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소설은 일반인이 거북해 할수 내용이 담겨 있을수 있습니다. BDSM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되돌아가기를 누르기를 바랍니다.
사랑없이 산다는 것
머큐리 지음
거실에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단정한 어투의 아나운서가 오늘처럼 많이 추운 날씨가 며칠 계속 될 것이라고
안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영은 다림질을 끝낸 와이셔츠를 가지런히 붙박이장의 한쪽에 구겨지지 않게 넣고
쓸쓸하기만 한 12월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결혼 6년에 쓸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정상일까?
사실 하루가 일년 같이 쓸쓸하다 못해 지루해진 날이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 했다. 불타는 신혼은 3개월에 불과했다.
겨우 3개월의 달콤한 날을 위해 그렇게도 극구 반대하시던 시새어머니를 6개월 동안 따라다니며
힘들게 허락을 구한 걸까싶게 짧은 행복이었다.
그나마도 장남이니까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남편의 말에 토씨하나 안 달고 싫은 기색이 역력한 시새어머니의
시집살이를 6개월 동안이나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로 견뎠다. 누군가 그랬다. 사랑의 유효기간이 3개월이라고…
그래서였을까? 이제는 부부생활에도 의무처럼 임하는 남편의 모습에서 주영은 스스로 움츠러드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옆집 미수새엄마는 밖에서 쭉쭉빵빵한 미스들에 둘러싸여 하루를 지내는 남편에게 아직도 '당신이 제일 예뻐'라는 소리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욕심이라고 하면서 웃어댔었다.
화장대의 거울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은 언제부터인가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허옇기만 한 화장기 없는 얼굴과 낡은 운동복을 가리고 있는 작업복인 앞치마도 자신의 얼굴처럼 빛이 바래어 있었다.
그리고 땋아 내린 머리에서 삐져 나온 몇 가닥의 머리카락도 초라한 모습에 한 몫하고 있었다.
처녀 때부터 남편인 흥균은 주영의 긴 생머리를 좋아했다.
하다못해 친구들과 함께 파마라도 하는 날이면 일주일동안 말도 못할 정도로 신경질을 부렸었다.
작은 키와 통통한 몸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동글동글한 얼굴과 이목구비 때문에 파마는 포기한지 오래지만
긴 머리 또한 부담이긴 마찬가지였다. 통통하지만 좁은 어깨 탓에 머리를 기르면 키도 더 작아 보이고 목까지 짧아
보여 바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흥균 말대로 파마도, 컷트도 하지 않은 긴 생머리는 목 뒤쪽에 느슨하게 땋아져
드리워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걸려있는 웨딩사진 속의 자신은 행복으로 활짝 웃고 있는데 지금은 그 사진 속의 두 사람은 없다
. 이젠 서로에 대한 열정은 식어버린 지 오래된 시들한 남편과 아이새엄마만이 있을 뿐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흥균이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시들어가기 시작한 것이…
주영은 조용하기만 한 집안이 갑갑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토요일의 늦은 오후였다.
주5일 근무를 하는 아빠들은 집에서 아이들과 뒹굴다가 자장면을 시켜먹는…
그들의 결혼생활에 유일한 생기인 아들 성준이가 놀이방에서 간 1박2일의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어서 열이 올라 보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고집은 누굴 닮았는지 꼭 눈썰매장에 가야 한다고
우겨서 어쩔 수 없이 약을 챙겨서 보냈다.
어제저녁에 놀이방 선생님이 걸어준 전화에서 성준이의 목소리를 듣고 울컥 눈물이 났더랬다.
흥균은 '이제 성준이도 다 키웠네' 라며 걱정하는 주영에게 무심하게 중얼거렸지만,
나면서부터 입도 짧고 잔병치레가 많아 키우는 동안 주영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건만 그런 마음고생도 모르는 것 같아 서
운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긴… 애 키우는 새엄마의 맘을 시시콜콜히 이해해주는 남편이 어디 있을까 만은…
주영은 갑갑한 마음에 아들이 올 때까지 아파트 단지나 한바퀴 돌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외투를 꺼내 입고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입구에 있는 작은 슈퍼에서 따끈한 캔 커피를 하나 사서들고
놀이방 버스가 서는 마을버스 정류장에 있는 작은 벤치에 앉았다. 가로수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잎사귀들이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고있었다. 토요일은 병원이 쉬는데도 불구하고
흥균은 학회에서 세미나 겸 단합대회 차 어젯밤에 괌으로 떠났다.
함께 마주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시간 마저 없이 서둘러 떠나버린 남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마치 겨울나무처럼
외면당한 것 같아 괜히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앞에 검은 승용차가 한 대 서더니 창문을 내렸다.
「어이, 아줌마! 날도 추운데 왜 이런데서 청승이셔?」
「어… 석준 씨…」
다정한 이웃사촌 석준이었다. 토요일이라 운동하러 다녀오는 지 깔끔한 하얀 폴로 티셔츠 위에 짙은 남색
스웨터차림이었는데 젖어 있는 짧은 머리가 천장을 향해 삐죽삐죽 솟아있었다. 멋들어진 에프터쉐이브 스킨냄새도…
그는 좀 냄새를 피우는 편이었다.
차안에서 담배나 피우지 말 것이지.
그의 차안에는 레몬이니 모과니 방향제까지 냄새 피우는 것은 종류별로 곳곳에 숨어있다.
석준은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가 자신인줄 알고 안도했다가 청승떨던 모습을 들킨 것에 부끄러워하는 변화무쌍한
주영의 얼굴을 보면서 웃었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1박 2일로 캠프에 간 성준이가 돌아오는 날이기도 하고…
그래서 나와있나?
「아들 기다리는 중?」
주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벤치에서 천천히 일어나 다 마신 캔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사이 주영의 입술에서 한숨이 나오는 것을 석준은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나 좀 있다가 마트 가야 하는데 같이 갈까?」
「글쎄? 성준이가 피곤해 할지도 모르는데…」
석준은 주영의 꺼리는 듯한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저녁에는 남편도 없다면서… 맛난 것 좀 얻어먹자. 재료는 내가 살게 무국이랑 장조림 좀 해줘.
나 벌써 일주일째 국 없이 밥 먹는 거 알아? 혼자 사는 노총각한테 자원봉사 좀 하시지.
피부 좀 꺼칠해 진 거 같지 않아? 아… 어지러…」
석준은 정말 어지럽기라도 한 것처럼 이마에 손을 짚으며 엄살을 떨었다. 그 모습에 주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주영 씨… 그거 알아? 울다가 웃으면 어디어디 털 난다고?」
「못됐어 정말… 아줌마 놀려먹는 게 그렇게 재밌어? 우리 성준이한테 다 일러 줄 테야!」
주영의 눈이 반달이 되면서 곱게 흘기는 것을 보고 석준은 하하 웃어버렸다.
「좀 봐주셔요. 그럼 성준이 상태 봐서 전화 해줘. 기다리고 있을게, 알았지?」
「알았어. 어서 문 닫아. 감기 걸리겠다」
석준은 손을 흔들며단지 안으로 사라졌다.
주영은 아직도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놀이방 버스가 오는가 길 끝을 열심히 바라다보았다.
잠시 후 길모퉁이에서 성준이가 다니는 놀이방의 노란 버스가 보였다.
얼른 버스 가까이 다가가니 곧 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먼저 내리더니 성준이를 안아 내렸다.
「성준아! 아, 선생님 고생 많으셨네요. 성준이 아프지 않았나요?」
주영을 보고서 눈인사하는 선생님에게 다가가 눈으로 마주 인사하며 주영은 조금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얼마나 잘 놀았는데요. 그렇지 성준아?」
선생은 주영의 걱정에 안심되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되물었다. 아이는 활짝 웃으며 새엄마의 손을 잡았다.
「네에!」
씩씩한 대답에 선생은 아이에게 노란 놀이방 가방을 등에 메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성준아, 그럼 두 밤 자고 월요일 날 선생님 다시 만나요. 성준 어머님 들어가세요」
「네, 수고하셨어요」
주영은 선생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고 성준이는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더 이상 버스가 보이지 않자 아이의 손을 잡아 앞뒤로 경쾌하게 흔들면서 주영은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었어? 기침 안 했고?」
새엄마가 묻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성준은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네 새엄마. 눈도 아주 많이많이 있었구요, 썰매도 탔어요. 밤에 불꽃쇼도 하구요,
모닥불 피워서 선생님이 고구마도 구워 주셨어요. 성준이 밥도 많이 먹었구요,
쉬도 잘했어요. 다음에는 아빠랑 새엄마랑 다같이 가면 좋겠어요」
주영도 아이의 밝은 기분에 맞춰 웃으며 약속하고 말았다.
「그래. 다음에는 꼭 다같이 가자. 우리 성준이 졸립지 않아?」
석준과의 약속이 생각나 주영은 아이에게 물었다.
「안 졸려요. 새엄마 마트가요. 성준이 과자랑 시식이랑 먹고싶어요」
아니나 다를까… 집보다 과자라든가 머리 쓰다듬으면서 시식코너에서 물만두
집어주는 아주머니들이 많은 마트를 더 좋아하는 성준이다.
「그럴까?」
반쯤 체념 섞인 대답을 하면서 아이를 잡지 않은 손으로 석준에게 전화하는 주영이다.
석준에게 전화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성준이는 벌써 앞장서서 주차장 입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영은 발그레한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걱정을 덜었다. 그리고 둘도 없는 친구가 생겼던 날을 생각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날은 주말 저녁이라서 인지 마켓에 사람들이 좀 붐볐다.
쇼핑카트에 성준이를 태우고 아이가 가리키는 데로 이리저리 사람들을 피해 물건들을 담았다.
' 오늘 저녁에는 만두전골을 해 먹을까? 유난히 만두를 좋아하는 성준이가 좋아할텐데. '
멍하니 생각하며 정육코너에서 국거리 양지머리를 포장해 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엄마 성준이 내려주세요」
느닷없이 성준이가 옷을 잡아당기면서 재촉했다.
「왜?」
갑자기 정신이 든 주영은 혹시 화장실 가고싶어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아이를 살폈다.
「저기 은희 있어요」
성준이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건어물 코너에 같은 놀이방 친구인 은희네가 다함께 장을 보고 있었다.
은희 아빠는 카트에 은희를 태우고 은희새엄마가 이끄는 대로 부지런히 따라다니고 있었다.
「어? 그렇구나」
성준이는 내려주자마자 은희에게 뛰어간다. 뒤에 남은 주영은 단란해 보이는 은희네가 부러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급하게 뛰어가던 성준이가 넘어질 듯 불안하게 내달리자 놀라서 소리쳤다.
「성준아! 뛰지…」
갑작스레 놀라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자 옆에서 포장을 기다리던 남자가 돌아보았다.
「?」
남자의 저요? 하는 듯한 표정에 주영은 당황해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 저기 우리 아들이요」
주영은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변명을 중얼거렸다.
「아, 네… 저는 저를 아시나 해서요」
그는 빙그레 웃었다. 포장된 고기를 받아들고 주영은 머쓱하게 인사하고 아이를 따라 갔다.
착한 사람 같았다. 선량하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랬고 사람 많은 곳에서 큰 소리로 말 한 것이 부끄러워
금새 빨갛게 물드는 동그란 얼굴이 그랬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결혼한 아줌마 같지 않게 어리게만 보였고 편안한 청바지에 티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작고 통통한 몸매가 허둥대며 아이에게 뛰다시피 하며 걸어가는 모습이 아이처럼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동글동글하게 땋아져 등허리에 드리워진 긴 머리채가 걸음에 맞춰 흔들리는 것이 귀여워 보였다.
뒤에 남은 남자는 여전히 웃음기가 있는 얼굴로 주영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부르는 점원의 목소리에
포장된 고기를 받아 쇼핑카트에 넣었다.
그렇게 우습게 만나고 나니 주영과 그 남자는 서로의 얼굴이 눈에 익어 가끔 마트에서나 길에서 마주치면 어색하게
눈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낯을 가리는 편인 주영 자신에게 이렇게 부담감 없이 다가서게 된 사람이 있다니…
성준이는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스스럼없이 다가가 과자를 하나씩 얻어 오기도 했다.
아이를 잘 다루는 것을 보니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주영도 서서히 경계심을 늦추고 있었다.
「오늘 또 만났네요? 매번 이 시간에 장 보러 오시나봐요」
석준은 주영이 아이의 손을 잡고 마켓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다가가 인사했다.
「아저씨 안녕?」
아이가 밝게 웃으며 인사하자 석준은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오 성준이! 웃차! 어? 성준이 어디 아팠었어? 왜 이렇게 가벼워?」
석준은 아이를 안아 올리면서 옆에서 웃고만 있는 아이 새엄마에게 눈을 돌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아이만을 쳐다보면서 물었었다.
아직은 눈을 마주치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아이의 새엄마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곧 아이는 방실거리며 어리광부리듯 대답했다.
「성준이 아파서 병원에서 주사 맞았어요」
석준은 아이와 함께 아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 그랬구나. 고생하셨겠네요. 우리 성준이 아저씨가 맛있는 거 사줄게 꼭 밥 많이 먹고 쑥쑥 크기다. 알았지?」
아이에게 대꾸하고는 슬쩍 아이새엄마에게 인사치레를 하면서 보니 아이보다 아이새엄마의 얼굴이 더 안 되 보였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아이를 자신의 카트에 올려 앉히고 말았다.
「네!」
석준의 카트에 앉은 성준은 신난 표정이 역력했다.
「아니… 그러실 필요는…」
아이새엄마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석준은 아이새엄마에게 눈을 돌렸다.
그녀의 미소짓느라 반달이 된 얄팍한 쌍꺼풀진 눈이 당황하면서 동그랗게 되고 있었다.
아이새엄마의 반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석준은 빙긋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고는 벌써 아이와 함께 마트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자아… 성준이! 불량식품 말고 다 골라봐. 아저씨가 다 사줄게」
석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느새 따라온 아이 새엄마가 단호히 말했다.
「아니야 성준아, 한 개만 골라. 저기… 애 버릇 나빠 질까봐서요. 고맙습니다」
아이새엄마의 정색을 한 만류에 석준은 머쓱해졌다.
「아… 그런가요? 제가 좀 오바했군요. 그래, 그럼 성준아 한 개만 제일로 먹고 싶은 걸로 골라오렴」
석준은 아이에게 달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는 석준에게 팔을 벌리고 내려달라는 시늉을 했다.
「내려주세요」
석준이 얼른 아이를 내려놓자 어색해 하는 어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는 벌써 저쪽으로 뛰어갔다.
석준은 자고로 아줌마들은 자신의 아이를 칭찬하는 말을 하면 편하게 대화 할 수 있다는 친구의 말을 떠올리면서
어색한 침묵을 깨고 아이새엄마에게 말했다.
「아이가 참 밝아요」
석준의 말에 아이에게 향해 있는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 석준을 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아이새엄마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이… 아직 없으신가봐요?」
수줍게 웃으며 말하는 아이새엄마의 눈은 다시 반달이 되어있었다. 석준은 사람의 눈을 바로 못보고 하는 대화에 좀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은 사람의 마음의 창이라는데 눈을 바로 보지 못하니 이 사람이 지금 어떤 기분인지 전혀 확신할 수가 없어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워 피곤해 지는 것 같았다.
「네, 아직 미혼입니다. 아… 제 이름은 김석준입니다. 성준이랑 이름이 비슷하죠?」
석준은 가볍게 말하고는 옆얼굴이지만 아이새엄마를 계속 쳐다보았다.
그의 눈길을 느낀 것인지 아이 새엄마는 당황해 얼굴을 붉히고는 별로 먹을 것 같지 않은 미원을 한 봉지 쇼
핑카트에 넣으며 대답했다.
「네, 그러시네요」
석준은 우물쭈물하는 아이새엄마를 보면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계속 쳐다보는 석준의 눈길에 결국 석준을 돌아보면서 묻는 듯한 그의 표정에 되려 묻는다.
「네?」
석준은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말했다.
「이름요… 설마 누구 새엄마라고 얼렁뚱땅 넘어가시는 건 아니죠?」
길거리에서 몇 번 만난 사람인데 이름을 알려줘도 될까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쳐지나갔지만
주영은 금세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잠재웠다. 보아하니 이 사람.. 피라미드나 그런 것처럼 뉴스에 나오는
신종 범죄인 같지는 않다. 게다가 자신이 어딜 봐서 범죄대상이 될 법한가? 거꾸로 놓고 털어 봐야 별로 나올 것이 없다.
「아, 제 이름이요? 이주영이라고 합니다. 좀 어색하네요…」
얼굴이 좀 달아오른 거 같아 주영은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지며 웃었다. 그제서야 그의 얼굴에도 만족한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뭐, 이제 이름도 알고 했으니 나중에 집에서 맛있는 거 하시면 좀 나눠주시는 거죠?」
석준은 좀 뻔뻔하다는 생각을 하며 밀어붙였다.
어라라? 주영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자신이 데이트 한 번 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당황했다가 결심했어! 하는 생각의 변화가 뻔히 읽힌다는 것을 그녀 자신은 알고 있을까?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주영은 물었다.
「네? 아… 네. 어디 사세요?」
주영의 대답에 석준은 크게 웃고 싶은 것을 누르고 다른 곳을 보면서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
「저 주영 씨랑 같은 단지 살아요. 아침에 출근하다가 성준이랑 주영 씨랑 봤어요.
남편 분 계신 것 같아서 아는 척은 안 했지만…
그러니까 맛난 거 하시면 외면하지 마시고 꼭 나눠주세요.
요즘 집에서 만든 거 못 먹어서 피골이 상접하니까 말이죠」
나중에는 배까지 억지로 집어넣으면서 하는 말에 주영은 그리 마른 체격도 아닌 그를 올려다보면서 하하 웃었다.
유쾌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탈렌트처럼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그의 얼굴은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웃으면 생기는 눈가의 주름으로 보아 그는 잘 웃는 사람인 것 같았다.
선량해 보이는 눈과 학생들이나 입음직한 헐렁한 니트 스웨터차림도 전체적으로 편안해 보이는 그의 인상에 일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웃음에 전염되어 마주 웃었다.
그렇게 그는 주영의 일상으로 들어왔다.
국을 끓일 때도 반찬을 할 때도 주영은 항상 석준의 몫을 따로 만들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흥균이 퇴근해서 집에 오기 전에 음식을 싸서 석준의 아파트 현관 앞에 놓고 갔고
석준은 쉬는 날이나 늦게 출근하는 날이면 주영을 불러내서 빈 그릇을 주고 가곤 했다.
그렇게 왕래가 잦아지고 서로 편하게 점심을 먹고 그렇게 노닥거리다 보면 석준이 이성친구인지 동성친구인지 헛갈리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그렇게 말을 서로 놓게 되었다. 성준이는 석준을 삼촌이라고 하면서 잘 따랐고
매번 성준이의 버릇을 망쳐놓는다고 주영에게 핀잔을 듣는 석준이었다.
그렇게 편한 일상을 살고 있을 즈음이었다. 흥균의 이상한 일상을 목격하게 된 것은..
「자기,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
「응? 왜?」
흥균은 넥타이를 매다 말고 거울 뒤로 양복저고리를 들고 서 있는 주영을 흘긋 보았다.
「응.. 좀 있다가 우리 성준이 생일이잖아요. 놀이방에서 내일 생일 파티 해준다네.
놀이방에 예쁜 옷 입혀 보내고 싶어서, 성준이 데리고 쇼핑 좀 할까 하구.
나간 길에 당신한테 들러서 저녁 좀 얻어먹고 싶어 그러는데… 괜찮지요?」
주영은 오랜만의 외출에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혼자서 애 데리고 힘들지 않겠어?」
흥균의 말투가 왠지 귀찮아하는 것 같아 들뜬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지만 주영은 그냥 밀어붙이기로 했다.
아들핑계로 오랜만에 흥균과 외식도하고 싶었고 며칠 전에 산부인과 다녀온 얘기도 하고 싶었다.
둘째가 생겼다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데…
「응… 그렇지 않아도 희진이가 성준이 생일 선물 사준다고 해서 만나기로 했어. 희진이랑 같이 나가도 괜찮죠?」
남편은 눈에 띄게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주영의 눈빛이 이상하다는 빛을 띄자 얼른 무표정으로 바꾸며 말했다.
「응? 뭐… 괜찮지. 나간 길에 당신 옷도 한 벌 사지 그래? 나날이 아줌마가 되가는 거 같아. 요즘 당신 별로 매력없어」
괜히 자신의 옷차림에 잔소릴 한다.. 주영은 기분이 상했지만 그저 웃으며 대꾸했다.
「뭐, 애 키우고 살림하는 여자들 다 그렇지. 알았어요. 당신 힘들게 번 돈 아깝지 않게 근사한 걸로 살게… 기대해요」
아줌마가 좋은 게 무엇인가? 아줌마는 왠만한 비아냥거림에는 눈썹도 까딱 않는다는 것이다.
왠만한 남편의 핀잔도, 왠만한 시댁식구들의 구박도, 그냥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아량이 있다는 것이다.
아량만 넓으랴? 맞받아치는 말솜씨는 또 어떻구? 속으론 하하 웃으면서도 주영은 예쁘게 눈으로만 웃으며 눈을 흘겼다.
흥균은 그런 주영을 보면서도 아무런 관심도 드러내지 않은 채로 심드렁하게 양복을 갖춰 입고 현관을 나서기 전에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럼 이따가 6시전에 병원으로 전화해. 준비하고 있다가 나갈 테니까」
마치 건망증 환자에게 하듯 당부하고 현관으로 나서는 남편이 내심 섭섭한 주영이다.
연애하던 시절 그녀의 따뜻한 미소가, 살살치는 눈웃음이 미치게 예쁘다고 해놓고는 요즘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주영이었다.
「그래요. 수고해요…」
마지못해 대답을 중얼거리는 주영을 뒤로하고 흥균은 바삐 나갔다.
흥균이 나간 후 현관문을 잠그면서 주영은 아침에 남편을 배웅하면서 하던 키스가 일상에서 사라진 것이 언제인가
문득 떠올렸다. 항상 잘 웃고 유머가 넘치던 그가 남편이란 이름이 되어 자신처럼 천천히 시들어 가는 모습을 보니
우울해 지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은희네처럼 딸이 생기고 남편이 가정적으로 바뀐다는 말처럼 될지 또 모를 일이다.
시새어머니는 성준이 하나로 끝내라고 성화를 하셨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주영에게는 흥균과 함께 하는
가정이 소중하지 시새어머니의 잔소리가 두려울 리 없었다.
주영은 아직 부풀지도 않은 아랫배에 손을 올리며 둘째는 딸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주영이 신입생 때, 흥균이 복학한 해 봄에 같은 과 선배의 주선으로 첫 미팅에서 만난 유명한 캠퍼스 커플이었다.
그렇게 만나 2년 간의 평범한 연애기간을 가지고 아주 자연스럽게 흥균의 집에 인사를 갔고 흥균의 새어머니인 박 여사가
조금 심하다 싶게 반대를 했지만, 둘은 그 일을 계기로 더욱 결혼을 원하게 되었고…..
그렇게 결혼에 골인 한 뒤 누구나 그렇듯이 결혼 6개월 동안은 시집살이를 하고 분가해서 바로 성준이를 가지고…
아..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성준이를 가지고 6개월쯤 되어 입덧도 가라앉고 대학 졸업논문 때문에 정신 없이 바빴던 그때쯤..
흥균은 논문 탓에 밤새우기 일쑤인 그녀에게 뱃속의 아이도 생각 좀 해가며 하라고 잔소리를 하고 밤참을 챙겨 주더니
어느 날부터 인가 그것이 뜸해지고 주영은 지칠 때도 되었다고 변명해 주면서..
뭐 실습이니, 동창회니, 친구들 모임이니 하면서 거의 매일 조금씩 귀가가 늦어지던 그 무렵….
그렇게 생각을 하다보니 벌써 결혼 6년 차 부부가 되어 서로에게 조금씩 무관심해 지고..
그렇게 남들 보기에 평탄한 삶을 지탱해 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흥균과 함께 동창회 모임에 나간지도 벌써 3년이나 지나있다.
그렇게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거리가 멀어져 가는 것 같아 서운했고,
요즘 흥균은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세미나다 뭐다 해서 출장도 잦고 부부생활도 한 달에 한번 할까 말까 했기
때문에 이번엔 둘째를 가질 요량으로 흥균을 작정하고 유혹해 얻은 성과였다.
아내 된 사람이 남편을 일부러 유혹하지 않으면 사랑을 나누는 것도 어렵다는 생각까지 들자 주영은
무거워진 마음에 참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요즘… 한숨이 늘었다.
집안 청소를 하고 시간을 보니 벌써 성준이가 올 시간이 가까워 오고있었다. 오늘은 외출을 한다고 오전반만 보냈는데…
주영은 서둘러 외출준비를 하고 평소 하지 않던 화장도 좀 하고 아파트 단지 앞으로 나갔다.
「아들, 오늘도 재미있었어?」
성준의 놀이방 가방을 들고 한 손으로는 아들의 손을 잡아 앞뒤로 흔들면서 주영은 아무런 고민도 없는 듯이 웃었다.
아이 앞이 아니면 언제 고민에서 벗어나랴 싶었다. 그래서 아이 앞에서 만큼은 크게, 활짝 웃고 싶었다.
「응 새엄마. 오늘 선생님이 그러시는데요, 내일 성준이 생일 파티 해 주신대요.
그렇다고 내일 예쁜 옷 입고 오라고 하셨어요. 새엄마. 성준이 예쁜 옷 사주실 꺼예요?」
오랜만의 외출에는 아이도 들떠있었다.
「그럼, 오늘 아빠께서 성준이 예쁜 옷 사러 나오면 저녁도 사주신다고 하셨는걸?」
오랜만의 밝기만 한 봄 햇살만큼이나 밝은 미소가 아이의 얼굴에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주영은 행복에 가슴이 뻐근해 지는 것을 느꼈다.
「와아! 그럼 오늘 석준이 삼촌한테도 가요?」
요 몇 주 동안 정신 없이 바쁜지 통화한지도 한참 된 석준의 이름이 아이의 입에서 불시에 나오자 주영은 깜짝 놀랐다.
어느 사이 자신과 아이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불리는 착한 이웃사촌의 이름이 오늘따라 왠지 불편하게 느껴진다.
「왜?」
「삼촌이 성준이 생일날 로봇 사준다고 했어요」
새엄마의 불편해 하는 심기를 모르는 채 성준이는 신나는 목소리로 조잘거린다.
아이의 얼굴에 피어있는 기분 좋은 홍조에 같은 마음으로 동조하지 못하는 주영은 그냥 동의도 그렇다고 아니라고도
하지 않는 말로 얼버무리고 있었다.
「그래? 그럼 삼촌 바쁜지 먼저 물어보고 가자」
「네에. 와아! 신난다!」
새엄마의 얼버무리는 말을 동조로 해석해 버린 성준이는 집에 와서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히는 동안 종알종알 신이 나서 떠들었다.
주영은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에 날씨도 좋고 아이는 신이나 있었지만 석준에게 전화하겠다고 한 약속이 이상하게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의 독신생활은 참으로 이상하다싶게 규칙적이었다.
혼자 사는 사람 같지 않게 항상 날이 서있는 하얀 와이셔츠가 그랬고 먹는 것도 대충 때우는 법이 없었다.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는 법도 없었고 여자와 함께 있으면서 전화하는 법도 없었다.
언젠가 무심결에 물어본 결과 독신주의자는 아니라고 했지만,
정말 가까워지면 질수록 주영을 챙기고 다정하게 구는 그에게로 마음이 향하는 것 때문일까?
그의 그윽한 눈빛이, 장난기 어린 사심 없는 손길에 자꾸만 신경이 곤두서서는 요즘엔 피해 다니기까지 하고 있었다.
요즘 얼굴보기 힘들다고 웃으며 말하는 석준에게 노총각 혼사 길 막힐까봐서라고 대꾸했지만
아직 존재조차도 않는 그의 여자가 왠지 얄미워지는 자신의 감정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구 사귀는 일에 익숙지 못해 동성친구조차도 어렵고 또 어려운데 이성친구야 오죽할까
라고 자신의 촌스러움을 한탄할 뿐이었다.
그 날 이후로 석준은 전화가 없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 정신없이 바쁜 탓이라고 솟구치는 서운함을 변명해 주곤 했지만 걸레질을 하다가,
남편의 와이셔츠를 빨다가, 석준이 좋아하는 무국의 간을 맞출 때마다 불쑥불쑥 생각나는
그의 미소에 조금씩 슬퍼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더욱 당황하고 있는 그녀였다.
역시 사람을 사귀고 마음을 나누는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은 도저히 익숙해 질 수 없는 일인 것만 같았다.
버스를 타고 서울시내로 향하는 내내 새근거리며 잠들어있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알 수 없는 답답함에 한숨을 쉬는 주영이었다. 백화점 앞에서 친구 희진과 만나 화려하게 진열된 상품들을 쳐다보면서도 그저 희진과 성준이가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석준은 그래프들로 가득한 컴퓨터 모니터를 비장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주영에게 옮은 것 같다.
얼마 전 농담처럼 던져진 주영의 말은 생각보다 깊숙이 박힌 가시가 되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녀의 웃으면 반달이 되는 눈이 보고싶다고….
하지만 주영의 말이 맞다. 애까지 낳고 잘 살고 있는 여자에게 연정을 품어봐야 어쩔 수 있겠는가?
자신의 아프기만 했던 첫사랑이 떠올랐다.
두 살 많았던 과외선생…
폭풍처럼 몰아치던 뜨겁기만 했던 열정에 자신을 잊어버릴 만큼 몰두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라고만 했었다.
항상 자신을 믿어주고 지지해 주시던 부모님조차도 자신의 열정을 아직 성숙하지 않은 열정이라고 설득하셨다.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었던 그때 도망치듯 군대에 입대하고 제대 후에는 아버지의 권유대로 유학길에 올랐었다.
함께 과외를 받았던 친구 창현에게서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정말 우습게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바쁜 일상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그녀가 그렇게 쉽게 잊혀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영은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무섭게 자신을 몰고 가는 열정도 없었다.
처음 만났던 여름의 이글거리는 날씨처럼 그녀 생각에 몸이 더워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끔 마주하는 그녀의 외로움에 마음 한 구석이 저려왔다.
그녀가 정성껏 만들어 주는 밑반찬들을 맛보면 오히려 자신이 위로 받는 듯한 느낌에 대충 빵 몇 조각으로 때우고 말던
아침식사는 일상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마치 리트머스 종이에 서서히 번져가는 색채들처럼 아무런 색깔 없이 흘러가던 일상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편한 감정이 어느새 연정으로 바뀌어 자신을 한없이 주영에게 기대감을 가지게 하는
마음을 멈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영의 말대로 자신은 결혼도 해야 하고 성준이처럼 예쁜 아이도 키워야한다.
괜히 가정 있는 착한 사람을 흔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석준의 결론은 그랬다.
스무살에 시작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책임질 수 없는 열정은 이젠 졸업할 나이가 된 것이다.
담배생각이 간절해 졌다.
한숨쉬듯 담배를 피우고 나면 갑갑한 마음이 조금은 안정이 될 것만 같았다.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불을 붙이려는데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번호를 보니 주영의 전화번호였다.
석준은 빙그레 웃으며 폴더를 열었다.
「석준 씨?」
망설이는 듯한 주영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어? 웬일이셔, 사모님?」
석준은 마음을 다잡고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
눈을 돌려 창 밖을 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봄의 청명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안 바빠?」
주영은 여간해서는 근무시간에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낮에 전화하는 것은 석준의 몫이었는데….
. 주영의 조심스럽게 바쁘냐고 묻는 말에 석준은 빙그레 웃었다.
「응 지금 괜찮아. 무슨 바람이 불어서 몸소 전화를 다 하셨어?」
「일은 무슨… 내일이 성준이 생일이라서 지금 백화점으로 쇼핑 나왔거든.
석준 씨 회사 근처인데…
성준이가 그러는데 자기가 선물로 로봇 사준다고 했다면서? 지금 빨리 안 사주면 안 된다고 완구 코너 앞에서 꼼짝도 안하고
서있어. 좀 달래봐」
그럼 그렇지… 석준은 뛰고있던 가슴이 왠지 모를 실망감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끼면서도 벌써 일어서서
벗어놓았던 양복저고리에 팔을 꿰며 말했다.
「어 그래? 뭘 달래, 달래긴. 나 금방 갈게 거기 꼼짝 말고 서 있어」
사람 많은 백화점 완구코너 앞에서 울상을 한 성준이와 주변을 살피며 소곤소곤 전화에 대고 말하고 있는
주영의 모습이 생생할 만큼 연상이 되고있었다.
또 이렇게 다시 주영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바보처럼 또다시 가슴이 울렁거린다.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미안해하는 주영의 목소리가 더욱 가라앉고 있다.
석준은 또다시 습관처럼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고있었다.
차라리 편안한 친구처럼 맘놓고 자신에게 기댄다면 맘이 편할 것 같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고 가르쳤단 말이야. 내가 약속 안 지키면 그 녀석 실망 할 거 아냐? 기다려 금방 갈게」
석준의 단호한 말에 주영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응…」
주영의 대답에 석준은 사무실을 나섰다.
주영은 전화를 끊고 한참을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얘! 무슨… 멍하니 서 있기는…」
화장실에 다녀온다던 희진이 어느새 다가와 어깨를 툭 치면서 눈을 흘긴다.
「어? 희진아… 얠 어쩌면 좋니…」
주영은 아직도 입을 내밀고 징징거리고 있는 성준이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뭘 어째? 내가 하나 사 주지 뭐. 나 요즘 돈 잘 벌어」
희진은 킥킥 웃으며 로봇 앞에서 입이 나와 주저앉아 있는 성준이의 곁에서 허리를 굽혀 앉았다.
「자아… 왕자님. 이거? 이모가 사줄게」
「아냐. 삼촌이 사준댔어. 이거 이모꺼 아냐..」
희진의 달콤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딱 잘라 말하는 아들 앞에서
주영은 또다시 한숨을 쉬면서 체념하듯 말했다.
「성준아. 삼촌 온다고 조금만 기다리래… 여기서 이러면 새엄마 속상해」
달래듯 말하는 주영의 말에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새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삼촌 온대요?」
금새 방긋거리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희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얘가 지금 나 찬 거 맞지? 그렇게 이뻐해줬더니만 그새 배신을 때려? 성준이 너 그럼 이모가 슬프지」
희진의 짐짓 기분상한 듯한 말투에 아이는 히히거리며 웃었고 주영은 희진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히히히…」
그렇게 완구점 앞에서 옥신각신 하고 있을 때 석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준! 삼촌왔다」
「삼촌!」
석준의 모습에 아이는 달려가 그의 다리에 매달렸다.
그 모습에 희진은 더욱 어이없어하는 웃음을 지으며 이산가족상봉이 따로 없네 라며 중얼거렸다.
주영은 몇 주만에 보는 석준의 모습에 또다시 가슴이 뛰면서 숨쉬기가 곤란해지는 것을 느꼈다.
석준이 웃으면서 아이를 안고 완구코너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에 맞춰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석준 씨… 미안해서 어쩌지?」
「괜찮아. 마침 머리 아프던 차에 잘됐다 생각했지. 자아, 성준. 뭐가 맘에 드는데?」
그냥 가볍게 말하고는 이내 아이의 손을 잡고 진열대 쪽으로 가버리는 석준이었다.
둘은 서로 이게 더 세네 아니네 하면서 로봇을 고르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희진이 팔꿈치로 주영을 찌르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 이웃사촌. 아빠랑 노는 시간이 없어서 그런지 성준이가 유난히 따라」
주영의 얼버무리는 말투에 희진은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다.
「야… 분위기 근사하다 얘. 뭐 하는 사람이야?」
희진의 석준에 대한 관심이 달갑지 않았다.
희진의 커리어우먼 다운 옷차림에 비해 초라하기까지 한 자신의 옷차림도 신경이 쓰이고..
「증권회사 다니나봐. 나도 잘 몰라. 애널리스트라는데 뭐… 내가 아는 분야도 아니고」
주영은 괜히 진열대 위의 테디베어 귀를 만지작거리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 능력 좋네? 그러고 보니 본 것 같기도 하다. 잡지에선가 본 거 같은데…」
가늘어진 희진의 관찰하는 듯한 눈길이 점점 불쾌해지고 있었다.
「응, 그래?」
주영의 불편해하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희진은 석준에게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놀리듯이 말했다.
「조신한 사모님께서 언제 저런 애인도 두셨데? 능력 좋다 너…」
희진의 말에 깜짝 놀란 주영은 벌렁대는 가슴을 누르고 희진을 나무랐다.
「야, 애 들어. 애인은 무슨…」
희진은 주영의 당황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야무지게 따지고 들었다.
「뭐 어때? 요즘 미시들 치고 애인 없는 사람 없다, 너. 그리구 능력 있는 유부남들은 또 어떻구?
애인 없으면 능력두 없는 거야, 얘. 흥균 씨도 그래 능력있지,
잘생겼지, 어디가면 유부남 소리 안들어. 처녀들이 흥균 씨같은 사람 가만히 안 둔다구. 너 남편관리 잘해」
왠지 그 말이 씨가 있는 농담 같아 주영은 희진에게 정색을 하고 쏘아붙였다.
「너나 잘해 기집애야. 서른이 넘도록 연애만 하다가 시집도 못 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주영의 말에 희진은 시선을 돌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넌 가끔 보면 우리 새엄마랑 똑같은 말을 하드라… 재미없어, 얘」
한참을 얘기하다 보니 드디어 골랐는지 자기 키 만한 상자를 들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성준이가 보였다.
「미안해서 어떻해, 석준 씨. 바쁜 시간에…」
주영의 미안해하는 모습에 석준은 편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또 그런다… 괜찮아. 그런 것도 유도리 못할 만큼 능력 없지 않아.
성준이 좋아하는 거 보니까 뿌듯하고 좋기만 한데 뭐… 친구 분?」
석준의 미소 띈 시선이 주영의 옆에 서 있는 화려한 공작새 같은 희진에게 가 닿았다.
「응. 희진아, 인사해 김 석준 씨. 이쪽은 대학 친구 정희진」
주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둘을 소개했다.
「음… 주영 씨가 친구를 좀 컬렉션 하는 모양인데요?
얼굴보고 오디션 봐서 친구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김석준입니다」
석준의 유들 거리는 말에 희진은 마주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아, 네… 석준 씨 보니까 그런 거 같네요. 정희진이에요」
둘은 웃으면서 서로 익숙하게 명함을 교환했다.
그런 모습조차도 주영은 자신의 초라함이 석준앞에 드러나는 것 같아 씁쓸해지는 마음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석준은 명함집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희진에게 미안한 듯 말했다.
「그럼, 저는 좀 바빠서 들어가 봐야겠는데 나중에 주영 씨랑 우리 저녁 한번 하죠」
「네」
냉큼 대답하는 희진이 얄미워진다. 주영은 그런 자신이 우스워졌다. 오늘 왜 이러는 거야?
「성준아 그럼 삼촌 간다. 새엄마 말씀 잘 듣고 밥 맛있게 많이 먹어」
석준은 아직도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에, 삼촌. 아까 약속 한 거 꼭 지켜야돼요」
야무지게 대답하는 성준이에게 하하 웃는 그의 얼굴에 익숙한 주름이 자리잡는 것을 보면서 주영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알았다. 그럼…」
석준은 주영을 한번 쳐다보고 희진에게 고개를 까딱 하고 왔던 것처럼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석준이 가고 나자 희진은 주영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받아 들고는 석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희진에게 그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싫은 느낌에 주영은 그냥 고개만 끄덕 거렸고 대답은 성준이가 다 했다.
희진이가 골라주는 대로 원피스를 하나 사고나니 시간이 벌써 6시가 다 되어갔다.
주영은 희진의 차에 올라타고는 서둘러 흥균에게 전화했다.
「뭐래?」
통화를 끝내고 휴대폰 폴더를 닫는 주영을 흘긋 보는 바람에 앞차가 잽싸게 끼여드는 것을 보고는
희진은 거칠게 클락션을 울려댔다.
「응… 포시즌에 예약 해 놨다고 거기 가 있으래」
주영은 희진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희진은 룸미러로 뒷좌석에 앉아 석준이 사준 로봇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짓궂은 어조로 말했다.
「그래, 성준아 그게 그렇게 좋아? 이모가 사준다고 했는데 왜 싫다고 했어? 이모가 더 큰 거 사줬을 텐데…」
「아냐, 이모. 삼촌이 사준다고 했으니까 삼촌이 사줘야 되는 거예요. 이모는 성준이 이불 사줬잖아요. 그것두 좋아요」
희진은 당돌한 성준의 대답에 눈을 굴리고는 주영을 보고 웃었다.
차는 시원스레 뚫린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신호가 잘 받는다.
「흥! 몰라, 얘… 병 주고 약주고 혼자 다해. 누굴 닮아 그렇게 똑똑한 거야?」
「새엄마 닮아서 그렇대요. 헤헤…」
심술궂은 미소를 띄면서 말하는 희진에게 어김없이 씩씩하게 대답하는 성준이다.
「그래… 그럼 그렇지. 주영이 너 맨날 애 앉혀놓고 세뇌시키는 거지?」
입을 삐죽거리며 약올라 하는 듯한 희진의 말투에 주영은 키득거리며 한 마디 거들었다.
「그래, 맨날 세뇌만 시키겠냐? 그거보다 더한 것도 한다, 야. 너무 재밌으니까
너도 얼른 결혼해서 나한테도 조카 놀려먹는 재미 좀 보게 해 주라, 제발 부탁이다」
「하여튼… 두 모자가 똑같애」
한숨을 쉬며 투덜거리는 희진에게 하루종일 느꼈던 열등감이 조금쯤 보상받는 것 같아
주영은 미소를 띄우며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진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내내 그렇게 투덜거렸다.
거의 다 와서 길이 막힌 탓에 조금 늦게 도착해서 보니 레스토랑에는 벌써 흥균이 나와있었다.
「아… 희진씨 오랜만이에요」
「네, 흥균 씨… 오랜만이네요」
둘은 서로 인사하며 어색해 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주영은 애써 외면했다.
낮에 희진의 얘기 탓인 것 같아 신경이 쓰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넷은 자리에 앉아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천천히 식사를 했다.
그 날 만큼은 흥균은 다시 학생 때의 그 유머 넘치는 젊은이로 돌아와 있었다.
주영은 잠시동안이나마 행복했다. 잘생기고, 능력 있고, 게다가 매력 넘치는 남편과 똑똑하고 착한 아들이
그녀의 양옆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고 누가 봐도 행복한 가정이니까.
무난한 삶… 좋은 거야. 그렇게 굴곡 없이 가슴 아픈 일 없이 그렇게 행복 할 수 있다면
그런 행복에 안주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고 주영은 자꾸만 뒷머리를 간질이는 불안함을 삼켰다.
무난하다못해 지루해진 삶의 공허함을 그렇게 변명했다. 사실 식사하는 시간 내내 겁이 났다.
희진과 흥균이 나누는 친근한 눈웃음과 격의 없는 농담들이 자신이 지난 시간동안 지켜온 꿈의
궁전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것만 같은 불안함에 손톱이라도 물어뜯고 싶었다.
왠지 자신만 소외된 듯한 분위기 속에서 억지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편한 웃음을 짓는 것이 힘들어
부지런히 성준이의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면서 억눌린 감정 탓인지 얼마 먹지 못했는데도 속이 거북해 지기 시작했다.
「주영아 우리 와인 한 잔할까?」
주영의 불편한 심기는 모르는 채 흥균이 웃는 얼굴로 주영을 돌아보았다.
「좋죠. 오늘 성준이 생일이 아니라 내생일 같네」
주영은 떨리는 미소를 지으며 괜히 신이 난 듯 말했다.
흥균이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부르고 와인을 시음하고 결정하는 내내 희진의 반짝이는 눈이
흥균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것을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주영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쓴 물을 애써 삼켰다.
자줏빛 와인은 크리스털 잔 안에서 루비처럼 반짝였고 흥균의 미소는 너무나 젊고 싱싱해 보였다.
요리가 끝나고 후식이 나왔을 때였다. 갑자기 희진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으로 입을 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진아. 왜? 어디 안 좋아?」
「응… 나 잠깐만…」
주영이 놀라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서며 물었지만 희진은 그냥 있으라는 손짓을 하고는 화장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주영은 갑자기 좋은 분위기가 깨어져 미안한 마음에 흥균을 돌아봤다.
그때… 그녀는 내내 뭔가가 머리 뒤를 간질이는 것만 같았던 불안감의 실체를 보고 말았다.
흥균의 얼굴도 희진이 못지 않게 하얗게 질려 있었던 것이다.
「성준 아빠…」
주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직도 희진이 사라진 화장실 쪽을 바라보고 있는 흥균을 불렀다.
「응?」
주영의 부름에서야 간신히 고개를 돌린 흥균은 불안함에 떨고있는 주영의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고
초조한 듯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어디 안 좋아요?」
「아니… 성준아, 얌전히 먹어야지. 그렇게 장난만 하면 안 돼」
괜시리 아이에게 화살을 돌리는 그가 미워졌다.
아니, 희진이가 걸어 놓은 마법에 빠져버려 의심의 날개가 자신이 억누를 수 없을 만큼 활개를 치는 것을…
의심하고 바가지 긁는 아줌마가 되어버린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우습게 보여 견딜 수가 없었다.
식사시간 내내 자신을 괴롭혀 오던 미묘한 분위기를 한 순간에 이해해 버린 자신의 영악함이 저주스러워졌다.
「성준 아빠… 성준이 낮잠도 못 재워서 피곤해. 희진이 오면 그만 일어나요」
주영은 희진이 와서 자신의 못난 모습을 볼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그럴까?」
흥균은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대답했고 잠시 후 다시 생기 있는 얼굴로 희진은 금방 자리로 돌아왔다.
견디기 힘들었던 오랜만의 외식은 그렇게 참담하게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성준이는 뒷좌석에서 잠이 들었지만
주영과 흥균은 각자의 생각에 골몰하느라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주영은 멍하니 가로등이 줄지어 서있는 창 밖 풍경을 보면서 울고싶은 마음을 다잡았다.
대학 1학년 봄에 흥균을 만나는 바람에 다른 또래의 친구들처럼 놀러 다녀보지도 못했고 이성친구들을 사귀지도 못했으며 졸업도 하지 못한 채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느라 사회생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촌스러운 주부가 되어있는 것이 모두다 흥균의 탓인 것만 같아 그가 원망스러웠다. 하루종일 희진의 화려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내색하지 못한 자존심이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것에 속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 옷을 갈아 입히고 씻겨 재우고 나왔을 때 흥균은 베란다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주영은 외면하고 싶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레스토랑에서의 희진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설마 정말 그렇기야 하겠냐는 생각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그렇지만 뭔가 잘못됐다. 아직은 추운 베란다에서 문까지 닫고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통화를 하는 흥균을 가만히 쳐다보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라 주영은 얼른 욕실로 들어가 화장을 지우고 씻고 부산을 떨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화장대 앞에 앉아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있을 때 흥균이 문을 열고 들어와 옷장에서 잠바를 꺼내 입으며 말했다.
「주영아, 나 잠깐만 나갔다 올게」
주영은 새롭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숨가쁘게 물었다.
「응? 이 밤에 어딜 가?」
흥균은 돌아보는 주영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지갑과 차키를 챙기며 중얼거렸다.
「남박이 요 근처에 있다고 술 한잔 하자네. 금방 올게」
벌써 방문을 열고 나서는 흥균을 따라나서며 주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요… 너무 늦지 말고. 전화해, 나 안자고 기다릴게」
떨리는 주영의 목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무심하게 대답한다.
「알았어」
흥균은 서둘러 나갔다. 아직 좀 쌀쌀한데 그렇게 얇게 입고 나가면 추울 텐데… 뭐, 어떠랴 싶었다. 차라리 감기나 확 걸려버려라! 그렇게 아프면 나가지 않고 집에 함께 있어줄 수 있잖아? 주영은 솟아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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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난 아직도 당신을 좋아해요. 나를 보고 웃어 줄 때면 믿음직스럽고… 우리 예쁜 성준이도 무럭무럭 크고 있고, 지금 내 뱃속에는 성준이의 동생도 자라고 있어요. 우리 함께 예쁜 가정을 만들자고 약속했잖아요. 그러니 제발 집으로 돌아와요. 내가 있고 사랑하는 우리 성준이가 있는 이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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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을 보다가 책을 보다가 하면서 불안함과 싸우다가 주영은 자기도 모르게 석준에게 전화를 하고 말았다.
「여보세요…」
아직 잠 기운이 묻어있는 목소리다. 놀란 주영은 시계를 봤다.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 석준 씨. 미안해, 벌써 잘 줄 몰랐어. 내일 다시 전화할게」
「어? 주영 씨? 뭐야 이 시간에… 괜찮아. 잠 다 깼어. 외식하고 들어와서 남편이랑 소곤거리느라 바쁠 줄 알았더니만… 무슨 일 있어?」
석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주영은 눈물이 솟는 것 같아 입술을 깨물고 잠시동안 가만히 있었다. 떨리지 않는 목소리를 낼 자신이 생겼을 때에야 주영은 중얼거렸다.
「아니… 우리 신랑 친구가 와서 나갔어. 자는 거 깨운 거 같은데 미안해서 어쩌지?」
「뭐, 맨날 자는 잠… 낮에 그 친구?」
주영의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불안감을 읽은 석준은 낮에 만난 주영의 친구를 떠올렸다. 당당하고 성공한 커리어우먼 같았지만 왠지 그늘이 져 보이는 솔직히 맘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회사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인테리어를 맡았던 사람 같은데 아는 척 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희진이? 아니야. 걔야 지네 집으로 갔지. 왜? 석준 씨, 관심 있어?」
주영이 지나치게 펄쩍 뛰면서 부정하는 목소리가 불안하게 들렸다.
「아니… 나 일 때문에 몇 번 본 거 같은데 모른 척 하길래… 뭐, 모를 수도 있지. 내가 그렇게 흔한 인상인가 싶어서 좀 자존심이 구겨지더라고..」
석준은 주영의 지나친 반응에 안심시켜 주려 농담을 했다. 행여라도 주영이 희진과 자신을 연결할까 싶기도 했다. 그런 여자는 자신의 아내 상으로는 절대로 노굿이었다.
「웃겨, 정말… 성준이 왕자병이 어디서 온 건지 알 것 같네. 자기가 그렇게 가르친 거지?」
석준의 농담에 긴장이 풀린 듯 주영은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따라 농담을 한다. 조금 편안해진 대화패턴에 석준은 한마디 더 거들었다.
「뭐… 왕자로 태어난 사람한테 평민 흉내를 내라고 하면 그게 더 힘든 법이야」
주영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정말 못 말려… 그거 왕자 암이야. 알지?」
주영의 편안해진 목소리에 용기를 얻어 석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소리가 좀 안 좋은 것 같은데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석준은 괜한 소리를 한 게 아닌가 싶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한숨을 쉬던 주영이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기까지 석준은 이제는 익숙해지기 시작하는 두근거림을 안고 숨을 죽였다.
「응, 그게… 나 좀 궁금한 게 있는데 남자 입장에서 대답 좀 해 줄 수 있어?」
주영의 우물쭈물하는 말에 석준은 그녀가 당혹해 할 때 짓는 표정이 떠올랐다. 도데체 그 말쑥한 기생오래비같이 생긴 그녀의 남자가 안겨주고 있는 불안감이 무엇일지 자신도 덩달아 불안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뭘까나? 내가 더 궁금하네… 뭐든 물어보셔. 소상히 아뢸 테니」
석준은 과연 주영이 솔직하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지가 의심스러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남자들 있잖아… 그거… 오랫동안 안 하면 힘들지 않아?」
긴장하고 주영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석준은 우물거리는 주영의 말에 놀라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거… 라니?」
심장이 벌렁대고 있었다. 이건 평상시의 주영의 모습이 아닌데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급박하게 몰고 간 것일까?
「아, 됐어… 내가 총각 붙잡고 이상한 소릴 다 하네…」
주영의 그냥 얼버무리려는 말에 석준은 주영의 고민에 대해 대충 알 것 같았다. 석준은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 주영의 남편이 곁에 있었다면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
「아, 그게 뭔데? 섹스?」
석준은 가벼운 말투로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억누른 감정 탓인지 갈라져서 나왔다.
「그게… 요즘 글을 좀 쓸까 하고… 그런데 내가 좀 아는 게 없는 거 같애서…」
석준의 대담한 반문에 당황한 주영의 빈약한 변명을 들으며 석준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심지어 거짓말에도 약하다. 뭐라고 얘기 해 줘야 주영이 안심을 할까하며 석준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음… 그거야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도 물론 금욕하고는 살지는 않지만 총각하고 와이프 있는 사람하고는 입장자체가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어. 남자란 동물이 원래 사냥이 전문이였어서 다 잡은 고기한테 미끼 안 준다는 우스갯소리도 하지만 사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남자한테 섹스란 가족에 대한 사랑을 지키는 수단인지도 모른 다는 생각 많이 해봤거든. 나 같으면… 글쎄? 주영 씨처럼 이쁜 마누라가 매일 옆에서 자는 데 그냥 잘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네. 왜? 요즘 부부생활 문제있어?」
석준은 지나가는 말처럼 주영에게 물었지만 전화기를 쥔 손에서는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이 밤에 외로움 많이 타는 주영을 놔두고 나가서 자신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대화를 하게 하는 그 남자가 저주스러웠다. 주영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래, 석준이라면 그러고도 남겠지…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니까…
「아냐. 문제는 무슨… 진짜로 그냥 궁금해서 물어 본 거라니까」
어색한 침묵이 전화선을 타고 흘렀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주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참! 내가 기쁜 소식 하나 얘기 해 줄까? 나 성준이 동생 가졌어. 이번에는 딸인 거 같아」
아직까지 남편에게도 하지 않은 말로 어색한 분위기를 만회하려는 주영이다.
「뭐야? 사람 잔뜩 긴장 시켜놓고… 딸인 건 또 어떻게 알아?」
고맙게도 주영의 의도대로 가라앉았던 석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 석준의 짐짓 약올라하는 듯한 목소리에 주영은 웃음이 나왔다.
「응. 그냥… 여자의 직감이지 뭐. 지난번에 성준이 가졌을 때도 아들이다 하면서 이름도 먼저 만들어 놓았었거든」
주영은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아무튼… 그 여자들의 직감이란 게 얼마나 잘 맞는 지 한번 보자구. 남편 아직 전화 없어? 근처라면 내가 한번 돌아볼까?」
이 밤에 근처 어디로 찾으러 나선다고.. 그래도 주영은 그렇게 말이라도 해 주는 석준이 너무나 고마웠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미안해, 자는 데 깨워서… 어서 자」
피곤해서 인지 주영의 목소리도 갈라졌다.
「뭐, 금방 들어오겠지. 걱정하지마. 다 큰 어른인데 무슨 일이야 있겠어?」
습관처럼 석준은 또다시 다독거리는 말로 주영을 위로하고 있었다.
「응. 잘 자…」
「그래, 내일 전화해」
「응…」
석준의 조금은 아쉬워하는 듯한 목소리에 주영도 아쉬움을 느끼며 전화를 끊었다. 주영은 거실에 걸려있는 흉물스러운 뻐꾸기 시계를 올려다봤다. 벌써 새벽 1시가 넘어간다. 전화도 없이 어디서 뭐 하는 거야… 주영은 다시 불안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만 같아 희진에게 전화했다. 전에는 밤새도록 수다를 떨기도 했는데… 혼자 사는 희진이에게는 별로 미안할 것도 없다. 주영과 희진은 그런 사이였으니까. 전화벨이 좀 길게 울린다 싶었고, 전화 받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여보세요? 희진아, 자는 중이야?」
「응? 아니… 음… 나중에… 전화…」
수화기 너머로 야릇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를 제대로 내려놓지도 못하고 거사를 치르는 모양이다. 가끔 예고 없이 전화를 할 때면 희진이의 애인과 함께 하는 시간에 전화를 하는 바람에 난처하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오늘도 그런가 보다. 주영은 웃으며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의 시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희진의 목소리…
「아! 흥균 씨… 좋아… 더…」
「희진아… 희진아..」
주영은 감전된 듯 전화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분명히 들은 남편과 희진이의 목소리… 생각이 정지되어버렸다.
친구들 중에 혼자서만 사회생활을 경험하지 못하고 일찍 결혼을 해 버린 주영에게 유일하게 남은 속을 털어놓는 친구였는데… 결혼 전 새엄마가 갑자기 위독해지셨을 때도 새엄마처럼 결혼 준비를 도와주고 돌아가셨을 때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곁에서 위로해 줬던 언니 같았던 친구… 성준이를 가졌을 때도 흥균보다 더 먹거리를 챙겨주고 아이 옷을 함께 보러 다니면서 행복을 나눴던 친구였는데… 언제부터… 아니, 희진이는 얘기했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사랑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25년의 세월을 허송세월 한 것처럼 왜 그 사람을 더 빨리 만나서 사랑할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고… 자신도 친구의 힘든 사랑 때문에 함께 우울함을 느꼈었는데… 그랬는데… 어쩌면 좋아, 나는. 왜 하필이면 성준 아빠인 거니, 희진아?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흥분에 들뜬 친구의 목소리와 탁하게 욕망에 젖어 속삭이는 남편의 목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와 온 몸이 무섭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결국 뜬눈으로 거실에 앉아 베란다 창 밖으로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고 하늘이 붉게 밝아 오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흥균이 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돌리는 소리에 놀라 후다닥 침대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흥균이 옷을 갈아입는 소리를 듣고도 주영은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평상시 같은 말간 얼굴을 할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주영아. 일어나. 벌써 7시 넘었어. 나 출근한다」
「응…」
흥균은 주영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시늉을 하다가 한숨을 쉬고는 나가서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주영은 흘러 넘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 성준 아빠… 왜 그랬어? 왜 하필이면 내 친구야? 왜 하필이면 희진이냐고… '
주영은 그 날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몰랐다. 시간관념이 없어진 사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이를 돌볼 수조차 없었다. 결국 시새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성준이를 보내고 누웠다가 갑자기 친구의 새어머니께서 돌아가셔서 집에 못 온다는 흥균의 전화를 받고는 드디어 억울함에 통곡하고 말았다. 이틀동안 흥균은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영은 결국 희진에게 전화하고 말았다.
「희진아, 나야」
「응… 전화 기다리고 있었어. 우리 만나자」
주영의 기운 없는 목소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희진의 목소리는 당당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넌… 그 동안 어떻게 내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면서 웃고 떠들 수 있었던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주영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희진은 주영의 앞에 놓인 물 잔에 시선을 고정하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커피 잔을 감싸 쥔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지만 마치 준비된 원고를 읽는 듯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 날 네가 전화했었다고 흥균 씨한테는 얘기 안 했어. 그 사람 아직 몰라. 사실 나 일부러 그랬어. 그 날 행복해 하는 네 모습에 심술이 나서인지도 모르겠지만… 나한테 잔인하다고 얘기하지마. 넌 다 가졌잖아. 예쁜 아이도 있고 능력 있는 남편도 있고 시새어머니도 잘 해 주시고… 그러니까, 흥균 씨 마음만은 나한테 양보해. 너무 심각하게 생각 할 필요 없어. 뻔뻔스럽다고 할지 몰라도 나 흥균 씨 정말 사랑해. 우리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너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은 없어. 서로를 얽맬 마음 없어. 우리 진짜 쿨한 관계야」
희진은 잠시 한숨을 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주영을 바라보았다. 주영의 얼굴은 충격으로 하얗게 질려 오히려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희진은 말라진 입술을 적시고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흥균 씨, 집에 소홀하지 않을꺼고, 내가 이혼을 요구하지도 않을 꺼야. 넌 그냥 너 하던 대로 살면 돼. 너 눈치 챈 거 같다만, 사실 나 어제서야 알았는데 임신했더라. 물론 흥균 씨 아이지만, 나 아이 안 낳을 꺼야. 그러니까 그런 거 걱정 할 필요 없어. 흥균 씨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할 테고… 뭐… 그 날 나 아픈 줄 알고 혼비백산해서 왔지만 임신한 것 같다는 말도 안 했어. 너 그렇게 귀신 본 사람 같은 얼굴 하지마. 그런다고 내가 너한테 미안해서 흥균 씨하고 헤어질 정도로 얕게 사랑하고 있는 거 아니니까. 유부남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때는 다 그런 거 생각하고 시작하는 거 아니겠니?」
희진은 힘들게 말을 마치고 눈길을 들어 주영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원하지 않았던 일이 있다면 바로 지금처럼 주영과 마주하는 일이었다. 충분히 생각하고 연습했다고 생각했는데 상상만큼 쉽지 않았다. 주영은 제일로 친한 친구라고 생각해 오던 희진이 미소까지 지으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흥균 씨라고 부르는 그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 아니고 다른 사람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아침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지저분한…
「희진아… 내가 친구로서 마지막으로 충고하는데,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야. 나보고 고리타분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너 지금 한참 잘못하고 있는 거야. 가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약속을 한 거야. 가정을 지키고 사랑하겠다고… 그건 세상의 어느 법도 깰 수 없는 절대적인 약속이야. 그런데 넌 지금 그런 가정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거야. 그래, 성준 아빠가 잠시 잘못생각해서 너한테 간 걸꺼야. 성준 아빠는 다시 가정으로 돌아올꺼야. 난 성준이 때문에라도 용서하고 덮고 살 거고… 그게 가정을 지키는 수단이라면 그렇게 할꺼야」
주영이 말하는 동안 희진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알고는 있다.
「알아. 니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머리로는 이러면 안 된다고 하는 데도 몸은 이미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나도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너는 항상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으로 나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알아? 흥균 씨 쏙 빼 닮은 성준이 같은 아이… 나도 낳고 싶고 너처럼 당당하게 키우고 싶단 말이야. 너는 나보다 먼저 흥균 씨를 만났다는 이유 하나로, 내 뱃속의 아이는 햇빛을 못 볼지도 모르는데 너는 그렇게 또 착한 사람역할이구나. 주영아… 그렇게 착한 척 하지 말아. 역겨워」
희진은 입술을 비틀면서 말했다. 무서울 정도로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얼굴로 차분하게 얘기하는 주영이의 얼굴을 후려칠 것만 같아 희진은 커피 잔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래 내가 착한 사람역할을 하는 게 그렇게 역겨우면 니가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면 되잖아. 나는 이날까지 네가 말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로 힘들어 할 때마다 바보처럼 널 위로해주었었지. 그렇게 네 편들어줄 때 속으로 비웃었니? 제발 똑바로 생각이란 걸 좀 하란말이야. 결국에는 상처 입는 사람은 너야. 이런 식으로 너와 나의 관계를 깨뜨리고 나면 넌 하나가 아니라 두 사람을 인생에서 잃게 되는 거야. 나 잠도 못 자고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고, 다음에는 화가 났고, 그리고 오늘은 네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희진이 뭐라고 말을 하려 하자 주영은 고개를 저어 말을 막았다.
「희진아, 한달 시간을 줄게. 네가 말하는 흥균 씨랑 얘기해서 정리해. 그리고 네 뱃속에 있는 아이는… 모르겠다. 지금 그 생각까지는 안 나는데, 흥균 씨랑 얘기해서 잘 결정해. 난… 성준이 올 시간 돼서 가봐야겠다」
주영은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희진의 얼굴도 더 이상은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주영의 손을 희진이 잡았다. 주영은 놀라 희진을 돌아봤다.
「잠깐만! 너도 지금 뭔가 잘못생각 하고 있는 거 같다」
희진은 흥분 한 듯 조금 큰 목소리로 빠르게 얘기했다.
「나 너한테 용서받고 싶어서 만나자고 한 거 아니야. 그리고 우리 만난 지 한참 됐어. 벌써 6년 다되어가. 너 성준이 가졌을 때부터 만났으니까… 네가 알았든 계속 모른 척 하든 우린 헤어지지 않을 꺼야. 흥균 씨를 좀 봐. 너랑 있으면 행복하지 않아. 내가 행복하게 해 주고 있다구. 너 장님 아니잖아. 안 그래?」
희진의 말에 주영은 온 몸의 피가 다 얼어붙을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주영은 희진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면서 소리쳤다.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 쳐다보든 말든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장님이 아니라서 내가 이런 꼴을 다 본다. 너 제발 정신차리고 인생 똑바로 살아. 먹지도 않은 게 다 넘어올 거 같아. 더러워. 둘 다 더러워서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다」
주영은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마지막으로 이를 갈 듯이 말했다.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죽여버릴 테니까」
주영은 돌아서서 레스토랑을 나왔다. 뱃속부터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 그래, 너희 둘 다 죽여버리고 싶어. 이렇게 나를 기만하고 배신한 네가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미워. 언젠가는… 너희 둘 다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어 줄 꺼야. 아가야… 어쩌면 좋니… 새엄마는 어떻게 하면 좋아. '
주영은 그 날 이후로 흥균과는 한 집에서 별거에 들어갔다. 그의 말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고, 그와 나란히 앉아 수저를 들기조차 욕지기가 나와 참을 수 없었다. 주영의 일방적인 각방 선언에도 불구하고 주영의 태도에 토를 달지 않는 것을 보면 흥균이 반성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용서가 될 리 없었고 한 번 사라진 신뢰와 애정은 얼음보다도 더 차갑게 분노로 다가와 마음 속으로 흥균에 대한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세우게 했다. 어떤 때는 그의 와이셔츠를 갈기갈기 찢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미쳐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휩싸이는 그녀였다. 이런 매일의 일상은 주영을 서서히 죽여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뱃속의 아이를 위해 기계적으로 음식을 삼키고 자고 일어나고… 성준이와 함께 외출을 언제 했는지도 기억에서 지워지고, 가끔씩 반찬을 얻으러 온다는 핑계로 집에 와서 성준이와 놀아주는 석준이 고마웠고 주영이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성준이의 놀이방 결석이 잦아지자 석준은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성준이를 데리러 와서 아이를 놀이방에 데려다 주고 출근을 하기도 했다. 주변의 말 많은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흥균의 잦은 외박과 주영의 우울한 모습들이 벌써부터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었고, 이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들마저 성준이와 놀면서 너희 새엄마아빠 이혼 할꺼라는 얘기를 해서 주영을 더욱더 움츠리게 했다. 이제는 복수의 대상이외엔 아무도 아닌 희진에게 준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흥균을 참고 견디느라 도를 닦는 다는 기분으로 하루종일 집안 일조차 손에 잡지 못하고 종종거리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달 이라는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 날, 여름을 재촉하듯 봄비가 유난히 장마 비처럼 며칠동안 내리더니 이번엔 황사가 며칠동안 불어왔다. 성준이는 벌써 일주일이 넘게 집에만 있게 하는 새엄마한테 심술이 나 있었고 석준이 삼촌이라도 와서 놀아주었으면 했지만 삼촌한테는 전화조차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너무나 서러워 아침부터 새엄마의 다리를 붙잡고 징징거리고 있었다… 결국 주영은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어 시새어머니에게 전화를 하고 말았다. 며칠동안 가서 동서네 유치원에서 놀다 보면 아이의 스트레스도 풀릴 것 같고, 거의 열흘 일정으로 흥균은 제주도에 세미나가 있다고 가버렸지만 주영은 세미나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아이를 더더욱 돌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시새어머니인 박 여사는 주영에게 에미가 되가지고 자식하나도 건사 못한다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부리나케 손주를 데리러 오셨다.
「새어머니, 죄송해요… 애가 너무 갑갑해 해서요. 그리고… 이거 성준이 과자 값이요」
미리 준비해둔 봉투를 내밀자 박 여사의 눈이 위로 찢어져 올라갔다.
「됐다. 내가 돈 받자고 애 봐주는 사람이냐? 내가 애 데리고 있는 동안 집안 청소라도 좀 말끔하게 해 놓거라.. 살림하는 사람이 있는 집구석이 왜 이 모양인 게야?」
냉정하게 주영의 손을 거절하며 잔소리를 하는 시새어머니도 미워졌다.
「네… 며칠 있다가 제가 데리러 갈게요. 성준아,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착하게 굴어야 한다」
성준이의 옷가지가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아이의 신발을 신겨 빨리 나서라고 재촉하는 시새어머니의 뒷모습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성준이의 목소리가 명랑하게 울려왔다.
「네, 새엄마. 새엄마, 빨리 데리러 오세요」
성준이는 생일 선물로 받은 로봇을 안고 벌써 문밖에서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뛰어 나갔다. 아이의 천진함은 너무나 솔직해서 가끔은 잔인하기조차 하다. 주영은 마음 한 구석이 찌르는 듯이 아파 와서 집에 들어와서는 문을 닫고 한 참을 울고 말았다. 아이가 간 후 둘러 본 집안은 정말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동안 정말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었던 것인지… 주영은 오랜만에 베란다 문을 열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마음도 무거운데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도 뿌연 것 같아 답답했다. 올해는 황사가 심하기도 했고 며칠 전에 흙비가 와서 유리창이 말이 아니었다. 날씨가 좋으면 창문 청소를 해야지 하고 내심 생각하고 있던 차라 주저없이 비눗물을 풀고 반바지에 반팔티로 갈아입고 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유리창을 닦던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마도 성준이가 할머니 집에 잘 도착했다는 전화인 것 같아 몸을 움직여 내려오려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아랫배를 강타하는 고통고 함께 뜨겁고 끈적한 것이 옷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흥균은 제주도에든 어디든 희진이와 함께 있을 때는 전화를 꺼놓기 때문에 연락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희진이에게 전화해서 바꿔달라고는 절대로 못하지… 내가 죽는대도. 지금 막 성준이를 데리고 간 시새어머니에게도 연락 할 수는 없었다. 왜 흥균에게 전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습관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이렇게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성준이가 사진 속에서 자신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주영은 점점 아파오는 배를 붙잡고 다시 전화를 집어들었지만, 결국은 혼자 뿐이라는 절망감에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외로움이, 패배감이 밀려왔다. 그것이 육신의 아픔보다 주영의 마음을 흔들었다. 고통이 더욱 거세게 다가왔고 숨 쉴 수조차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주영은 할 수없이 석준에게 전화를 했다.
「석… 준 씨… 빨리…」
고통에 말도 제대로 이을 수조차 없었다.
「주영 씨, 왜 그래?」
놀라고 당황한 석준의 목소리에 눈물이 다시 차오른다.
「나… 아파… 빨리…」
「119에 연락했어?」
바보같이 119에 전화할 생각은 왜 못한 걸까? 주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아흑!」
새롭게 강타하는 고통에 미처 삼킬 사이도 없이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끊어!」
그는 주영의 신음소리에 놀라 전화를 집어던지고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병원으로 가는 길… 그의 차는 주영의 신음소리와 피로 얼룩졌고, 그는 죽기를 각오한 사람처럼 쌍라이트를 켜고 미친 듯이 차를 몰아 병원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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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4개월… 유산… 자신의 아집 탓에 아이를 잃은 것만 같아 주영은 가슴이 아파 견디기가 힘들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흘 간 여전히 흥균은 전화한통 하지 않았다. 시새어머니가 성준이를 데리고 오셨다 가셨고. 저녁이면 석준이 와서 함께 있어주었다.
「피곤하잖아… 이제 그만 집에 가 석준 씨… 나 혼자 있어도 괜찮아. 내일 오전에 퇴원할텐데…」
옆에서 기다란 손가락으로 익숙하게 사과를 깍고 있는 석준을 보면서 주영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석준은 줄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져 있는 주영의 모습에 또다시 가슴이 아파왔지만 주영을 돌아보면서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아냐. 집에 가봐야 혼자 있을 텐데… 같이 밥도 먹고 티비도 보고 얼마나 좋아. 내 걱정은 말고 이거 좀 먹어봐. 진짜 달다」
석준이 이쑤시개에 찍어서 건네는 노란 사과 한 조각에 주영은 금새 눈가가 젖어들었다.
「석준 씨… 나, 자기한테 정말 너무 빚이 많다. 나 어떻게 다 갚으라고 이렇게 잘해 줘?」
떨리는 주영의 목소리에 석준은 얼른 다른 한 조각의 사과를 자신의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입안 가득 퍼지는 사과의 단 맛 조차도 쓰게 느껴졌다.
「글쎄… 니가 빚 때문에 깔려 죽을 만큼만 잘해주지 뭐. 걱정 마셔요. 너 아프면 내 홈메이드 음식은 어디서 조달하라고… 어서 기운 차리고 일어나서 나 잡채 해줘. 봄이라 그런지 입맛도 없고 갑자기 잡채가 먹고프네. 알았지?」
주영의 기운없는 목소리에 석준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지만 그저 웃으며 농담을 했다. 그래야 주영이 자신을 밀어내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래야 주영이 더 이상 슬픈 눈을 하지 않을 것만 같아서…
「응. 그거야 얼마든지 해 주지. 고마워…」
석준은 주영의 말간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아직 반 이상이나 물이 남아있는 주전자를 들고 일어섰다. 지금 이렇게 주영의 눈물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화가 치밀었다. 주영이 우는 모습을 보면 안고서 위로조차 해 주지 못한다. 욕심낼 수 없는 줄 알지만 점점 참기 힘들어 지고 있었다. 알면서도 자꾸만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참아 낼 자신이 없었다.
「나… 물 떠올게」
「응…」
퇴원은 혼자서 했다. 석준은 전화해서 화를 냈다. 왜 자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왜 그렇게 청승이냐고… 몸은 괜찮은지, 또 우울하지는 않은지 시시콜콜히 어미 닭처럼 물었다. 주영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석준 씨, 이럴 때 보면 꼭 우리 새엄마처럼 굴어. 잘은 모르겠지만 새엄마가 계셨다면 꼭 석준 씨처럼 하셨을 꺼 같아」
웃음기가 묻어 있지만 주영의 눈가가 젖어 있을 거라는 건 안보고도 알 수 있었다. 석준은 뜨거운 것이 목으로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아 그것을 꿀꺽 삼켰다.
「새엄마라고 생각 해, 그게 맘이 편하다면. 그건 그렇다 치고 집에 뭐 먹을거리도 없는 거 같던데 죽이라도 사가지고 갈까?」
주영이 수술실에서 나와 잠 들어있는 사이 문도 잠그지 않고 뛰어 나온 것이 생각나 집에 가 봤었다. 거실에 말라붙은 검붉은 핏자국에 소름이 끼쳐 걸레로 대충 닦아내고 활짝 열려진 베란다 문을 닫고 둘러본 거실의 한 구석에 성준이의 애기적 사진이 눈에 들어왔었다. 곳곳에 놓여있는 잎 넓은 관엽식물들과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그녀만큼이나 따뜻해 보이기만 하는데 조금 전 지워버린 핏자국의 영상이 겹쳐와 그로데스크하게 보이기까지 했었다.
「우리집, 석준 씨가 치워놓은 거야? 미안해서 어쩌지? 빚이 하나 더 늘었네… 조금 있다가 남편 올꺼니까 괜찮아. 석준 씨 너무 고마워」
석준은 자기가 치워놓지 않았다면 그 날의 공포와 싸우면서 자신이 흘린 핏자국을 닦아내야 했을 주영이 가여워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는 화가 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하고 말았다.
「아… 그렇겠네. 남편 오면 바가지 좀 긁어. 그 인간은 그렇게 해도 되. 부인 다 죽게 생겼는데도 안 와봤으니까. 그럼 내일 전화할게 좀 쉬어」
석준의 귀에 또다시 주영의 애처로운 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응… 수고해」
석준은 끊어진 전화기를 보면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 새엄마라… 난 새엄마 따위는 되고 싶은 않은데… 당신 곁에서 힘들어 할 때 안아주고 싶을 뿐인데… 이것도 내 욕심이겠지? 하지만 주영아, 빚이 늘어나서 빚에 깔려 죽을 만큼 잘해줄게. 그러니까 나를 보면서는 웃기만 해줘. 그것까지만 욕심낼게. 바보같이 울지 말고 날 보면서는 웃어줘. '
주영은 항상 뭐만 해 주면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주는 것은 인색하지 않은 그녀가 받으면서는 미안해하고 꼭 빚진 사람처럼 안절부절을 못한다. 그녀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 헐렁한 반바지를 흠뻑 적시며 흐르는 선홍색 피를 보고 그는 눈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등줄기로 흘러내린다. 만약 그때 남편이나 그 잘난 친구가 전화를 받았다면 자신에게는 절대로 전화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는 더욱 더 화가 났다. 회의 도중에 엎어버리고 뛰쳐나온 그의 마음을 주영이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실은 간이침대가 수술실로 사라질 때 너무나 두려워 눈물이 나더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허전하다. 그녀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마음껏 해 줄 권리가 자신에게 없음에 화가 났을 뿐이었다.
석준과 전화를 끊고 얼마 되지 않아 흥균이 들어왔다.
「당신 아팠다면서? 괜찮아?」
분명히 시새어머니는 그에게 아무 말도 안 하셨을 꺼 라고 생각은 했지만 배신감이 차 올라와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물론 괜찮지. 나 유산해서 사흘동안 병원에 있다가 퇴원해서 지금은 괜찮아. 당신이야 신선놀음에 정신 없었을 텐데 뭐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있었겠어? 괜찮아」
「뭐? 왜 나한테는 임신했다고 말도 안 했어?」
「내가 얘길 안 했다구? 당신 지난번에 내가 병원 다녀왔다는 얘기는 뭘로 들은 거야?
내가 사진 찍어왔다고 보라고 당신 책상 위에 올려놨잖아」
「그, 그랬었어? 미안하다… 요즘 너무 정신 없이 바빠서 정말 몰랐어」
흥균의 우물거리는 변명에 주영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미안해? 바빠? 그럼 미안하고 바쁜 일을 왜 만들고 다니는 거야? 당신 미쳤어! 결혼이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알았어? 그래서 나는 이렇게 허수아비처럼 세워두고 당신은 그렇게 자유로왔어? 성준이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나 당신 인간처럼 안보여. 오만정이 다 떨어진다구」
「주영아! 너 왜이래?」
흥균이 흥분해서 소리치는 주영을 잡기 위해 한 걸음 다가오자 주영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소리쳤다.
「왜이러냐구? 나한테 손끝하나도 댈 생각 말아. 나 당신 노리개 아니야. 희진이한테서 흥미 떨어지고 돌아오는 항구가 아니라구!」
흥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면서 주영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래… 어떻게 알았냐고? 그게 아니지… 어떻게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냐고? 희진이 만나서 얘기 다 들었어. 나 걔한테 한 달 줄 테니까 헤어지라고 했거든. 그동안 어떻게 정리를 하겠지 하고 믿었어. 희진이가 아니라 당신을 말이야! 희진이도 아무 말 안했어?」
흥균의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식의 표정이 너무나 가증스러워 주영은 마지막 한 가닥 남았던 믿음조차도 미련 없이 버렸다. 주영의 얼굴에는 혐오감이 피워낸 비아냥거리는 웃음이 떠올랐다.
「왜? 얘기할 시간 많았을 텐데? 지난 열흘 동안 둘이 침대에서 뒹구느라고 얘기할 시간도 없었어? 재미 좋았지? 그랬겠지. 마누라 속이고 마누라랑 제일 친했던 친구하고 놀아나는 기분이 오죽이나 재미있으셨겠어? 이불 속에서 내 흉은 안봤어? 주영이 애 낳고 뱃살 늘어졌다고 흉봤으면 희진이년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서비스 더 잘 해 줬을 텐데… 왜? 그런 기가 막히다는 눈으로 쳐다보지마… 당신 가증스러워」
주영은 흘러 넘치는 눈물이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거친 손길로 눈물을 지워내고 흥균을 쳐다봤을 때 희진과의 마지막 전화통화가 떠올랐다. 뻔뻔스럽게도 기쁨을 감추지 않는 목소리로 흥균이 아이를 낳자고 했다고 성준이는 잘 키워 줄 테니 이혼하라는 말로 확인사살까지 했다. 그 날의 고통이 너무나 생생하게 되살아나 천장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해 비틀거리며 식탁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희진이가 그러더라. 나보고 장님이냐고… 나, 장님이 아니고 귀머거리가 아닌 내가 너무나 원망스러웠어. 성준이 때문에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당신 자식 뱃속에서 키우면서 희진이보고 애 지우라고는 차마 얘기 못하겠더라. 당신 제주도 도착했다고 전화하던 날 희진이 한테서도 전화 왔었어. 당신이 애 낳자고 했다고, 이젠 죽어도 못 헤어지니까 나보고 알아서 물러서라고 하더라」
「그럼 생긴 애를 지우라고 해야 했다는 거야? 그게 애 키우는 새엄마가 할 소리야?」
흥균도 맞받아 소리쳤다. 주영은 눈을 감았다.
「당신, 정말 말 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구나. 내가 살 맞대고 여지껏 살면서도 바보처럼 모르고만 살았다니… 내가 정말 바보였어. 그래, 희진이 말대로 당신 놔줄게. 이제껏 당신 붙잡지도 않았지만, 성준이 봐서라도 내가 붙잡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신같은 개만도 못한 사람하고 한 지붕 밑에서 더 이상은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뭐? 개만도 못해?」
주영은 똑바로 흥균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그래, 개만도 못해. 당신이 개보다 더 나은 게 뭐가 있는데?」
흥균의 큼직한 손이 날아와 주영의 뺨을 후려쳤다. 거실의 소파 앞까지 날아간 주영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서 다시 흥균의 앞으로 다가갔다. 흥균은 아직도 주먹을 말아 쥐고 씩씩대고 있었지만 한 대 더 맞는 것쯤은 두려울 것도 없었다.
「이제 다시는 내 얼굴 볼 생각도 하지 말아. 책상 위에 서류 있어. 당신 도장만 찍으면 돼. 성준인 내가 키울꺼야. 방금 한 대 맞아 줬으니까 딴 소리 하지마! 당신 같은 개념없는 사람한테 애 맡겼다가 어떤 인간 만들라고? 난 내 아들 그렇게 크는 꼴 못 봐. 그러니까 당신이 양육비 주고 둘이 조용히 사라져서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마. 그리고 당신 짐은 벌써 어머님한테 가고 있을 테니까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해」
새어머니라는 말에 흥균의 얼굴이 움찔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새어머니한테 뭐라고 한 거야?」
이를 갈 듯이 낮은 목소리로 흥균은 물었지만 주영은 비웃음을 참지 않았다.
「설마 내가 그런 식으로 당신 짐을 덜어줬겠어? 당신 매는 당신이 맞아. 당신 새어머니께서 설마 귀하디 귀한 당신 아들한테 매를 드실까도 의문이긴 하지만… 당신 자식 귀한 줄만 아시지 남의 자식도 귀한 줄 모르시고, 며느리가 유산을 해서 병원에 누워있는데 당신한테는 좀 아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잖아. 하긴… 그러니 당신 같은 파렴치한을 낳고 미역국을 드셨겠지」
주영은 또다시 손을 드는 흥균을 노려보며 소리질렀다.
「그 더러운 손으로 때리기만 해봐. 너희집안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만들어줄테니」
흥균은 한번도 보지 못했던 주영의 독기어린 눈에 주춤해서 손을 내렸다. 주영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이 금방이라도 쇼크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흥균은 방법을 바꾸기로 했는지 식탁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주영에게도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주영아, 앉아. 앉아서 좀 진정하고 우리 얘기 좀 하자. 바로잡을 꺼야. 한 번 실수한 걸 가지고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좀 차분히…」
흥균의 말에 주영은 신물이 넘어오는 것을 느꼈다.
「얘기? 무슨 얘기? 그리고 실수? 그래 지금 분명히 실수라고 했지? 나도 희진이 앞에서 당신이 실수 한 거라고 얘기했었어. 당신이 실수 한 거라는 말에 희진이 비웃더라. 무슨 실수를 5년이 넘도록 해 오는 건데? 바로잡을 꺼라고? 뱃속의 애들 둘씩이나 죽이면서 바로잡을 꺼라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바로잡을 건데? 당신이야말로 아들 둔 아빠가 할 소리야? 나 미쳐서 칼 들고 날뛰는 꼴 보기 전에 빨리 도장 찍고 나가!」
「이주영! 그래, 내가 희진이 사랑한 건 잘못이라 치자. 하지만 성준이는 못 내놔. 성준이 내 아들이야. 정히 이혼하고 싶으면 성준이 놓고 나가!」
흥균은 아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들이대곤 느긋하게 기대앉으며 주영을 응시했다. 주영은 그러한 흥균을 후려치지 않기 위해 주먹을 말아 쥐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잠시동안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주영이 식탁 위에 놓여진 열쇠와 휴대폰을 집어들며 싸늘하게 말했다.
「내 앞에서 그년 사랑한다는 소릴 하면서 성준이는 안 된다? 됐어… 당신 맘 알았고 그래야 이혼하겠다면 그렇게 해 주지. 그러니 이젠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줘. 희진이년한테 몸도 마음도 다 뺏겨 놓고 이혼 못하겠다는 심사는 뭐야? 내가 무슨 당신 악세사린 줄 알아? 나는 무슨 자존심도 없는 허수아비인줄 알았어? 나 들어오기 전에 빨리 도장찍어 놓고 나가 줘. 당신 알다시피 이 집 우리 새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나한테 주신 거고, 당신 병원 권리금 절반은 내꺼야. 여기 당신 집 아니고, 내 집이거든? 그러니 나가 줘. 그동안 집세도 안 받고 밥이며 빨래며 심지어 잠자리 시중까지 들어줬으니까 위자료는 많이 줘야해. 희진이 돈 잘 버니까 나 다 주고 나가도 당신 먹여 살릴 꺼야, 걔는. 나보다 당신 더 많이 행복하게 해 준다니까 어디 한번 잘 살아봐. 내 눈에서 피눈물 빼고 둘이서 얼마나 잘 사는지 보자구. 우연이라도 내 눈에 띄는 날에는 둘 다 죽여버릴 거야. 알았어?」
자신을 지나 현관으로 향하는 주영의 팔을 잡아 흔들며 흥균은 말했다.
「주영아! 너 진짜 왜이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는 거야? 미안하다고 하잖아. 너 예전에는 이렇게 차갑지 않았어」
주영은 온 힘을 다해 흥균을 뿌리쳤다. 흥균의 손이 닿았던 곳에서 소름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다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잖아.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그건 내가 하고싶은 말이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서 애까지 낳고 살게 했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워.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야. 당신이랑 희진이 다신 안 봤으면 좋겠어. 그럼 잘 가」
주영은 아직도 의자에 앉아있는 흥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정처없이 걷고 또 걸었다.
' 그래… 결국 사랑이란 것도 약속이란 것도 다 부질 없는 거였어. 아무리 단단한 것으로 묶는 다고 해도 사람마음만큼은 묶을 수 없는 건가봐. 새엄마… 죄송해요… '
한참을 걷다가 주영은 석준에게 전화했다.
「어? 왜 밖이야? 집에서 몸조리 잘 해야 한다고 했잖아. 왜 나왔어?」
「석준 씨, 나 지금 공원 앞이거든… 기분이 우울해서… 그래서 무작정 나왔는데 갈 데가 없네? 와서 기분 좀 풀어 줘」
「알았어. 거의 다 와 가니까 5분만 기다려」
한참동안 자유로를 달리는 동안 주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준은 다시 집 앞으로 와서야 주영을 돌아보며 얘기했다.
「이제 기분 좀 나아졌어?」
「응, 석준 씨… 갑자기 전화해서 귀찮게만 하고… 천하에 도움 안 되는 이웃이다. 그치?」
주영은 힘없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석준은 부어오른 주영의 얼굴을 보며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을 억지로 삼키고 마주 웃으며 말했다.
「뭐, 언제는 나한테 도움 안 된다고 하더니만, 고새 배워 가지고 써먹네… 무슨 일 인지는 안 물을게 차비만 줘」
주영은 미소짓는 그의 얼굴을 돌아보고는 난처해하며 우물거렸다.
「저기… 그냥 지갑도 없이 나와버려서 어쩌지? 이번에는 외상으로 하고 다음에 내가 기름 한 번…」
석준은 자신의 뺨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됐구, 차비로 여기 뽀뽀 한 번 해 주라」
「응?」
「뭐… 그 정도쯤은 해줘도 될 거 같은데? 성준이도 차비하면 바로 하거든. 총각의 외로운 밤 위로도 해 줄 겸해서 한번 봉사하셔」
주영은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아들은 뽀뽀를 남발 했나보다. 요즘들어 자신이 놀이방에 못 보낼 때마다 그에게 부탁했더니만… 뭐, 어떠랴 싶었다. 제일 친한 친구와 남편의 부정을 알아버린 악에 바친 여자 역할을 하기로 하지 않았는가?
「그래? 그럼, 뭐… 이걸로 밤에 잠 못 자면 더 곤란 할텐데?」
주영은 다시 눈물이 차오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까칠한 볼에 입술을 댔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언젠가 내가 술 한번 살게」
「그 고맙단 소린 벌써 질리게 들었으니까 그만해도 되. 들어가서 푹 자. 내일 전화할게」
「응. 잘 가」
그의 차가 아파트의 주차장 입구로 사라질 때까지 주영은 가만히 서 있다가 집 쪽으로 걸어갔다. 가만히 손을 들어 입술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가 쓰는 스킨냄새가 배어있었다. 비가 오려는지 잔뜩 찌푸린 하늘이 답답해 한숨을 쉬었다.
' 성준 아빠는 집에서 나갔을까?'
역시 집은 텅 비어있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나다」
시새어머니인 박 여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네…」
「남자가 사회생활 하다보면 그럴 수 도 있는 게지 그런 걸 가지고 남편을 나가라고 하고 이혼한다고 펄펄뛰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냐? 너 시애미는 눈에 뵈지도 않는냐? 네 부모는 널 그리 가르치더냐? 여자가 좀 다소곳하고 참을성도 있고 해야지, 니가 그모냥이니 흥균이가 밖으로 돈 게 아니냐? 내가 그냥 어린 게 일찍 시집와서 고생한다 싶어 오냐오냐했더니만 아주 뵈는 게 없는 게냐? 내가 입이 써서 말 안 했다만, 너 병원 데려왔다는 사람은 뭐냐? 응? 아주 세상 무서운 게 없는 게야? 외간남자한테 업혀서 병원에 들어왔다는 소릴 듣고 내가 아주 창피스러워서 병원에 가고 싶지도 안더구나. 너 유산한 애기 흥균이 애가 맞기는 한 거냐?」
주영은 자신의 귀로 들려오는 시새어머니의 가시도친 말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새어머니! 말씀이 너무 지나치시네요. 저 이제까지 친정 새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새어머니께는 최선을 다했고 진심으로 존경하고 공경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때 성준 아빠 야단쳐서 가정을 지키라고 하시지는 못 하실 망정 뭐라구요? 하늘에 계신 저희 부모님 욕하시는 것도 모자라서 뱃속에 있던 애기까지 욕보이세요? 어머님 자식 귀한 것만큼 저희 부모님도 저 귀하게 키우셨어요」
주영의 말에 박 여사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 소리질렀다.
「아니… 이런 못 배워먹은 게 어디 시애미한테 소리를 지르면서 말대답이야 말대답이!」
주영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전화기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고 박 여사의 목소리는 실제로 후려치는 채찍과도 같이 아픔을 주고 있는 듯했다.
「성준 아빠한테 성준이 데려다 놓으라고 하세요. 어찌됐든 어머님께는 죄송합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주영은 단호한 어조로 말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수화기 너머로 뭐라고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지만 주영은 무시했다. 숨막힐 듯한 적막이 흘렀다. 주영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 인줄… 여지껏 뭐하고 사느라고 몰랐던 걸까?'
주영은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거실에 걸린 성준이의 돌 사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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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가 지나고, 그동안 이혼서류를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있던 주영은 용기를 내어 흥균이 도장찍은 서류를 들여다보면서 한참 난감해 하고 있었다. 결혼하는 데도 증인이 필요하다고 해서 병원에 의식 없이 누워있는 새엄마 곁에서 얼마나 울었는데 헤어지는 데도 증인이 필요하단다. 기가 막힌다. 이젠 울 때 곁에 있어줄 부모님도 않계신데… 주영은 옷을 챙겨 입고 무작정 석준에게 갔다.
「나 지금 석준 씨 회사 로비야. 잠깐만 나올래? 잠깐이면 되」
석준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성큼성큼 주영에게 다가오며 웃었다. 왠일로 주영은 평소 하지 않던 화장한 얼굴에 머리를 꼼꼼히 그물망에 넣어 핀으로 고정하고 짙은 색의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뭐야? 지하 아케이드 커피숍에 있지 그랬어. 가자」
석준은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미소지은 얼굴로 말했으나 주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석준 씨 바쁘잖아. 요즘 자기 정신 없이 바쁜 거 다 알아. 간단한 일이니까, 이따가 저녁에 약속 없다면 내가 술 한잔 살게」
「뭔데? 무슨 일인데 그렇게 얼굴이 비장해?」
석준은 창백한 주영의 얼굴이 안쓰러워서 짐짓 웃으며 말했다.
「응… 나… 이거에 싸인 좀… 결혼 할 때도 귀찮게 굴더니 헤어지는 데도 귀찮게 구네. 이런 찝찝한 거 해 달라고 해서 정말 미안… 근데 길가는 사람 붙잡고 해달랄 수도 없어서 말야」
석준은 주영이 들고 온 작은 가방에서 꺼내서 내미는 서류를 노란 봉투에서 꺼내보고 놀라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저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로 이런 일이 생겨버릴 줄이야… 석준은 주영이 건네 준 서류를 움켜쥐고 소리쳤다.
「어떻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런 일이 생겨? 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나한테조차 숨겨 온 거야? 아니다. 따라와! 너 이렇게 그냥은 못 보내겠다. 이혼이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석준의 큰 소리에 놀란 주영은 주변을 살피면서 애원조로 말했다.
「나 빨리 법원 가봐야 해. 5시전에 접수해야한다고 했단 말이야」
「시끄러, 이 철딱서니 아줌마야! 따라와. 딴 데로 새기만 해」
석준은 화난 듯 주영의 팔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석준의 큰 보폭에 맞춰 따라가느라 종종걸음치며 거의 뛰다시피 해야 했다. 건물의 제일 꼭대기 층으로 올라온 주영은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모이는 바람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석준은 주영을 자신의 사무실 소파에 앉혀놓고 비서에게 얼음물 한 주전자를 부탁하고 와서 맞은 편에 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빼지 말고 얘기해. 지금은 이웃사촌 아니야. 니 말대로 니 새엄마든 오빠든 뭐든 되 줄 테니까, 아무도 들을 사람 없으니까 숨김없이 얘기해. 유산한 것도 이 일하고 관련 있는 거야?」
「아니…」
주영의 풀 죽은 목소리에 석준은 너무 다그치듯이 말한 게 아닌가 싶어 주영에게 미안해졌다. 주영 자신도 많이 힘들텐데 자신의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고 주영을 너무 몰아붙인 것은 아닐까? 이러다가 진짜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리고 자신의 관심조차도 버거워 하면 안되는데… 석준은 한숨을 쉬고 조금 부드러운 시선으로 주영에게 말했다.
「자, 물 한잔 마시고 천천히 얘기 해봐」
때마침 비서가 가져온 쟁반을 받아들어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주면서 주영에게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데 아직 나가지 않았었는지 비서가 옆에서 난처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저… 이사님? 잠시 후에 경영혁신팀 회의가…」
「아! 회의가 있었지?」
석준은 그제서야 주영의 전화를 받은 후로 뒷전으로 밀려난 자신의 스케줄이 떠올랐다. 난처하다. 이런 때 신경쓰지 않고 한동안 주영의 얘기를 들어줄 시간조차도 없다니… 석준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비서에게 사무적인 어투로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그거 두시간 후로 미뤄주고, 나머지 스케줄은 빼줘요.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해야 할 것 같으니까. 그리고 밖에 박 변호사 대기시켜줘요」
「네,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가고 나서 주영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피식 웃었다.
「자기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이었네? 이사라… 그럼 나도 능력 있는 미시가 되는 건가?」
희진의 말이 떠올라 주영은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니 얘기나 좀 해봐, 나 폭발하기 전에. 들었지? 두시간 후에 회의 있어」
석준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영을 쏘아보면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주영에게 오빠 아니라 아버지라도 되어 달라고 하면 뭐든지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렇게 슬픈 눈을 하고 넋이 빠진 사람처럼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음… 별거 아니야. 단지 성준 아빠랑 같이 못살 게 된 것 뿐… 어쩌면… 성준이랑도…」
주영은 천천히 감정을 억누르며 말을 잇다가 아이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다. 석준은 옆자리로 와서 앉으며 티슈를 뽑아 손에 쥐어주었다. 주영은 석준이 쥐어준 티슈로 눈가를 닦아내며 치밀어 오르는 통곡을 억지로 삼키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석준 씨가 지난번에 백화점에서 봤던 그 친구 있잖아. 그 친구가… 나한테는 친언니나 동생처럼 친한 친구거든. 성준 아빠랑 그 친구랑 바람났어. 나 걔한테 두 달 동안 시달렸어. 성준이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지금은 성준이도 밉기만 하고… 나 미쳐가나 봐. 이젠 이 길 밖에 없는 거 같아서 차라리 그 사람 내가 먼저 버리려고 해. 벌써 5년이나 됐다고 해, 서로 그런지가…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내 친구에게 잘 해 주는 그 사람에게 고맙다고 생각해왔어. 우습게도 성준이 생일날 알게 됐어. 희진이한테 잘 들어갔냐고, 남편 흉이나 보면서 수나다 떨까하고 전화했다가 거기 함께 있는 그 사람 목소리를 들었어. 며칠 뒤에 희진이랑 만났고, 지금 두 사람 함께 살고 있어. 난 그 꼴 못 보겠어서… 내가 잃어버린 아기 생각나서 반은 돌아버린 거 같고… 그래서 이렇게 가다가는 내가 진짜 형편없는 사람이 되 버릴 것 같아서… 이혼 할 꺼야. 그게 다야. 이런 지저분한 연속극에 끼워 넣어서 미안해. 바보같이… 변호사 찾아가면 되었을 것을..」
석준은 주영의 움켜 쥔 손이 무릎에서 떨리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분노조차도 주영에게 미안해질 정도로, 차라리 억지로 통곡을 참는 주영을 끌어안고 함께 울기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자신의 눈가도 젖어들고 있었다.
「그래, 이주영. 너 진짜 바보 같다. 이렇게 바보 같은 줄은 내가 진작 알았지만 이렇게 바보같이 당하고만 있으니… 잠깐만…」
석준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변호사가 생각나 일어나서 인터폰으로 비서를 불렀다.
「박 강희씨, 박 변호사 대기 중입니까?」
「네 이사님 들어가시라고 할까요?」
「네」
주영은 어느새 눈물을 닦고 한숨을 쉬며 진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석준의 상임고문 변호사가 들어와 인사했다. 석준은 자신의 사촌동생이라고 하면서 주영을 소개했고 그간의 내용을 간략하게 얘기 한 다음 위자료라든가 아이 양육권에 대한 부분을 물었다.
「음… 차라리 처음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곳으로 경찰을 부르셔서 간통으로 고소를 하시는 방법이 제일 확실하긴 했을 텐데. 지금은 두 분이 이혼서류를 작성하신 뒤라 다른 법적 조치를 취하기는 힘들겠지만 남편 쪽에게 이번 이혼의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법원에서도 새어머니께 거의 대부분 양육권을 주는 것으로 판례가 나와 있습니다. 단, 새어머니 쪽이 경제력이 있다면 말입니다. 남편분과 양육권에 대한 부분은 합의를 하셨습니까?」
젊은 변호사의 감정을 배제한 사무적인 어투로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은 주영은 고개를 들어 변호사를 쳐다보며 차분하게 얘기했다.
「아니요. 그리고 그렇게 아이 문제로 소송을 하게 되면 아이까지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얘길 들어서요. 그렇게까지 요란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지 않아요. 위자료 문제야 어차피 병원도 공동명의로 올려놨고, 제가 시집올 때 가져왔다는 것이 증명되면 돌려 받는데 문제없는 것 아닌가요? 집은 남편 명의로 되어있지만 그것도 처음엔 친정새엄마명의였고… 돌아가실 때 저한테 상속하신 것을 남편명의로 바꾼 거니까요. 제가 남편을 가급적 만나지 않고 해결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변호사는 석준의 얼굴빛을 살폈다.
「제가 이혼소송 전문은 아니고 해서, 얼마만큼 상심이 크실 지 이해가 됩니다만, 사무실로 돌아가서 관련법규를 좀 알아보고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좀 편안히 가지시고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닙니다만…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인지 주영은 습관처럼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사님 통해서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주영은 엉거주춤 일어나 변호사와 인사를 하고 앉았다. 변호사가 나가고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물만 마시던 주영은 가방을 집어 들면서 일어섰다.
「석준 씨, 회의 있다면서… 나 그만 가볼게」
석준은 주영을 끌어 앉혔다. 그녀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해 보였다.
「아니야. 너 여기서 좀 쉬고 있어. 회의 끝나고 퇴근하려고 했으니까. 한 시간쯤이면 끝날꺼야. 밖에 얘기해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할 테니까 걱정말고 좀 누워서 쉬어. 알았지?」
「그럴 필요까지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주영은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아니, 이따가 너랑 얘기 좀 하려고 한다. 사라지면 애들 풀을 거니까 알아서해」
심각해진 분위기를 조금 바꿔보고자 석준은 일부러 농담을 섞어 위협했다.
「자기가 조폭이야? 맨날 애들 푼다고 협박하게…」
주영은 힘없이 웃으며 말대꾸를 했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응… 그럼 최고급 소파에서 발 냄새 좀 풍기고 있을게 냄새 배기 전에 와」
혼자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풀렸는지 주영은 농담을 하며 웃어주었다.
「알았어」
석준은 서류를 챙겨들고 나갔고 문이 닫히기 전 비서에게 이렇게 저렇게 지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영은 구두를 벗고 넓은 소파에 편안히 누웠다. 괜시리 눈물이 흘러 넘쳤다.
그동안 충분히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모자랐나보다.
생각보다 회의가 길어져서 주영이 갔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는데, 사무실의소파에서 모로 누워 잠들어있는 주영의 모습을 보고 석준은 안심했다. 그동안 많이 피곤했었는지 들어오는 소리에도 깨지 못하고 깊이 잠이 들어있었다. 깨우기가 안쓰러워 석준은 전화조차도 연결하지 말라고 하고 책상에 앉아 일을 하기 시작했다. 주영은 해가 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음… 언제 왔어? 어? 지금 밤이야? 내가 얼마나 잔 거야?」
「별로 많이 안 잤어. 지금 9시밖에 안됐어. 그만 나갈까?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으니 이제 배고플 거 아냐?」
석준과 주영은 함께 밥을 먹고 그냥 가벼운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집에 바래다주면서 석준은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바보같이 혼자서 끙끙거리지 말고 이제 잘 해결 될 거니까 걱정 그만 하고 푹 쉬어. 너 며칠 안 본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됐어. 알았지? 내일 전화할게」
「응, 석준 씨. 오늘 정말 고마워. 석준 씨 없었으면, 진짜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아」
「그래… 들어가」
석준은 힘없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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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보고 나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젠 널 욕심내도 될 것 같아서 한편으론 좋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나까지 밀어 낼까봐 두렵다. 너 같은 사람을 두고서 다른 곳에 정신 빼앗긴 너의 남자를 정신 잃을 만큼 패 주고 싶기도 하고 다행이란 생각도 들고… 나도 너 때문에 미치겠다. 주영아… 미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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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아직도 주영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시새어머니는 아이를 보내지 못하겠다고 하셨고, 흥균 또한 아이가 없어야 주영이 편할 거라는 식으로 얘길 했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있지만 주영의 겨울은 아직도 끝날 생각도 않은 채로 오히려 더욱 더 추워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유일한 햇살인 아이를 빼앗기고 기나긴 터널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로 그렇게 주영은 시들어 가고 있었다. 냉랭한 목소리로 아이를 보내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흥균의 목소리에 주영은 깨질 듯이 아파 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당신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이었어? 나한테서 성준이를 빼앗아가면서 나한테 마치 은혜를 베푸는 사람처럼 그렇게 얘기하면 당신의 죄책감이 좀 덜어져? 그런 식으로… 당신 진짜 비겁해! 희진이한테서 성준이 키운다고? 희진이한테 정신팔려서 성준이랑 잘 놀아주지도 않아 놓고, 키울 때 한번이라도 제대로 아빠 노릇도 안 해 놓고, 이제 와서 아빠랍시고 자기가 키운다고?」
주영은 흥균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성준이가 걱정되고 보고싶어서 아무것도 못하겠는데 흥균은 아이를 훈장으로 여기는 것처럼 굴고있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 흥균은 항상 그런 식이었던 것 같다. 결혼해야 한다고 새어머니를 설득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의사보다는 자신의 의사에 당연히 따라 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너는 힘들테니 내가 알아서 할게 그냥 옆에 있기만 하면 된다고…. 성준이를 낳기 전이나 후에 친구들의 모임이나 친척들의 대소사에 주영을 빼놓고 다니면서 아이 데리고 힘드니까 괜찮다고… 너는 집에서 살림 잘하고 아이 잘 키우면 되는 거라고…. 집에서의 자신의 역할까지도 주영에게 떠넘긴 채 밖에서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와 놀아 줄 생각도 없었으면서 친구나 친척들의 일에는 열심히 다녔다. 이가 갈릴 정도로 이렇게 누군가를 미워한 적이 없었다. 주영의 인생에는 항상 더 많이 사랑하고 아낄 사이도 없이 부모님도 친구들도 너무 빨리 사라져 버렸기에 흥균이나 성준이 만큼은 원 없이 아끼고 사랑하리라 다짐했는데…
「너 지금 힘들어서 애 돌볼 여유도 없잖아? 어차피 성준이 나씨 집안 사람이고, 우리나라 호주법이 바뀌지 않는 이상 너 다른 사람 만나도 동거인 밖에 안 될텐데 뭐 하러 그렇게 고집을 부려? 자존심 때문에 애 장래까지 어둡게 만들지 말자. 인수 처 보낼 테니까 성준이 짐 싸 놓도록 해. 그리고, 그 아파트 내놨어. 아파트 팔리면 니 통장으로 돈 보낼 테니까 이사 준비 해」
오, 맙소사! 모든 것들을 자기 맘대로 결정해 버리고는 통보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영은 너무나 화가 나서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직도 자신이 남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지막 남아있던 흥균에 대한 마음 한 자락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다 자기 맘대로야? 우리 부모님 안 계시다고 이렇게 날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당하고만 있을 거 같아?」
주영의 악을 쓰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흥균은 약올라 미칠 것 같을 만큼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수씨 출발 한지 좀 됐으니까 도착 할 때 됐어. 창피한 모습 보이지 말아」
흥균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주영은 끊어진 전화기를 집어 던지고 숨을 몰아쉬었지만 흥균에 대한 분노와 아이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이런 취급을 당할 만큼 잘못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도 흥균의 말과 행동들이 아니, 지금 돌아가는 상황들이 마치 자신에게 모든 잘못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의도와 생각 같은 것은 상관없었다.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거대한 수레바퀴처럼 막을 수조차 없다는 무기력감이 몰려와 소파에 그대로 늘어져 버렸다. 한동안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다시 시작되었다. 잠시 후에 인터폰이 울리고 동서가 들어왔다.
「형님… 저… 뭐부터 나를까요?」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얼굴을 외면한 채 앉을 생각도 않는 동서의 행동에 또다시 상처받는 자신을 느끼며 주영은 천천히 일어나 식탁으로 가서 물을 마셨다.
「잠깐 앉아 동서. 아직 짐 안 쌌어. 방금 전화 받아서…」
성희는 잠시동안 망설이다가 주영을 따라 식탁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성희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왠지 서러워진다. 성희가 보살피고 있을 아이가 생각나자 주영은 또 어쩔 수 없이 성희에 대한 서운함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뭐가? 성준이는 어떻게 있어?」
밤이면 몇 번씩 깨어나서 새엄마를 찾으며 우는 성준이가 눈에 밟혀 가슴이 메어지는 것만 같았다. 자식이란 존재는 그렇게 어미의 간줄기에서 떨어져 나와 또 어쩔 수없이 어미의 가슴에 맺혀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존재인 것을 곧 새엄마가 될 성희가 모르지는 않을 테지만 과연 성희가 자신의 마음을 백분지 일이라도 헤아려 줄 것인지…. 이런 상황들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주영은 성희를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생각해 보았다.
「아직 잘 몰라서 인지 잘 지내요. 어머님 성준이라면 끔찍하게 위하시는 거 아시잖아요」
성의 없이 대꾸하는 성희가 더욱더 미덥지가 않아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왜 내 자식을 남의 손에 부탁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 밤에 울지는 않고?」
「네. 어쩌다가 이런 일이… 며칠 전에 아주버님이 만나신다는 분 오셨더랬어요. 저는 성준이 데리고 나가 있으라고 하셔서 못 봤지만요. 인수 씨도 지금 난리 났어요. 요즘은 집안이 아주 살얼음판이에요. 형님, 저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요. 인수 씨도 그럴까봐 친구들도 못 만나겠고… 어머님 모시기 힘들어서 형님한테 전화도 못하겠고…」
새엄마를 찾을 성준이를 걱정하는 상대에 대한 이해보다 자신의 처지에 넋두리를 늘어놓는 성희가 원망스러웠다. 희진이가 다녀갔다는 얘기를 주억거리는 철없음에도 화가 치밀었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이기심에 눈이 가려져 앞에 앉아 억지로 눈물을 삼키는 자신의 모습까지 배려해 줄 여유조차도 없는 것 같았다. 두통이 더욱더 심해져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주영은 식탁에 기대 머리를 짚었다.
「어머님은 뭐라고 하셔?」
간신히 갈라진 목소리로 묻는 말에도 성희는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저희 새엄마 말씀으로는 시새어머니들은 첩을 좋아하는 법이라고 하시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요. 당신 자식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한 줄 아실 텐데… 인수씨 얘기 들으니까 어머님 정말 너무 하시더라구요. 그 여자가 이것저것 새어머니 선물 사 가지고 온 모양이던데, 좋아하시는 모양이… 형님 정말 이혼하실 꺼예요? 성준이 불쌍해서 어쩌라고..」
성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머릿속을 더욱더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혼자 빈집을 지키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아마도 아이를 낳아 키우는 새엄마라면 내 자식 소중한 것만큼 다른 사람의 뱃속에 있는 아이도 소중한 생명이라는 것에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아니다. 사실은… 자신이 없었다. 흥균의 떠나버린 마음을 알아버린 지금 그를 끌어안아 부서진 마음을 추스르고 살아가는 것은 정말 자신 없었다. 매일 어떤 마음으로 흥균의 얼굴을 마주 할 수 있겠는가?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시작되는 자신의 지옥을 어떻게 견딜 수가 있을 것인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균과 다시 잘 해 보라는 성희의 말에 자조섞인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그렇다고 일이 이렇게 까지 됐는데 성준 아빠랑 잘 살수는 없는 일이잖아. 성준이라도 데려왔으면 좋겠는데… 동서가 중간에서 고생하네. 성준이 잘 부탁해, 부탁할 사람이 동서밖에 없네」
미워도 할 수 없었다. 아이가 느끼는 새엄마의 부재를 조금이라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성희뿐이기에 자신은 무조건 성희에게 읍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걱정 마세요, 형님. 정말… 이혼하고 나면 형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텐데… 나중에라도 제가 성준이 데리고 나올게 형님 연락하세요」
또다시 이렇게 동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정말 싫다. 주영은 확고한 의지를 담아 성희에게 말했다.
「동서, 나 성준이 데리고 올 꺼야. 그때까지 성준이 좀 잘 부탁해」
자기도 모르게 고이는 눈물은 어쩔 수 없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알게된 지 1년도 채 안되는 낯설다면 낯선 사람인 성희에게 부탁해야 하는 아이가 가슴에서 맺혀와 그 응어리가 너무나 커져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불덩이는 출구를 찾지 못해 너무나 아프고 또 아파져서 그 이름만 불러도 절로 눈물이 나왔다.
「네…」
결국 주영의 눈물에 성희도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주영에 대한 연민이든 앞으로 성희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에 대한 억울함이든 이젠 되돌릴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함께 울면서 성준이의 짐을 싸고 차에 짐을 실으면서 성희는 마지막이라는 듯 주영을 끌어안았다.
「형님, 힘내세요. 조강지처 버리고 잘 사는 사람 없대요. 힘내세요. 인수씨도 형님 걱정 많이 해요. 그러니까… 성준이 봐서라도 힘내세요. 아셨죠?」
성희의 차 뒷좌석에 실려진 아이의 장난감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 성준이를 보내지 말 것을… 힘들어도 끌어안고 있을 것을… 그랬다면 이렇게 자기 손으로 짐을 싸서 아이를 보내버린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텐데… 아이를 버리는 것만 같아 가슴이 무너져왔다. 주영은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싶었다. 그래서 성희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응. 운전 조심해서 가. 늦게 왔다고 어머님 역정내시겠다」
성희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는 아직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주영에게 말했다.
「네… 연락하세요」
「그래…」
주영은 새롭게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서둘러 집으로 들어왔다. 주인을 잃어 텅 비어버린 아이의 방으로는 차마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고 어느새 자신의 자리가 되어버린 거실의 소파에 누워버렸다. 이제는 우는 것조차도 자신에게 허락하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식을 버린 어미에게는 눈물조차도 슬퍼하는 것조차도 사치인 것만 같았다.
석준은 남의 얘기를 하듯이 담담하게 아이의 짐을 싸서 보냈다고 중얼거리는 주영을 보면서 또다시 어찌할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래서 순순히 짐 싸서 보냈단 말이야?」
퇴근해서 주영이 어떻게 하고 있나 걱정이 되어 전화했더니 느닷없이 술 한잔하고 싶다고 해서 단지 옆에 있는 포장마차로 나오라고 했다. 슬픔의 기색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는 주영의 모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비가 오려는지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반소매 밑으로 드러난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응. 어떻게 해… 애 입을 옷도 별로 없고…」
주영은 한숨과 함께 소주를 들이켰다. 석준은 비워진 잔을 채워주며 위로할 말을 찾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 적절하지 않은 상황에 적절한 말을 찾는 다는 것이 웃기는 일이었지만…
「이 바보야…」
슬픔에 잠겨 오히려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는 주영을 이해하기에 자신의 가슴도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그냥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에 품어진 이 여자가 너무나 바보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고개 숙인 주영의 모습이 차라리 통곡하는 모습보다 더욱 애처로와 보여 가슴이 무거워 졌다. 석준은 자신의 잔을 들어 단 숨에 들이켰다. 쓰디쓴 소주가 태울 듯이 가슴을 훑어 내린다.
「낮에 성준 아빠 전화 왔었어. 집 내놨데… 나보고 한 달 안에 이사할 준비 하라더라. 기가 막혀서… 집 팔고 애 데려가는 게 마치 나한테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 집 팔리면 그 돈 내 통장으로 보내준다고 하더라구」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로 주영은 천천히 말했다. 넋두리가 아니었다. 이제 처한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상기하고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들이었다. 석준은 주영의 쳐진 어깨를 안아주고 싶었다. 이제는 그렇게 자신에게 기대 울게 하고 싶었다. 주영에게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남편은 실컷 욕하고 잊어버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미련하게 아직도 완전히 떠나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주영에게조차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도 남자지만 그런 형편없는 자식이랑 어떻게 6년을 넘게 살았던 거야?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이 바보야…」
석준의 화난 듯한 말에 주영은 어깨를 으쓱 하며 한 방울씩 비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텅 빈 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이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인지 아닌지 비교대상도 없었고…. 몰라, 믿고 싶었어. 내가 열심히 가꿔 온 가정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렇게 허무하게 깨져버릴 줄 상상도 못했어. 그런 얘기는 아침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얘긴 줄 알았단 말이야. 어떤 사람이 자기 남편을 두고 그런 지저분한 상상을 한데? 내가 몇 번 투덜거릴 때 성준 아빠 나한테 오히려 의부증 이라고 병원 가보란 소리까지 했었단 말야」
담담하게 말을 마치고도 주영의 눈길은 한 동안 점점 가속을 붙이며 빗방울이 떨어지는 거리에 향해 있었다. 그러다가 어깨가 떨리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격한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살고 싶지 않아. 차라리 그때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내 아기도 빼앗기고 비참한 꼴 당할 줄 알았다면 그때 차라리….」
주영의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에 석준은 참지 못하고 주영의 어깨를 잡아 거칠게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이러라고 내가 회의 하다말고 너한테 달려간 거 아니야. 이렇게 못난이 같이 굴면 속이 시원해?」
주영은 석준의 손에 정신없이 흔들리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석준 씨…」
석준은 주영의 어깨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격한 감정 탓에 목이 쉬어있었다.
「자꾸만 이러면 너 다시는 안 볼 꺼야. 바보야, 복수한다고 생각해. 너 그 인간한테 보란듯이 잘 살면 되잖아. 세상에 그 인간 같은 남자들만 있는 거 아니야. 성준이를 봐서라도 잘 살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못되먹은 생각하면 안 되는 거잖아」
석준의 말에 주영은 그의 셔츠를 움켜쥐고 아이처럼 소리내어 울었다.
「그래… 성준이… 보고싶어 미치겠어! 어떻해… 나 어떻해…」
「그래. 차라리 울어라, 울어..」
석준은 자신의 눈가도 젖어 가는 줄 모르고 주영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포장마차의 비닐을 찢어 버리기라도 할 듯이 소나기는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형수!」
주영은 차에서 내리는 시동생을 보고 비틀거리며 어색하게 허리에 둘려진 석준의 팔을 풀었다.
「왠일이세요?」
「잠깐 얘기 좀 할 까 하구요. 낮에 성희 왔다 갔다고 하길래…」
인수의 눈이 날카롭게 석준을 향하는 것을 보고 주영은 석준에게 그만 가라는 눈짓을 했다.
「주영아, 나 갈게」
석준은 자신을 쏘아보는 남자사이에서 주영이 난처해하는 것을 보고 순순히 물러났다.
「응. 고마웠어」
인수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사이 손으로 전화하라는 시늉을 하며 뒷걸음치는 석준을 보면서 주영은 어서 가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석준이 사라지고 나서 집으로 올라온 인수는 형수를 고까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머님 말씀이 맞았군요? 저는 설마 했는데…」
주영은 술기운으로 몽롱히 '또 시작이군' 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친구예요. 커피라도 한잔 드려요?」
커피메이커의 스위치를 켜면서 주영은 딱딱하게 말했다.
「아뇨, 됐어요. 성준이 때문에 제가 좀 도울 일이 있나 해서 와 봤습니다. 형수 애 옷 보내고 상심이 클 것 같아서 걱정도 됐구요. 그런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요」
주영은 싱크대에서 돌아서서 인수를 쳐다보았다. 인수의 앉아 있는 모습이 흥균과 너무나 닮아있어 도저히 표정관리가 안 되는 것 같았다.
「성준이 없는 게 새어머니 말씀대로 형수한테 더 좋을 같아요. 저희가 잘 키우겠습니다. 잘 사세요. 뭐… 제가 걱정한다고 해결 될 문제도 아니지만… 어쨌든 이번 일은 형이 잘못한 거라 형수를 비난하고 싶은 맘은 없습니다」
인수가 느릿하게 내뱉는 말들이 너무나 기가막혀 주영은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누가 저를 비난하게 놔두기나 한대구요? 성준인 제 아들이에요. 데려올꺼예요. 서방님 이러시는 거 저는 정말 이해가 안되네요」
주영은 차갑게 인수를 쏘아보았다. 이 집안 식구들은 뭐든 다 자기들 맘대로 생각하고 통보만 하는 게 생활화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인수는 주영의 차가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슬쩍 웃기까지 하면서 말했다.
「성준이야 어차피 나씨인데 굳이 데려 간다고 고집 피우실 필요 없어요. 형수 맘은 충분히 알았고, 그만하면 자존심도 세울 만큼 세웠으니까… 요즘 세상에 이혼 한 사람 큰 흠도 아니고, 형수 같은 사람이라면 좋은 사람 만나서 새로 시작 할 수도 있을 꺼예요. 저 아까 차안에서 그 사람 보니까 형수님이 소송이다 뭐다 해서 괜한 분란 일으키실 것 같지도 않네요」
인수의 느물거리는 투의 말에 주영은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서방님!」
「왜요? 변명이라도 하시게요? 저 다 이해해요. 형하고 살면서 힘들어서 다른 사람 만났다. 뭐, 그런 뻔한 변명…」
주영의 큰 소리에 인수의 비꼬는 말투는 더욱 신랄해 졌다. 주영은 숨을 들이마시고 인수의 말을 막았다. 낮아진 어조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심하게 갈라져서 나왔다.
「변명같은 거 없어요. 진짜 그냥 친구예요. 형님하고 똑같은 더러운 사람 만들지 마세요. 이렇게 저의 의사 같은 건 아랑곳하지도 않고 통보만 하셔도 괜찮다고 생각하실 만큼 제가 우스우세요? 어떻게 어머님하고 그렇게 똑같은 말씀뿐이세요? 어떻게 그렇게 형님하고 똑같은 얼굴로 저를 비난하세요? 제가 형님하고 똑같이 바람이라도 피운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그 사람의 죄가 좀 덜어지나요?」
주영의 신랄한 말에 인수는 화가 난 듯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주영은 맘껏 비웃어 주고 싶었다. 주영은 커피를 머그잔에 따르면서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아이 키울 자격 운운하신다면 성준 아빠가 자격 없지 왜 제가 자격이 없는 건가요? 이렇게 비겁하게 새어머니와 동생의 뒤로 숨어서 차례대로 저한테 와서 비난하고 비웃어주면 언젠가는 제가 잘못을 빌면서 물러설 거라고 성준 아빠가 시키던가요? 아무래도 다 함께 제정신이 아니신 거 같네요」
결국 인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형수,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주영은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거칠게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인수를 노려봤다.
「저 서방님한테 그런 비난받을 이유 없어요. 어머님께 말씀하세요. 성준이, 제 아들이에요. 성준 아빠 겉돌 때 혼자서 낳고 혼자서 키운 제 아들이에요. 동정하듯이 그렇게 아이고 가정이고 다 빼앗아 가면서 죄책감마저도 저한테 덮어씌우시려는 모양이신데… 어림도 없어요. 그동안 성준 아빠한테 속고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미안해하시지는 못 하실 망정 왜 이렇게 막 대하시는 건데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정말 어이가 없네요」
인수도 지지않고 주영을 마주 노려보며 말했다.
「형수를 비난하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 길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도 열이면 열이 다 형수 불쌍하다고 할 꺼예요. 그러니까 그 정도는 형수가 감수해도 되는 것 아닌가요? 형 지금 병원도 내놓고 매일같이 술이예요. 형수 때문에 우리집안도 지금 똥물 다 튀었다구요」
「그게 왜 저때문인가요? 서방님의 잘난 형님 때문이지. 그러니까 제 아들 데려오시라구요」
주영의 격앙 된 말에 인수는 벌떡 일어나 식탁을 내리쳤다. 식탁의 유리가 쩍하고 깨지는 소리와 함께 살기마저 내뿜는 인수의 눈초리에 주영은 뒤로 물러섰다.
「왜 우리가 성준이까지 맡아서 키워야 하는데요? 지금 제 처는 입덧으로 고생하는 데도 저 맘놓고 먹고 싶다는 것도 못 사다줘요. 형수만 참으면 되었을 것을 이렇게 난리를 치고 망신살 뻗쳐 놓고 혼자서 상처란 상처는 다 받은 사람처럼 그렇게 가증스럽게 구느냐구요. 그러니까 이쯤 하고 더 이상 시끄럽게 굴지 말자구요」
「가증… 스럽다구요?」
주영은 인수도 흥균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란 생각에 무섭게 떨려오는 손을 마주 잡았다. 인수는 처음처럼 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성준이 제 자식처럼 키울 테니까 걱정 마시고 형수는 형수 좋다고 하는 사람 만나서 잘 살아요. 위자료 문제는 제가 알아서 처리해서 형수 통장으로 보낼 테니까 집에 전화하실 필요 없어요」
「어떻게…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주영의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을 보면서 인수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지난 6년 간, 아니 연애하던 시절까지 합치면 무려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보아온 주영은 착한 사람이었다. 새어머니가 그렇게 반대를 하시는 결혼을 한 후에도 고된 시집살이를 자청해서 하면서 새어머니가 먼저 손을 들 때까지 묵묵히 참고만 있었던 사람이었다. 물론 형의 잘못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일로 겪어야 하는 데미지는 너무나 컸다. 당장 처가에서 불편한 눈치를 견뎌야 했고 형에게 부탁했던 사무실 내는 문제도 백지화되고 말았다. 게다가 새어머니는 대놓고 성희에게 성준이를 맡아서 키우라고 하고 계셨다. 그냥 착하게 남아있었으면 아무런 잡음 없이 모두가 편안했을 일을 이렇게 끔찍하게 벌려놓은 형수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형은 형수가 원하는 만큼 위자료를 주겠다고 했지만 집안을 풍비박산을 내 놓고 이혼하는 형수에게 인수는 단돈 만원도 주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새어머니의 부탁을 들어드리는 게 아니었다. 벌써부터 돌아가고 싶었지만 인수의 발목은 잡은 것은 새어머니가 약속한 사무실계약서였다. 빨리 해치우고 가버리자는 생각으로 인수는 이를 악 물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님 말씀이 형수가 힘들어하더라도 확실하게 끊어야 빨리 새 출발 할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성희한테야 내색 않으시지만 벌써 예전에 새어머니는 알고 계셨어요. 그 여자가 여러 번 집에도 찾아 왔었구요. 임신했다고 대놓고 말하는데, 새어머니도 여자인데 형수 맘 모르지 않으시겠죠. 그래도 그렇게 맘 떠난 사람이랑 사느니 차라리 헤어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신 거고 형수 입원해 있을 때도 형수 만나는 그 사람 먼발치에서 보고 마음 정하신 것 같더라구요. 그러니까 형수가 맘 접어요. 새어머니께서 저한테 부탁하신 거예요. 새어머니께서 형수 마음 다 알지만 형수 위해서 그러시는 거니까 새어머니 말씀 들으라고요. 그러니까 형수가 이쯤에서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하고 잊으세요. 성준이는 아직 어려서 금방 잊고 적응 할 꺼예요. 그러니까 성준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충고예요. 쉬세요… 갈게요」
인수는 자기 할 말을 끝내고는 황망히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주영은 적막이 온 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아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충격이 서서히 몰려와 뱃속부터 시작된 떨림이 온몸으로 번져갔다.
「아… 흑… 흑흑흑…」
주영은 숨조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거세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 새엄마… 새엄마… 새엄마아! '
「석준 씨… 사는 게 뭐가 이렇게 복잡하고 힘든 건지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처신했어야 모두 다 행복했을까? 나… 그렇게 욕심 많은 사람도 아닌데…」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주영의 기운없는 목소리는 언제나 석준의 위장에 위산과다를 일으켰다. 속이 쓰리다.
「너 욕심 많아. 너는 모르겠지만 진짜 욕심 많은 사람이야. 너와는 상관없이 너의 주변사람들로부터 한없이 네 덕분에 행복해 지길 바라는… 너무 욕심 많은 사람이야. 네가 행복해야 주변 사람들이 행복한 거야. 네가 행복해 지지도 않으면서 주변사람들 보고 행복하라고 하면 모두다 해피엔딩이 되는 게 아니잖아? "
석준의 말을 들으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주영은 소나기가 오려는지 갑자기 어두워진 창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조금쯤 손해보고 힘들어도 다들 편안하길 바란 게… 그게 욕심 많은 거라는 거야? 그런 얘기 처음 들어본다. 그런 말이 어딨어? 세상 모든 사람들 다들 그렇게 사는 거 아냐? 조금쯤 손해 보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편해지길 바라는 게 당연하잖아? 그런 생각 때문에 이런 벌을 받는 거라면 너무 불공평하잖아… 다른 사람들은 잘 살면서 행복해 지는데 나만… 나만… 이런 건 이해할 수 없어」
창 밖으로 보이는 빌딩 숲에 비가 쏟아진다. 주영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 맞춰 쏟아지는 비에 화가 나서 석준은 거칠게 말했다.
「뭐가? 네가 이제까지 바보같이 눈 가리고 귀 막고 산 결관데 누굴 원망하고싶어서 그러는데? 이제 넌 네 길을 찾아가면 되는 거야. 돌아보지마. 지나간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전혀 도움 안 돼. 지금 너 어떤 모습일지 돌아봤어? 웃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심지어 잠도 잘 못 자서 꼭 미이라같아. 너 스스로 벽을 쌓아 놓고 아무소리도 듣지 않고 살고 있잖아」
석준의 화난 듯한 목소리에 주영도 따라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지금 아무것도 생각 안 나고 아무것도 못 하겠는걸!」
석준은 주영에게 소리 친 것이 미안해져 얼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렇게 컴컴한 방구석에서 머리 쥐어뜯고 있지 말고 나와. 하다못해 나랑 영화라도 보자.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사람구경이라도 해. 그것도 싫으면 집이라도 보러 다녀. 그러다가 집주인이 진짜로 집 비우라고 하면 당장 어디로 가려고 그래?」
석준의 애원조의 말에 주영은 눈물을 훔쳐내고 한 숨을 쉬었다. 진짜 비 한 번 시원하게 온다.
「모르겠어…」
「주영아. 나와! 나와서 나한테 얼굴이라도 보여주라. 너 때문에 나 진짜 미칠 것 같다. 제발 부탁이야… 나와…」
「…」
자신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대답이 없는 주영이 원망스러웠다. 석준은 끓어오르는 성질을 가라앉히느라 숨을 몰아쉬고 일부러 강압적으로 말했다.
「이주영. 나와! 집 앞에 가서 다시 전화할게. 30분이면 도착하니까 준비하고 기다려. 알았지?」
「응…」
석준은 주영을 끌어내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회사에서도 틈만 나면 전화를 했고 극장이니 라이브카페니 밤만 되면 끌고 다녔다. 석준의 관심은 온통 주영에게 향해 있었고 어떻게 해야 주영의 마음을 열 수 있을지 몰라 그 자신 또한 불면의 밤을 보내긴 마찬가지였다.
집에서는 자신의 비서를 통해 대강 석준이 어떤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지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새어머니의 걱정스러워하는 시선에 신경 쓸 정도로 석준의 마음은 여유롭지 못했다. 여자들에게 기울인 관심이 이렇게 오래 간 때도 없었지만 이렇게도 욕심나는 사람은 만나본 적은 절대로 없었던 것이다. 그런 소중한 사람이 마음으로부터 죽어가고 있는데 주변상황이 눈에 보일 리 없는 것이 당연했다.
석준의 성화로 주영은 작은 오피스텔을 얻어 이사를 했다. 그동안 법원에서 합의이혼 재판이 있다고 해서 흥균을 딱 한번 다시 만났다. 흥균의 얼굴은 많이 상해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다니는지 얼굴은 까칠하고 볼은 홀쭉하게 들어가 있었고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주영 못지 않게 고단한 얼굴이었다. 지혜로와 보이는 백발의 판사가 물었다.
「아이는 아버지 나흥균 씨께서 맡으시는 것으로 합의 하셨습니까?」
「네…」
「네…」
주영은 눈물을 삼키며 대답했다. 판사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새어머니 되시는 이주영 씨의 면접권에 대해서는 법률에서 그 권리를 정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친모에게 아이를 만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할 수 없습니다. 두 분께서 충분히 생각하셨을 테지만 이혼이 정답일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두분 사이에 자녀가 있을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혼 서류는 각 호적지로 3개월 이내에 발송되지 않으면 무효가 됩니다. 그런 법규가 있는 이유는 이렇게 법정까지 왔지만 서로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하실 시간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부디 두분 다시 생각해 보시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절차는 끝났습니다. 나가셔도 좋습니다」
판사의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주영은 흥균의 소매를 잡았다.
「당신… 얼굴이 많이 상했네요… 차라도 한잔…」
주영의 떨리는 눈동자를 마주하고서도 흥균은 거칠게 주영의 손을 뿌리쳤다.
「됐어. 나 바로 구청 가서 이혼 신고 할거니까 당신도 구청 일이나 봐. 다 끝난 사람들끼리 무슨 차… 이제 당신 소원대로 됐잖아. 구질구질하니까 그만 헤어지자. 잘 살아. 그동안 미안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돌아서는 흥균의 뒷모습에 또다시 가슴이 무너졌다. 이렇게 보내면 성준이를 영영히 볼 수 없을 것만 같아 자존심도 버리고 잡은 건데… 그의 원망하는 듯한 얼어붙은 눈빛에 다시 잡으려 들었던 손만 허망하게 허공에 멈춰있다.
「성준 아빠…」
주영의 떨리는 목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흥균은 성큼성큼 법원을 나서고 있었다.
「당신도 행복해요. 성준이를 위해서라도… 행복하게 지내요. 제발…」
혼자 남은 주영은 이젠 전 남편이 되어버린 그의 뒷모습에 작별인사를 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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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새어머니는 성준이를 주영과 만나지 못하게 했다. 다만 동서를 통해 간간히 소식을 전할뿐이었다. 아무리 전화를 해서 울고 매달려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거절을 당할 때마다 주영은 완강하게 거부하는 시새어머니가 야속했지만 혹시라도 자신이 미움을 사서 아이에게 모질게 대하실 까봐 전화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시동생 말대로 정을 뗄려고 그러시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동서의 말대로 주영에 대한 원망이 커져서 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이의 소식을 전해주던 동서인 성희는 아이를 낳고 나서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가 점점 뜸해져갔고 그렇게 괴로워하는 주영에게 석준은 일을 가지는 게 좋겠다면서 친구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번역 일을 소개 해 주었다. 일을 하면서는 정말 아이생각에 빠져 우울해 하는 시간이 적어지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사무실에 출근을 한다고 해도 바쁠 때는 끼니도 잊을 만큼 열심히 일을 하며 일상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석준은 가끔 집으로 찾아와 함께 요리를 해서 밥을 먹기도 했고 함께 영화도 보고 운동도 다녔다. 그렇게 세 번의 계절이 지나고 다시 봄이 찾아왔을 때 흥균에게서 전화가 왔다. 성준이 문제로 만나자고… 주영은 성준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닌지 불안함에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흥균에게 당당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오랜만에 원피스를 꺼내 입고 화장도 했다.
그를 만났다. 일년만에 만난 흥균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피곤해 보였다.
「잘 지냈어?」
「응… 잘 지내요. 당신은요?」
「나도… 요즘 병원 일이 바빠서 다시 금방 들어가 봐야해. 차 시켜」
「….」
묻고 싶은 말들이 너무나 많아서 인지 오히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커피가 둘 사이에 놓여지고 나서야 한동안의 어색한 침묵을 깨고 흥균이 말을 꺼냈다.
「요즘도 그 남자 만나?」
흥균의 첫마디 말에 주영은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신경 쓸 필요 없잖아요. 그런 얘기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성준이 얘기나 해봐요. 무슨 일 있어요?」
주영의 입에서도 곱게 말이 나가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흥균은 피식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느릿한 어조로 얘기했다.
「음… 새어머니도 많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고, 제수씨도 애기 낳아서 성준이를 돌보기 힘들어해. 그래서…」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아우성치는 희망의 소리를 간신히 누르고 주영은 흥균을 쳐다보았다.
「희진이 있잖아요」
「희진이랑은 헤어졌어」
흥균은 비틀린 미소를 띄며 말했다.
「뭐라구요?」
충격이었다. 아기 가졌다고 새어머니께 허락 받은 것 아니었었나? 그리고 마치 주영의 탓이라는 듯이 노려보는 곱지 않은 시선은 또 뭐란 말인가?
「둘이… 결혼 한 거 아니었어요?」
주영의 새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흥균은 창 밖을 보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니. 희진이… 애 지웠어. 난 지금 혼자 나와 살고 있고」
그렇게 당당히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놓고 당연한 결과라는 듯이 자신의 앞에서 헤어졌다는 말을 마치 양복을 바꿔 입었다는 말처럼 하는 흥균이 믿어지지 않아 주영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흥균은 다시 눈길을 돌려 주영을 마주 보았다.
「주영아. 나란 사람한테 질린 것도 알고 다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도 알지만, 성준이 봐서라도 우리 다시 합치면 어떨까 하고… 인수 얘기로는 그 사람 그냥 친구라고 했다더군. 뭐… 아니라도 난 상관없어. 당신과는 다시 정상적인 부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 아니까」
주영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라는 어쩔 수 없이 가슴에 묻어 두어야만 했던 절실한 기도가 이뤄지는 것은 아닌지… 주영은 온 몸의 신경이 흥균의 말에 일제히 깨어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성준이는 우리 책임이니까… 허울 좋은 모습이라도 정상적인 가정에서 키워야 하진 않겠나 싶어서… 새어머니는 다른 사람 만나서 재혼하라고 하시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싶어. 요즘 만나는 사람한테 성준이 보여줬는데 받아들이지를 안더라」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이 내쉬어지면서 또 한번 자신의 어리석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성준이를 낯선 여자에게 선보일 만큼 그에게는 아이도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성준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받았을 충격이 느껴져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성준이한테 당신 여자친구를 보여줬다구?」
주영의 기막혀 하는 얼굴을 보면서 불쾌한지 흥균은 얼굴을 찡그렸다.
「어떻게든 너한테만큼은 연락하고 싶지 않았어. 지금 만나는 사람도 성준이 데리고 결혼하는 것은 싫어하는 것 같고 너도 만나는 사람 있다고 하니까 우리 그냥 서로의 사생활은 관여하지 말고 성준이만 생각하고 살면 어떨까싶어」
주영은 도저히 흥균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자신의 아들을 키워줄, 그리고 대외적으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흔들어 보일 깃발이 필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맘놓고 바람피울 수 있는 자유까지도….
「당신… 어떻게 사람이 되가지고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 그걸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다시 날 당신 허수아비로 전락시키겠다구? 당신 이런 생각하는 거 어머님도 아셔? 도대체 여자를 뭘로 아는 거야? 성준이 생각해서라도 다시 합치자는 말 듣고 난 당신 정신차린 줄 착각했네. 진짜 착각했어… 당신 국어사전 다시 찾아봐. 부부란 말의 뜻이 뭔지 다시 봐」
주영의 격앙된 목소리에 흥균은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주영아… 새어머니는 너 오늘 만나는 거 모르셔. 우리끼리 제발 조용히 해결하자」
이제는 그의 눈빛이 교활하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탐욕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소름이 끼쳤다. 주영은 흥균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냐. 새어머니께 전화해. 내가 성준이 데려다 키울꺼야. 그때 그렇게 했어야 했어」
주영의 단호한 거절에 흥균의 표정이 다시 바뀌었다.
「그럼, 너 그 사람이랑 헤어져. 다른 놈팽이 밑에서 내 아들 키울 수 없어」
위협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흥균은 단숨에 말했다. 주영은 지난 밤 잠도 자지 못하게 했던 여러 가지 상념들이 떠올라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뭐? 그럼 당신은 다른 여자 밑에서 내 아들 키울 수 있고 난 안된다고?」
「그래, 안돼! 그것만은 안돼! 차라리 보모를 두는 게 났겠어」
흥균은 흥분한 주영의 얼굴을 보면서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주영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뻔하게 알 것 같았다. 이런 장단에 놀아난 것이 분하고 또 분했다. 주영은 흥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비아냥거렸다.
「하! 진짜 웃기는 논리네. 지금 당신이 하해와 같은 이해심으로 베푸시는 화해의 모드를 감격해서 받아들이고 난 다시 수절 과부로 돌아가서 애나 키우고 당신 시중이나 들라 이거지? 그리고 당신은 밖에서 볼 일 다 보고 허울좋게 아빠소리는 듣고 싶다 이거고?」
흥균은 주영의 신랄한 말에도 불구하고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뭐…. 그렇게 얘기하고 싶다면.. 적어도 난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려고 하는 것 뿐이야. 넌 새어머니한테 애 보내놓고 전화 한번도 안 했다면서 뭐가 그리 당당해!」
어떠한 말을 한다해도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주영이었다. 이미 자신은 그쪽 집안에선 술안주 거리도 안 되는 나쁜 사람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주영은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억지로 삼키고 흥균을 노려봤다.
「뭐라구? 내가 연락을 안했다구? 나 새어머니께 전화해서 성준이 보여달라고 사정하고 울고 매달렸어. 절대로 안보여주시더라. 그렇잖아도 성준이 학교 가기 전에 데려오려고 변호사 만나고 다니던 중이었어. 그때 판사 얘기 들었지? 면접권 있다는 말. 나 계속 참고 기다리고 있었어. 당신 얘길 들으니 내가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드네. 이렇게 나 혼자서 나쁜 사람 다 될 줄 알았다면 성준이 그렇게 쉽게 당신한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당신 정말 나쁜 사람이야」
흥균은 주영이 간신히 내뱉는 말을 들으며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 나쁜 사람이라고 치고 어떻게 하고싶은지 일주일 동안 생각 해 보고 전화해 줘. 전화 없으면 성준이 데려갈 맘 없는 걸로 생각할게. 먼저 일어난다」
주영은 일어서서 나가려는 흥균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흥균은 나가려다 말고 갑자기 생각난 듯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참. 이주영, 설마하니 성준이를 법정에 불러 세울 생각은 아니겠지?」
흥균의 득의양양한 미소가 드리워진 얼굴은 주영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흥균의 말대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또다시 아이를 저버린 비정한 새엄마가 될 것이고 전화해서 그의 말대로 한다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흥균의 마지막 말처럼 성준이를 데려오기 위해 아이를 법정에 세워야 하는 일도 주영 자신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정말… 흥균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옴짝달싹 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이 너무 어이가 없어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아이를 놓고 저런 흥정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이기적일 수 있는 걸까? 다정한 웃음을 짓는 석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힘들 때마다 항상 곁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는 사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믿게 되어버렸는데, 이제는 그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헤어져야한다. 다시는 볼 수 없다.
' 그래, 석준 씨는 나처럼 흠 있는 사람말고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는 사람인데…. 헤어져야해. 아무리 성준 아빠가 싫고 또 싫어도 성준이가 있는데… 그 동안 내가 미쳤건 거야… 그동안… 꿈속에서 헤매고 다닌거야… 이젠 현실로 돌아와야지. 그래야 잘하는 거겠지, 새엄마? 여자란 이름보다는 새어머니라는 이름이 더 중요하잖아. 그렇다고 했잖아 새엄마… 나도 다시 새엄마로 돌아와야 하는 시간이 된 거겠지? 석준 씨한테 진 빚, 내가 떠나는 걸로 갚을 수 있는 거겠지? 그렇지만 새엄마… 그 사람 없이 어떻게 살지 벌써 겁이나… 새엄마… 나 정말 나쁜 엄만가봐… '
그제야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느껴졌다. 주영은 창 밖을 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네 김석준입니다」
힘있는 석준의 목소리… 주영은 크게 숨을 마시고 눈을 감았다.
「석준 씨?」
「어? 이주영? 이 번호 뭐야? 전화 안 가지고 나왔어? 왠일이셔? 이 미천한 자에게 먼저 전화를 다 하시고…」
주영은 내심 망설였다. 가능하다면 그와 만날 시간을 멀리로 늦추고 싶었다. 그냥 바쁘다고 하면 좋겠어… 속으로 주문을 외우면서 최대한 가볍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가 없었다.
「오늘 시간 되면… 나랑 바다 보러 가자. 갑갑해서 바다 보러 가려는데 혼자서 가긴 좀 청승맞잖아」
「어? 진짜? 나 내일부터 휴간 거 어떻게 알고… 너 도깨비빤스 입었지?」
물론 석준은 떨리는 주영의 목소리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짐작했지만 또 미안하다고 하면서 혼자서 떠나버릴까 봐 불안한 마음에 짐짓 웃으며 얘기했다.
「내가 그거 입은 거 어떻게 알았지? 자기 속옷 훔쳐보는 취미 있었어?」
「어? 진짜 그런 거야? 음… 투시력이 생겼나?」
「아… 몰라몰라, 혼삿줄 막혔어. 책임져」
석준의 능청스러운 농담에 주영도 이젠 제법 맞장구를 치면서 웃었다.
「하? 이 아줌마가 진짜로 안하무인이네. 총각한테 아줌마가 책임지라고 하는 법이 어딨어? 너 거기 어디야? 걸리면 혼나!」
석준은 내내 저기압이었던 주영의 반가운 변화에 웃음이 나왔다.
「어? 나 지금 고속버스터미널이야. 악! 카드 다 됐어. 한시간 내로 오셔. 안 오면 여섯 시에 출발하는 거 타고 가버린다」
「알았…」
말도 끝내기 전에 전화는 끊어져 버렸다. 석준은 재빨리 결재서류에 자신의 싸인을 휘갈겨 쓰면서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온다고 했으니 오겠지만 이제 한시간 동안 뭘 한다? 주영은 영화포스터를 보다가 신문판매대에서 영화관련 잡지를 한 권사서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작년에 산 원피스인데 좀 작아진 거 같았다.
' 그래… 아줌마잖아. '
자조 섞인 미소가 비어져 나왔다. 아이에 대한 생각은 가슴 한켠에 접어두고 자신만을 위해 옷을 사고 요리를 하고 석준과 함께 스쿼시를 배우고 연극과 영화를 보러 다녔다. 하지만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무심히 스쳐 지나는 사람들의 눈빛에도 석준과 함께인 자신의 모습에 죄책감이 일었고 혼자일 때면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인지에 대해 심판의 날에 자신에게 떨어질 고통스런 형벌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괴로워했던 밤도 많았다. 그런 시간들은 자괴감과 자기비하로 이어져 불면의 밤을 계속 반복하게 해 왔다. 결국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환청에 시달려 일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주영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정신과를 찾게 되었다. 담당의사는 과도한 직업적 친절로 무장한 로봇 같았다. 모두에게 묻는 질문과 모두에게 들은 대답들을 데이터화해서 간단한 알약 몇 알을 처방했고 근처의 약국에서 다소 비싼 약값과 불쌍하다는 듯한 약사의 눈빛까지 서비스로 받고 더욱 우울해진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 석준에게는 창피해서였을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의 걱정을 들을 것이, 그래서 더욱 더 석준에게 기대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거의 매일 밤마다 잠을 청하기 위해 큰잔에 와인을 따라 마시고 침대에 몸을 뉘었으며 언제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해 요리해서 식사를 했는지 떠오르지 않을 만큼 일과 자신의 우울증과 싸우고 있었다. 그렇게 힘들었던 지난 5개월 여간 석준은 변함 없이 가장 좋은 친구로, 오빠로, 때론 부모님처럼 자신을 보살피고 감싸 안아주었다. 그가 없었다면 정신과 의사 말대로 오래 전부터 자신을 갉아먹어 오던 우울증으로 자신을 학대하게 되었을 지도 몰랐다. 주영은 이젠 더 이상 자신을 미워하고 학대하게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그래서 규칙적인 식사를 하려고 노력했고 사랑이 가득한 시집이나 명상집을 읽으려고 도서관에도 자주 다녔다. 그러한 변화의 노력들이 다행히도 좋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고 석준뿐 아니라 사무실 식구들이나 주변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오랫동안 연락 없이 지내던 선배들과도 연락을 했고 가장 놀라운 변화는 석준과 함께 산책이나 쇼핑을 하다가 큰소리로 웃게 되어도 더 이상 주변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당황하거나 위축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조금씩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에 주영은 스스로 매우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다. 오늘 이렇게 흥균과 만나기 전까지는…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왠지 초라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신에게 속한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들을 단 한 순간이라도 쉽게 포기하고 쉽게 잊지 않고 싶었다. 자신의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책의 말들에도 귀를 적당히 닫고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은데… 한숨이 나왔다. 마치 그림자처럼 떨쳐지지 않는 책임과 그것을 외면하면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죄책감…. 그것이 자신이다. 어쩔 수 없는, 바뀌어지지 않을 자신의 본모습인 것이다. 주영은 손을 씻고 무심히 올려다 본 자신의 거울 속 모습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말았다. 무거워 지는 마음을 추스르기라도 하듯 어깨를 으쓱 해 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았다. 또다시 거울 속의 자신이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옷매무새도 고치고 립스틱도 다시 바르고 커피도 한잔 마시고… 그렇게 시간이 가고 석준이 터미널 입구에 나타났다.
「많이 기다렸지? 아직 버스시간 안됐지? 표 무르러 가자」
석준은 허둥대고 있었다. 그런 석준의 모습이 귀여워 보여 주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 표 안샀어. 그거 거짓말이었어. 기사 있는 사모님이 무슨 버스를 타? 안그래?」
주영의 웃는 얼굴에 석준은 어처구니없어 하는 얼굴을 하면서 따라 웃었다.
「그럼 갈까?」
「오면서 더워서 에어컨 켰는데 좀 춥지 않아?」
「내 옷 꼴을 봐봐. 춥게 생겼나. 나 요즘 왜 이러나 몰라. 계절도 모르고 옷을 입으니 말야. 그냥 청바지 입고 나올걸 그랬다고 무지 후회하고 있던 중…」
그러고 보니 주영의 옷은 좀 덥겠다 싶은 조금 두꺼워 보이는 긴소매의 원피스였다.
「뭐… 얼어죽진 않겠으니 다행이지. 그래도 바닷바람이 좀 춥긴 할텐데…」
석준은 자기도 모르게 흘긋 주영의 스타킹 신은 다리를 보면서 말했다. 커피 색 스타킹을 신은 주영의 다리는 오동통한 오징어 다리처럼 보였다. 그 생각에 석준은 빙긋 웃었다.
' 하긴… 이렇게 내가 침 흘리는 거 알면 너 도망갈꺼지?'
' 응… 나 도망갈꺼야.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애. 왜 그렇게 여자 다리에 집착해?'
' 그건 아니지. 너의 부드러워 보이는 가슴에는 두 배 이상은 집착하니깐 걱정 마셔. '
' 으… 늑대야! 내려 줘! '
석준은 마음 속의 주영과 대화하며 또다시 미소지었다. 그가 아는 주영은 자신의 여자로서의 경계심을 그렇게 장난스럽게 흘려 버리는 것으로 편안하게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재주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속 타는 건 석준이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자신이 정말 어쩔 수 없는 늑대속성을 가진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손을 뻣으면 만질 수도 있고, 어쩌면 가질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욕망의 발목을 잡았다. 무엇이 더욱 두려운 것인지 모르겠다. 주영이가 상처를 받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그녀의 거절로 받을 상처일지… 어쩌면 둘 다 일런지도…
「우리 음악 들을까?」
석준은 자꾸만 주영의 다리로 가는 시선을 떨치려 주영에게 말을 걸었다.
「응, 나 씨디 있는데 듣자」
주영은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서 씨디플레이어에서 씨디를 꺼내 오디오에 넣었다. 이젠 차 주인보다 더 그 기능을 잘 아는 주영이다. 주영은 항상 그렇다. 한번 만지작거리면 기계든 도구든 편하게 쓰는 재주도 있었다.
「내가 너 진짜 도구사용에 능하다고 얘기 한 적 있던가?」
주영은 오디오의 볼륨을 맞추면서 석준을 올려다보고 씨익 웃었다.
「응? 뭐… 나야 머리 좋은 대한민국 아줌마잖아. 요즘 나오는 세탁기나 뭐 그런 거
쓰면서 편하게 살림하는 것이 경쟁력이다 보니… 부러워? "
주영의 반달이 된 눈을 보면서 석준은 잔잔하게 가슴을 채우는 행복을 느꼈다.
「부럽지, 그럼. 난 한동안 뚫어져라 사용설명서 보고 하나하나 해 봐야 아는 걸 넌 몇 번 만져보고 술술 하니까 샘 나지」
석준의 장난기 어린 말에 주영은 얼굴에 드리웠던 미소를 거두고 앞으로 시선을 돌려 조용히 말했다.
「나두 석준 씨 부러운 거 많아」
「뭐?」
「석준 씨 부자잖아. 남자고 능력도 있고… 또 무엇보다도 미혼인 거… 그건 진짜 부러워」
「…」
석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고민들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그렇다고 드러내 놓고 아는 척을 할 수도 없다. 주영도 따라 말 없이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차안에는 맨하탄의 KISS AND SAY GOODBYE가 구슬프게 들려오고 있었다.
「저기 주영아…」
휴게소에 잠시 설까 하고 물으려 돌아본 주영은 잠이 들어있었다. 긴장이 풀린 다리는 살짝 벌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더 이상 슬픔을 감추려 만들어진 미소 대신 피곤함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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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아, 너 알아? 나 오늘 너 가질 꺼야. 도망가지마. 내가 너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게 정신없이 행복하게 해 줄꺼야. 일부러 웃지 않아도 웃게 해 줄꺼야.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는거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잖아. 어려운 문제는 또 내일 다시 생각해 오늘은 그냥 행복하게 지내자. 너를 따라가는 것 이젠 지치려고 해. 언제까지 비껴가는 네 시선을 따라서 그 자리에 서 있을 자신이 없어. 이젠 그만 날 봐줘도 좋잖아? 아무도 널 비난 할 사람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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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준은 가만히 주영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그녀의 손은 차다. 오늘도 분명히 빈 속 일 것이다. 어젯밤도 빈속을 와인으로 채우면서 일을 하다가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을 것이고…
그녀의 일상을 내가 다 꿰고 있다고 하면 놀라 기겁을 할까? 아니면 스토커냐고 따져 물을까? 뭐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그녀의 빈속을 채워주고 차가워진 손을 잡아 따뜻하게 해 주고 또다시 불면의 밤이 찾아오면 잠이 오게 할 와인 대신에 기댈 편안한 어깨가 되어주고 싶었다. 아슬아슬 하게 곡예 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 지켜보기가 더 아찔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아니… 그녀는 알면 안된다. 그럼 힘들게 한다고 또 미안해하면서 떠나갈 궁리만 할 테니… 그렇지 주영아? 그래도 오늘은 말 할 테다. 내가 널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길 사람이라고. 또 그래서 너무나 소중해서 곁에 두고 싶다고… 구속하고 싶다고….
「내가 너를 욕심내면 안 되는 이유라도 대봐 그럼」
석준과 주영은 한 허름한 횟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회 한 접시와 매운탕에 소주도 한 병씩 마시면서… 취기가 올라서인지 평상시 하지 않던 소리를 하는 석준이다. 주영은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난… 결혼도 했었고 아이도 있고 지금의 석준 씨의 스타일을 따라가기엔 너무나 촌스럽기도 하고 또…」
「됐어. 그만해. 내가 다 아는 이유네. 난 다 알고 시작했어. 네가 유부녀였다는 것도, 성준이 새엄마라는 것도, 그리고 살림하느라고 자기 자신은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던 성실한 사람이란 것도… 모두 다 알면서도 시작했다구. 아무리 네가 또 다른 이유를 가져다 댄다고 해도 내가 너를 욕심내서는 안되는 이유에는 해당이 안돼. 절대로 안돼」
주영은 석준을 허락 할 수 없는 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어렵게 구는 석준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석준 씨… 우린 이러면 안 되는 사람들이야. 난… 이젠 좀 편안해 지고 싶어. 그냥 편안히 여행도 하고 책도 쓰고 하고싶어. 이젠 더 이상 누군가의 사람으로 그렇게 남고 싶지가 않아. 나를 나보다 더 잘 안다고 하면서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성준이 인정할 용기는 없다면서 왜 그러는데?」
얼마 전 석준에게 주영은 성준이를 데려올 방법들에 대해 상의했었다. 그때 석준은 그렇게 매일 고민하지 말고 차라지 자기랑 결혼하자고 농담처럼 말했었다. 주영 또한 심각하지 않게 성준이까지 데려다 키울 수 있다고 하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냐고 말하며 웃었다. 석준의 얼굴이 제법 심각해지며 그건 좀 더 생각해 볼 문제라고 말했다. 뭐… 석준이 진심으로 결혼하자는 소리가 아닐꺼라고 생각했지만 왠지 두근거리던 가슴이 한 순간에 싸하게 가라앉으며 슬퍼졌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석준에 대해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오늘 그는 또다시 주영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고 있었다.
「인정할 용기가 지금 당장 있는 건 아냐. 우리 부모님계시잖아. 연세 많으신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면 그땐 데려와서 내 아들이라고 하면서 키울꺼야. 그 정도로는 부족해서 안 된다는 거야? 그럼 평생 우리 아이는 가지지 말고 성준이 데리고 외국 나가서 살자. 그럼 되? 아무도 너나 나 모르고 뒤에서 얘기하는 사람 없는 곳으로 가. 그래서 그냥 내가 네 옆에만 있게 해줘」
주영은 석준의 간절한 눈빛을 고개 숙여 외면하고는 쓴 소주를 마시며 눈물을 삼켰다. 오늘따라 석준은 더욱 힘들게 군다. 이렇게 하려고 만나자고 한 건 아닌데…
「석준 씨… 힘든 사랑은 두 사람만 힘들게 하는 게 아니야. 내가 보기엔 그래요. 주변의 사람들도 힘들게 하고 나중에는 모두다 지쳐서 너덜너덜 헤어진 걸레 조각처럼 나가떨어져. 그땐 그 조각난 감정을 추스를 힘도 없는 형편없는 사람들이 되고 말아. 그렇게 망가지는 거야. 나… 성준 아빠랑 다시 합칠 지도 몰라. 정말이지 그 사람 생각만 해도 너무나 끔찍하지만 아이를 생각하면 또 뭐가 어떠랴 싶어. 그게 나야. 성준 아빠한테는 손톱만큼도 감정 없어. 평생 서로 다른 곳만 바라보고 산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아… 하지만 아이는 아니야. 태어나기 전에도 키우면서도 성준이는 나 밖에 없었다구. 다른 사람 손에 맡겨서 놀이방이나 보내고 늙으신 성준이 할머니 손에 키울 수가 없어. 이게, 이게 내가 당신을 욕심내면 안 되는 이유야. 석준 씨… 당신은 얼마든지 세상을 욕심내요. 하지만, 하지만, 난 아니야. 누구의 와이프는 아니지만 성준이의 새엄마예요. 난, 그래서 안 돼」
차분히 얘기하는 주영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마지막 목소리는 흐느낌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석준도 따라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인지, 무엇 때문에 자신의 발목을 묶어 가둬두려 하는 것인지…. 무작정 이렇게 그녀를 잡아 자신의 안에 가두고 싶은 열망은 벌써 오래 전부터 자신의 심장을 잠식해와 이제는 그녀를 놓치면 죽을 것만 같은데 그녀는 또 이렇게 자신을 밀어내려한다. 새삼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주영이 원망스러워 거칠게 말이 나가는 석준이었다.
「나도 힘들어 죽겠어! 알아? 너 그렇게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성준이 얘기하고 그 남자 얘기 할 때마다 미칠 것 같아! 너 이혼했어. 이혼이 뭔지 알아? 결혼 무른 거야. 아까 터미널에서 표를 샀다면 너, 나 오고 나서 표 무르는 것하고 똑같아. 물론 아이가 있지. 하지만 이렇게 된 게 네 잘못이 아니잖아? 누가 너한테 잘못했다고 속죄하고 살라고 하는데? 너는 지금 너 스스로를 벌주고 있는 것처럼 밖에는 안보여. 니 입으로는 잘못한 것 없다고 하면서도 넌 지금 스스로에게 형벌을 주고 있다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 안보여? 내가 이렇게 널 사랑하면서 네 곁에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잖아. 왜 그런 형편없는 자식한테 다시 돌아간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된 건데? 너 진짜 머리가 돈 거 아냐? 그 자식 옆에서 너 미이라처럼 사는 게 네 몫의 인생이라고 생각해? 너 그렇게 무의미하게 살아야 된다고 누가 그러는데? 데려 와봐! 입을 찢어 놓을 테니까… 제발 주영아… 생각 따위 하지마. 그 말도 안 되는 생각 말이야. 아줌마!」
석준은 큰소리로 주인아줌마를 부르고 남은 회를 싸 가지고 소주도 여러 병 담은 봉지를 들고 식당을 나섰다. 아무 말도 없이 얼굴을 굳히고 있는 석준에게 감히 말도 못 붙이고 가만히 있던 주영은 성큼성큼 횟집을 나서는 석준의 뒤를 따르며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가는데?」
「자야될 거 아냐? 계속 저 아줌마 흘끔거리는 거 보면서 있고 싶었어?」
석준은 화난 얼굴로 주영을 돌아보며 쏘아붙이고는 다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주영은 말없이 석준을 따랐다. 석준은 망설임 없이 바닷가 근처의 모텔로 들어갔다. 그는 차마 따라 들어가지 못하고 모텔 입구에서 우물쭈물하는 주영을 돌아보고는 다시 다가와 거칠게 팔을 잡아끌면서 말했다.
「처녀도 아니면서 이런데 한번도 안 와본 것처럼 촌스럽게 굴지마. 나도 쪽팔려 죽겠으니까. 빨리 따라와」
석준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주영은 빨갛게 익어버린 얼굴을 숙이고 묵묵히 잡아끄는 석준의 손에 이끌려 모텔 방까지 올라왔다. 작은 원룸처럼 생긴 방에 베란다 쪽으로 더블 싸이즈의 침대가 있었고 한쪽 벽에는 화장대가 서있었다. 입구 옆에 있는 문은 아마도 욕실인 것 같았다. 신을 벗고 방안에 들어와서야 석준은 주영을 잡은 손을 놓았다. 주영은 그에게 잡혔던 팔꿈치가 아파 손으로 문지르며 어색하게 서 있었고 석준은 침대 옆에 있는 낮은 테이블에 들고 온 봉지를 올려놓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주영은 봉지를 열어 싸온 회와 소주를 꺼내 테이블에 있던 두 개의 잔에 술을 따라 놓았다. 그가 천장에 시선을 고정하고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주영은 가만히 기다렸다. 석준이 다시 주영을 향해 눈길을 보내주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입을 열었다.
「석준 씨가 보기에 나 바보 같지? 그래도 어떻해? 난 애 엄만데… 낳았으면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야? 부모가 되가지고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는 사람이나, 책임지지 못하고 애를 울리는 새엄마나, 다 같은 거야. 그래도… 자기가 그렇게 얘기해 주니 우쭐하긴 하데」
주영은 굳어진 석준의 얼굴을 보면서 살짝 웃어보였다. 그러나 석준은 더욱 무섭게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내 말 그런 농담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지마. 너 그럴 때마다 바보취급 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
자신이 웃으면 항상 마주 웃어주던 그였기에 주영은 놀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응… 미안…」
둘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말 없이 마시기만 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술병이 두 개쯤 비워졌을 때쯤에 석준이 말문을 열었다.
「주영아… 너 나 사랑하지 않아? 네 곁에 있는 내가 싫은 건 아니지?」
「응…」
주영은 갑작스럽게 차오르는 눈물을 떨구면서 대답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석준 씨한테 의지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어… 지금은… 나쁘게도… 정말 나쁘게도… 석준 씨가 내 곁에 계속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러면서도… 성준이를 생각하면 당신을 떠나보내야 하고… 그래서 벌받는 거라고 생각했어. 욕심내면 안 되는 사람을 욕심내고 있는 건 우습게도 바로 나니까. 당신을 떠나보내야 하는데도 계속 잡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니까…」
술에 취한 자신의 혀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온갖 속마음을 다 털어놓고 있었다.
「주영아…」
「아냐. 계속 내말 들어요. 이젠 얘기할래. 그 동안 석준 씨한테 정말 못할 짓 많이 했어. 나같은 사람 석준 씨처럼 훌륭한 사람 감히 꿈도 못 꾸는 사람한테 석준 씨 그동안 너무나 많은 것들을 해줬어요. 당신은 나 같은 흠 있는 사람말고 정말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어려움 없이 살 사람인데… 내 욕심에 지쳐서 당신 잡고 매일 울고 떠나가지 못하게 군거 정말 미안해요… 석준 씨, 꼭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눈물 때문에 화장이 번진 눈으로 주영은 석준을 올려 보았다.
「석준 씨… 진짜 좋아해. 사랑하는 거 같애… 하지만… 하면 안 되는 사랑도 있는 것 같아. 나도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이 아프다구. 왜 이제야 만난 거야. 왜 나 학교 다닐 때, 성준 아빠 만나기 전에, 아님 하다 못해 결혼하기 전에라도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나서 날 이렇게 괴롭게 하느냐구! 난 억울해… 진짜 억울해…. 그래서 석준 씨가 미워요…」
주영은 테이블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주영아…」
석준은 주영을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의 눈물로 셔츠가 젖어들고, 석준의 눈동자도 젖어들기 시작했다.
「니 마음 알려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나 이제 물러서지 않을꺼야. 주영아… 너를 잡고 놓지 않을꺼야. 나 없이 고통 받았던 시간… 내가 다 갚아줄게. 그러니까 울지마…」
석준은 주영의 얼굴을 감싸고 그렇게도 입맞추고 싶었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알싸한 소주냄새… 그리고 그녀의 화장품 냄새…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입맞춤은 키스가 되고 포옹은 그렇게 애무로 넘어갔다. 주영의 원피스 후크를 끄르는 석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원피스를 간신히 벗기고 나니 나타나는 슬립. 그리고, 브레지어… 드러난 가슴에 입을 맞춘다. 상상했던 것 보다 더욱 부드럽고 풍만한 이 가슴에 평생을 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영은 석준의 손길에 몸을 떨었다. 그의 입술이 가슴을 스칠 때 자신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말았다. 그의 머리칼에서도 그의 냄새가 났다. 따뜻하고 믿음직한…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몽롱한 의식 속에서 떠올랐다.
「석준 씨… 우리… 이러면 안…」
「생각하지마, 이주영…. 나만 봐… 생각 같은 거 하지마, 제발…」
석준은 주영의 거들을 벗기며 생각했다. 참 많이도 입고 다닌다. 현대판 정조대처럼… 그런 생각에 석준은 쿡쿡 거리며 웃었다.
「왜?」
「여자들 원래 이렇게 속옷 많이 입고 다녀? 이게 뭐야? 벌써 속옷 종류만 네 가지에 스타킹까지… 남자 숨넘어가게 하려고 갖은 수를 다 쓰시는 구만…」
석준은 주영을 침대에 눕히며 그녀의 가슴에 입술을 대고 웃었다. 주영도 따라 웃었다.
「나 아줌마잖아… 배 나온 거 가릴려고 그랬지」
석준은 스타킹과 팬티를 한꺼번에 벗겨내며 주영의 다리에 입을 맞추었다.
「주영아…」
「음…」
석준은 자신의 옷까지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돌아누워 있는 주영을 끌어안았다.
「안 씻었다고 소박 놓는 거 아니지?」
「몰라…」
석준은 주영의 가슴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목덜미에 자잘한 키스를 뿌렸다. 주영의 한숨소리가 달콤하게 들려왔다.
「사랑해…」
석준은 다른 한 손을 주영의 다리 사이로 넣어 여성을 쓰다듬었다. 그 곳은 벌써 흥건히 젖어 손을 적시고 있었다.
「이리와, 주영아…」
「석준 씨…」
석준은 주영의 다리사이에 자리를 잡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아…」
그녀만큼이나 따뜻하고 포근했다. 낯선 침입에 파르르 떨면서 그를 죄어오는 느낌이 석준의 이성을 한 방에 앗아가 버릴 만큼 근사했다.
「주영아… 나만 봐… 나만… 눈뜨고 날 봐… 너와 함께 하는 사람이 누군지…」
「응… 석준… 씨.. 빨리…」
석준의 움직임이 서서히 빨라지고 주영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둘은 함께 천국으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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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은 햇살에 눈을 찌뿌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의 과음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뒤에서 안고 있는 석준의 따스한 품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침이라 성이 난 그의 남성도… 주영은 눈을 감고 미소지었다.
' 그래… 내일 생각할래. 오늘 좀 행복하다고 내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내일의 난 또 불행으로 걸어가고 있을 텐데 힘든 거 잊고 하루쯤 행복해도 되는 거잖아… 사랑하는 사람하고 사랑하고 사랑 받고.. 오늘은 그렇게 있을래. 성준아… 새엄마 하루만 봐줘… '
햇살에 눈이 익을 때쯤 주영은 살며시 일어나 샤워를 하고 슬립 차림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뒤에서 어느새 일어난 석준이 다가와 가만히 끌어안았다.
「좀더 자 두지 그랬어? 아직 술도 다 안 깼을 텐데…」
「음… 괜찮아. 아침 바다보고 싶어서… 전망이 참 좋다. 저기 물새도 있어」
「어디? 와아… 어젠 그냥 눈 뒤집혀서 아무데나 들어왔는데 이렇게 좋다니… 봉 잡은 기분이네. 나 씻고 나올게. 아침 먹으러 가자」
「응…」
주영은 헝클어진 침대를 정리하고 샤워하면서 빨아 놓은 석준의 양말과 속옷을 드라이어로 말리기 시작했다.
「뭐해?」
「양말 말리잖아」
「그거 그냥 햇빛에 말리고 나랑 놀자」
「응?」
「샤워하고 나왔잖아. 산뜻한 기분으로 한 번… 어때?」
「몰라…」
석준의 손에 이끌려 주영은 정리해 놓는 침대에 다시 누웠다. 아침 햇살에 석준의 얼굴이 황홀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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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어쩌면 난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것을 욕심낸 것일지도 몰라. 언젠가는 욕심내고 훔쳐 달아 난 것 때문에 벌을 받을 꺼야. 그래도 하느님… 오늘만은… 그냥 행복하게 해 주세요. 제발…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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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준이 밀고 들어오는 속도에 맞춰 주영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울었어? 또 이상한 생각했지?」
「아니… 창피하게 자꾸만 그런 거 물을 테야?」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돌아눕는 주영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여 석준은 다시 주영을 끌어당겨 안으며 귓가에 은근한 목소리로 또 놀렸다.
「아니… 무슨 아줌마가 이렇게 순진하데? 너 그거 내숭이지? 우리사이에 무슨 내숭을 그렇게 떠냐? 평소처럼 해. 총각 밤잠 설치게 밤에 전화해서 이상한 거 물어보고 하던 이주영 어디 간 거야?」
「뭐야? 자꾸 놀리면 나 화낸다」
가슴을 애무하는 석준의 손길을 치워내며 주영은 토라진 척 했다.
「어? 진짜야? 미안해. 삐지지 말아라. 내가 맛있는 밥 사줄게… 응?」
석준은 놀라는 척 하며 주영의 어깨에 키스했다.
「못살아 정말…」
주영은 곱게 눈을 흘기며 웃었다.
석준은 오늘이 꿈만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뜬 그녀가 혹시라도 어제의 일을 후회하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불안했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얇은 슬립차림으로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두려운 마음을 감추려 일부러 가볍게 말하는 자신의 손을 뿌리치지 않은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좋을 거라는 것을 상상 해보았지만 정말 이렇게 충만한 기분일 줄이야… 그녀를 안고 떠오르는 햇살을 받는 그 순간에 가슴을 가득 채우는 안도감과 행복함에 목이 메어 오는 것만 같았다. 복잡한 그녀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또 이상한 생각들로 내일이면 자기 자신을 괴롭힐 것이 분명한 그녀지만, 그렇게 괴로워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다시는…. 석준은 주영이 샤워하는 동안 박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지난번에 이주영 씨 이혼 소송건이요. 남편 되는 사람 연락처도 남아있을까요? 네… 그럼 월요일에 뵙죠」
' 그냥 두고보지 않을꺼야. 네가 이렇게 바보같고 순진하니까 나라도 나서서 해결을 봐야하지 않겠어? 너 때문에 정말 미치겠다. 이주영… 이 순딩아… '
둘은 함께 손을 잡고 시장을 돌아다니고 해물 칼국수를 먹고는 다시 서울로 향했다. 차안에서도 석준은 주영의 손을 놓지 않았다. 주영은 편안히 앉아 창 밖을 보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주영아, 나 오랜만에 휴가인데 서울로 가지말고 다른데서 하루 더 지내다 가면 어떨까?」
「응? 어디?」
「청평에 우리 가족별장 하나 있거든. 아… 그런 눈으로 보지마. 으리으리한 거 아니고 조그만 한 거야. 아버지께서 낚시를 좋아하셔서 그냥 조그맣게 집 하나 지어놓으신 거야. 어때?」
「음… 좋아. 대신에 가는 길에 시장에 좀 들러 줘. 갈아입을 옷 하나 사야지… 자기는 옷 있어?」
「응, 트렁크에 골프 치러 나갈 때 입는 옷 있어. 아, 또 그런 눈… 사장님이 언제 나가자고 할지 몰라서 가지고 다니는 거야. 나 골프 진짜 못 쳐. 그냥 사장님 옆에서 '사장님, 나이스 샷' 소리밖에 안 해」
「푸훗!」
주영은 석준이 익살스럽게 하는 나이스 샷 소리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주영의 얼굴이 부서지며 웃는 모습에 익숙한 가슴의 통증이 온다. 사랑하는 사람을 웃게 해 주는 것이 이렇게도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라면 더더욱 주영을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맨날 그렇게 웃으면 좀 좋아? 세상 고민 혼자서 다 끌어안고 있는 사람처럼 오만상을 다 찌푸리고 다니니까 이주영 씨 혹시 병 있냐고 잉크쟁이 김창현이가 물어보지…」
「어? 김 사장님이 그러셨어? 나 아프냐고?」
「그래, 이 심술쟁이야… 그렇게 웃고 하면 좀 좋아? 아… 그렇다고 아무 남자나 보고 웃고 다니라는 소린 절대로 아니야. 웃는 건 나만 보고 웃어. 그냥 인상을 좀 펴고 다니란 소리야. 알았지, 이주영?」
「뭐야… 언젠 웃으면서 다니래놓고..」
「안 돼! 생각해 보니까 너 웃고 다니면 별별 놈들이 다 이주영 따라 다닐 꺼 아냐? 절대로 안되겠어… 너 월요일부터는 집에서만 일해」
「별 우스운 소릴 다 듣겠네. 언제부터 의처증 발병한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벌써부터 가둬 둘 생각부터 하고 그래?」
「아… 몰라. 주영아 볼륨 좀 올려봐. 낭만고양이 나온다」
「치… 할 말 없으니까 딴 소리는… 속도 좀 줄여. 아무튼 이 노래만 나오면 자기는 마구 밟더라…」
「네, 사모님」
핸들에 올려놓은 손가락이 까딱거리고 부드럽게 웃음 띤 그의 모습이 행복해 보여 주영은 마주 웃었다.
' 행복이란 것…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왜 나는 행복해 질 수 없는 것일까? 나도 다 잊고 행복해지고 싶은데… 이렇게 당신 손을 잡고 있으면 계속 행복할 수 있는 걸까? 석준 씨… 이런 못난 나라서 정말 미안해… '
청평에 도착해서 시장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주영의 트레이닝복을 한 벌 사고 어둑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작은 별장으로 왔다. 함께 라면을 끓여 먹고 저녁 뉴스를 보고 한 이불 밑에서 주말의 명화를 보고…. 물론 영화는 끝까지 보지 못했다.
「나 영화보고 있잖아, 석준 씨…」
「나만 봐… 다른 사람들 키스하는 거 보지 말고 나랑 키스해…」
「심술쟁이…」
「응. 나 심술쟁이야」
그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비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이제 이틀 밖에 안되었지만 그와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이 오래 전부터 해왔던 일들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그가 웃으면 함께 웃고 그가 다정하게 안아주면 마주 안아주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 행복하게 해준다. 아무 어려움 없이 그와 사랑할 수 있었다면, 평생을 함께 나누는 것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을텐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그저 꿈일 뿐일지라도, 언젠가는 깨어질 꿈일지라도 지금은 그를 안은 팔을 놓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잠꾸러기야… 일어나… 아침이야」
「응… 조금만 더 자자…」
밤새도록 주영을 안고 기쁨의 한숨을 짓게 만들었던 그의 손이 뒤에서 주영의 맨 몸을 다시 쓰다듬고 있었다.
「부탁이야… 나 눈 못 뜨겠어…」
「눈 안 떠도 돼. 다리만 살짝 들어줘」
그는 키득키득 웃으며 주영의 다리를 살짝 들고 그녀의 안으로 들어오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 뭐야. 밤새도록 해 놓고 또? 변강쇠 나셨네…」
「뭐야… 너도 좋으면서… 싫어?」
「싫다고 안 할 것도 아니잖아?」
「응」
석준은 주영의 목덜미에 키스하면서 또 웃는다.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뒤늦게 찾아온 사랑에 석준은 이제까지 외롭게 살아온 시간들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주영을 안고 또 안아도 부족했다. 원래 한 사람이었던 몸이 쪼개졌던 다른 한쪽을 찾은 것처럼 그렇게 하나로 있어야 안심이 되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자꾸만 비껴가는 주영을 잡고 또 잡아 이제야 하나가 되었는데 다시는 주영과 함께가 아닌 순간을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주영아… 사랑해… 사랑해…」
「석준 씨」
석준은 요즘 아무리 일이 바빠도 퇴근은 제 시간에 하려고 애처로울 정도로 노력하고 있다. 칼 퇴근을 위해서라면 점심시간뿐 아니라 커피 한잔 할 시간까지 아껴 일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퇴근시간이 한시간 남짓 남은 순간부터는 눈에 핏대를 세우고 온몸을 전투모드로 바꾸면서 비서와 직원들을 들볶다가 10분 여의 시간이 남게되면 오늘 끝내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내일 아침까지 자신의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려놓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눈빛을 보낸다. 석준의 비서인 박강희는 자신의 상사의 이러한 변화 뒤에 이주영이라는 작은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상사의 본가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전화가 왔었고 무엇보다도 상사의 작은 여자의 뒤를 조사하라는 특명까지 비밀리에 수행하고 있는 그녀이기에 이러한 변화들이 김석진 이사의 미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쯤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번의 귀뜸에도 불구하고 상사는 핑크빛 열정에 눈이 멀었는지 귀가 먹었는지 도통 들으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수년간 그의 곁을 지켜왔던 강희의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겪는 모습이었기에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을뿐더러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정말 큰일을 치를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스트레스는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이사님 내일 아침에 사장단 조찬회의 있으십니다」
벌써 퇴근준비에 정신 없는 석준에게 강희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몇 시?」
책상 앞에 바짝 붙어 서서 안경너머로 자신을 째리는 강희의 불편한 심사를 아는 지 모르는지 석준은 책상을 정리하고 차키를 챙겨 들으면서 건성으로 물었다.
「오전 8시에 하이얏트 호텔 봉황실입니다. 내일 아침에 댁으로 모시러 갈까요?」
강희는 의자에서 일어나 벌써 문으로 향하는 그를 쪼르르 따라나서며 다급하게 말했다.
「음… 그러지 말고 바로 그쪽으로 갈테니 브리핑 내용은 이메일로 보내줘요」
석준의 집이 자신의 집과 가깝기 때문에 함께 출발하면 브리핑 시간도 벌고 자신도 조금 여유가 있어 좋을 것 같아 한 말인데 석준은 오히려 일을 불려놓고 있었다. 강희는 한숨이 나왔다.
「네 알겠습니다」
강희의 대답에 석준은 싱긋 웃으며 문 밖으로 나섰다.
「그럼, 내일 봅시다」
바람처럼 목소리만 남긴 채로 석준은 나가버렸다. 강희는 한숨을 포옥 쉬었다. 오늘도 야근이다.
석준은 차에서 휴대폰으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주영의 약간 숨 가빠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야… 뭐하느라고 그렇게 숨이 차?」
주영의 목소리에 석준의 입매에 미소가 걸린다.
「아… 석준 씨? 걸레질 하다가 받아서 그래. 어디?」
「한 10분쯤 후에 도착할 거 같은데… 뭐 사갈 거 없어?」
「음… 와인 한 병 사와. 저녁메뉴 샤브샤브야. 좋지?」
석준은 비서를 시켜 사온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운 것을 떠올렸다. 허기가 밀려오면서 입안에 침이 고였다.
「좋지. 금방 갈게」
석준은 주영이 준비한 저녁메뉴에 대한 기대감을 감추지 않고 얼른 대답했다. 주영의 목소리로 하루의 전쟁 같은 일상의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아 석준의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두 달이 넘어간다. 주영과 함께 살기 시작한 행복한 나날이… 처음엔 그냥 저녁을 해주러 왔다가 석준이 일부러 술을 마시고 집에 안 보낸 날이 그 시작이었다. 낮에는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일을 하고 저녁이면 석준과 함께 그의 집으로 왔다. 처음에는 간단한 스킨과 로션 샘플이 화장대 위에 놓이기 시작했고 함께 산 잠옷과 간단한 옷가지들이 들어와 그의 옷장 한 구석에 자리했고 이제는 곳곳에 그녀가 사다 놓은 관엽식물들과 예쁘고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집안 곳곳에 당연한 듯 놓여있다. 그런 집에 돌아가는 길은 항상 설鵖다. 저녁마다 그녀와 마주한 밥상이 행복했고 함께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고 사랑을 나누는 침대가 행복해서 석준은 집으로 오는 길이 바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끔은 우울할 때도 있었다. 얼마 전 박 변호사로부터 알아낸 주영의 전 남편의 전화번호로 그를 만났을 때… 그때는 주영과 며칠동안 서먹하게 지낼 정도로 말다툼을 하긴 했지만….
석준을 마주한 흥균은 뻔뻔스럽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당당했다.
「아… 주영이가 만난다는 분이시군요. 이렇게 만나다니 참으로 유감입니다.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잘 통할 것 같은데… 저를 만나자고 하신 용건은 뭡니까?」
흥균의 거만다고 할 정도의 태도에 석준은 화가 치밀었지만 담담한 어조로 얘기를 꺼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영이가 아이를 데려오고 싶어합니다. 충분히 잘 키울 능력도 있고 나흥균 씨께서 특별히 아이양육에 관여하고 있지 않으신 것 같던데 굳이 아이를 새엄마에게 보내지 않으시려는 이유가 궁금해서요. 제가 알기로는…」
흥균은 테이블로 몸을 기울이며 석준의 말을 가로막고 약간 화가 난 어조로 말했다.
「아, 잠깐만요. 중간에 말씀을 잘라 죄송합니다만, 지금 김석준 씨께서는 전혀 상관없는 제 삼자라는 것을 잊고 계신 것 같군요. 무슨 권리로 남의 부부사이의 일을 이렇게 깊이 관여하시는 겁니까? 성준이는 저와 이주영의 아이입니다. 아이 새엄마에게는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해 최후의 통첩을 한 상태이고 그 조건을 수용한다면 저는 아이를 새엄마와 함께 키울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아이를 새엄마에게 보내라 마라 하는 참견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석준은 자존심이 상했다. 석준은 자신도 모르게 드러난 불쾌한 표정을 얼른 지우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주영이와 결혼할 생각입니다. 지금 충분히 진지하게 생각하고 만나고 있고 성준이를 양육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한다면 얼마든지 보낼 용의도 있습니다. 저에게 제 삼자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아닌가요?」
석준의 말을 들은 흥균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석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흠… 그건 김석준 씨의 본심이 아니실 겁니다」
흥균의 말투는 석준을 깔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석준의 물음에 흥균은 더더욱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며 마치 애송이에게 한 수 가르쳐 준다는 식으로 천천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제 얘기는 대한민국의 보편적인 사고를 가진 남자라면 절대로 애 딸린 이혼녀를 아내로 맞아들이는데 호의적이지 않을뿐더러 집안에서 그런 사람을 며느리로 흔쾌히 받아들일 리 없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던 석준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자 흥균의 미소는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김석준 씨 자신은 내심 아이를 받아들인다는 넓은 아량으로 제 아내의 마음을 쉽게 얻을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장 집안에서 반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여자를 보호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제 주변의 여자들은 항상 얘기를 하죠. 여자의 최대의 적은 여자라고… 당장 김석준 씨 새어머니께서 완강히 반대하실 때 주영이를 어떻게 보호하실 작정입니까? 당연한 수순은 제 아내는 당신에게 숨겨진 여자가 되어야 하고 성준이 또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될텐데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자신의 씨가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석준도 많은 밤들을 생각해 보았던 상황이었다. 부모님께 허락을 구하기가 힘들기는 하겠지만 주영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흥균의 얼굴은 뭉개주고 싶을 만큼 승리감에 싸여 자신의 고뇌를 애송이의 열정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태연히 말하고 있었다.
「저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불러내셨는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 아내를 아신다면 어떻게 저를 만나서 설득한다는 무모한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군요. 주영이가 그런 모험을 걸만큼 대단한 여자일 줄은 정말 몰랐군요」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도 모자라 주영까지 깎아 내리는 것으로 확인 사살까지 한 흥균은 석준의 화를 참느라 굳게 다문 턱이 떨리는 것을 보면서 빙글거리고 있었다. 석준은 화를 내는 것이 흥균의 승리감을 고무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자꾸만 아내라는 호칭을 쓰시는데 이혼하신 이상은 더 이상 나흥균 씨의 아내가 아닙니다. 그리고, 적어도 자신의 아이를 낳아 기른 사람에게 그런 평가를 하시다니…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를 않는군요. 주영이가 이혼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마저도 들 지경입니다. 어쨌든 저는 주영이를 반려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 성준이까지도 끌어안으려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되시는 겁니까, 아니면 일부러 저를 도발하시려는 겁니까?」
석준이 말을 하는 중간에 얼굴이 달아오르던 흥균은 비아냥거렸다.
「오호… 셋트로 받아들이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물 잔으로 가던 석준의 손이 그대로 딱 멈추었다. 흥균의 비아냥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대한민국 법이 바뀌지 않는 이상은 성준이는 제 아들이고 당신에게 가면 동거인 밖에 안 된다는 걸… 아실만한 분이 왜 이러십니까? 한 지붕아래 세 가지 성이 존재하겠군요 . 저는 아이에 대한 친권을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요. 그렇죠? 친권을 포기한 사람은 성준이 새엄마지 제가 아닙니다. 저는 아이가 자랄 때 분명히 아이에게 알려줄 생각입니다. 아빠가 마지막까지 설득했으나 새엄마는 너를 버렸노라고 말입니다」
이 남자의 생각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부모가 어떤 사람이 길래 이런 괴물을 낳아 키웠는지…. 석준의 마음속에서는 지금 쥐고 있는 이 물 잔을 저 녀석의 면상에 던져버리라는 속삭임이 들려왔고 간신히 이성의 힘으로 그 충동을 억누르느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흥균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제 의사는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김석준 씨의 이런 월권을 주영이가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아는 주영이는 이 사실을 알고는 가만히 있지 않을텐데…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약이 있어서요. 그럼, 다시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흥균은 웃는 얼굴로 일어서 나갔고 석준은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의 우월감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고 그의 눈동자에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날 저녁 집에 들어온 석준에게 주영은 눈도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흥균이 주영에게 전화해서 석준과 만난 일들을 얘기 한 모양이었다. 주영의 말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석준 씨… 나… 염치있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게 해 줘. 난 더 이상 석준 씨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 싫어」
주영은 거실 한 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석준은 그러한 주영에게 다가가 안아주었지만 주영은 마주 안아주지 않았다.
「난 너와 성준이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지 못한 것뿐이고 그렇게 해서라도 널 완벽하게 가질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만났을 거야. 하지만… 너와 미리 상의하지 못한 점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주영아… 널 정말 사랑해. 놓치고 싶지 않아. 내 맘 알지?」
석준의 물기 어린 고백에서야 주영은 석준을 마주 안았다.
「더 이상 욕심부리면 벌 받을꺼야, 석준 씨.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잖아? 내가 미안해요… 이렇게 못난 나라서 정말 미안해…」
주영의 목소리가 너무나 쓸쓸하게 느껴서 가슴이 아픈 석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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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왜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외로워하는 거야? 널 이렇게 안고 있어도 불안해… 제발… 아무생각도 하지 말아. 난 너만 있으면 되는데 너는 나 하나 만으로는 부족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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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날이 있으면 행복한 날이 온다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서로 그 날의 일을 더 이상 입에 올리지 않았으나 주영은 매일 밤 잠든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날이 쌓이는 불안감과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해 잠들지 못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날이 많아지고 있었다. 저녁이면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띄고 집으로 들어오는 그의 모습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행복이어서 하루라도 이별의 순간들을 늦추고만 싶었다. 그동안 길게 드리워져 있던 머리를 짧게 자르고 마음을 비워보려 노력해 보았지만 이런 불안정한 생활이 언젠가는 끝날 것임을 알기에 자신의 짧아진 머리를 보면서 예쁘다고 웃으며 말해주는 석준의 얼굴에서 슬픔이 더욱 더 진하게 느끼고 만 그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에서 석준의 새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충격이기 이전에 사실 안도하는 마음이 먼저였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정도… 그러나 약속장소로 나가는 발걸음은 더없이 무거웠고 차 한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다음에는 무섭게 떨려오는 무릎을 다잡느라 아무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주영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맞은편에 앉아 보랏빛이 도는 안경 너머로 거북할 정도로 쏘아보는 중년 부인의 눈길을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어 고개를 떨구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우리 김이사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던 거로군요」
「네…」
생각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주영은 등줄기로 한기가 스미는 것을 느꼈다. 교양이 묻어나고 있지만 너무나 사무적인 어투에 감정은 조금도 섞여있지 않았다.
「흠… 집에서는 석준이 말 한마디면 어른들도 가능한 한 따라주는 대들보 같은 아들이예요. 집안에서 어른들이 점찍어 놓은 참한 아가씨도 있기도 하고 이제 얼마 안 있어 회사도 물려받아야 하겠기에 이젠 좀 더 강력하게 결혼을 설득할 작정이었는데 지난 일요일날 집에서 식사하면서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얘길 하더군요. 그래서 누군가하고 내심 기대했었어요. 박 비서를 통해서 전화해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이렇게 불러낸 건 다급한 어미 맘이라고, 이주영 씨라면 이해 해주리라고 믿어요」
주영은 손이 떨려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마주 잡았다. 석준의 새어머니는 단아한 모습으로 미소마저 띄면서 차분히 얘기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우리 집이 아들만 세 녀석이라서 항상 딸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이주영 씨 보니까 항상 내가 그려왔던 착한 딸의 모습이라 마음이 참 좋네… 부모님께서는 돌아가신 지 좀 되었죠?」
주영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감추지도 않았다. 당연히 알아보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네…」
최 여사는 우아한 동작으로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새어머니 병 수발 하느라고 힘들었겠더군요. 게다가 젊은 나이에 험한 일 당할 때 부모님도 안 계시고 형제도 없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나도 마음이 짠해져서… 박비서 얘기만 들었을 땐 마음 여리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사람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늘 보니 그런 것 같지만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고… 자아, 이주영 씨. 내가 무슨 말하고 싶은 지 알죠? 그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 숙이고 입도 벙긋 하지 않으면 두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만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집에서 바깥어른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계세요. 오늘 내가 이렇게 주영 씨 만나는 것도 석준이는 모르고요」
주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지만 감히 최 여사의 눈을 바라보지는 못하고 앞에 놓인 커피 잔을 쳐다보았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주영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사모님… 저는 염치가 뭔지도 알고 사모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저도 계속 생각해 오던 일이고 석준 씨… 저처럼 흠 있고 어려움 있는 사람말고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란 착한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늙어가야 한다는 것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그래서 떠나야 한다고 아침마다 다짐을 해도 저녁이면 석준 씨가 없는 삶이 너무나 두려워서 떠나지 못하고 하루하루 미루게 되었습니다. 집안에 심려를 끼친 점 정말 송구합니다. 석준 씨가 그렇게 어깨가 무거운 사람인줄도 몰랐습니다. 그랬다면… 그랬다면 제가 조금 더 빨리 결정할 수 있었을 텐데요」
다행히도 목소리는 제대로 나와주었고 그의 새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떨구지도 않았다. 최 여사는 안경너머로 주영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일요일 저녁의 석준이는 정말 대단했다. 자신의 결혼 문제는 자신이 알아서 한다고 버럭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생전가야 화 한번 내는 일 없이 착실하고 듬직하기만 했던 큰아들이었다. 때로는 남편보다도 더욱 의지가 되었고 자라면서 한 번도 속썩이는 일 없이 기대에 부응했던 최 여사의 자랑이었다. 이제는 슬슬 회사 경영권도 넘겨줘야 하는 이런 중요한 때에 좋은 집안의 딸과 결혼해서 더욱 탄탄한 기반을 만들어도 모자를 판국에 결혼문제로 아들과 대립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예전부터 아들의 비서를 통해 이혼녀를 만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을 하기는 했지만 워낙 착실하게 회사일에 열심이었던 터라 그다지 심각한 관계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눈치만 주고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았는데 얼마 전에 그 이혼녀와 동거중 인 것 같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듣고는 더 이상 가만히 두고 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경영권 이전을 위해서는 이사진들에게 꼬투리 잡힐 만한 일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일렀건만 여자에게 발목잡혀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라면 자신이 직접 나서야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혼녀라니… 절대로 안될 일이었다.
「주영 씨가 이해해 준다니 고맙기만하고… 뭐라고 할 말이 없네. 어쨌든 주영 씨도 아이에게 당당한 새엄마가 되려면 어느 정도 비빌 언덕은 필요 할 것 같아서…」
최 여사는 가방에서 준비해 온 흰 봉투를 꺼내 주영에게 내밀었다.
「열심히 살아야하지 않겠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 이혼한 게 그리 큰 흠은 아니라고 하니 곧 주영 씨도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꺼예요」
주영은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지는 봉투를 보고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최 여사를 올려다보았다. 석준과의 사랑이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다.
「이것… 넣어 두세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최 여사는 주영의 단호한 말에 놀란 눈치였다. 최 여사는 주영이 밀어낸 봉투를 어색하게 다시 가방으로 넣으며 한 마디 했다.
「석준이 옆에 있던 여자들은 다들 이렇게 돈 봉투 쥐어주면 떠나가더군요. 자존심 상했다면 미안해요」
주영은 일부러 마음을 흔들려 하는 최 여사의 얄팍한 수가 보이는 것만 같아 화가 치밀어 입술을 깨물었다.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서면서 최 여사는 한 마디 덧붙였다.
「힘내서 열심히 살아요. 사람이 매일 힘들기만 하란 법은 없는 거예요. 그럼 내 말은 충분히 이해한 것으로 알고 먼저 일어날께요」
「네…」
주영은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 다시 앉았다. 최 여사의 쑥색 한복 치맛자락이 사라지고 나자 그 동안 이를 악물고 참았던 떨림이 무섭게 몰아쳤다.
'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야 석준 씨. 왜 그랬어? 왜 이렇게 날 비참하게 만들었냐구…
왜 이렇게 당신한테 미안하게만 만드는 거야… 이젠 미안하다는 말도 뻔뻔스러운 것 같아 더 이상 못하겠는데… '
주영은 잠든 석준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그의 시원스런 이마와 피곤함이 쌓여 있는 눈가, 그리고 그의 자존심만큼이나 시원하게 우뚝 솟은 코를 지나 항상 다정한 미소를 지어주는 선이 뚜렷한 입술, 강인한 턱, 키스하면 간지럼을 참지 못하는 목, 단단하고 믿음직스러운 어깨와 뜨거운 가슴…
' 석준 씨… 사랑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지?'
그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추자 주영을 안은 팔을 고쳐 안으며 마주 입맞춘다. 이런 사람을 떠나야 하다니… 주영은 돌아누웠다. 그리고 살며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주영아… 어디가?」
「응… 물 마시러…」
「빨리 와…」
주영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들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유난히 잠귀가 밝은 석준이 자신의 울음소리를 듣고 깨어날 까봐 컵에 따른 물을 계속 삼키며 눈물만 흘릴 따름이었다. 석준과 처음 만난 그 때로 돌아 갈 수만 있다면… 아무리 석준이 다정한 미소를 짓는 다고 해도 아무리 친절하게 굴어도 절대로 마주 웃음 짓지도 고개도 돌리지 않으리라. 이렇게 아플 것이었다면… 그를 절대로 만나지 조차 않았을텐데… 아니… 아니… 아무리 아프더라도 그를 만나 사랑 한 것을 후회할 수는 없었다. 산채로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프지만 그를 만나 살아 있음을 감사해왔던 그 순간들을 절대로 잊지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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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당신 앞에서 미안하단 얘기하지 않을래. 이걸로 난 당신에게 진 빚을 갚는 거니까. 내 심장을 다 줘버리고 난 떠나는 거니까. 하지만 사랑하는 당신 제발… 다른 사람 만나더라도 나를 잊지는 말아줘요… 이것도 내 이기적인 욕심일 테지만 당신에게서 잊혀진다는 상상만으로도 난 죽을 것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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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은 흥균과 함께 박 여사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오랜만에 뵌 박 여사는 흰머리가 더 늘어 머리를 다 덮었고 꼬장꼬장한 목소리는 여전하긴 하지만 돌아앉아 눈물을 훔치시는 것이 그동안 마음이 많이 약해지신 것 같다고 주영은 멍하니 생각했다. 흥균은 다시 합치기로 했다는 말을 준비해온 원고라도 읽는 듯한 단조로운 목소리로 얘기했고 주영은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잠시 후 흥균은 약속이 있다면서 나갔고 주영도 따라 나가려는데 박 여사가 주영을 붙잡았다.
「기껏 너라도 살라고 내보냈더니 이게 무슨 꼴이냐. 그 사람이 너 싫다고 내치든?」
「아녜요, 새어머니」
「그럼? 너 흥균이랑 진짜로 다시 살고 싶어서 돌아왔다는 말 난 안 믿는다. 성준이 이제야 애미 없이 사는 거 적응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야? 내가 너한테 그리 모질게 굴었는데도 아직도 흥균이나 이 집안에 미련이 남은 게야? 왜 그렇게 미련을 떨어? 이젠 열녀문 같은 것도 안 주는데 누가 너보고 이런 집구석에서 귀신 되라고 등 떠밀던?」
무섭게 다그치는 박 여사 앞에서 주영은 자동인형처럼 고개만 저었다.
「아니요… 새어머니. 아니예요. 제가… 제가 성준 아빠한테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박 여사는 소매 끝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말했다.
「너 어떻게 내 앞에서조차 거짓말이냐?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던? 너 그 남자랑 살림까지 차렸던 거 알고 있는데… 그 쪽 집안에서… 그렇지? 그 집에서 반대한 게지?」
박 여사는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흥균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그렇게 바람기로 속을 썩였는데 이제 그 아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착하고 순진한 남의 집 귀한 여식의 인생을 자신과 똑같이 망가뜨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박 여사는 처음부터 주영과의 결혼을 반대했었다. 속을 썩일게 뻔한 흥균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여리고 착해만 보이는 주영의 까만 눈동자가 맘에 걸려 차마 흔쾌히 허락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결혼한 지 반년도 안되어 안 좋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그래서 박 여사는 싫다고 하는 주영을 분가시키고 비싼 돈 들여 대학원 공부시키는데 열심히 안 한다고 잔소리를 해댔던 것이다. 그렇게 공을 들여 며느리의 눈과 귀를 막았건만 어느 날 찾아온 흥균의 여자가 결혼식에서 유난히 살갑게 굴던 며느리의 친구였다는 것을 알고는 어렵게 떠나보낼 결심을 한 것이었는데, 제 발로 돌아와 다시 살겠다니… 박 여사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 주영아… 미안해… 내가 저런 놈을 낳고 미역국을 먹었다. 네가 성준이 잊고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 내가 널 조금은 원망했다만… 그래도 이러라는 것은 아니었는데… 주영아…. 아가… 미안하다, 미안해…」
「아녜요, 새어머니. 아녜요…」
자신의 무릎에 엎드려 우는 박 여사의 등을 쓸며 마음껏 울 수 있는 시새어머니는 그나마 행복한지도 모른다고 멍하니 생각하는 주영이었다. 이젠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 온 것 같은데… 왜 그 나름대로의 성취감조차도 없는 것인지, 아니 도리어 허무하기 이를 수 없어 울음조차도 나오지 않는 주영이었다.
석준은 얼이 나간 얼굴로 주영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 석준 씨… 성준이 데려오는 조건으로… 미안하다고는 말 안 할게.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석준 씨… 난 잘 지낼꺼야. 성준이 봐서라도 열심히 살꺼야. 그러니까 석준 씨도… 잘 지내…」
주영의 억지로 내는 밝은 목소리를 모를 리 없는 석준이다.
「주영아… 그럼… 나는…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사실 성준이 얘기만 나오면 자기 싫어했잖아. 나도 말 꺼내기 어려웠고… 어차피 성준인 내 아들인데 자기한테 부담 주는 것 같아서 싫었어. 왜 내가 내 아들 보고싶다고 얘기 할 때 석준 씨 눈치를 봐야 하는 건가 싶어서 서운하기도 했지만… 나 석준 씨 이해해. 그러니까…」
애원해서라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석준은 다급하게 말했다.
「주영아… 제발… 이러지 말고 우리 만나자. 만나서 얘기해」
「아니. 석준 씨, 우리 당분간은 만나지 말아요. 나도 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고 자기도 그럴꺼야」
주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석준은 이대로 주영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미칠 것만 같았다.
「너 지금 그때 그 오피스텔이지? 기다려… 나 갈 테니까」
「아니, 거기 아니에요. 거기 세 놨어. 성준이랑 같이 살 건데 좀 좁잖아. 그래서 다른 집 구했어. 그만 끊을게. 안녕…」
「주영아!」
석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주영은 다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무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석준의 귀에는 계속해서 '안녕'이라는 말만 윙윙거리고 있었다. 그의 행복의 파랑새는 다시 불행으로 날아가 버렸다. 한동안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자신의 아파트에서 주영의 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을 때도, 그리고 주영의 핸드폰이 결번이라는 짜증나는 멘트가 계속 됨에도 불구하고 매번 다시 걸어 보면서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싶지 않았는지도… 하지만 이 늦은 밤, 주영이 사라지기 전 어떠한 단서라도 남겼을까봐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고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는 이 깊은 밤에 비명처럼 울린 전화벨소리에 이어진 주영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 그렇게 아무 감정도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얘기하면 누가 당신 마음을 모를 줄 알고? 내가 곁에서 지켜온 세월이 얼만데 그 속을 모를 거라고 바보같이 믿고있는 거야? 주영아… 그렇게 혼자서 아파하지 말고 제발… '
석준은 속이 타 들어가는 것만 같아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병째 들이켰다. 미처 입으로 넘어가지 못한 물줄기가 목을 타고 셔츠 속으로 사라지고 감은 두 눈에선 새로운 물길이 양쪽 귀 뒤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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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금 피눈물 흘리고 있는 거 다 알아. 이 바보 이주영… 제발 나를 위해서라면 이러지 말아. 이 세상 어디에도 맘 붙일 곳조차 없으면서 무작정 이렇게 떠나가 버리면… 이렇게 나를 무능력한 남자로 만들어버리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그러니 제발 돌아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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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은 한숨을 쉬면서 시계를 봤다. 벌써 아침이라고 해도 좋을 시간 6시 30분… 흥균은 오늘도 외박이다. 예상은 했었지만, 이런 생활이 도저히 적응이 될 것 같지 않다. 주영은 허울좋게 아이의 아빠라고 불리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밤을 지새운 것은 아니다. 출판사 김사장이 사정사정을 해서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일을 해 주느라고 성준이를 재워두고 계속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에 성준이를 깨워서 유치원에 보낼 시간이고 보니 밥을 하려고 부엌으로 나갔다. 한참 국의 간을 맞추고 있을 때 흥균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한참을 부엌입구에 서 있다가 한숨을 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흥균의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주영은 아이를 깨우기 위해 아이방으로 들어갔다.
「이쁜 성준… 아들… 아침이야. 일어나야지?」
「음… 새엄마…」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눈을 비비는 아이의 목을 끌어안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이의 볼에 뽀뽀하며 주영은 속삭였다.
「이쁜 성준… 사랑해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가가 붉어지는 것만 같다.
「새엄마 사랑해요…」
새엄마의 목을 마주 끌어안으며 아이도 중얼거렸다. 둘은 매일 아침마다 사랑고백을 했다. 한동안 성준이는 새엄마 없이 지내온 나날들에 대해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떨어지려 하지 않아서 주영은 하루종일 아이를 안고만 있었던 적도 있었다. 아이는 새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했고 주영 또한 아이를 떨어뜨리기 힘들었었다. 이젠 아침마다 하는 사랑고백으로 서로의 마음에 안정을 주고 있었고 힘들게 찾아온 작은 행복이었기에 더더욱 소중했다.
「아들…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자. 새엄마가 오늘은 우리 성준이 좋아하는 된장국 끓였어」
「네, 새엄마. 얼른 세수하고 올게요」
주영은 아이의 볼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해서 욕실로 보냈다. 아이가 입은 잠옷바지가 좀 짧아진 것이 보여 행복해졌다. 흥균과 주영은 서로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다만 아이를 사이에 두고 아이에게만 다정하게 얘기 할 뿐이다. 어느 날인가 성준이가 왜 새엄마랑 아빠는 뽀뽀를 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난처할 때가 있었지만 놀랍게도 흥균이 '아빠가 새엄마한테 무척 잘 못한 일이 있어서 벌을 받고 있는 중' 이라는 놀라운 대답을 하는 바람에 간신히 웃고 넘어간 일이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흥균은 집에는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올 뿐이었다. 뭐 어차피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 상관은 없었지만 이렇게 할 것을 뭐 하러 아이와 함께 집으로 들어온 것인지 가끔 화가 나는 주영이었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고 집에 아무도 없을 때면 주영은 석준은 뭘 하고 있을까하고 멍하니 생각을 하곤 했다. 자신도 모르게 전화기로 내미는 손을 보고 놀라고, 석준이 아이에게 사준 로봇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참지 못하곤 했다. 스스로에게 벌주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고 무서웠다. 혼자서 그와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울음을 삼키는 일은 매번 새로운 아픔으로 다가오기에 이젠 두렵기까지 했다. 그래서 출판사 김 사장에게서 다른 곳을 소개라도 받아 볼까하는 생각에 전화했다가 석준에게 주영의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는 다는 조건으로 일을 맡았고, 일은 긴 낮과 그보다 더 기나긴 불면의 밤들을 주영이 석준이 아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도와주었다. 주영이 자신을 녹초가 되도록 밀어붙여도 느닷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석준의 환영은 천만년이 지난다고 해도 괴로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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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떠나라는 당신 새어머니의 말씀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거 알고있지? 아마도 당신은 나보고 바보라고 욕하고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지내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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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6
난 가끔 김창현씨로부터 당신 소식을 듣기도 해. 바보같이 아직도 결혼 안 한다고 버티고 있다고… 혹시라도 내가 당신한테 결혼해버리라고 하면 결혼 할 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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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기적이게도 아직은 당신이 다른 사람과 함께인 모습은 상상도 하기 싫어. 내가 떠나 놓고도… 당신이 오길 기다리다니… 난 진짜 바보인가 봐… 당신… 잘 지내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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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준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주영의 하얀 얼굴이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의 얼굴을 보며 웃고 있었다. 석준은 가슴 한켠이 찌르듯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움직이기라도 하면 이 모든 영상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문가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김창현사장이었다.
「어? 왠일이야?」
「…」
주영의 눈이 문가에서 얼어붙어 있는 석준의 얼굴로 향해졌다. 주영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주영 씨… 내가 전화 한 건 아니고…」
창현은 당황하여 변명부터 하기 시작했고 석준의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그가 화가 났다는 표시를 하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가르고 주영이 입을 열었다.
「석준 씨…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석준은 자신의 귀에 들리는 주영의 담담한 목소리를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떠나 단 한순간도 아프지 않은 순간이 없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주영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채로 그렇게 담담하게 자신에게 잘 지냈냐는 안부를 묻고 있다니…
「응… 잘 지내. 주영 씨는?」
「저도요… 저, 김 사장님 아이가 학교에서 올 시간이 다 되가요. 그만 일어나 볼게요」
창현은 귀신을 본 것처럼 굳어 있는 친구의 눈치를 보면서 황급히 사무실을 나서는 주영을 배웅했다.
「주영 씨, 그거 이번 달 안에 끝내야 하는 것 알죠? 부탁해요」
「네. 걱정마세요. 제가 언제 마감 안 지키는 것 보신 적 있으세요?」
주영은 평소와는 다르게 미소까지 지으면서 대답하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김창현… 처음부터 하나도 빼놓지 말고 얘기해」
아무리 느긋하기로 소문난 창현이었지만 이렇게 처음 듣는 싸늘한 음성으로 말하는 석준의 목소리에는 도저히 느긋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한 일년전인가…」
석준은 자신이 제일로 믿고 있던 친구의 허둥대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자신을 떠나고 두 달여 지난 후에 주영이 전화를 해 왔고 주영과 석준의 관계를 알고 있던 창현이 급하지도 않은 일을 급해 숨 넘어갈 듯하다는 식의 연극으로 주영을 붙잡아 놓았던 것과 주영이 자신의 연락처를 절대로 석준에게 알리지 않기로 약속을 받고는 일을 시작했다는 것, 그렇게 일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처음으로 주영이 직접 원고를 가지고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석준이 들이닥친 것이라고…
「주소하고 전화번호」
「뭐?」
창현의 눈이 안경너머에서 놀라 동그랗게 되는 것을 보면서 석준은 분통을 터뜨렸다.
「이 나쁜 새끼야! 내가 그동안 어떻게 하고 살고 있는 지 뻔히 봐 놓고도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석준의 고함소리에 창현은 더더욱 정신이 없어졌다.
「석준아… 주영 씨는 아직 준비가 ..」
「나는? 나는 준비가 될 것처럼 보였냐? 니가 그러고도 친구야?」
창현이 괴로워하는 석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운명 같은 냄새를 풍기며 둘이 마주치게 되었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석준아, 진정하고 내 얘기 좀 들어. 주영 씨 요즘은 나하고 길게 통화도 하고 하지만 지난 달 까지만 해도 두 마디 이상은 말도 안 했었어. 일부러 니 얘기라도 하는 날이면 수화기 막고 우는 소리에 내 심장까지도 오그라들었었다고…」
그랬다. 주영은 작업한 원고를 보내거나 일 거리를 택배로 보낼 때 외에는 창현에게 조차 전화를 하지 않았다. 일부러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전화라도 하면 용건만 얘기하고는 얼른 전화를 끊기에 바빴다. 일이 너무 많아 마감시간 못 맞추겠다는 전화라도 하라고 과도하게 일을 부탁해도 그녀는 잠도 안 자고 일만 했는지 마감기일에 꼬박꼬박 일을 넘겼다. 지나가는 말로 석준의 얘기를 하는 날이면 수화기를 막은 채로 꺽꺽거리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석준보다 더욱 안쓰러웠다. 석준이 다시 만나라고 얘기하면 주영은 그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석준에게 못할 짓이라고… 석준이 너무 힘들어한다고 전화번호라도 알려주면 안되겠느냐고 하면 주영은 일을 그만 두겠다고 했다. 창현은 주영의 마음이 조금쯤 편안해 졌을 때가 오면 둘을 만나게 해 줄 마음이었지만 이런 상황은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창현은 석준을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 힘들다는 거 내가 왜 모르겠냐? 그래도 넌 감싸주는 가족이라도 있고, 어깨 두드려줄 친구라도 있지. 주영 씨는 아무도 없었잖아. 그냥 내 추측이긴 하지만… 요즘은 그 남편이란 사람이 생활비도 내 놓지 않는지 생전 얘기 안던 돈 얘기도 하더라. 우리 은비새엄마도 주영 씨는 지금 사는 게 사는 거 같지 않을 거라면서 너한테 전화해서 다 얘기하라고 하지만, 주영 씨가 그렇게 완강하게 버티는 데야 나라고 별 수 있었는 줄 아냐? 괜히 섣부르게 굴다가 주영 씨 나한테 마저 연락 끊고 잠수 탈까봐 걱정 되서 너한테 연락 못 한 거지…」
창현은 몇 달 사이 꺼칠해진 석준의 얼굴을 보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너는 도대체 밥이나 먹고 다니는 거야? 얼굴은 그 모양을 해 가지고… 몇 달 동안 잠수 타더니만… 너 주영 씨 남편 만나서 결판 짓는 다고 했잖아. 어떻게 된 거야?」
석준은 그 동안 간신히 참아왔던 상처가 벌어지는 것만 같아 거칠어진 얼굴을 손으로 쓸어 내리며 눈물을 감추었지만 갈라지는 음성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주영이 남편… 지금 한국에 없어. 자기 병원 간호사랑 눈 맞아서 미국으로 날랐다구. 그 바보 같은 여자는 지금쯤 그 인간이 벌여 놓은 빚더미에 치여 진짜 죽고 싶을 만큼 힘들 테고…」
창현은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그냥 생활비가 없어서 돈 얘기를 꺼낸 게 아니었다니… 그 동안 석준에게 들은 얘기가 있어 세상에 그런 사람이 다 있나하고 생각만 했었는데 상황은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와이프 말이 맞았다. 그런 인간은 평생가야 정신 못 차린다고 빨리 석준에게 주영이 있는 곳 알려주라고 닦달을 했었는데…
「뭐야? 나도 남자지만 그런 놈 진짜 이해가 안 된다. 어떻게 자기 새끼까지 낳아 놓고 그러고 다닌다냐? 진짜 머리 뚜껑 한 번 열어보고 싶네…」
창현의 어이없어하는 얼굴을 보면서 석준은 한 숨을 쉬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다시 호적정리 안 해서 법적으로는 책임이 없을텐데… 아마도 성준이 때문에 기를 쓰고 빚 갚느라 정신이 없을꺼야. 그러고도 남을 여자니까…」
창현은 석준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영은 아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심장이라도 내어줄 것 같이 굴었었으니까…
「빚이 얼마나 되길래?」
창현의 물음에 석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석준아…」
「언젠가 내가 그렇게 얘기 한 적 있었지… 빚에 치여 죽을 만큼 내가 잘 해주겠다고. 그런데 정말… 그렇게 돼 버렸다」
창현은 쥐어짜듯 간신히 내뱉는 석준의 말에 숨이 막히는 것만 같이 가슴이 답답해져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한 동안의 시간이 지나서야 석준이 고개를 들었고 창현은 말없이 주영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서 친구에게 건네주었다. 메모를 건네면서 창현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친구로서 해 줄 말은 아니다만, 가로막고 서신 너희 어머님 마음도 이해해라. 너 집안 장손 아니냐. 게다가 사업도 물려받아야 하는데 맏며느리라고 데리고 온 여자가 애까지 딸린 이혼녀라면 나라도 흔쾌히 좋다고 하진 못할 것 같다. 네 말대로 피눈물 흘리면서 돌아선 주영 씨 마음도 이해가 가고… 너 이렇게 마음 못 잡는 거 어머님께서도 마음 아파하시더라. 그래도 석준아, 너 사춘기 애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지 않겠냐? 집안에서 좋아라 하는 여자 만나서 그냥 정붙이고 살다보면…」
석준은 창현이 건네준 메모지를 지갑에 넣고 일어섰다.
「고맙다. 오늘은 1절만 해라. 간다」
「어,그래. 전화해. 술 한잔하자 」
황망히 사무실을 나가는 친구의 쳐진 어깨에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창현은 과연 이게 잘 하는 일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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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준은 친구에게서 받은 쪽지를 핸들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조금 전에 못 본 사이 엄청 커버린 성준이와 함께 손을 잡고 오피스텔로 들어서는 그녀를 보았으나 차에서 내려 불러 세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주변이 어두워지고 창백한 디지털 시계가 12시를 넘기는 것을 보고서야 석준은 휴대폰을 들어 메모에 적힌 주영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주영의 꽉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야… 잤어?」
「아뇨. 이 번호… 김 사장님이 알려 줬나요?」
「응… 몇 대 맞더니만 얘기 해 주더라구. 성준이는?」
「시간이 몇 신데요. 벌써 자죠…」
「그럼, 잠깐 나올래? 집 앞이야」
석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얘기하고는 숨죽여 주영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다. 전화가 끊어졌나 하고 휴대폰 액정을 확인하려 한 순간 주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응…」
석준은 순순히 나오겠노라고 대답한 주영의 말이 믿어지지 않아 재빨리 오피스텔의 입구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잠시 후 주영이 입구에 나타나 석준의 차 쪽으로 천천히 걸어와 조수석을 열고 가만히 앉았다. 거의 1년 반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동안 머리도 많이 자라 어깨를 덮고 있었고 방금 샤워를 했는지 그녀가 쓰는 비누 냄새가 차안에 은은히 퍼졌다.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공기 중에 떠돌았지만 누구도 먼저 말을 할 수 없었다. 석준은 흘끔 주영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옆쪽의 창 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알 수는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석준의 눈길과 그의 체온을… 석준의 작은 숨소리나 뒤척이며 다시 앉는 소리에도 온 몸의 신경은 곤두서서 돌아보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오피스텔 앞의 화단에서 고양이가 한 마리 나와 주영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화단 속으로 사라졌다. 경비아저씨의 렌턴 불빛도 몇 번인가 그들 옆을 스쳐 지나갔다. 석준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피웠다. 주영은 크게 숨을 쉬었다. 그 동안 긴장해서인지 맘껏 숨을 쉬지 못한 것 같았다. 석준이 다시 운전석에 앉고 주영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영은 여전히 석준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고양이가 나타났던 화단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시계가 새벽 3시쯤을 표시하고 있을 때 주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 할 말 없으시면 저, 들어가 볼게요」
「예전처럼 얘기 해. 자꾸 그러면 내가 불편해서 말도 못 붙이겠다」
「응… 석준 씨. 이제 그만 가. 나중에 연락할게」
석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주영은 차에서 내려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석준은 멀어지는 주영의 뒷모습을 보다가 더 이상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눈을 감고 긴장된 몸을 편안히 시트에 기댔다. 깜빡 잠이 들었던 듯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주영이었다.
「잠깐 올라와서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가. 503호야」
석준은 얼른 눈을 비비고 차에서 내려 주영의 집으로 갔다. 전에 혼자 살던 오피스텔보다도 작은 원룸이었다. 성준이의 책상으로 보이는 곳에는 예전에 백화점에서 성준이에게 사준 로봇이 한쪽 주먹이 없어진 채 서 있었고, 한 눈에 보기에도 아이의 짐말고는 별로 보이는 것이 없는 조악한 살림살이의 한 가운데에 그녀가 어색하게 서 있었다.
「앉아… 커피 하나에 설탕 하나 맞지?」
「응…」
작은 다과상을 가운데 놓고 둘은 커피 잔만을 응시했다. 시계바늘 소리가 너무 커서 뭐든 얘기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석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래… 잘 지냈어?」
「응… 석준 씨는?」
「나도…」
그리고 또 한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우리 거짓말하지 말자. 주영아… 니가 보기에 내가 잘 지낸 사람처럼 보여?」
석준의 애처로운 목소리에 마음이 무섭게 흔들리지만 주영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석준 씨가 잘 못 지낼 이유 없잖아. 아직 결혼 안 했다면서? 김사장님이 얘기 해 줬어. 집안에서 걱정하실 텐데… 성준이 만한 아이 있어야 되는 나인데 아직도 결혼 안하고 있으면 어떻해? 종갓집 종손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고 주억거리는 주영의 말에도 다시 심장에서 피가 도는 것 같은 희열을 느끼는 석준이었다.
「나 결혼 못해. 너한테 마음 다 주고 다른 여자랑 결혼해서 살면 그 여자 인생도 불쌍하잖아. 그런 맘 더 잘 알만한 사람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글쎄… 난 남자들 말 안 믿어. 못 믿겠어. 어떤 책에서 보니까 사랑에도 유효기간이란 게 있다더라. 뇌에서 나오는 호르몬에 내성이 생기고 나면 사랑이란 감정도 없어지는 거라고.. 그 기간이 딱 세 달 정도 밖에 안 된대. 그래서 그런가? 성준 아빠도 세 달 정도면 여자가 바뀌는 거 같더라. 석준 씨도 그렇지 않을까 내심 생각 해 봤지. 우리 딱 세 달 살았잖아. 그러니까 유효기간이 끝나갈 때쯤 헤어졌으니 석준 씨도 미련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창현의 말만 아니었다면 주영에게 자신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을 지도 모를 만큼 주영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석준은 주영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자신만은 주영에게 솔직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같잖은 자존심 따위는 모조리 버릴 때도 있는 것이다.
「난… 아직도 그 유효기간이 안 끝난 거 같아. 주영아, 혼자 있을 때도 널 생각만 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제발 우리 거짓말하지 말자. 너 자꾸 이렇게 비켜서는 거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석준의 말에 주영은 눈물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피를 토할 만큼 그리워하던 얼굴인데도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무너질 자신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비켜서고 싶어, 석준 씨. 나보다 더 나를 잘 안다고 얘기하는 석준 씨 이면서 지금 내가 이러는 이유를 몰라서 이렇게 나한테 힘들게 구는 거 아닐 것 아냐? 성준 아빠가 다 얘기했어. 자기가 그 사람한테 만나자고 했다면서? 아이 자기가 맡겠다고, 성준이가 커서 아빠 찾으면 보내주겠다고 그랬다면서? 그 사람이 날 얼마나 비웃고 조롱했는지 알아? 나같은 사람을 하강한 선녀처럼 떠받드는 어머님이 이해가 안 된다고, 애 버려 두고 자기 본분도 망각하고 연애질이나 하고 돌아다니는 화냥년이라고, 성준이가 자기 자식이 맞기는 하냐고… 나중에는 성준이까지 때리고…」
주영이 말을 이어갈수록 석준의 표정은 무섭게 변하고 있었다.
「뭐? 폭력까지 휘둘렀단 말이야? 내 이 자식을!」
주영은 눈물을 닦아내고 석준의 넥타이를 노려보았다.
「됐어, 그거 석준 씨가 만든 일이잖아? 석준 씨가 끼어 들지만 않았으면 나하고 성준이 그냥 그 사람 무시하면서 살 수 있었는데… 왜 그랬어? 처음부터 난 아니라고 했잖아. 당신 욕심내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안 된다고 했잖아」
처음에는 원망하고 싶었다. 그래서 석준을 떼어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리라고 마음먹었었다. 석준의 눈이 아니라 넥타이만 보면서 얘기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던 생각도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주영이 처음을 사주었던 넥타이는 빛이 바래지고 매듭부분은 약간 헤져 있기까지 했다. 외면하려고만 했던 그의 아픔이 주영의 가슴에 감당할 수 없게 다가왔다. 어깨를 떨면서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는 주영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석준의 가슴에 한 단어, 한 음절씩 와서 박혔다. 거짓말도 그렇다고 진실도 아닌 말들… 자신이 원한 것이 이게 아닌데 왜 그녀는 한 걸음씩 비켜나서 자신과는 절대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처럼, 평생을 그리워만 하고 만날 수는 없는 평행선처럼 지내야 하는 것인지…
「주영아… 너도 그렇고 성준이도 그 사람 때문에 너무나 힘들었고, 앞으로도 힘들꺼야. 난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무나 힘들어. 다른 사람도 아닌 이주영, 성준이 새엄마인 니가 나를 사랑해 주지 않기 때문에 매일매일 죽어가… 그런데 너는 아직도 이런 나를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것이 모두를 편안하게 해 줄 거라는 바보같은 생각으로 너 자신을 불행하게 하고있어. 이주영… 이게 진실이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 권리가 있어. 나흥균은 하는데 왜 너는 못해? 성준이 때문이라는 소리는 하지도 마. 성준이를 방패로 삼아서 너의 죄의식을 감추려고 하지 말라고. 나중에 성준이에게 얼마나 많은 책임을 떠넘기려고 그래? 그러면 너나 그 인간이나 다를 게 뭐야? 아니, 니가 더 나쁜 거야. 아이를 이용하는 니가 더 비겁한 거라구」
그동안 주영에게 해 주고 싶은 말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고작 이렇게 아픔을 주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는 것인지… 석준은 자신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그만. 그만해, 제발..」
괴로워하는 주영을 끌어안으면서 석준은 더 이상 눈물을 참지 않았다.
「아니, 이 바보 같은 여자야… 나 너를 처음 본 그때나 지금이나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 그래, 내가 진짜 나쁜 놈인거지. 성준이랑 놀아주고 성준이를 이용해서 유부녀인줄 뻔히 알면서도 너를 원했으니까. 네가 이혼한다고 했을 때 너의 눈물과는 상관없이 이기적인 욕심으로 기뻐했으니까. 이젠 정말 내 안에 가뒀다고 안심했었는데 그 자식이 성준이를 이용해서 널 빼앗아 갔을 땐 진짜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었어. 죽여버리고 싶었다구! 그나마 참은 건 니가 날 사랑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판단을 했을 거라는 믿음 하나 때문이었어. 한 번도 말은 안 했지만, 너 나 사랑하잖아.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거면 그렇다고 대답해봐. 아닌거야?」
주영은 석준의 품에서 빠져나와 석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석준 씨… 내 마음이 무슨 소용이 있어? 당신은 당신의 책임이 있는데 나까지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거야? 당신 새어머니말씀 때문에 내가 도망친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 아니라구. 난 내가 감당하기 힘들어서 도망친 거야. 당신 말대로 성준이의 뒤로 비겁하게 도망친 거라구. 당신을 떠나는 게 당신과 함께 하는 미래보다는 덜 두려웠기 때문에 그래서 도망친 거야」
주영의 눈동자는 아직도 석준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지만 주영은 두렵다고 했다. 석준은 주영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제발… 대답해 줘…
「이 바보야! 날 사랑하냐고 물었단 말이야. 날 사랑하냐고!」
석준의 불타는 듯한 눈길을 피하지 않고 주영은 소리쳤다.
「그래, 사랑해! 사랑한다구! 하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성준이는 당신 핏줄도 아닌데, 나는 또 이렇게 초라한 모습인데…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면 돌아보지 말라고 당신이 그랬잖아. 이젠…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어, 석준 씨. 난 당신에겐 아닌 사람이야…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원해도, 아닌 건 아니야!」
주영의 절규에 석준은 무너졌다.
「주영아…」
석준은 주영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주영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그 외로움과 두려움들을 감싸안고 싶었지만 그녀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의 손길을 거부했고 마주하는 따스한 눈길조차도 외면했다. 석준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졌을 때 주영은 조용히 말했다.
「그만 가… 그리고 어머님 말씀대로 결혼해서 예쁘게 살아. 난 잘 살 수 있어. 내 방패 성준이가 있잖아. 결코 약해지지 않을 자신 있어. 그리고 먼 훗날 성준이가 자라서 나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때, 그때 당신 곁에 아무도 없다면… 우리 그때 다시 만나. 옛 추억을 더듬어가며 쓸쓸하지 않게… 그때는 떠나라고 해도 떠나지 않을게…」
석준은 '다시 기다려야 하는 걸까?'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지금은 아무리 얘기해도 돌아올 주영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네가 없으면 잠들기조차 힘겨운데… '
「피곤하다. 주영아… 나 잠깐만」
석준은 중얼거리며 정신을 놓았다. 주영은 놀라 옆으로 쓰러지는 석준을 안았지만, 잠시 후 고르게 숨을 쉬는 석준이 잠들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의 양복저고리를 벗기고 베개를 가져다 베어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주영은 박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어머니, 저예요. 주말동안 성준이 좀 봐주세요. 아뇨, 일이 좀 많아서요. 네… 12시 반이면 학교에서 올꺼예요. 네? 그러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내일 데리러 갈게요. 네… 들어가세요」
다행히도 성준이가 학교에서 끝날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시겠다는 말씀에 자신의 몸에서도 긴장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성준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그를 본다면 아이에게 설명하기가 힘들어 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주영은 상을 치우고 코까지 골면서 잠든 석준의 얼굴을 보다가 책상에 앉아 일을 하기 시작했다. 석준의 깊은 숨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와 주영은 자신도 모르게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딱딱한 바닥이 불편해 잠에서 깬 석준은 잠이 든 주영을 끌어다 안고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주영은 가만히 눈을 떴다. 방안에는 저녁 석양이 비춰 들어와 방안 구석구석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석준의 숨결이 목덜미 뒤를 간질이고 있었고 사랑스런 그의 심장이 자신의 것과 함께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한 번 맛보았던 달콤한 행복이 금단의 열매처럼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것만 같아 주영은 눈을 질끈 감고 일어나 앉았다.
「조금만 더 누워있자. 아직은… 힘들어」
석준의 메마른 음성이 주영의 발목을 잡았다. 주영은 유혹에 이기지 못하고 다시 석준의 팔을 베고 누웠다. 눈물이 흘러 석준의 하얀 와이셔츠소매를 적셨다.
「나… 다음달에 미국으로 가. 주영아, 그때까지만 내 곁에 있어주면 안되겠니? 네 말대로 우리 앞으로 20년이든 30년이든 헤어져 지내려면 그동안 곱씹을 추억이라도 있어야 살 수 있을 것 같아. 부탁이다」
석준은 주영을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속삭였다. 주영은 돌아누워 석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석준 씨…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다시 시작하면 끝낼 수 없다는 거 알잖아…」
석준의 눈빛이 애절하게 주영의 얼굴을 헤매고 다녔다.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해 봤어. 너를 데려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목록까지 만들어봤던 나야. 심지어는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고 나도 이혼을 하면 너와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해 봤어. 하지만 그건 네가 원하는 게 아니잖아. 그렇지?」
주영의 눈이 눈물을 가득 담은 채 반달이 되어 미소짓고 있었다. 석준은 한숨을 쉬며 주영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결론은 하나였지. 너를 허락하시도록 우리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 정말 힘들더라… 그래도 지금처럼 미소짓던 네 얼굴이 떠올라서 참을 수 있었어」
주영의 눈꼬리를 타고 한 방울의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석준의 입술이 이내 다가와 주영의 눈가의 눈물을 마셨다.
「내 평생을 걸고 지켜주고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은 이주영… 너 하나 뿐이야. 이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어. 너 떠난 후에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널 사랑한 시간들을 후회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너도 그랬지?」
주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석준은 주영의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부탁이 하나 있어」
주영의 눈을 한 동안 보고만 있다가 석준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 잊지 말고 기다려 줘, 주영아. 다시 만나는 날에는 널 이렇게 힘들게 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 할 테니… 날 믿고 기다려 줄 수 있지?」
주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석준 씨를 위해서는 뭐든 해 줄게. 나 자기한테 빚 많잖아」
「그래…」
석준은 힘들게 미소짓는 주영의 입술에 키스했다. 주영의 흐느낌이 새어나오는 입술을 거듭 맛보면서 석준은 주영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더듬어 불면의 밤이면 미치도록 그리워했던 포근한 가슴을 찾았다. 주영의 작은 비명에 석준은 고개를 들어 주영의 눈을 보면서 허락을 구했고 주영은 그의 머리를 가슴에 안아 주는 것으로 허락했다. 석양은 어느새 보라 빛으로 마지막 절규를 보내고 있었다.
그 날 밤을 끝으로 석준은 주영의 곁을 떠나 회사로 돌아왔다. 그동안 소홀했던 업무들을 처리하고 미국 지사로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주영이 생각 날 때마다 석준은 주영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주영에게 전화해서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지만 그러게 되면 미국으로 떠나지 못할 것만 같아 그 마음조차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부모님은 틈만 나면 결혼을 언급하셨지만 석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떠나기 전날 밤, 그는 아버지와 마주앉아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껍데기뿐인 저로 인해 누군가를 또다시 상처 입히고 싶지 않습니다. 새어머니와 행복하신 아버지이시니까 제 마음 누구보다 이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힘드냐?」
석준은 위로하는 듯한 아버지의 한 마디 말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네…」
김 회장은 안경너머로 너무나 확실하게 보이는 아들의 눈물에 가슴이 저려왔다.
「사람은 누구나 결정하기 어려운 것을 결정하도록 강요당하는 순간이 온단다. 나도 너희 새엄마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 네 증조부께서 친일파 아니셨냐? 처갓집 집안에서 반대가 대단했었지. 그때 네 할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구나. 그렇게 힘든 결정을 하는 순간에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는 게 진짜 남자라고 말이다. 오늘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순간이 오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만, 그때 어떤 마음으로 아버지께서 내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겠구나」
김 회장의 따스한 말에 석준은 고개를 들고 아버지를 보았다. 김 회장의 얼굴에는 회한의 미소가 있었다.
「아버지…」
놀란 석준의 모습을 보면서 김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2년 가까운 시간동안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던 아들의 모습들에 많은 생각을 해왔던 김 회장이었다. 어느 곳 하나 맘에 들지 않는 구석 없이, 한번도 마음 아프게 하는 일 없이 부모의 마음에 흡족한 아들이었는데 그런 석준의 시들어 버린 모습에 가슴이 아픈 것은 김 회장이나 최 여사나 마찬가지였다. 억지로라도 선 볼 여자들의 사진을 들이밀며 최 여사는 석준의 마음을 돌려보려 갖은 애를 다 썼지만 아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차라리 화를 냈다면 설득하기가 더 쉬웠을 지도 모르겠지만 석준은 화는커녕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을 했다. 사진을 들고 방을 나서던 눈에 비친 아들의 어깨가 너무나 안쓰러워 보여 눈물을 찍어내던 아내의 어깨를 안고 이렇게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내내 해왔던 김 회장은 결국 석준을 미국에 보내서 고생을 좀 시키면 안될까 했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다 보면 한 2년쯤 지난 후엔 마음이 식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지만 이런 석준을 보면 그것도 기약할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었다. 김 회장은 기대와 설렘으로 빛이 일렁이는 석준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난 너의 결정을 믿는다. 어떤 결정을 하던 그건 네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라고 믿어줄 테니 걱정말고 다녀 오거라」
김 회장은 떨고 있는 아들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지었다.
석준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새로운 용기와 희망이 솟아나고 있었다. 점점 멀어져 가는 주영이 있는 하늘에 기쁜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자신의 결정을 믿어 주신다던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석준은 미소지은 눈을 감았다.
얼마 전 흥균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다시 희진과 함께였다. 박 여사는 희진과 나란히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는 앓아 누워버렸다. 성준이는 이젠 제 아빠에게 새엄마와 왜 뽀뽀하지 않느냐고 묻는 아기가 아니기에 미국에서 사왔다는 선물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머리를 싸매고 돌아누운 박 여사 앞에 죽 그릇을 놓고 주영은 애원하고 있었다.
「새어머니… 드시고 기운 차리셔야죠. 이렇게 계시면 저하고 성준이는 어떻게 하라고 이러세요. 제발…」
박 여사는 또다시 흐느끼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이꼴저꼴 안 보려면 일찍 죽었어야 하는데… 내가 오래 살아서 이런 꼴을 다 보고… 내가 죽어야지… 죽어야지…」
주영은 입술을 깨물고 박 여사를 억지로 일으켜 앉혔다.
「새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성준 아빠 저러는 게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니고 저 성준이랑 씩씩하게 잘 살잖아요. 어서 이것 좀 드세요」
주영은 박 여사의 입에 죽을 떠서 가져다 댔다. 박 여사는 한 입 받아먹고는 주영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주영아」
「네」
「흥균이, 결혼 시켜야겠다」
「네?」
박 여사의 말에 주영은 놀라 죽 그릇을 엎고 말았다.
「아무래도 흥균이 그 여자랑 결혼 시켜야겠단 말이다. 너 이제는 여기 오지 말아라. 성준이도 보내지 말아. 나 다시는 그 녀석 안 봐줄란다」
「새어머니!」
박 여사는 머리에 둘렀던 띠를 풀어내고 일어서서 방을 나갔다. 주영은 그릇을 치울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직 안나가고 뭐하고 있는 게야? 흥균이 제 처 될 사람하고 올게다. 어서 가거라」
「새어머니! 이러시면 안되요. 성준이는 어떻게 하시려고…」
박 여사는 덜덜 떨면서 자신의 다리에 매달리는 주영을 내려다보았다.
「성준이는 니가 데려가거라. 그렇게 혹 달린 과부소리 듣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난 내 아들 데리고 새 며느리 효도 받으면서 살란다」
매몰차게 말하는 박 여사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올려다보는 주영을 뿌리치고 박 여사는 이부자리를 개키고 얼굴에 로션을 바르는 등 부산스럽게 왔다갔다했다. 주영은 방바닥에 흐른 죽을 치워내고 일어섰다.
「저 가볼게요, 새어머니」
주영이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쟁반을 들고 나가자 박 여사는 눈썹을 그리다 말고 가슴을 치며 입을 막았다. 혹시라도 울음소리가 새어나가 주영이 다시 들어올까 싶어 더욱더 세게 입을 막는 박 여사였다. 집에 돌아온 주영은 멍하니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돌변한 시새어머니의 태도가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예뻐하시는 성준이가 눈에 밟혀서 어쩌시려고 성준이까지 안 보신다는 건지… 하지만 독하게 마음먹은 박 여사의 의지대로 흥균의 병원에 입원해 버린 탓에 주영은 그 날 이후로 시새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 여전히 적당히 무심한 동서인 성희조차도 주영의 전화를 피하다가 끝내는 전화번호를 바꿔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주영은 성준이를 학교에 보내고 화장실에 들어가 앉아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신진단 시약을 꺼내들었다. 두 개의 파란 줄이 나타나면 임신이라고 쓰여있는 포장을 벗겨내고 숨을 들이쉬었다. 잠시 후, 주영은 선명하게 두 개의 줄이 나타난 키트를 들고 흐느꼈다. 석준이 그렇게도 원했던 그들의 아이가 생겼는데… 맘껏 기뻐해 줄 수 없는 상황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주영은 임신진단 키트를 자신의 속옷 서랍 깊숙이 넣어두고 마지막으로 시새어머니에게 가기 위해 외투를 꺼내 입었다. 이제는 정말로 흥균에게서, 흥균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이었다. 그 결심을 하기까지 너무나 아파서 힘들었지만 성준이를 위해서라도 다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영은 숨을 들이마시고 박 여사가 입원해 있는 병실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갔다. 다행히도 다른 사람들은 없이 박 여사 혼자 누워 있었다.
「새어머니, 저 왔어요」
「네가 여긴 왠일이냐?」
박 여사는 꼬장꼬장한 눈빛만을 보일 뿐, 너무나 허약해져 일어나 앉을 수 조차 없는 듯이 보였다. 주영은 애써 미소지으며 담담하게 말하려 애썼다.
「새어머니, 저 이제 어머님 말씀대로 먼 곳으로 이사가서 살려구요. 이사해서 자리 잡고 연락드릴 테니까 혹시라도 성준이 보고 싶으시면 연락주세요. 그리고..」
주영은 가만히 박 여사의 마르고 버석버석한 손을 그러쥐었다. 자신도 모르게 쏟아진 눈물 속으로 주영은 간신히 말을 마칠 수가 있었다.
「어머님… 정말 감사합니다. 성준이 열심히 키울게요」
박 여사의 지친 눈매에도 이제는 다 말라버린 줄만 알았던 눈물이 한 줄기 긴 꼬리를 그리며 흘러내렸다. 주영의 손을 토닥거리던 박 여사는 곧 희진이 온다고 어서 가라고 재촉했고 주영은 시새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하고 병원을 나섰다. 이제는 더 이상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들른 산부인과에서 아주 작게 보이는 아기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 한 후 주영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렸다. 석준은 기다려달라고 했고, 자신은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 날의 약속으로 생긴 아기였다. 성준이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석준은 간밤에 꾼 이상한 꿈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오시더니 자신에게 꽃을 가득 실은 트럭을 맡아 달라고 하시면서 주고 가신 것이다. 생전가야 꿈 한번 꾸어 본 적이 없었는데 현실처럼 생생한 것이 왠지 불길 한 꿈이 아닌가 싶어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 것이었다. 결국 석준은 서울로 전화를 했다. 창현에게라도 주영의 소식을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여보… 세요…」
잠결에 받았는지 목소리가 짜증이 가득했다. 시차를 계산 안하고 자는데 전화를 했나보다. 석준은 웃으며 창현에게 말했다.
「아, 나다. 자는데 깨웠구나?」
「그래… 이 못된 녀석아. 좀 나중에 다시 해」
창현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전화를 끊으려 하자 석준은 얼른 말했다.
「잠깐만 창현아! 주영이… 무슨 일 없어?」
창현이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그럼 그렇지… 주영 씨 별일 없다고 전해 달라더라. 왜?」
「그게…」
석준은 잠시 망설였다.
「내가 간밤에 꿈을 꿨는데…」
「어? 너 꿈 같은 거 안 꾸잖아」
「그러니까 이상해서 말이야… 무슨 일 있는 거 아닌가 걱정이 돼서…」
「무슨 꿈인데?」
창현은 금세 잠을 털어 낸 목소리로 호기심을 드러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꽃이 하나 가득 실린 트럭을 주시고 가시더라. 너무 생생해서 꽃 냄새까지 맡았다니까. 갑자기 돌아가신 분이 꿈에 보인 것도 그렇고… 불안해」
한 동안 창현에게서 아무 말이 없었다. 전화가 끊어졌나 싶을 정도로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서야 창현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태몽 같다」
「뭐라구?」
석준은 전화를 떨어뜨릴 뻔하다가 다시 전화기를 고쳐 쥐고 물었다.
「확실해?」
「은비 새엄마가 은비 가졌을 때 실뱀 바가지로 푸는 꿈을 꿔 대서 태몽은 웬만큼 안다」
석준은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다른 사람의 태몽을 대신 꿔 주었을 리는 없고 주영이 아기를 가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국으로 당장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창현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할 거 없어, 김석준. 주영 씨… 사라졌어」
「뭐? 금방은 별일 없다고 했잖아!」
석준은 천국과 지옥을 한 번에 경험하는 것만 같았다. 기다린다고 약속했는데… 그럴 리가 없다.
「그 주영 씨 남편이라는 사람, 결혼식 올릴 거라고 성준이 데리고 멀리 나가 살 거라고 하면서 혹시라도 너한테 연락 오면 별일 없이 잘 지낸다고 얘기 해달라고 하더니 얼마 전부터 연락 안 돼」
석준은 눈을 감고 생각을 해 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흥균이 결혼을 한다면 주영이랑 한다는 소린지 멀리 나가 산다는 소리는 또 무슨 뜻인지…
「창현아, 부탁하나하자」
「그래」
「나 곧 나갈 테니까 그때까지 주영이 좀 찾아봐 줘」
석준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창현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래, 열심히 찾아보마. 일이나 제대로 하고 와. 임마, 괜히 어른들한테 밉보이지 말고」
「고맙다. 그럼, 수고해」
전화를 끊으며 투덜대는 창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석준은 전화를 끊을 생각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태몽… 결혼… 멀리 나가 산다… 창현에게 들은 모든 얘기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었다. 주영과의 마지막 밤에 생긴 아이라면 지금은 벌써 6개월이 지나가고 있을 것이었다. 조금 동그랗게 부푼 배를 한 주영의 모습이 떠올라 석준의 심장이 부르르 떨려왔다. 석준은 다시 집으로 전화를 했다. 창현 처럼 잠에서 덜 깨신 아버지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석준은 다급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도와주세요」
「석준이냐? 무슨 일이야?」
김 회장은 석준의 떨리는 목소리에 급하게 일어나 앉았다.
「석민이든 석호든 여기로 빨리 보내주세요. 저 한국에 들어가야겠어요」
「뜬금 없이 무슨 소리야? 이유를 말해야 돕던지 말던지 할게 아니냐?」
김 회장은 어젯저녁까지만 해도 새로 지어 올릴 공장 부지 문제가 잘 해결 됐다는 보고를 한 석준이 새벽에 왜 이렇게 허둥대며 전화한 것인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아버지, 할아버지 되실꺼예요. 저 애 새엄마 찾으러 가야 되요. 도와주세요」
석준의 말에 김 회장은 남아있던 잠기운이 싹 달아나는 것만 같았다.
「뭐야? 그게 정말이냐?」
「저 내일 비행기로 들어 갈 테니까 석호든 석민이든 빨리 보내주세요」
김 회장은 계속 동생들을 보내라는 말만 하는 석준이 꽤나 급하긴 급한 모양이라고 이해가 가면서도 새벽잠을 깨운 것이 괘씸해 호통을 치고 말았다.
「야, 이 녀석아! 정신이 있는 게야 없는 게야? 이 흰 새벽에 전화해서 뭐든 내 놓으라고 하면 다 들어줄 것 같더냐? 나이는 어디로 먹고 이런 소란을 부려?」
김 회장은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입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약속대로 아들의 결정을 믿어줄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아들의 풀 죽은 모습은 더 이상 가슴이 저려 두고 볼 수 없기는 아내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아들이라고 있는 세 녀석이 하나같이 집안에서 하라고 하는 결혼은 싫다고 빼고 다니더니 큰 녀석이 드디어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김 회장의 호통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최 여사가 일어나 앉으며 김 회장의 안색을 살폈다.
「무슨 일 이예요?」
김 회장은 아내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고 석준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은 거기 일 마무리 해 놓고 와라. 한 일 주일쯤이면 석호를 보내마. 일 똑바로 못해놓고는 올 생각 말아. 그럼 일해라」
김 회장은 끝까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한 뒤 전화를 끊고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일 이예요? 이 밤에…」
「당신 할머니 된다네?」
「네?」
김 회장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아내를 안아 누이며 말했다.
「내가 꾼 꿈 말이야. 당신이 태몽 같다고 했잖소? 그만 잡시다. 내일부터는 바쁘겠어」
최 여사는 아직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남편의 팔을 베고 누웠다.
주영은 한 동안 허리도 펴지 못하고 호미질을 한 끝에 한 이랑의 밭의 돌을 골라내고 비닐을 씌웠다. 성준이는 열심히 씌워놓은 비닐 위에 싸리 막대를 꽂아 고추 모종을 심을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성준아, 배 안 고파?」
봄볕에 제법 그을린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을 허름한 남방에 쓱 닦아내며 성준이는 밝게 웃었다.
「새엄마야말로 좀 쉬세요. 그러다가 세죽골 할머니 말씀대로 아가 빨리 나오면 어떡해요? 저야 동생 빨리 보면 좋지만요」
「어린것이 못하는 말이 없어!」
주영은 당황해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성준이에게 눈을 흘겼다. 성준이는 싸리 막대기를 그러쥐고 헤헤거리며 웃었다. 태양 빛이 너무나 아찔하게 좋은 오후였다. 성준이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웃자라 있었다. 성준 아빠의 결혼으로 지난 늦가을에 대전에서도 한참 들어오는 지리산의 끝자락에 있는 이름도 이상한 쌍치리라는 곳에 둘만의 작은 둥지를 틀고 전교생이 서른 명도 안 되는 작은 분교에 다니면서도 성준이는 불평한마디 하지 않고 씩씩하게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한 편으로는 성준이를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좋은 공기 마시면서 적당한 햇볕을 보면서 맘껏 산과 들로 뛰어다니더니 성준이의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이 곳으로 이사오면서 들고 온 것이라고는 성준이와 자신의 옷가지와 책 몇 보따리가 전부였다. 흥균과 살면서, 혹은 그 없이 살면서 힘들었던 시절을 생각이 나게 하는 물건들은 모두 다 버리고 왔다. 아마도 그 오피스텔에 새로 이사오는 사람이 유용하게 잘 쓰지 않았을까? 성준이는 다섯 번째 생일 선물로 받은 로봇만큼은 신경 써서 챙겼다. 성준이의 행복한 유아시절은 사실 그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그 로봇을 볼 때마다 성준이가 안쓰러워 지는 주영이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주영을 안아주고 위로하는 것은 이제 3학년에 올라간 성준이었다. 새엄마의 임신에는 의외로 담담한 반응을 보였던 성준이었다. 새엄마에게 아빠말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에 아이는 너무나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새엄마는 아빠처럼 여러 사람이 아니잖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러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야」
성준이의 기억에도 별로 없을 듯한 아빠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할머니께서 새엄마를 잘 돌봐드리라고 하셨어요. 할머니는 새엄마를 정말 사랑하셔서 성준이한테 맡기시는 거라고… 그러니까 새엄마는 성준이만 믿으면 되요」
어느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봄밤에 처음으로 아이의 태동을 느끼며 외로움에 눈물을 삼키는 주영을 꼭 안아주면서 결의에 찬 눈빛으로 엄숙하다 싶게 말하던 성준이었다. 주영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씩씩하게 웃어 보였었다. 집에는 따로 전화를 놓지 않았지만 대신에 성준이의 공부를 위해 인터넷은 연결해 놓았다. 동네에서 인터넷이 연결된 집은 몇 집이 안되었기 때문에 빨간 벽돌 작고 예쁜 성준이네 집은 동네 꼬맹이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성준이는 시골로 이사오고 더 씩씩해지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심지어는 동네 할머니들의 인기를 독차지해서 속 고쟁이 속의 사탕은 모조리 성준이 꺼라는 할머니들의 잔소리에 장이 서는 날이면 주영은 종류별로 알사탕을 사다가 노인정에 가져다 놓을 정도였다. 낮에는 집 뒤의 작은 텃밭에 고추니 콩이니 하는 것들을 심고 가꾸고 밤이 되면 성준이의 공부를 봐주고 다시 아침해가 떠오르기 전에 일어나 마지막으로 김창현 사장에게 받았던 책을 번역하는 일에 매달렸다. 이제는 제법 배도 불러와서 임산부임을 감추지도 못할 정도였다. 자신의 몸매가 엉망이 되었다는 것은 성준이의 어버이날 선물을 봐도 알 수 있었다. 성준이는 그동안 모아 놓았던 돼지저금통을 털어 장터에서 새엄마에게 입힐 몸빼바지를 사왔던 것이다. 주영은 꽃분홍 색의 몸빼를 보고, 웃으면 성준이가 서운해 할까봐 맘껏 웃지도 못하고 운동복 바지 위에 입고는 아들 앞에서 패션쇼를 했다. 뱃속의 아기의 예정일은 한 여름이었다. 한창 농사일이 바쁠 때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뒷집 아주머니에게 산후조리를 부탁해 놓은 상태였다. 사람 좋은 철용네 아주머니는 다른 아주머니들처럼 애아빠가 누구냐는 난처한 질문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탁을 한 것이었다. 기저귀천이나 배냇저고리들은 벌써 사다가 날씨가 좋고 바람이 부는 날이면 거풍을 시키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마당에 걸려있는 기저귀나 아기 옷들을 보면 성준이는 무척 좋아했다. 자기는 애기 때 어땠는지 이렇게 조그마한 옷을 입을 수 있었냐고 질문을 한바가지를 해댔다. 주영은 마지막 기저귀를 널고는 손으로 해를 가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길게 꼬리를 그으며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벌써 나온 매미들은 여름이 깊어 가는 것을 알리려는 사명감에 악을 쓰며 울어댔다. 석준은 기다리라고 했다. 자신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징표로 아이가 몸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주영은 한 숨을 쉬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를 기다리는 것인지 많이 생각 해 보았다. 그를 아프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받아들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이미 마음에서 접었지만 그가 말한 대로 언제가 됐든 만나는 그 날에는 절대로 자신을 힘들게 하지 않겠다는 그의 약속을 믿었다. 믿고 기다릴 것이다. 꼭꼭 숨어 피해 다니면서, 하루에도 열두 번씩 그에게로 달려가는 마음을 다잡고 있었던 그때에도 그렇게 운명 같은 냄새를 풍기며 만나지던 그였기에 기다리고 싶었다. 그의 말도 어쩌면 자신이 이렇게 아픔을 견디고 외로움을 참으며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를 보내는 것보다 더욱 힘든 것이 그를 잊은 듯이 기다리는 일이었다면 그때 그렇게 쉽게 보내주지 않았을 텐데, 어리석게도 보내고서야 뒤늦게 깨달은 자신에게 바보라고 수없이 후회했었다. 하지만, 아이가 있다. 아마도 석준을 빼 닮은 귀여운 여자아이일 것이다. 적어도 석준에게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려야 하겠지만 김창현 사장을 통해 알리기는 싫었다. 김사장이 준 마지막 책은 교정 작업 중이었다. 어차피 전화도 없어 연락하면서 교정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확실하게 해서 보낼 생각이었다. 오빠처럼 푸근하게 대해 주었던 김창현 사장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이번 책을 보내면 아마도 정말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영은 방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어놓고 작업을 시작했다. 책은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 책을 보내고 나면 아이가 태어날 때가 되어있을 것이었다. 오늘은 하늘에 높게 걸린 뭉게구름조차도 석준의 얼굴처럼 보였다.
' 보고싶어. 석준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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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현은 주영이 보내온 소포를 들고 정신 없이 석준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석준은 일을 하다 말고 뛰어들어오는 창현을 보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갑자기…」
창현은 석준의 책상 위에 포장을 뜯지도 않은 소포을 턱하니 올려놓고는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봐! 주영 씨가 보낸 거야」
「뭐?」
석준은 놀라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소포를 집어들고 주영의 이름을 확인했다. 전라남도, 구례군… 석준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창현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내가 마지막으로 주영 씨에게 부탁했던 일이었어. 연락도 되지 않고 해서 다른 번역가한테 맡기고 있었는데… 하하… 나 돈 이중으로 날리게 생겼다」
석준은 소포에 적힌 주소를 옮겨 적으려 노력했지만 손이 떨려와 도저히 글씨가 써지지를 않았다. 그렇게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고 찾아다녀도 땅으로 꺼진 듯이 나타나지 않던 그녀가 같은 한국 땅에 있었다. 이제 거의 아기가 태어날 시간이 다가와서야 연락을 해 오다니…
「가자!」
창현은 석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세 달 전, 부랴부랴 서울로 돌아온 석준은 거의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주영을 찾아 헤매고 다녔다. 주영의 오피스텔은 물론이고 흥균에게 찾아갔을 정도였다. 흥균을 다그쳐 성준이의 주민번호를 알아내서 교육부에 알아보기까지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이제는 주영이 먼저 어디로든 연락해 오기만을 기다라고 있는 중이었는데… 하긴, 이렇게 두메산골에 숨어있었으니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오밤중이 다 되어서야 겨우 주영이 사는 곳의 읍내에 도착했고 창현은 당장 찾아들어 가자는 석준을 겨우 설득해 허름한 여관에서 쉴 수 있었다. 작은 식당에서 3천 원에는 도저히 송구해서 먹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푸짐한 저녁을 먹고 여관에 들어와 잠을 청했다. 석준은 캄캄한 천정을 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모를 거다, 내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건 아닌지 두려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주영이가 날 보고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두려워서 잠이 오질 않는다」
「미친 놈… 그래, 사람들 달달 볶아치면서 찾을 때는 언제고 이젠 찾으니까 어쩌고 어째? 세상에 너처럼 유난스럽게 연애하는 사람은 또 없을 꺼다」
창현의 심술궂은 말투에도 불구하고 석준은 한 숨을 쉬었다. 자신과 아버지의 꿈만으로 주영이가 정말 임신해 있을 것인지도 때로는 궁금했지만 주영과 자신의 아이가 커가면서 점점 배가 불러오는 그 순간들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임신이 아니기를 바랬던 때도 많았다. 아버지는 아직도 새어머니를 설득하지 못해 쩔쩔매고 계셨지만 이제는 아무리 새어머니의 반대가 심하다고 해도 주영을 기다리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주영에게 남긴 부탁이 오히려 자신의 발목을 이렇게 잡을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때 주영의 어떤 말도 듣지 않고 미국으로 함께 들어갔을 텐데… 과거의 쓰린 기억들이 자꾸만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석준을 옆에 두고 하루종일 운전하느라 피곤했는지 창현은 코를 골면서 잠이 들어있었다. 동이 터 오기가 무섭게 석준은 창현을 흔들어 깨워 길을 재촉했다.
「야… 아무리 시골이지만 이렇게 일찍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겠냐? 아침이라도 먹으면서 길도 물어보고 혹시 모르니까 성준이네가 어디냐고 물어보는 게 순서야」
창현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이런 마음에 밥이 넘어갈리 없는지라 석준은 짜증을 부렸다.
「밥이 넘어가냐?」
「그래, 난 넘어간다. 이런 시골 밥상 언제 또 먹어보겠냐?」
얄밉게도 맛있게 식사하는 창현을 석준은 물만 들이키면서 노려봤다. 숭늉까지 마시고 배를 두드리는 창현을 두고 석준은 먼저 식당에서 나왔다. 길거리는 한산했다. 그때 저쪽에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광주리 하나를 머리에 얹은 할머니가 지나가는 것이 보여 석준은 그쪽으로 뛰어갔다.
「저… 어르신, 말씀 좀 묻겠습니다. 혹시 성준이네가 어딘지 아세요?」
할머니는 멀뚱히 석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귀가 어두워 잘 못 들으신 게 아닌가 해서 석준은 조금 큰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성준이네요. 혹시 아세요?」
할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버럭 화를 냈다.
「아이고, 아침 댓 바람부터 귀청 떨어지겠는 거… 성준이네는 뭐 하러 찾는 당가?」
「죄송합니다. 아세요?」
「알제, 그럼. 우리 손주 공부 시켜준 당께, 저어그 안 마을에 삐런 보루꾸 집이제」
석준은 새까맣게 그을린 할머니의 검버섯 핀 얼굴을 보면서 멍하니 다시 물었다.
「예?」
알 수 없는 단어들에 석준은 당황했다. 그냥 알았다고도 못하겠고…
「삐런 보루꾸 집이여」
할머니는 한 번 더 얘기 해 주고는 총총히 가던 길을 가고 말았다. 석준은 허허 웃음이 나왔다. 보루꾸라면 벽돌집이라는 소린데 '삐런' 이 문제였다. 갑갑함에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석준의 곁에 어느새 창현이 차를 몰고 왔다.
「어딘지 물어봤어?」
「안 동네 삐런 보루꾸 집이란다」
석준의 퉁명스러운 말에 창현은 하하 웃었다. 서울 토박이인 것은 둘 다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창현은 처가가 광주라 전라도 사투리에는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가자, 알 것 같다」
좁은 도로를 타고 5분쯤 들어가자 자그마한 마을이 나타났다. 앞쪽으로 넓은 논이 보이고 산자락 아래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달력에서나 보던 정겨운 풍경이었다. 창현은 그 중에서 제일 끝자락에 보이는 빨간 벽돌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여긴 거 같다. 삐런 보루꾸집…」
석준의 눈이 조그마한 대문을 열고 뒷집으로 뛰어가는 작은 사내아이에게 향했다. 뭐가 그리 급한지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해서 작은 언덕배기도 제대로 오르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지만 금새 다시 일어나 뒷집대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석준은 차에서 내려 사내아이가 나왔던 대문을 열고 천천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여자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석준은 얼른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그마한 거실 한 가운데에 만삭의 배를 감싸쥔 주영이 몸을 동그랗게 말고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주영아!」
석준의 새된 목소리에 주영은 석준을 바라보았다.
「석준…씨?」
얼굴은 온통 땀에 젖어 머리카락이 다 달라 붙어있었고 이내 다시 찾아온 고통에 주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석준은 얼른 주영을 안아들었다. 그때 뛰어나갔던 사내아이가 어떤 아주머니와 함께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아저씨 누구예요? 우리 새엄마 내려놔요!」
아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석준의 팔에 매달렸다. 석준은 그제야 아이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성준이… 그 꼬마 성준이가 이렇게 자라있다니… 석준은 아이에게 빠르게 말했다.
「성준아, 아저씨는 새엄마 친구야. 새엄마는 어서 병원에 가셔야 하니까 따라 나오렴」
아주머니는 얼른 방에 들어가서 작은 가방을 꺼내서 성준이에게 들려주었다.
「어여 가! 니기 애미 숨 넘어 가불기 전에…」
「네」
성준이는 성큼성큼 걷는 석준을 따라 나섰다. 차에서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던 창현은 놀라 담배를 비벼 끄고 얼른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읍내에서 병원 봤지?」
「알았어… 주영 씨 조금만 참아요」
석준 만큼이나 당황한 표정으로 주영에게 소리치는 창현을 보면서 주영은 석준과 아들의 사이에 앉아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려 6시간의 진통이었다. 머리가 벗겨진 늙은 의사는 지친 표정으로 분만실을 들락거렸고 에어컨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좁은 복도에서 석준은 초조함에 서성거리다가 주영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면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면서 진땀을 빼고 있었다. 창현은 이른 아침부터 놀라 끼니도 거른 채 울먹이는 성준이를 데리고 뭐라도 먹여서 오겠다고 하면서 나갔다. 점점 힘을 잃어 가는 주영의 목소리에 석준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주영의 서글픈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 날의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죄책감이, 그렇게 자신의 짐을 주영에게만 떠 넘겨버리고 떠나면서 띄었던 미소가 가슴을 찔러와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도 자신에게 허락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주영의 신음소리가 멎고 애처로운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의사는 땀이 범벅이 된 얼굴을 꼬깃한 손수건으로 훔치면서 분만실에서 나왔다. 노의사는 급하게 다가오는 석준에게 한 숨을 쉬고는 인자한 미소를 띄면서 걸쭉한 사투리로 말했다.
「무신 가스나가 고집이 그리 센지, 지 애미 잡을 뻔 했당께. 맘 노소, 둘 다 괘안응께… 쪼매 있다가 간호사 나오믄 드가 보소」
석준의 창백했던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의사는 웃으며 석준의 어깨를 한 번 툭 치고 밖으로 나갔다. 한순간에 긴장이 풀리는 것만 같아 석준은 벽에 등을 기대며 한 숨을 쉬었다. 생애에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창현이 성준이의 손을 잡고 들어오고 있었다.
「아저씨… 우리 새엄마 아직 못 봐요?」
성준이의 근심이 가득한 눈동자에 석준은 그제서야 눈물이 시야를 뿌옇게 채우는 것을 느꼈다.
「아니… 조금만 기다리면 새엄마한테 갈 수 있대」
석준은 간신히 중얼거리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성준이는 놀랍게도 마주 안아주면서 석준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아저씨. 우리새엄마 씩씩해요」
석준의 등을 토닥거리면서 위로하듯 힘주어 하는 말에 창현이 쿡쿡거리면서 웃는 소리가 났다. 석준은 고개를 들어 창현을 따라 웃었다.
「그래, 성준이 말이 맞아」
잠시 후, 석준은 성준이와 함께 병실로 들어가 주영과 다시 만났다. 지치고 피곤해 하는 얼굴에도 불구하고 주영은 옆에 안겨 쌔근거리며 잠들어 있는 아기를 보면서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성준이는 조그마한 아기가 신기한지 계속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볼을 쓰다듬으며 연신 자기도 이렇게 작았냐고 주영에게 물었고 주영은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석준이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그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은 채 그저 팔에 안은 아기와 성준이만 보고 있었다. 알고 있다… 그녀의 마음이 아직까지도 자신의 갑작스런 출현에 놀라고 당황했다는 것을… 하지만 마음이 아프다. 저녁의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이 되어 이웃의 아주머니가 아기를 보러 와서는 성준이를 데려갔다. 창현도 성준이와 아주머니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 본다고 말하고는 함께 나갔다. 한 순간 왁자지껄하던 병실 안에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석준은 주영의 곁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주영아…」
석준의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주영은 피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좀 자게 해줘… 너무 피곤해…」
「응, 자…」
석준은 눈을 감는 주영을 바라보다가 망설이며 그녀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손안에 안기는 주영의 조그마한 손이 많이 거칠어져 있었다. 안겨서 잠들어 있던 아기가 칭얼거리는 소리에 주영의 손이 반사적으로 아기를 토닥이는 것이 보였다. 아기… 자신과 주영의 아기… 그러고 보니 자신의 어린 시절과 많이 닮아 있는 이목구비가 보였다. 주영을 닮아 있는 작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다시 쌔근거리는 숨을 내쉰다. 생명의 경이로움에 석준은 새삼 가슴이 뭉클해옴을 느낀다. 주머니에 넣어 놓고 잊고 있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석준은 얼른 일어나 병실 밖으로 나가 폴더를 열었다.
「나다. 어디냐?」
「아버지, 지금 구례예요. 갑자기 나와버려서 죄송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한 숨을 쉬시는 게 들려왔다.
「어떻게 된 게냐? 회의일정도 잊어버리고 뛰어나갈 만큼 중요한 일이었던 게야?」
석준은 그제야 어제부터 마라톤으로 짜여져 있던 노사회의일정을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지금 주영이가 아기를 낳아서… 며칠 더 있어야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석준의 말에 숨을 들이키는 김 회장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뭐? 어떻게 찾은 게냐? 아니…」
처음으로 아버지의 허둥대는 모습을 목격하고 말았다.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김 회장에게 석준은 가만히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 딸이예요. 이마랑 코랑 아버지 쏙 빼다 닮았어요. 조금 난산이긴 했는데 지금은 편안하게 둘 다 자고 있어요. 그나저나 임금협상 어떻게 됐나요?」
「참 빨리도 묻는구나. 이 녀석아, 우리 손녀딸한테 이름 지어줘야 하지 않느냐? 참, 모르는 사이 손녀도 생기고… 빠른 세상이긴 해서 좋구나. 여기 일은 석민이가 잘 하고 있으니 걱정말고 네 안사람 잘 추슬러서 나중에 욕먹지 않게 잘 해. 허허… 참…」
「네, 아버지…」
전화를 끊기 전 석준은 붉어진 눈가를 비비며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알면 됐다. 그럼 며칠 내로 얼굴 좀 보자꾸나」
「네」
석준은 폴더를 닫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선명하게 보이는 은하수와 그 끝에 걸려있는 반달이 가로등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기이름이라… 벌써 아버지는 인명사전을 뒤지고 계신 건 아니실지… 오히려 주영을 설득하는 힘겨운 작업이 남아있는 자신보다 임금협상에서 땀을 빼고 있는 석민의 처지가 더 부러워졌다. 그러나 피할 수는 없다. 주영이 어떤 말을 하든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림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주영의 마음에 더욱 크게 상처를 입힐 것만 같아… 아니, 자신을 더욱 상처받게 할 것 같아서 기다릴 수 없었다. 성장한 성준이의 모습을 보고 자신은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음을 알아버렸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병실에 있는 아기를 떠올리고 다시 집어넣었다. 아기가 있다. 자신과 주영의 약속대로 기다려 준 아기가… 자신에게 주영의 말대로 책임져야 할 소중한 존재가 생겼다. 작은 손을 꼭 쥐고 앙칼진 목소리로 울어대던 작은 우리의 아기… 그래서 다시 용기가 샘솟는다. 석준은 담배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다시금 힘을 얻은 힘찬 발걸음으로 병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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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은 새벽에 아기의 칭얼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침대에 엎드려 자신의 손을 잡고 잠들어 있는 석준의 얼굴을 보았다. 피곤함에 꺼칠해진 얼굴에 자라난 수염이 까맣게 덮여 있었다. 주영은 가만히 석준에게 잡힌 손을 빼내 아기를 안아 젖을 물렸다. 아직 젖이 돌지 않은 것 같았는데 아기가 힘차게 빨기 시작하자 금새 가슴이 아려 오면서 젖이 돌기 시작했다. 주영은 다른 쪽 가슴이 젖어 오는 것을 느끼며 얼른 석준을 흔들었다.
「석준 씨…」
「음… 응?」
석준은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크게 나자 아기가 젖을 빨다 말고 울기 시작했다. 주영은 챙겨온 가방을 가리키며 가제 손수건을 꺼내 달라고 말하며 아기를 달래 다시 젖을 물렸다. 석준은 가방을 뒤져 가제 손수건을 두어 개 꺼내 주영에게 건넸다.
「요녀석… 새엄마 잠도 못 자게 배고프다고 울었니?」
석준은 열심히 젖을 빠는 아기를 신기한 듯 쳐다보며 웃었다. 주영은 얼른 다른 쪽 가슴에 손수건을 대고 그 동안 불편하게 안았던 아기를 고쳐 안았다. 작은 아기는 젖을 빨다 말고 잠이 들었다. 주영은 조심스럽게 아기를 뉘어 놓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미안한데 석준 씨… 가방에서 타올 꺼내서 따끈한 물로 적셔다 줄래요? 좀 씻어야 할거 같은데…」
「어? 그래. 알았어」
석준이 가방에서 다시 타올을 꺼내 병실 문을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주영의 두 눈에 왠지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새벽부터 조금씩 다가오던 진통이 아침이 되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어 성준이를 깨워 철용네로 보내고 거실로 기어 나왔을 때 마주친 석준의 얼굴은 도무지 현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었다. 김창현 사장의 차에 실려 병원으로 오면서도 자신의 어깨에 힘있게 둘려진 팔이 석준의 것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그 격심한 진통의 순간에도 눈을 감지 못하고 석준의 손을 잡고 놓지 못했다. 하지만 병실로 돌아와서 성준이의 깜찍한 질문에 답하면서, 철용네 아주머니가 무뚝뚝하게 고생했다고 말하며 아기를 이리저리 살피며 웃을 때, 심지어는 김사장이 나중에 다시 미역 한 꾸러미 사가지고 은비새엄마와 함께 오겠다고 웃으며 모두를 데리고 나가는 그 순간까지 한 쪽 구석에서 죄책감에 얼굴을 굳히고 있는 석준을 돌아보지 못했다. 그의 마음이 와 닿아 만져질 듯이 느껴지는 데도 그의 그런 자책 어린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의 마음에 짐을 실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오던 자신이었는데…. 그에게 말하지 않는 거짓을 범한 것이 그가 자신에게 느끼게 했던 것처럼 자책하고 슬프게 만들고 있다. 아기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주영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 눈을 깜빡여 눈물을 지우고 있었다. 석준은 조용히 병실문을 열고 들어와 아기의 등을 토닥이고 있는 주영의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지난 몇 달간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모습… 주영의 머리는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등뒤로 땋아져 드리워 있었고 출산으로 인해 조금 부어있기는 했지만 건강하게 조금은 햇빛에 그을린 얼굴이 아기에 대한 사랑으로 빛나고 있었다. 볼품 없어 보이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지만 좀 전에 아기에게 젖을 물릴 때 보인 그녀의 하얀 젖가슴은 임신과 출산으로 조금 더 부풀어 예전보다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그녀의 눈길을 돌리려 짐짓 헛기침을 해 보았다.
「여기… 조금 뜨거운 게 좋을 거 같아서…」
그녀의 눈이 아기에게 향한 따스한 빛을 채 지우지 못하고 자신에게 돌려지는 것을 보면서 석준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어느새 반달이 되어있는 눈이 이렇게까지 그리웠을 줄이야… 석준의 손에서 타월을 받아들고 주영은 가만히 석준을 바라보았다.
「응? 더 뭐 필요해?」
「아뇨. 잠깐 나갔다 와요…」
주영의 얼굴이 금새 발갛게 물들었다. 그제서야 석준은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볼 것 다 본 사이에 새삼 나가라고 하는 주영에게 서운함이 느껴졌다. 하긴 한동안 헤어져 있었으니 어색할 수도 있겠다 싶지만 역시 서운하다. 창현의 말처럼 처음으로 젖이 돌 때 뜨거운 타올로 마사지도 해 주고 힘들었을 팔 다리를 주물러 주고 싶었는데 벌써부터 자신을 밀어내는 것만 같아 또다시 가슴에 횡한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다. 석준은 병실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주영이 상의를 벗고 한 손으로 가슴에 타올을 대고 문지르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석준은 무뚝뚝하게 주영의 손에서 타올을 빼앗아 들고 그녀를 침대에 뉘였다.
「이렇게 혼자서 청승 떨지 않아도 지금 충분히 청승맞아 보이니까 이러지 마」
주영은 뭐라고 거부의 말을 하려다가 석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석준은 큰손으로 타올을 들어 부풀은 가슴에 얹고는 부드럽게 원을 그리듯 마사지를 해 나갔다.
「많이 아파?」
「아니…」
주영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석준은 묵묵히 주영의 양쪽 가슴을 마사지하고는 타올을 뒤집어 목덜미와 겨드랑이 밑까지 부드럽게 닦아내고 다시 상의 단추를 채워주었다. 환자복의 단추가 다 채워지자 그제서야 주영은 눈을 뜨고 석준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그렁한 석준의 눈에 자신의 얼굴이 비춰보였다.
「일부러 알리지 않은 건 아니야」
「알아… 내가 일 다 마치지 않고 일찍 돌아왔어. 너 찾아서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데… 이런 산골짜기로 뭐 하러 온 거야?」
석준의 갈라진 음성에 서러움이 가득해서 주영은 눈물이 났다.
「성준이 아빠가 돌아왔어… 어머님이 희진이랑 결혼시키시겠다고 하셔서 성준이 데리고 먼 곳으로 가라고 하셔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떠나 온 거라… 또다시 성준이 내놓으라고 하지 않게 친권포기각서 받았어. 아기 가진 걸 안 건 당신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인데, 전화 안한 거 미안해. 당신 발목 잡는 거 같아서… 약속대로 기다리겠다고 했으니까 그냥 기다리자 싶기도 했고, 정신도 없었어…」
석준은 가만히 주영의 손을 잡았다. 자신보다 더 외로웠을 주영이 느껴져 목이 메었다.
「석준 씨… 그렇게 마음 아파하지 말아요. 난 괜찮아. 이젠 좋은 이웃들도 있고 성준이 친 손주처럼 예뻐해 주시는 마을 할머니들도 많아서 외롭지 않았어요. 물론 당신이 너무나 보고싶고 그리웠지만… 무엇보다도 아기의 존재를 모를 당신 때문에 맘이 아팠지만 이젠 알잖아요. 그러니 이젠 괜찮아요」
석준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주영은 그저 담담히 석준을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이 생각해 봤어요. 아이 때문에 또다시 당신을 어려움에 밀어 넣고 나는 또 그냥 당신의 그늘에 가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렇게 지내고 싶지 않아. 지난 세월 동안 우리 헤어져서 살다보니 그렇게 살아지잖아. 그냥 그렇게 먹고 자고 하다보면 우린 잊혀지게 될 거예요. 하루하루 지나다 보면 서로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 순간이 올 거예요. 한동안은 슬프고 힘들고 외롭겠지만… 당신에게 했던 그 많은 이룰 수 없는 약속들 때문에 눈물나겠지만… 우리 아직도 사랑이니 열정이니 하는 거 운운할 만큼 어리지 않잖아. 이런 슬픔쯤 익숙해 질 수도 있고 또 언젠가는 그렇게 슬퍼하던 나날들도 괜찮았었다고 웃으며 추억할 수 있을 꺼야」
석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 새어머니 만났었다는 얘기 들었어. 그것 때문이라면 걱정하지마. 아버지께서…」
주영은 석준의 말을 막았다.
「당신 새어머니께서 만나자고 하셨을 때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는 거 알아? 안도했어. 차라리 이렇게 누군가에게 탓을 하면서, 변명하면서 당신을 떠날 수 있는 구실이 생긴 것에… 물론 당신을 떠나고 많이 힘들었고 피를 토할 만큼 당신이 그리웠지만 그렇다고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생기진 않더라구.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만해도 당신의 슬픈 눈동자를 보지 않으면 당신을 떠날 수 있다고, 그대로 돌아설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당신 차가 집 앞에 서 있는 걸 저녁에 들어오면서 봤어.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지. 딱 한번만 더 라고… 마치 마약중독자가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갈구하듯이… 내가 당신에게 그랬어. 너무 힘드니까 잠시만 휴식을 주어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면서… 나도 모르게 당신에게 당신을 믿고 기다린다고 약속하면서… 그게 무얼 뜻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석준 씨, 생각해 봐요.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지워 가는 세월이 더 아플까, 아니면 나와 당신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이니 열정이니 하는 것들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가족들을 지켜보면서 필사적으로 우리의 사랑이나 부르짖어야 하는 시간들이 더 아플까? 난 생각해 봤어요. 더 이상은 그런 시간들을 견딜 자신이 없어. 나에게 당신을 떠나라고 말씀하시던 당신 새어머니의 뜻을 꺾으면서, 당신 주변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나만 있으면 된다고 각오하고 나에게로 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도 바보지만… 석준 씨도 정말 바보야…」
주영은 미소를 지어 보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눈에는 하나가득 서글픈 눈물을 담고 끊임없이 석준에게 사랑한다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입으로는 석준에게 이젠 그만 포기하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석준은 주영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한숨을 쉬었다. 주영의 부드러운 얼굴을 쓰다듬는 석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 손길을 따라 주영의 얼굴 구석구석을 애절한 눈길로 다시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 너를 안고 싶어서… 한번 만 더 라고… 정말 미친 듯이 네가 보고싶어서 현실감이 없어지는 날도 있었어.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가 정말 기적처럼 널 만났는데 넌 계속 아니란 말만하고… 그렇게 네 말대로 쉽게 잊을 수 있다면 왜 아직도 널 지울 수가 없는 건데? 당신은 날 쉽게 잊을 수가 있어서 아직도 그렇게 아픈 눈을 하고 날 보는 거야? 우리 아직도 만나면 서로 아프고 또 아파서 서로 보듬어 안고만 싶은데 왜 잊으라고만 하는 건데?」
석준은 주영을 보며 미소지었다. 이제는 그녀의 말대로 돌아서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음을 새삼 느끼면서 아픈 눈물을 흘렸다.
「그래, 당신 말대로 우리 이러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었는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더더욱 함께 해야지. 그렇지 않아?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이 주변사람들을 모조리 내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 당신이 아무리 날 내치고 또 내칠 지라도 난 내일아침이면 다시 당신 곁에서 눈뜨고 밤이면 당신 곁에서 잠들 꺼야. 내겐 너무나 소중한 당신이기에 상처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우리 부모님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에서 쌍수를 들어 내가 흡족해 할 만큼 당신을 소중히 받아들여주길 바랬을 뿐, 내가 가진 것들을 떠나야 한다는 불안감 때문이 절대로 아니었어」
석준의 따스한 말에 새로운 눈물이 솟는 주영의 눈에 그는 입을 맞추며 말했다.
「봐… 또 이주영, 넌… 나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먼저 나를 단념하고 날 떠나서는 나를 또 이렇게 아프게 하고 돌아서서 울기만 하는 바보야… 이제는 제발 내가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란 말이야」
두려움… 그것이 항상 문제였다. 석준에게는 주영을 잃을까봐 두려워했던 생각 때문에 주영을 두렵게 하고 또 망설이게 했다. 언젠가는 헤어질 것을 예감하게 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바로 그런 두려움이었다니… 이제야 석준은 알 것 같았다. 이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주영에게 항상 말했듯이 자신이 솔직하게 말한다면 주영은 돌아서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없는 확신이 생겨났다.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 나 김석준이 목숨걸고 원하는 단 하나는 바로 이주영을 두려움 없이 사랑해주고 사랑 받는 일이야. 언제 다시 당신이 나를 내칠지 몰라 매일 매일을 두려움 속에 살고 싶지 않아. 그러느니 차라리 널 지우는 게 더 속 편할 지도 모르지… 우리 이젠 이러지 말자. 매일 서로의 추억에만 빠져서 거짓으로 괜찮다고 하는 거… 난 정말 싫어… 주영아, 정말 싫어…」
석준의 말에 주영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당신 가족들에게 힘든 결정을 하게 하지 말아요」
주영은 아직도 흔들리는 눈빛으로 석준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지만 석준은 그저 웃었다.
「힘든 결정은 내가 하는 거지 절대로 우리 가족들이 하는 게 아니야.
나 이제까지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해서 결정했어. 이제는 네가 결정할 차례야.
그저… 두려움 없이 날 선택하기만 하면 돼.
아무도 너의 결정에 반기를 들거나 욕하거나 할 사람 없어. 그
러니까 너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결정해. 절대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복의 여부 같은 건 너의 결정사항에 넣지 마.
그런 쓸데없는 걱정으로 너는 너 자신을 죽이는 길로만 안내하고 있어.
이제는 꼭 너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해. 봐, 생각보다 쉬워. 이렇게 내 손을 잡고 내 눈을 바라보면서
내 눈 속에 비친 당신의 얼굴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를 보고 영원히 내 눈 속에 있겠다고 말하면 되는 거야.
다른 건… 제발 부탁이야. 생각하지마」
주영은 가만히 팔을 들어 석준의 목을 안아 내렸다.
석준은 한숨을 쉬며 주영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잔뜩 긴장했던 심장이 이제야 주영의 것을 만나 함께 쿵쿵 뛰기 시작하고 있었다.
석준은 옆에 앉은 주영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려놓고 꼭 잡았다.
삼칠일이 지나 아이와 함께 주영을 데리고 일산으로 와서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중이었다.
그동안의 아버지의 설득에도 끄떡도 않으셨는지 새어머니는 주영을 보시고는 안색이 변해 싸늘한 태도로 아무말씀도 않고 계셨다.
아무래도 긴장이 되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주영의 손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파왔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김 회장은
석준의 팔에 안겨있는 아기를 얼른 받아 안고는 아기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기쁜 웃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늙은이들만 있는 집에 새사람이 들어왔구나. 어디보자…
어쩌면 이 녀석 석준이 어릴 때와 이렇게 닮았누? 당신도 좀 안아보지 그러오?」
억지로 최 여사에게 아기를 넘기는 김 회장이었다.
마지못해 아기를 안아 든 최 여사는 여전히 마뜩찮은 얼굴로 아기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남편 말대로 아기는 어릴 때의 석준의 얼굴과 너무나 닮아서 주영에게 안겨서 내쫓아 버리고
싶었던 처음의 결심을 마구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자다가 깨어나 하품을 하며 말간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길에 최 여사는 마음이 녹아 내리는 것을 느꼈다.
한순간 나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최 여사는 아기에게서 눈을 들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주영과 석준을 보았다.
다시 눈을 돌려 아기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남편을 보았다.
최 여사의 눈길에 김 회장 또한 눈가를 붉히고 고개를 끄덕여 주고 있었다.
' 이제 그만 아이들의 마음을 받아줍시다. 이만하면 석준이도 부모에게 할 만큼 했잖소?
부모체면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금쪽 같은 자식의 눈에서 눈물 빼고 욕심을 부리겠소?'
김 회장은 눈빛으로 최 여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석준의 힘 빠진 어깨에 누구보다 마음 아파 하던 자신이었지만 이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무리 남편이 갖은 말로 설득을 해도 차라리 이혼하자고 으름장을 놓을 만큼 싫고 또 싫었다.
귀하디 귀하게 키운 착한 아들을 여우같은 여자에게 빼앗기는 것만 같은 기분에 아들의 여자는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마음을 접어줘야 하는 때가 온 것 같았다.
한결같은 믿음으로 남편의 뜻이라면 토달지 않고 따라왔던 자신이기에 깊은 신뢰의 눈빛으로 받아들이라는
마음을 전하고 있는 남편의 젖은 눈빛은 이젠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최 여사는 다시 아들을 보았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손을 서로 맞잡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저려왔다.
저렇게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반대 따위는 부질없는 듯 느껴졌다.
팔에 안은 아기가 기지개를 켜는 것이 느껴져 아기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언제까지 자신의 아기로 남아있을 줄 알았던 큰아들 석준이 이제는 아빠가 되어 이 작은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
아기는 크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베넷 웃음을 지었다.
석준을 낳아 가슴에 안았던 그 순간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버지께서 이름을 정하셨는데… 맘에 들지 모르겠구나」
잠긴 목소리로 무심한 듯 최 여사는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 잔뜩 긴장해 있던 두 사람이 놀라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 최 여사는
김 회장에게 아기를 넘기고 일어섰다.
「저녁 준비 할 테니 주영이 따라 나오거라」
「네…」
주영은 감격에 눈물을 떨구면서 일어서서 최 여사를 따라나섰다.
석준은 김 회장의 눈을 보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김 회장은 짐짓 나무라는 눈길을 석준에게 보냈다.
「이 못난 녀석… 너희 새엄마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지 알면서 이런 불효를 해?」
「아버지…」
김 회장은 아기를 앞에 내려놓고 탁자의 서랍을 열어 작게 접혀진 종이를 꺼냈다.
「내가 한 참 고민을 해 봤다만… 요즘 사람들처럼 한글 이름은 영 어색해서 싫더구나. 그래서 돌림자 넣어서 지었다」
석준은 떨리는 손으로 김 회장이 내미는 종이를 받아들고는 그 위에 힘있는 글씨체로 쓰여진 한자를 보려고
노력했지만 눈물이 가득 고여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읽어 주세요. 무슨 글자인지 모르겠네요」
눈물을 훔치고 자신을 보며 웃는 석준의 얼굴에 김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종이를 받아 들었다.
「윤아와 윤주다. 아무래도 글로벌 시대에 외국사람도 발음하기 쉬운 것으로 고려하면 난 윤아가 좋더구나」
무뚝뚝하게 말하는 김 회장의 눈가도 붉어져 있었다. 석준은 고개를 숙이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네… 아버지… 저도… 저도… 그게 좋네요」
주방에서 최 여사는 국을 떠서 담아 주영에게 건네며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널 완전히 인정했다고는 생각지 말아라. 난 아직도 네가 흡족하지 않다」
주영은 조심스럽게 국그릇을 받아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죄송합니다…」
최 여사는 돌아서서 식탁에 수저를 놓으며 다시 말했다.
「석준이는 어깨가 무거운 사람이다. 내조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게다」
주영은 물 잔을 식탁에 놓으며 떨리는 가슴을 다잡고 있었다.
「힘든 일이 생기면 꼭 나에게 먼저 물어보고 처리하거라.
상의하지 않고 네 멋대로 했다가 구설수라도 생기지 않게 말이다. 알겠니?」
주영은 떨리는 눈을 들어 최 여사를 바라보았다.
최 여사는 아직도 얼굴을 굳히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물기가 어려있었다.
주영이 시선을 떨구고 떨리는 입술을 가만히 깨물어 눈물을 참는 것을 보면서 최 여사는 가만히 주영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계속 날 무서워만 하면 내가 널 어떻게 가르치겠느냐?」
주영은 최 여사의 손을 마주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넘쳐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혼자 있는 성준이 때문에 다시 내려가는 둘에게 최 여사는 말했다.
「다음에 올 땐 큰아이도 데리고 오거라. 손주가 한꺼번에 둘이나 생겨서 정신이 없다만
그래도 얼굴보고 정을 붙여야 하지 않겠니?」
그저 고개를 떨구는 주영의 옆에서 석준은 힘차게 새어머니를 끌어안았다.
「감사합니다. 새어머니…」
중얼거리는 석준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늦게 올라가는 둘을 위해 기사를 딸려 보내면서 김 회장은 주영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었다.
「조심해서 가거라, 새 아가…」
구례로 내려가는 차안에서 내내 주영은 잠들지도 못하고 석준의 손을 잡은 채 울기만 했다.
두 사람의 격한 감정이 넘쳐나는 가운데에서도 이제야 이름을 가지게 된 아기 윤아는 새근거리며 천사처럼 잠들어있었다.
주영은 젖을 물은 채로 잠든 윤아를 가만히 떼어 내려놓고 잠시 칭얼거리는 아이를 토닥여 다시 깊이 잠들게 했다.
절묘하다.
석준과 자신을 절묘하게 반반씩 닮은 얼굴로 가끔 깜짝 놀랄 만큼 그와 비슷한 표정으로 투정부리고 미소짓는
딸아이의 작은 얼굴에서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행복을 느꼈다. 아기의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잠든 집안을 깨우는
우당탕거리는 소리에 이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성준이의 숨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윤아야! 오빠 왔어!」
벌컥 열린 문으로 가을 햇살의 냄새를 가득 묻힌 성준이가 들어왔다.
주영은 가만히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대고 아기가 잠들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금새 해맑은 미소를 띈 얼굴이 풀이 죽어 아기 곁으로 다가오며 불퉁거렸다.
「치이… 왜 맨날 잠만 자는 거야? 새엄마, 내가 우리 윤아 주려고 모빌 만들어왔는데…」
그제야 성준이의 손에 들린 나무젓가락으로 만든 모빌이 보였다.
알록달록한 색종이로 둥글게 말아 꽃을 만들고 그 꽃의 한 가운데에 석준과 주영과 성준의 얼굴로 보이는 얼굴들이
그려져 있었다.
「멋지네… 우리 성준이가 만든 거야?」
새엄마의 칭찬에 금새 얼굴에 화색이 도는 아이… 주영은 가슴이 뭉클해진다.
「우리 윤아 맨날 잠만 자니까 내 얼굴이랑 아빠얼굴 잊어버릴까봐요.
근데 새엄마, 저 지석이한테 아빠가 사주신 롤러 빌려줘도 돼요? 타고 싶다고 밖에서 기다리는데…」
주영은 아들의 입에서 아무런 거부감 없이 나오는 아빠라는 단어에 또다시 가슴이 먹먹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몇 주전 만해도 석준에게 아저씨라고 하던 성준이였는데…
「그럼, 아빠가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놀라고 사주신 건데… 그래도 성준아, 조심해서 타야해.
찻길말고 회관 앞마당에서만 타야해. 알았지?」
외진 곳이라 차가 자주 다니지는 않지만 무서운 속도로 지나가는 차들 탓에 매번 다짐을 받는 주영이었다.
성준은 항상 똑같은 잔소리를 하는 새엄마의 당부는 항상 귓전으로만 들어서 문제이긴 해도,
누가 뭐래도 그녀의 아들은 새엄마를 걱정시킬 일은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성준은 어느새 들어온 그때와 마찬가지로 횡하니 나가버렸다.
주영은 성준이가 만들어 온 모빌을 들고 거실로 가서 앉았다.
따뜻한 가을볕에 초록빛에서 노란빛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집 앞의 은행나무 끝에 참새 한 쌍이 앉아있었다.
고개를 까딱이면서 거실에 앉아있는 주영을 보면서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는 모양이 한가롭고 평화롭게 보였다.
아직도 따스한 말 못해주시는 새로운 시새어머니도 윤아의 옷가지와 함께 성준이의 것까지 챙겨 보내시면서
조금씩 새로운 가족으로 인정하고 계셨다.
이번 주말에는 석준과 함께 내려오신다 하셨다.
윤아가 보고 싶어서라고 단서를 붙이긴 하시지만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제는 깊은 곳에서 느껴지던 짙은 외로움은 사라졌다.
석준의 끊임없이 속삭여주는 사랑한다는 말…
그것은 마치 영혼을 치유하는 약과도 같이 불쑥불쑥 일어나던 불안함을 잠재워주었다.
어제는 박 여사에게 전화를 넣었다. 기운 없이 받으시는 목소리에 가슴이 저려왔다.
그래도 친정새엄마처럼 믿고 의지하던 분인데 너무 오랫동안 연락도 못 드려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새어머니… 저예요」
「그래… 성준이는 잘 크지?」
대뜸 성준이부터 물으시는 목소리에 주영은 잠시 떨려오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숨을 들이쉬었다.
「네, 성준이는 잘 커요. 그리고요… 어머님… 저 결혼해요」
죄책감이 일어 목이 메었지만 말해야만 했다.
질기고 질긴 것이 인연이라는데 이렇게 끊어진 인연의 끈이 가슴에 맺혀 아프고 또 아파왔다.
「그래? 잘 됐구나. 주영아… 정말 잘됐어…」
박 여사의 목소리는 회한에 젖어들고 있었다. 아픈 눈물이 볼을 적셨지만 주영은 웃었다.
「네… 새어머니께 죄 많은 며느리였지만… 이제는 행복하게 살께요. 성준이…」
주영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박 여사는 말을 가로막았다.
「성준이는 나 죽을 때까지 내 손자다. 주영아, 성준이가 오고 싶다고 할 때는 내 말리지 않겠다만,
혹시라도 내 생각한다고 성준이 보내고 해서 시댁에 미움사거나 하지 말거라. 알았지?
고생 많이 했으니 이젠 새 사람한테 잘하고 이쁨 받고 잘 살아」
「네, 새어머니…」
「그래… 그럼 그만 끊자. 흥균이 들어온다」
「건강하세요. 새어머니… 제가 종종 연락 드릴게요」
「아니다. 그 집에 정붙이고 잘 살아.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그 집에나 잘해. 나한테 한 것처럼만 그리 해…
내가… 너 잘 살라고 항상 빌고 있단다. 그만 끊는다」
「네. 새어머니… 감사합니다」
주영의 대답을 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린 박 여사의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더욱 마음이 저렸다.
행복해할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하는 물음이 쓰게 입가를 맴돌 때 어떻게 알고는 석준이 전화해 또다시 사랑한다 말해준다.
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머튜리]사랑없이산다는것.txt
오전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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