 봤다. 무슨 내용인
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심각하게 보려니 머리가 아파왔지만 나올때는 만족한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장소, 게다가 음료수도 그가 좋아하는 것만 마셨다.
한 번은 재준이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피자가 먹고 싶은 걸."
나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럼 먹으러 가요. 이 근처에 있을까요?"
"나진양은 못 먹잖아요?"
"이젠 먹을 수 있어요. 아저씨 덕분에 좋아하게 되었는걸요."
재준은 아무말없이 나진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근처에 있는 스타케티 전문점으로 들어가
그것으로 먹었다. 그는 그때부터 나진에게 쌀쌀맞게 대했다. 특별히 달라진 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엇인가 느껴지는 것이 그랬다. 나진은 안절부절못했다.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아야 그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고칠텐데 재준은 말이 없었다.
그 날부터 재준과는 만나지 못했다.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물었지만 그뿐 다른 말을 없이 끊
기가 일수였다.
새새엄마도 재준의 태도가 변한 것을 눈치챘는지 나진을 채근했지만 그녀로서도 아는 바가 없
었다.
나진은 전과 다름없이 집안 일을 돌보며 틈틈이 시간이 날때마다 햇살이 들어오는 따뜻한
곳을 찾아 녹차를 가득 채운 컵을 들고는 나른한 고양이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즐겼다. 재준
과 만날때는 거의 이런 시간을 즐기지 못했는데 최근에는 모처럼 가질 수 있는 자신만의 즐
거움에 심취할 수 있었다. 1달만에 자신을 찾은 기분이었다. 언제나 재준에게 끌려다니다 보
니 정나진이라는 존재는 사라져버린 느낌이었다. 앞으로 두 달 후면 결혼인데 점점 더 자신
이 없어지고 있었다. 어디론가 멀리 도망쳐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가족의 생사가 자신의 손
에 달려있는데 무책임하게 굴 수 없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나진은 얼굴을 찡그리며 달려갔다. 재준의 전화가 아니기를 빌 뿐이었다.
"나진이구나. 새엄마가 일이 생겨서 너한테 부탁 좀 할까해. 화장대 위에 놓은 봉투를 재준군
에게 갖다줘야 하거든. 새엄마는 급한 일 때문에 나가야 하니까 네가 좀 갖다 주렴. 마침 점심
때도 다가오고 하니까 같이 데이트도 하면 되겠네."
나진은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느슨해진 재준과의 관계를 다시 끌어올리기 위한 새새엄마의 계략이다.
그걸을 알면서도 나진은 거절 할 수 없었다.
"옷 좀 잘 입고 가. 명색이 정성 그룹 사장의 약혼녀인데 엉망이면 재준군도 곤란하지. 작년
에 산 회색 원피스가 좋겠다. 재준군이 회색을 좋아하거든. 이번 주에는 쇼핑하면서 옷 좀
사자. 넌 여성스러운 옷이 없잖니. 알았지?"
나진은 군말없이 새새엄마가 원하는대로 했다.
회색 원피스는 에이라인으로 허리부분이 잘록하게 들어가 있고 목부분에는 귀여운 둥근 칼
라로 되어 있는 여성스러운 옷이다. 새새엄마가 나진의 생일 선물로 사 온것인데 밝은 색을
좋아하는 나진은 아직 한 번도 입지 않고 넣어두었다. 말로는 애인이 생기면 입겠다고 했는
데 결국 재준을 위해 보관한 셈이 되어 버렸다.
나진은 자신만의 시간이 방해를 받아 우울했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도착한 건물은 생각보다 크고 세련된 고층 빌딩이었다. 나진은 가
슴을 두근거리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재준과 만나면서도 일터로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갑
자기 회사에서는 그의
모습이 어떨련지 궁금해졌다.
안내 데스트에 인형처럼 앉아있는 예쁜 여성 두 명의 시선이 나진에게로 향해졌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 차재준 사장님을 뵙고 싶은데요."
망설이며 대답하는 나진을 보고 두 사람은 의아스러운 시선이 오가갔으나 이런 경우가 많았
는지 침착하게 대처했다.
"실례지만 어디십니까?"
난감한 질문이었다. 재준은 자신에게 결혼할 여성이 있다는 것을 알렸을까? 알리지 않았다
면 나진은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
"타루 출판사에서 온 정나진이라고 합니다. 드려야 할 서류가 있는데..."
나진은 자신이 들고 있는 서류봉투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잠시만 저쪽에 앉아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나진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여자가 가리키는 의자쪽으로 향했다. 넓은 공간 한쪽에 손님
을 위한 장소로 자판기와 푹신한 의자들이 놓여있는 휴게실이었다.
재준은 비서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이마를 두 손가락으로 짚고 돌렸다.
두퉁이 생겼다. 분명 나진의 새새엄마가 시킨 일이라는 건 뻔했다.
"김비서가 가서 가져오도록 하게. 그리고 점심 전 일테니 근처에서 먹여서 돌려보내고. 난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말하면 될거요."
재준은 김비서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들고있는 만년필을 빙그르 돌렸다.
나진과 만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 충실했다. 강하지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맞추는 듯 하면서도 예상을 뛰어넘는 행동이나 말을
통해 숨겨진 자신을 내보일 줄 아는 여자였다. 그 동안의 여성들은 돈에 눈이 멀어 뭐든 재
준이 하는 것만을 따르고 철저히 자기자신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싫증나는 존재였는데 나진
은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정하고 나니 나진도 별수 없는 여자였던지 다른 여
자들과 똑같아졌다.
무조건 '네, 네'가 입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영화를 볼 때도 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지
만 눈을 보면 아무런 생각도 없는 티가 났다. 이제는 탈이나는 피자도 먹을 수 있다는 말까
지 했다. 그것은 사랑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다. 만약 나진이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사랑
으로 그런 말을 했다면 달랐겠지만 나진의 말투나 행동은 노예가 주인님을 겁내는 태도였
다. 재준은 자신의 인생을 거는 일에 실패를 향해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떠한 일이든
철저한 자신이 자신의 결혼 문제에 있어서 감쪽같이 속은 것 같은 기분은 최악이었다. 지금
도 늦지 않았다. 원래 조촐한 결혼식을 원했기 때문에 결혼에 관한 것을 아는 사람은 당사
자들과 나진의 새새엄마뿐이다. 앞으로 두 달 남았지만 빨리 정리하는 게 좋다는 결론이 나왔
다. 재준은 오늘 저녁 직접 찾아가서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진은 건물 안을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
고 있었다.
"실례지만 사장님을 찾아오신 분 맞습니까?"
나진은 깜짝 놀라 그네처럼 흔들던 다리를 풀고 벌떡 일어섰다.
낮선 남자가 매서운 눈으로 나진을 응시했다.
"사장님께서는 중요한 약속이 있으셔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서류를 주시겠습니까?"
나진은 대나무처럼 꼿꼿한 자세를 한 남자에게 기가 질려 아무말도 못하고 봉투를 내밀었
다.
"가시죠."
"네. 안녕히 계세요."
나진은 얼떨결에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문을 향했다.
김비서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제가 손을 내미는 걸 못 보셨습니까? 안내해 드리겠다는 겁니다. 사장님께서는 점심 식사
를 대접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나진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김비서는 나진을 내려다보느라 코끝에 걸린 안경을 한 손가락으로 치켜올렸다.
아무리 봐도 사장을 쫓아다니는 아가씨라고 하기에는 어리고 순진해 보였다.
"전 사장님 명령에 따릅니다. 차를 대기시켜 주세요."
김비서는 말끔한 제복 차림의 남자에게 말하고는 차가 올동안 다시 나진을 관찰했다.
"사장님 명령이라고 해도 먹고 싶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먹이는 건 너무한거 아닐까요?"
과잉충성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실은 저도 점심 전입니다."
나진은 한번 김비서를 올려다보고는 말없이 그를 따라 차를 탔다.
김비서는 곁눈질로 나진을 훔쳐보고 있었다. 나진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척 할 수밖
에 없었다. 불안한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가 사장과 결혼할 상대자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러
는 거라고 여기면서 손을 불안하게 마주잡았다 풀었다 했다.
"특별히 드시고 싶은 메뉴가 있습니까?"
"뭐, 별로....그쪽이 드시고 싶은 걸로 하겠습니다."
김비서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갑자기 나진이 소리를 지르듯이 외쳤다.
"피자는 빼고요. 느끼한 건 절대 사양이예요."
김비서의 입가에 얼핏 웃음같은 것이 어렸다.
"사장님은 피자를 좋아하십니다."
"알고 있습니다."
작은 한숨같은 것이 나왔다.
"입맛이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는 것도 복일 거예요."
김비서는 된장찌개라고 크게 써 붙인 허름한 가게 앞에 다닥붙은 차들 사이로 재주를 부리
듯 주차시켰다.
"제게 결정권이 있다고 하셔서요. 괜찮습니까?"
"물론이죠!"
나진의 얼굴에서 함박웃음이 나왔다.
김비서는 자신도 모르게 나진의 손을 잡았다.
"건물은 이래도 맛으로 유명한 집입니다."
"된장찌개는 이런 데가 진짜예요."
나진은 만족한 눈을 이리저러 돌리면 가게를 살폈다.
안은 만원이었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아저씨와 합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름이?"
"정나진입니다. 재준 아저씨의 비서분이신가요?"
"김비서입니다."
나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나진을 유심히 보던 김비서가 다시 말했다.
"김선호입니다."
손님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된장찌개는 빨리 나왔다. 선호와 나진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
었다. 숟가락으로 찌개를 듬뿍 떠서 밥공기에 담아 밥과 비벼먹는 맛에 나진은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나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호는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덕분에 그는 점심시간을 30분이나
지난 다음에 회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꽤 늦었군."
"죄송합니다. 집까지 바래다 드리느라고.."
선호는 끝말을 흐렸다. 언제나 사장이 시키는 선까지만 했건만 오늘은 시간이 늦는것도 상
관않고 바래다 주었다. 같은 음식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나진은 기세
좋게 떠들어댔다.
"집..까지? 그녀가 부탁하던가?"
재준의 눈이 빛났다.
"아,아닙니다. 나진씨는.."
"나진씨?"
재준은 당황해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자신의 비서의 얼굴을 뚫어지게 봤다.
"그만 나가보도록."
재준의 손가락이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나진은 포만감으로 배를 두드렸다.
김비서라는 사람은 첫인상과 달리 유쾌한 사람이었다. 재준과 첫인상이 비슷하다고 여겼는
데 집에서 생각해보니 전혀 다르다. 선호는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있었다. 반면에 재준은... 나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재준에 대해서는 어떠한 평가도
내려서는 안되는 절대의 존재이다.
전화벨이 울렸다. 틀림없이 새새엄마일 것이다. 모처럼 재준과 만나도록 일을 꾸몄으니 결과가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나진은 받을까 하다가 그만뒀다. 지금의 즐거움을 방해받는 것은 너
무 가혹하다. 어차피
저녁때면 쏟아지는 질문을 견뎌내야 하니 잠깐이라도 자신만의 세계를 방해받고 싶지 않다
는 생각이 들었다.
새새엄마는 8시가 되었는데도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는 늦어도 7시 반이면 어김없이 귀가하는
새새엄마이다.
나진은 응석부리는 석준이를 데리고 집앞을 어슬렁거렸다.
"옆집누나, 새엄마는 언제 와?"
"글세. 조금 만 더 기다리다가 들어가자."
나진은 동생의 작은 손을 꼭 쥐고는 별을 보기도 하고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을 보기도 하면
서 서성거렸다.
뒤에서 차가 오는지 밝은 불이 두 사람을 비췄다.
나진은 한 쪽 옆으로 비켜섰지만 차가 멈추고 창문이 내려왔다.
"잠깐 타세요."
익숙한 음성에 움찔거리며 나진은 석준이 쪽을 향했다.
"동생도 같이요."
석준은 별다른 망설임도 없이 뒷자석을 열자 냉큼 올라타고는 좋아라했다. 나진은 아무 말
없이 재준 옆에 앉았다.
"오후는 바빴습니다."
사과의 의미는 조금도 없다.
"네. 김비서님이 잘 해 주셨어요."
재준은 뒷자석에서 장난치고 있는 석준을 흘끔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온 거는 일을 빨리 매듭짓고 싶어서입니다."
나진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재준을 봤다. 재준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탐색하는 듯이 나진
을 보고 있었다.
"우리의 결혼말입니다. 무효로 하고 싶습니다. 아직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도 아니니 별탈은
없을겁니다. 충격이 되겠지만.."
재준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고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분명 자신이 예상한대로 나진은 충
격을 받은 것 같다. 그런데 눈빛은 고통이나 괴로움은 조금도 찾을 수 없는 반짝이는 것이
었다.
재준은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서로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나진은 손가락을 들고는 그의 말을 막았다.
"설마 제가 싫어져서.."
"아닙니다. 단지 나진양에 대한 감정에 확신이 없습니다."
이것이 변명이던 아니던 상관없다. 문제는 다른 것이다.
"그,그럼 매거진은요? 새엄마가 맡기로 한 일도.."
나진의 호흡이 빨라졌다.
"그건 공적인 일이 아니던가요?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합니다."
"다행이예요. 계약도 없었던 일로 되는 거겠군요. 4년 뒤에도 결혼은 하지 않아도 되는거
죠?"
나진의 입에 미소가 번졌다. 너무 성급하고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기쁨에 정신이 없어 나
온 말이었다.
재준은 얼굴을 찡그렸다.
"계약이라뇨?"
"아저씨랑 아버지가 한 계약말이예요."
"저랑 나진양의 아버지랑?"
"아니요. 차현진 아저씨요. 6년전에 저를 두고 계약하신거요. 모르시나요?'
나진은 재준의 얼굴을 보고는 불안해졌다. 그는 전혀 모르고 있던 것 같았다.
나진은 말을 하는게 좋을까 망설였지만 적당히 넘어가기에는 순진했다.
"아버지의 출판사가 부도가 나게 생겨서 아저씨께서, 그러니까 현진아저씨가 돈을 빌려주셔
서 부도를 막을 수 있었대요. 아저씨는 돈을 돌려받을 생각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때 이미 아파트며 이것저것 담보로 대출을 받은 상태라 다른 것으로
담보를 잡고 10년안에 돈을 갚겠다고 하셨는데, 아버지가 워낙 강경하게 주장하셔서 어쩔
수 없이 현진아저씨는 저...."
나진은 재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여전히 얼굴을 찡그린 채였다.
"저를 담보로 하겠다고 하셨어요. 원래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아버지는 곧바로 계약서
를 써서 만약 10년안에 돈을 갚지 못하면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딸이 아니고 현진아저씨에
게 양도하겠다고 서명하셨대요."
"그게 계약이라는 말이군요. 6년 전의 일이니 앞으로 기한은 4년 남았는데 결혼이라니요?
계약에 그런 말도 나와 있던가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아닐거예요. 그 계약서는 아저씨가 갖고 있는걸요."
"아버지가?"
재준은 낮게 중얼거렸다.
"아니요. 재준 아저씨요."
갑자기 재준이 핸들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뒤에서 장난하던 석준이가 놀라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아저씨라는 호칭 좀 바꾸는 게 어때? 차라리 재준이라고 이름을 부르는게 낫겠군!"
나진은 어깨를 떨었다. 재준이 화를 내며 비꼬고 있는 것이다. 처음이었다. 언제나 신사같던
태도와 말씨로 대하더니 지금은 그런 것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려 완전히 타인처럼 느껴졌
다.
"다시 말하면 당신 새어머니가 매거진을 만들 수 있도록 하고, 계약에 따라 돈을 갚지 못하면
당신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정성그룹 사모님 자리를 택하자 이거
였군. 그래서 결혼을 허락한거였어. 마음도 없는데, 내게 잘 보이려고 무조건 내 말에 따르
면서 애를 쓴것도. 맞지?"
나진은 무섭게 변한 재준 때문에 혼란스러워 스스로 그의 말을 되새기며 맞는지 틀리는 지
를 생각한 한참 후에 대답했다.
"난 결혼하겠다고 말한 적 없어요. 반지를 받으면서 생각해 보겠다고 했을 뿐이예요. 그리고
당신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던 이유라면..."
나진은 어떻게 호칭을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재...재준....씨 말이 맞을 거예요."
뒤에서는 흐느낌이 울음으로 바뀌었다.
재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그것은 차가운 냉소였다.
"맞아. 당신 입으로 '예스"라는 답은 듣지 못했어. 나와 당신 새새어머니가 결정한 거지."
재준은 생각에 잠기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 시끄러운 꼬마를 데리고 당장 내려. 계약서를 살펴봐야 겠어."
나진은 허둥지둥 내려 석준을 뒷자석에서 끌어냈다. 재준은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차를 몰
고는 사라져갔다.
나진은 징징거리는 석준을 달래서 잠을 재우고 초조하게 새새엄마를 기다렸다. 재준이 출판사
의 일과는 상관없이 결혼을 파기한 것은 잘 된 일이지만 계약이야기를 했을때의 반응은 전
혀 뜻밖이었다. 나진은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10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아무런 연락도 없다니 새새엄마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진은 채 두 번도 울리지 않았는데 전화를 받았다.
"새어머니께 말씀드렸나?"
재준의 목소리들 듣자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아니요. 아직 들어오시지 않았어요."
"그럴거야. 오늘 출판협회 모임이 있거든. 잘됐어. 아직 새어머니에게는 말하지 말고 내일 아
침 일찍 이리로 오도록 해. 계약건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거,거기가 어딘데요?"
"기사를 보낼게."
"몇 시에?"
"6시."
전화는 끊겼다.
아침 6시라니. 나진은 그가 많이 화가 났다는 것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재준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책상위에 다리를 올려놓았다.
나진은 천하에 둘도 없는 여우였다. 천진한 모습으로 꾀어내더니 다시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돌아가고, 지금은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나진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전혀 없는
게임이었다. 결혼한 것도 아니고 사랑한 것도 아니니 상처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재준은 그녀가 충격을 받을까봐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고민을 거듭했다. 덕분에 회의는
엉망이 되었는데 나진의 양손에는 출판사를 살릴 수 있는 매거진 출판의 기회와 아버지들끼
리의 계약에 관해서도 쥐어져 있는 것이다. 일부러 자신을 질리게 만들어서 골치 아픈 결혼
문제을 해결하면서 계약건까지 걸고넘어진 것이다.
재준은 한 번도 게임에서 진 적이 없었다. 그것이 놀이이든 사업이든 패배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좀 전 까지는 정나진이라는 여자에게 유리한 게임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재준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계약서를 회심의 미소를 띠고는 쳐다봤다.
불리한 순간에 역전하는 것이야말로 게임의 묘미이다.
정나진이라는 여자를 깨지기 쉬운 물건처럼 다뤘지만 게임의 상대자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
리지 않고 상대하고 싶었다.
나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벨을 눌렀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서둘러 준비를 하고는 새새엄마에게는 산책을 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시선을 받으며 나왔다. 새새엄마는 12시가 다 되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보
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지치지만 않았어도 나진을 붙잡았을
텐데 비몽사몽간인지 곱게 허락해 줬다.
나진은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내내 주머니속에 넣어 둔 반지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처음
받은 날 열어보고 한번도 보지 않았던 결혼 반지이다. 빛을 내뿜는 다이아몬드를 보면서 숨
을 죽였을 때는 결코 결혼을 거절할 마음은 없었다. 그가 특별히 싫은 것도 아니었고 재준
과 같이 살다보면 사랑이라는 것도 생길 것 같았다. 그런데 새새엄마의 말이 모든 것을 바꾸
고 말았다. 가느다란 실같은 가능성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재준이 새새엄마의 일에
끼어 있고 계약서가 존재하는 한 절대로 그의 가까이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오늘 만나게 되면 반지를 돌려주고 계약서도 돌려 받을 수 있으면 그러리라 마음먹었다. 어
제의 태도로 보아서는 벌써 계약서를 찢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나진이 다신 벨을 누르려 하는데 문이 열렸다. 재준은 방금 샤워를 마쳤는지 가운을 입은
채로 물기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넘기면서 자리를 권했다. 꽤 넓은 아파트였다. 아
파트 입구에서부터 경비초소에 보고를 하고 들어올 정도로 고급이었다. 넓은 거실에 가죽
쇼파가 무겁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가전기기도 대형만이 존재했다. 모든 것이 나진 자
신보다도 크게 여겨져 저절로 위압감이 들었다. 나
진은 쇼파에 앉다가 뒤로 넘어갔다. 너무 푹신해 아무생각 없이 앉다가 튕긴 것이다.
"차는 뭘로?"
"유자차가 있을까요?"
재준은 물을 가스불에 올리고는 자신도 쇼파에 앉아 테이블에 계약서를 던졌다.
"이게 당신이 말한 계약서야."
나진은 그가 선선히 내어주는데 감격했다.
계약서를 받았어도 원금은 꼭 갚아야만 하는 돈이다.
나진도 재준에게 돌려줘야 할 물건이 있었다.
"이거....돌려 드릴께요."
나진은 반지 케이스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
그 말 뿐이었다. 다른 말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이없는 기분이었다.
나진은 계약서를 펼치고 내용을 살폈다.
내용은 새새엄마의 말대로였다.
-10년 뒤 원금을 갚지 못하면 정나진을 차현진에게 양도해 정나진에 대한 모든 권리는 차
현진이 행하도록 하며 정나진은 무조건 이를 따르도록 한다.-
친아버지가 이럴 수 있을까.
아무리 자신의 자존심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나진은 친딸인 것이다. 어느 새 나진의 눈에 눈
물이 고였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에 대해서는 말 할 필요가 없다. 나진은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계약서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려고 했다.
재준이 나진의 팔을 잡았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자신도 모르게 계약서를 놓아 버리고 말
았다.
"그건 당신 게 아니야! 차현진은 나의 아버지이고 나는 아들로서 그 권리를 넘겨받았지."
재준은 떨어진 계약서를 집으면서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나진의 다리를 훑어봤다.
나진은 섬뜩함을 느끼며 청바지를 입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세히 말하자면, 아버지는 이 계약에 관해 잊고 있었던 모양이야. 독일로 가시면서 유산을
정리하셨을 때 다른 서류에 끼어있던 걸 모르시고 넘겨 주신거지. 아버지는 떠나시기 전에
당신과 당신네 가족을
걱정하시면서 돌봐달라고 하셨어. 그래서 매거진 일을 맡기게 된거야. 이로서 내가 할 수 있
는 일은 다 한거야."
무척이나 거만한 말이다.
나진은 항의나 반발의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결혼을 생각한 것은 어쩌면 아버지의 당부가 마음속에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라.
오랜만에 만났는데 나진의 몸상태가 좋지 않았지. 그래서 동정심이 생긴거야."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매거진 일만으로도 충분히 도와준거예요. 애써 결혼을 생각하
지 않으셔도 되는 거였습니다."
재준의 얼굴은 냉소적이었다.
"그럼 잘됐군. 스스로가 나의 도움에 만족한다고 했으니 말이야. 그럼 이제 이 계약에 대해
말해 볼까? 이자는 받지 않는다고 했는데, 좋아. 원금은 언제 받을 수 있지? 4년까지 기다려
야 하는거야?"
나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매거진 일을 한다고 해도 4년 안에 원금을 갚는 것은 어렵다. 이미 적자가 너무 커서 4년이
라면 출판사가 안정을 찾을 수 있지만 원금을 갚으려면 4년을 넘겨야 한다.
냉철한 사업가로 유명한 재준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을리는 없었다.
"4년으로는 어려워요. 2년으로 연장해 줄 순 없나요?"
두 사람 사이는 어제까지만 해도 결혼 할 사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이 밝자마자 사무적
으로 변해 버렸다.
재준이 옆에 놓인 서랍장을 열고 장미꽃이 그려진 나무상자를 꺼내 담배와 라이타를 집어들
었다.
그는 나진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담배를 피웠다. 나진은 자신쪽으로 몰려드는 연기 때
문에 기침을 했다.
"2년이라고? 담보물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나진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옆으로 떨어져 앉았지만 여전히 담배 연기가 있었다.
"담배를 꺼주시지 않겠어요? 연기 때문에 기침하고 눈물이 나와요."
재준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을 알고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괴로워하는 나진의 얼굴을 즐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재준은 자신이
너무 나진에게 고분하게 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잔인한 생각이 머리를 치들었다.
"난 내 담보물의 가치를 알고 싶어. 그래야 2년을 더 연장할 지를 결정하지."
나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준을 쳐다봤다.
"전 집안 살림을 잘해요. 오래 전부터 해 왔으니까요. 특별한 재주는 없지만 살림을 잘 하는
것도 재주가 아닐까요?"
"고작 살림을 하는 걸로 자신의 가치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4년 동안 기다리는 것도 아
깝군."
나진은 그가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고 떨고 있는 손을 부여잡았다.
"한 번도 내 가치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없어요. 어떤 잣대로 가치를 측정하고 싶은거죠?"
재준은 몹시 흥미로운 표정을 했다.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다.
"나의 잣대로 가치를 측정해도 된다는 말이야?"
나진은 그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측정할 지 모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어서."
재준의 만족한 목소리가 명령을 내렸다.
나진은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가 하라는 대로했다.
"옷을 벗어봐."
나진은 위에 걸치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 쇼파위에 놓고는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왜 안벗고 있지?"
"지금 벗었잖아요."
나진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모습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것은 옷이 아니야?"
재준의 입가에 심술궂은 미소가 있었다.
그제서야 나진은 의미를 깨닫고 충격으로 몸을 떨었다.
분명 재준은 농담을 한 것이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난 사업가야. 손해 보는 일은 할 수 없어. 담보란 보통 원금만큼의 값어치가 있거나 그 이
상일 경우가 많지. 그래서 사업가가 돈거래를 할 때에는 담보의 값어치를 측정하는 것이 중
요해. 그렇지 않으면 손해를 보거든. 난 태어나면서부터 사업가야. 그러니 가치 측정도 정확
하게 할 수 있지."
재준은 뒷말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고개를 숙이고 그의 말이 진심이 아니기를 바라며 서 있는 나진에게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의 고동을 높이고 있었다.
"싫으면 관둬. 어차피 계약서에는 10년으로 했으니 4년을 기다리지. 4년 후면 담보물도 내
마음대로 해도 되니, 그때 나진을 어떻게 이용하면 원금의 손해를 만해 할 수 있을까?"
"4년 뒤에 일을 하겠어요. 아저씨, 아니, 재준씨 집에서 파출부를 해도 되고 아이들을 돌볼
수도 있어요."
"내 아이 말인가?"
나진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군. 원금대신 아이들로 받아도 좋겠어. 아이를 셋 낳으면 원금에 대한 손해는
없을거야."
재준이 나진의 배를 응시하고 있음을 알자 나진은 자신의 배에 손을 올려놓았다.
"결혼을 무효로 하자는 사람은 재준씨였어요."
"누가 결혼한대? 결혼을 하지 않아도 아이는 낳을 수 있는거야."
재준의 웃는 얼굴에 나진은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다. 나진은 무너지듯이 쇼파에 앉았다.
"갑자기 왜 그래요? 왜 무섭게 구는 거예요?"
나진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절망적으로 말했지만 재준은 재촉할 뿐이었다.
"4년 안에 갚을 수 있다면 이대로 가도 좋아. 만약 2년을 더 연장하고 싶다면 내가 말한 대
로 해."
나진은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재준이 농담을 하거나 빈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2년의 기간이 더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결혼도 하지 않고 세
아이를 낳아야만 할 것이다.
나진은 그가 막 입을 벌리려고 하는데 벌떡 일어나 옷을 벗었다. 한순간의 수치로 평생의
수치를 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마음으로 마음이 변하기 전에 일을 끝내기 위해
평소의 두 배 속도로 옷을 벗어 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속옷뿐이었다.
"이것도요?"
너무나 작은 목소리여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재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은 나진의 행
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나진은 그의 행동에 분노를 느꼈다. 어제까지의 재준은 가면을 쓰고 있던 사내였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냈던 것이다. 무엇이 본색을 드러내도록 만들었는지 나진은 알 수 없었다. 그녀
는 뒤돌아 서면 더욱 비참할 것 같아 일부러 당당히 마지막 속옷을 벗었다. 손으로 올려 가
리고 싶었지만 주먹을 꼭 쥐고 견뎠다. 그래도 재준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는 나지 않아 고
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제 됐나요?"
나진은 빨리 옷을 입고 싶었지만 재준의 대답은 없었다.
재준은 자신의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단지 나진의 기를 꺾어 이 게임의 주도권이 자신
에게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순간적으로 나온 요구에 자신도 당황했지만 게임은 즐기면서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는 것을 보면서 결혼을 거절
당한 보복을 했다. 말로는 자신이 먼저 거절했지만 따지고 보면 나진은 마음속으로 청혼을
받을 때부터 거절하고 있던 것이다. 그것을 감추고 자신을 비웃었을 나진에 대해 화가 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충분히 혼내줬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심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마음
으로 2년의 연장 기간을 더 주겠다고 말하려 하는데 나진이 일어나 옷을 벗기 시작했다. 너
무 동작이 빨라 말릴 수도 없었다. 나진은 순진하게도 재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버린
것이다. 금새 후딱 벗고 속옷 차림으로 있는 나진은 성숙한 여인이었다. 얼굴이나 분위기에
서 어린아이로 느껴졌던 나진의 몸은 예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갸날픈 몸에 풍만한 곡선
은 뜻밖이었다. 나진이 속옷을 이야기했을 때 그녀의 몸매에 홀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
덕였다.
가리지도 않는 걸로 보면 경험이 있는 여자 같지만 빨개진 얼굴과 몸과 혐오로 가득한 눈은
순결을 담고 있었다.
정적을 깬 것은 물이 다 끓었다고 울려대는 삑삑거리는 소리였다.
재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입어도 좋아."
재준이 차를 보라색 꽃으로 만발한 쟁반에 담아왔을 땐 이미 옷을 다 입고 난 후였다. 벗는
속도만큼 입는 속도도 빨랐다.
"2년 연장할 수 있는 건가요?"
나진은 재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나진은 자신의 몸매에 자신이 있었나 보군. 하지만 내가 보기엔 영 아니였어. 가슴도 빈약
하고 엉덩이도 여자로서는 빵점이더군."
나진은 질린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재준을 쳐다봤다.
목욕을 할 때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면 비쩍 마른 몸에 비해 가슴이 풍만해서 크게 보
이기도 했다.
그런데 재준은 빈약하다고 말했다. 그에 의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측정을 당한 것일까.
"10년이라는 세월이 아깝군. 2년의 기간은 더 연장해 줄 수 없어. 4년이 남은 것만해도 다행
으로 알라고."
"좋아요. 4년 뒤에 보죠."
나진은 단호하게 못을 박듯 말하고는 금방이라도 나갈 듯한 자세가 되었다.
재준은 나진을 당하기에 자신이 역부족임을 느꼈다. 예상을 하기 힘든 상대였다. 당연히 애
원하며 매달리리라 여겼건만 나진은 일찍 포기해 버렸다.
나진은 현관문의 손잡이를 돌리다 말고 재준을 향해 돌아서더니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재준씨가 새새엄마나 계약서와 무관한 사람이었다면 난 결혼 신청
을 받아들였을 거예요.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사랑 할 것 같았거든요."
나진은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완벽한 재준의 패배였다. 재준은 쓰라린 웃음을 지었다. 승리가 확실한 데 지고 말았다. 더
군다나 승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자신이 말하던 승리란 무엇인가?
나진이 무릎꿇고 애원하는 건지 제발 결혼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건지, 어쩌면 애당초 승
리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진의 마지막 말이 울렸다.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사랑 할 것 같았거든요.'
재준의 심장이 불처럼 뜨거워졌다.
재준은 쇼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시는 정나진의 이름도 듣기 싫었다. 그녀는 두려움이었고 태양처럼 뜨거웠다. 다가가는 것
만으로도 자신이 다 타버릴 것 같았다. 심장이 뛰는 것이 고통스럽게 여겨졌다. 첫 패배의
맛은 자신의 심장을
삼키는 것과 같았다.
나진은 손수 뜬 스웨터를 입어 보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솔직히 완성이라고 말 할 수 있
는 상태는 아니었다. 처음 뜨기 시작했을 때는 엉덩이를 덮을 만큼 긴 것으로 하려고 했는
데 겨우 허리부분까지 내려왔다.
나진은 달콤한 유자차를 머그잔에 가득 담고 창가로 향했다. 하나 둘 씩 지기 시작하는 낙
엽이 바람에 휘날렸다.
스웨터를 짜기 시작한 것은 2년 전 그날부터였다. 자신의 인생에 차재준이라는 대단한 존재
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왔다가 나가버린 그 날, 나진은 가게에서 병아리같이 노란 털실을
사서 엉성한 솜씨로 짜
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스웨터를 짤 생각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딜 수 없을 것
같아 풀렀다
떴다 하면서 지금의 스웨터가 된 것이다.
결혼이 무효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새새엄마는 절망으로 몸부림쳤지만 공과 사의 구분은
확실하다는 그의 말을 들은 새엄마는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나진은 다른 부분은 생략하고 그
가 결혼을 거절한 부분만 설명햇다. 새새엄마는 모든 것을 나진 탓으로 돌리며 그의 앞에 무
릎꿇고 빌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반신반의하던 매거진건에 계약을 하게 되자 새새엄마의 얼
굴에 활기가 붙었다. 그녀는 결혼파기가 몹시 못마땅해서 틈만 나면 나진에게 잔소리를 퍼
부었지만 1년이 지나고 정성그룹의 사장과 모델과의 염분이 생기면서 미련도 사라졌는지 이
제는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다. 가끔 일 때문에 만난다고 하지만 2년 동안 두 번
만난 게 고작이었다.
언젠가 출판협회에 차재준 사장이 초대를 받아 왔는데 옆에는 근사한 미인이 매달려 있었다
고 했다. 새새엄마는 '매달렸다'는 표현을 강조했다.
그 때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람이 많이 변했다고 했다. 남자다움이 물씬 풍기고
말수도 적어지고 어딘지 우울한 빛도 있었다고 했다. 게다가 예전보다 더 냉랭해져서 인사
를 하는 것조차 떨려왔다고 말하면서 새새엄마는 어깨를 움추렸다. 나진은 아무 말 없이 이야
기를 들을 뿐이었다.
이제 2년째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한 달이면 12월이고 곧 나진도 25살이 되는 것이다.
석준이는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더 바빠졌다.
1학년이 뭐가 바쁠까 싶었지만 녀석은 집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고 영어 학원이 끝나면
바로 친구네집으로 달려갔다. 나진으로서는 자신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나진은 어깨에 흘러내려온 머리를 손으로 뒤로 넘겼다. 등에서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은 보기
에도 부드러워 보였다.
"이런. 털실이 모자라잖아. 바보같이. 미리 챙겨놓았어야지."
나진은 중얼거리며 코트를 걸쳤다.
스웨터를 원래의 계획대로 만들고 싶었다. 2년 전 차재준에게 몸매에 대한 비평을 들은 후
헐렁한 옷으로 몸매를 가리게 되었다. 그가 내뱉은 한 마디가 나진의 자신감을 빼앗아가 버
린 것이다.
지갑을 들고 밖으로 나오니 생각보다 추웠다. 언제든지 눈을 뿌릴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하
늘은 먹구름이 있었다. 이제 11월초이니 벌써 서울에 눈이 올리 없건만 이런 추위라면 가능
할 것 같다.
나진은 옷깃을 여미고 몸을 숙이며 버스 정류장으로 나왔다.
두 정거장만 가면 색이 고운 가지각색의 털실을 살 수 있는 큰 가게가 있었다. 이번에 스웨
터를 완성하면 다음으로 장갑을 뜰 생각이다. 이번에는 속도를 내서 내년에는 자신이 만든
장갑을 끼고 스웨터를
입고 눈을 만지는 것이 목표이다.
푸른색의 자동차가 나진 앞에 섰다.
나진은 고개를 들고 아는 사람인가 운전석 쪽을 봤다.
"역시 나진씨로군요."
운전석 문이 열리고 환하게 웃으며 안경을 낀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김비서님!"
"어서 타십시오.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나진은 거부감없이 냉큼 올라탔다. 버스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였다.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누군가의 기억속에 있다는 사실이 기분을 좋게했다.
"당연하죠. 우린 입맛이 맞는 동지 아닙니까."
선호는 처음 만남때와는 달리 명랑하고 쾌활한 사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뻔한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질문이 나왔다.
"1년 반동안 독일에 있었습니다. 그쪽 지사에 지원했었거든요. 지금은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
지요."
"나진씨는요? 아직 사장님과 만나고 있습니까?"
나진은 웃었다.
"잘 아시겠지만 아니요. 차재준 사장님이 좋아할 만한 타입이 아니잖아요."
나진은 그가 웃을거라 생각했지만 선호는 말이 없었다.
"배가 고프군요. 점심을 먹으러 나왔는데....나진씨는 드셨습니까?"
"아니요."
"그럼 된장찌개 어때요?"
"좋죠!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는데 다시 가 볼 기회가 없었어요."
"그럼, 갑시다. 우선 회사에 들리고요. 메모를 남겨야 하거든요. 괜찮죠?"
나진은 망설여졌다. 행여 재준과 부딪힐까봐 걱정이 되었다.
"사장님은 출장 중이십니다."
선호는 나진의 마음을 읽었는지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해 주었다. 나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호가 사무실에 다녀올 동안 나진은 2년 전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있었다.
달라진 것은 긴 머리와 성숙해 진 자태였다. 결혼 할 뻔한 일 때문에 성숙해 진 것보다는
재준과의 이별에 있어 느껴야 했던 수치감과 비참함이 도움이 되었다. 그 날의 일은 자주
꿈속에도 재현되었다. 다른 점은 자신이 그대로 뛰쳐나오지 않고 재준의 목에 팔을 감고 요
염한 자세로 있는 것이었다. 그런 꿈을 꾸게 되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기가 흐르는 것 같
은 전율이 느껴졌다.
"오래 기다리셨죠? 미안합니다. 자, 가죠."
선호는 가볍게 나진의 팔에 손을 댔다. 첫 날 그의 태도가 잘가라는 의미인 줄 알고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돌아가려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었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처럼 서로 같은 것을 떠올린 것이다.
"김비서의 애인인가?"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것 같기도 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한
음성이었다.
선호와 나진은 동시에 돌아봤다.
"아,아닙니다. 사장님."
나진은 차갑게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를 떨구었다.
"오랜만이군. 정나진양."
재준이 손을 내밀었다. 새새엄마의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처럼 같은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나진은 말없이 그의 손을 잡고 약하게 흔들었다. 처음처럼 손끝을 살짝 대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재준의 검은 양복 단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점심 식사를 하러 가는 길입니다."
선호는 걸릴 것이 없다는 태도로 사장을 마주했다.
"다녀오게."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차재준의 뒤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다.
나진은 물끄러미 보다가 선호의 팔을 끌었다.
"얼른 가요. 갑자기 식욕이 돋네요."
"다음주에 돌아오실 예정이었는데, 죄송합니다."
선호는 미안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나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선호는 재준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싶었
다. 그의 작은 배려를 볼때 나진이 재준과 마주치는 것을 꺼려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나진은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우고 싶었다. 시작이라는 것도 없는 관계였다. 일방적으로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계약서 때문에 끌려다니다 재준이 끝냄으로 인해 끊어진 사이이다.
아직 기한은 2년이 남아있었다. 가끔 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날 위협과도 같은 말이 떠오르
기는 했다. 당시에는 정말로 4년 뒤에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믿어버렸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것은 단지 재준의 분노에서 나온 비아냥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정도로 그를 분노케 한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재준은 변했고 그 이후
로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계약에 대해서는 신경쓰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나진은 숟가
락을 들었다.
된장찌개는 그 맛 그대로였다. 나진은 배가 고팠다는 듯이 푹푹 떠서 먹었다.
"나진씨. 궁금한게 있습니다."
선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사장님하고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너무...개인적인 질문이라서 곤란하시겠지만 듣고 싶습니
다."
나진의 바쁜 숟가락질이 멈칫거렸으나 다시 빨라졌다.
"왜 과거형으로 물으세요? 우리는 아직 관계가 있어요. 사업가와 담보물의 관계죠."
선호는 웃었다. 나진의 엉뚱한 말은 이해하기 힘들다.
"사장님은 변했습니다. 바로 그 전환점에 독일로 갔는데 돌아와 보니 놀라움 그 자체더군요.
1년 반이라는 세월 동안 이렇게 많이 변할 줄은 몰랐습니다."
나진은 차재준과 관련된 이야기는 피하고 싶었다.
"독일로 지원한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선호는 나진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소외감 느끼겠군요. 나진씨도 변했습니다. 말투나 표정이 도전적인걸요."
선호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독일로 간 이유는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가길 잘했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의 눈은 독일에 있는 듯 했다. 반짝이는 눈은 독일에서의 무슨 일을 생각하는데 뺨이 붉
어지고 있었다. 내려오는 안경을 올리던 신경질적인 얼굴은 부드러워져 있었다. 끝말을 흐리
면서 표정이 바뀌는 걸로 봐서는 좋은 일만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열심히 선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나진은 선호와 눈이 마주치자 밥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진씨가 변한 이유도 사장님과 관련이 있겠군요."
혼잣말인지 들으라고 한 말인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선호는 된장찌개를 떠서 입으
로 가져갔다.
독일로 떠나기 전 사장의 행동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새벽에 회사를 나와 한밤중에 퇴
근하면서 일과 결혼한 사람처럼 굴더니 조그마한 실수에도 소리를 지르며 책상 위에 있는
물건을 던지기 일수였다.
"실수는 안돼! 이런 작은 실수가 패배의 원인이 되는 거라고. 일에서만큼은 난 완벽한 프로
야. 다시는 어떠한 패배도 용납 못해."
수염이 덥수룩해진 사장이 한 말이었다.
지나치게 패배라는 단어에 힘을 주는 사장은 1등을 놓치지 않던 우등생이 한 순간에 2등으
로 밀려난 꼴을 하고 있었다.
회의 도중에는 딴 생각을 하다가 엉뚱한 소리를 하더니 결국 마지막에는 이상한 말로 회의
를 끝내기까지 했다.
"더 이상 흐지부지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 없군. 직접 발로 뛰란 말이오! 정나진건이 뭐가
어렵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사장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회의장은 삽시간
에 '정나진건'에 대해 비상대책회의까지 세워졌으나 누구 하나 그 건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나중에 용기있는 중역이
사장을 직접 찾아가 물었고 사장은 그의 말에 충격을 받고는 그날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
에게 정중한 사과를 해야만 했다.
완벽을 주장하는 사장 한 마디에 벌벌 떨다 벌어진 소동이었다.
나진은 집까지 바래다준다는 선호의 친절을 정중히 거절했다. 집에 가는 길에 털실도 사야
하고 어쩐지 김선호라는 사람과 같이 차를 타고 있는 게 불편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가
회사를 들리기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와 단 둘이 있어서는
안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나진은 차가운 바람을 막기 위해 옷깃을 여미고 아기자기한
간판을 단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노란색하고 음......하늘색, 그리고..."
손가락으로 하나 하나를 집어가며 털실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나진의 손이 회색에서 멈추었
다.
오늘 재준을 우연히 만나기 전까지는 그에 대한 감정은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제멋대
로인 사람, 건방진 사람, 처음으로 나진의 나체를 본 사람, 담보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 이것이 차재준이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로 결혼 할 뻔했다는 사실은 어떠한 영향
도 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좋아할 뻔한 사람. 마음에 드는 점은 없어도 자상하고 따뜻했던 사람. 나진의 마음
한켠에는 싫어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회색도 사실 거예요?"
털실을 팔고 있는 주인답게 짜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다가온 30대 여인이 물었다.
나진은 고개를 저었다.
"회색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나진은 돈을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다가 작은 메모지가 닿았다. 김선호가 준 자신의
핸드폰 번호였다. 언제든지 된장찌개가 먹고 싶으면 연락하라고 적어 준 메모이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은 똑같은 날의 연속이었다. 김비서와 우연히 만난 것도 재준을 본 것도
스쳐가는 작은 사건에 불과했다고 여겨졌다. 나진은 작게 기침했다. 털실을 살 때 감기에 걸
린 것 같다. 별다른 증상은 없지만 추웠다 더웠다를 반복하고 기침이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나진은 늘 겨울에 감기를 달고 살기 때문에 이 정도의 증상이면 걸리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
지였다.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따뜻한 이불
을 덮고 자면 이틀 후에는 기침도 사라질 것이다.
나진은 빨래를 탁탁 털어 하나씩 곱게 펴서 건조대에 널고 있었다.
"옆집누나, 어디 있어?"
"베란다에."
나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거실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3시를 조금 넘은 시간.
"웬일로 학원에서 곧바로 온 거야? 기다려. 옆집누나가 간식 만들어 줄게."
"옆집누나."
석준이가 애교스럽게 뒤에서 나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뒤 좀 봐. 무서운 아저씨 왔어."
나진은 가슴이 철렁해서 후다닥 거실로 뛰어나왔다. 한 손에는 비틀어져 있는 석준이 바지
를 들고는 공격 자세를 취한 채였다.
"뭐야. 무서운 아저씨라더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진의 뒤에서 수줍게 몸을 숨기던 석준이 속삭였다.
"소리 지르던 아저씨 맞지?"
아이들은 금새 잊는다고 하는데 석준의 기억력은 놀라웠다. 처음 만난 아저씨의 차에서 놀
다가 얼떨결에 혼났던 일이 선명하게 기억이 나나 보다.
재준은 석준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억력이 좋은 녀석이군. 사과의 악수를 받아주겠니?"
석준은 망설이며 나진의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자신의 방으로 뒷걸음질쳐 들어가 버렸다.
나진은 무안해졌다.
"아직 어리니까요."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재준의 시선은 나진의 목부분에 있었다.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않은 표정이 역력했다.
앉으라고 권했지만 황망히 서서 이야기를 얼른 끝내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오셨어. 계약서에 관한 이야기를 드렸더니 바로 압수하시더군. 아버지가 그 일로
만나고 싶다고 하셨어. 내일 내 아파트로 오면 뵐 수 있을거야."
재준은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재빨리 돌아섰다.
"전화로 알려줘도 됐는데.."
별다른 생각없이 나온 말에 재준이 발끈해서 나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높은 담벼락이 눈앞
에 세워진 것 같았다. 갑자기 기침이 나왔다.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야. 회사일이 바빠서 잊을 까봐 지나는 길에 들린 것 뿐이야."
"아저씨 앞에서도 가치측정을 받아야 하나요?"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 일에 대해서 사과를 꼭 받고 싶었다.
재준의 얼굴이 빨개져서 꽉 쥔 주먹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일은.....마음대로 하도록 해. 아무 남자 앞에서 옷을 벗고 싶다면 말릴 수 없지."
나진은 얼른 석준의 방을 봤다. 방문이 닫혀져 있기는 하지만 재준의 목소리가 커서 들렸을
지도 모른다.
"사과의 말을 듣는 건 기대도 하지 말았어야 했군요. 늘 그렇듯이 아저씨의 말은 다 옳지요.
아저씨가 하는 행동도.."
재준이 나진의 양팔을 거세게 잡았다.
"아직도 아저씨라고 부르는군. 10년이라는 나이차를 강조할 필요는 없잖아."
흥분한 나진의 입에서 기침이 심하게 나왔다.
재준은 얼른 팔을 놔주고 다시 주먹을 쥐고는 돌아섰다.
나진은 그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기에 그가 돌아서자 자연히 그의 뒷통수로 시선이 갔다.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어 목이 드러나 있는 재준의 뒷모습을 훑던 나진은 숨을 죽였다.
'아름다운 목덜미야.'
머리의 끝부분부터 시작되는 뒷목덜미는 매끈하게 뻗어있었다. 당장이라도 손가락으로 만지
면 부드러움이 느껴질 것만 같다.
나진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섰다. 남자의 뒷목선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사실이 놀라
울 따름이었다.
"시간은.."
재준이 휙 돌아서자 나진과 시선이 마주쳤다. 재준은 말을 더듬었다.
"어,언제라도....."
"두 사람 뽀뽀할거야?"
석준이 방문을 빼꼼히 열고는 큰소리로 물었다.
"나 지금 창섭이네 가야하는데."
"아무때나 오면 돼. 내일은 하루종일 집에 계신다고 했으니까."
재준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단숨에 말하고는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나진은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의 매끈한 목선과 꿈속의 내용이 연결되어 지고 있
었다. 나체로 재준의 목을 끌어안으며 요염한 자세로 있던 꿈이었다. 나진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정나진, 정신차려!"
재준은 차 뒷자석에서 다리를 꼬고 신문을 들었다 놨다 했다. 자신의 천적이 다시 나타났다.
어리게 느껴지던 얼굴은 여인으로 성숙해져서 완전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사흘 전 김비
서와 다정히 있던 것을
보면서 미칠지경이었다. 도대체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한걸음에 달려가 안고 싶으면
서도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은 패배감이 두려웠다. 피하고 있는 동안에는 마음이 안정이 되
었지만 잊을 수는 없었다.
잠을 자려고 하면 정나진의 몸을 안고 있는 자신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잠을 자는
시간을 줄이고 다른 여자를 찾았지만 그들은 아예 여자로 보이지도 않았다.
일부러 찾아올 필요는 없었지만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천적과 마주하는 방법이 최선
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마음의 혼란만 가중시키는 꼴이 되었다.
석준이가 나오지 않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나진을 굴복시켰을 지도 모른다. 무력을 사
용하는 것은 열등감을 지닌 패배주의자나 하는 짓이다. 그러면 정나진 앞에서 완전한 패배
자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다. 재준에게는 아직 자존심이 있었다. 이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이성은 무너지는 것이다.
재준은 앞으로도 계속 나진을 피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진은 기억을 더듬어 재준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새새엄마에게는 현진아저씨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새새엄마는 연락도 없이 9시를 넘기기가 일수였다. 언제나 들어오면 녹
초가 되어 방으로 직행하기 때문에 말 할 기회도 없었고 자신의 문제인 만큼 스스로가 해결
하고 싶었다. 나진은 분홍색 손수건으로 기침을 하는 입을 막았다. 재준이 다녀간 뒤로 잠을
설쳤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그의 목 때문이었다. 만지면 어떤 기분이 들지, 어떤 감촉일지
궁금해서 한 번만 만져본다면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기침도 사라지고 힘이 솟아 날 것
같았다.
나진은 엉뚱한 생각을 밖으로 내쫓듯 머리를 흔들고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벨을 눌렀다.
"누구신가?"
굵고 점잖은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정나진입니다."
문이 활짝 열리고 은발의 노신사가 기쁨으로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어서 오너라."
나진은 웃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바닷가나 산으로 가면 언제나 자신을 엎어주던 아저씨가 현진아
저씨이다.
늘 '우리 꼬맹이'라고 부르면서 귀여워해 줬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까맣게 타 있었다.
"우리 꼬맹이 좀 자세히 보자. 나이가....맞아. 24살이지? 곧 25살이 되겠네? 어른티가 난다."
"아버지. 차 준비할까요?"
주방에서 여자가 나왔다.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틀어올려 반짝이는 핀으로 고정시킨 여자
는 날씬한 몸매를 과시하듯 짧은 미니스커트와 달라붙는 폴라티를 입고 있는데 검은색으로
통일 시켜 나된 분위기를 무마시켰다.
"재선이 하고는 처음 만나는 걸꺼야. 나이는 꼬맹이 보다 4살 위지. 내내 독일에 있었으니
까."
화장기 없는 재선의 얼굴은 신선한 아름다움이 있어 결코 28살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당당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떠오른 미소는 재준의 얼굴과 비슷했다.
"아가씨가 정나진이지요? 반가워요."
재선은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마음대로 차를 준비해도 돼요? 싫으시면 빨리 주문해 주세요. 회사에 가봐야 해요."
재선은 다시 나진에게 향했다.
"난 독일지사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회사일도 있고 오빠도 만나야 하고, 빨리 나가봐야 하니
까 말해 주세요."
오만한 모습까지 재준을 빼 닮았다.
"손님한테 무례하구나."
나진은 웃었다. 이미 재준에게 익숙해있어서 재선의 말투가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나진은 유자차를 부탁하고 쇼파에 앉았다.
"독일 지사에 계셨으면 김선호씨를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나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선이 주방에서 튀어 나왔다.
"선호씨를 알아요?"
나진은 놀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재선은 한 손에 들고 있는 차스푼을 나진의 얼굴 가까이에 대고는 휘둘렀다.
"선호씨하고는 어떤 사이예요? 아! 말하지 마세요. 결혼하지 않은 건아니까. 애인이든 뭐든
상관없어요.
어차피 그 사람은 내것이 될 운명이니까."
멋대로 결혼 준비를 하던 재준이 생각나면서 김선호의 모습도 스쳐지나갔다.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어쩜 남매가 하나같이 똑같은 것일까. 상대방의 의견이나 감정을 개의치 않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진은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는 현진 아저씨를
봤다. 화를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재선이 나진의 몸을 훑어봤다.
"선호씨 타입은 아니군."
현진 아저씨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만 나불대고 나갈거면 빨리 나가! 그리고 꼬맹이의 애인을 건드릴 생각은 하지도 마."
재선은 이런 대접에 익숙한지 별달리 동요되는 것도 없이 차를 가지고 오더니 탁 소리가 나
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나가버렸다.
"미안하다. 아이들이 하나같이 이상해. 저희 새엄마를 닮아서 그런 것 같아. 애인은 걱정하지
말아. 재선이
가 말은 그렇게 해도 행동은 못하는 아이야."
나진은 빙그레 웃었다. 우아한 자태로 밥을 먹을 때도 밥알을 셀 수 있을 정도의 양을 집어
먹던 아줌마를 닮았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저씨를 판에 박았다.
"애인은 아니예요. 재준씨의 일로 알게 된 재준씨 비서님이예요."
현진 아저씨의 눈매가 올라갔다.
"재준씨?"
나진은 그 호칭이 특별히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아저씨라고 부를까하고 생각했지만 현
진 아저씨 앞에서 또 한사람의 아저씨라는 호칭은 이상하다.
현진 아저씨는 헛기침을 했다.
"계약에 대한 이야기는 알지?"
고개를 끄덕이는 나진의 어깨는 축 쳐져 보였다.
"날 원망하렴. 계약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있었어. 네 아버지에게서 계약서를 받은 날로
찢어 버렸어야 했는데, 너도 알다시피 재준이 새엄마가 그 해 사고로 세상을 떠났잖니."
독일에서 두 남매를 돌보던 아주머니는 장을 보고 오던 중 만취한 운전자와 정면 충돌로 즉
사했다. 아저씨는 소식을 듣고 바로 독일로 달려갔으니 경황이 없을 만도 했다.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여러 가지 일이 있다보니 지금에서야 그 일을 해결하러 오게
된 거란다. 난 애초에 이런 말도 안돼는 일을 서류상으로 작성하는 것조차 못마땅했어. 당장
에 파기해 버리겠어."
단숨에 말을 마친 아저씨의 눈매가 짓궂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음 말이 들려왔다.
"그래도 계약은 계약이지. 그러니 원금의 손해를 입으면서 아무런 조건없이 담보물을 내 줄
수는 없단다."
나진은 숨을 죽였다.
현진 아저씨의 말은 반농담조였지만 표정은 진지했다.
"조건은 내 아들녀석을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는 거다."
어처구니없는 말이기에 나진은 소리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따라오너라."
엄하게 말하는 현진 아저씨의 뒤를 따라 간 곳은 주방이었다. 아저씨는 냉장고 문을 활짝
열고 나진에게 보여주기 위해 옆으로 비켜섰다.
안에는 몇 병의 작은 생수병이 있고 온통 맥주 천지였다. 냉동실에는 얼음밖에 없는데 반정
도 남아 있었다.
나진은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반찬은커녕 씹어 먹을 수 있는 게 한가지도 없었다. 다
음으로는 찬장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3분 미트볼, 3분 햄버거, 참치 등 인스턴트 음식이 종
류별로 쌓여 있었다. 대부분이 간단하게 3분이면 조리되는 것들이었다. 다음은 쓰레기를 분
리수거 한 곳. 갈수록 가관이라고 잔뜩 쌓아져 있는 술병들은 위스키, 브랜드 같은 독한 술
이었다.
"이런."
나진의 입속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인간이라면 밥을 먹지 이런 것들로 에너지를 충당하기는 않지. 더 놀라운 것들을 보여주
마."
아저씨는 침실문을 열었다.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옷들로 침대는 엉망이고 서류와 책들이 바
닥을 가득 메우고 있어 들어가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서재도 마찬가지였다. 바리게
이트를 친 것처럼 책과 서류가 쌓여 있었다.
"듣기로는 16시간을 회사에서 일하고는 집에까지 일을 가져와서 한다고 한다."
집안이 울릴 정도로 크게 한숨을 쉬는 아저씨는 나이가 들어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아무런
힘이 없어 보였다.
"독일에 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깔끔을 떨더니만 다 위선이었어. 너저분한 여자들을 옆
에 끼고 희죽거리는 모습을 하고는."
실제로 그런 모습을 봤는지 아저씨는 이마의 주름이 잡힐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어제는 나한테 소리 지르기까지 했단다. 빨리 여기서 나가라는 구나. 하긴 재선이도 한국에
서 살겠다고 강하게 주장해서 아파트를 얻긴 했다만...그건 그렇고 네 말이라면 듣지 않을
까? 그 얘는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가족 외의 사람이 따끔하게 한 마디 해 주면 이런 홀아비
같은 생활을 치우고 참한 여자랑 결혼 할거야. 충격요법이 제일이거든."
나진은 곤란해졌다. 재준에게 결혼 신청을 받고 얼마 안 있어 파혼당했다는 사실을 아저씨
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재준에게 충고를 해 줄만한 처지가 아닐뿐더러 재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점이 이상했다. 파혼당한 쪽도 자신이요, 헤어질 때 모욕을 당한
쪽도 나진이었다. 그런데도 재준에게는 항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 자신이 내뱉은 마
지막 한 마디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예요. 솔직히 말하면 재준씨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거든요."
아저씨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당히 궁금한 모양이었지만 억지로 들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 점에 대해 나진은 감사했다.
"하지만 계속 이런 생활을 하다가는 건강을 해치게 될 거야."
우울한 목소리였다.
"밥이라도 챙겨 먹일 수 있다면 좋을련만.."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아저씨의 얼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나진의
마음은 여렸다.
"그럼, 이렇게 해요. 제가 오후에 와서 청소도 하고 밥도 해 놓을게요. 석준이가 학원에서
돌아오기 전에 돌아가면 되니까요."
깜찍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면서 나진이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나야 걱정이 없다만, 네가 힘들까봐...."
금방 현진 아저씨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이것만으로도 기운이 솟는걸요. "
나진은 계약서를 흔들었다.
"재준에게는 아무말도 하지 않겠다. 제 멋대로 사람을 고용했다고 여기겠지."
두 사람은 큰 소리로 웃었다. 우렁각시라는 이야기처럼 재준을 보지 않고 그의 생활을 바꾸
는 거다. 충분히 가능하게 여겨졌다. 아저씨는 나진을 믿고 계약서를 내 주었다. 자유의 몸
이 된 것이다. 나진은 몇 년만 기다려 주면 돈을 꼭 갚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저씨는 한사
코 말렸지만 분명 새새엄마도 바라는 일일 것이다. 나진의 말을 듣고는 현진 아저씨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것은 어딘지 거북해 보였다.
당장 다음 날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열쇠를 받아 가지고 왔다.
새새엄마에게는 아직도 계약이나 현진 아저씨를 만났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쩐지 새새엄마의
태도가 쌀쌀맞게 느껴져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오후 1시부터 3시까지는 집에 없을 거라
고 석준이에게 양해를 구하자 어린아이 취급하지 말라며 오히려 자신을 내버려두라고 큰소
리였다. 요즘은 사춘기가 빨리 온다
고 하더니 이제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인 석준이가 그런 것 같았다.
막상 일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나를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청소를 하려고 재준의 옷가지를 집어들면서 내내 그의 목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벗어 놓은 와이셔츠의 목깃을 만지면 몸이 떨려오면서 묘한 흥분이 밀려왔다. 2시간
이라는 시간은 긴 것이 아니므로 빨리 움직여야 했다. 우선은 재준의 아파트에 오기 전 시
장을 봐 온 것들을 냉장고에 너 놓고 맥주는 상자에 넣어 다른 곳으로 옮겨 버렸다. 쌀을
씻어 놓고 보니 전기 밥통은커녕 압력솥도 없었다. 나진은 자신이 사온 물건은 전부 가계부
에 적어 놓았다. 아저씨는 우선 한 달 분의 생활비를 주셨다. 나진의 집 생활비의 5배가되는
큰돈이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헛으로 썼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빠짐없이 기록해 두
고 나중에 현진 아저씨에게 자랑스럽게 내 보일 생각이었다.
이미 3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는데 일을 한 표시라고는 냉장고 안을 채운 야채와 반찬들 뿐
이었다. 반찬은 집에 있는 것을 일정량 덜어서 가져 온 것으로 김치와 콩자반, 멸치볶음, 장
조림이었다.
방안은 아직 엉망이었고 밥도 준비해 놓지 못했다.
방을 정리하러 들어가서는 재준의 체취에 취해 버려 아무것도 못했던 것이다. 남자의 스킨
향기가 이처럼 좋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를 만났을 때는 전혀 맡지 못했는데 재준은 매
일 아침 스킨을 바르는지 방안에 향기가 가득했다.
제 정신이 든 것은 목을 간질이는 기침 때문이었다. 시계는 3시 반을 향하고 있었다.
내일은 좀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문을 잠그고 나왔다.
다음날은 그릇 몇 가지와 전기 밥솥을 사서 12시에 도착했다. 아저씨는 1시부터 3시까지라
고 말했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나진은 기침을 하면서 문을 열었다. 양손으로 잔뜩 쥔 짐은 자신의 몸무게보다도 더 나가는
것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무섭게 짐을 내려놓고는 빨갛게 변한 손바닥을 흔들었다. 열이 나고
있었다.
"역시 나진씨군요."
김선호는 코트도 벗지 않은 채였다.
"사장님이 이 말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내 집에서 당장 나가'"
나진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밑에 있는 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 좀 들어다 주시겠어요?"
김선호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의 말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선호씨의 가족은 어떻게 되요?"
"여동생이 한 명 있습니다."
"잠은 잘 주무세요?"
김선호의 눈동자가 옆으로 쏠렸다. 나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추측하려고 애쓰고 있
는 것이다.
"최근에 불면증이 생겼습니다."
나진은 조용히 선호를 쳐다보더니 상자를 끌어가지고 왔다.
"선물이예요. 잠이 오지 않을 때 조금만 마시세요. 선호씨라면 안심이예요."
상자안에 가득 들어있는 맥주를 보면서 선호는 자신의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겁니까? 사장님과 나진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사
장님은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기분이 상한 듯한 얼굴로 나진이 선호를 바라봤다.
"이건 차재준 사장님하고 관계없는 일이예요. 그 사람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선호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자 나진이 재빨리 이를 막았다.
"그만. 전 아무리 궁금해도 재선 언니와의 일은 묻지 않고 있다구요. 그러니 아무런 말도 하
지 말아 주세요. 사장님께는 담보물 신세를 면하려고 하고 있는 거라고 전해 주세요."
"그렇다면 저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재선씨와의 관계는 오해하고 계신 것
같군요."
나진은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도 입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언니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거죠? 자신만만하던 대요."
봉투 안에서 감자 하나가 나와 굴러갔다.
선호는 감자를 들고 와 봉투 안에 있는 물건들을 냉장고에 넣기 시작했다.
잠시 말이 없던 나진이 느닷없이 엉뚱한 부탁을 했다.
"선호씨, 잠깐 저쪽 좀 보겠어요? 네, 그렇게요. 고개는 약간 숙이고요."
선호는 경직된 자세로 나진의 말을 따랐다. 나진은 유심히 그의 목선을 바라봤다.
"이제 됐어요. 고마워요. 재선 언니하고는 독일에서 만난 건가요?"
선호는 다 집어넣고 손에 묻은 흙을 손수건을 꺼내 닦아 냈다.
"오늘밤도 잠자기는 틀렸군요."
나진은 키득키득 웃었다.
"불면증의 원인이 재선언니인줄은 몰랐는걸요. 언니가 너무 적극적이어서 거부감이 생기나
요?"
"골치 아픈 남매야."
선호가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 안경너머로 나진의 바쁜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나진의 손은 조금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수다를 떨 상대자가 있는 것이 나쁘지
는 않은 듯 나불거리고 있었다. 주로 선호에게 질문하는 내용이었지만 대답을 듣기도 전에
스스로 답하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즐겼다. 그것은 나진의 버릇이었다. 어린 나이부터
시작한 집안 일이 좋거나 재미있을 리는 없다. 그렇다고 않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왕에
하는 일이라면 작은 것이라도 즐거움을 찾자는 것이었는데 그런 마음에서 생긴 버릇이 혼자
질문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좋은 버릇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괴로움은 잊을 수 있었다.
말하는 걸로 봐서는 선호가 있다는 사실을 잠깐 잊고 있는 듯했다. 선호는 나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깜빡 놀라 어깨를 움찔하던 나진이 당황한 웃음을 웃었다.
"깜짝이야. 내 정신 좀 봐. 시끄러웠죠?"
나진의 입에서 기침이 나왔다.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감기에 걸리는 겁니다. 푹 쉬어야 해요.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겠습
니다."
나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는걸요. 이맘때에는 늘 감기를 달고 살기 때문에 익숙해 졌어요. 일종의
단짝 친구 같다고나 할까요?"
소리내어 웃는 나진을 보며 서 있던 선호는 손목 시계를 보더니 돌아가야겠다며 가볍게 고
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진은 그가 돌아가고 난 다음에야 점심식사에 대한 것이 떠올랐다. 언
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점심시간을 넘겨 버린 것이다. 게다가 맥주가 들어
있는 상자도 그대로 놓고 돌아가 버렸다.
나진은 한 손은 허리에 대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입과 손을 같이 움직이다 보니 에너
지가 금방 빠져나간 것처럼 힘이 빠졌다.
아무래도 맥주는 일부러 놔두고 간 것 같다. 그로서는 사장의 물건을 가져간 다는 것이 마
음 내키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진은 발로 상자를 찼다. 김선호 말처럼 여기서 자신이
뭘하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진은 식탁 의자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선호가 있던 자리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그의 목선은 재준에게서 받았던 느낌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선호는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도 말투에 있어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의 품에 안겨져 보호를 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재준의 목선을 보면서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아직은 그것이 뭐라고 단정지을 만큼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재선이 선호에
게 반한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자신 만만하게 큰소리를 치는 재선과 그녀 때문에 불면증에 걸리고 만 김선호는 생각보다
꽤 잘 어울리릴 것이다. 나진은 쫓는 사람과 쫓기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고는 크게 웃었다.
재선은 강하기는 하지만 선호는 바위와 같다. 한 번에 내리치면은 바위는 깨질 뿐이다. 바위
를 뚫는 것은 오직 인내하는 물방울 뿐이다. 재선이 방법을 바꾸지 않는 한 선호는 움직이
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나진은 나머지 일을 위해 마지막 힘을 냈다.
선호의 말을 들으면서 재준의 얼굴은 험악해져 가더니 결국에는 폭발하고 말았다.
"우습지도 않군. 아버지의 짓이야. 두 사람 다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야. 동화를 흉내내는
건가? 나를 놀리는 거야?"
재준은 책상을 두드리는 그의 손은 빨개졌다.
선호는 말없이 그의 흥분한 모습을 응시할 뿐 동요가 없었다. 그의 별명인 '차부인'이 무색
하지 않을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차부인'이라는 별명은 유일하게 사장을 무서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장의 사소한 일까지 챙긴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풀이하면 "차재준의
부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늦었군. 몇 시부터 와있던가?"
"12시에 왔는데 그 시간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재준의 눈이 선호의 얼굴을 재빨리 훑어 지나갔다.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이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간거지? 오는 시간도 물어보지 않고, 다신 오지 못하
게 만들지도 못하면서 돌아온 시간은 한참이나 걸리는군."
한 차례의 흥분이 사라졌는지 평소와 다른 없는 음색이었지만 비꼬고 있는 데다 가늘게 떨
리고 있었다.
"다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랑의 말을 속삭였다는 듯이 들리는군."
재준은 요란스러운 몸짓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친 행동이었기에 책상 위에 있던
서류들이 그가 일으킨 바람에 펄렁였다. 김선호의 한쪽 눈썹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사장님의 개인적인 일에는 나서지 않겠습니다. 사표를 쓰라고 하면 쓰죠. 비서란 어디까지
나 공적인 자리입니다. 그 동안은 아무런 말없이 해 왔지만 여기까지가 끝입니다. 정나진씨
와의 일도 사장님이 직접 해결하십시오."
"내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군. 내내 아무말도 하지 않더니 정나진이 나타나니까 변하고 말
았군."
"정나진씨와는 상관없습니다. 일에 있어서 인정을 받고 있기에 사적인 일에 관여하는 것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게 잘못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을 뿐입니다."
재준이 손으로 이마를 누르면서 왔다갔다 했다.
"분명히 정나진때문이야."
"계속 우겨대시는 군요. 좋습니다. 그럼 정나진씨 때문이라고 치죠. 그러니 앞으로는 사적인
일, 특히 여자문제에 저를 관여시키지 말아주십시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재준이 황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남자대 남자로 이야기 해 보자고. 그 여자의 어떤 점이 좋은가?"
선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남자대 남자로 묻겠습니다. 나진씨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말도 안돼는 소리! 우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남남이지. 관심은커녕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것도 싫어. 자네랑 사귀던 말던 전혀 상관이 없지."
재준은 상당히 과장된 표정과 행동으로 나진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났다.
"잘 됐군요. 내년 봄에는 식을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선호는 만족스러운 듯 싱긋 웃고는 문손잡이를 돌렸다.
"식이라니?"
"결혼식 말입니다."
선호가 나가면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재준은 그제서야 창가로 다가가 안절부절못하
고 뛰고 있는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일에서는 일인자라고 자신하지만 사랑은 꼴지인
자신이 여겨졌다. 김선호는 현재 비서로 일하고 있지만 원래 유망한 연구원이었다. 늘 묵묵
히 옆에서 보좌하면서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재준을 보살펴 왔던 것이다. 그런 그가 나
진을 갖겠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시간문제이다. 재준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김선호라면 나
진의 사랑을 받고도 남는 인물이다. 이로써 나진에 대한 모든 미련은 말끔히 사라질 것이다.
재준은 넥타이를 풀러 옆에 놓고는 서류 한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재준에게는 오직
일만이 자신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었다.
다음 날 나진이 아파트로 가자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자신이 사가지고 온 모든 물건
들이 상자에 가득 담겨 현관문 앞에 놓여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전과 마찬가지로
맥주로 꽉 차 있었다. 참을 수가 없는 행동이었다. 나진은 전보다 심해진 기침을 하면서 여
기저기 돌아다니며 살폈다. 역시 방도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나진은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것
들을 발로 차면서 화를 참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화장대에 작은 메모가 끼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하면 계약을 취소해 주겠다고 했는가 본데 헛수고야. 언제든 난 그 계약
서를 손에 넣을 수 있어. 그렇게 되면 가치측정보다 더 심한 꼴 당하게 될거야.-
"미안하지만 차재준씨. 그 계약서는 이미 제 손안에 있네요."
나진은 혀를 낼름거리고는 메모지를 찢어버렸다.
처음부터 모든 일을 다시하려니 의욕은커녕 감기 때문에 기력이 딸려왔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현진 아저씨를 위하는 것보다는 일종의 오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오만
하고 제멋대로인 사람의 콧대를 누군가가 꺾어줘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
였다.
나진은 원상복귀를 시킨 후 거울에다 메모지를 끼워 넣었다.
-우리 처지는 바뀌었습니다. 재준 아저씨는 계약서를 빼내기 위한 담보입니다. 그러니 고분
고분하게 계셔 주세요.-
나진은 일부러 '아저씨'라는 부분을 굵게 썼다. 아무리 봐도 멋진 말이었다. 재준의 생활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을 조건으로 계약서를 받았다. 즉 현진 아저씨는 재준의 생활을 변화시
키기 위해 계약을 파기하는 대신 차재준이라는 인간을 나진에게 맡긴 셈이다. 간단히 말해
서 담보물인 것이다.
나진은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재준도 담보물의 입장이 되면 겸손을 배우게 될 것이
다.
그러나 이런 교훈도 재준에게는 통하지 않은지 나진이 아파트로 가 보면 언제나 원상태로
변해 있었다.
그러기를 1주일이 지나가자 나진은 슬슬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양쪽 집을 오가
며 일하다 보니 감기는 더 심해져 열도 나고 어지러웠다. 끝까지 고집을 버리지 않는다면
나진쪽에서 항복을 선언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뜻밖에 지원군이 온 것은 일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 상태로 쇼파에 쓰러지듯 누워있을
때 나타났다.
"와 보길 잘했네. 일을 하기는 한 건가. 전하고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
경쾌하고 쾌활한 여자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진씨."
참으로 따뜻한 남자의 목소리이다.
나진은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또 다른 사람은 나진의 이마를 손으로 만져줬다.
"열도 있고."
"전부터 감기 증상이 있었습니다."'
"어머나. 두 사람은 자주 만나나봐요. 나진이랑 만났을 땐 건강했거든요."
재선언니랑 만나기 전부터 감기에 걸려있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쓸데없는 소리를 나불거릴
만큼 가벼운 기분이 아니었다.
"오실 줄 몰랐어요."
나진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재선이 옆에서 나진을 부축해 줬다. 선호는 말없이 웃옷을 벗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고는 주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가보라고 해서 왔어. 말은 놔도 되지? 내가 언니뻘 되니까. 회사에 들렸다가 선호
씨한테 바래다 달라고 했지. 웬일로 혼쾌히 승낙하나 했더니."
재선이 나진을 노려봤지만 미움이나 샘은 없이 장난스러운 것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이전
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미인이었다.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만 했다. 재선은 나진
을 일으켜 세우더니 침실로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
"안돼요.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예요."
"잠자코 있어. 선호씨가 알아서 해 줄 거야. 살림꾼이거든. 아버지도 주책이지. 이런 어린 아
가씨한테 오빠 살림을 맡기다니. 오빠도 이상하고. 네가 오는 게 싫으면 열쇠를 바꾸거나 경
비실에 말하면 되는데
왜 안그러는 건지."
재선은 힐끔 나진을 봤지만 나진은 모른 척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여기에서 제 정신인 사람은 나밖에 없나 보군. 오빠를 좋아해?"
은밀한 목소리로 재선이 물어왔다. 나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 번도 그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질문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단지 혼자서 재준 나름대로의 좋은 점이 있다고 생각한 적
은 있었다.
재선이 다그치듯이 다시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당연히 아니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지 뜻밖에도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재선의 눈빛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모르겠다? 그렇군. 때로는 자신의 감정을 분간하기 어려운 순간이 있지. 오빠에 대한 나진
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싶다면 눈을 감고 상상하는거야. 차재준의 입술이 정나진의 입술로
가까워지고 있다. 점점, 점점.."
마치 최면을 거는 것처럼 목소리를 신비하게 꾸며댔다.
나진은 눈을 감고 재선의 말을 떠올렸다. 재준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는 모습을.
"기분 나빠? 아니면 가슴이 떨려와?"
홍당무로 변한 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선호씨의 어떤 점이 좋으세요?"
황급히 말을 돌려버렸다.
재선은 침대에 걸터앉아 곰곰이 생각하는 듯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대고 눈동자는 천장으로
향했다.
"글세. 처음 봤을 때는 아무 감정 없었고, 다시 만났을 때 밥맛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다음 번에 만났을 때 가슴에 안기고 싶다고 생각했지."
재선은 꾸미거나 숨기는 것 없이 솔직히 말했다.
나진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무뚝뚝한 선호의 첫 인상이 좋지는 않았지만
만날 때마다 새로운 점을 발견하고 그것은 매력으로 변하는 것이다. 선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재선의 몸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고 행복해 보였다. 틀림
없이 마음 속 깊이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차츰 나진은 재선에게 동정을 느꼈다. 사랑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있었다. 선호는 보기
에도 재선의 존재는 일체 무시하고 있었다.
재선이 일어섰다.
"좀 자도록 해. 나중에 내가 깨워줄게."
턱까지 이불을 덮어주고는 살며시 방문을 닫고 재선은 나갔다. 잠깐동안 주방에서 왔다갔다
하는 소리와 그릇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사람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저씨 말대로 재선 언니는 말로만 큰소리를 치지 정작 선호의 옆에서는 행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언니가 큰소리치는 대로 행동했다면 지금이야말로 선호를 덮칠 수 있는 절호
의 기회가 될 것이다. 사람이란 겉모습으로는 판단이 안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이 나진의
녹초가 된 몸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몇 번 잠깐 잠에서 깼지만 일어날 힘이 없었다.
그리고 재선이 깨워주겠다는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일어나려 하지도 않았다. 잠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 이제 그만 대구로 내려가 봐야 합니다. 재선씨를 믿겠습니다."
"걱정마세요. 조금 더 자게 놔뒀다가 집에 데려다 줄께요.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설마하니
제가 나진이를 잡아먹겠어요? 갖다 버리겠어요? 그만 가세요.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출장
가는건데 늦으면 안되죠."
나진은 다시 잠 속을 헤맸다.
잠에서 깬 것은 쿵쾅거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화가 많이 났는지 발소리를 크게 내
며 냉장고를 열고 닫는 소리와 상자를 끌어당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중얼거림도 섞
여 있었다. 나진은 숨을 죽이고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새 캄캄해진 방안
에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는 어두운 조명이 전부였다.
선호와 재선 언니가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다가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
막으로 들려온 말소리로 보아 선호는 대구에 갔다. 그럼 재선 언니는?
도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무서워졌다. 상대방은 아직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끈질긴 얘야."
재준의 목소리였다.
나진은 한시름 놓았지만 여전히 숨을 죽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재준이었다.
그가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웃음이 나오려
는 것을 혀를 깨물며 참았다.
그는 한참을 주방에서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더니 옷 벗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소리가 크게 들려 밖으로 새어 나갈 것 같았다. 나진은 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은 이성의 속삭임일 뿐 감정적으로는 그의 벗은 몸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전쟁이 벌어지는 중 어딘가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샤워소리
가 들려왔다.
나진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 했다. 분명 재선은 깨워주겠다고 했는데 아무 말도
없이 가 버린 것이다. 몇 시쯤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조용히 몸을 일으키고 침대에서 내
려와 시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12시 40분?"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낮 12시 40분 일리는 없었다. 나지은 초조하게 손을 감싸 쥐었다.
이렇게까지 잠이 들다니 다 감기 탓이었다. 나가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 시
간에 나가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악몽과도 같았다.
"젠장."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히 위협적으로 들려 나진은 자신도 모르게 침대로 달려가 이
불을 뒤집어 썼다. 상황으로 보아하니 재준은 화가 단단히 나 있는 것 같다. 아마 선호가 주
방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을 것이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불을 끄는 소리도 들려왔다. 희미하게 방문 틈으로 들어오던 불빛
은 사라지고 집안 가득 어둠이 깔렸다. 재준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으나 듣지
않아도 자신에 욕이라는 것쯤은 뉘앙스로 알 수 있었다. 나진은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잔뜩
긴장한 채 묵묵히 앞으로의 일을 기다렸다.
"씽크대까지 닦아 놓다니 제 정신이 아니야."
선명한 말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침대의 한쪽이 푹 꺼졌다.
이불이 들썩이면서 단단한 근육의 허벅지가 나진의 다리를 덮치면서 손이 가슴에 닿았다.
"새엄마야!"
나진은 후다닥 침대에서 뛰어 내려가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
려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었다. 침대 옆 스탠드에 불이 들어오면서 재준은 금방이라도 주먹
을 날릴 것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것이라고는 달랑 속옷 하나 뿐이었
다.
나진은 눈을 감아 버렸다. 이성과 감정의 충돌의 원인을 원하지 않는 순간에 보고 만 것이
다.
"정나진."
놀라움의 목소리였으나 뒤따른 억양에는 노기가 실려있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글쎄요. 잠깐 자고 일어나 보니 이렇게 되어 있네요."
재준은 한 걸음에 나진의 앞으로 다가와 두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다 큰 처녀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그것도 침실에 있는 건 안 좋아보이지."
화가 많이 났는지 소리를 치지는 않았지만 재준의 숨소리는 거칠어져 있었다.
"게다가 속옷차림의 남자가 있다면 더더욱."
나진은 몸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지만 재준의 말을 수긍하고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깨워준다는 약속을 어긴 재선의 잘못이었다.
자신의 말에 재준이 당황하며 옷을 입을 줄 알았는데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쩐지
그의 눈에서 불길이 솟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단순한 긴장감이 아니라 두려움이
생겨났다.
"놓아주세요. 재준씨."
일부러 이름에 힘을 주어 말했다.
재준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나진의 팔을 으스러뜨릴 수 있음을 보여주
는 행동이었다. 갑자기 재준이 나진을 밀치더니 벗어 놓은 옷들을 입었다.
"집으로 데려다 주지. 집에 전화도 하지 않았겠지? 난리가 났겠군."
재준의 태도는 말썽많은 꼬마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태도는 은근히 나진의 자존
심을 건드렸다.
재선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재준에 대한 감정을 알고 싶다면 입술이 닿을 때의 기분을 상
상하라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나진은 달려나와 재준
의 목뒤로 손을 돌리고는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에 눌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입술을 떼
고 나니 스스로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망연할 뿐이었다.
재준의 몸은 경직되어 있었지만 눈에 떠오른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나진은 헛기침으로 위
기를 모면하려 했는데 정말로 기침이 나왔다.
"어리석은 짓이었어. 김비서가 알면.."
"네?"
나진은 되물었다. 지금 이 순간에 김선호 이야기가 나올 리 없었다. 분명 잘못 들은 거라고
여겼지만 재준은 말없이 차키를 들고 앞장서서 걸어나갔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내내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결국 답답함을 느낀 나진이 먼저 입
을 열었다.
"어쩜 좋아. 석준이 혼자서 무서웠을 텐데."
그것은 대화와는 거리가 먼 혼잣말이었다. 멍청하니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까 궁리하다가
어린 동생에 대한 생각이 난 것이다.
"새어머니가 계시잖아. 7시면 돌아오시지 않아?"
"한밤중에 들어오세요. 그리고 7시라고 해도 석준이 같은 어린아이에게는 혼자 있기에는 늦
은 시간이예요."
재준은 한밤중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더니 생각에 잠겼다. 간혹 나진의 얼굴을 곁눈질로 보기
는 했지만 화가 난 것도 아니고 흥미가 있는 얼굴도 아니었다.
차가 밝은 불을 뿜으면서 아파트 단지내로 들어갔다.
재준은 아파트 바로 앞까지 데려다 주려 했지만 앞에 차 한 대가 서 있어 나진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문을 열었다. 앞의 차에서도 누군가가 내렸다. 잠든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였
다. 운전석에서 남자가 내려 다정한 인사를 나누었다. 순간 나진의 눈이 여자와 마주쳤다.
"엄...마?"
시간이 정지해 버렸다고 느껴지는 순간 정중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이 아가씨가 따님이로군요. 반갑습니다."
남자는 다가와 나진 앞으로 손을 내밀었지만 나진은 어둠 속에서도 새새엄마의 얼굴이 창백해
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손에 안겨 있는 석준은 정신없이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전화해 보니 네가 없길래.."
뒷말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나진은 돌아서서 뛰었다. 어느 누구도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지
만 알 수 있다. 새새엄마가 늦게 돌아온 이유도, 자신에게 냉담해진 이유도 새로운 남자가 생
겼기 때문이었다. 분명 전화를 해 보고 나진이 없자 잘됐다고 생각하면서 석준이를 데리고
나가 셋이서 어울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 석준이도 나진의 눈을 속이며 셋이 만났을 것
이다. 왜냐하면 나진은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진은 혼자였다. 석준이의 몸에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새새엄마
의 아이이기도 했다. 친새엄마처럼 생각하려고 애를 썼는데 결국 남이었을 뿐이다.
현진 아저씨와 계약서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새새엄마에 대해
분명하게 알게 된 이상 그녀가 돈을 갚을 생각이 없다는 것은 뻔했다. 나진의 인생따위는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그
래서 재준이 결혼준비를 서둘렀을 때 기뻐하며 나진에게 계약이야기를 꺼내 거절 할 수 없
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나진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옆에서 크락션이 울렸다. 재준이었다.
나진은 망설이는 것 없이 그의 차에 올라탔다.
"알고 있었죠? 새새엄마한테 남자가 생긴 걸 다 알고 있으면서, 그러면서....난.."
나진은 울음을 터뜨렸다. 친새엄마의 장례식에서도 흘리지 않던 눈물이었다.
"아저씨는 나빠요!"
나진은 별의 별 소리를 다 했지만 재준은 묵묵히 받아주었다. 제일 싫어하는 '아저씨'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이번만큼은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재준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나진은 안으로 들어오자 모든 분노를 토해내듯 재준
의 다리를 발로 차고 가슴을 때리며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재준은 나진의 울음소리에 질려
버렸다.
그의 손이 거세게 항변하는 나진의 팔을 잡아 뒤로 돌리고는 더 이상 소리치지 못하게 입술
로 입을 막아 버렸다.
재준의 단단한 다리를 차던 나진의 발길질이 멈추어졌다. 나진이 진정이 되었다고 생각했는
지 재준은 입술을 떼었다. 그것은 키스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입막음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래
서 아무런 느낌도 생기지 않았는데 놓아주고 나니 두 사람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 목욕하고 싶어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속삭이듯이 나진이 말했다.
재준은 욕실문을 열어 주고는 자신의 방에 가서 수건과 헐렁한 티를 가지고 나와 나진의 발
밑에 던졌다.
"오늘밤은 여기서 자도록 해. 하지만 틀림없이 내일은 아침 일찍 돌아가야 한다. 이건 옛날
에 입었던 건데 잠옷으로 입으면 될거야."
그는 나진을 보지도 않고 차갑게 말하고는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나진은 주섬주섬 옷가지를 주서 들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속의 자신은 형편없는 모습이
었다. 눈물 콧물 뒤범벅이고 머리는 산발이 되어 버렸다. 잊고 있던 기침이 거세게 나왔다.
살짝 노크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기침이 심한 것 같은데."
"뜨거운 물로 샤워하면 좋아질 거예요."
대답을 하면서도 기침이 중간중간 나와 말이 끊겼다. 나진은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뜨
거운 물이 몸을 감싸면서 다시 서러운 생각이 밀려왔다. 나진은 한 손으로 입을 막고는 흐
느꼈다.
언제까지 새새엄마는 그 사실을 비밀로 하려 했던 걸까.
새새엄마를 떠올리자 재준이 미워졌다. 이상하게 그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화를 억제 할 수 없었다. 심하게 연속으로 기침이 나오면서 나진은 쓰러지듯 벽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욕실의 문이 열렸다. 아마 나진이 잠그는 것을 잊었을 것이다. 재준은 성큼 다가가 나진을
안아 올렸다.
나진은 힘없는 주먹으로 재준의 가슴을 때렸다.
"아직도 내가 아저씨 담보물로 보여요? 언제든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생각하냐구요? 나 같은
것에게는 새엄마에게 애인이 있다고 귀뜸해 줄 필요도 없었겠죠. 다들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진은 발을 버둥거렸지만 재준은 상관하지 않고 거실에 내려놓고는 수건으로 몸을 감싸주
고는 닦으라고 명령하고 샤워기를 잠그고 왔다.
"내게 명령하지 말아요. 화를 참을 수가 없어."
흥분 탓으로 기침이 몰려왔다.
이제는 기침하는 자신마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철이 없어도 보통 없는 게 아니군. 나이가 들었으면 어른답게 행동해야지."
재준의 말보다도 나진의 몸을 닦고 있는 그의 손이 따끔하게 느껴졌다.
나진은 재준이 자신의 나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있음에 정신이 팔려 조용해졌다. 성인
남녀가 단 둘이 야심한 시각에 있는데, 그것도 여자는 옷을 입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도 일
어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나진은 그것이 자신의 몸매가 형편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진은 부끄러움과 수치로 그의 손에서 수건을 뺏어 몸을 가렸다.
"난 어린아이가 아니예요."
재준은 그 말을 무시하고 나진을 번쩍 안아 침대에 눕히고 속옷과 헐렁한 티를 입혀줬다.
이런 행동들은 마치 5살짜리 꼬마를 상대로 하는 것 같았다.
이불을 끌어당겨 나진에게 덮어 주고는 재준은 서재로 들어갔다.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뿐만 아니라 성인군자로 여겨졌다.
나진은 현재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조금 만 자극을 가해도 안겨올 것이다. 재준은 책상 서
랍속에 넣어 두었던 위스키를 꺼내 잔에 따랐다. 이런 상황에서 나진을 안지 않은 것에 대
해 김선호는 무릎을 꿇고 자신을 신처럼 생각할 것이다. 선호를 위해서 나진의 처녀성을 지
켜야만 했다. 재준은 물을 마시는 것처럼 술을 목에 흘려 넣었다.
신이 아니어도 좋고 김선호가 자신을 파렴치한이라고 욕해도 좋다. 나진을 갖고 싶다. 그녀
를 갖고 자신의 아이를 낳아주기를 원하고 있다. 설령 나진이 끝까지 저항해 오고 자신을
증오하더라도 그녀를 사랑하고 싶었다. 참을 수 없는 불길이 몸과 마음을 휘젓고 있었다.
빨리 오늘이 지나가고...시계를 보니 새벽 2시를 향하고 있었다. 이 새벽이 빨리 지나가기를
열심히 기도하는 수 밖에 없다.
나진은 아무래도 재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졌다. 솔직히 그러고 싶은 마음보다는
지금 그가 뭘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분명 자고 있지는 않다. 나진의 신경은 모두 귀쪽으로
쏠려 서재에서 들려오
는 작은 소리를 포착하고 있었다.
나진은 재준의 서재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미 명분도 있다. 사과를 하기 위해서.
심호흡을 한 다음 가볍게 노크를 했다. 안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번 더 노크
를 한 다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으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정면에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고 옆으로 그의 책상이 보였다. 재준은 좀 전부터 문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의 손에는 반정도 담긴 술잔이 들려 있었다.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오른쪽 무릎을 약간 굽히고 발을 달그닥 거리며 노골적으로 못마땅함을 드러냈다.
"또 술이예요? 현진 아저씨가 얼마나 걱정하고 계신지 아세요? 자신의 건강도 생각해야죠?"
"잔소리 좀 그만하고 나가주지 않겠어?"
나진은 재준의 말을 무시하고는 그의 옆으로 가 술잔을 뺏었다.
"뭐 하는 짓이야?"
"잘난 차재준은 어디로 갔나요? 난 아저씨가 술마시는 거 싫어요."
재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아저씨라는 호칭은 영영 고칠 수 없나보군. 이래저래 날 패배시
키는군."
기운이 빠진 듯한 재준에게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그건 아저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재준씨라고 불러 줄 수도 있고 재
준오빠라고 불러 줄 수도 있죠."
나진은 장난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까닥이며 말했다. 나진은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를 모르고 있었다.
재준이 나진의 엉덩이를 세게 때렸다.
"나쁜 아이는 혼나야 해. 자, 호칭을 바꿔 주실까?"
엉덩이를 양손으로 감싸며 나진이 그를 노려봤다.
"좋아요. 할아버지라고 불러주죠."
재준이 다가왔을 때 그의 큰 체격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나진은 굴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는
도전적으로 올려다 봤다.
"당장 여기서 나가!"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재준이 힘을 다해 명령했지만 나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란 여자는 정말.."
나진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 쥐더니 재준은 참지 못하고 거칠게 입술을 뺏었다. 열정을 주체
할 수 없었다. 재준은 나진의 입술을 내리누르면서 깨물기도 하면서 만족할 때까지 놓아주
지 않았다. 처음에는 당
황해서인지 나진은 저항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재준이 각도를 달리하면서 입술을 마음대로
하자 금방 그의 몸에 바싹 몸을 밀착시키고 그의 뒷목으로 손을 돌려 더듬었다. 부드러우면
서 강한 감촉에 재준의 다른 곳도 만지고 싶어졌다. 나진의 손이 등으로 내려왔다.
재준은 얼른 나진을 뒤로 밀쳐냈다. 그 바람에 뒤에 있던 책장에 부딪혀 나진은 쓰러지고
말았다. 잠잠해졌던 기침이 나오자 부은 입술이 느껴졌다.
"얼른 돌아가서 자. 이런 행동은 애인한테나 하라고."
나진은 재준의 거부에 대해 자존심의 상처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침대로 돌아왔다.
"오늘은 이래저래 우는 일만 생기는 군. 절대로 내일부터는 울지 않을거야."
나진은 부은 입술을 어루만졌다. 아직 쾌감과 설레임이 남아 있었다. 2년 전의 재준이라면
이렇게 정열적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차갑거나 미지근한 태도였다. 무엇이 그에게 뜨거
움을 알려준 것일까.
아마 그 동안 사귀었던 여자들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자신은 재준에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이 쓰라렸다.
다음 날 아침 나진은 일찍 일어났다. 오후부터 잤던 터라 새벽에 잠이 들었어도 금방 눈이
떠졌다. 망설일 것도 없이 일어나 재준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만족한 웃음
을 지었다.
옷을 갈아입고는 서둘러 세수를 하고 멋대로 욕실 서랍장에서 새 칫솔을 꺼내 양치질을 했
다. 제법 이 집을 책임지다 보니 자기 집처럼 친숙했다.
나진은 주방으로 들어가 보고는 놀라서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김선호란 사람은 어떠한
말로도 표현 할 수 없는 인물이다. 반짝이는 주방에 가지런한 접시와 그릇들. 주방세제냄새
대신 달콤한 향기가 감돌았다. 재준도 보고 질렸는지 이전처럼 엉망으로 해 놓지 못했다.
전기 밥솥을 열어보니 손도 대지 않은 밥이 김을 피웠다. 나진이 사온 것은 그냥 흰쌀인데
선호가 잡곡을 사가지고 왔는지 밥에 섞여 있었다.
무를 채 썰어 오이랑 버무린 것은 매콤 새콤했다. 요리학원이라도 다녔는지 보통 솜씨가 아
니었다.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이거 보세요. 김비서님은 대단해요. 마법을 부린 것 같아요."
나진의 말에 재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그 동안이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여겼지. 그 친구, 맥가이버인가? 그래도 한가지 정
도는 못하는 게 있을텐데."
재준의 말투는 어쩐지 선호를 질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진은 그의 얼굴을 살폈지만 조금
도 그런 내색은 없었다.
나진은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은 자신이다. 물론 요즘 세상에 남자들의 솜씨가
더 좋다는 말도 있지만 집안일 경력만으로도 질 수 없었다. 서둘러 식탁을 닦고 국을 올려
놓고 가스불을 켰다. 국은 무국인데 이것도 선호가 만든 것이다.
"지금 뭐하는 거야?"
"아침 식사 준비요."
"그건 알아. 근데 왜 하는건데?"
나진이 멈추지 않고 움직이자 재준이 앞을 막아섰다.
"바보 같아요."
나진이 다가서자 재준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나진은 그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키스사건
으로 그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뿐만 아니라 뒤로 밀쳐져 부딪혔던 곳이 멍이 들었는지 쑤셔왔다. 이제 그 앙갚음을 할 때
가 온 것이다.
나진은 재빨리 그의 앞으로 다가가 두 팔로 벽을 짚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영화에
서 많이 본 장면이었다. 다만 지금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왜,왜 이러는 거야?"
재준은 짜증이나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당황하고 있는 자신을 숨기지는 못했다.
"사과하세요."
"뭘?"
"시치미를 떼는군요. 나한테 달려들었잖아요. 그리고 갑자기 미는 바람에 등에 멍까지 생겼
다구요."
"달려들어? 달려든 쪽은 너야."
재준은 기가막히다는 듯이 쳐다봤다. 나진은 뾰루둥한 얼굴로 단단히 벼르고 있음을 암시했
다.
"오히려 내가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보여줄까? 어젯밤에 너한테 맞아서 생긴 멍이 한두 군
데가 아니야."
재준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었다. 파란 것은 아니지만 노란색 멍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나진은 미안함에 고개를 떨구고 손을 내렸다. 동시에 새새엄마에 대한 일도 떠올랐다.
"할 말 없지? 그럼 이제 미안하다고 말 해 주실까?"
재준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얹고 나진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빨리 말해. 그래야 얼른 집으로 데려다 주지."
"그럼. 말 안하면 집에 데려다 주지 않을건가요?"
나진의 불안한 목소리에 재준은 만족해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 집으로 가기 싫었거든요. 거긴 이제 내 집이 아니예요. 아마 훨씬 오래전부터 아니
었을 거예요."
재준은 황당한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예상불능의 나진 본모습이 다시 나왔다. 집으로 가지 않겠다면 여기서 눌러 살겠다는 말이
나 다름없었다. 남자 혼자 있는 집에 와서 산다면 동거이다. 도대체 나진이 무슨 생각을 하
고 있는 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김비서를 생각하면 나진의 이런 태도는 순진함이 아니라
그를 모욕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순진함에서 나오는 말이라 할지라도 재준, 자신을 모욕
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전혀 남자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서로 불꽃이 튀었고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도 나진은 상황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
"나랑 같이 살겠다고?"
"네에?"
나진은 놀란 눈으로 재준을 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저씨, 아니 재준씨는 농담도 할 줄 아세요?"
흘겨보는 재준의 눈 때문에 얼른 호칭을 바꾼 나진은 어이없었다.
"집에 가기 싫다고 말했지 여기서 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안심하는군요? 집에는 안
들어가요. 어딘가 살만한 곳이 있을거예요."
"그러지 마. 내년 봄이면 집에서 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게 되잖아."
나진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랬던 것이다. 새새엄마는 내년 봄에 재혼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 큰 딸을 데리고 살지 못할 것이다. 가슴이 저려왔다.
안색이 나빠진 나진을 위로하는 듯이 재준이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기침은 완전히 멈춘거야? 이제는 여기와서 일하지 않아도 돼. 내가 아버지께 말할게. 계약
서를 받아다 줄테니...."
"아직도 모르는군요. 계약서는 이미 제 수중에 있습니다."
나진은 그의 놀라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진은 굉장한 요리를 만들 것처럼 초록색의 에이프런을 두르고 반찬을 꺼내 뚜껑을 열고
국을 떴다.
"혼자서 잘 먹어. 다 먹는데로 집에 데려다 주겠어."
나진이 달려와서 뭐라고 말하려 하지 재준은 단호하게 잘랐다.
"입다물고 내가 시키는 데로 해."
"좋아요. 대신 같이 밥먹는 거예요."
나진의 목소리에 애교가 넘쳤다. 재준으로서는 뿌리치기 힘든 사탄의 유혹이었다. 그는 김선
호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의 얼굴이 떠오르면 곧 그의 여자가 될 나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김선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재준 오빠. 같이 먹을거죠?"
이보다 더한 달콤함은 없을 것이다. 재준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지 않는 사슬이 재준을 휘감아 나진이 시키는 대로 따르게 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을 순 없다. 철부지 어린 여자에게 끌려 다니는 것은 자신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렇게 되면 억지로 나진을 가져 김선호에게서 뺏게 될 것이다.
나진은 재준의 밥을 떠와 손에 숟가락을 쥐어 줬다.
"선호씨는 음식도 잘 만드죠? 입맛에 딱 맞아요. 재준씨는 밥이나 국보다도 기름기가 넘치
는 음식을 좋아하죠? 그런 것보다는 밥이 영양가가 많아요."
재준의 눈썹은 나진의 말소리에 따라 꿈틀거렸다.
그는 최대한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계약서를 받았어? 그럼, 나 좀 볼 수 있을까? 오늘 점심 시간 때 회사로 와 주면, 아
니, 내가 집앞으로 올게. 잠깐만 확인 할 게 있어서 그래."
나진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끄덕였다. 재준이 이미 돌려 받은 계약서를 가지고 무슨
짓을 하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재준은 밥이 맛있다기 보다는 빨리 이 순간을 넘기기 위해 입에다 마구 쑤셔 넣었다.
"천천히 드세요. 이렇게 있으니까 마치 신혼부부 같아요."
나진은 싱긋 웃었다.
재준의 굳은 얼굴만 아니라면 완벽한 신혼 분위기였다. 나진은 재준이 깨끗이 밥그릇을 비
우자 상으로 뺨에 입을 맞추어 줬다. 그는 신경질을 부리며 화를 냈지만 34살의 남자치고는
귀엽다는 생각이 들 뿐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재준과 강렬한 키스를 나눈 후 그를 보기
만 해도 입을 맞추고 싶었다. 뺨이든 이마든 상관없이 뽀뽀세례를 쏟아붓고 싶은데 재준은
조금도 그렇지 않은 듯 보였다.
나진은 약속대로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들어가자 마자 새새엄마의 초췌한 얼굴이 나
타났다. 잘못했다는 말이 나오기 일보직전이었지만 나무라는 소리를 듣자 귀를 막고는 방으
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새 새엄마는 몇 번 방문을 두드렸지만 나진이 열지 않자 포기했는지 잠잠해 졌다.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지 않는 걸로 보아 재준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집에서 자는 것도 허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또 두 사람이 사전에 협의해
서 결정한 것이다. 나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재준에 대한 화였다. 한번쯤은 충동적으로
행동해 줄 수도 있을 텐데, 허락을 받고 재워 주다니 역시 2년전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키
스도 정해져 있었던 일일 것이다.
다시 2년전의 무례한 결혼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새새엄마가 결혼하면 누구도
자신을 보살펴 줄 사람이 없다. 석준이야 새새엄마의 아이이니 데려갈테지만 24살이나 된 딸
은 곤란하다.
또 다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정리가 되지 않는 생각들이 맴돌 뿐이었다.
재준은 두통을 참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사장님."
귀여운 목소리의 인사를 받으며 지나가던 재준은 비어있는 김선호의 자리를 응시했다.
"모레 돌아옵니다."
재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안녕. 오빠."
재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인상을 쓰고 있는 재준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봤다.
"어젯밤은 즐거웠어?"
큰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는 재준이 가방을 책상 위로 던졌다.
"빌어먹을. 비서를 자르던지 해야지. 강도가 와 있다고 해도 말하지 않을 작정인가."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 꾸미지 않은 오빠의 표정을 보고 싶었거든. 즐거운 밤은 아니었
나 보네."
재준이 단걸음에 달려와 재선의 어깨를 흔들었다.
"나진을 말하는 거라면 내 대답은 '그래'야. 무슨 짓을 꾸민거야? 약이라도 먹였어?"
재선은 억지로 재준의 손을 치우면서 옆으로 비켜섰다.
"역시. 그랬던 거야."
만족스럽게 웃더니 재선이 책상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잘난 차재준이 정나진이라는 어린 여자한테 빠지다니. 그럼 어제 가졌어야지. 너무 사랑해
서 지켜주고 싶었어?"
재준은 올라가려는 손을 주먹을 쥔 채 참고 있었다.
재선의 말은 바늘처럼 쩔러 댔다. 칼이라면 한 번의 아픔으로 끝나겠지만 동생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나진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내년 봄이면 결혼하게 될거야."
숨이 막히는 지 재준은 깔끔하게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렀다.
"김선호씨랑 말이지? 그래서 일부러 어젯밤에 오빠 품에 나진을 넘긴거야. 오빠는 바보야.
자신의 감정에도 솔직하지 못하고 하나뿐인 여동생도 나몰라라하고 있잖아."
재선의 눈에 고인 물기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직도 포기 못했니? 김비서랑 너랑은 물과 기름이야."
"그건 오빠 생각일 뿐이야. 오빠가 정나진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면 내 마음을 알거야. 그
사람은 나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아. 정말 나진이랑 결혼할까?"
눈물이 떨어졌다.
재준은 한숨을 쉬며 재선을 안았다. 새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독일 지사 연구원으로 있
던 김선호와 알게 되면서 재선은 줄곧 그를 잊지 못했다. 최근 그를 1년 반동안 독일로 보
낸 것은 재선의 마음을 확실하게 정리시켜 주고 싶어서 였다. 그런데 오히려 역효과만 일으
킨 셈이었다. 재선은 더욱 깊이 그에게 빠져 버렸다. 재선의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는 남자에
대한 오기라고 여겼지만 지금의 재선을 보니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나진 뿐
만 아니라 예측이 불가능한 여자가 한 사람 더 늘었다. 두 사람 다 재준의 마음을 쑤겨대고
있었다.
나진은 석준이의 아침을 챙겨주고 새새엄마가 나가는 대도 냉담하게 행동했다. 새새엄마는 여러
번 말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모른 척 했다. 지금은 어떠한 변명도 듣고 싶지 않다. 석
준이도 나진의 행동을
눈치채고는 옆집누나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얌전하게 굴었다.
천사와 악마가 나진의 마음속에서 외치고 있었다. 두 사람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 지나쳤다
고 후회하면서 막상 얼굴을 대하면 냉담하게 굴었다.
마음은 완전히 지옥이었다. 기침은 사라졌지만 머리가 울리고 열이 솟았다. 마음의 짐까지
겹쳐져 불안함이 밀려와 가슴을 짓눌렀다.
떠오르는 것은 재준에게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를 충동질하고 싶었다. 아무런 준
비도 되어 있지 않고 새새엄마와도 상관없이 자신을 대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진은 눈치를 보면서 어깨가 쳐져 학교로 향하는 석준의 뒷모습을 보면서 더더욱 그런 생
각을 하게 되었다.
내키지 않은 설거지를 끝마치고 청소기를 돌리면서도 눈은 시계로 향했다. 오늘따라 시간이
늦게 가고 있었다. 나진은 목욕을 하고 화장대 앞에 서서 새새엄마의 립스틱을 조심스럽게 살
폈다. 나이는 숙녀이지만 변변한 화장품 하나 없었다. 언젠가 새새엄마가 화장품을 사라고 권
했지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비싼 가격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지금은 그때의 일이 후회가 되었다.
잡지책에서 읽은 바로는 여자의 붉은 입술이 관능적으로 보인다고 했다. 나진은 새새엄마의
붉은색 립스틱을 발랐다. 처음 바르는 거라서 상당히 거북해 보이고 진해서인지 입술이 아
팠다.
거울속의 자신을 이리저리 비쳐보면서 지울까 생각했지만 그냥 있기로 했다. 재준을 놀라게
하는 데에는 그만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옷장을 뒤지고 뒤져 무릎위로 올라가는 스커트를 찾아냈다. 검은색인데 언제부터 있던 건지
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체형이 변하지 않아 잘 맞았다.
위에는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는 윗단추를 풀었다. 추운 날을 생각하고는 새새엄마의 쇼올을
꺼내 둘렀다. 완전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입었는데 달라진 옷차림부
터 재준의 눈길을 잡을 거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흥분이 되었다.
바쁘게 움직이면서 열과 함께 땀이 나고 머리가 더욱 울렸지만 나진은 상관하지 않고 밖으
로 나가 기다리기로 했다. 나뭇잎은 아직 다 떨어지지 않았다. 붉고 노란색으로 화려하게 보
였다. 나진은 그것들 중 하나를 따서 손가락으로 빙글 돌렸다.
"차라리 그때 결혼할걸."
처음으로 후회의 말이 나왔다.
결혼했더라면 지금쯤 아이가 한 명은 있을 것이고, 새새엄마의 재혼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축
하의 말을 해 줬을 것이다.
오늘 아침만 해도 또다시 자신도 모르게 결혼준비가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났지만 지금은 그래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운데 나와 있었어?"
나진의 가슴이 떨려왔다. 재준의 목소리가 감미롭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다니 자신이 바
보로 여겨졌다.
나진은 천천히 그를 놀래 킬 순간을 기다리며 돌아섰다.
"이게 뭐야! 입술에다 무슨 장난을 한 거야?"
확실히 재준은 놀라긴 놀랐다. 다만 나진이 원하던 놀라움은 아니였다. 나진은 실망과 창피
함으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재준은 가볍게 나진의 턱을 들어올렸다. 재준의 찡그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안주머
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나진의 입술을 문질렀다.
"그만둬요. 빨간 립스틱 좀 바른 게 뭐가 어때요? 24살이면 어른이예요. 아이도 낳을 수 있
고요."
스스로가 생각해도 뒷말은 이상했다. 여기서 아이는 전혀 상관없는 대목이었다.
"그런가? 마음대로 해. 하지만 이미 립스틱은 번져서 엉망이 되었는걸. 한가지 더 알려 주자
면 립스틱만 아니었으면 격렬한 키스를 퍼붓었을지도 모르지."
나진은 속으로 립스틱에 대한 욕을 퍼부었다.
재준은 차문을 열어 주었다. 그가 자신을 데리고 어디론가 갈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시동
을 걸지 않은 채 마주했다.
"계약서는?"
나진은 계약서를 꺼내 재준에게 내밀었다.
재준은 낚아채듯이 계약서를 잡고는 맞는 것인지 살폈다. 이어 그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 올
랐다.
나진은 그의 웃음에 무서움을 느꼈다.
"좋아."
재준은 만족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접어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너무 자연스러운 행
동이여서 나진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어리석은 정나진양. 보시다시피 계약서는 제 손안에 있습니다. 진작에 이걸 찢어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동정 어린 표정이지만 눈은 승리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 내가 패권을 쥐게 되었군."
"이리 줘요. 아저씨한테 말할 거예요."
나진이 몸을 돌려 그의 주머니 쪽으로 손을 뻗쳤다. 재준은 피하면서 나진의 손목을 붙들었
다.
"마음대로 해. 아버지도 나한테서 이걸 뺏지는 못할거야. 시키는 대로만 하면 내년 봄에 돌
려줄게."
"신사인 줄 알았는데 실망이예요. 아이를 10명 정도 낳아드릴까요?"
심술궂게 말하고 있는 나진의 입술로 재준의 시선이 쏠렸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내년 봄은 멀지 않았거든."
나진은 물끄러미 재준을 응시했다. 여유있는 말투와 농담은 예전의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었다.
"열이 나는 거야? 언제쯤 병원에 가 볼 생각이야?"
나진의 이마를 짚으면서 재준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뭘 시킬 건데요?"
재준의 손길에 취한 듯, 아니면 정말 열이 나서 정신이 없는지 목소리가 몽롱해졌다.
"오늘부터 집에 얌전히 있는거야. 내 아파트에는 오지 마. 이것만 잘 지켜주면 계약서를 돌
려주겠어. 원한다면 보는 앞에서 찢어 줄 수도 있지."
누군가가 뒷통수를 후려갈기는 것 같았다. 여전히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하지 않으면 직
성이 풀리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의 걱정과 간섭이 귀찮고 나진이 들락거리는 것이 싫은데
말을 듣지 않으니까 이런 비열한 방법을 쓰고 있었다.
나진의 입술이 떨렸다.
"내년 봄이면 결혼식 때?"
나진은 새새엄마의 결혼식을 떠올려 봤다. 암담해 졌다.
재준은 그렇다고 말하며 덧붙였다.
"결혼 선물이지."
완벽한 선물이 될 것이다. 재혼을 축하하면서 새새엄마의 앞에서 돈을 갚아도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계약서는 조각이 되어 휘날릴 것이다.
"편리하군요. 그깟 종이조각 하나 가지고 공놀이 하듯 나를 이리치고 저리치다니."
나진은 힘없이 차문을 열고 내렸다. 숨이 차 올라 헐떡였다. 열 때문이었다. 뒤에서 재준이
부축하기 위해 허리에 손을 댔다.
"내버려 둬요. 차재준씨. 당신이라는 사람은 날 비참하게 만들어."
냉혹하게 손을 뿌리치고는 천근 만근 되는 다리를 끌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재준은 발로 차를 힘껏 찼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얌전히 집에서 요양하며 편안하게 있다 시집가면 계약서를 넘겨주겠다
는 말은 전혀 상대를 비참하게 만드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비참했다. 이런 수법을
써서라도 나진에게서 벗어나려는 피나는 노력을 하는 건데 나진이 왜 이러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날부터 나진은 앓아 누웠다. 열이 오르내리는 바람에 오한이 나다가도 더워서 이불을 차
버렸다. 새새엄마는 내내 옆에서 물을 먹여주거나 이마와 팔, 다리를 젖신 수건으로 맛사지 해
주었다. 나진은 괜찮다
고 우겨대면서 새새엄마를 밀어냈다. 결국 사흘을 버티다가 새새엄마는 참지 못하고 억지로 나
진을 끌고 병원으로 데려갔다. 진단결과는 감기와 과로로 나왔다.
과로라는 진단이 나올 만큼 일한 것은 없지만 새새엄마와 재준의 일이 심적 부담으로 작용한
것이다.
나진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새새엄마에게 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아프다는 사실을 알면 현진 아저씨나 재준이 찾아
올 것이다. 아직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으나 나진은 한사코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새엄마는
입원하면 새엄마나 석준이를 도와주는 건데 말을 듣지 않는다며 신경질을 부렸다. 나진은 할
말이 없었다. 단지 푹 쉬면 낳는데 돈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새엄마는 이런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불편하게 만든다며 화를 내는 것이다.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천장을 보고
누운 나진은 처음으로 친새엄마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어린 딸과 남편을 보살피지 못하고 누워서 시중을 들게 할 수밖에 없던 새엄마였다. 차라리
병원에 있었더라면 하는 마음도 자주 들었는데 그때의 새엄마는 아빠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
을 것이다. 아빠가 출판사를 하면서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경제적인 도움은 못 될 망
정 돈을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을 새엄마를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졌다.
석준이는 아픈 옆집누나를 위해 다른 곳에 들리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손에는 옆집누나를
위한답시고 불량식품을 사가지고 와 조심스럽게 옆집누나 앞에 내려놓았다.
"이거 맛있어. 빨리 먹고 나아야 해."
사랑스러운 동생을 보면서 한 순간이나마 미워했던 것을 미안하게 여겼다.
새새엄마는 출근전에는 반드시 나진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갔고 퇴근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전
처럼 늦는 일 없이 일찍 들어왔다. 바깥일을 하느라 피곤할 텐데도 손수 죽을 끓여 줬고 점
심시간에도 틈을 내어 나진을 돌봐줬다.
나진은 일부러 냉담하게 반응했다. 새새엄마가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한 보상으로 잘 해주고 있
다고 믿고 있는 데다가 한편으로는 새새엄마를 고생시키는 자신에 대한 미움이 작용한 것이
다.
"나진아. 우리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니?"
새새엄마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나진은 피하고 싶기만 할 뿐이었다. 어떠한 이야기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너도 듣고 싶은 말이 있을거야. 그 동안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네가 어떻게 나올
지가 걱정이었단다."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요. 새엄마에게 애인이 있고 그 사람이랑 결혼하는
게 확실하잖아요. 결국 난 짐밖에 되지 않는 존재예요. 차라리 세상에서 없어져버리는 게 좋
았을 것을."
뱉어 놓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있다면 지금 한 말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쏟아져 나
온 말은 어쩔 수 없다. 스스로가 말해 놓고도 섬뜩했다.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내가 밉니?"
새새엄마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시는 새새엄마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나진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 죽여
울었다. 자꾸 마음과 어긋나는 말만 튀어 나와 새새엄마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나진은 새새엄마
의 등을 껴안았다.
"새엄마.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요?"
"잘 모르겠어. 만난 건 2년 정도 된단다. 골프용품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데 출판협회에도 관
여를 하고 있어서 알게 된 거야. 처음엔 안면정도 있는 사람일 뿐 이었어. 그런데 점심식사
를 계기로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지. 나도 모르겠어.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는. 난 너무 지쳤
단다. 출판사를 운영하는게 나한테는 맞지 않아. 누군가에게 의지하면서 보호받고 싶어. 난
새엄마이기 전에 여자란다. 네가 나를 보고 도망친 날, 실은 그 사람이 원해서 다 같이 저녁을
먹을 작정이었어. 전화를 하니 너가 없더구나. 다른 날로 약속을 정해야 했는데 어쩜 잘된일
이라고 생각했어. 네가 반대할 게 분명한데 석준이마저 그러면 어려워질테니까. 그래서 우선
은 석준이만이라도 설득할 작정이었단다. 그러면 너를 설득하는 것도 쉬울거라는 생각에서.
미안하다. 너를 배려했어야 했는데. 언제나 너를 어린아이라고 생각했어. 어른으로서의 기분
은 고려하지 못했단다."
새새엄마의 얼굴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진은 견딜 수 없었다.
"아니예요. 새엄마가 힘들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난 아직 철부지인가봐. 새엄마의 결혼엔 대
찬성이예요. 봄이면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출판사는 어떻게 하실거예요?"
"출판사는 정리해서 차현진씨에게 드릴 생각이란다. 얼마가 모자라겠지만 우선은 그 돈이라
도 갚으면 바보같은 계약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물론 아저씨야 돈을 받지도 않고 계
약서를 없애겠지만, 난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단다. 허락해 주겠니? 출판사에 대한 권리는
나보다도 너한테 있으니."
역시 그랬다. 새새엄마는 나진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불순한 생각들은 스스로의 함정이었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믿음을 가졌어야 했
다.
"출판사는 새엄마 것이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고맙다. 그런데 봄이라니?"
"재준씨한테 들었어요. 내년 봄에 결혼을 한다고."
새새엄마는 기가막혀서 나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뭐? 결혼을 한다면 아직 멀었어. 우선 석준이랑 너랑 익숙해 진 다음에 생각해 볼 문제이
니까. 내년 봄이라니, 말도 안돼. 매거진 계약도 내년까지는 지속되는데, 재준군은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다니?"
재준의 말이나 행동으로 봐서 그는 분명히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확실한 정보였을
텐데 정작 당사자의 말은 다른 것이다.
재준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어쩌면 나진을 괴롭히기 위해 꾸며낸
말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까지 비열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계약서를 낚아채서 다시 위협하는
것을 보면 가능한 이야기 같기도 했다. 나진은 아직도 차재준이라는 남자를 확실히 알 지
못했다.
나진은 자신이 재준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재준은 연락은커녕 아
프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새새엄마도 재준을 만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부탁한 말
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기대는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 더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약을 받아오고 나서는 힘이 없는 것 빼고는 감기 증상은
거의 사라졌다.
아직은 움직이지 말고 쉬어야 한다며 집안 일을 못하게 말렸지만 나진은 오후의 따뜻한 햇
빛이 쏟아져 들어오면 일어나 세탁을 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예전과 다른 것은 기계적인 행
동이라는 것이다. 중얼거려 봐도 재미가 없었고 특별히 중얼거릴 말도 없었다.
책상 서랍을 여니 작은 쪽지가 나왔다. 나진은 무의식적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네, 김선호입니다."
"선호씨. 저 나진이예요."
"알고 있습니다. 목소리에 기운이 없군요."
"저 아팠어요."
명랑하게 웃으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떨리면서 우는소리가 나왔다.
선호는 조용히 있었다.
"그냥 누군가랑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좀 더 솔직해지자면 혼자 아무말이나 떠들어 대고 싶
은 거예요.
혼자서 벽을 보고 떠들어댈 수도 있지만 그러면 슬퍼질 것 같아서요. 지금 바쁘세요?"
"10동안이라면 인간벽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막상 떠들어대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할 말은 많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할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판단이 서질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먼저 말할까요? 사장님은 하루종일 인상을 쓰고 있고 사장님의 여동생은 일을 핑계로
수시로 들락거리며 사장님의 신경을 돋우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듣
고 싶지 않아도 말들이 귀에 쏙쏙 들어오더군요. 게다가 제 이름까지 들려오니 관심있게 들
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진씨만이 저를 곤란한 입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제가요?"
"계약서 운운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자세한 내막
은 모르겠지만 사장님의 아버님으로부터 차재준 사장님의 생활을 책임지기로 약속하셨다면
계약과는 상관없이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닐까요? 적어도 정나진씨가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나진은 멍해졌다.
선호는 어디까지 내용을 알고 있는 걸까?
계약서에 대한 내용을 들었다면 담보물에 대한 것도 알 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의
말에는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고 했다. 일단 나진의 자존심은 지켜지는 것이다. 현진 아저씨
의 부탁은 재선언니의 말로 알았을 것이다. 남매가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
만 나진과 선호의 이름이 오간 것은 확실했다.
"재선 언니는 선호씨를 좋아하고 있어요."
어쩐지 말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제3자에게 듣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일
것이다.
보지 않아도 선호의 얼굴이 굳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선호는 다른 말을 했다.
"사장님도 이젠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정나진씨라면 잘 해낼거라고 믿습니다만."
나진은 긴 한숨을 쉬었다.
"재준씨는 어린아이가 아니예요. 그 사람에 비하면 저야말로 어린아이죠. 게다가 저를 싫어
하고 있는데 그러면 보살피는 게 아니라 고문을 가하는 결과가 될 걸요."
"단순히 언성이 높아져서 싸우는 소리가 아무에게나 들리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
닙니다. 나진씨가 있으면 사장님은 안정이 되어서 일에만 몰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재선
씨가 쳐들어와 사장님의 신경을 긁는 일도 없을 테구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재선은 이번 일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자신의 오빠를 못살게 굴고 있
는 것일까.
싸우면서 선호의 이름까지 들먹거리고 있다니 정말 이상했다.
"재선언니가 싫으세요? 언니 성격이 활달하고 적극적이다 보니 지나치게 구는 점도 있을 거
예요. 하지만..."
"재선씨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제게 있어 차재선씨는 사장님의 여동생일 뿐입니
다. 10분을 넘겼군요. 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질 겁니다. 나진씨, 사장님에 대
해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진씨과 사장님, 모두를 도울 수 있을 겁니다."
아리송한 말을 남기고 선호와의 통화를 끝냈다.
머그잔에 꿀유자를 몇 수픈 넣고 가스불에 물을 올려놓고 선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제는 결단이 필요했다. 계약서를 빌미로 한 번 휘둘렸으면 된 것이다. 두 번 다시 재준의
농간에 놀아 날 수 없다. 그가 싫어한다면 더욱 해야만 한다. 나진은 재준의 앞에서 옷을 벗
었던 일을 떠올렸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고 수치스러운 자국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 대한 의지를 굳히기 위해서였다.
선호 말대로 이번 일은 약속일 뿐이고 그것도 현진 아저씨와의 일이다. 불끈 힘이 솟았다.
차재준이 싫어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 그래서 그가 나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제발 계약서를 가져가 달라고 사정하게 만들 것이다.
나진은 망설일 것도 없이 당장에 일어섰다.
몸이 다 낳기는 했어도 섣불리 무리했다가는 다시 아플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나진은 재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리고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집에서 있었던 일, 바로 나진이 재준의 몸에 닿으면 그는 노골적으로 움추러들고 싫은
기색을 나타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나진은 당장에 공격 준비를 갖추었다.
재준의 두통은 나날이 심해졌다. 골치아픈 정나진을 쫓아냈는데 이번에는 예상불능의 여인
재선이 들쑤시고 있었다.
재선은 독일지사에서 일로 파견나와 놓고는 일을 하기는커녕 그것을 빌미로 들락거리며 재
준을 비난하거나 울기도 하는 등 완전한 히스테릭 증상을 보였다. 어제는 아버지한테서까지
전화가 걸려왔었다.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다며 냉혈동물이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언
제나 아버지는 무조건 재선의 편을 들었다. 이번 일에 대해서도 아버지가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재선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 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진의 일에 대해서는
시치미를 떼고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나진과의 일에 대해서는 재선도 의리를 지켜 입을 다
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동생으로 생각되는 점 한가지는 있는 셈이었다. 만약 재선이 자
신과 나진과의 일을 아버지에게 알렸다면 재준은 당장에 재선의 머리를 깎아 절로 들여보냈
을 것이다.
재선이 찾아와서 늘어놓는 귀아픈 이야기는 늘 똑같은 것이었다.
"오빠는 멍청해. 오빠는 바보야."
이제는 하도 들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일종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시작은 이런 식이었고 끝은 언제나 눈물의 외침이었다.
"날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는 거지."
중간의 내용은 순서가 정해져 있다.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분명 나진도 오빠를 사랑하
고 있다는 둥의 이야기와 함께 사랑은 쟁취라는 말까지 써 가며 조금도 재준을 위한 이야기
가 아니라 자기 쪽으로 유리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이었다.
"선호씨가 나진을 사랑한다고? 웃기는 소리야. 그냥 동생처럼 생각하는 거지."
처음에는 재준도 재선에게 맞서 호통을 치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했다.
그래도 고집불통 여동생은 소용이 없었다. 당장에 김선호를 품안에 안겨주지 않으면 숨이
넘어갈 것처럼 굴지만 재준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때로는 재선이 이성을 잃었는지
목소리를 낮추어 나진을 억지로 가지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다른 말은 다 참을 수 있어도
그런 말을 하는 동생의 얼굴을 보면 김선호가 재선이랑 결혼하면 머지않아 죽고 말거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밉살스럽게 보여 하마터면 그 말이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가끔은 재
선이 샌드백으로 만든 인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랬다면 실컷 때려줬을
것이다.
재선이 아무리 재준에게 말해도 소용없는 짓이다.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변하게 할 수 있
다면 재준은 상사로서 김선호에게 재선을 사랑하도록 명령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진까
지 얻을 것이다.
언제쯤 재선이 이런 것을 깨달을지 모르겠지만 될 수 있는 한 빨리 깨달아주길 바랄 뿐이
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는게 어떻습니까?'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얼굴로 선호가 말했다.
재준의 시선은 책상위에 있는 달력으로 향했다.
"토요일이군. 그래야 겠어. 일이 피곤하게 만드는게 아니라 여자라는 존재가 피곤하게 만들
어."
재준은 뒷목을 맛사지 했다.
"정나진씨가 병으로 누워있었던 것은 알고 계십니까?"
용수철이라도 달린 듯 순간적으로 재준이 의자에서 튕겨 일어섰다.
"무슨 병인데?"
선호는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제서야 재준은 자리에 앉으며 침착을 가장하려고 애를
썼다.
"글쎄요."
그것이 선호의 대답이었다. 재준은 처음으로 그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었다. 보기에도 일부러 뜸을 들이고 있음이 명백했다. 자신의 여자한테 관심을 갖지 말라는
일종의 무언의 협박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든 주도권을 뺏기는 것을 싫어하는 재준
이었다.
다시는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으리라 단단히 마음을 먹고 지금 받은 일격에 대한 반격
을 준비했다.
재준은 나진의 상태가 어느정도인지 알고 싶어서 몸이 달았지만 느긋하게 가죽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뒷머리를 두 팔에 기댔다.
"내 동생도 병에 걸렸지. 그것도 지독하게 말이야. 나진양의 병뿐만 아니라 재선이의 병에도
관심을 가져보는 게 어떤가?"
"재선씨의 병이라면 시간을 가지고 푹 쉬면 낫는 병입니다. 하지만 나진씨는.."
선호는 끝을 흐렸다. 재준의 가슴으로 차가운 한기가 지나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더 이상 느긋한 척 할 수 없었다.
"김비서는 어떻게 된 사람이야! 사랑하는 여자가 병에 걸렸다는데 별로 걱정하는 것 같지도
않군. 자네야 원래 냉정한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이건 해도해도 너무 하잖아. 나진이는 보이
는 것 자체부터가 약
해. 마음은 더 그렇고. 누군가가 옆에서 돌봐줘야 하는데 이러고 서서 고작 한다는 말이 나
보고 피곤해 보이니 일찍 들어가라고?"
재준은 정신없이 소리쳤다.
나진의 상태를 여지껏 모르고 있던 자신이 저주스럽고 옆에서 나진을 지켜주지 않고 있는
선호가 못마땅했다.
"병원은?"
"입원하지 않았습니다. 다 소리치셨으면 전 나가보겠습니다. 그런데 댁으로 돌아가실거죠?"
"자네는 나진이에게 가보지 않을 건가?"
"오늘 동생이 귀국합니다. 댁으로 가시는 건 틀림없겠죠?"
두 번 묻지 않는 선호였다. 그런데 재준이 집으로 갈건지에 유달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글세. 재선이가 오기로 해서."
재준의 마음은 벌써 나진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진이 아프다는 것을 알면서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선호의 앞에서는 내색할 수 없었다. 아무리 통이 큰 남자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여자
에게 다른 남자가 집적되고 관심을 가지면 좋아할 리 없다.
선호의 얼굴은 짜증이 나오는 것 같았지만 별다른 말없이 나가버렸다.
재준은 선호를 이해하려고 애쓴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사랑하는 여자가 아프다는데
별관심도 없어 보이는 것이 이상했다. 재선이에게 하는 것처럼 쌀쌀맞은 태도로 나진을 대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고 특별하게 아끼는 것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재준은 선호와 다른 직원들을 먼저 돌려보낸 후 천천히 나왔다. 나진의 집으로 들어가는 못
해도 석준이를 통해서 이야기를 들을 수는 있을 것이다. 워낙 나가놀기를 좋아하는 녀석이
라 잠깐 기다리면 마주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나진은 재준의 아파트로 온지 1시간이 지나고 있지만 아직 그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들
어오는 길에 재선과 부딪혔지만 무슨 말을 나누기도 전에 번개처럼 나타난 선호가 재선을
끌고 나가버렸다. 독일에서 여동생이 돌아오는데 같이 가 주겠느냐는 말에 우울하던 재선의
얼굴이 환하게 개어 옆에 꼭 달라붙어서는 쫓아가 버린 것이다. 선호는 이렇다 할 말은 없
었지만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무엇인가를 암시하
는 듯 했다. 재선을 데리고 나간 것하며 그녀가 여기로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도 모두 나
진을 위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재선이 있어도 크게 불편할 것은 없었다.
나진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쇼파에 앉아 손가락으로 열쇠고리를 빙글 돌리며 아파트 열쇠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 마침 새새엄마가 일찍 돌아와서 허락을 구하고 왔다. 새새엄마는 재준의 집
에 간다는 말에 몹시 놀
라워했지만 순순히 보내줬다. 재준이 일등 신랑감이라는 생각에 변화가 없는 만큼 아직 재
준을 사위로 삼고 싶어하는 마음이 작용한 것이다.
오늘은 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재준의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아무때고 오고 싶으면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날이다. 한편으로는 그의 약점을 이용해서 무례하게 굴지 못
하도록 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를 꼼짝못하게 만드는 것도 그렇지만, 재준이 두려워하는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특히 그
랬다. 나진이 다가가면 겁에 질린 것 같은 얼굴로 변하는 재준은 안아주고 싶을만큼 귀여웠
다.
나진은 나른한 몸을 기지개를 펴면서 잠을 쫓으려고 했다. 재준이 들어오는 순간 놀라는 얼
굴을 봐 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날씨는 포근했고 마음은 넉넉했다. 철저한
소음차단 창문의 위력으로 잠을 방해할 만한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잠깐만 눈을 감고 있어야지.'
한번 감겨진 눈은 자면 안된다는 의지를 굳히기에는 너무 무겁고 달콤했다.
10분정도 흘렀다고 생각했을 때 나진은 눈을 떴다. 환한 햇살, 변함없는 조용함. 잠깐이 분
명하다. 나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을 감기 전에는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눈을
뜨니 어느 새 쇼파에 누워 있었다. 시간도 2시간이나 지나있었다.
먹이를 노리는 차가운 눈빛이 나진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눈을 감기
전과 같다.
"재준씨."
미소가 감돌면서 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을 번쩍들어 그의 목을 감쌌다.
약점을 알고 나니 두려운 것은 없었다. 이제 사정없이 공격하기만 하면 된다.
"무슨 짓이야!"
재준은 거칠게 나진의 팔을 풀러 밀어버렸다. 나진은 중심을 잃고 뒤의 쇼파로 넘어지고 말
았다.
"어째서 여기 있는거야. 아프다면서 집에서 쉬지는 않고."
선호가 이야기를 했을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화가 난 재준이 앞으로 다가올 거라 여겼는데 오히려 그는 뒤로 물러났다.
"석준이 말로는 어디 갔는지 모른다던데 여기로 오다니. 얼마나 더 아파야지 정신 차리겠어.
다른 파출부를 찾을 테니 일을 하고 싶으면 다른데에 가서 알아봐."
"아무일도 하지 않았어요. 석준이를 만났어요? 어디서요?"
재준의 얼굴이 붉어졌다. 분노가 아니라 부끄러움이었다.
나진은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준 것이 기분 좋았다.
"자, 어서 가. 그렇지 않으면 계약서를 돌려봤기 힘들거야."
위협을 가하는 얼굴의 재준은 무서워 보였다. 만약 그가 나진을 부여잡거나 앞으로 다가왔
다면 나진도 무서움에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준은 조금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
고 목소리에는 표정과 달리 힘이 없었다.
"그럼 돌려주지 마세요. 평생 여기를 들락거리면 되는거지."
입을 삐죽거리는 나진은 베짱이 두둑했다.
"정나진. 난 지금 계약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야. 그 동안 아파서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
지."
"마음대로 해요. 돈은 반드시 갚지만 아마 시간이 좀 더 걸릴거예요. 기다리기 싫으면 날 마
음대로 하시던지요. 아무리 계약서로 위협해도 소용없어요. 난 마음의 준비를 끝냈는걸요.
더 이상은 종이조각 때문에 쩔쩔매고 싶지 않아요."
나진은 다리를 꼬고 딴청을 부리며 건방진 말투로 말했다. 될대로 되라는 식의 말로 계약서
에 대한 힘이 없어졌음을 알린 것이다. 나진은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설마하니
재준이 자신을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진이 다가오기만 해도 싫어하는 그이니 말이
다.
재준은 입술을 깨물며 붉어졌다 파래졌다 하는 얼굴로 나진을 쏘아볼 뿐이었다.
점점 더 나진의 사기는 높아만 갔다.
"왜 그러고 서있어요? 계약서를 꺼내 가지고 오시죠. 혹시 아나요. 눈으로 보면 조금은 영향
을 끼칠지도 모르죠."
스스로가 생각해도 건방진 태도였다. 빛을 갚지 못하는 사람중에는  차라리 날 죽여라
는 식의 베짱을 부리는 사람도 있는데 자신이 그 짝이었다. 다른 점은 돈을 꼭 갚을 거라는
것이다. 잘하면 기한내에 갚을 수도 있다. 새새엄마가 재혼하고 출판사를 처분하면 되는 것이
다.
새새엄마는 아직 결혼은 이르다고 말하지만 나진은 빨리 새새엄마에게 안정된 삶을 살도록 해
주고 싶었다.
자신이야 일자리를 알아보든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자취를 해도 될 것이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주먹을 꽉 진 재준의 손이 떨렸다. 그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라 있었다.
"보여 줄 필요도 없지. 정말 뻔뻔스럽게 나오는군. 혼이 나야지만 계약서를 돌려 봤을 때까
지 얌전히 있겠어?"
재준이 나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제서야 나진은 겁이 났지만 물러날 수 없었다. 재준은 말로만 혼내 준다고 하는 거라고
믿었다.
"셋 셀때까지 당장 나가. 그 길로 집에 가서 누워있던지 일을 하던지 마음대로 해."
"하나."
약간 엉덩이가 들썩였지만 나진은 자신의 나약함을 꾸짖었다.
"둘."
나진이 슬며시 재준의 얼굴을 살피는 그의 얼굴에는 괴로움과 곤란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
었다. 그것은 나진에게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결국 재준은 나진에게 지고 말 것이다.
그가 처량맞은 모습으로 계약서를 가져와 제발 가져가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불쌍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싸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셋."
다시 집안은 조용해 졌다.
나진은 말똥한 눈으로 재준을 올려다봤다. 역시 예상대로 그는 나진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재준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나진을 쫓을 방법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진아.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도저히 그 이유를 모르겠거든. 원
하는 걸 말해봐."
나진은 화가 났다. 180도로 태도를 바꿔서 다정하게 묻는 재준의 얼굴을 보니 얼마나 자신
을 싫어하고 있는지 알만했다. 윽박과 협박이 안통하니 자상한 태도로 자존심을 버리면서까
지 요구사항을 들어준다고 하고 있었다. 심술이 났다.
"계약서요. 그리고 재준 아저씨라고 부를 거예요. 마지막으로 현진 아저씨와의 약속을 지키
고 싶어요."
재준의 얼굴은 다정함을 꾸미느라고 이상한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아버지와의 약속이라면?"
"계속 여기와서 청소도 하고 밥도 할거예요. 그리고 가끔은 재준 아저씨랑 같이 먹을 거구
요."
나진은 도전적으로 턱을 치켜올렸다.
"당돌해! 정말 당돌하군. 계약서도 돌려주고 아저씨라고 불러도 좋아. 하지만 다시는 여기
오면 안돼."
"왜요?"
"왜냐고?"
갑자기 재준이 몸을 날려 나진을 쓰러뜨렸다.
"너를 보면 이렇게 하고 싶어지기 때문이지."
재준의 뜨거운 입술이 정신없이 나진의 입술을 탐했다. 전혀 예상못했던 일이라 나진으로서
는 저항이라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재준의 입술이 목으로 내려오면서 거친 손놀림으로 나진의 스웨터를 가슴 위로 올렸을 때서
야 정신이 번쩍 났다.
"그,그만 두세요."
나진은 재준의 가슴을 두 손으로 떠밀었다.
"미안."
재준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 아찔함이 스쳐갔다.
나진은 쇼파에 앉아서 서둘러 올라간 스웨터를 내리고 온 몸이 붉어져서는 바닥을 바라보고
만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키스를 받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다음 행동은 뜻밖이어서
일단 저항한 것이다. 처음이기에 당황스러웠다.
재준은 서재에 들어가서 계약서를 가져야 테이블 위에 던졌다.
"왜 여기 오면 안되는지 알았지? 난 남자야. 그것도 34살이야. 곧 35이 되지만. 너처럼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참을 수 없게 되어버려. 계약서는 가져가도록 해."
나진은 충격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재준이 남자이기는 하지만 진진하게 이성으로서
이런 말을 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재준이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가졌을 거라고는 막
연하게 알고 있지만 늘 신사이고 무뚝뚝한 줄 알았었다. 방금전의 난폭함은 처음으로 남자
를 느끼게 하는 최대의 사건이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여자라도?"
모기만한 소리였다. 남자로서 재준을 느끼면서 알고 싶어진 것이다.
나진의 심장이 팔딱 거렸다.
"그래. 다른 여자였더라면 끝까지 갔겠지."
"난 별로니까,"
나진의 눈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여성으로서 남자에게 모욕을 당한 것이다. 2년전에 몸매가 별로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이정
도로 모욕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지금은 그의 시선과 말 하나 하나가
여자로 자신을 깨우치고 있는 나진에게는 채찍처럼 날아왔다.
"그렇지 않아. 넌 아름다워. 너무 매력적이야. 그러니까.."
재준은 나진의 눈물에 참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줬다.
나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다만 여자로서 재준의 눈에 보여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네가 여기 있으면 위험해져. 우리 두 사람뿐만 아니라 김비서까지."
"김비서? 선호씨요?"
나진은 순진한 얼굴을 들고 재준과 시선을 마주했다.
두 사람과 김선호와는 특별한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 선호의 이름을 듣자 재준은 냉랭한 태
도로 돌아가 버렸다.
"어서 돌아가."
"만약 다시 오면은..?"
"다신 오면 끝까지 가달라는 부탁으로 알겠어."
"하지만 현진 아저씨와의 약속은 지키고 싶어요. 아저씨가 제가 잘 해 주셨는데 전 도움을
드릴 만한 게 없잖아요."
나진은 애원하듯 재준의 팔을 잡았다. 나진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폭발직전이라
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한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폭탄에 불을 붙이는 것이었다.
재준은 나진의 어깨를 힘껏 떠밀어 쇼파에 넘어뜨렸다.
나진은 아까보다 위험한 일이 생길 거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재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진이 애원의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재준은 철저하게 입술로 입을 막아버렸다. 나진은 얼마
간은 힘껏 저항했다. 그에게 여자로 보여진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이런 일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방금 전의 일로 달아 오른 재준에게는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손이 나진의 스웨터 속으로 들어왔을 때 재준은 나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김선호라는 이름은 잊어. 정나진이라는 여자 때문에 난 패배자가 됐어. 그러니 모든 걸 나
한테 맡기면 돼."
재준이 다시 선호를 들먹거리자 이번에야말로 그 이유를 들어야겠다고 여겼다. 나진은 재준
의 손이 가슴을 감싸자 그의 손을 쥐고는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더 이상은 안돼요."
재준은 단호하게 말하는 나진을 무시하고 힘을 사용해 나진의 손을 뿌리쳤다. 재준의 손은
말리는 나진의 손을 피해 밑으로 내려왔다. 나진의 머리에 적색신호가 들어왔다. 막을 수 있
는 방법은 한 가지이다.
"김선호씨를 못 잊어요."
외침이었다. 재준은 상체를 일으켰지만 완전히 나진의 몸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뭐라고 했지?"
"김선호씨를 못 잊는다고 했어요."
흥분과 두려움으로 나진은 숨이 차올라 단숨에 말하고는 헉헉거렸다.
"결혼 할 사이이니 당연하겠지. 하지만 오늘 내가 너를 차지하면 차마 그와 결혼하지 못하
겠지? 비열한 수법이라는 것은 알아. 승리니 패배니 그딴 것도 필요없어. 너를 영원히 갖고
싶어. 결혼은 나랑 해야 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네가 김선호의 품에 안기다니, 생각만해도
죽고 싶어. 걱정하지마. 곧 김선호를 잊게 될거야. 신혼을 즐기고 싶지만 나진이 내 품에 안
기면서도 김선호를 잊지 못한다니 어쩔 수 없지. 어떻게 하든지 아이를 빨리 만들어야 겠
어."
재준이 나진의 바지 지퍼에 손을 댔다. 억양과 표정으로 봐서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깨달
은 나진은 우선 재준을 말려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이런 식으로 억지로 하면 안돼요. 뭔가 오해가 있어요."
재준은 나진의 말을 듣지 않고 나진의 바지를 벗겨냈다.
"난 결혼하지 않는다구요!"
나진은 비명을 질렀다.
"그래. 다 끝나면 선호와는 결혼하지 않겠지. 대신 나랑 하는 거야."
재준은 자신의 넥타이를 푸르고 와이셔츠를 거칠게 벗어 던졌다. 그가 자신의 바지 벨트에
손을 대는 순간 나진은 사태를 악화시키기 전에 막아야만 한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
"숨을 못 쉬겠어요."
나진은 목을 감싸 쥐더니 이내 힘없이 두 팔을 떨어뜨렸다.
"나진아. 왜 그래? 정신 차려."
재준은 얼른 일어나 나진 옆에서 한 손을 잡고 어찌 할 바를 모른 체 당황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감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 몇 번 쓰러진 경험이 있어 그때
의 기억을 되살려 해 봤는데 효과 만점이었다.
나진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재준의 손에 한 손을 겹쳐 잡았다.
"정신이 드는거야? 미안해. 난폭하게 구는게 아니었는데."
"놀랐군요. 미안하지만 난 정신을 잃은 게 아니예요. 재준씨의 행동을 말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재준은 미간을 한껏 찡그리고는 나진을 한 대 치고싶은 것을 참는 듯이 나진의 손을 꽉 쥐
고는 그대로 있었다.
"내가 결혼한다면 적어도 당사자인 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까부터 김선호씨를
들먹이는데 언제부터 제가 선호씨와 결혼하는 사이가 된거죠?"
"그럼 결혼하는 게 아니었어? 하지만 김비서는.."
재준은 눈을 감았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선호씨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그게, 그러니까, 김비서는 내가 멋대로 우겨댄다면서 화를 내더니........마음대로 생각하라
고....그래서."
"그래서 정말로 멋대로 생각한 거군요."
나진은 팔딱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내년 봄에 결혼한다는 말은 비아냥이었군."
재준은 바보처럼 희죽였다. 당시에 들었던 말이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아무것도 아닌 것들
이었다. 바보나 멍청이도 선호의 말에는 진심이 없는 일종의 재준에 대한 비꼼이었던 것이
다. 일순간에 재준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나를 가지고 놀았겠다. 범새끼를 키운 꼴이군. 내 머리꼭대기에 있었다니."
"이보세요. 차재준씨. 새엄마의 결혼식이 내년 봄이라는 말은 대체 뭐죠? 새엄마랑 나랑 합동 결
혼식이라도 올린다고 생각했나요?"
"새어머니가 결혼하셔? 결국 조사장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건가?"
"뭐라구요?"
"정말 김비서랑 결혼하는게 아니었어?"
재준은 확인하듯 나진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그런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나진은 바지를
찾았다.
"또 날 가지고 논거죠? 새새엄마의 결혼과 선호씨까지 끌어들이다니 정말 대단해요. 아이를
만든다구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전 체중부족으로 당장에 아이를 갖는 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군요."
"걱정하지마. 나랑 결혼하면 체중을 금방 늘게 될거야. 지금 보니 많이 말랐군. 난 통통한
여자가 좋은데."
재준은 평가를 하듯 나진의 몸을 봤다.
그의 시선에 나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착각하지 마세요. 2년전이랑 똑같군요. 누가 결혼한데요?"
나진은 돌아서서 바지를 입었다. 금방 일어났던 아슬아슬한 순간이 떠오르면서 재준이 있는
곳에서 옷을 입는다는 사실이 의식되어졌다.
"나랑 결혼하기 싫다는 건가? 그럼 억지로라도 하게 만들어야 겠어."
재준이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계약서로 협박하겠다는 건가요?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걸 아실텐데요."
나진의 생각과는 달리 재준은 계약서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2년 전에 이게 문제가 되었다면 이제 문제 될 것은 없잖아? 나랑 결혼해 주겠어?"
"왜요?"
나진은 진지한 재준의 물음에 수줍어서 고개를 숙였다.
"왜라니? 아직도 모르겠어? 2년 전부터 줄곧 사랑했어. 아니 훨씬 전부터. 내 품안에 쓰러진
날, 그때부터 잊지 못했지."
"하지만 결혼하기 싫다고 한 건 재준씨였어요."
"간단한 이유야. 내가 사랑한 것은 나진의 외모가 아니라 정나진 자체였어. 어디로 튈지 모
르는 정나진이 좋았던 거야. 무조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르면서 잘 보이려고 자신을 숨기
는 여자는 싫었어. 그런데 나진이 그렇게 변해 버린거야. 그래서 어쩌면 원래의 나진은 그런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내 사랑에도 의문을 품었었고. 어리석은 짓이었
어. 언제나 완벽한 승리를 원했기 때문에 감정적인 부분은 무시했던 거야. 벌은 충분히 받았
지. 나진은 내 두려움이었으니까."
"선호씨는 좋은 오빠같은 사람이예요. 그 이상의 감정은 느낀 적이 없어요. 아마 선호씨도
그럴 거예요."
"그럼 대답은 '예스'인 거지?"
나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난폭하게 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요."
"그건 곤란해. 정나진이라는 여자 때문에 좋은 세월 혼자 보내면서 이 나이가 되어 버렸어.
그러니 보상을 받아야지. 그렇지만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는 주지. 결혼식까지 말이야."
재준은 부끄러워하는 나진의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선호씨랑 재선 언니랑 잘 되면 좋을텐데. 재준씨가 도와주면 안될까요?"
마음에 평온함이 밀려오면서 두 사람이 떠올랐다.
선호가 재선을 데리고 동생을 만나러 공항에 간 것을 보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김비서의 은근한 자극이 없었다면 우리 관계가 안 좋아졌거나 길게 끌었을지도 몰라. 하지
만 두 사람 문제에 끼어 들 수는 없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뿐이야."
나진은 몸을 떨면서 침대에 누워 남편의 샤워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남편. 그렇다. 오늘로서
남편이라는 존재가 생긴 것이다. 살며시 열린 창문에는 봄내음이 밤공기를 타고 흘러 들어
왔다. 나진은 이 향기를
기억하고 싶어 창문을 열어 두었다. 신혼여행은 내일로 예정되어 있다. 독일이었다. 현진 아
저씨도 독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같이 가는 것으로 정했다. 아저씨는 신혼부부
와 같이 있는 것이 부담스럽다면서 거절했지만 실은 두 사람을 위한 배려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독일로 정한것은 우선은 아주머니, 즉 시새어머니의 묘지를 방문하고 잠시라도 아저씨
혼자 쓸쓸히 지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재준이 허리에 타월을 두르고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왔다.
"현진 아저씨도 완전히 서울에 나와서 사시면 좋을 텐데. 재선 언니도 없으니 적적하실 거
예요."
"그렇겠지. 아버지는 우리의 신혼을 방해할까 봐 그러시는 거야. 그러니 우리 둘의 설득으로
는 무리야. 아이가 있다면 모를까."
나진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재준 앞에서 잠옷을 입고 누워있는 것이 어색하기만 했
다.
"그대로 있어.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겠지?'
재준은 익살스럽게 말했다.
"재선 언니랑 선호씨, 정말 잘 될까요?"
"난 최선을 다 한거야. 알래스카에 있다보면 너무 추워서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거나, 꽁꽁
얼어붙어서 떨어지지 않게 될지도 모르지."
"선호씨가 알래스카 연구직으로 지원하다니, 그걸 받아들인 본사의 사람들도 너무해요."
"김비서를 위해서는 잘 된거지. 원래 연구직에 있었고 그 일을 좋아했으니. 본사에서 연구직
에 있을 때 김비서의 실력을 인정해서 허락해 준거야. 그렇지 않으면 비서직에서 연구직으
로 옮기는 게 가능하겠어? 재선이가 거기까지 쫓아가다니."
"언니를 발령나게 한 건 재준오빠였어요."
"오빠? 지금은 오빠보다는 여보라는 말이 더 듣고 싶은데."
재준이 나진의 잠옷 단추를 다 끄르자 잠옷 깃이 양옆으로 벌어졌다.
"김비서를 포기하면 계속 독일지사에 있게 해 준다고 했는데 본인이 원했어."
말을 계속하면서 재준은 조심스럽게 나진의 위로 몸을 올렸다.
"선호씨는 어째서 알래스카로 가길 원했을까요? 재선 언니를 피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긴장감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일부러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려고 나진은 자꾸 선호의
일을 꺼냈다.
재준은 부드럽고 감미롭게 나진의 입술을 간지럽히면서 대답해 줬다.
"동생 때문이야. 여동생이 있는데 사고로 걸을 수 없어. 그런데 그 분야의 권위자가 알래스
카에 있다더군. 이제 이런 말은 그만이야. 시간을 끌면 혼내 주겠어."
입술이 겹쳐졌다.
재촉하던 말과는 달리 재준은 서두르지 않고 나진을 애태우면서 나진의 몸을 요구했고, 나
진은 점점 격렬해 지는 움직임에 익숙해지면서 응했다.
사랑의 행위가 끝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재준은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나진에
게는 처음 겪는 일인만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숨을 쉴때마다 작게 떨리는 나
진의 몸을 보면 참을 수가 없었다.
재준은 나진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서 나진이 알고 싶어하던 일을 말해 주었다.
"재선이 김비서의 사랑을 얻으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해. 그런 점에서 난 재선을 포
기시키고 싶지. 새어머니가 차사고로 돌아가신 거 알고 있지? 음주운전을 하던 차와 충돌해서
즉사하셨지. 상대방도 즉사했는데 김비서의 약혼녀였어. 약혼녀 옆에는 여동생이 타고 있었
지. 기적적으로 동생은 골절상만 입었지만 정신적인 충격으로 걸을 수 없게 되어 버렸어."
나진은 놀라서 재준의 손을 잡았다.
"당시에 연구원이었던 김비서를 새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고 재선은 증오했지. 원래는 근무지
가 같아서 나와는 안면이 있었지만 재선은 그날이 처음이었어."
"아니예요. 그 전에 만났어요."
나진은 재선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래? 어쨌든 울면서 김비서에게 달려들어서는 할퀴고 때리고 장난이 아니었어. 고작해야
재선이보다
3살 위인데도 김비서는 다 받아줬지. 자신도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슬픔이 있으면서. 김비서
는 약혼녀의 죄값을 치르듯 연구직을 그만두고 비서직으로 바꾸면서 내 밑으로 들어와 궂은
일은 다 처리해 줬어.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자는 그 사건과 김비서와 연관시켜 생각한 적
이 없었지만 그렇지 않았나 봐. 아버지는 재선에 대해서는 각별해서 모든 투정을 다 받아
주셨지.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 동생하고 나이차도 있는데다가 새어머니의 일로 상심했
으니까. 하지만 정작 재선이가 원하는 게 뭔지 몰랐던 거야. 변덕도 심하고 기분 변화도 심
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놔 뒀는데, 어느 날 퇴근하고 와 보니 그 녀석
이 김비서의 품에 안겨서 울고 있더군. 자기딴에는 눈물을 받아 줄 상대자가 필요했었나 봐.
지금 생각해 보니 장례식에서부터 김비서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내 결혼을 끝으로 속
죄의 길도 끝난거지. 오랫동안 돌보지 않던 동생과 자신을 위해 선택한 거 보면. 괜찮아?"
재준은 쓸데없는 말을 한 게 아닌가 싶어 나진을 응시했다.
나진은 재준의 품에 파고 들었다.
"난 두 사람이 잘 돼서 행복해 질 것 같아요."
"정말?"
"네. 왜냐하면 약혼녀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으니까 이번에는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때인 거
예요. 재선언니라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걸요."
재준은 나진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목에 입술을 눌렀다.
"처음이라서 봐 줬지만 이제부터는 내 식대로야."
나진은 재준의 손길과 입술이 거칠어 아프기도 했지만 처음에서 느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황홀감에 취했다.
"당신은 담보물로서는 가치 측정 불능이야."
"형편 없어서요?"
"그 반대."
재준은 나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격렬하게 끌어안았다.
*********************END*******************************
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민]사랑의담보물.txt
오전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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