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소설은 일반인이 거북해 할수 내용이 담겨 있을수 있습니다. BDSM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되돌아가기를 누르기를 바랍니다.
#프롤로그 제우스 그룹의 강당에서는 창립기념 파티가 한창을 이루고 있었다.
저마다 비싼 양복을 빼입은 각계의 유명인사들이 제우스 그룹의
회장 서재필의 주위에서 인사치례를 하느라 연회장 안은 북적거렸다.
그들을 한심하다는듯 쏘아보던 민혁은 거추장스러운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제끼며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게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샴페인잔을
들고는 구석으로 들어가 한번에 목에 털어넣었다.
알싸한 기포들이 민혁의 목을 타 내려가는게 기분이 그만이였다.
빈 잔을 내던지듯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다시한번 반항끼 어린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아버지 옆에는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인이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은체 사람들의 인사에 거만한 목인사로 그들의 인사에 답했다.
마치 많은 것을 가진자들이 없는 자들을 깔보며 내려다 보며 웃는 것만 같았다.
민혁은 자신이 그 가진자들의 한 통속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혐오스러웠다
[쳇...정부 주제에.....]
민혁은 듣기도 민망한 말을 내뱉으며 짜증스러움이 밀려오자
양미간을 찌푸린체 빨리 이 가식적인 놀음이 끝이 났으면 바랬다.
[민혁아!!! 이리 와봐라!!!]
그의 아버지인 서재필이 엉거주춤 서있는 민혁을 향해 소리쳤다.
민혁은 아버지의 부름이 내키지 않는듯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서재필은 민혁이 다가오자 그를 자신의 곁에 바싹 끌어당겼다.
[하하....이놈이 제 자식입니다.인사드려라...우진 그룹의 강회장님
이시다.....]
민혁은 자신의 앞에 서있는 남자에게 건성으로 고개만 숙이며
목례를 했다.
아들의 태도가 맘에 안드는듯 서 회장의 입가가 굳어졌다.
그는 이 상황을 돌려보려 강회장의 옆에 있는 두 아이를 가리켰다.
[따님이신가요?]
서 회장이 강회장의 옆에 붙어있는 두 아이에게 시선을 돌리자
아이들은 기겁을 하며 강회장의 뒤로 숨어 버렸다.
민혁은 힐끔 그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려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아이하나는 키가 훌쩍 큰게 아무래도
강회장의 큰 키를 닮은것이라 민혁은 생각했다.
[이 아이가..큰 아이입니다.]
강회장은 푸른 원피스의 아이를 손을 잡고 앞으로 이끌어냈다.
아이는 레이스가 잡힌 푸른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긴 머리를
촘촘히 땋아 옷과 같은 색의 리본으로 묶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큰 아이에게서 강회장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동생인듯한 그 아이는 민혁이 보기에도 아주 어려보였다.
곱슬머리인지 구불구불한 검은 머리가 동그란 얼굴과 참 잘 어울린다고
민혁은 생각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아이의 두 눈은 정말 순진무구해보였다.
민혁은 저도 모르게 자신을 빤히 보는 아이에게 윙크를 하며 장난을
걸었다.
그제서야 아이는 빨간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하얀 작은 이를 드러내며
민혁을 보고 웃었다.
[ 큰 딸애는 강진영이라고 하고...이 아이는 막내 강하영이라고
합니다..이제 8살이죠..]
강회장이 사랑스런 눈길로 딸들을 내려다 보았다.
[따님들이 참으로 이쁘군요...]
서재필도 아이들을 훏어 보며 누런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민혁은 강회장과 아버지의 대화가 길어지자 슬그머니 그들에게서
빠져 나왔다.
쟁반위에 샴페인 잔을 들고 다니며 서빙하는 웨이터에게 다가가
잔 하나를 뺏어 들고는 건물의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옥상으로 나오니 시원한 바람이 민혁을 반겼다.
그제서야 숨통이 트이는듯한 해방감에 민혁은 미소지으며 옥상에
놓인 휴식용 벤치에 걸터 앉았다.
민혁은 아버지가 너무도 미웠다.
그의 아버지는 친 새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룸살롱 출신
마담인 새로운 여자 송 미령을 집으로 데리고 왔었다.
민혁은 자신을 보며 눈웃음을 치는 그 여자또한 아버지 만큼이나
끔찍이도 싫어했다.
새어머니 생각을 떠올리며 시간을 죽이던 민혁은 파티가 거의 끝나가는
시간임을 알고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돌아가야 겠다고
생각하며 옥상에서 내려왔다.
민혁이 파티장안으로 들어가려다 홀에서 뛰어 놀고 있는 강회장의
둘째 딸의 모습이 보였다.
강 하영이라 했던가....
민혁은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 내며 아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가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깡총깡총 뛸 때마다 입고있는
하얀 원피스 자락이 나풀나풀 거렸다.
형제없이 쓸쓸하게 외 아들로 자라온 민혁은 가끔 동생이 있었더라면
하고 바란적도 있었다.
저런 여동생이 있다면 이뻐해 줄텐데 하며 민혁이 파티장안으로 들어
가려던 찰나 아이가 기우뚱 하며 계단에서 넘어지는게 보였다.
민혁이 놀라 아이에게 달려갔지만 이미 아이는 계단을 굴러 저 아래로
떨어진 후였다.
민혁은 바닥에 엎드려 있는 아이에게 달려가 안아 일으켰다.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아빠를 찾고 있었다.
[괜찮니? 어디 아픈데 없어?]
민혁은 아이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보았다.
다행히 어디 부러지거나 한 곳은 없는것 같았다.
어디서 부딪혔는지 아이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민혁은 아이를 들어올려 급히 파티장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다쳤어요!!!]
민혁의 고함에 놀란 얼굴의 강회장이 달려왔다.
[하영아!!!]
[계단에서 굴렀는데 부러진데는 없는것 같아요...]
아이는 민혁의 품에서 울면서 강회장에게 안아달라는듯 손을 내밀고
있었다.
119가 오는 동안 아이는 휴게실 소파에서 이마에 난 상처에 간단한
응급처치를 하고 있었다.
[괜찮겠습니까?]
서재필이 걱정하는듯한 얼굴로 강회장에게 물었다.
[이젠 괜찮은것 같습니다.]
울때는 언제고 이젠 이마에 반창고를 붙인체 철없이 지 언니와 놀고
있는 딸을 보며 강회장이 미소를 지었다.
[회장님!!! 119가 왔습니다.]
서재필의 비서가 119요원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하영아~~~아빠랑 병원에 가보자...]
강회장이 딸을 안아들었다.
하영은 아빠의 품에 안기다 말고 고개를 돌려 빤히 소파에 앉아있는
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은 소파에서 일어나 하영에게 다가갔다.
[괜찮아....병원에 가면 의사선생님이 안아프게 해주실거야..]
민혁이 아이의 볼을 쓰다듬어 주며 속삭였다.
이내 아이의 얼굴에 미소가 걸리더니 손에 꼭 쥐고 있던 무언가를
민혁에게 내밀었다.
아이가 내민 것은 나비모양의 브로치였다.
[왜....나 가지라구?]
민혁이 묻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은 아이가 내민 나비 브로치를 받아들었다.
아빠의 품에 안겨 멀어지는 아이를 보며 민혁은 자신의 손을 펴보았다.
그의 손에는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1
하영은 아침부터 징징대는 언니 진영의 목소리 때문에 밤새 앓았던
편두통이 재발하는것 같았다.
하영은 눅눅한 습기 가득한 자신의 방을 둘러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이면 햇살이 가득했던 자신의 방과는 달리 이곳은 햇살은 커녕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지하 방이였다.
처음엔 이런 방에서 어떻게 살아나갈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언니 진영과는 달리 하영은 빠르게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돈이 될만한 것은 다 팔아 넘기고 하영이 아끼던 피아노 마저 헐값에
팔아 넘기고 하영과 하영의 식구들이 이 지하 방으로 이사올때
유일하게 들고온건 그들의 옷 뿐이였다.
진영은 이런곳에선 살수없다고 땅바닥에 주저 앉아 울음을 터트렸지만
하루아침에 모든걸 다 내던져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 만큼이나 할까
하영은 생각했다.
하영이 조그만 주방겸 거실인 곳으로 나오자 진영은 벌써 얼마나
울었는지 눈과 코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난 정말 이런곳에서 못 살겠어....글쎄 어젯밤에 바퀴벌레까지
나오더라구.......차라리 죽어버리는게 낫겠어.]
징징대는 진영의 앞에서 그녀의 남편이자 하영의 형부인 동식이
진영의 손을 토닥거리고 있었다.
[죽기는 왜 죽어.....우린 다시 일어날수 있을거야..걱정마...
다시 청담동 집으로 당당히 돌아갈테니까....]
하영은 호언장담하는 형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영과 같이 형부도 너무 현실을 직시 못하고 아직도 허황된 꿈들만
쫓는 그들이 한심스러웠다.
[아빠는요?]
[어..처제 나왔어?]
동식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진영에게 그만 울라는듯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진영은 하영을 보자 더욱 큰 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다.
[하영아.....네가 아빠좀 설득해봐....지하방이 뭐니...우리가
왜 이렇게 된건데.....]
통곡하는 진영을 보며 하영은 진영앞에 앉아 근엄한 얼굴로 진영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언니......언니가 지금 이럴때야? 아버지는 지금 얼마나 힘드시겠어...
이럴때일수록 가족끼리 뭉쳐서 서로 도와야지....우린 이제 청담동에
살때와는 다르다는거 왜 몰라? 이럴수록 언니나 형부만 더 힘들어져..]
[난 정말 아빠를 이해 할수 없어....밑빠진 독에 물 붓기지....
내가 먼저 살고 봐야지...그까짓 직원들 살리는게 뭐가 중요해...]
부도의 위기에서 끝까지 직원들을 배려하고자 했던 강회장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직원들의 퇴직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다.
[아버지가 하신일이야.....그리고 난 아버지가 하신일이라면
옳다고 생각해....이렇게 울고만 있지 말고 뭐라도 할 생각을해...
난 오늘 제우스 그룹의 회장님을 찾아가뵐 생각이야....
그분이라면 아버지를 도와주실수 있을지도 몰라...]
[제우스 그룹?]
동진이 놀라며 하영을 쳐다보았다.
[처제 지금 제 정신이야? 우리가 왜 이렇게 망한건데...제우스
망할 서 회장때문 아니야!!!]
동진이 흥분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제우스의 의도적인 우진그룹 죽이기는 정말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
제우스에게서 받은 많은 어음을 그들이 요구하는데로 한꺼번에 막아낼
여력이 없던 우진은 마침내 부도의 길로 들어섰다.
[부탁하는데 까지 해봐야죠...그래도 한때는 친하게 지내셨는데...
내가 다시 가서 부탁해 볼거예요...]
하영은 아버지를 위할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부도로 인해 감옥에 들어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
제우스 건물 앞에서 하영은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자신이 제일 아끼는 아이보리색의 원피스를 차려 입은 하영의
모습은 지나가던 사람들도 한번더 쳐다볼 만큼 아름다웠다.
언니 진영이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면 하영은 새어머니를 많이 닮아있었다.
그녀의 미모는 새어머니 덕분이였다.
그녀의 외모는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요즘 세상의 널린 그런 미인형의 얼굴이 아니라
무언가 도도하면서도 단아한 누구도 쉽게 접근할수 없는 미인형의
얼굴이였다.
제우스의 건물을 바라보는 그녀의 속 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용기를 내자....강 하영...넌 할수 있어...]
하영이 이를 악물자 그녀의 볼에 귀여운 보조개가 생겼다.
하영은 씩씩한 발걸음으로 당당히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자 때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하영은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건 직원용 엘리베이터가 아니요..다른걸 타시요.]
뒤에서 들려오는 낮고도 위협적인 목소리에 하영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과 마주친 그 순간 하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것
같은 전율에 꼼짝할수가 없었다.
하영을 바라보는 관능적인 시선이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훏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그런 시선이 심히 불쾌해진 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영은 자신의 겉 모양새 때문에 남자들에게 이런 시선을 받는일이
한두번이 아니라서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현명하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의 시선 만큼은 다른 남자들과 다른 무엇이 있었다.
[직원용이 아니면요?]
어떤 일이든 긍정적으로 좋게 넘어 가려는 그녀의 성격과는 달리
그녀도 모르게 발끈 하며 자그마한 턱을 들어올려 남자를 쏘아보았다.
#2
자신의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히 고개를 드는 자그마한
여자를 보는 민혁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감히 이 건물 안에서 민혁에게 이렇게 당당하게 대드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이건 회장실 직통 엘리베이터요...직원용 엘리베이터는 옆에 있소.]
[잘됐네요...저도 회장실로 가려던 참이였는데...]
하영이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의 문닫음 버튼을 눌렀다.
[몇층이죠?]
하영의 물음에 대답이 없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다시 몸을 돌렸다.
[회장실이 몇층이냐구요...]
[29층이요.]
하영은 손을 뻗어 29라고 쓰여진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소리없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둘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영은 엘리베이터 벽면에 비춰지는 그의 모습을 흘끔거리며 살펴보았다.
자신보다 10센티는 더 커보이는 이 남자는 키 만큼이나 건장한 체격
을 가지고 있었다.
커다란 체격은 하영이 보아도 고급 브랜드로 보이는 양복안에 감춰진체
그가 숨을 내쉴때 마다 실크 와이셔츠가 들썩이고 있었다.
하영은 점점 시선을 위로 올려 그의 얼굴 생김새를 살펴보았다.
특이하게 각이 진 그의 턱은 남자다운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의 두툼한 입술은 굳게 다문체 였고 그녀를 쏘아보던 그의 눈은
층수가 바뀌고 있는 숫자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언젠가 하영이 언니의 화집에서 보았던 그리스 신화의
에로스 신과 같은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큐피트라고도 불리고 있는 에로스 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트가
달린 화살을 가지고 날아다니는 아이의 모습도 있었지만 하영이
화집에서 본 에로스의 모습은 그야 말로 관능적인 매력을 지닌
한 남자의 모습이였다.
하영이 그에게서 시선을 빼앗겨 그를 지켜보고 있던중 벽면에 비친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분명 하영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영은 당황하며 얼른 눈을 내리 깔았다.
다행스럽게도 엘리베이터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있었다.
마치 숨이 막혔던 사람처럼 하영은 큰 숨을 들이쉬며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회장실은 저쪽이요.]
남자가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고맙습니다.]
하영은 최대한 격식을 차리며 그에게 대답했다.
하영은 옷 매무새를 다듬으며 회장실이라고 쓰인 팻말이 달려있는
문앞에 서있었다.
하영은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회장실의 문을 열었다.
하영이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있던 비서가 일어서며 하영을 바라보았다.
[저...회장님을 만나뵈러 왔습니다.]
[사전에 약속을 하셨습니까?]
사무적인 어투로 물어보며 비서는 스케쥴이 적혀있는 노트를 뒤척였다.
[아..아니요...약속은 없었어요....]
[그러시면...곤란한데요.....어디서 오셨습니까?]
[저..우진 그룹 강 우진 회장님의 딸입니다.아버지 일로 긴히
회장님께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비서가 인터컴을 누르자 서 회장의 걸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진 그룹 회장님의 따님이 오셨습니다. 회장님을 만나뵙고 싶어
하시는데요...어떻게 할까요...]
[우진 그룹?]
인터컴 너머의 서회장은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하영을 들이라며
지시를 내렸다.
하영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영이 비서의 안내로 안으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있던 서회장이
고개를 들어 하영을 바라보았다.
[그래...강회장의 딸이라고?]
서회장은 천천히 하영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안녕하세요...강 하영이라고 합니다....어릴때 창립 기념 파티때
만나뵙고는 처음이네요....기억하실지...]
[강하영? 아.....막내 따님이구만....그래그래 기억나지.]
자신을 기억해 주는 서회장의 반응에 하영은 실낱같이 보이는 희망에
미소를 지었다.
[여기 차좀 부탁해요....자 앉지...]
[감사합니다.]
하영은 서회장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나를 만나러온 이유가....]
[이곳에 오기까지 많이 생각하고 망설였습니다....하지만......
아버지를 그런 험한곳에 보내드릴수는 없었어요....]
하영의 눈이 애절해 지며 서회장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부탁입니다...없었던 일로 해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서회장님께서
저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다면 정말 열심히 해서 은혜에 보답해
드리겠습니다...저희 아버지께..아니 저희 우진 그룹을 한번만
도와주세요....]
[허...이런.....곤란한 부탁이구먼...]
서회장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우진 그룹은 다시 회생이 불가능한 그룹이야....나도 생각을
많이 한다음에 내린 결론이야....이제 와서 다시 그룹을 살린다는건
석유통을 끌어안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격이지....미안하네...]
하영은 단 한마디로 거절하는 서회장을 무너지는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그럼...저희 우진 그룹이 제우스 그룹에 지고 있는 부채만이라도
그 상환 시일을 뒤로 미뤄주시면 안될까요.....어떤 일을 해서라도
꼭 갚아 드리겠습니다. 요번일 못 막으면 저희 아버지는 쓰러져서
다시는 못 일어 나실지도 몰라요....제발...부탁드립니다.]
하영은 구걸하는 심정으로 서회장에게 매달렸다.
[그런데......생각보다 참 어여쁜 아가씨로 성장했구만....나이가....]
안경너머로 하영을 쳐다보는 서회장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영은 달라지는 서회장의 눈빛이 불편한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
[스물...셋입니다.]
[오호...한창때군....아버지는 아닌것 같구...새어머니를 닮아서
그렇게 이쁜가?아버지 때문에 많이 힘들지?]
하영은 자신의 무릎에 놓여있던 자신의 손위로 놓여지는 서회장의
손길에 깜짝 놀라며 자신의 손을 빼내었다.
[놀라긴.....안쓰러워서 그래...젊고 한창 놀 나이에...아버지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다니.....]
서회장이 일어나며 천천히 하영의 옆자리로 옮겨와 앉았다.
하영은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이 솟아 오르며 조금만 참아보자며 또다른 그녀가 하영을
설득하고 있었다.
서회장의 손이 하영의 머리카락을 스쳐지나가자 하영은 얼굴을 뒤로
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다...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생각해 보시고....다음에
찾아뵈면 그때 답을 주세요....]
하영은 엉거주춤 일어서며 자신의 핸드백을 집었다.
[어허...뭐가 그리 급해서...차나 한잔 하고 가지....]
서회장이 그녀의 하얀 손목을 낙아챘다.
[회..회장님!!!]
하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그에게서 팔목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뭐하시는 겁니까!!!]
느닷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하영이 고개를 돌리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그 남자가 회장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서회장과 그에게 팔목을 붙잡혀 있는 하영을 혐오스런 눈빛으로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하영이 억지로 서회장에게서 팔목을 빼내자 서회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순순히 놔주었다.
[넌 예의범절도 모르냐!!! 노크를 하고 들어와야지!!!]
서회장은 얼굴이 붉어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크 했습니다....다른 일에 바쁘신 아버지가 못들으신거죠...]
아버지?
하영은 서회장을 아버지라 부르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하영을 쳐다보았다.
[그..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영은 민혁에게 못볼꼴을 들킨것 같아 수치심에 얼굴이 벌개지며
황급히 회장실을 빠져나왔다.
회장실을 나오는 그녀의 뒤통수에 남자의 뜨거운 시선들이 박히는것
같아 불편했다.
급히 빠져 나가는 하영을 보며 민혁은 자신의 아버지인 서회장을
노려보았다.
[이젠...회사까지 여자를 들이십니까?]
[이런!! 쳐 죽일놈!!!]
서회장이 화를 내며 책상위에 있더 서류철을 냅다 민혁에게 집어던졌다.
서류철이 민혁의 가슴을 맞고는 바닥에 떨어졌다.
[집에 데려다 놓은 여자도 부족해서 저런 어린여자까지 넘보십니까....]
[누...누가 어린 여자를 넘봤다고 하는거냐.....아버지한테 버릇없이
말을 막해도 되는거냐!!!]
서회장의 말에 민혁의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언제....아버지 노릇이나 제대로 하셨습니까?]
[저..저놈이...]
화가 나서 어쩔줄 모르는 서회장을 남겨둔체 민혁은 회장실을 빠져나왔다
그의 각진턱이 굳어져 갔다.
민혁은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가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그 어린 여자와 부둥켜 안다시피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는 민혁이 피가 거꾸로 솟는것 같았다.
집에 고이 모셔둔 천박한 그 여자도 모자라서 딴 여자에게 또 한눈을
파는 자신의 아버지가 혐오스러웠고 또 그의 자식인 그 자신또한
혐오스러웠다.
그가 거칠게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회장실을 빠져나간 그 여자가 타고 있었다.
하영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감싸며 정신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하영은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 놀라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마치 강제이라도 당한 여자처럼 수치심이 밀려오자 하영은 그자리에서
죽고만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영이 미처 1층으로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지 못하자 엘리베이터는
내려가지 않은체 그대로 회장실이 있는 29층에 머물러 있었다.
하영이 떨리는 몸을 추스리며 일어서서 1층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그 남자가 서있었다.
하영이 두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급히 문을 닫으려고 하자 민혁이
닫히려는 문사이로 급히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너무나도 무서운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는 남자가 두려워진 하영이
주춤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등에 엘리베이터 안의 벽이 와닿자 더 이상 물러설곳이 없음을
알고 하영은 떨리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런 하영의 모습을 말없이 노려보던 민혁은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아
당겨 그의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하영이 저항할 틈도 없이 그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뒤통수를 감싸며
화살이 과녁에 꽂히듯 정확하게 그의 입술이 하영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하영이 저항하며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민혁은 그녀의 반항에 코웃음을
치며 더욱 거칠게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하영이 비명을 지르기 위해 입을 벌리자 대담하게도 그의 혀가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와 그녀의 입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하영은 그의 무자비한 침입에 현기증이 일어나는것 같았다.
하영은 처음 해보는 낯선 남자와의 키스에 차츰 적응해 가며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반응을 눈치라도 챈듯 그가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를 엘리베이터
벽쪽으로 밀어붙쳤다.
그의 집요한 요구에 하영은 그의 넓다란 등에 팔을 두르며 키스에
응답해 가기 시작했다.
순간 키스를 하던 그의 입술은 미소를 짓듯이 양옆으로 벌어졌다.
갑자기 끝나버린 키스에 하영은 멍한 표정으로 민혁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탐낼만도 해.......]
그가 싸늘히 내뱉은 말에 하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영의 손바닥이 여지없이 민혁의 뺨으로 날라들었다.
[당신도..아버지하고 다를것이 없어.]
민혁은 하영에게 맞은 뺨을 어루만지며 하영을 노려보았다.
맑고 투명해서 손을 뻗어 담궈보고 싶은 깊은 여자의 눈동자에서
구슬같은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왜 우는거지?]
민혁이 거칠게 말을 내뱉으며 하영의 손목을 잡았다.
[내 첫키스를 당신같은 사람에게 빼앗긴게 억울해서요...]
하영은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곳을 빠져나갔다.
[기다려!!]
민혁의 외침을 뒤로 하고 하영은 정신없이 비상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다시는.....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꺼야........
다시는.....
#3
하영은 주체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버스 정류장으로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예전같으면 하영이 타고 다니던 작은 경 승용차를 이용했겠지만
그녀의 애마같은 차 또한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간 후였다.
나쁜자식.......
하영은 순간이지만 그에게 반응을 보였던 자신이 더욱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무자비한 침입자와 같았다.
그녀를 끌어당기던 그 힘에 하영은 모든 감각이 마비된듯 그가 하는데로
이끌려가고 있었다.
하영은 버스를 기다리며 자신을 음흉하게 훏어 보던 서회장의 눈길을
떠올리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군....
버스에 올라탄 하영은 왼쪽에 비어있는 좌석에 앉았다.
서회장의 아들이라면.....서 민혁이겠군...
하영은 내키지는 않지만 그의 얼굴을 한번더 떠올려봤다.
하영이 어릴때 창사기념 파티에서 어린 하영을 다정하게 안아주었던
민혁의 소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보았다.
희미한 어릴적의 일이였지만 그는 그때보다 많이 변하지는 않았다.
특유의 각진 턱하며 날카로운 콧날 커다란 키...
모두 어릴때 하영의 기억속에 있던 민혁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그에게 변한것이 있다면 소년때 반항기가 다분했던 눈에서
고독과 번뇌가 가득한 눈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하영은 슬며시 손을 들어 민혁이 거칠게 탐했던 자신의 입술을
만져보았다.
연약한 하영의 입술은 거친 공격에 상처가 나있었다.
창밖에 바쁘게 지나가는 풍경만큼이나 복잡해 지는 심정으로 하영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민혁은 자신이 왜 그 여자를 쫓아 건물 밖까지 나갔다 왔는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그냥 그저 그녀를 붙잡아야 겠다는 생각뿐이였다.
[제길....]
아무리 아버지가 미웠어도 그녀를 그런식으로 욕보일 권리는 자신에게
없다는걸 민혁은 알고 있었다.
민혁의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 순결해 보이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을
보았을때 민혁은 순간 아차 하며 스쳐가는 후회를 느낄수가 있었다.
하지만 민혁은 여자를 믿지 않았다.
먹이에 달려드는 승냥이떼처럼 민혁에게 달려드는 여자들 또한
민혁이 어느순간에 그녀들을 물리칠때면 그런 순진무구해 보이는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며 그에게 매달렸다.
민혁은 애써 그 여자도 그런 여자들중에 하나라며 계속 속으로
다짐을 받았지만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도 자신의 입술위에 남아있는
그녀의 향기를 느끼며 당황스런 감정을 추스리려 노력했다.
[송미령이 알면 가만있지 않겠군...쳇.]
이미 회장실에서 있던 여자의 이야기가 송미령한테 전해졌을 것이다.
그녀의 놀라운 질투심을 또 어떻게 잠재워야 할지 민혁은 난감해 졌다.
***********
서 회장 비서의 전화를 받은 미령은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의 섹시한 고양이 눈이 얇아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자신의 의상룸으로 들어가 핸드백과 겉옷을 꺼내왔다.
당장 회장실로 달려가 자신이 직접 확인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망할...영감쟁이 같으니라구...감히 딴 여자와 놀아나? 어림도 없지...
나는 이렇게 집구석에 쳐박아 놓고 맘대로 하며 다녀도 생각했다면
오산이야......어림도 없지.....]
미령이 주먹을 쥐자 빨간 메니큐어를 바른 긴 손톱이 손바닥에 박혀왔다.
강남의 유명한 룸살롱의 마담 송미령이 서회장의 눈에 들어 그의 본처가
세상을 뜬지 49제가 체 지나지도 않아 미령은 그의 집 안주인으로서
당당히 입성했다.
룸살롱의 마담이 재벌 기업 사모님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지만 어느 누구도 제우스그룹의 위력앞에서는 감히 나서서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환갑이 가까워진 서회장과는 달리 미령은 이제 40이 체 안된 싱싱한
젊음과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의 가게에 자주 들르는 서회장을 유혹하는 것쯤이야 미령에게는
식은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유달리 호색을 밝히는 서회장은 싱싱한 미령에게 군침을 흘렸고
미령은 그것을 기회로 삼아 서회장의 정부가 되었다.
이미 미령에게 푹 빠진 서회장을 구슬려 그의 본처의 자리를 차지하는건
문제도 아니였다.
미령이 처음 이 집으로 올 당시 그의 18살짜리 반항적인 아들이 있기는
했지만 아직 소년이였던 그는 아버지의 결정에 이렇다할 반대를 할
입장이 못되었다.
하지만 미령도 나이를 먹기 시작하자 서 회장은 슬슬 미령에게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유달히 소유욕이 강한 미령은 서회장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는것 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미령의 기세에 서 회장도 크게 반감을 표시하지는 못했지만
미령 모르게 서회장의 애정행각은 계속 되었다.
미령은 이번이야 말로 서회장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겠노라 다짐하며
서회장을 만나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서려했다.
미령이 자신의 고급 승용차에 우아하게 올라 시동을 걸자 저택의
차고 문이 열리며 서회장의 리무진이 들어서고 있었다.
미령은 차에서 내려 리무진앞으로 다가갔다.
기사가 차에서 뛰어 내리며 뒷 자석의 문을 열자 서회장이 내려섰다.
[어디 가려던 참이야?]
서회장이 외출복을 입고 있는 미령을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한테 가려던 참이였어요.]
[무슨일인데!!! 여편네가 집구석에나 쳐박혀 있지...남편 일하는 곳에
왜 뻔질나게 들락거리려고 해!!!]
서회장이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체 미령에게 소리쳤다.
거침없이 서회장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민망한 말을 들은 미령의
두 눈이 서회장을 노려보았다.
미령은 기사가 서 있는걸 인식하고는 등을 홱 돌려 저택안으로 들어갔다.
[버릇없는 계집애....먹을거 있고 등 따시니까 오만방자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구만....]
서회장은 먼저 들어간 미령을 따라 저택안으로 들어갔다.
서회장이 침실로 들어서자 단박에 서회장에게 도자기 인형이 날라들어
아슬아슬 하게 서회장을 비켜나 문에 부딪치며 산산이 조각났다.
[무슨짓이야!!!]
서회장이 고함을 지르자 미령이 서회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짜내기 시작했다.
[당신..어떻게 그럴수 있어요....나 좋다고 잘나가는 나를 끌어다가
이집에 가둬놓고는 자기는 젊은 년들 엉덩이나 만지며 흥얼대고
다녀요!!! 이렇게는 못살아요....흑흑..]
미령은 서회장을 찔러보기 위해 가장된 울음으로 더욱 크게 통곡했다.
미령의 커다란 통곡이 조금은 당황스럽다는듯 서회장의 누그러진
음성이 들려왔다.
[왜...왜그래...누가 누굴 만나고 다녔다고...]
[내가 모를줄 알아요? 당신 늦을때 마다 룸살롱 출입한다는거...흥...
오늘은 젊은 년까지 회사로 끌어 들였다면서요....차라리 날 죽여요.
이렇게는 못산다구...흑흑.]
미령의 발악에 서회장은 침대에 엎드려 우는 미령에게 다가왔다.
[울지마....그애는 우진 그룹 강회장의 딸이였다구.....지 아버지
살려달라고 부탁하러 온 참이였다구.]
서회장의 변명에 미령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예요?]
[정말이구 말구....미안해...내가 요즘 당신한테 좀 관심이 없었지?
회사일도 바쁘고 그래서.....]
어느정도 서회장이 자신의 술수에 넘어간걸 깨달은 미령은 눈물을
닦아내며 유혹하는 듯한 자태로 서회장의 넥타이를 끌어내렸다.
[한번만 더 바람피웠다는 소리 들리면 가만 안둘테야....]
미령의 투정에 서회장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미령을 쳐다보았다.
[그..그럼....]
자신의 품에 서회장을 안는 미령의 얼굴에 미소가 퍼져나갔다.
당신........
날 버리면 그땐.....당신 죽여버릴거야........
#4
지쳐버린 하영이 집으로 들어서자 진영과 형부인 동식이 쪼르르 달려나와
하영을 맞이했다.
그들은 하영이 문으로 들어서자 마자 하루종일 기다려 왔던 질문들을
속사포 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됐니? 서회장이 도와준데?]
[처제....어떻게 됐어?]
하영은 그들을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고는 말없이 자신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바로 진영이 다시 하영의 방으로 들어왔다.
[이야기좀 해봐!!! 어떻게 됐는데...오늘 하루종일 기다린 사람한테
이렇다할 이야기는 해줘야 할것 아냐!!]
[언니......나 피곤해...쉬고 싶어...]
[말해봐!!!! 잘 안됐구나! 하긴...네가 간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니...
차라리 나랑 형부가 다녀올걸 그랬나?]
[언니!!!]
하영이 참지 못하고 소리치자 진영은 움찔하며 하영을 보았다.
[그..그래...쉬어라....]
[아버지는?]
[아직 안들어오셨어....]
[나...좀 누워있고 싶으니까....저녁은 언니가 좀 해.]
[내가?]
진영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끔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무슨 요리를 해....너도 알잖아 나 밥도 못하는거....]
[못해도 해봐.....그럼 평생 굶고 살거야? 자꾸 해야 요리도
늘어나는 거야......]
[그..그래 알았어...]
진영이 내키지 않는 표정을 방문을 닫고 나가자 하영은 짜증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자신의 언니이지만 어쩔때는 한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영은 원피스를 벗어 던지고는 편안 옷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누웠다.
아버지가 들어오셨을때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지 못한게 너무 아쉽고
마음이 불편했다.
하영은 오지 않는 잠이지만 뒤척이며 눈을 감았다.
***********
하영이 얼핏 잠이 깨어나 시계를 봤을때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너무 많이 자버린건 아닐까 하영은 당황해 하며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로 나가자 조그만 밥상을 펴놓고 김치 하나에 소주를 마시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이 보였다.
[아빠........]
하영이 조그맣게 속삭이며 아버지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상 밑에는 아버지가 마신 빈 소주병들이 놓여있었다.
한때는 많은 직원들을 호령했던 우진 그룹의 회장 강우진은 지금
이렇게 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방에서 안주하나 변변치 못한 상에서
홀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하영은 솟아오르는 눈물을 감추려 눈을 깜박이며 다시 잔에 술병을
기울이고 있는 아버지의 손에서 소주병을 빼앗았다.
[하영아...그냥 내버려둬....]
[이러시다 몸이라도 상하시면 어쩌려구요....]
[너희들 볼 면목이 없구나....]
몰라보게 수척해진 아버지의 얼굴을 하영은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누가 뭐래도 우리들 아버지세요...
아빠 이렇게 무너지면 우린 어떻게 해요.....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잖아요.....그러니까 기운내서 우리 다시
시작해요...네? 아빠.....]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딸의 얼굴을 우진은 바라보며 손을 들어올려
하영의 볼에 흐르고 있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래.......네 말대로 열심히 살아보자...그래...]
[제가 아빠를 지켜드릴게요..걱정마세요.]
하영이 우진의 손을 꼭 붙들고는 그를 위로했다.
[언니한테 들었다.....오늘 제우스에 다녀왔다며?]
[네........]
[뭐할려고 갔냐.....]
[그냥..혹시 해서요.....아무 대답도 못듣고 왔어요...죄송해요..]
미안해 하는 하영을 보며 우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아니야...다시는 그곳에 가지 말아라.....그곳에선 절대
해답이 나올수 없다는거...너도 잘 알잖니.....이제 나도 정신차리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닐테니까....넌 가만히 있어......]
[아빠.....저희가 아빠 사랑한다는거 아시죠?]
[그럼...]
하영은 사랑이 넘치는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의 품에 안겼다.
참으로 오랜 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아버지의 품이였다.
***********
하영은 햄버거 집에서 대충 햄버거와 콜라로 끼니를 때우며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구인지를 계속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방안에는 아직도 이력서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급 명품 옷들을 팔아치운 돈으로
간신히 집세내고 생활비를 대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돈이기에
너무나 빠듯했다.
더군다나 워낙 곱게 자라온 언니 진영은 세간의 시선이 두려운지
집안에만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몰락한 집안의 건달이였던 형부 동식은 언니와 만나고 나서 아버지의
그룹에서 기생충처럼 빌붙어서 생활해 왔기 때문에 그 역시 지금
이 상황에서 허황된 꿈만 쫓을뿐 도통 취직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비롯한 두 식구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하영은 마침내
취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집세와 생활비를 생각하면 하영이 오늘 하루동안 이력서를
내고 다닌 곳은 턱없이 부족한 월급들을 제시했기 때문에 하영은
매번 헛걸음을 칠수밖에 없었다.
햄버거를 한입 크게 물던 하영의 시선이 고소득 보장이란 글귀에
눈이 쏠렸다.
하지만 이내 그 광고가 나온 곳이 룸 살롱인것을 알고는 볼펜으로
힘차게 두줄을 그어버렸다.
이제는 지친듯 구인지를 덮어버리고는 하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한 젊은 남자가 하영에게 접근했다.
[네?]
[초면에 실례인줄 알지만.....이미지가 너무 좋아보이셔서요...
모델한번 해볼생각 없으십니까?]
[모델이요?]
하영이 의심스런 눈길로 남자를 훏어보았다.
[생각있으시면 연락한번 주시죠...]
그가 명함을 하영에게 내밀었다.
명함에는 이태식이란 이름과 전화번호가 씌여져있었다.
[저....급여가 얼마나 되는지......]
[급여요? 아 그거는 일단 테스트를 거친다음에 본인께서 하게 되실
물건에 따라 급여는 천차만별입니다..생각있으시면 전화주세요.]
남자는 하영에게 인사를 하고는 가게를 나가버렸다.
하영은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 그 남자를 잡기위해 급히 뛰어나갔다.
젊은 남자를 따라들어간 사무실은 하영의 생각보다 낡고 누추했다.
하영은 이 남자를 따라온것이 잘못된 선택은 아니였을까 겁이 났지만
이내 걱정을 떨쳐버리고 남자가 건네는 쥬스잔을 받아들였다.
[만약 계약을 하게되면 어느정도 생각하고 계십니까?]
남자가 하영에게 물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많으면 좋다...........돈이 급하신 모양이군요...]
[네....]
남자가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 하영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잠시 일어나서 한바퀴 돌아 보시겠습니까?]
남자의 요구에 하영은 엉거주춤 일어나 한바퀴 제자리에서 돌았다.
남자는 턱에 손을 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이미지가 너무 좋군요.....저....당장 돈이 필요하시면...
한번 권해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해보시겠습니까?]
[무..슨 일인지......]
[만약 하시겠다고 하시면 하루에 몇백정도는 드릴수 있습니다.
그냥 간단한 테스트라고 생각하시고 사람들 앞에서 포즈만
취해주시면 되는 일입니다..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예요.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하영은 달라지는 남자의 눈빛이 의심스러웠지만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하영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
민혁은 벌써 한시간째 연거푸 독한 위스키를 마셔대고 있었다.
그런 민혁이 맘에 들었는지 독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호스티스들이
민혁의 품에 안겨오면서 계속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야야....너 그 사장님 잘 모셔라......앞으로 제우스의 주인이
되실분이니까.....]
옆에 앉은 여자의 젖가슴을 계속 만져대고 있던 한 중년의 사내가
웃으며 민혁의 옆에 있는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어머!! 진짜요!!!!]
여자가 간사스런 웃음을 흘리며 슬며시 민혁의 허벅지에 손을 갖다대었다
[무슨 짓이야!!]
민혁이 정색하며 매몰차게 여자의 손을 떼어냈다.
민혁의 반응에 놀란듯 여자가 입을 삐죽 거리며 자신의 술잔을 들이켰다.
민혁은 제우스의 발밑에 아첨하기 바쁜 기생충 같은 인간들을
바라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맘에 내키지 않는 자리였지만 사업상 어쩔수 없이 나오게 된
자리였다.
저마다 술에 흥청대며 여자들의 품에 안긴 남자들을 혐오스런 눈으로
바라보던 민혁은 룸의 방문이 열리자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사장님들....]
룸살롱의 마담이 들어서며 소리를 높였다.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보시면 오늘 사장님들
지갑좀 비우셔야 할거예요...]
[거 좋지......한번 데리고 와봐!!!!]
민혁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마담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차린듯
환호성을 지르며 마담을 재촉했다.
[무슨 일이지?]
민혁이 옆에 있던 호스티스에게 물었다.
[모르세요? 요새는 손님들도 눈이 높아져서 우리같은 년들하고는
잘 놀지도 않는다구요......사장님들 구미에 맞는 얼굴 이쁘고
공부잘하고 뭐 그런애들 있잖아요......요즘 세상이 어렵다 보니까
그런 잘난년들도 돈 벌려고 오는데 괜찮은 사장하나 물면은
팔자 피는거지 뭐.......]
[자자!!!! 너희들은 모두 나가있어!!!]
한 남자가 소리치자 호스티스들이 야유를 보내며 룸을 빠져나갔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마담이 웃음을 흘림 룸을 나갔다.
[오늘은 좀 삼삼한 년이 올라나?]
상스러운 소리들을 남발하는 자들이 민혁은 정말 맘에 안들었다.
[저는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야 겠습니다.]
민혁이 일어서자 남자들이 민혁을 붙잡았다.
[가시면 어떻합니까...잔치는 지금부터 시작이니 조금만 더 있다
가시지요.....저희가 사장님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으니까
그 선물은 보시고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의미있어 보이는 능글맞은 시선을 보이는 남자가 민혁을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전...이런곳인줄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거예요!!!]
하영은 얼굴이 파랗게 질린체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여자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냥 간단한 테스트라고 했지....정말 이런 곳인줄 알았다면...]
하영이 자신의 팔을 이끄는 마담을 쳐다보며 애원했다.
[이봐 아가씨 다 알면서 뭐그래? 돈벌기가 그렇게 쉬운줄 알아?
잔말 말고 따라와!!!!]
마담에게 질질 끌려가는 하영은 정말 두려움에 미칠것만 같았다.
많은 돈을 벌수있고 간단하게 사람들 앞에서 테스트를 거친다는
남자의 말을 믿은 자신이 바보였다.
처음 와보는 으리으리한 이런 술집에 막상 끌려와보고 나니까
하영은 자신이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영이 뭣모르고 남자를 따라 이곳으로 들어오자 사람들은 저마다
하영에게 달려들어 생전 처음 입어 보는 낯뜨거운 옷들을 갈아입히고는
그녀를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었다.
[제발 놔주세요.....네? 전 그런 여자가 아니라구요!!!]
[웃기시네..누군 처음부터 너 처럼 고상한 여자가 아니였는줄 알아?]
같이 걸어가던 마담이 코웃음을 치며 하영을 비아냥 거렸다.
마담과 웨이터들이 어느 구석진 룸으로 하영을 데리고 갔다.
[그냥 몇번 한번 웃어주고 사장님들 비위한번 맞춰주면 너하기따라에
몇백이 될수도 있고 몇천이 될수도 있으니 잘해봐....이런 기회가
아무한테나 오는줄 알아?]
마담은 룸의 문을 활짝 열고는 하영을 떠밀어서 들여보냈다.
민혁은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여자를 힐끔 한번 쳐다보고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잔 만을 들이켰다.
빨리 저 변태같은 자식들의 놀음이 끝나기만을 바랬다.
[우와!!!!오늘 물 좋은데!!!!좋아 나 오십만원 걸었다!!!]
한 남자의 외침에 이어 한 남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 팔십!!!]
[에이......좋다 기분이다 나 백!!!]
민혁은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여자를 앞에 세워두고 마치 경매를 하듯 여자에게 가격을
매기고 있었다.
민혁은 그제서야 흥미를 느끼고 고개를 들어 어두운 조명아래
안절부절 하며 서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좋아!!! 나 이백!!!]
한남자가 크게 소리치자 더 이상 나서는 남자들이 없었다.
[좋아 더 이상 없지? 나한테 낙찰이다]
이백을 부른 남자가 벌떡 일어서서 하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꺄악...이거 놓으세요...]
하영은 술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며 자신을 끌어당기는 남자에게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이거 왜이래!!! 비싼값에 팔렸으면 그 값을 해야 할꺼 아냐!!!]
거나하게 취한 남자가 하영을 자신의 품에 억지로 끌어당겼다.
하영은 힘껏 남자를 밀어내며 구석으로 도망을 갔다.
순간 민혁은 조명아래 비친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 여자였다.
비록 어두운 조명아래서이지만 분명 아버지 사무실에 있던 그 여자가
틀림없었다.
민혁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삼백!!!!]
느닷없는 민혁의 목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하영도 자신에게 삼백을 건 미친 남자가 누구인지 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 주인공을 확인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시선을 보며 하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삼백....더 이상 없으면 저 여자는 내가 갖겠소.]
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하영에게 다가갔다.
[다..당신은....]
[또 만났군....]
민혁의 낮은 음성이 하영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순간이였다.
#5
하영을 내려다 보는 민혁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민혁은 떨고있는 하영의 팔을 잡고는 그녀를 끌고 룸을 나갔다.
[어...저 친구...]
민혁에게 끌려나가는 하영을 보며 사장들은 알만하다는 웃음을
터트리며 아무도 하영을 끌고 나가는 민혁을 제지하지 않았다.
[이..이손 놔요!!]
하영은 끌려가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주며 버팅겼지만 민혁의 힘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민혁은 하영을 비어 있는 룸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내던지듯 민혁이 긴 소파위로 하영을 밀어버리자 하영은 비명을 지르며
소파에 엎어지고 말았다.
하영이 얼른 몸을 일으키며 민혁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죠!!!]
하지만 하영의 외침은 자신의 셔츠 단추를 끄르고 있는 민혁의 모습을
보자 입속으로 쏙 들어가고 말았다.
상황이 생각지도 못하게 흘러가자 하영은 두려움을 느끼며 가슴선이
깊게 패인 원피스의 앞자락을 여미며 민혁을 바라보았다.
[왜..왜이래요....]
[왜그러냐고? 몰라서 물어?]
민혁은 자신의 지갑에서 백만원짜리 수표 3장을 꺼내 하영의 앞에
던져주었다.
[자..계산은 치뤘으니까.....널 내 맘데로 해도 되는거지?]
[이..이러지 말아요..꺄악...]
민혁은 재빨리 하영을 소파위에 길게 눕혔다.
자신의 몸위에 엎드린 민혁을 밀어내려 하영은 안간힘을 썼다.
그런 그녀의 반항이 우습다는듯 민혁은 코웃음을 치며 하영의 양 손목을
잡아쥐고는 그녀의 머리위로 올렸다.
꼼짝없이 민혁의 몸아래 깔린 하영은 애원하는듯한 눈빛으로 민혁을
바라보았다.
[제발...놔주세요....모르고 끌려온거예요..정말 이예요.]
[처음부터 이런 여자인줄 알아봤지...내 눈은 못 속여...여기서
우리 아버지도 만난거야? 돈많고 나이 많은 늙은이라 쉽게
꼬실수 있다고 생각했나? 왜 뜻데로 되지 않아서 오늘 이렇게
나온거 아니야? 구역질 나는군....너의 방식대로 대해주겠어..]
[그게 아니예요...난....]
하지만 하영의 변명은 민혁의 거친 키스에 의해 막혀버렸다.
처음 키스와는 또 다른 하영을 또다시 혼란으로 이끄는 키스였다.
하영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민혁의 손에 더욱 힘이 주어지며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하영을 재촉하고 있었다.
마침내 뜨거운 열기때문에 숨이 막힌 하영이 입을 열었다.
그는 기다렸다는듯이 하영의 보드라운 입안으로 침입을 시도했다.
하영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민혁의 침입을 막으려했다.
[반항해봤자...더욱 나를 흥분시키는 것밖에 안돼....가만히 있어.]
민혁의 입술은 하영의 입술을 떠나 그녀의 하얀 목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낙인을 찍듯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던 그의 입술이 아름다운 하영의
쇄골뼈에 머물렀다.
[아름다워......이런 더러운 일을 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몸이군..
넌 순결한 처녀인듯한 표정과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그건 가면에
불과해....말해봐.....몇명이나 너의 몸을 탐했었지?]
[꺼져버려요....]
하영의 민혁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좋아...난 사냥을 좋아하지....쫓고 쫓기는...열심히 도망가봐....
열심히 쫓아갈테니.......오늘만큼은 내가 너를 돈을 주고 샀으니
오늘 너는 내 먹이감이야.......]
천끼리 찢어지는 마찰음과 함께 하영이 입고 있던 원피스 윗자락이
떨어져 나갔다.
민혁에 의해 옷이 찢겨져 나가자 하영은 비명을 지르며 훤히 드러난
자신의 가슴을 감추려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민혁은 그런 하영을 다시 똑바로 눕히고는 그녀의 위에 엎드렸다.
[싫어!!! 저리가!!!!]
민혁의 커다란 손이 하영의 다리를 쓸어가며 점점 원피스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영의 비명은 이내 민혁의 키스에 의해 중단되었고 하영은 이내
축 늘어지며 무기력하게 민혁의 손길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민혁이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하영과의 키스에 몰두했다.
그 순간 민혁의 볼에 뜨거운 무언가가 와 닿았다.
하영이 흘린 눈물이였다.
민혁은 불에 데인듯 몸을 일으키며 하영을 노려보았다.
[왜......이번엔 내가 당신 첫 남자라서 울고 있는건가?]
비아냥 거리는 민혁의 음성은 이제 하영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빨리 이 순간이 끝나기만을 바랄뿐이였다.
[당신이 불쌍해.....돈이면 한 여자의 순결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을수 있다고 생각하는 당신들이 불쌍해......마음데로해....]
이미 체념한듯한 하영은 두 눈을 감고는 시체같이 민혁의 몸아래
누워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젠장......일어나.....]
민혁의 몸이 떨어지자 하영은 두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뭐..뭐라구요?]
[당장 이자리에서 널 가지기 전에 나가라구!!!]
민혁이 고함을 치자 하영은 주춤 거리더니 이내 룸의 문쪽으로
달려갔다.
하영은 문을 열자마자 찢어진 자신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눈물을
훔치며 도망치듯 복잡하게 얽혀 있는 룸살롱의 복도를 뛰어갔다.
하영이 막다른 복도에서 코너를 돌자 마침 걸어오던 남자와 심하게
부딪치며 비틀거렸다.
[아!!! 이년이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죄송합니다.]
하영이 사과를 하며 고개를 들자 그녀앞에 서있던 동식또한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처제!!!]
[형..부...]
[아..여기...어쩐일이야?]
동식의 눈이 찢어진 하영의 옷자락에서 헝클어진 하영의 머리카락까지
옮겨갔다.
[형부야 말로 여기는 왠일이세요?]
[어머!! 사장님 여기 계셨구나....]
한 여자가 독한 향수냄새를 풍기며 동식의 팔에 팔짱을 꼈다.
동식은 하영의 시선을 의식한듯 여자의 팔을 풀렀다.
[형부.......]
[처..처제....나 여기서 봤단말 언니한테는 제발 하지마..응?]
동식은 비굴한 모습으로 하영에게 애원했다.
[무슨 일이지?]
하영을 뒤따라온 민혁이 동식과 함께 서있는 하영을 바라보며
동식으로 부터 하영을 보호하듯 막아섰다.
[무슨일이요]
민혁의 경계하는듯한 날카로운 물음에 동식은 절절맸다.
[호..혹시 제우스 그룹 서 민혁 사장님 아니십니까?]
동민의 대답에 민혁의 짙은 눈썹이 한쪽으로 올라갔다.
[누구신지?]
[아..전 우진 그룹 이동식 과장입니다...몇개월전에 제우스 하청건으로
만나뵌 적이 있는데.....]
[아....예...]
민혁은 동식이 기억난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저희 처제와는 아시는 사이 이십니까?]
동식의 말에 민혁은 놀라는 표정으로 등뒤의 하영을 돌아보았다.
[처제?]
[예...우진 그룹 강회장님 막내 따님 이시죠.]
민혁의 얼굴이 굳어지며 하영을 노려보았다.
[그래.....우진 그룹 따님이시란 말이지.....]
[형..부...이제 그만 가요.]
하영은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 동식의 팔을 이끌고 나가려 했다.
[잠깐!!!]
민혁의 부름에 하영은 땅에 발이 붙은듯 딱 멈춰섰다.
민혁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하영을 바라보았다.
[당신이.....그때 6살의 꼬마요?]
하영은 민혁이 어릴때 자신과의 만남을 기억하고 있자 마음한편으로
놀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맞아요....당신은 그때 계단에서 넘어진 나를 구해준...
서민혁씨구요......]
[재미있군....어쩌다가 우진그룹 공주님이 이런곳에 출퇴근을 하셨나?]
[뭐? 출퇴근!!]
동식이 민혁의 말을 듣고 놀라서는 크게 소리쳤다.
[말했잖아요.....나도 모르게 이곳에 끌려 왔다고...당신은 뭐든
마음데로 생각하고 마음데로 행동하는군요..형부 가요...]
[어...그래...]
앞장서가는 하영의 뒤를 따라가던 동식이 뒤돌아 민혁을 흘끔거렸다.
[그래...그 꼬마란 말이지.....]
동식과 사라지는 하영을 보며 민혁은 자신의 양복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입에 물었다.
하영이 이런곳에 출입하는 보통 여자들과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녀가 강 회장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자 의외의 사실에 민혁은
실소를 감출수가 없었다.
콧대 높은 부자집 따님이 말이 아니군......
민혁은 담배를 땅에 떨어뜨려 발로 비벼끄고는 다시 가게안으로 들어갔다
#6
동식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하영에게 자신과 룸살롱에서 만난
이야기를 비밀로 해달라고 애원했다.
하영 역시 동식에게 들키지 말아야할 상황을 들킨 상태라 그의 부탁을
거절할 입장이 못되었다.
[그대신 형부도 꼭 거기서 저를 보았다는 말은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그..그럼...그런데...서 민혁 과는 아는 사이야?]
[아뇨!!]
하영은 동식에 물음에 팔짝 뛰며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정말 다시는 상종하기도 싫은 남자예요.]
[하지만 왠지 그가 처제를 보는 눈빛이 틀리던데...]
[눈빛이 틀리다뇨?]
[아..왜 있잖아...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그런 눈빛....]
[형부는....집에 가서 괜한 소리나 하지 마세요....]
하영은 동식의 윗도리를 빌려 입어 찢어진 옷을 감추었다.
집에 들어가자 진영은 이미 잠이 들어있었다.
하영은 조심스럽게 아버지가 있는 방문을 열어 아버지가 잠든 모습을
확인했다.
하영과 진영이 어릴때 돌아가신 새엄마이지만 한번도 아버지의 모습이
쓸쓸하게 보인적이 없었다.
하지만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하영은 괜시리
콧등이 시큰해지는게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도 불쌍해 보였다.
하영은 조용히 문을 닫은다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찢어진 옷들을 벗어내며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세상에!!!]
하영의 목과 쇄골뼈 부근에 작은 파란 멍들이 들어있었다.
곧 하영은 그 자국들이 민혁이 남긴 것임을 알고는 경악하며 멍들을
지워보려 손으로 문질러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하영은 왜 매번 그를 만날때마다 곤란한 순간에만 부딪히는지
정말 속상한 마음에 옷을 벗어던지고는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의 앞에서 정말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고 마는 자신이 미웠다.
서민혁..
그 남자의 앞에서는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무릎을 꿇게 만드는
무서운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하영은 더 이상 민혁을 떠올리기 싫었는지 머리를 흔들며 그의
흔적들을 조금이라도 지우기 위해 샤워를 하기로 결심했다.
***********
민혁은 샤워기 밑에서 샤워기를 통해 나오는 차가운 물줄기들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물줄기들이 민혁의 다부진 몸을 타고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민혁은 벌써 두번씩이나 자신에게 열정을 불러일으킨 그 여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릴땐 참 귀여운 모습이였는데 어느색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자신을 쏘아보던 그 눈빛이 생각났다.
강 하영 백합과도 같은 여자였다.
겉으로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그 꽃을 탐하는
자에게는 진한 향기를 내뿜어 기절케 만드는 독을 품고있다.
민혁은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며 냉장고로 다가가
캔 맥주를 꺼내 시원하게 들이켰다.
맥주를 마시며 민혁은 자신의 서재로 들어가 자그만 책상서랍을
열어보았다.
서랍을 열자 산호조개로 장식되어 있는 보석함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보석함을 열자 빛 바랜 한 여인의 사진과 함께 목걸이나 팔찌등의
보석류들이 담겨있었다.
민혁의 새어머니가 그에게 유일하게 남긴 유품이였다.
민혁은 보석들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브로치를 꺼내 들었다.
나비 모양의 브로치가 스탠드 불빛에 의해 번쩍거리며 아름다운
모양을 나타냈었다.
[강 하영........강 하영.....]
자신의 아내가 죽은 이후로 민혁에게 타는듯한 갈증을 불러일으킨
여자는 하영이 처음이였다.
아내...
새삼 아내라는 단어를 곱씹어 보며 민혁은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그를 쫓아다니던 경쟁사 회장의 딸과
함께 민혁은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그 단한번의 실수가 민혁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어버렸다.
그녀가 임신을 한것이다.
서회장은 오히려 경쟁사와 사돈을 맺게 된것을 좋아하며 일사천리로
민혁의 결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사랑없이 시작한 결혼이기에 결혼생활은 민혁의 아내의 부정으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도 다른 남자와의 밀애를 즐겼던 그의 아내는
결혼한지 두달만에 그녀의 애인과 함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아버지의 문란한 여자 편력을 혐오했던 민혁은 아버지와 같은 인생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며 이름 뿐이였던 아내를 묘지에 묻고
돌아오던날 다짐했다.
민혁은 강 하영이란 여자에 대해 알아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버지를 찾아온 이유하며 아버지의 의심스런 하영에 대한
관심때문이라도 그녀에 대해 알아내야 했다.
#7
진동으로 바꾸어 놓았던 하영의 전화가 화장대위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려대고 있었다.
밤 늦게까지 영어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밤을 새웠던 하영은 부시시
잠에서 깨어나 전화를 받았다.
[네......여보세요.....]
[나요.]
비몽사몽간이였던 하영의 두 눈이 번쩍 띄여졌다.
이렇게 건방지고 위협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하나뿐이였다.
서 민혁.
[아침부터 무슨 일이죠? 그리고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신경질적인 하영의 반응에 수화기 너머로 민혁의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당신에게 아침은 항상 이시간이요?]
민혁의 말에 하영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는 어느새 오후 1시를 넘기고 있었다.
[어제 잠을 못잤어요...]
[만나고 싶소.]
[싫어요.]
[간단한 대답이군.]
[당신을 다시 만날 이유도 없을 뿐더러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내게 보인 반응을 봐선 아닌것 같은데?]
민혁은 일부러 하영을 자극할만한 말만 골라하며 그녀의 화를 돋구고
있었다.
[당신 주위에 널린 여자들중에서나 찾아봐요.]
하영은 소리를 지르며 소리나게 핸드폰 폴더를 닫아 버렸다.
다시 전화벨이 울리자 하영은 전화를 받자 마자 크게 소리쳤다.
[도데체 왜 그래요!!! 나좀 그냥 내버려두라구요!!!]
[나오는게 좋을거요....아님 내가 당신 집을 찾아갈까? 당신 형부와
마주쳐봤자 당신만 곤란할텐데...]
다시 소리 지르려던 하영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지금 협박하는건가요?]
[협박은 내 전문이 아니요.]
[좋아요...어디서 보죠?]
[차를 보내겠소.]
[찾아갈수 있어요.]
[3시까지 시간을 주겠소. 그때 맞추어서 차를 보낼테니 타고 와요.그럼]
민혁은 더 이상 말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영은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들린 핸드폰만 노려보았다.
[정말..오만방자하고...재수 없어.]
하영은 중얼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거실로 나가자 진영이 손톱에 정성스럽게 메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다.
[아빠랑 형부는?]
[아빠는 방에 계시고....니 형부는 밖에 나갔어..일자리좀 알아본다구.]
진영은 손톱의 메니큐어가 번질까 손톱에 입김을 불어대고 있었다.
[형부가 왠일이래? 취직을 할 생각을 다하고...]
[먹고 살려면 어쩔수 없잖니....그런데 넌 누구랑 싸우니? 방에서
왠 고함을 그렇게 질러대?]
[응? 아..아냐...]
하영은 긴 머리를 긁적이며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민혁의 차는 정확하게 3시에 하영의 집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영은 일부러 딱딱해 보이는 스타일의 정장을 빼입었다.
목에는 연한 하늘색의 스카프를 둘러 딱딱해보이는 스타일에 포인트를
나름대로 주었다.
하영은 거울을 통해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오늘 만큼은 민혁이
자신을 마음데로 휘두를수 없게 하겠다며 굳게 다짐했다.
하영의 민혁의 고급 승용차에 오르자 기사는 아무말 없이 하영의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한 고급 레스토랑 앞에서 차를 세웠다.
카사블랑카라는 간판이 달린 레스토랑을 하영은 잘 알고 있었다.
몇개월전까지만 해도 하영의 식구들은 이곳에서 식사를 했었다.
하영은 화려한 레스토랑의 외관을 보며 다시는 못와볼것만 같았던
이곳에 다시 오게되니 괜시리 마음이 울적해졌다.
하영이 레스토랑으로 들어서자 카운터 앞에 있던 직원이 그녀를
민혁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안내했다.
하영이 나타나자 민혁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하영은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간단한 목인사를 민혁에게 건넸다.
자리에 앉자 민혁은 하영을 훏어보기 시작했다.
[완전 무장을 하고 오셨군..]
[무슨 소리죠?]
[당신이 입은 옷 정말 끔찍하군...그거 정말 당신 옷 맞소?]
민혁의 웃음기 섞인 조롱에 하영은 순간 뜨끔했다.
사실 하영이 입고 있는 옷은 일부러 세탁소에서 빌려온 옷이였기때문이다
[내옷 맞아요....남이 입은 옷에 떠들 시간 있으시면 용건이나 말씀
하시죠....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신거죠?]
하영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민혁은 조용히 미리 준비되어 있는 와인을
하영의 앞에 놓인 잔에 따라주었다.
[난 아직 점심을 못 먹었는데...같이 식사하겠소?]
솔직히 그와 마주하고 밥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급히 나오느라 끼니를
제때 챙겨먹지 못한 하영이기에 그녀도 배가 고프긴 했다.
[좋아요.]
하영의 새침한 대답이 맘에 든다는듯 민혁이 작은 소리로 웃으며
웨이터에게 식사 주문을 했다.
[당신이 우진 그룹의 공주님인줄 알았다면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을거요......왜 미리 말하지 않은거요?]
민혁의 물음에 하영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냐구요? 당신이 말할 틈이나 주었나요? 만날때
마다 무슨 죄인인 마냥 밀어부치기만 했지 언제 내 말이나 들어주었
냐구요!!!!기가 막혀.]
[난 여자를 좋아하오. 당신을 만날때 마다 다 차려진 밥상이 앞에
놓여져 있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내가 볼때 마다 당신은
남자들에 둘러싸여 히히덕 거리는 모습 뿐인데....내가 당신을
그런 여자로 착각하는건 당연한 이치 아니요!]
[누가 히히덕 거렸다는 거죠!!]
하영의 얼굴이 새빨게 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자리에 나온 내가 바보예요......당신같은 사람하고 무슨 대화를
나누겠다고 여기에 나왔는지.....가겠어요.]
하영이 자신의 핸드백을 집어들자 민혁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앉으시오..,..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나지막한 민혁의 말에 하영이 주위를 둘러보자 몇몇 사람들이 하영과
민혁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영은 마지못해 자리에 다시 앉으며 민혁을 잡아먹을듯이 노려봤다.
[당신 앞에서 식사할 생각 없어요..입맛이 다 달아나 버렸어요.
본론이나 이야기 하세요....]
[그날 제우스에 왜 당신이 찾아왔는지 궁금하오.]
[무슨 대답을 원하고 있는거죠?]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이 제우스 회장에게 뭘 주고 뭘 얻기로 했는지
그게 궁금하오.]
[뭘 주다니요?]
[몰라소 묻소?]
민혁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말의 의중이 무언지 생각하던 하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당신 누굴 매춘부로 알아요? 아버지 때문에 서회장님께 부탁하러
갔었어요.....우진 그룹을 다시 도와줄수가 없느냐고....그랬더니
당신 아버지가 내 옆자리로 옮겨오시더니 내 손을 만지더군요....
아니 주물러 댔다고 말해야 겠네요.....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던중에 당신 덕분에 무사히 벗어 나거구요.이젠 됐나요?
정말 구역질나.....당신이나 당신 아버지나 똑같아.]
더 이상 참기 어려워진 하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레스토랑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왔다.
하영은 민혁에게 붙잡히기 전에 벗어나려 급히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미처 달려오던 트럭을 발견하지 못한 하영은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달려오는 트럭을 발견했을땐 이미 늦은후였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은체 하영은 죽음을 예감하며 두 눈을 질끈감았다.
차가 거의 다 다가왔다고 느낀 순간 그녀의 몸은 누군가에게 이끌려
인도로 올라와 구르고 있었다.
[아야...]
땅에 구르면서 부딪힌 팔에 고통이 밀려왔다.
[당신 미쳤소!!!! 그렇게 차도로 뛰어들면 어떻게해!!]
하영이 눈을 뜨자 그녀를 안고 함께 땅에 뒹굴렀던 민혁의 모습이 보였다
[택시를 잡으려고 했다구요...]
약간은 겁에 질려 주눅이 든 하영이 말을 더듬거리며 일어났다.
민혁도 일어나서 자신의 양복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있었다.
[그러게 누가 따라나오래요!!!아얏...]
하영은 민혁에게 고함을 치다 팔에 느껴지는 쓰라린 느낌에 하영은
자신의 상의를 팔위로 걷어올려 확인했다.
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팔에는 생채기가 나서 피가나고
있었다.
[병원에 가야겠군.]
[이정도로 죽지는 않아요.]
하영은 씩씩한척 하며 다시 걷어올린 옷 소매를 내렸다.
[데려다 주겠소.]
하영은 혼자 갈수 있다고 하고 싶었지만 내심 속으로는 많이 놀란터라
이것저것 가릴처지가 못되었다.
민혁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하영은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 하영은 두말않고 차에서 내려 자신의 집으로 걸어갔다.
[잠깐!!]
민혁이 하영을 불러세웠다.
[정말 병원에 안 가봐도 되겠소?]
[괜찮다니까요...]
민혁은 말없이 하영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올려 순식간에 하영이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벗겨냈다.
[무슨짓이예요!]
하영이 황급히 자신의 손으로 목을 감싸안았다.
민혁이 억지로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내리자 하영의 하얀목에 있던
작은 멍들이 드러났다.
민혁의 입이 일그러지며 하영을 쳐다보았다.
[그 영광의 상처는 내가 낸 건가?]
[꿈깨시죠.]
하영은 민혁의 손에 쥐어진 스카프를 잡아채고는 자신의 집으로
걸어갔다.
[또 만납시다.]
등뒤로 들려오는 민혁의 소리를 무시한체 하영은 집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가는 하영을 바라보며 민혁은 자신의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다행히도 민혁의 생각과는 달리 하영은 자신의 아버지를 혐오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럼 문제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민혁은 또다시 자신보다 어린 여자를 새 새어머니로 모시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림도 없는 일이지......
#8
하영이 집으로 들어가자 집안에서는 진영의 비명과 함께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놀란 하영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여섯명의 남자들이 닥치는 데로
집안의 물건들을 부수고 있었다.
진영은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그들이 무서운듯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아버지는 남자들을 뜯어말리며 애원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예요!!!]
하영이 소리치며 안으로 들어서도 남자들은 들은체 안하고 계속 방에서
물건들을 끄집어 내고 있었다.
하영의 방에 있던 화병까지 들고 나오자 하영은 그 남자에게서 화병을
빼앗고는 그들을 노려보았다.
[남의 집에서 이게 무슨 행패예요!!]
[행패?]
험상궂게 생긴 남자하나가 손으로 툭툭 하영을 건들면서 시비를 걸어왔다
[야...니네가 숨어 있으면 우리가 못 찾아낼줄 알았어? 어떻할꺼야...
우리돈 어떻게 할거냐고....니가 대신 갚아줄거야?]
남자가 하영을 잡아 끌자 하영의 아버지 강우진이 그 남자의 뺨을
후려쳤다.
[내 딸은 건들지마!!!]
[이 영감쟁이 미쳤나]
남자들이 한꺼번에 우진에게 달려들어 매질을 가했다.
[그러지 말아요!!!]
하영이 그들을 뜯어 말리며 웅크린체 그들의 발길질을 당하는 아버지의
위로 엎드렸다.
그들의 발길질은 하영에게도 무차별로 쏟아졌다.
[이놈들아!!!!날 죽여라....우리 애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우진이 벌떡 일어서며 한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이거 안놔!!!]
남자가 힘껏 우진을 밀치자 우진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이놈들..헉...]
우진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다 자신의 목뒤에 손을 갖다대며 거친숨을
몰아쉬었다.
[아빠!!! 왜그래요? 아빠!!]
하영이 우진에게 달려들었다.
[허..헉...]
우진은 거친숨을 몰아쉬며 괴로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그 자리에서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아빠!!!]
진영이 우진에게 달려와 그를 붙들고 통곡을 했다.
쓰러진 우진을 본 남자들이 슬글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하영이 그들을 향해 울부짖으며 부탁했지만 그들은 본체만체 자리를
피하기만 급급했다.
[아빠...정신차리세요..아빠!!!]
하영이 계속 우진을 흔들어댔지만 그는 깨어날 생각을 못했다.
***********
[뇌혈관이 터졌습니다. 빨리 수술을 해야할것 같습니다.]
병원으로 실려온 우진을 진찰한 의사가 하영에게 청천벽력같은
말을 꺼냈다.
[수..술이요? 수술 하면 아빠는 괜찮아 지시는 건가요?]
아직도 눈물로 범벅이된 하영의 얼굴을 안쓰럽다는듯 의사는 쳐다보았다
[일단 터진 혈관을 봉합하는 수술을 한다음 의식이 돌아오는지
돌아오지 않는지에 따라 환자의 상태를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다행히 의식이 돌아온다 해도 신체적으로 마비가 올수도 있고 언어장애
와 같은 뇌혈관 손상으로 인한 후유증들이 올수 있습니다.]
의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하영은 사형선고를 받는것처럼 섬뜩했다.
그녀에게는 오직 아버지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해주세요...수술해주세요..선생님 우리 아빠 꼭 사셔야 해요...]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진찰실을 나오는 하영은 힘없이 그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당장 수술을 하려면 큰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돈은 지금 살고 있는 지하방의 보증금을 빼도 턱없이
부족한 돈이였다.
하영은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을까 생각하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에 저장되어있는 전화번호의 주인공들을 찾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하영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없었다.
[아.....하느님 어떻게 하면 좋죠....]
***********
제우스의 서회장을 만나고 돌아오는 동식의 표정은 심각해보였다.
제우스의 서회장이 자신의 전화로 직접 전화해왔을때 동식은
그가 자신을 찾는 이유를 알수가 없었다.
동식과 마주한 서회장은 강회장의 안부를 묻는것 부터 시작했다.
어쩌면 그가 자신을 비롯한 장인인 강회장에게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처제인 하영이 서회장을 만나고 온 것이 기회가 됐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하영이참 어여쁜 아가씨로 성장했더군....남자라면
한번쯤 탐해 볼만한 아가씨야...]
느닷없는 하영의 이야기에 동식은 어리둥절 했었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동식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간파해버렸다.
[처제가 워낙 인물이 좋다 보니까...남자들이 많이 따르긴 하죠....]
[내가 자네를 부른건...그래도 그쪽에선 자네가 내가 대하기 편한
사람이라서 그래.....우리 제우스에서 일해볼 생각이 없나?
일찍이 우진 그룹에서 자네의 실력은 일찍이 들어서 알고 있고....
하는거에 따라서 우진 그룹을 살려줄수는 없어도..어느 정도 먹고
살수는 있을만큼 내가 도와줄수도 있지....]
서 회장의 제안이 동식의 구미를 자극했다.
[어떻게....처제와 한번..만나보시겠습니까?]
동식은 슬슬 서회장의 관심을 끌 만한 제안을 내놓았다.
[하하하하....역시 자네는 머리가 똑똑해.....음..맘에 들어....
하영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모든게 달라질수도 있어.....]
[정말.......아까 말씀하신 대로 해주시는 겁니까?]
이미 동식은 서회장의 미끼를 문체 끌려가고 있었다.
[꼭 말로 해야 하나?]
동식은 서회장의 느끼한 눈빛을 떠올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짐승만도 못한놈....넘볼걸 넘봐야지...여자 밝히는건 알고 있었지만..]
동식은 그를 욕하면서도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하면 하영을
설득할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동식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네.]
[여보!!]
울먹거리는 진영의 목소리였다.
[무슨일이야?]
[아빠가...아빠가.......]
[장인어른이 왜?]
[쓰러지셔서 지금 병원이야....]
동식은 급히 전화를 끊고는 택시를 불러세웠다.
[한국병원이요. 빨리가주세요.]
택시가 달리기 시작하자 동식은 손에 있던 핸드폰을 꽉 쥐었다.
이젠 선택의 기회마저 없어진 셈이다.
하영의 결정만이 남아있었다.
#9
하영은 불이 꺼진체 낯선 의료기계음만 울리는 중환자 실로 조용히
들어갔다.
저마다 각기 죽음의 기로에 서있는 중환자실의 환자들을 보니 하영의
마음은 더욱 미어지는것만 같았다.
여기저기 하영이 알지 못하는 선들에 연결되어 있는 앙상한 아버지의
몸을 바라보니 하영은 울컥 서러움에 눈물이 솟아났다.
하영은 아버지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조용히 아버지의 손을
잡아주었다.
[아빠....난 어쩌면 좋아요...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영은 지금 당장이라도 아버지가 일어나 모두다 괜찮아 질거라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 줄것만 같았다.
[아빠....왜 바보같이 이러고 누워있어요.....아빠 이렇게 누워만
있음 나하고 언니는 어떻게 해요.....나 정말 힘들어요....]
하영은 손에 쥐고 있던 아버지의 손바닥을 자신의 볼에 비볐다.
[어떻게 해서든...아빠는 내가 살려드릴게요...꼭....]
뜨겁게 흐르는 하영의 눈물이 우진의 손을 다 적셔갔다.
***********
지친 몸을 이끌고 하영은 이틀동안 갈아입지 못한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하영이 집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 깨진 물걸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잠을 잘 못자고 신경을 쓰느라 스트레스가 쌓여 있던 하영은 집안의
난장판을 보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형부와 함께 일찍이 집에 돌아간 언니 진영은
어느 물건 하나 치워놓지 않은체 하영이 쓰러진 아버지를 119차에
실고 병원으로 떠나기전의 상황 그대로 였다.
[언니!!! 언니 어딨어!!]
하영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진영을 부르기 시작했다.
진영의 방문이 열리며 잠이 덜깬 부시시한 진영의 모습이 나타났다.
진영의 뒤로 역시 수염도 깍지 않은 형부 동진의 모습이 보였다.
[언니 정말 너무한거 아니야? 내가 왠만하면 그냥 넘어갈려고 했는데...
집안 꼴이 이게 뭐야.....아빠가 아무리 병원에 저렇게 누워계시고
내가 집안에 없어도 적어도 이런 너저분한 물건들은 치워놨어야
하잖아....정말 왜그래....왜 언니까지 나를 속상하게하냐구!!!]
하영의 비명에 진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품을 크게 했다.
[나도...너 만큼이나 힘들어...이런거 나중에 치워도 되는거잖아...
별것도 아닌것 같구 신경질 내는 니가 더 이상하다.]
진영의 말에 기가막힌 하영은 말문이 막혔다.
하영은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 옷 갈아입고 또다시 병원에 가봐야해....]
하영은 더 이상 진영에게 신경질을 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방으로 횅하니 들어가 버렸다.
자기 방 역시 여기저기 어질러 있는 것을 한숨을 쉬며 하영은 쳐다보았다
반쯤 열려진 자신의 옷장에서 편한 흰색 면티와 면바지를 꺼내 입고는
병원에서 지내며 쓸 물건 몇가지를 커다란 가방을 꺼내 챙기기 시작했다
[하영아.....]
문 넘어로 진영이 하영을 부르고 있었다.
[왜?]
[잠깐 나와볼래...형부랑 내가 너한테 할말이 있어...]
하영은 마저 물건을 다 넣은다음 가방의 지퍼를 굳게 닫고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로 나가자 무언가 굳은 결심을 한듯한 진영과 동식이 앉아서
하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 인데? 아빠 혼자 두고 와서 나 빨리 가봐야해.]
[앉아봐.]
하영이 진영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자 진영은 팔꿈치로 동식의
옆구리를 찌르며 힐끗 눈치를 주었다.
동식은 하영을 쳐다보며 머뭇머뭇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장인 어른 수술을 해야하는데.....수술비가 얼마지?]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언니하고 형부한테 말씀 드릴게 있었어요.
일단은 예치금 먼저 병원에 넣으며 수술은 먼저 받을수 있데요...
이 집 빼면 예치금 정도는 돈이 나올거예요...그리고 아빠 수술받으
시게 한다음 그 다음 수술비는 어떻게든 우리가 만들어 봐야죠.]
[뭐!! 이집을 뺀다고!!]
진영이 끔찍한 표정을 지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안돼!! 이집 빼면 우린 당장 어디가서 살라고!!]
철없는 진영의 말에 하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언니!!! 언니는 지금 아빠가 중요해? 아님 이까짓 집이 중요해?
언니가 아무리 철이 없다고 하지만 정말 너무하는거 아냐?
어떻게 언니 한몸 편할것만 생각해? 아빠가 우리한테 평생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언니가 이러면 안되는거야...]
[처제..언니한테 너무 말이 심하잖아!!!]
진영을 향한 하영의 질책을 듣고 있던 동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몰라....나도 지금 머리속이 터질것 같단 말이야!!! 언니의
투정어린 하소염 들을 세도 없어...나 그만 병원에 가봐야해.]
하영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동식이 하영을 붙잡았다.
[처제!!!저....한가지 방법이 있긴 있어.]
[방법이라니요?]
동식의 말에 하영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 귀가 솔깃해졌다.
[저...사실은 어제 제우스 서 회장을 만나고 왔어.]
제우스란 말에 하영의 표정이 불쾌해져갔다.
[무슨 일인데요?]
[저...우리를 도와줄 생각을 하고 있더라구....나도 제우스에서
일해 주었으면 하고...또 어느정도 우리집에 도움을 주겠다고....
아..물론 제우스가 우리의 원수이긴 하지만 특별히 장인어른과의
옛정을 생각해서 베푸는 정 아니겠어?]
하영은 얼마전 서 회장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을 떠올리며 의심쩍은
얼굴로 동식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예요? 정말 서회장이 우릴 돕겠다고 했어요?]
[그...그래....그런데 말이야.....]
[그런데요?]
[저.....서 회장이.......처제가 한번 찾아와 주었으면 하더라구...]
[저를요?]
[에이....솔직히 까놓고 이야기 할께....서회장이 처제한테 관심이
있어.....그 관심이라는게 그 뭐냐.....]
동식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자 하영은 그대신에 대답을 이었다.
[형부.....그 사람....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지금 저한테 그 사람을
만나보러 가라는 거예요? 지금 형부가 저한테 그런 말을 하는거예요?]
동식이 하영의 물음에 대답을 못하자 잠자코 듣고만 있던 진영이
나섰다.
[하영아.....어쩌니 우리 상황에 찬밥 더운밥 가릴때가 아니잖아....
서회장이 너를 이뻐 한다니까.......너만 마음 굳게 먹으면.....
아빠 수술비도 구할수 있고 그리고 우리도 이런 지긋지긋한 지하방에서
탈출할수도 있고.....형부도 번듯한 직장이 생기니까.......]
진영의 말에 하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언니!! 정말 내 언니 맞아? 어떻게....나한테.........]
[하영아.....]
[싫어....절대로 안돼. 내가 저번에 서 회장을 만나러 갔다가
어떤 수모를 당하고 왔는지 언니는 몰라....그 자 한테 가느니
차라리 내가 술집에라도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게 나아...싫어.]
하영은 진영과 동식을 다시는 상종도 하기 싫다는듯 그들을 노려보고는
자신의 가방을 챙기고는 집을 뛰쳐나갔다.
[아....정말 처제는 왜그렇게 자기밖에 몰라? 한번만 눈 딱 감아주면
돈이 저절로 굴러 들어온다는데......]
동식이 화를 내자 진영은 동식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동생을 원망했다.
집을 뛰쳐 나오며 하영은 식구에 대한 배신감에 눈물을 쏟았다.
자신을 돈때문에 그 능글맞은 구렁이한테 먹이감으로 던져주려는
언니와 동식도 미웠고 자신을 볼모로 자신의 식구를 뒤흔드는 그
서회장도 미웠다.
병원에 도착한 하영은 자신의 짐가방을 중환자 가족 대기실에 있는
사물함에 집어 넣고는 아버지를 보기 위해 세균 소독 의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히 중환자실로 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영은 그들을 보며 직감적으로 밀려드는 두려움으로 그들을 따라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중환자실로 들어서자 의사들이 우진의 침대에 몰려있었다.
[무..무슨 일이죠?]
[환자 혼자 나두고 어딜 그렇게 다니십니까?]
[자..잠깐 집에...]
[당장 수술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환자 상태가 좋지 않아요.]
의사들은 우진의 침대를 급히 다른곳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아빠!!!]
하영은 의사들에 의해 어디론가 실려가는 우진의 침대 손잡이를 잡고
애타게 우진을 불렀다.
수술실이라는 전광판이 붙어있는 곳으로 우진으 들어서자 간호사가
따라 들어가려는 하영을 막아섰다.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하영은 굳게 닫힌 수술실 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빠......제발.........견뎌내줘요.....]
하영은 간절히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기분이였다.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릴때가 아니야......하영아 너만 굳게
마음만 먹는다면....아빠도 살리고...우리도 편히 살수 있어...
백지 상태의 머리속에 언니 진영의 말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영은 고개를 들어 수술실 문을 바라보았다.
[아빠........내가 꼭 아빠를 살리고 말거예요..꼭.]
#10
[회장님...전화왔습니다.]
인터컴이 울리며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지?]
[강 하영씨라고 합니다.]
[어..그래? 연결해요.]
서 회장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힘이 없는 하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그래...전화를 다 주다니....]
[저..저번엔..그렇게 인사도 못드리고 와서 죄송했습니다.]
[죄송하기는.......]
[저.......]
하영은 입이 떨어지지 않는 말을 내뱉기 위해 힘들어 했다.
[부담갖지 말고 편안하게 이야기 해봐...]
이미 서회장은 하영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올것을 짐작했다는듯
놀라는 기색없이 하영의 전화를 받아주고 있었다.
[형부한테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정말.....형부한테 말씀해
주신 그대로 인지.......]
[아버지가 쓰러지셨다지? 저런 걱정이 많겠구만........뇌출혈이면
수술비도 만만치 않지만 그 후에 들어가는 병원비만 해도 힘들텐데...]
서 회장은 정확히 하영의 어려움을 꽤뚫고 하영을 서서히 자신이
파 놓은 늪속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저...만나뵙고 싶습니다.]
[그래?]
[자..장소는 회장님이 말씀해 주시는 데로......]
하영은 관절이 다 드러나도록 하얗게 변하도록 핸드폰을 꼭 쥐고 있었다
[그럼.....장소는 내가 차후에 일러두지........오늘 사람을 통해
일단 아버님 수술비 먼저 보내주도록 하지.....]
[고..고맙습니다.]
[고맙기는.....이정도는 도와줘야지.....내가 강회장이랑 한두해
맺어온 인연인가? 하하하하]
전화를 끊는 하영의 입술에선 어느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너무 힘껏 입술을 깨물었는지 살점이 뜯겨져 나가
피가 흘러 입안에 찝찝한 맛이 느껴졌다.
***********
미령은 자신의 앞으로 배달되어 온 작은 소포용 종이 봉투를 찢었다.
뜯어진 봉투를 거꾸로 들어올리자 사진으로 보이는 것들이 어지럽게
우수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사진을 들어올려 사진 속에 주인공을 관찰하는 미령의 눈이 얇아지며
신경질적으로 한장한장 사진을 넘겨갔다.
사진속의 주인공은 자신이 사진이 찍힌줄도 모르고 하나같이 먼 산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미령이 보기에도 무표정한 모습의 사진이 이였지만 사진속의
주인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미령의 질투를 일으키게 하는건 자신이 잃어가고 있는
싱싱한 젊음을 이 주인공은 가지고 있었다.
그때문에 서 회장이 미령을 조금씩 멀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미령은 자꾸만 밀려드는 질투심때문에 사진을 소리나게 손을 찢기
시작했다.
보기흉하게 잘려나간 사진들이 바닥에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못된년 같으니라구.....어디서 꼬치 칠 때가 없어서..]
미령의 붉은 입술이 일그러지며 마지막 사진마저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 번호를 통해 누군인지 확인한 미령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래.나야....무슨 일이지?]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나자빠지면서 둔탁한 소리를 냈다.
[뭐? 그 년한테 전화가 걸려와?]
자신이 돈으로 심어놓은 서 회장의 비서의 전화였다.
[그래.알았어....또 전화가 걸려오면 다시 연락해.]
전화를 끊은 미령은 어디론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걸려왔다.
[나야.]
[그래..사진은 잘 받아봤어?]
[응.한가지 부탁이 있어...들어줄래?]
미령의 목소리가 갑자기 유혹적으로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데? 당신이 원하는건 다 해줄 자세가 되어있지...]
[강 하영....그 여자좀 처리해줘.]
[어떻게?]
[그냥.....간단하게 손만 좀 봐줘......다시는 그 얼굴로 남자앞에
설수 없도록 ...내말 무슨 말인지 알지?]
잔인한 미소가 미령의 입가에 피어났다.
[알았어.걱정말라고....]
미령은 스산한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발 밑에 떨어져 있는 찢어진
사진속에 있는 하영의 얼굴을 발로 짓밟아 버렸다.
***********
민혁은 환자 가족 대기실 의자에서 이불하나 없이 처량하게 쪼그리고
누워서 잠이 든 하영을 애처럽게 내려다 보았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머리맡에 앉아 하영이 숨을 내쉴때 마다 들썩이는
가녀린 어깨를 쳐다보았다.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온 사이 민혁의 왼팔이자 굳은일도 마다 하지 않고
처리해주는 기찬이 전화로 민혁에게 하영의 아버지의 소식을 알려왔다.
일이 끝나는 데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즉시 민혁은
하영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온 터였다.
민혁은 조심스럽게 대충 묶어 올린 하영의 긴 머리에서 흘러나온
머리카락을 쓸어올려주었다.
[참 가여운 모습으로 자는군.....]
민혁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양복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기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간단하게 덮을 만한 담요하고 피로회복제 같은 약좀 사와.]
[네. 알겠습니다.]
하영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 이건 꿈이라고 믿고 있었던건 그녀는 예전에 하영이
살던 청담동 집의 하얀 레이스로 치장된 자신의 침실에 누워 편안한
잠을 청하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비록 꿈이지만 하영은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조용하고 편안하다고
느껴졌다.
비록 자신의 침실은 빛도 하나없는 어둠에 잠겨있지만 하영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누군가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누구시죠........]
하영의 물음에도 아무 대답이 없는 그 사람은 천천히 하영이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앉아 누워있는 하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의 손길이 자신의 이마를 부드럽게 스쳐갔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에 기분좋은 한숨을 내쉬며 하영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그 사람의 손길은 천천히 그녀의 이마에서 콧날로 콧날에서 그녀의
입술로 옮겨가고 있었다.
[나의 아름다운 프쉬케.........]
하영의 귓가에 노래처럼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의 손길이 멀어지고 있었다.
[가지 마세요....]
하영이 어둠속에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언제나 그렇게 어릴때의 하영의
꿈속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또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대기실로 모여든 다른 사람들의 웅성거림때문에 하영은 잠에서
깨어났다.
어릴때 부터 꾸었던 꿈이였는데 그 꿈은 한동안 뜸했다가 요사이
또다시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타났다.
아직도 자신을 프쉬케라 부르는 그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프쉬케......
어릴적 나비 브로치를 하영에게 건네주며 자신의 품에 따뜻하게 안아주며
하영에게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프쉬케라는 아가씨의 사랑이야기를
들려주었던건 그녀의 새엄마였다.
새엄마는 하영에게 자신의 나비 브로치를 주며 언젠가 프쉬케와 같이
하영에게도 아름다운 사랑이 나타나면 그 상대에게 이 나비를 주라고
이야기도 해주었다.
에로스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험난한 여정도 슬기롭게 이겨냈던
프쉬케는 하영이 늘 동경해 왔던 인물이였다.
하영은 늘 자신을 어둠속에 프쉬케라 불렀던 그 사람이 누굴까 궁금해
왔었다.
비록 얼굴도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았지만 하영은 직감적으로 그 의문의
사람은 남자라는걸 알고있었다.
하영은 나름데로 그 남자를 에로스라 칭하며 자신의 상상속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힘들때 마다 자신의 침대에서 하영을 안아주며 달콤한 말들을
속삭여 주었던건 에로스였다.
하영은 벽에 걸리 시계를 보고는 자신이 너무 자버렸다는것을 알았다.
급히 몸을 일으키자 하영의 몸에 덮여있던 하늘색 담요가 툭하며
바닥에 떨어졌다.
하영은 담요를 들어올리며 의아해 했다.
분명 하영의 물건은 아니였다.
[저.....이 담요.....주인 있으세요?]
하영이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사람들은 다 손을 흔들었다.
[누구지?]
하영은 담요를 만지작 거리다 자신의 사물함에 넣어버렸다.
#11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민혁은 잠들어 있던 하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 일본 간사이 더 별일은 없었어?]
민혁은 운전하고 있는 기찬에게 물었다.
[저...서회장님과 이 동식 사이에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동식?]
[예....그리고 하영 아가씨 집에 갔다가 이상한 사람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사람이 하영 아가씨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누구지? 왜 사진을 몰래 찍는단 말이야?]
[얼핏 보기에는.........최 성호 같아보였습니다.]
[최성호?]
민혁은 왠지 낯잌은 이름에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갑자기 생각나는 어떠한 사실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최 성호라면.......사브리나 지배인 아니야?]
사브리나는 송미령이 예전에 운영했던 룸살롱의 상호였다.
송미령의 뒤를 봐주며 그녀와 함께 일했던 룸살롱의 지배인이 바로
최성호였다.
어느 순간 부터 이상한 미령의 행동에 민혁은 그녀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조사로 부터 송미령과 최성호는 보통 사이가 아니였음을
알아내었다.
민혁은 굳이 그들의 관계를 서 회장에게 알리지 않았다.
미령은 최 성호라는 남자보다 서 회장이 가지고 있는 재력을 더욱
탐을 냈으니 섣불리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을거라는 민혁의 생각이였다.
하지만 최 성호가 하영의 뒤를 캐고 다닌다는 그 배후에는 분명히
송미령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젠장......결국엔 알아버렸군.]
민혁은 미령의 무서울만치 집요한 서 회장에 대한 독점력을 알고있다.
서회장이 한번씩 건드린 여자들은 모두 미령의 서슬퍼런 독기에 스스로
나가 떨어졌다.
민혁은 솔직히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여성 편력을 해결해 주는 미령이
편하기도 했다.
[강 하영 주위에 사람하나 붙여놔....]
[네. 알겠습니다.]
***********
하영은 정성들여 화장을 하다가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쪽 눈에만 바른 마스카라때문에 짝짝이로 보이는 자신의 눈이
참 우숩고도 서글프게 느껴졌다.
마저 화장을 마친 하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제일
예쁜 디자인을 가진 원피스를 꺼내 입고는 스타킹을 신고 하영이
아끼는 향수를 목과 팔목에 정성스럽게 뿌려주었었다.
택시를 타고 서 회장과 만나기로 한 호텔로 향하는 하영의 마음은
의외로 차분하고 담담했다.
다른 방법이 있을거라고 넌 자존심도 없는 사람이라며 끊임없이
스스로 자책하며 반문하던 마음도 이젠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오직 병원에 누워있는 아빠만을 생각해내려 애썼다.
어느새 택시는 호텔앞에 멈추어섰다.
하영은 택시값을 지불하고는 택시에서 내려 우뚝 솟은 호텔을
바라보았다.
하영은 왠지 사람들이 자신을 손가락질 하는것처럼 느껴지자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는 호텔안으로 들어가 프런트로 다가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제우스 그룹.....]
[아..네..강하영씨 되시죠?]
제우스라는 명함만으로도 대번에 자신의 이름이 직원으로 부터
튀어나오자 하영은 밀려드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빨개졌다.
왠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 직원이 눈빛이 자신은 다 알고 있다는듯
하영을 비웃고 있는것만 같았다.
[네...]
하영이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직원은 하영앞에 열쇠를 내밀었다.
209라고 쓰여진 열쇠를 물끄럼이 바라보고 있던 하영이 열쇠를
받아들었다.
하영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서둘러 엘리베이터로 다가가
문이 열리자 마자 올라타고는 문을 닫았다.
하영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209호라고 쓰여진 호텔 객실 앞에서 머뭇거리던 하영이 열쇠로
문을 열었다.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돌아가는 소리가 마치 하영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는것만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특급 호텔 답게 호화스럽게 장식된 객실 내부가
드러났다.
하영은 애써 커다란 침대를 외면하며 조그만 장식 의자에 앉았다.
그때 큰 소리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하영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쳐다보았다.
계속 울리는 벨소리에 하영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오..벌써 와 있었군.]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서 회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좀 일찍 왔어요...]
[나. 금방 올라갈테니 기다리라구...]
[네.]
전화를 끊은 하영은 그제서야 밀려드는 두려움때문에 방안을
이리저리 헤멨다.
민혁은 자신의 양복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받았다.
[네. 서민혁입니다.]
[도련님 접니다.]
다급한 기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최성호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최 성호가?]
민혁의 눈빛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강 하영은 지금 어디있지?]
[지금 프린스 호텔로 들어섰는데 최성호가 같이 따라 움직이는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호텔? 그녀가 왜 호텔에 들어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장 그녀가 어디있는지 알아내...나도 그리로 갈께.]
[네 알겠습니다.]
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급하 자신의 자동차 키를 챙겼다.
[오늘 이후 일정은 비워놔요.]
민혁은 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가며 비서에게 외쳤다.
프린스 호텔로 차를 몰아가는 민혁은 왠지 자꾸만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민혁은 핸드폰을 들어 급히 번호를 눌렀다.
[네...제우스 회장실 입니다.]
[서 민혁입니다. 회장님은요?]
[회장님은 지금 자리에 안계십니다.]
[어디 가신줄 알고 계십니까?]
[중요한 손님과 약속이 있으시다고 프린스 호텔로 가셨는데요...]
[네.]
민혁은 전화를 끊고 힘껏 자신의 옆좌석으로 전화기를 집어던졌다.
[젠장........]
민혁의 차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12
하영은 차가운 물로 세수라도 해야겠다 생각하며 욕실을 찾아
이리저리 서성였다.
왼쪽에 있는 문을 열자 대리석으로 꾸며진 화려한 욕조와 함께 욕실이
드러났다.
하영은 욕실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는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올려 찬물이 쏟아져 나오게 했다.
209호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슬며시 들어왔다.
이내 문이 다 열리면서 커다란 체격의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검은 장갑과 마찬가지로 검은색의 가죽 자켓을 입고 있었는데
그의 험상궂은 얼굴을 검은색이 더 선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문을 닫으며 객실내부를 훏어 보았다.
분명히 어디에 있을텐데.......
그는 주머니에서 신문에 쌓인 물건을 꺼내었다.
신문을 펼치자 금색으로 도금이 된 나이프 잭이 나왔다.
강 하영이라는 여자를 뒤쫓던 최 성호는 하영이 프린스 호텔로 발걸음을
하자 그는 그녀가 서 회장과 만나러 가는 길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하영이 홀로 객실로 들어가는걸 본 최성호는 서 회장이 들어오기전에
빨리 일을 해결해야 겠다 생각하며 몰래 문을 따고 하영이 있는
객실로 들어왔다.
하지만 하영은 어디에도 객실 안에 있지 않았다.
이 기집애가 어디로 간거야?
마지막으로 성호가 욕실문을 열어보려 하자 철컥하는 객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호는 재빨리 짙은 녹색의 커텐뒤로 몸을 숨겼다.
문이 열리며 서 회장이 들어서고 있었다.
망할 영감쟁이.....
성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어떻게든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겠다고 생각하며 나갈 방법을 궁리했다.
그때 서회장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칸막이로 침실과 분리되어
있는 작은 객실로 들어갔다.
성호는 이때다 하며 재빨리 침실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누..누구야!!!!]
다시 침실로 되돌아 오던 서 회장과 성호가 딱 마주치게 되자 성호는
본능적으로 칼을 들어 올려 서 회장을 위협했다.
[너..넌...]
서 회장이 성호의 얼굴을 기억해 내기 시작했다.
[니가 왜 여기에 있지......]
서 회장이 성호가 자신의 앞으로 내민 칼 앞에서 떨며 그를 노려보았다.
[영감쟁이......조용히 해....그냥 미령이랑 조용히 살지.....
왜 젊은 여자들을 끌어들이고 그래? ]
[너....내가 너랑 미령이 그 계집애랑 관계를 모를꺼라 생각했나?
난 처음부터 너희들이 그런 관계인줄 알면서도 미령이를 데리고 왔어.....둘은 내가 속아넘어가주는줄도 모르고 ....멍청한 것들...]
서 회장의 말에 발끈한 성호가 서회장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다시 말해봐........뭐라고?]
[니가 아무리 미령을 꼬셔내려 해도 너에게는 단 한푼도 넘겨줄수
없어...더러운 파리처럼 미령이랑 내 주위에 알짱거리지 말고
조용히 사라져....]
턈욕스런 서회장의 눈을 본 성호는 한순간에 이성을 잃었다.
[이 영감쟁이가!!!!!]
성호는 서 회장을 힘껏 침대로 떠다 밀었다.
[죽여버리겠어!!!]
성호가 칼을 들고 서 회장에게 달려들자 서 회장은 재빨리 몸을
굴리며 스텐드를 집어 들어 성호의 머리를 내리쳤다.
[니..니가 나를 죽이겠다고!!!]
머리를 감싸고 쓰러진 성호를 또다시 내리치려고 다가가던 서 회장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았다.
[으ㅡㅡㅡ.]
서 회장이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으며 손에 들고있던 스텐드를 떨어뜨렸다
[왜이래....]
성호가 놀란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서회장을
바라보았다.
서회장은 무슨 말인가 하려 입을 벌리며 한손으로 성호의 멱살을 잡았다
[너...너...크흑....]
서 회장의 눈동자가 돌아가며 뒤로 몸을 제꼈다.
그리고는 그의 육중한 몸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바닥에 쓰러진 서 회장이 꿈쩍도 안하자 성호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이봐.....영감쟁이....]
성호가 발로 툭 서회장을 건드리자 그는 두 눈을 부릅뜬체 숨이 끊겨
성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뭐야..]
성호는 평소 미령에게 서 회장이 심장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바가
있어 서 회장이 심장마비로 죽었을거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겁을 먹은 성호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자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소리가
객실안을 울리고 있었다.
수도를 끝까지 틀어놓고 멍한히 딴 생각을 하고 있던 하영은 둔탁한
무언가 부서지는듯한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수도를 잠그고 욕실문을 열고 나서자 쓰러진 서 회장과 그의 앞에
서있는 칼을 들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하영은 끔찍한 광경에 앞뒤 가릴새도 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젠장...]
성호는 하영에게 칼을 들이밀며 다가서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객실을 빠져나갔다.
하영은 후들거리는 발걸음으로 쓰러져 있는 서회장에게 다가갔다.
그의 코 밑에 손을 갖다댄 하영은 그가 숨을 쉬고 있지 않는것을 알았다.
하영은 급히 전화기가 있는 곳을 뛰어가 아무번호나 막 눌렀다.
[네..프런트 입니다.]
[여..여기 209호인데요...사...사람이...사람이 죽었어요..빨리..]
하영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자신의 뒷목을 강하게 내리치는
바람에 그녀는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쓰러지는 하영을 민혁은 재빨리 자신이 안아올렸다.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빨리 이 여자를 데리고 나가.]
민혁이 죽어있는 서회장을 쳐다보며 같이 따라들어온 기찬에게
고함을 쳤다.
기찬은 정신을 잃은 하영을 안아올렸다.
[내 아파트에 데려다 놔.]
[예.]
기찬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서둘러 하영을 안고
객실에서 빠져나갔다.
[아버지.....아버지가 스스로 파신 무덤이예요..아무도 원망하지 마세요]
민혁은 비참한 아버지의 종말을 지켜보며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13
목 뒤의 뻐근함을 느끼며 하영은 희미하게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하영이 힘겹게 눈을 뜨며 눈에 들어오는 낯선 환경들을 익히기 위해
눈을 깜빡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하영은 무겁기만 한 몸을 어렵게 일으키며 자리에 앉았다.
벌써 밤이 되었는지 하영이 있는 방안은 어두웠고 은은한 스탠드 불빛
만이 방안을 유일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하영은 아파오는 뒷 목을 손으로 주무르다 문득 호텔에서 봤던 서회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맞어......서회장....]
하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가방을 찾았다.
하지만 그 방 어디에도 하영의 핸드백은 보이지 않았다.
하영은 전화기를 찾기 위해 방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방안에도 전화기는
있지 않았다.
[도데체 여긴 어디야......왜 내가 여기에 있는거지....]
하영은 복잡해 오는 머리속을 정리하기 위해 우뚝 서서 자신이 호텔로
들어가던 순간부터 차례차례 기억들을 열거해 보았다.
그때 갑자기 방안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며 스탠드의 불빛이 사라졌다.
[누..누구세요....]
깜깜한 어둠속에서 겁에 질린 하영이 방안에 들어와 있는 또다른
사람에게 외쳤다.
[강하영씨?]
어둠속의 사람은 굵은 목소리를 가진 남자였다.
그 사람이 남자라는 사실에 하영의 공포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네...제가 강 하영인데요....여기는 어디죠? 당신이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나요? 날 보내 줄수 있겠어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하영의 질문에 그 남자는 어떤 대답도 바로
해주지 않았다.
[지금 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어둠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두워요...불좀 켜주세요....]
하영이 감각으로 스탠드가 있는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됩니다. 그냥 그 자리에 서 계세요.]
명령과도 같은 날카로운 음성에 하영은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왜 내가 여기에 있는거죠? 제우스 그룹 서 회장이 죽었어요......
똑똑히 봤다구요....그 사람은 어떻게 됐죠?]
잠시 남자가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서 회장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세상에...]
하영은 떨림을 막기 위해 두손을 서로 꽉 쥐어잡았다.
[지금 부터 강 하영씨는 이곳에서 머무르셔야 합니다.]
[이곳에 머물다니요...무슨 이야기죠?]
[기자들과 경찰들이 사건 현장에 있었던 강 하영씨를 찾고 있습니다.]
[뭐..뭐라구요?]
[유일한 목격자이자 용의자는 함께 있었던 강 하영씨밖에 없죠.]
[말도 안돼요!!!]
하영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나..난 죽이지 않았어요.....그래요. 제가 욕실에서 나왔을때 한 남자가
있었어요..그 남자가 저도 죽일려고 했단 말이예요.]
하영은 그 남자의 얼굴을 기억해 내려 애썼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모든 것이 백짓장 같았다.
[설사 그 남자가 있다 하더라도 목격자가 없는 이상 강 하영씨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전..전화요....내가 직접 경찰에 전화해서 제 결백을 알리겠어요...]
[그것또한 안될 일 입니다.]
[안되다니요?]
[서 회장과 호텔에서 그것도 객실에서 따로 만나기로 한 이유가 뭐였죠?
왜 그 자리에 강하영씨가 있었는지 이유를 밝히려면 함께 만나야 했던
이유를 밝히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강 하영씨나 제우스도 큰
이미지 타격을 받을것이 분명한데요.....]
[아...말도 안되요...왜 하필 나죠?]
하영은 죽고만싶은 심정에 울먹거렸다.
[제가 모시고 있는 분께서 강 하영씨를 이곳으로 많은 사람들을 피해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그 분께서는 사건이 잠잠해 질때까지 강 하영씨
가 이곳에 쥐죽은듯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는 안돼요.....아빠가 병원에 계시다구요....]
[그것에 대해선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강 하영씨 아버님 수술비와
언니 강진영씨와 이 동식씨에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누가요?]
[강하영씨를 이곳으로 데려오신분]
[하..하지만....]
[믿을수 있는 간병인도 보내셔서 아버님을 24시간동안 돌볼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놓으셨으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왜...왜 나한테 이러는 거죠?]
[모든 사람이 행복해 지기 위해서죠. 어떠십니까? 솔직히 이 상황에서
강하영씨가 얻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분이 누구인지 알려주세요....왜 나를 돕는지....]
하영이 미심쩍은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제가 말씀 드릴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입니다. 그 외에는 어떤것도
말씀드릴수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강 하영씨에게 알려지는 것을
바라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강 하영씨가 만약
밖으로 나선다면 많은 언론의 표적이 될것이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병원에 계신 아버님이나 언니에게도 좋지 못할텐데요....]
그의 말을 듣는 하영은 갈수록 자신에겐 선택권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기 시작했다.
어찌 됐거나 자신은 지금 궁지에 몰리 새앙쥐나 다름없었다.
지금 상황에선 그 어떤 도움도 마다할 처지가 되지 못한것이다.
[좋아요...그렇게 하죠.]
모든것을 체념한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어둠속에서 떨리고 있었다.
[이곳은 외진 곳이라 인근에는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밖에 나가셔도
되지만 이 집의 울타리 밖으로는 나가시면 안됩니다.
이곳에서 강 하영씨의 살림을 돌봐줄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아침에 차를 타고 왔다가 저녁이면 다시 돌아갈겁니다.
먹을거나 입을거 필요하신 물건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부탁하면 됩니다]
[한가지만 물을게요.]
[네.]
[내가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러야 하죠?]
[그건 제가 말씀드릴수 없습니다. 그 분만이 그 기간을 알수 있죠.]
[그렇군요.....]
하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도 마시고 외부와는 절대 접촉 금지입니다.
그래서 집안에 전화기,컴퓨터, 강하영씨가 가지고있던 핸드폰..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완전 빠삐용이란 다름 없군.....]
[네?]
[아..아니예요. 그냥 혼잣말이였어요.]
[저는 그분의 말씀을 다 전해 드렸습니다. 그럼...행운이 함께 하시길.]
남자의 발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리며 남자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영은 재빨리 스텐드쪽으로 달려갔다.
[아야!]
어둠속에서 너무 급하게 서둘렀던 하영은 그만 침대 모서리로 보이는
부분에 발을 채이고 말았다.
하영이 아픔에 절절매며 스텐드 불을 키고는 창의 블라인드를 올렸다.
창밖으로 한 검은 승용차가 사라지는것이 보였다.
아.....이제 어쩌면 좋지....
하영은 병원에 누워있을 아버지가 너무도 걱정이 되었다.
하영은 힘없이 침대에 누워 두 눈을 감았다.
감기는 하영의 두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지금 이순간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아무것도 생각할수가 없었다.
그래....내일 생각하자...내일이면.....
#14
현재 공식적으로 심장마비로 사망한것으로 알려진 제우스 그룹의
서 재필 회장의 죽음을 둘러싸고 많은 추측과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서 회장이 왜 호텔 객실에서 죽음을 맞았는지 또한 그 객실에 다른
사람과 머물지는 않았는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한 목격자에 의하면 서회장이 사망한 객실에 한 젊은 여자가 들어갔으며
호텔 안내 프런트에 서회장의 죽음을 알리는 여자의 전화가 걸렸왔다고
목격자들은 진술하고 있습니다.
현재 경찰들은 그 여인을 찾고 있지만 현재 그 여인은 행방이 불분명한
상태라서 주위 사람들의 궁금증을 더욱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고 있던 하영의 눈에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 민혁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하영은 왠지 민혁의 모습을 보니 그에게 미안해지는 마음이 생겼다.
어쨌거나 그는 하나 밖에 없는 아버지를 졸지에 잃었고 그녀로 하여금
많은 매스컴으로 부터 시달리고 있는것이다.
하영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리모컨으로 텔레비젼을 껐다.
하영은 소파에서 일어나 바깥의 테라스로 연결되는 유리문 앞에서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영의 아침잠을 깨운건 어젯밤 그녀에게 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 남자의 말데로 하영이 머물고 있는 곳과 문명세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사람 가정부였다.
얼핏 마흔이 넘어 보이는 이 가정부는 생김새도 참 고우면서도
마음좋게 생긴게 하영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이 가정부는 필요이상의 말은 절대 하지 않았고 하영이 말을
걸기전에는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하영과 불필요한 대화는 나누지 말라고 철저히
교육을 받은 사람같아 보였다.
하영은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자신이 머물 곳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침실은 2층을 다 차지하고 있었는데 목조로 지어진 별장같아
보였다.
2층을 내려오자 커다란 벽난로와 함께 아이보리의 양모 카페트가
깔려 그위에는 하영이 보기에도 비싼 소파가 놓여있었다.
혹 옆에라도 다른 집이 있을까 밖으로 나가보았지만 주위는 커다란
호수와 우거진 나무들만이 보일뿐 하영이 머문 별장 이외에 사람이
사는 흔적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하영은 외부로 부터 그녀를 쫓고 있는 자들로 부터 철저하게 이곳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였다.
하영은 어제 서회장을 만나러 갈때 입었던 원피스를 그대로 입고
있는 것을 알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솔직히 이 옷을 입고 있는 자체가 왠지 찝찝한게 벗어버리고만 싶었다.
[저...아주머니....]
하영은 주방에서 과일을 씻고 있던 가정부에게 다가갔다.
[네.아가씨.]
지극히 예의바르고 깍듯한 대답이였다.
[제가 입을 옷이 없을까요...이옷은 불편해서 집안에서 입고 있기엔
좀 그렇네요......제가 옷이라곤 이거 하나밖에 없어서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가정부는 물을 잠그고는 자신의 거처로 보이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후 가정부는 커다란 종이 가방을 들고 나와 하영에게 건넸다.
[제가 잠시 깜빡했네요...여기 옷 몇벌과 속옷등을 준비해 왔습니다.
더 필요하신거 있으시면 제게 말씀하세요...다음날 올때 가지고 오겠
습니다....]
[고..고맙습니다.]
하영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가방을 받아들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침대위로 가방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다 쏟아버렸다.
가방안에선 편안한 면바지와 청바지 같은것들과 블라우스,니트등
이 쏟아져 나왔다.
하영은 옷을 집어 들고는 자신의 치수와 딱 들어 맞는 옷들의 사이즈를
보고는 깜작 놀랐다.
바지 허리 사이즈도 딱 맞아 들었다.
하영은 자신의 사이즈까지 다 알고 있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왠지 불신감과 거리감이 느껴졌다.
당장 내려가 가정부에게 옷을 사온 이가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내 하영은 포기했다.
하영의 눈에 종이 가방에 함께 들어있던 종이 상자가 보였다.
붉은 장미가 그려져 있는 상자의 뚜껑을 여니 속옷 세트가 나란히
준비되어 있었다.
모두 조그마한 들꽃이 자수로 새겨져 있는 파스텔톤의 수수한 디자인의
속옷들이였다.
그리고 연한 하늘색의 잠옷대용의 슬립도 들어있었다.
하영은 재빨리 원피스와 속옷들을 모두 벗어 던지고는 욕실로 달려가
몸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씻었다.
그리고 새 속옷을 꺼내 입고는 분홍색 반팔 니트와 청바지를 입었다.
새 속옷을 갈아입으니 기분이 좋아진 하영은 배가 고파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가정부는 조금은 늦은 아침식사를 준비해두었다.
하영이 식탁 의자에 앉아 맑은 콩나물 국이 하영의 식욕을 자극했다.
[같이 안드세요?]
하영이 앉자 주방을 나서려는 가정부를 불러세웠다.
[전 나중에 하겠습니다.]
[같이 하세요....혼자 먹기 싫은데....]
[괜찮습니다.]
가정부는 사양하며 주방을 나갔다.
하영은 왠지 쓸쓸한 기분을 느끼며 수저를 들어 콩나물국을 떠 먹었다.
담백하고 시원한것이 너무나 맛있는 하영은 어느새 식사를 하는데에
열중했다.
***********
대한 병원에 마련된 제우스 그룹 회장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갑자기 떠나게 된 서 회장을 향한 조의를 표했다.
하얀 소복을 입고 애처로운 모습으로 통곡하는 미령과는 달리 상주가
된 민혁은 무덤덤한 무표정으로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어쩌면 지 아버지가 죽었는데 눈물 한방울 안 흘릴수가 있지...]
[죽은 사람 앞에서 이런말 하긴 뭐하지만 서 회장이 아들과 사이가
무척 안좋았다고 하더만....저 여자때문이지.....]
민혁과 미령을 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소근대며 숨겨진 제우스 그룹
회장의 가정사를 들먹이고 있었다.
민혁은 그들의 속삭임을 애써 모른체 하며 이 지겨운 장례식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민혁은 마치 사람들이 자신에게 동정표를 던져 주지는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졸지에 잃은 가여운 미망인 역활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 송미령을 가증스럽다는듯 노려보았다.
최 성호가 미령의 사주를 받아 서회장이나 아님 강 하영을 해치려고
보낸것은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도 없고 하영이 나서지 않는 이상 그 사실은
비밀리에 영원히 묻혀지고 말것이다.
[저.....도련님....]
제우스 전속 담당 변호사인 김 변호사가 민혁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긴히..드릴말씀이 있습니다.잠시...]
왠지 심각해 보이는 김변호사의 표정을 보며 민혁은 그를 따라 장례식
장을 나갔다.
김 변호사와 함께 나서는 민혁을 미령은 울다 말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무언가 잠시 생각하다 미령은 그들을 쫓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이내 또 들어닥친 조문객들때문에 미령은 그들에게 붙잡혀
민혁을 놓치고 말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김 변호사의 승용차에 오른 민혁이 김변호사를 쳐다보았다.
[저....그게 자칫하다간 일이 크게 번질것 같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회장님께서 생전에 남기신 유언장이 있는데....그 내용이...]
[유언장이요?]
[네....그런데....]
김 변호사가 머뭇거리며 말하기를 어려워했다.
[괜찮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사모님께서 살아계시기 전에 작성된 유언장입니다. 제우스 그룹의
모든 지분은 도련님 앞으로 되어있으나 도련님께서 결혼하신 후에나
상속 받을수 있도록 작성되어 있지요. 만약 도련님께서 결혼하시기
전에 회장님께서 돌아가실 경우 그 지분은 도련님의 새어머니이신
사모님께서 맡아두셨다가 도련님께서 결혼하신후에 양도 하는걸로
되어있습니다.]
[하지만....제 새어머니는 돌아가셨는데....]
[그게....지금 가장 큰 문제가 그겁니다.]
김 변호사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민혁은 불안한 직감을 느꼈다.
[문제는 둘째 사모님이십니다.]
[왜죠?]
[오늘 유언장을 정리하며 몇가지 조사를 해봤었는데.....글쎄....
둘째 사모님께서 호적상 회장님의 부인으로 올라와 있더군요.]
[뭐라구요!!!!]
민혁이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럴리가 없습니다....아버지가 송미령을 아끼긴 했어도 혼인신고
는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
[그게...혼인신고 날짜를 보니 불과 몇개월전이더군요......제 생각엔
둘째 사모님께서 회장님 몰래 처리하신것 같습니다.]
[못된 년 같으니라구!!!]
민혁이 욕을 내뱉으며 승용차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도련님..]
김 변호사가 민혁을 따라 어찌할줄을 모르며 같이 따라 차에서 내렸다.
민혁은 끓어오르는 화를 감추지 못해 씩씩 거리며 거칠게 목에 맨
넥타이를 끄르기 시작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모든 지분은 현재 부인이신 둘째 사모님께로 넘어갑니다.]
[그건 안됩니다!!! 절대로 그럴수 없어요.]
[유언장상으로는 아무런 법적 하자가 없습니다.]
[젠장....젠장!!젠장!!]
민혁이 소리치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유언장 발효 시일을 어느정도 연기할수는 있습니다. 만약 그동안에
도련님께서 결혼만 하신다면.....]
[얼마나 낭았습니까?]
[두달입니다.]
[두달...]
민혁은 무언가 생각하는듯 잠시 침묵에 잠겼다.
[김변호사님은 저희집에선 한 식구처럼 오랜 세월같이 해오신 분입니다.
제가 김변호사님께서 제 편이라고 믿어도 되겠습니까?]
[물론 입니다. 도련님. 저도 제우스가 둘째 사모님께서 넘어가는건
두 눈뜨고 볼수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두달만 기회를 주세요....절대 그 술집여자에게 제우스를
넘겨주진 않을겁니다.제우스는 모두 내것이예요...절대 줄수 없어요.]
민혁은 다시 넥타이를 제대로 매고는 새로운 적수로 등장한 여자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장례식장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15
서 회장은 서씨 가문의 선산에 묻혔다.
모든걸 끝내고 돌아오는 차안에서는 모두가 지친듯 피곤한 얼굴로
아무말이 없었다.
미령이 타고 있던 승용차가 청담동 집앞에 멈추어 서자 곧이어 민혁의
승용차도 뒤쪽에 주차되었다.
미령은 집으로 들어서면서 한동안 비워둔 집안에서 먼지 냄새가 나자
신경질을 부리며 커텐과 창문들을 있는데로 다 열어제쳤다.
민혁은 미령의 그런 행동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며 소파에 앉았다.
[아파트로 돌아가지 않아? 왜 이리로 왔지?]
미령이 의심스런 시선으로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있는 민혁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도 안계신데....혼자 이 커다란 집에서 쓸쓸하시겠어요.]
민혁의 말에 미령의 길다란 눈썹이 올라갔다.
[무슨 이야기야? 민혁이가 내 걱정을 다해주다니 의외인걸?]
[내일 제 아파트 비우고 이곳으로 들어올겁니다.]
민혁의 폭탄같은 발언에 미령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여기 들어와?]
[네. 예전에 제가 쓰던 방을 쓰면 되니까 그방좀 청소해놔 주세요.]
[하지만...왜 갑자기....싫다고 나갈때는 언제고...]
[왜요? 아버지 집에 아들이 들어와 사는게 이상합니까?]
민혁이 서슬한 말에 미령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니..그런건 아니야...그래...내일 들어와.나..좀 쉬어야 겠다.]
미령은 자신의 검은 색의 숄과 핸드백을 챙겨 방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민혁은 알듯모를듯한 미소를 지으며 미령이 들어간 방을 노려보았다.
[그 어느것도 쉽게 당신에게 넘겨주진 않을꺼야.....당신을 제일
쉽게 옭아 매는 방법은 바로 내곁에 두는거지......]
민혁은 소파에서 일어나 자신이 쓰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방문을 열자 오랫동안 비워두어서 그런지 가구 마다 먼지가
자욱하게 쌓여져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날 아버지를 원망하며 집을 뛰쳐 나가던
그날과 같이 모든건 다 그대로였다.
민혁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야....내 아파트 짐 모조리 다 쌓아놔....청담동 집으로 다시
옮겨 놓을꺼야.....]
***********
하영이 이 커다란 별장으로 온지도 벌써 삼일째가 지나가고 있었다.
하루종일 하영은 텔레비젼과 가정부가 구해다준 여러 잡지책들을
들춰보며 무료한 시간들을 달래고 있었다.
해가 지자 가정부는 저녁 식사를 차려놓고 또다시 돌아갔고 홀로
큰 집에 덩그러니 남겨진 하영은 절대 밤에는 1층에 내려가지 않고
2층에서만 활동했다.
커다란 집에 혼자만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무서웠기 때문이였다.
하영은 벌써 3번째 다 읽어버린 잡지책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는
침대옆의 탁자위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시간은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하영은 차라리 빨리 잠자리에 들어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겠다
생각하며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가정부가 가져다준 하늘색 슬립 만을 걸친체 기분좋은 비단 이불속으로
쏙 파고 들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얼마뒤 하영은 꿈속인듯 어느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스쳐가는 가는
황홀한 손길에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의 팔을 스치던 손길은 점점 위로 올라와 하영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하영은 기분좋은 신음을 내뱉으며 자신을 만지는 손길에 모든 것을
내맡겼다.
손길이 하영의 입술을 부드럽게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뜨거운 입술이
하영의 입술위에 내려앉았다.
조심스럽게 하영의 입술위에서 움직이던 입술이 점점 깊은 키스를
시도해 왔다.
[음....에로스......]
하영은 속삭이며 살며시 입을 벌렸다.
그러자 뜨거운 혀가 침범하며 하영의 입안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편안하면서도 자신에게 열정을 일으키고 있는 키스에 하영은 열중하며
그녀 역시 키스에 대한 보답을 되돌리고 있었다.
순간 하영은 열중하고 있는 키스가 왠지 실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한 열정에 하영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어둠속에서 누군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인체 키스를 하고 있었다.
하영은 그사람의 입안에 비명을 내뱉으며 그 사람을 있는 힘껏
밀어버렸다.
[누..누구세요..]
누군가 자신의 방에 침범했다는 사실에 겁에 질린 하영이 본능적으로
스탠드의 불을 키려고 했다.
[켜지마......그냥 놔둬.]
위협적인 어둠속의 목소리에 하영은 흠칫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두었다.
[누..누구시죠? 왜 이곳에 있는거죠....]
[당신을 해치려고 들어온게 아니야.....]
[혹시.....날 여기에 데려다 준...그 분이신가요?]
어둠속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응.]
그의 간단한 대답에도 순간 하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했건 일단 그가 강도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안심이 된 그녀였다.
[누구시죠? 누구신지...얼굴을 보고 싶어요.]
[안돼.이제 나를 보는건 어둠속에서 뿐이야...나를 알려고 하지도 말고
볼려고 하지도 마.그게 우리 간의 약속이야. 당신이 그 약속을 어기면
당신 식구들에게 내가 베푼 모든건 다 끝장이야....]
[아..안돼요.그러지 마세요. 당신이 하라는데로 할게요.....어차피
난 아버지때문에 그 짐승같은 서회장에게 스스로 걸어갔어요....
이정도쯤 정말 견뎌낼수 있어요.....]
하영은 어둠속이지만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고
느껴졌다.
[부탁이 있어요.....우리 아빠...소식좀 알수 있을까요?]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수술후 의식도 돌아오셨어......]
[저..정말이요?]
하영이 어둠속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앞에 서있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고..고마워요...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종종 우리 식구 소식좀 여기 있는동안 듣고 싶은데.....]
[알았어..내가 전해주지....]
[고마워요.]
하영은 아버지가 무사하다는 소식 만으로도 이까짓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 어쨌든 아버지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온다면 상관없었다.
하영이 잡고 있던 손이 하영이 얼굴을 쓰다듬었다.
[울고있군.......]
그는 뺨에 흐르는 하영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너무 기뻐서요...사실 요 며칠동안 아빠 생각때문에 불안했거든요...]
[걱정 그만하고...자....다시 오지.]
눈물을 닦아주던 그의 손이 방금전의 키스로 인해 알맞게 부풀어 오른
입술을 스쳐갔다.
하영은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몸안에 솟아 오르는것같아 뜻하지 않은
열기로 당황스러워했다.
입술을 만지던 그의 손이 거두어 지자 하영은 알수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 시간에 다시 오지.]
문이 열리며 시커먼 그의 그림자가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하영은 그가 문을 닫고 사라질때까지 멍한히 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누구이건 자신과 가족을 돌봐준다면 더 이상 그를 궁금해 하거나
그를 알려고 하지 않을것이다 하영은 생각했다.
하지만 어둠속이지만 왠지 그의 손길이 낯설지 않은 느낌은 무엇일까...
#16
미령은 2층으로 올라가는 가구들을 팔짱을 끼고 바라보며 썩
유쾌하지는 않은듯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건 망가지지 않게 조심해서 옮겨주십시요.]
민혁의 비서 기찬이 들어서며 짐을 옮기고 있는 인부들에게 소리쳤다.
[기어이 들어오고 마는군.....]
미령은 기찬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기찬이 볼테면 보라는듯
홱 등을 돌리며 자신의 침실로 들어서며 쾅 소리 나게 문을 닫아버렸다.
미령의 그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듯이 기찬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민혁의 짐은 의외로 단촐하고 수수했다.
워낙 빈틈없고 깔끔한 성격의 민혁이라 자질구래한 물건들은 민혁의
아파트에선 볼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민혁의 사무용 책상이 2층으로 올라가자 기찬은 민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했다.
[수고했어...가구 배치같은건 내가 어제 일러준데로 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며 기찬은 민혁이 이 집으로 들어온것이 잘한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서 회장 생전에도 미령과 민혁은 견원지간 처럼 만나면 서로 으르렁
거리며 서로를 죽일듯이 미워했다.
그런 민혁이 서회장이 없는 이집에 더군다가 미령과 함께 지내기
위해 스스로 집안으로 들어간다는건 무슨 이유가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기찬은 굳이 그 이유를 묻지 않아도 조만간에 민혁이 자신에게 어떠한
지시 같은것을 내리게 되면 자연적으로 알게될 일이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죽어서도 사람들에게 기억되주길 원하고 있다.
그 말데로 라면 서 회장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을 존재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민혁과는 달리 사람들은 아직도 서회장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소문을 만들어 내는걸 좋아했다.
몇몇의 서재필에게 기생하며 영화를 누렸던 사람들만이 서 회장의
죽음에 관하여 쉬쉬하며 그들에게 새로운 다크호스로 떠오른 서 민혁이란
자에게 다시 기생하기 위해 바삐 움직일뿐이였다.
[사장님......김 변호사님 오셨습니다.]
문이 열리며 김 변호사가 민혁이 근무하는 사무실로 들어섰다.
[어서오십시요.]
민혁은 의자에서 일어나 김 변호사가 앉은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도련님..어떻게 뭐좀 알아보셨습니까?]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꾸며진 일 같습니다.]
[계획적이라니요....]
[서류상에는 분명히 아버지도 동의 하신걸로 되어있어요. 누군가
아버지 대신 싸인을 한게 분명해요....]
[그..그럼 누가 서 회장님의 흉내를 냈단 말씀이십니까?]
[예.]
[그..그렇다면.....]
[유언장에는 법적인 동거인 이라고만 표시되어있지 제 새어머니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어요....그들이 어쩌면 그 헛점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아버지에게 접근하고 몰래 혼인 신고까지 한거죠...]
[그...그렇지만 회장님이 언제 돌아가실지 알고 그런짓을 했겠습니까.]
[내 이혼 사실이 그들에겐 기회였을지도 모르죠...그들은 내가 다시는
결혼같은건 안할거라 생각하고 있었을테니까요......]
[그들이라면....또 누군가 있다는 말씀 이십니까?]
안경너머의 김 변호사의 눈빛이 불안한듯 흔들렸다.
[네. 송 미령과....그녀의 남편,내 아버지 흉내를 낸 또하나의 사람...
최성호란 작자일겁니다.]
[최성호?]
[송미령의 애인이죠......]
[세상에 그럴수가......]
[김 변호사님께서는 당분간 이일에 대해 함구해 주십시요.]
[네..알겠습니다.아..여기 유언장입니다.]
김 변호사는 자신의 검은색 서류 가방에서 굳게 봉인된 봉투를
꺼내 민혁에게 내밀었다.
[이걸 정말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전 도련님을 믿습니다....그리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도련님께서
숨겨 두시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민혁은 제우스의 운명이 달린 서류 봉투를 한동안 말없이 내려다 보았다.
문득 그는 세상사가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깟 종이 한장으로 몇십년동안 이뤄놓은 제우스 그룹의 행로를 결정
하게 된다는 것이 아이러니 했다.
***********
하영은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가며 텔레비젼을 계속 쳐다보았다.
집으로 돌아갈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각 채널의 뉴스란 뉴스는
모두 시청하며 사건의 추이를 지켜봐 보았지만 아직도 뉴스에서는
제우스 그룹 수장의 죽음에 관한 가십거리가 톱 뉴스로 내보내고
있었다.
하영이 텔레비젼을 보며 더욱 기가 막혔던 사실은 서 회장과 같이있던
여인이 연예계의 미모의 탈렌트 일지도 모륻다는 어이 없는 소문때문에
연예 프로에서 까지 서회장의 이야기를 보도 하고 있다는 것이였다.
사태가 도저히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물거품 처럼 사라지는
자신의 바램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하영은 신경질적으로 리모컨으로 텔레비젼을 꺼버린 다음 힘없이
자신의 침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으로 올라가던 하영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한 방향을 응시했다.
무료한 일상에 지쳐가는 하영에게 새로운 탐험같은 일이였다.
2층에는 자신의 머물고 있는 방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또하나의
방문이 왼쪽으로 꺽어지는 복도에 있는것을 발견했다.
하영의 방문 앞에서는 볼수 없지만 계단을 오르면서 보면 발견할수
있는 애매한 장소에 있는 방이였다.
하영은 계단을 마저 올라 그 방을 향하여 걸어갔다.
마치 비밀의 방 처럼 숨겨져 있는것이 더욱 하영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저 방안엔 하영을 돌보고 있는 어둠속의 남자에 관한 무언가가 존재
하고 있을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문 앞에 이른 하영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앞에두고 열까 말까
고민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서히 손을 가져가 하영은 조심스럽게 방문의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하지만 이내 굳게 잠겨있는것을 알자 밀려드는 실망감에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하영은 내일 가정부가 오면 열쇠를 달라고 해서 열어봐야겠다고 생각
하며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어쩌면 오늘 밤에 어둠속의 에로스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설레임을 안고 잠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하영의 머리속에는 온통 어둠속의 에로스에 관한 생각뿐이였다.
하영은 자신의 꿈속에서 나온 에로스와 그 남자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로지 밤에만 프쉬케의 침실을 찾아드는 어둠속의 에로스와 같이
그 남자 또한 어둠속에서 하영의 침실을 찾아와 두려움에 떨었던
하영을 위로해 주었다.
문득 그와의 지난밤의 키스가 떠오르자 하영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군지도 모르고 생김새 조차도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입술을 맡기다니
평상시 그녀의 성격이라면 있을수 없는 일이였지만 그 낯선 이방인에게
그녀가 알게모르게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수가 없었다.
#17
하영은 잠시 어둠속에 익숙해 지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자세로
거칠어진 숨을 고르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악몽이였다.
너무나도 끔찍한 악몽......
꿈속에서 죽은 서 회장은 하영을 향해 손을 내밀며 다가오고 있었다.
하영은 자신에게 다가오지 말라며 소리치고 있었지만 서서히 다가오는
서회장의 손길을 피할수는 없을것 같았다.
하영이 뒷걸음질 치며 크게 비명을 지르려 하자 누군가 뒤에서 세차게
하영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또다른 제 3자가 자신의 꿈에서 그녀를 끌어당기자 하영은 고개를
돌려 등뒤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서 민혁......
그가 하영을 바라보던 시선을 그들에게 다가오는 서회장에게 돌렸다.
당신도 저 사람과 똑같아.......
하영은 눈으로 민혁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난 저 사람과 달라.......
그의 뜨거운 시선은 하영의 말에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민혁은 조용히 하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라구요? 당신 손을 잡으라구요.......
하영이 묻자 그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싫어요.....
하영은 민혁에 대한 거부감으로 그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하영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스럽게 계속 손을 내밀고있었다.
하영은 벌써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서회장을 보자 소름이 돋았다.
하영은 서 회장과 서민혁 둘사이에 끼어버린 형국이였다.
하영은 밀려드는 공포심에 저도 모르게 민혁이 내민 손을 잡았다.
안돼........
서회장이 외치며 하영을 잡아 당겼다.
싫어요.....
하영은 서 회장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서회장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
했지만 힘을 준 서회장의 손아귀를 벗어나긴 힘들었다.
손 놓으세요.....
민혁이 소리치며 하영의 또다른 손을 잡아당겼다.
하영의 양 손을 하나씩 잡은 서회장과 서민혁이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힘껏 잡아당겨요.....
서회장에게 끌려가기 싫은 하영은 민혁에게 소리쳤다.
싫어....싫어!!!
하영은 악몽을 꾸느라 온 몸이 축축히 젖어 있었다.
하영은 샤워를 해야겠다 생각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샤워부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돌리자 샤워기에서 시원한 찬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직은 찬물로 샤워하기에는 추웠지만 하영은 개의치 않고 샤워기 아래서
쏟아지는 찬물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어느정도 끈쩍한 땀들이 씻겨내려가자 시원함을 뒤로 오한이 밀려들었다.
하영은 슬립을 벗어던져 버리고는 커다른 목욕타월을 서랍장에서
꺼내 알몸에 둘러 가슴 앞쪽에서 매듭을 지어 고정시켰다.
욕실을 불을 끄고 불 하나 켜지 않은 침실로 들어섰다.
침대 쪽으로 향하던 하영은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어두운 방안에 그녀 말고 또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문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하영의 동공이 확장되고 온몸이 오싹한체로
그대로 그자리에 얼어붙었다.
커다란 체격의 검은 그림자가 창가로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에
의해 드러나있었다.
[누..누구시죠....]
하영은 침을 꼴깍 삼키며 그림자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누구냐고 묻기는 했지만 그녀는 이미 그림자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만의 에로스.........
[당신이 침대에 누워있지 않아서 깜짝 놀랐소.]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몽을 꾸었어요....땀을 많이 흘려서 샤워를 했어요....저야 말로
깜짝 놀랐어요...심장이 떨어지는줄 알았다구요....]
어느새 하영은 그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상하지.....이 남자한테 왜 나는 이렇게 편안하게 마음을 놓는걸까...
[미안.....나때문에 그렇게 놀랄줄은 몰랐소.]
[항상 그렇게 어둠속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니까 그렇죠...]
[그건 나를 환영하는 뜻의 옷 차림이요?]
그의 말에 하영은 깜작 놀랐다.
그의 갑작스런 출현에 열중하느라 자신이 달랑 수건한장 걸치고
있다는걸 깜빡 잊었던 것이다.
[자..잠깐만 돌아서 주실래요...옷좀 갈아 입구요...]
[그냥 그대로 있어도 되요....달빛에 비친 당신의 실루엣이 참 아름답군.
여인의 몸이 이렇게 아름다울수 있다는걸 처음 알았소.]
하영은 마법에 걸린듯 그자리에 서서 그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불공평해요.......당신은 이렇게 날 볼수있는데...왜 난 당신은
볼수 없죠........]
[약속을 잘지켜야 착한 소녀라는걸 모르오?]
어둠속이지만 그의 입가에 왠지 미소가 걸린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난 소녀가 아니예요....]
[오...당신이 소녀가 아니라는건 잘 알고 있소....]
아슬아슬하게 걸친 수건위로 드러나는 자신의 맨살들을 그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문득 하영은 왠지 그의 말투나 억양이 익숙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영은 마른 입술을 혀로 입술을 축였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요....당신은 약속위반이라고 하지만...
왠지 당신을 예전부터 알고있던 사람인것 같아요......왜 날 돕는거죠?]
[때론 아무것도 모른체 지나가는 것이 좋을때도 있소.]
[서 민혁...그 사람과 관계있는 일인가요?]
느닷없는 하영의 질문에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왜...그자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거지?]
[제우스를 보호하기 위해 언론을 피하기 위해 날 숨길 사람들은
제우스쪽 사람들뿐이니까요.......서회장은 죽었고,,,남은 사람은
서 민혁 그 사람뿐이예요.서민혁이 시켰나요?]
[말할수 없소.]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그 사람이 시켰건 이제 와서 그거
무슨 소용이겠어요..어쨌거나 난 당신덕분에 많은걸 얻고 있잖아요...
당신은 서 민혁이란 사람과 왠지 비슷하면서도 틀린것 같아요...
왠지 그보다 더 신사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는 신사적이 아니란 말이요?]
비아냥거리는듯한 목소리였다.
하영은 그의 물음에 어깨를 들썩였다.
[솔직히 그는 너무 오만하고 무례해요...내 생전 그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니까요....그런 사람은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발아래에
꿇리고 싶어하죠.]
하영은 민혁과의 저돌적인 키스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당신이 계속 그런 차림으로 달빛아래 서있다면 나도 신사적이지만은
못할거라고 말해주고 싶군...]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에 하영은 그의 검은 형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쩔건데요?]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그녀의 발언은 매우 도발적이며 그를 자극하는
촉매재나 다름없었다.
아차 하며 하영은 입을 다물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그의 손에
의해 그가 서있는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어떻게 되는지 철저하게 알려주지.]
그가 으르렁 거리며 화난 그의 목소리가 이를 갈듯 흘러나왔다.
[미..미안해요..당신을 자극하려고 한 말은 아니였어요...]
하영이 더듬거리며 애써 자신의 등뒤의 맨살에 맞닿은 그의 커다란
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애썼다.
[이미 늦었어....제길..]
그는 욕설을 내뱉고는 머리를 낮추어 강력하게 그녀의 입술을 장악했다.
하영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그의 행동에 놀라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그의 품에 안겨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가슴의 근육에 하영의 부드러운 가슴이 짓눌렸다.
하영은 자신의 몸안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낯선 느낌에 몸을 떨었다.
자신의 몸안에 뜨거운 불꽃들이 튀어올라 얼어붙었던 그녀안의
얼음조각들을 하나하나 녹이고 있는것 같았다.
[그..그만해요...난......]
등뒤에 있던 그의 손이 하영의 가슴쪽으로 다가오자 하영의 반항은
입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가슴쪽에서 탐험을 하다 단단히 매어놓은 수건의 매듭을 발견하자
가차없이 그 매듭을 풀어버렸다.
매듭이 풀리자 수건이 스스르 밑으로 흘러내리려 하자 하영은 흘러내리
려는 수건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이 저지했다.
그녀의 나신이 적나라하게 그의 앞에 드러났다.
하영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는 그의 탐색적인 키스가 이어졌다.
이내 그녀가 항복하며 낮은 신음을 내며 입술을 열어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하영의 눈은 굳게 감겨져 있었고, 그녀의 팔은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위로 올라가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
그가 입술로 그녀의 목과 어깨의 쇄골을 따스하게 쓸어갔다.
하영은 그 순간 자신이 정말로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하영의 미모를 보고 아름답다고 칭찬하는 그런 가식적인
관심속에 하영은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거부해왔었다.
하지만 이순간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열정을 불러일으켜
주는 그가 고마웠다.
사람들의 눈요기거리인 예쁘장한 인형에서 살아숨쉬는 한 생명체로
거듭나는것 같은 기분이였다.
[에로스..........]
정신없이 그의 애무에 빠져들던 하영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영의 중얼거림을 들은 그가 갑자기 행동을 멈추었다.
갑작스런 그의 멈춤에 적응이 안된 그녀가 열정에 달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그의 얼굴의 윤곽이 드러났다.
[미안하지만 난 당신의 사랑의 화신이 아니요....낯선 남자앞에서
나신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서 있으면 이렇게 된다는걸 톡톡히
알았을거요....남자를 유혹할 만한 대담성이 없다면 다시는
이런짓 하지 마시오.]
남자는 강하게 하영을 밀쳐냈다.
하영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지 말아요.....]
[잘자요.]
그는 등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내가 도데체 무슨짓을 한거지.........
그제서야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깨닫게된 하영은 그를 잡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갔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1층이나 2층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볼수가 없었다.
#18
최성호는 시커먼 선글라스를 낀체 미령이 기다리고 있는 까페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먼저 그를 알아본 미령이 손을 흔들었다.
[당분간 연락하지 말라고 했잖아.]
성호가 투덜거리며 미령의 앞에 앉았다.
[상황이 안좋아.....민혁이 집으로 들어왔어..]
미령이 자신의 앞에 있는 물컵을 들어올려 마른 입술을 축였다.
[뭐? 서민혁이? 왜..갑자기.]
[몰라...뭔가 눈치챈것 같기도 하고......혹시 유언장에 관한거 아닐까?]
[젠장.......재수 없어 그런소리 하지마.....]
[솔직히 민혁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난 좀 불안해.....유언장때문에
김변호사에게 전화를 해봤는데...글쎄 딴소리를 하더라구...]
미령의 말에 성호의 인상이 험상궂어 졌다.
[딴소리라니?]
[아직 유언장의 공개시일이 두달이 남았다는 거야..]
[두달이라니..그게 무슨소리야....유언장 쓴 놈이 죽으면 당장에
유언장부터 공개해서 나눠가질껀 가지고 해야 할것 아냐!!]
성호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자 물컵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성호의 고함에 주위사람들이 힐끔거리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미쳤어?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떻게할려구!!]
미령이 고개를 숙이며 쓰고 있는 고급 상표의 선글라스를 더욱 깊게
눌러써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 자식이 유언장을 작성할때 자신이 죽고 나서 두달이후에 유언장을
공개할것을 명시했데....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혹 재수가 없어서 민혁이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우린 죽쑤어서 개주는
꼴이 되는거라구......]
[미쳤어? 그 새끼한테 모든걸 넘겨주게....내가 그 꼴을 보려고
서회장새끼 분장까지 하며 혼인신고 하러 간줄 알아? 젠장.......
사람까지 죽일뻔 했다구.......]
성호는 아직도 서회장과 몸싸움을 벌였던 호텔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무섭다는듯 진저리를 쳤다.
[아무래도 무슨 방법을 강구해야 겠어...당분간 민혁이 주위좀
잘 살펴봐...여자가 있나 없나....결혼이라도 하면 끝장이야.]
[에이...시팔....되는일이 하나도 없네....]
[참...그 기집애는 찾았어?]
미령이 목소리를 낮추어 성호에게 물었다.
[못찾았어...깜쪽 같이 사라져 버렸다니까....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진것도 아닌데.....]
[설마 병든 지 아빠도 버리고 도망갔을까봐?]
[없어..병원에도 지 집에도....식구들도 그녀가 어디있는지 모르는
눈치더라구.....]
[암튼...당분간 그 여자일은 제쳐두고 서 민혁이나 잘 살펴봐.]
[알았어......그나저나 이젠 우리 자유롭게 만날수 있는거야?]
성호의 눈빛이 달라지며 능글맞은 미소를 미령에게 보냈다.
선글라스 안으로 미령이 눈웃음을 치며 성호의 손을 잡았다.
[호텔 예약해놨어...나가자...]
오랜만에 연인을 만나 몸이 달아오른 미령이 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흐흐흐...그동안 그 늙은이한테 너를 빼앗겨서 얼마나 억울했었는지
알아? 이젠 늙은이도 죽고 없으니.....넌 내 차지야...]
성호가 미령의 허리를 힘껏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어머어머...사람들이 봐...]
미령은 급히 성호의 손을 떨쳐버렸다.
성호는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개가 주인을 따라가듯이 종종 걸음으로
미령의 뒤를 따랐다.
***********
민혁은 자정이 다되도록 미령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읽던 신문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다시 한번 시계를 확인했다.
[원래 이렇게 늦게 들어왔습니까?]
민혁이 가정부에게 물었다.
[저....]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회장님께서 안계시는 이상 이집의
주인은 저라는걸 모르시지는 않겠지요....집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 두어야 할것 아닙니까...]
민혁의 호통에 가정부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1주일에 두세번 ..........]
[됐습니다. 들어가세요.]
[하지만...사모님이..아직...]
가정부가 더듬거리며 난감해 했다.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예...안녕히 주무세요.]
가정부는 앞치마에 손을 닦아내며 자신의 방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민혁은 기가차다는 표정을 지으며 현관문쪽을 노려보았다.
쥬스라도 마시기 위해 민혁이 소파에서 일어나자 문을 열쇠로 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혁은 숨죽이며 미령이 들어서기만을 기다렸다.
미령이 조심스럽게 도둑 고양이 마냥 살금살금 들어오고 있었다.
[늦으셨군요.]
민혁의 목소리에 미령이 팔짝 뛰어오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아직 안잤어?]
[식구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는데 잠이 올리가 있습니까?]
민혁이 일부러 식구란 말을 강조하며 미령을 노려보았다.
[어...오늘 동창들끼리 모임이...있어서...늦었어...]
미령은 핑계를 대며 민혁의 눈치를 보았다.
[다음부터는 일찍 다니세요...아버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남보기도 안좋고.....가쉽거리 좋아하는 기자들이 아직도 우리집
근처에 깔려 있으니 괜한 루머 만들어서 제우스의 이미지를 망치시지
말란 말입니다.]
민혁의 저돌적인 말에 미령이 고개를 들어 민혁을 쳐다보았다.
[날 식구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몰랐는걸?]
미령이 자신이 입었던 고급 양가죽 재킷을 벗으며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민혁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안계시는 이상 이집의 주인은 저 입니다. 그건 인정하셔야
할거예요....앞으로 행동 자중하시고 정 할일이 없으시다면 봉사
활동 같은거라도 해보세요.....제가 아버지도 안계신 시점에서
그냥 새새어머니를 가만히 놔두는 이유는 그나마 아버지의 처로서
격식을 차려드리기 위함이지 아버지가 아니면 같이 살 이유도
업습니다...제가 이렇게 배려를 해드리는 이상 새새어머니도
절 배신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민혁의 위험스런 눈빛에 미령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협박하는거야?]
[충고라고 해두죠...이만 올라가겠습니다.]
민혁은 가벼운 목인사를 하고는 2층의 계단을 올라갔다.
올라가는 민혁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미령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궈버렸다.
[나쁜 자식.....가만히 두지 않겠어...감히 날 협박해?]
분에 못이긴 미령은 화장대 위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종 모양의 장식
을 집어들어 힘껏 집어던졌다.
청동장식이 벽에 걸어둔 그림액자에 맞으면서 액자의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에 흩어졌다.
서민혁.....
내 발아래서 애원하는 날이 올거야...두고봐....
#19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온 강 우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는 낯선 여인을 바라보았다.
우진은 손을 들어 그 여인을 깨우려 했지만 온 몸이 마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꼼짝도 할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의 몸통에 붙어 있는 모든것들이 감각을 멈춘것만 같았다.
산소호흡기 마스크 안에서 우진은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듯 입을 열었
으나 걸걸 하는 가래섞인 소리만 나올뿐 목소리를 낼수가 없었다.
[어머....어머......]
잠이 들었던 여인이 부시시 일어나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우진을
보고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정신이 좀 드세요?]
우진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여인이 반갑다는듯 무언가 계속 입을
달싹이며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무심한 여인은 그런 우진을 남겨둔체 병실을 뛰어나가고 있었다.
얼마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로 들이닥쳤다.
[강우진씨 정신이 드십니까? 여기가 어디인지 아시겠어요?]
우진은 말을 하기가 힘들자 두 눈을 힘겹게 깜빡이며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우진은 어떤 말을 건네려는듯 눈을 깜빡이며 의사를 바라보았다.
우진을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던 의사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따님을 찾으시는군요?]
드디어 의사가 우진의 마음을 알아주자 우진은 약하지만 고개를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리세요...집에 연락해 드리겠습니다.]
의사는 우진을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는 우진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보았다.
[강우진씨....어디 불편한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의사는 힘껏 우진의 왼쪽 다리를 비틀어 꼬집었다.
하지만 멍청이 천정만 바라보는 우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의사의 표정이 달라지며 우진의 왼쪽 손등을 또 꼬집어 보았으나
이번역시 우진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천정만 바라볼뿐이였다.
[역시.....예상대로군.....]
의사가 한숨을 쉬며 차트에 환자의 병상 기록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얼마뒤 진영과 그녀의 남편 동식이 잠을 자다만 표정으로 병실로
들어섰다.
진영은 들어서자 마자 울음을 터트리며 우진에게 매달렸다.
[아빠.....]
진영이 통곡하자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으로 진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괘....아...]
괜찮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자꾸만 뒤틀리고 어눌한 발음에
우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나 정말 아빠 큰일나는줄 알았단 말이예요...하영이도 그런데 아빠마저
세상에서 없어지면 나 혼자 어떻하라구...]
하영이란 이야기에 우진이 무슨 소리냐는듯 진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바로 하영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여보...뭐하러 처제 이야기는 꺼내...아버님 아직 완전히 회복되신
것도 아닌데.......]
[미..안해..그냥 나도 모르게 감정이 벅차 올라서...]
진영이 훌쩍거리며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내었다.
[어...어..하...어...]
[뭐라구요?]
[하...어...]
[아이참.....무슨 소리인지 못알아 듣겠네...]
진영이 우진의 말을 알아들으려 귀를 그의 입가에 갖다대었지만
무슨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수 없었다.
[처제 이름 말씀하시는거 아니야?]
[아빠..하영이? 하영이 말씀하시는거예요?]
진영이 우진에게 묻자 우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그게.....]
진영이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동식의 눈치를 보았다.
[아빠..하영이는....아이참 뭐라고 이야기 해야해?]
진영이 말문을 못 열고 짜증섞인 표정으로 동식을 바라보았다.
[처제는 나중에 올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장인어른.]
[어...어...]
[네..지금은 바빠서 못왔구요....나중에 올거예요.]
동식은 우진의 마음과는 달리 엉뚱한 대답만 하며 상황을 지나치려
했다.
그런 동식과 진영이 답답하기만 우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분명 하영에게 무슨일이 생긴게 분명했다.
하영이 성격에 바쁘다고 자신을 찾아오는걸 미룰 아이가 아니라는걸
우진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진의 병실을 나오는 진영은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아빠도 저렇게 정신이 돌아오시고....도데체 하영이는 어디에 있는거야.
우리야 아빠 수술도 해드리고..번듯한 집도 생겨서 좋기는 하지만....]
[걱정마...돈을 주고간 그 사람이 그랬잖아...처제는 자기들이 잘
데리고 있겠다고.....솔직히 처제 지금 돈 많은 누구하고 우리는
싹 잊고 잘 살고 있을지 누가 알어.....]
[하긴...그래.....]
[만약 처제한테 연락 오면 어디에 있는지나 알아봐...]
[알았어....]
***********
별장 주위를 기웃거리며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줄 무엇인가를 찾아
헤메던 하영은 낡은 창고 안에서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자전거를
발견하였다.
하영의 나무 기둥에 기대여 있던 빗자루를 들어 자전거의 먼지를
쓸어 내리자 하늘색의 아담한 자전거의 모양이 드러났다.
하영의 눈빛이 개구쟁이 처럼 빛나더니 자전거를 끌고 창고 밖으로
나왔다.
자전거를 타고 산책하기에는 너무 좋은 날씨라고 생각한 하영은
자전거에 훌쩍 올라 별장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오래되서 낡은 체인때문에 요란한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자전거는
그런데로 잘 돌아가고 있었다.
상쾌한 호수가의 바람이 불어 오며 하영의 하얀 레이스 치마를
펄럭거리며 하영의 늘씬한 다리를 드러냈다.
이미 기분이 좋아진 하영은 자신의 다리가 드러나는것도 아랑곳 안하고
콧노래까지 불렀다.
[넓은 길을 힘껏 달리면 더욱 기분이 좋지 않겠어요?]
느닷없이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하영은 급히 브레이크 핸들을
잡으며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그녀가 울타리 너머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편안한 여행복 차림의
낯선 남자가 서서 하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이 별장에 머무는 동안 한번도 다른 이를 만난적이 없다는걸
깨달은 하영은 본능적으로 낯선이의 출현에 몸을 사리며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시죠? 이곳은 사유지예요...아무도 들어올수 없는 곳인데요.]
[아....죄송합니다..호수 저 건너편에 낚시를 온 사람인데....
산책좀 한다는게 길을 잃어서....]
이 남자가 하영을 알리는 없겠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하영은 이 남자
에게 선뜻 곁을 주지 않았다.
[저도 이곳 지리는 잘 몰라요.......안에 사람이 있으니까 제가
여쭤 볼게요.....]
[저....죄송한데 물한잔 얻어 먹을수 있을까요?]
친근하게 구는 남자가 의심스러웠지만 하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울타리를 타고 훌쩍 뛰어 넘어 왔다.
하영은 별장안으로 들어서며 가정부를 불렀다.
[아줌마!!!!]
거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가정부가 하영의 뒤로 따라들어오는
남자를 보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낚시터에 낚시하러 왔다가 길을 잃으셨데요...물 한잔 드리고 가는
길좀 알려주세요....]
[네...그러죠.]
가정부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거 신세를 져서 죄송하게 됐네요.]
이제야 겨우 스물 서넛쯤 되보이는 이 남자는 하영의 또래와 비슷했다.
그를 살피던 하영이 시선이 낚시꾼들이 주로 입는 주머니 많이 달린
조끼에 머물렀다.
안쪽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 꼬물락 거리더니 까만 눈동자가 쏙 튀어
나와 하영을 보고 있었다.
[어머나!!!]
눈송이 처럼 하얀 털을 가진 애완용 토끼였다.
[어..이녀석 그속에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지!!!]
남자가 토끼를 억지로 주머니 속에 넣으려 했다.
[너무 귀여워요.....안아봐도 될까요?]
하영이 조심스럽게 부탁을 하자 남자는 토끼를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꺼내 하영이 내민 손바닥 위에 놓아 주었다.
그동안 주머니 속이 갑갑했는지 토끼가 발로 귀를 긁으면서 입을
오물 거렸다.
[여기..물이요....]
가정부가 어느새 물잔을 들고와 남자에게 내밀었다.
[어이고..고맙습니다.]
남자는 목이 많이 말랐는지 벌컥벌컥 물을 들이마셨다.
[너무 이쁘네요...직접 기르시나요?]
[네...집에만 있는게 갑갑해 보여서 데리고 왔죠...]
남자가 물을 다 마시자 하영이 아쉬운듯 토끼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남자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잘 마셨습니다. 아주머니...]
남자가 인사를 하며 가정부에게 물잔을 넘겨주자 가정부는 남자에게
친절히 낚시터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낚시터로 돌아가는 남자를 하영은 따라나섰다.
[여기서 사시나보죠?]
남자가 별장안으로 들어왔던 것처럼 훌쩍 또다시 울타리를 넘었다.
[아니요...잠깐...잠깐 쉬러 왔어요.....]
[아...네...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뭘요......]
하영은 웃으면서 남자가 돌아가는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곳으로 와서 처음으로 만나보는 외부인이 두렵기도 했지만
잠시나마 이야기의 상대를 만났다는것이 즐거웠다.
남자가 숲 너머로 사라지자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하영은 자전거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 다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커다란 나무 사이에서 승용차의 백미러가 반짝 거렸지만 하영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체 자전거 타기에 몰두했다.
하영을 지켜보는 승용차 안의 검은 눈동자에 뜨거운 불꽃이 튀어
올랐다.
#20
한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하영은 밤이 되자 뻐근해 오는
다리 근육때문에 끙끙 거리며 침대위에서 뒤척였다.
[운동부족이야....]
하영이 중얼거리며 잠을 자기를 포기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영은 문득 문을 바라보며 혹시라도 자신의 에로스가 문을 열고
그녀를 또다시 찾아 오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이틀전날밤 하영에게 열정을 불러일으킬만한 키스를 남기고간 그는
어제밤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하영은 깊은 숨을 들이쉬며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의 커텐을 활짝
제쳤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하영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호수위로 부서지는 달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울적해 지며
아빠의 얼굴이 그리워졌다.
하영은 갑자기 미치도록 이 별장을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낚시터에서 온 그 남자가 사라진 길을 따라 간다면 낚시터에
도착할것이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면은 서울까지 그녀를 데려다 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였다.
하영은 병원에 가서 잠깐 아빠의 얼굴만 확인하고 돌아오면 될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옷을 갈아입기 위해 붙박이 장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고 제일 활동하기 편한 옷을 꺼내 침대위에 던져놓았다.
하영이 옷을 갈아 입기 위해 슬립을 위로 벗으려고 할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들어섰다.
[탈출이라도 생각하셨나?]
하영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노크라도 좀 할수 없나요?]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하영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내가 말했을텐데.....내 허락 없인 이곳을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말라고.]
[나...난 그저....]
하영이 말을 잇지 못하며 침대위에 놓여진 옷들을 주섬주섬 들어올렸다.
[언제까지 이곳에 갇혀 있으라는 거예요!!! 정말 답답해서 미치겠어요.
전화도 안되고 주위에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고.....하루종일 할 일
없이 시체처럼 집안에 갇혀 있는 내 심정이나 생각해 봤어요?]
하영의 외침에 재빠르게 그가 다가와 하여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일을 이렇게 만든건 바로 당신이야.....난 당신과의 약속을 충실히
하기 위해 당신 아버지의 수술비와 식구들까지 돌봐줬어.....
그런데 당신은 나와의 약속을 지킨게 뭐가 있지?]
어둠속에서 분노에 가득찬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무슨 소리예요?]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막기 위해 당신을 이곳에 데려다 놓은거야....
그런데 고새를 못참고 젊은 남자하나를 꼬셔두었더군.....]
[그...그 남자는 길을 잃고 이곳으로 온것 뿐이였다구요!!!!당신그럼
날 지켜보고 있었군요!!!!! 뭐예요!!! 날 감시하고 있었던 건가요!!]
[내가 감시하지 않았다면....당신은 지금도 이렇게 탈출을 시도하려고
했잖아........약속을 어긴건 당신이야!!!]
남자가 하영을 마구 흔들어 대자 하영의 고개가 이리저리 힘없이
흔들렸다.
[그래요!!! 탈출하려고 했어요!!!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구요...
병원에 가서 아빠만 보고 다시 돌아올려고 했어요...정말이라구요...]
[그 말을 나보고 믿으란 말인가?]
[믿건 안믿건 당신 자유예요.....그래요. 약속을 어겼어요..그래서
어쩔건데요? 이번에 지하에 꽁꽁 가둬 놓을건가요? 빛도 들어오지
않는곳에 가둬놓고 또 나를 감시할건가요?]
감정이 격해 질데로 격해진 하영도 그에게 맞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약속을 어겼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지..안그래?]
하영이 미처 반항할 새도 없이 그의 입술이 거칠게 하영의 입술을 훔쳤다
하영은 그에게 발길질을 했지만 그는 꼼짝도 안한체 하영의 턱을 잡고
억지로 그녀의 입을 벌려 무례한 침범을 시도 했다.
하영은 그의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가 신음하며 잠시 그녀를 놓치자 하영은 재빨리 침대위로 뛰어올라
문쪽으로 달려가려했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세발자국도 못 옮기고 그에게 다시 붙잡혀 억지로
침대위에 눕혀졌다.
[싫어!! 저리가!!]
하영이 그의 몸 아래서 바둥거렸다.
[날 자극하지마....그럴수록 너만 다쳐.]
[내 몸에 손하나 까딱 하기만 해봐요....가만 두지 않을거야....]
하영이 이새로 말을 내뱉으며 두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쳤지만 그는
간단하게 하영의 손을 한손으로 쥐어 잡고는 그녀의 머리 위로 올렸다.
[과연 그럴까? 저번 밤에는 당신도 나와의 키스를 즐기지 않았던가....
말해봐.......나를 기다렸다고.......]
[웃기지 말아요......]
[웃기는 소리인지는 두고봐야 알겠지....]
어둠속에서 그가 낄낄 거리는듯한 웃음소리가 들리며 그의 나머지
한손이 대담하게 하영의 가슴위로 올라왔다.
하영은 비명대신 끙하는 신음을 내뱉고는 즉시 밀려드는 자신의
반응을 들키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억지로 참으려 하지마.......]
그가 속삭이며 그의 입술이 하영의 목을 따라 움직였다.
하영이 팔에 힘을주었지만 그에게 잡힌 팔을 쉽게 빼낼수 없었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천천히 그녀를 놀리듯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하영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자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입에 키스를 했다
처음의 거칠었던 키스와는 달리 하영을 달래는듯한 부드러운 키스였다.
하영의 도톰한 입술을 입에 담고는 그녀를 재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끝내 입을 열지 않으려 하자 그의 한손이
하영의 작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놀란 하영이 입을 벌리자 그의 혀가 물고기 유영하듯 미끄러져 들어왔다.
하영은 두 눈이 커다랗게 떠지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그에게 항복한 순간 참아왔던 불기둥이 한꺼번에
타오르며 그녀를 끝없는 소용돌이속으로 몰고갔다.
관능적인 그와의 키스에 정신이 혼미해진 하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위로 옮겨 온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말해봐.......날 원하고 있다고.....]
[싫어요......]
하영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니....이미 당신은 나에게 넘어왔어.]
그가 선언하듯 말을 내뱉으며 거침없이 하영이 입고 있던 슬립을
위로 벗겨내었다.
슬립을 벗겨내자 하얀 하영의 나신이 드러났다.
[정말....아름답군.......말로 표현할수 없을정도야.......]
그가 그녀의 위에 엎드리며 아름다운 조각상에 경의를 표하듯 그녀의
가슴위에 입을 맞추었다.
하영이 몸을 비틀며 그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말해....날 원하고 있다고...]
[그래요.당신을 원해요......]
하영이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사랑과 관능의 신 에로스에게 항복했다.
[나도 당신을 원해...절실히.....]
그가 잠시 그녀에게 몸을 떼자 하영이 실망의 소리를 냈다.
그가 옷을 벗는듯 그의 움직임이 하영의 몸을 죄고 있는 그의 허벅지의
근육으로 느껴졌다.
그가 다시 하영에게 엎드리자 그도 역시 하영과 마찬가지로 알몸이였다.
그의 따뜻한 피부가 하영에게 맞닿자 하영은 달콤한 한숨을 내쉬었다.
[오....세상에....이렇게 날 정신없이 몰아댈수 있는 사람은 당신
밖에 없을꺼야......]
그가 하영의 가슴을 입안에 가득 물었다.
아이를 가슴에 품고 있는 새어머니처럼 그를 끌어안고 있는 하영의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가슴을 끌어 당기는 압력을 느끼자 하영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술이 가슴을 떠나 그녀의 배꼽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그만해요...]
수치감에 하영이 다리를 오므리며 그를 다시 위로 끌어올리려 했다.
[아름다워.......]
그는 하영의 손을 뿌리치며 앙증맞은 그녀의 배꼽 위에도 입을 맞추었다.
[제발......]
하영이 흐느끼며 그의 어깨를 잡아 당겼다.
그가 마침내 위로 올라오며 하영의 매끄러운 어깨를 두손으로 잡았다.
[괜찮겠어?]
[이 상황에 당신은 괜찮겠어요?]
하영의 투정어린 말에 그가 낄낄 거렸다.
[어쩌면 부드러운 연인이 될수 없을지도 몰라........지금 나는 미치기
직전이니까......오세상에....그렇게 움직이지마....]
하영이 그의 몸아래서 꿈틀거리자 그가 신음을 내뱉었다.
[모두 당신 책임이야......]
순식간에 그는 그녀의 따뜻한 몸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하체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압박감에 하영은 놀라며 몸을 경직시켰다.
[긴장 풀어......]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며 움직이지 않은체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간간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하영이 긴장을 풀수 있도록 배려해
주며 기다리고 있었다.
차츰 하영의 몸이 나긋나긋해지자 그는 멈추었던 움직임을 다시 시작했다
**********
#21
시끄러운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하영은 슬며시 잠에서 깨어났다. 나른하면서도 기분 좋은 느낌에 하영이 쭉 몸을 펴면서 기지개를 켰다. 쾌청하고 상쾌한 초여름의 날씨였다. 하영은 코를 킁킁거리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향긋한 나무 냄새를 맡으며 기분 미소를 지었다.
문득 어젯밤의 일이 생각났다. 하영이 자신의 옆자리를 보았다. 그의 얼굴을 어쩌면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하영은 이미 오래전에 그가 자리를 뜬 듯한 흔적에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 었다. 하영은 이불을 제치고 침대에서 발딱 일어났다. 하얀 침대보에 어젯밤의 흔적인 혈흔 이 묻어있었다. 하영은 서둘러 침대보를 거두어 둘둘 말아 방 한구석에 던져놓았다. 가정부 몰래 하영이 직접 빨아놓을 작정이었다.
하영은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하영의 몸 위로 떨어졌다. 김이 서 린 욕실의 거울을 손으로 닦아내며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의 그 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에서 가슴까지 쓸어내려보던 하영은 어젯밤 자신의 몸 구석구석 스쳐가던 그의 손길이 생각났다. 그녀의 얼굴이 분홍빛 으로 물들었다.
하영은 양치질을 하기 위해 칫솔이 담긴 유리컵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컵을 잡자마자 비 눗물에 미끄러워진 손을 컵이 빠져 나가며 바닥에서 산산 조각이 났다. 놀란 하영이 반사적 으로 뒤로 물러서긴 했지만 유리 파편이 튀어 그녀의 정강이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붉은색 의 피가 샤워기의 물을 따라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하영은 그 모습을 우두커니 쳐다보며 왠지 모르게 밀려드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일본에서 온 바이어들을 만나고 제우스 그룹으로 돌아오던 민혁은 빌딩 앞에 몰려있는 사람 들을 보고는 멀찌감치 차를 세웠다. 그는 건물 안에서 일을 보고 있는 기찬에게 전화를 걸 었다.
“나야. 빌딩 앞에 웬 사람들이 몰려있지?”
“도련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야?”
“기자들이 떼로 몰려와 난립니다.”
“기자?”
민혁은 몰려있는 사람들의 목에 저마다 카메라가 걸려있는 걸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누가 언론사에 말을 흘렸습니다. 회장님과 강하영 씨가 호텔에 같이 있었다는 걸 누군가 말을 한 모양입니다.”
“젠장!!! 누가 그런 짓을 했지!!!”
“지금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만, 알다시피 제보자를 잘 알려주려 하지 않고 있어서.”
“알았어. 지금 들어갈게.”
민혁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는 빌딩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서민혁이다!!!!!”
누군가 민혁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순식간에 기자들이 그를 에워싸고 카메라 셔터를 열심히 눌러댔다.
“고인 서재필 회장과 같이 있었던 여인이 강하영이라는 여자라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강 하영이라는 여자가 부도 처리된 우진 그룹 회장의 딸이라는 게 사실입니까? 알려주십 시오!!!”
“외국으로 강하영 씨가 도피했다는 말도 있던데요!!!!”
기자들의 질문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터무니없는 이야기 입니다. 사고 당시 서 회장님은 외국에서 온 바이어를 만나기 위해 호 텔에 가셨습니다. 누군가 허위 정보를 퍼트리고 다니는 모양인데 저희 쪽에서는 제보자가 누군지 밝혀내서 제우스를 모함한 죄를 물어 고소에 들어갈 겁니다.”
민혁은 더 이상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들을 밀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어느새 기찬이 데리고 온 경비원들이 민혁에게 달려드는 기자들을 뿌리치며 민혁은 간부전용 엘리 베이터까지 안내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시끄러웠던 모든 소리들이 멈추었다.
“지금 당장 알아내. 제보자가 누군지.”
민혁은 이를 갈며 기찬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아줌마. 혹시 2층 복도에 있는 방 열쇠 가지고 있으세요?”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마친 하영은 문득 자신이 발견했던 방을 생각해내고 가정부에게 물었 다.
“열쇠요?”
“네.”
“어. 없는데.”
가정부가 하영의 시선을 피하며 은근슬쩍 넘어가려 했다. 가정부의 태도가 이상한 것을 하 영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래요? 할 수 없죠, 뭐. 난 그 방문이 잠겨져 있기에.”
하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거실 소파에 앉아 잡지를 뒤적였다. 하영이 잡지를 읽는 척하 자 가정부는 빨래를 널기 위해 뒤뜰 정원으로 사라져버렸다. 하영은 가정부가 나가자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 싱크대의 서랍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보통 집에서 열쇠 꾸러미 같 은 건 싱크대 서랍에 보관한다는 걸 떠올리며 하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랍을 뒤졌다.
세 번째의 서랍을 열자 덜컥거리며 열쇠꾸러미가 나타났다.
“빙고!”
하영이 열쇠 꾸러미를 집어 들고 뒤뜰에서 빨래를 너느라 정신없는 가정부를 살피며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갔다. 왼쪽 복도에 있는 문 앞으로 다가간 하영은 열 개가 넘는 열쇠꾸러미에 서 열쇠 하나를 들어 방문 열쇠구멍에 맞춰 보았다. 하지만 열쇠는 중간까지 들어가다가 멈 추었다. 제짝이 아닌 열쇠를 내려놓고 다른 열쇠로 열어보려 했지만 그것 역시 그 방의 열 쇠가 아니었다. 하영은 아래층을 힐끔거리고 다른 열쇠로 구멍을 맞춰보았다. 한참을 열쇠와 씨름하며 마지막 열쇠를 구멍에 집어넣자 부드럽게 열쇠가 안으로 쑥 들어갔다.
떨리는 손으로 하영은 천천히 열쇠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철커덕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영은 열쇠를 빼고는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커튼이 쳐진 어두운 방 안 내부가 들어왔다. 하영이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커튼을 활짝 젖히자 환한 빛이 들어왔다. 실내가 불을 켠 듯 환해졌다.
하영이 눈부신 빛에 눈을 찡그리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쾌쾌한 이상한 냄새와 먼지가 뿌옇 게 앉은 하얀 천들이 물건들을 뒤덮고 있었다. 커다란 바로크 양식풍의 거울이 벽에 걸려있 었고 그 아래에는 똑같은 바로크 양식의 책상이 놓여있었다. 그 위에는 미술도구처럼 보이 는 붓들과 팔레트 ,물감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이 방의 주인공이 깔끔한 성격임을 드러내주는 물건들이었다. 하영은 천천히 하얀 천이 덮인 물건들 사이로 걸어가 천들을 힘 껏 걷었다. 먼지들이 날리며 콧속을 자극하자 하영은 재채기를 연발하며 손을 휘저으며 먼 지들을 몰아냈다. 하영은 후다닥 창가로 다가가 방에 있는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활짝 열 어젖혔다. 신선한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오자,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정 도 진정이 된 하영이 고개를 돌리다 벽에 걸린 거울을 보았다.
거울을 바라보는 하영의 두 눈이 점점 커져갔다. 거울 속에는 알록달록한 색감의 그림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하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천 밑에 감추어져 있던 많은 그림 작품들이 갤러 리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모두다 풍경화를 그린 듯 은은한 색감이 왠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들이었다.
‘누굴까. 이 많은 그림을 그린 사람은.’
전시된 그림으로 다가간 하영은 천천히 그림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그려진 지 오래된 듯 제 대로 보관이 되지 않은 그림은 한쪽 구석의 물감이 색이 바랜 것이 보였다. 하영은 미지의 동굴을 탐험하는 것처럼 그림 하나하나를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문득 하영의 눈에 오른쪽 벽에 세워져 있는 천으로 덮여 있는 커다란 물건을 발견했다. 구 석진 곳에 있어 하영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자신의 키보다 30센티쯤 더 큰 물건이었다. 하영은 이것도 역시 그림일 거라 생각하며 발꿈치를 들어 천을 벗겨냈다. 천이 스스르 흘러내리며 그림이 나타났다. 천이 바닥에 떨어지고 웅장한 모습 들어낸 그림 앞에 하영은 그 자리에 서서 그림을 똑바로 쳐다봤다. 하영은 낑낑거리며 그 그림을 들어 올려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곳에 그림을 세웠다. 밝은 곳에 나오자 그림의 윤곽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에로스!
다부진 체격의 남자는 유일하게 걸친 옷이라곤 하체를 가리는 하얀 천뿐이었다. 숱이 많아 보이는 검은 머리는 야성적으로 헝클어졌고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 두 눈은 야성적인 분위기 와는 대조적으로 몽환적이고 부드러워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의 시선을 끈 건 그의 강인한 어깨 뒤로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활짝 펴진 눈부신 날개였다. 하영은 마른입으로 침을 삼 켰다. 그녀는 그림 속의 남자의 단단하고 매혹적인 조각 같은 몸이 만들어내는 곡선을 눈으 로 좇았다. 그녀의 시선이 위로 향하며 그림 속 주인공의 얼굴을 확인했다.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하영을 향하고 있었다. 그 미소의 실체를 확인한 하영은 섬뜩하고 숨 막히는 공포에 소름 끼쳤다. 오한이 일어나는 듯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건 끔찍한 악몽이야.’
***********
#22
하영은 불을 켜지 않고 컴컴한 방에 홀로 있었다. 그녀는 벽에 기대서서 창밖을 말없이 바 라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그가 찾아오고 있었다. 처음으로 듣는 그의 발소리였다. 2층으로 올라오는 그의 발소리는 힘이 있으면서도 당당한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소리 없이 방문이 열렸다. 하영은 서서 그 방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오는 것을 망연히 지켜 보았다. 방 안으로 들어오던 그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한 그녀가 선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자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오늘은 늦었네요.”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자고 있을 줄 알았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도 있다니 즐거운 일인걸.”
그가 나직이 웃음소리를 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오늘 2층에 잠겨져 있던 방에 들어갔었어요.”
“뭐?”
그의 음색이 달라지며 반문했다.
“그 방에 들어갔었다고요. 그 방에서 내가 무얼 봤는지 알아요?”
“그래. 호기심 많은 아가씨 그 방에서 무얼 봤지?”
냉랭해진 그의 말에 하영도 차가운 말로 응수했다.
“당신, 당신을 봤어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영이 그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나를 이런 곳에 가둬두고 밤마다 들락거리며 내가 당신에게 속아가며 당신 손에 당신이 하는 대로 놀아나는 내가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나는 정말 멍청한 여자예요. 안 그래요? 서 민혁 씨.”
하영이 스위치를 켜자 방안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방 안이 환해지면서 그녀 앞에 우뚝 서있는 민혁이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이 밤마다 하영 앞에 꿈처럼 나타난 에로스의 실체였 다,
“결국엔 알아내버렸군.”
민혁의 입가가 비틀리며 하영을 노려보았다.
“왜 그랬죠?”
“왜 그랬냐고?”
“네. 굳이 당신인 것을 속일 필요가 있었나요.”
“속이지 않았다면 당신이 순순히 나의 도움을 받으며 이곳에 있으려 했겠어? 지금도 이렇 게 나를 죽도록 미워한다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당신인데 내 도움을 받으려 했겠 냐고.”
“적어도 그때 당신이라는 걸 알았다면 지금만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지는 않았겠죠. 목 소리가 낯익다는 걸 알았을 때 당신이라는 걸 알아차려야 했는데.”
하영의 후회 섞인 말에 민혁이 입가가 굳어졌다.
“냉랭한 얼음공주로 돌아갔군. 어제 기억으로는 누구보다 뜨거운 여인이었던 걸로 알고 있 는데.”
“어제 일을 입에 담지 말아요. 더럽고 구역질 나.”
하영이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제우스와 당신 , 당신 가족, 내 가족이 살기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었어. 당신도 지금 돌 아가는 상황을 대충은 알 텐데.”
“당신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나 때문이에요.”
끔찍한 사고의 순간을 떠올리는 하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사고는 당신 때문이 아니야.”
“나 때문이에요.”
“그래. 당신의 억지대로 당신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치지. 그런다고 이제 와서 뭐 가 달라지지?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할까? 조금이라도 양심상 가책을 느끼고 있 다면 조용히 내가 하라는 대로 해주기만 하면 돼.”
“싫어요. 나도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요. 당장 여기서 나가 서울로 돌아가겠어요.”
그가 그녀에게 성큼 다가와 거칠게 하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금 와서 일을 망칠 수는 없어. 아직 약속은 유효해. 만약 당신이 그걸 어긴다면 당신의 가족에게 돌아간 혜택들을 모조리 다 뺏어버리겠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당신 아버지는 수 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긴 했지만 아직 안심할 정도의 건강은 아니야 .의사말로는 몇 차례 수 술을 더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어. 그 수술비와 병원비, 그리고 당신의 그 무능하고 멍청 한 언니와 형부에게 건네준 돈, 모두 빼앗아 버릴 수도 있단 말이야.”
그의 위협에 하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당신. 정말 잔인하군요. 돈으로 내 가족을 볼모로 잡다니 너무 비겁하다고 생각 안 해 요?”
“내 제안에 동의한 건 바로 당신이야. 쌍방 합의하에 이루어진 약속이라고. 누군가 신문사 에 당신 이름을 흘려놓았더군.”
“뭐, 뭐라고요?”
“내가 다행히 기자들 입을 막아 놨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강우진 회장의 딸이라는 걸 알고 있는 기자들이 병원에 누워있는 당신 아버지한테까지 기삿거리 알아내려 고 승냥이 떼처럼 덤벼들었을 거야.”
“오. 세상에! 안돼요. 아빠는 아직 중환자라고요.”
“어떻게 하겠어?”
하영은 지금 상황에서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승리의 카드는 서민 혁이 쥐고 있었다. 그의 게임의 룰에 따라 자신은 인형처럼 움직여야만 했다.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겠어요.”
하영이 체념한 듯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당분간만 더 이곳에서 지내. 아직 기자들이 포기 하지 않았어.”
“그러죠.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꼼짝 않고 있겠어요.”
너무나 애처로운 하영의 대답에 그가 미소를 지었다.
“난 말 잘 듣는 아이보다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내 품에 안긴 당신의 모습이 더 좋아.”
그의 원색적인 표현에 하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미안하지만 이젠 더 이상 당신의 애완 고양이가 되진 않을 거예요.”
“그거 유감스럽군. 당신에게 주기 위해 달콤한 크림을 가득 사가지고 왔는데 말이야.”
민혁이 그의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뭐예요?”
하영이 봉투를 받아들고는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꺼내보았다. 사진이었다. 사진을 보는 하 영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사진 속에는 그녀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다행히 의식이 돌아오시긴 했지만 언어장애도 있고 몸도 한쪽이 마비되어서 꼼짝도 못하 셔. 당신이 궁금해 할 것 같아서 아버님이 잠드신 동안에 사진 몇 장 찍어서 왔지.”
“아빠 얼굴이 너무 안돼 보여요. 너무 끔찍해.”
굵은 눈물방울이 사진 위로 툭하고 떨어졌다.
“의식이라도 돌아오셨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
“사람의 욕심이라는 건 끊임없나 봐요. 수술이라도 성공해서 의식만이라도 돌아오시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마음이 달라져요.”
“상황은 더 지켜봐야겠지만 아직 뇌 속의 굳은 피를 다 제거하진 못했다고 하더군. 뇌수술 이 위험해서 몇 차례 나눠서 해야 한대.”
마지막 사진을 확인한 하영이 고개를 들어 민혁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신경 써줄지 몰랐어요.”
그녀의 창백한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민혁이 손을 들어 말없이 닦아내주었다. 그가 천천히 그녀를 끌어당기자 하영이 다가와 그의 품에 안겼다.
“잠시 만요. 잠시만 울게요.”
“마음대로 해.”
그가 하영의 등 뒤로 팔을 둘러 따뜻하게 안아주자 하영이 억누르고 있던 울음을 시원하게 토해냈다. 민혁은 턱을 하영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그녀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어둠을 해치고 떠나가는 민혁의 승용차를 창밖으로 내려다보는 하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 다.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는 자신의 손에 들린 사진을 보았다. 초췌한 그녀의 아버지 의 모습에 자꾸만 가슴이 아려왔다.
************
#23
민혁의 사무실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방금 하영의 이름을 언론사에 흘린 범인을 기찬이 알아내 민혁에게 보고를 했다. 범인의 이름을 들은 민혁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언론사 측에서 누군가 돈을 건네준 모양입니다.”
“우리가 준 돈도 모자라서 처제를 팔아먹어? 나쁜 새끼.”
화가 난 민혁의 입에서 거침없이 욕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할까요?”
“당장 그놈을 잡아다 내 앞에 데려다 놔.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썩어버린 싹을 빨리 잘라버리지 않으면 뿌리까지 다 썩어 들어가는 법. 강하영의 식구들을 위해서도 그런 놈은 가만두어서는 안돼.”
“네. 알겠습니다.”
기찬은 민혁에게 인사를 하며 그의 사무실을 나갔다. 기찬이 나가자 민혁은 자신이 앉아있 는 회전의자를 창가 쪽으로 돌려 사무실 창 너머로 보이는 한강교의 야경을 감상했다.
강하영.
그녀는 마치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나비와도 같은 여자였다. 너무도 아름다워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 아름다운 날개를 잡으면 곧 힘을 잃어가며 죽어버리는 나비와도 같은 여인.
처음 그녀를 보는 그 순간부터 민혁은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강렬한 집착과 비슷한 느낌 을 경험했다. 그가 던지는 미소 하나만으로도 그에게 아낌없이 자신의 몸뚱이를 던지는 그 흔한 여자들과는 다른 고고하면서도 깨질 듯한 투명한 그녀의 아름다움을 그의 것으로 소유 하고 그녀를 탐내는 모든 것들에게 당당히 그녀가 그의 여자임을 공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소유하려 들수록 그녀는 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독가시를 뿜어내며 그를 마구 찔러댔 다. 마침내 그의 품 안에서 그녀를 완전히 가졌을 때 민혁은 비로소 어긋난 퍼즐을 다 맞춘 것처럼 승리감에 취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버리고 감추었던 가시를 다시 드러낸 이상 또다시 그들의 관계는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평생 마주 할 수 없는 평행선처럼 달려가는 그들의 관계에 민혁은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한 번 그의 손아귀에 들어온 이상 민혁은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민혁은 곰곰이 그녀를 그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생각을 했다. 생각에 잠긴 민혁의 두 눈가에 잔주름 들이 잡혔다. 순간 그의 눈이 번뜩이며 의자를 돌려 그의 책상 아래 있는 비밀 금고를 열고 는 노란 봉투를 꺼내들었다. 봉투를 노려보는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강 하영은 당분간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또다시 하영을 붙잡아 둘 수 있는 카드를 손에 쥔 그의 얼굴에 당당한 승리자의 오만한 표정이 스쳐갔다.
어두컴컴한 40평 남짓한 공간에선 저마다 아주 작은 확률에 인생을 거는 인생군상들의 남자 들이 그들의 피와 땀을 쏟고 있었다. 그들이 피어대는 수많은 담배들의 연기가 자욱하게 공 간을 메우고 있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조차 분 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땀에 전 카드를 노려보고 있는 동식의 이마에서도 땀이 흘러내려 그가 입은 남루한 셔츠 깃 을 적시고 있었다.
“뭐야. 죽을 거야 말거야?”
동식의 앞에 앉은 남자가 동식의 다리를 자신의 발로 툭 건드렸다.
“다, 다 걸겠어.”
동식의 말에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들의 얼굴에 순간 긴장감이 맴돌았다.
“좋아. 나도 다 걸지.”
“난 죽었어.”
동식의 오른쪽에 앉은 남자가 카드를 테이블 위로 집어 던졌다.
“먼저 까봐.”
동식의 앞에 앉은 남자의 눈이 작아지며 동식의 카드를 노려보았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힘차게 테이블 위에 그가 쥐고 있던 카드를 집어 던졌다. 그의 카드를 본 나머지 사람 들이 웅성거렸다. ‘7’포 카드(숫자 ‘7’이 적힌 카드를 네 개 가지고 있는 패)였다. 동식 은 크게 웃어젖히며 테이블 위에 베팅한 돈을 두 팔로 자기 앞으로 끌어 모았다.
“잠깐!!!”
동식의 앞에 있던 남자가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동식의 앞에 그의 패를 들어 보여주었 다. 동식의 표정이 순간 흉하게 일그러지며 그의 패를 빼앗아 다시 확인했다. 포 카드,
‘A’ 포 카드(‘A’가 적힌 카드를 네 개 가지고 있는 패)였다.
“이, 이럴 수 없어. 이 새끼! 어디서 사기치고 있어!!”
동식이 카드를 집어 던지며 순식간에 테이블 위에 올라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뭐야, 이 새끼야! 졌으면 그만이지. 어디서 행패야!”
남자에게 달려드는 동식을 순식간에 여러 남자들이 몰려와 동식을 바닥으로 끌어내고는 사 정없이 발길질을 해댔다. 무방비 상태에서 맞고 있는 동식은 그 상황에서도 돈을 세고 있는 남자에게 시선이 향했다.
“안돼. 그 돈은 내가 가진 전부란 말이야. 우리 장인어른 수술비야.”
“미친놈 웃기고 있네.”
동식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콧방귀를 끼며 돈을 자신이 입고 있는 잠바의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자리를 떴다.
“거기 서!!! 커헉.”
한 남자의 발길이 정확하게 동식의 명치를 강타했다. 숨이 끊어질듯 이어지는 고통에 동식 은 데굴데굴 몸을 굴렸다.
“에이. 기분 잡쳤다. 모두 가자.”
도박장에 있던 남자들이 하나둘 그들의 돈을 챙기고는 자리를 떴다. 동식은 비틀거리며 바 닥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여 있던 돈은 다른 이에게 넘어가고 티끌 한 점 남아있지 않았다.
“으흐흑.”
동식이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그의 아내 진영 몰래 빼내온 돈과 하영의 정보를 흘려준 대가로 받은 돈까지 모두 허망하게 잃고 만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박장을 나섰다. 그가 입고 있는 바지의 주머니를 뒤지자 만 원짜리 세 장이 나왔다.
“씨팔.”
동식은 처량해진 자신의 처지를 욕하며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동식 씨?”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에 동식은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야!!”
“잠시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누구야, 넌!!”
마침 누구라도 걸리기만 해봐라 벼르고 있던 동식은 자신을 부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남자에게 다가서기도 전에 갑자기 검은 승용차에서 뛰어 나오는 남자들에게 붙잡 히고 말았다.
“뭐야!!이거 안 놔!!!”
“소란피우지 말고 조용히 따라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가로등 앞으로 나서는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너, 넌!!”
기찬의 얼굴을 본 동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가 왜 이동식 씨를 찾아왔는지는 스스로 잘 알고 계시겠죠?”
“모르겠는데.”
“저희 사장님께서 이동식 씨를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같이 가주시죠.”
기찬이 동식을 잡고 있는 남자들에게 고갯짓을 하자 남자들이 강제로 그들이 타고 온 승용 차 뒷좌석으로 동식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들이 모두 차에 오르자마자 차는 순식간에 주 차장을 빠져나갔다.
***********
#24
민혁의 앞에 끌려온 동식은 처음에 보였던 당당함을 잃었다. 민혁을 보자마자 동식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비굴한 동식을 내려다보는 민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일어나.”
얼음같이 차가운 민혁의 음성에 주춤하며 동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혁은 의자에서 일어 나 힘껏 동식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동식이 테이블 위로 엎어지자 유리 재떨이가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일어나!!개새끼야!!!!'
민혁이 동식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다시 무차별하게 주먹질을 해댔다. 정신없이 날아오는 민혁의 주먹세례를 받은 동식의 얼굴이 코에서 난 코피 때문에 피범벅이 되었다.
“놔!!! 저런 짐승만도 못한 놈은 죽여버려야 해!!!'
“도련님!!! 너무 흥분 하셨어요. 진정하세요. 저 놈도 그만하면 알아들었을 겁니다.”
“흐흐흑.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동식이 무릎을 꿇고 민혁에게 걸어와 그의 바짓단을 부여잡았다. 화가 덜 풀린 민혁이 전화 기로 그를 내리찍으려 했다.
“도련님!!!!”
기찬의 고함에 민혁은 마지못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일어나. 죽여버리기 전에.”
“네.”
동식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민혁 앞에 섰다.
“내가 준 돈, 다 어쨌어?”
“그, 그게”
“똑바로 말 못해!!!!”
“도박판에 다 날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딱 한 번만 한다는 게.”
겁에 질린 동식이 민혁의 고함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연방 흘러내리는 코피를 옷 소매로 훔쳐냈다.
“내가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해.”
“예.”
“네가 언론사에 강하영이 이름 흘렸어?”
“아, 아닙니다.”
발뺌하는 동식을 보니 민혁은 화가 또 치밀었다.
“저 새끼 죽여버리겠어!!!”
민혁이 동식에게 달려들자 동식이 기찬 뒤로 숨어버렸다.
“예. 제가 했습니다. 살려주세요.”
동식은 이제 눈물까지 흘리며 민혁에게 살려 달라 애원했다.
“얼마 받았어.”
“배, 백만 원입니다.”
“미친놈. 고작 그 돈 받자고 같은 식구 이름을 팔아먹어? 당신 장인어른의 목숨 값으로 도 박을 해? 네가 정말 인간이야!!!”
서슬 퍼런 민혁의 눈이 잡아먹을 듯이 동식을 노려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동식은 두 손을 싹싹 문지르며 민혁에게 빌었다.
“도련님. 이쯤하면 알아들었을 테니 그만 하시는 게. 어쨌거나 강하영 씨 언니의 남편 되는 사람이니 이쯤에서 보내주십시오.”
기찬의 말에 동식은 그가 구세주라도 되는 양 애절하게 쳐다보았다.
“이동식.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예. 말씀하십시오.”
동식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날린 돈은 없었던 일로 하겠어. 다시 돈을 내어줄 테니 네 처가 모르게 다시 돈을 가져다놔.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 그 어느 누구한테도 입만 벙긋 했다간 그땐 쥐도 새도 모 르게 널 없애버릴 거야. 알았어?”
“예, 예.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강하영이 먼저 나서기 전에 그 어느 누구한테도 그녀 이야기는 꺼내지 마. 특히 병원에 계신 강회장님한테는 그녀 이야기가 들어가서는 안돼. 알아듣겠어?”
“예.”
“기찬아.”
“네. 도련님.”
“이 새끼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해주고 집으로 돌려보내라.”
“예. 알겠습니다. 나가시죠.”
기찬이 동식의 팔을 이끌자 동식은 민혁의 눈치를 보며 얼른 기찬을 따라 민혁의 사무실을 나왔다.
“짐승만도 못한 놈.”
그동안 저런 놈 때문에 고생했을 하영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자신의 와이 셔츠에 묻은 동식의 피를 닦아내며 이를 갈았다.
민혁은 집으로 들어서다가 거실의 불이 밝혀지며 미령의 방에서 그녀가 비틀거리며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속안이 훤히 비치는 슬립 비슷한 잠옷을 입고 있었다. 잠옷 안으로 비 치는 미령의 아직은 탱탱한 몸매를 바라보는 민혁의 표정이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듯 일그러 졌다. 나이에 맞지 않게 미령이 아름다운 몸의 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민혁은 인정하지만 그 아름다움에는 온갖 추악한 뒷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민혁은 알기에 조금도 흥미롭 지 않았다.
“오. 우리 제우스 그룹의 주인나리가 오셨군.”
미령이 비틀거리며 민혁에게 다가섰다.
그녀가 다가서자 독한 위스키 냄새가 민혁의 코를 자극했다.
“술독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 같군요.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들어가서 쉬시지요.”
“오호, 이런. 우리 아들이 지금 내가 술 마셨다고 야단치는 거야?”
우리 아들이란 미령의 표현에 민혁이 동공에 힘을 주어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만 들어가세요. 이런 모습 너무 추하군요. 혼자 사는 집도 아닌데 간단한 매너 정도는 지켜주시죠.”
민혁은 미령을 밀치고는 2층 계단을 올라갔다.
“야!!! 네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냐!!! 미친놈. 네 아버지가 죽었다고 네가 날 무시하고 깔 보는데 웃기지 마. 이 집의 안주인은 엄연히 나라고!!!나, 송미령!!! 송미령이라구!!!”
등 뒤로 들려오는 미령의 발악을 무시한고 민혁은 2층으로 올라갔다. 민혁이 그의 방문을 닫는 순간까지 미령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문을 잠가버렸다.
‘송미령, 당신은 상대를 잘못 골랐어. 당신 게임의 상대는 내가 아니야.’
초여름이 다가온, 하영이 머무는 별장에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었다. 하영은 그림을 덮고 있던 천들을 깨끗하게 빨아서 정원의 빨랫줄에 널며 어젯밤 텔레비전에서 잠깐 스쳐가듯 들 은 가요를 흥얼대고 있었다. 가사는 잘 몰랐지만 왠지 익숙한 멜로디이기에 하영은 계속 자 신이 외운 멜로디만을 반복해서 흥얼댔다.
눈부시게 하얀 천들이 바람에 깃발을 건 것처럼 이리저리 펄럭이며 하얀 파도처럼 일렁거리 는 물결을 만들었다.
민혁은 별장으로 들어가려다 빨래를 널고 있는 하영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펄럭이는 이불사 이로 간간이 하영의 수수하고도 꾸밈없는 미소가 보였다.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이는 그녀의 얼굴 표정에 동식과 미령에 대한 생각 때문에 오전 내내 불편했던 민혁의 마음이 평안해지 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지막 빨래를 넌 하영 이 한 손은 허리에 올리고는 한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빨래 바구니를 든 하영은 무 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하얀 물결 너머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민혁의 모습이 보였다. 민혁 과 하영은 그대로 멈춘 채 일렁이는 빨래 사이로 서로를 지켜봤다. 민혁의 시선은 물 빠진 청바지와 수수해 보이는 분홍색 반팔티를 입은 하영의 모습을, 하영의 시선은 왠지 피곤해 보이는 수척한 민혁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꿈인 듯한 분위기를 먼저 깬 건 민혁이었다.
“날 보고 싶지는 않겠지만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무슨 말이죠?”
하영이 침착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서울로 올라가자.”
서울이란 단어에 하영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서울에 올라가면 우리, 결혼하자.”
결혼하자결혼하자.
하영은 잠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25
“결혼하자, 우리.”
민혁의 선전포고와도 같은 선언에 하영이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 미쳤어요? 아님 내 귀가 잘못된 건가요?”
“농담 아냐.”
심각한 민혁의 표정에 하영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당신하고 내가 결혼이요? 그런 황당한 이야기가 어디 있어요?”
“결혼하자는 이야기가 그렇게 당신한테 황당한 일이야?”
“그럼 당신이 결혼하자 그러면 오, 제가 기다렸던 말이에요 하고 쌍심지 켜고 환영이라도 할 줄 알았나요? 돌아가세요.”
하영은 빨래바구니를 들고는 별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녀의 뒤를 민혁이 따라갔다.
“내 말 들어봐.”
민혁이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하영의 팔을 붙잡았다.
“그만해요. 날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뭐예요? 결혼이요? 웃기시네.”
“너와 나 서로에게 이득이 될만한 일이야. 그래서 또 다른 계약을 맺자는 거야.”
“계약이라뇨?”
하영이 민혁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넌 내게 두 달 간의 결혼으로 내게 제우스를 넘겨주는 거고, 난 그 보답으로 너의 식구들 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죠? 제우스를 넘겨준다니요?”
“아버지 유언장 때문에 그래. 내가 결혼해야만 제우스가 내손에 떨어지지. 하지만 두 달 안 에 결혼하지 못하면 제우스는 늙은 여우 손에 넘어가고 말지. 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제우스 를 그렇게 못된 늙은 여우 손에 넘겨줄 수는 없어.”
“싫어요. 더 이상 당신의 계략에 놀아나지는 않을 거예요. 일이 잠잠해지면 난 바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거예요. 더 이상 당신과 엮이기 싫다고요.”
“이동식. 그 자식이 사고를 쳤어.”
“뭐라고요?”
“이동식, 당신의 형부, 당신과의 약속의 대가로 준 아버지 수술비며 언니에게 준 돈까지 모 두 도박으로 날려버렸어.”
“마, 말도 안돼요. 형부가 아무리 의지가 약한 사람이긴 했어요. 도박에나 빠지고 할 사람 이 아니에요.”
“내 얘기는 진짜야. 당장 수술을 앞두고 있는 당신 아버지인데 이젠 어쩌지 수술비조차 없 으니.”
하영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매번 하영을 어려움에 빠뜨리는 언니와 형부가 미워졌다.
하영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민혁에게서 벗어나는 순간을 상상해왔다. 하지만 하영은 또다시 가족 때문에 민혁에게 족쇄를 또 차게 되었다.
“다 미워요. 왜 이렇게 사람들이 날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 거죠? 다른 사람 때문에 자꾸 만 엇나가는 내 자신이 너무 싫어요.”
하영이 눈물을 참으려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두 달만이야. 딱 두 달만 내 아내역할을 해줘. 내가 제우스를 무사히 넘겨받으면 그땐 당 신이 원하는 대로 해줄게. 이건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야. 내가 처음으로 너한테 하는 부탁이 야.”
민혁의 음성이 부드러워지자 하영이 눈물이 차오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부탁?”
하영이 속삭이듯 그에게 묻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당신에게 부탁하나 해도 되요?”
“무엇이든.”
“많은 돈은 원하지 않아요. 그냥 아빠 병원비만 부탁할게요. 그 외에는 어떠한 돈도 받지 않을래요. 들어줄 수 있어요?”
그에게 굳은 다짐을 받듯 하영이 재촉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어.”
“좋아요. 우리, 결혼해요.”
서울로 올라오는 민혁의 차 안에는 적막한 기운이 가득했다. 민혁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선
‘글루미 선데이’란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영은 우울해지는 곡을 들으며 꼭 자신의 기분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그녀의 기분을 아는지 민혁 또한 그녀에게 별다른 말 없이 운전에만 열중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우린 실제 부부처럼 행동해야 하나요?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린 단순히 계약된 거짓 결혼인데 실제로 결혼한 사람처럼 행동해야 하냐는 말이에요.”
“송미령, 그 여자 보통내기가 아니야. 그 여자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속이려면 실제부부 처럼 행동해야해. 당신이 걱정하는 게 부부간의 침대문제를 뜻하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물론 나는 당신을 굳이 마다할 생각은 없지만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하진 않을게 하지만 사람들 눈에는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부부처럼 보여야만해. 그러기 위해선 불가피한 행동을 하게 될지도 몰라. 그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지?”
“예를 들면 포옹이나 키스 같은 걸 말하는 건가요?”
“그래.”
“아, 알았어요.”
하영이 얼굴이 핑크빛으로 물들어 갔다.
“당신이 이 결혼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두 달만 참아주면 깨끗하게 이혼해주겠어.
당신에게 자유를 다시 주겠다는 말이야.”
사무적인 그의 말투에 하영은 상처받은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서울 톨게이트가 보이자 하영의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병원으로 먼저 가줄 수 있나요?”
하영의 조심스런 부탁에 민혁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어차피 우리의 결혼 소식도 알려야 하니까.”
병원에 도착한 하영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깊게 눌러쓰고 민혁을 따라 그의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실을 향해 걸어갔다. 몇 번을 와본 듯 능숙하게 병실을 찾는 민혁의 모습에 하영은 왠지 아버지를 알게 모르게 도와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았다.
하영과 민혁이 조용히 문을 열고 병실을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있는 우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창가 쪽으로 돌려 창문 밖의 세상을 동경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
하영이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그를 불렀다. 하영의 목소리를 듣고 우진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에 서서 그를 보고 있는 자신의 딸을 보자 우진의 입이 벌어 졌다.
“하어하.”
하영의 이름을 부르는 듯 그가 어눌한 발음을 내뱉으며 편히 움직일 수 있는 오른손을 힘겹 게 그녀에게 내밀었다.
“흐흑. 아빠!!!!”
하영이 울음을 터트리며 우진의 손을 부여잡았다.
“아빠. 나 참 나쁜 애죠. 이제야 아빠를 만나 뵈러 왔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눈물 젖은 뺨을 그의 손에 비벼대며 하영은 훌쩍였다.
“괘아하어.”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거야.”
민혁이 말하기 힘든 우진을 대신해 하영에게 말해주었다. 우진은 민혁의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이젠 아빠 곁에서 떠나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어. 어.”
우진이 쓰러진 후 그가 처음으로 미소가 보였다. 그의 시선이 하영의 뒤에 서있는 민혁에게 옮겨갔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서민혁이라고 합니다. 하영이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아버님 허락을 맡 으려 이렇게 하영이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결혼이란 말에 우진의 눈이 커지며 하영을 바라보았다.
“네.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허락해주실 거죠?”
우진은 찬찬히 민혁의 훑어보았다.
“하영이와 알고지낸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녀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허락해주 십시오.”
하영은 속으로 능숙한 그의 거짓말에 혀를 내두르며 아버지를 속이고 있다는 자책감에 괴로 워했다.
“이 사람, 제우스 그룹 서회장님의 아들이에요.”
하영의 말에 우진은 놀라며 몇 십 년 전 자신의 아버지를 반항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어린 소년을 떠올렸다.
“허락해 주십시오.”
우진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진이 내민 손을 민혁이 잡자 그는 힘을 주어 민혁의 손을 꽉 쥐었다.
“감사합니다.”
민혁이 고개를 숙여 우진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아빠. 미안해요. 절 용서하지 마세요.’
#26
“이젠 다 울었어?”
민혁이 운전을 하며 병원에서 나온 후에도 계속 훌쩍거리고 있는 하영을 힐끔 쳐다보았다.
“수술만 하면 다 나아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빠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으셔서 마음이 아파요. 제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보지 못하시잖아요.”
또다시 울컥 솟아오르는 설움에 그녀가 또 울음을 터트렸다. 민혁은 그런 하영의 모습을 보 며 조용히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하영은 굳이 민혁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은 채 눈물을 닦아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민혁은 새빨개진 하영의 작은 코가 귀엽다 는듯 쳐다보며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볼을 닦아 주었다.
“내 아파트.”
“그냥 내 집으로 가겠어요.”
“결혼을 올리기 전까진 내 곁을 떠나있는 건 좋지 않아. 그리고 솔직히 언니가 당신이 들 어오는 걸 반가워하지도 않을 거고.”
“당신은 우리 언니가 맘에 안 든다는 어투군요.”
“솔직히 그들은 당신 때문에 호위호식하고 사는데 한번도 당신 안부를 내게 물어본 적이 없어.”
막상 민혁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하영은 언니에 대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결혼준비 하는 동안은 내 아파트에서 머무는 것이 안전해. 결혼 후에는 청담동 집으로 들 어가서 살아야 하니까.”
민혁의 말에 하영이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 새어머니하고 같이 살아야 하는 건가요?”
“말은 바로 하자고 내 새어머니가 아니야. 그 여자는 우리 공동의 적이지. 그런 영화도 있 잖아. 적과의 동침.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왜 싫어?”
“아, 아니요.”
하영은 자신의 입장이 이렇다할 말을 할 입장이 못 된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 그의 말에 반론하지 않았다. 민혁의 차는 도심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주상복합식 아파트 앞에 멈췄다. 하영은 요새 한창 유행한다는 아파트의 고급화를 선도한다는 그 건물을 올려다보며 입이 쩍 벌어졌다. 텔레비전에서는 많이 봤지만 실제로 보니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부터가 화려한 인테리어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소리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고속 엘리베이터 또한 하영의 관심을 끌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민혁을 따라가며 하영은 여기 저기 두리번거렸다.
“여기야.”
민혁이 열쇠로 문을 열고 하영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하영은 화려한 겉모양만큼이나 아 파트 안도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아파트 내부는 깨끗하고 단순해서 새삼 놀라웠다.
“내가 이것저것 꾸미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간단한 가구들만 있어. 좀 썰렁하지? 조금만 머물면 되니까 불편하더라도 좀 참아.”
하영은 일본젠(Zen)풍으로 인테리어 되어 있는 민혁의 아파트가 맘에 들었다
“맘에 들어요. 잘 쓸게요.”
“냉장고에는 먹을 게 하나도 없어. 내가 이사하면서 며칠 집이 비어있었거든. 저녁은 나가 서 먹고 장 좀 봐서 냉장고 채워놓자.”
“네. 그래요.”
서울에서의 낯선 하룻밤을 보낸 하영은 피곤한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침실을 나서면서 혼자 지내기엔 너무 커서 썰렁해 보이는 거실을 하영은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영은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민혁과 함께 외출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성들여 화장 을 하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하영이 모든 준비를 다 마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벨이 울렸다. 그녀는 무인 카메라로 문밖 상황이 훤히 보이는 인터컴의 화면으로 다가가 방문자 의 얼굴을 확인했다. 민혁이 아닌 낯선 남자의 모습이 보이자 하영은 덜컥 겁이 났다. 그녀 는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들었다.
“누, 누구시죠?”
하영의 목소리에 남자는 자신의 얼굴을 화면에 들이밀며 대답했다.
“서민혁 사장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서민혁이란 이름에 하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문으로 달려가 의심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말끔하게 생긴 외모의 남자가 하영에게 인사를 했다. 그의 예의바른 인사에 그녀는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가 묻자 그를 살피고 있던 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걸 음 뒤로 물러나주었다.
“사장님이 보냈다고 하셨나요?”
하영이 문을 닫으며 거실로 들어서는 그에게 물었다.
“예. 전 사장님 개인 비서, 김기찬이라고 합니다.”
그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금박으로 고급스럽게 장식되어 있는 명함지갑을 꺼냈다. 그는 지갑 에서 명함을 꺼내 하영에게 내밀었다. 제우스 그룹이라는 커다란 로고 밑에 ‘김기찬’이라 는 이름 석 자가 쓰여 있었다.
“앉으세요. 주스라도 한 잔 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잠깐 앉으시지요.”
기찬의 말에 부엌 쪽으로 가던 하영은 몸을 돌려 소파 쪽으로 걸어왔다. 기찬의 앞에 조심 스럽게 앉은 하영은 그가 가죽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는 서류를 하영 앞으로 내밀었다.
“뭐죠?”
하영은 서류를 볼 생각도 안하고 기찬에게 물었다.
“결혼 계약서입니다.”
‘결혼 계약서!’
하영의 두 눈에 순간 분노의 불꽃이 튀어 올랐다.
#27
“지금, 결혼 계약서라고 하셨나요?”
“예. 사장님께서는 이 결혼이 서로 합의 하에 이루어진 그러니까 서로의 이득을 위해 하 는 위장 결혼이니 만큼 여자인 강하영 씨가 나중에라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한 일 종의 계약서입니다.”
“지극히 현실적이군요.”
하영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며 자신 앞에 놓인 서류를 노려보았다.
“당신네 사장이란 사람은 참으로 사려 깊은 사람이에요.”
비꼬는 듯한 하영의 말에 기찬은 그녀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챘다. 하영은 그 서 류가 자신을 돈으로 민혁에게 팔아넘긴다는 노예 문서와 같은 것처럼 느껴져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엇보다 그녀를 분노하게 만든 건 지극히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를 자신의 비서를 시켜 그녀에게 계약서를 내밀게 한 행동이었다.
“서류에는 무슨 내용이 있죠?”
하영은 감히 서류를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기찬에게 물었다.
“결혼은 2개월 동안 계약 하에 이루어지며, 결혼과 동시에 사장님께서는 강하영 씨의 아버 님의 모든 병원비 일체와 2개월이 지난 후 이혼하는 동시에 위자료를 강하영 씨가 요구하는 만큼 지불한다는 내용입니다.”
기찬의 사무적인 말들을 조용히 듣고 있던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런데 한 가지 사항이 빠졌네요.”
“무슨?”
기찬이 서류를 집어 들어 잘못된 곳이 있나 살펴보았다.
“사장님하고 이미 이야기를 나눈 사항이지만 이건 지극히 사업상의 결혼일 뿐이에요.
그러니 서로에 대한 헌신을 할 필요는 없단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무슨.”
기찬이 어리둥절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금욕이요. 남들 앞에선 제우스 사장님의 안주인 노릇을 완벽하게 해내겠지만,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선 부부의 역할을 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즉, 서로의 성관계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봅니다. 또 나의 성생활을 그쪽에서 터치할 경우도 아니라고 보고요.”
하영의 속사포같이 쏟아지는 말에 기찬이 당황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강하영 씨 말씀이 맞네요. 사장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결혼식은 언제 할 생각이죠? 되도록이면 빨리 하고 싶군요.”
하영이 기찬에게 물었다.
“그건 사장님께서 오늘 안으로 말씀이 있으실 겁니다.”
“계약서는 놓고 가세요. 이따가 사장님을 만나면 그때 서명하죠.”
“예. 알겠습니다.”
기찬이 돌아가고 나서 문을 닫는 하영은 치밀어 오르는 민혁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 다. 감히 자신을 돈 때문에 몸이나 파는 그런 여자로 매도한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건 하영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전화기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가다가 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네. 서민혁입니다.”
“나예요.”
“응.”
“방금 김기찬이라는 당신의 비서가 왔다 갔어요.”
“그래?”
너무나 무덤덤한 그의 반응에 하영은 마침내 냉정을 잃고 그에게 큰 소리를 질렀다.
“당신!!! 날 어떻게 보는 거예요!!! 내가 당신하고의 약속이라도 어기고 도망이라도 갈 줄 알고 그따위 계약서를 나한테, 그것도 비서를 통해 보내는 건가요!!!! 우리 사적인 이런 일 까지 남이 알게 하다니!”
“그는 남이 아니야. 내 동생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라고. 제우스에서 내가 유일하게 믿고 모 든 일을 맡겨 놓을 수 있는 사람이야.”
“그건 당신 사정이구요. 좋아요. 당신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어요.”
“무슨 말이지?”
“조금이라도 당신을 도울 수 있다는 일말의 남아있던 인간적인 배려마저 당신이 모두 가져 가 버렸으니 정말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사업적으로 나도 행동하겠어요.”
“좋아. 당신 마음대로 해.”
민혁은 더 이상의 말도 없이 무례하게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
‘나쁜 자식.’
전화가 끊긴 수화기를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하영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전화를 끊 은 민혁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전화기를 들어 기찬의 번호를 눌렀다.
“나야.”
“네, 사장님. 지금 제우스로 들어가고 있는 길입니다.”
“그녀가 다른 무슨 말 없었어? 무지 화가 나있던데.”
“아무래도 제가 서류를 건네 드린 것이 불쾌하셨던 모양입니다.”
“그건 괜찮아. 자네가 나한테 어떤 존재인지 그녀에게 설명하면 그녀도 이해해줄 거야. 다 른 말은 없었나?”
“강하영 씨가 다른 요구사항을 전해주었습니다.”
“다른 요구사항?”
그의 짙은 눈썹이 한쪽으로 지켜 올라갔다.
“예.”
“뭐지?”
“사업상의 결혼이니 서로에 대한 개인적인 생활에 대한 것은 터치하지 말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부부관계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기찬이 머뭇거리며 어떻게 조리 있게 설명할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미 그의 뜻이 무엇인 지 간파한 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수고했어. 들어와.”
“네.”
전화를 끊은 민혁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보다 강하영이란 여자는 자신을 방어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계약서를 빌미로 그녀는 자신의 성역에 그가 침범할 수 없도록 커다란 요새를 구축해놓고 있었다. 물론, 강 하영 그 여자의 말이 옳았다. 그들은 단지 사업이라고 보면 볼 수 있는 일종의 계약결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영이 자신의 앞에 없어도 그녀가 쓰는 은은한 꽃향기의 향수 냄새를 느낄 수 있었고, 그들이 어둠 속에서 열정적으로 나눈 사랑의 기억 또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과연 두 달이라는 시간동안 그녀를 자신의 바로 곁에 두고 그녀의 존재를 참아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영이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자 근사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민혁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 다. 그녀 역시 민혁이 예약해 놓은 고급 레스토랑을 가야했기에 의상에 신경을 썼다. 민혁이 탐욕스런 눈빛으로 하영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하영은 일부러 그를 도발시키기 위한 옷을 골라 입었다. 섹시한 매력을 거침없이 내뿜는 그 옷은 그의 앞에서 움츠려 왔던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일종의 민혁에 대한 자신의 도전이라 고도 볼 수가 있었다. 검정색 실크가 늘씬한 하영의 몸을 더욱 매력 있게 드러내 주고 있었 다. 깊게 패인 가슴 부분으로 알맞게 솟아 오른 하영의 가슴선이 보였다. 하영은 자신을 바 라보는 민혁의 시선을 일부러 모른 척하며 드레스와 한 벌인 검은 재킷을 입었다.
“오늘, 멋지군.”
약간 잠긴 듯한 그의 목소리였다.
민혁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하영은 아파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레스토랑을 들어섰다. 민 혁이 그 레스토랑을 예약한 이유는 다 철저하게 계산된 일이였다. 그 레스토랑에는 한국에 서는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기자들의 탐색전도 심했고 무엇보다 소문이 빨리 퍼질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민혁은 하영과의 저녁식사 장면을 자연 스럽게 노출시키며 그들의 결혼이 임박했음을 알릴 속셈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그가 식당 안에서 제일 잘 보이는 테이블에 하영과 앉아 주위 사람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을 느꼈다.
“마치 우리를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것처럼 쳐다보는군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하영은 내색하지 않으며 민혁에게 속삭였다.
“내가, 바라는 바지.”
그는 매력적인 웃음을 보이며 이마위로 흘러내린 하영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주었다.
그의 유난히 다정스럽게 보이는 행동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하영이 말을 내뱉었다.
“당신. 연기가 참 뛰어나군요.”
“당신이야말로 잘해주고 있어.”
민혁도 간간이 웃음을 흘려보내주며 대꾸했다.
“남들이 보면 정말 서로 사랑에 빠진 사람들처럼 보이겠어요.”
하영은 어색한 미소를 짓느라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긴장 풀어.”
“걱정 말아요.내 임무는 충실히 해낼 테니까.”
하영은 단 한마디로 민혁을 공격했다.
그들이 주문한 식사가 나왔다. 하영은 식사는 안중에 없고 포도주만을 홀짝거렸다.
“그렇게 마시다간 사람들 앞에서 볼썽사납게 내 품에 안겨서 레스토랑을 나가게 될 거야.
그만 마셔.”
“걱정 말아요. 보기보단 나도 주량이 세요.”
하영이 천천히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결혼할 생각이죠?”
그녀가 묻자 그가 미소를 머금고 그녀에게 대답했다.
“물론 미래 제우스 그룹의 주인답게 그에 걸맞은 결혼식을 올려야 하지 않겠어? 사람들 눈 도 있고 말이야.”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요.”
하영이 굳은 얼굴로 그에게 대답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인형처럼 웃고 있는 꼭두각시 노름은 하 기 싫어요.”
“그럼, 작은 구청 식장 같은 데서 결혼식을 올리자는 말이야!”
그가 하영의 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소리 높여 물었다.
“굳이 2개월 만에 끝날 결혼인데 호화로운 결혼식에 많은 비용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말 이에요.”
“결혼식 비용은 내가 다 부담할 거야.”
입술 사이로 나직이 흘러나오는 그의 말투는 다소 공격적이었다.
“이건 계약일 뿐이에요. 그리고 결혼식 비용의 대부분은 신부에게 들어가는 돈이라고요. 난 그 돈을 지불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는 걸 당신은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은 그는 그녀의 어려운 처지를 상기했다.
“이 모든 일들은 내가 시작했으니 결혼비용도 당신이 내야 한다는 조건은 없어. 신부비용 도 내가 부담하고 결혼식 비용도 내가 부담할 거니까 부담가질 필요 없어. 맙소사! 그럼 당 신은 여태 결혼식 비용 때문에 고민했던 거야? 내가 그걸 당신에게 지불하라고 할 줄 알았 어?”
그의 말에 하영은 조용히 대답했다.
“난 적어도 당신과 대등한 입장에서 이 계약을 시행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런 결혼, 자체 가 난 자존심 상해서 죽고 싶을 뿐인데 돈에 팔려가듯이 취급당하고 싶지 않았단 말이에 요.”
하영이 입술을 깨물어 울음을 참아내고 있었다.
“난 당신을 돈을 주고 산 게 아니야. 말했잖아. 난 당신의 도움 없인 제우스를 얻을 수 없 다고.내겐 당신 도움이 절실해.”
그가 손을 내밀어 테이블 위에 놓인 하영의 손을 잡아주었다.
#28
다음날 아침 하영은 샤워를 하면서 어젯밤의 일을 생각해보았다. 그런대로 민혁의 앞에서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것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식사하는 내내 그 녀의 가슴을 힐끔거리다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당황한 듯 포도주를 엎지르기도 했다.
마지막에 그와 결혼식 문제로 언쟁을 벌이며 눈물을 흘릴 뻔했지만 정말 눈물겨운 노력으로 그의 앞에서 바보같이 울지도 않았다.
‘아빠. 나 잘하고 있는 거지?’
왠지 서민혁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지만 병원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하영은 자기 감상에 빠지는 사치스런 행동은 하지 않기로 다짐했 다. 2개월만 참으면 그녀는 서민혁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아버지와 언니와 다시 예전의 행복 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꿈이 빨리 실현되기를 바라며 자신을 데리러 민혁이 오기 전에 재빨리 옷을 입었다. 어제 그는 그녀를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며 오늘 자신의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간다고 말했다. 드디어 송미령이라는 여자와의 첫 번째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문득 송 미령이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일까 궁금해졌다. 민혁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감히 제우스를 넘 보고 있는 것이다. 민혁과 손을 잡은 이상 그녀역시 하영의 적이었다. 자신은 충실히 민혁의 아내 노릇을 해주면 되고 그에게 제우스를 악녀의 손에서 되찾아주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만 된다면 그녀의 역할은 끝이다.
하영은 마지막으로 민혁이 선물해준 진주 목걸이를 목에 걸고는 전쟁터를 향하는 군인과 같 은 심정으로 거울을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긴장할 것 없어.”
표정이 굳어있는 하영의 모습을 보며 그녀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민혁이 말을 꺼냈다.
“긴장하지 않아요.”
“그냥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기만 하면 돼. 모든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알았 지?”
“네.”
어느새 그들이 타고 있는 차는 청담동의 호화 주택 앞에 멈추었다. 기찬이 차에서 내려 민 혁이 내릴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민혁은 다시 한 번 하영을 보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여긴가요?”
하영은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싸인 집을 올려다보며 그에게 물었다.
“응.”
“너무 삭막하군요.”
우울한 회색빛의 담장을 보자 그녀의 마음이 더욱 가라앉았다.
“나도 이곳에 들어 온지 얼마 안 됐어. 스물네 살 때 이 집에서 나간후론 한 번도 찾아오 지 않았지.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들어온 거야.”
“우릴 기다리고 있겠죠?”
“응. 어서 들어가자.”
하영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만졌다. 기찬이 미리 초인종을 눌러 문을 열어놓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삭막한 담장 안에는 커다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름모를 갖가지 나무들과 꽃나무들이 빽빽하게 정원에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 이 닿지 않았는지 가지들이 을씨년스럽게 널브러져 있는 그곳은 정원이란 단어를 붙이기가 무색했다.
하영은 종종 걸음으로 앞서가는 민혁을 따라 정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집 안으로 들 어서자 답답한 적막감과 두려움에 하영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민혁의 옆에 바싹 따라붙 은 그녀는 그와 함께 거실의 크림색 소파에 앉았다.
“사모님 모셔와.”
“네.”
기찬은 미령의 방으로 다가가 조용히 노크했다.
“누구야?”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하영의 귀에도 들려왔다.
“사장님 들어오셨습니다.”
기찬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미령이 모습이 나타났다. 민혁이 소파에서 일어 나자 하영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미령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민혁을 보다가 그의 옆에 서 있는 하영을 발견하고 놀랐다는 듯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영을 유심히 바라봤다.
어디선가 본 듯 한 얼굴.
무언가 생각난 듯 미령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렸다.
“너, 넌.”
미령이 하영을 가리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손끝이 심하게 떨렸다.
강하영.
틀림없었다. 사진 속에서 보던 그녀보다 약간 마르긴 했어도 분명 강하영이었다. 서 회장이 죽던 날 호텔에 함께 있었던 그 여자, 그 현장에 최성호도 함께 있었다는 걸 유일하게 알고 있는 그 여자.
미령은 서슬 퍼런 칼날이 자신의 목 앞에 놓여있는 것처럼 하영의 출현에 온몸에 소름이 돋 았다.
“누, 누구지?”
미령은 하영을 애써 모른 척하며 갈라진 목소리로 민혁에게 물었다. 하영은 미령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당당히 턱을 들어올려 미령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강하영이라고 합니다.”
민혁의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하는 그녀를 보는 민혁과 기찬의 눈이 놀란 듯 동그래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민혁은 걱정과는 달리 미령의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하영이 마 음에 든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하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난 낯선 사람이 내 집에 들락거리는 거 싫어. 앞으로 여자를 만나려면 밖에서 만나줬으면 좋겠어.”
미령은 하영의 어깨 위에 올려진 민혁의 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인사시켜 드리려고 데리고 왔어요. 이젠 한 식구가 될 사람이 니까.”
“한식구라니?”
잠시 민혁은 침묵으로 미령을 노려보았다.
“저와 결혼할 여자 입니다.”
폭탄이 터진 것처럼 그의 말이 미령에게 큰 충격을 준 듯했다. 미령이 몸이 잠시 비틀거리 는 걸 하영은 놓치지 않았다.
“겨, 결혼?”
“예. 식은 다음 주 내로 올릴 생각입니다.”
“겨, 결혼이라니. 여태 아무 말 없다 갑자기 결혼이라니!”
미령의 히스테리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우진 그룹 강회장님의 막내딸입니다. 우연찮게 회사에서 만나서 서로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죠.”
민혁이 뜨거운 시선을 하영에게 보내자 하영도 그에 응수하려는 듯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랑에 빠진 연인을 바라보는 미령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왜, 왜 하필 이여자야!!”
“말, 조심하십시오!!”
민혁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하영에게 달려들 듯 포즈를 취하는 미령에게 맞서 하영 앞으 로 나섰다.
“제 아내가 될 사람입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새 새어머니께 인사드리지 않 아도 될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인사드리려고 저 여자를 데려온 건 제가 취할 수 있 는 새 새어머니에 대한 예우였기 때문입니다.”
“하, 말도 안 돼. 사랑에 빠졌다고?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 줄 몰라서 그러는 거야? 저 여 자는 네 아버지가 탐냈던 여자라고!!”
미령의 말을 들은 하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미령의 발악 아닌 발악에 민혁의 얼굴이 무섭도록 어두워졌다. 기찬은 민혁의 변하는 표정 을 보며 그를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혁의 얼굴에는, 십여 년 전 그의 새어머니 장례 식 때 서 회장을 바라보던 살기어린 표정이 똑같이 되살아나 있었다. 기찬은 그때 민혁의 표정을 보며 그의 시선만으로도 죽을 것만 같은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었다. 지금 송미령은 가면 뒤에 감추고 살아온 민혁의 인내의 한계를 다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민혁은 금방이라도 미령을 후려칠 것 같은 기세로 주먹을 쥐고 미령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순간적으로 미령은 뜨끔해서 주춤 뒤로 물러섰다.
“사장님!!!”
기찬이 민혁을 부르며 미령과 민혁 사이를 가로막았다.
“괜찮아. 비켜.”
마지못해 기찬이 물러섰다.
“다시 한 번만 아버지의 일을 제 앞에서나 하영이 앞에서 꺼내셨다간 그땐 저도 가만 히 있지 않겠습니다.”
“날, 날 감히 네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난 엄연히 네 아버지의 처야.”
두려운 듯한 표정에서도 미령은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한 오기로 민혁에게 맞섰다.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두죠. 새새어머니에 대한 예우는 여기까지입니다. 설마 저 사람에게 시 새어머니 노릇까지 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여기 들어와서 살겠다는 거야?”
미령이 손을 뻗어 민혁의 팔을 움켜쥐었다.
“네. 이 집에서 제가 태어나고 저의 새어머니가 살다가신 집입니다. 결혼 후 저희가 살아갈 집이고 제 자식들이 살아갈 집입니다. 결혼 후 여기서 사는 건 당연한거 아닙니까?”
자식. 아이들.
하영은 민혁의 말에 민혁과 자신 사이에서 태어날 아기들을 생각해보았다.
‘민혁을 쏙 빼닮은 귀여운 아이가 태어난다면 아들이건 딸이건 무척 예쁠 거야.’
문득 하영은 자신이 이런 망상에 빠졌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와의 미래를 꿈꾸다니 어리석은 짓이야.’
하영은 부인하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가지.”
민혁은 멍하니 서있는 하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네? 아, 네.”
하영은 자신의 상상이 그에게 들키기라도 한 듯 얼굴이 붉어졌다.
“미안해.”
현관을 나서며 민혁이 하영에게 사과했다.
“뭐가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민혁은 자신과 기찬이 있는 자리에서 미령이 아버지의 더러운 이야기에 하영을 끌어들여 이 야기한 미령을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영이 느꼈을 수치심을 생각하면 정말 그 녀 앞에서 민혁은 할 말이 없었다.
“괜찮아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뿐인데요, 뭘.”
담담한 하영의 모습에 민혁은 걸음을 멈추고 하영의 손을 붙잡았다. 그가 따사로운 시선으 로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에는 많은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하 영은 그의 시선 속에 그녀를 지켜주겠다는 그의 의지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 고 있던 민혁의 손에 힘이 가해지면서 그는 느닷없이 하영을 그의 가슴에 끌어당겼다. 반항 할 사이도 없이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대체 왜이래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하영이 급히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누가 보고 있어.”
그는 정신없이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키스했다. 하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는 그 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아 고정시키곤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속삭였다.
“당신이 조금만 협조해 준다면 쉬울 거야. 우리의 의심 많으신 늙은 여우를 속이려면 말이 야.”
그의 말에 하영은 베란다에 나와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미령을 발견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 거리다가 팔을 올려 그의 목을 끌어안고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가져왔다. 그 부드러운 달콤 함 때문에 조금이나마 자제하고 있던 그의 인내심이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는 더 적극적으 로 하영의 키스에 응수하며 그녀를 감미로운 세계로 정신없이 몰아갔다.
잠시 후 뜨거운 열기에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하영의 눈에 입을 삐죽거리며 안으로 들어가 는 미령의 모습이 보였다. 하영은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몸을 비틀거렸다.
“그, 그만해요. 이만하면 충분하잖아요. 이 정도면 송미령뿐만 아니라 온 동네의 사람이 다 봤을 거라고요.”
민혁은 키스로 인해 립스틱이 지워진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의 온몸은 그녀를 향한 뜨거운 욕망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젠장. 점점 일이 어려워지는군.”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에요?”
“아니야. 어서 돌아가자고.”
그는 그녀를 다시 만지고 싶다는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민혁은 성큼성큼 앞서 가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를 괴롭히는 욕망을 저주하며 차에 올랐다.
민혁은 바쁜 시간을 쪼개서 하영이 웨딩드레스를 고르러 다니는 때에 맞춰 시간을 냈다. 그 는 오후의 스케줄을 모두 비워놓고 그녀와 함께 유명한 웨딩드레스 숍을 돌아다니며 하영에 게 어울릴만한 드레스를 고르기 시작했다. 정작 드레스를 입는 신부인 하영보다 민혁은 더 욱 세심하게 이것저것 입어보라며 그녀에게 요구하며 까다롭게 드레스를 골랐다.
“벌써 일곱 벌 째라고요.”
하영은 또 다른 드레스를 요구하는 민혁을 바라보며 구두 때문에 부어오른 발을 의자에 앉 아 문질렀다.
“많이 아파?”
그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무릎에 그녀의 발을 올려놓았다.
“뭐예요!!”
당황한 그녀가 황급히 발을 내리려고 했지만 그는 발목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그는 정성껏 부어오른 그녀의 발바닥을 손으로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들의 모습이 다소 민 망하게 생각된 하영은 슬며시 긴 웨딩드레스 치맛자락을 내려 자신의 발을 주무르고 있는 민혁의 손을 가렸다.
“어때? 시원해?”
“으음.”
하영은 너무나도 편한 기분에 등을 의자에 푹 기댔다. 그에게 자신의 발을 내맡기고 있는 게 창피하긴 했지만 능숙한 그의 마사지 솜씨에 그녀는 황홀경에 빠지고 있었다.
“많이 해본 솜씨네요.”
하영이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기찬이한테 배웠어. 기찬이가 발 마사지라고 한번 해줬었는데 참 좋더라고. 그래서 그한테 좀 배워놨지. 이럴 때 쓸모 있을 줄 몰랐어.”
그의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맺힌 걸 본 하영은 작은 웃음을 터트리며 발을 그의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이젠 괜찮아요. 고마워요.”
하영은 민혁의 자상한 배려에 마음속으로 놀랐다. 차가운 그의 얼굴 뒤에는 그녀가 모르는 수많은 표정들이 숨어있었다.
‘과연 그의 실체는 무얼까.’
왠지 그녀가 몰랐던 더 많은 모습들을 결혼생활 동안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전 다 예쁘게 보이는데, 민혁 씬 마음에는 안 드나 보죠?”
“당신에게 어울리는 드레스가 있을 거야. 여기는 없는 것 같으니까 다른 가게로 가보자.”
“하,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해요. 이곳 사람들한테 미안하잖아요.”
그녀는 혹시 자신의 이야기를 점원들이 듣기라도 할까 민혁의 귀에 속삭였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점원을 향해 손짓을 했다.
“예. 사장님.”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맘에 드시는 게 없으신가요?”
“예. 좀 그러네요.”
“내일 다시 한 번 와 보시겠어요. 내일 저의 디자이너 선생님께서 새로운 디자인의 드레스 를 선보일 예정이거든요.”
“그러죠.”
하영은 다시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민혁을 따라 웨딩 숍을 나왔다. 그녀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점원들은 그냥 돌아가는 그들을 상냥하게 배웅까지 해주었다.
“그들은 제우스의 사장이 자신의 가게를 다녀갔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하고 있어. 걱정할 필요 없어.”
“제우스의 위력을 다시 한 번 느껴지는군요.”
그들은 몇 블록 떨어진 새로운 웨딩 숍으로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디자이너 소피아’라는 명찰을 가슴에 단 여자가 그들을 맞이했다.
“드레스 좀 보러 왔습니다.”
“어머!! 제우스 사장님 아니신가요!!!”
호들갑을 떠는 여자를 보며 하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제 신부가 될 사람입니다. 드레스 좀 추천해 주시지요.”
“그럼요. 뭐 특별히 선호하는 디자인이라도 있으신가요?”
“단순한 거요.”
디자이너는 하영이 뭔가 충격적인 이야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으음. 유명 디자이너들의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디자인을 말하는 겁니다. 물론 이 정도 몸 매라면 어떤 디자인이라도 잘 어울리지만요.”
민혁이 헛기침을 해가며 당황해하는 디자이너에게 설명했다.
“전 유명 디자이너의 비싼 드레스가 필요하다고 보지 않아요.”
하영이 민혁에게 다급하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비싼 드레스를 몸에 걸치고 싶은 생각이 없 었다. 하지만 민혁과 디자이너는 하영이 이 자리에 없는 것처럼 싹 무시했다.
“우리 아름다운 신부님께 딱 어울리는 드레스가 하나 있어요!! 신부님이나 사장님께서 마 음에 들어 하실 거예요.”
디자이너는 그들의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드레스가 걸려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드레 스를 한 벌 꺼내들고 오면서 자부심어린 표정으로 그들 앞에 보여주었다.
“영국 다이애나 왕비의 결혼식 기억하세요? 왕비의 드레스를 디자인했던 디자이너가 만든 건데 한국에서 유일하게 저희 가게가 직수입한 거예요. 현재 드레스 중에서는 최고로 평가 받고 있어요.”
하영은 분명히 집 한 채 값은 나가 보이는 드레스를 보며 바로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억 지로 만져 보라며 등 떠미는 디자이너의 손에 이끌려 그 드레스를 만져보는 동안 은은하게 우윳빛으로 빛나는 고급 공단의 느낌이 마치 옷자락이 그녀의 손에 들러붙는 것 같았다. 목 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시원한 네크라인과 흐르는 듯한 아름다운 실루엣이 그녀의 마음에 꼭 들었다. 드레스를 바라보는 민혁 또한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어서 입어봐. 잘 어울릴 것 같아.”
하영은 어느새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내 불편했던 심기가 다 사라지고 신데렐라의 드레스를 입어보는 것처럼 로맨틱한 기분이 들었다. 사방 거울을 통해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는 하영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하영은 원래 자기 옷을 입은 것처럼 이 드레스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단순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위엄과 우아함이 드러난 드레스였다. 언젠가 사진에서 보았던 드레스를 입 은 다이애나 왕비가 풍기던 순수함과 여왕다운 위엄이 자신에게서도 풍겨 나오고 있었다.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드레스였다.
“자, 신랑 분께도 보여드려야지요?”
디자이너가 커튼을 젖히자 하영의 아름다운 모습이 민혁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바라보는 민혁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영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완벽해. 정말 완벽해.”
그의 감탄에 하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당신의 아름다움을 더 해주는 드레스야. 맘에 들어?”
그의 물음에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드레스 가 맘에 들었던 것이었다.
‘내가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볼 수 있겠어.’
하영은 마음을 굳게 먹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맘에 들어요. 하지만”
“이 드레스로 주세요.”
민혁의 말에 디자이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요. 아직 가격도 모르는데 엄청 비쌀 거예요. 수입품이라면.”
하영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민혁은 지갑을 꺼내 계산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녀는 옷을 벗기 위해 디자이너의 손에 끌려갔다.
“고마워요.”
하영은 민혁과 함께 웨딩 숍을 나오며 감사의 말을 꺼냈다.
“정말 당신한테 딱 어울리는 드레스야.”
“정말 비쌀 텐데. 괜찮겠어요?”
하영이 걱정스런 얼굴로 민혁을 바라보았다.
“내 여자가 될 사람한테 해주는 건데 뭐 어때.”
내 여자라는 민혁이 말이 묘하게 그녀의 가슴속에 와 닿았다.
“자. 다음에는 반지를 사야지. 자 타시지요. 공주님.”
민혁이 하영에게 차 문을 열어주며 익살을 떨었다. 그의 익살어린 말투에 하영은 웃음을 터 트리며 그의 차에 올랐다.
‘그래. 이순간만은 즐기는 거야. 잠시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29
민혁은 하영이 아파트의 문을 열쇠로 여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무거워 보이는 문 이 열리고 하영이 안으로 들어서다 우두커니 서 있는 민혁을 뒤돌아보았다.
“들어왔다 가실래요?”
처음으로 민혁에게 건네는 그녀의 초대였다.
“그래도 될까?”
민혁은 하영의 웨딩드레스가 들어있는 커다란 종이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하영은 거실의 불을 켠 다음 부엌으로 들어가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그녀는 자신의 집인 양 자연스럽게 집 안에서 행동하고 있었다.
“집 분위기가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 그냥 살기엔 좀 삭막할 텐데. 뭐라도 사서 새로 장식 하지 그랬어.”
민혁이 소파에 앉으며 거실을 둘러보았다.
“며칠만 더 있음 될 건데요, 뭐.”
향긋한 원두커피향이 피어나는 찻잔을 민혁 앞에 내려놓으며 하영은 민혁 앞에 앉았다.
“음. 냄새 좋은데. 달콤한 캐러멜 냄새가 나. 무슨 커피지?”
“블루 마운틴이요.”
“블루 마운틴?”
“네. 향이 참 좋죠?”
하영이 향을 음미하듯 찻잔을 코에 가까이 대고는 차를 마셨다.
“아, 참! 줄 게 있어.”
민혁은 찻잔을 유리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자신의 양복 안주머니를 뒤졌다. 이내 그는 벨 벳 천으로 정성스럽게 쌓여있는 반지 함을 내밀었다.
“뭐예요?”
“우리 결혼반지.”
그의 말에 하영은 물끄러미 반지 함을 내려다보았다.
“뭐 해? 안 열어봐?”
“언제 반지는 맞춘 거예요? 내 손가락 호수는 알아요?”
“맞춘 거 아니야.”
“그럼요?”
하영은 반지 함을 들어 뚜껑을 열어보았다. 그녀가 뚜껑을 열자 환한 거실의 조명에 반지가 반짝거렸다.
“세상에. 너무 아름다워요. 이런 반지는 처음 봐요.”
하영은 조심스럽게 반지를 꺼내 불빛에 비춰보았다. 그녀가 들고 있는 반지는 특이한 모양 을 하고 있었다. 백금으로 된 링 가운데에는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작은 나비가 장 식되어 있었는데 그 나비의 몸통 부분에는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하영이 반지를 움직일 때마다 불빛에 그 자태를 빛내고 있었다.
“이런 디자인은 처음 봐요. 특별히 모양을 맞춘 것 같은데.”
“그런 디자인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특별히 개인 소장용으로 만든 반지니까.”
민혁이 반지를 하영에게서 건네받아 그녀의 기다란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끼어주었다. 반지 는 마침 제 주인을 아는 양 모양 좋게 딱 그녀의 손가락에 들어맞았다.
“다행히 딱 맞네.”
하영은 자신의 손에 끼어진 나비반지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아름다워요. 만화책에서만 봐오던 반지 같아요.”
“맘에 든다니까 다행이야.”
“특별히 민혁 씨가 주문한거예요?”
“아, 아니. 산 거 아니야.”
“그럼요?”
하영이 의아한 얼굴로 민혁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거 돌아가신 새어머니 반지야. 언젠가 내가 결혼하게 되면 그 반지를 며느리가 될 사람에게 물려주라고 하셨지. 오래된 반지라서 색이 변했어. 세팅 맡겼다가 어제 찾아왔 지.”
“그럼 이게 새어머니 유품이란 말인가요?”
하영은 놀라는 표정으로 허겁지겁 반지를 자신의 손가락에서 뺐다.
“왜? 그냥 끼고 있어.”
“받을 수 없어요.”
하영은 조심스럽게 반지를 도로 반지 함 안에 넣고는 뚜껑을 닫았다.
“왜 쓰던 거라서 싫어?”
하영의 태도에 민혁의 목소리가 어둡게 변했다.
“쓰던 거라서 싫은 게 아니에요. 어떻게 이 반지를 저한테 줄 생각을 했죠? 민혁 씨, 생각 이 있는 사람이에요?”
하영이 발끈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왜 그 반지가 싫다는 거지?”
“새어머니 유품이라면서요. 그렇게 소중한 반지를 우리 결혼식에 낀다는 것은 돌아가신 분을 모욕하는 일이예요. 제가 정말 민혁 씨의 신부가 된다면 상관없지만 아니잖아요. 남을 속 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찜찜한데 돌아가신 분까지 속이고 싶지는 않아요.”
민혁은 하영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거칠게 반지 함을 낚아채고는 자신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의 태도에 하영은 조심스런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화, 났어요?”
“미안해. 미처 생각을 못했어.”
사과는 하고 있었지만 그는 내심 하영이 섭섭한 눈치였다.
“정말이에요. 반지 너무 아름다워서 갖고 싶을 정도예요.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요. 다른 반 지로 사주세요. 그리고 그 반지는 나중에 민혁 씨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난다면 그때 제대로 된 주인에게 돌려주세요.”
민혁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영의 눈을 응시했다.
“사랑 난 그런 사치를 할 만큼 여유롭지 않아.”
“사치라뇨.”
뜻밖의 민혁의 말에 하영이 반문했다.
“여성 편력이 심한 아버지 때문에 늘 술로 지내는 새어머니를 보고 자라왔어. 어린 마음에 새어머니한테 화를 내며 물었지. 저런 아버지 필요 없으니 나하고 둘이 살자고. 하지만 새어머니 는 그런 나를 때리면서 나무라셨어.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거야. 쳇, 그 게 무슨 사랑이야. 자신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사랑 때문에 아버지의 인생에 발이 묶인 체 죽어가는 새어머니. 사랑이라는 거짓된 이름으로 새어머니를 버려두는 아버지. 새어머니가 돌아 가시고 죽도록 미운 아버지 때문에 방황했었지. 그러다가 재수 없게 한 여자랑 엮이게 되서 결혼까지 하게 됐어.”
결혼.
그가 결혼을 했었다. 그에 대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었다. 그가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은 사람이란 걸 감안하면 결혼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왠지 자꾸만 그가 결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쓰이는 것 같아 그녀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결혼했었는지 몰랐어요. 그럼 이혼 하신건가요?”
“이혼? 아니, 이혼은 아니었어.”
“그, 그럼.”
“죽었어. 교통사고로.”
침울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하영은 그가 부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고 느꼈다. 왜 그의 슬픔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아파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아내를 사랑했던 걸까. 그래서 이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부인을 사랑하셨던 건가요?”
“왜?”
“많이 슬퍼 보이네요.”
“슬퍼? 그래 슬프지. 그 여자가 죽던 날, 두 번째로 내가 사랑하게 된 이를 잃었으니까.”
그의 입에서 사랑하는 이라는 말이 나오자 하영은 가슴속에서 무거운 돌이 툭 하고 떨어지 는 것 같았다.
“이런 우울한 이야기는 집어 치우자. 가야겠어.”
민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를 배웅하기 위해 하영은 따라 나섰 다.
“문 꼭 걸어 잠그고 자.”
“네.”
왠지 쓸쓸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하영은 문을 걸어 잠갔다. 테이블 위에 그가 커피 를 마시다 만 찻잔이 놓여있었다. 하영은 그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그가 마시던 찻잔을 들 어 올렸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곳에 살며시 자신의 입술을 대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에 닿는 건 늘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던 그의 뜨거운 입술 대신 차갑게 식어버린 찻잔만 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의 마음도 이렇게 차갑게 식어버린 걸까. 아내의 죽음 때문에 그렇게 차가운 사람으로 변해버린 걸까.
민혁은 몰던 차를 거칠게 인도 쪽으로 붙여 세웠다. 그는 비상등을 켜고는 주머니에서 담배 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쩌자고 그녀 앞에서 그 여자의 이야기까지 꺼낸 것일까.
“젠장!!!”
민혁은 힘껏 핸들 위로 주먹을 내리쳤다. 강하영이란 여자 앞에서 그의 숨겨왔던 치부를 자 꾸만 드러내는 것 같아 그는 화가 났다. 민혁은 자신의 지갑을 꺼내 지갑 안쪽 주머니 깊숙 이 숨겨 놓았던 사진 하나를 꺼내어 보았다. 그것은 배경도 없고 온통 검정색 사진이었지만 희미하게 검은색 위로 어떠한 자그만 완두콩 같은 형체가 보였다. 민혁이 차 안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자 차안의 전등을 키고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초음파 사진이었다. 완두콩처럼 보이는 형체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아이의 형상 을 하고 웅크린 채 자신의 존재를 사진으로 통해 알리고 있었다.
불쌍한 아이.
새어머니 죽음 이후로 없다고 믿었던 그에게 사랑이란 가능성을 알게 해준 그의 아이였다. 하 지만 그가 사랑을 채 쏟기도 전에 그의 아내는 그의 아이와 함께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그 에게 복수를 했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교통사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 의 아이까지 함께 죽음으로 몰고 사실에 분노했다.
그가 어릴 적 새어머니가 그에게 즐겨 읽어주던 동화책이 있었다. 눈의 여왕이란 동화였는데 남자 주인공의 눈 속에 눈의 여왕의 깨진 거울 조각이 박혀 그의 마음도 차갑게 얼어붙어 사랑하는 여자친구도 몰라본다는 이야기였다. 아이의 죽음은 곧 차가운 비수가 되어 민혁의 따뜻해져가는 심장을 내리꽂아 차갑게 얼려버렸다. 민혁은 아기의 사진을 지갑 속에 조심스 럽게 집어넣은 다음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자신의 얼어버린 심장엔 다시는 봄이 올수는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여자라도. 그게 가끔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강 하영이란 여자라 하여 도.
#30
하영은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정성스럽게 우진의 얼굴과 손등을 닦아주며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막내딸의 수다가 마냥 좋은 우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가락 하나 하나를 닦아주는 하영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진은 움직일 수 있는 손으로 하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진의 손길에 하영은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아빠, 나 시집보낸다니까 섭섭해서 그러죠?”
“으. 으.”
우진은 그렇다는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여전히 어그러진 흉한 소리만 나올 뿐이 었다. 자신의 뜻대로 말 한마디 못 하는 현실에 우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영은 물수건을 내려놓고는 우진의 손을 잡아주었다.
“알아요. 아빠가 말씀은 못하시지만, 난 아빠가 무슨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지 다 알아요.
식장에 나 혼자 들어가는 거 그것 때문에 마음 아프신 거죠?”
그녀의 말에 우진의 눈이 흐려지며 한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바보같이 우시긴.”
하영 역시 눈에서 눈물이 흘렀지만 그녀는 우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사람,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가끔 보면 농담도 할 줄 알고 배려도 할 줄 알고 따스 한 사람이에요.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되요.”
“하서미사라.”
비록 듣기 힘든 말이었지만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을 사랑하느냐는 말.
‘그 사람을 사랑하느냐고요? 아니요. 사랑하지 않아요. 아니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아 빠.’
하영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아빠 때문이야. 자꾸 시집가는 딸 마음 심란하게 하기예요!!”
하영은 살짝 우진에게 눈을 흘기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아빠. 있잖아요. 혹시라도 내가 아빠 실망시키는 일을 하더라도 나 미워하지 않기로 해요.
나 미워하지 않을 거죠?”
그녀는 다짐을 받듯 우진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어 어.”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손에 얼굴을 묻는 딸의 모습을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았 다.
“어? 너 왔니?”
하영은 언니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뒤돌아보았다. 화려한 외출복 복장에 짙은 화장을 한 진영의 모습을 보는 하영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아버지 이렇게 혼자 계시도록 하면 어떻게 해!”
하영은 진영을 타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누가 병원 앞에 와 있다고 해서.”
“언니는 잠깐이 세 시간이야? 내가 여기 온 지 세 시간이 넘었는데.”
하영은 자신이 아버지를 제대로 돌보지 못 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을 괜히 언니 진 영에게 화로 퍼붓고 있었다.
“뭐야. 넌 잘 와보지도 않으면서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돈만 주면 다 인줄 아니? 솔직히 돈만 던져 주고 네가 한 일이 뭐가 있는데!!!”
“언니, 어떻게어떻게 언니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진영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하영은 몸이 떨려왔다.
“나가서 이야기해.”
하영은 그들의 언쟁을 우진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진영의 팔을 잡아끌며 병실을 나갔 다.
“이거 놔!!!'
진영은 하영의 팔을 뿌리치며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언니. 정말로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야?'
하영이 슬픈 눈으로 진영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제우스 그룹 그 비서한테 돈이나 던져주면서 너 우리나 아빠한테 얼굴 제대로 비 춰준 적 있었어? 너 결혼하는 문제도 난 어제서야 알았어. 우리 가족 맞아?”
“미안해. 언니. 하지만 사정이 있었어.”
“무슨 사정? 흥. 제우스 그룹의 안주인이 되더니 우리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 거야. 그런 거 아니니? 왜 하필이면 너니? 솔직히 나도 너만큼은 아니지만 외모도 빠지지 않고 배울 만큼 배웠어. 지금은 내 형부 같은 사람 때문에 신세한탄이나 하고 있지만.”
드디어 진영의 본심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늘 어릴 때부터 진영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하영에게 알게 모르게 열등의식 같은 것을 키 워왔다. 하영이 껍데기처럼 여기는 자신의 외모를 진영은 늘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 샘을 내기도 했다. 아버지가 똑같은 드레스를 사가지고 와도 진영은 하영의 것을 탐을 내며 어린 동생을 구슬려 드레스를 서로 바꾸기도 했다.
하영이 언니가 자신에게 남다른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대학학교 때 의 일어난 작은 소동에서였다. 평소 하영을 짝사랑하던 남학생이 하루에도 몇 통씩 하영의 집에 러브레터를 보낸 적이 있었다. 많은 남학생들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하영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직 피아노 레슨과 공부에 시간을 다 보냈다. 어느 날인가 하영이 비 가 많이 오던 날 밤늦게 까지 피아노 레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그 빗속에서 자신 의 집 앞에 쓰러진 남학생을 발견했다. 부랴부랴 병원으로 실려 간 그 남학생은 한동안 폐 렴으로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남학생의 사건이 잊혀질 때쯤 하영은 우연히 진영의 책 상서랍에서 편지 꾸러미를 발견했다. 강하영 앞으로 온 남학생의 편지. 하영은 당장 편지들 을 들고 남학생을 찾아갔고 그는 하영과의 편지를 계속 주고받고 있었음을 이야기했다. 어 느 날 갑자기 그녀의 답장이 끊겼고 그날도 비를 맞고 하영을 기다리다 쓰러진 남학생을 하 영이 발견한 것이었다.
하영은 굳이 진영에게 자신을 대신해 편지를 쓴 이유를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이유를 캐묻 는다는 것은 언니 진영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로 하영 은 늘 언니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늘 좋은 것은 언니에게 양보했 고, 되도록이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하영은 자신을 낮추는 방법을 배워갔 다.
“언니는 제우스의 안주인 자리가 부러운 거야? 언니가 보기엔 내가 행복해 보여? 그렇 게 보여? 그 행복감에 내가 가족까지 잊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정말 그런 거야? 언니, 왜 이렇게 내 마음을 아프게 해? 지금 언니가 아니더라도 난 충분히 지금 괴롭고 힘들어.
하루하루가 벼랑 끝에 선 기분이야. 나에겐 아빠와 언니만이 내가 안심하고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인데 왜 밀어 내려고 하는 거야?”
하영은 밀려드는 슬픔으로 인해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왜 그래? 너, 결혼하는 데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무, 문제는 무슨 그냥 언니도 그랬잖아. 형부랑 결혼하면서 이 결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고민했었잖아. 결혼을 앞둔 신부의 그런 고민 그 런 거지, 뭐. 치이. 내가 너무 주책 맞았나?”
하영은 혹시라도 민혁과의 결혼계획을 진영이 눈치라도 챌까 둘러댔다. 의심스런 눈치로 하 영을 보던 진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결혼해도 우리 식구 나 몰라라 하지 말란 말이야. 나 혼자서 아빠 감당해 내기에 는 너무 힘들어.”
“미안해. 나도 자주 찾아뵙도록 할게.”
그때 하영의 핸드백에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전화를 꺼내 받아들 었다.
“여보세요.”
“나야. 어디야?”
늘 거만하듯이 상대방을 압도하는 굵직한 민혁의 목소리였다.
“병원이요.”
“전화도 안 받고 아파트에도 없고 걱정했잖아.”
정말로 그녀를 걱정하는 듯한 그의 말투였지만 하영은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발끈하며 소리쳤다.
“내가 일일이 보고 하면서 다녀야 해요!!!”
“왜 그래?”
화가 난 듯한 하영의 목소리에 다소 당황한 민혁의 목소리였다.
“가봐!!!! 병원에 내가 있을 테니.”
통화를 듣던 진영이 하영에게 가보라는 듯 손을 앞으로 내저었다.
“지 돌아갈 거예요.”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하영은 핸드폰의 플립을 닫아버렸다.
“나 가볼게.”
“그래. 미래의 제우스 사모님이 되실 분인데 이렇게 혼자 돌아다녀서야 되겠니? 보는 사람 들 눈도 있고 말이야.”
진영의 또다시 시작되는 비꼬는 말투에 응수하려다 하영은 더 이상의 싸움은 자신의 힘을 낭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엘 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민혁의 전화인 듯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액정에 서민혁이라는 발신 번호가 뜨자 하영은 플립을 열어 핸드폰의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지금 상태로는 그와 대화를 나눠봤자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하영은 힘없이 복도를 걸었다. 조용한 아파트의 복도에서는 또각거리는 하영의 하이힐 소리만이 또렷이 울렸다. 그 소리 하나하나가 망치로 자신의 머 리를 때리고 있는 것 같이 머릿속에 울리고 있었다. 자신의 집 문 앞에 다 이르렀을 때 그 녀의 구두소리가 아닌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 하영은 고개를 들었다. 화가 났는지 붉으 락푸르락하는 얼굴의 민혁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영이 막 입을 열려고 할 찰나 민 혁은 다짜고짜 하영의 핸드백을 빼앗아 뒤지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에요!!!”
하영이 가방을 빼앗으려 손을 뻗자 그는 등을 돌리고 핸드백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민혁 씨!!!”
“왜 전원을 꺼놓고 있는 거야!!”
그가 하영의 전화기를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그, 그냥. 병원 안에선 전화를 받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꺼놓았어요.”
“내 전화라서 꺼놓은 건 아니고?”
예리한 민혁의 지적에 뜨끔했지만 하영은 모른 척하며 민혁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피곤해요. 쉬고 싶어요.”
하영은 그에게 등을 돌리며 집으로 걸어갔다.
“강하영!”
민혁의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와 거칠게 하영을 돌려세웠다.
“뭐예요!!!!”
소리치려던 하영은 무섭도록 차가운 민혁의 표정을 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내 앞에서 함부로 등 돌리지 마. 알았어?”
“내가 당신 돈에 팔려갔다고 하지만 내 자유까지 판 건 아니에요. 난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요.”
속으로는 그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질 수 없다고 생각한 하영은 차가운 말을 내뱉으 며 그에게 맞섰다.
“돌아가세요.”
“제우스를 그렇게 만만하게 본 거야? 대한민국 사람들의 시선이 제우스의 안주인에게 쏠려 있어. 함부로 혼자 행동했다간 큰일을 치룰 수도 있다는 거, 일을 당해보고 나서야 후회하겠 어!!!! 젠장!!!!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자신의 아파트로 걸어가는 하영의 등 뒤로 민혁이 말을 퍼부었지만 그녀는 모른 척 빠른 걸 음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열쇠로 문을 여는 하영은 제발 그가 자신을 따라오 지 않게 해달라고 속으로 기도했다.
마침내 열쇠로 문을 열고는 부랴부랴 안으로 그녀는 들어섰다. 그리고는 그가 따라 들어올 까 손잡이를 잡고 문을 닫으려 했지만 이미 그의 발이 먼저 안쪽으로 들어온 후였다. 그는 억지로 문을 열어젖히고는 하영의 가녀린 어깨를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내 앞에서 이렇게 오만하고 당당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내 전화를 함부로 끊는 것도, 내 앞에서 당당히 먼저 등을 돌리는 것도 말했었지 내 앞에서 함부로 먼저 등 돌리지 말라고. 첫 번째는 경고였고 두 번째는 내 말을 어긴 당신한테 내리는 벌이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입술이 하영의 입술에 달려들었다.
*********
#31
하영은 무례한 그의 태도에 발길질을 해대며 반항했지만 그는 오히려
그녀의 반항을 즐기는듯 더욱 자신의 입술을 그녀에게 밀어붙쳤다.
그의 거친 침입에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이 찢어진듯 찝질한 피맛이
느껴졌다.
민혁은 힘껏 하영을 벽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자신의 탄탄한 긴다리를
하영의 다리사이로 밀어넣었다.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혀 질식할것만 같았다.
그녀를 향한 민혁의 응징은 생각보다 가혹한 것이였다.
그를 향한 그녀의 분노감과는 달리 그에게 차츰 반응해 가는 자신의
육체가 하영은 너무나도 저주스러웠다.
어느새 그녀의 모든 감각은 그가 조종하는데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를 밀어 내려고 그의 가슴에 올려놓았던 그녀의 손이 천천히
풀리며 그의 어깨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마침내 하영의 입술이 열리며 그의 침입을 반갑게 받아들이자 민혁은
거친숨을 내쉬며 하영의 엉덩이를 손으로 끌어당겼다.
한치의 빈틈도 없이 그들의 몸을 서로 붙은체 물결치는 욕망에 모든걸
내던지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수 없어....]
민혁이 하영을 번쩍 안아올리고는 자신의 구두를 한짝씩 벗으며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
하영은 한쪽은 벗겨지고 한쪽은 위태롭게 발끝에 걸려 달랑 거리는
샌들을 보며 낄낄 거렸다.
침실의 문이 열리고 민혁은 하영을 부드럽게 침대위에 눕혔다.
침대위에 누워 하영은 민혁이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제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를 내려다 보는 그의 뜨거운 시선때문에 하영은 아이스크림이
녹듯 자신의 몸이 흐물흐물 녹아 침대로 흡수되어버리는것 같았다.
그가 셔츠를 벗다 단추가 잘 안풀리자 귀찮은듯 손을 제껴 버리자
단추 하나가 투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셔츠를 벗자 매끈하고도 멋있는 그의 상체가 드러났다.
에로스.
별장에서 하영이 그림속에서 본 민혁의 모습과 똑같았다.
하영은 그가 정말 멋진 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은밀한 상상이 밀려드며 하영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구경은 다 끝난거야?]
그가 미소지으며 하영의 곁에 누웠다.
그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하영의 섬세한 얼굴 선을 쓸어갔다.
그의 작은 손길 하나만으로도 파르르 떠는 하영을 보며 민혁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승리자의 키스를 그녀에게 남겼다.
키스를 하며 그의 손이 그녀의 블라우스로 향했다.
단추 하나 하나를 끄를때 마다 풍겨나오는 하영의 향기에 취할것만
같았다.
단추가 다 끌러지자 하얀 레이스 브래지어 컵에 쌓인 아담한 하영의
가슴이 드러났다.
민혁은 더욱 가까이 자신의 몸을 하영쪽으로 밀어 붙이며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가슴위를 덮었다.
그의 손에 딱 알맞게 들어오는 하영의 가슴이 민혁은 마음에 들었다.
처음 그녀를 안았을때 자신의 몸안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그녀의
키 또한 편안한 속옷을 입었을때와 같이 편안한 느낌또한 좋았다.
그가 브래지어 안으로 손을 집어넣자 크게 숨을 들이쉬는 그녀의 반응이
느껴졌다.
그녀의 시원한 목줄기에 키스를 남겨가며 그의 얼굴이 점점 가슴쪽으로
내려 갔고 그럴수록 하영의 몸은 크게 비틀리기 시작했다.
[말해...날 원하고 있다고.]
민혁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감질맛 나는 키스로 하영을
고문하고 있었다.
[멈추기만 해봐요....죽여버릴거예요.]
그녀의 말에 웃는 민혁의 가슴이 들썩였다.
그는 브래지어를 위로 올리고는 한가득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물었다.
하영의 아름다운 허리가 활이 휘듯 둥글게 휘어졌다.
그녀의 손이 민혁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그가 선사하는 황홀한
연주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민혁이 그녀의 몸위로 올라와 그녀의 얼굴과 마주대했다.
[이렇게 몸을 맞대고 있는것만으로도 데일듯이 뜨거운데.....
어떻게 당신을 만지지 않고 한 집안에서 살아갈수 있다는 거지?
그 빌어먹을 조항은 계약서에서 날려버려야 겠어.]
그가 거칠게 말을 내뱉으며 다시 하영의 입술에 키스했다.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을 탐하면서 그녀의 입이 열리길 기다리던 민혁은
문득 그녀의 반응이 달라졌다는걸 느꼈다.
[왜그래?]
민혁이 키스를 멈추고 얼굴을 들어 하영을 내려다 보았다.
[무거워 죽겠어요....내 몸에서 내려가 주겠어요?]
이미 굳어버린 하영의 몸을 느낀 민혁이 주춤 그녀의 위에서 내려왔다.
[또 뭐가 불만인거지?]
그가 자신의 머리를 헤집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영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민혁이 벗겨놓은 자신의 블라우스를 들어
드러난 가슴을 가렸다.
[고맙네요. 당신 아니면 내 처지를 잊을 뻔 했어요. 미친척 하고
당신과 결혼하기로 했지만....내 육체까지 팔기는 싫어요.]
그녀의 말에 민혁의 눈동자가 짙은 색으로 변했다.
[그래....열정적인 여인에서 얼음 공주님으로 돌아오셨군.]
그가 거뭇하게 수염이 돋은 자신의 턱을 쓸어 만졌다.
[좋아...나도 나 싫다는 여자 억지로 안기는 싫어.당신 말고도
내 침대로 뛰어 들어오겠다는 여자는 많아.....날 원하지 않는
신부 때문에 밤마다 괴로워 할 신랑이 되지는 않을꺼란 이야기지.]
그의 말에 상처받은듯 그녀의 눈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꺼져버려요.]
[기꺼이.]
민혁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셔츠를 집어 들고는 침실을 나갔다.
현관문을 닫는 쾅하는 소리가 들리자 하영은 흐느끼며 침대에 엎드렸다.
그의 손길에 달구어진 그녀의 몸의 열기는 아직 식지 않았다.
이율배반적인 현실에 하영은 더욱 서럽게 흐느끼며
밤을 지새워야 했다.
***********
아침에 일어난 하영은 눈이 퉁퉁 부은 거울속의 자신의 모습과
대면하게 되었다.
하영이 막 치솔질을 할려는 찰나 거실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허겁지겁 욕실화를 벗고는 전화기로 뛰어갔다.
[여보세요...]
[나야.]
민혁이였다.
하영은 두 눈을 질끈 감고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네.]
[오늘 청담동 집에 우리 신혼방에 들어갈 가구 같은거 골라야 하는데...]
[전 아무래도 좋아요..민혁씨 마음데로 하세요.]
애써 감정없는 목소리로 하영이 대꾸했다.
[알았어.]
민혁 역시 두말않고 차갑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뚜 하는 신호음이 들릴때까지 하영은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머리속에 마구 엉켜 버린 실타래가 가득 들어있는것만 같았다.
전화를 끊은 민혁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쿵하는 소리에 놀란 여비서가 문을 열고 살짝 들여다 보고는 이내
조용히 문을 닫았다.
젠장.
모든 것이 엉망이였다.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어젯밤 하영에게 모진 말들을 내뱉었다.
다만 그녀에게 거절당한 자신의 자존심을 감추기 위해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였지만 결국은 하영에게 아니 여자로서는 듣기 힘든
수치스런 발언이였다.
어젯밤의 일을 사과하려 전화를 건 것이였지만 무뚝뚝한 하영의
반응에 또다시 화가 뻗친 민혁은 무례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쳇...서 민혁.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민혁은 인터폰을 눌렀다.
[네. 사장님.]
[지금.꽃집에 잔화해서 꽃바구니 하나 예약해줘요.]
#32
하영은 금방 택배원이 배달해준 커다란 장미 꽃바구니를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아직 피지 않은 검붉은 빛의 장미 봉오리들이 물기를 머금은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진한 장미향을 내뿜고 있었다.
하영은 꽃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는 꽃 사이에 꽃힌 카드를
펼쳐보았다.
TO.하영
미안해.
From. 민혁.
단지 미안해 라는 세 단어를 쳐다보는 하영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도데체 뭐가 미안한건지 이 남자는 알고나 있는걸까.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민혁의 성격상 미안하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었을 거라는걸 그녀는
있었기 때문이였다.
특히나 그녀에게만큼은 미안하다라는 말은 큰 용기가 필요했을것이다.
하영은 카드를 들고 침실안에 있는 화장대 서랍에 잘 넣어두었다.
그리고는 다시 거실로 나와 수화기를 들었다.
[네. 강하영입니다. 사장님 부탁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요.]
비서의 말이 끝나고 사장실의 전화로 연결되는 신호음이 들렸다.
[네. 서민혁입니다.]
[하영이예요.]
[응.]
[꽃 잘 받았어요.]
[그래?]
[할 말 없어요?]
하영이 대뜸 그에게 물었다.
[무..무슨 할말..]
그가 당황하는듯한 목소리가 느껴지자 하영은 빙그레 하얀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됐어요....오늘....같이 가줄래요? 가구 보러요.]
[그래. 오후 어때?]
[전 아무때나 좋아요.]
[그럼 이따가 기찬이 보낼께.]
[아니예요. 택시타고 가도 되요.]
하영은 민혁과 약속 시간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그답지 않게 당황하는 그의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 민혁이라는 남자는 마치 양파 껍질을 벗겨 내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냉철한 모습의 뒤에 새로운 모습들이 하나하나
그녀 앞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하영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그와의 약속 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 일어나 씻기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하영은 옷장 문을 열고 무얼 입을까 고민하다 언젠가
민혁이 맘에 들어했던 살구빛의 원피스를 꺼내들었다.
하늘하늘한 쉬폰 소재의 원피스가 시원하게 하영의 몸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무릎 바로 위까지 오는 치마 길이는 날씬한 하영의 다리를 맵시있게
드러내 주고 있었다.
단정히 머리를 빗고 다른때 보다 정성들여 화장을 했다.
마지막으로 원피스 색깔과 비슷한 립스틱을 입술위에 펴 발랐다.
거울속의 하영의 모습은 마치 무도회에 가기전의 신데렐라와 같은
모습이였다.
문득 하영은 자신이 민혁이 좋아하는 원피스,민혁이 좋아하는 립스틱,
그를 생각하며 외출 준비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위한 그녀가 할수 있는 그 무엇.
기분이 묘했다.
마지막으로 핸드백 안에 집 열쇠와 핸드폰을 챙겨 넣고는 침실을 나와
현관문 앞의 신발장에서 발목에 끈을 다는 식의 샌들을 꺼내 한쪽
발을 집어 넣으며 신을려 할때였다.
초인종의 소리가 커다란 거실에 울려퍼졌다.
하영은 별 의심없이 누구냐고 물어보지도 않은체 자물쇠를 돌리며
문을 열었다.
[택시를 타고 간다고 했는데...끝내 기찬씨를 보내는......]
문앞의 주인공을 확인한 하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하영을 잡아 먹을듯이 커다란 눈을 부라리며 미령이 하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을 속으로 추스리며 하영은 애써 태연한 모습으로
미령을 바라보았다.
[어쩐 일이세요? 연락도 없이..막 나가려던 참이였어요.]
미령은 하영의 말에 대꾸도 없이 막무가내로 하영을 밀치며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하영은 그런 미령의 모습을 기가 막히다는듯이 쳐다보며 순간 미령이
자신을 찾아온것을 민혁에게 알려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생각보다 반반하게 차려놓고 사네....]
미령이 팔짱을 끼고는 거실을 훏어 보았다.
[어쩐일이세요.....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하영이 핸드백을 소파에 내려놓고 부엌으로 향하자 미령이 그녀에게
달려와 팔을 낚아챘다.
[아야!!!]
길다란 미령의 손톱이 연약한 하영의 살을 파고들었다.
[말해봐...무슨 속셈이지? 무슨 속셈으로 민혁이와 결혼하겠다는거야?]
집요한 미령의 시선이 하영을 추궁하고 있었다.
[무..무슨 말씀이신지...]
[몰라서 물어!!! 알게 해줄까!!!]
순간 미령의 손바닥이 순식간에 하영의 뺨으로 날라들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일이라 준비도 없던 하영은 미령에게 뺨을
맞고는 휘청 거리며 식탁위로 널부러졌다.
하지만 곧 하영은 식탁에서 발딱 일어서서 미령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죠!!!!]
하영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말해!!!! 서 회장이 죽으니까 그 다음엔 그의 아들이야?네 속셈이
뭔데!!!! 한달도 안되서 서로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구...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란 말이야!!!!]
[조용히 말씀하세요.]
미령의 발악에도 하영은 눈하나 깜짝 안하고 조용히 그녀를 나무랐다.
[허. 이게 아직 정신을 못차렸나 보네!!]
다시 미령의 팔이 들리며 손바닥이 하영에게 날라왔다.
하지만 하영은 잽싸게 미령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녀를 때리려는 미령과 미령의 팔을 막은 하영과의 힘겨루기가 이뤄졌다
[한번은 그냥 맞아 드렸지만....두번은 안되요.]
[니 아버지가 시켰니? 얼굴도 반반하겠다.서회장좀 꼬셔서 우진 그룹좀
살려 볼려고 했더니만...어쩌지....그 늙은이가 젊은 기집애 맛도
보기 전에 어이없이 심장 마비로 죽어 버리고...왜? 그냥 물러나기는
아쉬웠나 보지? 그 아들까지 꿰찬거 보면?]
터져나오는 미령의 끔찍한 말들을 듣고 있던 하영이 힘껏 미령의
뺨을 때렸다.
살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미령의 고개가 힘껏 돌아갔다.
[당신이 어떤식으로든 날 모욕해도 참아낼수 있어요...어쨌거나 당신은
민혁씨의 새 새어머니 이시니까요. 하지만....아버지를 모욕하시는건
더 이상 참아드릴수가 없군요.....제 아버지를 모욕하신 댓가예요.]
[이...이 기집애가!!!]
미령의 눈동자가 돌아가며 하영에게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손에 잡히는 데로 할퀴며 발길질을 하영에게 해대고 있었다.
하영도 반항하며 그녀에게 맞서 봤지만 하영보다 키도 크고 무엇보다
감정적으로 광분한 미령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였다.
미령의 힘에 밀려 바닥에 쓰러지는 하영을 그대로 올라타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바닥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남자의 고함이 들려오면서 미령의 몸이 들리더니 거실쪽으로 던져졌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하영이 고개를 드니 기찬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 보며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워줬다.
[이게!!! 너 미쳤어!!!]
미령이 기찬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조용하십시요!!!! 제우스의 사모님께서 사람들 많은곳에서 망신을
당하고 싶으신겁니까!!!!]
기찬의 호통에 미령의 비명소리가 잦아 들었다.
[넌 상관마 빠져!]
미령이 옷 소매를 걷어부치며 하영에게 다가섰다.
기찬은 얼른 자신의 몸을 하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모님...왜 이러시는 겁니까.]
[상관 말래두!!!!안비켜!!!!]
[못 비킵니다. 제 임무는 사장님을 지켜드리는 일입니다.
전 오직 사장님의 명령만 받고 사장님의 행동 범위안에서만
움직입니다.
그 어느 누가 제게 명령한다 해도 전 사장님의 말씀만 듣습니다.
제가 모시는 분과 결혼하실 아가씨를 지켜드리는것도 저의 의무입니다.
아가씨를 건드리는 일은 감히 사장님에게 도전하는 일입니다.
사모님께서 여기 오신걸....사장님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그분이 화 나시면 어떤 분이신지 사모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분이 화 나시면 저라도 그 어느 누구도 그분으로
부터 막아드리지 못합니다.
이쯤 하면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잘 아실텐데요...]
기찬의 싸늘한 음성에 미령의 기가 한풀 꺽인듯 했다.
[네..네놈이...이젠 네놈까지 날 무시하려고 들어? 어림도 없지..
아직도 난 서재필 회장의 안사람이야.....그만한 힘도 가지고 있지.
네 까짓거 소리없이 보낼수도 있어.]
미령의 표독스런 눈이 기찬을 찔러죽일듯이 날을 세우고 노려보았다.
[사장님께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만 돌아가주시지요.]
꿈쩍도 않는 기찬의 태도에 미령은 자신의 가방을 바닥에서 주워들었다.
[너!!!강 하영.....그래.결혼하고 싶으면 해봐...서 민혁과 네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그래. 기다려 줄게.]
미령은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고는 하영의 아파트를 나섰다.
미령이 나가자 하영은 식탁의자에 털석 주저앉았다.
[아가씨!!1]
놀란 기찬이 하영을 뒤돌아 보았다.
[괜찮으세요?]
기찬의 시선이 미령의 손톱에 긁혀 하영의 팔위에 길게 나있는 상처에
고정되었다.
하영은 상처가 쓰라린듯 미간을 찡그렸다.
[병원에 가보셔야 할것 같습니다. 손톱에 긁힌 상처는 독이 오를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
[괜찮아요....연고하나 사서 바르죠,..]
[어쩌자고 사모님을 집 안으로 들이셨습니까...]
기찬의 질책어린 말이였다.
[안으로 들일새도 없이 자신이 다짜고짜 밀고 들어왔어요. 난 민혁씨가
기찬씨를 보낸 줄 알고 그냥 문을 열어주었구요.]
[제가 조금 일찍 당도했으니까 망정이지 늦었더라면 큰 일 나실뻔
했습니다.지금 당장 사장님께 보고 해야 겠습니다.]
기찬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지 마요!!!!]
하영이 기찬의 말을 잡아 끌었다.
[그냥...기찬씨하고 나하고 묻고 그냥 넘어가요. 민혁씨 한테는
알리지 말아주세요.]
[하지만...제가 아니였다면 큰 일 나실뻔 했습니다. 청담동 으로 들어가
사시게 되면 사모님과 함께 지내실 시간이 많아질텐데.....]
기찬은 정말 진심으로 하영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 때 일이죠..그냥..넘어가 줘요. 기찬씨도 아까 말했듯이
민혁씨 성격 알잖아요....화가 나면 어떻게 변하는지.....자존심
강한 그가 이 일을 알게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거예요. 결혼 앞두고
괜히 안좋은 말 나오면 민혁씨와 저의 계획이...그러니까...
제가 무슨말을 하려는지 잘 아시죠?]
기찬은 하영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안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리에 민혁과 하영 사이에 계획적으로 이루어지는 결혼이니만큼
한치의 헛점도 남에게 보여서는 안되는 일이였다.
특히나 당사자인 송 미령이 이 결혼의 거짓된 모습을 알게된다면
그땐 제우스는 그 악녀의 손으로 넘어 갈수도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예. 알겠습니다. 지금 약국에 가서 연고좀 사오겠습니다.]
[그래줄래요?미안해요. 기찬씨.]
기찬은 약을 사기 위해 하영의 아파트를 나갔다.
기찬이 나가자 하영은 무겁게 가라앉는 몸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속에서 자신의 몰골을 확인한 하영은 작은 비명을 질렀다.
머리는 여기저기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미령에게 맞은 뺨은 시뻘겋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미령의 손톱에 의해 팔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작게 크게 긁힌 자국들도
수둑룩 했고 그녀가 입은 원피스의 옷 솔기도 뜯어져 보기 흉한
실밥들이 나와 있었다.
[이꼴로 도저히 그 앞에 나타날수는 없겠어.....]
하영은 부어오른 뺨을 가라앉히기 위해수도꼭지를 열고 쏟아져 나오는
찬물로 계속 문질러 주었다.
생각보다 송미령이란 적은 강했다.
하영의 마음속에 슬그머니 두려움이 싹트기 시작했다.
기찬의 말데로 청담동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야 말로 송 미령과의
일 대 일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하영은 자신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영은 야무지게 이를 악물고는 찬물로 힘차게 세수를 시작하였다.
#33
[어때요? 괜찮아 보여요?]
하영은 차안에서 자신의 손거울을 들고 이리저리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며 운전을 하고 있는 기찬에게 물었다.
백미러를 통해 하영의 모습을 기찬을 살펴보았다.
[아직 뺨에 벌건 흔적이 보이긴 하는데...붓기는 가라앉은것 같습니다.]
[상처는 대충 옷으로 가렸는데....얼굴이 문제네요.]
하영이 볼에다 가득 바람을 물고는 퉁퉁해진 자신의 볼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하영의 모습이 귀여운듯 기찬이 피식 힘없는 웃음을 지었다.
[기찬씨는 민혁씨하고 같이 일하신지 오래 되셨나봐요.]
[오래 되었다기 보단 사장님하고 인연이 좀 많습니다.]
[무슨 인연이요?]
하영이 앞쪽으로 엉덩이를 끌어 당기며 그에게 물었다.
[제 하나 밖에 없던 형이 사장님하고 친한 친구사이였습니다.]
[어머..그래요?]
[정말 친한 친구 사이였는데......9년전에 사장님께서 어느 나이트에서
질이 나쁜 놈들과 시비가 붙었었는데 그때 형이 사장님과 함께 싸우다가
어느 놈이 형한테 의자를 들어 머리를 내리친 모양입니다.
그 자리에서 형은 즉사하고 사장님께서는 죽지 않을만큼만 많이
다치셨죠.....]
하영은 형이 죽었다는 이야기에서 기찬이 목소리가 흔들리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형하고 저하고 단 둘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
왔기 때문에 형의 죽음은 저에게 부모님을 잃은 것과 같은 일이였지요.
고아나 다름 없는 저를 사장님께서 거두어 주셨습니다.그 날이후로
사장님 밑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구요.]
[그렇군요......]
서 민혁에 대해 말하는 기찬의 어조에는 그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
묻어나오는걸 알수가 있었다.
친구의 죽음을 슬퍼 할 줄 알고, 그의 동생까지 책임질 줄 아는
지극히 인간적인 서 민혁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 순간이였다.
[기찬씨는 사장님에 대해 잘 알고 있겠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전....솔직히 그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어요. 그의 이름이 서민혁이고
제우스 그룹의 사장이라는것 밖에.....]
[그거 아십니까?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자기 방어를 위해 겉으로는
더욱 강해진다는 사실을.....사장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오자 기찬은 차의 속력을 줄여 차를 정지시켰다
[민혁씨가 이번 결혼이 초혼이 아니라는걸 알고 있어요.]
나즈막한 하영의 말에 기찬이 뒤돌아 보았다.
[사장님께서 말씀 하셨습니까?]
[네.기찬씨는 사장님의 전 부인에 대해 알고 계시겠네요.]
[알고는 있지만....아무도 제우스에선 전 사모님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마치 금기 사항처럼 말이지요.]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하영은 속으로 민혁이 사랑하는 부인을 잃은 슬픔때문에 그녀의 일을
꺼내지 못하게 하는것이라 생각하며 기찬에게 물었다.
민혁과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면 그라면 무언가 하영이 궁금해
하는 이야기를 들려줄수도 있겠다 싶었다.
신호가 바뀌자 기찬은 기어를 넣고 차를 천천히 출발시켰다.
[사장님과 전 사모님과의 결혼은 정략적인 결혼 같은거였습니다.]
[정략결혼이요?]
[예.큰 기업을 가진 집안끼리 서로의 생존을 위해 맺는 일종의 약속이죠]
하영에게 설명하는 기찬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사장님은 맘에 내켜하지 않았지만....돌아가신 회장님에 대한 반발심
그런것 때문에 억지로 결혼하셨어요....억지로 한 결혼이니 부부
생활이 제대로 될리도 없을거구요.]
그의 말에 하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부부 생활이 제대로 되지않다니.
자신의 앞에서 부인의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무척 마음아파했는데...
[전 부인이 교통사고 돌아가시면서....사장님과의 관계는 끝이 난건
가요?]
[예.정말 끔찍한 사고였죠.새벽에 사고 소식을 듣고 사장님과 함께
갔었는데.....사모님이 타고 있던 차가 완전히 찌그러져서 사람
형체도 알아볼수 없을 만큼.....큰 사고였습니다.]
[오..세상에.]
하영은 끔찍한 상상을 하며 두손에 얼굴을 묻었다.
민혁이 사고가 난 차 앞에서 오열하는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민혁씨가 많이 힘들어 했겠군요.........]
[네.그 사고 이후로 사장님께서는 한동안 회사도 나가시지 않고
술로 시간을 보내셨죠.]
힘들었던 시간을 회상하는듯 기찬의 눈빛이 흐려졌다.
[하루 아침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면 저라도 맨 정신으로는 견딜
수가 없었을 거예요.]
하영은 자신의 아버지를 잃을뻔 했던 순간을 기억해 내며 몸서리를 쳤다
[사장님께서 힘들어 하신 이유는......아기때문이였습니다.]
아기.
하영의 심장 한쪽에서 피가 싹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였다.
아기..누구의 아기. 민혁씨의 아기?
[아기요?그럼........]
하영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네.사고당시 사모님께서는 임신중이셨습니다.사모님 앞에서는
정말 찬 바람이 불 정도로 냉랭하게 대하셨지만...사모님께서
임신을 하신 이후론 사장님께서도 차츰 변화하기 시작하셨어요.
그만큼 아기를 사랑하고 계셨던 거죠.]
아내가 죽던날...내가 두번째로 사랑하는 이를 잃었어...
민혁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그의 아기.
하영의 손이 슬며시 자신의 배로 움직여 졌다.
그의 아기를 갖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를 닮은 아기.
앞에 가는 차에 경적을 울려대는 기찬으로 인해 하영은 잠시간의 망상
에서 깨어났다.
그들이 탄 차는 어느새 제우스 그룹의 커다란 빌딩 앞에 멈추어섰다.
기찬이 내리자 어느새 기찬의 전화를 받고 미리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민혁이 운전석쪽으로 올라탔다.
[앞으로 옮겨와.]
민혁이 하영이 앉은 뒷자석을 백미러로 바라보았다.
하영은 뒷좌석에서 내려 민혁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왜 이리 늦었어?]
민혁의 말에 하영은 슬며시 차 옆에 서있는 기찬을 바라보았다.
[차가 밀렸습니다.]
기찬이 그녀 대신 민혁에게 대답해 주었다.
[나 오늘 바로 퇴근할꺼야.]
[예. 알겠습니다.]
민혁과 하영을 태운 차는 천천히 제우스 건물을 빠져나갔다.
민혁은 하영을 데리고 커다란 가구 매장으로 안내했다.
신혼 부부들을 위한 화사한 가구들이 그들을 맞고 있었다.
민혁과 가구를 둘러보던 그녀의 눈에 하얀 화이톤의 가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자 앞서 걷고 있던 민혁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게 맘에 들어?]
[네.디자인도 단순하고..깨끗하네요.]
하영의 말에 민혁도 마음에 드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걸로 하지.]
그의 말에 하영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겉모양만 좋으면 모해요.안쪽도 꼼꼼이 살펴보고 사야죠.]
[그냥 사지.]
민혁이 귀찮다는듯이 그의 팔을 매장안으로 이끄는 하영을 말렸다.
[그냥 살거면 내가 가구 보러 나오지도 않았어요. 빨리 들어와요.]
그는 마지못해 하영에게 이끌려 매장안으로 들어섰다.
하영은 꼼꼼하게 장농 문도 열어보고 서랍장도 확인하면서 가구를
살펴보았다.
그녀를 보는 민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지시만 하면 기찬이 알아서 다 해주는 일이였지만 누군가와 자신이
쓸 물건을 함께 둘러보고 고르는 일이 나름대로 재미있고 신선한
일이였다.
함께라는것.....
가구를 고르고 나서 그녀와 함께 이불이며 신혼살림에 필요한 물건을
쇼핑하며 그녀가 당신것,내것 나누는 모습을 보며 함께라는 소중한
단어의 정겨움을 그는 오랜만에 느낄수 있었다.
세시간 가까이 쇼핑을 마치고 구두때문에 하영은 다리가 아파왔다.
[잠시 쉬어갈래요?]
하영이 걸음을 멈추고 백화점 매장 안쪽에 보이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가자고?]
[네.왜요? 가기 싫어요? 다리가 아파서 좀 쉬고 싶어서 그래요.]
민혁은 아이들이 북적거리는 아이스크림을 못마땅한듯 쳐다보았다.
[난 체면 차리는 남자들이 제일 싫어요]
하영은 그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서자 하영은 창가쪽에 보이는 작은 테이블로
걸어갔다.
의자에 앉아 조금은 발이 편안해 지는것 같았다.
하영은 그녀가 신고 있는 구두를 반쯤 벗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난..커피가 좋겠어.]
민혁이 헛기침을 해가며 메뉴판의 커피를 쳐다보았다.
어색해 하는 그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하영은
주문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기 아이스크림하구요, 커피 주세요.]
아이스크림이 나올동안 하영은 뒤돌아 민혁을 바라보았다.
한 아이가 위태롭게 아이스크림 콘을 들고 그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하영의 짐작데로 뒤뚱거리던 아이가 민혁의 무릎위로 엎어졌고
아이스크림이 민혁의 값비싼 양복을 타고 줄줄 흐르고 있었다.
민혁의 표정이 굳어지며 아이를 자신의 무릎에서 떼어놓았다.
그의 험학한 표정에 그녀가 나서기 위해 한 걸음 나섰다.
그때 울먹거리던 아이를 보는 민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게 아이를 들어올려 안아주었다.
[괜찮아...하마터면 다칠뻔 했네...새엄마는 어디있니?]
그의 다정스런 목소리가 하영의 귀에 들려왔다.
순간 아이를 안고 있는 그의 모습에 하영은 갑자기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왠지 모를 그에 대한 연민으로 하영은 눈물을 훔치며 등을 돌려 우는
자신의 모습을 그가 보지 못하게 했다.
아이에게 보여준 그의 따뜻한 미소가 자꾸만 하영의 가슴을 찢어놓을듯
이 아프게 했다.
아기를 잃었을때의 그의 아픔이 그녀에게도 느껴지는듯 했다.
[손님 주문하신것 나왔습니다.]
점원이 눈물을 훔치는 하영을 바라보았다.
[누..눈에 먼지가 들어갔나봐요.]
하영이 멋적게 웃으며 아이스크림과 커피가 담긴 쟁반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민혁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돌아오자 그는 손수건으로 양복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에게 넘어진 아이는 새엄마 손에 이끌려 가게를 나서고 있었다.
[왠 아이스크림이예요?]
하영이 잠긴 목소리로 아까의 상황을 못 본듯 모른척 하며 그에게 물었다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갖고 넘어졌어.]
[괜찮아요?]
얼룩져 있는 양복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하영이 바라보았다.
[괜찮아....]
그가 아이스크림을 닦아낸 손수건을 내려놓고 하영이 가져온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하영은 작은 스푼을 들어 맛있어 보이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 작은 입속에 쏙 집어넣었다.
달콤한 딸기향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시원한 감이 기분이 좋았다.
[맛있어?]
그가 아이스크림의 맛을 음미하는 하영을 보며 물었다.
[네.맛있어요. 먹어볼래요?]
하영이 어느새 스푼에 아이스크림을 떠서 불쑥 그의 입 앞에 내밀었다.
[됐어.]
그가 뒤로 물러나며 사양했다.
[맛있어요. 어서요.]
하영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변하며 그의 입 가까이 스푼을 가져다 주었다.
약간 망설이는듯 하던 그가 뜻밖에 덥석 입을 벌려 하영이 내민 스푼
위의 아이스크림을 물었다.
멍한히 그의 모습을 보는 하영을 향해 민혁이 한쪽눈을 감으며 윙크했다
[야...이거 맛있는걸?]
그의 너스레에 멍해있던 하영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스푼하나 더 가져올까요?]
[됐어.당신이 먹여줘.]
그의 시선이 에로틱하게 변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마술이라도 걸린듯 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스크림을
떠서 그에게 먹여주었다.
한입 얻어 먹은 그가 하영의 손에서 스푼을 뺏고는 아이스크림을 떠서
하영의 입가에 가져다 주었다.
하영도 스스럼없이 입을 벌려 그가 먹여주는 아이스크림을 받아먹었다.
아이스크림을 받아 먹을때 낼름거리는 하영의 분홍빛 혀를 뜨거운
시선으로 그가 바라보았다.
어느새 둘은 다정한 연인처럼 서로 아이스크림을 먹여주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34
무덤덤하게 받아 들일거라 생각했던 하영의 바램과는 달리 결혼식을
30분 앞둔 하영은 떨리는 손을 감추려고 쥐고 있던 백장미의 부케를
더욱 힘주어 잡았다.
하영의 메이크업을 담당해 주는 여자가 마무리로 하영의 얼굴부터
목 부분까지 펄 파우더를 두드려 주고는 조용히 신부대기실에서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곧이어 문이 열리며 진영과 동식이 들어섰다.
[어머나!!!너무 이쁘다.]
감색 수트를 차려입은 진영이 호들갑을 떨며 하영에게 다가왔다.
[언니 왔어? 아빠는?]
[간병인 아줌마가.]
진영은 하영의 목에 걸려있는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 늘어지듯
여러갈래로 갈라진 모양의 아름다운 목걸이를 부러운듯 바라보았다.
그 목걸이는 민혁이 특별히 하영을 위해 그녀 몰래 주문해 둔 것이었다.
빛나는 목걸이를 본 하영은 극구 사양했으나 민혁은 막무가내로 그
목걸이를 하영의 목에 걸어준 다음에야 식장으로 향했다.
거울속에 비치는 하영의 모습은 정말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시샘
할 만큼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부 메이크업으로 인해 하영의 이목구비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는데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과 살짝 벌어져 있는 살구빛의
입술위로 보이는 수줍은 신부의 미소가 순백색의 하얀 면사포 안에
숨겨져 있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 자락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게 퍼져 바닥에
부채꼴 모양으로 모양 좋게 펼쳐져 있었다.
[처제..결혼 축하해.]
동식이 진영의 뒤에서 쭈삣거리며 하영에게 축하의 말을 꺼냈다.
처음 진영으로 부터 하영의 결혼식 소식을 들은 동식은 민혁에게
한번 호되게 당한 적이 있는 터라 동식은 솔직히 하영의 결혼을
축하해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당황했었다.
하지만 그 당황스러움도 잠시 서 민혁이라는 거물이 자신과 같은
식구가 된다는 것은 동식에게 있어 다시는 없을 절호의 기회라고
그는 생각했다.
벌써 그의 머리속에는 민혁으로 부터 받을 제우스 그룹의 번듯한
일자리 하나를 탐을 내고 있었다.
[나...식장안에 들어가 있을게.]
진영은 하영의 등을 두드려 주고는 동식과 함께 대기실을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나서 하영은 약간은 울적해 지는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비록 거짓으로 이루어지는 결혼이였지만 자신의 옆자리에 아버지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이 아파왔다.
딸의 결혼식을 생각하며 쓸쓸히 침대에 누워있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심장에 찬 바람이 들어오는 것처럼 아프고 시렸다.
[정말 아름답군....]
어느새 들어왔는지 멋진 은색의 턱시도를 차려입은 민혁이 그녀앞에
서 있었다.
그의 몸에 딱 맞는 턱시도가 민혁의 매력을 한층 더해주고 있었다.
하영이 봐도 정말이지 그는 너무도 멋진 남자였다.
[당신도 멋져요.]
약간은 잠긴듯한 하영의 목소리에 민혁이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아버지 생각을 하고 있었어?]
정곡을 찌르는 그의 질문에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혼여행 떠나기 전에 아버님 만나뵙고 가자.]
[정말...그래도 되요?]
하영이 슬픈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나도 사실 아버님 때문에 맘이 안좋았어.]
[고마워요.]
그의 세심한 배려에 그녀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오늘은 신부가 행복해야 하는 날이야. 그렇게 울상하고 있을거야?]
그가 베일 안으로 손을 넣어 하영의 볼을 살짝 쓸어주었다.
[떨리지?]
[네...조금요.민혁씨는요?]
[나도 떨려.]
대기실 밖에서 식을 시작한다는 사회를 맡은 기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나가볼까]
민혁이 하영에게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던 하영이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와 손을 잡았다.
이젠 그와 함께 정말로 시작하는거다.
하영은 그의 손을 꼭 움켜쥐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그와 함께 떨리는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였다.
그의 손을 잡고 식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수많은 하객들의 시선이
하영과 민혁에게로 쏠렸다.
그들은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저마다 신부의 아름다움과 신랑의 늠름
하고도 멋진 모습들을 칭찬하고 있었다.
하영의 떨리는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듯 민혁의 팔짱을 낀 그녀의
팔위로 민혁이 슬며시 자신의 손을 얹어주었다.
주례가 있는 단상에 이르고 그들은 주례의 연설아래 서로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약속하고 있었다.
[신랑 서 민혁 군은 신부 강 하영을 맞아 신부 강 하영 양 만을 죽을때
까지 그녀 만을 사랑하며 아껴주고 그 사랑에 대한 헌신을 약속할수
있습니까? 큰소리로 대답해 주십시요.]
주례의 물음에 민혁의 그윽한 시선이 하영의 얼굴에 머물렀다.
[네.맹세합니다.]
그의 부드러운 음성이 하영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신부 강 하영 양은 신랑 서 민혁 군을 맞이해서 죽을때 까지
그를 사랑하며 아끼고 그의 사랑에 대한 헌신을 약속 할 수 있습니까?]
주례의 물음에 하영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가 대답을 않자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근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신랑측 부모님 좌석에 앉은 미령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하영...]
민혁이 나즈막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영은 고개를 들어 베일 너머로 보이는 자신의 신랑 민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알수없는 시선으로 그녀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죽을때 까지 그 만을 사랑하며....
그의 대한 사랑에 헌신할 것을.....
[네...맹세합니다.]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대답이 튀어나오자 사람들의 안도의 한숨이
일제히 나오기 시작했다.
민혁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깔리면서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영 역시 그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주었다.
[자 그럼 신랑은 신부에게 신부는 신랑에게 사랑의 헌신을 약속하는
증표로 이 수많은 증인들 앞에서 서약의 키스를 나누도록 하십시요.]
주례의 말이 끝나자 민혁은 하영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가 하얀 면사포를 들어 올리자 수줍은 표정의 하영의 얼굴이
드러났다.
민혁은 자신의 손을 그녀의 턱에 받치고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하영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며 하영은 지긋이 두 눈을 감았다.
드디어 그의 입술이 하영의 입술에 닿았다.
식장안에는 그들을 축복하는 탄성과 박수소리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서로의 입술에 느껴지는 감각만이 서로를 지배할뿐이였다.
그의 입술이 스치듯 하영의 입술에 와 닿았다가 다시 각인을 찍듯
힘차게 내려앉았다.
그의 입술을 통해 그의 뜨거운 기운이 하영의 온몸의 피를 타고
역류하는것만 같았다.
그의 입술이 떨어지고 하영이 눈을 뜨자 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그들은 눈으로 수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 여러분 새롭게 출발하는 이 부부에게 큰 박수를 보내주십시요.]
기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행진을 하는 민혁과 하영에게 꽃가루와
폭죽이 쏟아지며 사람들의 축하의 말이 오고갔다.
***********
하영은 조심스럽게 병실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눈에 아버지의 침대 옆에서 열심히 졸고 있는 간병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빠......]
하영이 부르는 소리에 우진이 고개를 들어 그의 딸을 바라보았다.
[하....여...]
우진이 반가운듯 굳어버린 몸을 힘겹게 움직이며 그녀를 반겼다.
하영은 눈물을 글썽이며 우진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아빠....아빠.......]
어린아이처럼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벼대며 계속 중얼거렸다.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저 딸의 볼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줄뿐이였다.
[장인어른.]
하영의 뒤에서 민혁의 음성이 들려왔다.
우진은 민혁을 보고는 더욱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혁은 그가 내미는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신혼 여행 가기전에 만나 뵈려고 왔습니다.오늘 결혼식에 못오셔서
많이 섭섭 하셨죠?]
[아...아...]
[괜찮으시다고 말씀하시는거예요.]
듣기 힘든 우진의 말을 하영이 대신 민혁에게 해석해 주었다.
[앞으로 정말 제 아버지 처럼 잘 모시겠습니다.]
그의 말에 기여이 우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민혁의 말에 하영 또한 복받치는 설음에 울음을 터트렸다.
그의 말이 이토록 사무치게 가슴이 와 닿을줄 몰랐다.
민혁의 눈에도 순간 눈물 같은것이 얼핏 스쳐지나갔다.
[고마워요...]
병실을 나와 하영은 민혁이 건넨 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의 표시를 했다.
[일때문에 강 회장님을 가끔 만나뵌적이 있어.....그때마다 느낀거지만.
우리 아버지와는 달리 가정적이신 강회장님이 무척 부러웠지.
아까 한말은 진심이야. 우리 결혼을 떠나서 강회장님을 진심으로 공경
하고 위해드리고 싶어.]
그의 눈을 바라보며 하영은 느낄수 있었다.
그동안 그를 밀어내려 부정해 왔던 그녀의 감정을 배반하는 일.
이미 그의 존재가 그녀의 마음 한쪽에서 이미 씨를 뿌리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35
그들의 신혼 여행지인 팔라완 제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민혁은 자신의
어깨에 기대여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하영을 내려다 보았다.
마닐라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서 필리핀 국내선을 갈아타야 하는 빽빽한
일정과 결혼식으로 인한 피곤의 여운이 그녀에겐 힘든 일이였는지
비행기에 올라 민혁과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는 어느새 잠이
들어 버린것이다.
민혁은 그녀가 깨지 않게 하기 위해 한 시간 전 부터 저려오는 어깨를
되도록이면 움직이지 않기 위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달콤한 휴식을 방해하기는 싫었기 때문이였다.
그녀의 잠든 모습은 하영이 별장에 잠시 피신해 있을때 방에 몰래
들어가 어둠속에 몇번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잠든 모습은 볼때마다 정말 아기처럼 평화로워보였다.
그의 마음까지 덩달아 평온해 지는 따스한 느낌.
하영은 그에게 그런 여자였다.
알게모르게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따뜻한 봄 빛같은 여자.
그가 흘러내린 하영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려 손을 대자 하영이
움찔 하며 두 눈을 번쩍 떴다.
[깻어? 미안.....]
그녀의 단잠을 깨운것 같아 미안해진 민혁의 사과를 했다.
하영은 자신이 그의 가슴에 거의 안기다시피한 자세로 잠이 들었다는걸
깨닫자 얼굴을 붉히며 얼른 자신의 좌석으로 돌아갔다.
[미..미안해요. 너무 피곤했었나봐요.]
그녀는 혹시라도 자신이 침을 흘리지는 않았나 당황하며 슬며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침 안흘렸어...아기처럼 온순하게 세상모르고 자던데?]
그의 말에 하영이 피식 웃으며 옷 매무새를 만지며 기내에 있는 창가를
내려다 보았다.
처음엔 새 하얀 구름만 보이더니 서서히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
하자 새파란 바다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머나..세상에 너무 아름다워요.]
하영이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입가가 슬며시 벌어졌다.
비행기 아래는 온통 산호빛 에메랄드를 깔아놓은것 같이 햇빛을 받아
아름다운 바다가 빛을 내고 있었다.
곧이어 기내에선 팔라완 제도 도착을 알리는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왔다.
그들이 공항에 내려서자 후끈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들은 공항에 있는 셔틀버스를 타고 도스 팔마스라는 휴양리조트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갔다.
가이드의 설명으로 인하면 그들이 타고 갈 배는 전형적인 필리핀
전통 선박으로 방카라고 불린다고 했다.
그들은 실은 방카는 넓디 넓은 바다위로 시원하게 파도를 가르며
달려갔다.
시원한 바다 바람을 맞으며 하영은 즐거운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영의 기분좋아 보이는 모습에 민혁도 마음이 흐뭇해 졌다.
그녀의 아버지때문에 내내 우울해 보였던 그녀였는데 다행히 여행의
기분에 만취되어 있는 그녀를 보니 이곳으로 신혼 여행을 온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역시 그동안 쉴 세없이 움직여온 터라 얼마간의 휴식이 필요했다.
마침내 저 멀리 아레세피섬의 리조트가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냈다.
그들의 배가 섬에 가까이 다가가자 이름모를 악기들의 은은하고도
아름다운 선율의 연주가 들려오고 있었다.
[다 왔나봐요..너무아름다운 곳이예요.]
하영이 황홀한 시선으로 야자수로 둘러싸인 섬을 바라보았다.
[이 리조트의 이름이 도마 팔마스라고 하는데 그 뜻이 무언지 알아?
스페인 어로 두개의 야자수라는 뜻이래. 이 섬을 지나가던 스페인
선박이 지은 이름인데 멀리서 보면 이 섬에서 커다란 야자수 두 그루
가 유난히 눈에 띈다는 거야.]
섬에 관해 잘 알고 있는 그를 보며 하영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잘 알고 있네요...한번 와 봤어요?]
[아니.내가 아는 사람이 이곳에서 휴양을 보냈는데..나에게 괜찮은
곳이라고 추천해 준 적이 있거든.]
[이런 곳이라면 몇달을 지내도 지겹지 않을것 같아요.]
하영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섬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배가 선착장에 도착하자 아름다운 빛깔의 시원한 열대 음료수를 들은
직원들이 하영과 민혁을 반겼다.
[한국에서 오신 서 민혁 사장님 되십니까?]
그 섬의 토착 원주민으로 보이는듯한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는 리조트의 직원인듯 하얀색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네 맞습니다.]
민혁이 영어로 대답했다.
그들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수상 코티지를 지나 그들이 머물 객실을
안내해 주었다.
막상 안내받은 하영은 당황스러운듯 얼굴을 붉혔다.
그들이 머물 객실이 하나 뿐이였던 것이다.
[왜 그래? 객실이 마음에 안들어?]
불편해 하는 하영의 얼굴을 보며 민혁이 물었다.
[아..아뇨...전 객실을 따로 가질 줄 알았어요.]
그녀의 말에 민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여기가 외국이라해도 나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 한국인 신혼
여행객도 있고 , 또 이 리조트 사장과는 아는 사이거든.신혼 부부가
따로 객실을 쓴다는건 말이 안되지.]
그의 말에 하영은 별다른 대꾸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하영은 자신의 지갑에서 달러를 꺼내 짐을 들어다 준 직원에게
팁으로 건넸다.
하지만 그녀가 건넨 팁을 직원은 웃으며 사양했다.
[여기서는 직원들이 팁을 받지 않아. 규칙이래.]
[아..그렇군요.]
하영이 돈을 도로 집어 넣으며 직원에게 고맙다는 미소를 보내주었다.
하영은 짐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객실을 둘러보았다.
민혁은 베란다로 통하는 창가로 다가가 유리문을 활짝 열어 제쳤다.
베란다의 문을 열자 온통 보이는건 바다뿐이였다.
그들이 머물 객실은 베이 코티지 였다.
바다 위에 기둥을 박고 한채한채 오두막을 지은 이 코티지는 그야말로
바다위에 떠 있는 수상 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더위때문에 땀을 흘리던 하영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하영은 가져온 가방을 정리하기 위해 침실로 보이는듯한 방으로
들어갔다.
침실은 생각보다 호화스럽지도 않고 아담하고도 깔끔했다.
침실 또한 작은 발코니가 딸려 있어서 발코니 문을 열면 침대에 누워서도
바다가 훤히 보이게끔 하였다.
커다란 침대로 눈길을 돌린 하영은 민혁과의 은밀한 상상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두근 거렸다.
그와는 절대 그럴일이 없을꺼야.
하영은 다짐하며 애써 침대만을 외면하려 애썼다.
그들이 머무는 객실에는 텔레비젼도 신문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세상의 복잡한 일상과 잠시 안녕할수 있는 말그대로 휴식을
위한 리조트 같았다.
하영은 벌써 이곳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 이곳을 떠날 때 쯤이면
무척 아쉬울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하지..좀 쉬었다가 나갈까?]
민혁이 옷을 정리하고 있는 하영에게 다가왔다.
[아니요.이곳에 오니까 피곤함이 싹 달아났어요. 벌써 부터 나가고
싶어서 발바닥이 근질근질 한걸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하영을 보며 민혁도 웃음을 지었다.
[그럼 대충 정리하고 나가자. 아까 들어오면서 보니까 스킨 스쿠버
프로그램이 있더라고...참 재미있어 보이던데...같이 갈래?]
[네.]
옷정리를 다 끝내고 하영과 민혁은 스킨 스쿠버를 하기 위해 객실을
떠났다.
스킨 스쿠버 강사가 열심히 영어로 주의해야 할점을 설명해 주면
민혁이 친절하게 하영에게 한국말로 설명해 주며 하영의 동작을
세심하게 살펴봐 주었다.
교육이 끝나고 민혁과 하영은 서로 산소통을 메고 수중세계로 나란히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멋진 열대 바다의 아름다운 모습이 장관을 이루었다.
민혁이 하영에게 손에 들고 있는 빵조각을 건넸다.
하영이 그것을 받아 물속에서 던지자 알록달록한 색깔을 가진 열대어
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어 빵 부스러기를 먹기 시작했다.
하영은 마치 자신이 인어공주라도 된 것 마냥 너무도 즐거웠다.
얼마간의 열대어들과의 데이트를 즐긴 민혁과 하영은 물밖으로 나왔다.
[정말 멋져요!!!!이렇게 멋진 경험은 처음이예요.]
하영이 소리를 지르며 민혁에게 외쳤다.
[우와!!정말 멋있는걸...아까 강사한테 들어보니까 돌고래도 여기서
볼수 있다고 하던데...내일 같이 볼까?]
[네..좋아요.]
[배고프지 않아? ]
[네 너무 배고파요.]
하영이 익살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움켜쥐는 포즈를 취했다.
[식당에 가자.]
식당으로 향하는 그들은 어느새 그들도 모르게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둘중 어느 누구도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듯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며 서로에게 미소를 남겨주는것도 잊지 않았다.
#36
리조트 안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갈줄 알았던 하영의 예상과는 달리
민혁은 그녀를 보트가 있는 선착장으로 안내했다.
[식당에 안가요?]
하영이 그의 팔을 잡아 당기며 물었다.
[지금 가잖아.]
민혁이 의미모를 미소를 지으며 하영을 이끌었다.
보트에 앉아있던 리조트 직원이 일어나 그들을 향해 깍듯이 인사를 했다.
보트에 오른 하영과 민혁은 바다를 가로질러 바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는 오두막으로 향했다.
[어머나....바다 한가운데 오두막이 있어요.]
정말 신기하게도 바다 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섬처럼 서있었다.
야자수 잎으로 만들어진 지붕과 바닥이 로맨틱하고도 이국적으로 보였다.
민혁이 먼저 보트에서 내려 오두막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올라오는 하영의 손을 잡아 올려주었다.
하영이 내리자 직원은 한 시간 뒤에 오겠다는 말을 남긴체 그대로
보트를 몰고 섬으로 돌아가 버렸다.
[자...이리와봐.]
민혁은 하영을 끌어당겨 두손으로 하영의 눈을 가렸다.
[뭐예요.]
하영이 민혁의 손에 눈이 가린체 미소를 지었다.
[자자...그냥 내가 이끄는 데로 가기만 하면 돼.]
그가 이끄는 데로 하영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자..천천히 눈을 떠봐.]
그가 손을 치워주자 하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두 눈이 휘둥그래 졌다.
식탁위에는 맛잇어 보이는 음식들과 열대 과일들이 먹음직스럽게
바구니 안에 담겨져 있었고 오두막 안에는 온통 붉은 열대 꽃들로
장식되어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아름다운 촛대위에 촛불이 어두워지는 어두막 안의
조명을 대신해 주었다.
[세상에....]
[어때? 내 선물이 맘에 들어?]
[그럼요.]
민혁은 신사답게 하영이 앉을 의자를 빼주었다.
식탁에 앉아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둘은 마치 남지나해의 푸른 바다위에
표류 된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무도 고요한 평화로움에 식사가 제대로 먹히지 않는것 같았다.
간간히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야자수 지붕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풀어놓은 하영의 긴머리를 부드럽게 간질였다.
멀리서 리조트에서 연주하는듯한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민혁과 하영이 포도주 잔을 서로 부딪치며 음악에 취해
아무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무 평화롭네요.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요.]
[나도...얼마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인지 모르겠어.]
촛불 너머로 민혁의 시선이 하영의 얼굴에 꽃혔다.
[춤출래?]
그가 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영은 음악과 분위기에 취해 그가 내민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그녀를 일으킨 그는 식탁옆의 넓은 공간으로 그녀를 에스코트 했다.
장식되어 있는 붉은 꽃을 하나 따서 하영의 머리를 귀로 넘겨주며
다정스럽게 귀에 꽃을 꽂아 주었다.
[마치 순결한 섬 처녀 같군.]
그의 손길이 하영의 얼굴을 살짝 스쳐갔다.
그가 조심스럽게 하영을 끌어당기자 그녀는 그의 품에 자연스럽게
안겨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그녀의 귀에 쿵쾅거리는 그의 심장소리가
들여왔다.
풋풋한 그의 땀냄새가 하영의 코를 자극했다.
그가 움직이는 데로 그녀의 몸도 함께 움직이며 저마다의 분위기에 빠져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민혁의 턱이 하영의 정수리에 와 닿았다.
하영 역시 그의 가슴에 더욱 얼굴을 파묻으며 자신의 허리를 감싼
민혁의 손길을 느꼈다.
어느새 그의 손길이 그녀의 허리에서 어깨위로 올라왔다.
그가 그녀를 자신의 몸에서 떼어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꿈을 꾸는듯 하영역시 몽롱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키스해도 돼?]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하영의 시선이 매력적인 그의 입술로 향했다.
[네...]
그녀의 대답이 이어지자 그가 하영의 얼굴을 잡고 조금 뒤로 젖혔다.
그러자 하영이 느끼는 감정을 눈동자에서 고스란히 읽어낼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포개었다.
소유욕이 담긴 키스.
민혁의 키스는 점점 무자비하게 변해갔고 그녀를 껴안는 포옹도 숨쉬기도
힘들만큼 강해졌다.
원초적이고 솔직한 그의 욕구가 하영의 몸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영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올려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열어 그를 받아들였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을 점령해 가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은 채 세게 끌어당겼다.
하영이 입은 얇은 다홍색의 원피스 사이로 흥분한 그의 남성이
느껴졌다.
[민혁씨....]
숨이 가쁜 목소리로 그녀가 민혁의 이름을 불렀다.
[오..세상에..당신 때문에 언젠가는 내가 미치고 말거야.]
민혁이 가슴이 들썩이며 다시 하영의 입술을 찾았다.
그의 손이 하영의 허버지로 내려가더니 원피스 자락을 위로 걷어올리기
시작했다.
하영은 굳이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넓다란 손바닥이 매끄러운 하영의 허벅지를 쓸어가기 시작했다.
[으..안돼.]
민혁이 괴로운 신음을 내뱉으며 최대한 그의 의지력을 동원해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민혁씨....]
갑작스런 그의 태도에 하영이 당황해 했다.
그런 하영의 모습에 그는 다시 하영을 끌어안았다.
[아니야. 너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그냥 이런곳에서 내 욕심만
채우고 싶지 않아. 이젠 함부로 널 대하지 않을꺼야. 물론 너를
간절히 원하고 있지만....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너를 갖지 않을거야.
너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싶어.]
그의 말에 감동한듯 하영이 글썽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예요?]
[으음.]
[고마워요.]
그들은 사이좋게 나란히 손을 잡고 오두막을 나와 오두막을 올라오는
계단 부분에 걸터 앉아 서로의 발을 바닷물 속에 담근체 어린아이마냥
물장구를 치며 즐거워했다.
발목을 스치는 따뜻한 바닷물이 너무도 기분좋았다.
그들의 너머로 붉은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언젠가...이곳에 다시 한번 와 볼수 있을까요?]
[글쎄.....]
하영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앉은 민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만약.
다시 이곳에 오게 된다면 그때도 당신과 함께 였으면 좋겠어요.
하영은 조용히 노을을 바라보는 민혁을 보았다.
최악의 상황에 그녀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
[하영..일어나...]
[으음.....]
뒤척이던 하영이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샤워를 했는지 물기가 촉촉한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민혁이 하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제 저녁 오두막에서 돌아와 민혁은 배려있게 하영에게 침실을 내주었다
그 댓가로 그는 힘든 밤을 직원이 들여보내준 샴페인으로 보내야만 했다.
[몇시예요?]
하영이 기지개를 펴며 그에게 물었다.
[어제 돌고래 보러 가기로 했잖아. 새벽 5시야.]
[와우...부지런하지 않으면 돌고래도 못 보겠네요.]
하영이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잘 잤어요?]
하영이 그를 향해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응. 덕분에.]
마지못한 그의 대답이였다.
하영은 그가 밤새 거실에서 뒤척이며 왔다갔다 하는 발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그 원인 제공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끝내 그녀는 모른체 했다.
하영은 침대에서 발딱 일어나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간편하게 쥬스 한잔을 마시고 나서 민혁과 하영은 야생 생태의 돌고래를
관찰하기 위해 모인 관광객과 그들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보트를 타고 어스름 동이 틀려는 바다로 힘차게 달려나갔다.
어느 정도 먼동이 트는 바다로 달려나가자 보트를 몰던 사람이 시동을
끄고 보트를 바다 한가운데 세웠다.
[돌고래가 수면위로 올라오는 시간은 고작 1~2분 정도이니까 두 눈을
크게 뜨고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가이드이 말이 끝나고 사람들은 저마다 바다 위를 쳐다보며 돌고래들이
모습을 드러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저..저기!! 돌고래다!!!]
한 남자의 외침에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하영! 저기봐!!]
민혁이 하영의 어깨를 끌어 안으며 손가락으로 동쪽 방향을 가리켰다.
순식간에 수십마리의 돌고래들이 파도를 뚫고 해가 뜨는 바다위로
힘차게 도약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오...너무 멋져요.]
그들의 몸통이 떠오르는 햇빛에 반짝이며 물방울들이 반사되어 보석처럼
공중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너무나도 신비롭고 생명의 희열은 말로 형용할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 이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거야.]
민혁이 중얼거리며 마지막 돌고래의 도약을 지켜보았다.
[사진 찍었어요?]
그녀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여기에...찍어놨지.]
[저도 이곳에 잘 찍어놧어요.]
하영도 손바닥으로 자신의 심장 부분을 지긋이 눌렀다.
돌고래가 사라진 곳에서는 커다란 태양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바다 새들이 아침을 알리는 즐거운 노래들을 줄지어 날아다니며 부르고
있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그들의 즐거운 하루는 어느새 오후를 넘기고 있었다.
점심을 마치고 민혁과 하영은 해변 앞쪽에 준비되어 있는 작은 카약
(카누와 비슷한 작은 배)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민혁이 노를 저을때 마다 반팔위로 드러난 그의 팔의 힘줄이 불끈
솟아오르고 있었다.
[힘 안들어요?]
[아니.]
민혁이 씨익 웃었다.
하영은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는 하영을 보며 민혁은 노를 열심히 저어갔다.
그들이 탄 카약이 어느새 그들이 머물고 있는 베이 코티로 향했다.
바다 한가운데 오두막을 올리고 있는 나무 기둥 사이로 들어가자
오두막으로 인한 시원한 그늘이 생겨 따사로운 햇빛을 막아주었다.
민혁은 잠시 노를 배에 걸쳐놓고 휴식을 취했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하겠네요.]
하영이 아쉽다는듯 한숨을 내쉬었다.
[왜 가기 싫어?]
[조금은요.]
[서울에 돌아가면 힘든 일이 생길지도 몰라.잘 견뎌낼수 있겠어?]
걱정스런 민혁의 표정을 바라보며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볼게요..그러니까 민혁씨도 많이 도와줘야 해요.]
[그럼.당연하지.]
하영은 머뭇거리다 그에게 다가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건...순전히 분위기 탓이라구요...알았죠?]
당황하는 민혁의 표정에 하영이 헛기침을 하며 변명했다.
[난 분위기 하나는 끝내주게 잘 타는 남자거든.]
그가 장난스레 속삭이며 그녀의 얼굴을 끌어 당겨 진한 키스를 남겼다.
#37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간 하영과 민혁은 그들의 신혼여행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기 위해 수영장으로 나와 수영을 즐기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은거예요?]
늦은 시간에 리조트의 수영장을 이용하는게 찜찜했던 그녀가 민혁에게
재차 물었다.
[괜찮아. 낮에 리조트 지배인에게 말해두었어. 제우스 빽좀 쓴거야.]
그가 킬킬 거리며 수영장 저쪽으로 힘차게 헤엄쳐 갔다.
그의 수영솜씨는 일등급이였다.
그가 물살을 가를때 마다 늘씬한 등의 근육이 수영장을 비추는 조명에
의해 더욱 멋있어 보였다.
하영은 망설이며 쉽게 풀장에 들어서지 못했다.
그녀가 가져온 수영복은 비키니 였는데,살때는 몰랐는데 막상 이곳에
와서 입으려고 꺼내 보니 너무 야한 디자인이였다.
차마 민혁의 앞에서 입을수가 없어 고민하던 끝에 다행히 밤이라서
주위가 어둡다는 장점을 살려 하영은 수영복을 입었던 것이다.
핑크색톤의 비키니는 늘씬하고도 하얀 피부의 하영의 몸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민망스러워하던 하영은 조심히 몸에 걸쳤던 가운을 벗고 민혁이 그녀를
볼새라 얼른 풀장안으로 들어가 물속에 몸을 감추었다.
[수영 못해?]
그가 어느새 한바퀴를 돌고 와서 하영에게 다가왔다.
[잘 하지는 못하지만...그렇다고 맥주병은 아니예요]
하영이 물속에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나랑 시합한번 해볼래?]
[좋아요. ]
하영은 흔쾌히 그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부터 저끝까지야. 누가 먼저 도착하나.]
[시작이나 하세요.]
[오....자신있나 본데...좋아 그럼...시작.]
그의 구령에 맞혀 하영은 힘차게 출발했다.
물살을 가르며 하영은 열심히 팔과 다리를 이용해 헤엄쳐 나갔다.
풀장이 중간쯤 이르자 하영은 그녀가 어느정도 그를 따돌렸다고 생각하며
더욱 발길질에 힘을 가했다.
숨이 턱에 차오르면서 결승 지점에 다 이르자 하영은 의기양양한 표정
으로 뒤돌아 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남기고간 물 보라만이 풀장위로 떠다닐뿐 민혁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민혁씨.......]
하영이 덜컥 겁이 나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풀장 가운데로 걸어가면서 그의 모습을 찾으려 애썼다.
[장난 치지 말아요....어디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민혁씨!!]
그녀가 소리치자 순식간에 그녀의 바로 앞에서 물속에서 민혁이
튀어 나왔다.
[꺄악!!무슨 짓이예요.]
놀란 하영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하하하...놀랬어?]
그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도 아니구...그런 장난 하지 말아요. 정말 잘못된줄 알았단
말이예요.......]
하영이 입을 삐죽 거리며 그를 놔누고 풀장을 나가려고 했다.
[어..정말 화났나보네.]
민혁이 나가려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미..미안해.화 풀어.]
그가 미안해 하며 그녀를 잡아 당겼다.
마지못해 그에게 끌려오던 하영이 갑자기 뒤로 홱 돌며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잡고 물속으로 쳐박았다.
그가 수면위로 다시 얼굴을 내밀었을땐 깔깔 거리며 하영이 도망치고
있었다.
[이 여우!!!]
민혁이 입을 크게 벌리며 그녀를 잡아 먹겠다는 포즈를 취하며 하영을
잡기 위해 물을 가르며 쫓아왔다.
[꺄악!]
하영이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도망가려 빨리 움직였지만 물속에서
움직이는건 여자인 그녀보다 남자인 민혁이 더욱 빨랐다.
몇 발자국 얼마 못가서 하영은 민혁에게 허리가 붙잡혔다.
[가만 두지 않겠어!!!]
그가 즐거운 목소리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물속에서 이리저리 그녀를
흔들어 댔다.
[아..잘못했어요...그만해요. 간지러워요.]
하영이 까르르 거리며 발버둥을 쳤다.
하영이 웃으며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대었다.
뒤에서 그녀를 안고 있던 민혁과 하영이 시선이 마주쳤다.
입가에 흐르는 물기를 하영이 무의식적으로 혀를 내밀어 핣아먹자
그의 눈빛이 흐려지며 끙하는 신음을 내뱉고는 그녀의 몸을 순식간에
돌려 세우고는 하영의 입에 키스를 했다.
그의 혀가 하영의 얼굴의 물방울들을 핣기 시작했다.
감각적이 느낌에 하영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는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 끌고는 하영의 입술 윤곽을 따라 입을
맞추며 마침내 그녀의 입을 열어 그의 혀를 집어 넣었다.
그의 혀를 받아들이며 하영의 작은 혀가 그의 혀를 휘감아 버렸다.
그가 거칠게 하영의 비키니를 벗겨내버렸다.
차가운 풀장의 물때문에 하영의 가슴이 도드라졌다.
[널 아직 사랑하지는 않아.......]
민혁이 욕망에 물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수 있을지 자신도 없고,하지만 널 처음 보는
순간부터 미치도록 너를 갖고 싶었어,매순간 널 갖고 싶어.]
[민혁씨....난....]
그는 놀란 아이를 달랠 때처럼 낮게 중얼 거렸다.
그녀는 매우 겁도 많고 수줍음도 많이 타는 편이였다.
하지만 그의 입술이 닿을때 마다 눈꺼풀을 내려 깔며 살짝 입술을
열고 잦은 숨을 내쉴때, 빠르게 뛰는 그녀의 하얀 목의 맥박을 느끼며
하영도 그를 몹시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하영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보드라운 감촉에 그의 숨이 넘어갈것만 같았다.
그가 그녀를 수영장의 벽쪽으로 몰고갔다.
수영장 벽에 하영의 등이 닿자 그녀를 좀더 위로 끌어 올리고는 자신의
얼굴앞에 드러난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물고 힘껏 끌어당겼다.
[민혁씨.]
하영이 크게 숨을 들이키며 그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너무나도 강렬한 그가 선사하는 입안의 압력으로 그녀는 기절할것만
같았다.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던 그의 손이 그녀의 비키니 수영복 팬티의
끈에 와 닿았다.
마지막 성역이였던 그녀의 팬티마저 민혁은 손 쉽게 벗겨내고는
이내 자신의 팬티 수영복 마저 벗어 버렸다.
[민혁씨....여기는.....]
하영이 당황하며 그를 만류했다.
[여기서...여기서...당장 당신을 원해.]
[하지만...민혁씨.]
[날 원하지 않는거야?]
그가 거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요.나도 당신을 원해요.]
[당신은 이제 내 아내야.]
그가 선포하듯 말을 내뱉었다.
그의 혀가 하영의 온몸 구석구석 탐험하기 시작했다.
하영이 흐느끼며 그의 손길과 수영장의 물길에 몸을 맡긴체 무아지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를 원하고 있어.
그는 물속에 있는 그녀의 발목을 잡아 끌어 자신의 허리에 그녀의
다리를 두를수 있도록 했다.
그녀는 포기 하는 마음으로 아니 그를 진정으로 원하는 마음으로
그를 더욱 가까이 끌어 안았다.
키스를 하는 그의 혀가 부드럽게 안으로 들어와 윗 입술 안쪽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리고 입 천장을 한번 훏고는 부드럽게 그녀의 혀를 끌어당겼다.
[너를 갖고 싶어.]
풀장의 물로 인해 투명하게 빛나는 하얀 하영의 나신을 바라보며
고통스럽고도 긴박한 어투로 그가 말을 내뱉었다.
그의 몸은 너무나도 뜨거웠다.
하영은 손을 들어 그의 강인한 어깨를 쓰다듬었다.
어쩌면 하영은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함껏 그를 끌어안으며 늘씬한 다리로 그의 허리를 조였다.
[몸이 차가워...내가 따뜻하게 해줄게.]
그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느낄수 있도록 힘껏 껴안았다.
[민혁씨...]
그녀의 부름에 민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힘차게 그녀의 몸안으로
자신을 깊숙히 밀어넣었다.
하영은 숨을 헐떡이며한치의 공간도 없이 가득찰 수 있도록 더욱
그의 허리에 감은 자신의 다리로 그를 더욱 조여갔다.
그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커다란 몸짓이 그녀를 밀어낼때 마다 물이 찰싹이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영은 만약 그들이 물 속에 있지 않았다면 자신은 다리가 풀려 제대로
서 있을수도 없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의 등에 하영으로 인해 초승달 모양이 손톱 자국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를 안은채 풀장 한가운데로 향했다.
물속으로 그대로 들어가며 둘은 키스를 나누었다.
물밖으로 나오면서 하영이 물에 젖은 긴 머리를 힘껏 뒤로 젖히자
물방울이 튀면서 달빛아래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의 여신......]
그가 달빛에 드러난 아름다운 하영의 상반신을 보며 속삭였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자신의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그녀의 몸안에
쏟아부었다.
기쁨의 소리를 내지르며 둘은 동시에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비로소 하영을 자신의 아내로 만든것이다.
그의 건강한 욕망의 흔적들이 따뜻하게 그녀의 몸안으로 흘러들어갔다.
***********
[잘 다녀 오셨습니까!!!]
인천 공항에 들어서는 민혁과 하영을 마중나온 기찬이 반갑게 맞이했다.
[기찬씨 잘 있었어요?]
하영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기찬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사모님.]
기찬은 민혁의 옆에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영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는 또한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달라진 민혁의 모습또한 놓치지 않았다.
왠지 그의 걱정과는 달리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기찬은 하영이 들고 있는 가방을 받아 들고는 그들을 주차되어 있는
차로 안내해 주었다.
[그동안 별 일 없었어?]
민혁이 차안에서 기찬에게 물었다.
[별 일 없었습니다. 아참 그리고 청담동에 사모님과 머무실 방은
제가 디자이너와 함께 꾸며 놓았습니다. 맘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그가 백미러를 통해 하영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기찬씨..그런 일까지 부탁해서.]
[아닙니다. 사모님. 결혼식날 사람들이 신부가 아름답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었습니다.]
[쑥스럽네요.]
하영이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민혁을 바라보았다.
그 또한 사랑스런 시선으로 하영의 볼을 꼬집어 주었다.
[청담동 집으로 모실까요?]
[아니. 대한 병원으로.]
민혁의 말에 하영이 그를 쳐다보았다.
[민혁씨...]
[원래 신혼 여행 다음에는 처가댁 먼저 가는거야. 몰라?]
[응.]
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38
청담동 집으로 들어서자 새빨간 원피스를 차려입고 화려하게 화장을한
미령이 그들을 달갑지 않은 얼굴로 반겼다.
[다녀 왔습니다.]
하영이 먼저 예의를 갖추며 미령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미령은 민혁과 하영이 붙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릴뿐 대꾸하지 않았다.
[피곤하겠구나...올라가셔 쉬어.]
[네.]
하영은 민혁을 따라 2층의 자신들이 머무를 보금자리로 향했다.
방 문을 열자 향기로운 라벤더 향이 방안에서 풍겨나왔다.
문앞에 달아 놓은 향주머니에서 나오는 향이였다.
방안의 불을 켜자 하영과 민혁이 직접 고른 화이트 톤의 가구가
눈에 들어왔다.
침대는 네 기둥이 세워진 중세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모양이였는데
기둥마다 하얀 천들이 둘러져서 커텐을 치는 식으로 침대를 가릴수
있게 해주었다.
화장대 위에는 민혁과 하영의 화장품이 나란히 다정스럽게 놓여져
있었고, 그 앞에는 그들을 환영하는 기찬의 축하의 꽃바구니가 있었다.
[기찬씨가 알아서 잘 꾸며 주었네요...참 세심한 사람이예요.]
하영이 침대위에 걸터앉아 새하얀 새틴으로 만들어진 침대보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맘에 들어?]
[네.]
[오늘 저녁....나가서 먹을까?]
[왜요?]
[그냥...불편하지 않겠어? 새 새어머니 하고.]
[이리저리 피하다 보면 아무것도 못해요. 어차피 부딪힐 일이라면
빨리 적응해 가는게 나아요.]
[그래.]
민혁이 양복을 벗자 하영이 자연스럽게 그의 양복을 받아들어 장농의
옷걸이를 꺼내 걸어두었다.
간단하게 서로 샤워를 마친 그들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미령은 벌써
식탁에 앉아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꼭 어른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니? 예의범절부터 배워야
겠구나.....어린것이 버릇없이........]
미령의 날카로운 어투로 하영을 쏘아 보았다.
민혁이 앞으로 나서며 미령에게 대들려고 하자 하영의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죄송합니다......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하영은 부드럽게 미령의 말을 받아치고는 조용히 식탁 의자에 앉았다.
미령은 식사 내내 하영에게 집안에서 그녀가 해야 할 일과 주의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며 집안의 제일 어른은 자신이라는것을 일깨워 주려고
하는듯 하영을 몰아세웠다.
[그만좀 하시죠. 하영이가 바보도 아니고...그런건 차차 익혀가면
되는 문제입니다. 새어머니가 그러시지 않으셔도 혼자서 충분히
해나갈수 있는 문제이니...이제 그만 식사좀 하죠.]
민혁의 타박에 미령은 그를 한번 쏘아보고는 말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민혁과 미령 사이에 흐르는 신경전이 거북한 하영은 밥알이 마치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껄끄러웠다.
식사를 마친후 민혁은 자신의 서재에 신문을 읽기 위해 들어갔고
미령은 머리가 아프다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영은 설겆이를 마치고 커다란 집의 구조도 익힐겸 이리저리 집안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어느새 거실에 있는 커다란 괘종이 밤 10시를 알리는 종을 울리고 있었다
하영은 거실의 불을 끄고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뒤돌아섰다.
[안올라 오고 뭐해?]
민혁이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편안한 하늘색 니트와 면바지 차림의 그의 모습은 참으로 편안해보였다.
늘 단정한 양복을 입고 있던 그와는 또 다른 모습이였다.
[지금 올라가려구요...]
민혁은 웃으며 하영에게 다가왔다.
[잠깐만...]
그는 몸을 굽히더니 하영의 무릎뒤로 자신의 팔을 집어 넣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민혁씨! 왜그래요...]
당황한 하영이 내려오려 몸부림쳤다.
[가만히 있어...온 집안 사람 다 깨울거야?]
민혁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원래 신혼방을 들어갈땐 이렇게 신부를 안아 올리고 들어가는거야.]
[무거워요...]
[괜찮아...자 올라 가실까요? 신부님]
하영은 쑥스러운듯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들의 신혼방으로 들어서자 그는 하영을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자,이제 신부를 방까지 무사히 에스코트를 했으니...뭘하지?]
[글쎄요..뭘 해야 할까요?]
그녀가 속삭이며 그의 까칠한 턱을 쓰다듬었다.
[우선..........굿나잇 키스부터 해야겠지....]
그의 목소리가 나른해지며 하영의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굿나잇...하영.]
[굿나잇.....]
그들의 인사는 달콤한 키스속에 묻혀버렸다.
***********
하영은 민혁 옆에 누워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격정적인 폭풍이 그들을 휩쓸어 간후,민혁과는 달리 하영은 쉽게
잠이 들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모든 것이 변해버린 기분이였다.
그녀는 모든 자제력을 잃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민혁과 함께 있을때면 그녀의 자제력은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어쩌면 그와 헤어지게 될 2달 후면 그의 옆에 있어도 편안히 숨을 쉴
수도 그를 만지고 싶거나 그와 키스를 하고 싶은 충동쯤이야 이겨낼수
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것도 불가능한 일이였다.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 할수없을 만큼 더 두려운 것은 바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였다.
그와 함께 있는 순간에도 조차 그를 향한 지독한 그리움 같은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고 그가 나른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바
주는 것도 행복했다.
그가 자신을 그의 품안으로 꼭 끌어 안아줄때는 정말이지 그를 떠난
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아직은 널 사랑하지 않아.
풀장에서 사랑을 나누던 날 밤 그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오직 그녀를 단지 계약 상의 아내로밖에 여기지 않는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의 아기가 죽던날 그이 심장에 남아있던 따스한 온기마저
죽은 아이가 모두 가져가 버린것이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2달뿐이였다.
그녀가 그의 마음을 그동안 바꿔놓지 않는한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민혁이 뒤척이며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하영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자신을 끌어당기는 남편의 품에 안기며 하영은 그를 사랑하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거라 생각이들었다.
민혁은 자신이 늘 일어나던 시간데로 아침 여섯시에 정확히 두눈이
떠졌다.
그는 왠지 포근해 지는 기분을 느끼며 자신의 품에 안겨 잠이든 하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엷은 홍조를 띤체 얕은 숨을 내쉬며 잠든 하영의 모습은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모습에 흥분되는 자신의 육체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욕심을 잠든 하영을 짐승처럼 덮치기는 싫었다.
이렇게 잠든 모습만 보아도 미칠듯이 그녀를 원하는데 과연 두달후엔
그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 보낼 수 있을까 민혁은 걱정이 되었다.
그는 매순간 그녀를 대할때 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 왔다고 믿어왔다
그녀가 잠결에 그에게 몸을 밀어 붇였다.
그녀에게 반응하는 자신의 감정, 그냥 동물적인 본능일 뿐일까.
하영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자신의 생각을 그에게 밝히지는 않았다.
그녀도 단지 그로 인해 알게된 육체적 기쁨때문에 그에게 마음을 열고
있는것이라 그는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감정이 아니길 바라는 그의 심정은 뭐라 말로
표현할수 없었다.
설마.....
순간 머리속이 어지러우면서 구역질이 날것 같았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절대 그럴리가 없었다.
그의 사랑은 끝났다.
예전에 날카로운 칼로 심장의 한족을 깨끗하게 도련낸듯 그런 시시한
감정놀이는 끝이났다.
여자들은 그에게서 돈을 원했다.
그는 외로울때마다 그녀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돈을 주었고 그녀들은
민혁의 외로움을 채워주었다.
지금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여자또한 결국은 돈 때문에 자신과 결혼을
한것이다.
하지만 자기 암시적인 그의 주문도 하영에 대하여 다른 여자들에게
느꼈던 혐오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오히려 그녀의 주문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39
민혁은 방안에 있는 전신 거울을 통해 출근 하기전 자신의 모습을
다시 확인했다.
짙은 군청색의 고급 양복은 마치 민혁의 일부인 그의 다부진 몸매를
더욱 섹시하게 드러내주는 역활을 했다.
민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으로 향수를 가볍게 뿌린뒤
자신의 서류가방을 들었다.
[준비 다 하셨어요?]
앞치마를 두른 하영이 설겆이를 마치고 마침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응. 도우미 아줌마 부르지 그래?]
민혁은 청담동 집으로 들어오자 마자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하영이
맘에 안드는듯 그녀의 물기가 묻은 앞치마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작은일은 제가 할 수 있어요...힘들면 그때 부를게요.]
[식순이 시키려고 결혼한거 아니야.]
[알았어요...잠깐만요.]
하영은 방을 나서려는 민혁을 붙잡고는 비뚤어진 그의 넥타이를 바로
잡아주고는 양복위의 먼지를 손으로 털어주었다.
순간 민혁의 가슴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낯선 느낌으로 인해 당황했다.
거울을 통해 비춰지는 그들의 모습은 한없이 다정한,정말 민혁이
젊었을적 꿈꿔왔던 완벽한 부부의 모습 그대로였다.
완벽한 부부.
민혁은 그 단어가 내포하는 자신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내고는 마음이 왠지 씁슬해졌다.
하영은 민혁의 생각보다 그의 아내의 역활을 충실히 잘 해내고 있었다.
너무도 자연스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정말로 그들의 계약대로
연기를 하고 있다면 뛰어난 주연감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오늘 집에서 뭐할꺼야?]
[그냥 좀 쉬려구요...아직 여행의 여독이 안 풀렸나봐요.]
[그렇게 해. 심심하면 회사로 나와.]
[걱정말고 다녀오세요.]
하영은 민혁을 마중하기 위해 그와 함께 2층에서 내려왔다.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미령이 2층에서 내려오는 신혼부부를
힐끔 쳐다보았다.
[다녀오겠습니다.]
민혁이 미령을 보자 거북스런 표정을 지으며 집을 나섰다.
[다녀오세요.]
민혁이 나가고 드디어 하영과 미령 둘만이 큰 집에 덩그러니 남아있게
되었다.
하영은 자신의 뒤통수에 꽂히는 미령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낄수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며 하영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미령에게 뒤돌아 섰다
하지만 이내 독기어린 미령의 눈과 마주치자 그녀의 용기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것만 같았다.
자신이 떨고 있는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하영은 자신의 뒤로
두 손을 숨기며 주먹을 꽉 쥐었다.
[모두 나가고....이젠...우리 둘 뿐이네....]
미령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하영에게 다가왔다.
[어쨌거나...내 며느리가 되었는데...저번에 있었던 불미스런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고...친하게 지내야지? 너도 알다시피...나와 민혁이는
사이가 별로 좋지가 않아...가정의 분위기를 위해서도 중간에서
네가 역활을 잘 해내야지....안그래?]
[그럼요...제가 많이 노력해야죠...]
[말길을 잘 알아들으니 편안하군....]
미령이 마시다 남은 커피가 있는 커피잔이 놓인 테이블로 향했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척 하다 미령은 커피잔을 슬쩍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장미꽃의 무늬가 있던 커피잔이 산산조각이 났다.
[어머!!! 이를 어째....]
미령이 발딱 일어섰다.
[괜찮으세요?]
하영이 미령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깨진 찻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하영이 찻잔을 치우는걸 내려다 보던 미령이 막 마지막 깨진 조각을
주으려던 하영의 손을 실내활르 신고 있던 자신의 발로 지긋이 눌렀다.
[아야!!]
하영이 깜짝 놀라 손을 들어올렸다.
[어머!! 미안해....거기에 손이 있는 줄 몰랐는걸....난 내가 걸리적
거릴것 같아서....자리를 비켜주려고 했는데..모르고 밟아 버렸구나...]
하영은 깊숙히 살이 베여 붉은 피가 떨어지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
보았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가 구급함 가져올게..]
미령이 수선을 떨며 자리에서 비켜났다.
하영은 미령이 발이 일부러 자신의 손을 눌렀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하영은 문득 자신이 미령을 상대해 낼 수 있을까 겁이 나기 시작했다.
민혁과 함께 미령을 상대하는것과 미령과 단 둘이 남은 상황에서
그녀를 상대하는 것은 차원이 틀렸다.
하영은 계속 흘러내리는 피를 닦기 위해 자신의 앞치마로 손을 감쌌다.
[괜찮겠니?]
미령이 어느새 구급상자를 하영의 앞에 내 놓았다.
[괜찮아요......]
하영은 애써 태연한척 하며 자신의 상처를 그녀 앞에서 감추려 했다.
[그래..별로 심하게 보이진 않는구나....여기 연고 있으니까 좀 바르고..
한동안 집안에 청소를 안했더니 온 집안에 먼지가 가득해....대 청소좀
해야겠어....할수 있겠지?]
미령이 우아하게 장식장위의 먼지를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리며 하영을
쳐다보았다.
[예.그러죠. 창문을 모두 다 열어야 하니까 거북하시면 들어가 계세요.]
[어?그...그래 알았어.]
미령은 자신의 생각보다 씩씩한 하영의 모습을 보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독한 계집애 같으니라구...만만하게 봐서는 안되겠는걸...
붉은 피를 뚝뚝 흘릴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고도 눈하나 깜박하지 않고
태연하게 자신의 앞에 서있는 하영의 모습을 보며 미령은 생각보다
하영이 만만치 않은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영이 청소를 시작했는듯 밖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청소기 소리를
들으며 미령은 초조한듯 자신의 방안을 서성이며 문밖의 하영을 노려
보듯 문쪽을 한참이나노려보았다.
[산너머 산이군.]
미령은 자신의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최성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걸직한 성호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왜!]
그는 다짜고짜 고함을 버럭질렀다.
아직까지 잠에 취한듯한 목소리로 보아 자신의 잠을 방해한 미령의
전화가 달갑지 않다는듯 보였다.
[미쳤어....지금 잠이 오니?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미령이 하영이 들을까 목소리를 낮추며 성호에게 앙칼지게 한마디 했다.
[뭐야...아침부터.....]
[시간이 얼마 없다구.....다잡은 먹이 서민혁이 입에 그냥 떨어뜨려
줄꺼야? 어떻게든 방도를 생각해 내야지.]
[결혼까지 했는데...무슨 방도...나도 요즘 미치겠다구!!!]
[그럼 나는 한집안에서 저 기집애 얼굴 마주치며 살아야 하는 나는
안 미치겠어? 방도가 없긴 왜 없어. 아직 두달이나 남았어....]
[그럼,,,당신한테 무슨 방도가 있다는 거야?]
[일단 만나. 만나서 이야기 해 줄게.]
미령은 청소기가 꺼지는 소리가 들리자 성호와의 만날 장소와 시간을
서둘러 정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
민혁이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책상위에는 여러 꽃바구니들이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뭐야?]
민혁이 한 꽃바구니에 있는 카드를 열어보았다.
제우스와 어떻게든 연줄을 이어보고 싶어하는 중소기업 사장의
축하메세지의 카드였다.
[오늘 아침 여러곳에서 결혼을 축하드리는 꽃바구니가 배달되었습니다.]
[모두 치워버려.]
민혁은 그들의 축하따윈 관심없다는듯 꽃바구니들을 모두 책상에서
내려놓았다.
민혁은 카드를 다시 꽃바구니 안에 던져놓고는 양복 상의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결혼식내내 기찬이 네가 많이 수고했다. 고마워.]
민혁은 진심으로 기찬에게 고마워했다.
[아닙니다. 사장님.]
[나 없는 동안 그쪽 상황은 좀 어땠어?]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습니다.최성호도 한동안 연락을 끊은체
두문불출하고 있습니다.]
[그 여우같은 여자가 쉽게 포기할리가 없어.주위를 잘 살펴봐.]
[예.]
[아참...그리고.....송미령과 단 둘이 남아있는 하영이가 걱정이
되는군....도우미를 가장해서 믿을만한 사람 하나 집안에
심어두는게 나을것 같아.송미령도 감시할겸....]
민혁은 그가 집을 나설때 하영의 뒤에 서있던 미령의 모습이 왠지
찜찜하였다.
[예. 알아서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요.]
민혁의 사무실을 나서던 기찬은 다시 한번 뒤돌아 책상위의 서류들을
살피고 있는 민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는 강 하영이란 여자를 만나면서 많이 변해가고 있었다.
자신은 스스로 자각을 하지 못했지만 수년간 그의 곁에서 민혁을 지켜
봐 왔던 기찬은 그의 변화를 생생하게 느낄수 있었다.
기찬이 처음 강하영이란 여자를 보았을때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있을까 믿어지지 않을정도였다.
마치 순백색의 도자기를 앞에 두고 깨질까봐 건들여 보지 못하는
그런 순결한 여인이였다.
그런 여인은 민혁에게는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을지도 모른다.
음지에서 살아온 민혁에겐 햇살같이 밝은 여자는 상반된 모순이였다.
하지만 기찬의 예상과는 달리 민혁은 강 하영이란 여자에게 무섭도록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천하의 냉정하기로 소문난 서 민혁이란 인물이 유일하게 돌답이 무너지듯
와르르 무너지는건 그 여자 앞에서뿐이였다.
아무튼 기찬은 새로운 작은 사모님이 마음에 들었다.
곰같은 그의 주인만 그녀의 마음만 알아차려 준다면 기찬은 더 이상
바랄것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40
하영의 손바닥의 상처는 다섯 바늘을 꼬맬 만큼 생각보다 큰 상처였다.
마취가 풀리자 꼬맨 부위가 화끈 거리며 아파오고 있었다.
하영은 붕대를 감은 손을 바라보며 이 상처를 민혁에게 어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 했다.
하영이 의사의 처방전 대로 병원 근처 약국에서 약을 타고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병원앞 택시 승강장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 외출한 김에 아버지를 보고 갈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미령의 외출로
집안이 비어 있을거라 생각하고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때 검은 승용차가 하영의 앞에 멈추어 서며 경적을 울려댔다.
짙게 선팅한 유리창이 서서히 내려오더니 이내 기찬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 기찬씨!!]
하영은 그제서야 그 승용차가 민혁이 타고다니는 승용차임을 알게되었다.
[사모님!!!타세요.]
[괜찮아요...택시 타고 가면 되요.]
[회사에 들어가려면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 타세요.]
하영은 그녀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힐끔 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자
이내 마지못해 승용차에 올라탔다.
[병원에 오셨습니까? 여긴 왠일이세요...]
[예?]
하영은 얼른 핸드백 밑으로 붕대를 감은 자신의 손을 감추었다.
하지만 기찬이 한발 빠르게 그녀의 붕대가 감긴 손을 먼저 발견한
후였다.
그는 인도쪽에 차를 급히 세우고는 뒷자석에 앉아있는 하영을 돌아보았다
[사모님!! 다치셨습니까!]
[아..아니예요..그냥 좀...]
[그냥 다치신것 같지 않은데요....그렇게 붕대까지 감고 계신걸 보면..
무슨 일이십니까?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기찬의 놀란듯한 두 눈이 안경너머로 매섭게 빛났다.
[그..그냥 좀 유리에 베였어요....]
[사장님께선 알고 계십니까?]
[민혁씨 한테는 알리지 마세요. 부탁이예요. 이따 내가 저녁에 따로
이야기 할게요....]
하영의 부탁에 기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상처.....큰 사모님과 관계있는 일입니까?]
기찬의 물음에 하영은 생각처럼 선뜻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하영의 모습을 본 기찬은 그 상처의 제공자가 미령임을
간파했다.
[아..아니예요. 그냥 내가 찻잔을 깨뜨렸어요..그걸 치우다가...]
[사모님...큰 사모님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만만하신 분이
아니라는거.....저번의 일 만으로도 충분히 아셨지 않습니까?
자꾸 큰 사모님에 의해 사모님께서 일을 당하신다면...저로써도
그냥 묵과해 드릴수만은 없습니다. 사장님께 말씀드려야 해요.]
기찬의 진지한 설명에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찬씨는 내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마냥 걱정스러운 거군요.]
[아..아닙니다. 사모님 ..전 다만...]
기찬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알아요..기찬씨가 걱정해주는 마음...저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
나 혼자 감당하기 힘들다 싶을땐 민혁씨나 기찬씨한테 도움을 청할게요.
그러면 됐죠?]
[사장님께서 아침에도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집안에 큰 사모님과
둘이 계실걸 생각하면 걱정된다고 하셨어요.]
[민혁씨가요?]
하영은 그가 자신을 세심하게 생각해 준다는 사실에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것 같았다.
[그런데 기찬씨는 여기 왠일이예요?병원에 볼 일이 있었나요?]
[네. 정의그룹 회장님께서 이 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사장님 대신
병문안차 들렸습니다.]
[그렇군요.....]
기찬은 다시 차에 시동을 걸고 서서히 출발시켰다.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보며 미령에 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분명히 자신의 존재를 달가와 하지 않는것을 노골적으로 하영에게
표현했다.
하영 역시 그녀에게 당하고만은 있을 생각은 없었지만, 조금만 더
송 미령이란 여자에 대해서 관찰해볼 생각이였다.
언젠가 동물에 관한 다큐를 그린 프로그램을 텔레비젼에서 본적이 있었다
검은색의 퓨마는 풀숲에 숨어있는 토끼를 잡아 먹기 위해 토끼를 한동안
주시하며 토끼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때까지 기다렸다가 토끼가 자신의
시야에서 완전하게 드러나게 되면 그때서야 토끼를 잡았다.
하영은 미령을 주시하며 그녀를 끝까지 몰아가볼 생각이였다.
궁지에 몰리게 되면 미령은 자신의 모습을 서서히 드러낼것이다.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면 민혁은 손쉽게
미령을 꼼짝 못하게 할 올가미를 손에 움켜쥘수 있는것이다.
민혁을 위해서라면 하영은 기꺼이 미령을 이끌어내기 위한 희생양이
되어줄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
미령은 성호가 머문 여관방의 구질구질한 침대가 불결하다는듯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녀가 내뿜는 연기가 자욱하게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의 성호가 탐욕스런 눈빛으로 알몸의 미령을 침대에
누워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 그들이 나눈 격렬한 정사로 인해 성호의 살찐 몸에서는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외로웠나봐?]
유난히 오늘따라 열정적이였던 미령을 두고 하는 말이였다.
미령은 반쯤 타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옷사이에서 자신의 레이스 팬티를 찾아 입었다.
[이야기좀 해...]
미령이 침대로 다가가자 성호는 또다시 슬며시 그녀의 손목을 잡고
침대로 이끌기 시작했다.
[왜이래!!!]
미령이 찰싹 소리가 나도록 성호의 손등을 내리쳤다.
[씨팔.....]
성호가 상스러운 욕을 내뱉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서 민혁이랑 강 하영 두 년놈을 어떻게든 끝장내야 할 것 아니야...]
[참나...결혼까지 한 마당에 무얼 어떻게 하냐구!!!]
성호가 목가에 흘러내리는 땀을 손으로 닦아내며 침대옆 탁자에 놓인
물잔의 물을 벌컥 들이마셨다.
[자기.....그렇게 느긋해 할때가 아니야.....강 하영. 그 기집애가
당신 얼굴 봤잖아....만약 그 기집애가 민혁이 한테 서회장이 죽은
자리에서 당신을 봤다고 이야기라도 해봐...어떻게 될지...생각해 봤어]
미령은 일부러 성호를 자극하는 말을 꺼내며 그의 변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성호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지며 물잔을 집어던졌다.
[에이씨.......]
[방법이 아주 없는건 아니야.....]
미령이 성호의 등을 유혹적으로 손으로 쓰다듬으며 그를 구슬렸다.
[무슨 방법인데?]
[이혼 시키면 되는거 아니야? 뭔가 구린 냄새가 나...그것들이 갑자기
결혼하겠다는 것도 그렇고.....그것들이 어떤 목적으로 결혼을 했는지
는 모르겠지만....강 하영 그년이 스스로 떨어져 나가겠금 상황을
만들면.....이혼은 문제 없는거 아니야?]
[그건 또 그렇네....]
단순 무식한 성호는 미령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그년이 서 민혁이 새끼라도 가지면 어떻게 되는거야?]
[뭐?]
[설마 지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데 여자가 이혼하자고 매달리면 해주겠
냐 이말이지......]
[그건 나중에 가서 생각해. 설마 두달사이에 애라도 가지겠어?]
미령이 그럴리가 없다는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그 강 하영 그년이 스스로 물러나게끔 만들어야 하는데....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나에게 생각이 있어...당신은 내가 시키는 데로 해주기만 하면 돼.]
마주보는 미령과 성호의 얼굴에 살기같은 소름끼치는 표정들이 떠올랐다.
***********
집에 돌아온 하영은 민혁이 돌아오기전에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서둘렀다
물기가 묻지 않게 하려고 고무장갑을 끼긴 했지만 마취가 풀린 꼬맨
상처때문에 밀려오는 고통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하영이 마지막으로 찌개를 식탁 가운데 올려놓자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는 인터폰으로 달려가 수화기를 들었다.
[사장님 들어가십니다.]
민혁의 귀가를 알리는 기찬의 목소리였다.
거실의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정원을 힘차게 가로질러 오는 민혁의
모습이 보였다.
하영은 자신의 옷 매무새를 확인하고는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환한 웃음으로 그를 맞이했다.
[다녀오셨어요?]
민혁은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와 그를 맞는 어린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오늘 심심했지?]
그가 건네는 가방을 받아들며 하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하나도 안 심심했어요...이것저것 집안일 하다 보니까
시간도 금방 흘러가던걸요.....오후 내내 민혁씨 저녁에는 어떤
반찬을 해줄까..이건 좋아할까? 이건 싫어할까? 생각하는것도
잼 있던걸요....내일은 정원좀 손 볼려구요...아름다운 정원이
너무 보기흉하게 변한것 같아....]
어린아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부모에게 재미나게 조잘거리는 것처럼
민혁에게 쉴세없이 재잘거리는 하영을 민혁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자신의 배쪽에 깍지를 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으로 보듬어
주며 하영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찌개 방금 올려놨거든요...식기전에 빨리 씻고 식사하세요.]
[잠시만...잠시만 이렇게 있자.]
민혁은 하영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는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하영의 손을 더듬다가 그에 손바닥에 닿는 천의 감촉에
놀라 그의 손을 떼었다.
그는 거칠게 하영의 어깨를 잡고는 그를 향해 뒤돌아 세웠다.
[뭐지?]
그가 붕대가 감긴 손을 그의 눈앞에 들어보았다.
붕대 감긴 손을 노려보던 민혁의 눈이 심상치 않게 변해갔다.
[말해봐...왜 붕대를 감고 있어....]
#41
자신을 바라보는 민혁의 시선에 하영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그냥 커피잔을 떨어뜨려서 치우다가 베였어요.]
더듬거리는 하영의 말투가 맘에 안든다는듯 그의 입가가 비틀려졌다.
[누굴 속이려고 해? 치우다가 손을 베여? 그냥 줍다가 베인 정도로는
이렇게 꼬매기 까지는 하지 않아..무슨 일이야?]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 하영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겉으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척 하며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었다.
[다친 사람이 민혁씨예요? 정말이예요..그렇지 않아도 상처때문에
욱신거려서 죽겠는데....이봐요. 이손으로도 민혁씨 저녁해주려고
저녁내내 낑낑 거렸다구요....]
민혁은 식탁위에 예쁜 접시위에 맛깔스럽게 담긴 반찬들을 훏어보았다.
[그 손으로 저녁은 무슨 저녁이야...정말 대책없는 아가씨군.]
민혁이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 거실의 소파에 억지로 앉히고는 그옆에
자신도 자리를 잡았다.
[어디 봐.]
민혁은 그녀의 손에 감긴 흰 붕대를 천천히 풀어갔다.
붕대가 다 풀리자 퉁퉁 부어오른 손바닥에 흉하게 보이는 꼬맨 상처가
나타났다.
민혁은 자신의 생살을 꼬맨것처럼 왠지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졌다.
[많이 아파?]
민혁이 살짝 상처를 건드리자 하영이 움찔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민혁은 하영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상처에 호호 바람을 불어대며 그녀의
고통이 잦아지길 기다렸다.
[이젠 괜찮아요...그만해요. 민혁씨.]
민혁은 풀어놓은 붕대를 집어들어 정성스럽게 그녀의 손에 다시 감아
주고는 엄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일 당장 도우미 보낼테니까 집안일 하지 말고 꼼짝도 하지마.]
[치이...하루종일 꼼짝도 안하고 있다간 뚱뚱보 아줌마 되라구요..]
[넌 살좀 쪄도 돼. 말랐잖아.]
[아니예요...내가 얼마나 튼튼하다구요..볼래요?]
하영이 소매를 걷어부치고는 자신의 가녀린 팔을 보여주었다.
[자 봐요!! 내가 은근히 통뼈라구요.]
[어이구..그러셔요....]
민혁은 그녀의 태도가 귀엽다는듯 그녀의 이마에 꿀밤을 때렸다.
[배고프다. 밥먹자....자 우리 새색시가 얼마나 음식을 맛있게 했는지
좀 볼까? 맛 없으면 엉덩이 때려줄꺼니까 각오하고 있어!!]
[불공평해요!!!다친 손으로 제대로 할 수 없었단 말이예요!!]
일어서는 민혁을 따라 하영이 투덜거리며 그를 따라갔다.
내심 무사히 자신의 상처를 넘어가주는 민혁이 다행스러워 하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의 저녁식사는 성공 반,실패 반이였다.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던 하영은 계란말이에 계란 껍질이 들어가는
불상사를 저지르고 말았다.
식사를 마치고 민혁은 자상하게 그녀 대신 설겆이를 해주었다.
극구 말리는 그녀를 뒤로 하고 민혁은 능숙하게 설겆이를 마치고 식기
건조기에 그릇까지 집어 넣어주는 세심함을 보여주었다.
[혼자 살때 늘 하던 일인걸 뭐...새삼스러워할거 없어.]
신기해 하는 그녀를 보며 민망스러운듯 민혁은 핀잔을 주었다.
식사를 하기전 그는 약속대로 계란껍질과 함께 먹게된 계란말이를 한
죄로 하영의 엉덩이를 때려주겠다며 도망다니는 하영을 잡기 위해 서로
2층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피하던 하영이 마침내 그의 품에 잡혀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즐거운듯 하영은 깔깔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둥거렸다.
[약속은 약속이니까...자 어서 엉덩이 내밀어.]
민혁의 말에 하영은 낼름 작은 혀를 내밀었다.
[내가 무슨 어린아이예요!!싫어요.]
강하게 거부하는 하영은 억지로 잡아 끌어다 민혁은 그녀를 침대에
엎드리게 했다.
[꺄악!!!]
하영이 비명을 질러대며 그를 피하려고 했지만 어김없이 그의 손바닥이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때려주었다.
엉덩이를 맞은 하영이 울상을 하며 침대에 발딱 일어서 앉았다.
[미안...아펐어?]
울먹거리는 하영의 표정을 보며 즐거워 하던 민혁의 표정이 미안함으로
변했다.
[이건...내 자존심 문제야....]
하영이 자신의 엉덩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민혁을 노려보았다.
하영이 화가 난 것이 아니라는걸 안 민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억울하면 내일부터 제대로 된 음식좀 내놔봐...계란껍질이나 먹이지
말고...알았어?]
[자꾸 그렇게 사람 성질 돋구면 국에다 확 독 타버릴꺼야.]
하영이 독을 내뿜으며 토라진듯 민혁으로 부터 등을 돌리고 앉았다.
[어.....우리 마누라 삐졌나 보네...]
민혁이 하영에게 다가와 슬쩍 그녀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러보았다.
[하지마요..나 화났어.]
[에이....화 풀어라...농담으로 한 소리인데 뭐...계란말이는 좀 그랬어
도...찌개는 괜찮았다니까...좀 짜기는 했지만...그건 물타먹으면
되는거니까....응? 화풀어...]
민혁이 하영의 옆구리를 간지럼 태우기 시작했다.
[큭....하지 마요..]
하영이 꿈틀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는 더욱 재미가 난듯 하영을 마구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하영이 마침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침대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그의
손길을 피하려고 애썼다.
하영의 몸위로 올라와 간지럽히던 민혁과 하영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는 하영을 내려다 보다 쪽 소리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너랑 있으면.....모든걸 잊게돼.....나 서민혁이란 이름조차 잊게
만드는것 같아......]
[나도 그래요.....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백지처럼.....]
하영의 손이 그의 강인한 턱을 쓰다듬었다.
민혁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오며 하영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을 기다렸다는듯이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민혁과 하영의 신혼방 앞에서 미령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서있었다.
방 너머로 들려오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미령의 끝을 알리는 전주곡
같이 소름끼치고 무서웠다.
[그래...마음껏 웃어라....곧 눈물쏟게 만들어 줄테니...]
얼마나 손을 꽉 쥐고 있었는지 그녀의 길다란 인조손톱이 부러져나갔다.
자신들의 방 밖에 반갑지 않은 손님이 서 있는것도 모른체 민혁과 하영은
진한 키스의 여운에 빠져있었다.
그의 키스가 진해지면서 빠르게 하영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나갔다.
[자..잠깐만요....]
하영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왜?]
[나...제대로 씻지도 못했어요.....손이 이래서....]
민혁은 잠시 그녀의 다친 손을 바라보며 생각하는듯 했다.
[이리와봐.]
민혁은 하영을 욕실로 데려갔다.
그는 하영이 입고 있던 블라우스와 치마를 벗겨주고는 타올 가운을
그녀의 알몸에 걸쳐주었다.
[민혁씨..]
[내가 씻겨 줄게....]
그는 서재에서 의자를 가져와 하영을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샤워기를 틀어 하영이 고개를 숙이게 한 다음 그녀의 긴 머리
카락에 물을 적셔갔다.
[샴푸 할테니까 눈 매우면 말해.]
하영은 온순한 양처럼 그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맏긴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민혁의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혹 그녀의 손에 물이라도 묻을까 조심스러워 하며 하영의 머리카락
을 정성스럽게 감겨주고 있었다.
그의 눈에 하얀 하영의 목덜미가 들어왔다.
[민혁씨.........]
[응?]
[있잖아요......만약에....]
[만약에?]
[아..아니예요.]
하영이 무슨 말을 하려다 관두자 머리를 감기던 그의 손길이 멈추었다.
[하영아.]
[네?]
[힘들어도...조금만 참아줘.두달만....]
그의 말을 듣는 하영은 자신의 고개를 숙이고 있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에 상처받은 자신의 표정을 들키기 싫었기 때문이였다.
두달이라는 시간이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처럼 그녀의 목을 죄어
오는것 같았다.
당신에게 난 두달짜리 신부밖에 되지 않는건가요...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없이 돌고 돌아도 결국엔 서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는 그들의 관계가 마음이 아파와 하영은 숨이 턱 막히는것 같았다.
그를 잡고 싶었다.
그를 붙잡아 그녀의 사랑안에 가두어 버리고 싶었다.
그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계약상에 없었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과
하영의 앞에 넘어올수 없는 선을 그어 놓음으로서 더 이상의 하영의
접근을 막아서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머리에서 샴푸기를 없애려 샤워기를 들이미는
민혁의 눈에 들썩이는 하영의 작은 어깨가 보였다.
울고있다.
그녀가 울고있다.
[하영아...너 우니?]
[아..아니요..눈에 비누거품이 들어갔나봐요.]
잠긴듯한 그녀의 목소리였다.
민혁은 잠자코 샤워기로 그녀의 머리를 헹군다음 수건으로 그녀의 삼단
같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없애주었다.
하영이 일어서려 하자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의 앞에 세웠다.
그녀의 두눈이 토끼처럼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하영아.]
[네....]
[너한테 부탁하나 하자.]
[네. 말씀하세요.]
[날 사랑하는 어리석은 짓 따윈 하지마.]
그의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심장을 갈가리 찢고 있었다.
[뭐라구요?]
[여기...]
민혁이 하영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심장이 있는쪽에 갖다대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너에게 놔눠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나때문에 아파하지도 말고, 나때문에 힘들어하지마...
난 너보다 나이도 많고 네가 원하는 것은 줄수가 없어.
헛된 바램으로 널 망치지 말란 말이야..]
하영의 손바닥 밑으로 활기차게 뛰고 있는 민혁의 심장 고동소리가
느껴졌다.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 늘 그리움에 목이 메이며 고통스러웠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마저 인내하며 그를 기다리고자 했던 그녀였다.
그를 사랑한다고...
그가 자신의 사랑을 알아줄때 까지 기다리겠노라고...말해야 할까.
하지만 그녀를 고통스럽게 바라보는 그의 존재는 현실이였다.
피하고만 싶은 현실.하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것이 당신에겐 큰 부담이 되는건가요?]
그녀의 목소리의 떨림이 민혁에게까지 느껴졌다.
[솔직히....모르겠어. 나도 네가 싫지만은 않아. 너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유쾌하고,편안하고.....눈에 안보이면 보고 싶고...그래.
하지만....]
[하지만..뭐요? 당신이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감정때문에...내가...
일을 그르칠까봐.....제우스를 잃게 될까봐...그게 두려운건가요?]
마침내 참아왔던 말들을 그의 앞에 내뱉고야 말았다.
하영의 말에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민혁은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
또 다른 사실을 확인하는 하영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지금은 내겐 제우스가 소중해.제우스만 생각하고 싶어.하영아...
우리 이러지 말자. 지금까지 우리 좋았잖아......괜히 서로의 마음에
상처내면서 불편해 지는 관계를 만들지 말자.]
그가 하영에게 다가서며 그녀를 껴안으려 했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영은 몸서리 치며
그를 거부하는듯 뒷걸음질 쳤다.
[손대지 말아요. 내몸에 손끝하나 대지 말아요.]
섬뜩하리만치 차가워진 그녀의 목소리에 그의 마음이 형언할수없을
정도록 복잡해졌다.
다정하게 미소짓던 그녀의 얼굴이,사랑스런 그녀의 눈빛이 일순간에
고통과 슬픔에 어둡게 변해있었다.
이것이 아니였다.
그녀에게 이럴려고 한것이 아니였다.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뭐라 설명할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갑갑해왔다.
그녀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널 잃고 싶지는 않아.]
[갖기 힘든것이 더 탐이 나기 마련이죠.]
[그런식으로 널 비하 하지마.]
거친 목소리로 민혁이 고함을 질렀다.
[날 그런식으로 만든건 바로 당신이예요.]
[하영아....]
그가 애원하듯 하영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외면했다.
[먼저 주무세요...정원에서 바람좀 쐬고 들어올게요.]
하영은 민혁을 남겨둔체 방안을 나가버렸다.
방에 덩그러니 남겨진 민혁은 침대에 털석 주저앉았다.
추락.
저 절망끝으로의 추락이 시작되고 있었다.
#42
민혁이 출근을 하고 나자 하영은 두통으로 인해 무겁게 느껴지는
머리를 감싸고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하늘색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전날밤 잠을 제대로
못 이룬 하영의 창백한 얼굴을 더욱 희게 만들었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마침 미령은 욕실에서 나오고 있는중이였다.
방금 샤워를 했는지 그녀의 칠흙같이 어두운 머리카락엔 물기가 묻어
있었다.
미령은 하영이 보기에도 나이에 비해 젊고 싱싱해 보였다.
서회장이 송미령이란 여자에게 집착 할만하다고 하영은 생각했다.
2층에서 내려오던 하영을 미처 못봤는지 유령처럼 거실에 서있던
하영을 발견한 미령을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머나!!이게 무슨짓이야!!쥐새끼마냥 그렇게 소리없이 다니다니...
누구 심장마비 걸려서 죽는꼴 보고 싶어서 그래!!!]
앙칼진 미령의 목소리가 바늘로 변해 두통때문에 머리속이 복잡한
하영을 더욱 콕콕 찔러대는것 같았다.
하영은 자신의 미간을 손으로 꼭 눌렀다.
[죄송해요...욕실에 계실줄은 몰랐어요.]
[앞으로는 조심해서 다녀...내가 심장이 얼마나 약한데...]
미령이 신경질적으로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았다.
[저....]
방으로 들어서려던 미령을 하영이 불러세웠다.
[오늘 정원좀 손 보려고 하는데..혹시 부르시던 정원사가 있는지 해서요]
[정원사? 됐어...손안본지 꽤 오랜데...새삼스레 무슨 정원손질이야.
괜한일이나 벌이고 다니지 말고, 가만히 집에나 있어.]
미령의 핀잔에 머쓱해진 하영은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하영을 노려보던 미령은 수건을 소파위에 던져 놓고는 하영이
들으라는듯 쾅 소리를 내며 자신의 방문을 닫아버렸다.
하영은 방으로 돌아와 화장대 의자위에 털석 주저 앉았다.
그들의 방에 걸린 결혼식 사진에서 민혁과 하영이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사진속의 민혁의 웃음이 가식적으로 느껴진 하영은 울컥하는 심정에
화장대 위에 있던 자신의 화장품 병을 집어 사진에 힘껏 집어 던졌다.
액자의 유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보기 흉하게 유리가 깨진 액자속의 사진을 보며 하영은 기여이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미령이 혹시라도 들을까 가슴속 깊이 억눌린 울음이였다.
그녀의 마음은 산산 조각난 유리조각의 파편으로 뜨거운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
민혁이 있는 사무실의 분위기는 험악 그 자체였다.
민혁의 방에서 나오는 사람들마다 그의 서슬퍼런 질책을 받으며 다 풀이
죽은체였다.
[김 비서...사장님 무슨 일 있으셔? 이거참 무서워서...]
이부장이 이마의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밖에서 대기 하고 있던
기찬에게 물었다.
[오늘...컨디션이 좋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암튼...사장님의 저 독화살을 받아낼 사람은 김비서 밖에 없을꺼야.]
이부장은 기찬의 어깨를 툭 건들여 주며 사장실을 나갔다.
민혁은 아침부터 저기압 상태였다.
민혁의 상태를 금방 파악한 기찬은 그가 하영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오랜 시간동안 그를 봐 왔지만 그는 화가 날때도 언제나 그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냉철함으로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있었다.
그런 민혁이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 하지 못하고 냉철함이 조각난
퍼즐처럼 분해된 적이 있었다.
한번은 하영의 형부인 동식이 하영을 볼모로 준 돈을 모두 도박으로
날렸을때,그리고 바로 오늘이였다.
그를 이렇게 까지 몰고 갈 이유는 딱 하나 뿐이였다.
강하영.
굳게 닫힌 민혁의 사장실 문 너머로 그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고함에 책상에 앉아있던 민혁의 여 비서 미스 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요..내가 들어가 볼게요.]
기찬은 불안해 하는 미스 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조심스럽게
사장실의 문고리를 돌렸다.
그가 들어서자 민혁이 집어 던졌는지 그의 재떨이가 바닥에 깨진체
뒹굴러 다니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사장님.]
기찬이 무릎을 꿇고 깨진 재떨이를 주워 들었다.
[기찬아...오늘 오후 스케쥴은 일체 잡지 말라고 윤 비서에게 말해.]
[예. 알겠습니다.]
기찬은 깨진 재떨이를 휴지통에 버렸다.
[사장님.]
인터폰이 울리며 윤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민혁의 고함에 움찔하는 윤비서의 모습이 열린 문으로 기찬의 눈에
들어왔다.
불쌍한 미스 윤.
기찬은 윤 비서를 측은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저...전화가 왔는데요.]
[아무 전화도 연결 시키지 말라고 했잖아.]
[저...그게 유 하라 씨라고 하는데요....그렇게 말씀드리면 사장님께서
아실거라고.......]
유 하라 라는 이름에 민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굳게 다문 입술 아래의 강인한 턱이 움찔 하며 떨렸다.
유 하라?
기찬의 눈빛이 변해갔다.
유 하라가 왠일이지...
그녀의 전화가 왠지 불안해 지는 기찬은 민혁을 바라보았다.
[연결해.]
[네 알겠습니다.]
뚜 하는 신호음과 함께 민혁이 책상위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기찬은 민혁이 통화 할 수 있도록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기찬은 문을 닫고는 문쪽으로 자신의 귀를 갖다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는 윤비서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듯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갔다.
[네. 서 민혁 입니다.]
민혁이 전화를 받자 섹시한 여자의 웃음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민혁씨? 전화 안 받을줄 알았는데....]
여전히 유혹적인 그녀의 목소리였다.
물길이 몸을 휘감듯 매끄럽고도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를 한때 즐겼던
민혁이였다.
그녀는 민혁과 사랑을 나눌때 마다 그 유혹적인 목소리로 쉴새없이
그의 귓가에 속삭이며 그를 더욱 흥분 시켜었다.
[유 하라. 오랜 만이군. 왠일이지?]
그의 한쪽 뺨이 실룩 거리며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런....오랜만에 통화하는데.....왠지 반기는 기색이 아닌걸?]
[용건이 뭐야?]
[이런...점점...우리가 용건이 있어야만 만나던 사이였나?]
담배를 피고 있는지 내쉬는 그녀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끝낼때는 서로 다시는 만날일이 없기를 바라는 전제하에 헤어
진것이 아니였나?]
[음...그건 그렇지...하지만 상황이 좀 바뀌였다면...이해해 줄라나?]
상황?
왠지 꿍꿍이가 있어보이는 하라의 목소리가 그의 심경을 건들였다.
[무슨 상황이라는 거지?]
[전화론 이야기 못해. 만나는게 어때?]
민혁은 잠시 이 여자를 만나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녀를 다시 만날 이유는 없었다.
그런 그의 망설임을 아는지 하라는 그에게 미끼를 넌지시 던졌다.
[당신 아내...강 하영....참으로 예쁘던데? 그런데 당신 취향은 아니야.]
[어디야.]
빙고.
하라는 강 하영이란 이름에 대뜸 미끼를 무는 민혁을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사바나.오늘 저녁 7시.]
[알았어.]
[그럼..이따가 봐...허니.]
전화를 끊는 민혁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전화가 끊겼다는 신호음이 들릴때까지 그는 수화기를 핏줄이 드러나도록
꽉 움켜쥔 그 자세로 앉아있었다.
[무슨 일이래요?]
밖에 있던 윤비서가 방안의 이야기를 엿듣는 기찬에게 소근거렸다.
[내가 엿들은건...비밀로 해줘요.]
기찬이 표정이 어두워지며 윤 비서에게 부탁했다.
유 하라가 사장님을 만나려 한다.
무슨 일이지....
문이 벌컥 열리며 민혁이 나오고 있었다.
바삐 사장실을 나가는 민혁을 기찬이 재빠르게 따라붙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던 민혁이 기찬을 뒤돌아 보았다.
[차는 내가 몰고 갈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민혁만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기찬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자신의 바지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바쁘게 버튼을 눌렀다.
[나야...부탁하나만 하자. 지금 사장님께서 내려가셨어....내가
따라 갈 수 없으니....네가 가야 겠다.그래...부탁좀 하자.]
전화를 끊은 기찬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
사바나에 약속 시간보다 먼저 도착한 민혁은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구석진 자리를 택했다.
결혼한 이상 쓸데없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일이 있어서는
안되였기 때문이였다.
타오르는 갈증으로 민혁은 자신의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올려 물을
벌컥 들이켰다.
유리잔에 자동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서는 하라의 모습이 비쳐졌다.
그는 물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유 하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민혁은 찾는듯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유 하라.
그녀는 그와 헤어질때 보다 더욱 매력적인 모습으로 변해 있는듯 했다.
글래머한 그녀의 풍만한 몸매는 약간 살이 빠진듯 했으나 여전히 육감
적인 몸매를 몸에 들러붙는 붉은 원피스가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었다
깊게 파인 옷 앞섶으로 보기좋게 선탠한 갈색의 젖가슴이 드러나 있었고
짧은 치마선 아래로는 늘씬한 그녀의 다리가 돋보였다.
그녀는 늘 사람들의 시선을 몰고 다녔다.
그녀가 들어서자 까페 안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한때 그녀를 자신의 옆에 두고 다니며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은근히 즐기기도 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가 미치도록 탐닉했던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는 이제 그의 눈에
는 천박한 몸뚱아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청순하면서도 우아한 하영과는 질적으로 다른 여자였다.
구석진 자리에 있는 민혁을 발견한 하라가 웃음을 지으며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만이야...민혁씨.]
하라가 그의 앞에 서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다듬어진 손톱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그녀가 내민 손을 무시하자 하라는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민혁이
앉아있는 길다란 의자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민혁은 인상을 썼다.
[맞은편에 앉아.]
[싫어...난 여기가 좋은걸...]
하라가 은근슬쩍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앞으로가.]
민혁이 이사이로 말을 내뱉었다.
그의 싸늘한 반응을 느낀 하라가 입을 삐죽거리며 마지못해 그의 옆에서
일어나 민혁의 앞자리로 옮겨갔다.
[만나자고 한 용건이 뭐야?]
[민혁씨...나 차도 안시켰어...]
하라가 손을 흔들자 웨이터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키스 오브 파이어 부탁해요.]
하라가 칵테일을 주문하며 자신의 핸드백에서 담배케이스를 꺼냈다.
민혁은 하라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빨리 용건을 마치고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유 하라.
그녀는 민혁의 어두웠던 그림자속에 존재했던 여자다.
그대로 묻혔어야 할 그 그림자가 다시 나타나려 하는 순간이였다.
#43
하라가 내뿜는 담배연기가 그의 후각을 간지럽혔다.
하라는 끈쩍거리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빨간 입술을
달싹이며 연기를 내뿜었다.
그녀가 내뿜는 담배연기가 불쾌한듯 민혁이 뒤로 물러났다.
[민혁씨가 나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거 알아....솔직히 우리가 헤어진거
서로가 싫어져서가 아니잖아....당신만 결혼 안했어도...우린....]
[그말 하려고 만나자고 한거야?]
민혁의 아내가 죽은 후 괴로움에 못 이겨 민혁은 한동안 골드머신이란
상류층 사람들만 모이는 사교 클럽에서 술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거기서 만난 여자가 바로 유 하라였다.
그녀는 골드머신에서도 알아주는 퀸카로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침을 흘리고 있었지만 도도한 그녀의 성품때문에 아무 남자나 쉽게
접근 할 수가 없는 그런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민혁에게 접근해 왔다.
독한 데낄라로 은근히 취기가 올라있던 민혁은 그의 옆에서 유혹적인
웃음을 짓는 하라를 보고는 거칠게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겨 열정적인
키스를 남겼다.
아니 절망에 허우적 거리던 민혁의 마지막 몸부림이였다.
그날밤 민혁과 하라는 서울 도심의 최고급 스위트룸에서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었다.
민혁의 거친 행동에도 하라는 그녀만의 능숙한 테크닉으로 그를 받아들였
고, 그 후에도 그들의 만남은 이어져 왔다.
적당히 튕길줄 알고, 자존심도 세울줄 아는 하라의 성격과 육감적인
하라의 외모또한 민혁은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때론 친구처럼 때론 열정적인 연인처럼 사랑을 나누는 서로에게
편안한 상대였다.
그들의 관계는 민혁이 하영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 되었고 하영과의
결혼으로 민혁은 하라에게 먼저 이별을 선전포고 했다.
하라는 갑작스런 민혁의 선전포고에도 뒷 끝없이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그런 그녀가 새삼스레 갑자기 그를 찾았다는건 또한 그의 아내 하영을
알고 있다는건 왠지 민혁에게 있어서 목에 걸린 가시같은 일이였다.
[잊으려고 해봤어....아니...잊을수 있다고 생각했어...그런데...]
뜸을 들이는 하라를 보며 민혁은 마른침을 목구멍으로 넘겼따.
[민혁씨...다시 되찾고 싶어.]
[너. 미쳤니?]
[그래. 미쳤어. 당신 서 민혁 이란 남자한테 미쳤어.]
하라가 대뜸 테이블 위에 놓인 민혁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거 놔.]
민혁이 다른 사람이 볼까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에게서 손을 빼내려했다.
[많은거 바라지 않아. 그냥 예전처럼 지내자. 당신 결혼생활엔 지장
안주도록 할게...응? 민혁씨...당신은 내가 그립지 않았어?]
[난 결혼했고, 아내가 있어. 아내에 대한 순종을 잊을만큼 파렴치한
인간은 아니야.....너 나 잘못 봤어.]
그가 거칠게 하라에게 잡힌 손을 빼내었다.
생각보다 그의 반감이 심하자 하라는 허리를 곧추 펴고는 그를 노려봤다.
[날 안만나 주면....집에 있는 당신 아내한테 나와 당신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겠어...그래도 좋아? 당신 아내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별로 좋아하진 않을텐데.....]
그녀의 말에 민혁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 협박이야!!]
민혁의 고함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앉아...서민혁 답지 않게...온동네 다 소문 내고 싶어?]
민혁과는 달리 느긋한 표정으로 하라는 그를 바라보았다.
민혁은 지긋이 아래입술을 깨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도 남의 결혼 생활 파탄낼만큼 못된 여자는 아니야. 그냥 가끔
만나주고, 그러면 돼...당신 부인 모르게 하면 되잖아.]
[어째서 내가 너를 다시 만나줄거라고 생각하는거지?]
[당신이 당신 아내를 끔찍이 생각하니까.나때문에 그 아내를 배신할
사람이 아니라는걸 아니까....]
하라의 말을 들은 민혁은 왠지 벼랑끝으로 몰리는 기분이였다.
생각지도 않던 복병이 나타나 민혁과 하영의 계획에 차질을 주게 되었다.
무엇보다 하영으로 하여금 이 여자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의 치부를 그녀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만약...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조용히 지낼수 있어?]
[맹세해.]
하라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에 십자가를 그었다.
[당신 하고 나, 둘 뿐이야.요즘엔 애인 따로 아내 따로인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솔직히 당신 나 싫어하지 않잖아....안그래?
난 당신만 있으면 돼. 결혼해 달라. 이혼해 달라...구질구질하게
당신한테 안 매달릴게.]
이미 민혁이 자신에게 넘어오고 있음을 간파한 하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민혁의 곁으로 와 앉았다.
민혁의 코에 하라가 쓰는 향수 냄새가 확 들어왔다.
은은한 비누 냄새가 나는 하영과는 다른 독한 향수냄새에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는 자신의 허벅지에 손바닥을 지긋이 갖다대는 하라를 저지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불쾌감때문에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알았어...만약..너로 인해 내 가정에 피해를 입는다면 그땐 널
가만두지 않겠어...알았어?]
순간 빙하처럼 차가운 민혁의 시선과 마주한 하라는 움찔했지만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내가 연락할게.]
[싫어.내가 연락할거야.]
그녀의 말에 한마디 하려던 민혁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미 패는 유 하라 그녀가 쥐고 있었다.
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볼 일이 있어....연락해.핸드폰으로만 연락해.회사고 집이고
핸드폰 아닌 곳에는 절대로 연락하지마. 알았어?]
[응....알았어.]
하라는 그가 보라는 듯이 관능적으로 다리를 꼬아 앉았다.
그녀가 다리를 꼬는 순간 짧은 치마가 위로 올라가며 그녀의 허벅지가
드러났다.
그녀를 보는 그의 입술이 뒤틀렸다.
민혁이 먼저 사바나를 나가고 나자 하라는 다시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 들어 입에 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웨이브진 긴 머리를 어깨너머로 쓸어 넘겼다.
[좋아...생각보다 일이 쉽게 되는걸....]
하라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한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라는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며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최 성호.
가슴 아래 단추를 풀어제낀 현란한 색깔의 셔츠 아래로 그의 가슴털이
보기 흉하게 드러나 있었다.
성호는 하라의 맞은편에 앉아 하라의 가슴을 탐욕스런 눈빛으로 쳐다
보았다.
남자들의 그런 시선이 익숙한 그녀였지만 이 최성호란 남자의 시선만큼은
소름끼칠 정도로 싫은 그녀였다.
[이미 미끼는 던져 놨으니.....약속은 약속이니까....]
하라가 그에게 손을 내밀자 성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작은 백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그녀의 손바닥 위에 얹어 주었다.
하라는 봉투를 받아 들고는 봉투를 열어 그 안의 물건을 확인했다.
봉투안에는 천 만원짜리의 수표 다섯장이 들어있었다.
[일만 잘되면....그보다 더한 돈도 줄수 있어...]
[약속은 틀림없죠? 만약 이상한 낌새라도 있으면 다 엎어버릴수도
있어요.......]
하영이 봉투를 자신의 핸드백에 집어넣으며 성호를 바라보았다.
[물론이지......너나 잘하라구...서 민혁 그 자식이 눈치채지 못하게.]
처음 최성호란 남자가 하라를 찾아와 서 민혁을 다시 만나줄것을
부탁했었다.
그를 두달안에 이혼을 시키는 조건으로 성호가 하라에게 제시한 금액은
그녀가 몇년을 벌어도 만져보지 못할 엄청난 금액의 돈이였다.
민혁에게 나쁜 감정이 있지는 않았던 하라였지만, 돈 앞에서는 그녀
또한 돈에 울고 웃는 하나의 속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그를 이혼 시키려는 목적이 뭐죠?]
하라는 궁금해 왔던 이야기를 성호에게 물었다.
[그건 네가 알것 없어. 너는 내가 부탁한 일만 제대로 해주면 돼.
지금은 착수금으로 주는 돈이니까 부담갖지 말고 너 쓰고 싶은데로
쓰도록해. 나머지 금액은 확실히 보장해 줄테니까...]
테이블 밑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는 성호의 손길이 느껴졌다.
하라는 움찔하며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의 성미를 일부러 건들일 필요가
없다고 느낀 그녀는 일부러 모른척 해주었다.
[좋아요....난 내가 해야 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꼭 해내고야 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선물 고마워요. 잘 쓸게요.]
하라는 그의 손길을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백을 챙겼다.
[그럼. 나중에 뵈요.]
하라는 성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남긴체 테이블을 떠났다.
걸을때마다 흔들거리는 그녀의 엉덩이를 바라보며 성호는 군침을 삼켰다.
[고년....볼수록 감질맛 난다 말이야.....]
성호가 움흉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가 사라질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서 민혁.
하라같은 여자를 소유했던 서 민혁이라는 인간이 부러워지는 성호였다.
아무튼 하라는 일을 제대로 해주고 있었다.
성호는 제우스의 회장이 되는 상상을 하니 온몸이 짜릿해 지는게 기분이
좋은듯 콧노래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하영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민혁의 서재로 들어섰다.
한 벽을 다 차지하는 책꽂이에는 많은 책들이 꽂혀있었다.
서재의 주인공은 책 읽는것을 좋아하는지 갖가지 장르의 책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하영은 무엇을 읽을까 손가락으로 책 하나하나를 짚어가면 제목을 확인
했다.
이문열 작가의 책이 눈에 띄자 하영은 얼른 책꽂이에서 책을 꺼냈다.
맨 위칸에 있던 책을 꺼내자 무언가 덜컹 거리며 책꽃이 선반위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보기에도 먼지가 앉아 낡아보이는 앨범이 선반위에 놓여 있었다.
하영은 호기심에 의자를 갖다가 밟고 올라서서 앨범을 내렸다.
앨범 위에 앉은 먼지를 책상위에 티슈를 뽑아 닦아 낸다음 책상에 앉아
앨범의 표지를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첫 페이지를 열자 홀딱 벗은 귀여운 아기의 사진이 있었다.
첫 눈에 보아도 사진속의 아이는 민혁임을 그녀는 알아챘다.
[너무 귀여워...]
하영이 작은 웃음을 터트리며 사진속의 아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앨범의 페이지를 넘길때마다 아기때의 민혁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기가 자라는 모습을 찍은듯 페이지마다 조금은 성장 한듯한 모습의
아기였다.
중간 페이지에 이르자 사진속에 여덞살쯤 되어 보이는 민혁과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있었다.
하영은 인자한 눈매의 여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새어머니였다.
민혁은 새어머니를 많이 닮아 있는것 같았다.
하영은 아련히 저려오는 새어머니란 존재에 손가락으로 사진을 쓸어갔다.
자신도 어려을적 새어머니를 잃은터라 사진속의 민혁과 그의 새어머니의
모습이 참으로 정겨운게 왠지 부러움 같은 질투심이 일어났다.
사진에서 시선을 떼던 그녀의 눈에 또하나의 사진이 들어왔다.
그 사진은 [이 유진 화백 전시회]란 플랜카드 현수막이 달린 입구에서
그의 새어머니가 서서 미소짓고 있는 사진이였다.
순간 하영은 별장에서 봤던 화구들과 그림들을 기억해 냈다.
그럼...그의 새어머니가 .....
별장에서의 그림은 그의 새어머니가 남긴 작품들이였다.
문득 그녀는 왜 그의 새어머니가 돌아가셨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한번도 그의 새어머니에 대해 하영에게 언급한 적이 없었다.
무슨 말못할 이유라도 있을까 하영은 궁금해 졌다.
사진속의 그의 새어머니는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의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음을 알수 있는 모습이였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을 에로스로 형상화해 가며 그림을 그리는
그녀의 모습이 하영은 상상이 되었다.
왠지 따스한 기분이 하영의 슬픔으로 가득찬 마음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기분이였다.
[새어머니.....그가 새어머니를 바라보듯...저를 바라봐줄 날이 올 수
있을까요.....]
하영은 중얼거리며 앨범을 소중하게 가슴에 끌어 안았다.
[여기서 뭐하는 거지?]
서재 문이 열리며 민혁이 들어섰다.
하영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하다 들킨것처럼 놀라서 팔짝 뛰며 의자에서
일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민혁은 책상위에 놓여진 앨범을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읽을 책을 고르다가.....발견했어요....미안해요. 마음데로 봐서.]
민혁은 하영이 펼쳐 놓은 앨범에서 그의 새어머니의 사진을 발견했다.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며 사진을 쓰다듬었다.
그의 모습을 보던 하영이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새어머니...맞죠?]
[응.]
그의 잠긴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새어머니란 단어만 대해도 목이 메여오는 그였다.
[별장에서의 그림....새어머니가 그리신건가요?]
[응....새어머니는 별장에서 그림을 그리시는걸 무척이나 좋아하셨지.]
[언제....돌아가신거예요...]
하영이 그의 곁에 서서 함께 사진을 내려다 보았다.
민혁은 넥타이를 풀어 제끼며 의자에 앉아 추억을 회상하듯 앨범을
넘기며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대학교때.....뇌종양으로 돌아가셨어....당신이 병이 있는지도 모르시고
손쓸틈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돌아가셨지.....]
하영은 그를 위로 하듯 그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전 어릴때 새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새어머니 얼굴도 몰라요....언니는
그래도 어렴풋이 새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지만...저는 그렇지
못해요.....]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그의 눈가에 촉촉히 물기가 맺혀 있었다.
[내 새어머니는 평생 아버지 때문에 눈물과 한숨으로 사셨지....
아버지는 새어머니가 돌아가시던 순간까지 당신이 새어머니에게 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셨어....그래서 난 아버지를 증오해.
쓸쓸하게 새어머니를 한 평생 놔두신 아버지가 너무 미웠어.]
하루종일 그에 대한 서운함과 미움으로 한숨을 쉬며 보냈던 하영이였지만
지금 이순간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그가 측은해져 하영은
저도 모르게 그를 뒤에서 살짝 껴안아 주었다.
자신의 가슴에 안긴 그의 넓다란 등을 통해 그의 슬픔이 절실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나쁜 기억이든 행복한 기억이든...당신은 마음속에 담아둘 추억거리라도
있잖아요...그 기억으로 새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를 생각할수 있잖아요
하지만 나는 새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어요.
새어머니가 어떻게 생기셨을까 사진을 아무리 봐도 마음속으로 그려지질
않아요......사랑하는 사람에게 추억할 기억이 없다는거....얼마나
가슴아픈 일인지....민혁씨도 그렇게 생각해요...그러면 조금은 견뎌
낼수 있는 힘이 될수 있을거예요.]
민혁이 그의 가슴앞에 모아진 그녀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었다.
[넌...언제나 나보다 많은 것을 나에게 주는구나....]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나도 당신에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되고 싶어요.
#44
뇌혈관에 남았있던 마지막 응고되었던 혈액 덩어리를 제거하는 세번째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로 옮겨진 우진의 옆에서 하영은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던 눈물을 기여이 또 흘리고야 말았다.
새어머니를 대신해 그녀에게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역할을 다 해주었던
아버지 마저 잃을까봐 심한 가슴앓이를 해왔던 그녀였다.
장시간의 수술로 우진의 얼굴은 형편없이 초췌했다.
마취가 풀리자 우진이 고통에 신음하며 힘겹게 산소호흡기를 단체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잘 하셨어요...이제 수술은 더 안하셔도 된데요....]
하영이 그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 갖다대며 아직 희미한 의식으로 그녀의
말을 잘 들을리 없는 우진에게 속삭였다.
우진은 실눈을 뜨며 누군가를 찾는듯 두리번 거렸다.
[민혁씨는 급한 일이 생겨서 못 왔어요...이따가 온다고 했어요.]
결혼을 한 후 우진은 유난히 민혁을 아들처럼 아껴왔다.
민혁이 오지 못했다는 딸의 말을 들은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못내 아쉬운 모양인지 실망감이 얼굴에 서렸다.
[이제 물리치료도 받으시고 퇴원해서 집에 갈수도 있어요.]
집이라는 말에 우진의 주름진 눈가가 살짝 펴지며 그가 미소짓는것이
보였다.
약기운에 취해서 잠이든 우진을 한참이나 말없이 내려다 본 뒤 하영은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병실을 나섰다.
때마침 식사를 하러 갔던 진영과 동식이 복도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지금 가려구?]
[응...]
하영을 바라보는 진영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래, 처제...어서가봐.]
동식이 나서며 어서가보라는듯 하영의 등을 떠밀었다.
민혁과의 결혼후 동식은 몰라보게 하영에게 유독 친절하게 대했다.
하영은 동식의 달라진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은체 모른체 했다.
민혁과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동식에게 헛된 욕심을 채워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부탁좀 드릴게요....]
[그래...잘가...]
동식의 가식적인 웃음에 몸서리를 치며 하영은 병원을 나섰다.
택시를 타기 위해 승강장에 서있던 하영은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듯한
느낌에 고개를 돌려 뒤돌아 보았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만 보일뿐이였다.
하영은 자신이 요즘 예민하게 변했다는걸 느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건너편에 주차되어 있는 검은 중형차안에
있는 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 남자는 하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천천히 운적석의 창문을 올렸다.
하영은 창문에 가려 점점 사라지는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이였다.
어디서 보았지?
하영은 그동안 자신이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해 내며 승용차 안의
남자와 비슷한 인물을 찾아내려 했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 택시가 서자 택시에 오른 하영의 기억속에 순간 빠르게
하나의 얼굴이 스쳐갔다.
하영의 두 눈이 커다래 지며 급히 몸을 일으켜 멀어지는 승용차를
뒷자석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았다.
분명...그 남자야.
하영은 생각하기 싫은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서회장과 그녀를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오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서회장이 죽던 그 호텔방에 함께 있던 그 남자였다.
순간 하영은 끔찍한 공포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속이 울렁거리며 식은땀이 흘렀다.
[손님...괜찮으십니까?]
백미러를 통해 하영을 지켜보던 택시기사가 걱정스런 투로 물었다.
[네...괜찮아요...]
하영은 갑자기 택시안이 너무도 갑갑하게 느껴지자 버튼을 눌러 창문을
끝까지 내렸다.
후덥지근한 바람이였지만 어느정도 그녀의 숨통을 트여주는것 같았다.
그 남자는 언제 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걸까.
아님 우연히 마주친걸까.
하영은 그가 분명 자신을 알아보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당황한듯 서둘러 창문을 닫았었다.
우연일수도 있다.
하영은 애써 속으로 자위하며 민혁에게 연락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가
이내 다시 핸드백 속으로 집어넣었다.
괜한 일 일수도 있는데 민혁에게 까지 알려 일을 크게 부풀리고 싶지
않았다.
***********
[재수없게 마주칠게 뭐람.]
성호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미령과 만나기로 한 곳으로 차를 몰아갔다.
그녀가 갑자기 자신이 있는 곳을 쳐다 볼지는 몰랐다.
[젠장....설마 나를 알아본건 아니겠지.]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고 서 민혁에게 이야기가 흘러들어간다면
약삭빠른 그 놈이 미령과 자신의 계획을 눈치 챌지도 몰랐다.
[잠시 스쳐간 얼굴인데...설마 기억하겠어.]
성호는 좀더 하영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미행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한강 둔치에 성호가 차를 세우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미령이
자신의 승용차에서 내려섰다.
성호가 차에서 내리자 미령의 짜증부터 쏟아졌다.
[왜 이제야 오는거야!!!]
[씨발...내가 놀다오는거야!!! 그 강하영이란 계집애 뒤꽁무니 따라
다니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는구만.]
[여태 그년 감시하다 온거야?]
미령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성호를 쳐다보았다.
[집구석에나 쳐박혀 있을것이지 어딜 그렇게 뻔질나게 돌아다니는 거야.
그년은....사람 진을 다 빼놓네.]
성호가 애꿏은 돌멩이를 발로 차서 한강에 빠뜨렸다.
투덜거리는 성호를 달래줘야 겠다고 생각한 미령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조금만 참어. 자기....멀지 않았어...]
그녀의 위로에 성호가 마지못해 미령을 쳐다보았다.
[배고파..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 오늘 수고했어. 맛있는거 먹자.]
미령은 자신의 차를 놔둔체 그의 차에 올랐다.
[그나저나 유 하라는 잘 하고 있는거야?]
미령이 묻자 성호가 차에 시동을 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마...그년도 돈에 환장했는지...몇장 먼저 쥐어주니까 고분고분
하게 말도 잘듣고 생각외로 스스로 잘 움직여 주고 있으니까.]
[나중에 딴 말 안나오게 몇장 더 쥐어줘.]
미령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뒤 한모금 빨아들이고는 성호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러나 저러나 자기 혹시 유 하라에게 군침 흘리는거 아냐?]
몇번 유 하라의 매력적인 외모를 잘 아는 미령이기에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미령이였다.
[무..무슨 소리야...난 자기 밖에 없다구.]
성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내심 속으로 뜨끔했다.
질투심이 유별난 미령이기에 그녀의 심기를 건들여 봤자 좋을것이
없었다.
[만약...그년한테 손 하나 까딱 했다간...죽여버릴꺼야.]
미령의 입에서 거침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에이씨.날 못 믿을거면 차에서 내려!!]
성호의 배짱에 미령이 배실배실 웃었다.
[성질하고는...알았어. 내가 미안해.운전이나 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었다.
미령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민혁과 하영 사이에 선을 그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내민 미끼를 이미 서 민혁은 물어버렸다.
이젠 낚시줄을 거두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녀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
미령의 외출로 간단하게 홀로 대충 저녁을 먹은 하영은 힘없이 2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풀썩 누워버렸다.
그 남자를 만난 이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얼마정도 침대에 누워있자니 방문이 열리며 민혁이 들어섰다.
[어디 아퍼?]
그가 들어온줄도 모르고 누워있는 하영을 보며 그가 걱정스런 어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민혁의 소리에 하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들어온지 몰랐어요. 언제 왔어요?]
[벨을 눌러도 모르길래 열쇠로 열고 들어왔지. 아무도 없어?]
[새어머니는 외출하시고 아직이세요.]
[아주 제멋대로군.]
민혁이 양복을 벗자 하영이 그의 양복을 받아들었다.
[식사는요?]
[했어. 오늘 병원에 못갔어. 미안해.]
[괜찮아요...]
[내일 점심시간에 시간이 좀 나는데 그때 다녀올게.]
[그러세요...목욕물 받아 드릴까요?]
[응.]
어느 순간 부터인가 그들 사이에는 상투적인 대화만 오갈뿐 예전에
있었던 정다움이라고는 찾아볼수 없었다.
하영은 그이 옷을 옷장에 걸어 놓고는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틀고 장미향이 나는 목욕세제를 욕조에 풀어넣었다.
민혁이 욕실로 들어가자 하영은 세탁을 위해 그가 벗어놓은 와이셔츠를
챙겨들었다.
그녀가 세탁실을 가기 위해 방을 나서려던 찰나 화장대 위에 놓인
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미 샤워를 하고 있는듯 물소리가 욕실에서 들리자 하영은 대신
그의 전화를 받아줄까 망설였다.
끊길 기미도 보이지 않은체 계속 벨이 울려대자 하영은 화장대로 다가가
그의 휴대폰을 들었다.
휴대폰 액정에 유 하라 라는 이름과 함께 전화번호가 뜨고 있었다.
유 하라?
하영은 낯선 여자의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영은 망설이다 플립을 열고 전화를 받았다.
[네...서민혁 사장님 핸드폰입니다.]
[........]
[여보세요?]
[서민혁씨 계신가요?]
허스키한 여자의 목소리에 순간 하영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금 샤워중이신데요....급한일이신가요? 말씀 전해드릴게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서 민혁씨...와이프 되시는가요?]
뭐라 대답해야 하는거지?
순간 하영은 당황스런 마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네.]
[말씀 들었어요. 전 유 하라 라고 합니다. 서민혁씨...친구죠.]
친구?
하영은 입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그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제가 나중에 다시 전화하죠.]
전화가 끊기자 하영은 한동안 멍한히 핸드폰을 들고 그대로 서 있었다.
아직도 하영의 귓가에 속삭이듯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가 쟁쟁했다.
마치 하영에게 도전하는듯이 또박또박 친구라고 이야기하던 그녀의
말에 순간 하영의 가슴에 질투심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갑자기 욕실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끊기자 하영은 급히 그의 휴대폰에
저장된 통화내역중 유 하라 라는 이름을 삭제해 버렸다.
찰칵하는 문여는 소리가 들리자 하영은 허겁지겁 그의 휴대폰을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버..벌써 샤워 다했어요?]
하영이 뒤돌아보지 않고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거울속에 하반신에 수건만을 두른 민혁의 모습이 비춰졌다.
[중요한 전화가 오기로 했는데 전화기를 두고 들어왔어.거기 휴대폰좀
건네줄래?]
하영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들어 민혁에게 건네주었다.
그와 얼굴을 차마 마주 대할수 없었던 하영은 고개를 숙였다.
[전화 온 것 없었어?]
[아..아뇨..안 왔었는데요.샤워하세요.전 세탁실에좀 다녀올게요.]
그의 시선이 그의 와이셔츠를 찢어버릴듯 꽉 움켜쥐고 있는 하영의
손으로 옮겨갔다.
[그래.]
민혁은 휴대폰을 들고 욕실로 들어가버렸다.
그가 문을 닫자 하영에게서 큰 숨이 터져나왔다.
민혁은 욕실로 들어오자 당황하던 하영을 생각하며 버튼을 눌러 통화
내역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통화내역이 없다는 메세지만 휴대폰 액정에 보여졌다.
[젠장.]
다행히 하라에게 온 전화는 없었다.
만약 하라에게 전화라도 걸려왔다면 하영이 볼 수도 있었다.
민혁은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내던지듯 휴대폰을 물기가 닿지 않는
벽에 걸린 선반위에 올려놓았다.
지하에 있는 세탁실로 내려가는 하영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뭐지. 이 알수 없는 두려움은.
그녀의 머리속은 온통 유 하라 라는 이름이 꽉 차 있었다.
그녀와 만나고 있는걸까.
친구 사이라는데...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한 걸까.
그녀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와 만나고 있는 걸까.
이밤에 전화를 걸 정도면 무지 친한 사이겠지.
끝도 없는 물음들이 꼬리를 물고 계속 빙빙 돌아갔다.
하영은 세탁기 앞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정말이지 모든것이 엉킨 실타래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45
유 하라....
전화기로 흘러나오던 그 여자의 목소리가 하영은 쉽게 잊혀지지가 않았다
사랑의 최대의 적은 불신이라고 했던가....
차라리 그에게 물어볼까.
유 하라가 누구냐고.
그런 확인이 무슨 필요가 있어.
내가 그를 사랑한다 이유만으로 그를 제약하려 한다면 그런 사랑이
무슨 필요가 있어.
언젠가 책에서 읽은 말이 생각났다.
믿음이 결여된 사랑은 덧없이 사라진다던.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꼬리를 물며 민혁에 대해 이어지는 불신의 흔적
들이 하영을 마음을 언짢게 했다.
심란한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하영은 물걸래로 민혁의 서재에 있는
책상을 훔치기 시작했다.
책상을 치우던 그녀의 눈에 문득 작은 탁자용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날짜에 시선을 집중했다.
누구지?
이 서재를 이용하는 사람은 그녀와 민혁 둘 뿐이였다.
미령은 한번도 이 서재에 들어오는 적이 없었다.
자신이 아니라면 민혁이 달력에 표시를 해 놨을텐데.
하영은 민혁이 표시한 그 날이 무슨 날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그의 생일도 미령의 생일도 아니였다.
하영은 자신이 입고 있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기찬씨?저 강 하영이예요.]
[네. 작은 사모님.]
[옆에 사장님 계세요?]
[아니오.전 밖에 나와 있습니다.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갑작스런 하영의 전화에 기찬은 그녀가 무슨 일이 있나 놀란 눈치였다.
[아니요. 뭐좀 물어보려구요.]
[예. 말씀하세요.]
[민혁씨가 달력에 동그라미를 표시했는데...그날이 무슨 날인지
알고 싶어서요...기찬씨는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요.]
[몇일입니까?]
[내일이요.]
수화기 너머로 기찬이 잠시 생각하는듯 했다.
[아...내일이라면 23일 이죠?]
[네.]
[내일은....돌아가신 큰 사모님 기일입니다.]
[큰 사모님이라면.....민혁씨 새어머니?]
[네.매년 큰 사모님 기일때 마다 사모님 산소에 다녀오셨죠.집에서는
제사상을 차릴 만한 처지가 못되니까요...]
[그렇군요...고마워요 기찬씨. 그 사람한테는 저한테 전화온거 비밀로
해주실래요?]
[예. 그러죠.]
전화를 끊고 하영은 책상에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달력을 집어 들어 민혁이 표시해둔 날짜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서재에 있니?]
아래층에서 그녀를 부르는 미령의 목소리에 하영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고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여기 있어요.]
하영이 2층에서 내려오자 미령은 허리에 양손을 얹은채 내려오는
하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거!! 니가 빨았니?]
미령의 손에 원색을 잃은 듯한 너덜한 블라우스가 들려있었다.
[어머..블라우스가 왜 이렇게 됐죠?]
하영이 놀라며 미령의 손에 들린 블라우스를 받아들고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너 제정신이니? 이거 드라이 해야 하는거 몰라?]
미령이 다시 하영의 손에서 블라우슬 잡아채고는 그녀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어제..분명히 구분해서 따로 놨는데.....]
[따로 놓기는...세탁실 세탁기 안에서 발견한거야.]
[죄..죄송해요..제가 실수로 함께 물빨래랑 함께 집어 넣었나봐요.]
[이거 비싼거라서 나도 아까워서 잘 안 입는건데.....]
미령의 미간이 좁아지며 짜증을 하영에게 퍼부었다.
민혁의 전화를 받고 심란한 상태에서 자신이 실수한 것이라 생각하며
하영은 속으로 멍청한 실수를 저지른 자신을 꾸짖었다.
[도데체가 제대로 하는 일이 없어.]
미령이 힘껏 하영의 얼굴로 블라우스를 냅다 집어던졌다.
블라우스가 하영의 얼굴을 맞고 땅으로 떨어졌다.
[죄송해요.]
마음속으로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감이 느껴졌지만 하영은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참아내고 있었다.
[지하실이 엉망이더구나. 오늘 안으로 깨끗이 정리좀 해놔. ]
[예.]
미령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영을 한번 더 쏘아보고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영은 미령이 방으로 들어가자 땅에 떨어진 블라우슬 집어 들고는
커다란 한 숨을 내쉬었다.
도데체 자신이 이 집안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령이 내뱉는 독설들을 참아내기 힘들었지만 순전히 민혁을 생각하며
참아내기로 결심했다.
블라우스를 들고 지하실로 내려서자 어둑한 백열전구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어지럽게 지하실을 비추고 있었다.
[도데체 뭘 치우란 말인지...]
모든 물건들이 반듯하게 정리가 된 상태였다.
하영은 할 일없이 이 물건 저물건 살펴보며 일 하는 척이라도 해야 겠다
생각하며 박스들을 하나하나 내려가며 그 안의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박스를 열자 낡은 책 꾸러미들이 나오며 오랫동안 묵은 케케한 먼지들이
하영의 코 속을 간지럽혔다.
미령은 외출을 위해 현관을 나서다 지하실에서 들려오는 하영의 재채기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하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열린 문으로 박스를 정리하는 하영의 모습이 보였다.
돌아서려던 미령은 순간 무엇이 생각난듯 뒤돌아 하영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살금살금 아래층으로 내려가 지하실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지하실문은 특이하게 밖에서 잠글수 있는 장치가 달려있었다.
예전에 지하실과 정원밖으로 이어주는 환풍기를 타고 도둑이 침범했던
적이 있어서 특별히 잠금 장치를 밖으로 설치했던 것이다.
미령은 지하실 문을 닫고는 잠금 장치의 버튼을 힘껏 눌렀다.
고생좀 해보라지...
미령은 자신의 핸드밴 손잡이를 우아하게 자신의 팔에 건다음 1층으로
올라갔다.
하영은 닫히는 문소리에 고개를 돌려 문쪽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자신이 열어두었던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놀란 하영이 정리하던 박스안의 물건들을 밀쳐내고는 문쪽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고 문을 밀어 냈으나 문은 굳게 잠긴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난 하영이 문을 힘껏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새어머니!!!1층에 계세요? 새어머니!!]
목이 터져라 미령을 불렀지만 1층에서는 아무런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여기에 갇힌거야?
하영은 엄습해 오는 공포감에 미친듯이 문의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보았다
어느새 하영의 두 눈에서 눈물이 솟아 올랐다.
[새어머니!거기 누구 없어요? 사람이 갖혔어요!!!]
목이 터져라 불렀지만 돌아오는건 지하실을 울리는 자신의 애절한 목소리
뿐이였다.
이내 지친 하영은 털석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백열 전구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구석에서 무언가 튀어 나올것만
같은게 너무도 무서웠다.
[아..핸드폰.]
하영은 앞치마 주머니 속에 있는 핸드폰을 생각해 내고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플립을 열었다.
[아..안돼.]
핸드폰 액정에 표시되는 전파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하영은 옆으로 던지듯이
밀쳐놓았다.
하영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는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지하실을 울리고 있었다.
자신의 눈물이 지하실에 갖혔다는 두려움때문인지 민혁으로 인한 일 때문
인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무작정 파도처럼 밀려드는 슬픔으로 인해 쉴새없이 눈물이 흘렀다.
울다 지친 하영은 어느새 지하실의 어둠도 익숙해 지게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이 곳에서는 시간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듯
하였다.
하영은 집어 던져놓은 핸드폰을 들어 플립을 열어 민혁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무런 신호음도 잡히지 않았지만 하영은 받지않는 핸드폰에 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민혁씨.......나 하영이예요...
그거 알아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거?
당신은 사랑같은거 필요없다고 하지만....
난 당신의 사랑이 절실해요.
너무도 절실해서 마음이 찢어질듯이 아파요.
왜 당신은 자꾸만 날 모른척 하는거죠?
내가 2개월짜리 신부라서?
정말 당신은 제우스만 필요한거예요?
난 당신에게 줄 것이 너무도 많아요.
사람을 사랑하는 따스함이 무엇인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무엇인지,
그리고,당신이 사랑했던 당신을 꼭 닮은
아기도 당신에게 주고 싶어요.
난 이렇게 당신에게 줄 것이 많은데,
당신은 나에게 줄것이 하나도 없나요?
난 당신 마음 하나 만으로도 살 수 있을것 같은데...
사랑해요.]
핸드폰 플립을 닫으며 하영은 벽에 몸을 기대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등쪽이 욱신거리는게 바늘로 찌르는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영아....
에로스의 사랑을 얻은 프쉬케가 등에서 날개가 돋아 나비가 되기까지,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있었단다.
사랑은 쉽게 얻어지지도 쉽게 잃어 지지도 않는거야.
너만의 사랑을 찾으려면 프쉬케처럼 에로스를 향한 사랑만으로도
어려움을 이겨낼수 있어야 할거야.
사랑의 시련을 이겨내야만 화려한 날개를 가진 프쉬케가 될 수 있단다.
[새엄마......]
새어머니의 얼굴 조차 기억나지 않는 가물거리는 기억속에 유난히
또렷하게 그녀의 머리속에 남아있는 그녀의 새어머니의 목소리가 점점
깊은 잠에 빠져드는 하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
벌써 몇번째 수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하영의 핸드폰은 연결되지 않는다는 안내원의 음성만 무심히 흘러나올뿐
이였고, 집 또한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민혁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하라의 일로 신경이 곧두섰던 민혁은 아침에도 무뚝뚝하게 하영에게
제대로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출근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민혁이였다.
무슨 일인지 몇시간째 하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힐끔 자신의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젠장.]
그녀를 불러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할 참이였다.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것일까.
민혁은 마침 사무실로 들어오는 기찬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야 겠어.]
민혁은 의자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둔 양복 상의에 팔을 넣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그냥좀.피곤하군.]
민혁은 차마 기찬에게 하영이 연락이 안돼 그녀가 걱정스러워 일찍
퇴근한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했다.
기찬과 함께 청담동 집에 도착한 민혁은 거의 뛰다시피 하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에 들어서자 아무도 없는듯 불이 다 꺼진체 어스름 깔리는 어둠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민혁이 거실의 불을 키다 샹드리에가 빛나며 거실을 환히 비춰주었다.
그야말로 집안의 너무도 고요한게 민혁은 집안에 혼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정도였다.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늘 그가 퇴근을 하면 웃으면서 현관에서 맞아주던 하영의 모습도,
그의 옷을 받아주던 모습도,보이지 않았다.
벌써 그녀의 존재에 익숙해져 가는걸까.
몇년을 혼자 해온 일들에 어느새 하영이 속속들이 개입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혼자 집에 들어서는 것이 쓸쓸했으며, 혼자 옷을 벗는일이
허전했던가.
민혁은 피식 소리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기 위해 민혁은 1층으로 내려가 부엌에 있는
냉장고 문을 열다 냉장고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메모지들을 살펴보았다.
정갈한 글씨체는 하영의 것이였다.
그날 그날에 해 먹을 식단을 적어놓은듯 꽤 구체적인 요리법까지
적혀있었다.
며칠전 침대에 엎드려 요리책을 보며 끙끙 거리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나름대로 그녀는 민혁의 아내 노릇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메모지의 내용을 살펴보며 물컵을 잡기 위해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그의 손에 무언가가 닿아 떨어지며 깨지는듯한 소리를 냈다.
미처 치우지 못한 마시다 만듯한 쥬스가 담긴 유리컵이 그의 손에
닿아 바닥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깨진 쥬스잔을 보며 민혁은 몸을 숙여 깨진 조각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날카로운게 깨지는듯한 소리에 잠이 들었던 하영의 두 눈이 떠졌다.
누군가 부엌에 있다.
하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힘차게 문을 두드렸다.
[문좀 열어주세요!!!!]
하영은 혹시라도 부엌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까
더욱 큰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발과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거기 누구 있어요!!!]
유리잔을 치우던 민혁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유리조각을 줍다 말고 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거실로 나오자 그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누구있어요!!!]
하영.
그녀의 목소리였다.
[어디야!!]
민혁이 고함을 질렀다.
[민혁씨!!]
그녀의 소리가 지하실에서 들리는 것임을 안 민혁은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을 서둘러 내려갔다.
[민혁씨!!나 여기있어요.]
민혁은 밖으로 잠궈져 있는 지하실 문을 경악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서둘러 문고리를 돌렸다.
문을 열리자 새어들어오는 환한 빛에 하영이 뒤로 주춤 물러나며
한손으로 눈이 부신듯 눈을 가렸다.
[여기서 뭐하는거야!!!얼마나 갖혀 있었던 거야!!]
민혁이 소리치며 하영을 지하실에서 잡아 이끌었다.
비틀거리며 하영이 민혁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왔다.
[모르겠어요...지금 몇시죠? 아침에 지하실 청소한다고 들어왔는데.]
그제서야 빛이 익숙해지자 하영은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민혁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긴장이 감이 풀리며 온몸의 힘이 쫙 빠졌다.
[괜찮아?]
[글쎄요...모르겠어요...난....]
하영이 비틀거니는가 싶더니 힘없이 그의 품에 기절하며 쓰러졌다.
가까스로 쓰러지는 하영을 민혁이 안아 올렸다.
[하영아!!! 정신차려!!]
그가 하영을 잡아 흔들었지만 그녀의 몸은 더욱 축 늘어질뿐이였다.
#46
[정신 좀 들어?]
민혁이 침대에 앉아있는 하영에게 물잔을 건넸다.
솔직히 하루종일 지하실에 갖혀 있었던 그녀는 물 보다는 음식이
필요했다.
극도의 심한 긴장과 배고픔이 겹쳐 너무나도 허기가 졌다.
[어쩌다가 지하실에...세상에.]
민혁이 기가 찬 다는듯이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님이 지하실 정리좀 하라고 해서 지하실에 있었는데 갑자기
지하실 문이 닫히는 바람에....]
하영은 이제 다시는 지하실에 들어갈수 없을것 같았다.
[집에 새어머니 안계셨어?]
[계셨는데...모르겠어요....어떻게 된 일인지.]
하영이 물을 마시고 건넨 물잔을 그는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어디 다친데는 없어?]
걱정스런 그의 표정에 하영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조금 놀랬을 뿐이지.]
당신...
날 걱정해 주고 있는건가요?
[하루종일 연락이 안되서 무슨 일이 있나 해서 일찍 퇴근했어.
만약 나라도 늦었다면 어쩔 뻔 했어.]
[이렇게 당신이 구해줬잖아요. 그럼 됐어요.]
하영이 손을 내밀어 침대위에 올라와 있던 민혁의 손을 잡아주었다.
[좀 쉬어.]
[네.]
침대에 그녀가 눕자 민혁은 이불을 끌어 올려 하영의 목까지 덮어주었다.
쉽사리 잠이 오지는 않았지만 너무도 피곤했던 하영은 뒤척이며 잠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민혁은 하영을 놔두고 방을 나오며 이를 갈았다.
왠지 이상한 냄새가 나는게 하영이 지하실에 갖힌게 미령의 짓인것만
같았다.
창문하나 열리지 않은 거실에 바람이 불어 지하실 문이 닫힐 염려도
없을 뿐더러 육중한 두꺼운 두께의 지하실문이 바람이 분다 해도
쉽게 닫힐 문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순진한 하영은 자신이 지하실에 갖힌것이 우연이라 생각하겠지만
민혁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를 갈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때마침 미령이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술에 취한듯한 충혈된 미령의 눈이 그를 쳐다보았다.
[오...우리의 잘난 아드님이시구만...]
갈지자 걸음으로 미령이 민혁에게 다가왔다.
[많이 취하셨군요.]
냉소적인 말투로 민혁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미령을 피했다.
[취해? 그래 많이 좀 먹었지. 어쩌겠어....너무 외로운걸...
남편잃은 미망인이 되기에는 내가 너무 젊다고 생각안해?]
미령은 자신의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새어머니께 이곳에 머물러 달라는 말씀 안드렸습니다.
언제든 떠나고 싶으실때 떠나시면 되요]
[꼭 내가 이집에서 나가줬으면 하는 말투네?]
미령이 입을 삐죽거리며 소파에 털석 앉았다.
[그래, 넌 내가 처음 이집에 들어올때부터 내가 이집에 발을 딛는것
조차 혐오스럽다는듯이 날 쳐다 봤어지.....서민혁.
새어머니라고? 웃기지마.....내가 죽이고 싶도록 밉겠지? 날 이집에서
쫓아내고 싶겠지? 내가 왜 나가? 이집에서 왜 나가? 난 엄연히
서재필씨 아내라고........]
[오늘 하영이 지하실에 갖힌거....새어머니 짓입니까?]
[뭐?]
미령이 소파에서 일어나 민혁을 뒤돌아 보았다.
그의 눈에 서린 섬뜩한 기운에 미령은 술이 확 깨는것만 같았다.
[무슨소리야?]
미령이 시치미를 떼며 민혁에게 물었다.
[하영이 다치기라도 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
[협박하는거야?]
미령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협박이 아니라 경고입니다.그나마 아버지와의 인연때문에 이렇게
대우를 해드리고 있지만.....이런식으로 하영을 통해 저를 건들여
보려고 하신다면 그땐 저도 똑같이 응수해 드릴겁니다.]
[기..기가막혀서....]
미령이 한마디 하려는듯 그에게 다가섰지만 민혁은 미령을 모른체 하며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서.민혁.]
미령은 죽일듯이 그의 등을 쏘아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지하실 사건으로 걱정했던 민혁의 생각과는 달리 하영은 생생한
모습으로 비뚤어진 그의 넥타이를 직접 고쳐 매주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무슨 일 있어요?]
하영이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아니. 별로.]
[그럼. 저녁에 좀 일찍 들어와요.]
[무슨 일있어?]
[무슨 일은요.....그냥 집에서 식사나 한끼 제대로 하자구요.
요즘 민혁씨 바빠서 집에서 거의 식사도 못했잖아요.
밖에서 먹는 음식 집에서 먹는것보단 못하잖아요.]
[알았어.]
민혁을 배웅하고 나서 하영은 자신의 지갑을 챙기고는 집을 나섰다.
자신의 새어머니 제사상을 늘 하영이 도맡아 했기 때문에 제사상 차릴
음식들을 장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그녀는 더욱 정성스럽고 깐깐하게 제수음식들을 골랐다.
어느새 가득찬 장바구니 때문에 팔이 아파왔지만 자신의 새어머니의
제사상 앞에 서 있을 민혁을 생각하며 마음이 흐뭇해졌다.
다행히 집으로 돌아오니 미령은 외출하고 집에 없었다.
요즘들어 미령이 외출이 잦아지는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오히려
집에서 부딪히는 일들이 적어지니까 하영은 생활이 편해졌다.
이것저것 장본것들을 식탁에 늘여놓고는 먼저 전을 부치기위해 재료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집안에서는 맛있는 음식 냄새들이 가득했다.
하영은 가스렌지의 불을 줄이고 거실에 있는 전화기로 달려갔다.
[기찬씨?]
[예. 작은 사모님.]
[오늘,사장님 저녁에 별 일 없으시죠?]
[예. 별다른 스케줄 없으십니다.]
[오늘 기찬씨가 책임지고 사장님 집으로 모셔와야 해요.
사실은 제가 어머님 제사상을 차릴거 거든요,]
[그러세요? 사장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군요.제가 책임지고
사장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부탁해요.]
***********
강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서씨 문중의 선산에 위치한 새어머니의 묘를
찾은 민혁은 그가 들고온 하얀 국화꽃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새어머니
묘앞에 내려놓았다.
어느새 새어머니의 묘에 잡풀들이 가득 올라와 있었다.
그는 잡풀들을 손으로 잡아 뜯었다.
[새어머니, 저 왔어요...그동안 저 보고 싶으셨죠? 저 결혼했습니다.
착하고 아름답고, 툭하면 눈물 쏟는 그 여자를 보면 새어머니가
생각나요.....새어머니가 사실을 아시면 저 많이 꾸짖을테시겠지만.
지금 저로서는 어쩔수가 없어요. 새어머니는 절 용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그녀가 절 사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전 그녀를 사랑한다고 감히 이야기는 못하겠어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제 자신의 감정조차 모르겠어요.
지금 제가 흔들리게 되면 제우스를 잃게 될지도 몰라요.
저 하나 생각하기에는 저를 믿고 살아가는 제우스에 수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을 버릴수가 없어요.
그 작은 여자가...잘 견뎌 내 줄수있을까요.]
그는 새어머니의 품에 안기듯 산소위로 두 팔을 벌려 엎드렸다.
풋풋한 풀 냄새가 그의 후각을 어지럽혔다.
[차라리...그녀가 죽을때 까지 용서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는 편히 더 제 맘이 편하겠어요.
그 바보같은 여자는 제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것을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려고 해요.]
오후시간이 다 되서야 민혁은 회사로 돌아올수 있었다.
그는 사무실에 딸린 자신의 자그만 개인용 룸에 있는 장식장에서
저녁에 하영과 함께 즐기기 위한 포도주 한병을 챙겨놓았다.
그의 친구가 외국에서 선물로 가져온 포도주였는데 그윽하고 깊은맛이
너무 마음에 들어 민혁이 아껴두기 위해 사무실 장식장에 따로 보관해
두었던 것이였다.
그는 포도주를 챙기고 책상 서럽을 열어 벨벳의 천으로 쌓인 보석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아름다운 빛을 내는 나비 모양의 브로치가 들어있었다.
그 브로치는 어렸을적 하영이 그에게 건넨 브로치였다.
그녀는 그 브로치를 그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할것이다.
특별히 보석가게에 맡겨 다시 새롭게 셋팅한 브로치는 금방이라도
날아오를것 같이 나비모양이 너무도 생생했다.
비록 하영이 원하는 것을 다 내 줄수는 없지만, 자신으로 인해 힘들어
하는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위로를 주고 싶었다.
그는 보석상자의 뚜껑을 닫고는 그의 양복 주머니 깊숙한 곳에
보석상자를 집어넣었다.
민혁이 막 사무실을 나서려던 찰나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아무생각없이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네 서민혁입니다.]
[나야.]
하라의 목소리에 민혁이 몸이 굳어갔다.
[그래.]
[저녁에 시간있어?]
[집에 가야해.]
[후후후....성실한 남편 노릇하려면 꽤나 힘들겠어...그런데 어쩌지...
내가 지금 자기가 너무도 보고 싶거든....]
나른한 하라의 목소리가 끈적거리며 수화기를 통해 넘어 왔다.
[오늘은 안돼.]
민혁은 딱 잘라 말하며 하라에게 더 이상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잠깐이면 돼.]
그의 거절에 오기가 난듯한 야무진 하라의 목소리였다.
[유 하라. 이런식으로 하면......]
[이런식? 그게 어떤식인데? 내가 마음만 먹으면 자기 집에 직접 전화
해서 당신의 사랑스런 부인과 직접 통화 할 수도 있다구...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거야?]
[유하라. 우리 관계에 그녀는 끼워두지마.....그녀는 순결한 여자야.]
[하..순결?]
기가 막히다는듯 하라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순결? 언제부터 서 민혁씨가 동정녀 마리아를 찾기 시작했지?
웃기지마.....솔직히 당신은 그 여자보단 나와 어울리는 남자지.
안그래? 난 지금 당장 당신을 만나야 겠어. 8시까지 사바나로 와.]
하라는 자신의 할 말 만 하고 전화를 딱 끊어버렸다.
민혁은 조용히 핸드폰의 플립을 닫았다.
하영에게 들고갈 포도주가 덩그러니 책상에 놓여있었다.
[제기랄.....]
그는 욕설을 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때마치 사장실을 들어서던 기찬은 급히 나서는 민혁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사장님. 어디 가십니까?]
[약속이 있어.]
[하지만......]
그를 잡으려던 기찬은 멈칫 했다.
비밀로 해달라던 하영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저..집에는 뭐라 할까요.]
기찬이 급히 민혁을 따라잡으며 물었다.
[내가 알아서 연락할게. 먼저 퇴근해.]
민혁은 엘이베이터에 올라 닫힘 버튼을 눌렀다.
기찬은 민혁이 요즘 알게 모르게 하라를 만나고 다니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도데체 그는 무엇때문에 그녀를 만나고 다니는 걸까.
기찬은 상냥하고 아름다운 하영을 놔두고 유 하라와 같은 여자를 다시
만나고 다니는 그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유 하라의 뒤를 캐고 다니지만은 아직까지 이렇다할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 그는 민혁에게 유 하라를 만나고 다니는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리지 못했다.
분명 그는 지금 유 하라를 만나러 가는 길일것이다.
기찬은 애타게 집에서 민혁을 기다리고 있을 하영을 생각하니 그녀가
측은해졌다.
#47
다행히 미령은 친구들과 모임이 있어 늦게 들어올거라며 전화를 걸어왔다
하지만 민혁은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연락없이 집에 오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기찬에게 전화를 걸어봐도 기찬역시 전화기를 꺼놓은 상태
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걸까?
하영은 정성스럽게 거실에 차려져 있는 제사상을 보며 조급한 마음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시계는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영은 어디 잘못된 곳이라도 없을까 다시 한번 제사상을 살펴보며
민혁이 빨리 집으로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시각 민혁또한 계속 시간을 확인하며 집에서 그를 기다릴 하영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 졌다.
계속 손목시계를 보는 민혁을 보는 하라는 그의 앞에 술잔을 갖다놓고는
가득 독한 위스키를 따라부었다.
[난 됐어.]
민혁이 사양하며 잔을 밀어내자 하라는 고집스럽게 다시 잔을 민혁앞에
갖다놓았다.
[마셔. 안절부절 하는 당신 꼴을 보니 부아가 치밀어서 못참겠어.]
하라는 자신의 앞에 놓인 데낄라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독한 데낄라가 목구멍을 태우는듯이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갔다.
하라는 유혹적으로 민혁의 손을 끌어당겨 그의 손목 안쪽에 소금을 뿌려
자신의 혀로 핣았다.
그녀의 뱀같은 혀가 감각적으로 민혁의 손목을 핣아갔다.
민혁은 그런 그녀의 유혹을 불쾌하게 느끼며 그녀에게 잡힌 자신의
손목을 빼내고는 자신의 바지에 그녀의 혀가 닿았던 부분을 거칠게
문질렀다.
[정말 이럴꺼야!!!]
하라가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이 취했어..그만 헤어지자.]
[뭐야 서민혁!!! 내가 당신 껍데기나 만나려고 이렇게 있는 줄 알아?]
하라가 손가락으로 민혁의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난 껍데기가 아닌 피가 흐르는 서 민혁을 원해.]
갑자기 하라가 그의 넥타이를 잡고는 그를 자신의 앞으로 확 끌어당기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민혁이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녀는 찰거머리 같이 들러붙으며
거칠게 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만두지 못해!!!]
민혁이 소리치며 하라를 거칠게 밀어냈다.
[싫어!! 당신은 내꺼야. 당신 나 좋아했잖아..안그래? ]
하라가 민혁에게 다가오며 거칠게 자신이 입고 있던 복숭아빛 니트를
벗어 던졌다.
그녀의 탐스러운 풍만한 가슴이 민혁앞에 드러났다.
하지만 한때 민혁이 집착했던 그녀의 아름다운 가슴도 민혁은 아무런
흥미를 일으키지 못했다.
하라는 덮치듯이 민혁에게 달려들어 그의 셔츠를 벗겨내려 했다.
[이러지마!!!]
[괜찮아..아무도 오지 말라고 일러뒀어.]
하라가 숨을 헐떡이며 억지로 벗겨낸 그의 셔츠를 양옆으로 벌리고는
그의 맨가슴에 입을 맞추었다.
[너 미쳤어!!]
민혁이 하라를 떼어 놓을때마다 집요하게 하라는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민혁은 불투명한 유리창 넘어로 혹시 자신들이 있는 룸 안으로 웨이터나
다른 사람이 들어올까 살폈다.
[유 하라!]
민혁이 소리치며 있는 힘껏 그녀를 밀쳐내자 하라는 힘없이 술잔이
늘어져 있는 커다란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너..오늘 최악이야.]
민혁이 자신의 셔츠 단추를 잠그며 몽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는
하라를 혐오스럽다는 쳐다보며 그녀를 남겨두고 룸을 나갔다.
헝클어진 모습으로 룸을 빠져나오는 민혁을 보며 웨이터들이 저들끼리
소근거렸다.
[서민혁!!!]
뒤쫓아 나온 하라가 그를 불렀지만 그는 들은체도 하지 않았다.
[뭘봐!!개새끼들.]
하라는 이미 나가버린 민혁을 보며 자신의 드러난 가슴을 흘끔 거리는
남자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급하게 자신의 차에 오른 민혁은 힘껏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쳤다.
그가 내리친 주먹때문에 경적이 크게 울리자 지나가던 행인들이
그의 차를 쳐다보았다.
언제까지 하라와의 만남을 지속할수는 없었다.
하영을 속여야만 한다는 죄책감 때문에 미칠것만 같았다.
그녀가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로 인해 많이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그녀였다.
하라와의 일로 또다시 그녀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는 정말로 하영에게
잔인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는 흐트러진 자신의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미 하영이 잠들었을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불이 꺼져 있을거라 생각햇는데 거실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거실에 차려진 제사상에 눈길이 멈추었다.
촛불에 불이 켜져있고 향이 타오르면서 향냄새가 거실을 가득 메웠다.
[민혁씨!!!왔군요.]
부엌에서 쟁반에 물그릇을 챙겨나오던 하영이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았다.
[뭐지?]
민혁이 신발을 마저 벗으며 거실로 들어섰다.
[왜 이제야 왔어요. 저혼자 해야 하나 걱정했는데...다행이네요.]
하영은 물그릇을 조심스럽게 제사상앞에 내려놓았다.
[하영아..이게 뭐냐고 물었어.]
[보면 몰라요? 제사상이잖아요. 설마 오늘이 어머님 기일인거
모르지는 않겠죠?]
하영이 짐짓 꾸짖는듯한 표정으로 민혁을 바라보았다.
[너....]
민혁이 놀란눈으로 하영을 바라보았다.
하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아 제사상앞으로 이끌었다.
[뭐해요?]
[하영아...]
그는 하영을 끌어당겨 품안에 안았다.
[민혁씨...]
[고마워..고맙다.항상 이렇게 받기만 해서 미안해.]
그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고마워했다.
[새어머니 기다리세요....]
그녀의 말에 민혁이 웃음을 지었다.
새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으로 집에서 하는 제사였지만 민혁은
실수없이 능숙하게 해 내고 있었다.
절을 하는 민혁의 뒤에서 하영은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 그가 하는
행동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왠지 그의 넓은 어깨가 오늘따라 측은해 보였다.
제사상을 모두 치우고 하영이 민혁이 있는 그들의 침실로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오자 민혁은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늘이 새어머니 제사일인건 어떻게 알았어?]
[당신이 달력에 표시해놓은 날짜를 봤어요. 그래서 기찬씨 한테
물어봐죠....]
[그 자식 괜한 일을 했군....]
[오늘 내가 괜한 일 한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민혁이 물끄러미 하영을 쳐다보았다.
[아니...고마워.]
[오늘 음식 준비하면서 당신의 기뻐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넌 왜 내게 주기만 하는거지? 난 너에게 아무것도 줄 수없는데 말이야.]
서글픈 그의 목소리였다.
하영은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당신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서두르지는 않기로 했어요.....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해볼수 있는데 까지는 해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무턱대고 날 밀어 내려고만 하려 하지말아요.부탁이예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민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항상 민혁이 자신의 바라볼때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처럼 그녀를 볼때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는 그녀를 갖고 싶어 하는 강한 열망이 담겨있었다.
그의 갈망과 뜨거운 굶주림은 그녀의 살갗을 태우는 것같았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민혁은 상처받은 짐승처럼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왜 그는 내 손길을 피하는 걸까...
그가 자신을 피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다친 이후로 그는 그녀에게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
어쩌다가 한 침대에서 그녀의 몸이 닿을때면 민혁은 소스라치며 그녀에게
서 멀어져 갔다.
하지만 더 이상은 참을수 없었다.
그의 강인한 입술을 느끼고 싶었고 그의 뜨거운 심장 고동소리를 느끼고
싶었다.
[민혁씨...]
애원하듯 하영이 속삭이자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마주보았다.
하영의 몸은 긴장되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하영은 대담하게 팔을 뻗어서 그의 뺨에 손을 갖다대었다.
그의 얼굴 근육이 긴장되면서 씰룩거렸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하영은 얼굴을 들어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의 하얀 목이 활처럼 휘어지자 민혁이 움직였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하영의 입술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의 벌어진 입술이 그녀의 뺨을 부볐고 그녀의 살갗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목덜미에서 따스하고 빠르게 뛰는 맥박을 느끼고는 그곳에 그의
입술을 멈추었다.
뜨거운 그녀의 피가 느껴지는듯 했다.
너무나도 무섭게 밀려드는 욕정으로 인해 민혁은 흡혈귀처럼 그녀의
목을 살짝 깨물고는 두팔로 이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민혁씨....]
그녀의 속삭임 만으로도 풋내기의 사춘기 소년처럼 포르노 잡지를 보고
도 금방 절정에 이르는 것처럼 그는 쾌감에 숨이 넘어갈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흰목,목덜미에서 뛰고 있는 맥박 ,흰 피부에 드러난
눈부시도록 시린 푸른 목덜미의 정맥.
탐하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녀를 만날때부터 그녀를 향한 그리움의 고통은
시작되었다.
그녀를 떠올릴수록 갈증과 외로움때문에 그는 괴로웠다.
그녀를 멀리하려 할 수록 더욱 고통에 빠져드는건 바로 그였다.
망설여 하는 그를 보며 먼저 그녀가 발돋움을 하며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대었다.
그녀의 입술이 닿자 그가 신음을 토하며 으스러지도록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를 만족 시키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를 온전히 자신의 남자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내것이야.
하영은 속으로 외치며 그의 가슴에 자신의 손바닥을 갖다대었다.
[안돼...]
그가 억지로 머리를 돌리며 그녀의 키스를 피했다.
[민혁씨...]
하라의 손이 닿았던 몸으로 하영을 안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그녀를 안는다는것은 마치 하영의 순결을 짓밟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통스런 하영의 눈빛과 마주한 민혁은 마음이 흔들렸다.
[샤워하자...같이 할래?]
그가 다정히 속삭이자 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이 내미는 손을 다정하게 마주잡은 하영은 그와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그의 앞에서 알몸을 내보이는건 처음이 아니였지만 왠지 밀려드는 부끄
러움으로 하영은 두 손으로 몸을 가리려 애썼다.
민혁은 낮게 웃으며 장미향이 가득한 거품이 이는 욕조안으로 그녀를
잡아 이끌었다.
그녀가 욕조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자신의
앞에 그녀를 앉혔다.
그리고는 뒤에서 민혁이 끌어안자 하영은 그의 가슴에 편안히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하영아.....]
[으음?]
기분좋은 하영이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기다려 줄수 있겠니?]
그의 말에 하영이 고개를 돌렸다.
[당장 너에게 이렇다할 대답은 해 줄수 없어. 하지만...네가 기다려
준다면....나도 노력해 볼게.]
그의 말이 무슨뜻인지 알아들은 하영의 눈에 금새 눈물이 차올랐다.
[이 울보야..또 우는거야?]
[당신이 날 감동 시켜서 그래요.그동안 당신이 내 속을 얼마나
썩였는지 알아요?]
하영이 훌쩍거리자 민혁은 손으로 그녀의 코를 잡았다.
[이 바보.....넌 바보야.....어쩔수 없이 너한테 끌려가는 나도 바보구]
#48
민혁은 초조한듯 책상위에 놓여진 탁자용 달력을 쳐다보았다.
이제 보름...보름만 참으면 제우스는 그의 손에 넘어오게 된다.
그리고 또하나...
민혁은 하영을 생각하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해결 된다면 하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시작은 어렵지만 그녀와 함께 해준다면 어려운 과정도 거뜬이 이겨
낼 수 있을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랜된 이불을 덮는 것처럼 그녀의 존재는 자신의 생활에 너무도 익숙
해져 있었다.
자신의 그림자속에서 하영은 묵묵히 그를 지켜주었다.
민혁은 문득 하영에게 주려던 선물이 생각이 났다.
급히 자신의 양복 안 주머니를 뒤져 보았지만 선물은 어디에서도
찾지를 못했다.
어디에 떨어뜨린건 아닐까 민혁은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순간 하라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혹시....
하라와 엎치락 뒤치락 했던 순간이 생각났다.
민혁은 책상위의 수화기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고는 자신의 핸드폰
플립을 열어 하라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왠일이야. 민혁씨가 먼저 전화를 다주고...]
설레이는듯한 하라의 목소리였다.
[물어볼게 있어...혹시 작은 보석상자 같은거...줍지 않았어?]
[보석상자? 글쎄...어디다 떨어뜨렸는데 그걸 나한테 물어?
중요한건가 보지?나 주려고 산거야?]
[아니야. 모르면 됐어.]
전화를 끊는 민혁은 왠지 기분이 불쾌해졌다.
하라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보석상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민혁이 룸살롱에서 미친듯이 뛰쳐나간 자리에 떨어져 있던 것이였다.
그가 선물을 마련해 줄 사람은 단 하나.
강 하영. 그의 아내뿐이였다.
하라는 나비 브로치를 자신의 가슴쪽에 조심히 달아보았다.
반짝이며 빛나는 광채가 탐스러울 만큼 아름다웠다.
이제 슬슬 카드를 내 보일때가 되었다.
굳이 민혁과 그의 아내 사이를 싫어하는건 아니였지만,평생 자신이
만져보지도 못할 돈이 떨어진다면 하라는 사람 죽이는 일만 아니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라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네 유 하라 예요.]
[나야.]
걸직한 최 성호의 목소리였다.
[마침 전화 잘 주셨어요...이제 슬슬 시작할까 하는데..어떠세요?]
[좋아. 나도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
수화기 너머로 낄낄 거리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송 미령과 함께 있나보다 하라는 생각했다.
어쩌다가 그런 천박한 여자가 제우스의 안주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라는 송 미령 같이 뒤에서 잔머리나 굴리는 여자는 질색이였다.
[좋아요.약속은 틀림없는거죠?]
[일만 제대로 된다면야....]
전화를 끊은 하라는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의 옷장으로 걸어갔다.
옷장 문을 열고 최대한 그녀의 매력을 드러낼 수 있는 옷을 골랐다.
강하영.
이젠 정면 승부야.
***********
하영은 퇴원을 한 우진을 데리고 민혁이 마련해준 아파트로 들어갔다.
민혁은 우진이 자주 움직이며 운동을 해야 한다는걸 알고는 거실이
널찍한 아파트를 골라주었다.
아파트로 들어선 진영과 동식은 호들갑을 떨며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다.
[맘에 들어?]
하영이 웃으며 진영에게 물었다.
[맘에 들다마다...그 좁은 집에서 이런 좋은 곳으로 왔는데...]
진영이 눈빛을 빛내며 자신들이 쓸 침실 안을 들여다 보았다.
하영은 휠체어에 앉은 자신의 아버지를 측은한 얼굴로 내려다 보았다.
[아빠..맘에 드세요?]
우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하영의 손을 잡아주었다.
[누워만 계시지 말고 자주 움직이셔야 해요..아셨죠?]
하영은 우진을 침실로 데려가 민혁이 마련해준 환자용 침대에 동식의
도움으로 우진을 눕혀주었다.
우진이 앞으로 살게 될 새로운 집에서 처음으로 잠이 들자 하영은 조용히
진영의 배웅을 받으며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하영은 택시를 타고는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 왠지 민혁이 미치도록
보고 싶다는 생각에 제우스 그룹으로 택시를 돌렸다.
제우스 건물 앞에 내려선 하영은 고개를 들어 웅장하고 위엄있는 자태로
우뚝 서있는 건물을 올려다 보았다.
너무 높다란 건물을 쳐다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일어났다.
잠시 비틀거리며 하영은 제자리에 서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요새 자주 빈혈 증상이 있는게 몸에 신열도 나고 해서 하영은 언제 한번
병원에 다녀와야 겠다 생각했다.
하영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 하는데 건물 안에서 한 여자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글래머한 몸매에 우아한 미모를 지닌 그 여자는 한번에 보아도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끌만한 대단한 미인이였다.
왠지 그녀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것이 순간 하영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회전문을 밀치고 하영은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혹시 강하영씨?]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하영이 뒤돌아 보자 그 여자가 우아한
걸음으로 하영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네..그런데..누구시죠?]
하영이 자신의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혹시 이 여자를
자신이 알고 있는게 아닐까 의심했다.
[서 민혁씨 부인 되시죠?]
그녀의 입에서 서 민혁이란 이름이 튀어나오자 예감했던 불안함이
실체로 드러나는것 같았다.
[네...누구신지....]
[반갑습니다. 유 하라예요..우리 한번 통화한적 있었죠?]
자신에게 내민 하라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유 하라.
이 여자가 유하라?
하영의 두 눈이 점점 커다랗게 떠졌다.
[저희가 언제 만났던가요? 저 인줄 어떻게 아셨죠?]
이 여자 멍청하지는 않군.
[결혼식장에서 봤어요.가까이서 보니 정말로 미인이시네요.]
하라의 능숙한 거짓말에 하영의 의심이 조금은 풀어지는듯 했다.
[예.그렇군요.]
[민혁씨 만나러 오셨나요? 저도 민혁씨 보러 왔는데 자리에 없네요.]
민혁을 만나러 왔다는 하라의 말에 하영의 한쪽뺨이 움찔했다.
[친한 친구사이 이시라구요....]
[우리 이러지 말고 차나 한잔 할까요? 민혁씨에 대해 말씀드릴 이야기도
있고....어떠세요?]
갑작스런 하라의 제안의 하영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라를 따라 들어선 곳은 제우스 그룹 건물의 지하에 있는 커피숍이였다.
[처음에 결혼 식장에서 하영씨 봤을때 깜짝 놀랐어요.]
하라가 쥬스잔에 있는 빨대로 길게 쥬스를 빨아들였다.
[왜요?]
[솔직히 하영씨는 민혁씨 타입이 전혀 아니거든요.아..둘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구요......]
하라는 일부러 하영의 신경에 거슬리는 말을 골라했다.
하라는 테이블 위에 팔짱을 끼며 가슴을 들이밀었다.
커피잔을 들던 하영의 눈에 반짝이는 무언가 들어왔다.
커피잔을 움켜쥐고 있는 하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부들부들 떨렸다.
하영의 얼굴 색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거.....하라씨 건가요?]
[아..이거요...참 예쁘죠?]
하라가 자신의 가슴에 달려있던 민혁의 나비 브로치를 뺐다.
[예..쁘네요. 잠시 봐도 될까요?]
[그러세요.]
하라가 흔쾌히 브로치를 하영에게 건넸다.
브로치를 손바닥에 놓고 하영은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닐꺼야...아닐꺼야...설마.....
현실로 비참함이 밀려오는것 같았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하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라를 쳐다보았다.
[이거...어디서 구하셨죠?]
[그거요? 민혁씨 한테서 선물 받은거예요.]
하영은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것만 같았다.
[미..민혁씨 한테요?]
[네 생일 선물로 받은건데....어머 하영씨 혹시 이것 때문에 기분
나쁜건 아니죠? 말씀 드렸지만 민혁씨하고 전 그냥 친구사이예요.]
변해가는 하영의 얼굴색을 보며 하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때마침 민혁에게서 나온 선물이 제 역활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것 같았다.
하영이 다시 건네는 브로치를 받아들어 하라는 하영의 앞에서 보란듯이
브로치를 가슴에 달았다.
[민혁씨 하고는 오래된 친구이신가요?]
[솔직히...한때는 서로 좋아하던 사이였죠...하지만 서로 성격이
안 맞는다는걸 알고는 친한 친구사이로 남기로 했죠. 남들은 남녀
사이에 무슨 친구냐고 하지만요...]
하영은 도무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하라의 목을 흔들며 민혁과 무슨 사이였는지 낱낱이 캐묻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간신히 메마른 침을 삼키며 하영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약속이 있는걸 깜빡했어요.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야
겠네요....]
[어머..제가 붙잡고 있었군요..죄송해요...담에 시간 나면 또 뵙죠.]
[예..그럼.]
하영이 의자에서 일어서다 비틀거렸다.
[괜찮으세요?]
하라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예..괜찮아요.]
하영은 하라의 뜨거운 시선을 뒤로 하고 커피숍을 나섰다.
하라는 창백한 얼굴로 커피숍을 나가는 하영을 보며 핸드백에서
담배케이스를 꺼내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에서 브로치를 잡아 뜯어 테이블 위에 내던졌다.
생각보다 이 브로치는 하영에게 큰 영향을 끼친듯 했다.
뭔가 사연이 있는 선물인가?
하라는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하영은 한동안 엘리베이터 앞에서 넋을 잃은체 멍한히 서있었다.
백지상태였던 머리속이 서서히 민혁에 대한 분노감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감히,그 브로치를 하라에게 넘기다니.
모멸감과 분노감으로 당장이라도 윗층으로 올라가 서 민혁이란 인간을
죽이고 싶었다.
그 브로치는 분명 하영이 어릴때 민혁에게 건네주었던 것과 똑같은
돌아가신 하영의 새어머니의 유품이 틀림없었다.
민혁이 가지고 있을거라 막연히 생각은 했었지만 막상 하라의 가슴에
달린 그 브로치를 보니 피가 거꾸로 솟는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자 하영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민혁의 사무실이 있는 20층 버튼을 꾹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순간에도 하영은 민혁과 마주 하게 되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수없이 연습했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20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지만 하영은 내릴
생각조차 하지 않은체 그 자리에 굳어버린 동상처럼 서 있었다.
[사모님?]
기찬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있는 하영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영이 고개를 들어 기찬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안색이.....]
기찬을 보자 순간 긴장이 풀리며 하영이 그대로 주저 앉았다.
[사모님!!!]
기찬이 안으로 달려들어와 하영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안에...사장님 계신가요?]
[예..계십니다....무슨 일으세요?]
기찬의 물음에 하영은 대답하지 않은체 사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서자 여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하영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하영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민혁은 통화중이였다.
통화하던 민혁이 들어서는 하영을 보고는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그럼 나중에 한번 뵙죠..네..감사합니다.]
민혁은 전화를 끊고는 책상을 돌아서 하영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회사로 다 찾아오고.....]
민혁이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오다 심각한 하영의 표정을 보고는
그의 얼굴이 굳어져 갔다.
[하영아....]
뒤에 서있던 기찬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자신을 노려보는 하영을 보며 민혁은 왠지 두려워졌다.
이토록 무서운 얼굴의 하영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였다.
하영은 민혁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순간 하영의 손이 올라가며 힘차게 민혁의 뺨을 쳤다.
따악하는 소리가 밖에 까지 들리자 대기하고 있던 기찬이 소파에
앉아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하영에게 맞은 뺨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며 민혁이 하영을 쳐다보았다.
[무슨일이야.....무슨 일인지는 알고는 맞아야 하는거 아니야?]
민혁의 음성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당신.....유 하라와 무슨 관계죠?]
#49
[유 하라가 누구냐고 물었어요.]
하영의 물음에 민혁의 시선이 순간 흔들렸다.
[내가 뭐라 이야기 하길 바라는 거지?]
[당신이 결혼전에 누구와 연인 관계였는지, 난 상관하지 않아요.
누구나 과거는 있기 마련이고 굳이 지금와서 과거지사를 가지고
따질만큼 속 좁은 여자는 아니예요.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계약상의
결혼일 뿐이지만 서로에 대한 예의는 지켜주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내가 마치 바람이라도 폈다가 들킨 남편같은 취급을 받아야 할 만큼
잘못한것이 있는건가?]
민혁이 위협적으로 하영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어째서..어째서 그 여자한테 그것을 준거죠?]
하영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내가 뭘 주었단 말이지?]
[브로치요!!! 나비 브로치 내가 몇십년전에 당신한테 건네준 내 새어머니의
유품이요......왜 하필 그것을 그 여자한테 준거죠?]
하영이 미칠듯이 민혁에게 말을 토해내고 있었다.
유 하라.
민혁은 속으로 이를 갈며 당장 그녀의 목을 비틀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준게 아니야.]
[그럼 그 나비 브로치가 날아서 그녀에게 가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하영이 비아냥 거리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잃어버렸었어.며칠전에 당신에게 선물로 주려고 가지고 있었는데
잃어버렸어. 잃어버린걸 하라가 주운거고.]
[하라씨가 그것을 주웠다면.....당신은 그걸 잃어버릴 당시 그녀와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군요.아닌가요?]
젠장.
민혁은 숨기려고 했던 하라와의 관계를 스스로 실토해 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결혼생활중에도 그녀와 만나고 다녔던건가요?]
[그래.]
너무다 간단하게 나오는 그의 대답에 하영은 가슴이 미어질듯 아팠다.
거짓말이라도 그가 아니라고 대답해 주기를 원했다.
[우습네요.처음 결혼계약서를 작성할때 서로의 대한 사생활은 간섭
하지 말자며 약속했었죠...그런데 막상 내가 겪어보니....
그거 알아요? 배신감이라는거.....배신감이라는 감정 정말....
지독하네요.......]
하영이 뒤돌아 문을 열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사모님!!!]
기찬이 뛰쳐나가는 하영을 쫓다가 민혁에게 다가왔다.
[사장님..어서 사모님을 잡으셔야죠.]
[그냥 놔둬...]
민혁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기찬은 민혁을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하영을 뒤쫓아 나갔다.
하지만 이미 하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중이였다.
결국에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유 하라.
이제서야 기찬은 유 하라가 민혁에게 접근한 의도를 깨닫게 되었다.
미리 손써보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기찬은 주먹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힘차게 때렸다.
***********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을 잡지도 않는 너무도 당당한 민혁의 모습이 기가차고 서러웠다.
무작정 택시에 올라 하영은 눈물을 닦아냈다.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기사의 물음에 하영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민혁의 자취가 있는 여우같은 미령이 있는 청담동으로 돌아가기는
이 순간 죽도록 싫었다.
[한강 둔치로 가주세요.]
[예.]
택시가 출발하자 하영의 핸드폰이 핸드백 안에서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서 하영은 발신자표시를 확인했다.
기찬의 핸드폰 번호였다.
하영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의 밧데리를 빼내버렸다.
전원이 끊겼다는 안내 메세지를 들으며 기찬은 전화를 끊었다.
창백하던 하영의 얼굴을 떠오르며 혼자 뛰쳐나간 그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느새 민혁이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랐다.
[어디로 모실까요.]
[아무데나.]
민혁은 자신의 넥타이를 풀며 좌석 깊숙히 몸을 묻었다.
[설사...사실이라고 해도...사장님은 거짓말을 하셨어야 했습니다.]
기찬이 백미러로 민혁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이미 엎지러진 물이야.....]
[사모님께서 충격이 크신듯 했습니다.경황없이 그냥 뛰쳐 나가셨는데...
전화도 전원을 꺼버리시고....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기찬이 넌...나를 원망한다는듯한 말투구나.]
[제가 주제 넘는 짓을 하는건 죄송합니다만....전 작은 사모님이 좋습
니다. 작은 사모님 같은 분 안계십니다. 제가 사장님을 존경스런
마음으로 공경하듯이....작은 사모님도 사장님과 같은 그런 존재
이십니다. 제게는....]
[유 하라를 만나봐야 겠어.마포로 가자.]
[예....]
기찬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천천히 차를 몰아갔다.
마포에 있는 하라의 오피스텔에 도착하자 민혁은 차에서 내렸다.
[금방 나올거야..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예. 사장님]
민혁의 하라의 오피스텔 문앞에서 벨을 힘껏 눌렀다.
벨을 눌러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민혁은 주먹으로 힘껏 문을 두드렸다.
[유 하라!! 나와!!!]
그의 고함에 잠시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하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한 붉은 빛의 슬립만을 걸친 그녀의 한손에 양주병이 들려있었다.
이미 술을 많이 한듯 동공이 열리고 그녀는 벽에 기대어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오..이게 누구야? 우리의 서 민혁씨.강하영씨 남편!]
하라가 웃음을 흘리며 민혁에게 다가섰다.
독한 술냄새에 민혁의 인상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그는 하라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하라는 안으로 들어서는 민혁을 히죽거리며 바라보고는 문을 닫았다.
[정말 영광인데요? 서 민혁씨가 이렇게 직접 왕림까지 해주시고...]
[너....하영이 만났어?]
[누구? 하영이? 그게 누군데?]
하라가 비틀거리며 소파에 앉아 얼음이 담긴 술잔에 술을 따랐다.
하라가 술잔을 들고 들이키려 하자 민혁이 거칠게 술잔을 빼앗아
벽으로 던져버렸다.
유리잔이 깨지며 술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아...강하영씨...이제야 생각이 나네...그래..만났지...]
[너....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거야.....내가 그 여자는 절대
건들지 말라고 했지....뭐야 뭘 원하는거야!!]
민혁이 거칠게 하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흔들어 댔다.
술에 취한 하라의 몸이 흐느적 거리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하...민혁씨...겨우 내가 당신 아내 만난것 가지고 화가 난거야?]
[널 다시 만나준건....니가 하영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할까봐였어.
오늘 만나서 무슨 소리 한거야? ]
[별소리 안했어..우연히 건물안에서 마주친것 뿐이고....그리고 민혁씨
가 나한테 준 브로치를 보여주었을 뿐인데.....]
민혁이 힘껏 하라를 소파쪽으로 떠다밀었다.
그리고는 미친듯이 그녀의 화장대를 뒤져 서랍에 있던 브로치를 찾아
내었다.
하라가 어느새 그의 뒤에 다가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민혁씨.....그 여자랑 그냥 이혼해...우리 다시 시작해...]
[이거놔.]
[민혁씨!!]
[이거 못 놔!]
민혁이 몸을 돌려 하라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하라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이건....하영을 모욕한 댓가야...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마.
한번만 더 나타났다간...그땐 내손으로 널 죽여버리겠어.]
민혁이 몸을 돌려 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민혁씨..그냥 가면 후회할꺼야....]
[하영이를 잃는 것보다 더 큰 후회는 없을꺼야.]
민혁은 쾅 소리나게 문을 닫아버리며 나가버렸다.
거실에 우두커니 서있는 하라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하라는 손등으로 피를 닦아내며 문쪽을 노려보았다.
지금껏 이렇게 수치심을 느껴본적이 없었다.
천하의 유 하라가 남자에게 구걸하다 거절 당하다니...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50
외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하영은 아무도 없는듯한 집안을 둘러보았다.
[미쳤군...이시간까지 집에 돌아오지도 않다니.]
미령이 투덜거리며 거실에 불을 켜고는 방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나야.]
성호의 목소리가 들리자 미령이 대답했다.
[이제 보름도 체 남지 않았어.이젠....마지막 방법을 쓸 수 밖에없어.]
[그렇지 않아도 매일 그년 뒷꽁무니 쫓아다니느라 죽겠어.
걱정마. 조만간에 내가 아주 아작을 내버리지.]
[정말 자기 믿어도 되는거야?]
[뭐야 못 믿겠다는 말이야?]
[괜히 어설프게 끝냈다가는 안하느니 못해. 할때 확실하게 하란말이야.
이젠 시간도 얼마 안남아서 실수라도 하면 그땐 우리 끝장이야.]
[알았어.....]
성호가 귀찮다는듯이 대답했다.
전화를 끊은 미령은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까지 된 이상 미령도 최후의 발악을 위해 하는데 까지 해보려는
참이였다.
생각보다 유 하라는 제 임무를 제대로 해 주지 못하는것 같았다.
멍청한 계집애.
얼굴만 반반했지 머리속은 텅 비였어.
이미 그녀는 돌아올수 없는 낡은 벼랑끝의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앞만 보고 가야 하는 다리.
그녀가 살기 위해서는 함께 다리를 건너려는 모든것들을 없애야한다.
그것이 미령이 마지막으로 다짐하는 그녀의 생존의 방법이였다.
***********
집으로 돌아온 민혁은 하영이 아직 돌아오지 않을것을 확인하고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다시 핸드폰을 꺼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하영은 받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나비 브로치를 꺼내 하영의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아무래도 그가 직접 그녀를 찾아 나서야 할 것 같았다.
그가 자동차 열쇠를 집어들고 방을 나서려는 찰나 누군가 계단을 올라
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영이였다.
축늘어진 그녀의 어깨가 민혁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녀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게 한것이다.
[이제 와...]
그의 목소리에 하영이 고개를 들어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하영은 아무런 대답없이 민혁을 밀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힘없이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는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궜다.
하영은 샤워기의 수도꼭지를 완전히 열어놓은다음 변기 뚜껑을 닫고
그위에 앉아 쏟아지는 샤워기의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민혁의 얼굴을 보고 참았던 울음이 간헐적으로 튀어 나왔다.
그녀의 흐느낌은 물소리에 묻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하영은 자신의 원피스를 벗어던지고는 샤워기 밑에서 찬물을 그대로
맞으며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민혁의 얼굴을 맞이하고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하영아...문좀 열어봐...]
민혁이 밖에서 욕실문을 두드렸다.
[할말이 있어....]
민혁은 안타깝게 계속 문을 두드려 댔다.
그는 알고 있었다.
보나마다 그녀는 숨죽여 소리없이 울고 있을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자신이 너무 저주스러웠다.
민혁은 포기하지 않고 더욱 크게 문을 두드렸다.
얼마뒤 샤워기 소리가 멈추며 욕실문이 열렸다.
흠뻑 젖은 하영이 면 원피스를 걸친체 욕실에서 나왔다.
[하영아....다 설명할게...유 하라..맞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여자야.
하지만 너와 결혼하면서 둘 사이는 깨끗하게 정리했어. 그런데
그 여자가 어느날 찾아온거야. 너의 이름을 들먹이는데 내 한심했던
과거로 인해 다시 너에게 상처주고 싶지 않았어.그래서 너에게 비밀로
하는 대신 그녀를 어쩔수 없이 만나왔어. 하지만 정말 맹세코 몇번
식사한것 뿐이야. 그 브로치는 너에게 선물로 주려고 내가 가지고
있던 건데...내가 잃어버린걸 하라가 주운 모양이야....그게 내가
아는 다야.....하영아....정말이야. 그 여자한테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아.]
변명같은 민혁의 말에 아무말이 없던 하영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여자를 만나왔다는 것보다.....우리만의 추억을 그 여자가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싫었어요. 그 브로치...돌아가신 새어머니의
유품이예요. 어린 아이 시절의 이야기 이지만...난 한번도 당신에게
준 그 브로치를 잊어본적이 없어요.]
[알아...미안하다.]
[그말...정말이죠? 기다려 달라는 말...그말...내가 믿어도 되는거죠?]
상처받은 하영의 눈동자가 민혁을 응시했다.
[너야 말로 날 용서해 주는거야?]
하영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강 둔치에서 바람을 맞으며 많은 생각들을 했었다.
그가 너무나 미웠고, 자신의 사랑을 저버리는것 같아 야속했다.
그를 만나게 되면 모진 말들로 자신이 상처받은 만큼 그에게 퍼부어야지
다짐하며 집으로 돌아온 그녀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녀의 다짐은 물거품처럼 헛된
것임을 알았다.
민혁이 하영에게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미안해..미안해..너한테는 이런 말 밖에 해주지 못하는거...그것도
미안해....]
[사랑해요.그 사랑만큼 아까는 당신이 미웠지만...당신을 증오하고
미워하려 했지만.....그러지 못하겠어요. 당신을 미워하는 일은
나를 아프게 하는 일인걸요....]
마침내 하영의 사랑한다는 고백이 그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민혁은 나비가 꿀을 찾아 꽃으로 찾아들듯이 하영의 입술을 미친듯이
찾아들었다.
하영은 더 이상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안하는지에 대해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누가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 그것은 이미 민혁을 사랑하는 하영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눈앞에 있는 민혁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겐 커다란 의미였고
그를 향한 자신의 사랑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은 벅차오르는 격정으로
숨이 막힐듯이 괴롭기 때문이였다.
하영은 주저하지 않고 그의 머리를 끌어 안으며 그의 키스에 응답했다.
민혁이 서둘러 하영이 입고 있던 면 원피스를 벗겨버렸다.
하영도 민혁이 입고 있는 셔츠를 거칠게 벗겨냈다.
알몸이 된 하영을 침대 눕히는 민혁의 손길이 빨라졌다.
그는 재빨리 자신이 입고 있던 바지 마저 벗어버리고 태초의 아담과
이브처럼 서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체 한동안 하영의 옆에 누워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나하나 각인을 찍듯이 민혁은 손가락으로 하영의 이마에서 코로
코에서 입술로 쓸어내려갔다.
하영의 입에서 달콤한 한숨이 새어나오자 민혁은 그의 입술로 그녀의
한숨을 단숨에 막아버렸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하영의 자그마한 가슴을 감싸자 하영이 다리를
비꼬며 몸부림을 쳤다.
그의 탄탄한 허벅지가 하영의 다리사이로 파고들며 물고기가 유영하듯
그의 혀를 하영의 입속으로 집어넣어 그녀의 혀를 빨아들였다.
하영은 민혁의 넓다란 어깨를 끌어안으며 좀더 그와 자신의 몸을 부착
시키려 애썼다.
민혁이 입술을 떼자 참아왔던 숨이 하영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민혁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물고는 그녀의 등으로 손을
둘러서 그녀의 몸을 살짝 일으켰다.
[민혁씨....]
하영이 숨을 헐떡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민혁씨....지금이요...못참겠어요.]
하영의 재촉에 마침내 민혁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가 자신의 몸을 그녀에게로 내리자 하영은 하복부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통증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천천히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듯 민혁의 몸이 춤을추기 시작했다.
그들만의 아름다운 왈츠가 시작되면서 그들의 환희의 찬 목소리가
선율이 되어 리듬을 탔다.
점점 민혁의 몸짓이 빨라지자 하영역시 고조되어가는 터질듯한 압박감에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미처 말리지 못한 하영의 젖은 머리카락이 유혹적으로 뺨에 들러붙었다.
[민혁씨...]
[지금이야...]
민혁의 외침과 동시에 하영과 그는 뜨거운 쾌락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오르가즘에 이른 그 순간마저 함께한것이 하영은 너무도 행복했다.
[에로스.....]
하영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민혁이 무슨말인가 하영의 입가에 귀를 갖다대었다.
[새엄마가 말한 나만의 에로스를 만난것 같아요....]
하영이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입에 쪽소리나게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민혁은 하영의 몸에서 내려와 그녀 옆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하영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아직 진정이 되지 않은듯 빠르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민혁이 천천히 감각적으로 그녀의 늘씬한 등선을 훏어 내렸다.
[예전에 등이 아프다고 했는데...이젠 안아파?]
[네.......이미 날개가 돋아버린걸요....]
하영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하영의 등을 훏어 내리던 민혁의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어느새 민혁이 잠이 들은듯 얕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그런 민혁의 이마의 머리를 넘겨주며 하영이 조용히 속삭였다.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옛날에.....프쉬케라는 아름다운 소녀가 살고 있었데요.....
그녀는 아프로디테의 미움을 받았는데 아프로 디테는 자신의 아들
에로스를 시켜서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추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하라고 했죠.....새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프쉬케에게 갔던 에로스는...
그만 오히려 자신이 프쉬케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민혁이 깊은 잠에 빠졌을때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51
빨래를 끝내고 나서 하영은 갑자기 배가 출출해 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먹다 남은 쉰 김치가 생각난 하영은 김치볶음밥을 해먹어야
겠다 생각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김치를 꺼내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던 하영은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구토로 인해 화장실로 후다닥 달려갔다.
변기 뚜껑을 열고 아침에 먹은 것을 다 올려낸 하영은 축 늘어진체
거실로 나왔다.
처음엔 스트레스로 인해 식욕도 없고 빈혈증상도 있겠다 싶었는데
이런 저런 일로 병원 가는것을 미뤄왔었다.
하영은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가 외출 준비를 했다.
속이 조금 안좋은것 뿐인데 병원에서 여러가지 검사를 하자 하영은
큰 병인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떨리는 마음으로 의사앞에 놓인 의자에 하영은 앉았다.
[저.....무슨 병이라도 났나요?]
하영은 꿀꺽 침을 삼키며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의사의 말을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생리를 하신게 언제입니까?]
[네?]
하영은 의사의 물음에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그...글쎄요...요번에는 그냥 넘어간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둔한 산모는 처음 보는군요...이정도 되었으면 어느정도
자각 증상이 있었을텐데....임신 입니다.8주 되셨네요.]
[예? 임신이요?]
하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얼굴을 했다.
8주라면.....
하영이 별장에서 피신 생활을 했을 때였다.
그의 아기...
하영은 갑자기 설레여 오는 두근거림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기요? 믿기지가 않아요...]
믿겨하지 않는 하영을 위해 나이가 지긋한 남자 의사는 초음파를 통해
그녀의 배속에 잠들어 있는 아이의 존재를 보여주었다.
생명의 탄생이란 참으로 고귀하고 신기했다.
아직은 형체조차 형성되지 않은 콩알 만한 크기의 생명이였지만
스스로 하영의 뱃속에 뿌리를 내리고 작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영은 병원에서 얻은 초음파 사진을 소중히 자신의 지갑속에 간직했다.
당장이라도 민혁에게 달려가 자신의 뱃속에 그의 아이가 있다고 선포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민혁의 생일에 깜짝 선물을 위하여 그때까지 숨기기로
했다.
그녀는 스스로 비밀을 잘 지켜낼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아기라는 생각만 해도 웃음이 배실배실 새어나오는데.
***********
[사장님 다 왔습니다.]
뒷자석에서 잠이든 민혁을 기찬이 소리쳐 깨웠다.
[어? 어...다 왔어?]
민혁이 피곤한듯 고개를 흔들며 바른 자세로 앉았다.
[많이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아..아니야.]
민혁은 잠깐 잠든 사이에 꾼 이상한 꿈이 현실처럼 생생했다.
돌아가신 그의 새어머니가 그에게 새하얀 강보에 쌓인 아기를 그에게
건네는 꿈이였다.
아기를 품에 안고 아기로 인해 따뜻하게 밀려오는 느낌에 민혁은 저절로
마음이 포근해졌다.
이상한 꿈이다.
민혁은 차에서 내려 제우스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정문쪽으로
걸어 갈때였다.
[어머!!민혁씨 아니세요?]
그가 뒤돌아 보자 진우의 약혼녀 세영이 달려오고 있었다.
[어..세영씨!!]
민혁은 반가운 얼굴로 세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만나뵙네요.]
세영이 씩씩하게 민혁이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처음 파티장에서 그녀를 봤을때 눈부신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녀의 발랄한 성격은 함께 있는 이로 하여금 유쾌한 기분을 가지게 했다
[여긴 왠일이세요? 진우 형님은요...]
[저 혼자예요.이 근처에서 볼 일이 잠깐 있었거든요.하영씨는
잘 있죠?]
파티장에서 유난히 하영과 친근하게 보였던 세영은 하영의 안부를
너무도 당연하게 민혁에게 물어왔다.
[그럼요...하영이가 성격이 좀 내성적이라 친구가 별로 없어요.
세영씨가 우리 하영이랑 친한 친구로 지내주었으면 좋겠어요.]
[어머!!모르셨어요? 하영씨하고는 벌써부터 전화연락하며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걸요?]
세영이 하얀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우리 하영이좀 잘 부탁할게요.]
[우리 하영이...민혁씨 너무 공처가 티 내시는거 아니예요?]
[하하하..그렇게 보였습니까?]
세영의 너스레에 민혁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담에 시간되면 하영씨랑 같이 만나요.]
[그러죠.]
멀어지는 세영을 보며 민혁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진우형님이 여자 하나는 잘 고른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영은 청담동으로 돌아가는 대신 아버지가 있는 마포로 갔다.
하영이 집으로 들어섰을때 때마침 우진은 휠체어에 앉아 베란다 창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햇빛을 감상하고 있었다.
[아빠!!!]
하영이 반갑게 그를 부르자 하영을 본 우진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영은 쪼르르 달려가 우진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우진은 다정하게 막내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빠...내가 좋은 소식 하나 가지고 왔어요.]
우진의 눈이 하영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듯 했다.
[아빠....할아버지 된데요...]
생글거리는 하영의 얼굴을 바라보던 우진이 그녀의 말이 무슨뜻인지
알게 되자 헤벌쭉 그의 입이 벌어졌다.
[하..아...]
[응. 아기....아빠가 할아버지가 되는거예요.]
이미 굳어 버린 다리이지만 우진은 벌떡 휠체어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어리게만 봐 왔던 막내딸이 아기 새엄마가 된다니 딸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자신의 병으로 우울증에 시달렸던 우진에게 희망을 주는 빛과
같은 사실이였다.
[아빠...민혁씨한테는 비밀이예요...그이 생일날 깜짝 놀래켜 줄거예요.]
어린 아이 마냥 재잘 거리는 하영의 모습이 귀여운듯 우진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만지작 거렸다.
[아빠...새엄마도 나 가졌을때 이렇게 기뻐했을까?]
문득 돌아가신 새어머니 생각에 기뻐하던 하영의 얼굴이 슬픔에 가리워졌다
그런 그녀를 위로하듯 우진은 하영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빠...사랑해요...오래오래 제 곁에 있어 주셔야 해요....]
하영은 자신의 손을 살며시 자신의 배에 가져다 대어보았다 #52
마포에서 돌아오던 하영은 문득 민혁이 생태찌게를 좋아하는걸 생각해
내고는 일부러 재래시장에 들려 장을 보고는 천천히 운동도 할겸 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기온이 많이 내려간듯 선선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가는게 참으로
기분이 좋아진 하영은 행복감에 절로 입가가 슬며시 벌어졌다.
아직 민혁의 생일은 5일이나 앞두고 있는데 그동안 입이 근질근질 해서
어떻게 참아낼지 하영은 괜시리 걱정이 되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집에서 약간 떨어진 공원에 낯잌은 차가 서있는
것을 보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회색 세단은 미령이 몰고 다니던 차였다.
왜 이 차가 여기에 있지?
의아하게 생각한 하영은 미령의 차 가까이 다가갔다.
갑자기 운전석 차문이 열렸다.
하영은 미소를 지으며 미령에게 아는척을 하려고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이는 미령이 아닌 험상궂게 생긴 남자였다.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친 하영은 한동안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최성호.
하영이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양손에 힘이 풀리면서 그녀가 들고 있던 비닐봉투들이 땅에 떨어졌다.
봉지안에 있던 사과들이 땅바닥에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자기!!]
또다시 조수석의 문이 열리며 미령이 차에서 내렸다.
하영의 눈이 커지며 미령과 성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머!!]
미령이 하영을 발견하고는 경악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들이 관계를 확인하고 순간적으로 위험을 느낀 하영이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안돼!!!잡아!!!]
도망가는 하영을 보며 미령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성호가 미령의 비명에 정신이 든 듯 하영을 뒤쫓아갔다.
하영은 죽을 힘을 다해 뛰었지만 얼마 못가 성호에게 긴 머리채가 붙잡
혀 그에게 끌려갔다.
[아악!!]
우악스럽게 하영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가는 성호의 힘때문에 머리가죽이
벗겨질것 처럼 고통이 잇따랐다.
미령이 어느새 차를 몰고와 그들 옆에 세웠다.
[누가 보기전에 빨리 태워!!]
성호가 발버둥치는 하영을 억지로 뒷자석의 차문을 열고 내팽겨치듯
하영을 뒷자석으로 밀어넣었다.
[살려주세요!]
하영이 필사적으로 소리를 쳤지만 저녁때가 다 되어가는 길거리는 그날
따라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았다.
성호가 하영의 옆에 올라타자 미령은 창문을 올리고 급히 차를
출발 시켰다.
[안돼!!]
하영이 계속 비명을 질러대며 유리창문을 두드려댔다.
혹 지나가는 사람이 그녀를 쉽게 볼수 있도록 하기위한 하영의 발악
이였다.
[누가 이렇게 길가에....]
기찬의 말에 서류를 잠깐 보고 있던 민혁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길가에는 누가 버린듯 사과들이 굴러다니고 야채와 생선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기찬은 차바퀴가 더러워질까 교묘하게 핸들을 돌려 그것들을 피해가기
시작했다.
민혁은 집에 가까와 지자 창문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은색 세단이 그의 차를 스쳐지나갔다.
시간이 멈춘듯 천천히 화면이 오버랩되면서 그의 눈에 차의 창가에
손을 갖다댄체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하영의 모습이 보였다.
[하영?]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정신을 차리자 이미 옆을 지나던 차는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민혁이 몸을 돌려 뒷자석의 유리창으로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았다.
미령..
미령의 차였다.
알수없는 두려움이 숨막힐듯이 그의 폐를 짓누르고 있었다.
[기찬아! 차돌려! 어서!]
민혁이 고함을 치자 기찬이 백미러로 그를 쳐다보았다.
[네?집에 다 왔는데요.]
[하영이가.....빨리 어서!!]
민혁의 다급한 목소리에 무언가를 감지한 기찬이 본능적으로 힘껏
핸들을 꺽어 차를 돌렸다.
차가 요란하게 타이어가 끌리는 소리를 내며 휘청하며 급 커브를 돌았다.
민혁은 미친듯이 미령의 차를 찾았다.
[송미령의 차를 찾아야해..어서.]
[무슨 일입니까.]
[그 여자 차에 하영이 타고 있었어. 하영이 그 눈......뭔가 불길해.]
기찬은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미령의 차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저..저기!!]
기찬이 한손으로 가리키는 곳에 신호대기중이던 미령이 차가 신호가
바뀌며 막 출발하고 있었다.
[빨리 따라잡아!]
[네!]
기찬이 차에 속도를 넣으며 미령의 차를 쫓기 시작했다.
[젠장!!저거 서 민혁 차 아니야!]
성호가 뒤돌아 보며 그들을 쫓고 있는 민혁의 차를 바라보았다.
사이드 미러로 미령이 힐끔 쳐다보았다.
[맞아...어떻게 알았지...]
민혁이란 말에 하영이 더욱 반항하며 차에서 뛰어내리려 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년이 미쳤나!!]
성호가 하영을 잡아끌었다.
[놔주세요!!]
[내가 경고했을때 순순히 서 민혁 그자식과 헤어졌어야지.
니가 스스로 판 무덤이야. ]
미령이 앙칼지게 하영에게 한마디 했다.
[새어머니...왜 그러세요...]
[새어머니? 웃기고 있네.입닥치고 가만히 있어!]
미령이 욕을 하며 속도페달을 힘껏 발로 밟았다.
[어떻게좀 따돌려야지.시팔..잡히게 생겼어.]
[시끄러워! 운전은 내가 해.]
미령이 앞을 막고 있는 승용차에 경적을 울려댔다.
미령은 깜박이도 켜지않고 차 사이를 이리저리 끼어들며 최대한 민혁의
차를 따돌리려고 애썼다.
[속도좀 더 낼 수 없어!!]
다급해진 민혁이 기찬에게 고함을 쳤다.
[이게 최고 속도입니다.]
어느새 기찬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아..제발.
민혁은 속으로 기도하며 하영이 무사하길 빌었다.
저 앞의 신호등이 깜박이며 노란불로 바뀌려고 했다.
[어어...]
기찬이 페달을 밟으며 미령의 차를 뒤쫓았지만 간발의 차이로 그의
차는 신호에 걸리고 말았다.
미령의 차가 유유히 그들 앞에서 달아나고 있었다.
[뭐야!!!]
[신호에 걸려서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젠장젠장!!!!]
민혁이 주먹으로 앞좌석의 등받이를 거칠게 내리쳤다.
[하하하....멍청한 자식들...따돌렸어.]
성호가 웃음을 터트리며 뒤에서 멈춰서있는 민혁의 차를 재미있다는듯
쳐다보았다.
하영은 민혁이 뒤쳐졌다는 말을 듣고는 두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젠 그녀를 지켜줄 사람은 자기 자신 밖에 없었다.
아가야...
새엄마를 지켜줘...너무 무서워...
하영은 두손으로 자신의 배를 감싸안았다.
***********
청담동 집으로 돌아온 기찬은 경찰에 미령의 차를 신고했다.
기찬이 전화로 경찰에 신고하는 동안 그는 엄습해오는 두려움으로
장식장에 있던 양주병을 꺼내 병째로 들이마셨다.
[사장님!! 그 독한 술을.]
뒤늦게 발견한 기찬이 민혁의 손에서 양주병을 빼앗아 들었다.
[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민혁이 다시 기찬의 손에서 양주병을 빼앗아 또다시 들이켰다.
기찬은 민혁이 하는 양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기찬아...너무 두렵다...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두려워 본 적이 없어.
내가 어리석었어...송미령과 하영을 단둘이 두다니.....
그여자가 이런짓을 능히 저지르고도 남는 여자라는걸 알면서....
내 욕심때문에...하영이를 위험에 빠뜨렸어....]
[사장님..진정하십시요. 이럴때 일 수록 냉정해 지셔야 합니다.]
기찬이 애원하듯 민혁의 팔을 잡아끌었다.
[도데체 어디로 갔을까....]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기찬은 즉시 종종 자신이 도움을 받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민혁은 힘겹게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열자 익숙한 하영의 향수 냄새가 났다.
민혁은 침대위에 하영이 벗어놓은 원피스를 바라보았다.
침대에 주저 앉아 원피스를 들어올렸다.
원피스를 들고 있는 그의 손이 떨려왔다.
그는 원피스를 얼굴에 가져가 깊게 얼굴을 묻고는 냄새를 들이마셨다.
하영의 살내음이 밀려오는것 같았다.
하영아........
제발.......무사하기만 해다오....
***********
하영이 끌려간 곳은 그녀가 예전에 머물었던 별장이였다.
미령과 성호는 하영이를 겨울에 땔감으로 쓰이는 나무장작들을
보관해둔 지하실에 가둬놓았다.
바닥에 쓰러진 하영은 미령과 성호를 피해 구석진 자리로 피했다.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세요.]
미령이 비아냥거리듯 하영의 말투를 흉내냈다.
[너하고 민혁이 우리 관계를 안 이상....우리도 이판사판이야.
다행히 우리한테 네가 있으니까 민혁이도 쉽게 우릴 건드리지 못하겠지.
이렇게 된 이상.....제우스를 가질 수는 없지만....너를 볼모로
서민혁에게 한몫 뜯어내야 겠어.]
미령이 팔짱을 끼고는 하영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미령은 두려움에 벌벌 떠는 하영 앞에 허리를 숙이고는 손으로 하영의
턱을 들어올렸다.
[난 예전부터 니 반반한 얼굴이 신경에 거슬렸단 말이야.
멍청한 계집애....처음부터 서 회장한테 접근하지 않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복잡하게 꼬이지도 않았을텐데......
그냥 간단하게 니 얼굴에 손 좀 봐주려고 했는데.....서 회장이
어처구니 없게 죽어버렸지 뭐야....]
[그..그럼...당신이...]
[서민혁도 웃기지? 호랑이 앞에 토끼를 맡겨놓다니...]
미령이 간사스런 웃음을 터트리며 배를 움켜쥐었다.
[당분간 네가 우리 포로가 되어주어야 겠어.]
미령은 하영을 지하실에 가두어 둔체 성호와 함께 나가버렸다.
철컹 하는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왔다.
불도 켜지지 않은 칠흙같은 어둠이 지하실에 찾아들었다.
하영은 두팔로 몸을 감싸며 벽에 등을 기대어 쭈그려 앉았다.
민혁씨...
나 무서워요...
어디 있는 거죠......
#53
어둠이 깔린 침실에서 민혁은 불도 켜지 않은체 기찬의 연락을 기다렸다.
하영은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증오스러웠다.
자꾸만 짧은 시간에 스쳐지나갔던 하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영아......]
그는 괴로운듯 머리를 숙였다.
[으악.....]
민혁이 고함을 지르며 화장대위의 물건들을 손을 쓸어버렸다.
그는 허겁지겁 1층으로 내려가 기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버튼을 누르자 때마침 현관이 열리며 기찬이 들어섰다.
[사장님!!!찾았습니다.]
[어디야!!]
[최성호 핸드폰 위치추적을 했는데 예전에 작은 사모님이 계시던
별장으로 나왔습니다.]
[등잔밑이 어두운줄 몰랐군.빨리가자.]
***********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하실문이 벌컥 열리며 최성호가 들어오고 있었다.
하영은 갑자기 새어들어오는 빛때문에 눈이 부셔 두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서 민혁도 슬슬 약이 올랐겠는걸?]
하영은 차츰 익숙해지는 빛속에서 성호가 다가오는걸 지켜보았다.
[날 보내주세요.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늦지 않았다구....이미 늦었어.너무 멀리 와버려서 되돌아 갈수없다구.
서 민혁이 한 눈에 반할 만 하군.처음 사진으로 봤을때도 참 반반한
계집이다 생각했었는데 말이야...볼수록 매력있단 말이야?]
순간 음흉해 지는 성호의 미소를 보며 하영이 뒤로 엉덩이를 끌며
물러앉았다.
[난 원래 남이 가진것을 더 탐이 나거든...]
성호가 그녀앞에 몸을 숙이며 두툼한 손으로 하영의 턱을 들어올렸다.
하영의 눈이 공포심으로 동공이 확대되었다.
[왜 이래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나왔다.
[어차피 이렇게 된거....서 민혁이 아끼는 도자기에 흠집하나 내는것쯤
어떠겠어......]
[이러지 말아요..이러지..꺄악!!!]
성호가 그대로 하영을 몸위로 무너지며 그녀의 몸위에 올라탔다.
하영은 발버둥치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워낙 등치가 좋은 성호의
몸아래서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했다.
[이러지마....]
하영의 뺨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민혁씨....제발......
성호가 입냄새를 풍기며 강제로 하영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부딪혀왔다.
하영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그의 입술을 피하려 했다.
[제발..이러지 말아요...난...난 아기를 가졌단 말이예요!!]
하영의 외침에 성호의 행동이 멈추었다.
[난..민혁씨 아기를 가졌어요...이러지 말아요..제발..살려주세요.]
하영이 흐느끼며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성호에게 애원했다.
[뭐? 그 자식 씨를 뱃속에 담았단 말이야!!!]
성호가 잠시 생각하는듯 눈알을 이리저리 돌렸다.
[상관없어...이미 난 이판 사판 이니까.]
성호가 다시 하영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손이 거칠게 하영의 블라우스 앞섶을 뜯어냈다.
후두둑 힘없이 단추들이 떨어져 나가더니 레이스 브래지어에 감싸인
하영의 가슴이 드러났다.
필사적으로 가슴을 가리려고 두손을 앞으로 했지만 그녀의 팔목도
이내 성호의 우악스런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러지 마세요...난 아기가 있단 말이예요.]
하영의 처절한 애원은 이미 욕정에 정신이 나가버린 성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성호가 하영의 치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악....]
하영이 비명을 질러댔다.
성호가 자신의 바지를 벗기 위해 몸을 잠깐 들어올리려 하는 찰나
그의 목에 차가운 금속성의 물체가 목에 와 닿았다.
그가 고개를 들자 미령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부엌에서 가져온듯한
부엌칼을 그의 목에 갖다대고 있었다.
[왜...왜이래.]
[일어나 이 개새끼야.]
성호가 엉거주춤 하영의 몸위에서 일어났다.
성호가 떨어지자 하영은 벌떡 일어나 찢어진 옷을 여미며 구석으로
달아났다.
[이러지마.이거 안치워?]
성호가 미령의 손에 든 칼을 뺏아으려했으나 미령은 더욱 칼날을 그의
목에 바싹 갖다댔다.
날카로운 칼날이 살을 스치며 피가 새어나왔다.
[이 개새끼....누굴 건드리려고 해?]
[오..오해하지마..저년이 먼저 유혹했다구]
[거짓말이예요.저 사람이 먼저 덮쳤다구요!!]
하영이 악다구니를 쓰며 소리쳤다.
[짐승같은 새끼.그래도 난 널 믿었는데...]
[아...정말 난 너 밖에 없어...미령아....]
성호가 은근슬쩍 넘어가려는듯 하자 미령의 표정은 더욱 표독스러워졌다.
[미친놈 지랄하네..내가 널 좋아했었다고 생각해? 웃기지마...
때마침 어려울때 마다 넌 정말 쓸모 있었어.뭐 머리쓰는 일은 멍청해서
제대로 해내지는 못했지만 말이야....정말 내가 너같은 깡패새끼
하고 제우스를 나눠가질줄 알았니?병신새끼.글도 모르는 주제에.]
미령이 비아냥 거리며 성호의 심기를 거슬려 놓았다.
[이년이 죽고싶나......]
성호가 이를 갈며 위협적으로 미령에게 다가섰지만 칼날은 더욱 깊게
그의 목을 찌를뿐이였다.
[죽어야 할 놈은 너야.그리고 너도 곧 없애주지.]
미령이 하영을 보며 히스테릭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미령이 잠깐 하영에게 정신을 파는 사이 성호가 미령의 팔목을
낚아챘다.
미령과 성호는 서로 칼을 빼앗기 위해 엎치락 뒤치락 했다.
미령이 성호의 힘에 뒤로 밀리며 다리를 삐긋하며 비틀거리는 동시에
성호가 재빨리 미령의 팔을 돌려 그대로 칼을 쥔 미령의 손을 그녀의
복부쪽으로 힘껏 밀어넣었다.
[꺄악!!!]
하영이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크게 뜬체 칼에 찔려 쓰러지는 미령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영은 도망가려고 재빨리 문쪽으로 달려나갔다.
[어딜 도망가!!]
이미 피를 본 성호는 제 정신이 아니였다.
하영의 허리를 낚아채고는 힘껏 그녀를 바닥에 내팽겨쳤다.
하영은 본능적으로 아기를 보호하려는듯 바닥에 떨어지면서도 두손을
배를 감싸안았다.
[미안하지만 너도 죽어줘야 겠어.하지만 죽기전에 내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것도 나쁘진 않잖아..]
성호가 급히 하영의 치마를 걷어올렸다.
[꺄악!!!!]
하영의 비명이 계속되었다.
***********
민혁이 탄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별장앞에 멈추어섰다.
[빨리 찾아봐!!]
민혁이 소리치며 별장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하영아!!하영아!!!]
민혁이 미친듯이 하영의 이름을 부르며 각 방마다 문을 열어보았다.
하지만 어느곳에서도 하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꺄악!!]
그 순간 여자의 비명소리가 별장으로 울려퍼졌다.
[사장님!!지하실입니다!!]
기찬이 소리치며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기찬은 하영의 위에서 바지를 벗고 있는 성호를 발견하자 뛰어 내려가
그를 힘차게 떠다밀었다.
[뭐야!!]
성호가 몸을 굴리며 미령의 배에 꽂혀있던 칼을 빼내었다.
그가 위협적으로 칼을 기찬에게 휘두르자 기찬은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성호를 노려보았다.
하영은 정신없이 지하실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그녀가 거의 다 올라가자 커다란 체구의 민혁과 부딪치고 비틀거렸다.
민혁이 하영이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하영을 붙잡았다.
[살려주세요...]
하영이 민혁인줄 알아채지 못하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영아!!!나야....]
민혁이 하영의 어깨를 흔들며 그녀의 턱을 잡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게 했다.
[민혁씨....]
민혁의 시선이 여기 저기 뜯어진 하영의 옷을 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 섬뜩한 광기가 떠오르며 지하실로 뛰어 내려갔다.
[민혁씨!!]
그가 지하실로 내려가자 기찬과 성호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태권도 유단자인 기찬이 발차기로 성호가 들고 있던 칼을 저멀리
차버리자 민혁이 표범처럼 날렵하게 성호에게 달려들었다.
[개새끼!!죽여버리겠어!]
민혁이 무차별로 성호를 두들겨 패기시작했다.
성호가 반항할 틈도 없이 민혁은 계속 그에게 매질을 가했다.
성호의 입안이 터지며 피가 울컥 솟아 올랐고 그의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민혁은 미친 사람처럼 성호를 죽일듯이 때리고 있었다.
기찬은 민혁이 하는양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가 아니더라도 기찬은 저 짐승같은 놈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혁이 땅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성호를 보며 벽에 세워져 있던
길다란 각목을 집어 들어 성호의 머리를 내리칠 자세를 취했다.
[안됩니다!!사장님 그만하세요.]
기찬이 민혁을 제지했다.
[이거놔!!이 새끼가 하영이를....죽여버리겠어!!!]
민혁과 기찬이 서로 실랑이를 버렸다.
성호는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자 힘겹게 몸을 일으켜 지하실의 계단을
올라갔다.
하영은 성호가 피투성이가 된체 지하실에서 올라오자 비명을 지르며
부엌쪽으로 달아났다.
[너...기다리고 있어...다시 널 찾아오겠어.]
성호가 위협하며 별장을 빠져나갔다.
뒤 늦게 성호가 도망간 사실을 알아차린 민혁과 기찬이 뛰어 올라왔다.
기찬이 성호를 뒤쫓아 별장을 빠져나갔고 넋이 나간듯 부엌에 숨어있는
하영을 본 민혁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민혁이 다가오자 하영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그를 피해 뒷걸음질
쳤다.
공포와 두려움에 가득찬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민혁의 가슴이 찢어
질듯 아파왔다.
[하영아.....]
민혁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민혁이 내민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영이 조금씩 앞으로 다가오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손을 잡자 민혁이 하영을 끌어당겨 품안에 안았다.
[미안해...미안해...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
그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54
경찰이 뒤늦게 도착해서 미령의 시신을 처리했다.
[사장님....아무래도 경찰서에 같이 가주셔야 할것같은데요.]
기찬이 하영과 함께 있는 민혁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가장 가까운 친인척이 사장님이시기 때문에 같이 가주셔야
한다고 경찰이 말합니다.]
민혁은 탈진해서 그의 곁에 기대있는 하영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영이를 부탁해.병원에 데리고 가봐야 할 것 같다.]
[네.걱정마십시요.]
민혁이 몸을 움직이자 하영의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미안해..하지만 가봐야해.]
하영이 민혁의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은 하영의 찢어진 옷을 가려주기 위해 걸쳐준 자신의 양복 윗도리를
더욱 여미어 주며 차에서 내렸다.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는 민혁을 바라보며 하영이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
복도에 있는 대기실에서 의사를 기다리던 기찬은 의사가 나오자
그에게 다가갔다.
[어떻습니가? 선생님]
[일단 진료실로 가시지요.]
의사를 따라 기찬은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 의사의 말을 기다렸다.
[다행히 성폭행 흔적도 보이지 않고,그냥 찰과상과 타박상 정도입니다.
물론, 태아도 이상없구요.]
[태아요? 지금 태아라고 하셨습니까?]
[환자가...임신 상태인걸 모르십니까?]
[예...몰랐습니다.]
[지금 2개월째입니다. 문제는 정신적 충격이 너무커서 환자가
일시적인 패닉 상태에 빠져있다는 겁니다. 가족의 보살핌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입니다.정서적으로 안정할 수 있겠끔 도와줘야 산모나
태아도 안전할껍니다.]
[예...알겠습니다. 지금 환자를 만나봐도 되겠습니까?]
[예.그러시지요.]
기찬이 조심스럽게 하영이 입원한 병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린 하영이 침대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사모님]
기찬의 소리에 하영이 고개를 돌렸다.
창백한 하영의 얼굴이 그녀가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얼마나 큰 충격
을 받았는지 절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기찬씨....어머님은요?]
하영이 눈빛이 흔들리며 미령의 소식을 물었다.
[돌아가셨습니다.]
하영은 두 눈을 감으며 끔찍한 기억을 떨쳐버리려는듯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도 끔찍했어요...그 남자가 칼로.....]
기찬이 하영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사모님....나쁜 기억들은 빨리 떨쳐버리세요. 그래야 사모님도 건강
하고...뱃속에 있는 아기도 건강할껍니다.]
아기라는 소리에 하영이 고개를 들었다.
[기찬씨....]
기찬이 다 알고 있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이 아시면 정말 기뻐하실 겁니다.]
[그럴까요?]
[당연하지요.그러니까 건강을 빨리 회복하셔야 해요.]
[기찬씨..부탁이 있어요.]
[무슨......]
[사실....저도 어제서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민혁씨 생일날 깜짝 선물로 이야기해 주려고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지금 민혁씨 많이 힘들거예요. 어머님 일도 그렇고 제우스도 그렇고...
당분간 제가 먼저 이야기 하기 전까지는 비밀로 해줄래요?]
[하지만....]
[부탁이예요.]
[예...알겠습니다.하지만 이렇게 좋은 소식을 언제까지 비밀로
해 둘수 있을지는 저도 장담 못하겠는걸요.]
기찬이 씩 웃으며 말을 꺼냈다.
[다행이예요. 기찬씨 같이 좋은 사람이 민혁씨 곁에 있어주어서...
고마워요......그동안 기찬씨 나한테도 큰 힘이 되주셨어요.]
[제가 사모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저희 사장님께 웃음을 다시 찾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기찬은 정중히 하영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하영이 잠깐 잠든 사이 민혁이 뒤늦게 하영의 병실로 찾아왔다.
오랜 경찰의 심문으로 많이 피곤해져 있는 상태라 민혁의 얼굴은
하루사이에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그는 조용히 잠든 하영의 침대옆으로 다가와 의자를 꺼내 앉았다.
하얀 팔에 보기 흉하게 멍든 자국을 보자 또다시 최 성호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경찰은 도망간 최 성호가 다시 그들에게 접근을 할 지 모르니 경찰을
따로 그들에게 붙여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민혁은 따로 보디가드를 자신이 섭외하겠다며 정중히 거절했고,
최 성호를 잡는데 주력해 달라고 부탁을 잊지 않았다.
최 성호가 도망간 이상 아직은 안심할때가 아니였다.
미령의 죽음을 바란건 아니였지만,악녀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보니
마음이 씁슬해졌다.
이제 제우스를 노리던 장애물이 사라진 셈이였다.
그것은 또한 하영과 민혁의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는 일이기도 했다.
이 여자는 과연 나하고 헤어지는 것을 원할까...
알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하영이 자신을 떠난다는건 생각하기도 싫었다.
정말로 이 여자가 날 사랑하는게 사실이라면 어쩌면 내곁에 영원히
내 아내로서 머물러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민혁은 자신을 떠나 다른 남자와 있는 하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강렬한 질투심과 소유욕이 일어났다.
이 여자는 내것이다.
영원히 내 안에 종속되어 있어야 한다.
차라리 이여자가 나의 아이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내 곁에 묶어둘수 있다면....
민혁은 살며시 하영의 손등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깨달았다.
미령의 주검을 바라보며 이미 그에게는 제우스는 중요하지 않다는것.
오직 그의 곁에서 함께 온기를 나눌수 있는 하영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
이틀뒤 퇴원을 한 하영을 민혁은 청담동이 아닌 예전에 민혁이 쓰던
아파트로 데리고 갔다.
되도록이면 미령과의 일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은 민혁의 생각이였다.
아파트로 들어가자 맛있는 음식냄새가 풍겨왔다.
도우미 아줌마가 맛깔스럽게 저녁상을 차려놓고 있었다.
하영을 식탁에 앉히고 도우미 아줌마를 돌려보낸 민혁이 하영의 앞에
앉았다.
[그동안 병원밥에 질렸지?]
[맛있는게 너무 많아서 무얼 먼저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영이 미소지으며 수저를 들었다.
향긋한 달래 된장찌개 냄새가 그녀의 식성을 불러일으켰다.
된장찌개를 떠 먹은 하영이 미소지었다.
[맛있어?]
[응..]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먹어...]
민혁이 다정하게 계란말이를 하영의 밥그릇 위에 올려놔 주었다.
밥을 떠먹으려던 하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왜?]
[된장찌개는 맛있는데...밥은 먹기 싫으네요....]
[속이 안좋아?]
[네..]
[병원밥만 먹다가 탈난거 아니야? 약사다줄까?]
민혁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요. 약 말구...]
하영이 망설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삼계탕 먹고 싶어요.]
[뭐? 삼계탕?]
[으응...찹쌀넣고 푹 끓인 삼계탕...]
[푸하하...왠 삼계탕? 그럼 우리 나가서 먹을까?
예전에 삼계탕 잘 하는 집에 가본적이 있어.]
[네.]
하영이 눈빛을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게 행복이야....
하영은 속으로 흐뭇해 하며 민혁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55
미령의 죽음이 있은후 민혁은 공식적인 제우스의 회장으로 새롭게
여러 이사진들 앞에서 취임을 하게 되었다.
등직한 민혁의 옆에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하영이 그의 곁을 지키고
서있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제우스의 주인과 그의 아름다운 아내에게 축복의
찬사를 아낌없이 내주었고 하영은 가슴이 벅찰정도로 행복감에 빠져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민혁을 올려다 보았다.
[하영아...그동안 고생 많았다.]
많은 사람들과의 접대로 지쳐버린 하영을 데리고 아파트로 돌아온
민혁은 침대에 누워 쉬고 있는 하영에게 따뜻하게 데운 우유 한잔을
가져다 주었다.
[민혁씨가 마음 고생이 많았죠? 축하해요.]
하영은 마음적으로는 민혁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있었지만 이제는
그를 떠나야 하나 그의 마음을 알길이 없는 하영은 속이 타들어갔다.
그는 내가 그의 아기를 가진 사실을 알면.....
함께 계속 살자고 해줄까....
구차하게 아기로 그에게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자존심보단
그와 그를 닮은 아기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유혹이 더욱 컸던
그녀였다.
그가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이젠 모든걸 잊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자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던 그의 말.
하영이 그를 기다려 줄 시기는 이제 끝이났다.
그의 선택만을 기다리고 있을뿐이였다.
하영은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줄때까지 아기의 존재를 숨기고
싶었다.
아기때문에 책임감으로 그녀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는 그의 말은 듣기
싫었기 때문이였다.
진실한 사랑을 꿈꾸는 하영 그녀 역시 다른 여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침실에서 잠이 든 하영이 깨지 않게 하기 위해 민혁은 조심히 침실방문
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그동안 쌓였던 긴장감이 풀렸는지 하영은 도통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뿐더러 쉽게 피로에 지치는것 같았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민혁의 2달은 영원히 깨지지 않는 악몽과도 같은 끔찍한 시간이였다.
그가 버틸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은 바로 하영이였음을 그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녀를 이용해 제우스를 찾으려 했지만 오히려 민혁이 하영에게 도움을
받은 꼴이 되어버렸다.
하영을 처음 제우스의 아버지 사무실에서의 첫만남을 기억해냈다.
그의 앞에서 당당하면서도 불을 뿜던 아름다운 여자.
그녀를 사랑한다.........
심장을 누군가 움켜쥐는것처럼 격한 고통이 뒤따랐다.
그녀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풀수없는 질문의 해답을 찾은것처럼 민혁은 가슴이 탁트이는것 같았다.
하영을 사랑한다고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던가.
어리석은 나의 감정놀이 때문에 그로 인해 상처받고 그로 인해 다시
웃음을 되찾고...
문득 하영에게 너무도 미안한 감정이 생겨났다.
그녀를 잡아야 한다.
2달간의 그의 아름다운 신부에서 영원한 제우스의 안주인으로 그녀를
잡아두어야 한다.
민혁은 하영을 영원히 자신의 곁에 영원히 붙잡아 둘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침실쪽을 바라보며 알수없는 듯한 묘한 미소를 지었다.
***********
너무도 포근하고 따뜻한 꿈.
꿈속에서 하영은 그녀의 몸을 더듬는 민혁의 손길을 느끼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꿈속의 민혁은 참으로 멋진 연인이였다.
그녀의 몸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구름위를 걷는것처럼 한없이 부드럽고
달콤함 그자체였다.
너무도 아름다운 꿈,황홀경에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꿈.
하영이 몸을 뒤척이며 미소를 짓다가 현실과도 같은 꿈때문에 두 눈이
번쩍 뜨여졌다.
꿈이 아니였다.
민혁의 매력적인 웃음을 지으며 하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미안...내가 잠을깨운거야?]
[으음...이런식으로 깨워준다면...얼마든지 환영이예요.]
하영이 희미하게 웃으며 두팔을 그의 목에 둘러 그의 얼굴을 잡아
끌었다.
[이런식으로 초대를 해준다면야...마다할 이유는 없지.]
민혁의 입술이 하영의 입술에 와 닿자 하영은 달콤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아이를 달래듯 입술을 갖다대었다 떼었다 하며 민혁은 하영을
너무나도 감질맛 나게 했다.
[으음...얄미워.]
하영이 민혁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어어..아퍼!]
민혁이 소리치며 옆으로 몸을 굴려 데굴데굴 굴렀다.
놀란 하영이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괜찮아요?]
하영이 옆에 누워있는 민혁을 슬쩍 건들여 보았다.
[으악!!]
민혁이 하영을 놀리며 그녀를 안고 침대에 굴렀다.
[꺄악!]
하영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민혁을 안고 넓은 침대에서 굴러다니며
재미있어 했다.
민혁도 즐거운듯 껄껄 거리며 하영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민혁의 몸을 일으켜 하영을 내려다 보았다.
민혁과 침대에서 구르며 그녀의 원피스형 잠옷이 말려올라가 그녀의
늘씬한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수줍은듯 하영이 얼굴을 붉히며 치마를 끌어내리려 했다.
[그러지마.....마치 조각품 같아...]
민혁이 하영의 자그마한 발을 잡아 올렸다.
[민혁씨!!!!]
하영이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채고 그의 이름을 다급하게 불렀다.
민혁은 섹시한 입술이 하영의 발등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발등을 시작으로 그의 입술이 점점 가느다란 발목으로 종아리로
올라오는가 싶더니 무뤂뒤쪽의 연한 살에 입을 맞추었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짜릿한 쾌감에 하영이 신음을 내뱉었다.
[민혁씨.....]
[서두르지마...천천히...당신을 음미해 보고 싶어.]
민혁의 목소리가 허스키해졌다.
그가 하영의 등을 들어올리며 그녀의 잠옷을 완전히 벗겨냈다.
비너스의 조각품처럼 완벽한 하영의 나신을 내려다 보며 치밀어 오르는
욕망에 민혁이 눈빛을 냈다.
그의 입술이 하영의 복부에 와 닿았다.
배꼽을 주위로 원을 그려가며 그의 입술이 옮겨다녔다.
하영이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복부에 살며시 갖다대었다.
민혁씨...그 속에 당신의 아기가 있어요.
하영은 하마터면 입 밖으로 말을 내뱉을 뻔했다.
민혁은 하영의 배를 쓰다듬으며 흥분으로 인해 뾰족이 솟아오른
하영의 분홍빛 유두를 입에 물었다.
하영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민혁은 계속 그녀의 가슴을 탐하면서 자신이 입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옷들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하영의 다리사이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문득 하영은 뱃속의 아기가 걱정이 되었다.
혹여 그들의 격렬한 사랑으로 아기가 잘못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영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민혁의 몸위로 올라왔다.
상황은 역전이 되어 주도권을 하영이 잡게 되었다.
하영이 긴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기며 민혁의 넓은 가슴에 입을 맞추었다.
민혁이 자신에게 한것처럼 달콤한 고문을 시작했다.
[으음...]
민혁이 괴로워 하며 몸을 꼼지락 거렸다.
자신의 몸 아래에서 무아지경에 빠진 민혁을 내려다 보는 하영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하영이 민혁의 입술에 뜨거운 키스를 남기자 민혁이 하영의 작고 탐스
러운 엉덩이를 두손으로 부여잡고 천천히 그녀를 자신의 몸으로
내려앉혔다.
그의 남성이 몸안으로 들어오자 하영이 끙하는 소리를 내며 그의
강인한 어깨를 두 손을 붙잡았다.
[민혁씨...]
[괜찮아...편안하게....긴장을 풀어...]
민혁의 말을 들으며 하영은 온몸의 힘을 빼고는 민혁이 리드하는데로
조금씩 몸을 움직여 나갔다.
잠시후 감각적인 느낌이 온 몸을 압도했다.
점점 하영의 몸짓이 빨라지며 민혁또한 그녀가 몰아가는데로 쾌락의
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오..세상에...]
민혁이 고함을 지르며 절정에 이르렀다.
하영이 힘없이 그의 몸위로 그대로 쓰러졌다.
민혁은 땀에 젖어 하영의 어깨위에 붙어있는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으스러질듯이 두 손으로 그녀를 그대로 안아버렸다.
[사랑해요.....민혂씨....]
조용한 침실에 하영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내말 들었어요?]
하영이 그에게 물었다.
[으응.]
민혁이 대답대신 그녀를 더욱 끌어 당겼다.
너에게 최고의 자리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싶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사랑한다..하영아.
#56
민혁의 생일 날 아침 하영은 정성스럽게 그의 아침상을 마련했다.
쇠고기를 넣고 푹 끓인 미역국의 냄새가 참으로 좋았다.
하영은 특별히 가족같은 기찬을 그들의 집으로 초대했다.
하영은 기찬에게도 자신이 직접 차린 따뜻한 밥상을 한번 대접하고
싶었기 때문이였다.
하영이 국을 담은 그릇을 내오자 기찬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야....정말 진수성찬인데요...잘 먹겠습니다.]
[차린게 별로 없으면서 기찬이 오라고 그랬나봐요....]
[아니요. 이정도면 정말 최대의 만찬인걸요...사장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고맙다...어서 먹자!!]
민혁과 기찬이 수저를 들어 국을 맛보았다.
하영이 눈빛을 빛내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먼저 맛을 본 민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기찬을 바라보았다.
기찬또한 맛을 보더니 이상한 표정으로 민혁을 보았다.
[왜..왜요? 맛이 이상해요?]
하영이 당황하며 자신의 수저를 들어 국을 맛보았다.
[별로 안 이상한데.....]
하영의 당황스런 표정을 보던 기찬과 민혁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 거렸다.
[맛있어...너무 맛있어.]
[뭐예요!!!]
그제서야 민혁과 기찬에게 속았다는걸 안 하영이 소리를 지르며 민혁의
어깨를 손으로 때려주었다,
민혁과 기찬은 놀라운 식욕을 보이며 금새 밥 한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기찬은 넉살좋게도 하영에게 밥 한그릇을 더 부탁했다.
[기찬아....그렇게 먹다가 탈 나는거 아니야?]
[먹고 죽은 귀신은 땟갈도 좋다고 하던데요?]
기찬의 농담에 다시 한번 그들의 집에 웃음꽃이 피었다.
민혁은 사랑스런 눈길로 하영을 바라보았다.
생일축하해요....
하영이 미소지으며 민혁에게 눈빛으로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
아침부터 시끄럽게 울려대는 벨소리에 하라는 지끈 거리는 머리를 감싸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제 정신없이 퍼마신 술때문에 새벽까지 구토를 하며 잠을 설친 하라는
두 눈이 쾡하니 들어가 있었다.
[누구세요.....]
잠이 덜 깬듯한 목소리로 하라는 문쪽으로 다가갔다.
[누구시냐니까요!!]
대답없는 방문객에 짜증이 치밀은 하라는 문을 확 열어제꼈다.
문을 열자 수염이 덥수룩한 성호가 문앞에 서 있었다.
[다..당신은....]
이미 뉴스나 신문을 통해 미령을 죽인자가 성호라는걸 알고 있었던
하라는 살인자가 자신의 눈 앞에 서 있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하라가 급히 문을 닫으려 했지만 성호가 재빠르게 하라의 머리채를 부여
잡고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열린 문은 성호가 발길질로 닫아버렸다.
[왜..왜이래요.]
하라가 머리채를 잡힌채 앙칼진 목소리로 성호에게 덤벼들었다.
성호는 그대로 하라를 소파위로 내팽겨쳤다.
[씨발..여기 까지 숨어 들어오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다..당신이 송 미령을 죽였다고 들었어요..사실이예요?]
[소문한번 빠르군.쳇.]
[이미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당신이 송 미령을 죽였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구요...왜 날 찾아온거죠?]
겁을 집어 먹은 하라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니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내가 할 일이요?]
성호가 하라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너...서 민혁이 한테 복수하고 싶지 않아?]
[무..무슨 말이예요...]
[난 서민혁때문에 살인자까지 되었어...사람까지 죽인 마당에 또하나
죽이는거 식은 죽 먹기야.그 자식한테서 제일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겠어.....어때?]
[그 사람한테 제일 소중한 것이라면......]
성호의 제안에 하라의 눈빛이 달라지며 호감을 보여왔다.
[넌 서 민혁을 얻고 ,난 그 자식한테 제일 소중한걸 없애 복수를 하고..
서로 이득있는 거래 아닐까? 강 하영. 그년하고 서 민혁을 잠시 떨어
뜨려주면 되. 하루종일 그 자식이 강하영한테 붙어있으니 도저히
접근을 할 수가 없잖아.]
[당신..그 여자를 어떻게 하려고....]
[그건 네가 알바가 아니야...그냥 모른척 하는게 너한테는 이득이야.]
솔직히 하라는 성호가 강 하영에게 무슨 짓을 하던지 상관없었다.
서 민혁만 그 여자에게서 되찾을수 있다면.......
[민혁씨와 강 하영을 떼어놓기만 하면 되는건가요?]
[그래.]
[좋아요.그대신 당신 볼 일이 끝나면 더 이상 서 민혁에게 지분거리지
말고 조용히 사라져 줘야 해요.약속 할 수 있어요?]
[서 민혁 그자식의 몰락이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나 혼자 그를 상대
하기에는 너무 벅차....그를 직접적으로 몰락 시킬수는 없지만.....
그가 가진 것 중에 한가지는 빼앗을 수 있지...]
성호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언제 하면 되는거죠?]
[기다릴 것 없어..오늘 당장에 시작하지.]
[좋아요.]
하라는 성호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하라의 손을 잡는 성호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어렸다.
서 민혁...
기다려라.
너에게 세상에서 제일 큰 고통을 안겨줄테니.
그 고통으로 평생을 서서히 죽어가게 만들어 주겠어.
***********
하영과 함께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뵙기 위해 민혁은 외출 준비를 했다.
그의 팔짱을 끼고 행복한 얼굴로 집을 나서려던 하영이 무언가 생각난듯
그의 팔짱을 풀렀다.
[잠깐 잊은게 있어요....잠깐만 기다려 줄래요?]
하영이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가갔다.
민혁은 다시한번 자신의 넥타이를 바르게 맨 다음 기찬에게 차를 대기
시키라고 연락하기 위해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들었다.
그가 플립을 열자 때마침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에 유 하라 라는 이름이 뜨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민혁은 벨소리때문에 하영이 나올까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나야.]
[민혁씨......]
수화기 너머로 힘이 없는 하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왠지 심상치 않은게 평소와 전혀 틀렸다.
[다신 전화하지마......다시는 너를 만나는 일이 없기를 바래.]
[알아...민혁씨가 날 끔직이도 싫어하게 되었다는거..그런데 민혁씨...
나 한번만...마지막으로 한번만 만나주면 안될까......]
[하라.그만해.하영이가 곧 방에서 나올거야.]
민혁이 목소릴 낮추었다.
[하영!하영!강하영!!!당신은 그 여자밖에 모르는군.....나 서울호텔
708호 객실에 있어...당신이 올때까지 기다릴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지막 길에 당신의 얼굴을 보고 갈 수 있었음 좋겠어...]
그녀의 말에 민혁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일이야...너 목소리가 왜그래...마지막 길이라니...]
그의 목소리가 점점 다급해 졌다.
[민혁씨 없는 세상은 내겐 아무 의미도 없다는걸 깨달았어.너무
늦게 깨달은게 후회돼.....당신30분내로 나에게 안오면.......
정말 당신 말 데로 이 세상에서 날 볼수 없게될지도 몰라.....]
[너..지금 무슨짓 하는거야.]
[내 시체나 잘 거둬죠.안녕]
[하라!!]
하라의 전화가 끊겨버렸다.
민혁이 급하게 그녀의 번호를 눌렀지만 이미 전원을 꺼버린 상태였다.
[젠장!!!]
민혁이 소리나게 플립을 닫으면서 소리를 쳤다.
[민혁씨!!!]
하영이 방에서 나오며 그에게 다가왔다.
[저..하영아..다음에 가면 안될까?갑자기 급하게 일이 생겨서....]
[안좋은 일이예요?]
어두운 민혁의 표정이 심각하게 보인 하영이 걱정스런 투로 물었다.
[어..회사 거래처 중에 문제가 생겼나봐...미안하다.]
[아빠가 기다리실텐데....그럼 저 혼자 다녀올게요.]
[안돼!!!혼자 다니는건 위험해....]
[기찬씨 하고 같이 갈게요...기찬씨 옆에 붙어서 꼼짝도 안할게요.]
애원하는 하영을 보며 민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기찬이랑 절대로 떨어져 있으면 안돼.집안에 들어갈때도
그와 함께 들어가...알았지?]
[응.그럴게요.어서 가보세요.급한일인데....]
[그..그래...미안..함께 나가자 밖에서 기찬이 대기하고 있을거야.]
[네.]
하영의 등에 손을 얹으며 민혁은 집을 나섰다.
하영을 기찬의 차에 태우고 보내고 나서 민혁은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서울 호텔로 급히 차를 몰아가는 민혁은 하라가 제발 어리석은
짓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랬다.
#57
서울 호텔에 도착한 민혁은 제일 먼저 호텔 중앙 홀에 있는 프런트로
달려갔다.
[수고하십니다.708호 인터폰좀 연결해 주실수 있습니까?]
[잠시만 기다리십시요.]
안내원은 708호의 객실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받지 않으시는데요...]
안내원이 전화를 끊으며 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은 점점 다가오는 불길한 생각에 다급히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저 사람 누구야? 제우스 회장 서 민혁 아니야?]
때마침 서울 호텔에 할리우드에서 영화 홍보차 건너온 영화배우를
취재하기 위해 와 있던 기자의 눈에 민혁이 띄였다.
민혁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기자는 육감적인 직업 능력으로 안내
프런트로 다가갔다.
[ 저...방금 올라간 사람과 아는 사람인데..허허 핸드폰을 제 차에
두고내렸지 뭡니까....]
[아...그러세요..지금 708호로 올라가셨는데...]
안내원이 의심없이 기자에게 민혁의 행방을 알려주었다.
[하..감사합니다..저 친구가 건망증이 심해서...]
기자는 너스레를 떨었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 멈추고,708호라고 쓰여진 팻말을 찾으며 호텔의
좁은 복도를 바쁘게 뛰어갔다.
드디어 708호란 팻말을 발견한 민혁은 객실의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민혁은 힘껏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유 하라!!문열어!!어서!!]
그가 큰 소리로 하라를 불렀다.
지나가던 한 손님이 힐끔 민혁을 쳐다보았다.
딸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스르르 열렸다.
민혁이 급히 안으로 들어서자 하라가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설마 했는데......자기가 올 줄은 몰랐어.]
하라가 유혹적인 걸음으로 민혁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민혁이 굳은 표정으로 하라가 먹다만 샴페인잔과 과일안주가 있는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줘야 하는거 아니야?]
[오늘 당신의 생일이잖아.....축하해 주고 싶었을 뿐이야.]
하라가 샴페인 잔에 샴페인을 따르고는 민혁에게 내밀었다.
또다시 어이없게 하라에게 속았다는 걸 안 민혁은 힘껏 하라가 내민
잔을 손을 쳐내었다.
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안에 있던 샴페인이 고급 카펫을 적시고 있었다.
하라는 그의 태도를 보고는 아무렇지 않은듯 어깨를 들썩이며 다시
다른 잔에 샴페인을 따라 자신이 마셨다.
[다시는...이런짓 하지마.그땐 네가 목을 맨다고 해도 달려오진 않을꺼야
넌 너에 대해 남은 일말의 동정심 마저 나에게 빼앗아 갔어.
더 이상은 너에게 휘둘리지도, 속아넘어가는 일도 없을거야.]
민혁은 하라를 무섭게 노려보고는 등을 돌렸다.
[거짓말!!당신 왔잖아...내가 죽는다는게 불쌍해서 온거잖아.
당신은 날 벗어날수 없어.내가 부르면 당신은 또 오게 될거야.]
하라가 자신 만만하다는듯 가슴을 내밀며 민혁을 쳐다보았다.
등을 돌렸던 민혁의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라의 모습을 보았다.
[똑바로 알아둬.
네가 걱정되서 온게 아니야.
너로 인해 또다시 하영이가 상처받지 않아야 하기에 그래서 왔어.
너,나, 하영이, 이제는 너의 자리를 없애기 위해,정리하러 온거야.
만약....내게 일말의 이성적인 감정마저 없었다면....
넌 내손에 먼저 죽었을거야...]
민혁의 차가운 시선이 하라의 심장을 얼려버릴듯 하라는 그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공포에 떨었다.
민혁은 몸을 돌려 문쪽으로 걸어갔다.
[나쁜새끼!!!후회하게 될거야......난 너 말고도 남자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하지만...넌 강 하영 없이는 안되잖아?]
민혁이 서서히 몸을 돌려 불안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야......]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내가 왜 죽는다고 생쇼를 벌이면서까지
당신을 불러낸 줄 알아? 맞춰봐....당신 수수께끼 좋아해?]
하라의 정서가 불안한듯 그녀는 히스테릭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민혁이 성큼 성큼 걸어와 하라의 양 어깨를 꽉 붙잡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말해.....장난하지말고...무슨짓을 벌이는거야.......]
[내가 당신을 차지 못할 바에야...그 여자도 당신을 갖지 못하게
하겠어.......최 성호.....단단히 벼르고 있던걸?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걸 빼앗아 가겠다고 했어.
뭘까...당신에게 가장 소중한건?강 하영? 아님....그녀 뱃속에
들어있는 당신의 새끼?]
[뭐?뭐라구?]
하라의 말을 들은 민혁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것처럼 순간 멍해졌다
[하영이...뱃속에.....]
놀라는 민혁을 보며 하라는 잼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그 여자가 임신한 걸 몰랐다는건 아니지?]
[몰랐어.......]
민혁이 침울하게 속삭였다.
[안됐군...내가 아니였으면 당신 새끼 존재도 모르고 그냥 저 세상으로
보냈을거 아니야?]
순간 무언가 번쩍 하며 하라의 뺨을 강하게 내리치는게 있었다.
하라는 너무도 센 힘에 떠밀려 소파에 나뒹굴었다.
하라는 민혁에게 맞은 뺨을 손으로 본능적으로 만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만약......만약...하영이나 아기한테 무슨일이라도 생기게 되면...
그땐....내 손으로 너희 둘 다 죽여버리겠어.......]
민혁은 하라를 놔둔체 객실에서 급히 빠져나갔다.
[이미 늦었어!!!이미 늦었다구!!하하하......]
하라가 민혁을 쫓아나오며 복도가 떠내려가듯 불안한 웃음을 터트렸다.
민혁은 엘리베이터가 그가 있는 층수를 지나 올라가고 있자 비상계단
쪽으로 뛰어갔다.
비상계단으로 뛰어가던 민혁은 계속 그를 주시하며 카메라의 셔터가
눌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는 뛰어가면서 급히 핸드폰을 꺼내 기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의 전화기는 꺼진 상태였다.
하느님.....
전 당신을 믿어 본 적도 기도를 해 본적도 없습니다.
그녀의 사랑을 거부한것이 죄가 된다면 그 죄에 대한
댓가로 저를 벌하신다면 그 어떤 지옥불이라도 기꺼이
뛰어들겠습니다.
그녀는 저를 사랑한 죄 밖에 없습니다.
저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많이 상처받고 아파했습니다.
이제야 겨우 그녀를 붙잡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그녀를 잃을 수 없습니다.
제발...
그녀에게 아무일도 없도록 도와주십시요.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녀에게 전해주지 못한 말이 너무도 많습니다.
도와주십시요....
***********
[오랜만에 강회장님 찾아 뵙는 거지요?]
기찬이 백미러로 하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예...이젠 건강도 많이 좋아지시고....혼자서 집 가까운 곳은 산책도
하신데요....]
[참 잘됐네요....모두가 이제 제자리를 찾아가는것 같습니다.
이젠...사모님과 사장님만 제자리를 찾으시면 되겠네요.]
기찬이 하영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냈다.
[그동안 기찬씨 고생 많았어요...고마워요.]
[아닙니다...사모님.그나저나 사장님께 아기를 가지신 일은 언제
알리실 참입니까?]
[오늘이요,오늘 저녁에 민혁씨랑 바닷가재 먹으러 가기로 했어요.
며칠전 부터 바닷가재가 무지 먹고 싶었는데....]
하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사장님께서 사모님 뱃속에 꼬마 도련님의 왕성한 식성을 맞추시려면
고생좀 하시겠는걸요....]
기찬이 껄껄대며 큰 소리로 웃었다.
[아..맞다 기찬씨 미안하지만 저 앞에 할인마트 앞에 차좀 세워주실래요?
우리 아빠가 복숭아를 좋아하시는데....사다드려야 겠어요.]
[제가 가서 사오겠습니다.]
[그러시지요.사모님은 저와 함께 차안에 계세요.]
하영에 옆에 앉아있던 민혁이 붙여준 보디가드가 하영에게 말했다.
[그럼 기찬씨가 마트에 가서 사오시고,전 잠시 차에서 내려서 기다리면 안될까요? 속이 울렁거리는게...별로 좋지 않네요...에어컨 바람때문 인가봐요..바깥 공기좀 쐬고 싶어요.]
보디가드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기찬을 바라보았다.
[그럼 사모님 차에 바싹 붙으셔서 보디가드와 함께 있으셔야 합니다.]
[그럴게요.누구 말이라고 제가 안듣겠어요? 전 말 잘 듣는 어른이라구요]
하영의 뾰로퉁한 대답에 기찬은 보디가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찬이 할인마트로 들어가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기찬이 마트를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며 하영 또한 보디가드와 함께
차에서 내려 인도쪽에 서 있었다.
약간은 따가운 햇볕이였지만 기분은 좋았다.
보디가는 하영 옆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은체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하영은 좀더 이곳저곳 구경하고 싶었지만 그녀를 위해 있는 보디가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차에 기댄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임신 소식을 듣고 기뻐할 민혁의 표정을 생각하면 하영의 얼굴엔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오늘은 민혁의 인생 최대의 선물을 받는 날이 아닐까 싶었다.
그에게 그 선물을 선사하게 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게 하영은 행복감으로
가슴이 터져 나갈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보디가드가 갑자기 몰려오는 사람들의 무리를 보고 하영에게 차에 들어가 있을 것을 권했다.
[네..그러죠.]
하영이 차에 타려던 찰나 대 여섯살 되어보이는 남자 아이가 그들을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수소를 넣어 하늘로 날라가는 풍선을 잡기 위해 아이가 깡총 발을
뛰며 앞도 보지 않은체 그대로 하영 옆에 있던 보디가드의 다리에
부딪쳐서 넘어졌다.
보디가드는 얼른 우는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어어...]
하영은 나무에 걸려있던 풍선이 다시 날아올라 차도 쪽으로 가자
풍선과 보디가드를 번갈아 보다 우는 아이를 보고는 풍선을 잡기 위해
재빨리 차도쪽으로 뛰어들었다.
마트로 걸어가던 기찬이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민혁에게 걸려온
전화가 없나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아침에 충전해 두었던 전화기가 왠일인지 방전으로 전원이 꺼져
버린 상태였다.
다시 전원을 키자 핸드폰의 액정에 불이 들어오며 음성메세지가 들어
왔다는 메세지를 알려왔다.
그는 음성 사서함으로 전화를 걸어 음성메세지를 확인했다.
[기찬아!!! 나야....최 성호...그 자식이 하영이를 노리고 있어.
내가 금방 갈테니까 경찰 부르고 하영이 잘 데리고 있어!!]
다급한 민혁의 목소리였다.
순간 기찬이 흠칫 하며 몸을 돌려 하영쪽을 바라보았다.
차도쪽으로 들어서는 하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시선이 하영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검은 승용차를 보았다.
승용차의 유리창 너머로 잔인한 웃음을 짓는 최 성호의 모습이 보였다.
[안돼.......사모님!!!!!!!]
기찬이 하영을 향해 달려가며 절규하듯 하영을 불렀다.
아이를 달래던 보디가드가 기찬을 보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곤
하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신의 손에 잡힌 풍선을 보며 웃음 짓던 하영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검은 승용차를 보았다.
최 성호.
그가 그녀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사모님!!!]
기찬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리는 찰나 날카로운 타이어 끌리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푸른 하늘의 흰 구름이 그녀의 눈속에 들어왔다.
새엄마.........
나 하늘을 날고 있는건가요.......
드디어......나비가 되어 저 하늘을 날고 있는건가요.......
눈부신 햇살에 하영이 두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주위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순간 아비규환의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보디가드는 재빨리 권총을 꺼내 몇 미터 앞에 쓰러져 있는 하영을 다시
차로 넘어서려고 후진 하는 최 성호의 차를 향해 권총을 쏘았다.
[탕!]
총소리와 함께 총알은 정확하게 차의 유리창을 뚫고 최 성호의 가슴에
정확하게 명중되었다.
그가 쓰러지며 핸들이 돌아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맞은편에서 오는
차와 다시 충돌을 하고는 건너편 인도턱을 넘어 가로수를 들이받고
전복이 되었다.
기찬은 쓰러진 하영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입은 하얀 원피스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사모님!!!]
기찬이 하영을 안아 일으켰다.
[사모님...정신차리세요....돌아가시면 안됩니다..제발...]
하영이 숨을 헐떡이며 희마하게 눈을 떴다.
피 묻은 손을 간신히 들어올린 하영이 기찬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아기....아기...기찬씨...살려줘요...제..발....아기만은....
민혁씨.....다시....아기를 잃게..할..수는 없어요...제발...
살려줘요.....]
하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모님...정신 놓치시면 안돼요...누구 구급차좀 불러주세요!!!]
기찬이 절규하며 주위사람들에게 외쳤다.
최 성호의 죽음을 확인하고 온 보디가드가 핸드폰으로 119에 신고했다.
[사모님!!]
보디가드가 하영을 만지다 그녀의 다리사이로 흔건히 고여있는 피를
보고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찬을 쳐다보았다.
[안돼...안돼....]
어느새 기찬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돼!!]
#58
기찬의 전화를 받고 뛰어온 민혁의 눈에 수술실 복도 앞에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하는 기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민혁의 걸음이 천천히 늘려지며 차마 기찬의 눈과 마주치지 못하겠다는
듯 애써 고개를 돌리려 했다.
민혁을 발견한 기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찬의 옷에 피가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그의 손이며 얼굴 목 부근에도 피는 묻어있었다.
아닐꺼야....아닐꺼야.....
민혁이 말을 잇지 못한체 고개만 흔들어 댔다.
믿을 수 없다는 민혁의 표정은 애절함 그 자체였다.
[사장님.....흐흐흑........]
기찬이 민혁앞에 무릎을 꿇으며 민혁의 다리를 붙잡았다.
[죄송합니다.......정말 죄송합니다.........]
[하영이...하영이는........]
민혁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하영의 이름만 되물었다.
[제가 지켜 드려였어야 했는데....그랬어야 했는데......]
[안돼........그럴리가.......]
민혁은 자신의 다리를 붙잡은 기찬의 손을 뿌리치고 수술실 앞으로
다가갔다.
수술실 문은 굳게 닫힌체 수술중이라는 전광판만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이럴수가 있습니까.......
그녀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절 사랑한 죄 밖에 없는 여자인데.......
왜 그녀에게 고통을 주십니까!!!!!!!]
민혁이 절규하며 그대로 수술실 문앞에 주저 앉아 흐느꼈다.
[사장님!!!]
기찬이 무릎을 꿇은체로 기어와 민혁을 붙잡고 함께 울음을 터트렸다.
절망으로 가득찬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수술실 문이 열리며 한 수술복을 입은 간호사가 뛰어나왔다.
민혁과 기찬은 벌떡 일어나 간호사를 붙잡았다.
[어떻게 됐습니까.....]
[죄송합니다.....아기는 유산 되었어요....산모도 지금 상태가 아주
위험합니다.사고로 머리쪽을 크게 다친데다가 유산하면서 출혈이
심했어요.....지금 빨리 수혈을 해주어야 합니다.]
간호사는 급하다는듯 민혁의 팔을 뿌리치고는 혈액 병동 쪽으로
뛰어갔다.
[안돼.....하영이를 만나봐야 겠어...]
민혁이 수술실로 들어가려 하자 기찬이 민혁을 붙잡았다.
[사장님 안됩니다.....]
[이거놔!!!그녀에게 할 말이 있어...늦기전에 해야해.]
민혁이 막무가내로 수술실의 문을 잡고 들어가려 했다.
[사장님!!제발....]
기찬이 눈물로 호소하며 민혁을 말렸다.
[아......아 가슴이 너무 아파.....심장을 칼로 도려내는것 같아...
기찬아....너무 아파서...죽을것만 같다.......]
민혁이 기찬을 부여잡고 어깨를 들썩이며 남자의 눈물을 흘렸다.
기찬은 민혁의 등을 도탁이며 그를 위로했다.
***********
수술이 끝난 하영은 회복실 대신 중환자실로 실려들어갔다.
뒤 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진영과 우진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하영을 보며 오열을 토해냈다.
말 못하는 우진은 울음 조차 제대로 토해내지 못하고 그저 한없이
산소호흡기에 의지한체 생사의 기로에 놓여져 있는 딸을 안쓰럽게
바라볼 뿐이였다.
[하영이는 저렇게 누워있는데....민혁씨는 어디 간거죠!!!]
진영이 기찬에게 화를 내며 민혁의 모습을 찾았다.
[이럴수 있어요!! 남편이라는 작자가 아내가 저렇게 누워있는데...
도데체 어디 있느냔 말이예요!!!]
진영이 발악하며 울음을 터트리자 옆에서 동식이 진영을 달래며
그녀대신 말을 이었다.
[도데체 어떻게 된겁니까!!!교통사고라뇨!!]
진상을 묻는 하영의 가족들에게 차마 기찬은 최성호의 일을 말할수는
없었다.
하영이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중환자실로 옮겨지자 민혁은
소리없이 행방을 감춘체 새벽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가 걱정된 기찬이 민혁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였다.
기찬은 이 상황에서 자신이라도 마음을 굳게 다잡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잘못하다간 하영이나 민혁 둘을 모두 잃을수도 있는 상황이였다.
***********
[저는 신을 믿지 않았습니다..하지만...저를 받아주신다면...
저의 죄를 고백해서 용서 받을수 있다면...그 용서를 통해...
제가 사랑하는 여인이 살아날수 있다면....신께서 제 목숨을
대신 원하신다 하시면 기껏이 신께 드리겠습니다.]
민혁의 조용한 음성이 성당을 울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커다란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민혁은 절실한 심정으로 두 손을 모았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그동안의 죄를 뉘우치고 죄를 고백하십시요]
성당을 순찰하기 위해 잠깐 예배당으로 들어온 신부가 뒤에서 조용히
민혁의 말을 받아주었다.
민혁은 뒤돌아 보지 않은체 두손을 모으고 두 눈을 감았다.
[새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데리고 들어온 아버지를 증오하고
미워했습니다.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을 하였고,제 욕심으로 인하여 아내와 제 아이의 목숨또한
잃게 하였습니다.
제 욕심으로 순결한 여자를 탐하였고,그 여인의 사랑을 모른체
하여 그녀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습니다.
그 여인이 제 아기를 가졌었습니다.
그 여인은 한없는 사랑으로 제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지만,저는
그 사랑을 거부하며 한없이 그녀를 아프게만 했습니다.
결국에 그녀역시 죽음의 기로에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체 또하나의 생명을 먼저 보냈습니다.
제가 지은 이 많은 죄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저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의 고통을 가져가 주신다면.....
제게 어떠한 벌을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제발...그녀를 살려주십시요.
제발 제곁을 떠나지 않게 해주십시요.
그녀에게 아직 해줘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녀를 제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티끌 한점조차 알려주지 못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그녀를 보낼수는 없습니다.
제발 그녀를 살려주시어 제가 그녀에게 평생을 헌신하며
저의 죄를 사할때까지 그녀가 제곁에 머물게 해주십시요...
제발....]
그의 눈에서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사랑은 늦었다고 생각할때가 바로 시작할때입니다.
둘의 사랑이 정말로 진실되고 순결하다면
주님께서 대답을 주실겁니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합니다.]
신부가 민혁에게 다가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구원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려고 성령을 보내주셨으니 교회를 통하여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59
기찬은 이틀째 중환자실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 민혁에게 다가갔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물 조차 제대로 못 넘기는 민혁이 걱정된 기찬이
민혁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어 쥬스병을 내밀었다.
또다시 거부하는 민혁을 기찬은 속상하다는듯이 쳐다보았다.
[이러시면 안됩니다.기운을 내셔야지요.....사모님도 사모님 이지만
회장님의 어깨위에 있는 제우스도 생각하셔야죠.]
[제우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야....]
민혁이 허망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꺼냈다.
[제우스란 이름 하나에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어.
아버지,송 미령,그리고 내 아기까지.하영이 마저 위험해.
그 사람들 목숨과 맞바꾼 제우스야.
난 겁이나...또다시 누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들 스스로 선택한 길입니다.자신의 것이 아닌것을 탐을 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죽음으로 뛰어든 거라구요.]
[어쨌거나 난 그들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껴.내 운명이 너무 저주스러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기운 내셔서 그들에게 보상하는 심정으로
더욱 열심히 사셔야죠.사모님을 봐서라도 더 기운 내셔야죠.
사모님께서 정신을 차리시게 되면 아기를 잃은 슬픔으로 가득하실꺼예요
회장님이 곁에서 사모님을 지켜드려야 합니다.]
[기찬아...하영이.....날 용서해 줄까?]
민혁이 눈물이 촉촉히 젖은 눈으로 기찬을 올려다보았다.
[사모님께서는 이미 용서하셨을 겁니다.]
기찬이 민혁을 안아주었다.
[강 하영씨 보호자분!!!]
중환자실의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외쳤다.
[네!!]
민혁과 기찬이 벌떡 일어나 간호사에게 달려갔다.
[환자가 의식을 회복하고 있습니다.얼른 들어와 보세요.]
[아..하느님 감사합니다.]
민혁이 기도하며 기찬과 함께 중환자 실로 들어섰다.
세균 감염을 막아주는 푸른 가운으로 갈아입고 민혁은 의사들이 모여있는
하영의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민혁을 보자 의사들과 간호사가 옆으로 길을 내주었다.
산소호흡기를 하고 있는 하영이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민혁을
바라보았다.
[하영아....하영아......]
민혁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의 이름만 불렀다.
하영이 힘겹게 두눈을 깜박이며 민혁을 향해 희미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민혁은 가까이 다가가 하영의 링겔이 꽂힌 손을 잡아주었다.
[미안해..미안하다는 말로도 용서받지 못할거라는거 알아....알지만...
고맙다...이렇게 다시 돌아와 주어서 정말 고맙다....하영아....
사랑해...정말로 사랑해.조금만 더 일찍이 내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했더라면....일이 이렇게 까지 꼬이지도 않았을 텐데....
너한테 상처만 주고 이렇게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던 나를 용서해...]
고개를 숙이는 민혁을 하영이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며 민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듯 하영이 입을 벙긋거리자 의사가 잠깐 그녀의 산소
호흡기를 떼내어 주었다.
[환자가 무슨 말을 하는군요...]
의사의 말에 고개 숙였던 민혁의 하영의 입가에 자신의 귀를 갖다대었다.
[아기....당신의 아기가...여기 있어요....]
하영이 민혁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배에 갖다대주었다.
민혁의 두 눈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하영은 자신이 아기를 잃었다는 사실을 모르는듯 했다.
하영이 인자한 미소로 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도 애써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하영의 배를 만져주었다.
하영의 두 눈이 다시 스르르 감겨버리자 민혁이 놀란 눈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잠에 들었어요.]
민혁은 안쓰러운듯 하영의 뺨을 손으로 쓸어주었다.
[아직 의식이 완전히 회복이 된것이 아니니까 좀더 환자 회복상태를
살펴봐야 겠습니다.일단은 의식이 돌아왔다는것은 한 고비 넘긴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중환자실에서 나오는 민혁은또다른 고민에 휩싸였다.
하영에게 어떻게 아기를 잃었다는것을 설명해야 할까.
일단은 그녀가 건강이 완전히 회복 될때까지 비밀로 해둬야 겠다고
민혁은 생각했다.
지금 하영이 유일하게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아기가 자신의 뱃속에
있다는 신념때문일거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경찰들이 지키고 있는 최 성호가 입원한 병실을 기찬과 함께 민혁이
찾아왔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만나봐야 한다는 생각이 민혁은
들었다.
경찰의 안내를 따라 병실로 들어선 민혁의 눈에 가슴에 붕대를 감고
누워있는 성호의 모습이 보였다.
병실로 들어서는 민혁을 본 성호가 주춤 몸을 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민혁의 분노에 찬 시선과 마주친 성호가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당신과 송미령으로 인해 난 내 아기를 잃고 아내까지 잃을 뻔 했어.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당신을 증오하고 미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미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어.모든 것을 잃고나니 미움도 증오도
모두 부질없어 지더군.당신을 용서할 수는 없을꺼야.그리고 당신을
용서하는것은 내 몫도 아니고.당신의 욕심으로 어이 없이 세상을
떠난 자들에게 용서를 구해.그것만이 당신이 살 길이야.]
뒤돌아 서는 민혁을 보며 최성호가 흐느껴 울었다.
[으으흑....]
살인자 이자 악인으로서 흘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의 통한의 눈물이였다.
[최 성호는 퇴원하는 데로 바로 구속조치 됩니다.
살인에다가 살인미수,아마 사형을 면치는 어렵다고 김 변호사가
그러더군요..]
기찬이 민혁을 쫓아오며 말했다.
[모두 나름대로의 죄값을 받고 있어...이제 남은건.......
바로 나야.]
***********
이틀이 더 지나고 하영은 드디어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녀를 지켜준 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가녀린 몸으로 생명의 끈을 꽉
붙잡은체 놀라운 회복속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하영이 일반 병실로 옮겨지자 민혁도 차츰 안정을 되찾으며 제우스로
돌아가 밀린 일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마치 커다란 비밀을 안고 있는 것처럼 하영의 앞에서는 쉬쉬
하며 무언가를 속이고 있었다.
아기를 잃었다는걸 그녀가 알기라도 한다면 또다시 그녀의 상태가
악화될수도 있다는 걱정과 염려때문이였다.
민혁은 오전중으로 모든 일을 마친다음 하영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하영이 좋아하는 백합꽃다발을 들고 웃는 얼굴로 병실문을 여는 민혁은
창밖을 멍한히 내다보며 앉아았는 하영을 보았다.
[하영아.....]
민혁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다가서자 하영의 고개를 돌려
민혁을 바라보았다.
생기를 잃고 빛을 잃어버린 하영의 눈과 마주대했다.
[거짓말이죠.......내 아기가....그럴리가 없어요.....]
이미 모든 사실을 알아차린듯한 하영을 보며 민혁은 뭐라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하영의 창백한 얼굴만을 바라볼뿐이였다.
[아기가 걱정이 되서...초음파를 하려고 해보려고 했는데.....
의사가....없대요...내 뱃속에 자라던 아기가 없어졌다고.....
민혁씨....거짓말이죠? 아니야....내가 꿈을꾸고 있는걸꺼야....
다시 잠들면.....현실로 돌아올수도 있을꺼야....]
하영이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 당겼다.
[하영아.....사실이야....모두 사실이야.....]
고통스런 민혁의 대답이 튀어나오자 하영이 몸을 일으켰다.
[거짓말....]
굵은 눈물방울이 하영의 눈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
[아직....당신한테 보여주지도 못했는데....당신 생일날 말 하려고
했는데.....정말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하영이 기가 막히다는듯한 웃음을 억지로 지었다.
민혁은 커다란 상실의 고통에 서서히 미쳐가는듯한 하영의 모습을 도저히
안쓰러워서 제대로 바라볼수 없었다.
하영은 자신의 팔에 꽂힌 링겔 주사 바늘을 떼어내고는 침대에서 내려서
민혁에게 다가가 그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꿈이라고 말해줘요....거짓말이라고 해줘요..네?]
하지만 하영은 그의 입에서 결코 나오지 못할 말이라는걸 알수있었다.
숨이 막혀왔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입만 벙긋거리며 목이 메여 말을 하지 못하며 눈물을 흘리는 하영을
민혁이 힘차게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기자 울음소리 조차 내지 못하고 흐느끼는 하영의 떨림이
몸을 갈갈리 찢는 아픔으로 민혁에게 밀려왔다.
#60
기찬과 진영,동식은 병실 밖에서 안에서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터져나오
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서로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울음소리만으로도 하영의 고통이 생생하게 그들의 가슴에 와 닿았다.
울부짖는 하영에게 민혁이 해 줄수 있는 일이라곤 그녀를 끌어안아
주는것 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민혁역시 자신과 하영사이에 있었던 아기를 잃은 상실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오직 하영의 생각때문에 미쳐 아기에 대한 감정을 추스리지 못했던
민혁이였다.
이 여자는 아기 없이 견뎌낼수 있을까.
도저히 나 만으로는 견뎌낼수 없는걸까.
민혁은 평생을 그녀만을 사랑하며 속죄하듯 살아오겠다고 결심했던
터였다.
흔들리는 그녀를 붙잡기 위해서는 하영에게 빨리 현실을 인식시키고
다독여 주는 일밖엔 없었다.
그 고통스런 방법으로 하영을 붙잡아 주어야 할 사람은 괴롭지만
그의 몫이였다.
[아이는...당신이 사고를 당할때 그때 유산 되었어.당신이 의식을
회복했을때 말해주지 않은건...아기 때문에 당신이 다시 건강이
악화될까봐 걱정이 들어서 비밀로 해왔던 거야.
하영아...지금은 당장은 견디기 힘들겠지만....아이는 다시 가지면
되는거니까....우리 편안하게 떠날수 있도록 우리의 아기 보내주자...]
그의 말에 하영의 독을 품은듯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다시 가진다 해도 그 아기는 허무하게 죽어버린 그 아기가 아니예요!
아무도 그 아기를 대신할순 없다구요!!!]
[알아...나도 너만큼 마음이 아파...견딜수가 없어...]
그제서야 하영은 자신의 이기적인 감정때문에 민혁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처음이지만 민혁은 두번이나 그의 핏줄을 허무하게 잃은것이다.
그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하영은 가슴이 아파왔다.
그를 위로 할수 없을 만큼 자신의 마음이 아픈것도 슬펐고,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또다시 예전의 슬픔을 들춰내야 하는 그의 모습도
보기 힘들었다.
***********
[한달 후]
하영과 민혁은 그들의 아기를 하영의 새어머니의 유골이 뿌려진
호수가에 함께 흘려보냈다.
아기의 유골은 없었지만 태어났을 아기를 생각하며 하영과 민혁이 준비한
아기의 신발과 배냇저고리등을 불에 태워 호수에 뿌려주었다.
어느새 무더운 여름이 거의 지나가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어
하영의 눈물이 흐르는 뺨을 차갑게 식혀 주었다.
아가야...
그동안 그 어둠속에서 얼마나 외로웠니...
제대로 된 옷 한벌 못입고 알몸으로 얼마나 떨었을까....
미안해.미안해.
너한테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수가 없어...
끝까지 너를 지키지 못했던 새엄마를 용서해 주렴.
아가야....새엄마 소리 한번 못하고 떠나기 얼마나 서러웠겠니...
할머니가 계신 그 따뜻한 곳에서 지켜봐주렴.
새엄마의 생이 다하는날 너를 만나게 되면 그때 따스한
새엄마의 품으로 널 꼭 안아줄게...
사랑한다....내 아가....
집으로 돌아와 하영은 피곤한듯 자리에 먼저 누웠다.
민혁은 거실에 나와 장식장에 있던 양주병을 컵에 기울였다.
아무리 독한 술을 마셔도 그의 괴로운 감정까진 취하게 만들지 못했다.
[언제부터 마셨던 거예요?]
어느새 잠이 깨었는지 하영이 거실로 나오고 있었다.
[어..방금.]
민혁이 급히 술잔과 술병을 뒤로 감추었다.
[할 말이 있어요.]
하영이 메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이며 그의 앞에 앉았다.
자신의 앞에 앉아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민혁은 드디어
그가 두려워 했던 말들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구나 생각이들었다.
[응...해봐.]
하영이 그의 앞에 신문을 내밀었다.
신문의 첫 장에 객실을 빠져나오는 민혁과 하라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있었고,제우스의 연인 이라는 타이틀이 함께 있었다.
민혁이 놀란 얼굴을 하며 하영을 쳐다보았다.
[하영아...이건......]
[민혁씨...제가 먼저 말할게요.]
[하영아...]
[이젠 당신을 오해하고 상처받고 혼자 슬퍼하고,이젠 그런거 하고
싶지 않아요.당신에 대한 내 사랑이 자신이 없어서,당신을 끊임없이
오해하고 나 스스로 상처를 만들어 갔던것 같아요.
이젠 그렇게 반복되는 힘겨운 사랑...너무 내겐 버거워요.
우리...잠시 헤어져 있어요. 헤어져 있으면서....서로에 대한
사랑,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며 당신만 좋다면 백지상태에서 새롭게
시작할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꼭 헤어져 있어야만 하니....]
[지금 우린 서로에게 고통만 줄 뿐이예요.당신...내 얼굴만 보면
죄책감과 상실감으로 괴로워 하잖아요.]
[헤어짐이...끝이 아니라고 말해줘...그렇다면 네가 하자는 데로 하겠어]
[끝이라고 생각할때가 시작일수도 있어요.]
민혁이 별다른 대답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에 이 집을 나가겠어요.]
[그래.]
하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방안으로 들어가자 민혁이 조용히 흐느꼈다.
if you do not love me,
(만약 당신이 날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i love you enough for both.
(제가 두 사람의 몫만큼 사랑해 주겠어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中]
#완결 새벽에 아파트를 나서는 하영의 소리가 들렸다.
민혁은 그녀를 배웅하지 않은체 자신의 있는 서재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차마 마주 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되면 그녀를 붙잡게 될까봐 그게 두려웠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민혁은 책상에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어둠이 어스름이 걷히면서 새벽이 밝아왔다.
하영이 자신의 짐 가방을 들고 아파트를 나서자 기찬이 차를 대기
시키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혁씨 모르게 오신거 맞죠?]
[네.]
기찬은 하영의 짐가방을 받아 트렁크에 실고는 자신도 차에 올랐다.
[기찬씨...다시 한번 부탁드릴게요...혹시라도 민혁씨가 저의 행방을
물으면....절대 모른다고 해주세요.저희 집 식구조차 모르게 해주세요]
[식구에게까지 말씀 안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들속에 당분간 생활하고 싶어요.
저희 집에는 제가 차차 연락을 따로 드릴게요.]
[꼭 이렇게 떠나셔야만 하는지...전 이해 할수가 없습니다.도저히
회장님을 용서하실수 없는겁니까?]
다소 원망스러운듯한 기찬의 음색이였다.
[그가 잘못한건 하나도 없어요...다만...저나 그를 위해 잠깐의
생각할 시간을 주자는 것 뿐이예요.나중에 웃으면서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
***********
하영이 떠난 뒤 민혁은 하영의 생각을 접어 둔 체 무섭게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가 크나큰 시련을 겪었다는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직 기찬만이 쓸쓸이 민혁의 곁은 지키며 그를 지켜볼뿐이였다.
하영이 없는 아파트를 들어설때 마다 밀려드는 미칠듯한 그리움도
차차 민혁에게는 익숙해 지기 시작했다.
하영 몰래 그녀를 멀리서라도 지켜보고자 했던 민혁의 바램은 그녀가
행방도 알리지 않은체 깜쪽같이 사라져 물거품처럼 변해버렸다.
그가 할수 있는 일이라곤 그녀를 무작정 기다리는 일 뿐이였다.
민혁은 일부러 하영과 함께 했던 그들의 침실을 모른체 하며 자신이
침실로 쓰고 있는 작은방으로 들어가갔다.
쥐죽은 듯이 고요한 거실에서 테이블 위에 민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자신의 휴식을 방해하는 핸드폰을 받기 싫다는듯 인상을 찌푸렸으나
혹 하영의 전화일까 싶어 핸드폰을 받았다.
[네..서민혁입니다.]
그의 말에 상대쪽에선 망설이는듯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영이니........]
[나야.하라.]
민혁은 더 이상 할말이 없다는듯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러자 상대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끊지마...할 말이 있어....이번이 마지막이야.다신 당신앞에 나타나지도 전화도 하지 않겠어.]
민혁이 그녀의 말에 대꾸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내가...무슨 짓을 저질렀는지...얼마나 끔찍한 여자인지...잘 알고
있어....용서해 달라는 말할 자격조차 없는것도 알아....강 하영씨
소식듣고 그때서야 내가 얼마나 큰일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고...
나 자신이 너무도 무서웠어.그동안 내가 당신과 하영씨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당신 날 죽이고 싶도록 미울꺼야....미안해..정말 미안해.]
[끊자.더 이상 할말 없어.]
[나! 떠날거야....미국으로 떠나.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꺼야.
그러니까 당신이나 강 하영씨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거란 이야기야.
이런 말할 자격 없지만........민혁씨....행복해야해.
그리고.....영원히 날 용서하지마.미안해.]
하라는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래...모두 그렇게 제각기 제 자리를 하나둘씩 찾아가는구나.
나만 이렇게 홀로 덩그러니 남아있게 되는구나.
민혁은 씁슬한 생각이 들어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거실에 들려있는 사진속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하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넌.....지금 어디 있는거니.....날 그리워 하고는 있는거니...]
#에필로그
[7개월 후-소록도 (小鹿島) ]
벌써 계절이 두번이나 바뀌고 소록도에는 봄이 찾아들었다.
봄을 맞이하는 소록도는 섬에 자생하는 이름모를 들꽃들이 만개하여
소록도를 찾는 관광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의 모양을 닮았다 하여 소록도라 불리는 이
작은 섬은 예전에는 한센병(나병환자)환자들이 모여 산다 하여 일반
사람들이 꺼려하는 곳이였다.
하지만 경치가 빼어나고 기후가 따뜻하여 점점 외부사람들의 발길이
닿으면서 많은 발전을 거듭해 나고 있는 섬이였다.
국립 소록 병원의 옆에 있는 중앙 공원에서 한 여인이 흰 원피스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공원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녀는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소록도의 높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가씨!!!]
환자복을 입은 한 나이든 노인이 여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그의 소리를 못 듣는것 같자 노인은 더욱 큰 모션을 취하며
다시 여자를 불렀다.
[하영 아가씨!!!]
그제서야 눈부신 봄날의 햇살속에 하영의 고개를 돌리며 한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영은 자전거를 몰아 노인에게 다가왔다.
[아저씨!!왜 나와 계세요.]
[그냥 산책좀 하려고 나왔지요....집에서 편지가 배달되어 왔던데...]
[정말이요?]
[예....강회장님이 직접 보내신 편지 같던데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하영은 눈빛을 내며 그대로 병원으로
향해 자전거를 몰아갔다.
자전거를 병원 건물 옆 모퉁이에 아무렇게나 세워놓고 하영은 그대로
병원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가 민혁의 집을 나와 소록도에 온지도 어느새 7개월이 다 되어갔다.
소록도는 강회장이 태어나 청소년기까지 살아온 고향이였다.
강회장은 한센 환자들을 위해 작은 요양 시설을 지어 기증했는데,
몇번 하영은 강회장을 따라 이곳에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온적이 있었다.
하영은 아버지가 태어나고 살아온 이곳에서 긴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한센 환자를 전문으로 보는 국립 소록 병원에서 환자들을 곁에서
돌봐주며 봉사일을 하며 나름데로 민혁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 삭이고
있었다.
[편지 온거 있다고 해서요.]
[여기요.]
간호사가 웃으며 하영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하영은 편지를 들고 병원 밖에 있는 벤취로 단숨에 내달았다.
편지 봉투를 뜯고 2장 분량의 편지지를 펼쳤다.
아직은 손이 불편해 다소 글씨가 많이 흐트러져 있었지만,하영은
아버지가 직접 쓴 편지를 무리없이 읽어나갔다.
[사랑하는 내 딸 하영이에게]
하영아...
내가 누워있는 이 방에도 어느새 봄은 찾아왔구나.
문득 네가 있는 소록도의 봄이 생각났단다.
봄이 되면 소록도는 그야 말로 이름모를 꽃들의 천국이였는데...
몸은 건강하게 잘있는지.
항상 잘 있다는 네 편지를 읽으면서도 아비로서 걱정이 끊이지
않는건 어쩔수가 없구나.
며칠전 민혁이가 다녀갔다.
이제는 어느정도 너도 마음을 추스렸겠다 싶었고,
더 이상 민혁이가 불쌍해서 너의 행방을 모른다고 잡아 뗄수는
없었단다.
하영아....
그리움이 길어지면 병이 되기도 한단다....
강회장의 편지는 진영이 아기를 가졌다는 새로운 소식들로 이어졌다.
아기...
새로운 생명이 또다시 잉태되었다.
이제는 허전한 자신의 배를 슬며시 만져보았다.
그리움이 길어지면 병이 된다는 아버지의 말이 하영은 가슴깊이
남았다.
처음 소록도에 도착하고 나서 하영은 며칠간은 민혁에게 달려가고픈
마음때문에 몇번이고 섬을 빠져 나가는 배에 오르려고 했는지 모른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의 대한 그리움은 차츰 사라지고 대신 그의 대한
새로운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알게된 사랑.
하영은 벤취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는 가야 할때이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연인에게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하영은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크게 투명한 웃음을 지었다.
처음 소록도에 들고 왔던 가방 그대로 챙겨들고 하영은 다음날 아침
소록도를 떠나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배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하영은 큰 숨을 들이쉬며 그동안
자신이 머물렀던 소록도를 다시한번 자신의 눈속에 고이 간직했다.
언젠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다시 이 섬을 찾겠다고 하영은
결심하며 부두에 들어오는 배를 향해 씩씩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배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려서고 있었다.
봄을 맞이해서 소록도에 놀러오는 관광객들로 작은 부두는 금새
북적거렸다.
하영은 배에 오르기 위해 배안의 사람들이 모두 내리기를 기다렸다.
하나 둘 내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하영의 두눈이 동그랗게 커져갔다.
선실 안쪽에서 한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너무도 낯잌은 모습.
그동안 미치도록 그리웠던 꿈속에서도 애타게 그녀가 찾던 사람.
귀신을 보듯 넋이 나간체 자신을 쳐다보는 하영을 본 민혁또한
표정이 굳어지며 걸음을 멈추고 하영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두 연인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수많은 말들을 눈으로
나누고 있었다.
하영이 천천히 배쪽으로 다가갔다.
하영의 옆에 서 있는 짐 가방을 본 민혁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해......]
민혁이 하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혁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하영의 얼굴이 환해지며 그가 내민
손을 덥석 잡고 배에 올라탔다.
민혁은 세게 하영의 손을 잡아끌며 바로 하영을 안아올렸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민혁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하영은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
[보고싶었어요....이제 당신을 사랑할 용기가 생겼어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당신을 믿고 따라갈 용기....
함께 어려움을 헤쳐갈 용기....]
[사랑해...사랑한다. 하영아...내 생이 다하는 날까지..널 사랑한다.]
[사랑해요....]
그들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뱃고동이 소록도의 부두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
[1년후]
[자자 여기 봐야지!!아이 착하다...]
사진기사가 한 손에 장난감 딸랑이를 들고 열심히 흔들어대고 있었다.
사진기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카메라 쪽을 보려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빠가 아기를 안아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사진기사의 주문에 민혁이 허리를 숙여 사랑하는 아내의 품에 안겨있던
자신과 똑 닮은 아기를 안아 올렸다.
아빠의 품에 안기자 아기는 금새 갓 나온 앙증맞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좋아요! 자 새엄마 아빠 붙어 서시고!!찍습니다. 하나, 둘, 셋!!]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아이가 놀란 듯 울음을 터트렸다.
[어어..울지마..착하지.]
민혁이 아이를 자신의 가슴에 안고 아기를 달래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영은 사랑스런 눈길로 민혁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았다
[와..이거 멋진 사진이 나오겠는걸요. ]
[하하..전 아직도 이 날개가 거추장스러워서 말입니다.]
민혁이 자신의 어깨에 매달린 하얀 날개장식을 민망한 듯 바라보았다.
[왜요...정말 잘 어울리는 걸요....]
[정말 두분이 잘 어울리시는 군요.]
자신의 등에 달린 날개를 잡아뜯는 아기를 보며 사진기사가 너털웃음
을 지었다.
10시간이 넘는 산통 끝에 새엄마의 애를 태우며 태어난 민혁의 아이는
민혁과 하영의 이름을 한자씩 따서 서 민하 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두분 이서 따로 사진 한장 찍으시죠..이거 작품하나 나오겠는데요.
두분이 미남 미녀이시니 사진빨도 잘 받겠어요.]
기사가 고갯짓을 하자 조수인 듯한 여자가 다가와 민혁에게서 아이를
받아 안고 뒤쪽으로 빠져주었다.
민혁은 하영을 다정스럽게 끌어 당겨 그의 옆에 세웠다
[자...서로 사랑스런 눈빛으로 마주보세요!!좋습니다.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이틀뒤 스튜디오의 유리 장 앞에는 커다란 홍보용 사진이 걸려있었다.
순백색의 눈이 부신 아름다운 날개가 돋은 두 사람이 사랑스런 눈빛으로
서로를 갈구하듯 바라보는 모습 이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들이 교차하는 듯 했다.
아름다운 사진 앞에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길이 멈추어 졌다.
사진 속의 주인공을 설명이라도 하듯 사진 틀 밑에는 사진의 제목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달려 있었다.
[에로스의 연인]
***********end***********
.
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에로스의연인.txt
오전 1:45
No comments
피드 구독하기:
댓글 (Atom)






0 개의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