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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미수]제발.txt

#아래 소설은 일반인이 거북해 할수 내용이 담겨 있을수 있습니다. BDSM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되돌아가기를 누르기를 바랍니다.

제발...[미수님 作]


앞으로 나에게 남겨진 시간들을 계산해 보았다. 시간으로 따지면 정말 긴 시간들이 나에게 주어진 셈이다. 하지만.. 개월수로 따져보니.. 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이젠 울수가 없었다.
이렇게 앉아 울고만 있다면 막상 마지막 그 날이 찾아온다면... 난 가만히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베란다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어다 쇼파에 내려 놓았다. 봄 햇살에 바짝 바른 빨래엔
손도 대지 않고 남편의 옷장을 열었다. 치워야 할 옷이 너무 많았다. 모두 내 손길을 기다
리고 있는 옷이었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난 옷장에서 벗어나 이불장을 열었다.
철 지난 이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 역시 내 손이 필요했다.
비틀거리며 방을 나선 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까 아침에 시장에 가서 사온 생선과 야채..
그것들도 내손을 거쳐야만 했다..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다 내손을 거쳐야 하는 것들이다.

이럴 순 없어. 이렇게 약해지면 안돼. 하지만.. 난 그 어떤 것도 해 줄수 있는게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퇴근해서 집에 올 남편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
가 지금 해 줄수 있는건.. 내 가슴에 엄청난 비밀을 담은 체 미소를 보일 뿐 아무것도 없었
다.
난.. 강해져야 했다. 그게.. 그게.. 정말 남편에게 줄수 있는 전부가 될것이다.

띵똥!!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띈 체 집에 들어설 남편을 기대하며 현관 앞까지 간 난 그 앞에서 멈
춰섰다.
얼굴에 남아있던 웃음이 사라졌을 때 또 한번의 초인종이 울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난 낮
에 걷어놓았던 빨래가 그대로 있는 쇼파에 앉았다. 여러번 연습한 것 마냥 아무렇지도 않은
듯 텔레비젼을 보고 있던 난 남편이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시
선조차 돌리지 않은 체 텔레비젼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어라. 자기 집에 있었네? "
여느 때라면 자신을 향해 달려올 아내가 오늘은 조용한게 이상했지만 남편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가 앉아 있는 쇼파에 앉고는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늦게 와서 화난거야? 아님.. 내가 잊은 무슨 약속이 있던거야?"
"지겨워졌어."
피눈물이 흐르고 있는 상처투성이인 가슴을 끌어안은 난 남편을 향해 소리쳤다. 고통으로
얼룩진 내 시선을 남편의 눈동자에 박으며 남편에게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뭐라구?"
놀라는 남편은 날 달래보려 손을 뻗었다. 아마 자신의 품에 안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 하
겠지..
"지겨워졌다구!! 모든 게 지겨워 졌어. 자기 알아? 자기 회사에 출근해 있는 동안 내가 했던
일들이 얼마나 많은 지 당신은 알고 있냐구!!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당신옷을 찾아 온 방을
헤매여야 하고 땀에 얼룩진 당신 와이셔츠에 빳빳하게 풀을 먹여가며 다림질 해야하고, 세
탁소에 맡긴 당신 양복 찾으러.. 하루에도 수십번도 넘게 저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는 게 지
겨워 졌어!! "
"지연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니? 또 새어머니가 다녀가셨던 거야? 그런거니?"
"아냐!! 그게 아니란 말이야!! 자기 귀 먹었어? 내가 하는 소리가 무슨 얘긴지 몰라?"
난 목이 메어와 말이 잘 터지지 않았지만 그 표현을 할 수 없어 말귀를 못알아듣는 남편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주먹으로 세게 두드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자기 때문에... 지겨워 졌다구!! 저기 저 양말 벌써 일주일 째 저기
에 있었어. 당신 봤어? 식탁위에 있는 물컵.. 닦지도 않은 체 3일 째 있었지만.. 당신은 보지
못했어. "
"자기야 갑자기 왜 그래?"
이젠 겁이 난 남편이 나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난 남편을 피해 두어발 뒤로 물러섰다.
"잘 들어둬. 나 이젠 자기 뒷치닥거리 하지 않을거야. 절대로.. 이젠 자기가 알아서 해!! 난
몰라."
소리나게 욕실 문을 닫고 들어온 난 수도꼭지를 있는대로 세게 틀었다. 샤워기 물도 틀었다.
변기 물도 내렸다. 그리고.. 그 소음 속에 내 울음 소리를 묻었다.

"자기 아직도 화 많이 났어?"
내 옆에 누우면서 남편이 물었다. 손을 뻗어 날 자신의 품에 끌어아는 남편의 손길을 난 외
면할 수가 없었다.
"...."
"미안해. 난 자기가 그렇게 힘이 들줄은 몰랐어. 정말 미안해."
"그냥..그런 생각이 들었어...만약 내가 갑자기 자기 곁을 떠나게 되는 그런 상황이 생긴다
면.."
남편의 규칙적인 심장 박동소리를 들으며 난 두눈을 꼭 감았다. 힘있게 날 안아주는 남편의
품에 안겨 난 눈물을 삼켰다.
"걱정마.. 이젠 내가 많이 도와줄테니까.. 그러니까.. 그런 생각 이젠 하지마. 알았지?"
"....."

아...아...
통증이 찾아왔다. 이른 새벽에 찾아오는 통증에 침이 말라갔다. 이를 악물고 자고 있는 남편
이 깰까봐 신음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난 화장품 뒤에 숨겨둔 약병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
다.
"아...아..태준씨..태준씨.."
난 또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통증과 싸워야 했다. 통증을 견뎌낼 수 있는 건 진통제가 아니
었다.
남편이었다. 이렇게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아픈 배를 움켜잡고 통증과 싸우다 보면 어느새
통증은 가시고 예전의 나로 돌아온다.. 하지만.. 내가 언제까지 남편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까?
내가 언제까지 자기 곁에 남아 있을 수 있는걸까?

1년 전 병원 방사선실..

"지연씨, 당신은 알고 있었죠? 그렇죠? 당신은 알면서 병원을 찾은 거죠?"
남편의 친구인 준호씨가 입을 열었다. 그건 나에게 확신어린 답을 말해주는 것과도 같았다.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그냥..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만큼인지..궁금해서 그래요."
"지연씨.. 항암 치료만 할 수 있다면..."
고개를 저으며 난 준호씨의 말을 막았다.
"준호씨..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나한테 남겨진 시간만 말해주세요..제발.."
"하지만.."
"제발.."
준호씨가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며 나 역시 고개를 돌렸다.
"길어야...1년이예요. 하지만 지금 지연씨 상태로 보면.. 그 정도까지도 장담 못해요. 그러니
고집 부리지 말고.."
"한가지 약속해 줘요."
바람에 날리고 있는 민들레 꽃을 바라보며 난 입을 열었다.
"만약.. 태준씨에게 말을 하면... 나 두번 다시 병원을 찾지 않을거예요. "
"하지만 그건..."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던 준호가 다시 앉는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난 준호에게 시선
을 던졌다.
"명심해요.."

그 때 이후 난 한번도 병원에 다녀가질 않았다. 아니 그저 병원에 가길 꺼려했다,
마지막 말을 듣기라도 한다면? 내일 당장 죽으니까 모든 준비를 끝내라구 한다면?
여러가지의 말들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그 어지러운 생각속에 자리잡고 있는 한 사
람..내 남편 때문에 난 더더욱 병원에 가질 못했다.. 하루하루 병에 찌들어 가는 환자들 곁을
지키는 보호자들의 웃음기 없는 얼굴이 싫었다.. 같이 죽을것 마냥 그런 슬픈 얼굴을 내 남
편이 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까 내 자신이 더욱 초라해 보일 뿐이었다.
난 강해져야 했다. 남자인 내 남편보다 더 강해지고 독한 여자가 되어야만 했다.
아니 어쩌면.. 나에게 남겨진 시간만큼...더 혹독하게 남편과의 사랑을 정리해야 했는지 모른
다.
하지만 난 아직 그 어떤 것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데.. 남편에게 짜증을 내면서도 돌아
서서 눈물을 찍어내기 바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생각도 못하고 있는데...
오늘도 남편은 짜증을 부리는 내 눈치를 살피며 한 아름의 꽃과 향긋한 샴페인을 품에 안겨
왔다.
그런 남편앞에서 난.. 또 한번의 성질을 부려야 헀다. 그가 사온 꽃과 샴페인을 바닥에 내동
댕이 치며 난 남편에게 화를 냈다. 이게 뭐냐구!! 내가 언제 이런 거 사오라구 했냐구 하면
서.. 난 남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요즘들어 아내의 짜증이 부쩍 늘었다. 무슨 일이 있는 지 알아보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아내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내가 자주 볼수 있는 퀭한 두 검은 눈동자만이 날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난 그런 아내에게 편안함과... 때론 그녀가 쉴수 있는 안식처가 되고
싶어하던 내가.. 밖으로 나도는 시간이 길어져만 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때.. 이미 나에게 한
여자가 다가와 있었다.
회사 동료이자... 아내의 후배였다. 그녀를 처음 본게 아마도 아내와 결혼식이 있기 일주일
전쯤이었을 것이다. 아낸 나에게 자신이 제일 아끼는 후배라면서 그녈 소개시켜주었고. 그때
의 난 아무생각없이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만을 나누웠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회사에서 봤을 때에는 안면이 있는 친구처럼 편안함을 가지고 대했다. 이 정
현.. 그녀의이름이다. 방황하는 날 붙잡아 준 여자의 이름이었다.
오늘도 난 그녀와 함께 선 술집에서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한시간째 앉아 있었다.
"선배. 그만 마셔요."
"그래.. 그래야지..이 것만 마시고..이것만."

난 이 남자를 잘 안다.. 난 이 남자를 잘 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난 이 남자를 알아왔다.
술에 취해 자신의 괴로움을 잊으려 노력하는 이 남자를 난 아주 잘 알고 있다. 박 태준 그
는 내 대학 선배이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학 선배였다.하지만 그는 알지 못한다. 내가
그를 언제부터 봐왔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단지..그에게 있어 난 아내의 후배일뿐.. 회사 동
료일뿐...
"지연아..지연아.."
술에 취한 그를 간신히 택시에 태우는 데 그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아내를 부른다. 그런 그
의 모습에 난 또 다시 상처를 받고 만다.. 이미 익숙해져 있는 그의 그런 모습....

이미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 남편은 벌써 한 달째 이 시간이 넘어야 집에 들어온다. 그것도
술에 잔뜩 취해.. 낯선 여자의 향기를 옷깃에 가득 머금은 체.. 들어와 나의 품에 안겨 펑펑
운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걸까? 무엇이 내 남편이 이렇게 울게 한 것일까? 하지만.. 금방 답이 나
온다...
나란 여자 때문에 정말 많은 걸 포기했던 남편인데.. 사랑하나 믿고 나를 따라온 그인데...
나로 인해 이렇게 울다니.. 불쌍한 우리 남편...불쌍한 우리 사랑....

남편의 집안은 정말 알아주는 집안이다. 땅이면 땅. 집이면 집. 수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고
가문있는 집안에서 뿌리깊은 가문을 지니고 있는 명문가 였다. 그런 그는 어려움없이 살아
온 외 아들이었다.
부모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자란 그가 어리석게도 나같은 여자와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어떤 집안인지.. 아빠가 누구인지 새엄마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나를 만나 사랑에 빠졌던 그
는 나와의 결혼을 위해.. 정말 비단길을 뿌리쳤던 것이다. 앞길이 환하게 열려있는 자신의
미래를 내동댕이 쳤던 그였다...
"네가 우리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게 무엇이 있니? 네가 감히 내 아들에게 줄 수 있는게
무엇이 있냐구?"
아들을 포기하지 않는 나에게 던진 시부모님의 질문에 난 당당하게 말했다.
"그에게... 웃음을 줄 수 있어요.. 진정한 웃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수 있어요.."
아.. 태준씨.. 나 어떡하지? 나 어떡해.. 어머님께 아버님께 약속드렸던 그 웃음...더 이상 줄
수가 없는데.. 나로 인해 울고 있는 당신이 지금 내 눈 앞에 있는데.. 어떡하지?
죽어가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게... 한가지가 있는데.. 그건 차마 할 수가 없어..
내눈 가득 당신을 담아가고 싶은 욕심에.. 당신을 놓아줄수가 없는데.. 어쩌지?
먼 나중에.. 정말 먼 나중에.. 당신이 알게 된다면... 당신이 이 내 욕심을 안다면...나 미안해
서 어쩌지? 나 혼자.. 당신의 행복 앗아간게 미안해서 어쩌지?

아내의 눈물이 느껴진다.. 아내의 가슴 치는 슬픔이 느껴진다... 아내가.. 나를 끌어안은 체
울고 있었다..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 볼을 부비며 아내가 울고 있었다....하지만 난 눈을
뜰 용기가 없었다.
아내의 눈물을 볼 용기가 없었다.. 무엇이 그리 슬픈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저 내탓이니까..모두 내 탓이니까..너무나 많이 사랑한 내 탓이니까....지연아 울지마...지연
아 울지마...

"자기야..."
"응?"
"나.. 사랑해?"
난 또 심술궂게 남편에게 뻔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남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응.. 사랑해.."
"나..그럼.. 나 사랑하는 만큼..날 사랑해주면 안돼? "
불안한 내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남편의 키스가 필요했다. 아니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서..
"그래.."
그래.. 남편은 정말 키스를 잘한다.. 부드럽게 그리고 애타게... 하지만...하지만....
난 두눈을 꼭 감은체 남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 입술에 온 힘을 기울였다. 내 전부를 쏟
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러지마.. 날 봐.. 내 눈을 봐.."
작게 속삭이는 남편의 말에 난 눈을 떴다. 검게 빛나고 있는 내 남자를 보았다.. 열정에 휩
싸여 있는 내 남자를 보았다.. 그 두 눈을 보며 난 거짓 연극을 시작헀다. 날 사랑하는 그
두 눈을 보며 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열에 들뜬 척... 그의 키스가 정말 좋은 척하며.. 난
연극을 하고 있었다.
"자기야.. 왜 울어?"
그의 손이 내 볼에 살짝 와 닿았다. 그의 입술이 뜨겁게 내 볼에 닿았다..
"그냥.. 그냥... 너무 좋아서..."
자기야.. 나 어떡하니? 나 어떡하니? 나 자기에게 해 줄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떡하니?
난 내 몸에 닿는 남편의 손길아래서 몸을 뒤척이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정말 그 손길이 내
몸에 닿아서 좋은 척 이 세상에서 ..정말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것 처럼 그렇게.. 난 남편
을 속이기 시작했다.

"아.."
내가 정신을 차린 건 남편의 땀이 내 눈물과 섞여 내 몸에 흘러내릴 때였다. 난 남편을 밀
쳐내곤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변기에 머리를 쳐박곤 방금전의 내 모습에 내 행동에 대해 욕
지기를 해댔다.
"지연아!! 지연아!!"
불안한 음성의 남편이 욕실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난 그 목소리를 외면해 버렸다. 그 목소리
에 자꾸만 약해져만 가는 날 볼때마다... 그를 내 곁에 묶어 두고 싶을 때마다.. 힘들어할 그
를 생각해서라도 난 강해져야 했으니까.
"지연아!!"
"괜찮아.. 미안해.. 안되겠어.. 미안해.. 자기야.."
"정말 괜찮아? "
욕실에서 나온 날 부축하며 침대에 눕히는 남편의 팔을 붙잡는 순간 나.. 또 다시 화기 치밀
어 올랐다.
그를 사랑하는데.. 나 이 남자 정말 사랑하는데.. 그것조차 내 맘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게...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내 운명에게 화가 났다..
"필요없어!! 이러지마. 내 곁에 있지 말라구.. 나 좀 내버려둬.. 나 아무렇지도 않아.. 나 정말
괜찮으니까.. 제발 저리가...."

무엇이 그렇게 널 힘들게 하니? 무엇이 그토록 널 괴롭히고 있는거니? 그게 나니? 나 때
문에 네가 힘든거니? 네 곁에 있는 내 존재가 널 힘들어 하냐구!!
난 또 다시 한발 물러섰다... 아내가 시간이 조금씩 지날 수록 날 밀어내고 있었다. 그걸 깨
달은 지금 난 더 이상 아내에게 손을 내밀수가 없었다. 내 작은 손길 하나에도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아내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준호씨. 준호씨!!"
"어? 지연씨? 왠일이예요? 그럼 결정한거예요?"
"왜 말안했어요... 왜 미리 말 해주지 않았어요?"
"지연씨. 우선 앉아서 차근차근 하게 말해 보세요.. 무슨.."
"왜..왜.. 내가 우리 태준씨 힘들게 할거라구 말하지 않았냐구요!! 왜... 더 이상 여자가 될 수
가 없다는 걸 말해주 않았어요. 흐...윽!!"
난 한가닥의 희망을 안고 병원을 찾았다.
"지연씨.. 지연씨 울지 말아요.. 그렇게 울면 몸에 해로워요. "
"나...나.. 그래도 괜찮은 줄 알았어요.. 사랑하니까. 정말 사랑하니까... 그것만은 허락된 줄
알았어요. 하지만.. 얼마나 비참한지 몰라요.. 나 좀 어떻게 해 봐요!! 나 좀...살려달라구요...
흐..흐.."
난 그렇게 준호씨에게 투정을 부렸다. 그렇게 생떼를 썼다.. 날 살려달라구.. 예전의 나로 되
돌아갈수 있게 해달라구.......

야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사무실을 나서는 데 어둔 복도에서 불빛이 새어나와 있었
다. 그 불빛을 따라 들어간 난 책상위에 엎드린 체 잠이 들어 있는 선배를 보았다.
눈물이 체 마르지도 않았는데도 아직도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선배를 보았다..
선배.. 무엇이 선배를 울게 하나요? 모든 걸 가진 선배가.. 왜 이런데서 울고 있나요?
난 얼마동안 서서 울면서 잠이 든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재킷을 걸쳐주었
다.
그게 슬퍼하는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태준씨?"
"언니.. 저예요.. 정현이."
"어..어... "
"아직 선배 안 들어왔어요?"
"음.. 좀 늦네..근데 무슨 일이야? "
"내일 저좀 만나면 안돼요?"
"내일?"
"네.. 할 얘기가 있어서요.."
"하지만.. 난.."
"태준 선배 얘기예요."
저절로 눈이 감겨졌다.. 이상한 예감에 손이 파르를 떨려왔지만 난 눈을 꼭 감고 약속을 정
했다.

차마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나를 향해 벽을 쌓고 있는 아내에
게 다가갈 수가 없던 난 거실 쇼파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잠을 청했다.

팔을 이마에 올려놓은 체 불편한 잠을 자고 있는 남편을 보며 난 고개를 돌렸다.. 그게 오히
려 더 낫은지 모른다.. 서로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 그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면.. 내가 당신
에게 줄 수 없는 그 것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태준씨.. 나만 봐줘요.. 아직
당신 앞에 있는 나만 봐줘요.

"언니!! 여기예요."
"오랫만이다.. 정말.. 너무 오랫만이야.."
난 핼쓱해진 언니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원래 전체적으로 말라보이는 체
형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히도 그런 언니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언니.. 무슨 일 있어요?"
"일은 무슨... "
"어디 아파보여요... 정말 괜찮아요?"
하마터면 난 정현의 말에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놓칠 뻔 했다.
"그럼.. 너무 건강한데... 근데 무슨 일이야?"
"저어.."

"그..게 무슨 뜻이야? 무슨 의미냐구!!"
난... 도저히 후배인 정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언니... 태준 선배가.. 힘들어하면.. 나도 같이 힘들다구... 언니 그러니까.. 그러니까.."
"하지마.. 하지마!! 더 이상 말하지마.. 언제부터였니? 언제부터였냐구!! 내가 태준씨.. 밀어낼
때부터였니? 그래서.. 그래서..네가.. 네가..."
"아냐!! 아냐.. 태준 선배는 몰라.. 내가 사랑하고 있는지.. 하지만.. 언니에겐 말해야 겠어.. 태
준 선배가 괴로워 할때마다.. 내 가슴이 아프다는 걸 말해야 겠어.. 언니 미안해.. 이러지 않
으려구 얼마나 노력했는지 몰라.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날 찾아오는 선배의 퀭한 눈빛이..
날 붙잡아.."
"그래서? 그래서? 네가 날 이렇게 만난 이유가 뭔데? 무엇을 말하려구 날 찾았는데!!"
"언니.. 태준 선배 용서해.. 선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 지금 선배 너무 힘들어해.
언니, 선배 사랑하잖아.. 사랑하니까.."
"조용히 해.. 입 다물라구...가야..겠다..."
손이 점점 심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사물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있었다.. 더 이상 앉아
있을 힘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난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준호씨.."
"네."
"이젠...이젠.... 태준씨에게.. 말 해야 겠어요..이젠 그 사람에게도 알려야 겠어요."
준호는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지연의 멍한 시선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 받아들이기 힘들거예요.."
"나.. 그 사람에게 정말 큰 잘못을 했어요.. 아마 그 벌을 받나봐요..그 사람이 가야할 길을
내가 막았거든요.. 그 사람이 하고픈 일을 내가 못하게 막았거든요..."
그 사람.. 준호씨처럼 의사가 되어야 했다. 대학 시절.. 그가 선택한 길이었으니까. 하지만 나
와 만난 그 순간부터 그에 대한 모든 지원이 끊겼다. 집에서 모든것을 끊어버린것이다.. 그
는 생계를 위해 대학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다.. 나로 인해...그렇게 하고픈 일을 그만 두워야
했다.
"지연씨.. 제가 대신 태준이에게 전해.."
"아뇨!! 제가 할께요..제가 할께요.. 준호씨.. 그 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딩동!!
"누구세요?"
"어..머니 ,저예요.."
"....."
"새어머니..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무슨 일이니? 곧 있음 아버지도 오실거야."
"새어머니.. 태준씨.. 용서해 주세요.. 태준씨 용서해 주세요..그 말 드리려구 왔어요."

"새어머니.. 그 사람...아무 잘못 없어요. 모두 제탓이예요.. 제가 그때 헤어졌어야 했는데.. 그때
그 사람 모른 척 외면했어야 했는데...그래서 저 지금 벌 받나봐요... 어머님, 아버님.. 슬프게
했던 죄 지금...저 받고 있나봐요..어머님.. 그 사람..용서해 주세요...저...저....용서해 주세요...저
요...이번에도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짓게 되었어요..그를 사랑한 것보다 더 큰 죄를 받고 있
어요.. 그를 위해 이젠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요..그래서...새어머니를 찾아왔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기에..새어머니..부디 절 용서해 주세요..."
난 그 분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인 체 그분들께 깊은 사죄를 올렸다. 그리고..
그 집을 나섰다.. 어머님.. 저요.. 있잖아요.. 어머님이 정말 좋았어요.. 태준씨가 곁에 있으
면... 새어머니도 같이 계실 줄 알았어요.. 하지만....모두 저 때문이예요.. 정말 죄송해요...

"도대체 어디갔다 이제 오는거야?"
현관문을 열기가 무섭게 화가난 남편이 날 맞이했다. 하지만 그 화난 모습마저도 너무나 사
랑스럽게 보여 나도 모르게 남편을 꼭 끌어안으려 헀다. 팔을 뻗던 난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바람에 손을 떨구었다.
"왜 그렇게 화를내? 자기는 맨날 늦게 들어오잖아."
"요즘 들어 자기 왜 그런거야?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날 괴롭히는 지 말좀 해봐!!"
드디어 남편이 화를 냈다.. 나에게 화를 냈다. 등을 돌린 체 벗은 옷을 옷장에 넣으며 난 냉
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나만이라도 냉정해야 했다.아니 난 냉정해져야 했다.
"지겨워."
"뭐..뭐라구?"
남편의 눈이 커졌다. 입을 벌린체 눈을 크게 뜬체 날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이 내 가슴에 파
고들었다.
하지만 난 그 시선을 외면했다. 고개를 돌렸다.
" 지겹다구. 모든 게 다 지겨워!! 아~~!! 이게 뭐야.. 이게뭐야...."
난 완전히 미쳐가고 있었다. 그를 향해 옷장에 있는 옷들을 집어던지는 난..미쳐가고 있었다.
"당신이 날 괴롭히고 있다구!! 내 곁에 있는 당신이 날 괴롭히고 있다구...왜 그래야 하니?
왜 나만 바라보는 거야.. 왜 나 하나만 믿고 모든걸 포기했냐구!! "
난 침대 서랍에 있던 의학 서적을 그에게 던졌다. 그 두꺼운 책이 남편의 발밑에 떨어졌다.
그 책을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이 또 한번 커졌다.

"나...바보 아냐..나.. 그렇게까지..잔인하지 않아. 당신에게 있는 꿈을 앗아갈 정도로 잔인한
여자가 아니라구...왜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왜? 왜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하지 못하
냐구!!"
"그건..."
"그러지마.. 나 때문에 모두 나를 위해서 그랬단 말이 이젠 지겹단 말이야!! 난..그저 태준씨
당신만 있으면 됐어..예전에도... 그리고..지금도... 모두 내 욕심때문에.. 희생하는 당신이 아니
라.."
"지연아..."
"됐어!! 저리가. 이젠 당신도 꼴 보기 싫어!! 내게 손 내밀지 마. 이젠 그 손따위 잡은 일 없
을거니까.
내가 당신을 버릴꺼야.이젠 당신하고.. 있으면.. 내 숨통이 조여지고 있는것 같아.. 답답해..
우리 그만...우리 그만두자..이게 나를 위해서야.. 당신이 사랑한 나를 위해서야.."
그리고...내가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서고.. 나 더 이상 당신 곁에 있으면 안돼.. 그러면.. 나보
다 더큰 슬픔을 가슴에 두고 살거 아냐... 그러면.. 당신 두번다시 사랑하며 살지 않을거 아
냐..

"무슨.. 말이야? 그만 두자니?"
"내 말 그대로야. 우리 그만 헤어져.."
"그만 두자니? 그만 두자고!!"
남편이 소리지르고 있었다. 두눈에 가득 슬픈 눈물을 담은 체 나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와 헤어져야 하는 이유도.. 이 모든 게 당신을 위해
서라는 것도
"그래.. 나 좀 놔줘..난 당신 놔줄테니까..우리..그러기로 했잖아.. 서로 힘들어지면.. 헤어지기
로 했잖아..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힘들어지면.. 헤어지기로 했잖아...나 실은 그 동안 거짓말
해 왔어..
나 당신 부보님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 당신은 그분들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그분들의
전부인 당신인데.. 나때문에..나때문에 헤어져 있다는 게 너무 힘들었어.. 그러니..이젠 그분들
께 돌아가.
그리고..날 잊어줘.. 나도 당신 잊을테니까."
"지연아!!"
"그래. 나도 알아.. 억지라는거.. 하지만 어떻게.. 하지만 어떡하냐구!! 내가 당신 때문에 힘이
드는걸.
내곁에 있는 당신 때문에.. 내 이 가슴이 아파오고 있는걸!!"
난 아내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난 아내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어렵게 시작된 우리 사랑을
이렇게 쉽게 던져버리는 아내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난 천천히 등을 돌려 방을 나서는데 아내의 기운없는 목소리가 날 불렀다...
"당신.. 이대로 나가면..우리 정말 끝난거야.. 우리 지금 이 순간부터..정말 끝이야..."

난 아내의 말을 뒤로한체 집을 나섰다. 온몸의 힘이 쫘악 빠진 듯했다. 비틀거리며 걷는 난
지금 그 어떤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보고 있느 아내의 상처입은 얼굴만이 아른거
렸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않았다.. 절규어린 아내의 슬픔만이 귓가에 들려올 뿐이었다.. 나 어쩜 이
렇게 이기적일수가 있을까.. 나 어쩜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았을까....
나 정말 괜찮아.. 태준씨.. 나 정말 괜찮아.... 이렇게 말하며 웃던 아내의 모습에서..왜 이처럼
큰 슬픔이 숨겨져 있는 지 알지 못했을까.....나..나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나도 때론 미칠정
도로..힘이 들었는데.. 아낸 어땠을까?

나 어쩌면 좋니? 나 어쩌면 좋니? 그에게 ...이런 못된 짓만 하는 나 어떡하니?
제발..날 좀 구해줘.. 태준씨.. 나좀 살려달라구...나.. 당신 곁을 떠나기 싫어.. 나..정말 당신없
인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어쩌면 좋아!! 나 좀 살려줘...
난 그가 나간 방에 주저 앉아 목놓아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그에게 준 상처가 너무나도
컸기에..

빗 소리에 눈을 떴다. 잘잘거리는 빗소리에 정신이 든 난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자꾸만 바닥에 주저앉고 있었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날 지탱해주고 있던..그의 빈자
리 탓일까? 일어서려 몸을 움직일때마다 심한 현기증이 일었다.. 눈앞이 노래지면서 자꾸만
몸이 앞으로 쏠리고 있었다.. 벌컥 겁이 났다.. 이대로 쓰러져 버릴 것만 겁이 났다.. 아직인
데..아직 내가 해야할 일이 남아 있는데..여기서 쓰러지면 안되는데....

이렇게 갈 곳이 없단 말인가!! 정말 발 붙일 곳이 없단 말인가... 빗속을 헤매인지 벌써 여러
시간이 지난듯 헀다.. 내 발길이 멈춘곳은 정현이네 집 앞이었다.. 초인종을 누를 용기가 나
지 않아 대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데 그녀의 현관문이 열리고 있었다.
"어!! 선배!! "
미소 지으려 했다. 하지만 추위에 얼얼해진 뺨이 움직여 주질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
하는 건.. 정현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날 불렀다는 것이다.

이렇게 통증이 심할 거라 생각지 않았다. 온몸에 있던 혈관들이 바짝 오그라 들정도로 고통
이 따를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고통을 이렇게 혼자서 감당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던 난 거
의 기다시피 해서 전화기 앞까지 왔다.
"준호..씨. 나.. 이상해...빨리 와줘.. 나.. 정말 이상해!! 준호씨..빨리 와줘..나 아파..죽을 것 같
아..
나 이대로..죽을 것 같단 말이야..."
- 녹음 되었읍니다.-
간결한 여자의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힘없이 수화기가 손에서 벗어났다.. 난 간신히 몸을
침대에 기둥에 기댄체 두 팔로 몸을 감싸안았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모르겠다.. 손을 어
디에 놓아야 고통이 덜한지를 모른 체 준호가 달려오기만을 바랬다.. 그리고...그리고...

"도대체 언니는 뭐하는 사람이야!! 선밸 이렇게 놔두고!! 정말 어쩔뻔 했어!! 이 열좀봐!! 아
무리 해열제를 먹어도 내리지 않잖아. "
속상한 난 아파서 거의 의식이 없는 선배 앞에서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내가 제일 아끼는
소중한 사람을 이렇게 고통속에 밀어넣은 지연언니를 원망하며 난..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
다.
"돼..됐어..헉헉.."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선배를 흘겨보며 난 고개를 돌렸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구!! 선배가 어떤 사람인데..선배가 언니에게 어떻게 해 줬는데..왜 선
배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냐구!! 속상해 죽겠어!! 정말.. 속상하단 말이야!!"
"울..지마.."
난 선배의 말에 거칠게 손으로 뺨에 흐르고 있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아까 집어던지 수
화기를 잡고는 다시한번 재 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계속 통화중이었다..
"이것봐!! 언니는 선배 걱정 하나도 하지 않잖아!!"

아냐.. 그럴리 없어.. 정현이 네가 몰라서 그래.. 그 사람도 ..지금 많이 아파하고 있을거야..
내가 아픈 만큼 그 사람도 똑같은 슬픔을 겪고 있을거야...나 그렇게 믿어..

"지연씨..."
의식이 깨어난 내 앞엔 준호씨가 서 있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와 구겨진 옷을 걸치고 침
통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를 보니 내 전화에 정신없이 달려온 듯 하다. 오른 손에 꽂혀 있
는 주사바늘과 2개의 링겔 병으로 인해 움직임에 제한을 받고 있긴 했지만 그를 향해 손은
뻗힐 수 있었다.
"내..손 좀 잡아줄래요?"
그가 내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그리고 차다찬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요..이제야.. 내가 살아있다는 게 믿겨져요.."
"지연씨..."
준후씨는..남편과 함께 의학을 공부했던 친구였다. 그와 남편은 정말 둘도없는 사이였는데..
그만 나를 만난 남편이 학교를 휴학하는 바람에.. 그 혼자서 의학계에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준후씨는 남편 친구이기 이전에 내 친구도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봐온.. 아주 오래
된 친구..
"준후씨...아직도 눈에 선해요. 그와 함께 걷던 그 길이... 그길을 같이 걷던 준후씨 모습도...
정말 좋은 생각을 갖고 있었지요...미지의 세계로 가 봉사하면서 살고 싶다구요... 제대로 치
료받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평생을 받치고 싶다고요...나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해요.. 그말을
하면서 반짝였던 우리 남편의...시선도.."
"갑자기 그 말은 왜 해요?"
잡고 있던 준후씨의 손에 힘을 가했다. 그러자 그가 날 제대로 쳐다보는 게 보였다.
"나..그 사람의 그 눈빛이 걸렸어요..나 그사람의 그 눈빛이 결혼한 후부터 날 따라왔어요..나
때문에...보잘것 없는 나 때문에..그 사람 그 빛을 잃었어요...그빛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때문에 나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그래서 죽기전에 결심했어요..그 사람에게 그 빛을 찾
아주고 싶어요.
푸른 하늘보다 더 푸르렇던 그 빛을 주고 싶어요.."
"지연씨 그런말이 어딨어요? 그 녀석이 얼마나.. 행복해 헀는데... 지연씨와 결혼하는 그 날
얼마나 행복해 헀는데.."
"알아요.. 너무 잘 알아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요. 나와 살면서..조금씩 지쳐가는
그를 보는 내 심정은요? 그를 사랑하는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내 심정은요? 도와주
세요. 준후씨라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거예요...그가 다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
요..."
"지연씨!!"
"안된다고는 말하지 마세요..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거니까.. 하지만.. 내 얘기는 하지 마세요..
제가 부탁했다고 말은 하지 마세요.. 그럼 그사람... 더 멀리 도망가니까..아무런 말도 하지
마세요..."
난 준후의 눈물에 고개를 돌렸다. 이미 내 눈에서도 눈물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가슴에 담
아두기 힘든 말들 때문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연씨..."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준후가 날 불렀다. 졸음으로 인해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앉는 난
어렵게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언젠가 그랬죠? 마지막 시간이 되면 알려 달라구..."
이젠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몸이 천근만근이 된것처럼 무겁게 침대에 내려앉고 있었다.
준후는 지연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시간이 너무 빨리..오고 있어요.."
"........나.. 병원에 데려가..주세요...그가 올지도...몰라요....."

낯선 방의 풍경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난 어지럼증에 고개를 숙였다. 저절로 신음
이 새어나왔다. 익숙한 향기에 또 다시 고개를 들고 천천히 방안을 살피는데 방문이 열리면
서 작은 쟁반을 들고 서 있는 정현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또..그녀를 찾아왔나보다.
"이젠.. 좀 괜찮지? 아까 의사선생님이 방문하셨거든요.. 어, 아직 일어나시면 안돼요.. 조금
만 누워있어요.."
침대를 빠져나오려는 날 막은 정현이 내 무릎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전복 죽이었다.
"너무.. 독한 약만 드셨어요..갑자기 열이 오르는 바람에 놀라서 그만.."
내 손에 숟가락을 집어주는 그녀를 바라보며 난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입안이 까실거렸
다.
"어머, 내 정신좀봐.. 목이 말랐을 텐데.."
그녀가 내 입술 가까이로 물잔을 대주는 바람에 편안한 자세로 시원한 물을 목안으로 넘기
면서 난 서서히 기운을 회복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거야?"
"신문을 가지러 밖에 나왔다가 선배가 서 있는 걸 봤어요..어제 아침에. 비가 와서.. 감기가
심하게 들렸어요...."
"언니한테..."
집에서 내 걱정을 하고 있을 지연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내 말에 정현이 눈쌀을
찌푸렸다.
"몰라요.. 전화를 해도 받지 않길래.. 집에 가 봤더니.. 역시 아무도 없더라구요."
"그..그래?"
아내의 부재에 당황했다. 내 걱정으로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을텐데...
"가야겠어."
"아뇨!! 이대로 못 보내요, 선배. 정말 이대로 보내드릴 수가 없어요. "
갑자기 정현이 내 팔을 붙잡았다.
"이대로..보낼 수가 없어요...흑"

작은 어깨가 들썩였다.. 울고 있었다. 난 가만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가 진정되기를 바라
며 기다렸다. 그손을 놓아주기를.. 하지만 그녀의 흐느낌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정현아.."
"나.. 선배 사랑해요.."
눈물 젖은 눈동자가 날 바라보았다. 그 애처로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정현아!!"
좀더 힘있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에겐 소중한 사람이예요. 선배는.. 나에게 정말 소중한 분이라구요!! 언니가 함부로 해서
는 안되는 사람이란 말이예요!! 절대로 이대로 선배를 보내드릴 수가 없어요..."
"정현아.. 왜 이러니? 네가 무슨.."
"선배는 항상 날 찾았잖아요.. 어쩌면 선배도 날 특별하게 생각하는지도 몰라요. 아직은 언
니가 곁에 있어서 그렇지.. 날 못알아 봤잖아요.. "
"그건 오해야.. 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긴 머리채가 따라 움직였다.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나.. 선배를 기다릴 테니까..언제가 될지는 몰라요.. 하지만 나 이젠
뒤로 숨지 않을거예요.. 당당하게 말할 거라구요!! 선배를 사랑한다구요!! "
더 이상 그녀의 곁에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환상에 빠져 있을지도 모르는
정현을 위해 난 그녀가 잡고 있는 팔을 거칠게 빼내고는 그 집을 나섰다. 그리고 정신없이
집으로 향했다.
내 아내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지연아!!"
왠지 모를 싸한 기운이 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차가
운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난 서둘러 안방으로 갔다. 안방은 어제 싸운 흔적이 남아 있느 상
태였다.
여기저기 흩어진 옷가지와 잔뜩 헝클어진 침대... 그리고..그리고...바닥에 놓여진 피가 고여
있는 주사바늘...아찔헀다. 뭔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던 것이다.

탁자 위에 놓인 일회용 주사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난 생각에 잠겼다. 아니 어쩌면 아무생각
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 생각자체가 날 몹시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내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과 그 생각이 저 주사기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때문이었
다.
만약..정말 만약에..아내가..내 아내가...안돼.두 눈을 꼭 감고..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자정이 넘고 새로운 하루를 알리는 시계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난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병원 어딘가를 헤매이고 있을 지연의 모습
과... 고통속에서 괴로워하는 지연의 모습이 동시에 떠오르고 있었다...

"아~!!"
"지연씨!! 이젠 괜찮아요.. 이젠 괜찮아요.."
하얀 병실에서 난 의식을 되찾았다. 그 병실에서 난..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위험한 상태였
는 지 알수 있었다..땀에 젖어 있는 준호씨를 보니 심각했다는 건 그방 눈치챌 수 있었지만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다시..내 자리로 올수 있었다는 것만이 고마울 따
름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갑자기 의식이..."
준호가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아까의 심각했던 상황을 얘기하지 않는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러지 마요..이젠 나에게 숨기지 않아도 되잖아요..난..이미 알고 있는데.."
"아까는 정말.. 태준이 그 녀석이 자꾸만 눈에 보였어요..지연씨.. 나 아무래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조금 더 빨리 치료만 한다면 충분히 살 수 있는데...급성으로 가기전
에....또 다른 휴유중이 나타나기 전에..치료만 받는다면.. 살 수 있는데... 자꾸만 원망서린 눈
으로 날 노려보고 있는 태준이의 모습이 아른거려요..."
죄책감에 시달리는 준호의 모습을 보면 나 자신도 약해진다. 아니, 나만을 바라보는 태준씨
의 눈을 보기만 해도 난.. 살고싶다는 강한 욕심이 생긴다. 하지만 내가 살았다 치자. 정말
내가 살아서 태준씨 곁에 있는다고 치자... 아무것도 줄게 없는 나 때문에 괴로워하는 태준
씨를 평생 곁에서 지켜본다고치자..남자로서의 욕구도 무시된체... 나무토막 같은 내가 곁에
있다고 치자....두고두고 내가 살아있음을 원망하며 살아갈 내가...무서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음에도 그걸 표현하지 못하는 난.. 어떡하라구.. 그를 사랑하는데.. 정말로 사랑하는
데...

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가봐요..나 눈 좀 붙일테니까.."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요..지연씨..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병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난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아냈다. 얼마나 울었을 까 귓가에
서 요란한 싸이렌 소리에 울음을 멈추었다. 앉아있을 힘도 없는 난 온 힘을 끌어모아 간신
히 창가로 가 섰다.
응급실이 정면으로 보이는 병실 창가에 서서 구급차에 실려온 환자를 보았다.
의식이 없는 환자의 손을 붙잡고 울고 있는 젊은 남자가 내 눈길을 끌었다. 애타게 환자의
이름을 부르며 잡은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 남자가... 먼 훗날 있을... 이별이 어떠할지 말해주
는 것만 같았다.
만약,, 저렇다면..싫어. 싫다구!! 그를 찾아야 해!! 그를..

띠리링~~!!
짧은 전화벨 소리가 날 깨웠다. 혼자였다. 아직 아내가 돌아오지 않았다. 수화기를 바라보는
데 자꾸만 호흡이 짧아지고 있었다. 불안한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애써 그 생각을 떨쳐내고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네.."
"에미다."
안도의 한숨이 크게 새어나왔다. 아.. 하느님!!
"새어머니.. 왠일이세요.."
"그렇게 무뚝뚝하게 전화를 받아야 겠니? "
"죄송합니다."
"그래.. 잘 지냈니?"
"네"
"...... 네 아내는?"
어머님이 아내의 안부를 묻긴 처음있는 일이었다. 우리의 결혼을 가장 심하게 반대하셨던
분이 바로 새어머니셨다. 여리고 여린 지연이에게 못할 말까지 퍼붓던 새어머니의 모습이 아직
도 상처로 남아있는데.. 난 그런 새어머니를 아직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잘 있읍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
새어머니의 말투가.. 이상하게 느껴진 건 내가 지금 예민해져 있는 탓일까? 난 새어머니께 그 말
투가 어떤 의미인지 따져 물었다. 그러자 한참이 지나도 말문을 열지 않으시던 새어머니가 말
을 했을 때 난 수화기를 놓쳤다.
"네 아내가 찾아왔어... 널 용서하라구. 모두 자기 잘못이라구.. 근데... 얼굴빛이 정말 좋지
않더라.
그래서 난 ..너와 헤어진줄 알았지 뭐냐.. 아무일 없다면 됐다. 그만 끊는다."

불켜진 집을 바라보며 난 아파트 단지내에 있는 놀이터에 앉아 있었다. 남편이 와 있는 모
양이다.
그네에 앉아 앞뒤로 움직이며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남편을 똑바로
쳐다보려면.. 강해져야 하니까. 그 얼굴을 보면서.. 영원한 이별을 얘기해야 하니까.

띠리리..
벌써 두 번째였다. 신호음이 울려 수화기를 집어들면 전화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이번에
도 그냥 끊었겠지 하면서 전화를 받았는데 뜻하지 않게 친구인 준호자식이었다.
"왠일이야."
"아직.. 안 잤구나."
"응. 무슨 일이냐. 이 늦은 시간에."
"그냥... 갑자기 네 생각이 나서."
"그래? 고맙다. 근데 지금 나 전화받을 상황이 아니거든. 다음에 다시 통화하자."
끊으려는 데 준후자식이 급하게 날 불렀다.
"왜?"
왈칵 짜증이 솟았다. 그 바람에 퉁명스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미안.. 내가 지금 신경이 날카로워. "
"태준아.."
"그래...말해라."
"날..용서해 주겠니? 날 용서해 줄 수 있겠니? "
"왜 이래!! 지금 농담이나 주고 받을 생각이라면.. 이만 전화끊는게 좋겠다. 나 지금 그럴 기
분이 아니거든."
상대쪽에서 갑자기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깐동안 침묵이 흘렀
다.
"여보세요!!"
"너..그럼 알고 있구나..벌써 알고 있었어..."
그 순간 내 시선이 앞에 놓인 주사기로 향했다...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히며 두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뱉었다.
"난.. 그녀를 막을 수가 없어. 죽음으로 가고 있는 그녀를 막을...힘이 없다구.."
아..힘없이 수화기가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수화기에서
준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난 다시 그 수화기를 집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시선은 아예 주사기에 고여 있는 피 에가 멈추어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반복하고 있었
다.
"그녀가...죽는다구? 내 아내가 죽는다구?"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쇼파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까지 갔다.
하지만 아내가 들어섰을 때에는 도로 쇼파에 앉아 애꿎은 텔레비젼 리모콘
으로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외박하고 들어온 소감이 어때?"
차마 아내와 시선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난 눈물때문에 따끔거리는 눈을
계속 깜박이며 텔레비젼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건.. 당신이 더 잘알고 있을 것 아냐.. "
"새어머니께서 전화하셨어."
"...."
"왜...말하지 않았어? 왜...왜..."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왔다. 그 목소리에 아내에 대한 원망을 담지 않으려
애쓰며 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놀라는 아내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하지만 아낸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
다. 그런 아내를 보니 자꾸만 화가 치밀어 올라오고 있었다.
"당신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래? 그럼.. 어거에 대해서도 말할 필요도 없었겠네?"
탁자위에 놓인 주사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난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창백하긴 하나 여전히 아무런 내색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 그것에 대해서도 난 할말 없어."
"그래? 하지만 난 있어!! 난.. 있다구!!"
자꾸만 흘러내리려는 눈물때문에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데 턱이 가늘게 떨
려왔다.

남편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다..눈물이...난 순간 휘청거렸지만 이내 중심
을 잡고 남편을 똑바로 쳐다보며 서 있었다. 여전히 흔들림없는 시선으로
차갑게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뭔지 말해봐.. "
"언제쯤 말해주려 했니? 언제쯤 말해주려 헀냐구!! 너 죽은 다음에 ?
아님... 네 무덤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 귀신이되어 나타난 다음에.. 나
이렇게 죽을 줄 몰랐지? 하면서..날 놀랠킬 작정이었니? 넌...그렇게 큰 비
밀을 감추고 있었던 거냐구!! 너 혼자 감당하지도 못하면서..너 혼자 아무
것도 못하면서...말하지 않았냐구!!"
"내일이야...당신하곤 상관없는 내일!!"
"지연아!!"
"어제 분명이 말했잖아.. 나 당신하고 헤어질거라구..내가 모를줄 알아?
정현이 그 기집애하고 있었던 일 내가 모를줄 아냐구!! 그 순간부터.. 당신
은 더 이상 나랑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어.. 더 이상..내 남편이 아니라
구!! 알아듣겠어? 나 ..죽을거야..나...날 배신한 당신을.. 평생 용서하지
않으려구..죽을거야.."
짝!!

난 놀란 나머니 쇼파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내의 뺨을 때린 오른손을 부여
잡고 난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래..이젠 더 이상 당신하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네..안그래?"
"지연아.."
"내말 사실이야.. 나 오래전부터 당신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
는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 오기가 생겨서 했어. 근데.. 지금은 그 오기조
차 사라졌어. 더 이상 행복할 이유도, 목적도 없어졌어.왠줄 알아?
당신이라는 사람이..지겨워졌거든. 당신이라는 남자 알고보니 보잘것 없어
졌거든."
"왜..왜.. 날 이렇게 아프게 하니? 왜..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그러니?"
"나 때문에 자기가 아프다구? 그럼 난? 그럼 난 뭐야!! 평생을 ..당신과 당
신 부모님을 떼어놓은 난 뭐냐구!! 이러지 말자.. 우리 서로 약속했던 것처
럼...서로가 힘들면 헤어지기로 했던 것처럼..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도 않은 것처럼.. 헤어지자.."
울지 않으려 했다. 절대로 울지 않으려 했다. 그를 아프게 하면서 그에게
심한 말을 하면서 난 울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내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난..너와 절대로 헤어지지 않아. 너와 절대로."
"미쳤어!! 당신이 그런다구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아? 그럼 내가 당신에게 매
달릴 줄 알아? 살려달라면서 당신을 붙잡을 줄 아냐구!! 시간 낭비하지마.
이미 늦었어.."

사실대로 말해. 하나도 숨김없이..어떻게 된거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난 거냐구!!"
"태준아.. 미안하다.."
"넌 알고 있었던 거니? 넌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냐구!!"
고개 숙이는 준호의 행동으로 보아 내 예감이 맞는다는 걸 알았다.
"그래...알고 있었어."
"이럴수가!!"
자리에 주저앉는 내 곁으로 준호가 다가와 내 어깨를 잡았다. 난 그 손을
거칠게 뿌리치면서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망설이면서 입을 여는 준호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난... 그때의 아내의 심
정을..느낄수가 있었다.

-준호의 회상-

"준호씨!! 나 왔어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지연의 모습을 보고 난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 서른
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인데도 아직도 소녀같은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서 들어와요."
"준호씨.. 나 진찰 좀 해줘요."
얼굴에 웃음꽃이 핀게 좋은 일을 숨기고 있는 듯 보여 준호 자신도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어떤 진찰요? 지연씨 어디 아파요?"
"아뇨.. 그냥.. 한번 해보고 싶어요.. 산부인과.."
그제서야 난 지연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게 되었다. 그래.. 저 표정.. 내 아
내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지.. 큰 아들을 임신했을 때..
"그런데 왜 날 찾아왔어요? 그 정도는 태준이 자식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 남편은.. "
순간 지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 사람.. 아예 의학 서적이란 서적은 모두 버렸어요. 그런 사람에게 어떻
게.. 이런 부탁을 해요.."
"그 녀석이..."
"화낼 필요도 없어요. 모두 제 탓이니까.. 학교를 마칠때까지.. 기다렸어
야 헀는데...그러면 어머님도 그렇게 완고하진 않으셨을 텐데.."
"지연씨.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래요. 이젠.. "
난 우울해 있는 지연과 함께 혈액 검사실로 갔다. 초음파보단 산모의 건강
상태를 먼저 알수 있으니까. 임신인지를 정확하게 알수도 있는 방법이니까.
그때까지.. 난 그녀에게 숨겨진 비밀이 단순한것으로만 알았다.
아니. 그녀에게서..웃음을 빼앗아 갈줄은 정말몰랐다.. 정말...

"지연씨?"
"준호씨.. 다시 한번 말해줄래요?"
검사 결과에 넋이 나간 지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조차 나지 않은
난 다시 한번 조그만 소리로 되풀이했다.. 악성..빈혈이라구....
"나..나.. 갈래요.. 나 간다구요..준호씨..나 좀 일으켜주세요..나 좀 일으
켜 달라구요.."
"지연씨!!"
"나.. 준호씨 보러 온거 아니예요. 나 준호씨 보러 온거 아니라구요!! 나..
나..나...어..흑~!!"
손으로 얼굴을 가린 체 복받쳐 오는 충격을 감싸안은 지연의 손등에서 눈물
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연씨.. 치료만 받으면 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치료를 받는다구요? 그럼 나 정말 살 수 있어요?"
"그래요.."
"남의 피를 내 몸에 넣어가면서요? 항암치료에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가면서
요? 아님.. 방사선으로 내 몸이 썩어들어갈때까지요?"
"지연씨!! 그건.. 먼 훗날 얘기예요."
"먼 훗날요?"
말을 잘못 했다는 걸 알고 지연일 설득하려는 데 갑자기 그녀가 병원을 빠
져나가고 있었다. 뛰어가 그녀를 붙잡는데 그녀가 몸을 홱 비틀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요..제가 연락할께요..내가 연락할께요.."

준호가 입을 다물었다. 침통한 표정으로 있는 그를 보니 내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면서 아픔이 비슷한 감정이 일어났지만 난 그를외면했다.
"그게.. 벌써 일년이 지났어.. 그 후에 몇 번 찾아와 약이나.. 기본적인 치
료를 받았어.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발길을 ...끊었어..그게 얼마나 위
험한지 그녀는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야.."
"무슨 말을 하든? 아내가 무슨 말을 했어?"
"너에겐 절대 말하지 말라고만 했어..."
"이런 제기랄!! 이런 제기랄!!"
난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병원을 나왔다. 그리곤 정신
없이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이대로 죽게 하지 않을거야.이대로 당신
이 내곁을 떠나게 하지 않을거라구!!

"준호씨.."
"어? 지연씨! 여기 왠일이세요? 오늘 부부가 약속이라도 했나봐요. 태준이
자식도 절 만나러 왔더라구요.."
"왜 그이에게 말했어요. 왜 그 사람에게 말했냐구요!! 왜 날 나쁜 여자로
만들어요.. 준호씨..날 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냐구요!!"
"지연씨.."
흥분해 소리치는 날 끌어안은 준호가 시끄러운 병원 복도를 지나 옥상으로
올라가는 비상 계단 쪽으로 이끌었다.
"지연씨가 이렇게 시간 낭비하는 게 안타까워서 그래요. 그 자식이라면..지
연씨를 설득 시킬 줄 알았어요. 아니 그렇게 해야돼요. 이건 의사로서의 충
고예요. 어제처럼 그렇게 또 한번 쓰러질 때마다.. 시간이 줄어들어요.
지연씨 그 녀석 사랑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 남겨두고 떠날 자신 있어요?
그 자식 지연씨 떠나면.. 모든 걸 잃게 돼요..왜 지연씨 욕심만 채워요?
왜 혼자의 아픔으로 돌리려 해요. 두 사람이 함께 겪는 아픔이 되어야 해
요. 그래야.. 지연씨가 살아갈 수 있어요."
"충고예요? 의사로서의 충고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날 비난하고 있네
요."
"지연씨!! 언제까지 그에게 숨길작정이었어요? 곁에서 늘 보는 사람에게 얼
마나 더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소리치는 준호와는 다르게 난 차분해져 갔다.
"우리..이혼해요..그러면.. 그는..내가 아프다는 것도..죽어간다는 것도 모
를거 아니예요!! 우리.. 헤어지면.. 더 이상 나때문에 그 사람 아파하는
일 없을 거 아니예요!!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예요. 준호씬 몰라요..
여자인 내 심정이 어떤지를...새엄마가 되고 싶은 게 어떤건지..준호씬 이해
하지 못해요."
준호는 더 이상 내 팔을 붙잡지 않았다. 난 유유히 병원을 빠져나갔다.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어젯밤 처럼 또 다시 남
편에게 심한말을 퍼붓고 그의 눈에 눈물을 나게 하더라도..남편과 헤어지리
라 다짐하며...

"지연아.."
현관문을 열고 난 또 다시 환상에 사로잡혔다.. 예전처럼 날 반기는 아내
를 그리며 난 허공을 바라보았다. 텅빈 집안에 내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걸
듣고 있으면서 내 확신이 점점 굳혀지는 걸 느끼면서.
아내의 빈자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행주를 헹구던 내 손이 멈추었지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예전처럼 그렇게 웃으며 아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
며 고개를 돌리는 데 시간이 참 많이 필요했다.
"이제 왔어? 밖에 날씨가.."
"뭐하고 있는 거야?"
"응.. 저녁 식사. 갑자기 된장찌게가 먹고 싶어서.. 어서 씻고 와. 내가
상 차릴테니까."
"입맛없어. 당신 혼자 먹어."
"에이.. 그러지 말고 어서와 같이 먹자. 차린 사람의 성의가 있지.."
방으로 들어서는 아내를 붙잡고 부엌쪽으로 이끄는데 갑자기 아내가 내 손
을 거칠게 뿌리치는 게 아닌가. 놀란 내 얼굴을 노려보는 아내의 눈동자
를..난 그날처음 봤다.

"누가 당신보고 이런 일이나 하래? 그럼 내가 당신에게 돌아올 것 같아? 정
신차려, 황 태준!! 당신 바보야? 나 더 이상 당신 사랑하지 않아?
당신 사랑하지 않는다구!! 그러니까 이딴 아부따윈 하지도 마!! 당신이 보
기 싫으니까. 내 앞에서 실실대고 있는 당신이 보기 싫으니까!!"
난 잔인한 말로 남편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그 어떤것으르도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내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난 고개를 돌리거나 남편의
맑은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았다...
"네 병때문이니? 네 병때문에 날 거부하는거냐구!!"
"알면서 왜 물어? 그래.. 나 곧 죽어. 그게 지금 내가 받아들여야 할 내 운
명이야. 힘들어 하는 나에게 당신이란 존재는..독약과도 같아.
병째 들어마시고 콱 죽고 싶을 만큼 달콤한 독약이라구!! 고통받지 않고 죽
기만을 바라는 내 앞에서..당신의 그 웃음이..날 더 비참하게 하고 있어.
두렵기만 한 죽음앞에서 어떤 심정으로 당신을 보는 지 알아? 내일 당장 죽
는다면.. 차라리 낫지... 하지만.. 내 병은 그런게 아니야.. 뼈를 깍는 듯
한 고통속에서 몸부림 치면서 서서히 죽음을 받아들여야 해..내 그런 모
습..당신에게 보이기 싫어..그러니 나에게서 떨어져!! 내 인생에서 사라지
라구!!"
"좋아..그럼..나하고 같이 가!! 나하고 같이 가자구!!"
거칠게 내 손을 잡고 밖으로 이끄는 남편을 따라 간 곳은 아파트 단지 앞
에 있는 철도 건널목이었다.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남편은 내 손을 놓았다.
"죽음을 선택했다구? 나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다구? 나에게 고통스러워 하
는 모습 보이기 싫어 죽음을 선택했다구? 좋아.. 선택이 무언지 보여주겠
어. 당신이 말하는 그 잘난 죽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겠어!!"

"태준씨!!"
"잘봐!! 잘보라구!! 당신때문에 죽는 날 지켜보면서...당신때문에 선택한
죽음이 어떤것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란 말이야!!"
건널목 철길위에 서 있는 남편을 보았다. 두 팔을 벌린 체 나를 향해 서 있
는 남편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철도위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올것만 기차의
기적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 철로위에서 벗어나
지 않은 체 계속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자 보라구.. 당신이 말한 내 심정이 어떤것인지 직접 느껴보라구..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당신의 모습을 보란 말이야!! 어서!!"
"태준씨!! 어서 내려와요!! 기차가 온단 말이예요!!"
"싫어.. 당신이 죽으면.. 어차피 나도 죽을거란 말이야..당신이 죽는 걸보
느니 차라리 내가 먼저 죽겠어.. 당신이 그랬지?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죽
는다구? 좋아. 나도 이 자리에서 저 기차에 치여 죽겠어. 당신에게 복수할
거야.. 왜...힘든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지...어떻게 쉽게 목숨을 내놓을 수
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당신때문에 죽는거야..."
기차가 출발했는지 요란한 기적소리와 함께 철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점점 기차가 모습을 드러내고 철로위에 있는 남편을 향해 위협적인 기적소
리를 울려대고 있었다.
"테준씨!! 제발..내려와요..제발.."
"말해!! 말하란 말이야!! 날 위해 살거라고 말하란 말이야!! "
"그..래요.. 살게요..나..나..살고 싶어요..정말 살고 싶단 말이야.."
어느새 난 따뜻하게 날 감싸안고 있는 남편의 품에 안겨있었다. 아슬아슬하
게 기차가 남편의 뒤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당신은 살 수 있어. 곁에 내가있으니까. 당신 곁에 내가 있으니까."
"나..무서워요. 당신과 함께 그끔찍한 고통속을 헤매야 하는게 겁이나요.
나중에.. 당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게 될까봐 그게 겁이나요.. 날 원망할
까봐..날 미워할까봐..겁이나요.."
남편은 대답대신에 있는 힘을 다해 날 꼭 끌언안았다.. 그리고 난..병원에
입원했다. 남편은 아예 회사를 그만 두고 병간호를 하는 틈틈이 다시 공부
를 하기 시작했다.

"너라면 해 낼수 있다고 했다. 지연씨라면.. 널 다시 내 세계로 들여보낼
수 있을거라 했다.. 축하한다... 태준아. 너와 함께 이길을 걷게 되어 기쁘
다."
준호의 말에 쑥쓰러워 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내 눈가가 촉촉히 젖어들고 있
었다. 하루하루 힘든 병원 생활에 이젠 익숙해져 가고 있는 남편과 나..
이젠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남편 혼자 두고 멀리 떠날거라는 바보같은 생
각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아직도 난 가야할 길이 너무 많
이 남아 있었다. 그 길이 어쩌면 혼자만이 걷게 될지도 모르는 험한 길이
될지도 모른다. 지치고 힘들때 손을 내밀어 잡아줄 사람이 없는.. 그길이
날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난 그때에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겠지? 날 사랑하는 남편이 있으니까... 난 그렇게 믿었다.
어쩌면 그렇게 믿었는데....

"태준아. 나좀 잠깐 보자."
"무슨 일인데?"
"지연씨하고 맞는 골수를 찾았어."
"그래? 어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런 인사는 아직 이른것 같아."
"무슨 소리야? 아내에게 맞는 골수만 있다면 당장 수술해도.."
준호가 고래를저었다.
"아니. 여러가지 조건이 맞아야만 해. 지금 상태로는 몇 시간에 걸릴지 모
르는 수술을 하기엔 지연씨가 너무 약해. 그리고 자꾸...합병증 비슷한게
보여."
"아냐, 그럴리 없어. 건강하단 말이야.너도 봤잖아. 식사도 매일 꼬박꼬박
하고 있는데? 아프다고 한적도 없단 말이야!!"
"눈으로 보이는게 다가 아닐때도 있어. 특히 지연씨 같은 경우에는.."
"너 이자식!!"
"미안하다.. 약물에...반응을 안 보여..."
누군가 세게 머리를 내리쳤더라도 이정도로 아프진 않을것이다. 비틀거릴
정도로 몸에 힘이 쫘악 빠지는 게 느껴졌다.
"무슨 뜻이야? 약물반응이 없다면?"
"수일내로 다시 한번 검사 받아보자."

아내는 편안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다행이다. 아내를 똑바로 쳐다볼수
도 없었을 텐데.. 난 잠든 아내의손을 잡았다.병마와 싸우는 아내의 모습
이 이렇게까지 아름답게 느껴질줄은 몰랐다.
"당신.. 꼭 이겨내야 해.."

"아, 맛있다. 정말 밥이 너무 꿀맛 같아요. 나 나중에 퇴원해도 이곳 음식
을 찾을 지도 몰라요. "
오늘도 난 밥을 다 먹었다. 한입한입 입안으로 음식을 넘길때마다 구토증세
에 시달려야 했지만 내 앞을 지키고 있는 남편 때문에 억지로 삼켜야 하는
날이지만... 그리고.. 미소도 잊지 않았다.내가 웃을 때마다 남편의 그늘
진 얼굴에 잠깐이라도 빛이 보이니까.
"우와.. 정말 다 먹었네..."
"그럼.. 당신은? 당신도 먹고 와야지.."
"그래..그래야지..."
하지만 남편은 병실을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할말이 남은 듯
계속 침대 주변을 서성이는 남편을 내가 붙잡았을 때 그 눈에 얼핏 스친 두
려움..
"당신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아무것도.. 아, 배고프다.."
"여보!!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숨기는 거 없기로 했잖아."
그제서야 남편이 내곁에 앉았다.깊은 한숨과 함께 내 손을 가슴께로 끌어
다 놓고는 남편이 입을열었다.

"당신에게 맞는 골수가 있대."
"우..정말?"
"그래..하지만..."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는 듯 남편이 망설였지만 난 더 이상두려울게 없는
마당이다. 남편이 무슨 말을 하든지 모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뭐?"
"수술을 받기에.. 당신이 너무...버겁대. 준호 자식.. 아무래도 돌팔이인가
봐.. 당신 건강한데 말이야.. 이렇게 웃고 있는데..밥도 잘먹고..아프지도
않잖아..그렇지? 준호 그 자식이 잘못한거지?"
그때 난 더 이상 남편에게 웃음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옷속에 감쳐진..내
아픔들이..남편을 더 힘들게 할까봐..난 입을 다물수 밖에 없었다.
"지연아?"
"응?"
"당신 정말..정말로...건강한거지? 그런거지?"
목안에 뜨거운 것을 삼킨 것마냥 화기가 일었다. 남편에게..자신있게 대답
을 못하는 나..끝까지 남편에게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 완전히 거짓말 쟁
이 되어..남편을 속여야 하는 데..그러기엔 나 이 남자를 너무 사랑한다.

"미안해.. 태준씨.."
"악!!"
내가 내지른 비명에 아내가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뺨위로 쉴새없이 눈물
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아내가 내민 팔에 나 있는 수많은..멍 자국.
전처럼 괜찮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 나. 시퍼렇게 멍이 든 그녀의 몸을 똑
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체 고개를 돌리는 나..
"이것만 빼고..나 너무 좋아..나 그냥 주사 바늘 때문에 이렇게 된거라 생
각할래..나처럼 태준씨도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응? 그렇게 생각하
자. 우리..여기서 눈물 보이면 어떡해? 응? 태준씨.."
"그...그래..그래..그럴게...나...그럴께.."

"준후야.. 어떻게 된거니?"
"그래.. 그럴 줄 알았다..봤니?"
"나.. 솔직히 보지 않았으면 했다.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
만을 믿고 싶었다..하지만..내 눈으로 보는 순간 나..아무말도 할 수가 없
었어..그녀에게 나보다 더 고통스러울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
다구!! 이런 젠장!!"
"너도 봤듯이..지금 그녀는 골수보다 더 급한게... 혈소판 부족으로 나타나
는 부작용이야..수술을 한다해도.. 출혈을 막아줄... 혈소판이 부족하면."
"그래서 온몸이 멍 투성인거야? 그래서..이유도 없이 멍이 드는거냐구?"
"그래..오늘 저녁부터.. 혈소판 수혈에 들어갈거야.. 네가 지연씨에게 말할
래?"
"아니.. 그녀에게 말하지 마..이번은 그냥.. 묻어두자."
"그래.."
비틀거리면서 병원 복도를 걷는 친구의 뒷모습에 준호는 눈시울이 뜨거웠
다.

그대는 나만의 여인이여
보고 또 보고 싶은 나만의 사랑

그대는 나만의 등불이여
어둡고 험한 세상 밝게 비춰 주네요

그대여 지금껏 그 흔한 옷 한 벌 못해 주고
어느새 거칠은 손 한 번 잡아 주지 못했던
무심한 나를 용서할 수 있나요 미안해요

이 못난 날 만나 얼마나 맘 고생 많았는지
그 고왔던 얼굴이 많이도 변했어요
내 맘이 아파요

그대는 나만의 여인이여
아직도 못 다한 말
그댈 사랑해요

그대의 생일날 따뜻한 밥 한 번 못 사주고
그대가 좋아한 장미꽃 한 송이조차 건네지 못했던
나를 용서할 수 있나요
미안해요

사는 게 힘들어 모든 걸 버리고 싶었지만
그대의 뜨거운 눈물이 맘에 걸려
지금껏 살아요

그대는 나만의 여인이여
아직도 못 다한 말 그댈 사랑해요
--------------------------------------------------------------김 건모 7집
(미안해요 중)----

가냘픈 팔에 수많은 주사자국을 남겨 주어 미안해진 난 잠든 아내의 머릿곁에 이 노래를
바쳤다.
나만을 믿고 살아온 지난 7년이라는 세월 동안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 노래를 아내에게
바쳤다.

요즘들어 나도 모르게 남편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었다. 침대에 누
워있을 때나.. 내 곁에서 내 손을 꼭 잡고 기도를 하는지 눈을 감고 있는
남편의 모습.. 하지만 남편은 모른다..난 남편의 모든 것을 좋아하지만 단
한가지 제대로 볼 수 없는 곳이 있다는 것을...
그곳만큼은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다. 그곳을 보면..나도 그곳으로 깊이 빠
져들어갈 것만 같아서. 그곳에 빠져 더 이상 빠져나오지 못할까봐서 문득문
득 겁이난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들 때마다 나 보다 더 아
파하는.. 남편의 눈동자. 아무것도 해 줄수 없음에 슬퍼하고 있는 남편의
눈동자를 오늘도 피했다. 어디 아픈곳이 없느냐고 물을때마다 그 눈은 말한
다.. 대신 아파할수만 있다면.. 너 대신 내가 아파할수만 있다면..하고.

문병온 친구가 놓고간 어떤 잡지에서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는 부부의
기사를 보았다. 하지만..나와 다른 점은..그의 아내는 이미 세상에 없다는
것과..난 아직 사랑하는 남편의 곁에 있다는 거다. 아..다행이다..
그 기사는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를 애처럽게 바라보며 영원한 사랑을 다짐
하는 남편의 일기로 되어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아내를 품에 끌어안을때마다 금방이라도 사라지지 않을까 겁
이난다는 남편...아마 우리 남편도 같은 마음이겠지?
아내는 지치고 힘이들때마다 남편에게 키스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마지막 순간에서도 아내는 남편에게 길고 긴 이별의 키스를 부탁했
다고 했다...난 그들의 기사를 남편 몰래 찢었다. 혹시라도 남편이 이기사
를 보고..불안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도..그의 아내처럼 홀연히 사라지지나 않을까..불안해 할까봐...

아내는 잘 참고 있었다. 간간이 찾아오는 통증에도 희미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여유까지 보이며 말이다. 하지만 난 그런 아내를 볼때마다 내 뼈마디
가 다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 고통이 어떤지 난..아내의 눈을 통해 보고 있
으니까..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나에게 속삭이는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을때가 많았지만..난 연신고개를 끄덕이며 아내를 안심시킨다.
그럴때마다..그녀가 고통속에 있을때마다..조금씩 아내를 이해하고 있다.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냐구.. 소리쳤던 지난 시간을 이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마음이 아프다. 자신의 아픔보다 내 아픔을 먼저 생각했던 아내
의 마음을..이젠 알 것 같다...

"여보.."
"응?"
"나 약속하나 해도 돼?"
"약속?"
"응..약속.. 그냥.. 당신에게 주고 싶은 약속말이야.."
"그래..말해봐."
아내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비록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을 보고 있
는듯 난 아내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만약 다 낫으면...다시는 당신 아프게 하지 않을께..나..이것만은 꼭
지킬께..그 약속 지키기 위해..나..꼭 이겨낼께.."
더 이상 말이 필요없었다. 난 주사바늘이 꽂아있는 아내의 팔을 조심하면
서 아내가 누워있는 침대로 올라갔다.
한팔로 안아도 될 정도로 마른 아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아내가 깊은 한
숨을 쉬는 게 느껴졌다.
"우리..앞에 그 어떤 장애물도 나타나지 않았으면..좋겠어..태준씨.."

모 방송에서 백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우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빡빡밀은 머리와 약물 부작용으로 퉁퉁 부은 얼굴과 손.. 그리고 앙상하게
마른 가슴. 어린 환자들이 그 무서운 백혈병과 싸우고 있는 모습에 같은 병
실에 있던 환자들도 눈시울을 적셨다. 골수만 있다면.. 내 나이에게 맞는
혈액이 있다면... 그 어린것들을 간호하면서 방송에 오열하며 부르짖는 어
머니들의 눈물에..나와 남편은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으니까.. 준호씨를 통해 들었다. 나에게 맞는 골수를 가
진 사람이 나타났다구.. 그래서 빠른 시일내에 수술에 들어가면..나 온전
한 사람이 된다고 그랬다.. 남편과 난 그렇게 희마을 갖고 하루를 보냈다.
오늘의 무사함에 감사하며.. 같이 있음에 행복하며..
하지만..난 남편의 공허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자꾸만 자꾸만 멀어져가
고 있는듯한 남편의 눈동자가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물어볼수도 없어.. 그저 남편이 먼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선배.. 나 좀 만나요.. 이렇게 날 외면하면.. 내가 너무 비참하잖아요..
그렇게 꼭꼭 숨을 필요가 없잖아요!!"
정현의 음성메세지였다. 흔들리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자꾸만 신경에 거
슬렸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몇번 그녀가 음성을 남겼지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짝 사랑이
란.. 금방 끝나니까. 하지만 오늘 남긴 메세지는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울고 있는걸까? 아님 술에 취한 것일까..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음성이 왔
다. 이런 젠장!!
"태준씨? 무슨 생각을 해요?"
아내가 내 손등을 두드렸을 때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갑자기 고개를 들수
없을 만큼의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아파하는 아내에게 차마 정현의 일을
말할 수가 없다.
"응.. 그냥.. "
삑삑!!
핸드폰의 메세지 경고음이 울렸다. 그 소리에 아내가 내 얼굴을 바라보는
바람에 당황했다.
"왜?"
"확인 안해요?"
"어.확인? 확인 해보나 마나지.. 아마 과장님이나.. 동료들이겠지.. 그동안
소식을 끊고 살았잖아."
"그래도.."
"됐어.."

- 나.. 죽을 것만 같아요.. 선배가 날 외면할때마다... 나 죽을 것 같단 말
이예요...-
문장 메세지였다. 난 잠든 아내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병실을 나섰다.
정현에게 가야겠다. 가서.. 그녀에게 말해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에 신경쓸 여유가 없으니까 ..


"선생님.. 죄송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봐요, 김 선생!! 이러면 어쩌라는 겁니까? "
"죄송합니다. 그럼 전화 끊을께요."
이미 끊어진 수화기를 붙들고 몇번이나 상대방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준호는 욕설과 함께 수화기를 집어던졌다.
"이런 젠장!! 이런 젠장!!"

"선배..나 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바보처럼..나 끝까지 여기서 선밸 기다
릴 작정이었거든요..웃기죠?"
이미 테이블위엔 빈 술병이 몇개 놓여 있었다. 촛점이 없는 정현의 눈동자
가 술에 취해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어서 앉아요.. 저번에는 괴로워하는 선밸 위해 내가
술을 따랐죠?이번에는.. 선배가 술좀 따라주세요.. 사랑때문에 괴로워하는
절 위해서요."
빈 술잔에 술을 따르며 난 정현의 흐트러진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번도 이
런 모습을 보인적이 없었다. 언제나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나에게 보여
졌던 그녀였다.
"선배. 알고 있어요? 나 지연언니한테도.. 말했어요. 선밸 사랑한다구.. 근
데 지연언니 바보처럼 그냥 나가버리더라구요..바보같아..나라면.. 선배
내 남자니까.. 얼씬도 하지말라고 할텐데..그 언닌 그냥 가버렸어요..
선배..나..나..정말 미칠것 같아요..선밸 자꾸만 욕심내는 내 자신 때문에
미칠 것 같아요.. 선배 아니면 안될 것 같아서..미칠 것 같다구요!!"
술잔을 소리나게 내려놓은 정현이 살며시 나에게 기대왔다.
"지연언니 아프다는 얘길 듣고..저 참 나쁜 생각 많이 했어요...나 정말 그
랬어요..하지만..나 미워하지 말아요.네? 선배!!!"
"너무 취했어. 어서 일어나. 집까지 데려갈테니까."
"싫어요!! 조금만 있어요,네? 조금만..곁에 있게 해줘요.."

"태준씨..태준씨..윽!!"
통증이 찾아왔다.. 팔과 다리가 뒤틀리면서 통증이 찾아왔다. 몸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정도로 너무너무 아팠다. 살려달라구 소리치고 싶었다.
나 좀 살려달라구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내가 기억하는 건...곁에 있던 남편을 찾아 손을 내밀었을 때 텅빈
허공만이 내 손에 닿았는 것....

"지연씨..지연씨.. 정신 좀 차려요!! 정신 좀 차리라구요!! "
누군가 심하게 내 가슴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자꾸만 잠들려는 날 깨우고
있었다. 뜨기 싫은 눈을 간신히 떴다. 그리고.. 공포감에 떨고 있는 준호씨
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지연씨!! 정말 이대로 눈을감고 싶어요!! 이대로.. 떠날거냐구요!!
제기랄!! 이대로 보낼 수가 없단 말이예요!! 정신 차려요!! 제발.. 제발 눈
좀 다시 한번 떠봐요. 그리고 날 봐요!! 어서!!"
하지만.. 지연이는 눈을 뜨지 않았다.. 심장이 멈추었다. 혈압이 내려가고
있었다.......
"지연씨!! 지연씨!! 태준이 자식에게 아직 이별도 얘기하지 않았잖아요!!
제발..제발.. 이러지 말아요!! 지연씨, 어서 눈을 떠요!! 어서!!"
준호는 미친듯이 지연의 심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다시 호흡할수만 있다
면... 다시 눈만 뜰수 있다면!!

삐삐..119
태준은 정현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 바람에 비틀거리며 정현이 길 바닥
에 쓰러질뻔했지만 그는 얼른 정현을 붙잡아 웨이터에게 넘겼다.
그녀의 주소가적힌 종이를 건네고 정신없이 술집을 빠져나갔다.
아주 잠깐이었는데.. 지연아..아주 잠깐동안에.. 네 곁을 떠난 것일 뿐인
데..왜 이러니? 왜이러니? 정말..왜 이러니...

"지연씨!! 지연씨!! 제발 눈을 뜨라구요!! 지연씨~!!"
이마에서 흐르던 땀이 의식을 잃어가고 있는 지연의 얼굴위로 떨어진다.
"지연씨.. 지연씨!!"
이대로 죽어서는 안된다. 이대로 죽게해선 안된다.. 준호는 다시한번 심장
마사지를 했다.
"지연씨..가려면.. 조금 있다가요.. 태준이 얼굴은 보고 가요!! 그렇게 하
란 말이예요!! 눈을 뜨고 태준이 얼굴 봐요!! 그 녀석은..보고 가야죠!!"
긴장감이 흐르는가운데 몇초가 흘렀다. 준호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지연이
의 몸에 연결되어 있는 기계의 움직임을 기다렸다.제발..제발...
잠시후...기계의 움직이 시작됐다.아주 천천히..떨어졌던 혈압과... 심장박
동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요..지연씨..그 녀석은 보고 떠나야죠..그녀석은.."
준호가 비틀거리면서 자리를 뜨자 재빨리 곁에 있던 간호사가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아준다. 하지만 준호는 그 손을 거절한다.
"그 자식에게 연락해봐요..어서.."

또 다시 호출음이 울렸을 때에는 택시가 막 정문앞에 멈춰섰을 때였다.
아무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미 그의 몸이 알고 있었다. 그는 중환자실 문
을 밀치고 들어갔다. 거기서..고개를 숙여 울고 있는준호의 모습을 봤다.
하나같이 슬픈 얼굴로 침대쪽을 바라보고 있는 간호사들이 보였다.
"그..그럴리 없어!! 그럴리가 없다구..그녀는 산다고 했는걸...나에게 그렇
게 약속했단 말이야!!지연아..."
천천히 침대 곁으로 다가간 난 창백한 아내의 혈색을 보는 순간 고개를 돌
렸다. 이렇게...현실을 외면할 수만 있다면..그럴수만 있다면...
"아마..각오는 해야될 듯 싶다.미안하다.."
"이런!!"

"지연아...이렇게 누워있으면 어떡해? 왜 이렇게 잠만 자고 있는거야?
벌써 내곁을 떠날려구? 이렇게 쉽게 날 떠날려구...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살기로 했잖아..약속 꼭 지킨다고 했잖아..
나..무서워. 나 무섭다구..지연아..눈좀 떠봐..날 보란말이야..넌 나 안보
고 싶니? 나.. 겁이나 미칠것 같아..이러지 말고 눈좀떠봐..나 슬프게 하
지 않기로 헀잖아..근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해!! 이러면 어떡하냐구!!
한번만이라도..눈 뜨고 날 보면 안돼? 나..그 모습 한번만이라도 보면 안되
니? 지연아...."
아낸 며칠이 지나도록 눈을 뜨지 않았다. 사는게 살아간다는 게 이렇게 힘
겹기는 처음이다.언제 어느순간 아내가 나 모르게 세상을 뜰지 모르는 지
금. 난 그야말로 지옥길을 걷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아내에게 투정도
부려보고 화도 내보지만 아낸 미동조차 없었다. 아니 아예 내 존재에 대해
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아내를 보며..나..아무것도 할수 있는 일
도 해줄수 없는 일이 없다는 게..더 날 미치게 했다.

"준호야.."
"그래.."
"지연이 어떻게 된거니? 저대로 눈조차 뜨지 않으면 어떡하니? 넌 알고 있
을것 아냐!!"
담배꽁초가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할일은 다했다..이젠 남은 건 그녀의 몫이야. 눈을 뜨느냐..아님 이
대로 잠이 드는냐!!"
"너 이자식!!"
준호의 멱살을 잡고벽에 밀어붙였다.
"그게 의사로서 할말이냐!! 네가 할일이 뭔데? 네가 할일이 뭐냐구!!
환자가 저러고 있으면...의사인 네가..어떻게 해서든 깨워야 하잖아!! 이
자식아!! 지연이 살려내란 말이야!! 우리 지연이...살려 내란 말이야..."
"이손 놓고 얘기해."
잡은 손을놓고 난 친구에게 한걸음 떨어졌다.
"다행히 지연씨는 뇌사상태가 아니다..그건.. 1퍼센트의 확률을 말하는 거
야.. 의식만 깨어난다면.. 수술이 가능하단 말이지.물론 전보다 확률이 낮
아지지만... "
"확률이 낮아진다면?"
"그래... 골수 이식을 한다해도.. 재발 가능성이 많다는 거야. 너도 알잖
아. 이런 병은 재발하면... 그 순간은 끝이난다는거.."
"골수 이식? 그거면...살수도 있단 말이지?"
"그래.. 지금 지연씨 혈액에서는 거의 체취가 되지 않고 있는 혈액을 구성
하고 있는 여러가지들이 골수에서 재생되고 있으니까. 지연씨 골수는..이
미 제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고 보면돼."
"살수는 있단 말이지? 정말 살수는 있단 말이지?"
준호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제겨우 희망을 갖는 친구에게
말을 해야했다...그 말때문에.. 또 한번의 좌절을 겪어야 하지만.. 사실은
말해야 한다.
"근데.. 그게 말이야.."
난 말끝을 흐리는 친구녀석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표정이 아까보다 더어
두웠다.
"골수..이식자가..도중에.. 포기하는 경우도 있어.. 그러니까 말이야.. 마
음을 바꿀수도 있다는 거지.. 그러면 우리 병원측도 강요는 못해. 그건 본
인의 자유의사로서..선택하는 거니까....내말은..."
"설마..설마..너..너.."
"그래..어제 오후에 연락이 왔더라..외아들인 모양이야...그래서.."
준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작은 희망마저 빼앗긴 태준이가 괴로워하며 소리
를 지르고 있었다.

"그럼..죽는다는 거야? 지연이 죽는다는거야?"
"....."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선 난 준호의 앞까지 바짝 다가섰다.
"그.. 사람 연락처 좀 줘.."
"태준아!! 그건..."
"달란 말이야!! 네가 어떻게 그 사람을 설득시킬수 있겠니? 네가 내 심정
이 어떤지 알지 못하는 데 그 사람을 어떻게 설득시킬수 있겠어!! 내놔.
내가 직접 찾아갈거야.. 무릎이 닳도록 빌라면 빌거야..지연이만 살수 있다
면..."
"태준아 그건..현명한 방법이 아냐. 그 사람이 널 구속할수도 있다구!!"
"구속? 구속이라 했니? 넌.. 그 구속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서 그래..
지연이가 죽으면..그녀가 죽는다면..나 어차피 그녀의 그림자에 묶여지내
게 돼..그게 바로 구속이야!! 벗어날수 없는 구속이란 말이야!! 어서 그 사
람 연락처를 줘..내가 직접 찾아갈거야..내가..살려낼거라구!!"
"태준아!!"
"시끄러.. 난 이미 제정신 아니야..그러니까..빨리 내놔!!"
난 준호의 손에서 쪽지를 건네 받았다...

"죄송합니다.. 약속을 못드리겠어요..그럼.."
"잠깐만요!! 제발 끊지 말아요!!제발 끊지 말라구요.."
"선생님.. 저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의 집에서..."
"제 아내예요..선생님의 골수가 필요한 사람이 제 아내라구요.. 그 사람 살
려야 돼요.. 선생님도 아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 심정 좀 헤아려 주
세요..제 아내..이대로 떠나 보내기엔...너무너무.. 선생님.. 제발..
이렇게 사정할께요.. 그러니.."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전화 끊겠습니다."
"이런 젠장!! 내 아내가 죽는다구!! 당신의 골수가 없다면 내 아내가 죽는
단 말이야!! 고통속에서 내 아내가 죽어가고 있단 말이야!! 젠장!!"
그 사람은 완고했다.너무나...난 아내를 찾았다.

"여보...여보...제발 눈좀 떠봐.. 그냥 눈만이라도 떠봐..아무것도 하지 않
아도 돼.. 내 투정 다 받아주지 않아도 돼..그냥.. 당신 눈만 봐도..나 이
겨낼 것 같아서 그래..나...당신이 날좀 봐줬으면 해.."
아내에게 맞는 골수를찾기위해 최소한 몇달은 걸린다고 했다. 준호의 말에
난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내거라도 줄수만 있다면...
"여보..나..잠깐동안 당신 곁을 떠나있을거야..아주 잠깐동안..
당신.. 이대로 보낼 수 없을 것 같아서..잠깐만 기다려줘..금방 올께.."

"준호야..나.. 잠깐 어디 좀 다녀와야 할 것 같다."
"태준아.너 설마.."
"몰라.. 그녀가 눈을 뜨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그냥 그
런 생각이 났어..나 금방 올께..."
"그래.. 우리 ..아무 생각 않기로 하자. 지연씨에 대한것도.. 그리고 너에
대한것도."
"알았어.."

내가 웅장한 저택 앞에 섰을 때에는 이미 자정이 훨씬 넘은 늦은 시간이었
다. 불이 꺼진 집을 바라보며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손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시간이 없다..시간이...정말 이대로..그녀를 그냥 보낼수가 없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난 반갑지 않은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굳게 닫힌 문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아내의 모습.. 새어머니를 붙잡
고 사정했던 일들.. 아까 병실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있을 때 문득 이런 생
각이 들었던 것이다..지금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내가 아닌 이분들
이 아닐까...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신 부모님들께 마지막으로 할 얘기가 있
던 건 아닐까...

"누구세요?"
아버지였다. 언제나 자신의 편에 서 계실거라 믿었던 아버지.. 결혼문제로
옥신각신 할때 아버지에게 얼마나 많이 배신감을 느꼈던가.. 그런 아버지
앞에서 나 오늘 무릎을 꿇는다...
"접니다."
"..."
"저라구요.태준이."
"왠일이니?"
"절 이렇게 문밖에 세워두실 작정이십니까?"
"돈이 필요한거냐?"
"아버지!!"
"네 새어머니에게 들었다. 하지만 네가 내 부인을 앞장세워 우리 맘을돌릴 생
각이라면.. 일없다. 그러니 어서 돌아가. 넌 이미 내 자식이 아니니까."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주고 서 있는 난 눈까지 감았다. 아버지의 말에
되돌아 가고 싶지만 나에게 물러설 곳은...없었다.
"아버지..아들..저 지금 부탁을 드리러 왔어요. 하지만 그런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일 오너라."
"아버지!! 우리에게 내일이란 없습니다!! 우리에겐 지금 당장의 시간도 없
단 말입니다!!"
삐익___!!
등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한발한발 집안으로 들어설때마
다 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안그러면 뒤돌아 다시는 집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왠일이니? 이 시간에."
"아버지...한번만..마지막 한번만..지연이를 만나주세요.."
"뭐...뭐라구?"
"그녀를 만나달라구요."
"아니 이녀석이!! 제정신이냐!! "
"제발 아버지!! 그녀를..며느리로 인정해 달라구요...말뿐이라도 좋아요..
그 사람을 찾아가 주세요..아버지!!"
난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체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제발 부탁입니다."
"내가 누굴 만나라구?"
"아버지 며느리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시끄럽다!! 네가 기껏 찾아온 이유가 그거란 말이냐? 네 아내가 시키던?
그렇게는 못한다. 절대로."
"아버지!!"
아버진 고개를든 아들의 눈물에 흠칫놀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홱 돌린
다.
"이렇게 잔인한 분이셨어요?이렇게 냉정하신 분이셨어요? 그래요..저 뒤늦
게 아버지에게 숨어있던 다른 면을 봤어요..하지만..하지만..저 아버지를
믿었어요..아버지가 보여주셨던 진정한 남자다움을..그게 어떤것인지 아버
진 저에게 보여주셨잖아요!!"
"흐음!!"
"그딴 헛 기침 따윈 집어치우세요!! 아들이 아버지 앞에 무릎꿃고 빕니다.
아버지...아내가...죽어가고 있어요!! 아내가...지금 당장 죽어가고 있다구
요!! 아버지의 며느리로써 죽고 싶어서..눈도 뜨지 않고 있어요.
자신을 보러 와 줄 두분을 기다리고 있다구요!! 왜 이러세요!! 정말왜 이렇
게 냉정하냐구요!!"
"태준아!!"
가운을 걸치고 안방에서 새어머니가 나오고 계셨다. 하지만 새어머니도 아버지
만큼 냉정하신 분이다..그걸 너무 잘 알고 있는 나다..

"새어머니.. 그 사람 찾아왔을때 한번만이라도 감싸안아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렇게 울면서 보내지 마시고...두 팔 벌려 안아주시지 그러셨어요!!
그 사람..다른 바라지 않았어요. 저와 살면서..의절하신 두분때문에 늘 눈
물짓던 사람이예요..저 하나면..됐던 그 사람인데....죽어가고 있어요..
두분을 기다리면서...새어머니!!"

"그게 무슨 말이니? 아프다니?"
"아내가 ... 아파요!! 당장 내일도 기약할 수도 없는 지경이라구요!!"
굵직한 눈물이 거실 마루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흣음.. 그만 가봐라."
등을 돌린 체 서 계신 아버지의 어깨를 보자 더 이상은 안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됐다. 그만 가거라."
"좋아요. 갑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 기억하세요!! 제 가슴에 못을 박으
셨다면 그건 두분의 아픔으로 돌아간다는 것을요!! 그것만 기억하십시오."
"아니, 이놈이!!"
아버지가 손을 높이 치켜 드셨다. 하지만 눈하나 깜박이지 않고 대응했다.
"때리십시오. 지금 전 그것도 느껴지지 않는 나무토막이 된 기분이니까.
어머님, 아버님을 닮아 저도 냉정한 놈이니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난다해
도 놀라지 마십시오. 그녀를 죽는다 해도 말입니다."

이런 내모습을 지연이는 바라지 않았겠지. 날 낳아주신 부모님께 대못을 박
고 나온 날 바란건 아니겠지... 하지만 지연아. 나 지금 아무것도 생각하
지 않기로 했어. 너만 생각할거야. 지금 이순간 부터 너만 생각할거라구.

누군가 깊은 잠에 빠진 날 깨운다.. 그 손길이 너무나 부드러워 내가 웃고있다는 게 느껴진
다.
누굴까? 누구길래 날 이렇게 부드러운 손길로 만져주고 있는 것일까?
난 그 손길의 주인을 보기위해...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
"어...새어머니!!"
난 봤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렇게 냉정해셨던 분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빼앗아
갔다고 나에게 소리지르셨던 그분이... 너 때문에... 너때문에.. 우리 집안이 이렇게 됐다구...
절망하셨던 그 분이.... 다시는 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고 하셨던 그분이....다시는...남편을 용
서하지 않으시겠다는 그분이.....날 보고 웃었다. 냉정하신 그분이... 나에게 마음을 열지 않으
셨던 그분이.... 한없이 밉게만 보일 나에게..처음으로 웃음을 주셨다..그 분이 나에게...웃음을
주셨다.
"새어머니...."
"왜 말하지 않았니? 왜...우리가 너희들을 아프게 했다고 말하지 않았니? 왜...네가 이렇게 많
이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니?"
"새어머니....새어머니...."
"이젠 됐다..이젠 됐어....널 보러 왔단다..널...다시는 아프지 말라고...다시는...우리 곁을 떠나
지 말라고 그 말을 하고 싶었단다....아가야.....그 말만은 꼭 해주고 싶었어..."
"날 용서해 주시는 거예요? 정말 날 용서해 주시는 거예요? 그런 거예요? 새어머니..새어머니..정
말그런거냐구요...."
난 한발 뒤로 물러서 계신 아버님을 바라보았다. 그분의 완고한 시선앞에서 전처럼 떨지 않
고 당당하게 그분을 바라보았다...나의 아버님..나의 어머님......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틀이 지난 후였다.. 이젠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중환자
실 앞을 서성이는 대 준호 녀석이 빠르게 걸어오고 있는 게 보여 그를불렀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넌 임마. 필요없어!! 너 같은 남편을 둔 지연씨가 불쌍하다.. 자식이 말이야...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말이야.."
녀석이 웃으며 말한다.. 그 녀석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구름이 싹 가신 상태였다.. 그리고 내
가슴에 무겁게 드리워졌던 두려움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무슨...무슨 말이야?"
"말해주긴 싫지만.. 안에서 지연씨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지연이가....깨어났니? 지연이가 깨어났냐구!!"
"그래. 오늘 새벽에 깨어났어."
"정말? 정말?"
"못 믿더우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던지.."
"야!!!"
"그만 소리치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봐."

솔직히..나 그 녀석 말을 믿지 않았다.. 어쩌면 더 큰 슬픔을 감추기 위해..일부러 나에게 농
담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하지만... 그녀가...날 향해 웃고 있는 그녀가 있었다. 그렇게도
보고싶어 하던 그녀의 미소가..그 곳에 있었다.
"지연아!!"
"어디갔다 이제와요?"
난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다시 내곁으로 돌아온 그녀가 그저 고맙
기만 했다.
"이 사람 좀봐.. 나 숨막혀 죽을 것 같아요.."
"다시는... 죽는다는 소리하지마..다신..."
"여보..."
난 울고 있었다..이렇게 살아서.. 내 앞에 앉아 있는 아내가 그냥 고마울 뿐이다..나 혼자 남
겨놓은 체 떠나지 않은 그녀가 그저 고맙기만 했다.

"나...나...용서 받았어요..새어머니께서 오셨어요...내 손 꼭 붙잡고 꼭 살라 그러셨어요..태준씨..
내 말 들어요? 제 말 듣고 있는 거죠?"
"응..."
"나..그렇게 부드러운 새어머니 모습 처음 봤어요..근데..그 모습에 자꾸 눈물만 나오는 거예요..
아마도 새어머니..우리 며느리 울보라고 흉보셨을 것 같아요. 나중에 당신이 잘 말해 주세요.나
울보아니라구..
여보...나 이제..살고 싶은데 어쩌죠? 나.. 정말 살고 싶은 데 어쩌죠? 자꾸만 불안해요..
나 이제껏 좋은 며느리 한번 되 드리지 못했는데..어쩌죠? 아버님께 귀여움 한번 못 받아봤
는데 어쩌죠? 내 손으로 한번도 식사를 못 해드렸는데 어쩌죠? 어머님하고..같이 쇼핑도 하
고...가볼곳이 너무 많은데...어쩌죠? 당신이 도와줘요..당신이.. 날 살려 달라구요..나 정말 살
고 싶어요....네, 여보?"

무슨 일이니?"
갑작스런 준호의 호출에 놀란 난 다짜고짜 그녀석앞에 섰다.
"놀라운 소식 하나 알려줄까?"
"놀라운 소식?"
"그래..자식이 말이야..복도 어지간히 많다니까..세상에 너처럼 못된 놈을
사랑하는 여자 있을까 싶었는데... 지연씨가 나타나질 않나..."
"용건이나 말해."
친구의 말에 기분이 나쁜 난 눈쌀을 찌푸렸다.
"너 나중에 술사야돼. 매일매일.. 지연씨에게.. 잘해줘야 하고."
"매일매일?"
"그래. 그녀가 싫증만 내지 않는다면 말이야. "
"설마..그럼?"
친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갔다..
"축하한다..그녀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어.. 모든 게...그리고.. 이건 정
말 정말.. 다행이야...그녀에게 맞는 골수를 찾았다. 오늘 저녁에 수술 들
어간다.."
"정말? 이게 꿈은 아니지...그렇지? 오 이런!! 이런..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한대 때려줄까? 그래야 네가 꿈속을 헤매지 않는 다는 것을 알지."
친구의 장난기에 난 오랫만에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는 웃는 일이 없을거
라 생각했던 내가 눈물까지 흘리며 웃고 있다.
"아내도 알고 있니? 아내도 알고 있어? 살수있다는 거 알고 있어?"
"그래.. 근데..널 놀래켜 주려고 하나보더라.. 그러니까...야!! 내 말은 끝
까지 듣고 가야지!!"

"여보!!"
한걸음에 병실로 돌아온 난 입가에 걸려있는 미소를 지우기가 힘들었다.
큰 비밀을 안고 있는 아내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면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난 아내가 날 또 한번 놀래켜 주길 기다렸다. 그녀가 날 놀래켜
주길 기다렸다.
"여보..나 말이야.. 병원에서 나가면.. 뭐해줄거야? 응?"
"글쎄...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겆이하고..."
아내가 곱디고운 시선으로 날 노려본다.
"칫. 그것밖에 해줄게 없어? "
"당신이.. 지겹다고 했잖아..그래서 난..."
갑자기 아내가 손가락을 내 입술에 갖다댔다. 아내의 눈이 촉촉히 젖어들
고 있었다.
"나 말이야...나 말이지...에이..말로는 못하겠다."
아내가 몸을 숙이더니 기습적인 뽀뽀를 해대는 게 아닌가.. 물론 싫진 않았
지만.. 난 일부러 몸을 뒤로 빼며 아내의 입술을 피했다.
"왜 그래? 갑자기. 쪽팔리잖아..."
난 같은 병실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척 했다. 모두들 고개는 다른 곳을 향
해있지만 몰래몰래 눈동자를 돌려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나랑은 반대로 아내는 혈색하나 변하지 않고 내
입술에.. 큼직막한 입술 도장을 찍는게 아닌가..그것도 아주 섹시하게...
"나..매일매일.. 당신 키스 받고 싶어..그래도 돼? 저번에 잡지를 보니까..
죽은 아내를 기리며 썼던 기사를 봤거든.. 남편이..제일 기억에 남는게..
키스래..근데.. 난 살아서 당신의 키스를 받잖아..평생을.. 당신의 키스를
받잖아.. 그러니까..우리 다른 기억들로 평생을 채워가면서 살고 싶어..
나..정말 그러고 싶어..당신 곁에서..당신이 주는 아주 하찮은 행복이라도
기억하고 싶어..그래도 돼? 나..이번에는 정말 오래도록 당신 곁에 있게 되
는데...그래줄수 있어?"
"지연아...."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게..너무 듣기좋아서..떠나기 싫어.. 당신이
날 보는 그 시선이 너무 부드러워서...당신을 보내주기 싫어..나 아마 욕심
쟁이가 될지 몰라..당신에 대한 욕심이 더 많아질지 몰라.나 그래도 돼?"
"그럼. 나..예전부터 당신 해달라는 거 전부 해줄수 있었는 걸..이젠 말만
하면돼.. 난 당신 곁에 항상 있을거니까..당신 말대로 질리도록 말이야."
아내가 내 목에 팔을 감았다.아직은 주사바늘이 꽂혀있는 연약한 팔이지
만.. 먼 나중에는 내 목을 힘껏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이 생기겠지...
"여보..나 참 많이 고마워하고 있어..날..보내지 않아서..힘들어 하는 날
붙잡아 줘서..나 평생..그 은혜 잊지 않고 있을거야..그래서..그래서..당신
이 힘들면..더 많이 안아줄께...나 그럴께...고맙고..사랑해..아주많이."
난 아내의 속삭임이 좋다..아마 이 속삭임 평생 들려달라고 할지 모른다.아
내처럼 나도 욕심쟁이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무섭지 않아?"
"아니 전혀.. 그냥..행복한 꿈꾸기 위해 잠깐동안 잠이 드는 거라 생각할
래.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그래. 그럴께.. 그러니까...새어머니!!"
붙잡고 있던 아내의 손을 놓쳤다. 녹색 머리수건으로 은발의 머리카락을 가
린 체 이동식 병원 침대에 누워 계신 분이..새어머니라니.. 아내를 살리시는
분이..새어머니였다니..
"마취중입니다."
간호사의 말을 무시한 체 난 새어머니의 손을 붙잡았다. 새어머니가 가늘게 눈
을 뜨셨다.
"내..아들이 소중한 만큼..나에겐 며느리도..소중해..."
새어머니...새어머니...난 눈가를 쓰윽 문질렀다. 조용히 눈을 감고 수술실로
들어가시는 새어머니와 아내...세상에서 가장사랑하는 사람이....서로를 가장
많이 미워했을 저 두사람이..오랜 벽을 허물고 진정 서로를 받아들이는 저
곳을 향해 난 고개를 숙였다..못난 아들 놈때문에...눈물짓던 새어머니의 모
습이 갑자기 떠올랐다..감당하기 힘든 아픔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나보다..
더 큰 아픔으로 날 바라보셨던 새어머니가...계셨다는 게..이제서야 알게 되
었다. 새어머니...새어머니..감사합니다...


누군가 그랬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필요로 한다고.
그 사랑을 키우기 위해..내가 바라는 것보다 서로에게 줄 무언가를 찾게 된
다고.. 그게 무엇이 됐든..두 사람이 함께 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하
다고...난 그걸 이제야 깨닫는다..
날 낳아주신 부모님을 외면하는 동안 아낸 꾸준히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리
라...그 분들과 끊을내야 끊을 수 없던 강한 끈을...아내가...아주 튼튼하
게 연결해 주었던 것이다..죽음 앞에서도..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생각했던
그녀..끊임없이 찾아드는 통증속에서도..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던 그
녀의..희생이 무엇인지를..이제야 알것같다....
그녀의 사랑앞에서 난 나약한 인간이 되고 작아진다..그 큰 사랑앞에서 나
고개를 숙인다...새어머니의 사랑처럼 위대한 힘을 지닌 그녀의 사랑앞에서..

시간이 간다는 게 이렇게 기분좋게 다가올 줄은 예전엔 몰랐다. 예전에 무
섭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나를 버리는 그날..난 시계를 보고 웃었다.
내가 살아돌아와서..누려야했던 그 시간들을 확인했다.
이젠..내 몸이 그 시간을 말해주겠지. 먼 훗날 파파 할머니가 되어 주름진
얼굴이 시간을 말해주겠지..나..이젠...자신이 있다..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뭐든..
"그럼요.. 지연씨는 지금 완벽해지고 있어요.. 보통 여자들보다 더 강한 것
만 빼고는요.."
"강하다고요?제가?"
"네.. 제 눈에 지연씨는 더 이상 나약한 여자가 아니예요. 그러니까..이젠
마음껏 사랑하세요.어쩌면.. 그 녀석을 닮은 아기가 태어날지 모르잖아요."
"아기요?"
남편이 내 손을 꽉 움켜잡고 있는 걸 알았을 때 내 눈에는 멈추지 않을 것
처럼 많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기라구요?정말.. 아기라고 했어요?"
"그럼요..단 한가지 주의하세요..."
준호가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뭐라 속삭인다..그녀 곁에 서 있는 태준이
를 쳐다보면서...그 말에 아내가 얼굴을 붉히며 웃는다..

"새어머니..."
"아무말도 하지않았으면 좋겠구나.. 미안하다는 말도...이젠 소용없잖아..
그저 우리 서로 멀리 돌아왔다구 생각하자...아직은...서툴지만.. 어쩌
면.. 좋은 시새어머니 역활을 잘 해나갈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구나..너무 좋은 며느리 덕분에..그리고..잘난 내 아들 덕분에.."
"새어머니..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내어깨에 듬직한 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졌다.
"장하다..네가...그렇게 복된 놈인줄.. 이애비는 몰라봤구나.."
"아버지.."
"사람들이 그러더구나..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구..하하..정말이지...
난 그말이 듣기 좋단 말이야..."

"여보..아까 준호 자식이 뭐라고 했어?"
"하하.."
내 질문에 웃음을 터뜨리는 아내..난 그 아내를 사랑한다..그리고..그녀의
속삭임도..
"절대로..당신 닮은 아들은 낳지 말래..골치아플거라나.."

--------------------------------------------------------끝--------

언젠가 친구와 함께 영화 "선물"을 봤어요..이영애가 마지막을 준비하는 모
습을 봤어요..코메디언으로 성공하는 남편을 위해 담당 PD의 부인을 찾아
가 허리를 굽히는 아내의 모습...정말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그리고.. 성공한 남편의 무대에서..웃으며 깊은 잠에 빠지는 아내의 모습
에.. 고개를 숙여 눈물을 흘렸답니다..
"제발"은.. 그 영화를 밑 바탕으로 그려진 거예요..
그냥.. 마음 편하게 읽어 주셨으면 하고 그린 거예요...사랑하는 사람을 남
겨둔 체 떠나는 걸로 하려 했는데...쩝~~!! 하여튼 많이 많이 울어주셔서
감사드리구요..지켜봐 주신거 감사드립니다....*^^*


----Hanmail.Boundary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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