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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불처럼뜨겁게.txt

#아래 소설은 일반인이 거북해 할수 내용이 담겨 있을수 있습니다. BDSM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되돌아가기를 누르기를 바랍니다.

『1』

“헉헉…….”

“하아……, 하아…….”

격렬한 신음소리. 살과 살이 맞부딪히면서 나는 색정적이고도 묘한 자극적인 소리.

최고의 호텔에, 최상급의 침대임에도 불구하고 매트리스의 삐걱거림은, 남녀의 교성과 한데 어우러져 룸 안 을 공기처럼 떠돌아다녔다.

“지혁, 깊이……, 더 깊이…….”

숨이 넘어 갈 듯한 여자가 간신히 히프를 치켜들었다. 여자의 몸짓에 지혁은 망설임 없이 거세게 돌진했다.
이어 들리는 여자의 찢어질 듯한 신음. 땀으로 번들거리는 지혁의 목을 감고 있던 그녀의 손에 더욱 힘이 들 어갔다.

잠시도 쉴 틈 없이, 지혁은 거세게 여자를 몰아붙였다.

여자의 치켜 올려진 히프 아래에 쿠션을 받치고도 모자라, 지혁은 자신의 손으로 여자의 허 리를 들어 올려, 여자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마치 그녀를 쾌락의 정점에 도달하게 하려는 것처럼, 그의 몸짓은 거 세고 거칠었다.

“하……, 그만…….”

그녀의 몸 안에서 점점 스피드를 내는 지혁의 남성을 의식해서인지, 여자가 매달렸다.

“NO!”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음성으로 지혁은 대답했다. 그리고 대답과 동시에 그의 허리는 더욱 빨리 전진 과 후퇴를 시작했다. 한 치의 빈틈없이 여자의 은밀한 곳을 채우던 그의 중심이 여자의 몸 안에 빨려 들어갈 때마다, 여자의 신음과도 같은 간드러진 교성이 룸을 빼곡히 메웠다.

지혁이 힘차게 돌진하면, 여자는 경련을 일으키듯 바르르 몸을 떨었다. 끝도 없이 매달리는 여자의 집요한 욕구에 지혁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그녀를 열락의 도가니로 함락시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여자의 신음은 울음 섞인 애원으로 바뀌었다.

숨소리가 빨라지고, 격렬하게 내뱉던 신음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여자가 지혁에게 바짝 매달렸다. 목에 감은 팔은 지혁의 숨통을 조를 듯 힘을 주었고, 그의 허리에 휘감았던 여자의 허벅지는 흡사 샴쌍둥이처럼, 본래 그와 하나의 몸인 양 맞붙어 있었다.

속살이 맞부딪히는 낯 뜨거운 소리와 함께, 여자가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신음마저 내뱉 을 수 없을 정도 로 지쳐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희미하게 울려나왔다.

“아아……, 그만, 지혁, 제발 그만해……!”

여자가 몸을 뒤틀었다. 견딜 수 없다는 듯 지혁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하지만 지혁은 움직임 을 멈추지 않았 다.

“당신이 원하던 거, 아닌가? 아직……, 멀었어.”

“그래도, 하……, 이건 너무해. 그만, 제발…….”

여자의 애원 따위 지혁은 무시했다. 듣지 못한 척 더욱 거세게 허리아래의 운동에 속력을 가했다.

어느 순간 여자는 매달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포기했다는 듯 축 늘어뜨린 여자의 몸 위에서 지혁은 픽, 실소 를 흘렸다. 애원하고 매달리던 여자의 허벅지에 힘이 실렸다. 마치 더 깊이 들어오라는 듯, 여자는 자신을 활 짝 열어주었다. 지혁의 입가에 매달린 실소가 사라져가고 그는 여자의 몸을 포악하게 침략 해 나갔다.

풍랑을 만난 배처럼 지혁의 몸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여자의 몸을 두 동강이라도 내려는 듯, 거세게 파고들 던 허리 움직임이 화약고에 불을 붙인 것처럼 뜨거워졌고, 절정에 치달아 황홀함에 비명을 내지르는 여자의 몸 위에서 지혁은 지친 기색 없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으음, 지혁?”

“음…….”

“우리, 우리 자주 만나.”

“음…….”

한차례의 열정적인 관계가 끝나고, 지혁은 자신의 입술과 손으로 여자를 어루만졌다.

축 늘어져 움직이는 것조차 하지 못하던 여자는, 방금 전의 격렬한 정사가 만족스러운 듯 탁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속삭였다.

지혁은 여자의 가슴을 지분거리던 입술을 미끄러뜨려 아래로 내려갔다. 지혁의 입술 아래에 서 달뜬 여자가 몸을 뒤틀었다.

“자동차와 아파트는 있고, 뭐가 필요해? 으음……, 또? 또 하자는 거야?”

나른하게 속삭이던 여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혁은 싱긋 웃고는 오므려진 여자의 허벅 지를 살짝 건드렸 다. 섹스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너무 황홀해 잠시 정신을 놓을 정도로 모든 것을 내던진 여자가 지혁의 손 길에 단박에 몸을 열었다. 기꺼이 열어주겠노라, 활짝 열어젖히는 허벅지 사이로 지혁은 얼 굴을 들이밀었다.

여자가 신음을 흘렸다.

지혁의 입술을 가르고 나온 뜨거운 혀가 여자의 은밀한 곳을 더듬었다.

“하……, 지혁, 우리 계속 만나자고. 응? 뭐가 필요해? 뭘 원해?”

대답 없는 지혁에게 안달한 여자가 그의 얼굴을 이끌어 입술을 포갰다. 새겨 넣은 듯한 지 혁의 육감적인 입 술을 빨아 당기고, 그의 혀를 삼킬 듯 빨아들이던 여자가 살며시 입을 떼고 확인하듯 다그 쳤다.

“나 계속 만날 거지? 그렇지?”

“으음…….”

또 다시 얼버무리며 대답을 회피한 지혁은 그녀의 말을 막으려는 듯 키스를 퍼부었다.

“그만! 내 물음에 답부터 해.”

“계속……, 만나자고?”

“그래.”

나직하게 되묻는 지혁의 말에 여자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혁은 고른 치아를 내보 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에 여자가 홀린 듯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계속 만나지.”

“후훗. 좋아. 그럼 지혁이 원하는 건 뭐지?”

“글쎄……. 지금은 오직, 당신만 있으면 돼…….”

유혹하듯 나른하게 대꾸한 지혁은 곧 여자의 몸 위로 올라갔다. 탄력을 잃어 더 이상 아름 답지 않은 여자의 몸과 대조적으로, 지혁의 건장한 몸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시들어 가던 여자에게 지혁은 생명력이었다.

무료한 삶을 지탱해주는 활력소였다.

여자는 그것을 놓치기 싫었고, 그래서 더욱 열렬하게 지혁을 받아들였다.

“이 밤이 지나면 그때,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겠어.”

환희에 들뜬 여자의 귓불을 핥으며 지혁은 들릴 듯 말 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여자는 지혁 이 원하는 것이 무 엇인지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가 전해주는 쾌락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겼다.

바쁘게 돌아가는 카메라.

분주하게 오가는 촬영스텝들.

그 스튜디오 가운데, 지혁은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멀뚱히 서 있었다.

화려한 조명 한가운데를 바라보는 지혁의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모든 이의 시선을 한데 모으고, 동경과 선망의 대상인 자리. 그 자리에는 한참 주가를 올리는 여자 탤런트가 몸을 이리 돌리고 저 리 돌리면서 촬영 에 여념이 없었다.

얼굴에 함박웃음을 매달고, 한 여름인데도 와인 빛깔의 롱코트를 걸친 여자는 조금도 덥지 않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컷!”

사진작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스튜디오 안에 메아리쳤다.

“아휴, 더워. 더워서 질식하겠네.”

컷소리와 함께 여자 탤런트가 코트를 휙 벗어 던졌다. 더위를 이기지 못한 탓인지 그녀는 가슴을 간신히 가 리는 손바닥만한 민소매와 핫팬츠를 입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연방 부채질을 하는 여배우에 게 사진작가가 득달같이 화를 냈다.

“당장 코트 입어. 바로 다음 촬영 시작할거야!”

“이 선생님, 조금만 쉬면 안 될까요?”

“입어! 남자 모델 어딨어?”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미는 여배우를 보지 못한 척, 사진작가는 스튜디오를 매섭게 훑어보았 다.

누군가 지혁의 등을 떠민 것은 그때였다.

“우지혁 씨? 어서 조명 안으로 들어가세요.”

“미적미적 거리지 말고 어서 시작해! 뭐하는 거야, 다들?”

촬영스텝 중 한사람이 다정하게 말했지만 사진작가는 냉정했다.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지혁 이 여배우에게 다 가가자 뭐가 못마땅한지 그녀가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너무 심한 거 아녜요? 아무리 뒷모습만 나온다지만, 어떻게 이름도 없는 모델을 내 상대 로 하는 거죠?”

잔뜩 날이 선 여배우의 말에 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관절이 꺾이는 소리 가 나직하게 들려 왔다.

“떽떽거리지 말고 코트나 입어.”

사진작가의 냉랭한 어조에 여배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뾰로통하게 나온 입술을 쏙 집어넣었 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지혁의 안면근육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오늘 그의 컨셉이 뒷모습인 게 그나마 다행 이었다.

이 바닥에서 이름이 없다는 것은 삼류를 뜻한다.

이 바닥에서 삼류란 사람들에게 무시 받고, 천대 받는다.

지혁은 어금니를 사려 물고 이를 갈았다. 허공을 노려보는 그의 시선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도 조만간 삼 류의 이름을 벗어 던질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정상에 우뚝 설 것 이다.

정면은 한번도 보지 못하고, 그의 앞모습은 카메라에 담아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촬영은 계 속 되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고급 스포츠클럽은 이른 새벽 시간이라 그런지 몇몇 사람만 있어 조용 했다.

그중 한 사람, 물살을 가르고 힘차게 수영을 하는 여자를 보는 지혁의 눈길이 날카롭게 번 뜩이며 그녀의 몸 을 쫓았다.

지난 한달, 자신의 모든 시간을 투자해 얻은 결과가 지금 그의 눈앞에 있었다.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 지혁은 마음에도 없는 여자를 한 달 동안이나 상대해야 했다.

자주 가는 바(Bar)에서 삼오그룹 오너의 아내인 미진을 만났을 때, 이미 지혁은 어느 한 여 자를 타깃으로 잡 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마음만 먹었을 뿐, 정작 지혁 자신이 그 여자에게 다가서기란 실상 불가능했다. 그것 을 이룰 수 있게 해준 여자가 바로 미진이었다. 우연처럼 만난 미진을 유혹하기란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였 다.

처음에는 지혁의 존재에 몸을 사리던 미진이었지만 채 삼일도 안 되어 미진은 그의 손아귀 에 떨어졌다. 좋아 서 만나건 아니다. 허나, 지혁 자신이 원해서 이뤄진 만남이었다. 늙은 암캐 미진은 그의 입 맛에 맞지 않는 여자였지만, 소영을 만나기위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언젠가 잡지에서 기사와 함께 사진으로 보았던 여자, 최소영.

그 기사를 보았을 때 지혁은 이 여자가 자신의 인생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 었다.

허나 평범한 사내 우지혁이, 최소영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녀는 유명인의 아내였고, 막강한 재벌가의 아내였다.

우연찮게 보게 된 기사에서 미진과 소영이 대학학교 동창이라는 내용은 그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만약 그 날 바에서 미진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혁은 아직도 소영을 만날 수가 없었을 테니까.

섹스중독자처럼 끝도 없이 요구하던 미진을 생각하면 와락 구토가 치밀었지만, 눈앞에 다가 온 ‘최소영’이라 는 대가에 지혁은 애써 구역질을 삼켰다.

막 사십대에 들어선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소영이 지혁의 곁을 스치고 지 나갔다. 오랫동안 몸매를 관리해온 듯 자그마한 비키니 수영복이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저어…….”

지혁은 등을 보이고 사라지는 소영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휙, 몸을 돌린 소영이 눈썹을 치켜세워 지혁을 바라보았다.

“수영을 아주 잘하시더군요.”

캔 음료수를 내미는 지혁의 손을 빤히 보던 소영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새겨졌다.

“무슨 뜻이죠?”

음료수를 받지도 않은 채 소영이 물었다.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보는 소영의 얼굴에 비웃음 이 어렸다. 지혁 은 그녀의 손에 음료수를 떠넘기다시피 하고는 두 손을 치켜 올렸다.

“아무런 뜻도 없습니다. 그저 수영하는 모습에 넋을 빼앗겼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후훗, ‘꾼’이군요. 그런데 상대를 잘못 골랐어요. 그쪽은 기껏해야 스물여섯? 일곱으로 밖에 안 보이는데, 나 는 마흔…….”

“서른입니다.”

지혁은 소영의 말을 자르고 자신의 나이를 밝혔다.

“우지혁이라고 합니다! 수영하는 모습으로 제 심장을 흔들어 놓았으니, 되돌리는 것도 그 쪽이 해주시죠.”

유혹하듯 말을 덧붙인 지혁은 소영의 앞에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소영이 천천 히 지혁의 손을 마 주 잡았다.

소영은 수영모자를 벗고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렸다.

“입에 발린 말이라는 건 알겠는데, 싫진 않네요. 칭찬 고마워요.”

“하하, 입에 발린 말이라니요.”

“어쨌든 주스는 잘 마실게요. 여기 회원인가본데 앞으로 자주 봐요.”

미련 없이 돌아서는 소영의 뒷모습에 지혁은 다급하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직 아침식사 전이시죠? 근처에 야채죽 잘하는 곳이 있는데……. 함께 드시겠습니까?”

지혁은 툭, 미끼를 던졌다.

걸음을 멈춘 소영은 한동안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서있었을까. 지혁은 슬슬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죽이라……. 위험스러울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와 아침식사라…….”

몸을 돌린 소영이 지혁에게로 한걸음씩 다가섰다.

미끼를 문 물고기는 절대 낚싯바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법이다.

“좋아요! 외간 남자와 죽 한 그릇 먹는다고 뭐 큰일이라도 나겠어요?”

그리고 지혁은 자신의 낚싯바늘에 걸린 ‘최소영’이라는 먹이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라 고 다짐했다.

막강한 재벌가의 아내로, 오만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최소영과, 가진 것이라고는 고작 잘난 몸 하나가 전 재 산인 우지혁이 만난 것은 그날, 그 순간부터였다.
허나 그때의 지혁은 모르고 있었다.

성공의 발판이라 생각했던 최소영이, 파멸의 지름길이 되리라는 것을…… 그는 감히 짐작조 차 하지 못하던 때였다.

『2』

촬영이 있는 날은 기껏해야 일주일에 한두 번이다. 그것도 어쩌다가 잡히는 일정이었고, 일 주일동안 한번도 출연제의가 들어오지 않는 날이 허다했다.

인기 있는 연예인이야 그럴듯한 매니저를 대동해서 어깨를 추켜세우고 다니지만, 무명 배우 에게 매니저는 사치였고, 어깨를 세운다는 것은 언감생심 바랄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혁은 매니저 없이 혼자 뛰어야했다. 어쩌다가 방송국 PD를 만나면 이마가 땅에 닿을 정 도로 머리를 조아 려야 했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연예인을 만나면 숨소리조차 죽여야 했다.

물론, 그가 PD를 만나는 것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문 일이다. 또한 대선배를 마주하는 기회도 잘 없었다. 그는 단역을 도맡아하는 엑스트라였고, PD나 인기 연예인들은 단역배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인색한 사람들 이었다.

그런 지혁에게 출연제의가 들어온 것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우지혁 씨? MBS 아침드라마 박종규 피딥니다. 이번 아침드라마에 출연하던 남자조연이 사고를 당하는 바 람에, 시급히 남조를 교체하게 됐습니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 우지혁 씨가 거론됐는데 프로 필은 벌써 봤고, 단역으로 출연한 프로도 대강 봤습니다. 어떻습니까? 한번 해보겠습니까?”

늦은 아침, 오늘도 하릴없이 방송국 주변을 배회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걸려온 전화는 뜻밖 이었다.

늦잠을 자고 막 일어난 터라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기만 했다. 지혁은 귀에 대고 있던 휴 대폰을 떼어내 멍 하니 바라보았다.

“우지혁 씨?”

분명 꿈은 아니다. 휴대폰 너머에서 낯선 남자가 재차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네…….”

지혁은 탁하게 갈라진 음성으로 간신히 대꾸했다.

“어때요? 요즘 스케줄이 빡빡하지 않다면, 바로 촬영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네, 그다지 바쁜 일은 없지만…….”

“잘됐군요. 지금 당장 방송국으로 나오세요. 오늘 마침 대본 연습 있는 날입니다.”

이렇게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 본적은 없다. 단역 하나를 맡길 때도 이리재고, 저리 재는 것이 이 바닥 생 리였다. 그런데 전화 한통화로 대본연습을 하러 방송국에 나오라고?

“저어, 찾는 사람이 제가 맞는지……. 저는 한번도 비중 있는 역할을 해본 적이 없는… ….”

“하하. 누군 태어날 때부터 주인공 역할 달고 태어난답디까? 단역배우라는 거 알고 전화 했습니다. 방송국에 나오면 알겠지만, 이번 남자조연 역은 이름 없는 신인이 해야 하는 역이고, 무엇보다…….”

호탕하게 말을 잇던 PD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위에서 우지혁 씨를 강력히 추천했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됩니다. 드라마를 협찬해주는 유한그룹에서 우지 혁 씨를 거론하더군요…….”

“아…….”

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단말마의 신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럼 조금 이따 봅시다.”

PD와의 통화를 끝내고 지혁은 버릇처럼 담배를 찾았다. 쓴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워갈 무렵 에야 서서히 정신 이 들기 시작했다.

유한그룹. 아침드라마 유리꽃을 협찬하는 곳이다.

그리고 유한그룹의 사장은 몰라도 그 사장의 안사람은 지혁이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마음만 먹고 다가 선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픽픽 쓰러지는 돈 많고 시간 많은 유부녀들. 그 가운데 유한그룹의 정숙한 아내도 지혁의 메모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겉모양새만 귀부인인양 우아하고 조신한척 하지만, 유한그룹의 피둥피둥 살찐 늙은 여우는 색정에 발광한 요부였다.

“제길!”

지혁은 쓰디쓴 욕설을 내뱉었다.

지쳐나가 떨어질 때까지 자신의 몸에 매달려 있던 여자를 떠올리자 불쑥 화가 치밀었다. 허 나, 괜찮다. 지방 덩어리 여자와 놀아난 것치고 수고비는 톡톡히 받아낸 셈이니까. 한 두어 달 더 상대해줘야 그럭저럭 괜찮은 배역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비대한 살집에 비해 여자의 행동은 재빨랐다.

샤워를 하고 방송국에 나갈 채비를 하면서 지혁은 콧노래를 불렀다.

지긋지긋한 유한의 늙은 여우와는 이제 결별할 때가 온 것이다. 받을 것을 받았으니 더 이 상 아까운 시간을 투자할 이유가 없었다.

간편하게 청바지와 면 티셔츠를 입고 그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신선한 이미지의 신인배우를 방송국 측에선 요구했다. 비록 5년이나 단역배우로 잔뼈가 굵은 지혁이지만, 부잣집 마나님들을 상대하는 그이지만, 거울 을 통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분명 방송국에서 요구하는 신인배우의 이미지였다.

신선하고, 깔끔한……. 풋풋한 내음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 지혁……. 오늘 너무 거칠어……. 부드럽게, 제발…….”

“으음, 원래 거친 것을 즐기지 않았나?”

“하, 하아……, 그만, 나 죽을 것 같아…….”

“이런, 미안하지만 아직은 아냐.”

흐느끼듯 울먹이는 미진을 놀리면서 지혁은 여유롭게 대꾸했다. 말 한마디 내뱉기가 힘든지 미진은 겨우 신 음사이사이로 어린아이처럼 어설픈 말을 내뱉었다. 그와 반대로 지혁은 흔들림 없이 말했고, 멈춰달라는 미 진의 부탁을 무시하고 박차를 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만! 아아……, 지혁……!”

밤꽃향내가 진동을 하는 룸 안에서 미진은 결국 비명을 지르고 지쳐 나가떨어졌다. 호텔에 들어서서 네 번째 로 만족시켜 주었을 때에야 미진은 죽은 듯이 까무러쳤고, 더 이상 지혁에게 손가락 하나 내밀지 않았다.

오늘부터 미진과의 관계를 끝낼 작정이기에 지혁은 그동안 나눈 정을 생각해서, 아니 그간 받았던 것을 생각 해서 그가 부릴 수 있는 최고의 기교를 미진에게 선보였다. 그래서인지 미진은 다른 날보다 더 힘들어했고, 정사가 끝났는데에도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음엔 언제 만날까?”

샤워를 마치고 나오던 지혁은 미진의 물음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타월로 중요부위만 가린 지혁은 휙 수건을 걷어내고 성마르게 자신의 몸을 닦았다.

얼마나 신음을 내뱉었는지 미진은 잔뜩 쉬어버린 음성으로 재차 물었다.

“응? 다음주로 할까?”

“앞으로는 만나기가 힘들 듯 하군.”

마치 다음주 약속을 정하듯 지혁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바닥에 흐트러진 옷을 추려 입던 지 혁은 침대에서 벌 떡 일어나는 미진에게 눈길도 던지지 않았다.

“뭐? 왜? 무슨 소리야!”

“오늘이 마지막이야. 그리고 내 마지막 서비스라고 생각…….”

“헛소리 하지 마! 왜 이래? 이유가 뭐야? 뭐가 부족해?”

“그런 거 없어.”

“웃기지마. 필요한거 있음 말하랬잖아. 이런 말로 내 심장 녹아내리게 하지 말고 단도직입 적으로 말해. 이런 방법으로 값 높이지 않아도 돼. 응, 지혁? 거짓말이지? 그렇지?”

미진은 애원조로 지혁에게 매달렸다. 좀 전까지 미진을 격렬하게 안았던 지혁은 어느새 냉 담하게 변해있었 다. 그는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미진의 손을 먼지를 털 듯 털어냈다.

“지혁?”

“그만 끝내자고. 사, 모, 님.”

한음절 한음절 뚝뚝 부러뜨릴 듯 말하는 그의 모습에 미진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뜻 한 바를 이루었는 데 미적거리는 것은 좋지 않았다. 미진은 소영을 만나기 위한 통과의례였을 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내게! 내가 여태 너에게 투자한 게 얼만데! 네 밑에 들이부은 돈이 얼만데!”

“내가 언제 달라고 했나? 그리고…… 받은 만큼 몸으로 봉사했을 텐데? 아닌가?”

“더러운 자식…….”

“이제 알았나, 나 더러운 거?”

지혁은 유들유들하게 대응했다.

받은 것, 그래 많았다. 미진의 섹스 파트너가 되고 난후 지혁은 뜻밖에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아파트를 갖게 되었고, 자동차를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미진으로 인해 지혁은 소영을 만날 수 있게 되었 다. 그러면 뭐하 나. 정작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미진은 해줄 수가 없는데.

유한그룹의 안사람이나, 최소영은 그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미진은 아니었다. 미진 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겨우 물질적인 혜택이었다. 그리고 지혁이 원하는 것은 결코 물질적 인 혜택이 아니었 다.

지혁은 쇄기를 박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동안 즐거웠어. 집과 차는 유용하게 잘 쓰도록 하지. 뭐 아까워서 돌려 달라한다면 기꺼 이 돌려줄 수도 있 지만…….”

분노를 이기지 못해 악을 쓰고 부들부들 몸을 떠는 미진을 혼자 남겨둔 채, 지혁은 여유롭 게 손을 흔들기까 지 하면서 스위트룸을 유유히 나섰다.

“개자식! 너 망하는 꼴, 꼭 보고 말거야! 두고 봐! 두고 보라고!”

핏대를 세워 격하게 소리 지르는 미진의 고함이 지혁의 뒤를 바짝 쫓아왔다. 지혁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 고 픽, 실소를 터트렸다.
망하는 꼴? 누가 망하는데? 나, 우지혁 말인가? 웃기지마라. 나는 이제 시작이다. 이제!

“오래 기다렸나?”

“아니, 별로. 이 호텔에서 볼일이 있었나봐?”

“음, 좀 급한 일이었지.”

호텔 커피숍에서 기다리던 소영은 반갑게 웃으며 지혁을 반겼다.

“급한 일? 급한 일이라……. 그게 뭘까?”

자리에 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지혁의 손길을 보면서 소영은 놀리듯이 물었다. 지혁은 한마디 대꾸도 없 이 커피를 주문하고는 맞은편에 앉은 소영을 응시했다.

여자란 다 마찬가지다.

자신은 정숙하다, 요조숙녀이다 하던 여자들도 한 꺼풀 벗기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였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대하다가도 마음만 통하면 감정의 댐이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다. 아니 어떨 때는 과연 유부녀이기는 한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막 나가는 여자도 더러 있었다.

바로 최소영, 이 여자처럼…….

“뭐, 예전에 사귀던 여자 정리라도 한거야?”

귀신같기는……. 지혁은 슬쩍 미소를 짓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풋. 깨끗하게 정리했길 바래.”

“물론이야.”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영의 옆에 앉았다. 그가 앉자 소영의 숨소리가 거칠게 변해갔다.
지혁은 피식 웃 으며 소영의 귓불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한숨 같은 신음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흩어져 나왔다.

귓불과 턱선, 그리고 목선까지 이어지는 손길에 소영은 견딜 수 없다는 듯, 지혁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 고 자그맣게 속삭였다.

“룸…… 잡을까?”

지혁은 소영의 턱을 쥐고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싶어?”

“응.”

소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고는 지혁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포갰다. 물컹한 혀가 그의 입안으로 침입했 다. 다른 때라면 기꺼이 그녀의 혀를 낚아채 거칠게 입안으로 빨아들였겠지만, 여기는 위험 하다. 지혁은 소 영의 어깨를 가볍게 밀쳐냈다.

소영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자존심이라도 상한 듯 얼굴이 붉게 닭아 올랐다.

“여긴 너무 공개된 장소야. 낮 시간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긴 하지만, 내일 아침 신문에서 가십거리가 되고 싶 진 않겠지?”

지혁은 소영의 볼을 톡톡, 두들겼다. 그제야 소영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당신만 옆에 있으면 제어가 안 되더라.”

“나도 마찬가지야.”

유혹이라도 하는 양 입술을 핥으며 말하던 소영은 지혁의 가슴팍을 손으로 훑어 내렸다. 지 혁은 잽싸게 소영 의 손을 움켜쥐고 경고하듯 말했다.

“사람들 많은데서 이러는 건, 곤란해.”

“알았어.”

소영은 못이기는 척 지혁의 탄탄한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길을 떼어냈다. 소영의 손길에서 벗어난 지혁이 편 안하게 커피숍 주변을 둘러 볼 때에야 그의 시야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꽤 오랫동안 서 있 었는지 그녀는 아 예 팔짱까지 끼고 지혁과, 그리고 그의 옆에 있던 소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에서는 시퍼런 채광을 쏟아내고, 안면근육은 딱딱하게 경직된 여자는 다름 아닌, 미진이었 다. 불과 삼십여 분전, 지혁의 몸 아래에서 신음을 내지르고, 잔인하게 버림을 당한 여자.

지혁은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냉혹한 비웃음을 던졌다.

“여긴 어쩐 일이지? 약속이라도 있었나?”

빈정거리는 그의 말에 소영의 시선이 미진에게 날아들었다.

“미진아?”

“최소영……!”

미진은 씹어뱉듯 소영의 이름을 불렀고 한걸음씩 지혁이 앉아 있던 테이블로 다가서기 시작 했다. 지혁은 미 진을 막으려는 듯 벌떡 일어나 미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긴 어쩐 일이냐고 했어. 내 말뜻, 무슨 뜻인지 이해 못하나?”

지혁을 휙 밀친 미진은 입술을 질끈 물고는 음산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 뒤를 따라 왔지. 당신 붙잡고 싶어서, 그래서 따라 왔는데……. 이게 지금 뭐하는 짓 거리지? 나랑 침대 에서 뒹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른 기집애와, 하필이면 내 친구와……!”

미진은 억울해서 말을 잇지도 못하겠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젠장, 미치겠군!”

지혁은 거친 말을 내뱉고 커피숍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점심시간이 지난 터라 커피숍은 조 용했다. 워낙 고급 호텔인지라 직원들은 멀리 떨어진 채 그들의 일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고 있 었다.

조용한 음악만이 커피숍을 메웠다. 그 가운데 재미있다는 듯, 웃음기어린 소영의 음성이 들 려왔다.

“정리했다는 여자가, 미진이었어? 후훗, 이거 너무 재미있는데?”

소영은 지혁의 곁에 나란히 서서, 미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소영의 시선을 고스란히 당 해낸 미진의 얼굴 이 확, 달아올랐다.

“최소영, 너 이럴 수가 있어?”

“뭐가?”

이를 악물고 한 음절씩 뱉어내는 미진의 말을 소영은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피식피식 비웃 어가며. 어차피 게 임이 안 되는 상대다, 자신과 미진은. 소영은 느긋하게 지혁을 지켜보았다. 나가떨어지는 사 람은 당연히 미 진이 될 터였다. 얌전히 있으면 아주 좋은 구경거리를 얻는 셈이었다. 언제나 고고한 척 턱 을 치켜세우고 살 더니, 미진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인가보다. 잘 생긴 남자에게 넘어가는. 테크닉에서는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황홀한 남자를 놓치기 싫어 매달리기까지 하는 미진을 보자, 소영은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 오려 했다.

그녀는 슬그머니 지혁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지혁의 짙은 눈썹이 다듬은 듯 정교한 미간으로 모아졌 다.

“어쩔 거야? 미진이는 아직 당신에게 미련을 못 버렸나 본데?”

지혁은 싱긋 미소를 흘렸다. 처음에는 소영에게, 그 다음에는 미진에게.

“이것 봐, 정미진 사모님. 나랑 살림이라도 차리길 원하나? 왜 이렇게 지저분하게 굴지? 서 로 즐겼으면 그만 아닌가? 당신이나 나나,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한 것도 아닌데, 유치하게 이러지 말자고.
왜? 내 마지막 서비 스가 부족했나? 부족했다면 언제든지 말만해. 기꺼이 안아 줄 테니까. 마지막 서비스는 확실 하게 해줄 수 있 어, 사모님. 그러니 제발 이렇게 얽혀들지 마. 기분 아주, 더러우니까!”

지혁은 최대한의 아량을 베풀어 친절하게 말했으나, 그것은 명백히 이죽거림이었다.

우지혁에게 이용가치가 떨어진 여자는 더 이상 그에게 무의미한 여자였다. 제아무리 깊은 사이였다 하더라 도 말이다. 지혁의 입가에 새겨진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미진은 홱 몸을 돌렸다.

“다시 보는 일 따위, 앞으로 없길 바래, 사모님.”

빈정거리는 지혁의 말에 미진은 한마디 대꾸 없이 사라졌다. 미진의 초라한 뒷모습을 말없 이 지켜보던 소영 은 깔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씹!”

지혁은 매트리스를 내리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주먹을 내리 꽂 았다. 얼얼한 아 픔이 손끝을 타고 전해왔다. 격한 욕지기가 입술을 뚫고 쉴 새 없이 비집고 나왔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유한그룹의 살찐 여우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지혁의 마지막 정기까지 들이마시려는 듯 그 여자는 넉 다운 이 되어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 그를 요구했다. 물론 지혁은 조금도 싫은 내색 없이 여자를 안았다. 그것이 그 의 일이므로.

이제 끝이다.

지혁은 양손을 깍지 끼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가끔씩 자신의 이런 생활에 환멸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 은 그야말로 가끔씩 이었다. 어쩌다가 한 번씩 말이다.

쓰디쓴 환멸 따위 개나 물어가라지!

시청률이 저조한 아침드라마라고 하나,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이 지혁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 대가로 그 여 자가 오늘밤 내내 질퍽한 섹스를 나누자고 했어도 지혁은 기꺼이 그녀를 쾌락의 정점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구역질이 치밀고 토악질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도, 지혁은 그 방면에서 프로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남편이 오기 전에 들어가야 한다며 여자가 일찍 호텔을 나섰으니 다행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혁은 여전히 여 자의 몸 안에 자신을 파묻고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유한의 피그는 만날 일이 없겠고, 한동안 소영에게만 충실하면 된다. 수영장에서의 첫 만남이후 소영 은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지혁의 품에 녹아들었다. 워낙 막강한 집안이고 도도한 여자라, 유혹하는데 시간 이 좀 걸릴 거라 짐작 했는데 아니었다. 소영은 물 만난 고기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아니 남 자에게 굶주렸다 는 듯이 지혁에게 얽혀들었다.

STS엔터테인먼트 사장의 아내, 최소영.

대외적으로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부부였지만, 내면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남 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젊디젊은 새파란 계집애와 눈이 맞아 호텔을 들락거리고, 소영도 그런 남편에게 뒤 지지 않게 알게 모르게 비밀스러운 생활을 유지해 왔었나보다. 소영의 말에 의하면 그랬다.
뭐, 그렇기에 지 혁은 손도 안대고 코를 푼 격이지만.

슬슬 나갈 채비를 해야 했다. 여기저기 바쁘게 만나던 여자를 한꺼번에 두 명이나 정리했더 니, 막혔던 숨통 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더구나 남은 여자는 소영 하나였고, 여자 하나를 상대하는 건 지혁 에게 숨쉬는 것만 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소영은 다른 유부녀들처럼 기름기 번들번들한 살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이에 찌 들어 늙은 얼굴도 아니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무엇보다 국내 최고 스타제조기라 불리는 STS엔터에인먼트 오 너의 아내라는 자 리가 더욱 지혁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거의 다 된 밥이니 시기를 봐서 상만 차리면 된다. 최소영, 그녀가 얼마나 매력적인 대가를 그에게 내밀지 지 혁은 기대감으로 입맛을 다셨다.

다음 타깃은 누구였더라…….

지혁의 입 꼬리가 슬그머니 치켜 올라갔다. 주말연속극 담당 강 PD의 숨겨놓은 여자. 그녀 가 타깃이었다. 늙 은 암캐들과 살을 썩느라 재미를 못 봤으니 이제 반반한 계집과도 재미를 보아야했다. 이런 것을 두고 ‘님도 보고 뽕도 딴다’고 하는 격인가? 강 PD는 정부의 말이라면 꼼짝도 못한다니 이번 게임도 식은 죽 먹기 리라.
이미 몇 차례 스치듯 만난 자리에서 강 PD의 세컨드는 지혁에게 꼬리를 치고 눈웃음을 치 고는 했다. 손만 내 밀면 그녀는 언제든지 침대에 드러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나이답지 않게 멋들어진 몸매를 자랑하는 소영과, 자신과 마찬가지로 몸 하나를 밑천 삼아 기생충처럼 사는 여자와의 사이에서 그는 적당히 즐기고 원하는 것을 받아 내기만 하면 되었다.

하루 종일, 한 달 내내, 방송국 주변을 어슬렁거려도 사람들 눈에 띄기란 쉽지 않았다. 다들 한 외모 한다는 사람들로만 가득 찬 곳이 방송국이었고, 모두들 스타를 꿈꾸고 모여드는 곳이 바로 그곳이 었다. 연기력만 좋 으면 언젠가 빛을 보리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어 버렸다. 제아무리 탄탄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소위 말 하는 줄이 없으면 그 바닥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웠다.

누군가를 짓밟아서 올라서야 한다면 주저 없이 짓밟을 것이고, 누군가를 이용해야 한다면 일말의 망설임 없 이 그렇게 하겠다. 눈에 띄고, 손에 잡히고, 발에 밟히는 그 모든 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 지 않고 이용해 먹 겠다.

연기 생활 5년 만에, 지긋지긋하게 단역만 도맡아 하던 지혁이 그 바닥에서 깨달은 하나의 진리였고, 지혜였 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깨달은 지혜를 언제부터인가 성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 『3』

쫑파티라는 것을 말로만 들었지 참석하는 것은 지혁으로서는 처음이었다. 드라마를 촬영하 는 동안 쌓였던 긴장을 해소하느라 연기자와 스텝들은 저마다 부어라 마셔라하는 수준이었다.

지혁은 돌아다니며 술잔을 건넸고 슬슬 달아오른 취기로, 감히 바라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 던 대 선배들과 가 벼운 농담도 주고받았다.

“다음 촬영은 정해졌나?”

주인공 아버지의 친구 역할을 맡았던 나이 지긋한 김시우가 물었다. 지혁은 피식 웃으며 고 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정해 진 건 없습니다.”

“음, 그렇군. 솔직히 자네가 낙하산으로 드라마에 투입 되었을 때……. 아, 오해는 하지 말 게. 공공연히 그런 말이 나도니 나도 그런가 보다 했지. 그러면서 낙하선으로 들어온 놈이 연기력이 되려나, 은 근히 걱정했다 네. 근데 그런 기우를 털어내고 아주 잘했어. 이 동네가 원래 좀 그렇지. 더럽고……, 추하 고……. 더러우면 안 하면 되는데, 어쩌겠나. 배운 도둑질이 이것이니 이걸로 먹고 살아야지. 안 그런가?”

사람들과는 따로 동떨어져 술잔을 기울이던 시우의 말을 지혁은 묵묵히 들었다. 인사를 나 누느라 모든 사람 들에게 술을 한잔씩 권하면서 지혁은 어느새 혼자서 술을 마시는 시우의 말동무 상대가 되 었다.

“아무리 연기가 좋아도 인기를 끌기란 쉽지 않지. 작품 하나를 끝냈다고 바로 섭외가 들어 오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진득하게 기다려보게. 작은 역할이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연기 한다면, 언 젠가 빛을 보게 되리라는 게 내 생각이야. 이 동네 사람들은 다 거기서 거기지만, 시청자들 눈은 못 속이거 든. 감독과 제작자 가 눈 맞고, 시나리오 작가와 연기자가 눈 맞고, 한마디로 지랄 같은 곳이지만…… 연기력만 좋다면, 그게 극 중에서 별 소용없는 작은 역할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시청자의 눈에 들게 된다네. 그 시간 이 1년이 걸릴 수 도 있고, 몇 십 년이 걸릴 수도 있지. 연기자가 되어 연기를 시작한 이상 배우는 연기만 하 면 된다네. 다른 곳 에는 눈을 돌리지 말고.”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지 몰라도 지혁은 가슴에 쿡쿡 박히는 시우의 말을 조용히 듣고 또 새겼다. 시우 의 술잔이 비면 말없이 술을 채워 주고, 나이 많은 시우가 술을 권하면 살짝 고개를 돌려 쓴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 쫑파티의 즐겁고도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지혁과 시우는 자못 심각한 대화를 나 누었다. 아니 일 방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시우였고 지혁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빛을 보겠지. 우지혁……, 자네는 아직 젊으니까 언젠가는 사람들의 입 에 오르내리는 인 기배우가 될 거라 나는 믿네. 뭐, 나처럼 빛도 못 보고 나이가 들지는 말게나. 워낙 출중한 외모에, 거기다 연 기력까지 갖추고 있으니 잘 되겠지. 잘 될 것이라 믿네. 아직 다음 작품이 정해지지 않았다 고 조급해 하지는 말게.”

시우의 충고 아닌 충고에 지혁은 고개를 주억거렸으나 그의 속마음은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시청률이 저조한 아침드라마 보다는 미니시리즈나, 주말드라마를 노렸다.

별 두각도 안 보이는 조연보다는 사람들의 눈길을 확 끌어당길 수 있는 주연을 노렸다.

인기 있는 드라마가 욕심나는 만큼 영화마저 탐이 났다.

시시각각 물밀 듯이 쏟아져 나오는 CF도 군침이 돌았다.

지혁이 원하는 것은 너무 많았다. 허나,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었다. 단지 그의 욕심이고, 바람이며, 희망 일 뿐.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는 옛말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는 모든 것을 다 원했다. 모든 것을. 그렇기에 지혁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연기에는 베테랑인 시우의 말에 절대적으로 동 의 할 수가 없었 다.

결국 기다려 봐야 돌아오는 것은 나이를 먹고, 늘그막에 추레한 노인 역이나 맡으며, 촬영이 끝나면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기 밖에 더 하겠는가. 지혁은 그렇게 살기 싫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이 더러 운 바닥에 뛰어 든 것이 아니었다. 결단코!

진득하게 기다리라고? 나는 못한다.

10년이 걸리는 거리라면, 나는 1년 안에 해보이겠다.

이미 5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으니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다. 오직 정면만 보며 달 릴 뿐. 전력 질주 해서 달리고 또 달릴 뿐.

“나는 이번에 2년 만에 드라마에 복귀한거네. 또 언제 드라마에 출연할지 모르지만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걸 세. 내가 원해서하기 시작한 일이니까, 기다리는 순간마저도 즐겁고 행복하게 할 거라네.”

시우의 지친 듯한 목소리가 지혁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시우의 오랜 기다림은 지혁의 의지 를 더욱 견고하게 해주었다. 그는 기다릴 수 없음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상을 향해 올라 갈 것에 대 한 확실한 자리매 김을 해주었다.

시우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쫑파티는 끝이 났다. 연기자들은 지혁이나 시우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술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지혁이 술을 내밀면 마지못해서 한잔씩 받은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지혁에게 술잔을 되돌 리지는 않았다. 대 사 한마디 없이 지나치는 엑스트라가 아니라, 난생 처음으로 조연을 맡았던 드라마의 쫑파 티는, 보이지 않게 무시하는 사람들 속에서 싱겁게 막을 내렸다. 씁쓸하게 마친 쫑파티가 그날따라 지혁을 허 전하고 외롭게 만 들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혁은 소영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자던 소영 은 오늘도 예외 없이 지혁을 찾았다. 그가 없으면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는 절박함마저 담아 그를 원했다.

“미진이 그 기집애 요즘도 만나?”

“아니. 끝낸 지가 언제인데.”

“후훗, 정말 궁금해. 어떻게 그런 주름살 자글자글한 여자를 안을 수가 있는 거지? 그런 기 집애랑 섹스가 가 능하긴 해?”

“섹스를 얼굴 보고 하나?”

지혁은 시큰둥하게 대꾸하고는 담배를 피웠다. 하얀 연기가 폐를 뚫고 나와 열기로 혼탁해 진 침실을 떠돌아 다녔다. 이제 겨우 만난지 두어 달 남짓. 그러나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졌고, 하루하 루 시간이 흐를수 록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보통 이런 만남은 호텔에서 이뤄지는 것이 다반사인데 소영은 겁 없이 지혁의 아파트로 찾 아오기도 하고, 남 편이 해외 출장을 가면 그녀의 본가로 지혁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가 소영의 으리으리한 저택에 가본 것은 한번 뿐이지만, 그녀가 얼마나 있는 집 여자인지 보여주는 것은 한번으로 충분했다.

“샤워 안 해?”

“으음……, 조금 이따가…….”

침대에서 일어서려는 지혁을 소영이 붙잡았다. 지혁은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는 소영을 보 고는 픽, 웃음을 흘렸다. 한바탕 땀을 더 빼자는 소리인가? 지혁의 짙은 눈썹이 모아졌다. 아무튼 나이든 여 자들이 더 하다니 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소영의 나체를 입술로 더듬었다.

목덜미를 훑고, 적갈색 유두를 희롱하고, 배꼽을 핥을 무렵, 소영은 희미한 신음을 쏟아내며 지혁을 말렸다.

“아……, 그만해. 오늘은 너무 지쳤어.”

“시시하군.”

“훗. 시시해도 할 수 없어. 저번처럼 서있는 것도 힘들면 곤란하단 말야.”

키들키들 경박한 웃음을 터뜨리던 소영이 손을 내저었다. 소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혁은 입술을 더욱 아 래로 미끄러뜨렸다. 벌써 촉촉하게 젖은 여체가 열렬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혁은 천천히 소영의 은밀한 곳에 긴 손가락을 밀어 넣고 귓불을 핥듯 속삭였다.

“이렇게 젖어 있는데 싫단 말이지.”

“아…….”

리드미컬한 지혁의 움직임에 소영은 간헐적인 신음을 토해냈고, 이내 반사적으로 몸을 들어 올렸다.

“지금 하지 말라고 하면, 다른 여자에게 갈 거야?”

욕망에 착 가라앉은 소영의 음성이 탁하게 갈라져 나왔다. 지혁은 더 깊은 곳으로 손을 밀 어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망설이듯 말끝을 흐리자, 소영은 허벅지를 활짝 열어젖혔다. 지혁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힘차게 요동치는 그의 일부를 그녀의 몸 안에 파묻었다. 교성을 내지르며 그녀가 지혁의 허리에 매끄러운 허 벅지를 휘감았다.

지혁의 귓가에 더운 숨결을 쏟아내던 소영은 명령하듯 말했다.

“다른 여자와는 이러지마!”

“쿡, 당신 하는 거 봐서…….”

소영의 독점욕은 익히 겪어 보아서 안다. 지혁은 건성으로 대꾸하고는 소영을 압박했다. 명 령 투로 내뱉던 그녀의 어조가 차츰 애원조로 변해갔다.

“제발…… 다른 여자는 안지 마. 나만, 나만…… 하아……. 지혁 씨 원하는 거 있으면, 내 가, 내가 다 해줄게.
나만 봐, 응? 나만…….”

거세게 파고드는 지혁의 몸짓에 소영의 음성이 점차 작아졌다. 들릴 듯 말 듯 희미하게 흘 러나오는 소영의 말에 지혁은 더욱 포악하게 그녀를 탐닉했다. 우지혁에게 최소영이 함락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레스토랑 아다지오에 들어서던 지혁은 소영을 찾아 눈을 돌리다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렇게 대외적으 로 만나는 것은 위험하다고 몇 번이나 자중하자 했건만, 소영은 막무가내였다. 밥 한 끼 먹 는 거 같고 누가 뭐라 하겠냐며.

하는 수 없이 약속장소에 나온 지혁은 때마침 소영이 누군가와 동석을 하고 있자, 걸음을 돌려 레스토랑의 후미진 곳으로 향했다.

휴대폰을 꺼낸 지혁은 소영의 전화번호가 입력된 단축키를 길게 눌렀다. 손끝에서 짜증이 묻어나왔다.

“나야. 일행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가도 되는 자리야?”

썩 내키지 않는 약속이라 그런지 지혁의 음성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 벌써 왔어? 음……, 한 십분 후에 오도록 해. 갑자기 누구를 만나게 됐거든…….”

그녀도 곤란한지 말끝을 흐렸다. 지혁은 알았다는 짤막한 대답과 함께 폴더를 덮었다. 밖으 로 나가기 위해 소영에게 힐끗 시선을 던진 지혁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다 묘하게도 심장이 내려앉 는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창을 등지고 앉은 여자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거짓 없고, 가식적 이지 않은, 순수한 미소를. 그 미소가 이상하게도 지혁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에 연결 된 것처럼 지혁은 여자에게 고정 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무어라 소영과 신나게 이야기 하던 그녀가 지혁의 집요한 시선을 의식했는지 말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십여 미터 거리.

중간중간 테이블이 놓여져 있고, 몇몇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가운데에서, 두 사람 이 시선이 서로에 게 얽혀들었다.

그 순간 갑작스럽게도 여자의 입술이 매력적으로 치켜 올라갔다. 웃고 있었다, 그녀는. 지혁 자신을 보며. 그 리고 그녀의 미소에 정상적으로 뛰고 있던 맥박이 고장이라도 난 듯 멈춰버렸다.

지혁은 홱, 몸을 돌렸다. 거칠다싶을 정도로 걸음을 빨리해 그는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주 차 해놓은 차에 올라타고서야 참고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폐가 터질 듯 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심장은 미친 듯이 질주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뭐야, 이거?”

가죽시트를 뒤로 확 젖히고 드러누운 지혁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낯모르는 여자가 예의상 한 번 웃어준 것뿐인데 못 볼 걸 본 것 마냥 안절부절못하다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피곤하기 때문이리라.

간밤에 밤새 향락을 누리듯 잠시도 지치지 않고 섹스를 벌였기 때문이리라.

차라리 피로를 풀기위해 잠이라도 자거나, 사우나라도 갈걸. 망할 여자 소영은 지난밤으로는 부족한지, 집에 들어 간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건 대낮에도 만나자며 아침부터 전화질을 해댔다.

“망할!”

소영을 떠올리자 욕지기부터 치밀어 올랐다. 소영을 상대하느라 다음 타깃으로 잡은 강 PD 의 정부는 얼굴도 보지 못했다. 문득 지혁은 최소영이라는 여자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할 필요성을 느 꼈다. 이쯤에서 슬 슬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면 소영은 망설임 없이 도와 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적당히 선 을 그어야지.

똑똑-

이런 저런 상념으로 혼란스러운 머리를 식힐 즈음, 누군가 자동차 윈도우를 두드렸다. 지혁 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시트에서 일어났다. 귀찮다는 듯이 윈도우에 시선을 던졌을 때, 지혁의 내면에서 무 언가가 툭, 끊어 졌다.

그 여자다! 소영과 동석하고 있던, 자신을 향해 말간 웃음을 짓던 여자!

간신히 진정시켜놓은 심장이 다시금 발작이라도 하는 양 거칠게 튀어 올랐다.

똑똑-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뿐 창을 내리지 않자 그녀가 다시 창문을 두들겼다. 생긋거리며 웃는 것을 잊지 않고.
빌어먹을. 여자의 미소를 바라보자 심장이 죄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지혁은 천천히 윈도우를 내렸다.

긴 머리카락을 대충 아무렇게나 묶은 헤어스타일. 잔머리 몇 가닥이 갸름한 얼굴선에 흩어 져 있었다. 투명할 정도로 고운 피부. 옅은 쌍꺼풀진 눈동자. 조금은 낮은 듯한 코. 입술, 입술은…… 큐피드의 활처럼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분홍빛의 유혹적인 입술까지, 지혁은 숨을 죽이고 훑어 내렸다.

“흠!”

여자가 헛기침을 쏟아냈다. 지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 홀린 듯 바라보던 여자의 입 술에서 시선을 거 뒀다.

“실례할게요. 댁의 차 때문에 제 차가 빠져 나갈 수가 없어서요. 그쪽이 너무 바짝 붙여 놔 서 저 같은 초보운 전은 차를 빼다가 확, 긁을 수가 있는데……. 미안하지만 잠시 차 좀 빼주실래요?”

여자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지혁의 차와 나란히 주차되어있던 자동차 는 아닌 게 아니 라 필요이상으로 바짝 붙어있었다.

“도와주실 거죠?”

찡긋, 애교스러운 윙크까지 하며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녀의 상큼한 미소가 지혁의 각막에 찍히듯이 선명히 파고들었다.

젠장, 더럽게 웃어대는군!

“천천히 후진해서 빼면 되겠는데?”

지혁은 짜증스럽게 대꾸하고는 홱 고개를 돌렸다. 불쑥 부아가 치밀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심 장을 강타하더니 혈관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귀찮은 건 알겠는데요, 이건 다 그쪽을 위해서란 말이에요. 뭐, 천천히 하면 되긴 되겠죠.
그러다가 그쪽 차 랑 내차가 사이좋게 정비공장으로 직행해서 그렇지. 이래봬도 내가 가만히 서 있던 담벼락 을 들이박고, 얌전 히 서 있던 차도 들이박은 알아주는 운전 실력이라서…….”

쿡, 지혁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여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쩔 거냐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 혁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키는?”

“왜, 왜요?”

“줘봐.”

여자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손에 들고 있던 자동차 열쇠와 지혁을 번갈아 보던 그 녀가 곱게 다듬어 진 눈썹을 치켜 올렸다.

“싫으면 그쪽이 알아서 차 빼든가.”

여자가 얼른 그의 손에 열쇠를 넘겼다. 순진하기는……. 지혁은 픽, 웃음을 물고 여자의 미 끈한 오픈스포츠 카에 몸을 묻었다. 자동차에 올라탄 지혁의 눈길이 다시 여자에게 향했다. 막 대학학교를 졸 업했을까, 싶을 정도로 어린 여자가 타기에는 차가 너무 고급스러웠다. 국내에는 몇 대 되지 않는 스포츠카 였고, 돈이 있어 도 쉽게 살수가 없다는 차였다.

시동을 걸고 기어를 넣으려는 찰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지혁은 잠시 시동을 끄고 여자 에게 양해를 구 하는 고갯짓을 한 다음에야 폴더를 열었다.

“어디야?”

“지하주차장.”

“그래? 어서 올라와. 이제 와도 돼.”

“그러지.”

어느새 여자는 뒤로 물러나서 그가 차를 빼주기만을 기다리는 듯 했다. 지혁은 백미러로 여 자를 훔쳐보며 천 천히 후진을 해서 그녀의 앞에 차를 세웠다.

“고마워요.”

여자가 또 웃었다. 아무래도 자주 웃는 것은 그녀의 버릇인가보다. 지혁은 씁쓸하게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고맙다는 말에 손만 한번 들어준 그는 그녀를 휙 지나쳤다.

서너 발자국 떼었을 때, 지혁은 걸음을 멈추고 툭 말을 던졌다.

“함부로 웃지 마, 아가씨. 그 미소…… 위험해보이거든.”

여자의 동그란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무슨 말이라도 할 것처럼 입술을 벌 리는 그녀를 뒤에 남겨두고, 지혁은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닫히는 문사이로 여자를 태운 자동차가 날렵하게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같이 있던 사람, 누구였어?”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다 마셔갈 즈음, 지혁은 묻고 말았다. 실은 소영을 보 자마자 묻고 싶었 다. 누구냐고, 이름은 뭐냐고, 뭐하는 사람이냐고…….

커피를 마시던 소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고, 작은 손가방에서 화장 품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새로 바르던 소영은 붉은 립스틱을 완벽하게 덧칠하고 나서 야 무심하게 입술 을 열었다.

“우리 은채?”

은채……. 지혁은 혀끝으로 굴리듯 그녀의 이름을 읊조려 보았다. 은채, 은채…….

“봤어? 내 조카야. 우리 오빠의 하나밖에 없는, 금지옥엽 딸. 여기서 약속이 있었는지 우연 찮게 만났는데 용 돈 달라고 얼마나 달라붙는지……. 그 불여우한테 한 재산 털렸지.”

조……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뇌수가 먹먹해지고 저릿한 통증 마저 전해왔다.

이건 뭐지……. 이건 뭘까…….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어 무어라 말하고 있는 소영을 바라보지만, 지혁의 시야를 채우는 것은 다른 여자 의 얼굴이었다. 활짝 웃고 있던 여자의 미소. 그 모습이 그의 뇌리에서 맴돌고 맴돌아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 『4』

“새엄마.”

은채는 신문을 뒤적이는 새엄마를 뜬금없이 불러놓고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별다른 말 이 없는 딸, 은채 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린 이 여사는 왜 그러냐는 듯 의문문의 시선을 보냈다.

“왜?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그냥…….”

“원, 실없긴.”

곱게 미소를 짓고 이 여사는 방금 전까지 읽던 신문의 헤드라인을 눈으로 훑어 내렸다. 크 게 눈에 띄는 기사 가 없어서인지 그녀는 신문을 접어 테이블에 미뤄놓고 은채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다른 날과 달리 하 루 종일 말이 없었다. 아니, 벌써 며칠 된 거 같기도 하다.

유난스러울 정도로 말이 많은 아이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 몇 번이나 무슨 일 있냐고 물 어보아도 별일 아 니라고만 하던 딸이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 여사는 은채의 코앞에서 손을 휘휘, 저 어보았다. 역시나, 은채는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지 눈앞에 뭔가 지나가도 모르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은채야? 최은채!”

크게 이름을 불러보아도 마찬가지. 이 여사는 버럭 고함을 지르고 은채의 어깨를 흔들었다.

“어? 왜 새엄마, 불렀어?”

“너 왜 그래?”

“뭐가?”

식어빠진 커피를 들이키며 은채는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제야 은채는 응접실에 앉아 있은 지 꽤 시간이 흘렀 다는 것을 감지 할 수 있었다. 커피가 식어버릴 정도로 나는 뭘 했지? 오히려 자기 자신에 게 묻고 싶은 말이 다. 너 요즘 왜 그러니, 최은채? 뭐가 문제야?

“솔직히 말해. 너 밖에서 무슨 일 있었지?”

친구처럼 편하게만 지내오던 새엄마의 관심도 지금의 은채에게 귀찮기만 했다. 와락 짜증이 밀려들어 은채는 그만 화를 터트리고 말았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데 왜 그래! 새엄마는 내가 무슨 일 있었으면 좋겠어?”

팩, 토라져서 제방으로 가려고 몸을 일으키는 은채의 손을 이 여사가 재빠르게 낚아챘다. 그 녀는 혀를 쯧쯧 차며 딸아이를 살짝 흘겨보았다.

“너 아직도 아빠 때문에 화난 거야?”

“아냐.”

새엄마의 손에서 슬며시 손을 빼낸 은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며칠 전, 미숙한 운전 실력으로 사람을 치었다.
그토록 기사가 운전해주는 차를 타라고 어르고 달래던 부친의 명령을 무시한 채, 저 혼자 운전하겠노라 큰소 리친 결과가 대형사고를 부른 것이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딱 보니 그거 같은데. 아빠가 너 걱정하셔서 그런 거야. 신경 쓰지 마.
다행스럽게도 피해 자가 찰과상에 그쳤기에 망정이지 크게 다쳤어봐. 어떻게 됐겠니. 그리고 아빠는, 피해자 보 다 널 더 걱정하 셨어, 이 기집애야! 사람 친 넌 얼마나 놀랐을까, 하면서 그날 잠도 못 주무시더라. 도대체 운전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기에 사람을 치니, 치길.”

“그 사람이 잘못한거다, 뭐! 갑자기 골목에서 톡, 튀어나오면 어쩌라는 거야? 운전하는 사 람은 무슨 레이더 망이라도 가졌대? 전방 몇 미터, 사람 나타남, 조심, 조심! 뭐 이런 레이더가 있는 것도 아 닌데 갑자기 튀어나 오는 사람을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은 내 차에 치지도 않았어. 피하다가 자 기 혼자 넘어져서 도로 바닥에 구르느라 찰과상 입을 걸 가지고 나보고 난리야.”

입술을 삐죽이며 말하지만 은채의 가슴은 사고 당시를 떠올리느라 놀란 새가슴이 되었다.
난데없이 눈앞에 서 사람이 쓰러졌을 때 얼마나 놀랬던가!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겪고 싶지도 않았 다. 그 결과 몇날며 칠 잡지를 뒤지고 인터넷을 뒤져서 알아낸 명차의 차키는 아빠에게 압수당했지만, 당분간은 운전의 ‘운’자도 떠올리기가 끔찍할 정도였다.

이게 다 그 남자 때문이야!

은채는 괜히 사고와는 전혀 상관없는 남자에게 화를 퍼부었다. 그 남자를 상기하자 스멀스 멀 치밀고 올라오 던 화가 흔적도 없이 사그라지는 느낌이었다. 피식, 은채는 실없이 웃고는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양 손으로 얼굴을 덮고 눈을 감은 채 그녀는 소리죽여 이 여사를 불렸다.

“새엄마…….”

“왜? 응? 뭐 할말 있으면 툭 터놓고 말해봐. 아빠 분위기 봐서 차키 돌려달라고 새엄마가 한 번 해볼 테니까 그 걱정은 접어두고. 대신 한 두어 달 자중하는 모습은 보여야지. 그렇지?”

등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달래는 새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은채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차?
운전? 절대 그따위 로 풀이 죽은 최은채가 아니었다. 차가 타고 싶으면 아빠 몰래 차키를 훔쳤을 테고, 운전이 하고 싶으면 렌터 카라도 빌려서 하면 된다. 뭐, 그것도 저것도 안 되면 친구차를 대신 몰아보던가. 여하튼, 지 금의 은채에게는 그런 것들은 걱정꺼리도 안 된다는 것이 도리어 문제였다.

후유, 긴 한숨을 내쉰 은채는 불쑥 새엄마에게 질문을 던졌다.

“새엄마는 아빠를 처음 만났을 때, 저 사람이 내 운명의 상대다…… 뭐, 이런 걸 느꼈다고 했 지?”

“그랬지. 첫 눈에 내 사람이라는 걸 알았었지.”

그때를 회상하기라도 하는 양, 이 여사는 살며시 눈을 감고 꿈을 꾸듯 대답했다. 은채는 피 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이가 들어도 새엄마의 러브스토리는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나보다.

“그런데, 그건 왜?”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 이 여사가 되묻자 은채는 급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근데 그 ‘느낌’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거야? 기억나?”

“물론 기억나지! 음, 가만있어보자……. 그 느낌이 어떤 거냐면, 심장이 터질 것 같기도 하 고, 네 아빠와 처음 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내 기분이 그랬거든. 가슴이 콩닥콩닥, 심하게 뛰었고 얼굴은 화끈거 렸고, 손발도 마 구 떨리더라. 후훗……. 무엇보다…….”

뒷말을 이으려는 새엄마의 말을 가로채고 은채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수백만 볼트의 전기가 통하는 느낌 같기도 해. 말하자면, 비 내리는 밤에 돌아다니다가, 천둥번개, 또는 벼 락을 아무런 예고 없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맞는 기분인 것 같기도 하고. 음…….”

“최은채!”

은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말하다가 별안간 새엄마가 등을 탁, 치자 정신을 번쩍 차렸다. 등 에서 얼얼한 아 픔이 전해와,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왜 때리고 그래!”

“흐음, 수상해. 너 솔직하게 말해봐. 그런 남자 생겼어? 첫눈에 운명이다, 싶은 남자? 어머, 얘 좀 봐!”

이 여사는 소녀 같은 미소를 입가에 물고 누가 듣기라도 하는 양 속삭였다. 은채의 얼굴이 단박에 새빨갛게 물들자 그녀는 더욱 호들갑스럽게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누구니? 어떤 남자야? 뭐하는 사람인데? 참, 나이는? 몇 살이니?”

“몰라!”

은채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앵돌아진 그녀의 행동에 새엄마가 당황 한 듯 목소리를 낮 추고 그녀를 붙잡았다.

“왜 화를 내고 그러니. 엄만 너무 기뻐서 그런 건데. 우리 딸이 다 자란 것 같아서 너무 좋 아서 그런 건데… ….”

그제야 은채는 화를 누그러뜨리고 새엄마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사과를 하는 그녀의 목소리 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미안해, 새엄마.”

“미안한거 알면 됐어, 이 기집애야.”

은채의 코를 살짝 비튼 이 여사는 은밀하게 덧붙였다.

“그런데 누구니, 그 미지의 남자는? 우리 콧대 높은 딸내미 최은채 양의 가슴을 설레게 한 남자가 도대체 누 구래?”

“몰라, 모른단 말야!”

은채는 홱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숨어버렸다. 뒤에 서 있던 새엄마에게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 는 매정하게 문을 닫았다.

뭘 아는 게 있어야 대답을 하지!

정작 답답한 사람은 은채 자신이었다. 그야말로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아니겠는가! 아는 거라곤 스치듯 마 주친 얼굴뿐이었다. 중저음의 나직한 목소리. 그리고…… 피식 웃을 때 새겨지던 보조개. 세 상에, 남자가 보 조개가 있다니.

“내 미소가 위험하다고 함부로 웃지 말라했으면서, 자기 미소는 뭐 안 위험한 줄 아나.”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허공을 향해 말하고는 침실 불을 끄고 희미한 스탠드 불빛만 밝 혀둔 채 침대 시트 에 얼굴을 파묻었다. 보송보송한 시트의 촉감에 사르륵 잠이 올 것 같다가도 그 남자의 얼 굴만 떠올리면 잠 이 달아나고 말았다.

“아아, 짜증나!”

머리끝까지 시트를 뒤집어썼다가 확 젖히고 일어난 은채의 눈길이 침대 맡 사이드 테이블에 날아갔다. 두개 의 휴대폰이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바보! 휴대폰이 없어진 것도 모르나.”

은채는 자신의 은색 휴대폰 옆에 있는 또 다른 은색의 휴대폰을 들고 폴더를 열었다. 여전 히 부재중 전화는 한통도 오지 않았다. 혹시나 전화가 올까 싶어 학교 앞에서 배터리 충전까지 꼬박꼬박 해두 는데 전화기 주인 은 단 한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괜히 들고 왔나…….”

은채는 시무룩하게 말하고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훔쳤나, 뭐. 칠칠맞게 떨어뜨리고 다니는 사람이 문제지.”

문제의 휴대폰을 테이블에 밀쳐두고 은채는 다시 침대에 머리를 눕혔다. 그날 일이 새록새 록 되새겨졌다.

친구에게서 연락도 없이 바람을 맞고 삼십 여분을 기다리다 아디지오를 나설 때, 우연찮 게 고모를 만났었 다. 늘 그렇듯이 물주라도 되는 양 갖은 애교를 뜯어 용돈을 두둑이 얻고 좋아라하고 있을 찰나에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새엄마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심장이 터질 것 같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얼굴이 불에 덴 듯 화끈거리고… …. 은채는 그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겪었다. 그리고 느꼈다. 눈으로, 온 몸으로.

“네 주인은 왜 전화도 안한다니? 너 찾을 생각 없다니?”

은채는 테이블 위의 휴대폰을 타박하듯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남자가 자신의 차를 빼주고 이상한 말을 남기고 돌아섰을 때, 은채는 보았다. 자신의 차 운전석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돌려주려고 그를 부르려고 했지만 그녀는 입을 꾹 다물 고 그대로 차에 올라타, 문자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훔친 거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지만, 역시 훔친 건 훔친 거였다. 휴대폰을 핑계로 그를 한 번 더 만 날 생각을 아주 잠시 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양 그의 휴 대폰은 만 삼일동 안 길고긴 침묵을 지켰다.

전화가 안 오면 갖다 버리면 그만이지, 뭐! 휴대폰에는 별 미련 없는 사람인가보네.

괜스레 울적해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은채는 겨우겨우 눈을 붙였다. 그러나 선잠에 뒤척거려 일어난 그녀는 낯선 남자의 휴대폰을 마치, 어미닭이 달걀을 품듯 품속에 끌어안고 나서야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휴대폰 번호는 갑자기 왜 바꾼 거야?”

“음……, 그냥. 전에 쓰던 것을 분실하는 바람에…….”

소영의 물음에 지혁은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있던 소영의 머리가 거추장 스럽다는 듯 지 혁은 자신의 팔을 홱 빼내고 성급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에 울화가 치밀었다.
격렬한 섹스를 치르고 나면 좀 나아지려나 했지만, 아니었다. 기분은 점점 바닥을 기고 있었 다.

“어디서 잃어버렸는데?”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 소영은 나체의 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미니바로 다 가가 브랜디를 두 잔 따랐다.

“글쎄. 당신 만나러 아다지오 갔을 때 잃어버린 것 같아.”

“거기서? 음, 이상하네. 아다지오라면 누가 잃어버린 물건 잘 찾아 놓을 텐데……. 전화는 해본거야?”

“아니.”

무뚝뚝한 대답과는 달리 지혁의 시선은 단박에 무선전화기로 날아갔다. 물론 전화를 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 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미치도록 전화를 하고 싶지만, 매번 수화기를 들자마자 재빨 리 끊어버리고는 했다.

“왜? 휴대폰 주은 사람이 전화를 안 받아? 그래서 몇 번 전화하다가 더 이상 전화도 안 한고 포기한 거야?”

지혁은 소영이 내미는 브랜디를 한입에 털어 넣고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했다.

분명 거기서 떨어뜨린 듯 하다. 여자의 미소에 잠시 넋이 나간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물건을 잃어버리는 경 우가 잘 없는데, 하지 않던 짓을 다하고. 운전이 서툴다고 말하던 여자의 차를 대신 빼주면 서 소영의 전화를 받은 것 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휴대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여자의 차에 있 겠지. 은채, 그 여 자 차에.

“아다지오에서 잃어버린 거 확실해? 그럼 내가 거기 전화해서…….”

“아냐. 거기 들어가기 전에 지하 주차장에서 없어진 거 같아. 신경 쓰지 마. 휴대폰 해봐야 얼마 한다고.”

“하긴. 새로 샀으면 그만이지. 그럼 연락처가 변경됐다고 미리 얘기해야겠네.”

지혁의 목에 팔을 두른 소영은 유혹하듯 나직하게 속살거렸다. 손끝으로 매끄럽고 건장한 근육들을 어루만 지며 그녀는 욕망에 물든 흐릿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무슨 연락처가 변경돼?”

지혁은 거리낌 없이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리는 소영의 손목을 낚아채고 물었다. 그녀가 요 염하게 미소를 지 었다.

“이주환 가수 알아?”

대뜸 가수 이름을 말하는 소영을 보며 지혁은 미간을 모았다. 이주환? 우리나라 사람 중에 이주환 가수를 모 르는 사람도 있나?

“근데, 그 가수가 왜? 그게 내 전화번호 바뀐 거랑 무슨 상관인데?”

시니컬하게 대꾸한 지혁은 담배를 찾아 꺼내 물었다. 어느새 소영은 침대 맡에 앉아 실오라 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대담하게 다리를 꼬았다. 살짝 벌려지던 허벅지 사이로 그녀의 은밀한 일부가 드러나, 마치 그 를 유혹하는 듯 했지만 한바탕 치른 정사로 지혁은 그다지 소영의 나체에 몸이 동하지 않았 다. 하긴, 언제는 몸이 동해서 했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지혁은 자조적인 미소를 배어 물었다.

소영은 풍만한 젖가슴을 살짝 들어올려 팔짱을 끼고 말을 계속했다.

“으음, 이주환 가수가 우리 엔터테인먼트 소속인건 알지?”

“그래서?”

그가 자신의 가슴에는 눈길도 던지지 않은 채 되묻자 소영은 슬슬 몸이 달았다.

“이주환이 이번에 신곡을 내는데…….”

말끝을 흐리는 소영의 득의양양한 미소에 지혁은 버럭 부아가 치밀었다. 가수가 신곡을 내 든 말든 그게 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어지는 소영의 뒷말을 더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지혁은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땀 으로 끈적한 몸이 기분을 더욱 불쾌하게 만드는 거 같아서였다. 그런 그의 걸음을 그녀가 잡아챘다.

“이주환 신곡 뮤직비디오에 출연할 남자 주인공으로 당신을 거론했어. 아니, 거의 확정됐다 고 보면 돼.”

지혁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로 그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이주환. 발라드의 황제라는 이름으로 10대부터 40대까지 팬 층을 고루 갖고 있는, 대한민국 의 자타가 공인하 는 국민가수. 명실상부한 최고의 가수. 그 이주환의 신곡 뮤비에 주연으로 발탁된다? 그것도 나, 우지혁이?
혈관을 타고 돌던 혈액이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얼굴 한가운데로 뜨거운 피가 확, 몰려드는 느낌에 지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주환이 음반을 냈다하면 가요계에 선풍적인 돌풍을 몰고 오지. 이번에 도 우리 엔터테인 먼트 식구들은 이주환 앨범이 대박이라 믿어 의심치 않거든. 이런 가수의 뮤직비디오에 출 연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정말……, 확정 된 거야?”

탁하게 갈라진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혁은 가볍게 목을 가다듬고 혹여 소영이 질 나쁜 농담을 하 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날카롭게 살폈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 와인빛 립스틱이 뭉개진 소영 의 입술에는 요염 한 미소가 맴돌아 다녔다.

“내가 적극 추천했는데 안 될 리가 있겠어? 내 말은 120% 보증수표야, 120%!”

소영은 자신의 말을 강조하듯 몇 번이고 했던 말을 반복했다. 지혁은 그제야 고개를 주억거 리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봐서 은근슬쩍 소영의 의중을 떠보려고 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멋진 선물을 내 밀었다.

STS엔터테인먼트는 소속 연기자들을 굉장히 고급스럽게 관리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인기연 예인은 물론, 이 제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샛별도 함부로 방송에 출연시키지 않는 곳으로 방송가에서는 유명 했다. 그런 만큼 방송국 측에서는 더 안달을 하고, STS엔터테인먼트 소속 연기자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 어 있었다.

특히나 신인배우를 위한 온라인 홍보 활동 및 기획사의 오디션 제공 등 최상의 메니지먼트 활동으로, 음반제 작, 연극, 영화, 방송, CF 등의 각종 데뷔의 기틀을 마련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지혁에게는 STS엔터테인먼트 의, 아니 소영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리고 기회는 다가왔다.

분명 기뻐해야한다.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이던가. 자신에게 이런 행운이 이토록 빨리 다가오 다니, 황홀함을 넘어서 무아지경에 빠져들어야 했다. 허나, 무엇일까. 무엇이 이렇게 자신의 심장을 아프도 록 세게 움켜쥐고 있는 것일까.

왜 하필이면…….

왜 하필이면, 최소영인가.

왜 최소영과 관계된 여자란 말인가.

우지혁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는 여자, 최소영. 그리고 자신의 눈에 박혀, 뇌리를 떠나지 않는 어 느 한 여자, 최소영의…… 조카…….

왜 하필이면 이 여자의 조카란 말인가. 나는 아직 최소영을 놓아줄 수가 없는데. 아직은, 아 직은…….

미치도록 전화를 하고 싶어도 최소영의 조카라는 이유로 잔화기를 든 손을 내려야 했다.

분명 자신의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걸면 그녀가 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한번쯤 모든 생각을 뒤로하고 목소리라도 들어볼까, 하는 욕심도 생기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도저히 지금의 이 충동을 이겨내지 못하면 무작정 전화를 하게 될지도 모 르는데. 그런데… … 전화를 하면 안 되겠지? 안되는 거겠지?

아무것도 아니라 치부하면 그만이다. 잠시 옷깃만 스쳤을 뿐인데 마음이라도 빼앗긴 것처럼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예쁜 그녀의 얼굴에 잠시 혹했나보다. 그가 살아온 동안, 그렇게 해맑은 미소를 짓던 여 자는 본적이 없기에 더욱 그렇겠지. 우지혁의 어두운 삶에서는 결코 볼 수 없던 햇살을 닮 은 여자라서 더 기 억에 남는 여자겠지. 여기까지 하자. 이쯤에서 머릿속에 남아있는 여자의 모습을 털어내자.
털어내야 한다.
깨끗이, 그리고 흔적도 없이.

“안 기뻐? 하나도 좋아하는 얼굴이 아니네?”

침대에 누워 있던 소영은 혼자만의 생각에 고립되어 있는 지혁을 일깨웠다.

“이 소식 전하면 당장이라도 나 안아줄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밤, 아니 아침이 오도록 당신과 뜨거운 밤 을 보내려고 준비했는데……, 기쁘지 않아?”

그래, 그는 이런 놈이었다. 어차피 이게 그의 인생이었다. 그는 여자들에게 이런 대가를 바 라고, 그들에게 환 락의 밤을 지불했다. 이것이, 그…… 우지혁의 모습이었다.

“너무 기뻐서 정신을 못 차리겠군.”

지혁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후후, 이 정도에 그러면 어떻게 해?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당신만…… 내 곁에 있 어 준다면……. 나 를 만만하게 보지 마. 어수룩한 미진이처럼 이용가치가 떨어진다고 나라는 여자를 씹던 껌 처럼 침을 뱉듯 내 뱉을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당신!”

못을 박듯 소영의 음성은 단호했다. 지혁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말하지 않 아도 알고 있었 다. 최소영의 곁을 떠나면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지혁은 기뻐할 수 도, 그렇다고 슬퍼할 수도 없었다.

이런 엿 같은 기분은 달갑지가 않았다. 고작 그 여자가 뭐라고. 해사하게 웃던 그 여자가 뭐 기에 이따위 시답 잖은 기분에 휩싸인다는 말인가. 전화를 하고 싶어 갈등 따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목 소리가 듣고 싶다 는, 돼먹지 않은 감상에 빠져들다니.

기뻐하자, 좋아하자, 이게 내가 원하던 바가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은가, 우지혁?

지혁은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 없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흔쾌히 동의했다. 더 이 상의 흔들림은 없 을 것이다. 오늘 밤 그는 소영에게 더 할 수 없는 쾌락을 선사해야 한다. 몇 번이고, 몇 번 이고, 지쳐나가 떨 어질 때까지 환락의 밤을 보내야 했다. 소영의 말처럼 아침이 올 때까지, 그녀와 섹스의 탐 닉에 허우적거려 야했다. 우지혁에게, 이주환의 뮤직비디오라는 대어를 낚아준 그녀를 위하여…….

질척한 늪지대.

숨통을 죄어오는 늪은 발밑에서부터, 지혁의 목까지 뒤덮고 있었다. 제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벗어 날수 없는 올가미. 또는 덫.

시커먼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다가서는 악마의 형상이 점점 요부의 모습을 한 소영의 얼굴로 변해갔다. 자신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뱀처럼 휙휙 감기는 소영의 서늘한 느낌에, 지혁은 헉하는 신음과 동시 에 눈을 떴다.

꿈이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지혁은 축축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고 시원한 생수병을 꺼 내어 입안에 들이 붓듯 물을 쏟아 부었다. 입가로 물이 새어나와 목을 타고 옷을 적셨다. 이제야 서서히 정신 이 들기 시작했다.

지난밤 지혁은 소영이 원하던 대로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섹스를 나눴다. 붉은 태양이 침 실 창문을 뚫고 들 어와 그들의 머리 위에서 내리꽂힐 때까지, 지치지 않고 서로의 몸을 탐닉했다. 그리고 그는 소영이 가고 꼬 박 10시간이 넘게 잠이 들었다. 아침이었던 밖은 어느새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지혁은 캔 맥주를 들고 베란다 문을 열어젖혔다. 시원한 바람이 코끝을 타고 전신을 휘감았 다. 땀을 흘린 탓 인지 차가운 한기에 소름이 끼쳤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알코올의 짜릿함에 지혁은 캔 맥 주 하나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평소에 술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다. 차라리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담배를 더 선호하던 지 혁이었지만, 근래 의 그는 부쩍 술이 늘었다. 하나만 마셔야지, 하고 시작한 맥주는 어느새 발아래에 빈 캔이 여기저기 나뒹굴 게 만들었다.

베란다에서 목을 축이기 위해 마시던 가벼운 술자리가 아예 거실로 옮겨졌다. 본격적으로 술을 마신지 얼마 나 되었을까. 지혁은 슬슬 취기가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몸이 붕 뜨고 입술에서는 연방 더 운 열기가 흩어져 나왔다. 더 이상 마실 술이 없다는 것을 알고 지혁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냉장고 문을 닫 았다. 남아 있는 술 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젠장!”

이렇게 술이 달고 맛있다는 것을 지혁은 난생 처음 알았다. 더 마시고 싶은 욕구를 꾹 누르 고 그는 소파에 몸 을 묻었다. 많이 마시긴 많이 마셨나보다. 가만히 서있는 것조차도 힘에 부쳤다.

스르르, 눈이 감기려는 찰나 지혁은 번쩍 눈을 뜨고 말았다. 그의 시선에 들어오는 전화기가 세상 어떤 것보 다 더한 유혹의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한번만이다, 한번만.

어쩌면 전화를 받지 않을 지도 모른다. 늦은 시간이니까. 그러면 이런 아쉬움 따위, 미련 따 위 말끔하게 지워 버려야지. 휴대폰을 잃어버린 지 벌써 오 일째. 아마도 배터리가 다 된 휴대폰은 벨 자체가 안 울릴지도 모른 다. 아니, 어쩌면 그 여자가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불현듯 실망감이 엄습했다. 그 여자가 아니면 어쩌지? 수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가 그녀가 아니면 어쩔 건 데, 우지혁?

지혁은 무선전화기를 들어 익숙한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힘을 주어 꾹꾹, 그러나 한참을 뜸 을 들으며 천천히 눌렀다.

RRRRR…….

동굴속의 울림처럼 신호가 울려 퍼졌다. 전화기를 들고 있는 손아귀에 끈적한 땀이 배어나 왔다. 받지 않을 것이다, 받지 않을 것이다. 지혁은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RRRRR…….

받지 마라……. 차라리 이 전화, 받지 마라. 네 목소리, 들려주지 마라. 네가 이 전화를 받으 면…… 나…… 어 쩌면…… 너를 탐내게 될지도 모른다. 너의 그 밝은 웃음을 욕심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전화를 하지 않 으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제발, 이 전화를 받지 말아라.

그 순간, 지혁의 귓가를 빽빽이 메우던 신호가 뚝, 멈췄다. 그리고 꿈결처럼 여자의 달콤한 목소리가 전화기 를 타고 흩어져 나왔다.

“여……보세요?”

툭, 그의 심장이 발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너를 욕심낼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귓가에 파고드는 여자의 음성에 그는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너를 탐낼지도 모른다…….
************************ 『5』 교수가 강의실을 나가기도 전에 은채는 주섬주섬 전공서적이니, 노트니 부지런을 떨며 챙겨 가방에 넣었다.
인사와 함께 교수님이 은채에게 조심하라는 경고의 눈짓을 보내도 그녀는 생긋 웃고는 손놀 림을 멈추지 않 았다.

오전부터 내내, 아니 전날부터 지금 이 시간이 되기를 기다린 듯 했다. 과 동기들이 강의실 을 뛰쳐나가는 은 채를 불렀지만, 그녀의 귀에는 그 소리가 단지 소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계단 을 뛰어가는 은 채의 팔을 누군가 단단히 낚아챘다.

숨소리를 고르며 은채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사람에게 눈길을 던졌다.

“박현욱! 나 바뻐, 이거 놔.”

아슬아슬하게 강의시간까지 마친 그녀는 친한 친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다 되 어가고 있었다. 늦 으면 그가 그냥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은채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했다.

“뭐가 그렇게 바쁘냐? 오빠가 불러도 들은 척도 안하고.”

“오빠 좋아하네!”

북적거리는 계단으로 강의를 마친 학생들이 물밀 듯 밀려나왔다. 행여나 지나가는 학생들이 은채를 밀기라 도 할까봐 현욱은 은채를 복도 쪽으로 이끌었다.

“모임 때문에 바쁜 거야? 그렇다면 걱정 붙들어 매시라! 너 데리고 가려고, 이 울트라 캡 숑 나이스 짱인 오빠 가 너 모시러 왔다는 거 아니냐. 가자, 아직 시간 널널하다.”

“울트라 캡숑 나이스 짱이 다 얼어 죽었나 보다, 얘! 그리고 우리 새엄마, 너 같은 아들 안 뒀어. 이게 어디서 꼬 박꼬박 오빠라는 거야, 확! 한대 패버릴까 보다.”

가방을 번쩍 들어 내려칠 기세로 말하자 현욱은 단박에 방어자세로 돌변했다. 그런 현욱의 행동에 은채는 풋, 웃음을 터트리고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그래, 그래. 너랑 나랑 남매는 아니지. 남매면 큰일 나게? 남매가 아닌데 신에 감사하는 바이다. 뭐, 오빠라 부르기 싫으면 자기도 괜찮고.”

“너 죽을래?”

“자기도 싫어? 음, 그럼 뭐가 좋을까.”

고민하는 모양새로 머리를 갸웃거리던 현욱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은채를 벽으로 밀쳤 다. 은채가 왜 그 러냐고 눈을 동그랗게 뜰수록 현욱의 음성은 낮아졌다.

“어휴, 엉큼한 것! 그래, 오빠도 싫고, 자기도 싫으면 여보라고 불러라. 너만 특별히 허락하 마.”

퍽, 은채의 주먹이 현욱의 아랫배를 강타했다. 오버액션을 취하며 바닥으로 무너지는 현욱의 어깨를 은채는 가방으로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야, 또. 넌 밥 먹고 그렇게 할 짓이 없니? 허구한 날 남의 강의실 앞에 죽치고 있질 않나, 쓰잘데기 없는 말을 하질 않나. 내가 너랑 상종을 말아야지!”

소리를 빽빽 질렀지만 은채의 입가에 미소가 배어 들었다. 늘 그렇다, 현욱은. 도무지 변한 게 없었다. 아무 리 구박해도 현욱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매일같이 은채의 곁을 맴돌았다. 약속이 있으면 약 속이 있다는 핑계 로, 없으면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핑계로, 오빠가 보호해준다느니 어쩌느니 하며 은채를 귀 찮게 하고 있었 다. 그 귀찮음이 우정이라는 이름이라는 걸 알기에 은채는 그다지 거부반응을 보이지도 않 았고, 싫어하지도 않았다. 단지, 지금은 곤란했을 뿐.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은채는 하나밖에 없는 절친한 친구인 현욱도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내일 얘기 하자. 오늘은 정말 바쁘단 말야.”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는 은채의 뒤를 현욱이 바짝 쫓아왔다. 은채는 걸음을 멈추고 매섭게 노려보며 쏘아붙 였다.

“나, 바쁘다고. 바뻐!”

“알아.”

“안다면 그만 가.”

“동아리 방 간다고 바쁜 거 아냐? 나도 거기 가는 길인데 이왕 가는 거…….”

은채의 걸음이 딱 멈췄다. 그녀의 등에 이마를 콩, 박고서야 현욱은 은채의 눈치를 보기 시 작했다.

“왜?”

가방을 뒤적거려 다이어리를 꺼내든 은채가 핑크빛 혀를 쏙 내밀었다.

“어쩌지?”

“뭐가?”

뭘 보던 중이었는지 은채의 펼쳐진 다이어리를 살피던 현욱이 물었다. 은채는 머뭇거리며 가죽다이어리를 접고 현욱의 어깨를 털어내듯 툭툭, 매만졌다.

“어허, 이 아가씨가 왜이러시나?”

뭔가 자신이 곤란할 때 만 잘해준다는 것을 아는 현욱이기에 그는 대번에 신경을 바짝 곤두 세웠다.

“이실직고 해. 뭐가 문제야? 내가 또 해결사 노릇 해줘야 하는 거야?”

“그게 아니고…….”

은채는 말끝을 흐리며 다이어리를 만지작거렸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 모임이 있다는 것을. 평소에는 다이어리에 적힌 스케줄에 맞춰 하루 일과를 조정했는데 오늘은 적잖이 들떠 있었나보다.
일주일 전부터 정 해져 있던 동아리 모임을 간과하고 있었다니.

“나 오늘 약속 있는데…….”

“근데?”

“모임이 있다는 걸 깜빡했거든.”

“그래서?”

“네가 선배들한테 얘기 좀 잘해달라고.”

“뭐야? 무슨 약속인데? 너 알잖아. 수업은 빠져도 동아리 모임은 빠지지 말라고 으름장 놓 던 무식한 선배들 말을, 그새 잊었냐?”

왜 잊었으리요. 그래서 한번도 불참 한 적이 없건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모임에 한번 빠졌 다고 선배들이 후 배를 죽이겠어, 배를 째겠어? 은채는 뻔뻔모드로 나가며 현욱에게 매달렸다.

“그러니까, 네가 말을 잘해야지. 갑자기 내가 너무너무 아프다고 해. 그래서 집에 갔다고.
아니, 그냥 병원에 갔다고 해라.”

“아예 죽었다고 해주리?”

“것도 좋고.”

말을 마쳤다는 듯 은채는 현욱을 등지고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은채의 앞을 현 욱은 큰 보폭으로 따라잡고 가로막았다.

“무슨 약속인데? 무슨 일이기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정신도 못 차리고 뛰어 나가니? 선배 말까지 씹으면서.”

“씹은 거 아니다, 뭐. 그냥 깜박 한거야.”

변명하듯 말했지만 현욱은 말꼬리를 잡기로 작정을 했는지 쉽게 놔주질 않았다.

“바부팅! 벌써 치매 오냐? 그나저나 어쩌냐? 걱정이네.”

“뭐가?”

연방 손목시계로 눈길을 돌리면서 은채가 되물었다. 현욱은 근심에 쌓인 얼굴로 자못 심각 하게 입술을 열었 다.

“얼굴도 못생겼는데, 치매 증상까지 있으면 시집가기 힘들잖아. 좋아, 오빠가 인심 썼다.
너, 내가 책임진다, 져!”

“나가 죽어라!”

베에, 입술을 내밀고 은채는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현욱을 밀쳤다. 두어 걸음 뒤로 밀쳐진 현욱을 보면서 은 채는 쐐기를 박았다.

“으이그, 또 시작이야. 누가 책임져 달래? 너더러 책임져 달라는 소리 안할 테니까, 너야말 로 걱정 붙들어 매 셔!”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 돌아서는 그녀를 현욱이 불러 세웠다. 하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은채야. 야, 최은채!”

지치지 않고 쫓아오는 현욱에게 오히려 은채가 먼지 손을 들어버렸다. 뒤에서 들리는 현욱 의 협박성 멘트에 브레이크를 밟듯,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너, 선배들한테 이른다. 아프지도 않고 멀쩡한 게 토꼈다고.”

“너……!”

“그러니까 나랑 잠깐만 동아리 방에 갔다가 약속장소로 가면 되잖냐. 가자. 아니면 나랑 같 이 약속장소에 가 든지.”

손목을 휘감는 현욱의 손을 홱, 뿌리친 은채는 도리도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따라 유별 나게 매달리는 현 욱을 이해할 수가 없어 짜증까지 나려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정말 곤란해. 나도 모임에 빠지고 싶지는 않은데…… 그리고 네가 갈 자리 아냐. 신경 꺼.”

“무슨 약속인데.”

현욱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삐딱하게 서서 은채를 정시했다.

“무슨 약속인데 네가 이러는 거냐고.”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현욱은 사나울 정도로 은채를 몰아붙였다.

“내가 뭘?”

“언제부터 내가 가면 안 되는 자리가 있었니?”

은채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남자가 여자보다 정신연령이 훨씬 어리다고 하더니만 틀린 말은 아닌가보다. 은채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현욱의 등을 토닥거렸다.

“짜식, 삐지긴! 그냥 너 모르는 약속이 있다는데 민감하게 반응하긴.”

현욱은 은채의 손을 뿌리치고 따지듯이 말을 계속했다.

“됐어. 그러니까 같이 가자고. 같이 가.”

“너야말로 왜 이러니? 네가 내 보호자도 아니고, 왜 내가 가는 데마다 네가 가야 되는 건 데?”

와락 짜증이 솟구쳐 은채는 현욱의 화를 풀어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 걷기 시작 했다.

어제 저녁, 기다리던 것을 포기할 무렵 먹통이던 주인 잃은 휴대폰이 드디어 벨소리를 울렸 다. 얼마나 기다 렸던 전화인가. 얼마나 듣고 싶었던 목소리인가. 나직한 남자의 음성. 얕은 한숨소리. 그 모 든 것이 전화기를 넘어 그녀의 귀를 타고 전해와 심장에 찌르르한 전율이 흐르게 했다.

잃어버린 휴대폰에는 미련이 없거나, 휴대폰을 찾기에는 너무 바쁜 사람이거나 둘 중에 하 나라고 생각하고 은채는 마음을 비우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그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우울한 그녀의 기분을 달래주 듯.

조심스러운 어조로 망설이듯 머뭇거리던 그의 목소리. 그가 언제쯤 휴대폰을 전해 받을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은채는 다른 약속이 있다는 것은 새까맣게 잊고 바로 다음날 만나자고 했다. 수업이 끝 나는 시간을 알려 주고 학교 이름을 말했을 때 그는 흔쾌히 오겠다고 했었다.

어느새 약속시간에서 일이십 분 지난 듯 했다. 잔소리를 해대며 따라오는 현욱에게는 더 이 상 신경도 쓰지 않고 은채는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생각에 헤매고 있었다.

어제도 이름을 물어보지 못했다. 오늘 만나면 기필코 물어봐야지. 나이랑, 또…….

“하나만 대답해.”

“뭐?”

“누구 만나러 가는 거야?”

“너 모르는 사람이야.”

“너 아는 사람 중에 내가 모르는 사람은 없어.”

“오늘부터 생겼어. 됐니?”

“그럼 내가 알아듣게 설명이나 해봐.”

“됐어!”

톡, 쏘아붙이고 현욱을 째려보던 은채는 걸음을 멈추고 양 손을 허리에 걸쳤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저번에 너, 아다지오에서 나 물먹인 적 있지? 삼십분 넘게 기다렸는데 너 연락도 없이 안 왔었잖아. 그날… … 우연찮게 휴대폰을 하나 주웠어…….”

거짓말을 하려니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나왔다. 은채는 흠흠, 헛기침을 내뱉고 목을 가다듬었 다. 현욱이 날카 롭게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날 주운 휴대폰을 오늘 주인에게 돌려주러 가는 길이지. 내가 왜 이런 설명까지 네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만, 이제 됐지? 나 그만 간다!”

“남자야, 여자야?”

홱 몸을 돌리고 앞으로 한발 내디디려는 은채의 발목을 현욱이 잡아챘다. 은채는 얼어붙듯 제자리에 멈춰서 고 말았다.

“그 휴대폰 주인 말야. 통화 했으니 알거 아냐. 남자야, 여자야?”

툭 던지듯 단조로운 말투에 은채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을 더듬거렸다.

“그건…… 왜 묻는데?”

“바보. 여자면 이쁜지 안 이쁜지 내가 나가보려고 그런다.”

콩, 머리를 쥐어박는 현욱의 장난스러운 손길에 은채는 그제야 긴 한숨을 내뱉었다. 내내 달 라보였던 현욱이 겨우 제자리에 돌아온 듯 했다.

“꿈 깨셔! 남자니까!”

픽 웃음을 토해낸 은채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하여튼 실없는 녀석이다. 책임진다고 할 때는 언제고 여자만 보면 턱받이가 필요할 정도로 침을 줄줄 흘리는 녀석은 제가 카사노바라도 되는 줄 아나보 다. 하긴 심각하지 않아서 좋긴 하다만. 손목시계에 눈길을 던지던 은채의 눈빛이 달라졌다. 현욱과 영양가도 없는 농담을 하느 라 벌써 약속시간에서 한참이나 지나 있었던 것이다. 뛰다시피 걸어 나가는 그녀의 어깨를 현욱이 거칠게 움 켜쥐었다.

“아얏! 야……!”

은채는 신음을 내뱉으며 현욱을 노려보았다. 손아귀에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은채가 노려보 든 말든 현욱은 척,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뭘 내놔? 나한테 뭐 맡겨 놨니?”

“휴대폰 내놔. 네 꺼 말고, 네가 주웠다는 그 주인 없는 휴대폰.”

휴대폰을 내놓으라는 현욱의 말에 주섬주섬 바지 뒷주머니에 꽂혀 있던 것을 꺼내들던 은채 는, 별안간 주운 것을 달라하자 현욱을 빤히 바라보았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현욱이 냅다 화를 터트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여자가 겁도 없이 어딜 가겠다는 거야? 약속 장소가 어디야? 내가 갖다 줄 테니까, 넌 휴대폰이나 줘.”

“야, 박현욱!”

“시끄러!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그런 곳에 덜렁 혼자 간다고 나서니, 나서길? 세상 남자가 다 나처럼 만 만한줄 아니?”

“오버하지 마, 잠깐 휴대폰만 돌려주러 가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내가 갖다 준다고!”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다 겨우겨우 학교 앞까지 나온 은채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 리고 언성을 높이 는 현욱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안됐지만 그럴 필요가 없네요. 저기 그 남자가 나와 있으니까.”

손가락으로 남자가 있는 곳을 가리키자 현욱의 눈길이 단박에 그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였다.

학교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비스듬히 자동차에 기댄 그를 은채는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눈을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만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도, 처음 보았을 때와 달리 슈 트 차림이 아니라, 블랙 진 바지에 바지 보다 더 딱 달라붙는 하얀색의 면 티셔츠, 그 위에 고급소재의 가죽재 킷을 걸치고 있었 지만 은채는 쉽게 그를 찾을 수 있었다.

“저 남자야?”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현욱의 말은 더 이상 은채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다림이 지루 했는지 남자의 발 아래엔 서너 개의 담배꽁초가 나뒹굴어 다녔고, 막 그의 입술에서 담배 하나 더 나가떨어지 던 찰나였다. 마 치 그림처럼, 모든 행동과 손짓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은채의 동공에 선명히 찍혀들었다. 구 둣발로 담배를 짓이기던 그가 무심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녀를 발견했는지 고갯짓을 멈췄다.

자동차에 기대고 서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뗐다. 그러나 은채에게 다가서지는 않았다. 오히 려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관망하듯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은채는 그런 그의 행동에 반발하듯 미동도 없 이 제자리에 우두 커니 서 있었다.

“휴대폰 어딨니? 내가 갖다 줄게.”

“됐어, 신경 꺼.”

현욱의 말이 자극제가 된 것처럼 은채는 돌연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최은채! 저 남자…… 위험해보여. 이건 느낌이야. 본능이라고! 가까이 해서 좋을 거 없는 사람 같아. 내가 휴 대폰 주고 올 테니까 넌 제발 여기 있어라, 응?”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현욱을 보면서 은채는 한숨을 폭 내쉬었 다.

“현욱아……, 너 걱정하는 건 아는데…….”

“알면 됐어. 어딨니, 휴대폰? 가방에 있니?”

휙 은채의 가방을 빼앗듯이 낚아챈 현욱은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몇몇 학 생들이 힐끔거리며 그를 보았지만 현욱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뭐하는 짓이야? 남의 가방을 왜 뒤지니?”

매몰차게 현욱의 손에서 가방을 되찾은 은채는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때였다.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내 휴대폰은 안 돌려 줄 건가?”

언제 다가왔는지, 바로 뒤에서 들리는 것 같은 그의 음성에 은채는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 고 코앞에 다가선 남자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시선을 마주하고 말았다. 아찔한 현기증에 은채는 비틀거리고 말았다.

“여기 있습니다. 이거 맞죠?”

유심히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 현욱이 불쑥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떻게 찾았는지 남자 의 은색 휴대전화 를 손에 들고서. 말없이 현욱의 손을 바라보던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고맙군.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이렇게 찾아 줘서.”

남자의 무뚝뚝한 어조에 은채는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뭐야?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줄 알았니?

“고마우면, 사례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톡 쏘듯이 내뱉는 은채의 말에 남자가 묘하게 입꼬리를 치켜 올리고 웃었다. 그 순간 현욱 은 버럭 소리를 질 렀다.

“최은채! 뭐하는 짓이야?”

“너 약속 있다 하지 않았니? 동아리 모임 있잖아. 어서 가, 시간 넘었어. 난 휴대폰 주워주 고, 여태 간수한 대 가를 받아야겠으니까.”

“대가? 그래, 학생. 뭘 받고 싶어?”

그가 다시 담배를 빼어 물었다. 불을 붙이고 길게 담배연기를 들이 마신 그가 나른하게 덧 붙였다.

“커피? 식사? 술? 아니면 현찰? 어떤 걸 바라나.”

은채는 양심이라는 것은 깨끗하게 잊고 뻔뻔스럽게 대가를 요구했다. 하지만 물질로 그 대 가를 판단하는 그의 기준을 비웃듯 단호하게 말했다.

“일주일. 일주일 동안 내 기사 노릇 좀 해줘요.”

그녀의 난데없는 대답에 남자의 입에 매달려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은채는 현우가 돌려준 남 자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재빨리 빼앗고는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제가 운전이 서툴러서요. 엊그제 멀쩡하게 지나가는 사람을 치어 버 리는 바람에…… 아 물론 찰과상 정도로 가볍게 끝났지만, 우리 아빠가 다시는 운전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기 사를 구할 때까 지는 내차도 내 마음대로 못 타요. 어때요? 그쪽 휴대폰 주워준 대가로 내 기사 노릇, 일주 일 하는 거?”

“당돌하군.”

그가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구둣발로 짓이겼다. 선그라스 때문인지 그의 표정을 하나도 알 아볼 수가 없었다.
기분이 나쁜지, 어떤지를 알고 싶었지만 그는 손톱만큼도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최은채, 너 미쳤니? 운전을 왜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해달라고 해? 나도 면허 있고, 차있어.
내가 해줄 테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해! 그리고 그쪽은 휴대폰 찾았으면 그만 가시지요!”

현욱의 딱딱한 말투에 남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면서 은 채와 현욱을 번갈 아보았다.

“두 사람…… 어떤 사이지?”

남자가 은채의 앞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바리게이트를 치듯 현욱이 가로 막았지만, 남자의 걸음은 거침없었 다. 은채는 별걸 다 물어 본다는 얼굴로 무심하게 대답했다.

“친구예요. 근데 그건 왜요?”

“단순한 친구 사이라 하기엔 이 친구가 좀, 지나친 걸?”

“잘 아시는군요.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졸업하면 결혼 할 사입니다.”

현욱이 끼어들자 남자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은채는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현욱을 노려보았다.

“박현욱, 너 죽고 잡니?”

“얘, 내겁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흑심을 품었다면 이쯤에서 철수하시지요.”

“박현욱 군? 충고 하나 할까? 수컷의 본능은 말이야…… 남의 것을 뺏는데 더 희열을 느 끼는 법이야. 더불어 말하자면…… 나는 본능을 따르는 수컷이지.”

거만하게 현욱의 어깨를 내려친 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물렸다. 사정없이 구겨지는 현 욱의 인상에 더 크 게 웃음을 짓던 그가 은채에게 눈길을 던졌다.

“나보고 운전기사 노릇을 하라 했나?”

은채는 턱을 치켜세우고 고개를 까딱였다.

“일주일 동안 운전기사라……. 그래, 오늘은 차를 가져 오셨나?”

“아뇨. 학교 나올 땐 차 안가지고 다녀요.”

“착한 학생이군. 좋아. 그럼 오늘부터 시작할까?”

“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은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자신의 차를 가리키며 고갯짓을 했다.

“운전기사 노릇 하라며? 말나온 김에 지금부터 하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는 자신의 차로 성큼 걸어갔다.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던 상반되는 심리 는 현욱의 사나운 어조에 은채는 발끈하듯 결정을 내렸다.

“너, 저 인간 차타면 다시는 안 본다. 나 안 볼 생각이면, 타고 가!”

“보든지, 말든지!”

은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현욱을 내버려두고 남자의 자동차로 몸을 옮겼다. 그는 어 느새 조수석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 저 욱하는 심정 에 딴죽을 건 것뿐인데, 정말 기사 노릇을 해주다니.

“뒷좌석 보다는 앞자리가 편하겠지?”

툭, 현욱은 지나치면서 은채를 밀쳤다. 넘어지듯 휘청거린 그녀는 간신히 중심을 잡고 딱딱 하게 굳어버린 현 욱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평소와는 달리 현욱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감돌았다. 은채는 무심결에 현욱 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순간, 남자의 손이 그녀의 손을 강하게 휘어감아 압박했다. 움 찔거리며 손을 빼 려는 그녀의 손을 그가 더욱 거세게 움켜쥐고 나직하게 명령했다.

“타.”

그녀의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너무도 부드럽게 승낙하던 때와는 달리, 차 안으로 밀치는 그 의 손길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 순간, 은채는 한번도 느껴 본적 없는 두려움을 온 몸으로 느꼈다. 전신의 신경이 바짝 곤두 서고, 올올이 일어서는 느낌. 분명 자신이 먼저 제안한 것이면서도 그녀는 전신으로 퍼져가 는 두려움에 살짝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웃기구나, 최은채. 너 이 남자 두렵니?

내면에서 무언가가 속삭였다. 은채는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어, 두려워.

뭐가 두려운데? 두려우면 왜 이런 터무니없는 제안을 한건데?

그냥……, 그냥……, 그냥…….

뚜렷한 확답을 내리지 않는 속마음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 다. 왜 이런 조건 을 내걸었는지, 되지도 않은 운전기사를 빌미로 왜 그를 붙잡았는지,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만나기를 원했다, 그를.

휴대폰만 돌려주고 더 이상의 인연은 없다는 듯 헤어지기가 싫어서였다.

그랬다면 자신의 차에서 그의 휴대폰을 처음 봤을 때, 그렇게 도망치듯 사라지지 않았을 것 이다. 몇날며칠 그의 전화를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이름이 뭐예요?”

주제넘다 싶을 정도로 당당하게 말하던 그녀는 차에 오르자 집 위치만 설명하고는 긴 침묵 을 지켰다. 말없이 정면만 주시한 채 운전에만 집중하던 지혁은 갑자기 들리는 은채의 목소리에 전신에 전류가 흐르는 듯 했다.

“지혁, 우지혁.”

“지혁…….”

그녀가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읊었다. 그 달콤한 음성에 지혁은 아찔함을 느껴야 했다.

“나이는요?”

“서른. 그러는 넌?”

“스무 살.”

“어리군.”

스물……. 어리구나. 아직 너무 어리구나.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에 켜켜이 쌓여가 는 기분이었다. 한 번만 보기 위함이었다. 멀리서라도 자신의 뇌리에 박힌 이 여자를 잠깐이나마 보기 위함이 었다. 그러나 욕심 은 점점 사나워지고 말았다.

목소리만이라도 들으려고 했던 마음이 그녀를 보고 싶게 만들었고, 멀리서 잠깐 동안 훔쳐 보기 위해 약속장 소로 나온 마음이, 결국 그녀에게 다가서게 만들었다. 급기야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순수한 열정으로 빛나보 이던 나이 어린 사내에게, 마치 아내를 빼앗긴 못난 남편이 된 마냥 지혁은 질투심마저 느 끼고 말았다.

여자를 상대로 한번도 이런 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다. 생소하다 못해 찝찝한 기분마저 들어 지혁은 자꾸만 욕설이 튀어나오려 했다. 어린 남자아이가 제 여자친구를 빼앗기기 싫어서 장래 결혼 할 사 이라고 하는 말에 발동이 걸리듯, 덥석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판단착오였다. 어서 농담이 었노라, 그녀에게 말해야 했다. 혀끝에 맴도는 말을 내뱉으려는 찰나, 그녀가 내뱉는 말에 지혁은 헉, 숨을 멈 추고 말았다.

“뭐하는 사람이에요? 직업이 뭐죠?”

핸들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가득 실렸다. 푸른 정맥이 살갗을 뚫고 튀어나올 듯 툭, 불거 졌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말문이 막히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물론 직업이 뭐냐는 질문은 많이 겪어 보았다. 그 리고 대답 또한 망설이지 않고 하던 그였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문이 열리질 않았다.

난 뭐하던 사람이지? 나는…….

“네? 무슨 일 하는데요?”

“호구조사 나왔나? 이름 묻고, 나이 묻고, 직업 묻고. 다음엔 뭐지? 결혼은 했냐, 자녀는 몇 이냐…… 뭐 이런 걸 물어볼 셈인가?”

지혁은 다소 거칠게 말했다. 부끄럽다니, 난생처음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웠다. 지독한 모멸 감, 수치심. 그 모 든 것이 해일처럼 그를 덮쳤다.

“음, 결혼 했어요?”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에 지혁 은 숨이 막혀왔다.

맑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하얀 구름처럼, 그에 대비되는 밤하늘처럼 새까만 눈동자는 그의 추악한 내면을 꿰뚫어보듯 맑고 티 하나 없었다.

“결혼…… 한거예요?”

“아니.”

후유, 그녀가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신호등에 걸린 지혁은 잠시 운전에서 손을 떼 고 은채를 바라 보았다.

“그건 왜?”

“그냥요. 그럼 애인은 있어요?”

위험, 위험. 그녀는 금지구역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지혁은 홱, 고개를 돌리고 그녀 를 외면했다.

“있구나, 애인…….”

실망스러운 어조로 그녀가 나직하게 대꾸했다. 그녀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그의 심장이 죄어 들게 했다. 지혁 은 입을 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허나, 의지를 배반한 혓바닥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없어, 애인.”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곡선을 이루었다. 힐끗거리며 보게 되는 그녀의 웃는 모습에 지혁은 마디가 꺾이는 소 리가 날정도로 핸들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빌어먹을 정도로 예뻤다, 그녀는.

“그럼, 은채는 아까 그 녀석과 애인 아닌가?”

“어머! 아녜요! 어…… 근데 내 이름, 알아요?”

순간 지혁은 급하게 숨을 멈췄다. 지난 며칠동안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달고 살았다. 소리 내 어 부르지는 못해 도 혀끝으로 읊어보고, 불러보고 하느라 그녀의 이름이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린 것이었다.

지혁은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음, 아까 은채 친구가 그렇게 부르더군. 최은채…… 라고.”

“그랬구나. 난 또. 나한테 관심 있는 줄……!”

은채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붉게 달아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지혁은 부드럽게 웃고 말았다.

“휴대폰 없어진 거, 언제 알았어요?”

“없어졌던 그날.”

무심결에 대답하고 지혁은 아차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은채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 짝이고 있었다.

“근데 왜 어제 전화 한거예요?”

이렇게 만나고 싶을까봐.

미치도록 보고 싶을까봐.

그날, 소영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그녀를 각막에 담는 순간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 았다. 지혁의 눈 은 오로지 최은채, 그녀 한사람만 기억하고 또 기억하고 있었다.

“네?”

그녀가 채근했다.

“바빠서…….”

“그랬구나.”

혼잣말을 하듯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손가락을 세워 골목을 가리켰다.

“저기, 좌측으로 들어가서 세 번째 집 앞에 세우면 돼요.”

어느새 그녀의 집에 다 온 모양이다. 지혁은 왠지 모르게 아쉽고 서운함마저 느꼈다. 오늘 하루만, 오늘 단 한번만 그녀를 보려고 했다. 허나, 자신의 마음을 그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내일은 언제 올 거죠? 학교로 올래요, 우리 집으로 올래요?”

“음, 저어…….”

“설마 아까 했던 말 취소하는 일은 없겠죠? 내일 네 시에 수업 끝나는데, 학교 앞에서 기 다릴게요. 아, 그리 고 이거요.”

은채는 지혁의 앞에 휴대폰을 내밀었다. 아까 현욱이 돌려준 휴대폰을 도로 빼앗아 가방에 넣어뒀던 것을 내 밀면서 살짝 흔들었다.

“내 전화번호 입력해 뒀어요. 바빠도 전화 자주해야 돼요. 알았죠?”

조수석 문을 열고 내리려던 그녀가 잠시 지혁을 바라보더니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지혁은 헉, 신음을 삼키 고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향긋한 샴푸내음이 후각을 자극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뺨에 닿고 이슬을 머 금은 듯 촉촉한 입술이 그의 귓가에 살며시 닿았다.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 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 휴대폰 말이에요…….”

속삭이는 그녀의 음성이 귓가에 스칠 무렵, 자동차 실내에는 벨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 다. 은채가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지혁은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다 급하게 쑤셔 넣고 말았 다. 그녀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액정화면에 뜨는 이름을 아주 잠깐 동안 봤지만 그것은 올가미처럼 지혁의 숨통을 죄어 왔 다.

최소영

그녀의 이름이 벨소리와 함께 액정화면에서 깜빡거렸다. 빌어먹을! 전화를 받을 수도, 그렇 다고 안 받을 수 도 없는 상황에서 지혁은 이를 갈았다.

“계속해. 휴대폰이 왜?”

“전화…… 안 받아요?”

“안받아도 되는 전화야. 무슨 말 하려고 했지?”

“음…….”

미심쩍게 바라보던 은채는 생긋 웃음을 짓고는 비밀 얘기를 하듯 지혁에게 다가섰다. 그는 주춤 물러서다 운 전석 문에 등이 닿자 물러서기를 포기했다. 자신의 귀에 와 닿는 그녀의 입술에 신경을 곤 두세우고 그 부드 러운 피부촉감을 온몸으로 느껴야했다.

“실은 내 차에 떨어진 휴대폰…… 그날 봤었는데, 일부러 그쪽 부르지 않았어요.”

지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쪽 다시 만나려고…… 그날 그대로 휴대폰 갖고…… 도망갔었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끊임없이 울려 퍼지던 벨소리도 더 이상 지혁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 다. 은채의 목소 리만이 그의 귀에, 가슴에 들려왔다.

“미안해요. 나……, 사실대로 고백 했으니까, 이제 홀가분하게 있어도 되죠?”

그녀가 생긋 웃고는 도망치듯 지혁의 차안에서 빠져나갔다. 미처 그가 손을 내밀기도 전에 그녀는 육중한 문 을 열고 그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어리석다, 그녀는.

어린 나이만큼이나 생각도 어리다. 그녀, 은채는.

내가 어떤 놈인지 알고 있을까? 내가 뭘 하는 놈인지, 그녀는 짐작이나 할까? 만약 안다면, 내가 어떤 놈인지 얼마나 더러운 놈인지 안다면…… 그녀는 그때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 까……?

지혁은 석상처럼 굳은 채 은채가 사라져간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침이 바짝 말라버린 듯 그는 심한 갈 증을 느꼈다. 심장이 메말라 쩍쩍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까지도 벨소리는 집요하게 자동차 안과 지혁의 주변을 맴돌아 다녔다.

“젠장!”

벨소리를 무시하고 지혁은 거칠게 시동을 걸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 여자, 최소영에게서…….

백미러를 통해 보이는 은채의 집에서 점점 거리가 멀어지자 지혁은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잡고 싶었다. 갖고 싶었다. 너무도…… 원했다. 그녀를. 저 안, 어딘가에서 환하게 웃음을 짓 고 있을 그녀, 은 채를…….

그러나 벨소리는 끊임없이 파고들어 집요하게 그의 신경세포를 일깨웠다. 그리고 가르쳐주 었다. 최소영, 그 녀에게 벗어 날수 없음을. 그녀에게서 우지혁은 결코 도망칠 수 없음을…….
************************ 『6』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마치 아내라도 된 듯한 소영의 말투에, 지혁은 거실에 들어서다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자신 의 아파트 비상 키를 소영이 갖고 있어, 수시로 드나들긴 했지만 오늘만큼은 마주하기 싫은 그녀였다.

“전화는 왜 안 받았어!”

“좀 바빴어.”

“얼마나? 얼마나 바쁘기에 내 전화를 안 받아?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내 전화를 안 받은 거지?”

거실 한쪽에 놓여진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들이키던 소영은 표독스레 물었다. 이미 제법 마 셨는지 소영의 눈 동자는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지혁은 피곤하다는 얼굴로 입고 있던 가죽 재킷을 벗어 소 파에 걸쳤다. 그 순 간, 소영의 긴 손가락이 지혁의 팔을 휘감아 그를 소파로 끌어당겼다. 무방비 상태로 소영에 게 넘어진 지혁 은 역한 위스키 냄새에 고개를 돌리고는 짜증스레 입을 열었다.

“집에 안가? 벌써 자정이 넘었어.”

“안가도 돼! 안아줘. 당신 너무 오래 기다렸어. 낮부터 전화하고, 또 전화하고…… 당신 오 기만 기다렸어. 어 서 안아줘…….”

지혁의 입술에 찍어 누르듯이 거친 키스를 퍼부으며 소영은 유혹적으로 속삭였다.

“우리 그이, 일주일 동안 해외 출장 갔어. 집안사람들에게 난 여행 다녀온다고 미리 말해뒀 고. 지혁 씨, 우리 가까운 곳으로 여행 갈까? 우리 둘만 있는 곳으로…….”

“여행?”

“응, 여행. 내일이라도 출발해. 그전에 나부터 안아줘. 아까부터 미칠 것만 같아.”

위스키 잔을 내팽개친 소영의 손이 지혁의 가죽벨트를 성급하게 풀고, 바지 후크를 끌렀다.
미처 만류할 사 이도 없이 소영은 잠자고 있는 그의 남성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손으로, 입으로, 혀로.

“음, 미안한데 오늘은 좀 피곤해서…….”

지혁은 자신의 발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소영의 어깨를 거세게 밀쳤다. 뒤로 밀려났던 소영은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지혁을 바라보다 시선을 그의 허리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곧 그녀의 입에서 음탕한 웃음이 삐 져나왔다.

“피곤해? 근데 어쩌나……. 지혁 씨 몸은 전혀 피곤하지 않은 것 같은데? 후훗.”

싫다고 내쳐도 소영은 거머리처럼 다시금 달라붙었다. 손가락으로 애무하듯 더듬고, 긴 손톱 으로 긁어대기 도 하다, 급기야 입술을 대어 살짝살짝 키스를 퍼부으며 혀로 핥아대던 소영은, 더 이상 참 을 수 없다는 듯 잔뜩 부풀어 오른 그의 남성을 입안 가득 넣고 삼킬 듯 욕심 사납게 빨아들였다.

“침실로 갈 필요 없어. 여기서 시작해.”

소영은 지혁의 티셔츠를 찢듯이 거칠게 벗겨 내려 했다. 그러나 지혁은 소영의 거친 손을 가만히 떼어냈다.
욕정으로 검게 물든 눈을 들어 지혁을 응시하던 소영은 벗기다 만 지혁의 옷은 내버려 두고 다급하게 자신의 원피스 지퍼부터 내렸다. 속옷은 하나도 걸치지 않고 있던 소영의 알몸이 지혁의 눈에 고스 란히 비쳐졌다.

“뭐해?”

옷을 벗지도 않고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지혁이 그제야 이상해 보이는지 소영의 눈매가 날카 롭게 빛났다.

“거실 바닥은 싫어?”

“음……, 그게.”

“나 가져! 지금! 여기서!”

“제길……!”

그녀가 아랫사람에게 지시를 내리듯 말하자 지혁은 그만 격한 욕설을 내뱉어야 했다. 그는 부탁하듯 입술을 악물고 애써 말을 이었다.

“피곤하다고 했어. 이해해줘.”

정말 피곤해 죽겠다는 듯 지혁은 소파에 몸을 파묻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아무것도 보기 싫었다. 어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섹스 따위는, 더구나 소영과 육체가 얽히는 건, 지금으로써 그가 제일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소영은 코웃음을 치고 지혁에게 바짝 다가섰다.

“피곤하다?”

“그래.”

“정말 피곤해서 그런 거야……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불쾌한 듯 소영의 음성이 나직하게 변했다. 욕정이 식은 목소리는 서늘함마저 내포하고 있 었다. 지혁은 소영 의 예리한 물음에 이렇다할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애꿎은 얼굴만 쓸어내리고 또 쓸어내렸다.

“오늘 낮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내 전화를 안 받은 이유, 말해봐.”

탄력적인 몸을 감출 생각도 없이 소영은 소파에 앉아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소영은 마시 다만 위스키 잔을 들어올렸다. 갈색 액체를 한가득 따른 그녀는 숨도 쉬지 않고 단번에 독한 위스키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다른 날 같으면 내가 옷을 벗기기도 전에 먼저 달려드는 당신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내 손길을 뿌리치는 이 유, 어디 한번 말해봐.”

“이유 같은 거 없어!”

“아니. 나 그렇게 맹한 여자 아냐. 우지혁이 상대하던 맹하고 어수룩한 미진이 같은 부류가 아니란 얘기야.
우지혁, 당신에게 내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졌어? 그래서 그래?”

‘실은 내 차에 떨어진 휴대폰…… 그날 봤었는데, 일부러 그쪽 부르지 않았어요.’

날카로운 소영의 음성 뒤로 지혁의 귀를 메우는 것은 은채의 부드러운 속삭임이었다. 금방 이라도 눈에 보일 것 같은 은채의 환영에 지혁은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이유도 없이 내 전화를 안 받았겠다……? 우지혁이 감히 내 전화를 무시했겠다?”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 소영의 어조가 격해졌다.

‘그쪽 다시 만나려고…… 그날 그대로 휴대폰 갖고…… 도망갔었죠.’

가슴속에 묵직한 돌덩이가 들어 있는 듯 했다. 심장을 압박하고 식도를 틀어막은 돌덩이가 숨도 쉬지 못하게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내 몸이라면 환장을 하던 우지혁이, 지치지 않고 내 몸을 파고들던 우지혁이 나를 거부했 겠다? 여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미안해요. 나……, 사실대로 고백 했으니까, 이제 홀가분하게 있어도 되죠?’

그래,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소영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도, 그녀와 짐승처럼 뒤엉켜 섹스를 하지 않는 것도, 다 그의 마 음인 것을. 그가 받기 싫어서 전화를 안 받은 것이고, 더 이상은 소영의 몸 안에 자신을 파묻고 싶지 않아서 인데, 거기서 무슨 부차적인 설명을 결부시켜야 한다는 말인가. 은채,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고운 얼굴이, 청아 한 목소리가… …, 그에게서 단 일초도 떠나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O.K! 나도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거 싫어. 우지혁이 내가 싫다는데 별수 있어? 여기서 멋지게 퇴장해줘야 지.”

‘이제 홀가분하게 있어도 되죠?’

너는 홀가분하니? 그런데 나는…… 사실대로 고백할 수 없는 나는, 홀가분할 수가 없어…….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나갈 채비를 하는 소영을 죄의식 가득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지혁은 어렵게 사과의 말 을 건넸다.

“미안해. 미안하게 됐어.”

“그만! 그따위 말로 내 기분, 비참하게 만들지 마.”

의외로 담담하게 나오는 소영의 말투에 지혁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다. 차라리 다른 여자 들처럼 바락바락 소리라도 지르거나, 울며불며 뺨이라도 갈기면 좋으련만.

나체에 원피스만 간신히 걸치고 바닥에 뒹구는 핸드백을 주워든 소영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지혁에게 마지막 인사를 던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즐거웠어. 아, 참!”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소영은 걸음을 멈추고 뒤로 홱 돌아보았다. 소영의 검은 눈동자가 사 악하게 번들거리 고 있었다.

“이주환 뮤직비디오 촬영하기로 한거 말인데…… 미안해서 어쩌나.”

소영은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말을 이으면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손톱에 시선을 고정시키 고는 입으로 후우, 바람을 불었다.

“아무래도 당신은 안 될 거 같아. 그래도 국내 최정상급 가수 뮤비인데 이름도 없는 남자 배우를 주연으로 쓸 수는 없다고 하네. 어쨌든 미안하게 됐어. 뭐 기회가 있으면 더 좋은 출연제의가 들어오겠 지. 기회가, 있으 면!”

오금을 박듯 소영은 한자 한자 힘주어 말했다. 빙그레 웃던 소영의 얼굴이 며칠 전 지혁의 악몽에 나온 악마 의 형상과 일치하고 있었다.

소영의 마지막 말은 분명 저주였다. 지혁은 그것을 뼈아프게 겪고 있었다. 소영과 정리한 다 음날부터, 일들 은 기다렸다는 듯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침드라마에 출연했던 조연 역할 이미지가 의외로 반응이 괜찮아, 큰 건 아니라도 서너 개 의 잡지촬영 일정 이 잡혀있었고, 아침 토크쇼에 출연해 달라는 제의도 받았었다. 날짜까지 다 정해 놓은 상태 에서, 지혁의 스 케줄은 하나씩 캔슬이 나기 시작했다.

잡지 촬영은 모두 취소되었고, 오늘 아침 기다리던 토크쇼마저 취소되고 말았다.

‘STS엔터테인먼트 윗사람 중에 누구, 심기 불편하게 만든 일 있어? 거기서 압력이 들어온 다고 하더군.’

토크쇼 출연자는 얼마 전 종영한 아침드라마의 연기자들이었다. 그중에 함께 촬영했던 선배 김시우도 출연 예정이었는지, 스튜디오 앞에서 퇴짜를 맞는 지혁에게 시우가 슬그머니 다가와 귀띔을 해주 고 간 것이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소영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지혁은 이를 갈지 않기 위 해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비릿한 피내음이 혀끝을 타고 식도로 내려갔다.

여기까지 하자, 최소영. 나도 잘못 한 것이 있기에, 서운해 하지는 않겠다. 분노하지도 않겠 다. 그러니, 이쯤 에서 그만하자…….

지혁은 자동차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소영을 생각하자 지끈거리는 두통이 뇌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그의 인 상이 험악하게 굳어 갔지만, 달칵하고 조수석 문이 열리자 지혁의 입가에 미소가 물렸다. 소 영의 방해공작으 로 엉망이 되어버린 기분도, 바닥으로 치닫는 암담함도 그의 내면에서는 깨끗하게 물러났다.
은채, 그녀가 그의 공간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은채를 바라보던 지혁의 미소가 점점 깊어졌다.

“오래 기다렸어요?”

뛰어 왔는지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은채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지혁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젓 고는 복숭아 꽃물이 번진 은채의 볼을 만져보기 위해 손을 뻗다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듯 이 내 거두었다.

가슴이 욱신욱신 쑤시기 시작했다.

심장이 발작을 일으키듯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거세게 돌출하려 했다.

그녀에게 손을 뻗기만 하면,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또 삼켜야 했다.

바라보기만 해도 주체할 수 없는 욕망으로 허리 아래가 묵직해졌지만, 정작 그는 은채의 손 하나 만져볼 수 가 없었다.

사흘째다. 그녀의 운전기사 노릇을 시작한지. 그 사흘 동안 지혁은 수백 번도 더 은채의 손 을 잡아보기 위해 망설였고, 입술에 키스를 퍼붓고 싶어서 수없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한번도, 단 한번도 만질 수 가 없었고, 다가설 수 없었다.

지금처럼, 아기피부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져보고 싶어도 그것은 그의 바 람일 뿐이었다.
그녀에게로 손을 뻗으면 어김없이 숨이 턱 막히고 고통스러운 통증만이 그를 덮쳤다.

“오늘은 바로 집에 안 가도 되는데…….”

새침하게 말하던 은채가 방긋 웃었다. 핑크빛 입술이 살짝 말려 올라가자 그 사이로 진주 같은 새하얀 치아 가 가지런히 드러났다.

혀끝으로 가지런한 치아를 맛볼 수만 있다면.

저 도톰한 입술을 입안으로 빨아 당기고, 이로 깨물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지혁은 알고 있었다. 은채의 입술을 맛보는 순간, 자신은 심장 이 터져서 그 자리 에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설령 심장이 터져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지만, 곱디고운 그녀 에게 우지혁이라 는 인간은 결코 가까이 근접할 수가 없었다.

“우리 영화 보러 갈래요?”

“음…….”

“요즘 재밌는 게 많이 한대요. 영화 좋아해요?”

지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동차를 출발 시켰다. 재잘재잘, 그녀가 쉼 없이 말을 쏟 아냈다. 학교에 서 있었던 일, 친구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 지혁은 한마디도 빠짐없이 은채의 말을 들었다.
그 기분 좋은 음 성에 지혁은 소영의 일은 깨끗이 지워버리고 은채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꽤 재미있었다. 유쾌하고, 시종일관 잔잔한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분 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옆에 앉은 은채 때문인지 지혁은 내내 허공을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의자 팔걸이에 올려놓은 그의 손 안에 무언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애태우듯 천천히 들어오는 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자 나직한 한숨이 지혁의 입술을 가르고 흩어져 나왔다.

은채였다. 아니, 은채의 손이었다.

그토록 잡아 보고 싶었던 그녀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

척추 사이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꼼지락거리던 그녀의 손이 한번씩 움직일 때마다, 지혁의 등골사 이로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어두운 영화관 안에서 조각처럼 선이 고운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지혁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그녀가 웃 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손 같은 건 잡지도 않았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손바닥에 끈적한 땀이 배어들었다. 혹여 그녀의 손에 땀이 번질까, 지혁은 서둘러 손을 빼내 려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을 은채가 가로막았다. 얌전히 놓여있던 그녀의 손이 지혁의 손을 단단히 붙 잡았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여 나직하게 무어라 속삭이지만, 지혁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뭐?”

그가 물었다. 옆 사람과 뒷사람이 듣지 못하게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목소리로. 그러자 은채 가 순식간에 그의 귓가에 바짝 다가와 귀엣말을 했다. 그녀의 달콤한 숨결이 훅하고 그에게 끼쳐들었다.

“손잡고 보자고요. 공포영화만 손잡고 보라는 법 있어요? 우리 사이좋게, 다정하게, 손잡고 봐요, 네?”

말을 마친 은채는 지혁의 손을 힘주어 꼭 움켜쥐었다.

“하하.”

잔뜩 긴장된 몸과는 반대로 그의 입에서는 어린아이처럼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왠 지 모르게 두근거 리는 심장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두근두근 거리다 폭주할 것처럼 빨라지고 가슴이 저 릿하게 아파오긴 했지만 지혁의 입술에 머물던 여유로운 웃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참 이상하죠?”

은채가 다시 달짝지근한 숨결을 불어넣으며 지혁의 귓가에서 속살거렸다. 무슨 소리냐는 듯 지혁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다른 사람들은 영화 볼 때 남자가 먼저 손도 잡고…… 스킨십도 하고 그런다는데, 지혁 씨는 안 그러잖아요.
내가 그렇게 매력 없는 여잔가…….”

뽀로통히 입술을 내밀었는지 부드럽고 촉촉한 느낌이 그의 피부에 닿았다.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지혁은 너무 맞붙은 몸이 부담스럽다는 듯 살짝 몸을 떼었다. 그러자 자석의 음극과 양극처럼 그녀가 더욱 바짝 그의 곁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마치 내가 더러운 병균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리를 두잖아요, 지혁 씨는. 차를 탈 때도 그 렇고, 같이 걸을 때 도 그렇고……. 혹시 나란히 앉는 영화관이라면 다를까 했는데, 것도 아니고. 나, 싫어요? 싫 은데 억지로 만 나는 거예요?”

더러운 병균이라니. 말도 안 된다. 더러운 병균은 지혁 자신이었다. 손가락만 대어도, 은채에 게 몹쓸 때가 묻 을까 전전긍긍하는데. 자신의 숨결만으로도 혹여 지저분한 흔적을 남길까 매번 일정한 거리 를 두는데 그녀 를 병균으로 생각하다니.

죄지은 사람마냥 한마디 말도 하지 않던 지혁을 말없이 응시하던 은채가 톡, 쏘아붙였다.

“싫으면 안 만나도 돼요. 일주일동안 운전기사노릇 해달라는 것, 철회 할게요. 그만 나갈까 요? 마음에 들지 도 않는 여자…… 상대하는 거 고역이잖아요. 혹시 내가 고백한 것 때문에 그러는 거라 면…….”

부스럭거리며 일어난 은채는 싸늘하게 뒷말을 이었다.

“잊어요. 내 마음이니까, 지혁 씨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그러니까 내 고백 따위…… 잊 어버려요.”

지혁은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은채는 그에게 눈길도 건네지 않았다. 뒷사람에 대한 배려로 등을 구부린 그녀 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처럼 휑하니 나가자 지혁은 벌떡 일어나 그녀의 뒤를 쫓았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고 올라왔다. 혀끝을 맴도는 말이 소나기처럼 후두둑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억누르고 억눌렀던 감정들이 일시에 금이 가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바보, 바보 같으니.

일주일이 지난 후, 그만 만나자 할까봐 밤마다 잠 못 이루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알까.

나이어린 여자의 철없는 행동이었노라고 그때의 고백 따위는 잊어 달라 할까봐 그가 매일 밤 가슴을 졸이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기나 하는 걸까.

마음에도 없는 여자라. 그래, 그는 언제나 마음에 없는 여자를 상대해 왔었다. 기사 노릇을 해주는 것도 아니 고, 함께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밤이 새도록 섹스만 나누었을 뿐. 섹스만. 마음에 도 없는 여자들과…….

그래서 그래, 이 바보야. 나 그렇게 더러운 놈이라서, 너에게 쉽게 다가설 수가 없는 거야.
내 몸에 묻어 있는 악취 나는 오물이 혹여 너의 몸에 튈까 싶어서, 그래서 그러는 거야. 바보 최은채.

나, 너에게 다가가도 되는 거니?

곱게 자란 너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구질구질하고 역겨운 삶을 살아왔는데, 그래도 다 가가도 되는 거니?
응, 은채야?

“기다려.”

뛰다시피 은채의 뒤를 따라 나온 지혁은 길가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탁, 은채가 매정 하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정말 싫어. 나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떨 때 보면 아닌 것 같아. 내게 마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아. 왜 틈을 보이지 않아요? 왜 곁을 주지 않아요? 이럴 거면 안 만나도 되잖아요. 일주일 동안 기사노릇 해 달라는 거 무시하고, 내 눈앞에 안 나타나면 되잖아! 왜 매일 그 시간에 나타나 나, 기다려 요? 왜 매일 내 마 음을 뒤흔들어 놔요? 이유가 뭔데? 다가섰다 싶으면 멀찍이 떨어지는 것으로 왜 내 마음을 황폐하게 만드는 건데? 왜?”

“은채야…….”

“나, 지혁 씨 좋아요. 그러면 안돼요? 지혁 씨 좋아하면 안 되는 거예요?”

어두운 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끗거리며 은채에게 눈길을 던졌다. 지혁은 사람들의 구경어 린 시선에서 그 녀를 보호하듯 너른 등으로 가리고 한숨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게 아냐, 은채야. 그러니까…….”

“나, 지혁 씨 좋아해도 되요? 지혁 씨도……, 나 마음에 두고 있어요?”

처음 보는 순간 그랬다.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각막에 새겨지던 그날, 그녀는 그의 심장에 파고들었다. 거 기가 제자리인 양, 그녀는 너무도 깊숙이 파고들어 둥지를 틀어버렸다.

“……그래.”

쥐어짜듯 지혁은 간신히 대답했다.

“근데 은채야…….”

“그럼 여기서 키스해줘요.”

지혁의 말을 냉큼 자른 은채가 대담하게 몸을 밀착시켰다. 순간 지혁의 머리가 아득해지고 발 딛고 선 땅이 거대한 지진을 일으키듯 갈라지기 시작했다.

“무슨?”

“우지혁, 내 남자로 찍었다고 세상사람 들에게 말하게, 여기서 키스해 달라고요.”

숨 막히는 달콤함이 그의 입술에 깃털처럼 닿았다. 은채가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까치발을 하고 선 그녀가 조금의 주저함 없이 그의 입술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녀가 원하잖아. 가져, 가져버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포개고 싶어, 고통스 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혁은 자신의 차가운 입술에 살짝 맞닿은 은채의 유혹적인 입술에서 자리를 옮겼 다. 매끈하고 티 하 나 없는 그녀의 이마로. 스치듯 부드럽게, 가벼운 입맞춤을 끝낸 지혁은 싱긋 웃음을 지었 다.

숨을 멈추고 있던 은채는 실망스러운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거봐, 나 별로 매력 없는 여잔가 봐.”

“천천히 하자, 은채야. 급할 건 없잖니. 천천히 한걸음씩, 그렇게 시작하자. 응?”

은채의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린 지혁은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 다.

그거 아니, 은채야? 나 정말 너와 키스하고 싶어.

그거 알고 있니? 이렇게 조심하고 있지만 내가 정말, 표현도 할 수 없을 만큼 너를 원하고, 갖고 싶어 한다는 거…… 너 알고 있니?

감히 입 밖으로 말할 수 없는 진실이 지혁의 내면을 빼곡히 채워나갔다. 온몸의 근육이 아 프도록 조여들고, 심장에 뻐근한 통증이 몰려와 신음이 절로 나와도 지혁은 단 한마디도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혀끝을 맴돌기만 할뿐, 감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단 한마디도.

“요즘 우지혁이 상대하는 여자가, 나이 어린 새파란 계집이라고?”

아파트를 들어섰을 때, 지혁은 소영이 왔음을 직감했다. 열쇠를 넣지도 않았는데 손잡이가 돌아가고, 현관에 가지런히 놓인 구두를 보았을 때, 그 신발의 주인이 소영임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래서 태연하게 거 실로 들어서서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동안 지혁은 일말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다. 단, 소영 의 첫 마디가 튀 어나오기 전까지는.

둔탁한 무기로 뇌를 강타당한 듯 지혁은 멍하니 소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흐음, 그 나이어린 계집이 당신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 아니, 그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우지혁이 어떤 남자 인지 알고 있어?”

거실 창가에 서서 날카롭게 지혁을 쏘아보던 소영의 눈동자에 비웃음이 어렸다.

“얌전히 물러나 주려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손해 보는 장사를 했더라고. 당 신에게 미안한 일 이지만 이렇게 물러나는 거, 내 스타일 아냐. 버림받는다는 거, 이용가치가 떨어진다는 거, 최소영에겐 너무 자존심이 상하거든.”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을 텐데? 당신 쾌락의 대상이 되어주는 것으로 나는 아무것도 요 구한 게 없고, 받 은 것도 없어. 당신 혼자 주고 싶어 안달했고, 당신이 주고 싶다는 그 뭔가를 하나 받으려 할 때 우린 끝났어.
끝남과 동시에 내 것이 되리라고 당신이 장담했던 뮤비도 물 건너갔지. 예정되어 있던 내 스케줄 다 파투 낸 거, 최소영이 짓거리 아닌가? 그럼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 즐길 만큼 즐긴 것으로 치부하 면 될 텐데, 지저 분하게 왜 이래?”

부아가 치밀어 올라 지혁의 음성은 다분히 공격적으로 튀어 나왔다. 소영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난 아직 충분히 즐기지 못했어. 겨우 맛만 보았을 뿐이야. 섹스 파트너는 서로가 지 겨워 질 때까지 아 냐?”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뭐야?”

“선택해. 들리는 말에 따르면 겨우 대학생이라는 어린 계집애가 당신에게 뭘 해줄 수 있겠 어? MBS 수목드라 마야. 24부작이고, 무엇보다 주연이야. 어때? 이주환 뮤비보다 더 큰 월척 아냐?”

소영은 지혁의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웃어댔다.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무너질 거라 생각했는 지 소영의 눈동자 가 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지혁은 어금니를 악 물고 겨우 말문을 열었다.

“……됐……어. 관심, 없어.”

그만하자. 이제 그만 하기로 했다. 정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기로 했다. 그냥 평범한 한 남 자이고 싶다고, 한 여자에게 영혼을 빼앗겨 아무런 생각 없이 곱고 아름다운 그런 사랑을 나도……, 나도 해보고 싶다고 꿈 꿔왔다. 그만하자. 그만하자, 최소영.

“싫다라……. 그렇군.”

소영은 홱 몸을 돌려 지혁에게 한걸음씩 다가섰다. 지혁은 손을 내밀고 소영이 더 이상 다 가서지 못하게 거 리를 두었다.

“그만 나가. 나가기 전에 비상키는 두고 가.”

지혁의 싸늘한 대꾸에 소영의 입가에 조소가 물렸다. 소영은 테이블에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열쇠를 내던졌 다.

“좋아! 알았어!”

은색 열쇠가 조명 아래서 반짝였다. 그러나 반짝임은 잠시였고, 열쇠는 다시 소영의 손아귀 에 자취를 감추었 다.

“가기 전에 하나 말해 둘게 있어. 아직 본격적으로 여자를 알아보지 않았지만, 우지혁이 만 나고 있다는 여자 …… 누구인지 알아내서, 네가 사귀는 남자가 나와 어떤 관계였는지 말하는 거, 어떻게 생각 해?”

지혁은 거대한 블랙홀 속에 갇힌 것처럼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소영을 바라보기만 했 다. 그녀가 지혁의 가슴팍을 더듬으며 요염하게 입 꼬리를 치켜 올렸다.

“내가 그런 짓 못할 거라 생각하진 않겠지?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우리가 어떤 관 계였는지, 무슨 사 이였는지, 어떤 짓을 했는지! 우지혁이라는 남자가 내 몸 구석구석 물고 빨았다고, 우지혁이 나뿐만이 아니 라 수많은 여자들과, 더구나 제 어미 뻘 되는 여자와도 서슴없이 섹스를 나누는 사내라 고…….”

악마의 속삭임처럼 소영은 지혁을 궁지로 내몰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그를 밀 어붙이고 있었다.

“그만!”

지혁은 귀를 틀어막고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빌어먹을, 빌어먹을! 어쩌니, 은채야……. 나 어쩌면 좋으니…….

“다시 돌아와! 조건은…… 수목드라마 주연. 그리고 당신이 사귄다는 여자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겠다는 것. 우지혁이 엉망진창으로 살아온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겠지. 안 그래?”

소영의 목소리가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지혁의 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은 소영이 그의 가 슴 근육을 쓸어내 리며 유혹하듯 말을 이었다.

“그 계집, 원한다면 계속 만나. 물론 입단속 하겠어. 단, 그 계집을 만나고 싶으면 나도 만 나야 할 거야. 그리 고 내가 부른다면 그 계집과 침대에서 뒹굴다가도 뛰어나와야 해. 그 계집보다도 내가 먼저 야. 꿩도 잡고, 알 도 먹고……. 이러는 게 당신에게 더 좋은 거 아냐? 꿩과 알, 모두 놓치기 전에…….” ************************ 『7』 “우욱!”

좌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전날 먹은 음식을 다 게워 냈다. 은채가 좋아한다 해서 함께 먹었 던 스파게티가 가 닥가닥 튀어나왔고, 가볍게 마신 와인도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우욱!”

다 게워 낸 것 같은데 아직도 멀었나보다. 구역질은 멈춰지지 않고 그를 괴롭혔다. 이제는 토해낼 음식물이 없어 끈적한 신물마저 넘어왔다. 지혁은 욕실 바닥에 주저앉아 고통스러운 숨을 격하게 내 쉬었다. 불현듯 잊 고 있었던 기억이 그의 뇌리를 잔인하게 헤집었다.

언젠가 이렇게 토악질을 한 적이 있었다. 음식물을 토하다 토하다 마지막에는 시뻘건 피까 지 올린 적이 있었 다. 아마, 그때는 눈에서도 무언가를 흘렸으리라. 뜨거운 무언가가 쉴 새 없이 흘려 내렸다 는 것을 지혁은 기 억하고 있었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 결코 지울 수 없는 악몽과도 같은 그날의 기억.

대사 한줄 없던 그에게 난생 처음 출연제의가 들어 왔던 날, PD는 그에게 호텔 커피숍으로 가보라 했었다.
누군가 기다린다고. 순진했을까. 멍청했을까. 그날을 떠올리면 지혁은 어김없이 그 자신이 바보 같았음을 인 정해야 했다.

호텔 커피숍.

그곳의 웨이터.

그리고 룸 넘버가 적힌 카드키.

떠밀리듯 룸에 들어섰을 때, 그때 지혁은 이 더러운 세상이, 아니 이 더러운 연예계가 얼마 나 구역질나는 곳 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발 디딜 곳이 없는 곳.

타협을 하지 않으면, 매장 당하는 곳.

여자가 옷고름을 풀면, 남자는 바지춤을 풀어야 하는 곳.

냉랭하게 고개를 가로젓고 나왔을 때, 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는 룸이 떠나가라 비웃었다. 그 리고 단 하루 만 에 지혁은 다시 그 여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는 세상과 타협하는 법을 배웠다.

그날 지혁은 여자와 살을 섞은 후, 호텔을 빠져나오자마자 길가에서 참고 참았던 토악질을 했다.

여자의 몸을 파고들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기위해 이를 악물고, 그 여자의 시야 에서 벗어났을 때 에는 각혈을 할 정도로 심하게 토악질을 했었다.

그리고 오늘, 지금 이 순간. 지혁은 그날과 마찬가지로 체내에 남은 음식물을 모두 게워냈 다. 시큼하고 끈적 한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비릿한 피내음이 식도를 타고 넘어와 피를 쏟아내고 또 쏟아냈다.

“젠장! 빌어먹을, 빌어먹을, 최소영.”

지혁은 토악질을 멈추고 욕실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밤새 단 한번도 그녀의 몸 안에서 자신의 남성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단하게 옭아매고 또 매달렸던 소영은, 지쳐 나가떨어져서 녹초가 될 지경에 이르러도 그가 몸을 떼게 하지 않았다.

집안이 떠나가라 신음을 내지르고, 음탕한 교성을 내뱉던 소영은 지혁이 아니면 죽기라도 하는 양, 끔찍하도 록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우욱!”

뱀처럼 휘감기던 소영의 육체를 떠올리자 멈췄던 구역질이 다시금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죽고 싶었다.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절실했다. 어차피 자신이 발 딛고 선 연예계라 는 바닥에서 살 아남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아니, 선택이라는 기회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다 그렇고 그러려니 했었다.
이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까지 하던 그였다. 허나, 이젠 아니다. 아니 었다. 아니어야 했 다.

벗어나고 싶어 처절한 몸부림을 쳐도 그는 덫에 걸린 짐승일 뿐이었다. 우지혁이라는 짐승 을 옭아매고 있는 올가미는 벗어나려고 할수록 그의 숨통을 죄어왔다. 추악하고 더러움으로 얼룩진 지난 날로 하여금, 그의 목 숨을 내놓으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는 나, 정말 싫다. 은채야.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는데, 어떤 것도 눈 질끈 감아 버리면 그만인데, 은 채야…… 네가 나에 대해 알게 되는 거, 죽기보다 더 싫다.”

벽에 등을 기대고 욕실을 비추는 거울을 바라보면서 지혁은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구토로 인해 가슴이 쿡쿡 쑤시며 따가웠지만 그는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네가 내게 경멸의 눈길을 던지면…… 어쩌지? 네가 나를 역겹다는 듯 바라보면, 나는 어 쩌지……. 너를 두 고는 이제 죽을 수도 없는데. 너를 보지 못함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인데. 내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네가 알게 된다면…… 나는, 나는…….”

정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그 순간 새까만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차마 소리가 되 어 나오지 못하는 말들을 목안으로 삼키고 지혁은 어기적거리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물을 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 줄기를 뒤집어썼 다. 옷을 적시고, 피부를 적시며,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가 흐려졌던 그의 이성을 점자 제 자리로 돌려놓았 다. 지혁은 어금니를 악물고 거울을 응시했다. 거기에 한 남자가 있었다. 공허한 눈빛의 한 남자가 그를 바라 보고 있었다. 상처입고 무너져 지칠 대로 지쳐버린 사내의 얼굴이 지혁의 참담한 기분을 더 욱 암울하게 만들 었다.

퍽, 둔탁한 소리를 내며 거울에 금이 갔다. 손등에 와 닿는 아픔 따위를 느끼기에는 가슴의 통증이 너무나 컸 다. 쩍쩍 금이 간 거울사이로 드러나는 자신의 얼굴을 외면하고, 지혁은 시뻘건 피가 흐르는 손을 샤워기 아 래로 내뻗었다. 핏물이 발밑으로 흘러내려 배수구 구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빌어먹을!”

은채야, 제발 나란 놈의 실체를 보지 말아라.

나란 놈이 너의 곁에 있고 싶어서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누구와 무슨 짓을 했는지, 너는 제 발 모르고 살아 라. 제발, 부탁이니, 모르고 살아라…….

긴 시간, 차가운 샤워기 아래에 서 있던 지혁은 간밤의 일이 꿈이길 간절하게 바랐다. 허나 떨어지는 물줄기 에 몸을 씻을 수는 있어도, 지난날은 씻어 낼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듯이 그는 너무도 잘 알 고 있었다. 소영과 한 몸이 되어 얽혀있던 그것은 꿈이 될 수 없음을. 한바탕 식은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그만 일 그런 악몽이 될 수 없음을…….

은채는 연방 손목시계에 눈길을 던졌다. 벌써 삼십 여분을 기다렸는데 지혁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평소 같 으면 수업이 끝나기 전에 먼저 나와서 기다릴 그인데, 오늘따라 연락도 없이 늦었다. 슬슬 걱정이 밀려들었 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생긴 건 아닌지.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별별 상상이 다 떠올라, 은 채는 서둘러 휴대 폰을 꺼내들고 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지혁의 음성이 휴대폰을 타고 흘러나왔다. 은채는 그제야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사 고는 아니구나.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나직하게 깔린 그의 목소리는 감기라도 걸린 사람처럼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혁 씨? 오늘 바빠요? 왜 안나왔어요?”

“미안. 안 그래도 전화 하려 했는데……, 많이 기다렸어?”

“아니, 많이는 아니지만 걱정이 되어서. 연락도 없이 안 나오기에.”

“으음, 갑자기 몸이 안 좋아서……. 어쩌지? 오늘은 나가기가 곤란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그런데 많이 안 좋아요?”

은채는 재빨리 택시 승강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아프단다. 그것도 모르고 무작정 기다 리고 있었다니.
자기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져 화가 나려 했다. 그가 아플 땐 뭘 해야 하는 거지? 은채의 마 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걱정할 정도는 아냐.”

“병원은 다녀왔어요? 약은 먹었어요? 아니다, 밥은 먹었어요? 빈속에 약 먹으면 위 상하는 데…….”

“걱정 마. 알아서 할게.”

“알아서 한다는 사람 목소리가 그 모양이에요? 집 위치가 어떻게 되요? 내가 갈게요. 나 밥은 못하지만, 주문 해서 지혁 씨가 다 먹는지 안 먹는지 감시는 할 수 있어요. 위치 말해주면 지금 당장 택시 타고…….”

“안돼! 오지마!”

버럭, 지혁이 소리를 질렀다. 한번도 없던 일이기에 놀란 은채는 되묻듯 그의 이름을 불렀 다.

“지혁 씨?”

“아, 미안. 소리 질러서 미안해. 음, 그런데 남자 혼자 사는 집에 함부로 오는 거 아냐.”

그가 변명하듯 재빨리 덧붙였다. 은채는 피식 웃으며 지혁의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되받아쳤 다.

“지혁 씨 집인데 뭐 어때요. 지혁 씨가 나 어떻게 할 것도 아니고…….”

“바보야, 나는 남자 아니니? 아파도 남자는 남자야. 늑대의 탈을 썼다고.”

“푸핫! 늑대? 지혁 씨가 늑대라고? 차라리 내가 늑대인 게 더 믿을 만 하겠다!”

웃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무지 지혁을 늑대로 상상할 수가 없어서 였다. 깔깔거리고 웃으며 걷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끗힐끗 눈길을 던졌다. 은채는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늑 대의 탈을 쓴 우스 꽝스러운 지혁의 모습을 지웠다.

“은채야…….”

웃음소리를 듣기만 하던 그가 갑자기 이름을 불렀다.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혁이 자 신의 이름을 부르 기만 해도 그녀의 심장이 두근두근,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은채는 가만히 가슴을 눌렀다.

“네.”

“은채야…….”

“왜요?”

“그냥. 내가 이름 부를 때마다 네가 대답해 주는 게 너무 좋아서. 네 목소리 듣는 게 너무 좋아서…….”

탄식처럼 속삭이는 지혁의 음성이 은채의 귀에 파고들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자신 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게 그녀 역시 너무 좋았다.

빈 택시가 한대도 보이지 않았다. 은채는 승강장에서 내려서서 차들이 휙휙 지나치는 도로 가를 두리번거렸 다.

“쿡, 목소리 듣는 게 좋으면 내 얼굴 보면 까무러치겠네. 그러니까 주소나 말해요. 얼른 달 려갈게. 뭐 먹고 싶 은 건 없어요? 가는 길에 사갈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혼자 쉬면 돼. 너도 피곤할 테니까 집에 가서 좀 쉬어.”

“하나도 안 피곤한데? 혹시……, 내게 집 가르쳐 주기 싫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 는 건가요?”

순간,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마치 일종의 긍정적인 대답 같아 은채는 입술을 깨물 었다.

전화기를 타고 지혁의 깊고 긴 한숨이 새어나와, 은채의 불길하고 불안한 가슴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갔다.
그는 감추는 게 너무 많았다. 숨기는 것도 너무 많았고, 말하지 않는 것도 너무나 많았다.

“그런 거 아냐. 말했잖니. 나, 남자라고…….”

“거짓말. 지혁 씨는 한번도 자신에 관해서, 나한테 얘기 해본 적 없잖아요. 지혁 씨 직업이 뭔지, 어디 사는 지,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 기껏해야 이름이랑 나이가 전부야. 왜 그렇게 비밀이 많아 요? 내가 알면 안 되 는 거예요? 지혁 씨는 꼭…… 베일에 싸인 남자 같아.”

은채는 서운함을 담아 종알거렸다.

“은채야.”

“네?”

“천천히 말해줄게, 천천히. 조금만 기다려주겠니?”

그가 메마른 어조로 부탁 하듯 말했다. 지혁의 메마른 음성에 촉촉한 물기가 배인 것 같아 은채는 선뜻 대답 하기가 망설여졌다.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나에 관해서 말할 수 없는 나를, 이해해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하지만 은채야, 이것 하나 만은 알아둬. 기억 해둬.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그건 잊지 말 아줘.”

쉽게 반했다고 말하고, 밥 먹듯 쉽게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는 세상 사람들 틈에서, 지혁의 고백은 사랑한다 는 말보다 더한 무언가를 은채에게 가르쳐주었다. 은채는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을 뻔히 알면 서도 고개를 끄덕 였다. 아끼고 소중하다는데 무엇을 불안해할까. 무엇을 조급해 할까.

“알았어요. 잊지 않을게요. 언제나 기억하고 있을게요.”

“그래. 내일 보자. 내일은 일찍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아뇨. 무리하지 말아요. 컨디션이 안 좋으면 안 나와도 돼요. 다 나아서 만나요. 알았죠?”

“아냐. 내일은 나갈게. 하루만 쉬면되니까……, 내일은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다정하고도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에 은채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요, 그럼 내일 봐요. 대신 내일까지 다 나아야 되요.”

“응. 조심해서 들어가.”

“네.”

“은채야!”

인사를 마치고 폴더를 덮으려는 찰나, 그가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네? 왜요?”

“아, 아냐. 음…… 차 조심해…….”

“쿡, 내가 앤가. 별걱정을 다해! 그만 쉬어요. 아픈 사람이 너무 오래 통화하는 것도 안 좋 아요.”

지혁이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은채는 단호하게 말을 마치고 폴더를 덮었다. 이런 식으 로 인사를 하다보 면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그가 오지 않아 서운했지만, 그건 그를 볼 수 없다는데 대 한 서운함이었다.

이런 거구나.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거…… 이런 느낌이구나.

주머니에 쏙 들어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은채는 부드럽게 속삭이던 지혁의 말을 되새겼 다.

“사랑해……. 사랑해, 은채야…….”

적막감만 가득한 침실에서 지혁은 나직하게 말했다. 끊겨버린 전화기에서는 더 이상 물방울 처럼 방울방울 터지듯 맑고 경쾌한 은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나갈 걸 그랬다. 소영과 지난밤 무얼 했 건, 안면몰수하 고 은채를 볼걸 그랬다.

이렇게 보고 싶어 미치겠는데. 목소리만 들어도 보고픔에 허기가 지는데. 세상 모든 사람들 이 자신을 후안무 치하다고 손가락질을 해도, 소영과의 정사를 뇌리에서 잘라내고 은채를 만나러 나갈 것을.
은채의 얼굴을 볼 것을……. 그랬다면, 이렇듯 대낮부터 술잔을 기울이지는 않을 텐데.

하루다. 겨우 하루를 못 보았을 뿐인데 평생을 못 보고 살아온 것만 같았다.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알고 지낸 날보다 모르고 살아온 날이 더 길었다. 최은채라는 여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모르 고 살아온 날이 더 많은데, 지혁은 은채를 보지 못한 하루가 더 길고 숨 막혔다.

초인종 소리도 없이 아파트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어제 밤 그를 약 올리듯 내밀었던 비상 키를 들고 소영이 뻔뻔스럽게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직도 모자라나? 간밤의 섹스로는 당신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나보군.”

지혁은 시니컬하게 웃으며 위스키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미 한 병을 넘어 두 병째 마시 던 병을 흔들어 보 이던 지혁은 안됐다는 듯 이죽거렸다.

“헌데 어쩌지? 최소영이 섹스에 만족을 했든 말든, 더 이상 당신에게 쓸 힘은 남아있지 않 은데?”

“걱정하지 마, 충분히 만족했으니까! 역시, 우지혁이라는 걸 새삼 가르쳐주더군. 그나저나 내가 온건 대본 때 문이야. 수목드라마 대본이야. 한번 봐둬. 신인배우를 등용할거라고 광고를 했기 때문에, 사 람들 시선을 의 식해서 오디션 비슷한 것을 하게 될 거야. 다른 사람은 어떻게 연기를 하나, 구경이나 하러 가봐. 물론, 지혁 씨가 확정된 거지만 사람들 이목을 끌기엔 몇 대 몇을 누르고 뽑혔다는 게 더 확실한 광고 효과를 몰고 오지.
드라마 이름과 연기자 이름을 높이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어.”

탁, 침대에 대본을 던진 소영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지혁의 입매가 사납게 비틀렸다. 지혁 은 제법 두께가 나가는 대본의 제목도 눈여겨보지 않은 채 소영의 발치로 야멸차게 내던졌다. 더러운 것을 만지기라도 한양 그는 자신의 손을 털어내기까지 했다.

“치워!”

사납게 눈을 치켜뜬 소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혁은 자조적인 웃음을 물고 소영에게 눈 길을 건넸다.

“그 드라마가 탐나서 최소영의 몸을 안아주는 게 아냐.”

“그럼?”

물어뜯을 듯 소영은 물었다. 소영을 바라보던 시선을 무심하게 돌린 지혁은 냉랭하게 뇌까 렸다.

“알 텐데? 내가 왜 그 조건을 받아 들였는지? 애초에 배역이 탐났다면 당신과 끝내지도 않았어.”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렇게 그 계집애가 좋아? 아직 젖비린내 나는 계집이 그렇게 당신 을 만족시켜줘?”

“함부로 지껄이지 마!”

“내 기분을 상하게 해서 얻을 게 없을 텐데, 우지혁 씨?”

“그래, 얻을 건 없겠지. 그러나 분명한 건 한 가지 알고 있어. 최소영은 내가 없으면 안 된 다는 것! 그러니, 적 당히 놀아. 수틀리면 당신이고 뭐고 다 그만 둘 테니까.”

소영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질끈 입술을 깨문 소영은 번쩍 손을 치켜들고 말았다. 그 러나 그녀는 지 혁의 얼굴을 후려치지 못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내려 양손을 마주잡아 사정없이 비틀 던 그녀가 지혁을 말없이 쏘아보았다.

“그래. 우지혁, 똑똑하군. 내 약점을 용케도 알아내고 틀어쥐다니. 맞아! 난 이제 당신 없으 면 안돼. 그러니 이쯤에서 타협하자고. 당신은 그 계집애랑 재미보고, 나는 당신과 재미보고. 뭐, 나도 그렇게 매력 없는 존재 는 아니잖아? 싫다면, 지혁 씨 몸이 내게 반응을 일으킬 리가 없지. 내 몸 안에서 그렇게 힘 차게 요동 칠 리가 없지. 안 그래?”

자신만만한 소영의 말에 지혁은 같잖다는 듯 냉소를 지었다.

“어디 한번 볼까? 오늘은 얼마나 나를 황홀하게 해줄지……. 내 몸에 우지혁이 얼마나 발 정 난 수컷처럼 반 응하는지 슬슬 시작해 볼까?”

요염하게 하나하나 옷을 벗어던진 소영은 흰 살결이 적나라하게 비치는 슬립차림으로 지혁 의 곁에 다가섰 다. 소영의 눈빛이 욕정으로 검게 달아올랐고 목소리가 탁하게 가라앉았다.

“우지혁이 자신의 본모습을 그 여자에게 숨기기 위해…… 얼마나 나를 뜨겁고 열정적으로 안아주는지, 그 여 자는 알기나 할까? 후훗. 뭐, 나는 좋아. 뭐가 됐든 당신만 내 곁에 있으면 되니까.”

“누워!”

지혁은 듣기 싫다는 듯 싸늘하게 명령하고는 침대 한쪽을 가리켰다. 소영의 눈길이 지혁의 턱짓을 따라 침대 가로 향했다. 셔츠를 찢듯이 벗어던진 그가 조소를 머금고 빈정거렸다.

“당신이 원하는 건, 주절주절 나불대는 게 아니고 섹스 아닌가? 그거 해줄 테니까 누우라 고.”

“내 입에서, 그 계집애의 존재를 말하는 것도 듣기 싫을 정도야? 이러니까 궁금해지는데?
도대체 어떤 여자 길래, 우지혁을 이렇게 흔들어 놓았을까. 어떤 얼굴인지 한번 보고 싶어지네.”

지혁은 소영을 침대로 휙 끌어당겨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깔아뭉갰다. 소름끼치도록 서늘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고 싶으면 어디 한번 해봐. 뒷일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 아이를 보고 싶다 고 했나? 그래, 보 고 싶으면 봐야겠지. 허나 이것 하나는 알아둬. 그 아이를 미끼로 당신이 나를 잡고 있긴 하 지만…… 내게 그 아이가 없으면, 최소영도 없어. 알아들어?”

사나운 광기마저 내보이는 지혁의 태도에 소영의 음성이 눈에 띄게 한풀 꺾였다. 이토록 거 세게 나오리라고 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제법 큼직한 것을 안겨주면 예전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 예 상했던 그녀의 짐 작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자존심이 상했다. 심한 모멸감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 다. 그녀는 나설 때와 수그러들 때를 아는 현명한 여자였다.

소영은 피식 웃음을 물고 자신의 목을 조를 듯 억세게 움켜쥐고 있는 지혁의 손을 더듬었 다.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들었어. 그러나 당신도 알아둬. 침대에서 나를 상대할 때는, 다른 여자는 생각하지 말고 나만 생각해. 나를 안으면서 다른 여자를 떠올리는 거, 절대로 용납 못해!”

“내가 누구를 생각하며 당신을 안든지, 그건 최소영이 관여할 바가 아냐. 당신은 내 몸을 원할 뿐이지, 내 생 각을 원하는 건 아니잖아?”

“적어도…… 그 계집애 생각은 하지 마.”

“걱정하지 마. 당신 얼굴을 보면서 그 아이를 떠올릴 생각, 추호도 없어! 그건 내 쪽에서 사절이야!”

애무도, 전희도 없었다.

부드러운 손길도, 다정한 속삭임도 없었다.

짐승처럼 얽혀든 육체는 소영으로 하여금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리게 했고, 그녀를 비웃듯 지혁은 입 한번 벙 긋거리지 않고 숨소리 한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성난 몸짓으로 공격할수록 무너지는 것은 그녀였고, 매달리 는 것 또한 그녀였다.

일이 끝나고 난후, 지혁은 지체 없이 소영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지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 지 못하는 그녀 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는 욕실에 들어가 기다렸다는 듯이 구역질을 해댔다. 침실에 남겨 진 소영이 독기를 내뿜으며 욕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지혁이 마시다 만 위스키 병을 욕지기를 내뱉으며 진열장으로 내던 지는 것도 그는 알지 못했다.

이런 나를 욕한다면, 나도 할말은 없다. 하지만 은채야…… 이것이 너의 곁에 남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면…… 내 선택은 결국 이거다. 너를 내 손에서 놓느니, 너를 내 곁에서 떠나게 하느니, 차 라리 욕을 들을지 언정 이 길을 택하겠다.

너의 얼굴을 못 본다면, 내 몸 아래 깔린 최소영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겠다. 그래서 너의 얼 굴을 내 눈에 담을 수만 있다면.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내 몸 아래에서 몸을 뒤트는 여자의 신음을 한 번 더 듣겠다.
그래서 네 목소리 를 계속 내 귀에 담을 수만 있다면.

무엇보다 은채야…… 최소영이라는 여자가, 나란 놈의 본질을 너에게 말하게는 하지 않겠다.
너의 고모라 는 여자와 내가 얼마나 더러운 사이인지 결코 네가 알게 하지 않겠다. 무슨 짓을 하든, 어떤 짓을 하든, 최소 영의 입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너를 잡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 무 슨 짓이라도…….

욕실에서 나왔을 때, 소영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침실은 깨어진 병 조각과 찢어발겨진 옷들 이 널브러져 난 장판이 되어 있었다.

거대한 저택마냥 위용 넘치는 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눅이 들게 했다. 높다란 담과, 곳곳에 숨어있는 보안장치. 어서 들어가라며 등을 떠밀던 지혁의 손길을 무시하고 은채는 벨도 누르지 않은 채 들어가기를 망 설였다.

“내일 시간 낼 수 있어요? 저녁에.”

달빛이 부서지듯 그녀의 고운 머리카락 사이로 빛을 흩뿌렸다. 고개를 숙이고 물어보는 은 채를 보면서, 지혁 은 매일 만나는데 따로 시간까지 정할 필요가 있나 싶어 되물었다.

“왜?”

“우리 집에서 저녁 먹지 않을래요?”

바닥을 발로 툭툭 차면서 은채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며칠 전, 감기에 걸렸다며 만나지 못 했던 그날 이후로 지혁은 부쩍 그녀와 거리를 두는 듯 했다. 원래 과묵할 정도로 말이 없던 사람이긴 하지만 근래에는 겨우 대 답만 할 정도였고,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 본적도 드물었다. 속상하고, 기분이 울적하기까 지 했다. 내색하 기 싫어 내내 웃는 낯으로 지혁을 만났지만, 역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그에게 은채는 더욱 다가서고 싶었다. 그러나 부담은 주기 싫었다. 그가 불편 해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은채는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음……, 싫음 말고.”

“하하. 무슨 저녁 초대가 그래? 오고 싶음 오고, 싫으면 말라고?”

지혁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간신히 충격에서 헤어 나왔다. 집으로의 초대. 이것은 무 엇을 뜻하는 걸 까. 그의 호기심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곧 은채가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으므로.

“아빠가, 지혁 씨 한번 보고 싶으시데요. 내일…… 우리 집에서 저녁 먹지 않을래요?”

“은채야…….”

숨이 컥 막혔다. 겨우겨우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도 지혁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기쁜 일이다. 동시에 저 주스럽기도 했다. 그녀의 집에 간다는 것은, 그녀의 부모님을 뵙는다는 것이리라. 그녀의 부 모님을 뵙는다는 것은 정식으로 최은채의 곁에 우지혁이 서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그것이 헛된 바람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정식 교제라니. 지금 그의 처지로는 언감생심 바랄수도 없는 것을! 이렇게 은채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도 감지덕지해야 한다. 그녀와 나란히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지. 그녀의 맑은 눈을 응시하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겠지. 더 이상 욕심내면 사람도 아니리라.

자신이 은채에게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한순간도 잊어버 리면 안 된다.

은채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던 달빛이 구름 속으로 가려졌다. 더불어 지혁의 가슴에도 먹구 름이 끼어들었다.

잊자, 잠깐만.

지워버리자, 아주 잠시만.

애초에 사람이길 거부했으니 하루정도 더,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산다한들 뭐가 달라지겠는 가.

언젠가 때가되어 그녀를 보내준다 하더라도,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오롯이 그녀의 남자가 되자고 지혁은 모 질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 아빠, 좋은 분이세요. 새엄마도 마찬가지고. 지혁 씨 어떤 사람인지 꼭 만나고 싶다고 하세요.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요. 딸내미가 사귀는 남자가 누군지 궁금해 하는 우리 부모님, 불편하게 받아들이지 말아 요. 분명히 약속하는데요, 내가 지혁 씨 좋아하는 만큼 우리 새엄마아빠도 지혁 씨를 보는 순 간 좋아하게 될 거 예요. 내일…… 우리 집에 올 거죠?”

지혁이 대답을 하지 않자 은채는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입술만 깨물었다. 거절해도 서운하 게 생각하지 말자 고 몇 번이고 다짐한 다음에야 물어봤지만 역시나 씁쓸했다. 매번 만날 때마다 그는 어른이 고, 자신은 작디 작은 어린아이 같았다. 그와 대등해지고 싶어서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마련한 자린인데 그 가 거절하면 어쩌 지? 바쁘다고, 다음에 시간내자고 말하던 부친에게 갖은 애교를 떨어 급하게 정한 약속인데, 그가 싫다고 하 면 어쩌지?

대답을 하지 않을 건가보다. 은채는 초조함을 숨기고 시큰둥하게 돌아섰다.

“부담 갖지 말라고 했는데……. 그냥 편안하게 생각해요. 우리 집에서 밥 한 끼 먹는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거절하면 나…… 너무 속상해서 지혁 씨 얼굴 안 보고 싶을지도 몰라요.”

콩, 지혁은 은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퉁겼다.

“못됐어!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금세 빨갛게 달아오르는 연약한 피부를 문질러주며 그는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럴게.”

환하게 웃는 은채의 고운 미소를 보면서 지혁은 불길함이 스멀스멀 가슴을 채워도 무시했 다. 고작 저녁 한 끼다. 겨우 몇 시간, 그녀의 집에 있는 것뿐이다.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조 심하면 되겠지. 그 녀의 집에서, 그녀의 부모님 앞에서, 소영과 마주치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겠지.

“부담 가져서 그러는 거 아냐. 내가 너무 모자라서 그러지. 너에 비하면 난…….”

“말도 안돼! 그런 게 어딨어요?”

지혁의 말허리를 자르고 은채가 끼어들었다. 흥분한 듯 턱을 치켜들고 은채는 소리를 높였 다.

“한번만 더 그런 생각하면 혼내줄 거예요. 누가 뛰어나고, 누가 모자라고……. 그런 건 누 가 판단하는데요?
세상에,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니!”

“알았어, 안 그럴게. 대신 나도 부탁하나 하자, 은채야.”

빙긋 웃음을 머금고 지혁은 등까지 물결치는 비단결 같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을 훑어 내 렸다.

“뭔데요?”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그는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떤 경우라도 나, 안 본다는 말은 하지 마. 알았지? 내게 있어 그것처럼 바보 같은 말은 없어.”

“알았어요. 그럼 지혁 씨도 다시는 부족하다느니, 모자라다느니 같은 말은 하지 말아요.”

은채는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그는 자신의 손안에 가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아쉬운 듯 천 천히 해방시키며 고갯짓을 했다.

“그만 들어가. 늦었는데 어른들 걱정하시겠다.”

“노친네처럼! 만날 만나면 들어가라 하기 바쁘네.”

삐진 척 혀를 쏙 내민 그녀가 돌연 지혁의 품에 파고들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이 라 지혁은 물러서 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그녀를 안아야만했다.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판단기능을 일시에 흐려 놓는 그녀만의 향취. 미친 듯이 질주하는 심장고동소리. 일정하지 않은 거친 호흡을 조절해보려 하지만 뜻 대로 잘 되지 않 았다. 목젖을 울리고 침 삼키는 소리가 요란하게 튀어나왔다.

쿡쿡, 그녀가 그의 품안에서 나직하게 웃었다. 순간 지혁의 얼굴이 검붉게 물들었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위로 기다렸다는 듯이 달빛과 가로등 불빛이 부서졌다.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에 새겨 진 미소가 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바닥으로 가라앉듯 그는 아득함에 어지 럼증마저 느꼈다.

“이런 말 하면 건방져 보이겠지만, 지혁 씨 여자 사귀는 거 처음이에요? 꼭 그런 거 같아.
마치 내가 잡아먹 을 것처럼 잔뜩 경계하고 있잖아요.”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그의 눈과 얽혀들었다. 지혁은 시선을 미끄러 뜨려 그녀의 콧날 을 훑고, 더 아래로 내려가 핑크빛 입술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달콤한 목소리, 뜨거운 숨 결…… 그 모든 것이 그를 유혹했다.

미치겠다. 미치고 싶다. 미치도록 너를…… 원한다!

“걱정 말아요. 지혁 씨 안 잡아먹어. 내가 무슨 식인종인가…….”

우스갯소리를 하듯 종알거리던 은채의 뒷말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지혁은 참을 수 없는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다. 주먹을 움켜쥐고, 어금니를 악다물고, 눈을 감고, 귀를 닫아도 안 되었다. 그녀를 가져야 했다. 느껴야 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장미꽃잎처럼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에 그는 자신의 것을 포갰다. 말을 하려고 벌어진 은채 의 입술을 가볍게 빨아 당기면서 그는 그녀를 벽으로 밀쳤다.

조심스럽게,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지혁은 진주알 같은 치아를 혀로 더듬었다. 그녀의 한 숨처럼 나직한 숨소리가 그의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도망이라도 가려는 듯 멈칫거리는 혀를 낚아챈 그는 그토록 부드럽게 하자고 다짐했건만 어느새 거칠어지고 말았다. 삼킬 듯이 거세게 자신의 입안으로 혀를 빨 아 당긴 그는 격한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천천히 해!

부드럽게 하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지만, 이성이라는 것은 이미 최은채라는 여자 앞에 참패를 당했다. 벨 벳처럼 부드러운 혀의 촉감을, 매끄러운 치아를, 깨물고 싶을 정도로 달콤한 입술을 남김없이 자신에게로 흡 수하려는 찰나, 어딘가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은밀한 시간을 방해하듯, 벨 소리는 끈질기게 울려댔다.

지혁은 아쉬운 듯 머뭇거리며 몇 번이고 자잘한 키스를 흩뿌린 후에야 은채의 입술에서 멀 어졌다. 은채가 가 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혁은 씁쓰레하게 말했다.

“나, 남자야. 늑대라고. 이제 알겠어? 잠깐만 기다려.”

액정화면에 뜨는 이름에 지혁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받지 말까 망설이다 시야를 채우는 은 채의 모습에, 지혁 은 황급히 등을 돌리고 폴더를 열었다. 혹여 은채가 휴대폰너머 들리는 음성을 들을까, 지혁 은 서너 발자국 자리를 옮겼다.

“여보세…….”

“어디야?”

폴더를 여는 것과 동시에 소영의 음성이 쏟아져 나왔다. 지혁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왜?”

“자기 아파트야. 지금 와. 지, 금!”

매번 이렇게 사람을 농락했다. 최소영, 그녀는. 휴대폰을 바스러뜨릴 듯 움켜쥐고 지혁은 긴 침묵을 지켰다.

“우지혁 씨…… 지금 그 계집애랑 같이 있어? 내가 두 사람의 좋은 시간을 방해한 거야?
그래?”

나긋나긋 약 올리는 듯한 소영의 말투에 지혁은 사나운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뭐가 궁금한 거야!”

버럭 소리를 지르자 뒤에 서 있던 은채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지혁은 재빨리 구겨진 표정을 관리했 다.

“지혁 씨? 무슨 전화예요?”

“아무것도 아냐. 잠깐만, 통화부터 마치고 얘기하자.”

다가오지마라, 은채야.

듣지 마라, 제발!

지혁은 은채가 다가선 거리만큼 뒤로 물러났다. 두려움, 무서움, 극도의 공포가 그를 덮쳤다.

“지금 들리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당신이 지키려고 발악을 하는 이유, 맞지? 후훗, 아주 어린애 같은 목소 리네.”

“용건만 말해!”

“용건? 말했잖아. 지금, 당신 아파트로 오라고.”

“기다려. 곧…….”

“지금이야, 우지혁 씨! 내 인내심을 테스트 하지 마.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난 언제든지 그 계집애 만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지혁은 감았던 눈을 떴다. 분노로 시퍼런 채광이 쏟아져 나오는 눈길을 들어 은채를 바라보 던 그는 다시금 눈을 감고 말았다. 그녀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통화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멀찌감치 물러 서기까지 하면 서.

“지금…… 출발하겠어.”

씹어뱉듯 대답을 마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은채가 한걸음씩 다가섰다. 지혁은 발아래에 뿌리 라도 내린 마냥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너는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걸까……. 조금만, 조금만 더 빨리 오지.

너는 왜 하필이면 그 여자의 조카인 걸까. 왜 그 여자와 연관된 걸까. 아니, 나는…… 나는 왜 이렇게 살아왔 을까. 너를 만나게 될 줄 알았다면, 그랬다면…….

머리가 깨어질 듯 격렬한 고통이 지혁을 강타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지혁은 힘겹게 말문을 열 었다.

“어서 들어가.”

“무슨 전화예요? 안 좋은 전화라도 받은 거예요?”

“아냐,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들어가. 너 들어가는 거 보고 나도 가야겠다. 내일 몇 시까지 오면 되 지?”

“7시쯤.”

“그래. 알았어. 잘 자.”

손을 흔들고 벨을 누르던 그녀가 눈 깜짝할 새에 다가와 지혁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하고 도망치듯 대문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의 숨결이 닿았다 멀어진 입술을 멍하니 매만지고 있을 무렵, 문 사이로 빼꼼이 은 채가 얼굴을 내밀었다.

“내일, 늦지 말아요.”

지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 조심하고, 좀 이따 내가 지혁 씨 꿈속으로 찾아갈게요.”

살짝 윙크까지 마친 그녀가 그와의 사이에 놓여진 문을 닫고 뛰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 채가 사라짐과 동 시에 그의 입가에 새겨졌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조금만 더 빨리 오지 그랬니. 내게, 나에게 조금만 더 빨리 오지…….

닫힌 문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지혁은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 『8』 공개 오디션 장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인기인이 있는가하면, 그야말로 연기 학원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초짜들도 두리번거리며 공개 오디션 장입구를 배 회하고 있었다.

따로 지정해놓은 분장실에서 나오는 연예인이 있는 반면, 구석에서 작은 손거울을 보며 옷 매무새와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사람을 무료하게 지켜보던 지혁은 씁쓸하게 입술을 말아 올 렸다. 문득 자신의 옷차림이 가장 후줄근하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웅성거리는 대기실에서 빠져나와 비상계단으로 들어간 지혁은 담배를 빼어 물고 창가 쪽으 로 자리를 잡았다.

평범한 베이지색 데님바지. 그 위에 걸친 아이보리색 카디건 안에는 푸른빛깔이 도는 체크 무늬 셔츠가 그의 의상을 보여주는 전부였다.

무슨무슨 대기업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면접시험처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 의 몸에 꼭 맞는 정장이 아니면, 마치 잡지에서 금방이라도 뛰쳐나온 듯 화려하고 유행하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못마땅함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도 욕설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어두운 기색으로 비 상문을 노려보 던 지혁은 까칠해진 턱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면도도 하지 않고 나왔다. 철저하게 이번 일에서 발을 빼기 위해 그 어떤 노력도 보이지 않 는 행동이었다.

까짓것, 아예 오디션 장에 나오지 않는 게 더 빠른 길이라는 것을 알지만 최소영의 도도한 얼굴은, 오디션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지혁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절대 거절하지 못할 제안이라 짐작하던 최소영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초고속 엘리베이 터를 타고 하룻밤에 인기인이 되기를 바라던, 미련하고 어리석었던 우지혁은 더 이상 존재 하지 않았다.

막다른 길에 내몰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살아온 날에 이제는 종지부를 찍어야했다. 물 론 연기가 좋아 시작한 생활이었고, 앞으로 펼쳐질 연기생활에 한 치의 미련이 남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그러나 늦은 깨달 음에 비해 깨우침은 한순간이 이뤄졌다. 잘라내야 할 미련이 있다면 지체 없이 잘라내야 했 다. 그리고 지혁 은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비로소 마음에 평화가 찾아들었다.

5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동안 단 한순간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그에게 실로 오랜만에 찾아 오는 평화였다.

카디건 소매를 슬쩍 들춰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하던 지혁은 여유롭게 비상구에서 몸을 돌 렸다. 슬슬 시작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실소가 새겨진 입술이 경직되어가면서 그의 얼굴에는 잔인한 빛 이 스치고 지나갔 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하라 했나, 최소영? 미안하지만 당신 제안은 내 쪽에서 거절이야.”

필터까지 다 타버려 불씨만 남은 담배꽁초를 꺼버린 후, 지혁은 싸늘하게 뇌까렸다.

“STS엔터테인먼트 소속 우지혁 씨, 맞습니까?”

자신을 이번 수목드라마 담당 피디라 소개하던 남자가 지혁에게 물었다.

총 일곱 명의 심사위원으로 이뤄진 오디션장 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만큼 쥐죽 은 듯 조용했다.

“나이 서른. 대표작으로는 얼마 전에 방영을 마친 아침 드라마 유리꽃. 그 외 이렇다할 활동을 하지 않은 배우이지만, STS에서 적극 후원 하고 있는 인물, 맞지요?”

MBS방송국 부사장이라는 직함 앞에 오만하게 앉아있던 나이 지긋한 노인이 지혁을 날카롭 게 주시했다.

지혁은 피식 웃으며 그들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거기 의자에 앉아서 한 오 분? 정도 시간 때우세요. 어차피 정해진 거, 입 아프게 특기가 뭐냐, 가장 자신 있 는 연기를 해봐라. 뭐 이런 웃기지도 않는 짓 하지말기로 하죠, 우리.”

가죽의자를 홱 돌려 다리를 한껏 꼬아 올린 여자가 빈정거렸다. 희고 기다란 손가락에 끼워 진 담배를 입에 물고 길게 연기를 내뿜던 여자가 손가락으로 정중앙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뭘 멀뚱히 보고만 있어요? 우리도 바쁜 사람이에요. 밖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질 테고.
우지혁 씨 한 사람 때문에 지금 이 사람들이 다 모인 거라고요. 그럴듯한 남자배우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죠.
모두들 작당을 하고 있다는 걸, 알만한 사람은 알고 또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죠. 어쩌겠어요. 이게 이 바닥 의 생리인데? 안 그래요? 후훗.”

예쁘장한 얼굴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여자탤런트, 박나리. 청순가련형의 이미지를 벗어던 지고 요부의 역 할도 멋지게 해냈던 그녀는 반짝 스타를 넘어서서 진정한 연기자라는 평을 받고 있던 여자 였다. 평소 화면을 통해서만 봐왔던 이미지와는 너무 상반되는 모습에 지혁은 잠시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 러나 이내 자신 의 페이스를 되찾은 그는 박나리가 가리킨 의자가 아니라 심사위원 석으로 성큼 걸음을 옮 겼다.

“그렇지. 이 바닥이 다 그렇고 그렇다는 거, 모르지는 않지.”

유들유들하게 말을 내뱉으며 다가서는 지혁의 행동에 놀란 듯 모두의 눈길이 그에게 고정되 었다.

“박나리 씨. 당신만 바쁜 거 아냐. 나도 바쁘다고. 바쁜 시간 쪼개서 여기까지 온 이유가 고작 당신에게 그따 위 말을 듣기 위함이라 생각하나?”

“무슨 짓이에요, 이거?”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테이블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지혁은 박나리와 이하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비웃듯 하 나하나 눈에 새겼다.

벌떡 몸을 일으키고 언짢음을 한눈에 보여주는 MBS부사장이 혀를 요란하게 차대며 휴대폰 을 꺼내들었다.

“STS도 한물갔군. 저런 걸 물건이라고 보내고!”

지혁은 날쌔게 노인네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STS가 한물간 게 아니라, MBS방송국이 한물갔지요, 어르신. 이런 식으로 남자주인공자 리를 주는 대가로 어르신이 받는 것은 무엇인지, 외람되지만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는 정중한 어조로 얼굴 가득 웃음을 물고 나이 많은 어른을 능멸했다. 시커멓게 변해가는 맞은편 노인을 놀리듯이 지혁은 휴대폰으로 테이블을 툭툭, 내리쳤다.

“전화를 해봐야 득이 될게 없다는 걸 아셔야지요, 어르신. 저야 잃을 것이라고는 배역밖에 없다지만, 어르신 은 이 오디션의 치부를 자신의 입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요?”

“겁이 없군, 우지혁 군.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고 이러는 겐가?”

서릿발처럼 냉랭하게 노인이 말했다. 지혁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테이블에서 멀어졌다.

“어떤 자리인지 알기에 이렇게 나왔습니다. 모르는 자리라면 아예 걸음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웃기지도 않는군! 이것도 하나의 작전인가? 일종의 연기라면 대단하다고 해주고 싶군!”

어디선가 가시 박힌 이죽거림이 날아들었다. 지혁은 누가 말했는지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부사장에게만 시 선을 고정시키고 말을 이었다.

“어느 분의 허락으로 제가 이 자리에 섰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STS측과 탁상공론으로 이 뤄진 이번 드라마 는…… 제 것이 아닌 거 같기에 거절하겠습니다.”

“하! 고작 그 말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겐가?”

어이없다는 듯 노인은 가죽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지혁은 입가에 새겨진 미소를 거두 지 않고 여유만 만하게 대답했다.

“이해해주십시오. STS에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지만 받아들이지 않더군요. 어렵게 마련한 자리라 없었던 일 은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몸소 나왔습니다. 뭘 얼마나 어렵게 마련한 자리인지는 모르 나, 구역질나는 STS측의 마녀와 뒷구멍으로 배역을 정한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구경 겸 나 와 봤지요.”

“우지혁 씨, 당신 지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성급하게 담뱃불을 비벼 끄던 박나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 으며 지혁의 곁으로 다가섰다.

“잘난 척도 정도껏 해요. 당신, 이 바닥에서 매장당하고 싶어?”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날카롭게 질문을 던진 나리는 지혁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연예계에서 STS엔터테인먼트 모르면 간첩이야. 방송국측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곳이 바 로 그곳이라고! 거 기 윗사람 중 누가 우지혁 씨를 곱게 봐줬는지 대강 알만한데, 너무 날뛰지 마. 그래봤자 당 신, 힘 있고 빽 있 는 사람 믿고 기세등등한 거 아냐? 그 기세는 당신이 믿고 까부는 STS측의 그 ‘요부’라 는 여자한테 쓰지 그 래? 어디서 혓바닥을 함부로 놀리는 거야!”

새된 여자의 목소리가 적막감만 감도는 오디션 장을 매웠다. 지혁은 사납게 눈썹을 치켜 올 리고 박나리를 구 석으로 몰아붙였다.

“당신이야 말로 함부로 지껄이지 마.”

지혁은 잇새를 악물고 한마디 한마디 음산하게 내뱉었다. 여배우를 보호하려는 듯 몰려드는 사람들을 위압 적으로 노려보던 지혁은 모두가 들으란 듯이 서늘하게 입술을 열었다.

“날 때부터 정상이 있었던 사람들은 모르겠지. 그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얼마나 더러운 짓 을 해가며 굽실거 려야 하는지. 열심히 노력하면 빛이 들 거라는 기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 은지. 연기력만 있으면 기회라는 게 덥석 다가올 거라고 믿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이 바닥에 얼마나 많은 지, 당신들이 알기 나 하나? 이렇게 몇몇 사람들의 입김으로 기회가 박탈당하는지 꿈에도 모르고, 저 문 밖에 서 얼마나 많은 사 람들이 단 한번의 기회를 잡기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당신은! 당신들은!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알기나 하나? 문 밖에서 진땀을 흘려가며 오늘의 주인공이 될 거라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해! 아니, 당신들은 몰라. 모르겠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다른 사람들의 꿈을 짓밟는 다는 것을 당신들은 죽어도 이해 못할 거야!”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두들 서로의 눈치를 살피느라 묘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지혁은 흐트러진 숨결 을 고르고 격앙된 감정을 애써 다스렸다.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쏟아내자 전신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 했 다.

“정상에 선 사람들은 알지 못해. 밑바닥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거리는 사람들 의 노력을. 아니, 당신들은 오히려 비웃어가며 즐기지. 그래, 어디 한번 올라와봐라. 네들 힘으로 올라 올수 있는지 죽을힘을 다해 고생해봐라! 그래봤자 네들은 안 된다! 그러면서 당신들은 유유자적하게 정상에서 군 림하고 있어. 마치 아랫것들을 살피는 상전처럼 말이야!”

고함을 지르고 홱, 몸을 돌린 지혁은 문가로 걸음을 옮겼다.

미련 따위 접어 버렸다. 난생처음 출연제의가 들어오고,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깨 달았을 때, 이렇게 돌아서야 했다. 그날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투지에 불타고 패기만만 했던 우지혁은 사 라졌을지언정, 좀더 단단하고 여물어진 우지혁이라는 남자가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 지혁은 울컥 가슴을 치 고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를 식도 안으로 삼켰다.

여기까지다. 더 이상의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 겨우 여기서 그만 둘 것을 그렇게…… 살아오다니. 겨우 이런 사람들 틈에서, 같은 사람들이 되기를 꿈꾸다니. 이제, 이제…… 그만두자. 그만두 자…….

단호하게 문을 열어젖히려는 지혁의 손길을 누군가 잡아챘다.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건 뭐요, 우지혁 씨? 당신의 난동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밖에서 벌 떼처럼 기다리는 기자들에게 시끄러운 기삿거리를 제공하지 않기 위함인 거, 알고 있겠지요?”

담당피디가 지혁의 앞으로 다가와 문고리에 손을 얹고 있는 그의 손을 거뒀다.

“잠깐 얘기 좀 합시다, 우지혁 씨.”

“하시죠.”

턱수염을 거뭇거뭇하게 기른 남자를 무심하게 보던 지혁은 관심 없다는 듯 무뚝뚝하게 대꾸 했다. 나머지 사 람들은 한곳으로 모여들어 소리를 죽이고 서로 대화를 나눴다.

“이미 캐스팅은 끝났습니다. 우지혁 씨가 하든 말든, 소속사와 얘기가 끝난 상태라는 겁니 다. 이번 작품이 어떤 건지, 알고 있겠지요? 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드라마 화 한겁니다. 이미 영화 로 한번 흥행에 성공했고, 그것을 드라마로 옮겨 안방을 공략하자는 취지입니다. 지금 저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난다 긴다 하는 연예인이 수두룩합니다. 그만큼 이번 배역이 탐나는 역할이라는 거죠. 우지 혁 씨가 이 문을 박차고 나가면 평생에 한번 올까말까 한 기회를 차버린다는 거, 명심하십시오!”

빌어먹게도 지혁은 망설였다. 젠장 맞게도 피디의 일목요연한 말에 머뭇거리고 말았다. 그러 나 흔들림은 잠 시였다. 이런 말에 흔들릴 요량이었으면 애초에 거절하지도 않았겠지. 지혁은 쓴 웃음을 물 고 천천히 문고리 를 돌렸다.

“잠깐 기다려요!”

사람들 무리에서 빠져나온 박나리가 빽 소리를 질렀다. 쏜살같이 지혁의 앞을 가로막고 문 을 닫은 그녀는 피 디에게 가보라는 듯한 눈길을 던지고 지혁을 응시했다.

“뭡니까?”

지혁은 귀찮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녁에 있을 은채와의 약속을 상기하자 한시바삐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불쑥, 박나리의 손이 지혁의 앞에 내밀어졌다.

“같이 일해 봐요, 우리!”

지혁의 눈썹이 활처럼 휘었다. 이 여자가 지금 뭐라 한거야?

“같이 일해보자고요. 당신, 맘에 들어요.”

“이것 보십시오, 박나리 씨…….”

“당신이 모르는 게 하나 있어요.”

지혁의 말허리를 자르고 나리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고 긴 한숨을 내쉬더니 서 있기가 힘들다 는 듯 벽에 기대섰다.

“정상에 선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모른다고 했죠?”

그녀는 담배케이스에서 한 개비의 담배를 꺼내더니 지혁에게 내밀었다. 지프라이터로 정성 스럽게 불까지 붙여준 그녀는 자신도 담뱃불을 붙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네, 몰라요. 그런데 정작 당신들은 알기나 하나요? 이 자리가, 내가 서 있는 정상의 자리 가 얼마나 무서운 곳이지. 당신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과연 알기나 할까요? 정상까지 오르는 게 힘든 만큼, 그 정상을 지키 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요?”

지혁은 처음으로 박나리의 얼굴을 정시했다. 뛰어난 미모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연예인의 대표적인 예가 그녀였지만, 그녀는 다른 반짝 스타와는 달리 꽤 오랫동안 정상을 지켰고 여전히 주가를 올 리고 있는 연예인 중에 하나였다. 짙은 메이크업으로 감춰진 그녀의 얼굴에서 화면서는 볼 수 없었던 아픔이 배어들었다.

나리는 후우,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정상에 섰다 해서 사람들 위를 군림하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최고의 인기를 누릴 때, 우리 같은 사람들 은, 다른 사람들 눈에 띄기가 더 쉽죠. 그리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누군가가 나를 부른 다면…… 기꺼이 가야하는 게 이 바닥 생리고요. 그게 내가 서 있는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내 몸값인 인기를 그대로 유지하는 비결이죠. 피라미드의 먹이사슬처럼 먹고, 먹히는 자가 정해진 곳이 바로…… 여기에요. 우 리는 죽어도…… 먹는 자가 될 수는 없어요, 우지혁 씨. 당신과 나, 우리는 죽을 때까지 먹히는 자로 살아가 야만 해요. 당신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겠죠?”

지혁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어갔다. 박나리는 한마디도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혁 자신은 지난 몇 년 동안 먹히는 자가 기꺼이 되지 않았던가. 허나, 그래서 남은 건 뭔가? 돌아오는 건 뭔가?
지독한 환멸과 골수깊이 사무치는 수치심밖에 더 있는가!

“먹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곳에서 살겠습니다!”

돌아서는 지혁의 뒤로 비웃음이 날아들었다.

“후훗. 말처럼 쉬웠다면 나도 오래전에 그만 뒀을 거예요. 한동안 이번 작품의 남자주인공 역할은 베일에 싸 놓겠어요. 기자들이 알아서 당신을 신격화 하겠죠. 그러면 이 드라마는 시작 전부터 시선을 확실하게 끌어당 기는 거고요.”

“안한다고 했을 텐데요?”

“두고 보죠. 하는지, 안하는지…….”

“두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지혁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미련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 의 시선이 일제히 지혁에게 꽂혔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꽤 오랜 시간을 보낸 지혁에게 보내는 그들의 눈빛은 매섭고 날카로웠 다. 개중에는 살기마저 전해오는 듯 했다.

지혁은 피식 웃으며 그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얼마 전만 해도 자신 역시 저들의 모습과 동 일했으리라. 참으 로 아이러니다. 그토록 가지려고 할 때는 마음이 무겁기만 하더니, 벗어던지자 왜 이리 가볍 고 날아 갈 것 만 같을까.

“기다리고 있을게요, 우지혁 씨.”

지혁에게만 들릴 정도로 박나리의 나직한 음성이 그의 귓가에 날아들었다. 지혁은 듣지 못 한 척 그녀의 코앞 에서 문을 닫았다.

“그 사람 불편하게 하면 안돼요, 아빠. 알았지?”

“알았다 이 녀석아!”

콩, 머리를 쥐어박는 부친 최 사장에게 애교를 떨던 은채는 주방에서 막 나오는 새엄마 재빨 리 다가갔다.

“맛있는 거 많이 했어, 새엄마?”

“그래, 그래! 아주 상다리 휠 정도로 아줌마가 해놨어. 기집애가 하루 종일 사람을 들들 볶 아요, 볶아!”

“정말? 가서 확인해야지!”

혀를 쯧쯧 차며 응접실에 나온 이 여사는 주방으로 사라져가는 은채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서운하다는 듯 중 얼거렸다.

“딸내미 키워봤자 말짱 헛것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아.”

남편 최 사장의 맞은편에 앉은 이 여사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초조하게 손을 비틀었 다. 일곱 시까지 이제 십여 분도 남지 않았다. 마치 시어른들을 처음 뵈었을 때처럼 가슴이 심하게 뛰기 시 작했다. 그런 그녀 를 이상하게 보던 남편이 허허, 웃으며 놀리듯이 말문을 열었다.

“당신 남자친구라도 오는 건가? 왜 그렇게 흥분하는 거야?”

“이이는…….”

눈을 흘기고 허공으로 손사래를 치던 이 여사는 주방에 들어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은 채를 떠올리며 목 소리를 낮췄다.

“당신은 안 떨려요?”

“내가 왜 떨려?”

“음, 나만 유난을 떠는 건가…….”

신문을 보던 최 사장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어두워졌다. 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신물을 접어 테이블 위 에 던지고 나직하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하루 종일 기분이 별로군.”

“네?”

“우리 은채가 언제 이리 컸기에 남자를 소개시켜주나…… 싶어서인지 오늘하루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어.
당장 딸 하나 있는 거 도둑맞는 기분마저 든다면, 당신 믿겠나?”

턱을 매만지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가 앉아있는 소파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겨우 저녁 한 끼 먹는 거라고 나 자신을 설득했지만, 역시 기분 나쁜 건 어쩔 수가 없군.
어떤 녀석이 올지 모르나 처음부터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려울 것 같아.”

“세상에! 그럼 안 되죠. 우리 은채가 첫눈에 반했다는 사람인데.”

남편의 어깨를 부드럽게 내려친 이 여사는 살며시 웃고 말았다. 남편은 마치 질투에 휩싸인 남자처럼 굴고 있었다.

“그러니까 도둑놈이지. 저 어린 것이 뭘 알겠어? 어린 내 딸이나 유혹하는 놈 같으니라 고…….”

“당신, 당신 얼굴에 침 뱉고 있는 거, 알아요?”

이 여사는 후훗, 웃으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남편의 뜨악한 얼굴을 보며 그녀의 웃음은 깊 어만 갔다.

“내가 당신 처음 만났을 때, 난 겨우 열아홉이었다고요. 그거, 잊었어요?”

최 사장의 얼굴이 검붉게 달아올랐다.

“열아홉 살짜리 유혹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흠흠, 그만하지.”

목청을 가다듬던 최 사장은 휙 하니 소파에서 일어나 응접실 창을 열고 정원으로 향하는 테 라스로 나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웃음소리가 그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아내의 나이 열아홉과, 딸아이의 나이 스물은 어떻게 이토록 차이가 나는 것일까. 아내는 열 아홉일 때 한 여 성이었는데 아내보다 한살 더 많은 딸은, 스무 살이 되어도 여전히 그의 눈에는 작디작은 아이로만 보였다.

귀한 딸로 애정을 듬뿍 받고 자랐을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 빗나가지 않았다. 지혁은 집안에 들어서면서부터 전해오는 따스한 풍경에 저절로 가슴 밑바닥까지 훈훈해졌다. 그와 함께 우지혁이 최은채에 게 다가설 수 없 는 이유를 하나 더 추가하는 셈이 되긴 했지만.

최소영의 조카라 했을 때부터 은채가 보통 집안의 딸은 아닐 거라 생각하던 그였다.

만날 때마다 집 앞까지 바래다주면서 보았던 집밖의 외관에 더욱 그런 생각을 굳히던 그였 다.

그러나 이토록 대단한 집이라니.

이렇게 부유한 집이라니.

부친이 사업을 한다더니, 이건 숫제 나라님의 집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휩싸일 정도였다.
곳곳에 전시되어 있듯 벽에 걸린 명화들. 한번도 보지 못했던 수입명품들은 집안 여기저기 배치되어 지혁은 그들과 다른 세계 에 동떨어진 듯 쉽게 동화될 수가 없었다.

“저녁을 들기 전에 간단히 차부터 마셔도 되겠는가? 아아, 편하게 말을 놔도 될 런지… ….”

최 사장이 조심스럽게 묻자 지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편하게 말씀 하십시오.”

“아빠, 우리 지혁 씨 너무 힘들게 하지 마.”

주방에서 차를 들고 나오던 은채가 방긋 웃으며 지혁의 곁에 앉았다. 어른들에게 먼저 차를 내밀고 지혁의 앞에 찻잔을 밀어놓은 은채는 부모님 보란 듯이 지혁의 손을 마주잡았다.

“쯧쯧, 저 녀석 보게!”

“긴장하지 말아요. 우리 새엄마 아빠, 지혁 씨 불편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 편안하게 앉아 있 어요.”

은채는 귀엣말을 하듯 지혁의 귓가에 바짝 붙었다. 최 사장의 웃음기어린 음성이 점점 높아 졌다.

“새엄마 아빠한테는 아직도 반말을 하면서, 제 남자친구에게는 꼬박꼬박 존댓말 하는 것 좀 보게!”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최 사장은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를 지닌 지혁을 요모조모 뜯어보 았다. 은채가 첫눈에 반했다 했을 때, 얼굴은 잘 생겼겠거니 예상했더니만, 인물이 보통을 넘어서 같은 남자 가 보기에도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탈이군!

헛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최 사장은 은채에게 과일을 집어주는 지혁의 다정함을 눈여겨보며 아무리 밉게 보 려고 해도 밉게 볼 수가 없음을 인정하고 말았다. 깎아진 듯 정교한 이목구비가 사람들의 시선을 한번에 끌 만했다. 악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만큼 선한 눈매나, 흐트러짐 없는 자세나 흡족하 기 이를 데 없었 다.

녀석, 제 어미를 닮아서 사람 보는 눈은 있군, 그래.

“나이가 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우리 은채가 하나도 말해주지 않아서…….”

“말씀 편하게 하시지요, 어머님. 아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머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 까?”

“저야 새어머니라 불러주면 좋지요.”

은채의 고운 미소는 어머님으로부터 물려받았나보다. 입가에 잔잔히 새겨진 이 여사의 미소 가 은채의 웃는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지혁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이 여사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나이 를 밝혔다.

“올해 서른입니다.”

최 사장 내외의 입이 딱 벌어졌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고 그 정적을 깨트린 사람은 최사장 이었다. 마른기침 을 쏟아내고 차를 들이킨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생각 보다 많군.”

“그러게요. 나는 스물 대여섯으로 보았는데.”

최 사장과 이 여사의 대화에 은채가 톡 끼어들었다.

“서른이 뭐가 많다고 그래요.”

“이 녀석아, 너랑 열 살이나 차이 나는데 많지, 그럼 적으냐?”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은채를 나무라듯 최 사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지혁은 씁쓸하게 웃 으며 나서지 말라 는 듯 은채의 손을 잡아 당겼다. 그러나 지혁의 예상을 깨고 나서는 사람은, 은채가 아니라 그녀의 모친인 이 여사였다.

“당신 오늘 실수 많이 하네요. 열 살이 적은 차이가 아니라고요? 그럼 우리는요?”

은채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자칫 무거워졌던 분위기가 은채의 웃음소리와 함께 눈 녹듯 사그라졌 다. 지혁은 무슨 소리냐는 듯 은채를 바라보았다.

“우리 새엄마랑 아빠랑 동갑이거든요, 띠 동갑.”

“떽, 이 녀석! 띠 동갑도 동갑이야!”

“아, 네에!”

혼내듯 소리를 지르지만 최 사장의 음성은 다정하기 그지없었고, 부친에게 경례를 표하는 은채는 귀여울 정 도로 장난스러웠다.

“그래, 나이는 그렇다 치고 하는 일은 뭔가?”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던 지혁의 입가가 경직되었다. 은채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 스르르 힘이 빠져 나갔다.
언젠가 그녀에게도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뭐라 답했던가? 지혁은 미리 준비 해온 대답이 있으 면서도 말문이 막혀 입을 열수가 없었다.

“불편하면 대답하지 말아요.”

은채가 속삭였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나직하고도 부드러운 음성에 지혁은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얼마 전까지…… 연기를 했었습니다.”

찬물을 뒤집어 쓴 듯 분위기가 급격히 식어 내렸다. 홱 얼굴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은채 를 외면하고 지혁 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더 이상의 거짓은 없어야 한다. 어림없다 내침을 당하더라도 은채의 부모님에게 거짓 을 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전까지라고요?”

이 여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네.”

“그럼 지금은 다른 일을 한다는 말인가?”

최 사장의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물음에 지혁은 이렇다할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금니만 사려 물었다. 최 사장이 되물었다.

“그만 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는가?”

“…… 제 길이 아닌 것 같아서 그만 두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나, 자네?”

갑자기 대화의 주제가 바뀌어 지혁은 난해한 얼굴로 최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가 날카로운 눈길로 지혁을 주 시하고 있었다. 지혁은 은채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정중하게 대답했다.

“사업을 하신다 들었습니다.”

“그것뿐인가?”

“네? 무슨 말씀이신지…….”

“됐네. 알고서 모른다 하는 얼굴은 아니군.”

“아빠!”

버럭 소리를 지른 은채가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무해요, 아빠! 지혁 씨를 어떻게 보고!”

“당신이 심했어요.”

“그런 거 같군.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미안하게 됐네.”

은채와 이 여사가 동시에 최 사장을 나무라자 그는 멋쩍게 웃으며 지혁에게 일어나라 손짓 을 했다.

“기분 나쁘지 않았으면 하네. 자네가 연기를 했다니까 혹시 했다네. 자아, 저녁이나 먹고 다시 이야기 나눔 세.”

먼저 일어나 식당으로 향하는 최 사장을 응시하면서 지혁은 도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지혁의 등을 이 여사가 조심스레 두드렸다.

“신경 쓰지 말아요. 저이 하는 일이 그쪽 방면이라서……. 음, 나중에 얘기하죠. 일단 시장 할 텐데 저녁부터 들어요.”

그쪽 방면? 무슨 소리지, 그게?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은채에게 물어보려는 찰나, 조용하던 집안에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정부가 인터폰을 받고 문을 여는 동안 지혁은 은채를 소리죽여 불렀다.

“은채야.”

“잠깐만요, 지혁 씨.”

검지를 세워 입술을 가로막은 은채는 현관으로 달려갔다.

“누구예요, 아줌마?”

“방배동 사모님 오셨어.”

“어머! 고모가요?”

쿵, 지혁의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고모……? 고모라 했나, 지금? 최소영…… 그 여자 말인가?

“새엄마, 고모 오셨대!”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식당을 향해 소리 지르는 은채의 목소리가 동굴속의 울림이 되어 지 혁을 강타했다.

“늦으셨네. 아까 낮에 전화 왔기에 오늘 은채 남자 친구 인사 온다고 했더니, 얘 고모가 한 번 보고 싶다고 하 더라고요. 은채가 즈이 고모랑 거의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내거든요. 괜찮죠?”

발 딛고 선 바닥이 흔들리고 있었다. 거대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마냥 지혁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간신 히 휘청거리려는 몸을 지탱하고 양해를 구하는 이 여사에게 겨우겨우 억지웃음을 지었다.

괜찮냐고? 괜찮냐고? 괜찮냐고!

지혁은 피를 토하듯 격하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시시각각 조여 오는 최소영이라는 올 가미에 숨통이 턱턱, 막혀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하필이면 이런 때에……!

현관에서 말갛게 웃고 있는 은채의 얼굴이 지혁의 동공에 확대되어 들어왔다. 지혁은 세상 모든 것을 외면하 듯 눈을 감고 말았다.
************************ 『9』 은채는 갑작스레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는 지혁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굳은 안색이 마치 급 체한 것처럼 보여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괜찮은지 물어보기 위해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들어 올리자 현관에서 왁자한 웃음소리가 날아들었다.

“지혁 씨,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알았죠?”

문틈에 입술을 모으고 말을 마친 은채는 지혁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현관으로 달려갔 다.

“고모오오오!”

부모님과 인사를 주고받는 고모의 품에 파고든 은채는 한껏 어리광을 부렸다. 그런 은채에 게 소영은 면박 주 듯 등을 찰싹, 후려쳤다.

“나쁜 기집애! 남자 친구 생기면 고모한테 제일 먼저 보고할 것이지. 새엄마아빠한테만 날름 보고를 해?”

“아냐. 안 그래도 고모한테는 따로 찾아가려고 했지.”

손이 닿지도 않는 따끔한 등을 문지르며 은채는 변명하듯 말했다.

“따로? 이것이, 또 용돈 뜯으려고 올려는 셈이었지?”

“앗! 어떻게 알았지?”

헤헤, 웃으며 혀를 쏙 내미는 은채를 한대 쥐어박으려고 하던 소영은 집안을 휘이 둘러보았 다.

“네 남자친구는?”

소영의 말과 함께 최 사장과 이 여사의 시선이 은채에게 고정되었다. 은채는 손가락으로 화 장실을 가리켰다.

“속이 안 좋은가봐.”

“그래? 그럼 우리 먼저 식당으로 가 있지.”

최 사장은 뒷짐을 지고 걸어가다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넌 또 혼자 오는구나. 네 남편은?”

일순 분위기가 험악하게 가라앉았다. 이 여사가 남편의 옆구리를 슬쩍 찔러보아도 최 사장 은 말을 멈추지 않 았다.

“너라도 잘 해라. 남편이 못마땅하다고 너까지 어긋나면 쓰나! 원, 한두 살 먹은 어린애들 도 아니고 몇 해째 이러고 사는지…….”

“여보! 은채도 있는데!”

“그만해요, 오빠. 오빠 잔소리 들으려고 온 거 아니니까. 꼭 애 앞에서 그런 말까지 해야 돼요?”

“부끄러운 줄 알면 알아서 처신해!”

“오빠!”

매번 만날 때마다 호통을 치는 부친과 지지 않고 대드는 고모를 늘 봐왔던 은채는 오늘도 사건 중재에 나서 야 하나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보세요, 귀 막고 있었다고요. 자아, 그러니까 다들 식당으로 가 요. 저 지금 배고파 서 아사직전이에요.”

은채는 부친의 등을 밀면서 소영에게 찡긋 윙크를 했다.

“그건 그렇고. 이 친구는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냐?”

최 사장은 걸음을 멈추고 화장실에 시선을 던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은채는 서운함을 드러 냈다.

“아빠가 곤란하게 하니까 그렇지. 나 같아도 긴장 되겠다!”

“내가 뭘? 이 녀석 보게. 벌써부터 역성을 드네, 그려.”

“몰라. 좀 잘해줘요. 무섭게 하지 말고.”

“알았다, 이 녀석아.”

허허, 웃음을 토해내는 부친에게 애살맞게 말을 마친 은채는 지혁이 염려된다는 듯 화장실 을 바라보다가 이 내 고모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 두런두런 들리던 말소리도 더 이상 지혁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척추사이로 식 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세면대 물을 틀고 얼굴에 찬물을 뒤집 어 쓴 지혁은 그대 로 벽에 몸을 기댔다.

참을 사이도 없이 격한 욕설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현관문이 열림과 동시에 화장실로 숨어들었지만,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 떻게 해야 하는 가, 하는 생각 따위는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니,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판단기 능이 완전히 제로 상태가 되어버렸다.

“빌어먹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막연히 예견 한 적이 있었다. 허나,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그날이 하필이면 오늘이 되리라고는 지혁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진정하자, 어떻게든 이 난관을 빠져나가야 한다. 여기서, 은채가 보는 앞에서, 은채의 부모님 앞에서 소영을 마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보내주어야만 하는가.

아직 시간이 남아있을 거라 여겼건만, 여기까지인가.

좀더 곁에 있고 싶었는데, 좀더…… 그녀의 웃음을 지켜보고 싶었는데, 허락된 시간은 여기 까지가 전부인가 보다. 그의 몸이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한참을 넋 놓고 있던 지혁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냈다. 단축키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눈에 띄 게 떨리고 있었다. 흐트러진 숨결을 정리하고 길게 심호흡을 내뱉은 그는 신호음이 울리자 이를 갈고 말았 다. 이 방법 밖에 없다. 정녕 이 길 밖에 없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여보세요?”

소영의 음성이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지혁은 질끈 눈을 감고 메마른 기침을 내뱉었다.

“나야.”

“이게 누구야! 어쩐 일로 먼저 전화를 다했어?”

놀라움과 빈정거림이 화살처럼 그의 귀를 겨냥하고 날아들었다.

“지금, 내 아파트로 와.”

지혁은 소영의 반응을 무시하고 대뜸 명령했다.

“뭐라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소영이 되물었다. 그는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처럼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귀먹었나? 지금, 내 아파트로 오라고 했어. 지금!”

“왜 그래? 무슨 소리야?”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당신이 매번 하는 짓, 나도 좀 하면 안 되나? 오늘은 내가 먼 저 부르지. 최소영 씨, 당신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지금 와.”

한마디 한마디 내쏘듯 말을 마친 지혁은 차마 눈을 뜨기가 두려워 감은 눈에 더욱 힘을 가 했다. 정면에 거울 이 있다. 그 안에 깃든 자신의 모습을 눈뜨고 볼 수가 없어 지혁은 암흑 속을 헤매기를 자 처했다.

“할 말? 우리가 언제부터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더라? 하긴. 안 그래도 나도 당신에게 할말 이 있긴 했는데.”

“잘 됐군. 그럼 지금 당장 올수 있겠지? 지금, 당장, 말이야.”

“지금은 좀 곤란하고, 한 한 시간 후쯤…….”

“웃기지마. 나는 ‘지금’이라고 했어.”

지혁은 소영의 말을 가로채고 쐐기를 박듯 단호하게 덧붙였다.

“다시 나 안 보고 싶다면 안 와도 그만이야. 어쩌겠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어. 지금 출발할게. 그거 알고 있어? 당신…… 오늘 상당히 이상해.”

“그만 주절대고 당장 나서기나 해.”

“후훗. 알았어, 알았다고. …… 어쩌지, 은채야? 고모 갑자기 급한 일 생겼는데…….”

순간, 은채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지혁은 휴대폰을 바스러뜨릴 듯 격하게 폴더를 덮었다. 욕지기가 치밀고 올라왔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떨어지듯 그의 몸은 추락에 추 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손가락도 움직일 수가 없고,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굳게 닫힌 문틈을 뚫고 은채의 토라진 목소리가 들려와 지혁의 흩어졌던 이성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이러는 게 어딨어, 고모!”

못내 서운한지 좀처럼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던 은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톤 높았고 짜 증스러움마저 배 어 있었다.

“고모한테 실망이야, 실망이라고!”

“미안해. 다음에 따로 시간 한번 내자, 은채야.”

“도대체 무슨 약속이기에 꽁지가 빠지게 나가는 거냐.”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아가씨, 저녁이나 들고 가요.”

“아뇨. 오늘은 그만 가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올게요. 은채야, 그 사람과는 나중에 우리 집으로 오든지, 아 니면 밖에서 약속을 정하든지 하자. 알았지?”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던 지혁은 쓴웃음을 삼켰다. 아니, 최소영. 그런 일은 없을 거 야. 그건 당신에 게도, 내게도, 무엇보다 은채에게 저주스러운 일일 테니까.

그래, 놓아줘야지. 처음부터 영원하리라는 기대는 갖지도 않았으니, 내 주제에 맞지 않게 잠 시나마 그녀와 함께하는 행복을 누렸으니…… 여기서, 이쯤에서, 놓아주어야지. 그녀를, 내 소중한 사람 을……. 최소영, 당 신의…… 조카를 그만 놔줘야겠지.

사람 욕심이라는 것은 왜 이렇게도 끝이 없을까. 지혁은 어두운 곳에서 은채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 미소를 욕심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밝고 고운 미소를 탐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 은채를 만나지만 않았다면. 아니, 그날 소영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나가지 않았다면.
아니, 아니. 단 한번만이라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아니다. 무엇보다 후회하는 것 은, 그 어떤 것보 다 되돌리고 싶은 것은, 최소영이라는 여자와 얽히지 않았다면. 그 여자와 엮이지 않았다면.
그것이 그가 바 라는 유일한 소망이고, 바람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

허나 지난날은 잘못 쓴 것을 지우개로 지우듯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 게 하고 싶다 해서 덮을 수도 없었다.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지난날과 최소영과의 추악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더불어 감출수도 없고 덮을 수도 없는 것이, 잔인하고 냉혹하지만 현실이고 진실이었다.

그는 은채의 곁에 한시도 더 머무를 수가 없었다. 이곳에 도착한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내린 결론이었고, 지혁은 서서히 이별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따뜻한 손을 놓자고. 그녀의 햇살 같은 미소를 이제는 그만 보자고…….

그러나 어찌하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최은채라는 욕심(慾心)은 이미 한계 를 넘어서서, 우지 혁이라는 남자를 사지(死地)로 내몰고 또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어디 아파요, 지혁 씨?”

소영을 보내고 뽀로통히 서 있던 은채가 화장실에서 막 나오는 지혁에게 물었다. 지혁은 설 핏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굴이 안 좋아요. 창백하고…….”

“아냐. 걱정하지 마. 어른들은?”

“식당에요. 배고프죠?”

팔짱을 쏙 끼고 식당으로 안내하던 은채는 지혁의 이마를 짚어보는 시늉을 했다.

“걱정 안할 수가 없네. 열은 안 나는데, 이마에 땀나는 거 좀 봐.”

손바닥을 펼쳐 보이는 은채의 손에 투명한 물기가 반짝였다. 지혁은 재빨리 그녀의 손에 묻 은 물기를 자신의 옷깃에 닦아냈다.

“별거 아냐. 은채 부모님 앞이라서 그런지, 긴장해서 그런가봐.”

“바보. 뭘 긴장하고 그래요. 아, 맞다! 우리 고모 그냥 갔어요. 급한 약속이 있대나, 뭐래 나.”

동요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그의 근육은 팽팽히 조여들었다. 숨이 식도를 가로막아 입도 벙긋 하기 힘들었지만, 애써 미소도 지었다. 턱과 입술에 경련이 일었다.

“그랬어?”

떨리는 음성이 부자연스러웠다. 가볍게 헛기침을 내뱉은 지혁은 식탁에 앉아있는 최 사장 내외에게 목례를 하고 맞은편에 합석했다.

“죄송합니다.”

“괜찮네. 남의 집이라 불편한 모양이구먼. 편하게 생각하게.”

최 사장은 음식물을 삼키고 나직하게 덧붙였다.

“미리 양해도 구하지 않고 다른 손님을 불러서 미안하네, 그려. 나도 은채 고모가 올 줄은 몰랐다네. 그나저 나 그냥 갔으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게. 나와는 남매지간이고, 아내와도 허물없이 지 내고, 또 은채와 는 둘도 없는 고모와 조카사이라네. 아직 자식이 없어서인지 조카 사랑이 유별나다네.”

“네, 그렇군요.”

밥알이 모래알갱이처럼 입안에서 서걱거렸다. 갖가지 산해진미로 차려진 식탁 앞에서 지혁 은 불쑥 구토가 밀려와 이를 악물어야 했다.

“조카 사랑이 유별나면 뭐해. 오늘 같은 날 그냥 휭하니 급한 볼일 있다고 가버리는데.”

수저를 내려놓고 은채는 속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혁 씨 우리 고모 못 봤죠? 얼마나 예쁜데요.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언닌 줄 알잖아요.
물론 우리 새엄마랑 내가 밖에 나가도 사람들이 모녀사이로 안보고 자매냐고 물어보는데, 우리 고모도 마찬가지 에요. 우리 새엄마 랑 저, 스무 살 차이거든요. 고모 랑도 마찬가지고. 우리 고모 마흔 밖에 안 됐는데, 보기에 는 기껏해야 서른 초반? 그 정도로 밖에 안 보여요.”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말이 지혁에게는 단도가 되어 심장에 박혔다. 최소영에 관한 이야기를 은채와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지그시 어금니를 물고 그는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럼 어머님이 마흔이라는 말씀이신지요?”

조용하게 식사를 하던 이 여사가 지혁의 눈길을 마주했다.

“왜요? 더 들어보이나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너무 젊어보이셔서 은채 새새어머니인가 생각했었습니다.”

소리 없이 웃던 이 여사가 지혁의 앞에 반찬을 죄다 밀어주었다.

“고맙네요. 이거 우리 그이나 은채 주지 말고 혼자 다 먹어요.”

“새엄마!”

“아무튼 여자들은!”

은채와 최 사장이 동시에 고함을 질렀지만, 지혁과 이 여사는 나직하게 웃음을 토해냈다. 화 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식사는 마무리를 지었다.

후식으로 응접실에서 과일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던 사이에 지혁은 화장실을 한 번 더 다녀 와야 했다. 일분 상간으로 울려대는 휴대폰 진동에 그는 발신자 번호를 보지도 않고 전원을 꺼버렸다. 그것 으로도 모자라 배 터리를 분리하고 나서야 지혁은 은채의 가족과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어울릴 수 있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나쁜 새끼!”

소영은 수십 번도 더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휴대폰을 냅다 창문으로 던졌다. 자그마치 네 시간을 기다렸다.
그 네 시간동안, 처음에는 전화를 받지 않던 지혁이 어느 순간부터 전원을 꺼놓고 있는 것 이었다.

“어디 간 거야, 어디!”

박살이 난 휴대폰과 달리 멀쩡한 거실 창을 사납게 노려보던 소영은 재떨이를 내던지고 소 리 질렀다. 와장 창,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거실창이 깨졌다.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물건을 내던지고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만약 이 순간 지혁이 눈앞에 있다면 살인이 라도 저지를 것만 같았다.

분명 그 계집과 있을 터, 그것이 더욱 소영을 극한으로 몰아갔다. 지금 당장 오라고 시답잖 게 명령을 해놓고, 오지도 가지도 않아?

소영은 곱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잔뜩 흩트려졌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거실과 침실 을 미친 여자처럼 서성거렸다. 자신에게 우지혁이라는 남자가 이토록 큰 의미를 차지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 지 못했다. 그저 즐기기 위한 만남이라 생각했다. 한 순간 쾌락을 즐기고 나면 그녀가 먼저 손 털고 헤어지 려했다. 허나, 여자 의 질투란 실로 무서웠다. 버림받는 다는 것에 대한 치욕은 매달린다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 웠다. 그것은 최 소영의 이름으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내가 준 기회를 차버리고, 나를 짐짝처럼 이곳에 처박아둬? 나쁜 새끼!”

스탠드를 집어던지고, 고함을 질렀지만 화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늘 낮, 방송국 드라마 측 에서 지혁이 출 연을 거부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렇지 않아도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나마 지혁이 먼저 만나자고 청했 기에 소영은 관대하게 그 부분을 용서해주려 했다. 원한다면 더 큰 먹잇감을 대령할 준비도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우지혁이 최소영을 우습게 알아도 너무 우습게 알았다. 이따위로 행동해서 좋을 게 없는데도 그는 주 제넘게 설치고 있었다. 가당치않게 자신을 떼어내려고 하지 않나, 어렵게 물색해준 드라마를 거절하지를 않 나.

한순간의 쾌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버림 받기 싫어 몸부림치는 여자, 최소영만 남았 을 뿐이었다. 그 리고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지혁을, 소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다짐 하고 다짐하게 만 들던 밤이었다.

밤이 깊어가고 새벽으로 치달을 무렵, 지혁은 지친 몸으로 아파트에 들어섰다. 현관에 들어 섬과 동시에 그의 얼굴 옆으로 무언가가 휙 날아갔다. 소름끼치게 차가운 소리를 내며 브랜디 병이 박살난 채 현관에 뒹굴었 다.

“무슨 짓이야?”

“어디 갔다 이제 오셨나, 몰라.”

얼마나 마셔댔는지 소영은 잔뜩 취한 채 빈정거렸다.

“아직 안 가고 있었나? 적당히 기다리다 안 오면 갈 것이지, 여기서 날밤이라도 새려고 했 어?”

지혁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기면서 소영의 곁을 무심하게 지나쳤다. 홱, 지혁의 팔을 잡아 챈 소영이 사납게 쏘아붙였다.

“드라마를 거절하셨더군.”

“안한다고 했을 텐데?”

“더 큰걸 바래? 말만해. 드라마든, 영화든, CF든…… 그 어떤 것이든 당신이 원한다면 기 꺼이 던져 줄 테니 까.”

은밀한 유혹을 하듯 소영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지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내가 원한다면……? 정말인가?”

“물론!”

“그럼 부탁하나 하지.”

“어떤…….”

표독스럽게 내쏘던 소영의 음성이 차츰 잦아들었다. 지혁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당신. 최소영. 내 앞에서 좀 사라져줘.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야.”

쫘악!

소영은 망설임 없이 지혁의 뺨을 갈겼다. 고개가 홱 돌아간 지혁은 불이라도 붙은 마냥 뜨 겁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어루만졌다.

“내가 하는 말이면 다 들어줄 것 같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군.”

“웃기지마. 나더러 사라지라고? 우지혁의 눈앞에서, 인생에서 물러나라고? 하!”

코웃음을 친 소영은 다시 한번 지혁의 뺨을 갈기려는 듯 손을 치켜 올리다 이내 떨어뜨렸 다. 그녀가 나직하 게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우지혁 씨, 그렇게는 안돼.”

“그럼? 어쩌자는 거야? 어쩌자는 건데? 최소영, 도대체 나와 어디까지 갈 셈이야!”

격렬하게 고함을 지르는 그와 달리 소영은 나긋나긋하게 대꾸했다.

“어디까지 갈 거냐고? 가르쳐줘?”

지혁의 어깨를 더듬어 내리던 소영이 그의 귀에 바짝 붙어서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나…… 이혼 할 거야.”

소영은 지혁의 셔츠 단추를 열고 그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훑어 내렸다.

“남편과 이혼 할 거라고.”

지혁의 얼굴이 잔인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반격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혼이라니. 이혼이라 니! 은채와 헤어지 려 했는데. 더 이상 진전되면 위험해질 것 같아서, 겨우겨우 그녀와 헤어지려고 마음을 먹었 는데. 이혼이 웬 말인가. 이혼을 해서 어쩌자는 건가!

“잘 생각해, 우지혁 씨. 당신 앞날이 화려해 지느냐, 시궁창에 처박히느냐…… 그것은 당신 선택에 달렸어.”

말을 마친 소영이 바닥에 나뒹구는 핸드백을 들고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지혁은 이를 악물 고 말했다.

“빌어먹을! 화려하게 살겠어, 최소영!”

“훗. 잘 생각했어. 현명한 선택이야. 진작 그래야지.”

걸음을 멈추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서는 소영에게 지혁은 펀치를 날리듯 싸늘하게 덧붙였다.

“내 곁에 최소영이 없는, 화려한 인생을, 살겠어. OK?”

웃고 있던 소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지혁은 비웃음을 물고 마지막 인사를 던졌 다.

“잘 가. 당신이 이혼을 하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러니 당신이 알아서 해.”

지혁은 침실로 들어서면서 소영과의 사이에 놓여진 문을 닫고 그녀의 시선을 차단했다. 빌 어먹을, 그녀가 자 신의 말을 알아듣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지혁은 나무문에 지친 몸을 기댔다.

이렇게 쉽게 헤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최소영과의 이별처럼 은채와의 이별도 쉬 울 수만 있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오는데, 극심한 통증에 신음마저 튀어나오려 하는데, 어떻 게 은채의 손을 놓지? 빌어먹을, 어떻게……! 그러나 지혁은 알고 있었다. 은채와 헤어지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최소영과 헤어지는 것임을. 소영은 결코 만만하게 물러날 여자가 아님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 다.

“일찍 다녀라. 다 큰 여자애가 왜 이리 늦게 다니는 게냐.”

지혁과 가까운 곳에 드라이브를 다녀오느라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귀가 한 은채는 부친 최 사장의 못마땅한 음성에 애교를 띠우며 생긋 웃음을 배어 물었다.

“죄송합니다.”

다른 때 같으면 한번 웃고 넘어갈 부친이 평소와는 좀 달랐다. 장승처럼 서서 그녀를 뚫어 져라 바라보고 있 었다. 은채는 자신이 너무 늦었나 싶어 벽시계에 흘긋 눈길을 던졌다. 아직 열한시도 안 됐 는데, 부친의 표정 은 한겨울 북풍한설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빠?”

“그 친구 만나느라 늦은 거니?”

“응.”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은채는 단박에 대답했다. 부모님께 인사도 드렸으니 당당하게 만 나도 되는 거 아 닌가? 하긴, 인사드리기 전에도 당당하게 만났지만.

“그만 만나라.”

뜬금없이 들리는 부친의 말에 은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못 들었겠지. 아니 내 얘기가 아 니겠지. 그러나 부친의 말은 간단명료하면서도 정확하게 핵심을 끄집어냈다.

“그 친구, 그만 만나 거라. 알았니?”

“아빠?”

“긴말 하지 않겠다. 어제 우리 집에 왔던 그 청년, 정리해라.”

“아빠!”

은채가 아무리 불러도 최 사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대꾸도 하기 싫다는 듯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오던 이 여사가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은채는 새엄마를 소리 높여 불렀다.

“새엄마, 아빠 왜 이래? 어제만 해도 아무 말 없었잖아. 오늘 아침만 해도 지혁 씨 괜찮은 사 람이라고, 새엄마랑 아빠랑 좋아했잖아! 근데 갑자기 왜 이래? 왜 이러는 건데?”

“여보?”

이 여사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최 사장은 아내와 딸에게 단호하 게 못을 박았다.

“그 청년은 아니야. 은채 짝으로는 절대로 아니야. 그러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해.”

휑하니 서재로 걸음을 돌리는 최 사장의 뒤를 은채가 바짝 쫓았다. 부친의 팔을 붙잡고 은 채는 그의 앞을 가 로막았다.

“설명해줘. 아빠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말해달란 말야!”

은채의 목소리가 고조되었다. 창백할 정도로 새하얗던 피부가 붉게 상기되었다. 흐트러진 숨 결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녀는 다시 한번 빽 고함을 질렀다.

“이해할 수 없어. 갑자기 통보하듯 이렇게 말하는 아빠를, 나는 이해 할 수가 없다고.”

최 사장은 은채의 어깨를 다독이려 들어올린 손을 모질게 접었다. 물론 어이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살아가다 보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설명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많은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건 옳지 않아요. 당신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은채에게 말해 주어야 하는 거잖 아요.”

이 여사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최 사장은 폐 깊은 곳에서 시작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이야기 하랴. 연기 를 했다던 딸아이의 남자친구 뒷조사를 해보았다고 어떻게 이야기 한다는 말인가. 그 청년 이 어떤 인생을 살 아왔는지 아내에게, 딸에게 무슨 낯으로 말한다는 말인가!

최 사장은 아내와 딸을 향해 야멸차게 입을 열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당신이나, 은채 너나. 당신도 그 친구 좋게 볼 필요 없어. 은 채 너도 명심해라.
이 시간 이후, 그 친구 이야기는 입에도 올리지 말거라.”

“아빠!”

그는 서재 문을 열었다. 은채가 전광석화처럼 재빨리 문고리를 잡아챘다. 최 사장의 길을 가 로막고 있던 은 채는 두서없는 말을 쏟아냈다.

“싫어, 싫어요, 아빠!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거야. 왜 이러는지 모르지만, 아니 뭣 때문에 그러는지 설령 안다 해도, 이럴 수는 없어, 아빠. 내 인생이잖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잖아. 내가 사랑 하는 남자라고. 그 런데 아빠가 왜 나서는 건데? 왜 내 인생에 이래라 저래가 간섭하는 건데?”

“너 이 녀석!”

숨 한번 쉬지 않고 다다다 퍼붓는 딸아이를 경악스럽게 바라보던 최 사장은 버럭 화를 냈 다. 이 여사도 은채 를 나무라듯 나직하게 딸아이의 이름을 외쳤다.

“은채야!”

“그만! 싫어요!”

은채는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 그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알고 이러는 게냐?”

쉽게 수긍할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은채는 격렬하게 그의 뜻을 거부하고 있었다. 최 사장 은 홧김에 말을 내 뱉고는 지그시 혀를 물었다. 얼굴을 떨어뜨리고 아무것도 듣지 않겠다는 듯 귀를 막고 있던 은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늘 해사하게 웃던 딸아이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 사람…… 어떤 사람인데?”

“됐다.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

차마 입을 열수가 없었다.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최 사장은 주먹을 그러모아 쥐고 은 채를 지나쳤다.
그러나 은채는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고 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은채가 낮게, 그러나 더 할 수 없이 단호 하게 말했다.

“하나만 얘기 할게, 아빠. 나 그 사람 어떤 사람인지 상관 안 해. 지혁 씨…… 어떤 사람이 든지, 난 내 느낌을 믿어. 내 심장이 하는 말을 믿어. 그 사람…… 내 사람이야. 내…… 심장이야.”

“최은채!”

최 사장의 역정과 노여움이 집안 전채를 뒤덮었다. 은채는 부친의 눈을 정시하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이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인지 뭔지는 나도 잘 몰라. 근데 아빠. 이거 하나는 정확 해. 우지혁은 최은 채의 남자야. 그리고 나는…… 아빠 딸인 것처럼, 그 사람의 여자고.”

홱, 몸을 돌리고 은채는 현관으로 내달렸다. 그녀의 뒤에서 아빠와 새엄마가 동시에 그녀를 불 렀지만 은채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리라 기대했던 아빠가 절 대 안 된다며 으 름장을 놓았다. 이러면 안 된다. 세상 누구보다 축하해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어떤 사 람보다 축복해주 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서늘한 적막감만 감도는 거실에서 이 여사는 쾅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남편을 질책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당신은 몰라도 돼!”

“여보?”

“젠장. 말 못하는 내 심정도 알아달라고! 말 할 수 없는 내 입장도 제발 알아주면 안 되 나?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건가?”

황망히 서 있는 아내를 외면하고 최 사장은 서재 문을 닫아 버렸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 질지 아무도 예견 할 수 없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급정거를 하고 차를 주차시킨 지혁은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은채에게 달려갔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은채를 집 앞까지 배웅하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은 채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지금 집 앞으로 와달라고 울먹이던 목소리에, 지혁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아 서 운전을 어떻게 하고 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은채야?”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은채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울컥, 그의 심장이 죄어들었다.
눈물로 젖은 은 채의 얼굴은 지혁의 가슴을 갈기갈기 난도질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은채를 일으켜 세우고 다그치던 지혁은 가만히 자신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그녀를 힘주어 안 아 줄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냥요, 그냥. 갑자기 지혁 씨가 막 보고 싶어서…….”

쉬어버린 음성으로 은채가 대답했다. 그게 이유가 아니란 것을 모를 만큼 지혁이 무지하지 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캐물을 수가 없었다. 말하기 싫다는 듯 조개처럼 단단하게 입을 다물어 버린 그녀에게 억지로 대답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주던 지혁은 은채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고 속삭였다.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거라면 기꺼이 도와 줄 테니까.”

“응. 알았어요. 그럴게요.”

들릴 듯 말 듯 한숨처럼 은채가 말했다. 울음을 그친 듯 다소 진정된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지혁 씨…….”

“음?”

향긋한 샴푸내음에 정신마저 혼미해진 지혁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어 지는 그녀의 말에 지혁은 손을 놓고 말았다.

“지혁 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그는 헉, 숨을 멈췄다. 혈관을 타고 돌던 혈액이 급속도로 식어 내려갔다. 일정한 속도로 뛰 고 있던 맥박이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간신히 쥐어짜듯 되물은 지혁은 은채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가로등 불빛에 비추이는 그녀의 눈이 예리 하게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은채는 피식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녜요.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에요.”

은채가 다가와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손을 잡았다. 지혁은 죄지은 사람처럼 은채의 눈길을 피했다. 혹시, 무 언가를 알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려움이 스멀스멀 밀려들기 시작했다.

놓아주려했다. 보내주려고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보내 준다는 말인가. 울먹이는 목 소리만 들어도 정신없이 달려올 정도로 그의 모든 신경과 촉각은 최은채를 향해 있는데. 한줄기 눈물을 흘 리는 모습만 보아 도 심장에 자잘한 유리조각이 수도 없이 박히는 기분인데.

허나, 시간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루 빨리 이 부드러운 손을 놓고, 이 따뜻한 눈을 외 면해야 한다는 것 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 놓아야 한다는 말인가. 언제 외면해야 한다는 말인가…….

티 없이 맑고 깨끗한 그녀의 이마에 조심스레 입맞춤을 하며 지혁은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 다. 그의 기간이 정해진 시한부 사랑은 막을 내려야 했다. 내일은, 내일은…… 이별을 말할 수가 있을까.

혼자만의 생각에 고립된 지혁은 알지 못했다.

그가 은채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이마와 턱에 자 잘한 키스를 흩뿌 리는 모습을 누군가 집요하게 쏘아보고 있음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만이 전부인줄 알았던 그의 주변에, 눈에 익은 소영의 차가 주차되어 있다는 것을 지혁은 긴 시간이 흐르도록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 『10』 텅 빈 강의실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은채의 한숨뿐이었다. 아침나절 강의도 빠뜨리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 까 고민을 하다, 답답한 마음에 학교에 나왔는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혁을 만나고 싶은 마 음도 그다지 들지 않았다. 무언가를 하긴 해야 하는데 그 무언가가 뭔지 도무지 감이 잡히 지 않는 기나긴 하 루였다.

“휴우…….”

또 다시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긴 한숨소리. 은채는 낙서를 끄적거리던 노트를 덮고 턱을 양손에 괴었다. 뭐 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빠가 왜 그러는지 이해불가능이었다. 딱 부러지게 무어라 말 해준다면 속이라 도 시원하겠건만, 아빠는 어제부터 자신과 눈도 맞추려 들지 않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 면 자신이 먼저 아빠에게 거리를 두었지만.

‘그 청년은 아니야. 은채 짝으로는 절대로 아니야. 그러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해.’

지난밤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아빠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것은 날이 밝고 시간 이 흘러도 여전히 은채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왜? 뭐가? 뭣 때문에? 도대체 왜!”

허공을 향해 따지듯이 소리를 지른 은채는 갑자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입술을 틀어 막았다. 언제부 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꽤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현욱이 그녀의 바로 뒤에 앉아 있었다.

“현욱아!”

은채는 반가움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지혁을 만나던 날, 그의 차에 타면 다시는 못 볼 거 라 현욱이 협박하 듯 으름장을 놓은 이후에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늘 곁에 있던 친구가 어느 날 사라져버려 서운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지만 지혁을 만나느라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 오랜만에 만나니 반가움 은 배가 되는 듯 했다.

“어쩐 일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살이 빠진 듯 야윈 얼굴을 보며 은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늘 개구쟁이 소년처럼 보이던 현욱은 어딘가 달 라보였다.

“너는?”

“나야 잘 지냈지.”

“잘 지낸 얼굴이 그 모양이야?”

무심하게 말을 던지는 현욱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은채는 머쓱한 듯 볼을 쓰다듬었다.

“내 얼굴이 어때서.”

“까칠해 보여. 너 잠 설치면 피부 까칠해 지잖아.”

은채는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현욱은 참 많은 걸 알고 있구나.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피는 친구의 예리함에 놀라고, 그런 우정에 고마움을 느끼며 은채는 현욱의 곁으로 다가섰다.

“너도 잠 못 잤니? 까칠해 보여. 살도 좀 빠진 거 같고…….”

“네 눈에 내가 보이긴 하는 거니?”

툭, 시비조로 현욱이 쏘아붙였다.

“왜 그래? 나한테 삐진 거 있어?”

“내가 애냐! 삐지게!”

벌떡 의자를 밀치고 일어난 현욱은 머리카락을 쥐어뜯다시피 쓸어 넘겼다. 초조한 듯 문밖 과 은채를 번갈아 보던 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오늘은 안 오냐?”

“뭐? 누구?”

은채는 현욱이 바라보는 복도로 눈길을 던졌다. 강의를 마친 상태라 그런지 복도는 한적하 다 못해 썰렁하기 까지 했다.

“네 전용 기사.”

“내 전용 기사?”

앵무새처럼 현욱의 말을 되묻던 은채의 미간이 곱게 접혔다. 뭔가 단단히 틀어진 모양이다.
현욱의 말속에는 금방이라도 찔릴 듯한 가시가 엿보였다.

“그래, 기사. 일주일만 운전을 해달라고 해놓고 한달이 넘도록 붙어 다니더니, 오늘은 어째 안 오냐?”

“생각 할 게 좀 있어서 내가 오지 말라고 그랬어. 그건 그렇고. 너! 말조심해. 기사가 뭐야, 기사가.”

“하, 그럼 기사 아냐?”

현욱은 싸움이라도 하려는 기세였다. 은채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간만에 만난 친구와 말 다툼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데 좋은 소리만 하자. 왜 그러니?”

현욱의 옷깃을 털어주면서 달래듯 말해보지만 소용없었다. 현욱은 단박에 그녀의 손목을 낚 아채고 으르렁거 렸다.

“아무 남자한테 이러지 마라. 네 이런 행동이 얼마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지 몰라서 하는 거야?”

“내가 뭘?”

“제기랄!”

무슨 말이냐는 듯 순진하게 쳐다보는 은채의 눈동자에 격하게 욕설을 내뱉은 현욱은 신경질 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내쳤다.

“그 자식 하고는 잘 돼가?”

잡힌 손목이 아픈지 금세 발갛게 손자국이 난 피부를 문지르던 은채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현욱은 비꼬듯 말을 덧붙였다.

“매일매일 지극정성으로 너 모시러 다니더라? 그 자식은 일도 안한데?”

입술을 질끈 깨문 은채는 양팔을 엇갈리게 팔짱을 끼고 현욱을 노려보았다.

“말이 심하다, 박현욱!”

“사실을 말하는데 심하긴 뭐가 심해.”

시큰둥하게 말하는 현욱을 한대 때리고 싶어 은채는 주먹을 움켜쥐어야했다. 그렇지 않아도 심란해서 머리 가 지끈거릴 정도였는데, 친구마저 두통거리에 합세하는 듯 했다.

“너 보다 나이가 많아도 한참 많아. 말조심해. 그 자식이 뭐니.”

“아하! 미안하다, 정정하지. 그럼 그 기생오라비 같은 노땅이랑은 잘 돼가?”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현욱이 이죽거렸다. 두 번 생각할 겨를 없이 은채의 가방이 현욱의 복 부에 내리꽂혔다.
인상을 찡그리며 그의 몸이 고꾸라졌다.

“너……!”

“한번만 더 그따위로 말해봐. 친구고 뭐고 없을 테니까.”

반가움도 잠시, 현욱의 빈정거림에 상처를 받은 은채는 칼바람이 일만큼 냉정하게 몸을 돌 렸다. 그녀의 뒤로 현욱이 싸늘하게 뇌까렸다.

“우리가 친구이긴 한거야? 제기랄! 우리가 친구이긴 한거냐고!”

“왜 이래. 너까지 왜 이러냐고!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잠잠하게 있던 너까지 왜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 드는 거니!”

냅다 가방을 팽개치고 은채는 고함을 질렀다. 서 있던 그 자리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현욱 이 보기 싫다는 듯 얼굴을 다리 사이에 묻었다. 차라리 지혁을 오라고 하는 게 나을 뻔 했다. 현욱과 되지도 않 는 말다툼을 할 바에야 다소 불편하더라도 그와 함께 있는 게 훨씬 마음이 안정될 것만 같았다.

“너…… 무슨 일 있어? 혹시, 그 자식…….”

현욱은 망설이듯 입을 열다 은채의 사납게 치켜 올라가는 눈매를 보고는 말을 얼버무렸다.

“그…… 남자랑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런 거 없어.”

단정 짓듯 은채는 강하게 못 박았다. 안 좋은 일?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지 않는가. 현욱을 노려보던 눈길을 거 두고 은채는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렸다. 막 강의실 문을 빠져나갈 때, 현욱이 그녀를 불러 세 웠다.

“은채야!”

은채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뚝, 제 자리에 선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묵묵히 현욱의 뒷말을 기다렸다.

“너…… 아직 어리잖아. 우리 아직 어리잖아. 꼭…… 지금 진지한 만남을 가져야겠니?”

“어리다고 사랑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어.”

단호하게 되쏘는 그녀의 말에 현욱은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사랑? 너 그 자식 사랑한다는 말을 한거야? 그래?”

날렵한 기세로 다가선 현욱은 은채를 돌려 세우고 물어뜯을 뜻 되물었다. 적막감만 감도는 강의실에 현욱의 고함이 메아리쳤다.

“제기랄! 사랑? 사랑!”

“오버하지 마. 내가 사랑한다는데 왜 네가 열 받고 난리니.”

“그래! 사랑해! 사랑하라고! 근데 왜 하필 그 자식이야. 왜 그 자식이냐고!”

은채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미친 듯이 소리치던 현욱은 은채를 쓰러뜨리기라도 하는 양 거세게 벽으로 몰 아붙였다.

“다들 왜 이래? 왜 지혁 씨는 안 된다고 하는 건데? 너는 이유가 뭐니. 그 사람 안 된다고 하는 이유가 뭔데?
왜 가만히 있다가 지금 이러는 거야. 아빠도, 너도…… 이유도 없으면서, 뚜렷하게 말할 것 도 아니면서, 왜 난리야. 왜!”

현욱의 팔을 뿌리치고 은채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누구하나 도움이 되는 사람이 없었다.
온통 지뢰밭에 서 있는 것처럼 한걸음 내디디기가 힘겨울 지경이었다. 은채는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넌 내 친구잖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같이 기뻐해줘야 하잖아. 그게 친구잖아.
그렇잖아, 현욱아… ….”

그 순간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휴대폰 벨소리가 은채와 현욱의 사이를 메웠다. 은채는 주섬 주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 번호를 확인한 다음에야 폴더를 열었다. 아빠의 전화라면 받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 나 눈에 익은 번호는 다름 아닌 고모의 전화번호였다. 구세주라도 만난 듯 은채는 단박에 우울한 기분을 떨 쳐냈다.

그래, 아직 고모가 있었다. 고모라면 기꺼이 지혁과 자신의 사이를 지원해 줄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아빠를 설득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은채의 가라앉았던 목소리는 원래대로 생기가 돌아왔다.

“고모?”

“어디니, 은채야?”

“학교. 왜?”

“지금…… 고모 집으로 좀 올래?”

수화기를 통해 소영의 긴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왠지 고모의 목소리가 좋지 않은 것 같아 은채는 불쑥 걱 정이 스며들었다. 고모부와 무슨 문제라도 있나…….

“급해?”

“그래, 급해. 당장 올 수 있지?”

다른 날과 달리 섬뜩한 차가움마저 느껴졌다. 은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나친 생각이야.
기분이 나빠서인 지 모든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신을 질책하고 대답했다.

“어. 지금 갈게.”

고민 상담은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뤄야 하나보다. 울적해지는 마음을 추스르고 은채는 강의 실을 빠져나갔 다. 현욱에게 화난 감정을 드러내느라 일부러 인사도 하지 않고 냉정하게 그를 무시했다.

“나…… 너랑 친구하기 싫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 생기는 거, 정말 싫다…….”

바쁘게 나가는 은채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현욱이 나직하게 고백을 했지만, 높게 쌓인 벽처 럼 차가운 등만 보 이던 은채는 그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 어떤 일이라도 마다 안 해. 일자리를 구할 수만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정말이냐?”

믿을 수 없다는 듯 상대편에서 되물었다. 몇 해째 연락을 두절하고 지내던 친구에게 불쑥 전화를 걸어 일자 리를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입장이었으나, 자꾸 확인하는 듯한 친구 녀석이 귀찮기만 했다.
지혁은 짜증스럽 게 대꾸했다.

“그래. 정말이야. 됐어?”

“흠, 정말 아무 일이라도 괜찮다는 말이지.”

숫제 욕설이라도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혁은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욕설을 삼키기 위 해 메마른 침을 꿀 꺽 삼켰다.

“그럼 연기는? 연기 생활은 안하나?”

“빌어먹을! 일자리 한번 구해주는데 더럽게 꼬치꼬치 캐묻는군. 때려 쳤어. 그러니 일자리 가 필요하지.”

약 올리는 듯한 어투에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지혁은 전화기를 쥔 손에 애써 힘을 주었다.

“그렇군. 잘됐다고 축하해야 하나? 하여간, 빠른 시일 내로 일자리 구해보도록 하지. 뭐, 대 단한 건 기대하지 마라. 너 알다시피 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근사한 자리는 못 구해준다.”

“알았다, 인마!”

“자리 나는 대로 연락하마.”

“어이, 친구! 고맙다.”

지혁은 당장이라도 일자리가 생긴 마냥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수화기 너머에서 호탕한 웃음 소리가 터져 나 왔다.

“별말씀을.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라.”

“물론이지.”

통화를 마치고 난 다음에야 지혁은 갓길에 세워놓은 차를 출발 시켰다. 은채가 오늘은 데리 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기에 마음 놓고 직장을 알아보러 다녔지만, 이렇다할 수확이 없었다. 며칠 전부터 신문의 구인구직 광고란을 보고 틈나는 대로 전화를 했어도 불경기 탓인지 일자리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였다.

새로 시작해야 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하나하나 잘못된 행보를 기억에서 소각시키고 다시 태어나야 했다. 비 록 은채를 보내 주어야 하나, 그녀의 손을 놓고 난 다음에도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힘들겠지. 그녀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생각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막상 닥치면 지금보다 더한 아픔이 자 신을 괴롭히겠지. 핸들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관절마다마디가 새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은채야…… 난 왜 그렇게 살아 왔을까. 너를 만날 줄 알았으면, 내 삶에 네가 다가올 줄 알 았으면, 그랬다면 …….

가슴이 먹먹해졌다. 숨을 쉴 수가 없을 만큼 심장이 옥죄어 들었다. 그런 지혁의 귀에 휴대 폰 벨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힐끗 액정화면을 보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창문 밖으로 내던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겨우 폴더를 열었다. 은채와 헤어질 때까지는 소영을 자극해서 이로울 것은 없었다.

받기 싫은 전화를 간신히 받으며 지혁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우리 집으로 와.”

싸늘한 음성이었다. 어떤 거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 강하게 실려 있었다. 지혁은 나직 하게 욕설을 내뱉 고는 핸들을 내리 찍었다.

“왜?”

“긴말 않겠어. 우리 집으로 와.”

명백한 명령. 다른 말은 하지 않겠다는 듯 소영은 같은 말을 내내 되풀이했다. 지혁은 한탄 처럼 말을 쏟아냈 다.

“제발…… 이러지 말자. 부탁이니까, 나 좀 내버려둬.”

왜 이 여자를 미끼로 택했을까.

왜 하필이면 이 여자를 먹잇감으로 노렸을까.

빌어먹을, 나는 왜 구역질나는 시궁창에 처박혀서 허우적거렸을까.

후회보다 더한 절망의 나락이 그를 옭아맸다. 벗어나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단단히 조여들 기만 할뿐 최소 영이라는 여자는 좀처럼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끝내자고, 우리 여기서 끝내자고…….”

메마른 음성이 탁하게 갈라져 나왔다. 매달리라면 매달릴 수도 있었다. 고개를 숙이라면 일 말의 망설임 없이 고개도 숙일 수 있었다. 최소영에게서 벗어 날 수만 있다면 지혁은 간도 쓸개도 다 내팽개 칠 수 있을 것 같았 다.

“끝내고 싶으면 와.”

유혹하듯 나직하게 속삭이던 소영의 말을 잘못 듣기라도 한 양 지혁은 황망히 되묻고 말았 다.

“뭐?”

“끝내고 싶다고 했잖아. 끝내 줄 테니까 오라고.”

정면을 주시하는 지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 여자가 지금 뭐라 한 거지?

“끝내는데 꼭 만나야 하나?”

정곡을 찌르는 그의 물음에 소영이 호호, 웃음을 터뜨렸다. 지혁은 욕설을 내뱉으며 말을 계 속했다.

“만나고 말고 할 필요 없이, 이 전화를 끝으로 서로 안 봤으면 해. 그게 더 낫지 않겠나?”

“아니. 만나야해. 마지막 기회야, 우지혁 씨. 앞으로 나를 안 보려면 지금 당장 우리 집으로 와야 할 걸?”

“젠장! 이유가 뭐야? 그냥 끝내도 될 걸 굳이 집으로 오라는 이유가 뭐냔 말야!”

“와보면…… 알아. 그래도 우리가 쌓아온 정이 있는데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안 그래, 우 지혁 씨? 기다리고 있을게.”

대답도 듣지 않고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여보세요? 이봐, 최소영? 젠장!”

격하게 울화를 터뜨리면서도 지혁은 거칠게 핸들을 꺾고 말았다. 귀청을 찢을 듯한 클랙션 소리가 지혁의 차 를 바짝 쫒아 왔지만 그는 속력을 늦추지 않았다.

마지막이라고 하지 않는가.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이게 끝이라고 하지 않는가. 가야 했다.
이 더러운 만남과 악연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머릿속이 공황상태에 빠졌다. 가슴은 공허했고 시선을 들어 바라보는 곳은 짙은 어둠뿐이었 다. 사랑이 영원 할거라는 기대는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에 산산이 부서졌다.

영원한 사랑? 엿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영원한 사랑 따위 다 나약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소리야! 소영은 악을 쓰고, 피를 토하듯 소리 지르고 싶었다.

남편의 외도에 반발하듯 바람을 피웠다. 젊은 계집들이랑 나날이 스캔들을 만드는 남편을 비웃듯 그녀도 수 많은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지혁은 달랐다. 아니, 시작은 엔조이였으되 어느 순간부 터 소영은 지혁 에게 많은 걸 바라게 되었다. 남편에게서 받지 못한 것을 보상받듯 지혁을 놓치기 싫었다.
어떻게든 붙잡아 야 했다. 남편에게서 버림 받은 여자가, 한낱 즐기기 위해 만났던 남자에게도 밀려날 수는 없었다. 자신이 가 진 부와 권력을 모두 이용해서 지혁을 묶어 두어야했다.

허나, 어찌하랴.

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길이 틀어져 버렸다는 말인가!

지난 밤, 애정 없는 남편과의 사이를 정리하기위해, 조언을 구한답시고 오빠내외 집을 찾은 것이 잘못일까?

거기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사실을 알고 말았다. 그때 서야 잊고 있었던 기억이 어느 날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어둠 속에 서 있던 지혁과 자신의 조카, 은채를 보 는 순간 기억상실 증에 걸렸던 환자가 기억을 되찾듯 소영은 선명하게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언젠가 지혁을 기다리던 레스토랑에서 우연찮게도 은채를 만났었다. 그날, 은채를 보내고 난 뒤 나타났던 지 혁은 지나치듯 무심하게 물었지만,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같이 있던 사람, 누구였어?’

난, 그날 뭐라고 했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얼마 후 자신이 했던 말은 토씨하나 빠트리지 않고 떠올릴 수 있었다. 난데없이 휴대폰 번호가 바뀌 었을 때. 그때 자 신이 했던 말.

‘휴대폰 번호는 갑자기 왜 바꾼 거야?’

‘전에 쓰던 것을 분실하는 바람에.’

‘어디서 잃어버렸는데?’

‘당신 만나러 아다지오 갔을 때 잃어버린 것 같아.’

그래, 아다지오에서 지혁을 기다렸었지. 하지만 어떻게? 두 사람은 거기서 어떻게 만났다 는 말인가?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지혁과 자신의 사이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이른바, 우지혁이 최소영 과 헤어지고 싶다 고 했던 같잖지도 않은 일. 서서히 아귀가 맞아 들어가는 이야기들. 퍼즐 맞추기처럼 쏙쏙 제자리를 찾는 어 처구니없는 장면들.

불현듯 미친 여자마냥 비실비실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은채의 남자친구를 소개 받기 위해 그 집에 갔던 날,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웃음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급기야 히스테릭하게 퍼져나가던 웃음을 간신히 멈추고 소영은 지그시 혀를 물었다.

그날 좀처럼 먼저 전화하는 일이 없던 지혁의 전화를 받고, 그녀는 기뻐했다. 당장 오라는 그의 말이 반가워, 서운해 하는 조카를 달랠 사이도 없이 그의 아파트로 달려가기 바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이런 사실이 숨 겨져 있으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질투.

뼛속깊이 파고드는 치졸한 질투라는 이름. 떨쳐내려고 이를 악물어도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이름, 질투(嫉妬).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냉담한 모습만 보이던 지혁이, 하다못해 섹스를 나누는 순간에 도 빈틈을 보이지 않던 그가, 은채의 앞에서는 세상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만지면 부서질까 조심스럽게 그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이마에, 볼에, 콧날에, 턱에 수없 이 입맞춤을 하 던 그는 생소해 보였다.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달라보였다.

비릿한 피내음이 혀끝을 타고 전해왔다. 문득 정신을 차린 소영은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노 려보았다. 냉소를 배어 문 그녀는 옷을 하나하나 벗기 시작했다. 슬슬 준비를 하고 있어야지.

이건 은채를 위해서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밖에 없는 내 소중한 조카를 위해서다. 결코 남 자에게서 버림받 았다는, 다른 여자에게 밀려났다는 추악한 질투가 아니라……. 그리고 우지혁은 나, 최소영 을 기만하고, 굴 욕적으로 만들었으며, 우습게보았던 대가를 철저하게 치르는 것이겠지…….

소영의 매끄럽고 탄력적인 나신의 몸이 거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을 받아 요염 하게 빛을 발했다.
거실 창 커튼을 닫는 그녀의 입가에 소름끼치도록 서늘한 미소가 새겨졌다.

“벗어!”

소영의 음성이 귓가에 전해지는 순간, 지혁은 이 집에 발을 디딘 자신의 우매함에 치를 떨 었다. 실오라기 하 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소영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자신감에 쌓인 채 석상처럼 굳 어버린 지혁을 코너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벗으라고, 여기서!”

“미쳤어?”

집안에 누가 있나 둘러볼 여유로움 같은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혹여 어디선가 사람 이 나타날까 불안 과 초조함을 드러내던 지혁은 카펫 위에 떨어진 소영의 옷가지를 내던졌다.

“입어.”

“말귀 못 알아들어? 벗으라고 했어. 당신, 우지혁 씨 말이야, 당신 옷 벗으라고.”

성큼 다가서는 소영이 마치 더러운 병균이라도 되는 양 지혁은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양손 을 앞으로 내밀어 거리를 두려했지만 소영은 막무가내로 그에게 달라붙었다.

“정신 나갔군, 최소영.”

잇새로 씹어뱉듯 나직하게 읊조리는 그를 그녀가 비웃었다.

“우리 집에서 섹스 하는 거 처음도 아닌데, 유난스럽게 굴 필요 없잖아. 왜, 침실이 아니어 서 곤란해?”

“환장하겠군! 이러자고 오라한건가? 마지막이라는 말로 유혹해서, 이런 짓거리를 하려고 오라 한거야?”

“왜? 그럼 안돼?”

“하! 이것 봐, 최소영 씨. 나는 정리를 하러 온 거야. 당신과 짐승처럼 얽히려고 온 게 아 니라.”

“그래. 정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안기고 싶다는데 이해 못해? 언젠가 당신 입으 로 그랬잖아. 마지 막 서비스는 확실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아마도 내 앞에서 미진이를 떼어낼 때, 그런 말을 했지?”

지혁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이 금방이라도 입술을 뚫 고 튀어 나오려했 다.

“마지막 서비스라 생각하고 시작해. 어려운 일 아니잖아?”

나른하게 속살거리던 소영은 지혁의 재킷을 벗겼다. 그 순간, 거세게 밀치는 지혁의 손길에 의해 소영의 몸 이 볼썽사납게 나뒹굴었다.

“치워! 치우라고! 끔찍하다. 지긋지긋하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당신이라는 여자와 이제는 섹스고 뭐 고 하기 싫다는데, 그런데 이런 식으로까지 해야 하는 건가? 그래?”

나가야 했다. 대화가 불가능한 여자와 더 이상 말도 안돼는 실랑이를 벌인다는 건 무의미한 짓이었다.

“빌어먹을, 최소영! 당신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었어.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고. 한번만 봐 주라. 아주 더러운 놈에게 걸렸다고 생각하고, 나 같은 놈 깨끗하게 잊어줘. 미친개에게 물린 셈치고, 엿 같은 상황에 잠시 닥쳤 었다고 욕이나 한바탕 퍼부으란 말야!”

울부짖듯 격하게 말을 마친 그가 소영에게서 도망치듯 몸을 돌렸을 때, 지혁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제자 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현관 입구에 그녀가 서 있었다.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장면을 그녀가, 은채가 낱낱이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한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고 핏기하나 없는 얼굴로 서 있던 은 채는 정물화처럼 미동 없이 자신과 소영을 정시하고 있었다.

지혁은 홱 고개를 돌려 소영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녀가 묘하게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그의 옆에 나란히 섰 다. 은채의 몸이 눈에 띄게 휘청거렸다. 지혁이 은채를 잡기 위해 앞으로 나가려하자 소영이 재빠르게 그의 손을 잡아채고 달콤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은채를 오라고 해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네. 인사하렴, 은채야.
고모 애인이야. 어 쩌나,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하네.”

미리 준비해놓은 로브를 걸치며 소영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말을 덧붙였 다.

“지혁 씨, 당신은 말 안 해도 알고 있겠지? 은채가 내 조카라는 거…….”

세 사람의 시선이 서로에게 얽혀들어 구속되고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속박 당했다.

그리고…… 그가 속한 세계가 잔혹하게 무너지는 순간, 시간은…… 정지해버렸다.
************************ 『11』 해가 뉘엿뉘엿 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최 사장은 무거운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오늘 하루만도 수 십 번 넘게 확인을 했건만 그는 불안함에 안절부절못하며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날세. 은채는?”

상대편에서 전화를 받자마자 최 사장은 은채의 행방부터 물었다. 귀하디귀하게 키웠다. 세상 만사 나쁜 해악 은 딸아이의 주변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곱디곱게 키워왔다. 그 딸아이가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 했을 때, 못내 서운하고 씁쓸해도 지금의 심정처럼 가슴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왜 하필이면 그런 녀 석일까. 누구보다 고운 딸이, 세상 어떤 것보다 소중한 딸이 왜 하필이면 그런 녀석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말 인가.

이번 일로 딸아이의 경호 겸 감시를 맡은 사내의 음성이 전화기너머에서 들려왔다.

“강의를 마치고 지금 방배동 사모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방배동에?”

누이 집에? 거긴 왜? 최 사장은 툭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삼키고 초조한 듯 주먹을 움켰다 쥐었다를 반복했 다. 딸아이가 고모 집에 간 게 무슨 큰일이라고 이러는 걸까. 허나 불안했다. 말도 못하게 불안해서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오늘 지혁 군은 만나지 않았나?”

“네. 학교에서 바로 방배동으로 오셨습니다.”

“저녁에 지혁 군을 만나는 것 같지는 않고?”

“글쎄요. 그건 계속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 알았네. 잘 지켜보고 있다가 집에 들어가면 자네도 퇴근하게.”

“네.”

전화를 끊고 기계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인 최 사장은 다른 곳에 전화를 했다. 역시나 그곳도 신호가 울리자마 자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 친구는 오늘 하루 뭘 했는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우지혁이라는 인물이 무얼 하든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는 인물이었 다. 허나 거기에 딸아이가 연관되어 있다면, 더 이상 뒷짐 지고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 종일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뭘 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우지혁 씨가 만났던 사 람들과 이야기를 나 눠보니 직장을 구하고 있다 합니다.”

“직장?”

“네. 닥치는 대로 알아보고 있는 형편인가 봅니다. 오늘 우지혁 씨가 들른 곳만 해도 막노 동이나 다름없는 기 사 직부터 가리지 않고 일자리를 구하고 있더군요.”

“그렇군.”

연기를 그만 두었다더니 빈말은 아닌가보다. 그러면 무얼 하나. 이미 물은 엎질러 진 것을.
아니 서로의 길은 다른 것을. 최 사장은 가죽의자에 몸을 묻고 담배케이스에서 담배를 하나 빼어 물었다. 그래 도 오늘은 딸아 이를 만나지 않았다니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 수고하게. 혹시 그 친구가 우리 은채를 만나면……. 아닐세. 그럼 나중에 다시 통화 하겠네.”

“네. 알겠습니다.”

“참, 그 친구 지금도 직장을 구하고 있나?”

차라리 우지혁을 따로 만날까? 그게 오히려 사태를 진정시킬 것 같았다. 은채의 주변에서 멀어지라고 단도 직입적으로 말해볼까, 하는 생각이 최 사장의 뇌를 지배했다. 한번도 사람들을 업신여긴 적 은 없었다. 부와 명예라는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식을 앞세운 일에는 부모도 결국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마는가보다. 한평생을 올곧게 살아왔는데, 딸아이가 사랑하는 남자는 기준미달이라는 이유로 멀리 보 내버릴 생각을 하다니. 직장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좋은 일자리를 알아봐주고, 그게 아니라 연기가 계속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후원자가 되어 줄 수도 있었다. 단, 내 딸 은채와 헤어져준다면.

“이 시간까지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나?”

“아닙니다. 우지혁 씨는 좀 전에 방배동의 한 주택에 들어갔습니다.”

“뭐야!”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가죽의자가 뒤로 홱 자빠졌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발아래에 떨어 진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최 사장은 버럭 언성을 높였다.

“거긴 왜? 언제?”

“네? 저어…….”

상대편이 머뭇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최 사장은 채찍질을 가하듯 다그쳤다.

“언제 들어갔냐는 말일세. 언제!”

“한 삼십분 되었습니다.”

“젠장!”

거칠게 전화를 내동댕이치며 최 사장은 험악한 욕설을 중얼거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만나는 것만 조심하면 된다고 여겼는데, 누이동생까지 주시하고 있어야 했다니. 어리석었다. 당연히 그래야 했음에 도 불구하고 눈앞에 닥친 일에만 조심에 또 조심을 하고 신중을 기했다. 다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다 부질없는…….

최 사장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은채의 경호를 맡고 있는 사내의 번호를 눌렀다.

“은채가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나?”

“네? 무슨 말씀이신지…….”

“빌어먹을! 은채가 그 집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됐냐는 말일세!”

벗어 놓은 슈트 상의를 팔에 꿰고 최 사장은 격하게 말을 쏟아냈다. 이제야 무슨 뜻인지 알 았다는 듯 전화기 너머의 사내는 시간을 가늠하는지 한참을 뜸들이다 대답했다.

“대략 오 분에서 십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젠장! 당장 들어가! 당장 들어가서…….”

최 사장은 어금니를 물었다. 들어가서 어쩌란 말인가. 빌어먹을, 왜 이 모양이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 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어 그 어떤 생각도 판단도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최사장의 음성이 가늘게 떨려나왔다.

“내가 지금 가겠네. 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게. 혹여, 은채가 나오면…… 조심해서 뒤따르도 록.”

“네, 알겠습니다.”

진정하자, 최은채.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고 배웠잖니. 진정하자, 진정.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보아 도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서 있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얼마 나 오랫동안 숨을 멈추었는지 폐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은채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불규칙한 심호흡 을 정리했다. 머 릿속이 깨어질 듯 아파왔다. 수십 마리의 벌에게 집중공격을 당하듯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가 없었다.

이게 뭐지? 눈앞에 펼쳐진 이 상황은, 이 일은 뭐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순간, 지혁과 만나지 말라고 하던 부친의 음성이 섬광처럼 귓가에 내리꽂혔다. 이거였구나.
갑자기, 난데없 이, 뜬금없이 지혁은 안된다고 하던 아빠의 말은, 결국 이걸 뜻하는 거였구나.

휘청, 꼿꼿하게 서 있으려 해도 자꾸만 넘어지려 했다. 은채는 장식용 콘솔박스를 짚고 간신 히 몸을 지탱시 켰다. 메마른 입술을 축이고 굳어버린 혀를 움직였다. 제발, 제발 흔들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있다면, 의연하 게 이 상황을 대처할 수만 있다면…….

“뭐야, 이거?”

떨림과 달리 말투는 톡, 쏘듯 날카로웠다.

“지금 이 상황,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이제는 빈정거림이 묻어나왔다. 은채는 입술을 질끈 물고 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모인 소영을 바라보 았다. 두 사람의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흐트러진 옷매무새의 지혁과 알몸에 로브만 걸친 고모의 모습이 은 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가 놓여 있는 느낌에 숨이 막혀왔다.

“나, 울면서 뛰쳐나가야 이 상황에 맞는 연출이 되는 거야? 그래?”

은채는 한걸음, 그들에게로 다가섰다. 다가서는 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듯 했다.
입도 벙긋하지 못 하는 지혁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해주길 바랐는데, 해명이든 변명이든 어떤 말이라도 해 주길 바랐는데 지혁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지혁 씨는 여기…… 어떻게 왔어요?”

지혁의 고개가 돌려지는 순간, 소영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물렸다. 은채는 얼른 손을 내저 었다.

“아니. 대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었어요. 그러니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왜냐하면, 나도 귀가 있고, 눈이 있으니까.”

지혁과의 거리가 차츰 좁혀졌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은채는 지혁을 볼 수가 없었다. 눈으로 보고 있어도 가 슴으로 느낄 수가 없었다. 그가 눈앞에 있는데 천리 밖에 있는 것처럼 만질 수가 없는 듯 했다.

은채는 눈자위가 뻑뻑해지는 눈을 들어 고모를 응시했다. 다르다. 여태 그녀가 알고 지내왔 던 고모의 모습이 아니었다. 항상 부드럽고, 따스하던 고모가 아니었다. 무섭고, 소름끼치고, 끔찍한 모습의 전 혀 다른 사람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

“고모?”

확인하듯 불러보았다. 그러나 확인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전혀 다른 모습의 여자이지만, 그 녀는 고모가 분명 했다.

“급하다고 한 용건이 이거였어?”

“그래.”

지혁을 부여잡고 있던 손을 놓고 소파에 앉은 소영은 냉담하게 말했다.

“왜?”

담배를 빼어 물고 불을 붙이는 소영의 손짓을 보며 은채는 따지듯 쏘아붙였다.

“너도 알아야 하니까.”

“뭘?”

담담하게 말하는 소영과 대조적으로 은채는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음성도, 눈빛도, 그 리고 손도…….

“뭘! 뭘 알아야 하는데. 내가, 내가 뭘 알아야 한다는 건데!”

소영에게 말하고 있으나 은채의 시선은 지혁에게 날아갔다. 그가 흐릿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흐릿한 눈동자가 은채의 가슴에 생채기를 만들었다. 지혁은 저런 눈빛을 가지지 않았다.
상처 입은 듯한 지혁의 눈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어, 은채는 홱 고개를 돌렸다. 왜 상처 입은 얼굴을 하고 있지? 왜 상처 받은 눈빛을 하고 있는 거지? 정작 상처 받은 사람이 누군데. 누가 상처를 입었는데!

“은채야…….”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메마르고 탁한 어조로 조심스럽게 부르고 있었다. 목소리는 변 함이 없는데, 그 는 변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지혁이 아니었다. 은채는 새된 음성으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만! 내 이름 부르지 말아요. 나, 나…… 아무래도 꿈을 꾸고 있는 거 같아. 아주 몹쓸 꿈을 꾸고 있는 것 같 아요. 깨고 싶은데, 어서 깨어나고 싶은데 깨어 날 수가 없어. 내가 뭘 잘못한거지? 내가 잘 못한 게 뭔데? 내 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 왜?”

“은채야, 내 말 좀 들어봐…….”

그가 다가왔다.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다가서고 있었다. 은채는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싫어. 내 옆에 오지 말아요. 다가오지 마!”

거짓말처럼 지혁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 모습이 오히려 은채를 고통스럽게 했다. 은채는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날렵하게 지혁의 몸이 움직였지만, 날카롭게 빛나는 그녀의 눈빛에 그는 발밑에 뿌리라도 내린 마냥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가고 싶다. 어서 나가고 싶었다. 나중에, 좀더 정신이 맑아지면 그때 다시 생각해야지. 지금 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보았는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다 잊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고모 가 무슨 짓을 했는 지, 지혁이 그런 고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는 본 것이 없고 들은 것도 없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힘겹게 일으켜 세웠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고꾸라질 것 같아 은채는 이를 악 물었다. 후두 둑, 눈물마저 솟구쳤다. 천장을 노려보며 식도 안으로 돌덩이를 삼키듯 뜨거운 침을 삼켰다.

“은채야!”

돌아서는 그녀의 뒤로 소영이 다급하게 불렀다. 은채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여전히 가운만 걸치고 있는 고모가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니, 집안에 들어섰을 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 으로 지혁의 곁에 서 있던 모습이 자꾸만 은채의 뇌리를 헤집었다.

“미안……하다.”

머뭇거리는 말투. 흔들리는 소영의 음성. 은채는 힘겹게 말을 내뱉은 소영을 싸늘하게 노려 보았다.

“뭐가? 뭐가 미안한데? 미안한 짓을 왜 하는데?”

성큼, 소영에게 걸음을 옮기며 은채는 숨도 쉬지 않고 쏘아붙였다.

“고모가 오늘 뭘 기대하고 날 불렀는지 모르지만, 난 아무것도 못 봤어. 들은 것도 없어.
그러니 여기서 상황 종료야! 게임아웃이라고! 지혁 씨를 여기 불러들여서, 내게 뭘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르지 만…… 고모 실수했 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어. 잊지 마. 고모는, 고모를 사랑하고 믿고 따르던 조카를 잃었어.
지금, 이 순간부 터!”

“너도 봤잖아. 저 남자가 어떤 남잔지 네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한마디도 빼놓지 않 고 다 들었잖아! 정신 차려, 최은채. 네가 사랑한다는 남자, 네가 사귄다는 남자가 어떤 남 잔지 똑똑히 보란 말야. 그 실체를, 번듯한 외모 아래 뭐가 숨어 있는지 그 이면을 보라고, 이 멍청한 것아!”

“아니. 이제 와서 내 생각 해주는 척 하지 마, 고모. 역겨워!”

“은채야!”

은채의 냉랭한 이죽거림에 소영은 경악하듯 언성을 높였다. 은채는 비웃음을 물고 지혁과 소영을 번갈아 노 려보았다. 지혁은 등을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처럼 은채 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뭘까.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는 언제나 먼 곳에 있었는데 은채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적어도 나를 생각했다면, 고모는 이런 짓을 벌이면 안돼. 적어도 조카를 생각했다면, 그런 차림으로 있지는 않았겠지. 고모의 지금 모습이 얼마나 웃기는지 알아? 남편을 회사에 보내놓고, 외간 남자 불러들여서…… 그, 그…… 말도 안돼!”

험악한 욕지기를 내뱉은 은채는 할말을 잃고 황망히 눈길을 떨어뜨렸다. 고모와 지혁이 뭘 하고 있었는지 떠 올리자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은채는 지그시 혀를 물었다. 상상하지 마, 그런 일은 없었어.
최소한 내 눈으 로 목격하지는 않았어!

“고모부가 없는 집에서 다른 남자와 부도덕한 짓을 벌이는 고모를, 내가 여전히 가족으로 인정해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고모?”

“느이 고모부가 먼저였어!”

소영의 찢어지는 듯한 음성이 거실을 메웠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던 소영이 머리를 쥐어 뜯으며 괴성을 질 렀다.

“그이가 먼저 나를 배신한거라고. 내가 왜 욕을 들어야 하지? 그이는 멀쩡한데, 너희 고모 부는 뭘 해도 괜찮 은데, 나는 왜 너에게 욕을 들어야하지?”

“착각하지 마, 고모. 그렇다면 고모가 오늘 불러야 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고모부였어.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고모가, 정작 보여주고 싶어 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고모부였어.
안 그래? 고모는 뭔가 엄청난 실수를 한거야.”

“너도 봐야해. 네가 환상을 갖고 있는 남자가 어떤 남잔지, 너도 알아야 하잖아. 이 남자, 네가 생각하는 그런 남자 아냐. 우지혁이라는 이 남자, 스타로 발돋움하려고 여자들…….”

“그만! 거기서 그만둬, 최소영 씨.”

지혁의 고함소리가 메아리쳤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은채 앞에서 나를 찢어발기고, 짓밟고 해야겠어? 그만하자. 다 보여주지 않았나.
그 정도면 된 거 아닌가? 빌어먹을! 어디까지 가야 속이 시원하겠어! 뭘 얼마나 더 해야 당 신 속이 편하겠냐 고! 뭘 원해. 도대체 내게서 뭘 원하느냐고!”

지혁은 격하게 쏟아내던 말을 멈추고 은채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은채야……. 이런 모습을 보여서…… 너에게만은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알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에겐 정말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점점 낮아지는 지혁의 음성과 함께 그의 몸도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반사적으로 지혁에게 다가가려던 은채 는 모질게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

이건 아니다. 그에 대해 알고 싶고, 궁금한 게 많았어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살아왔다는 걸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은채는 손톱이 살에 박히도록 거세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난 아무것도 못 봤어요.”

눈을 감았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그녀를 괴롭혔지만 은채는 입술을 물고 뇌리를 헤 집는 기억의 한 조 각을 떨쳐냈다.

“지혁 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 난 들은 게 없어요. 아니, 난 오늘 여기 오지 않았어요. 온 적이 없어요. 그렇게 살래. 그냥 그렇게 살아갈래. 그런데요, 지혁 씨…… 나 한동안…… 지혁 씨 얼굴 볼 자신이 없어요. 이해… …해줘요.”

무너진 그는 대답이 없었다. 은채는 흐릿해지는 눈길을 소영에게 던졌다.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고모. 내 꽃밭 망가졌다고 남의 꽃밭까지 망가트려야 겠냐고. 고모한테 묻고 싶어. 고모 꽃밭이 망가졌다고, 내 꽃밭까지 망가트릴 필요가 있었을까? 대답해 주겠 어, 고모?”

소영 역시 대답이 없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거부하듯 소영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 다. 은채는 소영 에게서 눈을 돌려 지혁에게 다가섰다. 그의 곁에 몸을 낮추고 흐트러진 그의 재킷을 여며주 며 은채가 속삭였 다.

“꽃밭에 물을 주고 정성들여 꽃이 피길 기다렸어요. 매일매일 사랑을 쏟으며 예쁜 꽃이 피 길 기다렸죠. 그런 데, 이제 막 꽃봉오리가 맺혔는데, 비바람이 부네요. 태풍도 불어요. 불어 닥친 태풍에 내 꽃 밭이 엉망이 됐 어요. 나……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이 꽃밭을 다시 정리하고 쓰러진 내 꽃을 일 으켜 세울지, 아니 면…… 포기할지…… 좀더 생각해 봐야 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지혁 씨. 이게 내 한계인가 봐요.”

일어나는 그녀의 손을 지혁이 잡아챘다. 은채는 단호하게 손을 빼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혁 씨와 고모 집에 오길 바랬어요. 우리 고모를 지혁 씨에게 보여주고 싶었죠.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네 요. 지혁 씨는 우리 고모, 이미 알고 있었네요. 이런 모습으로 여기서 만난 거…… 정말 유 감이에요.”

“은채야, 내 말 좀 들어 주면 안 되겠니?”

그가 붙잡았다. 한번 내쳐진 손을 다시 내밀어 은채의 앞에 내밀고 있었다. 은채는 자신의 손을 등 뒤로 돌려 감췄다. 지혁이 씁쓸하게 웃으며 손을 떨어뜨렸다.

“내게 시간을 줘요. 지혁 씨 말을 들을 준비가 될 때, 그때 들을게요.”

은채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앞으로 발을 디뎠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땅이 갈라지는 것만 같았지만 이를 악 물었다. 현관 앞에 다다랐을 때에야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여전히 먼 곳을 응시하는 소영에 게 말을 던졌다.

“내게 지혁 씨의 본질을 보여주려고 온몸을 던진 고모의 노력, 고마워. 그런데 고모…… 고 모가 미워. 정말 미워.”

어떻게 집안을 빠져나왔는지 모른다. 다만 흔들리는 몸으로 간신히 정원에 나왔을 때, 거짓 말처럼 은채는 아 빠를 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뛰어오는 아빠를 보면서 은채는 그 순간 의식 을 놓고 말았다.
깜깜한 암흑의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그녀는 지혁의 말을 떠올렸다. 고모에게 서슬 퍼렇게 퍼붓던 그의 음성 을…….

‘치워! 치우라고! 끔찍하다. 지긋지긋하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당신이라는 여자와 이제는 섹스고 뭐고 하기 싫다는데, 그런데 이런 식으로까지 해야 하는 건가? 그래?’

왜 하필이면 고모에요, 지혁 씨? 왜 하필이면 우리 고모인거예요……. 나, 감당할 자신 없는 데. 이겨낼 자신 …… 없는데.

“은채야!”

최 사장은 힘없이 쓰러지는 은채를 안고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은채는 이미 전신의 기력을 다 소모한 듯 죽 은 사람마냥 축 늘어져 있었다.

“나가라.”

“오빠.”

“나가! 내 집에서, 네 꼴 보고 싶은 마음 없다. 당장 나가거라.”

퇴근 후, 집에 들어서던 최 사장은 응접실에 앉아 있는 소영을 보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여사는 은채가 몸이 안 좋다는 말을 듣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온 동생에게 고맙다는 말은 못하고 화만 내는 남편을 이해할 수 가 없었다.

“왜 그래요, 여보.”

“당신은 조용히 있어. 앞으로 얘 오면 문 열어주지 마. 받아 주지도 말고! 알았어?”

소영을 휙 지나치던 최 사장은 동생에게 눈길 한번 보내지 않았다. 누구보다 원망스러운 사 람이 있다면 소영 이었다. 지혁이라는 사내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라 하지만, 소영은 동생이 아닌가.
더구나 은채에게 는 하나밖에 없는 고모이지 않은가. 그런 소영이 어찌했는가. 죽어도 이해 못하고 용서 못할 일이었다.

침실 문을 열던 최 사장은 이층을 올려다보며 아내 이 여사를 불렀다.

“은채는?”

“이층에요.”

“오늘은 뭘 좀 먹었나?”

“아뇨. 여전히 문 닫고 한번도 밖에 안 나왔어요. 도대체 왜 그러는지. 당신은 뭘 알고 있 는 것 같은데 말도 안 해주고…….”

서운한 듯 중얼거리던 이 여사는 소영의 등을 토닥이며 소파에 앉으라고 눈짓을 해주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이한테 좀 갔다 올게요. 요즘 뭐에 화가 났는지, 아가씨 오빠 기분이 살얼음판 분위기예 요.”

속삭이듯 말을 마친 이 여사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남편의 뒤를 바짝 따라 붙었다.

“말 좀 해봐요. 안 그러던 애가 저러니까 답답해 죽겠어요.”

삼일 째다. 삼일 전, 의식 없이 남편의 품에 안겨왔던 은채는 그 삼일동안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커튼을 죄다 치고 컴컴한 방에서 하루종일 우두커니 앉아있는 게 전부인 딸아이가 이 여사는 볼 때 마다 겁이 났다.

“무슨 일이예요? 당신이 지혁이 그만 만나라고 해서 그런 거죠? 내가 봤을 때 괜찮던데, 웬만하면 그냥 놔두 지 그래요.”

“모르는 소리!”

불쑥 역정을 내는 남편을 못마땅한 듯 흘겨보던 이 여사는 나직한 노크와 함께 은채의 방문 을 열었다. 아니 나 다를까 은채는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풀어헤친 채, 창백한 두 뺨에는 핏기 하나 없이, 늘 반짝이던 두 눈동자는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은채야 고모 왔는데 만나보겠니?”

고모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딸이었기에 이 여사는 은채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매 서운 눈길뿐이었다. 사납도록 치켜 올라간 눈썹이 낯설 정도로 살기가 어렸다.

“나가있어, 당신은.”

최 사장이 나직하게 명령했다. 이 여사는 양 손을 엇갈리게 팔짱을 끼고 단호하게 못 박았 다.

“싫어요. 나도 오늘은 이유를 알아야겠어요. 은채가 왜 이러는지. 난 은채 새엄마라고요.”

“나가줘, 새엄마.”

삼일 만에 처음으로 은채가 입을 열었다. 탁하고 가라앉은 음성이 은채의 목소리라고 믿기 지가 않았다. 아 니, 나가라는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 여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최은채, 새엄마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미안해. 미안한데 새엄마, 지금은 나 좀 내버려둬. 부탁이야.”

최 사장이 아내의 등을 떠밀었다. 밖으로 내몰 듯이 아내를 몰아내고 문을 닫는 최 사장에 게 은채가 말했다.

“아빠도 나가줘.”

침대에서 주섬주섬 몸을 일으킨 은채는 화장대 앞으로 다다가 빗을 집어 들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 하고 헤어핀으로 정갈하게 핀을 꽂은 은채는 여전히 문 옆에 기대선 아빠에게 부탁했다.

“나…… 괜찮아, 아빠. 걱정하지 마.”

“은채야, 그날 뭘 봤는지 모르지만, 다 잊어. 다 잊고…….”

“아니. 아냐, 아빠. 아빠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나 아무것도 본 거 없어. 정말이 야.”

은채는 힘겹게 미소 지었다. 입가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져 아파왔지만 미소를 거두지는 않 았다. 붙박이장을 열고 옷을 꺼내던 은채는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다.

“딸내미 옷 갈아입는 것 까지 지켜 볼 거야, 아빠?”

은채를 유심히 살피던 최 사장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밖으로 나가려던 최 사장의 걸음을 은채가 잡아챘다. 최 사장은 열어젖히던 문을 닫고 딸아 이를 바라보았다.

“아빠는 내 선택…… 언제나 믿지?”

가슴이 조여들었다. 무슨 뜻일까. 최 사장은 대답대신 고갯짓만 해보였다. 은채가 살며시 다 가왔다. 새끼강 아지마냥 그의 품에 파고든 은채가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새엄마한테 말하지 않아서 고마워요, 아빠. 새엄마가 알면 충격이 클 거야.”

너는? 너는 괜찮니?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 질문을 삼키고 최 사장은 은채의 어깨를 다 독였다. 그래, 그 래서 말하지 않았다. 여리고 고운 심성을 지닌 아내가 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 다면 그대로 쓰러 지겠지. 곱디곱게 키운 딸이 지금 죽을 만큼 아프고 괴롭다는 것을 알면 아내는 몇날며칠 눈물을 흘리겠지.

“나, 이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잠시 아팠나봐. 어른이 되려고,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 잠시 앓았었나봐.


“그래. 다 털고 일어나렴. 툭툭, 털고 다 잊어버리렴.”

은채가 생긋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딸아이의 미소였다. 억지 미소도 아니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웃 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그런 미소. 최 사장은 대견하다는 듯 은채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집안에만 있으면 더 힘들 거다. 친구라도 만나든지 해.”

“응.”

“학교도 삼일이나 빠졌잖니. 내일부터는 나갈 거지?”

“응.”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최 사장은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 는 은채의 말에 그의 인상은 차갑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고모…… 아래층에 계셔?”

문고리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실렸다. 아내가 괜한 소리를 해서는 은채에게 동요만 일으킨 건 아닌지 걱정 이 앞섰다.

“고모에게 내 방에 좀 오라고 해줘. 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만나지 마라.”

최 사장은 냉정하게 은채의 말을 잘랐다. 평생 안보고 살수는 없겠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 다. 이제 겨우 추스 르고 일어났는데 만나서 뭘 하려고.

“괜찮아, 아빠. 정말이야. 그러니까…… 고모 만나게 해줘요. 내가 아래층에 내려가면 되지 만, 거긴 새엄마가 있잖아. 아빠, 내 선택 믿어준다고 했잖아. 나, 지난 며칠 사이에 어른이 된 거 같아. 여태 어린 아이였는데 갑자기 커버린 것 같아. 고모랑 마무리 지을 일이 있어. 이대로 시간이 흐르게 둘 수는 없 어.”

작은 공주님이었던 딸은 이제 어른이 됐다 한다. 무슨 선택을 했는지 모르지만 믿어달라고 도 한다. 최 사장 은 먹먹해지는 가슴을 억누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았다. 기다리고 있으렴.”

은채는 티 테이블에 앉아 손가락을 비틀었다. 아직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허나 더 이상 숨 어 있을 수만은 없 는 노릇이다. 이제 부딪쳐야지. 눈을 감고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고동소리에 귀를 기울였 다. 그나마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듯 했다.

지난 며칠동안 전원을 꺼놓았던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자와 음성이 왔음을 가르쳐주 었다. 액정화면을 보던 은채는 그대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예상했던 대로 지혁에게선 단 한 개의 메시지도 없었다. 음성도, 문자도 아무것도……. 울컥 목이 메었다. 가슴이 심하게 아파왔다. 아프다고 말도 못할 정도 로 고통스럽게 심장이 죄어들었다.

“하아…….”

긴 한숨을 내쉬고 눈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똑똑.

낮은 노크소리. 은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조심스럽게 열리는 문틈으로 소영의 모습이 엿보였다. 늘 그렇듯이 유명 디자이너의 옷으로 우아하고 화려하게 온몸을 치장한 고모가 오늘은 전혀 아 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은채의 눈에는 나체로 있던 고모의 모습만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은채야, 괜찮니?”

“고모라면 괜찮을 것 같아?”

잔뜩 날이 선 그녀의 말투에 다가서던 소영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은채는 메마른 기침을 내뱉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알 수가 없어. 고모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안 돼. 왜 그랬어, 고 모? 왜 그런 거야?”

묵묵히 대답 없이 티 테이블 의자를 빼내는 소영을 한참동안이나 지켜보던 은채는 나직하게 말을 덧붙였다.

“나는, 고모를 좋아했어. 고모가 자랑스러웠고, 내가 고모의 조카라는 게 뿌듯했어. 그런데, 이젠 그럴 수가 없어. 고모는 더 이상 내 자랑이 아니야.”

소영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갔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지만 도무지 말문을 열수가 없었다.
그녀도 알고 있 었다. 자신의 행동이 어리석었음을. 질투에 눈이 뒤집혀 차마 사람으로서 하면 안 되는 짓을 했다는 걸, 소영 은 은채가 가고 난 다음에 깨닫게 되었다.

“고모의 결혼 생활이 어떤지, 나는 알지 못해. 고모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고통스러웠는지 나는 몰라. 그러나 고모, 고모가 아프다고 다른 사람마저 아프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고모부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나는 모 르지만 결혼을 한 유부녀가 조카에게, 외간 남자를 애인이라고 소개하는 건, 결코 현명하 다고 볼 수 없어.
나를 위해서 그랬다고 하지 마. 그건 날 위해서가 아니라 고모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걸, 고 모는 누구보다 잘 알거야.”

마흔 해를 살아오면서 이토록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신보다 한참 어 린 조카 앞에서 못 보일 꼴마저 보였던 장면을 떠올리자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어디론가 숨어버리 고 싶은 심정이 었다.

어떻게 이 아이의 가슴에 상처를 남길 생각을 했을까. 남편과의 불화로 아이를 낳지 않아서 인지 더 예쁘고 소중한 조카에게 어쩌면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은채의 자랑스 러운 고모가 아니었다. 추악한 모습을 보인, 방종하고 타락한 여자일 뿐이었다.

“고모를 사랑했어. 지금은 사랑한다 말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다시 고모를 사랑한다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다시 자랑스럽게 생각 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런 날이…… 다시 오기를 바래. 정말 이야. 그런데 고 모, 지금은 아냐. 지금은…… 고모를 사랑할 수가 없어. 이렇게 고모와 마주 앉아 있는 것만 으로도 나는 너무 고통스러워. 과연…… 고모를 다시 사랑할 수가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

혼잣말처럼 되뇌는 은채의 음성이 소영의 귀를 파고들어 심장을 둘로 나뉘게 만들었다. 지 독한 아픔에 소영 은 신음이 튀어나오려 했다.

“부탁 하나만 할게, 고모.”

은채가 망설이듯 말했다. 소영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가 지혁 씨와…… 어떤 사인지, 알고 싶은 마음 없어. 그러니 내게 그 부분을 알려주 려고 하지 마. 난 고 모에게서 지혁 씨의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 지혁 씨 얘기는 그 사람한테서 직접 들을 거야.
고모가 무슨 마 음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제 내 일에서 빠져줘. 이건 내 일이야. 내가 해결할 거야.”

“은채야, 그 남자는……!”

다급하게 입을 여는 소영의 말을 은채가 한손을 들어 제지했다. 은채의 단호한 표정에 소영 은 입도 벙긋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판단해.”

“너랑 어울리지 않아! 왜 그걸 모르니!”

“고모 랑도 어울리지 않았어. 고모, 그거 모르고 있었던 거야? 정신 차려, 고모. 고모가 돌 아가야 할 곳은 고 모부야. 고모부에게 돌아가! 고모부가 고모의 사랑이 아니라면 정리하고 난 다음에 다른 사 람을 찾는 게, 부 부의 이름으로 살아온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는 거라고 봐.”

“넌 몰라.”

“그래, 난 몰라. 하지만 고모가 한 행동은 나빴어. 아주 치사하고 비열했어.”

답답하다는 듯 소영은 가슴을 쳤다. 이건 질투가 아니었다. 잠시 동안 즐겼던 남자를 빼앗기 기 싫어 몸부림 치는 것도 아니었다. 골수 깊이 파묻혔던 질투는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그보다 그녀는 은 채의 조건 없이 베풀던 애정을 잃었다. 그 아이의 순수한 믿음도 잃었다. 이상하게도 가슴 한 구석이 뻥 뚫 린 기분이 들어 묘하게 그녀를 뒤흔들어 놓았다.

“고모가 이러는 거, 날 걱정해서인거야? 그러지마. 가식처럼 느껴져. 내 눈에는 걱정이라기 보다 오히려 유치 한 질투로 보여.”

은채의 빈정거림이 소영의 가슴에 서슬 퍼런 단도를 박았다. 이런 것을 기대하고 온 게 아 니었다. 아프다기 에, 자신의 행동으로 은채가 아픈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사과라도 하려고 왔건만. 물론 은 채와 전처럼 편안 하게 지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토록 틀어져버린 관계는 상상하지 않았다.

되돌릴 수 없는가. 이젠…… 끝인가. 은채는 자신의 조카이길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 게 만든 것은 바 로 그녀 자신이었다. 아니, 우지혁 그가 문제였다. 은채와의 사이에 지혁만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지혁, 자신이 질투에 눈이 멀게 만들고, 소중한 조카를 잃게 만든 장본인.
소영의 눈이 비 정상적으로 빛을 발하며 번들거렸다.

“하나만 물어 볼게. 지혁 씨 집, 어디야? 고모는 알고 있지? 나한테는 말 안 해줬어, 지혁 씨가. 철저하게 자 신에 관해서 말하지 않던 남자야. 왜 그랬는지…… 이젠 알 것 같아. 지혁 씨 어디 사는지 가르쳐줘.”

녹음기 재생버튼을 누르듯 지혁의 집 주소를 술술 불었다. 은채가 메모지에 받아 적는 것을 보며 소영은 혼 자만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은채가 지혁과 어울리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질투? 그게 뭔데? 난 이 애의 고모야! 잠시 정신이 나갔었어.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내가 어 떻게 그런 짓을 저 질렀을까. 이 애가 엇나가는 걸 지켜볼 수가 없어. 올바른 길만 가야해. 은채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이 아이의 웃음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 그는 안돼. 나처럼 더럽고, 추악하고 세상 때가 다 묻은 그는 안돼. 지 혁은 절대 안 되는 사람이야. 우리 은채와 어울리지 않아…….

소영이 상념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은채는 나가고 없었다.

사람의 깨달음은 참으로 늦게 온다. 비척비척 걸어 나오며 소영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 했는 지, 그리고 그 잘 못을 바로잡기 위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늠하기 시작했다.

이삿짐을 다 챙긴 지혁은 어수선한 아파트 내부를 휘이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상자가 널브 러져 집안을 한층 어지럽게 만들었다. 내일이면 이 집에서 나가야 했다. 아파트를 정리한 돈을 미진에게 보내 고, 차키를 넘겼 다. 받지 않겠다며 극구 거절하는 미진에게, 그녀로부터 받았던 것을 모두 되돌려주고 나니 가슴에 얹혀 있 던 돌덩어리가 제거된 기분이었다. 답답하고 무겁기만 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진 것 같았 다.

다만 한 가지.

칼로 자른 듯 매정하게 등을 돌려버린 은채, 그녀가 지혁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젠 연락이 없겠지. 그녀가 전 화 해주길 바랄 수도 없을 것이다. 지혁은 조용하게 잠들어 있는 휴대폰을 원망하듯 바라보 았다.

먼저 전화 할 수도 없었다.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모습까지 보였는데 무슨 낯짝으로 전화 를 한다는 말인가.
실망했을 것이다. 나라는 인간에게 지독한 환멸을 느꼈겠지. 씁쓸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신음처럼 흩어져 나왔다.

술이 그리웠다. 차라리 알코올의 힘을 빌려서라도 은채의 얼굴을 잊고 싶었다. 허나 고통스 럽고 괴로워도 그 녀의 기억을 부여잡는 게 훨씬 나았다. 다시 볼 수 없다면 그녀와의 추억만이라도 온전히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은채가 떠난 뒤 소영 역시 더 이상 연락이 없다는 것. 그것이 지혁에 게 유일한 위안이 라면 위안이었다. 비록 은채에게 모든 것을 까발리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갔지만, 이제는 그녀에게 죄를 짓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지혁의 막혔던 숨통을 열어주었다.

멀리서 가끔 지켜보기만 해야지.

은채가 눈치 채지 못하게 먼 곳에서 가끔 그녀의 얼굴을, 미소를 보기만 해야지. 그것마저 안 된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는 않겠지. 처음부터 그래야 했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 으로 만족해야 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탐냈을 때, 어떤 결과를 몰고 오는지 어리석은 지혁은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을 잃고서야 자각하게 되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파멸의 늪에 빠졌을 때에야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지혁은 또 다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숫제 닳아 없어질 정도로 만지고 만졌던 휴대폰이 었다. 행여나 은채 에게서 전화가 올까, 잠시라도 한눈을 파는 사이에 그녀가 연락을 할까싶어 지혁은 단 한순 간도 휴대폰을 손 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잠을 자는 그 순간마저도. 그러나 냉정하고 냉담한 은채는 한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 다. 마치 만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자신을 잊은 듯 했다.

서운하지 않았다. 서운해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시간을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설 령 평생이 걸리는 시간이라 하더라도 그는 기다려야 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연락이 없다 해도 당연하게 여겨 야했다. 보고 싶 어 미치더라도 먼저 연락해서 그녀를 귀찮게 하는 일은 없어야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녀가 그리워, 그리움에 허기가 질 지경인데.

그녀의 미소가 아른거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데.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문득 은채가 했던 말이 떠올라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꽃밭에 물을 주고 정성들여 꽃이 피길 기다렸어요. 매일매일 사랑을 쏟으며 예쁜 꽃이 피 길 기다렸죠. 그런 데, 이제 막 꽃봉오리가 맺혔는데, 비바람이 부네요. 태풍도 불어요. 불어 닥친 태풍에 내 꽃 밭이 엉망이 됐 어요. 나……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이 꽃밭을 다시 정리하고 쓰러진 내 꽃을 일 으켜 세울지, 아니 면…… 포기할지…… 좀더 생각해 봐야 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지혁 씨. 이게 내 한계인가 봐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듯 그 큰 두 눈에 물기를 가득 담고서 말하던 은채의 모습은 지혁의 뇌를 가르 고, 가슴을 둘로 쪼개며 엄청난 아픔을 몰고 왔다. 진작 떠나야 했다. 은채를 좀더 일찍 놓 아주었다면 그녀가 그토록 아픈 일은 없었을 것을. 조금만 더 곁에 있고 싶다는 욕심이 결국 화를 부르고 말았 다.

지혁은 쓰러지듯 거실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잘못 했다는, 미안했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비틀거릴 때 손 내밀 어 안아주지도 못 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했었다. 그것이 그를 더욱 극한으로 몰 아갔다.

혼탁해진 머릿속을 뚫고 초인종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문을 열 었을 때, 지혁은 외마디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곳에 야윈 얼굴의 은채가 서 있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환영이 만들어낸 건 아닌지 지혁 은 겁이 났다. 목이 막혀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다.

“나…… 왔어요, 지혁 씨.”

환영이 아닌가보다. 그녀의 꿈결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나…… 포기 할래요. 그 꽃밭, 포기…… 해야겠어요.”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그녀가 떠나려 한다는 것을 이미 짐작하던 바였다. 허 나 무얼까. 왜 숨 을 쉴 수가 없을까. 왜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울까. 왜…….

“…… 그래…….”

지혁은 쥐어짜듯 대답했다. 눈앞이 아득했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녀를 만났을 때에야 뒤늦게 살아있음을 알려주던 심장이, 나도 사람 임을 가르쳐주던 심장이 오늘 이 시간 멈춰버렸다는 것을. 그 심장이 죽어버렸다는 것을 은채는 알고 있을 까…….
************************ 『12』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서로 시선을 피해가며 긴 시간을 허비하던 은채가 정적을 깨트리 고 말문을 열었다.

“이사해요?”

지혁은 집안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삿짐은 천천히 쌀 것을. 은채 가 오리라고는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난장판인 집을 보이기가 왠지 무안했다.

“언제요?”

“내일.”

“어디로?”

씁쓸하게 입술을 말아 올린 지혁은 대답을 거부했다. 그녀가 알아서 좋을 게 없을 것이다.
이제 이별을 해야 한다면, 그녀의 손을 완벽하게 놓아줘야지. 눈앞이 흐릿해졌다. 울컥 메이는 목을 가다듬어 지혁은 메마른 기침을 쏟아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가 생긋 웃음을 배어 물었다. 순간 지혁의 심장이 저릿하게 옥죄어들 었다. 그렇다. 저 미소. 저 미소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은채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런 만큼 지혁의 가슴은 무너지고 있었다.

“인사를 해야 하니까.”

“그렇군.”

“그전에, 인사를 하기 전에, 나…… 지혁 씨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어요?”

은채는 망설이고 망설였던 질문을 던졌다. 지혁은 담담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말일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허나 그녀가 말하기를 원한다면 들어줘야지. 대답을 바란다면 그 역시 충실하게 해주어야지.

“우리…… 고모는 어떻게 알게…… 됐어요?”

소파에 앉은 은채와 거리를 유지하느라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혁은 휘청거리고 말았다. 예 상하고 있었는데 막상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그의 심장 한 가운데를 향해 날 아와 깊숙이 박혀 버렸다.

“꼭…… 알아야 하나?”

그는 힘겹게 되물었다.

“네.”

은채는 단호하게 고갯짓을 했다.

“내가, 접근했어. 계획적으로…….”

그녀가 눈을 감았다. 마치 아무것도 보기 싫다는 듯. 지혁은 감겨진 은채의 눈을 보며 고개 를 떨어뜨렸다.

나직한 그녀의 목소리가 지혁의 귓가에 날아들었다.

“왜요? 왜 계획적으로 접근해야 했는데요?”

“그 사람의 힘이…… 필요했거든.”

“힘? 우리 고모의 힘?”

은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그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지혁은 차마 그녀를 볼 수가 없어 시선을 돌리고 말 았다.

“내가 우리 고모의 조카라는 거, 언제 알았어요?”

그녀의 말이 지혁의 뇌리에 저장되어 있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났 던 날. 그녀의 미 소를 처음 보았던 날……. 빌어먹을, 그는 험악한 욕지기를 목구멍으로 삼키며 어렵게 대꾸 했다.

“그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알게 됐어.”

“그랬구나. 지혁 씨는 알고 있었구나…….”

“은채야!”

상처받은 듯한 그녀의 물기 젖은 어조에 지혁은 황급히 은채를 불렀다. 그러나 은채는 냉정 하게 손을 들어 지혁의 말문을 막았다.

“그래서 휴대폰을 잃어버리고도 전화하지 않았던 건가요? 내가 우리 고모의 조카라서? 지 혁 씨가…… 우리 고모를 만나고 있던 상태여서?”

잔인하다, 그녀는. 이렇게 잔인하고 모진 말로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말을 하고, 또한 그 를 고통스럽게 하 는 말을 하는 그녀는 잔인하다.

“네가 욕심날까봐. 나 같은 게 감히 너를 탐내게 될까봐. 안 되는 걸 뻔히 알면서, 너를 원 하게 될까봐…….
전화를 하지 못했어.”

“그런데, 왜 전화 했어요? 늦었지만, 지혁 씨는 분명 전화 했어요. 내가 갖고 있다는 걸 알 면서 뒤늦게 잃어 버린 그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어요.”

“미치도록…….”

은채의 강요에 지혁은 마지못해 속삭였다. 들릴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인 그는 각혈하듯 힘 겹게 뒷말을 덧붙 였다.

“……보고 싶었거든.”

벌떡, 몸을 일으킨 은채는 싸늘하게 지혁을 지나쳤다. 씽크대 배수구에 커피 잔을 올려놓은 그녀는 몸을 돌 리지 않은 채 채찍을 가하듯 날카롭게 질타했다.

“내게 처음부터 말할 생각은 없었나요?”

은채의 걸음을 따라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지혁은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 술이 봉해지기라도 한양 그는 굳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비밀이 지켜질 거라 여겼죠?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나는 아 는 게 하나도 없었 다고요. 지혁 씨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알고 싶었는데, 그런데…… 이런 비밀이 숨어있었다니. 이 런 어마어마한 일이 있었다니.”

“은채야…….”

“차라리 나를 이용하지! 우리 고모가 아니라 날 이용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나…… 기꺼 이 당해줄 수 있는 데! 그랬다면 모두가 이렇게 힘들지도 않을 텐데…….”

그녀는 모른다. 그녀는 죽어도 모르겠지. 최은채라는 여자가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최은 채라는 여자가 어느 날 우지혁의 인생에, 봄날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처럼 다가오리라는 것 을 알았다면,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그녀는 죽어도 알지 못하겠지.

“언제부터였어요? 언제부터…… 그렇게 살았던 건가요.”

은채는 말하기가 힘겹다는 듯 깊은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를 반복하다 겨우겨우 말을 마쳤 다. 지혁은 눈을 질 끈 감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혀가 굳어버린 듯 그는 입을 열수가 없었다.

“말할 수 없나요? 여전히 지혁 씨에게 나는 숨기고 싶은 게 투성이인 사람인가요?”

거칠게 되묻던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아픈 가슴을 다 들어내듯, 상처 입은 흉터를 다 보여 주듯 그녀는 격하 게 소리쳤다.

“내게도 말해 봐요. 나, 들을 준비 되어 있단 말예요. 어떤 말이든, 지혁 씨가 하는 말이면 하나도 빠짐없이 들을 테니까, 그러니까…… 내게도 지혁 씨를 보여줘요. 숨기려고만 하지 말고, 감추려고만 하지 말고 제발, 말해 줘요…….”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지혁을 힘겹게 했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이를 악물고 그는 은채를 외면했다. 그녀에게 말하라고? 지난날을, 그 추악하고 더럽 고 구역질나는 날 들을 그녀에게 말하라고? 악다문 그의 턱에 힘이 실렸다.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화 를 내고, 분노한 다 해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만은, 그것만큼은 들어줄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은채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안돼. 세상 사람모두에게 내 지난날을 이야기 할 수는 있어도 너에겐 할 수가 없어. 이런 내 마음, 이해해주면 안되니? 안되겠니?”

“아뇨! 아녜요! 지혁 씬 뭔가 잘못 알고 있어요.”

은채는 격하게 쏘아붙이며 지혁을 노려보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지혁 씨는 내게 해야 돼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못하는 말을, 나에 게 만은 해줘야 한다고요. 그게…… 사랑 아니에요? 그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거, 아닌 가요?”

숨이 컥 막혔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지혁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사랑 이라 한다, 그녀 가. 결코 사랑이면 안 되는데 그녀는 우리들의 사이를 사랑이라 한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목에 메어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은채는 걸음을 옮겨 지혁에게 다가섰다. 한걸음씩 조심스럽게 다가선 그녀는 어린아이를 달 래는 어조로 속 삭였다.

“말해 봐요. 난 알아요, 믿어요. 지혁 씨가 처음부터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걸, 어느 날 지 혁 씨가 잘못된 길 을 들어섰다는 걸 나…… 알아요. 지혁 씨가 하는 말…… 다 믿을게요. 세상 모든 사람이 안 믿는다 해도, 나 만은 믿을게요. 들을게요. 그러니 말해 봐요.”

지혁의 앞에 선 은채는 그를 올려다보며 주문을 걸 듯 했던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지 혁은 떠올리기 싫 은 오래전의 어느 날을 일깨우며 어금니를 사려 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말이 최면 이 되어, 잊고자 했던 기억들이 잔인하게 그의 뇌를 헤집었다.

“바보……. 언제나 넌 날 힘들게 하지. 보고 싶게 만들어서 힘들게 하고, 다가서면 안 되는 데 다가서고 싶게 만들어서 힘들게 하고, 네가 원한다면 뭐든지 하게 만드는 너는……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해.”

지혁은 원망스러운 듯 중얼거리며 은채의 단정하게 묶인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는 나직 하고도 조용하게 말을 시작했다. 잊으려고, 그토록 지우려고 노력했던 옛일을 하나씩 들춰내는 것은 그에게 또 하나의 고통이 었고, 죽음과 같은 아픔이었다.

“나는 욕심이 많았나봐. 그래, 아마도 그렇겠지. 그러니 연예계라는 곳에 뛰어들었겠지. 나 하나 추스를 능력 도 안 되면서 욕심만 앞섰던 거겠지.”

묵묵히 이야기를 듣는 은채를 소파로 이끌어 앉혀놓고 지혁은 창가로 다가섰다. 짙은 어둠 이 자욱하게 세상 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어둠을 뚫고 그는 오랫동안 봉인해놓은 회상에 차츰 빠져들었다.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 그때는 적어도 단박에 스타가 되리라는 헛된 망상을 품지는 않았 다. 그저 텔레비 전 화면에 나오는 연기자들이 부러웠고, 그래서 시작하게 된 것이 연기였다. 천직이라 여겼 다. 대사 한줄 없 어도, 주인공 옆을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단역이라 해도 연기를 하는 순간이 좋았고, 그걸 즐기던 그였다.

그러고 짧지 않은 사년의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단역인 모습의 자신이 초라해져가도 괜찮다 여겼다. 같이 시 작했던 배우들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이름을 얻어가도 지혁은 애써 자신을 다스렸다. 언 젠가는 그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고.

그러던 어느 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꿈처럼 달콤하게 다가왔다. 다만, 꿈처럼 달콤한 기회는 시퍼런 비수를 함께 동반하고 찾아왔었다…….

“우지혁 씨?”

엑스트라 전문인 지혁에게 미니시리즈 주연을 연기해보겠냐며 갑자기 찾아들었던 김형석 PD. 지혁은 반갑 게 그를 맞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네, 제가 우지혁입니다.”

“반갑군요. 김형석 피디요. 자, 인사는 여기서 마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가을 개편 으로 미니시리즈 가 방영될 예정이요. 기본적인 얘기는 어제 통화로 대강 마무리를 지었고…… 밤사이 대본 은 다 읽어 봤소?
어떻소? 한번 해볼 생각 있는 거요?”

“물론입니다!”

기쁨과 환희, 그리고 자신감에 가득 찬 지혁은 고함을 지르듯 큰소리로 대답했다. 김 피디가 피식 웃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잘됐군요. 캐스팅은 거의 끝난 상태요. 다음주부터 대본연습을 하고 아마 이주 후부터 스 튜디오에서 촬영을 시작할거요. 야외촬영은 중간중간 장소가 섭외되면 들어갈 거고…… 촬영이 들어가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요. 이점 기억해두시오.”

할말을 다 했다는 듯 김 피디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지혁에게 손을 내밀었 다. 힘차게 악수 를 마친 김 피디가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연기는 어떨지 모르지만 우지혁 씨 마스크는 꽤 좋군요. 뭐, 위에서 누가 ‘남자 주인공은 누구 시켜라’, 라고 해서 기분이 좀 나쁘긴 했지만 그런 소리 들을만한 얼굴이요. 앞으로 잘해 봅시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김 피디의 뜻 모를 말에 지혁이 되묻자 그가 은밀하게 메모지를 꺼냈다. 네모반듯하게 두 번 접힌 메모지가 지혁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건?”

“거기로 가서 메모지에 적힌 사람을 찾으시오. 당신에게 이런 행운을 물어다 준 제비 한마 리가 있을 거요. 아 니, 제비 한분이 계신다 해야 하나? 하여간 건투를 빌겠소. 참, 계약을 먼저 해야 하니 내일 나와 보시오. 같 이 가봅시다.”

휭하니 사라지는 김 피디의 뒷모습을 보던 지혁은 황급히 메모지를 펼쳤다.

파라다이스 호텔 커피숍. 5시. 이인주.

이게 뭐냐고 물어보려고 해도 김 피디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 되었다. 벌써 시간은 네 시가 넘어갔고 지 혁은 일단 약속장소에 가보는 게 도리인 것 같아, 무작정 택시에 몸을 실고 호텔 커피숍으 로 향했다.

“아, 이인주 씨요?”

다섯 시가 넘어도 약속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지혁은 웨이터에게 물었고, 웨이터는 반색 을 하며 카드 키를 꺼냈다.

“우지혁 씨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1208호입니다. 올라가 보십시오.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멀어지는 웨이터를 붙잡으며 지혁은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웨이 터는 막무가내로 올라가보라고만 하고 더 이상의 대꾸를 하지 않았다.

가지 말았어야 할 길.

발을 디디면 안 되는 곳.

허나 순진하고 어리석었던 그는 알지 못했다. 그 길이 가지 말아야 했던 길이라는 걸. 발을 디디면 안 된다는 걸, 그때의 지혁은 알지 못했다.

“사람을 잘못 보셨군요, 이인주 사모님.”

“뻣뻣하게 나와서 좋을 게 없을 텐데, 우지혁 씨?”

호텔 룸에 있던 여자가 냉랭하게 이죽거렸다. 지혁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몸을 돌렸다.

“후훗, 이것 봐, 우지혁 씨. 그렇게 나가면 당신 끝이야.”

지혁은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이죽거림이 계속 이어졌다.

“당신, 오늘 출연제의 받았을 텐데? 그거 누구 영향이라 생각한거지? 당신이 잘나서? 그렇 게 생각해, 우지혁 씨?”

“빌어먹을!”

거칠게 욕설을 씹어뱉은 지혁은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에게로 성큼 다가서며 화를 터트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가 비스듬히 일어나 시트를 열어젖혔다. 불쑥 구토가 치밀어 지혁은 고개 를 돌리고 말았다.

“원하는 게 뭡니까. 뭘 원하기에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하룻밤.”

여자가 딱 부러지게 말했다. 지혁은 헛웃음을 토해내고 여자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배신감 이 들었다. 자신 이 속해있는 연예계라는 곳에 문득 배신감이 들어 진저리가 처지고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하룻밤. 하룻밤이면 돼. 그럼 그 미니시리즈 주인공…… 당신 거야.”

유혹적인 몸짓으로 여자가 나른하게 손을 내밀었다. 지혁은 냉혹하리만치 잔인하게 여자의 손을 쳐내고 비 아냥거렸다.

“이것 보십시오,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모님. 시간이 남아 주체를 못하고 돈이 넘쳐나 쓸데 가 없다면 어려운 사람이라도 도와보시지요, 이런 추잡한 짓은 하지 말고.”

홱 돌아서는 지혁의 뒤로 찢어지는 듯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너…… 너, 거기 서. 거기 서란 말야!”

지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만 오만하게 비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이런 짓을 하지 않 아도 얼마든지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따위 더러운 짓을 안 하더라도 얼마든지 기회는 있을 것이다.
김 피디가 뭔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연출가가 연기자에게 이런 곳에 가보라고 귀띔하지는 않겠 지.

“두고 봐, 우지혁. 너 24시간 안에 내게 다시 돌아오게 될 거라고 장담하지. 두고 봐, 두고 보라고!”

여자가 핏대를 세워 소리쳤다. 지혁은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냉소를 지었다.

“글쎄요, 사모님.”

그러나 지혁은 그 여자의 말대로 단 하루 만에 다시금 그 여자를 찾아야 했다. 만나야 했다.
연기를 하기 위 해서가 아니었다. 드라마의 배역이 탐나서가 아니었다. 순전히 오기였고 다스릴 수 없는 분 노에 사로잡혀서 였다.

다음날 계약을 하든 안하든 이미 약속을 정해놓은 상태였기에, 방송국으로 갔던 그에게 날 아들던 수많은 비 웃음. 빈정거림. 그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질타, 또는 질책의 눈길들. 같이 연기를 하는 배우 들이, 같이 촬영 을 하는 스텝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던 말은 지혁의 분노를 한층 더 부추겼다.

‘이 바닥에서 그런 일 하지 않고 뜰 수 있을 것 같아? 적당히 튕겨. 너무 튕기면 값 올리 려는 술수로 밖에 안 보이니까. 그리고 이번 드라마에서 우지혁 씨는 제외됐어. 아무래도 신인이라서 무리가 있다 고 하더군. 다른 배우로 교체 됐으니까 그렇게 알도록! 뭐, 아쉬우면 어제 그 장소로 다시 가보던가. 하하 하…….’

그래, 힘 있는 사람들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어깨를 움츠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방송국을 빠져나왔다. 귓전에 맴도는 사람들의 비웃음이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침대에 드러누워 있 던 여자의 얼굴 이 떠올랐다.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을 물고 빈정거리던 스텝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래, 그 여자가 원한 건 하룻밤이었다. 겨우 하룻밤.

지혁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하늘을 노려보았다. 더러운 사람들이 세상을 가득 메우는데 하 늘은 깨끗하기만 했다. 까짓 하룻밤, 원한다면 주지. 그걸 원한다면 기꺼이 주지. 허나 배역을 위해서가 아니 다. 연기를 위해 서가 아니다. 당신이라는 여자를 안아주고 난 다음에, 매달리는 당신을 비웃어주지. 짓밟아 주지. 내게 했던 그대로 되돌려주지. 빌어먹을! 사납게 이를 갈며 다짐한 지혁은 호텔로 향했다.

“음, 근사했어! 약속대로 미니시리즈 주연은 당신거야.”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여자를 안았다. 짐승처럼 얽혀들어 여자가 원하는 대로 안아주었다. 짐 승의 교배와 다 름없는 섹스가 끝난 뒤 여자가 숨을 몰아쉬며 선심 쓰듯 하는 말에 지혁은 냉소를 배어 물 었다.

“됐어. 그런 거 필요 없어.”

“그럼?”

“배역이 필요하다면 내 손으로 여자를 낚을 거야. 돈에 팔리듯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게 아니라.”

“하! 그래서? 그럼 날 안은 이유는 뭐야?”

지혁은 벗어던진 옷을 걸치며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의 눈길에서 역겨움이 고스란 히 드러났다.

“당신 인생이 불쌍해서!”

“뭐?”

여자가 벌떡 일어나 표독스레 눈을 부라렸다.

“남자를 돈을 주고 구하지 않으면 안아줄 사람이 없나보지? 아, 난 됐어. 당신이 주는 더러 운 돈이나 힘, 필 요 없으니까 다른 남자들에게나 써봐. 혹시 나중에라도 당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은 하겠 지만…… 그런 일 은 없을 것 같군. 당신 말야…… 단 하룻밤을 안기에도 상당히 역겹거든. 구역질이 날 것 같 아, 당신이라는 여자와 잠자리하는 것은. 어쨌든 당신이 원하던 하룻밤은 내 선물이라고 생각해.”

“이 바닥에서 살아남고 싶으면, 이렇게 행동해서 이로울 게 없을 텐데?”

“이 바닥에, 당신 같은 쓰레기들이 널려 있다면, 내 손으로 쓰레기를 택하겠어. 최소한 당 신처럼 더럽지는 않 은 여자로 말야.”

그래, 그때부터 연기에 대한 애정은 변질되었다. 연기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식어버렸다. 닥 치는 대로 살아 왔다. 누구 한사람 잘못된 길이라고 지적해 주는 이 없었다. 모두가 진 흙탕물에 빠져 허우 적거리는데, 혼자 만 고고한 척 고개를 세울 수 없었다. 같이 진흙탕에 몸을 던지는 수밖에. 함께 더러워지는 수밖에.

정상을 향해 달려 왔다 생각했다. 오로지 목표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달려온 길 은 정상이 아니 라 죽음의 길이었나 보다. 죽음의 길 끝에서…… 그녀를 만났나보다. 남은 건 죽음 밖에 없 는데…….

회상에 잠겨있는 그를 은채가 부드러운 손길로 일깨웠다.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그녀가 나직하게 속삭 였다.

“그만 쉬어요.”

한숨처럼 쏟아지는 말을 남기고 은채는 쓸쓸히 돌아섰다. 망연히 서 있던 지혁은 그녀의 뒤 를 따르며 황급히 문을 열었다. 그녀가 인사도 없이 나가려 하자 지혁은 머뭇거리며 묻고 말았다.

“은채야…….”

“네.”

“네가 포기 했다는 꽃밭은…….”

“그거 알아요?”

지혁의 말허리를 자르고 은채가 말문을 열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지혁은 조용히 그녀의 이 어질 말을 기다렸 다.

“나…… 지혁 씨 처음 보는 순간, 내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요. 내 운명이라는 걸. 그런 데…… 아닌가 봐요. 내 가, 착각한 건가 봐요. 지혁 씨는 내 운명이 아니라…… 아니, 아녜요. 그만 가볼게요.”

은채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잘 지내라는 말도, 다시 만나자는 말도 남기지 않고 그 녀가 떠나갔다. 텅 비어진 복도를 바라보면서 지혁은 이제야 말로 그녀와 끝이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자신 에게 철저하게 실 망해버린 그녀가 돌아섰다는 것을……. 마음을 비웠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어둡고도 절망적 인 밤이었다.

“이혼해요, 우리.”

색정적인 신음소리와 열락의 도가니인 침실 문을 열어젖히면서 소영은 무심하게 말했다. 눈 앞에 펼쳐진 장 면에 가슴이 송두리째 흔들렸지만 그녀는 태연했다.

후다닥 일어나 시트로 몸을 가리는 젊은 여배우와, 벌거벗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남편.
목구멍까지 욕설 이 치고 올라왔다. 피가 거꾸로 돌아 머리끝까지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소영은 끝까 지 침착성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나가.”

드러난 하얀 젖가슴을 필사적으로 가려보려고 몸부림치는 젊은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영은 싸늘하 게 명령했다.

“재미는 다음에 보고, 오늘은 꺼져.”

몸에 시트를 둘둘 감고 도망치듯 나가는 여자는 요즘 들어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았던 연예 인이었다. 신인연 기자치고 드라마와 CF에서 맹활약을 하던 여자. 허둥지둥 나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노려보 는 소영의 눈길이 매섭게 변했다.

“당신 뭐하는 짓이야!”

남편의 고함에 눈썹도 까딱하지 않은 소영은 픽 비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은 뭐하는 짓이죠?”

“빌어먹을!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행패야. 당신 이정도 밖에 안 되는 여자였나?”

“여기가 어딘데요? 당신이 수시로 여자 갈아 치우는 아지트? 그나마 집에는 여자들을 불 러들이지 못하니, 아 예 집을 한 채 마련하셨군요. 이 집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거쳐 갔나요?”

남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소영은 이죽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길게 얘기 하지 않겠어요. 이혼해요, 우리. 더 이상 이렇게 사는 건 무의미하다고 봐요. 당 신은 당신하고 싶 은 대로 살고, 나도 당신 같은 남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요. 이혼해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젊은 놈팡이와 눈이 맞았다고 하던데, 왜 그놈이 결혼이라도 하자 고 하던가?”

“왜요? 그래도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갑자기 질투라고 나는 건가요?”

“하!”

그가 코웃음을 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운동으로 다져진 남편의 건장한 몸을 노려보 는 소영의 눈에서 시퍼런 채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고작 이혼하자는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왕림하셨나?”

“집에서는 도통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내가 와야죠.”

은채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지혁과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은채가 아니라 이 남자였다. 결혼과 함께 엄청난 바람기로 그녀의 가슴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었던 남자. 사랑했던, 한때는 모 든 것을 다 줘도 모자랄 만큼 사랑했던 남자. 그래서 놓아줄 수 없었고 버림받는 다는 걸 용납 할 수도 없게 만들었던 남자.

어떻게든 부부의 연만큼은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남은 것은 증오 밖에 없었다. 긴 시간 기다리고 인내하 고 참아왔던 세월은 사랑을 증오로 바꿔버렸다. 이제 미련을 버려야지. 손에서 놔야하는 건 한조각의 미련 없이 놔버려야지.

“최후통첩인가? 당신이 이러면 내가 무서워서 벌벌 떨 줄 알았나? 이혼? 그래, 하지. 나도 원하던 바였으니 까 당장 해! 당장!”

“그래요. 당장해요. 변호사를 통해서 일사천리로 진행하죠.”

“잘됐군! 그럼 이혼도 하기로 했으니 이만 나가주겠나?”

“왜요? 밖에 기다리는 계집과 계속 재미를 보셔야겠다? 이 말인가요?”

“잘 아는군.”

담배를 피우며 싸늘하게 뇌까리는 남편의 뺨을 때리지 않기 위해 소영은 주먹을 움켜쥐어야 했다. 어떻게 이 런 남자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었을까. 반발하듯 뭇 남 자들과 스캔들을 일으켜도 남편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잡아 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모 두 다 허황된 꿈 이라는 걸 소영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래요, 그럼 어디 소속사 여배우와 계속 재미 보세요. 앞으로는 그런 호강하지 못 할 테 니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린지 몰라서 묻나요? 나와 이혼하면 STS도 끝이에요. 당신 인생도 끝이라고요.”

아픈 가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소영은 이를 악물었다. 상처입고 곪아터진 흉터를 보이지 않기 위해 그녀는 애써 당당함으로 자신을 감추었다.

“STS는 내꺼야. 당신이 뭔데 끝이라고 하는 거야? 이혼을 조건으로 위자료를 바라나? 엔 터테인먼트를 바래?
하! 웃기지도 않는군.”

“아뇨! 그딴거 줘도 싫어요.”

소영은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STS가 오늘날 이렇게 성장 할 수 있었던 게 누구 덕인지 잊었나요?”

남편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갔다. 소영의 웃음소리가 점차 크게 번져 침실을 빼곡히 메웠 다.

“우리 오빠가 아니었으면 STS는 애초에 망했어요.”

“당신……!”

“MBS방송국 최대주주가 우리 오빠였기에 STS는 어느 곳에서나 인정을 받았어요. 영화판 이나, 방송가나, 가 요계나……. 우리 오빠가 없는데도 과연 인정을 받을까요? 소속사 여배우와 매번 스캔들이 나 일으키는 당신 엔터테인먼트를? 후훗! 어디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두고 보죠. 우리 오빠의 힘없이는, 명망 높은 STS가 석 달 안에 문 닫는다는데 내 전 재산을 걸겠어요.”

“이봐! 여보!”

남편이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은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여보? 우리가 언제부터 여보라 불 렀지? 소영은 뒤 도 돌아보지 않고 빌라를 빠져나왔다.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정리하는 건 의외로 간단했다.
십여 년을 살아온 남편에게 이혼을 하자고 말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왜 진작 하지 못했을까. 이렇게 홀 가분한 것을 왜 두 려워하고 망설이기만 했을까.

자동차에 올라탄 소영은 시동을 걸면서 머릿속을 정리했다. 과거와의 연결고리. 이제 단 하 나만 남아 있었 다. 그리고 그것 역시 하루 빨리 매듭지어야 할 일이었다.

택배회사 일을 마치고 밤늦게 퇴근하던 지혁은 골목어귀에 세워져 있는 자동차에 우뚝, 걸 음을 멈추고 말았 다. 멀리서 보아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지긋지긋한 소영의 자동차. 지혁은 몸을 돌리고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차라리 안 부딪치는 게 나으리라.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나 채 서너 발자국도 가지 못하고 지혁은 제자리에 서고 말았다.

“우지혁 씨!”

자동차에 기대선 소영은 피식 웃음을 물고 손짓을 했다.

“이런 곳에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 찾았네. 타, 같이 갈 때가 있으니까.”

“당신을 다시 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혁은 무심하게 대꾸하며 소영의 곁을 지나쳤다. 그녀가 지혁의 소매를 잡아채고 명령했다.

“타.”

“놔! 언제까지 이럴 거야? 당신이 원하던 대로 됐잖아! 이젠 그만하자고, 최소영 씨. 당신 보는 거 끔찍하고 소름 끼치니까 그만하자고! 빌어먹을!”

자동차에 주먹을 내리 꽂은 지혁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듣든 말든 고함을 질렀다. 다 잊었다.
최소영이라는 여자도 잊고, 연기를 했던 우지혁이라는 남자도 잊고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단 하나, 최은채 라는 여자만 제외하고. 그녀의 추억만을 기억에 각인 시킨 것 빼고는 과거와는 모두 인연을 끊었다. 그런데 왜 이 여자는 자신의 앞에 나타났을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이사까지 했는데 여긴 어떻 게 찾아왔을까.

“걱정하지 마. 당신에게 매달리려고 온 거 아니니까.”

“그걸 어떻게 믿나?”

“훗, 나 오늘 이혼했어. 아! 걱정하지 마. 당신 때문에 이혼한거 아니니까. 나도 새 출발하 고 싶거든. 물론 당 신과 새 출발 하겠다는 뜻은 아냐.”

지혁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소영은 조수석 문을 열고 어서 타라는 손 짓을 했다.

“내가 왜 당신과 이 차를 타야 하지?”

“우리…… 은채에게 사과를 해야 하잖아. 우리 두 사람…… 그 아이에게 상처를 입혔으니 까 사죄를 하러가야 지. 안 그래?”

더 이상 반박 할 수 없었다. 지혁은 갑작스레 마음을 바꾼 소영을 손톱만큼도 의심하지 않 고 차에 올라탔다.
사과든 사죄든 뭐든 좋았다. 그날 헤어진 후 한번도 보지 못했던 은채를 한 번 더 볼 수만 있다면. 그것을 핑 계로 그녀를 한 번 더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소영의 차를 탈수 있었다. 얼마든지…….

“공부가 하고 싶어.”

은채의 말에 부친 최 사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같이 공부를 하면서 무슨 공부가 하고 싶다는 건지 최 사장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공부? 유학이라도 원하는 거니?”

“아니.”

은채는 새침하게 입술을 물고 말을 아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많이 놀라시겠지. 반 대가 심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일주일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지혁과 헤어 지고 집에 돌아 온 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은채는 한가지의 생각에만 매달려 있었다.

공부.

그리고 그 공부에는 절대적으로 아빠의 도움이 필요했다.

“무슨 공부 말이냐? 말을 해야 알지.”

“매니저.”

“응? 뭐라고?”

“매니저 일이 배우고 싶어.”

“무슨……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매니저 일이 배우고 싶어. 아빠가 도와줘요.”

은채는 다른 말은 못하는 것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부친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안된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노기 띤 아빠의 얼굴에 은채는 넘어야 할 산이 거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결코 물러서 지 않겠다고 되새 겼다. 매니저가 되어야 했다. 매니저가 되는 공부를 해야 했다.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현 장을 뛰어다니면서, 촬영장을 뛰어다니면서 온몸으로 부딪혀 실전에서 배워야 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요. 매니저 일이 배우고…….”

“입 다물어라!”

버럭 역정을 낸 최 사장은 은채를 남겨두고 문짝이 떨어져나가라 서재 문을 닫았다. 앵무새 처럼 했던 말만 반복하는 딸아이가 보기 싫었다. 난데없이 매니저 일을 배우고 싶다고 하는 것도 보기 싫었 다. 그러나 무엇 보다 보기 싫은 것은, 은채가 저런 결심을 왜 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알기에, 그것을 허락 할 수 없기에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조용하다 했었지.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최 사장은 나직하게 뇌까리며 밤이슬이 내 려앉은 정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밤하늘은 지독하게 어두웠고, 그의 가슴 도 시커멓게 얼룩 이 져가고 있었다.

“미쳤어? 그만 둬. 그만 두란 말야!”

자동차가 곡예를 하듯 춤을 추었다. 버럭 고함을 지르고 마구잡이로 핸들을 꺾어대는 소영 을 말려보려 했지 만 그녀는 미친 듯이 운전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서울을 벗어나 교외 외곽으로 빠졌을 때에야 지혁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소영의 운전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정신 차려!”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는 앞차를 추월하고 장난치듯 끼어들기도 해가며 다른 운전자 들의 목숨까지 위 험에 처하게 했다.

“최소영! 최소영 씨, 당신 뭐하는 짓이야!”

2차선 밖에 되지 않는 도로는 위험했다. 더구나 수시로 추월과 끼어들기를 반복하는 소영의 운전은 미친 짓 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혁의 천둥 같은 고함에도 소영은 묵묵히 핸들만 조작하고 있었 다.

“이봐, 최소영 씨…….”

계기판의 속도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핸들을 쥐고 있는 소영을 말리기 위해 지혁이 손을 내밀자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빌어먹을!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우리…… 죽자.”

속삭이듯 나직한 그녀의 음성이 확성기로 떠들 듯 지혁의 귀에 내리 꽂혔다. 그의 몸 안에 서 무언가가 툭, 끊 어졌다.

“당신과 나, 이대로 못 살잖아. 은채에게 그런 짓을 저지르고 어떻게 살지? 내가, 내가 어 떻게 그런 짓을 저 지를 수 있었을까?”

“이러지마, 이러지 말자.”

소영은 또 다른 차를 추월했다. 중앙선을 넘고 아슬아슬하게 추월한 소영의 차는 날개라도 달린 마냥 무섭게 질주하고 있었다. 뒤따라오던 차와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승용차가 날카로운 경적을 울려도 그녀는 멈출 줄 을 몰랐다.

“당신이 뭘 했다고 그러는 거야. 괜찮아. 괜찮으니까 이성을 찾아. 제발, 제발 부탁이야.”

어르고 달래도 소영은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더욱 미친 듯이 달릴 뿐이었다. 지혁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는 거냐고!”

“당신, 우리 은채 사랑하지?”

고개를 돌리고 질문을 하던 소영이 잠시 방심하는 사이 중앙선 너머에서 오던 차와 충돌이 날 뻔했다. 간신 히 위기를 모면한 소영은 히스테릭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안돼. 당신, 우리 은채 사랑하면 안돼. 당신은 안돼. 우리 은채랑 절대로 안 되는 사람이 야. 그러니 우리 같 이 죽자. 나는 은채에게 죄를 지었고, 당신은 우리 은채를 탐내고 있잖아.”

“정신 차려! 이러지마. 당신 이러면 안돼!”

2차선 도로가 굽이굽이 틀어져 도로는 한층 상황이 악화 되었다. 어떻게든 소영을 진정시키 려는 지혁의 노 력을 허사로 만들고 급기야, 산을 깎아 만든 도로에는 절벽을 가로막는 난간마저 드러났다.

“우리 은채 옆에는 당신 같은 남자가 있으면 안돼. 당신은 없어져야 돼. 나만 아니었으면 은채가 당신을 만나 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랬다면, 나도 은채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없었을 텐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녀는 더 이상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에는 묘한 광채마저 띠며 입 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거친 운전을 가로막기 위해 나서고 싶어도 행여나 더 큰 사고를 부 를까싶어 지혁은 소영을 진정시키기에만 급급했다.

“걱정하지 마. 그 아이 앞에 나서지 않을게. 원하지 않을게. 절대 나 같은 놈이 탐내지 않 을 테니까, 진정해.
정신 차려!”

“아니! 안돼. 못 믿어. 사람 마음이라는 게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더구나 사랑은…….”

소영의 곡예운전은 계속 되었다. 칠흑 같은 어둔 밤, 그녀의 차는 2차선인 도로 위를 춤추듯 제멋대로 활보하 고 있었다.

“빌어먹을! 죽으라면 나 혼자 죽겠어. 당신이 바라는 게 그거라면 나 혼자 죽겠다고! 그러 니 이성을 찾아. 제 발 정신 차리란 말야! 당신은 안돼! 당신은 다치면 안돼! 이러면 안 된다고!”

“무슨 뜻이야? 내가 다치면 안 된다니?”

잠시 속도를 늦춘 소영이 희미하게 되물었다. 지혁은 어금니를 사려 물고 소영의 손에서 핸 들을 건네받길 바 랐다.

“놔!”

휘청, 자동차가 뒤집어지듯 흔들렸다.

“제기랄! 나 혼자 죽겠다는 말 안 들리나? 당신까지 죽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야! 당신이 원하는 게 내 죽음이 라면, 그래 죽어줄게. 그러니 당신은 참아. 당신까지 죽을 필요는 없잖아! 부탁이다, 제발!
당신은 다치면 안 돼. 안된다고…….”

“왜……?”

“빌어먹을!”

지혁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눈을 감고 말았다.

“은채가…… 슬퍼할 거야. 당신이 다치면…… 당신이 죽으면…… 은채가 슬퍼한다고!”

귀청을 찢을 듯한 경적소리에 눈을 떴을 때, 지혁은 보고 말았다.

중앙선너머의 커브 길에서 대형트럭이 다가오고 있음을. 자신의 차선을 벗어나 중앙선을 침 범한 소영이 핸 들을 꺾었을 때에는 이미 늦은 후였다. 대형 트럭과 소영의 차에서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밤하늘을 메웠 다.

지혁은 소영이 반사적으로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리는 것을 간신히 틀어, 차를 왼쪽으로 몰 아붙였다. 최대한 그녀가 받을 충격을 줄여야 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트럭과 정면충돌한 자동차는 아슬아 슬하게 조수석만 부딪힌 채, 트럭의 가속도로 절벽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충돌하면서 에어백이 터져 소영은 정신을 잃은 채 핸들에서 손을 놓고 축 늘어져 있었다.
난간을 들이박은 자동차는 트럭이 브레이크를 밟았는데에도 트럭의 가속도에 밀려 점점 벼랑으로 향했다.

지혁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동차 문을 열고 차가 추락하기 전에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쳤 다. 그러나 충돌 시 트럭과 들이받아서인지 조수석 문은 쉽게 열리지가 않았다. 겨우겨우 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던지려는 찰 나, 지혁의 시야에 의식을 잃은 소영이 들어왔다.

찰나였다. 순간이었고 빛이 스치고 지나가는 속도보다 더 빠른 순간 이었다. 그 짧은 순간, 지혁이 떠올린 것 은 은채의 목소리였다. 고모를 자랑하던 그녀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햇살보다 눈 부시던 고운 미 소…….

“빌어먹을! 당신은 죽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이 미련한 여자야!
은채가 슬퍼할지도 몰라. 당신이 죽으면 은채가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단 말야…….”

지혁은 두서없이 중얼거리며 소영의 상체를 지나 운전석 문을 열었다. 전신의 힘을 끌어 모 아 소영의 몸을 밖으로 내밀고 그도 뛰어 내리려는 순간, 그의 체중에 의해 차는 앞으로 쏠리고 말았다. 외 줄타기를 하듯 절 벽과 난간에서 흔들리던 자동차는 순식간에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 모든 것이 찰나였다.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지혁에게는 영원과도 같은 찰나의 순간들이었다.

은채야……!

희미해지는 의식사이로 지혁이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은채,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 리고 죽음과도 같은 어둠이 그를 덮쳤다.
************************ 『13』 한밤중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단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곤하게 자고 있던 이 여사는 쉴 새 없이 울려 퍼 지는 벨소리에 겨우 팔을 뻗어 무선전화기를 들어올렸다.

“네.”

“사장님 좀 부탁합니다.”

잠결이라 상대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뭐라고요?”

“최 사장님 좀 부탁하겠습니다. 급한 일입니다, 사모님. 늦은 시간인 건 알지만…….”

뒤척거리고 일어나 스탠드 불을 밝혔다. 사이드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시계는 새벽 두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 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의아함은 잠시 뒤로 미루고 이 여사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남편의 어깨를 두드렸다.

“여보. 여보!”

“으음…….”

“전화 좀 받아 봐요. 급한 일이라는데…….”

이 여사는 남편에게 전화기를 건네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 새벽에 무슨 일인지 걱정이 되 어 서둘러 잠옷위 에 가운을 걸치던 그녀는 전화를 받던 남편의 언성이 높아지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린가?”

최 사장은 잠이 확 달아난 얼굴로 비스듬히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잘못 들었길 바라며 재차 확인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사고가 났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후송중이긴 한데 상태가 위중한 걸로 보입니다.”

“누가? 누가 사고가 났다는 말인가!”

“아, 저어…… 우지혁 씨와 방배동 사모님이…….”

전화기너머의 사내가 말을 얼버무렸다. 최 사장은 격한 욕설을 내뱉으며 침실을 서성거렸다.
사고라니? 무 슨 사고라는 말인가!

“거기 어딘가?”

“인근 병원에서 대학병원으로 옮기는 중입니다. 수술준비를 해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미리 전화를 드리려 했지만 워낙 경황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상태는? 누이동생은 어떤가? 괜찮은가?”

“방배동 사모님은 다행히 괜찮으십니다. 문제는 우지혁 씨인데…….”

심장이 내려앉는 다는 것, 이런 때 쓰는 말인가 보다고 최 사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나 마 소영은 괜찮다 고 하는데도 불안감이 스멀스멀 엄습하고 있었다. 누이동생은 괜찮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심장이 발작이라 도 하듯 뛰는지 최 사장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잘 지켜보라고 자네에게 누누이 강조했…….”

격하게 말을 쏟아내던 최 사장은 걱정스레 바라보는 아내를 보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지금 당장 출발하겠네. 수고스럽겠지만, 계속 지켜 봐주게.”

“네.”

“참, 병원은 어디로 가는 중인가? 응급차와 연락이 가능하다면 윤 박사가 있는 곳으로 옮 겼으면 하는데.”

“안 그래도 그곳으로 갈까 싶어 사장님께 연락드린 겁니다. 우지혁 씨가 뇌를 많이 다친 듯 합니다. 상태가 위독한 것 같으니, 뇌 전문의 윤 박사님께 미리 연락을 해두시는 게 좋을 듯해서요.”

“알았네. 그러도록 하지.”

전화를 끊고 한시바삐 나갈 채비를 하는 그에게 아내가 물었다.

“무슨 일이예요?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당신은 몰라도 돼. 신경 쓰지 말고 자도록 해.”

“왜 이래요, 정말! 사고라면서요. 사고가 났다고 했잖아요.”

왈칵 짜증을 내듯 소리를 지르는 아내의 행동에 최 사장은 당혹감을 감출수가 없었다. 은채 가 알면 안 된다.
아내가 알게 되는 건 상관없다 해도, 딸아이가 알게 되는 건 막아야 했다. 하지만 아내가 알 게 되면 은채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리라.

피붙이가 위독하지 않다니 천만다행이나, 그가 위험하단다. 딸아이가 사랑한다고 울부짖던 사내가 위독하단 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랴. 안 그래도 그 남자 때문에 간밤에 은채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 는데, 여기서 사 고 소식까지 접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이치였다.

“소영이가 좀 다쳤다는군.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당신은 집에 있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가씨가 다쳤으면 당장 가야지. 나도 준비 할게요.”

“안돼!”

“여보?”

단칼에 이 여사의 말을 가로막고 최 사장은 절대 안 된다는 듯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우선 당신은 집에 있는 게 좋을 거야. 나 먼저 병원에 가보고…… 당신은 날 밝으면 그때 와도 늦지 않을 거 야.”

“당신, 뭐 숨기는 거 있어요?”

이 여사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최 사장은 고개를 돌리고 마른기침을 쏟아냈다.

“숨기긴……. 별소릴 다하는군.”

서둘러야 했다. 아내가 더 이상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지 않게 하기 위해 다급히 밖으로 나가던 최 사장 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멈췄다.

“참, 은채한테는 말하지 마.”

“네?”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 내가 말하라 하기 전까지는 소영이 얘기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여보…….”

이 여사가 무어라 말했지만 최 사장은 듣지 못한 척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간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이 런 사고소식을 들으려고 그랬나보다. 어쩌다 사고가 났는지, 왜 두 사람이 함께 있는지 묻고 싶은 게 너무 많 았지만 그건 병원에 가서 들어야 했고, 지금은 은채가 모르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겨우 이런 사내를 위해서 매니저가 되겠다고 자청한거냐, 은채야? 겨우 이 정도 밖에 안 되 는 남자를 위해 서?

“어머, 깨어 나셨네. 어때요, 정신이 드셨어요?”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전신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 조차 없어 소영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지?

“보호자 되시는 분이 여태 기다리시다 잠시 집에 다녀오신다고 가셨어요. 기분은 좀 어때 요?”

시끄럽게 재잘대는 여자의 목소리가 귓속에 윙윙대듯 들려와 뇌를 갉아 먹으려 했다. 입 닥 치라고 소리를 지 르고 싶어도 어찌 된 일인지 입술이 열리지가 않았다.

빌어먹을, 여긴 도대체 어디야? 저 여자는 누구지?

“그래도 이 정도니 다행이세요. 사고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차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에 요?”

사고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아……! 이제야 기억이 난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 렀는지. 소영은 희 미한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원이었다. 바늘이 주렁주렁 꽂힌 팔과 환자복……. 차례대로 훑어보는 소영의 눈길에 점점 경악이 스쳐지 나갔다. 살아 있었다니. 아직도 죽지 못하고 살아 있다니! 겨우 이렇게 깨어나려고 그런 짓 을 저질렀단 말인 가. 말도 안 된다!

“많이 아프시죠? 조금만 참으세요. 진통제를 투여 했어도 여전히 고통스러울 거예요.”

“그…….”

입안이 바짝 말라붙어 버렸다. 물기 하나 없는 건조한 혀를 움직이려니 소리가 되어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니 라 신음이 전부였다.

“네?”

“아…… 그…….”

“무리하지 마세요. 지금은 안정이 최고예요. 일단 한숨 주무시고 나서 생각하세요.”

이건 아냐. 그토록 죽으려 했는데 왜 살아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는? 지혁은? 순간 사고 나기 직전, 지혁 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소영의 뇌를 강타했다.

‘제기랄! 나 혼자 죽겠다는 말 안 들리나? 당신까지 죽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야! 당신이 원하는 게 내 죽음이 라면, 그래 죽어줄게. 그러니 당신은 참아. 당신까지 죽을 필요는 없잖아! 부탁이다, 제발!
당신은 다치면 안 돼. 안된다고…….’

왜? 난 당신을 죽이려고 했는데. 당신과 함께 죽어버리려고 했는데, 당신은 내가 죽으면 안 된다고 했지?

하얀 천장을 밝히는 전등이 소영의 눈을 눈부시게 만들었다. 그리고 떠올리기 싫은 장면이 오버랩 되기 시작 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부시던 트럭의 헤드라이트. 정신없이 깜빡이며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주던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소영의 기억을 잔인하게 헤집었다.

‘은채가…… 슬퍼할 거야. 당신이 다치면…… 당신이 죽으면…… 은채가 슬퍼한다고!’

지혁의 음성이 귀를 파고 들어왔다. 귀청을 찢을 듯한 트럭의 경적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 도는 듯 했다. 그 러나 경적소리보다 더욱 소영을 힘겹게 하는 건 지혁의 떨리던 목소리였다. 당신, 그 정도였 어? 그 정도로 우 리 은채 사랑한거였어?

“아아……!”

입안은 말라버렸는데 눈물은 마르지 않았나보다. 뺨을 적시는 축축한 물기를 느끼며 소영은 눈을 감고 말았 다.

“조금 있으면 잠이 올 거예요. 한숨 푹 주무세요.”

여자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옷깃이 스치는 사각거리는 소리. 문을 여는 소리, 닫는 소리. 그 모든 것 이 동굴속의 울림처럼 커다랗게 소영의 귀를 메웠다. 소리는 선명하게 들리는데 도무지 눈 앞의 사물을 분별 할 수가 없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사물은 사고 직전의 선명한 기억과는 달리 안개 속에 휩 싸인 듯 희끄무레 하게만 보였다.

물어 봐야 하는데. 그는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 보아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마비가 된 듯 움직일 수 도 없었다.

눈앞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흐려지는 의식사이로 선연하게 떠오르는 지혁의 얼굴이 소영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그는 어디 있 지?

문득 은채의 싸늘한 눈매와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 했다.

은채야, 고모가 또 실수를 한거니? 너에게…… 그리고 이번엔 지혁 씨도 포함해서, 두 사람 에게 내가 실수를 한거니? 그 사람에 대한 너의 사랑, 너의 정을 떼게 하기 위해 우리 집에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오히려 너에겐 상처만 입혔었지. 순결한 네 사랑은 견고해졌고, 순수한 너의 정은 두터워만 졌지.
하지만 은채야, 이 렇게 되길 바라고 죽기를 자처한 것은 아니었어. 내가 살기를 바라고 그런 짓을 저지른 건 아니야……. 너는 믿지 않겠지. 결코 믿으려 들지 않겠지.

어떻게든 바로 잡고 싶었다. 엉망이 된 실타래를 풀고자 노력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실은 더 엉켜버린 듯 하 다. 악연과도 같은 지혁과 자신이 죽어버리면 그만 일거라 예상했건만, 그렇게 되면 모든 것 이 제자리로 돌 아 갈 것이라 여겼건만, 어디서 잘 못 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틀어져 버린 것일까.

천장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불빛이 어른거리며 그녀의 시야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소영 은 어두컴컴한 블랙홀 속으로 빠지듯 점차 의식을 잃어갔다.

단박에 허락하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기에 부친의 반대에 서운하지도 않았다.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길 수 있다고 은채 는 몇 번이고 주 문을 걸 듯 다짐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점점 의욕을 상실할 것 같았다. 사기를 충전 하기 위해 턱을 치 켜세운 은채는 집에 가서 맞서야 하는 부친을 생각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마도 긴 싸움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나 밖에 없는 딸에 대해 실망하실 지도 모 르지.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것이 그녀가 결정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했 다 해서 돌아서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 그가 살아온 날들이 내 기준에 모자라다 해서 등을 돌리는 것은 올 바르지 않았다. 몇 날며칠 생각하고 잠 못 이루며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 실망하지 않았다면 새빨간 거짓이겠지. 운명이라 믿은 남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낱낱 이 듣게 되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것을 겪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 허나, 그에 대한 실망 보다 믿음과 신뢰 가 먼저였다. 무너진 하늘은 다시 떠받들면 되고, 갈라진 땅은 메우면 되는 거였다. 다 만…… 은채는 자신이 없었다. 과연 마음먹은 만큼 앞날을 헤쳐 나갈 수 있을 런지,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떠오르게 되는 고모와의 일을 깨끗하게 뇌리에서 지울 수 있을 런지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워지기만 했다.

이러면 안돼. 지금은 누구보다 강해져야 하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야. 정신 차려, 최은채!

“은채야, 최은채!”

학교를 막 빠져나가던 은채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목소리만으로도 누가 불렀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요즘 같은 때에는 현욱과 절대적으로 부딪 치고 싶지 않았 다.

“야, 최은채! 안 들려?”

현욱이 그녀를 홱 잡아끌었다. 은채는 거칠게 현욱의 손을 뿌리치고 눈을 매섭게 치떴다. 얼 마 전, 지혁의 일 로 현욱과 다퉈서인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귀찮기까지 했다.

“왜?”

“부르면 대답을 해야지.”

“안 들렸어.”

“귀에 뭐 틀어막았냐?”

“왜 부른지 용건만 말해. 나 바빠.”

은채는 냉담하게 현욱을 외면했다. 바닥을 발길질로 차대던 현욱은 뭐에 부아가 났는지 연 방 사나운 욕설을 내뱉었다.

“할말 없으면 갈게. 네 욕 들어줄 만큼 한가하지 않아.”

“젠장! 그래, 너 바쁜 거 알아. 안다고! 그런데, 내가 방금 무슨 소리 들었는지 알아? 망 할!”

돌아서는 은채의 손목을 낚아챈 현욱이 외쳤다.

“너 휴학 한다는 소리 들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해명해봐!”

“내가 휴학하는데 너한테 설명하고, 해명하고 해야 하는 거였니?”

“최은채…… 우리 자꾸 엇나가지 말자. 최소한 내가 네 친구라면 미리 말해줘야 하는 거 아냐? 난데없이 휴 학이라니? 휴학이라니!”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아니, 해야 할 일이 생겼어. 됐니?”

지나가는 학생들이 흘긋흘긋 쳐다보았다. 몇몇 친한 친구에게 눈인사를 보낸 은채는 현욱을 짜증스럽게 바 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현욱을 친구로서 의지할 수 있었다면, 누구보다 먼저 은채는 자신의 결정을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욱은 더 이상 고민을 상담할 수 있는 친구가 아니었다. 사사건건 반기를 드는 심술 궂은 사내아이일 뿐이었다.

“무슨 일?”

“넌 몰라도 돼.”

“망할! 그래도 넌 나를 친구라 부르냐? 이렇게 나, 무시하면서 친구라 부를 수 있어?”

현욱이 따지듯이 쏘아붙였다. 은채는 피식 실소를 흘리고는 현욱을 똑바로 정시했다.

“친구이길 거부한 건 너였어.”

가슴이 쓰리다 못해 예리한 바늘로 찌르듯 따가웠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울컥 목도 메이기 시작했다. 현욱과 만나면 왜 이 모양으로 늘 다투기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짐작이 가기는 했다. 현 욱이 왜 이러는지 ……. 하지만 은채는 아니길 바랐다. 현욱은 좋은 친구일 뿐 그 이상은 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소중한 친구 는 남자가 되었어도, 은채의 눈에는 여전히 소년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 소년이 남자가 되어 다가서는 것이 부담스럽고 감당하기 어려웠다.

현욱을 남겨두고 걸어가던 은채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

“너…… 그거 아니? 내가 얼마나 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너의 조언을 듣고 싶은지, 너 알기나 하는 거니?”

내 판단이 옳다고 해줄 친구가 필요했다. 내 결정을 두 팔 벌려 환영해줄 지지자가 필요했 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단 한사람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상대가, 은채에게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현욱이 가로막았다. 세상 고민 다 짊어진 얼굴로 그가 달래듯 부드럽게 덧붙였다.

“말해봐. 들어줄게. 그래, 다른 건 약속 못하고 네가 하고 싶은 말, 잠자코 들어줄게. 내 도 움이 필요하다면… … 얼마든지 들어줄게. 나…… 네 친구잖니.”

오랜만에 현욱의 입가에 시원스러운 미소가 새겨졌다. 은채는 북받치는 설움을 식도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고 현욱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듣고 싶은 말도 많았다. 어쩌 면 오늘은 집에 늦게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은채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슴에 담아두 었던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가씨는 어때요? 도무지 답답해서 병원에 가고 싶어도 당신이 질색을 하니, 가지도 못하 고…….”

최 사장은 너무 지쳐 대꾸할만한 기력조차 없었다. 밤새 11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수술실 문 밖에서 지켜보아 야 했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누이동생을 옆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지혁의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으로 마쳤 고, 누이동생은 중환자실에서 특실로 옮겼다. 수술을 마친 지혁까지 병실로 옮기고 싶었으 나, 깨어나기 전까 지는 누구도 환자의 상태를 예측할 수 없다 해서 그대로 중환자실에 두어야만 했다. 그나마 소영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누이동생은 꽤 오랫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마치 세상과의 단절을 원한다는 듯 소 영의 눈은 굳게 닫혀 있었다.

“괜찮아. 염려할 정도는 아냐.”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당신이라면 걱정 안 되겠어요?”

“여보, 나 잠시 옷 갈아입으러 들어 온 거야. 나중에 얘기 하면 안 되겠나?”

“당신 피곤한 거 알아요. 그러니까 나도 가겠다고요. 당신 혼자 동분서주 할 필요 없잖아 요. 요즘 무슨 일인 지 당신이 내게 벽을 쌓고 있는 것 같아요. 왜 그래요,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예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렇군요. 내가 하는 말은 겨우 쓸데없는 소리에 불과하군요. 당신, 끝까지 말하지 않을 참인가요? 끝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아내는 단호했다. 최 사장은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생각 을 정리했지만, 이어지는 아내의 말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아까, 윤 박사님에게 전화를 했어요. 너무 걱정이 되어서……. 난 당연히 아가씨가 수술을 했을 거라고, 아 가씨 상태는 어떠냐고 물었는데, 윤 박사가 뭐라 한줄 알아요?”

이 여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듯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그를 정시하고 있었다.
최 사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드디어, 아내도 알아 버렸는가.

“왜, 윤 박사님이 지혁 군의 수술을 집도 한거죠? 아니, 왜 지혁 군이 아가씨와 함께 사고 가 난 거죠? 설명해 주겠어요?”

최 사장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지 극히 조심스러웠다.

“난, 처음에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아니, 동명이인일거라는 생각까지 했다고요!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것이 아귀가 맞아 들어가더군요. 왜 당신이 은채에게 그 남자를 그만 만나라고 했는지, 왜 말할 수 없다고 했는지!
그 모든 비밀의 열쇠는 아가씨가 쥐고 있었어요. 그렇죠? 내 짐작이, 빌어먹게도 지금 이 상 황에 일치하는 거 죠? 그런 거죠?”

악을 쓰듯 이 여사의 음성이 높아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내는 정신없이 침실을 서성거 리며 손을 비틀고, 연방 신음을 내뱉었다.

“말도 안돼! 이건 말도 안 된다고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아가씨가, 은채 고모 가……!”

“여보, 진정해.”

“내가 진정하게 됐어요? 그래서였어. 우리 은채가 아파했던 이유가, 그 이유가…….”

더 이상 말을 잇기가 힘들다는 듯 이 여사는 이마를 짚으며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최 사 장은 아내를 부축 해 티 테이블 의자에 앉히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채는?”

“아직 안 들어 왔어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소리가 높아져서 은근히 걱정했는데,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니. 최 사장 은 아내의 맞은편 에 앉아 한숨처럼 말을 쏟아냈다.

“나도 아직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수는 없어. 분명한 건, 당신 짐작이 맞다는 것 외에는 별달리 할 말도 없고. 다만…… 상황이 안 좋아.”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뇌 전문의 윤 박사에게 수술을 받을 수 있었던 지혁은 어떻게 보 면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비서를 통해 사고 경위를 들었던 최 사장은 한순간도 마 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24시간 누이동생을 뒤따르라던 지시를 착실하게 이행한 그가 무어라 했던가. 암담함에 최 사장은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 어떤 말을 꺼내고 어떻게 이해를 시켜야 하는지 도무지 계산이 서질 않았다. 살아오 면서 이토록 혼란에 쌓이는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앞뒤가 꽉꽉 막혀버린 일도 드물다면 드 물었다.

“두 사람…… 어떤 사이예요? 아가씨랑, 지혁 군…… 아니 좀더 잔인하게 말해 볼까요? 은 채 고모와, 은채가 사귄다는 남자, 어떤 사인가요?”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아내의 음성에 최 사장의 미간이 좁혀졌다. 누이동생의 결혼생활이 평탄치 못하다는 것은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그들의 결혼생활에 간섭을 하려고 하기도 했었다.
허나 소영이 반 대를 했다. 자신들의 일이나 나서지 말라고 단호하게 쇄기를 박았었다.

결혼하기 전부터 누이동생이 더 원했던 결혼이었다. 이혼 역시 누이동생이 바라지 않던 결 과였다. 잘 이겨 낼 것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누이동생은 지치고 외로웠나보다. 그게 아니면 이걸 무어라 설명한 다는 말인가.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남자와 뒤얽힌 관계를 무어라 정의 내린다는 말인 가! 이 무슨 운명의 장난으로 그 남자가 하나밖에 없는 딸과 얽혔다는 말인가! 전생에 무슨 죄를 그리 지었기 에, 은채는 그 남자 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뇌수가 먹먹해졌다. 심장이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발겨지는 기분이었다. 최 사 장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당신 짐작대로야.”

“말도 안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이 여사는 답답하다는 듯 창문을 활짝 열어 제쳤다. 그럼에도 진정할 수 없는 지 침실 문까지 열어젖히고 소리를 질렀다.

“그만합시다, 여보. 오래 있을 시간이 없어. 바로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그 친구 상태가 안 좋아. 수술은 그 럭저럭 끝났는데, 뇌수술이라는 게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다더군.”

옷을 갈아입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최 사장은 파리하게 굳어버린 아내의 곁으로 다가섰 다.

“당신이 이렇게 충격 받을 까봐 말하지 않았던 거야.”

이 여사는 매섭게 남편의 손길을 물리쳤다.

“됐어요.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 하다 사고가 났는지 말해줘요. 어떻게 하다 그 지경이 되었는 지 어디 한번 말해보라고요!”

이 죄를 어찌 갚을까. 아니, 이 은혜를 어찌 갚을 수가 있을까. 분명 누이동생을 뒤따르던 비서는 소영이 먼 저 지혁을 찾았다 했다. 싫다는 남자 억지로 차에 태워 어디론가 달렸다고 했다. 그리고 그 차는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질주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분명 죽기를 작정한 모양이었다.

“자살…… 하려고 했었나봐.”

“뭐라고요?”

이 여사의 음성이 쇳소리로 변했다.

“누가요? 누가 자살을 기도해요?”

“소영이가.”

“미쳤군요. 미치지 않고는 그 짓을 할 수가 없지. 아가씨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거지… ….”

이 여사는 넋이 나간 사람마냥 했던 말을 몇 번이고 중얼중얼 반복했다.

“사고 직전에 그 친구가 핸들을 꺾었다더군. 트럭에 들이 받으려고 했던 소영의 차가 운전 석에 영향이 미치 지 않도록 조수석 쪽으로 핸들을 꺾었대. 그래서 비교적 소영인 무사하고 문제는…….”

“문제는요?”

“차가 트럭과 충돌하면서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한 것 같아. 절벽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지혁 군이 소영일 구했 다고 하더군. 절벽 아래에 자그마한 난간이 있었던 모양인데, 김 비서가 달려갔을 땐 소영인 그 난간에서 기 절한 채 의식이 없었다고 해.”

이 여사의 안색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 최 사장은 의무적으로 말을 하며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지혁 군이…… 먼저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더군. 충분히 먼저 피할 수 있었는데, 소영일 구하고…….”

이 여사는 침실 문에 고정된 눈을 거둘 수가 없었다. 남편의 말을 가로 막아야하는데 입이 얼어붙기라도 한 양 한마디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그 친구가 미처 빠져 나오기 전에 그만 차는 절벽으로 굴렀다고…….”

“그럴 리가…… 그럴 리가…….”

갑자기 들려오는 경악에 찬 목소리에 최 사장은 들고 있던 넥타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돌 아서는 그의 시야 에 바들바들 떨고 있던 은채가 들어왔다.

“은채야!”

최 사장 내외가 동시에 딸아이를 불렀다. 그러나 은채는 대답대신 고개만 가로저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 고 있었다.

“아냐…… 아닐 거야.”

“젠장!”

최 사장은 다급하게 은채를 붙잡았다. 곧 쓰러질 듯 은채는 힘없이 그의 품에 안겨들면서도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다그쳤다.

“아니지, 아빠? 내가,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어디서부터 들은 걸까. 그게 뭐가 중요하랴. 그토록 숨기려고 했건만, 이미 상처입고 깊은 상흔이 새겨진 딸 에게 이 아픈 소식을 전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전전긍긍했건만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 았다. 가장 좋지 않은 방법으로 딸아이는 사고소식을 듣게 되었다. 가장 들려주고 싶지 않은 방법으로.

“이건 아냐! 이건 아니라고! 전화를 받지 않기에 어디 여행이라도 간 거라 생각했어! 우리 서로 생각을 정리 할 시간이 필요 할 거라고 여겼단 말야! 내가 시간이 필요한 만큼 지혁 씨도 시간이 필요 할 거라고 생각했는 데…….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어. 안돼, 이러면 안돼…….”

“은채야! 은채야!”

생명력 없는 인형처럼 은채는 최 사장이 뒤흔드는 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최 사장은 악몽을 꾸는 것 같은 딸 아이의 어깨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은채야!”

“어디야? 병원…… 아니지. 윤 박사님이라고? 언제였어? 언제 사고 난 거야. 왜 난 모르고 있었던 거야! 왜 나한테는 말하지 않았던 거야!”

“진정해, 은채야. 괜찮아. 괜찮을 거야.”

은채는 거칠게 부친의 품을 벗어나며 싸늘하게 뇌까렸다.

“괜찮긴 뭐가 괜찮은데? 고모가 다치지 않아서? 고모가 무사해서? 아빠, 겨우 이 정도였 어?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었어? 그래? 용서 안 해. 아빠도, 새엄마도, 고모도…… 모두 용서 안 해. 죽어도 용서 못해!”

누구보다 용서 하지 못할 사람은 지혁 씨, 당신이야. 이렇게 떠나버리면 용서 안할 거야. 고 모 차에 왜 타고 있었는지 묻지 않겠어. 왜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 고모를 먼저 구했는지 묻지 않겠어. 하지 만,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잊어버렸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가 누워 있었다. 은채는 울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허나 의지를 배반한 눈물은 속절 없이 볼을 적시고 목덜미를 적셨다.

다가서기가 두려웠다. 그가 아닌 것만 같아 차마 손을 내밀기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언제나 다정하던 그였 다. 언제나 웃는 얼굴의 그였다. 그러나 지금의 지혁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하얀 붕대를 칭칭 감고, 수많 은 바늘과 줄에 의지해 가느다란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혁 씨…….”

메마르고 탁한 어조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당장이라도 대답해 줄 것 같은데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걸음, 그에게 다가섰다. 지혁의 맥박과 심장박동을 측정하는 소리가 은채의 심장을 찢어발 기는 듯 했다.

“일어나 봐요, 이렇게 누워 있지 말고 어서 일어나요, 제발…….”

지혁의 싸늘한 손을 잡고 은채는 속삭이듯 말문을 열었다. 멀리서 간호사가 조용히 하라는 경고의 눈짓을 보 내도 은채는 속삭임을 멈추지 않았다.

“나…… 지혁 씨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어. 그거 해야 돼요. 지혁 씨가 들어줘야 한단 말예 요. 그러니 일어나 요. 제발, 나 아프게 하지 말아요. 지혁 씨 이렇게 누워 있으면 나, 나…….”

은채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소리 죽여 울고 말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해야 할 말이 있 는데 하지 못했다.
화가 나고 억울해서, 그가 밉고 속상해서, 일부러 해주지 않은 말이 있는데, 그는 기다리다 지쳤는지 귀를 닫 아 버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나, 너무 아파요.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삐삐삐삐…….

순간 정적만이 감도는 중환자실에 위기가 닥쳐왔다.

지혁의 손을 잡고 있던 은채는 갑작스레 의사와 간호사가 지혁의 주변을 빙 둘러싸자 그를 보호하기라도 하 는 양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왜 이래요? 무슨 일이예요?”

“비켜주세요.”

간호사가 은채를 밀치고 지혁을 체크했다.

“혈압이 떨어졌어요.”

“맥박도 일정하지 않아요.”

“쇼크 상태야! 윤 박사님, 어서 윤 박사님 콜 해!”

“좀 전까지 괜찮았잖아! 갑자기 쇼크라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십여 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지혁의 주변에 매달려 무어 라 말하고 있는 것이 은채의 눈에는 흑백사진처럼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나가주세요, 우지혁 씨 보호자 분.”

누군가 은채의 몸을 밀어냈다.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던 은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간 호사의 손을 뿌리 치고 지혁에게 달려갔다.

“안돼요, 지혁 씨. 이건 아니잖아. 이러면 안 되잖아. 내가, 내가 할말이 있다는데 이러면 안 되잖아요!”

“보호자 분 밖으로 모셔, 어서!”

지혁에게 다가서기도 전에 은채는 서너 명의 사람들에게 끌려 밖으로 내몰려야 했다. 거칠 게 반항하고, 사납 게 소리를 질러도 그들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거 놔요! 이거 놔! 할말이 있단 말예요. 그거 하기 전에는 못 나가. 들려줘야 해요. 지혁 씨가 기다릴지도 모르는데……. 이거 놔! 놓으란 말야!”

“다른 환자분도 있어요. 왜 이러세요, 정말!”

“잠깐이면 돼요. 오 분이면 된다고요. 아니, 일분이라도 좋아요, 제발…… 나, 저 사람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 어요! 저 사람, 기다릴지도 몰라요. 지혁 씨! 들어봐요! 제발 내 말 들어봐요! 내 목소리 들 리죠? 들리는 거 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혁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은채는 사람 들의 손길에 밀리 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피를 토하듯 격하게 참고 참았던 말들을 내뱉었다.

“이러지 말아요. 이러면 안 돼요, 지혁 씨! 지혁 씨는 내 운명이 아닌 거 같다고, 착각 한 거 같다고 돌아 선날 있죠? 그날 오해하지 말아요! 그 말, 오해하지 말라고요! 지혁 씨는 내 운명이 아니라, 내가 품어야할 사람이 었다고 나 말 못했어. 더 이상 망가지지 않게,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게, 내가 품어야할 사람 이었다고 말 못했 단 말야! 너무 화가 나서…… 왜 하필이면 고모인지, 왜 나만을 기다려주지는 않았는지 서 운해서, 나 하지 못 한 말이 너무 많아. 나중에, 나중에 들려주려 있는데, 이러면 안 되잖아요, 지혁 씨. 내게 이 러면 안 되잖아 요. 내가 포기한 것은 꽃밭이었다고…… 비바람에 엉망이 되어버린 꽃밭을 포기한 거지, 꽃 은 포기하지 않았 다고 말하지 못했어. 말하지 못했단 말예요! 들어줘요, 지혁 씨. 이대로 눈 감지 말아요. 나, 어떻게든 지혁 씨에게 힘이 되려고 했는데. 이러면 안 되잖아! 나, 어떻게든 노력하는데. 내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눈 떠 요! 일어나란 말예요, 지혁 씨……!”

은채는 할말을 채 다 하기도 전에, 중환자실 밖으로 내몰리기도 전에,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 고 말았다.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지혁의 맥박이 현저하게 내려가는 소리가 잔인하게 은 채의 귀에 내리꽂혔다.
************************ 『14』 저주스러울 정도로 고모가 미웠다. 지혁은 얼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상처를 입고, 여전히 혼수상태인데 고모는 교통사고 환자로 보이지 않을 만큼 사지육신이 멀쩡했다. 기껏해야 여기저기에 긁힌 자국과 팔에 꽂 힌 링거바늘만이 그녀가 환자임을 보여주었다.

은채는 병실 문을 닫고 잠이든 소영의 곁에 다가섰다. 고른 숨소리를 내는 소영은 평화스러 웠다. 한 남자를 죽음의 사지로 이끌어 갔던 여자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자살을 하려고 했었지. 분명 아 빠는 그렇게 말 했다. 고모가 자살을 원했다고. 그와 함께 죽기를 원했다고. 왜? 은채는 눈을 매섭게 치뜨고 소영을 노려보았 다.

“고모가…… 내 고모이긴 한거야? 아니, 내가 고모의 조카이긴 한걸까…….”

은채의 혼잣말이 적막감만 감도는 병실을 지배했다. 울지 않으려고 했었다. 어떤 일에도 눈 물을 보이지 않겠 다고 다짐했건만, 지혁에게 하지 못한 말을 쏟아내면서 그만 오열을 터트리다 탈진하고 말 았다. 참고 참아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에서만 눈물이 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슴에도 눈물이 흐르는 것만 같 았다.

중환자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모님이 탈진한 그녀를 바로 병실로 옮겨, 은채는 그 뒤의 기억이 남아 있 지 않았다. 꼬박 하루를 잤다 했다. 죽은 듯이 잠만 잤다 했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동안, 지 혁은 다행히 위험 한 고비를 넘기고도 의식을 찾지 못해, 여전히 혼수상태라 했다.

그렇게 은채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소영의 병실을 찾았다. 허나, 소영은 은채와의 만남을 차 단하듯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래, 고모에게도 고모만의 아픔이 있다 했었지. 그녀도 아프고 괴로웠다고 했었지. 그러나 어찌하랴. 지금 의 은채에게는 고모의 아픔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을. 지혁을 죽음으로 이끈 고모 를 결코 용서 할 수 없음을 어찌하면 좋으랴. 이해 따위 불가능한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고모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무너진 은채는 더 이상 소영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 다. 어떤 말이라 도 퍼부으려고, 잠이 들었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속엣 말을 남김없이 퍼부으려 달려왔건만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은채는 쓸쓸히 걸음을 돌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그가 아프면…… 나도 아파. 고모는 지혁 씨를 상처 입히면서, 동시에 나까지 상처를 입혔 어.”

“은…… 은채니?”

메마르고 갈라진 음성. 드문드문 말까지 끊어가며 소영의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문을 여 는 은채의 행동을 정지시켰다. 은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 깨어났는지 굳게 닫혔던 소영의 눈이 그녀 를 바라보고 있었 다.

“이, 이리…… 와.”

힘겹게 손을 들어올리던 소영의 손이 침대 맡에 툭, 떨어졌다.

“미안해……. 미안해, 은채야.”

“뭐가? 뭐가 미안한데?”

설핏 자조적인 미소를 배어 물고 내뱉는 은채의 음성은 서늘했다. 손짓을 하던 소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재차 말문을 열었다.

“그는? 지……혁 씨는?”

“하!”

말도 안 된다는 듯 은채는 홱 고개를 돌려 소영을 외면했다.

“어떻게…….”

“뭐가 궁금한데? 살았는지, 죽었는지가 궁금해? 아니면, 죽었다는 확인이 필요해? 뭐가 궁 금한데!”

“은채야…….”

“내 이름 부르지도 마! 소름끼쳐!”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 누군데 이제 와서 걱정스러운 척 한단 말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따지 고 싶은 것도 많았고 듣고 싶은 말도 많았다. 그러나 소영이 깨어나자 거짓말처럼 하고픈 말도, 듣고픈 말도 공기 중으로 흩어져버렸다. 은채는 더 이상 고모와는 있기 싫다는 듯 냉랭하게 몸을 돌렸다.

“은채야…… 나, 물 좀 주겠니?”

소영의 부름이 애절했다. 못들은 척 밖으로 나가려던 은채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기계적으 로 생수를 내밀었 다. 일어나지 못하는 소영을 위해 침대를 일으켜 세우고, 고모의 등에 쿠션까지 받친 후에야 은채는 긴 한숨 을 몰아쉬었다. 힘주어 잡으면 바스라질 것처럼 고모의 몸은 가벼웠다. 문득 알 수 없는 슬 픔에 목이 메어왔 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우리는……. 응, 고모?

물로 입술을 적신 소영은 나직한 기침을 내뱉었다.

“그는 어떠니. 괜찮은 거니?”

“어쩌길 바라는데, 고모는?”

잔뜩 날이 선 목소리가 그녀에게도 낯설었다. 은채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소영이 마시다 만 컵을 만지작거렸 다.

“무엇을 바라고 그런 짓을 저지른 건데?”

“은채야…….”

“지혁 씨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면, 포기해. 지혁 씨…… 안 죽었어.”

창백하던 소영의 얼굴에 한줄기 빛이 스쳤다. 은채는 쇄기를 박듯 매몰차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고모의 허튼짓 때문에 지혁 씨가 아파.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 여전히 혼 수상태란 말야!”

소영의 입술이 쩍 벌어졌다. 말라붙은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고모를 이해하고 싶어.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 상황을 정말이지 이해하려고 노력이라도 하고 싶어. 그런데 그거 알아, 고모? 내가 이해를 하려고 했던 그 순간에, 고모는 지혁 씨의 목숨을 담보로 무 서운 게임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어떻게든 그 사람에게 힘이 되려고 했던 그 순간에, 고모는 지혁 씨의 목숨을 손에 쥐고 웃고 있었던 거라고! 그렇게 고통스러운 척 하지 마. 지금 이 시점에서 누가 가장 힘들지, 괴로울지…… 그걸 안다면, 그런 얼굴 하지 마.”

고개를 푹 숙인 소영은 묵묵히 은채의 말을 듣기만 했다. 한마디 한마디 뼈를 깎는 아픔으 로 은채는 이를 악 물었다.

“그래, 고모도 힘들겠지. 힘들었겠지. 하지만 왜 고모의 아픔에 다른 사람도 동참해야 하는 거지? 고모의 아 픔은 고모 혼자만의 것 아냐? 왜 거기에 지혁 씨까지 끌어 들이려 했냐고! 왜!”

“너랑 그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겠다고…….”

“그래서, 고모는 살고, 그는 위험에 처하게 했어? 내가 말했지. 내 일에 더 이상 상관하지 말라고. 내가 해결 한다고, 말했었지!”

소영의 나직한 말을 가로채고 은채가 소리 질렀다. 의식 없이 누워있던 지혁을 떠올리자 가 슴이 심하게 아파 왔다. 누군가 쥐어짜듯 신음마저 튀어나오려 했다. 이대로 그의 웃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없 을 것만 같아, 목 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은채는 모질게 마음을 다잡고 숨이 막히는 가슴을 주먹으로 두 들겼다.

“지혁 씨가…… 눈을 뜨지 못하면…….”

은채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말을 이었다.

“고모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말을 마치고 나가려는 은채의 뒤로 소영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나도…… 나를 용서 하지 못할 거야.”

은채는 걸음을 멈췄다.

“차라리 그때 지혁 씨가 죽기 싫다고 발버둥이라도 쳤으면 이렇게 힘들진 않을 텐데… ….”

물기 젖은 소영의 음성에 은채는 사고현장을 목격이라도 하는 듯 눈을 감고 말았다. 어땠을 까, 그는? 그 순간 얼마나 공포에 휩싸였을까…….

“내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 혼자 살겠다고 했다면…… 이토록 미안하지는 않을 텐데. 이렇게까지 죄스럽지는 않을 텐데…….”

고모의 안전을 먼저 생각했다는 아빠의 말이 은채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 순간 왜 고모를 먼저 구했을까. 자 신이 먼저 나왔다면…… 그랬다면……. 이어지는 소영의 말이 은채의 생각을 방해했다.

“내가 죽으면…… 네가 아파한다고, 그래서 네가 울지도 모른다고…… 자기 혼자 죽겠다 고…….”

은채는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 었다. 뭐라 한거 야, 지금?

“그 위험한 순간에, 그는 왜 네 슬픔에 아파했을까.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너 눈 물에 아파했을까.
그런 사람을…… 나는 왜 죽이려고 했을까. 차라리, 차라리 내가 죽어버리는 게 나았을 텐 데…….”

“그래, 나도 차라리 고모가 다치는 게 훨씬 나았을 것 같아! 차라리 고모 혼자 누워 있는 게……!”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다, 고모가 미울지언정 죽기를 바라진 않았다.
만약 고모가 죽었다면? 중환자실에 혼수상태로 누워 있는 게 고모라면? 뿌옇게 흐려진 각 막에 고모의 얼굴 이 들어왔다. 은채는 고개를 가로젓고 전신의 힘을 끌어 모아 바닥에서 일어났다.

“엉뚱한 생각하지 마. 지혁 씨가 자기 목숨까지 내버려가며 고모를 구했어. 지혁 씨 깨어날 때까지, 고모는 죽는다는 생각 하면 안돼. 죽고 싶어도 그때까지 참아. 또다시 엉뚱한 짓 하면…… 고모 다 시는 안볼 거야.”

단호하게 말을 마친 은채가 나갔다. 혼자 남겨진 소영은 굳게 닫혀버린 문이, 마치 자신을 향한 은채의 마음 을 대변하는 것 같아 오래도록 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있으면 은채가 돌아오기라도 하는 듯……. 얼마나 있었을까. 낮은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소영의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했지만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이 내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어때요, 아가씨?”

조심스레 들어온 이 여사가 소영을 살폈다.

“은채…… 나가던데,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언니, 미안하지만 저 좀 눕게 해줄래요? 혼자는 잘 안되네요.”

“그러세요.”

침대를 눕히고 나서 직접 쑤어온 죽이 담긴 보온병을 테이블 위에 놓고 이 여사는 흠흠, 헛 기침을 내뱉었다.

“내가 아가씨한테 무슨 말을 해야 되는지…….”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소영은 싸늘하게 말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치부가 낱낱 이 공개 되었다.
그것도 가족이라는 이름에게.

“그이가 알아요. 나도…… 알게 됐고요.”

“뭘요? 뭘 알게 됐는데요?”

따지듯이 되묻고 입을 다물어 버린 소영은 시트를 얼굴까지 뒤집어썼다. 머릿속이 엉망이었 다.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은채의 얼굴 만이, 혼수상태라 는 지혁만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뭘 안게 된 거 같아요?”

넌지시 물어보는 이 여사의 의도를 간파한 소영은 신음을 삼켰다. 오빠가 사고 뒤처리를 했 다 하더니 결국은 지혁과의 관계도 알게 되었구나.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수치심과 모멸감이 피를 타고 혈 관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우연으로 만나서 우연으로 끝나야 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직한 이 여사의 음성이 소영의 귀에 맴돌았다.

“우연으로 만나서 필연이 되는 사람이 있고요……. 누가 우연이고, 누가 필연인지…… 그건 아가씨가 가장 잘 알거라고 생각해요. 하나만 말하자면, 우연으로 끝나야할 인연이 길어지면, 그건 악연이 될 수밖에 없다 고 생각해요. 많이 생각했어요.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보고…… 누구의 잘못 인지, 이제 와서 그게 뭐 중요하겠어요. 아가씨의 결정에 공감하고 싶지만, 한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라 섣 불리 판단을 내릴 수가 없어요.”

소영은 천천히 시트를 끌어 내렸다.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던 이 여사가 힘겨운 미소를 짓 고 있었다.

“방금 우지혁……, 그 사람을 보고 왔어요. 사람 심리라는 게 참 이상해요. 그냥 사람 하나 놓고 봤을 때에는 그가 꽤 좋은 사람으로 보였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더군요. 그 런데요, 아가씨.
우리 은채가 많이 아파해요. 그 남자가 아파서…… 그 남자가 깨어나지 못했다 해서, 우리 은채가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해요. 어제 울더군요. 중환자실 밖에 까지 다 들릴 정도로 울다 울다 지쳐서 탈진 해버리더군요.
나도 울었어요. 우리 은채 울 때 나도 피눈물을 흘렸어요. 좀더 좋은 사람이면 좋을 텐 데……. 아가씨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럼 안 되는 거였어요. 어쨌든 아가씨 가 한 짓은 살인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은채를 생각했다면…… 좀더 신중했어야 했어요. 아가씨 목숨도, 그 사람 목숨도 모 두 소중하니까요.”

“언니…….”

“그 남자가 깨어나지 못해서, 우리 은채가 힘들어해요. 우리 은채가 힘드니까, 나도 힘드네 요. 나…… 은채에 게 힘이 되어 주기로 했어요. 은채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아니 벌써 결정을 내렸다면, 거기 에 따르기로 했어 요. 안된다고 하려 했는데…… 그럼 안 될 거 같아요. 지금 은채의 곁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아가씨도 그이도 우리 은채에게 안 된다고만 하니까. 나라도 내 딸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어요.”

소영의 말을 가로막고 독백처럼 말을 쏟아낸 이 여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만에 십 년은 늙어버린 듯 한 그녀는 소영의 손을 마주잡고 나직하게 읊조렸다.

“언젠가, 은채가 그런 걸 물어본 적이 있어요. 아빠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느낌을 기억 하냐고. 난, 은채의 그 느낌을 믿어 보기로 했어요. 이기적인 부모보다, 내 아이가 살아갈 때 힘이 되어주는 엄 마로 남겠어요. 만 약 훗날 이런 내 생각을 후회하게 되는 날이 온 다해도, 그건 그때의 몫이에요. 지금은 현재 만 생각할거고, 은채가 은채의 감정에 충실하듯, 나도 내 판단에 충실하기로 했어요. 아가씨가 어리석다고 비웃는다 해도 어 쩔 수가 없어요. 우연으로 만나 우연으로 끝냈어야할 인연과, 우연이 필연이 되어야 했던 인 연…… 누가 우 연이고 누가 필연인지, 아가씨도 진지하게 생각해주기를 바래요.”

이 여사가 일어섰다. 소영에게 힘내라는 듯 힘주어 잡았던 손을 놓고, 고갯짓으로 인사를 마 친 그녀가 조용 하고도 단아한 몸짓으로 병실을 빠져나갔다.

남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은채가 울고 있었다. 병원 복 도에서 듣게 되는 은채의 울음소리는 처절했고, 오열하다 쓰러진 딸을 보았을 땐,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누구 하나 은채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그녀가 되어 주겠다고. 딸아이의 우는 얼굴을 볼 바에야 웃 는 얼굴을 보겠 다고.

그러니까, 우지혁 씨, 그만 일어나. 우리 은채의 넘치는 사랑 받으니까, 제발 일어나서 그 사 랑에 보답해주라 고, 그녀는 깊이 잠든 지혁에게 소리 없이 부탁하고 소영의 병실에 왔었다. 이제, 뒤로 물러 서서 은채가 힘들 때마다 다독여주어야지. 힘내라고……. 지혁과의 사이를 반대하는 장벽은 그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힘겨울 테니까, 나라도 힘이 되어주어야지…….

병원 안의 소독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밖으로 나온 이 여사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말은 쉽 게 하지만 역시, 행동으로 옮기는 건 힘겨웠다. 정말 무조건적으로 딸아이를 지지 할 수가 있을까? 하늘은 높 기만 했고, 그녀의 물음에 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만 들어가거라.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잖니.”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거야.”

부친의 명령에 은채는 고집스럽게 턱을 치켜들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한번도 자리를 뜨지 않고 중환자실 앞을 지켰다. 지나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수시로 지혁의 상태를 물어보았다. 위험 한 고비는 넘겼 다는데 어째서 일어나지 않는지. 수술 경과도 좋아서 깨어나기만 하면 특별한 문제가 없을 거라는데. 어째서 세상에 미련 따위는 없다는 듯 눈을 뜨지 않는지, 은채는 무섭고 두려웠다. 이대로 그가 떠 날 것만 같아서 견 딜 수없이 두려웠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마라, 은채야. 분명히 말하는데 저 청년은 안 된다.”

최 사장은 중환자실 문을 노려보며 오금을 박듯 냉랭하게 말했다.

“기다릴 거야.”

은채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기다리겠어.”

반복되는 은채의 말에 최 사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집에서 기다려. 언제 깨어날지 누구도 장담 못해. 미련하게 여기서 이러지 말고 기다리려 면 집에서 기다려 라. 윤 박사 말로는 이런 경우, 환자가 깨어나길 거부하는 일도 있다더라. 환자의 의지에 달 렸대. 그러니 네 가 여기서 백날 이러고 있어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 알아둬. 무엇보다, 나는 허락 못한다. 알겠니, 최은채?”

“기다릴 거야. 아빠가 허락 할 때까지. 일년이 걸리든, 십년이 걸리든 기다리겠어.”

“만약…… 저 청년이 깨어나지 못하면?”

최 사장은 병실 문을 가리켜 손가락질을 했다. 은채가 가만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깨어날 거야. 난 믿어, 아빠. 이대로 떠나지 않을 거야. 내가 여기 있다는 거 알고 있다면, 나 혼자 내 버려두지는 않을 거야.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일어날 거야. 돌아올 거야.”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구는 거니? 안 된다고 했잖니. 안된다고!”

“기다릴게, 아빠. 아빠가 허락 할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지금은 여기 있게 해줘요. 제 발…… 부탁이에요.”

“너……! 다시는 아빠 얼굴 안보고 싶으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나도 딸 하나 없는 셈 치면 그만이니!”

은채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부탁에 서슬 퍼렇게 역정을 낸 최 사장은 홱 걸음을 돌렸다. 어 떻게든 집으로 데 려가려고 했다. 달래고 구슬려서, 그것도 안 되면 화를 내어서라도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은채는 요지부동이었다. 어떤 말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언제 저만큼 커버렸을까. 어리고 어렸던 딸 아이는 어디가고 저보다 못난 놈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린 여자만 남아 있을까. 좀더 괜찮은 사내라면 기쁘게 웃어줄 수도 있으 련만. 고작 저따위 모자람 투성이에 결점 투성이인 남자라니!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결단 코 안 되는 일이었다.

“아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최 사장은 은채의 부름에 얼굴을 돌렸다. 은채가 다가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숙였 다.

“미안해, 미안해요, 아빠.”

가슴이 답답했다. 곱게 웃을 줄만 알던 딸아이의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최 사장 의 마음을 암울하 게 만들었다.

“매번 힘들게 해서 정말 죄송해요.”

“됐다.”

억눌린 음성으로 겨우 대답을 마친 그는 차마 딸아이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힘이 되어 주고 싶어, 저 사람에게.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가르쳐주고 싶어.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고… … 어둠이 있는 것처럼 빛도 있다고…… 가르쳐주어야해. 바보 같다는 거, 알아. 내가 얼마 나 바보처럼 보일 지 너무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안 된다고 하지 마. 저 사람은 안 된다고, 내게 강요하지 마, 아빠. 지혁 씨가 아니면 내가 안 되는데, 내가 아니면 지혁 씨가 안 되는데…… 조금만, 아주 조금만 내 마음 을 알아줘요. 아 주 조금만…….”

“너도 조금이라도 이 에비 심정을 안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겠지. 손톱만큼이라도 내 마음 을 안다면…….”

말을 마치지 못한 최 사장은 엘리베이터의 열린 문틈으로 파고들어, 딸아이를 보지 않은 채 등을 돌렸다. 은 채의 속삭임이 병원내의 분주함을 뚫고 그의 귀에 들려왔다.

“미안해, 아빠.”

그래,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밖에 못하겠다는 거냐?

최 사장은 엘리베이터에 달린 거울을 노려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서서히 하강을 시 작했다. 억지로 끌고 가서 차라리 집안에 가둬버렸으면, 하는 몹쓸 생각까지 들었다. 허나, 딸아이에게 어떻 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어질어질 해지는 바닥에 서 있기가 힘겨워 최 사장은 벽을 짚었다. 곧바로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은채나, 중환자실에 드러누워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사내는 잊고 긴 잠을 청하고 싶었다. 깨고 나면 악몽이기를, 허허 웃으며 악몽을 꿨노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누적된 피곤함 때문인지 잠을 자본적이 언제였던 가 싶 다. 곤하게 잠을 자본적이 과연 있기나 한지, 의문마저 드는 날이었다.

병원 주차장에 대기 중이던 김 비서에게 다가선 최 사장은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고생했네. 힘들겠지만, 환자가 깨어나기 전까지 우리 은채 좀 지켜봐주게. 밥도 먹지 않고 고집을 피우고 있 는데…… 또 쓰러지지나 않을지 걱정이네, 그려.”

“염려 마십시오, 사장님. 아가씨는 조용히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차에 오르고 운전사가 뒷문을 닫으려는 찰나, 김 비서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방배동 사모님은 이대로 두어도 괜찮겠습……?”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소영에게 달려가 불호령을 내리고 싶었다.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일그러뜨린 최 사장은 손을 들어 김 비서의 말을 가로 막았다.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말게.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것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그래도 누이동생이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허나, 얼굴을 대면하면 실망과 미운감 정만이 앞섰다.
담당 의사에 말에 의하면 의식을 찾았다 하니 격한 감정을 추스르고 후에 만나는 것이 나으 리라. 서로 편안 하게 말문을 열수 있을 때, 그때 대화를 나눠도 늦지 않겠지.

“네,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수고하게.”

차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동안, 김 비서가 병원내의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김 비서의 뒷모습 을 바라보던 최 사장의 입술에서 한탄과도 같은 한숨이 길게 흩어져 나왔다.

“오늘이 며칠이죠?”

주사를 놓고 혈압을 체크하던 간호사에게 소영이 물었다.

“네?”

“아니, 내가 입원한지 얼마나 되었죠?”

“보름째예요. 답답하시죠?”

애교스럽게 되묻는 간호사의 말을 무시하고 소영은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그 사이 은채가 세 번 다녀가고, 언니인 이 여사가 매일같이 다녀갔다. 벌써 사고난지 이주일이 넘었던가……. 잠자고 일어나 고 하는 생활의 반복 속에서 시간은 무료하게 흘러간 모양이었다.

“밖에 좀 나갈 수 있을까요?”

“어디를요? 아직은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그 사람, 나와 같이 사고 났던 그 사람…… 아직도 중환자실에 있죠?”

은채와 간단한 대화를 나눠도 지혁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은채가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 았고, 소영 역시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언니와도 마찬가지였다. 지혁은 금기시된 단어와 같 았다.

“아, 우지혁 환자요?”

간호사가 아는 체를 했다. 차트를 들고 나가려던 걸음을 멈춘 그녀가 자못 심각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모두들 초긴장 상태예요.”

“왜요?”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발치로 떨어졌다. 살아나야 했다, 그는. 죽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죽음과 의 싸움에서 이겨, 자신의 사죄를 받아야 했다.

“수술은 성공적인데 환자가 살 의지가 없나 봐요. 모두들 그렇게 입을 모으고 있어요. 뇌가 손상이 많이 되었 지만, 뇌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에게 수술을 받았고, 또 무엇보다 응급처치가 빨라서 안심하 던 단계였는데 도 무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살 의지가 없어? 소영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갔다. 그가 살 의지가 없다면, 누구 때문인지 소영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환자도 환자지만, 그 보호자분이 너무 안됐어요. 24시간 대기실에서 떠나지를 않아요.
혹시 급한 환자가 있어 담당과장님들이 바쁘게 뛰어 다니시면, 혹시나 우지혁 환자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새 파랗게 질린 얼굴 로 물어 본다니까요. 아직 나이도 어린데, 어쩌면 그렇게도 잘 이겨내는지…… 볼 때마다 안 쓰러워 죽겠어 요. 어머, 다른 병실 가봐야 하는데! 그만 쉬세요.”

“저어, 미안하지만…….”

소영은 막 나가려는 간호사를 불러 세웠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간호사가 방긋 웃으며 말해 보라는 듯 고갯짓 을 했다.

“중환자실 면회 시간이 언제죠? 내가…… 가 봐도 될까요?”

“음…….”

간호사가 망설였다. 소영은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우리 은채, 대기실에서 기다린다던 아이 모르게 잠깐만 보고 오면 안 될까요?”

“네? 무슨 뜻인지…….”

“내가 우지혁 그 사람 잠시 면회 하는 동안, 간호사가 우리 은채를 다른 곳으로 데려 가면 안 될까요?”

간호사의 눈에 의혹이 가득 들어찼다. 만약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은채가 대기실에 있다면 지혁을 만나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들어가기도 전에 은채가 가로막아 중환자실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겠지.

“부탁할게요, 한 십분…… 정도만 그 아이와 커피를 마시든지, 그렇게 해줄 수 있겠어요?
그 환자, 나 때문에 그렇게 됐는데 아직 찾아가 보지도 못했어요. 다른 사람에겐 말할 때도 없고…… 아가씨가 좀 도와줘요.”

“음, 지금은 곤란하고…….”

바쁜 일이 있는지 손목시계를 바라보던 간호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 후에 다시 올게요. 그때 중환자실에 가도록 해요. 그리고 그 보호자 분…… 최소 영 씨와 가족관계 맞으시죠?”

확인하듯 간호사가 물었다. 소영은 설핏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조카에요.”

“좋아요. 제 담당 환자 가족 분에게 차 한 잔 대접하죠, 뭐. 올 때 휠체어 준비 해 올게 요.”

간호사가 나가고 소영은 주섬주섬 일어나 창밖으로 다가갔다. 멍하니 밖을 바라보면서 소영 은 소리 없이 속 삭였다.

당신이 못 일어나면, 난 은채를 볼 수가 없어. 은채를 위해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그랬 는데, 그 아이가 아파하는 걸 어떻게 지켜볼 수가 있겠어? 제발, 제발 부탁이야. 이렇게 부탁할게. 일어 나……. 내가 잘못했 어.

가지 않겠다는 듯 몇 번이고 거절의 뜻을 내비치던 은채를 간호사가 데리고 나가는 것을 지 켜보던 소영은, 은채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무렵에야 중환자실에 들어섰다. 자신이 이주일이 넘게 지냈던 병실과는 차원이 다른 곳. 그곳에 들어서면서 소영은 바들바들 떨고 말았다. 자신만 아니었으면 지혁은 이곳 에 오지 않아도 되었다. 생명을 담보로 힘겨운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순간, 죄의식과 죄책감에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 이었다.

차가 절벽으로 떨어지기 전에 충분히 먼저 빠져 나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먼저 구했다 했었지.
그 촌각을 다투는 시간에서도 그는 은채, 그 아이만 생각하고 또 생각했었나보다. 나는 고작 그 아이를 위한 다는 명목으로 은채를 아프게만 했는데, 그는 그 나름대로 은채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깨 어나지 못함으 로. 눈을 뜨지 못함으로…….

산을 깎아 만든 도로와 달리, 절벽 아래는 숲이 울창해서 바닥끝까지 차가 떨어지지는 않았 다 했다. 다행히 뒤따르던 김 비서가 사고에 대비해 구급차를 부르는 순발력을 보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 을까? 생각만 해 도 아찔했다. 등골 사이로 축축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산소호흡기에 생명 줄을 연장하고 있는 지혁은 낯설었다.

수술 때문인지 머리에는 하얀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모습 또한 그가 아닌 것 같았다. 팔, 다리 어느 곳 하나 성한 곳 없이 만신창이가 된 그는 소영을 극도로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많이 아팠지? 미안해…….”

휠체어를 정지시키고 소영은 나직하게 말을 쏟아냈다.

“우리가 죽는 게, 은채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어.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그게 은채에 게 가장 괴롭다는 것을, 나는 왜 알지 못했을까.”

소영은 눈을 감았다. 도저히 지혁의 얼굴을 보면서 말을 할 수가 없어서였다. 지독한 소독냄 새. 불규칙한 심 장박동 소리.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생명을 위협하듯 다가왔다.

“우리 언니가 그런 말을 하더라, 지혁 씨. 우연히 만나서 우연으로 끝내야 할 사람이 있다 고. 우린, 분명 우연 으로 끝냈어야 했겠지. 나나, 당신이나, 먼 길을 올 인연이 아니었는데, 내 아집과 집착으로 모두들 엉망이 되어버렸지.”

언젠가 지혁이 그만 끝내자고 했던 날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는 그때 마음을 정했나보다. 그 날, 오래전 그날, 지혁과의 인연을 잘라버렸다면 좀 나았을까. 소영은 기억에도 희미해지려는 그날을 떠올리 며 말을 이었다.

“우연히 만나서 필연이 되는 인연이 있다네. 난, 당신이랑 은채가 악연이라 생각했어. 그런 데 지혁 씨, 우리 은채랑 당신, 필연인거야? 그런 거야?”

운명일수도 있겠지. 질기고 질긴 운명이라는 이름. 소영은 가슴을 들썩거리며 마른기침을 내 뱉었다.

“일어나, 지혁 씨. 우리…… 잊자. 잊어버리자. 우리가 만났던 기억, 그 잔인하고 지저분한 기억들…… 모조 리 망각의 강에 내던져 버리자.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잊 자. 하나도 남김없 이, 잊어버리자. 그러자, 지혁 씨. 나도 잊을게. 당신이라는 남자의 이름까지 뇌리에서 지워 버릴게. 그러니… … 제발 일어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소영은 입술을 악다물었다.

“당신, 우리 은채 슬픈 거 싫다면서. 우리 은채 우는 거 싫다면서. 그럼 일어나. 은채가 슬 퍼해. 그 아이가… … 울고 있어. 우리 앞에서는 보이지 못하는 눈물을 혼자 삼키고 있어. 당신이 닦아 줘야지.
나는 닦아 줄 수 가 없는데, 내 손길은 거부하는데, 당신이 닦아 줘야지. 내게 속죄할 기회를 줘, 지혁 씨. 부 탁이니까, 이렇게 매달리니까, 제발 우리 은채 슬프게 하지 마.”

눈을 감고 있던 소영은 보지 못했다. 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음을. 그의 손가락이 힘 없이 움직이고 있 음을. 그의 눈가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음을, 소영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놔줄게. 당신, 미련 없이 놓아줄게. 그러니 은채에게 날아가. 은채를 아끼는 그 마음 하나로, 그 아 이를 행복하게 해줘. 난 잊었어. 여기를 나가는 순간, 당신을 잊을 거야. 만났던 기억도 함께 했던 기억도, 한 바탕 꿈을 꾼 것으로 여길게. 깨고 나면 희미해져, 어떤 꿈을 꿨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 그런 꿈…….”

소영은 휠체어를 움직였다. 바퀴를 뒤로 돌리려던 손길을 멈추고 그녀는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놔준다 해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을 거야. 하지만, 잘 이겨내리라 믿어. 당신이나, 은 채나…… 누구보다 강하니까. 사랑 앞에서는…….”

잊는다 해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겠지. 나 하나 지난날을 잊는다 해서, 모든 이들의 기억 이 사라지는 것 또 한 아니겠지. 하지만 나 하나 잊어서 모두가 편하다면, 잊을 것이다. 그를 처음 만났던 그날 부터, 오늘까지 이어온 이 지긋지긋한 인연을 잔인하게 잘라 낼 것이다.

그날…… 수영장에서 만났던 그를,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서던 그를. 음료수를 내밀 며 시작되었던 그날의 기억을 도려내야지.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내 사랑에 돌아보지 않던 남편의 기 억까지 도려내야 지. 어쩌면, 지혁을 남편의 대용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이제 남편을 잊었으니, 그도 잊어야 지…….

힘겹게 휠체어를 밀고 가는 소영의 뒤로 간호사가 다가와 슬며시 밀어주었다.

“병실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간호사의 살가운 배웅을 받으며 소영은 중환자실을 나왔다. 그러나 중환자실 문을 닫자마자 소영은 얼어붙 고 말았다.

눈을 감고 있으면 네 목소리가 들려. 언제부터 네 목소리가 들렸는지 알지 못해. 짙은 어둠 속에서 나 혼자 동떨어져 있는데, 이곳이 어딘지, 내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들려오는 네 목소리 는 마치 환청 같 기도 하다.

매일 너는 같은 말을 하지. ‘오늘은 어땠어요’, ‘아프지 않아요?’, ‘내가 보고 싶지 않 아요?’ 너는 늘, 같은 말을 하는데 나는 늘 다른 생각을 한다, 은채야. 울부짖던 네 목소리가, 여전히 내 귀를 메우고 내 의식을 지배한 다. 내가 정말 그런 말을 들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어. 목소리가 나온다면 묻고 싶다, 은채야.
정말 네가 포기 한 것은 꽃밭인지. 꽃밭은 포기 했어도 꽃은 포기 하지 않았다던 너에게 묻고 싶다, 은채야.

그 꽃은…… 네가 말하는 그 꽃이…… 내가 맞는지. 그러나 물어보기가 두려워, 돌아오는 대 답을 듣기가 두 려워 나는 차마 눈을 뜰 수가 없다.

그거 알고 있니, 은채야? 네가 말하는 꽃이 내가 맞다면…… 그 꽃은 뿌리까지 썩어 있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니? 더 이상 손 쓸 수없을 만큼 썩고 문드러져 활짝 피울 수가 없음을, 너는 알고 있니?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나는 늘 미안했어. 너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 복한데, 너에게 나는 불행 같았지.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는 너에게 나는 어둠이었고, 악(堊)이었으며, 나쁜 병균이었고, 독이 었어. 너를 더럽힐까, 멀리 물러서려고 해도 단 한번도 그렇게 하지 못했어. 내 이기심에 너 를 가까이 두고 싶어 했고, 너를 느끼고 싶어 했어. 욕심이라는 것을 알아. 헛된 바람이라는 것도 알아. 허 나, 왜 최은채 앞에 우지혁은 언제나, 늘, 무기력하기만 한걸까.

많은 걸 해주고 싶어도 정작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너를 떠나는 것만이 가장 너를 위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늘 미루기만 했었지. 내일, 또 내일, 그리고 그 다음 내일하며……. 이젠 정말 떠나려 하는데, 어디선가 네 울음소리가 들린다. 내가 제일 듣기 싫은 소리이기도 하면서,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 는 소리. 너의 흐 느끼는 소리는 내 걸음을 잡아채고, 돌아서는 내 몸을 멈추게 한다.

은채야, 너 울고 있니……?

너…… 울고 있는 거니……?

어디에서? 어디서 울고 있니, 은채야? 여긴 어디지? 난, 왜 널 볼 수가 없는 거지…….
왜…….

“삐삐삐삐삐…….”

일정한 그래프를 그리며 반복되던 지혁의 맥박이 급상승했다. 중환자실을 지키던 간호사가 급하게 다가와 지혁을 살폈다. 의사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한톤 높아져 중환자실을 가득 메웠다.

“선생님, 선생님! 이리 좀 와보세요! 우지혁 환자가……!”

“다시는 지혁 씨 찾지 마.”

한마디도 하지 않고 냉기를 내뿜으며 소영을 병실까지 데려다 준 은채는 병실 문을 닫으면 서, 차갑게 말했 다.

“그 사람 찾아 간 거 아냐.”

“그럼?”

“내…… 지난날을 지우러 간 거야.”

“그거, 무슨 뜻이야?”

은채는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소영을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주시했다.

“말 그대로야. 부끄러운 내 지난날을 지우러 간 거였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야, 고모?”

소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은채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내가 고맙다고 해야겠지. 내 지난날을 돌아볼 기회를 줘서. 고마워, 은채야.”

살며시 손을 잡는 소영의 손길이 따뜻했다. 은채는 소영의 손을 마주 잡으려다 병원 내 스 피커에서 들리는 방송에 탁, 손을 뿌리치고 말았다.

6층 중환자실의 우지혁 환자 보호자 분, 지금 급히 중환자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 다. 6층 중환자실의 우지혁 환자 보호자 분, 지금 급히 중환자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짓을 한거야?”

쇳소리를 내며 은채가 소리 질렀다. 창백하게 굳어버린 소영은 석고상이 된 듯 입도 벙긋하 지 못했다.

“무슨 짓을 한거냐고!”

황급히 병실 밖으로 빠져 나가던 은채는 홱, 몸을 돌려 소영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만약…… 또 한번 지혁 씨에게…….”

말을 잇지 못하던 은채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나쁜 짓을 했다면 그땐 정말이지, 죽는 그 순간까지 고모 안 볼 거야. 고모라 생각하지도 않을 거야!”

모든 생각과 신체 리듬이 일시에 정지했다. 어떻게 달려왔는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이 없어, 비상계단 을 정신없이 밟으며 중환자실에 왔을 때, 은채는 망설였다. 들어가기가 두려워, 문을 열기가 두려워 손이 바 들바들 떨리고 입술에 경련이 일었다. 그때, 병원내의 긴급한 방송이 재차 울려 퍼지기 시작 했다. 은채는 주 먹을 그러모아 쥐고 안간힘을 다해 문을 열었다.

중환자실에 일대 혼란이 찾아왔다. 분주한 사람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늘 적막감만 감돌 던, 그래서 죽음 이라는 단어가 유독 강해보이던 곳에 찾아온 혼란은 은채를 극도의 불안감으로 내몰았다.

익숙한 얼굴의 간호사가 다가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축하해요, 얼른 환자에게 가보세요. 여태 고생 많으셨어요.”

뭐지? 이건 뭐지? 곳곳에서 축하 인사가 날아들었다. 간호사에게 떠밀려 지혁이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선 은 채는 저도 모르게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다.

꿈이야!

그가 눈을 뜨고 있었다. 담당 의사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동안, 그는 고갯짓으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사람들이 옆으로 비켜서서, 은채와 지혁의 사이에 길을 만들어 주었다. 지혁의 얼굴이 천천 히 옆으로 향했 다. 지난 보름 사이 야위어진 그의 얼굴이 은채에게 고정되었다. 그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는 동안 시간은 빛처럼 빨리 지나갔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은채의 얼굴에 빗물이 흘러내렸다. 속절없이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을 사이도 없이 그녀는 지혁에게 달려갔 다.

“울지 마…… 울지 마, 은채야…….”

지혁의 속삭임이 은채의 귀에 바람이 머무는 것처럼 살며시 내려앉았다.
************************ 『마지막』 “아아, 젠장!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어야 하냐고!”

현욱은 지혁의 휠체어를 밀며 짜증스레 쓴 소리를 내뱉었다. 지혁은 피식 웃을 뿐 현욱의 투덜거림에 한마디 도 하지 않았다. 날씨가 점점 더 추워졌다. 맑게 갠 하늘은 청명하지만 피부에 와 닿는 바람 은 한겨울임을 실 감하게 했다.

“이것 보쇼, 노땅. 당신 양심이 있어야지.”

아예 화단 옆에 휠체어를 정지시켜놓고 현욱이 떠벌거렸다. 또 시작인가. 지혁은 귀여운 막 내 동생을 바라보 듯 현욱을 응시했다.

“당신 나이가 몇이야. 어떻게 은채를 넘볼 수가 있냐고.”

쉰일곱 번째. 현욱의 저 말은 자그마치 쉰여섯 번이나 들었다. 오늘로 한 번 더 추가. 지혁 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새겨졌다.

“말야, 양심이 있으면 신사적으로 우리 은채 놔줘야지. 그 꽃다운 나이의 은채를 노땅인 당 신이 넘본다는 게 말이 되냐고.”

또 흥분을 하는군. 이제는 노땅이라는 말에 면역이 되어서인지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 았다. 반대로 주절 거리는 현욱은 아니나 다를까, 흥분의 경지를 넘어 선 듯 했다.

“좋게 얘기 합시다. 은채 고게 워낙에 착해서 그렇지, 나중에 정신 차리면 당신이랑 러브러 브 한거 후회 할 거야. 그러니 조만간에 퇴원하면 깨끗하게 물러서 주쇼.”

어쭈? 많이 컸다, 저 녀석.

지혁의 눈썹이 활모양을 이루며 휘어졌다.

“은채 이쁜 거 나도 알아. 당연히 남자라면 넘어가지. 하지만 말요, 난 일곱 살 때부터 은 채를 내 색시 감으로 찍어 놨거든. 내가 정말 이런 말은 안 하려 했는데,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려고 작업 들 어가는 순간, 당신 이 나타난 거라고. 아아, 정말 재수 드럽게 없었지.”

화단에 박힌 돌멩이를 발로 차 던지며 현욱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를 지켜보던 경비원이 눈 살을 찌푸리며 다 가오자 현욱은 단박에 허리를 굽혀 차 던진 돌을 제자리에 던져 놓았다. 양손을 탁탁 털고 다시 휠체어를 밀 며 현욱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백날 말해 뭣하나. 들은 척도 안 하는데.”

휠체어를 미는 손끝에서 화가 묻어나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데다 처박을 듯 했다. 지혁 은 고개를 돌리고 말문을 열었다.

“피곤하면 그만 가지 그래?”

“그래, 그래. 당신이 하는 말은 그거 밖에 없지. ‘그만 가라.’ 젠장. 오늘은 가고 싶어도 갈수 없수다.”

또 멈춰지는 휠체어. 움직이는 시간보다 정지해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이러려면 뭐 하러 산책을 나온 것일 까. 별로 나오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부득불 산책을 나가야 한다고 우기던 현욱이 어째 얄미워지기 시작했 다.

“오늘 은채가 지방에서 올라온다고 했거든. 그 뭐냐, 권상진인가 뭔가 영화 촬영 중에 토크 쇼 일정이 잡혀서 은채도 따라 온다네. 아마 여기도 들릴 텐데 내가 착하게 당신 병간호 하고 있었다는 거 보 여 주려면 여기 있 어야지. 먼저 가면 매일매일 농땡이 깐 줄 알거 아냐.”

시큰둥하게 말하고 벤치에 주저앉은 현욱은 담배를 빼어 물었다.

“권상진, 그 자식 엄청 잘생겼던데. 당신 불안하지 않아? 매니저 노릇하다가 은채 바람나면 어쩌려고 그래?”

말이 점점 짧아지는군. 하긴 길었던 적이 있긴 한 걸까.

“차라리 그 자식하고 눈이나 맞았으면 좋겠다. 당신 같은 노땅한테 우리 은채 뺏길 바에야 권상진이 훨씬 낫 지. 낫고말고!”

고개까지 주억거려가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거기다 한술 더 떠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까 지 마시는 현욱을 지켜보던 지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은채는 돌연 휴학을 했다고 선전포 고하듯 말했다.
그 이유가 매니저가 되기 위함이라 했을 때, 얼마나 기함을 토했던가. 여전히 올 때마다 말 리고 반대를 했지 만 은채의 확고한 뜻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일이 재미있다고 하며 생글생글 웃기까지 했다.

오늘 오면 화를 내어서라도 그만 두라고 해야지. 하지만 지혁은 알고 있었다. 그런 말이 은 채에게는 전혀 통 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케줄에 쫓기다 보니 은채를 볼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일주일에 한번정도였다. 그것도 바쁠 때에는 열흘 에 한번으로 밀릴 때도 있었다. 힘들 텐데 한번도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던 그녀. 이대로 잠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다면 은채가 힘들지 않겠지. 허나 사고 후 눈을 뜨고 처음 본 것이 그 녀의 눈물이라 생 각한다면 어디론가 숨어버린다는 무책임하고 미련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래도록 기다 리고 기다렸던 그녀를 어떻게 버려둔다는 말인가.

장장 9개월을 입원해 있었다. 그 사이 작열하는 태양아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지나갔 다. 해가 바뀌어 북 풍한설이 몰아치는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지혁은 퇴원을 앞두고 있었다. 다음달쯤에는 퇴원 도 가능하다 했 다. 물론 입원 기간만큼 퇴원을 한 후에도 물리치료를 꾸준히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병원만 벗어 날 수 있다 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 들어갈까요?”

담배꽁초를 짓이기던 현욱이 물었다.

“아니. 조금만 더 있지.”

멀리서 현욱의 행동을 노려보던 경비가 험상궂은 얼굴로 다가왔다. 현욱은 잽싸게 허리를 굽혀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에 담배꽁초를 내던졌다. 지혁은 늘 경비를 약 올리듯 실랑이를 벌이는 현욱을 재 미있다는 표정으 로 지켜보았다.

“저 아저씨 놀리는 게 재미있나?”

“노땅이랑 둘이 있는 것 보다는 났지. 심심하니 아무하고나 놀았으면 좋겠네.”

“퇴원도 다 되어 가고, 혼자 지내는 것도 별로 불편하지 않으니 다음부터는 안와도 돼.”

“됐수다!”

“그렇게 싫으면서 매일 오는 이유가 궁금하군.”

“몰라서 묻는 거유?”

현욱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삐딱하게 서서 지혁을 내려다보았다. 휠체어를 타면 안 좋 은 점. 모든 사람 을 올려다보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지혁은 고개를 젖히고 현욱에게 시선을 던졌다.

“친,구,의 부탁이외다. 망할, 누가 언제 친구 하자고 했나? 은채 고 깜찍한 것이 친구라는 빌미로 나를 생고 생을 시키네요, 젠장! 나 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나, 어쩐다나. 그런 말에 헤벌레 넘어간 내 가 바보지!”

한숨을 푹 내쉬는 현욱이 안쓰러웠다. 보답 받지 못할 사랑을 하는 이의 어깨는 한없이 쳐 져있었다. 자신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은채와 이 녀석과 예쁘고 아기자기한 사랑을 했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지혁의 뇌를 파고 들었다.

“은채는 좋은 친구를 뒀군.”

“으으, 저 노땅다운 말투.”

진저리를 치며 현욱은 혀를 길게 빼어 물었다. 이 녀석과 있으면 지혁은 알게 모르게 자주 웃었다. 어쩌면 은 채의 배려이리라. 화를 내는 것 같아도 악의는 없어 보이는 현욱은 우정을 유지하면서 동시 에 소중한 사람을 보호하는 하나의 방편이겠지.

“그 노땅이라는 이름 말고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면 안되나?”

“뭐로 불러 드릴깝쇼? 젊은 엉아라고 불리고 싶은 거요? 꿈도 야무지슈!”

아아, 저 삐딱한 말투. 전생에 꽈배기 공장 사장이라도 되는지 말끝마다 배배 꼬여서는 사람 의 심기를 건드 리고 있었다. 지혁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뭘 바란 게 무리지. 아무려면 연적에게 무얼 기 대할까.

순간 현욱은 요란스레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소리를 질렀다.

“우왓! 은채 온닷! 이제 바톤 터치! 이 몸은 물러 갈 때가 되었습니다요.”

지혁의 눈길이 화단 옆에 길게 나있는 내리막길을 향했다. 그녀가 올라오고 있었다. 추운 날 씨에 양 볼은 발 갛게 상기되어 코트와 목도리로 중무장을 하고, 하얀 털모자로 얼굴을 예쁘게 감싼 그녀가 새하얀 입김을 내 뱉으며 빠르게 올라오는 중이었다.

“참, 은채한테는 내가 포기 하라고 했다느니, 뭐 그런 말은 절대 하지마쇼. 절대!”

못을 박듯 단호하게 말하던 현욱이 덧붙였다.

“복 받은 거요, 당신은. 나중에라도 행여나 은채 눈에 눈물 빼면 내가 확 채어 갈 테니 그 리 알고 있으슈.”

눈물이라……. 그런 일이 있을까. 지혁 자신도 은채의 눈물만큼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지혁은 한순간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현욱은 씁쓸하게 입술을 말아 올리며 동의하는 제 스처를 취했다.

“그렇겠죠.”

어느새 거의 오르막을 다 올라온 은채를 바라보며 지혁은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미소 는 오래가지 못했 다.

“제기랄!”

지혁의 앞에 서자마자 숨을 고르던 은채가 돌연 욕지기를 내뱉었다. 지혁과 현욱의 눈이 곧 튀어나올 듯 휘 둥그레졌다.

“지혁 씨,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나 좋은 차 사줘요. 아니다, 그땐 운전수도 하나 붙여줘요.
젠장, 운전 못해먹 겠네, 정말.”

“왜?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요. 그냥 오다가 어떤 차가 키스하자고 덤벼드는 바람에 사고 냈지.”

지혁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은채가 재빨리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창백하게 굳어버 린 지혁의 혈색 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 괜찮아요. 간단한 접촉사고였어요.”

“운전 하지 마. 나중에 퇴원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

“아니! 고작 퇴원해서 하고 싶은 일이 운전이에요?”

은채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지혁의 손을 맞잡았다.

“인사가 늦었네. 몸은 좀 어때요?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좋아.”

“넌? 힘들지 않아?”

“저도 좋아요.”

“욕하지 마. 촬영장 쫓아다니면서 욕만 늘었어.”

그의 타박에 은채가 웃었다. 예의 그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미소. 지혁은 눈을 감고 말았 다. 거울에 햇살이 반사되어 눈이 부시듯 지혁은 은채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눈이 멀 것만 같아서였다.

“아예 여기서 영화를 찍어라, 찍어.”

보기가 심히 괴롭다는 듯 입을 틀어막고 현욱이 부루퉁하게 말했다.

“어머, 넌 언제 왔니?”

은채는 이제야 보았다는 듯 한쪽에 서 있는 현욱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늘 오는 시간에 왔다, 됐냐?”

“흐음, 좋았어. 아주 착하네. 나중에 옆집누나가 돈 많이 벌면 맛난 거 사줄게.”

“누, 옆집누나?”

현욱이 펄쩍 튀어 오르며 경악을 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난 그만 간다.”

“야, 박현욱!”

“왜?”

홱 몸을 돌리고 걸어가던 현욱이 걸음을 멈추고 은채를 바라보았다. 은채가 생긋 웃으며 나 른하게 속삭였다.

“고마워.”

“됐네.”

무심하게 대꾸하는 현욱의 어깨를 털어주던 은채가 확인하듯 말을 이었다.

“너 아직도 버릇없이 우리 지혁 씨에게 반말 찍찍하는 거 아니지?”

현욱의 눈길이 단박에 지혁을 향했다. 지혁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보이지 않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으으러엄. 내가 아주 확실하게 형님으로 모신다. 그죠, 형님?”

형님이라는 단어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혁은 현욱이 아주 마음에 들 었다. 은채의 친구 라서 좋았고, 싫은 내색을 하면서도 매일 같이 찾아와 주는 것도 고마웠고…….

그러나, 지혁은 현욱의 말에 동의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장난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노땅이라 부르던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확인 불가능한 말만 하 던걸?”

“너!”

은채의 눈이 매섭게 빛나자 현욱은 후다닥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현욱의 뒷모습을 보며 은 채가 빽 소리를 질 렀다.

“내일도 올 거지?”

“몰라, 이 기집애야. 만날 우리 지혁 씨, 우리 지혁씨…… 눈꼴셔서 안 올 거다!”

바람 같은 기세로 현욱은 사라졌지만, 지혁은 알고 있었다. 현욱은 내일 그 시간이 되면 늘 그렇듯이 다시 나 타나리라는 것을. 아마도 이를 갈면서 나타나겠지.

“현욱이 그만 오라고 그래. 공부하는 것도 바쁠 텐데.”

“쟤 공부 안 해요. 날라리 대학생인 걸?”

“그래도…….”

말끝을 얼버무리자 은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욱이가 불편한건 아니죠?”

“불편하긴.”

“그럼 됐어요. 말은 저렇게 해도 저 녀석 착해요. 내가 지혁 씨 다음으로 믿는 녀석이거든 요. 나 없을 때 저 녀석 막 부려먹어요. 머슴처럼. 알았죠?”

허벅지를 덮는 담요를 매만진 은채는 지혁의 앞에 허리를 굽히고 앉아 그의 목도리를 단단 하게 여며주었다.

“오늘 날씨 엄청나게 추운데 따뜻하게 입고 나오지, 이게 뭐예요?”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다고.”

입술을 뽀로통히 내민 그녀가 이제는 제법 자란 지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많이 길었네. 퇴원하면 머리부터 다듬어야겠다. 그죠?”

퇴원하면 너희 집부터 찾아 갈 거야.

“퇴원하면 바빠질 거예요. 물리치료도 꾸준히 받아야 되고, 그동안 굳어버린 몸을 완화시키 려면 운동도 해야 하고…….”

그래, 바빠지겠지. 내침을 당해도 몇 번이고 너희 부모님을 찾아뵈어야 하니 바쁘다는 말로 는 부족하겠지.
지혁은 하고픈 말을 속으로 삼켰다.

“기대해요. 스파르타식 교육이 지혁 씨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병원에 있는 동안 푹 쉬는 게 좋을 거예요. 퇴 원하면 국물도 없을 테니까.”

지혁은 싱긋 웃고 말았다. 은채의 협박이 무섭기는커녕 귀엽기만 했다.

“집에는 다녀왔니?”

“아뇨. 좀 이따 지혁 씨 보고 가려고요.”

“그럼 안 되지. 어른들부터 찾아뵙고 여길 와야지.”

“지혁 씨가 더 보고 싶었는데?”

은채가 새침하게 미간을 모았다. 지혁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쥔 그녀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지혁 씨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열흘만인데.”

지혁은 발갛게 상기된 은채의 뺨을 어루만질 뿐 대답하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았냐고? 너 무 보고 싶어서 미 칠 것만 같아도, 감히 보고 싶다 말할 수 없는 마음을 그녀는 알까.

“어, 정말 안 보고 싶었나보네.”

묵묵히 말이 없는 그에게 실망했는지 은채는 서운하다는 듯 쫑알거렸다. 지혁은 모자 사이 로 삐죽이 나온 그 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들어가자, 춥다. 너 감기 걸릴라.”

“보고 싶었다는 말하기 전까지는 안 들어갈래요.”

“보고 싶었어. 아주 아주 많이, 엄청나게 보고 싶었어.”

“정말?”

고개를 홱 돌리고 지혁을 외면하던 은채가 말갛게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럼 왜 전화 안 했어요? 내가 먼저 전화 해야만 지혁 씨 목소리 들을 수 있고…….”

“너 촬영장 다니느라 바쁘잖니. 은채야…….”

“응?”

지혁은 머뭇거리며 은채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이 말을 하면 은채는 또 화를 낼 것이다. 하 지만 안 할 수가 없었다.

“너…… 매니저 일 그만 두면 안 되겠니?”

“그만!”

아니나 다를까, 은채는 목소리부터 달라졌다. 부드럽게 쥐고 있던 손까지 놓고 일어선 그녀 가 입술을 깨물었 다.

“난요,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벌써 결정을 내렸어요. 그리 고…….”

“힘들잖아. 네가 하기에 너무 거친 일이라고.”

지혁은 은채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러나 은채는 조용하라는 듯 입술에 검지를 붙이고 말했 다.

“무엇보다, 일이 재미있어요. 또 난 정식 매니저가 아니라 아직은 그저 배우는 입장이라고 요. 힘들 것 하나도 없어요. 차근차근 하나씩 배워서 나중에 지혁 씨한테 다 써먹을 건데, 설령 힘들더라도 잘 해낼 자신이 있어 요.”

“넌 참, 날 힘들게 만든다. 미안하게 만들고 부끄럽게 만들어.”

“그런 소리 말아요. 지혁 씨가 멋진 연기를 선보인다면 나, 하나도 안 힘들어요.”

“그것도 그래. 연기를 하기에 난 너무 늦었어.”

“누가 그래요, 늦었다고? 연기를 나이로 하는 건 아니잖아요. 외국의 배우들 봐요. 숀 코넬 리나, 리처드 기어 …… 그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빛나는 연기를 하잖아요. 난 지혁 씨가 스타가 되기 를 바라지 않아요.
해를 거듭할수록 빛나는 진정한 연기자가 되기를 바란다고요.”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지혁은 포기했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정 그렇다면 나 혼자 힘으로 할게. 너까지 고생할 필요는 없잖아.”

“같이 해요, 우리. 우리 두 사람 같이 웃고, 같이 힘들고, 같이 사랑하고…… 뭐든 함께하는 사이가 되기로 해 요.”

갑자기 은채가 말을 멈추고 가방을 뒤적거렸다. 지혁의 사진을 스크랩해서 파일로 만든 것 을 꺼낸 그녀가 골 몰히 생각에 잠겼다.

“지혁 씨 프로필 사진이나, 여태 촬영했던 잡지 사진, 뭐 그런 것을 다 모았어요. 그리고 지혁 씨가 출연했던 아침드라마 유리꽃도 틈틈이 봤고요. 근데, 음…….”

파일을 한 장 한 장 넘기던 그녀가 지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예리한 눈빛이 반짝이며 빛 을 발했다.

“지혁 씬 말이죠, 실물로 봤을 때랑 화면으로 봤을 때, 차이가 많이 나요. 왜 그럴까, 곰곰 이 생각해 봤는데… ….”

은채가 말을 멈췄다. 지혁은 무슨 말이 나올까 사뭇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실물이 훨씬 나아요. 실물로 봤을 때, 지혁 씨가 훨씬 더 잘생겼거든요.”

긴장감이 일시에 깨졌다. 그가 피식 웃으려 하자 은채는 턱을 치켜 올리며 웃지 말라는 듯 경고의 눈짓을 보 냈다.

“개인적인 시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시각이에요. 웃지 말아요. 내 말을 비웃는 거 같아서 기분 나빠.”

“아, 아냐, 비웃는 거…….”

“잘생겼다고 칭찬하는 게 아녜요. 어째서 실물과 화면으로 볼 때 달라 보이는지 그걸 설명 하려는 거지.”

진지하게 말하는 은채가 평소와는 달라보였다. 그녀는 두장의 사진을 지혁에게 내밀었다.

“봐요. 전신사진과 얼굴만 확대한 사진이에요.”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오만한 표정으로 한껏 멋을 낸 사진은 지혁을 한없이 부 끄럽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지혁은 눈길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게 왜?”

“보고도 몰라요? 지혁 씬 선이 굵어서 작은 화면이나 또는 사진에 자신을 다 담아 낼 수가 없다는 말이에요.”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은채는 지혁의 다리 위에 두장의 사진을 내려놓았다.

“이 말은 즉, 브라운관은 지혁 씨와 잘 맞지 않는다는 거죠. 오케이?”

“그럼?”

“글쎄요……. 일단은 여기까지 해요. 그담은 퇴원 후에 말해줄게요.”

무언가 비밀을 잔뜩 숨긴 얼굴로 은채가 해사하게 웃었다.

“이제 들어갈까요? 춥죠?”

담요를 여며주는 은채의 손을 잡고 지혁은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왜요?”

은채가 물었다.

“그냥. 너무 예뻐서…….”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한, 그래서 더 좋은 말을 찾아보려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아 억울할 만 큼 그녀가 예쁘고 아름다웠다. 손 내밀어 만져보고 싶을 만큼. 만지면 신기루가 되어 사라지지나 않을까 두려 워 지혁의 손끝에 는 애틋함마저 묻어나왔다.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은채와 지혁의 얼굴이 차 안에 있던 최 사장과 이 여사의 눈에 들어 왔다.

“봐요. 우리 은채가 어떤 표정인지.”

이 여사는 손가락을 가리켰다.

“여긴 왜 오자고 한 거야?”

“화만 내지 말고 은채를 보라고요. 당신이 보기엔, 우리 딸이 슬퍼 보여요? 힘들어 보이나 요?”

가볼 데가 있다고 급하게 남편을 데리고 온 곳은 다름 아닌 병원이었다. 숨바꼭질을 하듯 딸아이와는 마주치 지 않으려는 남편에게 이제는 보여주어야 했다. 은채가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숨소리만 들려 오는 자동차 실 내에서 최 사장의 혀 차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차 돌리지, 박 기사.”

“기다려요. 잠깐만, 아주 잠깐만 생각해봐요. 뭐가 우리 은채에게 가장 좋은 선택인지, 우리 가 어떻게 하는 게 은채를 위한건지, 아주 잠깐만 생각해봐요.”

멀리서 보아도 그림처럼 예쁜 그들이었다. 웃고 있는 은채는 그 어느 때보다 환했고, 그런 은채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지혁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대하는 듯 했다. 문득 가슴속이 뜨거워졌다.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최 사장의 내면을 빼곡히 채워나갔다.

“아가씨가 은채에게 권상진이라는 연예인을 소개시켜 줬대요. 정식 매니저는 아니지만, 권 상진 매니저를 쫓 아다니며 은채도 매니저 일을 배우고 있다 하네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소영과 이혼을 하고 난 후, 최 사장은 일체 엔터테인먼 트에 관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STS 소속의 연예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하나 다른 프로덕션이나 엔터 테인먼트로 이적 을 했다. 미래를 내다봤을 때, 스타제조기라 불리는 STS도 MBS의 최대 주주가 밀어주지 않는 한 끝이라는 걸 영악한 그들이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무너져가는 STS를 인수인계 받은 사람이 소영이었다. 다시 시작하자고 매달리는 남편을 냉 정하게 내치고 혼자만의 힘으로 그럭저럭 엔터테인먼트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었고 나날이 눈부신 발전을 해나가 고 있었다.

“사업을 하기로 했으면 정신 차리고 사업이나 하지, 왜 괜히 은채에게 헛바람만 넣는 건지, 원.”

최 사장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음성으로 냉랭하게 중얼거렸다.

“헛바람이 아니에요. 왜 몰라요, 당신은? 그건 은채가 저 남자를 생각하는 마음이라고요.
우리는 이해 못하 는, 하지만 은채에게는 아주 소중한 감정이라고요.”

“은채는 겨우 스무 살이야.”

가죽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최 사장은 눈을 감았다. 은채를 보지 않으려는 듯 눈을 굳게 닫 았지만 웃고 있던 딸아이의 얼굴은 그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스물한 살이에요.”

“젠장. 지금 말꼬리 물고 늘어지나?”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하여간 스무 살이든, 스물한 살이든 어릴 때 누구나 한번쯤 불같은 사랑에 휩싸이지. 그런 사랑은 식기도 빨 리 식는 법이야.”

최 사장은 단정 짓듯 말하며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그런 그의 곁에서 이 여사가 나직하게 말을 시작했다.

“그래요. 불처럼 타오른 사랑은 그만큼 빨리 식죠. 하지만 그거 알아요? 불처럼 뜨겁게 타 오른 사랑은 제아 무리 빨리 식어도 그 잔재는 남아 있어요. 사랑은 식어도 잔재가 남아 있는 한, 그들의 사랑 은 끝나지 않는다 고…… 나는 그렇게 믿어요.”

최 사장은 눈을 뜨고 아내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창밖을 바라보는 아내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새겨져 있 었다.

이 여사는 은채를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고 말을 이었다.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어요. 저 남자에게도 우리가 모르는 아픔이 있겠죠. 비록 좋은 기억 은 아니지만, 은채 가 잊기로 했고 아가씨도 잊는다 했어요. 모르긴 몰라도 저 남자도 잊으려고 하겠죠. 당사자 들이 잊으려고 하는데…… 제 삼자인 우리가 그들의 안 좋은 기억을 되새길 필요는 없어요. 그들이 잊는다 면…… 우리도 잊 는 게 그들의 대한, 가족이라는 이름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해요.”

아내의 단호한 음성이 최 사장의 내면에 무언가를 일깨웠다. 은채가 지혁과 병원내로 들어 가고 있었다. 최 사장은 딸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냉랭하게 말문을 열었다.

“차 돌리지.”

“네, 사장님.”

기사가 백미러로 이 여사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이 여사는 고갯짓을 하며 출발하자는 신 호를 보냈다. 차 가 미끄러지듯 병원을 빠져나가고 그 사이 최 사장은 두어 번 뒤를 더 돌아보았다. 은채는 사라졌지만 딸아 이의 미소는 그의 각막에 찍히듯 선명하게 새겨진 듯 했다.

“은채가 우리 앞에서는 잘 웃지 않지?”

최 사장은 한숨을 내뱉듯 말했다. 이따금 집에 들르더라도 은채는 웃지 않았다. 간단한 대화 만 나누던 은채 의 행동에 못내 서운하고 섭섭한 감정만 앞섰는데, 이제 보니 벽을 쌓은 건 그가 먼저였나 보다. 문득 후회가 밀려들었다.

“미안하겠죠, 당신 앞에서 웃는 다는 건.”

이 여사는 씁쓸하게 대꾸하며 치맛단을 매만졌다.

“은채의 곁에 있는 남자가 평생 은채의 미소를 지켜줄 수 있다면…… 당신은 은채가 환하 게 웃을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는 입장이에요.”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다했지. 그래, 이제 내게도 남들이 모르는 아픔이 생기게 되겠군. 허 나 내 아픔으로 은 채가 행복하다면……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여보……!”

들릴 듯 말 듯한 그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아내의 음성이 한톤 높아졌다. 최 사장은 창밖으 로 눈길을 던지며 무심하게 말했다.

“퇴원하면…… 저 친구, 집에 한번 부르도록 해. 그때는 안 좋은 기억은 털어내고 처음 봤 을 때의 우지혁이라 는 인물만 떠올리도록…… 나도 노력해보지.”

‘불처럼 타오른 사랑은 그만큼 빨리 식죠. 하지만 그거 알아요? 불처럼 뜨겁게 타오른 사 랑은 제아무리 빨리 식어도 그 잔재는 남아 있어요. 사랑은 식어도 잔재가 남아 있는 한, 그들의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고…… 나 는 그렇게 믿어요.’

그래, 나도 그렇게 믿도록 하지. 한때의 풋사랑이 아니라 영원할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변 함없기를 바라는 게 부모 된 이름의 도리겠지. 그렇겠지…….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지, 은채야? 그럼 그 사내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아라.
그렇다면 나도 네 선택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여주마. 그전에는 아마도 네가 선택한 남자에게 따뜻 하게 대해주겠다 는 장담은 못하겠다. 하지만, 나도 노력은 해보마. 노력은…… .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말들을 가슴속으로 삼키며 최 사장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 보았다. 이미 병원 을 벗어난 지 오래 되었건만, 이상하게도 은채의 환한 미소가 한겨울의 스산한 바람을 뚫고 그의 뒤를 따라 오는 듯 했다.
************************ 『뒷이야기 - 그래서 그들은…….』

‘불멸의 연인’ 한국영화대상 석권.

올해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운 ‘불멸의 연인’(제작 선유)이 국내외영화제에서도 화려한 수상경력을 쌓아 가고 있다.

북한 고위급 장교의 아들로 독일 유학생활을 하던 남자주인공(우지혁 분)과, 한국에서 법학 과를 전공하던 중 독일로 유학을 간 여자주인공(전재아 분)이 짧은 시간 불꽃같은 사랑을 불태우고 헤어진다. 십년 후, 외교관으로 입지를 굳힌 우지혁과 대통령 직속 비서실장의 자 리에 오른 전재아는 남, 북 정상회담에서 재회를 하게 되며 또 한번 불같은 사랑에 휩싸인 다. 분단의 아픔과 미묘한 감정을 소재로 삼은 이 영화는, 대종상과 영평상 주요부문을 석권 하고 산세바스티안, 도쿄, 토리노 영화제등에서도 수상의 낭보를 전하는데 이어, 30일 열린 TBC 주최 제7회 한국영화대상에서도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한 주요부문을 휩쓸었다.

영화배우 정준하와 김혜린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시상식에서 12개 부문 후보에 오른 ‘불멸 의 연인’은 최우수작품상과 함께 남우주연상(우지혁), 여우주연상(전재아), 감독상(민태준), 각본, 각색상(심호선), 편집상(이주연), 촬영상(송형진)등 7개의 트로피를 독차지했다.

‘불멸의 연인’과 나란히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함정’은 여우조연상(남서이), 남우 조연상(최진우), 신인 감독상(김시현)에 뽑혀 3관왕에 그쳤다.

10개 부문에 진출한 ‘Y의 기억’은 신인여우상(조혜연), 음향상(김광헌), 미술상(김인숙), 조명상(현민수)등 4개의 토로피를 가져갔다.

원로배우 김시우 씨는 공로상을 수상했고, 신인남우상은 ‘BOSS'의 정석현에게 돌아갔다.

음악상에는 ‘우연’의 (김근식), 단편영화상에는 ‘비밀의 화원’ (이윤석)이 선정되었다.

제7회 한국영화대상에서 주요부문을 휩쓴 ‘불멸의 연인’은, 러시아 국립영화 예술학교에 서 영화연출을 전공하고 ‘끌레르몽 페랑’ 단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바 있는 민태준 감독의 국내 첫 작품으로, 흥행보증수표라는 영화배우 우지혁과 감독 민태준의 콤비 가 이루어낸 쾌거라 할 수 있다.

이로써 무비저널은 연말 특집 편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우지혁 씨와의 50문 50답을 기 사로 선보이고, 내달에는 신년 특집 편으로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민태준 감독과 의 50문 50답을 본 기사에 실기로 했다.

인터뷰는 그의 집에서 이뤄졌다. 그의 뜻이기도 했고 자그마한 초대이기도 했기에 기쁜 마 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집이라서 편안하게 입고 있다며 미리 양해를 구했다. 간단한 청바 지와 니트 차림이었는데 그 모습을 보자, 어째서 여자라면 모두들 한번쯤 그에게 연모의 감 정을 싹틔우는지 알게 되었다. 웃을 때 고른 치열이 환하게 드러나는 그는 분명 가슴이 설 렐 정도로 매력적이었고, 인터뷰 중간 중간 곤란한 질문을 던져도 시종일관 부드러움을 잃 지 않는 다정한 남자며 프로 연기자였다.

무비저널 1 : 영화제 소식은 들었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우지혁 : (웃음) 감사하다. 너무 큰상을 받아 아직도 어리둥절하다.

무비 2 : 해외 신이 많아서 촬영당시 고생을 많이 했다 들었다. 독일에서 유학 신을 찍던 중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지혁 : 고생 없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겠나. 다른 영화를 찍는 것처럼 딱 그만큼 고 생을 했다. 독일 신은 무엇보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한참을 고생했다. 다행히 외국어에 능통한 민 감독님이 계셨기에 모든 스텝들이 감독의 뒤만 졸졸 따라다닌 것이 에피소드라면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겠다.

무비 3 : 남한과 북한의 복잡 미묘한 분단의 아픔과 심리를 살리고, 그 안에 운명처럼 만 난 연인들의 사랑에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림과 동시에 감동을 받았다 한다. 처음 시나리 오를 접했을 때 느낌은 어땠나?

지혁 : 한동안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출연 중이던 다른 영화의 막바지 작 업을 할 때인데, 오직 ‘불멸의 연인’의 내용만 머리에 들어왔다. 직접 시나리오를 쓴 민 감독에게 감탄하는 바였고, 시나리오를 읽어보자마자 너무도 욕심내던 작품이었다.

무비 4 : 민태준 감독이라면 영화계뿐만 아니라 방송가에서도 알아주는 인물이다. 유학파 감독으로 해외 단편 영화제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았고, 국내 첫 작품이 각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휩쓸었다. 가까이 근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냉정한 사람이라 하던데, 실제 성격은 어떤 가? 함께 일하는 동안 힘들지는 않았나.

지혁 : 절대 그렇지 않다. 젊은 나이에 그만한 자리에 올랐으니 지레 짐작하는 것뿐이 다. 민 감독은 부드럽다고는 할 수 없으나 냉정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촬영을 다해갈 무 렵엔 서로 속내를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털털한 사람이었다. 촬영 초에야 서로의 가치관 과 패턴을 모르니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에게 융화되고 상 대가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지 알게 된다. 민 감독과 일하는 동안 힘든 점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할 수 있겠다.

무비 5 :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을 만큼 친분이 있다 하니 물어보겠다. 연예계에서도 핫이 슈로 떠오르는 민 감독의 스캔들을 들은 바 있다. ‘불멸의 연인’의 제작사이자 선유그룹 의 오너 석민서 사장의 부인, 한여진과 민태준 감독의 스캔들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지혁 : 노코멘트.

무비 6 : 아는 것이 없다는 얘긴가.

지혁 :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다. 나는 영화배우고 민 감독은 감독일 뿐이다. 그를 영화인으로, 감독으로 존경하는 나는 그에 대해 설령 아는 바가 있어도 말하고 싶지 않다. 이해해 달라.

무비 7 : 곤란한 질문을 해서 미안하다. 그럼 함께 출연했던 전재아 씨와는 비교적 촬영 이 수월했나. 영화 전반에 베드신이 두 차례 나오는데 상당히 야했다. 그 신에서 전재아 씨 와 강한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들었다.

지혁 : (웃음) 감사하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겠다. 영화에서 꼭 필요한 장면이었고 서로 가 얼마나 사랑하고, 애틋하게 생각하는지 보여주어야 했던 장면이다. 많이 힘들었던 신이었 지만 그만큼 아끼는 장면이다. 전재아 씨는 일단 여자연기자이기에 노출을 꺼리는 부분이 있었다. 감독과 내가 그녀를 설득했고, 그녀는 흔쾌히 받아 들였다. 항간에 떠도는 의견대립 은 아니었다.

무비 8 : 연기 생활 십년이라 들었다. 맞는가.

지혁 : 맞다. 꼭 십년 째 된다.

무비 9 : 비교적 늦은 나이에 스타의 대열에 든 것 같은데 그 시간이 힘들지는 않았나.

지혁 :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중도에 그만두려고 하던 적도 있었다.
(웃음)

무비 10 : 아까운 배우를 놓칠 뻔 했다. 그 위기는 어떻게 넘겼나.

지혁 : 아내의 덕이 컸다. 그녀가 아니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남들 보다 늦은 나이에 스타가(웃음) 되었는데, 언젠가 아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진정한 연기자는 스타이기 보다는 연기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아직도 연기자에는 미흡하지만 늘 노력하려고 한다. 노력하면서 위기는 자연스레 엷어졌다.

무비 11 : 아내라 함은 부인인 매니저를 말하는 건가.

지혁 : 그렇다. 내게 아내가 둘이 아니니 당연히 그녀뿐이다. (웃음)

무비 12 :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되겠는가.

지혁 : 꼭 대답해야 하는 건가.

무비 13 : 부인이자 매니저인 최은채 씨에 관한 거다.

지혁 : 얼마든지 물어보라. 기꺼이 대답하겠다.

무비 14 : (웃음) 탤런트로 데뷔한 당신을 영화배우로 거듭나게 한 사람이 매니저라 들었 다. 맞는가.

지혁 : 맞다. 엑스트라의 자리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사람이 바로 아내이다.

무비 15 : 특별히 영화를 선택한 이유가 있는가.

지혁 : 아내의 의견이었다. 브라운관은 내 매력을(웃음) 보여주기엔 화면이 너무 작다 했다. 남들 보다 비교적 선이 굵은 나는 오히려 브라운관에서 약점이 된다는 거였다. 스크린 이라면 내 약점을 장점으로 바꿀 수 있다고 했고, 그녀의 도박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무비 16 : 믿을 수가 없다. 흥행보증수표인 당신이 브라운관에서 오랜 시간 무명 연기자 생활을 했다는 것이.

지혁 : 나는 영화배우로서 흥행보증수표라고 불리게 된 지금이 오히려 더 믿을 수가 없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다.

무비 17 : 지나친 겸손이다. 올 한해 집계된 바로는 데이트하고 싶은 연예인 1위, 결혼하 고 싶은 연예인 1위, 사윗감으로 가장 적합한 연예인 1위에 거론되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혁 : 결혼은 했으니 곤란하고, 아내가 있으니 데이트는 더더욱 곤란하다. 장인어른 과 장모님이 계시는데 다른 사람의 사윗감이라니. 내 소망은 오래 사는 것이다. 그러나 기분 은 좋다. (웃음)

무비 18 : 이 말을 전국의 수많은 여성 팬들이 들으면 실망 할 것이다. 일찍 결혼 한 것 을 후회하지는 않는가.

지혁 : 한 순간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다. 아내는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고, 하늘이 내게 준 선물이다. 후회라니, 가당치도 않다.

무비 19 : 만인의 연인으로 모든 여성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지혁 : 내가 만인의 연인이 될 수 있도록 뒤에서 노력한 사람이 아내이다. 나는 그녀 의 연인으로만 살아도 충분하다.

무비 20 : 아내 사랑이 남다르다 들었다. 인터뷰를 해보니 왜 그런 말이 도는지 알만하 다.

지혁 : 지인들이 말하길 팔불출이라 하더라.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웃음)

무비 21 : 지금은 이렇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데 결혼 전에는 부인 측에서 반대가 심했다 들었다. 어떻게 극복했는가.

지혁 : 반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분들의 마음 백번 이해한다. 신혼 초에는 장인어 른과 불편했지만 시간이 흐르니 그나마 많이 완화되었다. 늘 아내를 사랑하고 매순간 행복 하게 사는 게 그분들에 대한 도리라 생각한다.

무비 22 : 반대를 한 구체적인 이유는? 거듭 말하지만 당신은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영화 배우이다.

지혁 : (웃음) 거듭 말하지만, 나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든 사람이 바로 아내이다. 아내 를 만나기전의 나는 무명 배우였고, 무엇보다 곱게 자란 아내에게는 너무 부족함 투성이인 사내였다.

무비 23 : 부인과 나이차이가 많이 난다 들었다. 몇 살 차이인지?

지혁 : 10살 차이다.

무비 24 : 도둑놈 소리는 듣지 않았나? (웃음)

지혁 : 원래가 도둑놈이다. (웃음)

무비 25 : 아무래도 오늘은 특집이라 그런지 개인적인 질문을 많이 던지는 것 같다. 이해 해 달라.

지혁 : 괜찮다. 신경 쓰지 말라.

무비 26 : 예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들었다. 상처가 꽤 심했다 하던데, 지금은 어떤가?

지혁 : 5년 전이다. 지금은 말끔하게 완쾌되었다. 사고 후 일년 가까이 입원해 있었고, 퇴원을 하고도 일년을 넘게 물리 치료 차 병원을 다녀야했다. 그때 이후로 병원이라면 지긋 지긋하다.

무비 27 : 배우에게 얼굴은 생명이나 다름없는데 어쩌다 사고가 났나.

지혁 : 내 실수였고, 내 부주의였다. 내 지난날에 대한 죗값을 치르느라 사고를 당한 것 같다. 살아 난 게 기적이다. 그 사고이후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무비 28 : 사고 후 후유증은 없는가?

지혁 : 그런 건 없다. 다만 될 수 있으면 운전은 하지 않으려 한다. 아직도 그때의 공 포를 떨치지 못한 듯 하다.

무비 29 :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리는 말로는, 부인이 운전을 할라치면 당신이 대신 운전 석에 앉는다 한다. 그건 왜 그런지.

지혁 : 글쎄. 그건 나도 모른다. 아내가 운전석에 앉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두려운 게 났다고 생각한다. (웃음) 실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등이 흥건히 젖어있다. 이 사실을 아내는 아직 모른다. 비밀유지 해 달라. (웃음)

무비 30 : 이토록 사랑을 받는 부인은 행복하겠다. 그래서 영화계에서 잉꼬부부로 소문이 났나보다.

지혁 : 하루하루 아내를 향한 사랑은 그 크기가 더해지는 것 같다. 물론 크기로 사랑 을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내게 아내는 그런 존재다. 그녀가 내 곁에 있음으로 더 소중하고, 아내라고 부를 수 있음에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무비 31 :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안 나온다. 당신과 부인이 얼마나 뜨거운 사랑을 하는지 알만하다. 그런데 왜 영화가 끝나면 매번 상대배우들과 스캔들이 나는지?

지혁 : (웃음) 옛말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말이 있다. 영화배우가 되고 난 다음에 알게 되었다.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날수 있음을.

무비 32 : 스캔들에 부인의 반응은 어떤가. 화를 내지는 않나.

지혁 : 같은 일을 해서인지 전혀 개의치 않는다. 덧붙이자면, 스캔들이 났던 여배우들 과 친분이 있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내다. 스캔들이 터지면 아내와 여배우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통화를 한다. 기사를 봤냐고 시작해서, 사진이 너무 못나왔다고 우스갯소 리까지 한다. 여담이지만 제발 아내가 질투라는 걸 해줬으면 좋겠다. (웃음)

무비 33 : 참 이상하다. 당신정도의 남편이라면 촬영하는 여배우들 이하 모든 여성들을 경계하는 게 부인의 심리일 텐데 오히려 친분유지라니. 매니저라서 그런가?

지혁 : 글쎄. 매니저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아내의 타고난 성격인 것 같다고 할 까. 주변사람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촬영장의 분위기 메이커는 언제나 아내이 다. 이건 내 말이 아니라 함께 일을 했던 영화 관계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웃음)

무비 34 : 부인이 당신을 도와주기 위해 매니저 일에 뛰어 들었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지혁 : 사실이다.

무비 35 : 젊다고 하기보다는 어리다고 할만한 나이에 매니저 세계에 발을 디뎠는데 힘 들다고 하지는 않았는가.

지혁 : 내 50문 50답이 아니고 아내의 50문 50답인 거 같다. (웃음) 아내가 처음 매니 저를 한다 했을 때 반대를 많이 했다. 공부를 하던 학생이었고 무엇보다 너무 어렸다. 그러 나 그녀의 뜻은 누구도 꺾을 수 없을 만큼 완강했다. 나를 위해 그녀가 선택한 길이지만, 단 한번도 힘들다고 내색 한 적은 없었다. 아내는 여리면서도 강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 다. 늘 아내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무비 36 :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스케줄을 관리하는 것은 물론 당신이 입는 옷까지 직접 코디를 한다 들었다. 굳이 부인이 혼자서 다 하는 이유가 있다면?

지혁 : 내게 어떤 배역이 어울리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아내이다. 시나리오 만으로도 내가 어떤 연기를 할지 미리 예견하는 그녀이고,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하면 그녀의 선에서 끝난다. 스케줄 관리는 내 컨디션을 항상 최상으 로 만들려고 하는 그녀의 노력이다. 나를 그만큼 아는 그녀이기에 내 코디는 항상 그녀의 눈과 손끝에서 이루어진다.

무비 37 : 불만은 없었나. 가령 예를 들자면, 당신은 하고 싶은 영화였는데 부인이 반대 를 했다던가 했던 그런 작품 말이다.

지혁 : (웃음) 하나 있었다. 물론 불만은 아니고 좀 아까웠던 영화였다.

무비 38 : 끝까지 밀어보지 그랬나. 당신의 의견을.

지혁 : 의상에 빛이 바랠 영화라고 아내가 꺼려했다. 그녀의 예상이 적중했었다. 영화 를 보고 난 관객들이 이구동성으로 옷이 볼만했다라는 말만 있었다.

무비 39 : 타고난 매니저인가 보다. 당신의 부인은.

지혁 : 글쎄. 그렇게 말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아내가 얼마나 노력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내는 촬영장에서도 틈틈이 영화관련 서적을 보고 내가 출연한 신을 남김 없이 모니터한다. 그리고 영화계의 돌아가는 상황도 매번 파악해야 하고,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기사 중 단 한 줄도 헛되게 보지 않는다. 집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집안 일을 하기 에도 힘에 부칠 텐데 내가 출연한 최근 영화에서부터 오래전 드라마에서 나온 모습까지 수 십 번, 혹은 수백 번을 보아도 시간이 날 때마다 모니터를 가장한 연구를(웃음) 한다.

무비 40 :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지혁 : 제자리걸음인 연기자는 싫다. 한편의 영화를 마무리 지었을 때, 더 좋아진 모 습을 선보이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늘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무비 41 : 특별히 하고 싶은 연기가 있다면?

지혁 : 이렇다하게 정해 놓은 것은 없다. 다만 지금까지는 내게 어울리는 배역에만 주 력을 다했는데, 앞으로는 어떤 배역도 능숙하게 연기 할 수 있는 진정한 연기자가 되고 싶다.

무비 42 : 차기작은 준비되었는가. 준비되었다면 무슨 영화인지.

지혁 : 당연히 준비되었다. 이번엔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다.

무비 43 : 큰 결심을 내린 것 같다. 매니저이자 부인인 그녀가 브라운관은 피했으면 하지 않았나.

지혁 : 아내와 긴 시간 상의했다. 그러나 그녀가 먼저 드라마를 제안했고, 내가 망설 였다면 망설였다고 할 수 있다. 브라운관에서 실패를 했기 때문에 망설인 것은 아니다. 우선 드라마와 영화는 호흡부터 다르다. 무엇보다 사극이기에 많이 망설였지만, 그것이 드라마를 다시 시작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무비 44 : 사극이라니, 기대된다. 이번에는 영화제에서 최우수남우주연상을 획득하더니 내년 연말엔 방송가 드라마 부문에서 최우수남우주연상이나, 혹은 대상을 획득하는 건 아닐 까, 감히 짐작해본다.

지혁 : 준다면 마다하지는 않겠다. (웃음) 열심히 해볼 생각이다.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하는 만큼 좋은 연기를 해보고 싶다.

무비 45 : 잘하리라 믿는다. 그럼 한동안 스크린에서는 당신을 볼 수 없는 건가.

지혁 : 아마도. 두개의 작품에 출연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감정이 분산되고 흐려 진다. 될 수 있으면 하나의 작품에 내 모습을 다 보여주고 난 다음, 여유를 두고 다른 작품 을 하고 싶다. 무엇보다 아내가 임신 중이다. 아내가 쉴 수 있도록 나 역시 한동안은 스케줄 을 조정해야할 것 같다.

무비 46 : 경사가 겹쳤다. 늦게 알아서 미안하다. 진심으로 축하를 전한다. 아들이나 딸 중 특별히 바라는 성별은 있는가.

지혁 : 아침저녁으로 정안수를 떠놓고 빌고 싶다. 아내를 닮은 예쁜 딸이 태어나라고.
(웃음)

무비 47 : 한국영화제에서 최우수남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 수상소감 끝 멘트가 은채 야 사랑해였다. 여보 사랑해도 아닌, 은채야 사랑해로 전국의 수많은 여성 팬들을 울리면서 부인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을 고백한 까닭이 있다면?

지혁 : 영화제를 마치고 나오면서 안 그래도 지인들에게 팔불출이라는 소리를 엄청나 게 많이 들었다. (웃음) 아내의 이름을 부른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누구의 아내, 또는 누 구새엄마, 라는 이름보다 나는 내 아내가 자신의 이름으로 살기를 원한다. 우지혁의 아내 최은 채가 아닌, 최은채라는 이름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자신을 표현하고 빛낼 수 있다고 생각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그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주어야 한다고 여긴다.

무비 48 : 10년 후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지혁 : 진정한 연기자가 되고 싶다. 스타로 잠시잠깐 유명세를 떨치기 보다는 한 해한 해 묵을수록 장맛이 더 해가는 진국인 연기자가 되고 싶다. 욕심이 너무 과한가. (웃음) 무 엇보다 10년 후에도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면서 그녀와 하나이고 싶고, 또 그때쯤이면 그녀 를 닮은 예쁜 딸이 적어도 셋은 되어보길 꿈꿔본다. (웃음)

무비 49 : 지금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지혁 : 교외에서 살고 싶지만 바쁜 일정에 맞추느라 보다시피 시내 빌라에 살고 있다.
조만간에 교외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할 예정이다. 드라마 촬영 들어가기 전 시간을 내어서, 이사 갈 집에 예쁜 꽃밭을 만들었으면 한다. 아내가 좋아하는 들꽃들을 한가득 심어보고 싶 다.

무비 50 : 질문에 답하느라 고생 많았다.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세 가지를 말하라면.

지혁 : 첫째, 언제나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내 아내 최은채. 둘째, 내가 힘들 때마다 기댈 수 있는 터를 마련하고 지금의 나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든 나의 매니저 최은 채. 셋째, 내가 영원히 사랑하고 사랑하는…… 나의 연인 최은채 (웃음)

인터뷰를 마쳤을 때 그의 아내, 아니 최은채 씨가 저녁식사 초대를 했다. 입덧이 심해 음식 준비를 많이 못했다는 말과는 달리 식탁은 진수성찬으로 차려져 푸짐했다. 식사 내내 그는 아내를 챙겼고, 그녀는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아직 임산부라는 표시가 나지 않을 정도로 날 씬한 몸매에, 결혼한 유부녀라기보다는 아가씨 같기만 한 그녀. 집안 곳곳에 그녀의 손때가 묻어 있었고, 그 손때는 다름 아닌 우지혁, 그였다.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한번쯤 그와의 핑크빛 로맨스를 꿈꿔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한 여성하고만 핑크빛 로맨스를 꿈꾼다 했다.

식사를 마쳤을 때, 알게 되었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때로는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부드러운 연기로 수많은 여성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그는, 그의 아내 최은채 씨 곁에 있을 때 가장 빛나고 가장 아 름다웠다.

사진 촬영을 거절하던 최은채 씨의 부탁으로 기사의 사진은 그가 한국영화제에서 수상 했을 당시의 사진을 올린다. (좌측)

그의 사진 속 미소가 눈부신 이유는 아마도 그를 사랑하는 최은채 씨와 아내를 사랑하는 그 의 변함없는 사랑 때문은 아닌지…… 문득 생각해본다.

하나일 때 그가 숨 막히게 멋있고 한숨 나올 만큼 매력적인 남자라면, 아내와 함께 있을 때 의 그는 완벽한 남자였다. 아주 완벽한…….

내년 5월에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인 아기가 태어난다고 내내 행복해 하던 그. 그리고 그녀.
그들의 사랑은 한편의 영화보다 아름다웠다.

스크린에서 종횡무진 하던 그가 잠시의 외출로 브라운관에 간다 하니 영화인으로서 조금은 서운한 마음도 든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우지혁이라는 이름으로 스크린을 장악한 그였 기에 나는 믿는다. 브라운관도 조만간 그가 장악할 것이라는 것을.

그의 앞날에 언제나 행복이 가득하길 바라며, 특집으로 꾸며진 기사가 영화 이야기 보다는 개인적인 이야기로 다뤄졌지만, 길고도 짧았던 50문 50답은 여기서 아쉬움을 접고 이만 마 친다.
무비저널-이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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