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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이지영-이태리의살바체2.txt

대답에 만족한 살바체의 숨소리가 길게 내뱉어 지고, 희진의 입술로 다시 살바체의 얼굴이 내려앉았다.



* * *



미얀이 복도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희진을 그냥 놔둘 분이 아니었다.

아직 전하지 못한 말도 남았는데… 희진과 어떻게 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방안에선 아직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지만, 뭔가 깨부숴 지는 건 아닌지…

미얀은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안돼요. 주인님… 여자는 그렇게 다루는 게 아닙니다.'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복도를 서성이는 미얀을 보며,

주변 하인들도 무슨 일인가 집중해 두리번거렸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저택에 감돌았다.



* * *



살바체는 프로답게 희진의 드레스를 재빨리 풀어냈다.

부드러운 침대 한편에 희진을 알몸인 채로 내려놓고 살바체는 급하게 자신의 옷을 벗겨 내렸다.

금빛 단추가 바닥에 떨어졌지만 살바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 벌거벗은 희진의 아름다운 나체를 향해 눈을 때지 못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홧김에 희진을 안았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남자는 보이는 것에 더 흥분하고 자극되는 법…!

살바체는 로마에서 그 많은 여자들과 알몸을 보며 여흥을 즐겼음에도 만족하지

못했던 자신의 분신이 미쳐 날뛰어 대는 것을 느꼈다.

빨리 희진의 몸에 묻어 달라 발광하고 있었다.

조금 긴장한 듯한 희진의 눈이 계속해서 살바체의 단단한 가슴과 조금씩 들어나는 탄탄한 아랫배 쪽으로 향했다.

살바체의 모든 게 확연히 들어나 알몸이 되자,

한번도 남자의 벗은 몸을 보지 못한 희진이 얼굴을 붉히며 놀란 표정을 했다.

살바체가 희진의 눈을 보고 얼굴을 향해 손을 들어 자신을 보게 하며 말했다.



“내 얼굴을 봐. 떨 거 없어. 벌써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은 건가?”

“우습게보지 말아요.”



발끈하는 여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이유는 몰랐으나,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다 생각했다.

지금은 우선 이 놈을 잠제우고 싶었다.



“그럼 떨지 마.”



살바체가 부드럽게 웃으며 희진의 얼굴과 입술, 목부터 조심스럽게 키스하며 내려갔다.

희진은 눈을 감고 살바체가 주는 느낌을 외면하려 하지만,

처음 남자의 정성스런 애무를 받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여자로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천천히 배에서 배꼽으로 배꼽에서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발목까지…

엄지발가락을 살짝 깨무는 살바체 때문에 희진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살바체가 희진의 반응을 지켜보며 허벅지 안쪽으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지, 지금 뭐하는 거죠?”

“가만있어.”



손으로 가리려는 희진을 치우고, 살바체가 희진의 정점을 향해 입술을 움직여 갔다.

희진을 능숙하게 다루는 살바체의 혀와 입술 감촉은 곧 견딜 수 없는 쾌감을 불러 왔다.

희진의 숨이 저절로 거칠어 졌다.



* * *



“아읔!”



갑작스런 여자의 비명소리가 났다.

순간 미얀이 복도에서 멈춰 서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울상이 되어 문 쪽을 쳐다봤다.

혼잣말 하듯 미얀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안돼요. 그렇다고 때리시면 아니 됩니다. 주인님“



그러나 미얀 말고 다른 하인들은 얼굴을 붉혔고, 저마다 흠흠 소리를 내며 자리를 피했다.

오직 미얀만이 계속 중얼 거리고 발을 동동 굴렀다.



“으, 으읔“



희진의 숨넘어가는 목소리에 미얀이 사색이 되어 이대로 모른 척 명령을 어기고 문을 박차고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남자의 뜨거운 몸이 자신 안에 있는 느낌은 처음 생소하다 아프다 였다.

살바체가 희진의 몸이 아픈 수축현상을 일으키면 귓가에 힘주지 말라고 속삭이고는 했다.

그 말투가 달콤해서 조금씩 익숙해지길 반복된 동작을 하며 인내하는 살바체의 능숙함에 희진도 고분고분해 졌다.

그 후, 조금씩 살바체가 주는 느낌은 자극적이면서도 무언가를 애타게 만드는 갈망을 일으켰다.

아마, 그 끝에 흔히 말하는 오르가즘이라는 절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자꾸 재촉하는 희진의 엉덩이의 골반을 누르고, 살바체는 희진의 조임을 막았다.

오르가즘이란 오래 끌수록 그 정점이 크다.

희진에게 가르쳐 주고 싶다는 생각에 살바체는 달콤한 희진의 안에서 자신을 자제하고 또 자제 시켰다.



“그, 그만요.”



축축이 땀에 젖은 희진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주고, 살바체는 희진을 달랬다.

처음 사랑의 맛을 알게 된 여자의 표정은 아름다웠다.

희진의 얼굴에 붉게 핀 열꽃도 자신이 만든 결과물이라는 생각에 저절로 살바체의 잘생긴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가 감돌았다.



“L'amore e persona“



살바체가 익숙한 목소리로 이태리어인 “사랑스런 사람“ 이라는 말을 속삭였다.

희진이 알아들었다면 속으로 쾌재를 속으로 불렀을 그 말을 희진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축축이 젖은 두 사람의 아래에서 야릇한 감각이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찾아 들어와 마지막을 향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살바체는 희진의 뽀얀 가슴을 얼굴에 담고 동작을 멈추었다.



“살바체 프란트…”



달콤한 목소리의 살바체를 부르는 희진의 목소리에 살바체 역시 자제력을 놓아 버렸다.

희진의 무릎을 올리고 전보다 더 깊이 파고들며 희진의 고함 같은 신음소리와 함께

자신의 안에서 쏟아지는 분신들의 느낌과 동시에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전율에

살바체는 몸을 떨고 희진의 몸을 한층 더 끌어안았다.



“흐읔“



희진은 방금 살바체가 주었던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음과 육체가 따로 논다는 말… 희진은 실감하고 있었다.



'난 카르멘이야. 난 카르멘이야.'



희진은 계속 정열적인 카르멘이라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주문은 필요 없어졌고,

마음대로 육체를 주무르는 살바체의 능수능란함에 자신도 반응하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한 치의 가식도 없이…



'이건 내 예상에 들어가지 않는 일이였어.'



희진은 허공을 바라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살바체가 이런 방면에 프로라고 해도 자신도 반응하고 더 원하고 몸부림 쳤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앞으로는 피해야 할지도 몰라. 너무 위험해.'



희진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음을 배신하고 몸이 자유자재로 살바체를 원했다는 게 자기 자신이 원망스럽기 까지 했다.



'꿈틀, 꿈틀'



꿈틀 거리는 움직임에 희진이 놀라서 자신의 가슴 쪽에 얼굴을 묻고 있는 살바체를 쳐다보았다.

살바체가 희진의 안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놔 줄 생각 없어. 진“



희진의 심장이 다시 '쿵, 쿵'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어대자, 살바체가 의미를 깨닫고 얼굴을 들어 희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잡고 있는 건 당신이 아니라 나 아닌가요?”

“쿡쿡, 그래 맞아. 계속 잡아 달라고. 하나하나 가르쳐 줄 때 까지 말이야.”

“내가 더 알아야 할 게 있다는 말이군요.”



희진의 붉은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춘 살바체가 희진의 엉덩이를 한손으로 받치고 자신의 것을 한번 앞뒤로 밀어 한층 더 키웠다.



“으, 음…”



희진의 얼굴이 살짝 붉어 졌다.

살바체가 피식 웃으며 희진의 붉어진 볼을 손등으로 쓸며 말했다.



“그 아름다운 신음소리가 목에 잠길 때까지… 너무 많다고. 진“



천천히 움직이는 살바체를 느끼며 희진이 눈을 감았다.



'피하는 건 조금 미뤄야겠어.'



* * *



- 서울 (Seoul)



서울호텔 1301호, 앞에 서서 시원은 방 번호를 노려보았다.

문이 열리며 기다리고 있던 소영이 시원의 목을 끌어안았다.



“올 줄 알았어요. 시원 씨“



거칠게 소영을 밀어낸 시원이 호텔 안으로 들어서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병원에 갔던 일이나 말해보지.”



소영이 한쪽이 길게 파진 윗옷에 섹시한 청치마 차림으로 안으로 들어가, 소파 등받이에 엉덩이를 걸치고 다리를 꼬며 앉았다.

시원은 소영의 청치마 안의 팬티가 살짝 보이는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좀 얌전히 앉아.”



그러나 시원의 말에도 소영은 그저 다른 쪽 다리를 바꿔 올릴 뿐이었다.

시원은 한숨을 쉬며 호텔에 마련된 냉장고에서 찬 생수를 꺼내 돌려 마셨다.



' 이 여자 사람 미치게 만드는 군.'



짜증이 치솟아 올 때부터 참고 있었던 화가 치밀어 오를 것 같아 시원은 열심히 자신을 자제하고 있었다.



“나도 설마 했어요. 우리 조심 했었잖아요?”

“잘 아는군.”



시원의 차가운 반응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대하고 나니 소영은 화가 났다.

벌떡 일어선 소영이 화가나 시원 앞에 서서 시원이 들고 있는 열려진 생수병을 낚아채 시원의 얼굴에 단번에 부어 버렸다.



“무슨 짓이야?!”

“정신 차려요. 권 시원 씨. 당신은 이제 내꺼야.

조만간 어른들께 말할 생각이니까 당신도 준비하는 게 좋을 거예요.”

“웃기지마.”



시원이 소영의 생수병이 든 손을 붙잡고 자신에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너의 더러운 사생활을 내가 모를 것 같아?

붙어먹었던 자식이 내가 아는 놈만 네 명이야. 말해줄까? 누구누구인지? 잘 못 택했어.

난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아. 양 소영.”

“좋아요. 나도 아니라고는 말 안 해요. 그렇지만 당신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아무도 없었죠.

못 믿겠으면 조사해 봐도 상관없어. 알겠어요?”



소영이 눈에 불을 키고 시원에게 이를 갈았다.

시원은 차가운 눈동자로 소영의 팔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다시 말했다.



“누구의 자식이건 상관없어. 없애.”

“누구 맘대로. 당신이 책임져 줘야겠어. 권 시원. 결과에 책임지는 게 당신 철칙 아니었어?”



시원의 팔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낀 소영이 팔을 잡아끌고 풀고는 주무르며 곧바로 핸드백을 집어 들고 말했다.



“약혼날짜 잡아서 알려 주세요. 배불러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진 않으니까“



시원은 밖으로 나가는 소영을 붙잡지도 못하고 얼굴에 차가운 물기를 털었다.



“젠장!”



일이 갈수록 꼬이고 있었다.

잘 나가던 자신의 인생이 희진이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진 순간부터,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제길!”



시원은 다시 한 번 욕을 내뱉으며 냉장고 문을 거칠게 닫았다.



* * *



다음날 새벽, 희진은 옆에 누워 잠에 빠진 천사 같은 남자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번의 사랑을 나누고, 기진맥진이 된 두 사람은 저녁 식사도 거르고 잠에 빠져 들었었다.

일어나자마자 느낀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울부짖는 죄의식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육체적인 쾌락에 빠진 자신의 추악함이었다.

물론, 시원과 계약결혼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느끼는 죄의식과는 차원이 틀렸다.



“휴…”



희진은 이런 마음으로 살바체를 볼 수가 없어 무장하는 마음으로 발레실로 가서 연습하기로 했다.

몸이 녹초가 되어 나른했지만, 자신에게 벌을 주는 마음으로 희진은 가운만을 걸친 채 방문을 살며시 열고 복도로 나왔다.



“….미얀?”



희진은 밖으로 나왔다가 깜짝 놀라 벽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미얀을 보고 놀란 표정을 했다.

눈을 비비고 잠에서 깬 미얀이 희진을 알아보고 놀란 눈을 하고는 희진을 향해 벌떡 일어섰다.



“세상에! 아가씨. 괜찮으세요?!

주인님이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건 저도 처음 보았어요. 정말 이예요.”



울상이 된 미얀을 보고 희진은 또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난 괜찮아요. 미얀. 미안하지만, 연습실로 간단한 빵과 우유를 가져다주겠어요?

조금만 배를 채우고 쉬었다가 바로 연습을 해야 갰어요.”

“예? 정말 괜찮으세요? 어? 어제…저기, 그러니까…”

“미얀. 당신 주인이 자고 있어요.

깨우고 싶지 않으니까 조용히 연습실로 내가 말한 걸 가져다주세요.

아, 우유 말고 커피가 필요하겠어요. 속이 별로 좋질 않아요.”

“예… 알겠습니다.”



희진은 돌아서려다가 눈을 깜빡이는 미얀에게 말했다.



“그리고 좀 자도록 해요. 피곤해 보여요. 미얀…”

“아, 네!”



* * *



살바체가 일어난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오랜만에 깊은 숙면을 취한 살바체는 어느 때 보다 좋은 컨디션으로 눈을 뜰 수 있었다.



“진?”



차가운 옆 자리를 본 살바체의 눈썹이 올라가고 저절로 좋았던 기분도 다운이 되었다.

아침에 흥분하는 남자들의 체질상, 아침 일찍 여자를 안는 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행복이었다.

살바체는 신경질 적으로 버튼을 눌러 미얀을 불렀다. 미얀이 허둥지둥 한참 후에야 방안으로 들어섰다.

충혈된 미얀의 눈을 보고 살바체의 인상이 더 구겨졌다.



“얼굴이 왜 그러지?”

“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을 설쳤더니만.”

“그래. 진은?”



살바체의 물음에 미얀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연습 중이세요. 벌써 세 시간째 안에 계신데 무리하시는 게 아닌지 걱정입니다.”

“그래. 내가 조금 후에 가보지. 그보다 우선 아침부터“

“예. 준비하겠습니다. 아, 저기 주인님."



살바체가 시트를 덮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갑자기 나가려던 미얀이 뒤를 돌아 살바체를 불렀다.



“뭐, 뭐야?”



발정 난 자신을 들킬 뻔한 살바체의 표정이 험악했다.

미얀이 눈치를 보며 어제부터 미뤄뒀던 말을 꺼냈다.



“어제… 저기 아가씨가 주인님이 보내주신 상자를 어제 땅에 묻어버리라고 해서,

제가 잘 묻어 두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요.”

“상자? 그게 무슨 말이지?”



살바체가 미얀의 말을 못 알아듣고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제 보내신 선물상자 말 이예요.”

“미얀. 난 진에게 선물을 보낸 적이 없다.”

“예? 하, 하지만… 분명히 주인님 이름으로 선물상자가 온걸요.”



살바체가 피곤하다는 시선으로 미얀을 보며 이마를 문질렀다.



“좋아. 진이 그걸 묻으라고 했다는 말이지?”

“네. 간곡히 부탁하셔서 할 수 없이 제가 뒷마당의 큰 나무아래.”

“당장 가져와.”



굳은 얼굴의 살바체의 차가운 시선을 보며 미얀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살바체는 미얀이 그 문제의 상자를 가져올 동안 간단한 샤워를 하고 어제 벗어 두었던 옷을 대충 걸쳐 입었다.

젖어 금빛이 짙어진 살바체의 머리가 햇빛에 반짝였다.

머리를 수건으로 털고 있을 때, 미얀이 흙에 젖은 상자를 가져왔다.



“뭐가 들었지?”

“죄송합니다. 아가씨가 열어보지 말고 묻어달라고 해서…”



뭔가 이상한 느낌에 살바체가 미얀에게 상자를 받아 들고 입을 굳게 다물고는 미얀에게 나가라는 고갯짓을 했다.

미얀이 힐끔 살바체의 눈치를 보며 밖으로 나갔다.

살바체가 상자를 탁자에 올려놨다.

상자를 노려보는 살바체의 눈이 싸늘했다.

땅에 젖어 축축한 상자의 뚜껑을 살바체가 방금 씻은 깨끗한 손으로 살짝 열어 재꼈다.



“…?!”



* * *



-서울 (Seoul)



시원은 어제 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있었다.

소영의 말이 진실일거라 자신이 믿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회사의 잠시 술렁임이 잠잠해 졌지만, 이젠 자신의 인생이 길을 읽고 술렁이고 있었다.

희진을 찾지도 살았다는 증거조차 확실하게 얻지 못한 지금 상태에서 소영의 일은 발등의 불이었다.

시원은 고민 끝에 친구 석수에게 전화를 했다. 할 얘기가 있다며 석수 역시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주었고,

시원은 회사가 끝나자마자 먼저 약속한 홍대 쪽 청년시절 자주 갔던 바에 앉아 석수를 미리 기다렸다.

은은한 재즈 팝송이 흘러나오는 바에 앉아 간단한 흑맥주를 시켜 놓고 앉아 있는 시원을 향해

석수가 바에 들어와 시원의 어깨를 치며 앉았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약혼녀를 찾기 전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더니만.”

“아, 일이 좀 있어서…”



석수가 똑같은 흑맥주를 시키고 시원을 힐끔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갈 때보다 얼굴이 더 안 좋다.”

“뭐. 그렇지… 너 할 말이 있다며?”



시원이 맥주를 한잔 들이키며 묻자 석수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고는 시원에게 물었다.



“지훈이 자식 로마에서 뭐 이상한 거 없었어?”

“어? 아무것도 없었는데… 좋은 친구더군. 사교성도 많고.”

“그래. 좋은 놈이긴 한데…이 자식 이번에 돈을 꽤 번 모양이야.

작은 요트를 구입했다고 자랑을 해대더라고. 아니, 불쌍한 유학생 놈이 무슨 요트냐.

정신 나간 놈이지. 어디서 이상한 놈들이랑 어울려 다니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집이라도 팔았나 보지.”

“그런가?”



시원은 그 작은 아파트를 팔아도 웬만한 구식 요트 하나 구입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남의 일에 신경 쓸 만한 정신이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석수야. 너 그 쪽 방면에 있으니 유명한 사람들 많이 알겠지?”

“유명한 쪽도 종류가 다양하다. 정보냐 뒷조사냐 주먹이냐… 그렇지.

이쪽의 비리는 너도 대충 다 알거고 말이야.”

“한동안 가까이 했던 여자가 임신을 했단다.”



시원의 허탈한 말에 석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이 석수를 노려보며 맥주를 들이마셨다.



“권 시원. 네가 그런 실수를 다 하다니… 그 여자가 고단수냐. 네가 어리버리 했던 거냐.”

“둘 다 갰지. 젠장.”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 그 여자를 어떻게 하려고 찾아 온 거라면 번지수 잘 못 짚은 거 알고 있지?

나 이래 봐도 형사다.”



시원이 석수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뒷조사해서 그 애가 누구 앤지만 확실하게 알아봐 주라. 사람을 써서…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까.”

“뭐 그런 거야 쉽지. 그런데… 만약 너 애가 확실하다면 어쩔래? 책임질래?”

“… 그래야겠지.”



석수는 시원이 책임을 회피할 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학창시절부터 자신이 저지른 일은 무슨 일이고 해결을 보던 악착같은 놈이었다.



“좋아. 너 마음이 그렇다면 내가 도와주마. 그 방면에 잘 아는 놈이 또 하나 있지. “

“그래. 부탁한다. 급한 일이니까 되도록 이면 빨리…”

“알았다.”



가볍게 별 문제가 아니라는 표정의 석수를 보고 시원이 맥주를 다 마시고 웨이터에게 맥주를 더 시켰다.



“그런데, 약혼녀 일은 이제 완전히 접은 거냐?”

“…….”

“하긴 너한테 지금 그럴 정신이 없겠지.”



석수는 자신이 물어놓고 자신이 결론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 *



상자를 보자마자 서재로 달려간 살바체는 바로 문제의 상자를 들고 체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짓을 눈도 깜짝이지 않고 할 놈은 그 놈 밖에 없었다.



'무슨 짓이냐. 체논!'



살바체의 전화를 받은 체논은 다 알고 있다는 목소리로 웃으며 전화를 받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선물이 마음에 들었어?]

“제 정신이냐고 묻고 싶다. 체논“

[하하하, 원래 내가 반미치광이라는 것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건 그렇고 내 말은 그 여자 좀 고분해 졌냐는 말이야.

자기 약혼자의 손가락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을 텐데. 안 그래?]

“미친 자식. 이 손가락은 누구 꺼지?”

[아, 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손가락이니까 개 밥그릇에 던져 주라고.]



살바체가 이마를 만지며 상자를 노려보던 시선을 치우고 체논에게 이를 갈며 말했다.



“체논. 다시는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

이번 일 만으로도 네가 옆에 있었다면 목을 졸라 죽여 버렸을 테니까.”

[하하하, 내 평생 친구를 위해 서라면 그것도 행복한 죽음 이겠군. 그만 끊자고.

내 어여쁜 여자가 칭얼거리는 군.]



아침부터 바쁜 체논에게 더 이상 말 할 가치가 없자 살바체가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꽝' 소리가 나게 내려 놨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희진은 이 손가락을 보고도 자신에게 몸을 준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살바체는 곰곰이 생각하며 의자에 주저앉아 정신적으로 피곤해져 오는 이마를 두들겼다.



'어제 그 행동은 내가 원하는 데로 해 주겠다는 몸짓이었나?

어쩔 수 없이 자기 약혼자를 구하기 위한?! '



지금까지 봐온 희진의 성격대로라면 이렇게 나올 게 아니라,

소리를 치고 화를 내며 할퀴어야 정상이었다. 어제의 그 유혹은 뭐란 말인가?



'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게임을 하자는 건가?'



* * *



희진은 “지젤“2막 장면 윌리와의 춤을 연습하고 있을 때, 살바체가 연습실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느꼈다.

긴장된 모습에 다른 때와 달리 자신의 균형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낀 희진은 바로 동작을 멈추고 음악을 꺼버렸다.



“일어나자마자 옆에 없어서 조금 서운 했어. 진“



살바체가 이마를 만지며 연습실 문손잡이를 잡고 희진에게 말했다.

희진은 살바체를 뒤돌아보지도 않고 땀이 나는 이마를 흰 수건으로 닦으며

주저앉아 무리한 발을 토슈즈를 벗어 어루만졌다.



“내가 항상 옆에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 이예요. 살바체 프란트“



단호한 희진의 목소리에 살바체가“훗훗“하며 희진에게 다가와 무릎을 굵고 앉아,

희진이 어루만지고 있는 발을 자신 쪽으로 잡아 당겨 주물렀다.

리듬 있게 주무르는 살바체의 가는 손들을 쳐다보며 희진은 야릇한 느낌에 눈을 감고 싶은 것을 입술을 꽉 다물어 참았다.

어제의 익숙한 감각이 다시 살바체가 손을 대자 살아나는 듯 했다.



'여자들이 이래서 이 남자에게 사족을 못 쓰는 건가?'



살바체가 희진의 발을 계속 해서 주무르고 발목을 잡고 풀어주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말해봐.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희진을 외면하고 발을 보는 살바체의 눈이 희진의 대답을 기다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희진은 그런 살바체의 눈을 보지 못하고 흘러내린 살바체의 앞 머리카락에 시선을 주고 말했다.



“아무것도… 당신이 전직 안마사가 아니었을까 정도?”

“하하하“

“그만해요. 오래 연습해서 피곤하네요. 좀 자야겠어요.”



희진이 살바체의 손을 치우고 일어서서 돌아서려는 순간에 살바체가 바로 돌아서는 희진의 팔을 낚아채 자신 쪽으로 돌려 세웠다.



“…?”



당혹한 시선의 희진의 눈을 보고, 살바체가 희진을 한층 자신에게 더 밀착시키며,

희진의 드러난 목선을 더듬으며 속삭였다.



“말해. 왜 날 유혹했는지“

“…!”



살바체의 눈이 순간 싸늘해지며 매서워졌다.

희진도 그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어제부터 숨겨 두었던 화를 아주 조금 드러내 살바체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원하던 거잖아. 유혹하길 바랐잖아? 원하던 대로 해준 것뿐이야.”



희진이 매몰 찬 대답에 살바체가 희진의 목을 한 손으로 살며시 쥐었다.

다른 손으로 희진의 팔을 잡은 살바체의 손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누구 때문에?”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살바체는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누구 때문에 자신을 유혹했는지,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인지… 진실을 알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이 여자의 속을 다 파헤쳐 보고 싶은 마음, 쥐 흔들고 싶은 마음에 살바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구 때문이라고 당신은 생각하죠? 내 약혼자? 나?

그러는 당신은 뭐 때문에 날 잡고 있는 건가요? 당신을 위해서? 웃기지 말아요.

내가 이러는 이유에 정답은 없어. 있다면 단 한가지겠죠.”

“뭐지? 그 정답이? 사랑?”



희진이 살바체의 흔들리는 눈을 보고,

약점을 잡은 것처럼 눈을 빛내며 살바체가 잡은 팔을 뿌리치고 한걸음 물러나 대답했다.



“벌써 부터 말하면 재미없죠. 안 그래요? 당신이 원하던 대로 날 가졌으면 된 거 아닌가요?

유치한 대답은 하고 싶지 않아요.”



희진이 살바체의 뜻을 헤아리는 듯 생각에 빠져있는 표정을 보고 돌아서려는데, 살바체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 무대에서 누가 먼저 내려가는가? 이게 진, 당신이 원하는 게임의 방식인가?”



희진이 살바체의 말에 뒤돌아 잠시 멈춰 섰다가, 한걸음 걸어가기 전 조용히 살바체의 말에 대답했다.



“어쩌면…”



무대에서 퇴장하듯 아름다운 자태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는 희진의 모습을 살바체가 쳐다보며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희진은 살바체를 뒤로 하고 살기어린 눈빛을 띄우며 문을 닫았다.



' 복수하기 전엔 내려오지 않을 거야. 살바체 프란트…

내가 이 무대에서 내려온 순간 당신은 지게 되어 있어.'




연기[2장]



알페르노의 팔에 실비아 로세니가 사랑스런 미소를 지으며 살짝 웃고 매달려 있었다.

헬리콥터 안에서 실비아 로세니가 알페르노의 무표정한 옆모습을 보며 물었다.



“알페르노 지금 어디 가는 거죠?”

“이 주 동안 연락이 없는 내 자식을 보러.”

“네? 아! 설마 살바체 프란트를 보러 가는 건가요? 정말요?”



실비아 로세니의 얼굴이 환히 밝아지는 것을 모른척하고 알페르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가까워지는 교황의 섬을 바라보았다.

호기심에 온 발걸음이었지만, 자신의 불안한 신경이 계속 해서 살바체 프란트를 걱정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도 살바체를 본지 꽤 된 듯 하네요. 매스컴도 잠잠하고 말 이예요.

도대체 지금 뭐하고 있는 거죠?”

“길들이거나 길들임을 받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 아니면 둘 다 일지도…”

“…?”



실비아 로세니가 무슨 말인지 몰라 알페르노를 쳐다보지만 알페르노는 검은 머리카락을 살짝 가린

얼굴로 비행기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로세니는 언제나 이런 알페르노의 얼굴을 보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스칼렛 오하라가 된 듯 했다.

알페르노는 레트를 닮았다. 클라크 게이블 처럼 알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런 보이지 않는 그의 속마음이 바로 그의 매력이기도 했다.



“바로 저기야. 실비아.”

“뭐예요? 고립된 섬이네요. 왜 저기 가 있는 거죠? “

“살바체 프란트가 원하니까. 착륙해.”



섬을 보여주기 위해 잠시 선회하던 헬리콥터가 착륙할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 * *



- 서울 (Seoul)



시원은 소영을 만나러 가기 위해 퇴근 후 바로 코트를 걸치고 나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소영을 달래둘 필요가 있었기에, 소영이 만나 달라 말하면 거절하지 않고 만나주고 있었다.

귀찮고, 화가 나고, 짜증이 치솟았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부쩍 요즘은 웃을 일이 없었다. 그때, 나가려던 실장실의 전화가 울려 왔다.

시원은 다시 돌아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이번에 내 여 동생 혜수가 유학에서 돌아와. 알고 있지? 우리 혜수]

“네. 압니다. 벌써 그 꼬맹이가 그리 컸습니까?”

[이런, 꼬맹이라니… 이제 22살이야. 결혼 할 나이가 되었지. 사실은 자네 때문에,

우리 쪽에서 유학 중에 불러들인 거라네.

어쩔 수 있나… 뭐, 결혼 후에 다시 유학을 가도 좋다고 허락해서 돌아오는 것 이긴 하지만,

자네 이름을 들으니 고개를 끄덕이는 눈치야.]



시원은 수혁의 전화에 머리가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희진이 죽은지 한 달 만에 계약결혼에 덜미에 혜수가 잡힌 모양이었다.

빠른 사람들… 그렇지만 지금 시원은 그런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왜 말이 없나? 자네 생각을 묻고 있는 거야.]

“조금 시간을 달라 말씀해 주십시오. 아직까진…”

[그래. 뭐, 혜수도 그 쪽일 을 정리하고 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한다더군.

우리 혜수와 잘 되면 우린 처남사이가 되는 건가? 하하하]

“…….”

[나중에 보자고.]

“네. 들어가십시오.”



수혁의 집안과 희진의 집안은 하늘과 땅 차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같은 핏줄이긴 하지만, 큰집 작은 집이라는 관점은 엄연히 달랐다.

그래도 꽤 애쓴 흔적은 있었다. 혜수까지 유학에서 돌아오게 할 정도라면…

시원은 어렸을 적 혜수를 떠올려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항상 희진의 옆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한 여자애의 영상이 흐릿흐릿 할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다른 여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원은 앞에 있는 문제에 먼저 눈을 돌리고 실장실을 무거운 걸음으로 나갔다.



* * *



“알페르노…님?”



미얀이 놀란 표정으로 저택 문 앞에 서서, 알페르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실비아 로세니는 여전히 알페르노의 팔을 잡고 미얀을 도도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 살바체 프란트는 어디 있죠? 알페르노와 내가 왔는데도, 왜 나와 보지도 않는 건가요?”

“아, 예. 아마 모르시고 계실 거예요. 지금 승마를 하러 나가셨거든요.”



미얀의 멍한 시선의 말에, 알페르노가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미얀을 보며 물었다.



“그럼 살바체가 말하던 고양이는?”

“예? 고양이요? 저흰 고양이를 키우지 않습니다. 알페르노님…

제레미라는 개와 사냥개를 몇 마리 키울 뿐인데요.”

“…?”



실비아 로세니 역시 알페르노의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못 알아듣고 알페르노를 쳐다보고 있었고,

미얀 역시 열심히 설명하며 알페르노에게 대답했다.

그때, 저택 문 앞으로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며, 그 들 뒤로 저택의 문이 다시 열렸다.



“하하하하“



그 웃음소리를 듣는 알페르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고, 실비아 로세니의 입술도 웃음이 피어났다.

그러나 저택을 들어선 살바체의 옆에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동양여자를 보고

실비아 로세니의 얼굴과 알페르노의 얼굴에 각자 다른 표정이 생겼다.



' 저 여자는 뭐지? 동양인이잖아?!'

' 고양이인가 보군'



실비아 로세니의 탐색하는 시선을 받으며 희진이 미얀에게 흰 가죽장갑을 벗어 주었다.

살바체 프란트는 웃으며 알페르노와 인사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호기심에 들른 건데, 불청객인가?”

“그럴 리가… 진, 이리와. 알페르노를 소개해 주지. 궁금해 했잖아?”



희진이 살바체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돌아봤다.

알페르노의 눈에 여자의 웃음이 진짜인지 한눈에 간파해 보는 탐색의 눈빛이 잠시 스쳐 갔지만, 희진은 알고 있었기에,

철저히 감정을 속이고 있었다.



'난 아직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았어.'



“안녕하세요? 최 희진이라고 합니다.”



희진의 가는 손을 잡고 알페르노가 살짝 잡았다 놓았다.

살바체가 알페르노 옆에 서 있는 붉은 머리의 실비아 로세니를 보고 희진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한창 뜨고 있는 모델 실비아 로세니라고 하지.”

“아, 그러시군요. 처음 뵙겠어요.”

“네. 그러네요.”



희진은 들어설 때부터 실비아 로세니가 자신에게 좋은 감정이 아님을 눈치 채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희진이 곰곰이 여자의 비웃는 얼굴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해의 눈빛을 하고 물러섰다.



'아, 내 공연을 보러 같이 왔던 여자가 이 여자였어.'



살바체가 미얀을 보고 희진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



“미얀. 이 분들을 이 저택에서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해 드려. 오늘 자고 갈 생각이지?”

“글쎄… 그럴까?”

“뭐, 마음대로 하세요.”



살바체가 잠시 후에 보자고 말하고 희진의 어깨를 끌고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알페르노와 실비아 로세니의 얼굴이 두 사람의 뒤로 꽂혔다.

알페르노는 많이 달라져 여자에게 완전히 빠져 버린 살바체를 보며, 표정을 어둡게 했다.

실비아 로세니의 얼굴 역시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리 오세요.”



방긋 웃는 미얀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방에 들어선 희진은 곧바로 화장대로 가 승마 모자를 벗고, 머리를 풀어내고 있었다.

살바체가 희진의 뒤로 서서 희진이 머리에 손을 대고 핀을 풀어 내리는 것을 도왔다.

곱게 고불거리는 검은 머리가 하나씩 희진에 머리에서 흘러내려 고운 선을 그렸다.

살바체가 희진의 머리를 다 풀어 놓고 거울을 통해 희진의 눈을 보며 말했다.



“갑자기 온 손님들이야. 기분 나쁜가?”



부쩍 챙기고, 하나하나 표정까지 챙기는 살바체의 배려는 하루가 갈수록 더 해지고 있었다.

희진은 그럴 때마다 미소 지었던 표정을 지으며 살바체의 어깨를 잡은 손을 겹쳐 잡았다.



“내 손님이 아니죠? 당신 손님이잖아요? 내가 기분 나쁠 이유가 없죠.

이 집은 내 집이 아닌 당신 집이니까…”

“진… 언제 쯤 당신 집이라고 생각할 거지? “

“살바체 프란트. 무대는 집이 될 수 없어요. 연기를 하는 공간일 뿐이지.”



살바체는 희진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며,

한숨을 쉬며 희진의 어깨를 잡아 돌려 세우고는 다시 앙칼지게 변하는 여자를 잠제우기 위해 입술을 겹쳤다.



* * *



- 서울 (Seoul)



시원은 임신을 하고서도 몸가짐을 단정히 하지 않고 아직도 요란한 치장에 야한 옷차림의 소영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

소영의 귀에 큼지막한 동그란 귀걸이가 달랑이고 있었다.



“결혼하고 싶다면 그 옷차림 먼저 바꿔야 할 거야. 양 소영.”

“훗훗, 그건 결혼 후에 바꿔도 상관없죠. 나도 달라질 수 있다고요. 시원 씨.”

“그래. “



탁자 위에 소영이 자신을 기다리다, 담배를 핀 모양인지 재떨이에 붉은 립스틱이 묻은 담배꽁초가 있었다.

곧바로 시원의 얼굴이 매섭게 변했다.



“담배 끊은 거 아닌가?”

“아, 많이 줄인 편이예요. 웬만해선 잘 안 피는 걸요. 오늘만 눈감아 주세요. 시원 씨.”



살살 눈치를 보며, 애교를 떠는 여자에게 더 이상 화를 내기엔 쉽지 않았다.

시원은 못 마땅한 기를 숨기지 않았지만,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시켰던 전통식 한국음식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시원은 입맛이 없었지만, 입덧을 하고 있다는 소영을 위해 수저를 들었다.

다행히 괜찮은 모양인지 맛있다며 먹는 소영을 보고 시원 역시 말없이 국을 떠먹었다.



“정기적인 검진은 잘 받고 있겠지?”

“물론 이예요. 그것보다 나 다음 달 말이면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거라고요.

언제 어른들에게 말씀 드릴 예정이죠?”

“곧“



시원의 말에 얼굴이 환히 밝아지는 소영의 얼굴이었다.



'드 ㅡ. 드ㅡ.'



그때, 시원의 핸드폰이 울려 왔다.

시원은 진동으로 해 놓았던 핸드폰의 폴더를 열고 석수의 목소리를 들었다.



[미안, 오래 기다렸다. 보고를 이제야 받았어. 그건 그렇고, 이 여자 뭐냐?]



석수의 말에 시원이 이마를 만지며 자신을 수저를 들고 쳐다보는 소영을 힐끔 보고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말했다.



“계속해.”

[얼마동안 조용해서 증거를 못 잡다가, 오늘에서야 잡았단다. 만날래? 자세히 말해 줄 테니]

“결론만 얘기해. 지금“



소영이 심상치 않은 시원의 표정에 수저를 내려놓고 호기심에 시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원은 소영에게서 신경을 끄고 석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여자 임신하지 않았다. 오늘 병원에 간 건 맞는데, 피임도구 제거하러 간 거였단다.

이제라도 너나 다른 놈팡이 놈의 애를 하나 가질 요량이었겠지.

아무튼 그런 여우의 손에서 벗어난 걸 축하한다. 권 시원]

“…그래. 수고 했다. 다시 전화할게“



시원이 전화를 끊자마자, 소영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영이 그런 시원이 이상해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왜 그래요? 급한 일 있어요?”

“시간이 아깝다.”

“네?”



소영이 이해를 못하고 다시 나가려는 시원의 팔을 잡았다.

시원이 경멸스럽다는 눈초리로 소영이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것을 보며, 말했다.



“손 때.”

“왜, 왜 그래요? 시원 씨?”



소영의 손을 자신의 팔에서 때내고 시원이 다시는 보기 싫은 여자의 얼굴을 보며,

낮은 저음으로 소영에게 말했다.



“내가 그렇게 가지고 싶었어? 없는 애까지 만들어 낼 만큼?

이상하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

네가 임신을 했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고,어른들께 말하라고 내게 강요한 이유 말이야.”

“무슨 소리인지 통 모르겠는데요. 시원 씨.”

“양 소영. 언제까지 속일 생각이지? 오늘 병원에 갔던 게 무엇 때문인지 내가 말해줘야 하나?”

“그, 그거야 임신 때문에…”

“양 소영!”



시원이 지친다는 듯 이마를 만지며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다시 소영이 잡으려고 시원의 팔을 붙들려고 했다.

시원이 바로 두 손을 쳐들고 그런 소영의 행동을 막고 거부의 빛을 띄웠다.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마.”

“…시원 씨!”

더 이상 이 여자를 볼 이유도 변명을 들을 이유도 없었다.

그 동안 이 여자에게 쏟았던 시간만 아까웠다.

그 뒤 소영을 버리고 나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시원에게 석수가 와 등을 치며 말했다.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해라. 차라리 잘 된 거 아니야?”



* * *



- 사르데냐 섬 (sardinia island)



신선한 칠리의 맛이 들어간 올리브 양고기 요리와 함께, 2년 정도 숙성시킨 레드와인이 곁들여진 식사가 준비되어 나왔다.

살바체는 희진의 옆에 앉아 음식에 대해 설명도 하고, 지겹지 않은 식사를 유도해 주고 있었다.

알페르노와 실비아 로세니는 이런 살바체 프란트의 모습이 생소해 음식을 먹으며 계속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이 음식은 미얀이 한 것 같군. 특별히 준비한 모양이야. 괜찮아?”

“네. 아주 좋아요.”



실비아 로세니는 살바체가 웃으며 묻는데도,

눈썹도 움직이지 않고 아무 표정도 없이 입술만 움직여 대답하는 희진을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건방진 계집'



살바체 프란트가 어떤 남자인데…!

동양여자 하나가 뭐 그리 잘난 게 있다고 살바체가 시중을 들어주고 그 대답에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단 말인가…!

이건 뭐가 잘 못 되도 한참 잘 못된 일이었다.



“진 여기가 좋소?”



알페르노의 질문에 희진이 살바체를 한번 쳐다보고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글쎄요. 좋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싫다고 말하기에도 그러네요.

다 아시면서 물어 보시는 거라면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은데요… 괜찮겠죠?”

“다 알 다뇨? 뭘 말이죠?”



두 남자의 묘한 시선과, 희진의 눈빛이 화가 난 듯 반짝이다가 다시 무표정하게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실비아 로세니가 묻지만,

어느 하나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실비아는 그런 지금 상황이 못 마땅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주인공이 아닌 들러리 인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이봐요. 진… 이라고 했죠? 그렇게 불러도 되겠죠?”

“그래요.”



남자들의 시선이 전부 자신에게 모아지는 것을 속으로 흐뭇해하며, 실비아가 희진을 보며 상냥한 미소를 짓고는 물었다.



“직업이 뭐죠? 어디선가 본 듯해서 말 이예요.”

“네. 알고 있어요. 제 공연을 보러 오셨다 들었으니까… 저도 물어도 될까요?

저의 지젤이 당신이 보기에도 그렇게 남자의 소유욕을 불러낼 만큼 대단했나요?”

“…?!”



실비아는 희진의 당당한 눈을 보고 그제야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살바체와 보러갔던 그 지젤의 동양인…!

실비아 로세니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희진에게서 살바체 프란트에게로 옮겨 갔다.

뭉클 뭉클 배신감이 솟구치고 있었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이 여자에게 반해서 이곳까지 데리고 와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배신한 게 아닌가?!

알페르노에게 날 넘겨주며 어르던 그 말들이 … 하나 씩 생각나자 실비아 로세니는 속았다는 생각에 속이 들 끓었다.



“대단 했지. 진… 당신은 내가 본“지젤“중 가장 뛰어나고 아름다운 지젤 이었어.

항상 내가 말했잖아?”

“사랑에 빠진 남자들은 아첨쟁이가 되죠. 안 그런가요? 알페르노?”

“후후후…”



희진을 빼고 다들 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있을 때, 미얀이 후식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자, 이탈리아 브래드 푸딩입니다. 사과와 크림, 오렌지가 곁들어 졌지요.”

“고마워요. 미얀.”



희진이 따뜻한 미소를 미얀에게 지어 보였다.

미얀도 맛있게 드시라고 속삭이고는 손님들과 식탁에 하나씩 두고 밖으로 나갔다.



“전에 내가 말했던 대로 된 거냐?”

“무슨 말? 아~! 하하하, 글쎄… 아직은 뭐라고 단정 짓지 못하겠는데.

조금 더 맛 본 뒤에 알려주지 알페르노.”

“너무 그 맛에 물들여 지지 마라. 자극이 심한 것 같으니까.”

“명심하지.”



뜻 모를 남자들의 말에 여자들 역시 관심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기에, 알아듣지 못했다.

희진은 어렴풋이 자신에 대한 말인가 의심했다가,

실비아 로세니의 들어난 적의를 읽고 곧 얼굴을 무표정하게 만들었다.



“살바체 프란트… 여기까지 이곳에 놀러 왔는데, 나 여기 저택 구경 좀 시켜 주겠어요?

알페르노에게 들으니, 당신 취미가 여기 전부 모여 있다던데요.

그림이며 아름다운 조각들 까지… 박물관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더군요.”

“없는 게 없기야 하지. 이곳에 이탈리아의 역사가 전부 모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까.

잠깐만 둘러볼까? 그럼? 진. 괜찮겠어?”

“갔다 오세요.”

“그래. 둘이 다녀와. 난 진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지.”



살바체 프란트가 잠시 진에게 시선을 주고 있을 때,

실비아 로세니가 살바체의 팔짱을 희진에게 보란 듯이 끼우며 부추겼다.



“어서 가요. 흥분 되는 데요“



희진은 달콤한 푸딩을 입에 넣으면서도 이상하게 쓰게 느껴지는 듯해 인상이 써지려고 했지만,

알페르노가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기에 참았다.



“너무 살바체를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훗,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희진이 눈을 빛내고 알페르노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물론, 난 살바체 프란트를 걱정하고 있지. 그러나 이젠 진 당신을 걱정해야 할 듯 해.

남자는 저렇게 부드러울 때, 저 조심해야 하는 것이오. 살바체는 감정을 잘 속이지.

당신 역시 그런 것 같지만… 적수는 되지 못할 거요.”

“그런가요?”

“그렇소.”



그때, 하인들과 미얀이 들어와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고, 진과 알페르노는 응접실로 옮겨 푹신한 소파로 가서 따뜻한 차를 마셨다.

포근하고 아늑한 분위기에도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차라리 그렇게 걱정이 되시면 절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시는 게 어때요?

알페르노 라면 저 하나 쯤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건 간단한 일 아닌가요?”

“여기가 싫소?”



단도직입적인 희진에 말에 알페르노가 눈썹을 올리고 가볍게 물었다.



“싫어요. 갇혀 있다는 것 좋아 할 사람이 있을 까요?”

“그럼 살바체 프란트는? 좋아하오?”

“…. 굳이 제 감정을 말 할 필요가 있나요?”

“그럼 도움도 없소.”



희진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알페르노를 똑바로 쳐다보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좋아요. 전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오직 그를 보며 생각하는 건 복수뿐이죠.

하루하루 여기서 나갈 궁리만 하고 있어요.

알페르노. 당신 역시 이런 내가 그의 옆에 있다는 게 싫을 거예요.

당신은 끔찍이 살바체 프란트를 생각하고 있으니까.”

“날 처음 보는 당신 눈에도 그게 보였다니… 나도 다 산 모양이군.”



알페르노도 찻잔을 내려놓고 무릎에 깍지껴 잡고는 진을 지그시 쳐다봤다.

희진은 왠지 속마음을 전부 털어 놓고 거북해 오는 것을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왠지 이 남자에게 연기를 계속 한다는 것은 힘들게 느껴졌다.

속까지 전부 파헤치는 눈을 가진 남자다. 알페르노…



“진… 한 가지 당신도 모르는 게 있소.”

“그게 뭐죠?”

“바로 당신 마음“

“네?!”



희진이 눈을 깜빡이며 알페르노를 정신 나갔냐는 듯이 쳐다보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알페르노의 눈은 말할 때와 마찬가지로 확고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내게 당신을 빼 달라 말하는 이유는 더 이상 살바체에게 상처를 주기 싫은 당신 마음에서

도움을 청하는 것 같다는 말이오. “

“훗,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된다… 이것 봐요. 진. 솔직히 말해주지.

난 오늘 살바체가 저러는 모습을 지금껏 처음 보았소.

그게 진심이든 속이고 있는 모습이든 처음 이었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나?”



희진이 진지한 알페르노의 얼굴을 보며 모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위험… 아까도 말했듯이, 나조차도 처음 보는 살바체의 모습은 지금 위태위태한 낭떠러지에 서 있는 모습 같아.

평범한 남자도 저럴 때가 가장 무서운 법이오.

그런데, 살바체 프란트가 한 여자에게 빠진 모습이라… 진… 당신은 방법을 잘 못 택한 거요.

차라리 처음부터 계속 외면하고 할퀴고 했어야 옳았소.

그럼 어느 순간 질릴 수도 있었겠지.”

“결론만 말해요. 알페르노. 날 빼 줄 건가요? 아닌가요?”



희진은 계속된 알페르노의 훈계가 짜증이 났다.

모든 것을 두 사람의 대한 속마음 까지 다 안다는 듯 한 알페르노의 말이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 이 남자도 날 이곳에 둔 사람 중에 한 남자일 뿐이야.'



희진은 더 이상 알페르노에게 구걸하듯 자신의 안위를 부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예상했던 데로 알페르노 역시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난 끼지 않을 생각이오. 살바체 프란트 내 양아들에게 미움을 받고 싶진 않으니까.

그것 말고도 난 저 놈에게 죄 지은 게 많은 몸이오.”

“어련 하시겠어요?”



그때, 밖에서 희진과 안에 있는 사람이 들으라는 듯, 요란 스런 실비아 로세니의 웃음소리가 복도에서 들려 왔다.

희진은 눈을 빛내고 자리에서 일어서 조금 파인 드레스를 옆으로 내리고 재 빨리 알페르노를 향해 다가가 무릎에 앉았다.

알페르노가 놀란 모습을 보며 희진은 만족한 웃음을 속으로 지었다.



“무, 무슨 짓이지?”

“살바체 프란트를 자극하지 말라고 하셨나요? 알페르노…

미움 받고 싶지 않다고 하셨죠? 절 이대로 놔두면 위험하다는 걸 아실 거예요. “

“당신을 죽여 버릴 수도 있소. 진.”



알 페로노의 시선이 매서워지며, 마피아 대부의 눈으로 살기가 피어났다.

희진의 눈이 반짝이며 이런 알페르노를 향해 고개를 숙여오며 말했다.



“그럼 당신의 양 아들이 더 당신을 미워하게 되겠죠? 안 그래요?”

“…! "



희진은 알페르노의 입술 근처로 얼굴을 내렸다.



“꺄!”

“…!”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며 조용한 정적과 함께 여자의 비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곧바로 희진의 머리카락이 붙잡혀 올라갔다.




길들여지다.[3장]



희진은 머리채가 올라가며 무섭게 변한 알페르노의 얼굴을 대면해야 했다.

알페르노를 너무 우습게보았던 게 잘못 이었는지도 몰랐다.

알페르노가 희진이 자신에게 입을 맞추기 직전 희진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오는 살바체를 보며 낮게 말했다.



“네 고양이 장난이 너무 심하군.”

“…. 그 손 놔. 알페르노.”



희진은 알페르노의 무릎에서 살바체가 자신의 팔뚝을 잡고 잡아끌어 들이는 대로 끌려갔다.

곧바로 매서운 실비아 로세니의 손이 희진을 향해 날라 왔다.



“어디다 감히!”



'탁!'



그러나 희진을 때리려던 실비아 로세니의 손은 곧바로 살바체의 손에 의해 가로 막혀 졌다.

희진의 팔과 실비아 로세니의 손을 잡은 살바체는 매서운 눈으로 실비아 로세니를 보며 말했다.



“내 여자는 아무도 손 못 대.”

“살바체 프란트! 어떻게 이 상황에 이 여자를 감쌀 수가 있죠? 방금 보지 않았어요?”

“입 다물어. 실비아“



실비아 로세니는 살바체의 무서운 눈이 자신을 향한 것 을 보고 희진을 노려보다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알페르노를 향해 몸을 돌리고 그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알페르노…! 흑흑“



실비아 로세니의 등을 토닥이는 알페르노가 살바체를 향해 나가보라는 고갯짓을 했다.

살바체가 희진의 팔뚝을 잡고 알페르노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무슨 일이세요? 주인님?"



살바체와 실비아의 차를 내오던 미얀이 희진의 팔을 잡아끌고 나오는 살바체의 표정을 보고 놀라 쟁반을 들고는 물었다.



“들어갈 것 없어. 우리도 방해하게 하지 마. 아무도…”

“네? 네…“



미얀은 희진의 무표정한 얼굴과 살바체의 화난 표정을 번갈아 쳐다보며,

얼떨결에 대답하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끌려가는 희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 * *



“알페르노. 왜 살바체를 혼내 주지 않은 거죠?

당신은 살바체의 양 아버지잖아요? 자식이 잘못 했을 때 야단치는 게 맞는 거잖아요?”



아이처럼 보채는 실비아 로세니를 보고 알페르노는 말이 없이 그저 실비아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자신의 나이를 두 배로 쪼갠 것보다도 젊은 실비아를 향해 알페르노는 언제나 자상했다.



“말 좀 해보세요. 그 여자가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죠?

또 왜 살바체가 그런 여자를 저보다 더 챙길 수가 있어요? 전 억울하다고요. 알페르노.”

“우린손님이야. 실비아. 지금 일 만으로도 우린 불청객이나 다름이 없어 졌지.”

“알페르노. 난 도대체 이해가 안 돼요.

왜 항상 살바체 프란트의 일엔 당신이 죄지은 사람 마냥 기를 못 펴는지 말이예요.”

“… 이해할 필요 없어. 실비아. 아무도 이해할 필요 없지.”



더 이상 투정부리는 것은 싫다는 눈빛의 알페르노 였기에,

눈치가 빠른 실비아는 입을 다물고 알페르노에게 더 파고들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 중인지 알페르노는 계속 조용히 입을 다물 뿐이었다.



'이 곳에 오니 당신이 더 보고 싶구료… 헤지나'



* * *



'꽝!'



희진은 바로 자신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은 살바체가 등 뒤로 문을 꽝하고 닫는 것을 들으며 그의 화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무작정 바보처럼 빌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만든 건 자신이었다.

이렇게 살바체를 도발하고 이렇게 그를 화나게 만든 건 의도했던 일이었다.



“미쳤어?! 알페르노가 누군지 알고 멋대로 일을 내는 거지?

날 화나게 하는데 이용 할 사람이 그리 없던가? “

“…….”

“말해! 말도 잘하면서 왜 입을 다물고 있는 거지?! “



희진을 향해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드는 살바체의 표정에 갈등이 어리고 있었다.



'이 남자… 갈수록 게임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거야?'



희진은 마구 흔들리는 속에서도 살바체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살바체 프란트…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



“진!”



어쩌면 살바체는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희진을 사랑하게 된 것일지도…

연기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지도 몰랐다.

희진의 얼굴에 경멸스럽다는 표정이 어렸다.

살바체가 희진의 얼굴에 띈 그 표정에 호흡도 흔들던 손도 멈추었다.

희진의 입술에 자연스러운 비웃는 곡선이 그려지고, 살바체를 향해 매서운 말이 터져 나왔다.



“살바체 프란트… 그 웃는 표정 좀 그만 두지 그래요? 역겨워…“

“후후… 뭐라고?”



살바체의 잔잔하게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살바체의 어이없다는 표정이 얽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희진은 상처받은 살바체의 얼굴을 보고 자신을 잡은 손을 매섭게 떨어뜨려냈다.

뒤를 돌아 안으로 또박 또박 걸으며 희진이 살바체에게 말했다.



“이제 웃는 연기 나도 지겨워 졌어요. 싫은데도 좋은 척 하는 연기 지겨워 졌다고요.

오늘 저녁만 해도 잘 만든 각본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죠.

납치 된 여자를 향한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이라니….

이제 가면을 벗지 그래요?

날 처음 데리고 와 협박하던 살바체 프란트 그 남자의 모습으로 돌아오라는 말 이예요. “



살바체는 희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속이 하나하나 도려나는 아픔을 느꼈다.

처음 받는 생소한 아픔에 살바체의 눈에 진한 아픔이 새겨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언제…! 어느 사이에…!'



살바체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충격에 빠졌다.

게임으로 시작한 일이 이젠 게임이 아닌 현실이 되어 있었다.

알페르노의 말처럼, 살바체는 이 여자에게 길들여짐을 받고 말았던 것인가…?!

저 여린 여자의 피부와 촉감에 모든 감각 하나하나가 진동해 그세 마음까지 반응해 버린 것은 자기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살바체는 희진을 향해 성큼 걸어가 어깨를 잡아 돌려 세우고 물었다.



“정말 연기뿐이었나?! 지금까지 날 대하고 웃었던 그 모든 게 다 연기일 뿐이었다?!”

“그래요. 당신도 연기였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요? 우린 게임 중이었죠.

난 지금도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았어요. 살바체 프란트.

난 내 무대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거예요.

그게 당신을 화나게 하는 일이라고 해도, 어쩌면 난 그걸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죠.”

“…!”



희진이 살바체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고혹적으로 아름다운 미소가 그려지는 희진의 얼굴을 보고 살바체가 입술을 굳히고 내려다보았다.

희진의 두 손이 살바체의 가슴을 향해 내려앉았다.

살바체는 희진의 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자신을 유혹하던 희진이 보여줬던 그 자세… 그 모습 그 대로 다시 희진이 살바체를 향해 유혹하듯 입술을 열었다.



“우리 계속 해야죠. 안 그런가요? 살바체 프란트?”



살바체는 굳게 입을 다물고 희진을 계속 한참을 진지하게 내려다만 봤다.

희진의 진심을 읽기라도 하듯 가면처럼 가린 희진의 얼굴에서 해답을 찾는 듯,

살바체는 한참 동안 희진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열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가 아니라, 열개의 얼굴을 가진 고양이군.”



싸늘한 살바체가 이 한마디를 하고 매몰차게 희진의 손을 뿌리 쳤다.

뒤돌아 나가는 살바체의 힘 있는 걸음걸이에 희진이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로 살바체를 향해 말했다.



“우리나라에선 고양이를 요물이라고 하죠. 이제 지칠 때도 되지 않았나요?”



희진의 말에도 살바체는 문을 들어왔던 것과 같이“꽝“하고 닫아 버리고 나가 버렸다.

살바체가 나가고 난 뒤에도 희진은 한참 동안 문을 노려보고 서있었다.

갑작스런 눈물이 솟구쳐 올라오고 있었다.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살바체에게도…! 자신에게도…!

희진은 바로 침대로 몸을 던져 알 수 없는 눈물을 쏟아 부었다.



* * *



문이 열린 응접실에서 알페르노는 예전 이곳에서의 추억에 잠겨 있었다.

살보네와 헤지나… 그리고 자신…. 그 아름다웠던 한 때는 이곳에서가 마지막 이었다.



“헤지나…”



알페르노가 혼자 생각에 잠겨 응접실 베란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순간 밝게 현관이 열리고,

검은 차가 현관 앞에 대기하고 있다 검은 코트를 걸쳐 입은 살바체를 한순간에 태우고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이 자식… 날 내버려 두고… 허허“



이유를 짐작하고 있는 알페르노 이었기에, 고개만 흔들 뿐 화난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씁쓸한 표정이 계속해서 살바체를 태우고 떠나는 검은 차를 향하고 있었다.

남자를 약하게 만드는 것은, 항상 그 사랑이라는 놈이다.



* * *



“주인님이 이번엔 언제 오실까요? 설마 아가씨를 두고 오지 않거나 하진 않으시겠죠?”



마주 앉은 미얀이 불안한 시선으로 희진을 향해 말했지만,

희진은 무표정하게 미얀을 보고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런 일은 전에도 있었던 일이잖아요? 그리고 난 그를 기다리지 않아요. 미얀“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이상하시다고요. 저에게 연락한번도 없으셨어요.

일주일 동안, 단 한 번도 말 이예요. 자주 아가씨 안부를 묻곤 하셨거든요.

하루에도 적어도 한번은요… 그런데 이번엔 아무 말씀도 아무 연락도 없으시잖아요…

큰일이 나신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미얀. 그만하고, 마저 이거나 읽어 주겠어요?



희진은 자꾸 살바체를 기억하게 하는 미얀의 말을 잘라버리고, 읽고 있던 이탈리어 책자를 미얀에게 읽어보라고 시켰다



“알겠어요. 좋아요… 음 어디였죠? “

머리를 휘휘 젓은 희진이 미얀에게 말했다.



“미얀. 우린 처음 첫 장도 아직 시작하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읽어 보라니까.”

“아, 그랬나요? 음…“Come siete?“ 이 말은 안녕하세요? 라는 말 이예요.

또, 밑에 “E felice.” 는 반갑습니다. 라는 말 이구요…”

“E felice… Come siete?….”

“아가씨. 정말 우리 주인님이 안보고 싶으세요?”

“미얀…!”



미얀은 그러나 희진의 말에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기심에 말똥거리며 희진을 쳐다보았다.



“전 정말 이해가 안 된다고요.

어떻게 이 주 동안 한시도 안 떨어져 있으셨던 분이 갑자기 안 보이는데 보고 싶지가 않으실 수 있으세요?

저 같으면 아마 살수 없을 거예요. 불안해서…”

“미얀. 난 그를 떠나고 싶어요. 그게 내 진심이죠.

도와주지 않을 거라면 그 책이나 마저 읽어 주겠어요? 부탁해요.”



* * *



-서울 (Seoul)



시원은 일주일동안 회사 일을 하나씩 정리해 두고, 다시 로마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동안 양 소영 때문에 희진을 찾는데 기울일 수 없었던 신경이었지만,

잠이 들기 직전이면 쉽게 잠이 오지 않을 만큼 무언가 놓친 기분이 계속 시원을 잡고 있었다.

낮에 수혁의 전화에 시원은 앞으로 회사를 또 얼마간 비울 예정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 만나

점심식사를 하기로 하고는 서둘러 약속장소로 향했다.

마피아가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서울에 있는 시원이 피부로 느끼기에는 그저 먼 나라 얘기 일 뿐이었다.

시원의 머릿속엔 희진이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여기야!"



딴 생각에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던 시원은

자신을 부르는 수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반갑게 웃다가 수혁 옆에 앉은 여자의 모습에 발을 멈추었다.

누군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수혁과 닮은 구석이 많지만 여자다운 구석이 많은 혜수는 얌전한 옷을 입고 다고 곳이 시원을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작은 볼에 홍조가 이곳에 억지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시원은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가 웃으며 말했다.



“혜수 아니야? 아직 돌아오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아, 엊그제 돌아왔어.

어차피 만날 사람들이니 편하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가 나오라고 했네. 괜찮지?”

“아, 네."



수혁의 설명에 시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빈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혜수는 예전부터 말이 없던 아이였다.

여전히 식사하는 내내 수혁과 함께 얘기하는 시원과 수혁을 웃으며 바라볼 뿐 끼어들지 않고 얌전히 식사를 하는 모습이었다.

미국에 있다 왔는데도 물들이지 않는 순수함이 아직 남아 있는 아가씨였다.



“나 먼저 들어가도 되겠지? 내 동생 잘 데려다 주게나.”

“네. 들어가십시오.”

“오빠. 들어가세요.”



시원은 혜수의 목소리를 이때 처음 들은 기분이 들었다.



“간단한 차 한 잔 더 시킬까?”

“네. 그러세요.”

“뭐 마시겠어?”

“… 커피요. 크림 설탕 안 넣은 걸로 부탁 드려요.”

“그래.”



원두커피 두 잔을 시키고, 두 사람은 말이 없이 앉아 있었다.

따뜻한 차가 나올 무렵에야 혜수가 차를 들어 입에 대면서 말했다.



“희진이 언니… 안 되었어요. 미국에서 그 얘기 듣고 며칠을 울었어요.

제가 동경하던 언니였는데…”

“그랬어? 하긴 네가 희진이 많이 따랐던 거 같다. 내 기억에도…”

“맞아요. 희진이 언니 친척들 중에서 저랑 가장 잘 통하는 언니였거든요.

저와는 달리 항상 당차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길도 … 주관이 뚜렷했던 언니였어요.”

“… 넌 하고 싶은 공부 그만 두고 온 거잖아? 후회 없어?”



시원의 질문에 혜수가 차를 내려놓고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시원오빠니까… 희진이 언니 빈자리 제가 채워드리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오지 않았을 거예요. “



할 말을 잃은 기분에 시원은 한참 말을 안 하고 혜수의 얼굴만 들여다보았다.

거짓으로 대하면 벌 받을 지도 모르겠다는 양심에 시원이 혜수를 보고 말했다.



“혜수야. 솔직히 말해 줄께.”

“네. 말씀하세요.”

“난 아직도 희진을 잊지 못하고 있어. 시간이 필요해.

이런 나를 너에게 기다려 달라 말하고 싶지 않다. 다시 공부를 하러 미국으로 가는 게 어떻겠어?”



한동안 말이 없이 시원의 말에 찻잔만 쳐다보던 혜수가 시원을 처음으로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오빠. 죄송해요. 저… 이미 자퇴서 내고 왔어요.

공부는 이제 그만 둘 생각이에요. 노력할게요.

오빠가 희진 언니 잊을 수 있도록, 저 노력할 거예요. 아니, 꼭 잊게 해 드릴 거예요.”



* * *



-사르데냐 섬(sardinia island)



살바체는 밤늦은 시각 “교향의 섬“으로 돌아왔다.

잠이 오지 않는 불면증이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지금 자신의 모습이 참 어이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희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 버릴까 고민을 했다.

그럼 모든 게 다 쉽게 끝날 것 같았다.

알고 있었다. 희진이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머리를 써 도전해 보라고 한 것도 자신이었다.



'아직은 네가 이긴 게 아니야. 지젤.'



살바체의 눈에 각오가 서렸다.

이번엔 기필코 이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각오,

어떻게든 자신의 손에 좌지우지 되게 만들고 말겠다는 소유욕이 들끓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간 살바체는 곧바로 나선형 계단을 지나 희진의 방으로 향했다.



'다시는 나 살바체 프란트가 한 여자 때문에 도망치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선 살바체는 고급 침대에 누운 실크가운에 여자의 실루엣에 멈춰 섰다가 희진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섰다.

허리선 위로 출렁이는 희진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구부러지며 흩어져 있었고,

가냘픈 어깨의 곡선과 허리의 잘록한 선이 한눈에 살바체의 눈으로 들어왔다.

침대가 부드럽게 출렁이며 살바체의 무게가 침대에 실려 오고,

따뜻한 체온을 실은 손이 희진의 어깨를 향해 다가가 고운 피부를 쓸어내렸다.



' 널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

온전히 나만 보고, 온전히 내 여자가 되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인가?'



희진의 고운 살결을 만질 때 마다, 들어오며 새겼던 마음에 증오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그렇게 가라앉았다.

살바체는 희진에게서 손을 때고, 코트와 옷을 하나씩 벗어 침대 옆에 두고 희진의 곁으로 들어가 뒤에서 조금씩 희진을 끌어당겼다.

위에 베고 있던 베개에 손을 올리고 자고 있던 희진이 뒤척이며 조금씩 살바체에게 따뜻한 몸을 찾아 안겨왔다.



“진…내 귀여운 고양이”



조심히 앉은 살바체가 이렇게 뒤에서 끌어앉고 희진에 귀에 속삭일 때,

희진의 잠꼬대가 살바체의 귓가를 정확히 때렸다.



“안…안돼요. 시원 씨…”

“…!”



* * *



희진이 시원에 앞에서 팔을 벌리고 말했다.



“안돼요. 시원 씨…”



시원이 그런 희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총을 들고 희진에게 물었다.



“왜 그를 감싸는 거지? 당신을 납치하고 아프게 했던 사람이야. 어서 비켜!! “

“아뇨. 이 사람을 죽일 순 없어요. 난… 난 이 사람을… "



꿈속에서도 희진은 자신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왜 총을 든 사람이 시원이고 자신이 감싼 사람이 살바체였는지,

그리고 왜 난 이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는 건지… 설명이 안 되는 기분으로 눈을 떴을 때,

희진은 등 뒤에서 들리는 거친 숨소리에 놀라서 뒤로 돌아 보고 숨을 들이마셨다.



'살바체 프란트…?!



“꿈속에서 그립던 사람을 만나니 좋던가? 눈물이 날 만큼 행복하던가?”



살바체의 거친 숨소리와 화난 눈빛을 보고 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가 화가 났는지, 왜 자신을 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방금 꿈속에서 내용도 이해가 되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자신도 살바체도 희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르겠다는 그런 눈빛 하지 마. 방금 내 귀로 똑똑히 들었으니까.

그 놈이 로마에 있었다면, 당장 죽여 버렸을 거야. “

“손가락을 자른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희진이 싸늘한 목소리로 살바체에게 말했다.

살바체가 곧바로 희진의 팔을 올리고 위로 올라와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만 보게 하겠어. 그 눈, 그 웃음, 전부 나만 향하게 만들겠어.

다신 그놈의 이름을 부르지 마.”

“내가 그런다고 당신 것이 되진 않아요. 살바체 프란트.”

“이미 네 몸은 내 것이 되었어.”

“그건 당신과 남자들의 착각이죠. 내 몸은 내꺼지 당신께 아니에요.”

“이래도?”



살바체의 입술근처에 희진을 비웃는 미소가 어렸다.

곧바로 희진은 그의 매끄러운 손이 유혹하며 자신의 실크 잠옷 안으로 부드럽게 흐름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살바체의 손이 희진의 가슴의 정점을 엄지로 살짝 쓸었고,

희진의 눈이 저절로 천천히 감겨오고, 가슴으로 부터 야릇한 감각이 반복되는 느낌에 숨이 가슴을 타고 크게 움직였다.

차라리 살바체 프란트가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을 우악스럽게 처음처럼 다루었다면 마음으로든 육체로든 반항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살바체의 손길은 눈빛과 다르게 한없이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희진이 부드럽고 자상한 움직임을 천천히 올라서는 오르가즘에 오르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살바체는 알고 있었기에

희진을 육체로 굴복시키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었다.

희진의 목선과 쇄골근처에 계속 키스를 하며 살바체는 희진의 드레스를 위로 살짝 올리고

흰 레이스의 조그만 팬티를 벗겨내고는 희진의 정점을 부드럽게 쓸었다.



“하아…”



일주일 동안 정성스런 살바체의 애무에 길들여졌던 육체가 마음을 배반하고 첫 번째 탄성을 내질렀다.

살바체의 단단한 몸이 부드럽게 자신의 안으로 살짝 살짝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그의 조용한 목소리를 들었다.



“Curses voi ed il mio destino. (당신과 나의 운명을 저주해) “



괴로운 살바체의 심정과 그의 눈빛이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보이는 그 모습이 보이는 듯해

희진이 살바체에게 이태리어로 말한 그의 말의 뜻을 물었다.



“…무슨 뜻이죠?”



살바체가 희진의 배에 손을 얹고 자신을 묻은 상태에서 희진의 눈을 들여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갈 때까지 가보자는 말이야. 지옥이든 천국이든… 난 당신을 놓지 않겠다는 말이지.”

“계속 이 게임을 하자는 말인가요?”

“Dal momento quando li vede il destino e partito. (당신을 본 순간부터 게임은 시작되었어) “

“학, 하아…"



살바체는 등을 피고 희진을 내려다보며

희진의 아름다운 여성의 곡선과 열꽃이 피어오르는 희진의 얼굴을 보며 때때로 눈을 감고 느낌에 젖어 들었다.

허리가 휘고 손이 저절로 머리위로 향해 쾌락을 더욱 부채질 하는 희진의 몸짓에

살바체도 희진의 아름다운 목선과 골반까지 한 번에 쓸어내리고 휘어지는 허리를 붙잡고 한층 더 힘을 주며 몰아 붙였다.



“Ampiamente non e conosciuto neppure in chiunque. Mettete fuori all'interno.

(아무에게도 주지 않아. 당신은 내꺼야.) “



절정을 향해 다가가는 순간이었지만, 살바체의 목소리와 눈은 한없이 가라 앉아 있었다.

살바체의 눈이 어느 때보다 차갑게 일렁였다.



* * *



- 서울 (Seoul)



혜수는 시원이 운전하는 모습을 힐끔 쳐다보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계속 자신이 말 한 뒤에 시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차 안에 긴장된 공기가 흘렀지만, 그건 자신만의 공간만인 것 같았다.

시원의 주위로는 완벽한 자신만의 공간이 존재하는 듯해, 혜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동경해 오던 오빠… 희진의 언니의 상대라 포기해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이 조금의 용기라도 있었다면 진작 고백하고도 남았을 첫사랑이자 짝사랑의 상대였다.

유학을 빨리 진행했었던 이유도 희진 언니와 행복해 하는 시원을 보기 싫었기에 잊기 위해 결정한 일이었다.

알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의 희진 언니의 들러리였음을…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용기내기로 한 이상, 모든 것을 내 던져 시원을 잡고 말겠다.

혜수는 미국에서 서울로 돌아오며 결심하고 또 결심했었다.



“난 이번에 이탈리아로 다시 가볼 생각이야.

희진이 죽음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난 그렇지 않아.

희진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빠!”



혜수는 별안간 시원의 고백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만큼 희진언니를 사랑했었던 걸까?

이탈리아에 갔다 온 걸로 아는데, 다시 가봐야 할 만큼… 죽어서 시체로 돌아온걸 알면서도,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행방을 찾을 만큼… 그 만큼 희진 언니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말도 안 돼요. 희진 언니는 죽었어요.”

“그렇지 않아. 희진은 죽지 않았어. 다만 행방불명되었을 뿐이지.

이번에 가서 기필코 희진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가져올 생각이야.

그리고 희진의 아버님에게 그 증거를 제시해야겠지. 그럼 국제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오빠…!”



시원이 혜수의 집에 차를 조용히 갔다 대고 혜수의 경악한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번에 이탈리아에서 희진이 마피아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 했어.

어쩌면 마피아 중 한명에게 납치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약혼자인 내가 모르는 곳에서 고통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걸 생각하면 잠도 오지 않아.”

“오빠… 그건 환상 이예요. 그런 일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아요. 영화 같은 일이라고요.

거기다, 모두 희진언니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어요. 왜 인정하지 않으시는 거죠?”

“…그만 내려. 집에 다 왔어.”

“시원오빠!”



시원의 고집스런 옆얼굴이 더 이상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혜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시원의 얼굴을 보다가 몸을 돌려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래. 오랜만에 만나서 즐거웠다.”



시원이 바로 차를 돌려 가버리고 나자, 혜수는 차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며 눈물이 나는 자신을 느꼈다.



'죽은 사람에게 지지 않아요. 저…'



혜수는 다시 한 번 울면서 다짐을 했다.



* * *



-사르데냐 섬(sardinia island)



미얀은 부쩍 말이 없어지고 웃음이 없어진 희진과 살바체를 보며 살얼음판을 걷듯이 행동하고,

모든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주위를 주었다.

살바체 프란트도 희진도 요즘은 두 사람이 함께 있어도 행복해 하는 모습이나, 웃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거기다, 살바체는 서재에, 희진은 연습실에 날이 밝으면 틀어박혀 저녁이 되어서야 나오고는 했다.



'이상해. 왜 들 그러시지?'



이럴 때 일수록 더 조심하고, 음식이나 환경을 유지하는데 더 심열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자신이 할일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쇄신 시켜보는데 있었다. 두 분을 위해서 미얀은 뛰고 또 뛰었다.

문제의 날도 미얀은 일하는 여자들에게 주위를 주고,

오늘의 주식인 송아지스테이크 요리의 준비과정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저택을 때렸고, 미얀은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접시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쨍그랑'



불길한 생각에 미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치워요. 금방 올 테니까“



곧바로 희진의 방에서 들린 여자 목소리를 향해 미얀이 긴 치마를 부여잡고 뛰었다.



* * *



희진이 살바체를 노려보고 외쳤다.



“살인자! ”



살바체 프란트는 한손에 쥐고 있는 카나리아가 축 쳐져 있는 것을 느끼고 다시 새장에 넣고 희진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했다.



“내 아리아를 왜 죽이는 거죠? 그 조그만 게 무슨 죄가 있다고 죽이죠? 말해요!”



희진은 아리아를 보고 웃으며 속삭이며 말하다가 당한 갑작스런 봉변에 그제야 눈물을 흘리며 살바체에게 따져 물었다.

살바체가 다가온 희진에 팔을 잡고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당기며 차게 내 뱉었다.



“그 웃음! 내게 보이지 않을 거라면 다른 어떤 것에도 보이지마. 손도 대지마!”

“미쳤군요. 당신 미쳤어요!”



살바체가 오랜만에 희진에게 그 말을 들었다는 시선을 하고 눈썹을 올리고 희진의 눈물을 쓸며 말했다.



“차라리 그렇게 화를 내는 게 어때?

그게 더 인간적이긴 하군. 감정을 실린 얼굴을 할 때는 내가 당신을 가질 때뿐이지.

이 한 방울의 눈물만큼도 난 당신에게 가치도 없겠지?”

“잘 아는 군요!”



그때, 미얀이 쏜살같이 들어와 힐끔 두 사람을 쳐다보고 말했다.



“무, 무슨 일이세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괜히 말을 시킨 게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하던 미얀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서있었다.

살바체가 희진을 향해 눈을 치우지 않고 미얀에게 말했다.



“이 새장 치워“

“안돼요! 미얀. 치우지 말아요. 내가 묻어줄 거야!”

“네?!”



순간, 미얀은 그제야 희진이 소중히 여기던 카나리아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속으로 비명을 삼키고 미얀이 한걸음씩 다가가 새장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가엽게도… 죽었네요.”

“어서 치워“

“네.”

“안돼요. 미얀. 그냥 놔둬요. 부탁이에요.”



희진이 살바체에게 두 손을 잡히고 미얀에게 사정했지만, 미얀은 살바체의 눈빛에 기가 죽어 새장을 들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살바체가 희진을 향해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진. 우린 따로 할일이 있잖아?”

“….살바체 프란트!!”

“당신의 다른 표정이 보고 싶어. 지금…!”

“…!”




잔인한 폭풍 [4장]



희진이 이곳에 온지 벌써 두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희진은 카나리아 아리아가 죽고 더 부쩍 말이 많아진 미얀의 말을 들으며 비오는 밖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오늘은 비가 와서 주인님이 오시지 못하는 모양이네요. “

“천둥치는 날 헬기를 띄우는 건 자살행위야. 미얀.”

“네. 맞아요. 그래서 못 오시고 계신가봐요. 올 시간이 훨씬 지나셨잖아요? 기다리지 마세요. 아가씨.”

“난 기다리지 않아요, 미얀.”

“아까부터 창문만 보고 계셨잖아요?”



미얀이 희진의 젖은 머리를 말려주면서 고개 돌린 희진에게 말했다.

금방 샤워를 마치고 나온 희진의 얼굴이 뽀얗게 살아 있었다.



“저 비가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차라리 그럼 날 보러 영영 오지 못할 테니까.”

“아가씨…”



멍하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미얀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아, 희진이 미얀의 손에서 브러시를 빼앗아 들고 말했다.



“내가 할께. 그만 쉬도록 해요. 미얀.”

“네.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요. 미얀“



미얀이 나가고 난 뒤에 희진은 창문 쪽으로 걸어가 커튼을 쳤다.



'콰콰콰 쾅 '



다시 가까운 곳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방의 불도 나가 정전이 되고 말았다.



“꺄~!!!”



순간 동시에 밖에서 미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희진이 비병소리에 놀라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공간에서 커튼을 다시 치고 가끔 천둥치는 불빛에 의지해 서랍 쪽으로 다가갔다.

촛불이든, 손전등이든 불이 필요 했다.

여기 저기 찾아 헤매던 희진이 다시 “꽝꽝!” 하고 더 세게 치는 천둥소리에 놀라

안 열리던 서랍을 힘 있게 열다 서랍과 함께 넘어졌다.



“아야“



다시 방안이 환하게 밝아져 오고, 희진은 그제야 초를 집어 들고, 서랍에서 불을 찾아내 초에 불을 비췄다.

희진은 초에 불이 들어오자마자 밖 복도로 나가 주위를 살폈다.

벌써 몇 명의 하인들이 미얀의 비명소리에 밖으로 나와 작은 초들이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미얀. 무슨 일이예요?”

“아, 아가씨… 제가 갑자기 불이 나가는 바람에 계단에서 넘어져서 그래요.”



희진이 주위 사람들의 염려스러운 눈들을 보며 미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촛불을 미얀이 잡고 있는 발목에 갔다 댔다.



“움직이지 말아요. 삔 것 같아요.

내일 의사에게 보이기 전까지 뜨거운 수건으로 찜질을 하고 쉬어야 해요.”

“아, 네. 그래야 갰어요.”



희진이 옆에 서 있는 남자하인을 보고 미얀을 올려서 방에 대려다 주라는 손짓을 했다.

남자 하인이 알겠다는 표시를 하고 미얀을 올려 안아들고 계단을 내려갔고,

여자 하인 몇 명이 염려하는 얼굴로 그들을 따라갔다.

희진은 그제야 방으로 다시 돌아와 양초를 책상위에 올려두고 아까 쏟았던 서랍을 정리하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주저앉았다.



“응?”



못 보던 얇은 책자에 희진이 몇 장 넘겨보다 옆으로 치워두고 서랍을 정리해 끼워 둔 뒤,

그 책자를 들고 초를 가지고 침대 머리맡에 초를 조심스럽게 세워두고는 책자를 들고 앉았다.

날짜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일기장인 듯 보였다.

희진은 프랑스어로 적힌 그 말들을 읽어 내려가다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알페르노? '



희진은 연애편지를 쓰듯 써내려간 그 일기장에 한참 쳐다보다

그제야 이 일기장이 프랑스 인이었던 살바체 프란트의 새어머니 헤지나의 일기장인 것을 알았다.

아마도 이 방은 그의 새어머니가 썼던 헤지나의 방이었던 모양이었다.

곳곳에 보이는 알페르노라는 익숙한 이름과, 숨겨둔 일기장이라니…

희진은 읽어 내려가다 모르는 단어에 눈살을 찌푸리며 해석에 들어갔다.

잠시 후 희진은 그 일기장에 마음을 빼앗겼다.



* * *



다음 날 헬기를 타고 살바체가 보낸 의사가 도착했다.

살바체는 로마에 급한 일로 저녁식사에 맞춰 오겠다는 말을 전했다.

미얀이 자신의 방에 들어선 희진을 보고 미안한 눈빛을 했다.



“걱정시켜 면목 없습니다. 아가씨.”

“의사가 삼일간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미얀. 걱정 말고 푹 쉬도록 해요.

당신 말고 일하는 사람이 10명도 넘잖아요.”

“그렇지만, 저만이 아가씨와 대화할 수 있잖아요? 제가 없는 동안 심심하실 텐데…”

“괜찮아요. 흥미로운 걸 발견했으니까… 미얀, 미안한데 이곳에 프랑스어 사전이 있을까요?”

“프랑스어 사전이요? 아… 아마 주인님 서재에 가시면 있을 거예요.”



희진이 미얀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그 방은 문이 잠겨 있잖아요.”

“아, 그 방 말고, 3층 다락근처에 큰 문이 하나 있죠?

그곳이 예전에 큰 서재로 썼던 곳 이예요. 아마 아가씨가 읽으실 만한 책들도 있을 거예요.

아,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지?”

“그래요?”



희진이 곧바로 미얀의 말에 침대 옆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가씨!”

“네?”



나가려던 희진이 미얀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죄송한데, 주인님의 애완견인 제레미를 좀 봐주시겠어요?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거예요. 불쌍한 것이 임신 중인데 말 이예요.”

“어디에 있죠?”

“지금은 주인님 서재 방을 지키고 있을 거예요.

충성스러워서 주인님이 오시기 전까지 나올 생각을 안 하네요.”

“… 미얀. 물지는 않겠죠?”

“걱정 마세요. 제레미는 착한 개랍니다.”



미얀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희진은 알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고 미얀이 주는 개의 먹이를 받아 들었다.

한숨을 한번 쉰 희진이 살바체의 방 쪽으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살바체의 방문을 조금 열었다.

곧바로 개 짓는 소리와 함께 제레미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렸다.



“제레미. 너 주려고 밥 가져왔어. 가만히 있어.”



그래도 친해질 생각이 없는지 제레미는 동요하지도 않고 계속 짖었다.

희진이 고기를 조금 잡아 뜯어 방문 사이로 던져 주자,

짖던 제레미가 희진을 한번 보고 고기 조각을 보고 하더니 배가 고팠는지 고기를 주서 먹었다.



“잘했어. 제레미. 이 방문 조금만 더 열고 고기 다 줄 테니까. 절대로 나 물면 안 된다.”



희진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조금 문을 더 열자 가만히 쳐다만 보는 제레미였다.

희진이 살짝 미소를 짓고는 접시에 있는 고기를 전부 발밑에 두고 한걸음 물러났다.

제레미가 희진에게서 눈을 때지 않고 어슬렁거리면서 나와 접시에 코를 박았고,

희진이 가만히 제레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웃으며 쪼그려 앉았다.



“임신 하면 잘 먹어야 하는 거야. 제레미.”



금새 다 먹어치운 제레미를 보고 희진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제레미를 보고 이리 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제레미가 희진을 힐끔 보고 이제 희진에게서는 더 나올게 없다는 듯 눈을 무심하게 하고는

열려 있는 살바체의 방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버렸다.

희진은 허탈함에 웃음이 나왔다.



* * *



- 서울 (Seoul)



혜수는 여자 친구들과 함께 조용한 바에 앉아 있었다.

이곳에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찾은 친구들이 혜수를 끌고 들어온 강남에 위치한 바였다.

그동안 혜수는 오빠 수혁에게 부탁해 시원이 이탈리아로 떠나지 못하게 하고 집안 어른들에게 약혼을 서둘러 달라는 부탁을 했다.

혜수는 희진이 죽지 않았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이미 수혁에게 들은 바로는 희진의 시체를 화장하고 강물에 뿌렸다고 했다.

그런 희진이 살아 있다고 믿는 시원이 혜수는 불안하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이제 곧 약혼할 애가…”

“그래. 부럽다. 최 혜수… 킹카 중에 킹카로 유명한 권 시원의 약혼녀라니.

그 도도 카리스마 시원 씨와 순진한 처녀 혜수와의 결혼. 볼만 하겠다. 하하하“

“맞아. 맞아.”



모두 대학학교 때 부터 친구들이라 혜수가 누구를 좋아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는지라, 혜수의 친구들은 놀리느라 바빴다.

굳이 혜수도 내숭을 부리지 않고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살포시 웃어 보였다.



“어? 야… 저기 저 여자. 양 소영 아니니?”

“아, 맞아.”

“저 기집 년 아직도 저러고 다니네.”

“야, 선배에게 그게 무슨 말 버릇이야?”



혜수가 친구들의 눈살에 소영이 쪽을 한번보고 이렇게 말했지만,

애들은 혜수에게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는 시선으로 보며 혜수에게 말했다.



“너 모르면 가만히 있어.

너 오기 전에 저 양 소영이 권 시원이랑 약혼한다고 얼마나 떠들고 다녔는지 알아?”

“뭐?”

“웃기지도 않아.

지네 오빠가 이번에 국회의원 된 거 하나로 가진 유세는 다 부리고 다닌다니까.

솔직히 줄을 잘 타고 흐름을 타서 그렇지.

어림도 없지. 없어.”

“… 야, 이리 온다. 조용해.”



언제 소영에 대해 얘기했냐는 듯 서로 아무렇지 않은 시선으로 소영을 무시하고 있던 애들이 곧바로 소영이 아는 척하며 다가오자

고개를 가닥이며 인사했다.



“아니, 오랜만이다. 혜수? 잘 있었니? 니들은?”

“아, 안녕하세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각기 인사하던 애들 중 곧바로 말 잘하기로 유명한 미선이가 소영에게 잘난 척하듯이 말했다.



“이번에 언니 소식 들었죠?

우리 혜수가 권. 시. 원 씨랑 약혼하게 된 거 말 이예요.

집안들끼리 정한 일이라 혜수도 어쩔 수 없다지 뭐예요? 그렇지?”

“어?…응“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소영의 표정에 모두들 고소하다는 표정이었다.

혜수는 그 사이에 껴서 아무 말 없이 앞에 있는 맥주병을 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



“그래? 잘 되었네. 그렇지만, 최 혜수… 네가 행복할까?”



소영이 혜수 쪽으로 걸어와 어깨에 손을 집으며 이렇게 말했다.

혜수가 그 손을 쳐다보고 성격에 맞지 않게 눈을 빛내며 소영에게 말했다.



“네. 전 행복할 거예요. 꼭… 무슨 일이 있어도 말 이예요.”

“그래. 두고 보지 뭐. 즐거운 시간 들 돼“



금방 자존심을 세운 양 소영이 자리를 뜨고 나자 모두 눈살을 찌푸리다가 혜수를 보고 웃었다.



“야. 너 웬일이니? 깜짝 놀랐다.”

“그러게. 미국 갔다 오더니 너 많이 간이 커졌다.”

“…"



혜수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시원을 놓지 않겠다고….



* * *



-사르데냐 섬 (sardinia island)



살바체는 그 날 날씨가 다시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도 불과하고 약속대로 저녁 무렵 도착했다.

희진은 창문 밖에서 살바체가 들어서는 것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자신도, 살바체도… 무엇인가 살바체에게 복수하고 끝낼 계기가 필요했다.

준비는 거의 맞춰지고 있었다.

희진은 살바체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기 전에 생각을 정리 했다.

희진의 눈빛이 카르멘의 복수의 눈빛으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약해지는 마음을 다 잡고 희진은 살바체가 자신의 생각대로 힘 있게 들어오는 모습을 외면하고

침착하게 침대에 앉아 살바체의 인사를 들었다.



“오늘 뭐했지? 귀여운 고양이?”



살바체의 물음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희진의 턱 선이 굳게 다물어 졌다.

살바체의 짙은 눈썹 한쪽이 올라가는 것이 무슨 뜻인지 희진은 알고 있었다.

살바체의 눈썹이 동시에 올라가면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저렇게 잔인하게 만든 게 자신이라는 것 역시…



“산책“

“또?”

“잤어요.”

“또“

“식사 했죠.”

“또…”



희진은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서 이번엔 그를 놀려 줄까? 어떻게 복수해 줄까?

이 생각 밖에 희진은 요즘 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살바체에게 다가가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았다.



“당신 개 있죠?”

“제레미?”



희진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흥미롭다는 듯 살바체가 각진 자신의 턱선을 문질렀다.



“계속해.”

“그 개 임신 했더군요.”

“만졌나?”

“만졌죠. 예뻐서 한참 예뻐해 줬죠. 처음보다 이제 절 잘 따르더군요.”



살바체가 희진의 말이 우스운지 '훗' 하고 코웃음을 쳤다.

눈… 짙은 파랑색의 그 눈이 검정빛을 띄기 시작 했다.

희진은 알았다.

저 눈이 바로 살바체의 상처 받은 눈이라는 것을… 상처를 보이지 않기 위한 그의 방패라는 것을…



“너의 카나리아의 대한 복수인가?”



살바체의 긴 손가락이 희진의 턱을 앞으로 당기고 고집스런 검은 눈을 똑바로 응시 했다.

희진은 주눅 들지도 않고 맞받아 쳤다.



“죽여요. 내 카나리아처럼…”

“후후, 하하하하“



살바체의 은빛과 비슷한 금발머리가 고개를 젖히고 웃을 때마다 이마에서 가늘게 흔들렸다.

희진은 알고 있었다.

천사처럼 생긴 저 얼굴과 정 반대로 악마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악마를 끄집어 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복수. 복수 할 테야. 두고 봐…'



희진의 눈빛이 반짝 빛날 때 살바체가 순간 웃음을 멈추고 한쪽 입술 선을 비스듬히 올렸다.



“내 작은 고양이가 내 애완견을 만졌다? 죽이길 원한다?”



희진은 살바체가 죽일 리 없을 거라 생각 했다.

이 저택에서 그의 사랑을 받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바로 그 스페인산 토종의 개 제레미 라는 것을…

살바체의 시선이 제레미를 볼 때 부드럽게 변한다는 것을 희진은 여러 번 목격한 바가 있었다.



“쿡, 재밌어. 날 시험 하다니…”



살바체는 그 말과 함께 허리를 펴고 일어나 고급 탁자에 올려져 있는 전화기를 들고 말했다.



“제레미 가져와.”



단 한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은 살바체가 희진을 향해 천천히 유유히 돌아 섰다.

탁자의 비스듬히 기대 팔짱을 끼고 희진의 시선을 잡고는 살짝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살바체 때문에 희진의 미간이 저절로 좁혀 왔다.



“하루가 지날수록 날 더 닮아가는 건가? 아니면 원래 잔인한 여자였나.”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그의 물음에 희진 역시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내 잔인성을 당신이 끄집어냈겠죠.”

“쿡“



그때, 문이 열리며 듬직한 체구의 그을린 몸매를 하고 하인이 늑대만한 크기의 흰털이 복실한 제레미를 데리고 들어섰다.

제레미는 주인인 살바체를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살바체의 내민 손을 핥았다.

제레미를 데리고 온 하인이 나간 후에 살바체가 여전히 제레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스럽다는 듯 주저앉아 자신의 어깨에 제레미의 머리를 올려놓고 안았다.

희진은 그 모습을 보고 코웃음 쳤다.



'당신은 죽일 수 없어.'



희진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살바체 프란트는 희진의 표정을 힐끗 보고는 다리를 피고 천천히 일어섰다.

희진의 시선이 그를 따랐다.

살바체는 구석의 고급 장식장 안에 취미로 모아놓은 구식 칼들이 즐비한 곳에서

잘 다듬어진 날렵한 칼집을 하나 꺼내 들었다.



'스르륵'



칼집에서 길게 뻗어 나오는 칼의 스침 소리가 희진을 소름끼치게 했다.

희진은 그 때만 해도 설마 하며 살바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잘 봐.”



살바체는 희진의 눈으로 한번 눈짓하고는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칼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을 만큼 날렵한 동작으로 제레미의 목안에 칼끝을 밀어 넣었다.



“캥, 캥!”



'헉!'



희진의 눈 안에 지금의 모습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다가왔다.

제레미의 작은 탄성! 뿜어져 나오는 제레미의 목에서 타고 흘러나오는 붉은 피…

조금의 양심도 없이 애정도 없이 제레미의 목을 뚫고 들어가는 그의 칼…

그의 입술의 즐거운 듯 올라간 입술 선까지… 희진은 할 말을 잃었다.



'스윽…'

'털썩'



목에서 빠져 나온 칼이 빠지자마자 바둥거리던 제레미는 힘을 잃고 부르르 몸을 떨다 곧 움직임을 멈췄다.

희진 역시 숨을 멈췄다.



'너무 큰 도발이었어. 그를 또 얕잡아 봤어.'



살바체 프란트는 그 칼을 들고 천천히 희진을 향해 걸어 왔다.

움찔하는 희진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살바체는 진지한 눈으로 희진을 보며 피가 묻은 칼을 희진의 목선에 갔다 댔다.



“조심해. 너도 저 꼴이 될 수 있어. 내게서 도망치면 말이야.”



희진은 살바체의 진지한 눈을 보며 말했다.



“제레미의 뱃속의 새끼들… 어쩌면 살릴 수 있을 지도 몰라요.”

“훗, 살리고 싶나?”

“살려 줘요. 지금…”



희진의 말이 우스운지 살바체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칼을 칼집에 넣고는 말했다.



“왜 그래야 하지? 넌 또 만질 텐데…”

“차라리 내 손목을 자르지 그래요?!”



전화기 쪽으로 가는 그의 등에 대고 희진이 소리 쳤다.

살바체가 피식 웃고는 칼을 소리 나게 탁자에 올려 두며 말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야. 원한다면 해주지. 원해?”



희진의 말이 없는 모습을 보며 살바체는 전화기를 들고 말했다.



“제레미 데려가. 수의사 부르고.”

“…빨리요.”

“급하다는 군….”



남 일처럼 말하는 살바체는 그 말을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고 가늘게 분노해 떨고 있는 희진을 향해 유유히 걸어 왔다.


'무대에서 퇴장할 시간이 다가왔군요.

이렇게 만든 게 나라는 것을 … 당신은 모르겠지만, 난 알고 있어요.

내가 원하던 복수, 결말이 다가오고 있어요. 살바체 프란트…!'




퇴장 [5장]



살바체의 손이 희진의 허리를 꼭 감싸고 있을 때, 희진이 눈을 떴다.

뒷목에서 살바체의 고른 숨이 느껴졌다.

희진은 눈을 감고 잠깐 숨을 들이켰다.

살바체에게 남자로서의 매력, 끌리지 않는다 말한다면 거짓말이었다.

특히 이렇게 평화로운 아침을 맞을 때나,

살바체의 부드러운 손길이 자신을 만지고 있을 때면 희진은 크나큰 마음의 흔들림을 느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마음과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그 마음은 극과 극이었다.

살바체가 잔인해지면 자신도 잔인해지는 게 쉬웠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날 차라리 증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살바체 프란트. 내가 남는다 해도, 우린 파멸뿐이니까…'



희진이 살바체의 손을 치우고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일어나려고 할때,

살바체가 희진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고 말했다.



“가만있어.”



살바체 역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안정된 순간이라 생각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눈을 뜨면 서로 상처를 주는 시간만이 있을 뿐이니까…



“일어날 생각 이예요. 놔주세요.”



희진이 살바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살바체의 손이 미끄러지듯 놔주는 동시에 희진이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욕실로 들어섰다.

희진은 거울을 보며 물을 틀어놓고 한참을 서 있었다.



'난 무대에서 지금껏 연기를 해 온 것뿐이야.

이대로 마지막 대본에 따라 연기를 하고 내려오면 끝나는 거야. 마음 약해지지 마. 최 희진.'



희진이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도 살바체는 침대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향긋한 비누 향기가 나는 희진의 모습을 눈으로 쫓던 살바체가 희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희진이 그에게 천천히 걸어가자 살바체가 희진의 팔을 끌고 가슴근처에 머리를 묻었다.



“날 잔인하게 만들어마. 진.”

“…난 그런 적 없어요. 살바체 프란트.”



한없이 부드러워지고, 한없이 유혹적이며, 한없이 잔인해지는 남자에게 희진은 다시 거짓말을 했다.

살바체의 눈빛도 짙은 남색으로 어두워 졌다.



* * *



-서울 (Seoul)



“오빠에게 부탁했어요. 우리가 약혼을 하고 나면 시원오빠에게 시간을 달라고 말 이예요.

저도 희진 언니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오빠를 말리지 않을 생각 이예요.”



시원은 점심을 먹으며 혜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아버지와 집안어른들의 반대로 시원이 이탈리아로 떠나는 게 무산이 되고 말았다.

그 말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잘 알고 있는 시원은 일부러 혜수가 만나자고 해도,

만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고 따돌리고는 했다.

괘심했다.

믿고 얘기했던 일을 전부 어른들에게 말하고 자신의 발목을 잡은 혜수가 시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혜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먼저 희진의 말을 꺼내 시원을 달래고 있는 것이었다.

시원은 어쩌면 혜수가 보기보다 영약한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약혼식을 나도 몰래 잡아 버린 건가?”

“오빠… 제가 말하려고 해도, 오빠가 전화를 안 받으셨잖아요?

저도 이렇게 빨리 진행될지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그래도 이틀 뒤라니… 난 동의한 기억도 없어.”

“…죄송해요. 하지만, 어른들끼리 정한 일에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오빠.”



시원이 피곤하다는 시선으로 혜수를 보다 물을 한잔 마시고 몇 숟가락 뜨지 않은 수저를 내려 놨다.

안절부절 시원의 눈치를 보던 혜수도 수저를 내려놓고, 시원의 안색을 살폈다.



“넌 기다릴 수도 있었어. 내가 이탈리아에 갔다 온 후에도 얼마든지 시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안 그래?”



시원의 책망하는 눈을 보고 혜수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있다가 울 것 같은 눈으로 시원을 보며 물었다.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여자로서 아무런 매력도 없나요? 많이 부족해 보이나요?”

“…휴, 최 혜수“

“저 오빠 사랑해요. “

“뭐?!”



갑작스런 폭탄발언에 시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혜수를 바라봤다.

혜수가 시원을 보고 고집스럽게 눈물이 고인 눈으로 보며 못 박았다.



“저 오빠 사랑한 다구요. 솔직히 말하면 오래 되었어요.

오빠가 희진 언니 보고 있을 때부터… 제 마음 알아달라고 말하는 것 아니에요.

저 그만큼 잘하겠다는 각오로 말씀 드리는 거예요.

약혼식 후에 오빠가 이탈리아로 떠나고 저에게 아무런 감정 없다고 해도, 저 기다릴게요.

그럼 이탈리아에 다녀오신 후에 저 조금만 봐주세요. 네?”

“최 혜수….”



시원은 혜수의 눈을 보고 차마 거절 할 말을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남자가 진실하게 다가오는 한 여자에게 거절의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시원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 샤르 데냐 섬 (sardinia island)



희진은 하루 종일 집안하인들의 냉랭한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꼈다.

제레미를 죽인 게 살바체 임에도,

예전의 모습이 하나도 없이 그 사랑하던 제레미를 오죽하면 주인님이 죽였겠는가하는 하인들의 시선이었다.

비록 뱃속의 다섯 마리의 새끼 중 네 마리는 살렸지만, 그건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미얀 역시 주인님을 이해할 수 없다며 희진에게 투덜거렸다.



“제가 어제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런일은 없었을 텐데. 제가 몸으라도 막았을 거라고요.

아, 불쌍한 제레미. 불쌍한 주인님…”



희진이 미얀의 마지막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미얀이 누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말했다.



“뭐가 살바체가 불쌍하다는 거죠? 제레미를 죽인 사람은 바로 그예요.”

“아뇨. 그렇다고 해도 분명 후회하셨을 거예요.

백번 후회하시고, 자책하셨을 게 분명하다고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사랑하는 아가씨가 옆에 계시니까요.”

“미얀…”



희진이 한숨을 쉬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얀이 희진을 보고 말했다.



“저 곧 일어날 거예요. 아가씨.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세요.”



나가려던 희진이 문을 열려다가 미얀을 돌아보고 다가가 가만히 통통한 미얀의 손을 잡았다.



“미얀. 날 외롭지 않게 미치지 않게 그동안 지켜줘서 고마워요.

미얀이 아니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아가씨. 그동안 제가 없어서 힘드셨나요?”

“그래요. 미얀 얼른 나아줘요.”

“네. 곧 일어나겠습니다.”



희진은 살바체가 그날 저녁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살바체가 나가는 걸 보지 않으려고 희진은 일부러 연습실에 틀어박혔다.

연습 중 살바체가 희진의 연습실로 들어서 한참 희진의 모습을 지켜보다 나갔지만,

희진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연습에만 몰두했다.

연습은 살바체가 나가고 나자 뚝 끊겼다.

곧바로 음악을 끄고 난 희진은 토슈즈의 끈을 풀어내고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저녁식사를 혼자 하고, 모든 하인들이 잠에 빠져 저택이 조용하길 기다린 희진은

모두 고요해 지고 난 뒤에 옷장으로 다가가 옷장 구석에 숨겨 두었던 살바체가 주었던 상자를 꺼내 들었다.

바세론 콘티탄틴 1972의 시계가 작은 방의 불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희진은 곧바로 그 시계를 자신의 손목에 끼어 넣고, 금속성의 아름다운 상자 안에 살바체에게 줄 선물을 넣었다.



'헤지나의 일기장.'



이 일기장으로 살바체와 알페르노에게 크나큰 고통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자신이 사라지고 난 뒤에, 살바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희진은 마음을 다 잡고 일기장을 넣어두고 간단한 메모를 남겼다.



[당신과 내가 있었던 모든 일은 한낱 무대에서 연기했던 것에 불과하다 생각해요.

난 무대에서 내려왔어요. 살바체 프란트.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내 기억에서

그리고 당신의 기억에서 사라지 길 바래요.

공연이 끝난 후, 텅 빈 무대만이 남듯이 말 이예요. 안녕.]



희진은 쪽지를 네 등분으로 잘 접어 일기장 끝에 끼워두고, 상자를 화장대 위에 살바체가 볼 수 있게끔 잘 올려 두었다.

가려면 이제 움직여야 했다.

승마장까지 걸어갈 시간과 말을 훔칠 시간…

그리고 해변에 물건을 배달하러 오는 배를 타기 위해서 지금 움직여야 했다.

배를 타기위해 뱃삯으로 줄 보석을 조금 챙긴 희진은 옷을 가장 단순하게 입고 승마부츠를 신은 뒤에

가장 아끼는 토슈즈와 보석을 가방에 넣고 방을 조심스럽게 나와 나선형계단을 지났다.

올려 묶은 머리와 승마용 단순한 모자가 희진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저택의 뒷문을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연 희진은 곧바로 쏟아지는 달빛에 의지해

바삐 다리를 움직여 승마장 쪽으로 걸었다.

가끔씩 저편에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희진의 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희진은 걸으면서 긴장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살바체가 일기장을 본 후에, 올 여파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안된 마음도 들었지만,

희진은 앞으로의 일만을 생각했다.

우선은 자신의 인생을 찾는 게 가장 중요했다.



'내 인생은 다시 찾겠지만, 살바체 프란트…

당신의 인생은 이제 벼락으로 떨어지겠죠?'



3시 무렵 2시간정도 걸었던 희진은 승마장 근처 말 푸레짓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조심히 안으로 들어간 희진은 50마리도 넘는 말들 사이에서 자신이 탔던 말을 찾았다.

말이 놀라지 않게 말의 미간을 쓸어주고 조심스럽게 안장과 말을 끌고 나가려는데,

순간 사람의 기침소리가 저 끝에서 들려왔다.

희진이 숨을 죽였다.



'푸우'



기침 소리에 맞춰 말이 푸레짓 소리를 냈다.

말을 사이에 두고 공간에 숨은 희진은 사람이 지키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놀라 숨을 멈추고 호흡을 진정시켰다.



'여기서 들키면 끝장이야.'



떨리는 마음을 진정 시킨 희진은 곧 기침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벽을 사이에 두고 망을 보았다.

전에도 본 적이 있는 관리인 한명이 꾸벅 의자에 앉아 끝에서 졸고 있었다.

저 남자에게 들키지 않고 끌고 나가려면 최대한 조용해야 했다.

조금 후면 동이 터올 테고 사람이 더 올 수도 있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희진은 마음먹고 안장을 손에 든 채 최대한 조용한 걸음으로 지푸라기가 자신의 발소리를 죽여주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말을 천천히 끌고 움직였다.



'조금만 더 가면…'



다시 남자의 기침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왔다.

훌쩍이는 소리로 보아 깨기 일보직전 인 듯 했다.

희진은 순간 뛸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등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 시간에 걸음을 한걸음 더 걸었다.

뛰는 순간 발소리에 남자가 화들짝 깰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남자의 놀란 말소리가 들린 후에 뛰어도 늦지 않았다.



'푸우, 푸우'



간간히 들리는 말 푸레짓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남자는 희진이 문 여는 소리를 듣지 다행히 듣지 못하고 있었다.

희진은 말을 끌고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으며 아직도 꾸벅 졸고 있는 남자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승마장에서 한참을 말과 안장을 가지고 걸어 나온 희진은 안심이 된 후에야

안장을 얹고 올라타, 전에 살바체와 지나가다 유심하게 봐둔 선착장으로 말 머리를 향했다.



'이런 고립된 섬에서 항상 신선한 음식을 어떻게 장만하죠? 미얀?'

'거의 자급자족 하고 있지만, 사르데냐 섬에서 평일에만 배달을 해주고 있어요.

이래 뵈도 일하는 사람이랑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필요한 게 많답니다.'

'그래요?'

'네. 새벽에 일찍 나가보지 않으면, 신선한 재료를 구하지 못 할 수도 있죠.

우리 쪽 저택에서 쓰는 음식이야, 배달을 직접 해주고 있지만,

서민들은 자신이 직접 나가보지 않으면 안 되죠.'



희진의 생각대로 라면, 선착장은 단 한 곳이어야 했다.

만약 다른 곳으로 오는 배라면… 희진은 허탕을 쳐야 하는 것이다.

해변을 따라 말을 달린 희진은 곧이어 분주한 선착장을 볼 수 있었다.

생각대로 한참 사람들이 물건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희진은 모자를 더 깊숙이 눌러 쓰고 밤에 그림자에 얼굴을 숨기고는

말에서 내려 필요한 가방을 챙겨 들고 말의 엉덩이를 차 돌려보냈다.

저 배를 타지 못한다면 큰일이었다.

희진은 둑 앞에 나와 있는 사람들 중 저택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있는지 유심히 보며

익숙한 얼굴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희진 보다는 하나라도 더 나은 물건을 고르고, 흥정하려고, 물건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관심을 갖는 사람들 이었다.

희진은 배 앞으로 다가가 그동안 연습했던 이태리어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책임자처럼 보이는 남자에게 속삭여 말했다.



“Si brucia e nya che desidera andare all'isola. (사르데냐 섬으로 가고 싶습니다.) “

“Il caso non e il lavoro duro.(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오.) “



희진은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남자의 긍정적인 고갯짓에 희망을 가지고 챙겨왔던

사파이어 반지를 하나 빼 남자에게 건넸다.

큼지막한 사파이어를 남자가 눈을 빛내며 평가하듯 보석을 불빛에 비춰보고 있었다.

희진은 침을 삼키고, 하나 둘 자신을 유심히 보는 시선이 등 뒤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 긴장하며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Cio e la troppa cosa costosa.(이것은 너무 비싼 물건이오.) “



고개를 저으며 반지를 돌려주는 남자를 보고, 희진은 절망감에 남자의 굵은 팔뚝을 덥석 잡고 다시 부탁했다.

꼭 타야 했다.

오늘 안으로… 지금 당장, 이곳에서 떠나야 했다.



“Sta affidando a. (부탁입니다.) “



남자가 희진의 간절한 눈동자를 보며, 희진의 팔이 자신의 팔뚝을 잡은 모양을 눈여겨보고는 거칠게 내뱉었다.



“Con il freebie l'altro copriletto. (그냥 타시오.) “

“?!”



희진이 못 알아듣고 남자를 멀뚱히 쳐다보자, 남자가 다시 한 번 희진의 팔을 잡아 배 쪽으로 당기며 타라는 시늉을 했다.

희진은 감사하다는 표시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재빨리 배 안 쪽으로 들어가 사람들 시선에서 자신을 치웠다.

남자가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들과 자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주고받고 마음을 돌릴 것 같아 조마조마 했다.

다행히, 크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었던 듯, 물건을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들과,

배를 움직이려고 준비하는 남자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살바체 프란트의 여자가 동양인 이라는 소문이 벌써 다 알고 있는 일일 테지만,

설마 이런 이른 새벽에 배를 타려는 낮선 여자가 그 여자일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듯 했다.

살바체 프란트의 여자는 이런 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무튼,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 섬에서 나갈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가장 어려운 고비는 넘기게 된 것이다.

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동이 떠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교황의 섬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 * *



“이걸 파시겠다고요?”



희진은 엉망인 초보의 발음의 문법이 엉망이었지만 말이 통하는 남자를 만났다는데 감사하며

가장 쉬운 단어를 골라 남자가 알아들을 말을 고심해 영어로 대답했다.



“친구와 함께 구경 왔다 친구를 잃어버렸지 뭐예요.

이걸 팔아 배 값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요.”

“이런 딱 하게 되셨군요. “



바세론 콘티탄틴 1972의 시계가 남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하지만, 저흰 이런 고가 시계를 당장 살 만한 형편이 안 될 듯싶습니다.”

“아… 저, “



희진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남자가 다시 건네는 시계를 쳐다보고 말했다.



“조금이라도 괜찮아요. 제가 집에 돌아갈 차비정도만 된다면 상관없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글쎄요.”



아깝다는 표정으로 시계와 희진을 번갈아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흔들렸다.

희진은 입술을 깨물고 남자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어 주길 바랐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에 저희 가계에 방문해 다시 찾아 가십시오.

이런 명품을 그저 헐값에 받아 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희진은 남자에게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남자가 알려주는 로마로 가는 배의 세세한 정보를 들었다.



“배를 타고 6시간 정도… 도착하면 로마로 가는 버스를 한 번 더 타셔야 할 겁니다.”

“네.”



희진은 남자에게 다시 한 번 인사하고 허름한 시계방을 나와 비가 오기 시작한 사르데냐 섬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살바체가 자신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그가 문제의 상자를 열어볼 시간이 얼마 남지 않고 있었다.

희진은 고개를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남자가 말해준 항구로 걸음을 빨리해 걸었다.



* * *



아침을 알리는 햇빛이 비가 온 후 굵은 먹구름 사이를 뚫고 간간히 모습을 드러냈다.

로마 자신의 저택에서 눈을 뜬 살바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어제 저녁 모임에서 만난 체논과 양주를 들이부은 결과였다.

욕실로 맨발로 걸어 들어간 살바체는 욕실 장에 구비된 각종 비타민과 아스피린 중 하나를 꺼내 입속에 털어 넣었다.



“여. 일어났군.”

“넌 멀쩡하군.”

“크큭, 당연하지. 나야 생활이니까.“



말쑥한 정장차림의 체논을 보고 살바체가 머리를 흔들었다.



“약이라도 탄 거 아닌가?”

“그럴 리가. 알페르노에게 총 맞아 죽고 싶진 않다고.”

“그만 나가. 좀 씻어야 갰어.”

“그래. 서두르라고. 오늘 약속 잊지 않았겠지?”



살바체가 체논이 나가는 등 뒤에 대고 물었다.



“약속?”

“자네가 꽁꽁 숨겨둔 그 여자를 보여주기로 한 것 말이야.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하! 웃기지마. 체논. 그럴 말은 한 적 없어. 취중에라도 절대 할리 없지.”



살바체가 장담하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체논이 그런 살바체를 눈여겨보며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바체가 변했다는 것은 어제 친한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확연히 들어났었다.

말이 없고 웃음도 없는 살바체는 줄곧 어두운 시선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여유나, 사람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변함없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변해 있었다.

체논은 그 이유가 알페르노가 염려했던 대로 그 동양여자 때문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소유욕이냐? 아니면“

“한 마디만 더 해봐. 너라고 해도 죽여 버릴 테니까.”



자신의 문 앞에서 욕실 문을 꽝 닫아 버리는 살바체를 보며, 체논은 확신 했다.

살바체에게 독이 될 여자임을… 체논의 눈빛도 어두워 졌다.




추적[5장]



이른 아침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희진이 배에 탈 무렵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흐릿한 아침의 햇살은 구름사이에 가려 언제 비를 뿌릴지 모른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희진은 이태리 사람들 사이에 섞여 푹 씌어진 모자사이로 하늘을 보며,

검푸르게 흔들리는 파도 때문에 중심을 잡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배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난간에서 중심을 못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 첫 배를 타서였는지 사람이 많이 타지는 않았다.

여기 저기 뭍으로 물건을 팔러 가는 사람들이 짐을 들고 앉아 있거나, 자기들 끼리 말을 주고받으며 가고 있었고,

선원들은 갑판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척 큰 배다.

배 밑으로 큰 화물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을 실어 나르는 일과 물건을 싣는 일을 두 가지 모두 하고 있는 배 인 것 같았다.



'회색, 아무것도 없는 공허,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거지?'



희진은 멀리 보이는 사르데냐 섬을 보며, 왜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인지, 홀가분하다는 기분 보다, 무언가 놓고 온 기분…

눈을 뜨면 그 방 그 침대에서 눈을 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이건 아직 내가 이태리에 있기 때문에 드는 마음 일 뿐이야.

현실 같지 않게 드는 데서 오는 기분이라고.'



희진은 고개를 저으며, 바다를 힘차게 가르는 배에 밑을 보며 한걸음 더 다가섰다.



'탁'



갑자기 어깨를 잡는 낮선 남자의 손길에 희진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에 희진에 다리가 풀려갔다.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왔다.



“E pericoloso. (위험합니다.) “



희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깨를 잡은 남자를 쳐다보고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한걸음 물러났다.

놀랐던 가슴이 한참 동안 진정 하지 않고 뛰어대고 있었다.

계속 자신의 등 뒤로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에 희진은 자리를 옮겨 배에서 가장 시선이 머물지 않고

몸을 앉아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진정해. 살바체라고 해도, 배에 실려 가는 나를 어쩌지 못해. '



손이 심하게 떨려 와 희진은 손을 모으고, 입으로 가져갔다.

뭍으로 가기 위해 얼마 동안의 시간이 필요 할까? 6시간 정도라고 했다.

그럼 문제는 살바체가 언제 자신이 도망갔다는 것을 알게 되는가 하는 것인가?

그래. 아직은 긴장해야 해. 살바체는 언제나 얕잡아 볼 수 없는 남자다.

희진은 고개를 혼자 끄덕이고 불어오는 바람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 * *



체논이 살바체가 욕실에서 나오길 기다리며 하인이 가져다준 에스프레소 커피한잔을 여유롭게 앉아 마시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에스프레소 한잔… 체논은 자연스럽게 진한 커피 향을 코끝으로 음미하며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그때, 긴장된 표정으로 살바체의 방으로 들어서는 집사의 모습에 체논이 아침인사를 건넸다.



“잘 잤는가?”

“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체논이 웃으며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집사의 손에 들린 무선전화기로 보아 긴급한 살바체의 전화 인 모양이었다.



“살바체는 욕실에 있네. 급한 일 아니면 조금 후에 걸으라고 하지?”

“아, 언제든지 교황의 섬에서 오는 전화는 지체 말고 바꾸라는 살바체님의 지시 때문에…”



나이 많은 집사가 안절부절 하는 게 못내 안쓰러워 체논이 전화기를 받아 들고 대신 욕실의 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살바체! 네 애완동물 전화다.”



금방 크게 들리던 물소리가 뚝 끊겼다.

곧이어, 살바체가 젖은 근육질의 몸을 그대로 하고 욕실 문을 발칵 열고는 체논이 들고 있는 전화기를 바로 빼앗아 들었다.

아주 빠른 몸놀림에 체논이 피식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갈수록 살바체의 전화를 듣고 있는 얼굴이 어두워져 충격에 빠진 듯 보이자 체논의 웃음도 사그라졌다.



“무슨 일이야?”



곧바로 비누가 조금 묻어 있는 몸을 대충 큰 수건으로 씻어내고 나갈 준비를 하는 살바체를 보고 체논이 궁금해 물었다.



“집사. 최대한 빨리 헬기 준비 시켜.”

“네. 알겠습니다.”

“왜 그러냐고 묻잖아?”



바지와 셔츠를 입는 살바체가 체논을 힐끗 돌아보고 빠른 어투로 대답했다.



“내 지젤이 도망쳤다.”

“뭐?! 푸웃…. 하, 하하하하하“

“?”



살바체는 웃어 재끼는 체논을 보고 인상을 쓰며 잠시 노려보다 서둘러 나갈 준비만을 서둘렀다.

저 놈의 얼굴은 나중에 쳐 주어도 상관없었다.

살바체의 시선에도 웃음을 그치지 못하고 한참 바닥에 주저앉아 잔기침을 하던 체논이 살바체를 보고 말했다.



“하하, 정말 귀여운 여자군. 나도 같이 가겠어.

살바체와 마피아의 손에서 이태리를 빠져나갈 생각을 하다니,

얼마나 간 크고 재밌는 여자인지 두 눈으로 보고 싶으니까 말이야.”

“마음대로 해. 협조할 생각이면 말이다.”

“그럼. 난 언제나 너 편이라고.”



체논이 능청스럽게 말하고는 곧바로 나가는 힘찬 발을 따라

반쯤 남은 에스프레소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켜고 살바체를 따라 나섰다.



* * *



“교황의 섬을 빠져 나간 건 확실 한 거야?”

“그래. 오늘 새벽 희진을 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야.

지금쯤 이 섬 사르데냐에 있던지, 아니면 벌써 배를 타고 뭍으로 빠져나가고 있을 거야.”



시끄러운 헬기 소리에도 침착하게 가라앉은 살바체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체논의 귀로 울려 왔다.

살바체의 눈에 먹이를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이 꽉 차 있는 게 체논의 눈에 고스란히 잡혔다.



“왜 진작 알리지 않았다는 거지? 본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라면 말이야.”

“도도한 여자가 그런 배는 타지 않을 거라 생각 했던 거지.”



짧은 대답을 하면서도 살바체의 눈에 여자를 생각하는지 잠시 흐릿해 졌다.

체논이 헛웃음을 짓고, 가까워 오는 사르데냐 섬의 항구를 쳐다보았다.



“사람을 푸는 게 좋겠는데? 내가 부르지.”

“아니, 다 지시해 놓았어.”

“빠르군.”



검은 헬기가 천천히 사르데냐 항구근처로 착륙하고 있었다.

힘차게 헬기에서 내린 살바체와 체논의 검은 코트가 몰아치는 파도 바람에 흔들리며 나풀거렸다.

사람들이 숨을 참으며, 힘 있는 남자들이 자신 들 쪽으로 다가오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



“어찌 되었지?”

“이 매표소 점원에 말로는 아침 첫 배에 말투가 이상한 여자가 있긴 했다고 합니다.”



체논은 검은 정장의 남자의 말에도, 한방 얻어맞은 눈으로 말을 하지 않는 살바체를 보고 의아해 쳐다보았다.

살바체는 곧 이성을 찾으려고 입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믿기지 않는 남자의 말을 다시 물었다.



“정확한가? 이태리어로 표를 주문했다는 게? 분명 도와준 사람이 없었다고?”

“네. 혼자 표를 구하는 여자였답니다.

모자를 눌러 쓰고 있어 얼굴을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분명 여자 목소리였고, 체구도 조그만 했다고 합니다.”

“…….”

“왜그래?”



체논이 계속 심각해지는 살바체의 얼굴을 보고 궁금함에 되물었다.



“희진은 이태리어를 하지 못해.”

“하, 그게 충격인가? 이태리어 조금 배우는 거야 금방이지 뭘 그래?

독학으로도 충분히 시간만 있으면 가능해. 안 그래?”



살바체는 그 동안 희진이 발레 말고는 모르는 단순한 여자라 생각했던 자신을 깨달았다.

책을 보는 희진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이런 배신감이 드는 걸까?

이 여자 어디까지 자신을 놀라게 할 것인가?

치밀하게 준비한 게 분명하다.

지금까지의 보고로도 충분히 자신의 허술함이 들어나고 있었다.

희진을 옭아매는 덫이 그 동안 자신이 여자에게 빠져 있는 동안 허술해 졌던 것이다.

그리고 희진은 그 덫을 아주 유유히 벗어 난 것이다.

자신을 처음부터 유혹한 이유, 연기를 한 이유가 바로 이 날을 위해서?



'난 아직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았어요. 살바체 프란트'



살바체의 숨이 거칠어 졌다.

계속 지키고 있던 평정이 불규칙하게 깨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살바체의 목소리도 커졌다.



“그럼 분명 그 배를 탔다는 말이군. 다시 헬기 띄우고, 너희들도 따라와!”

“네.”

“예!”



힘 있게 몸을 돌려 헬기로 가는 살바체의 굳은 등을 보며 체논이 고개를 저으며 뒤를 따랐다.

이제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에 대한 궁금함 보다, 이 여자를 찾은 후에 살바체의 행동이 더 궁금해지는 체논이었다.



'재밌어.'



처음이었다.

이 친구를 아는 동안 이때껏, 자라 온 시간 동안,

살바체가 불안함과 집착에 허덕이는 모습을 보인 것은, 그렇기에 체논은 흥미로웠다.



“뭐, 내 손까지도 필요 없겠군. 벌써 덜미를 잡힌 것 같으니 말이야.”



배를 따라 헬기를 출발 시킬 때, 체논이 웃으며 살바체에게 말했다.

살바체는 아무 말 없이 아무것도 없는 막막한 바다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체논의 말에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 것인지, 잡았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살바체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누구 마음대로 퇴장이라는 거지? 누구 마음대로 !'



* * *



“선장님! “



갑판에서 화물에 대한 보고를 받던 한 남자에게 선장님이라며 뛰어 온 갑판원을 보며 의아한 시선을 했다.



“큰일입니다. 지금 배를 멈추라는 전갈입니다.”

“뭐?! 잘 가던 배를 누가 멈추라는 건가?”



이때껏 사르데냐 섬을 오가는 배를 항해하면서, 갑작스럽게 배를 멈추라는 명령은 처음 받는 일이었다.

아니, 누가 이런 대형 화물선을 멈추라 마라 할 인간이 있겠는가? 이 바다에서 그런 명령을 받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프란트 家입니다. 지금 살바체 프란트님을 태운 헬기가 이 배를 쫓고 있다고 합니다.”

“뭐?!”

“이 배는 프란트 家 화물선이 아니지 않은가? 거기다 멈추라 마라 할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이야?!”

“모르겠습니다. 그저 멈추라는 전갈만 계속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젠장!”



화물 서류를 팽개치듯 허벅지에 내리치던 선장이 결심을 하고 갑판원에게 말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네. 내 평생 단 한 번도 잘 가던 배를 멈춘 역사가 없어.

우린 시간을 지켜야만 하네. 안된다고 말하게.”

“선장님!”

“!”



갑판원들과 선원들이 선장을 쳐다보며,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하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지만, 선장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러나 다시 뛰어 든 한 선원에 말에 다시 공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저, 마피아가 연관된 일이라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뭐?!”

“맞습니다. 살바체 프란트와 마피아의 관계… 아시지 않습니까?”



긴장된 표정들을 하나씩 돌아보는 선장의 시선도 흔들렸다.

마피아, 라는 말은 이태리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말 중에 하나였다.



“어쩌죠? 저기 검은 헬기가 보입니다. 선장님!”

“… 할 수 없지. 배를 멈추고, 배를 탄 사람들에게 잠시 연착 될 거라 전하게.”

“예!”

“네!”

“부선장은 헬기가 착륙할 수 있도록 돕도록 하고! 빨리 서둘러!”



그제야 안도한 선원들이 서둘러 각자의 일을 하려고 뿔뿔이 흩어 졌다.

선장은 갑판 꼭대기로 다가가 난간에 기대 검은 헬기를 노려보았다.

이때껏, 이런 일은 처음이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데로 해줄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빨리 그 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나주길 바라는 일 밖에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잠시 후, 선장은 살바체와 함께 있는 체논을 보며, 자신의 결정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체논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검은 헬기에서 내린 살바체와 체논은 자신들을 마중 나온 선원들과 선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선장의 물음에 살바체가 미안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한 여자를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었소. 그 여자가 분명 이 배를 탔다는 정보를 받았지. 찾아 봐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살바체의 말에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 참 간이 큰 여자가 분명했다.

살바체와 체논에게서 벗어 날 생각을 하다니…

선장은 그 모르는 여자가 자신의 배에 탔다는 이유로 배를 멈춰 세워야 했기에 그 여자를 속으로 원망했다.

왜 하필 자신의 배인가…!



“찾아봐.”



검은 정장의 남자들이 서둘러 밑으로 내려가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살바체 역시 갑판에 나와 있는 사람들과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눈을 빛내며 찾기 시작했고, 체논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선장 옆에 서서 선장의 어깨를 두들기고 말했다.



“빠른 판단이었습니다. 배를 멈추기 쉽지 않았을 결정인 걸 잘 압니다.

보상은 충분히 해 드리겠습니다. 선장.”

“아닙니다. 보상이라뇨. 당치 않습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그것으로 좋습니다.”

“하하하하“



살바체와 검은 정장의 비서들이 여자를 찾아 다녔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지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체논이 한숨을 쉬며 살바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어깨를 치며 물었다.



“여기 없는 것 아냐?”

“그럴 리 없어. 분명 이배에 탔을 거다.”



다시 비를 뿌릴지 모르던 하늘이 그새를 못 참고, 해를 보일 듯 하다 다시 비를 뿌리기 시작 했다.

체논의 어깨와 살바체의 넓은 어깨위로 비가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선장도 비가 오는 것을 보고 속으로 조바심을 치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이러다, 비가 많이 오면 배가 고립될 수도 있었다.

태풍이 온다는 말은 없었지만 말이다.

화물을 제 시간에 맞춰 내리기 위해선 지금 떠나지 않으면 그도 힘들었다.



“여기 다른 숨을 곳이 없소? 화물칸 이라든지 말이오.”

“화물칸은 관계자 외에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그 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찾아 볼 수는 있겠지요?”



체논이 살바체의 말에 힘주어 거들자, 선장이 안 된다고 말하려다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샅샅이 뒤지고 가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대신 빨리 살펴주고 나와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살바체가 비서들과 함께 화물칸으로 안내하는 선원을 따라 뒤를 따랐다.

걸으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살바체의 눈이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도대체 누군데 이러는 거지?”



선장의 혼잣말로 투덜거리는 소리를 체논이 언제 다가왔는지 들었다가 피식 웃으며 선장에게 대답했다.



“잃어버린 애완동물이지. 나도 빨리 좀 찾았으면 좋겠군.”



* * *



'두두두두ㅡ.'



희진이 구석에 숨어있다,

갑자기 들려오는 헬기 소리에 고개를 벌떡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다 배가 그 헬기를 반기듯 조금씩 멈춰서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희진은 앞이 캄캄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살바체 프란트! 어떻게 벌써?!'



새벽부터 긴장하고 밖에서 추위에 떨었던 몸이 움직이지 싫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희진은 몸을 일으키고, 사방을 둘러보며 숨을 곳을 찾았다.

이렇게 큰 배를 배가 항구에 닿기도 전에 멈출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는 살바체 그 밖에 없었다.

아니, 그가 아니라고 해도, 희진에게 지금 자신을 증명할 어떤 증명서도 없었기에 난감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본능은 헬기를 본 순간부터 그라는 확신을 주고 있었다.



'숨어야 해!'



정체불명의 헬기가 배를 향해 다가오자 사람들이 그 모습을 쳐다보며 모여 들기 시작했고,

선원들도 그 헬기를 맞으며 배를 멈추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희진은 그 틈에 어딘지도 모르는 안으로 숨어 들어가 열리는 문마다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갔다.

숨고 또 숨고 숨을 곳이 필요 했다.

희진이 발을 자신도 모르게 돌린 곳은 큰 화물이 가득 들어찬 공간이었다.

선원들이 밖의 일로 분주했는지 안은 한산했기에 이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희진은 곧바로 큰 단단해 보이는 나무 판 화물을 향해 걸어갔다.

단단해 보이는 위 뚜껑을 선원들이 한쪽에 놓아둔 쇠로 열고 안에 있는 물건을 확인했다.

다행히, 여러 색의 옷감들이 들어있는 나무 상자였다.

희진은 그 옷감들을 하나씩 꺼내 비슷한 화물에 뚜껑을 열어 그 안에 더 채워 넣었다.

자신이 들어갈 공간이 생기자, 희진은 옆에 뚜껑을 단단히 닫아 두고, 비워 둔 상자에 들어가 뚜껑을 닫아걸었다.

판자 사이로 밖에 공기가 조금씩 들어와 답답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심장 뛰는 자신의 소리가 밖에까지 들릴 것 같아 바짝 긴장이 되었다.

한 참 후, 화물 칸 문이 “끽“소리를 내며 열렸다.

희진은 그 소리에 숨을 멈추고, 호흡도 멈추었다.



“여긴가?”

“네!”



'살바체 프란트!'



분명 살바체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희진이 호흡을 멈추고 있던 숨이 화들짝 들여 마셔졌다.

들킨 것 같은 기분에 가슴에 뜀박질이 더 거세지고 있었다.



“찾아봐!”



살바체의 목소리와 함께 여러 명의 구두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왔고,

화물을 덮어둔 덮개를 치워대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한참을 입을 막고 숨을 참던 희진은 이 악몽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없습니다!”

“여기도 없습니다.”



희진이 그제야 눈을 뜨고 밖에 주위를 살폈다.

아직 나가지 않은 검은 옷들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다.

순간, 살바체의 싸늘한 목소리가 희진의 귀를 때렸다.



“여기 화물 다 열어보겠다고 전해.”

“예?!”

“다 열어 보겠다고 말했어.”

“하, 하지만, 선장님이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보, 보고하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희진이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살바체의 명령대로 화물의 모든 뚜껑을 연다면 바로 들킬 수밖에 없었다.

희진이 진땀나는 얼굴로 밖을 쳐다보았을 때,

살바체의 얼굴이 정면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 같아 희진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뚜벅, 뚜벅'



살바체가 조금씩 희진이 있는 화물 쪽으로 걸음을 옮겨오고 있었다.

희진은 저절로 화물의 빈 곳으로 더 바싹 몸을 움츠렸다.

살바체는 정확하게 희진이 있는 화물 앞에서 '탁'하고 발을 멈추었다.



'안 돼…'



금방으로 벌컥 열어 재낄 것 만 같아, 희진은 숨도 쉬지 못하고 그냥 넘어갈 듯 정신이 아찔해져 왔다.

심장의 거센 뜀박질 소리가 살바체에 귀에 고스란히 다 들려 알아챈 것만 같았다.



“…….”



살바체의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거친 그의 숨소리가….



'아, 내 숨소리도 저렇게 들리면 어쩌지? 다 알아챘을 거야. 그는 분명 다 알고 있어!'



희진은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그 잠깐의 시간이 천년처럼 길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때, 선장을 데리고 온 모양인지 곧바로 선장인 듯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화물칸을 때렸다.



“이제 그만 가야 합니다. 이 화물들은 중요한 외국 선박들입니다.

곧 시간을 지켜 공항으로 운반되어져야 할 물건입니다.

죄송하지만, 지금 뜯었다가 다시 챙길 시간이 저희들에겐 없는 실정입니다.

제발 그만 해 주십시오.”



간곡한 선장의 말에도 살바체는 아무 말 없이 희진이 든 화물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살바체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긴장감이 희진에게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탁!'



갑작스런 뚜껑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희진이 큰 소리를 낼 뻔했다.

그저 살바체가 노여움에 화물 위를 손으로 쳐댄 것뿐이었지만, 희진은 알지 못했다.



“돌아간다.”



살바체의 목소리가 희진의 옆에서 들려오고, 그 두렵던 발소리도 곧 희진에 옆에서 거두어졌다.

희진은 안도감에 눈물이 차오르려고 했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살바체의 거친 숨소리, 그의 남성샤넬 향기가 아직도 그대로 희진에게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문이 꽝하고 닫히고, 화물칸에 불빛이 꺼졌지만, 희진은 그 꺼진 불빛조차도 반가 왔다.



* * *



“못 찾았나?”



살바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비서들에게 그만 철수하라는 손짓을 했다.

선장에게 고개를 끄덕인 살바체가 체논과 함께 다시 헬기에 올랐다.

곧 바람을 타고 헬기가 하늘로 올랐지만, 살바체는 여전히 그 배를 노려볼 뿐이었다.



“표를 파는 사람이 잘 못 본 게 아닐까?”

“…….”

“이봐!”

“이상해. “



갑자기 인상을 쓴 살바체가 계속 인상을 피지 않고 멀어지는 배만 쳐다보고 있자,

체논이 그 표정을 유심히 쳐다보고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말이야?”

“분명 느꼈어. 그녀가 내 옆에 있는 기분… 가슴이 미치게 뛰어댔어. “

“자세히 말해봐. 도대체 어디서 말이야?”

“화물칸. 다 열어 봤어야 했는데…!”



체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살바체를 보며 말했다.



“내가 그 여자였다면 그런 곳엔 숨진 않겠어.

원하는 남자가 따라온다. 미치게 찾아다닌다.

난 어서 오라는 듯이 갑판에 유유히 서있는 쪽을 택하지. 후후“

“진은 그런 여자가 아니야. “



살바체가 체논의 우수개 소리가 싫은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체논이 흠흠 소리를 내며 기침을 하다, 살바체를 보고 물었다.



“그래. 이제 어쩔 생각이지?”

“…….”

“내가 잘 쓰는 방법을 써보지. 함정을 파는 방법. 길을 차단하는 방법. “

“어떤 것이든, 지금은 무조건 찾아야 해.”

“좋아. 나한테 맡겨 두라고!”



체논이 살바체에게 말하고, 핸드폰을 들어 부하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할 일을 마친 체논이 살바체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지금껏 묻지 않았던 궁금함을 물었다.



“찾은 다음에는 도대체 어떻게 할 거야? 죽일 건가?”

“아니.”

“그럼?”

“죽을 때까지 다시 싸움을 걸겠지.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어.”



살바체 프란트의 어이없는 말에 체논이 헛웃음을 쳤다.

제발 알아들을 말을 하라고 얼굴이라도 몇 대 쳐 갈기고 싶은 기분을 체논은 숨기고,

살바체의 싸늘한 얼굴에서 바다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친구를 향해 위로의 말을 던졌다.



“걱정하지 말라고. 살바체 프란트의 손은 피했을지 몰라도,

나 체논의 손은 피할 수 없을 테니“



* * *



'꽝!!!'



살바체가 희진 옆에 있는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희진은 옆 벽에 금이 가는 소리가 귀로 '드드득' 하고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보다 희진은 앞에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내려다보고 있는 살바체의 눈 때문에,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멋대로 무대에서 내려오는 걸 내가 보고 있을 거라 생각 했나?!

말했을 텐데, 도망치면 죽여 버리겠다고 한 말을!!”



희진은 모든 패를 내보인 후였기에, 용기를 상실했다.

살바체에게 잡히고 나면 두 번의 탈출이 용납되지 않을 거라는 걸 희진은 알고 있었다.

그는 두 번 실수 할 사람이 아니었다. 살바체의 눈이 희진의 두려움에 떠는 눈을 보고 더 매섭게 반짝이며 빛났다.



“그 동안 날 잘도 가지고 놀았어!

이제 누가 위에 있는지 확실하게 알아둬야 할 거야. 날 봐!”



강압적인 살바체의 번뜩이는 눈이 청색보다 더 짙은 남색으로 물드는 모습에 희진이 고개를 저으며 숙여오자,

곧바로 살바체의 긴 손가락이 희진의 가냘픈 턱을 들여 올리고 자신을 억지로 쳐다보게 했다.



“내 인생을 다 뭉게 놨지. 날 지옥에 넣어두고 쳐다보니 좋은가?!

그래?! 진! 왜 입이 굳었나?!”

“…난, 난…”



희진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허공을 갈랐다.

살바체가 희진 쪽으로 귀를 가져다 대고 고개를 숙여와 그 소리에 집중했다.



“…. 진이 아니에요. 난 당신 앞에서 카르멘 일 뿐이죠.

단 한 번도 진인 적이 없었어요. 내가 당신을 죽이기 전에, 당신이 먼저 날 죽인 거예요.

그 욕실에서…! 당신이 먼저 나를 죽였단 말 이예요!”



희진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 동안 상처 받았던 마음이 고스란히 살바체의 눈앞에서 터져 나왔다.

증오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 복수하고 싶었던 그 눈이 아픔을 가지고 무섭게 살바체 앞에서 타올랐다.

살바체의 눈이 충격을 받고 흔들리는 모습에, 희진이 살바체를 노려보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애써서 그 동안 연기하듯 생활했던 숨겨왔던 진실한 희진의 모습이 살바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희진을 고통의 눈으로 쳐다보던 살바체의 눈이었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살바체의 눈과 정 반대로 희진에게 처참하게 떨어졌다.



“그런 말로 내 눈을 가리려고 하지 마. 진.”

“…….”

“당신은 날 배신했어. 날 배신하고 도망쳤지.

우리 나라사람들은 한 번의 배신이라 해도, 절대 용서하지 않아.

나 역시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날 지옥에 던져둔 당신을 절대! 절대로 말이야!”



살바체가 제레미를 죽였던 칼을 꺼내 들었다.

스르륵하고 꺼내지는 칼날의 스침소리가 희진의 귀로 파고들었다.

희진의 눈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살바체가 칼을 꺼내들며 흔들리는 은빛금발의 찰랑거림과 함께,

살바체의 눈이 한 꺼풀 어둠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꿀꺽'



긴장된 마른 침이 저절로 희진의 목에서 넘겨져 왔다.

희진은 설마하며 자신 앞으로 냉혹한 눈을 하고 칼을 들며 다가오는 살바체를 보고

더 도망 칠 곳 없는 벽에 서서 옆으로 숨어보려고 몸을 움츠렸다.



'날 죽일 거야. 저 눈이 말하고 있어. 어떤 희망도 내게 없다고…!'



한 순간, 제레미를 죽일 때에 살바체의 영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한번의 망설임도 없이 칼끝을 제레미의 목에 밀어 넣던 살바체의 잔인함을 희진은 기억했다.

희진은 그 순간 자신의 목을 향해 손으로 감쌌다.

제레미의 고통스러워하던 영상이 계속해서 희진을 무서움에 떨게 했다.



'제레미. 난 살바체가 널 정말 죽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 정말이야. '



희진이 목을 감싼 채 도르래 치며 살바체가 자신에게 칼끝을 바닥에 끌며 걸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살바체의 조용하고 싸늘한 목소리가 살바체의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와 칼끝을 바닥에 스치는 소리와 함께 희진의 귀로 파고들었다.



“당신은 날 죽였어.”



순간, 희진은 붕 뜨는 느낌에 자신이 기절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기절하는 순간조차,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감은 순간 죽는 다면 고통은 없을 테니까…



'부으으응'



깜빡이는 희진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한 조각의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둠…희진은 두려움에 옆에 벽을 손으로 탁탁 치며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싫어! 싫어! 죽기 싫어!'



한참 바동거리며 벽을 손으로 때리던 희진이 순간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해 내기 시작했다.

살바체에게서 숨기위해 배안에 숨어들었다가 선박 안으로 들어왔던 일이…

그리고 이곳은 바로 옷감이 있던 그 안이 분명했다.

희진은 그제야 발에 걸리는 옷감의 느낌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난 죽지 않았어.'



꿈속에서의 일이 방금의 눈앞에 일처럼 생생하기만 했다.

살바체의 목소리와 그 눈빛이 어둠 속에서 갑자기 살아날 것 같아 희진은 어둠이 두렵게 느껴졌다.

그때, 희진은 익숙한 소리를 들었다. 엔진이 돌아가는 큰 굉음이…



'뭐지? 저 소리?'



아까 붕 뜨는 느낌과 이 소리… 설마…?



* * *



- 로마(Rome)



“확실해? 비행기가 아니라면 열차를 알아봐.

유페로로 타고 다른 나라로 도주할 가망성이 높아.

하나하나 확실하게 체크해. 주위 인물들은? 그래? 거참, 이상하군.

계속 흔적을 찾아봐. 함정을 파 놓는 것도 잊지 말고…!“

“…….”



알페르노와 체논은 큰 거실 호화로운 소파에 앉아 있었고,

체논이 전화를 끊은 후, 창문으로 로마 시내를 내려다보는 은빛금발의 남자를 향해 말했다.



“정말 이상해. 이태리 여자도 아니고, 동양여자 하나를 이 시간 동안 실마리하나 찾지 못하고 있다니 말이야.

거기다, 포위망을 좁히고 싶어도, 어떤 흔적도 찾지를 못하고 있으니…”



체논의 암담한 말투와 허탈한 말투가 싸늘한 거실의 공기를 갈랐다.

알페르노는 살바체의 말 없는 넓은 등을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곧 소식이 있겠지. 분명 움직이지 못하고 숨어 있을 가망성이 많아.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아무 단서도 없을 수는 없어. “

“체논 말이 맞다. 처음 내가 본 느낌대로 보통여자가 아니야.

이렇게 쉽게 잡힌다면 재미없는 일 아니냐?”



알페르노까지 체논의 말을 거들었다.

여자하나에 안절부절 못하는 양 아들의 모습은 알페르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계속 신경 쓰고 있기야 했지만,

교황의 섬에서 보았던 여자는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느낌에 살바체에게서 치워버릴 결심을 하고 있던 알페르노였다.

그 방법이 양 아들에게 미움을 사는 방법만 아니었다면 벌써 시행되었을 것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나타나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일지도…



“그 화물이야. 분명!”

“이런, 이런…”



살바체가 눈을 빛내고 주먹을 쥐며 유리벽을 내리치는 것을 체논이 지켜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부터 살바체는 그 화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체논. 그 화물에 대해 알아봐. 어디로 어떤 나라로 갔는지…!”

“이봐. 그 배가 얼마큼 큰 배였는지 안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건가?

화물이 몇 개라고 생각해? 그게 가능했다면 벌써 알아봤을 거다.”

“…젠장!”



살바체의 욕 한마디에 알페르노의 얼굴도 체논의 얼굴도 어두워 졌다.

저렇게 여자하나에 괴로워하는 살바체라니…

이태리 남자로서의 자존심까지 그 조그만 여자에게 져 버렸단 말인가?

손짓 한번 만으로도 수십명의 여자를 뒤로 넘어가게 할 살바체가 아닌가?!

체논은 갈 수록 이 여자가 궁금했다.



'그래. 얼굴이라도 봤으면 좋겠어.'



알페르노는 체논과는 정 반대의 생각을 하며, 양 아들의 축 쳐진 어깨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랑은 언제나 독약이었다.

특히 살바체 프란트 같은 열정적인 영혼의 소유자에게, 단 한번 오는 사랑이라면, 취명 적이었다.

알페르노는 이 여자가 죽었든 살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돌아오지 않는 것이….

살바체의 언제나 당당하고 넓었던 등은 깊은 상실감에 젖어 펴질 줄을 몰랐다.



* * *



- 서울(Seoul)



“짝짝짝, 짝짝짝“



박수소리가 서울호텔의 홀에서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가까운 친척들만 모인 자리였지만, 장내 100여명의 사람들이 방금 약혼을 한 시원과 혜수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축하하네. 축하한다.”

“축하해요. 아가씨.”



여러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혜수가 잘생긴 시원 옆에 서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수혁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원하던 남자를 만나 약혼한 게 뿌듯했다.

미국에서 원하던 공부까지 팽개치고 달려 올 만큼 시원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수혁이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 동안, 친척 동생인 희진과 약혼을 한 시원을 보며, 눈여겨보고는 했지만 자신 동생 옆에 서 있는 시원을 보니,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수혁이었다.



“오늘 자리가 자리인 만큼, 장관님은 오지 않으셨네. 대신 혁진이 왔지. 인사했나?”



수혁이 장내를 두리번거리는 시원을 보고 말했다.



“네.”

“자네가 이해하게. 큰아버님 마음이 오죽 하시겠어.”

“알고 있습니다.”



혜수가 시원을 올려다보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수혁 역시 시원의 눈치를 잠깐 보다 생각난 김에 혁진에게 가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자리를 옮겼다.



“이봐. 벌써 가려고?”

“어? 그래. 가봐야지.”



수혁이 혁진이 전화를 받고 허둥대는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쳤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서둘러. 너 같지 않아. 냉철한 인간이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군.”

“하, 그럴지도… 진짜 그래. 미안하지만 길게 얘기 할 시간이 없겠어.”

“도대체 무슨 일이냐니까?”



수혁이 혁진의 나가려는 팔을 잡아채고 물었다.

이놈을 이렇게 만들 정도의 급한 일이 무엇이라는 말인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수혁은 꼭 알아내겠다는 생각으로 혁진의 팔을 놔주지 않았다.



“좋아. 말하지. 먼저 이 손이나 놔.

나도 지금 전화 받고 믿기지 않으니까 말이야. 빨리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좀이 쑤신다고.”



혁진의 표정으로 보아, 나쁜 일은 아닌 듯 보였다.

기쁜 일?

지금 자신의 동생이 약혼한 일 말고, 냉혈한 혁진의 입을 저렇게 찢어지게 만들 일이 도대체 뭐지?

솔직히, 희진의 약혼자가 혜수와 결혼하는 것을 보는 혁진의 얼굴이 이렇게 밝다는 게 맘에 들지 않기도 했다.

조금의 질투라도 해주길 바라는 유치한 오라비의 감정이라고나 할까…



“궁금해 죽겠어. 빨리 말하고 가라고.”

“아, 아버지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야. 좋은 일이니 말해 주지.

하지만, 시원에겐 비밀로 해줘. 오늘 같은 날 희진이 살아 있다는 말로 초를 깨고 싶진 않으니까“

“뭐?!”



수혁의 놀란 얼굴, 사색이 된 얼굴을 보고 혁진이 도리어 수혁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내 동생 희진이 살아 있어. 지금 막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는 군.

난 내 동생을 만나러 지금 공항으로 가봐야 해.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알아보고 전화주지.”



혁진이 빠르게 수혁에게 말하고, 홀을 부리나케 나갔다.

수혁은 방금 들은 그 말을 다시 차근차근 되새기며,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희, 희진이 살아 있다고?!'



그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알아들은 수혁이 입을 벌린 채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저절로 고개를 기쁨에 들떠 있는 하나 밖에 없는 여 동생 혜수에게 돌렸다.



'하지만, 이 일을 숨긴다 해도, 언제까지 숨길 수 있겠어?!'



암담한 현실에 수혁은 머리가 아찔해져 왔다.

저 아름다운 미소에서 기쁨과 행복을 거둬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혜수와 시원은 약혼한 게 아닌가?

희진이 시원을 아직 원하고 있다 해도, 장관 큰 아버지가 두 사람을 다시 맺어주진 않을 것이었다.

자신의 동생 혜수의 얼굴과 자신의 아버지 얼굴을 봐서라도 말이다.



'그래. 미리 걱정할 것 없지.'



수혁은 그러면서도, 자신의 동생과 달리 한 번도 진한 행복한 웃음을 짓지 않는 시원을 보고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지젤의 귀향 [6장]



화물 안에서 잠이 들었다가 악몽을 꾼 이후로 희진은 잠을 자지 못했다.

다시 잠이 든 다는 것이 무서웠다.

복수 하겠다 다짐하고 계획한 일이었지만, 막상 일을 내고 난 뒤 너무 큰일을 저질러 버리고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밀려들어온 탓이었다.


'살바체가 일기장을 보았을까?'


이태리 교황의 섬에서는 살바체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일기장을 두고 나왔지만,

막상 서울이 보이는 비행기 안에 앉아 안도의 숨을 쉬어야 할 이 때에,

그 일기장 때문에 안도보다는 불안감이 찾아 들어 희진을 가라 앉혔다.

어쩌면 그 일기장은 태워버려야 했을 지도 몰랐다. 지금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 일기장을 보란 듯이 두고 나온 자신의 행동이 경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정확한 건… 살바체가 그 일기장을 보고 나면 날 다신 찾지 않을 거란 거겠지.

자신에게 상처를 준 날 절대 다시 찾지 않을 거야. 아니, 찾는 다면… 다른 목적이겠지.

죽이고 싶을 테니까… 죽도록 미울 테니까…'


오후 햇볕이 따뜻하게 비행기 안 창가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들이 저 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창가에 덮개를 내렸지만,

희진은 가만히 앉아 눈부신 태양을 가늘게 눈을 뜨고 쳐다보기만 했다.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났다.

피곤하고 잠을 못 이룬 탓에 눈물이 났다. 비행기가 인천공항 활주로를 가르며 착륙했다.

희진은 여전히 비행기 창가 좌석에 앉아 눈을 비비지도 않고 눈물이 흐르게 그냥 두었다.


“저 손님. 도착했습니다.”


스튜디어스에 차분한 어조에, 그제야 희진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가방이라고 할 것도 없는 짐을 들고 희진은 반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익숙한 서울 공기가 폐부로 들이마셔지고, 자신과 닮은 검은 머리 사람들이 익숙한 한국어로 말을 하고 있었다.


“…….”


희진은 그 사람들 사이를 걸어 들어가, 수속을 밟기 위해 차례를 기다렸다. 남들 보다 간단한 짐이었기에, 빠른 수속을 할 수 있었다.

희진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이 아닌 위조 된 여권을 내밀고 수석을 맞췄다.


“희진아!!”


게이트로 나온 희진을 먼저 알아보고 달려온 사람은 혁진이였다.

오빠의 반가운 얼굴을 보자, 희진의 얼굴도 그제야 화색이 돌았다.


“오빠!!”

“최 희진!”


훤칠한 키에 잘생긴 남자는 단번에 오랜만에 연인을 만난 것처럼 희진을 향해 달려와 안았다.

얼굴을 서로에게 뭍은 두 사람을 주위 사람들이 흐뭇하게 쳐다보며 비켜가고 있었다.


“오빠….”

“맙소사. 정말 살아 있었어. 우린 죽은 줄만 알고…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오빠…”


한참을 안고 머리를 만져주고, 얼굴을 들어 다시 확인하는 혁진의 얼굴에도 물기가 번져갔다.

언제나 아버지를 닮아 빈틈없고 정도 내색하지 않는 자신의 오빠가 이렇게 자신을 안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희진도 울면서 바라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아… 맙소사. 진짜 살아 있었어. “

“오빠…”


희진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계속 오빠라는 대답만 했다.

혁진이 서 있는 두 사람의 상봉을 여러 사람들이 구경하는 것을 느끼고 희진의 작은 가방과 손을 잡고 걸으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가자. 차에 가서 다시 보자.”

“응“


혁진이 다시 동생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처럼 희진의 손을 꽉 잡고 자신의 차로 데려 갔다.

희진을 차에 오르게 하고 차에 탄 혁진은 그제야 희진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마주 앉아 동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또 말랐어. 아버지께 오면서 대충 말은 들었지만 아버지 말을 통 믿을 수가 없었다.

네가 살아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지만, 그 동안 마피아에 잡혀 있었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이야?”

“응“

“젠장! 이태리 자식들! “


희진은 흥분하며, 핸들을 쳐대는 혁진의 거친 손놀림을 보며 혁진의 손을 잡았다.

다시 이렇게 손을 잡고 느낄 수 있으니 그걸로 되었지 않았냐는 희진의 눈빛이 혁진에게 향하고

혁진이 희진의 눈을 보고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미안하다. 희진아.”

“오빠가 왜요.”

“하나 밖에 없는 동생. 이태리 놈들 말만 믿고 죽었다 생각하고 무심하게 지낸 나.

지금 이 순간, 용서가 안 된다. 찾았어야 했는데, 더 정확하게 알아 봤어야 했어!”


희진이 따뜻한 눈빛을 하고 혁진을 보고 웃었다.

혁진은 그 모습에도 눈물이 날 것 같아 한참을 희진을 외면하고 차 밖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희진도 말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그런 오빠에게 시간을 주었다.

혁진이 희진의 옆얼굴을 보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희진이 변한 듯 보였다.

예전에 해맑고 깨끗하고 당찼던 희진에게서 아픔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착 가라 앉은 그늘진 희진의 모습이, 혁진의 눈에 그대로 잡혔다.


* * *


-사르데냐 섬 (sardinia island)


이틀의 시간이 지나도록 단서 하나 제대로 건지지 못한 체논이었다.

어쩌면 체논의 말처럼 지금 희진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에 꽁꽁 숨어 있는지도 몰랐다.

살바체가 잠도 자지 못하고 계속 체논과 함께 희진의 행방을 쫓아다니자, 알페르노가 급기야 화를 내고 말았다.


“찾기만 하면 그 여자를 내가 죽여 버리겠다. “


살바체는 할 수 없이 알페르노의 협박에 로마 자신의 집에서 잠을 청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 뒤척이던 살바체는 뒷일을 알페르노에게 부탁하고, 사르데냐 '교황의 섬'으로 향했다.

하루가 지났을 땐 분노가 치밀고, 화가 치밀더니, 이젠 걱정이 되고 있는 살바체였다.

이태리에 희진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사람을 붙여 놓고 감시하고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희진에 대한 단서도, 실마리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진. 도대체 어딜 간 거지? 자신의 육감처럼 그 화물에 탔다면, 지금은 어찌 되었을 지도 살바체는 걱정이 되었다.


“젠장…”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면 그 나마 다행이지 않을까 생각까지 드니…

살바체는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저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나면 걱정하지 않고 무작정 화라도 낼 것 같았다.

불이 꺼진 저택으로 차에서 내린 살바체가 들어서자,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미얀이 마중을 나와 반겼다.


“주인님…”


피곤에 절어 있는 살바체의 생기 없는 얼굴을 보고, 미얀이 안쓰러운 얼굴로 살바체의 검은 코트를 받아 들었다.


“먼저 쉬셔야겠습니다. 목욕 물 받아 놓을까요?”

“필요 없어. “


살바체는 미얀을 뒤로 하고, 천천히 나선 형 계단을 올라가 희진의 방 앞에 섰다.

미얀이 곧바로 따라 올라와, 살바체를 대신해 문을 활짝 열어 주며 말했다.


“말씀 하신 대로 아가씨가 가신 후에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


살바체가 고개를 조금 끄덕이고 활짝 열린 희진의 방을 둘러보고 서 있었다.

함께 있었던 지난 일들이 하나 둘씩 살바체의 기억에서 빠져나와 아무도 없는 방을 유령처럼 지나다녔다.

의자에 앉아 브러시로 긴 머리를 빗어 내리는 진의 뒷모습, 아리아를 향해 미소 짓고 서 있던 아름다운 모습,

창문을 내려다보며 사심에 젖어 있던 모습…


“주인님. 주인님 방을 치워 드릴까요?”


미얀의 조심스런 목소리에 살바체가 아무 말도 없이 걸음을 옮겨 방안으로 들어섰다.

살바체의 뒷모습을 보며 미얀이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럼 푹 주무세요. 주인님. 아가씨는 곧 찾으실 거예요.”


'찾는다…'


살바체는 속으로 미얀의 말을 따라 하며, 침대에 걸터앉아 두 손을 깍지 껴 입으로 가져가 댔다.


'…저기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배우 아니셨나요?'

'하하하하 배우라고? 내가?'

'실례되는 질문을 했나요? 아니신가 보네요.'

'누가 아니라고 했던가. 어차피 인생은 다 연극 같은 연출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지. 그리고 그 주인공은 배우인 나고 말이야.'


살바체는 희진과 처음 식당에서의 일을 생각하고 희미하게 눈으로 슬프게 웃었다.

처음에 연기 한 것은 자신이었다.

또한, 줄곧 우위에 있다 자신했었다.

하지만, 마지막 연기한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진정한 배우였는가….

살바체는 그제야 자신이 희진에게 완패했음을 깨달았다.

충견 제레미를 죽일 때도, 알페르노의 편을 들기보다 희진의 편을 들었을 때도,

또, 저 이사벨라 데스데의 진품이 바리바리 갈겨 휴지조각이 되었을 때도…

살바체는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었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라, 희진이 예술을 망가뜨렸다는 죄책감을 느끼는 게 싫어, 모조품을 걸어 두기까지 했다.


'그래. 나처럼 너도 언젠가 무대에서 걸어 나오길 포기하리라 생각 했다. 그 연기가 진짜가 되리라 생각 했다.'


살바체는 '이사벨라 데스데의 초상'을 보며 천천히 일어섰다.

순간 그림을 향해 일어선 살바체의 눈에 익숙한 상자가 들어왔다.

'판도라의 상자'라며 희진을 향해 내밀었던 그 상자가… 자신을 기다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 * *


- 서울 (Seoul)


“그 화물이 프랑스 행 화물이었다니…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버지.”

“…….”


희진은 지금껏 있었던 일들 중 살바체에 대한 일을 제외하고 말했다.

마피아에게 잡혀 지금껏 갇혀 있다 우연히 도망쳐 배를 타고 화물에 숨었다.

다행히 그 화물이 프랑스 행 화물이었고, 프랑스에 도착해 제일 먼저 아버지에게 구원을 청했다.

도망치기엔 위조된 여권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희진은 속으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너무나 잘 짜인 각본… 아직 자신은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나? 왜 살바체라는 이름을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무슨 수를 써 주실 수도 있는 일인데도 희진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당분간은 혁진이 너도 희진이 살아 돌아왔다는 말을 외부에 알리지 마라.

이 사실이 언론에 유포 되면 큰 사단이 난다. 알겠냐?”

“네. 잘 알고 있습니다. “

“희진이 너도 당분간 집에서 쉬면서 나가지 말도록 하고… 마피아는 국제적으로도 얕잡아 볼 수 없는 집단이다.

나라고 해도 국제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도 있구나.

잘못해서 들고 일어났다가는 우리 집안만 풍비박산 날 수도 있는 게야.”


희진은 아버지의 말을 이해했다.

국제적인 망신… 언론은 그저 발레리나 최 희진이 폭발현장에서 살아온 것, 마피아에게 유괴되었다가 도망쳐 온 일 말고도,

다른 추잡한 일도 끌어내려고 안달을 할 것이었다.

혁진도 잘 이해가 되었기에 아버지의 말에 실망하지 않았다.


“그만 쉬렴. 희진아.”


아버지가 안 본 사이 많이 늙어 지셨다는 것을 깨닫고 희진이 나가라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의자에서 일어나

가만히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았다 놓았다.

희진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다듬어 주는 아버지의 손길에 희진은 어느 때 보다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푹 셔. 희진아. 새어머니랑 옆집누나 때문에 더 녹초가 되었을 거다.”


혁진의 말에 희진이 웃었다.

두어 시간을 붙잡고 울고 또 우는 새어머니 때문에 희진 역시 녹초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진이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두고 서재를 나갔다.


“얼굴이 많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 살아 돌아 온 것 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한다. 정말 다행이지… 그럼.”

“아버지….”


희진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던 분이, 혁진 앞에서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계셨다.

얼핏 보이는 눈물에 흔적에 혁진의 마음이 짠 해 졌다.


“마피아는 희진이 돌아왔다고 해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수시로 네가 들락거리고,

집에 사람도 더 들여 놓고, 희진이 어딜 가든 꼭 사람을 붙여 놓도록 해라. “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희진이가…”

“안 된다. 이번일은 무조건 조심하고 봐야해. 보이는 곳에 두지 말고 보이지 않는 곳에 두면 될 거 아니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혁진의 완벽한 복종의 대답에도, 문화부장관인 희진의 아버지는 마음을 놓지 않고 이것저것 생각을 하고 있는 눈치였다.

혁진은 아버지의 말이 없음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시원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

“너무 서둘러서 결정한 게 실수였습니다.”


하루만 더 일찍 희진이 돌아왔어도, 무산 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겠지만, 이미 약혼식은 치룬 뒤가 아닌가.

혁진은 아버지가 고개를 젓는 것을 지켜보고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이미 한 것을…. 물어 보면 일러 주거라.”

“…….”


혁진은 자신에게 희진이 시원에 대해 물어 보지 않기를 바라며, 아버지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6개월 만에 들어선 자신의 방.

희진은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서서 한참을 침대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떨어지는지… 울고, 또 울고, 그렇게 새엄마와 언니를 붙잡고 울어 놓고도,

아직도 흐를 눈물이 남아 있었나 싶었다.

하지만, 계속 해서 흐르는 눈물은 희진의 깊은 가슴 속까지 축축하게 젖게 했다.


“흐흐흑…. 허엉…”


희진은 그 자리에 앉아 침대 모서리에 얼굴을 대고 통곡하듯 울었다.

왜 집에 돌아와 기쁨보다도 가슴이 미어지듯 아파오는지,

쥐어뜯고 또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깊은 아픔에 견딜 수가 없는 것인지…

이 순간 희진은 자신의 모순되는 감정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어 버리는 것을 택했다.


* * *


-로마 (Roma)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이제 삼일 째… 알페르노의 협박에 살바체가 '교황의 섬'으로 떠난 지 정확히 삼일 째였다.

그리고 5일째 어떤 단서도 여자에 대한보고는 없는 상태였다. 체논은 알페르노의 명령으로 여자를 찾아 출타 중이였다가

이제 막 돌아와 창가에 서 있는 알페르노와 대면했다.


“무슨 걱정 있으십니까?”


창가에 서 있는 알페르노의 모습이 수심에 젖어 있었기에, 체논이 궁금함에 알페르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페르노는 체논을 향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쳐다보고 다시 로마 시내를 내려다보고는, 체논에게 말했다.


“살바체가 삼일 째 연락이 없다. 너에겐 무슨 연락이 있었어?”

“아뇨. 없었습니다. 여자 때문에 잠도 안자던 놈이 이상하긴 하네요. 대부에게도 연락이 없다니 말입니다.”

“…전화도 받지 않고 있다.”

“제가 다시 해보죠.”


체논이 곧바로 소파에 있는 화려한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어 '교황의 섬'으로 전화를 걸었다.

열번 정도 울리는 신호에도, 누구 하나 받는 사람이 없자, 체논이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순간, 여자의 목소리에 체논이 알페르노를 바라보며 미얀에게 말했다.


“나 체논이야. 살바체를 바꿔주겠어?”

[저… 지금 주인님께선 누구의 전화도 받길 거부하십니다.]

“왜지?”

[모, 모르겠습니다. 체논님]

“… 이상하군.”


미얀의 목소리도 체논이 듣기로 무척 수심에 잠긴 목소리였기에 저절로 체논의 이마가 깊게 주름이 갔다.


“여자에 대해보고 할 게 있다고 전해. 그럼 받을지도 모르지.”

[아?! 정말요?!]


호들갑스런 미얀의 목소리에 체논이 수화기를 자신의 얼굴에서 조금 멀찍이 떨어뜨리고, 살바체의 목소리가 나오길 기다렸다.

미얀의 반응을 보아 살바체는 여자 때문에 좌절해 있었던 듯 했다.

피식 웃음을 짓고 체논은 바보 같은 놈이라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린 뒤 나온 미얀의 말은 뜻밖의 말이었다.


[체논님… 주인님께서 필요 없다고 합니다.]

“뭐?!”

[…. 또]


한참을 말을 하지 않고 뜸을 들이는 미얀이었다.

체논은 미얀의 뜸 들이는 목소리에도 멍해 있느라 신경질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가씨를 찾는 일도 그만 두시라고 하십니다.]

“뭐?! 하, 뭐라고?!”

[죄, 죄송합니다. 체논님.]


몸 둘 바를 모르는 미얀에게 체논은 할 말이 없자, 수화기를 소리 나게 ‘꽝’내려놔 버렸다.


“젠장! 미친놈의 자식!!”


자신이 여자를 찾기 위해 이탈리아 전역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동안, 수하를 부리듯 부려먹은 살바체가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찾는 일을 그만두라니…! 아무리 살바체라고 해도…

체논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체논은 자신의 자존심이 순식간에 땅으로 떨어진 기분에 일그러지는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날 가지고 놀아?!'


알페르노가 이런 체논을 지켜보며 체논의 앞으로 걸어와 말했다.


“무슨 일이냐?”

“이 자식이 여자를 찾지 않겠답니다.”

“… 그래? 잘 되었다.”

“네?!”

“잘 되었어. 이제 발 뻗고 자겠어.”


알페르노의 얼굴은 아까와는 달리 무표정했다.

체논은 알페르노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화났다는 것조차 잊어 버렸다.

알페르노는 체논의 멍한 표정에도 상관없다는 얼굴로 바에 있는 양주병을 하나 들고, 잔에 독한 양주를 따랐다.


“살바체 말대로 해. 모두 접어.”

“그냥 놔주라는 말입니까? “

“본인이 접겠다는데, 우리가 무슨 권리가 있겠어? 어차피 억지로 잡는다고 오래 있을 여자도 아니었다.”

“…….”


체논은 알페르노의 말에 다시 인상을 구겼다.

지금 자신의 기분은 두 사람에게서 속은 기분… 선물 상자를 받고 좋아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자를 받은 기분이었다.

놀림을 받은 기분….


'젠장. 난 헛수고만 한 건가?'


* * *


- 서울 (Seoul)


“희진아. 이거 어떠니?”


미진이 희진에게 아름다운 밍크코트를 들고 몸에 대보며 물었다. 희진이 웃으며 자신의 언니 미진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래?”


겨울… 밖으로 펑펑 쏟아지는 눈 속에 강남거리가 하얗게 눈이 쌓이고 있었다.

겨울 코트를 장만하러 같이 바람이나 쏘이자며, 미진이 삼일 째 집에만 있는 희진을 데리고, 처음으로 외출을 데리고 나왔다.

집에 돌아온 후로, 잘 웃지도 않는 희진 때문에, 온 식구가 살얼음을 걷듯 조심스러웠다.

웃는 것은 새어머니와 아버지와 대화할 때 뿐… 그것도 진심으로 웃는 모습이 아니었기에,

미진은 새어머니와 머리를 맞대고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고는 희진을 데리고 나왔다.

밖에 나온 희진은 옷에는 관심도 없고, 계속 쇼 윈도우에 밖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얀 모피코트를 하나 들고, 미진이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희진의 뒤로 걸어와 희진의 어깨에 모피를 걸쳐주며 웃었다.


“빨리 하나 골라봐. 아버지가 큰맘 먹고 하나 사라고 하셨잖아? 이런 일 살다 한번 뿐일지도 모른다? "

“그래. 이거 괜찮아.”


희진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 흰 모피코트를 내려 보며 미진에게 말했다.

다시 고개를 돌리는 희진을 바라보며 미진이 한숨을 쉬고 기다리는 점원을 향해 돌아서서 다시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털이죠?”

“유럽산 여우 모피 털이예요. 예쁘죠?”

“괜찮네.”

“엊그제 혜성그룹 예비며느님도 이 코트를 고르셨어요.”

“…!”


순간, 점원의 대답에 미진이 화들짝 놀라 희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진은 다행히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지, 앉아 있는 무릎에 미진이 골라준 코트를 덮고 있었다.


“아~ 그래요? 한번 입어봐야겠네.”


미진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애써 연기하며, 점원에게서 코트를 받아들고 걸치는 시늉을 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길 바라며 한 행동이었지만, 다시 한 번 점원은 미진의 희망을 깨고, 눈치 없이 말을 했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혜성 그룹 예비 며느님이 울고 가시겠는데요?”

“…!”


미진이 곧바로 코트를 입다 얼었다.

아까와 달리 희진이 그 말을 들은 듯 점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점원이 미진의 표정에 어리둥절하며 쳐다보지만, 미진은 입술을 깨물고 있어야 했다.


“방금 뭐라고 했나요?”

“네?”


희진이 점원을 향해 굳은 시선으로 물었다. 미진은 속으로 한숨을 쉬고, 점원을 원망하며 쳐다보아야 했다.


“무슨 말 말인가요?”

“혜성그룹… 예비 며느리라고 들은 것 같은데요.”

“네. 그 분도 여기 단골이시랍니다.”

“…….”


희진의 날카로운 시선이 곧바로 미진에게 향했다.

미진이 진땀을 흘리며 코트를 벗어 점원에게 신경질 적으로 떠넘기고 기다리고 있는 희진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내가 모르는 일이 있는 거야? 혜성그룹 예비 며느리가 누구야?”

“…그게, 시원이 말이지.”

“그래. 혜성그룹 외아들이 시원 씨라는 건 알아. 그런데, 예비 며느리라니?”


희진의 믿기지 않아 하는 얼굴에 불쾌감이 잔뜩 들어차 있었다.

그 동안 희진이 시원의 얘기를 꺼내지 않고 있었기에, 식구들은 적잖이 마음을 놓고 있었다.

서로 눈치를 보며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는데… 미진은 하필 자신인가하며 속으로 점원을 욕했다.


“언니!”


곧바로 망설이는 미진을 향해 매서운 희진의 목소리가 꽂혔다.

그 동안 희진은 식구들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시원에 대해 생각했었다.

그에게 손가락에 대한 미안함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희진은 계속 궁리 중이었던 것이다.

자신 때문에 잃었을 새끼손가락… 아마, 시원도 다른 가족들도 그 손가락이 자신 때문에 잘렸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을 테지만,

자신은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다.


“시원이 말이야. 네가 이해해야 해.”

“뭘? 뭘 내가 이해해야 한다는 거야?”

“우린 말이지. 희진아. 네가 살아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어.

널 강에 뿌리고 돌아왔기 때문에, 우린 시원이 좋은 사람을 다시 만나야 한다 생각했지. 우리 마음 이해하지?”

“…언니“


장황된 표정의 미진의 말을 희진이 듣고 있다 다시 다그쳤다.

미진이 한숨을 푹 내쉬고 희진의 두 손을 잡아끌어 잡고는 마음을 다잡고 희진에게 말했다.


“시원이… 너 동생 혜수랑 약혼 했다.”

“…뭐?”

“우리 사촌 동생 혜수. 기억하지?”

“… 어, 언제?”

“네가 돌아온 날… 그 날 시원이 혜수랑 약혼 했어. 우린 그 결정이 옳다고 생각 했거든.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희진아.”


희진은 멍했다.

미진이 그런 희진의 창백한 얼굴, 충격에 빠진 얼굴을 보고 눈물을 터트렸다.

자신의 동생을 꼭 끌어안고 미진은 희진의 아픔이 자신의 것 마냥 울었다.

희진은 자신을 안고 울고 있는 미진을 느끼면서도 멍한 시선을 풀지 않고 있었다.


* * *


- 사르데냐 섬 (sardinia island)


알페르노가 차에서 내려 저택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를 찾지 않겠다 말하는 살바체가 지금 어떤 심경을 하고 있는지, 불안한 마음에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함께 술이나 마시면서 위로할 생각에 알페르노는 체논을 보내고 곧바로 '교황의 섬'으로 날라 왔다.

알페르노 대신 수하 한명이 저택 문을 열었고, 곧바로 익숙한 얼굴을 하고 미얀이 알페르노를 마중 나왔다.


“어서오세요. 알페르노님.”

“그래. 살바체 프란트는 어딨지?”


미얀이 알페르노의 코트를 받아 들고,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는 알페르노에게 말했다.


“지금 주인님 방에 계세요. 며칠째 식사도 외출도 하지 않으시고 계십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

“… 저도 잘은 모르지만, 오시자마자 아가씨 방에 들어가셨다 나오시고는….”

“나오고?”


뜸을 들이는 미얀 때문에 알페르노가 답답해 끝말을 따라하며 재촉했다.


“갑자기 아가씨 방을 못 질 하라고 하셨어요.”

“…?”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셔서 여태…. “


알페르노가 미얀의 눈물 젓은 눈을 보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살바체 방으로 안내해.”

“예.”


미얀이 조심스런 걸음으로 알페르노를 안내하며 걸어갔다.

알페르노는 나선형 계단을 올라, 지나치는 붉은 문에 엑스자로 나무를 박아 못질이 되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


도대체, 이 여자가 무슨 일을 저질렀단 말이냐?

이 정도로 이 여자가 미운 것이냐?

생활이 안 될 정도로 이 여자에게 빠져 있던 것이냐?

여러 가지 질문이 빠르게 알페르노의 머릿속에 복잡하게 떠올랐다.

미얀을 따라 큰 문에 선 알페르노는 미얀이 조심스럽게 살바체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똑똑'


“주인님…”

“…….”

“주인님. 알페르노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한참 동안 대답 없는 문 앞에 미얀과 알페르노가 서 있었다.

미얀이 알페르노를 힐끔 눈치 보며 다시 살바체를 부르려고 하는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

“주, 주인님“


알페르노는 놀란 표정으로 흐트러진 살바체를 쳐다봐야 했다.

살바체가 짙은 원망과 증오가 뒤 섞인 눈을 하고 있었다.


“…. 여기까지 무슨 낯짝으로 왔지?!”


살바체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 목소리, 눈초리… 살바체의 술에 취한 흐트러진 청색의 눈이 알페르노를 향했다.



다음 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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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 공주완결소설②〃

번호: 226

제목: 이태리의 살바체(3막-지옥 속으로)

글쓴이: 지영공주V

조회: 320

날짜: 2005/03/07




##수정인물이름수정. 명칭수정. 오타수정. 문법수정. 내용수정 (틀린곳은 꼬리말로...)##


※3막-지옥 속으로※





혈(血)[1장]



“주, 주인님?”


미얀이 두 사람을 눈치 보며 살바체를 불렀다.

알페르노가 침착한 목소리로 미얀을 물러나 있으라는 표시로 손을 들어 물리치고 살바체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걱정 돼서 왔다.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온 거냐?”

“…몰라서 물어? 정말 몰라서 묻느냔 말이다!”

“아악! 주인님!”


미얀이 두 사람에게서 물러 서 있다, 갑자기 알페르노의 멱살을 잡으며 달려드는 살바체를 보며 놀라 소리쳤다.

알페르노 역시 믿기지 않는 얼굴로 살바체를 쳐다보고 흔들리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게 거짓말이었어! 인간 같지 않은 자식!”


'퍽!'


미얀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살바체에게 맞고 넘어진 알페르노를 쳐다보고 나오는 신음 소리를 막았다.


“다신 오지 마! 내 앞에서 사라져!”


살바체가 널브러진 알페르노를 짐승 쳐다보는 시선으로 보고는 문을 “꽝“닫고 들어갔다.

미얀이 그제야 침을 삼키며 얼른 알페르노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서려고 했다.

곧바로 알페르노가 그런 미얀을 입가의 피를 닦으며 향해 손으로 저지하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미얀은 두려웠다.

어느 누가 이태리의 대부인 알페르노의 얼굴을 정면으로 칠 수 있겠는가?

이태리의 그 누구라고 해도, 꿈에서라도 상상 조차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주인님. 어쩌시려고…'


알페르노는 일어서서 닫힌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문에서 눈을 돌리고 미얀을 보는 알페르노의 얼굴엔 분노보다 상심한 남자의 눈이었기에 미얀이 놀랐다.


“미얀이라고 했나?”

“네? 네…”

“방을 마련해 주게. 당분간 이 곳에서 지내야 갰어.”

“아, 알겠습니다. 알페르노님.”


'와 장창 창창! 쨍'


동시에, 닫힌 문 안에서 물건과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알페르노의 무거운 시선이 살바체가 들어간 문으로 향했다.



'뚝-. 뚝-.'


붉은 혈흔이 살바체의 꽉 쥔 손에서 떨어졌다.

저주스럽다. 저주스럽다….

흐트러진 살바체의 눈이 깨진 거울로 비취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증오에 불탔다.

고귀한 혈통, 마피아를 등에 짊어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고귀한 혈통이라 자부했었다.

프란트 家의 유일한 독자이고, 프란트 家의 유일한 생존자라 자부해 왔던 지난 삶들이 모두 거짓이었다니…!

거울을 통해 보이는 청색의 눈과 은빛금발의 머리까지 저주스러웠다.

아버지라 믿었던 살보네. 새어머니 헤지나 역시 살바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했다는 새어머니의 고백이 담긴 일기장…!

진이 남기고 간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새어머니의 일기장은 단번에 살바체를 구렁텅이에 밀어 넣고 지옥으로 떨어뜨렸다.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로로…!


'진! 당신이 원하던 게 이거였나?

내가 지옥에 떨어져 죽기를 바랐나? 당신의 성공을 축하해.

난 지금 죽음 보다 더한 고통 속에 있으니까'


'쨍!'


거울이 다시 한 번 살바체의 얼굴을 산산 조각내며 조각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살바체의 손에 붉은 피가 거울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서울 (Seoul)


저녁식사를 하며 식구들이 말없이 희진의 눈치를 살폈다.

미진에게 희진이 시원의 소식을 알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식구들은 표정 없이 식사를 습관적으로 입으로 가져가고 있는

희진을 보며 숨소리도 조심하고 있었다.

이럴 때, 위로를 해준다는 것은 아픈 곳을 다시 긁는 일 밖에 되지 않았다.

희진은 걱정하는 식구들의 표정이 보기 싫어서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물을 한잔 마시고는

잘 먹었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희진의 아버지 역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진은 터벅터벅 방으로 올라가 문을 닫아걸고 잠갔다.

시원이 혜수와 약혼을 했다…?

어차피 살바체에게 복수 하겠다 다짐한 순간부터, 유혹해 몸을 던진 순간부터 마음 한구석엔 시원을 접어두고 있었다.

그 순간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복수하겠다는 생각 밖에는… 시원의 새끼손가락에 대한 복수,

자신의 순결을 무참히 짓밟은 복수, 아프게 한 복수…


'돌아갈 곳, 원래 내 자리가 없어진 기분이야.'


가슴이 뻥 뚫렸다.

축 쳐지고, 아무것도 없는 공항상태. 마음이 텅 비었다.

그래. 시원에겐 자신이든 혜수이든 별 상관없는 배경이었을 테고, 죽었다는 확신으로 자신을 기다릴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리 실망스러울까?


'살바체. 당신에게 도망쳐도, 내겐 남는 건 없군요.'


신기하다.

시원이 혜수와 약혼했다는데도 이제 흐를 눈물도 다 나왔는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시원이나 혜수를 찾아가 내가 살아 있다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실망감, 허탈감이 찾아 들 뿐이었다.

희진은 방구석으로 걸어가 CD를 틀었다. 조용한 차이코스키의 백조의 호수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그동안 이태리에서 가져와 열어 보지 않았던 작은 가방을 꺼낸 희진이 안에서 토슈를 찾아 들었다.


'띵…'


때구르르 굴러 가는 반지 하나.

희진은 그 반지를 보고, 한참 줍지 않고 서 있었다.

불빛아래 사파이어의 남색 빛이 오색으로 반짝였다. 살바체 프란트의 눈동자처럼….


'진. 당신에겐 어떤 보석이 어울릴까 한참 고민했지. 날 닮은 보석이라 하더군.

그래서 난 사파이어를 좋아하지 않아.'

'그런데도 내게 내미는 이유가 뭐죠?'

'차갑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한… 변덕스런 보석이니까'


살바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희진의 기억에서 빠져나와 귀 근처를 간질였다.

바닥에 떨어진 사파이어반지를 쳐다보던 희진의 눈에 자신의 대한 분노가 힐끗 지나갔다.

바로 눈을 치워버리고 자리에 앉은 희진은 들고 있던 토슈즈를 신경질 적으로 발에 끼워 넣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토슈즈를 맨 희진이 음악소리를 더 크게하고 방의 중앙으로 걸어가 클래스를 시작했다.



* * *


-사르데냐 섬


아름다운 섬에 태양이 쏟아져 아침을 알리는 빛을 쏘았다.

서재에 앉아 있던 알페르노는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살기에 졸고 있던 책상에서 얼굴을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살바체가 자신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변하지 않은 살바체의 눈이 아직도 알페르노를 증오한다 말하고 있었다.


“살바체 프란트“

“웃기지마.”


알페르노가 달래는 목소리로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것을 살바체가 목소리로 저지하며 낮게 읊조렸다.


“프란트 라고? 누가 프란트 家 사람이라는 거지? 여기 떠도는 유령들이 다 비웃겠어!

어렸을 때부터 생각했지. 난 프란트 家 사람이다. 마지막 남은 혈통이다!

난 교황을 두 명이나 역임한 유명한 이탈리아 프란트 가문의 장자다!”

“…….”


알페르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상처 받은 살바체의 눈을 보며 말을 잃고 서 있었다.

28년간 숨겨 두었던 일이 들통 난 것 같아 불안했다.


“당신 역시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떠들었지. 나에게 자부심을 집어넣고, 긍지를 심어 줬어.

그런 당신이! 그런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알페르노가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며 살바체를 향해 물었다.

살바체가 알페르노를 노려보고 뒷주머니에 끼어 있던 낡은 책자를 던졌다.

알페르노는 그 낡은 일기장을 들고 헤지나의 필채를 확인하고 놀란 눈빛을 하며 넘겼다.

물기에 차츰 젖어가는 알페르노를 보면서도 살바체의 표정은 무섭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어, 어디서 난거지?”

“애완동물이 물어놓고 갔더군.”


살바체의 목소리에 허탈감이 섞인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잠깐 알페르노의 얼굴에 반짝이는 눈빛이 스쳐 지나갔지만,

살바체는 씻은 후에 아직 물기가 남은 앞머리를 신경질 적으로 털어 버렸다.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당신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지옥이니까 말이야.”


알페르노는 그 말만 하고 뒤 돌아서는 살바체를 보고 말로 잡았다.

오해라고 말해 줄 수는 없었지만, 사실을 말해 줄 수는 있었다.

손에 붕대를 감고, 피곤해 보이는 눈이었지만, 어제의 흐트러진 모습이 아닌 살바체에게 알페르노가 한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네가 아직 더 알아 둘 일이 있다.”

“하, 좋아…. 마지막으로 들어주지.”


뒤 돌아선 살바체가 걸음을 멈추고 얼굴도 보지 않고 알페르노에게 말했다.

알페르노는 살바체의 굳은 등만 바라보고 말했다.


“처음 살보네가 결혼해 헤지나를 데리고 나에게 왔을 때,

난 헤지나에게 첫눈에 사랑을 느꼈다.

내 눈엔 천사 가브리엘이 앞에 있다 해도 그 보다 아름답진 않았다.

이미 살보네와 헤지나는 깊은 사랑을 하고 있었지. 그러다 사고가 있었어.”

“언제 끝낼 거지? 그 따위 일은 듣고 싶지 않아.”

“듣기 싫더라도 들어라. 낙마하는 사고였다.

그 사고로 살보네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고, 헤지나와 사랑을 나눌 수 없었다.

살보네는 그 때문에 헤지나를 사랑하면서도 안을 수 없다는 아픔에 심하게 자학하기 시작했고,

헤지나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떠날 거라 생각하며 두려워 한 거지.”


살바체가 알페르노의 빠른 말을 들으며 뒤 돌아서 알페르노를 노려보고 소리쳤다.


“그래서! 내 새어머니를 가로 챈 건가?!”

“아니, 그렇지 않다. 살바체… 너의 생각과는 틀려.

살보네의 집착은 헤지나 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헤치고 있었다.

우린 그렇기에 두고 볼 수 없었어.”

“하, 우리라고?!”


살바체의 눈이 증오로 반짝였다.

알페르노는 침착하게 살바체를 설득하기 위해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피를 흘리고 자학한 살보네를 재워두고 헤지나가 내 방으로 왔다.

그녀는 내게 부탁했다. 살보네가 믿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그에게 아이를 주고 싶다고 말이다.”

“…….”

“자신이 아이를 가지고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분명 희망을 가지고 다시 살 거라고 헤지나는 울면서 나에게 매달렸다.

난… 난 살바체. 두 사람 다 소중했다.

친구인 살보네도 헤지나도 … 도울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살바체가 그 말에 비웃음을 흘리며 알페르노에게 말했다.


“알페르노. 아직도 솔직하지 못하군.

내 새어머니에게 홀렸기 때문에 당신은 친구를 배반한 거야. 당신은 배신 한 거야!”

“…….”


한걸음에 알페르노에게 다가선 살바체가 알페르노의 멱살을 잡고 눈을 분노해 떨며 이를 갈며 말했다.


“나와 내 아버지 둘 다 배신 한 거야. 당신을 용서 하지 않겠어.”


'탁!'


살바체가 알페르노의 멱살을 잡던 손을 치워 버리고 다시 뒤돌아섰다.

힘 있게 걸어 나가는 살바체의 뒤에 대고 알페르노가 말했다.


“난 평생을 내 자식에게 아버지라 불리지 못하는 것을 죗값으로 알고 살았다.

널 프란트 家 자식으로 살게 하는 것이 내 죄 값이었다. 살바체!”


살바체는 아무 말 없이 우뚝 서서, 한참 뒤 돌아 보지 않고 서 있었다.

알페르노가 희망을 품고 살바체의 등을 뚫어지게 보고 있을 때, 살바체가 아무렇지도 않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내 새어머니를 단 한번만 가진 게 아니었어.

그 일기장에 다 적혀 있더군. 알페르노와 사랑을 나누며 마음까지 줘버린 자신을 말이야.

두 남자를 사랑해 버린 자신을 자책하며 쓴 일기장 이라니…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겠지. 알페르노.

당신은 내 새어머니의 마음까지 아버지에게서 빼앗았어.

불쌍한 정신분열의 남자구실도 못하는 남자에게서 말이야.”

“…!”

“내 입에서 평생 한번이라도 아버지라는 말이 나올 거라는 희망을 품었나?

대부로 있으면서 말이야. 다신 얼굴 보지 않겠어.

당신 얼굴 볼 때마다 피 냄새가 나는 내 혈통이 생각나서 구역질 나“


얼어붙은 알페르노를 놔두고 살바체는 마지막 말과 함께 싸늘한 공기를 두고 서재를 나갔다.



* * *


- 서울 (Seoul)


“오빠?! 뭐라고?!”


혜수는 믿기지 않아 수혁의 얼굴을 쳐다보고 다시 물었다.

앞이 캄캄해져 오는 수렁 속에 집어넣어지는 기분,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핑크빛 세상이었던 것이… 짙은 회색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돌아온 지 꽤 댔다. 너희 둘 약혼하는 날. 혁진이 돌아왔다며 희진을 데리러 공항으로 갔었다.”

“…!”

“이제 조만간 알려질 일이기에 더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걱정 마.

너와 시원이의 약혼은 다시 깨지지 않을 거니까“

“하, 하지만“


희진은 '시원 씨는?' 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이태리로 희진을 찾으러 가겠다며 며칠 전부터 회사 일을 마무리 하고 있는 시원이라는 것을 혜수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좋지? 어쩌면 좋아…'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질 것 같은 눈을 하고 혜수는 흔들리는 눈으로 초점을 잃었다.

이런 혜수를 보며 수혁이 안타까운 얼굴로 동생의 손을 잡고 다독이며 말했다.


“오늘 혁진에게 들으니, 희진이 너희 둘 약혼 소식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보면 희진도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걱정 말라고 하더구나.

그러니 너도 걱정 마. 시원이 희진이 살아 돌아온 걸 알았다고 해도,

이번 약혼은 절대 깨지지 않는다고 큰 아버지도 말씀 하셨다고 하니까.”

“저…정말?”

“그래. 이 오빠 말이니 믿어.”


혜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수혁이 웃으며 혜수의 등을 두들기고 방을 나갔다.

하지만, 계속 불안한 기분이 가시지 않고 혜수를 괴롭혀 댔다.

금방이라도 시원이 이 사실을 안다면 분명 희진에게 달려 갈 것이 분명한데…

아직도 시원의 가슴엔 희진 밖에 없는데…

갈수록 밀려드는 생각에 혜수가 참지 못하고 방을 왔다 갔다 하며 입으로 손톱을 가져다 댔다.


'언니를 만나야 해. 솔직히 털어 놔야해.'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혜수의 눈에 새로운 각오가 깊게 서렸다.



* * *


-로마 (Roma)


흐릿한 창밖으로 가끔 지나치는 차들과 동이 터와도 아직 꺼지지 않은 쇼윈도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알페르노는 말없이 서 있었다.

28년 전에 과거가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헤지나' 그녀의 대한 사랑으로 알페르노는 지난 28년을 혼자 지내왔다.

그녀보다 더 사랑할 여자를 만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가망은 없었다.

살보네는 그녀의 죽음과 동시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스스로 총으로 목숨을 끊어 헤지나의 뒤를 쫓았지만,

알페르도는 두 사람의 죽음에 망연자실해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해야 했었다.

헤지나를 죽어서도 놓지 않는 살보네의 집착과, 살보네를 배신했다는 갈등 속에 알페르노는 그때 제 정신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린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자식이고 핏줄인 살바체 때문이었다.

하지만, 헤지나가 바랬던 일이기도 했고,

죽은 살보네의 최면 때문에, 알페르노는 알면서도 묵인하며 대부로서 평생을 살바체의 그늘로 지내기로 결심했다.

이때까지 알페르노는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었다.

이렇게 옆에서 살바체를 보며,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자신에 아들이 남들이 우러러 보는 자리에 서 있고, 자신은 마피아의 대부로서 아들을 뒷받침해 주는 관계.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우위에 자리해 있는 살바체의 떳떳한 모습에 알페르노 역시 뿌듯함을 느껴왔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깨부수어 버리다니…!

살바체를 우습게보고 달아난 것도 용서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이렇게 자신과 살바체의 관계를 무참히 깨뜨리고 도망간 일을 알페르노는 용서할 수 없었다.

이 여자만 아니었어도 살바체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일도, 좌절해 버릴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살바체의 삶이 이 여자 때문에 아직도 어찌 될지 모르는 판국에 있었다.

알페르노는 그 생각만 하면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살바체가 그 자존심에 다시는 자신을 찾지 않을 거라는 것도…


“대부. 밤을 세신 겁니까?”

“…….”


체논은 알페르노의 근심 섞인 뒷모습을 보고 소파에 걸터앉았다.

'교황의 섬'에 갔다 온 뒤로 알페르도는 무슨 걱정이 있는지 저 모습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체논은 알페르노의 뒷모습이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피식 미소를 지었다.


“체논.”

“네“


아침신문을 넘기며, 체논이 알페르노를 보며 대답했다.


“그 여자 찾아.”

“네?”

“찾아서 죽여 버려.”

“…!”


알페르노의 뒷모습이 굳게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체논은 자신이 확실히 들은 것인지 다시 확인하려고 입을 열려다 알페르노의 목소리를 들었다.


“살바체가 손을 땐 여자다. 못 죽일 이유가 없지.”

“하, 하지만….”


체논이 이유를 물으려고 알페르노를 응시하며 묻자 곧바로 날카로운 알페르노의 눈이 체논을 향했다.


“아, 알겠습니다. 대부.”



* * *


- 서울 (Seoul)


혜수는 긴장한 모습으로 희진이 커피숍 안으로 들어오길 기다렸다.

혜수가 전화로 만나자는 말에 희진은 나오겠다는 대답만 했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더 일찍 나와 희진은 들고 있는 사진을 무릎에 올려두고 두 손을 모아 용기를 긁어모았다.

어차피 희진이 살아 돌아온 이상, 자신은 나쁜 여자가 된 것이다.

이 보다 더 나쁜 여자가 되어도, 시원을 자신의 남자로 만들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혜수가 들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바짝 긴장하고 있을 때, 희진이 세련된 흰색의 모피코트를 커피숍 안으로 들어섰다.

어딘지 예전보다 더 세련된 희진의 모습에 혜수는 자신의 옷차림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희진이 혜수를 쳐다보고 흰 백을 소파에 내려두고 편하게 자리에 앉았다.


“언니. 살아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혜수의 말에 희진이 희미하게 웃었다.

다가온 점원에게 커피를 주문한 희진이 혜수에게 눈으로 뭘 시킬 거냐는 뜻으로 물었고,

혜수가 커피 두 잔을 점원에게 부탁했다.


“언니… 이거“


혜수가 무릎에 있던 봉투를 희진 쪽으로 건넸다.

희진이 사진이 든 누런색 봉투를 말없이 내려다보며 뭐지? 하는 표정으로 혜수를 쳐다봤다.

혜수는 가만히 사진 봉투만 쳐다보고 입을 닫고 있었다.

희진은 혜수의 모습에 봉투를 열어 사진을 확인했다.

두 사람이 다정히 약혼을 하는 모습, 혜수의 아이보리색의 약혼식 드레스가 아름다웠다.


“…?!”


하나씩 넘기던 희진이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짓고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혜수가 충격 받은 희진의 모습을 보고 물을 한잔 들이켰다.

곧이어 점원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와 탁자 위에 내려놓았지만, 희진은 그 사진에서 눈을 때지 않고 있었다.

혜수가 커피 잔을 보며 먼저 입을 열려고 할 때, 희진이 사진을 내려놓고 혜수를 쳐다보았다.

가라앉은 희진의 표정에서 혜수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항상 자신의 일에 당당하고, 기죽지 않는 희진이라는 것을 혜수는 잘 알고 있었지만,

시원의 사진을 보고도 동요 없는 희진의 표정을 보니 혜수는 속으로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비교가 되었다.


“할 말 있으면 해. 만나자고 한건 너니까.

무사히 내가 돌아온 걸 축하하기 위한 자리는 아닌 것 같고, 내가 네 약혼을 축하해 주길 바라서 보자고 한 거니?

이 사진도 그래서 나에게 보여 준거고?”


희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혜수에게 물었다.

혜수는 희진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비참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조용한 어조에서도 희진의 말에는 혜수의 양심을 쿡쿡 찔러대는 말이 섞여 있었다.


“미안해요. 언니. 하지만, 전 이 약혼 언니가 돌아왔어도 깨고 싶지 않아요.

알다시피, 언니와 시원 씨 약혼 우리 친척들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고…”

“…….”

“거기다 우린 매스컴에도 전부 사실화 시켰어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길 바랐거든요.”

“누가. 시원 씨가?”


혜수는 희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매스컴에 사실화 시킨 것은 수혁이 한 일이었다.

시원은 내일 아침이 되어서야 신문을 볼 테지만, 그건 나중 일이었다.


“너 시원 씨 좋아하니? “

“네?”

“좋아하냐고 물었어.”

“사랑해요.”


혜수의 대답에 희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당찬 혜수의 대답은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게 희진의 귀로 파고들었다.


“언니와 약혼할 당시에도, 저 시원 씨 사랑했어요.

용기가 없어 말은 못했지만, 혼자 짝사랑한지 오래 됐어요. 언니.”

“…….”

“그래서 부탁하려고 만나자고 했어요.

정말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시원 씨랑 저 결혼하기 전까지 만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희진이 간절한 눈빛의 혜수를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 된다고 하지만, 막상 이런 혜수를 보니 희진은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희진을 바라보는 혜수를 보며 희진이 말했다.


“내가 시원 씨를 잡을 거라 생각했니? 다른 여자와 약혼한 남자를 말이야.”

“난 언니가 시원 씨를“

“사랑하지 않았어. 결혼할 남자로 마음에 들었을 뿐이지. 지금은 실망만 들어.

날 이렇게 만나자고 한 너에게도 말이야. 차라리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나았을 거야.

그럼 너에 대한 실망은 지금 보다 덜 했을 테니까.”

“언니.”


희진이 소파에 있는 자신의 백을 들고 혜수를 내려다보며 일어섰다.

더 이상 말을 한다는 게 구차해 보였다.

그러다 잊었던 말이 생각나 희진이 혜수를 뒤돌아보며 물었다.


“사진에서 보니 시원 씨 손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정말 그래?”

“네?”

“다친 곳 없냐고.”

“네… 없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희진이 혜수를 보지 않고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잠깐 서있다 다시 뒤돌아 서 커피숍을 나갔다.

혜수는 희진의 뒷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희진의 당당한 모습은 언제나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혜수는 탁자 위에 있는 사진을 봉투에 챙겨 넣고 떨리는 다리를 들고 일어섰다.



'하 ㅡ. 살바체 프란트. 나쁜 자식!'


운전사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올라 희진은 창밖을 보고 눈으로 화를 터트렸다.

애써 혜수에게 침착하게 대답했지만, 그 사진을 본 순간부터 희진은 겉으론 침착했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다.

혜수가 묻는 말에 어떻게 대답했는지, 희진은 빨리 나올 생각 밖에 하지 않았다.


'날 놀렸어.'


시원의 손이 멀쩡하다니…

그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고, 복수 할 결심에 모든 걸 내 던졌는데, 그게 전부 살바체의 함정이었다니…!

내가 복수심에 불타 자신에게 모든 걸 내 던지는 모습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함정에 걸려 착각하는 날 보면서 얼마나 비웃었을까?!

희진은 속으로 계속 생각하고, 분개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느꼈다.

거칠게 눈물을 닦아내고 희진은 창문 밖을 노려보며 응시했다.

속으로 살바체를 오해하고 있었던 실수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모든 원인을 살바체에게 돌려야 살 수 있었다. 지금 이렇게 버티고 있는 이유.

처음부터 실수였다면 희진은 설 힘도 없었다.

자꾸만 생각나는 살바체의 은빛금발의 머리칼, 아름다운 미소, 그 말투…

자신의 몸을 사랑스럽게 더듬던 그 손가락들… 거칠게 화를 내는 그 말투까지…!

희진은 힘차게 머리를 저으며 모든 생각을 날려 버렸다.


'나쁜 자식, 나쁜… 나쁜 '


* * *


시원은 혜수와 약혼한 순간부터 후회했다.

실수였다는 생각을 했다.

애초에 단출하게 양가 식구들과 친척 몇 분만 모시고 치룰 약혼식을 거대하게 치룰 때부터, 시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또 이렇게 신문에 공표까지 해 버린 혜수의 행동에 시원은 화가 났다.

시원이 이태리에 다녀올 때까지, 미뤄두고 기회를 주겠다던 혜수는 약속도 깨고 이렇게 시원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젠장!”


시원이 신문을 내려놓고, 머리를 거칠게 넘겼다. 자신 말고는 모두 좋아하고 있는 약혼이었지만 시원은 속은 기분이었다.


'그래. 좋아. 한번 해보자고.'


시원은 눈을 빛내고 곧바로 혜수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단 한 번에 나오는 혜수의 목소리에 시원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본론을 말했다.


“내일 이태리로 갈 비행기를 예약할 생각이야. 내 생각은 변함없어.

희진을 어떻게든 찾고 말테니까. 최 혜수.”

[… 오빠. 왜 그래요? 화 난거예요?]

“몰라서 묻나?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기다리겠다던 대답은 뭐였지?”

[뭐 때문에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시원이 혜수의 대답에 밀려드는 화를 잠시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혜수 역시 조용히 시원의 대답을 기다렸다.


“매스컴에 약혼한 내용이 실렸어.”

[아… 그 일이라면, 아마 어른들이 하신 일일 거예요.

희진 언니 일의 눈가리개로 쓰기 위해서 말이에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 약속은 변함없어. 알고 있겠지?”

[알아요.]

“좋아. 난 내일 이태리로 갈 생각이야.”

[네? 이렇게 빨리요?]


시원이 혜수의 물음이 짜증이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참 말이 없이 두 사람에게서 침묵이 흘러갔다. 시원이 수화기를 멀찍이 떨어뜨리고 신경질 적으로 말했다.


“그렇게 알아. 끊어.”

[오빠!]


급하게 말을 거는 혜수에게 시원이 핸드폰을 끊지 않고 말을 기다렸다.


[할 말이 있어요. 우리 만나요.]

“갔다 와서 보지.”

[안돼요. 저… 저기 중요한 말이에요.]


별로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시원이 손목시계를 힐끗 보고 혜수에게 말했다.


“오늘 준비할게 많으니 1시간만 시간 내겠어.”


* * *


시원은 혜수와 전화를 끊고 집으로 차를 몰았다.

잠깐 남은 시간동안 이태리에서 입을 옷가지와 필요한 물품을 챙기고,

이태리에서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전화를 해 볼 생각이었다.

언젠가 희진이 연습했던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깍끼인형 중 사탕인형의 춤이라는 곡이 CD에서 흘러 나왔다.

희진의 아름다웠던 목선, 자연스럽게 춤을 추던 손동작과 매끄러운 다리의 선들까지…

시원은 그때의 아름다웠던 장면을 생각하고 앞을 응시했다.

다시 한 번 혜수와 약혼한 게 후회가 되었다.

가족들의 걱정하는 시선과 주위의 압력에서 혜수의 제의는 시원에게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그 순간 더 좋은 방법이 없다 생각한 게 멍청했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모든 게 시원의 생각과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희진을 이태리에서 찾아온다 해도 다시 원상복귀 시킬 수 있을지…

아니, 우선은 찾아야 했다.

그 후는 찾은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시원은 전에 석수가 한 말을 생각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보기엔 너 할 만큼 했다. 가족들도 나서지 않는 상태고, 물증도 없었잖아.

형사인 나도 심증만 가고 물증이 없는 일이 천지다.

마피아까지 얽혀 있는 일이라면 더 힘들어. 그 놈들이 증거를 남길 놈들도 아니고,

설령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태리 사람이라면 두려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만 위험해.'


이도 저도 아닌 입장. 전 약혼녀는 이태리에서 실종상태고,

지금 약혼녀는 자신의 발을 잡고… 시원은 답답함을 느끼며 넥타이를 거칠게 끌어 내렸다.

이런 기분이 싫다.

딱 부러진 정답도 없이 어중간한 상태. 희진이 살았든 죽었든 어떤 확신만 잡아도 시원은 앞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감정이 의무이든 사랑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시원은 차고의 차를 집어넣고 3층집 개인저택으로 들어섰다.

가정부가 열어준 문으로 집에 들어선 시원은 곧장 새어머니를 찾아 안방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나도 소식 듣고 뒤로 넘어갈 뻔 했어.

살아 돌아온 지 열흘이 지났다는데 다 모르고 이제야 소식 들었지 뭐야.”


가정부가 옆에서 시원의 새어머니에게 도련님이 돌아왔음을 알리려고 하자,

시원이 손으로 막아서고 새어머니의 말에 눈을 빛냈다.


“그럼. 혜수가 훨 났지.

듣기로는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고 하지만, 필시 말 못할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겠어?

기가 센 희진이 보다 착하고 말 듣는 혜수가 시원이 짝으로는 잘 맞는 것 같아.

그렇지? 응. 혜수가 얘기하겠다고 시원이에게 아무 말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


가정부가 시원의 표정을 보고 안절부절 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이 노려보는 시원의 표정이 살벌했다.

곧바로 시원이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가정부가 시원을 불렀다.


“도련님!”


그 소리에 놀란 시원의 새어머니가 그제야 전화기를 내려놓고 쫓아 나왔지만,

뒷모습을 보이고 나가는 시원을 잡을 수는 없었다.


“시원아!”


새어머니의 다급한 외침에도 시원은 돌아보지 않고 열이 식지 않은 자동차에 올라 다시 시동을 켰다.

곧바로 시원이 희진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 * *


희지은 2층 자신의 방에 돌아와 땀을 흘리며 클래스에 집중했다.

더 몸이 굳기 전에 연습실에 나가봐야 할 것 같았다.

집에서 하는 연습은 한계가 있었다.

그때, 방의 노크소리와 일하는 아줌마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막내 아가씨”


희진이 음악을 끄고 땀을 닦으며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는 희진의 표정에 일하는 아줌마가 말했다.


“사모님이 내려오시랍니다. 손님이 찾아 오셨어요.”

“손님? 누구죠?”


희진은 지금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도 이태리에서 돌아온 후로 연락하지 않았는데, 누가 찾아온단 말인가?


“건칠하고 잘생긴 청년이던데요.”


일하러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아줌마는 시원의 이름을 몰라 희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희진은 아줌마의 말에 생각하는 눈빛으로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 땀을 느릿하게 닦으며 대답했다.


“이태리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절 찾아올 남자는 없어요.

만나고 싶지 않다고 전해 주세요. 만약 시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이요.”

“하지만, “

“새엄마도 이해하실 거예요. 죄송하지만 앞으로 두 시간 동안은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희진은 그 말과 동시에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육감으로 시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한 남자 만날 이유가 없었다.

구차하게 이미 지나간 일에 무슨 할 말이 필요한가?!

혜수의 부탁이 아니었다 해도 희진은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존심 상하고 배신감도 들었다. 그의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았다.



희진의 새어머니는 일하는 아줌마가 내려와 전하는 말을 듣고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희진이 내려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예의상 찾아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미안해. 희진이 만나기 싫은 모양이야. 안부는 내가 전해 줄께.”

“새어머니. 제가 올라가 보면 안 되겠습니까?”


희진의 새어머니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두 사람 앞으로도 자주 볼 사이잖아?

사둔지간이 될 테니 말이야. 그때 동안 희진도 맘 정리 할 시간이 필요해. 이해하지?”

“…….”


시원의 가라앉은 얼굴표정을 보고 희진 새어머니 역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지 않았다면, 사위가 되었을 시원이었다.


'인연이 아니었던 게지.'


희진 새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뒤 돌아서는 시원이 뒷모습이 처량했다.

시원의 머릿속엔 혜수가 지금 이 순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없었다.

오직 어떻게 하면 희진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 * *


- 사르데냐 섬 (sardinia island)


'히이잉~ !'


말 울음소리가 승마장의 한편의 마구간에서 들려 왔다.

승마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밖에 서서 멀쩡하게 잘 있는 말 한 마리를 데리고 들어간 살바체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어쩌면 좋죠?”

“낸들 어쩌겠어. 모든 게 주인님 소유인데.”


이곳 관리를 맡고 있는 책임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총을 들고 말을 끌고 들어간 살바체가 뭘 하려고 들어간 것인지는 세살 먹은 애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탕!!'


말들이 총소리에 놀라 발을 구르고, 살바체를 기다리는 일꾼들 역시 그 소리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살바체의 분노를 살까봐 사람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 여자는 마녀예요.'


책임자는 저택에서 일하는 자신의 부인이 어제 저녁 자신에게 했던 말을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 단번에 주인님을 그리 홀려 놓을 수는 없죠.

주인님에게 웃음을 빼앗아가서 이제 무서운 빈껍데기만 남으셨어요.

저택 사람들이 요즘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서로 얘기도 못 지경이라고요.'


책임자 역시 살바체가 데리고 들어간 흰 말을 생각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여자가 타고 도망갔던 그 말이었다. 살바체 끌고 들어간 말은…

차라리 저 말을 죽임으로서 그 여자를 잊을 수 있다면 다행이었지만,

나오는 살바체의 표정은 들어갈 때와 똑같이 어둡기만 했다.


“내 눈에 보이지 않게 치워버려!”


살바체는 굳어 서 있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피가 튄 장갑을 벗어 따라오는 사람에게 건네주고 앞을 바라보았다.


* * *


- 서울 (Seoul)


일주일 후, 희진은 예전 발레 선생님이었던 압구정동에 학원을 하고 계신 장 선희 연습실에 예약을 했다.

많은 친구들이 해외로 유학을 가고, 이제 파릇한 신인의 얼굴들이 보이고 있었다.


“찾아줘서 고맙다. 소식 궁금했는데… 결혼은 언제 하니?”


시원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선생님이 희진에게 물었다.

희진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선생님에게 대답했다.


“결혼 안하려고요. 앞으로 발레에만 전념하고 싶어요.”

“음, 솔직히 결혼해서 세계적인 소질이 보이는 발레리나들이 그만두는 것 보면 가슴이 아팠어.

식구들이 그러라고 하니? 시원 씨는?”

“차차 설득해야죠.”


희진의 어깨를 두들기고 고운 미소를 짓던 선생님이 인사하며 나가는 다른 학생들을 마중 하러 나갔다.

희진은 마음을 놓고 오랜만에 잡는 바를 잡고 클래스를 하며 몸을 풀었다.

한참 몸을 풀던 희진은 따가운 눈초리에 동작을 멈추고 문 쪽을 쳐다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원이 언제 왔는지 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희진의 얼굴에 반가움보다 당황한 눈빛이 짙게 자리 잡았다.

시원이 그런 희진을 뜨거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연습실 안으로 들어와 바를 두 손으로 잡고 있는 희진에게 말했다.


“이제야 만났어.”



혼돈 속으로[2장]


“이제야 만났어.”


기억 속에 있는 희진은 실제로도 변함없이 아름답고 생기로 왔다.

희진은 시원의 손이 자신을 잡기 위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바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한걸음 물러섰다.

거부의 몸짓과 싸늘한 말이 희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여긴 뭐 하러 왔죠?”


시원의 눈빛도 싸늘하게 변하고 분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거칠게 넘겼다.


“이봐 진. 내가 널 만나기 위해 얼마큼 노력해야 하지? “

“만나기 싫다고 말했을 텐데요. 전 제 의사를 충분히 전했다고 생각해요.”


희진이 시원에게서 눈을 돌리고 말했다.

시원은 곧바로 희진의 팔을 잡아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그 동안 거부당하고 이 여자 때문에 걱정했던 일들이 분한 마음으로 찾아 들었다.


“널 찾아서 이탈리아를 뒤지고 다녔어.

모든 사람들이 네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죽지 않았다 생각한 건 나 하나뿐이었어!

고작 이건가?! 내게 돌아올 말이 고작 이거야?! 진!”

“그래서… 다른 여자와 약혼 했군요.”


희진의 눈이 곧장 시원에게 파고들었다. 시원이 희진을 쳐다보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할 말만 하고 돌아가세요.”


희진이 다시 시원에게서 팔을 거칠게 빼내고 몸을 돌렸다.

약혼했을 당시에도 시원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저 자신과 모자람 없이 맞는 상대이고 서로의 대한 신뢰가 있고,

이 남자라면 결혼해서도 트러블 없이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기에 혜수가 말했을 때도, 이 남자에게 신뢰를 배신한 배신감이 들었을 뿐,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돌아온 후 자신의 자리가 사라진 상실감, 배신감… 그게 다였다.

그런데, 이 남자… 언제부터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해 온 걸까?

이 남자가 보는 난… 어디까지 가 있단 말인가?

귀찮았다.

귀찮고, 짜증나고, 매달리는 이 남자 조금 있던 호감마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혜수와의 일 변명할 생각 없어. 다시 제자리로 찾아 놓으면 그 뿐이야. “

“하“


희진이 코웃음 쳤다.

이렇게 쉽게 말하다니… 아이큐 세 자리의 인간이라는 게 의심스러웠다.

다시 시원이 코웃음 치는 희진을 두 팔을 잡아 자신에게로 돌려놓았다.


“진. 지금 난 내 약혼에 대해 말하려고 온 게 아니야.

그 동안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알아야 한다 생각하지 않아?”

“좋아요. 말하죠. 뭐가 알고 싶죠?”

“모두다.”


시원에 눈에 알아야겠다는 고집이 잔뜩 들어차 있었다.

희진이 그런 시원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약혼녀가 이태리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런데 의문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어.

널 찾아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지.”

“헛수고 했군요.”

“…뭐?!”


믿을 수 없어하는 시원의 눈을 보면서 희진은 말했다.


“헛수고했다고요. 난 당신이나 우리 집 식구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위험하지 않았어요.

너무 잘 지냈죠. 생각 할 시간이 필요 했고, 공연이 끝나자마자 여행을 갔던 거였어요.

당신하고 나의 약혼은 그때부터 흔들리고 있었던 거예요. 혜수와 약혼은 잘 된 일이예요.

나에게나 시원 씨에게나…”

“하아…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믿든 안 믿든 중요하지 않아요. “


희진은 시원의 충격 받은 눈을 보면서 얼굴을 돌렸다.

시원의 두 손이 희진을 잡던 손을 내렸다. 당당하게 희진은 시원에게서 몸을 돌렸지만,

뒤 돌아선 눈엔 죄책감이 가득 찼다.


* * *


-로마 (Roma)


가운을 걸친 체논은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소파에 편하게 기대 TV를 켰다.

요 며칠 뉴스나 시사회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살바체의 모습에 체논이 웃음을 흘렸다.

알페르노나 살바체나 일에 목숨을 걸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역시 바보 같은 너 라는 걸 깨닫기라도 한 거냐?'


예전에 만나던 유명한 여배우를 옆에 끼고 있는 포즈를 보니,

자신의 생각대로 이미 그 동양여자는 지나간 일인 모양이었다.


“체논. 뭘 보고 있어요?”


체논의 애인인 흑발의 배우이기도 한 에르나가 향긋한 향기를 뿜으며 체논의 목을 뒤에서 감싸 안았다.


“저 친구 말이야. 이주 전만 해도 한 여자에게 목숨을 걸었었지.”

“그랬어요?”


에르나가 재밌다 는 표정으로 탁자에 있는 와인을 들고 체논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유혹적인 에르나의 자태에도 체논은 TV속에 살바체를 쳐다보고 혼자 미소 짓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에 사랑은 한 순간 일 뿐이라는 내 말이 맞았지?”

“오. 체논. 남자들은 겉만 보는 성질이 있다는 것 모르나요?

저 살바체의 표정을 잘 보라고요. 힘이 잔뜩 들어간 저 굳은 표정.

살바체를 여자들이 안달 했던 이유는 여유 있는 표정의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 때문이었어요.

그 여자가 살바체에게 저런 표정을 남긴 거라면… 아직도 그 여자는 특별한 거죠.”


체논이 그제야 에르나를 쳐다보고 눈썹을 꿈틀하며 말했다.


“TV만 보고 잘도 아는군.”

“예전보다 더 일도 열심이고, 표정도 숨기지 못하잖아요?

아마 살바체에게 매달려 있는 저 여자도 눈치 채고 있을걸요.”


체논이 에르나의 말에 다시 TV 속 살바체를 보고 심각한 표정을 했다.

만약 알페르노가 그 여자를 죽이라 했다는 것을 알면 살바체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다.

한국으로 그 여자를 죽이러 간 놈들에게 아직 연락이 없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그 여자에게 있는 것은 분명했다.


“만약, 그 여자를 죽였다면…”


에르나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체논에게 말했다.


“설마 그러진 않았겠죠? 평생 살바체를 보지 않을 거라면 모르지만요.

절대 당신이 그러지 않았길 바라요.”

“…….”


체논이 자신을 믿는다는 표정으로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에르나를 보고 인상을 썼다.


* * *


- 서울 (Seoul)


시원은 연습이 끝나고 희진이 나오길 기다렸다.

저절로 핸들을 쥐고 있는 손이 분노로 떨려 왔다.

그 동안 이 여자를 기다리며 바보 같이 이태리를 돌아다니고,

찾아 주지 못하는 것에 괴로워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런데도 안보면 그만 인 것인데, 그게 되질 않았다.

연습실을 나오자마자, 차를 돌려 나왔지만, 다시 말을 해야 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희진을 납치라도 해서 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 시원의 핸드폰이 울려 왔다.

시원은 핸드폰의 번호가 혜수인 것을 확인하고 받지 않았다.

계속 울리는 벨소리가 짜증나 꺼버리려고 시선을 돌리는 순간 갑자기 열린 창문사이로 갑자기 차가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ㅡ '


갑작스런 소음에 시원이 전화기를 손에 들고 앞 창문을 응시해 쳐다보았다.


'희진?!'


검은 차로 끌려 들어가려는 여자는 분명 희진이 분명했다.

곧바로 시원이 전화기를 던져두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뛰었다.


“진?!”


동시에 희진을 뒤에서 보호하고 있던 운전사와 경호원들도 희진임을 확인하고 뛰어오고 있었다.

가냘픈 희진의 비명소리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악!! 사람 살려요!!”


희진을 잡던 남자들이 희진을 구하기 위해 달려드는 경호원과 시원을 보고 인상을 쓰며,

희진의 팔을 거칠게 밀어 희진의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쳐졌다.

전속력으로 도망치는 차를 보며 경호원들이 차에 번호판을 확인하고 있었다.


“진!!”


시원이 바닥에 고꾸라져 머리를 다친 듯 보이는 희진에게 달려갔다.

희진이 시원을 보고 거친 숨을 삼키고 있었다.


“도대체 저 놈들 뭐야?!”

“…. 몰라요.”


희진이 머리를 만지며 일어서려는 모습에 시원이 부축했다.

경호원들이 방금 있었던 일을 무전으로 연락할 때, 시원이 희진을 자신의 차로 데리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야해“

“아녀. 집으로 가요.”

“진!”


희진이 아픈 머리를 울리는 시원의 고함소리에 인상을 쓰며 시원을 쳐다보고 말했다.


“진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싫으니까.”

“뭐?!”

“아까부터 거슬렸어.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요.”


기가 막혀 시원이 희진을 쳐다봤다.

아픈 사람을 두고 실랑이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기에, 시원이 참을성을 가지고 희진을 돌아보고 인상만 썼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시원의 차로 경호원이 다가와 말했다.


“괜찮아요.”

“방금 그 차 수배는 했습니까?”

“네. 경찰에 연락했으니 곧 잡을 수“


'꽝!!'


“아악!!”


경호원이 시원에게 대답할 때, 갑자기 건너편에 서 있던 희진을 태우고 왔던 차가 불길에 휩싸이며 터졌다.

건너편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거리를 가득 매웠다.

시원이 곧바로 희진의 눈을 자신 쪽으로 돌려놓고 눈을 감게 했다.


“무, 무슨 일이죠?”


희진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시원이 말을 잊었다.

눈앞에 광경이 섬뜩해 시원을 떨게 했다.

만약 저 차에 희진이 타고 있었다면… 시원은 등골이 오싹해 지는 느낌에 희진을 더 꽉 껴안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게 무슨!'


* * *


-로마(Roma)


천사의 성(Castel S. Angelo) 아름답게 꾸며진 실내에서 아름다운 교향곡이 울려 퍼졌다.

이탈리아 제 1당인 기민당의 주요 인사를 비롯하여, 여러 이탈리아의 주요인물들이 한 자리에 자리한 파티였다.

이름은 그럴싸한 세계기아를 위한 모금운동의 자리였지만,

이름 있는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기 위해선 호화로운 자리를 포장할 이름이 필요하게 마련이었다.

베란다의 유리 창문으로 멀리 콜로세움이 선명하게 로마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곳은 원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2세기에 무덤으로 지어 놓았던 성을 그 후 수차례 개조하여

교황의 피신 소, 감옥 등으로 사용하였다가 현재는 군사 박물관인 곳이었다.

성 안젤로(천사의 성)라는 이름은 6세기경 로마에 페스트가 유행했을 때 교황이 천사의 모습을 보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


“살바체 프란트!”


살바체는 실내 한편에 자신을 아는 체하며 다가온 저명인사들과 서서 말하는 것을

심심한 표정으로 들으며 들고 있는 와인에 살짝 목을 축이고 있었다.

그때, 자신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살바체의 뒤로 들려왔다.


“당신이 여기 올 거라 생각했죠. 오늘은 여자가 보이지 않는군요.”


살바체는 곧 함께 서 있던 남자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실비아 로세니를 쳐다보았다.

잘 꾸며진 얼굴에 붉은 실크 드레스를 아슬아슬하게 입은 여자의 모습은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색이었지만, 천박하지 않게 붉은 색을 소화해 내는 여자였다.


“오랜만이야.”

“이런… 그런 심드렁한 인사라니. 너무 한데요? 살바체 ”

“혼잔가?”


살바체의 말에 실비아 로세니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가 슬픈 얼굴로 연극하듯 말했다.


“불행히도 혼자는 아니에요. 아, 알페르노와는 끝났어요. 몰랐나요?”

“언제?”

“조금 됐어요. 열흘전인가… 대판 싸웠죠. 훗,

알페르노와 싸우고 죽지 않은 여자는 나뿐이지 않을까요?”

“그런 농담 재미없군.”


실비아 로세니는 살바체의 굳은 표정을 보고 정말 재밌어 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숨을 내쉰 실비아는 살바체를 보고 말했다.


“알페르노가 그런 적이 없었는데, 무척 신경질 적이 된 거 알아요?

솔직히 말하면 내 유혹에도 넘어오지 않는 남자는 당신과 그 뿐이었어요.”


살바체는 벽에 기대 아무 말 없이 들고 있는 와인잔을 단번에 비워 버렸다.

실비아 로세니는 자신의 솔직한 대답에도 아무 말 없는 살바체가 얄미웠다.

그래서 다시 말을 시작했을 때, 다가온 의도와는 달리 말이 신경질적으로 나가고 있었다.


“전에 그 여자. 당신 집에서 봤던 동양여자 말이에요. 아직도 함께 있나요? “


다 마신 잔을 빙글 돌리던 살바체의 손이 멈추는 것을 보고 실비아 로세니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 여자 당신을 떠났군요.

내가 보기에도 그 여자 한곳에 오래 머물 여자는 아니었죠.

내가 있는데도 알페르노를 유혹하는 여자였으니… 안 그런가요?”

“입 닥쳐. 실비아.”


조용히 읊조리는 살바체의 목소리에도 로세니는 조용히 있지 않았다.

대신 살바체의 손에서 유리잔이 깨질듯 흔들리는 것을 보고 살바체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거 알아요? 당신의 그 여자 알페르노가 엄청 미워했던 거…

당신 섬에 다녀간 후로도 틈만 나면 그 여자 얘길 내게 했었죠.

당신 곁에 있게 하면 안 되겠다고 말이죠.

내가 알페르노와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도 그 후 부터였고,

난 당신이 그 여자와 헤어진 게 잘 된 일이라 생각해요. “

“로세니…”


작은 경고조의 무서운 말투에도, 실비아 로세니는 살포시 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웃어보였다.


“궁금하네요.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그만 하라고 말했어.”

“설마 죽진 않았겠죠?”


'쨍!'


곧바로 로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살바체의 손에 들고 있던 빈 잔이 깨지며 바닥에 닿아 '쨍' 소리를 내며 깨졌다.

실비아 로세니는 '헉' 소리를 내며 살바체에게서 한걸음 떨어져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살바체의 눈빛은 로세니를 산채로 죽여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미, 미안해요. 난 그저…”


당신을 위해 한 소리였어요. 라는 말도 먹어 버리고,

실비아 로세니는 컵의 잔상을 꼭 손으로 쥐었다가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살바체의 모습과 눈에 잡혀 말문을 잃었다.


“앞으로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알페르노가 아니라 내 손에 죽게 될 테니까.”


곧바로 살바체는 두 사람을 호기심의 쳐다보는 시선들을 무시하고 천사의 성 입구로 빠져 나갔다.

곧이어 코트를 가져다주는 하인에게 코트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간 살바체는 기다리고 있는

비서가 문을 열어주는 동시에 차에 몸을 실었다.


'젠장!'


손의 살 속으로 유리가 박혀 쓰라렸지만, 살바체의 손은 펴지질 않았다.

손에 쥐어진 고여 있는 피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와 검은 코트를 적시고 있었지만,

살바체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방금 로세니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죽진 않았겠죠?'


살바체는 피가 흐르는 주먹을 쥔 손을 입가로 가져가 댔다.

무섭게 파고드는 공포가 자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어디에 있든 자신의 건제한 모습을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힘을 냈다.

넌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살바체는 그 동안 TV며 연회에 계속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 여자에게 복수해 주고 싶었다.

그 여자의 자존심을 산산조각내고 싶었다.

알페르노 역시 없는 인간이다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아니,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난 당신의 피가 아닌 프란트 家 라고, 이렇게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프란트 家 사람이라고…!

일주일은 페인처럼 미친 사람처럼 술만 퍼 마셔보기도 했고,

일주일은 ‘교황의 섬‘ 사람들을 무섭게 닦달하며, 진을 생각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했다.

만족?! 아니 더 자신을 미치게 만들어 댔다.

소근 거리는 사람들이 전부 자신을 미친 사람 대하는 것 같이 조심스럽기만 하자, 살바체는 이건 아니다 싶었다.

다시 마음을 먹었다.

자신이 건제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젠장! 그런데 어느 것 하나 먹혀들지 않고 있었다.

어떤 반응도! 어떤 연락도! 기껏 추측에 말 한마디에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이라니?…!


'설마 죽진 않았겠죠?'


살바체의 명령 없이 가만히 서 있는 차 안에서 비서가 흰 손수건을 살바체에게 건넸다.

자신의 생각에 빠져있던 살바체가 그 흰 손수건을 보며 거칠게 빼앗아 손에 묶으며 말했다.


“알 체논… 지금 어디 있지? 알아봐. “


* * *


체논은 갑작스럽게 파티 복 차림으로 자신을 만나러 온 살바체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저번에 에르나와 TV를 보았던 그 모습 그 차림으로 살바체가 자신 앞에 서 있었다.


“하하하. 정말 오랜 만이야. 저번 일에 대해 사과하러 온 건가?”

“사과?! 웃기지마. 그럴 이유 없어.”


살바체의 굳은 표정에서 체논은 전에 아르나가 자신에게 말했던 그 표정을 보았다.


'그래. 이 자식 아직도 빠져나가지 못했군. 멍청한 놈'


체논은 그러면서도 속으로 재밌어하며 이 친구를 용서하기로 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실수라 치부하며,

평생의 한번 할 실수 정도는 얼마든지 용서해 줄 수 있는 관용이 있는 자신이라며 흐뭇해했다.

아니, 이 친구의 그 사랑의 끝이 궁금하다고나 할까…


“그럼 뭐 하러 찾아 온 거야? 그것도 이 야밤에 말이야.”

“네가 그럴 말 할 자격이 있나?”

“물론 없지. 나도 너에게 이런 말 하는 내 자신이 우스워“


체논이 재밌는 농담이었다는 표정으로 살바체의 어깨를 치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눈짓을 했다.

곧이어 거실 한편에 마련된 바로 걸어간 체논이 두 잔의 독한 양주를 따라 소파에 앉아 있는 살바체에게 건넸다.


“무슨 일 있었나? 그 손은 또 왜 그래?”


붕대가 감겨진 손으로 체논이 내미는 술잔을 받는 살바체를 보고 체논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러나 살바체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곧장 본론을 꺼내 물었다.


“그 여자 어디 있지?”

“하, 이 친구. 나에게 전에 했던 말 잊었어? 그 여자 찾는 일 그만두라고 한 거 말이야.”

“찾지 않았나?”


살바체의 직선적인 물음에 체논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주를 목 깊숙이 단번에 집어넣었다.

뜸을 들이는 체논을 보며 살바체의 눈썹위로 깊은 주름이 만들어 졌다.


“이봐. 그렇게 눈썹 올리면서 쳐다보지 마. 찾았다고 말해줄까? 아니면 못 찾았다고 말해줄까?”

“농담하지 마. 농담할 기분 아니니까“

“나 역시 마찬가지야. 어떤 대답을 원해?”


살바체가 체논의 표정을 보고 들고 있던 잔을 단번에 입속에 털어 넣었다.

화끈한 감각이 목구멍부터 배속까지 밀려 들어왔다.

살바체는 체논의 비웃는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곧바로 살바체는 체논을 쳐다보고 잔을 탁자에 소리 나게 내려놓고 일어섰다.

체논의 눈썹이 살바체의 일어나는 것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됐어. 찾든 안 찾았든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말이군.”

“훗…”


살바체가 일어나 나가려는 순간, 체논이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살바체가 걸음을 멈추고 체논이 자신을 보며 서서히 소파에서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 이 순간 죽었는지도 모를 일이지.”

“?!”


살바체의 눈이 정지했다.

충격에 빠진 살바체의 눈을 보고 체논은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바로 자신의 멱살을 잡으며 달려드는 살바체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뭐야?! 사실대로 말해?! 죽었나?! 살았나?!”

“이 친구. 이 손 놓고 말해. 숨이 막혀 제대로 말도 할 수 없겠어.

왜 죽었다고 한다면 날 죽이기라도 할 것 같군.”


'퍽!'


농담처럼 던진 체논의 말에 살바체의 붕대를 감은 손이 곧바로 턱을 강타했다.

체논의 얼굴이 바닥으로 꼬꾸라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체논의 멱살을 부여잡은 살바체가 소리쳤다.


“그딴 개소리는 집어치워! 누구 맘대로 그 여잘 죽인다는 거지?!

난 그 여잘 죽이라고 말한 적이 없어?! 진을 죽였다면 너도 같이 죽여 버리겠어!”

“쿠…쿨럭, 젠장…. 이거 장난 아니잖아.”


체논이 한손을 들어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지만, 거친 살바체의 손은 아직 떠나지 않고, 체논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흔들리는 살바체의 눈을 보며 체논은 아픈 와중에도 자꾸 실없이 웃음이 났다.


“글쎄… 이러는 와중에도 그 여자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하나? 나에게 그러지 말고,

내게 명령한 사람에게 가보라고. 그게 누군지는 내가 말 안 해도 알겠지?”

“…당장 그만 두라고 해.”

“미안하지만, 대부의 명령이야.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다.”


체논이 그제야 살바체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을 때어냈다.

옷을 잡아끌어 주름을 없앤 체논이 자신을 노려보는 살바체를 보고 말했다.


“벌써 한 번의 시도가 있었지.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더군. 운이 좋은 여자야.

그렇지만, 마피아가 두 번의 실수를 하는 것 보았어? 이번 시도면 이 여자는 죽어.”

“젠장!”


살바체가 이마를 붕대가 감긴 손으로 거칠게 쓸어내리는 모습을 보고 체논이

살바체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걸치고 말했다.


“대부를 찾아가. 그 여자를 살릴 사람은 알페르노 한사람뿐이다.”

“…….”


절망적인 표정의 살바체를 보고 그제야 체논은 웃음기 있던 표정을 멈췄다.


* * *


-사르데냐 섬 (sardinia island)


피가 거꾸로 서는 기분이었다.

매 순간 순간 일초마다 이 여자가 지금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살바체는 술을 들이키면서


술이라는 자각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이렇게 술을 마시고 모든 기억을 잃는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 이 여자 그렇지 않아도 죽이려고 하지 않았나?

낭떠러지로 밀어버리고 떠난 여자, 자신을 지옥보다 더한 현실에 내팽개치고 가버린 여자.

생각조차 하기 싫었던 여자가 아닌가?

한마디로 배신하고 떠난 여자였다. 이렇게 안절부절 할 이유 전혀 없는 여자였다.

그런데… 그런데도 이렇게 미치게 만드는 것은 뭐란 말인가?!

눈을 감을 때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진의 영상이 그려졌다.

무대에서 아름다운 푸에테를 돌다 총 소리와 함께 꼬꾸라지는 진의 모습,

길을 걷다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는 진의 모습. 차에 타자마자 '꽝'하는 폭발음과 함께 터져버리는 모습…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움찔 움찔 손가락을 타고 유리가 박혔던 살들이 쑤셔왔다.


'싫어! 싫어! 싫어!'


욕실에서 외치던 희진의 목소리… 자신을 끊임없이 쳐대던 가날 펐던 손짓들…

왜 그때는 그 아픔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으면서, 지금 에와 그 아픔들이 하나하나 가슴을 도려내는 것인지…

그런 아픔을 줬던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은 것인지…


“이런 세상에! 주인님! 밖에서 비가 들이치고 있잖아요?”


미얀이 비가 들이 닥치고 있는 창문을 급하게 닫으며, 살바체에게 말했다.

살바체는 그 모습에도 미동 없이 술잔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아가씨가 생각나요.

주인님을 생각하며 창문을 바라보던 아가씨…

걱정하시는 눈빛이면서도 걱정하지 않으시는 척 애쓰시던 모습… 눈에 선하네요. 아!”


미얀이 방정맞게 살바체가 싫어하는 것을 잊어 먹고, 생각나는 대로 주절 거렸다가

곧장 뒤돌아서서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그러나 살바체는 아까와 같은 자세로 술잔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그만… 주무세요. 주인님.”

“…….”


대답 없는 살바체를 보고 미얀이 들리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쉬며 빠르게 방을 나갔다.

한참 초점 없던 살바체의 눈이 한순간 거칠어 졌다.

곧장 일어선 살바체가 창문으로 다가가 미얀이 열어둔 천둥치며 비가 쏟아지는 창문을 거칠게 열어 재꼈다.

비가 굵은 빗방울을 살바체의 얼굴로 내리치고 있었지만, 살바체는 그 비를 맞으며 얼굴을 더 높이 쳐들었다.

아팠다.

아프고 또 아파서 가슴이 찢어졌다.

처음엔 소유욕에 다음엔 집착에 다음엔 자신의 고통 때문에 보이지 않던 일들이 이제야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 이 저택에서 그 여자에게 줬던 건 아픔뿐이었던 것을…

서서히 굳어 갔던 진의 표정이 자신이 쌓게 만들었던 가면이었다는 것을…

연극을 하지 않고 견딜 수 없게 자신이 만들었다는 것을…


'진….'


왜 몰랐단 말인가?!

진의 표정이 굳어 갈수록 가면을 쓴 듯 무표정해 질수록 고통에 슬픔에 짙어 가던 그림자였음을…!

전엔 보이지 않던 진의 표정 뒤에 감정이 이젠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였다.

소유욕, 집착이 걷히고 난 후 죽음을 코앞에 직면한 후에야 살바체는 깨달았다.

자신을 잔인하게 몰아간 후에 무표정하던 진의 아픈 속마음이…그제야 깨우쳐 졌다.


“진!”


살바체의 떨어지는 얼굴의 물 사이로 거친 살바체의 목소리가 어두운 허공을 갈랐다.

곧이어 대답이라도 하듯 두터운 천둥소리가 또 다시 허공을 갈라왔다.

늦었을 수도 있었다.


'젠장! 절대 그럴 수는 없어! 이대로 아픔만 주고 보낼 수는 없어!

나 살바체 프란트에게서 떠날 수는 없어!'


* * *


-서울 (Seoul)


희진은 2주일을 집에만 갇혀 지냈다.

범인도 잡지 못한 미결된 사건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하지만 희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잡으러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버지의 힘으로 쉬쉬하며 엔진과열로 인한 폭발로 처리 했지만, 뒤로 여전히 조사 중이었다.

다행인 것은 지나가다 차의 파편을 맞아 다친 사람 몇 명을 제외하고는 사상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살바체 프란트…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요.'


찾지 않거나… 죽이려고 할 거라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현실로 다가오자 희진은 두려워졌다.

살바체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는 까닭도 있었지만, 살바체의 집념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더 무서웠다.


'도망쳐봐. 다리를 부러뜨려 버릴 테니까.'


부러뜨리는 걸로는 모자랐겠죠.

당신에게 아픔만 주고 지옥을 선사했으니 날 죽이고 싶겠죠.

무서워서 집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면서, 희진은 이상하게 전에 있던 뻥 뚫렸던 가슴이 사라져 버린 것을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실감이라 여겼던 그 마음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살바체가 증오를 품으며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도, 두려우면서도 가슴이 뛰었다.


'내 손에서 벗어 날수 없어.'


살바체의 말대로 자신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살바체 프란트! 당신 역시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군요!'


희진은 무릎을 올리고 침대에 기대 앉아 눈을 빛냈다. 다시 카르멘의 눈이 희진의 눈에서 살아나고 있었다.


* * *


“파혼 하자.”

“오빠!”


혜수의 놀란 눈을 보면서 시원은 인상을 썼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혜수의 눈이 급속히 젖어들고 있었다.


“희, 희진언니 때문인가요? “

“그래. 이번에 희진이 죽을 뻔 했던 얘기는 들었겠지?

분명 희진은 말하지 않고 있지만, 내가 위험할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이태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그, 그게 우리 약혼과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시원이 그 들 사이로 커피 잔을 들고 온 점원을 기다렸다 점원이 내려놓은 커피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뜸을 들이는 시원의 모습을 보고 혜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시원을 쳐다봤다.


“지켜주고 싶다. 아무도 건들이지 못하게… 내 눈 앞에서 사고가 일어났어.

그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무작정 뛰어 들었다. “

“오빠… 그건 내가 그 지경이 되었다고 해도 오빤 분명 날 구하러 달려왔을 거예요. “

“그래. 그렇지만, 느낌이 틀려.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무작정 대책 없이 달려가진 않았겠지.

솔직히 말하면 이런 느낌은 전 부터 들었었어. 희진이 죽었다 생각하는데도 믿지 않았던 나를 돌아보고,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희진을 찾아 다시 갈 생각을 했다.”


혜수가 한참 숨을 고르며, 시원을 똑바로 보려고 노력했다.

강하게 심장을 조이는 느낌에 혜수는 시원을 바로 보기 힘들었다.


“오… 오빠가 하…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그래. 변명하지 않아. 애초에 우리 약혼 희진을 찾으면 돌려놓기로 했었던 것 이었잖아?

널 주위 압력 때문에 이용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해. 더 좋은 자리 나타 날거다.”


시원이 혜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것을 느끼며, 혜수가 가슴을 잡으며, 시원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오빠! 말해주세요. 확실하게… 대, 대답해 주세요.”

“…….”

“이렇게 가는 거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확실한 답변도 없이…

이, 이렇게 가는 거 비겁해요…”


혜수가 감겨오는 눈을 부릅뜨고 시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시원이 한숨을 쉬며 창백한 표정의 혜수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내가… 희진을 사랑한다는 것…. 다시 본 순간 확실하게 깨달았어.

그래. 난 진을 사랑한다.”

“헉….”


순간 혜수의 눈이 뒤집혀 졌다.

곧바로 흰자를 보이며 꼬꾸라져 의자와 함께 혜수가 넘어갔다.

시원이 그 모습을 보이며 동공을 크게 하고 혜수에게 다급하게 다가가 쓰러지려는 혜수를 붙잡고 이름을 크게 외쳤다.


“최 혜수! 최 혜수!!”

“헉…헉…”


가슴을 쥐어뜯으며 혜수가 숨을 힘겹게 쉬고 있었다.

시원이 급하게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누가 병원 응급차 좀 불러 주십시오! 빨리!”


조용하던 카페 안이 일순간에 시끄러워 졌다.


* * *


-로마 (Roma)


알페르노는 깔끔하게 차려 입은 살바체를 근 한 달 만에 다시 마주보고 있었다.

자신을 다시 보지 않겠다 다짐 하던 살바체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알페르노의 감회는 더욱 새로운 것이었다.

다시 자신을 찾아준 살바체가 고맙고 대견했지만, 살바체의 표정이 굳어 있었기에 알페르노는 내색하지 못했다.


“왜 왔지?”


말 역시 딱딱하게 나갔다.

살바체에게 강하게 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보다도 우선 적으로 강한 배신감도 한 몫하고 있었다.

그 동안 뒤를 봐주고, 아버지보다 더한 정으로 키워주고,

이젠 피까지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렇게 남을 쳐다보듯 보는 살바체의 표정을 보니 화가 치솟았다.


“누구 마음대로 내 여잘 손을 대지?”

“너 여자?!”


알페르노가 헛웃음을 지으며 살바체의 말을 따라 했다.

이 자식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하는 알페르노의 표정이었지만,

살바체의 표정은 변하지 않고 알페르노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 누구 마음대로 라고 말했나? 너의 여자라고 말하는 그 여잔 너 뿐만이 아니라,

나에게 까지 피해를 줬다.

내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어. 그 것 만으로도 그 여잔 죽어도 싸다.”

“웃기지마. 그 여잔 내 여자야. 나만이 죽일 수 있어.”

“훗, 그래서 죽일 거냐? 죽이려고 찾아온 놈 같진 않은데…”


알페르노가 재밌다 는 표정으로 살바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짙은 청색을 띈 살바체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고 알페르노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쳐 소리 없이 방안을 침묵으로 감쌌다.


“뭘 원해.”

“?!”


살바체가 큰 소리로 알페르노에게 외쳤다.


“뭘 원 하냐고 물었어! 원하는 걸 말해! 뭐든지 들어 주겠어!”

“하… 하, 하, 하하하하“


살바체의 말에 알페르노가 웃어 재꼈다.

책상에 앉아 웃는 알페르노를 노려보는 살바체를 보며 알페르노가 겨우 웃음을 멈추고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그 여자 목숨으로 거래를 하러 온 거군. 좋아. 그럼 합당한 대가를 요구해 봐야겠어.”

“…….”



너를 위해. [3장]


미얀은 울먹이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교황의 섬'에서 나왔다.

그 동안 주인님을 기다리며 정성스럽게 꾸려갔던 이 섬의 주인이 바뀐 탓이었다.

할아버지의 할어버지… 또 그 위에 할아버지가 지켜 오셨던 섬이었는데,

미얀은 살바체의 대부이면서 교황의 섬을 가로챈 알페르노가 밉고 또 미웠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 섬을 알페르노에게 줘 버린 것인지… 주인님 역시 야속하고 미운 미얀이였다.


'아가씨가 돌아오실 곳인데…'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었다.

희진과 함께 했던 그 때를 미얀은 살바체 만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올 거라는 생각에 주인님 몰래 희진의 방의 못질을 뜯고 물건들을 정리하고는 했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알페르노는 희진의 방의 물건을 전부 치우게 해 버렸고,

미얀은 망연자실 알페르노의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미얀은 희진의 물건을 치우며 이대로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진위를 물어보기 위해

알페르노에게 목숨을 걸고 서재로 들어가 물었다.


“알페르노님… 저희 주인님께서는…”

“미얀이라고 했었지?”

“네.”


주인님의 서재에 앉아서도 알페르노는 한층 더 늙은 모습이었다.

무엇이 마음에 안드는지 인상을 잔뜩 쓰고 있어, 얼굴 가득 수심이 잡혀 있었다.


“살바체에게 전해라. 다시 이 섬을 찾고 싶다면 날 찾아오라고.

빌어먹을 자식! 이런 고집불통인 것은 닮지 말 것이지!”


'꽝!'


미얀은 책상을 내리치는 알페르노의 무시무시함에 기가 질려 알겠다고 말하고 부리나케 도망쳐 짐을 쌌다.

곧바로 '교황의 섬'을 빠져나와 사르데냐 섬으로 배를 타고 이동하면서 미얀은 멀어지는 교황의 섬을

눈물을 흘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주인님… 어쩌시려고 저 귀한 섬을…어렸을 때부터 가장 소중하게 여기셨던 섬이지 않습니까?'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로마에 도착한 미얀은 곧바로 살바체의 저택을 찾은 후,

집사의 눈초리를 받고 서 있어야 했다.

키가 작고 통통한 몸짓의 여자를 보고 집사는 눈으로 지그시 내려 보며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저는 교황의 섬에서 온 미얀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


집사는 미얀을 내려다보고 잘 왔다는 말도 없이 문을 조금 열어 들어오라는 표시를 할 뿐 이였다.

곧이어 들어선 미얀을 보고 집사가 따라오라는 절제된 고갯짓을 하고는 앞서 걸어갔다.

'교황의 섬' 말고 이곳 로마의 본 저택으로 온 것은 처음 이었기에 미얀은 이곳저곳 딱딱한 실내장식에 주눅이 들었다.

'교황의 섬' 저택은 들어서자마자 따뜻한 온기와 사람냄새가 풍겼는데, 이곳은 교회처럼 엄숙한 분위기가 풍겨왔다.


“주인님. 교황의 섬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들여보내.”


미얀은 엄청나게 큰 서재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 살바체를 보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래도 실의에 빠져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미얀은 화가 났다.

아무렇지도 않게 팔아 치울 만큼 교황의 섬이 주인님에게 헛된 곳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얀. 그 가방은 뭐냐.”

“나왔습니다. 교황의 섬을요.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주인님을 모셔야 할 곳이지,

다른 주인님을 모실 곳이 아닙니다. 전 여기 있겠습니다.”


미얀이 당차게 살바체를 쳐다보고 고개를 한번 크게 끄덕여 자신의 주장을 폈다.

살바체는 미얀의 고집스런 얼굴을 쳐다보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한번 저었다.


“알페르노님께서 말씀 전하라 하셨습니다.”


미얀의 다음 말에 살바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굳어 있는 살바체의 표정을 보지도 않고 미얀이 전하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대답했다.

조금은 서운함이 깃든 미얀의 목소리 였다.


“섬을 찾고 싶으면 날 찾아와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어먹을 알 페로노! 찾아갈 이유 없다 전해.”


살바체 프란트의 강한 어투가 어딘지 누구와 닮은 듯 보였다.

미얀이 그런 살바체를 보다가 눈을 크게 하고 곧바로 살바체에게 되물었다.


“제… 제가 전해야 하나요?”


미얀의 얼빠진 물음에 살바체가 화가 났던 것도 잊고 미얀을 쳐다봤다.

그 한마디에 다시 저를 보내려는 건 아니시겠죠? 하는 미얀의 표정을 보고 살바체가 다시 웃음을 만들었다.

어딘지 예전과 틀려지는 여유가 보이는 듯해 미얀이 눈을 깜빡여 살바체를 쳐다봤다.


“넌 쉬어. 내일 집사를 통해 할 일을 알려주겠다.”

“…….”


할 말 다 했다는 듯 다시 일에 집중하는 살바체였다.

미얀은 그 모습을 쳐다보고 삐쭉거리며 나가길 주저 했다.

꼭 물어봐야 할 일이 있는데, 묻는 다는 게 자신에게 자격이 있는 것인지 겁이 나기도 했다.


“뭐야. 미얀… 빨리 말하고 나가도록. 이걸 오늘 안으로 작성해야 한다.”

“그, 그게 뭔데 그러십니까?”


미얀이 힘없이 눈치를 보며 물었지만, 살바체는 미얀을 보지도 않고 담담하게 물음에 답했다.


“이번 친선에 필요한 서류지. 이게 없으면 쫓아가지 못한다니 별수 없지. “

“예?”

“할 말을 해봐. 미얀.”

“아…. 왜 '교황의 섬'을 팔았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미얀이 어렵사리 본론을 꺼냈다.

성격으론 그 동안의 원망으로도 다다다 하고 따지고 싶었지만,

살바체에게 소리를 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살바체가 미얀의 말에 미얀을 쳐다봤다.

미얀이 주뼛거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서려는데,

살바체가 깊어지는 청색의 눈으로 열릴 것 같지 않은 입술을 열어 힘겹게 말했다.


“진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

“…!”


살바체는 미얀을 보았다가 잠시 시점을 잃었다.

살바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얀은 손에 잡힐 듯해 눈물이 어린 눈으로 살바체를 쳐다보고 있었다.

살바체가 고개를 한번 흔들고 다시 서류를 쳐다보며 미얀에게 명령했다.


“미얀. 쉬어.”

“예?…네.”


* * *


-서울 (Seoul)


하얀 병실 침대 위에 파리하게 누워 있는 혜수의 눈은 떠질 줄 모르고 있었다.

혜수가 눈을 뜨기만 기다리고 있던 시원은 갑자기 들이닥친 수혁에게 목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이 자식! 도대체 어쨌기에 우리 혜수가 심장마비를 일으킨 거야?!

원래 심장이 약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어. 이렇게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고!”

“수혁아! 너 왜이래?!”

“새어머니는 가만 계세요. 혜수가 이 자식 때문에 지금껏 맘고생 얼마나 한지 잘 아시잖아요?!

도대체 무슨 얘길 한 거야?! 둘이 무슨 얘길 했기에 애가 쓰러지냔 말이야?!”


시원은 대답하지 않고 수혁이 멱살을 잡고 흔들어도 가만히 있었다.


“이 자식이!”


수혁이 이런 시원이 열 받아 한대 치려고 할 때였다.


“오빠…”

“혜수야!”


혜수의 새어머니가 곧바로 침대로 가까이가 딸의 손을 잡았다.

반쪽이 된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혜수의 모습이 안 되어 혜수의 얼굴을 만지는 새어머니의 손도 떨려오고 있었다.

혜수는 그러나 새어머니의 표정은 보지 않고 오빠인 수혁을 보며 말했다.


“그러지 마요. 시원오빠 아무 잘못 없어요. 새엄마 시원오빠 보내주세요.

나 새엄마한테 할 말 있어요.”

“무슨 말인데 그래? 이 자식 있을 때 해!”

“수혁아…”


혜수는 오빠와 새어머니를 쳐다보고 고개를 저었다.

이제 되었다 생각했다. 자신의 성격상 사랑만 보고 무작정 밀어 붙여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만큼 시원이 가지고 싶고 사랑하는 마음 간절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희진도 살아 돌아왔고 시원의 마음도 확인한 이상 더 잡을 용기도 없었다.

온몸의 힘이 다 소진 된 느낌이었다.


“시원오빠 그냥 가세요. 제가 저희 집 쪽은 알아서 하겠어요.”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혜수가 말했다. 시원은 혜수의 말에 더 나갈 수가 없었다.

그냥 이 순간 끝났다 생각하고 나가버리고 돌아보지 않으면 그만인데 책임감에 그럴 수가 없었다.

미안한 죄책감에 시원은 혜수를 똑바로 쳐다 볼 수도 없었다.

그때, 보호자가 누구냐며 간호사가 들어왔다.

수혁이 새어머니에게 혜수를 부탁하고 간호사를 따라 나섰고

시원도 의사를 만나 얘기를 듣기 위해 수혁의 뒤를 따랐다.


“혜수가 잘못 되었다 그럼 자넨 내 손에 죽어.”


수혁이 으름장을 놓고 의사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최 혜수씨 보호자세요.”


간호사의 말에 의사가 의자를 건네며 자리에 앉아 차트를 살펴보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군요.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신 모양입니다.

심장에 무리가 가서 단순한 심장마비를 일으킨 겁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자주 있으면 쇼크사할 위험이 크니 꼭 안정제를 드시게 하시고

마음을 편하게 먹게 해 주십시오.”


수혁은 의사에 말에 안도했지만 시원은 그럴 수 없었다.

혜수의 심장이 어렸을 때 부터 나빴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수혁이 시원의 표정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원래 선천적으로 심장이 조금 약하게 태어나긴 했지만,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볼 건 없었어. 쓰러진 것도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야.”


이렇게 변명하듯 혜수의 대해 설명해야 하는 자신이 짜증났지만

수혁은 시원의 의심하는 표정을 그냥 지나 칠 수는 없었다.

시원이 뭘 잘못했는지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수혁이 시원과 혜수의 병실로 들어서려는데 안에서 혜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엄마. 나 파혼시켜 줘요. 시원오빠 보내줄래요.”

“뭐? 혜수야!”

“더 이상 못해요. 다른 사람 사랑하는 오빠 더 잡아두기엔 내가 너무 아파요.

뒷모습 보는 거 더 이상 못하겠어요. 새엄마.”


두 모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수혁과 시원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굳어 서 있었다.


* * *


“파리에서요?”


희진의 오빠인 혁진과 새어머니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다 전화를 받고 있는 희진을 보며 호기심어린 눈을 했다.


“아뇨. 선생님. 기회가 좋다는 건 알지만 지금 제 상황이 외국에 나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 돌아오시면 상의해 보고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네. 네 선생님… 네. 그럴게요. 들어가세요.”

“뭔데 그래?”


오빠 혁진의 물음에 희진이 난처한 표정을 했다.

연습을 나간 후로 희진이 국내로 들어왔다는 것이 알려졌고,

파리 로얄 발레단에서 이번에 공연 들어가는 '백조의 호수'에서 흑조인 오딜역을 제의해 온 것이다.

파리… 발레리나로서 파리 무대에 서는 것은 가장 큰 꿈이었다.

기회가 왔지만 식구들이 전부 말릴 것은 확실해 보였다. 벌써 혁진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못한다고 딱 부러지게 말하지. 저번 일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허락 할리가 없잖아.”

“그래. 희진아. 이번은 네가 접도록 해라.”


희진은 말도 꺼내지 못하고 벽에 걸린 것이다.

밖에 나가지도 못한지 20일이 지나고 있었다.

답답한 건 둘째 치고 이런 제의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뻐하지도 못하는 지금이 짜증스러웠다.

살바체에게 잡혀 죽는 한이 있어도 꼭 하고 싶은 일이었다. 평생의 꿈이었다.

희진은 일을 맡치고 들어오시는 아버지와 함께 저녁식사 자리에 앉았다.

언제 다시 얘길 꺼내 볼지 생각하고 있을 때 먼저 희진의 아버지가 말을 했다.


“이번에 이탈리아에서 외교단이 왔다.

거기서 중요 인사 한분이 이탈리아에서 너의 공연을 봤다고 칭찬을 하더란다.

내일 친선파티가 있는데 널 꼭 데려오라고 하시더라.”

“누가요 아버지?”

“대통령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 누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외교단 중에 중요인사라고 하니 …허허“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새어머니와 혁진은 표정을 굳혔다.

방금 받은 전화로 그렇지 않아도 희진의 마음이 붕 떠 있는데,

이번 일이 계기로 더 마음을 굳힐까봐 조바심이 난 까닭이었다.

그러나 희진의 아버지인 문화부 장관은 흐뭇해하며 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식자랑을 하지 않는 양반이었지만, 딸아이를 중요한 사람이 알아보고 지목했다는 것이 뿌듯했던 것이다.


“아버지. 전 싫습니다. 이탈리아 사람인데 희진이 보려고 하겠습니까?”


이탈리아 인들 때문에 희진이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고,

이번에 차 폭파 사건도 아직 풀리지 않고 있는데 이탈리아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희진을 데려가시겠다니…


“희진아. 아버지 따라 가겠냐?

저명인사들이 다 모일 테니 큰 사고는 절대 일어날 수 없을 거다. 안심해라.”

“알아요. 어버지. 가겠어요.”


아버지의 부탁이었다. 거기다 희진은 아버지의 환심을 사야했다.

죽더라도 꼭 맡고 싶은 역이였다. 그 역을 하다 무대에서 죽더라도 말이다.


“혁진이 네가 내일 희진이 데리고 오도록 해라. 경호 확실히 하고 정검도 철저히 해야 한다.”

“네. 아버지.”


20일 동안 외출한번 못했던 희진을 알기에 혁진은 어쩔 수 없이 희진을 위해 알겠다고 대답했다.

다른 사람 손에 맡기는 것보다 이젠 직접 희진을 챙겨야 겠다 속으로 다짐도 했었었다.

희진이 그 차에 타고 있었다면…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혁진은 아찔해 지고는 했다.


“걱정 마. 오빠가 지켜 줄 테니…”

“그래. 그럼 내일 저녁이다. 내 집으로 차를 보내마. 혁진이 네가 신경 좀 써라.”

“네.”


희진의 새어머니만이 불안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희진이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때지 못하게 하고 싶은 새엄마의 심정이었다.

희진의 아버지가 그런 새어머니의 표정을 읽고는 말했다.


“국 좀 더 주시오.”


* * *


나가지 못하는 희진을 위해 희진의 시집간 언니인 미진이 아침부터 달려왔다.

이탈리아 외교단뿐만 아니라, 정치계 사업계 중요인사들이 모이는 자리라고 했다.

미진은 그 중에서 희진이 가장 뛰어나게 돋보이고 예뻤으면 싶었다.

희진으로 인해 대리만족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에 미진의 마음도 준비하는 동안 설렜다.

모처럼 집안이 희진의 일로 인해 떠들썩해 졌다.


“와 준다니?”

“그럼 당연하지요. 새엄마. 40만원이 누구 애 이름인가?”

“뭐 그리 많이 불러. 반만 줘도 달려 올 텐데.”

“가장 예쁘게 해서 내 보내야지. 저 올린 머릴 하고 어딜 나가요. 안 그러니 희진아?”


희진이 미진을 쳐다보며 못 말린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새어머니와 뿌듯한 표정의 미진을 보고

싱긋 웃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희진아. 뭐하고 있어. 얼른 씻어. 나갈 수만 있으면 전신 마사지 같은데 가면 좋은데….”

“왜 또 부르지 그러냐.”

“맞다. 진짜 그러면 되겠네. 못 부를 것도 없지 뭐.”


가만히 두면 미진이 집안을 외부인으로 꽉 채울 것 같아 희진이 전화를 걸려는 미진의 손을 붙잡았다.


“언니. 그냥 언니가 해줘. 언니 마사지 하는 거 많잖아.”

“그런 걸로 되겠어? 아버지가 허락한 일인데 이럴 때 아버지 돈 좀 왕창 써보자.

걱정하지 마. 언니만 믿어.”

“새엄마 돈 없다.”


희진의 새어머니가 곧바로 미진의 말에 정색했다.

미진이 새어머니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누가 새엄마보고 내랬어요? 이건 다 아버지한테 청구할 거라니까.”

“니 아버지 돈이 새엄마 돈이지.”

“평생 용돈 받고 생활비 받아 생활하신 분이 무슨… 김 서방이 그럼 난 벌써 헤어졌어.”


투덕거리는 모녀는 친구 같았다. 희진이 쿡쿡 거리며 웃다가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며 말했다.


“언니 나 먼저 씻을게.”


두 사람은 희진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에도 계속 티격태격 중이었다.


* * *


혜성그룹 회장실로 아침부터 호출을 받은 시원은 옷매무세를 정돈하고

비서의 알림과 동시에 아버지를 뵙기 위해 들어섰다.


“앉아라.”


시원은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에게 할 말이 있었다.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고 소파에 단정히 앉은 시원은 아버지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어제 혜수의 병실에서 나와 곧장 집으로 돌아와 방으로 들어간 후에 나오지 않았던 시원이었다.

아침에도 각자 따로 출근했던 탓에 어제의 일을 말씀 드릴 시간이 없었다.


“그래. 혜수는?”

“오늘 퇴원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몸이 약해서 쯧쯧… 내 네 어미에게 혜수 약 한 채 지어 먹이라고 했다.

곧 있으면 결혼날짜도 잡아야 할 것이고 몸 관리 잘해야지.”


당연히 고개를 끄덕여야 할 시원이었지만, 시원은 반대로 할 말이 있다는 굳은 표정이었다.


'똑, 똑'


곧이어 비서가 따뜻한 차 두 잔을 부자 사이에 하나씩 두고 나갔다.

서로 나름대로 생각을 읽느라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시원이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는 아버지를 보며 침묵을 깼다.


“아버지… 혜수와 파“

“남아 일언 중천금이라고 했다.

기업을 이끌어 갈 사람은 특히 약속을 중요시해야 하는 법이다.”


단번에 아들의 의중을 파악한 시원의 아버지는 답답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들을 보았다.

희진이 죽었다 할 때부터 회사도 팽개치고 찾아다닌 놈이 아니었는가…

이제 희진이 살아 돌아왔으니 다시 아들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될 운명이었고 필연인 처음부터 어긋난 안 될 연분인 것이다.


“시원아. 내가 반듯한 사람으로 보이냐.”

“네? 네…”


시원의 마지못해 하는 대답에 차를 입으로 다시 가져가던 시원의 아버지는 담담하게 옛날 얘기를 꺼냈다.


“내 예전에 네 어미 만나기 전, 부모님이 말리던 여자가 있었다.”


시원이 놀란 표정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단 하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분이었다. 항상 맞는 격식, 맞는 길을 중요시하는 분에게 그런 과거라니…


“사실이다. 그 여자를 많이 사랑했다.

하지만 그 여자에겐 꿈이 있었고 나 하나만 보고 살기엔 꿈이 큰 여자였다.

희진이가 그 여자와 다르다는 것도, 이 아비는 안다. 네가 나와 다르다는 것도 알고 말이다.

하지만 인연이 아닌 사람을 잡으려고 하면 화가 따르는 법이다.”


세월의 연륜을 가지고 있는 시원의 아버지를 시원은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궁금한 것은 왜 그 여자를 떠났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원은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다른 말을 꺼냈다.


“후회한 적 없으십니까?”

“후회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난 만족하며 살고 있다.

혜수와도 좀 더 시간을 가져봐라. 지금껏 네가 혜수에게 마음을 열었다 보기엔 힘들지 않냐?

한 달의 기한을 주마. 섣부른 판단이 또 다른 후회를 낳을 수도 있는 거다.”


시원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혜수를 처음부터 거부하기만 했었다.

한 달이 지난다고 해서… 그 마음이 다시 바뀔 리는 없었지만,

희진을 얻기 위해 그 정도는 감수 할 수 있었다.

그 전에 시원은 아버지에게 더 확실한 답을 듣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한 달 후에도 제 생각이 변함없다면요.”

“네 편에 서 주마.”

“그러겠습니다.”


그제야 편하게 차를 들어 마시는 시원을 보며 시원의 아버지가 말했다.


“퇴원하는 애 맘 상하지 않게 들여다보고 저녁에는 시간 좀 내거라.”

“네.”


* * *


정확히 6시에 고급 중형차가 희진의 집 앞에 대기 했다.

희진은 새어머니와 미진의 배웅을 받으며 오빠 혁진과 함께 차에 오르려고 했다.

얇은 흰색의 시폰 드레스는 끝이 하늘색이고 잔잔한 흰 깃털모양의 수가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다.

가슴 선에서 마무리 된 드레스는 어깨 곡선을 살리고, 긴 목선이 두드러져 보이게 했고,

그로 인해 희진의 여성스런 아름다운 선들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내 돋보이게 했다.

사르르 소리를 기분 좋게 울리며 희진이 차에 올라타자 혁진이 새어머니와 미진에게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희진 옆에 탔다.

곧이어 두 대의 호위차량이 앞뒤로 희진이 타고 있는 검은 차를 둘러싸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쁘다.”


혁진이 희진을 보고 웃었다.

긴장한 사람은 희진 보다 혁진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희진의 편은 항상 오빠 혁진이었다.

칭찬에 인색한 혁진이었지만 희진에게 만은 달랐다.


“오빠. 미안해. 고집 부려서.”

“더 고집피지 않으면 괜찮아.”


혁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희진이 이번 파티에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벌써 혁진이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희진은 그런 오빠의 손을 잡았다 놓고는 경복궁을 지나치는 거리 풍경을 쳐다보았다.

청와대로 들어서자 희진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청와대로 가는 것은 처음이었고,

이런 공식적인 모임도 처음이 엇기에 떨리는 거라 생각했지만, 가슴의 떨림은 쉽게 멋질 않고 있었다.

희진이 창밖을 응시하는 상태에서 오빠 혁진의 손을 찾아 잡는 것을 보며 혁진이 희진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자신 역시 이 모임이 썩 내키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태리사람들이 모이는 파티는 가고 싶지도 않았다.

차가 청와대 앞 대로에 멈춰서고 희진이 혁진의 도움으로 차에서 내려 안내인을 따라 모임이 있는 영빈관으로 이동했다.

싸늘한 찬 공기에 감기에 걸릴까 혁진이 희진의 어깨에 손을 올려 감싸 안고 걸었다.

단순한 친목, 친선 모임이었지만, 꽤 많은 인원이 영빈관에 모여 있었다.

혁진이 아버지를 찾아 희진을 데리고 걸어갔다.

희진은 주위를 잠시 바라보며 경계가 삼엄한 것을 느끼고 안심했다.


'그래. 오랜만에 하는 외출이라 불안해서 그래.'


“아, 저기 제 아들과 딸이 오는 군요.”


희진은 아버지의 말이 들리는 곳을 보고 미소를 만들었다.

차분한 이미지의 아름다운 동양의 미를 여실히 보여주는 희진을 주위 사람들이 힐끗 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세 명의 이태리 외교관인 것 같은 키가 큰 남자들과 이야기 중이었던 희진의 아버지는

걸어오는 딸과 아들은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뒤 돌아선 외교관들 역시 걸어오는 희진과 혁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희진이 아버지를 향해 거의 다 다가갈 무렵 돌아선 외교관들을 보고 희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


희진의 눈동자가 커지고 가슴이 멈추었다 미치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희진의 아버지가 다가온 희진의 손을 잡았지만, 희진은 느끼지도 못했다.



다시 만나다. [4장]


'살바체 프란트…!'


희진은 자신을 여유롭게 내려다보는 살바체를 보고 한동안 굳어 서 있었다.

자신 앞에 서 있는 살바체의 실체를 보고 있으면서도 아직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살바체가 이곳 청와대 영빈관에 … 그것도 친선 자격으로 자신 앞에 서 있을 수 있다니…

희진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죄를 짓고도 당당하게 서 있는 저 모습이라니…!

여유롭게 미소 짓는 살바체의 표정이 문화부장관인 자신의 아버지를 비웃는 것 같아 희진은 화가 났다.

저절로 입술이 앙다물어지고 손에 힘이 들어가 떨려왔다.


“혁진이는 저의 장남이고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입니다. 이번에 정치에 입문했지요.”

“아, 이 젊은 나이에 말입니까? 대단하십니다.”


희진의 아버지는 혁진을 소개하느라 희진의 굳은 표정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곧이어 희진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앞에 세워졌다.


“자, 인사해라. 널 보고 싶어 하던 분이시다.”


희진은 살바체에게서 눈을 때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희진은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희진의 생각과 달리 나이 지긋한 이탈리아인이 희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

“정말 아름답소. '지젤'을 본 후에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악수까지 나누게 되다니 믿기지 않는군요.”


희진은 어리둥절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일그러진 희미한 미소를 짓고 감사하다 속삭였다.

힐끗 살바체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살바체는 여유로운 표정을 고집하고 있었지만

희진이 아름다운 흰색과 푸른색의 드레스를 입고 영빈관에 들어선 순간부터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자신이 만졌던 목선, 저 쇄골 밑에 탐스러운 완벽한 가슴 역시 수어차례,

수십 번 자신의 손에 거머쥐었었고, 완전히 보이지 않는 잘록한 허리선 밑은 그에게 쾌락의 근원지였었다.

자신의 것! 내 것이라 몸이 요동치고 있었다.

눈이 처음 마주쳤을 때도 살바체는 불끈하며 동요하는 자신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몸에 힘을 줘야 했다.

살바체는 희진이 늙은 대사의 손을 잡을 때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차라리 안보면 표정을 숨기기 편했다.

자신을 배신하고 지옥에 던져두고 떠난 여자였다.

보란 듯이 자신의 자리를 찾은 희진은 아름답고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살바체는 인정해야 했다.

대단한 여자였다. 자신의 지젤 진은…


“다음은 어떤 작품을 계획 중입니까?”


대사님의 말에 대답한 것은 혁진이었다.

자연스럽게 동생의 어깨에 손을 올린 혁진은 동생을 대신해 대답했다.


“없습니다. 이태리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휴식을 취하는 중입니다. 조만간 안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그럼요. 이리 아름다운 여인을 데려가는 분은 분명 확실하게 미래를 보장해 줄 분일 겁니다.

안 그럼 소질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대사님의 말에 희진의 아버지가 생각하는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희진은 줄곧 살바체를 의식해 자신을 사이에 두고 무슨 말이 오가는 지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


희진은 자신은 보지도 않고 희진의 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는 살바체를 보았다.

화가 났던 감정이 더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몸을 돌리는 살바체를 힘껏 따라가 쳐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희진의 눈이 살바체의 뒷모습에서 떠나지 않았다.


'젠장'


우선 피하고 봐야 했다.

소유욕, 집착이 희진을 보자마자 무섭게 살아 꿈틀거릴 거라 살바체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희진에게서 받은 고통 죗값으로도 충분히 정 떨어져야 할 일이었다.

이곳에 온 목적은 이것이 아니었다.

한 여자로 인해 두 남자의 우정, 파멸… 그리고 집착의 무서움을 잘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남자로서 자존심을 무참히 깨부수는 바보 같은 짓거리였고,

살바체는 처음부터 희진에게 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집착에서 찾아냈다.

사랑한 다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랑 역시 시간으로 퇴색하기 마련이었고 희진을 완전히 놓아버림으로 그 끈이 끊어질 거라 생각 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살바체는 희진과의 모든 것을 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진 패배였다.

깨끗이 인정하리라.

그런데…! 희진을 본 순간 다짐했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희진을 보는 남자들의 눈을 파 놓고, 희진의 몸을 만지는 남자들을 모두 다 죽여 놓고 싶었다.


'제길. 살바체 프란트. 정신 차려'


* * *


시원은 조금 늦은 시간에 아버지와 함께 청와대 영빈관에 도착했다.

그룹 회장으로서 이탈리아와의 친선은 중요한 일이었다.

혜성그룹은 수혁의 회사 ANG반도체 회사와 공유관계를 맺고 있었고,

ANG의 기술은 혜성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심장이었다.

시원과 수혁은 모두 이 일에 중심에 서 있었다.

이탈리아 역시 수출국으로 중요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주최한 파티에 빠진다면 최면도 서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희진?'


시원은 구석에서 이탈리아 사람과 대화를 주고받는 희진을 보고 걸음을 빨리했다.

그때 차 폭파 사건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희진의 모습에 시원은 가슴이 떨렸다.

희진도 다가오는 시원을 보았다.

계속 민감한 신경에 지루한 대화를 따라가기 힘들었던 희진은 시원이 반갑기까지 했다.

살바체가 나타난 이후, 줄곧 안절부절 하던 희진이었다.

파티장 안을 샅샅이 찾아 살바체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

두 가지의 마음이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잠깐 실례할게요.”


희진이 곧 다가온 시원을 보며 얘기하던 대사님에게 양해를 구했다.

검은 연미복 차림의 시원은 멋졌지만 희진은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얼굴이 저번보다 야윈 것 같군.”

“괜찮아요. 그 보다 혜수가 쓰러졌다는 말 들었어요.”


시원이 곧바로 혜수 얘길 꺼내는 희진이 맘에 안 들어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나 희진은 두리번거리며 살바체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우리 파혼할 것 같아. 한 달 후에“

“네?”

“기다려줘. 진…한 달 후면“


희진은 시원의 말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곧바로 시원의 말을 끊으며 희진이 말했다.


“시원 씨 뭔가 착각하고 있군요. 혜수와 파혼한다고 나와 다시 잘 될 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우린 끝났어요. 그건 변함없어요.”


시원이 한숨을 쉬며 희진의 팔을 끌어 사람이 없는 공간으로 데리고 갔다.

지금 때와 장소가 좋지 못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언제 다시 희진을 볼지 기약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진. 이건 의무감이나 죄책감에서 하는 말이 아니야. 난 당신을 사랑해.”

“!”

“다시 생각해 주겠어? 기다리라면 기다리지.”


희진이 믿겨지지 않는 표정으로 시원을 보다가 시원이 잡고 있는 손을 때어내고 한걸음 물러섰다.

시원은 속이 시원한 기분이었지만, 희진은 그렇지 못했다. 도통 시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온통 머릿속엔 이 자리에 살바체가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 들어차 있는데,

시원은 그 생각을 멋대로 흩트려 놓고 희진의 사고를 정지시키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 할 필요가 있었다. 심장이 연속적으로 놀라 서 있기도 힘들었다.


“미, 미안해요. 바람 좀 쐐야겠어요.”

“같이 가지.”


희진이 급히 자신을 잡는 시원의 손을 다시 때어내며 말했다.


“아뇨. 혼자… 혼자 가겠어요.”


가까운 발코니가 있는 큰 창가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 들어간 희진은 난간에 기대 호흡을 정리하고 진정시켰다.

시원의 사랑한다는 말에 크게 동요한건 아니었다. 이미 대답도 정해져 있었다.

시간이 흘러가는 걸 붙잡고 싶었었다.

도대체 왜 살바체가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 자신을 보면서도 어떻게 동요 없이 서 있다

자리를 떠 버리고 사라진 것인지 이해 할 수 없었다.

화가 났다.

시간이 지나 그가 가버리고 대답도 듣지 못하고 살바체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듣지 못하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억지로 참고 나타나길 기다리는데도 살바체는 희진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시원이 그런 희진의 머리를 흩트려놓고 간신히 잡은 가슴을 망가뜨린 것이다.


'살바체! 어쩌자는 거죠? 모르는 타인을 보는 당신 시선… 도대체 뭐죠?'


찬 공기를 들여 마시는데도 답답한 가슴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거칠게 뛰어대던 심장도 묵직하게 내려 앉아 느린 박자로 쿵, 쿵 귓가를 때려 편두통을 일으켰다.


'안 봐도 상관없잖아? 이대로 시간이 지나 끝난다 해도 상관없잖아?

아니, 아니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 분명 날 잡으러 온 거야. 복수하러 온 거라고.

나타날 거야. 그 표정은 그저 날 속이기 위한 방패일 뿐이야.

살바체에게서 내가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렇게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던 거라고.

내 속이 바짝 바짝 타 들어가는 걸 즐기고 있는 거라고!'


그때 희진의 속마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살바체의 목소리가 희진의 등 뒤에서 들려 왔다.


“진. 나의 지젤… 오랜 만이야.”

“헉!”


급히 희진이 등을 돌렸다.

살바체가 여유롭게 잔을 들고 창가 옆 벽에 기대 희진을 보고 있었다.

반쯤 빛에 가린 살바체의 얼굴이 매력적이고 위험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흰 연미복의 세련된 살바체의 모습은 아름답고 조각같이 강했다.

은빛금발의 찬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도, 각진 턱 선과 잘 뻗은 콧날도…

그리고 청색의 깊은 호수 같은 눈 역시…


“살바체 프란트…”


희진이 한참 강렬한 살바체의 눈에 잡혀 있다 최면에 걸린 듯 중얼 거렸다.


“그래. 내 귀여운 고양이… 날 지옥에 던져두고 잘 살고 있었군.”

“…!”


희진의 가라앉았던 심장이 터질 듯 다시 두근거렸다.

답답하던 가슴도 긴장감과 살바체가 주는 뜨거운 시선에 자취를 감추었다.

살바체가 벽에 기대있던 몸을 일으켰다.

살바체가 빈 잔을 난간에 내려놓고 천천히 희진의 떨리는 눈을 잡으며 다가섰다.

희진은 꼼짝없이 청색의 살바체 눈을 보며 가슴을 들썩였다.


“무대에서 내려 온 소감이 어떤가?”

“…….”


살바체가 희진과 딱 한걸음 떨어져 멈춰 섰다.

희진은 살바체의 잘 뻗은 부드러운 손이 자신의 드러난 목선을 미끄러지듯 매만져 오는 감촉을 느끼며

고스란히 그 눈에 잡혀 있었다.

뜨거웠다. 찬 겨울 저녁 공기에도 온몸이 타 들어가 마비되는 듯 했다.


“손 치워요.”


조롱하는 살바체의 눈빛과 말투에 희진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지만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올가미에 걸린 것처럼 손가락 하나 가닥 일 수 없었다.

계속 자신이 목선과 드러난 쇄골 근처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살바체의 손놀림에 희진은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기도 벅찼다.


'그래. 그는 유혹하는데 선수이고, 내 몸에 대해 속속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이런 말 없는 유혹에 고스란히 무너졌던 기억이 희진은 생생했다.

예전엔 이런 자신이 불감증이 아닐까 고심 한 적도 있었다.

어떤 야한 영화, 드라마를 봐도 시원이 자신을 키스하며 안았을 때도 희진은 아무런 느낌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살바체는 희진의 몸을 능숙하게 다루고 손 하나만으로 민감한 감각을 깨우며

여성을 깨워 나갔다. 그리고 그는 그걸 즐기기도 했다.

이렇게 손짓 하나에도 희진은 무너질 것 같은 유혹을 느꼈다.

한번 깨운 여자의 감각은 다시 일어나 희진은 들뜨게 만들었고 살바체의 이런 손길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희진은 그럴 때 마다 몸을 혹사 시켰었다. 다른 방법은 모르기에 어쩔 수 없었다.


“나쁜 인간“


희진은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살바체를 향해 말했다.

즐기고 있었다. 이런 시선, 자신의 반응을… 그는 즐기고 있었다.


“날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 넣은 벌을 달게 받을 건가?”


살바체가 눈썹을 올리고 희진에게 물었다.

다문 입술을 보며 살바체의 부드럽게 쓸던 손이 희진의 목을 감쌌다.

희진은 두려우면서도 눈빛만은 지지 않고 살바체를 쏘아보고 있었다.


“자업자득 이예요. 나 역시 당신과 함께 있는 게 고통이었으니까.

무슨 염치로 여길 온 거죠? 우리 아버지를 제대로 쳐다 볼 염치가 있던가요?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당신이 온 거죠?”

“쿠쿡…”


희진의 당찬 목소리가 살아난 게 재밌다 는 듯 살바체가 쿡쿡 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살바체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진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희진은 순간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당신 때문이야. 감히… 감히 라… 내가 전 세계에서 못 갈 곳이 있을 거라 생각하나?

누구도 날 막을 수도 권리도 없어. 당신 아버지라고 해도 말이야."


희진은 살바체의 읊조리는 말과 차가운 눈에 잡혀 짙은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살바체의 손이 곧 자신의 목을 조여 올 것만 같았다.


“나… 날 어쩔 거죠?”


가슴이 뛰었다.

희진의 두려움의 잠긴 목소리와 가늘게 떠는 몸을 살바체도 느끼고 있었다.

살바체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자신이 희진에게 두려운 존재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살바체는 희진의 목에서 손을 치우고 희진의 초점 잃는 눈을 턱을 들어 똑바로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천천히 살바체의 입술이 희진의 입술로 다가왔다.

살바체는 자신의 숨과 희진의 가는 숨이 달콤하게 얽혀 가는 것을 느끼며, 마주치기 바로 직전 멈춰 섰다.


“진…”


달콤한 살바체의 음성엔 어떤 감정도 사라진 것 같았다.

희진이 살바체의 숨을 느끼며 코앞에 있는 살바체의 입술과 눈을 번갈아 쳐다봤다.


“당신이 이겼어.”

“?!”


놀란 희진이 눈을 크게 떴다.

살바체는 동시에 몸을 일으키고 희진에게서 크게 물러서 자신의 허리에 손을 짚었다.

한손은 자연스럽게 이마를 문지르는 살바체를 희진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자유야. 난 완전한 K. O를 당했지. 무대에서 내려 온 걸 축하해. 진“


살바체가 그러며 희진에게 정중히 인사하는 포즈를 취했다.

동시에 살바체는 다 끝났다는 후련한 얼굴로 희진을 보지도 않고 뒤 돌아 섰다.


'하, 웃기지 말아요. 당신이 날 이렇게 쉽게 놓아줄 리가 없어.'


희진은 아직 믿지 않고 있었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가려는 살바체를 희진이 말로 다시 잡았다.


“날 죽이려고 한 사람의 말 치고는 별 설득력이 없는데. 어쩌죠?”


희진의 조롱 섞인 말투에 살바체가 유유히 돌아 섰다.

희진의 믿지 않는 눈을 보며 살바체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지옥에 가게 만든 일기장은 나뿐만이 아니라 알페르노에게도 같은 길로 인도했지.

그의 분노가 클 거라 당신은 생각하지 못했겠지.

진, 당신의 머릿속엔 내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만이 존재했을 테니까…

이제 안심해도 좋아. 내 말대로 당신은 이제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해도 되는 자유를 얻었으니까.”

“…….”


살바체는 그 말을 끝으로 희진에게서 멀어졌다.

희진의 인생에서 완전히 퇴장했다.

희진은 살바체의 말과 담담한 표정에 멍해졌다.

기뻐하고, 좋아야 마땅했지만 그런 마음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희진은 퇴장한 살바체를 향해 뛰었다.

왜 뛰어야 하는지 자각도 없이 무조건 살바체를 잡아 따지고 싶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 * *


시원은 희진을 찾아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혁진 역시 희진을 찾고 있었다.

순간 발코니 창가에서 키가 크고 세련된 흰색 연미복을 근사하게 차려 입은 남자가 나왔다.

누가 보더라도 인상이 강하게 남겨질 아름다운 이태리 남자였다.

남자는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리고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얘기 한번 나누고 싶어지는 힘 있는 남자였기에 시원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때지 못했다.

남자가 사라지고 난 뒤 시원은 다시 희진을 찾아 두리번거렸다가 누군가를 찾는 희진을 발견하고 걸어가 팔을 잡았다.


“모두 찾고 있어. 어디 있었지?”

“바람이요.”


희진은 말하면서도 누군가를 찾는 눈치였다.


“당신 아버지와 오빠는 저 쪽에 계셔.”

“시원 씨. 잠깐… 잠깐요.”


자신의 팔을 잡고 이끌고 가려는 시원을 제지하고 희진은 살바체를 찾아 눈동자를 바삐 굴렸다.

시원이 이해 못하는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희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무슨 일 있어?”

“아뇨. 없어요.”


울것 같이 잔뜩 찌푸린 얼굴인데도, 희진은 시원에게 아니라고 말했다.

시원은 가족들에게 희진을 데려가기 전에 아까 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진… 아까 내 말은 진심이었어.”

“시원 씨“


자꾸 자신을 잡는 시원을 희진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난 시원 씨 사랑하지 않아요. 거짓 없이 진심으로“


희진은 무례인 것을 알면서 시원에게 딱 잘라 말했다.

시원 때문에 살바체를 놓쳤기 때문은 아니었지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원은 자신을 두고 가버리는 희진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 * *


희진은 집에 아버지와 오빠와 함께 돌아왔다.

하지만 쉽게 잠이 오지도 마음이 편해지지도 않았다.


'진. 당신은 자유야.'


“하!”


자꾸 코웃음이 쳐졌다.

지금껏 자신을 가지고 상처주고 미친 사람처럼 소유욕을 부린 사람이 이제 와서 자유라니…

가지고 놀다 버리겠다는 건가? 이제 쓴물 단물 다 빼먹은 빈껍데기만 남으니 실증 났다는 말인가?

화가 났다.

용서한다는 투로 말하는 살바체.

담담하게 모든 걸 끝냈다는 몸짓으로 자신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던 살바체 프란트…!


“누구 맘대로! 나쁜 자식! 끝까지 나쁜 자식!”


'끝났다고 이제 자유라고 말하면 내가 기뻐 춤이라도 출거라 생각한 건가?

난 어차피 자유였어.

적선하듯 용서하듯 당신의 동정을 받는 건 내 자존심 상 용서할 수 없어.

항상 멋대로 인 인간. 두고 봐! 가만히 안 있어!'


희진은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뜬 눈으로 날을 샜다.

동이 터오고 사람들이 출근할 시간이 지나오자 희진은 이태리 외교관에 전화를 걸었다.


“살바체 프란트… 네. 어제 연회에 참석했던… 아뇨. 약속은 없어요.

좋아요. 그럼 묶고 있는 곳이라도 알려 주세요. 이유를 꼭 말해야 하나요?

알겠어요. 말하죠. 받을 게 있어요. 아주 중요한 거죠. 어디요? 네… 알아요. 알겠습니다.”


희진은 고맙다는 말도 안하고 전화를 끊었다.

여자의 꼬치꼬치 캐묻는 말투에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살바체 프란트. 기다리라고. 다 퍼부어 주고 말거니까'


희진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빠른 걸음으로 내려간 희진은 새어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을 지나쳐

현관으로 내 달렸다.


“희진아! 어디 가니?! 희진아!”


희진의 새어머니가 인터폰으로 희진이 나갔으니 따라가라는 말을 경호원에게 다급하게 전했다.

희진은 경호원이 뒤로 따라 붙는 것을 알면서도 뛰어서 빈 택시를 불러 잡아탔다.

갑작스런 희진의 돌발행동에 경호원들도 허탕을 치고 황당한 표정을 하고 서 있어야 했다.

희진은 그들은 안중에도 없이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서울 로얄 호텔 최대한 빨리요!”



비창 [5장]


63빌딩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Royal suite room .

살바체는 몇 개의 짐을 내가고 있는 벨 보이를 보며 전화를 하고 있었다.

가라앉은 살바체의 목소리와 시선은 어딘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였다.


“예정보다 빨리 떠날 생각입니다. 네. 오고자 했던 일은 마무리가 끝났고,

비행기도 예약해 놓았습니다. 12시 비행기입니다. 네.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럼 로마에서 다시 만나죠.”


피곤한 표정의 살바체는 외교관 총리와의 전화를 끊고 잠을 못자 피곤한 눈가를 어루만지며

눈을 감고 소파에 기댔다.

희진을 보내고 난 후 이렇게 허탈해 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어제의 아름답게 빛나며 사람들에게 미소 짓는 한 여자의 영상이 떠올랐다.

따뜻하게 손에 닿던 감촉, 보기만 해도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고 할 수만 있다면

내 뱉는 그 달콤한 숨 까지도 전부 가지고 싶게 만드는 여자.

이곳에 더 머문다는 것은 위험했다. 한 나라에 있다는 것은 고문 이었다.

어제 영빈관을 나온 후에 살바체는 잠 못 이루고 뜬 눈으로 날을 세웠다.

독한 술 역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조금 더 체류하면 마음먹고 보내리라 다짐했던 자신과의 약속도 깨질 것 같았다.

희진은 자유롭게 날아다녀야 할 여자였다.

억지로 묶여 둔다고 가질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살바체는 저번 알페르노의 시도로 희진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살바체는 직접 얘기해 주려고 달려온 것이었다.

더 이상 위험은 없으니 편하게 살라고 자유를 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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