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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겁쟁이]매혹적인신데렐라.txt

#아래 소설은 일반인이 거북해 할수 내용이 담겨 있을수 있습니다. BDSM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되돌아가기를 누르기를 바랍니다.




매혹적인 신데렐라 [Fascinating Cinderella]











※ 매혹 魅惑 : 매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호림.

















※ oo1















“하아... 하아...”







AM 2:18. 고요하던 골목 멀리 다급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점점 그 소리는 가까워졌고, 이윽고 고요한 적막을 깨버린 주인공이 골목 귀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략 15-18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이다. 짙은 어둠 때문에 확실한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꽤 오래 달렸는지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교복으로 보이는 옷은 여기저기 뜯겨져 있었고 눈동자는 겁에 질린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쫓기는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더 이상 달릴 힘도 없는 것 같은 다리를 억지로 부여잡고 도망치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하지만 여자아이를 도와 줄 사람은 이 시간에 아무도 없었고, 그것을 알기에 아이는 더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것 같았다.



여자아이가 골목 귀퉁이에서 모습을 보인 지 꽤 되었지만 여자아이를 쫓는 사람은 보이질 않았다. 아마도 따돌린 듯하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그래도 불안한지 뒤를 계속 돌아보며 맞은 편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끼이익!!'







아이가 사라진 쪽으로 듣기 싫은 소음이 들려왔다. 분명 차가 급정지를 하는 소리였다.



아마도 아이가 차에 치일 뻔 했나보다. 무엇인가 부딪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니 아이는 무사한 듯하다.



다행이다. 죽지 않아서.. 두려움을 가득 담고 살기위해 도망쳤는데 뜻 밖에 사고로 죽음과 마주해야 한다면.. 너무 안쓰럽지 않은가?



다시 자동차가 이동하는 소리가 들리고 골목은 아까의 요란함을 집어 삼키고 다시 고요해진다.



더 이상 소녀의 거친 숨소리와 힘겨운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 oo2















은은하게 풍기는 커피향에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3년간 보아온 너무나 익숙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유능한 비서 인 은벼리였다.



자신이 아침을 안 먹고 오는 날은 어떻게 아는지 베이글이나 샌드위치와 함께 커피 한 잔을 가져온다. 그녀가 그렇게 그의 모든 것을 알기까지는 비서가 된 뒤,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 걸렸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아침을 먹고 오지 않은 자신을 위해 방금 만든 한 입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샌드위치와 한 잔의 커피가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사장님, 뭐 다른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3년이다. 그녀와 비서와 사장 사이로 관계 된 세월이..



이 정도의 기간이면 아무리 사장이라도 좀 더 애정 있는 눈빛이나 말투가 나올 법도 한데, 눈앞에 있는 비서는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른 것이 전혀 없었다.







"아침부터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은벼리 비서"







자랑은 아니지만 방금 전 자신의 목소리를 다른 여자들이 들었다면 당장 데이트 신청을 받을 수 있을만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원한다면 거액의 내기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비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인사를 하고 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패션도, 성격도, 일도 3년 전이랑 다른 것이 하나도 없군."







머리는 한 올의 여유도 없이 틀어 올려 핀으로 고정시키고, 자신의 몸매보다 한 치수 정도 큰 무늬 없는 어두운 톤의 정장을 입고, 렌즈가 아닌 검은 색 뿔테 안경을 고집한다.



어떤 때에는 너무 큰 옷을 입고 와서 그녀가 옷을 입는지, 옷이 그녀를 입는지 모를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그녀가 성적 매력이 전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무엇과도 쉽게 바꿀 수 없는 여자였다.



일에 있어서도 그녀는 업계 TOP이라 할 수 있다. 얼마 전 연봉 5억이라는 거액을 제시하며 다른 기업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면 그녀가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 지 대충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단 칼에 그 제의를 거절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새삼 그녀가 존경스러워졌다.



그녀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에게 그녀는 공기와 같이 편안하면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꽤 오랫동안 그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던 그는 그녀가 두고 간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샌드위치를 하나 먹은 뒤, 커피를 마셨다.







"음식 솜씨도 변함이 없군, 재료는 같은 데 왜 다른 사람이 만들면 이 맛이 안 나는 걸까?"







항상 가졌던 의문은 오늘도 풀리지 않은 채로, 그의 입가는 그녀가 가져다 준 음식으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


은벼리는 24살 이라는 나이에 비해 많은 것을 얻는 성공한 여성이다. ‘Fascinate’라는 이 향수 회사는 3년 전에는 직원이라고는 사장과 그녀뿐인 보잘 것 없는 회사였다.



향수라는 제품은 프랑스, 영국, 이태리 등의 나라에서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나라의 작은 회사가 낄 틈은 없었다.



그래서 그와 그녀의 도전을 다른 사람들은 성공할 수 없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도전은 1년 후, 타임즈에서 ‘모든 사람을 매혹하는 향기를 제조한다, Fascinate’ 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리고 지금은 향수를 대표하는 세계 기업 중 하나로 꼽히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이미 외국 기업들의 텃새가 심한 제품을 뒤 늦게 개발하여 시장을 뚫고 나가는 것은 사실 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Fascinate’의 성공은 가히 신화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고, 그 신화의 중심에는 은벼리와 서인후가 있었다.







“인후 씨 여기 있어?”







오늘 중으로 끝내야 할 기획안 때문에 두툼한 서류뭉치와 모니터만 정신없이 번갈아 보던 은벼리는 갑자기 들리는 하이 톤의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겼다.



눈앞에 여자는 꽤나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누구인지 고민하던 은벼리는 3일 전 자신의 사장 옆에 있었던 여자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사장님은 무슨 일로 찾으시죠?”







육감적인 몸매,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 짙은 화장,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 벗은 건지 입은 건지 구분이 안가는 빨간 원피스.



그녀를 살핀 은벼리의 머릿속에 그녀는 고추장으로 인식이 되었다.



‘고추장을 경비 아저씨들이 왜 안 잡은 거지?’라는 의문을 가지다 곧 지금 시간이 경비 아저씨들도 잠깐 자리를 비우는 점심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슨 볼일이 있는지 알아서 뭐하려고?”







한 낱 비서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것에 화가 난 듯, 고추장은 은벼리를 쏘아보고 사장실로 다가갔다.



고추장은 분명 사장실 문을 열려고 했지만, 그녀보다 먼저 사장실을 막아 선 은벼리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너 뭐야? 내가 누군지 알아?”







고추장의 예의 없는 말투에 ‘당신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라고 말하고 싶은 은벼리였지만 침착함을 유지했다.







“사장님 지금 점심 드시러 가셨습니다.”



“그래? 그럼 사장실에서 기다리지 뭐. 커피 한 잔 타와”







자신이 사장 와이프라도 된 듯 당당하게 사장실 문고리를 돌리려는 고추장의 행동에 ‘오늘 너의 이런 행동들이 우리 사장과의 관계 청산을 재촉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냐?’하고 묻고 싶어졌다.



서인후 사장은 회사나 집으로 찾아오는 여자는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단 칼에 자르는 남자였다. 호기심이 화를 부른다는 말을 실감나게 해주는 스타일이랄까?







“개인적인 용무이시면 사장님과 통화를 한 후..”







문득 자신의 사장이 여자들에게 개인적인 연락처를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 난 은벼리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고추장 또한 그런 여자들 중 하나인지 은벼리의 말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존심이 상한 고추장은 은벼리를 독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너 정말 사람 짜증나게 하는구나?”







라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에서 사라졌다.







“은벼리 비서, 괜찮아?”







고추장이 사라지자마자 사장 전용 연결선으로 흘러나오는 서인후 사장의 얄미운 목소리.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사장만 아니면 벌써 그 잘난 얼굴로 작지만 야무진 자신의 주먹이 날아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젠 익숙합니다. 지겨울 정도라서 말이죠.”







싸늘한 그녀의 말투에 사장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 건지 한 동안 연결선으로 말이 없었다.







“내가 나가서 초밥 사올까?”







은벼리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초밥인 것을 아는 사장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더 이상의 신경전은 오히려 역효과를 부른다는 것을 알 만큼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 앞에 새로 생긴 초밥 집에서 사다주세요”



“알았어.”







말을 마치고 곧장 사장실에서 나온 사장은 은벼리에게 ‘미안’이라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운동장 열 바퀴는 돌고 온 것 같네”







사장의 여자와의 신경전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획안으로 인해, 이틀 연속 야근으로 몸 상태가 이미 물 먹은 솜처럼 몸이 힘든 상태에서 예고 없는 고추장의 방문은 그녀의 피곤을 배로 느끼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은벼리는 사무실 전화 수화기를 들고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잠깐의 신호음이 가고 상대방은 곧 전화를 받았다.







?뭐 필요한 거 있어??







상대방은 자신의 핸드폰에 뜨는 사무실 번호에 익숙한 듯, 한 번에 누군지 아는 말투였다.







“사장님, 죄송한데 약국에서 피로회복제 같은 거 하나 사다주세요”



?알았어. 내가 갈 때까지 다른 일 하지 말고 좀 쉬고 있으라고.?



“네, 그렇게 할게요.”







서인후의 개인 연락처를 아는 여자는 가족 외에 은벼리가 유일하다.



바람둥이라 소문난 그이지만, 일정한 선을 두고 여자를 냉정하게 대했으며 그 선을 잠깐이라도 넘는 여자가 있다면 가차 없이 버렸다.







“사귀는 수많은 애인들한테도 이렇게 친절하면 내가 이 고생을 안 할 텐데.”







왜 자신에게 친절한지, 왜 자신만 그의 번호를 아는 유일한 여자인지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3년간 함께한 비서이기에 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모든 상상은 항상 깨끗하게 종료가 되었다.



그래서 연락처를 외우는 것에 유독 약한 그녀가 유일하게 외우는 번호가 집 전화와 자신의 핸드폰 그리고 사장의 핸드폰 번호라는 것도 3년간 함께한 사장이기에 라는 수식어로 깔끔하게 정리 될 수 있었다.













※ oo3















“이틀 연속 야근은 무리였나? 거기다 핵폭탄까지 투하 되었으니 몸이 남아나지 않겠군.”



양손 가득 초밥을 든 채로 사무실로 들어 온 서인후 사장은 자신보다 몇 배나 큰 의자에 기댄 채 잠이 든 은벼리를 바라보았다.



검은 뿔테 안경은 코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었고 꽤나 피곤했던 듯 잠간 사이에 깊은 잠에 빠진 듯 하다.







“초밥은 천천히 먹어도 되니까 다행이군, 그보다 좀 불편해 보이는데..”







초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피로회복제는 은벼리의 책상에 두었다. 잠이 든 은벼리는 앉아서 졸고 있어서 그런지 꽤 불편해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인후는 사장실에 있는 휴게실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야근할 때 자주 사용하는 곳으로 침대와 샤워실까지 완비 되어있는 곳이다.







“할 수 없지. 잠깐이라도 편안하게 자는 것이 좋으니까”







결심을 한 그는 의자에 곤히 잠들어 있는 그녀를 향해 몸을 숙였다.







“향기도 여전하군.”







그녀에게 다가가자 알싸하면서도 아주 달콤한 향이 났다. 하지만 지난 3년간 한 번도 그녀가 향수를 사용하는 것은 못 보았다. 이건 그녀 특유의 향이다.



그녀에게 풍겨 나오는 이 향기는 꽤나 자극적이다. 처음 이 향을 느꼈을 때 그는 ‘이 향이다!’라고 외쳤었다. 아주 달콤한 초콜릿 같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흥분되는 향.



그녀를 잘 몰랐을 때는 정숙한 그녀에게서 이런 향이 풍기는 것은 아이러니 했지만, 지금은 그녀와 상당히 잘 어울리는 향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Fascinate’만의 독특한 향을 개발하려던 그는 그녀가 비서로 채용된 지 3개월로 접어드는 시기에 회사이름에 어울리는 향을 찾았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에게서.



그리고 다음날 그는 바로 조향사를 불러 일을 진행시켰고 5개월이라는 시간 끝에 그녀의 향을 향수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2만개의 제품이 시판 2개월만에 품절될 만큼 그 인기는 대단했다.







“하지만 정말 자연산 향기와는 격이 다르군.”







잠시 그녀의 향에 취해 옛 일을 생각하던 그는 ‘Fascinate’의 대표 향수가 결코 그녀의 향을 다 담아내지는 못했다는 생각에 약간은 못 마땅했다.







“하긴, 온 여자들이 그녀와 같은 향이 나면 그것도 문제군”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인후는 가볍게 벼리를 안아들고 휴게실로 향했다. 그녀를 품에 안아들자 그녀의 향이 더 진하게 풍겼다.



인후는 자신도 모르게 향 때문에 긴장되는 몸을 느끼고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깔끔하게 정리 된 침대 위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조금의 미동조차 없는 그녀를 바라보며 오늘 일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하루도 아닌 이틀간의 야근으로 지칠 대로 지친 그녀를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여자가 더욱 지치게 만들었고, 그 원인은 어쨌든 자신에게 있었다.







“오늘 정말 미안해, 은벼리 비서”







코에 불편하게 걸려있는 안경으로 손을 옮기다가 그녀가 안경을 벗은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눈이 나쁜가?”







혹시나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 안경을 찾기 위해 당황할까봐, 안경을 벗겨 주기 위해 움직였던 그의 손은 조심스럽게 안경을 씌워주는 것으로 행동을 바꿨다.







“잘 자라고, Fascinating Cinderella”







그녀의 향기를 모티브로 한 향수의 이름은 Cinderella이었다. 그 이름이 정해지고 벼리의 별명은 Fascinating Cinderella가 되었다.



본인은 자신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라고 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는 꽤나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말했다.



휴게실 문을 조심스럽게 닫은 그는 다시 책상에 앉아 잠시 중단 되었던 일을 시작하였다.



그녀가 일어나면 같이 초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말이다.





.


.



달콤한 잠에 취해있던 벼리는 1시간 만에 잠에서 깨어났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완전한 숙면으로 그녀를 누르고 있던 피곤함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잠시 멍해있던 그녀는 곧 여기가 자신이 잠들어 있던 비서실이 아니라는 생각에 놀란 듯 눈이 커졌다. 때마침 휴게실로 들어오는 인후와 눈이 마주쳤다.







“사장님?”



“아, 이제 일어난 건가? 피곤한건 좀 괜찮아?”







사장의 등장으로 완벽하게 잠을 쫓은 벼리는 빠른 두뇌 회전으로 여기가 사장의 전용 휴게실인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이곳에 잠들도록 해 준 사람 또한 사장이라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어서..”



“머리가 맑아졌으니 이제부터 능률적으로 일하면 되는 것 아니겠어? 그보다 이제 배 좀 채울까? 아직까지 안 일어났으면 깨우려고 들어온 거라고. 나 지금 아사 직전이야”







어느새 초밥을 들고 휴게실 안으로 들어오는 사장의 모습에서는 차가운 이미지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가끔 너무 말썽을 피우고 뒤치다꺼리는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것이 골칫거리이긴 하지만, 적어도 벼리에게 서인후 사장은 자상한 오빠 같은 사람이었다.



같이 일을 시작 한 후 처음 몇 개월은 꽤나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너무 오래된 일이라 그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무슨 생각해 은벼리 비서?”



“아, 그냥 좀. 자다 일어나서 그런지 옛 생각이 나요. 그런데 사장님 정말 여기서 먹으려고요? 시트 더러워지면 어떻게 해요?”







인후가 음식들 펼친 곳은 벼리가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앉아있는 인후의 침대였다. 자연스럽게 음식을 꺼내는 인후의 행동에 오히려 벼리가 정색을 했다.







“괜찮아, 시트가 더러워지면 씻으면 되는 거야. 그것보다 우리 초밥 먹을까?”







정말 배가 고팠는지 밥을 먹자는 인후의 말에 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 주인은 침대에 살짝 걸터앉고, 자신은 침대 주인인양 침대 가장자리에 편하게 앉아서 초밥을 먹는다는 상황이 왠지 모르게 웃겼지만, 진지하게 초밥을 먹는 사장의 모습에 자신도 배가 고팠다는 것을 느끼고 젓가락을 손에 쥐고 초밥을 먹기 시작했다.







“많이 먹어, 좀 살쪄야겠어. 잘 먹는 편인데 그것들은 살로 안가고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겠네.”



“사장님!”







빠르게 자신의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인후의 시선에 벼리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오히려 사장이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행동을 취해서 소리친 벼리가 무안해졌다.







“밥이나 먹자고 Fascinating Cinderella”







별명을 부르면서 초밥을 하나 들어 자신의 입 앞에 갖다 대는 사장의 행동에 벼리는 그를 얄밉다는 듯이 한번 흘겨보고 초밥을 받아먹었다.











※ oo4-oo5














‘♩?♬♪?’


AM 7:00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소리에 고요하던 아침이 활기를 찾았다.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방에 놓여 진 침대가 꿈틀대기 시작한다. 움직이기 전에는 그저 이불만 깔린 침대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 침대 위에 자고 있었던 것이다.



침대 밖으로 하얗고 가녀린 팔이 나와 알람을 껐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그 안에 있던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사람은 평소에 보기 힘든 아름다운 여자였다.



여자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벗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은 너무나 완벽했다. 실크로 된 잠옷을 입은 그녀의 몸매는 들어갈 것도 나올 곳도 확실해 굴곡이 심하지만 전혀 천박해 보이지 않는, 남자들이 첫 몽정을 할 때 꿈꿨을 만한 몸매였다.



화장실로 들어 간 그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찬물로 세수를 한 후, 세면대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찬물로 세수를 해서 그런지 여자의 얼굴은 핏기가 없이 창백했다.







“은벼리, 괜찮아.. 이 얼굴을 버린 순간 넌 예전의 네가 아니야. 이제 두려움에 떨던 어린아이가 아니야...”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거울을 보며 스스로를 달래는 그 아름다운 여자는 Fascinate 사장의 유일한 비서이자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로 알려진 은벼리였다.



샤워를 하고 거울 앞에 앉은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아무런 감흥 없이 쳐다보다가 스킨, 로션, 썬크림, 무색의 립글로즈 순서로 바르기 시작했다.







“야근을 한 것이 타격이 커서 그런지 얼굴이 창백하네.”







거울에 비춰진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생기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서랍에서 렌즈 통을 꺼낸 그녀는 뚜껑을 열어 검은색 렌즈 하나를 손에 올리고 거울에 가까이 다가갔다.



놀랍게도 거울에 비춰진 그녀의 눈동자는 초록을 담고 있는 황금색이었다. 별 어려움 없이 렌즈를 양쪽 다 착용한 그녀는 아무에게도 렌즈를 착용했다는 것을 알리기 싫은 듯 그 위에 도수 없는 안경을 착용했다.



다시 거울에 비춰진 그녀는 보통의 한국인과 같은 검은 눈동자였다. 렌즈를 착용했다고 생각 못 할 정도로 자연스러워 보였다. 렌즈를 착용한 후, 머리를 틀어 올려 고정시키고 옷장 문을 열었다. 옷장의 2/3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어두운 색의 클래식 한 정장이었다.



그 중 하나를 골라, 너무 커서 그냥은 입을 수 조차 없는 치마를 벨트로 고정시켜 억지로 입었다. 다시 한 번 거울을 바라보는 그녀는 옷이 너무 커서 이 옷을 입은 채로는 아까의 완벽한 바디라인의 실루엣조차 연상시킬 수 없었다.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의 모습과는 전혀 동일인물로 매치를 시킬 수 없는 지금의 모습을 만족한 듯이 바라본 벼리는 시간이 7시 45분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여유롭게 집을 나섰다.





.


.




“좋은 아침입니다.”







Fascinate를 씩씩한 목소리로 출근하는 사람. 은벼리였다.







“벼리 왔어? 이거 하나 가져가서 마셔.”



“아저씨 매일 저 주시면 아저씨들은 뭐 먹어요?”



“자식 같이 이뻐서 주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올라가봐. 사장님 아직 출근 안 했어.”



“고마워요, 아저씨. 이따 점심시간에 식사 같이 해요”







경비 아저씨가 준 우유를 한 손에 들고 승강기 앞에 섰다. 다른 승강기랑은 다르게 벼리가 서있는 승강기는 지문인식 버튼으로 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사장 전용 승강기이기 때문이다.



이 승강기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사장과 벼리뿐이다. 그래서 승강기 안에는 사장실로 가는 버튼 밖에 없으며 승강기 문 또한 1층과 사장실이 있는 38층에만 존재했다.



승강기 앞에 서 있자 많은 직원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낸다. Fascinate에서 반년정도 일한 직원들은 비록 벼리가 여자이고 어린 나이지만, 그녀가 사장과 대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장인 서인후를 포함한 직원들은 그녀의 직함이 ‘사장의 비서’지만, ‘부사장’을 겸직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벼리는 그런 직함을 인정하고 있지 못한다.



직원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도착한 승강기 안으로 들어서는 벼리는 몇 일전 광고사와의 브리핑을 떠올리고 있었다.







##



?사장님 지금 올라가셨어.?



“네 아저씨. 이따 점심시간 맞춰서 내려갈게요.”







경비 아저씨와의 짧은 통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 문이 열리고, 사장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색 굵은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진한 회색 양복에 흰 와이셔츠, 은색 실크 넥타이를 한 그의 모습은 정말 근사해보였다.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은벼리 비서 좋은 아침이에요. 어제 브리핑 수고했어요.”







사장의 말에 벼리는 고개를 살짝 숙였고, 사장은 사장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아침을 드셨네.”







냄새에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민감한 벼리는 오늘 사장에게서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이 아침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여유롭게 커피만 탔다.







“오늘은 부드러운 카페라떼가 좋겠다.”







회사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담배를 피운 듯, 약간은 거친 목소리가 마음에 걸려 평소에는 대부분 아메리카노를 타주던 벼리는 오늘은 카페라떼가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벼리는 아침에 아저씨에게 받은 우유를 개봉해서 커피 잔에 적절하게 부었다. 순식간에 카페라떼를 하나 만들고 커피를 싫어하는 벼리는 남은 우유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있는 수많은 찻잎 종류 중 홍차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달콤한 밀크티를 탔다.



완성 된 커피를 들고 사장실 문을 열자, 벌써 일에 집중하고 있는 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커피를 올려놓았다.







“광고 시안은 언제까지 하기로 했지?”



“이번 주까지요. 다음 주 월요일에 시안 발표하기로 했잖아요.”



“혼자서 할 수 있겠어?”



“글쎄요, 우선 한 번 해봐야죠.”







인후는 달력을 보았다.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오늘을 포함해서 5일이 남았다. 브리핑을 완벽하게 한 그녀를 좀 쉬게 해주고 싶었지만, 광고주 쪽에서 그녀에게 광고시안을 한 번 짜보게 하고 싶다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했다.



그는 그 요구를 거절하려 했지만 그녀 스스로 광고시안을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은 없어도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시안 발표는 다음 주로 잡혔다.



그녀는 항상 그랬다. 자신도 일에 중독 되서 사는 사람이지만, 그녀만큼은 따라갈 수가 없다.



그녀는 자신처럼 일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그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가끔 그녀는 너무 불안해 보일 때가 있다. 그 불안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일을 자신의 한계까지 쌓아 놓는 것 같다.







“주말에 우리 집에 오도록 해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네? 안 그러셔도 괜찮습니다.”



“그냥 와요, 한 번도 시안을 안 해본 사람이 5일이라는 짧은 시간은 무리야. 그게 아무리 우리 회사 부사장 겸직 비서라도 말이야.”







정중히 거절하는 벼리의 태도에 장난스럽게 말을 하고 커피를 마셨다.







“정말 귀신이네, 우리 비서 아무데도 못 보내겠어.”







자신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 담배를 피우고 와서 그런지 아메리카노는 왠지 마시기 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라떼 생각이 간절했지만 괜히 그녀를 아침부터 번거롭게 하기 싫어서 아무 말 안하고 사장실로 들어온 그인데 그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듯 라떼를 만들어 온 그녀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런 대단한 비서를 발견한 나도 대단한 건가? 우리 집 열쇠는 가지고 있지?”



“네, 몇 시쯤 찾아뵐까요?”



“아침 일찍! 아침 혼자 먹기 싫으니까 같이 밥 먹고 일 시작하자고.”



“그럼 9시까지 사장님 댁으로 가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굽 낮은 펌프스를 신은 그녀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혹시나 사장이 출장을 간 사이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그녀에게 인후는 자신의 집 열쇠와 주소를 주었고, 실제로 그렇게 긴급사항을 모면한 경우도 3번이나 된다.



그래서 그 이후로도 그녀는 인후의 집 열쇠를 챙겨 다녔다. 3번이나 그의 집을 가보았지만 그가 집에 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집을 찾아가는 것은 여태까지와는 다른 이야기이다.



일 때문에 가는 것이지만.. 잘 아는 상사의 집이지만.. 남자 혼자 살고 있는 집을 찾아 간다는 것이 꽤 마음에 걸리는 그녀였다.





자신의 자리에 앉은 벼리는 곧 그 생각을 접고 이번에 맡게 된 일을 시작했다. 벼리가 이번에 기획을 맡게 된 신제품의 이름은 ‘Narcissus'이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은은하게 풍기는 향이 거부감이 들지 않고, 향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한 번 취해보고 싶게 만드는 향이 이번 제품인 나르시스만의 특징이다.



Fascinate의 대표 제품인 신데렐라와는 전혀 다른 향이지만, 두 가지 제품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비로 거부감이 들지 않는 향이라는 것이다. 이 특징은 Fascinate만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마도 사람의 향을 모티브로 삼아서 제조하는 것이기에 그럴 것이다.





벼리는 광고시안을 위해 나르시스라고 붙여진 향수 샘플을 바라보고 있었다. 향수를 싫어하는 벼리에게도 별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제품.



나르시스는 벼리와 같은 사람을 겨냥해 만든 향수이다. 신데렐라의 향보다 덜 자극적이기 때문에 더 다가가기 쉬운 제품이 바로 이 향수이다.



그렇기에 벼리는 자신이 가장 나르시스를 잘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 광고주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막상 광고시안을 짜려고 하니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르시스, 수선화. 나르시스, 미모의 소년.”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에 집중이 안 되는 벼리가 지금까지 흥행한 여러 광고시안들에서 눈을 떼고 무심코 쳐다본 곳에는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이 있었다.



한 치의 흩어짐 없는 비서의 모습이지만 벼리는 그 속에서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거울을 바라보는 벼리의 눈은 지독한 상처를 담고 있었다.







“하하.. 내가 나르시스가 된 기분이네. 나도 그 아이처럼 죽고 싶었지.. 하지만 난 나르시스처럼 나를 연민하는 감정 같은 것은 없으니까.. 어쩌면 내가 가장 이 소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나르시스의 전설을 잘 알긴 하지만, 문서로 작성을 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나르시스에 대해서 자세하게 찾아보던 벼리는 나르시스에 관한 글들을 읽어보았다.






“나르시스는 수선화 꽃말의 유래가 된 전설 속 인물이다. 미소년 나르시스는 그의 주위에 사는 님프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사랑을 주지 않았다. 자신을 사랑하는 님프들을 잔인하게 대하던 나르시스의 모습에 화가 난 한 님프가 복수의 여신을 찾아가 나르시스가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실연을 당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복수의 여신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나르시스는 어느 날 샘가에서 물을 마시려다 물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빛나는 눈, 탐스러운 입술, 아름답고 하얀 얼굴.. 결국 그는 물가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물의 요정이라 착각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키스를 하려고 입술을 가까이 하거나 안으려 팔을 물속으로 넣으면 그 요정은 사라지고 말았다. 사랑의 포로가 된 나르시스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그 샘가를 떠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죽었다.”



“그의 시체를 그를 사랑하는 님프들이 화장하려 했지만, 시체는 없고 그 자리에 한 떨기 수선화가 피어 있었다. 나르시스의 전설 이야기는 갑자기 왜 찾으시는 거죠?”







벼리는 자신이 읽던 글 마지막 줄을 대신 읽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꽤나 반반한 얼굴을 가진 Fascinate 홍보 부 탐장 김우재였다.







“안녕하세요, 김 팀장님.”



“어제 광고주와 협상한 그 광고시안 작업 중이신가요?”







어느새 벼리가 있는 곳까지 다가와 벼리를 바라보며 나름대로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벼리는 그의 관심이 싫었고, 소름이 돋았다.



김우재는 일명 ‘비서킬러’로 불리는 사람으로 그의 여성편력은 심각한 수준이다. 서인후 사장도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지만, 그는 적어도 여러 명을 동시에 사귀는 타입은 아니다.



비록 하루일지라도 정리가 완벽히 끝난 후, 다른 여자를 사귀는 인후와는 다르게 벼리 앞에 느끼한 미소를 날리는 김 팀장은 여자를 남자보다 떨어진다는 생각하는 최악의 남자이다.







“은벼리씨, 오늘 점심 어때요?”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습니다.”



“그거 아쉽네요. 내일 점심도 예약된 것인가요?”



“점심은 항상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여자를 사귈 때 여자는 곧 악세사리라는 공식이 입력 되서 여자의 외모나 몸매만을 중요시하는 김우재가 벼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몇 일전 만남 때문이다.







“왜 안경을 쓰고 다니죠? 그렇게 예쁜 눈을 안경에 가리다니..”







벼리는 몇 일전 화장실에서 나오다 김우재와 너무 세게 부딪히는 바람에 안경테가 부러졌던 일을 생각했다.



점심시간 때 일어난 일이라 바로 안경점으로 가서 새로 안경을 맞추고 다시 회사에 들어와 업무를 했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왜 하필 부딪힌 사람이 김우재였는지.. 왜 하필 안경테가 부러졌는지..



안경을 쓰지 않은 벼리의 모습은 그녀의 본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음이 사실이지만, 한국 미적 기준으로 볼 때 예쁜 축에 속하는 외모였고, 김우재는 그런 벼리의 모습을 본 후로 계속 그녀에게 치근대고 있는 중이다.



치근댄다 해도 같은 사무실도 아니고 친한 동료사이도 아닌 그저 회사식구이기 때문에 마주치는 일이 별로 없어 생각보다는 큰 걱정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 오늘 사장의 부름을 받았는지 사장실에 올라온 그로인해 벼리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나랑 오늘 저녁에 데이트 안 할래요? 좋은 레스토랑을 알고 있는데..”







점심을 먹자는 그의 제안을 거절한 것을 후회했다. 점심 제안도 거절했는데 저녁 제안까지 거절하자니 미안한 미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 식사하고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저 죄송하지만 이번주까지는..”



“미안하지만 신데렐라 아가씨는 나랑 약속이 되어있네, 김 팀장”







광고시안을 핑계로 거절하려던 그녀의 말이 서인후 사장의 말에 묻혀버렸다. 김우재는 갑작스러운 사장의 등장에 놀란 듯 벼리에게 보내던 느끼한 미소는 어느새 사라지고, 어쩔줄 몰라했다.







“김 팀장, 자네는 날 만나러 온 건가, 내 비서를 만나러 온 건가?”







열려진 사장실 문에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기댄 채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인후의 말투에 김 팀장은 더 난감해하고 있었다.







“들어와요”







인후가 문에 기댄 몸을 일으켜 옆으로 살짝 비켜서자 김 팀장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사장실로 들어갔다.







“차는 필요 없으니까 하던 일 계속해”







벼리를 보며 김 팀장을 대하던 태도와는 전혀 다르게 싱긋 웃으며 말을 하고 마지막으로 한쪽 눈을 찡긋거린 뒤 사장실 문을 닫는 인후.



방금 그의 행동에 김 팀장이 자신에게 더 이상 치근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벼리는 잔뜩 긴장해서 굳어있던 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벼리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도와주는 인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 oo6
















Fascinate는 사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동급으로 대우하는 다른 기업과는 차별화 된 회사이다. 보통 사내에서는 정식 직원들이 비 정식 직원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기 마련이지만, 벼리는 기업이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사내 직원이 많아짐에 따라 시내 규칙을 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사장에게 건의를 했고 인후의 승낙으로 사내규칙을 만들었다.

제1규칙은 바로 ‘사내에서 일하는 직원들 중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존댓말을 쓰자!’였다. 처음에는 불편함을 느끼던 직원들도 점점 이 규칙이 서로를 존중해주는 좋은 규칙이라는 것을 깨닫고 제1규칙은 성공했다.

이 규칙의 성공으로 직원들은 사내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한 달에 한번 자치적으로 모임을 가져 새로운 규칙을 건의하거나 기존의 규칙을 수정하는 일을 했다. 이렇게 모임을 자주 가지기 때문에 다른 회사에 비하여 사람들 간의 친밀도가 높고, 공동체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사내 직원들이 ‘내가 만들어 가는 회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회사의 능률이 다른 회사들의 비해 월등하게 뛰어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러한 Fascinate의 회사방침을 배우기 위해 많은 대기업에서 벼리에게 일일초청강사를 요청하는 일도 다분하다. 벼리는 아무리 힘든 스케줄에도 그 제안은 거절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사내직원들 간의 사이좋은 회사가 드물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좋은 환경에서 사람들이 일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Fascinate의 또 다른 좋은 점은 바로 사내 식당이다. 직원이 몇 안 되는 시절에는 음식점에서 사먹는 것이 당연했지만 지금은 Fascinate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수 백명이 넘는다.

이런 기업들은 당연히 사내식당을 마련한다. 벼리는 처음 사내식당을 도입할 때 인후에게 영양사를 5명으로 하자는 제안을 했고, 영양사들에게 한 달 동안의 메뉴를 거의 겹치지 않게 만들고 영양을 되도록 맞추면서 맛도 높이는 방안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 결과 대부분 회사의 기피대상 1호인 사내식당이 Fascinate 안에서는 기호대상 1호였다. 이런 벼리의 노력으로 Fascinate는 대기업 사내 직원 만족도 설문조사에서 언제나 당당히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저씨!”



벼리가 찾아간 지하 1층 사내식당은 언제나처럼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신분을 막론하고 자신에게 인사를 걸어오는 사내 직원들에게 답인사를 하며 빠르게 경비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이구, 벼리 왔어?”



“죄송해요. 일하다가 그만..”



벼리는 나르시스 광고 기획안을 생각하다 문득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시간이 벌써 12시부터 1시 30분까지인 점심시간 중 30분을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사장은 김 팀장과의 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는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장실 문을 한번 바라보고 점심은 대부분 외부인과 먹는 인후이기에 신경을 쓰지 않고 바로 사내식당으로 온 것이다.



“배고프지? 어서 앉아.”



“네!”



벼리는 자신의 몫까지 배식을 받아 온 아저씨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아저씨들과 함께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경비원 아저씨들과 함께 밥을 먹기 시작한 때가..



“우리 벼리랑 밥 같이 먹는 낙으로 내가 회사에 오는 것 아니겠수?”



“나도 그려, 벼리 없음 회사 나오는 것이 영 심심해”



하나 둘 경비원들의 툭툭 내던지는듯한 말에 벼리는 그저 싱긋 미소를 짓는다. 벼리도 그들이 소중했다. 일에 치여 힘들 때 이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난다.



“우리 새끼도 벼리만치 예쁘면 좋겄구만”



“에이, 아저씨 따님 사진으로 보니까 너무너무 아름답던 걸요?”



벼리의 말에 ‘그렇지?’하며 바로 자신의 딸 자랑을 하는 경비원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부모도 이랬을까? 무조건 자신이라면 좋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다녔을까?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원망이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부모가 은벼리라는 존재를 싫어했을지도 모른다. 타인과는 다른 생김 때문에..



“우리 신데렐라님 먼저 가버리셨어요?”



문득 식당에 앉아, 슬픈 생각을 하고 있는 벼리의 머리 위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당신은 어떻게 아는 걸까? 항상 내가 괴로울 때 있어주는 것 같아.



“사장님.”



“혼자 먼저 먹으니까 맛있으세요?”



투정 아닌 투정에 벼리는 또 다시 미소가 지어졌다. 이 사람은 특별했다. 2년간 함께한 시간동안 서로에게 너무나 편안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특히나 일을 할 때는 서로가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벼리에게는 좀 더 깊은 존재였다. 이 남자는 벼리에게 등불이었다. 진심으로 이 남자는 벼리라는 존재를 알아주고, 벼리의 실력을 인정해주고 높이 평가해준다.



“죄송해요, 회의가 한참이 지나도 안 끝나 길래.”

“안 그래도 너무 배가 고파서 나왔어, 김 팀장은 더 회의하고 싶은 모양이던데”



“일은 확실히 마치시고 나오셨어야죠.”



“이번만 봐줘. 나 배고팠단 말이야”



“알았어요. 여기 앉아요, 사장님 배식 받아 올 테니까”



벼리의 따끔한 충고에 미안하다는 듯, 두 손을 모으고 벼리에게 말하는 인후. 벼리는 그가 정말 그 회의에서 빠져 나오고 싶었음을 알고 그를 자신의 옆 자리에 앉히고 벼리는 서둘러 배식을 받는 곳으로 갔다.



“사장님, 벼리랑은 정말 아무 사이 아니오?”



벼리의 빠른 행동을 잡을 수 없었다. 배식을 받으려 줄을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인후에게 한 경비원이 말을 걸었다.



“누가 그래요? 아무사이 아니라고.”



“아니, 그냥.. 그럼 무슨 사이 맞는겨?”



“글쎄요, 적어도 저한테는 특별한 여자인데요? 벼리 없으면 전 아무것도 못하거든요.”



인후의 말에 경비원들의 표정은 처음보다 더 궁금하다는 듯, 인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빠르게 걸어와 인후의 앞에 배식 판을 놓고 물 컵을 그 옆에 두는 벼리로 인해 그들의 대화는 단절 되었다.



“사장님 지금부터 정확히 20분 안에 다 드세요. 점심시간 곧 끝나니까.”



“알겠습니다. 깍쟁이 비서님”



그의 대답에 만족한 벼리는 자신도 먹다 남긴 밥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
.



“여보세요?”



?벼리야, 아빠다.?



“아빠,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냥 오늘은 우리 딸이랑 저녁 밥 먹고 싶어서.?



“치이, 맨 날 먹는 밥 지겹지도 않으세요?”



?우리 딸이랑 먹는 밥은 다르지!?



“알았어요, 어디로요?”



?Moon에서 보자꾸나. 내가 차 보내 줄 테니 타고 와.?



“저 이제 어린 아이 아니에요. 제 차 운전해서 갈게요. 9시?”



?그럼 그때 보자꾸나.?



“네, 열심히 일하고 만나요.”



벼리는 전화를 끊고 컴퓨터 시계를 보았다. 오후 7시를 조금 넘긴 시간. 다른 사람들은 퇴근을 준비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이 곳 사장실은 퇴근할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똑똑!



‘들어오세요.’



사장실 안에서 들리는 인후의 목소리에 벼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인후는 해 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숨이 멎을듯하게 멋진 모습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왜?”



“오늘 9시에 저녁 약속이 생겨서 먼저 가보려고요.”



“약속?”



벼리의 말에 인후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벼리를 바라보았다. 벼리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인후는 무서운 기세로 벼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사장님?”



“누구랑 약속인거지?”



인후의 이해 못할 행동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벼리는 인후의 사적인 질문에 정신을 차렸다.



“그건 사장님이 관여 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 됩니다.”



“김 팀장인가?”



“네?”



“난 지금 당신이랑 약속이 잡혀 있는 상대가 김 팀장인지 물었어”



“... 아닙니다.”



“그럼 남자야?”



“사장님!”



벼리는 평소와는 다른 인후의 태도에 난감해 하고 있었다. 그 행동에 놀란 사람은 벼리 뿐 만이 아니다. 인후 또한 자신이 왜 이렇게 남의 사생활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미안해.. 내가 좀 민감했나보군, 나가봐”



“아버지랑 약속이 있습니다. 내일 집으로 찾아뵙는 것은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피곤하신 것 같으니 내일 하루는 푹 쉬세요.”



“아니! 내일 와줘.. 그래 줄 거지?”



인후의 애처로운 말투와 눈빛에 벼리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장실을 나왔다. 퇴근할 준비를 하며 왜 오늘따라 인후의 행동이 이상했는지에 대하여 생각을 했다.



“걱정되는 여동생을 관리하는 건가?”



답이 나오질 않는 답을 찾으려 하며 벼리는 사장실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회사를 빠져나갔다.















※ oo7
















Moon이라 쓰여 진 간판이 있는 레스토랑. 한적한 숲속 길에 있는 이 레스토랑은 적지 않은 마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는 30년 된 전통 있는 레스토랑으로 제한된 인원만을 수용하는 전문적인 고급 음식점이다.



경치 외에도 외국에서 직수입하는 최고급 와인과 실력 있는 주방장들이 즐비해 음식 맛 또한 일품이다. 벼리는 주차장에 자신의 차를 세우고 익숙하게 Moon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회장님께서 방금 전 도착하셨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지배인님”







자신의 말에 고개를 한 번 숙이고 예약이 된 방으로 안내하는 지배인을 따라가는 벼리. 지배인이 걸음을 멈춘 방 앞에는 Sun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고, 다른 곳과는 문의 모양부터 다르게 설계되어 있었다.



지배인은 자신의 할 일을 마친 듯 다시 걸음을 옮겼고, 벼리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벼리 왔니?”



“아빠”







벼리에게 아빠라고 불리는 사람은 도저히 기혼남으로 보이지 않았다.



‘은영일’은 한국 자동차 기업의 회장으로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부인도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돈이 목적이든 아니면 그의 수려한 외모와 다부진 몸매이든 많은 여자들의 사냥의 대상이지만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인물로도 유명하다.



은영일 회장이 바로 은벼리의 아버지였다.







“우리 딸 얼굴이 왜 이렇게 푸석한 거야?”



“요 몇 일 야근을 해서 그런가봐.”



“뭐? 우리 딸을 야근시킨다고?”



“은영일 회장님, 나 3년 전부터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있거든요?”



“망할 놈의 회사 같으니라고. 이래서 내가 우리 회사에 너를 들이려고 한 것이다!”



“내가 그건 싫다고 했지? 난 낙하산 질색이라고!”



“너 정도면 낙하산해도 되니까 내가 시키려는 거지!”



“난 자동차랑은 안 맞거든요? 나 이러면 한동안 아빠 안 본다! 아무튼 만나기만 하면 우리 회사 욕이나 하고.”







벼리의 말에 영일은 도저히 39세의 남자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마디로 ‘나 삐침’이라고 얼굴에 쓰여 있었다. 그런 영일의 모습에 벼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일에 관한 것은 언제나 무섭고 냉철하지만, 벼리와 관련된 일에는 늘 어린아이가 되어 버리는 남자였다.



그러는 사이 음식들이 하나 둘 벼리와 영일의 앞에 놓이고 있었다. 모든 음식이 나오고 직원들이 다 사라졌다. 벼리와 영일은 서로 가끔 쳐다보면서 저녁을 먹었다.







“아빠”



“왜?”



“아빠는 결혼 안할 거야?”



“켁켁!!”







벼리의 질문에 영일은 사래가 걸렸다. 그런 영일의 행동에 벼리는 물 컵을 영일에게 건냈다. 물을 마시고 진정시킨 영일은 벼리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결혼?”



“아빠, 만나는 여자 없어? 결혼하고 싶은 여자 없냐고.”



“없어.”



“혹시 좋아하는 여자가 애 딸린 남자 싫다고 해서 그런 건 아니고?”







영일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갔다. 벼리를 끔찍하게 여기는 영일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그렇다고 벼리의 욕심으로 영일의 인생을 망칠 수는 없었다.







“은벼리”



“아빠.. 난 아빠 인생의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아.”



“넌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딸이야.”



“39살 아빠의 24살 딸.. 다들 이것만으로도 알 건 다 알아”



“쾅!”







벼리의 말에 영일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테이블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너 내 딸이다. 내 딸이야..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딸이라고..”



“차라리 할아버지 호적으로 올리지 그랬어. 그랬으면 그저 나이차이 많이 나는 오누이잖아. 결혼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딸이 있다니. 나 같아도 아무리 사랑해도 꺼려질 거야”



“난 너만 있으면 된다. 너 때문에 나랑 사랑하지 못한다는 여자는 필요 없어.”



“아빠.. 한 번도 그날의 결정을 후회한 적 없어?”







잘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영일의 마음에 상처가 될지.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영일에게 도움은 못될망정 짐이 되긴 싫었다.



영일은 그런 벼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벼리의 두 눈을 마주보고 말했다.







“난 한 번도 은벼리를 내 딸로 만들기로 결정한 것에 후회한 적 없다. 오히려 널 만나게 해 준 그날 신에게 감사하다고 기도했어”



“나도.. 나도 그랬어.. 그날 아빠가 너무 당연하게 날 구해줘서 진짜 아빠 같았어.. 아빠가 내 진짜 아빠가 되어 준다는 말을 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아빠는 이런 나랑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봐.. 이제 나도 다 컸으니까.. 아빠만 좋다면 호적상으로는 가족이 아니어도 될 거라는 생각을 했었어..”







벼리의 말에 영일은 아파오는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물론 이때까지 끌리던 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도 벼리보다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혼을 안 한 것이다.



자신이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적어도 벼리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자신이 꼭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인물이여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벼리야, 아빠는 결혼을 못하는 게 아니야. 내 마음에 드는 여자가 아직 안 나타나서 안 하는 것뿐이야. 은영일하면 달려오는 여자들 트럭에 차고 넘친다. 그건 너도 알지?”



‘끄덕끄덕’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지금 같은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마. 난 우리 딸 아픈 것 싫다.”



“응.. 미안해 아빠”



“내가 은벼리만큼 사랑할 수 있는 여자가 나타나면 지체 없이 결혼할 거야, 약속할게”



“응! 나도 도와 줄 거야!”







영일은 벼리에 관한 일이라면 아이가 된다. 반대로 벼리 역시 영일과 함께 있으면 완벽하던 비서 은벼리의 모습이 아니라 아빠에게 사랑받고 싶은 귀여운 딸이 된다.



이 두 사람의 모습이 그날의 선택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
.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느낌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침 9:40 이었다. 주말에는 회사를 나가지 않기 때문에 이 시간에 일어난 것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 일찍 일어난 이유는 배고픈 그의 코를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 때문이리라.







“아주머니가 오늘 오실 일은 없는데”







자신의 공간에 타인이 있는 것을 별로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있는 휴일에는 일하는 사람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는 이유는 뭐지? 인후는 빠르게 침대에서 일어나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는 한 여자가 분주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고, 그 뒷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아주 익숙한 뒷모습인데 뭔가 평소와 다른 느낌에 인후는 졸린 눈을 비비고 다시 여자를 주시했다.







“벼리?”







그의 목소리에 분주히 움직이던 여자는 움직임을 멈추고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인후는 그제서야 오늘 그녀와 자신의 집에서 아침을 먹고 그녀의 일을 도와주기로 한 것이 생각났다.







“사장님, 일어나셨어요? 씻고 나오세요. 아침 다 준비 됐습니다.”







그녀의 상큼한 미소에 아침인사를 받는 것이 혼자서 텅 빈 집에서 있는 것보다 좋은 것 같은 느낌에 인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자신의 원칙에 어긋나면 아무리 아끼는 사람이라도 거침없이 자르는 것이 서인후이다. 하지만 은벼리는 모든 상황에서 제외가 되어 있었다. 그가 스스로 만든 원칙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드는 그녀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겁고 기분 좋았다.







“은벼리라..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군.”







허기진 배를 아까 본 맛있는 음식들로 채울 생각에 인후는 기분이 좋아져 찬물로 빠르게 샤워를 했다.











※ oo8















“우와, 이거 정말 먹을 수 있는 것들이야?”







인후는 샤워를 마치고 아직 완전하게 마르지 않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주방으로 들어오자 거의 아침 준비가 끝나고 있는 벼리를 볼 수 있었다.



분명 인후의 집에 있었던 듯한, 하지만 한 번도 보지도 못한 것 같은 병아리처럼 노란 앞치마를 입고 있는 벼리는 분명 인후의 눈에 다른 날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차린 식탁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화려한 형형색색의 음식들로 가득했다.







“사장님, 집안이어도 감기 걸리실 수 있으니까 머리는 다 말리고 앉으시고.. 앗! 손으로 집어 먹지 마세요!”







잔소리를 하는 벼리의 모습에도 인후는 그의 특유의 일명 ‘살인미소’를 날리며 식탁에 앉았다. 그 모습에 벼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인후에게 가져다주었다.



아침을 거의 먹지 않는 인후라는 것을 아는 벼리는 부담감 없이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아침을 만들었다. 예상대로 잘 먹어주는 인후의 모습에 벼리는 아침을 한 보람을 느끼며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안 먹어?”







문득 열심히 아침을 먹던 인후는 식사를 할 생각이 없는 듯한 벼리를 바라보았다. 벼리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치마를 벗어 원래 앞치마가 있었던 듯한 자리에 걸어 두었다.







“먹어야 되는데”



“저는 아침은 항상 아버지랑 같이 7시에 먹거든요”



“흐음.. 그럼 나만 좋으라고 이렇게 차린 거야? 미안하게”







정말 벼리에게 미안한 듯 인상을 쓰는 인후의 모습에 벼리는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의외라는 듯 바라보는 인후의 표정에 금방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지만.







“사장님, 전 지금 사장님이 이렇게 제가 만든 음식을 잘 드시니까 기분이 좋아요”



“그래?”



“네, 그러니까 저한테 미안하시다면 맛있게 드세요”







아이를 달래 듯 부드러운 톤으로 벼리가 인후에게 말을 하자, 인후도 곧 다시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음식을 하기위해 열어놓은 창문으로 따스한 아침 햇살과 은은한 미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덜 마른 인후의 촉촉한 머리카락 끝에는 작은 물방울 들이 맺혀 그의 어깨로 쉼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물방울들이 거슬리는 지, 밥을 먹다가 머리를 좌우로 세게 흔들었다.







“정말 초등학생도 아니고, 일은 그렇게 열심히 하시면서 왜 다른 일은 이렇게 귀찮아하는 거세요?”



“그냥. 귀찮잖아”







성의 없이 대답하고 다시 음식을 먹는데 집중하는 인후. 벼리는 그의 머리카락에 여전히 물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고 인후가 앉은 의자에 걸쳐진 수건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그런 벼리의 행동에 잠시 분주히 움직이던 손을 멈춘 인후는 곧 음식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앞으로는 감기 걸릴지도 모르니까 최소한 머리는 이정도 말리세요.”







다 마르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물방울이 맺히지 않을 정도가 되자, 벼리는 인후의 뒤에서 싫지 않은 잔소리를 했다. 인후는 벼리의 말에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아침 잘 먹었어.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서재에 가서 광고시안 구상하고 있어.”







말을 마친 인후가 아까 벼리가 입었던 앞치마를 두르자 벼리는 색다른 그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대로 서재로 향했다. 벼리가 서재의 문을 닫자 인후는 뒤를 돌아 그녀가 들어갔을 서재의 문을 쳐다보았다.







“흐음.. 다들 이런 기분이여서 결혼하는 건가?”







누군가와 함께 아침을 맞이한다는 것이 인후에게는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를 만나왔지만, 한 번도 누군가와 아침을 맞이한 적은 없었다.



관계를 가진 후에는 어김없이 그 자리를 벋어났다. 잠시 같이 있어달라는 여자들의 요구에도, 그런 것을 원한다면 다른 남자 찾아보라는 차가운 말을 남기고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그에게 오늘 아침은 여태까지의 만족감과는 다른 충만함이 느껴졌다.



자신을 위해 아침을 해주고, 덜 마른 자신의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말려주는 것이 여태까지 느끼지 못한 갈증을 부추기는 기분이다.







“서인후 미쳤다. 그녀의 손길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내일은 여자를 만나야겠군.”







아까의 부드러웠던 벼리의 손길을 수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인후는 곧 정신을 차리고 그가 제일 최근에 만나던 여자를 떠올렸다.



.

.



“하아.. 광고를 만드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건가? 괜히 해본다고 했네.”







며칠 동안 광고시안을 만들기 위해 다른 어느 때보다 머리를 굴린 벼리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아야!”







눈에 미세먼지가 들어간 건지 눈이 갑자기 아픈 벼리는 안경을 벋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몇 번 깜박거리자 아까의 고통이 사라졌다.



그러는 중 인후가 과일을 들고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은벼리 비서 , 진행이 잘 되어가?”



“그냥 막막해요.”



“그러 길래, 왜 욕심을 내서.. !!!!!”







인후는 과일 접시를 책상에 올려놓고 그제야 벼리에게 눈을 돌렸다. 안경을 쓰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제외하고는 2년 동안 한 번도 그녀의 눈동자를 장애물 없이 바라본 적은 없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예뻤다. 그가 만나는 여자들과 비교한다면 그저 평범함에서 조금 예쁜 얼굴이지만 안경을 쓴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가 났다.







“안경 안 써도 내가 보여?”







책상을 사이에 두고 벼리와 인후는 꽤나 거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인후는 벼리가 자신을 뚜렷하게 쳐다보고 있다고 느꼈다.



눈이 심하게 안 좋은 사람은 사람을 쳐다볼 때는 초점이 확실하지 않는 것이 정상인데, 자신을 쳐다보는 벼리의 초점은 너무나 정확했다.







“눈이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그런데 왜 안경을 항상 쓰는 거지?”



“...........그냥 안경이 편안해서요.”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며 다시 안경을 쓰는 벼리의 행동이 뭔가 어색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라면 누구나 아름다워지고 예뻐지는 것을 원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인후는 그런 일반적인 길을 걷지 않는 벼리가 이상했다.



왜 은벼리는 아름다워지는 것이 싫은 걸까? 인후가 아무리 생각한다 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장님, 광고시안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할까요?”



“그러지. 뭐 생각해본 것은 있어?”



“나르시스의 신화를 모티브로 광고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도 그 생각은 해봤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신화를 조금 각색하는 것은 어떨까요?”



“수선화가 피게 된 신화인 나르시스의 이야기를 각색한다고?”



“네. 현대적인 재해석을 하는 것이죠. 수선화는 고대 그리스어인 ‘Narkau’에서 유래된 말이고, ‘Narkau’는 우리나라 뜻으로 ‘최면 성’이에요”



“그렇군, 신화에서도 복수의 여신이 나르시스에게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는 마법을 걸었지.”



“우리는 그 것을 마법이 아닌 최면으로 바꾸는 것이죠. 주인공은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와는 다른 성을 가진 여자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를 시기하는 인간으로 인해 최면에 걸리고 그 여자가 물에 빠져 죽는 거죠. 그리고 그 여자가 빠져 죽은 자리에는..”



“그 자리에는 나르시스라는 향수만 남는다는 것인가?”







자신의 생각을 확실히 읽은 인후의 말에 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2년 동안 벼리와 함께 일한 서인후 사장답게 정확하게 파악했다.



벼리 또한 그런 인후의 말에도 당연한 것이라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벼리야”







가끔, 아주 가끔 인후는 이렇게 벼리를 성과 비서라는 타이틀을 제외한 채로 부른다.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럴 때는 강철 심장이라 불리는 벼리조차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겉은 태연하게 행동하려 애를 쓴다.



그저 표정에 변화 없이 인후만을 주시하는 것이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이다.







“네?”



“벼리 너는 네 키보다 더 높이 쌓인 일을 하면서도 항상 흔들림이 없어. 처음 접해보는 광고시안조차 이렇게 완벽하게 구성을 하면 내가 도와줄 일이 없잖아.”







서운하다는 기분이 여실히 묻어나는 인후의 말.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벼리가 방금 말한 내용이 적힌 광고시안 문서를 훑어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성이 남긴 마지막 향기라”







광고 마지막에 나갈 문구로 생각한 글을 인후가 소리 내어 읽었다.







“내가 여자라면 궁금할 것 같군.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면 많은 여성들이 궁금해 할 거야, 과연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향기가 어떤 것일지. 너무 완벽해서 도와 줄 것이 없는 시안인데?”



“사장님”



“응?”







벼리의 부름에 인후는 시안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 벼리에게로 향했다. 인후의 눈동자 속에는 벼리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저에게 사장님은 힘들 때면 어떻게 알고 기분 좋게 해 주시고, 곤란할 때는 어디서 나타나서 도와주시고, 함께 있어도 불편한 느낌이 없는 그런 사람이에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바로 사장님이니까, 쓸데없는 곳에 삐치지 말고 광고시안 작성하는 방법이나 제대로 가르쳐 주세요.”







눈을 흘기며 벼리의 모습이 인후의 눈동자 속에 비춰진다. 그런 벼리의 모습에도 인후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벼리 옆으로 다가와 시안 작성법을 가르쳐 주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주는 사람’그 한마디가 인후는 듣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 oo9

















Fascinate 회사 안 가장 큰 회의실 안에는 새로운 제품에 대한 광고 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곳의 총 책임자는 인후, 또한 벼리는 막 광고시안에 대한 자신의 프리젠테이션을 마친 후였다.







“어떠셨습니까?”







인후는 발표를 한 자료를 챙기고 자신의 옆 자리에 앉는 벼리를 한번 쳐다보고는 벼리에게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광고시안을 부탁한 광고주에게 물었다.







“아, 정말 대단하시네요. 마치 따로 광고에 대한 일을 몇 년 하신 분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럼 우리 은벼리씨의 광고시안을 토대로 써 볼 생각이십니까?”



“다 괜찮습니다만, 모델은 남성모델을 하는 것이 어떨까요?”







광고주의 말에 광고 쪽 사람들은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벼리는 광고주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져 광고주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인후는 벼리의 얼굴에서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자 광고주에게 계속 말을 이어보라는 눈짓을 했다.







“남성 모델을 여자로 만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들 광고의 기본은 잘 아실 것입니다. 여성은 남성에게 끌리고, 남성은 여성에게 끌리기 마련이죠. 그렇기에 자동차와 같은 광고에는 여성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도 한번 그런 대중심리를 이용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르시스 향수는 여성층을 노리는 것이기에 남성 모델을 광고에 쓴다. 꽤 괜찮지 않을까요?”



“그럼 전설 속에 나오던 나르시스의 이미지 그대로 가는 건가요?”







벼리는 광고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했다. 그런 벼리의 모습은 마치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는 착실한 수제자 같은 모습이기에 광고 쪽 사람들이나 Fascinate 사람들이나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아주 훌륭한 시안을 만든 은벼리씨의 생각을 저는 듣고 싶은데요?”



“제 생각에는 남성 모델을 여성으로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벼리의 발언에 회의장에 있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광고에서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방법임은 물론이고, 지금 나르시스라는 향수 광고에 아주 참신한 소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모두들 하고 있었다. 특히 광고주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 벼리를 놀랍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런 생각을?”



“요즘 여자보다 아름다운 남자가 많은 인기를 끌고 있고, 그것이 전설 속에 등장하는 나르시스와 연관 짓기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르시스는 남자이지만 어떤 여자 요정들 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꽤 파격적인 소재로 인해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요?”







광고주 한동석은 Fascinate와의 첫 미팅 때, 서인후 사장보다는 은벼리라는 비서에게 눈길이 갔다. 대기업 거물들 사이에서는 빠지지 않고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들 중 하나인 은벼리.



실제로 깔끔한 첫 미팅 진행에 동석은 그녀의 숨겨진 재량이 궁금해 광고시안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했고, 거절할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렇게 완벽한 시안으로 동석을 비롯하여 함께 온 광고 직원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또한 자신의 날카로운 질문에 빠른 캐치를 하며 말을 논리정연하게 이어나가는 벼리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대단한 인재이다.



서인후의 재량이야 사석에서 많이 봐 왔기에 뜬소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비서인 은벼리 또한 이렇게 알찬 속을 가진 보석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Fascinate와의 계약 성사가 자신들의 회사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Fascinate 또한 자신들로 인해 많은 이익을 볼 것은 두말 하지 않아도 자신이 있었다.







“그럼 이 광고와 가장 잘 어울리는 모델은 과연 누구일까요?”







동석은 벼리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동석의 질문을 받은 순간 벼리의 뇌리를 스쳐가는 인물. 광고와는 정말 잘 어울리지만 추천은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벼리의 머릿속에 떠오르자 벼리는 답을 하는 것을 망설였다.







“그건 광고주님이 결정하실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딱히 생각해 본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시안을 만들었을 때는 사람들이 대게 누군가를 이미지화해서 만들기에 한번 물어본 것입니다. 은벼리씨는 이 시안을 만들면서 이미지화 한 인물이 없는 것인가요?”



“있긴 합니다.”







날카로운 광고주의 질문에 벼리는 내키지 않은 듯 대답을 했다. 분명 그 사람을 생각하며 이미지화 한 시안이긴 하다. 하지만 별로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 사람이 누구죠?”



“아시아의 별이라는 호칭을 가진 모델출신 영화배우 ‘지일’입니다.”







벼리의 말에 다들 지일이라는 인물을 생각하며 잘 어울린 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일은 벼리의 말대로 아시아의 별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지금은 유럽에서도 꽤나 많은 지지도를 얻고 있다.



그 이유는 외국 모델에도 뒤지지 않는 신장, 남성적인 카리스마, 마지막으로 유럽에서는 ‘천사의 얼굴’이라는 호칭을 받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마스크 때문이다.



지금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이 지일이라면 확실히 전설 속 나르시스에 뒤지지 않는 외모를 가졌을 것이라 납득 될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지일씨로 갑시다.”







광고주의 말에 벼리는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 인후를 바라보았다. 주위 사람들이 자신이 내뱉은 지일이라는 인물을 떠올리며 납득을 하는 모습에 벼리는 망연자실했다.



이럴 줄은 몰랐다. 광고주가 모델을 정하게 유도하려고 했건만, 결국은 지일로 몰아가고 있었다. 벼리의 시선을 못 느낀 것인지 인후도 광고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벼리는 그런 최종적 결정에 작은 한숨을 쉬었다.



성격 상 거짓말을 잘 못하는 타입이라 결국 지일을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것을 자백한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벼리는 곧 CF촬영에 들어가면 더 이상 이 기획에 간섭하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 될 것이라 생각했다.







“벼리씨, 정말 대단하네요.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되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광고주의 목소리가 자신의 귀에 울리기 전까지, 벼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하고 있었다.



.
.



“하아, 정말 미치겠네.”







회의가 끝나고 사장 비서실로 돌아온 벼리는 자신의 자리에 앉자마자 한숨을 크게 쉬며 컴퓨터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부탁이요?’



‘저의 광고 팀이 날로 먹는 다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게끔 최고의 광고를 만들겠습니다.’



‘네? 저는 그런 생각 하지 않았는데요.’



‘지금 제 부탁을 들으시면 그런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꼭 은벼리씨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은 지금도 저희 광고 팀이 날로 먹는 것은 아닌가하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걸요?’



‘그 부탁이라는 것이 뭔가요?’



‘지일’



‘지일?’



‘지일이라는 사람은 아주 하찮은 것이라도 작품을 고르는데 아주 심혈을 기울이는 인물로 유명한 것은 아시죠?’



‘아, 1년에 100여개의 서로 다른 러브콜에도 정작 선택되는 것은 한두 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얼핏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지일이라는 사람을 벼리씨가 광고를 찍도록 설득해주시면 합니다.’



‘네? 제가요?’



‘광고를 포함한 작품들은 원래 기획한 사람이 가장 잘 인물 선택을 잘 할 수 있고 또한 그 인물을 잘 설득할 수 있습니다. 제 말은 몇 십 년을 통한 저의 경험에서 나온 것임으로 확실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벼리씨가 지일을 직접 만나 그를 설득해주십시오.’







아까 광고주가 벼리에게 부탁한 것은 다름 아닌 지일을 설득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직접 만나서 말이다.







“지일, 지일, 지일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 거지?”







벼리는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쉬고는 이내 자신의 핸드폰을 열어 익숙한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바쁠 테니까 할 말만 할게, 오늘 우리 집에 들려. 알겠지?”







벼리는 자신의 전화를 받은 상대방에게 간단하게 말을 하고 통화를 마쳤다. 그런 일방적인 통화에도 상대방은 바쁜 듯,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통화를 끝낸 후, 그녀의 핸드폰으로 ‘이따 봐’라는 문자가 한 통 왔다. 그 문자 밑으로‘노땅’이라는 이름이 찍혀있었다.











※ o10
















‘띵동-!’






샤워를 막 끝내고 나온 벼리는 현관벨 소리에 얇은 파자마 차림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나”






이름도 말하지 않고 당당하게 나라는 말만하는 상대방의 목소리에 벼리는 누군지 짐작이간 듯, 현관문을 열었다.






“꺄악!”






그녀가 문을 열자마자 모자와 선글라스를 낀 키가 큰 남자가 벼리를 꽉 껴안았다.



벼리는 그런 남자의 돌발적인 행동에 작게 소리를 지르며 양 손으로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벼리의 행동을 쉽게 저지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잘 지냈어?”


“꼭 이렇게 요란스럽게 들어와야 해?”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연스럽게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었다.






“스케줄은?”


“네 전화에 영문도 모른 채 오늘 새벽에 끝날 일정을 지금 다 마치고 왔다. 이리와, 벼리야”






두 팔을 벌리며 벼리가 그 팔 안에 들어오기를 바라는 남자는 다름 아닌 최근 대한민국 여자들이 가장 결혼하고 싶어 하는 남자로 뽑힌 한국 최고의 모델 지일이었다.



벼리는 그런 그의 요구에 미소를 지으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자신에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지일은 벼리의 팔을 잡아 그녀를 확 끌어 당겼다.






“으앗, 노땅!”


“보고 싶었어.”






단단한 지일의 가슴에 안긴 벼리는 화를 낼 기회를 놓치고, 그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행동에 기분이 좋아져 그의 큰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만졌다.






“방금 샤워하고 나온 거야? 냄새 좋다.”






크고 따스한 그의 품에 얌전하게 안겨있던 벼리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벼리의 아빠 영일이었다.






“왔냐? 근데 왜 남의 딸은 그렇게 사랑스럽다는 듯이 안고 있는 거냐?”


“흥! 내가 형보다 나이만 더 많았어도 벼리는 내 딸이었어!”


“넌 그게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형한테 할 소리냐?”






지일의 본명은 은지일. 나이는 31세. 가족사항은 8살 차이가 나는 형 은영일과 형의 딸이자 자신의 하나뿐인 조카 은벼리이다. 하지만 이런 프로필은 기획사 사장과 자신의 친구 겸 매니저를 제외하고는 극소수만 아는 것이다.



자신의 모델 활동으로 가족들 특히 벼리가 괴롭힘을 당할까 걱정된 지일은 처음 모델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세계에서 인정받는 모델이 될 수 있다. 그런 나를 얻고 싶다면 나의 신분을 철저히 숨겨줄 수 있는 한국 최고의 기획사여야 한다.’는 발언을 했을 정도로 자신의 조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Y라는 한국 최고의 기획사의 최고의 스타답게, 일반인들은 그가 활동한 지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지일의 성이 ‘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그의 프로필은 지금도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었다.






“형이 벼리를 나에게서 뺏어간 순간 형은 나의 형이 아니라고 말했잖아.”


“유치한 자식, 네가 그러고도 31살의 아시아의 별 지일이냐?”


“그런 건 상관없어. 그런 것보다는 벼리가 더 중요하니까, 난 형보다 벼리를 사랑해. 지금이라도 아빠자리를 포기하시지?”


“뭐라고? 사람들이 좀 알아준다고 해도 ‘지일’보다는 ‘은영일’이 더 대단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리고 벼리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은영일이야!”






만나기만하면 다섯 살 난 말썽꾸러기들처럼 벼리를 놓고 끊임없이 싸움을 하는 두 사람.



벼리는 만인의 스타인 ‘지일’과 최고의 카리스마 ‘은영일’의 실체를 캠코더로 찍어 그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 정도로 평소 두 사람에게서는 연관시킬 수 없는 모습이다.






“두 남자 분들은 열심히 싸우세요, 난 졸려서 잘래.”


“뭐? 은벼리,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래! 난 너의 그 전화 때문에 엄청 무리해서 집에 온 거라고!”


“내 딸이 널 불렀어?”


“아, 맞다! 노땅한테 할 말 있어서 불렀지?”






정말 자기위해 2층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벼리는 지일의 말에 다시 거실로 내려왔다. 지일과 영일은 잠시 싸움을 멈추고 소파에 앉았고, 벼리도 그들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왜 집에 오라고 한 거야? 무슨 일 있어?”


“아무 일도 없어. 그리고 없을 거야.”






벼리의 말에 두 남자는 궁금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노땅이 바쁜 건 아는데 우리 회사 광고 모델 좀 해줬으면 해서.”


“뭐?”


“이번에 만들‘나르시스’라는 광고기획을 내가 했는데, 나르시스 역할을 해줄 사람이 노땅밖에 없을 것 같아서.”


“그래? 흥미로운 제안이네. 우리 벼리가 기획했다면 확일 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해보지 뭐.”


“정말? 노땅 나중에 다른 말하기 없는 거다? 내일 내가 노땅 기획사에 찾아갈 테니까 사장님께 잘 말씀드려놔.”


“알았어, 그 대신 내가 원하는 것 하나 들어주기, 어때?”


“좋아!”






지일의 허락에 기분이 좋아서 그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벼리는 알지 못했다. 또한 영일이 그 옆에서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지일과 웃음을 교환하는 것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지일의 허락만으로 안심하고 있을 뿐이었다.




.

.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가벼운 기분으로 Y기획사에 와서 지일과의 계약을 문서화하기 위해 Y기획사 사장을 찾은 벼리는 잠시 사장의 말에 당황스러워졌다.






“이번 광고 촬영을 허락하는 대신 지일이 곧 있을 향수축제에 자신을 초대해 달라는 요구를 했어. 벼리양은 모르고 있었어?”


“하아, 어쩐지 쉽게 허락한다 했어. 갑자기 왜 그러는 거래요? 노땅이 파티 싫어하는 것은 사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속물들이 너무 많아서 싫어하긴 하지, 벼리양도 그래서 파티를 싫어하잖아. 그래도 이번에는 벼리양이랑 같이 파티에 참석할거라고 신이 났던걸? 지일이 저렇게 들뜬 상태면 나도 말릴 수 없는 것 잘 알지? 벼리양의 아름다운 모습 기대한다고 전해달래, 한동안 바쁘니까 자기 찾으려는 헛수고는 하지 말라던 걸.”






그녀는 결국 한숨을 쉬고 사장의 말에 놀라 떨어트린 펜을 다시 잡고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은근히 다혈질인 그녀의 조용한 모습이 마치 폭풍전야를 보는 것 같아 사장은 왠지 두려웠다.






“사장님.”


“응?”


“노땅한테 전해주세요. 광고효과가 없을 경우 이 계약은 무효라고요.”






‘지일’이라는 보증수표가 실패할 가능성은 0%에 가까웠지만, 벼리는 이렇게 조금이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다름 아닌 자신을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지일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화가 났다.






“전해주지.”






들어올 때와는 달리 얼굴이 차갑게 굳은 벼리가 나가자 사장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소파에 기대 편하게 앉았다. 그리고 수회기를 들어 지일에게 전화를 했다.






“그래, 잘 계약됐다. 내가 왜 너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냐? 하긴, 벼리양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나도 한번 보고 싶긴 해서 목숨을 걸었지. 지일이 네가 세계의 미녀들을 만나도 관심조차 두지 않는 이유가 벼리양 때문이잖아. 나로서는 도저히 벼리양의 본모습이 상상이 안가지만, 그렇게 아름답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니까 궁금하긴 하잖아?”






지일과의 통화를 마친 사장은 벼리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숨기는 이유는 왜일까? 저렇게 화가 날 정도라면 단순한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천하의 지일이 그녀를 설득하는 것이 무서워 일 핑계를 댈 정도의 이유가 뭐지?”




매혹적인 신데렐라 [Fascinating Cinderella]











※ 매혹 魅惑 : 매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호림.



















※ o11

















“하아..”






Y기획사에 다녀온 뒤로 일은 되지 않고, 한숨만 쉬는 벼리. 지일은 그가 벼리를 피하면 쉽게 만날 수도 없고 통화조차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힘들기에 더욱 괴로웠다.






“정말 내 눈에 보이기만 해봐, 그날이 너 죽고 나 사는 날이다.”






핸드폰에 자신이 찍어놓은 지일의 번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벼리는 중얼거렸다. 그때 비서실 문을 ‘똑똑-’두드리는 소리에 그녀의 시선은 그곳에 머물렀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아주 아름다운 여자였다. 갈색의 긴 머리는 굵게 웨이브가 져서 세련되어 보였고, 옷차림 또한 조신했다.






“누구시죠?”


“서인후씨 만나러 왔습니다. 지금 인후씨 사무실 안에 있나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로 사장님을 찾으시는 건지 물어도 될까요?”


“내가 불렀어, 들어와요.”






벼리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벼리가 질문을 던진 여자가 아니라 절묘한 타이밍에 사장실에서 나온 인후였다.



그의 말에 여자는 살짝 벼리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장실로 들어갔고, 벼리는 3년 동안 개인적인 용무로 여자를 부른 적 없는 인후의 처음 보는 행동에 놀랐다.






“은벼리 비서, 정말 급한 용무 아니면 30분 정도 사장실로 찾아오는 모든 연락을 차단 부탁해.”


“아, 네. 알겠습니다.”






사장실 문이 닫혔다. 평소 만나던 여자들과는 다르게 기품이 넘치는 전형적인 있는 집안의 여자였다.



그녀를 본 것은 잠시지만, 벼리는 그녀가 자신의 장점을 잘 알고 그 장점을 살릴 줄 아는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나와는 다르게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여자.”






잊으려 했는데, 잊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의 악몽을 자꾸 다시 떠올리고 있다. 이대로 이 지옥에서 살아야 한다면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까지 들 정도로 힘들었던 그때의 자신이 자꾸 떠오르고 있었다.



그 악몽을 떠올리자 키보드에 올려 있는 두 손이 떨린다. 진정시키려 두 손을 모아서 깍지를 꼈다.






“지옥에서 탈출한지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잊지 못한 건가?”






지금도 가끔 그때의 악몽을 꾼다. 그럴 때는 어김없이 영일의 침대에 가서 영일에게 안겨 잔다. 영일과 함께 그렇게 잠들지 않은지 반년이 넘어가서 이제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영일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진 벼리는 핸드폰을 들어 단축번호 1번을 누르자‘파파’라는 이름이 떴다.




.

.




회의 중이던 영일은 자신의 핸드폰 진동소리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쉬어가죠.”






길어지던 회의였기에 영일은 임원들에게 쉴 틈을 주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휴식을 취하자 영일은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자는 ‘단 하나’, 영일은 빠르게 통화키를 눌렀다.






“벼리야?”


?아빠..?


“목소리가 왜 그래?”


?아빠, 보고 싶다.?






벼리의 힘없는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영일은 평소의 씩씩함과는 다른 벼리의 목소리에 초조해져갔다.






“은벼리, 너 무슨 일 있어?”


?아빠, 이제 그 사람 없는 거지? 그 사람 안 오는 거지? 나 그 사람한테 안 가도 되는 거지? 그렇다고 해줘. 나 무서워.?






벼리의 말에 영일이 더 무서워졌다. 혹시나 그녀가 다른 마음을 먹을까 겁이 났다. 한 동안 괜찮은 것 같았건만 다시 그 시절이 생각나는가보다.



그녀 곁에 지금 자신이 있어야했다.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 갈게, 지금 아빠가 갈 테니까 회사지? 거기 꼼짝 말고 있어.”


?응, 빨리 와 아빠.?






그는 그녀의 안정된 대답에 불안감을 덜며 통화를 마쳤다. 그의 통화를 들은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영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내일 회의는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딸이 많이 아픈데 걱정이 돼서 지금 회의를 계속해도 들어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중하게 말하고 그는 빠르게 회의실을 빠져 나갔다. 이런 황당한 상황에서도 은영일의 회사 ‘창조’직원들은 너그럽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완벽한 영일이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흔들리는 유일한 경우가 큰 계약을 앞 둔 시점이 아니라 그의 하나뿐인 딸에게 문제가 생긴 경우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 밖으로 나온 그는 자신의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은지일 너 지금 어디야!”


?지금 화보 촬영으로 일산에 있는데 무슨 일 있어??


“젠장, 내가 더 빠르겠네. 끊어”


?무슨 일인데!?


“벼리가 또 아픈 것 같아서 지금 벼리한테 가는 중이다.”


?!!! 나도 지금 갈게, 내가 더 빨리 갈지도 모르겠다.?






영일이 괜찮다고 말하려했지만 지일이 통화를 끊는 것이 더 빨랐다. 그의 동생인 지일도 벼리의 사랑이라면 그와 각축을 벌일 정도이기에 다시 전화를 해서 말리지는 않았다.



영일과 지일은 온통 벼리에 대한 걱정으로 Fascinate로 차를 빠르게 몰았다.



두 사람이 그렇게 차를 몰고 오고 이을 때, 벼리는 떨치려 해도 떨쳐지지 않는 불안감으로 점점 힘들어하고 있었다.



사장실 문이 열리고 인후와 아까 그 여자가 나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벼리의 상태는 위태로웠다.






“은벼리 비서, 난 이분과 점심을 먹고 올 테니까 급한 용건은 내게 전화해요.”






모니터에 가려 보이지 않는 벼리의 얼굴 때문에 인후는 그녀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면 언제나 짧게 ‘네’라고 대답하는 그녀의 버릇을 인후가 몰랐다면 아마 그대로 비서실을 지나쳤을 것이다.






“은벼리 비서, 내말 들려요?”






인후는 그녀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그녀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벼리는 지독한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땀에 젖어 거친 호흡을 하고 있었다. 두 눈은 불안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벼리야! 왜 그래! 응? 정신 차려봐!”


“인후씨, 무슨 일 있어요?”


“젠장, 구급차 불러!”


“네?”


“빨리 구급차 부르라는 소리 안 들려!”






인후의 짜증스러움이 가득한 명령에 그와 점심을 먹기 위해 그의 회사를 찾아온 ‘김해주’는 119를 부르면서도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공과 사의 구분이 철저하기로 소문난 서인후의 데이트 신청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흥분에 들떠 있었다.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자신을 회사에 초대하는 그의 태도에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서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그녀가 착각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벼리야, 정신이 차려봐!”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벼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하는 두려움이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와 쉼 없는 눈물이 자신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그때 사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119가 온 줄 알았건만 선글라스를 낀 한 남자였다.






“벼리야!”






지일은 땀을 흘리며 울고 있는 벼리의 모습에 순간 두려워졌다. 이 여린 아이가 혹시나 다시 예전처럼 감정 없는 인형같이 살아가게 될까봐 무서웠다.



그녀에 대한 걱정으로 시속 190이 넘는 속도를 내며 순식간에 도착한 그는 빠르게 벼리에게 다가가 인후의 품에 안긴 그녀를 자신이 안아 들었다.



익숙한 품이 느껴지자 한 겨울 얇게 입은 사람처럼 덜덜 떨던 벼리는 점점 안정을 찾으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지일?”


“미안해, 벼리야. 내가 잘못했어. 너 혼자 두고 아무것도 몰라서 미안해.”


“나 안가도 되는 거지? 그런 거지?”


“안가도 되는 것이 아니라 안가는 거야. 설령 네가 간다고 해도 내가 안 보내. 걱정 마, 내가 너 죽을 때까지 지켜줄 거니까 두려워하지 마.”


“정말 나 안 버릴 거야?”






눈물로 촉촉이 젖은 눈망울에는 깊은 아픔이 담겨 있었다. 지일은 벼리를 더욱 세게 안아주며 그녀의 이마에 살짝 뽀뽀를 해 주고 큰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내 목숨보다 소중한 은벼리 죽을 때까지 지켜줄 거야,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해. 사랑해, 벼리야.”


“나도, 나도 사랑해.”






그 말을 끝으로 벼리는 점점 안정을 찾으며 잠이 들었다. 뒤 늦게 온 119를 괜찮다고 돌려보낸 지일은 그녀가 진정되자 형에게 전화를 해 집으로 가서 주치의를 부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아까부터 살기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로 눈을 돌렸다.






“우리 벼리가 신세를 졌군요. 서인후 사장님입니까?”



“네, 공인이신 지일이라는 분 맞습니까?”


“맞습니다. 나중에 광고 건으로 다시 만나게 될 테니 죄송하지만 벼리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지금 우리 벼리가 많이 아파서 정식으로 인사하기가 좀 그러네요. 저 말고 벼리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하니 나중에 다시 인사 하도록 합시다.”


“우리 비서와 무슨 사이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지일은 인후의 질문에 자신의 짐작이 착각이아니라 생각했다. 사랑까지는 아니라도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사장은 벼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까 듣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그렇게 쉽게 넘겨주기에는 벼리가 너무 아까운 지일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우리 벼리의 매력은 역시 가려지지 않는군. 앞으로 재미있어 지겠는 걸?”






벼리의 안정을 찾은 표정에 안심된 지일은 자신의 말에 급격히 굳어가던 사장의 얼굴을 생각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 o12



















“벼리가 발작하기 전에 지일이가 다행히 잘 도착해서 지금은 그냥 수면 상태야. 하지만 다시 이런 일 안 일어나도록 노력하게. 벼리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아직도 과거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약한 아이야. 그건 자네들이 더 잘 알지?”







주치의 말에 영일과 지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 누워있는 벼리를 바라보았다. 벼리는 첫 만남 때부터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워서 자신들이 지켜줘야 버틸 수 있는 여린 아이였다.







“아마 밤중이나 깨어날 거야, 오늘은 벼리 옆에 밤새 있어주게. 발작은 안했지만 악몽을 꿀 확률은 높아.”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주치의가 나가고 영일은 벼리의 곁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손과는 너무 다르게 작고 하얀 손.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지금 이 손보다 더 작았다. 그래서 자신이 힘을 조금만 주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손이었다.







“미안해, 벼리야.”







지금은 영일에게 벼리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한 지일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아주었다.



.
.





‘새엄마, 나 집에 있기 싫어. 나도 데려가면 안 돼?’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왜 이렇게 칭얼거려? 그리고 내가 왜 네 새엄마야!’







습한 기운이 도는 곧 무너질 것 같은 허름한 집들 중 한 집이 요란스럽다.



집 안에는 여기저기 분을 찍어 바르며 화장을 분주히 하는 여자와 떨리는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17살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두 여자 뒤로 욕망에 찌든 혐오스러운 인상의 건장한 남자가 TV를 보며 바닥에 누워있었다.







‘나도 가면 안 되는 거야? 새엄마라고 안할게, 제발’



‘미쳤니? 이 새벽에 널 데리고 가서 무슨 장사를 하겠어! 눈 색깔이 초록색인 년을 데리고 온 내가 바보지! 얌전히 집에 있어!’







매몰차게 높은 힐을 신고 야한 차림으로 나가는 여자. 그녀가 가고 집 안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TV에 집중되어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자, 아이는 자신의 몸을 웅크렸다.







‘나도 가면 안 되는거야라고? 너 입 조심해. 나에게 자꾸 벗어나려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수가 있어!’







아이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는 지옥 같은 곳.



어느새 아이에게 다가온 남자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아이의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쥐고 억지로 아이의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남자의 한 손에는 식칼이 들려 있었다.







‘요부 같은 년, 너를 볼 때마다 욕정이 끓어올라! 넌 선천적으로 남자를 홀리는 더러운 창녀의 피가 흐르는 년이야.’







남자는 잔뜩 쉰 목소리로 말하며 아이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자, 아이는 소름이 끼치는 듯 더욱 심하게 떨며 울고 있었다.







‘내가 널 보며 이렇게 흥분하는 모습이 너도 좋지? 더러운 양키 피가 섞인 계집이니 오죽 하겠어? 오늘 네 계모는 밤 시중 하느라 내일 오후에나 들어올 테니 여유롭게 시작하자고.’



‘싫어! 저리가! 꺄아악-!’







아이가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자, 남자는 아이의 뺨을 때린다. 그 힘이 얼마나 센지, 아이의 입 안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다.







‘이년이 아직 제 정신을 못 차렸군, 뭐 길들이는 맛이 있는 것도 나름 괜찮지. 하지만 계속 소리 지르면 나도 널 어떻게 할지 장담 못해! 알아서 처신 하라고.’







남자는 칼로 아이의 목을 가볍게 스쳤다. 그러자 선명한 붉은 피가 그 선을 따라 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금속의 감촉에 두려운 아이는 결국 저항을 멈추고 그저 한 없이 울기만 했다.



남자는 그런 아이의 태도에 만족한 듯, 칼을 옆에 내려놓고 하얀 목에 맺힌 붉은 피를 혀로 핥았다.



칼이 지나간 곳에 따끔거리는 느낌과 더러운 남자의 행동에 아이는 오늘은 다른 날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다. 정말 오늘은 자신이 더럽혀질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저씨, 살려주세요.’



‘오늘 같은 기회가 흔치 않아, 왜 이런 집구석에 5년 동안 내가 몸 파는 년의 기둥서방질이나 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해? 바로 너 때문이야, 넌 남자의 욕정을 해소하기에 딱 좋은 몸을 가지고 태어났거든? 아마 다른 놈들도 널 가지고 싶어 미쳐가고 있을 걸? 썩을 대로 썩은 네 계모를 계속 만나는 놈들의 목적도 단 하나야. 넌 알고 있었지? 그걸 즐기고 있지? 어서 남자한테 안기고 싶지? 너도 똑같은 년이야.’



‘아니에요. 아저씨 저 공부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공부? 네년은 평생 나한테 몸만 대주면 돼.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마.’







남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욕정을 풀기위해 자신의 옷을 하나 둘 벗고 있었다. 아이는 살고는 싶지만, 이대로 몸을 더럽힐 바에는 그저 죽고 싶었다.



그 순간 아이가 옆으로 얼굴을 돌렸을 때, 아까 남자가 들고 있던 식칼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아직도 뒤를 돌아 옷을 벗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저 욕정에 취해 제 정신이 아닌 원초적인 얼굴을 한 남자를 보자,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칼을 들고 초인적인 힘으로 남자에게 칼을 휘둘렀다.







‘아악! 이 미친 계집년이! 크아악!’







남자를 피하며 칼을 휘두르는 아이의 두 번째 공격으로 칼은 그의 등에 꽂혔다. 남자는 집이 울릴 듯이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도망가는 아이의 뒤를 쫓았다.



잡히면 정말 자신은 죽는다는 생각에 아이는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다. 다행히 급소는 피했지만, 꽤 많이 흐르는 피 때문에 남자는 아이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하아, 하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참을 뛰던 아이는 더 이상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눈앞에 보이는 모퉁이를 돌면 속도를 낮출 생각으로 열심히 달렸다.



‘끼이익-!’



막 모퉁이를 도는 순간, 귀를 거슬리게 하는 엄청난 소음과 밝은 빛 때문에 아이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
.





정신이 들어 눈을 뜬 벼리는 온 몸에 수십 마리의 뱀이 지나가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17살까지의 지워버리고 싶은 악몽이 지금까지 그녀를 억누르고 있다.



어릴 적 양친을 잃은 벼리는 고아원에서 생활했지만 보통아이들과는 다른 생김새에 아이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고, 12살에는 젊은 부부에게 입양되었지만, 알고 보니 그들은 그녀의 외모로 돈을 벌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여자는 몸을 팔며 돈을 벌고, 남자는 그런 여자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벼리가 19살이 되면 그녀를 비싼 값에 사창가에 팔아넘기려 했고, 남자는 여자가 없을 때마다 벼리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욕정을 보이며, 19살이 되어 그녀가 팔리기 전에 그녀를 가질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벼리가 17살 때 결국 그녀에게 강제을 시도했다.







“결국 미수였어, 난 더럽지 않아.”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린 날의 공포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가끔 그 남자가 자신을 잡으러 올 것 같은 생각에 오싹한 기분이 드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일어났어?”







자신의 망상에 사로잡혀있던 벼리는 갑작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이내 그녀의 눈에 영일이 보였다.



영일은 억눌린 신음을 내뱉는 그녀가 악몽을 꾸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아무리 깨워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초조해하는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그녀는 곧 눈을 떴지만, 초점이 없는 채로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며 더럽지 않다는 말을 내뱉는 모습에 영일의 가슴이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빠?”



“이마가 땀으로 흠뻑 젖었네, 잠깐 기다려.”



“아빠, 가지 말고 곁에 있어줘”







그녀의 말에 영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곳도 갈 수 없었다.







“그때도 그랬어. 모퉁이를 돌며 난 쓰러졌지. 그냥 지나쳐도 되는 나를 아빠는 병원에 데려다 주었고, 나의 사정을 알고 무서운 할아버지를 설득해서 나를 딸로 입양해 주었어. 아빠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죽어가는 나를 살려주었어.”



“벼리야”



“아빠 나 너무 행복한데, 가끔 무서워져. 그래서 이렇게 나를 감추고 사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안심하려고 하고 있어. 내 모든 불행은 이 모습에서 비롯된 것 같아서, 그래서 이 모습을 감추고 싶어 하나봐.”



“너의 모습은 누구보다 아름다워. 다만 그 아름다움을 시기하고 악용하는 사람을 만나서 너의 어린 시절이 힘들었을 뿐이야.”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여자들을 보면 무서워져. 나와는 달리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화도 나. 은영일 딸 정말 못된 거지?”







자신과의 대화로 불안감이 많이 사라진 벼리의 모습에 영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은영일 딸은 착하기만 해서는 안 되는 거 몰랐어? 어디 나가서 ‘저 은영일 딸이에요’라고 할 수 있으려면 더 못된 딸이 돼야 하는데?”



“그게 뭐야, 아무튼 아빠랑은 대화가 안 돼!”



“벼리야, 적어도 나랑 지일이 앞에서는 너의 모습을 포장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네가 아무리 못된 사람이라도 널 버리지 않아. 넌 그런 사람이 되지도 못하고. 너의 짐을 우리에게 한 번에 다 넘겨주지는 못해도 조금씩 덜어줄 수는 있는 거잖아. 그렇지?”



“...응”



“우리 앞에서는 좀 더 어리광 부리고, 약한 모습 보여도 우린 널 사랑해. 아빠 마음 잘 알지?”



“아빠, 나도 사랑해”



“그래. 착하다, 우리 딸.”







영일의 품에 안긴 벼리는 오늘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은 기분에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그런 벼리의 모습에 영일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순간까지.









※ o13



















“벼리야, 정말 괜찮겠어?”



“오늘 하루 쉬자니까. 벼리 너 쉬면 나도 오늘 촬영 안 갈게”



“은영일, 은지일 씨. 한번만 더 말하면 벌써 20번째 같은 대답하거든요? 저 어린아이 아닙니다. 출근 할 거니까 어서 준비해요.”







영일의 품에서 기분 좋게 잠이 깬 벼리는 회사 출근을 하기위해 서두르고 있었다.



보통의 아침 풍경과 다른 점이라면, 식사준비를 할 때부터 출근준비를 하는 지금까지 영일과 지일이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는 것뿐이다.



단호한 벼리의 대답에 그들도 결국 포기를 하고 각자의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에 들어와 검은 렌즈를 끼려는 그녀는 거울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 장의 사진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친부모와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자신이 혼혈아인 것은 초록색의 눈과 브론즈 빛깔의 머리, 서구적인 생김새에서 알 수 있지만 부모 중 누가 외국인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2살 때 고아원에 보내졌으니 기억 날 리가 만무하다. 자신에게 부모와 관련된 한 장의 사진은커녕 사소한 추억조차 없는 것이 아쉬웠다.







“벼리야, 출발하자.”



“응! 노땅, 잠시만.”







문 밖에서 들리는 지일의 음성에 곧 사념을 거두었다. 그리고 벼리는 빠르게 자신에게서 아름다움을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숨기고 밖을 나갔다.







“오늘 회사까지 내가 태워다 줄게. 오늘 너희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서 show가 있어.”



“그럼 나 퇴근할 때 내차 없어서 불편하단 말이야. 노땅, 그냥 따로 가자.”



“퇴근 할 때는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지일이 말대로 해. 오늘 퇴근하기 30분 전에 아빠한테 전화하고, 알았지?”







영일의 말에도 자신의 차를 타고 가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려던 벼리는, 자신을 쉬게 하고 싶어 하는 그들의 마음을 이미 한번 꺾었기 때문에 이번 제안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네”







벼리는 자신이 비서실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근하는 인후에게 활기차게 인사를 했다.



그런 자신의 인사에 부드럽게 인사해 줄 평소의 인후를 생각하던 그녀는 이유모를 냉담한 인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들어가는 사장실로 인후를 아무리 쳐다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 어제 술을 많이 드셨나보네.”







벼리는 그에게서 알코올 냄새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따로 해장을 하고 온 것도 아니었다.







“은벼리씨, 오늘은 아무것도 안 마셔도 되니까 그냥 볼일 봐요.”







그에게 따뜻한 꿀 차와 함께 무엇을 해줄지 생각하던 벼리는 전용선으로 흘러나오는 그의 말에 약간은 허탈한 심정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오늘 처리해야할 서류를 쳐다보다가 능숙하게 하나하나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반면 인후는 사장실에 들어온 지 10분이 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어제의 그 위태로웠던 모습으로 자신을 밤새 걱정시키던 그녀가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평소의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왔다.







“저렇게 활기찬 이유는 지일 때문인가?”







왜 자신이 어제 잠도 자지 못하고 그녀를 걱정한 것인지, 그녀가 오늘 활기찬 모습으로 출근하게 만든 사람이 지일이라는 사실에 왜 화가 나는지, 인후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제 그녀가 그렇게 나간 뒤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한 그는 바람이라도 쐬고 올 생각으로 사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사장님?”







이미 몇 개의 서류를 완벽히 처리한 벼리는 갑작스럽게 열린 사장실 문에 놀라 인후를 바라보았다. 인후는 문소리에 놀라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가 귀엽게 보였다.







“은벼리 비서, 어제 온 김해주 양에게 오늘 저녁 다시 만나자는 메모와 함께 빨간 장미 100송이를 보내줘요.”







인후는 그녀가 귀엽다 생각하는 자신을 여자를 느껴본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벼리가 아프지만 않았다면 자신은 김해주라는 여자와 달콤한 밤을 보냈을 것이다.



하루 늦어졌지만, 오늘은 꼭 여자와 밤을 보내야한다고 결심했다. 벼리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인후는 그 길로 비서실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서인후 사장의 빨간 장미 100송이는 상대와의 시작.”







여자와 관계를 시작할 때는 빨간 장미 100송이, 감사한 마음을 전할 때는 파란 장미 100송이, 자신에게 실수한 여자에게 경고의 표시를 할 때는 노란 장미 100송이, 마지막으로 여자와 이별을 할 때는 분홍장미 100송이를 보내는 그다. 즉, 어제 만난 여자와는 시작을 할 사이인 것.







“정말 이런 심부름 할 때가 가장 싫어. 한 달 정도 잠잠하다 했더니 다시 시작이네.”







그의 비서라는 것을 후회하는 유일한 순간은 바로 이렇게 여자와 관련된 일을 자신에게 시킬 때이다. 왜 이런 개인적인 일을 비서에게 시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람둥이라는 거 그렇게 소문내고 싶은가?”







작게 투덜거리던 벼리는 갑자기 요란스럽게 울리는 사무실 전화를 들었다.







“Fascinate입니다.”



?Hello??







전화상으로 들리는 중후한 외국 남자의 목소리에 급히 발신번호를 확인한 벼리는 외국에서 걸려온 국제전화라는 것을 알았다.







“Fascinate, Can I help you?/ Fascinate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I'd like to speak to Mr. Arthur, please. / Arthur와 통화를 하고 싶습니다.?







Arthur(아서)는 인후의 외국 이름이었다.



세계적인 기업으로 자리 잡고 나서 다른 나라와 워낙 교류가 잦고 외국인들은 한국이름보다 자신의 나라 이름을 더 친근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벼리와 인후는 외국에서 가장 쓰이기 좋은 영어로 된 이름을 각자 만들었고 외국에서는 그들을 한국이름이 아닌 영어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다.



벼리의 이름은 Eileen(아이린)이다.







“Whom may I say is calling?/ 저랑 통화하는 분은 누구시죠?”



? this is Stanislas./ 저는 Stanislas입니다.?



“Stanislas? Is that you?/ Stanislas? 정말 당신인가요?”



?Oh, Am I speaking to Eileen?/ 아, 제가 Eileen과 통화하는 건가요??



“You got it! It's me, Stanislas!/ 맞아요! 나에요, Stanislas!”







뜻밖에도 전화를 한 상대방은 프랑스 향수업계의 대표인 ‘Stanislas De Pas.(스타니슬라드 드 빠-프랑스식 발음)’였다.



그는 50대의 남성으로 서글서글하고 푸근한 느낌으로 벼리와는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는 거물급 인물이다.







?I miss you, Eileen. It's been a long time./ 보고 싶어, Eileen. 오랜만이야.?



“Sorry, Stanislas. I can't call you for sometime./ 미안해요, Stanislas. 한동안 연락을 못했어요.”







적어도 2주에 1번은 Stanislas와 통화를 했는데, 요즘 신제품 출시로 한 달이 넘도록 그와 통화를 못한 벼리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Don't worry. Any way, is Arthur there?/ 괜찮아, 그것보다 Arthur 있어??

“I'm sorry but He's just stepped out, Are there any messages?/ 죄송하지만 그는 방금 나갔어요, 전할 메시지가 있나요?”



?yes, Perfume festival is on May 15 at Korea. I really want to see Arthur and you at the festival./ 응, 향수 축제가 5월15일 한국에서 하게 됐어. 축제에서 Arthur와 너를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Of course./ 물론이죠.”



?I can't talk to you right now. I'll try to get hold of you later./ 지금은 길게 통화할 수 없어. 나중에 연락할게.?



“Okay, Talk to you later soon./ 네, 나중에 통화해요.”







스타니와 통화를 마친 벼리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원래 향수축제는 매년 5월 프랑스의 그라스라는 도시에서 한다.



이번 년에는 부득이하게 프랑스에서 할 수 없게 되어 한국에서 하게 됐다. 한국으로서는 상당한 이득이고 기회였지만, 벼리에게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노땅이랑 스타니가 나의 이런 모습 인정하지 않을 텐데. 결국 어쩔 수 없는 건가?”







스타니 또한 그녀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 있다. 작년 축제 때, 7년간 아무도 몰랐던 그녀의 진정한 모습을 스타니는 알았다. 그리고 축제 당일 날은 벼리는 그가 준비한 옷이며 화려한 치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벼리는 축제의 히로인이 되었지만, 그녀가 누군지는 오직 스타니만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행인 것은, 인후가 작년 축제 때 회사를 비울 수 없어서 벼리만 프랑스에 갔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들키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해. 노땅이랑 스타니는 절대 자신의 입으로 내 비밀을 말할 사람들이 아니니까.”







벼리는 필사적으로 이번 축제에서 자신이 무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과연 그녀는 무사히 축제를 넘길 수 있을까?















※ o14
















스타니와의 통화가 끝나고, 자신의 본 모습이 들통 나지 않을 방법을 다 모색했을 때 인후가 다시 비서실에 들어왔다.



아까 전 알코올 냄새가 지금은 전혀 나지 않는 것을 빼고는, 나갈 때와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은벼리 비서, 나 없는 동안 특별한 연락 온 것 있나?”



“프랑스 스타니 회장님이 전화하셨습니다.”



“스타니 회장이? 무슨 일로 전화한 거지?”



“5월 15일로 향수축제 일정이 잡혔다는 연락을 하셨습니다.”



“15일이라, 그럼 이번 주에 바로 회의를 잡아야 되는 건가?”



“네, 이번 주에 회의를 해야 다음 주쯤 축제를 위한 모든 준비가 완성될 듯 합니다.”



“그럼, 금요일 전체 회의에서 이야기 하도록 하지. 은벼리 비서도 축제에 대해 건의할 것 있으면 그때 하도록 해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사장님.”



“뭐죠?”



“지일 광고 모델 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일’이라는 이름에 인후는 안정되어 있던 자신의 마음이 또다시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느끼면서도 왜 이렇게 지일 때문에 자신이 민감한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인후는 기껏 집중하기 시작한 서류에서 눈을 떼고 벼리를 바라보았다.







“말해요.”



“지일 씨는 우리 회사 광고모델로 계약하는 대신 조건을 하나 제시했습니다.”



“조건?”



“네, 이번 향수축제에 자신도 참여한다는 조건입니다.”



“향수축제?”

“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향수축제에 지일이 참여한다면, 광고의 이미지를 더욱 잘 살릴 수 있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오히려 감사한 일이죠.”







분명 그녀의 말처럼 Fascinate로서는 광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득을 취하는 절호의 찬스였다.



하지만 지일이 자신에게 이득 없는 이 일을 벼리 때문에 조건으로 제안한 것 같아서 인후는 썩 내키지는 않았다.







“개인 적인 생각으로는 어떤가요?”



“네?”



“우리 회사가 아닌, 은벼리씨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제안이 어떤가 묻는 겁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 이만 나가서 금요일 회의 안건을 정리해 각 부서에 통보하도록 하겠습니다.”







속으로는 제발 모델을 바꾸더라도 지일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말자고 외치고 싶었지만, 회사의 입장으로는 큰 손해가 될 것이기에 벼리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인후에게는 방금 그녀의 말이 자신과 지일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만 나가보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장미 100송이 메모와 함께 김해주씨께 보냈습니다.”



“...수고했어요.”







두 사람은 사장실 문을 사이에 두고 퇴근 할 때까지 더 이상 마주치지 않았다. 인후는 김해주를 만나면, 복잡한 자신의 머리가 정리될 것이라 확신하며 퇴근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



“은비서, 이만 퇴근합시다.”







서류들에 집중하고 있던 벼리는 인후의 목소리에 벌써 퇴근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네, 잠시 만요.”







여러 서류와 책들로 흐트러진 책상을 정리하고 가방을 챙긴 후 인후를 바라본 벼리는 순간 영일에게 전화를 안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녀의 퇴근준비가 다 되자 비서실을 나가는 인후의 뒤를 따르며 영일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 딸, 오늘 퇴근이 좀 늦네? 30분 후에 회사 앞에서 봐.?



“나 지금 끝나서 그냥 버스타고 갈게.”



?지금 끝났다고? 왜 30분 전에 전화 안했어??



“미안, 깜박했어. 오랜만에 대중교통 이용하는 것도 괜찮아.”







벼리와 인후가 탄 사장 전용 승강기는 1층으로 향했다. 조용한 폐쇄공간에는 벼리의 통화소리만 들렸다.







?30분 그냥 안 기다리고 먼저 갈 거야??



“응, 괜찮아. 나 신경 쓰지 말고 조심히 운전하세요.”



?그럼 우리 벼리도 집까지 조심히 와야 해!?



“알았어, 이따 봐.”







영일과 통화를 마친 벼리는 곧 1층에 도착하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비서, 오늘 차를 안 가지고 온 거야?”



“네, 이럴 줄 알았으면 가지고 올 걸 그랬어요.”



“누가 태우러 온다는 것 거절한듯한데, 내가 태워다주지.”



“그냥 오랜만에 대중교통 이용할게요. 사장님은 오늘 저녁에 약속도 있으시잖아요.”



“약속 시간까지 아직 여유로워.”







회사 정문으로 나가자 인후의 차가 시동이 걸린 채 대기되어 있었다. 인후는 운전석에 올라 벼리를 바라보았다.



차를 이용하는 것에 익숙한 그녀는 대중교통의 귀찮음을 알기에 못 이기는 척 조수석에 몸을 맡겼다.







“사장님 차 오랜만에 타는 것 같아요.”

“그런가? 뭐, 은비서 차 산 후에는 내차 탈 일이 없었지.”



“새삼 사장님차가 좋다는 걸 알겠어요, 내 차 의자는 이렇게 푹신하지 않은데.”







아이처럼 즐거워하며 조수석에 몸을 기대는 그녀의 행동에 인후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벼리는 오늘 자신에게 내내 딱딱했던 그가 원래 자상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 같이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 오늘 저한테 화난 것 있었죠? 하루 종일 사신처럼 냉랭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딱딱한 말투로 명령하고.”



“내가 그랬어?”



“설마 모른다고는 안하실거죠? 아침 인사도 단답형이고, 내가 꿀물 타주려고 했는데 마실 것 필요 없다고 하고. 에이, 말하다 보니까 또 화가 나잖아요!”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오늘 그의 태도에 서운했던 것을 하나 둘 말하기 시작했다.







“미안,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하루 종일 힘들었어. 그래서 이렇게 우리 신데렐라님 집까지 모셔다 드리는 거잖아.”



“치, 나 차 없을 때는 정말 급한 일 아니면 매일 데려다 줬으면서.”







오늘따라 정말 서운했는지 평소와 다르게 투덜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인후의 미소를 없어질 생각을 안했다. 오히려 그의 미소는 더욱 진해져갔다.







“그럼 뭐 해주면 화가 풀릴까, 신데렐라님?”



“내일 나 점심에 저번에 사줬던 초밥 집에서 점심 사주면 조금 풀릴 것 같아요.”



“이거 완전 칼만 안 들었지 강도 수준인데? 대체 점심을 몇 번을 사줘야 화가 다 풀리는 거야?”



“점심은 내일 한번이면 되고요, 가끔 나 차 안가지고 올 때 이렇게 태워줘요. 사장님 차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내차를 타다가도 문득 사장님 차가 그립다고요.”



“그 정도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 그럼 이제 화 다 푸는 거지?”



“아니요, 내일 점심 사주기 전까지는 꽁해있을 거예요.”







벼리의 집 앞에 도착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그들만의 분위기에 젖어 서로를 바라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o15
















‘신데렐라를 찾아서 - Perfume festival
날짜 : 5월 15일 금요일 오후 4시 / 참여자격 : 초청장 소지자, Fascinate 직원
숙지사항 : 하나, 신분을 막론하고 참여자격에 해당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둘, 의상은 축제에 어울리는 것이면 된다. 셋, 모든 참여자들은 그날 타인의 이름을 묻지도 말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도 않아야한다. 넷, 향수를 뿌리고 축제에 참여해야한다. 다섯, 이번 축제는 가면무도회인 만큼 참여자 전원은 가면을 착용한다.
이상의 조건을 갖추고 오는 사람은 누구나 축제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되보고 싶은 분들은 누구나 참여하십시오.’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



“이번 축제 때, 각 유명 향수 회사들의 현 광고모델들이 다 온다는 거 알고 있어?”



“그럼 지일도 오는 거야? 나 무조건 참석!”



“지일은 너무 눈이 부신 사람이라 아무리 가면으로 가린다고 해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우리 그날 서로 다 못 알아보고 엉뚱한 사람들끼리 눈 맞는 거 아니야?”



“그럴 확률도 있겠다! 우리 사장님이랑 눈 맞을지도 모른다는 소리?”



“나 오늘부터 피부 관리 해야지!”



“난 다이어트! 드레스 거금주고 사야겠다!”



“꺄아! 꼭 내가 정말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겠다.”



“우리 회사에 멋진 남자들 은근 많잖아! 제발 아무나 걸려라!”



“나도, 나도. 난 외국 남자도 좋아.”



“외국 사람은 다들 거물급이나 모델인거지?”



“그럼, 향수축제 외국에서는 엄청 유명한 축제야! 외국 유명 인사들도 엄청 온다는데?”



“빨리 축제날이 됐으면 좋겠다.”







이른 아침부터 회사 여기저기에 붙여진 축제공지사항으로 Fascinate가 떠들썩했다.



사내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부터 사장까지 회사식구라면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는 말에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있었다.



또한 벼리가 축제 관련 회의에서 제안한‘가면무도회’와 ‘익명성’이라는 규칙이 회사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다.



그 외에도 유명한 세계적 축제인 만큼 많은 유명인들의 참석을 기대하며 회사의 분위기는 한껏 들떠있었다.





.
.



“벼리선배님!”







벼리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회사의 들어온 지 3개월 된 21살 신입사원 송희나였다.



당시 사원 면접관으로 참석했던 벼리는 밝고 똑똑하면서도 아직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묻어나는 희나에게 많은 점수를 주었고, 다른 면접관들도 벼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가장 높은 점수로 합격한 사원이다.



신입사원으로 뽑힌 후, 회사 전체 회식에서 희나는 ‘은벼리 선배님이 있는 이 회사에 꼭 입사하고 싶었다. 뽑아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희나의 그 고백에 벼리는 친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희나씨, 지금 출근이에요?”



“네, 선배님 축제 공지 보셨어요?”



“그럼요. 공지에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요?”



“아니요! 선배님도 참석 하시는 거죠?”



“별로 참석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야겠죠?”



“선배님 엄청 예쁘실 것 같아요. 제가 선배님 몰라보더라도 선배님은 저 알아봐 주실 거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기대에 부푼 희나의 눈동자가 벼리를 바라보았다. 벼리가 그런 희나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자 희나의 얼굴에는 기쁜 듯 화색이 돌았다.







“그럼 저 이만 제 부서에 가보겠습니다. 선배님, 축제 때 뵙겠습니다!”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씩씩하게 자신이 소속된 부서로 돌아가는 희나.



벼리는 그런 희나가 사라질 때까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며, 희나가 축제날 자신을 알아볼 확률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출근이야?”



“사장님, 일찍 나오셨네요.”







벼리가 희나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벼리의 등 뒤에서 그녀에게 되묻는 인후였다. 곧 두 사람은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자 직원들의 인사를 받아주기 바빴던 그와 그녀는 서로에게 시선을 두었다.







“축제 때문인지 다들 들뜬 것 같네.”



“네, 많이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신데렐라는 전혀 그런 기분이 아닌 것 같은데?”



“사장님, 저 원래 이런 행사 좋아하지 않는 것 아시잖아요.”



“그래도 무조건 참석해야 해.”



“참석은 하겠지만 사장님이 저를 못 알아보실 수도 있잖아요.”



“뭐 우리 회사 신데렐라는 거짓말 안하니까 못 알아보더라도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잖아? 그런데 어떤 옷 입을 거야? 설마 항상 입던 옷을 입고 참석할 건 아니지?”



“아직 어떤 옷 입을지 결정 안했어요, 사장님 말대로 항상 입던 옷은 안 입고 갈 거니까 걱정 마세요.”







장난스럽게 물어보는 인후에게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고 그녀는 그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도 그는 여유롭게 사장실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옷이 정해지면 나한테 어떤 의상 입고 올 건지 말해줄 거지?”



“어림없네요. 사장님은 축제날 절대 절 못 알아보실 걸요?”



“그래? 그럼 우리 내기할까?”



“무슨 내기요?”



“축제날, 은비서가 보기에 이 사람이 나라고 생각되는 사람의 의상을 잘 생각해 두었다가 다음날 나에게 그 사람의 의상을 말해주는 거야.”



“사장님이라고 생각한 남자가 축제날 입었던 의상을 다음날 사장님에게 말하라고요?”



“그렇지, 난 그 반대로 은비서라고 생각한 여자가 입었던 의상을 다음날 은비서에게 말하는 거지. 그래서 맞춘 사람 소원 한 가지 들어주기 어때?”



“서로 아니라고 우기면요?”



“우린 둘 다 서로 잘 알잖아?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두 사람 다 맞거나 두 사람 다 틀리면 내기는 무효화되는 거야. 한번 해볼까?”



“좋아요,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







자신 있는 목소리로 승리를 확신하는 인후의 모습에 오기가 발동한 벼리는 위험한 내기를 허락했다.



인후에게 본 모습을 드리지 않기 위해 가면무도회라는 아이디어까지 생각해낸 그녀는 자신의 경솔함을 곧 후회했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위험한 내기의 막이 오르는 축제날까지는 앞으로 3일 남았다.














※ o16















“은영일 사장님, 지일님 안녕하십니까?”







영일과 지일은 지금 내일 있을 향수축제를 위해 유명한 디자이너 옷 가게에 왔다. 그런 그들을 힐끔거리며 직원들이 바라보자 깍듯하게 지일과 영일에게 인사를 한, 지배인이 눈치를 주었다.







“요즘 여자 옷으로 가장 잘 나온 디자인 몇 벌 보여주세요.”



“아, 사장님 실례지만 여성분의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24살”



“여성분의 얼굴과 신장, 그분의 분위기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느새 능숙하게 메모지를 잡어 든 지배인은 영일이 할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배인의 질문에 답을 하는 사람은 영일이 아닌 지일이었다.







“키는 162cm 정도, 몸은 전체적으로 마른편이지만 굴곡이 있고, 얼굴은 엄청 작고, 혼혈이여서 피부는 백옥같이 하얗고, 눈은 황금을 머금은 초록색으로 전체적으로 미인상이고, 분위기는 쉽게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여자랄까?”



“네?”







지일의 말에 지배인은 ‘그게 사람입니까, 인형입니까?’라는 말을 던지고 싶었지만, 지일의 옆에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영일 때문에 차마 질문을 하지 못했다.







“지일 군이 빠트린 것이 하나 있는데, 그 여자는 모든 남자를 홀릴 수 있는 독특한 향을 가지고 있네.”







영일의 말에 지배인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상 디자인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뒤로 2명의 여직원이 따라 붙었다.







“지배인님, 지일 옆에 있는 분은 누구에요?”



“입 조심해, 너희들이 함부로 입에 올릴 분들이 아니니까.”



“누군지만 가르쳐주세요.”



“세계적인 기업인 ‘창조’의 은영일 사장님이다.”



“정말요? 어쩐지 완전 귀티가 흐르더라, 근데 지일이랑은 무슨 사이인거죠?”



“원래 두 분은 친한 사이야, 신경 쓰지 말고 이제 각자 할 일 하도록 해!”







여직원들은 아직 궁금한 것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지배인의 명령에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지배인은 다시 드레스들에 눈을 돌렸다.







“정말 그런 여성이 있긴 한 건가? 그런 여성에게 잘 어울릴만한 옷이 뭐가 있지?”


“지배인님, 누구 옷을 찾는 거죠?”



“선생님, 은영일 사장님이 지일님과 함께 어떤 여자분 옷을 보러 오셨습니다.”



“은영일 사장이?”







지배인과 말을 하는 여자는 이 가게의 주인이자 유명한 세계 디자이너인 이현주였다. 지금까지 작업을 한 듯 피곤해 보이는 현주는 은영일이라는 말에 놀라고 있었다.







“은영일 사장이 왔다면 아마 그 어떤 여자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 아가씨는 이런 곳의 옷을 별로 안 즐길 텐데? 정말 이상하네.”







하지만 현주는 영일이 필요하다면 분명 쓰일 곳이 있기 때문이라는 판단을 하고, 그 여자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자신이 디자인 한 옷들을 바라보았다.







“아! 지배인, 내 작업실에 있는 그 옷 좀 가져와요.”



“설마 그 옷을 파신다고요? 선생님이 본인의 입으로 그러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옷은 특정한 사람을 모델로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입는다면 절대 빛을 발하지 못할 것이기에 팔지 않으실 것이라고.”



“그 주인공이 나타났거든, 걱정 말고 작업실에 있는 옷 가지고 나와요.”







현주는 놀란 지배인에게 버릇처럼 한쪽 눈을 찡긋거린 후, 영일이 있을 대기실로 향했다. 자신의 예상대로 영일이 보이자 현주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은 사장! 오랜만이네?”



“작업 중 이었나봐?”



“늘 그렇지, 지일군도 오랜만이네?”



“그러게 현주옆집누나 오랜만이네. 또 며칠 밤새서 작업실에만 있었던 거야?”







지일은 33살이지만 자신의 형과 친구사이인 현주의 등장에 가게에 들어온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했다. 그런 지일의 태도에 직원들은 자신들의 선생님을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세계적 모델인 누구 씨가 요즘 들어 내 옷을 안 입어주니까 오기가 생기더라고?”



“아줌마, 그 누구 씨가 설마 나는 아니지? 아줌마가 만든 옷이 내 옷장의 반 이상은 차지하고 있다고.”



“그거 새로운 사실인데? 천하의 지일 씨가 내 옷을 선호하고 있었다니, 그런데 우리 주인공은 어디에 두고 두 사람만 온 걸까?”



“이현주, 벼리가 여기 안 올 아이인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하긴, 고집불통 은영일 딸이라서 한 고집 하는 아가씨지. 안 그래도 오랜만에 우리 아가씨 옷을 만들어서 가져가라고 연락하려했는데, 알아서 오시네.”







현주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배인이 드레스 한 벌을 조심스럽게 들고 왔다.



가게에 있는 직원들과 옷을 사러 온 손님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그 옷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감탄하고 있었다.



지배인이 가져온 드레스는 화려하지만 천박하지 않은 너무나 고급스러운 옷이었다. 모든 옷감은 실크 소재였으며, 롱 드레스에 전체적인 색깔은 은색에 가까운 회색빛이었다.



윗부분은 어깨 끈이 없는 탑 형식이었고, 허리부분은 잘록한 허리의 강조를 위해 같은 소재의 천으로 큰 리본이 묶여져 정면에서 약간 왼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금색 나비들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이 드레스 위에 수놓아 있었고, 조명에 비친 드레스는 그 자체만으로 빛이 났다.







“괜찮지? 이번 년도 파티용 드레스 부분에서 그랑프리의 영광을 얻은 작품이야. 은색 같은 느낌이 드는 회색과 금색의 투톤으로 만든 드레스지. 두 사람 다 내가 이 드레스를 누굴 생각하면서 만들었는지는 보자마자 알았지?”



“녹색과 은색, 그리고 금색. 우리 벼리 색깔 아니겠어?”



“맞아, 황금을 머금은 초록색 눈을 가진 벼리를 생각나게 하는 옷. 이 옷은 벼리 아니면 아무도 소화 못해, 오히려 이 드레스의 화려함에 옷을 입은 사람이 죽어 보일거야. 내가 오직 벼리만 입을 수 있도록 그녀의 이미지에 가장 잘 어울리게 만든 옷이지.”







현주의 말에 드레스를 한번 입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가게 안에 있는 여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읽힌 것만 같아 민망해졌다.







“그런데 아가씨가 무슨 일로 이런 옷이 필요한 거야?”



“내일은 본인이 싫어도 아름다워야 하는 날이라서.”



“그래? 무슨 일인지 궁금한데?”



“너도 받았지? 신데렐라를 찾아서. 내일 보자, 디자이너 선생”



“아, 이 축제 초대장의 주인공이 우리 아가씨였어?”







현주의 말에 영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벼리에게 어무나 잘 어울릴 것 같은 드레스를 들고 가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지일은 이내 영일에게 질문을 했다.







“어? 은영일 사장님! 이거 계산 안 해?”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옷은 세계적인 모델이 사야 되지 않을까?”



“뭐라고? 야, 은영일! 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보고 아직 너 따라오려면 멀었다며!”



“내일 우리 벼리 파트너는 너니까 네가 지불하세요.”







단호한 영일의 말에 지일은 불만이 가득 한 얼굴로 자신의 카드를 지배인에게 내밀었다.







“아줌마 저 옷 얼마야?”



“모르는 것이 좋을 걸?”



“어차피 이달 말이면 알게 되니까 지금 가르쳐줘.”



“듣고 놀라지나 마, 지금 내가 말하는 가격은 그랑프리상을 받으면서 전문가들에게 책정 받은 가격이니까 깎으려고 하지 마!”







현주는 웃으며 그의 귓가에 벼리의 드레스 가격을 속삭였다.







“젠장. 야, 은영일! 당장 그 드레스 가지고 안 와? 네가 계산하라고!”







지일의 절규가 이어졌지만 영일의 차는 이미 출발했고, 현주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카드와 함께 영수증을 주었다.







“영수증에 싸인 부탁드립니다, 지일 군?”



“아무튼 이럴 때는 둘 다 친구 아니랄까봐 아주 꼭 닮았어.”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손님. 호호호. 내일보자고, 지일 군.”







끝끝내 화풀이 대상을 찾지 못한 지일은 현주를 한 번 째려보고는 ‘다시는 안와’라는 말을 남기고 가게에서 사라졌다.














※ o17















“오늘인가?”







평소보다 일찍 잠이 깬 벼리는 문득 오늘은 회사를 오후에 나가는 날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정말이지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이 결국 왔네. 아빠는 아직 안 일어났겠지?”







영일이 일어나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벼리는 자신의 방을 나와 영일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곤히 잠든 영일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벼리의 방과 같이 큰 창문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영일의 방. 큰 침대에 영일은 평온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고, 침대 옆에 있는 탁자에는 그와 벼리가 다정하게 찍힌 사진이 올려져있었다.



꽤 오래전 사진인 듯 어린 벼리는 웃으며 영일을 바라보고 있고, 영일은 벼리를 두 팔로 안아들고 그녀의 뺨에 뽀뽀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벼리는 순간 자신의 손을 잡는 영일의 행동에 사진에서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영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딸,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그냥 일찍 일어나졌어. 아빠 오늘 출근 평소랑 같은 시간에 하는 거지?”



“아니, 오늘 어차피 회사 나가도 얼마 안 있다가 너희 회사 가야하니까 출근 안하기로 했어.”



“정말 이해가 안가. 자동차 회사 회장이 어떻게 향수 회사 행사에 올 수 있는 거야?”



“따님, 나 은영일 그렇게 하찮은 아빠 아니거든요?”



“누가 하찮은 사람이래? 그냥 관련이 없다는 거지.”



“잘난 동생 둔 덕분에 초대장을 쉽게 구했지”







영일은 침대에서 일어나 벼리의 팔을 당겨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황금빛 초록 눈동자 속에 자신의 모습이 비춰져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 벼리도 영일도 서로를 바라보았다.







“벼리야”



“응?”



“나중에 너 시집간다고 그러면 아빠는 어떻게 살지?”



“이봐요, 은영일 씨, 뜬금없이 무슨 소리세요.”



“우리 딸이 어느 날 아빠한테 결혼한다고 하면 아빠 어떻게 해야 해?”



“아빠, 잠 덜 깼어? 갑자기 결혼 얘기가 왜 나와”







벼리는 평소답지 않은 영일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영일은 여전히 벼리의 눈동자에 비춰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딸이 결혼한다고 데려오는 남자가 나보다 멋진 남자면 결혼 시키고, 아니면 안 시킬 거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씻고 나오세요, 난 밥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공주님”







영일은 벼리의 눈가에 살며시 뽀뽀를 해주고 하품을 하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벼리도 곧 영일의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잘 잤어?”



“어, 노땅! 지금 뭐해?”



“뭐하긴 아침 차리지! 벼리 넌 어서 가서 씻고나와, 오늘 할 일이 많으니까”







이미 다 씻은 듯 머리가 촉촉하게 젖어있는 지일은 세 사람 몫의 간단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평소 벼리가 밥을 다 차린 후에야 음식 냄새를 맡고 일어나는 지일이 오늘따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노땅은 아침 일찍 어디 갔다가 축제에 참가해야하는 거야?”



“응, 그리고 너도 나랑 같이 가야해. 시간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으니까 어서 준비해”







지일의 재촉에 벼리는 자신의 방에 있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대체 두 사람 다 오늘따라 왜 그러는 거지?”







벼리의 의문은 집을 나와 영일의 차를 타는 순간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물어도 지일이나 영일은 ‘그냥’이라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영일의 차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해 멈추자 벼리는 차문을 열고 내렸다.



영일과 벼리보다 먼저 도착한 지일은 자신의 차에 기대서 벼리를 바라보며 한 건물을 손으로 가리키며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벼리는 그 곳이 자신은 평생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Beauty shop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제야 영일과 지일을 눈에 힘을 주고 째려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들어갈까요, 신데렐라님?”



“오늘 단 하루만이야.”







정중한 신사처럼 허리를 약간 숙이면서 벼리에게 손을 내미는 지일이 얄미운 벼리는 그 손을 세게 내려치고는 씩씩하게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어머! 지일 씨 오랜만이네”







먼저 들어오는 벼리를 보며 인사하던 가게 원장은 따라 들어오는 지일을 보고 벼리를 무시한 채 지일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더욱 뚱해진 벼리는 한숨을 쉬며 편안해 보이는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꽤나 유명한 곳인지 많은 직원들과 언뜻 보이는 사람들 중에는 연예인들도 섞여있는 듯 했다.



허나 자신과 친분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사람을 분류하는 벼리에게는 유명한 연예인들도 그저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는 벼리의 옆에 어느새 지일이 다가와 앉았다.







“오늘은 나보다 이 아가씨를 신경써주세요.”







이곳에 지일이 들어온 순간부터 이 가게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수많은 연예인들을 보았을 직원들의 시선은 모두 지일에게 모아졌고, 심지어 연예인들조차 황홀함과 존경스러움이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모두의 선망의 대상인 지일이 자연스럽게 벼리 옆에 앉아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원장에게 부탁을 하자, 원장을 포함한 기게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벼리에게 집중되었다.







“이 아가씨는 누구?”



“오늘 신데렐라가 될 아가씨”





.
.


“벼리는 언제 다 되는 거죠?”



“아, 지금 의상 갈아입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등에 날개만 달아주면 하늘로 날아갈 천사 같이 턱시도 풍의 새하얀 슈트를 입은 지일은 그를 바라보는 여자들이 저절로 얼굴을 붉힐 정도로 멋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하얀 색인 지일은 눈이 부셔 보일 정도였다. 심지어는 멋으로 쓴 뿔테 안경도 하얀색이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영일은 지일과 대조적으로 올 블랙이었다. 지일이 완벽한 외모와 몸매로 만들어진 인간이라 불리는 사람이라면, 영일의 매력은 지일보다 훨씬 무게감 있고 지적이게 보인다는 것이다.



색의 대조만 아니면 두 사람의 의상은 거의 흡사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마치 천사와 악마,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주제의 조각상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도록 했다.







“은영일 씨, 실례지만 지금 몇 시지요?”



“아직 여유롭습니다, 지일 씨”







은영일과 지일이 대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지만, 친 형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밖에서는 서로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여자분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한 직원의 말에 지일과 영일 그리고 그들을 쳐다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가려진 커튼으로 향했다.



커튼이 조금씩 거두어지고 벼리의 모습이 완전하게 눈에 들어오자, 가게 안의 분위기는 찬 물을 끼얹은 것같이 조용했다.



굵은 웨이브를 넣어서 자연스럽게 올린 머리는 만지면 소름끼칠 정도로 부드러워 보였고, 가지런한 이마와 단정하게 정리된 둥근 눈썹은 한층 더 그녀의 인상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황금빛 녹색 눈동자는 보면 그 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깊어 보였고, 붉은 입술과 투명하면서도 매끈한 피부는 남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필 준비가 되어있었다.



올린 머리는 가늘고 긴 목선과 그 선을 따라 이어지는 가녀린 어깨선을, 탑 형식의 드레스는 그녀의 선명한 쇄골을 돋보이게 했다.



쇄골부분은 금색 펄로 반짝거려 한번 만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또한 그리 야하지 않은 드레스라고 생각했건만 그녀의 몸에 딱 맞는 옷은 어깨부터 가슴 허리 등 너무 선명하게 굴곡이 잡혀 사람들이 마른 침을 삼키게 했다.







“나 이상해?”







지일과 영일이 자신의 모습을 본지 한참이 지나도 말을 하지 않자 벼리는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어봤다. 그녀의 질문에도 그들은 대답이 없었다.







“왜 그래? 어디가 이상하면 이상하다 말을 해줘, 나도 이런 모습 어색하단 말이야”







그녀기 투덜거리기 시작하자 그제야 영일은 웃으며 벼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벼리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너무 아름답다. 숨이 막힐 정도로,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워서 두려울 정도야”



“Papa, The owl thinks her own young fairest or the crow thinks her own birds fairest. (아빠,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 보이는 법이야)”







영일의 칭찬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 벼리는 그에게 농담을 했고,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지탱하며 걸어 나왔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걸을 때마다 드레스가 조명에 비춰져 나비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착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런 모습에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감탄을 하게 되었다.







“너 같은 고슴도치 있으면 내 전 재산을 털어 사겠다. 이거 열어봐”







영일이 주는 상자를 열자 목걸이와 귀걸이가 벼리의 눈에 들어왔다.



목걸이는 우선 줄은 다이아몬드로 연결되어있고, 가운데 부분에 자연스럽게 어린아이의 손바닥만 한 나비모양의 펜던트가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그 나비는 녹색 에메랄드가 촘촘히 박혀있는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보석이었다. 귀걸이도 목걸이의 나비 펜던트를 축소한 모양이었다.







“아빠..”



“그 드레스는 지일이가 선물한 거라서, 나는 특별히 너에게 어울리는 보석을 준비했지”







고개를 숙여 벼리의 귓가에 속삭인 뒤, 영일은 그 보석을 직접 벼리의 목에 걸어주고 벼리의 귀에 달아주었다.



오늘 그녀는 모든 사람의 혼을 앗아갈 것 같은 매혹적인 황금빛 녹색 나비가 되어있었다.







“이제 가실까요, 공주님?”







지일은 그녀에게 얇은 밍크로 된 검은 숄과 녹색 클러치 백을 건네주었다.



지일의 마무리로 모든 준비를 마친 벼리는 애써 긴장감을 떨치려 쉼 호흡을 하며 두 멋진 남자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영일의 차가 아닌 지일의 차에 탔다.



올 때와는 달리 그녀는 가게 안의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그들의 시야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믿기지가 않아, 어떻게 저런 얼굴이 실존할 수 있는 거지?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을 거야”







가게 안에 있던 어떤 사람의 말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벼리의 모습은 정말 실제로 보지 않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그런 매혹적인 신데렐라가 되어있었다.














※ o18















“초대장을 소지하시고 있으셔야 입장이 가능합니다. 초대장을 주시고 이 가면을 착용해 주십시오.”







양복을 입고, 가면을 쓴 두 명의 남자가 나누어 주는 각양각색의 가면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하는 이곳은 Fascinate 이다.



남녀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오늘은 자신이 누구인지 감출 수 있다는 설렘으로 축제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지일과 벼리도 어느덧 회사 앞에 도착을 했고, 그들의 앞에는 영일이 먼저 도착을 했다.



차만 보고도 영일이 도착했다는 것을 파악한 몇몇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입장하지 않고 그가 차에서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영일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의 인기가 많다는 소문을 증명해주기 위해서인지, 많은 여성들이 그의 외모에 감탄을 하기 시작했다.







“벼리야, 아빠랑 삼촌이 이렇게 인기가 많아서 좋지?”







차 안에서 내리지 않고 영일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여유롭게 바라보던 지일이 조수석에 앉은 벼리에게 짓궂게 물었다.



벼리는 어느새 자신의 얼굴 앞에 가까이 다가온 지일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어 그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지일 씨, 당신 지금 엄청 바보 같은 표정이었거든요? 그거 알고 있으신가요?”



“괜찮아요, 저는 은벼리라는 한 여성에게만 이런 표정 보여주니까요”







지일은 아까와는 달리 진진한 표정으로 말한 뒤, 벼리의 뺨에 살짝 뽀뽀를 해주고 차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오자 여성들이 마치 십대 소녀 팬들처럼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런 반응에 지일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조수석 쪽으로 돌아가 문을 열어주었다.







“노땅, 나 이러다가 안티 팬 생기는 거 아냐?”







진심이 담긴 벼리의 말투에 지일은 가지런히 정리 된 벼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벼리는 정말 안티 팬이 기하급수 적으로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한숨을 쉬며 차에서 내렸다.







“지일이 어떤 여자랑 같이 왔나봐!”



“꺄아! 이거 완전 특종 아니야?”



“어떤 여자가 감히 대한민국 여성들의 영원한 이상형인 지일과 같이 오는 거야!”



“이럴 수가! 나 정말 기가 막힌다! 지일은 우리 모두의 남자라고”







당당히 입장을 하기 위해 이쪽으로 올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지일이 조수석에서 누군가를 에스코트 해주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또한 지일의 키에 가려져 벼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사람들의 궁금증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그런 여자들의 격렬한 반응에 벼리는 두려움을 느끼고 지일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노땅, 아빠랑 삼촌이 인기 많아서 좋으냐고? 지금 대답하자면 난 당신들의 인기가 무섭고 두렵다.”



“도도하신 우리 신데렐라님이 무서워하다니, 이거 영광인 걸?”







장난스러운 말투와는 달리 지일은 벼리가 자신의 손을 꼭 잡자, 그도 한 손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고 다른 손은 드레스가 밟히지 않도록 드레스 끝을 잡아 주었다.



그런 신사 같은 지일의 행동에 여자들은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고, 벼리는 이왕 이렇게 된 것 철판 깔자는 마음으로 당당하게 지일을 바라보았다.







“좋아, 준비는 확실히 된 것 같으니까 전쟁터로 떠나볼까요?”



“응!”







지일이 뒤를 돌아 벼리를 이끌고 계단을 오르자 그에게 가려져 있던 그녀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만인의 남자인 지일이 여자를 동반했다는 것에 불만을 품던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지일이 초대장과 함께 그녀에게 어울리는 금색의 가면을 골라 씌워주고 축제장으로 입장할 때까지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사람 맞지?”



“세계 최고의 도예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아름다운 자기 인형 같았어.”



“지일의 옆에서 죽지 않는 외모를 가진 사람이 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외국인인 것 같았지? 눈이 금색이었던 것 같은데”



“눈동자 색은 녹색 아니었어?”



“녹색이었어?”







그렇게 말하던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지일과 의문의 존재인 벼리의 모습을 보기위해 너도나도 축제장으로 들어가기 바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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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칼라로 소매는 프렌치 커프스 형식인 흰색 드레스셔츠와 짙은 남색 비즈니스 슈트를 입고, 그에 어울리는 푸른색 민무늬 타이를 블라인드폴드노트 형식으로 매듭을 지어 전체적으로 차가우면서도 깔끔한 모습의 남자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4시 25분. 올 때가 됐는데 왜 안 오지? 벌써 온 건가?”







유명 회사의 로고가 쓰여 있는 고급 시계를 바라보던 남자는 남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누구인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수 있는 매력적인 남자, 서인후였다.



인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비서를 찾기 바빴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저기 지일 아니야?”



“맞아! 내가 실제로 지일을 볼 수 있다니! 이거 꿈 아니지?”



“근데 저 옆에 있는 여자는 누구지?”



“외국인인가 봐! 웬일이야, 몸매 장난 아니다.”



“얼굴도 엄청 예쁜데? 가면으로 가려도 가려지지 않아! 같은 모델 동료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좀 키가 작지 않나? 외국 여성 모델들은 다 키가 크잖아”



“그럼 혹시 애인?”



“말도 안 돼! 근데 정말 같은 여자지만 질투도 함부로 못하겠다.”







인후는 어느 순간 소란스러워진 파티장이 지금 막 들어온 지일과 그의 파트너이라는 것을 알고 입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지일의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사람은 자신이 예상하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어쩌면 그의 비서인 벼리가 지일과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멀리 보이지만 지일의 파트너는 벼리가 아니었다.







“정말 아름다운 여자군”







지일과 온 여자는 벼리가 아니었다. 지금 그의 눈을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여자는 너무나 아름다운 외국 여성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인후는 순간 이름도 모르는 지일의 파트너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고 생각했다.







“Good afternoon, ladies and gentlemen. Welcome to Perfume Festival. (신사 숙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향수 축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곧 사회자의 멘트에 두 사람의 시선은 엇갈렸고, 인후는 너무 찰나의 시간이라 정체모를 아름다운 여성이 자신과 정말 눈이 마주친 것이 확신할 수 없었다.



애써 자신이 저 여성의 눈빛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잊고 사회자의 능숙한 멘트를 귀로 들으며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긴 온 건가?”







인후는 익숙한 그녀의 향기도 느낄 수 없었다.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면, 그녀를 찾기보다는 축제에 참가한 회사 대표들과 인사하기 바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찾지 못하면, 거의 자신이 그녀를 찾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한 인후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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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는 파티장 안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저 멀리 인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 자신과 인후의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지잉- 지잉-’ 잠시 뒤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들자 ‘사장님’이라는 글자가 액정에 떠 있었다. 인후가 있는 곳을 바라보니 역시나 그가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여보세요?”



?도착했어??







초조한 말투에 벼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보고 있던 지일은 그렇게 미소 짓는 그녀가 예뻐, 손을 들어 벼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일도 그 옆에서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영일 외에 그들을 주시하던 많은 사람들은 지일이 벼리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 모습에 또 한 번 시끄러워졌다.







“네, 했어요.”



?그래? 나 찾았어??



“오늘 남색 슈트에 짙은 파란 넥타이 멋진데요?”







그녀의 말에 인후가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인후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벼리는 자신이 핸드폰을 들고 인후를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라 순간 당황했다. 어쩌면 그가 자신을 알아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난 아직 우리 비서가 안 보이는데. 이러다 내가 내기 지는 건가??



“글쎄요, 그럼 전 소원 생각하고 있어야겠네요.”



?꼭 찾을 거야, 두고 보라고.?







그와 통화를 끊고 벼리는 시선을 또 인후에게 두었다.



그가 자신을 보고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경험을 해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자신을 못 알아볼 정도로 평소에 완벽히 자신의 모습을 감췄다는 안도감보다는 서운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여전히 두리번거리는 그가 미워 보일 정도였다.



그녀는 그에게서 눈을 떼고 지일을 바라보았다.







“Are you angry? (화났어?)”







지일의 물음에 벼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So, beautiful lady, shall we dance? (그럼, 아름다운 아가씨, 춤추실까요?)”



“Sure. (물론.)”







벼리는 정중하게 춤을 신청하는 지일의 손 위에 살포시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그들이 춤을 추기 전에 이미 많은 커플들이 춤을 추며 파티장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벼리가 지일과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의 한편에 자리를 잡자 춤을 안 추는 사람들은 물론, 춤을 추고 있던 커플들도 그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Let's get started. (그럼, 시작해볼까?)”







지일의 말이 끝나고 그들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 춤을 추기 시작했다.















※ o19


















지일과의 춤이 끝나고, 많은 여자들이 가면을 쓰나마나 소용없는 지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벼리는 팬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에게서 멀어진 지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순간 자신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한국 최고의 모델인 지일과 함께 온 여자에 대한 궁금증인가?”







벼리는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 같은 사람들의 시선을 보며 시니컬한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체질적으로 이런 사치스러운 행사를 싫어하는 그녀의 눈에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좋은 방향으로 보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일과 춤을 추다가 플로어의 중간까지 오게 된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때 벼리는 자신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져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Eileen?”



“Stanislas!”







풍채 좋은 몸, 큰 키, 가면 사이로 보이는 파란 눈동자. 벼리를 아이린이라 부르며 그녀의 어깨를 잡은 사람은 며칠 전 통화를 한 스타니였다.



스타니는 두 팔을 벌리며 마치 벼리를 한 번에 알아본 자신을 칭찬해달라는 듯한, 53세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개구진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조금 전까지 잔뜩 곤두서 있던 그녀의 마음이 단박에 풀렸다. 벼리는 스타니의 품에 안겨 그의 양 볼에 뽀뽀를 가볍게 해 주었다.







“Eileen, I've been missing you. (아이린, 만나고 싶었어.)”



“Me, too. (저도 그래요.)”



“Do you know where Arthur is? (아서가 어디 있는지 알아?)”



“He is over there. (저기 있어요.)”







벼리가 많은 사람들 틈 속에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인후가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스타니도 곧 그를 발견했다.







“I see him now. (이제야 그가 보이는군.)”







스타니는 순간 벼리의 손목을 잡고 인후를 향해 발을 옮겼다.







“Stani!”



“I know, I know. Don't worry. (나도 알아, 걱정하지 마.)”







벼리는 자신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스타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스타니는 걱정 말라는 말을 하며 그녀를 데리고 인후에게 다가갔다.



스타니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식한 벼리는 최대한 가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려 노력했다.



다행스럽게도 지일이 씌워 준 자신의 가면은 눈과 이마, 아랫입술을 제외한 모든 곳을 다 가리는 모양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벼리는 초조해졌다.







“Arthur!”







당당한 스타니의 목소리에 외국기업 대표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인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인후는 곧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스타니에게 다가왔다.



벼리는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자신도 한걸음씩 뒷걸음질 쳐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그런 행동은 스타니의 손이 인후와 악수를 하기 위해 벼리의 손목을 놓아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어느 정도 그들과 거리가 멀어지자 웨이터가 건네주는 샴페인을 받을 여유가 겨우 생겼다.







“Excuse me?”







손에 든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며 들뜬 표정으로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고 있던 벼리는 약간은 어눌한 영어 발음을 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에게 막 다가온 남자는 어려 보였고, 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을 보니 사람들에게 알려진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s, shall we dance?”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말하지 않고,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끌어가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보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긴장된 목소리로 춤을 추자고 하고 있었다.



벼리는 그런 그가 공인치고는 상당히 순수해보여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가면에 가려져 그녀의 미소가 보이질 않는 상태라, 남자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는 벼리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못 알아들은 건가? 어쩌지”







남자가 한국말로 작게 중얼거리며 다른 영어를 찾으려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이 또 웃겨서, 벼리가 이번에는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남자의 입에서 어떤 영어가 나올지 궁금해진 벼리는 말을 하지 않은 채로 그 자리를 피하지도 않고 남자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I, I like you! please, dance with me!”







좋아한다는 말까지 들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벼리는 순수 청년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내심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이 한 어눌한 말로 얼굴이 빨개진 남자의 얼굴을 보자 또 다시 유쾌해졌다.







“저랑 춤추시고 싶다는 말씀이죠?”



“네, 그렇긴 한데... 어! 한국말 하실 수 있으세요?”



“처음부터 한국말 하셨으면 금방 대답해 드렸을 텐데”



“앗! 진작 말씀해 주시지. 쪽팔리게..”



“아, 그냥 애쓰시는 모습이 좋아서 잠시 그냥 있는 다는 것이 기분을 상하게 했나보네요. 미안합니다.”



“아, 아니에요! 그럼 저기요”







다시 한국말로 춤을 추자는 말을 또 해야 하는 상황에 난감한 표정을 짓는 남자를 보자, 벼리는 더 놀리다가는 정말 순수청년이 화를 낼 것 같았다.



그녀는 샴페인을 웨이터에게 건네고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춤추실까요?”







순수청년은 벼리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 했지만, 곧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플로어의 중앙으로 향했다.




.
.



“아서, 자네 왜 그러는가?”







Fascinate라는 회사가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서인후와 은벼리를 만나게 된 순간부터 스타니는 한국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관심이 2년 가까이 지속된 결과 능숙한 한국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굳이 영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사업상의 대화가 가능할 정도이다. 인후와 단 둘이 이야기를 한다면 당연히 영어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한국 기업인들과 함께 대면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스타니는 한국어를 사용했다.







“아닙니다, 그냥 주위를 둘러 본 것입니다.”



“그래?”







아까부터 계속 정체모를 여인에게 시선이 가고 있었다. 인후는 스타니가 자신에게 다가오면서 저 여인을 대동하는 것을 보았고, 두 사람이 꽤나 친분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래서 저 여인이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그럼 여기서 그만하지, 오늘은 축제의 날이니만큼 일도 잊고 신나게 놀아봐야 되지 않겠어?”







스타니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아서, 저기 플로어 중간에 아까 내 옆에 있었던 아가씨가 있는데 보이는가?”



“네”



“저 아가씨가 이런 공식적인 행사를 많이 싫어하네, 자네가 좀 말동무가 되어 주겠나?”



“저 여성분 정도면 말동무는 순식간에 구할 수 있을 텐데요?”



“하하하, 아서 자네도 아름다운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군.”



“저 정도의 아름다움을 몰라보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런가? 아무튼 저기 있는 저 아가씨는 낯가림이 은근 심하다네. 또 지일군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였다가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가 아주 바쁘기 때문에 신경 써 줄 틈이 없지. 나는 또 나 나름대로 이리저리 인사 받느라 신경을 못써주고 있어.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네.”







인후는 스타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체모를 미모의 여성이 방금까지 파트너였던 신인 인기 배우가 아쉬워하는 것을 아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플로어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아서, 소중한 꼬마 아가씨를 잘 부탁하네. 지일 군이나 은영일 회장이 그녀에게 갈 때까지 되도록 같이 있어주게.”



“은영일 회장이면, 창조 회장님 말씀입니까?”



“부탁하네, 친구.”







인후는 스타니에게 질문을 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는 바쁘게 다른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향수계의 대부 스타니, 대한민국 최고의 모델 지일, 거기다가 세계기업인 창조의 회장인 은영일까지? 대단한 여자네”







어차피 확인 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 마침 저 수수께끼 같은 여자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갈 방법을 찾던 중이었던 그에게는 스타니의 제안이 고마웠다.



인후는 사람들을 피해 칵테일을 들고 테라스로 조심스럽게 향하는 그녀의 모습을 뒤쫓았다.



아까 스타니와 함께 저 여인이 다가왔을 때, 그는 자신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묘하게 완전하게 부정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식한 후부터 계속 저 여인이 신경 쓰였다.



테라스로 향하는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몇몇 있었지만, 말도 안 되는 상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 인후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게 터무니 없는 상상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밝혀야겠어.”












※ o20























“아직 저녁 바람이 좀 쌀쌀하네.”







벼리는 아무도 없는 넓은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파티 장에서 들려오는 발랄한 왈츠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늘 하늘은 유난히 맑아 벌써 어두워진 밤하늘에는 영롱한 보석 같은 별들이 총총히 박혀있었다.







“정말 아름답네.”







어두워진 밤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벼리의 취미 중 하나는 바로 지금처럼 어두워진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녀는 낮에 보는 하늘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오묘한 매력을 밤하늘에서 느꼈다.



손에 들린 칵테일을 맛보았다. 칵테일을 다 마시고 화려한 조명들과 도로를 달리는 수많은 자동차들을 바라보는 벼리는 고독을 즐기는 사람 같아 보였다.







“한국 분이신가요? 외국 분인 줄 알았는데, 한국어가 상당히 유창하시네요.”







자신의 뒤로 들리는 목소리에 벼리는 빠르게 뒤를 돌아본 그곳에는, 가장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서 있었다. 그의 상사인 서인후의 등장에 벼리는 속으로 너무 깜짝 놀라고 있었다.



벼리는 ‘결국 들킨 것인가?’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인후의 뒤로 파티장 안에서 자신을 보며 윙크하는 스타니를 보고 아직 들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혼혈이거든요.”







벼리는 긴장감으로 두근거리는 속마음을 숨긴 채, 간단명로하면서 평소보다 하이 톤의 도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혼혈이시군요. 저는 외국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네요.”



“테라스로 오신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이유가 있어야만 이곳에 올 수 있는 건지는 미처 몰랐네요.”



“제 말을 오해하셨네요, 그 쪽이 어디에 있던지 그건 본인 마음이죠, 그럼 전 실례하겠습니다.”







여유로운 인후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낀 벼리는 테라스를 빠져 나가기 위해 결음을 옮겼다. 하지만 인후의 곁을 스치는 순간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았기 때문에 테라스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죠?”



“이유가 있습니다.”



“네?”



“제가 테라스에 나온 이유가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이유 저는 알고 싶지 않습니다.”







반항적인 눈빛으로 인후를 쳐다보며 그의 손에 잡힌 팔을 빼내기 위해 이리저리 팔을 움직여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다른 손이 벼리의 턱을 잡아 올려 그와 시선을 맞추도록 했다.







“상당히 무례한 분이시군요!”



“당신 무슨 향수를 쓰지?”



“그걸 왜 제가 그쪽에게 말해야하는 거죠?”







블랙홀처럼 깊은 인후의 눈동자가 벼리의 황금빛 초록 눈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강렬한 시선에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타들어, 재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내가 착각을 한 것인가? 아까 잠시 스쳐간 당신의 향기는 내가 아는 여자의 향과 너무 똑같았는데,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전혀 다른 향이야. 근데 왜 그녀의 향기가 당신의 향속에 포함되어있는 것 같지? 그리고 아직 출시조차 되지 않은 나르시스 향이 섞여있는 것이지? 난 이 해명을 들을 때까지는 당신을 보내줄 수 없어.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들은 꼭 가시가 있는 법이니까.”







자신을 스파이로 간주하는 인후의 모습에서 벼리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2년 동안 함께한 그를 너무 얕본 자신을 탓했다.



서인후라는 남자가 자신의 향을 모티브로 향수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부분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나르시스 샘플 향수를 뿌린 것이다.



벼리는 바보같이 그것으로 자신의 향을 충분히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례를 참 많이 저지르시는 분이네요. 다짜고짜 팔과 턱을 잡질 않나,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죄 없는 사람 죄인 취급하시는군요.”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도둑이 제 발 저린다.”







인후는 아직까지 확실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그녀가 스파이가 아닌 것은 지일과 스타니를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이렇게 도발하는 이유는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까 스타니와의 만남에서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녀의 향이 마치 ‘또 다른 그’라고 표현해도 손색없는 자신의 비서의 향 같다고 생각했다.



그 궁금증 확인을 위해 테라스에 왔고, 가까이 마주하면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확실할 줄 알았다.



근데 오히려 아까보다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나르시스의 향과 섞인 이 여인의 향은 너무나 미묘해서 그 속에 포함된 향이 벼리의 향이라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저는 발을 저린 적 없습니다. 그저 무례한 남자에 대한 반항이었습니다.”







벼리는 정말 이대로 들킬 것만 같아 불안해졌지만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작전을 펼쳤다. 그런 당당한 그녀의 행동에 인후는 점점 그녀와 벼리를 분리시키고 있었다.







“제가 괜한 사람 오해를 한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그럼 이제 이 손들 좀 치워주시겠어요?”







속으로 안심하면서도 그녀는 끝까지 도도했고, 인후는 결국 자신이 착각 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 여인의 손목과 턱을 고정시키고 있는 자신의 손은 그녀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사과의 뜻으로 춤 한곡 신청하고 싶습니다.”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어서 춤은 사양하고 싶네요.”



“그렇다면 이왕 무례한 것, 계속 무례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인후는 두 손으로 그녀를 가볍게 들어 자신의 가까이에 서게 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거의 껴안다시피 안고서 파티 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그녀를 리드하기 시작했다.





“이보세요!”



“이보세요가 아니라 서인후입니다.”



“전 그런 것 궁금하지 않아요! 당장 놓아줘요!”







벼리는 일부러 스텝을 틀리며 인후의 발을 밟았지만, 인후는 교묘하게 피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너무 얄미워 벼리는 슬슬 화가 나고 있었다.







“서인후씨!”



“왜 그러십니까, 신데렐라?”







신데렐라라는 말에 벼리는 순간 정체를 들킨 줄 알고, 숨을 날카롭게 들이키며 고개를 들어 인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어떤 당혹감과 분노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의 착각임을 알았다.







“정체를 알려줄 것 같지 않으니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인데 왜 그렇게 놀라는 거죠?”



“전 놀란 적 없습니다. 자꾸 이렇게 억지 부리시면 정말 발 밟을 거예요.”



“할 수 있으면 한 번 밟아 보시죠.”







벼리의 협박 아닌 협박에 인후는 웃으며 여유를 부렸고, 그에 더 화가 나는 벼리는 더 열심히 스텝을 틀리며 인후의 발을 밟기 위해 노력했다.







“앗, 이 비겁한 인간! 방금 밟을 수 있었는데!”



“비겁하다니? 난 내 발을 보호하기 위해 이러는 것입니다.”







정말 막 발을 밟을 기회였는데, 그 순간 인후가 그녀를 가볍게 들어 올려 그 기회를 놓치게 되자 벼리는 주먹을 쥐고 인후의 가슴을 때렸다.



하지만 가녀린 그녀의 주먹은 인후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여전히 자신을 가볍게 들고 있는 인후가 미워도 이런 상태로 그녀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무 것도 없었다.







“힘만 세면 다에요? 여자를 배려하는 구석이 전혀 없는 사람이군요!”



“여자도 여자 나름 아닐까요?”



“뭐, 뭐에요?”







벼리와 인후는 자신들이 아까까지 얼마나 껄끄러운 사이였는가를 잊고 마치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처럼 티격태격 싸웠다.



벼리는 다리를 흔들면서 그의 품에서 빠져 나오려 했지만 그럴수록 인후는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았다.







“서인후씨, 나 숨 막혀서 죽을 것 같아요!”



“살인자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죽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서인후씨!”





이 순간 인후는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여자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지금은 그녀의 정체를 아는 것보다 그녀를 느끼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인후는 자신의 품 안에서 버둥거리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어?”







갑작스럽게 자유를 느끼는 벼리의 몸이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렸다. 인후는 그 순간 강하게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그녀의 얼굴을 향해 몸을 숙였다.



당혹감으로 살짝 벌어진 벼리의 입 안으로 인후의 혀가 매끄럽게 들어왔다.




매혹적인 신데렐라 [Fascinating Cinderella]











※ 매혹 魅惑 : 매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호림.















※ o21

















밀어내도 밀쳐져지지가 않는다.



아무리 도망쳐도 기어코 따라와 붙잡는다. 밀어내기위해 꼭 쥐어있던 두 손은 어느새 다른 손에 이끌려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고, 주저앉을 것 같은 몸은 그의 몸에 기대어 있다.



벼리는 처음 하는 키스의 강렬함에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입 안을 어느새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타인의 침입에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하아.. 하아..”



“생각 같아서는 더 탐하고 싶었는데, 신데렐라가 숨 막혀 죽을까 걱정 되어서 떨어졌습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약간의 두려움까지 느낀 자신에 비해, 눈앞에 있는 남자는 너무나 태연했다. 마치 이 상황이 모두 장난인 것처럼.







“이 주위에 경찰서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벼리는 장난기 묻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인후의 얼굴을 보면서 차갑게 말하고 파티 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지일을 찾아 다녔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사람이기에 찾는 것은 쉬웠지만,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힘든 지금의 벼리 상황에서는 그가 쉽게 눈에 보이질 않았다.



그녀는 사야를 가리는 가면을 과감하게 벋고 주위를 몇 번 둘러보다 겨우 지일을 찾았다.







“지일!”







수많은 기자들과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지일은 벼리의 목소리에 단번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 또한 벼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 파티장 안으로 들어왔을 때처럼, 또다시 파티장 안에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시선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지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면은 왜 벋었어, 무슨 일 있는 거야?”







지일이 자신의 얼굴을 만져주자 아까 인후와의 키스가 생각난 벼리는 지일의 허리를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모든 사람들이 술렁거렸지만 두 사람 다 그런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수 없었다.







“벼리야?”



“노땅, 안아줘”



“어떤 놈이야”







울음기 가득한 벼리의 부탁에 지일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껴안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일의 질문에 벼리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왜 인후와의 키스로 자신의 기분이 이렇게 슬퍼지는지 그녀조차 그 이유를 몰랐기 때문에 말할 수가 없었다.







“그냥 갑자기 무서워졌어, 혼자 있으니까 무서웠나봐”



“미안해, 미안해 벼리야”







며칠 전 악몽을 꾼 벼리이기에 지일은 그녀의 거짓말을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집에 갈까?”



“......”







그의 질문에 당장 ‘응’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자신과는 달리 지일은 공인이기에 벼리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그의 눈을 바라만 보았다.







“괜찮아, 나도 너랑 춤 한곡 추고는 계속 기자들이랑 사람들 속에서 해 줄만큼 해 줬으니까”



“그래도..”



“나도 이런 공식 행사 싫어하는 거 잘 알잖아. 우리 집에 가서 라면 끓여서 영화나 한편 볼까?”







쾌활한 그의 목소리에 벼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지일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에 뽀뽀를 해줬다.







“가시죠, 공주님?”







그의 장난에 미소를 짓던 벼리는 어디선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그 시선의 주인공이 인후라는 것도 알았다.



여자들에게는 큰 의미인 첫 키스를 가져가 놓고 그런 행동을 장난으로 생각하는 인후의 행동에 화가 난 벼리는 그 시선을 알면서도 무시했다.







“지일, 나 아파서 못 걷겠어.”







벼리는 인후에게 보여줄 마음으로 지일에게 투정부리며 그를 향해 팔을 벌렸다. 그녀의 행동에 지일도 곤란한 기색 없이,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듯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꺄아! 지일이 안았어!”



“뭐야! 저 여자랑 사귀는 사이인거야?”



“혹시 저 여자 신인 모델 아닐까? 엄청 예쁘잖아!”



“솔직히 엄청 잘 어울리는 커플이긴 하다.”







기자들은 오늘 행사에 참여하는 조건이 카메라를 미소지자라는 사실에 분개하며, 연신 벼리가 누군지에 대한 논쟁을 펼쳤다.



가면에 가려져 있을 때는 자신들이 아는 몇몇 공인 여성들과 비슷하다는 말을 했지만, 정작 가면을 벋으니 전혀 본적 없는 얼굴이었다.



또한 너무 아름다운 얼굴이라 신인 모델이나 연예인이었다면 분명 화제였을 텐데, 기자들조차 처음 보는 생소한 얼굴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기자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두 사람의 화려한 퇴장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대체 저 여자는..”







인후는 키스가 끝난 후, 어색한 분위기가 될까봐 농담을 하는 자신을 상처받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나가버리는 정체모를 여자의 행동에 평소처럼 냉철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녀와의 키스조차 너무 충동적이었다. 마치 십대 호기심 왕성한 소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이성적으로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그녀의 입을 점령했다.



그렇게 도둑처럼 가진 그녀의 입은 너무나 달콤해서 아찔했고, 자신의 손에 이끌려 허리를 감싸는 얇은 팔과 온전히 기대오는 그녀의 가녀린 몸으로 인해 그의 모든 이성은 욕망에 잠식해버렸었다.



충동적인 키스도 물론이지만, 키스를 하면서 이 자리에서 당장 그녀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은 그로써는 정말 생전 처음으로 가지는 욕망이었다.







“오늘로 끝인 건가?”







인후는 어떤 오해를 한 사람처럼, 심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녀가 파티장으로 들어가고 그녀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도 뒤따라 들어갔지만 그 여자는 지일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사라지는 그녀를 보면서도 그는 따라갈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가면 속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여자였어,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는데”







분명 자신이 충동적인 마음이 들만큼 그녀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에게 호기심이 든 것은 비단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많이 닮았어.”







가면을 벗은 모습은 절대 그녀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참 많이 닮아 보였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유일한 여자, 은벼리를.



분명 눈동자도 다르고 몸매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달라보였지만 목소리와 그녀의 향기 등 닮은 점도 많았다.







“우리 신데렐라 아가씨랑 피가 섞인 사이인가?”







그렇다면 말이 되었다.



생김은 다를지 몰라도 지일과 자신의 비서인 벼리가 친한 사이인데, 저 연인과 지일이 친한 이유도 설명이 되고, 목소리가 닮거나 향기가 비슷한 것도 말이 되고, 저 여자가 아직 출시도 안 된 나르시스 향수를 뿌리고 있는 것도 벼리가 샘플을 선물로 줬다면 말이 된다.







“정말 혈연관계라면..”







인후는 순간 혼란스러워졌다.



혈연관계라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좋아해야하는 것인가, 오늘 자신과 여자와의 이야기를 듣고 벼리까지 자신을 미워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 싫어해야 하는 것인가?







“내일이 오는 것이 무섭군.”







혹시 지금이라면 벼리를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그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지만, 그의 주위에서는 그녀의 향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는 문득 테라스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혈연관계라지만 그 향기마저 같을 수 있는 건가?”







자꾸 벼리와 그녀를 엮으려는 자신의 행동에, 인후는 말도 안 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하지만 자꾸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녀에게서 벼리의 향이 느껴진 상황, 그녀의 입을 탐할 때, 나르시스 향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벼리의 향 만 더욱 짙어진 상황, 그녀가 사라지자 미세하게 있던 벼리의 향이 완전히 사라진 상황.







“젠장, 미치겠군.”







인후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사람들 틈에 섞여 들어갔다.













※ o22

















“안녕하십니까? 저번에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던 것 같네요. 이번에 Fascinate의 광고모델로 활동하게 된 지일입니다.”



“반갑습니다. 지일씨가 저희 회사 광고모델 제의에 흔쾌히 승낙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인후의 회사 사장실 안에는 인후와 지일 단 둘만 있었다. 벼리는 어제 인후와의 어색한 만남 때문인지 그저 비서실에서 모니터만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벼리의 행동에 인후와 지일은 자신들의 만남이 첫 만남이 아니라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아도 됐다.







“제가 승낙한 이유는 저기 밖에 있는 공주님 때문이지요. 감사의 인사는 우리 공주님께 해 주시길 바랍니다.”



“벼리는 당신 장난감이 아닙니다. 말조심 해주십시오.”







인후는 순간 지일에게 화가 났지만, 왜 화가 났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지일의 여유 있는 말투 때문인지, 그 전에 벼리를 안고 회사를 나가던 모습과 어제 그 여자를 안고 파티장을 나가는 모습이 생각나서인지.



하지만 한 가지 벼리를 지일만의 호칭으로 부르는 것이 상당히 불쾌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장난감이라고요? 상당히 저에 대해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계시네요. 저는 우리 벼리를 장난감으로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날 느끼시지 못하셨습니까? 벼리는 저의 목숨입니다. 아니,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일은 인후의 발끈한 말에도 좀 전과 같은 여유로운 말투로 대답을 했다. 하지만 눈빛은 부드러운 말투와는 달리, 인후를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굶주린 호랑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인후는 벼리가 쓰러진 그날 지일이라는 남자가 얼마나 거친 숨을 쉬면서 사장실 안으로 들어왔는지를 생각해냈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에 그가 했던 대답도 똑똑히 기억해냈다.







“그럼 대체 어제 그 여자는 당신에게 무슨 존재였습니까?”







인후는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지일이 벼리를 장난감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그날 알았다.



하지만 벼리를 보던 눈빛으로 어제 그 여자를 바라보았고, 벼리를 망설임 없이 안아들었던 그 팔로 그 여자를 망설임 없이 안아 들었다.







“그 여자라.. 서인후 사장님이 지금 그 여자라고 표현하는 여자 또한 저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대체 지일씨는 세상에 목숨보다 소중한 여자가 몇 명입니까?”



“서인후 사장님, 왜 제가 이런 질문을 받아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사생활이 왜 그렇게 궁금한 거죠? 혹시 절 사랑하십니까?”



“하아, 지일씨와는 대화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굳이 숨기지 않아도 됩니다. 목숨보다 소중한 제 리스트에 오르고 싶습니까? 워낙 출중한 얼굴이라 이런 일이 꽤 있어서 당황스럽진 않습니다, 더구나 서인후 사장님 같은 외모라면 금단의 사랑도 해볼 만하죠.”







지일은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있던 몸을 일으켜 인후가 앉은 의자 팔걸이에 요염하게 앉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에도 인후는 전혀 얼굴에 동요가 없었다. 지일은 그런 인후의 얼굴을 손으로 살며시 쓸어 내렸다.







‘벌컥-!’



“지일씨!”







인후와 지일은 서로가 진심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인후는 아무런 제지를 안 한 것이고, 지일도 그저 장난으로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행동을 밖에서 바라보던 벼리는 결국 사고뭉치 지일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사장실 문을 열고 지일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오, 사장님의 순결을 지키는 비서의 등장인가요?”



“당장 나오세요! 사장님 죄송합니다. 워낙 장난이 심한 사람이라서”







벼리는 성큼성큼 사장실로 들어와 인후의 얼굴에 머물러 있는 지일의 손을 잡고, 인후에게 사과를 한 뒤 지일을 끌고 사장실을 나가려했다.







“왜”







왜라는 인후의 말에 벼리는 사장실을 나가려던 몸을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인후의 표정은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사장님?”



“왜 벼리 네가 나에게 사과를 하는 거지? 지일씨가 한 행동인데.”



“그, 그게..”







자신의 질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벼리의 표정을 보던 인후는 그녀의 표정에서 이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지일이 보는 앞이라 오기로 반말을 사용하며 벼리라고 불렀지만, 정작 그녀는 질문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됐습니다. 나가보도록 하세요.”







인후는 그렇게 말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가 서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벼리도 조심스럽게 인사를 한 후, 지일을 사장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한명입니다.”







지일이 나가기 전, 무심코 던진 말에 인후의 시선이 지일을 바라보았고 벼리도 엉뚱한 말을 하는 지일을 바라보았다.







“사장님이 궁금해 하는 제 리스트에 있는 사람, 오직 한 명입니다. 제 말의 의미를 알게 되는 날이 올지, 안 올지는 사장님에게 달렸습니다. 그럼 촬영할 때 다시 뵙죠.”







지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벼리의 등을 밀며 사장실을 나갔다. 그리고 인후는 그런 사장실 문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 명이라고? 그 말의 의미를 아는 것은 나 자신에게 달렸다고?”







지일의 의미심장한 말에 인후는 어제보다 더 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
.



“아! 아파, 은벼리!”



“그러게 왜 우리 사장님 속을 긁어? 그리고 마지막에 그 말은 뭐야? 아무튼 내가 들어갔어야 했는데, 당신이 초등학생이야? 왜 자꾸 사고를 치는 거야!”







벼리는 사장실을 나오면서부터 계속 지일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화를 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오늘 자신과 인후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로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그 어색한 분위기에 기름을 부어주는 지일의 행동에 화가 단단히 난 것이다.







“오해야! 난 사고를 친 기억 없다고!”



“뭐? 기억이 없어? 아무튼 빨리 나가. 난 사장님한테 다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으니까, 노땅 집에서 봐.”







지일은 그리 세게 때리지도 않으면서 투정을 부리는 벼리가 귀여워 그녀의 이마에 기습뽀뽀를 했다.







“야!”



“난 이만 가겠습니다. 은벼리씨 미안하지만, 오늘 저는 스케줄이 빡빡해서 밤을 새고 내일 오전에나 집에 들어갑니다!”







지일은 긴 다리로 잽싸게 비서실 문 앞으로 가서 벼리에게 살짝 윙크를 해준 뒤 사라졌다.







“아시아의 별? 저런 모습을 봐야 그런 말이 안 나올 텐데, 내가 아무리 말해봐야 세상 사람들이 믿기나 하겠어? 내일부터 촬영인데 사장님이랑 부딪힐까 걱정되네.”







벼리는 오늘 급격히 어색해진 자신과 인후의 분위기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듣기 좋은 깔끔한 인후의 목소리에 벼리는 여느 때와는 달리 걱정되는 마음을 달래며 사장실 문을 열었다.







“사장님”



“무슨 일이지?”







인후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상태로 벼리에게 질문했다.







“잠시 이야기나 할까 해서요.”







벼리가 그렇게 말하고 소파에 앉자, 그제야 인후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랑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서로를 모르던 처음 잠깐의 시간을 제외하고, 3년 동안 한 번도 차갑게 대하지 않던 인후가 자신을 차갑게 대하는 것이, 요즘 들어 오늘을 포함해 벌써 두 번째이다.



몇 일전에도 그가 자신을 차갑게 대했을 때, 꽤 서운한 감정이 들어서 종종 차를 태워준다는 그의 말에 겨우 서운 했던 감정을 풀었다.



그런데 다시 차가운 태도를 보이는 인후를 보자 어제의 도둑키스가 떠올랐고, 분위기를 풀어야겠다는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벼리의 눈에서 갑작스럽게 눈물이 흘렀다.







“은벼리 비서?”







인후는 느닷없는 벼리의 눈물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자신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인후는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씨이, 사장님 그렇게 잘났어요? 그렇게 대단해요?”



“무슨 말이야..”



“나는 그렇게 하찮은 사람이에요? 요즘 들어 내 존재가 하찮은 것이 느껴져서 이렇게 나 자꾸 무시하는 거예요? 나 사장님한테 그런 하찮은 존재에요?”



“벼, 벼리야..”



“나한테 자꾸 이렇게 차갑게 굴지 말고, 나 싫으면 싫다고 말해요! 하찮으면 하찮다고 말해요! 사장님이 나 싫어하는데 옆에 있게 해달라고 안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라고요!”







서운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벼리는 눈물이 이미 자신의 의지를 벗어났다는 것을 느끼고 더 추한 모습을 보이기 전에 이 자리를 뜨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벼리야?”



“사표는 지금 써서 낼 거니까 걱정 마세요. 퇴직금이나 넉넉히 챙겨주세요”







사장실을 나가려는 그녀의 팔을 인후가 잡았다. 그리고 벼리를 뒤에서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







“미안해 벼리야. 응? 내가 다 미안해, 잘못했어.”



“뭐가.. 미안한데요?”



“차갑게 대해서 미안해, 너한테 화내서 미안해, 요즘 들어 자꾸 속 좁게 행동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한 거예요?”







벼리의 물음에 인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린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잠시 뒤, 벼리는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도둑키스를 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빠졌지만, 인후는 정말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또 나한테 차갑게 굴 거예요?”



“아니, 절대 안 그럴 거야”



“저번에도 나 화 어렵게 풀어놓고 일주일도 안 되서 차갑게 행동해놓고”



“그때는 차갑게 굴지 않겠단 약속은 안했잖아, 다시는 그렇게 행동 안할게.”



“만약 그러면?”







벼리의 질문에 인후는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양 손으로 감쌌다. 그런 행동에 벼리는 그의 얼굴에 더욱 가까이 다가갔고, 두 사람은 서로의 숨소리도 들릴 만큼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때는 이 회사를 벼리 너에게 줄게, 그리고 내가 너의 비서가 될게.”













※ o23

















“사장님 지금 자신이 무슨 말 하는지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럼!”



“그만큼 자신이 한 말을 지킨다는 거죠? 하지만 이런 약속은 절대 하지마세요. 이 회사 사장님 말고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많으니까요. 저를 포함한 직원들은 아마 사장님이 사장이 아닌 회사를 생각해보지 않았을 테니까요.”



“우리 직원들은 아마 벼리가 사장으로 취임했다는 말을 들으면 축제를 열 사람들이야. 다른 사람과는 죽어도 이런 약속 안 해, 벼리니까 이런 약속 하는 거야”







인후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아직도 얼굴을 가까이 마주한 채, 서로를 어색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인후는 벼리의 얼굴에서 자신의 손을 떼지 않았고, 벼리도 인후의 눈에서 자신의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우리 내기했었죠? 난 사장님 찾았는데, 사장님은 나 찾았어요?”



“아니, 못 찾았어.”







벼리는 자신과 키스까지 해놓고 못 찾았다 말하는 인후가 밉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고 내기에서 이겨서 기쁘기도 했다.







“그럼 내가 내기에서 이긴 거네요?”



“그런데, 당신과 많이 닮은 사람을 봤어”



“닮은 사람?”



“응, 어제 파티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아주 아름다운 여자인데 당신을 많이 닮았어.”



“그런 아름다운 여자가 어떻게 저랑 닮았어요. 억지 부리지 마요”







그가 말하는 아름다운 여자가 자신인 것을 하는 벼리는 시선을 급히 내리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아니, 많이 닮았어. 목소리, 하는 행동, 특히 당신만의 향기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어. 혹시 당신과 혈연관계인 여자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어.”



“난 친 자매는 없어요, 외동이거든요. 그런 소원 한 가지 들어주는 거죠? 지금 당장은 생각 안 나니까 나중에 필요할 때 사용할게요.”



“그렇게 하도록 해.”



“그럼 나가볼게요,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세요.”



“벼리야”







벼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벼리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인후. 그녀는 그런 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왜요?”



“앞으로는 공식적인 자리 아니면 그냥 이름 불러야겠다.”



“그게 편하시면 그렇게 하세요.”



“너도 그렇게 해.”



“네?”



“너도 공식적인 자리 아닐 때는 사장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나만 이름 부르면 불공평하잖아?”



“그럼 ‘인후야’라고 불러도 되요?”







벼리의 장난에 인후는 그녀의 허리를 꽉 잡고 숨도 못 쉴 정도로 세게 안았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으아! 장난 안 할 테니까 놔줘요, 사장님”



“인후씨라고 부르면 놔줄게”



“하지만..”



“그럼 안 놔줄 거야, 오늘 하루 종일 이렇게 있을래, 이름 부를래?”



“인후씨! 이제 됐어요?”







벼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를 품에서 해방시켜주었다. 자신을 째려보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사적인 자리에서 이름 안 부르면 장소 불문하고 이렇게 꽉 안아버릴 거니까 명심해”



“악당!”







벼리가 화를 내며 사장실 문을 쾅- 하고 닫고 나갈 때까지 인후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
.



“인후씨 있죠?”







퇴근시간이 다되어 가는 저녁,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는 벼리도 본 적 있는 여자였다. 절로 우아함이 풍겨 나오는 너무 여성스러운 여자.







“아, 선약하셨습니까?”



“아니요, 그냥 저번에 약속이 취소되어서 오늘 인후씨 시간이 되는지 궁금해서 왔어요.”



“실례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김해주입니다.”



“잠시 소파에 앉아서 기다려 주십시오.”







보통 때의 벼리 같으면 사장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여자를 보냈겠지만, 저 여자는 예외였다.



저번에도 인후가 직접 사장실에서 나와서 사무실로 데려간 여자였기에 함부로 벼리 혼자 결정할 수는 없었다. 벼리는 소파에 우아하게 앉는 여자를 보고,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벼리?”



“사장님 김해주라는 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김해주?”



“선약은 아니신데, 저번에 사장님이 직접 모시러 나온 여자 분이라서 잠시 기다리시라고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들어오라고 해줘요.”







인후는 벼리가 쓰러지던 날 자신이 일방적으로 한 약속을 취소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정중하게 사과를 해야 도리인 것 같아서 해주라는 여자의 출입을 허가했다.







“사장님께서 들어오시라 합니다.”



“감사해요”







벼리는 해주가 문을 닫고 사장실을 들어갈 때까지 바라보다 곧 자신의 퇴근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장님, 퇴근하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요, 오늘 같이 가기로 했잖아’



“아, 네”







벼리는 전용 연결선으로 흘러나오는 인후의 말에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아직 끝내지 못한 서류에 다시 집중했다.





한편 해주는 왠지 자신을 밀어내는 것 같은 인후의 단호한 말에 기분이 상했다. 자신이 여기까지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데, 자신을 짐짝 취급하는 기분이 들었다.







“중요한 약속인가요?”



“네, 김해주씨 저번에는 죄송했습니다. 우리 비서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도저히 저녁을 같이 할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괜찮아요, 그보다 저는 오늘 시간이 되는 줄 알고 왔는데 바쁘신가 보네요.”



“네, 비서와 중요한 약속을 해서요. 다음에 제가 시간 날 때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같이 나가는 건 괜찮죠? 지금 나가려는 것 같은데”







자신이 확실한 선을 그어 말하는데도 은근히 선 안쪽으로 들어오려는 해주의 말에 인후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수줍게 말하는 해주의 눈에는 그런 인후의 표정이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죠”







인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양복 상의를 입고 핸드폰과 차키를 챙겨 사무실 밖으로 나왔고, 해주는 그런 그의 뒤를 졸졸 따라 나왔다.



인후는 자신의 말에 얌전히 서류를 보고 있는 벼리를 보고 해주로 인해 불쾌해진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벼리야”



“네?”



“갈까?”







인후는 해주가 뒤에 있는 상황에서도 벼리를 친근하게 불렀고, 자신은 깍듯하게 대하면서 비서에게는 한 없이 다정한 인후의 모습에 해주는 벼리가 점점 미워지고 있었다.







“아, 약속이 있으신 거 아닌가요?”



“아니, 해주씨는 그냥 지금 우리 나가니까 같이 나간다고 하시더라고. 사장과 사장 비서가 없는 사장실에 손님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



“잠시 만요”







벼리는 거침없는 인후의 말에 아까의 우아함과는 달리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는 해주의 모습에 빠르게 가방을 챙겼다. 벼리가 가방을 챙기는 사이 인후는 어느새 그녀의 외투와 차키를 들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차로 데려다 주기로 했으니까 차키도 가방에 넣어두라고, 이리와”







인후는 마치 애인처럼 벼리에게 외투를 걸쳐주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고, 벼리는 점점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빨리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뒤를 돌아 인후가 들고 있는 외투에 팔을 넣었다.



그렇게 옷을 입고 나면 끝인 줄 알았는데, 인후는 벼리의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한 뒤 그녀의 외투 단추를 하나하나 끼워주었다.







“제가 할게요”



“가만있어, 다됐다. 그럼 나갈까요?”







벼리는 싸늘한 표정의 해주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인후의 노골적인 태도에 해주가 많이 기분이 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서랑 참 사이가 좋으시네요.”



“그런가요? 3년간 함께한 사람인데 사이가 안 좋은 것이 더 이상하죠.”



“마치 애인사이 같아요.”



“저 같은 놈에게 벼리는 과분한 영광이죠.”







그 말을 끝으로 해주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엘리베이터 안은 침묵만 흘렀다. 1층에 도착하자 해주는 말없이 먼저 회사를 빠져나갔고, 벼리는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숨을 쉴 수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절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네요, 저 여자 분 눈빛에 그대로 질식해 죽는 줄 알았어요.”







인후는 정말 힘들어 보이는 벼리를 부축해 자신의 차에 태웠다. 벼리는 조수석에 편하게 기대어 눈을 감았다.







“밥 먹으러 가자”



“집에 데려다 줘요”



“밥 먹고 데려다 줄게, 맛있는 거라도 먹여야 덜 구박하지”



“정말 못 말려. 제가 지금 눈 뜨고 싶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요. 안 그랬으면 사장님도 눈빛에 질식해 죽는다는 의미를 알게 되었을 테니까요.”



“그것보다 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라”



“네? 꺄아!”







인후는 자신의 옆에서 눈을 감고 있는 벼리를 꽉 껴안았다.



그의 가슴에 얼굴이 묻힌 벼리는 갑작스러운 인후의 행동에 놀라 주먹으로 그의 등을 때렸지만. 오히려 그 손도 인후의 손에 잡혀 그의 허리를 감싸게 했다.







“내가 사적인 자리에서 사장님 이라고 쓰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알았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이것 좀 놔 봐요!”



“어서 인후씨라고 해”



“인후씨! 이것 좀 놔줘요!”



“이거 효과 만점인데? 앞으로 종종 써먹어야겠어.”







벼리가 그를 바라보았지만, 인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여유롭게 차를 출발시켰다.







“우리 정말 사장과 비서 사이 맞아요?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필요 이상으로 친한 것 같아요. 아까 여자 분이 정말 우리 사이를 오해하면 어떻게 해요?”



“우리 사이를 어떻게 오해하는데?”



“뭐 속으로는 서로 좋아한다고 볼 수도 있잖아요.”



“그건 오해가 아닌데?”



“네에?”



“당신 나 싫어해? 난 벼리 좋은데”



“뭐 나도 인후씨 좋아하긴 하죠.”



“그럼 오해가 아니잖아?”







벼리는 뭔가 자신의 질문과 인후의 질문에 핀트가 어긋난다는 것을 느꼈지만, 바로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에 얌전히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빨리 정말 사랑하는 여자 만나세요, 여자들 그만 좀 울리시고요”



“사랑하는 여자?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의외의 대답이 나오자 벼리는 놀란 눈으로 인후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런 벼리를 바라보고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주었다. 벼리는 그 미소 속에서 더 이상의 대답은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실망을 했다.







“치, 대신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주세요”



“아마 벼리 당신이 가장 먼저 알게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












※ o24
















“이거 예상보다 더 대단한데요?”



“사람.. 맞습니까?”



“저는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지일씨는 정말 나르시스가 환생한 것 아닐까요?”







광고 촬영장이 이렇게 소란스러운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촬영을 위해 분장을 마친 지일의 모습이 지상의 것이 아닌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이성적으로 지켜보는 사람은 촬영 감독을 제외하고 인후와 벼리 둘 뿐이었다.







“정말 최고의 이슈가 되겠군.”



“마음만 먹으면 정말 잘 하는 사람이니까 아마 보란 듯이 이 홍보를 성공시킬 거예요.”







지일을 바라보며 약간의 자부심이 찬 어조로 자랑스럽게 말하는 벼리.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인후는 지일에게 향하던 시선을 돌려 벼리를 바라보았다.







“둘은 무슨 사이지?”



“네?”



“지일과 당신, 무슨 사이인거지?”







인후의 질문에 벼리는 지일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과연 무슨 사이라고 말해야하는 것일까? 벼리는 난감하기만 했다.







“말 못할 사이인가?”



“그냥 아는 사이에요”



“그런 것 치고는 지일이 당신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은걸? 거기다 나에게 그런 소리까지 했으니”



“그런 소리요?”







벼리는 또 노땅 저 인간이 무슨 잘 못을 저지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인후를 바라보았고, 인후는 그런 벼리의 작은 변화도 대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눈에는 그녀가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애인을 걱정하는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었고,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보기 싫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뭐라고요!!”







어수선한 분위기가 대충 정리가 되고, 이제 막 차분한 분위기로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하려던 감독은 자신의 등 뒤로 들리는 큰 목소리에 인상을 쓰며 그 근원지를 찾았다.



자신의 목소리가 컸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벼리는 그런 감독에게 죄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연신 숙였다.







“은 비서님이라면 제 촬영장에서는 뭘 하셔도 용납됩니다.”







이번 촬영의 일등 공신이 누군지 잘 아는 감독은 그 근원이 벼리라는 것을 알고 곧 인상을 풀며 장난스러운 멘트를 날렸고, 그런 감독의 말에 약간은 경직되어있던 촬영장의 분위기가 풀리고 있었다.



정작 벼리는 그것을 모른 채로 부끄럽다면서 인후의 등 뒤로 숨기 바빴다.







“뭘 그렇게 놀라, 내 말이 틀린 거야?”



“아 몰라요!”







벼리는 장난스런 묻은 인후의 목소리에 짜증이 나 주먹으로 그의 등을 힘껏 때렸다. 그가 뒤를 돌아 자신을 바라보자, 보란 듯이 혀를 힘껏 내밀어주고 흥- 하며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저 가녀린 손으로 때린다고 정말 아플 거라 생각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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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촬영장에서 나온 벼리는 너무 오랜 시간 비서실을 비워 두었다는 생각에 사장 전용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서 뒤를 돌아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김 팀장의 모습에 놀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벼리를 제외하고는 인후만이 유일하게 문을 열 수 있는 전용 승강기의 문은 김 팀장의 뒤에서 소리도 없이 닫혔다.







“김 팀장님 무슨 일이시죠?”







벼리는 애써 태연한 척 물었지만, 지금 밀폐된 공간에서 자신을 음흉하게 바라보는 남자와 함께 있는 불안감에 그녀의 목소리는 여지없이 떨리고 있었다.







“은 비서님, 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뭐, 뭐가 궁금하시죠? 사장님을 찾으시는 것이라면.. 꺄악!”







떨리지만, 차분히 말을 이어나가려는 벼리였다. 그러나 자신의 안경을 벗겨 바닥에 던지는 김우재 팀장의 난폭한 행동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자르고 있었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당신 어제 그 여자지? 지일이랑 같이 왔다 간 여자”







김 팀장의 눈에는 이성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어제 본 그 황홀했던 여자가 자신이 일하는 회사의 비서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쾌재를 불렀다.



사장의 비서여도, 비서는 비서. 언제든지 자신이 탐할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미모가 딸렸기에 작업을 걸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날 안경을 깨트리는 작은 실수 이후, 그녀가 꽤나 반반한 외모라는 것을 알고 대시를 했지만 인후에게 가로막혀 성공하지 못했었다.



그 이후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어제 본 녹색 눈의 미인이 왠지 사장의 비서라는 느낌이 들었고,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자 비록 눈동자의 색은 다르지만 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김우재 팀장, 지금 상당히 무례하신 것 잘 알고 있습니까?”



“너무 딱딱하게 굴어도 재미없는 거 알아? 여태껏 그런 깜찍한 얼굴을 숨기고 다녔다는 것이 신기하네. 젊은 남녀사이에 무례하고 말고가 뭐 있어”







김 팀장은 점점 벼리에게 다가갔고, 벼리는 그런 그를 피해 뒤로 한발자국씩 물러났다. 하지만 아무리 넓어도, 도망쳐도 그녀와 김 팀장이 있는 곳은 폐쇄된 엘리베이터였다.







“너도 사실은 즐기는 거지?”





‘내가 널 보며 이렇게 흥분하는 모습이 너도 좋지? 더러운 양키 피가 섞인 계집이니 오죽하겠어?’





“싫어!!!!!!”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그날의 악몽과 김우재의 말이 벼리의 머릿속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그녀는 김 팀장의 손에 붙잡혔고,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그 손이 그 남자의 손과 너무나 같게 느껴졌다.







“그냥 즐기자고, 이렇게 싫은 척해도 나중에는 내 밑에서 신음소리를 지르며 더 해달라고 재촉할 거 다 알아”





‘네년은 평생 나한테 몸만 대주면 돼’





“아저씨, 제발 살려주세요.”







이미 두려움이 가득한 벼리의 눈에 비춰지는 모습은 김우재의 본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악몽에 발단인 남자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초점이 없는 눈과 살려달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김우재의 눈과 귀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김우재는 어느새 정신적인 충격으로 반항이 적어진 벼리의 옷을 분주하게 벗기고 있었다.



전혀 부드러움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그의 행동에 벼리의 마이에 있던 핸드폰이 떨어졌고, 그 핸드폰은 ‘사장님’이라는 발신자 표시가 뜬 채로 요란스럽게 진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두 사람 중 누구도 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벼리는 고장 난 녹음기처럼 살려달라는 말만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김우재는 속옷만 입은 벼리의 상체를 보며 황홀해하고 있었다.







“죽이는군, 이 죽이는 걸 왜 진작 못 알아봤지? 사장도 완전 눈 먼 장님이군.”







벼리의 상체를 가리는 속옷을 벗기기 위해 김우재는 손을 분주히 움직였고, 벼리는 맨 살에 와 닿는 김우재의 손에 온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그리고 계속 살려달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절박한 말을 들어 줄 사람은 이 공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김우재는 색욕에 몸이 달아오르고, 벼리는 들리지 않는 자신의 절규를 외치는 그때였다. 도저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것은.













※ o25





















“왜 전화를 안 받지?”







촬영장에서 나간 벼리에게 전화를 한 인후는 긴 통화음에도 받지 않는 벼리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분명 사장실로 갔을 것이 확실한 벼리가 핸드폰은 안 받음은 물론, 비서실 전화도 받질 않았다.







“올라가 봐야겠군.”







촬영에 집중하고 있는 지일을 잠시 바라 본 뒤, 사장실을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몸을 옮겼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하는 기분에 인후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계속 벼리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왜 여기에 엘리베이터가 멈춰져 있지?”







벼리가 사장실을 올라갔다면 분명 엘리베이터는 사장실이 있는 38층에 멈춰져 있어야 하건만, 전용 승강기는 자신이 있는 5층에 있었다.



인후는 지문 인식을 하고 엘리베이터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인후의 시야에 힘없이 울면서 쓰러져있는 벼리와 그 위에 올라탄 짐승 같은 김우재의 뒷모습이 보였다.







“벼리야!”







벼리의 이름을 외치며 인후는 그녀 위에 앉아있는 김우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사정없이 승강기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 충격에 김우재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고, 인후는 쓰러져있는 김우재의 목을 한 발로 밟고 있었다.







“큭.. 사.. 장님..”



“사내에서 무슨 짓이지? 저 여자 누군지 몰라?”



“크윽!”







인후의 눈에는 이미 살기로 가득해 있었다. 김우재의 목을 밟고 있는 다리의 힘이 더 들어가자 김우재는 발버둥을 치며 그의 발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벗어나기는커녕 더욱 자신을 조이는 인후의 힘에 이제는 숨조차 쉬기가 힘들었다.







“이제부터 대답을 안 하면 긍정으로 받아들이겠어. 죽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행동해서 내가 대신 죽여주려고 하는데, 불만 없지?”







정말 죽일 것처럼 질문하는 인후의 태도에 위기감을 느낀 김우재는 어떻게든 대답하려 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대답은커녕 숨도 잘 쉴 수 없었고,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서인후가 진정 무서워지고 있었다.







“너무 좋아서 울기까지 하네, 그럼 천천히 죽여 볼까?”







인후는 호흡곤란으로 새파랗게 질려가는 김우재의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정말 산소가 결핍되어 기절하기 직전에 인후는 김우재의 목을 밟고 있는 발을 들어 올렸고, 김우재는 살기위해 추한 모습으로 미친 듯이 호흡을 하고 있었다.







“당장 여기서 꺼져. 어떻게 처리할지는 내가 곰곰이 생각해볼 테니, 그때까지 죽지 말고 살아있으라고”







기어가다시피 회사 밖으로 나가기 위해 도망가는 김우재를 뚫어질 듯 바라보던 인후는 또 다시 닫혀버린 승강기 문을 열었다.







“... 벼리야”



“살려주세요, 한번만.. 아저씨 한번만..”







여전히 울며 초점 없는 눈동자로 벼리는 살려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무 간절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인후의 가슴은 누가 불을 지른 것처럼 뜨거워졌고, 뭐라도 부셔버려야 진정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벼리야, 나야. 은벼리, 정신 차려!”







인후의 외침에도 여전히 벼리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인후는 우선 사장실로 가는 버튼을 누르고 경비원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다시 전화를 할 때까지, 지금 이후 그 누구도 오늘은 사장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호원들을 문 앞에 배치시켜 놓으라 했다.







“살려주세요, 제가 잘할게요.. 살려.. 주세요.”







그가 다가가자, 흠칫거리며 온몸을 떠는 벼리의 모습에 인후는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았다.







“벼리야, 괜찮아. 쉬이- 내가 지켜줄게, 내가 지켜줄게.”







이미 엘리베이터는 사장실에 멈췄지만, 인후는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억누르며 벼리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여전히 초점은 없지만 조금씩 울음을 멈추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안심했다.







“내가 누군지 알지? 너랑 3년 동안 일한 사람이잖아,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잘 찾잖아, 내가 수많은 사람들 틈에 있어도 넌 한 번에 나 찾잖아. 내 향수냄새는 거부감이 안 들어서 좋다고 했잖아”







인후는 끊임없이 말을 하면서 벼리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너무나 부드러운 말투와 익숙한 그의 향기에 벼리는 안심을 했고, 인후는 자신의 양복을 벗어 그녀의 몸에 조심스럽게 입혀 주었다.







“됐다. 벼리야, 이제 사장실 가자. 내가 안고 갈 건데, 무섭지 않지?”







어린아이 어르듯 말하면서, 인후는 조심스럽게 허리 쪽으로 손을 옮겼고 조금 움찔하던 벼리는 괜찮다고 조심스럽게 수 없이 안심시키는 그의 말에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우리 벼리, 착하다. 이제 사장실가서 뜨거운 것 좀 먹고 한숨 자자”







벼리를 조심스럽게 안은 인후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어느새 사장실 앞에 배치되어 있는 경호원들의 모습에 벼리는 위화감을 느끼는지 인후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인후는 그런 벼리에게 괜찮다고 속삭이며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경호원들도 인후에게 안겨있는 벼리의 모습에 놀랐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의무인 그들은 이내 인후를 위해 사장실 문을 열어주었다.







“사장님, 은 비서님 잘 돌봐 주십시오.”







경호원은 들릴 듯 말듯 인후에게 부탁했다. 벼리는 이 회사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그리고 경호원들도 이 회사의 직원이기에 상당히 위태로워 보이는 벼리의 모습에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 마음을 잘 알기에 인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들었지? 저렇게 당신 걱정하잖아. 당신 잘못되면 나 저 사람들한테 제 명에 못살 거야, 그러니까 어서 기운 차리자”







인후는 벼리를 침대 방으로 데리고 가서 그녀를 침대에 눕히려했다. 하지만 떨어지기 싫은 듯 더욱 꼭 자신의 목을 끌어안는 벼리의 행동에 그럴 수 없었다.







“벼리야, 침대에 누워서 편히 한숨 자자. 응?”







그의 말에도 벼리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인후는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벼리를 불안하지 않도록 꽉 안아주었다.







“미안해, 내가 당신 나갈 때 같이 나갔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내 탓이야, 미안해”







인후는 헝클어져있는 벼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만져주었다. 벼리는 그런 그의 행동에 갓난아이처럼 더욱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괜찮아, 이제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내가 깰 때까지 아무데도 안가고 여기 있을게. 그러니까 편히 자자”



“고마워요”







정신이 들었는지 인후의 말에 벼리는 고맙다고 그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곧 잠이 들어서 확신할 수는 없었다. 벼리가 잠이 완전히 들고도 한참동안 인후는 괜찮다 말하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만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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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잉- 지잉-’



벌써 시간은 저녁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인후는 그녀의 핸드폰 진동소리에 발신번호를 확인했다. ‘파파’라고 뜨는 이름에 인후는 망설이다, 지금 받지 않으면 걱정할 것이 분명하기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우리 공주님, 어디야??



“저 지금 은 비서가 시정이 있어서 전화를 받지 못합니다. 저는 은벼리 비서가 다니는 회사 사장인 서인후입니다.”



?서인후 사장??







인후는 자신과 통화를 하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것처럼 익숙했다.







“은 비서 아버님 되십니까?”



?그렇소, 우리 딸이 무슨 사정이 있는 거지??







인후는 그 질문에 자신의 품 안에 잠든 벼리를 바라보며, 사실을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일지 잠시 고민했다.







“오늘 급히 처리할 일이 생겨서 죄송하지만, 은 비서가 저랑 같이 야근을 해야 합니다. 지금은 서류를 가지러 가서 자리를 잠시 비웠습니다.”



?야간은 저번 기획 이후로, 한동안 없다고 하는 것 같았는데??



“급하게 생겼습니다. 외국 회사와의 미팅으로 좀 상의할 것이 많아서요.”



?조만간 딸이랑 함께 저녁이라도 하도록 하지, 내가 전화 왔다고 전해 주시게?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벼리 겉으로는 강해보여도 한 없이 여린 아이네, 일도 적당히 시켜주게?



그렇게 그녀의 아버지와 전화를 마친 인후는 자신의 품에서 뒤척거리는 벼리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인후의 시선은 뭐라 단정 지을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그런 여자인거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자존심이 강해서 그런지 알고 있었는데, 그게 제 착각이었다는 것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인후는 다시 편한 자세를 찾았는지 새근새근 잠시 든 벼리를 바라보다 그녀의 이마에 살짝 뽀뽀를 해주었다.







“제발 좋은 꿈만 꾸길..”













※ o26

















인후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벼리를 바라보았다. 무서운 꿈을 꾸는지 벼리의 몸이 움찔거릴 때마다 다독이며 괜찮다고 계속 속삭여 주었다.



그 덕분에 벼리는 그렇게 잠든 이후 아직 한 번도 깨지 않고 곤히 잠을 잘 수 있었다.







“정말 지켜줘야만 하는 여자.”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벼리를 관찰할 틈이 없었는데, 지금은 마음 놓고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잠든 벼리를 바라보던 인후는 그녀는 누군가의 보호가 절실한 여린 여자라는 것을 느꼈다.



아까 김우재의 행동으로 드러난 그녀의 몸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완벽했었다. 자신의 두 손으로 충분히 잡힐 것 같은 허리, 여린 어깨선, 늘씬한 각선미, 세게 잡으면 부러질 것 같은 가는 팔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벼리는 누군가가 지켜주지 않으면 곧 깨져버릴 아름다운 도자기 같았다.







“이렇게 숨기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던 거겠지, 어릴 적 경험으로”







아까 살려달라고 중얼거리던 벼리의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후는 알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시절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녀가 왜 얼굴과 몸매를 가리고 다녔는지는 알 수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인후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보았다.







“나에게만은 알려줬다면 좋았을 것을”







인후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3년간 함께 일한 자신에게도 이야기 해주지 않은 것에 약간의 서운함이 있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벼리의 잠든 모습이 축제 때 만난 신데렐라와 닮아 보였다.







“안았을 때의 느낌조차 비슷했어. 그리고 이 향기.. 과연 같은 향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어느새 방 가득 퍼져있는 벼리의 은은한 향에 잠시 취해있던 인후는 이렇게 그녀를 안고 있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벼리야, 이제 편하게 침대에 누워서 자자”







그녀의 귓가에 소곤거리며 인후는 자신의 목을 끌어안은 벼리의 팔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그런 인후의 행동에 벼리는 칭얼거리며 살짝 눈을 떴다.







“깼어?”



“인후씨..”



“그래, 나야. 기분은 어때?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







벼리는 아직 몽롱한 기분에 취해 인후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따스한 인후의 시선에 지금 이 상황도 꿈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 아파”



“눈?”







벼리의 예상외의 대답에 인후는 벼리와 얼굴을 맞대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벼리는 렌즈로 인해 건조해진 눈이 가렵고 아파왔다. 갑갑해지는 눈 때문에 착용하고 있는 렌즈를 빨리 빼고 싶었다.







“인후씨”



“응? 눈은 먼지가 들어간 건가? 특별히 이상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소원 한 가지 들어주기로 한 내기, 기억나요?”



“응, 갑자기 그건 왜?”







인후는 뜬금없는 벼리의 질문에 그녀를 바라보았고, 벼리는 그런 인후를 보며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사건으로 눈치 빠른 인후가 자신의 사정을 거의 알게 되었을 것이다. 벼리는 그런 그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버리자 생각했다.







“나 지금 그 소원 들어줘요”



“지금? 무슨 소원인데?”



“지금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나한테 화내기 없기. 내가 다 말해줄 거니까 화내지 않기”







인후는 진지하게 말하는 벼리의 눈동자가 심하게 일렁이자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화를 내겠어. 나한테 당신이란 존재가 어떤 위치인지 당신도 잘 알잖아. 그건 소원이 아니다, 나중에 소원은 말하고 이제 나한테 할 말 있으면 해봐. 당신이 회사를 노리고 들어온 스파이라고 해도 난 당신에게 화 안내, 아니 못내”







자상한 인후의 말과 행동에 아직도 그의 품에 안겨있던 벼리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인후의 허리를 꼭 안았다.







“미안해요. 인후씨는 나 이렇게 믿어주는데, 나는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벼리의 떨리는 목소리에 인후는 그저 그녀를 꼭 안아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벼리는 인후의 품에서 진정을 하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 지금 렌즈 끼고 있어요.”



“렌즈?”



“화장실.. 잠시 갖다 올게요.”







벼리는 그의 의문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풀어주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초췌해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답답하게 덮은 일회용 렌즈를 빼서 휴지통에 버리고 따듯한 물을 틀어 세수를 했다.







“사장님이니까 괜찮아”







물기가 흐르는 얼굴은 아까와 달리 따듯한 물로 어느 정도 생기를 찾았다. 인후의 단호한 말에 용기를 얻어, 거울 속에 비춰지는 여자는 더 이상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뒤, 벼리는 조심스럽게 화장실 문고리를 돌려 인후가 있는 곳으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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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일이 네 말대로 정말 엄청난 미인이더군.”



“당연하지, 은영일의 딸, 은지일의 조카. 무슨 말이 더 필요 하겠어?”







Y기획사 대표이사 사무실에서 들리는 사무실 주인인 최상규 대표이사와 지일의 대화였다.







“너 대체 속셈이 뭐였어? 이렇게 신문 일면을 장식할 최고의 스캔들을 만들어 놓았으면 이유는 말해줘야 내가 억울하지 않지”







상규가 말하며 바라보는 탁자에는 사진은 실려 있지 않은 상태로 ‘지일과 의문의 미인. 신인모델인가, 연인인가?’라는 헤드라인 문구만이 깔끔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글쎄요? 최상규 대표이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은지일, 장난치지 말고 말해봐. 너와 같은 모델로 만들기 위한 사전작업은 절대 아닌 거 알아.”



“형은 우리 벼리가 어떤 여자 같아?”



“흐음,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비밀을 가지고 있어서 그 비밀로 인한 슬픔이 곳곳에 스며들어있는 여자라고나 할까?”



“역시 형 같은 늙은이도 나이를 괜히 먹는 건 아닌가보네. 우리 벼리는 자신이 가진 외모로 인해, 어릴 적에 평생 동안 잊지 못 할 끔찍한 일을 겪은 아이야. 그 일이 있고도 벌써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날의 일로 악몽에 종종 시달려. 그 끔찍한 사건이 있은 후 벼리는 자신의 모습을 본능적으로 감추고 다녔어. 난 그런 벼리를 죽을 때까지 지켜줄 수 있어. 하지만 벼리는 그런 나의 행동을 전혀 원치 않을 거야. 자신 때문에 내가 속박당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난 벼리를 스스로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어. 그 첫걸음이야, 자신의 본 모습을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은지일, 네 머리는 온통 그 아이 생각뿐이니?”







상규의 뜬금없는 물음에 지일은 피식하며 작게 웃었다.







“아니, 유감스럽게도 나의 머리에는 벼리로 가득 차있지 않아. 그걸 벼리가 바라지 않기 때문이지. 영일이 형도 벼리로 가득 차있지는 않을 거야, 나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하지만 영일이 형이 나보다 조금 더 많은 부분을 벼리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놓고 있을 거야”



“지금 너만으로도 이렇게 아낌없이 그 아이를 사랑해주는데, 그보다 더한 은영일 회장이라.. 전혀 상상이 안 되는데?”



“그래? 난 너무 상상이 잘 되는데. 나중에 우리 집에 한 번 놀러와, 카리스마의 대명사 은영일 회장의 진짜 모습을 보고 기절할지도 모르니까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하고. 최상규 대표이사님 전 이만 물러갑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너를 회사 소속모델로 계약한 그날부터 하루에 몇 번씩 기절했을 거다. 워낙 내가 강심장이라서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거지”







상규의 뼈 있는 말에도, 지일은 어깨를 으쓱하며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주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o27





















벼리와 의문의 신데렐라가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그 두 사람이 동일인물일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많은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눈동자가 다르다는 확실한 이유로 그는 두 사람이 동일인물 이라는 가능성을 것 부정했던 것이다.







"결국 난 하나만 알았지, 둘은 몰랐던 것이네"







그날 축제 때 본 여인의 황금빛 초록 눈동자가 원래의 색이라는 것은 자신의 눈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후는 벼리의 눈동자를 제대로 바라본 적 없다는 것을 알았다.



보려고 해도 두꺼운 안경에 가려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벼리의 눈동자가 전형적인 검은색이기 때문에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것이다.







“사장님”







벼리는 화장실에서 나와 침대에 앉아있는 인후와 1m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처음 나왔을 때, 그의 놀란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벼리는 초조했다. 그가 자신을 믿어줄 것이고, 화를 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인후가 혹시나 자신에게 실망할까봐, 모든 사실을 알고 자신을 더럽다고 생각할까봐, 그게 더 걱정이 되었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일까? 단순히 미안한 감정을 넘어선 이 느낌. 과연 무슨 감정일까?







“이리와”







인후는 초조한 벼리를 바라보면서, 자상하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그런 그의 태도에 그녀는 초조한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쉽게 발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우선 이리와, 벼리야. 지금 아직 새벽 3시다.”







다시 한 번 재촉하는 그의 말에 벼리는 결국 팔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까지 그에게 다가갔다. 인후는 침대에 앉은 채로 벼리의 허리를 안았다.







“실망 안 해, 당신 깨끗하니까 걱정 마. 다만 조금 서운했던 것뿐이야, 그래도 내게 제일 먼저 말해줬으니까 그것도 이해해. 오늘은 힘든 일이 많았으니까 우선 자자. 그리고 내일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하자”







인후의 따듯한 말에 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허리에 두른 팔을 풀고 인후는 벼리를 침대에 눕혔다.







“사장님은요?”



“난 이렇게 있어도 괜찮아”



“불편하잖아요.”



“그럼 같이 잘까?”







벼리가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인후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자 벼리는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였고, 인후는 그런 그녀의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아름다워”







예상외의 그의 말에 벼리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인후는 자신을 외팔을 뻗어 그녀의 팔베개를 해주고, 그녀의 허리를 오른팔로 휘감았다.







“이제 이 아름다움 내가 지켜줄게. 더 이상 아프지 않게 이 아름다움 내가 지켜줄게. 그러니까 울고 싶거나 힘들어지면, 이렇게 내 품에 기대”



“사장님”



“또 자꾸 사장님이라고 할래?”



“.....인후씨”



“그래. 나 서인후야, 당신은 은벼리이고.”







진지한 인후의 말에 벼리는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너무 고마웠다. 그의 친절에 자신이 심장이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세차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게 이런 심장소리를 들킬까 걱정이 되어 진정하려했지만,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인후는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벼리야”



“네?”



“은벼리”



“...”







엄지손가락으로 벼리의 입술을 만져보던 인후는 순간 손가락을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온 신경이 곤두서있던 벼리는 그의 움직임이 멈추자 자신도 모르게 서운함과 긴장이 풀려 낮게 한숨을 쉬었고, 인후는 그런 벼리를 바라보다가 갑작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훔쳐갔다.







“음!”







여태껏 수많은 여자들과 키스를 해보았다. 하지만 키스가 이렇게 사람을 애 태우는 것인지, 키스하고 있는 상대의 모든 것을 당장이라고 가지고 싶은 것인지는 몰랐던 인후는 벼리와의 키스가 이성과의 싸움으로 번지고 있었다.



갑작스러웠지만, 키스에 서툰 벼리를 베려한 인후의 키스는 아주 부드럽게 시작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키스에 긴장을 한 벼리는 인후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잔뜩 긴장을 했지만, 그의 혀가 천천히 자신의 치아를 하나씩 건드리고 숨어있던 자신의 혀를 찾아내 조심스럽게 맞물리자 벼리는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짜릿함이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앗.. 하아..”







숨도 쉬지 못하고 자신의 움직임에 이제야 조금씩 보조를 맞추는 벼리의 순수함에 인후는 여태껏 느끼지 못한 만족감을 느꼈다.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건지”







그는 사랑스럽다는 말을 하고는 다시 숨이 고른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좀 더 깊이 파고들어왔고, 벼리도 서툴지만 그의 움직임에 적응하고 있었다.



방안은 어느새 두 남녀의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한 키스 소리가 울렸고, 그 울림이 벼리의 가슴을 더욱 세차게 뛰게 만들었다.



그렇게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인후가 벼리의 입술에서 떨어져 나갔고, 그녀는 그제야 거칠게 숨을 쉬었다.







“다음부터는 정말 숨 쉬는 방법을 가르쳐 줘야겠어, 이러다가 당신과 키스를 더하고 싶어도 못하잖아”







인후는 아쉬움에 벼리의 입술에 몇 번이고 ‘쪽’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벼리의 허리를 끌어당겨 두 사람의 간격을 더욱 밀착시켰다.







“이제 이 입술은 내 것이라는 표시야, 이 달콤한 입술은 아무한테도 줄 수 없어”







벼리를 향해 말하는 인후는 자신도 모르던 강한 소유욕에 놀랐지만, 그녀의 입술 외에 머리카락 한 올조차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이 머리카락도, 손도, 입술도, 허리도 다 내 것이야”







인후는 자신과의 키스로 인해 어느새 도톰하게 부어있는 입술을 만족스럽게 쳐다본 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자신의 영역표시를 확실히 하기 위해 백자처럼 하얀 그녀의 목을 세게, 여러 번 깨물었다.







“아앗! 인, 인후씨 아파요”



“희미해질 때마다 다시 만들어 놓을 거야, 저번에 말했었지? 사랑하는 여자 만난 것 같기도 하다고.. 그게 당신이야”







인후의 말에 벼리는 말도 안 된다는 눈으로 인후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예상한 인후는 그저 웃으며 벼리와 자신 사이에 공기초자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꽉 안을 뿐이다.







“당신의 처음은 무조건 나니까, 오늘은 더 하고 싶어도 여기까지만 하자. 오늘부터 우리 진지하게 사귀는 거야, 알겠지?”



“.. 너무 혼란스러워요”



“혼란스러움도 내 품에서 해. 난 당신 놔줄 생각 없으니까”







인후는 벼리의 입술에 도장을 한 번 더 찍은 후,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큰 손으로 쓰다듬어주었고, 벼리는 인후의 가슴께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불안해하지 마. 처음이야, 키스 하나만으로 이렇게 미칠 듯이 상대방을 가지고 싶은 기분”







내심 사귀자는 그의 말에도 불안감을 떨칠 수 없던 벼리는 인후의 자상한 배려에 안도했다. 그리고 자신이 고양이가 된 것 같이 그의 몸에 얼굴을 비비면서 더욱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이제 나 이렇게 회사 나와도 되는 거예요?”



“내가 당신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말고 이제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는 거야”



“정말 나 지켜주는 거죠?”



“내 여자는 내가 지켜”



“치, 왕 느끼남. 누가 선수 아니랄까봐”



“내 여자, 사랑스럽다, 내가 지켜줄 거야, 키스만으로 널 이 자리에서 당장 안고 싶어.. 이런 말 다 당신한테 처음 하는 거야.”

“정말요?”



“하늘에 맹세코”



“인후씨, 나 지켜줘서 고마워요. 그러고 보니, 3년 동안 인후씨는 항상 내가 곤란할 때 옆에 있어줬던 것 같아요”



“당신의 존재는 예나 지금이나 나를 포함한 우리 회사 직원들에게는 절대적이니까”







인후의 말을 끝으로 벼리는 다시 편하게 잠이 들었다. 인후는 벼리가 잠이 들고도 한참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 너무한 거 아니야? 방금까지 그렇게 진한 키스를 하던 혈기 왕성한 남자가 옆에 누워있는데, 이렇게 아기처럼 예쁘게 잠이나 자고.”







인후는 살짝 벼리의 볼을 꼬집은 뒤, 자신도 곧 벼리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신혼부부처럼 사랑스러워 보였다.











※ o28




















“어제가 토요일이어서 다행이에요, 아니었으면 나 사표 냈을 거야”



“어허! 못하는 말이 없다. 당신 사표내면 나 우리 직원들 등살에 못 사는 거 알면서 그런다.”



“경호원 아저씨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표에 대한 고려를 할까하다가 참은 거예요”







일요일 아침을 회사 침대에서 맞이한 벼리와 인후. 일요일이라 회사 사람들이 없다는 것에 안심을 한 벼리는, 사장실 밖에 밤새 서 있었다는 경호원들을 보고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기에 민망하긴 하지만, 인후와 밤 새 사장실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 두 사람과 본인들 외에는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나마 괜찮았다.







“영광입니다, 은벼리 부사장님”



“인후씨는 걱정도 안 돼요?”



“걱정을 왜 해? 당신들이 존경하는 은벼리 비서가 이제는 내 것이다. 이렇게 한 마디만하면 해결 될 것을”







사내 커플, 그것도 사장과 비서라는 관계에 걱정하는 벼리와는 달리 인후는 여전히 장난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런 인후를 째려보았지만, 사실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그의 행동이라는 것을 벼리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튼 오늘 푹 쉬어. 좀 더 자고, 일어나면 전화하고”



“인후씨가 자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전화해요”



“당신 전화라면 그 어떤 순간에도 방해가 되지 않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말고, 푹 잔 다음에 전화해”



“알았어요, 인후씨도 들어가서 더 자요. 인후씨가 나보다 더 못 잤잖아요.”







피곤할 것이 분명함에도 전혀 그런 내색 없이 자신의 차로 벼리를 집 앞까지 데려다 준 인후에게 벼리는 미안했다. 그녀가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그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고, 고맙다는 말만 해줘”



“고마워요, 인후씨”







인후씨라는 호칭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벼리의 입에서 나온다. 이 순간 그런 그녀가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인후는 결국 벼리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으음...”







인후의 키스에 점점 적응하기 시작한 벼리는 좁은 차 안에서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제법 대담하게 그의 키스에 응했다.







“보내기... 싫다”







벼리의 입술을 한참동안 탐하던 인후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고, 벼리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섹시하게 느껴져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거야, 벼리야 나 힘들다”



“인후씨..”



“내일까지 어떻게 기다려. 이렇게 눈앞에 있어도 힘든데, 내 눈에 안보이면 나 어떻게 견디지?”







낯간지러운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인후의 대담함에 벼리는 더 이상 차 안에 있다가는 그대로 인후의 집에 가야할 것 같은 느낌에 얼른 차에서 내렸다.







“인후씨, 내일봐요”



“알았어, 이따 꼭 전화해”



“네, 먼저 들어가요”



“당신 먼저 들어가는 거 보고 출발할게”







인후의 배려에 벼리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의 미소를 따라 인후도 미소를 지었다. 벼리는 인후에게 손을 흔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일과 영일은 일 때문에 나갔는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부웅-’하는 자동차 소리에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던 벼리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채로 자신의 방으로 갔다.




.
.



?인후씨, 기분이 이상해요?



“기분이 왜 이상해?”



?그냥.. 꿈꾸는 것 같아요, 우리 정말 사귀는 거죠??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벼리의 목소리에 인후는 조금씩 잠에서 깨고 있었다. 시계는 벌써 오후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인후씨??



“아, 잠시 시계 보느라 그랬어. 당신 일어나자마자 바로 전화한 거지?”



?네?



“그럼 충분히 잤겠네, 다행이야. 악몽은 꾸지 않았고?”



?네,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요??



“행복해? 당신은 평생 행복해도 모자란 여자야, 그 행복 그냥 느끼기만 하면 되는 거야”



?정말 고마워요?







인후는 아침에 일어나서 벼리가 해주었던 그녀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경외심이 들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그녀에게는 씻을 수 없는 얼룩이 되어 버린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벼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과거를 지워줄 수는 없지만 그녀의 현재는 행복하게 지켜줄 것이라 수 없이 다짐한 인후였다.







“벼리야”



?네??



“벼리야, 벼리야”



?왜 그래요?



“보고 싶다. 당장 당신을 내 옆에 두고 싶어, 더 통화하다가는 정말 납치해오고 싶을 거 같아. 오늘은 이만 끊자”







인후는 당장이라도 벼리의 체온과 향기를 느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여자는 서인후의 재력과 외모에 하루도 떨어질 날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원해서 관계를 가진 여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같이 철없는 소년처럼 여자를 원한 적은 전혀 없었다. 오직 은벼리라는 여자에게만 느껴지는 감정이고, 소유욕이었다.







?인후씨?


“응?”



?나도.. 보고 싶어요, 내일 봐요?







작은 목소리로 주저하며 말하는 그녀의 순수함에 인후는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여태껏 만나던 여자들과는 달리 순수하고, 강직한 여자다. 그런 여자를 자신이 먼저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



3년 전부터 그랬지만 사귀기로 한 어제부터는, 정말 순간순간 그녀가 너무 소중해서 소름이 돋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많았다.







“벼리야”



?왜요??



“뽀뽀해줘”



?...네에??



“핸드폰에 쪽-소리 나도록 뽀뽀해줘, 그러면 내일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뭐에요!?



“뭘 부끄러워해, 우리는 그것보다 더한 것도 하는 사인데”



?인후씨!?



“누가 듣는 것도 아니고, 왜 흥분하실까?”



?.......쪽!.. 됐죠? 나 끊어요.?







인후는 자신의 부탁에 난감해하면서도 다 해주는 벼리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이미 끊어진지 오래인 핸드폰을 보며, 그는 실없는 사람처럼 피식피식 웃었다.



인후의 핸드폰 액정화면이 벼리의 잠든 모습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오늘 아침, 벼리보다 먼저 일어난 인후가 자신의 품에 천사처럼 잠든 그녀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핸드폰으로 찍어 메인화면에 설정해 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귀여우면 내가 참기가 힘든데, 우리 순진한 아가씨는 그런 늑대의 심정을 알 리가 없지”







인후는 계속 피식거리며 한참동안 핸드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o29



















“우리 사랑스러운 딸-!”







잠은 자면 잘수록 더 오는 법이라는 말을 실감케 하듯, 벼리는 그렇게 많이 잠을 자고도 인후와의 통화 후 또 잠이 들었다. 오늘따라 일찍 퇴근한 영일이 그녀의 방문을 열기까지 그녀는 평온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 아빠?”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이야? 보고 싶었어!”







아직 몽롱한 상태로 일어나서 영일을 바라보는 벼리. 영일은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워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의 행동에 벼리는 곧 정신을 차리고 자신도 그를 꼭 끌어 안았다.







“우리 공주님은 아빠 안 보고 싶었었나?”



“왜 안보고 싶었겠어, 정말 보고 싶었지”



“회사에서 야근이나 계속 시키고, 정말 그만 둘 생각 없는 거야?”



“또, 또, 또 그런 말 한다! 은영일씨 나 자동차에 관심 없어요.”



“그렇다고 향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향수는 좋아해, 다만 내 체질 상 안 맞는 거지”







자신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하는 벼리의 행동에 영일은 속 좁은 사람처럼, 바로 얼굴표정이 뚱해있었다. 그의 표정을 본 벼리는 아이 같은 영일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되도록 야근 안하는 방향으로 할게, 요즘 노땅 일로 처리해야 할 문제가 많아서 그래”







영일은 벼리의 머리를 손으로 쓸어 주었고, 그녀는 그런 그의 품에 기대있었다.







“벼리야, 현주가 너 보고 싶다더라.”



“현주 언니가?”



“이번 축제 때, 네가 입은 옷이 현주 옷이잖아. 축제 날 너랑 오랜만에 보겠다고 들떠 있었는데 지일이 그놈 때문에 너랑 그놈이 먼저 나가버려서 얼굴 못 봤다고 엄청 서운해 하던데?”



“정말? 당장 내일이라도 찾아가봐야겠다.”



“그렇게 해, 야근하느라 피곤했지? 더 자. 내가 괜히 자는데 깨운 건가?”



“아니, 많이 잤어. 아빠야말로 아직 양복도 안 벗어서 불편하겠다. 어서 씻으세요, 밥은 먹고 온 거야?”



“안 먹었어, 네 얼굴 봐야한다는 생각에 퇴근하기 바빴지”



“아무튼 아빠 몸도 주인을 잘 못 만나서 고생이라니까? 어서 나가자. 아빠 씻을 동안 밥 차릴게, 나도 잠만 자느라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배고프다.”



“저는 오늘 저녁으로 우리 공주님 표 김치찌개가 먹고 싶은데, 우리 공주님 생각은 어떠신지?”







영일은 자신의 방문을 열며 벼리에게 물었고, 벼리는 그를 바라보며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



언제나 다른 집과는 달리, 그다지 부산스럽지 않은 벼리의 출근시간이 오늘따라 부산스럽다. 그 이유는 출근을 하러 나가는 벼리의 모습이 평소와 다른 모습에 지일과 영일이 그녀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어서이다.







“은벼리, 시살대로 말하라고! 무슨 이유로 이 모습으로 출근한다는 거야?”



“아빠, 그냥 이제 3년 동안 숨겼으니까 이만하면 된 거 같아서 그런다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3년 간 숨겼으니 이 모습은 더욱 못 보이지! 너 누구한테 들킨 거지?”







영일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던 벼리의 입이 순간 정지했고, 그런 그녀의 변화를 지일과 영일이 눈치 채지 못 할리 없었다.







“형 진짜인가 봐, 이렇게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가는 걸 보니 서인후 사장에게 들켰군?”



“맞아, 회사 사람들 다 날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들킨 김에 내 모습으로 다니려고 해. 그동안 본 모습 숨기며 다니면서 항상 회사 사람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는데, 이 기회에 깨끗하게 밝히려고”







많이 씩씩해진 벼리의 태도에 영일과 지일은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여느 날과는 다른 벼리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결코 좋은 효과 때문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혹시나 또 그녀가 자신들이 보지 못한 곳에서 상처를 입었을까 걱정이 되었던 두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에서 전혀 어두운 부분은 보이지 않자, 이제는 기쁨이 그들의 마음을 채워갔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절대 타인에게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는 그 결심이, 너무도 견고해서 절대 변하지 않을까봐 항상 안타까웠던 두 사람이다.



너무나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큰 상처를 입은 그녀가 스스로 아름다움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그녀보다 더 아파했다.



여자라면 당연히 아름다워지는 것에 행복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그녀 자체가 그들에게는 아무리 아물도록 노력하고 조심해도 아물지 않는 상처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이제 변화를 시작하였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기 시작한 벼리의 모습에 영일과 지일은 이제야 자신들의 상처가 아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벼리야, 아름다움은 죄가 아니야. 지금의 너의 모습은 7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이제는 이 아름다움으로 행복해질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해야해”







진지한 지일의 말에 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일의 말이 맞았다.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야하는 것이다. 절대 타인은 자신의 행복을 만들어 줄 수는 없다.







“그럼 난 오늘 우리 예쁜 딸 회사까지 태워줘야겠다. 아빠가 퇴근할 때도 시간 맞춰서 갈 테니까 오늘은 그렇게 하자, 지일이 넌 오늘 스케줄 없어?”



“이따 마지막으로 광고 때문에 벼리 회사 가야해, 그리고 저녁에 다음 달 쇼 때문에 회사 가봐야 하고”



“그래? 그럼 넌 아직 시간이 넉넉하네. 그럼 우리 먼저 갈까?”







오늘 회사 주차장에 자신의 차가 없다는 것이 불편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지만, 너무나 기뻐하는 영일의 모습에 벼리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팔을 잡아 이끄는 영일의 아이 같은 모습에 짧게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차에 탔다.







“벼리야”



“응?”



“너 또 다른 일은 없어?”



“다른 일?”







벼리는 뜬금없는 영일의 말에 운전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그 어떠한 힌트도 찾을 수 없었다.







“아빠, 무슨 말이야?”



“너희 사장이 너한테 아무 말도 안 해?”



“우리 사장님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해?”







영일이 왜 인후를 언급하는지 의문이 드는 벼리를 다시 영일을 바라보았다.







“내가 나중에 너랑 식사나 같이 하자고 했는데”



“우리 사장한테 밥을 먹자고 했다고? 그것도 나랑?”







당황하는 벼리의 질문에 영일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벼리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사장님이 내가 누구 딸인지 아는 거야? 아니면 창조 회장과 우리 사장의 만남인 거야?”



“둘 다 틀렸어. 은벼리의 아버지와 은벼리의 사장과의 만남이고,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해”







계속해서 폭탄발언을 하는 영일 때문에 벼리는 점점 불안감이 더해갔다. 그녀의 비밀을 밝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후에게 또 다른 사실을 말해야하는 현실에 막막해졌다.



자신의 창조회장의 딸이라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숨긴 것은 아니지만 벼리가 직접 그에게 말해줘야 그의 충격도 덜 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오늘 당장 만나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오늘 한 번 서인후 사장에게 네가 물어봐, 언제쯤이 좋은지”



“아빠, 나중에 먹자”



“왜?”



“지금 내 본모습을 안 것만으로도 충분히 혼란한 사람이야, 이 상황에서 또 이런 말을 한다면 아무래도 우리 사장님 충격이 클 거 같아”



“그래? 지일과 네가 삼촌 조카사이라는 것도 모를 텐데, 언제쯤 말하려고?”



“그건.. 이번 일 끝나면 노땅이랑 마주칠 일 없으니까 말 안하려고”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반대는 안한다만, 계속 미루다보면 나중에 다른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신중해야한다.”



“응..”







회사에 도착해 영일의 차에서 내린 벼리는 그의 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회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 넘어 산이네, 다 말해야 하는 건가?”







벼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언제나처럼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머릿속이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 차있어서, 회사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가씨, 외부인 출입 금지입니다”







벼리와 너무도 친한 경비 아저씨가 그녀를 외부인으로 간주하고 그녀 앞을 가로막을 때까지, 벼리는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모든 것을 어떻게 인후에게 말할까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 o30


















“아저씨?”



“외부인 출입 금지입니다”







자신을 가로막는 경비원의 행동에 벼리는 사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는 경비원을 바라보았다.타인을 보는 경비원의 눈을 보다가 문득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직원들이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선약이 되어 있으시다면 로비에서 확인을 하시고 들어가셔야 하니까 저를 따라와 주세요.”



“아저씨, 저 벼리에요, 은벼리”







벼리의 말에 경비원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다급함이 담긴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컸고, 그 덕에 로비에 있던 직원들이 그녀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실 그녀의 모습에서 3년 동안의 은벼리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못 알아보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두꺼운 뿔테 안경과 센스 없는 펑퍼짐한 검은색 정장차림, 한 올의 여유도 없이 틀어 올린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한번 쓸어보고 싶은 웨이브 진 브론즈 빛 머리카락, 회색과 흰색이 절묘하게 섞인 투피스 정장이 그녀의 완벽한 몸에 딱 달라붙어 보는 남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고, 안경으로 항상 가려져 있던 그녀의 환상적인 눈동자가 보는 사람을 다른 세계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벼리?”



“이렇게 저 몰라보니까 서운한데요? 지난주만 해도 우유주셨으면서”







미소를 짓는 벼리의 모습에서 예전의 모습이 언뜻 보이기 시작하자, 경비원은 그녀만의 특유의 향도 맡을 수 있었다.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여자와 자신이 딸처럼 아끼는 벼리가 동일인물 이라는 것이 사실이라고 증명해주고 있다.







“어, 어떻게”



“죄송해요, 그동안 말씀 못 드려서. 더 이상 속이기에는 너무 양심에 걸려서 이렇게라도 밝히고 싶었어요. 아저씨, 제가 밉죠?”







벼리의 목소리에는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 어떤 모습으로 있던 은벼리는 은벼리이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세월동안 배워왔던 경비원은 그저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토닥토닥 두르려줬다.







“벼리야, 너처럼 속 깊은 아이가 지금까지 숨겨왔다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겠지. 난 다 이해한다.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자상한 경비원의 말에 벼리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하지만 다른 사원들은 벼리의 모습에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음에도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보다 오늘부터 우리 사장 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이렇게 아름다운 벼리를 두고 서류가 눈에 들어올까?”



“아저씨!”







다시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에게 한 여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벼리 선배님!”



“희나씨”



“역시 선배님 맞으시네요.”







살짝 흥분해 있는 희나의 모습에 벼리는 미소를 살짝 지었다. 그런 벼리의 미소에 희나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배님, 예쁘신 분인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미인이세요! 축제 때 숨겨진 히로인이 선배님이셨다니.. 역시 벼리 선배님이세요!"







벼리는 자신이 모습을 숨기고 다닌다는 사실을 희나가 어렴풋 알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경비원 아저씨를 제외하고 희나만이 지금 태연하게 벼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제외하고 로비에 있는 Fascinate 사원들은 벼리의 진정한 모습에 여전히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또 몇몇 사람들은 헛것을 본다고 생각한 것인지, 눈을 비비고 다시 벼리를 바라보았다.



그런 사원들의 모습에 벼리는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 두렵긴 하지만 애써 당당하게 행동했다. 그렇게 희나와 서 있던 벼리는 자신의 시선 멀리, 막 회사로 들어오는 인후가 보이자 안도감과 긴장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런데 다들 로비에서 왜 이렇게 멍하게 서 있는 것이죠?”







벼리가 서 있는 곳까지 다가온 인후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로비를 둘러보았다. 그의 등장으로 사원들은 조금 충격이 가신 듯, 그를 보며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우리 은비서가 너무 예뻐서 다들 걸음을 못 옮기는 건가? 저랑 은비서는 이만 일하러 올라가봐야 하니까, 다들 너무 시간지체 하지 마시고 각 부서로 돌아가세요.”







시간이 멈춰진 공간에서 몇몇 사람들만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인후가 벼리의 손을 잡고 사장 전용 승강기 앞으로 걸어갔고, 경비원과 희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인후와 벼리가 엘리베이터에 올라 그 모습이 사라지자, 로비에 있던 사원들은 시간의 마술에서 풀려났는지 그제야 하나 둘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거 꿈 아니지? 축제 날 봤던 그 의문의 여인이.. 벼리비서였어?”



“완전 특종감이다, 여기 있는 전원이 다 같은 꿈은 꿀 수 없으니까.. 지금 내 눈으로 본 것이 사실이라는 소리인데”



“저런 미인이 우리 회사에 있었다니, 이거 완전 대박인데?”



“내가 회사에 들어온 지, 벌써 2년이 다되어가는데 지금까지 몰랐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사장님은 알고 있으셨나본데? 전혀 동요하시지 않잖아”



“그건 여기 있는 희나씨도 마찬가지잖아? 희나씨,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어?”



“그냥 짐작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저도 그 축제의 히로인이 벼리 선배님인지는 몰랐어요, 다만 가끔 불안해 보이는 모습 때문에 뭔가 숨기는 모습이 있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에요”







희나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야기를 빨리 자신의 부서 사람들에게 알려줘야겠다는 한 사원의 말에 로비에 있던 사람들은 무슨 중대한 사명감을 띈 비장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시작했다.



벼리의 진정한 정체를 모든 사원들이 알기까지는 그 후로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
.



“오늘이 마지막 광고 촬영일입니다. 가 보실 건가요?”



“난 벼리랑 있고 싶은데?”



“사장님이 안 가시면 제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후의 장난에도 벼리는 사무적인 태도로 말하고 있었다. 그에 기분이 상한 인후는 의자에서 일어나 서류를 바라보는 벼리에게 다가가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사장님!”



“난 너 보고 싶어서 죽을 것만 같았는데, 벼리는 아닌가보네?”







서운함이 담긴 인후의 말에 벼리는 그의 품을 벗어나려던 행동을 멈추고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너무 예뻐서 다른 사람이 당신을 뺏어가 버리면 난 어쩌지?”



“아무도 안 뺏어 가니까 걱정 마요, 누가 뺏어가겠어요?”



“당신을 보면 누구든 차지하고 싶어 할 거야, 내 곁에서 안 보이면 불안해”



“서인후씨”



“응?”



“저 그렇게 약하고, 지조 없는 여자 아니에요”



“알아, 그래도 걱정 되는걸”



“대체 누가 날 뺏어 갈까봐 제일 걱정되는 거죠?”



“지일”







벼리는 자신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지일이라 대답하는 인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지일을 향한 질투심이 보였다.







“당신 축제날 지일이랑 같이 왔잖아, 지일과는 정말 무슨 관계인거지?"







확실하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벼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그가 혼란스러워 할 것이기에 아직은 말해 줄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벼리는 인후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왜 그렇게 지일과 저의 관계를 궁금해 하시는 거죠?"



"또 나에게 숨기는 건가?”



"사장님!"







인후의 말투가 급격하게 차가워지자, 벼리는 다급함에 목소리를 높였다. 고개를 들어 자신과 마주친 그의 눈동자는 신뢰감이라곤 없어 보였다.









"흥분하는 것을 보니 그런 것 같군, 정말 당신이라는 여자 겹겹이 포장된 상자 같아. 과연 그 포장이 다 풀렸을 때, 어떤 물건이 들어 있을지 궁금하군."



"이 이야기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장님도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니까요"







존댓말을 사용하며 단호하게 대답한 벼리는 빠르게 사장실을 빠져나갔고, 인후는 그녀가 나가자마자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던져버렸다.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이 그를 화나게 했다.







"대체 내가 뭔데 그 일에 자꾸 관심을 가지는 거야!"







인후는 자신의 경솔함에 짜증이 났다. 지일과의 관계에 대한 물음에 항상 대답을 피하는 벼리 때문에 답답한 마음에 그녀에게 화를 냈다.



그저 참았어도 됐는데,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관계인 것이 못 마땅했다. 자신의 잘못을 탓하던 인후는 문득 벼리의 눈물이 마음에 걸려 사장실을 나갔지만, 비서실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젠장!"







그녀의 부재에 문득 불안해진 인후는 그녀를 찾기 위해 비서실을 빠져나갔다.



벼리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를 찾아야만 했다.




매혹적인 신데렐라 [Fascinating Cinderella]











※ 매혹 魅惑 : 매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호림.

















※ o31

















“하아..”







인후의 차가운 말에 상처를 받은 벼리는 사장실과 비서실을 빠져나와 비상계단을 이용해 옥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가 사귀자고 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그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좌지우지 되는지, 벼리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둘 중 많이 좋아한 사람이 나중에 더 상처를 받는 법, 누구나 인정하는 남녀관계의 진리이다.







“지금 인후씨 말에 이렇게 상처를 받는데, 나중에 헤어질 때가 되면.. 상상이 안 가네”







무거운 마음으로 옥상에 도착한 벼리는 맑은 하늘을 보며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문을 열었다. 높은 건물에 탁 트인 옥상과 파란 하늘이 그녀의 눈에 가득 찼다.



벼리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옥상에 자신만 있다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았다. 누군가가 쳐다보는 느낌에 고개를 돌린 벼리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어?”



“순수청년?”







뜻밖에도 자신을 보며 놀라는 남자는, 축제 때 자신과 춤을 췄던 순수청년이었다. 무의식 적으로 튀어나온 ‘순수청년’이라는 단어에 남자는 벼리를 보고 놀란 것도 잠시,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정말 반가워요, 그때 그렇게 가버리시고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여기는 무슨 일로?”







벼리에게 순수청년이라 불린 그는 데뷔한지 3개월 된 신인 배우 하성희였다.



신인이지만 한국 감독 중 최고라 불릴 수 있는 감독의 16부작 드라마에 주연으로 발탁 된 전례 없는 파격적인 캐스팅과 반듯한 외모, 활달한 성격으로 그는 데뷔와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몰고 있는 신인 아닌 신인이었다.



지일과 같은 Y기획사 소속으로 향수축제에 참가하게 된 성희는 자신과 춤을 췄던 그녀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주위에서 그녀를 찾았지만,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는 그제야 그 여인이 알려지지 않은 연예인이 아니라 일반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결국 그는 그녀와 남다른 관계 같아 보이던 선배 지일을 만나기 위해 오늘 이곳에 온 것인데 뜻밖에도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앞에 나타나준 것이다.







“나 이 회사 직원이에요, 반가워요. 그러고 보니, 우리 이름도 모르고 있네요. 은벼리에요”



“하성희입니다. 나이는 23살이고 Y기획사 소속 신인배우입니다.”



“어쩐지 그날 많은 여자 분들이 절 시기어린 눈빛으로 쳐다본다 했어요.”







벼리는 자신의 예상대로 연예인이라는 점은 놀랍지 않았지만, 노땅과 같은 Y기획사 식구라는 것에 살짝 신기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악수 할까요?”







자신의 앞으로 보이는 하얗고 작은 손이 보이자 성희는 잠시 당황했다. 자신이 그 축제 이후로 그렇게 애타게 찾던 여자가 눈앞에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꿈을 꾸는 것 같은데, 자신을 잊지 않고 이렇게 반갑게 대해주자 성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벼리의 손을 잡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잘 지내요, 나중에 유명해져서 저 모른 척 하지는 않을 거죠?”



“그, 그럼요!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전 24살이니까 제가 1살 많네요. 연예인들은 실제나이보다 한두 살 적게 말한다고 그러던데, 성희씨도 실제나이가 아닌가요?”



“아니요, 23살 맞습니다.”



“그럼 내가 옆집누나네요?”







성희는 옆집누나라는 말에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아직 벼리에게는 자신이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동생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말 편하게 놓으세요, 옆집누나라고 불러도 되죠?”



“그럼요”



“말 놓으세요, 옆집누나.”







동생이라고는 없는 벼리는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는 많은 호감이 갔다. 벼리가 송희나를 귀여워하는 이유 중 하나도 자신보다 어리기 때문이었다.



가족이라고는 영일과 지일뿐인 벼리는 사회에서도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기에, 어디에서나 자신보다 어린 사람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Fascinate에서도 24살인 사람은 많아도 24살보다 어린 나이를 가진 직원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의 눈에 미소를 짓고 있는 성희는 어느새 너무나 귀여운 남동생이었다.







“유명한 남동생을 하루 만에 만들 수 있다니, 나 나중에 네 팬들한테 혼나는 거 아니야?”



“걱정 말아요, 옆집누나는 예뻐서 누가 함부로 접근할 수도 없을 거예요. 그리고 저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에요”







성희와 이야기를 하면서 우울했던 마음이 풀린 벼리는 벌써 사장실에서 나온 지, 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그만 들어가 봐야겠다. 다음에 또 보자”



“아, 옆집누나 잠깐만요!”



“왜?”



“전화번호 가르쳐주세요.”







약간 망설이는 성희의 말투에 벼리는 기꺼이 그가 내민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찍어 주었다.







“내 핸드폰은 지금 사무실에 있어. 문자하나 보내줘, 그러면 남동생 성희라고 입력해 놓을게”







벼리의 말에 성희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고, 벼리는 손을 흔들며 옥상을 빠져나왔다.







“저는 첫눈에 반한 사람이라고 저장해 놓을게요.”







벼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성희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성희는 시간이 지나면 벼리도 곧 그에게 동생으로서가 아닌, 이성으로서 호감을 가져 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
.



“막상 들어가려니까 또 걱정되네.”







사무실 앞에 도착한 벼리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벌써 10분 째 문 앞에 서있는 벼리는 38층에 사장실외에 아무 것도 없기에,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내가 노땅이랑 무슨 관계인지”







벼리는 호흡을 하며 걱정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씩씩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인후의 모습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안심이 되면서도 약간의 허탈감이 밀려왔다.



‘지잉- 지잉-’



책상 위에 요란스럽게 울리는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발신자는 ‘사장님’이었다.







“여보세요?”



?벼리야, 어디야!?



“지금 사무실에 있어요.”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호흡이 거친 인후의 목소리에 잠시 의문이 든 벼리는, 인후와 그렇게 짧은 통화를 마치고 성희의 문자를 확인하게 위해 핸드폰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한 시간 사이에 부재중 통화가 20통이 넘게 와 있었고, 문자도 수 없이 와 있었다.







“사장님?”







부재중 통화는 모두 인후였고, 문자도 성희의 문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발신자가 인후였다. 막 문자를 확인하려하는데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고, 인후가 서 있었다.







“하아.. 하아..”



“사장님! 무슨 일 있었어요?”







뭔가 불안해 보이는 인후의 모습에 벼리는 그와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걱정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놀란 눈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사실 지일은 삼.. 읍!”







지일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려던 벼리의 말은 난데없는 인후의 거친 키스에 입안에서 맴돌기만 할뿐,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여태까지의 키스와는 달리 지금 키스는 너무나 저돌적이었다.



인후의 혀가 벼리의 치열을 남김없이 핥으며, 그녀의 입 안의 모든 것을 정령 하였고, 벼리는 그의 키스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 상태를 알고 있는 것인지 인후는 벼리의 다리와 자신의 다리를 번갈아가게 겹쳐 그녀를 벽에 기대게 하였다. 그리고 혀를 더 깊숙하게 넣어 본격적으로 그녀를 탐하기 시작했다.



든든한 다리로 그녀를 받치고 있어서 두 손이 자유로운 인후는 오늘 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벼리의 정장을 단숨에 벗겨 바닥에 떨어뜨리고, 어느새 난방 단추를 푸르고 있었다.







“으응..”







벼리는 그런 인후를 제지하기 위해 원가 말하려고 했지만, 자신의 혀가 그의 혀와 얽혀있어서 그저 야릇한 신음소리만 내뱉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행동이 더욱 그의 욕망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이제 인후의 손은 벼리의 하얀 속살에 닿고 있었고, 브래지어를 벗기기 위해 그의 두 손이 그녀의 등 쪽으로 옮겨갔다.







“아앗”



“.. 성감대인가?”







인후의 손이 척추를 따라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리자 벼리는 경련을 일으키며 등이 휘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쾌감에 신음소리는 더욱 아찔해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거친 키스를 끝낸 인후는 벼리를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인후씨.. 내 말 좀 들어줘요”







벼리는 더 이상 인후의 몸이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것을 알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깊은 욕망이 벼리의 가슴을 세차게 뛰게 만들었다. 자신의 말에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벼리는 그가 자신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말했죠? 그 악몽 이후에 생명의 은인에게 입양 되었다고.. 나를 입양시켜 준 고마운 사람, 지금 저의 법적 아버지는 당신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 창조기업 회장 은영일이 나의 아빠에요”







벼리의 조용한 고백에 인후는 너무 놀라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 그녀의 아빠와의 통화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다름 아닌 창조 회장이었기에 그 목소리가 그렇게 익숙하게 들렸던 것이다.







“그리고 지일.. 그의 본명은 지일이 아니에요, 은지일이 그의 본명이죠. 은영일, 은지일.. 감이 오죠?”



“은지일.. 회장님의 친동생인가? 그럼 결국 당신의 삼촌이 되는 거군”







인후의 말에 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후가 이 비밀을 알아도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을 잘 알기에 벼리는 더 이상 오해로 얼룩지기 싫은 마음에 어렵게 고백을 했다.







“진작 말 못해서 미안해요, 내가 숨기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서 조금씩 말해주려 했는데.. 인후씨가 그렇게 힘들어할 줄 알았다면 진작 말했을 거예요. 사실 무섭기도 했어요, 너무 숨긴 것이 많아서 인후씨가 나 미워할까봐..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인후를 바라보는 벼리의 모습에 인후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벼리의 얼굴을 감싸고 입술에 살짝 입맞춤을 해주었다.







“내가 더 미안해, 당신 불안한 거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화내서 미안해. 당신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당신 찾으러 나갔는데 안보여서 미치는지 알았어.”



“미안해요, 인후씨”



“괜찮아. 괜찮으니까 이제 울지 마, 뚝!”







인후는 벼리의 눈물을 세심하게 닦아주며, 그녀를 보자마자 거칠게 행동했던 자신을 탓했다.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옷을 다시 입혀주었다.







“나 이제 안 미워하는 거예요?”



“미워한 적 없어, 그냥 질투한 거야.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사람 좋아할까봐 불안해서 질투한 거야”



“인후씨 키스가 너무 거칠어서 이제 나 싫어하는지 알았단 말이에요”



“미안해, 당신 보니까 미친 듯이 키스하고 싶어서 그랬어, 이제 그렇게 안 할게”







인후는 벼리의 옷을 자신이 입혀주며 어느새 눈물이 멎은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인후의 시선에 벼리는 그의 허리를 감싸고 그의 가슴에 기댔다.







“우리 아빠랑 밥 먹기로 했어요?”



“응, 언제 먹을까?”



“난 상관없어요, 그런데 인후씨 괜찮겠어요?”



“뭐가?”



“우리 아빠 보는 거.. 나중에 우리 헤어지면 인후씨 불편하잖아요.”







소파에 앉아, 벼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 자상하게 그녀의 얼굴을 만져주던 인후는 벼리의 말에 행동을 멈췄고, 벼리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 o32

















여자를 사귈 때는 진지하다. 절대 사귈 동안 다른 여자를 바라보는 적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진지함과 처음 사귈 때의 마음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언제나 그랬다, 벼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인후는 삶을 그렇게 사랑 없이 보내고 있었다.







“음.. 우리가 만약 헤어지게 되면 불편한 점이 참 많을 것 같아요. 사귀기 전에 이런저런 것들을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했었어야 하는데, 우리 둘 다 깊이 생각을 안했나 봐요.”



“왜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거지?”



“네?”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 것이냐고 물었어, 은벼리”







인후의 목소리가 많이 낮았다. 화를 내는 적은 있었지만, 그가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목소리를 낮춘 적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은 그가 진정 화가 났다는 의미라는 것을 벼리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가 화를 내는지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 사귀는 것이라 잘은 모르지만 남녀사이는 언제나 헤어질 수도 있는.. 그런 사이잖아요.”



“...”



“왜 그래요, 인후씨랑 사귀고 나서 우리 항상 다투는 것 같아요. 화 풀어요, 네?”







벼리가 인후에게 다가가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의 굳은 얼굴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아까와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은벼리, 벼리야”



“.. 네”



“우리 절대 안 헤어져, 네가 날 싫어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헤어져 줄 수 있어. 너의 행복을 위해서.. 하지만 내가 너에게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는 경우는 절대 없을 거야”



“나도.. 나도 먼저 헤어지자고 안할 거예요, 인후씨 이렇게 붙잡고 있을 거야”



“제발 그래주세요, 신데렐라님. 저의 소원입니다”







인후의 목소리가, 표정이 원래의 그로 돌아오자 벼리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분명 끌어안은 사람은 그녀인데, 막상 포즈는 그가 그녀를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인후씨,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말아요?”



“무슨 딴소리?”



“지금 이렇게 제발 붙잡아 달라고 하고서 나중에 나보고 지독하다고, 질린다고 그러면서 후회하지 말라고요”







벼리의 귀여운 투정에 인후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벼리는 양 볼을 부풀리고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조차 너무 사랑스러워 보였다.







“벼리야”



“왜요?”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어쩌면 좋니”



“으으, 인후씨 느끼해”



“은영일 회장님.. 아니, 당신 아버님과 다음 주에 약속 잡아야겠다. 괜찮지?”



“그렇게나 빨리요?”



“응, 생각 같아서는 이번 주로 하고 싶지만 광고 마무리 때문에 바쁘니까”



“알았어요, 내가 아빠한테 말해 놓을게요.”



“아니, 내가 나중에 전화 드릴 거니까 그러지 않아도 돼”



“왜 이렇게 빨리 만나려고 하는 거예요?”







벼리의 질문에 인후는 그녀를 더욱 끌어안았다. 지금에야 깨달은 것이지만 이제는 확실히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처음 그의 비서로 들어왔을 당시에는 그녀도 인후에게는 다른 사람과는 다를 바 없는 그저 그런 존재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자각을 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녀가 그의 일 순위가 된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였다.







“당신을 빨리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인후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벼리의 코끝에 살짝 키스를 해주었다.







“둔한 여자는 몰라도 되는 이야기입니다.”




.
.



“현주 언니!”



“어머, 우리 벼리 왔네?”







Lee shop에서 단골손님을 상대하던 현주는 등 뒤에서 들리는 벼리의 맑은 목소리에 저절로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 웬일이야!”







평소 침착한 이미지로 손님을 상대하는 현주의 호들갑에 가게 안의 사람들의 시선은 현주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다가 결국은 모든 사람의 시선이 막 기게 문을 열고 들어온 벼리에게로 쏠렸다.







“언니, 이제 나 이렇게 다니려고요”



“정말이야? 꺄악! 너무 잘됐다! 우리 예쁜 벼리 얼굴 이제 아무데서나 마음껏 볼 수 있는 거잖아? 안 그래도 지일이랑 너희 아빠 은영일 회장이 어울리는 옷 평상복으로 몇 벌 만들어 주라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벼리에게 한번 쏠린 시선들은 다른 곳을 바라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현주는 벼리가 사람들의 시선에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단골손님을 지배인에게 맡기고 벼리를 2층 작업실로 데려갔다.







“어떤 멋진 왕자님이 우리 공주님을 이렇게 예쁜 모습으로 되돌려 놓은 거지?”







단번에 벼리의 변화에 남자가 관여 되어있다는 것을 알아낸 현주는 그녀에게 짓궂게 물었다.







“역시 언니 속이는 것 보다 귀신을 속이는 것이 빠르겠어요.”



“오호호, 하루 이틀도 아닌 걸 가지고 뭘 또 놀라고 그래?”



“..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요.”



“흐음, 누구? 혹시 그 파티에서 너랑 같이 테라스에 있었던 그 남자?”







현주의 말에 이번에는 정말 놀랍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벼리.



현주가 남들보다 예리한 감각으로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한몫 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의 정체까지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벼리였다.







“정말.. 언니를 보면 진정한 프로가 뭔지 확실히 알 수 있다니까요”



“그 이야긴 내 추측이 맞는 거네? 너희 회사 사장이지? 패션 잡지에도 종종 등장하는 Fascinate의 젊은 사장 서인후”



“네, 그 사람 이예요”







말하는 벼리의 얼굴에서 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홍조가 떠오르는 모습에 현주는 안심이 되었다. 지일과 영일을 빼고 은벼리를 가장 오래 봐 온 사람은 다름 아닌 현주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벼리의 표정만 봐도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현주는 영일과 지일 그리고 자신의 끈기와 노력으로 7년 동안 벼리가 점점 사람답게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고 발작을 하는 벼리를 보면서 내색은 안했지만 누구보다 힘들어했던 세 사람이었다.







“벼리야, 지금 네 모습을 보니까 이제 정말 완벽한 사람 같아 보인다. 지금 너는 그저 사랑에 빠진 평범한 여자야”



“고마워요, 언니”







은벼리는 이현주에게 딸과 같은 존재였다. 4살 차이가 나긴하지만 워낙 친한 사이라 친구처럼 지내는 영일의 딸이 된 순간부터 벼리는 그녀에게도 딸과 같은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지금은 훗날 자신이 결혼을 해서 애를 낳게 되더라도 지금 벼리만큼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 현주는 그런 자신의 소중한 딸 벼리가 점점 성숙해지는 모습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언니, 다음 주에 언니랑 인후씨랑 아빠랑 나랑 노땅이랑 저녁하려고 하는데 괜찮죠?”



“그럼, 우리 벼리 남자친구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두 눈으로 확인해야지! 다음 달에 옷 전부 완성 될 거니까 한번 들려야 한다?”



“그럼요, 현주언니 항상 고마워요. 언니는 나한테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에요”



“벼리 너도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야”



“아빠랑 언니랑 결혼했으면 좋겠다.”



“어머? 우리 벼리 또 헛소리 하는 것 보니까 집에 갈 때가 됐나보다. 어서 가봐, 밖이 벌써 어두워졌네.”







현주는 벼리를 마중하며 그녀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의 차가 점이되어 시야에서 멀어지자 흔들던 그 손을 내렸다.







“은영일에게는 아직도 은벼리가 가장 소중하거든.. 비록 이성으로서의 사랑은 아니지만 은영일 눈에는 은벼리만으로도 벅차서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거든.. 딸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다른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거든..”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그녀의 눈은 미소를 짓던 아까와는 달리 공허하고 슬퍼보였다. 잠시 그렇게 차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현주는 이내 자신의 가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o33



















이른 아침부터 Fascinate의 고위 간부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신제품인 나르시스가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반응이 아주 성공적입니다. 상품도 워낙 오랜만에 출시된 것이고 그 향 또한 사람들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수정을 거듭한 제품인 만큼 신데렐라보다 더 빠른 시기에 품절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 나르시스를 몇 만개 만들었죠?”



“기존에 만들기로 한 1000만개 중 반이 완성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 중 20만개가 팔릴 것이고, 나머지는 기존 사항대로 해외에 수출할 계획입니다.”



“이번 나르시스는 초기 계획과 같이 한정수량으로 판매가 됩니다. 1000만개라고는 해도 향수는 소모품이기 때문에 극히 적은 숫자입니다. 또한 세계 각 국에 수출되는 저희 회사의 특징까지 고려한다면 턱 없이 모자란 숫자이죠. 또한 지일이라는 최고의 광고모델의 선전효과로 지금 나르시스가 시중에 판매가 시작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시간동안 꽤나 파격적인 숫자의 상품이 판매 되었죠, 정확히 그 수량이 어떻게 됩니까?”



“어제까지의 판매조사결과 5일 만에 2천개의 제품이 팔렸습니다. 저희가 예상한 조사결과보다 2배가 넘는 수치이며 이대로 나간다면 2개월 만에 2만개가 팔렸던 신데렐라의 기록을 1개월이라는 기간에 깰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정말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수치이군, 그렇다고 우리의 기획을 변경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향수도 유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유행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기존과는 다른 향을 제조하기 때문에 차별성을 둘 수 있었지요. 그 결과 프랑스와 같은 향수 업계의 틈새를 우리가 공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장님, 지금 수치로 보면 1000만개를 더 추가 생산하여도 전혀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한 직원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직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인후는 그 제안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한정수량이라는 것을 이미 밝힌 시점입니다. 그런데 수량을 배로 늘리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



“정확한 수량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해외에 수출까지 하는 상황에서 2000만개라는 수치는 여전히 적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확실히 신데렐라가 나온 지 2년 4개월이라는 시간동안 3억 만개라는 판매수익을 올리기는 했지만, 그만큼 신데렐라는 어디서나 구입할 수 있는 흔한 제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르시스는 희소성의 가치를 두자는 차원에서 판매수치를 현저히 낮춘 것입니다.”







확고한 인후의 반응에 직원들은 망설이고 있었다. 확실히 인후의 말에 동의를 해서 나르시스를 생산하였지만, 5일 동안 너무 경이로운 판매실적에 직원들 중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그래서 나르시스에 대한 전망을 각자 분석을 한 뒤,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분주하게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만큼 다들 자신의 회사에 애착을 가지고 있기에 자진해서 업무량을 늘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Fascinate의 힘이었다.







“제가 의견을 하나 내도 되겠습니까?”







둘 다 좋은 의견이기에 합일점이 찾아지지 않아, 서로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직원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순간 오늘 회의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은 벼리가 드디어 입을 열어다.



언제나 다른 그 누구보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적절한 합일점을 찾아내는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자, 회의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런 직원들의 모습에 벼리는 맑은 미소를 지었다.



벼리가 자신의 모습을 과감하게 드러낸 지 어느덧 일주일이 되어가기에 직원들은 대부분 그녀의 본모습에 많이 적응을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미소를 보이자 어느 정도 적응된 직원들의 시선이 또 다시 벼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1000만개를 생산하자는 기존의 약속을 계속 지켜나갔으면 합니다.”







암묵적으로 부사장이라 불리는 벼리가 사장인 인후와 같은 의견을 말하자 직원들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은 비서님도 아시다시피..”



“대신, 다른 방법을 하나 더 제시하고 싶습니다.”



“다른 의견이라 하면?”



“여러분들도 아시듯 향수는 소모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생산을 하더라도 대부분 빠른 시간 내에 팔리는 것이죠. 하지만 음식과 같은 소모품에 비하면 소모품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 사용기간이 긴 것도 사실입니다.”







향수의 기존 정의에 대하여 짚어나가는 벼리의 말에 직원들이 모두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나르시스 제품을 30ml로 그 양을 통일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가장 사람들이 질리지 않고 사용하기 적당한 양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나르시스 향수의 양을 이용해 보자는 것입니다.”







벼리의 말에 직원들은 여전히 아리송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인후는 어느 정도 그녀의 생각을 이해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나르시스라는 향을 시리즈로 만드는 것이지요, 그 시리즈 시판 간격은 6개월 정도로 하는 것입니다. 30ml는 짧게는 3~4개월에서 길게는 1년까지 쓸 수 있는 양입니다. 6개월이라는 기간이 지난 후 나르시스의 향을 기존 향과는 다른 느낌으로 만들고, 그 제품을 각각 2000만개씩 생산한다면 기존 희소성의 가치도 변하지 않을 것이고, 대중들도 시리즈 중 하나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큰 만족감을 느낄 듯합니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인데요?”



“그러게요, 역시 은 비서님이십니다!”







정말 좋은 생각이었다. 나르시스를 시리즈로 만들어 일정 기간의 공백을 둬서 기존 단계의 나르시스보다 조금 다른 향을 만들어 판매하자는 벼리의 의견은 인후의 의견인 희소성도 떨어지지 않고, 직원들의 의견인 판매수익에서도 떨어지지 않는 최상의 기획이었다.







“그럼 다들 은벼리씨의 의견에 동의 하시는 겁니까?”







인후의 질문에 회의장 모든 직원들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후 또한 얼굴에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그럼 자세한 회의는 며칠 뒤 있을 본 회의 때 하도록 합니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본 회의 전까지 은벼리씨는 간단한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다른 질문 사항은 없습니까?”







인후의 말에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자, 회의를 마친 인후는 직원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상석에 앉아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벼리도 역시 그런 그의 옆에서 직원들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역시 당신이네?”



“뭐가요?”



“당신의 한마디에 다들 동의하잖아, 내가 말할 때는 들은 척도 안하더니”







괜히 화가 난 척 하는 인후의 모습에 벼리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사귀게 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해 주는지, 위해 주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왜 그래요, 사장님 싫어하는 직원이 어디 있다고..”



“당신 그 미소 다른 직원한테 보여주지 마! 아까도 다들 혼이 나가서 헤헤거렸단 말이야!”



“푸훗! 사장님 자꾸 왜 그래요, 점점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당신이 자꾸 아름다워지니까 내가 점점 불안해지잖아.”



“사장님만으로도 저는 벅차요.”







벼리의 말에 인후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인후는 자신의 눈에 은벼리라는 여자가 점점 더 아름답게 보이고 있었다.



자신의 눈에도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얼마나 아름답게 보일지 그것이 고민스러운 인후였다. 그런 인후의 속 타는 마음을 알리가 없는 벼리의 모습을 보는 인후의 표정은 어두웠다.







“은벼리.”



“네?”



“나만 좋아할 거지?”



“에에?”







뜬금없는 인후의 말에 벼리는 황당하다는 듯 인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인후의 얼굴에서는 어떤 장난스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나만 좋아할 거지?”



“.... 네”



“나도 너만 좋아할 거야, 사장실로 가자.”







벼리는 자신의 손을 이끄는 인후의 크고 따뜻한 손에 얼굴에 또 금방 미소가 어렸다. 그러한 사소한 변화가 벼리 본인에게는 너무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전혀 기분이 나쁜 변화가 아니었다.



어느새 사장 비서실에 도착한 두 사람, 벼리는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자신의 책상위에 올려있는 흰 장미꽃다발에 당황했다.







“흰 장미?”







벼리의 의문스러운 독백에 인후는 책상위에 올려 진 장미를 들고 벼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내 그 꽃다발을 벼리에게 내밀었다.







“사장님?”



“내가 당신에게 주는 거야.”



“사장님이요?”







인후의 꽃다발 심부름을 많이 한 벼리는 한 번도 인후 스스로 준비한 적을 보지 못했다. 그의 장미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흰 장미 100송이는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또한 자신이 흰 장미 심부름을 해 본적도 없었다.







“흰 장미, 무슨 뜻인가요?”



“내가 당신을 지켜줄 테니 더 이상 혼자 있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벼리의 품에 꽃다발을 안겨 준 인후는 어느새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곧 두 사람은 이곳이 회사라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이 뜨거운 키스를 이어나갔다.















※ o34















“안녕하세요, 인후씨 지금 있죠?”




“아, 안녕하세요. 사장님께서 지금..”








벼리는 느닷없이 회사 사장실을 찾아온 낯익은 여자의 등장에 당황했다. 그 때문인지 평소 재치 있게 인후를 찾아오던 여자를 쫓아내던 벼리의 실력이 발휘되지 못하고 망설였다.








“은벼리씨, 저 아시죠? 저는 예외의 대상이니까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주세요. 들어가 볼게요.”




“아, 저 김해주씨..!”








당당하게 사장실로 들어가는 해주를 불러보지만, 이미 해주는 사장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해주의 뒷모습을 보던 벼리는 이상하게 가슴이 찌릿하고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이게 질투...인가?”








벼리는 인후와 사귀게 되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알게 된 자신이 인후에게 많이 뒤처지는 것을 느끼고, 아무도 몰래 서점에 가서 사랑과 관련된 책들을 하루 종일 읽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책에서 봤던 질투라는 감정이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는 벼리였다.








“이게 질투라면.. 나 정말 이제 방법이 없는 것일까..?”








처음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운 벼리는 인후에게 너무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왔다. 3년 동안 그를 지켜본 그녀로서는, 인후가 언젠가 다른 여자들처럼 자신을 향한 사랑도 곧 고갈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 자신이 가장 상처를 덜 받는 방법은 그에게 너무 깊이 빠지지 않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 벼리이다.



하지만 지금 낯선 여자의 방문에도 이렇게 흔들리는 자신을 보자, 갑자기 모든 것이 자신 없어지기 시작하는 벼리였다.






.

.




“뭡니까?”




“인, 인후씨.”




“지금 이런 행동 제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입니다. 당장 나가주십시오.”








인후는 느닷없이 열리는 사장실 소리가 평소 벼리의 문소리와는 다른 것을 느꼈지만, 그녀 이외에 지금 이 시간에 자신의 사장실을 찾을 사람은 없다는 생각에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 서류에 집중하던 얼굴을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벼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등장과 그 사람이 얼마 전 자신이 직접 정중하게 이별을 고한 김해주라는 라는 것, 마지막으로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신의 여자가 어쩌면 마음이 아팠을 것이라는 생각에 인후는 화가 났다.




반면 해주는 며칠 전, 이별을 고하던 그때의 정중하고도 자상했던 서인후라는 남자가 며칠 사이에 이렇게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자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처리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금 전 사장실을 들어오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자신의 의도대로 진행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이다.








“미안해요, 인후씨가 이렇게 싫어할 줄 몰랐어요.”




“후회에 단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후회라는 것을 한 순간,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김해주씨의 이런 행동, 저로써는 정말 불쾌합니다. 제가 김해주씨를 마지막으로 본 날의 그 모습은 한때 좋은 감정을 가졌던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습니다. 그때의 제 모습은 이제 단 한 여자만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그 누구도 쉽게 보지 못할 것입니다. 당장 나가주시죠.”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죠!”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신의 여자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김해주씨와 얽히기 싫습니다.”








마지막까지 잔인하게 말을 하는 인후의 모습에 해주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는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붉어져서 사장실을 나갔다.








“젠장!”








인후는 그런 해주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해주로 인해 어쩌면 상처받았을 자신의 여자에 대한 걱정에 화가 날 뿐이다.



해주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분명 연애초보인 벼리가 많은 동요를 했을 것을 알면서도 쉽게 그녀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벼리와는 달리 자신은 이미 많은 여자들을 알아왔기 때문이다.








“차라리 비서와 사장의 관계로 남았어야만 했나.. 그냥 사장이라는 울타리에서 그녀를 보호하고 아껴주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기회를 준다 해도 인후는 벼리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전혀 변동이 없었다.



분명 나중에 이렇게 그녀의 맑고 순수함에 죄책감을 가지게 될 것을 알면서도 인후는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받아들였고, 그 상황을 실제로 겪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선택 기회를 준다 해도 분명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만큼 그에게 은벼리라는 존재는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상념에 빠져있던 인후는 문든 벼리에 대한 걱정에 현실로 돌아왔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살짝 열려져 있는 사장실 문을 열고 벼리가 있을 책상으로 시선을 두었다.








“벼리야”




“사장님?”








인후의 예상대로 벼리는 책상에 앉아 분주하게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부름에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인후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빠르게 그녀가 앉아있는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있는 그녀를 단숨에 안아들었다.



왼손은 그녀의 엉덩이를 바치고,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감쌌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리둥절해 있던 벼리는 곧 자신이 그에게 안겨있다는 사실에 급속도로 얼굴이 붉어졌다.








“뭐, 뭐하는 거예요! 누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려고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우리가 사귀기 전부터 우리 사귄다는 소문은 회사 식구들이 다 아는 거였는데.”




“그건 말 그대로 소문이었고요!”



“소문이 사실로 된 것 뿐인데 당신 왜 이렇게 민감해? 혼삿길 막힐까봐?”








인후의 장난스러운 말이 벼리에게 비수가 되었다. 그녀는 지금 인후가 한 말이 지금 연인사이이긴 하되, 결혼은 안한다는 뜻으로 들려왔다.



벼리는 자신이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이렇게 그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되니 평정심이 쉽게 잡아지질 않았다. 그런 벼리의 마음이 들어난 얼굴은 입가에 맴돌던 미소가 사라지게 했고, 그런 벼리의 표정변화에 인후는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당신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요, 사장님 저 좀 내려 주세요.”




“왜 그러는데, 아까 그일 때문에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진 거야? 그 일이라면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확실히 끝냈어.”








참 자상한 남자이다. 그래서 더욱 잔인한 남자가 바로 서인후이다. 항상 경계심을 가지고 그를 대해야 하는데, 벼리는 이렇게 자상한 그를 보면 경계심이 풀리고, 온 몸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알아요, 빨리 내려줘요.”




“키스해줘.”




“네?”




“당신이 나한테 키스해줘, 그러면 당신 내려줄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어디 있어요.”




“왜 말이 안 돼? 당신 나랑 사귀잖아, 나 좋아하잖아. 아니야?”




“사장님..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억지 그만부리고 어서 내려 주세요.”








벼리의 말에 인후는 그녀를 내려주기는커녕 여전히 그녀를 안은 상태로 침대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장님!”




“그래, 나 사장이야. 나 사장인 거 잘 알고 있으니까 그만 불러.”




“저 좀 내려달라고요!”




“그게 소원이라면”








아주 귀중한 물건처럼 소중하게 안고 있던 것과는 달리, 인후는 벼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를 거칠게 침대에 내려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인후는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누르고 있었다.








“뭐하는 짓이에요, 사장님!”




“나 사장 맞는데, 사장이기 전에 나도 남자야.”




“읍!”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볼 겨를도 없이 능숙하면서도 평소와는 달리, 거칠게 자신의 입안으로 침입하는 인후의 키스에 벼리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인후는 자신의 거친 키스에 반항조차 못하는 벼리를 보며 자신의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그의 손이 그녀의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를 만지기 시작했다.








“흐음.. 읏!”








벼리는 자신의 몸을 만지는 크고 강한 인후의 손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그의 그런 행동을 멈추기 위해 그의 손을 잡아 보았지만, 평소에는 못 이기는 척 멈추는 그의 손이 오늘은 멈출 생각을 하질 않자 벼리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흐읍.. 아.. 제발.. 인..후씨..”








한참 끝에 겨우 입술을 떼어낸 인후의 얼굴은 그녀의 목으로 이동했다. 그런 그의 행동을 제지하기 위해 키스가 끝나자마자 바로 인후를 말리는 벼리.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오랜 키스로 목이 잠겨 인후의 욕망을 부추기는 결과만 가져오고 있었다.








“오늘 널 가진다.”




“!!!!”








망설임 없는 인후의 말에, 그의 손길에 흠칫거리던 벼리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을 보고 벼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은 금방이라도 벼리를 태울 것 같은 욕망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당신이 날 거부한다면, 난 그만 둘 거야.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해?”








벼리를 똑바로 바라보는 인후의 눈빛, 그의 눈빛에는 욕망도 있었지만 그녀가 싫다면 여기서 그만 둘 단호함도 있었다. 벼리는 그가 자신에게 선택권을 주기 전까지는 당연히 인후가 이런 행동을 그만두길 원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후가 선택권을 자신에게 넘겨주는 시점에서부터 그녀는 혼란스러워졌다. 그의 눈에서는 어떠한 잡념이 보이질 않았다. 자신이 싫다고 한다면 그는 정말 여기서 그만 둘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거절한다면 그가 자신을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가 자신을 영영 보지 않을 것만 같았다.



벼리는 한참을 그렇게 인후에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했다.








“거절인가? 알겠어, 미안해. 오늘 내가 당신에게 너무 부담감을 준 것 같군, 시간도 그러니 이만 퇴근할까? 내가 바래다주지.”








인후는 난감한 표정으로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한참동안 얼어붙어 있는 벼리를 보고 결국 자신의 잘못을 탓했다.



여자에게 처음이란 아주 중요하고, 특히나 자신의 여자는 남들보다 더욱 민감한 것을 알면서도 어쩌면 그녀가 자신을 선택해주지 않을까하는 욕심에 그런 질문을 했다.



물론 그녀를 정말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다. 자신과 연애를 하면서도 항상 당당하지 못한 그녀가 마음에 걸렸었다.



마치 자신이 놔주면 그녀는 멀리 날아갈 것 같이 경계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인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자신과 하나가 되면 그런 벼리의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 인후는 방금 전 벼리의 모습에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자신을 책망하는 인후와 달리, 벼리는 자신을 데려다주기 위해 그녀를 등진 상태로 옷을 바로잡는 인후의 등을 껴안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가지 마요..”













※ o35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벼리의 말에 인후는 옷을 입기위해 움직이고 있던 모든 행동을 정지했다. 자신이 너무나 기다려 온 말이었기에 그저 환청을 들은 것이라 여기기에는 그 목소리가 너무도 생생했다.





“인후씨, 가지 마요.”





벼리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인후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리고는 인후의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도록 했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그녀의 초록빛 황금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무런 말도 없는 두 사람, 주위도 고요하기만 했다.





“가자, 이러다 늦겠다.”



“인후씨!”





“미안해, 당신 지금 내 행동 때문에 뭐가 옳은 것인지 판단이 안 되는 거야. 오늘 들어가서 푹 자고나면 괜찮아질 거야.”





인후는 벼리를 가볍게 안아주고 다시 옷을 입기 시작했다. 벼리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인후에게 다시 말을 하려했지만, 분명 그가 또 자신을 말릴 것이 분명했다. 결국 벼리는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했다.





[우리 딸 어디야?]





벼리의 핸드폰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녀의 아빠인 은영일이었다.





“아빠, 나 오늘 집에 못 들어가요.”





벼리의 말에 인후는 그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신이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전화를 가로채 거짓이라 말한다면, 영일이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저녁을 함께하기로 한 날인데, 괜히 이런 일로 만나기도 전에 마이너스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내일 당당하게 자신의 입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밝히고 싶었다.





[또 야근이야? 요 며칠 야근 안한다 했더니, 그새 야근이 하고 싶었던 거야?]




“응, 아빠 내일 저녁 같이 하기로 한 거 알죠? 내일 봐요!”




[그래, 몸 생각하고, 우리 딸 사랑한다.]




“나도 우리 아빠 사랑해요.”





벼리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 것인지, 똑바로 인후를 바라보고 있는 상태로 무사히 영일과의 통화를 마쳤다.





“이래도 장난이라고 말할 거예요?”




“벼리야.. 내가 언제 당신한테 장난이라고 했어. 그저 난 오늘 나의 행동 때문에 당신이 심리적으로..”




“난 전혀 아니에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당신은 나를 막상 안으려니까 겁이나요? 그래서 지금 이러는 거예요? 내가 부담스러워 진거냐고요!”




“아니야, 왜 그래.. 내가 당신 얼마나 원하는지 당신이 더 잘 알잖아..”




“그럼 오늘 같이 있어요, 나 당신이랑 있고 싶어요. 내가 싫으면 싫다고 말해줘요. 더 이상 원하지 않을게요.”




“당신.. 다른 남자한테는 절대 이런 말 하지 마.”





담담하게 말하지만 파르르하게 떨리는 눈, 은근히 자극적인 목소리, 키스로 인해 더욱 섹시해진 입술. 인후는 벼리의 이런 모습에 넘어오지 않을 남자는 절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자신의 여자, 조금만 방심하면 누군가가 그녀를 채어갈까 항상 걱정이 된다. 순수하기에 더럽히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부추기는 인물이 바로 그녀이다. 그렇기에 어릴 적부터 순탄치 못한 생활을 한 것을 인후는 알고 있었다.





“당신을 아껴주고 싶어, 당신을 상처 입히기 싫어.”




“그렇다면 날 안아줘요.”




“벼리야..”




“인후씨, 더 이상 당신에게 바라지 않을게요. 한번만.. 안아줘요.”




“...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네.”




“알았어, 우리 집으로 우선 가자.”





인후는 차를 몰고 자신의 집으로 가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차를 몰았다. 벼리 또한 그런 인후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다. 다만 쿵쾅거리는 자신의 심장소리에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갈 것처럼 긴장되고 있는 것이 신경 쓰일 뿐이다.

어느새 도착한 그의 집, 오늘따라 그녀의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아마도 숨도 못 쉴 만큼 큰 긴장감 때문이리라.





“내릴까?”




“네.”




“마음이 변한 건 아니지?”




“안 변했어요, 내가 무슨 변덕쟁이인줄 알아요?”





벼리의 말에 인후는 미소를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반면 벼리는 씩씩하게 말은 했지만, 긴장이 너무 많이 돼서 일어날 기운도 없었다. 그때 그녀가 타고 있던 조수석 문이 열리고 인후가 벼리를 안아 들었다.





“이, 인후씨?”




“당신 그렇게 씩씩하게 말해도, 파리하게 변한 안색이 지금 당신 심경을 말해주고 있어. 얌전히 내 품에 안겨있으세요, 아가씨.”





정곡을 찌르는 인후의 말에 벼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자라 해도 매우 가벼운 벼리이기에 인후는 전혀 어려운 기색 없이 그녀를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저녁이라 사람들은 없었지만, 앞에 있는 경비원이 마음에 걸리는 벼리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 당당했던 모습은 어딜 가셨을까?”





인후의 장난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점점 경비실에 가까워지는 느낌에 벼리는 말을 받아칠 수가 없었다. 딱히 받아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쑥스러워하는 벼리와는 달리, 인후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경비원에게 한가득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 수고하셨습니다.”




“아, 수고야 인후 군이 했겠지.”




“이제 이런 모습 자주 보실지 모르니까 익숙해지세요, 너무 놀라지 마시고요.”





인후는 여유롭게 농담을 하며 경비실을 지나쳤다. 그런 인후를 경비원은 멍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인가보네.”





자신이 봐도 너무 완벽한 남자인 인후가 여자가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긴 경비원이 언젠가 그에게 질문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여자가 수 없이 따를 텐데, 왜 아무도 안 사귀는 거요?’




‘사귀는 여자는 있습니다.’




‘나중에 나한테도 소개 좀 시켜줘요.’




‘아저씨께 소개시켜 드리려면 집에 데리고 와야 하는데, 아직 그러고 싶은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 아마 아저씨가 만나게 될 여자는 제 아내가 될 사람일 겁니다.’





그런 인후의 말에 빨리 국수나 한 그릇 먹게 해 달라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런 이야기를 한지도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 자신이 이곳에서 일한지 벌써 3년, 그동안 집으로 들어가는 그의 옆에 여자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오늘 드디어 3년 만에 그와 함께 동행 한 여자를 본 것이다.





“곧 국수 얻어 먹겠네.”





경비원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

.



“내일 나 경비 아저씨 얼굴 어떻게 볼지 걱정돼요.”




“아까 그 씩씩하던 은벼리양 맞으신가요?”




“인후씨, 나 장난 아니라 정말 걱정 된다고요.”




“괜찮아, 정 그러면 내일도 아까처럼 나한테 안겨서 내려가던가.”




“그게 더 창피해요!”





얼굴이 빨개지는 벼리의 모습이 마냥 귀여운 인후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벼리는 그의 집은 몇 번 들어왔지만, 그의 침실은 처음 들어 온 것이라는 생각에 두리번거리며 그의 성격과 어울리는 깔끔한 침실을 구경했다.





“감상은 내일 듣고 싶은데?”




“네?”




“우리 두 사람이 보내기에는 오늘 밤이 너무 짧다고 말하는 거예요, 이 아가씨야.”





벼리는 그의 말에 침실 구경하는 것을 관두고 그를 바라보았다. 인후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가 자신의 눈에 너무 예뻐서 새삼 그녀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많은 여자를 안아보았지만, 이렇게 떨려본 적은 없었다. 그만큼 그녀가 자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우리 씻을까?”




“저, 저 먼저 씻을게요!”





같이 씻자는 말을 하려던 인후는 잔뜩 긴장한 벼리의 귀여운 모습에 웃으며 알겠다고 말했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벼리는 샤워실로 보이는 문으로 후다닥 들어가 버렸다.





“뭐 사랑을 나눈 뒤에는 자연스럽게 같이 씻어야 하니까.”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인후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벼리는 쉼 없이 쿵쾅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에게 안겨 그의 여자가 되고 싶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아, 이러다 심장이 터져 죽는 것은 아닐까라는 걱정이 들었다. 연애와 관련된 책에서 ‘개개인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첫 경험에서 많은 아픔을 느낀다.’라고 쓰여 진 문장이 떠올랐다.





“많이.. 아플까?”





벼리는 첫 경험이 아프더라도 그와 함께하는 경험에서 느끼는 것이라면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겨우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며 샤워를 마친 벼리는 문득 자신이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

벽에 걸린 가운은 인후의 것이어서 많이 커 보였지만, 안 입은 상태로 나갈 수는 없기에 그 가운을 입고 나갔다.





“다 씻었어?”




“네.”





그녀가 나올 때까지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인후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리는 벼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가운을 입고, 자신이 쓰는 샴푸를 쓰고 나온 벼리의 모습에 그녀를 만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만지면 다급하게 모든 것이 끝나게 될 것 같은 느낌에 샤워실로 들어가 찬물로 들뜬 마음을 좀 진정시켰다. 여분의 가운을 입고 샤워실을 나온 인후는 문소리에도 깜짝 놀라는 벼리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순수한 여자를 본 적 없는 인후는 벼리의 모든 것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웠다. 자신이 지켜줘야 하는 여자,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여자가 바로 은벼리였다.





“벼리야, 이제 나에게서 달아날 생각하지 마, 당신 이제 내 여자야.”




“네.”



“이 시간 이후로 나 외에 다른 남자는 생각 못하도록 만들겠어, 내가 얼마나 독점욕이 강한 남자인지 알게 된다면 당신은 아마 나에게서 달아날지도 몰라.”





“.. 나도 욕심 많은 여자에요, 당신과 사랑을 나눈 모든 여자들이 질투가 나는 걸요? 이런 나.. 싫어요?”



“아니, 나야 영광이지.”





“나도 그래요. 당신이 나 독점해 주는 거.. 너무 감사해요.”





벼리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아 들어갔다. 그렇게 그들만의 밤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o36 [19禁]


















항상 그랬지만 지금 이 순간에 하는 애정표현은 두 사람의 가슴을 쉴 새 없이 뛰게 만들었다. 같은 흰색 가운을 입고 있는 것이 두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주었다.

벼리는 이제 익숙해져버린 뭉클한 인후의 혀가 자신의 입 안으로 들어오자,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응했다.




“자, 잠시 만요.”





본격적인 키스를 하면서 인후의 손이 가운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벼리는 당혹감에 급하게 인후의 손을 제지했다. 그 이유는 새 속옷이 없는 관계로 씻은 후, 가운 속에 아무 것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다 알고 있어, 이거 안 보여?”





인후는 가운 위로 손을 옮겨 벼리의 가슴 한쪽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리 두껍지 않은 가운 위로 딱딱하게 솟은 것이 보였고, 인후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벼리를 바라본 뒤, 가운을 젖히고 연한 분홍색 유두에 입을 가져갔다.





“아앗! 으음..”





인후는 밑에 누워있는 벼리의 위에서 몸을 밀착시키고, 풍만한 그녀의 가슴을 한 쪽은 입으로, 다른 한 쪽은 손으로 만졌다. 어느새 그를 제지하던 벼리의 손은 인후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있었다.

그의 입김과 손길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졌고, 그의 움직임에 따라 벼리의 신음소리도 점점 커져갔다.





“당신.. 맛있다.”




“네?”




“은벼리, 당신 진짜 맛있다고.”





맛있다는 말이 외설스럽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인후의 말에 금방이라도 터질듯이 빨갛게 변한 벼리의 얼굴, 그 모습이 너무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인후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며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은벼리라는 인물과 관련되었을 때만 진실 되었다. 그리고 그 진실 된 미소는 인후 본인도 몰랐지만, 세상 모든 여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만했다.





“나 싫어요.”




“응?”




“인후씨 그 미소.. 다른 여자 보여주기 싫어요.”





작게 투덜거리는 벼리의 말에 인후는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점점 뾰로퉁 해지고 있었다.





“당신 왜 심술 났어?”




“몰라요!”




“이리와.”




“꺄악!”





인후는 벼리의 머리 한 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그녀를 꽉 안았다. 그런 그의 행동에 그녀를 금방 심술 난 표정을 풀고 해맑게 웃었다.





“이 아가씨야, 내 몸은 다 당신거야.”




“정말요?”




“나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 아닌 거 알지?”




“네, 잘 알아요.”




“나 당신 거니까, 당신도 내거 해라.”"





인후는 당연히 그녀의 대답이 긍정적일 것을 알기에, 기다리지 않고 침대에 다시 그녀를 눕혔다. 그의 빠른 동작에 아무런 장애물 없이 하얀 그녀의 나신이 드러났다. 민망한 지 벼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벼리야, 눈 떠.”




“나 창피해요.”




“이렇게 아름다운데, 뭐가 창피해.”




“그래도..”




“나도 벗을 테니까, 눈 뜨고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똑바로 바라 봐.”





설득력 있는 인후의 목소리에 벼리는 질끈 감은 눈을 살며시 떴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용기를 내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잘 했다는 듯 벼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걸치고 있는 가운의 끈을 풀었다. 자연스럽게 인후가 입고 있는 하얀 가운이 내려갔고, 잘 다듬어진 그의 몸이 벼리의 눈앞에 보였다.

부끄러웠지만 시선을 피하지 말라는 인후의 말에 침착하게 그를 바라보는 벼리, 인후는 그런 그녀를 다시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가슴골에 얼굴을 묻었다.





“인후씨..!!”




“아프지 않게 할게, 처음이라 그래도 아플지 몰라.”




“괜찮아요.”





누워있는 벼리의 몸 위로 그녀를 껴안는 인후의 몸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벼리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자, 벼리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예상했던 인후는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벼리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그런 그의 행동이 결실을 맺은 듯, 잔뜩 긴장했던 벼리의 몸이 점점 부드럽게 이완되고 그에 따라 오므려있던 다리가 살며시 벌어졌다.




“당신 많이 아프면 나에게 말해.”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벼리, 인후는 허벅지에 한참을 머물던 손을 그녀의 은밀한 곳으로 옮겨갔다.





“으읏!”





자신조차 제대로 만져본 적 없는 곳에 타인의 손길이 느껴지자, 벼리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났고 그녀의 허리는 활처럼 휘어지고 있었다.





“하아.. 하... 앗!.. 으음..”





그녀의 은밀한 곳을 은근하게 만지기 시작한 인후의 손은 점점 더 그녀를 자극하면서 입술도 서서히 가슴에서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하앗! 이, 인후씨 제발!”




“쉬이, 괜찮아. 괜찮아, 벼리야.”




“아파요.”




“처음이라 그래, 괜찮아. 곧 나아질 거야.”





인후의 손가락이 벼리의 좁은 곳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커지면서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잔뜩 찡그리면서 아파하는 벼리의 모습에도 인후는 손가락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조심스럽게 더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주름잡한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그녀가 안정을 찾아가는 속도에 맞추어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아.. 이상해, 이상한 느낌이 나요..”




“곧 좋아질 거야, 나만 믿어.”




“.. 지금 인후씨 말이 웃긴 거 알아요?”





인후의 멘트에 ‘오빠 믿어?’라는 멘트가 떠오르자, 벼리는 아픈 순간에도 웃음이 나왔다. 그런 그녀의 미소에 인후도 따라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우리 심각한 상황이야, 아가씨.”




“나도 알아.. 앗!”




“당신도 날 기분 좋게 해 줘야지?”




“늑대, 에로 변태 대 마왕!”




“어허! 나는 give & take를 중요시 여기는 것이야.”




“말이나 못하면 멋있기나 하지.”





말을 태연스럽게 하는 벼리지만, 사실 인후가 자신의 손을 이끌어 잔뜩 성난 그의 것에 가져간 순간부터 그녀의 손이 긴장감으로 떨리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지금 순간이 무서웠지만, 한편으로 호기심도 들었고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에 휩싸여 있었다. 그의 얼굴을 한번 바라본 벼리는 결심한 듯, 그의 것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하아.. 하아..”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당신 선수지?.. 하아.. 계속 해.”





인후의 말에 새침한 표정으로 그를 잠시 바라본 벼리는 무서움이 많이 사라지자, 손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자신의 손 강도에 따라, 여지없이 무너지는 그를 바라보자 점점 흥미가 생기고 있었다.





“은벼리.”




“네?”




“내일 출근 안하고 싶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전히 비밀스러운 농담을 주고받기에는 너무나 순수한 벼리의 대답에 인후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모든 것을 자신이 하나하나 가르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너무나 만족스러운 인후.





“그건 이런 말이야!”





그녀의 처음이 자신이라는 생각에 이미 벼리의 손에서 더 이상 부풀기 힘들 정도로 커진 인후의 남성은 더욱 커졌다.

인후는 여전히 그의 남성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떼어낸 후, 자신의 손가락으로 인해 촉촉이 젖은 그녀의 은밀한 곳으로 남성을 가져갔다.





“그, 그게 들어가요?”




“응.”




“손가락도 아팠는데..”




“처음은 아프지만, 나중에는 기분이 좋아질 거야.”





인후는 그녀의 두 손을 자신의 목에 두르고, 그녀의 허리에 베개를 받쳐주었다. 그리고 아프다고 말할 것이 분명한 그녀의 입을 자신의 입으로 막았다. ‘시작할게.’라고 그녀의 입 안에서 웅얼거리던 인후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으응.. 하앙.. 응!”





신음소리조차 그의 혀로 인해, 제대로 새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벼리는 자신의 여성에서 느껴지는 그의 거대함에 아파하면서도 놀라워하고 있었다. 너무나 크게 밀려오는 고통에 벼리는 잠시 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인후는 그녀를 배려해주기 위해, 그녀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후,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좁은 그녀의 여성이 인후를 계속 자극하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움직이면서 만족하고 싶었지만, 처음인 그녀를 위해 인후는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괜찮아..요.”




“..하아.. 정말? 움직여도 되겠어?”




“네.. 하앙!”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인후는 천천히, 그러나 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시작되자, 안 그래도 좁은 그녀의 여성이 점점 조여오고 있었다.

인후는 처음인 그녀를 배려하기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조여 오는 그녀의 여성에 패하고 조심스럽던 처음 움직임과는 달리, 이미 격할 대로 격해지기 시작했다.





“아아.. 아아.. 아아! 인후씨!”




“하아.. 읏, 벼리야.”





강렬한 움직임에 침대가 위아래로 숨 없이 흔들렸고, 거친 숨소리와 야릇한 마찰음이 방안 가득 울리고 있었다.

어느새 벼리의 두 다리는 본능적으로 그의 허리를 감고 더욱 그의 남성을 깊이 받아들였고, 두 사람 모두 땀이 흥건해진 상태로 쾌락의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아.. 아아앗!! 인후씨!!!”




“읏! 벼리야.. 벼리야, 사랑해.”





두 사람은 동시에 절정을 맞이한 듯, 조금 전까지 너무나 격렬했던 움직임은 멈췄고 인후는 벼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사랑해’라는 말을 무의식 적으로 내뱉은 인후, 벼리는 그런 인후의 말이 단순히 절정에 다다른 순간이기에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하아.. 괜찮아?”




“벼락 맞은 것처럼 좀 찌릿찌릿해요.”




“벼락? 아무튼 은벼리 못 말리는 아가씨야. 나 이대로 한 번 더 하고 싶다.”





아직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인후는 땀으로 젖은 벼리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의 시선에 벼리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나 내일 결근해도 되는 거죠?”




“그럼, 내가 사장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인후씨는 가야해요! 두 사람 다 빠지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괜찮다니까, 소문을 사실로 만드는 것뿐이라고 했잖아.”





지금 대화가 벼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까 ‘혼삿길 막힐까봐 그래?’라고 그가 말했을 때 느꼈던 비참함을 또 느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아까 인후씨 말대로 혼삿길 박힐까봐 그러죠, 그리고 우리 삼촌이 눈치 하나는 끝내주거든요?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은 조심해야 해요.”





그에게 들을 바에는 자신의 입으로 하는 것이 덜 상처받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벼리는 아까 인후가 했던 말을 그가 하기 전에 스스로 말했다.





“그건 내가 바라던 건데?”




“네?”




“당신 혼삿길 막히는 거, 내가 원하는 거였다고.”





예상치 못한 인후의 대답에 벼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이마에 인후는 다정하게 키스를 해주었다.





“당신 삼촌이랑 아버지께는 내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것이 좋으니까 내일 저녁까지 당신 삼촌이 눈치 못 챘으면 좋겠지만, 우리 회사 직원들이 당신과 내가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해서 당신 혼삿길을 막혔으면 좋겠어.”




“그거.. 무슨 심보에요?”




“당신은 나랑 결혼해야 하니까, 난 다른 놈들이 당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질투가 난다고. 당신을 내 옆에 영원히 나만 볼 수 있도록 가둬두고 싶을 정도야.”


“이, 인후씨..”




“사랑해, 이 아가씨야. 당신은 이제 내거니까 아무데도 못가. 당신 나한테 코 꿰인 거야.”




“.....흑!”




“어, 벼리야?”




“나도.. 나도 사랑해요.. 사랑해요, 인후씨.”





인후의 말에 벼리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불안감이 한 번에 풀렸다. 갑작스럽게 밀려온 안도감과 행복감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인후는 그런 벼리를 잠시 당황스럽게 바라보다가 사랑한다는 그녀의 말에 너무나 기쁘게 활짝 웃으면서 그녀를 안아주었다.

첫 번째 관계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관계도 부드러우면서도 격렬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인후가 관계를 가지는 내내 사랑하다는 말을 끊임없이 해주었다는 것이었다.











※ o37[19禁]















“지금 뭐라고 하셨죠?”




“아, 저.. 은비서님께서 오늘 출근을 못 하신다는 연락이 와서..”




“서인후 사장님은 어디 있습니까?”




“사장님께서도 오늘 못 나오신다고..”




“오늘 사장님과 사장 비서 분 모두 안 나온다는 말입니까?”




“네, 저는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소 차가운 태도의 사장 밑에서 일했기에 냉랭한 반응에는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했건만, 자신의 눈앞에 있는 지일을 대하다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지일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원래 엄청 차가운 사람으로는 유명하지만, 저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은 몰랐네. 생긴 것마저도 무서울 만큼 완벽하네.”






지일이 나가고 난 뒤에야 제대로 숨을 쉬는 듯이 호흡을 가다듬은 희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마치 사전에 입을 맞춘 것처럼, 나란히 결근을 한 사장과 벼리.

희나는 잠시 그들이 함께 있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다가, 사실이라면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기에 다른 생각을 접고 앞에 놓인 서류로 눈을 돌렸다. 한편, 지일은 사장실을 나오면서 핸드폰을 꺼내 영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형, 어디야?”




[회사지, 왜?]




“벼리한테 연락 왔어?”




[어제 야근한다는 연락 왔었다고 내가 너한테 말했잖아.]




“그렇지..”




[뭐야, 싱겁게. 이따 저녁에 어차피 볼 건데, 뭐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이따 봐, 형.”






영일과 통화를 마친 지일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져갔다. 사내 직원들은 지일의 모습에 인사라도 하려고 그가 자신의 곁을 지나치길 기다렸지만, 막상 지일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표정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일이라는 모델, 원래 저렇게 무서운 사람이야?”




“저번 광고촬영에서는 좀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난 무슨 저승사자가 다가오는 줄 알았어.”




“선밴 저렇게 멋진 저승사자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난 순간적으로 지일이 지나갈 때, 제발 빨리 자나가라고 속으로 빌었다.”




“하긴, 방금은 정말 다가가기 어려운 건 사실이었죠.”






지일이 회사 정문을 지나는 순간까지 아무 말도 못하던 사내 직원들은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평소와는 달라 보이는 지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

.




잠에서 막 깨어나 뒤척거리던 벼리가 살며시 눈을 뜨자, 맨 처음 보이는 것은 인후의 얼굴이었다. 몽롱한 눈은 인후를 바라보며 점점 생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아!”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본 뒤, 한 5초가 지났을까? 벼리는 그제야 자신이 어제 어디서 잤는지, 자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가 생각나서 자신도 모르게 작게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곤히 잠을 자던 인후도 뒤척이기 시작했다. 인후의 움직임에 숨도 참으며 모든 행동을 정지한 벼리는, 그가 뒤척임을 멈추고 다시 잠이 드는 것을 보고나서야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어제 황홀한 밤을 보낸 결과, 처음 느끼는 날카로운 허리의 통증에 그녀의 입에서는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인후를 다시 바라본 후, 손으로 허리를 주물렀다.

벼리는 지금 자신이 알몸인 것이 신경이 쓰여, 그가 깨기 전에 침대 밑에 구겨져 있는 가운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손으로 허리를 주물러 봐도, 좀처럼 움직일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녀는 이러다 인후가 깰 때까지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에 아픔을 꾹 참고 침대에서 벗어나려했다.






“아얏!”






침대에 겨우 빠져나온 벼리는 굴러 떨어지듯이 침대 밑에 주저앉았고, 아릿한 허리 통증에 결국 참았던 신음을 질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괴로운 소리에 인후가 잠에서 깼다.






“... 벼리야?”




“인후씨..”




“벼리야, 어디 있어?”




“인후씨, 일어나지 말아요.”






벼리는 아직 알몸인 자신을 인후가 보는 것이 창피해서 인후에게 일어나지 말라고 했지만,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에 그녀가 보이질 않자 걱정된 인후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 앉아있는 벼리를 발견한 그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 오지 말아요!”




“왜?”




“내가 할 수 있으니까 그냥 다시 잠이나 자요!”






목까지 붉어진 벼리의 모습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진 인후는, 주저앉은 그녀를 가뿐히 안아들었다.






“우리 아가씨, 잘 잤어?”




“아무튼 얄미워!”




“이래서는 움직이기는커녕, 씻지도 못하겠지?”




“뭐, 뭐하는 거예요?”




“뭐하긴, 우리 아가씨 깨끗하게 씻겨 주려고하지.”




“내가 할 수 있으니까 인후씨는 그냥 침대에 가서 더 자면 안돼요?”






벼리답지 않게 애교를 부리며 그를 말려보았지만, 인후는 그녀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하면서 여유롭게 욕조에 물을 틀고, 옆에 걸터앉았다.






“난 욕조에 들어가게 해 줘요!”




“안 돼, 지금 아직 물이 차가워서 당신 감기라도 걸릴 수 있으니까, 물 다 받을 때까지는 그냥 내 무릎에 앉아있어.”






단호한 인후의 말에 벼리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자신이 감기에 걸릴 것이 걱정되어 이렇게 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이 그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얌전히 자신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만져주는 인후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그의 어깨에 한참을 그렇게 기대어 있었다.







“이 정도면 됐네, 으쌰!”







인후는 벼리를 안고 그대로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의 행동에 무언가 말을 하려던 벼리는 따스한 물 온도에 그것도 잊어버리고, 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따스한 물 온도, 부드러운 인후의 손길.. 벼리는 이런 상황에 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고, 제대로 앉아있을 힘도 없어서 인후의 몸에 등을 기대었다.







“미안해, 많이 힘들지?”




“치이, 어제 그렇게 늑대처럼 굴던 남자랑 지금 이렇게 친절한 남자랑 동일 인물이신가요?”




“그럼, 동일 인물이지. 이렇게 색다른 모습을 많이 보여주니까 당신도 좋지?”




“정말 말이나 못하면 멋있기나 하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벼리는 인후의 행동에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항상 혼자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지일과 영일에게 익숙해지기까지도 많은 시간에 걸렸었다.

인후와의 관계도 처음부터 이렇게 익숙한 것은 아니었고 어제 이후로 더욱 많은 친밀감이 들었지만, 인후와의 친밀감은 그의 비서가 되고 단 두 달 만에 형성이 되었다.

두 달이라는 기간은 영일과 지일조차 그녀의 마음을 완벽히 열 수 없었던 짧은 기간이다. 인후에게 그녀만이 예외인 여자인 것처럼, 그는 처음부터 벼리에게 예외인 남자였던 것이다.






“인후씨.”




“응?”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벼리야.”






달콤한 그의 말에 벼리는 지금 이 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졸음이 밀려오는지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벼리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인후는 손으로 벼리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졸려?”




“자꾸 잠이 와요,”




“어서 씻고, 당신은 더 자.”




“이따 저녁 시간 맞춰 가려면 나갈 준비해야 하는데.”




“아직 시간 많아, 걱정 말고 더 자.”




“인후씨는 나 잘 동안 뭐 할 거예요?”




“회사에 전화도 해보고, 당신 나가기 전에 간단하게 먹을 것도 만들어 놓고, 은근히 바쁜데?”




“나 잘 때, 팔베개 해주면 안 돼요?”






벼리의 귀여운 질문에 인후는 대답을 않고, 그녀의 입술을 맛보았다.

어제 자신이 그녀의 생채기하나 없는 하얀 나신에 만들어 놓은 수많은 붉은 자국들을 보면서도, 간신히 욕정을 누르고 있던 인후는 벼리의 귀여운 투정에 결국 그녀의 입술을 탐한 것이다.

이미 시작한 이상, 끝나기 전까지 그녀를 놓을 생각이 없는 인후는 조금이라도 그녀를 빨리 재우기 위해, 어제 발견해 놓은 그녀의 민감한 성감대를 집중 공략하며 그녀의 몸이 자신처럼 달아오르길 기다렸다.






“하앙.. 인후씨!”






벼리는 그의 손길에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자신의 몸이 마치 ‘내 주인은 서인후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왠지 모를 배신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딱딱한 남성이 자신의 여성을 파고들자 벼리의 머릿속은 하얘지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어제와 오늘을 포함해 처음인 벼리에게는 무리가 갈 정도로 관계를 가진 두 사람, 벼리는 결국 넓은 욕조 속에서 그의 남성을 온 몸으로 느끼며, 절정의 순간이 지난 후, 바로 깊은 잠이 들었다.

그녀가 이기기 힘든 잠에 들기 전, 욕망이 가득하면서도 미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인후의 시선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 이제 놓아줄 수가 없다, 이제 당신 없이는 내가 살 수가 없어.”






그런 인후의 말을 끝으로 벼리는 잠이 들었고, 인후는 그녀 안에서 자신의 남성을 빼지 못하고, 한참을 움직였다.

잠에 들어서도 벼리는 약한 신음소리를 내뱉었고, 그런 그녀의 행동에 그는 더욱 식을 줄 모르는 자신의 남성을 탓했다. 하지만 그녀를 완전히 가질 때까지 그는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오늘.. 오늘 당신을 집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이렇게 날 초조하게 만드나봐.”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 후, 오늘은 벼리를 그녀의 집으로 보내야만 한다. 이제 막 서로에게 갈망을 느끼기 시작한 연인에게는 그건 지옥과 같은 고통이었다.

특히 남자인 인후의 경우에는 그 고통이 벼리보다 심한 것이고, 오늘 밤에 자신이 힘들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인후의 남성이 벼리의 여성을 끊임없이 파고드는 것이다.

잠이 든 그녀를 충분히 가지고도 아직 많이 모자랐지만, 그녀의 연악한 몸을 생각해 겨우 멈춘 인후는 침대에 벼리를 눕히고 그녀의 부탁대로 팔베개를 해주었다.






“벼리야.. 우리 빨리 결혼하자.”






벼리의 귓가에 살며시 사랑을 속삭인 인후는 이불을 꼼꼼히 덮어준 뒤, 잠든 그녀를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 o38












아늑한 레스토랑인 Moon, 이곳이 생기면서부터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는 지배인의 시선이 'sun'이라 쓰인 방에 머물렀다. 그 이유는 지금 sun에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들의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은영일, 지일, 은벼리, 이현주는 전혀 이상해보이지 않는 익숙한 만남이지만, 서인후라는 한 사람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게 되니 이상한 모임이 되어버렸다. 분위기라도 화기애애하면 괜찮을 텐데, 실제로 그들 사이에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차가운 정적만 흐르고 있다.






“이현주에요, 벼리와는 친언니 같은 사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아, 처음 뵙겠습니다. 서인후입니다. 벼리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자연스러운 분위기 조성을 위해 먼저 말을 건 현주는 인후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벼리’라는 말에 의아했다. 자신이 아는 벼리는 쉽게 남에게 약점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이다. 하지만 몇몇의 예외가 있고, 그 예외의 인물에 자신과 가족 외에 서인후라는 남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놀랍고도 흥미로웠다.






“오랜만이군, 자리가 불편한 것은 아닌가?”




“괜찮습니다, 은영일 회장님. 오히려 이렇게 사적인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네 말대로 이 자리는 사적인 자리이고, 나는 당신 회사 직원의 부모님으로 만나는 것이니 너무 격식 차리지 않아도 된다네.”




“네, 편안하게 있다 가겠습니다.”






영일과의 대화가 끝난 인후는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날카롭게 자신을 바라보는 지일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일을 할 때는 항상 부드러운 미소로 너무나 뻔뻔하게 행동하던 세계적인 모델인 지일이 왜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것인지 인후는 알 수가 없었다.






“지일씨가 벼리와 가족사이라는 것을 알고 많이 놀랐습니다.”




“오늘 왜 회사 안 나오셨습니까, 서인후 사장님?”




“..... 제가 보기에 지일씨는 그 이유를 다 알고 계시고 있는 것 같은데요.”




“사장님!”






갑작스러운 지일의 질문에 깜짝 놀란 인후이지만, 곧 이성을 찾고 지일이 자신을 그렇게 노려보았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당당한 인후의 대답에 그 옆에서 초조하게 아래만 바라보던 벼리가 정색을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은 지일과 인후, 두 사람에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당당한 이유가 뭡니까, 서인후 사장님?”




“사랑합니다.”






뜬금없는 인후의 말에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지일과 영일은 이미 예상했는지 담담한 모습이었고, 벼리는 타이밍이 좋지 않다고 느꼈는지 더욱 초조해했고, 현주는 보통 때의 침착하고 단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두 눈이 커져 인후를 바라보았다.






“은영일 회장님, 아니 아버님. 제가 따님을 많이 사랑합니다.”




“인후씨!”






벼리가 인후를 말리기 위해 그를 바라보았지만, 인후는 그런 벼리의 시선을 무시하고 계속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이 여자,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많이 아껴주고 싶습니다, 사랑해주고 싶습니다. 결혼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이, 인후씨! 아빠 방금 사장님이 한 말 못들은 걸로 해주세요.”




“너는 가만히 있어라.”




“아빠 사장님이..”




“벼리야.”






낮지만 단호한 영일의 부름에 결국 벼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결혼을 언급하는 인후를 새초롬하게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저 벼리를 잠깐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우리 딸, 누구에게 주어도 아깝지 않은 아이이네. 하지만 이 아이를 결혼시키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하네.”




“아버님.”




“지금 내 딸의 표정을 보니 아직 둘이서 합의 하에 한 일은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 맞습니다.”




“자네 마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네,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상의해 본 후에 이야기 하는 것도 늦지 않을 것 같아.”




“... 책임지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인후는 물러서야 할 때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사장이라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정도를 아는 것이다. 하지만 벼리에 관한 일에서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녀와의 결혼은 하루라도 앞당기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 딸을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




“... 완전하지는 않지만, 아픔이 많은 여자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강해보이지만 여린 사람이라서 항상 지켜줘야 하는 여자입니다.”




“알겠네, 우선 생각은 진지하게 해 볼 테니 자네도 우리 딸과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게. 이제 식사를 하도록 하지.”






.

.




그렇게 식사를 마친 그들은 Moon 자체가 워낙 고급 식당인지라 꽤나 이름 있는 사람들만 오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워낙 그들은 외모부터 시선을 끌기에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방을 나와 Moon 로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밖을 나왔다.






“형, 옆집누나 데려다주고 벼리랑 먼저 집에 가.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영일은 지일이 해야 할 일이 인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 느꼈지만, 지일이 직접 해결하기 원하기에 모른척했다.






“그래, 이따 보자. 서인후 사장도 다음에 보도록 하지.”




“네, 들어가십시오.”






인후의 인사를 받은 영일은 현주의 팔을 끌어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벼리가 인후에게 인사를 할 시간을 주기위한 영일의 배려였다.






“인후씨, 오늘 일어난 일 꿈이죠?”




“아니, 꿈 아니야. 난 당신 삼촌이랑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푹 쉬고 내일 이야기 하자, 잘 자.”




“인후씨도 잘 자요. 노땅도 빨리 들어와야 해.”






지일은 벼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그녀를 직접 영일의 차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벼리가 타자 시동을 걸고 출발한 영일의 차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지일은 그제야 인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 대 맞고 시작합니다, 서인후 사장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퍽’이라는 소리와 함께 지일의 힘이 실린 무거운 주먹이 인후의 얼굴을 때렸고, 인후는 그 힘 때문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오늘 벼리랑 같이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지일의 주먹으로 인후의 찢어진 입술 사이로 피가 조금씩 번진다. 인후는 양복 소매로 입술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지일을 당당히 바라보았다.






“나하고 우리 형한테 그 아이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야. 서인후 사장님, 당신이 우리보다 벼리를 더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해?”




“글쎄요, 두 분의 사랑이 많이 크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리고 제가 두 분의 사랑보다 뛰어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제 방식대로 벼리를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두 분과 제 사랑의 정도를 비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터진 입이라고 말은 잘 하는 군.”




“벼리를 사랑합니다. 자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외모를 보고 반한 것인가?”




“.. 저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니더군요. 은벼리라는 존재가 제게 소중할 뿐입니다. 왜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제가 그녀에게 친절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비단 함께한 시간이 길다거나, 저의 비서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벼리를 오래전부터 아끼고 소중히 생각한 것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벼리의 외모를 몰랐다 하더라도 사랑했을 거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예전부터 저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제가 못 느끼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흔들림 없이 단호한 인후의 말에 지일의 굳어있는 인상도 조금씩 이완되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지일의 얼굴에는 무언가 썩 내키지 않아하는 부분이 있었다.

사랑하는 조카가 결혼을 조만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언제나 자신과 영일의 품에서 커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여린 아이가 벌써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할 남자를 만났다는 것이 지일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서인후 사장님, 아마 당신은 나와 형을 따라오기까지 많은 시간을 걸릴 거야. 평생 따라오지 못 할지도 모르지, 벼리를 목숨보다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 말대로 당신은 스스로의 방식으로 벼리를 아낌없이 사랑해주도록 해. 만약 벼리가 조금이라도 아파한다면, 난 모든 것을 버리고라도 당신에게서 우리 벼리를 빼앗아 올 거야. 날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퉁명스럽게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은 하지만, 두 사람의 사이를 인정한다는 뜻이 담긴 지일의 말에 인후는 찢어진 입술이 아픈 줄도 모르고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반면 그런 인후의 감사인사를 받는 지일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

.




어둠이 둘러 싸여있는 반 지하, 쾌쾌한 지하 특유의 냄새가 없어지지 않은 좁은 집에는 험악한 인상의 남자와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야?”




“찾을 거야.”




“벌써 7년이야, 그년이 죽었을 수도 있어!”




“안 죽었어. 그년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야.”




“얼굴 알아볼 수 있어?”




“그년 눈동자 잊었어? 그리고 남자를 흥분시키는 그 향도 잊을 수 없어.”




“찾아서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건데?”






어느새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며 말하는 여자, 여자의 물음에 남자의 눈에는 욕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여자는 남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당한만큼 갚아줘야지, 이렇게 내가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이유가 뭔지 그년에게 똑똑히 가르쳐 줘야지.”






남자의 탐욕스러운 말투에 여자는 인상을 구기며 그를 외면했다. 마치 그 말을 듣게 된 순간부터 자신이 강제을 당하는 것 같은 끈적거리는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7년이면 포기할 만도 한데 포기할 줄 모르는 남자의 집착에 이미 질려버렸다. 그만큼 그 아이가 남자를 홀린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지만, 왠지 여자는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는 거친 남자의 행동에 오래 할 수 없었다. 그저 그 아이 생각에 흥분한 짐승 아래에서 신음소리를 흘리는 일에 집중해야만 했다.













※ o39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무슨 생각은, 그저 하루 빨리 결혼을 하고 싶었을 뿐이야.”




“사장님 어딘가에 얽매이는 것, 싫어하는 사람인 거 다 알아요. 내가 처음이라서 책임지려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시다면..”




“은벼리!”









벼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인후는 벼리의 자책과 비슷한 말에 결국 화가 났다. 자신이 여태껏 행동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진심을 잘 몰라줄 수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몰라줄 줄은 몰랐다.


인후는 자신의 부름에 약간 움츠려있는 벼리를 보고 화를 진정시키고, 그녀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









“벼리야.”




“...”




“은벼리.”




“...네.”




“나 정말 당신 사랑해, 당신이 옆에 없으면 불안할 정도로 지금 난 당신이라는 마약에 중독되어있어.”




“...”




“안 믿어줘도 괜찮아, 내가 지금부터 하나하나 당신을 향한 진심을 보여주면 되니까. 하지만 단 한 가지, 당신을 비하 하지 마. 당신이라는 여자, 나에게는 필수조건이나 마찬가지야.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내 앞에서 당당한 모습만 보여줬으면 좋겠어. 내가 말하는 당당한 모습은 강한 척 하라는 말이 아니야.
당신은 한 없이 약한 여자여도 돼, 내가 지켜줄 거니까. 하지만 자신 스스로가 나에게는 둘 도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은 좀 인식을 해줬으면 좋겠어.”







인후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벼리는 더욱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인후의 말에 담긴 진심은 둔한대로 둔한 그녀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미안해요, 인후씨.”




“괜찮아, 내가 여태까지 당신에게 보여 진 모습이 있으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 지금부터 조금씩 알아줘.”




“나도, 나도 인후씨 정말 많이 사랑해요.”







아이처럼 순수하기만 한 벼리의 직선적인 고백에 인후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어제 하루 동안, 대리 비서를 수행한 희나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인후와 벼리는 자신들만의 분위기에 푹 빠져있었다.







“어제 지일삼촌이랑은 무슨 이야기 했어요?”




“당신을 달라는 부탁을 드렸지, 나를 좀 마음에 안 들어 하시더라고.”




“삼촌이 좀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면이 있을 거예요, 그래도 당신이 좀 이해해 줘요. 어릴 적부터 아빠랑 삼촌이 나를 좀 과하게 보호하려는 면이 있었어요.”




“나라도 그랬을 거야, 이렇게 예쁜 딸을 어느 누가 쉽게 내놓겠어?”




“인후씨.”




“응?”




“어쩜 그런 말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글쎄, 이 멘트가 어디가 어때서?”




“빨리 인후씨 스스로 얼마나 자신이 느끼한지를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뭐야?”







짐짓 화를 내는 인후의 품을 빠르게 빠져나온 벼리는 인후에게 살짝 혀를 내밀고는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인후는 그런 벼리의 모습을 눈으로 쫓으면서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노땅, 오늘로 회사 오는 것도 끝이네?”




“왜, 서운해?”




“뭐, 시원 섭섭? 집에서 매일 지겹도록 보는 사람인데도 회사에서 볼 때는 색다른 모습을 지켜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그래? 그럼 아예 여기서 일을 할까?”




“노땅.”




“왜요, 이쁜이?”




“다 좋은데, 제발 오버만 하지 말아주세요.”




“오버? 그게 뭡니까, 유능하신 은벼리 비서님?”




“그런 단어 모르세요? 지일씨 같은 사람을 칭하는 말인데, 그리 좋은 말은 아니니 모르시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네요.”







지일은 자신의 말에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벼리의 볼을 사정없이 꼬집었다. 점심시간을 피한 시간인지라 회사 휴게실에 있는데도 회사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두 사람은 여유롭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으로 벼리의 회사를 방문하는 것인 지일은 약간은 아쉬운 감정에 인후의 양해를 구해서, 기획사로 가기 전에 벼리와의 시간을 잠시 가지고 있었다.







“벼리 선배님!”







휴게실에서 시간을 가지던 벼리와 지일은 뒤에서 들리는 곱고 낭랑한 목소리에 그 곳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희나가 총총 걸음으로 두 사람의 곁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벼리만 보고 다가오던 희나는, 곧 지일도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어색하게 웃으며 곁으로 다가왔다.







“어, 희나씨. 커피라도 마시려고?”




“아, 아니요. 선배님께 드릴 서류가 있어서요.
어제 특별한 업무사항은 없어서 제가 다 처리했는데, 그 결과 보고서를 따로 제가 보기 편하게 작성해 놓았는데 그걸 깜박하고 선배님 책상에 올려놓지 않아서 막 사장실로 가려던 참이었어요. 안녕하세요.”




“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희나는 서류를 벼리에게 전해주고는 그녀 옆에 앉아있는 지일에게 인사를 어색하게 건네주었다. 어제와 같은 무서운 기류는 느껴지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지일은 그녀에게는 무서운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어제 자신이 좀 무례했다고 느낀 지일은 희나에게 사과를 하면서 악수를 청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희나가 불편해하는 것 같은 태도에 손을 내리려 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머뭇거리던 희나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사이에 작고 하얀 희나의 손이 큰 지일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니에요, 제게 뭘 잘못 하신 것이 없는데요. 선배님, 보시고 이상한 것 있으면 말해주세요.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희나씨, 고마워. 내가 나중에 비싼 밥 살게.”




“그럼 저야 감사하죠.”







희나는 지일의 손에 감싸져 보이지 않는 자신의 손을 무례하지 않게 빼내며,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눈빛으로 지일에게 인사를 하고는 벼리에게 다정하게 웃으며 서류를 건네주고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일이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노땅, 왜 그래?”




“아니야, 이름이 희나라고?”




“송희나, 내가 아끼는 후배야.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참 순수해.”




“송희나..”




“그보다 아빠가 노땅 곧 해외로 나갈 거라던데, 맞아?”




“아, 다음 주부터 한 달 동안 해외 쇼 무대 원정이 있어. 너한테 말 한다는 것이 깜박했네.”




“다음 주?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니야?”




“별로 갑작스럽지는 않았어, 네가 네 일로 바쁘니까 내가 말 하는 시간을 계속 미룬 것뿐이야.”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럼 내가 이 것 보다 더 바빴으면, 아예 말도 안하고 떠나려고 했어?”




“또 왜 말이 그렇게 돼, 우리 벼리 화났어?”




“몰라, 이제부터 나도 노땅이 어디가든, 뭘 하든 상관 안할 거니까 노땅도 나한테 신경 꺼!”




“에이, 왜 그래. 미안해, 내가 말 안한 건 잘못했어. 다음부터는 스케줄 잡히면 내가 무조건 우리 벼리한테 제일 처음 알려줄게!”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벼리는, 지일의 부재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약간의 심술로 풀고 있었다.


영일도 있고 이제는 인후까지 있지만, 7년 동안 항상 자신의 가장 가까이에서 자신을 든든하게 지켜주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지일이었기에 그 불안감이 컸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도 성인이고, 더 이상 불안해 할 필요가 없기에 지일이 언제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일이 없는 한 달 동안 그의 빈 자리는 너무나 크겠지만, 그렇게 조금씩 떨어져 있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필요했다.







“정말이지?”




“그럼, 男兒一言 重千金! 우리 벼리 나 없이도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을 수 있지?”







지일도 벼리만큼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 아무것도 불안할 것이 없는데, 자신이 없는 한 달이라는 기간이 벼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불안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스케줄에 맞추어 그녀를 데려가고 싶었다. 아니, 불과 며칠 전만해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 인후의 확실한 다짐을 받고나서는 함부로 그런 결정을 할 수 없었기에 벼리를 놓고 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벼리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고개를 살짝 들어 자신을 바라보게 하였다. 그러자 그녀가 자연스럽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익숙한 서로의 향기에 두 사람은 마음 한편에 놓고 있던 불안감들을 조금씩 날려 보내고 있었다.







“씩씩하게 잘 있을게, 대신 돌아다니는 나라 수만큼 선물 사오기! 알겠지?”




“그래, 우리 벼리 이제 정말 다 컸네. 씩씩하게 있으면 내가 예쁜 선물 잔뜩 사올게.”




“약속!”







지일은 벼리를 바라보며, 평소보다 더 진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가 내민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속으로 기도했다. 정말 그녀가 자신이 없어도 이제는 아무런 불안감 없이 잘 살 수 있게 되기를.


물론 그렇게 된다면 서운한 것도 사실이지만, 자신의 품 안에서는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게 하고 싶고 실제로 그런 재력도 넘쳐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삶은 죽은 삶보다 못한 삶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지일은 그러지 않았다.







“노땅, 항상 고마워. 알지?”




“나야말로 고마워, 넌 존재 자체가 나와 형에게는 평생 동안 받고도 넘치는 행복이야.”




“나도 그래. 아빠랑 삼촌을 만난 것은 내 인생에 끝없는 축복이야.”




“선물 사오려면 돈 두둑하게 준비해야겠네?”




“아, 어디어디 나라 갔다 오는 건데?”




“우선 프랑스의 파리에서 시작해서, 독일의 베를린, 호주의 멜버른, 미국의 로스앤젤로스와 뉴욕, 일본의 도쿄, 중국의 상하이까지 갔다가 올 거야.”




“정말 원정 쇼 무대네?”




“그렇지.”




“좋겠다, 사진도 많이 찍어 와야 해!”




“알았어, 씩씩하게 잘 있을 거라고 했으니까 선물이랑 사진이랑 잔뜩 가지고 올게.”




“그건 꼭 사와, 그 영국 경찰 아저씨들 목각인형 같은 거!”




“알았습니다.”







금방 아이같은 모습으로 변한 벼리의 모습에 지일은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사진이나 광고 매체,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너무나 귀한 미소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미소는 오직 은벼리, 그녀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 o40









“역시 은벼리 비서님입니다.”




“지일의 광고로 홍보 효과가 있으리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렇게 크게 성공하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것밖에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다음 시리즈 향수 한정판에 대한 예약도 3일 만에 끝났습니다.”




“해외에서도 이렇게까지 빨리 팔리기는 힘든 것으로 아는데, 아마 시리즈 판매 형식이라 절판 된다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습니다.”








지금 이 곳, fascinated 간부 회의실에는 온통 벼리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간부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벼리를 칭찬하는 이유는 바로 벼리가 얼마 전 제안했던 한정판 시리즈 판매라는 획기적인 기획이 큰 성공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벼리 또한 이렇게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회사 사람들의 칭찬이 더욱 그녀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마치 회사에 신입사원이 상사에게 처음 칭찬받는 설렘과 동일했다.








“저 혼자였다면 이루어 질 수 없었을 기획입니다. 성공사례는 커녕, 그 어떤 곳에서도 보지 못 한 기획을, 저를 믿고 착실히 진행시켜주신 여러분 덕입니다.”








겸손한 벼리의 말에 간부들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능력의 뛰어남을 십분 발휘하며, 그 노력이 자신 혼자만의 것으로 돌리지 않는 사람, 진정한 리더십을 가진 자의 모습이었다.



벼리의 그런 자연스러운 리더십이, 여자인 벼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힘이 되어준 것이다.








“다들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긴 하지만, 이렇게 처음 스타트가 좋으니 다들 일 할 맛이 날거라 생각합니다.

그럼 회의가 끝난 시점부터 각자의 부서에서 정해진 일을 착실히 수행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광고부 팀장은 당분간도 공석인 것 잘 아시죠?”








인후의 말에 회사 간부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 전까지 있었던 김우재 광고 팀장의 갑작스러운 사퇴로 인해 많은 혼란이 있었지만, 그의 빈자리를 벼리가 그 누구보다 잘 채워주고 있었다.



아니, 김우재 팀장이 광고부 팀장으로 있었던 때보다 더욱 수월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갑작스러운 김우재 팀장의 사퇴가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시켰지만, 그 누구도 입 밖으로 직접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이번 기획은 은벼리씨가 아이디어를 제공한 일이니, 이번 일까지는 은벼리씨가 하는 것으로 하고, 나르시스 광고 안이 끝나면, 광고부 팀장을 뽑도록 하겠습니다. 각자 그때까지 광고부 팀장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을 생각해 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사장님, 모레 파리에서 오픈 기념식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직접 가십니까?”




“아, 이번에는 직접 가야 합니다. 큰 일 없으면, 내일 오후에 간부들 몇 명과 함께 프랑스로 일주일 간 갈 예정입니다.”




“그럼 나르시스 일은..”




“이번에는 그래서 은벼리씨가 한국에 남을 것입니다. 그렇게들 알고 한국에 남는 분들은 최대한으로 은벼리씨를 도와주세요.

무늬만이라고해도, 사장인 제가 있는 것이랑 없는 것이랑은 심리적인 부담감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그럼 이만 회의를 마치도록 하죠.”








인후는 그렇게 말을 마친 후, 하나 둘 자리를 떠나는 간부들을 바라보았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회의실에는 벼리와 인후만 앉아 있었다.








“나 없어도 잘 할 수 있지?”




“사장님, 저 어린 아이 아닙니다. 걱정 마세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말에 당당하게 대답하는 벼리의 모습에 인후는 걱정하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럼 은 비서가 아닌, 은벼리는? 은벼리도 괜찮은 건가?”




“... 은벼리는 아마 많이 쓸쓸할 것 같아요.”




“정말?”








벼리의 서운함이 묻어있는 말투에 인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되묻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언제나 강한 면만을 보여주려 하는 벼리를 잘 알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던진 질문에서 예상외의 수확을 얻은 인후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번에 삼촌도 한 달 동안 쇼 원정을 한다고 그랬어요. 당신도 그렇고, 삼촌도 그렇고 거의 떨어져 지내보지 않았던 두 사람이 한 번에 해외로 나간다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나 없는 틈을 타서 다른 남자 찾는 건 아니겠지?”




“인후씨! 아무튼 생각하는 건 그런 것 밖에 없죠?”




“그런 것이 뭔데?”








인후는 벼리의 반응이 너무 귀여워, 일부러 능글맞게 말을 이어가며, 점점 벼리에게 다가갔다. 벼리는 그런 그의 행동에 질려다는 듯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점점 감당하기 힘든 방향으로 변해 가는 것 같아요.”








벼리에게 바짝 다가간 인후는 가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고개를 그녀의 어깨에 묻었다.


사실 많이 불안했다. 그녀와 일하는 동안, 한 번도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떨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드는 단순한 불안감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인후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가 없는 동안 회사에서 그녀를 지켜줄 보디가드들을 고용했다.


회사 밖에서도 지켜주게 하고 싶지만, 그녀 본인이 원치 않았고, 그녀의 아버지인 은영일이 그녀를 잘 지켜줄 것이라 믿고 있기에 인후는 이렇게 하는 것으로 막연한 불안감을 떨쳐내고 있었다.








“가기 싫다.”




“나도 보내기 싫어요.”




“가지 말까?”




“이번에는 꼭 가기로 했잖아요.”




“그럼 당신도 같이 갈래?”




“인후씨, 난 지금 나르시스 광고랑 새로운 시리즈 완성시키는 것 봐야하는 입장이에요.”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왜 하필 지금 프랑스를 가야하는 거냐고, 당신이 일 끝날 때까지 오픈을 미룰걸 그랬어.”








예정된 회사의 행사를 며칠 미루는 것에는 상당한 액수가 깨지게 된다.


특히 지금 같은 외국 오픈 기념식 등은, 하루 미루는 것만으로도 몇 천에서 몇 억까지 깨질 수 있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일을 자신 때문에 미룰 생각을 했다는 인후의 말에 벼리는 가슴이 철렁했다.








“사장님 자꾸 이러시면, 저 회사 그만 다닐 거예요.”




“그럴래? 그건 정말 안 되는 일인데, 남자인 서인후 입장에서는 가장 바라는 일일지도.”








나름 협박이라고 생각하고 내뱉은 말인데, 약간 반기는 것 같은 인후의 대답에 벼리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 생각이 100% 남자인 그의 입장에서 한 말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김우재 같은 놈이 얼씬 못하도록 내일부터 두 명의 보디가드 들이 회사에서 당신 불편을 느끼지 않는 선에서 보호해 줄 거야.”




“알았어요, 나 정말 꼬마가 된 기분이에요. 회사에서는 인후씨가 주의사항이라고 말해준 것들을 외울 정도가 되었는데도 들었던 이야기 또 듣고, 집에서는 그런 역할을 인후씨 대신 삼촌이 지겹게 하고 있고..

외국 두 번만 나갔다가는 나 정말 무슨 갓난아기 되는 거 아니에요?”




“그냥 당신 일주일 간 보지 못할 생각하니까, 괜히 불안해.”




“잘 있을게요, 하루에 한 번씩 전화 한다면서요. 인후씨가 전화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받을게요.

인후씨가 한국 시간으로 여덟시만 되면 전화 한다고 했으니까, 그 시간에는 십분 전부터 핸드폰만 뚫어지게 바라볼게요. 혹시 내가 안 받으면, 그땐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니까 하던 일 다 미루고 한국 오는 거죠?”




“아니, 안 올 거야.”




“뭐에요, 안 올 거면, 왜 이렇게 잔소리는 많이 하는 거예요?”




“그런 일 생기면, 당신 잘 못 되기라도 하면, 나 살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일 안 생기도록 이렇게 잔소리 하는 거야. 당신은 나 없는 일주일 동안 아무 일도 없이 잘 지낼 거니까, 내가 갑자기 한국 올 일은 없을 거야.”








다짐하다시피 단호하게 말하는 인후. 그의 몸이 긴장되는 것을 느낀 벼리는 인후의 허리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그런 그녀의 작은 행동에 그는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알았어요, 전화도 잘 받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일도 잘 하고, 당신 생각도 많이 할게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해야 할 일 잘 마무리하고 돌아와요.”




“..벼리야.”




“왜요?”




“나 출장 같다오면 우리 근사한 곳에서 밥 먹자.”




“한국으로 돌아오면 인후씨 해 달라는 거 해줄 테니까, 일만 잘 하고 돌아와요.”




“정말이지? 정말 내가 해 달라는 거 해줄 거지?”




“네, 그 대신 하나만 들어줄 거예요!”








벼리의 말에 인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후는 프랑스에서 그녀를 위한 특별한 반지를 주문해서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와 떨어지기가 싫어서, 프로포즈를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모르는 벼리는 그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인후는 그녀를 두고, 그녀와 떨어져서 어딘가를 간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다. 한시라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기에 빨리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고, 그 자신도 그녀의 것이 되고 싶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결혼이라는 것을 자신의 인생에서 완벽히 배제 시키고 있었는데, 그녀의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은 그녀와 빨리 결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사랑해, 벼리야.”




“저도 사랑해요, 인후씨.”








이제 곧 그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냥 행복했다.


하지만, 이번 출장으로 그녀와 일주일간 떨어져 있어야 하는 불안감이 지워지지 않고, 인후의 마음 한 구석을 자리 잡고 있었다. 다만 지금 그는 행복감에 젖어 그 사실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매혹적인 신데렐라 [Fascinating Cinderella]











※ 매혹 魅惑 : 매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호림.













※ o41













“은팀장님, 오늘 다음 시리즈 향수 샘플이 나오는 날입니다.”




“네, 곧 출발 하도록 하죠. 희나씨!”








인후가 떠난 지도 벌써 삼일이 지났다. 그동안 벼리는 광고부 임시 팀장으로써, 광고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광고부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는 워낙 자주 부딪혔고, 특히 희나가 있는 부서이기에 벼리는 별 어려움 없이 이곳에 적응을 하고 있었다.



또한 광고부 사람들도 지금 Fascinate의 전설 중, 한 사람인 벼리가 자신의 부서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에 많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팀장님, 저 왔습니다.”







“오늘 나르시스 두 번째 시리즈 샘플이 나오는 날이라서 나 먼저 퇴근해야 할 것 같아요. 급한 일 있으면 전화하고, 바로 퇴근 할 테니까 대충 일 마무리 짓고, 퇴근들 하도록 조치좀 해줘요.”




“같이 동행하지 않아도 될까요?”








벼리만 혼자 먼 공장까지 간다는 것에 미안한 희나는 벼리에게 물었다. 그런 희나의 물음에 광고부 사람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벼리를 바라보았다.



지금 사장인 인후가 없는 삼일 동안 누구보다 많은 일을 하고,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벼리였다. 그런데 오늘은 향수 공장이 있는 먼 곳까지 혼자 보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런 광고부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있는 벼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는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차를 타고, 공장까지 세 시간 정도 걸려요. 왕복으로 하면 여섯 시간. 내일 일하는데 지장을 줄 충분한 시간이에요. 그런 일은 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여러분들은 나르시스 향수가 어떻게 하면 더 잘 선전이 될지 궁리 하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나 먼저 갈 테니, 다들 수고하세요.”




“팀장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내일 팀장님은 지각하셔도 아무도 닦달하지 않겠습니다!”




“힘드시면, 내일은 그냥 안 나오셔도 되요.”








발걸음을 옮기는 벼리의 뒤로 광고부 사람들이 벼리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사람들의 고마운 마음에 벼리는 기분이 좋아, 삼일 동안 쌓인 피로가 한 번에 풀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경계를 가지는 그녀는, 이번 광고부 팀장 대리 일로인해 좀 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본인 스스로가 느낄 정도로 달라진 자신의 변화에 벼리는 상당한 만족감이 들었다.








“그럼 오늘도 일을 잘 마무리 해볼까?”








회사를 빠져나와 차에 오른 벼리는 시동을 걸기 전에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우리 딸, 무슨 일이야?]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영일이었다.



회사에서 일하는 중에도 벼리의 전화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단 받고 보는 영일, 그의 딸 사랑은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기에 회사 사람들도 그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








“오늘 현주언니랑 밥 먹기로 했는데, 큰일 났어.”




[무슨 큰 일?]




“나 지금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올라오면 거의 8시가 넘어서나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아. 나 언니랑 오랜만에 약속한 거라서 언니 많이 들떠 있었단 말이야, 오늘 아빠가 대신 언니랑 저녁 먹으면 안 될까?”




[안 될 거야 없지, 그런데 왜 그렇게 늦어? 밤 길 위험한데.]




“나는 괜찮아, 그럼 내가 언니한테 전화해 놓을 테니까 아빠가 회사 끝나면 언니 가게로 바로 가는 거다?”




[알았어, 아직 밤에는 날씨 쌀쌀한데, 외투 입었지? 밤 길 많이 위험하니까 혼자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곧장 집으로 와야 한다!]




“잔소리는, 알겠습니다! 이따 집에서 봐요.”




[알았다, 우리 딸 이따 보자.]




“응!”








기분 좋게 영일과의 전화 통화를 마친 벼리는 바로 현주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자신의 사정을 말하고, 약속을 취소할 수는 없다고 부득부득 우겨서 영일과 꼭 저녁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렇게 모든 통화를 마친 그녀는, 자동차 시동을 걸고 조심스럽게 차를 움직였다.








“그럼 오늘은 둘이 사이가 좀 진전되지 않을까?”








벼리는 현주가 자신의 아빠인 영일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도 아는 사실을 영일을 알지 못했다.



벼리는 현주와의 약속을 깰 수 없기에 영일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 저녁을 계기로 두 사람의 사이가 좀 더 진전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나 같은 큰 딸이 있어서 언니가 많이 아깝긴 하지만, 언니가 아빠를 많이 좋아하니까 잘 됐으면 좋겠다. 그럼 이제 제대로 달려볼까?”









*




“오셨습니까!”




“네, 사장님 연락 받고 바로 달려왔죠. 샘플은 어디에?”








지방 공장에 도착한 벼리를 마중 나 온 사람은 공장 사장이었다. Fascinate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서기까지 이 공장은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금은 Fascinate가 성공했기에 이 공장에서도 많은 돈을 벌고 있지만, Fascinate가 아직 중소기업에 불과할 때는 매달 적자만 났었다.



하지만 이 공장 사장과 직원들이 인후와 벼리, Fascinate 식구들을 믿고 끝까지 함께 해주었기에 지금의 Fascinate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지금까지 그들은 신뢰라는 큰 틀 안에서 서로 협력하며, 마치 하나의 회사처럼 상부상조 하는 형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








“여기 있습니다.”




“와, 병이 예쁘네요?”




“이건 제 딸이 디자인학과를 다니는 중이라, 실습 과제로 제출한다고 나름대로 고민해서 만든 병입니다. 아버지 되는 사람이 향수 공장을 하니, 그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병 디자인을 만들었다며 제게 선물 하더라고요.”




“그렇게 소중한 병을 샘플용으로 담아 주신 거예요?”




“제겐 그만큼 이번 일이 소중합니다. 이 병도 아마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채, 관상용으로 보는 것보다는 자기 용도에 맞게 사용되는 것을 더 원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마치 오로라 빛깔처럼 오묘하면서도 여러 색을 담고 있는 작은 병은 꽃 모양을 형상화 한듯했다. 벼리는 이 병의 디자인을 문득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회사에 디자인 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처럼 시리즈로 나가게 되는 경우에는 병 디자인을 각각 다르게 해야 하기 때문에, 다들 힘에 부쳐 한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사장님, 이 병을 디자인한 따님을 뵐 수 있을까요?”




“제 딸을요? 지금 학교에 있을 텐데.. 대학생이라 저희와 떨어져서 서울에 친구와 자취를 하고 있습니다. 제 딸은 무슨 일로?”




“이 디자인을 저희 회사에서 계약을 하고 싶어서요, 사장님 따님 연락처 좀 가르쳐 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이죠, 제 딸이 아마 연락을 받으면 놀라서 기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장 사장의 농담에 벼리는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좋은 디자인을 발견한 그녀의 마음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아마 이 디자인을 조금만 보완하는 형식으로 한다면, 디자인 팀도 조금은 일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기쁘게 만들었다.



공장에서 나와 한적한 길목에서 차를 세운 벼리는 곧 병을 디자인 한 사람에게 연락을 했고, 내일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그리고 다시 회사 디자인 팀에 연락을 해서, 이런 사실을 전해주었다. 기뻐하는 디자인 팀의 목소리에 흡족해진 벼리는 전화를 끊고 다시 차를 출발시키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똑! 똑! 똑!’




벼리는 자신의 차 창문을 살짝 두드리는 낯선 사람의 등장에, 시동을 거는 것을 멈추고 차창 너머의 사람에게 시선을 두었다.

문을 조금 내려달라는 손동작에 벼리는 창문을 내려 사람을 바라보았다. 모자를 푹 눌러 쓴 중년의 남자였다.



차 창문을 내리자, 왠지 모를 싸한 느낌에 그녀는 닭살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시죠?”




“저.. 제 차 기름이 떨어졌는데, 죄송하지만 여분의 기름이 있으시면 좀 주실 수 있으신가 해서요.”




“아, 잠시 만요.”








벼리는 가끔 지방을 다니기 때문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항상 여분의 기름을 트렁크에 싣고 다녔다. 벼리는 벌써 7시가 넘은 시간이라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고는 트렁크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트렁크에 있으니, 제가 꺼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젊은 아가씨가 혼자 이런 시골에는 무슨 일로?”




“회사 일 때문에 공장에 잠시 들리던 길이에요.”








벼리는 기름통을 꺼내, 중년의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중년의 남성에게 거부감이 느껴졌지만, 단순히 자신이 아직 낯을 가리는 성격이고, 지금 이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어쩐 일로 이런 시골까지 오셨어요?”








벼리는 일부러 어색한 상황을 풀어버리고, 자신의 찜찜한 기분도 완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중년 남성에게 밝게 말을 걸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 온 건가?”




“네?”




“아가씨,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지?”




“아, 네..”








갑자기 중년 남성의 분위기가 변한 것 같은 기분에, 벼리는 순간 긴장했다. 중년 남성은 기름을 붓던 통을 바닥에 내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벼리는 이 상황이 이상하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익숙함은 결코 기분 좋은 익숙함이 아니었다.



이것은 떨치고 싶어도 떨쳐지지 않는 악몽이 다시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끔찍한 익숙함이었다. 남자는 모자를 벗었고, 잘 보이지 않았던 남자의 얼굴이 완벽하게 드러났다.








“그렇게 놓친 이후로 널 찾아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릴 줄 알았다면, 그 날 그렇게 널 놓치지는 않았을 거야.”




“어, 아저씨..”



뜬금없는 말, 하지만 두 사람은 이게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잘 알고 있었다. 벼리는 온 몸이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빨리 도망쳐야 한다는 신호가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두 눈에는 그 날의 악몽이 떠오르는 듯,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거 보이지? 평생 나의 노예로 살면서 이 빚은 톡톡히 받아 낼 거다!!”








자신의 팔을 잡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지도 못한 채, 이미 이성적인 사고는 다 날아간 표정으로 벼리의 두 눈은 울고 있었다.








“인후씨..”








무의식 적으로 그녀가 중얼거린 말은 서인후, 그였다. 남자는 이미 벼리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한 상태였기에 그녀의 중

얼거림은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차가 버려진 채, 벼리를 태운 허름한 차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지잉- 지잉-’




열려진 차 안에서 벼리의 핸드폰이 울린다. 지금 시간은 8시 3분, 발신자는 ‘사장님’ 바로 인후였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없기 때문에 핸드폰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o42









“회장님, 아가씨가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알겠네.”








영일은 서류를 보다가, 비서의 말에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누군가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기 위해 사무실 문만을 바라보았다.

비서가 나간 뒤, 잠시 후 들어오는 사람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젊음에는 같은 여성이 바라보더라도 놀랄 만 한 기품이 풍겨 나오는

내면이 진정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어릴 적부터 교육을 철저히 받아온 사람에게서만 풍기는 다가가기 힘든 기운이 그녀의 주변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걸어 들어오는 모습에는 조금의 군더더기 없이, 마치 우아한 나비가 꽃잎에 살짝 앉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서 와.”




“제가 혹시 방해를 한 건 아닌가요?”








목소리도 하이 톤이 아닌 조금은 저음이지만, 듣는 사람의 귀에 정확하게 전달하는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영일은 자신의 책상에서 2m 정도 떨어져서, 눈을 살짝 내려 깔고 조심스럽게 묻는 여자에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오히려 우리 딸이 당신과의 약속을 깨서 많이 미안해하더군, 아버지 되는 사람으로서 이 정도는 해야지.

그리고 당신이라면, 언제든지 이런 부탁 내 쪽에서 감사한 것이고.

나 같은 유부남이 사교계의 전설을 개인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황송한 일이지.”








영일의 말에 여자의 얼굴은 잠시 살짝 흐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사업상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영일은 눈치가 아주 빠른 사람이지만,

여자도 보통은 아닌 사람인지라 영일은 그 찰나의 변화를 알지 못했다.








“일에는 지장을 드리고 싶지 않아요, 끝나실 때까지 소파에 앉아 있겠어요.”




“그래, 당신이 그래야만 만나준다고 했으니, 그렇게 하도록 하지. 뭐 마실 것을 가져다줄까?”




“..녹차 한 잔만 가져다주세요.”








여자의 말에 영일은 고개를 끄덕이곤, 비서를 부르는 대신 자신이 직접 녹차를 가지러갔다.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은 여자는 회장실을 잠시 비우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조차 고혹적으로 보일 만큼 여자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녀는 이현주, 한국 패션계의 전설이자, 세계에서도 당당히 다른 유명 패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젊고 당찬 여자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은영일이라는 창조회장을 짝사랑하는 마음만은 소녀인 여성이다.








“당신 녹차에 우유 조금 넣는 거 좋아해서 그렇게 타 왔어.”




“감사해요, 이제 저는 신경 쓰시지 말고 하던 일, 마저 하세요.”








현주의 말에 영일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의자에 앉아 보던 서류에 눈을 돌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현주도 자신의 앞에 놓은 녹차를 들고 마셨다.

은영일은 창조회장이자 냉혹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인물,

하지만 자신의 회사 사람들과 가족들에게는 너무나 헌식적인 멋진 남자이다.

회사 사람들과 가족 이외에 그에게 대접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그 곳에 여자는 현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회장실에 자신이 보던 서류를 두고 그녀에게 차를 타주기 위해 사무실을 비우는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그녀를 믿는지 잘 알 수 있었다.

현주는 다시 한 모금 영일이 직접 만들어 준, 그녀만을 위한 녹차를 마셨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전혀 밝지 않았다.

얼핏 보면, 피곤에 지친 얼굴이었다.

현주는 녹차를 다 마시고는, 소파에 몸을 완전히 편안하게 기대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들어 영일을 바라보았다.

자세의 흐트러짐이 조금도 없이, 남자다운 강한 기운을 팍팍 풍기며, 일을 하는 그의 모습에

현주의 얼굴을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오늘 너무 지치는 일이 있었던 현주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눈이 감기고 있었다.






.

.




영일은 마지막 서류의 검토하고 결재 서명을 한 뒤, 빨리 일을 처리하기 위해 한 번도 들지 않았던 고개를 들었다.

시간은 그녀가 들어오고, 삼십분이 흘렀다.

시계를 바라본 뒤, 자신을 기다린 현주에게로 시선을 돌린 그는 미소를 지었다.

남 앞에서 흐트러짐이 거의 없는 그녀가 소파에 몸을 파묻히다시피 기댄 채, 잠이 든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보였다.

영일은 아직 저녁을 먹을 시간까지 시간이 여유로운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잠이 든 소파로 다가갔다.

앉은 채로 잠이 들어서 조금 불편해 보이는 그녀를 편안하게 눕혀주기 위해, 몸을 숙여 그녀에게 다가갔다.

혹시 그녀가 깰까 조심조심 그녀를 편안한 자세로 만들어 준 뒤, 자신의 코트로 그녀를 덮어 주었다.








“유독 벼리랑 이 사람만 작은 것 같군.”








주위에 자신을 유혹하는 수많은 여자들은 다 키가 큰 것에 반해, 벼리와 현주는 그녀들에 비해 많이 작았다.

하지만 둘 다 몸매는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았다.

현주의 얼굴에 흐른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 영일은 현주가 유독 외로움을 잘 느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깨어나면, 자신이 옆에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도록 그녀의 옆에서 오랜만에 책을 읽었다.

영일은 책에 집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현주의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그 곳에 시선을 두었다.

벨소리가 거슬렸는지, 조금 뒤척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영일은 그녀의 핸드폰을 꺼냈다.








“모르는 번호인데, 잘 못 걸린 건가?”








잠시 망설이던 영일은 그녀가 오늘 유독 피곤해 보이는 눈치였기에, 깨우기가 싫어 전화를 받았다.








[현주 씨, 저 김대호입니다. 오늘은 약속이 있으시다니 유감스럽습니다만, 내일은 혹시 괜찮으신가요?]




“지금 이현주 씨가 전화 받을 상황이 안 됩니다. 나중에 다시 걸어 주시죠.”




[..그쪽은 누구시죠?]




“사업상 아는 사이일 뿐입니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영일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가 그렇게 전화를 끊고 현주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그녀는 어느새 일어나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깼어? 당신 깼으면 그냥 바꿔 줄 걸.”




“..죄송한데, 제가 오늘 생각보다 많이 피곤해서요. 식사는 나중에 벼리 오면, 벼리랑 같이 할게요.”




“많이 피곤해? 아까도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








영일은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손을 현주의 얼굴에 가져갔다.

아니, 현주의 얼굴에 그의 손이 닿기 전에 현주가 몸을 틀어 버렸기에,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뭐 잘 못한 건가?”




“아, 죄송해요. 오늘 기분이 많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더 있다가는 당신한테 자꾸 짜증 부릴 것 같아요. 그만 가 볼게요.”








현주는 자신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영일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빠르게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팔을 잡는 그의 손 때문에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당신 오늘 좀 이상해, 정말 아픈 거 같으니까 내 차 타고 가.”




“그럴 정도는 아니에요, 호의는 감사하지만 제 차 제가 몰고 가고 싶어요.”




“안 돼, 이건 부탁이 아니야. 당신 정말 오늘 안 좋아 보여, 나도 오늘 일 다 끝났으니까 나가자.”








현주는 윗옷을 걸쳐 입는 영일의 모습을 보며, ‘당신이 있으면,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마음까지 그에게 다 고백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지금 그가 자신을 그나마 특별하게 생각해주는 이 상황조차 허락될 것 같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그녀는 오늘도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숨긴다.








“그럼 나갈까?”




“...네.”






.

.




“무슨 일 있는 건가,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지? 회사에서는 일찍 퇴근하고 공장을 같다는데..”








인후는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는 벼리가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의 불길한 예감이 맞았던 걸까?

인후는 그녀와 떨어져 있는 3일 동안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일주일간 잡혀있는 모든 일정을 단 3일 만에 끝마치고, 지금 한국행 비행기 안에 탑승 중이다.

이제 한 시간이면, 한국에 도착을 할 수 있는데, 정작 그가 걱정하는 대상인 벼리가 전화를 받지 않자,

그는 불안감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인후는 다시 핸드폰을 들고, 영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네가 웬일인가?]




“회장님, 벼리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요. 지금 회장님이랑 혹시 같이 있는 건가요?”




[벼리가 전화를 안 받아? 그럴 리가.. 그 아이 요즘은 온통 지일이랑 자네 전화 올 시간만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계속 전화를 안 받는데, 지금 회장님이랑 같이 없는 건가요?”




[난 지금 집에 방금 들어왔는데, 집에는 없는 것 같군.]




“뭔가 기분이 이상합니다. 3일 간 벼리가 많이 걱정이 돼서, 빠르게 일을 마치고 1시간이면 도착을 하는데..”




[.. 내가 찾아보도록 하지, 너무 걱정은 하지 말게.]




“제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이었으면 합니다.”




[나도 그러길 바라네. 지일에게는 내가 연락 하도록 하지.]








그렇게 영일과의 전화를 끊고, 인후는 비행기 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깜깜해진 밤하늘이 인후의 기분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벼리야..”








그녀에게 아무 일 없길 바라는 심정으로 그는 다시 회사와 공장에 전화를 걸어, 벼리를 찾아보라는 부탁을 했다.













※ o43











“지금 뭐라고 했어! 벼리가 사라졌다고?”








지일은 영일에게 걸려온 전화에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아직 쇼 원정이 한참이나 남아 있는데, 그 쇼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자신인지라 빠지지도 못하는데,

이 중요한 시기에 벼리가 사라졌다는 말은 지일에게는 지독한 고통이었다.

영일도 사실 그렇게 될 지일을 알기에 숨길 수만 있으면 숨기고 싶었지만,

나중에 지일이 혹 이 일을 알게 된다면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끊임없이 자책할 것을 알기에

그나마 덜 힘든 방향으로 선택을 한 것이다.








“지일, 준비 됐어요?”








이제 막 쇼 무대가 시작될 시간인지라, 이미 무대에 나갈 준비가 모두 된 상태이다.

지일은 스텝의 부름에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걸음을 옮겼다.

무대에 올라선 그의 모습에는 벼리에 대한 걱정은 없어 보였다. 그저 평소의 아름다운 모델 지일의 모습이었다.

그가 프로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무대였다. 프로는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대중 앞에 설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지일의 방식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발.. 제발 내가 갈 때까지, 그녀가 무사할 수 있게 해주세요.’






.

.




“으읍-!”








쾌쾌한 냄새가 벼리의 코를 찌른다. 7년 동안 너무 어렵게 잊은 냄새인데, 이런 상황 한 번에 다시 그때의 악몽이 떠오른다.

탈출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시 악몽으로 돌아왔다. 아니, 이게 현실이고, 그 7년이 아마 달콤한 꿈이었을지도..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내가 잡아 온 거야! 내가 7년 동안 쟤 하나만 얻길 원했어!”




“팔지 않으면, 우리가 죽어!”




“아니, 안 죽어. 난 다른 놈에게 못 줘!”




“당신 정말 미쳤어, 난 이 일에서 손 떼겠어!”








낯선 남녀의 목소리, 하지만 벼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다.

정말 잊었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인데, 이제 이 사람들과의 인연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이 두 사람은 7년 동안 자신만을 기다려 온 것이다. 탈출하고 싶은 마음도 그녀에겐 없었다.

이미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었다. 이대로 주위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것보다는,

그저 이렇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 손과 발은 뒤로 묶여있고, 입도 자유롭지 못했다. 자유로운 것이라고는 두 눈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눈은 벼리 스스로 차단시켜버렸다.

귀에 울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만으로도 무서워지는데, 실제로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네가 빠져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너도 7년 동안 나에게 협력한 거라고!”




“난 지금부터 손 떼겠어. 이제 정말 모르니까, 당신 알아서 하라고!”




“뭐라고?”




“난 당신처럼 명을 재촉하고 싶지는 않아.”




“쟤가 뭐가 대단하다고 난리야!”




“여태까지 조사한 당신이 더 잘 알잖아! 쟤 지금까지 누구 밑에 있었는지 알아? 창조 그룹이라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평생을 살아도 만날 수 없는 그런 사람 밑에서 자랐다고!”




“그래서 그러는 거야.”




“뭐?”




“그 창조그룹 회장이 저 아이를 정말 사랑했다고 생각해?”




“.. 무슨 소리야?”




“그런 대단한 사람들이 우리조차 출생이 어딘지 모르는 그런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했을 거라고 생각해?

저 아이 하나 잃어버렸다고 만약 그 회장이 자신의 재력을 사용한다면, 그 회사 이미지에 엄청난 피해가 가게 되겠지.

과연 저 아이가 그 사람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 확신할 수 있어?”




“만약 저 아이를 누군가가 구하러 온다면, 그건 저 아이의 가치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크다는 뜻이야.

저 아이를 구하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알았어, 그럼 이제 어쩔 거야?”




“우선은 이대로 두고, 적어도 일주일 넘게까지 기다려야 해. 그 뒤에 가질 거야.”




“하아.. 이거 정말 잘 하는 짓이야?”








여자는 불안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벼리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서 며칠 동안 벼리를 이대로 둬야하는 것도 자신이 정한 것이지만,

참을 수 없는 욕정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이 자리에서 당장 가져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남자는 빠르게 쾌쾌한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남자가 나간 뒤, 한참의 정적이 흐르고 여자는 벼리가 있는 곳으로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난.. 널 그냥 두고 싶었다.”




“....”




“어쩌면, 이번 일로 우리는 정말 큰 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말 저 남자가 어린 너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어.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그 사실을 알았다면..”








여자의 목소리는 촉촉하게 젖어갔다. 세월이 그녀를 변하게 한 것인지, 그녀는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지만 벼리의 귀에는 그녀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 벼리의 상태를 안 여자는, 한숨을 쉬고 창고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여자가 사라지자,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외부와는 단절된 고요함이 지하실을 가득 메웠다.








“이게 현실인 거야, 지난 7년이 내가 평생 얻을 수 있는 행복이었던 거야.

이제 그 행복한 추억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면 되는 거야, 그러다 죽으면.. 그러면 되는 거야. 난 행복한 삶을 산거야.”








벼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흐느꼈다. 그녀는 제발 아무도 이곳에 오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자신이 받은 것도 다 갚을 수 없는 것인데, 마지막까지 그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는 말했다, 벼리를 구하기 위해 올 사람은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안다, 자신이 아는 세 남자는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벼리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남자의 말대로 그들이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것이 두려웠다.

이대로 좋게 잊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은 채로 나쁜 여자로 기억 남는 것이 두려웠다.

염치없는 생각이지만, 그녀는 적어도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추억되고 싶었다.








“한 번만 볼 수 있으면..”








벼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그들을 만나고 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이 그들이 행복한 길이고, 자신이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라면 자신이 괴로워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딱 한번만 보고 싶었다.

새로운 생을 살게 해준, 하나뿐인 멋진 아빠인 영일을..

진정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가르쳐 준, 소중한 삼촌인 지일을..

사랑한다는 것이 사랑받는 것만큼 주요한 감정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사랑하는 인후를.. 한번만 보고 싶었다.








“아빠.. 삼촌.. 인후씨..”








그녀는 지금 그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악몽을 꾸는 것이 아니라,

실제 악몽에 처한 상태에서도 예전 같은 발작이 안 일어나는 것은 그들이 그녀를 강하게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공통된 틀 안에서 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했고,

그것이 그녀를 이렇게 강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그녀의 흐느낌을 멈추게 했고,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게 만들었다.








“고마워요.”








세 사람에게 언제나 해주고 싶었던 말, 항상 해줘도 또 해주고 싶었던 말.

그들이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벼리는 그렇게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

.




“당분간 제 자리는 비워두도록 하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사정이고, 이렇게 큰 회사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정말 무책임한 짓인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여러분들께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녀를 찾을 때까지 저는 이 자리로 돌아올 생각이 없습니다.

그녀를 못 찾는다는 전제는 없습니다. 저는 꼭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동안 저보다 뛰어난 인재가 나온다면, 언제든지 제 자리를 내어줄 수 있습니다.

이 회사는 제가 만든 회사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인후는 오랜만에 회사 모든 직원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했다. 회의라기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내놓겠다는 말이었다.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표라는 자리는 언제나 냉정을 잃지 않아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지금 벼리가 사라진 자신은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자리를 당분간 공석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은비서님, 꼭 찾아 주십시오.”




“은비서님 찾으신다면, 언제든지 이 자리는 사장님이 쓰실 수 있습니다.”








인후는 자신의 무책임한 말에 회사 사람들이 많이 힘들어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큰 오산이었다.

이것은 그만큼 그들이 벼리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회사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벼리를 꼭 찾아달라는 말을 하자, 인후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자신의 자리가 안전하다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렇게 벼리를 생각해 준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사장님, 선배님 꼭 찾아 주세요.”




“걱정 말아요, 송희나씨.”








희나의 질문에 인후는 그렇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한 다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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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게 무슨 소리야!”




“형 제발.. 나 벼리 없으면 죽는 것 알잖아. 정말 미안한데, 모든 스케줄 취소 좀 해줘.”




“너 정말..”




“상규형, 나 이러다가 미쳐버릴지도 몰라. 내가 나중에 다시 제대로 된 무대에 설게.”




“은지일, 이건 네 개 게스트로 서는 무대가 아니야! 지금 남은 6개의 쇼의 주인공은 다 너라고!”




“빨리 찾을게, 우리 벼리 혼자 울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내가 가야한단 말이야.

빨리 찾고 돌아올게, 쇼 무대는 다 설 수 있어. 그저 연습만 좀 빼달라는 거잖아.”




“은지일, 현지 스텝들 사이에 네 소문 돌 거라고! 지일, 건방져졌다고 소문 돈 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되면 너의 쇼를 고운 시선으로 볼 것 같아?”




“이대로 미치는 것보다는 괜찮잖아, 형 나 정말 이대로 계속 하다간 미쳐버릴 것 같아.”








Y기획사 사장 최상규는 처음 보는 지일의 모습에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전화가 와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쇼를 자신보다 소중히 생각하는 지일이

쇼를 취소해 달라는 소리에 그는 정말 놀랐다.

하지만 그 이유가 벼리의 실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자,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은지일이라는 남자에게 은벼리를 제외하고는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본인 스스로 말하고 다닐 정도로

그녀는 그에게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하아.. 나중에 벼리 찾으면, 너 노예계약서 써야 할지도 모른다.”




“쓸게, 평생 계약서 쓸게, 벼리를 제외한 일에 대한 항목들이면, 뭐든지 쓸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자, 결국 사장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은벼리가 걸려있는 일에는 지일이 어떤지는 수년간 지켜보면서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들어와라.”






.

.




“회장님, 여기 7년 전, 그 일과 관련된 일입니다.”




“고맙군, 혹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나?”




“별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그 날 밤 이후, 두 남녀 모두 원래 일하던 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서 정착했습니다.

아마도 아가씨와 관련된 일인 것 같습니다.”








영일은 벼리가 납치당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을 비서에게 조사시켰다.

비서의 말에 영일은 알았다고 말하고는 비서가 가져온 서류로 눈을 돌렸다.

처음 인후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 했었건만, 지금 벌써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사라진지 3일째이다.

평소의 깔끔한 영일의 모습은 오간데 없고, 턱에는 까끌거리는 수염이 자리 잡고 있었고,

단정했던 양복은 이미 헝클어져 있었으며, 얼굴은 피곤으로 가득했다.








“벼리야, 어디 있는 거니..”








금방이라도 ‘아빠’하며 그녀가 달려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삼일 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제 정말 그녀를 본격적으로 찾아야할 때가 온 것이다. 그렇게 결심한 그는 예전의 냉철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 o44











벼리가 없어진지, 벌써 오늘이 6일째다. 영일은 실마리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아서 애가 타고 있었다.

잔뜩 구겨진 인상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영일은,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런 회장실을 사전 이야기도 없이 벌컥 열고 들어온 사람은 비서실장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흥분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영일은 어떤 실마리가 잡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회장님, 드디어 그들이 있던 곳을 찾았습니다.”




“그게 어디지?”




“그들은 그 일이 있은 후, 바로 그들이 일하던 술집을 나와 새로운 술집으로 옮겨갔는데,

그 곳은 금요일마다 암암리에 노예경매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경매라..”




“그 곳에 돈을 주고 알아봤더니, 남자와 여자가 노예경매의 최상품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일하는 곳을 아가씨가 사라진 날과 같은 날 아침에 빠져나가,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고 합니다.”








노예경매라는 단어에 영일의 눈이 무섭게 변했다. 그리고 그의 주위 분위기는 점점 더 가라앉았다.

그런 영일의 모습은 그의 곁에서 10년 넘게 일한 비서실장도 감히 말을 걸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지금 출발하도록 하지, 거기서 뭔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사장님 지금은 아직 그곳이 문을 열지 않은 상태라..”




“확실히 그 인간들이 한 짓이야, 벼리가 또 그 고통을 겪고 있는데 지금 나보고 얌전히 있으라는 건가?”




“........”








영일의 외침에 비서실장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확실히 지금 영일의 상태는 최고조에 달해있기 때문에, 좀 더 냉정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딸을 생각하는지는, 가족 외에 그의 곁에 가장 가까이 있던 자신이 단연 으뜸이었다.

영일의 큰 사랑을 알면서 자신이 막을 힘은 없었다.

자신은 진짜 피를 나눈 딸이 있으면서도, 항상 영일의 사랑보다는 덜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일에 치여, 모임에 치여 그는 가족은 거의 뒷전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아니다, 가족이 언제나 최우선이었다. 그의 사랑을 보면서 스스로 후회를 하고,

가족에게 스스로 잘하기 위해 자신도 조금씩 변해갔다. 그래서 더더욱 막을 수 없었다.








“자네 마음에 안 든다면, 나 혼자서라도 가도록 하지.”




“회..”








막 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하는 영일의 모습을 보던 비서실장은,

등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영일을 부르려던 행동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현주가 어느새 서 있었다.

그녀의 등장에 비서실장은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회장실을 나갔다.








“당신,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




“실장님한테 벼리 찾았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회장님이 이렇게 생각 없이 행동하고 있을 것 같아서 왔어요.”




“생각 없이? 지금 내가 생각이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은 당신도 잘 알잖아.

더 이상 지금은 할 말도 없고, 할 시간도 없군. 나중에 이야기 하도록 하지.”








영일은 자신을 나무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현주의 눈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회장실을 벗어나려했다.

하지만 그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현주가 막고 있어서 나갈 수 없었다.

비키길 재촉하는 그의 눈길을 현주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담담히 바라보았다.








“은영일 회장님!”




“나중에 이야기 해.”



“지금 회장님에게는 여유로움이 필요해요. 여유로움에서 찾을 수 있는 회장님만의 날카로움이

지금 회장님에겐 전혀 보이질 않아요, 지금은 그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모습이라구요!”




“이현주! 내 딸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야, 내가 정신이 보통 때 같을 수 있을 것 같아?”




‘짜-악!’








자신의 말에도 여전히 분노와 흥분으로 휩싸인 영일을 보고, 현주는 그의 뺨을 세게 때렸다.

그녀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영일은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때린 건 미안해요.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이야기를 들을 생각을 안 해서 그랬어요.

은영일씨, 지금부터 내가하는 이야기 잘 들어요. 나도 이 이야기만하고 더 이상 당신 안 말릴 테니까.

지금 당신 벼리에게 전혀 도움 안 되는 행동만 하고 있어요.

당신이 그 곳을 지금 가서 들쑤신다면, 그 사람들 귀에는 안 들어갈 것 같아요?

7년이에요. 7년 동안 그들은 바보처럼 있었을 것 같아요?

그들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어이없는 짓을 벌였을 거예요.

자신 없었으면, 이런 일 시작도 안 했을 거라고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찾는 사람이 많은데도 실마리조차 잘 나오지 않는 거잖아요.

지금 당장 벼리 구하러 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아요, 다만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하잖아요.

지금은 일단 비서실장님에게 부탁해서, 돈을 얼마를 줘서라도 그 곳 사람들을 많이 매수를 해서,

좀 더 확실한 정보를 얻어오는 것이 중요하다고요. 그들도 7년 동안 그곳에 정착하면서 친해진 무리들이 있을 거예요,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런 진짜 정보를 가진 사람들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고요!”








냉정하고도 명확한 현주의 말에 영일은 좀 진정되어가는 자신을 느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당연히 먼저 생각했을 것들을, 지금은 타인을 통해 듣고 있었다.

그만큼 그에게 여유가 없었다는 뜻을 것이다.

영일은 자신의 반 정도 되는 체구로, 감정이 절정에 달한 자신을 단숨에 제압한 현주를 바라보았다.

여린 여자이지만, 많이 강한 여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냉철하게 판단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차가운 여자 같으면서도,

자신의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 한 없이 열정적인 여자이다.

벼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아이처럼 순수한 여자이지만, 쇼 무대를 가질 때는 누구보다 무서운 여자이다.

영일은 새삼 자신과 벼리, 지일의 곁에 현주라는 여자가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미안, 당신 힘들게 해서. 나 원래 은영일로 돌아왔어, 당신 덕분에.”








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이미 칼자루는 자신들에게 넘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영일은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제지해준 현주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영일의 모습에 현주는 안도하고 있었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영일이 자신의 말을 듣고도 간다고 한다면 말릴 방법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벼리에 대한 사랑이 끔찍한 남자이기 때문에, 현주는 이 방법이 성공할 확률은 50%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의 바람대로 일이 좋은 쪽으로 되어서 현주는 다행스러웠다.








“다행이다.”



“당신에게 화를 내서 미안, 벼리 찾으면 내가 당신 근사한 곳에서 밥 한번 살게.”




“음.. 그것보단 내 소원 하나만 들어줘요.”




“소원? 그러지 뭐.”








현주는 비서실장을 찾으러 회장실을 나가는 영일의 뒤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떤 소원을 들어달라고 말할지도 모르면서, 그는 흔쾌히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녀의 요구로 인해, 나중에 두 사람이 어떻게 될지는, 당사자인 본인들도 알 수 없었다.











※ o45











“서인후, 형한테 연락이 왔다.”




“회장님께서요? 혹시 벼리를 찾은 건가요?”








지일은 인후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왜 영일이 이 촉박한 시간에 자신과 인후를 찾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은영일은 절대 시간낭비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일은 영일의 일방적인 연락에도, 묵묵히 벼리를 찾는 것을 멈추고 그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








“저는 여기서..”




“그건 안 돼, 형이 우리 둘 다 불렀어. 무슨 확실한 증거가 잡혔기 때문일 거야,

여기서 우리끼리 찾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격이야. 우선 형을 만나서 왜 불렀는지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일의 논리적인 말에 인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후는 벼리를 찾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애가 탔다. 하지만 자신보다 지일이 더 애가 타는 것은 분명했다.

가족이라는 틀은 깰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니까, 인후는 이번 사건으로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벼리를 이제는 자신의 틀에 두고 말 것이라고.








“벼리는 괜찮을 거다, 너무 걱정 마.

별로 내키는 건 아니지만, 우리 벼리 확실히 너를 만나고부터 많이 강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




“항상 많이 걱정이 되던 아이가, 너를 만나고부터 내면으로도 점점 강해지는 모습이 보였어.

처음에는 그게 나와 형이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이였는데 그걸 네게 뺏긴 것 같아서,

어린아이처럼 나는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참 고마울 뿐이야, 우리 벼리 지금 많이 힘들지만, 아마 강하게 버티고 있을 거니까.

이제는 자기가 진정 울 수 있는 품을 찾았으니까, 그 아이는 이제 아무데서나 울지 않을 거야.”




“........”




“서인후, 바람둥이로 유명한 남자였지, 하지만 그 바람둥이라는 수식어가 남들과는 달리 아주 깨끗한 바람둥이라서

내가 널 우리 벼리 짝으로 인정 한 것이야. 아니었으면 넌 나보다 우리 형한테 먼저 퇴짜를 맞았을 거니까.”




“감사합니다. 벼리 꼭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당연하지. 우리 벼리는 형과 나에게 정말 소중한 보물이야, 세상에 절대 둘은 있을 수 없는 보물..

그 보물을 아무한테나 주진 않는다고, 우리가 품기에는 너무 소중한 것이라 네게 맡기는 것이야.

항상 그 보물이 완전 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말길 바란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 보물은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와 있을 것이니까.”








함부로 품을 수조차 없는 너무도 소중한 보물. 지일의 말에서 인후는 정말 은벼리라는 한 사람이

은영일과 지일에게 얼마나 크고 소중하며, 절대적인 존재인가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인후에게도 은벼리는 소중한 보물이었다. 하지만 지일과 영일처럼 품을 수조차 없는 보물이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오로지 그만 품을 수 있는 보물이었다.

영일의 회사로 향하며 지일의 말을 듣고 있는 이 순간, 그는 벼리가 더욱 간절해졌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찾아서 아무데도 갈 수 없도록 끌어안고 싶었다.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면 그의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 그는 확신했다, 그녀는 반드시 무사히 자신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인후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



“결국 아무도 오지 않는 건가? 넌 지난 7년간 행복한 나와는 달리 좋은 사람을 만나 생활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니?”








여자의 질문에 벼리는 그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벼리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에는 어떤 애틋함이 담겨 있었지만, 벼리는 그런 그녀를 알지 못했다.

벼리를 바라보는 여자는 7년 전과는 달리,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그녀는 한때는 유명한 재벌이나 정치가에게만 몸을 내어주는 여자였다.

지금도 자신의 나이 사람들에 비하여 외모에서나 몸매에서나 월등히 앞섰지만,

그녀에게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네가 지금 이 말을 듣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난 말이다, 널 사랑했었어.

다만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나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일부러 너에게 더욱 차갑게만 대했지..

그것이 어린 너에게 큰 상처가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어쩔 수 없었어, 나는 더러운 여자니까.

난 네가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너무나 안심했지. 그 남자가 너에게까지 욕정을 느끼는 줄은 몰랐으니까..

너만은 행복하길 바랐는데.. 그때 이후로 넌 행복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왜 또 이렇게 우리는 나쁜 인연으로 만나게 되는 거니.”








여자의 물기어린 고백에 벼리는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둠이었지만, 며칠 사이에 익숙해져버린 벼리는 여자가 있는 곳을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여자는 벼리에게서 등을 돌려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그런 여자의 모습을 보는 벼리의 눈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나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하지만 이렇게 만나고보니, 자신의 마음이 그게 아니라는 것을 벼리는 알았다. 사실은 다시 만나보고 싶었다.

지일과 영일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해하면서, 가끔씩 그때 그 여자..

자신이 한때 새엄마라고 불렀던 여자는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자신의 예상과 너무나 다른 여자의 모습에 벼리는 통쾌한 느낌보다는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벼리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이 이 여자가 나름대로 행복한 생활을 하길 원했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사실 엄했지만, 가끔 노래를 좋아하는 벼리를 위해 밤무대에서 꽤나 인기 있었던 그녀는 벼리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고,

맛있는 것과 예쁜 것도 사주던 여자였다.

남자의 견딜 수 없는 그런 행동만 아니었다면, 벼리는 아마 그 곳을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린 언제부터 이렇게 만나면 괴로운 일만 생기는 관계가 된 것일까?

아마도 내가 널 보육원에서 데려온 그 날부터 잘못 시작된 것이겠지..”








어릴 때는 그렇게 무서웠던 여자가, 이제 보니 한 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벼리는 자책하는 그녀가 괜히 안쓰럽게 느껴졌다.

사실 그녀는 나름대로 벼리를 생각해서 그녀가 이 길로 뛰어드는 것이 싫어 점점 차갑게 대한 것이다.

처음에는 정말, 크면 자신과 같은 여자로 만들기 위해서 데리고 왔다.

어릴 때부터, 아름다운 외모로 보육원 친구들조차 어려워한다는 보육원 원장 선생님의 말에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해서 데리고 왔다.

하지만 그녀도 여자는 여자였는지,

새엄마라며 졸졸 따라다니는 꼬마아이를 보면서 자신이 인간답지 못한 일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후 그녀는 남자의 눈을 피해 그녀를 다른 곳으로 보낼 방법을 찾았지만,

자신보다 한가한 남자의 시야에서 벼리를 숨길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그녀는 더욱 괴로워졌고, 자신을 점점 더 따르는 벼리에게 더욱 차갑게 대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벼리는 더욱 아름답게 변해갔고, 남자는 벼리를 성의 도구로 바라본 것이다.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까지 널 찾으러 오지 않는다면, 넌 이제 정말 나와 같아지는 거야, 내가 제일 바라지 않았던 일이 결국 오고 만 거야.”




“.......”




“지금이라도 누가 널 데리고 가줬으면 좋겠다. 넌 나와 같은 인생을 제발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창고에 울려 퍼지는 그녀의 독백은 진실 된 것이었다. 그녀는 이런 생활에 너무 찌들어서 벼리를 탈출 시켜줄 수도 없었다.

몸을 팔았어도 자존심을 팔 수 없어서 약물에는 손을 대지 않았던 그녀는, 야만인 같은 남자에 의해

이미 몇 년 전부터 마약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마약에 찌든 여자에게 남자의 말은 이미 거역할 수 없는 ‘신’적인 것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제발 누가 벼리를 데리고 가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종교도 믿지 않는 그녀는 그렇게 벼리를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난.. 그렇게 불행한 아이는 아니었네요.”








따스함이 담긴 벼리의 목소리에, 여자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벼리를 바라보았다.

벼리는 목소리처럼 따스한 눈길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벼리의 모습에 여자는 한 없이 가슴이 먹먹해져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가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난 정말 행복한 7년을 보냈어요, 7년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했어요.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었어요, 7년 동안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에 난 너무 행복해요.

그 행복으로 난 평생을 살아갈 수 있어요.”




“흐윽.. 내가.. 내가 널..”




“자책하지 마세요, 전 예전의 당신이 좋아요. 이렇게 약해진 당신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요.”








벼리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렇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다 말라갈 때, 어두운 창고의 문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면서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빛 한줌 없던 창고 안으로 많은 양의 빛이 들어왔고,

적응이 되지 않는 여자와 벼리는 그 환한 빛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이제 이 행복감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거야, 몸은 더러워져도 마음은 은벼리로 그렇게 남는 거야.’




벼리는 밝은 빛에 눈을 뜨지 못하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서인후를, 은영일을, 은지일을 이제 영원히 가슴 속에 담아두고

혼자만 꺼내볼 수 있는 추억으로 만든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




“네가 아는 것은 그것이 전부인가?”




“아, 정말 더 이상은 저도 모른다고요.”








영일의 비서실장은 아직 숨기는 것이 있는 것 같은 남자의 어색한 말에 자신의 주머니에서 수표 뭉치를 꺼냈다.

그러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을 것 같던 남자의 눈빛이 탐욕으로 가득 찼다.

그런 모습을 보는 비서실장의 눈에는 허탈함이 담겨있었다.








“이래도 더 이상 말 할 것이 없는가?”




“사실.. 그 남자는 저희 가게에서 알아주는 줄이에요.”




“줄?”




“꽤 반반한 여자애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입니다.

제가 들어오기 전보다 훨씬 전에 들어온 그가 7년 동안 데리고 온 여자애들이

지금 우리 가게의 매출을 전부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장님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남자입니다.”




“지금 어디있지?”




“그건.. 저도 잘 모르죠.”




“이게 가지고 싶지 않은 것 같군.”








비서실장이 수표 뭉치를 좌우로 흔들자, 남자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고 그걸 놓칠 비서실장이 아니었다.








“지금 어디 있어?”




“그가 가게에 안 나올 때 자주 가는 곳이 있긴 한데..”




“거기가 어디지?”






-




“형, 벼리가 어디 있는지 알았데?”








지일과 인후는 영일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사무실에서 비서실장의 연락만을 애가 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영일의 사무실로 비서실장의 전화가 걸려왔고, 지금 막 영일은 전화를 끊었다.








“.. 가자.”








영일의 말에 지일과 인후의 얼굴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하지만 영일의 얼굴은 그들과는 달리 어둡기만 했다.

그리고 그 세 사람과 같이 있던 현주는 그런 영일의 얼굴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람처럼 어딘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무실을 나가는 지일과 인후와는 달리, 영일은 아직 사무실에서 떠나질 못했다.








“왜 그러는 거세요?”




“.. 불안해서.”




“뭐가요?”




“.. 그 때와 같이 우리 벼리가 아파할까봐 겁이 나.”








강하기만 한, 은영일이 한 없이 약해져 있었다. 현주는 그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자신이 아닌 벼리라는 것이

내심 부럽기도 했지만, 그의 약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만족스러웠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틀 안에 그녀가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현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영일의 넥타이를 당겼다.

그러자 등이 굽어져 그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과 가까워졌다. 현주는 영일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꾸 약한 소리만 할래요? 우리 벼리 당신 기다리다가 목 빠지겠어요!

어서 가서 벼리 안아줘야죠, 지금 우리 벼리 7년 전과 같이 보면 안돼요, 정말 사랑하는 남자까지 생겼잖아요.

벼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강해졌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남자답지 못하게 걱정만 하고 있지 말고, 어서 가서 벼리한테 ‘아빠 왔다’라고 외치면서 꼭 끌어안아 줘요.”




“.. 응, 고마워. 요즘 늙어서 그런지 자꾸 약한 소리만 하게 된다. 늦었는데, 내 차 타고 집에 들어 가.”




“알았어요, 어서 가 봐요. 나 우리 벼리 내일 볼 수 있는 거죠?”








현주의 물음에 영일은 자신의 차키를 현주의 손에 쥐어주고, 자신에 비해 너무나 작고 여린 그녀의 몸을 꼭 끌어 안아주었다.








“응, 당신한테 약속할게. 정말 고마워.”








영일은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현주의 눈빛은 말 할 수 없이 복잡해보였다. 그가 나간 뒤,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네, 이현주입니다.”








잠시 핸드폰으로 들려오는 소리에만 집중한 그녀의 눈은 심하게 탁해지고 있었다.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알게 되었을 때의 눈빛이었다.










“알겠어요, 아버지. 그러니 이만 끊어주세요.”








차갑게 전화를 끊은 그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녀의 눈은 닫히지 않은 사무실 문 너머, 영일이 사라진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 o46











여자는 남자의 탐욕으로 가득 찬 눈을 본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자의 눈은 벼리를 바라보았고, 벼리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정면만을 담담히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점점 벼리에게로 다가갔고, 여자는 차마 그 모습을 바라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넌 나가.”




“.. 꼭 이래야 하는 거야?”




“그런 소리 하려고 남았던 거야? 싫은 소리 듣기 전에 알아서 나가.”




“.. 나중에 벌 받을 거야.”




“쓸데없는 소리 집어 치워! 이 상처가 뭔지 알아?”








남자는 자신의 윗옷을 벗어 여자에게 보여주었다. 왼쪽 가슴, 심장과 가까운 곳에 칼자국으로 보이는 상처가 있었다.

그것은 7년 전 벼리에게는 필사의 탈출을 한 흔적이었고, 남자에게는 집착의 원인을 제공한 상처였다.

여자는 남자가 그 상처를 보인다는 것이 이미 자제심을 잃은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 당신 정말 인간이길 포기한 거야?”




“그런 건 태어날 때부터 없었어,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나가!”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는 남자의 말투에, 여자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이끌고 창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여자의 시선은 벼리에게 머물렀다.

그렇게 여자가 밖으로 나가고 남자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벼리에게 다가갔다.

남자의 접근에도 벼리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감정 없는 인형처럼 앉아있었다.








“왜 이렇게 얌전 하실까, 이제 현실을 잘 직시 한 건가?”




“........”




“나와는 말도 섞기 싫다는 건가? 이거 보이지? 네가 7년 전에 내 몸에 만든 상처.”








소름이 끼치도록 남자의 말투는 음산했다. 그런 말투에도 벼리는 동요하지 않았다.

남자가 다가와서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순간에도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렇게 도도한척 있어도 너 역시 우리랑 같은 부류야, 절대 다른 부류의 사람이랑은 섞일 수 없다고.

이번 일로 너도 그 사실을 잘 느꼈겠지? 네가 이곳에 온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잖아?”








남자는 일부러 벼리의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말로, 행동으로 그녀를 자극했다.

하지만 여전히 인형처럼 아무 반응 없는 벼리의 모습을 보자, 남자는 차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이제부터 확인해 보자고, 과연 마지막까지 네가 그런 표정으로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








남자의 관심은 더 이상 벼리의 표정에 있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벼리의 몸에 쏠렸다.

찌든 생활에 물든 남자의 손이 거칠게 벼리의 옷을 찢었다. 남자의 몇 번의 행동으로 벼리는 어느새 속옷만 남아 있었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매끄러운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벼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큰 벌레가 온 몸을 정령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인후가 만질 때는 온 몸이 그를 향해 있고, 그의 손짓 하나에도 기쁨에 충만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소름이 끼치고, 두려움만 가득할 뿐이다.

거부하려해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기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지만,

그녀는 이대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는 남자는 무반응인 벼리의 태도에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자는 관계를 가질 때, 저항하고 반항하는 여자의 태도에 더 흥분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남자가 원한 것은 7년 전과 같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벼리의 모습이었다.

몸을 원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렇게 나무토막 같은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7년 전과 독한 것은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군, 이러면 내가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나보지?

이제부터 천천히 내가 널 길들여 줄 거야.”








남자는 벼리의 가슴을 잡고, 거칠게 만졌다.

전혀 여자를 생각하지 않는 배려 없는 그의 행동에, 벼리의 얼굴에도 고통의 빛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만족한 남자는 더욱 세게 벼리의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한 쪽 가슴을 만지던 손이 이제는 양쪽 가슴을 다 만졌고,

어느새 벼리의 몸은 차가운 바닥과 남자의 사이에서 편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 조금씩 느껴지나 보지? 어때, 이것도 느껴져?”








남자는 흥분된 자신의 몸을 벼리의 몸에 밀착시켰다. 그와 동시에 참고 있던 벼리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갔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남자의 몸을 뒤로 밀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남자는 만족한 듯,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진작 이랬어야지.”








남자는 벼리를 만지던 손을 떼어내어, 자신의 바지를 벗는 일에 열중했다.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보던 벼리는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느새 바지를 벗은 남자는 그녀의 턱을 잡아, 자신의 얼굴 가까이로 당겼다.








“이제 실감이 나는 건가? 지금부터 시작인데, 벌써 눈물이라니. 오늘 밤이 아주 짧게 느껴지겠는 걸?”








남자는 벼리의 속옷을 뜯어내다시피 벗기고, 그녀의 맨 살을 본격적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벼리는 인후 외에는 누구에게도 허락한 적 없는 자신의 몸을, 누군가가 만진다는 것이 너무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남자가 만지는 모든 부분을 다 도려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더 싫었다.

남자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고, 벼리는 온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그런 저항은 남자에게 통하지 않았다.

남자는 거칠게 벼리의 두 다리를 벌렸다.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넌 모르겠지? 지금부터 천천히 느껴봐,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남자의 손이 벼리의 매끄러운 두 다리를 만졌다. 그리고 그의 손이 점점 벼리조차 모르는 그 곳으로 다가갔다.




‘쿵-!’




벼리의 은밀한 곳으로 남자의 손이 도달하려는 순간, 창고 밖으로 둔탁한 소음이 들렸고, 남자의 손은 순간 멈췄다.








“뭐야, 거기 누구야!”








남자의 소리에도 창고 밖은 그저 조용할 뿐이다.

순간 잠시 긴장했던 남자는 별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다시 벼리의 몸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때, 창고의 문이 열렸다.








“뭐야!”








남자는 여자가 들어오는 거라는 생각에 화를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누, 누구야!”








남자는 지금 이 상황이 많이 당황스러운 듯,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런 남자의 말에 벼리는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남자를 바라본 벼리는 그 남자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으로 자신의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인후씨...”








그 곳에는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어두운 표정의 인후가 있었다.

남자를 지나, 어느새 벼리의 곁으로 다가온 인후는, 그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벼리에게 입혀주었다.

하나하나 꼼꼼히 단추를 채우는 그의 손은 참기 힘든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참기 힘든 분노를 참으며, 그녀에게 가장 먼저 달려와 주었다.








“미안해, 벼리야. 내가 많이 늦었지?”




“인후씨..”




“많이 놀랐지? 내가 다 잘못했어. 출장을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불안했으면 가지 않았어야 했는데..”








벼리는 자책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는 그런 벼리의 손을 잡아, 양손 바닥에 입맞춤을 해주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하지만 아주 세게 안아주었다.

벼리는 익숙한 인후의 향기와 온도에 잔뜩 긴장되어 있던 몸이 한 순간에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점점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 당신이 울 곳은 내 품 안이잖아.”








다정한 그의 말, 따스한 그의 품, 그리웠던 그의 손길에 벼리는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런 벼리의 모습에 인후는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영일과 지일이 7년 전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후는 벼리를 안아 들고, 그녀와 지긋지긋한 인연으로 얽힌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새 지일의 발 아래,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우리 벼리, 괜찮은 거지?”




“네.”








지일은 인후의 단호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발로 쓰러져있는 남자의 목을 눌렀다.

조금 후, 숨을 쉴 수 없어 하얗게 질린 남자의 모습에도 지일은 그저 웃고 있었다.








“괴로워? 우리 벼리는 지금 跏릿?훨씬 괴로웠어.

7년이라는 시간동안 벗어나지 못하는 악몽 속에 갇혀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증오했었어.

네가 그 기분을 알아? 모르겠지, 인간이 아닌 짐승이니까.”




“끄윽!”




“이대로 숨이 끊어질 때까지 있어볼까? 한 10초만 더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정말 그럴 것 같은 지일의 말에, 남자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지일의 발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은 무의미한 짓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죽이고 싶은데, 우선은 살려둔다. 하지만 사는 게 죽는 것보다 괴롭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도록 하지.”








지일이 발을 떼자 남자는 미친 듯이 잔기침을 하며, 거칠게 호흡을 했다.

그런 남자의 모습을 지일은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지일은 자신의 뒤에 있는 영일의 경호원들에게 손짓을 하였고, 남자는 그들의 손에 잡혀 밖으로 끌려 나갔다.

대충 상황이 정리된 지일은 다시 벼리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지일의 눈에는 아빠인 영일의 품에서 환한 미소를 띠고 있는 벼리가 보였다.













※ o47











“노땅, 나 정말 괜찮다고 했지?”




“이제 네가 내 조카라는 사실 공공연히 아는 사실인데, 삼촌이 이 정도도 못해?”




“나 정말 괜찮은데..”








그 일이 있은 후, 벌써 일주일이 훌쩍 넘었다. 지금 이 곳은 벼리가 일하는 Fascinating회사이고,

아직 광고 팀 쪽 일이 완벽히 마무리 안 된 벼리는 아직 광고부에 남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인후의 곁에서 일할 때와는 달리, 사람들과 많이 부딪히게 된다.

예전의 은벼리였다면 누구보다 힘들어했을 일이지만, 지금은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의 즐거움을 하나씩 깨닫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옆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으려하는 지일이 문제였다.








“정말, Y기획사 사장님 이러다가 피 마르시겠다! 쇼 원정 안 끝마치고 온 거잖아!”




“응.”




“그런데 지금 이건 무슨 여유야!”








지일은 자신에게 투정부리는 벼리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정말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애타게 보고 싶었던 자신의 조카가

바로 앞에서 예전과 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너무 감사하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벼리가 혹시 후유증이라도 있을까봐 누구보다 마음 졸인 지일이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일주일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지일은 이제 정말 자신이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인후와 영일이 있기에 아쉬운 마음과 걱정스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내일은 비행기에 올라야 한다.








“내일 아침 비행기로 출국할거야, 이번에는 정말 선물 사올 거니까, 어디 가지 말고 있어야 한다?”




“..응”




“난 사장님 얼굴 좀 보고 와야겠다, 오늘까지만 내가 너 독점할 거라고 해야지.”




“그, 그게 뭐야!”



“벌써 일주일 째, 내가 막 시작한 연인들의 사이를 방해하고 있잖아? 아마 서인후 사장 애가 타고 있을 걸?”








장난스러운 지일의 말에 벼리의 얼굴이 붉어졌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광고부 팀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벼리가 돌아 온지 4일 째이다.

벼리와 인후가 없던 며칠간, 그들은 진정 벼리와 인후가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새심 깨달았다.

벼리가 돌아오자, 가장 먼저 인후부터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와 벼리가 돌아온 바로 그 날, 회사의 모든 일은 정상화로 돌아온 것이다.

회사 사람들이 벼리가 창조그룹 은영일의 입양 딸이자, 지일의 조카, 서인후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벼리가 없어지고 바로 다음 날이었다.

갑작스러운 은영일 회장과 서인후 사장의 휴가와 잇따른 지일의 귀국이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 예상한 몇몇 예리한 기자들이 그들의 공통점을 찾은 것이다.

그 세 사람의 공통점은 바로 ‘은벼리’였다.

은벼리가 한국을 움직이는 세 남자의 공통점이라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그녀에 대한 것을 밝히는 것이 그들의 관심이었다.






‘그녀는 제가 너무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은영일 회장님의 딸입니다.

비록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회장님과 그녀를 보면 누구나 부녀지간이라 생각할 정도로 서로 끔찍하게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일의 하나뿐인 조카입니다.

은영일 회장님과 지일의 관계를 억측하셨던 분들은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아 두셨으면 합니다. 두 분은 친 형제지간입니다.

더 이상의 질문을 받지는 않겠습니다. 지금은 그녀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지금 이렇게 기자회견을 하는 것은 나중에 일이 커졌을 때,

혹시 그녀가 힘들게 될 이상한 기사들이 날 것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녀가 혹시 이상한 기사로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시에는, 그 기자와 신문사.. 매장시킬지도 모릅니다.

저에게는 그 정도 힘은 있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회장님과 지일 씨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저 혼자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스캔들 기사에 제가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번 일도 만만하게 보셨다간,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셔도 소용없습니다.’






기자들이 그녀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인후가 먼저 재빨리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가 한 말은 다음날 신문에 조금의 왜곡도 없이 실리게 되었고,

서인후의 존재가 절대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노땅, 솔직히 나 보러 오는 게 아니라, 사장님 괴롭히려고 오는 거지?”




“글쎄? 네가 말하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적당히 괴롭혀, 정말 나중에 미움 받기 전에.”








벼리는 지일이 인후를 많이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도 인후를 괴롭힌다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지일의 모습은 그가 인후를 많이 좋아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아무튼 나 너희 사장님에게 간다! 나중에 퇴근 시간 맞춰서 올게!”








자신에게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지일의 모습을 보던 벼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개구쟁이처럼 장난치는 모습이 지일의 애정방식이었기에,

벼리는 그저 지일이 인후에게 너무 미움 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직 퇴근시간이 되려면 3시간이나 남았는데, 3시간 동안 사장님을 괴롭힐 건가?”








살짝 걱정은 되지만, 지일이 그녀보다 사람을 파악하는데 능숙한 사람이다.

그런 생각에 다다르자 그녀는 다시 자신이 하던 일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




“사장님, 오늘 나온 나르시스 새 제품입니다.”




“아, 희나씨 고마워요.”




“사장님, 제가 있어서 혹 불편하신 것 있으시면, 선배님께 부탁하세요.”








인후는 아직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벼리가 하던 일을 거의 완벽히 해내는 희나에게 놀라고 있었다.

물론 벼리가 희나를 추천했기에,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일을 맡기기는 했지만,

벼리가 지금껏 해왔던 일이 남들의 몇 배, 심지어는 자신보다 많은 일을 해왔기 때문에

사실 그는 벼리가 없는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두 명의 비서를 고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희나는 그런 그의 생각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도록 만들었다.








“희나씨야말로 나에게 말하기 힘든 어려운 일은 은비서에게 말하도록 해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전 제 자리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오늘 또 다른 연락이 올 곳은 없는가요?”




“나에게 올 연락을 기다리고 있으셨습니까, 서인후 사장님?”








희나와 인후는 사장실 입구에서 들리는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입구에 있는 사람이 지일이라는 사실에 인후는 반가움이 담긴 표정으로,

희나는 뭔가 불편한 것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오셨습니까? 마침 신제품이 나왔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어이구, 나의 뭘 믿고 그런 큰일을 저지르시려는 겁니까?”




“저야 당연히 은비서를 믿죠. 그녀 말이면 콩을 팥이라 해도 전 믿습니다.”








자신있는 인후의 말에 지일은 그만의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지일이 사장실 문 앞을 차지하고 있기에, 희나는 사장실을 나가지 못하고 문 주변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아, 새로운 비서님이 나 때문에 나가지를 못하시는 듯하네. 미안해요, 송희나씨.”




“아닙니다, 그럼 전 이만.”








매일 출근하는 직원들처럼, 4일 동안 출근 도장을 찍던 지일은 어느새 희나와도 대화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희나는 여전히 지일을 많이 어려워하는 태도였다.

희나가 문 입구의 반 정도를 비켜준 지일의 옆을 조심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지일의 시원한 향수 냄새에 그녀는 잠시 주춤했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닙니다.”








희나가 사장실 문을 닫고 나가자, 지일은 잠시 문 밖으로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소파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편안하게 앉았다.








“피곤하실 일 있으셨습니까?”




“아니, 사장님만 하려고? 그냥 내일 출국해야한다는 생각에 좀 걱정이 되네.”




“제가 잘 보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아, 아니 그런게 아니라..”




“벼리도, 희나씨도 제가 잘 지켜주고 있겠습니다.”








인후의 말에 지일은,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치우고 인후를 바라보았다.

약간의 놀란 것 같은 지일의 시선에도 인후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무튼 정말 능글맞다니까.”




“제가 말입니까?”




“여기 나랑 이야기 하는 사람이, 너 말고 또 있어?”




“능글맞다니요, 기왕이면 눈치가 빠른 것이라 말씀해 주십시오.”




“정말 벼리가 이 모습을 봐야하는데, 아까 벼리가 나한테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요?”




“너한테 미움 받기 싫으면, 너무 괴롭히지 말라더라.”




“그건 맞는 말 아닙니까?”




“서인후 사장님.”




“왜 그러십니까?”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저한테 미움 받기 싫으시면, 저 좀 그만 괴롭히세요.”








일부러 여자 같은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내는 지일의 행동에 인후는 크게 웃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누구보다 어렵다 느낀 지일이, 지금 인후에게는 편한 친구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지금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벼리는 이런 쪽으로 둔하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지만..








“오늘 우리 새 비서가 지금껏 점심을 못 먹고 있습니다. 돈 많으신 지일님이 우리 비서 좀 어떻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무튼 서인후 넌 정말 능구렁이야.”








지일은 인후에게 핀잔을 주고, 사장실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희나씨, 우리 회사 전속모델이 배가 고프다는데,

나는 점심도 먹었고, 일 할 것이 좀 남아서 가긴 좀 그러니까 같이 좀 가줘. 희나씨도 지금껏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네? 사, 사장님!]








인후는 자신의 뜬금없는 연락에 그저 당황스러워 하는 희나와,

내심 기분이 좋아져 있을 지일을 생각하며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o48











“뭐 먹고 싶은 것 없습니까?”




“아, 저는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요.”




“그래요?”








지일은 자신을 어려워하는 희나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왜 이렇게 어려워하는지 대충 알고 있으면서, 지일은 그녀의 행동에 괜히 마음이 상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입니까?”




“네?”




“내가 그렇게 어렵고 불편하다면, 그냥 다시 회사로 돌아가죠.”








지일은 희나를 불편하게 하면서 밥을 함께 먹고 싶지는 않았다.

지일은 어쩌면 오늘 밤 희나가 소화제를 먹어야 할지도 모르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은 편한 상대와 편안한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 그게 지일의 생각인 것이다.








“아, 저기..”








지일은 회사로 돌아가자는 자신의 말에 잠시 망설이는 희나가 의아했다.

자신이 회사로 돌아가자고 하면, 누구보다 좋아할 것 같은 사람이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지일은 그런 그녀를 위해, 잠시 차를 길 가에 멈추고 조용히 그녀를 기다려줬다.








“그냥 밥 먹어도 되는 데..”




“송희나씨.”




“네?”




“지금 희나씨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계적인 모델..”




“그거 말고.”




“저희 회사 모델..”




“그거 말고.”








희나는 자꾸 다른 대답을 요구하는 지일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희나는 왠지 그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자신에게 계속 물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벼리선배님의 삼촌?”




“그거 말고.”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남은 것 없어요?”




“..은지일?”








희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지일의 본명을 말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바라본 희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자신을 보며, 광고에서나 보던 그런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광고에서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였다.








“바로 그거에요.”




“네?”




“희나씨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은지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물론 어렵게 느껴지겠죠, 광고나 뉴스에서만 보던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 볼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하지만 난 어디에서나 은지일이라는 사람일 뿐, 나라는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너무 그렇게 어려워하지 말아요.”




“아..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도 하지 말아요. 희나씨가 죄송하다고 말하면 왠지 내가 더 미안해지는 것 같으니까.”








희나는 너무나 높은 산 정상에 서 있는 것 같은 지일이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자신의 그런 태도를 알고, 지일이 이렇게 괜찮다고 말해주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도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뭐 드시고 싶으신 것 있으세요?”




“그런 건 보통 데리고 나온 사람이 물어봐야 하는 건데.”




“음, 저는 다 잘 먹거든요. 이쪽 지리도 제가 더 잘 알고요, 뭐 드시고 싶으신 것 없으세요?”








지일의 말에 어려워도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희나가 그의 눈에는 너무 귀엽게 보였다.

그녀의 태도로 보아, 자신이 그렇게 꺼려지는 상대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순두부찌개 어때요?”




“네?”




“순두부찌개, 몰라요?”




“아니요, 정말 그거 드시게요?”




“그런데요?”




“음, 그럼 저기 저 골목으로 들어가 주세요.”








희나는 뭔가 근사한 것을 먹을 것 같은 지일이, 자신이 자주 먹는 순두부찌개를 고르자 내심 당황스러웠다.

천하의 지일이 순두부를 먹는 모습은 상상이 가질 않기 때문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도 인간이에요. 그런 걸로 치면, 우리 벼리가 더 신기해야 하는 건 아닌가?”




“벼리 선배님은 저의 우상이에요!”




“그래? 우리 꼬맹이가 누군가의 우상이라니. 정말 우리 꼬맹이가 다 컸나보네.”








지일은 벼리라는 소재에 금방 경계심을 풀고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희나는 지일이 벼리이야기를 할 때, ‘우리 꼬맹이’라는 호칭을 쓰면서 아주 편안해 보이는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벼리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여기에요!”




“잠시만, 내리지 말고 기다려요.”








지일은 차 문을 열려고 하는 희나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자신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왜 그가 그러는지 모르는 희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이 타고 있는 편의 차 문을 직접 열어주는 행동에도 그녀는 그저 지일을 바라볼 뿐 이었다.








“숙녀 분, 먼저.”








이 순간 희나는 자신이 지일의 소중한 여자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의 여자가 되는 여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라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곧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지일에게 들킨다면, 정말 미안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그의 얼굴을 보기조차 민망할 뿐이다.








“아까 회사에서도 그렇고, 어디 아파요?”








지일은 자신의 눈을 피하며, 바닥을 보고 있는 희나의 얼굴이 약간의 홍조를 띠는 것을 보고,

좀 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손을 그녀의 이마에 가져갔다.








“열은 안 나는 것 같은데, 서인후 사장님이 일을 많이 시켜요? 내가 좀 혼내 줄까요?”




“아, 아니요! 저 괜찮아요.”








희나는 자신의 이마에 아직도 닿아있는 지일의 큰 손과 가까워진 그와의 거리가 그녀에게 온통 적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의 행동이 너무나 달콤했다.








“그럼 우선은 빨리 들어가요, 밖이 좀 쌀쌀하니까. 밥을 안 먹어서 그럴지도 몰라요.”




“네.”








참 자상한 남자, 은지일. 희나의 머릿속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점점 자리 잡히는 순간이었다.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사진보다 훨씬 미인이시네요.”








상투적인 대화, 지금 이 곳은 호텔 로비였다. 현주는 지금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짜증이 밀려왔다.

집안의 성화에 못 이겨 이곳을 오긴 했지만, 지금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가 불편했다. 빨리 모든 일을 끝내고 싶었다.








“제가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믿지 않으시길래,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뭘? 아, 사귀는 사람이 있으시다는 거요? 제가 현주씨를 알게 된지 꽤 되었는데, 주위에 그렇게 보이는 사람은 없던데요?”




“제가 지금 그럼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건가요?”




“아닌가요? 저는 현주씨가 지금 제가 귀찮아서 그런 말씀 하시는 것 같은데요.”








현주의 말에도 상대방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런 남자의 모습이 현주를 더욱 짜증나게 했다.








“아닙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 이상 이런 무의미한 이야기로 시간을 뺏기고 싶지는 않네요.”




“그럼 그 상대방이 누군지 말씀해 주실 수는 있으시겠죠?”








직설적인 남자의 질문에 현주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사랑하는 남자는 있지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잠시 고민하던 현주는 이 귀찮은 만남의 종결을 짓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들으시면, 놀라실 텐데. 창조그룹 은영일 회장님이 제 남자에요.”








이번에는 현주의 말에 남자가 많이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그 놀람도 잠시, 남자의 표정은 다시 아까의 여유로움을 찾았다.








“두 분이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누구에게도 그런 깊은 관계라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는데요.

그저 두 분은 몇 번 만난 것이 전부라 들었습니다.”




“정말 사람 말을 안 들으시네요, 이렇게 신뢰가 없으셔서 어떻게 세상을 사세요?”




“저는 신뢰가 가는 말만 믿습니다.”




“하아, 정말 대단하시네요. 지금 여기로 불러오기라도 해야 믿으시겠어요?”




“그러시겠어요? 은영일 회장님은 제가 평소에 정말 보고 싶었던 분인데.”








남자의 말에 일일이 대꾸하기가 힘들어진 현주는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영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 한 번의 통화음이 지나고, 영일이 전화를 받았다.








[현주?]




“어, 자기야. 지금 많이 바빠?”




[...당신 무슨 일 있어?]








수화기 건너 들리는 영일의 목소리는 현주의 ‘자기야’라는 호칭에 많이 당황한 듯 했다.

현주는 뒷감당 할 걱정은 많이 되었지만, 이번 한번은 철판을 깔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자기, 나 지금 어떤 사람 만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자꾸 내 말을 안 들어. 자기가 내 애인이라는 소리를 안 믿는 거 있지?”




[당신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남자랑 있어?]




“응, 자기 지금 나올 수 있어? 자기를 눈으로 봐야 믿겠데.”




[거기 어디야?]








현주 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의 통화를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긴장을 하는 눈치였다.

그런 남자의 상태를 간파한 그녀는 더욱 세게 밀어붙이기로 했다.








“나 지금 자기 너무 보고 싶어, 지금 여기 리안 호텔 로비에 있어.”




[가깝네, 5분 안에 갈 거야.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갈게.]




“응, 자기 고마워. 바쁜데 미안해.”




[괜찮아, 나중에 둘이 이야기 하자고. 지금 나간다.]








영일과 그렇게 통화를 마친 현주는, 자신의 앞에 안절부절 못하고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온다고 그러네요, 밥을 안 먹은 것 같으니까, 일단 우리는 차만 마시죠.”




“그, 그러세요.”








현주의 자신 있는 말투에 남자는 정말 오늘 자신이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은영일 회장을

두 눈으로 직접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o49











“회장님, 어떻게 처리 할까요?”




“글쎄, 지일이 녀석이 직접 처리하고 싶어는 하는데, 내일 출국이니까 내 선에서 처리를 해야 할 것 같군.”








영일은 벼리를 납치한 남자와 여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비서실장과 고민하고 있었다.

우선은 경찰에 넘기긴 했지만, 벼리는 여자를 빼내주기를 원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남자의 죄가 경감되기 때문에, 가볍게 일이 처리된다.

지일과 인후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고, 영일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은 반대였다.

하지만 벼리가 그녀를 용서해주길 간절히 원하는 상황이라 일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아예 둘 다 풀어주는 것은 어떨까요?”




“..그런 다음엔?”




“남자는 지금까지 평생을 그 바닥 일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만약 회장님께서 조금 손을 써서 그 지역을 조금 움직인다면, 그 남자는 더 이상 그 바닥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겠죠.”




“돈을 벌 수 있는 줄을 아예 끊어버리자는 건가?”




“네, 평생을 바쳐 일을 한 곳입니다.

그 곳에서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면, 그는 아마 큰 절망감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좋은 방법은 아니군, 난 그 남자를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고 싶은데 말이야.”




“하지만 그건..”




“알아, 우리 벼리가 절대 원하는 일이 아니지.”




“...아가씨께서 많이 괴로워하실 것입니다. 자신 때문에 회장님이나 지일, 서인후 사장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응, 우리 딸은 그런 순수한 아이이니까.”




“그럼, 이번일은 어떻게 할까요?”




“우선은 그 쪽 지역을 좀 움직여보도록 하지, 오늘 지일이랑 상의도 좀 해봐야겠어.”




“알겠습니다.”








그 일에 대한 이야기가 대충 끝나고, 비서실장이 회장실을 나가려는 참에 영일의 핸드폰이 울린다.

발신자에 뜨는 ‘이현주’라는 세 글자에 영일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는다.








“현주?”




[어, 자기야. 지금 많이 바빠?]








영일은 ‘자기야’라는 호칭을 쓰는 현주의 목소리에 당황스러웠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비서실장을 나가보라 하고,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이현주라는 여자는 영일과 잘 아는 사이임에도 그가 일하는 시간에는 되도록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이 시간에 전화를 한 것은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영일은 생각했다.








“...당신 무슨 일 있어?”




[자기, 나 지금 어떤 사람 만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자꾸 내 말을 안 들어. 자기가 내 애인이라는 소리를 안 믿는 거 있지?]




“당신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남자랑 있어?”




[응, 자기 지금 나올 수 있어? 자기를 눈으로 봐야 믿겠데.]








현주의 다급한 음성에 영일은 지금 현주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대충 눈에 그려졌다.

그녀는 지금 꽤나 잘 나가는 그룹 자제들 사이에서 최고의 신부 감으로 뽑히고 있었다.

학벌, 집안, 외모, 성격 어디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그녀를 예전부터 많은 남자들이 흠모하고 있다는 사실은

영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아마도 맞선을 보는 중인 것 같았다.

현주의 아버지를 잘 아는 영일은, 아마 그녀가 아버지의 강요로 선을 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 어디야?”




[나 지금 자기 너무 보고 싶어, 지금 여기 리안 호텔 로비에 있어.]








자기라는 말이 영일에게는 많이 생소했다.

자신에게 접근하는 여자는 많지만, 그는 절대 자신의 선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과 반말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서로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요즘 들어서는 다른 곳에 신경 쓸 것이 많아서, 여자를 잘 만나지도 않았다.

그런 그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은벼리, 이현주, 이 두 사람이 전부였다.








“가깝네, 5분 안에 갈 거야.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갈게.”




[응, 자기 고마워. 바쁜데 미안해.]




“괜찮아, 나중에 둘이 이야기 하자고. 지금 나간다.”








그렇게 현주와 통화를 끝낸 영일은 빠르게 회장실을 벗어났다.

이 시간에 자신에게 전화를 해서, 평소의 그녀라면 쓰지 않을 자기라는 호칭을 쓰며,

자신을 불러내는 것은 지금 그녀가 꽤나 난처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의 틀 안에 속하는 현주가 난처한 것은 그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회장님, 어디 가십니까?”




“현주 좀 만나고 올게. 지금 꽤 다급한가봐.”








비서실장은 영일이 빠르게 사라지고 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영일이 닫지 않은 회장실 문을 닫았다.








“현주씨 만큼 회장님과 잘 어울리는 아가씨도 없는데.”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 그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




“지금이라도 가시고 싶으면, 가세요. 무례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현주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가 꽤나 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배려하는 차원에서 말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오히려 맞선 남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말 오긴 오는 것입니까? 제가 지금도 속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그럼 계속 기다리세요.”








현주는 남자의 도발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영일이 한 말을 항상 지키는 남자이기에 전혀 초조할 것도 없었다.

그는 반드시 이곳에 빠른 시간 내에 도착할 것을 그녀는 의심치 않았다.








“현주씨야말로, 자작극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 말씀하세요. 현주씨 부모님께는 아무 말 않겠습니다.”




“저기요, 지금.. 꺄악!”








현주는 자신을 약간 무시하는 남자의 말에 무어라 받아치려는데,

뒤에서 앉아있는 자신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는 무언가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나야, 늦은 건 아니지?”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안은 것은 다름 아닌 영일이었다.

현주는 모든 상황을 파악한 그가 자신의 연극에 맞춰주기 위해 일부러 한 행동임을 알았다.








“자기, 나 놀랐잖아요. 일이 많이 바빴던 건 아니에요?”




“아무리 바빠도 당신이랑 밥 한 끼 먹을 시간 없으려고?”








영일은 허리를 껴안았던 팔을 풀고, 현주의 머리를 부드럽게 만지면서 그녀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해주었다.

그런 영일의 행동에 호텔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현주는 어쩌면 지금 자신이 아주 일을 크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악의 경우, 내일 신문 1면을 장식하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이 분이 나랑 자기 관계를 자꾸 의심하잖아, 그래서 불렀어.”




“아, 그래? 어디 자제 분이신가?”








영일의 질문에도 남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 정말 꿈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이현주라는 여자가 대단한 여자이긴 하지만,

세계적인 기업의 회장이 이렇게 사랑하고 있을 줄은 정말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자기한테 말해줘도 자기는 잘 모를 거야. 저기요, 괜찮으세요?

이제 제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은 잘 아셨겠고, 저희랑 식사라도 함께 하시겠어요?”








현주는 아까 자신을 무시한 남자의 발언을 복수하기 위해, 일부러 비꼬는 말투로 말했지만

남자는 그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식사 함께하겠냐는 말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 곳을 빠져나갔다.








“미안해요.”








남자가 호텔에서 사라지자마자, 현주는 영일의 넓은 품에서 떨어져 사과를 했다.

그런 반듯한 현주의 태도에 영일은 왠지 모를 서운함을 느꼈다.








“당신이 아까처럼 나에게 기대는 것이 난 좋은데?”




“장난 말아요, 이러다가 내일 신문에라도 나겠어요.”




“나야 괜찮지만, 당신 혼삿길 막히면 큰일이지.”




“난 결혼 생각 같은 것 없어요, 회장님 걱정 되서 그러는 거라고요!”




“결혼할 생각이 없어? 이 사실을 알면, 많은 자제 분들이 땅을 치며 울겠는데?”








여전히 장난스러운 영일의 말에, 현주는 몸에 있던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으로 그녀가 그에게서 어떤 존재인지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당신은요?”




“응?”




“...아니에요. 나는 밥 안 먹을 거예요, 어제 하루 종일 집에서 시달렸더니 신경이 날카로워진 건지 밥이 안 먹혀요.”




“그럼 지금시간까지 아무 것도 안 먹었어?”




“차는 마셨어요, 나는 괜찮으니까 회장님 뭐 드세요. 오늘은 내가 살게요.”




“뭘 먹어야지, 그렇다고 미련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으면 어떻게! 병원은 갔었어?”




“신경성인 것 아는데, 무슨 병원이에요.”




“하아, 내가 정말 당신 때문에 못 살겠다. 당신 벼리나 내가 만든 죽은 먹을 수 있겠어?”




“그거야 나 신경성으로 밥 못 먹는다고, 벼리랑 회장님이 직접 예전부터 만들어주던 거니까 당연히 먹을 수 있죠.”




“지금 죽 먹으러 가자.”




“네? 회사 들어 가봐야죠, 무슨 죽이에요.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오늘은 급한 일 없으니까 일찍 퇴근해도 돼.”




“내가 싫어요, 나 아니었으면 오늘도 정각에 퇴근할 사람이잖아요.”




“정말 이럴래?”




“회장님이야 말로 왜 이래요! 내가 굶어 죽든지 말든지, 그건 내 사정이죠!”








영일은 오늘따라 정말 신경이 날카로운 것 같은 현주의 태도에 낮게 한숨을 쉬고, 그녀를 단숨에 안아 들었다.

그의 행동에 아까보다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주시하게 되었다.








“뭐, 뭐하는 짓이에요, 사람들 다 쳐다보잖아요!”




“당신이 당신 발로는 안갈 것 같으니까, 이렇게라도 데려가려고.

저항하기만 해봐,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이미 창피할 만큼 행동하고 있어서 겁 안나요, 이거 놔줘요!”




“후회 안할 거지?”




“후회할 것 없으니까 빨리.. 읍!”








내려달라 말하는 현주는 자신의 입 안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물체에 놀랐고, 그녀의 코는 어느새 그의 향으로 마비되었다.

현주는 지금에서야 영일이 자신에게 ‘키스’라는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 o50











“수고하셨습니다.”



“은비서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다들 같이 수고한 건데요, 뭘.

일하고 있을 때는 너무 힘들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는데,

막상 일이 끝나고 나니까 광고 팀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이 서운하네요.”








오늘로써 벼리는 광고부 쪽 일을 모두 마쳤다. 그녀의 말에 광고부 팀 직원들은 모두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일을 같이 하면서, 말로만 들어왔던 벼리의 일 처리 능력을 직접 볼 수 있어서 그들에게는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른 부서 직원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점에서 내심 우쭐도 했었건만, 이제 그런 시간도 다 지나간 것이다.








“우리 오늘 마지막 날이고 하니, 다 같이 회식할까요?”




“좋아요!”








시무룩한 직원들의 표정을 보던 벼리는 마지막으로

함께 힘들게 일했던 그들과 회식이라도 한 번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했다.

이번 기획이 자신 때문에 너무 촉박하게 돌아가서, 회식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제안에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자, 진작 회식을 생각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럼 오늘 회식 물주는 사장님이신건가요?”








한 직원의 말에 벼리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난 지금 바로 사장님이랑 단판을 짓고 올게요.”




“은비서님, 회식비 많이 받아오세요!”




“오늘은 아주 고급으로 풀코스 가자고요!”




“그냥 아예 사장님도 같이 회식할 수는 없나?”








장난스러운 직원들의 말을 뒤로하고, 벼리는 인후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어, 선배님!”




“응, 희나씨. 사장님 안에 계시지?”




“그럼요, 오늘 광고부 쪽 일 끝나는 날이죠?”




“응, 일 마무리 중이야. 혼자서 일하는 거 힘들지?”




“지금까지는 괜찮아요. 선배님이 하던 일에서 절반 조금 넘는 분량을 겨우 소화시키고 있는 중이에요.”




“희나씨 잘하는 건 우리 회사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인데?”




“선배님만 하려고요?”




“이따가 회식할 거니까, 희나씨도 일 끝나면 바로 광고부로 와.”




“정말요? 퇴근시간 ‘땡!’하면 바로 내려갈게요.”








희나와 간단한 대화를 나눈 벼리는 사장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녀의 시야에 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과 함께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인후가 보였다.

인후는 그녀의 인기척을 못 들은 듯, 여전히 서류를 바라보았다.








“사장님.”




“어, 지금.. 벼리?”








인후는 희나의 목소리라기엔 너무 익숙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바라본 그는 잠시 사고가 정지된 것 같았다.








“나 오랜만에 보는 건데, 반갑지 않아요?”




“벼리야.”




“치, 반응이 너무 느려서 시시하다. 나 그냥 갈래요.”




“가지마!”








사무실을 나가려하는 벼리의 행동에 인후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이제야 좀 사랑하는 사이 같다.”




“너, 정말!”




“오랜만에 봤는데, 싱거운 반응을 보인 인후씨가 잘못한 거잖아요.”




“그럼 우리도 이 두 분처럼, 뜨거운 만남을 가져야하는 건가?”








인후는 벼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 후, 신문을 보여주었다.

그 곳에는 그녀의 아빠인 영일과 현주의 뜨거운 키스신을 멀리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제목은 ‘창조그룹 회장의 숨겨둔 애인?’이었다.








“음, 이렇게 까지는 안 해도 돼요.”




“두 분은 언제부터 이런 사이였던 거야?”




“글쎄요, 나도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 그런데 우리 아빠가 언니를 좋아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언니가 아빠에게 너무 넘치는 여자이긴 하지만.”




“왜 넘쳐? 창조그룹 회장이라는 타이틀 쉽지 않은데.”




“나라는 걸림돌이 있잖아요. 아무리 친 딸이 아니라도 호적상으로 딸이 있다는 건, 무시 못해요.”








인후와 대화를 하던 벼리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져갔다.

그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작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아마 회장님께 이 소리를 했다간, 많이 화를 내실거야. 그 사실 당신은 누구보다 잘 알지?”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한 말이 사실이잖아요.”




“그건 두 분이 해결해야 할 사정이야. 내가 보기에는 현주 옆집누나는 당신을 엄청 사랑하는 것 같은데?”




“나도 언니 사랑해요! 언닌 나에게 새엄마 같은 사람이란 말이에요.”




“아마 그 분도 당신을 아끼는 동생처럼 생각할 거야.

그러니 이렇게 축 쳐지지 말라고, 그보다 일하는 시간에 어떻게 여긴 온 거야?”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인후씨,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요?”








벼리는 인후의 질문에 회식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곳에 들렸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오늘의 물주가 되어 줄 인후를 설득하기 위해, 벼리는 그의 목에 자신의 팔을 두르고 그의 귓가에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자신의 방법이 꽤나 먹혔는지, 벼리는 그의 몸이 지금 굳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당신 지금..”




“오늘 우리 광고 팀 회식하려고 하는데, 인후씨가 물주 해줄 거죠, 응?”








여전히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 때문에 인후는 꽤나 곤욕이었다.

벼리를 안은 지도 너무 오래됐는데, 이렇게 대놓고 유혹하는 그녀의 행동에 그는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무리 다급해도 이런 대낮에 밖에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그녀를 안을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은 그녀를 천천히 여유롭게 끊임없이 안고 싶었다. 그리고 그럴 것이다.








“정말 나쁜 것만 먼저 배운다니까.”




“이게 나쁜 거예요?”




“당신 지금 내 눈에 작은 악마처럼 보이는 거 알아?”




“소악마? 소악마 엄청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알려져 있잖아요. 내가 그렇게 예뻐요?”




“참, 갈수록 심해지네.”




“내가 그렇게 예쁜지 물어봤잖아요.”




“그래, 정말 예뻐. 내 눈에 당신은 소악마야.”








예쁘다는 인후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벼리는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그에게 기대었다. 한 손은 그의 목에 여전히 머물러 있고, 한 손은 인후의 파란색 넥타이를 만지고 있었다.

그런 벼리의 행동이 그의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했다.








“나 이러다 정말 여기서 당신 안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서 내려가 봐.”




“오늘 직원들이 회식 고급으로 풀코스 돌기를 원하던데, 가능해요?”




“응, 당연하지. 이제 된 거야?”








벼리의 질문에 인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긍정의 대답이 나왔다.

정말 더 이상 그녀의 유혹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인후씨.”




“당신 오늘 밤에 잠자기 힘들 줄 알아!”




“흥, 몰라요. 이따 봐요!”








벼리는 인후의 승낙이 떨어지자, 바로 그의 무릎에서 내려 사무실 문을 당겼다.

짓궂은 인후의 말에도, 벼리는 혀를 한 번 내밀고 사무실을 나갔다. 인후는 그제야 숨을 크게 쉬고 안정을 찾았다.








“정말 갈수록 사악해지네.”








말은 그렇게 해도,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마치 너무 사랑스러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그의 미소를 해맑았다.








“이 두 분도 우리처럼, 행복하신 건가?”








인후의 시선은 신문에 실린 영일과 현주의 사진에 머물렀다.

그는 두 사람도 자신들처럼, 행복한 사랑을 할 것이라 믿고 싶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아직 사랑을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그걸 인후가 알리가 없었다.




매혹적인 신데렐라 [Fascinating Cinderella]











※ 매혹 魅惑 : 매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호림.















※ o51











“대체 뭐라고 했길래, 그 쪽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아버지, 전..”




“네 눈에는, 내가 하나밖에 없는 자식 잘못 되길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냐?”




“그런 거 아니에요,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그럼 뭐가 문제인 거냐? 그 정도 집안이면, 우리 집안과 잘 맞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냐?

우리가 정치나 경제계 집안은 아니어도, 몇 대째 교수, 선생을 하고 있는 집안이다, 그것도 네 대에서 끊겼지만 말이다.”




“아버지, 전 아직 결혼 생각이 없어요, 전 아직 일이..”




“그럴 거면 나가! 이 집에 더 이상 널 둘 수가 없구나!”




“아버지!”




“대체 뭐가 불만인 것이냐! 지금까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지 했건만, 아직도 충분치 않은 것이냐?”




“지금 제가 하고 싶은 대로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음대로 해본 것이라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밖에 없어요!

제가 어린 아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절 힘들게 하세요! 지금까지 아버지의 뜻대로 해 드렸잖아요, 제 직업 하나 빼고는요!”




“이, 이런 고얀 것! 내 이래서 딸은 싫었건만!”




“그 레파토리도 이제 지겹지 않으세요?

예전같이 그 레파토리에 아버지 말 듣는 딸은 이제 없어요, 그럴 시절은 이제 지났다고요.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오늘 이성적인 대화는 무리인 것 같아요.”




“지금 나갈 거면, 다시는 들어올 생각 말거라!”








현주는 자신의 아버지의 외침에도 서재에서 나왔다.

그녀가 서재를 나오자, 서재 바로 앞에서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는 새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새엄마, 미안해요. 미안한데, 이건 아니잖아요.”




“현주야..”




“나 힘들어요. 새엄마 힘든 거 알고, 아버지가 날 위해 하는 행동인 것도 잘 아는데 나 점점 지쳐가요.”




“너희 아버지는..”




“새엄마, 가 볼게요. 당분간은 집에 안 들어올 게요.”




“현주야!”




“사랑해요, 새엄마.”




“... 밥은 꼭 챙겨먹어, 요즘 점점 더 야위어 가는 것 같아.”




“네, 새엄마도 건강히 계세요.”








현주는 자신이 커가는 사이 많이 늙은 새엄마를 꼭 안아주고는 집을 나섰다. 말은 그렇게 하고 왔지만, 그녀는 많이 불안했다.

이번에 확실히 하지 않으면, 정말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결혼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차에 오른 그녀는 시동을 걸지 못하고, 두 눈을 감았다.








“정말 힘들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교수라는 직업을 가져서 그런지, 다른 집안보다 유독 고지식한 아버지를 대하는 것에 그녀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문제만 아니면, 백번이라도 져줄 수 있건만, 이 문제까지 양보할 수는 없었다.








“정말 괜찮은 남자 없나?”








현주는 자신의 중얼거림이 문득 너무 웃겨서, 피식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정해주는 남자보다는, 사랑하지는 않아도 자신과 잘 맞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나았다.

문제는 아직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은영일..”








지금 이 순간 그가 생각나는 자신이 너무 미웠다.

그는 절대 자신과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하필 그런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이현주 인생, 살기 참 힘든 인생이다.”








현주는 자신의 집을 쳐다본 후, 시동을 걸었다.

오늘 회사에 잠시 들려달라는 영일과의 약속이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했지만, 피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그의 회사로 향했다.






-




“은영일 회장님 만나러 왔어요, 비서실장님께 연락 좀 해줘요.”








항상 거침없이 회장실까지 향하던 현주는, 오늘은 회사 1층 프론트에 있는 직원에게 부탁을 했다.

회사에서 근무한 지 2년이 되어가는 여직원은, 당연히 회장실로 향할 것이라 생각한 현주가

자신에게 부탁하는 것이 이상했지만, 수화기를 들어 비서실로 연결을 했다.








“여기 로비인데요, 이현주씨가 회장님을 만나시길 청하십니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 시간이 된다고 그러세요?”




“네, 올라오시라고 하십니다.”




“..고마워요.”








현주는 친절한 직원의 말에 웃으며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도를 모를 리가 없는 비서실장이 허락을 했다는 말에 한숨이 나왔다.

그녀는 오늘은 정말 만나고 싶지 않았건만, 그를 만나야했다.

이제 더 이상의 꾀도 부릴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그녀는, 마음을 굳히고 회장실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넓은 엘리베이터에 자신 외에는 아무도 타지 않았다.








“정말 오늘은 더 이상 낼 힘도 없는데.”








현주는 영일을 만날 때는 항상 힘이 필요했다.

자신의 마음을 꽁꽁 숨겨둘 수 있는 힘. 하지만 오늘은 이미 힘을 다 쏟고 와서,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미 엘리베이터는 그녀가 내릴 곳에 도착해 있었다.

현주는 한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회장 비서실로 향했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하아, 오늘은 날 도와주면 안 되는 거였어요?”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됐어요, 내가 실장님이랑 말을 말아야지. 오늘 나 정말 힘들단 말이에요, 이 회사 회장님께 실수해도 뭐라고 하지 마세요.”




“네, 아가씨가 하는 실수는 회장님도 아무 말씀 안 하실 겁求?”




“오늘따라 실장님이 참 미워요.”




“오늘따라 아가씨가 참 보고 싶었습니다. 그만 들어가시죠?”




“정말 못됐어!”








조금 더 실장과 이야기 하고 싶었던 현주는, 자신의 생각을 간파한 실장의 말에 그를 한 번 흘겨보고 회장실 문을 열었다.

그런 현주를 바라보는 실장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당신 왔어?”




“네.”




“뭐 마실래?”




“아니요.”




“그래? 일단 좀 앉아.”








현주는 영일의 권유에 따라,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있는 신문이 눈에 거슬렸다.

며칠째, 같은 기사가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더욱 피곤하게 했다.








“신문 봤어?”




“신문 안 봐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도 흘러나오더라고요.”




“그때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마요, 그건 내가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이잖아요.”




“..그런가?”




“네, 그때는 정말 미안했어요. 내가 부르지만 않았어도, 지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난 즐거웠는데?”




“..네?”




“난 즐거웠다고, 당신에게 그런 행동까지 한 것은 미안하지만, 난 그날 즐거웠어. 내가 손해 볼 것도 없고.”




“손해 볼 것이 없다고요?”




“오히려 들러붙던 여자들이 스스로 사라져줘서 고마웠는데? 이참에 당신 정말 내 여자 할래?”








영일의 장난스러운 말에 힘들게 유지하고 있던 현주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져 같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일이 있기 전과 있은 후에도 행동이 한결같은 그가 너무 미웠다.








“아무튼 미안했어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그리고 이제 제가 이 회사 올 일도 없을 거예요, 그리고 회장님 만나는 것도 이제는 안하려고요.”








현주의 말에 영일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회장님도 저도, 이제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결혼해야 하는 나이잖아요.

아무리 몇 년 동안 아는 사이라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제가 회장님 만난다는 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좋지 않게 보일 거예요.”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혹시 내가 그때 했던 행동이..”




“그런 건 아니에요, 아버지가 제 호적 팔 생각까지 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이제는 결혼이라는 것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가 된 것 같아서요.

우리는 이제 사적인 일로 만나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만 가 볼게요.”




“현주야!”








영일은 소파에서 일어나려던 현주를 붙잡았다.

이대로 현주를 보내면, 정말 다시는 이런 자리가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그를 긴장시켰다.

이렇게 자신을 긴장 시킬 수 있는 여자는, 그에게 벼리와 현주밖에 없었다. 그런 현주를 잃을 수는 없었다.








“왜 그러는 거야, 응?”




“아무 이유는 없어요, 이제 부모님 말씀 좀 들어보려고요.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정말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당신이 결혼을 생각하는 것이랑, 나랑 만나는 것이랑 왜 관련이 있는 거지?”








고백할 마음은 없다, 이 마음은 그에게 전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녀는 영일을 바라보며,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회장님, 안녕.”








현주는 그녀의 작별인사에 아무 말도 못하는 영일의 곁을 스쳐지나 사무실을 나왔다.

예상보다 빨리 나오는 현주의 모습에 비서실장은 궁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이제 자주 보긴 힘들 것 같지만, 가끔씩 제 가게에 들려주세요.”




“아가씨?”




“저 그만 가볼게요.”








현주는 그렇게 회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녀가 내린 뒤, 여전히 아무도 타지 않은 듯, 엘리베이터는 그녀가 내렸던 회장실 층에 그대로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녀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괜찮아, 이제 정말 안녕인 거야. 예쁘게 웃었으니까, 그러니까 된 거야.”








이제 깨끗이 끝난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그녀의 눈에는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막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열려진 문 너머로 영일이 보였다.

갑작스러운 영일의 등장에 놀란 현주의 눈은 그의 눈과 마주쳤다.

눈물로 잔뜩 흐려진 그녀의 눈에 비춰진 그의 표정은,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울 정도로 잔뜩 굳어져 있었다.








“나 너 못 보내, 당신 못 보내.”
























※ o52











그날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굳이 키스를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입술을 훔쳤었다.

그 날일을 사과하라면 수백 번도 더 사과할 수 있건만, 오히려 미안하다 말하는 현주의 태도에 영일은 기분이 이상했다.

‘혹시 나 이외의 남자에게도 키스를 당하고도 먼저 사과를 할까?’ 라는 의문에 다다르자, 영일은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났었다.








“나 너 못 보내, 당신 못 보내.”








자신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안녕이라 말하던 여자가 서럽게 울고 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필시 자신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게 무슨..”




“못 보내는 게 아니라, 당신 안 보내. 아무한테도 당신 줄 수 없어.”








영일은 자신이 내 뱉은 말에 놀라는 현주를 잡아, 엘리베이터 밖으로 당겼다.

힘없이 자신의 품에 안기는 작고 가녀린 그녀의 몸을 영일은 그 어느 때보다 세게 끌어안았다.








“..회장님.”




“현주야, 미안하다. 나 욕심내면 안 되는 거 잘 아는데, 당신 안 보고 살 자신이 없어.”




“.....”




“그냥 내 곁에 있어주면 안 될까? 나 당신이랑 벼리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영일의 고백에도 현주의 얼굴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했다.








“저랑 회장님은 아니에요, 나 어릴 적부터 꿈이 결혼하는 거였어요.

지금은 일하는 중이라 이루지 못하고 있지만, 내 가장 큰 꿈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그 꿈 이루어 줄 수 있는 남자 찾아보려고요.”




“현주야.”




“..사랑해요.”








절대 그에게 말하지 못할 줄 알았던 말이건만, 현주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 채

좋아하는 장난감을 잃은 어린 아이처럼 조르는 그를 단념시키기 위해, 숨겨두었던 자신의 마음을 꺼내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고백에 영일의 얼굴은 빠르게 굳어버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현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려고요.

더 이상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영영 만나지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만 가 볼게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의 고백에 이렇게 힘들어하는 그를 보았으니, 그녀는 더 이상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이미 그녀에게는 한계가 왔었다. 그 전에 미리 그와의 관계를 정리했어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주는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힘들었던 말이었는데, 너무 쉽게 나와 버린 사실에 현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정말 안녕이다. 그녀는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눈앞에 서 있는 영일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를 마음껏 두 눈에 담아보았다. 더 이상 바라지 못하는 것이기에, 지금 욕심을 부려보는 것이다.

현주는 이 순간 이후, 다시는 그를 생각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넌 정말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여자야.”








막 문이 닫히려는 순간, 영일이 현주가 탄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현주의 턱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눌렀다.

놀란 현주가 무어라 말을 하려했지만, 그 순간 영일의 혀가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며칠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키스에 현주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엘리베이터는 층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내려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 위해 버튼을 누른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현주는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그저 영일의 셔츠자락을 붙잡고, 그의 단단한 팔에 휘감겨, 거친 호흡을 내쉬며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는 것이 전부였다.

영일은 계속 키스를 하면서, 엘리베이터의 한 구석으로 그녀를 몰아세웠다.

그녀와는 달리 그는 지금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볼 수 없도록 자신의 품 안에 그녀를 안은 영일은,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까, 그 작업은...!!”




“왜 그래?..!! 회장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려던 두 여직원은, 이 회사의 회장인 영일이 평소와는 다른 잔뜩 흐트러진 채로

한 여자를 안고 있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런 직원들의 모습에도 영일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해달라는 의미로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댔다.

두 사람은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고, 영일은 다시 현주의 입술에 거침없이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반면 현주는 영일의 키스에 정신이 혼미해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으응..”




“하아.. 이렇게 도장 쾅 찍어 놨으니, 다시는 도망갈 생각 말라고.”








힘이 잔뜩 빠진 그녀를 안아든 영일의 명령과 같은 말에, 현주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영일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기분이 좋아져 다시 그녀의 입술로 파고들었고, 그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혔다.








“지금.. 회장님 맞지?”




“장난 아니다. 우리 회장님 저렇게 열정적인 사람이었어? 난 항상 차가운 모습만 봐서..”




“누군 아니야? 근데 저 여자 누굴까, 진짜 부럽다.”




“회장님 진짜 멋있으시다. 정말 저 여자 사랑하시나봐!”




“이건 우리 팀 직원들한테 이야기해도, 왠지 우리만 미친 사람 취급 받겠다.”




“당연하지, 헛것 본 거 아니냐고 그럴걸?”








두 여직원은 영일에게 안겨있어서 얼굴조차 볼 수 없었던 현주에 대한 부러움으로 한동안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그러는 사이, 영일과 현주는 다시 회장실 층에 도착을 했다.

한 팔로 그녀를 안은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영일은 여전히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회장실이라 함부로 드나드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 곳에서 한참을 더 서 있었다.








“하아.. 하아..”




“.....이제 알겠어? 당신의 그 꿈, 내가 이루어 줄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은영일만 이루어 줄 수 있는 거야.”




“...하아..”








오랜 키스로 인해, 아직도 거친 호흡을 내쉬는 현주를 바라보던 영일은 그녀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노골적인 영일의 행동에 현주의 얼굴은 급속도로 빨개졌다.








“사랑해. 그 동안 당신이 내게 너무 차고 넘치는 사람이라 단념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미안하지만 그냥 당신 내가 가질게.

놓아주려 했는데, 그러기엔 내가 정말 죽을 것 같아서 당신 놓을 수가 없다.

그 대신 내가 정말 행복하게 해줄게, 당신 정말 아낄게. 그래도 안 되겠어?”








진심이 가득 담긴 영일의 고백에, 현주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꿈을 몇 번을 꿨는지 모를 정도로 너무 바래왔던 일이다.

현주는 지금 이 순간도 혹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에는 그와의 키스가 너무 생생했지만..








“싫어도 할 수 없어, 이 세상에서 당신을 나보다 사랑해줄 남자 없어. 그러니까 제발 그냥 나에게 한번만 져줘, 응?”








간절한 영일의 말에 현주는 미소를 지었다. 현주는 여전히 자신을 안고 있는 그의 목을 껴안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난 당신보다 먼저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녀의 속삭임에 영일은 그 어느 순간보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지일이 출국한지도 어느새 일주일,

그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정한 시간에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희나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밥은 먹었어?]




“..네.”




[아직도 내 전화가 불편해?]




“아, 아니요!”








희나는 서운함이 담긴 지일의 말에 그가 보지 못한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하지만 지일은 그녀의 말투에서, 지금 희나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상상이 갔다.








‘나 내일 출국해요, 원래 일정을 미루고 온 것이라 다시 쇼 원정 때문에 가봐야 해요.’




‘아, 그러시군요.’




‘희나씨.’




‘네?’




‘내일부터, 희나씨한테 전화해도 될까요?’




‘저한테요?’




‘희나씨가 부담스럽다면,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지 않으시면 되요. 우리 친구 할까요?’








지일의 제안에 희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번호를 가르쳐줬다.

장난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그 다음날 저녁 낯선 번호가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고,

그 번호는 바로 지일의 핸드폰 번호였다.

그날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가 걸려왔고, 이제 희나는 그가 전화를 걸어오는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 지금 중국이야, 이거만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




“..정말요?”








지일이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말에 희나는 자신이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이라면 지일이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연예프로나, 신문기사를 통해 늦게 접했을 것인데,

지금은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그의 스케줄을 보고받고 있었다. 다름 아닌 지일, 본인에게서.








[나 돌아가는 게, 좋은가 보네? 마중이라도 나와 줄 거야?]




“..정확히 언제 오는 건데요?”




[어, 정말 나와 줄 건가 보네. 나 3일 뒤, 오전 10시 비행기야. 아마 한국에는 수속하고 짐 찾으면, 12시쯤 나올 것 같아.]




“주말.. 이네요?”




[희나씨가 혹시나 나와 줄까하고, 주말로 잡았지. 정말 나와 줄 거야?]








아이처럼 들뜬 지일의 목소리에 희나는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정말 어렵기만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편안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가 알게 된 지일은 순수한 사람이고, 다정한 사람이고, 여전히 멋있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될 것 같아요. 그럼 그날 봐요, 마지막까지 열심히 일 잘하시고요.”




[‘지일씨, 힘내세요!’라고 말해주면, 더 잘할 것 같은데.]




“네?”




[아직 이건 무리인가, 그냥 혼잣말이라고 생각해. 그 날 봐, 내일도 전화할게.]




“저.. 지일씨, 힘내세요!”








희나는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대범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그렇게 외친 후, 빨개진 얼굴로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

돌발적인 행동에 자신을 자책하는 희나와는 달리, 지일은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며

지금 당장 그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분명 쑥스러워 하고 있을 그녀가 지금 너무 그리웠다.













※ o53











사람들로 가득한 음식점,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삼겹살 집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벼리 팀 회사 사람들이었다.

다들 허기가 졌는지 불판에 있는 고기가 익기 무섭게 젓가락들이 움직였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는 벼리도 있었다.








“팀장님, 우리 술 한잔해요!”




“맞아요! 오늘이 팀장님 마지막 날인데, 송별회라도 제대로 해드리고 싶어요!”




“이모, 여기 소주 5병이요!”








벼리는 막무가내로 술을 시키는 사원들의 행동에 그저 웃기만 했다.

그들은 지금 벼리를 보내야한다는 서운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라면, 벼리는 술과는 담을 쌓은 것이다.

알코올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음식만 먹어도, 온 얼굴이 붉어지는 체질이라 술을 마시지 못했다.

그런 벼리의 체질을 모르는 사원들은 벼리를 위해 즉석에서 술을 제조하고 있었다.








“이거 다 마셔야 해요!”




“팀장님, 원 샷 입니다!”




“원 샷! 원 샷!”





차마 술을 못 마신다고 빼기도 힘든 자리. 벼리는 자신의 테이블 앞에 놓인 술잔을 바라보다, 눈을 꼭 감고 술잔을 들었다.

입에 잔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술잔을 뺏었다.

놀란 벼리는 눈을 뜨고 자신의 술잔을 가져간 사람을 찾았고, 사원들의 시선이 몰란 곳을 바라보았다.








“어, 여긴 어떻게?”




“옆집누나, 오랜만이에요.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그동안 연락도 안하시고, 전화도 결번이라서 지일 선배님 찾아갈까도 생각했었어요.”








벼리의 술잔을 빼앗아 대신 마신 사람은 향수 축제날, 그녀의 댄스 파트너였던 하성희였다.

정말 뜻밖의 인물 출현에, 벼리는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성희는 손에 들린 술잔을 내려놓고, 벼리만큼 자신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사원들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신인배우 하성희입니다. 여기 있는 벼리옆집누나랑은 친분이 있는 사이입니다.

옆집누나가 술을 잘 못해서, 대신 제가 마신 거니까 너무 마음상해 하지는 마세요.”








신인배우이긴 하지만, 워낙 유명한 성희의 등장에 사원들은 아직도 멍한 표정들이었다.

성희도 이곳에서 회식이 있는지, 뒤 테이블 사람들이 연신 그를 불렀다.








“제가 지금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아, 응.”








고개를 끄덕이는 벼리에게 싱긋 웃어준 성희는, 그녀의 사원들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테이블로 갔다.

그가 사라지자 사원들은 그제야 좀 정신이 돌아온 듯 했다.








“우와, 팀장님 하성희도 알아요?”




“아, 어쩌다보니 알게 되었어요.”




“지일이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삼촌이라서 연관될 수도 있겠다!”




“맞다, 같은 소속사라고 들었는데.”




“근데 정말 예의 바르네요. 저는 신인이 너무 떠서, 좀 건방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맞아요, 엄청 착해 보여요!”








사원들이 너도 나도 하성희에 대한 칭찬을 했다. 벼리가 보기에도 그는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에 대한 이야기로 들떠있었다.

다시 그들만의 이야기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가게 안으로 인후와 희나가 나란히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장님, 여기에요!”




“어, 희나씨!”




“어서 오세요!”








두 사람의 등장에 조금은 수그러졌던 분위기가 다시 떠들썩해졌다.

광고부 팀은 직접 현장을 뛰어 다니는 직업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다들 활발하고 싹싹했다.

그런 사람들의 틈 속에서 지내다보니, 벼리도 많이 밝아져 있었다.








“다들 즐거워 보이네요?”




“사장님이 오늘 크게 쏘신다고 하셨다는 소리 들었습니다!”




“저희 오늘 죽을 각오 하고 있습니다.”








인후는 사원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행동에 사원들은 신이 나서, 다시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인후는 벼리의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에이, 우리 사장님 너무 티내신다!”




“사장님도 팀장님 대신 흑기사 하세요!”




“흑기사?”








갑작스러운 사원들의 흑기사 요청에 인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벼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벼리는 그냥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 팀장님이 마시려던 술을 하성희씨가 마셨거든요!”




“사장님도 아시죠, 떠오르는 샛별 하성희.”




“정말 멋있었어요.”




“사장님은 팀장님 애인이시니까, 질 수 없잖아요.”








하성희라는 말에 인후는 벼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지난 향수 축제 때, 인후가 아직 그녀의 본 모습을 몰랐을 때, 그녀와 춤을 추던 파트너가 하성희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지금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우와 그녀가 아는 사이라는 사실에 그는 괜히 불안해졌다.

또한 하성희라는 인물에 대한 평판이 너무 좋은 것도 문제였다.

그에 비하여 젊고 인기 많은 하성희가 그녀의 흑기사가 되어 주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보다 많이 따라줘요.”




“네?”




“아까 하성희가 은 팀장을 대신해 마셨던 술보다, 더 많이 따라줘요.”








인후의 귀여운 질투에, 벼리를 비롯한 사람들은 미소를 지었다.

벼리를 제외한 사람들은 인후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의외의 모습에 놀람도 있었지만, 벼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인후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사장님은 광고부 팀, 특제 소맥을 제조해 드리겠습니다!”




“이거 정말 아무 곳에서나 맛볼 수 없는 맛입니다.”








모두들 준비라도 한 것처럼, 인후에게 줄 술을 일사분란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인후 앞에 놓은 술, 인후는 벼리가 말릴 새도 없이 빠르게 그 술을 마셨다.

직원들은 화끈한 인후의 모습에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이거 다 마셨으니, 내가 소원 빌 차례 아닌가?”




“당연하죠. 사장님은 정말 제대로 된 술을 마셨으니, 큰 부탁 하나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죠, 팀장님?”




“그, 그럼요.”








벼리는 인후가 무슨 부탁을 할지 몰라 불안했다. 인후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내 부탁은 우리 먼저 들어간다는 겁니다.

여기 희나씨가 오늘 술 계산은 알아서 할 테니까, 오늘은 미안하지만 팀장님 좀 빌리겠습니다.”




“앗, 사장님 그러시는 게 어디 있어요!”




“팀장님 오늘로 저희랑 마지막이란 말이에요. 정말 너무 하세요!”




“너무 한 것 아닙니다. 제가 은 팀장 찾고 나서 지금까지, 단 둘이 있어본 시간이 길지가 않아요.

우리 아직 사귄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인데, 좀 너무하다 싶지 않아요?”




“사장님!”




“은 팀장은 가만히 있어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뭐, 그건 그렇네요.”




“그럼 오늘 회식비로 얼마가 나와도, 다른 말 하지 않는 거세요?”








직원의 질문에 인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식비가 무제한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에 사원들은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정말 너무하네. 내가 회식비에 밀린거야?”




“팀장님, 죄송합니다. 이런 기회 정말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잖아요!”




“저희를 용서하시고, 사장님이랑 오붓한 시간 가지세요!”




“팀장님, 사장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정중한 사원들의 배웅에, 벼리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인후를 바라보았다.

인후는 그저 희나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벼리의 손을 잡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정말, 이게 뭐에요.”




“뭐가?”




“내가 창피해서 회사를 못가겠어.”




“나 이러다 정말 딱 죽을 것 같더라. 당신 안아본 지가 언제인지, 생각도 안 나는 거 알아?”




“으휴, 이 늑대!”




“내가 늑대면, 당신은 여우야. 오늘 회사에서 내가 얼마나 당신 안고 싶었는지 알아?”




“치이, 변명은 잘 해요.”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안돼요.”




“아버님이 당신 재워달라고 하던데? 아버님 오늘 집에 못 들어가신다고, 당신 걱정된데.”




“뭐라고요? 아빠가 집에 못 들어온다니, 그런 일은 일 년에 한번 있기도 힘든 일인데.”




“걱정은 안 해도 돼.”




“인후씨가 어떻게 알아요? 아빠가 왜 못 들어오는지 말해줬어요?”




“응.”




“무슨 일인데요?”




“비밀. 당신도 곧 알게 될 거니까, 조금만 참아.”




“그게 뭐에요, 아빠한테 전화해봐야지.”








벼리는 새로 산 핸드폰을 꺼내 영일에게 전화를 하려했지만, 인후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녀의 핸드폰을 뺏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은 그는 그녀를 자신의 차에 태웠다.








“인후씨!”




“오늘은 우리 둘만 생각하자, 응?”




“.......... 오늘만 이에요!”








간절한 부탁에, 마지못해 인후의 부탁을 들어주는 벼리.

그는 그녀의 손을 한번 꼭 잡은 뒤, 빠르게 차를 몰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 o54 [19禁]











“하아, 인후씨, 이제 그만!”




“지금 그만두라고? 절대 안 돼.”








벼리는 집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입맞춤을 해오는 인후의 행동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그녀는 아직 현관문에 기대어 그의 저돌적인 키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인후는 한참만에야 그녀를 안아 들어, 자신의 허리에 그녀의 다리를 두르고 그녀의 구두를 벗겨낸 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진지는 너무도 오래되었기에,

인후는 벼리가 이런 관계를 나누는 것에 서툰 것을 알면서도 배려해줄 수가 없었다.

배려를 해주기에는 그녀와 떨어져있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더구나 오늘은 다른 사람을 통해, 그녀를 자신 외에 남자가 그녀를 도와주었다는 것을 들었다.








“미안, 벼리야. 나 지금 당신 너무 간절하다.”




“인후씨.”




“나중에 욕먹을게, 지금은 그냥 나 좀 살려주는 셈 치고, 힘들어도 안겨주면 안 될까?”




“당신이 이렇게까지 이야기 하는데, 내가 안 들어줄 것 같아요? 그렇게 울상 짓지 말아요, 사랑하는 사장님.”




“벼리야.”




“정말 몸만 다 컸지, 어린애라니까.”








벼리는 자신을 가볍게 안아 든, 인후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자신이 먼저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그는 안심하고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혹시나 그녀가 자신을 혐오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던 것이다.

그러기에는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씩이라도 먼저 다가와주는 그녀의 행동이 그는 너무 감사했다.

쉬운 일은 아닐 텐데도, 그녀는 그를 위해 스스로가 조금씩 다가온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래도, 미안. 그리고 사랑해.”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인 인후는, 침대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는 자신의 옷을 벗고, 그녀에게 다가가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옷을 벗긴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아찔한 기분에 휩싸였다.

옷을 벗김으로 조금씩 드러나는 그녀의 몸을, 그의 뜨거운 입술이 맛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 몸의 모든 부분을 자신의 입술이 기억하도록 하려는 듯이, 그의 입술은 분주하게 그녀의 모든 부분을 훑고 지나갔다.

그의 입술 움직임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신음소리도 깊어져갔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입고 들어온 옷은, 모두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침대 위에 사랑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은 온전히 맨 몸인 상태였다.

인후는 옷 속에 숨겨진 육감적인 벼리의 몸을 본격적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가진 후부터는, 그녀가 어떤 옷을 입고 있어도 그녀의 알몸을 연상시킬 수 있었다.

회사 소파, 전용 휴게실 등 그녀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는 곳은 널리고 널렸다는 사실이

그를 더 힘들게 했다. 그녀의 몸은 가지면 가질수록 마약처럼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마치 신이 그의 짝으로 그녀를 만들어 놓은 양, 일에서나 사랑에서나 그녀는 그에게 완벽한 존재였다.

지금까지 여자의 몸을 알 만큼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의 오산이었다. 여자의 몸을 아는 것은 쉬웠다.

세상 모든 여자의 몸을 알아도, 평생을 함께할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모른다면 그건 행복한 인생이 아닌 것이다.

벼리를 알게 되고서야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정말 당신 없었으면, 난 아마 평생 사랑을 몰랐을 거야.”




“아아, 아앗!”








그녀의 은밀한 곳을 그의 손이 깊이 파고들었다. 봉긋 솟은 가슴에 고개를 묻은 그는 귀여운 그녀의 반응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그녀의 허리가 점점 휘어갔다.

그 순간 너무 섹시한 벼리의 표정에, 인후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날카로운 숨을 쉬는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면서, 인후는 그녀의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감싸고는 그녀를 가졌다.

벼리는 그 순간 밀려오는 고통에, 소리를 지르며 그의 목을 세게 감싸 안았다.

그녀가 오랜만에 하는 사랑에 많이 힘들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의 행동은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고통으로 잔뜩 인상을 쓴 그녀의 이마를 쓸어주면서도, 그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방안은 두 사람의 사랑행위로 처음 들어올 때와는 달리, 따스한 공기가 돌았다.








“인후씨, 이제.. 그..그만!”




“조금만.. 조금만 더..”




“하앗.. 으응... 인후씨.. 앗!”




“아직.. 아직이야.. 벼리야, 조금만 더..”




“하앙.. 아아아.. 핫!”








그녀는 이제 고통이 아닌 절정을 맛보고 있었다.

처음에 고통으로 가득했던 목소리가, 지금은 듣는 사람이 긴장할 만큼 섹시하게 변해 있었다.

인후는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더욱 흥분되고 있었다.

자신으로 인해 절정을 느끼는 사랑하는 사람을 본다는 것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느낄 수 없는 종류의 감동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벼리를 괴롭힌 인후는 자신도 이제는 한계라는 것을 느꼈다.








“벼리야!”




“아앗, 인후씨!”








그녀의 허리를 껴안은 그는 마지막으로 가장 깊숙한 그녀의 몸을 맛보고 있었다.








-




처음 사랑을 나눌 때와는 너무도 다른 그의 사랑에, 그녀는 손 하나 까닥할 힘이 없었고,

허리는 움직이지 않아도 아릿한 고통이 남아있었다. 또한 그녀의 몸은 아직도 그의 사랑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뜬 순간, 행복함을 느꼈다.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자신이 잠을 자는 내내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허리를 만져준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 잤어요?”




“어, 당신 일어났어?”




“내가 먼저 질문 했어요, 사장님.”




“아, 어제는 너무 내 생각만 해서, 당신 오늘 힘들 것 같아서.”




“나 당신 쪽으로 몸 돌려줘요, 당신 입술에 키스하고 싶어.”








인후는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벼리가, 몸을 돌려달라는 부탁에 또 다시 미안해졌다.

지금 그녀는 몸을 움직일 힘이 전혀 없는 것이다.

자신이 돌려준다 해도 고통을 느낄 그녀가 눈에 훤한 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는 가만히 놔두고 자신이 그녀의 몸을 넘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치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그래도 당신 힘들잖아.”




“그런 거 잘 아시는 분이, 어제 밤에 그렇게 절 밤새 괴롭히셨어요?”




“벼리야, 미안.”








벼리는 정말 많이 미안한 기색을 보이는 그의 얼굴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손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그녀는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난 인후씨가 날 더 사랑해줘도 상관없어요, 인후씨 나는 장난감이 아니에요.

당신이 사랑을 심하게 한다고 해도 망가지지 않으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요.”








벼리는 힘없는 자신의 손을 따라와 주는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목을 살짝 빼서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지금이라도 좀 자요, 인후씨. 나 때문에 잠도 못 잤잖아.”




“난 괜찮아, 당신은?”




“나도 괜찮아요.”








인후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자신이 반지를 분명히 끼고 회사를 간 적이 없는데, 지금 자신의 손에서 무엇인가가 반짝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반지가 끼어져 있는 곳은 그녀가 한 번도 끼어본 적 없는 왼손 네 번째였다.








“인후씨.”




“응?”




“나 지금 눈이 이상한 건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당신 눈 아무 이상 없어.”




“근데 왜 지금 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어져 있는 것 같죠?”




“그게 보여? 그럼 당신 눈은 정상이야.”








벼리는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손을 자신의 눈 가까이로 가져왔다.

엄청 고가로 보이는 핑크빛 다이아반지가 그녀의 손에 끼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다짐대로 그녀를 위해 특별주문으로 반지를 제작했고, 그동안 틈이 없어서 줄 수 없었던 반지를 오늘 새벽,

그녀가 잠이 든 사이 조심스럽게 끼어준 것이다.








“마음에 들어?”




“.........”




“벼리야, 울어?”




“... 당신은 항상 나 놀라게 만드는 거 알아요?”




“울지 마, 사랑하는 아가씨.

옛날 사람들은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이 심장이랑 가장 가깝다고 느꼈데, 그래서 결혼반지를 이 자리에 낀다고 하더라.”








인후는 반지가 끼어진 벼리의 손에 입맞춤을 하고,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당신의 심장에 가장 가까운 손가락은 이제 내가 차지한 거야, 그리고 내 심장은 당신이 차지해 주었으면 좋겠어.

벼리야, 나랑 결혼해 주겠어?”








너무 많이 울어서, 목이 메어왔다. 인후의 질문에 목이 메어 답하지 못한 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목을 끌어안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인후는 웃으면서 다정하게 달래주었다.








“사랑해, 은벼리 아가씨. 아니 이제는 은벼리 아줌마인가?”










※ o55













[벼리,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인후씨가 어제 청혼했다고, 노땅한테 제일 먼저 말해주는 거야.”








벼리는 인후에게 달콤한 청혼을 받은 다음 날, 제일 먼저 외국에 나가있는 지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벼리는 수화기 너머로 지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제부터 연락이 두절된 영일을 제외하고, 누구보다 먼저 축하의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은 다름 아닌 지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지일의 반응을 보니, 자신이 경솔하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이 삼촌도 아직 결혼은 못해봤건만, 어찌 네가 날 버릴 수 있는 거야!]




“응?”








반대할 줄 알았건만, 예상외의 대답에 벼리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녀를 배려해주는 그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축하한다는 못 들어서 조금은 서운했지만, 반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웠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조카야, 그거 아니? 너의 아버지도 아직 결혼은 못 해보셨단다. 뭐 조만간 결혼 할 것 같지만.]




“뭐? 아빠가 결혼한다고?”




[나 지금 쇼 들어간다. 나중에 또 전화할게!]




“노땅, 그게 무슨 말이야!”




[나중에 형에게 직접 들어. 내일이면 나도 한국 들어가니까, 그때 보자 조카님.]




“치이, 알았어. 실수하지 말고, 잘해.”




[당연한 소리를, 괜히 내가 아시아의 별이라고 칭송받겠어?]




“또 그놈의 왕자 병 도졌다. 어서 끊어!”




[조카야.]




“응?”




[사랑하는 조카야.]




“왜 그래,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해.”




[결혼식 날, 넌 누구보다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있을 거야. 정말 진심으로 축하한다.]




“.........”




[그 위태롭던 아이가, 이렇게 자라서 결혼을 한다는 것이 정말 꿈만 같다.

벼리야, 결혼을 하더라도 나랑 형은 언제나 너의 편이라는 사실 있지 마. 내일 보자.]








지일이 전화를 끊을 때까지, 벼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누구보다 축하받고 싶던 사람의 진심어린 축하가, 이렇게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고마워, 내가 이 세상에 죽지 않고 살게 해준 한 사람.”








한편, 지일은 벼리의 전화를 끊고 서둘러 무대로 향했다.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지일은 평소보다 배는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무대를 넋 놓고 바라보는 사람들과 무수히 많은 기자들의 셔터를 누르는 소리로 예상컨대,

내일 신문 기사의 1면 장식은 그 누구도 아닌 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 누구보다 아끼는 한 사람의 결혼이, 그의 미소를 이렇게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




“회장님, 잠시 만요.”




“왜 그래?”




“이건 정말 뭐가 잘못된 것 같아요.”




“현주야, 대체 뭐가 두려운 거야. 혹시 벼리 때문에 그러는 거야?”








현주는 영일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벼리는 그에게서처럼 그녀에게도 그 어떤 값진 보석보다 소중한 사람이었다.

단지 갑작스럽게 오랜 짝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 상황이 그녀는 두려울 뿐이었다.

지금 그녀는 꿈을 꾸는 것 같이 자욱한 연기 속에 휩싸여,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뭔가, 정말 뭔가 아닌 것 같아요.”








혼란에 휩싸인 현주를 바라보던 영일은,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주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영일이 가끔 어쩔 수 없이 회사에 24시간 이상 있어야 할 때

그가 잠시 들리는 그의 명의로 된 자그마한 집이었다. 지일도 벼리도 모르는 오직 그만의 공간이었다.








“불안해하지 마, 지금 내 감정은 충동적인 것이 아니야.”








영일은 지금 현주가 불안해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그의 마음이 단순한 충동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잘 알고 있기에 생기는 모순이었다.

현주가 알고 있는 영일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한 없이 관대한 사람이고,

그들의 요구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몇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현주는 영일이 자신을 잃게 되는 것을 선택하느니,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으로 그녀를 붙잡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어쩔 수 없는 진퇴양난 속에,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그녀는 여기고 있었다.








“이현주.”




“네? ..앗!”








그의 부름에, 여전히 불안한 그녀의 눈동자가 영일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는 조금은 거칠게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살결이 드러난 그녀의 어깨선을 따라,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회, 회장님..!”




“난 못해.”




“...네?”




“내가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무리한 부탁도 들어주려 노력하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내 인생의 전부가 될지도 모르는 결혼까지 희생하는 짓은 난 못해.”




“........”




“넌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잖아, 내가 널 위해 희생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그거 알아?

내가 지금껏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미친 듯이 숨기고 있던 이유가, 내가 네게 걸림돌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는 거.”




“그게 무슨..”




“내가 창조 회사의 회장이라고 당신에게 차고 넘치는 사람이 아니야.

당신도 유명세를 타고는 있지만, 나랑 결혼하게 되면 벼리에 관한 문제부터 시작해서 기자들의 끊임없는 간섭을 받게 될 거야.

물론 내가 막을 수 있는 만큼은 막겠지만, 가끔 막을 수 없는 기자들도 있기 마련이지.

당신은 나와 결혼한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그런 기자들과 끊임없이 부딪히게 될 거야.

난 언제나 생각했어, 당신이 정말 내 아내였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당신이 내 아내가 된 순간부터 잃게 될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 도무지 용기가 나질 않았어.

내 품안에서는 한 없이 행복하게 해줄 수 있지만, 내 품을 벗어난 잠시 동안 당신이 어떤 상처를 받을지는 모르는 것이야.

난 그게 겁이 났어. 하지만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 그런 걱정들이 부질없다는 생각을 했어.

물론 아직도 당신에게는 미안해, 하지만 지금 내 품에 안긴 당신을 놓아주지는 않을 거야.”




“...회장님..”




“현주야, 내가 이렇게 염치도 없이 당신을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이제 내 마음을 나도 제어를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야.

내 권력이라면, 충분히 당신을 온실 속의 화초처럼 지켜줄 수 있어.

하지만 벼리가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처럼, 당신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아.

당신을 화초로 만드는 온실은 되어 줄 수 없지만, 당신이 힘들 때 문득 뒤 돌아보면,

언제나 곁에 있어주는 그림자가 될 수는 있어. 언제나 기대어 울 수 있는 나무가 될 수는 있어.”








현주의 일렁거리는 눈동자 때문에, 그녀의 눈동자의 비춰지는 영일의 모습도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작고 가녀린 그녀를 다시 꽉 안았다. 그의 가슴께에 닿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잠시 뒤, 그의 셔츠가 조금씩 젖어들고 있었다.








“사랑해, 이현주. 이제부터 당신에게는 창조그룹 회장이 아닌, 그저 당신을 사랑하는 한 남자로 있고 싶어.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이후로는 날 회장님이라고 부르지 마.

난 당신 앞에서는 한 없이 미안하기만 한, 하지만 당신을 놓아줄 수는 없는 지독한 사랑에 빠진 나쁜 남자일 뿐이니까.”








영일은 여전히 그의 셔츠를 적시며, 고개를 끄덕이는 현주의 행동이 귀여웠다.

그의 손에 의해, 위로 들린 그녀의 얼굴에는 아까의 불안감은 없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사랑에 빠진 여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일 지일이한테 연락하고, 당신 집에 정식으로 인사 가자.

그리고 벼리 녀석 요즘 연애하느라 바쁘니까, 벼리한테는 그 후에 말해주자.”




“...네.”




“그럼 이제 서로 마음도 알았으니, 서로의 몸도 알아 볼 차례인가?”




“꺄악!”








가뿐히 그녀를 안아든 영일은 자신들이 있던 거실을 지나, 넓은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현주를 침대에 내려놓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을 탐하는 영일의 모습에는, 그의 말대로 창조그룹 회장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한 여자를 너무나 사랑하는 남자, 은영일만 있을 뿐이었다.











※ o56 [19禁]















영일은 자신만이 들어올 수 있는 이 공간에,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이상했다.

그리고 그 상대가 벼리도, 지일도 아닌 현주라는 사실이 더욱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녀를 이런 마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항상 사랑하는 마음을 숨긴 채 그녀의 좋은 동료로 있기 위해, 지난 몇 년간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정확한 마음을 알고, 자신의 마음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런 노력은 필요 없었다.

이제는 마음껏 그녀의 얼굴을 지금처럼 만질 수 있었고, 그녀의 입술을 지금처럼 탐할 수 있었다.








“이현주.”




“네?”




“지금 우리 꿈꾸는 거 아니지?”




“.....아니에요.”




“만약에 꿈이면, 어떻게 하지?”








영일의 나약한 모습에, 현주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보다 한참 위에 있는 그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얌전하게 끌려오는 영일의 모습에서는, 평소의 완벽한 은영일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지금 당신도, 나도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아마도..”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면, 뭐가 걱정이에요.”




“무슨 말이야?”




“꿈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것이니까, 꿈에서 깨어난다고 해도 다를 것은 없잖아요.”




“그런가?”




“당연히 그렇죠. 비록 꿈이라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확실히 알고 있는 거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그럼, 당신을 가지는 것이 지금은 꿈이어도, 나중에 또 다시 가질 수 있는 거야?”




“으휴, 은영일씨!”








현주는 다시 장난스러운 말을 던지는 영일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리고는 용기를 내서, 그녀가 먼저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지금 나 유혹하는 거야?”




“정말, 그냥 받아주면 안 돼요?”




“그렇다면야, 나야 황송하지.”




“..읏!”








영일은 귀여운 현주의 행동에, 더 이상 그녀를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주의 얼굴을 영일의 큰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수줍게 다가오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영일씨?”




“그냥 받아준다고 했잖아, 어서 아까 하던 유혹 계속 해줬으면 좋겠는데?”




“뭐라고요? 당신 정말 짓궂은 거 알아요?”




“알고 있는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안 되기 때문에, 아마 당신이 아무리 소리치고 다녀도 믿을 사람 없을 걸?”




“당신 점점!”




“그것보다, 어서 하던 거나 마저 해달라니까요.”








영일은 아까처럼 다시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목석처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현주는 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그녀 스스로 그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가 느끼기에는 너무 어설프고 서툰 키스일 테지만, 그녀 인생에서는 생전 처음 해보는 대담한 키스였다.








“더 움직여.”




“하지만..”




“현주야, 어서..”




“..정말 이럴 때는 미워 죽겠어.”








영일의 무리한 요구에 현주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두 눈을 꼭 감고 그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대담하게 변한 그녀의 태도에 그는 그녀를 안아, 침대가 있는 그만의 방으로 옮겨갔다.

항상 자신만이 눕던 침대에, 사랑하는 사람이 누워있다는 것이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벌써 어두워져 창가에 스며드는 달빛을 받고 있는 현주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특히나 오늘은 현주가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담담하게 이별하기위해, 다른 때보다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를 찾아갔었다. 두 사람만의 소란으로 인해 조금 흐트러져있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정말 나 당신이랑 항상 붙어있어야겠다.”




“하아.. 하아..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이렇게 남자들을 홀리는 모든 것을 갖춘 여자가 내 여자라는데, 내가 회사에 앉아서 일이 잘 되겠어?”




“뭐에요?”




“당신 가게 우리 회사 옆으로 옮겨라, 내가 옮겨줄게. 그리고 당신 작업실은 내 사무실 더 획장하자.”




“영일씨, 정말 점점 왜 그래요.”




“나 이런 독점욕 강한 남자야, 그건 이미 알고 있었잖아.”




“그동안 이 독점욕 숨기느라 어떤 노력을 한 거예요? 지금 새삼 당신이 대단해보여요.”




“내 고통을 조금이나마 알았어? 그럼 이리와!”




“앗!”








능숙하게 현주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는 영일은, 곧 자신의 옷도 벗었다.

달빛을 받아 투명하게 비춰지는 현주의 완벽한 나신이, 그의 마음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정말, 내일은 아무데도 못 가게 만들어야겠다.”




“무슨 소리에요?”




“무슨 소리인지는 지금부터 느껴봐.”








현주의 서투른 키스와는 차원이 다른 영일의 능숙한 키스 솜씨에, 현주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침대에서 나는 그의 냄새가 점점 진해지는 것과, 입에만 머무르던 뜨거운 기운이 온 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하아, 하아!”




“현주야, 하아..”




“아앗! 자, 잠시만..”




“안 돼, 미안..”








한참을 엉켜서 서로를 만지던 두 사람은, 이미 달아오를 데로 달아올라 있었다.

영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그녀를 다시 똑바로 눕게 하고, 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쳤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던 현주도, 괴로워 보이는 그의 표정과 뜨거운 그의 몸을 통해 그의 상태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조금은 두려웠지만, 그녀도 그와 하나가 되고 싶었다.

더 이상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영일은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의 안을 점령했다.

점령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두 사람의 호흡은 거칠어졌고, 심장은 무서운 속도로 뛰었다.

달빛아래서 두 사람은 그렇게 시작된 사랑을 오랫동안 멈추지 못했다.





*




“지일씨, 이번에도 완벽하게 쇼 원정을 마무리하셨는데,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이번에 조카일로 잠시 입국을 하셨는데, 다시 돌아가셨을 때 현장 반응은 어떠셨나요?”




“이번에도 모든 디자이너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으셨는데, 언제쯤 다시 볼 수 있는 것인가요?”




“향수 광고 모델 승낙은 결국 조카를 위한 것이었나요?”








역시 기자들답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지일이 입국하는 공항은 많은 취재진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지일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끊임없이 질문을 시작했고,

희나는 그런 기자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은 지일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그 복잡한 곳을 나오려 애를 썼다.








“아, 잠시 만요. 꺄아악!”








밀려오는 수많은 기자들과 카메라에, 빠져나오지 못하던 희나는 뒤에서 밀치는 기자들 덕분에 발을 헛디뎠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당연히 느껴져야 할 통증이 아직까지 느껴지지 않았고,

귓가에는 아직은 조금 낯선 사람의 안정된 호흡이 들려왔다.

눈을 감고 있던 희나가 눈을 떴을 때는, 가장 먼저 자신이 자난 며칠간 너무나 그리워했던 지일의 모습이 보였다.







“괜찮아?”




“지일씨?”




“아무튼 내가 이래서 눈을 뗄 수가 없다니까.”








희나는 그 멀리 있던 지일이, 넘어지려던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녀가 아까 멀리서 바라보았던 지일은 아직 저기 기자들 사이에 있었다. 하지만 지일은 또 자신의 옆에 있었다.

어리둥절한 희나의 표정에 지일은 그저 장난끼 묻은 얼굴로 씨익 웃을 뿐이었다.








“나중에 설명할게, 들키기 전에 어서 나가자.”




“에에?”








지일은 능숙하게 복잡한 기자들 사이를 빠져나갔고, 그들이 기자들과의 사이가 조금 멀어졌을 때,

기자들의 입에서 ‘지일이 사라졌다.’, ‘지일이 아니다.’, ‘진짜 지일은 어디 있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지일과 희나는 준비된 벤에 여유롭게 오르고 있었다.













※ o57















“자, 이거 받아.”




“이게 뭐에요?”








취재진들로 가득한 공항을 빠져나온 지일은, 옆에 있는 희나에게 꽤나 큰 쇼핑백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준 쇼핑백과 똑같은 것이 그에게 두개나 더 있었다.

쇼핑백의 정체가 뭔지 궁금한 희나의 물음에도, 그는 어깨만 으쓱 할 뿐이었다.








“이, 이게 다 뭐에요?”




“그냥, 우리 벼리가 기념선물은 잊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이번에 원정했던 나라들에서 하나씩 샀어.

이제 벼리를 챙기면, 두 명 더 챙겨야 하거든.”








지일이 건네준 쇼핑백에는, 귀여운 액세서리부터 값비싼 고가품까지 가득했다.

워낙 큰 쇼핑백이라 넘치지는 않았지만, 천하의 지일이 이런 물건을 직접 골랐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선배님과 연락은 하셨어요?”




“응, 오늘 들어오는 거 알아. 저녁에 만나기로 했어, 나 없는 동안 우리 벼리가 중대한 결정을 했더라고.”




“중대한 결정이요?”




“응, 어린 줄 알았는데 정말 많이 컸더라고. 그래도 내 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지만.”




“벼리 선배님, 제 눈에는 한 없이 높아 보이는 분이신데요?”




“송희나에게 은벼리는 선배고, 은지일에게 은벼리는 조카니까.”








희나는 딱 부러지는 명쾌한 지일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희나는 자신의 시선을 다시 그가 준 쇼핑백으로 옮겨왔다.








“정말 고마워요, 예상치 못한 선물이라서 너무 기뻐요.”




“기뻐하니까 열심히 고른 보람이 있네.”




“정말 일일이 직접 다 고르신 거예요?”




“벼리가 워낙 까다로워서, 누가 고른 물건인지 귀신같이 알아내거든. 이번엔 꼭 내가 직접 골라서 사오겠다고 그랬었어.”




“그렇구나. 은벼리 선배님은 정말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는 것 같아요.”




“그 아이는 사랑받아 마땅한 아이거든, 희나도 그렇고.”




“네?”








벼리의 사랑이 느껴지는 지일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희나는, 갑작스러운 지일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희나 스스로 해 본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더 놀라웠다.








“뭘 그렇게 놀라, 희나도 한 없이 사랑스러워.”




“그,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니까, 놀라는 내가 이상한 것 같아요.”




“아무도 이런 말을 해준 적 없어? 천하의 지일이 하는 말이니까 믿어도 돼. 희나는 사랑스러운 여자야.”








지일의 사랑스럽다는 말이, 희나의 귀에는 마치 사랑고백처럼 들려왔다.

감미로운 지일의 목소리가 희나의 얼굴을 붉어지게 만들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그녀는, 그저 쇼핑백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에 지일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배 안고파?”




“아, 한국 음식 한동안 못 먹어서 그리우셨죠? 오늘은 제가 사드릴게요.”




“그래?”




“네, 뭐 드시고 싶은 것 있으세요?”




“희나가 만들어준 음식이 먹고 싶어.”




“제가요?”




“요리 못해?”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오늘 점심은 희나가 직접 만들어준 한식을 먹고 싶은데, 안 될까?”




“근데 어디서 음식을 해요?”




“그거야 당연히 우리 집이지.”






.

.




“저, 들어가도 돼요?”




“응, 들어와. 집주인이 괜찮다 하잖아.”




“그래도..”




“이제 와서 왜 그래, 내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 사양하지 말고 들어와.”








희나는 지일의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왔다.

창조그룹 회장과 톱 모델 지일, 그녀의 우상인 벼리가 사는 집이라서 희나는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지일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웅장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평범한 집처럼 아기자기하고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집이었다.








“어, 옆집누나?”




“지일아!”








희나가 그렇게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사이, 부엌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앞치마를 두르고 지일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희나는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함께 사는 집인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생했어, 네 소식은 신문이랑 방송으로 다 봤어. 이제 한 동안 쉬는 거지?”




“응, 옆집누나가 있으면 형도 있겠네?”




“아, 응. 오늘 일요일이잖아.”




“옆집누나 우리 집에 너무 오랜만인거 알아? 이제 옆집누나가 아니라 형수님인가?”




“정말, 이 집 남자들은 하나같이 능구렁이들이야. 그런데 저기 예쁜 숙녀 분은 누구?”




“옆집누나, 이쪽은 인후 회사에서 일하는 송희나씨. 희나씨, 이쪽은 친 옆집누나와도 같은 이현주 옆집누나.”




“안녕하세요, 송희나입니다.”




“안녕하세요, 이현주에요. 내가 늙긴 늙었다보다, 이 손 좀 봐! 정말 아기피부 같다.”




“아니에요, 오히려 너무 아름다우세요. 벼리 선배님 아름다운 것과는 다른 느낌인 것 같아요.”




“어머, 정말요? 빈 말이라도 너무 고마워요.”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갈 때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나는 그 문소리의 주인공이 영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창조그룹의 회장을 사석에서 만난다는 사실에 그녀는 경직된 표정으로 문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지일이 왔냐?”




“형, 다녀왔어.”




“너 일하다 온 거 맞아? 저 예쁜 아가씨는, 어떻게 데려온 거야?”




“지금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인데, 형보다는 열심히 일했어. 형은 옆집누나 잡고 결혼해 달라고 사정하느라, 일도 제대로 못했지?”




“아무튼 형한테 한 마디를 안 져요.”








희나는 생각보다 편안한 분위기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자신에 비하면 다들 너무나 대단한 사람들이고, 하나같이 외모 면에서도 뛰어난 사람들이라

위축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첫 만남이기에 어색한 것도 한 몫하고 있었다.








“집까지 데려올 정도면, 상당히 소중한 아가씨인가 보네.”




“당연하지.”




“만나서 반가워요. 지일이 녀석이 요즘 신이 난 이유가 아마도 아가씨 때문이었나 봐요.

난 은영일이고 회사 회장 자리를 맡고 있긴 한데, 아가씨가 무서워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은 아니니까 너무 무서워하지는 말아요.

회사는 대단하지만, 그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내가 아니라 우리 직원들이라서.”




“아, 송희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철없는 지일이 좀 잘 부탁해요.”




“오늘 옆집누나가 아무래도 밥 해줄 것 같다, 우리 오늘은 그냥 얻어먹자.”








예상과는 다른 따듯한 환대에, 희나는 긴장했던 몸을 조금은 풀 수 있었다.

지일은 희나를 데리고 냉큼 소파에 앉았고, 현주가 과일과 차를 내왔다.








“영일씨, 밥 거의 다 되어가니까 식탁 좀 차려줘요.”




“알았어.”




“아니, 이거 좀 먹고 해요. 그렇게 바로 가면 어떻게 해요.”








현주의 말에 영일은 다시 소파에 앉아, 현주가 건네는 과일을 받아먹었다.

희나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광장이 의아해 보이면서도, 너무나 잘 어울렸다.








“희나씨, 오늘 저녁까지 같이 먹고 가요. 저녁 먹기 전에는 벼리도 올 거야.”




“그렇게 해요, 아가씨.”








현주와 영일의 제안에, 희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바로 후회를 하긴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는 없었다.













※ o58















“다녀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식사 준비가 거의 끝날 무렵, 벼리와 인후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벼리의 도착에 누구보다 먼저 마중나간 것은, 음식이 담긴 접시를 열심히 나르던 영일이었다.

영일은 아직 신발도 벗지 않은 벼리를 안아주면서, 인후에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게, 우리 딸도 수고 많았어.”




“아빠, 대체 우리 가족 맞아? 왜 연락이 안 돼?”




“미안, 미안. 우선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오늘은 특별한 손님도 오셨어.”




“특별한 손님?”








특별한 손님이라는 말에, 벼리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지일의 옆에 낯익은 희나가 함께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간은 놀란 벼리의 표정을 본 희나는, 약간은 붉어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희나씨?”




“선배님, 안녕하세요.”




“우리 벼리 왔어?”








지일은 긴 다리로 당황한 표정의 벼리에게 다가와 그녀를 안아주었다. 벼리도 자연스럽게 그의 행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다 지일을 떼어내, 그에게 뭔가 답을 원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많이 좋아해.”




“에에?”








벼리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대답이, 지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순간 벼리는 잠시 동안,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네가 인후 사랑하는 것처럼, 내가 희나 사랑한다고.”




“정말이야? 어떻게 나는 지금까지 모를 수 있었지?”




“당신, 이런 쪽으로 둔하잖아. 나는 진작 알고 있었는데?”




“정말요? 인후씨 말대로 내가 둔한거야? 혹시 어제 할 말 있다는 게 이거였어?”








벼리의 물음에, 지일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벼리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의 옆에 있는 희나를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을 보니, 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사실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희나씨가 순진해서 노땅에게 넘어간 거야. 희나씨 정말 예쁘고 순수하니까, 눈 부릅뜨고 있어야 할 걸?

희나씨가 회사에서 얼마나 인기 많은지 알아?”




“서, 선배님!”




“왜, 희나씨 정말 인기 많잖아. 내가 뭐 없는 말 했나? 내 말이 맞죠, 인후씨?”




“하긴, 잠시 내 비서로 있을 때도, 남자 사원들이 음식이다 뭐다 잔뜩 사들고 들락거리더군.”




“그것 봐! 노땅 어떻게 희나씨 잡았는지 몰라도, 아마 날아가지 않게 잘 지키고 있어야 할 거야.”




“그렇게 인기가 많았어, 희나? 하긴 내가 한 눈에 반할 정도면, 말 다한 거겠지.”








희나는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몰리자, 조금은 쑥스러워서 지일의 곁으로 더 붙었다.

그런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벼리는 놀라긴 했지만, 그 모습을 보니 둘이 상당히 잘 어울린다는 것을 느꼈다.








“자, 다들 그럼 부엌으로 모이세요. 그렇게 거실에서 서서 밤 샐 건 아니죠?”








현주의 말에 거실에 있던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 한 가득 차려진 음식에, 그들은 저절로 탄성을 지르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다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겠지만, 우선 밥은 먹어야죠? 밥은 식으면 맛이 없어지잖아요.”




“네!”








현주가 그렇게 말한 후, 식탁에 앉은 그들은 밥을 먹었다.

벼리는 많은 사람이 함께 하는 지금 이 시간이 매우 행복하게 느껴졌다.

아마 그녀가 찾던 진정한 행복은 지금 이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 이제 누구부터 이야기 할까.

우선 벼리 이야기 들어볼까? 명분은 벼리랑 인후 이야기를 정식으로 듣기 위해 모인 거니까.”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함께 모여 앉은 그들은, 이제 오늘 모인 이유를 해결하려했다.

지일의 권유에 인후와 벼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저희 결혼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 신중하게 결정한 거야?”




“네, 많은 생각을 한 결과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심장을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형 생각은 어때? 난 일단 찬성이야. 어차피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오히려 늦어지는 게 이상할지도 몰라.”








영일은 아무 말 없이, 벼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린 하나뿐인 딸 벼리.

세상에 그 누구도 그녀를 구해주지 못한다면, 그의 평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그것은 아마 그의 동생인 지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벼리는 자신의 반려를 찾았고, 지금은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도 당연히 찬성이다. 지금까지 봐온 것으로 보면, 최고의 신랑감이니까.”




“아빠,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인후는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벼리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이제 정말 그녀가 자신의 손에 잡힌 기분이다.

벼리도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한 듯,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럼 다음은, 형이랑 현주옆집누나로 넘어가볼까?”




“아빠랑 언니? 혹시 두 사람..”




“딸, 아빠도 결혼할거다. 전에 이야기했지? 아직 너보다 소중하고, 아껴주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났다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여자가, 이제 너보다 더 많이 소중해질지도 모르겠다.”




“아빠! 정말이야? 어떻게 나한테 한 마디를 안 해! 언니도 그렇고. 아니, 아니 아무튼 두 사람 너무 축하해요.

내가 아빠랑 언니 서로 사랑하게 해달라고, 틈틈이 기도한 보람이 있네?”








장난스러운 벼리의 말에, 다들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희나는 자신이 이런 가족사를 들어도 되는 것인지 의문스러웠지만,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지일이 있기에 마음 놓고 함께 웃을 수 있었다.







.

.




기분 좋게 오늘 만남을 정리한 후, 지일은 희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집을 나섰다.

밤이라 모자만 눌러쓰고 밖을 나온 지일, 하지만 그의 존재감은 모자 하나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들 한 번씩 지일을 쳐다보기 바빴다.








“오늘 제가 정말 있어도 되는 자리였어요?”




“응, 당연하지. 희나도 곧 우리 가족이 될 텐데.”




“네?”








당황하는 희나를 보던 지일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는 살짝 한 키스에도, 너무 놀라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순수한 그녀의 반응이 기분 좋았다.








“나 희나 많이 좋아해. 아니, 좋아하는 것은 처음 봤을 때부터였으니까, 지금은 많이 사랑해.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날 사랑한다 말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

나조차도 이런 나에게 놀라고 당황스러우니까.

하지만 인후가 우리 벼리를 사랑하듯, 형이 현주옆집누나를 사랑하듯, 그렇게 희나를 사랑하고 있어.”




“지일씨.”




“나는 이제 좀 더 진지하게 우리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은데, 희나는 어때?”








희나는 망설임 없는 진실 된 지일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허락에 지일은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 희나를 껴안았다.

그의 어깨선에 조금 못 미치는 그녀의 두 발은, 어느새 허공에 떠있었다.








“지일씨, 사람들이 쳐다봐요!”




“보면 어때? 사귀는 사람들끼리 애정표현하면, 누가 안 된다고 법으로 규정해놨나?”




“그건 아니지만..”




“그것 봐, 괜히 사람들 시선 의식하지 말라고.”




“지금 지일씨가 하는 말, 순 억지인 거 알아요?”




“왜냐면 지금 나는 희나가 내 마음을 받아줘서, 그런 거 생각할 기분이 아니거든.”








막무가내인 지일의 행동에도 희나는 그저 웃음이 났다.

지일을 만나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일이 많아졌지만, 그것 또한 지일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하는 일이기에, 나쁘지 않았다. 지금 그의 고백을 듣고서 알 수 있었다.

그를 만남으로 생기는 불편함 들을 감수하면서도 만나고 싶을 만큼, 송희나가 은지일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지일씨.”




“응?”




“나도, 많이 사랑해요.”











※ o59















“선배님,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응? 내 조카가 결혼한다는 말만 한 것 같은데.”




“이야, 드디어 은지일과 은영일의 영원한 천사가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가는 거야?”




“그런 거겠지. 정말 난 평생 나랑 형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무사히 쇼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지일은, 오랜만에 자신의 소속사에 나와 있었다.

Y엔터테인먼트 사장실에는, 최상규 사장과 하성희가 있었다.

지일은 성희가 있음에도, 들어와서 맨 처음 꺼낸 말이 벼리의 결혼 이야기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성희는 놀란 눈으로 지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벼리옆집누나가 결혼을..”




“성희 네가 우리 벼리를 알아?”




“아, 네. 향수축제이후에 몇 번, 우연치 않게 만나서 아는 사이가 되었어요.”








성희는 그 뒤에 ‘제가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삼켰다.

벼리의 납치 사건과 서인후 사장의 공개 기자회견 이후로, 성희는 벼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이성으로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전, 막상 그녀를 만나게 되니까 자신의 마음이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오늘 지일의 충격발언에 더욱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랬어? 우리 벼리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데, 굉장하네.”




“옆집누나가 낯을 많이 가리는 가요?”




“벼리의 과거는 너도 어렴풋이 알겠지. 소문이라는 것이 무서워서 막는다고 해도, 다 막아지는 것이 아니잖아?”








지일의 말에 성희는 순간 몸이 움찔했다.

은지일, 은영일, 서인후가 단 한사람, 은벼리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도는 것을 철저히 막아놓고, 한동안은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사항이 되어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신문사, 방송사 등 모든 언론사에서 최고의 이슈감이 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조용히 덮어놓고 간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현재 각각 한국의 한 축이라고 불리는 세 명의 남자가, 그녀의 소문을 발 벗고 막았다.

순전히 그녀의 마음이 다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는 명목 하에. 언론사들은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기막힌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내고 회사 문을 닫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다 지난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 우리 벼리 이제는 정말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나무를 만났거든.”








지일의 말에 성희는 벼리가 서인후라는 사람을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먼저 그녀를 만났다면,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까?

성희는 잘하면 잘했지, 지금 서인후 사장보다 자신이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그보다 일찍 못 만난 것이 한 없이 후회스러웠다. 흔히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성희 그에게 벼리가 첫사랑이었다. 성희는 정말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정리할 때가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을 표현할 기회조차 없었지만, 그는 그녀를 알고 좋아했던 것이 후회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일이 네가 그런 일로 일부러 왔을 리는 없고, 또 할말 있지?”




“역시 최상규 사장님이시네.”




“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우리 기한 끝나가지?”




“기한?”




“계약서 안 보고 살아? 우리 다음 달에 3년 계약 끝나잖아.”








지일의 말에 상규는 그제야 지일과의 3년 계약이 곧 끝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잠시 잊고 있긴 했지만, 큰일은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또 다시 3년 계약을 하면 되니까.

지일의 말에 상규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야?”




“나도 이제 좀 쉬려고.”




“뭐?”








이것이야말로 폭탄 중에도 큰 폭탄이었다.

아까의 말은 성희 하나만의 폭탄이었지만, 이번에는 상규와 성희 모두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장난처럼 쉽게 내뱉은 지일의 말에, 성희와 상규 모두 앉아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배님, 그게 무슨 소리세요?”




“야, 은지일. 너 미쳤어?”




“다들 왜 이렇게 흥분하는 거야. 어서 다시 앉아.”




“지금 너 같으면 자리에 앉게 생겼냐?”




“왜 그래, 형.”




“왜 그래? 너 지금 장난으로 하는 말이지?”




“내가 장난으로 언제 이런 말 한 적 있어?”




“없지, 없으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잖아!”








상규는 정말 황당한 말에,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지금까지 지일과 일을 하면서, 한 번도 계약에 관한 트러블이 생기지 않았다.

또한 지금 그가 그만 둔다는 생각도 해 본적이 없었다. 지금 지일은 세계의 트렌드이다.

그런 그가 일을 그만둔다는 말은 쉽사리 믿기지가 않았다.

또한 지일 그 스스로가, 일에 대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이상했다.








“다른 곳에서 돈 올려주디?”




“형, 나 지금 있는 돈도 평생 떵떵거리고 살 수 있거든?”




“그럼 뭐야? 돈에도 관심 없는 녀석이고, 일에 싫증난 것도 아니고,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데?”




“상규 형. 형한테는 많이 미안한데, 우리 계약 맨 처음에 내가 했던 말 기억 나?”




“......꼬마 아가씨보다 사랑하는 사람 생겼냐?”




“역시 괜히 사장 하는 건 아니네. 이 일 시작한 이유가 벼리 때문이야, 그건 형도 잘 알지?

내가 TV에 나오는 일을 하면, 죽어있던 벼리가 조금이라도 반응할 것 같아서, 그 모습을 보려고 시작했어.

그때의 벼리는 정말 숨만 쉬는 인형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랬지. 벼리를 위해 시작한 일이니까, 벼리가 행복해지고 벼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때는 미련 없이 그만두겠다고.”




“하아, 네 마음은 알겠는데, 나에게도 시간을 좀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직 2주 남았습니다, 사장님. 사장님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이제는 그만 둬야 할 것 같아.”




“못된 녀석. 넌 들어올 때도, 나갈 때도 네 마음대로 되는 구나. 내일 시간 비워둘 테니, 그 대단한 아가씨랑 밥 한 끼 먹자.”




“알았어, 난 그만 나가볼게 형. 성희랑 하던 말 계속 하라고.”




“꼴 보기 싫으니까, 빨리 나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상규의 얼굴에는 지일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은은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하성희.”




“아, 선배님!”




“너는 아마 나보다 더 대단한 녀석이 될 수 있을 거야.

난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이곳에 발을 들여서, 지금은 이곳이 정말 좋아졌지만, 너는 처음부터 이곳을 들어온 이유가

이곳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잖아?”




“그걸 선배님이 어떻게..”




“심사위원은 폼으로 있는 거 아니다? 내가 너 뽑았으니까, 너도 나중에 심사위원이 되었을 때는

너보다 더 대단한 녀석을 꼭 뽑아라. 그래야 나중에 이 세계를 나가야 할 때,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거니까.”




“아..”




“너 같은 녀석이 있어서, 아직 이 세계는 대중들에게 먹히는 건가보다.

너는 절대 물들지 마라, 넌 물들기도 쉽지 않은 타입이긴 하지만. 네가 내 후배여서 나는 참 좋았다.”




“........지일 선배님을 같은 소속사에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제 생애 최고의 기회였었습니다.

선배님 그동안 많은 것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셔서 감사드렸습니다!

이제는 제가 많은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선배님과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고해라, 가끔 보도록 하자.”








지일은 그렇게 사장실을 나갔고, 성희는 그의 기척이 사라지고도 한참을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상규의 얼굴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성희야, 넌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도 작아지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올인 할 수 있는 그런 사람.”








혼잣말과 같은 상규의 말에, 성희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현주니?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온 거야. 새엄마 딸 얼굴 보려다가, 목 빠지겠다.”




“새엄마, 미안해요.”




“근데, 이 분은?”




“아, 이쪽은 창조그룹 은영일 회장님. 제가 많이 말했었죠?”




“차, 창조그룹?”








현주는 항상 자신의 새엄마에게 영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새엄마가 좀 더 담담한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잔뜩 굳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




“따님과의 결혼을 허락 받으러 왔습니다.”








현주의 새어머니는 영일의 말에, 그저 자신의 남편을 부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그런 새어머니의 모습에 영일과 현주는 서로를 바라보며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난 좀 더 우리 새엄마가 침착하실 줄 알았어요. 기절 안하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 같아요.”




“이거 예상외로 내가 냉대 받을 것 같은데?”




“예상외라고요? 그 무한한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글쎄, 당신이 이제부터 잘 찾아봐. 나도 아직 어디 있는지 모르겠으니까.”




“아무튼, 정말 뻔뻔하기로는 세계 일등이야.”











※ o60















거실에는 네 사람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누구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려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결코 유쾌한 자리는 아닌 듯하다.








“... 우리 여식과 결혼을 하신다고요?”








조용히 차를 마시던 네 사람 중,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는 현주의 아버지이자, 한국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이상주 교수였다.








“네, 서로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따님에 비하여 많이 모자란 것은 사실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이미 결혼할 나이가 된 딸이 있는 입장이니까요. 하지만 많이 사랑합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 지금까지 저는 제 딸에게 억지로 선을 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모자라지도, 너무 넘치지도 않는 저희와 맞는 집안과 평생 인연을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의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마땅치 않은 기색이 역력한 상주의 목소리가, 영일의 마음에 날카롭게 꽂혔다. 상주의 말에서 어느 하나 틀린 것은 없었다.

자신도 그런 것 때문에, 현주에게 상처를 입힐까봐 사랑을 접으려 했으니까.

하지만 이미 서로의 마음을 알았고, 시작을 한 이상 멈출 생각은 없었다.








“정말 곱게 키우셨다는 것은, 따님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많이 마땅치 않은 것은 잘 압니다.

제가 교수님이었어도 그랬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도 이미 시작한 이상,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포기할 것이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마음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어도, 창조그룹 회장이라는 타이틀은 너무 부담이 됩니다.

제가 원한 것은 그런 대단한 것이 아니라, 저희와 잘 맞는 그런 집안이었습니다.”




“창조그룹, 그렇게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지금은 세계기업이라 칭송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희 할아버지께서 세우신 회사입니다.

오히려 5대가 넘게 선생님과 교수직을 이어오고 있는 교수님 집안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상주는 자신의 말에도 전혀 굽힘없이 자신의 마음을 차분히 이야기하는 영일이 마음에 들었다.

아내가 안방으로 들어와서 현주가 결혼할 남자를 데려왔다고 말을 했을 때부터, 상주는 남자의 인성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물론 창조그룹이라는 소리에 반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크긴 했지만, 며칠 전 현주와의 다툼으로 그도 느낀바가 많았다.

직접 만나본 영일은 상주의 마음에 꼭 들었다. 아직 밖으로 내색은 전혀 하고 있지 않지만 말이다.

덜컥 바로 승낙을 하기 전에, 상주는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역시 세계적인 기업의 회장님이라 그런지, 말로는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여보, 부엌에 가서 그것 좀 가져와.”




“그거라면..”




“그래, 어서 가져와.”








상주의 말에 현주는 불안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런 딸의 시선이 뻔히 느껴졌지만, 상주는 묵묵히 영일만 바라볼 뿐이었다.








“술은 좀 할 줄 아는가?”








지금까지 존대로 대하던 상주는, 갑작스럽게 말을 놓았다.

하지만 영일의 얼굴에는 조금의 당혹감이 없었다. 오히려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자로서 마실 만큼은 마십니다.”




“그래? 나는 술 잘하는 사위가 좋네.

내가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늙어서 그런지 혼자 마시기가 영 적적해서 말이지.”




“..........”








상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현주의 새어머니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나왔다.

일반 가게에서 파는 술이 아니라, 고급스러운 도자기에 담긴 술은 꽤나 독한 냄새가 났다.








“당신이랑 현주는 들어가서 먼저 자도록 해, 자네 혹시 내일 회사 일찍 나가야 하는가?”




“아닙니다. 내일 하루는 회사 빠질 각오하고 이리 온 것입니다.”




“그것 하나 마음에 드는군. 뭐해? 어서 두 사람은 들어가 먼저 자라니까.”




“아버지, 이 사람 내일 회사 안 나가면 안돼요.”




“아니, 본인이 괜찮다는데, 왜 네가 그러는 거냐? 나도 내일 학교 가야하는 사람인데, 빠질 생각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현주야, 괜찮아. 나 정말 내일 하루 회사 안 나갈 생각하고 이리 온 거니까, 걱정 말고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




“...알겠어요.”




“딸자식 키워봐야 아무 소용이 없군, 내가 말할 때는 듣지도 않더니.”








서운함이 담긴 상주의 말에, 현주는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기 전에 잠시 영일을 바라보았다.

묵묵히 상주의 술을 받고 있는 그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귀여워 보였다.






.

.




“현주야, 현주야?”




“으음..”




“아가씨, 일어나세요.”








현주는 잠결에 자신의 입술에 느껴지는 따스함에 눈을 뜨니, 영일이 자신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잠이 다 깨어서도 이게 꿈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분명 자신의 집인데, 영일이 자신을 깨운다는 것이 말이 안 될 법도 했다.








“...영일씨?”




“어서 일어나. 장모님께서 아침 준비 다 되었다고, 당신 깨워달라고 하셨어.”




“지금 몇 시에요?”




“지금? 7시 반.”




“당신 지금까지 술 마신 거예요?”




“아니, 새벽 1시까지 마시다가 장인어른께서 먼저 주무시고, 나도 바로 잠들었어.”




“1시라고요? 정말 대단들 해. 무슨 피가 끓어오르는 10대 청소년들도 아니고. 몸은 괜찮아요?”




“나는 멀쩡해, 장인어른도 괜찮아 보이시고.”




“으음, 근데 우리 아빠한테 허락 받았다보네요, 장인이라고 부르는 거 보니?”




“그럼, 내가 뭐랬어. 내가 괜히 은영일이야?”




“잘났어, 정말.”








아침에 가장 먼저 보이는 사람이 영일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기분을 더 없이 좋게 만들었다.

그녀는 팔을 들어, 그의 목에 두르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행동을 가만히 기다려주던 영일은, 갑자기 그녀를 안아 들었다.








“꺄악! 당신 뭐하는 거예요?”




“아무래도 장인어른이랑 장모님이, 우리 두 사람 목 빠지게 기다리실 것 같아서.

당신 일어날 것 기다리다가 날 샐 수는 없잖아?”




“알았어요, 내가 내 발로 걸어서 들어갈 테니까 내려줘요!”




“그럴 수는 없지. 이게 싫었으면, 진작 일어났어야죠. 잠꾸러기 공주님.”




“영일씨!”








현주의 외침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영일은 그녀를 화장실 안까지 안고 들어갔다.

그녀를 회장실에 있는 탁자에 올려놓은 그는, 직접 칫솔에 치약을 짜서 그녀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현주는 영일을 흘겨보았다.








“왜 아침부터 그렇게 도발적인 눈빛으로 쳐다보실까? 내가 양치질까지 시켜줄까?”




“영일씨!!”








현주는 옆에 있는 샤워 타월을 영일에게 던졌다.

그녀의 행동에 그는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가 나가자, 그녀는 이를 닦기 시작했다.








“어서 씻고, 내려와. 나 먼저 내려가 있을게.”




“알았어요.”




“현주야.”




“알았다니까요, 금방 씻고 내려갈게요.”




“현주야.”




“..왜 그래요?”




“사랑해.”








갑작스러운 영일의 말에, 현주는 놀란 토끼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침 햇살만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신이 나랑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태어나줘서 고마워.

다른 시대에 태어날 수도 있었고, 다른 나라에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 이렇게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




“정말 늦겠다. 어서 씻고 내려와.”








영일이 그렇게 방을 나가고, 현주는 한참을 멍하니 그 자리에서 서 있었다.











※ o61















“오늘은 먼저 들어가서 쉬도록 해.”




“네?”








오랜만에 인후의 사무실로 출근한 벼리는, 출근하자마자 퇴근을 일찍 하라는 인후의 말에 그를 바라보았다.








“당분간은 당신 바쁠 거 아니야, 내가 당신 배려하는 거야. 지금 회사 일도 마침 순조롭잖아?”




“내가 바쁠 것이 뭐있어요.”




“오늘 당신 우리 새어머니 만난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긴 한데.”








인후의 말에 벼리는 퇴근을 일찍 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비서 시절부터 인후의 부모님을 꽤 자주 봐왔던 벼리지만,

최근 인후와의 관계가 달라지면서, 그녀는 친부모님처럼 편했던 인후의 부모님에게 격식 아닌 격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우리 부모님이 당신이랑 그렇게 결혼하라고, 결혼하라고 평소에 노래를 부르셨는데. 이제 두 분의 소원을 이뤄드리겠네.”




“어머님, 아버님이 정말 그러셨어요?”




“당연하지. 당신 처음 우리 부모님 만난 날, 그날부터 주구장창 그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셨어.”




“사장님 괴로웠겠어요. 그때는 절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을 텐데.”




“글쎄,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어.

나도 당신을 우리 부모님께 소개시켜드릴 쯤에는 이미 당신에게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인가?”




“내가 무슨 조련사에요? 길들이긴, 뭘 길들여요.”




“바람기 많은 서인후를 당신이 길들였잖아?”




“아무튼, 그럼 나 오늘 일찍 갈게요. 새어머니 만나고 바로 집으로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알았어. 새어머니가 오늘 며느리 만난다고 들뜨셨으니까, 조심하라고.”




“어머님은 사장님과는 달리, 너무나 고상하셔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요?”




“당신!”




“흥분하지 말아요. 그보다 아버님은 왜 같이 안 나오신데요?”




“내기에서 지셨어, 어제 밤새도록 누가 당신을 만날 것인가를 두고, 내기게임을 했거든. 운 좋게도 새어머니께서 이기셨지.”




“두 분 다 오셔도 되는데, 그걸 왜 굳이..”




“사이가 너무 갑작스럽게 바뀌어서, 두 분 다 만나려면 당신이 너무 힘들지도 모른다고.”








인후의 말에 벼리는 그의 부모님께 감동을 했다.

언제 만나도 너무나 좋고 다정한 두 분이 가족이 된다는 생각에, 그녀는 밤잠을 설칠 정도로 감사했다.

하지만 방금 인후의 말대로 그의 부모님을 알게 된지 이미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사장과 비서라는 조건에서 만난 그들이기에 지금은 전보다 뭔가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 자신의 마음조차 배려해주는 그의 부모님의 마음이 그녀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정말 두 분은 언제 만나도 유쾌하시고, 편안하게 해주시는 것 같아요.”








진심으로 기뻐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벼리의 모습이, 인후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녀와의 결혼은 승낙 받는 것에,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은 부모님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그가 그녀에게 3년간 길들여졌듯이, 그의 부모님도 그녀에게 2년간 길들여진 것이다.

꾸밈없이 순수하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올곧은 은벼리라는 존재에게 아무런 거부감 없이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인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벼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두 분은 항상 당신을 만나고 나면, 딸을 가지고 싶다고 하셨어.”




“이제는 내가 두 분의 딸이 되어 드릴 수 있잖아요.”




“그래, 오죽 기쁘셨으면 자식 칭찬에 인색한 우리 아버지께서 내게 장하다고 하셨을까.”




“아버님은 나에게는 정말 자상하신데.”




“그건 당신이 그만큼 사랑스럽다는 거지.”




“저, 정말! 사장님만큼 낯간지러운 소리 잘하는 사람도 드물 거야. 그럼 난 일하러 갈래요.”




“이따가 퇴근할 때, 내 얼굴 보고 가는 거 잊지 마.”








-




“어머, 비서 아가씨?”




“네? 아, 안녕하세요.”




일찍 퇴근을 하고, 막 회사를 나온 벼리는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마주쳤다.

바로 인후가 벼리와 사귀기 전에 사귀었던 김해주였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인데도, 벼리는 별로 반가움을 느낄 수 없었다.

인후가 사장실로 들여온 유일한 여자였기에 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벼리도 질투심 많은 여자 중에, 한 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주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벼리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 그래도 사장님 뵈러 가는 중이었는데, 일찍 퇴근하시나 봐요?”




“네, 사장님은 무슨 일로?”




“아, 다른 의도는 없어요. 처음에 아가씨와 인후씨가 사귄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뭔가 화도 나고 질투도 났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했던 것 같아요.”




“네?”




“아가씨와 인후씨가 사귀는 거, 당연하다고요.

사귀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서로에 대해 잘 알고, 다른 사람은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신뢰가 두텁고.

남녀사이에 그런 관계라면, 당연히 사귀게 되는 것 아닌가요?”








해주의 거침없는 말에, 벼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벼리의 모습에 해주는 더욱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인사가 늦었네요, 축하드려요. 조만간 식장에서 뵐 수 있는 건가요?”




“아, 그럼요. 청첩장 보내겠습니다.”




“고마워요, 일찍 퇴근하는 이유가 있을 텐데 오래 잡고 있어서 미안해요. 다음에는 하얀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기대할게요.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를 인후씨는 그동안 왜 몰랐는지 모르겠네요.”




“고맙습니다.”




“인후씨 만날 필요도 없겠네, 오늘은 이거 전하러 온 거거든요. 벼리씨에게 줄게요.”




“저한테요?”








해주가 벼리에게 건네준 것은 하얀 봉투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해주를 바라보자, 그녀는 열어보라고 했다.

그 안에는 다름 아닌, 신부이름에 김해주라는 세 글자가 쓰여 진 청첩장이었다.

놀란 벼리는 해주를 다시 바라보았고, 해주는 그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쪽보다 먼저 결혼식을 올려서 놀랐어요?”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인후씨랑 헤어지고, 선을 봤어요. 그 남자를 만나면서, 이런 게 정말 사랑이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인후씨도 자상했지만, 제 신랑이 될 사람과는 비교할 것이 못 되더라고요.”




“너무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꼭 두 사람이 손잡고, 식장으로 오세요.”




“꼭 갈게요, 해주씨.”








벼리는 해주와 헤어진 뒤, 그녀의 손에 들린 청첩장을 바라보았다. 청첩장을 바라보자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우리 집안은 대체 누구부터 결혼을 해야 하는 거지?”








잠시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던 벼리는 이내 봉투를 가방 속에 집어넣고 시간을 확인 한 뒤,

인후새어머니를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




“이게 다 뭐야?”




“뭐가.”




“너 왜 나하고 벼리한테 말 안했어?”




“이런 걸 이야기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내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지금 네가 한 행동이 어린아이가 하는 행동 같은데?”








영일은 ‘스타의 은퇴’라는 문구들로 가득한, 모든 신문사의 신문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지일은 그런 그를 이해가 가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일은 자신의 형이 화를 내는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형과의 상의도 없이 들어간 연예계였다.

물론 그때는 혼날만한 이유가 있어서 혼이 났었다. 하지만 지금은 왜 영일이 화가 났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은지일, 우리나라에 널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글쎄, 아주 어리거나 아주 늙으신 분들 외에는 다 알 것 같은데.”




“그럼 그 사람들이 이런 기사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



“뭐, 그냥 은퇴하나보다지. 무슨 생각이랄 것이 있나?”




“넌 지금 걸어 다니는 한국 재산이야! 인간문화재와 같은 취급을 받는 존재라고!

네 몸이 네 것이지만, 꼭 네 것만은 아니라는 소리다!”




“형, 나 이제 그만둘 때도 됐어.”




“희나씨 때문에?”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도 꽤 비중 있긴 하지.”




“널 보면서 연예계의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은 다 어떻게 할 거냐,

너 은퇴한다는 소리에 기자들이 지금 눈이 빨개져서 그 이유를 찾아다니는데 나중에 희나씨 곤란해지면 어쩔 거야,

차라리 결혼한다는 기사가 더 괜찮을 거라는 생각 안 해봤어?”




“형, 희나는 내가 지켜줄 수 있어.”




“그건 ‘아시아의 별’일 때나 가능한 거야. 돈과 능력 있어서 지켜줄 수는 있지만,

널 좋아하는 많은 일반 사람들에게서 널 뺏어갔다는 죄책감에는 빠져나오지 못할 거다.”




“형!”




“아마 가장 큰 이유는 벼리겠지, 벼리는 희나씨랑 다를 것 같아?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거 잘 알잖아.

네가 은퇴한 이유에 관한 기사들 중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단 한글자라도 나오면,

두 사람 다 상처받을 존재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잖아.

너 지금 하는 일이 지겨워졌니? 이제 돈 벌만큼 벌었다는 거니? 전부 아니잖아.”




“물론 나도 이 일을 하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껴.

처음에는 벼리를 위해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정말 내가 원해서 하게 되었어. 하지만..”




“이미 답은 나왔잖아.”




“답?”




“지금은 다른 사람들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잖아. 너 스스로 좋아서 하는 거잖아. 그렇다면, 그 누구도 널 말리지 않아.

은벼리, 송희나 두 여자 모두 적극 찬성할 거야. 나중에 네가 정말 힘들다 느낄 때, 그 때 그만두어도 늦지 않아.

지금 그만 두면, 넌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야.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








영일은 지일의 손을 잡아주었다. 자신의 동생은 참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

물론, 그런 면이 사랑스럽다고 느끼긴 하지만, 이런 경우가 생기면 형으로서 안타까워진다.

처음 모델 일을 시작할 때도, 지일은 그다지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미술 쪽으로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상태가 좋지 않은 벼리와, 거리를 돌아다닐 때마다 무수히 받아오는 캐스팅 명함에 그는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영일도 많이 화를 냈지만, 지일의 예상대로 화면에 나오는 지일의 모습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는 벼리를 바라보며, 미안하지만 동생을 말리지 못했다.

나중에는 그 스스로가 모델 일을 좋아해서 다행이었지만,

만약 모델 일이 쭉 그저 그렇게 느껴졌다면, 영일은 강경하게 말리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 것이다.

그때의 일은 아직도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영일은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평소 같지 않게 지일에게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정말 힘들어서 그만두는 것이라면 전혀 말릴 이유가 없었지만,

지금 지일의 모습을 보면 동생이 아직 이 일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넌 ‘별’이야, 스스로 빛을 내는 별. 오랜 시간이 흘러서 더 이상 빛을 낼 힘이 없을 때, 그때 멈추는 것이 가장 아름다워 보여.”




“........고마워, 형.”








지일은 자신의 손을 잡은 영일의 손을 마주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영일의 말처럼, 정말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의 모습이었다.











※ o62















“딸!”




“새어머니, 일찍 오셨네요. 제가 기다렸어야 하는 건데.”




“무슨 그런 말을, 시간이 남고 남는 내가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지.”








카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두 여자에게 쏠렸다.

젊은 여자는 빨려들 것 같은 미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중년의 여성도 만만치 않은 외모로, 젊었을 적에는 상당한 미모로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바로 은벼리와 그녀의 시새어머니인 정현아였다.








“새어머니, 점심은 맛있는 것 드셨어요?”




“나야 집에서 먹었지, 우리 딸은 아들이 맛있는 거 사줬어?”




“아니요. 새어머니 인후씨가 요즘 저 밥을 안 사주는 거 있죠?”




“그래, 그런단 말이지? 내 이 놈을 그냥!”








인자한 얼굴에 걸맞지 않게, 벼리의 말에 금세 화를 내는 현아의 모습은 사춘기 소녀처럼 귀여웠다.

그런 현아의 모습에 벼리는 미소를 지었다. 새엄마의 사랑을 모르고 살았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주위에서는 친 부모에 대한 어떤 추억도 찾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벼리 스스로가 자신이 불행하다 느끼지 않는 이유는,

친구 같은 새엄마가 되어주는 현주와 진정한 새엄마의 사랑을 주는 현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는 항상 그녀를 딸이라 불러주는 현아가, 벼리에게는 정말 새엄마와 같은 사람이었다.








“새어머니, 인후씨한테 전화하는 것보다 저희 같이 쇼핑해요!”




“그럴까?”








벼리의 말에 거칠게 열었던 핸드폰을 다시 닫는 현아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벼리의 손을 잡고 카페를 나선다.

인자하고 자상하기 그지없지만, 모든 행동에는 신속하고 결단력이 있는 현아였다.

그리고 벼리는 그런 그녀에게서 많은 점을 배우고 있었다.

다정하게 거리를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은, 타인에게는 고부지간이 아닌, 너무 다정한 모녀의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지금 학교에 계세요?”




“그 양반이야 지금 학교에서 편안하게 노닥거리고 있겠지.”




“새어머니, 그럼 저희 오늘 쇼핑은 잠깐만 하고, 아버지한테 갈까요?”








벼리의 제안을 듣고, 그 양반이라며 툴툴거리며 말하는 현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벼리는 분명 어제 자신과 만나는 것을 문제로 다투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현아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화색이 도는 것을 보고는 벼리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이 한 지붕 아래 산지도 벌써 30년이 넘었건만, 언제나 깨가 쏟아지는 부부였다.

‘그 양반’이라는 호칭은 싸웠을 때만 사용하는 것이고, 평소에 현아는 ‘그이’라고 부른다.








“그, 그 양반을 뭐하려고 봐. 오늘은 그냥..”




“새어머니, 저 아버님 보고 싶어요. 요 며칠 바빠서 뵙지 못했더니, 아버님 얼굴이 아른 거려요.”




“그러니? 우리 딸이 정 그렇다면, 뭐..”




마치, 마지못해 승낙하는 것 같은 현아의 말에, 벼리는 살포시 미소만 지을 뿐이다.








-




‘똑똑-!’




“들어오세요.”








꽤나 큰 방, 한 쪽에는 책장에 수많은 책들로 가득하다.

책상 뒤에는 바로 창문이 있었고, 창가에는 아기자기한 화초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책상에는 한 남자가 안경을 쓰고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가 앉아있는 책상 위에는 ‘校長, 徐絪太’라는 명패가 놓여 있었다.

그는 바로 인후의 아버지이자, 제일 대학학교의 교장인 서인태였다.

노크하는 소리에 보던 신문을 접고, 문을 바라보는 그의 첫인상은 한 없이 차가워 보였다.

인후와 판박이인 얼굴에서 조금 더 차갑고,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랄까?








“아버님, 저에요.”




“....!! 딸내미야?”




“네, 아버님.”




“우리 딸!”








인태의 사야에 벼리의 모습이 보였다.

차가운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던 인태는, 정말 동인 인물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온화한 표정으로,

두 팔을 벌리고 벼리를 품에 안았다. 지금 그의 모습은 흡사, 팔불출 아버지들의 표본이었다.








“우리 딸, 여기까지 힘들게 왜 왔어?”




“아버님 보고 싶어서요.”




“아유, 말도 어쩜 이리 예쁘게 하는지!”




“새어머니가 아버지 학교에 있으시다고, 보러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 흐흠, 당신이 그랬소?”








벼리를 안은 팔을 푼 인태는, 벼리의 뒤에 서 있는 현아를 바라보았다.

어제는 그가 심하게 토라져서, 현아의 손을 잡고 잠이 들지 못했다.

항상 잠을 잘 때는 서로의 손을 잡고 자는 것이 당연한 것이어서, 어제는 허전한 기분에 잠도 잘 오지 않았던 것이다.

현아도 인태의 그런 행동에 토라져있었던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손을 잡아주던 인태가 어제는 손조차 잡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요, 새어머니가 아버님을 얼마나 생각하시는데요.

그러니 두 분 제가 보는 앞에서 화해하세요. 안 그럼 제가 불편하잖아요, 네?”








벼리의 제안에 인태는 잠시 망설이다가, 현아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보, 어제는 내가 미안했어. 용서해줘.”




“.... 어떻게 내 손도 안 잡아 줄 수가 있어요?”




“글쎄 말이야, 나도 어제 당신 손을 못 잡아서 밤새 한 숨도 못 잤어. 내가 어떻게 되었었나봐, 이제 그만 화 풀어요.”




“... 다시 안 그럴 거죠?”




“그럼, 내 신조 알잖아. 후회할 짓은 절대 되풀이 하지 말자!”








단호한 인태의 말에 그제야 현아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리고 그런 현아와 인태의 모습에 벼리는 저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것을 느꼈다.

벼리는 아마 인후가 두 사람의 사이가 이상한 것을 알고, 오늘 일찍 퇴근을 하도록 해준 것이라 생각했다.








“새어머니, 아버님. 오늘 저녁에 맛있는 것 먹어요!”




“맞다. 여보, 우리 오늘 맛있는 거 먹어요. 글쎄 아들이 우리 딸 밥도 안 사준다는 소리가 있어요.”




“뭐? 많이 먹어도 모자란 우리 딸을 굶겨?”




“아니에요, 그냥 제가 장난으로 한 말이에요. 그래도 오늘 맛있는 것 사주실거죠?”








사랑스러운 벼리의 애교에, 인태는 자신의 큰 손으로 벼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항상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인후의 버릇이 인태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딸은 소원이 너무 소박하단 말이야, 욕심이 너무 없어도 세상 살기 힘이 드는데.”




“아버님, 저는 이미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에요. 더 이상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에요.”








그녀의 말대로 벼리는 소박하면서도 꼭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가졌다.

자신을 언제나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고, 자신이 즐거워하는 일이 있고, 소중한 추억이 있고,

좋은 직장동료가 있고,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가장 소중한 것들이 그녀의 주위에서 그녀를 감싸고 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이 우러나오는 진실 된 말에, 인태와 현아는 서로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딸 하나는 잘 두었단 말이야, 아들은 매일 말썽인데.”




“여보, 우리 딸 정말 빨리 데리고 오고 싶은데, 이제 날짜 제대로 잡아야하지 않을까요?”




“그런가? 딸, 우리 아들놈이랑 결혼날짜 정식으로 잡을까?”








인태의 말에 벼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벼리의 긍정적인 표시에 그는 소리 내서 크게 웃으며, 현아를 바라보았다.








“역시 우리 딸이 효녀야.”




“그러게요, 정말 소중한 딸이에요. 내 꿈이 딸 하나 있는 것이었는데.”




“이보다 사랑스러운 딸이 또 어디 있겠어?”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 그 이상 인간관계에 소중한 것은 없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정말 힘들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실을 좋아해주는 확률은 높지 않다.

하지만 지금 벼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해주고 있다.

이 확률을 다 합한다면, 그녀는 복권 당첨 확률보다 더 낮은 확률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벼리의 말이 맞다.

이미 그녀는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다. 다른 사람들은 가지기 힘든, 그런 것들을 지금의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딸, 우리 그럼 이번 달 안에 일을 치룰까?”




“네?”




“쇠 불도 당김에 빼라고, 말이 나온 김에 식을 올려야 하지 않겠어?”




“맞아요, 역시 우리 남편이라니까!”




“아, 저기..”




“그럼 축하 기념으로 저녁을 거하게 먹으러 갈까?”




“좋아요, 오늘 당신 정말 멋져 보이는 거 알아요?”




“그래?”




“아버님, 새어머니..”




“응?”




“.....아니에요, 어서 밥 먹으러 가요!”








뭔가 너무 급속도로 진행하는 기분에, 벼리는 뭔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려 했지만,

이미 자신들의 말에 취해서 아이처럼 좋아하는 두 사람에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먼저 씩씩하게 나가는 벼리의 뒤로, 서로 마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인태와 현아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 o63















‘아시아의 별 지일, 은퇴에 대한 발언을 하다?’




‘지일의 은퇴는 조작된 거짓, 진실은 비밀리의 결혼!’




‘지일의 그녀, 대체 누구인가.’




‘지일의 여자, 일반인일 확률 99%’








수많은 신문의 일면은 지일과 희나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며칠 전, 은퇴를 선언했던 지일은 다시 Y엔터테인먼트로 돌아갔다.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있어서 지일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하질 않았건만, 역시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신문은 지일의 은퇴와 희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희나는 수많은 신문과, 그것에 대한 이야기로 수군거리는 회사 사원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지일을 걱정했다.








“희나씨, 이 신문 읽었어?”




“아, 예.”




“대체 누굴까? 이 잘난 남자와 결혼을 생각하는 여자.”




“그러게, 은 비서님은 알지 않을까? 지일의 조카잖아!”




“아, 그렇겠다! 희나씨가 비서님이랑 친하니까 좀 물어봐라.”




“그래, 그게 좋겠다.”








사원들은 기대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희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그녀의 입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그의 여자에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에 희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잘 알고 있는데.”








순간, 낮지만 흡입력 있고, 고요하지만 설득력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희나를 향해있던 모든 사원들의 시선이

모두 그 목소리가 울리는 사무실 문가로 집중 되었다.

엄청난 키에 선글라스를 쓰고, 최고급으로 보이는 실크 양복을 입은 사람은

다름 아닌, 현재 한국 사람들 최고의 관심을 받고 있는 지일, 본인이었다.







“지일이야!”




“여,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지?”




“아직 향수 촬영이 다 안 끝난 건가?”




“웬일이야! 너무 멋지다!”




“광고 팀에는 무슨 볼일 일까?”








지일이 나타난 순간부터, 희나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와 달리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사원들이 있는 곳으로 긴 다리로 몇 걸음 만에 당도했다.

그가 멀리 있을 때는 수군거리던 사원들도 지일이 다가오자, 그의 존재감이 너무 강렬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자.”








뜬금없는 지일의 말에, 사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희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 지일에게 해가 될까 걱정이 되어서이다.

그 이유를 잘 아는 지일은 그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일씨..”




“희나가 내 말을 자꾸 안 들으려고 하니까 그러지.

어제 희나 부모님께도 인사 드렸는데, 아직도 이렇게 쑥스러워하면 어떻게 해?”




“그, 그게..”




“결혼하고, 애까지 낳아도 이 성격이 변하기는 힘들 것 같네.”




“지일씨!”




“잠시 제 여자 좀 빌리겠습니다. 아마도 다음에는 식장에서 보겠네요. 희나 좀 잘 부탁드립니다.”




“지일씨, 잠시만요!”








희나의 거부에도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의 손을 끌고 사무실을 나가는 지일.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광고 팀 전 직원들은 멍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제 직원들한테 뭐라고 말해요!”




“뭘 뭐라고 말해, 내가 지일의 여자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면 되는 거지.”




“그게 그렇게 지일씨 말처럼, 쉽게 나오질 않으니까 문제죠.”



“희나는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때론 마음이 가는대로,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도 괜찮아.”




“.... 그보다 무슨 일로 회사에 온 거에요? 기자들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 텐데.”




“당신이 많이 보고 싶어서.”








지일은 단숨에 희나의 앞에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행동에 잠시 놀란 그녀지만, 곧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 기자회견 할까?”




“기자.. 회견요?”




“우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이제 곧 결혼 할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기자회견.”




“지일씨, 난..”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당신 곁에는 항상 내가 있을 거야.

나중에 당신이라는 존재가 기자들 눈에 들어가면, 분명 당신 힘들어질 거야.

그러니 전에 우리 사이를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송희나, 나 믿지?”








지일을 바라보는 희나의 눈에는 그에 대한 신뢰감으로 가득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입술에, 지일은 살며시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수많은 기자들, 수많은 팬들. 이 많은 사람들은 오직 지일과 그의 여자를 보기위해 모여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지일이 기자회견 장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자,

많은 팬들의 소리와 기자들의 웅성거림,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졌다.

모든 사람들은 오늘만큼은 지일보다,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모습을 드러낸 희나에게 관심이 쏠렸다.








“오늘은 그 어떤 질문도 받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자회견을 연 것입니다.

제가 누군지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은 질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저 한다면, 하는 남자입니다.

지금 이후로 그 어떤 말이 나온다면, 그 시점에서 이 기자회견은 끝나는 것입니다.”








지일이 처음 꺼낸 말은, 혹시 기자들의 질문이나 팬들의 말에 상처받을 희나를 걱정해서

오늘 기자회견에 조건을 거는 말이었다.

그의 말에 기자들은 불만이 언뜻 보이는 눈치였지만, 그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일은 그 자체가 전설은 사람이니까.








“다 아시겠죠, 제 옆에 있는 사람이 바로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기자회견 이후로, 그녀에게 어떤 위협이나 취재에 대한 접촉이 있을 시, 지일이라는 제 모든 것을 걸고 막을 것입니다.

그 방법이 정당하기만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 지일의 말도, 기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 이후로, 절대 지일의 여자에게 그 어떤 접촉도 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한 눈에 반했습니다. 꾸밈없는 순수함이 가득한 얼굴에 한 번에 끌렸습니다.

저에 대해 관심보다는 두려움을 가지는 이 여자에게 관심이 갔습니다. 그래서 한 번, 두 번..

만나다 보니 어느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제 관심을 불편해하는 모습에 더욱 이 여자가 궁금해졌습니다.

어느 분들은 그러겠죠, 단순한 호기심 아니냐고, 그 질문에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30년이 넘도록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기에, 단순한 호기심과 사랑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지일의 말 한 마다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기자들의 녹음기는 돌아가고, 자판은 쉼 없이 탁탁거렸다.

팬들은 그저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할 뿐이었다.






“절 사랑해주시는 모든 분들을 저버리고, 이 한 여자만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누구보다 말릴 그녀이기에 저는 결혼을 하고도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아직도 절 어려워합니다.

그만큼 여리고 순수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기자회견을 통해 정식을 제 여자라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지일은 가늘게 떨리는 희나의 손을 꼭 잡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가 기자회견장을 꽉 채웠다.








“이미 양가의 허락은 받았습니다. 나중에 여기 계시는 모든 분들이 결혼식에 오셔서, 축하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상으로 기자회견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짧은 기자회견이었지만, 지일의 말은 회견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희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오늘 이후로 기자 분들은, 제 여자에게 그 어떤 접촉도 시도하지 마십시오.

만약 접촉이 있다면, 그 기자 분은 이 바닥 최고의 바닥을 보고 싶으신 분이라 여기겠습니다.

팬 여러분들께는 많은 이해 부탁드립니다.

저의 결혼이 여러분들에게 많은 혼란을 줄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이 사랑하는 저 지일이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저와 제 여자가 행복한 모습으로 결혼할 수 있도록, 팬 여러분들의 많은 축복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정중하게 회견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지일.

그런 그의 모습에 회견장에 있는 모습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 같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행동에, 지일과 희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두 사람은 공식 커플이 된 것이다.











※ o64















“딸, 아빠 왔다!”








영일은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벼리를 찾았다.

휴일이라 집에서 오랜만에 느긋하게, 책을 보며 쉬고 있던 벼리는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영일은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두 팔로 안아주었다.








“다녀왔어요?”




“응, 지일은?”




“노땅은 지금 일어나서 씻고 있어. 노땅도 요즘 많이 바빴잖아. 아빠도 생각보다 일찍 들어왔네?”




“오늘 우리 딸이랑 드레스 보기로 한 날이잖아. 현주가 다 되었다고 연락 와서 일찍 퇴근했지.”




“아, 벌써 드레스 나온 거야?”




“벌써 라고? 지금 네 결혼식이 얼마나 남은 지, 알고 있어?”








은씨 집안사람들 결혼식에 가장 첫 스타트를 끊기로 한 커플은, 벼리와 인후였다.

이미 모든 것이 준비가 되어있었고, 실제로 결혼식 날짜도 3일 뒤이다.

정말 결혼이 코앞으로 다가왔건만, 벼리는 아직 실감이 안 나고 있었다.








“어, 형 왔어?”




“지일이 너도 나갈 준비해라.”




“어딜?”




“희나씨 드레스도 완성됐단다.”








이번 은씨 집안 결혼식으로 가장 고생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현주였다.

그녀의 고집이기도 했지만, 현주는 세 벌의 턱시도와 자신을 포함한 세 사람분의 드레스를 직접 다 만들었다.

며칠에 걸친 밤샌 작업으로 영일은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녀를 보지 못한 며칠 동안 그녀가 너무 그리웠던 영일은, 오늘 그녀에게 걸려온 전화에 하던 일도 뿌리치고,

그녀를 조금이라도 빨리 보기위해 회사를 나선 것이다.








“그래? 그럼 난 인후 회사 들려서, 인후랑 희나 데리고 현주 옆집누나 가게로 갈게.”




“그렇게 할래? 그럼 나랑 벼리는 먼저 가 있을 게.”








-




“언니!”




“어, 벼리 왔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




“아빠가 언니 많이 보고 싶었는지, 회사 일도 다 안 하고 나왔어.”








짓궂은 벼리의 말에, 영일은 헛기침을 했고 현주의 얼굴을 약간 붉어졌다.

영일은 보고 싶었던 현주의 입술에 살짝 키스를 해주었다.

벼리가 가장 먼저이긴 하지만, 그들도 이번 달에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애정표현에 벼리의 기분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이제 모두 행복할 시간만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그, 그럼 우선 드레스 입어 볼래? 벼리는 내가 치수를 잘 알고 있어서 고칠 곳은 거의 없겠지만, 혹시나 걱정 되니까.”




“네.”








벼리는 현주와 함께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커튼을 걷자 보이는 하얀 드레스, 벼리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언니..”




“내가 항상 말했잖아, 네 드레스는 내가 만들 거라고.”




“정말.. 입기 아까울 정도에요.”




“너만 어울리는 옷이야. 다른 사람은 절대 소화할 수 없는 드레스.”




“고마워요.”




“내가 오히려 고맙지. 그 어리던 아이가 이렇게 성장해서 결혼을 한다고 하니까, 내 심장이 다 떨리더라.”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준비하는 사이, 인후와 지일, 희나가 도착했다.

소파에 앉아 웨딩잡지를 들추는 영일의 모습이 너무 어색하게 느껴졌는지, 세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형, 정말 안 어울린다.”




“뭐가?”




“형이 그런 웨딩잡지를 본다는 것이 너무 웃겨.”




“헛소리하지 말고, 이리와 앉아. 희나씨, 오랜만이야.”




“네, 회장님 안녕하세요.”




“회장님, 벼리는요?”




“오자마자 팔불출 티내기는, 지금 드레스 갈아입는 중이야.”








네 사람은 소파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들을 제외한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그들을 향해있었다.

현주의 가게가 워낙 상류층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지금 가게에 있는 사람들은, 소파에 앉아있는 세 남자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의 기둥인 세 사람이 동시에 앉아 있기에, 사람들은 쉽게 접근할 수도 없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희나에게 돌려졌다. 기자회견 이후, 사람들이 그녀의 얼굴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희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약간의 질투, 부러움 등이 담겨있었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괜찮아?”








희나가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에 불편해하는 중, 그녀의 귓가에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일의 그런 사소한 행동에 희나의 굳어있던 얼굴은 금방 환해졌다.

아까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강렬했지만, 그녀는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제 곧 내 남자가 될 사람, 누구보다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 희나도 조금씩 겉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람은 언제든지 변하는 법.








“그나저나, 우리 호칭이 많이 걱정이다.”




“듣고 보니, 그게 좀 걸리네요.”








영일의 말에, 인후가 바로 동의를 했다. 사실상 다 아는 사이인지라, 결혼 후 호칭이 걱정이었다.

꽤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에, 네 사람은 각자 고민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커튼이 열리는 소리에 그들은 곧 각자의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다들 왔네요. 우리 벼리 어때요?”




“.......................”








현주의 물음에 그 누구도, 어떤 말도 이어가질 못했다.

흰 드레스 전체에는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촘촘하게 박혀있어서, 빛에 비추어지자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 듯했다.

벼리의 몸매를 강조하기 위해, 드레스는 길지만 옆트임이 길게 되어있었고, 윗부분은 탑 형식으로 쇄골이 도드라져 보였다.

또한, 현주는 은색 실로 직접 드레스에 화려한 자수를 놓았다.

지금 벼리의 모습은, 정말 여신의 강림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우리 딸이지만, 놀라울 정도다.”




“역시 우리 벼리네.”




“선배님, 정말 아름다우세요!”




“당신, 누가 보쌈해갈까 두렵다.”








네 사람은 벼리의 모습을 보며 다들 한 마디씩 했고,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벼리는 고칠 부분도 없고, 딱 됐어.”




“언니, 정말 고마워요.”




“알았어, 이제 벼리는 정말 결혼만 하면 되겠네?”




“그 다음은 옆집누나차례인거 알지?”




“그 다음은 지일이 네 차례고?”




“그보다 우리 정말 호칭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마지막 희나의 말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벼리는 요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했다.

예전에 그렇게 죽고 싶던 시절이 정말 어리석다고 느낄 만큼,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웠다.

이 감정은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단 한사람이라도 못 만났다면, 느끼지 못했을 즐거움이다.

또한 인후의 부모님과 회사 식구들을 몰랐더라도 이런 즐거움은 없었을 것이다.

벼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녀의 행복을, 즐거움을 만들었다.






-



“서인후군은 은벼리양을 평생의 반려로 맞이하여, 초심의 마음을 잃지 않고, 아끼고 사랑해줄 것을 맹세합니까?”




“네.”




“은벼리양은 서인후군을 평생의 반려로 맞이하여, 초심의 마음을 잃지 않고, 아끼고 사랑해줄 것을 맹세합니까?”




“.......네.”




“이로써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모든 하객 여러분들은 이 부부의 미래에 행복이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



“노땅이랑, 아빠도 지금쯤이면 다들 도착했겠다.”




“신혼여행을 한날, 한시에 다른 곳으로 떠나다니. 정말 특이하다니까.”




“그러게요, 우리 집안 식구들이 좀 특이하잖아요?”




“벼리야.”




“왜요?”




“정말.. 정말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내 앞에 나타나줘서, 내 마음을 받아줘서, 나와 결혼해줘서, 내 아내가 되어 줘서.

모든 것이 다 고마워.”




“나도, 인후씨를 내 두 눈에, 내 마음에, 내 인생에, 이렇게 담을 수 있어서 정말 고마워요.”




“그럼, 이제부터 하나 더 고마워해도 될까?”




“네?”




“우리 아기 만들어야지!”




“꺄악, 인후씨!”








그렇게 다들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힘들고, 다투는 일도 있겠지만, 행복하고, 즐거울 날이 그들에겐 더 많이 남아 있었다.

세 커플 모두 허니문 베이비를 만들어 왔다는 행복하고도 기막힌 이야기는, 조금 더 훗날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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