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소설은 일반인이 거북해 할수 내용이 담겨 있을수 있습니다. BDSM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되돌아가기를 누르기를 바랍니다.
부여별곡 - 김옥수 지음 / 우수작
' 누명을 쓰고 몰락한 집안을 구하고자 애쓰는 오라버니들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집을 나선 치희는 노예상인에게 붙잡혀 팔려간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치희는 휘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가 오라버니들을 잡으려는 호민이자 집안의 원수라는 사실을 알게되고…'
부여별곡 - 김옥수 지음 / 우수작
시대상황
고구려는 서진정책의 일환으로 242년 요동 서안평을 공략하여 무너뜨리고 이어 현도를 복속시킨다. 이때 위(魏)군을 이끌던 유주자사 관구검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패배가 계속되자 갑자년(244년)에 부여로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구한다. 부여에서는 많은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실권자 대사 위거가 날로 커지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이를 받아들인다. 누차 실패만 계속하는 위의 실권자 사마의는 병인년(246) 8월에 관구검에게 군사 1만을 내어주고 고구려를 공격하게 한다. 부여는 족장세력인 마가, 우가, 구가, 저가 등의 대가(大加)들의 협의하에 왕을 선출하고 가뭄이나 흉년이 들면 그 왕에게 책임을 물을 정도로 제가들의 권한이 막강했다. 그러나 점차 대사(원래는 씨족 내부에서 신분이 열등했으며 대가 밑에서 행정적 업무를 담당하는 관인)의 능력이 중요시되어 그 위치가 높아졌다. 결국 마여왕 때 성장한 대사 위거는 부여의 실권자가 되어 대가들에게 사신을 영접하게 하기도 한다.
등장인물
치희(여주인공): 부여 출생으로 집안이 화를 당해 읍루에서 자라남. 18세.
건무: 치희의 큰오라버니. 23세.
묵거: 치희의 둘째 오라버니. 21세.
미유(진서): 치희의 쌍둥이 오라버니. 어릴 때 헤어짐. 18세.
추아저씨: 어린 건무, 묵거, 치희를 보살펴 준 사람. 휘의 아버지의 친구.
휘(남주인공):고구려 유민. 부여에서 직책은 호민. 26세.
매당: 휘의 형수. 아들이 하나 있음.
선유: 휘의 여동생. 태호와 혼인 후 투기를 이유로 죽임을 당함. 휘의 아버지: 고구려에서 누명을 쓰고 부여로 망명함.
조우: 휘의 친구. 형서: 휘의 친구. 태호: 우가의 신임을 얻고 있는 그의 조카. 휘의 여동생 선유와 혼인.
위거: 우가의 조카. 직책은 대사. 국가권력을 쥐고 있음.
설리: 미유의 양부모의 딸
1장
병인년(246) 7월 가을 읍루(相婁, 부여 동쪽의 나라)와 부여의 국경지대 치희는 싱그런 풀내음이 물씬 나는 초원을 달리면서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살아 있는 기분이 느껴졌다. 쉬지 않고 내달리는 동안 말이 많이 지친 듯했지만 근처에는 쉬어갈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풀 위에 드러눕고 싶을 정도로 기진맥진해 있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가면 훌륭한 휴식처가 나타날 것이다. 「해모야, 힘든 것 다 알아. 우리 조금만 더 가자. 너 못지 않게 나도 쉬고 싶단다. 곧 물을 먹게 해줄게」 치희는 지친 말을 달래며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곧 초원지대가 끝나고 숲길로 접어들었다. 짐승들이 튀어나올 법한 좁은 오솔길로 들어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개울이 나타나자 그녀는 말에게 물을 먹이고 가지고 있던 물통에 물을 채웠다. 계속 길을 재촉해 한참을 더 나아가서야 치희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다.
숲 한가운데 높이 솟은 나무들 사이로 둥그렇게 생긴 공터가 보였다. 키가 낮은 풀들이 공터를 메웠고 그 중심부에 오라버니들의 팔로도 두 아름이 넘는 오래된 나무가 있었다. 나무는 두 그루인데 뿌리가 서로 얽혀 있어 그들이 아빠나무, 새엄마나무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여기는 그들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10년 전 겨울, 부여에서부터 여기까지 쫓겨온 삼남매는 형제나 부모를 잃은 슬픔보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각박한 세상 인심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날도 역시 큰오라버니가 구해온 음식을 아껴가며 먹고 있었다. 언제 다시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큰오라버니인 건무의 나이는 겨우 열세 살에 불과했다. 입고 있던 비단 옷가지들을 모두 음식과 바꿔 먹고 더는 방법이 없어지자 그는 음식을 훔쳐왔다. 그게 시작이었어. 오라버니들이 도둑이 된 것은 어린 그녀를 위해서였다는 사실이 마음을 쓰라리게 했다. 게다가 그녀는 나무뿌리와 껍질은 먹을 수 없다고 우겼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어렵게 구한 음식을 주고 그들은 나무뿌리를 씹으며 가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숲속 움막에서 떨고 있던 그들을 지금의 추아저씨가 발견해서 읍루로 데리고 갔다. 그도 부여에서 쫓겨온 사람이었다.
읍루에서의 생활 역시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굶주렸으며 동굴 안에서 뒷간을 만들어 그 주위로 잠을 청했고, 부여인을 대하는 읍루 사람들의 곱지 않은 눈초리를 견뎌야 했다. 차츰 시간이 지나 그들에게 받아들여지면서 오라버니들은 그들과 같이 약탈에 나섰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의 생존본능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이제는 살 만해졌고 더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사냥을 나가는 날이 부여의 부잣집을 털러 가는 날이라는 것을 치희는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이번에도 읍루 여자들을 납치하는 노예상인들을 치러 간다고는 했지만 어쩌면 여태처럼 그녀를 속였을 수도 있었다. 가을을 알리는 나뭇잎은 노랗게 물들어 공터를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치희는 말이 풀을 먹을 수 있도록 풀어준 뒤 나무 아래 널찍한 돌 위에 등을 대고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무도 맑은 물빛 하늘이었다. 저 하늘처럼 내 인생도 맑게 개일 날이 있을지…, 치희는 긴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오라버니들에게 빨리 위험을 알려야 할 텐데…, 눈이 무거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나무 타는 냄새와 함께 자욱한 연기 속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여덟 살 난 치희는 둘째 오라버니 묵거의 손에 이끌려가고 있었다. 묵거는 작은 그녀의 보폭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줄곧 앞을 향해 줄달음질쳤다. 치희는 뒤를 돌아보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바동거렸다.
저 뒤에 부모님이 계시는데…. 등뒤로 불길이 치솟는 집 안에는 부모님과 다른 오라버니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귓가에 들리는 비명 소리가 모두 부모님의 목소리 같았다. 치희는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자… 다시 떠올랐다. 새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녀에게 멀리 가라고 손짓을 하시며 서서히 쓰러지던 모습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 그녀를 묵거가 잡아끌었다. 병사들에게 들키기 전에 빨리 도망가야 했다. 다시 돌아선 순간 커다란 말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묵거는 얼른 그녀를 자신의 뒤에 세웠다. 치희는 오라버니의 등 너머로 올려다보았다. 순간 말 위에 앉은 검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등뒤에서 솟는 불길이 그늘을 만들어 그의 얼굴을 감추었다.
그러나 치희는 그의 눈을 보았다. 세상 모든 것을 파괴시키고도 남을 강렬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커다란 말과 불빛마저 가려 버린 그의 체구와 매섭게 쏘아보는 눈에 공포를 느꼈다. 저 검은 남자가 우리를 죽일 거야. 잠깐 동안이나마 부모님 곁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목숨을 포기하고 눈을 감는 순간 그의 입이 열렸다. 「가거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둘은 뛰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몇 번이나 넘어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약속장소에 이를 수 있었다. 치희는 산 위에서 불타는 집을 내려다보며 울음을 터트렸다. 새엄마… 아빠…. 오후가 되자 볕이 더 따가워졌다. 바람을 타고 떨어진 나뭇잎이 얼굴을 건드리자 치희는 잠에서 퍼뜩 깨어났다. 손으로 눈가를 훔치자 눈물이 묻어났다. 오늘도 그 꿈을 꾼 것이다. 요즘은 잠잠했는데 밤새 달려온 탓에 피곤했었나 보다. 치희는 금세 꿈을 떨쳐버렸다. 추아저씨의 말을 엿들은 바로는 오늘쯤이면 오라버니 일행이 여기서 산 하나 넘은 곳에서 밤을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밤이 되기 전에 그곳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두툼한 바지와 저고리를 입기는 했지만 낮이 짧아져서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그녀는 짐을 챙기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망설이며 나무 뿌리 사이에 난 구멍 속을 더듬어 보았다.
처음 여기 왔을 때 묻어 둔 물건들이 그대로 있었다. 배고픔 속에서도 팔지 않고 끝까지 지킨 물건들이었다. 큰오라버니 건무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칼을, 둘째 오라버니 묵거는 가장 아끼던 붓 하나를, 그리고 치희는 새어머니가 주신 옥팔찌를 헝겊에 싸서 넣어두었었다. 부여를 뒤로하고 읍루로 떠나면서 그들은 언젠가 다시 집을 찾을 때 꺼내자고 약속했지만 치희는 이곳에 들를 때마다 오라버니들 몰래 꺼내보곤 했다. 그녀는 물건들을 다시 싸서 그 자리에 넣어 두고는 작은 짐승들이 출입을 못하도록 입구를 잘 막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누웠던 큰 바위 주변에 놓인 작은 돌들의 옆면을 자세히 살폈다. 오라버니들이 남긴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이곳을 지날 때마다 자신들의 지정된 돌에 그림을 새기는 것으로 다녀갔다는 흔적을 남겼다. 사냥 때는 주로 활을 새기는데 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번에 납치범을 잡으러 나왔다가 여기를 거쳐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돌은… 여전히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그 돌을 안타까운 듯 바라보던 그녀는 자신의 돌에도 그림을 새겼다. 그리고는 떠나려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해모가 보이지 않았다. 「해모, 어서 나와. 해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빨리 움직여야 해」 응답이 없었다. 여기 오면 공터를 벗어난 적이 없었는데…. 3년 전에 큰오라버니가 구해 준 암말은 그녀에게는 최고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물을 찾으러 갔나 싶어 개울로 가보았지만 그곳에도 없었다. 걱정스레 다시 공터로 돌아왔을 때 해모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해모만이 아니었다.
「입다물어. 앞으로 우는 년은 밖으로 끌어내어 욕을 보일 테다. 이 옷으로 갈아입고 얌전히들 있어. 말만 잘 들으면 살 수도 있으니까」 납치범들은 10여 명의 여자들을 허름한 창고에 거칠게 밀어넣고는 칙칙한 색의 갈포(거친 삼베)로 만든 옷을 머리 위로 던져넣었다. 그의 험악한 말에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먼저 잡혀온 아가씨들이 그들에게 앉을 자리를 내어주었다. 치희는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끌려오다가 생긴 생채기들을 살펴보았다. 발에는 물집이 잡히고 다리 여기저기가 긁혔지만 큰 상처는 없었다. 그녀는 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다행히 옥패는 무사했다. 무늬를 새긴 반 조각의 옥패는 가죽끈에 매달려 있었다. 미유 오라버니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막내 오라버니는 살아 있어. 그녀는 쌍둥이 미유가 살아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납치범들은 조각난 옥패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지 그녀의 암말에만 신경을 썼다. 날을 세어 보니 그 숲에서 잡혀 여기까지 3일간이나 끌려왔다. 그녀말고도 여자들을 계속 붙잡아 도착할 때는 열 명이 더 되었다. 창고 안에는 그녀 또래의 아가씨가 스무 명 남짓 있었는데 말투로 보아 모두 읍루에서 잡혀온 것 같았다. 먼저 잡혀온 사람들은 이미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녀 앞에도 옷이 놓여 있었으나 치희는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주는 것은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어서 갈아 입는 게 좋아요. 안 그러면 봉변을 당한답니다」옆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소리 죽여 말했다. 「왜 우리에게 이런 걸 입으라는 건가요?」 치희는 의도적으로 읍루족 말을 사용했다. 어린 그들을 험한 세상으로 던져버린 부여라는 나라는 동경의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이었다. 「어머! 읍루족이군요. 옷이 달라서 못 알아봤어요. 난 또 나와 같은 부여사람인 줄 알고 반가웠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읍루족이라 모두 나를 미워해요. 다 같은 처지인데 말이에요. 아! 당신은 이해 못하겠군요. 말이 서로 다르니…」 그 아가씨는 치희가 옷 갈아입는 것을 거들어 주며 중얼거렸다. 치희는 그녀가 불쌍해 보였다. 그녀도 막 이곳에 들어설 때 옷차림으로 인해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느꼈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읍루족 말투를 듣고는 눈빛이 부드러워졌던 것이다. 그녀와는 이유가 다르지만 읍루족은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부여인들을 증오했다. 이 부여 아가씨는 내심 실망했으면서도 치희를 끝까지 도와주었다. 「난 읍루에서 왔지만 부여말도 할 줄 알아요. 저 사람들은 왜 우리를 잡아 가두는 건가요?」 치희는 문밖에서 보초를 서는 사람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말을 아는군요. 정말 잘됐어요. 혼자 너무 외로웠답니다. 저들은 부여 귀족들에게 우리를 껴묻거리(죽은 사람과 같이 땅 속에 묻는 부장품)로 팔려는 거예요. 운이 좋으면 살아서 노예가 되고요. 하지만 산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죠. 저는… 아무튼 이런 곳에서 돈을 주고 하녀를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가만히 있어도 하녀들은 얼마든지 있는데. 그러니 그동안이라도 무사히 있으려면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 좋답니다」 말할 상대가 있다는 것이 기쁜지 그녀는 묻지도 않은 것까지 세세히 알려 주었다. 사실 치희는 그들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들은 바도 있었고, 그녀를 속이지 않았다면 오라버니들도 바로 이들을 잡고자 나선 것이니까. 뒤에서 허리끈을 매주는 아가씨의 힘을 느끼며 치희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갈포지만 주름진 치마와 저고리를 입어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10년 전 불에 타던 집과 누명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뒤로하고 집을 떠날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날은 치희가 여덟 살이 되는 생일날이었다. 잔치를 벌여 악공들의 음악소리가 집 안을 휘감았고, 새어머니는 그녀에게 제일 예쁜 비단옷을 입혀 놓고 자신의 팔찌를 채워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들이닥쳤다. 부모님은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고 그녀는 묵거 오라버니의 손에 이끌려 항상 놀러 가던 산 속 동굴로 도망을 갔다. 약속된 그곳에서 건무와 미유를 기다렸지만 새벽녘이 되어서야 나타난 사람은 건무뿐이었다.
작은 창살 사이를 통해 들어온 햇살 한줌이 건초 사이에서 잠을 자는 아가씨들을 비추었다. 치희는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잔 탓에 온몸이 다 쑤셔왔다.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사이 밖에서 손님을 맞으려는 듯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다. 말 울음 소리와 아부하는 소리가 몇 마디 들리더니 곧 그들을 가둔 창고의 문이 덜컥 열렸다. 한꺼번에 들어오는 강렬한 햇살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햇볕을 가린 손바닥 밑으로 가죽신과 그 위를 덮고 있는 질 좋은 비단 옷자락이 보였다. 「둘이 필요해. 지난번 애들에게 싫증이 났거든. 너무 내 비위만 맞추려고 들어서 말이야. 좀 예쁘장한 애들은 없나? 어차피 죽을 거지만 그 전에 좀 즐긴다고 해될 것은 없겠지. 안 그런가?」 햇빛에 눈이 어느 정도 적응을 하자 자신들을 유심히 살피는 남자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있었다. 온몸에서 부의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상인들에게 거만을 떨며 물건을 고르듯 여자들을 뜯어보고 있었다. 치희는 여기서 팔려가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오라버니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분명 이들을 잡으러 올 것이다. 치희는 눈에 띄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었다. 3일간 끌려다니며 제대로 씻지도 못한 얼굴은 다른 여자들과 별 다를 바가 없었으나 고개를 숙이면서 탐스런 머리결이 두드러졌다. 결국 그녀는 지목되었고, 거칠게 저항하는 바람에 온몸이 꽁꽁 묶이고 말았다.
그들은 치희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눈을 가린 후 말등에 그녀를 걸쳐 태워 말을 달리게 했다. 중간에 간간이 쉬어 그녀의 입에 물을 대어줄 때를 빼고는 하루 종일 계속 달렸다. 그녀가 지쳐 미동조차 할 수도 없을 때쯤 삐걱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녀를 태운 말이 멈추고 하인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서방님, 어서 오십시오」 「영감, 저 아이를 데려다가 애들시켜 채비를 해주게」 누군가 그녀를 말에서 끌어내려 작고 보드라운 손에 그녀의 손을 쥐어 주었다. 어린 하녀의 손 같았다. 그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눈가리개를 풀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다란 목욕통이 보였다. 곧 하녀 둘이 들어와 옷을 벗기더니 그녀를 통 속에 집어넣고는 씻기기 시작했다. 소리를 지르며 저항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목욕 생각이 간절하던 터라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사실 목소리가 나올지도 의문이었다. 목욕을 끝낸 뒤 하녀들은 살결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하얀 비단 옷을 입혀 주고는 머리를 틀어올리고 낯선 방에 그녀를 들여놓았다. 치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꼭 보물창고 같았다. 화려하고 예쁘고 진귀한 것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화 없는 아름다움이 어떤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어느 것도 몸에 닿지 않게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으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값비싼 비단 치맛자락이 발에 걸렸다. 죽을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인가? 방 안의 기괴함이 공포를 더했다.
이윽고 차를 든 하인을 대동하고 아침에 그녀를 고른 남자가 들어왔다. 깨끗한 흰옷으로 갈아입은 그도 불빛 아래서 보니 꽤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눈은 음흉하기 그지없었다. 「오호, 그래. 내가 시궁창에서 주옥을 골랐군. 이 정도라면 죽이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는걸. 이 방에 딱 어울려. 난 진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모으는 게 취미거든」 그는 불빛에 비친 그녀의 자태를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치희는 그를 피해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나다가 결국 등이 벽에 닿았다. 「읍루 사람이겠지? 하인들 말에 의하면 우리말을 아는 것 같던데. 그 옷과 장식은 마음에 드나? 내일 넌 그 차림으로 죽게 될 거야. 돼지가죽(읍루인들도 삼을 길러 천을 짰으나 대부분 돼지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으로 옷을 만드는 너희네 사람들은 만져 보지도 못할 것들이지. 이렇게 죽는 것도 영광이지 않아?」 가까이 다가온 그는 물러서는 그녀의 뒤쪽 책상에 손을 뻗어 예쁜 머리꽂이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틀어올린 머리에 천천히 꽂았다.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언제나 이런 것들을 몸에 걸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지? 어때, 너만 잘하면 살려주는 것은 물론 매일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주지」 「비열한 부여 놈아, 내가 네 말을 들을 것 같으냐? 어림도 없는 소리. 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는 날에는 널 죽이고 말 테다」 앙칼진 목소리였지만 두려움에 떨어 점점 작아졌다. 「하하하… 새장 속에 갇힌 새도 주인을 죽일 수 있나? 할 테면 해보라구. 자아, 어서!」 그는 부추기듯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들어 보였다.
치희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떠밀고는 그가 비틀거리는 틈을 타 반대편으로 도망을 쳤다. 「성깔이 있군. 점점 더 구미가 당기는데. 할 수 있을 때 마음껏 도망치라구. 그래 봐야 독 안에 든 쥐니까」 좁은 방 안에서 그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치희는 그에게 쫓겨 한 구석으로 몰렸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어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는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치희는 거칠게 저항했지만 그의 완력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주변을 더듬거리는 그녀의 손에 조금 전에 하인이 가져다 놓은 찻주전자가 잡혔다. 치희는 그것을 그를 향해 내던졌다. 뜨거운 물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비명을 지르며 그가 치희를 놓아주었다. 「못된 것 같으니라구. 넌 방금 살기를 포기한 거나 다름없어. 이렇게 되면 지금 당장이라도 죽일 수밖에. 죽여서 내일 무덤에 처넣어 버릴 테다」 그에게서 섬뜩한 살기가 느껴졌다.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손에 닿은 찻물의 뜨거움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도망쳐야 했지만 발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그의 눈길을 외면하며 발길을 옮겼을 때는 이미 그의 손아귀에 잡힌 뒤였다. 「저리 가. 놔달란 말이야. 아… 안 돼」 그가 치희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바동거리던 치희의 손끝에 머리꽂이가 닿았다. 치희는 그것을 뽑아들고 있는 힘껏 그의 어깨를 내리찔렀다.
그녀의 목을 조르던 손아귀에 힘이 풀리면서 잠시 주춤하는 듯했으나 그는 다시 일어났다. 그가 여길 나가 다른 사람들을 깨운다면 그녀는 죽은 목숨이었다. 치희는 가구 위에 있던 말조각상으로 일어서려는 그를 다시 한 번 내리쳤다. 그는 그 자리에 풀썩 내려앉았다. 치희는 한동안 그대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손이 덜덜 떨렸고 옷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었으며, 방 한쪽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피…」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나무 타는 냄새가 나고 검붉은 피를 흘리며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발견하기 전에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야 했다. 머리꽂이가 발에 치어 쨍그랑 소리를 냈다. 치희는 머리꽂이를 주워서 손에 거머쥐었다. 그 머리꽂이가 자신을 지켜주길 바라면서. 방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하인이 나갈 때 방해하지 말라던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치희는 발소리를 죽여가며 어둠 속을 헤쳐나갔다. 집안 풍경이 눈에 익었다. 어릴 때 뛰어다니던 그녀의 집과 구조가 비슷해서 나가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간신히 집을 벗어나자 무조건 뛰었다. 쌀쌀한 밤공기도 짐승들의 울음 소리도 그녀는 느낄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날이 밝기 전에 되도록 멀리 가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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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는 자신의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토끼 한 마리만이 매달려 있었다. 오늘따라 사슴의 흔적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어서 보았다 해도 놓쳤을 가능성이 컸다.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7개월 전, 평소 병약하던 형이 세상을 등지고 떠났다. 그는 형의 많은 재산과 함께 임신한 형수를 보살펴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재산이야 예전부터 해오던 대로 그가 돌보면 되겠지만 형수는 달랐다. 그랬군! 그때 눈치챘어야 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구려사람인 아버지가 3년상을 치르지 않고 부여의 장례관습에 따라 5개월간 시신을 집안에 안치시켰다가 장례를 치를 때 뭔가 눈치챘어야 했다. 여름이라 시신을 보존시킬 만큼 저장된 얼음이 부족하다고 하신 것은 핑계일 뿐이다. 그를 괴롭히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혼자 살려면 너희 형수와 혼인하도록 해라. 장례도 끝났으니 더 미룰 필요 없다. 사내애가 태어나면 그 애를 이 집의 후계자로 삼고 계집아이이면 네 아들을 만들도록 해라 싫습니다 단호히 거절하는 그에게 아버지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싫다고? 언제까지 네 전처의 그늘에서 살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게 싫다면 다른 여자하고라도 혼인하거라 그것도 싫습니다 의자 손잡이 위의 아버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너를 아들로 인정하지 않겠다.
그리고 시골의 말들과 함께 네 에미가 살던 집을 처분해 버리겠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그의 결심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호민(豪民, 촌락에 거주하는 많은 재산을 가진 유력한 평민을 의미. 귀족들이 이들을 매개로 읍락의 평민을 지배함)이라는 신분을 내세워 자신의 관할 구역을 둘러본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나 여기도 문제는 많았다. 그가 왔다는 말에 사람들이 들러 도둑이 기승을 부린다고 하소연을 했다. 알았다는 그의 말 한마디에 그들은 이미 잡히기나 한 것처럼 뛸 뜻이 기뻐하며 돌아갔다. 다시 아버지의 말씀이 그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산달이 거의 다 되었으니 어쩌면 조카가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형의 재산을 고스란히 전하기 위해서는 형수와 혼인하여 그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돌봐야 할 것이다. 형의 유언도 있었다. 모두 내 탓이니 형수를 미워하지 말고 잘 돌봐주어야 한다 죽기 직전에 그를 불러 당부하던 말이었다. 젠장! 취수혼이라니. 어디서 그 따위 것을 만들어서는…. 부여에서는 이를 바람직한 혼인의 형태로 여기고 있었다. 아무리 형의 유언이라고 해도 형수를 아내로 삼는 것은 먼저 간 형에게 못할 짓인 것 같았다. 그리고 형수의 행실은… 도망간 그의 아내와 결코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여자와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였다.
「오늘 사냥은 이것으로 끝이군」 막 말머리를 돌리려는데 숲 저쪽에서 뭔가 하얀 것이 흔들리다가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바람이 한차례 그의 귀 뒤를 스치고 지나가자 다시 하얀 것이 흔들거렸다. 바람의 강도가 세었던 탓인지 이번에는 그 시간도 꽤 길었다. 그는 말을 한쪽에 매어 두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바람에 흔들리던 것은 쓰러진 사람의 옷자락이었다. 휘가 발견한 여자는 어느 귀족의 부인인 듯 보였다. 낮은 숨소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였지만 상처가 심한지 옷 여기저기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급히 달려가 말을 끌고 왔다. 등에 태우려고 그녀를 안아들자 뭔가가 툭 떨어졌다. 주워 보니 피로 범벅된 머리꽂이였다. 그는 마른 피를 옷깃으로 대충 닦아내었다. 그의 눈이 험악하게 반짝 빛났다가 뚫어지게 그것을 쳐다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여기에 쓰러졌던 흔적이 있습니다. 근처에 남자 발자국이 있는 걸로 보아 누군가 발견해서 데리고 간 것 같습니다」 「더 찾아봐. 뭔가 더 있을 거야. 내 그 년을 잡기만 하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감히 나를 찌르고 도망을 쳐? 계속 주변을 수색해」 부하들은 부리나케 주변으로 흩어졌다.
태호는 그녀에게 당한 뒤 정오가 지나서야 하인에게 발견되었다. 만 이틀이 지나 정신을 차린 그는 바로 뒤를 쫓기 시작했다. 어깨에 심한 통증이 느껴지자 간신히 잠재운 분노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태호는 당한 만큼 꼭 돌려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래도 죽이기는 아깝단 말야. 그 방에 딱 어울리는 여자를 찾았는데…. 손 아래 느껴지던 여자의 가냘픈 허리가 생각났다. 그는 입맛을 다셨다. 분노와 욕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어찌됐든 우선은 잡는 것이 문제였다. 「이봐. 노예상인들 쪽은 어떻게 됐나? 아직 연락이 없나?」 「조금 전 연락이 왔는데, 도착해 보니 산채가 완전히 쑥밭이 됐더랍니다. 여자들도 온데간데없고요. 간신히 도망친 사람 얘기를 들으니 남자 네댓 명이 와서 싹 쓸고 갔답니다. 활을 굉장히 잘 쏘는 사람들이고 화살촉에 독이 있어 쉽게 당한 거랍니다」 「다른 말은 없던가?」 「그들이 어떤 여자에 대해 물었다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찾는 사람과 같은 것 같습니다」 「다시 사람을 보내 그들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 부딪치게 하진 말고」 태호가 그의 심복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을 때 저 건너편에서 사람이 달려왔다. 「저쪽에 말발자국이 있었습니다.
패인 깊이로 보아 둘이 탄 것 같고 그 근처에서 이 새깃이 꽂힌 머리쓰개를 발견했습니다」 부하의 손에 검은색 절풍(고구려인이 사냥할 때 쓰는 독특한 머리쓰개로 검은색의 태와 그 앞쪽에 가리개를 붙이고 양 옆에 끈을 달았다. 이걸 쓰면 태는 이마 부분을 가리고 가리개는 상투를 가리우며 끈은 쓰개가 벗겨지지 않게 턱에 걸어 맨 모습이 된다)이 들려 있었다. 「고구려인이 쓰는 것이로군. 상당히 귀한 것이고 말이야…. 부여에서 이걸 쓸 사람은 하나밖에 없지」 태호는 금세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쩔까요. 둘이 타고 갔다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아니다. 누군지 알았으니 가자. 숙부께서 찾으시면 곤란하니…. 내게 더 좋은 생각이 있다」 태호의 입가로 잔인한 미소가 흘렀다. 치희는 편안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화려하게 치장된 방 안이었다. 그녀가 도망친 방과 구조는 다르지만 그 화려함은 비슷했다. 다시 잡혀온 걸까? 그녀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흘러내린 이불 위로 드러난 옷은 흰색 비단이었다. 도망칠 때 입고 있던 옷이 아니었다. 살갗에 스치는 감촉이 너무나 부드러웠다. 그녀에겐 이런 비단은 꿈도 꾸지 못한 사치였다.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다시 잡혀왔다는 확신을 더욱 굳혀 주었다. 그녀가 살그머니 문 앞까지 다가갔을 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행히도 자신이 찌른 그 남자는 아니었다. 치희는 죽은 그가 다시 살아날 리 없다고 애써 자신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문앞에 선 남자로부터 풍기는 위압감에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서야 했다.
「일어났군. 아직은 무리일 텐데…」 처음 듣는 깊고 성량이 풍부한 남자의 목소리가 돌아서는 그녀를 잡아끌었다. 못마땅한 그의 눈길이 그녀의 맨발로 향했다. 그제서야 치희는 발에 쿡쿡 쑤시는 통증이 느껴졌다. 맨발로 험한 숲을 헤치고 다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발을 내려다본 그녀는 얼른 옷자락 속으로 발을 감추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치희는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오라버니들을 제외하고 그녀가 본 남자들이란 거칠고 야만스러운 사람들뿐이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지금껏 봐오던 남자들과는 달랐다. 위풍당당하고 약간 거만한 듯하면서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것 같은 사람! 그리고 쓰러진 여자를 구해줄 만큼 선량한 마음을 지닌 잘생긴 남자라면! 처음 본 사람인데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남자는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저 짙은 눈썹만 보더라도…. 다시 눈을 들어 그를 응시했을 때 치희는 파헤치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깜짝 놀랐다. 그 눈길에는 알 수 없는 남성적인 반응이 들어 있었지만, 동시에 비난이 섞인 경멸도 느껴졌다. 꼭 시린 겨울바람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다닐 만은 합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딘지요? 그리고 댁은 뉘신지요?」 그는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를 침상으로 몰아붙여 다시 자리에 앉게 했다.
「이곳 호민 휘라고 하오. 여기는 내 집이고. 앞으로 며칠간은 움직이지 마시오」 호민이란 말에 치희의 눈이 번쩍 띄었다. 혹시 이 사람이 오라버니들을 잡으려는 사람일까? 나를 구해주고 치료까지 해준 사람이? 그렇다면 오라버니들은 더 위험해. 오라버니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를 텐데…. 그래, 이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호민이 비단 이 사람뿐이겠는가? 치희는 아니길 바랐다. 그녀는 한 호민이 국경 근처의 도둑 떼를 소탕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러 가던 중에 상인들에게 붙잡혀 팔렸던 것이다. 납치범에게서 그녀를 산 사람은 잔인하고 음흉해 보인 반면 이 사람은 매우 진지해 보였다. 그러나 위험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단 큰 체구로 그녀를 주눅들게 했다. 오라버니들보다 큰 사람을 일찍이 보지 못했는데 그도 만만치 않았다. 키가 6척(180cm)쯤 되어 보이고 옷 위로 드러난 체구는 얼굴만큼이나 미끈하고 단단해 보였다. 나이는 스물 대여섯 되어 보이며 온몸으로 내 말을 거역하지 마시오라고 외치는 듯했다. 그는 상투를 틀고 검은색 머릿수건으로 머리를 완전히 싸서 뒤로 동여매고 있었다. 흰 바지를 입고 그녀와 같이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한쪽으로 여미는 저고리에는 깃, 소매, 섶에 흑색 단이 대어져 있었다. 그리고 단과 같은 천의 검은색 허리띠 옆으로 칼을 차고 있었다.
각진 턱과 오똑한 코, 짙은 눈썹, 육감적인 입술, 전체적으로 무척 잘생긴 얼굴이었다. 꿰뚫어보는 듯한 눈길로 인해 깔끔하고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그는 눈부시게 흰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어두운 분위기를 내뿜었다. 분명,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쉽게 보아넘길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를 살피는 동안 치희는 온몸에 쏟아지는 그의 눈길에 자신의 몸이 한껏 부풀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한 남자의 여인이 된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이런 묘한 기분은 난생 처음이었다. 치희는 몸 속에서부터 작은 떨림이 느껴지자 추위 탓인 것 같아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전 가야 합니다. 여기 이대로 있을 순 없습니다. 절 보내 주시어요」 당당하게 말하고자 했으나 들리기는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짓던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와닿았다. 그의 뜨거운 눈길은 그녀에게 생소한 여성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처자 이름이 뭐요?」 그는 그녀의 질문은 무시하고 자신의 궁금증만을 내세웠다. 「치희라 하옵니다. 저를 돌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그만 절 보내 주시어요」 다시 한 번 인내심을 가지고 부탁을 했다. 「그럼 대답해 보시오. 왜 그런 곳에 쓰러져 있었는지. 누구인지 알아야 보내줄 게 아니겠소」 원수 대하듯 적대적인 그의 물음에 치희는 당황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사실대로 말하면 그의 반응은 지금보다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도망친 껴묻거리라고 말해? 아니면 도둑들과 한패라고? 어떤 경우든 자신은 죽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오라버니들에게 먼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저는… 저… 저…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말이오?」 그의 질문에 이 상황을 모면할 방법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잡아떼면 되질 않는가? 추아저씨도 누군가 과거를 물을 때면 항상 모른다고만 대답을 했으니까. 그녀는 타는 입안을 적시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네.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왜 이곳에 있는 건지요?」 그가 거짓말인 걸 눈치채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이 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휘는 이 작은 여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도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작고 가냘픈 체구에 갸름한 얼굴, 반달형의 눈썹과 도톰한 입술, 붉게 물든 뺨, 희고 부드러운 피부를 가졌더라도 말이다. 속이 비칠 것 같은 얇은 흰옷 위로 드러난 몸매,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내릴 듯한 흑단 같은 머릿결, 그리고 사람을 끌어당겨 놓아주지 않는 그 눈동자까지 그에겐 모두 속임수로 비쳤다. 저 아름다움 속엔 어떤 악녀가 들어 있을까? 「기억이 없다…. 좋소, 그럼 이것을 좀 보겠소?」 그가 옷자락 사이에서 머리꽂이를 꺼내었다. 치희는 그 물건을 보자 그날 밤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자신의 손에 묻어 있던 피를 다시 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몸이 떨려왔다. 「이것도 기억 못하겠군. 처자를 발견했을 때 손에 쥐고 있던 것이오. 손아래 누이가 시집갈 때 혼수로 넣어준 것이지. 어떻게 이걸 갖게 되었지? 아! 기억이 없다니 물론 모르시겠군. 처자 같은 여인들 때문에 내 누이가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아오?」 분노로 떠는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공포를 가중시켰다.
여동생이 그 집으로 시집을 갔다면 그도 한 편일 것이다. 치희는 손이 아프도록 이불만 쥐어짰다. 분노를 터트리지 않고 억제하며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그 집안은 지금 상중인데 도망쳐나온 것을 보아하니 정숙지 못한 첩이 아닌가 싶은데… 어떻소, 내 말이 틀리오?」 그의 상상력은 끝없이 달리고 있었지만 치희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기억이 없다고 했으니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는 그녀를 마음대로 요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부정이라도 한다면 그는 다른 방향으로 캐물을 것이다. 그러다가 들통이라도 나면? 치희가 그의 말에 반박을 못하자 그는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되도록 빨리 연락하여 처자를 데려가도록 하겠소. 여긴 처자 같은 여인네를 들일 수 없소」 끝내 태호의 첩으로 결론을 지은 그는 뒤돌아 방을 나가려 했다. 순간 치희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곳에 가면 죽을 것이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잠깐만요. 가지 마시어요. 할 말이 있사옵니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 절 보내지 마시어요」 그가 다시 돌아섰다. 「아직 할 말이 남았나?」 그는 좀전에 서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섰다. 「저는 사람을 죽이고 도망쳤사옵니다. 그곳에 보내면 절 죽일 겁니다」 마음이 변하기 전에 단숨에 말해 버렸다.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하지만 자신 있었다. 배고픔에 떨며 읍루에서 살기 위해 배운 것은 사람을 구별하는 법이었다. 치희는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로 그가 태호를 싫어한다는 데 주사위를 던졌다.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말해 보시오」 짐작대로 그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말투는 여전히 쌀쌀했다. 내가 잘못 짚었나? 그나저나 뭐라고 하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전부 다 들려줄 수는 없었다. 「그가 절 껴묻거리로 묻는다고 해서 그걸로 찌르고 도망쳤사옵니다. 죽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았지요」 상당히 많은 부분을 삭제했지만 모두 사실이었다. 그는 입을 열지 않고 그녀를 계속 쏘아보았다. 더 많은 것을 말하라는 뜻이리라. 「그는 죽었어요. 그리고 전 도망쳤지요」 그의 시선이 손에 들린 머리꽂이에 가 멎었다. 저 여자는 이것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역시 거짓말일 것이다. 거짓말이 드러나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곧 알게 되리라. 「이것으로 찔렸다면 죽지는 않았을 거요」 태호 성격에 저 정도 미모의 여자를 새어머니의 무덤에 같이 묻는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갔다. 절대 손해나는 짓은 안 하는데…. 「이제 절 어쩌실 건가요?」 그녀의 질문을 무시한 채 그는 방 안을 서성거렸다. 가끔씩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이 그녀에게 와닿았다. 「사실을 알아본 후에 다시 얘기합시다. 그럼 푹 쉬시오」 짧은 인사만을 남기고 그는 방을 나갔다. 휘가 나가자 그제서야 치희는 긴 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사실을 말하고 나자 마음은 홀가분했다. 이제는 그가 자신의 목숨을 쥐고 있는 셈이었다. 오라버니들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빨리 도망가야 했다.
지금 그녀에게는 다시 몸을 추스를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이었다. 휘는 방문을 나서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 작은 여자가 집에 들어온 뒤로 생긴 것이었다. 숲에서 그녀를 발견했을 때 태호의 여자라는 것을 알고 그대로 버려 둘까 했다. 그런 여자만 보면 동생 선유가 당했을 고통이 생각났다. 하지만 옷에 묻은 피를 보고 그래도 사람은 살려야 한다는 양심의 소리를 따라 집으로 데려왔던 것이었다. 미루어 짐작건대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 도망친 태호의 첩인 듯했다. 좀더 알아봐야겠지만 적어도 그녀가 태호를 찌르고 도망쳤다는 것만은 사실일 터였다. 아마 미모로 남자를 홀려 그의 재산에 빌붙으려다가 그의 새어머니가 죽고 껴묻거리로 묻히게 되자 도망친 것이리라. 그녀는 그의 기억 속에 있는 누군가를 불러내려고 했다. 한참 후에야 휘는 그 작은 아가씨가 그에게 3년 전에 죽은 누이를 생각나게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누이가 죽은 건 모두 그 우가 늙은이의 농간이었다. 늙은이는 그의 집안의 부를 이용할 생각으로 촌수로는 멀지만 총애하는 조카, 태호의 아내감으로 선유를 택해 청혼을 했다. 형은 집안의 결정권자로서 나름대로 그 일에 신중을 기하였지만 신랑감 태호의 준수한 외모와 집안의 세력 등 그만한 혼처가 없다고 결론짓고 혼사를 단행했다. 형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라도 그런 결정을 내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휘는 세상을 둘러보기 위해 여러 나라를 돌던 중이었다. 그 여행으로 그는 많은 지식을 얻은 반면 두 여자를 잃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누이는 혼인을 했고 그의 아내는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간 뒤였다. 아내에게 정겨운 말 한 마디 건네준 적 없고 혼인 후 바로 몇 년간의 여행으로 집을 떠나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라 생각했다. 그로 인해 집으로 돌아오면서 세워놓은 그의 꿈들은 산산이 부서졌다. 처음에 태호는 그의 마음엔 썩 들지 않아도 누이에겐 잘 대했다. 그리고 그의 세력으로 반갑지 않은 이 호민의 자리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2년이 안 돼서 선유를 만나러 방문했을 때 그녀는 서서히 시들어 가고 있었다. 오라버니, 날 여기서 데려가 주시어요. 제발! 더는 여기 있기 싫어요 모두 남편의 바람기 때문이었다. 선유는 명목상의 아내일 뿐이었다. 그런 동생을 보고 휘는 그 집안의 어떤 요청도 거절했다. 하지만 마음 약한 형이 수시로 도와주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것마저 없다면 선유가 어떤 수모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태호와 결정적으로 틀어진 계기가 된 것은 말(馬) 문제였다. 형은 곡식 농사의 대부분을 관리하였고 그는 말과 가축을 맡고 있었다. 그의 말들은 모두 최고의 전투용 말이었다. 그런데 태호 쪽에서 친분을 내세워 싼 값에 그 말을 팔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휘는 말을 파는 조건으로 태호의 바람기를 잠재우려 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 집에서는 선유가 투기를 하였다고 하여 그녀를 무참히 죽인 것이다. 투기란 부인이 하지 말아야 할 것 중 가장 악덕한 것이기에. 그리고 선유의 시체를 인도하고 싶으면 혼인 당시 건네준 돈을 점찍어 둔 말들로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그때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는 화가 치솟았다. 호민이라!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은 그가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유가 혼인할 무렵, 즉 태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 휘는 반역자 집안을 처단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 이미 판결까지 난 사건이라 의심하지 않았는데, 태호가 뒤에서 조작하여 한 집안을 몰살시킨 것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혈기왕성하여 물불 가리지 않던 시기였다. 이제 우가장 사람이라면 치가 떨렸다. 그는 치희라는 여자가 깨어나는 즉시 돌려보내려 했다.
그녀를 데려온 첫날 그녀의 상태를 보러 갔을 때는 그저 예쁜 여자인 줄만 알았다. 그 후로도 그녀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 곧잘 그 방에 들러 자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깨어난 그녀는 자는 모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문을 열고 그녀를 발견한 순간 그녀의 얼굴과 몸 주위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나오는 듯했다. 반달처럼 휘어진 아름다운 눈썹과 오똑한 코, 굳게 다물어진 작고 도톰한 입술… 무엇보다 그를 감탄하게 만든 건 그 눈이었다. 그 눈을 한번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잊을 수 없으리라. 자신을 바라보는 맑고 투명한 까만 두 눈은 거친 세상을 모르는 사람의 것이었다. 긴 머리칼에 감싸인 작지만 굴곡 있는 완벽한 몸매는 아이 같은 얼굴과 어울려 묘한 요염함을 내뿜고 있었다. 태호가 그녀를 첩으로 거둔 것이 이해가 갔다. 「젠장, 정작 중요한 것은 묻지를 못했군」 휘는 그녀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당당히 자신과 맞서려는 그녀에게 끌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선유의 고통을 생각하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고, 온몸에 느껴지는 육체적 이끌림은 그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대로 그녀를 쓰러뜨리고 싶다는 약탈자의 본능을 느꼈다. 너무 오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탓이리라. 내일 도둑 떼의 동태를 살피러 갔다와서 같이 지낼 만한 여자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3장
어린 하녀가 들어와 창문을 열고 옷 입는 것을 거들며 부산을 떨었다. 그날 가져온 옷은 연분홍색 비단 저고리와 치마인데 소매끝과 깃, 치맛단에 검은 선을 대어 화려함을 더했다. 하녀는 주름잡힌 치마를 입혀 주고 저고리 입는 것을 거들어 주더니 검은색 띠를 허리에 매주었다. 읍루집에도 이제는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지만 이렇게까지 수발을 들어주는 사람은 처음이라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금세 그 편안함에 익숙해졌다.
소노라고 불러 달라는 어린 하녀는 매일 아침마다 다른 옷을 입혀 주는 것을 큰 낙으로 삼고 있는 듯했다. 어디서 이런 옷을 구했냐고 물어도 우물쭈물할 뿐 정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말 아가씨는 어떤 옷을 입어도 예쁘시네요. 제가 오늘도 잘 골라온 것이지요?」 소노는 한 발자국 떨어져 그녀를 바라보며 만족해했다.
어린 하녀는 처음에 그녀가 존대말을 쓰자 무척 송구스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치희는 어린 동생으로 생각하고 말을 놓았다. 「내가 어제 부탁한 일은 주인께 여쭈어 보았느냐?」
하녀는 그녀의 머리를 뒤로 내려 곱게 빗질을 해주었다. 「여쭈었더니 그냥 좋도록 해라라고만 하셨사옵니다. 그리고 집을 벗어나면 안 된다고 하셨지요. 제 생각으로는 허락하신 것 같은데 오늘 나가 보시겠는지요?」
치희는 소노의 말에 당장 나가고 싶어졌다. 그와의 대면 이후 7일이 지났는데 어린 하녀만 방에 들러 시중을 들어줄 뿐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몸이 아파 움직일 수가 없었지만 거의 회복된 지금은 좁은 방 안에 갇혀만 지내자니 답답했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수도 없는 일이니 빨리 나갈 방도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주인나리께서 다치셨사옵니다. 나쁜 도둑들을 잡으러 가셨다가 공격을 당했다는데 팔에 약간 상처만 입으셨을 뿐 심하진 않으신가 보옵니다」
그 말에 치희의 동작이 멈췄다. 설마 설마 했는데 그가 오라버니들을 잡으려는 호민일 줄이야. 그리고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다. 한시 바삐 오라버니들에게 갔어야 했는데…, 몸이 좀 안 좋다는 이유로 여기 너무 오래 있었다. 오라버니들이 걱정되었다. 그녀에겐 그들이 전부였다. 입안이 마르고 가슴이 답답해지자 찬바람이 간절해졌다.
「좀 걷고 싶은데 네가 안내 좀 해주겠니?」 이곳이 워낙 넓어 처음 왔을 때 길을 자주 잃었다는 소노의 말을 이미 들은 터였다. 도망치려면 지리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했다.
「알았사옵니다. 아가씨, 밖이 쌀쌀한데 나가시려면 이걸 입으시지요」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소노가 내민 것은 자색 두루마기였다. 역시 검은 띠가 둘러져 지금 입고 있는 옷과 한 벌처럼 잘 어울렸다. 두루마기 밑으로 분홍색 주름치마가 한 뼘 정도 드러나 걸을 때마다 찰랑거렸다.
소노의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나가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하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물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 곡식을 찧고 있는 사람,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는 사람 등 모두들 바쁜 아침나절을 보내고 있었다. 치희는 자신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읍루에서나 태호 집에서처럼 무시나 멸시의 시선이 아닌 감탄의 눈빛이었다.
옷 하나에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진다는 것이 그녀를 서글프게 했지만, 이곳에 거의 1주 가까이 있으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사람들 사이에 추측이 난무했으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리가 아프다고 하였더니 소노는 뒤뜰의 정원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 길로 들어서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잠깐이나마 세상 걱정을 모두 잊게 만드는 곳이었다. 한쪽에 세워진 누각에 앉아 바라보는 정원의 경치가 그만이었다. 노랗고 빨갛게 물든 나뭇잎들이 푸른 가을 하늘과 맞닿아 있었고 어디선가 낙엽을 태우는 냄새가 가을의 향긋한 풀 냄새와 섞여 코를 자극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정원 한쪽 구석에 키 작은 나무 사이로 흙담이 보이고 그 아래 작은 틈이 있었다. 그녀의 체구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 밖의 성과에 기뻐하며 좀더 살펴보려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서방님께서 이리로 오시옵니다」 소노가 그의 출현을 알렸다.
치희는 누각 쪽으로 걸어오는 그를 보며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래도 자신을 구해준 사람인데 고마워할 수가 없다니.
그가 누각으로 오르자 그녀는 바짝 긴장되었다. 지금쯤이면 그녀에 대한 조사가 끝났을 것이다. 그가 물을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와는 다른, 이유를 알 수 없는 떨림도 있었다.
「집은 잘 구경했소? 몸은 다 나았다고 들었소」 휘는 가죽신에 감싸인 그녀의 발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태호에게는 그녀와 같은 첩은 없었다. 다만 며칠 전에 노예상인들에게서 사온 여자가 그를 찌르고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비밀로 쉬쉬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 여자는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태호의 첩으로 몰아세울 때 전후 사정을 다 말했을 것이다.
「정말 아름다운 정원이옵니다. 지금이 7월(부여는 은력을 사용하므로 7, 8, 9월이 가을이다)중순이니 벌써 가을이군요. 듣자니 도둑 떼를 소탕하다 다치셨다 하던데 그들은 모두 잡았는지요?」 그녀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한쪽에 난 연못 위로 나뭇잎이 둥둥 떠다니는 걸 쳐다보는 척하면서 그를 살폈다. 그의 입을 통해 나쁜 소식을 듣고 싶지 않았다. 왜? 그에게 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고? 이런 생각은 그녀를 당혹스럽게 했다.
「아직이오. 동태를 살피다 잠깐 부딪친 것이오. 곧 소탕할 거요」 그녀가 꺼낸 화제는 그에게는 예상 밖이었다. 태호 집이 도둑에게 털릴까 걱정이라도 하는 걸까? 그를 찌르고 도망쳤다지만 그 사이 태호에게 반한 건가? 태호의 반반한 외모와 부가 얼마나 여자들의 환심을 끄는지는 소문으로도 드러났다.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가 태호에게 보내겠다고 했을 때 그녀의 눈에 떠오른 공포가 생각났다. 그녀는 태호가 혈안이 되어 자기를 찾고 있는 것을 알까? 수하들의 말로는 살기가 등등하여 여자를 찾으면 죽일 거라고 하던데…. 그녀에게 앞으로 닥칠 일을 생각하니 한가하게 정원을 구경하며 도둑 걱정이나 해주는 그녀가 애처로워 보였다.
태호는 한번 마음에 둔 것은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특히 아름다운 것일 때는 더욱. 그러나 태호 손에 닿으면 모든 것이 그 빛을 잃고 파괴되었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할 것 없이. 이 여인을 보호해 주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그녀에게 끌리는 마음은 전 부인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한 것이었다.
휘의 말만으로는 오라버니들의 상태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추아저씨가 오라버니들에게 알리지는 못했으리라. 아저씨는 지병이 다시 도져서 자리에 누우셨다.
「새어머니가 이곳을 만드셨소. 그때는 나무들도 저렇게 크지 않았지. 올해는 일찍 물드는 걸 보니 더 빨리 추워질 모양이오」 정원을 뚫어져라 보는 그녀에게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말을 꺼냈다.
치희가 그의 말을 급히 막았다. 「모르는 절 데려다 이렇게 극진히 대접해 주시니 정말 무어라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하지만 이제 떠나고 싶어요」
단호하지만 떨리는 목소리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떠난다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골칫거리가 될 것 같은 여자는 빨리 치워 버리는 것이 좋았다. 「처자는 떠날 수 없소」
그의 말에 놀라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도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이 여자를 잡는다면 분명 나중에 후회하게 되리라.
「날 우가장이라는 곳으로 보내겠단 말씀이신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높고 날카로워졌다.
「그렇지 않소. 처자가 찌른 그 사람은 죽지 않았소. 지금 혈안이 되어 처자를 찾고 있다고 하오. 벌써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오. 처자가 안전할 수 있는 것은 내 옆에 있을 때뿐이오」
그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자신을 찾는 데 혈안이 돼 있을 무리를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졌다. 오라버니들에게 가는 일이 더욱 힘들어질 것 같았다.
「돌봐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려요. 저를 보호해 주실 필요까지는 없사옵니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그의 도움을 거부했다. 거지라고 놀리던 아이들의 돌멩이를 대신 맞아주던 오라버니들에게는 지금 그녀가 절실히 필요할지도 모른다.
「처자가 내 집에 손님으로 있는 동안은 처자의 안전은 내 책임이오」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나리께서 몇 가지 것들만 빌려주시면 저 혼자서도 갈 수 있사옵니다」 그녀는 고집스레 말했다.
그녀의 말이 결국 그의 화를 돋우고 말았다. 휘는 사태도 모르고 고집을 부리는 그녀를 잡고 흔들고 싶었다. 그녀에게 남자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자가 위험을 알면서도 움직일 때는 남자가 이유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그의 경험이었다. 아마 경비가 심한 태호의 집에서 혼자 도망치지는 못했을 것이니 도와준 사람이 있을 터였다.
「지금 집밖에서 지키고 있을지도 모르오. 그들이 내 집으로 쳐들어와 처자를 끌고 간다고 해도 난 막을 수 없소. 그 집안의 권세가 지금 하늘을 찌를 듯이 높기 때문이오. 그들은 대가이고 나는 한낱 호민에 불과하오. 단지 그들이 여기로 못 들어오는 것은 내게 빚이 있기 때문이오」
그의 벼락 같은 목소리에 그녀는 더럭 겁이 났다. 「그렇다고 소리를 지를 필요까지는 없지 않사옵니까」
그녀가 쏘아붙이자 그도 화를 삭이려 노력했다.
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것도 남자가 있는 여자를 원하는 걸까? 휘는 금실이 좋은 형서와 새로 태어났을 아들을 떠올렸다. 내게 아직 그런 희망이 남아 있던가. 더구나 한사코 나를 떠나려는 여자를 보며 이런 마음을 품는 이유는? 그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치려고 했다.
「이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움직이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도와줄 수 없소」 단단히 경고를 하고 그는 바람에 옷자락을 휘날리며 사라졌다.
해가 지고 어둠이 땅으로 내려앉았다. 사방이 모두 고요했다. 치희는 소리나지 않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보퉁이를 꼭 안으며 중간 문이 닫혀 있지 않기만을 빌었다. 삐걱거리는 문 소리에 누군가가 잠을 깰지도 몰랐다. 치희는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갔다. 다행히도 문은 열려 있었다. 낮에 하녀가 정원으로 안내했던 길을 떠올리며 부지런히 걸어갔다. 말을 구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휘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아야 쫓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조용히 없어진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밤에 보는 정원은 낮하고는 너무나 달랐다.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흔들리는 나뭇잎이 괴기스럽게 보였다. 그녀는 흙담 아래 짐작되는 곳을 향해 곧장 나아갔다. 달빛이 비교적 환하게 비추었지만 정원의 후미진 구석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치희는 한참을 헤맨 끝에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먼저 보퉁이를 밖으로 밀어내고 그녀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낮추었다. 그때 등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낚아챘다. 치희는 놀라 낮은 비명을 질렀다.
「비단 옷 입은 도둑이로군」
그녀의 목덜미를 잡은 것은 휘였다. 어둠 속에 빛나는 그의 눈은 싸늘했다. 도둑이란 말에 치희는 가슴이 뜨끔했다. 오라버니들이 도둑이라면 그녀도 한패가 아닌가.
「어딜 가려고 이 야밤에 여기까지 오셨을까?」
빈정거리는 그의 말투와 낭패감에 치희는 약이 올라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를 잊어버렸다. 더 이상 품위를 지키기란 어려웠다.
「놔주셔요! 아프단 말이에요. 나리께선 여기서 대체 뭐하고 계신지요?」 그녀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둥거렸다.
「내 집인데 어딜 못 다니겠소. 그리고 보다시피 도둑을 잡고 있는 중 아니오. 얌전한 처자인 줄 알았더니 모두 연기였군」 빈정대는 말에 분노가 묻어나왔다.
「놔줘요. 정말 아프단 말이에요」 그가 목 뒤쪽의 옷을 움켜잡고 있어 깃에 목이 조였다.
「도망가지 않고 얌전히 있겠다면 놔주겠소. 허튼 수작 부리면 하인들을 깨워 망신을 줄 테니 알아서 하시오. 알아들었소?」
치희는 너무 아파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손의 힘을 풀고 놓아주었다.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필 그가 잡은 곳이 나뭇가지에 찢겨 상처난 손목이었다. 그녀는 신음을 삼켜야 했다.
「얼마나 훔쳤는지 한번 봅시다」 그는 그녀가 던진 보퉁이를 구멍에서 끄집어내어 끌렀다. 거기에는 그녀가 지금까지 모아둔 간식거리와 옷 한 벌, 그리고 단도가 들어 있었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우리 집에 이렇게 훔쳐갈 것이 없는 줄 몰랐소. 내게 부탁을 했으면 더 많이 주었을 텐데 말이오. 자, 어디 가려고 했소?」 빈정거리는 말조차 차갑게 들렸다. 그는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절대로 말할 수 없사옵니다」 그녀도 완강하게 버티었다.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손을 잡아빼자 오히려 그가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부드러운 곡선이 그의 몸에 닿았다. 휘는 어느 것이 그녀의 진짜 모습인지 분간이 안 됐다. 요조숙녀처럼 보이다가도 이럴 때는 꼭 철부지 같았다. 어느 쪽이든 흰 천이 달빛에 비춰 드러나는 그녀의 몸매와 그의 몸에 닿은 곡선은 그녀가 충분히 다 자란 어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처자가 꼬신 남정네를 찾아가는 거겠지. 미모에 홀려 처자를 도운 사람 말이오. 이제 처자는 어디에도 갈 수 없소. 도둑질한 자는 그 물건의 12배를 배상한다는 법률을 알고는 있겠지?」
그녀의 몸은 여전히 그에게 닿아 있었다. 열기가 그의 머리 위로 솟구쳤다. 그는 최대한 그녀의 몸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생각을 돌렸다. 장차 골칫거리가 될지도 모르는 여자를 잡아 두려는 이유가 뭐지? 자신이 구해준 여자가 태호에게 잡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갚을 방법은 저보다 나리께서 더 잘 아실 것 같네요. 제가 뭘 하면 되는지요?」 그녀 능력으로는 갚을 방법이 없다는 건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치희는 가슴과 배에 그의 단단한 몸을 느꼈다. 오라버니들과 길가다 좁은 통로에서 부딪친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좀더… 자극적이고 원시적인 느낌이었다.
그녀는 벗어나려고 손을 비틀어 빼며 몸을 움직였다. 아픈 손목쯤은 이제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작은 움직임이 그를 더욱 자극하고 말았다. 그는 신음을 삼키며 억누르려고 애쓰던 자신의 몸이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음… 그건 좀더 생각해 봅시다. 일단 이것 하나만 먼저 변상하시오」 그는 보퉁이 속에서 손에 잡힌 작은 음식을 꺼내들었다.
「어떻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잡고 있던 손을 허리에 두르고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일이 처음인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입술로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치희는 갑작스런 사태에 멍해 있다가 문득 허용해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되…」
그 짧은 사이 그녀의 입이 열리고 기회를 잡은 그가 침범해 들어왔다. 그는 거침없이 그녀를 정복해 나갔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그녀는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단단한 팔이 그녀를 잡아주었다.
휘는 이런 사태까지 몰고 간 자신을 탓하며 몸이 요구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고 그녀를 떼어놓았다. 그는 여자로 인해 망가진 사람들을 떠올렸다. 아버지, 형, 그리고 자신까지… 순식간에 열기가 걷혔다.
「밤이 늦었으니 들어가 자도록 하시오. 오늘부터는 밖에 사람을 세울 테니 딴 생각은 품지 마시오」 한참만에 입을 연 그는 숨을 가쁘게 내쉬는 그녀와는 달리 너무도 침착했다.
그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녀를 방까지 데려다 주고는 하인을 시켜 밖을 지키게 했다.
방으로 돌아온 치희는 오래도록 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감촉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혀가 주는 느낌은…. 온몸이 지끈거렸다. 그가 입술을 떼었을 때는 솔직히 아쉬움마저 들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은 실패했어. 오라버니들이 나를 찾을 텐데…. 짜릿한 순간도 잠시 무거운 걱정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날 밤 이후 치희는 불안한 마음에 속이 다 타버리는 것 같았다. 집 안팍이 수상하게 돌아가는 것이 무기를 점검하고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무언가 부산하게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소노를 시켜 알아본 바로는 도둑떼를 잡으러 가기 위해 대대적으로 준비 중이라 했다. 지난번엔 요행으로 오라버니들이 다치지 않았다 해도 이번엔 어림없어 보였다. 10년간 버텨온 그들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지만 이쪽의 상황을 보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가 힘들었다.
사람 수부터 차이가 났다. 오라버니들은 수가 적고 조용히 움직이는 걸 좋아했다. 나쁜 평판이 들리는 부잣집이 있으면 주위를 맴돌아 정보를 수집했다. 주로 묵거가 계획을 세우고 건무가 행동을 했다.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면 마을사람을 한두 명 고용했는데 일하기 직전까지 계획을 알려주지 않고 그들이 할 일만을 짧게 일러주었다.
어릴 적에는 그녀도 정보수집을 하면서 그들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녀가 열다섯이 넘어서면서부터는 끼워주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오라버니들이 그 생활을 끝냈다고 생각했다. 집도 번듯하게 지었고 부리는 사람도 있었으며 읍루에서 알아줄 정도로 돼지도 많이 키워 좋은 가죽을 만들고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다시 도둑으로 나선 이유를 추아저씨는 아는 것 같았다.
그를 비롯하여 오라버니의 일행은 많아야 네댓 명인데 이쪽 사람들은 거의 그 열 배에 가까웠다.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그동안 그녀가 보고 들은 바를 알려야 했다. 특히나 오라버니가 그녀를 찾아 나섰다면 더욱 위험했다. 이곳으로 오게 해서는 안 되었다. 묵거의 말이 생각났다.
무슨 일이든 먼저 정보를 수집하고 완벽한 계획을 세워야 실패하지 않는다
그녀는 집 안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날마다 정원을 어슬렁거리는 것이 일과가 되어버린 그녀는 누각의 나뭇잎을 치우는 늙은 노부를 알게 되었고 그에게서 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여긴 서방님의 아버지가 처음으로 정착하신 곳입죠. 나중에는 아름다운 마님만 이곳에서 살다 가셨어요. 세 분 모두 어린 시절을 여기서 보내셨구요. 그 일이 있기 전에는 서방님도 이곳에서 사셨는데 이제는 가끔씩만 들리시다니…」 만날 때마다 똑같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할아범이었다. 머리에 허옇게 백발이 성성한 그는 옛일을 또릿또릿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치희는 며칠 전부터 그 얘기가 궁금하던 차였다. 그 부분만 나오면 이야기가 끊어지고 건너뛰는 것이다. 소노에게 물어봐도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이 집안의 건드릴 수 없는 금기 같았다. 궁금한 것은 못 참는 그녀는 무슨 일인지 꼭 알아내기로 마음먹었다.
휘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하인이 달려와 조우가 기다린다고 전했다. 하인 편에 소식을 전하지 않고 직접 왔다는 것은 뭔가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급히 사랑방으로 드니 조우는 느긋하게 앉아 하인이 내다 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괜한 걸음을 했구먼. 그렇지 않아도 도둑떼 문제만 해결되면 돌아갈 참이었는데….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이렇듯 뛰어 왔나?」
조우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일어나 그를 맞았다. 얌전한 서생 같은 그는 언제나와 같이 침착한 모습이었다.
「내가 온 것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군. 들리는 말에 의하면 대단한 미인이 여기 머문다는데 그 때문인가?」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친구를 보아서는 집안에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기사 조우를 놀라게 할 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20년지기 친구이지만 휘는 그가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질 못했다.
「하하… 거기까지 소문이 났구먼. 그런데 그쪽은 모두 편안하신가?」 휘는 친구에게 자리를 권했다.
「음… 귀족들 집에 도둑이 들었네. 3년 전쯤에 출몰하던 도둑들과 수법이 비슷해. 이상한 것은 태호와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 집이 털리는데 모두 그 사실을 쉬쉬한다더군」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워낙 지은 죄가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형서는 잘 지내나?」
「형서는 자네가 떠나던 날 득남을 했네. 요즘 아이 보는 재미에 빠져 지내지. 자네 형수님 근황은 궁금하지 않은가? 자네에게도 남자 조카가 생겼다네」
「그런가? 그 일 때문에 왔는가? 형수가 내게 알리라고 하던가?」 기뻐할 줄 알았던 휘의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했다.
「자네답지 않군. 자네 형이 남긴 하나뿐인 핏줄인데 어찌 그리 무심한가? 나 같으면 당장 달려가 보겠네」 조우의 지적에 휘는 얼굴을 조금 찌푸릴 뿐 다른 반응이 없었다.
한참 만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형서 그 친구만이 사람 사는 것처럼 사는군. 그래, 여기까지 날보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닐 테고…, 아버님이 보내셨나?」
오랜 경험으로 조우는 친구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았다. 「두 가지 용건 때문일세. 하나는 궁에서 연락이 왔네. 마여왕께서 찾으신다는군」
휘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궁에 다녀온 후로 6년이 훨씬 지났다는 걸 상기했다. 「무슨 일 때문인가? 다시 날 찾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휘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정원 한쪽에 앉아 늙은 할아범과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는 치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위(魏)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다시 고구려로 진격할 모양일세. 그에 앞서 위에서 현도태수 왕기가 이끈 군사들이 도성에 들어와 있네. 이번에도 군량 지원을 요청하러 왔다더군」
「그래서 지원을 해주기로 했단 말인가?」
「고구려가 부여를 위협하고 있으니 위와 손을 잡을 걸세. 반대하는 대가들도 있지만 주로 찬성하는 쪽으로 말이 오가고 있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조우는 이것이 휘에게는 얼마나 난감한 문제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두 나라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일은 없었다. 휘의 아버지는 부여로 망명했지만 그 전에는 충성스런 고구려의 관리였다. 누명을 쓰고 도망쳐오기는 했으나 아버지가 고구려를 많이 그리워한다는 것을 휘는 알고 있었다.
「망설이는 이유는 알겠지만 자네가 부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갈등하는 휘의 뒤에서 조우가 충고를 던졌다.
「아버지는 아직도 당신을 버린 그 나라를 그리워하시지. 아마 허락 안 하실 걸세. 무슨 일이 있더라도 두 나라 사이에 끼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하셨거든」 휘의 시선이 기와 위의 푸른 하늘에 가 멎었다.
조우는 그가 죽은 형을 회상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조각 같은 옆얼굴을 보면서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휘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려웠다. 다정하고 마음 여리던 그 소년은 선유가 죽고 아내가 도망간 후로는 얼굴에 미소를 띠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우리 집안 사정을 아는 마여왕과 위거께서 지금까지 이런 일에 나를 부르신 일은 없었는데…. 내가 성내에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조우는 이런 물음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 한 가지도 놓치지 않는 휘를 알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 용건이 그것인데, 좀 알아보았더니 우가 쪽에서 대사 위거께 자네를 추천했다고 하더군. 우가가 대사님의 숙부가 되질 않나. 아마 태호가 손을 쓴 것 같네. 태호는 우가와 먼 친척이 되지만 늙은 우가에게 상당히 신임을 얻고 있는 모양일세. 다시 부딪치는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번엔 무슨 일로 우리를 걸고 넘어지는지 모르겠군. 그쪽과 무슨 문제가 있나?」 조우는 계속해 휘의 등만 보고 이야기했다. 휘는 조우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창 밖만 쳐다볼 뿐이었다. 조우는 그의 등 너머로 밖을 내다보았다. 어려 보이는 아가씨가 늙은 하인과 정답게 말을 주고받으며 일을 거들고 있었다.
「저 처자가 소문의 주인공이신 모양이군. 어떻게 이곳에 머물게 된 건가?」
「우연이었네.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지」 그제서야 그는 돌아서 자리로 다가갔다.
「혹시 저 처자 때문에 우가와 마찰이 생긴 것은 아닌가?」
「자네를 당해낼 재간이 없겠군」
「그렇다면 태호의 행동이 이해가 가는군. 내 생각에는 저 처자를 돌려보내고 더 이상 부딪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자네 혹시 저 처자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닌가?」
「자네답지 않게 참견을 다 하는군. 저 처자는 쫓기는 몸이라 어디도 갈 수가 없어서 머물게 한 걸세」
조우는 자신의 의견을 무시하는 휘를 처음 보았다.
「정말 참한 처자로군. 하지만 집에 계시는 매당 아씨를 생각해야지. 형님의 장례를 치른 지도 2개월이나 지났으니 무슨 말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자네 아버님도 기다리시는 눈치던데…. 어쨌든 우가에 대해 좋지 않은 말들이 계속 들리고 있으니, 되도록 그쪽과는 왕래를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그건 자네가 나설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더 이상 이런 얘기는 꺼내지 말게」
조우는 휘의 목소리가 위협적이 되어 가는 것을 알아차렸다. 휘는 친구이긴 하지만 자신의 상관이기도 했다.
「형님께서는 자네가 앞으로 혼인을 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유언에 매당 아씨를 부탁한다고 남겼을 걸세. 내 짧은 생각이지만, 부여에서 자네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유력한 집안의 딸과 혼인을 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것 같은데, 어쩔 텐가?」 조우가 어렵게 꺼내 놓은 대안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매당 아씨와 혼인하라고 부추기는 말에 불과했다. 그는 휘가 다시 혼인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말에 휘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것이 아닌가.
한참 만에 휘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를 친구로 두길 잘한 것 같군. 자네는 항상 내게 해답을 주니 말일세」 휘는 이 말 한 마디만 던지고 통쾌히 웃으며 방을 나갔다.
조우는 몇 년 만에 들어 보는 그의 웃음소리와 함께 새로이 전개될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치희는 예뻐 보이는 나뭇잎을 들었다 놨다 하며 늙은 하인 옆에 앉아 그가 마당을 쓰는 것을 바라보았다.
「여기 계신 지 정말 오래되었군요. 그럼 이곳 주인이 어렸을 때 어떻게 자랐는지 다 아시겠네요?」 그 노부는 여기에서 30년 전부터 살았다고 했다.
「그러믄입쇼. 두 분 서방님들을 모두 제가 보살펴 드린걸요. 어릴 때는 정말 개구쟁이였지요」 그는 떨어지는 나뭇잎을 쓸어모아 한 곳으로 치우고 있었다. 얼굴 가득히 그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묻어나왔다.
「학문은 열심히 익혔나요? 이만한 재산을 관리하려면 꽤 영특해야겠는데요」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다들 무척 똑똑하셨지요. 글공부 시간에는 어떻게 감쪽같이 빠져나가시는지 우리가 찾아다니느라 애를 먹었습죠」 노부는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치희는 얼른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어디로 빠져나갔나요?」 뒷짐을 지고 구부정하게 걷는 그의 뒷모습은 이런 일을 하기에도 힘겨워 보였다.
「글쎄요. 뒤뜰 쪽의 틈새도 있고…, 외양간 옆쪽으로 난 담이 낮아 그곳을 넘기도 하시고…, 부엌 뒤로 하인들이 드나드는 문도 있고, 집이 워낙 넓다 보니 빠져나갈 곳이야 한두 군데가 아니지요. 언젠가 한 번은 땅 밑으로 구멍을 파 집 뒤로 나가신 적도 있습죠」
치희는 그가 말하는 것을 빠짐 없이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집 안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구조를 익히고 도망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어디부터 탐색을 할까 고민하는 사이 할아범은 저만큼 가고 있었다.
「헌데 이 집은 크기에 비해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네요. 좀 한적해 보입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다시 쫓았다.
「마님께서 살아 계실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지요. 지금은 모두들 성내로 옮겨가고 여기는 가축을 돌보는 일꾼들만 남아 있습죠」 그는 또 나뭇잎을 한 곳으로 쓸어모으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는 나리 혼자만 사시나요?」 그녀는 그처럼 독재적인 사람과 같이 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빠져나가기 위한 정보 수집이 목적이긴 하지만 휘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노에게 물었더니 그의 칭찬만 잔뜩 늘어놓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화낼 때만 빼고는 보기만큼 무서운 분은 아니에요. 잘못만 하지 않으면 인자하시지요
그 말은 그가 자신을 만나러 올 때는 항상 화가 나 있다는 뜻이었다. 나의 무엇이 그를 화나게 하는 걸까? 내가 그 도둑과 한 패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몰라. 치희가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할아범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곳에는 사냥철과 가을걷이 때만 와 계시지요. 전에는 여기 사셨는데 아씨가 나가시고 난 뒤부터는 성의 큰나리 댁으로 들어가셨죠」
노부의 뒤를 따르던 치희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아씨가 나가다니? 그럼 혼인한 사람? 하긴 혼인하고도 남을 나이인 듯이 보였다. 어디 혼인뿐이겠는가, 아이도 서넛은 있겠지. 왜 진작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그럼 나에게 한 행동은 무엇이란 말인가. 잠시 즐기기 위한 노리개? 그도 머리꽂이로 찌른 그 망나니와 똑같았다. 단지 한쪽은 과격했고 다른 한쪽은 달콤했다는 차이만 빼면 말이다. 며칠 전 그녀를 보호해 주겠다던 그의 말에 고마움을 느끼기까지 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여겨졌다.
4 장
치희는 그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집 안을 탐색하고 다녔다. 물론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주로 할아범이 말한 곳을 중심으로 돌아보았다. 소노는 자꾸 엉뚱한 곳만 묻는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모두 안내해 주었다. 마구간지기와 친분을 쌓아둔 덕에 그녀가 타기 좋은 말도 알아두었다. 여기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말은 필수였다.
그날도 마구간에서 말들과 친해지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말을 탈 줄 아오?」
등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다름아닌 휘였다. 말을 훔칠 생각을 하고 있던 그녀는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죄진 사람처럼 놀라는군. 처자가 쓰다듬던 그 말이 가장 얌전한 말이오. 한번 타보겠소?」
그는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걸까? 그러면서 말을 타보라고 제안하는 까닭은 뭐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치희는 뒤에 있는 말이 고개를 흔드는 바람에 넘어질 뻔했지만 이내 그가 잡아 주었다. 그의 품에 안기니 그날 밤의 일이 다시 떠올랐다. 그의 입술의 감촉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때는 황홀했지만 그 후에 얼마나 후회를 했던가.
치희는 얼른 그를 밀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를 올려다보니 뜻밖에도 그가 웃고 있었다. 그의 미소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 독재자 같은 사람도 미소를 지을 줄 아는구나…. 더 놀란 것은 그의 미소가 소년 같은 악동의 이미지를 풍긴다는 것이었다. 뭔가 위험하고 장난스런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미소 작전이란 말이지.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말과 친해지는 데는 타보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은 없다.
「그래도 되겠는지요? 정말 한번 타고 싶었사옵니다. 너무나 예쁜 말이에요」
그의 웃음 한 번에 들뜬 목소리로 대꾸하자 그는 치희가 말을 탈 수 있도록 채비를 해주었다. 밖으로 나가 한번 달려보고 싶었지만 휘는 집 안을 한 바퀴 도는 것만 허락했다.
「달려보고 싶사옵니다. 이렇게 가만가만 걷는 것은 어린아이라도 할 수가 있답니다」 그가 그녀를 말에서 내리려 하자 그녀가 졸랐다.
「좋소. 나가서 신나게 달려보고 옵시다. 여기 용호를 채비하거라」
하인이 끌고 나온 말은 주인만큼이나 잘생긴 명마였다. 휘는 집 뒤편으로 난 야트막한 오솔길을 따라 말을 몰았다. 한참을 오르다 다시 내려가니 말을 달리기 좋은 초원이 나타났다.
그가 먼저 속력을 높였다. 그녀도 곧 그의 뒤를 따랐다. 말을 타는 거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그를 따라잡기는 버거웠다. 치희는 그가 훌륭한 기수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달리던 그가 속도를 늦추고는 호숫가 옆 큰 나무 그늘 밑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쉬어 가는 게 좋겠소. 정말 말을 잘 타는군. 규방의 얌전한 처자들은 말을 타지 않는 걸로 아는데 어떻게 배웠소?」 그녀를 말에서 내려주며 그가 물었다.
그 말이 그녀에게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고이 자란 사람들과는 차이가 나는 모양이었다. 집안이 화만 당하지 않았어도 그들처럼 살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고 지금의 자신을 비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나마 살 수 있었던 것도 두 오라버니가 목숨을 걸고 싸웠기 때문이었다. 호화로운 집에서 배부르게 먹고 산 그는 절대로 그녀의 처지를 모를 것이다. 그녀는 상처를 감추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전 오라버니가 셋이나 있사옵니다. 그들을 따라다니려면 말타기는 필수였지요」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열다섯까지는 그녀도 그들과 같이 다녔다. 마을에는 집에 혼자 남은 그녀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다. 특히나 부여사람을…. 어쩌다 혼자 남으면 먹을 것 하나 없는 동굴에서 누가 오지나 않을까 두려움에 떨며 오라버니들이 식량을 구해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추아저씨는 목적지도 밝히지 않고 한 번씩 집을 비우면 보름은 돌아오지 않기가 일쑤였다. 글공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생활에 간섭도 하지 않았고 먹을 것이 없어 며칠을 굶게 되면 어디서 났는지 슬그머니 식량을 구해오기도 했다. 성격은 왜 그렇게 괴팍한지…. 기분이 좋을 때 말고는 항상 퉁명스러웠다. 그러나 아저씨로 인해 읍루 마을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있었으니 그들에게는 은인이었다.
「늘 궁금하던 건데 처자 나이가 어떻게 되오?」
그의 말이 주의를 끌었다. 그는 낮은 나뭇가지에 말을 묶어 두고는 풀 위에 앉았다.
「열여덟이옵니다」 그녀도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열여덟이라… 납치당하기 전에 혼인한 적 있소? 그 나이면 벌써 하고도 남을 나이인데… 처자의 행동을 보면 아직 처녀인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쪽이오?」 그는 그녀가 태호집까지 끌려 가게 된 경위를 아는 듯했다.
「제가 상인에게 팔린 걸 알았군요. 전 아직 혼자이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 그녀는 이제 많이 익숙해진 치마를 추스르며 그에게서 좀 떨어져 앉았다.
「며칠 전 밤에 한 소행을 잊지는 않았겠지? 그때 나에게 상당한 빚을 진 걸로 아는데…. 이제 그 빚을 받아야겠소」
그녀는 겁이 나면서도 별것 아닐 거라고 자신을 달래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태연함을 가장하려 했으나 긴장된 목소리였다.
「내 부인이 되어 주어야겠소. 참으로 대단한 조건이 아니오. 도둑에게 부귀영화를 안겨주게 되었으니 말이오」 그는 큰 선심이나 쓰듯이 말했다.
말을 타게 한 저의가 이 때문이었다니, 그녀는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더구나 그에게는 부인이 있지 않은가. 하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자하니 그 매당 아씨라는 여인이 이번에 아들까지 낳았다고 하던데. 부인과 아들을 두고 또 둘째 부인을 얻으려고 하다니. 아무리 부인을 서너 명씩 두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이라지만.
「이 치사한 인간 같으니. 그깟 옷과 먹을 것에 날 팔라고요? 다 갚아주면 될 것 아닙니까?」 분개한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떻게 갚을 거요? 처자는 돌아갈 집도 없고 또 이 집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태호 일당도 있소. 그런 상황에 내 빚을 갚겠다니 어디 그 방법이나 한번 들어봅시다」
「그거야… 일… 그렇지! 일을 해서 갚지요」 그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꼼짝없이 갇힌 꼴이었다.
그는 들으라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처자가 평생 일해야 옷 한두 벌 값 정도 갚을 수 있을 거요. 처자가 부채노예인 이상 내가 잠자리에 불러도 처자는 할 말이 없소. 어떤 쪽을 택하겠소? 내 아내가 되겠소, 아니면 노예로 평생 일하며 내 잠자리를 데워 주겠소?」
그는 치희에게 한 가지 길만 강요하고 있었다. 나를 구해준 이유는 내 몸 때문이었어. 태호라는 인간과 하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오라버니들의 일만 없었다면 그를 존경할 뻔하지 않았는가. 조금, 아주 약간 좋아하는 감정도 생기려고 했다.
「전 절대로 나리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노예의 길을 택하겠다 이건가? 난 어느 쪽도 상관없소」 그는 아예 풀 위로 드러누웠다.
그의 느긋한 행동이 그녀의 화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래, 침착해야지.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다. 치희는 최대한 화를 억눌렀다.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거죠? 전 나리께서 조그만 옷과 음식에 연연해하는 옹졸한 분이 아니란 걸 알고 있사옵니다. 마음을 넓게 가지고 절 보내 줄 수는 없는지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평생 그 은혜 잊지 않겠사옵니다」 치희는 그를 달래어 보기로 했다.
「처자는 자신의 모습을 잘 모르오? 처자는 남정네로 하여금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여인이오. 난 처자를 얻고 싶고 또 처자는 내게 물질적인 빚말고도 생명을 빚지고 있으니 서로 원하는 것으로 갚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소」 그는 전혀 물러설 틈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전 싫사옵니다」 그녀의 입도 고집스레 다물어졌다.
「나이 열여덟까지 시집도 안 간데다 갈 집도 없는 처지에 이 정도 혼처면 좋은 자리 아니오? 내노라 하는 가문에서도 줄을 서는 자리요」 그가 능청스럽게 떠벌렸다.
「그렇다고 제가 둘째 부인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지요」
누워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누가 처자더러 둘째 부인이 될 거라고 했소? 도대체 어디서 무슨 말을 들은 게요?」
그가 평정을 잃자 그녀는 고소했다. 「모두들 매당 아씨 이야기를 하더군요. 이번에 아들까지 얻었다면서요? 축하드리옵니다. 아름다운 부인과 자식을 두고 어떻게 또 부인을 얻으려고 하시는지요?」
화낼 줄 알았던 그가 미소를 짓더니 굳어진 그의 어깨 근육이 눈에 띄게 풀어졌다. 뭐가 잘못된 거지? 이런 말을 하면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도 다른 남자들처럼 부인을 서넛씩 거느리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걸까?
「하하하… 처자가 오해한 모양이오. 고작 그런 이유로 내게 시집오기를 거절했소? 걱정 마시오, 난 혼자니까. 매당 아씨라 불리는 사람은 내 형수요. 아이는 물론 형의 아이고. 이젠 거절 못하겠지?」
휘의 말에 그녀의 귀가 솔깃해졌다. 그가 혼자라는 사실에 왜 안도감이 드는 걸까? 자신이 둘째가 아니라서? 치희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돼.
「그래도 못 하옵니다」
완강하게 거부하는 그녀를 보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번엔 또 뭐요?」 그도 유쾌한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그녀의 손에 반 조각의 옥패가 잡혔다. 그녀는 초조하거나 걱정이 생기면 항상 목에 걸린 옥패를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 옥패! 미유 오라버니!
「전 찾아야 할 사람이 있사옵니다. 그를 찾으려고 집까지 나왔지요. 왜 혼인할 수 없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러니 그만 포기하시지요」 그녀는 마지막 패를 내놓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치희는 자신의 승리를 예감했다. 그도 다른 방법이 없으리라.
「오라! 왜 갈 곳이 없다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소. 그럼 이건 어떻겠소? 둘 다 원하는 것을 가지는 거요」 포기할 줄 알았던 그가 다시 뭔가를 생각해낸 것이 분명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돌아가야 했어. 치희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무슨 뜻이지요?」 싸늘한 목소리였다.
「난 혼인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소. 형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 아버지가 형수와 혼인하지 않으면 이곳을 파시겠다고 했소」
「안된 일이군요. 하지만 그분의 가족을 돌보는 거야 당연한 일이 아닌지요? 그런데 그게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요? 저와 혼인을 하면 그들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옵니까? 가족을 모른 척할 정도로 야비한 사람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치희는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신랄한 어조로 그를 비난했다.
「젠장!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지만 난 형수와 혼인하기 싫소. 그리고 이곳도 잃을 순 없소」
그의 눈길이 그녀에게 머물며 옷 위로 솟은 가슴 언저리를 헤매는 것이 느껴졌다. 불편한 그녀는 한 팔을 들어 무릎 위에 올려놓아 그의 시선을 막았다. 「그러면 전 무엇을 얻게 되는지요?」
「처자는 정혼자를 찾아 집까지 나왔다고 했으니 내가 그를 찾아주겠소」
치희는 그가 미유 오라버니를 정혼자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고쳐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가 오라버니를 정혼자로 알고 있다면? 가만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나리와 혼인을 한 뒤 제가 정혼자를 찾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사옵니까? 그때 가서 그에게 시집갈 수는 없지요. 그리고 그를 찾는 것은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사옵니다」 그렇게 멍청한 줄 몰랐다는 듯이 치희가 설명했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문 밖에 지키고 서 있는 태호의 부하들을 보지 못해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설령 그들이 없다 해도 처자 혼자 이 넓은 부여땅 어디서 그를 찾겠소. 혼인보다는 그를 찾는 것이 더 급하지 않소? 그리고 열 네다섯에 혼인을 하는 것이 보통인데 처자의 나이까지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그럼 처자는 누구에게 시집가겠소?」
아무리 사람을 착각하고 있다지만 죽었다고 함부로 말하는 그가 너무 미웠다. 가뜩이나 오라버니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애써 아닐 거라고 다짐하던 터였는데….
「이 나쁜 인간 같으니!」 치희는 그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가 그녀의 팔목을 잡아 저지시켰다. 그녀는 분통을 터트렸다.「그는 죽을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꼭 찾아 나리께 보여드리죠. 오늘도 집에서 벗어났지만 위험한 사람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잖습니까. 내일이라도 당장 찾아나설 겁니다. 나리의 도움 따윈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숨을 들이쉬며 화를 진정시켰다. 그는 아픈 상처만을 골라 건드리는 재주를 가진 것 같았다. 그녀가 화를 가라앉히려는 노력을 보이자 그가 팔을 놓아주었다.
「처자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그들은 계속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소. 저쪽에… 보이오?」 그는 매우 평안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며 숲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적들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치고는 너무 느긋했다.
「괜히 절 겁줄 생각은 마시지요. 그런 속임수에는 안 넘어갑니다」 그녀도 그쪽을 보았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소? 그럼 내가 없는 동안 내 제의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오」 휘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뒷짐을 지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치희는 그를 잡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그의 옷자락 끝이 빽빽히 들어선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곁에는 푸드득거리는 말 두 마리만 있을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도 그는 오지 않았다.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자신을 달래는 사이에도 그가 한 말이 신경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계속 감시하고 있소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 치희는 가슴을 쓰다듬어야 했다.
「날 버려두고 가다니 나타나기만 해봐. 가만두지 않을 테다」 그에 대한 분노가 더욱 커져 갔다.
그때 그녀 옆으로 화살이 하나 날아와 나무에 박혔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헝겊이 매달린 화살대는 눈에 익은 것이었다. 치희는 주위를 살피며 헝겊을 풀고 누가 볼세라 화살은 멀리 던져 버렸다. 예상대로 묵거 오라버니의 글씨였다. 얼마나 급히 썼는지 찢어진 옷자락에 피로 쓴 글씨였다. 글자는 몇 자 안 되지만 뜻은 다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를 공격한 그를 쫓다가 너를 보았다. 무사해서 안심이구나. 큰형님이 다쳤지만 많이는 아니니 걱정 말아라. 그리고 우리말고도 너를 찾는 사람들이 있더구나. 위험하니 우리가 데리러 갈 때까지 그 집에서 기다려라. 그리고 그를 조심하거라. 그는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한 흉수다.
치희는 놀라 한동안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입은 벌어진 채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숨이 가빠오자 긴 한숨을 내쉬며 크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가… 그가… 집안의 원수라니…, 결국 오라버니들이 찾고야 말았다. 그녀에게 말하지도 않고 부여의 부잣집을 턴 이유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남매가 10년 동안 소원하던 일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내 기쁨이 가셨다. 그에게 복수할 일이 걱정되어서? 그가 너무 강한 것 같아서? 아니면…. 아니야! 치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녀가 잘못 해석한 것인지도 몰랐다. 묵거 오라버니의 편지는 워낙 짧았으니까. 그라고 지칭한 사람이 태호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다행인 건 오라버니들도 그가 공격할 것을 알고 있다는 것과 누구든 원수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보고 기다리라고 할 때는 큰오라버니의 부상이 크지 않다는 것을 뜻했다. 곧 그들이 데리러 올 터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면 같이 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 만약 휘가 내 뒤를 쫓다가 그들까지 발견되면? 묵거 오라버니도 이 정도는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마지막 말은 그녀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그와 가까워질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그녀의 해석이 옳다면 다른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가 부모님을 죽인 원수라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오라버니의 혈서를 막 품안에 접어넣을 때 누군가 등뒤에서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녀는 괴한의 손을 치우기 위해 손톱으로 할퀴었다.
「나쁜 것 같으라구! 얌전히 있어. 우리 주인나리께서 너를 얌전히 데려오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가만 놔두지 않았을 거다」 괴한의 입에서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바동거리다가 그의 손이 헐거워진 틈을 타 이빨로 그를 물었다. 순간 신음 소리가 들리더니 손이 입에서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손이 여전히 잡혀 있어 도망을 칠 수는 없었다. 그가 헝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같이 있던 놈을 부를 생각이었나? 포기해. 그는 오지 못할 거다. 우리 동료가 그를 잡으러 갔거든. 좋은 말까지 대기하고 있으니 금상첨화로군」 괴한은 그녀를 휘가 타던 말에 태우려 했다. 그러나 말이 요리조리 피하며 거부했다.
잘한다. 말아, 너 참 영리하구나. 네 주인이 올 때까지 조금만 더 버티거라. 치희는 속으로 열심히 말을 응원했다.
괴한은 포기하고 대신 얌전한 그녀의 말에 그녀를 걸쳐놓았다. 그가 말에 올라타려고 할 때 누군가 뒤에서 그를 덮쳤다. 휘였다. 괴한과 휘는 서로 부둥켜안고 풀밭을 몇 바퀴 구르며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다. 말 등에 걸쳐진 그녀는 그들과는 반대편으로 머리를 두르고 있어 등뒤의 상황을 볼 수가 없었다. 얼마 후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잡아 끌어내렸다. 그녀는 거친 손길에 괴한일 거라고 생각하고 발길질을 했다.
「나요. 처자가 저항하면 그 상태로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소. 그러고 싶소?」
그의 목소리에 치희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녀가 얌전해지자 그는 그녀를 내려주고 입을 가린 헝겊을 풀어 주었다. 반가움도 잠시, 그를 보자 괴한들이 있는 줄 알면서도 자기를 혼자 두고 떠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 나쁜 사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화가 난 그녀는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는 두 대 정도는 맞아주다가 곧 저지했다.
「이 헝겊을 괜히 풀었나 보오」 그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헝겊을 들어 보였다.
「그들이 있는 걸 알면서도 저를 버려두고 갔어요. 어떻게…」 그녀는 따져 물었다.
「분명히 경고를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은 건 처자요. 그래서 도움이 필요 없다던 처자의 말을 믿었소. 그래 이제 어떻게 할지 결정했소?」
무심코 시선을 돌린 그녀는 괴한이 저만큼 떨어진 풀밭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눈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왔다.
「죽은 건가요?」
「잠시 기절한 거요.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하시오」 휘는 그녀를 재촉했다.
집안의 원수일지도 모르는 사람과 혼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오라버니들은 이 사람 곁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만약에라도 반역자로 몰린 부모님이 누명을 썼다는 것을 밝혀 줄 단서를 찾는다면? 그렇다면 그의 부인만큼 좋은 자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의 힘을 빌어 미유 오라버니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아내가 되겠어요. 한 가지 여쭈어 볼 것이 있는데…」
「그게 뭐요?」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전에 느꼈던 떨림이 다시 시작되려고 했다. 긴장해서 그러는 거야. 저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저… 그러니까… 나리께서는 저를 갖고 싶다고 했는데 혼인을 하면 그런 것도 해야 하는지요?」 치희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한꺼번에 쏟아냈다. 간간이 마을 여자들에게 들은 말로는 혼인 후 첫날밤에 남편은 아내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준다고 했다. 그리고 여자는 순결이라는 것을 잃는다. 그것은 한 남자에게만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자들은 자기 남편은 날마다 한다면서 낄낄거렸다. 그런 끔찍한 고통을 날마다 겪으면서 어떻게 웃고 살 수 있는 걸까…. 치희는 생각도 하기 싫었다. 훗날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때는 그를 위해 참고 견딜 수 있으리라.
「그건 아내로서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의 경우는 특별하니 그런 일은 없도록 하겠소. 혹여 처자의 정혼자가 오해를 할 경우 내가 지금의 상황을 해명도 해주겠소. 그러나 처자 역시 아버님만큼은 확실히 속여야 하오」
웃을 줄 알았던 그가 의외로 진지하게 말을 하자 그녀는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별로 기분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사옵니다. 항상 이렇게 쫓기며 살아야 하는지요? 방금 전과 같은 일이 계속되면 제가 정혼자를 찾더라도 그를 만나러 갈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언제까지 나리의 보호를 받을 수만도 없는 일이지요」 그녀는 그를 떠날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치희는 또다시 오늘 같은 일을 당해 태호를 만날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걱정 마시오. 혼인선물로 이 사건을 마무리지어 주리다. 대신 처자는 내 말이면 무조건 복종하는 순종적인 아내가 되어야 하오. 절대로 도망가선 안 되오. 이것만 기억하시오」 그는 잔뜩 화가 난 듯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쭈어도 되는지요?」 치희는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았다. 「왜 제게 이런 제안을 하시는지요? 나리 말씀대로 혼인하려고만 한다면 저보다 더 좋은 규수들이 줄을 설 텐데 왜 이런 거짓 혼인을 하십니까?」
그녀의 말에 그는 침묵을 지켰다. 결국 그녀가 순순히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고 그는 입을 열었다.
「우리 집안의 사내들은 사랑하는 여인을 모두 잃소. 어떤 식으로든 말이오. 내가 혼인해서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여인에게는 불행이겠지만 난 아내를 잃을 염려가 없을 것이오. 하지만 사랑한다면 아내를 잃을 것이 분명하오. 난 처자를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있소.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기로 한 여인을 사랑할 리는 없잖소」 좀전의 장난기 어린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냉혹함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난 처자를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있소 그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나야말로 원수일지도 모르는 나리를 사랑할 리 없죠, 그녀는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태호는 한 호민이 올린 진상품을 닦으며 어디에 놓을지 고심하고 있었다. 그가 넌지시 금으로 만든 술잔이 좋다고 했더니 그날로 싸들고 찾아온 것이다. 또 한 번 눈감아 줄 일이 생기겠군.
문이 열리고 그의 심복이 들어왔다.
「아직 움직임은 없느냐?」 태호의 눈길은 술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 그게… 감시하던 애들 다섯을 보냈는데 하나만 살아왔습니다」
심복의 말에도 태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 사람 몇 죽어도 그에겐 또 다른 부하가 있었다. 「누구에게 당했지?」
「둘은 칼에 찔리고 둘은 화살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방금 들어온 소식인데 고구려 사람이 그 여자와 혼인을 했답니다. 내일 성안의 집으로 떠난다는데요」
「그럼 내가 먼저 가서 기다려야겠군. 우리도 숙부댁으로 갈 차비를 하게. 그리고 대사 위거의 동태는?」 위거를 발음하며 그의 안색이 전에 없이 구겨졌다. 그는 조심히 닦던 금잔을 소리나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그 대사라는 직분을 떼어낼 날이 올 것이다. 아니, 대사라는 관직 자체를 없애 버릴 것이다.
「아직 우리 쪽 기미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위거님은 대가들을 시켜 위군을 환영하고 그들에게 줄 군량에 신경을 쓰고 있다 합니다」
방금 전보다 태호의 행동이 눈에 띄게 풀어졌다. 「일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양쪽 다 계속 감시해. 나가 봐」
부하는 나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뭐야?」
태호의 물음에 오히려 안도를 느낀 듯 부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병사에 비해 말이 부족합니다」
「내가 알아서 하지」
그제서야 부하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충직하긴 하나 우둔함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쯤은 나에게 말하지 않고도 해결해야 할 텐데…. 이런 일까지 신경을 써야 하나.
그의 분노는 모두 위거에게 몰렸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위거는 한때 대가의 가신이었던 대사의 신분으로 지금은 국가 권력을 두 손에 쥐고 있었다.
왕도, 그리고 늙은이 우가도 그에겐 꼼짝을 못했다. 그리고 난 그 늙은 우가에게 꼼짝 못하지. 그러나 곧 바뀔 것이다. 숙부를 내세워 거사가 일단 성공하면 늙은이도 처치해 버리고 그가 모든 권력을 장악할 것이다. 그리고 눈엣가시 같은 위거와, 한때는 매형이었으며 위거의 신임을 얻는 휘도 제거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여자도 얻을 수 있겠지.
5장
병인년(246) 8월 가을 부여 성 안
그들의 짧은 여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부여성 남문 성벽 앞에서 소노와 치희는 감탄을 터트렸다.
「정말 높고 크군요. 안은 어떨지 너무나 궁금해지옵니다」 입을 떼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감탄이 절로 나왔다.
조우가 설명했다. 「성책을 둥글게 쌓아 안은 원형모양인데 워낙 높아서 외국 사신들이 오면 마치 감옥 같다고들 하죠. 들어가시면 궁성이 있고 그 가운데 대로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통하는 길이 있어 사출도라고 하는데 마가, 우가, 구가, 저가라는 제가들이 그 지역을 다스리고 계시죠. 우리는 어느 쪽도 아니지만 휘의 아버님이 처음 이곳에 오셨을 때 왕명으로 우가 쪽에 자리를 잡으셨죠」
「그만 하지, 조우! 이 정도가 뭘 대단하다고」 그의 말은 이 정도에 감탄하는 그녀를 조롱하는 듯했다.
부여의 수도성 안으로 들어서자 소노의 감탄 소리가 점점 커졌다. 치희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자존심 때문에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휘의 부인이라는 마음에 들지 않는 신분으로 성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씨, 정말 어마어마하고 화려한 곳이옵니다」
소노의 호칭이 아가씨에서 아씨로 바뀌었다. 그와 혼인한다는 말을 듣고 그럴 줄 알았다며 제일 좋아한 사람이 소노였다. 그리고 부여 성 안으로 갈 때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다. 시골에서 자란 소노나 치희에게 번화한 이곳 풍경은 별천지에 온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소노와 같은 처지라면 그녀도 마음껏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란스럽게도 소란을 떠는구나. 별로 신기한 것도 없는데」 소노에게 핀잔을 주면서도 주위를 둘러보며 커다랗게 떠지는 눈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여기는 부여의 모든 부자들이 다 산다고 들었사옵니다. 대가들이 모여 산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집이 아주 크옵니다. 기와집도 아주 많고 사람도 무척 많사옵니다」
치희는 귀로는 소노의 말을 듣고 눈으로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저 중에 미유 오라버니가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힘이 닿는 데까지 오라버니를 찾기로 했다. 어디서부터 단서를 찾아야 할지 난감했지만…. 더군다나 태호라는 사람과도 더 가까워졌으니 몸조심하라는 휘의 말이 떠오르자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날 저녁에 성공만 했더라도…. 휘로부터 부인이 되어 달라는 말을 들은 날 밤 치희는 다시 도망을 시도했다. 남의 집안일에 끼어드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혼인이란 커다란 대사를 그것도 원수와 하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약속까지 한 마당에 마음이 바뀌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서 휘에게 잡히고 말았다. 말을 가지러 마구간에 갔는데 그가 거기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처자가 밤에 말을 타고 싶어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소. 같이 타겠소?
마구간 문에 기대어 서 있는 그를 보는 순간, 치희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알았다. 다음날에서야 그녀의 방 문 앞에 서 있던 보초가 날마다 그녀를 따라다니며 행적을 그에게 보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집 안 곳곳을 둘러본 그녀의 의도를 짐작 못했을 리 없었다.
여행길 내내 그는 굳은 얼굴로 무뚝뚝함을 유지했다. 조우에게 최대한 그녀의 편의를 봐달라는 말 한마디뿐이었다. 저런 얼음장 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도착했군. 들어갑시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활기가 느껴졌다. 시골의 그의 집이 소박하고 조용하다면 이 집은 화려하고 생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짐을 받아들기 위해 나오는 하인, 말을 돌보는 마부 등 그녀 앞에서 왔다갔다하는 사람의 수만 해도 수십 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일행이 말에서 내릴 즈음 안쪽 문이 열리더니 아름다운 여인이 뛰어나왔다.
「작은서방님, 어서 오시어요. 추운데 오시느라고 고생이 많으셨지요? 기별이라도 하시지 않구서요」
하얀 옷에 틀어올린 머리에는 장식 하나 없었지만 기품 있고 단아한 자태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려주고 있었다. 조우가 먼저 나섰다.
「제가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짐이 많아서 호수를 몇 개 돌아오는 바람에 시일이 늦춰져서요. 이렇게 돌아다니셔도 괜찮으신지요?」
조우가 늦은 이유를 설명하자 그때까지 아무 말 않던 휘가 나서 인사를 했다.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조카를 낳으셨다고요. 고생하셨습니다. 아기는 건강한지요?」
주고받는 대화로 보아 치희는 그녀가 매당 아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사흘간의 여정 동안 조우로부터 여러 가지 집안 사정을 들었었다. 조우는 그녀와 휘의 혼인을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물론이지요. 지금 제 처소에서 자고 있답니다. 언제든지 보러 오시어요. 충분히 이 집안의 기둥이 될 만큼 튼튼하답니다. 그런데 저 처자는 뉘신지요?」 매당이 휘의 뒤편에 서 있는 치희를 보았다. 눈길은 처음부터 치희에게 쏠려 있었지만 이제서야 묻는 것이었다.
「제 아내입니다. 곧 잔치를 하려고 하니 형수님께서 준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동안 이 사람이 머물 곳이 필요한데 어디가 좋을지요?」 휘가 치희의 등을 떠밀어 앞으로 내세웠다.
오는 내내 한마디도 않더니 아쉬우니까 아내라고 내세우는군.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휘는 뭐가 못마땅한지 매당만 쳐다볼 뿐이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치희라 하옵니다」 치희는 자기가 아니었다면 그의 부인이 되었을 여인에게 인사를 했다. 저 부인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까?
매당은 한순간 놀라는가 싶더니 금세 미소를 지었다. 「작은서방님께서 드디어 혼인을 하기로 하셨다니 아버님이 좋아하시겠어요. 처소는 어디가 좋을지 생각해 봐야겠는데요」
「전에 선유가 쓰던 곳이 있지 않습니까? 형수님 거처하고도 가까우니 그곳이 어떨까 싶은데…. 아직은 많이 낯설 테니 형수님께서 옆에서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휘가 먼저 제의했다. 그러자 매당과 조우 사이에 불편한 눈길이 오갔다.
「그렇긴 하지만 그곳은 지금 조우 도련님이 쓰고 있어서요. 전에 쓰던 곳이 좁아 집무에 적당치 않다 하여 서방님이 안 계신 동안 그곳으로 옮겼지요. 전에 동서가 쓰던 곳은 잠겨 있어 청소도 안 되어 있을 것이고, 그럼 새어머니 처소가 남네요.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면 어떨는지요?」
「거긴 자네 처소에서 너무 멀지 않나. 차라리 내가 다시 옮기지 뭐」 조우가 자신이 희생하겠다고 나섰다.
치희는 그와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데 귀가 솔깃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심심찮게 그의 알 수 없는 눈길을 받아오던 터였다. 아무리 쑥맥이라 하더라도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원수와 혼인은 해도 몸까지 허락할 수는 없었다.
「제가 그곳을 쓰지요. 저 때문에 번거로이 옮길 필요는 없습니다」 치희가 얼른 끼여들었다.
휘는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더니 꼭 쥐고 있던 고삐를 하인에게 맡기고는 급히 안채로 가버렸다.
매당은 치희의 처소까지 따라와 이것저것 챙겨 주고 설명해 주었다. 치희는 처음에 매당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곧 그런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매당은 잃어버린 동생이 돌아오기라도 한 듯 세세히 알려주고 필요한 것을 물었다.
「작은서방님과 예를 올려 동서지간이 되었으니 말을 놓겠네. 조금 전에 둘이 서 있을 때 정말 잘 어울리던걸」 매당은 그녀가 들고 온 몇 벌 안 되는 옷을 장 속에 정리해 주었다.
매당의 다정한 말에 치희는 경계심을 풀었다.
「그래도 난 동서가 걱정이네. 작은서방님은 도망간 전 부인을 아직 잊지 못하는 것 같던데…, 이 옷들도 모두 그녀의 옷들이고…. 작은서방님은 돈도 많으면서 어쩜 이 옷들을 동서에게…」
걱정스레 말하는 매당의 말에 치희의 가슴 깊은 곳에서 은근한 아픔이 느껴졌다. 전에 소노에게 어디서 났느냐고 물어도 절대 대답하지 않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던가. 소노는 그가 혼인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물론 안 했다는 말도 없었다. 그녀가 물어 보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전 부인의 옷을 그대로 줄 건 뭐람.
치희는 혼인한 목적을 다시 되뇌었다. 자신의 행동에 의심이 들 때마다 하는 일이었다. 부모님의 누명을 벗길 단서를 찾고 미유 오라버니를 찾기 위함이다.
「도망을 가다니요?」 관심이 없는 척 물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어머! 몰랐는가? 내가 괜한 얘기를 했군그래. 그래도… 음… 이제는 알아야겠지? 작은서방님이 없는 동안 동서가 외간 남자와 도망을 갔다네. 그 이후로는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이 집안의 묵계인데…, 그러니 동서도 모른 척하게나. 내가 말했다는 걸 절대로 말해선 아니되네. 알았는가? 그나저나 옷이 이것밖에 없으니 당장 새로 지어야겠구먼. 동서도 이 옷은 더 이상 입고 싶지 않겠지?」
좋아하는 색을 묻는 매당의 말에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치희는 다른 생각에 빠졌다. 어떤 여인이기에 그를 버리고 떠날 수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한 만큼 고약하게 굴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매당은 괜한 말을 했다 싶었는지 금세 화제를 바꾸었다.
「이 집이 다른 집들과는 구조가 다르지 않나? 나도 처음에 시집 와서 많이 당황했다네」
「왜 그런가요?」
「이 집안 사람이 고구려 유민인 것은 알고 있나?」
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도중 조우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아버님께서 우겨서 이렇게 지으셨다네. 옷이며 관습들도 다른 것이 많을 터이니 모르면 어려워하지 말고 물어 보게. 처음엔 누구나 다 그러니까」
「그럼 시골집은 왜 여기와 다른지요? 그곳도 서방님의 집이라 들었는데요」
「아직 못 들었는가? 어머님은 아버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그곳에서 따로 사셨다네. 아버님은 어머님의 주변에서 고구려가 생각나게 하는 것은 모조리 없애버리라고 명령하셨다는군. 어머님이 그 나라를 몹시도 그리워하신 모양이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작은서방님이 그곳을 사용하셨지. 또 궁금한 게 있는가?」
「아닙니다. 이렇듯 친절히 대해 주시니 무어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셨다니 축하드립니다. 얼마나 예쁜 아기인지 보고 싶사옵니다」
「내가 얻은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예쁘다네. 내일 내 처소에 들러서 보고 가게나. 그 김에 옷감도 고르면 되겠군그래. 빨리 기운을 차리고 잔치 준비하는 걸 도와줘야 하네.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바빠지겠어」
매당과 소노의 도움으로 방 정리는 금세 끝났다. 애초부터 치희의 짐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하녀가 들어와 아이가 깨어났다는 말에 매당은 서둘러 돌아갔다.
치희는 방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화려한 휘장과 전에 살던 사람의 소박함이 묘하게 어우러진 곳이었다. 방 안의 구조도 그녀가 늘상 보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방문을 들어서면 부드러운 깔개가 깔린 바닥 위로 좌측에는 커다란 장이 있고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방 크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넓은 평상이 있었다. 쉬려면 우선 신을 벗어놓고 낮은 평상을 올라가야 했다. 나무로 잘 다듬어진 평상의 벽 쪽은 나무가 아니라 바닥 같았다. 손을 대어보니 차갑고 딱딱한 평상과는 달리 따뜻했다. 푹신한 이불이 있는 이유도 있지만 이불 아래 바닥 자체가 따뜻했다. 이런 곳이 있다면 추운 겨울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평상 위의 낮은 탁자에 정리하고 있는데 창문 옆으로 악기 하나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에게도 익숙한 고─삼국지 동이전에 진한에는 중국의 슬(瑟)이나 축(筑)이 아닌 다른 어떤 종류의 악기가 있다고 전하는데 이는 가얏고의 원형이 된다. 고라는 이름 역시 음악학자들의 추정이다. 지금의 가얏고는 이때보다 한참 후에 가야의 가실왕(581-617)의 명령을 받들어 이전부터 전승되어 오던 고를 개량한 것으로 보인다─라는 악기였다. 중국의 슬(瑟)이란 악기와 비슷한데 그 소리가 슬은 작고 미약한데 반해 이 악기는 조금 더 맑고 가냘픈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추 아저씨의 말이 생각났다.
이건 남쪽 진한과 변한이라는 나라에서 만드는데 아직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단다. 처음 이 악기의 음색을 들었을 때 그냥 지나칠 수 없었지. 한번 들어 보렴 아저씨가 줄을 퉁기자 가슴을 울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치희도 열 살이 되어 아저씨에게 악기 타는 법을 배웠다. 아저씨는 굶어도 연주할 때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셨다. 그녀도 그 말을 믿고 배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동나무로 만든 이 악기는 뒷면을 배 모양으로 파고 원통형 몸체의 아래 끝쪽에 장식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모두 12줄로 줄 중간이 괴로 떠받쳐진 악기였다.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반가운 마음에 타보려고 보니 줄이 끊어져 있었다.
다음날 치희는 시아버지 될 분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치희의 방과 가까운 가장 집 안쪽에 독립된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사잇문을 들어서니 그를 모시는 늙은 하인이 정원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그는 정원 나무들의 겨울 준비를 손수 하고 있었다.
「둘째 아씨께서 오셨습니다요」
노복의 말에 그가 손을 털고 일어섰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나서 본 그는 너무 뜻밖이었다. 앉아 있을 때는 반백의 초로의 노인으로 과연 휘가 싫어하는 일을 강요할 수 있었을까 의아해했는데 일어서자 휘가 누구를 닮았는지 확연히 드러났다. 희끗희끗 흰머리가 비치는 회색머리에 눈썹도 회색인 그는 온몸에서 위엄을 풍기는 노장이었다. 위풍당당한 풍채에 사람을 꿰뚫어보는 그 눈이란…. 치희는 체구가 왜소하고 병색이 짙으며 고집 센 노인을 상상했었다. 결코 이 분의 눈을 속이기란 쉽지 않으리라.
「휘가 데려온 내 둘째 며느리로구나. 읍루 사람인 줄 알았는데 부여인이로군. 들어가서 얘기하자꾸나」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치희는 한눈에 자신의 내력까지 꿰뚫어보는 그가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불편한 그의 시선이 줄곧 그녀에게 머물렀다.
「혼례를 안 올리겠다던 녀석이 갑자기 처자를 데려와서 놀랐지. 약속대로 아내를 얻었으니 일체의 절차나 네 출신은 따지지 않겠다. 들었을 테지만 이 집에 전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다시 일어나지만 않으면 난 상관 않으마」
치희는 불편한 자세로 앉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시아버지 앞에서 한 마디라도 잘못 꺼냈다가는 모든 것이 들통날 것 같았다.
「서로를 존중해 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약간 가시가 돋친 말이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휘의 아버지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며느릿감으로 최고였다. 청초한 아름다움에 가시도 품고 있었고 행동 하나하나가 우아함을 풍겼다. 사람의 기품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으며, 한번 몸에 배면 바꾸기도 쉽지 않은 것이었다.
어제 오후에 급하게 온 서신으로 이 아이가 며느리가 된 것을 안 그는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고 생각했다. 늘 서신으로만 대하던 그녀와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더욱 마음에 들었다. 휘가 혼인한 것을 알았을 때는 허락도 얻지 않고 저지른 일에 화가 단단히 났었지만 읍루에서 온 그 아이라면 어떤 상황이라도 맞아들여야 할 형편이었다.
그 늙은이가 잘 키웠군. 그런 환경에서 저 정도로 곱게 자라기도 쉽지 않았으리라.
어제 휘가 와서 늘어놓은 거짓말로는 문제가 많을 것 같더니 저런 며느리라면 한 차례 커다란 풍파가 집안을 쓸어야 그 녀석도 정신이 들 것 같았다. 뭐 구해 주고 보니 아냇감이라 생각돼서 혼례를 치렀다고? 시골집을 판다고 하지 않았으면 절대 꿈에도 혼인은 생각할 놈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 일의 전말이 모두 드러나면 한바탕 집안이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허허…, 그 녀석이 널 택한 이유를 알겠구나. 앞으로는 아버님이라 부르고 그 녀석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와서 일러도 되느니라」
치희는 앞으로 일이 수월하게 풀리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는 여느 노인들처럼 옛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렇게 편견없이 그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추아저씨말고는 없었다.
일단 친해지자 그는 아주 다정다감한 아버지 같았지만, 큰아들과 딸까지 잃은 슬픔이 간혹 내비쳐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외모로 풍기는 엄격함과 달리 그 안에 내재된 자상함은 아버지란 저런 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원수의 아버지였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분이었다.
노부의 말에 맞장구도 치면서 치희는 그가 사람과의 대화를 많이 그리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주 놀러 오너라. 이제는 모두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하는구나」
「예. 시간이 나는 대로 들르겠사옵니다」
치희는 조심스레 일어나 방을 나왔다. 그는 이제 아버님이라고 부르라며 그녀를 배웅까지 해주었다. 그녀가 사잇문을 나설 즈음 뒤에서 다소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고 내가 너를 완전히 며느리로 인정한 것은 아니니라. 첫 손주를 보게 해줄 때에만 가능한 일일 것이야」 노여움마저도 섞인 음성이었다.
방 안에서까지만 해도 그렇게 다정하시더니…. 순식간에 변해 버린 태도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처소로 돌아왔다.
「어서 오게나. 자네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군. 그렇게 아들 보는 재미가 좋으신가?」
휘가 서재로 들어오는 형서를 반갑게 맞았다. 형서는 휘를 얼싸안으며 조우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자네도 빨리 장가들어 아들을 보게나. 그럼 이 재미를 알 테니. 휘! 자네는 곧 이 기쁨을 알 수 있을 걸세」 가슴을 쫙 펴며 형서가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작은 평상에 둘러앉자 곧 하인이 차와 다과를 내왔다.
「오랜만에 뭉쳤으니 형서의 득남도 축하할 겸 술 한 잔 하는 것이 어떤가?」 휘가 그들의 의중을 물었다.
「술은 자네가 낼 것이 아니라 형서가 내야 하는 것 아닌가?」 조우도 한 마디 했다.
「휘가 내는 것이 맞네. 죽마고우에게 술 한 잔 안 주고 장가를 들 수 있을 것 같은가?」
세 남자는 한바탕 시끌벅적하게 웃고 나서는 술을 나눠 마시며 그동안의 일들을 주고받았다.
휘는 도착하자마자 쉴 사이도 없이 궁으로 불려갔다가 오후 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사신들 접대하는 자리에 태호도 나왔던가? 무슨 일은 없었는가?」 사건의 전모를 아는 조우가 먼저 물었다.
「새로운 사실을 말해 주더군. 내가 혼인한 처자가 읍루 여인이라지 뭔가」 화가 난 음성으로 말하는 휘의 얼굴에는 분노의 기색이 역력했다.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혼인한 그의 잘못도 있었지만 꼭 속은 기분이었다. 성내로 오는 도중 그녀에게 가족이나 집안에 대해 물으면 입을 다물고 말을 돌리던 이유를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그런 미모에 기품과 지식을 갖추었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그가 차마 친구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일 때문이었다. 왕을 알현하고 물러 나오는데 태호가 그를 조용히 불렀다.
내가 데리고 놀던 아이가 형님 집에 있다지요? 혼례를 치렀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혹시 그 아이가 아닌지…
얼굴만 봐도 욕지기가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휘는 이런 놈에게 고역을 당했을 치희를 생각하니 지나가는 사람만 없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내 아내 이름은 치희라고 하네. 말조심하게 아내라는 말을 강조하며 나즈막하게 위협하는 그의 목소리도 태호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제 형수가 된 사람인데요. 뭐, 제가 양보해야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그 애를… 아니 형수님을 상인들에게 후한 값을 치르고 사왔다 그겁니다. 인사 없이 그냥 채가시다니 아니될 일이지요. 형수님이 상인에게 팔린 읍루 사람이라는 소문이 퍼지면 곤란하실 텐데요 은근히 협박하는 모양이예전 선유 때와 똑같았다.
두 번씩이나 그에게 당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다 여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울타리에 든 사람을 보호하는 것은 그의 책임이었다.
이번엔 얼마인가?
제가 상인에게 치른 값과 중매비 정도는 주셔야지요. 제가 아니면 어디 두 분이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가을이니 형님네 말들도 살이 통통하게 올랐겠군요. 잘 훈련된 전투용 말로 서른 마리 정도 주십시오
태호가 제시한 보상은 턱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휘는 두 번도 생각지 않고 대답했다.
수락하네. 이번 군량 문제가 해결되는 대로 보내주겠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태호를 꼭 자신의 손으로 파멸시키리라 다짐하면서. 이유야 어찌됐든 자신의 아내에게 약속한 혼인선물을 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 일을 생각하며 다시금 분노로 떨고 있는데 형서의 말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자네 정도면 부여에서도 유력한 집안 딸과 혼인할 수 있네. 그럼 집안 기반도 더욱 확고해질 것이고. 고구려에서 왔다는 것 때문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질 않은가? 아니면 자네 형수도 있고 말이야. 둘째 부인이라도 맞이하게」 형서는 그를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난 이미 결심했네. 그러니 그 문제로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아 주게」 단호하게 그들의 간섭을 저지하는 휘의 말에 두 사람 다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이보게, 휘! 마여왕과 대사 위거를 만난 일은 어찌 됐는가?」 조우가 화제를 돌렸다.
「우리보고 군량을 대라고 하시더군. 조우, 자네 말이 맞았네. 태호가 손을 썼어. 형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 휘는 얼굴을 찌푸리며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조우는 그의 집의 재정을 관리하고 있었고 형서는 넓은 평야 지대에서 나는 곡식을 관리해 주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의견도 중요했다.
「올해 농사가 그리 잘 되지 않았네. 군량을 대주고 나면 소작인들과 우리가 먹기에도 부족하네. 다행히 작년 물량이 남아 있어 조금 안심이 되지만 말일세」 형서는 가지고 온 장부를 그에게 내밀었다. 휘는 빽빽이 들어찬 글씨들을 대충 훑어넘기고는 장부를 덮어버렸다.
「정말 관구검에게 군량을 대줄 것 같던가? 몇 년 전에 위는 고구려와 손을 잡고 공손씨 세력을 평정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고구려를 공격하니 또 우리도 배신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술이 오르자 형서는 못마땅한 의사를 내비쳤다.
「지금이 병인년(246)이니 8년 전이군. 하지만 요즘 고구려의 세력이 커지면서 점점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니 위와 화친을 맺어놓아야 쉽게 넘보지 못할 것이 아닌가」 어느 편도 들지 않았던 조우 나름대로의 해석이었다.
그의 뒷말을 되새기느라 이야기가 잠깐 끊긴 사이 치희가 소반을 들고 들어왔다. 친구가 와서 궁금해한다는 이유로 휘가 부른 까닭이었다. 정숙해야 할 부인이 술자리에 나오는 것은 격식에 없는 일이지만, 어릴 때 집안이 화를 당한 이후로 치희가 예도를 익힐 기회도 없었고 휘도 그런 것을 초월하고 사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치희가 들어오자 조우와 형서가 일어나 읍하며 인사를 했다. 그녀도 엉겁결에 마주 보며 인사를 했다. 치희가 처음 본 형서의 인상은 대단히 강직하고 성실하며,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같이 인상이 후덕해 보였다.
그녀는 여기 오기 전에 방에서 고의 줄을 손보던 참이었다. 인사를 나누었으니 돌아가 그 일을 계속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가려 하는데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부여나 고구려나 다 한 집안인데 서로 으르렁거리는 걸 보면 정치도 꼭 집안 싸움 같구먼. 안 그런가? 난 둘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이고 말이야」
휘는 술을 한 잔 쭉 들이켰다. 성량이 풍부한 그의 목소리가 치희의 주의를 끌었다.
「자네 말이 맞네. 부여와 고구려와의 마찰은 대소왕과 주몽 때부터 시작된 것이니 집안 싸움이네그려. 이렇게 옛 일을 봐도 집안을 잘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타나지 않은가」
맞장구를 치는 형서의 말에 치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시아버님이 사셨다는 고구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세 사람 중 아무도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자 치희는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방 한쪽에 조용히 앉았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그녀의 행동은 조우와 형서의 눈길을 끌었고, 조우는 그녀를 위해 그들 모두 알고 있는 옛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반복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천제의 아들)와 하백의 딸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났지. 유화가 부모 몰래 임신했을 때 해모수는 이미 늙어서 동부여의 왕인 해부루라는 아들과 손자 금와까지 있었어. 집에서 쫓겨난 유화를 금와가 거두어 모셨는데 그때 태어난 아이가 주몽이었지. 어릴 때부터 탁월한 재능이 돋보인 주몽은 금와의 아들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는데, 특히 금와의 큰아들 대소와 가장 사이가 나빴어. 대소가 그를 죽이려 하자 주몽은 목숨을 걸고 도망쳐서 지금의 고구려 땅으로 피난을 갔다가, 미망인이 된 소서노를 만나 혼인하고 그녀의 힘을 빌어 고구려를 세웠지. 금와가 왕일 때는 고구려와 사이가 좋았지만 그의 아들 대소가 왕이 되고 나서부터 두 나라 사이가 극도로 악화되었어. 결국 대소는 주몽의 아들 유리가 왕이 되자 고구려를 침략했지」 역사에 해박한 지식이 있는 조우가 알아듣기 좋은 목소리로 차근차근 이야기를 했다.
휘는 이미 아는 이야기였으므로 눈을 빛내며 듣고 있는 치희의 행동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성내에 들어와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친구들의 등 뒤편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그녀는 방 안의 불빛과 어우러져 선녀처럼 보였다.
혼인 후 그녀는 늘어뜨리던 머리를 틀어올리고 다녔다. 전에 늘어뜨린 머리가 훨씬 더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그녀도 매우 아름다웠다. 불빛을 받아 눈부신 목덜미와 새색시답게 홍색의 단을 댄 화려한 노란색 꽃무늬 치마저고리가 그녀의 모습에 신비감을 더해 주었다.
새신랑이면 지금쯤 이렇게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손을 잡고 침상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만으로도 앉아 있기가 불편해졌다. 풍성한 옷으로 인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무정한 친구들은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에 부여와 고구려가 서로 적대시하지 않고 손을 잡았다면 지금은 뉘라서 우리를 업수이 여기겠는가? 아마 저 대륙도 우리 앞에서 꼼짝하지 못할 것일세」 형서가 조우의 말을 받았다.
이야기가 끝이 나는 것 같자 치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나지 않게 문을 닫고 나왔다. 자신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나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휘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제 그의 아내가 된 여자는 대단했다. 모든 남자들을 끌어들이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깐깐한 아버지마저도 이미 그녀에게 기울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집안부터 따지셨을 분인데…. 혼인만 하면 어떤 것도 상관 않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그는 결코 믿지 않았었다.
처자 하나는 잘 골랐더구나. 사람이 그만하니 다른 건 따지지 않겠다
하인이 들어와 아버지가 치희를 인정 못한다고 노여워하셨다고 말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버지도 형수에 대해 뭔가를 눈치채신 걸까? 그럴 리가 없다. 그 사실은 죽은 형과 자신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그도 친구들의 이야기판에 뛰어들었다.
「자네 말이 옳으이. 하지만 현실이란 그렇지가 않질 않나. 나의 바람은 부여와 고구려가 자네들과 나처럼 잘 어울렸으면 하는 것이네. 중간에 위같은 나라가 끼여들지 않고 말일세」 휘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었다. 함부로 말을 하는 휘가 아니었기에 형서와 조우는 술기운에도 바싹 긴장을 하였다.
「이 사람, 휘! 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자네 말인즉슨 둘 중 누군가 배신을 했다는 말인가? 이거 너무 섭섭하구먼」 발끈한 형서가 휘를 나무랐다.
휘는 조우를 바라보았다. 조우는 조용히 술잔을 채우고 있었다.
「자네가 우리를 의심한다면 우리 중 누군가 그런 행동을 한 탓이겠지. 하지만 친구를 의심하는 것은 서로간에 불쾌한 일이니 대화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조우는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네들보고 뭐라는 게 아니네. 다만 위나라 같은 사람이 끼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을 뿐일세. 너무 앞서가지는 말게」 휘는 무뚝뚝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여보게, 자네 참 고약한 사람일세. 우리가 친구라 앉아 있지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나갔을 것이네. 하하하… 내일도 사신 접대가 있나? 내일 가면 이번 일은 마무리되겠군」 성격 좋은 형서가 무거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애를 썼다.
「내일 오후에 잠깐 들르면 되네. 그런 자리에 내가 있을 이유가 없지. 그러니 오늘 밤에는 마음놓고 마셔도 되네」
세 사람은 정담을 나누며 술잔을 주고받았고 얼마 안 가 형서가 제일 먼저 떨어졌다. 휘와 조우는 그를 좁은 평상으로 옮겼다. 가끔 휘가 쉬는 곳으로 한 사람이 누우면 꼭 맞는 크기였다.
이제는 아쉬운 대로 조우가 그와 대작하고 있었다. 그도 오늘 저녁에는 꽤 여러 잔을 마신 것 같았다.
「태호에게 군마 서른 마리를 주기로 했네. 준비해 놓을 테니 자네가 보내주게」 휘는 조우의 빈 잔에 술을 부어 주었다.
「자네답지 않은 일이로군. 평상시 그렇게 아끼던 것들을…. 그녀의 존재가 그렇게 큰가?」
친구의 질문에 휘는 대답을 회피했다. 조우도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시골의 도둑들을 잡는다고 병사들을 무장시키더니 왜 그냥 왔는가?」 조우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성 안으로 오는 내내 궁금했지만 휘가 침울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바람에 차마 묻지 못했던 것이다.
「성내서도 부자들이 털린다는 자네 말을 듣고 조사를 했더니 모두 태호와 연관이 있더군. 모두 10년 전 사건을 아는 사람들 집이었다네」
휘의 말에 조우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그 일은 공무상 휘의 유일한 오점이었다. 그로 인해 저 친구는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그럼, 누가 재조사라도 한단 말인가? 그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을 텐데…. 우리가 알기에 그 집 식구는 모두 죽었지 않은가?」
조우의 말에 휘는 그날 밤 자신이 놓아준 두 남매를 떠올렸다. 오라버니 뒤에 숨어 있던 꼬마 여자아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던 그 눈망울까지. 혹시 그들이 살아남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실수했음을 안 다음 그들을 찾아 부여의 구석구석까지 5년을 뒤졌지만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뒤늦게 그 집안의 누명이나마 벗기려고 했으나 그도 여의치 않았다. 모든 증거는 태호가 쥐고 있었다.
태호! 일을 이렇게 만든 그 놈을 반드시…. 술잔을 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내 예상이 옳다면 그도 곧 파멸하리라.
「조우! 자네가 우가의 낌새가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나. 군마 서른 마리를 요구하는 걸 보면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나도 연관되기 전에 자네가 조사해 주기 바라네」
조우는 가득 찬 잔을 한 입에 털어넣었다. 「그러지」
딱잘라 말하는 조우를 휘가 심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보게, 조우! 자네는 내가 제일 적으로 두고 싶지 않은 사람이네. 가끔씩 자네의 그 침묵이 날 불편하게 하거든. 문제가 있으면 내게 말을 해주게나」
「내가 자네의 적이 될 일이 생기면 먼저 말을 해주겠네. 그것 하나는 약속하지」
휘는 그가 얼마나 말을 골라 하는지 아는 터였다. 그가 약속한 일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거의 한밤중이 되자 조우도 비틀거리며 처소로 돌아갔다. 휘는 곯아떨어진 형서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서재를 나왔다. 이것저것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치희의 방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의 방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늦은 시간에 여기 서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사실 진짜 아내도 아닌데….
여기에 오지 못할 이유는 또 뭐가 있지? 이미 혼례는 올렸으니 그가 이 방에 들어간다고 해서 이상히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도착한 첫날부터 같이 잠자리에 들지 않는 것 때문에 하인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던 터였다.
휘는 정혼자를 찾아주겠다며 그녀와 한 약속을 저주했다. 혼인은 하되 손은 대지 않겠다! 그때는 그녀를 향한 갈망이 이토록 커질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었다. 단지 형수와 혼인하지 않기 위해 아버지를 속이는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휘는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뒤돌아섰다. 그녀의 처소를 빠져나갈 때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스럭거리는 발자국 소리에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그가 돌아보자 그녀는 문 밖으로 나왔다. 휘는 반가움에 성큼 다가가려다 그녀가 자신을 맞이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녀는 곧장 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이 밤중에 저렇게 얇은 옷만 입고 어딜 가는 거지? 혹시 벌써부터? 그리고 보니 정혼자를 찾는다고 했지. 그녀에 대한 의심이 확 피어올랐다.
휘는 발소리를 죽이며 뒤를 밟았다. 바람에 펄럭이는 옷이 그녀의 몸에 휘감겨 날씬한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녀를 안았던 느낌이 되살아났다. 그녀도 다른 여자들과 다르지 않으리라. 외간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는 둘 다 죽여 버리리라고 다짐했다.
문을 향해 가던 그녀가 갑자기 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내가 따라가는 것을 눈치챘나? 그녀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녀는 작은 보폭으로 종종거리면서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휘는 그녀가 보일 만한 곳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다가갔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흑… 흑… 새어머니… 아버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듯 그녀는 코앞에 서 있는 그도 못 알아보았다. 눈물을 연신 흘리며 손등으로 닦아 내는 모양이 어린아이 같았다. 휘는 살며시 다가가 그녀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마침내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멈춰세웠다. 그녀는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를 밀쳤다. 여전히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 꿈속을 헤매는 듯 계속 울기만 했다. 나쁜 악몽을 꾸는 듯했지만 이렇게 돌아다니며 꾸는 사람도 있나? 그녀가 정신을 못 차리자 애가 탄 휘는 그녀를 흔들었다.
「부인… 이보시오… 눈을 떠! 잠에서 깨란 말이오」 그가 그녀의 얼굴을 살짝살짝 때리자 그녀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잡혀 갔다.
「어때? 이제 깼소?」
그와 눈이 마주친 그녀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아… 여기… 검은 남자」 그 말을 내뱉고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대로 죽는 것은 아닐까? 깨끗한 그녀의 피부에 핏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가슴에 손을 댔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휘는 그녀의 가슴이 자기 손안에 꼭 맞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황급히 손을 떼었다. 아픈 사람을 놓고 무슨 상상을….
휘는 그녀를 안아들고 처소로 들어가 눕힌 뒤 하녀를 깨워 급히 의원을 부르러 보냈다. 그녀는 계속 식은땀을 흘리며 헛소리를 했다. 그는 땀을 닦아 주며 초조한 마음으로 의원을 기다렸다. 잠시 뒤 하인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의원이 급한 병자가 생겨 출타 중이라 집에 없답니다」
기다린 보람도 없게 만드는 하인의 말에 그가 벌떡 일어났다. 「뭐야? 이 성안에 의원이 한 집뿐이더냐? 다른 곳엔 사람도 안 보낸 게야?」
그의 고함 소리에 하인은 급히 잘못을 빌고 분주히 떠나갔다. 집안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단 한 사람 매당만이 아침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휘는 자신의 몸에 감기는 부드러운 몸을 느끼며 손으로 여자의 엉덩이를 쓸어내렸다.
「음…」
여자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퍼뜩 깨어났다. 눈을 뜨니 그녀의 몸 절반 이상이 그에게 겹쳐져 있었다. 난처한 상황이었다. 잠결에 그의 욕망은 이미 눈을 떴다. 도저히 진정될 듯싶지 않았다. 그녀는 악몽에서 벗어난 듯 편히 자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도착한 의원은 피로가 심신을 약하게 만들어서 악몽을 꾸는 거라고 진단하고, 심하면 그녀처럼 돌아다닐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는 옆에서 따뜻하게 돌봐주는 도리밖에 없다는 말만 남기고 별 처방 없이 그냥 가버렸다. 계속 새어머니, 아버지를 찾는 그녀를 껴안아 주면 진정된다기에 순전히 부모된 입장으로 안아 주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녀를 안는 것을 보던 사람들은 킥킥거리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긴 또 언제 지금처럼 나긋나긋한 그녀를 안아 보겠는가? 그는 그녀의 얼굴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 주었다. 검은 머리카락… 검은… 검은… 그러자 그녀가 중얼거린 검은 남자란 말이 떠올랐다. 대체 그 녀석은 또 어떤 놈이지? 정혼자에 검은 남자까지 이름 모를 남자들이 하나씩 등장하는 것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치희는 잠에서 깨어난 지 오래였다. 단지 알 수 없는 느낌에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제 저녁에 잘 때만 해도 이런 일은 전혀 예상 못했는데…. 몸 아래 절반이 그에게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왠지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았다. 혹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눈도 뜰 수가 없었다.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면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최고였다. 처음으로 꿈이 전부 기억났다. 그녀는 불타는 집 안을 울며 헤매고 다녔다. 어디론가 끌려간 새어머니 아버지를 찾아서…. 마침내 그들을 찾았을 때는 이미 당하신 뒤였다. 그녀를 발견한 새어머니가 어서 가라며 손짓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부모님은 불타는 나무 기둥 아래 깔렸다. 그녀는 그들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뒤에서 치희야…라고 부르며 묵거 오라버니가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도망가다가… 그래! 항상 생각나지 않았던 부분이다.
그때 그녀는 엉덩이를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을 느꼈다. 서서히 그의 다섯손가락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자극적인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다. 그녀는 빨리 자신을 다잡았다. 잠결에 쓰다듬었다면 그가 깨지 않길 바랐다. 다행히 더 이상의 움직임이 없는 것이 깬 것 같지는 않았다.
치희는 계속 생각을 더듬었다. 동굴에 도착하기 직전에 있었던 일… 그 검은 남자가 자신들을 놓아주던 일이었다. 분명히 그 눈을 다시 보았다. 꿈에서 보았지만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다시 보면 꼭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바로 복수할 대상이었다. 그들을 놓아주기는 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일은 변하지 않았다.
또다시 그의 손이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하나를 아프게 떼어내는 바람에 그녀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곁에서 낮고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건 어디서 나는 소린가? 정말 그가 웃는 것이 맞을까? 그에게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듣기는 처음이었다. 그녀가 얼굴을 대고 있는 가슴이 들썩거렸다.
「이제 그만 일어나시지. 잠 깬 것 다 알고 있소. 부인이 눈을 떠야 지금의 사태를 해결할 수 있소」 그는 최대한 목소리에 감정을 싣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그녀도 안심하고 눈을 뜰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녀가 살짝 눈을 떴다 감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치희는 완전하게 눈을 떴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벌어졌다. 바로 이 사람이었다. 휘가 그 검은 남자라니! 원수일지도 모르는 남자가 원수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치희는 다시 기절했다.
휘는 자신 때문에 두 번씩이나 기절하는 여자를 보고 당혹스러웠다. 의원이 잘못 진단하지는 않았을까? 이 여자는 큰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와 검은 남자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녀의 기절로 한껏 부풀어오르던 몸은 금세 차갑게 식었고, 그는 다시금 그녀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급히 몸을 일으켜 대충 옷을 걸친 후 달려나가 하인들을 향해 고함쳤다.
「당장 가서 의원을 다시 모셔와!」
6장
아침부터 가느다란 빗줄기가 떨어지더니 오후가 되어 서서히 개기 시작했다. 가을비가 한 번씩 찾아올 때마다 날씨는 더욱 추워지는 법이었다.
치희는 옷깃을 여미며 매당의 처소로 향하고 있었다. 며칠 전 치수를 재어 바느질에 들어간 수의가 완성되었다고 매당이 들르라고 한 까닭이었다.
부여와는 달리 고구려 사람들은 혼례를 치르자마자 죽을 때 입을 수의를 지어 놓는다고 했다. 읍루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냥 묻어 버리고 그 위에 돼지를 산처럼 쌓아 바쳤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마저도 못해 드렸다. 그녀가 원수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지내는 걸 알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한시 바삐 반역자란 누명을 벗어야 번듯한 장례라도 치러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매당의 처소를 찾은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매당은 괜찮다고 하지만 갓 태어난 아이 때문에 함부로 드나들 수 없어서 방문을 미루던 중이었다. 치희는 마침 아이도 볼 수 있어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재게 놀렸다.
매당의 처소로 막 들어서려는데 휘가 그곳에서 걸어나왔다. 마주치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주위 사람들로부터 요 전날 밤의 일로 휘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를 듣기는 했지만 모두 그의 연기에 속은 것이리라. 그래야 식구들에게 그들의 혼인을 의심받지 않을 수 있을 테니….
이제 그가 원수인 것은 분명해졌다. 오라버니들이 찾은 사람은 휘였다. 그의 첫인상이 기억났다. 꿈에서 본 남자와 온통 그의 주위를 휘감고 있던 그 검은 분위기!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치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수지만 눈부시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평소엔 흰 옷만 입더니 오늘은 왜 저리 차리고 나섰을까?
수를 놓은 회색 비단 옷에 금으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화려한 자주색 띠로 허리를 매었다. 그가 잘생긴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멋있어 보인 적은 없었다. 휘가 점점 다가오자 그녀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그날 아침 그녀를 쓰다듬던 그의 손가락의 느낌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와 마주 보기가 쑥스러웠다.
치희는 치부를 들켜 버린 것 같아 잠이 깬 뒤로 교묘히 그를 피해 다녔다. 열두살 이후로는 잠자며 돌아다닌 적이 없었다. 그 전까지는 두 오라버니가 번갈아가며 잠자는 그녀를 지켜야 했다. 노곤한 하루에 밤마다 사라지는 여동생까지 오라버니들의 희생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큰오라버니를 아버지라 부르며 안겨 잤었는데…. 그럼 휘에게 안겨서?
단단한 몸 위에 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그에게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가슴을 쓸어내렸다.
「들어오지 않고 왜 그러고 서 있소? 여기는 어쩐 일이오?」 예의 성량 풍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당의 처소에서 나올 때부터 침울한 표정이더니 그녀를 보고는 더욱 무뚝뚝해졌다. 그녀가 피해다니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옷이 다 되었다고 하기에 입어 보러 왔사옵니다. 제가 여기 오는 것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지요?」 치희는 자신의 입을 쥐어박고 싶었다. 굳이 적대감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는데….
「그런 게 아니라… 관둡시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어제 깨어난 이후 하루종일 방 안에만 있었다는데 무얼 하고 지냈소? 시간을 내서 아버지께도 좀 들르시오. 그리고 이제 부인이 안주인이니 서서히 이곳에 적응을 하고 하인들도 관리해야잖소」 그에게서는 전날 아침에 있었던 일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기분이 의외로 가라앉자 치희도 굳이 화내고 싶지 않았다. 「집 안을 이미 둘러봤지만 제가 할 건 없었습니다. 모든 일은 매당 형님께서 잘 처리하시더군요. 어제는 방에서 찾아낸 고의 줄을 고치고 있었지요. 오늘 아침에 모두 고쳤사옵니다」 치희는 이틀을 걸려 완성해 놓은 그 일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자신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분을 돋우어 주었다.
「부인이… 그러니까… 새어머니 방에 있던 그 물건을 고쳤단 말이오?」 뜻밖에 휘는 그 사실에 경악했다.
내가 고쳤다는 게 그렇게 충격일까? 「왜 제가 잘못 건드렸을까 봐서요? 음까지 맞춰서 조율해 놨사옵니다. 최소한 더 나빠지지는 않았답니다」 칭찬까지는 아니어도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치희는 기운이 빠지며 책망하는 그에게 섭섭함을 느꼈다.
「음… 지금은 바쁘니 다녀와서 얘기합시다」
왠지 그는 처음 봤을 때보다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그가 그녀를 지나쳐가려 하자 다시금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차리고 어디를 가시는지요?」 그녀 자신이 듣기에도 약간 독기가 서린 것 같아 깜짝 놀랐다.
그는 멈칫 하더니 뒤로 돌아섰다. 「유녀 집에 가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시오. 그리고 한 가지 더! 질투는 여자가 삼가야 할 행실 중 가장 악한 것이오 」
치희는 약이 오르기는 했지만 그의 뒷모습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왜 내가 질투를 한다고 생각했을까? 빠른 시일내에 단서를 찾아 이곳을 떠나야겠어. 미유 오라버니를 찾는 일은 얼마나 진전이 됐을까? 그녀는 너무 신경쓸 일이 많았다.
휘는 거추장스러운 옷들을 벗어버리고 평소 입는 흰 바지와 저고리를 챙겨 입고 하인에게 끈을 매게 했다. 밖에서 일을 보면서도 두 여자의 말이 계속 떠올라 빨리 끝내려던 일도 더욱 지연되고 말았다. 다행히 늦은 시각에서야 그는 대사 위거의 노력으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곡식을 싼 값에 조정에 팔고 조정은 그것을 위나라 군사에게 군량으로 대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염려 하나는 덜어드린 셈이다. 대신 두 나라간 전쟁의 결과를 염려하시겠지. 그리고 이번 일은 단지 밑지는 장사를 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오늘 태호가 좀 이상했었다. 그 눈빛,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문득 자신에게 요구한 군마 서른 마리가 떠올랐다. 혹시…? 요즘 태호가 모시는 우가와 대사 위거 사이에 감정이 좋지 않았다. 만약 그의 예상이 옳다면 어느 쪽이 이기든 그는 살아남기 힘들었다. 당장 조우를 시켜 알아봐야겠어.
옷을 다 입고 머리를 천으로 동여매자 아침에 들은 형수의 말이 또다시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아버지도 없는 우리 아이는 어쩌면 좋은지요. 사내아이에게는 아버지가 꼭 필요한 법인데… 흑흑… 서방님이 살아 계셨다면… 작은서방님께서 이 애의 아버지도 되어주셔야 합니다
고를 모두 고쳤어요 반갑지 않은 일을 해놓은 치희의 말도 있었다. 과연 그녀와 혼인한 게 잘한 일일까? 그녀가 온 후로 집안이 조용한 날이 없었다. 고만 해도 또 어떤 풍파를 일으킬지.
치희의 처소로 향하는데 개었던 하늘에서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발이 제법 굵었다. 쉽사리 그칠 비는 아닌 듯 보였다. 처마 밑으로 비를 피해 가려면 조우의 처소를 거쳐 매당의 거처 앞을 지나가는 길이 제일 좋았다.
막 매당의 처소를 벗어나려는데 하얀 그림자가 매당의 처소에서 나와 조우의 처소 쪽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었고 깜깜한 밤이라 누군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도둑인가도 생각해 보았지만 아직 불이 켜진 매당의 처소는 조용했다. 도둑이라면 시끌벅적해야 할 터였다.
휘의 입가에 뜻모를 미소가 배어나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궁금해하던 사건의 베일이 하나 벗겨진 셈이다. 지금은 치희를 보는 일이 더 급했다. 그러나 그녀의 방 앞에 섰을 때 그는 선뜻 들어설 수 없었다.
치희는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빗줄기가 굵사옵니다. 바람이 불어 방 안으로 들이치니 어서 창문을 닫으시지요」
소노가 치희를 재촉했지만 치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창문 옆에 붙어 있었다. 오후에 휘가 올 거란 말에 소노는 그녀를 꽃단장시켜 주었다. 화장을 하고 머리를 빗고 새로 지은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었다. 동경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어린 티를 벗은 성숙한 모습이었다. 하나 이런들 무엇 하겠는가? 진짜 부부도 아닌데.
시간이 늦어도 그가 오지 않자 치희는 연신 하품을 하는 소노를 쉬라고 내보냈다. 그가 아직도 도망간 전 부인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매당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녀의 방문을 잠가 두고 어느 누구도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또 아이에게 아빠가 필요하다는 매당의 말도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 휘의 형수이기는 하지만 매당은 충분히 좋은 아내가 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시아버지와 매당 그리고 예쁜 아기, 모두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녀에겐 어느새 소중한 사람들이 되었다. 지난날의 과오를 밝히는 과정에서 그들도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닐까?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자신의 처지처럼 처량하게 들리고 비에 맥을 못추고 떨어지는 나뭇잎은 그녀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했다. 비가 안으로 들이치자 그녀는 살짝 피했다. 고에 비가 다가들 것 같아 한쪽으로 치우려고 악기를 들었다. 고생은 알아주지도 않고 빈정거린 그가 다시 생각났다. 손가락으로 줄을 하나 퉁겼다. 청아한 소리가 마음을 달래주는 듯했다.
치희는 무릎 위에 악기를 올려놓고 음을 맞춰 보았다. 조율이 잘되어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어느 결에 연주를 하고 입으로는 노래를 불렀다. 멀리 두고 온 님을 그리워하는 곡이었다. 지금의 자기 처지와 비슷했다. 돌아가신 부모님, 오라버니들과 추아저씨, 그리고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미유 오라버니까지 모두 그리웠다.
악기의 소리와 그녀의 노래가 점점 애절해지면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목이 메이고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연주하기가 힘들었다. 치희는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싸늘한 바람이 피부에 느껴졌다. 얼룩진 눈 너머로 열린 문 앞에 굳은 채 서 있는 휘의 모습이 들어왔다.
「밤이 늦어 내일 오실 줄 알았사옵니다」 치희는 그를 맞기 위해 무릎 위의 악기를 치웠다.
「내가 오늘 들른다고 했잖소」 그는 문지방에 선 채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왜 그러고 계신지요? 바람도 찬데 문을 닫아 주시면 좋겠사옵니다」 치희는 평상을 내려가 그를 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 역시 현명한 생각인지 판단할 순 없지만 비에 젖은 그를 밖에 세워둘 수는 없었다.
「저…」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부인 먼저 하시오」 휘가 양보를 했다.
「제가 말씀드린 그 사람은 찾았는지요? 그를 빨리 찾고 싶사옵니다」
「왜 내가 일부러 찾지 않는 것 같소? 걱정 마시오. 부인을 빨리 보내기 위해서라도 그를 반드시 찾겠소」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화난 목소리가 분위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제 말뜻은 그게 아니옵니다. 단지 어느 정도 진척되어 가는지 알고 싶을 뿐이옵니다」 그녀의 어조에는 그를 달래는 힘이 있었다.
「부인의 설명이 너무 부족하오. 부인과 같은 나이에 이름은 미유, 그 옥패의 반쪽을 가지고 있다, 이걸로는 찾기 어렵소. 집안이라도 안다면 모를까」 그는 그녀와 말을 할수록 더욱 화가 끓어올랐다.
「그럼 절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지요?」 용건이 끝났으면 나가 달라는 투였다.
할 말을 찾던 그는 자신이 여기 온 이유를 떠올렸다. 새어머니의 고! 휘는 낮으면서도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 악기를 고쳤소? 그게 어떤 것인지 알고나 손을 대는 거요?」
치희는 화부터 버럭 내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망가뜨린 것도 아니고 고생해서 고쳐 놓았더니 고맙다는 말은커녕 이렇게 화를 내셔도 되는지요?」 그에게 섭섭하기도 하고 화가 나서 그녀도 받아쳤다.
「그건… 새어머니의 마지막 남은 유품이란 말이오」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방 밖에서 듣던 악기 소리와 어우러진 그녀의 애절한 노랫소리 위로 그는 잠깐 새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었다. 그런 역사를 또다시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제가 원래대로 고쳐 놓았잖사옵니까. 실을 꼬느라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아십니까?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괴를 찾아 방 안을 두 번이나 뒤졌습니다」 새어머니의 유품이라는 말에 뜨끔하기는 했지만 그게 화낼 이유는 아니지 않은가.
「난 끊어진 줄이 더 좋소. 그 줄이 끊어져 있어야 마음이 편하단 말이오」 그가 신발을 신은 발로 평상 위로 급히 뛰어올라왔다. 그러고는 고의 줄을 모두 한손에 잡아쥐었다.
줄을 끊으려는 것이다. 치희는 그의 손에서 악기를 빼앗았다. 그 바람에 그의 손가락에 걸린 줄 2개가 끊어졌다.
「아니 됩니다.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다시 끊어 버리다니요」 악기를 안고 보니 그의 손에서 피가 흘러 흰 옷에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그 줄은 끊어진 채 있는 것이 가장 좋소」 그는 손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악기를 다시 빼앗아들었다. 「다시는 이 물건에 손대지 마시오. 아니, 아예 찾을 생각도 하지 마시오」 그는 악기를 들고 휭하니 나가 버렸다.
치희는 휘가 집무를 보는 서재를 뒤지고 있었다. 전에 한 번 들어와 보기는 했지만 뭐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치사하게 악기까지 가져갈 건 뭐야? 아무리 가짜 혼인이고 가짜 아내라지만 이런 대우를 받으며 있을 순 없었다. 그도 오라버니를 못 찾는다면 빨리 서류나 찾아 여기를 떠나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어차피 그는 집안의 원수였다. 부모를 죽인 원수!
책장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그녀는 문서 쪽으로 옮겨갔다. 꼼꼼하게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지금이 병인년(246) 8월…. 문서를 한 뭉텅이 들어내었다. 2월… 없었다. 옆의 문서함으로 옮겼다. 갑자년(244) 7월… 또 한 뭉치를 더 들어냈다. 경신년(240)… 그때가 병진년(236)이니까… 아마 이쯤에 있을 것이다.
그때 밖에서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인이 지나가는 소리인지 다행히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러고 있다가 발각되면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그녀는 오후에 휘가 집을 나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이곳으로 왔다. 집안의 오명을 벗을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꿈속의 검은 남자는 그녀를 살려 주었다. 그리고 휘는 태호로부터 그녀를 구해 주었다. 그러나 그가 부모님의 원수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문서함 하나가 바닥을 드러내도 무오년(238)이었다. 대충 넘기며 언뜻 보기에도 그는 안 가본 나라가 없었다. 들어낸 것들을 정리하고 옆 가구의 문을 열었다. 병진년(236)… 찾았다. 그때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분명히 이 방을 향해 오고 있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곧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급히 서류들을 밀어넣고 함 뚜껑을 닫자 아슬아슬하게 문이 열렸다. 치희는 몸을 일으켜 들어오는 그를 맞았다.
「부인이 여긴 어인 일이오?」
퉁명스럽게 묻는 그의 말에 서방님이 한 짓을 확인하러 왔어요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삼켰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사옵니다. 안 계시길래 구경을 좀 하던 중이었습니다」
휘는 그녀를 지나쳐 들어와 탁자에 앉았다. 그에게서 옅은 술 냄새가 풍겼다. 마침 잘되었다 생각한 그녀는 조용히 문가로 걸어갔다.
「약주를 하신 것 같으니 다음에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서야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나중에 가지러 오면 된다.
「전에 태호를 만났소. 어떤 말이 오갔는지 궁금하지 않소?」 휘는 등을 돌리고 나가려는 그녀에게 미끼를 던졌다. 곧 반응이 왔다. 그녀가 다가와 그의 앞에 앉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요? 말씀해 보시지요」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이런 이야기만이 그녀의 주의를 끌 수 있다니.
「왜 내게 읍루 사람이라는 얘기를 안 했소? 속은 기분이 들더군. 그 밖에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되오?」 집안 사람들 모두에게는 생글거리면서 자신은 피해 다니는 그녀에 대한 불만을 그는 이런 식으로 터트리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가 되나요? 제가 읍루 사람이라 혼인을 취소하고 싶으신가요?」 치희는 그도 별수없는 속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허락한 이상 문제는 없소. 다만 조금 놀랐을 뿐이오. 이제껏 부인이 부여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으니 말이오. 그러고 보니 이해가 되는군. 말을 잘 타는 것이나 예절을 모르고 행동한 것들이 말이오」
그가 엉뚱한 말만 늘어놓자 그녀는 태호와 있었던 일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읍루에서 살았지만 부여 태생이옵니다. 태호라는 사람과는 어떻게 됐는지요?」
「걱정 마시오. 그에게 부인 대신 훈련된 군마 서른 마리를 주기로 했소. 혼인 선물치고는 너무 과하지 않소?」 말과는 달리 그의 눈은 그녀에 대한 욕망으로 한껏 달아올라 불타고 있었다.
「그 과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 제게 원하는 것이라도 있사옵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후회했다. 그가 오해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득인다고 느낀 순간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이번엔 애를 태울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기꺼이 입을 열어 주었고 그의 혀가 그녀를 자극하자 머리 속이 환해지며 몸 깊은 곳으로부터 전율이 전해져 왔다. 그가 원수라는 것도 잊었다. 욕망 앞에서 이성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녀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안으며 그가 주는 쾌락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그가 갑작스레 입술을 떼고 목에 두른 그녀의 팔을 풀어냈다. 「지금 장난하는 거라면 당장 그만두시오. 부인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 그리고 난 부인이 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지. 난 강제로 뺏지는 않을 것이오」 그는 자제하지 못한 자신을 향한 분노로 몸을 떨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일어선 휘는 옷 위로 솟은 그녀의 가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거절당한 상처, 당혹감, 그리고 같이 잠에서 깨어난 아침 이후 그녀를 지배하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막 여자로서 눈뜨는 아내였다. 그러나 결코 손을 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약속하지 않았던가. 아내로서의 의무는 없을 것이며 정혼자를 찾아주겠노라고. 정말 바보 같은 약속이었다. 여기서 등을 돌리고 나가야 하는데 자신이 없었다.
「휴…」 그가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뭔가 단단히 결심을 한 듯 비장한 표정까지 엿보였다.
그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팔을 뻗어 그녀를 으스러지게 감싸안았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날 아침에 웃음으로 들썩이던 그 가슴에서 요란하게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휘는 탐스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볼 때마다 만져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머리였다.
「이건 부인이 시작한 일이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굶주린 듯 강렬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도 본능적으로 입술을 열고 그의 뜨거운 입술을 받아들였다. 오늘 밤 그를 자극하여 취하고자 한 것이 이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입맞춤에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치희는 자신이 그런 소리를 냈다는 것조차 모르고 그에게 열중해 있었다. 그가 다급히 그녀의 허리 띠를 풀었다. 금세 앞섶이 열리고 그녀의 가슴이 드러났다. 그녀의 가슴이 그의 손에 꼭 맞게 쥐어졌다.
「음… 아…」 그의 조그만 손놀림에도 그녀는 신음을 삼켜야 했다.
그녀의 신음 소리에 자극받은 그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든 듯 와락 끌어안았다. 「젠장! 부인은 악녀 같소. 날 무너지게 만든단 말이오. 더 이상 부인에게 손을 댔다간 정말 강제로라도 빼앗을지도 모르오. 난 부인을 이불 속으로 데려가 밤새 사랑을 나누고 싶소…」 그가 다시 머리를 쓰다듬으며 얼굴에 짧은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의 손이 목뒤를 지나 다시 가슴으로 내려올 때 가죽끈에 매달린 반 조각짜리 푸른 옥패가 잡혔다. 반 조각이라….
동서는 가끔 목에 걸린 옥패를 보며 울어요.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요?
형수의 말이 생각나자 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휘는 옥패를 잡아채 그녀의 목에서 떼어냈다. 그리고는 손을 높이 쳐들었다.
치희는 몸 속에서 타오르는 그를 향한 갈증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빚어내는 희열, 입술의 부드러움, 몸 전체의 감각이 열 배는 민감해져 그가 베푸는 향연을 만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목에 그의 손길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가죽이 당기는 통증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눈이 번쩍 떠졌다. 그의 손에 들린 옥패가 바닥으로 내리쳐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미유 오라버니! 안 돼!
「안 돼!」 치희는 옥패를 필사적으로 빼앗아 들었다. 그의 힘에 밀려 바닥으로 쓰러졌지만 다행히 옥패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녀는 옥패를 가슴에 꼭 품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조차도 그녀는 그를 경탄시켰다. 달아오른 뺨, 풀어헤쳐진 저고리 앞으로 흘러내린 까만 머리와 대조되는 하얀 젖무덤, 그리고 방금 전까지 그의 손끝으로 굴리던 유두까지. 한 인간에게 저런 아름다움을 몰아준 신이 저주스러울 정도였다.
그녀의 눈빛이 번뜩였다. 눈빛만으로도 그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은 칼이 되어 그의 가슴에 박혔다.
「그렇군. 이제서야 정혼자가 생각난 모양이군. 왜 아까 유혹하듯 날 바라볼 때는 그가 생각나지 않았소?」 굳어진 입매 사이로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난 그의 대용이 아니오. 나도 앞으로 여자가 생각나면 다른 사람을 찾겠소」
돌아서는 그의 등뒤에서 그녀의 눈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미유 오라버니를 감히! 우리 가족을 이렇게 만든 그가…. 그리고 나는? 이 지경까지 오도록 놔두다니! 그의 말들과 행동이 상처에 기름을 붇고 거기에 동조한 자신의 행동이 그 상처에 불을 질렀다. 어떻게 내가… 그에게…. 옥패를 쥔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문 앞까지 간 그가 걸음을 멈추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였다. 「여기까지 찾아와 물어 볼 말이 뭐였소?」
「제 정혼자를 찾았는지요?」 그도 분노를 느끼기를 바라며 최대한 태연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쾅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눈물을 참으려고 최대한 이를 악물었다. 저 사람 때문에 우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골은 점점 더 깊어만 갔고 그 때문에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바싹 긴장을 해야 했다. 낮에는 휘가 상처입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고 밤이 되면 돌아다니는 치희의 병은 더욱 심각해졌다. 영문도 모른 채 하인들은 두 사람이 빨리 화해하기만을 바랐다. 조우는 일 때문에 며칠째 집을 비웠고 매당도 손 든 상태였으므로 일은 집안의 어른이신 시아버지에게까지 전해졌다.
「싸움을 해서 말도 안 하고 지내는 것 같다고? 허허! 그 녀석이 그 일로 하인들에게 고함을 질러?」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는 걱정은커녕 얼굴 가득 웃음을 띠웠다. 어리둥절한 하인을 앞에 두고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가 말했다. 「오늘 저녁은 식사를 같이 할 테니 모두들 모이라고 전하거라」
그날 저녁 그들은 한 자리에 모였다. 매당이 아이를 데려와 할아버지에게 손자를 안겨드렸다. 방글방글 웃는 손자를 안고 할아버지는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휘와 치희에게선 여전히 한기가 풀풀 날렸다. 시아버지는 매당에게 아이를 돌려주며 말했다.
「큰아가, 요사이 네가 바쁘다고 들었다. 저 애들 잔치 준비하랴, 집안 돌보랴, 아이 보랴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 그래서 내가 그 짐을 좀 덜어 줄 생각이다」
「아니에요, 아버님. 모두 제가 할 일인데요」 매당은 급히 부정하며 시아버지의 걱정에 송구스러워했다.
「너희 둘, 이 집의 장자가 될 이 아이는 너희들의 자식도 되느니라. 큰아기가 집안일을 돌보는 낮에는 젖어미가 돌보지만 저녁까지 맡겨 둘 수도 없으니 당분간은 너희 둘이 보도록 해라. 어느 한쪽에 책임을 전가시킬 시에는 용서치 않을 것이야」
두 사람에게는 불벼락 같은 말이었다.
「아버지…」
「아버님… 저…」
휘와 매당, 치희 모두 항변을 하려고 했지만 결정권자가 손을 들어 그들의 말을 저지했다.
「휘, 네 이놈! 아이가 태어난 후 제대로 이 애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나도 안다. 이 녀석은 앞으로 태어날 네 녀석의 아이들 못지않게 중요한 우리 집의 후계자니라. 네 형을 보듯 돌보도록 해라. 그리고 작은아가, 너는 집안일에 손 하나 까딱을 안 하더구나. 갓 시집와 모른다고는 하나 매당 저 아이 혼자 얼마나 고생이 심하겠느냐」
모두 사실이었므로 아버지의 호통에도 두 사람 다 할 말이 없었다.
「당장 오늘 저녁부터 데리고 있다가 아침이 되면 어미에게 데려다 주거라. 그리고 전 며느리가 쓰던 방을 손보도록 했으니 끝나는 대로 작은아기는 그리로 옮기도록 해라」
그의 명령이 떨어진 후, 식사는 침묵 속에 진행되었다. 상에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음식이 가득했다. 곡식을 갈아서 시루에 찐 밥과 소금에 절인 채소 외에도 조(俎:위가 평평하고 다리가 달려 도마와 비슷한 모양의 그릇)와 두(豆:반구형으로 안이 파여 그 안에 음식을 담고 밑에 납작하게 펴진 다리가 하나 있는 그릇)에는 사슴고기, 돼지고기, 생선이 올라와 있었고 젓갈과 보기 힘든 과일과 술도 차려져 있었다. 모처럼 식구들이 함께 모인다고 해서 매당이 정성껏 차린 것이었다.
그러나 치희와 휘는 음식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돌을 씹는 것 같았다.
태호는 과거 아내의 친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안에 그 여자가 있단 말이지.
성내 유력한 집안에선 곧 열릴 이 집 잔치에 대한 기대가 컸다. 워낙 부자인데다 집에조차 알리지 않고 한 혼인, 거기에 하인들의 입을 통해 오르내리는 부인의 미모 등이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입소문을 대할 때마다 태호는 그녀가 더욱 갖고 싶어졌다. 세상의 관심이 되는 것은 모두 그가 가져야 했다. 위거나 휘가 아닌 바로 자신이.
맞아! 며칠 후에 성안의 한 대가의 생일잔치 집에서도 그들을 만날 수 있겠군. 그 대가와 휘의 친분이 두터웠지. 잘하면 그 여자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인나리! 저 집은 여전히 조용합니다. 그 여자는 밖으로 한 발도 나오지 않습죠」 몇 날 며칠 한 곳만 지켜보자니 좀이 쑤신 부하가 짜증을 냈다.
그가 여기 온 이유도 그래서였다. 심복의 말에 의하면 부하들 사이에서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런 일을 시키는 그를 못마땅해하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거사를 치르기 전에 그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면 모든 것이 헛일이다.
「그도 우리의 거사와 관계가 있으니 잘 지켜보거라. 그가 혼인한 시기가 절묘하니 필시 그의 부인도 우리 일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의 한마디에 부하들이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꼭 설명을 하고 명분이 있어야만 움직이는 멍청한 놈들. 위거를 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위거가 밀어 준 위의 관구검 세력이 고구려 위궁(동천왕)에게 무참히 깨지고 있었다. 소식통에 따르면 비슈류에서 3천, 양맥곡에서 3천 명의 병사가 죽었다고 했다. 위나라를 밀어 주자고 대가들을 설득한 위거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때가 그를 칠 기회였다.
막 돌아가려는데 휘의 집에서 수레가 한 대 나왔다. 작은 것이 여인들이 타는 수레였다. 태호는 부하 몇 명을 데리고 급히 뒤를 쫓아갔다. 수레가 한적한 곳에 이르자 일당은 수레 앞을 막아섰다. 안에서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주아야! 왜 멈추느냐? 무슨 일이지?」
「아씨! 괴한들이 앞을 막았습니다」 수레 앞에 선 하녀가 안절부절못하며 고했다.
「안에 있는 사람은 봉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내리시오」 그의 부하가 소리쳤다.
휘장이 걷히더니 흰 옷을 입은 아름다운 부인이 내렸다.
젠장, 그녀가 아니었다. 「이제 가보시오」
「혹시, 우가장의 태호님이 아니신지…」
여자의 말이 돌아서는 태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자신을 알아본 여자를 급히 돌아보았다. 이 사실이 새어나가면 좋을 것이 없었다.
매당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시누이의 남편이자 자신을 이 집에 시집올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준 사람. 시동생과 앙숙인 그가 이 집의 수레를 막았다면 필경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기억하실지 모르지만 매당입니다. 우가 댁에서 저를 중매해 주셨지요」
태호는 금세 기억이 났다. 자신만큼이나 재물에 욕심이 많던 모녀가 떠올랐다. 가보를 내놓으며 부잣집에 중신을 놓아 달라고 부탁을 했었지. 혼례를 치른 후에는 아는 척도 않더니….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인 줄 착각했습니다」 태호는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저의 동서를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매당은 그의 눈초리가 바뀌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내 짐작이 맞았어. 그는 탐스럽고 아름다운 여자라면 결코 놓치는 법이 없었다.
태호는 속으로 뜨끔했다. 저 여자는 보기보다 영리했다. 그리고 재물에 욕심이 많지. 그러자 한때 떠돌던 소문이 떠올랐다. 휘가 취수혼을 피해 시골로 갔다고 했지.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감돌았다. 나와 같은 편이 되겠군.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십시오」 짧은 그 말은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주고받는 눈빛 속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매당이 웃음을 흘리는 것으로 보아 그녀도 뜻을 이해한 것 같았다. 의외로 그녀를 잡기가 더 쉬워질지도 모르겠다.
치희는 시아버지의 난데없는 명령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첫 날은 두 사람 다 뜬눈으로 밤을 새고 말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도 이유지만 낮에는 얌전하기만 하던 아기가 밤만 되면 이유도 모르게 보챘다. 젖어미가 젖을 주러 올 때만 빼고는 계속 울어댔다. 시간을 나누어 번갈아 가며 보긴 했지만 아이의 울음 소리에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둘째 날부터 치희는 아기가 미워지려고 했다. 하루 새에 친해졌는지 휘가 볼 때는 젖어미의 젖을 먹고 조용히 자던 아이가 그녀 차례만 되면 깨어나 시끄럽게 울었다. 별별 짓을 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가뜩이나 안는 것조차 부담스러운데. 그에게 도움을 청하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낮에는 매당의 일을 돕고 밤에는 아이와 씨름하기를 6일. 어느덧 그녀도 지쳐 우는 아이를 안고 꾸벅꾸벅 졸기에 이르렀다. 아침에 깨어서야 그가 밤새 아기를 대신 봐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루 내내 그게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원수라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는 해야겠는데 일주일 가까이 말이 없다가 대뜸 말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 밤도 역시 끔찍하겠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처소로 들어서던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멈추었다. 휘가 그녀의 방 평상에서 온통 물을 튀겨가며 아기를 목욕시키고 있었다.
「이 놈! 목욕을 하니 시원하지? 이제는 울지 말고 잘 자야 한다」 젖어미가 옆에서 거들기는 했지만 그는 제법 능숙하게 아이를 받치고 물을 끼얹으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연약한 아이를 쓰다듬는 그의 섬세한 손길, 부드럽게 아이를 어르는 모습이 세상 어느 것보다 감동적이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는 딸꾹질을 하는 아이를 물에서 꺼내어 물기를 닦아주었다.
치희는 무엇에 홀린 듯 다가가 아이의 작은 손을 만져 보았다. 커다란 옷에 가려 보이지 않았는데 이렇게 손가락이 작을 줄이야.
「그 뒤에 아기 옷 좀 주시겠소? 추운지 딸꾹질을 하오」
걱정스런 그의 말에 치희는 깨끗하게 개켜진 아기 옷을 집어 그에게 건넸다. 그가 말을 걸었어.
그는 아기에게 능숙하게 옷을 입히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저렇게 아기를 잘 다룰 수 있나? 아니면 특별한 능력이라도? 그녀는 그의 손을 계속 지켜보았다. 조심스럽고 유연한 움직임… 나를 만질 때도 저랬어.
그녀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를 증오하는데도 새로 깨어난 여자로서의 반응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원수야! 원수! 원수! 마음속으로 계속 외치고서야 떨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시아버님은 빨리 화해하라고 이런 일을 시키셨겠지? 그의 이런 모습을 더 보다가는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만약 그를 좋아하게 된다면…. 아니지, 차라리 빨리 화해하고 아이를 새엄마에게 보내야겠다.
「어쩜 이렇게 아이를 능숙하게 다루시는지요? 며칠 사이에 이뤄진 일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숨겨 놓은 아이가 있소. 그 애를 돌보다 보니 늘었다오」
옷을 다 입힌 아이를 이불 위에 올려놓고 바람이 들어갈세라 꼼꼼히 싸는 그를 보던 치희는 그의 말에 고개를 획 들었다. 도망간 전처에, 이제는 숨겨 놓은 아이까지?
그녀에게서 말이 없자 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충격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며칠 만에 말을 하게 된 것이 반가워 분위기를 바꾸려고 한 마디 했더니 또 굳어 버렸군.
「농담이오. 그저 해본 말이었소. 사실은 형서 부인에게 부탁해서 실습을 좀 하고 왔소. 부인한테는 우스갯소리도 못하겠구려」 내게 아예 관심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그는 유쾌하게 생각했다. 「이제 화해합시다. 그래야 부인도 밤에 잠을 잘 수 있을 것 아니겠소」
정말 걱정이 돼서인지 괜한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말을 안 했으면 그녀라도 나설 참이었다. 밤에 잠을 못 자는 것은 대단한 고문이었다. 자면서 돌아다닌 것과 자고 싶어도 못 자는 것과는 차원이 틀렸다.
그가 먼저 화해를 청해온 것이 고맙기는 했지만 대뜸 응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의 줄을 끊은 연유를 설명해 주시면 화해하지요」
그의 눈에 잠깐 분노가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꼭 다물었다. 분위기가 무거운 걸 느꼈는지 유모는 아이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치희는 괜한 걸 물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냥 화해하는 건데…. 오늘 밤도 잠자기는 틀렸다고 체념하려는 찰나 그의 입이 열렸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고구려에서 이 나라로 오신 뒤로 사이가 좋지 않으셨소. 난 항상 그 악기 때문에 싸우는 소리를 들어야 했소. 어머님이 악기를 타시며 노래를 부를 때면 아버님은 언제나 화를 내셨지. 나중에는 어머님에게서 악기를 뺏고 시골집으로 보내셨소. 처음엔 아버지를 원망했지. 고구려를 그리워하는 새어머니를 왜 그렇게 미워하실까 하고 말이오. 커서야 알게 된 거지만 새어머니는 그 악기를 타며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셨소. 아버님이 화를 내신 것도 당연하지.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어머님이 연주를 하실 때마다 우리를 버리고 떠나시지는 않을까 걱정해야 했다오. 아버님도 형님도 선유도 마찬가지였지. 그래서 형과 내가 저 줄을 모두 끊어 버렸소. 어머님은 그 뒤로 악기를 타지 않으셨는데 세상과도 인연을 끊고 그 시골집에서 지내셨소. 부인의 처소는 아버지와 가장 가깝소. 여기서 악기를 타면 그 소리가 안채에까지 들리오」 그는 남의 이야기하듯이 말을 이어갔다.
「그건 몰랐습니다. 그때 줄을 끊은 것을 후회하셨는지요?」 그녀는 가급적 그가 말을 많이 하도록 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에게서 예상치 않았던 고백을 들은 터라 그녀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그렇소. 형님과 나는 무척 후회했소. 그 뒤로 어머님은 당신 주위의 모든 것과 담을 쌓고 사셨으니까. 우리가 원망스러우셨을 거요. 우리는 새어머니 없는 아이들처럼 자라났지」 그는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어머님이 그렇게 된 것은 누구 탓도 아닙니다. 제가 어머님이었더라도 자식들에게 걱정을 끼친 자신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단절하고 당신 속으로 숨고 싶기도 하셨겠지요. 그 기간이 너무 길었던 것이 안된 일이었지만요. 그러니 더 이상 자책하지 마시어요」
휘는 다소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날 아버님이 들으셨다면 화를 내셨을 터인데, 아무 말 없으신 걸 보니 들리지 않았나 봅니다. 이제 악기를 돌려줄 수 있겠지요?」
「안 되오」 그의 대답은 번개같이 곧바로 날아왔다.
「그건 그저 악기일 뿐입니다. 얼마나 소리가 아름답고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데요. 제가 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지요?」
한순간 풀어질 것처럼 보이던 그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방 밖에서 들리던 그녀의 애절한 노랫소리와 그녀의 눈물이 다시 떠올랐다.
부인도 역시 그 악기를 타며 정혼자를 그리워할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허락할 수 없소 입 안에서만 맴돌 뿐, 차마 밖으로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요. 그 악기는 나의 진정한 부인만이 탈 자격이 있소」
맞아, 난 진짜 그의 아내가 아니었지.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왜 이리 온몸이 떨리는 거지?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상처받은 듯한 치희를 휘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역사가 되풀이되려는 걸까? 그는 결국에는 악기를 타는 것을 허락하고 말리라.
그가 나가자 치희는 그가 원수라고 애써 머리에 되새기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나서는 괜한 걸 물었다고 후회했다. 그의 아픔을 한 가지 알게 되었고 그의 인간적인 면을 본 것은 좋았지만, 화해를 못했으니 치희는 또 밤새 아기를 봐야 할 것이다.
둘만의 조용한 소풍이었다. 가을비가 내린 후 아침 날씨가 더욱 쌀쌀해졌지만 오후에는 바람도 없고 햇살이 따뜻했다.
치희는 오늘 아침 그가 찾아와 제의한 화해를 받아들였다. 자신의 속마음은 조금도 내비치지 않고 아기를 매당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다시 한 번 아버지를 속이자는 것이었다. 이 소풍도 식구들을 속이기 위한 행동의 하나였다. 거짓으로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또 다른 거짓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녀도 그와 더 이상 신경전을 벌이며 힘을 소진하고 싶지 않았다.
뒷문을 나서 성벽을 타고 돌아나가 한참을 더 가자 숲이 나왔다. 나무와 풀들이 내뿜는 향기에 어느새 그녀의 마음은 많이 누그러졌다. 「여기서 쉬어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곳도 멋진데요」
그는 그녀와 보조를 맞추면서 말을 계속 걷게 했다. 「조금 더 가면 나만의 비밀 장소가 있소. 보면 놀랄 테니 기다려 보오」
계곡을 따라 더욱 안쪽으로 들어가니 물소리가 들렸다. 폭포였다. 가을 단풍과 어우러진 폭포의 장관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정말 아름다워요. 어떻게 이런 곳을 알아내셨는지요?」
넋을 잃고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휘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이 나라는 호수도 많고 산이나 구릉도 많다오. 그래도 이런 곳은 흔치 않소. 부인이 기뻐하는 것을 보니 나도 좋구려. 조금 더 갑시다. 더한 장관을 보여주겠소」
폭포를 따라 오르자면 말은 아래에 매어 놓고 걸어가야 했다.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라구요」
「그건 보고 나서 판단하구려」
그가 앞서 걸어갔다. 길이 험해서 간간이 그가 손을 잡아 주어야 했다. 치희는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짜릿한 기분을 맛보았다. 밤마다 같이 지내면서 두 사람 다 서로 무척 조심했다. 조금이라도 닿으면 불이 붙을 것 같아서였다.
힘든 오르막길이 계속되더니 그가 그녀의 손을 이끌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길도 없었다. 둘은 짐승도 다니지 않을 것 같은 곳으로 풀을 헤치며 걸었다.
「어디로 가시는지요? 이러다 길을 잃지 않겠습니까?」
「겁먹지 말고 따라오시오. 틀림없이 좋아할 거요」
한참을 가자 산 속에 있을 법하지 않는 공터가 나왔다. 그리고 그 풍경은….
그녀는 공터가 시작되는 입구에 서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공터를 하나 가득 메운 노란 꽃들에 눈이 부셨다. 무릎 정도 높이의 작은 꽃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정말… 정말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그녀는 꽃이 다칠까 발도 뗄 수 없었다.
「자, 이리 와봐요」 그는 많이 와본 듯 꽃들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쉽사리 찾아냈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꽃밭 가운데로 나아갔다. 신기하게도 한가운데에는 꽃이 없고 키가 낮은 풀들만이 자라고 있었다.
「신기하옵니다. 이곳에만 꽃이 없다니. 정말 소풍 오기 딱 좋은 곳입니다」
그는 가지고 온 깔개를 풀 위에 깔고 그 위로 작은 짐보퉁이를 내려놓았다.
「서 있지 말고 앉으시오. 오느라 힘도 들었을 테니 요기나 합시다」
그가 부시럭거리며 보퉁이를 열자 그녀도 거들었다. 밥과 반찬거리, 간식거리, 과일, 물통 등이 들어 있었다.
「어떻게 이런 곳이 있는 줄 아셨는지요? 길도 없던데」 치희는 과일을 하나 들어 베어 물었다. 부여에서는 과일을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이것도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겠지.
「사냥 나왔다 발견했소. 처음 발견했을 땐 꽃이 이렇게 많지 않았지. 동생 선유를 데리고 한 번 놀러온 뒤부터는 그 애가 이곳을 가꾸었소」 목소리엔 동생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그럼 이것도 일부러 만든 곳인지요?」 치희는 그들이 앉은 풀밭을 가리켰다.
「물론이오. 소풍 올 때마다 선유는 꽃을 깔고 앉지 못하겠다고 했지. 베어 버리자고 했더니 선유가 우겨서 이곳의 꽃을 옮겨 심었소. 아마 저 어디쯤 될 거요」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도 꽃들은 가득했다.
「향기가 참 달콤합니다. 이 꽃이 무슨 꽃인지도 아시는지요?」 치희는 손을 뻗어 닿는 가지를 하나 꺾어 향기를 맡아 보았다.
「선유가 부인과 똑같이 물었을 때 조우가 뭐라고 했는데 기억나지 않소. 그때 난 작은 국화라고 했지. 지금은 땅이 거의 고르게 보이지만 이곳을 만들기 위해 꽃 아래에 깔린 돌들을 치워야 했소」
「잡초도 별로 섞이지 않고 꼭 누가 가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모르겠소. 선유가 시집간 후로는 와본 적이 없으니까. 어쩌면 죽은 선유가 돌보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휘는 아직 꺼내지 않은 짐을 살피더니 잔과 술병을 내었다. 그는 스스로 잔을 채우더니 한 잔 들이켰다.
「제가 괜한 얘기를 꺼낸 모양이옵니다. 이곳에 데리고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녀의 말에 휘가 고개를 들었다. 쑥스러워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휘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부인에게 화낸 것은 미안하오. 고를 퉁기는 부인을 보니 아버님이 생각났소. 그 당시에는 어머님께 화내는 그분을 원망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소」 그도 다른 한 손을 뻗어 꽃을 꺾어들더니 빙빙 돌렸다.
「난 부인이 그를 잊고 나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소. 형님의 아이를 보면서 내 아이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 부인은 어떻소? 부인의 인생에 나라는 존재를 받아들여주면 좋겠다는 말이오. 난 한 번의 실패 후 다시는 혼인을 하지 않으려고 했소. 헌데 그런 다짐을 깨고 부인을 맞이했고 이제는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소. 내 곁에서 그 실패의 상처를 지워주지 않겠소?」 그는 어렵게 말을 마쳤다. 그리고는 치희에게 자신의 눈을 바라보게 했다. 말보다는 눈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뚫어질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난 부인을 원하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매당 형님은 어쩌시구요? 모두들 두 분이 혼인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하지요」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요구에 응하고 싶어하는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걱정 마시오. 매당은 나의 형수일 뿐이오. 그게 걱정이라면 따로 살 집을 구해 내보내겠소」
「아니될 말입니다. 형님은 제게 너무 잘해 주셨어요. 형님을 내보낼 수는 없지요」
한풀 꺾인 그녀의 눈빛으로 보아 그녀도 그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욕망으로 떨리는 그녀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그럼 이번 일만 끝나면 시골로 돌아가 말들을 돌보며 삽시다. 부인이 내 사람이 되는 걸 허락한 걸로 알아도 되겠소? 이 꽃은 부인과 어울리겠군」 휘가 그녀의 귀 뒤에 꽃을 꽂아 주었다.
치희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다. 청혼하며 꽃을 꽂아 주는 것은 읍루의 관습이었다. 휘가 모르고 한 행동이더라도 그녀는 그 꽃을 받아들였다. 오라버니들이 찾는 원수라는 것도 그의 뜨거운 눈길에 모두 잊어버렸다.
「서방님의 아내가 되겠어요」
치희는 꽃향기와 그의 눈길, 그의 목소리에 취해 있었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다가왔다. 그녀는 그가 일깨워 준 여자로서의 갈망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의 입술이 주는 감촉은 놀라웠다. 그와 같이 아이를 보는 동안 긴장으로 바싹바싹 타 들어간 신경에 단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휘의 목에 팔을 둘렀다. 입술을 겹친 채 밤새 그리워했던 그의 냄새를 마음껏 들이켰다. 호기심이 강한 그녀는 그의 혀의 자극을 받고 대담해졌다.
휘는 심장이 울리는 소리를 무시하며 냉정을 유지하려고 힘썼지만 뇌는 이성을 거부했다. 서재에서 그녀를 가지려 했던 날 이후 억제해 온 욕망이 그녀와 같은 방에서 아이를 돌보는 동안 극에 달했었다. 옆에 두고도 손도 댈 수 없는 그 고통! 놀라운 것은 다른 여인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아니면 안 되었다.
이제 그 욕망이 빛을 보게 되었다. 끝까지 지키려고 고집을 부리던 치희가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있었다. 참는다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중간에 그녀가 거부하더라도 멈출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계속 밀어붙이면 이 여인은 또 도망치려고 할 테지. 그래서는 안 돼. 이 여인만큼은 잃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휘는 안겨드는 그녀를 밀쳐냈다. 그는 몇 번의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간신히 말을 할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하오. 나를 이런 지경에까지 몰아넣을 수 있다니…」 그는 자신의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토해냈다. 「부인에게 최고의 첫날밤을 안겨주고 싶소. 그런데 여기서 안을 뻔했다니. 그저 입맞춤 정도만 하려고 했소. 그런데… 조금만 더 있었으면 멈추지 못했을 거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진실된 말들은 치희의 가슴을 울렸다. 적어도 내 잘못은 아니었어. 이 사람은 진심으로 나를 아껴주고 있어. 이런 생각이 들자 지금까지 그에게 흐르던 감정의 강물을 막고 있던 둑이 터졌다. 조금씩 조금씩 새어나오던 감정은 이제 홍수가 되어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구려. 부인이 내 곁에서 떨어져 앉는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겠소. 내 탓이오. 부인이 안전하려면 잠시 산책이라도 하고 오는 게 좋겠소」 그는 자신을 자제하려는 듯 다리를 감싸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치희는 그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데 놀랐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그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흐트러 놓은 머리와 날렵한 다리와 두 팔 사이로 보이는 그의 가슴을. 그녀와 입맞춤을 하는 사이 허리띠가 헐거워졌는지 그의 옷깃이 벌어져 가슴이 들여다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안겨 있었던 그 단단한 가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윽고 휘가 고개를 들었고 눈이 마주쳤다.
그는 신음하며 숨을 들이켰다. 「부인이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어쩔 수 없소. 그러니 저기로 가서 꽃구경이라도 하시오. 계속 그러고 있으면 부인은 정혼자를 만나기도 전에 순결을 잃게 될 거요」
그의 말에 치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라버니들! 원수! 그의 집무실에서 한 번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다니…, 그녀는 자신을 호되게 질책했다.
그녀는 허둥지둥 일어났다. 쓰러져 물이 전부 흘러 버린 물통이 눈에 들어왔다. 「폭포에 가서 물통도 채우고 잠시 구경하고 오겠습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정혼자의 존재를 깨닫자마자 황급히 그의 곁을 떠나는 그녀를 허탈한 심정으로 쳐다보다가 돌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치희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리 가고 싶었다. 폭포는 그 자리에서 쉼없이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치희는 물통을 채우고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엉망이었다. 대충 옷매무새를 고치고 나니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달아오른 뺨도 점차 식어 갔다.
그를 미워해야 하는데, 증오해야 하는데, 마음과는 반대로 움직이는 욕망은 대체 어떤 것일까? 왜 그를 보면 만지고 싶고 안기고 싶은 것일까? 어쩌자고 그에게 그의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했을까? 분위기에 취했나? 그녀는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더구나 그는 원수가 아닌가?
부스럭거리는 발자국 소리에 돌아보니 그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내려갑시다. 모두들 우리가 화해했다고 생각할 거요」
그들은 올라왔던 길을 다시 더듬어 내려갔다. 험한 길이 나오면 손을 내밀어 잡아 줄 뿐 그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7
수레에 탄 치희는 한 대가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아 휘와 함께 가는 길이었다. 근처에 이르자 악공들의 흥겨운 가락이 새어나와 그녀에게까지 들려왔다.
그가 오늘 아침에서야 하인을 통해 알려와서 그녀는 부리나케 준비를 해야 했다. 대가의 잔치인만큼 유력한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모일 것이다. 그녀는 꽃무늬가 수놓아진 흰색 비단옷을 입고 푸른색 허리띠를 매어 화려함을 더했다. 소노가 머리를 손질해 주는 동안 머릿수건을 쓸 것인지를 가지고 잠깐 고민을 했다. 고구려에서는 집 안에서도 써야 한다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 치희는 망설이다가 머릿수건을 내려놓고 대신 휘가 보내준 패물들로 장식을 했다.
집 안에 들어서자 주인인 듯한 사람이 그들을 안내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수만 봐도 잔치의 규모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생일을 맞은 사람에게 휘가 축하 인사를 하고 선물을 건네는 동안, 그녀는 낮은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옆에 서 있었다.
탁자에 자리를 잡고 나자 음식이 연이어 나왔다. 휘는 금세 옆사람과의 이야기에 빠졌다. 치희는 줄곧 누군가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따가운 눈길의 주인과 눈이 마주치자 치희는 놀라서 신음을 삼켰다. 태호였다.
「왜 그러시오?」 그녀의 긴장을 느꼈는지 그가 돌아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녀의 눈길을 쫓던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 자도 올 줄 예상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내가 해결했으니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소」 휘는 안심을 시키려는 듯 그녀의 시선을 자신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때 한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음식을 나르던 하인이 한 손님에게 쏟아 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주인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고 있었다. 그녀도 그에게 시선이 쏠렸다. 그의 모습이 눈에 익었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아. 아주 그리워하던 사람….
하인을 따라 안채로 들어가는 그 사람을 그녀는 꼼짝 않고 지켜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도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하인과 함께 사라졌다. 미유 오라버니가 확실했다. 어찌 되었든 확인해야 한다. 하늘이 돕기라도 한 듯, 다른 대가가 도착하면서 그를 맞이하기 위해 휘가 일어나 나갔다.
「저 잠깐…」
그녀는 옆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급히 남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따라갔다. 하인의 송구스러워하는 목소리로 금세 그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하인이 나가길 기다렸다가 바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눈빛만으로도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더구나 살짝 열린 그의 저고리 사이로 그녀와 같은 반쪽 옥패가 보였다. 그의 눈에 약간의 의심이 스치는가 싶어 그녀도 급히 목에 걸린 옥패를 꺼내어 보였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고 그녀의 가슴이 찡하게 울려왔다. 반쪽을 찾은 것이다. 그녀는 느낌만으로도 확신했다. 새어머니의 뱃속에서 10개월을 같이 크고 새어머니의 젖을 함께 나눠먹던 자신의 반쪽 오라버니!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10년 만의 해후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부둥켜안았다.
「네가 치희구나, 그렇지? 방금 전 너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혹시나 했는데. 네가 날 한눈에 알아보다니…」 그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미유 오라버니! 살아 있었군요. 난 알고 있었어요. 모두들 잊으라고 해도 난 느낌으로 알았어요」 치희는 그를 꼭 붙잡았다. 손을 놓으면 꿈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 형님들은? 모두 어떻게 됐지?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모두 살아 있어요.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잘은 모르지만 아마 성 안 어디에 있을 거예요」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어떤 것부터 물어야 할지 모르겠구나.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여긴 어떻게 왔지?」
「저… 남편과…」
그때 뒤에서 분노에 차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인,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요?」 그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위협적인 그의 목소리에 미유는 품 안의 그녀를 떼어놓으며 눈으로 그가 누군지 물었다.
「제 남편이어요. 제발, 오라버니라고 말하지 마시어요. 아니, 아무 말도 마세요」 치희는 미유에게만 들리도록 조그맣게 말했다.
휘는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의 성난 눈이 치희의 눈물 어린 눈에 와 꽂혔다. 그는 치희의 손을 잡아 미유의 품에서 끌어내어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의 거친 행동을 미유가 저지하려고 하자 치희가 고개를 저었다.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미유는 동생이 다치지 않기만을 바랐다. 우선 남편이라는 사람을 달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아! 이제 보니 휘라는 분이 아닙니까? 고구려인으로 대단한 재산가라고 들었는데…」 미유는 얼른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며 누이의 남편을 살폈다.
휘는 그의 열려진 저고리를 쳐다보더니 대답 없이 치희에게 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망설이자 미유가 입을 열었다.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사이입니다. 부인이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지요」
「이 여인은 내 사람이고, 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는 하나 남의 부인을 안고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러고 보니 당신은 혹시 구가 밑의 호민 진서라는 사람이 아니오?」 휘도 그를 알아보았다.
「예, 맞습니다」 미유는 누이 남편의 험악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더 이상 여기 있다간 누이에게 불똥이 튈 것 같아 얼른 누이를 돌아보았다. 「제가 차후에 댁을 방문하겠소. 나머지 이야기는 그때 합시다」 미유는 10년 만에 만난 누이를 남을 대하듯 해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사정이 있는 것 같으니 어쩌랴.
휘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미유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 뒤를 쫓던 휘의 눈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혹여 태호와 마주칠까 걱정하며 찾아왔더니 다른 남자의 품 안에 안겨 있을 줄이야. 그래도 아내가 되겠다고 꽃밭에서 약속한 그 한마디에 희망을 걸었었는데.
「자, 말해 보시오. 전에 알던 사람이라니? 여기는 부인이 아는 사람이 없질 않소. 누구지?」 그는 최대한 분노를 자제하고 있었다.
「바로… 제가 찾던 사람입니다」 치희는 눈을 꼭 감았다.
「그래. 그 정혼자였군. 그를 만나서 그렇게…」 이를 꽉 다물고 말하는 그를 보며 치희는 그가 다른 상상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와… 난…」
「됐소. 그만 갑시다」
그녀의 말을 자르며 그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치희도 그의 옆에 가 앉았다.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녀의 눈길은 자꾸 미유 쪽으로만 향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미유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환히 웃어 주고는 했다.
결국 치희는 그도 보다 못한 휘에게 끌려 급히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씨! 기다리시던 진서라는 분께서 오셨사옵니다. 어떻게 할는지요?」 소노가 급히 들어와 미유가 왔음을 알렸다.
진서라는 이름이 생소했지만 그녀는 급히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가려다 소노가 있는 것을 생각해냈다.
「이리로 모시고 오너라」
「주인나리의 집무실에서 뵙는 것이…」
외간 남자를 혼인한 부인의 처소에 들이는 것은 망측한 일이었다. 그러나 치희는 그의 집무실을 사용한다는 것이 싫었다. 그 때문에 오라버니와 헤어지지 않았던가. 그리고 만약 그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좋을 것이 없었다.
「그냥 이곳으로 모셔 오너라. 조용히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방 안에서 초조히 기다리자 소노의 안내를 받은 오라버니가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차와 다과를 내온 소노도 서둘러 밖으로 내보냈다.
「오라버니! 어서 오시어요」 치희는 미유 오라버니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며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는 그녀를 꼼꼼히 살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너와 그렇게 헤어진 뒤 남편에게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녀를 걱정하는 것이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는 오누이 같았다.
「우리가 얼마나 오라버니 걱정을 했는지 알아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진서라는 이름은 또 뭐구요」
그의 이야기 보따리가 풀어졌다. 건무와 떨어져 헤매다가 한 인심좋은 집에 양자로 들어가 진서라는 이름으로 지금껏 살 수 있었다고 했다. 이름을 바꾸었으니 그녀와 오라버니들이 찾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혼인도 했고 아이도 하나 있단다. 나도 너를 5년 동안 찾아 헤맸지. 부여 구석구석 안 뒤진 곳이 없었다. 형님들과 너는 어떻게 됐지?」
치희는 동굴에 큰오라버니 혼자 나타난 후에 굶으며 고생한 이야기, 추아저씨를 만나 읍루에 간 이야기 등을 눈물을 글썽이며 털어놓았다. 오라버니들이 도둑이 된 일까지. 도둑이 된 부분에서 미유는 얼굴을 한 번 찡그리고는 말았다. 사정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나 혼자만 호의호식한 것 같아 미안하구나. 읍루에 있었으니 찾지 못한 게 당연하지. 그곳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나저나 형님들은 어디 있지? 언제나 볼 수 있는 거야?」
「제게 연락이 왔는데…」 치희는 더욱 소리를 죽여 귀엣말로 속삭였다. 어제 아침에 그녀의 처소로 화살이 또 하나 날아들었는데 묵거 오라버니의 편지가 묶여 있었다. 성 안에서 머물고 있다는 것과 곧 데리러 온다는 내용이었다.
「오라버니들은 지금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한 흉수를 잡아 누명을 벗으려고 해요. 그리고 그 주동자가 제 남편이고요」
미유는 그 말에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둘 사이가 이상한 이유가 조금은 짐작이 갔다. 그도 의심을 품고 사건을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의 부모님이 관련된 것을 알고는 그만두었다. 과거의 일을 들추어 그들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동생은 자신보다도 더 용기가 있었다. 남편이 연루됐음을 알고도 파헤치려 하다니.
「그도 알고 있느냐? 내가 보기에는 그럴 사람은 아니던데. 괜한 사람을 의심하는 것 아니냐?」
「그렇지 않아요. 그날 밤 그가 우리 집에 있었던 걸 또렷하게 기억하는걸요. 그는 오라버니를 제 정혼자로 알고 있어요.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드릴 단서와 오라버니를 찾으려고 그와 혼인을 했지요. 오라버니를 찾았으니 한 가지는 해결됐고 곧 단서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오라버니께서 큰오라버니와 묵거 오라버니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해주세요」
정혼자라는 남자가 제 사람을 안고 있었으니 휘가 펄펄 뛰던 것도 이해가 갔다. 조금 전에도 누이를 만나러 오는 길에 그를 보았는데 그 눈길이 비수를 품고 있었다. 그건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려는 남자의 눈길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치희는? 그를 사랑할까? 원수라고 믿고 있는 남편을? 말로는 부정하고 있지만, 누이 역시 그를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안쓰러웠다. 무척이나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 터였다.
「형님들도 네가 이렇게 사는 것을 알고 있니? 장차 어쩌려고 이런 짓을」
「오라버니들이 알았다면 여기 있게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제야 기별을 전하는 걸 보니 아직 제 소식을 못 들은 것이 틀림없어요. 오라버니도 제가 혼인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시어요. 오라버니들이 마음 아파하는 건 싫어요. 지금까지 날 돌봐준 오라버니들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지 않겠어요. 난 단서만 찾으면 곧 떠날 거예요」
미유는 단호하게 말하는 치희의 말을 믿었다. 이 아이는 남편을 버리고 떠날 것이다. 그를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치희의 말은 계속되었다. 「제가 단서를 가지고 나갈 터이니 오늘 밤 오라버니는 문 밖에서 기다려 주시어요. 아직 결정적인 건 찾지 못했지만 제가 찾은 문서는 그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줄 거예요. 큰오라버니가 지난번에 그에게 다쳤다는데 다 나았는지 꼭 봐야겠어요」
미유는 치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줄기차게 계획을 쏟아내는 그녀는 그의 양부모님의 딸과 너무도 닮아 웃음을 자아냈다.
그녀는 부드럽게 그에게 다가왔다. 그가 느긋하게 몸을 펴고 두 팔을 뻗어 그녀를 감싸안아 끌어당겼다. 그의 손이 배에서 가슴께로 옮겨졌을 때도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그의 손길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따뜻하고 촉촉하며 깃털처럼 가벼운 입맞춤… 그 입맞춤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며 그는 몸을 움직여 그녀를 몸 아래에 가두었다. 그의 입술이 한층 더 강하고 격렬하게 그녀의 나신을 더듬고 있었다. 매달리는 그녀를 보며 그는 자신의 열정을 그녀에게 전할 준비를 했다.
갑자기 그녀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찾았을 때 그녀는 그를 비웃으며 정혼자의 손을 잡고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소리쳐 그녀를 불렀다.
치희… 가지 마시오. 돌아와요…
그러나 그녀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었다.
휘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열을 내뿜고 있었다. 꿈속의 일이 빌미가 되어 그의 몸이 채워지지 않은 갈망으로 떨렸다. 조금만 더 진행되었더라면 민망한 일이 생길 뻔하지 않았는가. 휘는 일단 열을 식히기로 했다.
얇은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싸늘한 바람이 옷 속으로 스며들자 한기가 느껴졌다. 의식도 또렷해졌다. 그녀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된 꿈은 서재에서 다툰 뒤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반응도 다양해져 꼭 생시의 그녀를 만난 것 같았다. 다른 날과 다른 점은 그녀가 정혼자와 같이 떠났다는 것이다. 아마 오후에 그녀의 정혼자였던 진서가 찾아온 것을 보았던 탓이리라.
그들은 하녀도 내보내고 오후 내내 둘이서 방 안에서만 보냈다. 화가 불같이 끓어올랐지만 그녀를 믿자고 한없이 자신을 타일렀다. 그녀는 새어머니나 전 부인과는 다를 거라고. 더군다나 그에겐 그들을 떼어 놓을 권리가 없었다. 그녀가 정혼자를 찾으면 떠날 거라는 게 둘 사이의 계약이었다. 형수의 비밀도 밝혀진 이상 그녀는 더 이상 그의 아내로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휘는 욕망 이상으로 그녀를 원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진정한 아내로서 그녀를 맞아 아이를 낳고 살고 싶었다. 형수의 아이를 돌보는 동안 비록 몸은 피곤했지만 그녀를 매일 볼 수 있어 행복했었다. 그녀도 산에서 그의 아내가 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문득 부모님이 생각났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새어머니를 평생 지켜보시던 아버지를…. 휘는 아버지처럼 살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상처를 받으신 거다. 치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버지처럼 괴롭지는 않으리라. 그녀를 사랑하지 말자. 둘 사이에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만 들어가 잠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뒷담 쪽으로 사라지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꼭 그녀 같았다. 그는 급히 쫓아갔다. 또 악몽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집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러다 길이라도 잃으면 어쩌려고. 정신도 없는 사람을 누군가 발견해서 데려간다면 큰일이었다.
집 뒷문에 다다라서야 그녀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잠자다 나온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머리는 풀어내리고 있었지만 옷을 단정히 차려입고 행동 역시 조심스러웠다. 잠결에 나온 사람이 털옷까지 걸치고 나왔겠는가. 그녀를 불러 세우려는 생각을 접고 그는 계속 뒤를 밟았다.
집 밖에서 푸드득거리는 말 소리와 함께 누군가 말을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들을 향해 나아갔고, 그녀를 맞기 위해 달빛 아래로 나온 사람은 다름아닌 그녀의 정혼자였다. 그녀는 그의 손을 빌려 말에 오르려 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휘는 성큼 나서서 그녀를 잡아 말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손을 붙들고 집으로 향했다.
「놔주시오. 이럴 이유가 없습니다」 그녀가 저항하자 미유라는 사람이 나섰다. 「놓아주시오. 그 사람은 잘못이 없소. 나와의 사이를 오해한 것 같은데 우린…」
치희가 급히 그를 저지했다. 「빨리 제가 준 걸 가지고 가시어요. 전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빨리요」
「이건 집안일이니 당신은 어서 가시오. 오늘 일은 내 다음에 물으러 가겠소」
치희의 애절한 눈빛에 미유는 물러나야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들은 부부였다. 자신이 상관할 수가 없었다. 남편의 손에 이끌려 들어가는 누이가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모든 결정권은 그의 손에 달렸으니….
다시 돌아가 휘에게 사정을 말해야 하나? 무슨 사정을? 그는 원수라고 하지 않았던가. 준비도 없이 호랑이 굴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미유는 치희가 건네준 서류와 반쪽의 옥패를 챙겨 형님들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10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무척 궁금했다.
그녀는 그의 처소로 끌려갔다. 그는 방에 들어가서야 팔을 놓아주고는 문을 닫았다. 이곳은 처음이었다. 구조는 그녀의 방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검소하고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방이었다. 장식품도 조각상 몇 개뿐이었다.
「자! 이제 솔직히 말해 보시오. 둘이 도망가려고 했소?」
「아니에요. 잠깐 나갔다 오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녀는 사실대로 말했다. 큰오라버니의 병세만 보고 오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야밤에 둘이 만나 밀회를 즐기기로 했다. 왜 그를 집 안으로 끌어들이지 그랬소. 그랬다면 잡히지 않았을 텐데 말이오」
현장에서 잡히기는 했지만 그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데 그녀도 화가 났다. 「고맙군요. 다음에는 그 방법을 이용해 보지요」
그녀의 말이 그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되었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하얗게 질렸다. 그가 손을 치켜들었다. 치희는 그가 때릴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가 난폭하게 나올수록 그를 증오하기도 더 쉬우리라. 그녀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 끌어당겼다.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거 놔주시어요. 그는…」 이런 공포감은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가 사납게 손을 떼는 바람에 그녀는 이불 위로 쓰러졌다.
「아무 말 마시오」
그가 위험스럽게 다가왔다. 이제껏 그녀에게 보여주었던 그 다정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것이 진정 이 사람의 모습이었어. 여덟 살에 처음 보았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온통 검은 색을 휘감은 남자.
「난 부인을 존중하려고 했소. 서재에서도 산에서도 부인을 원했지만 참았소. 부인이 준비될 때까지, 나를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거요. 그러나 부인은 이런 일을 벌였지. 더 이상은 봐주지 않겠소. 오늘 밤 부인을 내 것으로 만들겠소」
그를 피해 뒤로 물러났으나 등에 닿은 것은 벽뿐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훑어내리더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다른 손으로는 허리끈을 풀고 있었다. 그녀의 옷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의 입술이 어깨와 목을 따라 움직이는가 싶더니 가슴으로 다가왔다.
그의 입술이 정점에 닿자 그녀는 신음을 내뱉었다. 저항하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다. 그녀의 손은 어느 결에 그의 목에 둘러져 있었고 등은 휘어져 그에게 더욱 다가들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은 욕망과 분노로 뒤섞여 있었다. 그가 손으로 가슴을 슬쩍 쓸고 지나가자 그녀의 입에서 또다시 신음이 새어나왔다.
「보시오, 부인은 내 여자요. 그런 애송이와 도망친다고 해도 만족할 수 없었을 거요」
그의 빈정거리는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몸에 붙은 불을 끄고 싶었다. 「제발, 절 보내 주셔요. 그렇지 않으면 증오할…」 간신히 내뱉은 말도 욕망으로 흐려졌다.
「오, 그건 안 되지. 이미 늦었소. 난 부인에게 수많은 기회를 주었소. 난 남자지 돌은 아니오. 언제까지 참을 수는 없단 말이오. 오늘 그 빚을 모두 받겠소」
그녀를 애태우는 그의 손길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그는 그녀의 마지막 하나 남은 옷까지 마저 벗겨 버렸다. 그는 그대로 옷을 입고 있었다. 수치심을 느낀 그녀는 이불로 몸을 가리려고 했다.
「안 돼. 그대로 있으시오. 부인의 아름다운 몸을 보고 싶소」 그는 이불을 빼앗아 치워 버리고는 그녀의 몸을 뇌리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그가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허리끈을 풀자 앞섶이 열리면서 가슴이 드러났다. 바지 끈이 풀리고 발 아래로 옷이 떨어지는 순간 그녀는 눈을 감아 버렸다.
「지금 정숙한 부인 행세를 하는 것이오? 만난 지 겨우 이틀밖에 안 된 외간 남자와 도망가려는 사람이 이 정도가 뭐 대수겠소」 눈을 감는 그녀를 보고 그는 야유를 퍼부었다.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몸에 부드러운 살이 닿았다. 비단보다도 더 부드럽고 따뜻하며 자극적이었다. 그녀의 몸이 눕혀지고 곧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치희는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을 뜨시오. 부인! 최소한 누구와 같이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소?」 그의 말에 치희는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오늘 일로 예전의 그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했는지 다시 그가 입술을 겹쳐왔다. 그녀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의 손길에 자신을 맡겨 버렸다. 그러나 그의 부드러운 손길에 새어나오는 신음은 막을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시작된 그의 애무가 점점 더 거칠어지더니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아름답소」
그가 주는 열기에 그녀는 어느덧 정신이 몽롱해졌다. 휘가 억눌린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더욱 맹렬한 기세로 그녀를 애무해 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과 입술과 눈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도 그를 쓰다듬고 맛보고 음미할 수 있도록 교묘히 유도했다. 드디어 그는 자제력을 잃었다.
「제발…」 그녀는 아직 얻지 못한 무언가를 애타게 갈구했다.
「말하시오. 사랑한다고. 떠나지 않겠다고」 그는 참기 힘들어하면서도 그녀를 다그쳤다.
「이제 그만…」
「빨리 말하란 말이오. 사랑한다고. 떠나지 않겠다고」
머리가 하얗게 빈 채 그녀는 그를 따라 말했다. 「사랑해요. 떠나지 않겠어요」
「좋소. 약속을 지키시오」 그는 힘겹게 내뱉고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제발…」 치희는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른 채 그에게 애원했다.
마침내 그가 들어왔다.
「윽…」 그녀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의 몸도 그대로 굳었다.
「잠깐만… 잠깐만 그대로 있으시오. 제발… 다치게 하고 싶진 않지만 난 이제 물러설 수 없소」 그가 자그마한 소리로 쉴새없이 그녀를 다독거리며 달래고 쓰다듬었다.
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아픔이 아닌 환희 탓이었다. 치희는 서서히 달아오르는 감각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의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행복감에 휩쓸려 그녀는 이성을 잃었다. 그도 있는 힘과 사랑을 다하여 그녀에게 쏟아부었다.
수백 년은 지난 것 같았다. 마침내 휘가 탐스런 머리칼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치희는 꼼짝 않고 누워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도 뜨지 않는 그녀가 반응을 보이기까지는 그가 살아온 평생보다 훨씬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드디어 그녀가 눈을 떴다.
「부인 괜찮소?」
그녀는 천장만 쳐다볼 뿐 아무 대꾸도 없었다.
그는 점점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부인! 뭐라고 말 좀 해보시오」 그가 그녀를 흔들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비치더니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자 그는 간단히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더는 옆에서 우는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가 등뒤로 문을 닫자 안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휘는 미유와 도망가는 그녀를 발견했을 때보다 더욱 깊은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에 은은한 통증이 전해지면서 어젯밤의 기억이 밀려왔다. 그의 분노와 자신의 욕망에 굴복하고 말았다는 것이 그녀를 못 견디게 했다. 머리 속에서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었고 생각 같아선 자리라도 펴고 눕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행동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아침부터 하인들이 들락거리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물어왔고, 좀 쉴 수 있을 것 같자 시아버지와 매당이 모두 처소로 들르라고 전갈을 보내왔다. 그녀는 안채의 아버님이 계시는 곳으로 먼저 향했다.
시아버지는 손까지 잡아 이끌면서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애 보기가 힘들었겠구나. 내 그 녀석의 버릇을 고치려고 그랬느니라. 그리고 며칠 전 밤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가락을 들었다. 언제 내 옆에서 한번 연주해 주겠느냐? 그걸 들으니 죽은 마누라가 생각나더구나」
「제가 모르고 아버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 같아 송구하옵니다. 뒤늦게 서… 서방님이 일러 주었지요」 서방님이라는 말이 목에 걸려 잘 나오지가 않았다.
「네 잘못은 없다. 난 그 사람과의 즐거운 추억만을 간직하고 살지. 그때 그녀를 놓아주지 않은 것을 지금껏 후회한단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 하고 그 녀석과 또 싸웠느냐?」
「어떻게 아버님께서…」 그녀의 고개가 수그러들자 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 아침 불렀더니 퉁퉁 부어서 왔더구나. 남자란 여자가 조금만 따뜻하게 대하면 얼음처럼 금방 녹아내리지. 다시 또 밤새 아이를 보고 싶지는 않겠지? 넌 그쪽으로는 소질이 없어 보이더구나」
「노력하겠사옵니다」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럼 그만 가보거라. 그리고 오늘 휘의 처소 옆으로 방을 옮기거라. 손질이 끝났다는구나」
어제 저녁 일도 모자라 이제는 그의 코앞으로 방을 옮겨야 하다니. 그녀는 헤쳐나갈 방법을 궁리하며 매당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쪽에서 아이가 새근새근 잠자고 있었다. 잔치 준비를 의논한 뒤 치희는 매당의 일을 거들고 있었다. 아기가 깰까 봐 나직하게 말하긴 했지만 치희의 목소리는 어딘지 맥이 풀린 사람 같았다.
「역시 아기는 새엄마 옆에 있어야 해요. 제가 돌볼 때는 가엾게도 이렇게 편히 잠들지 못했답니다」
익숙한 솜씨로 아이의 기저귀를 개키던 매당은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서야 좀 새엄마가 된 것 같네. 처음엔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너무 작고 약해 보여서 힘주어 안을 수도 없더라니까」
그녀도 매당의 손을 보며 어렵사리 따라서 기저귀를 개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목에 걸려 있던 옥패가 보이지 않는구먼. 잃어버렸는가?」
「저 그게… 이제는 필요 없어서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항상 있다가 없으니 조금 허전하긴 하네요」 치희는 자신의 목을 더듬어 보았다. 옥패는 미유 오라버니가 건무, 묵거 오라버니에게 그녀의 안전을 설명할 수 있도록 잠시 빌려주었었다. 오라버니를 만났으니 그건 더 이상 의미가 없기도 했다.
「주인이라면…」 조심스레 말을 꺼낸 매당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곧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겁니다. 한 가지 문제만 해결되면요」 매당이 의아해하는 것을 모른 척하고 치희는 계속 손을 놀렸다.
「아직도 서방님과는 화해 안 한 건가? 오늘 아침도 낯빛이 굳어 있던데… 한 식구니까 참고 살지만 전의 동서와는… 아참! 이런 말은 해서는 안 되지」 그녀는 재빨리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는 손에 든 천으로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저… 전에 부인과는 어땠는지요? 사이가 좋았는지요?」 치희는 망설이며 물었다. 어제와 같은 일이 있었는데도 그의 전 부인에게 신경이 쓰이다니. 어느 누구도 그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치희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신경이 쓰이나 보구먼. 그 당시 두 내외는 시골에서 살아 많이는 알지 못하네. 잠깐 보기로는 상당히 아름다웠지. 꽤 여리고 사람을 잘 사귀지 못했다는구먼. 시집온 후로도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고 들었네. 작은서방님은 공부 중이어서 그녀에게 많은 신경을 써주지 못했나 보이. 그럴 수밖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서방님은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며 길을 떠나셨는데 몇 년이 걸리셨지. 돌아오셨을 때는 그녀가 다른 사람과 이미 떠난 뒤였고. 작은서방님은 그들을 찾지 못하게 했네」
매당의 말을 들으니 그가 부인를 사랑했다는 것이, 그리고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젯밤 사랑한다고,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라고 강요하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를 그녀와 착각했는지도 몰라. 평소와는 다른 그의 행동과 목소리가 그런 의심을 더욱 굳게 했다.
어깨 너머로 치희를 쳐다보던 매당이 안에서 작은 함을 들고 나왔다. 그녀는 뚜껑을 열고 안의 내용물을 꺼내어 들었다. 치희는 매당의 손에 들린 장신구들을 보았다. 금팔찌며 목걸이, 비녀, 머리꽂이 등 상당히 귀한 것 같았다. 매당은 놀라는 치희의 손에 그것들을 꼭 쥐어 주었다.
「정말 예쁘군요. 그런데 왜 이런 것을 제게 주시는지요?」
「서방님께서 생전에 내게 선물한 것인데 난 상중이라 필요가 없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있다가 없으면 서운한 법인데 이걸 쓰게. 그것들을 볼 때마다 서방님 생각이 나서…」 말을 맺지 못하고 매당은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울적해 있는 그녀를 예쁜 장신구로 달래 주려는 매당의 마음에 치희는 감격했다.
「진정하세요. 그렇게 우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정이 그러시다면 제가 잠깐 보관하고 있을 터이니 다음에 찾아가시어요. 저에게 이런 것은 너무 과분합니다」
치희가 한사코 받기를 거절하자 매당은 빌려주는 걸로 했다.
「고맙네. 동서가 없었으면 어떻게 지냈을지 모르겠네. 닳는 것도 아닌데 그동안 쓰도록 하게. 장 속에 넣어두기만 하면 뭐하겠나?」
매당의 처소를 나오면서 치희는 손안의 물건을 보며 또 한 번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다음에 매당이 찾을 때까지 함 속에 잘 보관해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의 처소로 향하던 그녀는 문득 발걸음을 돌렸다. 처소로 돌아가면 또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녀의 시간을 방해할 것이 분명했다. 처음 왔을 때와는 달리 그녀의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식구가 된다는 것은 많은 의무를 동반하는 것 같았다.
휘의 서재에 다시 가서 결정적인 단서도 찾아야 하는데…. 요즘은 그가 서재를 비우는 일이 별로 없었다. 바깥일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 조우와 서재에 틀어박혀서 하루종일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의논하는 것 같다고 소노가 전했다.
정원을 찾고자 했으나 길이 점점 좁아지는 것이 다른 길로 들어선 것 같았다. 담과 건물 사이로 사람 둘 정도 지나갈 수 있는소로를 따라가니 조그만 정원이 나왔다. 찾는 곳은 아니었지만 혼자 있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여기라면 찾는 사람도 없으리라. 그러나 한편으론 사적인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어 선뜻 발을 들여놓기가 꺼려지기도 했다.
휘 둘러보니 정원 쪽으로 난 방문 앞에 조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며칠이 지나도 만나기 힘든 사람들을 오늘은 계속 마주치고 있었다. 하필이면 혼자 있고 싶은 때에. 그는 태평스레 문틀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그가 눈치를 채지 못하자 치희는 헛기침을 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정원에 침입한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이곳엔 어쩐 일로 오시었소?」 사적인 공간을 침범당한 것이 못마땅한 듯 그는 무뚝뚝하게 그녀를 맞았다.
그녀 역시 그가 반갑지 않았다. 「혼자 있을 곳을 찾다가 길을 잘못 들었나 보옵니다밗 치희는 자신이 들어왔던 좁은 길을 가리켰다.
「다른 사람이 잘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놀란 것뿐이오」 그가 그녀 가까이 다가와 평상으로 안내했다.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계셨는지요?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기 노을을 보고 있었소. 늘 이맘때면 항상 하는 일이지요. 유난히 오늘따라 아름답다 했는데 같이 볼 사람이 생겨서 그런 모양이오」
낮에 그토록 파랗던 하늘이 황금빛으로 물든 낙엽과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군요」 맞장구를 쳐주고 치희는 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평소 그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 같았는데….
「그리운 사람이 있지요? 보고 싶은 사람 말입니다」
조우는 놀라움을 담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치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오라버니들과 같이 자라다 보니 표정만 봐도 알 수가 있답니다.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요」
그도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쓸쓸하던 차에 옆에서 말상대가 되어 주는 친구의 부인이 그리 싫지 만도 않았다.
「그리운 사람이 누군지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조우는 대답을 망설였다. 「사랑하는 사람이오. 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절대 나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오」
그는 매우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 무척 잘생겼다. 휘를 보기 전이었다면 그에게서 대단한 호감을 느꼈을 것이다.
「부인의 전 정혼자를 찾았다고 들었소. 이제 어떻게 할 거요?」
「그분이 약속을 지키기를 바랄 뿐이지요. 그런데 이미 한 가지는 어겼지요」 그녀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정혼자가 나타나면 보내주겠다 하고 그녀의 순결을 지켜 주겠다 했는데….
「무슨 약속인지는 몰라도 그가 약속을 했다면 꼭 지킬 것이오. 그가 약속을 어겼다면 아마 상대방의 잘못도 있지 않나 싶소」 조우는 며칠 전 자신이 휘에게 한 충고를 떠올렸다. 휘는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20년 넘게 사귄 친구로서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휘는 이 여인에게 빠져 있었다. 처음부터 느끼던 것이었지만 휘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휘에게 던진 충고는 간단했다.
자네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녀가 자네를 사랑하게 한다면 자네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네
하지만 휘가 실천하지 못할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사랑이란 혼자서는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휘가 부인을 사랑한다는 것을 눈치 못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한 행동들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불쑥 찾아온 저를 반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좀 뜻밖이에요. 뭐랄까, 전 조우 님이 감정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답니다. 뭐 하나 여쭤도 될는지요?」 그녀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왜 저를 싫어하시는지요?」
「부인을 싫어하는 게 아니오. 다만 휘가 걱정이 될 뿐이오. 부인을 만난 뒤로 그는 적이 많아졌소」 자못 심각한 어조였다. 친구를 아끼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8장
치희는 부드러운 천으로 악기를 닦았다. 흰 천이 지난 자리에 본래의 색이 살아났다. 시아버님의 말씀대로 그녀는 휘의 거처 옆으로 방을 옮겼다. 머무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 사이에 짐이 놀랄 정도로 늘었다. 물론 모두 그의 것이었고, 그녀가 떠날 때 가지고 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악기는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가 들어와 아무 말 없이 놓고 간 것이었다. 아버님이 갖다 주라고 한 마디 하셨을 것이다. 그가 스스로 가져다 줄 리는 만무했다.
새 거처는 단장한 지 얼마 안 되어 나무 냄새가 물씬 풍겼다. 날이 건조한 탓인지 더욱 심했다. 그녀는 악기를 닦으며 오늘 밤에는 그의 서재를 꼭 뒤지리라 결심했다. 치희는 줄을 다시 잇고 음을 맞추었다. 명주실이 늘어나 음이 고르지 못했다.
한 줄을 퉁기려는데 그가 불쑥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그를 외면했다. 얼굴조차 쳐다보기가 싫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그들을 꽁꽁 옭아매었다. 보이지 않는 긴장이 흘렀다.
「어인 행차십니까? 아직도 볼일이 남으셨는지요?」 그녀는 악기를 닦는 일에 더 열중하는 척했다.
「부인은 내 사람이오. 남편이 밤에 아내를 찾아온 이유가 뭐겠소?」
빈정과 분노가 섞인 그의 목소리에 그녀의 손이 멈췄다. 치희는 얼굴을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다시 제 몸에 손을 대면 기필코 가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할 소리가 아니오」 한순간 멈칫하던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정혼자를 찾았으니 전 떠나겠습니다. 우리가 한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
다가오던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부인은 떠날 수 없소. 어제 한 말을 잊었단 말이오? 날 사랑한다고, 떠나지 않겠다고 열에 들떠 한 말들 말이오」
어제의 일을 상기시키는 그가 미웠다. 그리고 그 말을 빌미로 걸고넘어지는 그가 가증스러웠다. 「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말이 휘에게는 그의 존재조차 부정하는 말로 들렸다. 그녀에게 그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이러자고 여기 온 것이 아니었는데…. 그는 둘 사이의 관계를 되돌리고 싶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그의 마음은 관두더라도 그녀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마음을 전하고 다시 시작해 보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낮에 고도 보냈던 것인데…. 모두 헛수고였다. 그녀에게 그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정혼자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 거짓말쟁이!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겠어」
그는 단 두 걸음에 그녀에게 다가가 팔을 낚아챘다. 그녀는 적어도 그날 밤만큼은 그가 필요하다고 말했고, 그를 느끼고 그에게 애원했다. 힘으로 그녀를 다루지 않겠노라고 수없이 다짐했건만 그 역시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팔을 빼내려고 몸부림쳤지만 그의 힘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그는 그녀를 끌어당겨 입술을 포갰다.
「이건 어떻소? 어제 부인은 내 손안에서 몸을 떨었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소?」
그의 손에 그녀의 얇은 옷들이 찢겨졌다. 그녀의 가슴을 더듬는 손길도 거칠고 대담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차가운 것이 뺨에 닿자 그는 움찔하더니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 한 곳에 머물렀다.
「젠장! 그 말이 맞았어. 내게서 끝까지 지키던 그 옥패도 그 놈을 줘버렸군」
치희는 얼른 옷을 여몄다. 부끄러움에 혀라도 깨물고 싶었다.
「그 진서란 사람, 조사해 봤소. 출신조차 알 수 없는 고아더군. 이제부터가 부인이 가장 관심이 있어할 부분이오. 이미 4년 전에 혼인해서 아이도 있소. 게다가 그 내외는 금실 좋기로 자자하더군. 같이 도망쳤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을 버렸을 거요」
「그에 관해서는 저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절대 절 버리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답니다.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느낄 수 있지요」
열심히 오라버니를 변호하는 그녀의 말은 그를 쫓아내는 데 한몫 했다.
「젠장! 부인에겐 이제 질렸소. 부인도 다른 여자와 하나 다르지 않군. 한순간이나마 믿은 내가 한심하군. 그렇게 당하고도 부인을 원하다니 우스운 일 아니오?」 그는 허탈한 웃음소리를 뱉었다.
그는 평상에 쓰러져 있는 그녀를 슬쩍 쳐다보았다. 자신이 보낸 악기가 눈에 띄었다. 화해하고자 보냈던 그 악기는 그가 아버지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웃는 것 같았다.
「저 악기를 당장 치워 버리시오. 다시 내 눈에 띄면 부숴 버리겠소」 예고없이 들이닥친 폭풍처럼 그는 한 바탕 휘저어 놓고 휑하니 사라졌다.
치희는 꼼짝도 않고 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주아야! 그쪽은 어떻게 됐지? 깨어났느냐?」 몸종이 들어오자마자 매당은 추궁을 했다.
「깨어나셨다가 다시 정신을 잃으셨다 하옵니다」 하녀의 말을 들은 매당은 손톱을 깨물었다. 새로 들어온 동서가 이대로 죽어 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을 터였다. 감히 내 자리를 넘보고 들어와? 의원이 약이라도 지어 주면 달여 주는 척하고 독약이라도 풀어 버리고 싶었다. 「의원은 오셨니? 약은 지어주고?」
「나리의 벼락 같은 고함에도 약은 없다고 하며 그냥 갔습니다. 마음의 병이라 고칠 길이 없다고 말하는 걸 들었사옵니다」
매당은 분통이 터졌다.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이제 기댈 데는 태호밖에 없는 건가? 집안 사람 모두 그 작은 계집에게 속고 있었다. 집안의 물건들에 관심을 가지고 감탄을 터트리는 것을 보니 그녀 역시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게 없는 집안에서 자라난 것이 분명했다. 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작은서방님을 꼬신 게 분명했다.
그래도 나는 집안이라도 좋았어. 내가 무엇 때문에 사랑도 버리고 그렇게 병약한 남자에게 시집을 왔는데… 재물! 그래, 이 집의 돈 때문이었다. 굶어 본 사람만이 알았다. 가문? 명예? 이런 것은 다 필요 없었다. 어린 동생들 감싸안고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든 생활, 지긋지긋했다. 새어머니 역시 그런 이유로 가보까지 팔아가며 아는 친척에게 다리를 놓아 태호를 만났다. 새어머니는 그녀의 미모와 가문을 내세워 팔다시피 이 집으로 시집을 보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고구려 집안, 엄한 시아버지, 1년의 절반은 누워지내는 남편, 말붙이기도 힘든 시동생, 거기에 이 집 사람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시집온 첫날부터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재물에 팔려 오다시피 해서 그런 거라고, 아기 낳고 잘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녀는 스스로를 달래었다. 허나 기다리던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5년이 지나자 하인들은 아이도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 등뒤에서 수군거렸다.
이제 이 아이에게는 그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하지 않으리라. 이 집안의 상속자로 모든 것을 누리고 살게 하리라.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녀가 이 집안에 들어와 마음 고생한 것만으로도 이 아이는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그런데 그 계집이 들어와 다 망쳤어. 예정대로 시동생과 혼인을 했다면 아이는 이 집안의 장자로 입지를 확실히 굳힐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이 아들을 낳는다면 재산은 누구에게 갈지 뻔한 이치였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이거지….
「주아야! 죽을 끓여오너라. 내가 문병을 가야겠구나」
오후 무렵 미유 오라버니에게서 서신이 왔다. 어제 그녀는 계속 울다가 혼절을 해서 결국 자리를 펴고 눕게 되었다. 일어날 기운도 없었다. 의원은 마음을 너무 많이 상한 탓이라고만 했다. 소노가 전하길 휘는 의원이 다녀간 후로 그 길로 나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마 어디 유녀집이라도 찾아간 모양이지.
그녀는 누워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다. 왜 그와 혼인했을까? 이제 오라버니를 만났으니 떠나도 될 터인데 왜 미적거리고 남아 있다가 이런 일까지 당해야 하는가? 집안의 원수를 떠나서 이제 그는 증오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수십 가지의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히자 그녀는 애써 잡념들을 떨치려 했다.
치희는 힘겹게 일어나 앉아 오라버니의 서신을 뜯어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미유 오라버니가 두 오라버니들을 만나 그들이 미유 오라버니 집으로 처소를 옮겼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이 만나는 감동적인 장면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집안의 원수를 확실히 알았으니 곧 행동을 할 거라는 것과 그녀에게 이곳에서 나오라는 큰오라버니의 말도 전했다. 그녀의 부탁대로 혼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그날 저녁 남편에게 끌려가 무사한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눈물이 솟았다. 그녀를 걱정해 주는 사람은 가족뿐이었다. 그들이 보고 싶었다. 그녀는 나머지를 급히 읽어 내려갔다. 건무 오라버니와 묵거 오라버니가 그녀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니 빨리 연락을 취하라고 적혀 있었다. 그의 서재에서 아직 중요한 것을 찾지 못했는데….
서신을 들고 고민하고 있는데 매당이 병문안을 왔다.
「아프다고 해서 왔네. 내일 모레가 잔치인데 이렇게 자리 보전하고 있으면 어찌 하나. 빨리 일어나야지」 그녀는 손에 들고 온 작은 소반을 내려놓았다.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도와야 하는데…」 치희는 더욱 몸을 일으켜 옷을 가다듬었다.
「걱정 말게. 예정대로 잘 돼고 있으니. 기운 차리라고 죽을 좀 가져왔네. 아침도 못했잖은가?」
「고맙습니다, 형님」
「그런 말 말게. 서방님 때문에 속 끓이는 것 다 아네. 좀더 기다려 보세. 작은서방님도 뉘우칠 걸세」
「제가 당한 일을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을 만나니 더욱 서러움이 북받쳤다.
「그만 울고 좀 먹어 보게. 다 먹지 않으면 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것이야」 매당이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며 죽을 권했다.
수저를 들던 치희의 손에서 서신이 떨어졌다.
「서신이 아닌가? 무슨 일이 있는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매당에게 대답 안 할 수도 없고 사실 별 내용도 없어 치희는 편지 내용을 좀 각색해서 말해 주었다. 오라버니들이 그녀를 만나러 왔는데 몰래 혼인을 해서 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고.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런지요? 제 설명도 없이 오라버니들이 서방님과 만나는 것이 걸립니다. 또 서방님께 말할 입장도 아니고요」
그녀의 말을 들은 매당은 자못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럼, 미리 몰래 가서 만나보는 건 어떤가. 그들에게 충분히 이해시키고 나서 서로 소개를 시키는 거지. 아, 그렇지! 내일 밤에 만나고 다음날 잔치에 그들을 초대하는 거야. 잔치하는 이유도 사람들에게 두 사람이 혼인한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친정식구도 있는 것이 좋겠지」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만나지요? 전 성내의 지리도 모르는데요」 치희는 다시 걱정이 되었다.
「그건 염려 말게. 내가 서신을 대신 보내 주겠네. 그리고 약속 장소를 정하면 그곳까지 내 하녀를 시켜 데려다 주라고 하면 되지 않겠나?」 매당은 모든 문제의 해결안을 척척 내놓았다. 그녀는 치희가 죽을 한 그릇 다 비우고서야 돌아갔다.
「매당, 꼭 이럴 필요가 있겠소? 그녀는 휘의 부인이오. 그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부인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소. 지금의 부인은 전 부인과는 다르오」 그녀가 계획을 이야기했을 때 그가 보인 반응이었다.
「당신도 처음에는 제가 혼인하는 데 동의했잖습니까?」
「그건 그녀가 나타나기 전이었소. 그녀가 없었기에 당신이 혼인하는 데 동의를 했었던 거요」
「변한 건 없습니다. 전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그들의 혼인을 깨버리겠어요. 이 아이에게 집안의 모든 재산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매당은 젖을 빨고 있는 아이를 쓰다듬었다.
「나도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도와주는 것이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을 궁지에 몰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오」
그녀는 마음 약한 소리를 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혼인할 겁니다」 그녀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럼 난 어떻게 하란 말이오. 이러지 말고 나와 함께 멀리 갑시다. 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소. 당신 아이도 내 아이처럼 훌륭히 키워 주겠소. 처음에는 고생을 하겠지만 나중엔 이보다 더한 재산도 안겨줄 자신이 있소」
그의 말에 매당은 마음이 흔들렸다. 2년 전부터 몰래 만나면서 사랑을 키워 온 사람이었다. 이 싸늘한 집안에 시집와서도 그를 볼 수 있었기에 참고 견딜 수 있었다. 혼인 전에 서로 좋아했던 그가 시동생의 친구로 나타났을 때 놀라면서도 한편 반가웠었다.
매당은 그의 유혹에 빠지기 전에 이 집의 재산을 생각했다. 하루 한 끼도 못 먹어 굶던 시절을… 그와 도망치면 이 아이도 그렇게 살아야 하리라. 어떻게 가진 아이인데…, 얼마나 사랑하는 아이인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아이가 누릴 수 있는 부를 빼앗을 수는 없었다.
「제발 제 부탁을 들어주시어요. 당신이 절 사랑하듯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가 혼인해서 아이에게 상속권이 생기면 당신과 같이 떠나지요」 그녀는 그에게 매달렸다.
그는 그녀의 눈 속에서 무엇에도 꺾이지 않을 의지를 읽었다.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소? 이게 잘하는 짓인지 난 정말 모르겠소」 그는 머리를 내저으며 마침내 그녀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 서신을 우가장 태호에게 전해 주시어요.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매당은 서신을 내어 놓았다.
그는 품속에 갈무리를 하며 물었다. 「무슨 내용이오? 내가 알아도 되면 말해 주시오」
「내일 모레 어떤 장소로 나오면 찾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태호는 휘의 가장 숙적…」
매당이 그를 노려보자 그는 두 손을 들었다. 「알았소」
그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올까 문을 꼭 닫아 주는 그를 보며 매당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정말 당신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군요. 미안해요. 하지만 절대로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겠어요 그녀는 말없이 그에게 용서를 빌었다.
치희는 매당이 다녀간 후로 계속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의 이목을 끌지 않고 떠날 수 있을 것인가? 매당이 아침에 와서 한 말이 계속 귀에 울렸다.
내가 오라버니들에게 연락을 했으니 오늘 밤에 내 뒤뜰로 오게. 그곳에서 말과 동서를 안내할 하녀가 기다릴 것이네
완벽하게 준비를 한다고 해도 휘의 이목을 속이기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새로 옮긴 처소는 그와 가장 가까웠다. 아무래도 무슨 방법을 찾아야 해.
치희는 그가 외출했다는 말을 듣고 휘의 서재로 향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책상 위에 서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지난번에 서류를 빼낸 함은 자물쇠가 굳게 걸려 있었다. 도둑을 방비하기라도 한 듯 모든 함이 다 닫혀 있었다.
낭패감에 힘없이 책상 위로 눈길을 돌리던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 집안의 사건과 연루된 사람들 명단이었다. 왜 10년 전의 사건이 책상 위에 올라와 있을까, 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서둘러 그것을 챙기려는데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태연하게 돌아섰다. 휘였다. 그 뒤에는 소노가 서 있었다.
「어디 있는지 찾았더니 여기 있었군. 여기서 뭘 하셨소? 찾는 거라도 있소?」
「아닙니다. 잠시 뵈러 왔다가…」 책상을 등지고 돌아선 그녀는 그가 보지 않았을까 염려가 되었다.
「왜, 책상에 부인의 흥미를 끌 만한 것이라도 있었소?」 그가 그녀 뒤쪽의 책상을 흘낏 쳐다보았다.
「아무것도요. 그런 것은 없답니다. 단지 좀 뵈러 왔다지 않사옵니까」
「무슨 일로 날 찾았소?」
소노의 손에 들린 것이 눈에 띄었다. 지난번 소풍을 갈 때 가져갔던 그 보따리였다.
「그러니까… 괜찮으시다면 지난번에 간 곳으로 소풍을 갔으면 해서요. 아직 꽃이 피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그때 충분히 구경하지 못했잖아요」 그녀는 간신히 말하고는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도 그럴 생각으로 부인을 찾았소. 소노가 먹을 것도 모두 준비했소. 말은 어떻게 됐지?」 그가 등뒤의 소노에게 물었다.
「모두 준비되었으니 이제 나가시기만 하면 되옵니다」
치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말이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치희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한번 와본 길이라 눈에 익었다. 폭포에 이르러 그가 입을 열었다.
「부인, 아직 마음이 안 풀렸구려. 내 사과하리다」
치희는 그가 준 상처가 떠올랐다. 그 상황을 모면할 다른 방법이 생각났더라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대꾸하지 않자 그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지난번 왔을 때가 막바지였는지 꽃은 모두 지고 없었다. 하지만 낙엽이 한창이어서 가는 길마다 부스럭거리며 발 밑에서 잘게 부서졌다. 가운데 공터도 낙엽이 이불처럼 푹신하게 쌓여 있었다. 그때의 추억을 되새기자는 건가?
이곳에서 그와 처음으로 다정하게 보냈지. 오늘 떠난다고 생각하니 그와 지낸 날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그의 인상, 도망가다 잡힌 일, 아내가 되어 달라던 말, 그녀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 그와 사랑을 나누던….
그의 뒤를 따르던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가슴 한쪽이 무너져 내리며 콕콕 쑤시는 아픔이 계속되었다. 그를 생각할 때면 나타나는 이런 아픔은 오늘따라 그 증상이 심해지면서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난 그를 사랑해라고.
치희는 그를 사랑했다. 그는 원수라고, 결코 좋아해서는 안 된다고 수없이 되새겼지만 그를 향한 사랑은 첫 만남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해 오늘까지 마음 한 구석에서 소중히 자란 것이다.
스스로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은 어쩌지 못했다. 그가 집안의 원수라는 사실 역시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그를 사랑하지만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어리석은 여자 같으니…. 생각에 잠긴 그녀는 자리에 앉고 나서도 계속 침묵을 유지했다.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거요? 부인이 이렇게 조용해질 수 있다니 놀랍군」
그녀는 그를 쏘아보고는 더욱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럼 누가 이기나 한번 볼까? 부인이 이기면 더 이상 건드리지 않겠소」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더니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런 상황에서 농을 걸고 싶을까? 순식간에 바뀐 그의 태도에 치희는 자기만의 생각에서 벗어났다. 왜 갑자기 소풍을 오자고 했으며 무엇이 저렇게 기분이 좋을까? 요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은 전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다니. 화해를 하자는 것인가?
오늘 밤에 여기를 떠나면 다시는 그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생각에 그녀는 마음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해졌다. 이미 그의 여자가 된 몸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 마음까지 가져간 그를 떠나면 평생을 혼자 살아야 할 것이다. 치희는 솟구치는 눈물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와의 즐거운 추억을 한 가지쯤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아버님의 말이 생각났다.
난 그 사람과의 즐거웠던 추억만을 간직하고 살지
그분의 말씀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사랑하는 남편을 집안의 원수로서, 증오의 대상으로서 한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할 것을 생각하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의 진정한 아내로 살고 싶었다.
「음… 부인과 이름이 똑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소? 그 여인의 이름도 치희였는데 우리 나라 남쪽에 있는 고구려왕의 부인이었지. 그녀도 부인만큼이나 아름다웠다는군. 부인의 이름도 그녀의 이름을 따서 지었지 않나 싶은데…. 이런 이야기는 관둡시다」 그는 이야기하다 말고 엉덩이의 흙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이제 막 마음을 열고 듣던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새 기분이 바뀌었나?
휘는 앉아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내의 관심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그 대상은 아마도 미유라는 사람이겠지. 그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떠날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그리 멀지 않은 시일 내에. 떠나기 전에 그와 행복했던 기억 한 가지 정도는 만들어 주고 싶었다. 여태까지는 화를 내고 비꼬고 싸우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게 전부였으니까.
오늘 하루 그녀에게 최고의 날을 선사해 주리라.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남편처럼. 그녀가 어디를 가든 평생 그를 잊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 역시 그녀와의 잊지 못할 추억을 갖고 싶었다. 그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눈가에 웃음을 띠려고 노력했다.
「더 이상 얘기해서 뭐 하겠소. 부인은 관심도 없는데 바보같이 나만 혼자 떠드는 것 같군」
장난기 가득한 눈에 심술궂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보며 치희는 투정부리는 아이를 달래듯이 자신을 다루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는 그의 눈에서 그녀도 뭔가를 읽을 수 있었다. 무엇인지 정확히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그가 시작한 이 놀이를 최대한 이용하리라.
「좋습니다. 이렇게까지 용서를 빌고 계시오니 이번만은 봐드리지요. 이제 그 뒷얘기를 해주실런지요」
새침하게 말을 끝마치자 그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기를 좋아하고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그녀의 약점을 공략한 계획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은 누군가 건드리면 무너져 버릴 모래성 같은 약속이 있었다. 오늘 하루는 조용히 보내자는 말없는 묵계였다. 마음을 감추고 자신마저도 속이는 그들의 놀이가 시작되었다.
「그만 웃고 어서 말씀하시지요. 꼭 저를 그렇게 비웃어야겠는지요?」
점점 날카로워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휘는 서서히 웃음을 거두었다. 「잠깐, 잠깐. 하나만 물읍시다. 분명히 부인이 진 거요, 그렇지? 어서 대답하시오」
무슨 내기를 했기에 내가 졌다는 것일까? 어쨌거나 이제는 그 내기의 종류를 따질 이유도 없었다.
「좋습니다. 무슨 내기인지는 몰라도 제가 졌다고 하지요. 잘못을 뉘우치는 것 같아 용서해 드린 겁니다. 빨리 얘기나 해보시지요」
「워낙 잘못한 것이 많아 어느 것을 용서한 건지 모르겠구려. 대충 그렇다고 해두고. 대신 한 가지 더. 이 내기에 졌으니 난 한 가지를 요구할 수 있소. 오늘 밤은 나와 함께 지내는 거요」
그의 말에 순간 긴장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치희는 그가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모르지만 완벽한 추억을 만들기 위해 그의 의견에 동의하기로 했다. 언제 다시 그와 이렇게 지낼 수 있겠는가.
「이야기 하나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시는군요. 좋습니다. 저도 그렇다고 해두지요」 그녀의 대답에 그가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진짜 아내를 아끼는 남편처럼.
「좋소. 이젠 화내지 마시오. 토라진 모습이 더 예쁘긴 하지만 」 휘는 다시 곁에 앉아 짧게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는 완벽한 거짓 부부였다. 스스로를 속이면서 둘 다 이 놀이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하루뿐이다. 「어디까지 했더라. 음… 고구려의 치희 얘기를 하고 있었지. 고구려 제 2대 유리왕 때였소. 첫 부인이 죽고 왕은 두 후궁을 맞아들였는데 그 이름이 화희와 치희였지. 화희는 유력한 가문의 딸이었고 치희는 천하게 여기는 망명한 한나라 사람이었는데 그 둘 간에 다툼이 잦았다오」
「그 왕은 부인이 둘뿐이었나요?」 그녀가 궁금해하며 이야기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니, 태자의 새어머니인 황후 송씨가 있었지」 그는 대답하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계속하시지요. 이젠 조용히 듣고만 있겠습니다」 머쓱해진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래서 유리명제는 그들을 갈라 동궁과 서궁에 따로 거처하게 했는데 그가 사냥을 나간 사이 또 말다툼이 벌어졌다오. 화희가 치희에게 네년은 한인이 살던 비첩인 주제에 어찌 이토록 무례할 수 있느냐?라며 모욕적인 발언을 했소. 그 말에 치희는 친정집으로 가버렸지. 나중에서야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뒤를 쫓았지만 치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오. 왕은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외로운 마음을 시로 읊었는데 제목이 황조가라고 하오. 천한 출신으로 그만한 대우를 받은 걸 보면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웠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지」
굵고 힘이 있으면서도 다정한 그의 목소리. 이것도 오늘로써 끝이었다.
「그녀를 위해 시까지 지었다니 정말로 사랑했나 보옵니다. 그럼 그 화희는 어떻게 되었는지요? 왕이 사랑하는 사람을 쫓아버렸으니 벌을 받았겠네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치희 편을 들고 있었다.
「아니, 그렇지 않소. 가장 부덕하게 여기는 투기를 했는데도 살아남았지. 그만큼 세력이 강한 집안이었소」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왠지 모르게 화희의 모습 위로 매당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녀는 그럴 리가 없었다. 얼마나 자신에게 잘 대해 주었던가. 치희는 얼른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 황조가라는 시를 아시는지요? 듣고 싶사옵니다」
그녀가 졸라대자 마지못해 그는 입을 열었다.
펄펄 나는 저 꾀고리 편편황조(翩翩黃鳥)
암수 서로 정답구나 자웅상의(雌雄相依)
외로운 이 내 몸은 염아지독(念我之獨)
뉘와 함께 돌아갈꼬 수기여귀(誰基與歸)
유리 왕이 치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녀에게도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왕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그 여인이 부럽기까지 했다. 오늘, 가장 찬란하고 빛나는 하루를 만들리라.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굵은 눈물 방울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
휘는 울고 있는 치희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시에 눈물을 흐리다니, 아직 어린애 같구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들어 자신의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노래가 너무 애절하지 않사옵니까? 제가 떠나도 그처럼 그리워할 수 있는지요?」
그녀의 말에 휘는 움찔했다. 일어나 한바탕 휘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다독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난 부인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오. 절대로 부인을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말이오. 어디에도 보내지 않고 내 곁에 묶어 두겠소」 그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치희는 새벽녘이 되어 주위가 고요해지자 조심스레 일어났다. 그녀의 몸에 얹혀진 그의 팔을 움직이기란 쉽지 않았다. 만일 그가 잠에서 깨어난다면 모두 허사가 되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의 팔을 슬며시 밀어젖히자 그가 꿈지럭거리더니 방향을 틀어 돌아누웠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시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으로 방 안이 어슴푸레했다. 그녀는 옷을 찾아 입고 미리 준비해 둔 털옷도 걸쳤다. 돌아서 나가려던 발길을 멈추고 치희는 마지막으로 잠자는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숲에서 돌아온 뒤 그들은 꿈 같은 시간을 보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서로의 옷을 벗기며 입을 맞추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섬세하게 다루었다. 온몸에 쏟아지던 그의 손길과 입술이 머무를 때마다 늘어놓던 찬사들. 그리고 그녀의 손길 아래서 신음을 삼키던 그의 모습 하나하나가 그녀의 뇌리에 남았다. 한 번의 관계를 갖고 나서도 또다시 불타오르는 그를 보면서 치희는 그도 마지막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아닐까 의심을 품었다.
그녀는 다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그가 깨지 않도록 나지막이 속삭였다. 「미안해요. 서방님의 마음을 알지만 전 가야 합니다. 서방님과 저는 만나서는 아니 될 사람이었어요. 전 서방님의 꿈을 이뤄줄 수가 없답니다」
그녀는 이불로 그를 잘 덮어주고는 문을 나섰다. 자신의 등뒤에서 베개를 내리치는 그의 주먹 소리는 듣지도 못한 채.
약속한 장소로 가니 하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말은 구하지 못했다고 매당 아씨께서 전하라고 하셨사옵니다. 좀 느리더라도 걷는 것이 눈을 속이기에 좋다고 하시면서」
치희는 아무 말 없이 하녀를 따라 어두운 밤길을 한참을 걸어갔다. 고요히 잠든 성내는 어디가 어딘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하녀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만 나아갔다. 치희는 그녀를 놓칠세라 열심히 그 뒤를 쫓았다. 하녀가 야트막한 야산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조금 올라가니 근처에서 말들의 콧김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가까운 곳에 오라버니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치희는 낮은 나뭇가지에 옷이나 머리가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앞으로 나갔다. 거기서 하녀가 멈춰섰다.
「여기까지만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시면 됩니다」
치희는 하녀가 가리킨 곳을 향해 나아갔다. 두 사람과 말 세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오라버니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먼저 물어왔다.
「오라버니들을 만나러 오시었소?」 둘 중 인상이 덜 험악한 사람이 물었다.
「예. 그런데… 그들은 어디 계신지요?」 성질 급한 오라버니들이 다른 사람을 보냈을 리는 없는데….
「함부로 다니실 수 없다 하시면서 저희보고 모셔오라 하시었습니다. 말에 오르시지요」
치희는 의아해하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말 가까이 갔을 때 난데없이 뒤에서 큼지막한 손이 입을 틀어막고 움직이지 못하게 손을 묶었다. 그제서야 일이 잘못된 것을 알고 심하게 반항하자 무엇인가 그녀의 머리를 심하게 내리쳤다. 그리고 암흑이 찾아왔다.
9장
조우와 형서가 휘의 방에 들어섰다. 아침부터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휘는 방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손에 든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우리 왔네」
휘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병에 술이 없는지 주둥이 쪽을 바닥을 향해 몇 번 흔들더니 휙 던져 버렸다. 그는 주위를 더듬으며 다른 술병을 찾았다.
그들은 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주인공이 사라져 어제의 잔치는 무산되었다. 초대한 손님들 집에는 일일이 사람을 보내어 잔치가 취소되었음을 알렸다.
어제 휘는 정말 대단했다. 거의 살인적인 눈빛을 내며 하인들에게 모든 것을 치우도록 지시했다. 큰 소리도 내지 않았고 분통을 터트리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슬금슬금 피하며 되도록 그의 근처에는 가지 않으려 했다.
휘는 많은 술을 자신의 방으로 가져오게 한 뒤로 방에만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아침이 되어서 하인들이 급히 형서와 조우를 부른 것이었다. 하인들이 들어서면 술병이 날아와 접근을 못한 탓이었다. 조우가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휘! 우리가 왔다니까. 이제 그만 마시지」 조우가 그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형서에게 건네주었다.
「가서 하인들에게 시원한 물 좀 가져오라 해주게. 이건 치워 버리고」
형서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형서, 올 때 옷도 부탁하네. 술은 휘가 아니라 옷이 전부 마신 것 같으이」 조우가 형서의 등에 대고 덧붙였다. 조우는 휘를 구석에서 끌어냈다.
「이보게 친구, 그렇게 후회할 거면 가서 모셔오면 되지 않은가. 이러고 있다고 해결되겠나?」 조우는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후훗…」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휘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나 싫다고 간 여인을 뭐 한다고 붙잡나. 가서 잘 살면 되는 거지. 자네는 여인을 얻으려면 말야, 몸보다는 마음을 먼저 얻도록 하게. 내 꼴 나지 않으려면 말야」 발음도 분명치 않게 휘가 조우에게 훈계조로 말했다.
「자네도 모르는 게 있었군. 난 그 사람의 마음은 얻었어도 몸에는 손가락 하나 댈 수가 없었지. 그 고통 또한 자네 못지 않을 것이네」 감정도 섞이지 않은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조우는 휘를 평상으로 눕히고 옷을 벗겨냈다. 옷 여기저기에 술이 흘러 냄새가 진동했다.
「난 말이야,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잡지 못했네. 내가 말했지. 난 부인을 떠나보내지 않겠소. 내 곁에 묶어 둘 거야 모두 거짓말이었네. 하루 동안 서로를 속이며 찬란하게 불태웠지. 사랑을 나누면서는 그녀가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마저 품었다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래서 자네의 충고대로 하려고 노력했다네, 난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려고 했어. 그런데 항상 그녀는 빗나가더군. 왜 그런지 몰랐지. 어젯밤 내 방에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기까지는 말야. 생각해 보니 반대로 되었어. 난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달아났지. 어떤가, 웃기지 않나?」 휘는 팔을 들어 손목으로 얼굴을 가렸다.
조우는 그의 뺨 위로 흐르는 것이 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인이 얼굴을 찡그리며 그가 부탁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문 좀 활짝 열어 주게. 환기를 시켜야겠어」
하인은 그가 말하는 대로 문을 모두 열어젖혔다. 조우는 휘를 반쯤 일으켜 입에 물을 대고 억지로 마시게 했다.
「이제, 좀 자두게나. 깨어나거든 말짱한 정신으로 이 문제를 다시 의논하도록 하자고」
그를 다시 평상에 눕히고 나자 형서가 그의 옷을 들고 왔다. 둘은 어렵사리 휘의 옷을 갈아 입히고 조심스레 방을 나왔다.
방문을 닫으며 형서가 한 마디했다. 「난 휘가 눈물을 보인 것은 처음 봤네」
조우는 형서의 침중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건 눈물이 아니라 술이 묻은 거야. 그렇게 알아 두세」
휘는 난리가 났나 보다 생각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조우가 뭐라고 하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그 다음 일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 그녀가 떠났지. 그것만이 중요한 거야. 그때 또다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쩔쩔 매는 하인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누군데 내 집에 와서 큰 소리를 낸단 말인가. 휘는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분은 여기 안 계십니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그럼, 주인을 불러! 다 알고 왔어. 치희를 내놓을 때까지 절대로 나갈 수 없어」
「제발! 조용히 좀 해주십시오」 하인은 손을 들어 그들을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리께서 일어나시면 큰일이 날 텐데, 이 일을 어쩌지」 문을 지키던 하인은 거인 같은 사람들 앞에 서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남의 집에서 소란들이오?」 휘가 마당으로 걸어나오며 거구들에게 소리쳤다. 두 명은 땋은 머리를 보아하니 읍루 사람 같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바로 자신의 아내를 데려갔을 미유였다. 그를 보자 피가 다시 솟구쳤다. 그때 우렁찬 목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네가 주인이냐? 우린 치희를 찾으러 왔다. 그녀를 내놓아라」
말고삐를 쥐고 있는 그 남자는 결코 만만해 보이지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는 절대로 물러설 사람 같지 않았다. 뒤에 서 있는 사람은 그보다는 약해 보이지만 여차 하면 뛰어들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내가 주인이오. 그런데 당신이 찾는 사람은 여기 없소. 그녀와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휘는 그들의 뒤쪽에 있는 진서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도 단단히 화가 난 듯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아인 내 누이야. 여기 있는 것 다 알고 왔다」 다시 그 우렁찬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치희의 오라버니들인 것을 알았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세 명의 오라버니가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저 사람들은 둘뿐인데.
「흥! 잘못 찾아오셨소. 그녀에 대해서라면 나보다는 뒤에 있는 저 사람에게 물어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휘는 턱짓으로 진서를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제서야 미유가 앞으로 나섰다. 「연락도 없이 들이닥쳐 죄송하오. 예가 아닌 줄 알지만 형님들이 워낙 성화를 대서…. 우리 누이를 보게 해주시오. 무사한지 꼭 봐야겠소. 어제부터 기다렸지만 연락이 없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소」
모두의 눈이 그에게로 쏠렸다. 휘는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 한참 걸렸다.
「무슨 말이오. 그녀가 당신의 누이였단 말이오?」 마당 안이 경악에 찬 그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그들은 없어진 아내를 찾고 있었다.
「그녀가 당신에게 간 게 아니란 말이오? 그녀는 어제 새벽에 사라졌소. 당신한테 간 줄 알았는데…」 그의 말에 또다시 시선들이 미유에게 모아졌다.
「무슨 말인지… 우리는 기다리라는 연락만 받았소」 진서의 어이없는 대답이었다.
참다 못한 건무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모른다는 말인데. 혹시 네 녀석이 10년 전의 잘못을 덮을 요량으로 그 아이를 어떻게 한 것 아니냐?」 성질 급한 건무가 앞으로 나서자 형제들이 양 옆에서 그를 말렸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그때 그의 친구들이 부산스레 들어왔다.
「무슨 일로 이렇게 마당에 모여 있지? 휘! 자네 이제 괜찮나?」 형서가 일어난 휘를 보며 반가워했다. 그러나 무색하게도 마당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괜찮지 않네. 일이 생겼어」
무언가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고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집 안쪽에서 휘의 아버지와 늙은 노인 한 분이 나왔다. 그를 본 형제들은 또 한 번 경악해야 했다.
「추아저씨! 여기는 어인 일이십니까?」
묵거의 놀란 목소리에 아저씨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저지했다.
위엄을 갖춘 휘의 아버지가 나섰다. 「허허!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모두 들어가세. 휘야, 손님들을 안으로 모시거라」
그들 모두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군말 없이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휘의 아버지가 먼저 기선을 잡았다. 「내가 설명을 하지. 휘야, 여기 모인 손님들과 작은아기 치희는 네가 10년 전에 실수를 범한 그 집의 남매들이다. 네가 찾다가 못 찾은 사람들이지. 그리고 이 녀석은 내 아들로 치희의 남편이 되오. 휘야, 네 매형들이다. 어서 인사드리거라」
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으나 진상을 알기 위한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일단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휘라고 합니다」
「실례가 많았소. 그렇다고 우리 사이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오」 형제들도 예를 갖추어 답했으나 여전히 위협적인 어조였다.
다시 휘의 아버지가 나섰다. 「이제 내 설명을 듣고 사태를 해결하게. 그날 자네들 집안을 그렇게 만든 것은 내 아들이 아니네. 우가 밑의 태호라는 놈이지」
「저희도 짐작하고 있습니다만 증거가 없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모두들 휘라고 알고 있습니다. 치희도 이 사람이라고 확신을 하고요」 묵거가 그동안 조사한 사실을 말했다.
「그건 염려하지 말게. 내가 그동안 모든 증거를 확보해 두었다네. 자네들과 이 추늙은이의 공이 컸지」
이야기가 겉도는 것 같자 미유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지금 중요한 것은 치희를 찾아내는 겁니다」
차분한 묵거가 저지시켰다. 「잠깐 듣고 나서 이야기하지. 계속 하십시오, 어르신」
「그 일이 있은 후 이 녀석은 자네들을 찾아 수소문했지만 못 찾았지. 그 전에 내가 찾았거든. 난 자네들을 내 친구인 이 추가 늙은이에게 부탁했네. 그래서 자네들이 읍루에서 살게 된 것이고. 그런데 우연히도 치희가 우리 집에 며느리로 들어오게 됐지. 그러다 어제 아침에 사라졌네」
「왜 제게는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까?」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휘가 따져 물었다.
「증거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혈기왕성한 네게 알렸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냐?」
「그럼 그 아이가 어디 있단 말씀이십니까?」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미유가 다시 물었다.
「그건 내가 말할 것이 못 되네. 다 저 녀석이 못난 탓이지. 이봐, 추늙은이. 우리가 할 일은 이제 끝난 것 같네. 다음 일은 젊은 사람들한테 맡기고 우리는 들어가 그동안의 회포나 풀지」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휘를 돌아보았다.
「네 이 녀석! 둘째 아기를 찾기 전에는 집에 들어오지도 말거라」
두 노인이 사라지자 서재는 혼란에 빠졌다. 모두가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앞뒤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사건이 정리되었다.
그녀는 오라버니들이 왔다는 미유의 서찰을 받고 그들에게 곧 연락한다는 편지를 전했으며, 다음 날 그의 집에서 사라졌는데 그들에게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다리다 못해 쳐들어 온 것이었다. 그럼 그녀는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좌중은 모두 침묵에 잠겼다. 누구도 그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설명할 사람도 없었다.
휘는 자신을 떠나던 그녀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을 원수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한 행동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어 미칠 것 같았다. 모두 내 잘못이야.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한쪽에서 시종일관 그들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형서가 한숨을 내쉬더니 조우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고, 조우는 조용히 휘에게 그의 말을 전했다.
「죄송합니다만,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집안에 문제가 생겨서요」 휘는 조우와 형서를 따라 일어서며 그들의 양해를 구했다.
「만약 누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우리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인 묵거가 나섰다. 모든 것을 꿰뚫을 것 같은 눈으로 한 동작도 빼놓지 않고 그들을 살폈다는 데 휘는 내기를 걸 수도 있었다.
「다른 일인 것 같소. 만약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말씀드리리다」
셋이 사라지자 방 안에는 더욱 무거운 한숨만이 남았다.
「그가 거짓말한 것은 아닐까요? 어딘가에 치희를 숨겼는지도 모르잖아요」 묵거는 닫혀 있는 방문을 의심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그건 아닐 겁니다. 내가 보기엔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에요. 치희를 무척이나 걱정하는 눈빛이던걸요」
미유의 말에 팔짱을 끼고 있던 건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었다. 큰 덩치와는 다르게 그의 동작은 우아했다. 미유는 그의 동작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며칠 그의 집에서 머무르는 동안, 형들은 처음 인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읍루에서 생활했다고 해서 거칠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모든 동작에 절도가 있고 예의가 배어 있었다.
「셋째 말이 맞다. 난 그를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본다」
「큰형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런데 처음에는 치희에게 화가 많이 난 것 같던데… 혹시 부부싸움하고 집 나간 것 아냐?」 묵거는 두 형제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방을 나갔던 사람들이 다시 들어왔다. 그들이 보기에 가장 인상좋던 사람의 고개가 절반 이상 숙여져 있었다. 뭔가 잘못한 듯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녀가 있는 곳을 알았습니다. 역시 태호의 짓이더군요. 전에 그녀를 납치하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는데 아직까지도 기회를 노리고 있었나 봅니다. 지금 그녀를 찾으러 가려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휘는 그들이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일이 생겼습니다. 요즘 서재에 도둑이 들어 제가 조사하느라 책상에 10년 전 사건의 명단을 두었는데 그것이 없어졌습니다. 부인이 가지고 가신 것 같습니다. 만약 태호가 발견해서 부인의 정체를 눈치챈다면 살기 어렵습니다」
조우의 말을 들은 그들은 서둘렀다. 휘는 따라오려는 미유를 한사코 저지했다. 오라버니인 줄은 알지만 그동안 쌓인 감정이 쉽게 풀리지 않은 까닭이었다.
「일이 끝나면 당신 집으로 가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겐 그냥 우리가 방문한 것으로 해주시죠.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니 멀리 움직일 수가 없어요. 당신 집이 가장 가까우니 그리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가서 손님이 오는 것처럼 하인들에게 준비를 시켜 주십시오」
휘의 부탁에 마지못해 미유는 집으로 돌아갔다. 형제들과 휘는 급히 전략을 짰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형서가 휘에게 입을 열었다.
「내가 할 일이 있으면 말하게. 사죄하는 뜻으로 어떤 일이든 하겠네」
휘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지금은 없네. 일이 잘 된다면 내일 저녁 술이나 한잔 하세. 그때 자네 문제는 다시 이야기하세. 자네를 믿어 보겠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형서가 방을 나갔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관련되었다면 우리 일을 누설하지 않겠소? 저렇게 보내도 되느냐는 말이오」 둘째가 날카롭게 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그 친구는 제가 보증합니다. 그로 인해 다시 문제가 생기면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조우의 비장한 어투에 더 이상 그 문제로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밤이 되기 전에 태호의 집에 도착하려고 출발을 서둘렀다.
머리에 통증을 느끼며 깨어난 치희는 차라리 다시 정신을 잃고 싶었다. 눈을 뜬 곳은 처음 그녀가 끌려왔던 그 공포의 방이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낮이란 것은 알 수 있었지만 도대체 얼마나 쓰러져 있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나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오라버니들을 만나러 나갔다가 봉변을 당한 일이 떠올랐다. 오라버니들은 어찌 되고 그가 기다리고 있었을까?
초조하게 서성이는 사이 방 안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방 밖의 보초가 불을 밝혀 주기 위해 들어왔다 나가며 곧 주인이 올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심장이 요란하게 쿵쾅거렸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었다. 어서 이 방에서 나가야만 했다. 필사적으로 도망갈 구멍을 찾는 그녀의 눈에 족자 뒤쪽으로 창틀이 보였다. 아주 작은 창이어서 그녀의 작은 체구도 빠져나가기가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매달릴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창 밑 가구 위의 물건들을 치우고 족자를 걷어내니 더 작아 보였다. 안쪽으로 창을 열자 바로 눈앞에 담이 보였다. 머리를 내밀어 살펴보니 담과 창 사이가 1척 반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치희는 비스듬히 몸을 틀어 창문에 끼워넣었다. 다행히 엉덩이가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체구가 작다는 것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치희는 있는 힘을 다해 담 위에 걸터앉았다. 적당히 뛰어내릴 곳을 찾는데 담 아래에 불을 밝힌 다른 처소가 눈에 들어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방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여자가 뭐라고 썼는지 한번 읽어 봐」
분명 태호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그의 목소리를 잊겠는가?
「부탁한 사람을 주인이 찾고 있으니 한시 바삐 죽여 달라는데요」
「흥! 여우 같은 계집! 자기가 한 일이 들통날 것 같으니까 내 손을 빌려서 죽이겠다고?」
치희는 직감적으로 자신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그들이 말하는 여우 같은 계집이란 누구일까? 누가 나를 태호에게 넘겼을까? 날 데려다 준 하녀? 돈 때문이었나?
「매당이라는 여자, 생각보다 더 악독하군요」
하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매당? 매당이라고? 놀란 치희는 한순간 휘정거리다 담에서 떨어질 뻔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렇게 믿었던 사람이…. 그럼 처음부터 나에게 접근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단 말인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러자 아무도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는 사람은 매당뿐인데 그녀가 일을 꾸몄다면 그에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서둘러 도망치려고 옆으로 엉덩이를 들썩거리는데 또 다른 말이 들렸다.
「요즘 읍루에서 온 듯한 사람이 우리가 데리고 있는 여자를 찾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혹시 휘가 10년 전의 일로 아직까지 앙심을 품고 사람을 사서 조사하는 것이 아닐까요?」
「글쎄… , 그 사건은 내가 꾸민 일이지만 모두들 그가 한 일로 알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뒷처리만 하고서 원망은 그가 다 들었으니. 그때 그의 표정이 볼 만했지. 자기가 실수했음을 알고 길길이 날뛰던 것 말이야. 자네도 봤지? 오명만이라도 벗겨 달라고 사정하는 걸 거절했지. 그 놈은 사정을 하러 와서도 목에 잔뜩 힘을 주더군. 부탁하러 온 사람의 자세가 아니더란 말이야」
「그들을 어떡할까요?」
「누구? 아! 읍루에서 온 사람들? 그냥둬.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어. 조금만 지나면 다 해결될 문제야. 우리의 거사가 성공하기만 하면, 흐흐흐…」
치희는 이제껏 자신이 휘를 오해하고 있었음을 알고 소름이 끼쳤다.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란 걸 믿었어야 했다. 치희는 집에 가고 싶었다, 그가 있는 곳으로. 오라버니들도 아닌 휘가 보고 싶었다. 하녀의 뒤를 따라나오면서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얼마나 괴로웠었던가. 집! 그 말이 그녀의 가슴을 울렸다. 이제는 그곳이, 그의 품속이 그녀의 집 같았다.
자신이 그에게 주었을 상처를 생각하자 눈물이 솟구쳤다. 그때 태호의 웃음소리가 섬뜩하게 귓가에 울렸다. 그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주인님! 그 여자를 죽이실 겁니까?」
「음… 아니야. 휘는 곧 망하게 돼 있어. 내일이면 결판이 나겠지. 내가 써놓은 명령서를 보자고」
한참 만에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서랍에 잘 넣어둬」
명령서라는 걸 볼 수 있다면 좋겠는데…. 태호와 하인이 방에서 나왔다. 그들은 그녀가 갇혀 있던 처소 쪽 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어서 도망치라구! 이성은 그렇게 말했지만 실제로 그녀는 담에서 뛰어내려 그 처소로 들어가 서랍을 뒤지고 있었다. 손이 떨려 뜻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찾았다! 견식이 짧은 그녀의 눈에도 이것은 반역이 분명했다. 내일 밤! 시간이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위거라는 이름 옆에 휘의 이름도 거론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빨리 가서 알려야 해.
그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방문이 벌 컥 열리고 태호가 들어섰다. 그의 눈길이 그녀의 손에 들린 서류에 꽂혔다. 그는 전보다 더 간사해지고 악독해진 것 같았다. 눈빛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후훗! 여기 있었군. 고 작은 창으로 도망칠 생각을 하다니, 정말 대단한 계집이로군. 그래, 어때? 읽어 본 소감이…」 그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왜 좀더 빨리 움직이지 못했을까? 그가 들이닥치기 전에 나갔어야 했는데….
「전 글을 모릅니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 같으니까 가져가려고 했을 뿐이지요」
그는 그녀가 읍루에서 왔다는 것을 기억해 냈는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래, 이 요사스러운 것! 널 얻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 줄 알아?」 그는 문서를 거칠게 빼앗아 품속에 잘 갈무리하고는 느물스런 눈으로 그녀의 주위를 돌며 훑었다.
「왜 날 데려왔지요? 남편이 값을 치른 걸로 아는데요. 말 서른 마리가 부족하다고는 생각 안 합니다. 왜 약속을 어긴 거죠?」 그의 눈이 가늘어지자 그녀는 그것이 웃음이라고 생각했다.
「후… 난 중매비만 받았지, 다시 네게 손을 대지 않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어」
「간사하군요」 치희는 그의 눈길에 몸을 떨면서도 애써 당당함을 가장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 때문에 들인 수고를 생각하면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자, 이리 와!」
그가 저항하는 그녀의 팔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그녀의 옷깃을 잡아채자 품속에 있던 휘의 서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그것을 집어들었다.
「네가 왜 이런 것을 갖고 있지? 그래, 너도 읍루에서 왔지. 맞아! 넌 읍루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부여인 같았지. 너도 읍루에서 와서 내 뒤를 캐는 그 형제들과 한패였군」 그는 문서를 들고 방 안을 잠깐 서성이더니 돌연 태도를 바꾸었다. 「오늘 밤이 지나면 넌 죽어 줘야겠어. 아니, 지금 당장!」
지난번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그가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할 때쯤 그가 손을 거두었다.
「아니! 아니지. 이렇게 쉽게 죽일 순 없지」
태호가 다시 그녀를 품안에 끌어들일 때에도 호흡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침착하자,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이 사람의 화를 돋우어 죽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다. 내가 이대로 죽는다면 휘도 끝이다. 태호가 내일 거사를 치른다지 않는가.
그때 기적같이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휘가 들어섰다. 찬바람이 들어왔다.
「뭐지?」
태호가 뒤를 돌아본 순간 휘가 그를 공격했다. 의외로 태호는 일격에 쓰러졌다. 휘가 급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 다친 곳은 없소?」
말문이 막힌 그녀는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를 보자 참았던 눈물이 터지려고 했다. 휘는 그녀의 눈에 고이는 눈물을 보았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연신 밖의 동태에 신경을 썼다.
「지금은 아니오. 조금만 더 참으시오. 들어오기보다는 나가기가 더 어려우니까. 지금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옆에서 떨어지면 안 되오, 알았소?」 그는 치희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다시 밖의 동태를 살폈다.
치희는 뒤로 조금 물러서다가 뭔가 물컹한 것을 밟았다. 태호의 손이었다. 그 바람에 그가 정신을 차리며 일어나려 했다. 치희는 그를 보며 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저기, 저 자가… 일어나요…」
휘가 뒤를 돌아봤을 때 태호는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휘는 성큼 다가가 주먹을 힘껏 휘둘렀다.
「이제야 좀 시원하군. 쓰러진 사람을 때리기엔 자존심이 허락 안 해 관두려고 했는데 제 스스로 매를 벌었어. 좀더 패줬으면 좋겠군」
그가 다시 문으로 돌아갔을 때 치희는 태호의 품 속에서 명령서가 빠져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치희는 급히 그것을 주워 들었다.
「자, 이제 나가야 하오. 오라버니들이 놈들의 주의를 끌고 있으니 부인은 내 뒤만 따르시오. 알았소? 어떤 일이 있어도 나서지 마시오」
휘가 그녀의 손을 잡고 나가자 치희는 문서를 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그를 따라 뛰었다. 얼마 못 가 도둑이야라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이곳 저곳에서 뛰쳐나왔다. 휘는 앞을 가로막는 어수룩한 하인들을 헤쳐나갔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는 휘와 치희의 간격이 두 걸음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치희는 그때 누군가의 단도가 휘의 등을 향해 번득이는 것을 보았다. 치희는 급히 몸을 움직여 휘의 등을 막았고 칼은 그대로 치희의 팔에 꽂혔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그가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휘가 그녀를 찌른 사람을 때려 눕히고 급히 담 쪽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담 위에 오라버니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화살이 빗발치자 하인들은 성급히 흩어졌다. 건무가 그녀를 끌어올려 주고 아래에서 조우가 받아주었다. 그리고는 휘도 빠져나왔다. 휘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뭐가 뭔지 혼란스러웠지만 보고 싶은 사람들은 거기 다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다치지 않았어요?」 치희는 막 담을 넘어온 휘를 돌아보았다.
「치희, 너! 괜찮아?」 묵거가 걱정스레 소리쳤다.
「네… 이… 이것을…」 시야가 점점 더 흐려졌다.
조우가 명령서를 받아들자 휘가 그녀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칼에 찔렸어요. 빨리 가서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어서 셋째 형님 댁으로 갑시다」
미유를 자연스레 형님이라고 부르는 휘의 말을 들으며 치희는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녀의 팔에는 아직도 단도가 꽂혀 있었다.
치희는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기분은 상쾌했지만 왠지 몸이 묵직했다. 뭐지? 몸을 일으키려 하자 한쪽 팔이 지독히도 아파 왔다. 팔에 흰 천이 둘둘 말려 있는 것을 보고서야 치희는 자신이 왜 여기 누워 있는지 생각났다. 다시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려는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그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분간이 되지 않았다. 휘는 어디 있는 거지? 혹시… 날 버려 두고 간 것 아냐? 아니면 많이 다쳤거나….
다시 누군가가 목청을 높였다.
「들어가서 이 약을 발라 줘야 합니다. 이걸 바르면 금방 낫는다구요」
소리는 바로 방 밖에서 들렸다. 그러고 보니 이 방도 생소했다. 휘의 집에는 이런 방이 없었다.
「안 되오. 그런 말도 안 되는 처방에는 따를 수 없소. 그걸 발랐다 잘못되면 난 휘에게 최소한 사망이오」
밖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것 같았다.
「그를 그렇게 무서워하는 줄은 몰랐군요. 저도 다쳤을 때 발랐지만 이렇게 성성하잖습니까. 왜 그리 사람을 못 믿으시는지요?」
아가씨의 목소리가 무척 앳되었다.
「난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 만한 것은 질색이오. 그러니 이제 가보시오. 이 방엔 들어갈 수 없소」
확실히 조우였다.
「혹시 무슨 문제 있는 것 아니에요? 아니면 저 안에 있는 사람이 낫지 않길 바라든지 말입니다」
아가씨는 그의 화를 돋우려는 것 같았다. 조우가 어떤 사람인데 이성을 잃겠어.
「바보 천치, 멍청이, 폭군, 나쁜 놈…」
놀랍게도 그녀의 입에서 욕이 쏟아졌다. 치희는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조우는 저런 소리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또 누군가의 발소리가 났다.
「두 사람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요?」
그녀의 귀가 솔깃해졌다.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제가 이 약초를 발라 주려고 들어가려는데 이 사람이 비켜주질 않사옵니다」
아가씨의 애교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상당히 아름다울 것 같았다. 휘가 그새 그녀에게 반한 것은 아니겠지?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를 사랑한다고 인정한 다음부터는 그의 모든 것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조그만 것 하나까지도.
「이 친구는 조우라 하오. 자네는 왜 막았나?」
「이 처자가 의원 처방도 없이 그냥 막무가내로 들어가려고 하질 않나. 저걸 바르고 부인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막았지. 보아하니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아는 것이 얼마나 되겠나」
조우가 변명을? 아가씨가 그를 황당하게 한 모양이기는 했다.
「처자는 나을 수 있다고 확신하오?」
휘의 목소리였다. 언제 들어도 그의 목소리는 그녀를 들뜨게 했다.
「물론입니다. 아주 감쪽같이 나을 거예요.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럼, 들어갑시다」
방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이 들어왔다. 치희는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낮게 깐 눈 밑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담황색 옷을 정갈하게 입은 아가씨는 그녀의 생각대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 뒤에서 벌레씹은 표정을 하고 있는 조우도 보였다. 아마 조그만 아가씨에게 진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친구, 자네가 날 배신할 줄은 몰랐네」 조우가 씁쓰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럴 때는 배신이란 말을 쓰는 것이 아니네. 그리고 난 저 사람이 빨리 깨어날 수 있다면 뭐든지 다 해볼 생각이야」
휘가 지친 듯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자 조우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가씨가 천을 걷어내고 약초를 바르자 아주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눈을 뜨고 비명을 질렀다.
「아… 아파요. 그만해요」
그녀가 입을 열자 두 사람이 달려왔다. 그녀의 눈에 휘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사람처럼 눈은 충혈되고 얼굴은 홀쭉해져서 반쪽이 되어 있었다.
「깨어났어. 깨어났다고」 그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그의 옷이 상처난 팔에 닿았다. 그녀가 다시 비명을 지르자 그가 물러났다.
「엄살 그만 부려요. 조금만 참으면 금방 낫습니다. 자꾸 엄살을 부리면 난 어렵게 구한 약초를 써보지도 못하고 쫓겨날지도 모른답니다」 어린 아가씨는 짐짓 엄하게 그녀에게 훈계를 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눈을 깜짝여 보였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너무나 귀여워 치희는 웃고 말았다. 아가씨는 어느새 천을 다 감았는지 손을 털고 일어났다.
「보셔요. 제 약이 제일이지요? 부인께서 깨어나셨잖아요」 그리고는 조우에게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조우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을 짓더니 헛기침을 크게 하고는 그녀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드디어 휘와 단둘이 되었다.
「저 처자는 누군지요?」 호기심 가득한 말투였다.
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음… 부인이 깨어나서 다행이오. 열에 들떠 의식이 없을 때는 미치는 줄 알았다오」
「전 이제 괜찮습니다. 그런데 저 처자는 누구고 여기는 어딘가요?」
그가 그녀의 손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정말 다행이오. 아…부인이 나에게 물었소? 음… 그러니까…」 그는 그녀가 질문한 것을 듣지 못한 듯했다. 아니면 혹시 머리를 다친 건 아닐까? 그들이 때린 몽둥이에 맞아서?
「서방님 어디 편찮으신지요?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이다가 그녀의 침상 곁에 쓰러졌다. 그녀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여봐라!」
조우가 급히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
그는 휘를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다. 친구가 쓰러졌는데 웃다니…. 조우가 휘를 부축했다.
「이 사람 다친 것 아닙니까? 왜 이러는 건지요?」
걱정스레 묻는 그녀에게 그는 장난스레 말했다. 「음… 부인 때문이오. 이틀 밤을 꼬박 새며 병상을 지키더니 부인이 깨어나니까 긴장이 풀린 모양이오. 그나저나 이를 어쩐다? 무거워 들 수가 없군. 사실 이틀 동안 이 친구는 사람이 아니었다오」 말끝에 배인 그의 웃음이 그녀에게도 전염되었다. 「부인이 옆으로 조금만 비키면 이 친구를 눕힐 수 있을 것 같소만」
치희는 다치지 않은 팔로 그를 도와 휘를 겨우 침상에 올릴 수 있었다.
치희는 자는 그를 내려다보며 행복에 들떠 있었다. 이제 그가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 그녀는 확신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그를 오해하고 떠났던 일은 앞으로 사는 동안 두고두고 갚을 것이다. 그가 용서해 준다면 말이다. 우선은 그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팔의 상처는 설리가 발라 준 약초 덕에 시각이 다르게 아물어 가고 있었다. 휘는 하루 밤낮을 꼬박 잠만 잤다. 그동안 치희는 설리와 친한 언니 동생 사이가 되었다. 조우와 토닥거리던 그 소녀는 미유 오라버니의 양부모님의 딸로 이름이 설리였다.
그녀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온 오라버니들은 놀라운 사실을 말해주고 갔다. 추아저씨는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부여를 떠났는데 그 사람이 휘의 새어머니였다 한다. 두 분이 도망가기로 약속한 날 밤, 그녀가 가정을 지키겠다며 나오지 않자 아저씨는 그녀 곁을 떠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치희의 마을로 와서 지금까지 살았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추아저씨가 휘의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그들 남매를 돌봐 준 것이다.
그리고 조우가 와서 먼저 매당의 소식을 전했다. 방에서 나가지 못하게 사람을 시켜 지켰는데도 아이와 둘이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그녀가 가장 걱정하던 일이었다.
「부인께서 가져오신 명령서 때문에 우리는 곤경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휘가 소원하던 일이 이루어졌소. 그리고 부인 덕에 태호를 영원히 사라지게 할 수 있었소」
태호가 반역을 일으켰을 경우 휘는 결과가 어떻게 되든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반역에 성공하면 그가 정권을 쥐고 눈엣가시인 위거와 휘를 제거했을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말을 제공한 일로 태호와 같은 일당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휘와 조우는 그 명령서를 대사 위거에게 전해서 그들을 전부 잡아들였다.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반역죄로 즉시 사형을 당했다고 했다.
조우가 나가자 설리가 다시 들어왔다. 설리는 상처를 살펴보고는 그 날 밖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여자 형제가 없던 치희에게 그녀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설리는 그녀의 약초를 구하기 위해 나가야 한다며 일찍 일어났다.
「혼자 다니면 위험하니 조우님께 같이 가자고 해봐요. 부탁하면 거절은 못할 거예요」 나가려는 설리에게 치희가 말했다.
설리는 정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약한 서생 같은 사람을 어디다 쓰겠어요? 차라리 혼자 가는 게 낫지요」
모두 나가자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하루 종일 방문객이 끊이질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눈을 떴다.
「잘 주무셨는지요?」 맨 처음 건넨 말이었다.
그가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시 누웠다. 「난 잘 잤소. 부인은 괜찮은 거요? 왜 내가 여기 누워 있지?」
치희는 그가 쓰러진 일과 다녀간 사람들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는 누운 채로 느긋하게 듣고 있었다.
「참! 조우 님이 서방님이 깨어나면 계획대로 모든 일이 다 해결됐다고 전하랍니다」
「음… 누워서 그 말을 들으니 너무 좋군. 이제 나는 좀더 자 야겠소」 그가 다시 하품을 하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니 됩니다. 우린 이야기를 해야 해요. 깨시기만 기다렸습니다」 그녀가 그를 흔들어 깨우자 그는 이불을 더욱 끌어당기며 저만큼 도망갔다.
「다음에 합시다… 지금은 너무 잠이 오는군」
그녀는 그가 잠이 확 깰 만한 말을 찾느라 고심했다. 그래 말하는 거야.
「전 서방님을 사랑합니다. 지금 일어나서 대답하지 않으시면 오라버니들과 같이 떠나겠사옵니다」
그녀는 뒷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첫 마디를 꺼냈을 때 그의 잠은 이미 달아나 있었다. 그가 일어나 앉았다. 「뭐라고 했소? 다시 한 번 말해 주겠소?」
「서방님을 사랑해요」
그가 행복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내 평생 가장 행복한 날이오」
치희는 그에게서 몸을 뺐다. 「자! 서방님도 말씀하시지요」
「뭘 말이오? 내가 숨긴 거라도 있소? 부인이 없을 때 맹세코 난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았소」 그가 딴청을 피웠다.
「그 말은 반대로 들리는데요. 만약 서방님이 저말고 다른 부인을 얻는다면 다시 찾은 친정으로 가버리겠사옵니다. 그 왕의 부인처럼 말이지요」 아버지의 누명은 벗겨졌고 그 옛집에는 오라버니들이 돌아가 새로 집을 짓고 있었다.
「투기가 가장 나쁜 것이라고 말했을 텐데요, 부인!」
「죽인데도 할 수 없습니다. 오라버니들을 따라가기 전에 빨리 대답을 하시지요.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녀는 진지하게 물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가슴이 방말이질쳤다.
「아름답고 상냥하고 성깔도 좀 있고… 그리고 한 사람의 아내요」
「그런 것말고요. 감정적으로 어떻게 느끼냐는 말이지요」 그녀는 초조한 듯 두 손을 잡아 비틀었다.
그가 그녀의 두 손을 꼭 거머쥐고 눈을 맞추었다. 「난 부인이 나를 버리고 떠날 때조차 사랑했소」
그의 한 마디에 그녀의 마음이 찡하게 아파왔다. 그녀가 떠났을 때 그가 느꼈을 아픔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지요. 서방님은 집안의 원수인데다 절 사랑하는지도 몰랐고…」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눈을 보게 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다 이해하오. 부인이 오라버니 뒤에 숨어 있던 그 아이였다는 걸 몰랐던 내 책임이오」
그녀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아셨군요. 서방님이 그 검은 남자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자 이젠 그가 놀랐다. 「부인이 검은 남자라고 부르던 사람이 바로 나였단 말이오? 그런 줄도 모르고 부인이 그를 찾을 때마다 그를 미워했소」
「이젠 서방님을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겁니다」
「지난번 부인이 그 말을 언제 했더라…」
「이 악당…」
그가 입을 맞추자 그녀의 말도 사라졌다. 두 사람은 사랑의 말을 이제 몸으로 전했다
뒷이야기
정묘년(247) 1월 부여 성밖 시골, 영고(迎鼓) 때
「이제 그만 하시지요」 치희는 계속해서 꼼지락거리는 그의 손을 배에서 떼어 놓았다.
「언제쯤 되야 이 녀석이 나오는 게요?」 그가 다시 손을 뻗어왔다.
「아들이라고 확신을 하고 계시군요. 전 딸이 더 좋습니다」
「아니 될 말. 부인 같은 여자가 세상에 또 하나 나온다면… 상상만 해도 골치가 아파지는군」
「내가 그렇게 골치 아픈 존재인 줄 이제야 아셨답니까?」 그녀는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부인 손가락 하나에도 내가 무너지는데 그런 손가락이 열 개가 더 생긴다면 어떻게 되겠소? 그런 일은 훨씬 나중이어도 되오」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우신지요? 이런 계절에 오자고 해서 미안합니다. 여기 오니 성안의 식구들이 그리워지는군요」 그들은 정월에 휘의 시골집에 와 있었다.
「나보다는 부인이 더 걱정이오. 여기도 성안의 집처럼 손질을 좀 해야겠소」 그가 빙긋이 웃으며 그녀를 더욱 끌어안았다.
「차라리 우리가 성안에 들어가 살면 어떨는지요? 아버님과 추아저씨는 시골에서 살고 싶으신가 봅니다. 여기는 어머님의 추억도 많잖습니까? 두 분이 그렇게 사이가 좋은 걸 보면 좀 놀랍습니다. 한 여인을 사랑했다는 것이 그들을 그렇게 묶어 줄 수 있을까요?」
「그게 아니오. 그분들은 지금은 사돈처럼 지내시는 거요. 이제는 나도 그분이 장인어른 같다오. 지난번에는 부인을 고생시켰다고 어찌나 진노하시던지」 치희는 그가 고개를 젓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괴팍한 추아저씨가 그에게 어떻게 했을지 눈에 선했다.
「저도 그분이 아버지 같습니다. 그런데 오라버니들과는 어땠는지요? 서방님 칭찬을 많이 하던데…」
「나도 활은 꽤 쏜다고 자신했는데 형님들은 못 당하겠더군. 활대만 해도 4척이고 화살이 1척 8촌이니 왠만한 힘가지고는 어림없지. 큰형님은 아직도 나를 부인의 남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소」 그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의 손이 다른 쪽 가슴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큰오라버니는 좀처럼 겉으로 표현을 않지요. 아니 됩니다!」 그의 손이 가슴에 닿자 치희가 찰싹 때렸다. 그가 작게 저항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영고에 못 가서 어쩝니까? 모두들 나와서 밤낮으로 춤추고 노래하고 술을 마시며 신나게 논다면서요. 대가들 회의도 있고. 서방님도 가보셔야 하지 않은지요? 전부터 꼭 구경하고 싶긴 했는데…」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이제 그녀의 머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걱정 마시오. 구경이야 하겠지만 나는 부여 사람이 아니라서 많은 부분에서 제외될 거요. 그들끼리만 어울려 노는 날이거든. 나 때문에 부인이 못 가서 섭섭한 거요?」
그의 목소리에 실망하는 기색이 없자 그녀는 안심이 되었다. 「아닙니다. 서방님과 여기 있는 게 더 좋습니다」
그녀의 말에 그의 눈이 더 불타올랐다. 「아직도 안 되는 거요?」 그가 자꾸 보챘다.
「서방님은 아이 같습니다. 한 가지만 더요. 매당은 어떻게 했는지요? 전 형님이 혼자서 도망갔다고는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모두 서방님께서 꾸민 일이지요?」 그녀가 그를 마주 보기 위해 돌아누웠다.
「부인, 부인은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오. 이렇게 계속 이야기하다가는 부인이 아니라 따뜻한 물주머니를 안고 자는 것이 편할 것 같소」
「저만큼 따뜻하지는 않을 텐데요? 빨리 대답하시지요. 전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그 아이는 형서 님의 아이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지요?」
그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음… 맞소. 형님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소. 형님은 형수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탓이라며 자책했소. 죽을 때까지도 내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지. 나와 형님만의 비밀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님도 아셨던 모양이오. 그래서 형서와 함께 떠나보냈소. 어쨌거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형수는 그것도 모른 채 그의 둘째 부인으로 살아갈 것이오」
「그런데 어떻게 그 아이를 예뻐할 수 있었는지요? 아버님이 아기를 보라 하셨을 때 말입니다」
「그냥 친구 아이라고 생각했소. 사실은 조우를 의심했었소. 그리고 부인 옆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 아이가 더 예뻐 보이더군. 이제 더 이상 궁금한 것은 없겠지?」
「아직…」
「이제는 안 되오. 부인 입으로 분명히 한 가지라고 했소」 그는 그녀의 입술을 막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나갔다. 이런 행복을 모르고 그녀를 포기하려 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 여자는 절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저주 같은 그의 집안 남자들의 상처도 끝이 날 것이다.
폭풍과 환희가 지나가고 느긋한 여유가 남았다.
「언제 봐도 부인은 대단하오」 그가 귀 뒤에 작은 입맞춤으로 애정의 표시를 했다.
「음… 서방님도 대단하십니다」 그녀가 기지개를 켰다. 그때 그녀의 손에 부시럭거리는 것이 걸렸다. 「이게 뭐지요? 왜 여기 있는 건가요?」
그녀에게서 상자를 받아든 그가 꺼낸 것은 예쁜 옥패였다.
「조우가 보낸 것이군. 부인에게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는데… 옥패는 태어날 아이에게 주는 것이군. 또 여기 이렇게 써 있소. 제가 그 친구에게 엉뚱한 충고를 하는 바람에 고생이 심하셨지요? 같이 노을진 하늘을 본 후로 계속 후회했지요. 그리고 친구! 자네에게 한 충고는 엉터리였네. 심술을 부렸지. 그래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 아닌가? 다녀와서 보세나! 이게 무슨 뜻이지? 부인은 알고 있소?」
치희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조우 님이 서방님께 뭐라고 충고를 하셨는지요?」
「그게… 부인을 붙잡으려면 부인이 나를 사랑하게 하라고 했소. 절대 내가 부인을 사랑해선 안 된다고 하면서」
그의 말에 치희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조우 님은 그때 서방님이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서 놀린 겁니다. 서방님이속은 거예요」
「음… 어린 시절 악동 기질이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조우 님이 아니라 서방님이 악동이었을 것 같은데요」
「허허, 날 모함할 작정이오?」 그는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아마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었을 거요. 부인만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다니… 그게 말이 되오? 그는 그것을 깨닫게 해주려고 했나 보오」
「두고 보시지요. 조우 님도 이제 선유 아가씨를 잊고 새로운 사람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더 이상 그 꽃밭을 가꾸면서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살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요」
「어디 참한 처자라도 있소?」 치희의 얼굴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저럴 때는 정말 위험한데….
「미유 오라버니의 여동생 말입니다. 지난번에 보니 성질이 대단하더군요. 그 둘은 앙숙이지요, 우리들처럼요. 조우 님과 어울릴 것 같지 않습니까?」
그 말에 휘는 신음을 삼켜야 했다. 조우! 우리가 돌아갈 때 집에 없길 바라네. 자네의 앞날도 편치 않겠구먼. ♣
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김옥수]부여별곡.txt
오전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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