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소설은 일반인이 거북해 할수 내용이 담겨 있을수 있습니다. BDSM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되돌아가기를 누르기를 바랍니다.
그린비-실 버 엔 젤
유난히 푸르렀던 여름의 하늘.
푸르른 녹음이 우거져있던 숲속에서 ... 은빛천사를 보았다.
금방 하늘나라에서 내려온것 같던 천사 ...
은빛천사가 내마음에 날아들었다 .
"어떤가? 여름방학동안 하기에는 멋진 일자리네. 이만한 일자리 없어."
백발이 희끗희끗한 교수가 제안하는 일자리를 들은 윤주는 꽤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제 갓 스무살의 대학생 정윤주. 대학생이 되고나서 맞는
첫번째 방학이었다. 친구들과 여행이니 뭐니 해보고 싶은건 산더미
였지만 윤주에게 그런것들은 애시당초 먼나라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동생이 셋이나 되는 빠듯한 중산층인 집안에 대학학비를 달라고 요구
할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어떻게든 자신의 학비며 용돈은 스스로가
알아서 해야하는 윤주였다. 그래서 이번 여름방학은 윤주에게 있어서는
돈벌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그래서 교수에게 일자리를 알아보게 된것이었다.
"어허, 정윤주! 이런 기회가 흔한게 아냐. 그냥 자네는 휴가나 즐기면서
별장에 머물면 되는거 아닌가. 유림이 녀석 공부나 틈틈히 좀 봐주고.
놀며하는 일이야. 더구나 두달 아르바이트에 오백이나 주는데가 어디 있겠는가?"
교수에 말에 윤주는 곤혹스런 표정이었다. 평서부터 자신을 좋게 봐주던
사람좋은 노교수가 특별히 추천하는 일자리였다.
더구나 보수도 엄청나다. 단지 걸리는게 있다면 두달동안 꼼짝없이
강원도 별장에서 생활해야 한다는것이었지만 교수의 말대로 그냥 휴가를
즐긴다고 생각해버리면 그것또한 그리 큰 문제가 될것같지는 않았다.
"교수님, 그런데 왜 강원도 별장에서 과외를 해요? 그것도 대학생
과외선생한테 오백씩이나 준다니. 그 강유림이란 학생이 대단한 학생인가봐요?"
"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강대사네 외동아들 녀석이네. 강대사는
직업이 대사다 보니 해외로만 근무를 다니고 또 유림이녀석 친새엄마는
유림이 어릴때 돌아가셔서... 지금 새새엄마가 있긴 하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런가? 친자식이 아니니 아무래도 사랑은 못주는가 보더군.
그 새새엄마는 강대사 따라 해외로 같이 나가고 지금 한국에는 유림이 혼자 있는셈이지."
"와...대사요? 대단하다. 그런데 ... 왜 아들은 혼자 한국에 두고
떠나요? 그것도 외아들을."
"유림이가 몸이 안좋아. 그래서 해외로 데리고 다닐만한 사정이 못되지.
유림이는 학교도 휴학하고 한 이년전쯤부터 그 별장에서 살고있어.
그래도 걔가 영특해서 얼마나 똑똑한지 가르치기도 쉬울걸. 어때, 자네가 하겠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대며 뭔가를 생각해보던 윤주가 베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스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정도로 어려보이는
동안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긴 생머리가 아직도 여고생같이
풋풋하게만 느껴졌다.
"네, 제가 해볼게요. 언제 출발하면되죠?"
"언니 좋겠다~ 이 더운데 우아하게 강원도 별장에 휴가간다니!"
이제 대학생인 윤주의 동생 희주는 언니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럽다며 연신 윤주의 속을 뒤집어놓고 있었다. 자식이 넷이나 되는
윤주네 집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첫째인 윤주는 이제 대학생.
둘째인 희주가 이제 대학생. 그아래로 두 동생은 아직도 초등학생
이었다. 시끌벅쩍한 분위기 속에서 짐을 챙긴 윤주는 트렁크에 옷을
꽉꽉 눌러담고는 신경질적으로 트렁크 뚜껑을 쾅 닫아버렸다.
"부럽냐? 부러워? 퍽이나 부럽겠다. 이 좋은 여름방학에 놀지도 못하고
돈벌러 가는게 어디가 부럽냐? 잘봐둬. 너도 나중에 내꼴날테니까."
희주의 머리를 한대 가볍게 쥐어박은 윤주는 입을 씰룩거리는 희주를
뒤로하고는 화장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헐렁한 반바지에다가 셔츠 한장을 받쳐입고 캡모자를 눌러쓴 모습이
영락없는 대학학생같았다.
자신의 모습이 꽤 만족스러운듯 피식 웃은 윤주는 침대위에 놓인
트렁크를 들고 방을 나섰다.
"새엄마, 아빠! 나 출발한다!!!"
거실에 나온 윤주가 꽥꽥 소리를 질러대자 안방에서 인상좋은 윤주의
부모님이 걸어나왔다. 놀지도 못하고 학비벌로 가는 딸이 안쓰러운듯
미안한 눈빛으로 윤주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을 모를리 없는 윤주는
씩씩하게 웃어주었다.
"에이, 뭘 그렇게 쳐다봐. 좋지뭐. 이 더운데 난 강원도 별장에 딱
가서 멋지게 지낼텐데. 헤헷..혼자 가려니 이거 미안하다."
"얘는...새엄마가 정말 미안해 죽겠다. 우리딸 학비도 제대로 못줘서.
그래, 가서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기도 하고 그러면서 다녀와. 전화도 자주하고. 알았지?"
"그래, 우리 윤주. 아빠도 우리딸 전화 기다리고 있으마."
"언니! 잘다녀와- 올때 우리 선물도 사와야돼!"
초등학교 3학년인 막내 인우는 큰옆집누나가 마치 어디 관광이라도 가는듯
선물까지 사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막내의 그 깜찍한말에 거실에 모인
가족은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섯명의 식구들에게 한마디씩
인삿말을 건네받은 윤주는 양손에 하나씩 트렁크를 들고서는 씩씩하게 대문을 빠져나왔다.
골목을 빠져나갈때까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동생들에게
환하게 웃어준 윤주는 큰길로 나오자 마자 택시를 한대 잡아탔다.
버스를 타고 역까지 가볼 생각이었지만 더운 날씨에다가 트렁크가
워낙에 무거워 어쩔수 없는게 안타까운 윤주였다.
한참 낮시간이라 별로 밀리지 않고 택시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그 특유의
씩씩한 발걸음으로 역안으로 들어섰다.
"강릉가는 기차표 한장요."
강릉가는 기차표를 끊어서 손에든 윤주는 나즈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정말 강원도로 떠나는 일만 남은것이다. 한때 꿈꿔봤던 여름날의
MT며 미팅이며 그런건 다 물건너가 버렸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캡모자를 벗은 윤주는 서둘러 기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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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역에 내린 윤주의 얼굴에는 조금전까지 가득했던 불만스러움은
온데간데 없고 온통 환한 미소로 가득했다. 강원도 촌구석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상상이 완전히 틀렸다는걸 깨달았다. 너무도 아름다운
녹음이 펼쳐진 곳이었다. 공기부터가 서울의 탁한 공기와는 틀린것
같은 느낌이 대번에 느껴져왔다.
"와우, 이거 멋진데. 이정도면 지낼만도 하겠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강릉역 안으로 들어선 윤주는 트렁크를 잠시
땅에 내려두고 호주머니에 꼬깃꼬깃 접어서 넣어두었던 쪽지를
펴보았다. 교수가 가르쳐준 별장 위치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였다.
강릉은 처음인데다가 사람이 드문곳에 위치한 별장을 찾아간다는게
윤주에게는애시당초 무리였다. 어쩔까 고민하던 윤주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쪽지에 적힌 번호를 꾹꾹 눌렀다. 몇번의 신호음끝에 핸드폰
너머로 중년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여보세요?]
"아..안녕하세요. 전 과외선생님으로 별장에 가게 되있는 정윤주라고 합니다."
[아! 과외선생님요. 저희도 전해들었어요. 오늘 오신다고 하시더니 지금 어디세요?]
"지금 여기 강릉역인데 아무래도 저혼자는 찾아가기가 힘들것 같아서요.
죄송하지만 별장 위치좀 상세하게 가르쳐 주실래요?"
[처음 오신분이면 찾기 힘들거에요. 음...보자...아! 제가 강릉역으로
사람을 보낼께요. 한 30분쯤 뒤면 그쪽으로 사람이 갈꺼에요. 서울 가 4580 차가 오면 그걸 타고 오세요.]
"감사합니다. 조금있다 뵈요."
기사까지 보내주겠다는건가? 이정도면 꽤 대우도 괜찮은걸.
뿌듯한 마음에 쿡쿡 웃음을 터트린 윤주는 대합실 의자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역안을 훝어보았다. 몇몇의 오가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정말 한적했다. 아직 본격적인 여행철이 시작되려면 조금 이른감이
있는 때이고 더구나 평일이라 더 한산한것 같았다.
그렇게 한 30분쯤을 앉아 기다리자 한 남자가 바쁘게 역안으로
뛰어들어와 누군가를 찾는듯 두리번 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도 저 남자라 자신을 데리러 온 사람임을 알수있을것 같았다.
"여기요! 여기에요."
윤주가 손을 번쩍 들며 소리치자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짓던 남자도
윤주가 누군지 알아차렸는지 인자하게 웃으며 윤주쪽으로 걸어왔다.
인상이 퍽이나 좋은 중년남자였다.
"아이고, 정윤주 선생님이시죠? 제가 늦진 않았는지..."
"아니에요, 늦기는요. 딱 30분만에 도착하셨는걸요. 데리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제 일인데 감사는요. 얼른 가십시다. 이건 제가 들어드릴께요."
남자는 대합실 의자위에 놓인 윤주의 트렁크를 번쩍 들고는 종종
걸음으로 역을 빠져나갔다. 잠시 멍하게 그남자를 쳐다보던 윤주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그의 뒤를 따라 차에 올랐다. 윤주의 짐을
뒷좌석에 밀어넣은 그는 신나게 차를 몰았다.
뭐가 그리 흥겨운지 그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좋은일 있으세요?"
"네? 아.. 좋은일은요. 그냥 기분이 참 좋습니다. 오랜만에 우리
유림도련님 선생님으로 젊은분이 오셔서 좋네요. 우리 도련님 이제 덜심심하시겠어요."
우리 도련님이라는 그의 말에 어딘가 따스함이 묻어있는것 같았다.
젊은 선생님이 왔다고 이렇게 기뻐하는걸 보면 그동안 나이든 선생님들만 왔었나봐?
대수롭지 않게 그의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웃어준 윤주는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서울에서는 볼수없는 풍경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푸른 산의 모습과 여유롭게 하늘에 걸려있는 정말 새하얀 구름.
"와- 여기 정말 대단해요. 지금쯤 서울은 정말 북적댈텐데 여긴 다른
세계 같네요."
"그렇죠? 여기서 한 한달만 살면 서울가기 싫어지더라구요. 여기가 훨씬
사람사는 맛이 느껴지는데 아니겠습니까."
별장에 도착할때까지 윤주는 그렇게 기사와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이름은 김승현이라고 했다. 원래는 강대사의 전용기사
였는데 그가 해외파견을 나가며 자신은 한국에 남아 유림을 돌보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한눈에 봐도 참 순박하고 정많은 사람이었다.
별장으로 들어서는 길은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었다.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자동차가 산길을 한 10분쯤 달리고 나서야 푸르른 나무들
사이로 동화속에나 나올법한 예쁜 별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흔히들 말하는 전원주택풍으로 지어진 별장이었는데 그보다 훨씬
아기자기하고 예쁜 건물이었다. 그리고 그 별장을 둘러싼 풍경또한 일품이었다.
"정말 예뻐요! 전 이런집은 영화에나 나오는 집인줄 알았어요."
김기사를 따라 별장으로 들어서면서도 윤주의 입에서는 쉴세없는
감탄사와 칭찬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겉도 멋졌지만 별장안은
더더욱 윤주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온통 원목으로 장식된 실내는
따뜻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둥근 모양으로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나있었고 널찍한 거실의 한쪽벽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통유리 창문 너머로 숲속의 모습이 한눈에 펼쳐지고 있었다.
"아이고, 선생님 오셨네요."
인기척이 들려오자 주방에서 뭔가를 하고있던 여자라 반갑게 거실로
달려나와 윤주의 손을 덥썩 잡고 연신 웃어만대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윤주는 대충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창문에서 눈을떼지 못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까 전화받으셨던 분...맞으시죠?"
"제목소릴 기억하시네요. 전 도련님 돌보고 있는 박은숙이라고해요.
그냥 편하게 불러주시면 된답니다."
"아..네. 저...그럼 강유림군은 어디있죠?"
"유림도련님요? 산책 나가셔서 아직 안오셨는데...아마 한 일이십분
내로는 들어오실꺼에요. 여기에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시원한 아이스티 한잔 타드릴테니."
윤주를 거실 쇼파에 앉힌 그녀는 조금은 호들갑 스럽게 다시 주방으로
달려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뭔가를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다.
멀뚱하게 쇼파에 앉은 윤주는 테이블이며 티비며 그런것들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아무리 봐도 너무 마음에 드는 창이었다. 마치 숲속을 그려놓은 한폭의
그림으로 벽면을 가득 채운듯한 느낌이 절로들었다. 마침 오후 6시쯤의
오후 햇볕이 내리쬘 시간이라 나무들 사이로 은은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런 풍경사이로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한사람의 인영이 흐릿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아직 너무 멀어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사람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윤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사람이 윤주의 시야에 확실히 들어왔을때. 윤주는 심장이
덜컥하는 기분이었다.
새하얀 피부가 너무 인상적인 소년이었다. 유독 하얀 피부에 대조되는
까만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거 드시면서 기다리세요. 도련님이 올시간이 됬는데 ...
아! 저기 오시네요!"
테이블에 아이스티를 내려놓은 은숙은 유림이 별장문을 열고 들어서자
부리나케 유림에게로 달려가 마치 일곱살난 어린애를 다루는양 그를
대했다. 날씨가 덥지요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쉴세없이 말을 건네며
그녀는 유림을 윤주 앞으로 데리고 왔다. 역시나 창밖의 그 소년이
강유림이었다.
멀리서 봤을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윤주의 시선은 천천히 유림의
모습을 뜯어보고 있었다. 약간 길다는 느낌이 나는 새까만 머리칼과
그와는 참 대조되게 피부는 마치 새하얀 눈이 내린것같았다.
몸이 안좋다고 하더니 그래서 그럴까 ...? 어떻게 남자가 저렇게 흴수있을까?
속으로 무수히 감탄사를 내뱉으며 시선을 살짝 위로 올린 윤주의 눈에
유림의 손이 들어왔다. 저런걸 곱다고 하는것이리라. 정말이지 여자
손보다도 선이 더 고울것같은 유림의 새하얀 손에 윤주는 피식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상상했던것과는 참 다른 모습이었다. 강릉으로 오는 기차안에서 계속
강유림이 어떤 학생일지 그려보던 윤주였다. 윤주의 상상속에 강유림은
키는 훤칠하게 크고 미남형의 남자였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서있는
그는 상상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앳되보이는 얼굴과 윤주보다 조금 더 클것같은 키.
그렇다고해서 여자같이 곱상하게 생긴 얼굴은 또 아니었다.
쌍꺼플없이 커다란 눈매와 날렵한 턱선은 남자같았지만 또 선홍빛의
입술은 여자같기도하고.
"안녕? 네가 강유림이지? 난 방학동안 널 맡게될 정윤주라고해."
윤주가 활짝 웃으며 유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유림은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들고는 윤주를 찬찬히 살피고 있을뿐.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쪽...몇살이죠?"
"응? 나? 난 올해 스무살. 유림이는 올해 열여덟이라고 들었어.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좋고 윤주옆집누나라고 불러도 좋고. 유림이 편할대로 불러."
"그러죠. 정윤주씨."
'정윤주씨' 라는 극히 사무적이고 딱딱한 호칭에 윤주는 조금 얼굴을
찌푸리고는 유림을 향해 내밀었던 손을 다시 접었다.
첫눈에도 알수있었다. 유림은 그다지 윤주를 달가워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서늘한 그의 눈빛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다른이가 이런 태도를 취했다면 윤주는 분명 불쾌했을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그사람을 무시하고 돌아서 버렸을테지만 이상하게도 유림에게는
불쾌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목소리 때문일것이다. 한마디 한마디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글쎄 ... 색으로 표현하자면 한없이 맑은 물빛이라고 해야할까?
참 맑은 목소리였다. 그의 외모와도 닮아있는 목소리.
어리고 맑아보이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목소리또한 그랬다.
"그래, 유림아. 난 그냥 유림이라고 부를께. 그래도 되지?"
"마음대로. 그럼 전 이만."
윤주를 향해 고개를 살짝 목례를 한 유림은 돌아서서 천천히 이층계단을
올라가 자신의 방문을 세게 쾅 닫아버렸다. 멍하게 그런 유림을 올려다
보던 윤주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은숙을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유림이가 ... 절 별로 안좋아하나봐요."
"아휴, 도련님도 참. 그게 아니라 .... 유림 도련님이 원래 사람을
좀 .. 가리시는 편이라. 선생님 불쾌하시진 않으시죠? 원래는 참 착한
분인데 ... 친한사람한테는 저런분이 아니에요. 이해해주세요."
워낙에 미안해 하는 그녀의 태도에 윤주는 괜찮다며 몇번이나 그녀를
향해 웃어주었다. 실제로 그렇게 불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두달동안 함께 지내야할 상대가 이처럼 마음에 든다는것이
말이다.
이런 맑은곳에서 오래살면 유림이 처럼 되는걸까?
산보다도 맑아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보다도 맑은 ...
천사의 목소리 같은 목소리를 가진 그사람. 도저히 싫지가 않았다.
사람을 대하는 그 사무적이고 딱딱한 태도가 조금 걸리긴 했지만.
"선생님은 어떤방 쓰실래요? 여기 방에 여섯갠데 안쓰는방이
세개랍니다. 이층에 방 두개랑 일층방 하나가 있는데 마음에 드는
방으로 쓰세요."
"음...유림이 옆방 비었나요?"
"도련님 옆방요? 비어있긴 한데 ... 그방보다는 일층방이 더 넓고
전망도 나을텐데..."
"아니에요. 일단 유림이랑 친해져야 될것같으니까 유림이 옆방으로
할게요. 전망이야 뭐 여기서 보이는 전망이 다 멋진걸요."
방문을 닫은 유림은 방문에 기대서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 강릉 별장에서 지낸지도 벌써 삼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대학교를 휴학하고 이쪽으로 옮겨왔고 그 이후로는 학교에
나갈수도 없었다.
태어났을때부터 몸이 약하다는말을 듣고 자라고 또 잔병치례또한 많이
하며 자란 유림이었지만 본격적으로 몸이 나빠지기 시작한건 초등학교
3학년 부렵이었다. 한창 뛰어노느라 정신없을 그무렵에 유림에게
'대동맥판막증' 이란 듣기에도 생소했던 병이 찾아왔다.
호흡이 곤란해져오고 가끔씩 열살짜리 어린애가 견디기에는 죽을만큼
힘겹기도 한 고통이 뒤따르는 끔찍한 병앞에 열살짜리 꼬마 강유림은
꼼짝할수 없이 당할수 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에 관한 합병증
으로 '심장천식' 이라는 병까지 같이 오고 나서는 유림으로써는 학교
마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유림에게는 어렸을적 기억 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게 병원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공을 차며 즐겁게 뛰어놀 시간에 유림은 항상 새하얀
병원벽을 마주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 과정에서 새엄마를 잃고 철저하게
외롭게 자란 유림이었다.
아버지가 있긴 했지만 항상 일로 바쁜 그였고 가정적인것과는 거리가
먼 강대사와는 가족다운 말도 몇마디 나눈적이 없었고 강대사는 다른
여자와 재혼한 이후로는 유림에게 큰 관심을 두지않고 있었다.
그런 유림에게 가족이라고는 어린 유림을 쭉 돌봐온 유모 은숙과
김기사밖에는 없었다.
대학교 2학년때 병의 악화로 학교를 휴학하고 이 강원도 별장으로
내려온이후. 강대사는 꼬박꼬박 많은 액수의 생활비와 가정교사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러나 유림에게 그런것은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형식뿐인 가족.
일년에 한두번 볼까말까한 아버지라는 존재는 유림에게는 다가서기
힘들고 딱딱한 존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가정교사' 란것도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그냥 건성으로
대충대강 유림과 몇달을 때우고는 더이상은 별볼일 없다는듯 훌쩍
떠나가곤 하는 사람들 이었다. 그들이 원하는건 강대사가 지급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과외비였지 유림이 아니었다.
그런 아주 형식적인 만남. 잠시 스쳐지나가고 나면 외로움만 더 커지는
그런 사람들의 방문이 이제는 아주 지긋지긋했다. 더구나 이번에 보낸
여자는 겨우 스물밖에 되지 않은 대학생이라니. 안봐도 뻔한일이었다.
머리칼을 쓸어넘긴 유림은 긴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 털썩 누워서 눈을
감았다. 귓가에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기분좋게 들려왔다.
유월중순의 더운 날씨에도 이곳은 그렇게 덥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곳이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여름바람에 상쾌함까지 느껴지는 그런
오후였다.
유림은 더이상 새로운 가정교사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는듯 잠시
표정을 찌푸렸다가 곧 얼굴을 베게에 파묻고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오후의 햇살이 잠든 유림의 위로 부숴져 내리고 있었다.
#. 실버엔젤 - 산들바람같은...
유림의 방옆에 있는 자그마한 방안에 들어선 윤주의 입에서 나즈막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항상 동생들과 북적거리는 한방을 써온 윤주에게는
혼자서 방을 쓸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나는 일이었는데 이방은
윤주의 마음에 쏙 들었다.
유럽풍으로 난 창문너머로 나무들이 우거진 모습이 보이고 방안은
전체적으로 밝은 파스텔톤으로 꾸며져 있었다.
윤주에게는 스위트룸보다 더 좋게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싱글벙글
연신 웃어대며 윤주는 트렁크에서 이것저것 짐들을 꺼내 정리해나가기
시작했고 은숙은 그런 윤주를 갸우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금까지의 선생님들과는 확연하게 틀린 아가씨였다. 나이부터가 그랬다.
여지껏 과외선생님은 이십대 후반. 또는 삼십대 초반의 어른들이 오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갓 대학을 입학한 신입생 선생님이다. 더구나
어떻게 보면 유림보다도 더 어려보이기도한.
"이방이 좋으세요? 지금까지 선생님들은 다들 일층방을 쓰시던데..."
"일층방요? 거긴 너무 커서 혼자쓰기는 썰렁해요. 여기가 딱 좋은데요?
좁다고 해봐야 제방보다 훨씬 넓어요. 더구나 혼자 쓸수도 있구요."
혼자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짐정리를 마친 윤주는 기지개를 한번
크게 펴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온통 초록으로 뒤덮인 풍경이 마음속까지 맑게 정화시켜줄듯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정말이지 다른나라에 온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풋, 이거 새엄마랑 아빠한테 정말 미안해 지는데?
나만 좋은데서 여름을 보내게 생겼으니..
윤주는 아랫층에서 식사하라는 고함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그렇게
창밖만을 내다보고 있었다. 식사시간을 알리는 고함소리에 윤주는
간편하게 옷을 갈아입고는 후다닥 아랫층에 있는 식당으로 달려
들어갔다. 식탁에는 유림과 은숙. 그리고 김기사 세명이 윤주를
기다리고 앉아있었다.
"죄송합니다~ 이거 제가 제일 늦어버렸네요."
쑥스럽게 웃은 윤주는 유림의 앞쪽인 자신의 의자에 앉아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잔뜩 배가고픈 윤주앞에 차려진 밥상에는 야채 샐러드와
간단한 몇가지 음식만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처음받는
밥상에서 반찬 투정을 할수도 없는 상황이라 윤주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수저를 들었다.
식사하는 동안에도 유림은 한번도 고개를 들지 않고 묵묵히 자기
밥그릇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한마디도 없이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사를 맛있게 하는것도 아니었다. 밥알을
세는듯 밥그릇을 몇번 깨작거려본 유림은 야채샐러드에 몇번 손을
댔다가 수저를 탁 놔버렸다.
"유림아, 그거 먹고 되니? 더먹지."
불쑥 꺼낸 윤주의 그 한마디에 세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윤주쪽으로
쏠렸다. 머쓱한 윤주는 괜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살짝 유림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짓던 유림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원래 이렇게 먹어요. 그럼 이만 일어날께요."
유림이 싸늘한 태도로 식탁에서 일어서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리고 나자 윤주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변해 있었다. 딴에는 친해져
보려고 건넨말에 유림이 냉담하게 반응하자 여간 서운하고 속상한게
아니었다.
이정도면 따뜻하게 말해줄법도 하건만 유림은 윤주를 똑바로 쳐다봐
주지도 않고 있었다.
"저...선생님.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도련님이 원래 식사는 저렇게
밖에 안하세요."
매끼니마다 저렇게 먹고 산다고? 윤주는 거의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림이 왜저렇게 말랐는지 대충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원래 몸이 좋지 않은데다 식사도 이정도로 밖에 안하니 저럴수 밖에.
"괜찮아요~ 제가 뭐 초면부터 너무 많은걸 간섭했나보네요. 그럼 저도
이만 일어날게요."
유림의 뒤를 따라 식탁에서 일어난 윤주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이대로 몇달을 지낼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건 두달간
윤주는 유림의 과외선생님으로 이곳에 온것이었고 그 임무를 다하자면
일단 유림과 친해지는게 급선무였다. 유림의 방문앞에서 숨을 가다듬은
윤주는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유림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윤주는 입술을 꼭 깨물고는 유림의 방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밤하늘을 내다보고 있던 유림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윤주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왜 함부로 들어와요?"
"노크했는데 대답이 없길래. 일단 허락도 없이 들어온건 내가 미안.
근데 있지 우리 잠깐만 얘기하면 안될까? 나 너한테 할말도 있고
그런데."
참 넉살도 좋은 여자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허락도 없이 남의 방에
들어닥치고서는 싱글싱글 웃어가며 말을 걸어온다는것이.
유림은 할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창가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빤히 윤주를 올려다 보았다.
어디 할말있으면 해보라는듯한 태도의 유림의 모습에 윤주는 피식
웃고는 유림의 맞은편인 유림의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먼저 할말은 ... 우리 수업이야기야. 일단은 내가 너한테 수학이랑
영어를 가르칠거거든. 그러니까 수업은 음 ... 언제가 좋을까?"
"좋을대로."
짧막한 대답에 윤주는 울컥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미소를 잃지않고
밝은 표정으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응? 그래..그럼 수업은 낮에는 더우니까 하지말구 저녁먹고 이시간대에
하자. 정확하게는 8시부터 10시까지. 너무 긴가? 아니다, 이정도는
되야 뭘 공부하지. 뭐 혹시 열시부터 자거나 하는건 아니지?
시간 괜찮지?"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유림이 피식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유림이
한마디를 하면 윤주는 열마디 스무마디를 늘어놓고 있었다. 더구나
가르친다는 그말에 유림은 웃지 않을수가 없었다.
지겹도록 찾아와대는 가정교사들과 삼년을 넘게 보낸 유림이었다.
그런 유림은 이미 보통 대학학생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수학이나
영어쪽에서는 윤주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모자랄 실력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토록 당당하게 자신을 가르치겠다는 윤주의
태도에 웃어버리고 만것이었다.
그런 의미를 알리 없는 윤주는 일단은 유림이 웃자 자신도 덩달아
웃어버렸다.
"그래. 그럼 수업은 그때하고 우선 기본실력부터 알아야 하니까 내일은
기본 테스트부터 해보자. 우리 내기하나 할까? 기본테스트해서 네가
80점 이상 받으면 내가 유림이 네가 원하는걸 하나 들어주고 80점이
안되면 유림이가 내부탁하나 들어주기로."
윤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어려운 문제들을 잔뜩 내서
유림이 도저히 80점을 못맞게 만들어 놓고 유림에게 자신을
'윤주옆집누나'라고 부르라고 시킬 예정이었다.
그 제안에 유림은 잠시 윤주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희미하게 입가에
미소를 걸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림의 눈에 윤주는 도저히 대학생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말투나 행동
같은게 자신보다도 어린 아직 소녀티를 벗어내지 못한 십대 철부지
같아 보였다. 그리고 방긋방긋 잘 웃어대는게 어린아기 같기도했다.
쉽게 말하자면 '선생님'의 느낌보다는 차라리 '동생'의 느낌이 더
크게 와닿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웃음과 밝은 행동들이 마치 산들바람같았다.
더운여름날 불어오는 시원한 한줄기의 산들바람.
#. 실버엔젤 - Green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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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 입을 떡하니 벌린 윤주는 도저히 믿을수 없는지 유림의 시험지를
보고 또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 있었다. 계획했던대로 어려운
문제만 고르고 골라서 만든 테스트지를 유림에게 당당하게 내밀었건만
유림은 불과 이십분만에 모든 문제를 다 풀고는 윤주에게 시험지를
내밀었다.
적어도 한시간은 끙끙대야 반이라도 풀것이라 예상했던 윤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시험지를 받아들고 시큰둥한 태도로 매겨나가기 시작
했지만 시험지를 다 매기고 나서는 경악스런 표정이 되버렸다.
세상에 ... 이건 있을수도 없는일이야! 내가 얼마나 고민해서 낸
문젠데..세상에나.. 백점이라니. 미쳤어 ... 미쳤어 정윤주!
이건 꿈이야!
단 한문제도 틀리지 않고 다맞은 시험지. 유림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윤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윤주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유림을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하하...유림이 공부 ..되게 잘하는구나. 기본실력이 .. 장난이
아닌데. 뭐..약속은 약속이지. 내가 유림이 부탁하나 들어줄께."
"정말 뭐든지 들어줘요?"
그물음에 잠시 움찔한 윤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자신이
해버린 약속이니 이제와서 내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할수 있는거라면 들어주지."
"그럼 이걸로 해요. 수업하는것 이외에 나한테 관심 끊어요. 어차피
여기 돈벌로 온거잖아요. 수업만 하면 되는거니까 그 외에는 서로 얼굴
볼일 없으면 좋겠네요."
유림의 앞에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온 윤주는 괜한
방문에게 화풀이를 하는듯 세게 방문을 닫고 방에 들어와서는 한참을
씩씩거리며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세상에 .. 건방져도 건방져도 저렇게까지 건방진 녀석이 세상에 있다니!
첫인상부터 뭔가 차갑고 냉철해 보이기는 했지만 유림이 이정도일줄은
몰랐었다. 수업이외에 관여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니.
그건 내가 싫단말이야?
자존심이 푹 푹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았다. 뾰루퉁한
표정의 윤주는 이리저리 방안을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그냥 침대에
주저앉아 버렸다. 어떻게 유림에게 다가서볼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저렇게 다가오지 말라고 잔뜩 방어를 하는 녀석에게 무슨수로
다가간단 말인가?
고요한 숲속에 위치한 별장이라 방안은 윤주의 새근새근한 숨소리와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풀벌레 소리로 가득차 있었다.
고요함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고 있는 윤주의 귓가에 음악선율이
들려왔다. 유림의 방에서 들려오는듯한 그 음색에 윤주는 침대에서
살짝 일어나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직접 연주하고 있는듯한 청명한 피아노 음색이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유림의 방 한쪽구석에 있던 피아노 한대가 떠올랐다. 그럼 이건
강유림이 연주하는소리? 의외네. 그녀석이 피아노도 칠줄안다니.
곡명은 알지 못하지만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던 선율이었다. 어딘가
슬픈듯 하면서도 맑고 또 맑은듯 하면서도 애달픔을 담고있는 음색이
유림을 닮아있는 곡이었다.
초여름의 밤. 조금은 무덥던 그날에 윤주는 그렇게 한참을 유림의
피아노 곡소리에 취해있었다.
"유림아, 좋은아침!"
잠에서 깬채 부스스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던 유림은 언제 일어났는지
벌써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윤주의
모습에 흠칫 놀라며 조금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윤주를 쳐다보았다.
윤주가 이곳 별장에 온지도 벌써 일주일째. 지난 일주일동안 조용하던
별장은 윤주 덕택에 꽤나 시끄러워져 있었다. 은숙과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잠시도 조용히 있지를 않고 시간만 나면 유림만 보면 졸졸 따라
다니며 말을 건내는 윤주 덕택에 유림은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뭘 이렇게 일찍 일어나요? 더 잘줄알았는데."
"일찍이라니, 벌써 8시가 넘었는데. 이때쯤이면 딱 일어나 줘야지.
오늘 날씨 되게 좋아. 그치?"
"그런것 같네요."
시큰둥한 유림의 대답에 윤주는 잠시 시무룩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용기를 낸듯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아줌마가 그러시던데 유림이 너 산책나가는거 좋아한다며?"
"그런데요."
"그럼 나랑같이 산책나갈래? 오늘 날씨가 산책하기 딱 좋은날씨잖아."
도대체 이 여자는 자존심이 없는걸까 아니면 성격이 너무 좋아고
해야하는걸까. 일주일째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는데도 기세가 꺾이기는
커녕 날이 갈수록 더 씩씩해져만 가고 있었다. 당장에 싫다는 대답을
내뱉으려던 유림은 입을 다시 다물고 천천히 윤주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자세히 쳐다본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뭐 꽤나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어깨보다 살짝 더 아래로 내려오는 생머리와 살짝
속쌍꺼플 진 시원스럽게 큰 눈매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유림의
가슴을 두근거리게했다.
"그럼 같이 가는거지? 우리 아침밥먹고 출발하자. 난 이산에 난 산책로는
하나도 모르니까 네가 소개해줘. 얼른 밥먹자."
유림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윤주는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해버리고는 쪼르르 식당으로 달려가버렸다. 멍한 표정으로 그런
윤주의 뒷모습을 쳐다본 유림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여러모로 사람 귀찮게 만드는 여자였다. 과외를 하겠다고 나서는것
부터 시작해서 사생활 간섭에다가 이제는 마음대로 산책까지 결정해버려?
하지만 유림도 싫지만은 않았다. 휴학이후로 처음 만난 유림 나이
또래의 사람이 윤주였다. 심장병이라는 몹쓸 녀석 덕택에 친구하나
제대로 사겨보지 못한 유림은 친구는 필요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 왔지만 그래도 가끔씩 드는 외로움을 감출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여자친구 같은건 아예 생각도 해본적이 없는
유림이었다.
그런데 윤주의 환한 웃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고 말걸기도 쑥스러운 그런 느낌.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 감정이었지만 윤주가 온 첫날부터 유림은 쭉 그랬다.
하지만 이 모든게 그동안 또래를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유림은
생각하고 있었다.
#. 실버엔젤 - 산책
유림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나선 윤주는 연신 환호성을 질러대며
뭔가를 쫑알댔다. 유림은 자신이 왜 이런 안내를 도맡아야 하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다고 느꼈지만 별말없이 윤주에게 자신이 즐겨
찾는 산책로를 소개시켜주고 있었다.
여러개의 산책로 중에서도 유림이 특히 아끼는 오솔길이었다.
한두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조그마하고 구불구불한 길이었지만
경사도 거의 없고 평지에 가까운 길목이 심한 운동을 해서는 안되는
유림이 다니기에 적당한 코스였다. 더구나 그 길옆섶에 피어있는 여러
꽃들이나 나무들. 여름이면 시원스런 물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조그마한
시냇물같은건 유림이 무척이나 아끼는 모습들이었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도시와는 전혀 달라보이는. 마치 다른 세계에
와있는 착각까지 들게하고 있는 주변 풍경에 윤주는 가슴속 깊은곳까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또 서울에서 자란 윤주는 이런 한적산 산을
접할기회가 거의 없었다. 지리산이다 설악산이다 몇번 놀러다닌적은
있었지만 이 산에 비할게 아니었다.
알려지지 않은. 조그마하고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이산에는
깃들어 있었다.
"와, 유림야! 대단하다. 이거 완전히 식물원이 따로없네.
별나무가 다있어."
'유림아' 라는 말이 그렇게 정답게 들릴수가 없었다. 유림은 윤주의
뒷모습을 보며 아주 옅지만 따뜻하게 미소지어보았다. 삼년동안을
유모와 김기사. 두사람과만 지내왔다. 가정교사가 수없이 찾아오고
병원 의사들도 볼일이 꽤 있긴했지만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없었다.
유모나 김기사는 항상 '도련님' 또는 '유림도련님'으로 자신을
불러주었고 가정교사들은 '유림군' 내지는 '유림학생' 으로 자신을
불러줬었다.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준다는게 ... 이런 느낌일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수 있을것 같은 기분. 내이름이 다른사람에게
불려질때..저런 느낌이구나.
맑게 울리는것 같은 느낌이 ... 드는구나.
산책로를 한바퀴 빙 도는동안 윤주는 이꽃 저꽃을 들여다보며 향기도
맡아보고 꽃이름이 뭔지 또는 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유림에게
귀찮을 정도로 물어댔다.
유림은 간간히 짜증서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나름대로는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여서 설명해주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읇는다고
했다. 산속에서만 근 삼년을 살다보니 유림은 저절로 식물이름에는
도가 터있었다. 더구나 항상 다니는 길목에 핀 꽃이며 나무들이야
유림에게는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한것들이었다.
"유림이 너 진짜 똑똑하다. 내가 뭐 가르칠것도 없겠는데."
윤주가 건낸말에도 유림은 아무 대답없이 그냥 묵묵히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말수가 꽤 적은. 아니 많이 적은편이었다. 가끔 건네는
말에나 대답해주고 그외에는 일체 말을 하지 않는 유림.
사람을 많이 대해보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내가 어느학과 다닐것 같아? 그거 아직 모르지? 맞춰봐~"
윤주는 어떻게든 유림과 친해져 보려 부던히 노력중이었다. 태어나서
싫다는 사람 붙잡고 이렇게 많은 얘기를 건네본건 또 처음이었다.
질렸다는듯 윤주를 쳐다본 유림이 뭔가 생각해보는듯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의미를 알수없는 웃음을 입가에 씨익 머금었다.
웃을때 한쪽 입꼬리가 약간더 올라가게 미소짓는 유림의 표정이
꽤 마음에 들었다.
잘 웃지 않는 애지만...웃으면 저렇게 멋진데. 좀 자주 웃지.
"유아교육학과."
"...유아교육학과? 틀렸어~ 내가 어딜봐서 그렇게 보여? 내가 유치원
선생님하면 아마 아무도 나한테 애 안맡길껄. 쿡, 나한테 맡겨놔봐-
한달만에 애 엉망될거다. 난 영문학과다녀. 안어울리지만 뭐 어쨌든
난 영문학과생이라구."
S대 영어영문학과라. 공부 꽤나 했나보네.
유림의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피어올랐다. 윤주의 저런 분위기는 꽤
마음에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도 친구 대하듯이 편안하게 대해줄수
있는 성격. 저런걸 흔히들 사교성이 좋다고 말하는거겠지?
그점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유림아, 그럼 넌 꿈이뭐야? 너 공부 무지 잘하니까 꿈도 높을것
같은데."
그 질문에 유림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누구도 유림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유모조차도. 심장병이라는 시한폭탄같은
병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유림에게 '미래의 꿈' 이란걸 물어본다는걸
사람들은 다들 꺼려했고 그래서 어떻게든 그 질문은 피하려고
노력했다.
유림 자신도 물론 그랬다. 누군가가 그런걸 물어온다면 다른 이들처럼
흔쾌히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싫어서 '꿈' 따위는 잊고살았다.
아니, 꿔보지도 않았다.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여자가 누굴 놀리는건가?
하지만 윤주의 눈을 본 순간 그런 화는 누그러들어버렸다.
그 눈빛에는 유림을 놀려보겠다거나 조롱한다는 기색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궁금해 하고 있는것 같다.
바보같은 여자군 ... 해야될말 해야되지 말아야 할말도 구분 못하는...
"생각해본적 없어요. 그런거 저한테는 사치죠. 모르세요? 언제죽을지
모르는 병안고 사는 사람한테 그런건 사치고 욕심이에요."
윤주는 그제서야 아차 싶은지 굳은 표정으로 유림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유림은 이미 싸늘하게 굳은 표정이었고 윤주는 마냥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래, 유림이는 환자였지. 심장병 환자...
하지만 왜 꿈을 꾸면 안되는걸까? 죽는다는 법은 없는거잖아.
살수도 있는거고 원하는걸 이룰수도 있는건데 ...
꿈이 사치고 욕심이라니.
"왜 그게 사치야? 꿈꾸는데 돈드니? 그냥 한번쯤 생각해 볼수도 있잖아.
거창하게 큰게 아니라도 뭐 작은거라도 말야. 지금 내 꿈은 너랑
친하게 지내보는 거거든. 더 크게 보자면 음... 나는 동시통역사가
되고 싶고 빨리 아기 새엄마가 되고싶고. 이런게 다 꿈이지뭐 별다른건가."
"그쪽이랑 나랑은 다르죠. 그쪽은 ... 잠들기 전에 내일아침에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해본적 있어요? 오늘밤이 마지막이 아닐까.
이런생각. 해본적 없죠? 그렇다면 당신은 몰라요. 그게 어떤 마음인지.
그런 마음가지고 꿈을 가진다는게 얼마나 미친짓인지."
어떻게든 친해져보려 건넨말이었는데 유림은 정말 불쾌한지 표정을
냉철하게 굳히고는 윤주를 스쳐지나 조금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왔던길을 되돌아가 버렸다.
유림을 뒤따라 가려던 윤주는 그냥 걸음을 멈추고 유림의 모습이
숲속에서 사라질때까지 그자리에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큰 실수를 해버린것 같았다. 유모가 유림에게는
말조심할게 많다고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 그걸 깜빡해버리다니.
하지만 유림의 말이 뇌리속에 박혀서 떠나질 않았다.
그럼 유림아 ... 넌 잠들기 전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잠드는거니?
내일아침에 ... 눈뜰수 있을까? 내가 내일까지 ... 살수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일단 살아있구나
라는것에 안도하고 ...밤이면 또 불안해하고.
그렇게 ... 살고있는거니?
가슴이 알싸해져왔다. 아직 어린 유림이었다. 윤주 자신도 겨우
스물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지만 유림은 그런 윤주보다도
두살이나 어린. 겨우 열여덟의 한창나이인 소년이었다. 그런 유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산다니. 그런 두려움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니.
애달픈 시선으로 유림이 사라져간 곳을 바라보고 서있던 윤주는
그렇게 한 십분쯤을 숲속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터덜터덜 별장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실버엔젤 - 별가루가 쏟아지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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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윤주의 조심스러운 노크소리에도 유림은 아무대답도 하질 않았다.
문앞에서 몇분쯤을 서성거리던 윤주는 더이상은 못기다리겠는지
빼꼼히 문을 열고 유림의 방안을 들여다 보았다. 벌써 해가 져서
깜깜해진 밤이었는데 유림의 방에는 불조차 켜져있지 않았다.
"유림아, 수업해야지."
유림을 부르며 방안에 들어선 윤주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을 무렵.
침대에 누워있는 유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침대옆으로
다가간 윤주는 힐끔 유림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은빛으로 쏟아져 내리는 달빛을 받아서일까. 하얀 유림의 피부가 더
하얗게 빛나고 있는것만 같았다. 사람이 들어와도 모르고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차갑고 냉정한 유림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피식 웃은 윤주는 들고 들어온 교재를 탁자위에 얻어두고 유림의
침대 옆에 있는 스탠드에 불을 켰다. 은은한 오렌지빛 조명이 방안을
밝히고 침대위에 잠든 유림의 모습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조금 헝클어진 머리칼과 긴 속눈썹에 윤주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유림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여자도 아닌 녀석이 ... 곱게도 생겼네.
속눈썹 긴거좀봐. 와, 성냥개비 얻어놓으면 안떨어 질정도로 길다.
와, 손봐. 웬만한 여자손도 저 손은 못따라가겠다.
유림을 깨우려고 침대 옆으로 다가간 윤주는 자신이 그쪽으로 다가간
사실도 잊어버리고 유림을 쳐다보는데만 열중해 있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본적이 없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이십년. 길지는 않지만 나름대로는 강산이 두번 변한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에 잘생겼다면 잘생긴 남자들을 수도없이 보아왔다.
항상 텔레비젼을 틀면 나오는 연예인들. 아니면 길가다 마주치는
남자들. 혹은 학교 선배나 친구. 그렇지만 한번도 남자에게는 관심이
가질 않던 윤주였다. 아무리 조각같이 잘생긴 남자라도 윤주에게는
그냥 시큰둥한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유림에게는 조금 관심이 갔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을
묘하게 끌어당기는 매력을 유림은 가지고 있었다. 아직 그 관심이
그냥 호감인지 아니면 더 발전한 감정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윤주가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며 다시 시선을 유림의 얼굴쪽으로
돌렸을때 곤히 잠들어 있던 유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듯 하더니
윤주가 자리를 피할세도 없이 유림이 번쩍 눈을 떠버렸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윤주의 얼굴이 나타나자 유림은
놀란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휘둥그레진 눈으로 윤주를 쳐다보았다.
"뭐..뭐해요? 자는데 들어와서."
"응? 수..수업하려고 들어왔지. 그래, 수업!"
"그럼 깨우지 왜 사람 자는걸 쳐다보고 있어요? 이상한 취미네."
유림의 말에 윤주는 더이상 대꾸할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뻣뻣한 걸음으로 테이블에 다가가 애꿎은 교재만 폈다
접었다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켠 유림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윤주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시선을 교재에만 두고 있었다.
아직도 낮의 일때문에 기분이 상해있는지 차가워 보이는 유림의
표정에 윤주는 괜시리 더 미안해 지고있었다.
잘때는 그렇게 예쁜 녀석이 ... 날개만 딱 달면 천사라고 해도
될것같은 애가 왜 눈만 뜨면 이렇게 차가워 지는걸까?
조금만 웃어도 훨씬 멋져보일텐데.
커다란 눈을 꿈뻑거리며 유림을 힐끔힐끔 훔쳐보던 윤주가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려 사탕몇개를 꺼내서 유림 앞쪽으로 내밀었다.
교재를 읽어보고 있던 유림은 윤주가 불쑥 내민 사탕몇개에 놀란듯
윤주를 쳐다보았다.
노란색. 빨간색. 초록색.
색부터가 현란한 알사탕들이었다. 대체 이걸가지고 뭘하자는거야?
"이거 먹어. 내가 화해의 의미로 주는거니까. 아까 낮에는 있지
미안했어. 내가 실수한것 같아. 화 풀었지? 아직까지 화나있는거 아니지?"
어린애를 달래는것도 아니고 사탕 몇개를 내밀고는 화를 풀라고?
정말이지 정윤주 다운 발상에 유림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지만 윤주는
뭐가 좋은지 그런 유림을 향해 수줍게 씨익 미소지어 주었다.
유림은 뭐라고 하는 대답대신 윤주가 내민 세개의 사탕중 딸기 사탕을
하나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레몬 사탕을 집어들어 윤주 앞으로
내밀었다.
"먹어요. 난 하나만 먹음 되니까."
"그럼 화 푼거지? 응?"
"........................"
유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만 봐도 알수 있었다.
조금은 누그러진 듯 한 표정에 윤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유림이 준
레몬사탕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상큼한 레몬향이 기분좋게 느껴졌다.
"근데 유림아 있지 ... 이건 주제넘은 참견일지도 몰라. 네 말대로
난 네 기분을 다 알수가 없잖아. 근데 있지 난 꿈은 ... 사치가
아니라고 생각해. 유림이 너도 꿈이란거 .. 미래란거 가질수 있는
거잖아. 네가 못할게 뭐있어? 며칠밖에 안봐서 모르지만 너 똑똑하고
바른애니까 못할거 하나도없잖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지말구.
난 네가 꿈을 꼭 가졌으면 좋겠다. 뭐 내말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도 좋지만."
그말만 던지고 윤주는 시선을 교재쪽으로 돌려 오늘 진도나갈 부분을
큰소리로 읽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유림의 귀에는 윤주의 큰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조금전 윤주가 한 말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사치가 아니라고 ... 가질수 있는거라고 ... 꿈을 ... 가지라고.
누구도 해준적이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난 .. 이말을 듣기를
원했던걸까? 누군가 나에게도 미래라는게 있다고. 꿈이란걸 가질수
있고 그걸 이룰수 있을거라고 말해주기를 무의식 중에는 바라고
있었던걸까.
윤주가 해준 그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한바탕 울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윤주 앞이었기에 유림은 눈물을
감추려 눈에 잔뜩 힘을 준채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는 영어교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유림이 시선을 돌려 윤주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창밖의 밤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여름밤의 하늘. 칠흑같이 어둡다기 보다는 어슴푸레한
희미한 남색빛을 띄고 있는 밤하늘에 오늘따라 별이 많아보였다.
공기 맑은 곳이라 항상 별이 잘 보이곤 했지만 오늘은 기분탓일까.
유독히 별이 더 많아보이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부숴지는 별빛아래로 보이는 윤주의 모습에 몇년만인지
모르게 미소가 저절로 피어올랐다. 억지로 짓는 미소가 아닌 ..
마음에서 우러나서 짓는 미소. 그래, 윤주 덕택에 몇년만에 따스한
미소를 지을수 있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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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에 침대에서 일어나던 유림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심장의 고통에 이를 꽉 깨물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가슴이 꽉 조여오면서 아파오고 갑자기 숨쉬기가 곤란해 지는 증세.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찾아온 이 끔찍한 고통에 유림은 두려움이 더
크게 와닿았다.
가뿐 숨을 들이마시며 식은땀만 흘려대던 유림이 있는 힘을 다해 침대
옆쪽에 있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쳤다. 실상 유림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지만 이런 갑작스런 상황이 있을걸 대비해서 가지고있는
물건이었다.
0번 버튼을 꾸욱 누르자 몇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은숙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유림은 입술을 꽉 깨물고 몸을 더 잔뜩
웅크렸다. 이제는 심장을 죄여드는 고통이 조금전보다 한층 더
커져있었다.
"유모 ... 의사불러 ... "
힘겹게 그 한마디만을 내뱉고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유림은
더 커져만가는 고통에 이불을 꼭 끌어안았다. 아무리 입술을 깨물어
봐도 ... 버텨봐도 견디기 힘든 고통은 어찌할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분쯤 뒤. 유모가 헐레벌떡 뛰어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유림은 눈앞이 흐릿해짐을 느꼈다.
유림덕택에 조용하던 별장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놀란 유모가
유림의 방으로 뛰쳐 들어와 눈물을 쏟으며 난리였고 김기사는
의사를 모시러 간다며 헐레벌떡 차를 몰고 강릉 시내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뒤 별장에 도착한 의사는 일단 응급처치를 마치고 나서는
씁쓸한 표정으로 뒤에 선 세사람을 쳐다보았다.
"심장발작입니다. 심장천식 증상으로 찾아오는건데 일단 생명에
위험을 줄만한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환자가 고통이 심할텐데 ..
그래서 일단 진통제와 수면제를 같이 주사했으니 오후쯤 지나야
깨어날겁니다. 약은 꼭 먹이셔야 합니다. 한달에 두번씩은 검진하러 오셔야하구요."
의사는 한무더기의 약봉지와 링겔병 몇개를 남겨두고는 다시 진료
가방을 챙겨서 별장을 떠났다. 이렇게 의사가 온다해도 해줄수 있는
치료는 고작 이런것이 전부였다. 그를 배웅하고 들어오는 은숙의
눈가에는 눈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이런 심장발작은 자주 일으키는
유림이었고 이제는 익숙해 질만도 하지만 그래도 눈물이 났다.
저 어린 나이에 ... 마음껏 뛸수도 없는. 학교조차 포기하고 이런
산속에서 안정을 취해야하는 유림. 그리고 몸서리 쳐질만큼의 약들.
그 모든게 보는이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윤주
역시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유림이가 ... 많이 안좋은가요?"
".....선천성 심장병이세요. 거기다가 심장천식까지 합병증으로 오시는 바람에 .... "
"수술 하면 낮는다던데 ..."
수술이면 뭐든지 다될거라는듯한 윤주의 말투에 은숙은 쓴 웃음을
지었다. 벌써 세차례나 심장 수술을 받은 유림이었다. 가슴을
세번이나 가르고 다시 꿰매고. 하지만 나아지는게 없었다. 이제는
심장이 약할대로 약해져서 수술을 다시 함부로 할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 그녀의 설명에 윤주는 뭐라 대꾸할말을 잃어버렸다. 약해보이는
유림이었다. 창백한 피부와 남자치고는 너무 가는 팔목이나...
하지만 저정도 였다니 ... 의학발달이니 뭐니 하도 떠들어대서
수술이면 다 되는줄 알았는데 ... 그것도 아니네 ...
"많이 놀라셨죠? 가서 좀 쉬세요. 얼굴이 많이 안좋으세요."
"유림도련님 지켜야죠. 제가 안하면 누가해요..."
"제가 할게요. 유림이 옆에는 제가 있을테니까 가서 쉬어요.
아주머니가 건강하셔야 유림이도 잘 돌보죠."
은숙은 그래도 윤주가 못미더운지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윤주의
등살에 못이겨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은숙을 들여보내고 긴 한숨을
내쉰 윤주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유림의 방에 들어섰다.
침대위에는 팔에 링겔바늘을 꼳은 유림이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잠들어 있다기 보다는 약기운을 빌어 고통을 덜고있다는 표현이 더
옳을듯 싶었다.
유림아 ... 그게 그런거였니? 잠잘때 ... 두렵다던 네 말이 ...
이런거였구나 .. 보는 나도 두려운데 .. 가슴이 조마조마한데
넌 ... 어떨까?
몇년동안을 그 두려움 속에서 잠들고 눈뜨고 ...
유림이 너 ... 어떡하니 .. 불쌍해서 ... 안되서 어떡하니 ...
유림을 안지는 겨우 보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동안 유림은
윤주에게 참 냉정하고 차가운 아이였다. 그런데도 가슴이 너무
아파왔다. 창백한 유림의 얼굴. 그리고 링겔바늘.
단지 연민이라 하기에는 곤란한. 그보다 더 가슴을 아려오게 하는
그 느낌이 윤주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유림의 침대맡 의자에 앉은 윤주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 유림의 손을 살포시 쥐어보았다.
차가웠다. 마치 얼음장마냥 차가운 손을 윤주는 두손으로 꼭
감싸쥐어 주었다.
열여덟이란 나이. 그때 난 정말 평범한 대학학생 이었는데.
그냥 공부하라면 공부하고 친구들과 수다떨고 복도 뛰어다니고..
가고싶은 대학이 있어서 나름대로 이것저것 꿈도 꿔보던 ...
그런데 유림아 .. 너 .. 너무 힘들겠다...
너무 ..... 아프겠다 ...
긴 여름의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무렵. 유림은 의식을 되찾았다.
눈을 떴을때 윤주의 모습이 보이자 잠시 눈을 크게 떴던 유림은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다가 얼른 다시 누우라고 이불을 덮어씌우는
윤주때문에 다시 침대에 누웠다.
팔에 꽂힌 주사바늘 .. 이것만봐도 알수있었다.
그 빌어먹을 심장발작이 다시 찾아왔구나. 그리고 ...
이렇게 눈뜬걸 보니 ... 난 운좋게도 아직 살아있구나.
"유림아, 뭐 좀 먹어야지. 내가 가져올게."
윤주는 유림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주방으로 뛰어내려가 은숙이
끓여둔 전복죽을 가지고 올라왔다. 이제 자기가 할테니 이만 가서
쉬라는 은숙의 말을 끝내 뿌리치고 윤주는 자신이 쟁반을 가지고
유림의 방으로 올라갔다.
왠지는 모른다. 그냥 유림옆에서 그를 지켜보고 싶었다.
그가 너무 안쓰러워서일까. 옆에 있어주고 싶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윤주가 쟁반을 들고 방안에 나타나자 유림은 고개를 베게사이에
파묻어버렸다. 윤주를 도저히 똑바로 바라볼수가 없었다.
이런 내 모습을 .. 보이기 싫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생활...
제대로 할수있는건 아무것도 없는것만 같은 이런 모습이
나 자신도 혐오스럽고 저주스러운 이런 모습을 ...
"맛있겠지? 아주머니가 너 준다구 열심히 끓이셨어. 입맛은 뭐
당연히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먹어야지. 안그래?"
윤주는 평소와 다름없게 싱긋 웃으며 유림에게 죽그릇을 내밀었다.
유림은 그냥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이런 모습에 .. 윤주가 조금은
당황할거라 생각했다. 또 어줍짢은 동정을 한다던가 불쌍하다는등의
말을 할까봐 두렵던 유림이었다. 그런데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윤주의 태도. 유림으로써는 놀랍고도 고마운 일이었다.
윤주가 내민 죽그릇을 받아들고 수저를 들려던 유림은 오른쪽 팔에
끼워진 주사바늘 때문에 표정을 찌푸리고는 수저를 놓아버렸다.
오른손잡이인 유림이 오른손에 링겔주사를 맞고 있으니 도저히
수저를 들 방법이 없었다. 유림이 짜증서럽게 수저를 내려놓고
다시 침대에 누워버리자 윤주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죽그릇과
유림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불편한건데 ... 이렇게 힘든건데 ...
나같은 사람은 감히 천분의 일. 아니, 백만분의 일도 알수없는
이런 고통과 불안함 ... 두려움 속에서 살고있는 거구나.
윤주는 잠시 서글픈 표정을 짓다가 이내 다시 원래의 밝은 표정을
되찾았다. 잘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유림같이 자존심 강하고
도도한 성격을 가진 녀석이 자신의 동정을 원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괜한 동정은 어쩌면 유림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림아, 우리 거래하나 할까?"
"...뭐요?"
"너도 좋고 나도 좋은일인데. 음, 너 지금 오른손 불편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죽 떠먹여주는 대신 넌 내부탁 하나 들어주기.
어때? 이게 바로 상부상조라니까. 누이좋고 매부좋고. 어때? "
"...이상한거 시키려구요?"
"아니! 네가 할수있는거야. 어려운것도 아니야. 어때? 할래?"
윤주가 그냥 자신이 죽을 떠먹여 주겠다고 나섰으면 유림은
분명히 자존심이 상했을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거래를 신청하는 윤주의 태도는 전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윤주에게 동정받는게 아니라 그녀와 거래를 한다는 느낌.
유림은 다시 고개를 들고 침대에 똑바로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그러죠. 조건이 뭐죠?"
"아주 간단해. 넌 그냥 날 '윤주옆집누나'라고 부르기만 하면되.
아니, 옆집누나가 싫으면 선생님도 좋구. 제발 '정윤주씨'라는 호칭만
좀 안썼으면 좋겠어. 너무 딱딱하잖아. 그치? 내 조건은 이게다야."
부탁이라길래 거창한걸 내걸줄 알았더니 ... 풋, 당신다운 거래야.
윤주의 말에 유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윤주를 향해 피식
웃어주었다.
"그러자, 윤주야."
뭐, 윤주야?
유림이 꺼낸 그 말한마디에 윤주는 떫떠름한 표정으로 유림을
쏘아보았다. 두살이나 위인데 누구 맘대로 말을놔?
"야, 윤주가 뭐냐~ 다른걸로 불러."
"싫어. '정윤주씨'만 아니면 뭐든지 된다며?"
"그래, 그건 그렇지. 근데 내가 두살이나 윈데 윤주야는 좀.."
"한입으로 두말하게?"
이제는 아예 여유로워진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씨익 미소짓는 유림의
표정에 윤주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분명 자신의 입으로 마음대로
부르라고 했고 그래서 윤주라고 부르겠다는데 그걸 반대할 이유도
없었거니와 유림의 입에서 나오는 '윤주야' 라는말이 듣기 싫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한다면 오히려 듣기 좋았다.
그저 평범한 '윤주'라는 이름도 네 입에서 나오면 이렇게 ...
듣기좋은 이름이 되는구나. 유림아, 네 목소리로 들으면
세상 모든 말들이 있지 ... 다 아름다울거 같다.
유림의 목소리는 남자 목소리라 하기에는 조금 톤이 높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맑고 청아하게 공명하는듯한 목소리가 여자같을법도 하지만
또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푸르르게 우거진 여름의 숲보다는
수줍게 싹이 돋아나는 봄의 나무. 그 나무에 돋아난 새순같은 느낌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유림의 얼굴과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었다.
"참나, 그래 네 맘대로 불러라! 까짓거 내가 확 봐준다. 윤주라고 불러."
못이기는척 슬쩍 대답해준 윤주는 전복죽 그릇을 조심스럽게 한손에
받쳐들고 유림의 침대 옆쪽에 걸터앉았다. 이제 윤주가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조금전까지 창백하고 무표정했던 유림의 얼굴에는 어느센가
희미한 미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제 내가 약속지킬 차례지? 아~해봐. 이거 식어서 이제 뜨겁지도 않다.
먹기는 딱 좋겠어."
"뭘 그렇게 많이떠? 내입이 그렇게 큰줄알아. 조금만 떠."
한숟갈 가득 죽을 떠서 드리미는 윤주의 손을 살짝 피하며 밉지않게
투정해대는 유림의 태도에 윤주는 그를 곱게 쏘아보면서도 유림의
말대로 이번에는 숟가락의 반쯤만 죽을 한숟갈 떠서 유림에게 내밀었다.
"너무 적잖아. 이래서 언제 다먹겠어. 적당껏좀 떠봐봐."
"야, 이게 적당한거지 어떻게더 적당하게 만들어? 그냥 주는대로 먹어."
"싫어. 잘좀 맞춰봐봐."
"뭐가 그렇게 까다롭냐? 그냥 주는대로 먹어!"
전복죽 한그릇을 사이에 두고 두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옥신각신댔다.
하지만 투정을 부리는 유림의 표정이나 그 투정을 받아주는 윤주의
표정. 어디에서 불편함이나 거리낌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들
마냥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티격태격대며 두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어린시절로 돌아간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적 새엄마에게 실컷 떼도 써보고 어리광도 피워보던.
지금은 기억속에서 희미해진 .. 아니 지우려고 애썼었던 행복했던..
그리고 평범했던 때의 기억. 윤주에게서 어렸을적의 추억을 느꼈다.
푸르름을 ... 싱그러움을 느꼈다.
미묘하게 가슴설레는 ... 두근거림을 느꼈다.
"all the effects which science produces are the outcome of
the knowledge it provides. he knowledge is..."
"과학이 만들어내는 모든 효과는 과학이 제공하는 지식의 결과이다."
윤주가 지문을 읽고 해석해주기도 전에 유림은 벌써 척척 해석을 다
해내고 있었다. 벌써 몇문장째 이런식이었다. 윤주는 유림을 노려보고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야, 가끔가다가 모르는게 하나쯤은 있어줘야 되는거 아니냐? 이렇게
나보다 잘알면 내가 민망하잖아."
"그러니까 수업은 그만하는게 좋을것 같다니까."
아까부터 수업에는 영 관심없이 창밖만 쳐다보고 있던 유림은 이제는
아예 수업을 하기 싫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윤주는 못이긴다는듯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영어교재를 탁 덮어버렸다.
사실 윤주 자신도 별로 수업에 매달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유난히도 날씨가 좋은날. 이렇게 집안에만 틀어박혀서 영어수업을 하고
있다는건 윤주로써도 따분하기 짝이없는 일이었다.
"좋아! 그럼 오늘은 다른거 수업하지뭐."
다른수업이란 말에 유림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미 유림이 다
알고있는 것들을 굳이 수업하겠다고 빡빡우기는 윤주이다. 이번에는
또 뭘하겠다는거야?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마. 이번에는 진짜 멋진 수업이니까.
가정교사의 권한으로 내오늘 특별히 너의 휴가를 허락하노라-
우리 야외수업가자."
"야외수업?"
"응! 야외수업. 나 사실 보름넘게 산에만 있었더니만 먹고싶은것도
너무 많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렇거든. 오늘은 뭐 특별하게 산아래에서
수업한번 하자구."
윤주의 제안에 유림은 적지않게 놀랐다. 세상에 야외수업이라니.
항상 유림이 생각하는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지 윤주가
해내는 생각은 하나같이 다 유림의 예상밖이었다. 이곳에 오고나서
한번도 혼자서 시내에 나간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김기사와 같이
필요한 것들을 사러 나가거나 하는것이 다였다.
그래서일까. 윤주의 제안이 싫지 않았다.
유림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윤주는 환호성을 지르며 옷갈아입고
오겠다며 자신의 방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윤주가 나가고 난 방에서
유림도 한참동안 옷장앞을 서성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려댔다.
이건 그냥 말그대로 야외수업이야. 그래, 그냥 그런것 뿐이라구.
그런데 바보같이 긴장은 ... 핏... 강유림 너 정말 바보다.
윤주와 함께 외출한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고 있는 자신에게
스스로 핀잔을 늘어놓으면서도 유림은 마냥 좋았다.
한참을 옷을 고른뒤에 유림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고는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방을 나섰다.
"정말 두분이서 나가실 수 있겠어요?"
"그럼요~ 오늘은 야외수업이거든요. 제가 책임지고 유림이 잘 데리고
다닐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도련님 괜찮으시겠어요?"
은숙은 끝내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유림에게 직접 의견을 물어보았다.
윤주의 뒷쪽 멀찌감치 서서 팔짱을 끼고 두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유림이
걱정말라는듯 싱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은숙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했지만 유림이 저렇게까지 밝은 모습으로 웃어주자
어쩔수 없이 승락을 내렸다.
"와우~ 그럼 다녀올께요! 저녁시간 전까지는 돌아올테니까 염려마세요-
걱정되시면 핸드폰으로 연락주시구요- 다녀오겠습니다!"
은숙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자 윤주는 폴짝폴짝뛰며
유림의 손을 끌고 별장을 나섰다. 문을 박차고 나간 두사람을 바라보는
은숙의 얼굴은 온통 걱정으로 가득했지만 김기사의 표정은 흐뭇함으로
가득했다.
"에구, 잘 다녀올런지 몰라요. 마음이 안놓이네요."
"허허, 걱정할거 없을것 같습니다. 도련님이 저렇게 웃는게 ...
얼마만일까요?"
김기사의 질문에 은숙은 골똘히 유림의 모습을 돌이켜 보았다.
항상 어딘가 무표정하고 차갑던 유림의 표정이 저렇게 환하게
변한건 ... 그래, 윤주가 별장에 오던날. 그때부터 인것 같다.
"이번 선생님이 마음에 드시나봐요. 저렇게 나가시니까 꼭 남매같네요."
"남매는 무슨. 내눈에는 요세 그 뭐냐..그래, 애인사이 같아 보이는데."
그의 말에 은숙은 별장 창밖으로 이제는 저 멀리 멀어져 가고 있는
유림과 윤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유림도 남자치고는 작은
체구였지만 윤주또한 작은 체구라서 두사람은 정말 김기사의 말처럼
연인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주 잘어울리는 ...
"어떻게 됬건 .. 참 좋네요. 도련님이 저렇게 웃으신다는게."
별장에서 도로변까지 나오는 흙길을 이십분쯤 걸어나온 유림과 윤주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장마가 지나가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된 7월의 날씨에 땀이 저절로 흘러내렸지만 간혹 불어오는
바람이 그렇게 흘러내린 땀을 식혀주기도하는.
한마디로 쾌적한 여름의 날씨였다.
"뭘 그렇게 서있어? 버스타러 안가? 버스 정류장은 저긴데."
"버스를 타?"
"그럼 걸어갈래?"
윤주는 아주 당연한듯 버스 정류장을 손으로 가리켰고 유림은 조금은
싫은듯한 기색이었다. 당연히 택시를 탈거라 생각하고 따라나온
유림에게 윤주가 가리킨 버스정류장은 적지않게 충격적이었다.
이 더운 날씨에 버스를 기다려서 또 저걸 타고 시내까지 나가자고?
세상에 ... 잘못 걸렸군.
"택시타. 날씨도 더운데 .. "
"택시는 무슨. 버스타는게 나아. 뭐 여기서 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한대
뿐인것 같은데 헷갈리지도 않고 좋잖아. 아! 알겠다. 너 버스 한번도
안타본거지?"
윤주는 그제서야 유림이 이래뵈도 대사댁 도련님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해외에 대사로 파견될정도의 집안에 외아들이 버스를 타고
돌아다닐리가 없지. 더구나 강유림이 버스를 탄다니. 풋, 완전
코믹인데.
"그래, 안타봤다. 그러니까 택시잡아."
"시끄러. 그냥 버스타. 내가 오늘 버스 구경시켜주마. 세상에 어떻게
열여덟 되도록 버스도 안타봤냐? 오늘 확실하게봐도. 아, 저기
버스오네!"
유림이 싫다고 말할틈도 주지 않고 윤주는 무작정 유림을 끌고서 버스에
올라버렸다. 제대로 반항한번 못하고 얼떨결에 버스위로 끌려온 유림은
윤주에게 이끌려 버스 맨뒷좌석에 털썩 앉았다. 덜컹거리며 버스가
출발하자 유림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앉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사가 딸린 차에 뭔가 고귀해 보이는 부잣집 도련님은 영화나
드라마에나 나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윤주였다. 그런데
그런 윤주앞에 나타난 진짜 도련님 강유림. 그는 윤주 눈에는 너무
귀여워 보였다. 정말 부잣집 도련님티가 팍팍 난다.
녀석, 꼭 저렇게 버스 처음 타는 티를 내요.
아무렇지 않은척 하고 있긴 하지만 유림의 시선은 힐끔힐끔 버스
이곳저곳을 쳐다보기도 하고 창밖을 내다보기도하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고 윤주의 눈은 유림의 그런 움직임을 모두 잡아내고 있었다.
처음 몇분동안은 어색해하던 유림도 버스가 세코스쯤 달리고 나자
그제서야 적응이 되는지 버스의자에 푹 기대앉아 여유로운 자세로
차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름이란게 ... 이런 계절이었구나.
부숴져내리는 햇살 그리고 ... 짙푸른 녹음들.
더위마저 기분좋게 느껴지는 .. 이런 계절이었구나.
왜 그동안은 몰랐을까. 열여덟번이나 겪어온 여름동안은 왜 ..
여름이 아름답다는걸 몰랐을까.
살짝 열어둔 차창사이로 불어들어오는 바람이 기분좋게 머리를 흩날리고
빠르게 스쳐가는 바깥 풍경들이 저절로 유림을 미소짓게 만들었다.
버스는 30 분쯤을 달리고 나서야 자그마한 강릉 시내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두사람은 한참동안 멀뚱히 정류장에서서 주위를 둘러만
보았다. 윤주야 처음 오는 강릉이니 지리를 모르는건 당연했고 한번도
여길 나와본적이 없는 유림이 길을 알리도 만무했다.
길도 모르는체 윤주는 무작정 유림의 손을 잡아 끌었다. 어디로
가든지 길은 나오기 마련이라는게 윤주의 생각이었다. 그런 윤주의 앞에
베스킨라벤스 간판이 나타나자 윤주는 한가득 웃음을 머금고 그 가게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유림은 얼떨결에 윤주의 뒤를 쫓아 가게로
들어서서는 윤주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신이나하며 쪼르르 아이스크림 앞으로 달려간 윤주는 양볼을
잔뜩 부풀리고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려대고있었다.
"유림아! 너도 하나 골라봐. 우리 아이스크림 먹고가자."
"풋, 뭐야? 이것도 야외수업의 일종이야?"
"말하자면 이것도 수업의 연장이지! 오늘의 숙제!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골라라~ 얼른 이리와서 너도 골라봐. 우리 먹고가자, 응?"
윤주의 등살에 못이긴 유림은 대충 아무 아이스크림이나 지목하고는
의자에 앉아 가게안을 둘러보았다. 아직 중대학학생은 방학을 하지 않은
때라 한적했지만 곳곳에 대충 윤주또래로 보이는 사람들이 두세명씩
모여 앉아서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까르르 웃어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윤주가 아이스크림을 유림앞으로 불쑥 내밀기 전까지. 유림은
그렇게 가게안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한번도 이런곳에는 와본적이
없는 유림에게는 그냥 모든게 처음이고 생소한것들이었다.
"누구 아이스크림이 더 맛있나 내기할래?"
'우리 내기할까?' 이건 윤주의 입버릇중 하나였다. 하루에도 네다섯번씩
사소한걸로 내기하자며 졸라대는 윤주였다. 어김없이 윤주의 입에서
튀어나온 내기라는 말에 유림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유림과 내기에서는 단한번도 이겨본적 없는 윤주였다.
하지만 윤주도 이번만큼은 자신만만해보였다. 아이스크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인 윤주는 자기가 이런 내기에서 유림에게
질리가 없다고 생각하는것 같았다.
"내 아이스크림이 베리베리 스트로베리~ 이거 진짜 맛있거든!
음...네껀 첨보는건데 이거이름이 뭐야?"
"나도몰라. 그냥 찍은거야."
"그런것도 안보고 그냥 찍어? 근데 니꺼 색깔 너무 예쁘다.
저기, 여기요! 이 아이스크림 이름이 뭐죠?"
궁금한건 못참는 성격인 윤주는 유림의 아이스크림 컵을 들고 종업원에게
큰소리로 소리쳤다. 옆자리에 있던 손님들은 그런 윤주의 태도에
키득거리고 자기들끼리 뭐라 수군덕대고 있었지만 윤주는 아랑곳하지
않는것 같았다.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당황해하던 종업원도 이내 다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친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러브미입니다, 손님"
"아! 네, 고마워요. 들었지, 유림아? 이 아이스크림 이름이 '러브미'
라네. 쿡, 이름은 되게 이쁘다. 그치?"
러브미? 유림의 입가에도 피식 웃음이 걸렸다. 핑크색이 곁들여진
아이스크림 빛깔이 얼핏 이름과 어울리는것 같기도했다. 그러나 그보다
아이스크림 하나에 너무 기뻐하고 있는 윤주의 모습에 유림은 더욱
기분좋았다.
자신의 아이스크림을 한참 신나게 퍼먹던 윤주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아이스크림을 먹고있는 유림을 빼꼼히 쳐다보았다. 입도 벌리지 않고
열심히 오물오물거리는 유림의 입모양이 너무 귀여워보였다.
"유림아, 나 러브미 먹어봐도 되지? 왠지 그게 더 맛있어 보인다. 그대신
너도 내꺼 한숟갈 먹어봐. 그래야 누구께 더 맛있는지 알지~ 후훗- 우리
이번에는 뭘로 내기할까? 음 ... 이번 내기는 네가 정해봐."
"지는 사람이 .. 계산하기."
"계산? 에이, 너무 시시한데. 좋아, 뭐 그럼 그걸로 하자. 그럼 나
이거 먹는다~"
유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주는 유림의 아이스크림을 한숟갈 가득히
퍼서는 한입에 집어넣었다. 달콤한 그 맛에 저절로 행복해지는
느낌이었다.
'러브미' ... 아이스 크림 주제에 나를 사랑해 주세요라..
"어! 뭐야, 이게 더 맛있잖아. 야아- 너 첨오는거 맞아? 솔직히 말해!
너 자주 다녔지? 응? 어떻게 나보다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잘 찾아낼수
있는거지."
"느낌이지 느낌! 이번 내기도 그럼 내가 이긴거다- 계산은 윤주
니가 해라."
"너 정말 치사대마왕인거 아냐? 어쩜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져주지를 않냐. 그래, 내가 계산한다! 그런데 유림아~ 나 그거 한입만
더먹어도되지?"
생글생글 웃는 윤주의 얼굴에 유림은 그냥 자신의 아이스크림을 컵째로
윤주에게 건내주었다. 그 아이스크림 하나에 너무나 행복해 하는
윤주의 모습에서 행복을 느꼈다. 행복이란 녀석은 참 신기한 녀석이다.
'행복' 그 단어만 들었을때는 무지하게 크고 대단한것 같지만 실상
행복은 크고거대한 존재가 아니다. 생활 곳곳에 .. 아주 작은곳에
숨어있으면서 사람을 미소짓게 만드는 존재.
그게 행복이란 녀석이다.
그래, 윤주가 유림에게는 행복이었다. 보고있으면 기분좋아지는 사람.
보고있으면 ... 내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람. 참 밝고 ... 좋은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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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아, 우리 이제 뭐할까? 뭐 하고 싶은거 있어?"
강릉시내를 신나게 돌아다닌 윤주는 이제 더 이상은 할만한게
생각나지 않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유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림도 딱히 뭔가 할만한게 생각나지 않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윤주를
쳐다보았다.
아이스크림 가게에다가 옷가게. 또 신발가게 등등. 온갖 가게를 다
돌아다니고 또 온갖 구경거리는 다 보고 돌아다닌 탓에 다리도 아프고
더 이상은 어딜 돌아다니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잠시 길한가운데 멈춰서 주위를 살피던 윤주의 눈에 '이미지포토' 라는
간판이 들어왔다. 뭔가 떠오른 듯 씨익 웃은 윤주는 유림의
팔을 이끌고 그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날이 많이 덥죠?"
손님없이 조용한 가게에 앉아 부채질을 해대고 있던 주인아저씨는
사람좋은 훈훈한 미소로 유림과 윤주를 맞아주었다.
"아이고, 보니까 연인사이신 것 같은데 사진 찍으러 오셨군요.
허허 정말 어울립니다. 두사람- 얼른 앉으세요. 제가 예쁘게
찍어드리죠."
"아..아저씨, 우리 그런사이 아니에요."
"쑥스러워하시기는. 저도 이장사 꽤 하다보니까 이제 척보면 압니다.
보면 딱 연인인데요. 그런데 제가 본 커플중에서 최고로 잘 어울립니다."
주인아저씨는 윤주의 말은 신경도 쓰지 않는지 연신 두사람의 칭찬을
해대며 카메라 앞에 섰다. 윤주는 그저 피식 웃어넘기고는 카메라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아 유림에게 얼른 오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사진..찍자고?"
"그럼 여기서 사진찍지 뭐 하겠냐. 얼른와. 우리 사진 한 장 멋지게
찍어서 들어가자. 오늘 수업의 라스트야. 얼른 이리와."
잠시 경직된 표정으로 윤주를 쳐다보던 유림은 할수없이 느적느적
발걸음을 옮겨 윤주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진찍기는 유림이 굉장히
싫어하는 것중에 하나였다. 최근 몇 년간 단 한 장도 사진을 찍어본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가게 안에 들어왔고 게다가 저렇게 좋아하는
윤주를 두고 혼자 나갈수도 없는 일이었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윤주
옆에 앉은 유림의 표정은 조금 떨떠름한 그런 표정이었다.
카메라 앞에서서 이리저리 각도를 재보던 주인 아저씨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요즘 젊은사람들 안같게 참 쑥스러움들 많으시네- 연인이 사진찍는데
그렇게 뚱해서 쓰겠어요? 남자분 좀 웃으시고 아..포즈도 그게 아닌데."
두사람의 포즈가 영 못마땅한 주인아저씨는 뚜벅뚜벅 두사람에게로
다가오더니 포즈를 교정해준답시고 이포즈 저포즈를 취해보았다.
그렇게 한 세네포즈쯤 잡아본 그는 이제야 마음에 드는지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서 카메라 앞으로 다시 돌아갔다.
얼떨결에 유림은 윤주의 어깨에 손을 두르게 되었고 윤주는 그런 유림의
허리를 끌어안은. 그야말로 닭살커플이나 할만한 그런 포즈가 되어버린
두사람은 서로 쑥스러운지 시선을 피하느라 안절부절이었지만
주인아저씨는 정말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사진을 찍자마자 두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서 손을
떼고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는것만 같았다.
"두분이 다 선남선녀라서 뭐 별로 손볼 것도 없네요. 조명효과만 넣어서
그냥 뽑아도 되겠죠?"
"네, 아저씨 좋을대로 해주세요."
잠시 시간이 지난뒤 그는 사진을 윤주에게 건내주었다. 사진속에 있는
윤주와 유림. 두사람의 모습이 정말이지 썩 잘어울리는 다정한 연인의
모습같았다. 그걸 쳐다보는 윤주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유림과 연인이라 ...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저씨, 고마워요. 안녕히계세요-"
"잘가십쇼- 그리고 두분 예쁘게 오래오래 사귀세요~"
샤워를 마친 윤주는 머리에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는 침대에 쓰러지듯
주저앉아버렸다. 오늘 하루종일 돌아다닌 탓에 몸도 피곤하고 잠도
쏟아졌지만 기분만은 여느때보다 좋은 밤이었다.
유림이랑 아이스크림도 먹고 ... 사진도 찍고. 아, 사진!
사진이 생각난 윤주는 지갑을 뒤적거려 오늘 유림과 찍은 이미지 사진을
꺼냈다. 거기에 담긴 유림의 모습.
가슴이 뜨끔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림을 보면 가슴이 뛰고 ...
괜시리 웃음이나고. 같이 있으면 너무너무 행복한 느낌.
이걸...좋아한다..라고 말해야 하는걸까?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 일이었다. 정윤주가 남자를 좋아한다니.
그것도 두 살어린 ... 심장병을 앓고있는 강유림을?
분명 다른 사람들은 웃기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유림을 사랑하는
나를..이상하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런 세상의 시선을 신경쓰는건
정윤주 스타일이 아니었다.
좋으면 좋은거야, 그래...가슴이 뛰면 그걸로 되는거지.
좋아서 .. 그사람이 너무너무 좋아서 옆에 있고 싶은마음.
그거 하나면 된 것 아닌가?
윤주는 사진속에 유림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어 보았다.
은빛천사...유림아, 난 지금까지 있지...내가 참 맑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어. 웃기지만...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어.
근데 나 .. 널보니까 알것같아. 맑은게 어떤건지 ... 깨끗하고
순수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너 차갑게 말하고 무뚝뚝하게 날
대하지만 가끔씩...아주 가끔씩 네가 환하게 웃을 때 ..아니면
네가 날 가만히 쳐다볼 때. 그때 네 눈이 얼마나 맑은지 ...
넌 모르지? 까만 눈동자가 너무너무 맑고 곱다. 그런데 ...
그런 눈동자 깊숙이에는 ... 슬픔이 있어보여. 내가 모르는
슬픔같은거 말야. 그래서 ... 네가 더 좋은걸까? 그런걸까, 유림아?
사진에서 시선을 뗀 윤주는 유림의 방쪽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벽너머에 유림이 있다. 눈부시고 화려한 금빛보다는 ..
맑은..한없이 맑은 은빛을 닮은 유림이 저 너머에 있다.
"강유림...어떡하니...나...너 좋아하나보다...그런가보다, 유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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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7월의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더위를 핑계로
유림과 함께 산속 자그마한 계곡으로 나온 윤주는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무그늘 아래있는 널찍한
바위에 걸터앉은 유림의 시선은 못박힌 듯 윤주에게 고정되 있었다.
긴머리를 대충 틀어올리고 하늘색 셔츠에다 하얀 반바지를 입고있는
모습이 계곡의 싱그러움을 닮아있었다.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 소박한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는 청아한 아름다움이 윤주에게서는 느껴졌다.
"유림아, 너도 이리와봐. 계곡물에 발만담궈도 더위가 싹 달아난다."
"됐어, 여기 있을래."
"에이! 빼지말고 이리와. 진짜 시원하다니까."
유림이 끝내 거절하자 윤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유림을 끌고
계곡물로 들어왔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원한 물줄기가 피부에 와닿는
느낌에 유림은 잠시 움찔하다가 이내 편안한 자세로 윤주옆에 앉아
계곡물에 발을 담궜다.
나란히 앉은 두사람은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시원한 물줄기 소리와
매미 울음소리. 그리고 흥얼거리는 윤주의 노랫자락만이 숲속을 가득
채운 느낌이었다.
"그거 무슨 노래야?"
"응? 이거? How deep is your love. 노래 좋지? 내 애창곡이야."
노래 제목을 말한 윤주는 이제 가사까지 붙여 제법 멋들어지게 노래를
불렀다. 그노래가 끝날때까지. 유림은 넋을 잃고 윤주를 바라봤다.
열여덟번째 여름. 아무래도 여름과 함께 첫사랑이 불쑥 찾아온것만 같다.
"있지 유림아, 지금까지 가정교사중에 여자선생님이 나말고도 있었어?"
뜬금없는 윤주의 질문에 유림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명있었어. 한명은 서른넘은 노처녀선생이었고 또 한명은 대학원
다닌다던 여자였었지. 근데 그건왜?"
"음..그렇게 치면 지금까지 여선생님 중에서는 내가 제일 젊은거네?"
"그런셈이지. 그런데 왜자꾸 그런걸 묻는데?"
뭔가 말을 꺼내려던 윤주는 입만 달싹거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꼭 유림에게 말을 해볼 작정이었다.
관심있다고 ... 널 좋아한다고.
그런데 남에게 할말 다하고 사는 당당한 정윤주도 이 일만큼은 자신있게
할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남자앞에서는 정말로 별수없나보다.
하긴..세상에 어떤 여자가 사랑고백을 아무렇지 않게 할수 있겠는가.
"유림아, 나 너한테 할말있다. 그런데 어쩌면..네가 싫어할지도 몰라..
그래서 무서워서 함부로 말을 못하겠다. 나 이말해도 화 안낸다고
약속할래?"
"뭐 어떤거길래 그래? 알았어. 화 안낼테니까 말이나해봐. 뭐야?"
"응..그러니까 말이지 ... 내가 너보다 두 살이나 윈데 그렇게 자꾸
반말써도 되는거냐?"
"할말이 그거냐? 내 참.. 잔뜩 기대했더니 김빠지네. 그게 어때서?
겨우 두 살밖에 안많은데."
그 대답에 윤주는 마음이 편해졌다. '겨우두살' 이라면...그렇다면
유림아 나도 .. 널 사랑해도 되는거지? 네 말대로 겨우 두 살인데 ...
"할말은 ... 그게 아니라 .. 내가 하고싶은 말은...유림아 ... 있지...
그러면 ... 내가 널 좋아해도 되는거네? 겨우 두 살이면 ..."
아무렇지 않은, 아니 오히려 너무 태연한 윤주의 말에 유림은 눈을
크게 뜨고는 할말을 잃은 듯 윤주를 쳐다만봤다.
잘못들은게 아니라면 ...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
정윤주...지금한말...그거 혹시 ... 날.... 좋아한단...말이냐?
"그게..무슨..."
"나 있지 너 좋아한다. 되게 웃..기지? 나 가정교사 하려고 와놓고
유림이 너 가르치러 와놓고 선생님이 학생을 좋아하니까 이상하지?
너무너무 웃기지만 있잖아 유림아...나 널 되게 좋아하나보다."
두사람 사이의 시간은 잠시 멈춰버린것만 같았다. 윤주는 긴장되고
간절한 눈빛으로 유림을 바라보고 유림은 뭔가 혼란스러운지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윤주가 싫을리 없었다. 오히려 좋았다. 윤주를 향해 가슴이 뛰고 윤주를
보면 가슴이 뛰는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두렵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거 ... 참 두렵고 무서웠다. 이런 몸으로..
언제 멈춰버릴지 모르는 심장을 가지고 ... 이렇게 외줄타기를 하듯이
아슬아슬한 내가 .. 누군가를 좋아한다는게 .... 너무 두렵다.
"그게 어떤건지 알아? 날 좋아한다는게 무슨 뜻인지 알아?"
"무슨..말이야?"
"호기심 아니냐고! 그래, 처음보는 타입한테 느끼는 호기심 있잖아.
그렇지 않고서는...날 좋아한다는게 말이되냐? 그동안 봤으면 알잖아.
내가 어떤지."
그말만 남기고 유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당황한 윤주는 그런
유림의 뒷모습을 보며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림은 그런 윤주를
봐주지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래, 호기심이겠지... 나같은 놈을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게 ..
말이되냐? 두 살이나 어려.. 아니 그건 있을수 있다 치더라도 난
심장병이라는...시한폭탄을 안고사는 놈이잖아 ...
"야! 강유림!!! 거기서."
윤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유림이 걸음을 멈추자 윤주는
얼른 유림에게로 달려와서는 그의 한쪽팔을 붙잡았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마구 솟구쳐 오르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유림을 놓치기 싫다는 생각 한가지만으로
가득차 있어서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내가 .. 장난으로 이러는거 같아? 호기심으로 이런다고?"
"솔직히 말해서...그래, 너도 알잖아. 난 심장병이야!!! 그게 뭔지알아?
언제 죽을지 모른단 말이야. 수시로 병원신세에 살아도 산게 아닌것같아!
나조차 내가 지긋지긋한데 ... 그런 날 네가 좋아한다는걸 믿으라고?"
18년을 사는동안 .. 나조차도 내가 지긋지긋했다. 난 왜이럴까...
그렇게 저주스럽던 나인데 ... 나조차 사랑할수 없는 나를...
다른사람이 사랑할 수 있다고...?
"너 바보야? 왜그렇게 삐뚤게 생각해? 니가 어디가 어떤데?
왜 넌 누가 좋아하면 안되는건데?"
자신도 모르게 발끈한 윤주는 유림을 향해 덜컥 큰소리를 질러버렸다.
유림의 말에 너무 화가났다.
왜 너같이 맑은애가...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니?
그깟 심장병이 뭐길래 .. 넌 이렇게 ... 너무 ... 맑고 투명한데...
"강유림! 잘들어. 호기심 아냐. 그래, 난 심장병 그게 어떤건지 몰라.
얼마나 괴로운지도 모르고 그걸 겪는 니마음 짐작은해도 이해는 못해.
그치만 나 호기심으로 누굴 좋아할만큼 바보아냐. 내마음은 내가 제일
잘알아. 나 네가 좋아. 너랑있으면 참 좋아. 그게 이유야.
강유림이 좋아. 네가 좋다고! 그래, 나 너 사랑한다!"
"미쳤어...정윤주, 날 사랑한다니..."
"미쳐도 좋아. 널 사랑한다는건..진심이니까."
"후회할꺼야. 아니, 분명히 후회해!"
유림은 아예 두눈을 질끈 감고 소리지르고 있었다. 윤주의 얼굴을
보고서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윤주를...밀어낼 자신이 없었다.
마음대로 .. 내마음이 시키는대로 할 수 있다면.
내마음에 진실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렇다면 아마 난 아무
거리낌도 없이 사랑하면 됬을텐데 ... 윤주 널...사랑해도 될텐데..
"내가 후회할지 안할지 어떻게 알아? 난 후회안해. 자신있어.
널 좋아하는 내마음..내사랑! 이거 후회하지 않을 자신정도는 있어!
잘들어 강유림. 나 정윤주는 강유림을 좋아해. 너무너무!"
윤주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져 버리자 유림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평소에는 활기차고 밝아보이던 태양빛이 오늘따라 너무 짜증스러웠다.
아니, 자신에게 화가났다.
마음은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 나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입으로는 이런 말들만 내뱉는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가
짜증스럽고 서글프다.
"제길..정윤주...나도 사랑해..사랑한단말야...근데 ...
바보야..그러면 안된다..너 나 사랑하면 안된다...그럼...
틀림없이 ... 네가 많이 아프고 힘들테니까. 나 사랑하면..안된다.."
#. 실버엔젤 - 사랑은 어쩔수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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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윤주는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을 하고 또 웃는 얼굴로 유림을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림은 윤주가 어딘가 불편한지 수업하는 내내 윤주의
시선을 피하고 지금도 노골적으로 윤주를 피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유림을 바라보는 윤주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강유림, 어디 아프냐? 표정이 왜그래?"
유림의 얼굴이 왜 그런지는 윤주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림에게 말을 걸만한 구실이 그것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윤주의 질문에 유림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어딘가 까칠해진 듯 해 보인다.
"아니. 멀쩡해. 신경안써도 괜찮아."
"그래? 난 .. 그냥 걱정이되서. 유림아 어제 일은 ... 생각해 봤어?
다시 생각해봐도 내가 싫어?"
윤주가 기어코 어제이야기를 다시 꺼내자 유림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제 윤주가 고백한뒤.
하루종일을 그일을 가지고 고민을 해봤다.
그냥 윤주를 사랑해버리고도 싶었다. 벌써 마음은 그러고 있었다.
하지만 윤주에게 그런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플까봐 ...
윤주 네가 아프게 될까봐.
"그런게 문제가 아니잖아. 나랑 사귀는게 쉬울것같아?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라구. 난 평범한 다른 남자랑은 다르잖아.
널 지켜준다거나 보호한다거나 이런걸 내가 할수 있을 것 같아?
거기다가 나랑 사귀면 ... 슬픈날도 많을거다. 겁주는거 아냐.
진심이야. 나 때문에 속상할거야. 아플거야...그래서...
후회하게 될거야."
그래, 이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유림은 윤주를 지켜줄수도 ...
보호해 줄수도 없었다. 자신의 몸 하나를 지탱하기도 너무 힘겨워서
그것조차 힘에 부쳐서 ... 사랑하는 여자가 생겨도 그여자를 지켜줄
힘이 없는 남자. 그것도 모자라서 그 여자를 슬프게 해야만 할 남자.
유림은 그랬다.
하지만 유림의 그말에 윤주의 표정은 오히려 평화스러워 보였다.
잔잔한 미소까지 띈 윤주는 살포시 유림의 손을 잡았다.
"너 참 바보다. 똑똑한줄 알았더니 순 바보야. 세상에 남자가
여자를 지키라는 법있냐? 없지? 그런거 없지? 바보야 ...
누가 지켜달래? 그런거 필요없어. 슬픈날 많을거라구?
뭐 그렇다고 해도 네가 날 안받아주면 ... 난 매일매일이
슬픈날일 것 같다. 그럴바에야 널 사랑하면서 슬픈게 난 더
나을것같거든. 솔직히 우리 만난지도 겨우 한달인데...
그 짧은 시간에 내가 널 깊이 사랑한다고 확신은 못하지만
사랑하고 싶다 유림아...내가 싫은게 아니라면...그런거라면
나 ... 너 많이 사랑하고 싶어. 그러면 안될까? 사랑하면 안될까?"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랑한다는 말 ... 누구도 해준적이 없던 말.
하지만 너무 듣고 싶었던 말을 ... 윤주에게서 들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들었다.
윤주를 밀어내야 겠다는 결심은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사람의 마음이란건 머리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성이란 녀석이 아무리 대단한 녀석이라 해도 ...
사람의 마음까지 제어할 수는 없는법이다.
"미안하다 윤주야 ...."
".....뭐....가...?"
윤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은...유림아...내가 싫다는거니?
그래서...그래서 미안하다는거야?
"제길...나도...너 사랑하나보다. 미안하다...미안하다 정윤주.
나도 너 사랑해서 ... 미안하다..."
서로 사랑을 고백한 날인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한 날인데..
보통이라면 기뻐해야할 이날. 두사람의 눈에서는 그냥 눈물만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기뻐서 운다고 해야할까 ...
아니면 .... 아니면 뭘까..?
이유도 모를 눈물을 두사람은 한참을 흘러댔다.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던 윤주가 유림을 힐끔 쳐다보고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유림아..우리 왜울었지...?"
"....몰라...."
"풋, 우리 너무 웃긴다. 이유도 모르고 둘이 붙들고 울고.
고백한날 붙잡고 운 커플도 세상에 몇 안될거야. 그치?"
윤주에게는 사람을 웃게 만드는 힘이 있는것만 같았다. 유림조차도
그런 윤주를 향해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눈으로 웃어주었다.
모른다고 말했다. 눈물이 나던 이유를 ... 윤주에게는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답은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서글퍼서 눈물이 났다. 사랑하는데 미안해야 하는 스스로가 서글퍼서.
그리고 ... 기뻐서 눈물이 났다. 세상에 ... 이런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 기쁨과 서글픔이 뒤섞인 눈물이 흘렀다.
세상엔 ... 욕심내면 안되는게 참 많이 있다.
가져서는 안되는게 ... 너무 많이 있다.
난 스스로도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소중한 것'
이런것들은 내가 욕심내서는 ... 안될것이란걸 말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냉정해지려 애썼다. 소중한 사람도 ...
사랑하는 사람도 만들지 않으려고 .. 무던히도 애써왔다.
그런데 ... 욕심내면 안되는건줄 알면서도 ...
이제는 나도 가지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가슴속에 품고싶다.
그래, 윤주야...네 이름을 가슴속에 품고싶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 소중한 사람으로 ... 네 이름을...
새기고 싶다. 아니, 이미 ... 새겨버렸다.
정윤주 이름석자를...나도 모르는 사이에 ...
내마음 속에 새겨버렸다...
"유림아 ..."
"...응...?"
"나 잘할께...너한테 참 잘해주고 싶다. 산책도 같이 가고싶고
하고싶은 말도 많아. 그래서 내가 널 귀찮게 할지도 모르지만...
나 너한테 되게 잘해주고 싶다..."
"................"
유림은 아무말이 없었다. 그냥 고개를 숙인채 아주 고요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유림아...."
"....이번엔 또...왜...?"
"그냥. 네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자꾸 말걸게된다. 헤헷...너 있지
목소리 너무 좋은거 알아? 하루종일 들으라고 해도 들을 수 있을거 같아.
그래서 자꾸 말걸게 되나봐."
윤주의 칭찬에 유림은 어색한듯 피식 웃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잠시라도 환하게 웃어주기를 바랬는데 ... 눈치없는 바보 유림이.
어디 한번 예쁘게 웃어주면 덧나나?
유림이 웃어주기를 기다리던 윤주는 잠시 뾰루퉁하게 유림을 쏘아보다
이내 환하게 웃어버렸다. 미워할수가 없는 사람. 그게 바로 유림인것
같다.
"유림아...!"
"...왜자꾸 불러?"
"마지막으로 부르는거야. 하나만 부탁해도 되지? 나 있지 ...
너 한번만 안아봐도 되지?"
처음부터 유림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았는지 윤주는 유림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림에게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코끝에 느껴지는 유림의 향기가 좋았다.
피부에 와닿는 그의 체온이 좋았다.
원래 이런건 ... 남자가 짠 해줘야 멋진건데.
하긴, 아무렴어때. 그렇지 ... 유림아 ...?
그냥 사랑하면 되는거지...남자는 어째야되고 .. 여자는 어때야하고
그런거 우리 따지지 말자.
그냥 사랑하자.. 그냥 예쁘게 사랑하자...많이...사랑하자...
#. 실버엔젤 - 가슴속에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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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은 이렇게 빠르기만 한지. 윤주가 처음 도착했을 때 6월
초여름 날씨였던 여름은 이제 한창 무르익을데로 무르익은
8월 한여름에 들어서 있었다. 두사람에게는 그런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동화같은 나날들이었다. 외부와는 단절된 것 같은
예쁜 오솔길을 두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거닐고
가끔씩 괜히 밤하늘을 한번 쳐다봐 보기도하고.
사랑에 빠지면 세상 모든게 아름다워 보인다는 그말이 정말
맞는말인것만 같았다.
오늘도 유림과 산책을 다녀온 윤주는 별장으로 들어서자 마자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냉수한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서울에 날씨에 비한다면 시원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물먹다 채하면 고생이에요, 천천히 드세요."
"햐, 시원하다! 역시 더울때는 물이 최고에요!"
물컵을 내려놓으며 시원하게 웃는 윤주의 모습에 은숙까지 엉겁결에
따라웃고 말았다. 윤주나 유림 두사람은 구태여 두사람의 사이를
김기사나 은숙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한집에서 생활하는 그들은
구지 말로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두사람의 눈빛만 봐도 ...
서로를 쳐다보며 짓는 미소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숙으로써는 너무 안심되고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올곧고 바른 아가씨를 ... 또 이렇게나 환하고 예쁜 아가씨를
유림이 좋아하게 되었다니 ... 그리고 윤주도 유림을 좋아해준다니...
정말 하늘이 내린 인연인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 장보러 갈건데 뭐 필요한거 있으세요?"
은숙은 일주일에 한번정도. 김기사와 함께 시내로 장을 보러 나가곤
했다. 그때마다 윤주나 유림이 필요한걸 사다주곤 했는데 오늘이
그날인 것 같았다.
잠시 머리를 갸웃거려 보던 윤주는 뭔가 떠오른 듯 베시시 웃으며 은숙의
귀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둘이서 뭐해?"
주방에 들어서던 유림은 뭔가 속닥거리고 있는 두사람의 모습에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윤주는 그냥 싱긋 웃고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별거 아냐. 우리 둘사이의 비밀이야. 그쵸오~?"
"그럼요~ 도련님, 이건 선생님이랑 저랑 둘이 비밀이에요.
아무리 도련님이라도 이건 못가르쳐 드리죠."
"야, 이제 나만 놔두고 둘이서 속닥거리네. 유모, 나랑 지낸 시간이
몇 년인데 이러기야~ 도대체 무슨 얘긴데?"
"도련님도 참. 이건 비밀이라니까요! 그냥 좀있다 보시면 알거에요."
은숙과 김기사가 돌아오는 자동차 소리가 나자마자 티비를 보고있던
윤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달려나갔다. 두사람은 뭘
그리도 많이 샀는지 양손가득 뭔가를 들고 별장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제가 부탁한거 사셨죠?"
"그럼요, 누구 부탁인데 당연히 사와야죠. 여기있어요."
은숙이 검은 비닐봉투를 윤주에게 내밀었다. 빼꼼히 내용물을 확인한
윤주는 만족스럽게 씩 웃고는 은숙을 향해 찡긋 눈짓을 보내주었다.
그리고는 뭐가 그리 좋은지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 비닐봉투를 가지고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요세 세상에 저런 아가씨 없을거야. 정말 좋은 아가씨죠?"
"그럼요, 우리 유림 도련님이랑 딱 천생연분이라니까. 오늘은 또
뭘하시려고 저런걸 부탁하시는지."
"뭘해도 하겠죠뭘. 우리는 모른척하고 빠져주자구요."
"허허, 그래야지. 암..우리가 빠져줘야되고 말고."
김기사와 은숙은 마주보며 기분좋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 무렵 별장 밖으로 달려나온 윤주는 유림의 방 창문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서 비닐속에 담긴 물건을 꺼냈다.
비닐속에 담긴 물건은 어렸을적 한번쯤은 해봤었던 폭죽이었다.
일명 '스파이크' 라고 불리는 예쁜 불꽃이 생기는 폭죽.
별것아닌 것이었지만 윤주는 너무 가슴이 들떴다.
미리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성냥을 꺼낸 윤주는 만발의 준비를 마치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잠시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윤주는 두손을
모으고 유림의 창문을 향해 크게 소리질렀다.
"유림아! 강유림!!!!"
침대에 누워 책을 뒤적거리던 유림은 창밖에서 들려오는 윤주의
고함소리에 미간을 찌푸리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한손에 오렌지빛 불빛을 내뿜으며 예쁘게 타오르고 있는 폭죽을
든 윤주가 환하게 웃으며 유림에게 내려오라는 듯한 손짓을
해대고 있었다.
"유림아! 얼른 내려와!"
"그게 뭐하는거냐?"
"보고도 모르냐? 불꽃놀이지~ 얼른 내려오면 너도 하게해주마!
야, 멀뚱히 보기만 하지말고 얼른!"
뭐야, 낮부터 뭘 준비하더니...쿡...저걸 준비했나보네.
어린아이같은 윤주의 모습에 유림은 키득키득 웃어대며
얼른 윤주가 서있는곳으로 달려나갔다.
유림까지 덩달아 신이났다. 유림이 숨을 몰아쉬며 단숨에
윤주가 있는곳까지 달려오자 윤주는 비닐봉지 속에 든
폭죽을 하나 유림의 손에 쥐여주었다.
"어때? 예쁘지? 이거 꼭 별같지 않냐? 반짝반짝하는게."
윤주의 손에서 예쁘게 빛을 내뿜는 불꽃을 잠시 넋놓고 쳐다보던
유림이 아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유림의 폭죽에도 불이 붙고 곧 치지직 소리를 내며 오렌지빛
불꽃이 튀어오르기 시작했다. 유림의 마냥 신나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에 윤주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이었다.
한여름밤. 캄캄한 숲속의 밤에 그 불빛은 유난히 더 빛나보였다.
윤주의 말대로 정말 별빛과 같아 보였다.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화려하게 밤하늘을 수놓는 커다란
불꽃놀이도 아니었고 시끌벅적한 인파와 음악이 있는 흥겨운 자리도
아니었다. 그냥 조용한 숲속에서 두사람만이 즐기는 단촐한
불꽃놀이었지만 그 어느때보다 신나고 마냥 좋기만했다.
"유림아, 나 오늘 너한테 별을 선물한거다! 그치?"
"야, 이게 무슨 별이냐? 불꽃이지."
"얘가 뭘 모르네. 내가 별이라면 별인거야! 잘봐봐!
별같아 보이지? 넌 오늘 정윤주한테 별을 선물받은거야.
넌 무지 행운아라구."
"아이구, 그래그래. 이거 별이다. 영광인데, 별도 선물받고."
유림이 못이긴척 동조해 주자 윤주의 얼굴에는 한층 더
밝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정말 별을 선물하고 싶었다. 유림은 별빛을 닮은 아이라서
그래서 별빛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늘에 있어서 딸수 없는 별대신 윤주가 생각해낸게
불꽃이었다. 별은 아니지만 ... 비슷하잖아..
유림아, 잊지마!
오늘 내가 선물한 별을 잊으면 안돼.
가슴속에 꼭 꼭 담아둬야된다- 그리고 그 별을 떠올릴 때
그때 나도 함께 떠올려주기야. 내 가슴속에 ... 나도
예쁜 불꽃처럼 ... 남을수 있다면 좋겠어.
고운 불꽃으로 ... 잊혀지지 않는 ... 아름다움으로.
지금 이 불꽃은 빨리타고 쉽게 꺼져버리지만
우리 가슴속에 세기는 불꽃은...오래오래 예쁘게 지키자-
한여름 밤. 무더운 열대야 속에서도 한줄기 시원한 산바람이
뺨을 간지럽히는 듯 하던 그날밤. 두사람은 밤이 깊도록
그렇게 앉아서 손끝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비닐안의 폭죽이 바닥날때까지. 그렇게 마냥 기뻐하며
불꽃을 바라보며 ...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죽을때까지 잊혀지지 않을것만 같았다. 예쁘게 타오르던
불꽃은 시간이 지나면 꺼져버리지만 ... 두사람에게 불꽃은
그 이상의 의미였다. 윤주의 말대로 불꽃은 어느새 두사람의
마음에 꺼지지 않는 '별' 로 자리잡았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별빛으로.
안녕하세요 ^^
그린비입니다- 감상 주시는 모든분들 정말로 감사드려요~
하루에 3~4편씩 올려달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하하;;
제가 좀 느리게 써서요 ㅠ_ㅠ
세네편은 좀 무리고;; 한편씩은 될수있으면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그리고 주인공 이미지 궁금하다고 하신 분드을~
이미지는 지금 준비중이에요 ^^
아직 초반부니까 한 중반쯤 되면 주인공 프로필 쓸께요^^
그럼 이만-
#. 실버엔젤 - 우리 멀어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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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전화벨 소리에 윤주가 부스스 눈을 떴다.
잠시 낮잠을 자다가 깨어난 윤주는 아직도 잠이 덜깬 얼굴로
짜증스럽게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야, 정윤주! 너 강원도 산골에 쳐막혀 죽었냐? 어떻게 한번도
연락이 없어?]
귀가 아플정도로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대는 목소리.
대학학교 동창이자 같은과 친구인 경미였다. 길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쭉 켠 윤주는 피식 웃으며 전화기를 들고 창가로 다가가
창턱에 털썩 기대앉았다.
정말이지 ... 방학을 하고나서 다른사람들에게 한번도 연락을
한적이 없었다. 고작 집에만 몇 번 전화했을뿐.
유림이만 쳐다보고 유림이 생각만하느라..잠시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깜빡하고 있었나보다.
"야, 나 귀안먹었어. 시끄럽게 소리질러대기는. 나 강원도 산골에서
자~알 지내고 있다. 여기 아주 천국이야! 풋, 너는 푹푹 찌는 서울에서
잘지내고 있냐?"
[아이고, 너 팔자폈다. 거기서 여유로운 방학을 즐기시고 계시고.
여긴아주 푹푹 찐다, 쪄! 그나저나 너 언제 올라오냐? 곧 개강하는데.]
"개강? 벌써 개강이야?"
[너 달력안보냐? 벌써 팔월 중순이야. 얼른 올라와야 개강을하지.]
경미의 말에 윤주는 잠시 어리벙벙한 기분이었다. 이곳에 도착했을때가
막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던 유월의 중순이었는데 ... 벌써 팔월의
중순이라. 세상에, 언제 두달이 후딱 지나가 버린걸까?
"와...시간 진짜 빠르네. 그래, 곧 올라가야지. 올라가면 너한테
제일먼저 연락하마."
[그래, 너 아르바이트 뛰어서 돈도 많이 벌었을텐데 서울오면 한턱쏴라.
그리고 너 현수선배한테도 연락좀 해줘라. 그선배가 아주 전전긍긍
하더라. 너한테 연락이 안온다고.]
"됐어, 내가 왜 현수선배한테 연락을 해야되냐?"
[너 너무 그러지마라~ 그래도 너 좋다는 사람인데 잘해줘야지않겠어?]
'현수선배' 라는 말에 윤주의 눈이 잠시 찌푸려졌다가 이내 다시펴졌다.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때부터 윤주에게 관심을 보이던 같은과
선배였다. 윤주는 별반 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았지만 그는 후배
이상으로 윤주를 대해주고 있었고 그런 그 태도가 불편해서 윤주는
주로 현수를 피하는 타입이었다. 이번 여름도 그랬다.
이 별장에 와있는 내내 연락을 하지 않은건 물론이고 한번도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선배 사람 좋은건 알지만 남자친구감은 아니야. 그리고 나 남자친구
생겼어. 이번 여름동안."
[뭐? 남자친구? 야, 너 진짜냐? 정말이야?]
"그럼 내가 거짓말하리? 진짜야. 너 알면 뒤집어질걸. 진짜 멋진애거든.
서울가서 자세히 얘기해줄게- 궁금해도 꾹 참고 며칠만 기다려라."
[쳇, 정윤주 제법이다. 그 강원도 산골에서 언제 남자를 다 구했냐?
그래, 서울오면 보자. 얼른 올라와!]
"그래, 서울에서보자."
전화를 끊은 윤주는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동안 이 별장을 떠나야 한다는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나가 버렸다니.
괜히 가슴이 뻥 뚫린 듯 허전해지는 것 같았다.
서울가면...유림이 못볼텐데.
보고싶어서 어떡하지? 유림아, 너 못보면 나 어떡하지?
"낮잠자더니 일어났네. 거기서 뭐해?"
윤주의 방앞을 지나가던 유림은 윤주가 창턱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윤주의 방안으로 들어왔다.
한숨만 푹푹 내쉬던 윤주는 유림의 미소에 금세 다시 기분이
좋아지는지 생글생글 미소를 되찾았다.
"그냥 뭘 좀 생각하고 있는 중이지. 난 몰랐는데 오늘이 벌써
8월 중순이래. 9월에는 개강하잖아."
그말에 유림의 얼굴도 금세 흐려졌다. 정말 두달이란 시간이 너무
짧다고만 느껴졌다.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은 어찌나 잘 흘러가버리는지.
갑자기 서운해 지는 느낌이었다. 윤주가 없는 별장은 어떨까...?
윤주가 없이 이년도 넘게 살아온 이곳인데 ...
윤주가 여기에 머문건 두달인데.. 그 두달사이에 윤주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렸나보다. 윤주가 없었던 조용한 별장으로 다시 되돌아
간다는 생각이 들자 유림은 숨막힐 듯 초조해져왔다.
"아..개강하지...돌아가야겠네..."
"...응...돌아가야지...가야..학교를 가니까. 근데 나 가기싫다.
그냥 여기 있으면 좋을 것 같아."
"그런말이 어딨냐. 너 대학생이잖아. 가서 다시 공부해야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유림도 너무나 싫었다. 그냥 윤주가 여기에
계속 머문다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렇게 구차하게 윤주에게
부담감이 되기는 싫었다.
"공부..? 그래, 해야지. 하긴 해야되는데 ...너 못볼 생각하니까
진짜 막 허전하고 그래. 그래도 너! 바람피우면 혼낸다.
전화도 자주 하고 그러자. 그럴꺼지?"
"생각해보고."
마음은 이게 아닌데 ... 입은 또 생각과는 상관없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사실은 있지 윤주야...나 매일매일 전화하고 싶어.
네 목소리 하루도 빠짐없이 듣고 싶어. 네가 날 매일 생각했음 좋겠다.
그런데 ... 난 바보인지...그런 내마음을 ... 똑바로 말을..못하겠다..
"생각은 무슨. 너 매일 연락안하면 내가 서울에서 공부하다말고
너 잡으러 이리로 내려올지도 몰라."
윤주의 장난기 섞인 그말에 유림은 피식 웃었다. 결코 크고 환하게
웃는법이 없는 유림이었다. 잠시...산들바람이 스쳐가듯이 그렇게
짧게. 그리고 여운이 남는 미소를 지을줄 아는..그 미소가 너무나
아름다운 그런 유림이었다.
"너 내말 농담아니다. 난 내가 좋아하는 거에는 진짜 죽도록
매달리는 편이야. 내가 고 2말에 성적상담할 때 담임한테
전 S대 갈껀데요 이러니까 담임이 놀라 뒤집어지더라구. 내성적으로는
절대 무리라고 하향지원하라더라. 근데 나 끝까지 지원했어.
다들 안된다는데 나혼자 죽어라고 매달렸거든. 그랬더니 합격했어.
그것말고도...나 한테 오래된 곰인형 하나가 있거든. 그게 내가
일곱 살때 선물받은거라니까 이제 13년 된 인형인데..나 그거 아직
가지고 있다. 내가 진짜 아끼는 거거든. 내가 좀 그래. 내가
아끼는거..내가 사랑하는거. 내가 하고 싶은거. 그건 어떡해서라도
지켜내고 이뤄내고말아. 너도 마찬가지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너도 내가 어떻게든 꼭 잡아두고 있을꺼야. 그러니까 연락도 자주자주
하고 ... 내가 너 보러 자주 와도 안미워하고 그럴꺼지?"
어떻게 미울수가 있을까... 어떻게... 귀찮을 수가 있을까.
그런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윤주의 연락이 ... 귀찮아 지는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것 만 같았다.
"그럼 뭐...자주 연락해주지. 그대신...윤주야 ..."
"그대신..?"
뭔가 할말이 있는듯한 유림은 뒷말을 빨리 꺼내지 못하고
한참을 주춤하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신...자주 ... 연락해라. 자주보러오고...자주 생각하고.
못보니까 멀어지고 ... 그러다가 네가 날 잊어버릴까봐...
솔직히.....무섭다..."
"별걱정을 다하시네요- 그럴일 없을걸. 나 하루에 한번씩
너한테 전화하고 일주일에 한번은 너보러 오고 하루에 백번은
네 생각할건데."
그말을 한 윤주가 웃었다. 환하게 유림을 향해 웃어주었다.
그 미소하나로 알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아무말도 하지 않아도 ... 그저 그사람이 웃는것만 봐도
그사람이 하고싶은 말을 알 것 같다.
윤주의 미소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멀어져도 널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을거야..' 라고.
그린비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요~
그래서 목요일날 돌아오거든요 ^^
그때까지 못올릴것 같네요~
그대신 돌아오고 나서 올리께요오~
#. 실버엔젤 - Med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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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똑바로 챙긴거냐? 빠트린거 없고?"
"내가 바보냐? 다 똑바로 잘 챙겨넣었으니까 걱정 접어라."
"넌 워낙 덤벙대니까. 혹시나 빠트린거 없나 다시 확인해봐."
윤주는 바닥에 앉아 한창 짐싸기로 바빴고 유림은 윤주의 침대에
올라앉아서 이것저것 간섭해가며 윤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두사람의 표정 어디에서도 서운하다거나 슬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서로가 그런 감정을 숨기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걸 알고있는 두사람이다. 헤어진다고 해도
멀리 떨어진다고 해도.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서울과 강릉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오갈 수 있는 그런 거리인데 ...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사람인데 괜히 슬프고
안타까운 분위기 따위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확인 다했어. 완벽하게 챙겼어."
윤주의 말에 유림은 조금 표정을 굳혔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윤주가 짐을 다 챙겼다는 말은...이제 떠나야 한다는 말과 같다.
아무리 스스로 위로해봐도 .. 얼마든지 다시 만날 사람이란걸
알아도 그래도 떨어져야 한다는 허전한 마음까지 떨칠수는 없었다.
그런 유림의 마음을 다 아는지 윤주는 따뜻하게 웃어주며
유림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두사람은 한동안 아무말없이
그냥 그렇게 앉아있기만 했다.
"나 가기전에 하나 부탁하고 싶은거 있어."
"부탁? 어떤거?"
"너 피아노 잘 치잖아. 나 몇 번 훔쳐 들은적 있다. 네가 피아노
치는 소리가 너무 좋아서 ... 창문에 기대서서 몇 번이나 몰래
들은적이 있어. 오늘은 몰래 듣는거 싫고 ... 네가 날 위해서
한곡 멋지게 쳐주라. 응?"
유림의 피아노 소리가 좋았다. 기분 탓이겠지만 그 음색만은
윤주의 귓가에 특별하게 와닿았다. 어딘가 애달픈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평화롭게 와닿는. 피아노 만이 가진 것 같은
그 음색이 유림의 손끝을 통해 다시한번 아름답게 바뀌는것만 같아서
가슴한쪽이 따스해져 오는 그런 느낌이 들던 음색.
윤주의 부탁에 잠시 뭔가 생각해 보던 유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윤주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 한쪽편에
약간 낡은듯한 피아노 한 대가 서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유림은 숨을 가다듬고 윤주를 바라보았다.
"음...그래, 이번에는 네가 선곡해봐. 어떤게 좋을까?"
"나 피아노곡은 잘 몰라. 음..근데 좋은건 .. 왜 있잖아
네가 자주 치는건데 ..어딘가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맑기도 한
것같은 음악인데..."
"내가 자주 치는 음악? Meditation 말이야?"
"제목은 몰라. 아마 그 음악이 맞을 거야."
유림은 피식 웃었다. 유림이 가장 좋아하는 그 곡을 윤주 또한
좋아한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가슴을 울리는 것 같은 음색이 좋아
유림이 좋아하는 곡. 유림의 희고 긴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심호흡을 한 유림의 손이 미끄러지듯 건반 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가에 기대서서 그런 유림을 바라보는 윤주의 표정은 그냥 멍해졌다.
아름답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확실하게 와닿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흔히들 예쁜 보석이나 또는 예쁜 풍경.
그런것들을 아름답다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움과는
비길수 없는 아름다움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유림이 ... 그리고 감미로운 피아노의 선율.
저런걸 ... 아름답다고 말하는 거겠지?
숨도 못쉬게 아름답다는건 ... 저런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유림아, 나 정말 행운아다. 여기로 오게되고 널 알게되고.
널 사랑하게 된 행운을 거머쥔 나는 ... 정말 행운아야.
김기사가 트렁크에 윤주의 짐들을 다 싣고나자 윤주는
그제서야 떠난다는게 실감이 나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두달사이에 이렇게나 정이 많이 들어버렸을까.
이렇게 떠나는게 못내 아쉽고 서운할까.
"선생님, 가셔도 자주 놀러오시고 하셔야되요."
윤주의 손을 꼭 붙들고 말하는 은숙의 말에 윤주는 고개를
끄덕끄덕 해주었다. 당연히 그럴 마음이었다. 유림이를 보러
자주 오고 ... 연락도 자주하고. 그렇지 않으면 윤주 자신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요, 자주 올꺼에요. 연락도 자주 하구요. 유림아 ...
나 그럼 ... 갈게."
"응? 그래...잘가..."
호주머니에 손을 꼽고 좀 뒤떨어져 서있던 유림은 윤주가 건낸
인사말에 웃어주며 윤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야, 헤어지는데 악수는 너무 약한거 아니냐? 아주머니, 아저씨
저 잠깐만 실례좀 하겠습니다."
김기사와 은숙이 실례라는게 도대체 뭘까 채 생각해내기도 전에
윤주는 유림을 꼭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윤주의 행동에 처음에는
당황하던 유림도 이내 미소지으며 그런 윤주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다른 젊은이들이 그런 행동을 했다면 틀림없이 눈살을 찌푸렸을
김기사와 은숙이었지만 그들의 눈에 지금 유림과 윤주 두사람은
조금도 미워보이지가 않았다.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서 오히려
보는 사람이 기분 좋기까지 한 두사람이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윤주는 차에 올랐고 김기사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창밖의 유림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자동차가 천천히
숲속길을 빠져나가고 뒤에서 그런 윤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유림의 모습도 윤주의 시야에서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두달.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윤주에게는 참 많은 추억을 준
기간이었다. 윤주의 머릿속에 유림과의 두달이 빠른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났다.
처음 보았던 그의 모습 ... 유림의 맑고 청아하던 ... 미성의 목소리.
그리고 같이 산책했던 일. 함께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장난치던 일들.
불꽃놀이 ... 오늘의 피아노까지.
모두 하나도 빠트릴 것 없이 너무 예쁜 기억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덜해졌다.
앞으로 유림과 더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서울과 강릉의 거리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 도련님이 참 많이
웃으시고 밝아지셨어요. 서울 가셔도 자주 오셔야합니다."
김기사에 말에 윤주는 그냥 생긋이 웃어만 주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분명한 일이었기에...
"그럼요..자주 올꺼에요."
"우리 도련님 참 예쁜 분이시죠?"
"네, 유림이는요 ... 너무 예쁘고 맑아요. 꼭 천사같거든요."
"허허, 선생님도 참 에쁜 분이십니다. 그래서 두분이 참 보기 좋구요.
우리 도련님 많이 사랑해 주세요 ... 외로운 분이세요."
"네..많이 많이 사랑할꺼에요. 정말 많이 사랑할꺼에요...
너무 사랑해서 심장이 터져버릴만큼 ... 사랑할꺼에요..."
#. 실버엔젤 -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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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정윤주! 여기야!!!"
카페에 들어서서 두리번 거리던 윤주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경미를 발견하자 씨익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방학동안 경미의
모습은 꽤나 많이 변해있었다. 머리도 하고 귀도 뚫고.
"오오~ 김경미! 너 뭐냐? 바람났냐? 패션이 현란해졌다."
"바람? 아이고, 좀 나고 싶은데 안나더라. 그냥 혼자 이리저리 꾸며봤지.
야, 너 나한테 해주기로 한 얘기 안잊었지?"
경미는 아마도 남자친구 얘기를 하는 듯 했다. 싱긋이 웃은 윤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아 냉수한잔을 쭈욱 들이켰다.
"내 남자친구가 그렇게 궁금하든?"
"그럼, 이 기집애야! 우리과 최고의 킹카 현수선배까지 마다한 네가
사귄다는 남자는 도대체 얼마나 잘난남자냐? 궁금해 미치겠다."
"후훗, 보면 놀랄걸. 니 예상이랑은 좀 다른 타입일텐데."
"뭐냐? 뜸들이지 말고 얼른 공개해라아~"
자꾸만 조르는 경미를 못이기는척 하며 윤주는 지갑을 꺼냈다.
그속에 끼워져 있는 유림과 찍은 사진을 보자 다시한번 웃음이 나왔다.
강릉에서 올라온지 이제 겨우 삼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유림이 보고싶었다.
"이거 아무한테도 공개 안하려고 했는데 ... 할 수 없지. 네가 궁금
궁금하다니 가르쳐 주는 수 밖에."
윤주가 짠하며 지갑을 내 보이자 경미는 두눈을 껌뻑이며 한참동안
사진을 넋놓고 쳐다보았다. 윤주가 좋다고 적극적으로 대시하던
현수선배는 영문과 뿐만 아니라 다른과에서도 넘보는 킹카였다.
큰키와 서글서글한 눈매. 그리고 쿨하다고 말하는 그 성격이 누가봐도
남자답고 괜찮은 선배였다. 그에 못지 않게 학점도 우수한.
그래서 처음에 그가 윤주에게 다가섰을 때 모두는 윤주가 당연히
현수를 받아들일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윤주는
현수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경미는 그런 윤주가
사귀는 남자라면 현수보다 더 굉장한 킹카일꺼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윤주가 내민 사진속에 있는 남자는 .. 글쎄 , 남자라고
말하기 보다는 소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분명 잘생긴 얼굴이라 말할수 있을법한 얼굴이었다.
하얀 얼굴과 큰 눈과 ... 미소가 예쁜. 하지만 이건 현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스타일이었다.
"저..정윤주! 너 뭐냐? 현수선배 뻥 차고 사귄다는게 이렇게
여자같이 생긴애냐? 얘 도대체 몇 살이야?"
"우리 유림이가 어때서? 유림이 열여덟이다."
"열여덟? 정윤주! 오, 이런. 두 살이나 연하를 좋아해?"
"두살이면 어떻고 스무살이면 어때? 내가 좋다는데. 어떠냐? 멋지지?"
더 이상은 할말이 없는 듯 경미는 윤주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이런 경미의 반응쯤은 미리 예상했던 것이기에 윤주는 별 반응없이
그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세상에 정윤주! 어디서 만난거야?"
"아르바이트 했잖아. 대사집 도련님 과외. 그집에서 만났어.
유림이가 내 제자인 셈이지."
"너 과외하러 가서 연애질만 하고왔구나!"
"아냐아~ 과외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 우리 유림이가 너무 똑똑해서
내가 가르칠게 없어서 그렇지."
"어쭈우- 우리유림이? 언제부터 '우리' 자까지 붙이는 사이가 됐냐?"
"왜? 부럽냐?"
능글맞은 윤주의 말장난에 경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어쩌면 이게 가장 정윤주 다운 선택인지도 몰랐다. 모두들 다 인정하는
킹카라도 정윤주 눈에는 모자라고 이렇게 곱상한 소년이 더 좋다니.
그래, 참 정윤주 다운 선택이야.
"그래, 솔직히 좀 탐나는데? 예쁘장한게 진짜 도련님같이 생겼다.
쿡, 근데 이런 도련님이 널 좋다고 해준다니 너무 신기한걸."
"야야! 너 내친구 맞냐? 나정도면 완전 퀸카지 뭐가 모자라냐?"
"아이고, 아주 병에 팍 걸려서 돌아왔네. 너같이 험상궂은 퀸카가
어딨냐? 그나저나 현수선배 너무 불쌍해진다야. 이제 가망성도
완전히 사라져 버린거네."
"내가 뭐 잘못했냐? 애시당초 난 현수선배는 그냥 선배로는 좋아도
남자로는 별로라고 못박아서 말했잖아."
윤주는 정말 태연해 보였다. 윤주는 현수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넘기려는 듯 싶었다. 하지만 경미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주위에서 보기에 현수는 윤주를 꽤나 진지하게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 현수가 경미의 눈에는 한없이 불쌍해만 보였다.
"어쨌든 너 축하한다. 정윤주도 드디어 연애를 하는구나. 언제한번
소개시켜주라."
"우리 유림이 남 보여주기 아까운데. 흠, 생각해보고 결정하지.
나한테 잘해라. 그럼 특별히 유림이 소개시켜주마."
윤주의 농담에 두사람은 마주보며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윤주의 표정은 정말로 행복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유림과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하루하루 유림을
생각해보고 또 시간날때면 틈틈이 전화도 해보고.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유림과 함께 있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너무 사랑해서 ... 너무 행복해서 무서웠다.
이렇게 사랑해도 될까 ... 행복해도 될까 하는 생각에 괜시리
무서워졌다. 그정도로 유림이 좋았다.
별장의 하루는 조용하게 시작해서 조용하게 끝나곤 한다.
두달간 윤주가 머무르는 동안은 어딘가 시끌벅적하고 사람사는 맛이 나는
분위기였지만 윤주가 떠나고 나자 별장은 원래의 고요함을 다시
되찾았다. 유림은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그 깊숙이서 느껴지는 외로움과 그리움은 너무 큰것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좋아할수도 있구나 ...
한사람의 빈자리가 이렇게 큰것일수도 있구나를 유림은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괜히 혼자 있을때면 윤주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윤주가 쓰던 방앞을 지나다보면 멍하게 그 방안을 쳐다보곤 하는
유림이었다.
겨우 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도 그립다. 주말이면 내려오겠다고
윤주가 말했지만 유림에게는 그 주말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
혼자서 멍하게 밤하늘을 바라보던 유림은 원망스럽게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9시. 윤주가 전화올 시간이 됬는데 왜 핸드폰이 울리지 않는걸까.
자신이 전화를 해볼까하는 생각도 해보던 유림은 몇 번이고 핸드폰
폴더만 열었다가 힘없이 닫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먼저 해볼 용기는 나지가 않았다. 그냥 저장된 번호만 꾸욱 눌러주면
되는건데도 무서웠다. 괜한 자격지심이겠지만 유림에겐 그런 마음이
있었다.
혹시 자신이 윤주에게 짐이 되면 어쩔까 하는.
윤주에게 자꾸만 전화하고 보채서 윤주를 귀찮게 하면 윤주가
자신을 싫어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걱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Rrrrr- Rrrrr-]
그때마침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 유림의 얼굴은 더 이상 환해질 수 없을
정도로 환해졌다. 액정에는 분명히 '윤주' 라는 번호가 떠 있었다.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유림이 핸드폰을 열었다.
[유림아, 뭐하고 있었어?]
"뭐하긴. 그냥 ... 책읽고 있었지."
[야, 강유림. 목소리가 왜그러냐~? 나 안반가워?]
"아..안반갑기는. 반가워."
[근데 목소리가 왜그렇게 가라앉았니. 어디 아픈거야?]
"아니, 멀쩡해. 그냥...너무 반가워서 그런가보다."
[난또..걱정했잖아. 유림아 .. 나 오늘 내 제일 친한 친구한테
너 이야기 해줬어. 걔가 유림이 너 보고싶다고 그러더라.]
윤주는 한참이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유림에게
들려주었다. 경미의 이야기 하며 오늘 여동생과 다툰 이야기까지.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유림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윤주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사소한 것이라도 .. 아주작은 것이라도
유림에게는 너무 즐겁고 행복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 하다말고 유림이 벽에 걸린 시계를 무심코
쳐다보았다. 시계 바늘은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상에 ... 벌써 두시간이나 지났단말야?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기껏해야 한시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두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니.
"벌써 11시야. 윤주 너 내일 학교가야지."
[와- 벌써 열한시야? 시간 진짜 빠르네. 휴, 나 끊기 싫은데..아쉽다.]
"나도. 근데 너 전화요금 많이 나오면 어쩌려고그래. 얼른 끊고 자야지."
[응, 그래. 유림아- 잘자구 내일 또 전화할게.]
"그래, 윤주도 잘자고 학교 잘가고."
인사를 나누고 전화를 끊고나서도 유림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 윤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자 낮에 들었던
외로움과 슬픔은 싹 다 사라져 버린 것 만 같았다.
[Rrrrr- Rrrrr-]
또다시 울리는 핸드폰. 유림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히 윤주일 것이다. 또 무슨 빠트린 말이 있길래 금세 다시 전화지?
유림은 액정을 확인할 사이도 없이 급히 핸드폰을 열었다.
"뭐 빠트린말 있어? 끊고 일분도 안되서 다시 전화네."
[...유림아...애비다...]
당연히 전화기 너머에서는 윤주의 목소리가 들려와야 하는건데 ..
그래야 되는건데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는 윤주가 아니었다.
그 목소리에 유림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싸악 사라져 버렸다.
"아...아버지..."
#. 실버엔젤 -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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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쯤 수화기를 들고 전화통화를 마친 유림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몇 달만에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였지만 반가움 보다는
오히려 불편함이 더 컸다.
해외근무를 마쳤다는 그는 일주일 뒤 귀국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리고 귀국하게 되면 서울 저택으로 올라와 함께 지내자는 말도 함께
남겼다. 그 말에는 그냥 건성으로 대답을 한 유림이지만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다.
아버지. 이름뿐인 존재나 다름없었다. 10살 무렵 새어머니를 잃고 나서
부터는 아니 그전부터. 아버지는 유림에게 있어서 따뜻한 존재가
아니었다. 마냥 다가서기 어렵고 무서운.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그가 해외파견을 나갈 때면 유림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제 ... 그와 함께 살아야만 한다.
유림의 작은 얼굴에 온통 근심이 가득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쉬던 유림은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감싸쥐고 침대에
털썩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아버지' 라는 단어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유림의 새어머니가 세상을 뜨고나서 일년정도의 시간. 그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는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새로 결혼을 하고 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유림에게는 새새어머니이고 배다른 이복동생이 생긴 것이었지만
유림에게는 달갑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누구하나 유림을 함부로
대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잘해주고 친절해도 유림에게는
그것이 불편하기 그지없는 대우였다.
그리고 유림보다 11살이나 어린. 이제 겨우 일곱 살난 유림의
남동생 한림도 유림에게는 부담이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건강하고 밝게만 자라나는 동생.
자신에게는 항상 무뚝뚝하고 무서운 존재인 아버지마저 웃게 만드는
동생.
아버지...한림. 그리고 새새어머니.
행복해 하며 함께 서 있는 세사람. 유림은 결코 그 세사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윤주가 보고싶어졌다. 윤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왜 갑자기 윤주가 보고싶어 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냥 무작정 윤주가 그리웠다.
이럴 때 윤주가 옆에 있다면...그렇다면 너무 큰 위로가 될텐데.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했다.
윤주야 ... 아버지가 한국에 돌아온데.
돌아와서 ... 버리고 떠날때는 언제고 이제는 ... 같이 살자고 그런다.
어떡하면 잘하는건지 ... 넌 알까?
내가 ... 그 세사람 사이에 끼어드는게 ... 잘하는 일일까?
내모습이 .. 불쌍하고 비참해 보이지는 않을까...?
윤주야 ... 윤주야 ...
어떡하면 좋을까 .......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부산스럽게 등교를 준비하던 윤주는 다시 한번
달력을 쳐다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토요일이었다.
토요일 그 자체만으로도 날아갈 듯 기분좋은 날이었지만 윤주에게
오늘은 더더욱 특별한 날이었다.
유림을 보러 갈 수 있는 날!
드디어 유림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윤주는 벌써부터 잔뜩 들떠 있었다.
옷장을 한참이나 뒤적거려 하얀색 난방과 베이지색 면바지를 꺼내입은
윤주는 평소에는 바르지 않던 핑크빛 립글로즈도 살짝 바르고 집을
나섰다. 여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것이 정말로 엊그제 같이
느껴지는데 벌써 9월에 접어든 날씨는 더위가 한풀 꺾여 아침에는
제법 선선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윤주에게는 그런 아침공기가 더 상쾌하게만 느껴졌다.
유림을 만나는 날.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세상 모든게 다 좋아보였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이런것인가 보다. 그사람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고 그사람 만나러 가는 길은 너무나 즐겁고 ...
그사람 생각만해도 미소가 피어오르는.
윤주의 기분은 학교에 도착할때까지 그렇게 마냥 좋기만 했다. 그러나
교문을 들어서고 난 뒤 몇분쯤 뒤. 뒤에서 들려오는 한 목소리에 윤주의
그런 기분은 깨지고 말았다.
"윤주야, 정윤주!"
윤주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뒤따라오는 남자.
그의 목소리에 윤주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예상했던대로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현수가 숨을 몰아쉬며
놀란 표정으로 서있었다.
지금 막 후배들에게 윤주의 남자친구에 대해 듣고 달려오는 참인
현수의 표정은 황당함과 놀람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선배, 나한테 할말 있어요?"
"정윤주! 너 남자친구 생겼냐? 그게 진짜냐?"
역시나 예상했던 현수의 태도였기에 놀라거나 당황스럽지는
않았지만 윤주는 조금은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현수를 좋아한적도 없고 받아들일 마음도 애시당초 없었기에
미안할 마음은 없어야 하는건데 ... 그래도 진심으로 날
좋아해준 사람을 매몰차게 거절하려니 ... 다른 사람이 있다고
그 얼굴에다 대고 직접 말하려니 그래도 미안한 마음은 너무
크게 들었다.
그 미안함 때문에 잠시 망설이던 윤주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몸짓 하나에 현수는 멍한 표정이 되어서는 눈만 꿈뻑꿈뻑대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때부터. 윤주는 다른 학생과는 달라보였다.
어딘가 밝고 또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을 가진. 그보다 더 좋은건
그 씩씩함과 밝은 성격. 열정이 매력적인 여자였다.
윤주보다 예쁜 여자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지만 윤주보다
현수의 마음에 더 드는 여자는 도저히 찾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싫다는 윤주를 끈덕지게도 따라다니는 현수였다.
최고의 킹카가 여자 꽁무니나 따라다닌다는 수군거림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던 현수였다.
그런데 그런 윤주가 ... 다른 남자를 사겼다고 말하고 있다.
아주 행복하게 ...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선배, 나 남자친구 생겼어요. 정말 좋아하는 애가 생겼어.
미안해요. 선배도 좋은 사람인데 선배는 선배에요.
남자친구보다 좋은 선배요. 그럼 저 먼저 갈께요."
윤주는 대충 말을 얼버무려 버리고 현수를 향해 고개를
꾸벅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현수에게서 멀어져 갔다.
"정윤주!"
뒤에서 들리는 현수의 고함소리. 윤주는 걸음을 딱 멈추고
무슨 용건이냐는 듯한 눈길로 현수를 쳐다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현수는 주먹을 꽉 다잡아쥐고 거의 악이 섞인
목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정윤주! 너 후회한다! 꼭 후회하게 되있어!!!
나 너 포기안해! 그 남자랑 헤어지면 나한테 와라.
곧 헤어지게 될꺼야. 그렇게 되면 나한테 와라!!!"
교문을 내려가던 모두의 시선은 윤주와 현수에게로 쏠려있었다.
그러나 현수는 부끄러움도 잊었는지 너무나 당당한 눈빛으로
윤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가 차는듯한 표정의 윤주는 잠시 그런 현수를 쳐다보다
피식 웃어버렸다.
"선배, 잘못봤어요. 나 그렇게 쉽게 안헤어져. 유림이 보면
선배도 생각이 달라질꺼에요. 나중에 유림이 소개시켜줄께요.
그럼 선배도 좋은사람 만나요. 전 갑니다."
현수를 향해 능글맞게 손을 흔들어준 윤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겨 교문을 빠져나와버렸다. 태연한척 하고 교문을
빠져나왔지만 윤주의 가슴은 아직도 심하게 뛰고 있었다.
현수의 눈은 진심이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인줄 알았다.
현수가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은 그냥 지나가는 연애감정 정도라고
그렇게 여겨왔었다. 불과 몇시간 전까지만해도.
하지만 좀전의 현수의 눈에서 알 수 있었다.
저사람...진심으로 나를 좋아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그 마음을 웃음으로 거절하긴 했지만 그래도 불안하고 미안했다.
현수선배, 미안해요. 선배가 좋은 사람인건 다 알아요.
멋진 사람이죠. 솔직히 놓치기 아까운 남자란것도 알아요.
그런데요 선배, 난 유림이가 더 좋아요.
세상사람들이 다 선배가 더 낮다고 말해도 그래도 난 유림이가 좋아요.
미안해요 .. 선배 나보다 좋은 여자친구 얼마든지 사귈수 있는
사람이니까 더 멋진 여자 만나요.
씁쓸하게 미소짓고 윤주는 강의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고 멍한 현수는
한참이나 그런 윤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사람을 좋아한다는건 참 힘든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마음만큼 그사람이
날 좋아해 준다면 좋겠지만 사랑이란건 항상 그렇게 되는게 아니니까.
하지만 그사람이 날 좋아해 주지 않는다고해서 포기할 수 있는것도
아니다. 짝사랑으로 속이 타들어가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마음. 그게
짝사랑인 것 같다.
"정윤주, 난 기다린다. 진짜로 기다릴꺼야."
윤주는 이미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지만 현수는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수학여행에서 쨘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못올린거 오늘 열심히 한번 써볼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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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버엔젤 - 아버지
십분쯤 수화기를 들고 전화통화를 마친 유림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몇 달만에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였지만 반가움 보다는
오히려 불편함이 더 컸다.
해외근무를 마쳤다는 그는 일주일 뒤 귀국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리고 귀국하게 되면 서울 저택으로 올라와 함께 지내자는 말도 함께
남겼다. 그 말에는 그냥 건성으로 대답을 한 유림이지만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다.
아버지. 이름뿐인 존재나 다름없었다. 10살 무렵 새어머니를 잃고 나서
부터는 아니 그전부터. 아버지는 유림에게 있어서 따뜻한 존재가
아니었다. 마냥 다가서기 어렵고 무서운.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그가 해외파견을 나갈 때면 유림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제 ... 그와 함께 살아야만 한다.
유림의 작은 얼굴에 온통 근심이 가득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쉬던 유림은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감싸쥐고 침대에
털썩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아버지' 라는 단어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유림의 새어머니가 세상을 뜨고나서 일년정도의 시간. 그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는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새로 결혼을 하고 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유림에게는 새새어머니이고 배다른 이복동생이 생긴 것이었지만
유림에게는 달갑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누구하나 유림을 함부로
대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잘해주고 친절해도 유림에게는
그것이 불편하기 그지없는 대우였다.
그리고 유림보다 11살이나 어린. 이제 겨우 일곱 살난 유림의
남동생 한림도 유림에게는 부담이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건강하고 밝게만 자라나는 동생.
자신에게는 항상 무뚝뚝하고 무서운 존재인 아버지마저 웃게 만드는
동생.
아버지...한림. 그리고 새새어머니.
행복해 하며 함께 서 있는 세사람. 유림은 결코 그 세사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윤주가 보고싶어졌다. 윤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왜 갑자기 윤주가 보고싶어 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냥 무작정 윤주가 그리웠다.
이럴 때 윤주가 옆에 있다면...그렇다면 너무 큰 위로가 될텐데.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했다.
윤주야 ... 아버지가 한국에 돌아온데.
돌아와서 ... 버리고 떠날때는 언제고 이제는 ... 같이 살자고 그런다.
어떡하면 잘하는건지 ... 넌 알까?
내가 ... 그 세사람 사이에 끼어드는게 ... 잘하는 일일까?
내모습이 .. 불쌍하고 비참해 보이지는 않을까...?
윤주야 ... 윤주야 ...
어떡하면 좋을까 .......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부산스럽게 등교를 준비하던 윤주는 다시 한번
달력을 쳐다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토요일이었다.
토요일 그 자체만으로도 날아갈 듯 기분좋은 날이었지만 윤주에게
오늘은 더더욱 특별한 날이었다.
유림을 보러 갈 수 있는 날!
드디어 유림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윤주는 벌써부터 잔뜩 들떠 있었다.
옷장을 한참이나 뒤적거려 하얀색 난방과 베이지색 면바지를 꺼내입은
윤주는 평소에는 바르지 않던 핑크빛 립글로즈도 살짝 바르고 집을
나섰다. 여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것이 정말로 엊그제 같이
느껴지는데 벌써 9월에 접어든 날씨는 더위가 한풀 꺾여 아침에는
제법 선선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윤주에게는 그런 아침공기가 더 상쾌하게만 느껴졌다.
유림을 만나는 날.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세상 모든게 다 좋아보였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이런것인가 보다. 그사람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고 그사람 만나러 가는 길은 너무나 즐겁고 ...
그사람 생각만해도 미소가 피어오르는.
윤주의 기분은 학교에 도착할때까지 그렇게 마냥 좋기만 했다. 그러나
교문을 들어서고 난 뒤 몇분쯤 뒤. 뒤에서 들려오는 한 목소리에 윤주의
그런 기분은 깨지고 말았다.
"윤주야, 정윤주!"
윤주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뒤따라오는 남자.
그의 목소리에 윤주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예상했던대로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현수가 숨을 몰아쉬며
놀란 표정으로 서있었다.
지금 막 후배들에게 윤주의 남자친구에 대해 듣고 달려오는 참인
현수의 표정은 황당함과 놀람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선배, 나한테 할말 있어요?"
"정윤주! 너 남자친구 생겼냐? 그게 진짜냐?"
역시나 예상했던 현수의 태도였기에 놀라거나 당황스럽지는
않았지만 윤주는 조금은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현수를 좋아한적도 없고 받아들일 마음도 애시당초 없었기에
미안할 마음은 없어야 하는건데 ... 그래도 진심으로 날
좋아해준 사람을 매몰차게 거절하려니 ... 다른 사람이 있다고
그 얼굴에다 대고 직접 말하려니 그래도 미안한 마음은 너무
크게 들었다.
그 미안함 때문에 잠시 망설이던 윤주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몸짓 하나에 현수는 멍한 표정이 되어서는 눈만 꿈뻑꿈뻑대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때부터. 윤주는 다른 학생과는 달라보였다.
어딘가 밝고 또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을 가진. 그보다 더 좋은건
그 씩씩함과 밝은 성격. 열정이 매력적인 여자였다.
윤주보다 예쁜 여자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지만 윤주보다
현수의 마음에 더 드는 여자는 도저히 찾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싫다는 윤주를 끈덕지게도 따라다니는 현수였다.
최고의 킹카가 여자 꽁무니나 따라다닌다는 수군거림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던 현수였다.
그런데 그런 윤주가 ... 다른 남자를 사겼다고 말하고 있다.
아주 행복하게 ...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선배, 나 남자친구 생겼어요. 정말 좋아하는 애가 생겼어.
미안해요. 선배도 좋은 사람인데 선배는 선배에요.
남자친구보다 좋은 선배요. 그럼 저 먼저 갈께요."
윤주는 대충 말을 얼버무려 버리고 현수를 향해 고개를
꾸벅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현수에게서 멀어져 갔다.
"정윤주!"
뒤에서 들리는 현수의 고함소리. 윤주는 걸음을 딱 멈추고
무슨 용건이냐는 듯한 눈길로 현수를 쳐다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현수는 주먹을 꽉 다잡아쥐고 거의 악이 섞인
목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정윤주! 너 후회한다! 꼭 후회하게 되있어!!!
나 너 포기안해! 그 남자랑 헤어지면 나한테 와라.
곧 헤어지게 될꺼야. 그렇게 되면 나한테 와라!!!"
교문을 내려가던 모두의 시선은 윤주와 현수에게로 쏠려있었다.
그러나 현수는 부끄러움도 잊었는지 너무나 당당한 눈빛으로
윤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가 차는듯한 표정의 윤주는 잠시 그런 현수를 쳐다보다
피식 웃어버렸다.
"선배, 잘못봤어요. 나 그렇게 쉽게 안헤어져. 유림이 보면
선배도 생각이 달라질꺼에요. 나중에 유림이 소개시켜줄께요.
그럼 선배도 좋은사람 만나요. 전 갑니다."
현수를 향해 능글맞게 손을 흔들어준 윤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겨 교문을 빠져나와버렸다. 태연한척 하고 교문을
빠져나왔지만 윤주의 가슴은 아직도 심하게 뛰고 있었다.
현수의 눈은 진심이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인줄 알았다.
현수가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은 그냥 지나가는 연애감정 정도라고
그렇게 여겨왔었다. 불과 몇시간 전까지만해도.
하지만 좀전의 현수의 눈에서 알 수 있었다.
저사람...진심으로 나를 좋아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그 마음을 웃음으로 거절하긴 했지만 그래도 불안하고 미안했다.
현수선배, 미안해요. 선배가 좋은 사람인건 다 알아요.
멋진 사람이죠. 솔직히 놓치기 아까운 남자란것도 알아요.
그런데요 선배, 난 유림이가 더 좋아요.
세상사람들이 다 선배가 더 낮다고 말해도 그래도 난 유림이가 좋아요.
미안해요 .. 선배 나보다 좋은 여자친구 얼마든지 사귈수 있는
사람이니까 더 멋진 여자 만나요.
씁쓸하게 미소짓고 윤주는 강의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고 멍한 현수는
한참이나 그런 윤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사람을 좋아한다는건 참 힘든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마음만큼 그사람이
날 좋아해 준다면 좋겠지만 사랑이란건 항상 그렇게 되는게 아니니까.
하지만 그사람이 날 좋아해 주지 않는다고해서 포기할 수 있는것도
아니다. 짝사랑으로 속이 타들어가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마음. 그게
짝사랑인 것 같다.
"정윤주, 난 기다린다. 진짜로 기다릴꺼야."
윤주는 이미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지만 현수는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 실버엔젤 -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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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선생님, 여깁니다!"
강릉역에 미리 마중나와있던 김기사는 윤주가 역안으로 들어서자
반갑게 손짓을 해대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윤주에게로 쏠렸지만 윤주는 그런 것 쯤 신경쓰지 않는 듯 김기사 보다
한술 더떠서 짝짝 손뼉까지 쳐대며 김기사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거참, 선생님도. 겨우 이주일밖에 안지났는데 별일이야 있겠어요.
선생님도 잘 지내셨죠?"
"그럼요~ 유림이 보고싶어서 고생한거 빼면 저야 다 멀쩡하죠. 얼른
가요."
윤주는 싱긋 웃으며 김기사의 팔을 잡아끌었다. 한시라도 빨리 유림을
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윤주의 등살에 못이겨 서둘러 차로
향한 김기사는 함박웃음을 웃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아버지의 전화 이후로 내내 힘이 없어 보여서 안타깝던 유림이 윤주가
찾아와서 모처럼만에 활짝 웃을걸 생각하니까 저절로 기뻐졌다.
자신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유림을 십년이 넘도록 지켜봐온 김기사였다.
그에게 유림은 거의 아들같은 존재였다. 그런 유림이 윤주로 인해
웃고 행복할 수 있다니. 항상 아프고 슬프기만했던 유림이 행복해
한다니.
김기사가 신나게 속도를 낸 덕택에 평소보다 10분은 빠르게 별장에
도착했다. 차가 숲속길에 들어설 때부터 설레던 윤주의 가슴은 차가
별장앞에 도착하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차가 멈춰서자 마자 차문을 박차고 달려나간 윤주는 곧장 별장으로
뛰어갔고 김기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윤주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쿵쾅거리며 별장으로 들어간 윤주는 별장을 두리번거리며
유림을 찾기 시작했다.
분명 오늘 아침에 오늘 온다고 전화를 했는데 ... 얘가 어딜갔지?
"유림아! 강유림! 나왔어~"
윤주의 목소리가 조용한 별장을 쩌렁쩌렁 울렸지만 유림은 대답이
없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고 별장을 한번 쭈욱 둘러보던
윤주의 시야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들어왔다.
그래, 저 계단. 유림이 방은 저 위니까 ... 혹시 저기 있을지도 모르지.
윤주는 조심스럽게 계단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숨에 뛰어 올라갈수도
있지만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나무로 된 계단이 윤주가 한걸음씩
옮길 때 마다 삐그덕 대는 소리를 내고 코끝에는 향긋한 나무 향기가
느껴졌다. 정말 별장이 자연의 일부인양 그렇게 느껴졌다.
계단 끝까지 오른 윤주는 조심조심 발걸음을 유림의 방문앞으로 옮겼다.
느낌이라는게 확실히 맞는것이라면 유림이 분명 이 방안에 있을것만
같이 느껴졌다.
"유림아 ... 나 왔어. 들어가도 되니?"
방문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자 윤주는 늘상 그랬듯 그냥 문을
열고 유림의 방안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윤주의 예상이 맞아들어간
것일까. 유림은 방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미소지으며 유림에게로 다가서던 윤주는 몇발자국 걸어가다가 걸음을
멈춰버렸다. 윤주의 시선이 향한 테이블. 그 테이블 위에 널부러져 있는
약병이 윤주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지금 곤히 잠든 유림이 ... 저 약을 먹고 잠든걸까?
윤주는 조심스럽게 약병을 들어 라벨을 살펴보았다. 온통 전문 의학
용어들로 가득해서 약의 성분따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윤주의
눈에 너무도 선명하게 쓰여있는 세 글자가 들어왔다.
'진통제'라고 씌어진 그 글씨에 윤주의 가슴이 알싸해져왔다.
이렇게 천사같이 잠들었는데 ... 이렇게 평온하게 잠들었는데
사실 이건 잠이든게 아니라 진통제를 먹고 ... 약기운에 쓰러진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 진통제를 이렇게 먹고 잠들 정도로 ...
그렇게 아팠을까? 유림아 ... 너는 왜 아파야 되는거지? 이렇게 예쁜
우리 유림이가 왜 ... 이렇게 아프고 힘들어야 하는걸까...
서글픈 눈빛으로 약병을 바라본 윤주는 천천히 유림에게 다가가 잠든
유림의 머리칼을 쓸어넘겨주고 유림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늘따라 유림의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하게 보이는것만 같았다.
"....윤주야 ..."
잠든줄만 알았던 유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윤주의 목소리를 불렀다.
화들짝 놀란 윤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림을 내려다 보았다.
힘없이 축 늘어져서 큰 눈만 겨우 뜬 유림이 윤주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진짜 왔네 ... 윤주야 ... 보고싶었어..."
"그럼..진짜 오지 가짜로 오냐? 나도 너 보고싶었어. 무지무지
보고싶었어. 어디 많이 아파? 약 먹고 잠든 것 같은데 .... 괜찮은거지?"
"응..아까까지는 많이 아픈 것 같았는데 윤주 보니까 하나도 안아프다.
너무 기분좋다."
"바보야...날 보면 안아픈게 어딨냐? 너 지금도 많이 안좋아 보이는데...
내가 괜히 깨운것같아. 다시 한숨 잘래?"
그 말에 유림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얼마나 기다린 윤주인데 ..
얼마나 보고싶었는데 그런 윤주를 앞에두고 다시 잠에 빠져든다는게
너무나 싫었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서 윤주를 꼭 안아보고 싶은데
몸이 도저히 말을 듣지 않았다. 진통제를 과다하게 삼켜버린 터라
몸은 마비되 버린 듯 힘이 쭉 빠져나가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몸을 뒤척거려보려 노력하던 유림은 결국은 포기하고 한숨을 푹 내쉬고
윤주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어딘가 애처로와 보이는 유림의 시선이
강아지의 눈같다고 생각되었다.
"윤주야 ... 나 진짜 너 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기다렸는데 ...
괜히 약먹었나보다. 잠이온다..힘이 하나도 없어. 너 봐야되는데..."
나른한 유림의 표정과 목소리만봐도 알 수 있었다. 약기운을
이겨내기에는 힘에 부치는 유림이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갈거니까 자고 일어나도
우리 시간 많이 있잖아. 내가 옆에 있을테니까 푹 자. 유림아."
윤주는 이불을 끌어다 유림을 폭 감싸고 유림을 토닥거려 주었다.
마치 어린아이를 재우는 새엄마처럼 그렇게 한참을 유림 곁에서
윤주는 유림을 토닥여 주었다.
잠들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보던 유림은 눈꺼플이 스르르 감겨옴을
느꼈다. 너무나 편안해졌다. 며칠간을 아버지 일..그리고 자꾸만
찾아오는 심장발작등으로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던 유림이었다.
그러느라 신경은 잔뜩 곤두서 있고 잠조차 잘 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윤주가 토닥여주는 따스한 온기에 모든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려버렸다. 아버지에 대한 걱정도 .. 심장 발작에 대한 염려도
사라지고 평온해졌다. 윤주가 옆에 있어서 가슴까지 따뜻해 짐을 느끼며
유림은 잠이 들었다.
"대사님! 이쪽입니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공항에서 누군가를 찾아 두리본 거리던 강대사는
저편에서 손을 드는 비서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쪽으로 향했다.
그의 뒤쪽으로는 아직 한창 젊은 그의 부인과 그의 막둥이 아들 한림이
따르고 있었다.
"귀국을 축하드립니다, 강대사님."
"허허, 그래. 고맙네. 축하는 둘째치고 차는 대기시켜 뒀나?"
"네, 공항에 대기시켰습니다.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나가시죠."
비서의 안내를 따라 강대사 내외와 한림이 공항을 빠져나왔다.
이제 50데 초반의 나이인 강대사는 어딘가 엄격함과 품위같은게
느껴지는 중년의 남자였다. 커다란 눈매와 날렵한 턱선은 유림을
떠올리게 했지만 전체적으로 풍기는 그의 분위기는 유림과는 딴판이었다.
"아빠, 우리 이제 집에 가는거야?"
이제 일곱 살된 한림의 귀여운 목소리에 강대사의 근엄한 입술에도
미소가 피식 걸렸다.
"그래, 한림아. 이제 우리 집으로 가는거야. 어때? 신나지?"
"응, 신나는데 한림이는 유림이 형도 보고싶어. 형은 언제와?"
'유림' 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강대사는 잠시 멈칫하다가 그냥
웃어버렸다. 한국에 오자 제일먼저 유림이 떠올랐다. 이탈리아로 파견
근무를 나가게 되면서 데려가지 못하고 혼자 한국에 남겨둬서 마음이
쓰이던 아들이었다. 몸도 아픈 녀석을 아무도 없는 한국에 두고 가서
미안한 마음이 너무나 컸다.
그런데 이제 그런 아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유림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할지 그는 막막하기만 했다.
강대사 자신도 자식에게 살갑게 굴거나 다정하게 구는 성격은 되지
못했고 유림또한 아버지에게 애교를 부리며 매달릴줄 아는 성격이
되지 못했기에 두사람사이는 항상 어딘가 어색함이 흘렀다. 더구나
삼년이라는 긴 시간을 서로 보지 않고 지냈는데 그 어색함이 더
커지진 않았을까.
"한림아, 유림이는 곧 우리 집으로 올라올꺼야. 그때 형이랑 만나면 돼.
그렇죠, 여보?"
강대사가 아무런 말이 없자 옆에 서있던 그의 부인이 입을 뗐다.
이제 겨우 30대 후반의 나이인 선옥은 강대사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후 강대사가 재혼한 상대가 바로 선옥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날렵한 선들이 한림과 쏙 빼닮아 있었다.
"그래, 내가 전화해 뒀으니 알아서 저택으로 올꺼야. 한림아, 걱정마라.
유림이 형이 오기로 했으니까. 우린 일단 우리집으로 가자꾸나."
그말에 한림은 이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비서의 손을 잡고 공항밖으로
폴짝폴짝 뛰어나갔다. 한림과는 좀 떨어져서 뒤를 따르던 강대사 내외는
서로의 얼굴을 한번 마주보고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여보, 유림이가 서울 저택으로 오긴 온데요? 예전처럼 절 불편해
하진 않을까요?"
"걱정마. 그녀석도 이제 철도 들만큼 들었을테니 예전같이 그러기야
하겠어. 그리고 이제 치료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지. 서울로 데리고와서
그방면에 최고인 주치의 몇을 붙일 생각이야."
"그래요. 그렇게 해서라도 얼른 유림이가 나아야죠."
강대사의 머릿속에는 잠시 예전의 유림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 그가
재혼하고 난 후 선옥을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때. 유림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 보다 꽤 심각했다. 원래 낯을 많이 가리고 얌전한 아이
였지만 선옥에 대해서는 굉장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말도 하지 않고 함께 식탁에 앉는 것조차 유림은 싫어했었다.
그런 반응이 한림이 생기고 나서는 더욱 심해져서 강대사를 곤란하게
했던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제발 그렇지 않기를 그는 간절히 바랬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공항 주차장에 있는 검정색 벤츠앞까지
도착한 강대사는 차에 올랐다. 그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 실버엔젤 - 가족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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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쯤 됐을까? 유림은 잠시 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깨어났다.
잠시만 자다가 일어나야지 하고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벌써
주위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윤주는...윤주는 어딨지?
갑자기 불안해졌다. 너무 늦게 일어나서 윤주가 그냥 가버리진
않았을까...왜 윤주가 옆에 없는걸까 마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유림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위에 놓인 스탠드의 스위치를
켰다. 오렌지빛 조명이 은은히 방안을 밝히고 깜깜했던 방안이 어느정도
밝아지자 유림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유림의 방 한쪽 구석에 놓인 안락의자에 윤주가 잠들어 있었다.
유림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다 지쳐서 잠들어 버린듯한 윤주.
그 얼굴을 보자 유림은 안도감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난 유림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게
살금살금 윤주가 잠든 의자 앞까지 다가갔다. 윤주가 깊이 잠들었나
눈앞에 손가락을 휘휘 움직여 본 유림은 윤주가 꿈쩍도 하지 않자
조심스럽게 잠든 윤주의 손을 잡아봤다.
참 따뜻한 손이었다. 하얗고 조그마한 윤주의 손이 마치 아기손같이
보였다. 무엇보다도 온기를 가진 그 손이 유림은 좋았다.
"강유림~ 이거 반칙인데. 잠들었을 때 몰래 손잡는건 반칙이야."
잠든줄 알았던 윤주가 갑작스레 말을 꺼내자 유림은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잡고있던 윤주의 손을 놔버렸다. 놀라서 어쩔줄 몰라하는
유림의 모습을 보며 윤주는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조금전 유림이 스탠드 불을 켤때부터 깨어있던 윤주였다.
눈을 뜨려 했지만 유림이 침대에서 내려오는 소리에 가만히 눈을
감고 자는척을 하던 윤주였다.
"노..놀랐잖아!"
"왜에~? 무슨 잘못이라고 했어? 놀라기는. 내 손 잡아본 소감이 어때?"
"소감은 무슨.."
"에이~ 손이 참 예쁘다거나 뭐 그런 칭찬 하나쯤은 해도 되는거 아니냐?
그럼 내가 정말정말 기쁠텐데."
"모..몰라..나 ... 바람좀 쐬고 올게."
뭐가 그리 쑥스러운지 귀까지 빨개진 유림은 서둘러 말꼬리를 돌리고는
허겁지겁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 같다.
왜 그런 짓을 했지? 윤주가 이상한 녀석으로 생각하지는 않을까.
괜한 행동을 했다는 생각에 유림은 한숨만 푹푹 내쉬며 한참동안을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아직 손에는 윤주의 손에서 느껴졌던 온기와 그 감촉이 남아
있는것만 같았다.
이렇게나 윤주가 좋아져버렸다. 생각만 해도 행복해질 정도로.
그녀의 작은 것 하나에도 어쩔줄 몰라하고 행복해하고..들뜨는
어느샌가 윤주앞에만 서면 어린아이...철모르는 어린아이가 되버린다.
하지만 너무 행복해진다. 어리광부릴 누군가가 있다는게.
기댈 누군가가 있다는게 ... 그리고 내가 ...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지만...내가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는게 너무 행복하다.
내몸하나 제대로 어쩔수 없는 나지만...윤주를 지켜주고 싶다.
윤주가 기댈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다 그런 생각이 쭈욱 들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친뒤 두사람은 나란히 별장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밤하늘이 내다보이는 테라스에서 두사람은 아무 말없이 하늘만 올려다
보고 있었다. 숲속의 밤하늘은 언제봐도 참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아니,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 때문에 더 아름다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윤주야, 너희 가족 얘기 궁금하다. 얘기해주라."
느닷없는 가족이야기라니. 윤주는 왜그러냐는 눈빛으로 유림을
바라보다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림의 옆모습이
너무 쓸쓸해보였다. 그래서 갑자기 왜 가족이야기는 묻는거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우리집은 식구가 좀 많거든. 새엄마랑 아빠. 그리고 사남매가 있어.
놀랍지않냐? 요즘 세상에 사남매 찾아보기 힘든데."
"응. 사남매면 많네."
"많아서 집이 북적북적거려. 항상 그랬었어. 아침이면 화장실 전쟁이
벌어지거든. 서로 먼저 씻겠다고 난리법석이야. 거기다가 밥먹을 땐
또 어떻고? 완전 난장판이야. 반찬 맛있는거 하나 있으면 빨리 먹어야지
안그러면 못먹는다. 내가 첫째로 내 밑에 동생이 지금 대학생이고
나머지 두명은 아직도 초등학생이야. 나이 차이도 좀 많이 나는 편이지.
새엄마는 그야말로 평범해. 평범한 가정주부신데 굉장히 소녀같은 분이야.
소설책 좋아하시고 꽃선물 받는걸 좋아하시는. 그리고 아빠는...음..
한마디로 스마일맨이야. 항상 웃고계셔. 가끔 우유부단해서 답답할때도
있지만 그래도 사람은 참 좋은 분이야. 진짜 평범한 시청 공무원이셔.
우리집 소개는 이정도. 별거없지?"
윤주의 물음에 유림은 대답대신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슬퍼 보였다.
윤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눈동자가 너무 애달파 보였다.
"아니...너무 좋다. 너무너무..듣기 좋아. 너희집은 ... 사람사는
맛이 날것같아."
진심으로 부러웠다. 평범한 가족...다투고 가끔은 서로 미워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결국은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사는 평범한 가족.
유림은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던 가정을 가진 윤주의 모습이
부러웠다.
"유림아...오늘 왜그래? 안좋은일 있는거야?"
"나도 가지고 싶다...그런 집 있잖아. 학교를 다녀오면 집에 새엄마가
있는거야. 새엄마는 내뒤를 따라오면서 공부해라 씻어라 잔소리 하시고
나는 투정도 부리고. 저녁상 앞에서 아빠한테 오늘 학교 얘기도
하고 ... 새엄마한테 어리광도 피워보고. 넌 평범하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윤주야 그거 평범한거지만..그게 제일 행복한거야. 어떻게보면
평범한 행복이 가장 큰 행복이야...왜냐하면..나같은 녀석도 있거든.
그 평범한걸 가지고 싶어하는데도 .. 절대로 가질수 없는 나같은
녀석이 .. 있거든."
가슴이 찡해져왔다. 그래, 유림이는 새엄마가 안계셨지...그리고 ...
아빠는 외국에 나가 계신다고했지. 유림의 가족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얼핏 느끼기에도 평범한 가정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유림이 많이 외로웠구나..힘들었구나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근데 윤주야 ... 아버지가 귀국했데. 다시 돌아오셨데. 한국으로..."
"그래? 잘됐다! 그럼 이제 유림이도 할 수 있겠네. 아빠한테 하루일과를
얘기하고 어리광도 피워보고."
윤주는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유림은 고개를 숙여버렸다.
윤주의 말대로라면 얼마나 좋을까. 여느 아버지처럼 그렇게 ...
인자하게 웃어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한테는 나말고도 있어. 어리광 피우고 사랑스러운 아들이 ...
하나 더있어.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도 하나 가지고 계시지."
"유림이 동생있니?"
"말하자면 그런거겠지. 새엄마가 돌아가시고...재혼하셨어.
그여자랑 사이에서 아들하나 낳았는데 걔가 예뻐죽지.
그래서 나같은놈 하나는 그냥 버려두고 셋이서 해외근무 나갔다.
그래놓고 다시 돌아왔다고 ... 날더러 다시 들어오래. 집으로 오래.
근데 윤주야, 나 너무 헷갈린다. 어디가 집인걸까?
그 세사람이 사는집이 ... 나한테도 집인걸까?"
유림의 두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좀처럼 울지 않는 유림인데...
울지 않으려 애쓰는 그인데 그래도 눈물이 나왔다.
너무 궁금했다. 과연 내가 갈곳은 어디일까? 누가 가족이고...
어디가 집인걸까?
내가 거기에 ... 그 세사람 사이에 끼일 자격이 있는 녀석일까.
잠시 그런 유림을 바라보던 윤주는 와락 유림을 끌어안아버렸다.
유림을 품에 끌어안고는 그냥 아무말없이 유림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뭔가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 할말이 없었다.
자신은 알 수 없다. 유림이 느끼는 기분이 어떤것인지 ...
그 외로움과 슬픔이 어떤 느낌인지. 그런 자신이 유림을 섣불리
위로하는건 웃긴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유림아..너 너무 예쁜애야. 누가봐도 사랑스러운..우리 유림이...
아빠가 있고 ... 새엄마가 있고 동생이 있는데가 집이지뭐.
그리고 이 별장도 집이잖아. 이 별장에는...널 너무 아끼는
아주머니랑 김기사 아저씨랑 두분이 계시잖아. 피가 섞여야 가족이니?
사랑하며 살면 그게 가족이지..나도 있잖아. 별장도..서울집도
다 우리 유림이 집이야."
윤주의 품에 안긴 유림은 그렇게 한참을 펑펑 울어댔다.
며칠동안 쌓여있던 가슴속 슬픔이 한꺼번에 다 터져나오는 듯.
그런 유림을 감싸주는 윤주는 자신의 눈에서도 쏟아져 나오려하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유림을 보듬어주고 있었다.
남자가 우는건 참 꼴불견이라고 생각했어...남자가 약하게 우는거
별루라고. 그런데 있지 유림아...네가 우는건 ... 하나도 보기 싫지가
않다. 네 눈물은 ... 싫지가 않아. 아니, 오히려 네가 내앞에서 우니까
좋다. 다른데서 울지말고 내앞에서 울어 유림아..내가 달래줄 수 있잖아.
혼자서 울지말고...내앞에서 울어...응? 유림아..
네가 혼자서 눈물흘린다고 생각하면...내가 너무 아프다...
'아버지' 그리고 '가족'. 그런 머리아픈 단어들이 조금씩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윤주의 말을 한번 믿어보고 싶었다.
서울에 있는 저택도..이 별장도.
다 집이라고. 다 내가 있을만한 자격이 있는곳이라고.
유림은 눈물을 닦고 윤주를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훌쩍이며 눈물을 닦은
유림은 다시 윤주의 허리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윤주는 유림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고 유림은 윤주의 품에 기대서.
한참을 그렇게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서로 함께 있는 순간...
걱정..근심..슬픔따위는 다른 세상의 것처럼 느껴졌다.
#. 실버엔젤 - 3년만의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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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장으로 향하는 흙길위로 검정색 벤츠가 유유히 들어서고 있었다.
별장앞에 멈춰선 차에서는 강대사가 내려섰다. 잠시 별장과 그 주변을
돌아본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 무거운 발걸음을 별장쪽으로 옮겼다.
오늘. 아들을 삼년만에 다시 만나는 날이다. 두고떠난 아들.
하지만 항상 마음에 걸렸던 아들이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별장문을 두드리자 잠시뒤 문이 열리고 은숙이
놀란 얼굴로 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가벼운 목례로 그 인사를
받아들인 강대사는 뚜벅뚜벅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서서
몇발자국 옮기면 나타나는 유림의 방. 그는 그 방문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유림을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야말로 버리듯 두고
떠났었던 아버지인데 ... 어떻게 아들을 다시 봐야할까.
꽤나 혼란스러웠다. 이태리로 근무령이 떨어졌을 때. 그로써는 적지
않게 고민되는 일이었다. 심장병으로 한참 수술을 받고 몸이 약할대로
약해져 있던 유림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는건 애시당초 불가능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떠나지 않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는 아내인 선옥과 아들 한림. 그 두사람만을 데리고서 한국을
떠났다. 유림을 한국에 남겨두고서. 이 별장에 남겨두고서 그는 그렇게
떠났다. 고의는 아니었다. 그또한 가슴아픈 심정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도 안다.
유림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가족이라 믿었던 사람들이 자신만 남겨둔채
다 떠나버리고 그런 가족들을 바라보는 15살 소년의 마음이 어땠을지.
'똑똑-'
그는 큰 결심을 했는지 용기를 내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유림의 짧막한 대답이 들려오고 그는 스르르 문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리고 그의 눈앞에 유림의 모습이 나타났다. 출국할 때 공항에서
배웅했던 유림의 모습 이후로는 삼년만에 처음보는 아들의 모습이었다.
그때 유독 약해보이고 작던 아들은 그래도 삼년사이에 그전보다는
나아진 모습이었다. 여전히 작고 마른 체구였지만 그래도 그때보다
나아진 아들의 모습에 그는 일단 마음이 놓였다.
"그동안 잘 지냈냐?"
"...네...아버지는...?"
"나도 그럭저럭 잘 지냈다."
두사람 사이에 어색하고 상투적인 몇마디가 오고갔다. 더 이상 할말을
찾을수도 꺼낼수도 없었다. 원래부터 어색했던 그들 부자사이에
화제거리가 존재할리 만무했다.
"짐은 다 챙겨놨냐?"
"네. 유모랑 김기사는...같이 가는겁니까?"
"그래, 지금까지 널 돌본 사람들이니 같이 가야지. 너도 그걸 원했고."
"감사합니다."
"그런걸로 감사는. 짐은 김기사한테 차에 싣고 오라고 말해뒀다.
너는 내차를 타고 먼저 올라가도록 하자. 두사람은 뒤따라 올거야."
그는 그말만을 남기고 먼저 뒤돌아서 계단을 뚜벅뚜벅 내려가버렸다.
유림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였다.
그가 자신을 버리듯 내팽게치고 이태리로 떠나버렸을 때 그를 미워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버지를 탓하고 미워해보고 그렇게 삼년을 보냈다.
하지만 그랬던 그이지만 이렇게 삼년만에 다시 만나고 보니 조금은
반갑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도 변함없는...자신을 향한 딱딱하고
냉담한 그의 말투에 유림은 조금 가지고 있던 희망도 버려버렸다.
그래, 뭘 바랬던거지? 저 사람이 다정하게 손이라도 잡아줄줄
알았던 거야? 강유림...괜한 생각하지 말자. 저 사람은 내 아버지야.
냉혈한 강민우 대사. 저 사람한테...뭘 바라겠어?
유림은 잠시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래도 삼년을 지냈던 방인데.
모든게 다 익숙하고 친근한 것들인데 두고 떠난다는 생각에
서운하기까지했다. 하지만 미련을 가져봤자 소용없는걸 잘 아는
유림이기에 그냥 가벼운 한숨만을 내쉬고 강대사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차를타고 서울로 올라가는 내내 유림은 차창밖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강대사 또한 그런 행동을 취할 뿐. 두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고가지 않았다. 그런 차안의 시간은 유독 더디게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창문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이제 서울에 진입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높은 건물들과 많은 차들. 그리고 소란스러운 거리의 풍경들.
그렇게 혼잡스런 서울의 풍경들이 몇십분쯤 스쳐지나고 차는 고풍스러워
보이는 저택앞에 유유히 멈춰섰다. 기사가 차문을 열어주자 강대사가
먼저 차에서 내리고 유림은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3년만에 찾아온 저택은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높은 담장과 그
너머로 보이는 저택의 모습. 다른 장차관급 인사들의 저택에 비하면
화려한것도 아니었지만 일반인이 보기에는 입이 떡하니 벌어질 정도로
크고 멋진 집이었다.
그러나 유림에게는 별 느낌이 없었다. 유림에게 저택은 그저 들어가기
싫은 커다란 건물에 불과했다.
"유림이 형아~!"
두사람이 대문을 열고 저택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한림이 두팔을 벌리고
두사람을 향해 쪼르르 달려나왔다. 강대사는 웃으며 한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만 유림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3년전 출국할 때 겨우 네 살먹은 꼬마였던 한림이 이제는 제법 커있었다.
유림은 그제서야 그 꼬마가 한림이란걸 알아 차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형아 진짜 많이 컸다~ 한림이두 많이 컸지?"
"그래...그런 것 같네."
너무나 반가워하며 유림에게 매달리는 한림과는 달리 유림의 태도는
그냥 무덤덤했다. 유림에게는 한림도 아버지도. 그리고 새새어머니도.
다 남같은 느낌만 들었다.
유림의 그런 태도에 한림은 조금 시무룩해 있다가 이네 다시
환하게 웃으며 유림의 손을 잡았다. 유림이 가만히 그런 한림을
쳐다보았지만 한림은 그냥 씨익 웃어보였다.
풋...정말 누구랑 닮았네.
해맑게 웃는 한림의 모습. 순간적으로 윤주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것만
같았다. 어딘가 모르게 한림은 윤주를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생김새는 아니지만 저렇게 환하게 웃을때는 영락없이 윤주였다.
그런 한림을 향해 유림은 피식 한번 웃어주고는 한림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 저택으로 들어섰다. 초조하게 두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선옥이 유림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조심스럽게 미소지으며 유림에게
다가왔다.
"유림아, 그세 많이 컸구나. 오랜만이지? 다시 같이 살게되서 기쁘구나."
"...네...그렇네요."
"응...그래..아! 오느라 피곤했지? 유림이 네방은 예전에 쓰던 방으로
다 정리해 놨단다."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유림은 형식적인 인사만하고 가방을 들고 이층으로 훌쩍 올라가 버렸다.
유림이 계단에서 사라지고 나자 선옥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선옥이 강대사와 재혼했을 때. 그때 유림은 10살짜리 꼬마였다.
새엄마를 잃은지 채 일년도 되지않은. 게다가 심장병이라는 큰 병도
안고있고 그래서 큰 수술도 한차례 받아야만 했던 유난히 작고 곱상했던
아이. 첫눈에 유림이 마음에 들었다. 배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그아이의 새어머니가 되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역시
쉬운일은 아니었다.
선옥이 다가서려 할수록 유림은 더 물러서 버리는 듯 했다.
그녀가 베푸는 친절도 ... 다정한 말들도 유림은 모두 연민으로
받아들였고 여전히 냉담하기만 했다.
"새엄마, 형아 와서 너무 좋지? 난 진짜 신나! 나도 이제 형이랑 사니까."
이태리에서부터 형이 보고싶다고 난리를 피우던 한림은 정말 기쁜 듯
싱글벙글 웃어만 대고 있었다. 선옥은 그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옅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래, 새엄마도 신이 난단다. 저아이...내가 낳은 아이도 아니고
내가 어떻게 잘해준것도 없는 아이지만...이상하게도 참 끌린단다.
너무 안됐고 슬퍼보여서...내가 어떻게든 해주고 싶은 아이인데...
여전히 날 피하는구나.
그래...내가 잘못했겠지? 그이를 따라 외국으로 나갈때...그때
어떻게든 그사람 설득해서 유림이도 데려갔어야 하는건데...
몸이 약하단 이유 하나로 버리듯 한국에 두고 떠났던건...
다 우리 잘못이겠지?
"여보, 당신도 씻고 오세요. 제가 오늘 저녁은 거하게 준비했어요."
선옥은 섭섭한 마음을 이내 떨쳐버리고 환하게 웃었다. 옆에 서서
곤란한 표정으로 안절부절하던 강대사도 선옥이 그렇게 웃어주자
안심이 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유림이 다시 가족에게 돌아온 그날. 9월의 선선한 날씨에 그들의
만남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조금은 어색하고...거리감있게.
※늦어서 죄송해요 학교일로 선배들이 절 끌어 들여서 ;;
"야, 정윤주! 너 표정펴라. 아침부터 인상 하고는."
"지금 내기분이 말이 아니야. 시비걸지마라."
여간해서는 얼굴을 찌푸리는 법이 없는 윤주의 얼굴이 아침부터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벌써 유림에게 일주일째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핸드폰은 꺼져있고 별장 전화는 받지도 않고.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것만 같았다. 혹시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지 않나 자꾸 불길한 예감들만이 스쳐지나고 정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는 윤주였다.
"뭐냐아~ 정윤주! 얼굴펴! 우리과 스마일걸 네가 그렇게 찌푸리면
아침부터 강의실 분위기가 팍 죽잖냐."
"오늘은 스마일걸 안할래. 정말 신경쓰여 미치겠다니까."
아침강의가 끝난 강의실에서 윤주와 경미가 한참을 티격대고 있을 때
강의실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현수가 불쑥 강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이, 둘이 뭐하냐?"
"어! 현수선배! 별거 아니에요. 그냥 우리 스마일걸이 아침부터
우울하길래 제가 위로좀 해주고 있죠."
"아이고, 니가 무슨 위로를해? 사람 속 더 뒤집고 있구만.
그나저나 선배는 우리 강의실에 어쩐일이에요?"
윤주의 퉁명스런 물음. 현수는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윤주가 자신의 마음을 거절했다는걸 모를리 없는 현수였다.
윤주의 말 뜻을 너무 잘 이해했고 충분히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것과
자신의 마음은 별개였다. 윤주는 자신을 거절했지만 거절 당했다고 해서
좋아하던 마음이 한순간에 싹 사라지는건 아니었다.
"나야 뭐 윤주보러왔지."
"선배! 그러지 말라니까. 장난도 한두번이야."
윤주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튀어나왔다. 현수는 물론 경미까지
잔뜩 놀란 표정이었다. 영문과 내에서도 성격좋기로 유명한 정윤주가
이렇게까지 신경이 날카로왔던 적은 두사람의 기억으로는 지금까지는
한번도 없었었다.
"혀..현수선배, 선배가 이해해요. 얘 지금 자기 남자친구한테 일주일째
연락이 안된다고 완전 히스테리 상태야. 괜히 건들지 말고 우리는
나가요."
경미가 괜히 더 멋쩍어 하며 현수의 팔을 잡아 끌었지만 현수는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윤주만 쳐다보았다.
장난이라고 말했니...? 장난도 한두번이라고?
정윤주...내가 그렇게 가벼운놈으로 보이든? 장난으로 이러는 것 같아?
그의 얼굴에 서글픈 빛이 서려있었다. 윤주도 힐끔 그런 표정을 읽었지만
애써 현수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었다. 잠시 강의실에 공기가
무거워진듯한 착각마저 들도록 세사람 사이에는 싸늘한 기운만 도는
것 같았다.
"현수선배...경미야...미안해요. 내가 오늘 좀 기분이 그래.
진짜 미안해. 근데 있지 오늘은 나 먼저 갈게. 다음에 내가 술한잔
살께요. 오늘은 진짜 미안해요."
스스로 생각해도 두사람에게 미안한지 윤주는 억지로 한번 웃어주고는
가방을 대충 챙겨서 강의실을 빠져나가버렸다. 괜한 현수와 경미에게
화풀이를 한것같아 미안한 마음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강유림...너 어떻게 된거야? 왜 연락 안해...바보같은 유림이...
나 걱정되 미치겠잖아...혹시 무슨일 있는건 아니지...?
구월의 말에 접어든 날씨는 선선하고 하늘도 화창하게 개인날이었지만
윤주의 기분만큼은 먹구름이 잔뜩 끼인 날씨였다.
오늘따라 날씨는 또 왜이리 좋은지 괜한 좋은 날씨까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윤주가 교문쪽으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겨 막 교문을 빠져
나가려 할 때쯤 윤주의 귀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주야-!"
다정하게 '윤주야'라고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 흔하지 않을 것 같은
고운 미성의 목소리에 윤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세상에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유림이 뿐일텐데...이렇게 예쁘게
내이름을 불러줄 사람도 유림이 뿐일텐데...내가 헛걸 듣는건가?
너무 걱정이 되고 신경이 쓰여서 이제 환청까지 듣는걸까?
윤주는 끝까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윤주의 시선이 향한 교문 옆쪽에 유림이 환하게
미소지으며 서 있었다. 하늘색 셔츠를 걸치고 너무 환하게 웃고있는
유림의 모습이 보였다.
"가..강유림! 너...너 여기 어떻게 왔어?"
당연히 강릉 별장에 있어야 하는 유림인데..그런 유림이 서울에.
그것도 윤주네 학교 교문앞에 버젓이 서있다는게 윤주는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유림에게도 지난 한주는 눈코 뜰세없이 바쁜 한주였다.
서울생활에 적응한다고나 해야할까. 뭐 적응이라고 해봐야
학교도 나가지 않고 바깥출입은 거의 없는 유림에게 큰 일은 없었지만
짐을 옮기고 방을 새로 꾸미고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을 찾아가 새로운
주치의를 소개받는 것은 유림에게 있어서는 꽤 바쁜 일정이었다.
그러느라 윤주에게 서울 저택으로 들어오게 됬다는 연락도 깜빡 해버린게
오늘 아침에서야 생각난 유림은 불쑥 지갑만 들고 택시에 올라버렸다.
택시기사에게 무작정 윤주네 학교 앞으로 데려다 달라고 한 유림은
이른 아침부터 교문앞에 기대서서 교문을 나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다
쳐다보고 있었다. 저 무리 속에 혹시 윤주가 있진 않을까하며.
"너 뭐야! 왜 연락안하니? 핸드폰은 꺼놓고...별장전화는 불통이고!"
"아..그게 내가 그때 말 못했지? 나 지난주에 서울 올라왔어.
아버지랑...한집에 살아, 이제.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도 이제 여기
산단거지."
"핸드폰은 왜 안받냐?"
"아! 서울로 올라오면서 별장에 두고와버렸어. 그래서 연락이 안됬나봐.
미안해, 너한테 전화해야 되는건데 일주일동안 너무 바빠서..."
유림을 만나면 단단히 혼내주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전화도 해주지 않고
일주일동안 자신을 속끓이게 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 주겠다고 몇 번씩
이나 다짐했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유림의 모습에...환하게 웃는
그 미소에 그런 마음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유림에게는 왜 이렇게 한없이 약해지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윤주는 자신도 모르게 유림을 용서해 버리고 말았다.
유림이 지금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그리고 이제 유림과 같은
서울하늘 아래에 있을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고 가슴을 들뜨게
만들어서 화내는 것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몰라, 너땜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너 모르지? 혹시 또 아프진
않을까...나쁜일 생긴건 아닐까 진짜 피말라 죽는줄 알았어!"
윤주는 버럭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조금은 애교까지 섞여있는 것 같은 목소리에 유림은 연신
싱글싱글 웃고만 있었다.
서울에 적응하는건 유림에게는 꽤 힘든 일이었다. 아니, 서울에
적응한다기보다 새로운 집에 적응하는게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아팠던 머리가 윤주를 보니 다 나아버리는 것 같아 기분
좋은 유림이었다.
"미안해, 그대신 내가 오늘은 멋지게 한턱 내려고 맘먹고 나왔어."
유림이 윤주앞으로 지갑을 불쑥 내밀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유림의
지갑을 받아든 윤주는 빼꼼히 지갑안을 들여다 보았다.
정말로 거하게 한턱 낼 생각인제 유림의 지갑은 만원짜리 지폐로 두둑히
채워져 있었다.
"헉, 뭐야. 무슨 열여덟살짜리 지갑에 돈이 이렇게 많냐? 와, 역시
너 대단한 집 도련님이었어. 그럼 오늘 나 뭐사줄건데?"
"음...윤주가 좋아하는거."
"너 그말에 후회하지마라."
"괜찮아. 너무 비싼것만 아니면 돼."
윤주는 뭔가 머릿속에 떠올랐는지 유림의 한쪽팔에 다정히 팔짱을
끼고 유림을 잡아 끌었다. 유림과는 해보고 싶은게 참 많다.
세상에 모든 예쁘고 즐겁고 재미있는 일들은 다 유림과 해보고 싶었다.
맛있는건 다 유림이랑 먹으러 가고 싶고 재미있는 영화는 다 유림이랑
보고싶고.
"윤주야, 어디가는건데?"
"음...따라와 보면 알아! 얼른가자-"
윤주는 계속 혼자 키득거리며 유림을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조금전까지 원망스럽던 화창한 날씨가 어느샌가 너무 기분좋게 느껴지고
있었다. 유림과 함께 있는 오늘. 오늘 보는 가을하늘이 지금까지 가을
하늘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았다.
#. 실버엔젤 - 가을하늘보다 더 푸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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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주, 뭐냐? 잔뜩 기대하고 따라왔더니. 먹고 싶다는게 이런거였어?"
유림의 핀잔에도 윤주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행복한 미소만 방긋방긋
띄우며 테이크 아웃해서 가지고 나온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물었다.
실내에 틀어박혀 있기에는 오늘은 하늘이 너무나 맑은 날이었다.
이런 좋은 날씨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유림과 함께 조그마한 공원으로
나온 윤주였다. 손에는 공원옆 샌드위치 전문점에서 산 샌드위치와
레모네이드가 들려 있었다. 경치 좋은 벤치를 골라 앉은 윤주는
샌드위치가 맛있는지 연신 환호성을 내지르며 열심히 먹느라 바빴고
유림은 멀뚱히 그런 윤주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야, 뭘 그렇게 쳐다봐? 너도 먹어. 진짜 맛있어. 오늘같은날
실내에 쳐박혀 있는거 보다는 이게 훨씬 좋지. 안그래? 그치?"
"그래, 이게 훨씬 좋다."
어린애처럼 마냥 좋아만 하는 윤주의 모습에 유림도 웃어주었다.
윤주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좋아지는 기분이었다.
뭔가 대단한걸 사달라고 할거라 생각했는데 고작 레모네이드에
샌드위치라니. 하지만 이게 가장 정윤주 다운 선택이었다.
윤주의 성격상 그녀가 고풍스런 레스토랑이나 카페를 선호할 리 없는
것이다.
겨우 만원으로 두사람의 점심식사를 끝내버린 유림은 뭔가 신기하기도
하고 또 어딘가 이상하게도 느껴졌다. 윤주랑 만나려고 두둑히 채워온
지갑이 별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나 오늘 진짜 신경쓰고 나왔는데 괜히 그랬다. 만원으로 점심이 다
해결되는데."
"그래? 뭐 나는 이런게 더 좋아. 레스토랑가서 대단한 음식 먹는건
나중에 할래. 내가 돈 많이 벌면 그때. 너랑 있으니까 공원도 뭐
완전히 고급 레스토랑 못지않게 좋은데뭐."
꾸밈이 없는 모습이 좋았다. 애써 화려한척 하려 하지 않고 애써
똑똑해 보이려고도 하지 않는 윤주였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거리낌없이 드러내 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참 건강하고 밝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유림아, 너 그럼 서울에서 계속 사는거야?"
"응, 그렇게 된거지뭐. 쭉 서울에 있게 될거야."
"근데 너 우리학교는 어떻게 찾아왔어? 서울에 온지 얼마 안되놓고...
보니까 길도 잘 못찾던데 재주도 좋아요."
"그게 다- 내 능력이야. 맘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다니까."
"어쭈, 강유림. 제법인데. 능력좋다야~"
유림의 농담에 능청스럽게 맞받아치며 웃어넘기는 윤주였지만 그녀또한
모를리 없었다. 유림이 자신을 기다렸으리란 것을. 서울도 몇 년만에
오는 녀석이 그것도 길이라고는 혼자서는 찾을 줄 모르는 유림이 겨우
윤주네 학교를 찾고 그앞에서 무작정 자신을 기다렸을 것임을 짐작
하고도 남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윤주의 머릿속에 문득 자신이 별장에 찾아갔을 때
자신의 품에 안겨서 펑펑 울었던 유림의 모습이 스쳐지났다.
분명 아버지 때문이라 했다. 서울에 와 있다면 아버지랑 같이 살게 된
것임이 분명한데.
"집은...어떠니? 괜찮아? 아버지랑은...잘 지내고?"
그 물음에 유림은 잠시 손에 들고있던 레모네이드를 내려두고 대답을
망설이다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생활
이었다. 귀국하고서도 여전히 강대사는 이곳저곳 바쁜일이 많았고
그래서 아침일찍 나가서 저녁 늦은 시각이 되어야 집에 들어오곤 했다.
유림의 긴 하루 일과는 선옥과 한림. 두사람과 함께 보내는게 대부분
이었다.
하지만 유림이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밖으로 내려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았기 때문에 거의 혼자서 지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림에게는 하루에 몇 번씩. 은숙이나 김기사와 마주칠 때가 가장
행복한 때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아버지나 새어머니보다도 은숙이나
김기사가 더 편하고 좋았다.
"그냥 그래.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걱정하지마...잘 지내니까."
저녁해가 질 무렵쯤. 택시한대가 고급 주택이 밀접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택시에서 윤주가 먼저 폴짝 뛰어내리고 유림이 그 뒤를 따랐다.
"와, 유림이네 집 좋다. 헤어지긴 아쉽지만...얼른 들어가봐. 너 집에는
말도 안하고 나왔다며. 걱정하시겠다."
윤주는 유림의 등을 떠밀다시피해서 유림을 대문앞에 세웠다.
뭔가 계속 아쉬운 듯 윤주를 쳐다보던 유림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윤주와 있을때가 가장 좋은데 ... 가장 행복한데 그 시간을 끝내고
다시 이 집으로 들어가려니 영 마음이 탐탁치 않았다.
"오늘 미안해. 내가 데려다줘야 되는건데 ... 원래는."
"야, 원래 그런게 어딨어? 너 서울에 온지도 얼마 안됐으면서
나 데려다주고 집 찾아갈 수 있냐? 걱정마. 원래 어떻게 해야 되는건
없다니까 그러네. 얼른 들어가봐."
윤주는 평소처럼 그냥 웃었다. 유림과 윤주. 어떻게 보면 뒤바뀐
면이 참 많았다. 항상 우는 유림을 달래는건 윤주였고 힘든 유림을
토닥이는것도 윤주였다. 일반적인 연인이라면 남자가 여자를 보호하고
다독이고 여자는 보호받아야 하는건데.
오늘만 해도 그랬다. 데이트를 마친 후 여자가 남자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커플은 정말 몇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윤주는 조금도 싫다거나
하지 않았다. 아무려면 어떤가. 서로 사랑하는데 서로 너무 좋아하는데.
그 마음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되는거지.
유림은 한숨을 푹 내쉬고 벨을 꾸욱 눌렀다. 은숙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잠시뒤 대문이 열렸다. 아쉬운 듯 계속 윤주쪽만 쳐다보던
유림은 윤주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는 대문안으로 사라졌다.
그런 유림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윤주는 몇분쯤을 그 앞에 서있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가을하늘에 고운 저녁노을이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그날밤 유림이 이 집에 온 후 처음으로 온 가족이 한자리에 둘러앉았다.
강대사는 무표정하고 어딘가 엄한 표정으로 쇼파에 떡하니 앉아있었고
그의 오른쪽에는 유림과 한림. 왼쪽 쇼파에는 선옥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네사람 사이에는 어딘가 묵직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것은 강대사의 헛기침 소리였다. 몇 번 헛기침을 한 그는
유림을 힐끔 쳐다보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 넌 오늘 말도 안하고 어딜 나갔던거냐? 네 새어머니랑 유모가
걱정이되서 난리더구나."
"....죄송합니다. 누굴 좀 만나러요."
"여..여보, 됐어요. 유림이만 잘 들어왔으면 된거죠. 이제 그만하세요."
뭔가 한소리를 더 꺼내려던 강대사는 선옥이 말리자 그냥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훈계를 마쳤다. 쇼파앞 테이블에는 과일이 차려져
있었지만 누구도 과일에는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지금 네사람의
분위기가 과일을 먹으며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너무나
무거웠다.
"넌 이제 서울에 다시 왔으니 병원도 꼬박꼬박 나가고 ... 그리고
가정교사도 다시 한사람 구해야지. 공부는 계속해야 하는거니까."
가정교사라는 단어에 유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내가 알아보도록 하마. 젊고 유능한 과외선생으로."
"아버지...제가..알고있는 사람이 있는데 ... 그사람이 계속 하면
안될까요? 여름에 두달간 별장에 왔었던..."
유림이 강대사의 말에 대답이외에 자신의 의견을 밝힌 것은 이 집에
온 후로 오늘이 처음이었다. 놀란 강대사와 선옥은 서로 마주보고
다시 유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난번이라면...그 대학생 말이냐? 아직 어리고해서 경력도 없고...
그래, 그래도 네가 좋다면야 별수 있겠냐. 그 사람으로 하는 수 밖에.
그럼 가정교사는 그 선생한테 다시 맡기기로 하마."
그 말 한마디에 유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선홍빛 입술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짓는 그의 미소에 강대사와 선옥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유림이 저렇게 활짝 웃다니.
"감사합니다. 그럼 전 올라가서 윤주한테 연락할께요."
"형아, 나도 같이가~!"
유림이 인사만 남기고 후다닥 2층 자신의 방으로 뛰어 올라가고 한림도
그런 유림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이제 거실에는 선옥과 강대사
두사람만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한참동안 두사람은 아무말이 없었다.
유림이 자신들을 향해 웃었다는 것. 그 사실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윤주라면...그 학생 이름인가?"
"네, 그런 것 같네요. 이름 부를 정도면 유림이랑 꽤 친해졌나봐요.
잘됐어요, 유림이도 저렇게 좋아하고. 저아이가 웃는건 처음이네요.
저렇게 환하게 웃는건 처음봐요."
"나도 그래. 저녀석이 저렇게 웃을줄도 알았다니...그 윤주라는 학생이
좋긴 좋은 모양이군."
두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싱긋 웃었다. 유림이 누군가에게 저토록
관심을 보인다는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유림의 변화에 그들은
기뻤다.
이제 유림도 누굴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구나...
그래, 조금만 더 지나면 우리도 좋아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 실버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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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네 집 대문앞에 멈춰선 윤주는 조금은 주눅이 드는지 초조한
표정으로 옷매무새를 다듬고 괜시리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한참동안을
그앞을 서성이기만했다. 유림의 전화를 받고서 과외를 당연히 승낙해
버린 윤주였다. 유림과 함께 있는 시간을 이렇게 다시 가질 수 있다는건
윤주로써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좋은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여기까지 오고보니 긴장되는건 어쩔 수 없었다. 지난번의
별장에서의 만남과는 다른 만남이었다. 지금은 유림의 아버지..새어머니.
그리고 동생까지. 그 모든사람을 다 만나게 되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대수롭지 않은 부분이었지만 윤주는 괜히 그런것까지 신경이
쓰였다. 같은 값이면 유림네 부모님께 좋게 보이겠다고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단정한 정장풍의 캐주얼까지 챙겨입고 나온 그녀였다.
몇분쯤 뒤. 윤주는 용기를 내 벨을 꾹 눌렀다. 문이 열리고 열린 그
문안으로 윤주는 살금살금 들어섰다. 정원에 우뚝우뚝 솟은 키큰
나무들과 정원 한구석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연못까지. 모두 윤주에게는
경악스러운 광경들이었다.
세상에, 세상에만 반복하며 윤주는 저택의 현관까지 들어섰다.
"윤주 선생님, 오셨네요. 반가워요."
은숙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를 만나자 윤주는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저택 안의 화려한
인테리어가 윤주를 다시한번 주눅들게 만들었다. '기품'이라는게 대번에
느껴지는 인테리어였다.
"아..네. 안녕하셨죠?"
"그럼요, 전 항상 잘 지내죠. 어서 들어오세요. 대사님이랑 사모님이
기다리세요."
"..네..."
윤주는 쭈뼛거리며 은숙의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은은한 브라운
톤의 가죽쇼파에는 강대사와 우아하게 머리를 틀어올린 한눈에도
저사람이 이 집 안주인이구나를 짐작캐 해주는 선옥이 앉아있었다.
윤주를 본 선옥은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나 윤주에게 다가왔다.
"아가씨가 정윤주양이죠? 반가워요. 이리로 앉으세요. 아, 아주머니
차 부탁해요."
"네, 사모님."
은숙도 차를 가지러 주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야말로 윤주는 거실에
혼자 던져진 기분이었다. 그래도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려 애쓰며
윤주는 선옥이 가리키는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강대사는 한참을
말없이 윤주의 모습만을 훝어보았다. 당정한 옷차림새와 선해보이는
윤주의 눈동자가 그의 마음에 꼭 들었다.
유림이 저런 사람을 좋아한단 말이지...그래, 저만하면 합격점이군.
"가정교사를 해줄만한 사람을 알아보겠다고 했더니..유림이가
윤주학생을 추천하더군. 그래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이렇게 불렀네."
"아, 네. 감사합니다. 저 참 많이 모자란데 유림이가 절 추천했나봐요.
저야 영광이죠."
윤주는 싱긋 웃으며 강대사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다시 단정히
쇼파에 앉아 시선을 살짝 내리깔고 테이블만 바라보았다.
"학교도 명문대이고..유림이도 좋아하니 윤주학생한테 가정교사일은
맡기기로하지. 시간은 어떻게 짜는게 좋겠나?"
"저야 아무 때라도 괜찮아요. 수업은 주로 오전에 듣거든요. 그 외에
아르바이트는 아직 잡아놓지 않았으니까 오후시간은 비어있어요."
"그래, 그럼 일주일에 세 번씩 수업을 하고...시간이야 유림이랑
상의해서 한번 짜도록하게. 유림이는 2층에 있으니까 올라가봐요."
유림이란 이름이 나오자 윤주는 아주 잠시지만 너무나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두사람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강대사는 윤주를 불러 이모저모를 자세히 뜯어보고 또 여러가지를 꼼꼼히
이야기 해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막상 윤주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냥 첫인상 만으로도 그녀는 강대사 마음에 쏙 드는 학생이었다.
저만하면 유림의 가정교사감으로는 손색이 조금도 없는 아가씨였다.
굳이 더이상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첫인상으로 합격점이니 말이다.
차를 가지고 나온 은숙은 윤주가 계단으로 쪼르르 올라가 버리자
곤란한 표정이었다.
"이런, 세잔 타왔는데 선생님은 그냥 올라가 버리셨네요."
"괜찮아요. 아주머니도 이리로 앉으셔서 같이 차한잔 하세요.
유림이가...저 학생을 참 좋아하나봐요. 전 그 아이가 누구 이야기를
하며 웃는걸 처음봤어요."
"그럼요. 저도 깜짝 놀랐다니까요. 도련님이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는건
또 처음이었죠. 윤주 선생님 참 좋은 분이죠? 너무 밝고 좋은 학생
이에요. 요세 세상에 저런 학생 또 없을거에요."
은숙의 윤주칭찬에 선옥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얼음장같이 차갑게만
보이던 유림도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아이였다니. 가슴한쪽이
따뜻해져 오는것만 같았다. 가만히 앉아 차를 홀짝이며 두 여자의
대화를 듣고있던 강대사도 좀처럼 보기힘든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이제 아들이 다 컸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항상 꼬마일것만 같던 녀석이 누굴 좋아할 나이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괜시리 자신이 더 뿌듯해졌다.
"그럼 윤주학생도 우리 유림이를 좋아하고?"
"그야 물론이죠. 두분이 참 서로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이층으로 올라간 윤주는 곤란한 표정으로 주위만 두리번 거렸다. 막상
올라오긴 했지만 유림의 방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이집에 처음 들어온
윤주가 알리 없었다. 우왕좌왕하던 윤주는 계단에서 가장 가까운 방문
앞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려보았다. 이방이 맞을까 하고 고민하던 윤주는
살짝이 손잡이를 돌리고 방문을 열었다.
"옆집누나 누구에요?"
방문을 열자마자 꼬마가 눈에 들어왔다. 방바닥에 앉아서 장난감을
만지작 거리던 꼬마는 갑작스레 문을 열고 나타난 윤주를 빤히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을 내뱉고 있었다.
"어? 아..나는 오늘부터 가정교사로 온 정윤주야. 여기 유림이방
아니니?"
"아니에요. 여긴 한림이 방인데요. 유림이 형 방은 여기 아니에요."
"그래? 실례했어. 미안해~ 하던거 계속해."
윤주는 한림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 주고 다시 살짝이 방문을 닫았다.
피식 웃음이 절로 터져나왔다. 조금전 보았던 그 꼬마를 보니 유림의
어린시절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그란 눈에 새하얀 피부. 그리고 어딘가 똘똘해 보이는 모습.
분명 강유림도 어렸을땐 저런 꼬마였겠지.
"정윤주, 거기서 뭐해? 내방 여기야."
2층 구석진곳에 위치한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유림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림의 방문앞에서 어정쩡거리던 윤주는 유림의 모습에 반갑게 그에게로
달려갔다. 겨우 3일 못봤을 뿐인데도 오늘 보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너희집 너무 넓어. 네방 못찾아서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르지?
잘못들어가서 네 동생 방도 갔었어. 한림이라는 꼬마."
"풋, 한림이? 그녀석 너 닮았지?"
"날닮아? 네동생이 왜 날닮냐? 아주 너랑 판박이던데."
"말하는게 너같잖아. 걔도 피식피식 잘 웃거든."
별것아닌 이야기인데도 유림과 하면 왜이렇게 할 이야기가 많은건지.
한림으로 시작된 두사람의 이야기는 그칠줄을 모르고 한참동안이나 쭉
이어졌다. 윤주는 수업을 해야된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유림과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서로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신이 태초에 두사람을 창조할때
부터. 둘은 서로를 위해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 그런 뜻으로
만들어준 사람인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로 모르고 살아왔던
남이었던 두사람이 이렇게나 예쁘게...이렇게나 아름답게 서로를
좋아할수 있을까 싶었다.
"아줌마, 여기 소주한병 더요!"
이미 얼굴에 취기가 잔뜩 오른 현수는 오늘은 무슨 깡인지 벌써 소주
두병을 혼자서 비우고는 한병을 더 주문했다. 걱정스런 얼굴로 그런
현수를 바라보는 친구인 지혁의 눈살이 묘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입학했을때부터 자기 좋다고 매달리는 여자도 다 마다했던 녀석이
짝사랑에 빠져서 이렇게 허우적대고 있는 모습을 보려니 지혁으로써는
여간 짜증스러운게 아니었다.
다시 소주잔을 기울이는 현수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던 지혁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현수의 손에서 소주잔을 빼앗아 자기입에다 소주를
들이켜버렸다.
"너 이자식 미쳤어? 진짜 보고있자니 꼴사나워 못보겠네. 그러게 너
좋다는 여자는 죄다 마다하고 왜 짝사랑질은 하냐? 너 미친거아냐?
정윤주가 뭐그리 대단하냐?"
힘없이 풀려있던 현수의 눈동자에 뭔가 모를 광채같은 것이 돌았다.
잠시 지혁을 노려보던 현수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서글픈 웃음을
터트렸다. 알고 있다. 좋다는 사람 마다하고 굳이 내가 싫다는 사람에게
매달리는거. 그게 얼마나 보기 싫고 한심하고 못난 바보짓인지.
자신도 물론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윤주에게 거절까지 당한
마당에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러는 자신의 모습이 분명
스스로가 생각해도 못나보이고 한심했다.
"이자식아, 나도 다 안다. 아니까 그러지마라. 나도 다 아니까...
너까지 그러지마라."
"아냐? 아는놈이 그러냐? 그냥 싹 잊어라. 뭐 네가 정윤주랑 사겼던것도
아니고 뭐가 그리 미련이 남냐? 바보같은놈."
내뱉듯 중얼거린 지혁은 빈 소주잔에 술을 채우고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현수는 굳은 듯 멈춰서 가만히 테이블만 내려다 보았다.
지혁의 말이 옳다. 사귄것도 아니다. 그렇다고해서 자신이 윤주와
특별히 가까이 지냈던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싹 다 잊을수 있을까. 반년 가까이의 시간을 정윤주를
바라봤다. 반년. 그저 육개월의 시간. 짧다면 또 한없이 짧은 시간
이었지만 현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하루하루 윤주를 볼때마다 조금씩
쌓여가던 호감이 이제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가슴속에 빼곡이 들어앉아
지워버릴수가 없었다. 가슴에 품고있으니 너무 아파서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래도 지워지지가 않았다.
"걔도 미쳤지. 세상에 왜 널 마다하고 딴남자가 좋다는거냐? 얼마나
잘난놈이랑 사귄데?"
비아냥거림이 섞인 목소리였다. 남자가 봐도 괜찮은 녀석이었다.
아니, 현수는 지혁이 보았을때는 최고의 남자였다. 그런 자신의 친구를
이렇게 뻥 차버리고 다른 남자를 사귄다는 윤주가 지혁의 기준으로는
이해되질 않았다.
"너 그러지마라. 그냥 내가 내맘대로 윤주 좋아한거니까 ... 윤주가
다른 사람이랑 사귀든 뭘하든 걔 자유야. 나혼자 괜히 병신짓 하는
거니까 윤주한테는 뭐라그러지마라."
잘못은 다 나한테 있다. 윤주는 아무잘못 없다.
지금 현수가 하는 말의 요지는 한마디로 그것이었다. 그런 현수앞에서
더 이상 윤주를 욕할수도 없는 지혁은 답답증이 오는지 가슴만 쾅쾅
두드렸다.
"야, 김현수. 너 미쳤다. 미친건 알지?"
"...나도 알아...그래, 나 정윤주한테 미쳤다...완전히 미쳤어..."
#. 실버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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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벽지로 깔끔하게 꾸며진 사무실 안에서 심장병 전문의와 면담을
나누던 강대사는 의사의 말에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유림을 서울로 데리고 와서 곧장 찾아갔던 대학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유림의 정밀검사 결과가 나왔다며. 그말 한마디에 열일을 마다하고
병원으로 찾아온 그에 귀에 들려온 의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야말로
고통이었다.
심장판막증이라는 병의 특성상 완치는 애시당초 어려운 것이라는 것이
의사의 말의 요지였다. 그리고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병세가 점점더
커져가고 있다고. 합병증인 심장천식까지 겹친 탓에 지금 유림의 상태는
한마디로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 의사의 말이었다. 강대사가 알아볼 수
없는 차트까지 예로 들어가며 열심히 설명하는 그의 말이 강대사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것만 같았다.
무엇을 더 바라는가. 그 작고 어린 아이에게 세상은 뭘 바라고
있는것인가. 두 번의 대 수술.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 분명히
안정을 취하면 나아질거라고 완치는 어렵더라도 평생 조심하며 살면
안전할거라고 그때 병원에서 말했었다. 그런데 4년만에 그 병원은 또
말을 바꿔버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수술을 하자.
그게 어떤 말인지 ... 그들은 알 고 있을까?
"수술을...두번이나 했습니다. 한번도 힘들다고 한 수술을 어린 나이에
두 번 받은 아이입니다. 세 번째로 수술을 받아도 ... 별 무리가
없겠습니까?"
"...저희도 그점에서 확신은...드릴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삼차 수술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지금 환자의 상태도 좋지 않고 또
심장에 무리가 크게 가버릴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확률은 반반입니다."
오십퍼센트의 확률. 죽음 아니면 삶이라는 아주 간단한 답이었지만
강대사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아버렸다. 간단한 답이 아니다. 지금
이 의사는 오십퍼센트의 확률만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살 확률은
오십뿐이라는 것이다. 반대로..죽을 확률도 오십이라는 것이다.
"......그런 위험한 도전은...하고싶지 않습니다. 지금 상태로도 제가
보기에는 이상은 없어 보이던데 ... 이대로는 약물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까?"
"수술도 위험하지만 현재 상태도 ...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심장천식
이란게 언제 발작을 일으켜 어떻게 되버릴지 모르는 것인데다가 지금
판막쪽도 지난번 수술해 놓은 부위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 지금 이대로 방치해 둔다면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강대사는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멍한 표정으로 바닥만 내려다
보던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의
발걸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런 결정도 내릴수 없었다. 아니, 내리고 싶지 않았다.
그냥 막무가내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왜 그냥 유림이를 두고
떠나버렸을까. 왜 그 아이를 버려두고 외국으로 도망치듯 떠났을까.
가까이에 있었더라면 따뜻하게 사랑해 주었더라면 어쩌면 유림의 병이
나았을지도 모르는데라는 부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한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림을 닮은, 아니
유림이 그녀를 닮은 것이리라. 20살 꽃답던 나이에 자신에게 시집와서
서른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져버렸던 유림의 새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아내였던 은하가 떠올랐다.
그녀에게도 그랬었다. 그녀에게도 유림에게처럼 한번도 사랑한단 말을
해주지 못했다. 너무나 사랑했는데 ... 꽃보다도 더 곱던 그녀를 참
많이 사랑했는데 가슴속에만 담아두었던 그말은 끝내 그녀가 죽는날
까지도 입밖에 내지 못했었다.
유하는 유림과 비슷했다. 아니, 똑같았다. 하얗고 조그마한 얼굴도 ...
선홍빛 입술도. 수줍게 짓던 미소까지도. 유난히도 말수가 적은 점
까지도 같았다. 그런 그녀가 남겨두고간 유림을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
볼때마다 은하가 생각나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아들이다.
은하에게 못주었던 사랑이 죄스러워 피하기만 했던 아들이다. 이제야
겨우 다가설 마음을 먹었는데...아버지 노릇을 해보겠다고 결심했는데
어떻게 해야한단말인가.
"안녕하세요."
현관문이 열리고 환한 웃음을 머금은 윤주가 들어섰다. 선옥에게 인사를
건낸 윤주는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유림의 방문앞에 섰다. 일주일에
삼일의 수업.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리는지 모른다. 오늘도 유림을
본다는 생각에 예정 시간보다 두시간이나 빨리 와버린 그녀였으니까.
"유림아, 나왔다~ 기다렸지?"
윤주는 평소처럼 벌컥 방문을 열고 유림의 방안으로 들어섰다. 창문을
열어두고 그 창턱에 걸터앉아 음악을 듣고있던 유림이 해맑게 웃으며
폴짝 창턱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웃음에서는 레몬향기가 날것만 같았다.
너무 싱그럽고 풋풋해서 꼭 레몬향이 베어있을것만 같은 웃음이었다.
"오늘은 두시간이나 일찍왔네."
"응! 너 보고싶어서 강의 끝나자 마자 달려왔다~ 나 착하지?"
"풋..그래, 착하다. 진짜 착하다."
어떻게 보면 윤주가 차라리 더 어려보였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게
동안인 그녀의 얼굴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말투나 몸짓등이 더더욱
그러했다.
"뭐냐, 바람 차가워. 감기들면 어쩌려고 창문을 열어놨어?"
"답답해서. 바람이라도 쐬려고."
하루종일 방안에서 지내는 유림이 답답할만도 했다. 그래도 별장에
있을때는 주변을 산책할 공간이라도 있었지만 이곳 서울은 유림이
다닐만한곳이 없었다. 만날 친구도 ... 갈만한곳도 아무것도 없었다.
밖은 온통 다 낮설고 위험한것들 뿐이었다.
요즘 그런 답답한 생활속에서도 유림의 낙이라면 당연 윤주였다.
일주일에 세 번 뿐이지만 '유림아' 라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유림에게는 한줄기 바람과도 같았다.
시원하게 가슴을 두드리는 바람.
"그래도 이제 추우니까 문닫자. 우리 얼른 수업해야지."
"오늘은 또 뭔데?"
"오늘의 수업? 오늘은 바로 이거지!"
장난스런 미소의 윤주가 손에 들고온 비닐봉지를 유림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매번 수업때마다 윤주는 항상 뭔가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사실 윤주가 유림에게 가르칠건 거의 없다고 해야할 정도였다. 혼자있는
시간에 잡다한 공부를 헤치운 유림은 웬만한 대학생 보다도 박식했다.
차라리 윤주가 배우면 배웠지 가르칠만한 입장이 못되었다. 그런 윤주가
선택한 수업은 공부가 아닌 그냥 일상생활이었다.
영화이야기...요즘 학교 이야기. 또는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등이
윤주가 수업시간에 유림에게 해주는 것들이었다. 그와 더불어 갖가지
군것질 거리까지.
오늘 윤주가 싸들고 온건 한여름. 윤주와 함께 강릉 시내를 돌아다닐
때 한번 갔었던 베스킨라벤스의 아이스크림이었다. '러브미' 라는
깜찍한 이름의 아이스크림.
"러브미. 뭔지 기억나지? 난 그날 이후로 이것만 먹는다~ 이거보면 네
생각나거든."
유림은 대답대신 또 싱긋 웃었다. 윤주와 있을때는 유난히 웃는일이
많았다. 원래 말수가 적은 유림은 할말이 없을때나 쑥스러울때면 가끔씩
이렇게 웃어주었다. 그런 그의 웃음이 너무나 좋은 윤주였다.
너무 맑아서...천사같아서 그런 미소를 볼때마다
유림을 향한 자신의 마음속 사랑이 조금씩 조금씩 더 자라나는것만
같았다.
#. 실버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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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오셨어요?"
거실을 들어서는 강대사에게 유림이 인사말을 건냈다. 윤주가 다녀간
날은 유림의 기분이 유난히 더 좋아보였다. 어색하게 웃으며 유림의
인사를 받아준 강대사는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림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검사결과에 관한 것은 아직도 강대사만이 알고있는
비밀이었다.
한달여의 시간 동안 고민해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유림을
위하는 길일까. 의사의 말대로 오십퍼센트의 확률을 한번 믿어보고
수술을 해아하는건지 아니면 그것보다 더 안전하고 좋은 방법이
존재하는건지. 하지만 결론은 쉽사리 내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지체할수도 없었다.
유림의 생명이 걸린 일이다. 자칫 잘못해서 그가 고민하는 사이.
갑자기 유림이 어떻게 되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미칠것만
같았다.
"여보, 표정이 왜그래요? 당신 무슨 일 있어요?"
"아니...별일 아니야."
"그런데 당신 표정이 왜그래요? 걱정이 많은 사람같아요."
"별것아니라니까."
단호하게 끊어 말하는 그의 말에 선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는 항상 이랬다. 어딘가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었다. 그가 말하려 하지 않는 일을 캐묻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 선옥은 더 이상 무엇을
물어보려는 마음은 버렸다. 하지만 뭔가 있는것만은 분명했다.
"오늘...그 아가씨는 왔다갔나? 정윤주라는..."
"아, 다녀갔죠. 당신 오시기 조금전에 돌아갔어요. 그 아가씨는
갑자기 왜..?"
"....아니야. 그냥 물어본거니 신경쓰지마. 그냥 유림이 녀석이 웃고
있길래...그 아가씨가 다녀갔나 싶어서..."
"후훗, 유림이가 참 좋아하죠? 그 아가씨가 다녀간 날은 항상 저렇게
웃고있네요. 둘이 참 보기 좋아요. 윤주 학생도 참 좋은 사람이고."
"그래, 그렇군...잘된일이야."
대충 말을 얼버무린 강대사는 긴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유림은 이제야 겨우 소중한걸 찾게된 것 같다. 정윤주라는
사람을...유림은 사랑하게 되버렸냐보다. 열여덟. 그래, 어리다면
어린 나이지만 ... 사랑을 모를 나이는 아니니까.
그런데 유림아...이 불쌍한 녀석아...
왜 하필 지금이냐. 왜 지금와서 찾은거냐..아예 몰랐다면 나았을지도
모를텐데. 내 아들아,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네 녀석이
많이 아프다고 한다. 가끔 찾아오는 심장발작, 그 빌어먹을
판막이라는게 유림아...많이 안좋다는구나.
생살을 가르고 심장에 칼을 대는 수술을...또 하라는구나.
그래야...살수 있다고 세상이 그렇게 말하는구나. 그런데 유림아,
애비가 어떻게 너한테 이런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제사 겨우 조금씩
웃는 녀석에게...나는 어떻게 그 말을 해야하는거냐....
"옆집누나는 오늘 또왔어요? 왜 이렇게 우리집에 자주 와요?"
동그란 눈을 치켜뜨고 윤주를 요모조모 뜯어보는 얄미운 한림이 녀석의
시선에 윤주는 피식 웃고는 한림의 통통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가
놓아주었다.
"왜? 내가 자주 오니까 싫어? 난 유림이 보러 오는거야. 내가 유림이
과외 선생님이니까."
"피, 우리 형은 똑똑해서 옆집누나한테 배울거 없어요. 우리 형이 배로
똑똑해요."
"그래, 너네 형 잘나서 좋겠다. 그럼 좀 비켜줄래? 옆집누나는 유림이
보러 가야되니까."
유림의 방문앞을 막고 선 한림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오늘은 또
무슨 심술인지 유림의 방문앞을 가로막고 좀처럼 비켜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언제부터인가 한림은 윤주에게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자신에게는 좀처럼 말도 붙여주지 않는 유림이 윤주에게만은
웃어주고 친절한 것이 못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싫어. 또 우리 유림이형 나랑 못놀게 하고 둘이서 놀려고 그러죠?"
"너 유림이가 나랑만 놀아줘서 삐졌구나? 그치?"
"아냐! 그런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냐. 단단히 삐진거 맞구만. 한림이 이제 보니까 진짜
소심하네. 그런걸로 삐져서는 방에도 못들어가게 막고 서있고."
약을 살살 올리는 것 같은 윤주의 말에 한림의 얼굴이 빨개 지더니
한림은 원망스레 윤주를 올려다보며 씩씩댔다. 나름대로 화를 내는
모습이었지만 윤주의 눈에는 그 모습까지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럼 우리 협상할까? 오늘은 특별히 너도 수업에 동참시켜 주도록
할게."
윤주의 그말에 한림은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윤주를
바라보았다. 그세 화는 가라앉아 버렸는지 한림의 뽀얀 얼굴에 그사이
미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진짜요?"
"그럼. 오늘은 너도 같이 수업하는거야. 어때, 마음에 들어?"
"네! 마음에 들어요."
역시 애는 애였다. 이런 제안 하나에 울다가 웃다가 할수 있는 어린애.
윤주는 피식 웃고 한림의 손을 잡고 유림의 방안으로 들어섰다. 평소와
다름없이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있던 유림은 윤주의 모습에 활짝
웃으며 다가오다 옆에 서있는 한림을 보고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아, 이 꼬마가 오늘 수업에 동참하고 싶어하길래 데리고 왔어.
나쁘지 않지?"
한림은 긴장되는 듯 윤주의 손을 꼭 잡았다. 아직 어린 꼬마인
한림이지만 그래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유림이 너무나
좋은데 형이 생겨서 친구들에게 자랑도 막 하고 싶은 그런 기분인데
유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에게 희미하게 웃어주기도 하고
그래도 다정한 유림이지만 하지만 윤주를 대할때처럼 환한 표정이
아니란걸 꼬마이지만 알 수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유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승낙에 한림은 환하게 웃으며
유림에게로 쪼르르 달려가 유림의 손을 잡고 좋아서 어쩔줄 몰라했다.
"형! 진짜 한림이랑도 같이 노는거야? 진짜루?"
이런 작은 것 하나에 이렇게나 좋아하는 모습에 유림은 가슴이 싸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 꼬마녀석은 아무 잘못도 없는 녀석인데 괜시리
이녀석을 미워한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쩌면 한림에게 '질투' 라는 우스운 감정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가질 수 없었던 따뜻한 가족을 가진 아이. 자신에게는 그렇게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아버지마저 웃게 만드는 녀석의 환한 웃음에
유림은 어쩌면 질투를 했을지도 모른다.
한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는 생각을 직접적으로는 하지
않았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오늘은 한림이랑 같이 놀꺼야. 그렇게....좋아?"
"응! 한림이는 유림이 형이 너무 좋아! 유치원 친구들 한테도 막
자랑했어."
너무나 씩씩하게 대답하는 한림의 모습에 윤주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두 형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건 유림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윤주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한림도 ... 선옥도
강대사도. 유림을 사랑하고 있다고. 다만 선옥과 강대사는 그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인 것 같다고.
셋이서 함께 보내는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한림은 아직은 앞뒤 정리가
되지 않는 말솜씨로 최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유림에게 해주려 애썼고
유림은 그런 한림의 이야기에 고개도 끄덕여 주고 눈도 맞추어 주며
열심히 들어주었다. 윤주도 유림의 옆에 앉아 한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리고 창문을 따스하게 비춰주던 가을의 햇살이 지고
어둑어둑한 어둠이 깔릴때까지. 그들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런데 안락의자에 기대앉아 있던 유림의 표정이 점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고통을 견뎌보려 이를 악물고 있는 유림이었지만
더 이상은 숨길 수 없는지 그의 이마에 식은땀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런 유림의 모습에 윤주는 당황해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유림아, 왜그래? 어디 아파? 응? 유림아, 왜그래?"
"형아!"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윤주의 목소리도 ... 한림의 목소리도 아스라이
멀어져만 갔다. 느껴지는 것은 가슴을 압박해오는 끔찍한 고통뿐이었다.
요즘들어 잦아지던 발작이었다. 하지만 진통제 몇알을 삼키고 몇분뒤면
가라앉곤 했었던 통증이었는데 이번 녀석은 그리 만만한 것 같지가
않았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어버릴것만 같이 괴로웠다.
유림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괴로운 듯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결국 바닥으로 풀썩 쓰러져 내려버렸다. 놀란 한림은 그런 유림을
붙잡고 울음을 터트려버렸고 거의 사색으로 질린 윤주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누구 없어요! 유림이가...유림이가 쓰러졌어요! 유림이가...유림이가
쓰러졌어요!!!"
#. 실버엔젤
병원 복도에 기대선 윤주의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구급차가 도착하고 유림을 태우고 병원으로 오는동안 얼마나 눈물을
흘려댔는지 눈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실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한 유림은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산소마스크에 의지한채 죽은 듯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심장병이라는게 이렇게 무서운 것인줄 왜 진작에는 실감하지 못했을까.
유림이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것도.
하지만 눈앞에서 그런 광경을 직접 목격한 윤주는 더 이상은 할말이
없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온몸에 소름이 끼치도록
두려웠다. 그 심장병이라는 녀석이 너무 두려웠다. 잠시 뒤 유림의
병실문이 열리고 강대사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윤주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 또한 윤주 못지않게 놀란 얼굴이었다.
"윤주 학생...많이 놀랐지?"
"...대사님도 놀라셨겠어요...유림이...괜찮은거죠? 많이 아픈거
아니죠?"
"......글쎄...."
대충 말을 얼버무린 그는 복도에 있는 의자에 털썩 기대앉아 가만히
윤주를 쳐다보았다. 그의 그런 태도에 윤주의 초조함은 더더욱
커져만가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해주면 좋을텐데...그냥 쓰러진거라고
별것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주면 좋을텐데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 처절해보였다.
그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도저히 믿고싶지 않은 사실.
유림의 병은...별게 아닌게 아니란 것.
"....대사님...많이 안좋은거에요?"
잠시 뭔가 고민하며 고개를 숙였던 그는 괴롭게 고개를 들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더 이상 혼자서 고민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이미 일은 터져버렸고 이렇게 된이상 그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아들의 생명을 건 오십퍼센트의 도전을.
"윤주학생...지금부터 내 말 잘듣게..."
병원침대에 앉은 유림은 이제 티비를 보는것도 따분해 졌는지
티비전원을 꺼버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병원에 들어온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좀처럼 퇴원조치가 내려지지 않자
유림은 잔뜩 심술이 나 있었다. 가벼운 발작이면 입원하고 이삼일쯤 뒤
퇴원하곤 했는데 이번 같은 경우는 또 몇년만에 처음이었다.
창밖에는 병원 뒤 산책로를 거닐고 있는 여러 환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벌써 며칠째 윤주가 보이지 않자 유림은 이제 슬슬 윤주가 보고싶어
지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찾아올거라 생각했던 윤주가 벌써 삼일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혹시 윤주가 아프거나 한건 유림의
초조함이 점점 커져가고 있을 무렵. 병실문을 두드리는 가벼운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열린 문 너머로 윤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윤주의
모습은 며칠 사이에 수척해져 있었다. 생기가 없는 얼굴하며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눈. 그리고 정윤주다운 활기가 다 빠져버린 모습에
유림은 침대에서 뛰어내려 윤주에게 다가갔다.
"윤주야, 얼굴이...왜그래? 무슨 일 있어?"
윤주는 또다시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꾹 집어 삼켰다. 일주일전
강대사로부터 들은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가벼운 병이 아니라는 말. 또다시...수술을 해야하는 극박한 상황이라던
그의 말 말이다. 그리고 수술을 한다해도 백퍼센트는 장담할 수 없다던
말...확률은...반반이라고 했던 그말.
아직도 유림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강대사도 당분간만은
유림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 했었다.
"아니...그냥 레포트 땜에 신경을 많이 써서그래. 전공과목 레포트
제출이 오늘까지라서..며칠동안 좀 고생했거든. 나 없는동안 잘 지냈지?"
윤주는 평소와 다름없이 활짝 웃어주었다. 그런 윤주의 웃음에 유림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베시시 미소를 지어주었다. 웃고있는 윤주의
눈에 희미하게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윤주는 일부러 더 크게 웃고 더 크게 떠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소리라도 내지르며 엉엉 울어버릴 것 같았다.
오늘따라 괜히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유림과
함께 있는 병실에서 윤주는 울컥울컥 터져나오는 울음을 웃음으로
감추며 그렇게 서글프게 웃고 있었다.
"정윤주, 너 지금 혼자 청승맞게 뭐하는 짓이냐?"
윤주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뛰어나온 경미는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잔을 홀짝이고 있는 윤주를 보고 혀를 끌끌차며 윤주의 앞자리에
앉아 윤주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평소에는 술도 입에 잘 대지 않는
윤주가 이렇게 혼자 술잔을 잡고 있는 모습은 보기 드문일이었다.
경미의 등장에도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고 술잔만 비워대던 윤주가
혼자 소주한병을 다 비워내고 나자 짧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
경미를 쳐다보았다.
"야, 너 진짜 빠르다. 전화한지 몇 분 안된거 같은데 벌써 나왔네...
풋, 내가 친구하난 진짜 잘뒀네. 이시간에 불러내도 달려나오는
친구도 다있고 정윤주 참 성공한 인생이다...그치?"
"기집애..실없는 얘기는. 너 왜 안하던 짓을 하고 그러냐? 이 시간에
혼자 포장마차에 다 앉아있고. 너 표정이 왜그래? 안좋은 일 있어?"
"아니...안좋은일...후훗...그런거 없어...없어...그래...없어야지...."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이야기를 중얼대는 윤주의 얼굴에서 기어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버렸다. 낮부터 꾹꾹 참아왔던 눈물샘이
터져버리기나 한 듯 윤주는 엉엉 서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포장마차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윤주에게 향했지만 윤주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그저 서럽게 울기만했다.
"저..정윤주! 너 지금 우니? 세상에..."
당황한 경미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대학학교때부터 알아온
윤주였지만 누구 앞에서 정윤주가 이렇게 망가지는 모습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힘든일이 있어도 또 속상한 일이 있어도 좀처럼 잘 울지
않던 윤주였다. 혼자 속으로 꾹꾹 집어 삼키는 한이 있더라도 남
앞에서는 눈물 보이기가 싫다던 당차고 자존심강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런 정윤주가 오늘 자신의 앞에서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윤주야...무슨일이야? 응? 왜 그래? 나쁜일이라도 있는거야?"
"흐읍...경미야...나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으니...유림이가 .. 있지
경미야..우리 유림이가..."
"유림이가 어떻게 되기라도했어? 왜 그러니? 응? 말을 해봐, 울지만
말고."
"유림이가...많이 아프데. 원래 아픈 애였는데 ... 병이 심해졌데.
심장판막이 이상하데...그래서 유림이가 많이 아프거든..근데 더
심해졌데.... 있지 경미야...우리 유림이가...우리 유림이가
경미야......."
윤주는 차마 뒷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라는 말은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혹시나 자기가
방정맞게 그런 말을 입에 담아 유림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윤주는 말조차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경미는 윤주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참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아낸 윤주는 울음을 그치려 이를 악물었다.
보고있는 경미의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것만 같았다.
"정말 젠장할 경우다...세상에 이런게 어딨냐."
"그렇지...? 나 이럴줄 알았으면 의대갈걸 그랬다. 망할 의학이...
발전했다 발전했다 난리를 치면서...그깟 심장병하나 완쾌시키질
못한데. 확률은 반이래. 죽는거 아니면 사는거...하..그래...말은 쉽지?
그래, 어떻게보면 간단하지. 답은 둘중에 하날테니까. 근데 그게
의사야? 그게 의학이니? 사람 생명두고 죽는거 아니면 사는거라고
말하는게 그게 뭐냔말야! 이럴줄 알았으면 내가 확 의대가는건데...
그래서 우리 유림이 고쳐주는건데..."
부질없는 말이라는걸 모를리 없는 윤주였다. 자신이 의대를 갔다고
해서 유림을 고칠수 있는게 아니란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의사의
잘못이 아니란것도. 하지만 이렇게라도 누굴 원망하지 않으면
미쳐버릴것만 같았다. 너무 억울해서 속상해서 가슴이 터져버릴것만
같았다.
#. 실버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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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이렇게 머뭇거리는 건 좋지 않습니다.
하루 빨리 결정을 내리고 정밀검사에 들어가는 게 환자에게 여러모로
좋을 겁니다."
의사의 말에 강대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길이 없는 것이다. 절반의 확률
밖에 되지 않는데도 도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는 결정을 내렸습니다만...아직 아들녀석에게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네, 힘드실거란것쯤은 저희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환자도
얼른 알아야 합니다. 본격적으로 치료에 들어가면 제일 힘든건 환자
자신입니다. 그런 힘든 고비를 다 이겨내려면 얼른 본인도 준비를
해야죠. 정 말하기 힘드시다면 저희쪽에서 환자에게 말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의사에 말에 강대사는 조용히 머리를 저었다. 그런 말을 남의 입을
통해 듣게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남보다 못한 아버지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자신이 해야한다고 생각됐다. 힘없이 원장실을 빠져나온 그는
곧바로 유림의 병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에 기대서서 눈을 감고
지난날을 회상해 보았다. 열 살난 아들이 처음 심장병 수술을 받던날.
울며 무섭다고 매달리던 유림의 모습이 아직도 그의 눈에 선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삼년뒤. 이차 수술을 받을때도 유림은 무섭다고 말했
었다. 그렇게 두려워하던 녀석을 또 보내야만 하는건가. 또 수술실로
등을 떠밀어야만 하는것일까. 그는 굳게 마음을 먹고 유림의 병실문을
열었다.
이어폰을 꼽고 노래를 흥얼거리던 유림은 문을 열고 들어서서 괴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대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아들을 바라보던 그는 느릿느릿 유림의 침대옆까지
다가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유림아...애비가...할말이 있다..."
-유림아, 다시 수술을 해야 한다구나....판막에....지난번 수술 해
놓은데 이상이...생겼다고 하는구나...
그가 남겨두고 간 그 말 한마디만에 유림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시
수술을 해야한다...다시 심장에 이상이 생겼다. 그가 한말은 그것
이었지만 유림의 눈동자는 강대사의 눈동자 깊숙이에 존재한 그의
근심까지 읽을 수 있었다.
이번 수술은 절대 쉬운 수술이 아닐것이란걸. 두 번의 수술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위험을 부담한 것인데 삼차수술이란건 무엇을 말하는지.
유림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무덤덤했을 뿐이었는데
이제 왈칵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왜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남들은
다 가지는 사소한 행복조차 왜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인지 유림은
이를 악물며 소리없는 울음을 토해냈다. 어둑어둑 해가 지는 병실
안에서 유림은 불을 켤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게 서러운 눈물만을
떨구었다.
왜 .... 왜 나는 안되는거지? 빌어먹을 세상이...왜 나한테는 ...
아무것도 허락해 주지 않는걸까. 건강한 몸도 그리고 행복한 가족도...
그것도 아니라면 이제부터라도 행복하게 살수있길 바랬는데 ....
빌어먹을.....나 같은 놈은...하나도 가질 수 없는건가...?
난...행복하면 안되는 녀석일까...?
숨기려 애썼지만 유림의 울먹임소리는 병실 문 밖까지 세어나왔다.
차마 그런 아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어서 복도에 서있던 강대사는
들려오는 아들의 울음소리에 자신의 눈에서도 흘러내리는 서글픈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무너지듯 병원 복도에 주저앉아 버렸다.
대사라는 지위를 가진 남자가 철의 심장이라 불릴 만큼 철저하게
냉철했던 그가 무너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해주는 거였는데...그래, 내 아들녀석...
이렇게 안된 녀석인데 ... 좀더 따뜻하게 토닥여줄걸 그랬다...
그랬어야 했는데 ... 유림아, 애비가 다 죄를 지어서 이런 것 같다.
네 애미도 그렇게 보냈는데 ... 제대로 사랑해주지도 못하고 쓸쓸하게
보냈는데 유림아, 너마저 이렇게 보내버리면 나는 죽을 것 같다.
그러니까 유림아...내아들아...넌... 꼭 살꺼다. 아니, 애비가 꼭
살릴꺼야. 그래, 오늘만 울자...우리 오늘만 서럽게 울자....
오늘만...울자...'
"정윤주! 정윤주 오늘 결석인가?"
출석을 부르던 교수는 윤주의 활기찬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한번 강의실을 훝어보았다.
입학이래 한번도 강의를 빠지지 않았던 성실빼면 시체라고 불리던
정윤주가 강의실에 나타나지 않다니. 교수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교수님, 윤주 오늘 병원갔어요."
"정윤주 학생이 병원을 가? 어디 아픈가?"
"아뇨...윤주가 아니라 ... 윤주...친척이..많이 아프거든요.
돌봐줄 사람이 없다고 윤주가 갔어요."
경미는 대충 말을 둘러대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며칠간을 넋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지내던 윤주가 이제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하고
있는것만 같아 경미는 불안했다. 아무래도 유림이 신경쓰여서 수업을
받을수가 없다며. 그래서 새벽같이 유림이 입원하고 있는 병원으로
달려가버려 강의조차 들어오지 않는다는건 경미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유림은 안지 몇 달이나
되었다고 그렇게 그애에게 집착하느냐고 언젠가 경미가 물었을 때
윤주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자신도 모른다고...왜 반년도 만나지
않은 그애에게 이렇게 마음이 가고 그애가 이렇게나 좋은지 ... 왜
이렇게 깊이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자신도 모른다고. 하지만 사랑한다고.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윤주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었다.
그렇게 강의가 끝나고 경미는 어색하게 강의실을 걸어나왔다.
윤주없이 들은 강의는 처음이라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때 캠퍼스 저쪽에서부터 급하게 달려오는 한
남자의 모습이 경미의 눈에 들어왔다. 큰 키가 유독 눈에 띄는
현수였다. 숨을 몰아쉬며 경미에게 달려온 현수는 잠시 숨을 돌리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경미야! 윤주가 아픈게 진짜야? 오늘 정윤주가 강의에 안나타났다던데."
"선배 진짜 빠르네. 그게 어떻게 선배 귀까지 들어갔어요?"
"...그 강의 듣는 후배가 문자 보냈더라구. 윤주가 어디가 아픈건데?"
윤주가 오늘 아파서 빠졌다는 문자만 받고 부리나케 달려온 현수였다.
경미는 그런 현수를 안됬다는듯한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선배가 잘못알았네요. 윤주가 아픈게 아니라 윤주가 아픈사람
간호하러 병원간거에요."
"...간호? 그런거였어? 난 또...놀랐지. 누가 아픈데 천하에 정윤주가
강의까지 포기하고 간호래?"
"......유림이요..."
"유림이? 윤주 동생인가?"
"아뇨...윤주 남자친구요...선배도 알죠? 윤주 사귀는 사람 있는거..."
그말에 현수의 얼굴빛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이내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그의 어깨가 경미의 눈에는 그렇게
처량해 보일수가 없었다. 보는 사람의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현수였다.
왜 자기 싫다는 여자가 이렇게까지 좋을까 가끔 이해되지 않을때도
있었지만 경미는 이제 그런 생각보다 현수가 참 대단한 남자라는
생각만 들었다.
"아...그랬구나...그래, 그럼...난 가볼게."
더 이상 케묻지도 않고 쓸쓸히 걸음을 돌리는 현수의 뒷모습에 경미는
자신도 모르게 화가 솟구쳐 올랐다. 자신은 유림의 편도 그렇다고
현수의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한 사람으로써 저런 현수의 모습은
보기 안쓰럽고 또 답답했다.
"S대 대학병원이에요! 거기 심장병 병동에 가서 강유림 찾으면
될꺼에요. 그럼 거기 윤주도 있을테니까요!"
경미가 버럭 지르는 고함소리에 현수는 놀라며 멀뚱히 경미를 쳐다
보았다. 답답한 듯 가슴을 쾅쾅 두드린 경미가 다시한번 크게 소리를
질렀다.
"가봐요! 가서 부딪쳐요! 가서 매달려도 보고 달래도보고 그래도 윤주가
싫다면 그때는 포기해요! 그렇게 바보같이 혼자서 애만 끓이지 말고."
경미의 말을 이제야 이해한 듯 현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미의 말이 옳았다. 그래, 한번 거절당했다고 해서 이렇게 기죽어서
그녀곁을 맴돌기만 하는건 전혀 소득없는 그야말로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한번 매달려 보는거다. 어떻게 되든...
"고맙다, 김경미!!! 네 말 가슴깊이 새기고 가마! 행운을 빌어라!"
악몽같던 중간고사를 끝내고 그린비 컴백! 했습니다 ^^
그동안 잠수했던 몫만큼 열심히 쓸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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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버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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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아...먹어야지..먹어야 살지! 너 왜이러는데?"
윤주는 애가 타는 듯 발만 동동 구르며 유림에게 통사정을 하고
있었지만 유림은 입을 굳게 다문채로 가만히 병원 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대사로부터 자신의 몸 상태를 들은뒤 유림의 태도는 줄곧 이랬다.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듯한 멍한 표정으로 그저 하루종일 벽만 바라보고
있을뿐. 어떤것도 먹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윤주가 찾아와서 이런저런 얘기도 건네보고 먹을
것도 권해봤지만 그런 유림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유림아! 강유림!!!"
"안먹어. 먹기싫어!"
유림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고는 베게사이로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며칠 사이에 너무 앙상하게 말라버린 유림의 모습에 애만태우던
윤주는 입술을 지그시 다물고 유림을 쳐다만 보았다.
창백했지만 항상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유림의 얼굴이 며칠사이
형편없이 초췌해진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이렇게 널 못살게 구는걸가. 왜 이놈의 세상은...이렇게 모진걸까.
자신은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문 윤주는 성큼성큼 유림에게로 다가가
유림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유림은 그런 윤주의 시선을 외면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너 왜 이러는데? 왜 이렇게 고집불통에다가 네 멋대로 하는 건데?
너 이런 애 아니잖아."
한참동안 두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윤주는 유림의 옆모습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유림은 창밖에 시선을 돌린채로 눈물을
참아보려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모두가 힘들겠지만 가장 힘든건
유림 자신이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현실앞에서 미칠것만 같은 사람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유림아...왜이래...이러지마...응? 먹어야 살지...너 벌써 한참이나
안먹고 그게 뭐야...속상하잖아..."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윤주는 살며시 유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유림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손 끝에 느껴지는 그 슬픈 떨림에 윤주는
그냥 고개를 숙였다. 유림이 ... 울고있었다.
그래, 유림아... 힘든건 너겠지? 우리 유림이...그래, 네가 제일많이
괴롭고 제일 많이 괴로울텐데...그럴텐데 내가 왜이럴까...너 힘든데...
왜 내가 너한테 소리지르고 화내는거지?
지금 내가 슬픈건...지금 네가 괴로운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윤주야...정말로 먹으면 살까...? 먹으면 살수있는걸까?"
"....강유림! 너 그런말 하지마. 먹으면 살아. 그래! 잘먹고 잘 웃고.
그러면 살아. 누가 너 죽는데? 왜 그런말은 하니."
"나..있잖아 윤주야...윤주야.....나.....무서워...."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꺼낸 그말에 윤주는 울지않으려 더욱
눈에 힘을주어야만 했다. 애써 담담하려 애쓰며 윤주를 아는지 모르는지
유림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있잖아...내가 막...너무 싫어져서 미칠거 같아. 난 왜이럴까..
윤주야...왜이런걸까? 있잖아...나 살고싶어...윤주야...나도
살고싶어...너무너무...살고싶어. 그런데 .. 그래서 너무 무서워.
나 이렇게 살고싶은데 윤주야, 너무 무섭다. 삼차수술이란거 있지
그거 쉬운거 아니야. 두 번 수술만으로도 위험한건데 ... 세 번은...
산다는 보장이 없어. 어떡하지..나 너무 살고싶어서 무서워...윤주야..."
눈물로 흐려진 윤주의 시야에 환자복을 입고 앉아 처량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유림이 비쳤다.
왜 이렇게 유림이 작아보이는걸까.
오늘따라 왜이렇게 더 창백하고 안되보이는지 윤주는 더 이상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려버렸다. 살고싶다...너무나 살고싶다고
말하는 유림의 말에서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간절함과 애달픔이 느껴졌다.
"...흡..흐윽....야..! 강유림...너 그런말 하지마. 너있지...꼭
살테니까 그런 재수없는말 하지마!!! 왜 해보지도 않고 겁을 내냐..응?
너 꼭 살아야돼. 아니, 꼭 그렇게될꺼야. 살아줘야되...여기서 살자.
내가있는 여기서...아버지도 있고 네 동생 한림이도 있고...새어머니도
있고...김기사 아저씨랑 아주머니도 있고 너 사랑하는 사람들 많은
여기서 살자. 꼭 그렇게될꺼야...그러니까 무서워하지마...응?
유림아..."
'강유림' 이라고 적힌 팻말이 붙어있는 특실앞에서 병실문을 빼꼼히
열고 안을 들여다 보던 현수는 두사람의 모습에 차마 병실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다시 문을 닫고 병실을 나와버렸다.
경미가 가르쳐준대로 병원으로 달려왔고 그래서 병실을 찾았다.
윤주가 좋아한다는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자신의 눈으로 꼭
확인하려했다. 얼마나 좋은 녀석일까..얼마나 멋진 녀석일까 머릿속으로
많이 상상해 봤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남자라고 부르기에도 멋하다 싶은 자그마한 체구의 소년이었다.
유독 하얀 얼굴에 윤주를 바라보던 서글픈 눈빛이 자신의 가슴까지도
아프게 만들던 소년.
현수의 입에서 탄식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멋진 녀석이라면
나을텐데. 아무리 멋진 녀석이라 해도 그녀석에게서 윤주를 빼앗아볼
자신이 있었는데 유림을 본 순간 현수는 허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유림을 바라보던 윤주의 서글픈 표정과 그런 윤주를 바라보던 유림의
애틋한 눈빛사이에는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음을 현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나았을 것을 괜한 발걸음을 했다고 생각하며
현수는 복도 벽에 기대서서 한참을 병실문을 바라보았다.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지금 상황에서 분명한 것 하나는
정윤주는 저 강유림이란 녀석을 너무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윤주를 포기하기에는 자신또한 윤주를 너무
좋아하게 되버렸다는 것. 그 두가지 사실만이 머릿속을 온통
어지럽혔다.
이제는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현수가 막 발걸음을 돌리려 할때쯤.
병실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윤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현수를 발견한
윤주는 두 눈만 커다랗게 뜨고 멀뚱히 현수를 바라보았고 현수는 그런
윤주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여버렸다. 윤주를 만나기 전에 조용히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운도 따라주지 않는 것 같았다.
"혀..현수선배...여길 선배가 어떻게 알고 왔어요?"
놀란 윤주의 목소리에 현수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어 윤주를
바라보았다. 그래, 기왕 여기까지 왔고 또 윤주에게 들켜버린 바에는
솔직하게 말하는게 더 낮겠다 싶었다.
"....경미한테 들었어. 여기 오면 너 있을거라고 ... 걱정되서..."
"선배...자꾸 이러면 나 불편해져요."
불편해진다는 그말에 현수는 그냥 쓴 웃음만 지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녀가 불편하다고 말하는데 그래서 놓아주어야 하는
건데도 도저히 되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윤주의 뜻대로 따라줄 수 가
없었다.
"나랑....잠깐만 얘기 좀 하면 안될까? 아주 잠깐이면 되는데..."
#. 실버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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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휴게실에 마주 앉은 두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고가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윤주는 그냥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고 현수는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겨우 입을 뗐다.
"나 많이 생각해봤어. 윤주 네 말대로 내가 자꾸 이러면 네가 피곤해
진다는것도 알고 또 못난짓인것도 알아."
"선배, 피곤하다는게 아니라 내말은..."
"아냐, 피곤할꺼야. 그래, 그럴거야. 근데 윤주야, 나 이번만은
내맘대로 할래. 너한테 나 좋아하라는 강요같은거 안해. 내가 너
좋아하니까 너도 조금은 날 바라봐달라는 그런 억지는 안부려.
걱정안해도 좋아. 그런데 ... 내마음은 내마음대로 하고싶다."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것같은 현수의 목소리였지만 그 깊숙이에는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의지가 들어있음이 느껴졌다. 뭔가 말하려던
윤주는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현수는 진심이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현수의 마음은 정말로 진심이라는게 대번에 느껴졌다. 그래서 더 이상
뭐라 말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착한 사람을 괜시리 자신이 아프게
만드는것만 같아서 미안한 마음만이 느껴졌다.
"선배...선배 그러면 내가 너무 미안해 지잖아요..."
"아냐, 아냐 윤주야. 미안해 할 것도 없고 부담가질 것도 없어.
그냥...난 내감정에 충실한거니까 그런 나 때문에 네가 힘들거나
그럴건 없어. 아까 그 애...병실에 있던...걔가...유림이지?"
"응? 아...맞아. 선배도 봤구나...우리 유림이..."
유림이라는 말끝이 약간 흐려지면서 윤주의 입가에 서글픈 웃음이
걸렸다. '우리 유림이' 라는 호칭만으로도 윤주가 유림을 어떻게 생각
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현수의 입에서 슬픈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많이...아픈거야?"
"......응...."
"그래, 네가 고생이 많네. 얼굴 많이 안좋아보인다."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은 대화였다.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데 ... 지금 자신은 그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를 걱정해주고
있는 꼴이니 말이다. 현수의 말에 잠시 멍하게 현수를 바라보던 윤주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굴에 걱정이며 슬픔이 뚝뚝
묻어나는데도 윤주는 계속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아니, 미소라고
하기보다는 억지 웃음에 가까운 표정이었지만 윤주는 무던히도 웃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선배..정말 아픈건 유림인데뭘. 난 그냥...옆에서 보는것밖에는 ..
아무것도 못해줘. 그애가 참 많이 아프거든. 그래서 선배 걔가
무섭다고 ... 살고싶다고 막 우는데도...나는 같이 울어주는 것 밖에
못하는 바보야. 뭔가 해주고 싶은데 내가 해줄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너무 속상하고...내가 너무 한심하고..."
세상사람들은 흔히들 말한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많이 주었음에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주고도 더 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 윤주의 사랑이 현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저토록 걱정해주고 그리도 애틋한 눈으로 그 유림이란 녀석을 바라
보면서도 지금 윤주는 더 주지 못함을 속상해 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계획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윤주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
놓고 자신을 선택해 달라고 말해볼 작정이었는데 현수는 이제 그런
마음은 버려버리기로 했다. 유림의 모습에서 그리고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윤주의 모습에서. 이 두사람 사이에 지금 자신이 끼어드는건
전혀 승산이 없는 무모한 짓임이 느껴졌다. 그냥 윤주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현수 자신의
사랑이었다.
"그래..난 잘은 모르지만...너무 그렇게 생각하지마. 너같이 멋진
여자가 사랑해 주는것만해도 유림이라는 걔 참 복받은 녀석인거야.
힘내, 정윤주."
현수는 싱긋 웃으며 윤주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윤주는 그런
현수를 향해 서글픈 미소가 아닌 환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이렇게
착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현수는 좋은사람이었다.
"고마워, 현수선배. 그리고 선배...미안해...선배마음 못받아줘서."
"그럴거 없어. 그런 부담...안가져도 돼. 나 ... 오늘은 이만 가볼게.
다음에 시간나면 또 올게. 그때는 유림이 나한테도 소개시켜주라.
친한선배라고."
"응, 다음에 오면 소개시켜줄게. 유림이 좋아하겠다.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심심했는데."
"그럼 나 이제 갈게. 오후 강의가 있어서 이제 들어가봐야겠다.
나올 것 없이 넌 그냥 병실 들어가라."
가볍게 손을 흔든 현수는 웃으며 뒤돌아서서 병원을 빠져나왔다.
윤주앞에서 자신을 '친한선배'라고 유림에게 소개시켜 달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은 듯 남긴 현수였지만 마음은 묵직하게 쓰라려왔다.
"아까 그사람...누구야?"
한참을 망설이며 우물쭈물 하던 유림이 던진 뜬금없는 질문에 윤주는
놀란 토끼같은 표정이 되버렸다. 하지만 유림은 나름대로 꽤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윤주가 잠시 병실 밖을 나간사이 문밖에서 들려오던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살짝 문밖을 내다보았고 그 문틈사이로 윤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훤칠한 키에 남자를 보았다. 첫눈에도 윤주와
매우 잘 아는 사이인 것 같던 남자가 유림은 아직도 거슬리고
신경쓰였다.
"누구? 아!! 현수 선배 말이구나? 그냥 좋은 선배야. 학과 선밴데
내가 학교를 안나가니까 걱정되서 경미한테 물어서 찾아와 봤데."
"그렇구나...뭐...난 그냥 한번 물어봤어. 혹시나하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척 얼버무려 버리는 유림의 말투가 사랑스러웠다.
분명 지금 유림의 뾰루퉁한 표정은 윤주가 다른남자와 함께 얘기
했다는게 무척 거슬린다는게 확연히 드러나 있는데도 말이다.
한참을 우울해 하던 유림이 이제야 조금 밝아진 것 같아서 윤주는
다행스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유림의 침대옆에
걸터앉은 윤주는 장난스런 표정으로 유림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에이~ 강유림! 너 질투했지? 솔직히 말해서 내가 현수선배랑
얘기하는거 보니까 질투난거 맞지?"
"...질투는 무슨..혹시나 해서 물어본거야!"
"내 눈은 못속여~ 너 질투한거 맞잖아~? 아니야? 정말 아니야? 아님
나 섭섭한데.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랑 얘기하는걸 보고 질투안해주는
남자친구가 어딨냐?"
"아...아니야! 그런거 아니라니까..!"
아니라고 말하는 유림이지만 그 얼굴은 벌써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떻게 보면 참 차갑고 말도 없는. 낯을 유독 많이 가리는 아이었지만
이럴 때 보면 유림은 참 맑은 아이였다. 거짓말 할 줄 모르고 자신의
감정을 어쩔 수 없이 얼굴에 나타내 버리고 마는. 당황한 유림은
어쩔줄 몰라하며 윤주의 시선을 피하다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진짜 아닌거야?"
"....솔직히...조금...그랬어. 그냥 가슴이 팍 답답해져 오는...
그런 느낌....같은거.."
"피, 그게 질투지뭐. 우리 유림이가 날 많이 좋아하긴 하는구나!
질투도 해줄줄 알고."
가까이 다가온 윤주의 향기가 유림의 코 끝에 전해져왔다. 상큼한 과일
향을 닮은 ... 하지만 그보다 더 깊고 그윽한 향기가 항상 윤주에게서는
느껴졌다. 가슴이 훈훈해져왔다. 윤주가 이렇게 곁에 앉아있다는 것
만으로도 놀랍도록 안심이 되고 또 즐거워졌다. 3차 수술에 대한 공포와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으로 잔뜩 우울했던 기분도...살고싶지 않다고
느꼈던 생각들도 모두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윤주가 옆에
있는데 ...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고 그 향기를
느낄 수 있는데 어떻게 삶이 부질없는 것일 수 있을까.
"사실은 윤주야...나 무지 고맙다. 너한테...고마워..."
"고맙기는...내가 뭐 해준게 있어야지..."
윤주 자신은 해준 것이 없다고 생각해도 유림은 아니었다. 윤주가 준
것이 너무 많았다. 6월의 강릉 별장에서 윤주를 처음만난 순간부터.
윤주가 유림에게 준 것은 무수히 많았다. 작은 기쁨에서부터 커다란
감동까지.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잔잔한 사랑까지. 모두가 윤주가
준 것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윤주는 자신에게 살아야 겠다는 의지를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해준거 ... 참 많아. 나같은 애를 진짜 좋아해준 거부터 시작해서...
윤주랑 찍었던 사진...윤주랑 먹었던 아이스크림...그리고 윤주가
보여준 불꽃놀이...그런거 다 네가 준거잖아. 그리고 지금도...이렇게
옆에 있어주잖아..."
벌써 몇 달도 지난 일들은 유림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쉽게 잊혀질 리가 없는 추억이었다. 그녀와 함께 걸었던 길. 그리고
그때 나누었던 얘기들 ... 또 함께했던 모든 것들이 유림에게는 '추억'
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간직되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을 만들어 준
사람. 그사람이 윤주였고 자신이 가장 힘든 순간인 지금.
옆을 지켜주는 것 역시 윤주였다.
"너도 참..별걸 다 기억한다...그거 정말 별거 아닌건데..."
"별거 아니라도...나한테는 정말...다 예쁜 추억이야. 윤주야, 나땜에
많이 힘들지?"
"힘들기는...내가 왜 힘드냐. 유림이 네가 힘들지...난 아냐. 괜찮아..
정말이야! 나 튼튼하잖아."
윤주는 다시한번 환하게 웃어주었다. 유림 앞에서 윤주는 찡그린 표정을
한적이 단 한번도 없는 것 같았다.항상 웃어주었다. 조췌해져 버린
얼굴이 윤주 자신도 분명 힘들다는걸 말해주고 있는데도 절대 그 내색을
유림앞에서 하지 않았다. 그런 윤주의 모습에 유림은 더더욱 가슴이
아파오는것만 같았다. 자신이 윤주를 힘들게 만드는 것 같아서...
그리고 슬픈데도 자신앞에서는 웃어주는 윤주의 웃음이 가슴아파서...
"윤주야, 힘들면...그렇게 웃어주지 않아도 돼. 나는 있지 ... 화내는
정윤주도...울고있는 정윤주도 다 좋을 것 같아. 그러니까 윤주야...
힘들면 울어도 되고 화내도 되고...찡그려도 괜찮아. 앞으로 나 때문에
더 많이 힘들텐데...그럴때마다 웃어주려면...그러려면 윤주 네 속이
너무 상할꺼야."
"....유림아..."
"나 있지...다시는 이런 무모한짓 안해. 수술 안한다는 억지도 이제
안부려. 그래, 오늘 네가 했던 말대로 ... 나 꼭 살꺼야. 꼭 살아서...
하고싶은게 너무 많아. 못해본것도 무지 많고. 그래..윤주야...나
수술도 받을꺼야. 더 이상 바보짓 안해. 그런데...그렇게 되면 앞으로
네가 참 더 많이 힘들꺼야. 수술이...보통일이 아니거든. 그런 나
쳐다보는 네가...많이 슬프겠지..? 그래도...나 미워하면 안된다..
윤주야...넌...내편이지?"
당연히 네 편이라고. 언제나 네편일거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윤주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가만히 유림을 바라만보았다. 지금 유림이 하고
있는 말이 어떤말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윤주는 대답대신 유림의
하얀 손을 꼭 잡아주었다. 윤주의 볼에 살짝 보조개가 패였다.
"...나 .... 항상 네편이야..강유림! 내가 ... 어떤일이 있어도...
네편에 서줄테니까 걱정마. 그런걱정은 전혀 할 필요도 없어. 그래,
유림아...꼭 해낼꺼야. 수술 그거 우리 유림이는 꼭 이길 수 있을꺼야.
그치? 그까짓거 확 이겨버리고 우리 많은거 해보자. 같이 놀이공원도
가고..같이 바다도 보러가고...나 너랑 아이스크림도 다시한번 먹으러
가고싶어. 하고싶은거 나도 무지 많아. 우리 그거 꼭 다해보자. 너 수술
끝날때까지...그래서 다 낮는 날까지 나 항상 네 옆에 있을게.
강유림....! 내가 너 ... 많이 사랑해...그거...알지?"
유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윤주를 향해 미소지어 주었다. 마주보는
두사람의 눈빛과 미소가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여있어도 슬픈빛이 감돌아도 두사람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하늘이
유난히도 푸르던 가을날. 서로를 바라보는 두사람의 눈은 가을하늘
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 실버엔젤
"유림아, 이쪽은 현수선배."
병실에 들어선 현수는 아직까지도 뭔가 어색한지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유림을 쳐다보았다. 그런 현수를 가만히 바라보던 유림은 조금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현수를 훝어보았다. 윤주는 분명 그냥 친한 선배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유림은 현수가 신경쓰이는 기분을 어쩔 수
없었다. 현수와 함께 병실로 들어선 경미는 처음에는 유림을 보고 조금
놀란 듯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주와 유림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뭐야, 정윤주 너 완전 도둑이다! 이렇게 예쁜 애를 갖다가 꼬신거냐? "
"내가 꽃뱀이냐? 기집애, 친구한테 말하는 모양새하고는. 유림아,
이쪽은 내 단짝 경미. 내가 자주말했었지?"
"유림아, 안녕?"
경미의 인사에 유림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본격적으로 판막수술을 준비하면서부터 이것저것 검사도 많이 받고
약물치료도 시작하느라 유림의 얼굴은 더욱더 창백해 보였지만 표정만은
한결 더 밝아져 있었다. 하지만 환하게 웃는 가운데도 현수를 바라보는
유림의 눈동자는 어딘가 긴장되고 초조해보였다. 뻘쭘하게 서있던
현수와 경미는 윤주가 의자를 끌어다 주자 그제서야 어색하게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오늘 처음 만난 세사람인 탓에 대화는 서먹하기 그지
없었다. 간간히 윤주가 던지는 말들이 전부였고 경미와 현수. 그리고
유림 세사람은 그냥 윤주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한참을 혼자서 떠들어
대다싶이 한 윤주는 갑자기 말을 딱 그치고 세사람을 둘러보았다.
"뭐야? 이거 나혼자만 떠들어 대는거잖아. 왜 그렇게 말이 없어? 야!
경미너 내숭이냐? 평소답지 않게 말이 왜 그렇게 없어. 현수 선배두
그렇구."
"야, 처음보는 사이에 그럼 무슨 할말이 많겠냐. 아,분위기 진짜
서먹하네. 아무래도 먹을게 없어서 그런 것 같다! 정윤주, 일어나!
슈퍼 갔다오자."
"그럴까? 그럼 유림이랑 현수선배랑 둘만 있어야 되는데 어색하지
않겠어?"
윤주는 유림이 걱정되는 듯 유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유독 낯을
가리는 유림이 현수와 단둘이 병실에 남게되면 너무 어색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유림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미소지어 주었다. 그 미소에 윤주는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했다.
"그럼 다녀올게. 선배랑 둘이 재밌게 놀구있어. 가자, 경미야."
윤주와 경미가 병실을 나가고 나자 병실안은 그야말로 고요했다.
하지만 그런 고요함 가운데서도 유림과 현수는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한 여자를 둘러 싼 두남자. 어떻게보면 사이가 도저히 좋을 수 없는
관계이다. 아니, 서로를 미워해야 되는 관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수는 유림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유림은 어딘가 모르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녀석이라고 생각되었다. 겨우 두 번째 보는 만남
인데도 이렇게 끌리니 말이다. 윤주가 유림에게 그렇게 푹 빠져버린것도
괜한일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윤주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네..."
현수가 용기를 내서 붙인 말에 유림은 조용히 대답만 하고는 다시
고개를 약간 숙여버렸다. 사교성이 없는 유림으로써는 오늘 처음 본
현수와 자연스런 대화를 나눈다는게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현수역시
그렇게 활달한 성격은 되지 못하는 탓에 두사람 사이에는 다시 정적만이
감돌았다. 어색한 분위기에 현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법 쌀쌀해진 11월의 날씨에 윤주가 옷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으로
병원을 나서는 모습을 보자 현수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유림의 예리한 눈썰미는 그런 현수의 표정변화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현수의 표정에 가슴이 덜컥했다. 자신의 눈이 잘못된게
아니라면...느낌이 맞다면 현수는 윤주를 좋아하고 있다.
지금 그의 표정이 그러했다.
"....윤주....좋아하죠...?"
갑자기 던진 유림의 그 질문에 현수는 화들짝 놀라며 창문에서 시선을
떼서 유림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걸 다 알고있는듯한 유림의 까만
눈동자가 가만히 현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꼭 나쁜짓을 하다 들킨 어린애
마냥 현수는 가슴이 뛰었다. 하면 안되는 짓을 하다 들킨것만 같았다.
"...응? 그게 무슨..."
"후배로말고..여자로...윤주...좋아하고 있죠? 현수형 눈이 그래요...
그렇게 보여요.."
현수의 얼굴이 점점더 빨개지더니 이제는 숨길수 없을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이런 마음이 들 필요가 없는데...윤주를 먼저 좋아한건
자신이고 이런 죄책감이 들 이유가 전혀 없는건데도 현수는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유림의 시리도록 맑은 눈동자 앞에
죄인이 된것같은 기분이었다.
"그게...그래...솔직히...나한테 윤주는...그냥 후배가 아니라...
여자야..."
힘겹게 내뱉은 현수의 한마디에 유림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활달하고
성격좋은 윤주를 좋아하는 남자가 자신밖에 없을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윤주를 좋아할 수 있을거라고 그렇게 생각은
해봤었지만 이렇게 직접 듣고보니 착찹해지는 마음이었다. 더구나
자신은 이렇게 환자복을 입고 병원에 가만히 쳐박혀 있어야 하는 처지인
지금. 눈앞에 현수는 그런 자신의 처지에 비해 너무 나아보였다.
명문대생에다가 훤칠하게 큰 키와 서글서글한 눈매. 그리고 풍겨오는
그의 분위기가 자신이 봐도 멋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너 대단하다. 어떻게 그걸 한눈에 알았냐? 정윤주는 일년이 다되가도록
못느낀걸 십분도 안되서 알아차리네."
".........."
"근데 걱정하지마. 나한테 정윤주는 여자지만...윤주한테 나는
'좋은 선배' 그 이상은 절대 아니니까. 윤주가 선택한 남자는...
너잖아...강유림..."
자신의 피나는 노력에도 꿈쩍도 하지 않던 정윤주. 그런 그녀가 선택한
사람은 유림이 아닌가. 그말을 내뱉은 현수는 스스로가 더 불쌍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럼 현수형은..내가 많이 밉겠어요."
"아니...원래는 그래야 정상이겠지만...솔직히 너 보기 전까지는 윤주
뺏어간 그놈이 누군지 참 밉고 싫었는데 ... 막상 널 보니까 그렇진
않아. 왜 천하에 정윤주가 푹 빠져버렸는지...알것같아..."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지만 솔직한 감정으로 유림은 참 예쁜아이였다.
남자에게 '예쁘다'는 말은 쓰지 않는 것이 옳은건지도 모르지만
유림을 표현할 말은 그 단어밖에 없는 것 같았다. 긴 속눈썹과 까만
눈이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시리도록 맑은 그 눈빛이 인상적인
소년이었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것만 같은 천사같은 아이.
"나 웃긴놈같지? 좋아하는 여자한테는 단호하게 거절당했고...그리고
그 여자 남자친구 앞에서 이런 말이나 하고있고...진짜 웃긴놈이지..?
근데 난 지금도 윤주를 좋아하지만 널 미워하진 않아..."
"특이하네요...사랑하는 여자를 뺏어간 남자가 밉지않다니...그건...
윤주가 다시 돌아올거란 자신감인가요?"
"쿡...자신감은 무슨. 나 알아. 윤주는 절대 나한테 안와. 나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한테도 안갈녀석이야. 지금 그녀석 눈에는 너밖에
안보일테니까. 난 그냥 윤주를 좋아하는거야. 윤주가 누굴 좋아하든
상관없이. 그리고 너도 좋은 녀석같다. 그래서 미워하고 싶지 않아."
어딘가 모순되는 현수의 말이지만 유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을 좋아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그리고 그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도 밉지 않다...이건 도를 닦는 사람도 하기 힘든 말이
아닌가. 하지만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눈앞에 앉은 현수란 남자는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란걸 유림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럼...윤주를 빼앗아갈 생각은 없단 말이군요."
"...말하자면..."
"다행이네요. 빼앗아 가고싶다고 해도 난...윤주는 절대 안뺏길
거거든요. 윤주는 내사람이에요."
조용조용하고 얌전해만 보이던 유림이 내뱉은 단호한 어투의 그말에
현수는 깜짝 놀라며 다시 유림을 살폈다.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
걸까. 그말을 하는 유림의 표정은 진지했고 또 그 이상으로 단호했다.
윤주는 자기사람이라...절대 뺏기지 않는다. 그만큼 윤주를 사랑한다는
말일까? 현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고 있는 동안 유림이 현수앞으로
불쑥 손을 내밀었다. 여기저기에 링겔 주사 자국이 남아있는 앙상한
손에 현수는 잠시 주춤했다.
"웃긴 경우지만...현수형은 좋은사람같아요. 내가 사랑하는 여자
짝사랑하는 남자지만...형만 괜찮다면...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유림의 제안에 현수는 피식 웃어버렸다. 이런 말도 안되는 제안을
하는 유림도 웃겼지만 그런 유림의 제안에 반가운 마음이 든 자신이
더웃겼다. 왜 이녀석에게 이토록 끌리는걸까. 현수는 스스로에게
의아해 하면서도 유림이 내민 손을 잡아버렸다.
"그래, 우리 웃긴 관계지만...친하게 지내자. 잘부탁해, 강유림."
"저두요. 하지만 윤주는 절대 양보안합니다. 정윤주는...강유림이
지켜요."
#. 실버엔젤
윤주의 하루일과는 거의 병원에서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서
얼른 오전 강의를 듣고 윤주는 곧장 유림이 입원해 있는 대학병원으로
직행했다. 오늘도 강의를 마친 윤주는 어김없이 유림의 병실로 향했다.
유림이 좋아하는 오렌지를 사들고 병원복도를 신나게 걸어가던 윤주는
소란스러운 병실의 분위기에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춰버렸다.
유림의 병실이었다. 틀림없는 유림의 병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사람이 와있다 해봤자 김기사 아저씨나 은숙아주머니...아니면 유림이
아버님 아니면 어머님일텐데...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윤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병실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병실안의
상황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윤주는 들고있던 오렌지 봉지를 바닥에
떨어뜨려 버렸다. 유림은 꼼짝도 않고 침대에 누워있었고 의사와
여러명의 간호사들이 그런 유림의 주위를 둘러싸고 산소호홉기를
들이대고 또 윤주는 알아듣지도 못할 전문 의학용어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 그들 옆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던 은숙은 윤주의 모습을
보고는 울부짖으며 윤주에게 달려왔다.
"윤주아가씨...흐읍...우리 도련님...우리 도련님 어떡해요...우리
유림도련님..."
"이...이게 ...이게 뭐에요? 왜들이래요? 네?"
"도련님이...갑자기 심장발작을 일으키셨어요...그런데...이번에는
심한가봐요...어떡해요.."
세상이 한바퀴 도는 느낌이었다. 유림이 어떻게 된단말인가. 윤주는
뭔가 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간호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섰다.
"유림이..우리 유림이 왜 이래요? 왜 이러는거에요???"
"심장발작입니다. 갑자기 호흡곤란을 일으켜서 저희가 응급조치를 해둔
겁니다. 이제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니 너무 걱정하실건 없습니다.
그럼 저흰 이만 갈테니 환자 상태가 조금이라도 안좋다 싶으시면 곧장
호출 해 주세요."
그 말만 남기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을 빠져나가자 윤주는 털썩
병원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순간 아찔해 지는 기분이었다. 유림을
둘러싼 의사와 간호사들을 봤을 때. 순간 유림이 잘못된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칠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은숙은 눈물을 닦으며 윤주를
자리에서 일으켜 주었다.
"아가씨...아가씨 이러시면 안되요...힘을 내세요..아가씨.."
"아주머니...저 어떡해요...무서워요...유림이..유림이 괜찮은거죠?
우리 유림이..괜찮은거죠?"
"그럼요. 도련님이 어떤 분이신데요. 아까는 제가 경황이 없어서..
아가씨 걱정만 시켰네요. 도련님 괜찮으실꺼에요. 의사 선생님도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잖아요."
비틀거리며 바닥에서 일어난 윤주는 유림의 침대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있던 유림의 눈꺼풀이 서서히 떠져다. 잠시 눈살을
찌푸리던 유림은 몇분정도 지나고 나서야 주위가 분간이 가는 듯 했다.
천장만 바라보던 유림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힘겹게 고개를
옆쪽으로 돌렸다. 그곳에 윤주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손을 붙잡고
서럽게 울고있는 윤주의 얼굴이 보였다.
윤주야...울지마...정윤주, 울지마. 나 괜찮아..응..? 윤주야...
울지말라고 윤주에게 말해주고 싶은데. 그리고 윤주를 꼭 안아주고
싶은데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산소호흡기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침대에 엎드려 울던 윤주는 유림의 손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이 울음을 뚝 그치고 고개를 들었다. 깨어난
유림이 지그시 윤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유림아..강유림..너 괜찮은거지? 응? 유림아."
그 질문에 유림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윤주는 그제서야
한시름 놓이는 듯 크게 숨을 몰아쉬고 기도하듯 두손으로 유림의 손을
감싸쥐었다. 한참을 윤주를 올려다 보던 유림이 뭔가 하고싶은 말이
있는 듯 잘 움직여 지지않는 입술을 애써 달싹거리고 있었다.
산소호흡기 때문에 전해지지도 않는 그말이 도대체 무엇인지. 윤주는
유림에게 바짝 다가가 산소호흡기 가까이에 귀를 기울였다.
"....윤주야....울지..마....나...괜찮아...울지마.."
힘겹게 내뱉은 유림의 말은 그것이었다. 울지 말라는 말... 자신은
괜찮으니 울지말라는 유리의 말에 윤주는 가슴이 꽉 메이는 느낌이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야하는 상황인데..바보같은 강유림.
지금 자기가 누굴 걱정해 줄 상황이 아닌데도..그런데도...
날...걱정하는거니? 응? 유림아..
유림의 발작 소식을 전해들은 강대사가 헐레벌떡 병실로 들어섰다.
어찌나 서둘렀는지 평소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흐트러진 머리와 삐뚤어진 넥타이가 그의 다급한 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유림이는..?"
"조금전에 잠들었어요. 위험한 고비는 다 넘겼다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산소 호흡기도 조금전에 뺐구요."
윤주의 설명에 강대사는 허탈한 탄성을 내쉬고 유림을 바라보았다.
심장 박동수를 체크하는 기계를 연결하느라 열어젖혀놓은 유림의 상의
때문에 수술의 흉터가 가득한 유림의 가슴이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찢고 또 다시 꿰맨 상처들. 살기위해 겪어야 했던 아픔이 눈에 들어오자
강대사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너무...걱정마세요. 대사님..."
조심스러운 목소리의 윤주였다. 강대사는 유림에게 향하던 시선을 돌려 윤주를 바라보았다.
항상 윤주에게는 고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유림을 찾아와 주는 윤주의 정성이 보통 정성이
아니란걸 강대사는 잘 알고있었다. 부모도 하기 어려운 일을 지금
윤주가 하고 있는 것이다.
"정선생이 고생이...많네. 오늘도 정말..고맙네."
"고맙긴요. 그리고 정선생이라고 부르지 마시고 그냥 윤주라고 불러
주세요. 그게 더 듣기 편해요."
강대사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윤주에게 다가가 윤주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참 올곧고
착한 아가씨였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아가씨였다.
인스턴트식 사랑이 일반화 되어버린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마음을
다해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진짜 사랑을 아는 사람이 바로 윤주라고
강대사는 생각됐다. 몸도 성치 않은 유림을 이렇게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고마움이었다.
"그래..윤주양. 정말...내가 너무고맙네. 우리 유림이...이애를
아껴줘서...내가 너무 고맙네."
"아니요..제가 더 고마워요. 유림이 세상에 있게 해주신 분이잖아요.
유림이 같이 맑고 예쁜애..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분인데..제가 더
감사해야죠. 저 있죠..유림이 아버님 앞에서 건방진 말씀인지도
모르지만 ... 유림이 몰랐으면 어떻게 살았나 싶어요. 너무...
사랑해서요. 유림이 같이 좋은애를 모르고 살았으면 얼마나 막막했을까..
요즘은 그런 생각도 들어요."
"요세 윤주양도...고생이 많을텐데. 얼굴도 많이 수척해졌고..."
"저보다 유림이가 더 힘든걸요."
슬프게 미소짓는 윤주의 표정에 강대사는 딸을 얼싸안 듯이 윤주의
어깨를 감싸고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그리고 두사람은 병실에 서서
한참을 유림을 내려다보았다. 한사람은 아버지 그리고 또 한사람은 연인.
두사람의 호칭은 엄연히 달랐지만 두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바는 한가지
였다.
유림이 무사하길...부디 건강하게 살아주길.
#. 실버엔젤
유림의 수술날짜가 정확하게 잡혔다. 원래 내년 3월 쯤으로 예정되어
있던 수술은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는 유림의 상태 때문에 더 앞당겨져
버렸다. 1월 4일이란 명확한 수술날짜가 잡히고 나자 병원도 유림도.
그리고 유림을 돌보는 사람들도 모두 바빠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12월에
접어들어버린 지금. 유림의 수술까지는 불과 한시간의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지만 모두 알고있었다. 이 수술은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것임을 말이다.
윤주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항상
밝았다. 유림의 병실로 들어설 때 마다 항상 환한 미소를 머금은 윤주
덕택에 유림은 잘 견뎌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에도 몇십알씩 되는
알약들과 피검사 그리고 갖가지 링겔주사와 심전도 검사같은 힘든
과정들을 군말 하나 없이 잘 견뎌주고 있었다.
오늘도 몇십알의 알약을 억지로 삼킨 뒤 멍하게 창밖을 쳐다보던 유림은
천천히 윤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침대 옆 의자에 기대앉아 책을 읽는
윤주의 모습이 유림의 눈동자에 들어왔다. 이제 윤주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윤주야, 뭐 읽고 있어?"
"응? 이거? 별거 아냐. 그냥 소설. 네가 피곤해 하는 것 같길래
말붙이기 미안해서."
"아냐..안피곤해."
그렇게 말하고 환하게 미소짓는 유림의 얼굴이 예전보다 많이 야위어져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림의 몸이 나빠져 간다는게 이제는 눈으로
드러날 만큼이었다. 앙상해진 팔목과 창백해져만 가는 얼굴빛을 볼 때면
윤주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냥 울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항상 웃으려 노력했다. 유림이는 곧 나아질테니까..수술만 하면 다
나을테니까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한없이 위로하고 또 위로
했다.
"윤주야, 나 부탁하나 있는데..."
"부탁? 어떤건데? 우리 유림이 부탁이면 꼭 들어줘야지."
"어려운걸수도 있어. 그래도 들어줄래?"
"내가 할 수 있는거라면. 뭔데? 뭐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니?"
잠시 말하기를 멈칫하고 망설이던 유림이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나 수술하기 전에...여기서 한번만 나가보고 싶어. 병원에서 나가서...
별장 가보고 싶어. 우리 처음 만났던 강릉별장에..."
병원이 싫었다. 병원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도 이제 지긋지긋 하도록
싫었고 하루에도 몇십번씩 자신의 상태를 살피러 들어와 힐끔 자신을
들여다 보고 가는 의사나 간호사들도 이제는 끔찍이 싫었다. 던져주는
약을 입에 털어넣고 멍하게 누워있을때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면 그럴수록 강릉 별장에 그리웠다. 윤주를 처음 만났던 곳.
윤주는 할말을 잃은 듯 가만히 유림을 쳐다만 보았다. 유림의 기분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윤주 자신조차 이 병원이란곳이 지긋지긋
한데...벌써 몇 달을 이안에서 보내고 있는 유림의 기분이야 어떨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하지만 함부로 대답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유림의 상태에서 병원을 떠나 강릉으로 훌쩍 가버린다는게 어떤
일인지...윤주는 도무지 짐작 할 수 조차 없었다.
"...유림아, 수술도 얼마 안남았잖아...병원에서 나갔다가 갑자기
위험해지면..."
"괜찮아. 내 몸상태는 내가 잘 알아. 수술때까지는 버틸꺼야.
정말이야...정말로..."
"병원에서 허락 안해줄텐데...너희 아버님도."
"너만 있으면돼. 너만 같이가면...될것같아. 많은거 안바래. 딱
하루만...수술하기 전에 하루만...거기가 꼭 가보고 싶어서 그래..."
딱 하루라고 하는 말이 왜 그렇게도 깊게 와닿는지. 윤주는 잠시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당장 떠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앞으로는 영영 그곳에 가보지 못할
사람처럼 말하는 유림의 말투가 너무 두려웠다. 얼마든지 갈 수
있잖아...유림아...앞으로 얼마든지..수술 끝나면...언제든지 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그런식으로는...말하지마....무섭잖아....
".....정말....괜찮겠어?"
"정말 가보고 싶어. 가서 ... 별장 창문밖으로 겨울 산도 보고싶고 ...
맑은 공기도 마시고 싶고..."
"너 데리고 갔다가 다시 오면 나 무지 혼날텐데. 의사선생님이랑 너희
아버지한테 무지하게 혼날꺼야."
"아...그렇겠다...윤주 네가 곤란하면...어쩔 수 없지..."
윤주가 곤란해 진다는 말에 유림은 낮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떨구
었다. 실망스런 눈빛으로 고개를 숙인 유림의 머리위로 겨울의 따뜻한
햇살이 비춰들어왔다. 그 모습이 왜 그렇게도 가슴아픈지 윤주는 가슴이
찡하고 울려오는것만 같았다. 저렇게나 가고 싶어 하는데...힘든것도
아닌데 들어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강유림..."
"응?"
"너 강릉 다녀와도 괜찮다고 나한테 약속할 수 있지? 지금 상태보다
더 안나빠진다고...약속하지?"
"물론이지!"
"약속 안지키면 나 화낼꺼야.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야되. 진짜..
괜찮은거지...다녀와도?"
거듭 묻는 윤주의 질문에 유림은 언제 우울했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윤주는 결국 또 유림에게 지고
말았다. 유림의 부탁에는 왜 언제나 이렇게 약해지는 지 모르겠지만
이번 또한 그랬다. 어쩌면 윤주 또한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유림을
처음 만난 그 별장에 무척 그리웠다.
그래, 한번쯤은 정말 괜찮을지도 몰라. 이렇게 온종일 병원에 갇혀서
수술날짜를 기다리는 것 보다는 한번쯤은..저렇게도 가보고 싶어하는
곳을 다녀와서 수술을 받는게 더 나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유림아, 나 네가 하고 싶어하는거라면 다 들어줄테니까 우리
유림이...건강해져야된다. 내가 바라는거 그거 딱 하나니까 유림아...
수술해서...꼭 다 나아서..우리 .... 수술끝나고 그 별장...다시 같이
가자...유림아..
-뭐? 정윤주 너 지금 무슨말을 하는지 알아? 수술이 한달앞인 애를
어떻게 하겠다고?
핸드폰을 받는 현수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수술이 겨우 한달남은 유림을 데리고 강릉을 다녀오겠다는
윤주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런 여행을 도와
달라고 지금 자신에게 부탁하는 윤주의 태도는 더더욱 그랬다.
"선배, 부탁이야. 유림이가 너무 가고싶어해.."
-가고 싶다고 다되는거 아니잖아? 그거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너 알아
몰라? 똑똑하기로 소문난 정윤주가 모를리는 업겠지.
"나도 알아...선배...나도 다..알아...지금 내가 하는 생각이 얼마나
미친 생각인지..위험한 생각인지 알아. 근데 선배..유림이가 부탁이래...
유림이가...너무 슬픈 눈으로 그렇게 부탁을 해...선배 나 선배한테도
못할짓 하는거 너무 잘알아. 나 포기하라고 말해놓고 다른남자랑 같이
여행가는데..선배한테 태워다 달라고 하는말. 이거 인간이 할짓
못되는것도 알아. 근데 현수선배...나 인간이 할짓 못할짓 그런거
지금은 분간못하겠어. 아니, 하기 싫어...그냥..유림이가 하자는데로만
하고싶어. 선배...나 죽도록 미워도..이번 한번만 좀 도와줘. 응? 나
유림이 수술 끝나고 나면...선배한테 무릎이라도 꿇을게. 그러니까
이번만 제발 좀..."
처량한 목소리였다. 현수가 알기에 윤주는 누구보다 자존심 강한 여자
였다. 겉으로는 서글서글하니 비위좋고 성격좋은 속으로는 누구에게
뭐하나 신세지는 것 조차 자존심 상해하는 그런 여자였다.
그런 정윤주가 거의 빌고있었다. 애원하고 있었다. 잠시 표정을 잔뜩
찌푸렸던 현수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까지 좋은거냐? 정윤주, 너 참 대단하다. 그리고 강유림도...
너희 두사람...정말...날...힘들게 만드는거 아냐? 그리고 ... 너희
두사람 다...정말 ...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란거 아냐? 날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데도..제길, 난 ... 너희 두사람 다를..미워할 수가
없다...
".....정말 너...휴, 말을 말자. 태워다 줄게. 그래, 내가 졌다.
도와주마. 몇시까지 병원으로 가면되냐?"
-선배, 고마워...정말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유림이 수술끝나고 해. 몇시에 갈까?"
-8시까지 병원으로 와줘.
#. 실버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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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시면 저녁 회진이 끝난 시간이라 간호사들이나 의사들이나 휴식
시간을 가지곤 했다. 그래서 병원 복도나 병실에서 빠져나가가 가장
좋은 시간이 바로 그때였다. 회진을 마친 의사가 병실을 빠져나가자
마자 유림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팔에 꽂혀있는 링겔바늘을
뽑아버렸다.
"유..유림아! 너 그래도 되는거야?"
"이걸 꽂고 나갈수는 없잖아."
대답하고 피식 웃는 유림의 미소에 생기가 느껴졌다. 병원을 빠져
나간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유림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병원 캐비넷에 곤히 넣어두었던 옷을 꺼내든 유림은 급한 마음에
병원복을 벗어던져 버리고 얼른 옷을 껴입었다. 놀란 윤주는 얼른
유림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병실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윤주의
모습이 재밌는지 키득키득 웃어댄 유림은 마지막으로 옷걸이에 걸려있던
코트를 벗겨내서 걸쳤다.
"윤주야, 이제 됐어. 가자."
유림이 준비를 마쳤다는 말에 두사람은 손을 꼭 잡고 살며시 병실
밖으로 나왔다. 역시 간호사들의 휴식시간이라 병원 복도에는 환자나
환자 가족들 외에 간호사들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윤주의 심장이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건 병원에서 도망치는것이었고 옳지 못한 행동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병원 복도를 무사히 빠져나온 두사람은 엘리베이터를 잡아
타고 1층 버튼을 눌렀다. 그제서야 숨을 몰아쉰 두사람은 서로를 바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렸을적 해보았던 숨바꼭질이 떠올랐다. 지금
마치 술래를 피해 어디로 꼭꼭 숨는것만 같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춰서고 두사람은 병원밖으로 걸어나왔다. 12월의 쌀쌀한 날씨가
피부에 확 느껴졌다.
병원 주차장에 현수의 차가 보였다. 약속대로 현수가 와 준 것이다.
유림과 윤주는 종종걸음으로 현수의 차가 있는곳까지 달려가서는 얼른
현수의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아 뭔가를 심각하게 생각해보고
있던 현수는 갑자기 나타난 두사람의 모습에 따뜻하게 웃어주고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현수 자신도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있는지 알 수 없었다. 병원에서
도망치는 이 두사람을 도와주다니. 분명 말려야 하는 일인데도 이런
잘못된 행동을 오히려 돕고있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병원을
빠져나와 환하게 웃고있는 유림의 얼굴을 보자 현수의 그런 생각을은
싸악 사라져 버렸다.
윤주에게 유림을 처음 소개 받고나서. 유림과 친하게 지내기로 약속했던
그날 이후 현수는 시간이 날때마다 유림을 찾아가곤 했었다. 그때마다
어딘가 힘없고 우울해 보였던 유림이었는데 오늘만은 너무 기쁘고 들뜬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유림의 표정을 보자 현수도 기뻐지는 것
같았다.
"자, 병원에서 탈출한 두사람. 어디로 모실까요?"
"강릉별장요!!!"
동시에 소리지르는 두사람의 목소리에 현수는 보일 듯 말 듯 웃고
차를 출발시켰다. 이제부터 현수는 두사람의 도망에 공범자가 되버린
것이다.
"현수형, 고마워요. 정말 너무 고마워요."
별장에 도착한 유림은 현수의 손을 붙잡고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만
해댔다. 현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냥 웃기만 했다.
"고맙긴. 네 얼굴 너무 밝아 보여서 내가 오히려 더 좋다. 내일...
데리러 올게. 몇시에 올까?"
"선배, 데리러도 와주게?"
"그럼. 내가 데려다 줬으니 데리러도 와야지. 왜? 데리러 오지 말까?"
"아니, 아니...그래주면 너무 고맙지. 유림아, 우리 내일 몇시까지
여기 있을까?"
"음...밤7시쯤."
"그래, 그럼 그때 데리러오마. 두사람 재밌게 잘 놀아라. 이 도망자들.
아, 그리고 이건 식량이다."
현수는 이제야 생각난 듯 운전석 옆 조수석에 놓아두었던 커다란 비닐
봉투를 두사람앞으로 내밀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봉지안을 들여다본
두사람은 말없이 현수를 쳐다만 보았다. 빵과 초밥. 먹을만한 것들을
잔뜩 싸둔 음식 보따리였다. 자신들은 미처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세심한것까지 배려를 해준 현수의 정성이 마냥 고마웠다.
"선배아니었으면 우리 쫄쫄 굶을뻔했네...선배..고마워...정말로..."
"현수형..고마워요..."
"고맙단말은 나중에 들을게. 우선은 둘이 잘 놀아. 난 진짜 간다."
손을 흔들어준 현수는 다시 차를 몰고 별장을 빠져나갔다. 현수의
차가 뽀얗게 흙먼지를 일으키며 별장을 빠져나가는 동안 유림과 윤주는
그 자리에 서서 현수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현수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두사람은 천천히 별장안으로 들어섰다.
별장을 비운 사이에도 김기사와 은숙이 종종 들러 관리 해 둔 덕분에
별장은 방금전까지 사람이 살던 곳처럼 깨끗했다. 보일러를 틀어놓지
않은 실내는 싸늘했지만 보일러 버튼을 눌러두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따뜻해져 오기 시작했다. 거실 쇼파에 앉은 유림은 자신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통유리창 너머로 겨울의 숲속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름에 온통 푸르름이 가득했던 나무들은 어느덧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밤이라 자세히는 모이지 않았지만 나무들은 모두 앙상하게
하늘을 향해 뻗어있었다. 쓸쓸하고 슬퍼 보이기도 하지만 겨울의 숲도
나름대로 매력있었다. 조용하고 잔잔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건 겨울
숲만의 분위기였다. 그런 겨울숲의 풍경을 유림은 말없이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유림아, 추워?"
혹시 유림이 추울까봐 윤주는 별장에 있는 이불이란 이불은 몽땅 거실로
끌고나와서 거실 카펫위에 몇겹이나 깔고 그위에 유림을 앉힌것으로도
안심이 안되서 또 두꺼운 솜이불로 유림을 둘둘 말아놓아버렸다.
그바람에 유림은 이불에 포옥 쌓인채 얼굴만 겨우 보이는 정도였다.
"쿡, 이렇게 이불 둘둘말고 뭐가 춥겠어? 하나도 안추워."
"너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잖아. 정말 안추워?"
"윤주 네가 더 추워보인다. 이리와. 같이 덮자."
아직도 실내가 싸늘한데 윤주는 유림과 멀찌감치 떨어진곳에 혼자
카펫위에 앉아있었다. 유림이 옆으로 오라고 손짓하자 윤주는 옅게
미소지으며 그냥 고개만 도리도리 내저었다. 그러나 유림은 포기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윤주가 오지 않자 자신이 둘둘 만 이불을 끌고
윤주 옆으로 다가왔다.
"너 그러다가 감기든다. 같이 앉자."
이불을 들고 얼른 들어오라고 유림이 계속 재촉하자 윤주는 못이기는척
피식 웃고는 유림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불속에 유림의 온기가 고스란히
베여있었다. 한이불을 둘둘 두르고 곁에 앉은 두사람은 잠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뭐가 그리도 웃긴지 어린아이처럼 큰소리로 웃어댔다. 오래간만에
소리내어 웃어보는 두사람이었다. 조용한 숲속의 별장.
오랜만에 불켜진 그 별장에 두사람의 웃음소리가 넘쳐흘렀다.
#. 실버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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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오니까 여름 생각난다. 우리 처음 만났던때."
싱그러웠던 여름이 떠올랐다. 이 별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 느껴졌던
향긋한 나무 내음과 숲속으로 뻗은 저 길로 유림이 천천히 걸어오던
모습. 그리고 자신을 처음 바라보았던 유림의 까만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래, 그 순간 부터였다. 유림을 사랑하게 된건..그날 이 별장에서
유림의 눈을 처음 바라보았던 순간 부터였다.
그날 느꼈었다.
아, 세상에 저렇게 맑은 눈을 가진 사람도 있구나..
세상에 저렇게 맑은 사람도 있구나 ... 세상에 저렇게...
천사같은 아이도 있는거구나...
그리고 그 느낌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많이 야위고 안색도 창백해
져버렸지만 윤주에게 있어 유림은 아직도 은빛 날개를 가진 천사였다.
"너 첨에는 나 되게 싫어했었는데...그치?"
"내가 그랬었나?"
"그러엄, 강유림 너 말도 못하게 튕겼잖아. 괜히 심술도 잘내고."
언제 윤주에게 냉정했던 적이 있었을까 싶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을
생각만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사람을 싫어했던적이 있었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처음에는 그랬었던 것도 같았다. 그때는 윤주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쌀쌀했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니 너무 후회되었다. 많이 사랑해도 모자란 시간이었는데
왜 그랬을까. 처음부터 많이 사랑할껄...더 많이 사랑해줄껄...
어쩌면 이제 ... 생각도 하기 싫지만... 이런 생각은 해보고 싶지도
않지만 ... 만약에 ... 아주 만약에 수술이 잘못 되버린다면...
다시는 윤주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이제는 이렇게나 일분일초가 아쉬운데 왜 그때 많이 사랑하지 못했을까.
"근데 강유림, 솔직히 너 튕기는것도 내눈에는 예뻐보였어. 후훗, 나
미쳤나봐. 그치? 네가 하는건 뭐든 다 좋다."
그말을 하고 윤주는 유림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댔다. 잠시 멈칫하던
유림은 이내 평온한 표정을 되찾고 자신의 어깨에 기댄 윤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윤주는 손을 뻗어 유림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윤주야...나 있지 ... 수술 다 끝나면 해보고 싶은게 너무 많다.
너랑 이 별장에 다시 와서 불꽃놀이도 다시 해보고 싶고 그리고
쿡, 그 버스 있잖아. 너랑 버스 탔던거. 그것도 다시 해보고 싶어."
"뭐 그렇게 평범한 것들이야~ 그거라면 내가 항상 같이 해 줄수 있지."
"그리고 또 해보고 싶은거 되게 많다. 이건...아무한테도 말해본적
없는건데..항상 나 혼자만 생각해 보던건데 .. 나 그게 되고 싶어.
건축설계사. 멋진 집짓는 사람."
유림이 자신의 미래를 이야기 한것은 처음이었다. 윤주는 동그란 눈으로
유림을 올려다 보다가 유림을 향해 환히 웃어주었다. 그런 윤주의
미소에 용기를 얻은듯 유림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되면...정말 예쁜 집하나 지을거야. 영국쪽에 짓고싶어.
유럽풍으로 무지 예쁘게. 그리고 거기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고싶어.
집만큼 예쁘게...그렇게 살고싶었어...항상.."
"우리 유림이 로맨티스트다. 너무 멋진데."
"근데 윤주야..."
"응?"
"지을 수 있을까? 그 집..."
유림의 목소리가 슬퍼져 있었다. 두려웠다. 꿈꾸던 모든것들을 하나도
이뤄보지 못할까봐. 그걸 이뤄보기도 전에 덜컥 떠나야 할까봐.
두렵지 않다고 항상 생각해봐도 두려움이란 녀석은 항상 마음속 깊숙히에
남아있는 것이라서 완전히 없애버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왜 못하냐? 당연히...할 수 있지..."
"정말...그럴까?"
윤주는 목까지 슬픔이 차올라오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솔직히 윤주
자신도 두렵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두려웠다. 하루에도 몇번씩
혹시나 유림이 잘못되면 어떡할까 미칠듯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믿었다. 유림은 꼭 나아서 돌아온다고.
꼭 건강해져서 ... 예쁘게 웃으며 '윤주야' 라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줄거라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난 믿어. 꼭 그렇게 된다고. 꼭 너 멋진 집 지을 수 있을거야.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꼭 거기서 예쁘게 살거야...꼭!"
"풋, 윤주야...그러면 있지..."
"응?"
유림은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 한참을 망설였다. 그렇게 몇분을 뜸들이고
유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윤주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집에서...너랑... 예쁘게 살고싶다."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싶었다. 그냥 이대로 모든게 멈췄으면.
윤주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여버렸다. 그에 비해 유림은 너무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다정한 눈빛으로 윤주를 바라보며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강유림...지금 네가 한말...어떤 말인지...알아?
유림아...그거...그말은...있지....
"...유림아..."
"웃기지? 아직 난 겨우 열여덟이고 확실히 살지도 모르는데.
근데 윤주야, 나 지금 프로포즈..그래, 그거 하는거야. 몇년뒤가
될지 모르지만..아니, 그런 날이 올지 안올지도 지금은 확실하지가
않지만...난 꼭 그러고 싶어. 예쁜집에서...너랑 예쁘게...살면 좋겠어."
윤주의 눈에서는 어느새 쉴세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냥 머리는 하얗게 백지가 되버리는것 같았다. 목까지 차올라있던
슬픔이 입밖으로 터져나와 버린듯 윤주는 유림을 붙잡고 엉엉 소리내서
한참을 울었다. 유림은 따뜻한 미소로...울지 않으려 애쓰며 윤주를
달래주고 있었다. 자신까지 울어버리면 오늘이 너무 슬퍼질 것 같았다.
슬픈날로 만들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슬프고 싶지 않았다.
"...유림아...다시 한번만...한번만...다시 말해줘봐..."
"윤주바보, 한번에 못알아 듣는구나. 다시 말해줄게. 나 있지 ..
예쁜집에서 윤주 너랑 살고싶어. 그렇게 하려고 나 꼭 나을거야.
건강하게 나아서...꼭 그렇게 하고 싶어. 너도..그렇게 해줄래?
내가 지은 집에...주인이...되줄래?"
생각할것도 없었다. 생각해보기 전에 대답은 이미 마음속에 들어있었다.
윤주는 울면서 미소지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쉴세없이 떨어지는데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럼...당연하지...너..약속 지켜! 정말 예쁜집 지어야되.
동화속에 나올것 같은 집. 꼭 지을꺼지?"
"응...그렇게 할께."
"약속했다. 나 약속 안지키는 사람..싫어하는거 알지? 꼭 지켜야되."
"그래...그래, 윤주야..."
참아왔던 유림도 결국은 울어버리고 말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리고 있었지만 유림은 울지않으려 애쓰며 터져나오는 울음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강유림...너 수술 끝나고 다시 건강해지면..그때 나 꼭 업어
줘야되. 나 업고 다닐 수 있을만큼 건강해 져야되."
"응..그것도 약속해.."
"그리고....그리고...."
윤주는 한참을 말을 잊지 못하고 훌쩍이다가 힘겹게 다시 입을 뗐다.
"다시는...아프면 안되...다시는..."
결국은 두사람 다 울어버리고 말았다. 서로를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다. 가슴속에 차있던 슬픔을 다 쏟아내버리기라도 하는듯.
하지만 슬프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슬픈데...그런데
왜 또 한편으로는 행복하기도 한건지.
그건 아마도 희망때문인것 같았다. 꼭 다시 나을거라는 희망.
다시 나으면 우리 더 예쁘게 사랑할 수 있다는 희망.
#. 실버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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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는 정확히 약속한 시간에 다시 별장에 도착했다. 손목시계를
쳐다보는 현수의 얼굴이 썩 밝지만은 않았다. 왜 이런 짓을 자초해서
하고 있는건지...왜 이렇게 바보같아 진건지 이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유림에게서 윤주를 빼앗아 보겠다는 헛된 망상은 모두
버렸다. 두사람 사이에는 누군가 끼어들 틈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는 마음을 바꿨다. 그냥 두사람을 도와주기로.
너무 예쁜 두사람이 꼭 행복하게 될 수 있기를 빌어주기로 했다.
그렇다고해서 윤주를 완전히 잊은건 아니었다. 아직도 사랑한다.
그래서 이러는 것이다. 내가 가질 순 없지만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기위해.
잠시 뒤 별장문이 열리더니 윤주와 유림이 모습을 나타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간직한 두사람의 모습을 보니 현수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베어났다.
"와, 현수형 시간약속은 칼이네. 정확하게 와있네요."
"그럼, 약속하면 또 나 아니겠냐. 얼른 타라. 춥다."
현수를 보며 싱긋 웃음 유림은 얼른 뒷좌석에 올랐다.
아직까지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어제 병원을 빠져나올때보다는 훨씬
밝아진 모습이었다. 별장문을 잠근 윤주도 얼른 차에 오르자 현수는
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유림과 윤주는 벌어지는 별장을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그 별장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쳐다봤다.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유림이 다 나으면 꼭 다시 찾아올 별장이기에.
슬픔은 꾹꾹 눌러담기로했다.
"어때, 둘이 잘 놀았어?"
"네. 잘 놀았어요. 이제 병원 다시 들어가도...하나도 안무서울것
같아요."
"그래? 그거 잘됐다. 지금 네 얼굴 너무 좋아보인다, 유림아."
유림은 대답대신 그냥 웃었다. 하루사이에 뭔가 마음이 편안해진
느낌이었다. 어제 윤주를 붙잡고 한참을 울고나서는 이상하게 더이상
슬프지 않았다. 두려움도 없었다. 그냥 마음이 편안했다.
차가 20분쯤 달리고 나자 조금전부터 꾸벅꾸벅 졸고있던 윤주는 완전히
곯아 떨어져 버렸다. 밤새 잠든 유림의 얼굴을 쳐다보느라 거의 한숨도
못잔턱에 누가 업어가도 모를정도로 정말 푹 잠들어 버렸다.
유림은 피식 웃으며 그런 윤주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주고
가만히 창밖을 쳐다봤다. 까만 밤하늘. 그리고 몇개의 별.
더할나위 없이 멋진 겨울밤이었다.
"아이고, 정윤주는 아주 곤히 잠드셨네."
백밀러로 뒤를 쳐다본 현수는 나즈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많이 피곤한가봐요...어제 저 달래준다고 거의 못잤거든요. 형,
나 웃기죠? 내가 남자고 윤주는 여자고...그래서 내가 윤주를 달래주고
토닥여줘야 되는건데 우린 매일 반대에요. 내가 항상 위로받고....
보호받는것 같아요."
"뭐가 웃겨? 윤주가 원래 그런 녀석이잖아. 씩씩하고 강한애야.
정윤주 한테는 널 지켜주는게 행복일텐데 뭘...그게 정 마음에 걸리면
수술 끝내고 부터는 네가 정윤주를 지켜줘라."
"...윤주는요...강하지 않아요. 씩씩하지 않아요. 강한척 씩씩한척
하고 있는데 ... 사실은 많이 여려요. 눈물도 많고 정도 많고....
또 너무 여려요. 그걸 감추려고...괜히 씩씩하게 구는거에요.
그래서 가슴이 막 아파요...윤주를 보면...마음이 아파요."
항상 그랬다. 밝고 활달한 윤주를 보며 모든 사람들은 윤주는 참
씩씩하고 강한애라고 말했었다. 현수 자신 조차도 그리 생각했었다.
하지만 유림만은 다른것 같았다. 유림은 윤주의 씩씩함속에 감춰진
여린 마음까지도 꿰뚫어 본것 같았다.
"그래서...이제 내가 지켜줄 생각이에요. 윤주가 울지않게...힘들지
않게. 꼭 건강해져서..."
"그래...강유림. 꼭 그렇게 해라..."
잠시 멈칫하던 현수가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의지에 찬 유림의
목소리에서 확신을 느꼈다. 약하고 어린 녀석이지만...저녀석은 정말
윤주를 행복하게 해줄수 있는 녀석이구나 하고.
그리고 이제는 윤주를 마음속에서 정말 놔줘야겠구나 하고.
그런 쓸쓸한 현수의 마음이 느껴졌는지 유림은 가만히 현수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현수형..."
"왜?"
"형은...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녀석...싱겁기는. 내가 뭐가 좋은 녀석이냐."
"아뇨...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 말 하지말고 꼭 다시 건강해 지기나해라. 그래서 꼭 윤주
행복하게 해줘야지. 알지? 정윤주 행복하게 해줄 남자는 너뿐이다.
그래서 나도 양보한거니까...꼭 건강해져라."
그말에 유림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서울로 향하는 차안에서
유림은 몇번이고 다시 다짐했다. 꼭 다시 이길을 찾을거라고.
그때는 다시 건강해져서 건강한 모습으로 강릉을 다시 찾을거라고.
그때는 별장오르는 흙길을 꼭 윤주를 업고서 오르겠다고.
병원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을거라는 윤주와 유림의 예상과는 달리
병원은 조용했다. 두사람이 빠져나가고 난뒤 환자가 없어졌다고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었지만 두사람 몰래 현수가 병원에 연락을 해준덕에
병원은 조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텅빈 유림의 병실을 지키던 강대사는
윤주와 유림이 다시 병실로 들어서자 벌떡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는 많이 화가 난것 같았다.
"...대사님...죄송합니다...정말...죄송합니다."
윤주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했지만 강대사의 시선은 유림에게로
쏠려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유림을 바라보던 강대사의 충혈된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버렸다. 그 눈물과 함께 그는 그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긴장이 한순간에 풀려버리자 다리에 힘도 풀려버렸다. 유림이 갑자기
없어지자 거의 사색이되어 유림을 찾던 강대사였다. 몇시간 후 두사람을
강릉 별장에 잠시 데려다 줬으니 안심하라는 현수의 전화를 받고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 별장에서 유림이 혹여 잘못되지 않을까...병세가 악화되지 않을까.
다시 유림을 데리러도 가고 싶었지만 윤주와 둘이 병원을 빠져나간
유림의 마음도 이해를 했기에 그럴수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로 하루를 꼬박 지샌그는 무사하게
돌아온 유림의 모습을 보자 울어버린 것이다. 당황한 유림은 멍하게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신도...울줄 아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렇게나 냉철한 사람이면서...그렇게...매정한 사람이었으면서...
지금 나때문에...우는겁니까...?
윤주는 두사람의 모습을 살피다가 유림에게 몇마디 말을 소근거리고는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이건 자신이 끼어들 일이 아닌 이 두 부자의
일인것 같았다. 윤주가 병실을 나가고 나자 유림은 어색하게 강대사에게
다가갔다.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멀뚱히 그를 바라보던 유림이
어색하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불쑥 나타난 유림의 하얀손에 강대사는 놀라며 시선을 들었다.
"...일어...나세요..."
#. 실버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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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아..."
"얼른 일어나세요...얼른요..."
얼떨결에 유림의 손을 잡고 일어난 강대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자신에게는 찬바람이 쌩쌩불던 유림이
먼저 자신에게 손을 내민것이다.
두사람은 한참동안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강대사의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런 그의 눈물을 힐끔 바라본 유림은
고개를 살짝 내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말도없이...걱정시켜서..."
"......."
"답답했어요...병원이...싫었어요. 그래서 나가고 싶다고..제가 윤주
졸라서 나간거에요. 수술하기 전에...마지막으로...밖이 보고싶었어요."
".....걱정했다...혹시...네가 잘못되지는 않을까...걱정했다..."
유림에게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기는 처음이었다. 그동안 유림앞에서는
걱정되는 마음도 또 애달픈 마음도 숨겨만왔었다. 그런 모습을 아들에게
보이는것이 부끄러워 자신의 강한 모습만 유림에게 보여왔었던 그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처음으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유림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걱정했다는 그말에 유림은 적지않게 놀란듯 했다. 어렸을적부터 항상
차갑고 냉정했던 아버지였다.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도
또 안아주지도 않았다. 그저 한번 바라보는 눈길. 그것이 강대사가
유림에게 보인 관심의 전부였다. 그리고 새어머니가 죽고나자 더
냉정해졌던 그. 그래서 지난 외국발령에는 아예 자신을 한국에 떼어놓고
가버린 그. 유림은 아버지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죽던살던 신경쓰지 않을거라고...그는 냉정한 인간이라고 치부해왔다.
"...걱정...이요?"
"그래...그래, 이녀석아...애비가..얼마나 걱정했는지...아냐.."
강대사는 천천히 유림에게로 다가가 아들의 어깨를 감싸안아주었다.
그에게 안긴 유림의 눈이 커져있었다. 한번도 안아준적이 없던 그가...
한번도 다정히 바라봐준적이 없는 그가...지금 자신을 안아주고 또
걱정해 주고 있다니.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유림아..."
"...아...아버지..."
"사랑한다...내아들아.....유림아....사랑한다..."
아들을 더 힘주어 품에 안은 강대사가 목이 메어 오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유림에게 사랑한다 말해주었다. 생전처음 아들에게 해주는 말이었다.
항상 사랑했었다.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을것이다.
그 사랑의 방법이 다를 뿐. 안아주고 사랑한다 말해준 적은 없지만
아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항상 사랑이 담겨있었다.
그런 아들이 심장병에 걸렸다고 했을때. 모두의 앞에서 냉혈한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담담했던 그였지만 돌아서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던.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는 사랑을 말해주기로 했다. 유림의 새어머니는 그냥 보냈지만
사랑한단 말한마디 못해주고 그렇게 떠나보냈지만 유림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유림에게는 사랑한다 말해주고 더 많이 사랑해주고 싶었다.
그게 그의 마음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유림아, 좋은아침!"
윤주는 평소와 다름없는 환한 얼굴로 병실에 들어섰다. 온갖 의료
기계들에 얽매여 움직이기도 어려운 유림은 윤주가 나타나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억지로 몸을 약간 일으켰다.
"조심해야지! 누워있어, 괜찮으니까. 얼른..."
윤주는 얼른 달려와서는 유림을 편안히 눕혀주었다. 이제 겨우 수술을
열흘쯤 앞두고 있는 유림은 절대안정을 취해야 했고 그래서 이제는
마음대로 돌아다니는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유림아, 오늘이 무슨 날이게?"
"오늘? 무슨 특별한 날인데?"
하루종일 누워지내는 유림의 생활은 바깥과는 단절된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달력도 보지않고 텔레비젼도 라디오도 켜지 않는 유림이
날짜를 알리가 만무했다.
"오늘이 바로 크리스마스야. 메리크리스마스, 유림아."
오늘이 크리스마스? 윤주가 꺼낸말에 유림은 그제서야 달력으로 눈을
돌렸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깜빡하고 지낸탓에 크리스마스가
온것도 몰랐다니. 유림은 피식 웃고 윤주를 다시한번 쳐다보았다.
"..난 크리스마스도 몰랐네. 풋, 윤주도 메리크리스마스."
"내가 너 이럴줄 알았다니까. 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까먹을 수 있냐? 내가 이런 너를 위해 뭔가를 준비했지."
"뭘...준비해?"
놀란 유림을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준 윤주는 병실 문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있었는지 몇사람이 병실 문을
빼꼼히 열고 병실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윤주가 그들에게 눈을
찡긋해보이자 문밖에 있던 사람들은 기다렸다는듯 병실문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메리크리스마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들어온 세사람. 바로 현수와 경미, 그리고
한림이었다. 갑작스러운 그들의 등장에 놀란 유림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있다가 곧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의 손에는 크리스마스 케익이며 과자같은것들이 잔뜩 들려져 있었다.
"어때? 멋지지?"
"쿡, 뭐야? 나몰래 준비한거야? 이거 감동받았는데..."
"이 형님이 너를 위해 특별히 케익까지 사오셨다!"
"유림아, 이 옆집누나는 이 과자 다 사왔다~"
"유림형아, 한림이도 용돈 보탰어!"
저마다 자신이 사온걸 자랑하던 세사람은 크게 웃으면서 유림의
침대위에 음식들을 올려놓았다.
모두가 즐거운 크리스마스. 병실에서 다섯사람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파티가 시작되고 있었다.
#. 실버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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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에서 보내는 유림의 크리스마스는 윤주와 현수. 경미. 그리고
한림 덕택에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종일 떠들썩 하고 즐거운
분위기였다. 벌써 시계바늘은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열시부터는 보호자 이외에는 유림을 면회하는게 금지된다.
회진나온 간호사가 그걸 알리고 나가자 그들은 급하게 준비해온
선물을 유림과 윤주앞으로 내밀었다. 뭐냐는 멀뚱한 두사람의
시선에 현수는 얼른 뜻어나 보라는 듯 고갯짓을 해댔다.
윤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었다. 조그마한
보석케이스였다. 설마하고 연 케이스 안에는 커플링이 들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심플한 디자인인 반지 가운데에 한줄의 라인이 들어간
커플링. 윤주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반지와 눈앞에 세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정윤주, 촌스럽게 너 커플링 첨보냐? 놀라기는."
"경미말이 맞다. 커플링 첨보는애 같아. 그거 ... 그렇게 비싼건 아냐.
경미랑 내가 돈모아서 샀는데...고르기는 경미가 골랐다. 괜찮냐?"
"나도 돈 보탰어! 내 용돈도 보탰어!"
자신도 보탰다고 우기는 한림때문에 병실에서는 또 한바탕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윤주는 떨리는 눈으로 반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런걸 가지게 되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 윤주에게는 정말
커다란 선물이었다.
"예뻐...진짜 예쁘다. 세사람 다..고마워...난 세사람 크리스마스
선물도 못챙겼는데..."
"에이~ 정윤주! 괜찮아. 그대신 너희둘이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우리한테 거하게 한턱내라. 알았냐?"
윤주의 어깨를 토닥이며 경미가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윤주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지를 유림의 눈앞에 들이댔다. 눈만
멀뚱대며 반지를 바라보던 유림의 입가에도 서서히 웃음이 번져나갔다.
"유림아, 예쁘지? 반지 진짜 예쁘지?"
"응...예쁘다..."
"이거 우리꺼래. 한번 껴볼까?"
유림이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윤주는 남자반지를 꺼내서
유림의 왼쪽손 넷째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반지를 끼워주다 문득
유림의 가느다란 손가락과 링겔주사 바늘로 멍든 손을 보자 다시
마음이 욱씬거리며 아파오는것만 같았다.
남자손이 왜 이렇게 가늘고 하얀걸까...
왜 이렇게....가는거야...강유림....
유림의 손에 반지를 끼워준 윤주는 자신도 반지를 끼고 반지낀 손을
유림의 왼손옆에 바짝 가져다 댔다. 손만 본다면 어느손이 여자손일지
분간이 가지 않을것 같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반지는 단순한 장신구일 뿐일지도 모른다.
단지 멋을 위해 끼는 악세사리. 하지만 두사람의 사랑이 담겨있을때
조그마한 물건일 뿐인 반지는 어마어마한 의미를 지닌 물건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이 그런것 같다. 그냥 단순한 반지가
유림의 손에 끼워지고 윤주의 손에 끼워지는 순간. 그 반지는 둘의
커다란 사랑을 담은 상징이 되버리는 것이다.
"우와, 내가 골랐지만 기막히게 잘어울린다. 그치, 현수선배?
둘이 끼니까 반지가 더 사는것 같다."
"응, 그런것 같다. 너희둘이 너무 잘어울린다. 반지도 잘어울리고."
이제는 진심으로 이런말을 해줄수도 있었다. 아직 윤주를 완전히
단념하지는 못한 현수이지만 이제 그렇다고 해서 윤주에게 특별한
집착을 가지는것도 아니었다. 지금 그는 어떻게 해서든 유림과 윤주.
두사람이 오래오래 예쁘게 사랑하며 살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유림아...꼭 나아라. 그래서...윤주랑 예쁘게 예쁘게 사귀는 모습...
우리한테 보여줘야되. 알았지?"
"네..경미옆집누나.."
"형아...형아 수술 끝나고 한림이랑 축구도 하고 놀러도 많이가자.
한림이는 유림형아 많이 좋아해. 그때 놀러가면 윤주옆집누나도 끼워줄께.
형아 다낫고 우리 놀러많이가."
"그래...한림아...그러자...놀러...많이...가줄께..."
꼬마 한림의 말에 제일 가슴아픈 유림이었다. 지금껏 한번도 동생에게
따스하게 대해준 기억이 없었다. 한림은 잘못한게 없는데...괜한
피해의식으로 한림에게 아버지를 뺏겼다는 느낌을 가졌었던 시간이
후회스러웠다. 유림은 떨리는 팔을 뻗어 한림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아주 따뜻하게 한림을 향해 웃어주었다.
"난..뭐..특별히 할말은 없다. 우리 강릉별장에서 돌아오는 날
차안에서 했던 약속 꼭 지켜라. 알지, 강유림?"
현수의 의미모를 말에 유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윤주가 잠든 동안 했던 둘만의 약속이었다.
윤주를 지켜주라고...행복하게 해주라고 했던 현수의 부탁.
잊을리가 없었다. 지켜주고 싶었다. 꼭 지키고 싶은 약속이었다.
9시 30분. 간호사가 면회시간이 끝났음을 알리자 네사람은 아쉬운
표정으로 병실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병실을 나가던 윤주는 병실문앞에서
잠시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침대에 누운 유림이 뒤돌아서 가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유림에게 살짝 미소짓은
윤주는 간호사에게 들리지 않게 소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림아...사랑해!"
그말을 남긴 윤주는 손을 흔들어주고 병실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그들이 빠져나가고 정적이 깃든 병실에서. 유림은 기분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반지에 살짝 입맞추며 나즈막히 속삭였다.
"나도..나도 많이 사랑해..윤주야...사랑해..."
#. 실버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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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문이 달그락 열리는 소리가 유림의 귓가에 들려왔다. 분명 유모인
은숙일거란 생각에 유림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가만히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병실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바로 옆까지 바짝
다가왔을때. 유림은 은숙이 아니다 싶은 생각에 힐끔 옆에 선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강대사였다. 그가 좀처럼 보기힘든 은은한 미소를
지은채로 유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일이세요?"
"오늘은...여기서 자려고 왔는데...괜찮겠니...?"
조심스러운 그의 물음에 유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한번도 유림의 옆에서 자준적이 없는 그였다. 며칠전 그에게서
사랑한단 말을 듣긴 했지만 유림은 아직까지도 아버지가 어색하고
대하기 힘들긴 했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가 밉지는 않았다. 왜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아버지란 존재가 참 따뜻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고있었다.
유림의 승락에 어린애마냥 좋아하며 강대사는 의자를 끌어다가 침대옆에
바짝 갖다대고 유림의 옆에 앉았다. 잠시 할이야기를 찾아 머리를 굴리던
그는 뭔가 떠오른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림아...네 새엄마 얘기 해줄까?"
한번도 죽은 새엄마에 관한 이야기는 꺼낸적이 없던 강대사였다.
억지로 자신의 기억속에 억지로 묻어두려는듯. 그랬었던 그가 오늘은
꽤 오랫동안 유림에게 유림의 새엄마인 은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때 이야기. 그녀가 어떤 여자였는지...얼마나 사랑
스러웠었는지...또 얼마나 유림을 사랑했었는지.
유림의 손을 꼭 붙잡고 그는 그렇게 한참동안을 기억에 한자락에 숨겨
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내었다.
"참 고운 여자였다. 내 인생에...그리 고운 사람은...네 새엄마밖에는
없었다. 곱고...착한 사람이었어. 나한테는 과분할 정도로...."
"...새엄마를...사랑...했어요...?"
아버지는 새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 여겨왔었다. 항상 냉정했던 그의
표정은 새엄마를 못마땅해 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던 유림이었다. 그런
유림의 질문에 강대사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냐. 보기만해도 사랑스러운 사람
이었는데...사랑했다...영혼까지...사랑했다..."
"그럼...왜 그러셨어요. 새엄마한테..왜 그렇게...차가우셨어요..."
"그때는 몰랐다. 사랑하는게 어떤건지. 사랑한다는 내맘을 들키는게
자존심이 상한다고 여겨서 꼭꼭 숨겼었다. 생각해보면 내가...그때까지도
철이 없었던것 같더구나. 그래서 네 새엄마에겐 정말 몹쓸짓을 많이했다.
한번도 따뜻하게 사랑한다 말해주지 못했었던게...정말 가슴에 한이
된다 싶을 정도로 사무치더구나."
"그럼...지금 새어머니는요?"
"선옥? 그래...착한 사람이지. 유림아, 네가 새새엄마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건 잘 안다. 하지만 유림아, 이건 알아야해. 솔직히 말해서
내 친새엄마를 사랑했던 마음만큼 새새엄마를 사랑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런게 생겼어. 정이랄까...같이 살면서...정이란게 쌓이더구나.
보면 선옥도 참 좋은 여자야...넌 모르겠지만...네 새새엄마가 널 참
좋아한단다."
모를리 없었다. 선옥이 자신을 좋아한다는건 유림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애써 모른척 했었다. 자신을 향한 선옥의 관심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척하고 싶었다. 선옥을 좋아하게 되면 죽은
새엄마를 배신하는거라고 어린 유림은 항상 그렇게 여겼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바보같은 마음이었다.
"네 새엄마가 죽던날...내가 혼자 결심한게 뭔지 아니? 너는...유림이 너는
잘 키우겠다고 죽은 내새엄마한테 마음속으로 수백번을 약속했다. 당신한테
못준사랑 유림이한테 주고 키우겠다고 그렇게 약속했다. 그런데 ...
내가 그동안 그 약속을 못지키고 살았다. 널 두고 훌쩍 외국으로 파견
나갔었던 일은 정말이지 왜 그랬었는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유림아...
아빠는 그 약속을 꼭 지켜야 될 의무가 있단다. 네 새엄마에게 다 못준
사랑을 너에게 줄..의무가 있는 사람이란다."
"의무요?"
"그래, 의무. 앞으로 너한테 줄게 너무 많단다. 이제 앞으로 더 많이.
그러니까 유림아, 애비한테 기회를 줄꺼지? 아빠가 너한테 많이많이
줄수있게 시간을 다오. 용서를 빌...시간을 다오. 알았지? 유림아..."
가슴이 따뜻해져왔다. 아버지의 따뜻한 온기 그리고 사랑.
그런것들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세상은 정말 살만한 곳인지도 모른다.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고 사랑해야할 사람이 있는 세상은...
아름다운 곳인지도 모른다.
꼭 살아야 겠다는 의지가 가슴을 꽉 채우는것만 같았다.
"네...꼭...다시...건강해질께요...꼭..."
벌써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새해를 맞이할 기쁨으로 거리는 온통
술렁이고 있었지만 윤주의 마음은 점점더 무거워져 왔다. 이제 유림의
수술날짜가 겨우 사흘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집을 나서 유림의 병원으로
가던 윤주는 뭔가 생각난듯 동네 어귀에 있는 조그마한 성당앞에
멈춰섰다. 특별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윤주였다. 세상에 신은 없고
종교란건 참 웃긴거라고 평소에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신이 있다고
믿고싶었다. 그래서 기도하면 꼭 들어줄거라고 믿고싶었다.
그런 간절한 마음에 윤주는 느릿느릿 성당안으로 들어섰다. 원래
사람이 없는 성당이기도 한 이곳에는 오늘은 단 한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던 윤주는 용기를 내어 예배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한 실내의 중앙 단상에 성모상과
십자가가 보였다. 단상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윤주는
어색한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숨을 가다듬고 두손을 꼭 모아쥐었다.
"주님...전 사실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당신을
믿을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제발...제발 제 기도 좀 들어주세요.
기도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엉터리라도...이해하고
들어줴요. 유림이...우리 유림이 데려가지 마세요...
우리 유림이가 너무 맑고...너무 예쁜 애라서 주님도 탐내시는거죠?
그래서...자꾸 주님이 데려가시려고 그러시는거죠? 저 다 알아요...
주님도 탐낼만큼 우리 유림이 예쁘고 맑아요. 너무..사랑스럽죠..
그런데요...제가 못줘요. 누가와서 달래도..유림이는 못줘요.
주님이 달래도 못줘요...저 지금요...지금 저 말이죠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서 죽을거 같아요. 유림이 걱정되서 미쳐버릴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발...유림이 데려가지 마세요. 주님, 그애가 없으면 저는
죽어요. 당신은 우리 유림이 없어도 되지만 전 안되요. 전 죽어요.
저 좀 살려주세요...유림이...제곁에 머물게...해주세요....제발..."
기도를 끝마치는 윤주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서 십자가를 쳐다보며 그렇게 한참을 울어댔다.
애써 태연하려 하고 있지만 불안함을 어떻게 감출 수 있겠는가.
사흘뒤. 불과 사흘뒤에 유림의 생사가 결정되는 건데.
그렇게 삼십분쯤이 흐른뒤 윤주는 의자에서 일어나 잠시 주춤했다.
성호를 그어야 한다는건 알겠는데 성호를 어떻게 긋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그러자 윤주는 그냥 마리아상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예배당을 빠져나왔다.
순서도 인사도 엉망인 기도였다. 하지만 그 간절함만큼은 진실한
기도였다. 만일 신이 정말 있는것이라면 그래서 윤주의 기도를
들었다면 그는 꼭 유림을 살려줘야만 할것이다.
신이 꼭 존재하기를. 그래서 꼭 자신의 기도를 들었기를...
그래서 유림을 살게해주기를 바라며 윤주는 병원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실버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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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4일의 아침. 모두가 긴장한 순간이었다. 수술준비를 끝마친
의료진들은 마지막으로 오늘 수술에 대한 회의를 마치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수술을 앞두고 마지막 검사까지 마친 유림은 병실 침대에
덩그라니 앉아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긴장이나 초조함도 보이질 않았다. 그저 담담해 보일 뿐이었다.
병실문을 조금 열고 그런 유림의 모습을 바라보던 윤주가 용기를 내서
병실안으로 들어섰다.
"좋은아침, 유림아."
익숙한 목소리에 유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환하게 웃고있는
윤주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자 유림도 덩달아 씨익 웃어주었다.
긴장되는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본 윤주는 초조함을 감추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있었다.
"컨디션은 어때?"
"좋아. 오늘 날씨도 되게 좋다...기분도 좋아."
"그래? 잘됐다, 꼭 잘될꺼야. 그치?"
"....응...잘될꺼야..."
잠시 망설이던 유림도 결국에는 잘될거라 말해버렸다. 너무 애타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윤주의 눈빛앞에서 도저히 약한 모습을 보일수가
없었다.
"우리 별장에서 한 약속 알지? 그거 꼭 지켜라, 강유림. 응?"
"...꼭 지킬께..꼭..."
"그래, 너 착한애니까 꼭 지킬거야."
한시간쯤 뒤. 수술준비를 마친 의사들이 유림의 병실로 들어왔다.
유림의 병실에 모여있던 모두의 표정이 긴장되어버렸다. 이제 시작인
것이다. 반반의 확률을 가진...도전이.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조금전까지 환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윤주조차 입을 다물어버렸다.
수술준비실에 도착하고 나서도 유림을 둘러싼 사람들은 말없이
유림을 바라만 보았다. 강대사..선옥. 한림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유림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사이로 윤주의 모습도 보였다.
유림은 그들을 향해 웃어주었다. 희미한 미소였지만 그 미소가 말하고
있는듯 했다. '꼭 다시 돌아올께요...'라고.
유림의 시선이 가장먼저 강대사에게로 향했다.
아버지...세상에서 가장 밉기도 했지만 많이 원망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계속 그립고...사랑했던 사람. 강해보이지만
사실은 많이 약한사람.
잠시 강대사와 눈을 맞추던 유림은 시선을 강대사 옆에서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며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는 선옥을 쳐다봤다.
아버지말대로 착한 사람이었다. 새엄마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해서
괜스레 미워했었지만...생각해보면 자신에게 무던히도 잘해주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동생 한림도.
너무 예쁜 자신의 동생이었다.
아버지...새어머니...그리고 한림. 세사람 모두다 너무 소중한 가족이었다.
왜 이제서야 안걸까. 소중한 사람들을 왜 이제서야 알아본걸까.
진작에 소중한줄 알았더라면 ... 더 잘해줬을텐데... 맘아프게
하지 않았을텐데.
유림의 까만 눈동자가 세사람을 지나 이제는 윤주에게로 향했다.
아무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지만 윤주의 마음을 다 알수 있을것만 같았다.
유림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을 달싹여 보았지만 아무말도 꺼낼수가
없었다. 목까지 꽉 차올라온 울음때문에 목이 메여 말할수가 없었다.
그때 뚜벅뚜벅 다가온 간호사가 유림에게 호흡기를 씌웠다.
마취성분이 들어있는 공기를 들이마셔 서서히 전신이 마취되어가는
것이다.
정윤주....웃고있지만 항상 밝지만...그래도 많이 여린 사람.
지금도 웃어주고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한없이...울고 있을 사람.
할말이 너무 많은데...윤주야, 너한테 할말이 너무 많은데 ...
한마디도 못하겠다. 너무 하고싶은 말이 많아서...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한마디도 못하겠다.
널 두고는...떠날수도 없을것 같다. 울보 정윤주를 남겨두고는
떠날수가 없을것 같아...윤주야....윤주야................
점점 머릿속이 희미해져왔다. 마취약의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는지
아무리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애써보아도 약기운을 이겨낼수가 없었다.
점점더 감겨오는 유림의 눈동자는 완전히 마취상태에 빠져 의식을
잃어가는 내내 윤주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유림의 눈이 완전히 감겼을때. 감긴 유림의 눈가로 눈물
한방울이 흘러내렸다. 고여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버렸다.
꺼낼수 없던말. 차마 할 수 없었던말. 그래서 마음속으로만 집어
삼켜야했던 그말은 자신의 가슴속에 고스란히 담아둔채로.
수술이 끝나고 나면 꼭 윤주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
'사랑해...윤주야...세상에서 제일...나자신보다도 더사랑해...'
#. 실버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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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취에 빠진 유림이 수술실로 들어가고 나자 수술실 문은 굳게
닫기고 '수술중' 이라는 전광판에 푸른 불빛이 들어왔다. 굳건하게
서있던 윤주는 수술실 문이 닫기자 마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유림앞에서는 어떻게든 태연해지려고 강해지려고 악으로 버텨봤지만
이제 더이상 버틸힘이 없었다. 바닥에 무너져내린 윤주는 그저 멍한
눈빛으로 수술실 문만을 응시했다.
가슴속에 담은 사랑은 쉽게 사라져버린다. 세월이 가면 가슴속에
담겨있던 사랑했던 이름도...추억도 희미해져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슴속에 새긴 사랑은 잊혀지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사람을 가슴속 깊이에 새겨버린 사랑은 잊을래야 잊을수가 없는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그 사람 이름 새겨진 자욱이 가슴속에 간직되기 때문이다.
아련한 추억...아름다운 기억으로 평생을 가슴속에 그 사람을 담고서
살아가는 것이다.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윤주의 사랑이 그러했다. '강유림'이란 이름 석자를 가슴속 깊숙히에
새겨버려서...아무리 오랜시간이 흘러도..결코 잊을 수 없을것이다.
그사람 이름 새겨진 가슴속에 그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은 담을수
조차 없을것이다.
"....유림아....유림아......강유림..."
유림의 이름만 불러대며 윤주는 그렇게 바닥에 무릎을 꿇은채
눈물만 떨구었다. 그런 윤주의 모습에 강대사도 꾹 감추어왔던 슬픔이
터져나오는지 고개를 돌리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윤주옆집누나...울지마요....옆집누나..울지마요."
윤주의 옆에 다가온 한림이 불쑥 윤주에게 곱게 접힌 편지 한통을
내밀었다. 눈물로 범벅이된 얼굴을 든 윤주는 왠 편지냐는듯한 눈빛으로
한림을 바라보았다.
"유림형아가..수술하러 들어가면 옆집누나 주라그랬어요."
유림이 준 편지라는 말에 윤주는 얼른 편지를 펴 들었다. 새하얀
종이위에 정성껏 또박또박 눌러쓴 유림의 편지였다. 더 북받쳐 오르는
설움에 눈에 가득 고여버린 눈물로 앞이 희뿌옇게만 보였다.
소매끝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편지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니가 이걸 읽을때 쯤이면 윤주야...난 수술실에 들어가 있을것 같아.
내손으로 직접 주고 싶었는데...직접 주면 나도 눈물날것 같아서
한림이를 통해서 전해주네. 솔직히 윤주야...나도 무섭고 많이 불안해.
정말 내가 살수있을지...다시 니 얼굴을 볼 수 있을지 불안하고
혹시라도 널 다시 못볼까 하는 생각이 들때마다....숨이 막힐것같아.
그래도 난 우리 윤주 울리기 싫은데...꼭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데...
윤주야..오늘은 하루종일 병실에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봤어.
윤주 니가 세상에 살아줘서 참 고마웠어. 우리 어쩌면 평생 스치지도
못할 인연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먼저 나에게 다가와준 니가 고맙고...
사랑해준 니가 고맙고...날위해서 눈물 흘려준 니가 고맙고....
살고싶다는 생각을 하게해준 니가 고맙고...
너한테는 정말 고마운것 투성이더라. 난 해준게 없는데...넌 너무
많은걸 줬더라.
윤주야..이건 아주 만약에...아주 만약에 이야기야.
내가 만약....세상을 떠나더라도 말이지 난 슬프지만은 않을것 같아.
니가 준것들이 참 많잖아. 정윤주라는 참 고운 사람...내가슴속에
담을 수 있었고 니가 준 사랑 다 예쁜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고...
그런 사랑..그런 추억...다 가져갈수 있는것들이잖아.
그래서 난 슬퍼도 견딜것 같은데 윤주 너는...못견디게 슬프겠지?
우리 착한 윤주...분명히 많이 울고 아파하겠지?
만약 내가 다시 못가도 많이 울지말고...많이 슬퍼하지말고.
예쁘게 웃으면서...환하게 웃으면서...살았으면 좋겠어.
그렇다고 날 완전히 다 잊지는 말고...가끔씩 기억해주면서.
그럴때마다 난 윤주 니 마음속에 살아있는게 되잖아. 그치?
하지만 이건 아주 만약에 얘기니까. 아주 만약에...
나 꼭 살도록 노력할께. 누가 와서 하늘로 가자고 해도 안가고
윤주너랑 살거라고 말할래. 그래서 다시 돌아오도록 많이 노력할께.
결과가 어떻게 되든...윤주 니가 아파하지 않길 바래.
난 사랑이 어떤건지 몰라.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게 어떤건지...
해본적이 없었으니까. 이번이 처음이니까...니가..처음이니까.
그런데 해보니까 윤주야 ... 사랑이 참 힘들더라. 참 ... 아프더라.
그런데....또 참 아름답더라.
사랑 그거...내안에 나보다 더 소중한 한사람을 품게 되는게
사랑인거 같애. 나한테 너는 그래 윤주야. 나한테 정윤주는...
나 자신만큼 소중한 사람이야. 이말을 직접 해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편지로 쓰네. 그래도 용서해 줄꺼지? 나 수술해서 다시 널
볼수 있으면 그때는 직접 말할께.
사랑해 윤주야...숨쉬는 동안...아니...숨을 멈춰도...
사랑해.........사랑해.....................사랑한다....윤주야....'
사랑한다는 말이 씌여있는 부분에 잉크가 번진 자국이 남아있었다.
이 말을 쓰면서 유림도 울었다는 것이다. 유림이...울었다는 말이다.
편지의 마지막을 다 읽은 윤주는 편지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더큰
울음을 터트렸다. 아픈 울음이었다. 가슴속에서부터 차오르는 슬픔이
미칠것같은 슬픔이 눈물이 되어 뿜어져 나오는 서러운 눈물이었다.
"...나도...나도 사랑해...유림아....내 천사...유림아...사랑해..."
수술중이란 전광판에 불이 들어온지도 열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거의 탈진 상태에 빠진 윤주는 초점없는 눈으로 병원 벽만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 강대사와 선옥은 서로 손을 꼭 잡고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굳게 닫혀있던 수술실 문이
급하게 열리고 간호사 한사람이 다급하게 달려나왔다.
"보호자분들 중에 A형인 분 계시나요? 급히 수혈이 필요합니다!"
수술중 출혈이 너무 심해 급한 수혈이 필요하다는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에 윤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 AB형인데...여보, 당신은"
"저도...저도 B형인데..어떡해요..어떡해요, 여보."
선옥과 강대사는 어쩔줄을 몰라하며 발만 동동 굴러댔다. 그때 윤주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O형의 피는 모든 혈액형에게
수혈이 가능하다고 했던. 대학학교 시절 생물시간에 배웠었던것 같은
기억이 스쳤다.
"제가! 제가 O형이에요. 제 피가 수혈가능하지 않나요?"
잠시 윤주를 쳐다본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윤주의
작은 체구가 영 마음에 걸리는 표정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꽤 많은 양을 수혈해야 하는데 아가씨는 너무 약해
보이네요.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요. 유림이만 살릴수 있으면 괜찮아요! 제가 할께요. 얼른요."
윤주의 억지에 간호사는 윤주를 수술실 문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유림의 심장수술이 이루어지고 있는 수술실은 수술실 안에서도
또 하나의 문으로 가려진 곳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윤주는 유림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가까워진것같은 마음이 들어
조금은 안심이 됐다.
주사바늘이 혈관에 꽂히는대도 조금의 아픔도 느낄수가 없었다.
그냥 얼른 수혈을 해서 유림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외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 실버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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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한 남자도 힘든 1000cc의 혈액을 수혈하고도 윤주는 끄떡없어
보였다. 지금 자신의 몸상태가 좋지않다고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그냥 유림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 그 생각하나만이 윤주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급한 수혈을 마친지도 어느덧 네시간 가량이 흘렀다.
총 열네시간의 수술. 그야말로 대수술이었다. 수술실안의 시간은
일초일초가 극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유림을 둘러쌓고 메스를 든
여섯명의 심장병 전문의들은 곤욕스러운 표정들이었다.
여러 대수술들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그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확신이 없었다. 삼차수술이라는 어려운 상황. 게다가 환자의 몸상태가
극도로 나빠져있는 지금 수술이 성공하리라는 장담은 누구도 할수없었다.
흘러내린 피들로 하얀 시트는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고 장갑을 낀
의사들의 손도 온통 피로 흥건했다. 여섯명의 의사들 중에 가장 나이들어
보이는 의사가 긴장된 표정으로 수술을 진행하고 있었다.
가장 정밀하고 정확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심장수술인만큼 그의 손은
민첩하고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시간 가량이 더 흘렀다. 총 열다섯시간의 수술이 끝나고
의사들은 서로 마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수술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아직 수술이 완전한 성공을 이룬것은 아니다. 환자가 깨어나느냐
깨어나지 못하느냐. 그것에 수술의 성공여부가 달린것이다.
그들이 유림을 눕힌 침대를 끌고 수술실을 빠져나오자 강대사와 선옥.
그리고 윤주 세사람이 동시에 자리에 일어서서 그쪽으로 달려왔다.
"일단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냈습니다. 이제 남은건 환자의 회복여부
입니다. 열두시간입니다. 환자가 열두시간안에 마취에서 깨어나 의식을
차려야 수술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만약 깨어나지 못했을 시에는....
사망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꿈을 꾸었다. 온통 새하얀색으로 칠해진 예쁜 집. 유림은 뭔가에
끌린듯 그 집안으로 들어섰다. 온통 새하얀 색의 벽지들.
하얀 그 공간에 흔들의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흔들의자에
너무나 그립던 얼굴이 자신을 향해 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어..새엄마!!!"
유림의 부름에 그 여자는 다정하고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너무나 그립던
한사람. 새엄마였다. 죽었던 새엄마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유림이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기자 그녀는 아들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유림아...내아들아...니가 벌써 여기에는 왠일이니?"
"새엄마 보고싶었어...새엄마 너무 보고싶었어..."
"그래...새엄마도 우리 아들이 너무 보고싶었단다. 새엄마 없이도 잘컸네.
우리 유림이...그런데 왜 벌써 이런델 왔니? 얼른 돌아가..유림아..."
"벌써 가라구? 조금만 더 있다가...새엄마, 조금만 더있다가...아니,
새엄마랑 여기서 살면 안될까?"
"나중에 다시 만나자. 우리 유림이 오래오래 살고...행복하게 세상에서
살고 난뒤에 우리 다시 만나자. 돌아가야지 유림아...우리 유림이
기다리는 사람들이...있잖아..저기서 널 기다리고 있구나."
그녀의 손가락 끝이 문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새엄마의 손끝이 향한곳을 바라보았다. 환하게 미소짓는 윤주가
팔을 벌리고 유림에게 어서 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래, 윤주.... 날 기다리고 있을...윤주...
"새엄마..."
"새엄마는 걱정말아. 잘 지내고 있단다. 어서 가야지. 저 아가씨가
널 참 애타게 부르는것 같은데. 예쁜 아가씨를 슬프게 하면 안되지.
우리 아들...얼른 가거라. 가서..행복하게 살아야지..응?"
아쉽게 새엄마에게서 떨어진 유림은 윤주와 새엄마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새엄마는 그런 아들에게 얼른 가라며 환하게 웃어주고 있었다.
그런 새엄마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유림은 윤주가 기다리고 있는
입구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기다려 주고 있는 사람...애타게 이름을 부르고 있는 사람...
윤주에게 ... 가기위해.
11시간 째였다. 열두시간안에 깨어나지 못하면 사망이라던 의사의
잔인한 말이 윤주의 귓가에 자꾸만 맴돌았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유림의 손을 꼭 잡은 윤주는 간절했다. 벌써 꼬박 하룻밤을 새고
또 무리한 수혈로 몸은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견디고 있었다.
유림아...강유림...약속...지킬꺼지..?
지키기로 했잖아...꼭 지켜야되...꼭....지켜...
제발...다시 눈뜨고 날 좀 쳐다봐주라..유림아..한번만 더
니 목소리로...내이름...불러줘...제발...
윤주의 눈에서 또르르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유림의 하얀 손위로
떨어져내렸다. 한방울 두방울 흘러내리는 눈물만큼 윤주의 간절함도
더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그때 유림의 손이 움찔하고 움직인것만
같은 느낌이 윤주의 손끝에 느껴졌다. 혼자 느끼는 착각일까?
윤주는 두눈을 크게 뜨고 유림을 쳐다보았다.
잠시 파르르 떨리는듯 하던 유림의 눈꺼풀이...서서히...떠지고 있었다.
조금씩 그의 까만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림이...살아났다. 눈을 떴다. 그가....눈을 떴다.
잠시 허공을 살피던 유림의 눈이 윤주를 향했다. 아직은 눈앞이
희미해서 확실히 보이지 않았지만 눈앞에 보이는 희뿌연 사람의
형상은 분명 윤주였다.
다시...살았구나...윤주 널...다시...보게됬구나...
"유림아....유림아!!! 강유림! 나 보이니? 나 누군지..누군지 알겠어?
내가..보이니?"
다급한 윤주의 물음에 유림은 힘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여 주었다.
잊을리 없었다. 죽어도 잊지 못할 사람의 얼굴이었다.
죽도록 사랑하는 얼굴...윤주의 얼굴.
윤주는 떨리는 손으로 유림의 얼굴을 감싸쥐고 한참을 유림을
바라보았다. 신이 기도를 들어준것일까...이런걸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유림아...고마워...약속..지켜줘서...고마워...우리 유림이...
유림아...살아줘서...고마워....사랑해.........유림아........
내 천사...유림아.......사랑해.........강유림.....고마워....."
#. 에필로그 - forever with you (영원히 당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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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주, 너 지금 떨고있냐?"
"떨긴...누가 떨어. 안떨려..안떨려.."
안떨린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윤주의 손은 사시나무 떨듯이 덜덜
떨려오고 있었다. '신부대기실' 이라는 팻말이 붙은 공간.
유월의 신부가 된 윤주의 모습은 평소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새하얀 웨딩드레스와 하얀 베일. 누구보다 아름다운 신부였다.
오늘 신부의 들러리를 해주기로 한 경미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누구보다 유림과 윤주, 두사람의 사랑을 잘 알기에
이렇게 맺어지는 두사람의 모습이 너무나 보기좋은 경미였다.
수술이 대성공으로 끝난뒤. 일년정도의 회복기간을 두고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유림은 대학에 입학했다.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며
건축공학과에 입학한 유림은 거의 천재적이다 싶은 정도의 능력으로
4년 걸려도 딸까 말까한 석사학위를 2년만에 따버리고 졸업도
남들보다 일년 앞선 3학년에 해버렸다. 그야말로 초스피드 졸업이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열기위해 영국으로 떠날것을
결심한 유림이 윤주와 결혼을 하는것이다.
유림은 그곳에서 건축가로 일하고 윤주는 전공을 살려 번역일을
하기로 했다. 스물세살의 신랑. 그리고 스물다섯의 신부.
어리다면 아직 어린 그들이지만 아무도 그들의 결혼을 말리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은 결코 어리지 않다는걸 아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아는
사람이면 다들 입을 모아 이 결혼을 축복해 주었다.
"자, 10분후에 식 시작됩니다. 신부 준비해주세요."
호텔로비에 선 유림은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했다.
5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유림은 꽤 많이 변해있었다. 열여덟의
하얗고 창백했던 그야말로 소년의 티를 벗지 못했었던 유림은
어느덧 스물셋의 남자가 되 있었다. 예전보다 더 환해진 그의 표정.
그리고 혈색이 도는 얼굴이 이제는 누가봐도 '예쁜소년'이 아닌
'멋진남자'라 할만한 유림이었다. 유림의 시선이 호텔로비를 들어서는
한 남자에게 못박힌듯 고정되었다.
"현수형!"
"어, 그래. 축하한다. 둘이 결혼한다니. 이렇게 될줄 알았다니까."
두손을 마주잡은 두남자는 서로를 쳐다보며 그저 피식 웃어버렸다.
열여덟의 강유림이 현수에게 했었던 약속. 윤주는 내사람이니 내가
꼭 행복하게 해주겠다던 그 약속을 유림은 지키게 된 것이다.
현수도 이제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어느덧 20대 후반에 접어들어 있었고 그동안 윤주를 깨끗히
단념할 수 있었다. 이제 정말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두사람을
축복해줄수 있는것이다.
"행복하게 잘 살아라. 너희 둘다. 내가 부러워 미칠만큼 잘살아!"
"신랑입장!"
사회를 보는 현수의 목소리가 식장을 울리고 감미로운 음악소리에
맞춰 까만 턱시도를 차려입은 유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객들의 큰 박수소리가 울려퍼지고 유림이 단상으로 향했다.
그런 유림을 바라보는 강대사와 선옥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어리기만 했던 아들. 약하기만 했던 자신들의 아들이 이제는 한 남자가
되어서 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정을 꾸릴만한
건강한 사람이 되어준 것이다. 신랑이 들어서고 잠시 뒤.
'신부입장' 이란 말이 들렸다. 잠시 뒤 아버지의 손을 꼭 잡은
신부 윤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결혼행진곡에 맞춰 윤주는 떨리는
발걸음을 조심조심 옮겨 유림에게로 다가왔다. 단상 앞에서 윤주
아버지는 유림에게 윤주의 손을 넘겨주고 이제 단상앞에 유림과 윤주.
두사람만이 남게되었다.
긴 주례사가 이어지는 동안 두사람은 숙연한 표정으로 주례사를
경청하고 있었다. 조금씩 떨고있는 윤주의 손이 느껴지자 유림은
잡은 손에 더 힘을 꼭 줘서 윤주의 손을 감싸쥐어 주었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자 윤주는 조금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스무살 유월달에 만난 은빛천사 유림. 많이 슬프고 아픈 사랑이었지만
이제 그런것들 다 헤쳐나가고 유림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5년전 유림을 처음 만난 6월. 그리고 그와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올해의 6월. 두사람에게 6월은 특별한 달인것 같다.
결혼식은 내내 행복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윤주가 던진 부케를
경미가 받고 피로연까지 모두가 행복한 가운데 잘 진행되었다.
그렇게 식을 모두 마치고난 두사람은 급하게 공항으로 향했다.
신혼여행이 아닌 이민을 떠나는 두사람이었다. 영국에서 생활을 위해
출국하는 두사람을 배웅하러 많은 사람들이 공항에 나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배웅속에 윤주와 유림 두사람은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자리에 앉자마자 윤주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결혼식날 신부께서 왠 한숨?"
"그냥, 너무 떨려서 죽는줄 알았어. 이제 우리 둘만 남으니까
조금 안심이 되서그래."
"너무 좋아서 떨려 죽는줄 알았구나? 나같이 멋진 신랑보니까 좋아서."
이제는 농담까지 슬슬 잘 던지는 유림이었다. 그런 유림을 곱게
홀겨본 윤주는 크게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어휴, 강유림! 너 정말 능글능글 해진거 알아?"
"그런가? 정윤주 닮아가서 그런가보다. 우리 신부, 오늘 한번도
못안아봤네. 어디 한번 안아볼까?"
"여기서? 미쳤어? 사람들 다본단 말이야!"
"보면어때? 우리 이제 부부야. 부부가 서로 안든말든 무슨 상관이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림은 윤주를 꼭 끌어안았다. 윤주의 예상대로
주위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두사람에게로 쏠렸지만 유림은 정말
그런 시선은 상관도 않는것 같았다.
수술이 끝나고 다시 건강해지고 나서는 많이 쾌활해진 유림이었다.
많이 웃고 또 많이 밝아진 모습. 이제는 윤주보다도 더 밝아진것 같았다.
"진짜 안믿긴다. 정윤주, 이제 우리 결혼한거지? 평생 같이 사는거지?"
"응. 평생 같이 사는거지."
"윤주야"
"응?"
"기대해, 영국가면 너한테 보여줄 선물있어. 깜짝선물. 보면 정말
놀랄꺼야."
#. 에필로그 forever with you (영원히 당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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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도착하자 공항에 두사람을 마중나와 있는 두사람이 보였다.
유림이 영국에서 운영하게 될 건축설계회사의 직원이라는 두 사람은
사장인 유림보다도 한참은 위로 보이는 인자해 보이는 한국인 남자였다.
두사람의 안내로 차에 올라 앞으로 유림과 윤주가 생활할 집으로
향하는 내내 유림은 뭐가 그리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미소짓고만
있었고 윤주는 난생처음보는 영국의 거리가 신기한지 차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유림아, 근데 우리 어디로 가는거야? 우리집은 어딘데?"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데야. 보면 깜짝 놀랄껄."
"왜? 집에 마법이라도 걸어놨어?"
"걸어놨어. 마법..."
두사람을 태운 차는 런던시내를 벗어난 근교로 들어섰다. 번화한
느낌의 시내와는 달리 탁트인 벌판이나 푸른 나무들이 보이는 한가로운
풍경들이었다. 그렇게 몇십분쯤을 달린뒤. 차는 하얀색 나무집앞에
멈춰섰다. 유림이 먼저 차에서 내렸고 윤주는 잠시 넋을 놓고 그집을
바라보다가 차에서 내렸다.
주위의 분위기와 너무 잘어울리는 집이었다. 하얀색의 울타리가
쳐져있고 푸른 잔디가 깔린 마당. 예쁜 꽃들이 심어져 있는 뜰.
그리고 유럽풍으로 지어진 새하얀 이층집.
그야말로 동화속에나 나올법한 집앞에 윤주는 할말을 잃어버렸다.
"유..유림아....이거...이거 우리집이야?"
그말에 유림은 그냥 어깨만 으쓱해보일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유림이 준비한 '선물'이었다. 5년전 윤주에게 했었던 약속이었다.
건축가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면 영국에 예쁜 집을 짓겠다고....
그 예쁜 집에서 윤주와 함께 예쁘게 살거라고 자신이 했었던 약속.
그때에는 불분명한 약속이었지만 유림은 그 약속을 지킨것이다.
꼭 살아서 윤주에게 예쁜집을 선물하겠다는 그 약속을...
"윤주 니가 항상 그랬잖아. 약속은 꼭 지켜야하는거라고. 그래서 나도
약속지켰어. 기억하지? 우리 5년전에...나 수술하기 전에 강릉 별장에서
너랑 했었던 약속. 그 약속..지킨거야."
"...유림아..."
"이집에 마법걸려있어. 사랑의 마법! 이거 내가 설계한 첫번째 작품이다.
어때? 마음에 들어?"
"당연하지...너무 예쁘다. 이렇게 예쁜집은...태어나서 처음이야."
윤주의 눈에서 또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원래 이렇게 울보가 아닌데
유림앞에서는 우는일이 많은 윤주였다. 그만큼 그녀가 유림을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낀다는 말이었다.
유림은 따뜻하게 웃으며 그런 윤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따뜻하게 부숴져 내리는 햇살을 받아 더 빛나보이는 집이었다.
이제 두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갈 집.
"유림아, 우리 이 집 이름지을까?"
"이름? 집에 이름을? 풋, 그래 짓자. 뭐라고 지을까?"
"실버엔젤! 은빛천사 강유림이 지은 집이니까..이 집 이름은
실버엔젤이야."
마주본 두사람은 서로를 따스하게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유림은 모든 약속을 지켜주었다. 꼭 병을 다 낫게해서 윤주옆에
살겠다던 약속...예쁜집을 짓겠다는 약속.
이제 윤주가 지킬차례였다. 예쁜집의 안주인이 되주겠다는 약속말이다.
유림을 닮은집. 그의 사랑이 담겨있는 집 '실버엔젤'에서 죽는날까지
행복하게 사는것. 그게 그들의 마지막 남은 약속이었다.
"윤주야, 우리 여기서 행복하게 살자. 우리 둘이서...아니다, 언젠가
태어날 우리 아기까지! 여기서 다 행복하게 살자."
"강유림...나 감동받았어. 너 진짜...진짜....너무 멋지다!"
"이런걸로 감동은. 약속을 지킨것 뿐인데. 자, 들어가자. 안을 둘러보면
더 놀랄일이 많을껄."
두사람은 조심스럽게 집안에 발을 들여 놓았다. 화창한 날씨가
마치 두사람을 축복해주고 있는것만 같은 날이었다.
심장병을 앓던 세상을 향해 적대적인 눈을 가졌었던 열여덟의
어린 소년 강유림.
활기차고 웃음많고 정많았던 따뜻한 여자 정윤주.
5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다시 건강해져서 따뜻하게 웃을줄 아는 남자가 된 정윤주의 남편 강유림.
그리고 조금은 얌전해진, 하지만 아직도 너무나 환하게 웃을줄
아는 여자 정윤주로 말이다.
유림이 편지에 썼었던 말처럼 사랑은 아픈것이다. 그리고 슬픈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픔..슬픔을 다 잊게 할만큼 사랑은...아름다운것이다.
그런 사랑의 아름다움을 알고있는 두사람은 누구보다 행복하게
'실버엔젤'에서 살아갈 것이다.
예쁘게....행복하게....영원히...함께....................... 끝
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그린비]실버엔젤.txt
오전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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