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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릴케]파초-기다림.txt

#아래 소설은 일반인이 거북해 할수 내용이 담겨 있을수 있습니다. BDSM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되돌아가기를 누르기를 바랍니다.

파초 - 기다림 (릴케)

파초 - 기다림



검정색 세단이 멈춰섰다. 한걸음에 뛰어내린 기사가 열어준 문에서 소박한 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가희가 내렸다. 곱슬기가 조금 있는 생머리를 가지런히 하나로 묶은 가희의 차림은 고급차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기사가 가방을 받아들려고 하자 가희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기사를 뒤로 한 채 커다란 저택 앞에 버티고 섰다. 배타적으로 굳게 닫혀 있는 웅장한 대문 앞에서 까치발을 하고서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지만 대문 안 저택은 냉랭한 기운만 풍긴 채 조금도 양보할 마음이 없는 듯 했다.
곧 기사가 달려가 초인종을 눌렀다.

“아가씨 모시고 왔습니다.”

“어머? 정말요? 제가 나갈게요.”

가희는 눈을 크게 떴다. 인터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제법 활발하고 밝았다.

“큰 아가씨가 나오실 듯 합니다.”

기사의 친절한 설명에 가희가 상냥한 미소로 대답했다. 곧 대문이 활짝 열리더니 누군가가 뛰어나와 인사를 할 사이도 없이 소란스럽게 가희를 꼭 안았다.

“네가 가희구나. 반가워.”

칠흙같은 검은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나풀거리는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가희를 끌어안았다. 가희는 조금 당황스런 표정으로 안긴 채 서 있었다.

“언...니?”

“그래. 내가 니 언니야! 넌 내 동생이구. 맞지?”

가녀린 겉모습과는 반대로 힘차게 껴안는 언니 서주의 환대였다.

“너무 너무 좋아!”

마침내 숨막힐 정도로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서 서주가 가희의 눈을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가희도 눈을 들어 서주의 눈을 마주보았다. 맑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서주의 눈이 아름다웠다. 참 예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혼자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새어머니는... 잘 보내드렸어?”

시종일관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던 가희의 눈이 침울해졌다. 서주도 안쓰러운 미소를 지어보냈다.

“미안. 내가 주책이지? 얼른 들어가자.”

기사에게는 양보하지 않았던 가방을 서주에게 건넨 가희의 손을 서주가 꼭 쥐었다. 25년만에 처음으로 만난 친언니 서주는 생각보다 훨씬 더 따뜻한 사람이었다. 새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보다못한 아버지의 명령으로 찾은 아버지의 집, 다른 새어머니와 배다른 언니가 있는 이 큰 집이 앞으로 가희가 살아야 할 곳이었다.








“새엄마!”

서주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넓은 거실을 울렸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매서운 손바닥이 가희의 뺨을 내리쳤다. 그 손끝이 어찌나 맵던지 뺨이 따끔거리기까지 했다. 눈을 크게 뜨고서 매운 손바닥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갈색 머리를 하나로 틀어올린 여인이 그 손끝만큼이나 매서운 눈을 하고서 가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손끝에 온 힘을 실었음이 분명함에도 눈빛하나 흔들리지 않고서 선 여인이 바로 가희의 새새어머니 김현수였다. 서주가 새어머니와 가희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정작 울어야 할 사람은 가희였음에도 눈물을 흘린 쪽은 서주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우에요? 신발도 벗지 않은 애한테.”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구나.”

여인이 차갑게 말했다. 서주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동생을 돌아보았다. 동생이 몸을 단정히 하고 현수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민가희라고 합니다.”

“그 성이 창피하지도 않느냐? 그 애미에 그 딸이라 참 뻔뻔하기도 하구나.”

“새엄마! 이러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지독히도 곧은 동생의 표정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서주가 새어머니를 향해 소리쳤다.

“시끄럽다. 여려터진 것 같으니라고.”

새어머니가 못마땅한 눈으로 두 자매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몸을 획 돌렸다.

“쉬세요.”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 쪽은 가희였다. 돌아서려던 현수가 아직도 현관에서 들어서지도 못했으면서도 꼿꼿이 서 있는 가희를 노려보았다.

“되도록이면 발소리를 죽이고 다녀라. 이층에서 내려오지도 말았으면 좋겠다만 주방에서 해야 할 일이 있을테니 굳이 말리지는 않으마.”

“새엄마. 가희는 내 동생이에요. 아버지 딸이구요. 가희가 주방에서 할 일이 뭐가 있단 거에요. 아줌마가 있잖아요.”

“이런 쓸개도 없는 것 같으니라고. 딸자식 하나 있다는게 저렇게 물러터져서는. 쯧”

현수가 친딸인 서주마저도 성에 안 찬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다시 한 번 가희를 쏘아보고 유유히 안으로 사라졌다.

“세상에 새어머니를 만족시킬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새어머니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던 서주가 곧 몸을 돌려 가희에게 향했다.

“미안. 내가 칠칠치 못해서 이 모양이야. 그래도 너무 야속하게 생각하지는 마. 새엄마가 원래 좀 고집스러우셔.”

“괜찮아요. 참 미인이세요.”

동생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서주가 이내 방긋 미소지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아직 신발도 안 벗었잖아. 얼른 들어와. 언니가 방 정리해놨거든. 어제 밤 새운거 있지. 우선 내 맘대로 꾸며봤어.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따뜻함을 풍기는 언니를 가희가 불렀다. 호리호리한 몸으로 가방을 끌고가던 서주가 머리를 찰랑거리며 가희를 돌아보았다.

“응?”

“... 고마워요. 언니가 생겨서 좋아요...”

잠시 눈을 깜빡이던 서주가 곧 환하게 웃었다. 희고 고른 치열이 드러나더니 마치 천사처럼 새하얀 미소를 지었다. 가슴이 뿌듯해졌다. 서주가 좀 무거운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웃었다.

“가희야. 언니가 생긴 게 아니라 원래부터 있었는데 지금 만난거야. 우리 친자매잖아. 그렇지?”

가희가 마침내 동생같은 여린 미소를 지었다. 대문을 넘어서 현관문에 다다르기까지 꼿꼿하게 자신을 지키려는 고집스런 냉소를 짓던 그녀의 입가에 진정으로 그녀의 얼굴과 어울리는 여린 미소가 풍겼다. 그 미소를 이끌어낸 서주였다.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아버지한테 들었던 넌 좀 더 여린 아이였거든. 이제부터 언니가 있으니까 좀 더 환하게 웃어. 알았지?”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내렸다. 소리없이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가희의 콧등을 지나 떨어졌다.

“울지 마. 언니는 네가 와 줘서 너무 기쁜데...”

그러나 서주도 어느새 울먹이고 있었다.

“며칠동안 한 번도 울지 않았어요. 새엄마 장지 지키면서도 울지 못했어요. 불쌍한 민가희는 어쩌나하고 모두들 수군거릴까봐 울지 못했어요.”

가희의 어깨를 끌어안은 서주가 그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은 마침내 긴 서러움을 토해내는 모습이었다.

“가희야. 울 땐 울어야 다음에 웃을 수 있는거야.”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며 방울방울 서러움을 토해냈다. 그 등을 쓰는 서주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힘들면 돌아와 - 하진]

메시지가 도착해 휴대폰을 열어보았더니 짧은 글귀가 보였다. 하진의 메시지였다. 가희는 걱정하고 있을 친구의 메시지가 담긴 휴대폰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가희의 눈매가 잔잔해졌다. 친구이자 연인인 속깊은 남자 하진을 떠올리니 가슴이 따뜻해왔다.

[걱정하지마. 하진아. 난 잘 지내고 있어. 모두들 잘 해 주어서 행복해 - 가희]

[자주 연락해. 걱정돼서 잠도 안 와 - 하진]

[걱정하지 말라니까. 나 씩씩하잖아. 잘 자 - 가희]

[너도 푹 자. 내가 니 꿈에 찾아갈게 - 하진]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데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검은머리를 총총 땋은 서주가 잠옷차림으로 들어섰다.

“뭐하고 있었니?”

가희가 휴대폰을 치우고 웃었다.

“친구한테 연락이 와서요.”

“응. 근데 행복한 표정이구나. 혹시 애인?”

“아... 네.”

“어머! 정말? 나한테도 소개시켜 줄거지? 나도 현이씨 소개시켜줄게.”

“언니 약혼자라는 분?”

“어머. 알고 있었어?”

“네. 아버지한테 들었어요.”

“아. 그렇구나. 아버지 들어오실 때 된 것 같은데 오늘 늦으시네.”

“저 때문에 괜히 아버지가 난처하실까봐 걱정이에요.”

“그런 생각 마. 아버지는 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좋으실 분이니까. 그동안 네 걱정을 습관처럼 하셨어. 가희야. 언니 미웠지? 한 번도 찾아가보지도 못했어. 그렇지만 나로서는 새엄마걱정도 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단다. 나마저 너한테 가면 새엄마가 많이 속상해하실테니까. 가희도 새엄마 사랑하지? 언니도 그만큼 새엄마를 사랑하거든. 우리 새엄마는 성에 차지 않는 나 때문에 많이 속상해하시지만 말야.”

“언니는 예쁘고 멋진 사람이세요. 왜 그런 생각을 해요.”

“아니. 난 그렇지 않아. 가희는 공부를 참 잘했다지? 그렇지만 난 뭐 하나 잘 하는게 없단다. 몸도 약하고 공부도 중간 정도였고 운동도 젬병이야. 지금 하고 있는 피아노도 새엄마가 억지로 시키는거야. 난 음악에 그다지 관심이 없거든. 재능도 없고.”

“언니같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까 이상해요. 언니는 언니 자체로 참 귀중한 사람인데.”

“고마워. 그렇지만 이런 나한테도 소중하고 귀중한 보물이 있단다. 바로 현이씨야.”

“아...”

“현이씨는 나한테 생명같은 존재야. 실은 현이씨는 나보다도 새엄마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가희야. 새엄마가 내게 권해준 그 많은 것들과 사람 중에서 내 마음을 끈 건 하나도 없었는데 현이씨는 아니었어. 현이씨를 내게 소개시켜 준 새엄마한테 너무 감사해.”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은 참 아름답구나. 가희는 저절로 미소짓게 만드는 서주의 사랑에 감사했다. 가희, 그녀에게 행복의 존재인 언니에게 사랑을 주는 ‘현’이라는 사람에게 감사하고 싶은 밤이었다.

“현이씨는 나에게 과분할 정도의 사람이야. 못하는게 없어. 똑똑하고 자상하고 엄청 잘 생겼단다. 운동도 잘 하고 가끔씩 요리도 해주는데 너무 맛있어. 난 현이씨의 모든 면이 좋아. 무엇보다 진실한 사람이거든. 난 그런 현이씨의 모습이 좋은데 새엄마는 아닌가봐. 솔직히 새엄마는 현이씨의 배경을 좋아하는 것 같아. 의사이신 아버님 어머님이나 현이씨가 회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같은게 좋으신 것 같아. 어찌보면 이 결혼은 정략결혼이야. 새엄마의 눈에 든 현이씨를 소개받아 추진되어진 결혼이니까. 그렇지만 만약 새엄마가 저렇게 안이 닳아 하시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었을거야. 현이씨는 나에게 그런 존재거든.”

서주가 마치 꿈을 꾸듯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새침떼기일 것 같은 겉모습과는 반대로 조근조근 다정하게 말하는 서주를 바라보는 것만도 좋은 가희였다. 잠옷을 입고서 언니의 사랑이야기를 듣는 일상의 행복에 빠질 수 있는 지금이 신기했다. 한 참 생각에 빠져 있던 서주가 곧 얼굴을 붉혔다.

“어머. 나 좀 봐. 주책맞게 피곤한 애를 붙들고 내 얘기만 해 버렸네. 미안. 현이씨 얘기만 나오면 이 모양이라니까. 내일쯤 너한테도 소개시켜 줄게. 너 소개시켜 준다고 하면 기뻐할거야. 자상한 사람이거든.”

“언니. 그러지 않아도 돼요. 괜히 행복한 결혼을 앞 둔 언니한테 누라도 되면 어떻게 해요. 배다른 자매가 있다는 걸 그 쪽 집안에서 알면...”

가희가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서주의 눈가가 빨개지더니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 언니...”

“바보. 왜 그런 말을 하니? 이제 그런 생각 마. 넌 내 친동생이야. 이제 좋은 생각만 하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서주의 모습에 당황한 쪽은 가희였다.

“언니. 울지 말아요.”

아니나다를까 벌써 훌쩍이는 서주였다. 아무래도 서주는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잔정이 많고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다. 서주의 새어머니, 김현수와 정략결혼을 한 아버지는 현수와 성격차이로 방황했다. 그러던 중 당시 비서였던 가희의 새어머니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사랑에 목숨까지 걸었고 현수의 협박과 회유속에서 마침내 가희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주의 존재 때문에 차마 이혼을 하지 못하고 다른 한 쪽으로 가희를 키웠다. 남들의 이목이 두려워 이혼도 간통신고도 하지 못하는 김현수의 묵인 하에 커온 가희였다. 그리고 얼마전 암으로 새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새어머니의 투병중에도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은 극진한 것이었다. 가희는 자신도 아버지같은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아버지를 닮은 사람은 자신이 아닌 언니인 서주쪽인 것 같았다.

“우리 동생 남자친구는 이름이 뭐니?”

“류하진이에요.”

“응. 착하겠지? 언니가 만나봐서 아니다싶으면 훼방놀거야.”

“착해요. 너무 착해요.”

“그럼 다행이야. 난 너만 좋으면 돼.”

두 사람은 그 날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꿈나라의 문전으로 다가갔다. 마침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나른한 졸음이 몰려올때까지도 행복한 대화들은 끊이지 않았다. 어스름한 어둠이 레이스커튼이 달린 창문을 두드릴 때 쯤 두 사람은 포근히 잠들어 있었다.

몇 시간 후 방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아버지가 들어섰다. 다정하게 잠들어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자식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주름진 눈가가 잔잔해졌다. 아버지는 큰 딸 서주의 단정한 이마를 쓰다듬어준 후, 항상 미안한 마음부터 먼저 드는 작은 딸 가희의 이마도 부드럽게 쓸었다. 현수를 닮아 서구적으로 생긴 서주의 볼을 찬찬히 쓰다듬고 수진을 닮아 귀염성있고 단정한 가희의 볼을 어루만졌다. 마침내 함께 누워있는 자매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빠?”

잠귀가 밝은 서주가 부스스 눈을 떴다.

“서주. 깼니?”

“네. 늦으셨네요. 가희가 온 날인데.”

“미안하다. 일이 늦게 끝났어. 우리 서주가 가희에게 잘 해 주었나보구나.”

“집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눈물 한 번 안 비치고 참더라구요. 놀랐어요. 힘들텐데.”

“그래. 가희는 그런 아이란다. 서주가 언니니까 아버지가 또 부탁할게. 가희를 지켜줄거지?”

“네. 걱정마세요.”

언니와 아버지의 눈이 동시에 동생에게 향했다.

“잘 자라.”

아버지가 몸을 숙여 서주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이미 커버린 딸에게도 그렇게 여전히 이어지는 입맞춤이었다. 서주도 전혀 쑥스러움없이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았다. 잠시 후 문이 닫히고 서주가 다시 눕는지 부스럭거렸다. 잠든 줄 알았던 가희의 눈가에 보일 듯 말 듯 이슬이 맺혔다.












꿇어와 함께 연재 시작합니다.


파초 - 기다림



가희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일하는 아줌마를 거들어 식사준비를 하고 청소를 도왔다. 서주는 말렸지만 아버지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집으로 들어오기 전 아버지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제가 알아서 찾을게요. 제 자리를 스스로 찾을게요.”

그 약속의 일환으로 부지런을 떠는 가희였다. 그런 모습이 새새어머니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지는 모를 노릇이었지만 적어도 아버지가 곤란하지 않기만을 바랄뿐이었다. 새어머니와 서주가 결혼문제로 잠시 외출한 사이에 가희도 집을 나섰다. 무작정 놀 수 만은 없는 일이었다. 고향에서는 꽤 큰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일을 했지만 그만 둔 지금은 다른 일거리를 찾고 싶었다.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싶어 일을 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뭔가 자신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 곳 저 곳 시야를 넓히며 걷고 있는데 문득 눈에 익은 실루엣이 느껴졌다. 생면부지의 서울에서 낯익은 사람이 있을리 만무한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가희야!”

반색을 하며 뛰어오는 남자는 하진과 자신의 친구인 재성이었다.

“어머. 재성이구나.”

가희도 반가워서 폴짝폴짝 뛰었다.

“안 그래도 한 번 연락하려고 했었어. 하진이 놈이 니 걱정을 한 보따리 늘어놓길래 오늘 내일 연락해야지 했는데 이런 우연이 있나.”

“그러게. 정말 서울에서 김실장 찾기만큼 어렵다는 한재성을 다 찾았구나?”

“내가 할 말이다.”







두 사람은 잠시 후 한 호텔 커피숍에 앉아있었다.

“재성아. 너 사업 크게 한다더니 성공했구나. 호텔커피숍이 다 뭐니?”

“아니 그게 아니고 약속이 있어서. 거물을 만나야 하거든. 그래서 나로서도 사치를 좀 하는거야. 사업은 무슨. 그저 조그마한 가게 하는 것 가지고.”

“또 겸손이구나. 우리 고향에서는 너 유명해. 엄청 잘 나간다고 너희 새엄마가 소 잡고 돼지 잡아서 잔치한 거 모르지?”

“하여간 울 어무이 때문에 못 산다. 어쨌거나 이렇게 힘들게 너 만났는데 도저히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고 해서 끌고 온거야. 그대로 헤어지면 하진이 녀석이 아마 내 명줄을 딸거다. 참 너 아버지 집에 들어갔다며?”

시종일관 웃던 가희의 얼굴이 다소 침울해졌다.

“응.”

그러나 언니 서주의 미소를 생각하며 이내 웃는 가희였다.

“팥쥐언니하고 그 새어머니는 잘 해주니?”

“설마. 우리 언니 천사야. 나로서도 놀랄 정도로.”

“하긴 니가 콩쥐같은 천사표는 아니니 의붓언니라고 무조건 팥쥐로 매도하는건 좀 문제가 있겠다.”

“잘 나가는 사장되더니 겁이 없어졌는데?”

“흰소리 마. 잘 나가지 않는다니까.”

재성은 손사레를 쳤지만 그의 성공신화는 이미 알만큼 아는 가희였다. 재성은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중간거래상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일본이나 다른 나라의 벼룩시장이나 보세옷집에서 옷을 구입해 우리나라 시장에 되파는 일이었다. 공항에서 신고를 할 때 터무니없는 낮은 가격을 부르지 않는 이상 50-60%정도만 신고를 하면 묵인하에 넘어가는 진리를 깨우쳐 구입가격보다 2배, 많게는 3-5배 정도의 가격을 붙여서 되팔 수 있었다. 그러니 마진은 물론이고 교통비를 빼더라도 고스란히 주머니에 돈을 챙기는 형국이었다.

“어떻게 보면 돈 벌기 쉬운데. 근데 난 왜 이렇게 어렵지?”

“부자 아버지 뒀으면서 무슨 걱정이냐?”

“말도 안되는 소리 마. 난 내 능력으로 살고싶어. 참 오늘 만난다는 거물은 어떤 사람이니? 고객?”

“아니. 스폰서야. 쉽게 말해 돈 줄. 아이디어만 있으면 뭐해. 뒷돈이 있어야지. 한영그룹 알지? 거기 실세라는 소문인데 좋은 사업 아이디어를 가진 소자본가들을 밀어주는 취미가 있는 사람이야.”

“어머. 정말? 그럼 나도 한 번 들이대 볼까?”

“아서라. 그 남자는 절대 사업에서는 여자를 믿지 않아.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아도 남자하고만 거래를 하는 특징이 있지.”

“요즘에도 그런 말도 안되는 고리짝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있니? 재수없어진다.”

“본인의 생각이 그러한 걸 누가 뭐라고 하겠냐? 자기 돈 가지고 구미에 맞는 대로 지원하겠다는데.”

“아무리 자기 돈 가지고-”

“왔다.”

한참 흥분하고 있는데 순식간에 표정이 바뀐 재성이 벌떡 일어나더니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인사를 받아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거울을 가지고 있었다면 짝 금이 갔을 것 같다는 생각. 가희로서는 생전 처음으로 들어보는 딱딱하고도 차가운 어투였다. 지독히도 사무적이라고 표현하다면 맞을까?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주름 하나 가지 않은 단정한 정장차림에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을 듯 가지런히 빗어넘긴 머리카락이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모습이었다. 마치 온 몸 전체를 금방 드라이크리닝한 느낌이랄까? 그런 느낌의 남자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자리에 앉았다. 앉자마자 다리를 척 꼰 그 남자가 재킷을 살짝 벌리더니 안주머니에서 지문하나 묻지 않은 고급담배케이스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긴 손가락으로 탁 소리를 내며 케이스를 두드린 남자가 이내 다가온 웨이터에게 주문한 것은 블루마운틴이었다.

곧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일 정도로 얇고 가는 입술에 담배를 물었다. 재성이 라이터를 꺼내려는 듯 안주머니를 더듬대자 남자가 이내 손으로 저지하더니 안주머니에서 나온 고급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재성으로서는 스폰서이니 어쩔 수 없을 듯 했지만 다소 비굴해보이는 모습에 조금 화가 나는 가희였다. 게다가 남자의 지나치게 정돈된 모습이 마치 정갈하게 담겨있는 종갓집 김치같아 쳐다보기에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사업은 잘 확장이 되어간다고 들었습니다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미간을 찡그리며 담뱃재를 터는 남자를 향해 재성이 들고 있던 서류를 재빨리 내 놓았다.

“지금까지 매출전표입니다.”

남자가 서류를 집어들더니 긴 연기와 함께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좋네요. 더 이상 제가 도와드릴 필요성이 없을 것 같은데요?”

“현재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이왕 중간상인의 역할을 하는 거라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은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해 두신 아이템은 있습니까?”

남자가 그다지 수긍하지 않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생각해 둔 것은 여러 가지 있지만 아직 이렇다 싶은 아이템은...”

“확실히 정해 둔 계획이 있으시면 추진하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무리한 확장은 기존의 틀까지 쓰러뜨릴 확률이 크거든요.”

“그렇지만 그게...”

대충 눈치로 때려잡아보니 재성은 사업을 확장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아이디어는 없고 앞에 앉은 남자에게 우선 자금줄을 부탁할 생각인가 본데 남자가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애가 탄다. 대충 그런 분위기라는 것을 직감한 가희였다. 그 때 갑자기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싸이트를 운영하면서 직접 주문을 받는 건 어때요? 우리나라 구매자들 중 일본의 하이틴 그룹이나 연예인들을 좋아하는 젊은 층을 겨냥하는 거에요. 그들의 사진이나 이미지를 내걸면서 코디방법을 제시하는 거지요. 그러면 코디지식도 얻고 연예인이 걸친 의류나 액세서리를 따라하는 대리만족도 느끼고 게다가 그것이 일본 현지에서 직접 조달해 오는 것이니 그만큼 희소성이나 기대효과도 클 거구요. 다만 진짜 명품인 그들의 패션을 보세 시장에서 얼마나 잘 건지느냐가 문제겠죠.”

갑자기 끼어든 가희였던지라 차마 막지 못한 재성의 낯빛이 불안해졌다. 그가 당황한 채로 가희와 남자사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순간을 참지 못하고 끼어든 것 까지는 좋았지만 가희는 일순간 약간 저조해 있었다. 남자의 표정이 만만치 않았다.

‘뭘 저렇게 노려보지? 아님 말게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표현도 못하나? 아니면 지나가는 개가 짖었다고 쉽게 생각하던가. 생긴대로 엄청 깐깐하시군.’

“한사장님 부인입니까?”

낮게 물어 온 남자였다. 뜨악한 분위기에 커피라도 마셔야겠어서 한 모금 삼키던 가희가 순간 켁켁거렸다. 재성이 얼른 냅킨을 내밀었다.

“네?”

“분위기를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군요. 부인도 아니면 동업자입니까? 알기로는 동업자가 없는 걸로 아는데요.”

“아. 그냥 고향 친구입니다.”

진땀이 나는 듯 안절부절못하는 재성이었다. 가희는 친구의 저자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울은 돈 많으면 다 대통령인가?’

“말 그대로 고향 친구인데요?”

“맹랑한 아가씨로군. 툭툭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지는 않나?”

“자유의사도 말 못하나요? 여기가 법정인가요? 제가 하는 말이 불리하게 작용할 일이라도 있나요?”

“재밌군.”

“저로서도 좋은 생각이 났기에 드린 말씀이에요. 듣기로는 스폰서를 하신다고-”

“난 여자와 일하지 않아.”

순간 가희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뭐야 이 남자.

“왜 그렇게 단정하시죠?”

“여자들은 밖에 있는것보다 안이 어울리지 않나?”

“남존여비 사상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절대 남성우월론자?”

“전혀. 오히려 진보적인 패미니스트이지. 여성을 존중하고 아름다움을 찬양하지.”

남자가 일부러 들으라는 듯 이죽거리며 가희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남존여비로군요. 여자들이 남자들의 구미를 맞춰주는 액세서리같나요?”

“때때로 18k나 도금을 한 여자들이 발끈하는 것이 많이 보이지.”

“당신이야말로 겉모습은 다이아몬드일지 몰라도 은만큼의 값어치도 없어보이는군요.”

남자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분나쁘다 이거겠지? 아니 아직 많이 남았어. 가희가 가방을 뒤적거리며 야비하게 씨익 웃었다.

“여자와 일을 하지 않는건 당신 구미이고 사업철학이겠지만 여자와 일이 마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심히 불쾌하네요.”

“여권신장론자를 몰라봤군.”

“아니요. 단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할 뿐입니다. 그럼 이만.”

가희가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네요.”

재성이 제발 그만하라는 듯 안달복달을 하고 있었지만 가희에게는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더 할 말이 있으신가?”

“당신같은 은제품이 얼룩이 타면 무엇으로 닦는 줄 아시죠? 바로 이거에요. 많이드세요.”

가희가 가방안에서 치약을 꺼내더니 남자의 커피잔에 있는 힘껏 쭉 짜 넣었다.

“가, 가희야!”

재성이 벌떡 일어났지만 이미 가희는 치약 두껑을 덮어 가방에 넣은 후 나가버린 후였다. 당혹스런 얼굴로 가희를 외쳤지만 그녀는 돌아올리 없었고 재성은 지옥불에라도 빠진 참담한 표정으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가 전혀 동요도 없이 앉아있었다. 팔짱을 낀 채로 시니컬한 미소를 지은 채 그대로였다.

“죄송합니다.”

남자가 손을 척하고 들더니 재성의 말을 막았다. 그가 이내 담배를 꺼내 물고는 빨아들였다. 담배를 손에 쥔 채로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사장님 고향이 제주도였습니까? 망아지가 한 마리 올라온 듯 하군요.”

“네?”

“저 아가씨 이름이 무엇입니까?”

“네? 아. 네. 민가희입니다.”

“민가희라...”

되뇌이는 남자 앞에서 재성이 서류를 든 채 오도가도 못하고 안달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파초 - 기다림



“너 잘 지내는 거지?”

기분이 저조해져서 하진에게 전화를 하자마자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걱정해 주는 목소리에 몸에 온기가 돌았다.

“응. 잘 지내. 뭐가 그렇게 걱정스러워서 비명이니?”

“오늘 재성이 만났다면서. 녀석 광분한 상태던데.”

“안 그래도 무서워서 전화 안 받고 있었어.”

“내가 신경쇠약 걸리겠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내가 돈 줄을 좀 막았거든. 그런데 그 남자 정말 재수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재성이가 이해해 주려나?”

“이해해주긴. 당분간 피해다녀라. 자식 열 받았어.”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래. 도대체 한 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걱정 마. 인류의 규격에서 상당히 벗어났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적당한 때를 찾아서 재성이 화 좀 풀어줘야겠네.”

“며칠 뜸 들이고 전화 해.”

“알았어. 넌 잘 지내고 있니?”

“니가 없는데 잘 지낼 리가 있겠니?”

“내 걱정은 마.”

“말이랑 행동이랑 제발 좀 통일해.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알았어...”

“가희야. 보고 싶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녹음할까봐. 힘들때마다 돌려 듣게.”

“힘든거야? 그래?”

“아니야. 제발 오버 좀 하지마. 그냥 힘들수도 있다 이거지.”

“제발 나 숨통 좀 트게 해줘. 너 때문에 밤잠설쳐서 요즘 완전 꽝이다.”

“내가 자장가라도 불러줘야겠네.”

“여곡성?”

“너 나빠. 어? 벌써 집에 다 왔다. 다음에 전화할게.”

“끊지마. 잠깐만 가희야!”

휴대폰을 접으려던 가희가 이내 전화기를 귀에 댔다. 잠시 침묵하던 저 쪽에서 천천히 하진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니가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아. 니가 조금도 그립지 않아.”

“응?”

“그립다고 말하는 순간 끝장날 것 같거든.”

가희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냥... 끝장나버려. 바보야... 나 그만 끊을게.”

가희는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의 말대로 자꾸 그리워하면 지금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현관물을 밀고 들어서니 거실에 앉아 잡지책을 뒤적이던 서주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가희 들어왔구나.”

“네. 너무 늦었죠?”

“늦기는. 아까 현이씨 들렀었는데 네가 없어서 좀 서운해하더라.”

“그랬어요? 아까워라. 일찍 들어올 걸 그랬어요.”

“또 들르겠대. 걱정 마.”

“일찍 일찍 다니거라. 너는 그만큼의 예의도 없니?”

육중한 안방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나온 김현수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가희는 왜 김현수만 보면 움츠러드는지 모르겠다. 미안함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싫은 것일까.

“죄송합니다.”

“철이 없어도 너처럼 없는 애는 처음 보겠구나. 애물단지 주제에 잘도 쏘아다니는구나.”

“새엄마!”

서주가 원망스런 눈을 하고서 현수를 막아섰다. 현수의 매서운 눈이 이번에는 딸을 향했다.

“목걸이 하고는. 쯧. 니가 그만한 대접을 못 받으니까 강실장이 그런 은 따위를 사 오는게 아니냐. 자존심 상하지도 않느냐? 당장 벗어버려라. 보기도 싫다.”

“그렇지만 다이아니 루비가 뭐가 중요해요. 아무리 은이더라도 현이씨가 사 준 거잖아요.”

서주의 목에 반짝이는 예쁜 은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은 얘기가 나오니 낮에 만났던 왕재수가 생각나는 가희였다.

“쯧쯧 모자란 것 같으니라고.”

현수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몸을 획 돌렸다.

“참. 너는 내일 되도록이면 늦게 들어오거라. 서주 이모와 외삼촌들이 오신다. 네가 낄 자리가 아니라는 건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니 멋대로 돌아다니는 건 좋다만 행여나 천박한 짓거리는 하고 다니지 말기를 바라마. 누구처럼 말이다.”

가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바른 말을 해야 할 때가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흘려들어야 할 말을 담아둘 필요는 없었다.

“가희야...”

서주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부르자 이내 가희가 빙긋 웃었다.

“내일은 친구랑 pc방에서 진쳐야겠어요.”

“그러지 말고 언니하고 영화 볼까?”

“아니요. 안 그래도 마음 풀어줄 친구 녀석 만나야 해서 괜찮아요. 외삼촌 오신다는데 언니가 있어야죠.”

“안 그래도 되지만... 그럼 언니가 카드줄테니까 맛있는거 사먹으렴.”

“아니에요.”

“그냥 언니 말 대로 해. 자. 얼른 씻어. 내가 물 받아 줄까?”

늘 다정한 서주였다.










넓은 사무실의 마호가니 테이블 위에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 안경을 쓴 남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서류에 쓰여진 이름은 민가희였다. 한 장 한 장 서류를 넘기는 남자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아버지가 민영권이라...”

그가 곧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신호가 몇 번 가더니 이내 다소 하이톤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한사장님. 강유현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다급한 재성의 목소리가 다소 불안정했다.

“어제 보았던 민가희를 불러주십시오.”

“가, 가희를요?”

“네. 제가 일 끝나는대로 들르겠습니다. 먼저 만나고 계십시오. 아무래도 좀 늦게 끝날 것 같으니 부탁하겠습니다. 시간이 괜찮겠습니까?”

“물론 괜찮습니다. 괜찮고말고요. 그런데 가희는 왜...”

“아. 어제 가지고 오셨던 서류도 갖고 나오십시오.”

“네? 아. 네. 알겠습니다.”

곧 재성의 목소리가 기쁨에 들떴다.

“그럼.”

유현은 전화를 끊고서 다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가지런한 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민가희라... 민영권이라...”










“그 밥맛이 날 보자고 했다고?”

“그렇다니까. 그리고 말 좀 조심해라. 밥맛이 뭐냐! 밥줄이면 몰라도.”

“너 왜 그렇게 저자세니? 돈 빌리는 거지 목숨 구걸하는거야?”

“요즘엔 돈이 목숨이야. 그렇게 말하는거 보니까 너도 아직 멀었네.”

벌써 몇 시간 전부터 유현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재성이었다.

“그러니까 그 남자가 서류를 다시 가지고 나오라고 했다. 어쩌면 자금을 대 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더러 알아서 수그려라. 이 말이구나?”

“똑똑한 것. 정리한번 잘 하는구나.”

“그 남자는 그렇다고 쳐. 친구란 녀석이 밴댕이 소갈딱지 같아서 펄펄 뛸때는 언제고 금방 돈 대준다니까 비시시 해서는. 너 그럼 안돼. 너하고 나하고 하진이하고 어떤 친구니? 너 내가 학교 다닐 때 잃어버린 수업료 대신 내 준 거 기억하지?”

“과거지사 나오는 것 보니 취했나보군.”

“아니. 전혀. 날 취하게 하는 건 세상이거든.”

“하진이녀석 노심초사 오매불망 니 걱정뿐이던데 정말 힘든거야?”

“아니. 힘들지 않아.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되기 때문에 힘들지 않아. 아버지도 안 불쌍하고 새새어머니도 안 밉다. 아무튼 오늘은 집에 늦게 들어오라고 명령하시니 자유로워서 좋네.”

“왜 늦게 들어오래?”

“서주언니 이모하고 외삼촌들이 온대. 그러니까 불청객은 사라져줘야지. 아니 머리뜯기지 않으려면 몸 사려야 하는걸지도.”

“그런 말 하진이한테도 해라. 무조건 강한 척하는게 능사는 아니야.”

“그래서? 당장 달려오게 만들라고? 하진이는 달려올 녀석이야. 아마도 내가 힘든 소리 한마디라도 하면 달려올거야. 그래서 안돼.”

가희의 눈동자가 금새 침울해졌다.

“어차피 너 때문에 걱정돼서 조만간 아주 올라온다고 하더만. 가희야. 듣고 있어?”

“응?”

맥없이 중얼거리며 이리저리 몸을 흔드는 폼이 취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너무 늦네. 어? 여깁니다!”

재성이 손을 번쩍 들더니 벌떡 일어났다. 아마도 요주의 인물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파초 - 기다림




- 오늘 분량이 좀 깁니다. 여기까지가 실제 프롤부분이라서 자르기가....




재성이 손을 번쩍 들더니 벌떡 일어났다. 아마도 요주의 인물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한치의 오차도 없는 남자의 모습을 보니 술이 번쩍 깨는 가희였다. 모르긴 몰라도 절대 틈을 보여서는 안 될 타입같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껴졌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재성이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가희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또다시 친구를 곤란에 빠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용건만 말씀드리지요. 서류 가지고 오셨습니까?”

“아. 네.”

재성이 기다렸다는 듯 서류를 내밀자 그것을 받아 든 유현이 잠시 훑는 듯 하더니 고개를 돌려 가희를 쳐다보았다.

“한 번 시작해 볼 마음이 있나?”

“무슨 말씀이시죠?”

가희가 반문했다.

“어제 말한 그 아이템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한 것은 없나?”

대답은 않고 또 다시 묻기만 하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이 남자가 말하는 방식인 듯 했다.

“아직 자세한 것을 생각한 적은 없지만 가공무역쪽으로 생각을 해보긴 했어요. 중국 등지에서 재료를 값싸게 구입해서 그것을 우리나라에 가져와 재가공해서 역수출하는거에요. 물론 그 정도는 별다를게 없지만 요즘 불고 있는 한류열풍을 타겟으로 삼아서-”

그렇게 가희와 유현의 이야기가 꽤 길게 이어졌다. 잠시 후 재성은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을 하고서 술집을 나섰다. 가희는 다소 의아해하는 눈치였고 유현은 별반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재성이를 밀어주는 조건이 내가 함께 일하는 것이라니. 이상한 남자 맞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희였다. 일이 끝나자마자 유현은 휑하니 떠났다. 가희와 재성도 몇마디 더 주고받은 후 헤어졌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늦은 시간이었다. 이 정도면 모두들 갔겠다싶어 집으로 향했다. 인터폰을 누르니 일하는 아줌마가 작은 목소리로 아직 친척들이 가지 않았다고 일러주었다.

“사장님 계시니까 열어줄까?”

“아니요. 이따가 들어갈게요.”

가희는 힘이 탁 풀려서 대문 앞 시멘트 바닥에 걸터앉았다. 술기운이 깨니 밤바람이 추워졌다. 옷깃을 더욱 여미고 가만히 앉아 밤하늘의 별을 세었다. 어제까지는 없던 별이 새엄마의 별인 것 같아 슬퍼졌다.

“새엄마. 별이 된거야? 아니면 별마저도 되지 못한거야?”

몸을 웅크려뜨리고 있자니 솔솔 잠이 왔다.







유현은 김현수의 호출로 서주의 집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가족들의 모임에는 꼭 부르고야 마는 고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값비싼 포도주를 사는 바람에 시간이 더 지체되었다. 차가 골목을 들어서고 서주의 집 대문을 비추었다. 헤드라이트 불빛끝에 어딘가 사람의 형체 같아보이는 것이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유현의 눈이 커졌다.

“민가희?”

방금 전 헤어진 민가희였다. 아마도 집 안에서 만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 예감이 보기좋게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서주의 배다른 동생이라... 당차게 대들더니 참 한가로운 아가씨로구만. 얼어죽으려고 작정한건가?”

차를 대충 주차시키고 문을 열려는데 대문이 열렸다. 안에서 사람들 몇 명이 나왔다. 유현도 아는 서주의 외삼촌들이었다.

“난감하군.”

내리려던 유현은 잠시 멈춰섰다. 사람들이 나오는데도 움츠리고 앉아있는 가희가 미동도 없는 채 그대로였다.

“나 원 참. 잠들기까지.”

유현이 혀를 끌끌 찼다. 서주의 외삼촌들이 가희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뭐라고 수근덕거리고 있었다. 곧이어 나온 김현수의 눈이 공처럼 커지더니 사나워졌다. 현수의 성격을 잘 아는 유현으로서는 지금 현수의 눈초리를 보고 대충 가희의 상황이 짐작이 되었다.

“밖에서 낳아 온 딸을 곱게 볼 리가 없는 성격이지.”

그의 입가가 조소로 말려 올라갔다. 당황한 현수가 재빨리 서주의 외삼촌들을 배웅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제서야 시끄러웠는지 가희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 있는 현수가 앞에 버티고 선 후였다. 가희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남사스러워서. 원. 넌 도대체 뭐하는 애니? 여기가 어디라고 이러고 있는거니!”

“죄송합니다. 잠깐 앉아있는다는 것이.”

“내가 얼마나 창피했는지 알아? 도대체 너란 애는.”

가희는 입도 못 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녀에게 현수라는 존재는 두려움 그 이상이었다.

“당장 다른 데 가 있거라!”

“....”

“뭘 멀뚱히 서 있어? 가란 말 안 들리니?”

차갑게 소리치는 현수앞에서 가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독불장군이시군.”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유현이 담배를 비벼 끈 후 천천히 차문을 열었다. 어둠속에서 걸어나간 그가 그들을 향했다.

“새어머니. 늦었습니다.”

순간 현수가 눈을 크게 뜬 채 뒤를 돌아보았다. 가희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대로였다. 당황한 현수가 가희와 유현쪽을 번갈아보다가 이내 파르르 떨리는 미소를 지었다.

“자, 자네 왔는가?”

“네. 너무 늦게 와서 다들 가셨나봅니다.”

“아닐세. 서주 이모들이 기다리고 있네.”

“그렇습니까? 아. 그런데 이 쪽이 서주 동생입니까?”

“그, 그렇네. 인사하게.”

“처제로군. 반가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가희가 눈을 들었다. 아마도 언니의 약혼자인 ‘현’이라는 사람이 온 모양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인사를 하려고 그를 마주보는데...
그녀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세어나왔다.

‘이 남자가 왜...’

“서주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거기다가 웃기까지. 이 남자가 웃기도 했어?’

웃는것도 모자라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유현을 보는 가희의 눈동자가 당혹스러움으로 커졌다. 그러나 유현은 전혀 아는 척할 마음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랬기에 가희도 이 놀라운 사건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서주언니의 약혼자가 아닌 나쁜 감정을 가진 남자에게 안 좋은 순간을 들켰다는 안도감은 있었다. 불행한 것은 감정이 안 좋은 그 남자가 바로 언니의 약혼자라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어차피 서로 감정도 안 좋았어. 그러니 오늘 일 보았다고 해도 수치도 아닌 걸.’

“자. 들어가세.”

현수가 유현에게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문득 서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처음에 서주언니가 아닌 새새엄마의 마음에 드는 남자라고 했었나?’

“처제도 들어가지.”

“그, 그래. 들어가자꾸나. 가희야.”

“네.”

어쨌거나 그가 나타나는 바람에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점점 날씨가 추워져서 난감해졌기에 잠시동안 그가 고맙기도 했다. 그에게 눈을 맞춰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다만 차가운 옆모습만을 느끼게 해 줄 뿐이었다.








가희는 며칠동안 느꼈다. 서주가 말했던 의미를 체감할 수 있었다. 유현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를 말이다. 그만큼이나 서주를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유현의 모습이었다. 첫인상이나 그 이후의 느낌을 종합해볼 때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정도로 틈을 보이지 않는 남자가 서주에게 보이는 미소는 다른 것이었다. 그랬기에 서주는 더없이 아름다운한 미소를 지으며 약혼자와 동생 사이에서 행복해했다.

서주가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가희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들의 데이트에 이따금 끼곤 했다. 덕분에 서주에게 보여지는 유현의 매너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매너가 가희에게까지 미치는 경우는 없었다. 그 남자가 마음을 보이는 곳은 오직 민서주뿐인 듯 했다. 서주를 똑같이 사랑하는 가희로서 그것이 딱히 배아플 일은 없었지만 눈꼴이 시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한 레스토랑에서 서주가 잠시 washing room에 간 사이 유현이 가희에게 말했다.

“나는 서주의 성품을 사랑한다.”

커피잔을 들어올리던 가희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왜일까. 인간적인 모습 따위 보여주지 않을 것 같은 남자가 언니에게 보여주는 마음은 끝이 없었다.

“저도 그런 언니를 사랑해요.”

“나는 평범한 행복을 꿈 꾼 적은 없어. 그렇지만 서주를 생각하면 가장 평범한 걸 해 주고 싶어. 더 많이도 적게도 아닌 남들만큼의 평범한 사랑을 주고 싶다.”

그 날 유현은 멋스러운 집업 가디건 차림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조금은 자유로운 스타일이었다. 한치의 양보도 없을 것 같은 차가운 정장차림이 아닌 캐주얼 차림이라 그런지 다소 그같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잔잔히 들려주는 목소리는 그를 더욱 더 어떤 ‘보통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어쩌면 저런 모습이면 편한 ‘형부’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저어 사과드리고 싶어요. 일전에...”

한 여자를 깊이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좋아보여 가희는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가희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관용은 언니에게만인가?

“민가희. 차분한 타입인데 한 번 발끈하면 끝이 없는 성격이시더군.”

“독심술까지 하시나요?”

“독심술이라기보다 인성분석이라고 표현하고 싶군.”

“인재잠재손이라고 보는데요. 제 잠재적인 가치를 본래의 것보다 너무 낮게 평가하시는군요.”

“본래의 가치는 훨씬 크시다? 맹랑한 자신감이로군.”

“제 공간에서는 그렇다고 봅니다.”

“그런데 항상 자기 자신의 공간이 작아서 문제로군.”

“처제는 사과하고 싶을 뿐이라고 전해달라는데요? 일전의 무례를 가슴깊이 통감하고 있다고 전해달랍니다.”

“본인이 직접 사과하는 것을 듣고 싶다고 전해주겠나?”

“유감스럽게도 언니가 다가와서 다음기회로 미루자고 전해달라고 하네요. 언니.”

“응. 오늘 맛있게 먹었니?”

“네. 너무 맛있었어요.”

유현이 웨이터를 부르더니 식어버린 서주의 커피를 다시 주문했다.







집으로 태워주겠다는 유현의 제의를 서주가 한사코 반대했다.

“가희랑 쇼핑 갔다가 들어갈게요. 갈 때 즈음 되어서 김기사님 부르면 돼요.”

“오늘은 그만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현이씨 오늘 이상해요. 제가 어린애인가요?”

그렇게 말하는 서주였지만 걱정하는 유현의 모습이 싫지는 않은 듯 했다. 행복에 겨워하는 미소가 바로 말해주었다. 그럼에도 유현은 계속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그가 난감한 표정으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약속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아무래도 가봐야겠는데.”

“그럼 빨리 가보세요. 제 걱정 마세요. 가희도 있잖아요.”

“그래. 그럼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들어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메시지 남기고. 알았지?”

“네.”

늦었는지 유현이 서둘러 떠나고 난 후 가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 매일 이렇게 거창하게 헤어져요?”

“아니야. 현이씨 오늘 이상하네. 항상 바쁜 사람이라 길게 만날 여유가 없어서 조금 서운해하긴 했지만 오늘처럼 심하진 않았는데. 가희야. 네가 보기에도 좀 이상했지?”

“이상할 건 없지만 조금 많이 걱정하는 눈치였어요.”

“그러게. 마치 내가 아기가 된 기분인거 있지. 어쨌거나 백화점 가볼까? 언니가 우리 가희 외출복 좀 사주고 싶어.”

“전 괜찮아요.”

“아니야. 그냥 취미야. 언니가 어렸을 때 제일 좋아하던 놀이가 바로 인형옷 갈아입히기였거든. 그 때 그런 생각을 했었어.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럼 매일 예쁜 옷도 입혀주고 머리도 묶어줄텐데 하고 생각했지. 가희는 이제 다 커버렸지만 언니는 아직도 그러고 싶어. 아마 내가 아직 덜 컸나봐.”

“저도 인형 좋아했어요. 꿈을 꿀 수 있게 해 주니까요.”

“그래. 언니는 가희가 최고의 여성이 되었으면 좋겠어. 완벽한 여성이 되기를 바래. 언니는 잘 하는게 아무것도 없지만 가희는 능력껏 꿈을 펼치기 바래. 언니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무엇이든지 도와줄게.”

성품을 사랑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유현의 말을 하루하루 조금씩 더 느끼게 해 주는 서주였다. 가희에게 있어 서주의 마음은 넓은 바다와도 같았다.






그 날은 이상했다. 늦어버린 약속시간 때문에 조급해하면서도 걱정스러운 얼굴을 접지 못하던 유현도 이상했고, 쇼핑이 끝난 후 연락한 김기사가 차가 막히는 바람에 많이 기다리게 한 것도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양 손 한 가득 쇼핑백을 들고서도 들뜬 얼굴로 자꾸만 이것저것 더 사는 모습도 이상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들은 서주는 쇼핑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부자집 아가씨 답지 않게 소박하고 단촐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로지 전부 다 가희의 것으로 가득찬 쇼핑백이 늘어나고 또 늘어났다. 가희는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기뻐하는 서주를 막기가 난감했다.

그렇게 서주의 선물을 양 손 가득 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그 때 왜 서주는 길 건너에 있는 상점에서 예쁜 옷을 발견한걸까. 왜 서주는 그것을 가희에게 사주고 싶었을까. 왜 유현은 계속해서 그렇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섰던 것일까. 아니 왜 가희는 길을 건너다가 쇼핑백을 떨어뜨렸을까. 그래서 몸을 숙인 사이 질주해오는 차를 막기 위해 서주가 그녀를 밀친 것일까.

한낮의 공간이 엄청난 파열음을 내며 울렸다. 뭔가가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쇼핑백이 허공으로 흐트러졌다. 서주가 가희의 몸에 하나하나 맞춰가면서 채곡채곡 사 모았던 모든 것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사랑스러운 마음이 담긴 예쁜 핀과 옷과 신발과 핸드백이 붉게 물들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서주에 의해 튕겨져나간 가희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콘크리트에 부딪힌 머리를 누르며 고통으로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여자가 쓰러져있었다.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새엄마는 죽었는데 저 사람이 새엄마인가? 저 얼굴은 새엄마가 아닌데 그럼 누구지? 저렇게 빨간 피를 뒤집어 쓴 사람이 예쁜 서주 언니는 아닐거야. 오늘도 나에게 행복을 채워주던 서주언니가 아닐거야. 그래. 아닐거야. 절대 아닐거야!

“가...희...야...”

“아니...야...”

머리를 감싸쥐었다. 미친듯한 비명을 질렀다. 곧 사람들이 서주를 들쳐업더니 차안에 실었다.

“아가씨. 빨리 타요. 다급해요!”

“아니야!!!!!!”

무섭도록 날카로운 절규가 피에 흥건히 젖은 아스팔트를 울렸다.



파초






“그럴 리가 없어! 서주야! 서주야아아아!”

비통한 새새어머니의 목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그 단정한 얼굴을 빛내주던 따뜻하고 아름다운 눈은 다시 떠지지 않았다. 마치 편안하게 잠든 것 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누워있었다. 절규하는 새새어머니를 대여섯명의 의사들이 붙들었다. 하얀 시트가 백합처럼 순수하고 맑은 얼굴을 천천히 덮었다.

“아니야... 죽은게 아니야... 제발... 살려주세요. 그러지 말아요...”

가희가 비틀거리며 침대옆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독을 품은 새새어머니의 손바닥이 둔탁하게 머리를 쳤다. 가희의 몸이 비틀거리다가 벽으로 나가떨어졌다.

“네 년 때문이야! 네 년이 화근이야! 네 년이 서주를 죽였어! 살려내! 살려내! 이년아!”

의사들이 달려들어 현수를 붙들었다. 온 몸이 천근같았지만 가희는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앞이 흐려져 어디에 침대가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무턱대고 미친 듯 걸었다. 시야가 밝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하는데, 눈물을 가르쳐 준 서주언니를 눈물 때문에 보지 못하면 안 되는데...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언니... 가지마... 제발 날 두고 가지마...”

손을 뻗었지만 그 순간 의사들을 제친 현수가 다시금 가희에게 달려들었다. 독을 품은 그녀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순식간에 가희의 머리채를 틀어 쥔 채 그녀가 미친 듯 소리쳤다.

“죽어! 차라리 네가 죽어! 네가 죽었어야 해! 니가 뭔데 우리 서주 목숨을 뺏어가! 니가 뭔데! 네가 도대체 나와 무슨 원한이 졌길래! 이 년아! 이 죽일 년아!”

가희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새새어머니가 쥔 머리카락이 온통 헝클어져 머리끝이 아파왔지만, 옷이 떨어져나가고 온 몸이 구타를 당해 괴로웠지만 그녀의 시선은 침대로만 향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계속 떨어져내렸다. 슬픔인지, 비통함인지, 괴로움인지, 안타까움인지 죽을만큼의 서러움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의사들이 달려들어도 현수를 그녀에게서 떼어놓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마치 죽여버릴 듯이 현수가 가희를 헤집고 있었다. 얼굴이 할퀴어지고 찢겨진 옷 때문에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제발 그만하세요. 김여사님!”

“니 년이 죽어! 내 딸 살려내고 니 년이 죽어!”

“그러고 싶어요. 제발 그래주세요.”

가희가 중얼거렸다.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제발... 그래주세요.”

그때였다.

“그만하세요. 새어머니.”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가희의 머리채를 쥐어튼 채 놓고 있지 않는 현수의 손목을 한 남자가 잡아끌었다. 온통 얼굴이 젖어 화장이 흘러내린 현수가 남자를 돌아보았다. 묵묵히 그러나 단호하게 현수의 손목을 쥐고 있는 남자는 유현이었다.

“강실장! 죽었어. 우리 서주가... 우리 서주가!!”

현수가 비통하게 소리치며 유현의 가슴에 무너져내렸다.

“죽었네. 죽었어! 우리 서주가!!!”

“보내줘야지요. 일어나세요. 새어머니.”

“강실장! 죽었어! 죽었다니까! 자네 어떻게 그렇게 무감각할 수가 있나! 서주가 죽었네. 여려터진 것이 결국 저 애물단지를 구하느라고 죽었네. 저것이 죽었어야 해! 저것이!!!”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옵니까. 서주가 살아돌아옵니까.”

유현이 냉정하게 소리쳤다. 눈물 한 방울 맺히지 않은 채 그가 외쳤다.

“가...강실장.... 어찌하나... 그럼 어쩌면 좋겠나!!!”

“보내줘야지요. 보내줘야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서주야!”

그 때 병실문을 밀어젖히고 아버지가 들어섰다.

“이 무심한 양반아! 서주가 죽었는데에! 죽었는데에!”

현수의 외침과 함께 아버지의 무릎이 꺾이더니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시 한 번 미친듯한 오열이 터졌다.

“저것이 죽인거야! 당신이 낳아온 저 귀신이 우리 서주를 죽여버린거야! 저것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서주를 죽이려고 태어난 거야! 그 년이 저주를 한 거야! 우리 서주를 죽이라고 저주를 한거야!!”

현수가 다시 가희에게 달려들었다. 유현이 현수의 몸을 막는 동시에 아버지가 처참하게 주저앉아있는 가희의 앞을 막아섰다.

“이 사람아. 서주앞에서 이게 무슨 짓인가! 어떻게 그런 야멸찬 소리를 하는가!”

아버지가 안타깝게 소리쳤다.

“서주가 죽은 이 시점에서도 당신은 그 년을 걱정하는거에요? 우리 서주가 죽은 게 누구 때문인데!! 저 년 때문이야! 아니 당신 때문이야! 당신하고 저것이 결국 우리 서주를 죽인거야! 그 착하고 불쌍한 것을 죽인거야!”

아버지가 가희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가희가 휘청거렸다.

“아버지... 제가 맞아요. 제가 언니를 죽였어요. 방법이 있다면... 절 죽여주세요. 너무 착하고 예쁜... 언니 대신... 절 데리고... 가 주세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절 데리고 가... 주세요...”

가희가 휘청거리며 서주의 침대로 무너져내렸다.

“가지마! 서주한테 가지마! 니가 감히 어디라고 서주 근처에 가!”

“언니! 제발 가지 말아요! 제발... 제발!!”

아버지와 가희는 그대로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차디찬 주검이 그녀의 부재를 말해주고 있었다. 싸늘한 뺨이 그녀의 영혼이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는 그 따뜻한 미소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그 깊은 성품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겨우 만나게 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니를 이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가희야. 울 땐 울어야 다음에 웃을 수 있는거야.]

[언니는 가희가 최고의 여성이 되었으면 좋겠어. 완벽한 여성이 되기를 바래. 언니는 잘 하는게 아무것도 없지만 가희는 능력껏 꿈을 펼치기 바래. 언니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무엇이든지 도와줄게.]

바로 방금전까지도 언니의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다정한 미소도, 속깊은 마음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새새어머니 말대로 그녀를 구하려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서주를 죽이기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새새어머니의 말이 맞는 지도 모른다.

새엄마. 저주한거야? 평생을 뒤에서 살게 한 새새어머니를 저주한거야? 그럴거면 그런 사랑 하지 말지 그랬어. 정말 난 저주로 태어난거야? 그 착한 서주언니를 내 손으로 죽인거야?

마음이 죽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유현이 다가왔다. 그가 떨리는 손을 들더니 시트를 걷어냈다. 마치 잠든 것처럼 하얗고 순결한 서주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장미꽃잎같은 뺨이 아직 채 온기가 가시지 않은듯했다. 금방이라도 볼을 쓸면 눈을 뜰 것 같았다. 같은데...

모두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둘러싼 사람들 중 누구의 슬픔이 가장 클 것인가를 잴 수는 없겠지만 유현에게 있어서 서주의 의미를 아는 가희이기에 더욱 더 죄인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새새어머니도 숨을 죽였다.

오직 비통한 슬픔을 꾹꾹 누르고 있는 유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치도 흔들림이 없는 표정으로 서 있던 그가 깊은 눈으로 서주를 내려다보았다. 눈물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선채로 잠든 것 같은 서주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천천히 그의 몸이 숙여졌다. 그리고 그 창백한 입술로 사자(死者)의 입술을 눌렀다. 병실안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나는... 오늘 그래서 그렇게 불안했던 걸까...”

비통한 목소리와 함께 그가 천천히 시트를 덮었다.

“사랑해. 서주야...”

천천히 돌아서는 그의 시선이 가희를 향했다. 가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가희는 그 아픔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독한 경멸을 쏘아대며, 머리채를 휘어잡고 욕을 하는 새새어머니보다도, 같은 아픔으로 여전히 가희를 끌어안고 있는 아버지보다도 더 그녀를 아프게 하는 눈초리였다.

몇초간이었을까. 단지 눈을 깜빡할 시간이었을까? 그 짧은 순간 유현이 가희를 노려보았다. 너무도 절절한 원망이 느껴지는 눈.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의 눈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잠시도 되지 않아 다시 평정을 찾고야 말았다. 그 마음을 잠식하고 있을 슬픔과 아픔은 그와 눈이 바로 부딪힌 가희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현수의 독을 품은 질시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희는 집을 떠날 수 없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현수가 가희에게 가하는 폭압은 한계를 넘고 있었지만 그것을 피하고자 아버지의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서주의 장례식을 치른 후 더욱 더 가희에게 매달렸다. 고통받는 사람은 셋 다 마찬가지였지만 가희의 아픔을 감싸주고 도닥여주는 아버지를 떠날 수는 없었다.

“아빠. 새새어머니 말이 맞아요. 어쩌면 저는 정말 저주받은 아이일지 몰라요.”

“그런 말 말거라. 너는 분명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야. 아버지가 한 사랑을 믿지 못하겠니? 네 새엄마가 남기고 간 것을 매도할거니?”

“그렇지만 서주언니는요. 저 때문에 죽은 서주언니는요.”

“너 때문이 아니란다. 그 애가 짧은 명을 타고난 걸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니. 그렇게 일찍 죽으려고 그 애는 사랑을 베풀었나보구나.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그렇게 그 애는...”

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가희 역시 더 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부녀가 또 밤을 눈물로 지새울 수 밖에 없었다.

“서주언니가 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었더라도 좋으니 조금만이라도 더 있어주었으면... 제발 그래주었으면...”

“그 애는 사랑을 남기고 떠난 거란다. 평생을 가슴속에 사랑을 품고 산 아이야. 나는 너희 둘 중 누가 더 소중하다는 말은 못한다. 그렇지만 너무 아프구나.”

“아빠...”

몇날 며칠을 모진 폭언과 폭행을 보이던 현수는 이제 그것도 지친 듯 이번에는 아예 가희를 보지도 않으려고 들었다. 그녀가 보여도 무시하기 일쑤였고 눈에 띠였다 치면 나가라는 말만 되뇌었다. 그녀 역시 상처가 깊을 것이었다. 늘 성에 안 차고, 눈에 안 들어오는 딸이었을지라도 그녀에게 단 하나의 혈육이었다. 그 슬픔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런 그녀가 또다시 광분의 상태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잠시 잠잠해졌다 싶었을 때 일하는 아줌마마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당하는 가희가 안쓰러울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온 그녀가 다시금 가희에게 끔찍한 폭행을 가한 것은 회사에서 들은 유현의 소식 때문이었다.

그녀를 보내는 장례식 장에서조차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고 차갑게 서 있던 그였다. 그러나 속으로 아픔을 키웠던 것인지 장례식 이후 며칠을 혼수상태에 헤메었다. 깨었다싶으면 술을 마시고 다시금 세상을 거부하며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을 반복하던 그는 결국 지독한 우울증이라는 판명을 받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으로 그가 택한 길은 모든 것을 접고서 외국으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 소식에 현수가 광분을 터뜨렸다.

그녀가 유현을 탐낸 것은 누구도 아는 사실이었다. 유현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서주를 사랑했기에 그녀의 욕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서주가 없는 지금 그에게 있어 그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었다. 현수는 회사의 지분을 상당량 보유하고 있는 실세였다. 초기의 그녀는 자그맣게 한영그룹의 계열회사를 맡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성공을 거두었고 그이후로 그녀에게 차근차근 회사의 주식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유현을 탐낸 것은 어쩌면 미래에 대한 욕심일 것이다. 서주를 잃어버린 지금 그녀에게 있어 전부가 될지도 모르는 사업을 하는데 있어 유현은 어쩔 수 없는 필요였다. 그러니 그런 그가 떠나는 것은 어쩌면 현수에게 있어 마지막 몸부림이 사라지는 의미일지도 몰랐다.

“니가 도대체 내 인생을 얼마나 망쳐놔야 속이 시원하겠어! 도대체 넌 어떤 악귀를 품고 있는게냐! 날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당장 죽어버려!”

현수가 거실에 있는 모든 것을 가희에게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가희는 이미 몸 곳곳에 상처를 입은 채 찢겨진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이고. 사모님. 그러다가 사람 죽이겠어요.”

“시끄러워! 죽이려고 그러는거야! 내 인생을 이렇게 망쳐놓았으니 저것도 죽어야 해. 죽을만큼의 고통을 봐야해! 니가 그러고도 세상을 살아갈 생각이 있어?”

“없어요... 죽지 못해 살아야 한다면 새어머니가 절 죽여주세요.”

“니가 감히 뚫린 입이라고 지껄여?”

쨍그랑. 도자기가 깨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 깨진 파편이 다리에 파고들었다. 그러나 가희는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어떻게 이 죄의식을 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밤마다 떠오르는 서주의 환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눈감을 때마다 생각나는 그녀의 미소지은 모습을 지울 수 있을까.

“니가 강실장마저 내쫓고서 나를 망치려 하는구나. 니 년이 날 죽이려고 하는구나!”

“죄송해요.”

가희가 울먹였다. 미움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새새어머니의 괴로움이 조금이라도 덜하기를 기원해본다.

“죄송해요.”

“시끄러워! 듣기 싫으니 네가 대신 죽으면 될 거 아니냐!!”

“죽고 싶어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서주언니 대신 죽을 수 있다면.”

“올리지 마! 니 더러운 입에 내 딸 이름 올리지 마! 죽어서도 저주하려고 그래? 그 불쌍한 걸 죽어서도 또 죽이려고 그러는 거냐!”

“아이고. 사모님. 진정하세요. 제발...”

아줌마가 현수의 몸을 잡고 늘어졌다.

“저리비켜!”

“이러다가 정말 죽겠어요.”

“비키라니까!”

독을 품은 현수가 아줌마를 세차게 밀치고서 가희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의식이 가물가물한 가희는 그저 그녀가 휘두르는대로 흔들릴 뿐이었다. 머리끝이 아파왔다. 그녀의 손톱이 지나간 자리마다 통증이 심했다. 명치끝이 쑤셨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새어머니!”

누군가가 달려들어 현수의 손목을 낚아챘다. 온통 옷이 찢겨진 채 가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유현의 목소리임을 알고 있었기에 또다시 죄인이 되었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이거 놓게. 내가 저것을 죽이고 나도 죽을게야.”

“새어머니. 그만두세요. 이러면 서주가 편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순간 현수의 몸이 딱 멈췄다.

“가, 강실장.”

“네. 접니다. 그만 진정하세요. 서주 보낸지 한달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어지럽히고 싶으십니까? 서주 가는 길을 이렇게 막으실 생각이십니까?”

울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울고 있는게 확실한 목소리였다. 울먹이지 않아도 가슴깊이 눈물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절절한 원망이 담겨져 있던 눈빛이 생각나 가희는 다시 서늘해졌다.

“그러니 새어머니. 이거 놓으십시오.”

가희의 머리채를 쥐고 있는 현수의 손목을 누르며 유현이 말했다.

“그럴 수 없어. 이 것을 죽여야 내가 살아.”

“결혼하겠습니다.”

갑작스런 유현의 말에 현수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가희는 그 말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무, 무슨 말인가.”

“가희와 결혼하겠습니다. 어차피 새어머니께서 원하신 건 제가 아닙니까. 떠나지 않겠습니다. 서주의 곁에서 영원히 살겠습니다. 새어머니 곁에서 영원히 있겠습니다.”

“가. 강실장...”

“그러니 놓아주세요. 이런식은... 서주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 화근덩어리와 결혼을 하겠다는건가? 서주의 배다른 동생과 결혼을 하겠다는건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그럼 서주는! 우리 서주는 어쩌란 말인가!”

“결정하십시오. 떠나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가희를 저에게 주시겠습니까.”

“그럼 우리 서주는, 서주는 어쩌란 말인가!”

가슴깊이 아픔이 느껴졌다. 그러나 가희는 아픔 뿐 다른 감정은 하나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놀라움도 없었고 의구심도 없었다. 오직 이 끝도 없을 것 같은 고통에서 헤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죽이든지 무엇을 시키든지 아무것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죽여도 좋았다. 무엇을 해서라도 제발 이 끔찍한 고통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소리치는 현수를 놓은 유현이 천천히 일어나더니 온통 상처입은 가희의 몸을 재킷으로 덮고서 번쩍 안아들었다.

“저, 정말 떠나지 않을텐가? 그 원수같은 계집애를 준다면 우리 서주를 지켜줄텐가?”

“서주는... 어디에도 가지 않습니다. 여기 이 가슴속에 담아 둘 것입니다.”

천천히 유현이 걸음을 뗐다. 아스라해지는 의식속에서 현관문이 열렸다. 어디로 가는건지, 무엇을 해야 하는건지 관심도 없었다. 단지 그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묻고 묻어두었던 비통함이 터져나올 뿐이었다.

“정신차려. 서주몫까지 살아. 니가 휘청거린대도 손 뻗어줄 사람 없어. 지금 넌 그런 길로 가는거야.”

“상관없어요. 손 뻗어주지 않는대도 관계없어요. 차라리 아무도 손 따위 뻗어주지 않기를 바래요.”

“그래. 독해져라. 나마저도 널 상처주는 길일 것이다. 지금 이 길은...”

“아무것도 관심없어요. 다만 알려주세요. 어떻게 그 깊은 슬픔을 담고도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설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속으로 고통을 삼킬 수 있는 법을 알려주세요. 저는 슬퍼할 자격도 없어요. 그러니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슬퍼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발 알려주세요.”

“사람들은 참 바보구나.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드니 말이다.”

한숨이 바람에 섞였다.

“아무도 내 눈물을 보지 못하니 참 씁쓸하다. 그렇게 사랑했는데 내가 아무렇지도 않을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니. 서주는 이런 세상에 어울리지 않아 그렇게 일찍 떠난 것이냐.”

“방법 따위는 없나요? 끔찍한 고통을 견딜 방법 따위는 없나요?”

“없다. 그 어디에도 슬픔을 삼킬 방법은 없다. 마음으로 차마 보내지 못해 울지 못하는 걸 슬픔을 견딘 것으로 본다면 그걸로도 좋겠지.”

“내려주세요. 걸어갈 수 있어요.”

유현은 아무말없이 그녀를 내렸다. 천천히 대문이 열렸다. 그의 말대로 어쩌면 지금 이 대문을 나서는 순간 더 큰 시련이 덮여올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문을 나서고 싶었다. 언니에게 아듀를 고하려면. 그래서 질긴 고통을 다른 식으로 이어가야 한다면...

“가희야!”

순간 들리는 목소리에 가희의 무릎이 풀렸다. 어른거리는 시야로 천천히 드러나는 모습은...

“하...하진아...”

“가희야!”

하진이 뛰어오고 있었다. 오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내 고통을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하진아!”

미친 듯 뛰었다. 지금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하진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눈물도 숨기지 않았다. 그가 팔을 벌리는 순간 그 품에 무너져내렸다.

“몇날 며칠을 기다렸어. 혹시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했어. 괴로웠지. 많이 힘들었지!”

“하진아! 하진아!”

“아팠지! 괴로웠지! 힘들었지!”

하진의 팔이 느껴졌다. 그의 품이 느껴졌다. 따뜻한 그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며칠을 서주의 주검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속에서 지낸 밤이었다. 마침내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를 느꼈다.

“언니가 날 구해줬어. 이제 겨우... 언니가 구해준 순간이 떠올라. 언니가... 날...”

“가희야!”

하진이 입술을 들어 가희의 뺨에 묻었다. 그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마시고 또 마셨다.

“너무 사랑했어. 하진아. 사랑하는 언니를 죽이려고 내가 태어난걸까? 하진아.”

“아무 말도 하지마. 아무 생각도 하지마. 죽음 앞에서는 누구든 약해지는거야. 너 자신을 잃지마. 니가 죽으면 모든 게 다 허사가 되는거야. 니 언니의 죽음까지도.”

“하진아...”

가희는 그대로 자신을 덮쳐오는 깊은 어둠속에서 까무러치고 말았다. 몇 날 며칠을 고통으로 뜬 눈을 세웠다. 잠시라도 깜빡 잠이 들면 언니의 주검이 떠올라 소스라치며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 미소가 떠올라 당장이라도 손목을 긋고 싶었다. 아프게 저 하늘로 간 새엄마를 원망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사람은 이래서 이기적인거니? 그렇게 죽여달라고 내 입으로 말했으면서 나 살아갈 방법을 찾는거니? 서주언니는 이런 나를 위해... 왜... 죽어야... 했을까...”

그녀의 몸이 미끌어져 내렸다. 그대로 하진의 품에 매달린 채 혼절하고 말았다. 담벼락에 기대있던 유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희를 세상 그 모든 것으로부터 지키겠다는 듯 굳건하게 안고 있는 하진의 옆으로 다가간 유현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강유현이라고 하네.”

하진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런데요?”

“아내를 나에게 넘겨주었으면 하는데.”

순간 하진의 눈이 커졌다.

“무, 무슨 말입니까!”

“앞으로 당분간은 뒤로 물러서 주어야 할 것 같군.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말이지.”

하진이 마치 알을 품듯 가희를 껴안은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잠시 질리는 유현이었다. 내 사랑을 지키고자 다른 사람의 사랑을 끝내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헛소리하지마! 결혼? 누가 누구와! 가희가 왜 당신같은 남자와! 왜!”

“글세. 나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웃기지 마. 뺏을 수 있으면 뺏어봐. 내가 데리고 갈테다. 어디도 못 보내!”

“그 애가 평생을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며 살았으면 좋겠나? 아버지에게 마저 외면당하기를 바라나? 언니의 죽음을 뒤로 하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라나.”

“당신과 결혼하면 가희가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어? 모든 사람들에게 이 짐을 덜 수 있어?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냔 말이야!”

“최소한... 죽음을 직시할 수는 있겠지.”

“넌 뭐야? 넌 도대체 뭔데 그렇게 냉정한 눈으로 가희를 데리고 가겠다는거지? 그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가희와 결혼하겠다는거지? 넌 도대체 뭐야!”

“나는 서주의 약혼자다. 서주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것으로 설명이 되겠나?”

하진의 팔이 툭 떨어졌다. 그의 눈이 허무하게 흔들렸다.

“나도 너만큼 한 여자를 사랑했다. 그것으로 설명이 된다면 그만 그 애를 놓아줘. 그것이 그 애에게 유일한 안식이다.”

하진의 속눈썹이 젖어들었다. 그가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아픔은... 아픔을 남는 것이다. 잘못된 관계의 시작은 모든 사람을 상처준다.”

“그 상처 중심에 가희가 서 있어. 그런데 내가 손놓고 있기를 바라는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 중심부터 잠식해 들어갈테니까.”

유현이 천천히 몸을 숙여 가희를 안아들었다. 힘을 준 하진의 손이 떨렸다. 그의 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가, 가희야...”

묵묵히 가희를 안아 든 유현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희야!!”

한 남자의 처절한 외침이 등을 울렸지만 유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한 사람의 주검이 내 심장을 얼게 만든다. 그 사람의 냉기가 내 뇌를 얼린다. 민가희. 잠든 것이냐. 아니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냐.”

유현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Until I can forget your love...”


파초 - 기다림




“쓸 데 없는 행복을 바라지 마. 넌 서주 대신 살고 있는 허깨비에 불과해. 그래도 니 몸뚱이로 강실장을 잡을 수 있으면 잡아봐라. 니 천한 몸을 그 강실장이 봐 줄지나 모르겠지만 말이다.”

새새어머니의 잔인한 말과 함께 결혼식이 올려졌다. 그 한 구석에서 괴로운 눈을 들어 식의 처음부터 끝을 지키고 서있는 하진의 존재를 가희도 알았고 유현도 알았다.

“안하면 안되니? 그 결혼 하지 마! 부탁할게. 이렇게 부탁할게.”

무릎을 꿇고서 외치던 하진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속눈썹이 젖어들었다. 지금 이 순간, 남들 눈에 완벽해 보이는 눈부시게 흰 턱시도 차림의 남편을 옆에 두고 가희는 극한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 결혼의 의미를 새새어머니만큼이나 아는 아버지는 밤동안 잠든 그녀의 옆에서 아프게 흐느꼈다.

누군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해서는 안되는 것임을 나도 알고 남도 알 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루한 주례사와 함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결혼식이 끝났다. 서주의 죽음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었다. 진심어린 축하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사랑으로 옆에 선 남편도 아니었다. 눈을 돌려버려야 하는 그녀의 사랑은 끝까지 식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 모든 사람들을 남겨두고 눈물의 결혼식이 끝이 났다.









“피곤할텐데 자도록 해.”

하얀 얼굴에 냉기만을 띄운 채 유현이 말하고는 몸을 돌려 나갔다. 휘황찬란한 호텔 특실에 덩그러니 그녀만이 남았다. 가슴이 답답해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바닷바람이 확하고 밀려왔다. 신혼여행도 없기를 바란 그녀였지만 형식적인 구색을 맞추기 위해 제주도로 향했다. 서주와의 결혼식 후 떠나기로 했던 유럽여행예약은 취소된 지 오래였다.

천천히 바다 쪽으로 걸어가는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이제는 그녀의 남편이 된 유현이란 남자. 금방 결혼한 신부가 마주친대도 한번쯤은 뒤돌아볼 정도의 단정한 용모를 지닌 남자, 몸에 두르고 있는 것, 양말 한 짝 조차도 고급제품인 남자, 한 여자에게만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던 남자, 그러나 갑작스럽게 떠나간 사랑앞에서조차 자신을 냉정하게 통제하는 남자. 그가 이제 남편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저기 창 밖에 있고 자신은 지금 안에 있다. 이 엄청난 괴리감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가희는 샤워를 한 후 잠옷이 아닌 평상복을 갖춰입은 채 소파에 누웠다. 한눈에 보이는 더블침대를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생각을 막기 위해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감겨지는 순간 마치 그려놓은 것처럼 미소짓는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을 번쩍 떴다.

“언...니?”

그녀가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며 싱긋 웃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언니!”

언니였다. 언니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언니였다. 떠나던 날 입었던 옷 그대로, 그 고운 얼굴을 흘러내리던 피도 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언제나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사람은 정말 서주였다.

“어...언니. 왜 갔어요. 왜 날 두고 갔어요. 아직 모르는 것도 많은데, 아직 할 얘기도 많은데 왜 날 두고 갔어요. 아니 왜 날 대신해서 갔어요. 가야 할 사람은 나잖아요. 내가 가야 하잖아요!”

서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아픈 것이었다.

“난 살아도 살아갈 수 없는데, 눈을 떠도 보이는 게 없는데, 눈을 감아도 감을 수가 없는데. 바보같아요. 언니 너무 바보같아요! 지금이라도 되돌려요. 이 세상에 필요한 건 내가 아니에요. 밝아지기 위해선 언니가 필요해요. 언니가 없는 이 곳은 어둠뿐이에요.”

서주가 여전히 아무말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가희의 눈에서 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현씨는요. 언니 약혼자는요. 그는... 어떡하구요.”

가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프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언니는 내가 만들어낸 환영일까? 아니면 꿈일까. 그러니 언니는 저렇게 아무말없이 마지막 모습 그대로 웃고만 있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그 때 가희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녀가 놀라움에 가득찬 눈으로 언니 서주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희미하기는 해도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무슨 말을 할 것처럼 달싹이기만 하던 입술이 움직였다.

[네 앞의 등불은 네 자신이 밝히는 거란다. 남이 밝혀주는게 아니야.]

“싫어요. 제발 가지 말아요. 언니! 언니는 몰라도 전 언니를 만난 게 불행이에요.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그러지 말 걸 그랬어요! 가지 말아요. 싫어.... 싫....”

사라져 버리려고 하는 서주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무리 뻗쳐도 아련한 연기처럼 사라지는 서주였다. 희미한 별빛만큼이나 아련해서 가슴이 아파왔다.

“싫어... 싫어!”

눈을 번쩍 떴다. 식은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어디를 둘러봐도 우두커니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 뿐 방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언니가 있었던 흔적조차 없었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말해줘요. 언니. 언니가 나타난 건 내 바램이에요? 아니면 정말 언니에요! 말해줘요. 제발...”

희미하게 파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저 파도 어딘가를 바라보며 누군가가 서 있겠지. 그도 지금 같은 사람을 그리고 있겠지.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기를 드는 순간 명치끝이 아려왔다. 하진이라는 이름이 액정에 떴다.

“하진아...”

“울고... 있었어?”

“아니야.”

“울었잖아! 울고 있었잖아!”

“바보야. 굳이 아니라고 하면 그렇게 넘겨줘. 그렇게 해줘야 하는거야.”

“혼자... 있어?”

“고마워. 오늘 하루만 니 전화를 기뻐할 게. 꿋꿋이 견디려고 했는데 슬프네.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는게 슬프네.”

“밤새도록 함께 있어줄게. 외롭지 않도록 있어줄게.”

“바보. 어떻게 같이 있을 수 있어.”

“들어봐.”

가희의 눈이 커졌다. 하진의 목소리가 사라지더니 그 자리에 음악이 메꿔졌다. 천천히 들려오는 음악소리... 가희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I'm walking in the rain"

Endless rain이 가희의 가슴을 적셨다.

“넌 언제나 날 이렇게 따뜻하게 해. 자꾸 이러면 어떡할래.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잠시 뒤로 미룰게. 잠시만 뒤로 미룰게.”

휴대폰을 꼭 감싸쥔 채 천천히 몸을 눕혔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아스라이 내리는 밤의 장막, 그리고 별이 숨쉬는 소리가 넓은 창문을 통해 밀려들어왔다. 슬픈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천천히 눈이 감겼다. 까무룩한 잠에 빠져들때까지 그녀가 좋아하는 어느 가수의 음악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유현은 비워지자마자 다시 채워지는 양주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접기로 결심했었다. 이 땅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결심을 하고 찾은 서주의 집, 그러나 떠나간 사람의 짐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한 여자의 고통에 차마 발을 돌릴 수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 숨막힐 정도로 정돈되고 한치의 오차도 없는 생활을 하는 그에게 있어 생애 처음으로 몇 초만에 뒤바뀐 결정이었다. 발랄하게 웃던 가희의 모습, 맹랑할 정도로 따박따박 말을 하던 며칠전의 모습과 현수에 의해 온통 상처받고 있는 모습이 겹쳐보이면서 알 수 없는 박탈감을 느꼈다. 마치 가희라는 생명마저 잃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위태로워 보였다. 충분히 그의 결정을 뒤엎을 만한 혼란이었다.

‘널 안아들고 나올 때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미쳐버린 세상에서 널 보호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이트 잔을 쥔 손이 떨렸다. 천천히 일어섰다.

“서주도 지금 저기 어딘가에서 혼자 떨고 있겠지. 나도 이렇게 혼자이고 너도 그렇게 혼자있구나. 가희야.”

술기운에 비틀거리며 도어를 열었다. 넓은 거실 뿐 아니라 침실, 심지어 욕실까지 온통 밝은 불이 켜져있었다. 무서웠던 것일까? 미간을 찌푸린 채 눈에 힘을 주고 침실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소파에 누은 채 잠들어 있었다. 이불도 덮지 않은 채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잠에 빠져있었다. 그의 눈이 흐려졌다.

천천히 다가서던 그의 눈동자가 무엇을 발견한 듯 흔들렸다. 잠든 그녀의 손에 꼭 쥐여진 휴대폰에서 희미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살짝 빼내 귀에 대 보았다. 몇 번을 반복했을지 모를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두운 검은 눈동자가 액정을 훑었다. 하진이라는 이름이 떠 있다. 그 날, 집 앞에서 으스러질 듯 그녀를 껴안고 있던 남자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가희가 부스스 눈을 떴다. 냉랭하게 선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본능적으로 시계를 살폈다. 새벽 2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천천히 그에게 다시 시선을 옮기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주, 주세요.”

“뭘?”

“장난하지 말아요. 전화기 주세요.”

“아. 이거?”

그가 천천히 휴대폰을 얼굴높이까지 들어올렸다. 그녀가 더욱 손을 뻗었다. 순식간이었다. 바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굉음을 내며 휴대폰이 벽에 날아가 부딪혔다. 부딪힌 전화기가 산산조각이 난 채로 바닥을 뒹굴었다.

“무슨 짓이에요!”

벌떡 일어나 달려갔지만 이미 휴대폰에서는 더 이상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깨진 액정은 하진이라는 이름을 보여주지 않았다.

“너무해요. 이건 정말이지...”

유현이 성큼성큼 다가섰다. 부서진 핸드폰 잔해를 손에 든 가희가 원망의 눈을 한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어느새 앞에 와 서 있었다. 위협적인 검은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거지?”

“그쪽이야말로 어떤 식으로 되길 원하는거죠? 미워하고 또 미워하기를 바래요?”

“글세. 너야말로 어떤 걸 원하지?”

“제 사생활에 간섭하지 말아요.”

유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순식간에 그녀의 팔을 낚아챈 그가 그녀를 덜렁 들어올려 침대위로 내동댕이 쳤다. 아찔한 순간 입술을 깨물었는지 비릿한 피냄새가 나면서 찐덕한 액채가 흘러내렸다.

“이게 무슨 짓이죠?”

“잊었어? 오늘이 우리 첫날밤이라는 걸? 나는 아무런 보상도 없이 이 결혼을 지속할만큼 관대한 사람이 못 되거든.”

“보, 보상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요.”

가희의 눈에 두려움이 스쳤다.

“내 마누라님께서 사생활을 간섭받지 않기를 바라시는 거군. 그거 좋지. 그러려면 신부로서의 의무도 충실해야 하지 않겠어?”

시니컬한 미소였다. 심장까지 얼 정도로 차가운 말투였다.

“당신이 이렇게나 악질일 줄은 몰랐네요.”

그의 긴 그림자가 졌다. 얇은 입술을 비틀어올린 그가 가희의 어깨를 꼭 쥔 채 힘주어 일으켜세웠다. 터진 입술에서 흐른 피가 몽글몽글 맺혔다. 천천히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가희의 눈이 커졌다. 거친 호흡이 느껴지더니 그의 혀가 입술에 맺혀오르는 피를 천천히 핥았다. 주먹에 힘을 주어보았지만 그의 손아귀에 잡힌 어깨 아래는 그대로 무용지물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힘에 제압되는 것이 여자이고 남자였단 말인가.

“하지 말아요.”

고개를 획 돌렸다. 어깨에 박힌 손톱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그녀를 침대에 팽개친 그가 몸을 타고 올라왔다. 남자의 몸이 느껴졌다. 탄탄한 근육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술냄새가 확 덮쳐왔다.

“제발 그만해요.”

“잘 들어. 스무살 이상의 강제은 법정에서도 죄라고 인정하지 않아. 그 나이 이상은 여자의 동의없이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거든. 어떻게 할래? 받아들이겠어? 아니면 날 죽여버리겠어?”

하체를 고정시킨 그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점점 옥죄어오는 통증에 숨이 가빠져왔다.

“평생 받아들일 일 따위는 없을거에요. 그렇지만... 당신을 죽이고 싶지도 않아요.”

입술을 꼭 깨문 채 흘러나오는 낮은 목소리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차갑게 웃고 마는 그였다.

“관대하시군.”

“취했어요. 그만 하세요.”

그녀가 힘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머리를 쓰는건가? 반항할수록 남자는 짐승이 된다는 것을 아는거야? 그래서 나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수를 쓰나?”

“머리를 썼다면 벌써 당신 앞에서 슬립차림으로 섰을거에요. 당신이란 남자, 제 위치에서는 꿈도 못 꿀 정도로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는 상대잖아요? 좋아요. 계산적인 것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 드릴수도 있어요.”

“너는 위협을 당할수록 스스로를 단단한 껍질 속에 숨겨버리는 사람인가? 마치 달팽이처럼 위험한 상황일수록 몸을 사리나? 그렇게 모욕을 당하면 차가운 장막으로 널 위장하나?”

그의 숨결이 확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쏟아져내렸다. 위에서 그녀를 내리누르고 있는 남자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들어왔다.

“내 앞의 등불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힘으로 켜는 거라고 하니까요.”

“그거 재미있군.”

그의 입가가 말려올라갔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허벅지로 조이고는 천천히 셔츠의 앞섶을 풀어헤쳤다. 그녀는 미동도 않고 누워있었다. 하나 둘 열려가던 단추가 다시 천천히 여며졌다. 그가 허탈한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그녀를 향해 몸을 숙였다. 입술위로 손가락이 느껴졌다. 터진 입술을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쓸고 있었다. 곧 뜨거운 숨결이 확 와 닿는가 싶더니 그가 입술을 벌려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녀는 그 입술을 외면하지 않은 채 그대로 누워있었다. 그의 혀도 입술선을 훑기만 했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숨결은 뜨거웠지만 그 입술은 그렇지 못했다. 아득히 찝찔한 피맛이 느껴졌다. 그렇게 유현은 열정에 들뜨지 않은 채 조용히 입술만을 핥는 키스를 해왔다.

이상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서로가 없었다. 굳이 거친 호흡과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싶지도 않았다. 겁을 주려고 시작한 입맞춤이었는지도 몰랐다. 화가 나 비틀린 마음에 시작한 입맞춤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입맞춤은 오래도 이어졌다. 몇 분이 흐르는가 싶더니 십분이 흐르고 이십분이 흘렀다. 삼십분이 흐르고 사십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몸의 다른 부분을 움직이지 않고서 그저 입술만을 핥는 키스였다. 그러나 그 새벽이 다 새도록 그들의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파초 - 기다림




이튿날 두 사람은 서먹한 기운을 풍기며 앉아있었다. 가희는 룸서비스로 들어온 아침식사에만 집중했고 유현도 커피를 마시며 테이블위에 켜놓은 노트북만 들여다보았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길게 길게 이어지던 키스 끝에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아침햇살이 스며들어와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마치 전날밤의 일이 꿈처럼 아련했다.

서주의 모습이 보이던 순간부터가 꿈이었는지, 하진이 전해주던 음악을 들으며 잠이 든 이후부터의 일들이 꿈이었는지, 입맞춤이 꿈이었는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다만 몇 시간 전 터진 입술에 아직도 통증의 기운이 남아있다는 것만이 확실할 뿐이었다. 문득 그의 얇고 붉은 입술에 시선이 갔다. 따끔따끔한 입술에서 흘러내리던 피를 핥던 그의 숨결이 느껴져 갑자기 얼굴이 닳아올랐다.

유현 역시 일처리를 하기 위해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냉랭하게 맞받아치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오르고, 남자가 들려주는 음악을 꼭 껴안은 채 잠들어있던 모습이 떠오르고, 온 몸에서 힘을 뺀 채 그 흔한 거부조차 없이 입술을 받아들이던 숨결이 떠오르자 갑자기 몸이 더워졌다.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것일까.

“올라가면 휴대폰 새로 하도록 해.”

마침내 그가 노트북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단 번호는 바꾸도록 하고.”

“모든 말이 명령조이군요.”

둘 사이의 대화가 또 끊겼다. 잠시동안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내가 사서 보내도록 하지.”

“그럴 필요 없어요. 번호를 바꾼다고 만날 사람을 못만나지는 않아요.”

“지금 나를 자극하는건가?”

“전혀요. 의무를 다했으니 사생활을 보장받기를 바랄뿐이에요.”

탁! 그가 노트북을 소리나게 덮었다. 가희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위협적으로 파고들던 그의 눈동자가 이내 냉랭해졌다.

“어차피 의무였다 이 말이군.”

“.....”

“그러나 그 정도가 의무라고 생각하는 건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이라고 보는데.”

“당신이 이 재미없는 놀거리에 빨리 흥미를 잃기를 바랄 뿐이에요.”

유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차가운 눈매가 그녀를 훑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룸을 나섰다. 찰칵. 담배에 불을 붙였다. 상념이 섞인 담배연기가 길게 흘러나왔다.

“재미없는 놀거리라... 그 또한 멋진 표현이군. 민가희. 직구를 던지는 능력이 있었나? 재미있군.”

그의 입가가 비틀어올라갔다.







신혼여행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냉랭한 기운이 오갔다.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은 잠시 바닷가를 함께 거닐었던 몇 분 뿐이었다. 그조차도 결국 말다툼으로 끝나 그들은 각자 헤어져 다른 곳으로 향했다. 유현은 첫날 들렀던 바에서 혼자 술을 들이켰다. 가희 역시 룸으로 들어가기가 죽기보다 싫어 북적한 곳을 찾아 헤맸다. 결국 가희는 호텔지하의 나이트로 향했다. 마시지 않던 양주까지 시켜놓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처음 몇 잔만 힘들었지 취하고보니 독한 술도 나름대로의 위안이 되었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를 알 듯도 했다.

그녀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어긋나버린 길,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 꿰어진 단추의 모습으로 앉아있는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입술을 받아들인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언제쯤 서주의 잔상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라면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 독한 것이었다.

미친 듯이 술을 들이켰다. 어른거리는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친한 언니를 생각했다.

그녀의 이름은 여진이었다. 여진은 가희의 동네언니였다. 예쁘장하니 생긴 여진은 그만큼 인기도 많고 끼도 많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불행히도 알코올중독의 아버지가 있어 순탄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 삶이란 어떤 면에서보면 참 신기한 것이다. 그렇게나 아버지같은 남자를 싫어하던 그녀가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아버지같은 사람들이었다. 술에 취하면 이성을 잃고 미쳐버리는 그런 부류의...

젊은 시절에는 그런 남자들과 가벼운 만남을 가졌지만 나이가 들수록 여진은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선택한 남자가 술이라고는 입에도 못대는 어수룩한 남자였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을까. 남자는 순진하다못해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여진은 외로움과 꿈과 현실사이의 괴리감을 견디지 못해 조금씩 무너져갔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점점 빠져든 것이 바로 술이었다. 결국 알코올 중독 진단을 받은 그녀는 남편과 이혼을 하고서 모든 것을 잃었다. 어수룩하던 남자도 자신의 울타리를 위협받자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켰다. 결국 마지막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혼녀라는 딱지와 배신, 그리고 술로 인해 피폐된 정신뿐이었다.

“술은 아무것도 해결 해 주지 않아.”

가희가 비웃듯이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나도 결국 여진언니처럼 마지막에는 피폐해지는게 아닐까. 유현이라는 남자 역시 자신의 생활이 위협을 받는다면 여진언니 남편처럼 남이 될 게 틀림없겠지.”

그런 불안함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취할대로 취한 그녀의 테이블로 남자들이 몇 명씩이나 찾아왔다. 흐트러져서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이 구미가 당겨서였을까.

“실례지만 이 몸이 결혼을 한 몸이라서요. 오늘 신혼여행 왔답니다.”

찾아오는 남자들에게 그렇게 말하니 꽁지빠지듯 달아나버렸다. 가희는 피식 웃었다.

“재밌네.”

빙글빙글 웃고 있는데 또 다른 남자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술 한 잔 사드리고 싶은데요.”

“말씀드렸지만 이 몸은 신혼여행중이라니까요.”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획 들었다. 그러나 테이블 앞에 서 있는 낯선 남자는 피식 웃을뿐 다른 남자들과 달리 그대로 서 있었다. 희미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느낌이 유현과 비슷한 남자였다. 단정하고 깔끔한 신사의 이미지였다.

“신부치고는 특이하시군요. 벌써 부부싸움이라도 하신겁니까?”

“남의 가정사에 관여마시고 돌아가세요.”

가희가 손을 휘휘 휘저으며 벌떡 일어났다.

“이 나이트는 날파리가 많네요.”

중얼거리며 그를 지나친 그녀가 스테이지로 향했다. 미친 듯이 몸을 흔들고 있는 인파 속에 묻혀 조금씩 비틀거리고 있는 가희를 바라보며 남자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눈을 아래로 깔고서 음악을 타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긴 속눈썹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순수해 보이는 얼굴에 눈이 갔다. 격렬한 음악이 멈추더니 곧 블루스 타임이 시작되었다.

“뭐야. 맥빠지게.”

툴툴거리며 자리로 돌아가려는 가희의 손목을 누군가가 끌었다. 흐릿한 눈을 들어 바라보니 방금 전 그 남자였다.

“이거 놓으시죠.”

“지금 취한 사람은 당신입니다. 여기서 화를 내봤자 취한 사람의 객기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텐데요.”

“무서운 협박이군요. 못 들으셨나요? 날파리가 많이 끼는 것 같더니 아직이네요.”

“꽃을 따라 움직이는 곤충은 날파리가 아니라 벌이죠.”

“느끼하군요.”

“자. 무료한 저에게 갓 결혼한 고귀한 신부를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가희가 피식 웃었다. 남자는 속으로는 어떤 작당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겉으로는 유쾌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 남자 웃기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졌다. 유현이었다. 유현이 저 쪽에서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댁의 변태적인 취미에 갑자기 동참하고 싶어지는데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는 이유가 뭐죠? 속상하게 한 남편이라도 나타났습니까?”

“정말 신기한 사람이네요. 어때요? 블루스 한 번에 턱이 날아가는 경험을 드리죠. 관심있나요?”

“신부를 이대로 방치할 신랑이라면 그만큼 흥분할 성격도 아니라고 봅니다만.”

천천히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어감았다.

“묘하게 자존심을 긁네요.”

가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동작이 눈에 띄게 줄었다. 의기소침한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다.

“울어요?”

눈물이 뚝 떨어져내렸다.

“재미있죠? 이런 행동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분명 괴로운 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괴로워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남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대로 선 가희의 어깨가 계속해서 들썩였다.

“이름이... 뭐죠?”

“허무하네요. 그냥... 이대로 돌아갈게요.”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리려는 순간 바람소리가 나더니 익숙한 향기가 그녀의 손목을 획 끌어당겼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현...씨?”

동시에 위협적으로 그녀를 스쳐지나간 유현의 주먹이 그대로 남자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에 춤을 추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웨이터들이 달려오고 테이블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가희는 그만하라고 말릴 자격도, 마음도 없었다. 갑작스런 주먹에 나가떨어진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빙그레 웃으며 유현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납치당한 신부를 구하려면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낯선 남자의 말에 유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팔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자진해서 납치되는 경우도 있나?”

유현이 싸늘하게 가희를 노려보며 말하자 가희가 냉랭하게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안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유현에게 내밀었다. 명함이었다.

“xx연구소에 있는 백현웅입니다. 언제든지 이혼하실 때 연락을 주시죠.”

아무 말도 없던 가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유현이라는 남자도 만만치 않았다. 천천히 명함을 주머니에 넣은 그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곧 연락하도록 하지. 그 전에 그 연구소가 적자에 허덕이게 할 방법을 찾으면 먼저 연락하지.”

현웅이라는 남자가 피식 웃더니 아직도 얼얼한지 턱을 문지르며 가희를 스쳐지나갔다. 슬쩍 그를 쳐다보니 그가 곁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빙긋 웃어왔다. 황당해서 웃었지만 이내 앞에 서 있는 유현과 눈을 마주치자 웃음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유현에게 이끌린 채로 온통 시선집중이 되어버린 그 장소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자존심 운운하며 화를 낼 법도 하련만 건물을 빠져나간 유현이 묵묵히 그녀를 끌고 간 곳은 약국이었다. 여전히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녀에게 숙취드링크를 건넨 그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희도 드링크병을 만지작거리며 옆에 앉았다.

그가 고개를 획 돌렸다. 드디어 시작인가 싶었는데 예상외로 그가 드링크를 휙 낚아채가더니 두껑을 따서 돌려주며 말했다.

“마셔.”

드링크를 다 마신 후에도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을 밤하늘만 들여다보기만 했다. 가희도 말이 없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같은 곳을 보고 있었음에도 그의 생각을 알 수는 없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이쯤에서 타협을 보는게 어떨까.”

“어떤 식으로요?”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더 이상 다툼은 말자. 식구들도 있는데 계속 싸우고만 있을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약속해줘요. 이 결혼은 계약결혼이라는 것을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천천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우리가 계약결혼을 하건 말건 세상 사람들 눈에는 이미 부부야. 그런데도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유현이 차분해지도록 노력하며 말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해요. 새새어머니가 안정될때까지 만이에요. 그때까지로 해요. 그렇다면 저도 더 이상 당신과 싸울 일이 없을 듯하네요.”

“계약결혼이면 불만 가질 일이 없으시다?”

“당신도 저도 이 결혼이 영원할 거리라고는 생각 안 하지 않나요? 우리 두 사람 다 서주언니를 품고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당신에게도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릴 숨통을 트여주고 싶어요. 그게 그나마 힘든 위기에서 절 건져주신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제 도리에요.”

“의무, 도리, 인정, 참 박애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셨군.”

그가 이죽거렸다.

“좋아. 그렇게 하지.”

그가 벌떡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찌르며 말하며 앞서 걸었다.

“민가희. 내가 만난 협상가들 중에서 가장 실리를 챙기는 형이군. 그래. 수렁에서 건져 준 인간적인 보답은 하겠다 이 말인가?”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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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초 - 기다림




유현은 당당했다. 스트라이프 정장을 세련되게 차려입은 모습이 위화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당당하게 서 있는 그에게 망설임 같은 것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서주언니가 떠나지 않았다면 내가 이 남자옆에 동등하게 설 수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감사했다. 이유는 지금 그들이 향하는 곳이 친정 즉 아버지와 새새어머니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옆을 든든하게 받쳐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유현이 그 역할을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아버지 앞에서나 새새어머니 앞에서 초라하기 싫었다.

그들은 여전히 서먹서먹한 채였다. 자잘한 말다툼은 그쳤지만 두 사람은 이전의 냉랭한 분위기로 돌아가 있었다. 결국 마지막 날까지 손끝 하나 건들지 않은 채 서울로 돌아왔다.

“가희야!”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가 반겼다. 가희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새새어머니가 옆을 버티고 섰기 때문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유현이 먼저 인사를 했다. 다행히 그는 밝게 웃고 있었다. 아버지가 다가가 유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강실장. 잘 왔네. 그래. 좋은 여행 되었고? 재미잇게 둘러보았나?”

“편한 여행이었습니다.”

“가희야. 너도 좋았고?”

“네.”

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의 눈에 안도감이 돌았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왜 볼상사납게 문전에서 그러세요?”

새새어머니가 멀찌감치 선채로 못마땅하다는 듯 내뱉자 아버지가 어이쿠하며 유현과 가희의 손을 잡아 끌었다. 방으로 향하려는데 현수가 가희를 저지했다.

“너는 과일이라도 깎아 오거라.”

“여보. 지금 방금 여행에서 다녀온 애를...”

“시댁에서 살 건데 욕은 얻어먹지 말아야 할 거 아니에요. 이제부터라도 가끔씩 들러서 아주머니한테 주방일을 배우도록 해라. 어차피 네가 해야 할 일이 그런 것 뿐일테니.”

다정한 말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저렇게 그녀를 의식해주는 것만도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있어 가희는 원망이 모이고 모여 쌓인 산과같은 존재일테니. 그러나 지금은...

엷은 한숨을 내쉰 가희가 천천히 몸을 돌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유현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끌어 감싸듯이 안았다. 가희가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새새어머니를 향해 있었다.

“장모님. 이 사람이 지금 좀 피곤합니다. 어제 밤에 실은 제가 배탈이 나서 밤새도록 잠을 못 잤거든요. 음식이 입에 안 맞았나봅니다.”

‘무슨 병간호? 무슨 배탈? 무슨 음식?’

“그, 그럼 어쩔 수 없지.”

현수가 당황한 듯 중얼거리며 아버지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을 따르며 가희가 머뭇거리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뭘. 나도 완벽한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야.”

이상했다. 왜 명치끝이 따끔거린 것일까.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하는 그 모습이 얄미워보이기까지 했다. 방안으로 들어서 큰 절을 하는 중에도 현수는 고개를 돌린 채였다. 마침내 절이 끝난 후에야 불쾌한 시선을 그들에게로 돌렸다.

“그래. 참 잘 어울리는구나. 강실장. 정말 고맙네.”

“무슨 말씀을요.”

“자고 가겠나?”

아버지의 질문에 유현의 시선이 잠깐동안 가희를 훑었다.

“죄송하지만 내일부터 출근을 할 생각이라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지. 일이 중요하니 말일세.”

“그래. 내일부터 출근한다고?

“네. 비워둔 시간이 긴지라.”

“잘 생각했네. 그럼 내일 회사에서 보기로 하고 오늘은 그만 가 보게. 피곤할텐데.”

“죄송합니다. 장모님. 가희야. 가자.”

“아. 넌 잠시 남아라. 할 말이 있구나.”

“여보. 가희가 피곤하다고 하는데.”

“잠시면 돼요!”

그녀가 쏘아붙이자 유현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어머님. 그럼 나가있겠습니다. 밖에서 기다릴게.”

가희는 지금 이 순간이 긴장되는 순간이었음에도 그가 하는 연극에 자꾸만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배려를 목적으로 조근조근 터져나오는 대사들이 귀엽기까지 했다. 유현이 나가자마자 현수가 가희를 쏘아보았다. 아버지는 묵묵히 옆을 지키고 앉았다.

“그래. 남의 자리를 척하니 꿰차고 앉아보니 소감이 어떠니.”

“여보. 그런 말 하지 않기로 했잖소!”

“조용히 해 보세요. 처음만난 날부터 느낀 거지만 얘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눈 하나 꿈쩍 안해요. 그걸 몰라요?”

“이 사람. 참...”

“언니가 꿈에 나타났어요.”

현수의 눈이 커졌다.

“지금 뭐라는 거냐!”

“새어머니. 저에게도 아픔이에요. 제발... 그만해 주세요.”

“누가 새어머니라는 겐지. 너도 참 낯짝도 두껍구나. 그래. 살아있는 너는 그런 말로 포장하면 되겠지. 죽은 사람만이 슬픈게 아니냐! 이기적인 것, 끔찍하도록 이기적인 것. 결국 강실장마저 꿰어찼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어봤자 며칠도 못 버틸 것이다. 그 옷에 발이 걸려 넘어지거나 홀랑 벗겨져 버릴테니까!”

현수가 높은 목소리로 비웃었다.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당신이 뭘 알아요. 그래도 더 마음에 드는 딸이 모든 행복을 손에 쥐었으니 당신이 뭘 알겠어. 나에게 아무말도 하지 말아요. 잘난 당신 딸하고나 잘 살아 보라고요. 알았어요?”

현수가 신경질적이고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더니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깊은 눈으로 가희를 바라보았다.

“가희야...”

“아빠.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할 수가 있어요? 그게 가능해요?”

“그럴 리가 있겠니. 아버지한테는 둘 다 너무 소중한 공주였단다.”

“새새어머니 말이 맞아요. 전 이 집 안에 있으면 눈물도 안 나요. 오기가 나서 더 나오질 않아요. 저는 이 모양인데도 아버지는 왜 언니를 더 사랑하지 않으신거에요! 이렇게 충분한 이유가 있는데도 언니를 더 사랑하지 않으신 거냐구요.”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다짐대로 그녀는 눈물을 누르고 또 눌렀다.

“언니는 천사였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어요. 유현씨도 사랑했고 저도 사랑했어요. 그런 언니를 죽게 한 저에요. 그런데도 언니를 더 사랑하지 않으세요? 제가 덜 사랑스럽지 않으세요? 밉지 않으세요?”

“가희야. 미안하다. 모든 것이 아비의 잘못이다.”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러나 부녀는 들어서는 유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짓말이라도 좋아요. 아니라도 좋아요. 그냥 언니를 더 사랑했었다고 말씀해주세요. 너무 사랑받아서 하늘이 시기해서 데리고 간 거라고 그렇게... 사랑받을 필요도 없는 저같은 애 때문에 하늘로 간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주세요. 아버지. 그렇게 말 해 주세요.”

“일어나라. 가희야.”

유현의 목소리가 등뒤로 들려왔다. 약한 소리를 들켜버리고 말았다. 유리같은 그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냉정한 빛을 담았다.

“강실장. 우리 가희를 부탁하네. 이 마음의 짐을 벗겨주게나. 제발 부탁이네.”

“그와 있는 한 더 지워지지 않을 거에요!”

가희가 매몰차게 말하고는 애써 당당한 척 벌떡 일어나 그를 스쳐 지나갔다. 우는 소리 따위 그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제발 부탁이네. 어미를 잃고 언니를 잃은 아이일세. 둘 다 그 눈앞에서 보내버렸어. 이렇게 부탁하겠네. 잠이 들어었어도 한 번 더 확인해주고, 웃고 있어도 한 번 더 봐주게. 정말 잠이 든건지, 울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게 봐주게. 이렇게 부탁하겠네.”

자존심이 상했는지 금세 차가워진 채 나가는 가희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유현이 아버지의 말에 결국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희는 걱정을 한보따리 안고서 시댁 앞에 서 있었다. 새새어머니에게 독한 말을 들은 지금 자신감이 완전히 상실된 느낌이랄까. 또다시 멸시의 눈초리를 받을 것이 분명해서 맥이 풀렸다. 유현의 말대로 나약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단단하게 껍질을 싸버리는 존재인가.

머뭇거리는 그녀의 곁에 선 유현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가희가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유현이 빙긋 웃었다.

“겁나?”

“마,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요. 겁 따위 나지 않아요.”

고집스럽게 내뱉는 그녀를 유현이 계속해서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았다.

“재미있어요?”

“응. 아주 많이. 들어가자.”

“악취미가 있었군요.”

“사실 재미있긴 해. 아니라고 외치는 네 모습이 자꾸만 재미있어지네?”

“그렇다면 더더욱 뻔뻔해져야겠네요.”

“원하는대로.”

그가 가희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초인종을 눌렀다. 웅장한 대문이 덜커덩 열렸다. 멸시일지 아닐지 어쨌든 문 안을 들어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새아기 왔니?”

몇 번 뵌 적이 없는 시새어머니가 반색을 하며 맞았다. 우아하게 틀어올린 머리의 중년 부인은 단정한 눈매가 유현과 많이 닮아있었다. 가희는 점점 더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는요?”

“안에 계시지. 자. 얼른 들어오너라. 피곤할텐데 빨리 인사드리고 올라가 쉬렴.”

아직은 다정하기만 한 노부인이었다. 그러나 가희에게는 그 다정함마저 폭풍전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부인이 앞서 걸었다. 유현이 살짝 몸을 기울인 채 속삭였다.

“겁나지 않는다면서?”

“겁나지 않아요.”

“그럼 지금 그 표정은 뭐지? 잔뜩 굳어있잖아.”

“그럼 정신나간 여자처럼 촐랑거릴까요?”

유현이 픽 웃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도 표정은 풀어줬으면 하는데. 며느리를 맞아서 기분 좋은 새어머니도 질릴 표정이잖아. 스스로 말하지 않았나? 자신의 앞에 있는 등불은 자신이 켜는 거라고. 왜? 금방 꺼져버릴까봐 두려워?”

“바로 당신이 끌 것 같아 걱정될 뿐이에요.”

유현의 웃음이 딱 멈췄다. 그가 가희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왜... 왜 그렇게 보죠?”

“봐. 난 네 원수가 아닌 남편이야. 그런 내가 널 괴롭힐 것 같아? 왜 그렇게 날 못 믿지? 내가 그렇게 잘못한게 많나?”

순간 대꾸할 말도 잃어버린 가희였다. 그의 단호한 목소리가 자꾸만 믿음직스러워지는 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일 뿐이겠지?

“애들이 도착했네요.”

“들어오라고 해요.”

“들어오렴. 현아. 아가야.”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려해도 지금 시새어머니에게서 들려온 목소리는 따뜻한 어떤 것이었다.

“들어가지... 왜 아가라고 하시지?”

유현이 또다시 유들거리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자꾸만 얄미울정도로 밉살스러워지는 그였다. 방안에 들어서니 다소 엄한 기운이 느껴지는 시아버지가 이내 웃음을 띠며 그들을 반겼다. 놀라운 변화였다. 사람의 인상에서 미소가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큰 것인지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시새어머니도 그의 곁에 앉더니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결단코 예상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결혼식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웃지 않으시던 분들이셨다.

“그래. 피곤하지? 현이가 잘 해주었느냐?”

잠시 넋이 빠져있느라 자신에게 향하는 질문인지 모르고 있는 가희의 옆구리를 유현이 쿡 찔렀다.

“네... 네. 아버님.”

노부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일을 뒤로 미루더라도 조금 더 쉬고 오지 그랬니.”

새어머니의 말에 유현이 가뿐히 웃어보였다.

“음식이 입에 안 맞는 바람에 제가 고생을 좀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밤새도록 간호 하느라고 지쳤고요. 그래서 조금 일찍 올라왔습니다.”

‘또 음식? 병간호? 하지도 않은 밤샘?’

정말이지 오늘따라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유현이었다. 어찌도 저렇게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지.

“세상에. 네 고질병이 또 도졌나보구나. 어째 그렇게 까탈스럽니. 아기. 네가 고생했겠구나.”

“아니에요. 이 사람은 아파서 고생했지만 전 한 것도 없었습니다.”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연극을 한다면 완벽하게 맞춰주는 것도 좋겠지. 깜쪽같이 맞짱구를 치는 가희를 유현이 이것봐라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 이제 너희들은 부부이니 작은 부분이 아프더라도 함께 나누고 다독여주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현이 니가 솔선수범하며 가정을 잘 이끌어야 해. 부부란 억겁의 인연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니 절대 가벼이 여기지 말고. 알겠느냐.”

아버지의 말에 유현과 가희가 동시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그럼 이만 가서 쉬거라.”

“쉬세요. 아버지. 새어머니.”

“쉬십시오. 어머님. 아버님.”

곧 유현을 따라 방을 나서는 가희를 시새어머니가 불렀다.

“아가야. 잠시 말 좀 나눌까?”

가희가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 네...”

“새어머니. 설마 벌써 시집살이 시키시려는 건 아니시겠지요?”

“녀석하고는. 벌써 마누라 치마폭에 쌓인 것이니?”

“그럴리가요.”

유현이 마치 날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으로 허겁지겁 이층으로 올라갔다. 잔잔하게 웃으며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시새어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 소파에 좀 앉겠니?”

“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미룰까 했다만 이 이야기를 해야 할 듯 하구나. 그래서 피곤한 너를 붙잡았단다. 괜찮겠니?”

“네.”

“서주일은 너무 안타깝단다. 참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손끝이 떨려왔다.

“어떤 인연인지는 모르겠다만 현이가 너와의 결혼을 선전포고하듯 말했을 때 사실 걱정스러운 마음이 많았단다. 그래서 그다지 좋은 기분으로 너희들을 축복해주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말씀대로 부부란 수억만번의 인연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본단다. 아직은 많이 슬프고 아프겠지만 이미 내 며느리가 된 이상, 그리고 현이의 안사람이 된 이상 그 인연을 소중히 하고 아름답게 가꿔가기를 바란단다.”

“새어머니...”

“그래. 이제 내가 아가 너의 어미란다. 우리 집 사람이 된 이상 나쁜 기억은 잊고 좋은 일만 생각하기를 바라마. 그렇게 해 줄 수 있겠니?”

사람의 눈물은 어쩌면 따뜻한 기운에 녹아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멸시와 비난이 가득할때는 눈물을 얼음처럼 굳혀버릴 수 있다. 그래서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 그러나 따뜻함과 인정이 느껴질 때 그 얼음은 녹아내리고 만다. 그래서 주체할 수 없이 넘쳐흐르게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오늘 돌아온 너희들 얼굴이 밝아서 정말 다행이란다. 아무래도 부모맘은 내 자식이 행복한 것이 가장 좋으니까 말이야. 우리 현이가 그다지 살갑지 않은 성격이고 원만한 성격이 아니란 걸 아는데 무척 좋아보이는구나. 나는 현이의 표정을 믿으려고 한다.”

“새어머니. 저는 너무 부족합니다.”

“그래. 그런 마음으로 아끼고 살거라. 나는 보이는 것만 믿는 성격이란다. 둘 사이가 좋아보여서 정말 다행이야.”

“새어머니...”

가희는 부를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따뜻함이 실려있는 말 한마디가 가희의 아픈 마음을, 괴로운 심장을 녹여주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눈물을 굳이 막으려 들지 않고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벌써 방안에 들어갔을 것이라 생각한 유현이 방문앞에 기대 선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서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턱을 들어올리는 손을 그녀가 고집스럽게 밀어냈다.

“보지 말아요. 그냥 지금은 이렇게 두어줘요.”

“들어가자.”

유현이 그녀를 끌었다. 낯선 방안에 들어선 그녀는 좀처럼 앉지 않은 채 계속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유현도 난감한 채로 그녀 곁에 서서 머뭇거렸다.

“그, 그만 울고 씨, 씻든지.”

그러나 가희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결국 유현은 다그치기를 포기하고서 창가쪽으로 다가섰다. 괜히 답답해져와 창문을 열었다. 울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래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쥐었다. 거부할 것이 걱정되었는지 머뭇거리며 쥐어지는 손이었다. 그녀의 움직임이 거부의 뜻을 담고 있지 않아 용기를 내어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딴청을 부리는 척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어보았다. 그녀가 천천히 머리를 그의 가슴에 기댔다. 눈물이 셔츠에 젖어들었다. 어색하고 뻣뻣하게 그녀를 안은 그가 손을 들어올려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언제나 늘 잘난 척을 해서 위로해 줄 방법을 못 찾는 거잖아.”

그가 머쓱한지 중얼거렸다.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는 그녀와 그런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안아주는 그의 모습은 그날 저녁만은 연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고마워요.”

눈물 젖은 목소리에 유현이 할 말을 잃었다. 많이 부딪히고 많이도 답답하리라 생각한 그녀와의 생활이었다. 아직 채 며칠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마음을 담을 수 있는 어떤 것이어서 신기하기까지 했다. 지금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맙다고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마음을 풀어주고 있었다. 말 한마디가 지니고 있는 위력은 차치하고라도 민가희가 주는 신선한 바람에 조금은 시원해지는 유현의 마음이었다.

뭐든지 멋진 말로 대꾸해주고 싶어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놀란 유현이 삽시간에 그녀의 어깨를 휙 밀쳤다. 그 바람에 가희의 몸이 휘청거렸다.

“오빠!!!”

째지는 듯한 탄성을 지르며 누군가가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라미야! 놀랐잖아! 인마. 노크도 몰라?”

유현이 정말 놀랐는지 툴툴거리며 가희를 돌아보았다.

“미, 미안. 갑자기 밀어서. 놀랐어?”

고개를 돌려 재빨리 눈물을 훑은 가희가 얄밉다는 표정으로 유현을 살짝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게 놀랐어요?”

“어, 새어머니인줄 알았지.”

그렇게 매몰차게 밀어버리는 그의 반응이 야속할 만도 하련만 자꾸만 소년처럼 보여 밉지만은 않았다. 그가 머쓱한 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새언니.”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가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쁜 사람을 많이 봤지만 앞에 서 있는 아가씨는 눈에 확 띌 정도였다. 플레어스커트에 레몬빛 스카프를 나풀나풀 맨 옷차림은 발랄했고 반가운 듯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는 반짝였다. 달갈형의 얼굴은 장미꽃잎처럼 보드랍고 흰 이미지였고 허리까지 내려와있는 오랜지 색 머리카락은 상큼했다.

“오빠. 너무 보고싶었어.”

그녀가 순식간에 날아들더니 유현의 가슴에 안겨 그를 꼭 끌어안았다. 유현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이 왈가닥 녀석. 결혼식은 왜 안왔어?”

“몰라. 바빠서 그랬어.”

“아무리 바빠도 오빠 결혼식을 제껴? 이런 나쁜 녀석을 봤나.”

가희는 사이좋아보이는 예쁜 남매를 바라보았다. 잔잔하게 웃으며 쳐다보는데 유현을 꼭 끌어안은채 그 가슴에 머리를 기댄 그녀가 가희를 돌아보았다. 순간 적색경보가 울렸다. 그녀의 눈초리가 매섭게 가희를 향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때 유현이 라미의 턱을 들어올리는 바람에 그녀의 시선이 가희를 스쳐지나 유현에게 향했다.

“지금 들어온거니?”

“응.”

“그럼. 얼른 가서 씻고 자. 오빠도 피곤하다.”

잘못 본건가? 가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느껴질 정도로 매서운 눈초리였다. 그러나 유현을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는 라미의 미소는 발랄상큼 순진무구 그 자체였다. 그럼 마치 독에 잔뜩 올랐을때의 장희빈의 그것과 같은 라미의 눈초리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정말 잘 못 본 걸까? 라미가 방을 나가려는지 몸을 돌렸다.

“라미야.”

“응?”

그녀가 비시시 웃으며 돌아보았다. 아무리 봐도 예쁘기만 한 미소였다.

“언니한테 인사하고 나가야지.”

유현이 가희쪽으로 턱짓을 까딱하며 말하자 라미가 혀를 쏙 내밀더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새언니. 미안해요. 깜빡 잊었지 뭐에요. 서 계신 줄도 몰랐네?”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할지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가희였다.

“반가워요. 아가씨.”

“결혼 축하해요. 언니. 오빠두.”

“고맙다.”

“고마워요.”

“그럼 좋은 밤 되세요. 근데 오빠 두 사람 정말 안 어울리는 거 알지?”

그녀가 혀를 쏙 내밀며 위트식으로 말하고는 헤헤거리며 방을 뛰쳐나갔다.

“장난하곤.”

‘장난? 말에 뼈가 있는게 느껴지는데 장난?’

“아가씨가 서운한가봐요. 사이가 참 좋은 남매지간이었나 봐요.”

“좀 심하다싶을 정도로 따르긴 해.”

“참 예쁘고 착하고 말도 너무 귀엽게 하는 동생이네요.”

“티없이 순수한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그러세요.”

가희가 몸을 쌩 돌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께름직한 그녀였다. 웃는 얼굴로 선전포고를 한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런생각에 빠진 채 정리하기 위해 가방을 여는데 유현이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왜, 왜요?”

“이봐. 민가희씨.”

유현이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유현의 그런 눈빛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오락가락 혼란스러운 가희였다.

“마, 말해요.”

마치 저 깊은 속까지 들여다볼 것 같은 그의 눈이 부담스러워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라미도 새어머니도 아버지도 이제는 모두 네 가족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이제는 새어머니의 말에 울 필요도 없고, 라미에게 낯설어 할 필요도 없다는거야. 일부러 경계할 필요도 없고 부담스러워할 필요도 없어. 가족이니까.”

코끝이 시큰해졌다. 왜 자꾸 이 남자는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냉정했으면 그대로 머물러주었으면 좋겠다. 이 남자가 속이 깊은 것 따위, 이 남자가 실은 인간적인 사람이란 것 따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상에 젖어들고 싶지 않았다. 새새어머니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언니의 자리에 앉아서 행복까지 노리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입술을 앙 다물었다. 아무 말도 없는 그녀를 향해 유현이 중얼거렸다. 왠지 힘이 없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너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이제 나잖아. 가족보다 더 가까운 게 바로... 부부니까.”

별이 반짝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만약 반짝이는 그 순간에 소리가 난다면 지금 이 순간같은 소리이리라. 마음이 반짝하는 소리. 마음이 무작정 따뜻해져서, 심장이 두근거려서 눈물과 함께 올라오는 소리.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로 별은 반짝일 것이다. 무지개가 피어오르는 소리. 꽃봉오리가 터지는 소리. 새싹이 올라오는 소리. 어쩌면 세상에는 들리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소리들이 많을 지도 모른다. 가희는 지금 그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파초 - 기다림





이튿날 아침, 가희는 새벽부터 일어나 주방으로 내려갔다. 유현은 침대 저 쪽 끝에서 잠들어 있었다. 침대가 넓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그들이었다. 서로 극과 극쪽에 누은 채로 낮은 숨소리마저 신경쓰이는 밤은 말 그대로 고역이었다.

그 밤 내내 유현은 머릿속을 메아리치는 네 글자 때문에 고심했다. 바로 계약결혼이었다. 가희도 그녀 나름대로 다정하게 들려오던 시새어머니의 말들을 되뇌면서도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에 얽혀 잠이 오지 않았다. 서주의 잔상과 새새어머니의 싸늘한 말투, 그리고 울부짖던 하진의 목소리까지 섞여 와 혼란스러웠다. 거기다가 유현의 고마운 말들과 배려가 더해 져 자꾸만 세상에서 제일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방을 나서기 전 유현을 돌아보니 그가 그 큰 몸을 말아 새우잠을 자고 있다. 그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안쓰러워 망설이던 끝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갑자기 이불이 닿는 바람에 얕게 깨어났는지 그가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는 통에 가희는 잠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내 잠들어버리는 모습에 실소가 새어나왔다. 확실히 잠이 든 그의 모습은 눈을 떴을 때와 많이 틀린 느낌이었다.

한 사람을 알게 되는 것, 아니 한 남자를 알게 되는 것은 신기한 일인 듯 했다. 그러나 부부로서 알아가는 한 남자의 모습은 더욱 더 생소하고 신기한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방을 나섰다. 나름대로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래층은 벌써 깨어있었다. 시새어머니와 일하는 아줌마가 벌써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새어머니.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가희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시새어머니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니 왜 벌써 일어났니? 더 자지 않고. 피곤할텐데.”

“아니에요. 어머님은 잘 주무셨어요?”

“그럼. 잘 잤지. 그런데 아가야. 아버지는 벌써부터 손주기대에 잠을 설치시더구나. 그 양반도 참.”

순간 가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하는 아주머니도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통에 얼굴마저 화끈거렸다.

“작은 사모님 놀라셨는가 봐요.”

“그러게요. 내가 아침부터 주책맞은 소리를 했네.”

가희는 얼른 앞치마를 두르고서 황망한 표정을 감추었다.

“새어머니. 저 뭘 할까요?”

“아니다. 오늘은 그냥 구경만 하렴. 피곤할텐데 뭐하러 나오고 그러니.”

“이 사람 출근할텐데요.”

“아가야. 그럼 밖에서 신문 좀 가지고 오겠니?”

“네.”

현관문을 미니 상큼한 새벽내음이 진동했다. 밤사이 서리가 맺혔는지 보이는 풀꽃마다 영롱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신문을 집어 든 가희는 그 새벽을 마셔보고 싶어 두 팔을 열고서 숨을 들이켰다. 정신이 맑아졌다. 잘 손질된 넓은 정원을 돌아보는데 문득 무엇인가가 눈에 띄었다. 커다란 잎이 시원스레 보이는 나무였다. 야자수처럼 멋지게 펼쳐진 그 잎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던 그녀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곧 허리를 숙였다.

“아버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너도 잘 잤느냐?”

“네.”

그가 다가오더니 가희의 옆에서 뒷 짐을 지고 섰다.

“파초를 보고 있었느냐?”

“아. 저 나무가 파초인가요?”

“그렇단다.”

그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파초를 바라보았다. 가희도 함께 바라보았다.

“전 파초가 난초와 같은 풀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 얼핏보면 나무로 보이지. 그런데 잘 보렴. 줄기가 녹색이지?”

“아. 정말 그렇네요.”

“여름에 더위를 식혀주는 관상용으로 좋아서 내 정원에 두게 되었단다. 원래 따뜻한 지방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라 가을이 되면 말라죽지. 한 번 고사(枯死)하면 다시 살아나기 힘들단다.”

“네.”

“어떤 사람이 저 당당하고 이국적인 풍채가 좋아서 파초를 얻어다가 길렀단다. 그런데 그 파초가 꽃을 다 피우고 말라죽게 생긴 마지막 처지인지라 자꾸만 주위 사람들이 팔아버리라고 부추기는 게야. 그러나 그는 쳐다보기만 해도 뿌듯해지는 파초를 팔 수가 없었다. 일하던 소를 늙었다고 팔아넘기고 그 소를 산 주인이 소를 잡으면 그 고기를 다시 사먹는게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 남자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 더 이상 꽃을 피울 수 없다고 해도 팔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파초가 가진 특징 때문이 아닐까 하구나. 아가야. 올 여름은 폭염 속에서도 느껴지는 저 풀의 서늘함을 한 번 느껴보려무나. 무덥고 지리한 장마철, 비를 머금었을 때 가슴은 젖되 옷은 젖지 않는 그 서늘함을 느껴보거라. 어찌 꽃을 피우고 죽었다고 고개를 돌려 팔아버릴 수 있음이냐. 또다시 피어나기를 바라고 있을 수밖에 없는게지. 비록 다시 살아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저렇듯 마당을 지켜주고 있는 뿌듯함을 가슴깊이 느끼기 위해서라도.”

“아...”

그의 나지막한 말에 가희는 전과는 다른 눈으로 파초를 바라보았다. 그 속에서 조근조근하게 말해주는 시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이 새벽 그녀의 마음을 정돈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파초의 꽃말은 기다림이란다. 열대지방인 제 나라를 떠나 날씨도 맞지 않는 이국땅에서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말라죽더라도 꽃을 피우는 그 거대한 기다림을 보는 사람들마다 느끼기를 바란다.”

“네. 아버님.”

“그 마지막 모습이 비록 웅장하지는 않더라도 그가 주었던 더운 여름날의 서늘함과 위엄을 느낄 수 있다면 나름대로의 삶이 헛되지는 않겠지. 그렇지 않겠느냐. 아가야.”

인자하게 눈을 맞춰오는 시아버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 엄한 눈이 참으로 선하게 느껴져서 가희의 미소가 밝아졌다. 묵직한 기다림, 폭염을 식혀주는 시원하고 넓은 잎, 가슴은 젖되 옷은 젖지 않는 서늘함...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존재가 되어야 한단다. 이국땅에서도 멋지게 피어 마지막까지 당당한 저 식물처럼, 서로 다른 환경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이라도 자꾸만 뿌리를 내리고 적응해간다면 그것이 바로 제 나라고 제 집이란다. 그러니 한 번 내 정원에 뿌리를 내렸으면 그 정원을 밝게 비춰주든 아니든 그 자리가 영원한 자리가 되는 것이란다. 내 말뜻을 알겠느냐?”

“네. 아버님.”

“현이 녀석이 넓은 잎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만...”

“많이 넓어요. 아버님. 벌써 몇 번이고 덮어준 걸요.”

가희가 활짝 웃으며 파초로 눈을 돌렸다. 시아버지도 뒷짐을 진 채 그 새벽공기를 맞으며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 출처 :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 1904-?)의 수필집 중(中) ‘파초’









아침식사를 마치고 유현은 출근준비에 바빴다. 출근준비를 도와줄까하는 심각한 고민도 잠깐 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머쓱해서 방문 주위를 배회하던 가희는 손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나서려고 하는데 때마침 유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미야. 새언니 못 봤니?”

출근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급한 마음에 문잡이를 돌리려는데...

“새언니? 요 앞에 잠깐 나갔어. 오빠 출근하는거 배웅해 주라구 부탁하고 가던데?”

“그래?”

가희의 손이 딱 멈췄다. 아무래도 어젯밤 느꼈던 미묘한 눈초리는 실제인 모양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는 라미의 말을 두 귀로 똑똑히 들은 이상 지금 욕실문을 열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희는 그대로 변기두껑을 내린 후 팔짱을 낀 채 앉아서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두드렸다. 두 사람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가 아래층으로 따라 내려갔다. 배웅을 하려는 듯 유현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라미가 눈이 휘둥그러진 채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다녀와요.”

유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나간 거 아니었어? 라미가 나갔다고 하던데.”

“아. 갔다가 다시 돌아온 걸 아가씨가 못 봤나봐요. 그렇죠. 아가씨?”

“그, 그랬어요?”

라미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팩 돌렸다. 어찌어찌하여 유현을 보낸 후 찔리는 표정으로 서 있는 라미를 가희가 불렀다.

“아가씨. 잠시 저 좀 보실까요?”

“미안해요. 그렇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구요.”

라미가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땍땍거리자 가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가씨. 내가 싫나요?”

“솔직히 그래요. 우리 오빠가 결혼한 것 자체가 싫어요. 누구라도 싫어요. 오빠와 한 방을 쓰는 것도 싫구 오빠의 부인이 되는 것 싫어요. 정말 싫어요. 그러니까 나랑 친해지고 싶단 생각 말아요. 오빠의 부인인 이상 전 새언니가 정말 싫단 말예요!”

그러더니 탁탁 소리를 내며 이층으로 올라가 버리는 라미였다. 그 통통 튀는 외모와 분위기에 어울리는 성격이기는 했다.

“성격 한 번 대차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어. 브라더 콤플렉스였구나.”

가희는 옅은 한숨을 내쉰 후 이층 방으로 향했다.









가희는 재성의 매장으로 들어섰다. 겉으로는 평온한 생활이었지만 가희의 마음속은 그렇지 못했다. 유현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도 아직은 힘들었고 아무리 좋은 시부모님이라고 해도 그들이 바라는 바대로 100% 나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남의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불안함은 씻기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재성의 매장이었다. 만약 서주언니가 떠나지 않았으면, 그래서 갑작스런 이 결혼을 하게 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매일 드나들고 어떤 일을 했을 그 곳이었다.
재성을 찾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하진이 서 있었다.

“하진아...”

두 사람은 정지한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진의 얼굴이 수척했다. 미안하다는 말로 다 못할 마음이 솟구쳐올라왔다. 그가 힘없는 미소를 보내왔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거야?”

“응...”

두 사람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하진이었다.

“잘 지내는거지?”

“응. 미안해...”

적어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마지막까지 꺼내지 말아야할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결혼... 축하해.”

“고마워.”

자꾸만 좋은 단어들이 나쁜 의미로 바뀌는 상황이었다. 미안해. 고마워. 결코 하진에게 해서는 안 될 말들이었다.

“고향에 내려간 거 아니었어?”

“아주 올라왔어. 이 곳에 있을거야.”

가희의 눈이 커졌다.

“그, 그래?”

“응. 가희야...”

가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부담 갖지마. 난 너한테 추호도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

“왜... 그런 말을 하니.”

“가희야.”

“응?”

“이미 사랑은 끝난거지? 너한테는 그런거지?”

“하진아...”

“이제부터 내가 너에게 품는 감정은 사랑이 아닐테니까. 잘못하면 널 부정한 여자로 만들테니까. 잘못하면 내가 널 방해하는 걸 테니까.”

“하진아...”

“아니면 니가 힘들테니까. 바쁘게 지내길 바래.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길 바래.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지 말도록 그렇게 늘 바쁘게 살길 바래.”

“하진아!”

눈물이 터져나왔다. 연인에서 친구로 돌아가려고 하는 하진의 마음이 아팠다.

“울지 마. 이제 난 너한테 다가가도 안 되잖아!”

“괜찮아. 그냥 슬퍼서 그래. 그렇지만 난 사실 너한테 울어보여서도 안돼.”

“며칠동안 내내 미친놈이 되고 싶었어. 니가 있을 호텔에 뛰어들고도 싶었어. 네가 있는 집 안에 들어가 모두를 죽이고 널 끌고 나올 생각도 했어.”

“하진아. 그러지 마. 자꾸 널 힘들게 하지 마.”

“니 말대로 됐으면 좋겠다. 힘들지 않았으면 나도 정말 좋겠어. 그렇지만 내가 그러지 않은 건 널 알기 때문이야. 넌 돌릴 마음이 없겠지? 이미 결정한 이상 죽어도 돌리지 않겠지? 그럴테지?”

“하진아. 나 니가 음악을 전해 주던 날 결심했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한 번 만 너에게 손을 내밀기로 그렇게 생각했어.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되니까. 내 자리가 아니라고, 남의 자리에 앉아있다고 해서 그 자리를 망칠 수는 없는 거잖아. 막 살 수는 없는 거잖아.”

“가희야.”

“말 해.”

“도와줄게.”

“응?”

“니가 그 자리를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줄거야. 나도 조만간... 좋은 사람 만나도록 노력할게.”

“미안. 나 이렇게 나쁜 사람이야. 내 삶을 붙들려고 이렇게 몸부림을 치고 있어. 차라리 이기적이라고 욕해. 그럼 편할 것 같아.”

‘이기적인 건 나야. 마음을 접지도 않았으면서 이렇게 멋진 남자인척, 모든 걸 다 이해하고 있는 듯, 수용하고 있는 듯 서 있으니까.’

“가희야!”

언제 왔는지 재성이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야. 신혼여행은 잘 갔다왔...”

쾌활하게 외치던 그의 시선에 하진이 들어왔는지 그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두 사람 같이 있었구나.”

하진과 가희 둘 다 재성을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혼란이 가득한 눈동자일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괜찮아?”

재성이 숙연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가희가 얼른 눈물을 닦고서 재성을 보았다.

“나 일하러 왔어. 기억나지? 유현씨가 나랑 함께 일한다는 조건으로 투자하기로 한 거.”

“기억은 나지만... 지금은 그 때랑 많이 달라졌잖아. 상황이.”

“달라진 거 하나도 없어. 할 거야? 말 거야?”

“나 참.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어떻게 너랑 그 강실장님이랑 결혼을 한 건지 정말 놀랄 노자다. 아... 하진아...”

재성은 가희와 하진의 사이에 끼어서 좀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나 좀 나갔다가 올게.”

하진도 그 분위기가 부담스러웠는지 가희를 흘끗 쳐다본 후 이내 밖으로 나갔다. 곧 재성의 질문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냐? 우리 세 사람 만났을때는 서로 몰랐던 거 맞지? 그럼 그 이후에 눈이 맞은거야? 하진이 자식은 어쩌고. 너희들이 그렇게 쉽게 끝날 사이였냐? 그런데도 두 사람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는거야? 나는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있어.”

가희가 차갑게 외쳤다.

“엥?”

“더이상 질문하지마. 머리아파. 특히 부탁할게. 하진이 앞에선 그 사람 얘기하지 말아줘.”

“일단 알았다. 니 위치가 그러니 내가 어디 힘이 있나.”

“재성아. 나와 그 사람을 연결시키지 마.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난 나야.”

“그렇지만 넌 강실장님 부인...”

“글세 그만하라니까!”

가희가 필요이상으로 냉랭하게 소리치자 재성이 눈을 꿈뻑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예민하게 반응했던 가희가 이내 어깨에 힘을 뺀 채 고개를 숙였다.

“소리쳐서 미안해. 그냥 나와 있는 동안에만 민가희로 있고 싶어. 편하게 아무 생각 없이 있고 싶어. 그렇게 해줘.”

“그,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할게.”

재성이 가희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그러나 가희의 말에 옅은 한숨이 베어있음을 조용히 눈치 채는 그였다.









한 편 유현은 현수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출근을 하자마자 점심 약속을 잡았다며 장소를 알려온 그녀였다. 조용한 식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무슨 말이 나올까 예민하게 순간순간을 체크하고 있는 그였다. 식사를 조금 하다 만 그녀가 냅킨에 손을 닦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먹기가 쉽지 않네. 서주가 좋아하던 음식이라 말일세.”

유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서주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가슴속에 쩍 소리가 나며 금이 갔다.

“먼저 간 아이만 불쌍하지.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사는데 말일세.”

원망을 담은 그녀의 말투였다. 유현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자네가 내 곁에, 이 회사 안에 남아준 것은 고맙지만 날이 갈수록 솔직히 서운하네. 서주가 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결혼인가. 그것도 서주의 동생과 말일세. 천한 피이긴 하지만 서주와 반은 같은 피가 흐르니 동생이 아닌가.”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몰아세우지 말아주십시오.”

간곡한 청이었다. ‘나’를 몰아세우지 말라는 의미보다 ‘그녀’를 몰아세우지 말라는 부탁을 담아보았다.

“사랑이든 아니든 결혼을 한 것은 기정사실이지 않나. 사랑해서 결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꼬. 거기다가 강실장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테지. 먼저 간 아이만 불쌍한 것 아니겠나. 비명횡사한 것도 불쌍해 죽겠는데 마지막까지 그려주어야 할 사람은 이미 다른 여자를 품고 살고 있으니 어찌 이것이 배신이 아니겠나.”

현수가 차가운 눈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말을 이었다. 유현은 갑자기 답답해졌다. 그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예리하게 눈치 챈 현수가 천천히 커피잔을 들어올렸다.

“자네도 자꾸만 간 아이 이름을 들먹이면 좋지는 않겠지. 그렇다고 그 아이를 아주 잊어버리잔 말인가. 그 애 떠난지 일년도 안 지났네. 일년이 뭔가. 3개월도 채 안되었네. 이런 식으로 잊혀질 줄 알고 자네를 사랑했겠나. 이런 식으로 쉽게 지워질 줄 알고 자네를 바라보았겠나. 이 매정한 사람아.”

가슴이 아파왔다. 현수의 말하는 의도도 알 듯 했고, 그 마음이 딸을 사랑하고 위하는 순수한 마음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 듯 했다. 가희에 대한 끝없는 미움임을 이미 알고 있는 그였더라도 그 마음을 무조건 나쁘다고 탓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딸을 잃었다. 게다가 그렇게 미워마지 않는 가희 때문에 잃었는데 어떻게 그 미움과 고통이 크지 않겠는가.

그녀의 말이 천배는 크게 증폭되어 그의 귀를 울렸다. 매정한 사람. 떠난 서주. 그러나 많이 사랑했던 그녀. 그녀 말대로 3개월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잊으려하는 그녀의 부재. 그러나 이미 몇 번은 가희와 함께 웃어버린 지금까지의 날들. 자꾸만 웃어주고 싶었던 일들이 떠오르자 이것은 그녀의 말대로.

“배신일세. 자네는 서주를 배신하고 있는거야. 마음으로 배신하고 있단 말일세.”

그녀가 서운의 마음을 가득 담아 그에게 소리쳤다. 유현의 가슴이 고통으로 찌르르 울렸다.

“죄송합니다. 새어머니.”

“우리 서주가 눈에 밟히지도 않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서주가 부탁했습니다. 가희를 부탁했습니다.”

유현의 속눈썹이 천천히 젖어들었다.

“그 여려터진 것이 지 앞가름 구분 못하고 남 신경만 쓰는 성격이란 걸 자네가 모르는가. 그렇다고 그 불쌍한 것마저 외면하고 부탁만 들어줄 것인가. 그 불쌍한 걸 그런 식으로 아프게 할 것인가. 죽어서도 울게 만들 것인가. 그럴 것인가.”

유현의 가슴이 천천히 요동치고 있었다.


“그 여려터진 것이 지 앞가름 구분 못하고 남 신경만 쓰는 성격이란 걸 자네가 모르는가. 그렇다고 그 불쌍한 것마저 외면하고 부탁만 들어줄 것인가. 그 불쌍한 걸 그런 식으로 아프게 할 것인가. 죽어서도 울게 만들 것인가. 그럴 것인가.”
유현의 가슴이 천천히 요동치고 있었다.








유현이 생각보다 늦어졌다. 벌써 열시가 넘어가고 있는데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없는 채로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시부모님과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열시가 좀 넘었을 때 라미가 들어왔다. 유현은 아직이었다. 좀 답답해져 와 샤워를 한 후 겉옷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신경쓰지 않고 지내려고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들어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며 지내려고 했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눈앞에 두고 외면하는게 편할 듯 했다. 보이지 마저 않으니 더 신경쓰이는 것 같았다.

방을 나서는 순간 마침 방을 나오던 라미와 부딪혔다. 그녀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오빠가 벌써부터 늦네요?”

“그러네요.”

빈정대는 말에도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가희의 반응에 라미의 눈이 더욱 차가워졌다.

“우리 오빠 전 애인이 엄청 예뻤는데. 이름이 서주였던가?”

서주와 가희의 관계를 모르는 라미가 복장을 긁으려는지 흘린 말이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가희였지만 이내 웃었다.

“그 언니 정도면 내가 양보할 수도 있었겠다 했는데.”

가희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일말의 표정변화가 없는 가희에게 질린 라미가 슬슬 뒷걸음질쳤다.

“아가씨. 해 줄 말이 있거든요?”

“뭔데요? 해 보세요.”

“미안하지만 brother complex는 보기 흉해요. 게다가 우린 밤마다 하루동안 있었던 일들을 서로에게 들려주거든요? 그 때 아가씨 얘기를 해 줘도 될까요? 오빠로서는 참 실망스러워 할텐데. 그렇게 예뻐하는 아가씨한테 말이에요.”

“오, 오빤 믿지 않을걸요? 그러면 나도 언니 얘기 지어낼 거에요. 오빠가 설마 친동생인 내 말을 안 믿겠어요?”

“아. 오늘 아침처럼 그렇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지어내겠다는 말인가요? 그런데 어쩌죠? 내가 오해받는건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지만 아가씨를 너무 착하고 예쁘다고 믿고 있는 오빠가 실망할까봐 걱정이에요. 어차피 내 성격 나쁜 건 오빠도 이미 알고 있거든요. 이걸 어쩌나...”

“치. 성격 나빠서 정말 좋겠네요. 흥!”

분을 참지 못한 라미가 얼굴을 욹으락붉으락 하더니 빽 소리치고는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가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참 재밌는 아가씨라니까. 그래도 순진한 것 같지?”








대문앞을 서성였다. 낮 동안 더웠던 날씨가 무색하게 밤공기가 쌀쌀했다. 어두운 골목 저 끝을 기웃거리며 바라보아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차의 헤드라이트빛이 번쩍일때마다 혹시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몇 번이고 실망으로 바뀌었다.

“많이 늦네. 그냥 들어가서 자 버릴까?”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들었다.

“룸메이트가 늦어도 걱정해주는게 인정인데 조금만 더 기다리자. 그래. 룸메이트. 그 표현 좋네.”

허무하게 웃으며 골목을 바라보는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천천히 드러나는 모습이 낯익었다. 유현이 차도 타지 않고 걸어오고 있었다.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그 모습이 조금 비틀거린다.

“술을... 마셨나?”

겉옷을 더욱 여미고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쓸쓸한 그림자를 길게 길게 몰고 오던 그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가희의 눈이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커지며 반짝 빛났다.

“가, 가희니?”

“술 마셨어요?”

“기다린 거야?”

“출근해야 하면서 술을 마시면 어떻게 해요.”

“왜 기다렸어?”

“왜, 왜라뇨. 그냥 같은 방에 사는 남자가 늦으니까...”

유현이 피식 웃었다. 쓸쓸한 소리였다. 가희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유현이 눈을 들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현수를 만난 이후 하루종일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서주의 잔상. 그녀의 말 그대로 너무 빨리 해방된 것 같은 미안함이 다시금 밀려왔다. 잊어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도 나쁜 것이었지만 이렇게 쉽게 잊은 것 같은 죄책감은 더 큰 아픔이었다. 잊을 수 없어서 아픈 것이든, 잊고 싶어 기억을 밀어내는 것이든 다 고통이겠지만 어느 순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더 큰 고통이었다. 크나큰 미안함이고 죄스러움이었다.

비틀거리며 다가선 유현이 가희의 어깨를 휙 끌어당기더니 그녀를 가슴에 안았다. 가희가 놀랐는지 짧은 비명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녀의 등을 누른 그는 그녀를 놓지 않았다.

“가희야. 이상하지? 인간이란 동물은 이렇게 쉽게 타성에 젖어버리는 존재일까?”

그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그도 지금 그녀처럼 마음이 불안한 것이다. 가희는 그것이 느껴져서 그의 품을 차마 밀어낼 수 없었다.

“한 사람이 눈이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서 나 많이 힘들 것 같아.”

‘네 새 새어머니가 날 끊임없이 감시하고 다그치는 이상 아마도 편하기는 힘들겠지? 편하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지?’

‘서주언니로군요. 언니가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힘든거죠? 그런거죠?’

엇갈린 생각에 두 사람의 마음이 아파왔다. 괴로운 호흡을 토해내는 그에게서 술냄새가 풍겨져왔다. 취기가 오르는지 불안하게 비틀거리는 그였다.

“들어가요. 많이 취한 것 같아요.”

“왜 기다린거야? 혹시라도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아니겠지? 역시 또 빌어먹을 의무겠지? 아침에 아버지랑 정원에 서 있는 널 봤어. 너 내 부모님한테도 의무를 다하는거니? 그렇게 할 건 다 하는 게 니 성격이니?”

알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새벽공기를 마시고 있는데 아버님께서 나오셨어요. 그 순간만은 아버님의 말씀을 정말 가슴깊이 느끼며 들었어요. 그건 아버님으로서가 아니라 좋은 말을 하는 윗사람으로서 들은 것뿐이에요. 그런 자연스런 대화마저 의무로 만들지 말아요.”

“그래. 그건 정말 다행이구나. 니가 모든 걸 다 의무로 생각하고 지내는 건 정말 숨막히잖아. 계약결혼이라는 단어도 숨막히고 네 냉랭한 태도도 숨막히고.”

그가 두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쥐었다. 그의 눈이 흐려졌다. 마치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싫으면 때려도 좋아. 맘대로 해.”

가희의 눈이 커졌다. 뺨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뭔가 뜨거운 느낌이 입술전체를 휩쓸더니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녀의 입술을 벌렸다. 벌어진 입술사이로 그의 혀가 밀고 들어왔다. 놀라움으로 심장이 급격하게 뛰었다. 입안을 세차게 파고들어온 혀가 그녀의 혀를 휘어감았다. 뜨거운 숨결이 입술 뿐 아니라 온 얼굴 전체를 덮었다. 뺨을 쥔 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숨막힌다고 외치던 그가 호흡을 갈구하고 있었다. 너무 숨이 막히니 그 숨결을 좀 나눠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숨이 막혀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숨을 나눠주는게 뭐가 죄가 될까. 인공호흡을 해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데 이게 뭐가 죄가 될까. 게다가 우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부인데 뭐가 죄가 될까.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강제적으로 벌려진 입술이 아닌 스스로 연 입술로 그의 입술을 훑었다. 유현의 몸이 일순간 주춤했다. 그의 팔을 살짝 잡았다. 긴장으로 팽팽해진 근육이 느껴졌다. 그대로 그에게 더 몸을 기대 그의 윗입술을 살며시 빨았다. 이빨로 살짝 물고는 그의 부드러운 입술에 그녀의 입술을 묻었다. 유현이 그녀의 허리를 힘있게 끌어당겼다.

... 깊고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유현은 이튿날 머리가 띵한 채로 잠에서 깨어났다. 웬일인지 이마가 축축해서 벌떡 일어나는데 무언가가 툭 떨어져 내렸다. 유현의 눈이 황당함으로 커졌다. 젖은 수건이 어느새 말랐는지 조금 눅눅해진 채로 무릎위에 떨어져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겨드랑이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손을 넣어 꺼내보니 기가 막히게도 체온계였다. 어딘가에 꽂혀 있을 링거바늘만 찾으면 완전히 병자수준의 처치였다.
황망하게 웃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가희가 들어섰다.

“술 마신 사람한테 체온계를 꽂는건 어느나라 처치법이야?”

“어? 깼어요?”

“그래. 숙취 내려주느라고 물수건 얹은거야?”

“밤새 열 많이 났어요. 몰랐어요? 다 나은 모양이네요. 처방전이 없어서 물약밖에 못 샀는데 효과가 있었나봐요.”

유현의 눈이 커졌다.

“약국? 그 밤에 약국을 갔었단 말이야?”

“찾느라 혼났어요. 무슨 남자가 술 좀 마셨다고 그렇게 열이 펄펄 나고 그래요?”

“그럴 리가...”

유현은 정말 신기할 따름이었다. 음식 때문에 조금 민감한 체질이기는 했지만 감기같은 잔병치레는 많지 않은 몸이었다. 스트레스가 병을 키운다더니 그게 맞는가보다라는 생각을 하는 그였다.

“그래서 그 밤에 약국을 찾아다녔다고?”

“그럼 어떡해요. 사람이 아픈데. 새엄마도 처음엔 그런식으로 아프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순간 유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희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체온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의사는 아니지만 이 정도는 괜찮은 것 같네요. 얼굴색도 괜찮...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가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머쓱해진 유현이 고개를 돌렸다.

“이 병원은 깐깐한 의사밖에 없는 것 같군. 예쁜 간호사는 없어?”

“나가보시죠. 라미아가씨가 대기하고 있으니까요.”

가희가 비웃듯이 말하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됐네. 간호사보다야 이왕이면 의사가 낫지.”

유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 위에 물약과 물약을 따르는 하얀 스푼이 놓여져 있었다. 게다가 그 물약은 소아용인 듯 색깔마저 주황색이었다.

“뭐야. 저런 약을... 게다가 저 스푼으로 먹인건가? 내 참. 사람을 완전 애 취급하고 뭐야? 저 여자!”

그러나 괜히 입가가 말려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꾸만 미소가 번지려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주황색 물약을 보고 있으려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결국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 날 이후 유현은 무엇인가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가끔씩 멍해지곤 했다. 그 망설임을 알 것도 같아 가희는 일부러 보지 않은 척 외면했다. 한사람의 눈이 지켜보고 있는데 그라고 어떻게 편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사랑했을텐데 왜 아프지 않겠는가. 그녀도 그런 것을. 평생을 그 눈에서 해방되지 않을 것 같은데.

며칠이 지나자 어느 정도 짐도 정리되었고 그녀의 공간도 나름대로 정해졌다. 두 사람은 마치 금이라도 그어놓은 것처럼 나누어진 공간을 사용하고 있었다. 넓은 방에서 그가 다니는 공간으로 일부러 다니지 않았고 그도 가희가 테이블에 앉아있을때는 서재를 이용한다든가 다른 곳을 이용했다. 그것이 오히려 편한 그들이었다. 일부러 너무 의식하며, 사사건건 부딪히며 복잡해지고 싶지 않은 것이 현재 그들의 마음이었다.

가희는 옷 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가방을 꺼냈다. 열어보니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새옷과 장신구들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바로 서주가 가던 날 그녀에게 사준 것들이었다. 기쁨에 넘치는 표정으로 세세하게도 챙겨주었던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났다. 미친 듯 다시 모아들인 그녀였다. 절대 버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피가 묻은 것들은 어느 정도 추려 태웠다. 그녀의 피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한참을 만지고 또 만지다가 가방을 덮었다. 옷장 맨위 수납장에 넣을 생각으로 까치발을 들어 가방을 밀어넣는데 무언가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잘못 미는 바람에 가방이 쿵하고 떨어져내렸다. 아슬아슬하게 발등을 피한 가방이 활짝 펼쳐져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미, 미안해. 언니.”

가슴이 아파와서 얼른 옷가지들을 다시 정돈해서 넣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참후에야 진정한 그녀는 테이블의자를 끌어 수납장을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상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탓에 가방이 들어가지 않았나보다. 상자를 옆으로 밀어 공간을 만들던 그녀는 문득 그 상자가 궁금해져 조심스레 꺼내보았다. 꽤 묵직한지라 땀까지 흘리며 바닥에 내려놓고 두껑을 여는 순간...

“아...”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세어나왔다. 머릿속이 텅 비었다. 명치 끝이 콕콕 쑤셔왔다. 유현의 모든 기억이 상자안에 가득 차 있었다. 차마 버리지 못한 서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녀의 사진, 때때로 유현과 함께 있기도 하고 혼자 있는 모습이 담기기도 한 사진들과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써내려간 편지들, 그를 위해 놓았음이 분명한 십자수와 정성이 가득 들어간 직접 짠 스웨터들. 서주가 가득 담긴 물건들이 하나도 변색되지 않고, 하나도 구겨지지 않은 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녀가 담겨진 상자가 그녀의 기억을 담은 옷가지들을 튕겨낸 것일까. 가희는 가슴이 아파져왔다. 이 것을 차곡차곡 담았을 때 유현의 마음은 어땠을까. 눈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프지 않을 것이라 치부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겨내려고 많이 노력했을 것이다. 그 혼란의 선상에 그녀 자신이 서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현씨.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이렇게 고마운 당신이니 나는 아파하지도 말고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만 살아야 하는걸까요? 언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 가슴이 다 모자른데, 하진이 생각만 해도 심장이 아픈데 당신에게 해 줄수 있는게 무엇이 있을까요. 당신의 결정을 져버리지 않고, 어머님 아버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앞으로 더 어떻게 나 자신을 붙들어야 하는걸까요. 당신말처럼 이렇게 타성에 젖어있다가 혹시라도 당신에게 익숙해져버리면 그냥 그대로 좋은 건가요? 그런가요?”

서주의 사진을 들어올려 가슴에 꼭 껴안았다. 웃고 있는 그 모습이 야속해서, 눈이 시리도록 곱고 고와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언니. 일년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언니를 모르던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죽어도 집으로 찾아가지 않을거야. 죽어도 언니를 만나러 가지 않을거야.”

상자를 덮으려고 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그녀의 손에서 사진이 툭 떨어져내렸다. 잠시 정적이 방안을 감돌았다. 유현이 문앞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눈물 젖은 얼굴을 훑더니 천천히 앞에 놓여있는 상자로 향했다. 순식간에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가희가 당황한 채 상자를 덮었다.

“미, 미안해요. 가방을 넣으려다...”

문이 쾅하고 닫혔다. 믿을 수 없도록 냉정한 표정의 그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그녀에게서 상자를 빼앗듯이 가져가 번쩍 들어올렸다. 그의 시선이 받침대로 썼던 테이블의자로 향했다.

“왜 꺼내 본거야?”

“그게 아니...”

유현이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캐내고 싶었니? 그래서 구석구석을 뒤진거야?”

그녀의 눈이 커졌다. 순간 서운함으로 물드는 그 눈빛과 마주친 유현의 시선이 냉정하게 돌아갔다.

“사생활을 간섭하지 말자고 한 쪽은 너였어. 잊었어?”

“잊지... 않았어요.”

내가 던진 비수가 그대로 다시 돌아와 내 가슴에 꽂혀버린다. 그래서 인간이 어리석다고 하는것일까?

“여기 있는 사람은 네 언니가 아니야. 민서주.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름은 네 언니가 아니야.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행동 하지 마.”

야속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궁금했어도 열어보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잘못된 호기심이 부른 어리석음일수도 있다. 그가 상자를 안아든 채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버렸다. 마치 단절시켜 버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방문이 닫혔다. 가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있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이 정상이었을지 몰라.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우리 두 사람이 그동안 너무 쉽게 타성에 젖어 있었나봐. 지금까지 이런식으로 삐걱거려야 했는지도 모르는데 정말... 잘 지냈었지? 서주언니. 그렇지? 그의 마음속에 있는 언니를 밀어내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내가 아니었나 싶어. 나 정말 무서운 아이지? 아파하는 척하면서 내 살길을 찾고 있었나봐. 정말 나쁘지?”

서재로 들어가 상자를 내려놓은 유현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꺼내 문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심한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담배를 쥔 손끝이 떨렸다. 서운함을 가득 담은 검은 눈망울이 생각나자 마음 한 끝이 무거워졌다. 사생활 운운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상자 앞에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마음이 차가워져 갔다. 그것은 사진에 담긴 서주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일수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의미인 듯싶었다.

“왜 발견한거야. 바보야. 왜 그 앞에서 그렇게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던거야. 상자를 여는 순간 무슨 생각을 했어. 이런 걸 보아봤자 혼자라는 생각이 커질 뿐이야. 이래서는... 서주도 너도 지킬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만다.”

유현은 이제야말로 태워버려야 할 때가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없는 그녀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던 그녀를 태워버리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가씨. 오빠 어디 있는지 알아요?”

방을 나선 가희가 라미를 붙잡고 물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빠. 아까전에 옥상 갔어요. 무슨 상자 같은 거 들고 올라가던데.”

“네?”

“깜짝이야. 왜 소리는 지르고...”

헐레벌떡 옥상으로 향하는 가희를 라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았다. 옥상문을 벌컥 밀어젖혔다. 매캐한 냄새가 흘러오더니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세어나왔다. 유현의 눈이 커졌다.

“너...”

“하지 말아요! 태우지 말아요!”

“오지 마!”

유현이 상자 안에서 물건들을 와르르 쏟더니 불안으로 획 던져넣었다. 던져진 사진들이 순식간에 화르르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유현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다짜고짜 달려온 가희가 맨손으로 불을 헤집더니 타들어가는 사진들을 끌어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유현이 손 쓸 세도 없이 그녀가 타들어간 재를 털어내며 사진을 끌어안았다. 유현의 불같이 화를 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가 온통 검정투성이가 된 그녀의 손과 가슴에서 사진을 빼앗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눈물을 머금은 가희는 사진을 끌어안은 채 몸을 말기만 했다.

“싫어! 그러지 마요. 태우지 마! 그럼 안 돼요. 미안해요. 다시는 당신 물건 손대지 않을게요. 다시는 아무것도 열어보지 않을테니까 화내지 마요.”

“민가희!”

유현이 소리쳤다. 그의 눈이 분노로 불타올랐다. 손이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하고 있는 말들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그녀였다.

“화상 입으려고 그래? 얼른 그 사진 내려놔. 제발!”

“미안해요. 당신이 서주언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언니 떠나기 전 당신 모습 잊을 수 없어요. 차갑던 얼굴이 언니앞에서는 환하게 변하던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나 하나 때문에 당신은 언니를 슬퍼할 시간도 잃은 거에요. 나 한사람 때문에 언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 거에요. 나 때문에 원치 않은 결혼식을 한 거에요. 나 때문에 당신은 사랑이란 기회를 잃은 거에요.”

시달리던 자책감을 순식간에 쏟아냈다. 그녀의 손에 온통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유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풀썩 주저앉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만하자. 이제 그만 과거에서 벗어나면 안 되겠니?”

그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어깨가 쉴 새 없이 들썩이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을 깨닳았다. 그녀가 저렇게 마음의 벽을 겹겹이 쌓고 있는 이상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무엇을 해도 그녀에게는 동정 내지는 의무로 비춰질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온통 막고 있었던 것이다.

“넌 도대체 얼마를 더 속죄해야 마음이 편해지겠니. 얼마를 더 살아야 내가 남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겠니.”

확실히 느꼈다. 서주를 추억으로 돌리는 일보다 가희의 마음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주는 것이 더 시급하게 느껴지는 자신을... 그녀말대로 서주의 죽음을 슬퍼할 시간을 그녀 때문에 잃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우선순위는 가희였다.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러니 그녀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은 해도...

“처음에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힘들이지 않고 받아들였어요. 어쩌면 나도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가는 것이니 똑같이 잃은 것이 있다라는 생각도 했어요. 너무 괴로워서 어떤 합리화라도 시켰어요. 그렇지만 몰랐던 거에요. 나는 그런 식으로 괜찮을 수 있지만 당신은 그대로 피해자가 된다는 걸요. 당신은 사랑도 잃고 필요없는 사람인 저 마저 책임지게 된 거에요.”

화를 내야 했다. 그게 아니라고.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그녀를 다그쳐야 했다. 지금 생각 같아서는 때려서라도 그녀의 야속하고 바보같은 입을 다물게 해야 했다. 그러나 유현은 힘이 빠진 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많이... 아프구나. 네가 나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그렇게...’

유현은 아무 말 없이 불을 껐다. 자칫하면 저 불구덩이 안에라도 뛰어들 것처럼 위태로운 그녀의 모습이었다. 불안해진 유현은 먼저 불을 끈 후 재가 된 것들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다시 상자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안 태울테니까 여기에 넣자.”

그녀가 여전히 사진을 꼭 끌어안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손을 뻗었다.

“그만하자. 제발 날 한 번이라도 믿어줘라. 혼자 모든 걸 판단하고 단정짓지마. 그게 널 고립시킨다는 걸 도대체 언제쯤 깨닳을래.”

그가 냉정하게 소리치더니 약간의 완력을 써 그녀의 품에서 사진을 빼앗아들었다. 상자안에 사진을 마저 담은 그가 상자를 그녀에게 쑥 내밀었다.

“네가 가지고 있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녀가 유현을 돌아보았다.

“...네?”

“어차피 이미 태워버리기로 결심했던 거야. 그러니 나에게는 이제 없는 것과 같아. 그렇게 불까지 헤집으며 달려들 거라면 니가 갖고 있어. 그럼 편하겠니?”

가희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겨우 웃어가며 상자를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런 그녀를 돌아보는 유현의 입에서 한숨이 세어나왔다. 여전히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손을 보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병원 가자. 손 치료해야지.”

“괜찮아요.”

“또 네 맘대로 괜찮아? 내가 안 괜찮으니까 제발 말 좀 들어!”

가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화를 버럭버럭 내던 그가 성큼 다가오더니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가서 먼저 좀 씻자. 이 모양으로 나갈 수는 없잖아.”

“....”

“넌 어떻게 그렇게까지 무모할 수 있는거냐.”

“상관 말아요.”

“또 시작이군. 입 험한 것 하나는 인정해준다.”

그가 가희를 끈 채로 아래층 동정을 살피더니 빠른 걸음으로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내 집에서 눈치를 보고 다녀야 하다니. 학교 다닐 때 외박하고 들어온 이후로 처음이다. 너 알아?”

“그러니까 왜 나쁜 짓을 하고 다녀요.”

유현이 기가 차다는 듯 단발마의 탄성을 내뱉고는 그녀를 욕실안으로 휙 밀었다. 그리고 그도 안으로 들어섰다.

“왜... 왜 들어와요?”

“손이 그 모양이면서 씻을 수 있어?”

“씻을 수 있어요. 나가요.”

“가만 있어봐. 팔이랑 얼굴만 대충 씻고 옷 갈아입어. 이리 내라니까.”

그가 괜히 화까지 내면서 그녀의 팔을 획 끌어 상처부위에 물이 닿지 않게 주의하면서 조심조심 물을 얹었다.

“화상이 얼마나 큰 상처인 줄 알아?”

“그쯤은 저도 알아요.”

“그렇겠지. 모르는게 뭐가 있으실까. 우선 급하니까 이정도로 닦고 옷이나 갈아입어. 재투성이 신데렐라도 아니고 도대체가...”

그가 수건을 건네주더니 욕실을 나섰다. 수건으로 닦고 있는데 옷가지를 챙겨든 그가 욕실문을 획 열었다.

“나와.”

“주세요. 여기서 입을 거에요.”

“혼자 못 입으니까 나와.”

“싫다니까요!”

“거 참. 말 정말 많네.”

그가 그녀의 팔을 획 끌어당기더니 그녀를 끌어냈다. 거의 포로 수준이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자꾸만 거칠게 행동이 나가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그 역시도 머쓱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는 듯 했다.

“원피스만 갈아입어. 자 팔 올려봐. 걱정마. 안 볼테니까.”

그가 등에 있는 지퍼를 내려준 후 고개를 돌린 채 원피스를 벗겨내렸다.

“자기 마누라 옷 갈아입는 것도 보면 안되니 나처럼 불쌍한 남자가 있을까. 우렁각시를 데리고 사는 것도 아니고. 내 참.”

툴툴거리면서도 자상하게 와닿는 손길이었다. 원피스를 벗겨내린 후 그가 내민 옷을 팔에 끼웠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가 선택한 옷이 앞에서 단추를 채우는 원피스였다. 입기 쉬운 옷을 고른 그의 배려일수도 있었겠지만 그녀의 입장으로 봤을때는 정말 난감한 배려였다. 천천히 앞으로 돌아온 그가 단추를 하나씩 하나씩 채웠다. 가까이에 선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을지를 생각하자 온통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조금씩 뛰던 심장이 그의 손이 가슴선을 언뜻 스쳤을 때는 쿵 떨어져 내렸다. 마침내 가슴선 위에서 단추를 채운 그가 천천히 마지막 단추까지 채웠다. 드디어 대작업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숨을 돌리려고 하는데 이미 옷 입기가 끝났는데도 그의 숨결이 멀어지지 않았다. 그의 손도 옷위를 떠나지 않았다. 잠시 멈춰섰던 흰 손이 천천히 올라오더니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쓸었다. 심장소리가 밖까지 세어나올 듯 시끄럽게 쿵쿵거렸다. 부드럽게 뺨을 쓴 긴 손가락이 귓불을 어루만졌다.

고개를 돌린 채 쳐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이 상황을 난감해 하고 서 있는데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어깨를 타고 내려가더니 손목을 살며시 쥐었다.

“가자. 아프지?”

“괜찮아요.”

“가희야... 한번쯤은 아프다고 해줘.”

그가 천천히 그녀의 팔을 들어올리더니 빨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손등에 살며시 입술을 눌렀다. 온 몸이 저릿하는 전율이 느껴졌다. 두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사실은... 많이 아파요.”

머뭇거리며 흘러나온 말에 그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돌았다.

“아프다는 말 듣고 안심해보긴... 정말 처음이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가자.”

그를 따라 나섰다. 가자... 가자... 자꾸만 그의 뒤를 끝까지 따르고 싶은 마음이 천천히 움트는 것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어머. 손이 왜 그러니?”

시새어머니가 놀라서 묻자 가희는 얼른 손을 뒤로 감추었다.

“아... 그냥 좀 다쳤어요. 별 거 아니에요.”

“조심하지 않구서. 아버지 걱정하시겠다. 아버지가 우리 며느리를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알지?”

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버지는 마치 가희의 아버지처럼 그녀를 위해주었다. 매일 저녁마다 선물을 들고 오시기도 했고 가끔씩은 밖으로 불러 점심을 사 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시아버지와 두 사람만 식사를 한다는 것이 영 어색하고 부담스러웠지만 갈수록 그 자리가 행복해지고 따뜻해졌다. 그의 말대로 자꾸만 이 곳에 뿌리를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칠 정도로... 한 자리를 차지한 파초처럼 그렇게.

“그런데 아직 손주 소식은 없니? 아버지가 영 기다리시는 눈치가 아니신데.”

“네? 저, 저기...”

당황한 가희를 쳐다보며 새어머니가 웃었다.

“아버지 참 주책이시지? 하긴 나도 고물고물 움직이는 우리 손주 손가락 빨리 잡고 싶긴 하구나.”

가희는 얼굴이 온통 붉어진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쨌거나 손이 다쳤으니 당분간 물에 넣지 말고 조심하렴. 주방일은 신경쓰지 말고.”

“죄송합니다.”

“손 다친 게 뭐가 죄송한 일이니. 그나저나 이 주책맞은 양반이 니 보약 지으려고 호통치실까봐 벌써부터 걱정이다. 한 번 시간내렴. 함께 한의원에 가 보자꾸나.”

“새어머니. 전 괜찮아요.”

“아버지가 안 괜찮으니 그게 문제지. 하여간 정 많은 양반이라니까. 젊은 시절의 카리스마는 다 어디가고 지금은 부처님같은 관용만 남아서 내가 좀 맥이 빠지는구나.”

새어머니가 싱긋 웃더니 출근채비를 했다. 가희는 사이좋은 시부모님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재성의 매장으로 출근한 가희의 붕대감은 손을 하진이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재고정리를 하던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재성도 놀란 듯 눈이 커졌다.

“너 손이 왜 그래?”

“음식하다가 조금 벴어.”

“그러길래 조심하지. 그 손으로 뭐하러 나왔어?”

“괜찮아. 이게 뭐 죽을병이니?”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하고 컴퓨터로 다가서는 가희를 따라 하진의 시선이 옮겨졌다. 그러나 가희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 백화점 좀 갔다 올게. 두 사람 점심 알아서 시켜먹어.”

재성이 나간 후 가희는 매장을 정리하고 하진은 저 쪽에서 선채로 각각 다른 일을 했다. 점심으로 분식이 도착하자 두 사람이 마주앉았다. 하필이면 오른 손이 다쳐 왼손에 젓가락을 들고 더듬더듬 김밥을 집어먹는데 갑자기 하진이 옆자리로 옮겨앉았다. 가희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가 아침부터 한 번도 웃지 않은 냉랭한 얼굴로 그녀를 외면한 후 젓가락으로 김밥을 집어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난 상관 말고 너 많이 먹어.”

“먹어 둬. 배고프면 더 짜증나는 애잖아. 너.”

가희가 피식 웃었다.

“내가 언제? 나 안 그래.”

“어쨌거나 먹어라. 어설프게 젓가락질 하는거 보니까 내가 다 답답해서 그래.”

하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가희가 결국 입을 벌려 김밥을 받아먹자 하진의 표정이 조금 환해졌다.

“나 단무지도 줘.”

“얻어먹는 처지에 옵션까지 챙겨 먹는 거야?”

“옵션이 아니고 기본이야. 뭐야? 툴툴거릴거야?”

“어찌 그렇게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냐? 결혼하면 다 그래?”

순간 하진의 조금 풀렸던 얼굴이 또다시 굳어졌다. 자책하듯 고개를 돌리는 하진을 쳐다보던 가희도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힘든 건... 아니지?”

하진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절대 아니야.”

그녀의 말에 하진이 피식 웃었다.

“절대라는 단어까지 쓰는 걸 보니 둘 중 하나네. 정말 행복하다던가 아니면 정말 힘들다던가.”

“사람 떠보듯 말하지마. 그런 거 듣기 싫어.”

“제발 사람 심장 좀 떨어뜨리지 마.”

하진이 손을 쑥 뻗더니 붕대가 감긴 그녀의 손을 들어올려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지?”

매몰차게 손을 빼기가 미안했던 가희는 고개만 끄덕였다.

“하진아...”

“왜.”

“안 내려갈거야?”

순간 하진의 눈에 원망의 빛이 돌았다.

“내려갔으면 좋겠어?”

그의 목소리가 차갑다. 그러나 가희는 더 차가워져야 했다.

“사실은 그래. 니가 여기 있으면 내가 걱정돼. 그냥 내려갔으면...”

“도대체 왜!”

“하진아.”

“너 왜 자꾸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거야! 처음엔 마음을 밀어내더니 이제 몸까지 밀어내는거야? 나에게도 시간을 줘. 사람들 방식이 다 같니? 외면하면서 잊는 사람이 있으면 눈에 새기면서 잊는 사람도 있는거야. 무엇이 옳다고 누가 판단해? 질척거리는 것 같아 싫다면 니가 여기 오지 마. 나 같은 놈 보기 싫으면 니가 고개 돌리면 될 거 아냐. 너 냉정한 거 잘하잖아. 그렇게 해. 인마!”

하진이 불같이 화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커지던 가희의 눈에 이내 잔잔한 미소가 돌았다. 그녀가 빙긋 웃으며 그를 불렀다.

“하진아.”

“....”

“하진아.”

“왜...”

“나 김밥 더 줘라. 배고파.”

힘주었던 미간이 천천히 풀렸다. 그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잖아. 혼란스러운 일들이 아무리 많아도 배고픈게 제일 급하지 않겠어?”

“너다운거야.”

“응?”

“그게 너다운 거라고. 힘들어도 웃어. 손 한쪽이 불편하면 뻔뻔하게 입을 벌려. 내가 싫고 부담스러우면 차라리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려. 말 돌리면서, 좋은 말로 걱정스러운 듯 말하면서 스스로 아프지 마.”

“알았으니까 나 김밥 빨리 줄래?”

하진이 피식 웃으며 김밥을 내밀자 그녀가 비시시 웃으며 입을 벌렸다. 그 입술에 눈이 가 자꾸만 돌려지려는 시선을 하진은 다잡아야 했다. 마음으로 약속한 자신과의 싸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직시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물고만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내뿜자 깊게 한숨이 섞여져 나왔다. 넓은 쇼윈도를 통해 들여다본 안에 그녀와 하진이 있다. 친밀한 그 모습에 명치 끝이 콕콕 쑤신다. 몇 모금 빨아들이지도 않은 장초의 담배가 그날따라 너무 써 던져버렸다. 한쪽 팔이 무거워져 내려다보니 부자연스러운 오른손으로 먹는 것이 서투를 게 뻔한 가희를 위해 사 온 초밥이 들려져있다. 마음의 무게가 더해 져 팔이 더 무거워졌다. 다시 안을 들여다보니 마치 다정한 연인같은 두 사람이 앉아있다. 무슨 표정인지 알 수 없는 유현이 그 자리를 뜬 후 길 옆 쓰레기 통에 초밥이 구겨진 채 버려있었다.








매일 밖에 나갈 수는 없어 이틀에 한번 꼴로 재성의 매장으로 찾아가기로 한 가희는 그 날 하루종일 집안 청소를 했다. 시부모님이 모두 의사인 관계로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고 라미는 라미대로 바쁘게 돌아다녔다. 결국 낮동안 집을 지키는 사람은 일하는 아줌마와 가희뿐이었다. 요즘 들어 유현의 표정이 더욱 굳은 것 같다. 손을 다친 다음날이었던가. 잔뜩 술에 취해 들어온 날 이후로 더욱 그랬다. 왠지 눈길을 피하는 듯이 느껴졌고 귀가하는 시간도 늦어졌다. 다음날 아침 가희가 내민 꿀물도 마시지 않은 채 아침마저 거르고 나간 날 이후로 더더욱 그랬다.

손이 많이 나았기에 하루종일 몸을 움직여 집안청소를 마친 가희는 저녁 준비를 한 후 가족들을 기다렸다. 시부모가 들어온 후 함께 커피한잔을 마시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라미도 들어와 방안에 있었지만 유현은 아직이었다. 잠시 후 걸려온 전화로 늦을 거라는 말만 하고 끊어버린 유현을 제외하고 저녁을 먹었다. 다시금 소원해진 듯 보이는 그들의 관계에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라미였다.

“오빠는 맨날맨날 늦네.”

들으라는 듯이 그 말을 해 버리고 방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라미를 빙긋 웃으며 쳐다본 가희는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을 받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하진이니?”

“왜 안나와? 어디 많이 아픈 거 아니야?”

“아니야. 손 조금 다친 거 갖고 너무 걱정하지마. 마치 내가 대단한 사람같잖아.”

“나한테는 대단해.”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지?”

“여기 집 앞이야. 나와.”

“뭐?”

“안 돼?”

가희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지금 나갈게.”

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모두들 잠자리에 든 것 같았다. 살며시 현관물을 밀고 밖으로 나가니 차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하진의 실루엣이 보였다. 차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하진이 웃었다.

“뭐라고 한소리 들을 줄 알았더니 의외로 착하게 나오네?”

“안 그래도 한 소리 할 생각으로 나온거야. 하진아. 나 이 집 딸이 아니고 며느리야. 이렇게 찾아오면 곤란한 걸 떠나서 내가 가족들에게 미안해. 이러지 마. 하진아.”

가희가 쓴 ‘가족’이라는 단어에 하진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들렀어. 너무 부담갖지 마.”

“부담 잔뜩 주고서 부담 갖지 말라면 그래지니?”

갑자기 그가 무언가를 쑥 내밀었다. 가희의 눈이 커졌다.

“하진아...”

소담스럽게 포장된 장미 한 다발이었다.

“난 받을 수 없어. 알잖아.”

가희가 고개를 돌리자 하진이 낮은 한숨을 내뱉았다.

“알아. 그냥... 향기만 맡아.”

냉랭하게 돌아갔던 가희의 고개가 다시 돌려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냥 향기만 맡아줘. 받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 그래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왔는데 빈손으로 올 수는 없잖아.”

갑자기 그녀의 눈에 눈물이 몽글몽글 차올랐다.

“모두들 왜 그래. 모두들... 어째서 이렇게 나한테 친절한거지? 난 해 줄게 없는데. 난 그만한 사람이 아닌데 왜 모두들 이렇게 베풀어주기만 하는거야? 어떻게 하라고.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어쩔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하진의 손가락이 훑었다.

“넌 그냥 그대로 있으면 돼. 아무도 너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않아. 다만 니가 니 자리에 잘 서 주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야. 나 뿐 아니라 널 위해주는 사람들은 모두 그걸 바라는거라고 생각해. 너에게 무엇을 원해서도 아니고 니가 대단한 사람이어서는 더더욱 아니야. 그냥 너이기 때문이야. 그냥 너이기 때문에...”

“난 무언가를 받기만 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나봐. 다른 사람의 이해와 사랑을 무조건 받기만 하려고.”

한없이 슬프게 가라앉는 차안의 분위기였다. 하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울지 마. 고작 장미꽃 한 다발에 인생 참회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인마.”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웃는 하진을 향해 가희가 갑자기 달려들어 목을 껴안으며 외쳤다.

“하진아. 미안해. 이제 제발 그만해. 나 지금 이렇게 잠시 너 보는 것조차도 불안해. 그러니까 이제 널 볼 수 없어. 이제 그만 해 줘. 제발.”

눈물을 가득 담은 호소에 남자의 가슴이 무너졌다.

“가희야...”

“이래서는 안 돼. 나 어쩌면 간사하게도 나 편한대로 변해버리고 있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날 보지 마. 앞으로 예전과 같은 눈으로 널 볼 일 따위는 없을거야.”

입술을 깨물었다. 꼭 해야 할 말들은 언제나 그렇게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법인가 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으면 안되는 말이 있다.

“그를... 좋아하니?”

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그와 난 그럴 수 없는 사람이야. 그렇지만 무시할 수도 없어. 이런 마음으로 더 이상 널 볼 수 없어.”

“그러고... 싶니?”

“응.”

하진이 가희의 어깨를 거칠게 틀어쥔 후 몸에서 떼어냈다. 그가 괴롭게 외쳤다.

“그럼 울지 말고 말해! 흐느끼지도 말고 아픈 얼굴도 하지 말고 말 해! 사라져달라고 말 해! 그만 없어져버리라고 말 해!”

“아프지 않아. 울지도 않을게. 이제 그만 가줘!”

가희가 눈물을 닦은 후 꾹 꾹 눌러가며 외쳤다.

“오기로 말하지 마! 정말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래.”

“내가 이 길로 어디든 가서 죽어버린다고 해도 그렇게 말할 거야?”

“그래. 그럴거야.”

어깨가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하진의 슬픔과 분노가 고스란히 손을 통해 느껴졌다. 그러나 그 분노에 달궈진 열은 세찬 물줄기를 들이부어서라도 꺼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물을 부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천천히 그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힘을 잃은 그가 그녀의 몸을 놓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랑을 잃은 후 두 사람이 파멸하지 않는 방법은 포기가 아니면 부정이겠지. 넌 부정을 택한 거니? 그렇게 독하게 날 밀어내려는 거야?”

“아니. 내가 택한 방법은 포기야. 널 포기해서 널 도울 수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부정하려고 해. 그만 들어갈게.”

차문에 손을 뻗치는 가희의 손목을 하진이 획 끌어당겼다. 힘겹게 그녀를 안아오는 힘이 느껴지는 순간 그를 밀치고서 미친 듯이 차를 뛰어나왔다. 차문을 세차게 닫는 순간 하진의 가슴도 함께 닫혀버리길 바랄 뿐이었다. 창을 통해 비치는 그의 모습에 한숨과 번뇌가 묻어나와도 고개를 돌려야 했다. 마지막 말도 해주지 못하고서 냉정하게 보내버릴 수밖에 없었던 첫사랑이었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던 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마지막까지 배려가 담긴 침묵을 주어서 고마웠다는 말을 언젠가는 해 줄수 있을까? 가희는 그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천천히 돌아서던 가희의 걸음이 멈췄다. 유현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반가운 마음이 앞서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러나 그의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어둡고 차가운 눈이 그녀를 향했다.

“유현씨.”

“친구는 잘 보내셨나?”

그가 손가락에 쥐고 있던 담배를 땅바닥에 던져 비벼끄고는 비웃듯이 말했다. 가희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그가 다가오더니 그녀 앞에 버티고 섰다.

“이거였나? 사생활을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가?”

그녀의 눈이 커졌다.

“내 말 좀 들어봐요.”

“뭘?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지? 집 앞에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옛애인 생각에 빠질 시간이 필요한건가?”

“유현씨. 난...”

하진과 헤어졌다라고는 말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지금 두 사람의 관계였다. 유현과 가희의 관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냉정함을 하진에게 안겨줄 수는 없었다. 옆에 없다고 해서 그 아픔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말 한 마디 없이 떠난 하진을 두 번 상처입힐 수는 없었다. 그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올리더니 그녀의 젖은 속눈썹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것이 바로 그 남자를 위해 흘린 눈물의 흔적인가? 법률상 아내라고 해도 내 여자를 안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내가 니 남편이다. 말해. 그런 내가 밉다고, 싫다고 말해! 니가 생각하고 있는 걸 말해!”

“술 마셨어요?”

“하! 술주정을 하는 것 같아?”

“술 냄새가 나서 하는 말이에요. 그만 들어가요.”

유현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의 눈앞에 성큼 다가온 그의 숨결이 뜨거웠다.

“그, 그만해요.”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눈이 험악해졌다.

“저 놈 때문이었어? 그래서 계약결혼이니 뭐니 운운한거야? 왜? 그 몸 그대로 저 놈한테 다시 가고 싶은거야? 그래?”

그녀의 눈이 커졌다.

“말도 안돼. 도대체...”

“말 해. 널 구해준게 누구지? 말해 봐! 너만큼 아픈 사람이 누구야? 나야? 아니면 그 놈이야? 말해 봐! 결국 널 아프게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야. 넌 저 놈 만이 아픈거야!”

“그렇지 않아요. 오늘 난...”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그의 눈에 조소가 돌았다.

“니가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을거야.”

으스스한 그의 말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순간 유현이 그녀의 손목을 획 끌어 대문을 밀어젖혔다.

“이거 놔요! 도대체 뭐 하는 거에요!”

“소리 질러 봐. 너도 부모님이 깨는 걸 바라지는 않겠지?”

이상했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평소의 그 같지 않았다. 무섭도록 차가운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살기라고 했나? 그의 눈빛에서 그런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처음으로 유현이라는 남자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그랬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었다.

“무서워요. 이러지 마요.”

“하! 무서워? 내가 무서워? 널 끄는 손이 그 놈이 아니라 나여서 무서운거야?”

이상한 비교였고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분노에 찬 그였다. 가희는 그에게서 빠져나가기 위해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가 빨랐다. 눈깜짝할 새 현관문을 밀어젖힌 그가 그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완력을 쓰며 그녀를 끌어 방문을 세차게 밀었다. 휘청거린 그녀의 몸이 그대로 침대위로 내팽개쳐졌다.

냉정한 검은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넥타이를 풀어헤친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가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뒷걸음질치며 본능적으로 옷깃을 여몄다. 그가 피식 웃었다.

“왜? 겁나?”

“제발 그만해요. 당신같지 않아.”

“나같지 않아? 그렇다면 정중히 물어주지. 나같은 게 어떤거지? 병신처럼 내 여자를 다른 남자 품에 내주는 것, 그게 나다운건가?”

“난 당신 여자가 아니에요. 뭔가 착각한 거 아녜요?”

그의 눈이 험악해졌다. 경계하듯 그를 노려보자 유현이 피식 웃었다. 그가 웃더니 나즈막하게 중얼거렸다.

“내 여자가 아니야? 그럼 내 여자로 만들면 되겠지.....”

“내 여자가 아니야? 그럼 내 여자로 만들면 되겠지.”

“무, 무슨 말...”

“너야말로 무엇을 착각하고 있지? 네가 나와 결혼한 이상 아무것도 해 줄게 없다면 그 몸이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니야? 당연한 사실을 아직도 모르셨나?”

유현이 이죽거렸다. 낯설고 낯선 그의 눈이고 목소리였다. 마치 깊고 깊은 물속에 침몰하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당신이란 사람 정말이지... 최악이군요.”

“이게 바로 니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의무야. 잊었어?”

유현이 재킷을 벗어던진 후 성큼성큼 다가와 가희가 입은 가디건을 거칠게 벗겨내렸다. 가희는 고개를 돌린 채 망연자실하게 앉아있었다. 곧 민소매차림의 그녀의 흰 팔이 드러났다. 거친 숨결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목선을 따라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거칠게 파고드는 그 입술이 뜨겁기는커녕 차디차기만 했다.

“이혼 하겠어요.”

목석처럼 누워있는 여자의 위에서 똑같이 목석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남자의 차가운 분노에 불이 붙었다. 팔을 쥔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고통스러운 듯 옅은 비명을 흘렸다.

“그만해요. 아파요.”

“아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칼날을 들이대고 넌 이 정도로 아프니?”

그의 하중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이 커지더니 미친 듯 그를 밀쳤다.

“그만해요! 다가오지 말아요!”

“막을 수 있으면 막아봐. 내 아픔만큼 그대로 전해줄테니 어떤지 느껴보란 말이다!”

차갑기만 하던 그의 손의 느낌과 호흡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더니 발버둥치는 그녀의 다리를 허벅지로 고정시켰다. 탄탄하게 옥죄어오는 하체의 힘으로 인해 벗어날 수 없게끔 고정된 그녀가 팔을 들어 그의 가슴을 쳤다. 그러나 아프도록 단단히 밀어붙이는 그의 힘을 감당할 수 없었다. 원피스 지퍼가 내려가더니 상체가 훤하게 드러났다. 어깨가 드러나고 가슴굴곡이 드러나더니 흰 브레지어속으로 그의 손이 파고들었다. 원망섞인 비명이 세어나오자마자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막았다.

브레지어를 위로 밀어젖힌 그의 손이 연약한 가슴을 움켜쥐었다. 비명이 세어나왔지만 그의 입술에 막힌 한숨은 안에서만 메아리쳤다. 온 몸을 비틀어보았지만 그의 힘이 그렇게 강하라리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다른 한 손이 무릎을 스쳐지나는 것 같더니 아프게 허벅지를 쓴 후 그녀가 상상도 못한 곳으로 도달했다. 단발마의 비명이 세어나왔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덮여버린 입술밖을 세어나오지 못했다. 눈물이 흘러 침대시트를 적셨지만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거친 호흡만이 그의 분노와 욕망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렇게 숨마저 막힐 정도로 밀어붙이던 그의 몸에서 천천히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허벅지안쪽을 쓸던 큰 손의 느낌도 잔잔해지고 힘을 잃은 그녀의 입술을 내리누르던 입술도 부드러워졌다. 더 이상 비명이 세어나오지 않자 그가 입술을 떼고서 그녀의 콧등에 입술을 다시 눌렀다. 눈물이 번져 얼룩진 뺨도 눌렀다. 흥건히 젖어버린 눈꺼풀도 눌렀다.

“울지 마. 소리치지도 마.”

탁한 그의 목소리는 분명히 부드럽지는 않았다. 마치 경계하는 듯한 투였음에도 낮은 애원이 섞여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느낌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봉긋 솟아오른 뽀얀 젖무덤에 입술을 눌렀다. 천천히 굴곡을 쓸던 입술이 목선을 타고 올라가 귓불을 살짝 물었다. 그녀의 입에서 한숨섞인 낮은 탄성이 세어나왔다. 순간 귀를 울리는 그의 숨소리에 뜨거운 욕망이 뿜어져나왔다.

젖무덤을 움켜쥐었던 손에서 이내 힘이 풀리더니 천천히 움직여 유두를 자극했다. 엄지손가락이 유두를 쓸고 지나갈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분명히 두렵고 무서운 그였는데 이상하게도 갈수록 몸이 천천히 닳아올랐다. 그가 몸을 들더니 그녀의 옷을 천천히 벗겨내렸다. 하얀 속옷마저 모두 침대밑으로 떨어진 후 빠르게 자신도 셔츠를 벗어던졌다. 가슴을 가리고 있는 그녀의 팔을 벌린 그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상체를 안아올렸다. 맨가슴이 맞닿는 순간 유현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를 눌렀다.

다시 그녀를 눕힌 그의 입술이 콧등에서 시작되어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더니 날카롭게 유두를 핥고 지나가 배꼽 근처를 배회했다. 온 몸을 동그랗게 마는 가희의 벗은 어깨를 그의 큰 손이 부드럽게 쓸었다. 파르르 떨리던 그녀의 몸이 진정이 되고 있었다. 배꼽을 지난 아래로 내려간 입술이 허벅지를 눌렀다. 그렇게 그녀의 온 몸을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하게 누르던 입술이 다시 가슴으로 돌아왔다. 입술을 벌려 그녀의 가슴을 입안가득 무는 순간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촉촉한 샘을 쓸었다. 온 몸을 찌르르 울리는 전율과 함께 그녀의 목안에서 탄식과도 같은 호흡이 세어나왔다.

유두끝을 자극하던 혀가 젖무덤을 배회하다가 다시 돌아와 분홍빛 유두를 물었다. 마치 아기처럼 잘근잘근 부드럽게 씹더니 다시 입안가득 물었다. 거친 호흡이 터져나왔다.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허벅지를 부드럽게 쓰는 손의 느낌이 와닿는 동시에 상체를 일으켜 세운 그의 몸 한부분이 뜨거운 호흡과 함께 그녀의 몸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두 사람의 호흡이 동시에 짧게 끊기는 순간 그녀가 침대시트를 움켜쥐었다. 온 몸을 두 팔로 지탱하고 있던 그가 이내 그녀의 목안 깊숙이 입술을 묻었다. 뜨거운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안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이 그대로 맞닿은 맨가슴을 통해 느껴졌다. 가희의 온 몸도 놀란 듯 경직되었다.

“무슨 마음인지는 몰라. 그래도 널 보낼 순 없어. 절대로.”

그가 외치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가희의 입에서 탄식이 세어나왔다.

“제, 제발...”

그의 몸이 리듬을 타듯 천천히 거세지더니 격렬해졌다. 파고드는 그의 힘이 느껴졌다. 몸 속 깊숙이 그가 느껴졌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였다. 가희는 고통으로 일그러지면서도 자꾸만 몸을 열며 그를 받아들였다. 곧추세운 그의 힘이 더욱 더 그녀를 밀어붙였다. 힘이 들어간 근육질의 팔을 지푸라기 잡듯 움켜쥔 가희를 향해 유현이 외쳤다.

“말해봐. 그만할까? 응? 그만해? 대답해!”

가희는 미친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따위로 대답하지 말고 말로 해. 그만해?”

“시, 싫어. 머... 멈추지 말아요.”

유현이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무릎위에 그녀를 앉힌 후 미친 듯이 입술을 찾으며 더욱더 안으로 파고들었다. 자신의 목을 휘어감은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외쳤다.

“말해. 날 사랑한다고 말해.”

“난...”

그녀가 눈물을 터뜨렸다. 그의 눈이 험악해졌다. 그녀를 거칠게 눕힌 유현이 그녀의 다리를 더 벌린 후 미친 듯 파고들며 소리쳤다.

“말해. 너도 나를 사랑해. 그렇지?”

“난... 몰라요. 사랑할 자신이... 없어.”

“젠장!”

유현이 그녀의 뺨을 움켜쥐었다.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그런 머리아픈 생각 따위 집어 쳐. 지금 이 순간만 생각해. 지금 이 순간은 날 사랑하란 말야! 빌어먹을 의무라도 좋아. 날 사랑한다고 말해. 넌 날 사랑해. 그렇지!”

그녀가 눈물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지금 이 순간 미친 듯이 그의 품이 격렬할 뿐이었다. 그 품이 뜨거워, 그 숨결이 숨이 막히도록 뜨거워 온기가 그녀를 감쌀 뿐이었다. 미친듯한 환희가 온 몸을 달굴 뿐이었다.

“말로 하라고 했지? 날 사랑해?”

“그래요!”

“그 놈보다 날 사랑해. 그러거지!”

“사랑해요!”

“날 더 이상 아프게 하지마. 알았어?”

“사랑해요!”

그의 눈도 젖어갔다. 오열을 터뜨리듯 사랑을 외쳐대는 그녀의 말에 그의 가슴이 타들어갔다. 사랑해서 사랑한다고 하는건지, 다른 이유로 사랑을 울부짖는건지,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을 인식이나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저 정이 그리워 그의 품에 파고드는건지, 힘들기만해서 저렇게 받아들이는건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은 그녀가 외치고 있지 않은가. 그 역시도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했으므로.

사랑해서인지, 질투인지 단순히 정복욕인지 아니면 그저 그런 동물적인 본능뿐인지 그도 자신을 알지 못했다. 지금 이순간은 그녀의 몸이 너무나 탐이 날 뿐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을 흥분시키는 그녀의 몸이 미치도록 갖고 싶을 뿐이었다. 그 몸안에 완벽하게 들어가고 싶을 뿐이었다.

“이혼 따위 없어. 계약결혼도 없어. 넌 이제 내 여자야!”

“사랑해요!”

그의 온 몸이 그녀를 휘어감았다. 견딜 수도 없을 정도로 그녀를 폭발시켜버리는 그의 힘에 온 몸을 열었다. 거친 숨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욕망에 달뜬 격정에 온 몸을 내주었다.

그녀에게서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다리를 들어올려 마지막 환희에 도달하는 순간 온 몸이 축 늘어진 그녀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그 뺨에 얼굴을 묻고서 긴 호흡을 토해냈다. 온통 땀에 젖은 그녀의 목과 가슴에 다시 입을 맞췄다. 그리고 방금전까지 사랑을 토해내던 그 입술을 다시 덮었다.

“사랑해!”

그가 외쳤다. 그러나 그녀는 젖은 눈꺼풀을 더 이상 뜨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신이 내뱉은 감정을 그대로 거울처럼 반사해서 들은 것일 뿐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되돌아온 메아리였을 뿐임을 황망하게 깨닳을 수밖에 없었다.

“사랑을 다그쳐. 그래. 그렇게 해서라도 널 보낼 수 없다. 젠장. 골치아프게 생각할 것 없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어.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네가 날 사랑하지 않더라도 넌 이제 내 여자야. 절대 안 놓는다.”

유현이 잠든 그녀의 어깨를 꽉 끌어안은 채 중얼거렸다.







다음날 새벽 가희는 눈을 번쩍 떴다. 간 밤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방안의 공기가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벌떡 몸을 일으킨 가희는 얼른 유현을 돌아보았다. 편안하게 잠들어있는 유현을 마주친 가희의 뺨이 확 닳아올랐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가희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덮은 뺨과 우뚝 선 콧날, 감고 있는 이지적인 눈매를 훑었다. 그냥 보기에도 냉정하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 어디에서 간 밤의 열정이 뿜어져나오는건지 아니 어떻게 자신이 그렇게나 미치도록 반응할 수 있었는지에 생각이 미치자 세차게 두근거렸다. 붉은 입술과 마주치니 심장이 쿵 내려앉아 가희는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흐르는 물줄기에 몸을 씻어내렸다. 분명 혐오스러울 거라 생각한 그와의 밤이었다. 어쩌면 언젠가는 그 위기에 닥치게 되면 죽어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져왔다. 매일 밤 그와 함께 한 침대에 몸을 눕히면서 늘 들던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그날 새벽 가희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여자가 된 느낌이어서 마치 자신의 몸이 성스러워졌다는 기분이랄까. 남자의 몸을 알아버린 다음날 새벽 그런 느낌을 갖는게 이상했지만 그런 기분이었다. 그의 손이 닿았던 몸 구석구석을 씻어내려가면서, 그의 입술이 닿았던 몸을 물줄기에 맡기면서 느낀 감정은 그것이었다. 그것은 혐오라기보다는 두근거림이었고 두려움이라기보다는 흥분이었다.

한참 물줄기에 몸을 맡기고 있던 그녀는 간밤에 그를 향해 사랑한다는 말을 쏟아내었던 일이 떠오르자 또다시 얼굴이 확 닳아올랐다. 까무룩하게 잠에 빠져들기 전 각인처럼 파고들던 그의 외침도 아련히 떠올랐다. ‘사랑해’라고 외치던 그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욕실문을 닫고 나오는데 침대가 비어있다. 심장이 뛰면서 고개를 돌리는 그녀앞에 유현이 서 있었다. 그가 방금 잠에서 깨어났는지 다소 부스스한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일어났어요?”

“샤워했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앞으로 그가 성큼 다가왔다. 그녀가 들고 있는 수건을 빼앗듯이 던져버린 그가 천천히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유현씨.”

“나 좀 책임져 줘.”

“네?”

“괴로워서 미쳐버릴 것 같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그가 그녀를 침대에 눕히더니 채 마르지 않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침대에 펼친 후 그녀가 입고 있는 가운을 벗겨내렸다.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앞섶을 여며쥐었다.

“유현씨!”

“니가 깨기를 기다렸어.”

그가 거칠게 가희의 손을 끌어내리더니 반쯤 열린 가운을 열어제끼고 아직 촉촉이 젖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놀란 그녀의 뺨을 그의 손이 어루만졌다.

“지금 니 모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란 걸 알아?”

“내려...가야 해요... 그만해..요...”

그 와중에도 쉼없이 움직이는 그의 손 때문에 숨이 막힌 그녀가 간신히 말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그만...”

그녀의 머리카락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그가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빠른 그의 손짓이 몇 번 오가더니 온 몸에서 가운이 벗겨져 나갔다. 샤워로 내려간 몸의 온도가 다시 천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브레지어 훅이 풀려져나갔다. 그녀가 탄성을 내뱉으며 그의 머리를 끌어당기는 순간 그의 몸이 다시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욕망에 거칠어진 그의 목소리와 눈빛이 탁해졌다. 그녀의 몸도 빠르게 열리기 시작했다.

“최고로 행복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게 해줘.”

그가 입술을 벌려 가슴을 더듬으며 탁하게 중얼거렸다.

“키스해줘.”

그녀가 입술을 벌려 그의 입술을 핥는 순간 그가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자신의 위로 그녀를 곧추 세웠다. 체위가 바뀐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그녀를 밀어젖혔다. 다시 격정에 불이 붙고 있었다.






유현은 그 날 아침 몇 시간이나 지각을 한 채로 출근을 했다. 그 새벽이 지나고 출근차비를 다 하고난 후 다시금 그녀의 입술을 끝없이 탐닉했다. 시부모님이 모두 나가는 모양인지 아래층이 어수선했음에도 유현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입술을 쉴새없이 탐닉한 후 또다시 그녀의 옷을 벗겨내리려는 것을 간신히 저지한 가희가 육탄전까지 벌여가며 겨우 방문을 연 후에야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며 방을 나서는 그였다. 또다시 그에게 잡혀버릴 것이 이제 슬슬 겁이 난 가희는 멀찌감치서 그를 배웅했다.

“이리 와.”

그가 구두를 신은 후 그녀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라미아가씨도 집에 있고 아줌마도 주방에 있어요. 그만 가요.”

가희가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며 말하자 이번에는 그의 눈이 험악해졌다.

“다시 올라갈까?”

“지각했어요. 알아요?”

“내 사무실에는 나밖에 없어. 나에게 지각 따위가 있을까? 얼른 이리와.”

“다녀와요.”

“그래. 좋아. 오늘은 하루 쉬어야겠군.”

그러더니 그가 천천히 신발을 벗으려는 듯 발을 빼고 있었다. 아연실색한 가희가 한걸음에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피식 웃더니 다시 신발을 신고는 가희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최고로 매력적인 향수를 발견했어.”

달려들줄 알았던 그가 예상외로 부드럽게 그녀를 껴안기만 한 채 중얼거렸다.

“네?”

“니 향기말이야. 내 몸에 제일 잘 어울리는 향수야.”

그러더니 안심하고 있는 그녀의 입술을 순식간에 덮는 유현이었다. 가희가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밀었다. 그러나 더욱 옥죄어오는 입술은 물러설 줄 몰랐고 결국 일하는 아줌마에게 그 민만한 장면을 적나라하게 들킨 후에야 그는 현관을 나섰다. 덕분에 가희는 하루종일 아줌마의 장난섞인 시선을 견뎌야 했다.

“젠장. 무슨 일이 이렇게 많은거야? 나 들어갈때까지 자면 안돼. 알았지?”

벌써 몇 통째 걸려온 전화였다. 그 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났다.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는 그런 감정이 두 사람의 가슴속에 각각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 일환인지 그날 하루종일 걸려오는 전화였다. 이렇게 전화할 시간을 아껴 일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마치 수업이 끝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문제아처럼 안달이 난 채로 걸려오는 전화에 가희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천천히 마치고 와요.”

“하루종일 뭐했어?”

“특별히 할 일 있나요. 그냥...”

“재미없었지? 내일쯤은 시간이 나니까 점심 때 나와. 맛있는 거 사줄게.”

“강유현씨. 미안하지만 내일 태양이 뜨려면 오늘을 빨리 마쳐야 하지 않겠어요?”

가희는 벌써 몇 시간째 전화통에만 붙어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이상한 남자를 향해 일침을 가했다. 그러나.

“아. 걱정마. 눈은 서류를 훑고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일하는데도 인정받으니 용하시네요.”

“이봐. 이봐. 지아비를 무시하는건 현명한 아내의 태도가 아니야.”

가희의 얼굴이 확 닳아올랐다. 지아비니 아내니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민망한 그녀였다.

“유현씨. 잠시만요. 네 새어머니. 유현씨. 저 아래층에 내려갈게요. 어머님께서 부르세요.”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뭐.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그, 그러지 말고 그냥...”

“그럼 끊는다.”

가희는 쇼 덕에 겨우 끊은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새어머니가 부른 일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빨리 전화를 끊어야 할 것 같아서 한 연극이었다. 겨우 숨을 돌리고 화장대 앞에 앉는데 다시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누구지?”

테이블옆에 앉아 전화기를 드는데.

“왜 거짓말했어? 새어머니 너 안 불렀다잖아!”

다짜고짜 화를 내는 유현이었다.

“유, 유현씨?”

“방금 아래층에 전화해봤어. 하! 거짓말을 하신다?”

가희는 눈을 멀뚱멀뚱 뜬 채로 이 기가막힌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 남자가 왜 이러지? 정말...

“아무래도 오늘 일찍 들어가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아. 피곤할텐데 먼저 자.”

게다가 토라진 것 같은 말투까지... 이 상황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기다릴게요. 되도록 일찍 오세요.”

“아니. 그냥 자. 밤새야 할 것 같아.”

“유현씨!”

아무래도 거짓말을 한 것에 화가 난 것 같은 말투였다. 그래서 얼떨결에 그를 불렀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왜?”

냉랭하게 묻는 그는 방금전까지와 너무 달랐다. 이 남자는 과연 속 좁은 남자인가?

“아... 그러니까 야식이라도 가져갈까... 해서...”

잠시 저 쪽이 조용하다.

“됐어. 그냥 둬. 그만 자라.”

딸칵. 이내 끊어지는 전화였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가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강유현이... 이 남자가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괜히 거짓말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확인까지 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강유현이란 남자가...

“토라진 남자는 전혀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가희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가 에라 모르겠다란 생각으로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결국 감았던 눈을 뜨고야 말았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가희는 결국 한숨을 내쉰 후 아래층으로 내려가 냉장고를 열었다. 안 쪽을 보니 야식거리가 있어 빠른 속도로 도시락을 싸서 주방을 나섰다. 조용히 현관을 다가서는데.

“가희니?”

“네? 어, 새어머니.”

그녀의 시선이 가희가 든 종이가방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어딜가니?”

“아. 저기 유현씨가 야근을 한다길래...”

가희는 괜히 쑥스러워서 말을 더듬었다. 새어머니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래도 이 밤에 위험해. 김기사를 부를테니 잠시 기다리거라.”

“아, 아니에요. 벌써 택시 불렀는걸요.”

“그랬니? 다음부터는 김기사를 부르도록 하렴. 그나저나 우리 현이가 기뻐하겠구나.”

가희의 얼굴이 발갛게 닳아올랐다. 새어머니가 인자한 미소를 지은 후 현관을 향하는 가희를 배웅하기 위해 다가왔다.

“주무세요. 새어머니.”

“그래. 잘 다녀오렴.”

가희는 다소 겸연쩍기는 했지만 도시락을 들고서 부푼 마음으로 회사를 향해 출발했다.









택시가 멈추자 내린 후 회사를 올려다보던 가희의 눈이 커졌다.

“한영그룹 오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벌써 문 다 닫았는데요?”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가희에게 택시기사가 말했다. 가희는 그야말로 맥이 탁 풀렸다.

“네. 그렇네요.”

“다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에요. 뒷문으로 한 번 가 볼게요. 그럼 가세요.”

친절한 택시기사에게 웃으며 대답한 후 뒷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철벽수비가 된 한영그룹은 꼭꼭 닫힌 채였다. 가희는 힘없이 정문으로 돌아와 난감하게 섰다.

“야근한다고 하더니... 아니었나?”

불현듯 유현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빙긋 웃었다.

“민가희. 너 웃기는구나. 이제 의심까지? 평범한 부부들이 하는 걸 다 하겠다는 거니?”

중얼거리며 도시락이 담긴 종이가방을 내려보았다. 한숨을 내쉰 후 택시를 잡기 위해 대로로 나섰다. 그러나 이미 밤이 깊은 지라 택시가 많지 않았다. 도로변에서 택시를 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낯익은 차가 그녀앞으로 끼익 멈춰섰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현씨?”

급하게 멈춰선 차 문이 열리더니 유현이 뛰어내렸다. 그가 한걸음에 달려와 가희앞에 섰다.

“이 밤에 겁도 없이 여기가 어디라고 와?”

“어, 어떻게...”

“집에 들어갔더니 새어머니가 길이 어긋났다고 말씀하시잖아.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난... 유현씨 화나지 않았어요?”

“화? 내가? 왜?”

반문하는 유현을 향해 가희가 눈을 깜빡거렸다.

“전화... 거짓말해서 화난 줄 알았어요.”

유현이 혀를 끌끌 찼다.

“도대체 넌 날 뭘로 본 거냐? 내가 그 정도 일로 화낼 사람으로 보여? 오히려 그 때쯤 일이 끝나서 장난친 거야. 늦는 척하면서 들어가려고 했더니. 너도 참 박자도 못 맞춘다.”

가희의 무릎에서 힘이 쭉 빠졌다.

“장난이요? 정말 그럴 수 있어요? 전 그것도 모르고 야식거리 들고...”

유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가 이내 가희의 손에서 종이가방을 받아들었다.

“이거 감격인걸? 너 착한 여자였구나.”

“놀리지 말아요.”

“놀리긴. 얼른 들어가자. 그건 그렇고 이 밤에 택시 타려고 한거야? 겁이 없군.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짓 하지 마. 알았어?”

“그러죠. 야식싸오는 ‘짓 ’같은 것 하지 않을게요.”

금새 뾰루퉁해지는 가희의 어깨를 유현이 끌어안았다. 온기가 느껴졌다.

“벌써 삐치셨구만. 자. 얼른 들어가자.”

유현이 가희의 손을 꼭 잡더니 차문을 열었다. 차안에 들어선 유현이 가희를 돌아보았다.

“우리 나온김에 드라이브 할까?”

“아니에요. 피곤할텐데 얼른 들어가요.”

“그럴수야 없지. 민가희라는 철의 여인이 날 위해 손수 야식까지 준비해 왔는데 이 날을 기념하지 않을 수 있나.”

“역시나 비꼬는군요.”

“이러지 마. 난 곧은 사람이라고. 너만큼 뒤틀려있지 않았거든.”

역시나 재빨리 노려보는 가희의 눈을 은근히 피한 유현이 핸들을 돌렸다. 가로등이 총총히 별처럼 떠있는 그 밤 유현과 가희는 까만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밤의 드라이브를 즐긴 후 집으로 돌아왔다. 식구들이 깰까봐 조심조심 방으로 들어선 후 가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야식은 어쩌죠? 아까워라.”

“먹어야지. 뭐가 걱정이야.”

“그럴래요? 그럼 빨리 차려올게요.”

“아니.”

일어서는 가희의 손목을 유현이 잡아끌어 무릎위에 앉혔다. 가희가 질겁을 하며 그를 밀었다.

“왜, 왜 그래요.”

“내가 음미하고 싶은 건 야식보다는 다른 거야.”

그의 사악한 미소가 시작되고 있었다. 가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기겁을 하고 그의 품을 밀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넌 갈 수 없어. 하루종일 기다렸거든.”

“그, 그런...”

유현이 가희를 번쩍 안아들었다. 그러나 가희는 사실 걱정이었다.

“유현씨. 저어...”

“응? 왜?”

“저어... 사실은 많이... 아파요. 그러니까...”

유현과 첫 잠자리를 한 후 하루종일 아팠던 그녀였다. 그녀의 말에 유현의 눈이 커지더니 얼굴이 상기된 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랬구나. 미안해.”

“그러니까... 저기...”

“알았어. 안기만 하는 건 괜찮지?”

“그, 그건...”

“그건?”

대답을 종용하는 유현이었다. 가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말로 하라고. 벌을 주겠어. 안는것에 키스 추가.”

“네?”

“보고싶었어.”

유현이 기습키스를 해오더니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의 한 손이 부드럽게 가희의 이마를 쓸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가슴이 떨려왔다. 마음 한 곳에 불안한 마음이 솟아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 품이 싫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보고싶었다라는 말이 반갑지 않았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길고 긴 입맞춤 후 입술을 뗀 그가 가희의 눈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아프게 해서 미안해.”

가희가 팔을 뻗더니 그의 목을 감싸안아 그를 포근히 안았다. 유현의 눈이 커졌다.

“가희야...”

“졸려요.”

천천히 눈이 감겼다. 마치 소녀가 된 기분으로 그가 쓸어주는 손길을 느꼈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따스함에 점점 더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오늘 집에 도착했을 때... 니가 없어서 나 많이 화 났었어. 네가 없다는 사실에 화부터 먼저 나더라.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넌 하룻밤만에 날 길들인걸까? 아니면 처음 만났던 날, 당차게 날 몰아붙이던 순간부터 이것은 운명이었던걸까. 뭐든... 네가 좋을대로 해석해. 난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니...”

잠결에 뺨을 스치는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사실 며칠동안 유현의 컨디션은 제로였다. 마치 지독한 고민이 있는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안달난 사람처럼 불안해보이기도 했다. 가희는 그의 눈과 마주칠때마다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돌려야 했다. 이유인 즉슨 바로 그것이었다.

유현이 지금 저렇게 정서불안같은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가희가 여자만의 의식에 걸렸다는 것. 가희는 피식 웃음이 세어나오기도 했다가 황당한 듯 혀를 차기도 했다가 좀 창피해져서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유현에서 흘러나오는 표정은 시종일관 원망이었다.

“여자들은 참 불편하겠어.”

유현이 커피를 마시며 중얼거리자 사과를 깎던 가희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리 좀 와봐!”

그가 가희의 손에서 과도를 강제로 빼앗듯이 내려놓더니 그녀를 획 끌었다.

“왜 이래요.”

무릎위에 그녀를 덜렁 앉힌 유현이 얼굴을 코앞으로 가져왔다. 미동만 해도 맞닿을 거리에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그에게서 금방 마신 헤이즐넛향이 베어나왔다.

“이봐요. 민가희씨.”

어찌나 가까운 거리였던지 그 짧은 말을 하는데도 입술끝이 살짝살짝 닿았다. 이 상태에서 입을 열면 아무래도 그의 입술과 완전히 닿을 것 같아 가희는 눈으로 대답했다. 그가 픽 웃더니 그 짧은 거리마저 좁히며 다가와 입술끝이 닿고 말았다.

“언제 끝나십니까?”

입술을 살며시 벌리며 물어오는 그의 말에 가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치겠어. 날 좀 어떻게 해 줘.”

남자들은 갈수록 아이가 된다고 했던가? 유현에게서 이런 모습이 나오리라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가희는 마치 미지의 생명체같은 그라는 존재로 인해 혀마저 차고 있었다.

“소름 돋아요. 그만해요.”

“흠. 정말 못말리는 여인이로군. 벌을 받아야겠어.”

그의 입술이 다시 다가왔다. 질리지도 않는지 유현은 그렇게 단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서 그녀를 쓸고 어루만지고 입술을 겹쳐 왔다. 벌써 몇 번이나 숨이 막힐뻔한 경험을 한 가희는 질겁을 하고서 안간힘을 써 그에게서 빠져나가 문을 벌컥 열었다. 유현의 얼굴이 단호해졌다.

“이리와.”

“산소가 부족해서 그래요.”

“그으래? 그럼 함께 나갈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유현의 끈질김에 가희가 결국 외마디 비명같은 소리를 남기고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가 버렸다.

“커피 더 마실거죠? 아주머니!”

혼자 남은 유현이 담배를 꺼냈다.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돌았다.

“다가갔다 싶으면 저만치 떠나있고 잡았다 싶으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구나. 기어코 날 해바라기로 만들고 싶은 거니? 그렇게 되더라도 원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내가 선택한 여자를 행복하게 해 줄수 있다면... 아니 적어도 거부하지만 않아준다면 좋겠는데 말이다.”









이튿날 가희는 시부모님의 제안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오랜만의 황금연휴를 맞아 도심에서 떨어진 별장으로의 여행이었다. 가희가 들어오기 전에도 유현의 가족은 가족끼리의 여행을 자주 즐긴듯한 모양이었다.

담쟁이 넝쿨과 장미가 멋지게 흐드러진 별장에 도착하고나서 제일 바쁜 사람은 유현이었다. 정원에서 바비큐파티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밖에 나오면 당연히 남자들이 일을 해야 한다며 시아버지까지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는 통에 라미와 가희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아가씨. 경치 좋죠?”

“몰라요.”

쌩하고 지나가는 라미를 향해 짧은 웃음을 터뜨린 가희가 유현에게 다가갔다.

“정말 유현씨가 다 준비할 거에요?”

“그래. 경치 좋으니까 둘러보고 와. 공기도 몸에 좋을거야. 새어머니는?”

“좀 피곤하신지 잠시 눈붙이신다고 하셨어요.”

“그래? 그럼 우리도 잠깐 눈 좀 붙일까?”

“얼른 돌아보고 올게요.”

기겁을 한 가희가 재빨리 달아나자 유현이 픽 웃었다.

“너무하시는군.”

“현아. 불이 너무 약한 것 같지 않으냐?”

“글쎄요.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유현과 그의 아버지가 성공적인 바비큐파티를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적한 시골길에 개미가 복작거리고 있었다. 열심히 지나다니는 개미들을 피해 파릇한 풀들을 살짝 밟아가며 상쾌한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름모를 꽃과 풀들이 가득한 공간은 돈 한 푼 안 들이고서도 세상에서 제일 잘 꾸며진 정원의 모습이었다.

민들레를 닮은 노란 꽃을 꺾었다. 분명 민들레는 아니었지만 이름을 알리 없는 가희는 그 꽃을 그냥 민들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손에 민들레를 든 채 빙글빙글 돌려가며 걷는데 개울가가 보였다. 폭이 좁은 고랑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참 맑았다. 그 물에 손을 담그고 싶어 다가가 가만히 물안을 들여다보니 갑자기 소설 소나기가 생각났다. 돌을 퐁퐁 던지며 친해지고 싶었던 소년을 막은 깜찍한 장면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천천히 미소짓고 있는데 수풀이 갑자기 부스럭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희는 질겁을 하며 총알처럼 튀어올라 뒷걸음질쳤다.

“느, 늑대? 이, 이리?”

너무 놀라면 오히려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는가? 가희가 지금 그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충격을 받고 있는데 수풀이 더욱 심하게 움직이더니 무언가가 툭 튀어 나왔다.

“꺄아아악!”

순간 풀썩 주저앉는데...

“괜찮아요?”

수풀에서 뛰어나온 정체불명의 생명체는 다름아닌 사람이었나보다. 가희가 부들부들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들었다.

“사, 사람이었구나.”

본의 아니게 가희를 기절직전까지 몰고간 사람 즉 낯선 남자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손을 뻗었다. 가희는 고개를 저어가며 가까스로 혼자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쯤 되자 또다른 두려움이 덜컥 들었다. 최소한 야생짐승은 아니었지만 지금 앞에 선 사람은 낯선 남자였고 이 곳은 인기척이 전혀 없는 시골길이었다. 아직 방심할 단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모자덕에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등산중이었는지 어드벤처를 하는 것인지 마치 탐방대와 같은 차림으로 모자를 푹 눌러쓴지라 그 얼굴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었다. 아니 확인할 겨를도 없이 가희가 몸을 획 돌렸다.
당황한 채로 걸음을 빨리 하는 가희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남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제주도에서 육지로 건너와 만나는군요.”

가희의 발이 딱 멈췄다. 그녀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네?”

남자가 천천히 모자를 들어올렸다.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남자의 얼굴은 맑았다. 저런 느낌은...

“누구세요?”

어디서 봤지?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셔서 혼자 술을 마신 기억이 나십니까?”

가희의 눈이 커졌다.

“기, 기억하죠. 당연히. 당신은 누구시죠?”

“그 때 그 클럽에 있었던 날파리입니다.”

순간 가희의 목에서 탄성이 세어나왔다. 술에 취해 얼굴은 기억할 수 없었지만 느꼈던 인상이 유현처럼 깔끔했다는 막연한 기억이 났다.

“그럼 혹시 그 때 그 남자?”

“네. 날파리인지라 제주도에서 여기까지 날아왔습니다.”

남자가 빙글거리며 웃었다. 그의 목에 카메라가 걸려있었다.

“촬영 중이셨어요?”

“그저 취미이죠.”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대단한 우연이군요. 저 나름대로는 이 우연을 로또 1등 맞을 확률 정도에 빚대고 싶은데 그대는 어떠십니까?”

“우연이라기보다는 그냥 딱 마주친 것 같은데요.”

“남편분과는 화해를 하신겁니까? 아니면 속세를 떠나신 겁니까?”

“설마요. 가족들과 함께 여행왔어요.”

“가족이라면?”

“가만히 대답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건데요. 제가 왜 당신말에 꼬박꼬박 대답해야 하는걸까요? 우리는 우연히 마주친 생판 남이 아닌가요?”

“너무 딱딱하시네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그대와 저는 부르스까지 춘 사이가 아닙니까. 그러니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 말아주셨으면 하는데요.”

“그렇게 만났기 때문에 더더욱 쳐다보기가 민망하네요. 그럼 전 이만.”

가희가 몸을 획 돌렸다. 외국에서 고국사람 만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지금까지 대화를 지속할게 뭐람. 어깨를 으쓱하며 몇 걸음 걷는데.

“반갑습니다! 백현웅입니다!”

갑자기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저 남자 뭘 잘못 먹었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들던 가희의 눈이 커졌다. 유현이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로 서 있었다. 가희가 기가 막히다는 눈으로 현웅을 돌아보았다.

‘혹시 지금 저렇게 외친 대상이 내가 아니라 유현씨인가?’

“정말 우연일까요? 아니면 필연일까요? 무척이나 반갑습니다만.”

남자가 여전히 신이 난 채로 만면에 가득 웃음을 띠며 말하고 있었다. 유현이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로 천천히 다가왔다. 가희는 눈을 깜빡거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생김새가 비슷한 두 사람이었다. 현웅이라는 남자가 지금 탐험복 비슷한 옷차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깔끔한 흰 셔츠 차림의 유현이 가희옆에 서더니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당신 누구지?”

“이런. 서운하군요. 다행히도 아직까지 자금사정이 위태롭지 않은 xx연구소의 백현웅입니다. 제주도에서 신부를 납치하려다가 주먹맛을 보았던 기억이 있지요.”

유현의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

“재미있군. 제주도에서 봤을 때는 그래도 멀쩡해보이더니 그 간 많이 상하셨군.”

“그 쪽도 제주도에서보다 훨씬 덜 겁나보이는데요?”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파바박 튀는 것을 감지한 가희가 유현의 팔을 끌었다.

“유현씨. 가요.”

“이봐. 함께 저녁 먹겠나?”

유현의 뜻밖의 제의에 가희의 눈이 커졌다. 현웅도 다소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아. 이걸 어쩌지요. 저도 참석하고 싶지만 할 일이 남아서 말입니다. 오늘 해지기 전에는 이 곳을 떠나야 해서 말이죠.”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유현이 손을 척 내밀더니 악수를 청하자 현웅이 말끔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쥐었다. 가만히 보니 유현보다 몇 살은 어린 얼굴이었다. 유현이 저렇게 반말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반가웠습니다. 아름다운 신부님은 특히 더 반갑네요.”

“고맙군.”

유현이 입으로는 웃으면서도 눈으로는 사납게 쏘아보며 대답하자 남자가 이내 몸을 돌리고 사라져갔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유현이 빙글 몸을 돌려 가희를 쳐다보았다.

“가자.”

무슨 말이라도 물을 줄 알았던 그가 별소리없이 그녀를 끌었다.

“안 물어요?”

“뭘?”

“저 남자요.”

“왜?”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해. 왜 매일 말끝을 흐리고 날 피해?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질릴 정도로 따박따박 대들던 널 기억하는데 왜 변하지? 내가 그렇게 부담스럽니?”

“.....”

“말 하지 않을거야?”

“실은 부담스러워요. 아직은 당신이...”

유현의 눈빛이 쓸쓸해졌다.

“이유가 뭘까. 넌 왜 그렇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걸까. 이제 마음을 열때도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냥 내 생각일 뿐인 걸까?”

가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주하고 싶어지는 이 기분을 그에게 말하기가 왜 이렇게 겁이 나는건지 모르겠다. 그에게 마음속의 말을 꺼내는 순간 모든 것이 흩어져버릴까봐 겁이 나는 것이 지금 그녀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유현이라는 사람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 그것은 두려움일까? 아니면 그의 말대로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일까.

“난 너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어. 많은 것을 얘기하고 싶고 함께 공유하길 바래. 지금 저 녀석을 우연히 만난 것 따위 우리에겐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화 낼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내가 그렇게 옹졸해 보이나? 지금의 나에겐 그런 감정싸움보다는 네가 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게 무엇보다 중요해.”

두근거렸다. 마치 소풍을 앞 둔 초등학생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내 눈을 똑바로 봐 줘. 왜 항상 내 눈을 피하지?”

유현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눈을 맞추지 않았다.

“얼른 가보는게 좋겠어요.”

황급히 떠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져 내린 유현의 손이 외롭게 내려갔다. 마치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서둘러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유현이 아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현은 그 날 저녁 다름없는 모습으로 가족들을 대했다. 가희도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서 쉽사리 유현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평화로운 시골에서 가족들끼리의 오붓한 파티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마침내 모두들 잠을 자기 위해 뿔뿔히 흩어질 때까지도 가희와 유현은 두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방에 들어선 유현은 과음을 한 모양인지 일찍 잠이 들었다. 내심 그와 둘만이 있는 시간이 걱정이 되었기에 가희는 그것이 다행이긴 했지만 막상 그가 지친 듯한 표정으로 등을 돌린 채 누워있으니 신경이 쓰여 마음이 무거웠다.

샤워를 마친 후 살며시 이불을 끌어 멀찌감치 누워 불꺼진 천정을 바라보았다.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불편한 마음에 뒤척이지조차 못하고 누워있는데 유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숨을 죽인 채 어둠속에 일어선 유현의 실루엣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달빛에 어스름히 비친 그의 실루엣이 움직이더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침대에서 내린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얼어있지 말고 편하게 자. 난 소파에서 잘테니.”

그가 냉랭하게 말하고는 천천히 소파쪽으로 다가갔다. 곧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정적이었다.

왜 그 밤에 눈물이 나는 것일까. 더없이 단란한 가족들 틈에서, 더없이 완벽한 남편의 옆에서, 더없이 따뜻한 말을 해주는 남자의 옆에서 가희는 왜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그것은 마음이 만들어놓은 벽, 그 벽에 부딪힌 가희가 아파서 울었다. 스스로 쌓은 벽에 갇힌 채 눈물을 흘렸다. 따뜻한 눈빛의 남자가 밖에서 벽을 허물며 출구를 준비해주고 있었건만 어리석은 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 자꾸만 안으로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자꾸만 어두워지는 그 통로가 외로워서 서럽게 울었다. 고개만 돌리면 따스한 출구가 기다리고 있는데도 눈을 돌려버린 어리석음으로 그에게 미안해 울었다. 아니 바보같은 자신에게 미안해서 그렇게 울어버렸다.

“도저히 내가 부담스럽고 내 곁이 싫으면 말 해. 너를 지켜주는 방법이 네 곁에 있어주는 것이 아닐 수도 있을테니 언제든... 말 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들썩이는 어깨를 그대로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나 가희는 알지못했다. 이미 느낌만으로도 그녀의 상태를 모두 알아버릴 수밖에 없는 유현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 N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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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가희는 늦잠을 잤다. 밤새도록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이였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니 유현도 아직 잠든 채 그대로였다. 이불이 소파에서 떨어져 있어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몸을 숙이는데 뭔가 뜨거운 기운이 확하고 와닿았다. 그의 숨결이 뜨거웠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니 그가 이마에 식은땀까지 송글송글 맺힌 채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펄펄 끓었다.

“유, 유현씨.”

가희가 뺨을 감싸쥐며 그를 부르자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젠장. 너... 내가 아픈 것... 같냐?”

그가 창백한 입술로 중얼거렸다.

“아, 아파요? 어디가...”

“아프긴... 뭐가 아파... 젠장.”

그 답지 않게 거친 말들이 튀어나왔다. 가희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눈으로 그의 이마를 쓸어올렸다. 머리카락을 적신 식은땀이 가희의 손마저 흠뻑 적셨다. 가희가 눈물을 터뜨리며 외쳤다.

“유현씨. 아파요? 많이 아파요?”

“밤새도록... 니가 떠나는 꿈만 꿨어...”

“기다려요. 어머님 불러올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몸을 일으키는 가희의 손목을 그가 쥐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다르게 힘이 전혀 없는 그의 손이었다. 가희의 목에서 결국 흐느끼는 소리까지 터져나왔다. 그가 힘없이 웃었다.

“왜... 울어? 겁이 나서?”

“몰라요. 묻지 말아요. 그냥 눈물이 흐르는데 어쩌란 말예요.”

“혹시 걱정되어서 운 거라고 말해주면... 좋을텐데...”

“이거 놔요. 빨리 병원에...”

그가 힘없는 눈으로 빙긋 웃었다.

“너... 울렸다고 새어머니가... 나 뭐라고 하시겠네...”

“유현씨... 장난하지 말고 놔줘요.”

“내 말... 들어줘... 잠시면 돼... 어젯밤에 한 말... 취소하고 싶어... 싫어도... 떠나지 마... 내 곁이 싫어도... 그냥 있어 줘라... 그냥....”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가희가 온통 눈물 범벅이 된 채로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가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며 그 앞에 주저앉았다.






“음식이 몸에 안 맞았던 모양이구나.”

링거를 꽂은 채 잠들어있는 유현의 옆에서 새어머니가 겨우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괜찮은 거겠죠?”

하얗게 질린 가희의 어깨를 새어머니가 톡톡 두드렸다.

“걱정 말아라. 타고날 때부터 체질이 좀 그랬어. 몸에 좀 안 맞으면 온 몸에서 열이 나고 그랬단다. 현이 어렸을때는 나도 몇 번이나 까무러쳤단다. 얼마나 걱정이 되었는지. 그런데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특별히 나쁜 음식도 없었는데 말이다. 의사말대로 스트레스성일 리는 없을텐데...”

그 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라미가 뛰어들었다.

“오빠! 새엄마. 오빠 많이 아파?”

“라미야. 여기서 떠들면 안 돼. 아무래도 라미 데리고 나가야겠다. 가희야. 니가 좀 있을래?”

“네.”

“싫어. 내가 있을거야. 새엄마!”

“쉿. 조용히 해야 한다니까! 얘가 왜 호들갑이니. 남들 보면 비웃어. 중병도아닌데.”

“뭐가 중병이 아니야. 지금 기절해있잖아.”

“약기운에 잠든거야. 아무래도 안되겠네. 가희야. 나가마.”

“네. 그러세요. 아가씨도 너무 걱정마세요.”

“언니. 미워요. 우리 오빠 아프게 한 거 언니 맞죠?”

“얘가 도대체 무슨 소리야. 얼른 나가자.”

새어머니가 당황해하며 라미를 끌었지만 라미는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가희를 섬뜩하게 노려보았다. 문이 닫히자 가희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렇네요. 아가씨. 내가 오빠를 아프게 하네요.”

천천히 그의 옆에 앉아 손을 꼭 쥐어 뺨에 묻었다.

“빨리 일어나요. 당신이 아픈 건 싫어요.”








어느 틈에 잠이 들었던걸까. 잠결에 무언가가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유현씨?
눈을 뜨고 고개를 번쩍 드니 역시 그가 빙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고 있었다.

“여기로 올라와.”

그가 옆자리를 가리켰다.

“깼어요? 안 아파요? 답답한 곳은 없어요? 어디가 제일 아파요? 목 마르지 않아요? 의사 불러줘요?”

“하나씩 물어. 뭐가 그렇게 복잡해?”

유현이 빙긋 웃자 정신없이 분주하던 그녀가 겨우 차분해졌다.

“피곤하잖아. 여기서 자.”

“사람 놀래키지 말아요. 제발...”

“놀랐어?”

“그럼 잘 자던 사람이 갑자기 열이 펄펄 나는데 안 놀라요? 정말 나빠요.”

“잘 자긴. 소파에서 새우잠 자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미안해요. 그치만 너무 놀랐어요.”

“걱정되진... 않았어?”

“모, 몰라요.”

그녀가 민망한지 고개를 돌렸다. 유현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어찌나 솔직하지 않은지. 말해 봐. 과부 될까봐 겁났지? 그렇지?”

“이렇게나 약한 남자 믿고 살아가야 할 날이 오히려 걱정이네요.”

“또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들이대는 군. 이러니 내가 아파서 살 수가 있나. 도대체 이 놈의 몸이 왜 이러지?”

유현이 툴툴거리자 가희는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그의 표정이 아팠을 때와 사뭇 달랐다. 많이 나은 모양이었다.

"또 음식때문이래?”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남자가 그렇게 약해요?”

“계속 아픈 사람 자존심까지 건드리기야?”

“빨리 나아요. 정말 당신 아픈 거... 싫어요.”

가희가 먼저 팔을 뻗어 유현의 손을 잡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유현이 놀란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아프지 말아요.”

“가희야...”

가희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

“음식 때문에 픽픽 쓰러지는 당신?”

유현이 피식 웃었다.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어. 그건 바로 사람의 진심을 모르는 사람이야.”

“....”

“장모님. 네 새어머니 말이야. 정말 불쌍한 사람이시지. 너를 모르고서 미워만 하며 살고 있어서 나는 참 불쌍해. 나는 알겠는데... 왜 어머님은 모르시는걸까.”

유현이 손을 뻗어 가희의 뺨을 어루만졌다. 또다시 벽을 허물고서 출구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유현이 내민 손을 이제 잡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조금만 손을 뻗어 잡기만 하면 된다. 눈을 들어 그의 맑은 눈을 마주하고서...

“어머님께 유현씨 깨어났다고 말할게요.”

그러나 그녀는 또다시 벽을 허물지 못했다. 조금만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도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불안했다. 여기서 그를 잡아버리면 어떻게 될까. 함께 손을 잡고 탈출한 출구가 실은 낭떠러지면 어떡하지. 그래서 결국 그녀 때문에 그마저도 위험에 처해지면 어떡하지. 그런 불안한 마음에 결국 또다시 그의 손 바로 앞에서 팔을 빼고 말았다.
병실이 그렇게 쓸쓸해질 수 없었다. 유현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돌았다.

“지구끝까지 도망간대도 너라면 달려가 잡겠지만, 정작 너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잡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지. 아니면 스스로 옭아맨 동아줄에 묶인 채 손 뻗어주는 사람 따위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닐지 그런 생각에 무기력해지네..."









가희는 어제 백화점에서 시새어머니가 사 준 심플한 정장을 입고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가슴을 장식하고 있는 코사쥬가 예쁜 정장을 입고 내려오자 새어머니가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쁘구나. 역시 내가 옷 보는 눈이 있지?”

“네. 새어머니.”

“라미야. 새언니 예쁘지?”

“옷은 예쁘네요.”

주스에 스트로우를 꽂아 쪽쪽 빨던 라미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친정가는거라면 현이 퇴근하고 함께 가지 그러니?”

시새어머니가 라미의 말을 무시하며 말했다.

“유현씨 퇴근하면 피곤할텐데 혼자 다녀올게요.”

“아 참 그래. 내가 깜빡했구나. 자 이거 받으렴.”

새어머니가 흰 봉투를 내밀었다. 가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봉투를 받아들었다.

“이게 뭐에요?”

“아버지께서 주시는 용돈이란다. 필요한 데 쓰렴.”

“네?!”

가희가 놀라서 외치며 봉투를 다시 내밀었다.

“아니에요. 용돈이라뇨.”

“그냥 갖고 있으렴. 아버지가 좋아서 주시는거야. 며느리한테 용돈도 주고 챙기고 싶으신게지. 우리 가희가 아버지한테 점수를 땄나보구나.”

“새어머니...”

“난요! 아빠가 난 용돈 안 주셨어요?”

라미가 주스를 다 마셨는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배꼽티에 타이트한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모습이 발랄하고 귀여웠다.

“옷을 그런 꼴로 입는데 뭐가 이뻐서 용돈을 주겠니? 아버지 오시기 전에 얌전한 걸로 갈아입어라. 어서.”

“이 옷이 뭐가 어때서요? 입고 나가는 것도 아니잖아. 새언니만 용돈 주고 난 뭐에요?”

“오빠한테 주라고 할게요. 아가씨.”

“정말요?”

금세 반색을 하던 라미가 곧 가희와 눈이 마주치자 머뭇거렸다.

“돼, 됐어요. 에잇. 올라갈래.”

“라미야!”

위층으로 올라가던 라미가 곧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돌아보았다.

“새언니 나가는데 인사안하니?”

“저녁때 다시 볼 건데 무슨 인사는.”

“라미야아. 갈수록 얼마나 말을 예쁘게 하는지 새엄마는 참 기쁘구나.”

새어머니가 경련을 일으키듯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하자 라미가 곧 항복한 듯 중얼거렸다.

“알았다구요. 다녀오세요.”

“네. 아가씨.”

“그래. 그럼 얼른 다녀오렴.”

“다녀오겠습니다. 아버님께는 제가 저녁때 감사의 말씀 드릴게요.”

“안 그래도 된단다.”

팔짱을 낀 채 뜨악한 얼굴로 서서 두 사람의 말을 소리없이 입으로 따라하며 삐죽거리는 라미를 바라보며 가희가 웃었다.

“아가씨. 이따가 뵈요.”

“그러시든지, 아야. 새엄마 왜 자꾸 때리고 그래요?”

현관문을 닫는데 여전히 쥐어박히는 소리가 등뒤로 들려왔다. 가희는 빙긋 웃으며 집을 나섰다.







아침에 새새어머니가 아프다며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한 번 와 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가봐야 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피해서만 될 일은 아니었다. 한동안 괜찮아보이던 그녀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이유는 아마도 서주의 생일이 다가오기 때문인 것 같다. 유현 역시 말은 안 해도 달력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예민하게 인식하면서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던 가희였지만 아버지에게 언질을 듣고서야 유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서주의 생일이 지나가는 그 날까지 아무래도 모두들 힘든 나날을 견뎌야 할 듯 했다. 그래서 죽음은 그런 것. 사자(死者)가 눈을 감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남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 눈이 천천히 천천히도 감기는 것이 아닐지.

특이할 점은 현수가 먼저 가희를 찾았다는 것이다. 한 번 보러 오라는 뜻을 비추었다. 아무 이유없이 그런 말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 아무래도 마음이 무거웠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 상황이 혼란스럽기 때문이겠지. 가희는 막연한 불안함을 느끼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당신은 좀 나가 계세요.”

자리에 누운 현수가 아버지를 향해 말하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인 후 가희를 한 번 쳐다보고 밖으로 나갔다. 며칠 사이에 많이도 수척해진 아버지의 모습에 코끝이 찡해졌다.

“왜? 네 아버지가 안 됐니?”

기운이 하나도 남지 않은 모습으로도 냉랭한 목소리를 내는 현수였다.

“많이 편찮으세요?”

“보고도 묻니? 그럼 내가 아프지도 않은데 연극을 하는 것 같아?”

“그런 뜻 아니었어요.”

“여전히 정나미 떨어질 정도로 할 말은 다 하는구나. 그래. 너는 행복하니? 듣기로는 강실장과 아주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것 같다고 하던데. 염치도 모르는 것. 그래. 강실장은 어떻게 또 홀린거니? 아. 그렇겠지. 네 어미가 오죽 잘 가르쳐주었을까.”

새엄마를 모욕하지 마세요라는 말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이렇게나 능욕당하고 있는데 누구를 위해 분노를 쏟아낸단 말인가. 차라리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겠지.

“어차피 제가 할 일이 그것 아닌가요? 유현씨를 잡아 두는 것이요. 서주언니가 없으면 가치조차 없어 이 곳을 떠나려고 했던 그를 잡아 두면 그걸로 족한 것 아닌가요?”

“그래. 말 한 번 잘 하는구나. 어느 누가 그런 널 보고 불쌍하다고 하더냐? 마음속으로는 독을 품고 사는 독한 것이 네가 아니냐.”

“그 독에 제가 삼켜지는 한이 있더라도 서주언니 잊지 못해요. 언니 자리에 대신 있다는 사실도 잊지 못해요. 표면적으로 주어지는 이 행복이 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절대 잊지 않아요. 그러면 안심하시겠어요?”

그래서 몇 번이나 고개 돌렸어요. 몇 번이나 내민 손을 뿌리쳤어요. 더 이상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아프게 그 사람을 외면했어요. 이 이상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맹랑한 것. 어차피 네가 그 정도란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 놀랄 것도 없구나. 내가 너를 부른 건 몇 가지 충고를 하기위해서이다.”

“말씀하세요.”

“아이는 절대 안 된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가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를 예리하게 살피며 현수가 말을 이었다.

“너와 강실장의 피가 흐르는 아이 따위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네가 아이를 낳는다면 십중팔구 억울하게 죽은 서주의 혼령이나 지독한 네 에미의 혼령이 뒤섞인 아이일게다. 무섭지도 않니. 가만히 있는 서주의 불쌍한 혼을 건드리지 마라.”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한이 밀려와 식은땀이 맺혔다. 그녀의 말에 심장부터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대답해. 알았니?”

“알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제 몇 주 후면 서주 생일이다. 그날만은 네가 강실장의 곁에 없기를 바란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서주와 강실장, 정말 깊은 사이였다.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는지 너는 감히 상상도 못할 것이다. 대용품으로 품에 안는 너 따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마음이었다는 게다.”

어두워지는 가희의 표정을 바라보는 현수의 입가가 가늘게 말려 올라갔다.

“새어머니.”

가희가 침착하게 그녀를 부르자 현수의 눈꼬리가 길어졌다.

“그래. 또 무슨 되바라진 소리를 하고 싶지?”

“유현씨는 서주언니를 영원히 사랑할 거에요. 그러니 조급해 마세요. 건강에 안 좋으세요.”

“이... 감히 지금 니가 날 가지고 노는게냐!”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저... 저... 버릇없는 것 같으니라고.”

가볍게 인사를 한 후 핸드백을 들고 일어서려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새어머니. 서주언니는 누구를 닮았을까요. 지금도 언니는 많은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있을거에요. 그 가슴이 저 때문에 어지럽지 않기를 바래요. 그러기 위해선 새어머니께서 저에 대한 미움을 접어주셔야 해요. 언니가 말했어요. 제가 새엄마를 사랑하는만큼 언니도 새어머니를 사랑한다구요. 저와 새어머니가 계속 반목한다면 언니가 슬퍼할거라고 생각해요.”

“뭐, 뭐야? 당장 그 입 안 다무니!”

“처음부터 착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서주언니였어요. 이렇게 되바라진 소리한대도 그게 바로 저니까 이상할 것도 없어요. 그러니 절 미워하시는건 괜찮아요. 그렇지만 저 때문에 새어머니께서 계속 속상해하시면 언니한테 너무 미안...”

“당장 나가!”

분노에 찬 현수가 미친 듯이 소리치며 가까운 컵을 들어 냅다 집어던졌다. 그녀의 다리를 스친 컵이 벽에 날아가 깨진 채로 흩어졌다. 다리에 통증이 몰려왔지만 아프기보다는 메스꺼웠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버지와 일하는 아줌마가 뛰어들어왔다.

“에그머니나. 사모님!”

“도대체 이게 무슨일이오.”

“그, 그 뻔뻔한 계집아이한테 물어보세요. 얼마나 입바른 소리를 지껄여대는지 물어보라고욧!”

“죄송해요. 아버지. 저 그만 갈게요.”

“가희야...”

“죄송해요.”

“가희야!”

미친 듯 뛰어 대문을 나섰다. 휴대폰이 울렸다. 유현의 이름이 떴지만 가방안에 쑥 집어넣고 말았다. [대용품으로 품에 안는 너 따위와는...] 현수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서주와 강실장 깊은 사이였다!] 그 말이 비수라도 되듯이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화가 났던걸까. 새새어머니에게 되바라진 소리들을 쏟아낸 이유는 화가 나서였던걸까. 그런 말을 듣고나서 화를 주체하지 못해 뾰족하게 반응했던걸까. 정말 그런 이유로 덮어두어야 할 서주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새새어머니에게 항의한 것일까. 마치 언제 끝날지 모르는 후덥지근하기만 한 장마철의 습한 대기안에 심장을 담아둔 것처럼 답답해왔다. 미치도록 답답해졌다.

어차피 처음부터 언니의 연인이었다. 그 깊은 마음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꼈다. 그러니 유현이라는 이름안에 서주가 있는것은 당연한 것이다. 원망해도 안 되고 질투해서도 안된다. 그럼 지금 드는 이 감정의 혼란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야 말로 정말 배은망덕한 감정인가.

“너 따위를 살리려고 떠난 서주를 감히 니가 질투하고 있는거니? 그런 너에게 손을 뻗어준 유현을 몇 번이나 상처주고서도 오히려 원망하고 있는 거니! 천벌을 받을 것 같으니라고! 뻔뻔한 것 같으니라고! 감히 너 따위가!”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건만 그런 환청이 그녀를 괴롭혔다. 가희는 미친 듯 귀를 막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나갔으니 똑바로 처리해. 단 일이 커져 골치 아파지는 건 싫으니까 그저 약점 잡을 정도로만 처리해.”

현수가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 전화기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입가가 씩 말려올라갔다.
가희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메슥거림을 느끼며 비틀비틀 걸었다.

“재, 재성이한테라도 가야겠어.”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뻗는데 한대의 검은 자동차가 질주해오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택시가 아니네... 그런데 저 차가 왜... 그녀의 눈이 커지더니 비명소리가 급브레이크소리에 묻혔다. 그녀의 몸 바로 앞에서 급정거한 차가 멈춰섰다. 가희의 몸이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무릎을 접은 채 쓰러진 그녀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쉴 새 없이 많은 사람들의 잔상이 맺혔다. 그러나 그 순간 가장 커지는 잔상을 이제 깨닫는 그녀였다. 당연히 서주일거라 생각한 그 곳에 맺힌 영상은 유현이었다.

썬팅을 한 차유리 안에서 선글라스 너머로 조용히 가희를 지켜보던 남자가 천천히 담배를 꺼내물었다. 차문이 열리더니 나타난 미끈한 구두가 천천히 움직였다. 마침내 가희의 앞에서 우뚝 선 남자가 몸을 숙여 그녀를 안아들어 뒷좌석에 길게 누였다.
빨간 담뱃재가 몇 번을 타들어간 후 그가 이내 기어를 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쾅! 수화기를 세차게 내려놓은 유현이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도대체 왜 전화를 받지 않는거야!”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창밖을 노려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겉옷을 집어들었다. 방금 전 집에 전화를 하니 가희가 없었다.

“언니. 친정 갔어. 벌써 오전에 나갔는데? 몰라. 전화가 와서 받고 나갔나? 기억 안나네. 언제쯤 들어온다고 했냐구? 그냥 저녁 때 보자고 하던데? 근데 오빠 그거 알아? 아빠가 말이야. 오빠! 오빠!”

라미의 말을 흘려들은 후 가희의 집으로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아주머니가 가희는 이미 갔다고 말해주면서 안 그래도 현수가 또 짜증을 부렸다는 말을 살짝 귀뜸해주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렇게 전화도 안 받고 연락이 두절된 상태이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유현은 더 이상 그대로 있지 못하고 무작정 가희의 집으로 향했다.







“벌써 나갔네.”

현수가 자리를 보전한 채 차갑게 대답했다.

“네...”

“강실장은 안부의 말 한마디 못하는 사람인가?”

현수가 힐난조로 말하자 유현이 이내 눈을 크게 뜨고는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 죄송합니다. 새어머니. 많이 편찮으세요?”

“엎드려 절받기보다 더 구차하네. 그래. 집 나간 마누라가 그렇게 걱정이 되나? 일하다 말고 찾아올 정도로? 도대체 자네는 우리 서주를 기억하고 있기나 한가!”

유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숨이 새어나왔다. 또다시 나오는 서주의 이름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언제부터인지 그 이름이 듣는 것이 겁이 나 일부러 피하게 된 현수였다. 그녀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을 것이다. 유현은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곳을 나간 후 연락이 두절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가희도 새어머니 딸입니다. 제발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지 마십시오.”

“누가! 누가 누구 딸이라는 겐가. 자네 정말 나를 화나게 할 작정인가? 그것이 내게 어떤 소리를 퍼부어대고 나갔는지 안다면 그런 소리 못할걸세! 그 독한 말을 녹음해놓지 않은 것이 분통해 미치겠는데 서주를 잊더니 이제 나까지 모욕하는겐가. 게다가 그런 천박한 계집아이 따위 걱정을 어떻게 감히 여기서 할 수 있지? 어떻게 감히 내 집에서.”

“새어머니!”

“모르지. 또 어디서 추악한 짓을 하고 있을지. 태생이 그렇지 않은가. 보게. 자네도 그 천한 것에게 이미 홀리지 않았나? 그것이 밤에 어떤 여우짓을 한게지? 입에 올리기도 싫지만 그것이 자네를 홀리던가? 그래서 우리 서주는 까맣게 잊은거냔 말일세!”

유현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분노로 주먹이 떨려오고 있었다.

“그, 그만하세요.”

“자네가 나를 피한 걸 내가 모를 줄 아는가? 적어도 서주가 생각나서일거라 생각했네. 설마 자네가 서주와 나를 피했겠나. 그런데 아니었어. 지금 자네를 보니 알 것 같네. 그 년한테 홀려서 우리 서주를 잊은걸세. 그렇지않나!”

“그만하세요!”

유현이 집이 울릴 듯이 크게 소리쳤다. 일순간 현수의 몸이 움찔할 정도로 그렇게 유현의 눈에서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그 눈과 부딪힌 현수의 눈이 아주 잠시동안 겁에 질렸다. 지금 유현의 분노가 그 정도로 거세 있다는 것을 느끼는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 물러설 수는 없었다.

“믿을 수 없어. 어떻게 자네가... 자네가!!”

울부짖는 현수앞에서 유현이 결국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가희를, 그녀를 몰아붙이지 말아주십시오. 충분히 아픈 사람입니다. 손을 뻗어도 냉정하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이렇게 아픈데 왜 자꾸 어머님께서는 외려 나서서 그녀를 흔드시는 겁니까. 저에게도 이정도이신데 그녀에게는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도대체 어떤 말씀을....”

“자네가 뭘 알아! 왜 나만 탓하는거지? 우리 모녀를 능멸하는 쪽은 그년이란 말일세!”

“새어머니. 제발 그만해주세요.”

유현의 목소리가 비통했다. 현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잊은 거군. 우리 서주를 완전히...”

“정말 나쁜 말이지만... 이 제 간 사람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서주를 잊어야 제가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냥 잊혀졌습니다.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접니다. 차라리 욕을 하시려면 저에게 하십시오. 분노를 쏟으시려면 저에게 하십시오. 지금 저에게는 서주보다 가희가 중요합니다.”

현수의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서 주먹을 꾹 쥐었다. 커진 그녀의 눈에 핏대가 섰다.

“어, 어떻게 감히 여기서 그런 말을...”

“여기 어디 서주가 있다면 들어줘라. 서주야. 제발 들어주길 바란다. 널 잊은 것도 나고 널 상처준 것도 나다! 그러니 탓하려면 날 탓해라. 이제 제발 가희를 좀 놓아줘. 너의 성품을 알아. 그 성품에 부탁할게. 그러니 제발 가희를... 놓아줘라.”

“그만해! 당장 나가게!”

현수가 미친 듯 소리쳤다.

“새어머니. 서주가 죽고싶어서 죽은게 아니듯 가희도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겠습니까?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그 애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주세요.”

“서주는 죽고싶어서 죽은거네! 가희, 그 원수같은 것을 살리려고 제 몸을...”

“그렇다면 더더욱 서주를 편하게 해 주어야지요. 목숨까지 바쳐서 아낀 동생입니다. 왜 새어머니는 그런 가희를 아프게 하지 못해서 안달이신겁니까.”

“나가게!”

“새어머니.”

“당장 나가. 적어도 자네라면 날 이해해 줄줄 알았네. 그러나 아니었어. 자네는 이미 변했어. 몇 달간의 여유를 주겠네. 그 결혼 끝내게. 이혼해.”

“새어머니!”

“인정할 수 없어. 서주를 떠나보냈다고 자네가 말한 이상 더 이상 자네를 붙들 마음 없네. 내가 사업을 말아먹는 일이 있더라도 자네와 그것이 함께 있는 꼴은 더 두고 보지 않을게야. 절대로!”

“저는 이혼하지 않습니다.”

“자네 정말...”

“가 보겠습니다. 몸조리 잘 하십시오.”

유현이 냉정하게 일어났다. 독하게 그를 쏘아보던 현수의 눈에 다급함이 돌았다.

“강실장.”

미친듯 쏘아댔지만 금세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지금 그를 잃을 수는 없었다. 처음 의도했던 대로 밉디 미운 가희의 인생을 망칠 의도는 유현의 생각지못한 태도로 빗나가 버렸지만 그렇다고 그를 등돌리게 하는 것은 그녀로서는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게다가 지금 가희는 그녀가 파 놓은 함정에 걸려있다.

‘그래. 지금은 그것만으로 만족해야겠지. 그런 계집애에게 휘둘려서 막대한 손실을 볼 수는 없어.’

“내가 좀 심했네. 가희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주게.”

유현도 모를 리 없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철저히 타산적인 계산에 의해 나온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지금 말조차 어떤 의도로 나온 것인지 모를 리 없었다. 유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많이 화났나?”

“아닙니다. 내일 회사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 그래. 잘 가게.”

“가희에게 어머님 말씀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러게.”

‘만약 제 상태로 돌아온다면 말일세.’


가희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희미하게 눈을 떴다. 낯선 천정이 보였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일어나서 그런지 머리가 멍해왔다.

“여, 여기가 어디지?”

“생각보다 늦게 깨어났네요.”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의 등 뒤에서 쾌활하게 들려온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이 공처럼 커졌다.

“당신은...”

“이제 제대로 기억해 주는 건가요?”

현웅이었다. 도대체 그가 왜... 남자가 희미하게 웃자 가희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남자가 또 크게 웃었다.

“왜요? 자는 사이에 겁탈이라도 했을까봐 겁이 나나요?”

“다, 당신 뭐야! 왜 당신이 여기 있지? 여긴 어디야? 도대체 뭐야!”

미친 듯 소리치며 침대에서 뛰어내린 가희가 출구를 찾으려는 듯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난 남자고 당신은 여자입니다. 날 거치지 않고는 이 방을 나가기가 힘들단 얘기지요.”

“난 가겠어.”

“궁금하지 않나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

“매섭군요. 내가 말하는건 당신의 모습이 어째서 그렇게 정상적인 상태인지 그것이 궁금하지 않냐는 말입니다.”

“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지?”

그가 천천히 테이블에서 무언가를 들어올려 그녀에게 보라는 듯 내밀었다. 지난 번 시골에서 우연히 마주친 날 보았던 카메라였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생각끝에 그녀의 목에서 외마디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 저질...”

“멋진 나신을 적당히 촬영하고 다시 옷을 입혀 놓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요? 원래 이런 말은 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쉽게 안심을 해 버리길래 입이 근질거리는군요.”

불같은 분노를 기대한 현웅이 빙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흔들리던 눈동자가 이내 그에게 직선으로 들어왔다. 그 눈 너머에 감춰져있는 떨림이 느껴지는데도 꼿꼿하려 애쓰는 그녀의 모습에 현웅의 입가가 말려올라갔다.

“자. 그래도 궁금하지 않나요?”

“원하는대로 다시 궁금해졌어. 그래. 그 더러운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고 쳐. 그걸로 뭘 어쩌겠다는 거야. 간단히 말해. 당신 변태야 아니면 하수인이야.”

“구미가 당기는 질문이군요. 그렇지만 이 카메라를 더럽다고 하다니 너무했어요. 얼마나 비싼건데.”

그가 빙글거리며 그녀에게 눈웃음까지 쳤다.

“당신 정신병자야?”

이빨마저 부딪힐 정도로 온 몸을 떨려왔다. 침착하게 애쓰려해도 겁이 났다. 시종일관 웃는 그 모습에서 오한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세 가지 추리중에 적어도 하나는 답이 나왔네요. 그렇지만 사실은 셋 다 해당될 수도 있겠지요.”

“처음부터 의도적이었어. 제주도에서부터 그랬던거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이유가 뭐지? 무엇을 얻고 싶은거야!”

“당신의 존대를 한 번 듣고싶군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내 반말이라는 거 알아요?”

“내가 당신을 마음속 깊이 경멸하고 있는데 그까짓 존대를 해서 뭐가 달라질까?”

“무서운 여인이군요. 그렇지만 솔직하기도 하니 구미가 당기네요. 글쎄요. 당신의 나체사진으로 무엇을 할까요? 인터넷에 올릴까? 아니면 벽에 걸어두고 자위할때마다 쳐다볼까? 아니면 당신 남편한테?”

“미친놈.”

현웅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오호~ 세게 나가시는데요?”

“그 따위 존대 집어치워. 당신이 왜 그런 짓을 한 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해서 어쩌지?”

“무엇이 그리도 미안할까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계속해서 빙글거리는 현웅을 향하는 가희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당신이 그 사진을 어디에 사용하든 어차피 흔들릴 건 없으니까. 그것보다 당신일이나 걱정하는게 좋을거야. 여기서 날 죽여버리지 않는다면 감옥으로 가든가 아니면 지옥으로 떨어질테니까. 물론 두가지 길 다 내 손으로 안내하겠어.”

“아. 사양할게요. 난 정신병자이긴 하지만 살인자는 아니거든요. 당신을 죽일수야 없지요. 게다가 내가 죽고싶지도 않고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글쎄요. 굳이 설명하자면 마녀에게 백설공주를 죽이라고 사주받은 사냥꾼정도?”

가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신의 유치한 동화놀이에 휘둘릴 마음 없어.”

“이왕 시작한거면 동화가 끝나는 건 봐야하는 거 아닌가? 혹시 알아요? 일곱난장이라도 나타날지.”

“비켜. 당장이라도 당신을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그럴 수 없다니까요. 벌써 한참전부터 쫓아다녔는데 이제야 내 손에 들어온 당신을 그냥 보내 줄 바보가 있을까요?”

“차라리 날 죽여.”

“말한 걸로 아는데요. 전 살인자가 아닙니다.”

“아니. 당신이 날 죽이든 아니든 당신은 이미 살인자야. 내 모든 것을 죽여버려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면 그게 죽은 것과 뭐가 달라!”

“엄연히 다르지요. 사람이란 당장이라도 죽고 싶을 정도의 수치심을 겪어도 어느 틈엔가 다시 적응하고마는 동물이니까요.”

“그렇게 시니컬한 성격이라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용하는 짓을 하는거니? 당신이란 사람에게 남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글쎄요. 원래부터가 그렇게 타고난 걸 어떡하겠습니까. 약간 미친성분에 부정적인 성분이 첨가되어서 이 모양이 되었지요.”

가희가 그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당신의 그 비싼 카메라로 찍은 날 잘 사용하길 바래. 어차피 떠날 시기가 일찍 오는 것일 뿐일테니 언젠가 감사의 인사를 하러갈 때까지 기다려. 그 자리에서 그대로 그 정신상태로 .”

그녀의 비장한 눈빛이 현웅을 향하자 마치 우유막이 한 겹 쌓인 듯 희미하던 현웅의 눈동자가 천천히 맑아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를 쏘아보던 그녀가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현웅의 입가가 씩 말려올라갔다. 현관까지 다가섰을 때도 미동도 않던 현웅이 천천히 그녀를 불렀다.

“이봐요. 가희씨.”

“이봐! 민가희!”

“대답하지 않아? 그래요. 민가희씨. 이 소리를 잘 들어봐요!”

갑자기 무언가가 둔탁하게 벽을 향해 날아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파열음이 울렸다. 가희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카메라가 산산조각이 난 채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녀가 황당한 눈으로 카메라에서 현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현웅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그런 사진 따위 없었지만 아무래도 믿을 것 같지 않으니 카메라를 부숴버렸네요. 다시 말해두지만 이 카메라 엄청 비싼 거랍니다.”

“그래서?”

“먼저 석고대죄를 한 셈이니 이제 존대말 좀 써 주는거 어때요?”

“난 당신과 장난할 마음 없어. 도대체 당신은 뭐지?”

“글쎄요. 분명한건 연구소 직원은 아니란 겁니다. 제주도 역시 당신을 따라 내려갔고 별장에서 당신을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닌 사람입니다. 당신 남편을 일부러 자극한 사실도 있는 사람이지요. 그렇지만 저 카메라는 거짓이 아닙니다. 저 사진작가거든요. 물론 지질이도 못나가는 사진작가이긴 하지만요.”

현웅이 유감스러운 듯 말하자 가희가 기가 막히다는 듯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담긴 분노는 조금 사그라들어 있었다.

“그렇게나 솔직하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심하게 솔직하게 말예요.”

“오. 드디어 존대를 해 주시네요. 비꼬는 기운은 있지만 말입니다.”

“가슴깊이 경멸하고 있다는 것도 덧붙일게요.”

“기세로 봐서는 카메라를 부수지 않았으면 제가 박살났을 것 같은데요?”

“웃지 말아요. 미안하지만 나한테는 납치범과 웃고 얘기할 만큼 미친 성분 없어요.”

“아. 잠시 착각했군요. 우린 지금 납치범과 인질이지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가희는 도대체 이 남자의 저의를 모르겠다.

“자. 이제 날 청부한 사람이 누군지 그것에 대해 말해야 할 때인가요?”

다가오는 현웅을 가희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말하지 말아요.”

현웅의 눈동자가 커졌다.

“절대 말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요.”

“그래봤자 이미 마음속으로 짐작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짐작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아. 그러니 그만 해 줘요. 제발.”

“겁이 나나요?”

“겁?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니까 말하지 말아요. 내가 알고 있는 백현웅이라는 사람은 그저 나이트에서 만난 날파리일 뿐이야. 우연히 시골길에서 마주친 당신은 야생화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 사람일 뿐이야. 그러니 그만해요. 아무것도 말하지 마.”

“당신은 강한 척 하지만 바보같아.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게 뭐죠?”

“미움이 커지지 않는 것.”

“정말 바보같은 신파로군요.”

“미움이 커지지 않아서 나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 수평도 유지할 수 있을테니까. 그럼 그의 앞에 다시 설 수 있으니까. 찾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다시 앞에 서고 싶으니까. 집에서 나왔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니까...”

그녀의 목소리에 눈물이 맺혔다.

“정말 듣기 싫군요.”

현웅은 왠지 힘이 쭉 빠졌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왜 나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은거지요? 이대로 보내면 곤란해지는거 아닌가요? 말해봐요. 당신이야말로 얻는게 뭐죠?”

“지금 절 걱정해주는 건가요?”

가희가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그냥 한 번 언니 흉내를 내 보았을 뿐인걸. 언니라면 그렇게 말 했을 것 같아서 그래보았네요. 역시 내 천성에는 맞지 않다는 걸 느꼈지만...”

“당신 남편 말이에요. 그가 권한 저녁제의가 고마워서라고 해 두죠.”

“당신이야말로 신파로군요. 유치하기 그지없네요.”

“주먹맛이 매워서란 이유도 덧붙여 주세요.”

“백현웅씨. 하고싶은 말이 있는데 해도 될까요?”

“원하시는대로.”

“오늘 느낀 거지만 당신 눈빛이 흐려요. 그 안은 맑은데 겉이 너무 흐리네요. 그런 눈으로 세상을 카메라안에 담아봤자 잘못된 각도만 잡힐 뿐이라고 생각해요. 먼저 맑은 눈으로 세상을 쳐다본 후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세요. 그럼 정말 좋은 사진이 나오리라고 그렇게 생각해요. 이만 갈게요.”

몸을 돌리는 가희의 손목을 현웅이 낚아챘다. 가희가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그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가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말 몇 마디는 어쩌면 사람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마법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현웅의 모습이 그랬다. 방금전 그렇게 미웠던 감정이 무색할 정도로.

“아니요. 어차피 많이 어지러웠어요. 잘 쉬었어요. 그럼...”

“잘 가요.”

현관문이 찰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곧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잘 가요...”








몇 시간 전, 현웅은 가희를 침대에 눕힌 후 천천히 셔츠단추를 풀기 위해 손을 뻗쳤다. 분명히 차에 부딪힌 것 같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혼수상태에 빠진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니 깊은 잠에 빠진 것도 같았다. 준비해두었던 수면제 따위조차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몇 장의 나체사진만 담으면 끝이었다. 강유현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골을 만들기에는 적합할 것이다. 분노와 다툼이 점점 커지다 보면 두 사람이 분열될 것이다. 우연히 신혼여행지에서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가희를 유현에게 알린다. 그것이 현수의 각본이었다.

엄청난 미움과 오기였다.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느껴지는 현웅이었다. 처음 제주도에서부터 현웅을 시켜 그녀의 뒤를 감시하기 시작한 현수였다. 그저 지켜보기만을 원하던 주문이 강도가 점점 세지고 있었다. 고용된 사람으로서 현웅은 그녀의 말을 들어야 했다. 어쩌면 갈수록 더한 것을 요구할지도 모르는 현수였다. 그러면 그 말을 따라야 할 것이고...

현웅은 생각을 털어버리기 위해 고개를 내젓고 손을 뻗었다. 천천히 단추를 푸는데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수면제를 먹여야 할까? 흠칫 뒤로 물러서는데 그녀는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한 번 멈칫거린 현웅은 다시 그 단추를 풀기 위해 손을 뻗기가 망설여졌다. 한참 후 다시 손을 뻗어 마저남은 단추를 톡 푸는데...

“미안...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현웅이 기겁을 한 채 뒤로 물러섰다. 다행히도 그 목소리는 잠꼬대인 모양이었다.

“미안?”

아무래도 빨리 일을 마쳐야겠다싶어 손을 뻗는데 그녀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놀란 현웅이었다. 당황한 채 서 있는데...

“유현씨... 정말... 미안해요...”

천천히 흐느낌 소리가 커졌다. 맑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현웅의 눈이 커졌다. 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한 번도 말 못했지만... 가슴깊이 당신을... 사랑해요... 언니마저... 뒤로 할 정도로... 그렇게....”

현웅을 유현이라 오해한 모양이었다. 흐느낌이 점점 잦아들더니 안심한 눈의 그녀가 천천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유현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이었다. 현웅은 넋이 나간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골길에서 마주쳤던 남자의 얼굴이 생각나면서 그녀와 겹쳐보였다. 사랑에 빠진 연인, 그를 향한 독백, 잠이 든 채 그를 향하고 있는 순수한 고백... 그 모습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그렇게 그의 마음을 흔드는 어떤 것이 있었다.

그랬다. 렌즈에 담고 싶은 것은 잠든 나체를 한 불행한 여인이 아닌 사랑을 토로하는 여심이었다. 결국 현웅이 다시 손을 뻗었을 때 그의 손은 단추를 채우고 있었다.








원망의 깊이가 얼마나 크면 그렇게 독한 미움을 뿜어낼 수 있는 것일까. 아니 그것은 원망이라기보다는 분노인가? 가희는 참담함을 느꼈다. 현웅이 했던 말처럼 듣고 싶지 않은 척해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누구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그래서 가희는 이 밤이 더욱 추웠다. 그것은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아픔이었다. 그러나 영원히 묻어두어야 할 아픔이기에 마음은 더 착찹하기만 했다.

작은 가슴에 모두 담아두어야 했기에 그 무게가 깊어 온 몸이 비틀거렸다. 드디어 집 앞에 도착해 고개를 들었다.

“유현씨...”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유현이 서 있었다. 먼거리에서도 느껴지는 포근함에,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에 안도감이 들었다. 이렇게 무작정 좋기만 해서 무엇을 어찌해야 할까.
담배를 구두발로 비벼끈 유현이 천천히 다가왔다. 아무말 없이 다가온 그가 이내 가희의 턱을 들어올려 그 눈을 마주보게 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온거야.”

“그냥 바람 좀 쐬고 왔어요.”

그녀가 그의 눈을 피하자 유현이 손에 힘을 주었다.

“숨기지 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아 주면 안 돼요? 이런 일이 있었겠다. 저런 일이 있었겠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 주면 안 돼요?”

“그걸 원해? 내가 아무것도 묻지 않길 원해? 그냥 남남처럼?”

가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눈을 마주보고 있으면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매달리고 싶어진다.

“내가 하루종일 어떤 마음이었을 것 같니.”

“……"

“하루종일 발을 동동 굴렀어. 내가 스스로 이상할 정도로 그렇게 안타까웠어. 걱정스러워서 한시도 앉아있을수가 없었어. 마치 가출한 딸 기다리는 심정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아무것도 묻지 않을테다. 돌아오기만 하면 그걸로 된다. 돌아오기만 하면...”

“유현씨. 그만해요. 제발...”

“그런데 넌 아무말도 안 해. 그렇게 또 걸어잠궈. 아무리 두드려도 손만 아플 뿐이야. 그렇게 얼음으로 온통 널 얼려도 어차피 얼음은 그 안이 비치는거야. 다 보이는데 왜 자꾸 감추려고만 하니. 왜!”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당신얼굴 보는것조차도 겁이 나요. 당신앞에 이렇게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데, 아니라고 해도 이런 미움을 받고 있는 나를 인정하는 게 정말 싫은데…
말하지 말아요. 자꾸 말하면 나도 날 못 막을지 몰라.

“아니잖아.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야. 말을 해 줘야 알 거 아니야. 그렇게 외면하기만 할거니? 끝까지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거니?”

“잃을까봐 겁이 나요! 그래서란 걸 당신은 정말 몰라요?”

마침내 오열이 터져나왔다. 온 몸을 휩쓰는 고통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란 사람이, 저기 위에 서 있는 당신이란 사람이 불안해서 힘들어요. 내가 당신에게 무언가가 될 수 없는 사람이란게 불안해요. 익숙해지는게 불안해요. 당신이란 사람에게..,”

바람소리가 났다. 귀를 스친 바람끝에 이미 그가 그녀의 손목을 끌고 있었다. 대문이 열리고, 현관문이 열리고,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복도와 물건을 뒤로 하고 방문이 열렸다. 불을 켜지도 않은 채 유현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의 손에 의해 하나둘씩 옷가지들이 벗겨져 내려갔다. 마침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몸을 그가 거칠게 끌어안고서 침대에 눕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내가 니 옆에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겠어.”

유현이 괴로운 한숨을 토해내며 그녀의 입술을 더듬었다.

“입술을 열어. 니 온 몸을 열어. 너에게만 충실한 나라는 걸 도대체 언제쯤에야 알아주겠
니.”

“당신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걸 누가 정해! 내가 일직선으로 너에게만 향하고 있는데 왜 부정하는거야! 느껴지지 않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거니!”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험악하게 인상을 찡그린 유현이 그녀의 다리를 강제로 벌려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짧은 탄식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를 담은 그의 힘이 느껴졌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도대체 무엇으로 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생각해봐요. 불꺼진 방에서 욕망에 들떠 나눈 감정을 사랑으로 착각하는게...”

“입 다물어!”

야속한 가희의 말에 유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로서는 더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해지는 안쓰러움으로 이제는 그녀가 원망스러워지기까지 했다. 한발자욱도 양보하지 않고서 껍질만 싸는 그녀가 미워서 미칠 것 같았다.

“현실을 직시해요! 어차피 이런 관계로 지속된...”

“입 다물라고 했어!”

유현이 불같이 화를 냈다. 가희는 땅 속 깊은 곳으로 꺼질 것 같은 슬픔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유현이 손을 획 뻗어 그런 가희의 턱을 거칠게 돌렸다. 그의 눈이 으스스했다.

“욕망으로만 봤니? 그랬어? 너야말로 그래서 밤에만 나에게 문을 여는거야? 한번도 틈을 주지 않는 니가 그래서 밤에만 날 보는거야?”

“모르겠어요. 몰라요!”

“마음대로 생각해! 니 몸만을 원해! 미치도록 널 갖길 원해! 그것뿐이야! 그렇게 생각하는게 편하면 니 맘대로 생각해!”

그가 미친 듯 소리치며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마 고통을 이기지못한 가희가 그를 밀치며 괴롭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해요. 제발...”

“우린 이렇게 살면 되는거야! 그래.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러니 너도 행복해 해! 이런 밤만이라도 행복해하면 될 거 아니야! 하루종일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어떤 아픈 일이 있었든 내가 상관할 자격이라도 있어? 위로해 줄 자격이라도 있냔 말이야!”

거친 호흡이 쏟아져나왔다. 아프도록 강하게 유현의 하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통증이 밀려왔다. 그의 하중에 당장이라도 몸 아래가 끊어질 것 같았다.

“그만해요. 제발...”

“죽어도 포기 못해! 니가 밀어내도 넌 내 여자야. 죽어도 넌!”

폭풍같은 그의 힘이 그녀를 밀어붙였다. 평소와 같은 입맞춤도 없었다. 원망스러울 정도로 아프게 다가오는 그의 힘에 가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손을 적셨다. 유현의 가슴이 타들어갔다. 그러나 안타까움을 삼켜버린 분노와 아픔이 그를 몰아세웠다. 미치도록 그녀가 미웠다. 야속하도록 그녀가 미웠다. 그럼에도 아픈 신음을 꾹 꾹 누른 채 눈물만 흥건히 고인 그녀가 야속해져 멈출 수 없었다.

한 번만이라도 날 봐주었으면... 제발 한 번만이라도 나라는 사람을 생각해주었으면. 힘들면 손 뻗어주었으면. 오늘 같은 날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마음을...

“다른 사람은 상상할 수 없어! 내 생각을 누구도 상상할 수 없어! 결국 너도 알지 못하니 나만이 알고 있겠지. 그러니 너도 상상하지 마. 내 마음 따위 상상하지 마! 욕망으로 널 안는건지 아닌지 멋대로 추측하지 말란 말이야!”

까맣게 타들어가는 가슴처럼 칠흙같이 어두운 그 밤, 유현의 성난 외침이 안타까움을 밀어낸 채 그녀의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들고 있었다.


- NEXT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새벽, 유현이 벌써 일어났는지 욕실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가희는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지난 밤, 아픔과 슬픔 속에서도 자꾸만 그를 향해 팔을 벌리고 싶었던 유혹을 이율배반적으로 느꼈다. 그 아스라한 새벽의 기운속에서 가희는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었다.

서주에 대한 죄책감,그러나 생각할 시간도 없이 머물게 된 남자의 옆자리, 여유도 없이 화살처럼 흘러간 시간,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앞만 보고 살아온 시간들, 그러나 어느 새 마음을 온통 채워버리는 남자, 그저 습관으로 치부해버리기에는 위험하고 형태가 뚜렷해지는 남자의 모습에 가희는 지금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좀 더...
좀 더... 좀 더... 그러나 끝맺지 못하는 한 문장이 그렇게 길고 희미할 수가 없었다. 유현이 씻고 나왔는지 옷장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몇 분간인가 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꼭 감고 있는데 어느사이엔가 유현이 다가왔는지 그의 손길이 가희의 머리카락에 와 닿았다. 천천히 쓸어주는 느낌, 조용히 느껴지는 그의 숨결...

“가희야...”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더욱 질끈 감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내면부터 흔드는 목소리... 체취.

“난 너를...”

그러나 유현에게도 끝을 맺지 못하는 길고 희미한 문장이 있었나보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몇 초인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깊숙이 묻은 후 방을 나섰다. 한 남자가 밀물처럼 쓸려왔다가 썰물처럼 멀어져갔다. 가희는 그 조류의 흐름을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다.







몸에 열이 펄펄 났다. 유현이 출근한 후에도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는 가희가 이상했는지 새어머니가 방을 찾았다. 그럼에도 눈을 뜨지 못하는 가희의 이마를 놀란 그녀가 짚어보았다.

“세상에. 열이 펄펄 끓는구나. 이걸 어쩌니.”

“죄송해요. 새어머니.”

가희가 마른 입술을 축여가며 겨우 말을 꺼냈다.

“아픈게 뭐가 죄송할 일이니. 이걸 어째. 잠깐만 기다려라. 아무래도 현이한테 연락을...”

“어머님!”

가희가 놀란 듯 소리쳤다.

“아이고. 조심해라. 이렇게 열이 펄펄 끓는데 왜 일어나니. 왜? 무슨 할 말 있니?”

“유현씨... 부르지 마세요. 그냥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 같아요.”

시새어머니의 깊은 눈이 그녀를 향했다. 가희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그녀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좀 자렴. 식은땀 좀 봐라.”

“네.”

그녀가 나간 후 깊은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한참을 꿈 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희미한 시야로 라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자세히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걱정스러워하는 눈이 느껴졌다. 가희가 힘없이 미소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많이 아파요?”

“학교 안 갔어요?”

“내 멋대로 휴강했어요. 새엄마가 언니 옆에 있으라고 명령하기도 했고.”

“그런... 미안해요. 난 괜찮으니 얼른 학교 가봐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엄청 아픈 얼굴 하고 있으면서. 얼른 일어나봐요. 죽이라도 먹어야 약을 먹을 거 아녜요. 새엄마가 약 꼭 먹이라고 했단 말예요.”

툴툴거리기는 했지만 말끝에 걱정이 묻어나는 라미였다. 그 마음이 고마워 가희는 있는 힘을 끌어모아 반쯤 몸을 일으켜 기대고 앉았다.

“어, 얼른 죽 먹어요. 나도 약 먹는 것 보고 나갈거란 말예요. 이 좋은 날 내가 환자 병간호 하게 생겼어요?”

“아가씨.”

“왜, 왜요?”

“고마워요.”

“이, 이상한 말 하지 말아요. 고맙기는 뭐가. 칫.”

“귀여워요. 제멋대로이긴 해도 마음 따뜻한 사람이란 거 알고 있었거든요. 말은 그렇게 밉살맞게 해도 기분은 너무 좋네요.”

“이왕이면 좋은 말로 해 줌 어디가 덧나요? 제 멋대로는 뭐고 밉살맞게는 또 뭐람.”

라미가 쳇쳇거리며 숟가락을 내밀었다.

“설마 먹여줘야 하는 건 아니죠?”

“힘 없다고 하면 먹여줄래요?”

말은 막해도 귀여워보이는 라미의 하얀 얼굴을 보며 가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던 라미가 숟가락을 척하니 빼앗았다.

“줘봐요. 정 힘 없으면 먹여드릴게요.”

가희가 다시 그녀에게서 숟가락을 빼앗아 들었다.

“미안하지만 죽 먹을 힘은 있답니다. 착한 아가씨.”

“치. 누가 뭐라고 했나? 그럼 얼른 먹어요.”

“그래요. 죽이 참 맛있겠어요.”

“죽 따위가 맛있을게 뭐람. 물컹물컹하고 씹을 것도 없는 걸. 그러니까 아프면 언니만 손해라구요. 난 죽먹기 싫어서 아픈 날은 밖에 나가서 아프곤 했어요.”

“그건 덜 아파서 그런거에요. 앞으로는 그런 위험한 일 하지 말아요. 감시할거에요.”

“하여간 정말 정이 가다가도 돌아온다니까. 도대체 오빠는 언니 어디가 좋은거람.”

“글쎄말예요. 참 이상한 사람이죠?”

“그렇게 금방 시인할 건 또 뭐람. 지금 나 떠보는거죠?”

“죽 떠 먹을 힘도 없는데 아가씨를 어떻게 떠요?”

“우~ 정말 재미없거든요?”

“그래요? 난 아가씨랑 얘기하니까 너무 재미있고 좋은데.”

가희가 잔잔하게 미소지으며 라미를 바라보자 그녀가 좀 머쓱한지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언니 참 이상해요. 우리 오빠 돈 잘 버는데 언니랑 오빠 외식이나 데이트하는 거 한 번도 못 본거 같아요. 애교도 좀 부리면서 밥 사달라고 하면 오빠가 잡아먹나? 무슨 여자가 그렇게 뻣뻣해요? 우리 오빠 겉으로는 냉정해보여도 애교부리고 달라붙으면 거절 못하는 성격이란 말예요. 언니보면 딱 그 생각나요. 사포알아요? 왜 뻣뻣하니 까칠한 거 있잖아요. 부직포같은것도 가끔 생각나기도 하구요. 우리 오빠 알고보면 정말 부드러운 남잔데 언니는 그런것도 모르고 결혼했어요? 정말 이상해.”

팔짱을 낀 채로 불만을 터뜨리는 라미의 말이 귀여워 가희는 빙긋 웃었다.

“그렇네요. 난 정말 오빠에 대해 모르는게 많네요.”

“그렇다고 누가 의기소침하래요? 정말 이상한 새언니야.”

“라미아가씨 반만큼만 애교 있었어도 좋을 걸 그랬어요. 그럼 오빠도 행복했을텐데 그렇죠?”

“자, 자꾸 왜 그래요? 나갖고 뒤흔들고 엎어치고 매칠때는 언제구 왜 자꾸 약한 소리 하냐구요? 아프다고 착한 척하기에요?”

“아가씨. 참 귀엽네요. 부러워요.”

“그러니까 왜 자꾸 그렇게 약한 소리하냐구요. 내 말은 오빠가 언니 많이 사랑하는 거 같으니까 언니가 좀 더 애교도 부리고... 뭐 그렇게 하면 더 해, 행복해지지 않을까... 도대체 내가 왠 상관이람. 왜 이러지?”

이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라미였다. 아무래도 자기가 생각해도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대사라는 것을 깨닳은 모양이었다.

“만약에요, 이건 정말 만약인데요. 나... 오빠와 헤어진다고하면 아가씨 고소해할까요?”

갑자기 라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에?”

“더 늦기 전에 오빠와 내가 헤어진다면...”

“언니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난 우리 오빠 눈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오빠가 얼마나 언니 사랑하는줄 알겠는데 왜 그런 말해요!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언니 첨 봤을 때 오빠 사랑하지 않는다는 느낌 받았어요. 그렇지만 갈수록 두 사람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오빠마음이 느껴져서 그래서 언니가 조금 좋아지려고 했는데 어떻게 그런 말해요! 언니 정말 그런 사람이에요?”

“아가씨...”

“그래요. 솔직히 첨엔 우리오빠 옆에 언니 있는 거 싫었지만 이젠... 언니가 우리오빠 옆에서 떠나면 나 가만 안 있을거에요. 정말 가만 안 있을거에요!”

“후후. 정말로?”

“정말이구 말구요. 나 아직 어려서 잘은 몰라도 우리 오빠 나쁜 사람 아니잖아요. 솔직히 나한테는 우리 오빠만큼 멋진 사람 없어요. 언니한테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 말예요!”

그 심각한 상황에서 가희가 풋 웃음을 터뜨리자 라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비웃어요?”

“아니. 아니에요. 그렇지만 진지한 아가씨 보니까 마치 딴 사람 같아서.”

그러더니 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가희였다. 그녀가 허리까지 접어가며 웃어대자 라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닳아올랐다.

“정말 언니란 사람...”

“아가씨. 한국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죠. 오빠랑 나랑 헤어지면 아가씨가 고소해할까봐 절대 헤어지지 않겠다는 말을 하려고 한건데 중간에서 잘라버리고 혼자 흥분하니까 재밌잖아요.”

그녀가 계속 웃음을 그치지 못하며 말했다.

“엥? 그런 말이었어요? 나빠요. 그럼 중간에 아니라고 하던가. 괜히 흥분했잖아요! 아이고 아까워라. 내 화.”

“아가씨. 정말 귀여워요.”

“신나게 비웃고 나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아가씨. 참 예뻐요. 난 아가씨가 여태껏 이렇게 예쁜 사람인지 몰랐던 거 있죠. 늘 퉁퉁 부어있어서 그렇게 밉상일 수 없었는데.”

“언니!”

“소리지르니까 더 미워보이네요. 복어처럼 볼이 불룩해요.”

“죽 내놔요!”

이렇게 작은 아가씨도 정을 나눠 주는데 난....









“유현아. 너 많이 취한 것 같다. 그만 마셔.”

친구 강훈이 유현의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이리 줘. 오히려 마셔도 취하지 않아서 미칠 지경이니까.”

“한동안 퇴근시간 땡하면 집에 겨들어가서 친구들도 외면하던 놈이 왜 그러냐? 부부생활에 문제 있어?”

“닥치고 술이나 마셔.”

“강유현이나 웬 일이실까. 입이 꽤 험한데?”

“머리 울리니까 잔소리 할 거면 먼저 들어가.”

“너도 일어나라. 내일 출근 안 하냐?”

유현이 픽 웃었다.

“글세. 지금은 일이고 뭐고 다 관심도 없다.”

“일벌레가 무슨 그런 황송한 말씀이냐? 정말 무슨 문제 있는거야?”

“문제라... 문제야 많지. 태산이야. 쌓이고 쌓여서 다 짊어지기에도 부족하지.”

“그러길래 인마 너무 서둘러서 결혼한다 싶었다.”

“그래? 공처가이신 니가 한 번 말해봐라. 결혼이 그렇게 어려운 거냐? 사랑하고 보듬어주고 그게 결혼 아니야? 보기만해도 좋은 게 그게 사랑 아니냐고.”

유현이 또다시 스트레이트잔을 비우며 중얼거렸다. 친구의 어두운 눈을 강훈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대학학교 시절부터 친한 죽마고우였다.

“심각한 문제 있어?”

“온통 문제투성이라니까.”

“왜? 제수씨하고 안 좋아? 하긴 해놓고도 이상한 질문이다. 결혼생활에 문제 있다는건 제수씨와의 문제겠지.”

“그렇게 말하지마. 문제는 나야. 가희가 아니야. 그녀는... 좋은 사람이야. 아무리 너라도 가희를 나쁘게 말하는건 싫다.”

“발끈하기는. 누가 뭐라고 했냐? 괜히 생사람 잡지 마라. 니가 좋아하면 나도 제수씨 소중한 사람이리고 여겨.”

“니가 왜 남의 여자를 소중하게 여겨!”

“인마 너 오늘 왜 그래? 이래도 태클이고 저래도 태클이네. 사람 헷갈리게.”

“상처가 많아. 그래서 마음을 열지 않으려고 해. 그 마음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사실 조금 너무한다 싶어. 좀 야속하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그러네. 그렇지만 미워해도 나 혼자 미워할거니까 네 놈은 뭐라고 하지 마 인마!”

“누가 뭐래냐?”

강훈이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아니 오늘은 같이 좀 미워해줘라. 오늘만 허락할게. 우리 가희 너도 좀 미워해 줘. 나 많이 속상하다.”

“안 믿어. 인마. 미워하면 욕 할 거면서.”

유현이 낮게 웃었다.

“그래. 그러려고 했지. 미움도 사랑도 다아~ 나 혼자 하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네.”

“한숨쉬지 마. 안 어울려.”

“아니. 요즘은 나 자체란 인간이 한심스러워서 한숨이 절로 나와.”

“유현아. 서주씨 동생이잖아. 시작부터가...”

강훈은 친구의 얼굴을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상처가 될 말일 것이다.

“넌 가희를 몰라. 서주 동생으로서의 의미는 이제 없어. 서주와 그녀는 이제 나에게 별개의 존재야. 그만큼 내게 있어 다른 존재야. 가희는...”

“그렇지만 시작이 그렇잖아. 그걸 무시할 수 있어?”

“니 말이 맞아. 그러나 시작이 잘못 되었다고 꼭 비틀어져야 하는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내가 이렇게 빠져들어버렸다는 거야.”

“한마디로 외사랑의 수렁에 빠져든건가? 그 강유현이?”

“모르겠어. 이 미친듯한 끌림이 사랑인지 아니면 집착인지. 혼란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이 과연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냥 놓아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 뿐이야.”

“잘 생각해. 놓아주고 싶지 않은 것과 곁에 있고 싶은 건 다른거야.”

“그렇군. 그래. 니 말이 맞아.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안 난다. 사랑해서 붙잡고 싶은건지 아니면 강제로라도 그 자리에 묶어두고 싶은건지...”

“글세. 두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짐이 무겁다는 생각은 든다. 내가 서주씨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강훈아... 육체적인 끌림은 사랑이 아니냐?”

갑작스런 유현의 질문에 강훈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가 그만 마시던 술이 목에 걸렸는지 켁켁거리기까지 했다. 놀란 눈으로 돌아보는 강훈을 유현이 빙긋 웃으며 쳐다보았다.

“그냥 묻는거야. 인마. 놀라기는.”

“니 입에서 그런 말 처음 들어보는 것 같다.”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 나 가희만 보면 미칠 것 같아. 몸이 먼저 반응해. 이건 정말 욕망일 뿐인걸까?”

“사랑없이 섹스가 가능한 동물이 남자이긴 하지만 지금 니 늬앙스에는 사랑이 깔려있는데 뭘 혼란스러워하는거냐. 왜? 제수씨가 거부해?”

“그걸 거부라고 해야 하나. 인마! 그렇게 자세한 건 묻지 마. 그리고 가만히 듣자하니 누가 니 제수씨야? 형수님이라고 불러.”

유현이 강훈의 뒤통수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미친놈. 너는 내 마누라한테 형수라고 부르냐?”

유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강훈도 낮은 한숨을 쉰 후 곧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친구는 오늘 많이도 웃고 또 많이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시간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원한다면 생각할 시간을 줘야 할지도... 나 자신도 정리를 못하고 있으니 그녀는 오죽할까. 이런 마음을 그녀가 느꼈다면 내가 미덥지 않은 것도 당연한 결과일테지. 나는 정말 서주를 잊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털끝만치도 없었을까? 혹시 그녀를 잊고자 하는 무의식으로 가희를 본 것은 아닐까?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여져 깊은 생각 없이, 서로를 마음에 담는 과정없이 시간에 쫓겨 마음속에 꾹꾹 밀어넣은 것은 아닐까?”

“왜 그런 말이 있잖아. 위기속에 피어난 사랑은 오래가지 않는다고. 다만 정말 사랑한다면 그 위기를 기회로 돌려 빨리 편안한 마음으로 상대를 봐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셨어.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날 만약 내가 한 결정을 번복하는 일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부부가 된 인연을 내 손으로 끊어버리는 일이 있다면 아버지께서 애지중지 자랑처럼 기르셨던 파초를 뽑아버리시겠다고. 그것이 바로 갑자기 내린 결혼결심을 승낙하는 조건 비슷한 것이었어.”

“....”

“말 그대로 그것은 협박이셨지. 그렇지만 동시에 부탁이기도 했어.”

“아버님 성격이야 나도 잘 알지. 그렇지만 가족 때문에 헤어질 수 없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 그런 타당성을 하나씩 지우다보면 어느새 변명으로만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니까. 결혼은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외롭지 않을 것 같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끊임없는 자기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같아. 자신을 조금씩 양보해서 서로를 맞추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부단하게도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방에게 맞추었을 때 비로소 두 사람이 함께 설 수 있는게 아닐까… 물론 상대방도 똑같은 생각을 해 주어야 형평성이 성립하겠지. 그렇지 않으면 그건 한 사람의 희생에 불과할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면 너무 억울하잖아?”

“희생? 억울? 희생을 해서라도 받아준다면 억울하지 않을 것 같은데.”

“가희씨쪽이 네 일방적인 희생을 바라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어때? 가희씨는 그걸 원하니? 네 희생을?”

“그럴 리가 없겠지. 그런 여자 아니다. 가희는…”

“그게 바로 사랑이다. 남의 부부사를 내가 다 알리 없지만 네가 생각하는 가희씨가 너의 희생을 바라지 않는다면 분명히 사랑일 거라고 생각해.”

“부담스러워서 싫은거라면 어떡할래? 돌팔이야.”

“넌 어때? 무조건 밀어붙일 수는 있겠지만 가희씨가 부담스럽다면 계속하겠어?”

“아마 못하겠지.”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다가가. 가령 이 술처럼 생각해. 좋아하는 사람과 갖는 술자리는 부담스럽지 않잖아. 부담스럽기는커녕 그 시간이 행복하고 그 순간이 전부이지. 언젠가는 가희씨도 너도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마음없이 그저 그 자리만을 생각하며 행복할 날이 오지 않을까? 고민하는 자여. 너에게 길이 열릴 것이다. 어때? 멋지지? 후련하지?”

“난 사실 아까전부터 이 자리가 무지하게 지루하던 참이었어. 너란 녀석과의 술자리는 나를 미치도록 무료하게 만들어. 이 징그러운 자식아.”

“그러게. 근 십년동안 무료하게 많이도 마셨네.”

“필름이 끊길때까지...”

“그래.”

“정신을 놓을때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아니 정신을 놓지 않기위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더 마셔라! 그것이 정답이다.”

“그런가?”

“그렇지.”

이 밤,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은 작은 술잔에 담긴 내 한숨소리... 단숨에 들이켜 내 입술에 담아 그녀에게 전해주면 혹시라도 알아채 주려나...








가희는 물끄러미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직 열이 다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라미와의 대화 때문일까. 마음부터 가뿐해지기 시작하더니 머릿속이 천천히 맑아졌다. 인터넷으로 재성이 경영하는 쪽의 물류경향을 체크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돌리니 유현이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척 보기에도 많이 취한 모습으로 도어록을 잡고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다급하게 그녀를 훑었다.

“유현씨?”

그가 저벅저벅 다가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숨이 확 막여왔다.

“어디가 아팠어. 나 때문이야? 그러니?”

“그냥 몸살이에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녀를 유현이 품에서 거칠게 떼어내더니 그 눈을 마주보았다.

“또 나에게는 아무말도 하지 않겠다는거지?”

“술 마셨어요? 열이 나요.”

그의 몸이 뜨거웠다. 아픈 사람은 그녀가 아니고 그일지도 모른다.

“가희야…”

그를 보던 가희의 눈이 커졌다. 그가 천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고 있었다.

“왜, 왜 그래요.”

“나 니가 없어서 미칠 것 같아.”

“있잖아요. 나 여기 있는데... 왜 이렇게 열이 펄펄 나는 거에요.”

“옆에 있는데도 없는것처럼 느껴져서 그렇게 외롭고 허전할 수가 없어. 이렇게 내 눈 앞에 보이는데, 손 뻗으면 만질 수 있는데도 텅 빈 의자가 느껴져서 한없이 서럽다.”

깊은 한숨이 섞인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감정을 일깨운다.

“솔직히 말해 줘.”

유현이 아픈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쳐다보았다.

“솔직하게 말해줘. 차라리 말해줘라. 시간을 달라면… 줄게.”

유현은 시간을 준다는데 그녀의 시간은 멈춰버리고 만다. 안타까움이 시계바늘을 막아버리고 만다.

“늘 내 감정만 내세웠어. 네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힘들면... 많이 힘들면 말해. 니 말대로 계약기간을 더 이상 끌고 싶지 않으면 지금 말해 줘.”

가슴이 아파왔다. 그것은 오로지 유현의 아픈 눈으로 인한 안타까움이었다. 다른 것에 대한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계약결혼이라는 말까지 써가며 지속한 결혼생활도, 유현의 가족들이 어느순간부터인가 고맙고 좋아져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도, 서주와 새새어머니에 대한 미안함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아픈 눈만이 그녀의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그것은 백마디 말보다 더 강렬한 외침이었다. 소리없는 외침에 가희의 가슴이 아파왔다.

“솔직히 그래요. 당신만 보면 아파요. 당신 눈만 보면 힘들고 괴로워요.”

유현의 고개가 툭 떨구어졌다. 절망이 심장을 쥐어짰지만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신이 할 일은 없었다. 더 이상 그녀를 구속하는 일 따위는...

“그렇지만 당신을 보지 않으면 더 아플 것 같아요.”

유현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가희가 편안하게 웃고 있었다. 그로서는 거의 처음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온화한 미소였다. 저기 가슴속에 따뜻한 봄햇살을 담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너무 청명해서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너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다시... 말해줘.”

“내가 힘겨운 것보다 당신이 힘겨운 게 더 힘겨워졌어요.”

가희가 곧 쑥스러운지 고개를 숙이자 유현이 가희의 뺨을 감싸쥐었다.

“다시 말해줘.”

“그, 그만해요. 또 시작이야.”

가희는 유현의 모습이 때로는 더없이 믿음직스럽기도 하다가 때로는 더없이 개구쟁이같아 밉기도 하다.

“언제 또 들을 수 있을지 기약도 없잖아.”

“그런 말 너무 자주 하는거 아니에요. 정말 투정꾼 같아.”

가희가 난감한 눈으로 그를 들여다보았다. 힘겹고 힘겨운 생각 끝에, 혼란과 혼란을 거듭한 끝에 겨우 입밖으로 나간 말이었다. 그러나 원한다면 반복해서 해 주어도 좋은 말이었다. 그러고 싶은 말이었다.

“가희야.”

유현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녀에게로 천천히 몸을 숙였다.

“아직...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는 없지?”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난...”

이미 사랑하는데도, 그 사랑이 다인데도 그말을 입밖으로 내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가희는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입 밖으로 나와 흩어져버리는 것이 싫었다. 고이고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너무 소중해서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에요. 유현씨. 숙제에요. 왜 말하지 못할까요?”

“숙제가 너무 어렵잖아요. 나쁜 선생님.”

“그거 알아요? 선생님들은… 수업을 하다가 어려운 질문을 받았을 때 자기도 모르면 그걸 숙제로 돌리곤 해요.”

유현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유는 본인도 모르시겠다?”

“말하자면…”

“그만하자. 오늘은 수확이 많았으니까 더 바라면 착취가 되겠지.”

유현에게는 차라리 웃어넘기는 것이 덜 아픈 그런 순간이었다. 웃음소리로 덮어버린 아픔을 잊기 위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오직 온기로서만 치료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아픔을 만든 주체는 누구일까. 그녀의 입술을 입술로 더듬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가희야. 내 입술에서 한숨이 느껴지니? 오늘 하루종일 한숨만 마시고 돌아왔어.”

그녀가 까치발을 들어 입술로 그의 눈꺼풀을 촉촉이 적셨다.

“다음부터는 한숨말고 술 마셔요. 몸에 안 좋아요.”

“술이 더 몸에 안 좋은 거 아니야?”

“차라리 술이 덜 나쁠 것 같아서 그래요. 그러니 술로 마셔요. 다시는 한숨 같은거... 마시지 말아요.”

그녀의 입술에 포개진 그의 입술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조금씩 채워지기를 기다리자. 그녀의 마음속에 그가 포화상태처럼 가득찰 때까지 오래 걸린다면 어쩔 수 없지만 지금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어준 것이 기뻤다. 조금씩 열리는 마음이 다시 닫히지 않도록만 노력하고 싶었다. 겨우 입을 열게 된 진주조개가 함부로 다가서 다시 꽉 다물지 않도록 그렇게... 멀리서 보아줄 인내심을 키워야 했다.

시작... 갇힌 그녀를 닫힌 벽 안에서 끌어내기 위해 조금씩 시작되는 괭이질, 땀이 비오듯 쏟아져도 힘들지 않을 것 같았다.


유현은 수화기를 내려놓고서도 한동안 넋이 빠진 모습이었다. 한동안 멍한 채로 앉아 있다가 인터폰을 눌렀다.

“네. 실장님.”

“소현씨. 지금 전화온 사람이 아내가 맞습니까?”

“네. 실장님. 사모님이셨습니다.”

“그렇네요. 아. 소현씨. 커피 부탁할게요.”

“네. 실장님.”

버튼에서 손을 뗐다. 꿈이 아닐까 했더니 가희가 전화를 하긴 한 모양이었다. 처음으로 회사로 전화를 걸어온 그녀였다. 그녀쪽에서 전화한 것은 거의 처음이지 싶다. 게다가 그녀가 한 말이...

“유현씨. 점심 사 줄래요?”

서둘러 겉옷을 집어들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데 문이 열렸다. 나갈 채비를 하는 그를 비서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실장님. 커피는...”

“커피요? 아. 내가 커피를 부탁했었나요?”

“네. 방금 전에.”

“아. 미안하지만 소현씨가 마셔요. 난 약속이 있어서 나갑니다. 참. 이후 스케줄은 취소해주세요.”

“그렇지만 오늘 오후에.”

“소현씨의 능력을 믿겠습니다. 그럼.”

들뜬 모습으로 서둘러 사무실을 나서는 유현을 소현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코너를 돌아서던 유현의 발이 멈췄다.

“강실장. 어디 가는가?”

현수가 예리한 시선으로 유현을 훑었다.

“네. 점심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가? 자네와 점심이라도 할까해서 가는 길이었네만.”

“죄송합니다. 중요한 약속이라서요.”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보는 유현을 향하는 현수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전에 그 애 찾으러 왔던 날 그래도 집으로 잘 들어온 모양이지?”

유현의 눈썹이 움찔했다.

“네. 어머님께서 걱정해주신 말씀 전해주었습니다.”

“그, 그래. 잘 했군. 그 애는 괜찮은가?”

“물론이지요. 그럼 저는 시간이 다 되어서 가 보겠습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리는 그를 현수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강실장. 내일 점심은 함께 하도록 하지. 동행도 있으니 시간 비워놓길 바라네.”

“동행이라면...”

“자네도 반가워할 얼굴일세. 그럼 그렇게 알고 가 보게나. 모르긴해도 많이 바쁜 모양이니.”

유현은 별 말 없이 고개를 까딱한 후 몸을 돌렸다.

언제쯤에야 그녀의 미움속에서 가희를 건져낼 수 있을까.

"새어머니. 가희는 조금씩 변하려 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새어머니는 늘 그자리에 계실건가요? 변화하기를 두려워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도태됩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니…”






“아가씨. 점심 먹으러 갈래요?”

잡지책을 낀 채 소파위를 뒹굴거리던 라미가 곁눈으로 가희를 바라보았다.

“네?”

“점심 먹으러 가자구요. 오빠한테 갈건데 아가씨도 함께 가요.”

라미가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가희의 위아래를 쭈욱 훑어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말을 할거면 일찍 해주었어야죠. 언니 혼자만 그렇게 쫙 빼입으면 다에요?”

가희는 툴툴거리는 라미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아직 시간 있으니까 얼른 준비하고 나와요. 오래 걸리면 혼자 갈거에요.”

“에잇. 귀찮아 죽겠는데. 정말 이상한 새언니라니까.”

그렇게 궁시렁거리면서 이층 그녀의 방으로 뛰어올라가는 라미였다.








유현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강라미. 넌 웬 일이야.”

“새언니가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왔어. 설마 내가 온 게 싫은거야?”

“그럴러가요. 아가씨를 끔찍이 아끼시는 오빠인걸요. 그렇죠?”

조금 삐친 라미와 떠보는 가희 사이에서 어깨를 으쓱하는 유현이었다.

“어쩐지 쉽다 했어.”

앞서가는 라미뒤에서 유현이 가희의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이었다.

“무슨 뜻이죠?”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다 싶었더니 그 넝쿨이 라미였다 이 뜻이지.”

“그럼 그 호박은 바로 저인가요?”

“그런 셈이 되나?”

“두 사람 뒤에서 그렇게 속닥거릴 거에요? 오빠. 나 서운하려고 그런다!”

“알았어. 우리 라미가 좋아하는 스파게티 먹을까?”

가희는 조금씩 거리를 메꾸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지금부터 우리는 시작인걸까. 그녀는 마음을 열고 있는 것이 맞는걸까. 유현은 그런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졌다.
처음 보았을 때 차가웠던 그의 모습, 서주에게만 향하던 인간적인 모습. 그러나 그의 실제 성격은 따뜻한 사람인지 모른다. 단지 낯선 사람에게 혹은 자신과 깊은 관계에 없는 사람에게만 무의식적으로 냉정하게 대하는 타입의 사람인지도... 그는 그런 사람 같았다. 이제 조금씩 그를 알게 되면서 가희는 유현이라는 남자가 좋은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의무나 회피로 시작한 결혼이었지만 유현은 넘치도록 많은 것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러니 좋은 사람에게 자신이 받은 것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면 해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웃어주고 싶었다. 후회하지 않도록 그에게... 이것은 당신에게 드리는 나의 노력입니다. 꼭 드려야 할 것입니다.








“제대로 된 프러포즈를 못했잖아.”

눈물이 흘렀다.
식사 후 라미를 등 떠밀 듯 돌려보낸 유현이 소담스런 카페에서 내민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영롱하게 빛나는 값비싼 보석이 그녀의 눈물을 담고 있는 것 같아 속이 아려왔다. 마치 매운 음식이라도 잔뜩 먹은 것처럼 속이 쓰렸다.

“유현씨. 나 이거 지금 받을 수 없어요.”

그녀의 말에 유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그의 말이 차라리 처음처럼 감정없이 단호하기만 했으면 좋으련만. 어느날부터인가 그 말속에 담긴 안타까움이 느껴져 마음이 무겁다.

“며칠 후면 언니 생일이잖아요. 적어도 서주언니 생일 후에 받고 싶어요.”

무엇인가 말하려던 유현이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

“미안해요.”

“사과하지마. 괜히 서러워지니까.”

슬픈 영화를 본 것도 아니고, 찡한 시를 읽은 것도 아니고, 애잔한 음악을 들은 것도 아니다. 단지 한 남자를 보고 있을뿐인데도 감정이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뭉클해지는건 어떤 문학이고 감각일까.

“미안해요. 비싼 반지 같은데 좀 아깝다.”

가희는 그의 미소를 보고 싶어 우스개소리를 했다.

“아까우면 냉큼 받지?”

그러나 그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불행중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슬프기보다는 토라진 듯 했다.

“팔아버릴 거 아니면 고이 가지고 계셔 주시지요.”

“팔아버릴거야. 팔아서 다 술값으로 써버릴 테다.”

“어머님께서 당신 가지셨을 때 많이 토라지셨나봐요. 어쩜 저리도 잘 토라질까.”

“새어머니한테 그대로 전해줄까?”

“비겁하기까지…”

“자네 지금 비겁이라고 했나?

“커피가 좀 덜 내려온 것 같지 않아요? 맛이 별로네.”

능청을 부리는 가희를 유현이 노려보는 것으로 반지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주고 싶은 마음이, 또 받고 싶은 마음이 넘쳐날테지만 그들을 막는 것은 역시 보이지 않는 서주가 아닐까 하는…






“지내는데 불편한건 없어?”

“좋아요.”

“라미가 새침떼기같은 성격인데 두 사람이 친해진 것 같더군.”

“착한 아가씨에요. 유현씨만큼이나...”

“내가 착해?”

유현이 빙긋 웃으며 묻자 가희도 웃었다.

“몸이 약한 사람이 대체로 착하죠?”

“체질상 문제가 있을 뿐이야. 도대체 누가 몸이 약하단거야?”

“어머. 그럼 체질적으로 약한건가봐요.”

“자꾸 놀려라.”

“놀리긴. 내가 언제. 안 그랬는데.”

“우리 한 몇 년 나가서 살까?”

물어오는 유현의 말에 가희가 미소를 거두었다.

“그럴 수 없어요.”

어쩌면 모두 다 잊고서 밖에 나가 있으면 그녀도 그도 덜 힘들지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이 직면한 문제는 극복하든가 맞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 고개돌리거나 잊을 문제가 아니었다. 현실을 직시하니 가희의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럴 수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야?”

“가족과 함께 살고 싶어서란 뜻이었어요. 다른 의미는 없어요.”

“정말이지?”

“정말이라니까. 무, 물론 그동안 혼자서 끙끙거렸던 적은 있지만 이젠 다 말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

유현이 그녀를 예리한 눈으로 쳐다보는 바람에 잠시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정말인데.”

“우리 아기 가질까?”

“아기… 네? 아, 아기?”

갑작스러운 유현의 말에 가희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공처럼 커진 눈으로 유현을 바라보았다.

“피임하고 있는 거 알아.”

가희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기가 있으면...”

“아직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가희가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끊어 말하자 유현이 곧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 발끈하기는.”

“발끈한 거 아니에요. 난…”

“발끈했어.”

“안했다니까요.”

“했다니까 오늘 왜 이렇게 아니라고 우기지?”

“안 한 걸 했다고 하니까 그렇잖아요.”

“그래. 안했어. 너 잘났다. 잘났어.”

가희의 입이 헤 벌어졌다. 유현의 말투가 마치 어린애들같아 놀랄 노자였다.

“확 엎어놓고 엉덩이 두들겨 줄까보다.”

“유현씨!”

“너무 얄미워서 입맞추고 싶어 죽겠네.”

“빨리 나가요. 회사 들어가야죠.”

당황한 가희가 얼른 백을 집어들고 일어나자 유현이 뒤따랐다.

“오늘 스케줄 오프야. 자. 이제 영화나 보러갈까?”

“그럴거였으면 라미아가씨 들여보내지 말지 그랬어요.”

“그 철부지를 사이에 두고 데이트하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일 안 해도 돼요? 그렇게 일 안해도 월급 나와요?”

“돈 못 벌면 굶지 뭐.”

“누가 굶겠대요?”

“오호. 절대 굶을 수는 없다?”

“절대로.”

“ 그럼 아버지 새어머니한테 얹혀 살지. 뭐가 걱정이야.”

유현이 사악하게 웃으며 그녀를 끌었다.

“그런…”

“자. 가자. 예약해뒀으니까.”

영화는 좋았다. 함께 나눠먹은 팝콘도 맛있었고 들어갈때부터 나올때까지 작은 행동 하나하나까지 챙겨주는 그의 배려도 좋았다. 영화를 기다리는 사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며 킥킥거리며 웃기도 했다.

“타이타닉 봤어요?”

“본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네.”

“타이타닉은 재난영화에요. 동시에 러브스토리이기도 하구요. 영화를 전체적으로 봤을 때 반정도는 사랑이야기이고 반 정도는 블록버스터형이었죠.”

“그랬나? 대충은 기억나는데 자세한 건 기억 안나.”

가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샘 치고 들어요.”

“안 나는데 어떻게 샘 치나?”

“말 안할거에요.”

“알았어. 말해봐.”

유현이 빙긋 웃으며 비스듬히 턱을 괴고서 귀밑으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러나 가희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느라 신경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었으면 벌써 공공장소에서 무슨 짓이에요? 하며 손을 찰싹 때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재잘재잘 떠드는 그녀의 입술을 빙긋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 영화하나를 봐도 여자와 남자의 차이를 알 수 있대요.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여자들은 남여주인공들의 러브스토리에 치중된 전반부를 좋아하는 반면 남자들은 배가 침몰되는 후반부를 재미있게 보는 식인 것 같아요. 그렇게 보면 남자와 여자를 금성과 화성이라는 다른 곳에서 왔다는 책의 비유가 맞는 것도 같아요.”

“그럴수도 있겠지만 전부 그렇다고는 볼 수 없지.”

유현은 여전히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간간히 대답을 해 주었다.

“당연하죠. 근데 친구 애인도 그랬다더라구요. 한참 남자주인공의 멋진 사랑연기에 감탄하고 있는데 옆에 앉은 친구의 애인이 그러더래요. 야. 배는 언제 부서지냐?”

깔깔거리며 웃는 가희를 유현이 빙그레 웃으며 쳐다보았다. 쾌활하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좋다.

“누군지 몰라도 나랑 비슷한 말을 하는 남자네.”

“거봐요. 남자들은 대부분 그런다니까요.”

“다 좋은데 그 쪽으로 기울지 마.”

갑자기 유현이 그녀의 팔을 획 끌어당겨 끌어안다시피 하자 가희가 그를 살짝 밀치며 밉지 않게 흘겼다.

“공공장소에서 이러지 말아요.”

“역시나.”

“네?”

“그럴 줄 알았다고. 어쨌거나 이 쪽으로 기대.”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

“난 이쪽이 편하단 말이에요.”

“옆에 남자 앉았잖아. 그러니까 니 남자쪽으로 기대라고.”

유현이 픽 웃으며 자신에게 기대라는 시늉으로 어깨를 톡톡 투드렸다.

“난 편하지 않으면 영화 못 봐요.”

“영화보러 극장오는 사람도 있나?”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난 영화보러 극장 안와. 꼭 붙어있으려고 오지.”

유현이 팔을 크게 두르더니 또다시 그녀의 어깨를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미안하지만 난 영화보러 왔거든요?”

“영화 좋아해? 그럼 홈씨어터 사자. 모르나본데 극장은 그냥 데이트하는 곳이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죠? 정말 신기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니까.”

“앗. 영화 시작하네. 자 이제 나한테 기대.”

“몰라요. 불편하단 말이에요.”

“정말 말 많아.”

결국 영화가 끝날 때까지 유현에게 기댄 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영화의 장면들을 흘려보낼 수 밖에 없었다. 웬만큼 집중하거나 몰입하지 않고서는 영화든 드라마든 책이든 볼 수 없는 가희로서는 돈이 아까울 정도로 무슨 내용인지 기억나지 않는 그 날의 영화였다. 그의 숨결이 느껴지고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는 손길이 느껴져서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갈 때쯤 가희는 유현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영화의 내용은 기억이 안나도... 그의 느낌 하나하나가 장면에 스며들어 언젠가 아주아주 나중에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되더라도 그 장면에 그의 느낌 하나씩 맞닿아있어 아련히 기억날 것 같은...



파초 - 기다림 [20]


릴케 | 2004-07-27 PM 9:58:45 | Read : 5397 | Comment : 0 | Comment Write▽ |





- 오늘은 꿇어와 함께 올립니다. 대패를 판다고 단체로 선동하신 분드으을~ 제가 님들의 닉네임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흐흐흐(음흉한 웃음), 분발하겠사옵니다. 오늘편은.... 사실 끝이 아닙니다. ㅋㅋㅋ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이해해주세용~








영화를 본 후 유현이 이끄는 대로 이곳 저곳 드라이블 하다보니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유현씨. 빨리 들어가요. 어떡하지. 저녁시간 다 되어 가는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를 유현이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미안하지만 오늘 저녁도 그대의 시간은 내거랍니다.”

“네?”

“새어머니한테 먼저 드시라고 했어.”

“왜 그랬어요.”

“내 마누라 점심부터 저녁까지 거둬 먹이겠다는데 뭐가 이상해?”

“그, 그 단어 싫어요.”

“왜? 마누라 이쁘잖아. 누라야!”

“정말 자꾸 그럴래요?”

“어라? 무섭네. 이러다가 또 내 커피에 치약타는거 아니야?”

가희는 순간 움찔했다. 소, 소시적 얘기를...

“무슨 말인지 모, 모르겠네요.”

“잊은 척 해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시치미 떼지마. 은제품에 빛이 바래면 치약으로 닦아야 한다면서 치약을 짜넣은게 누구더라?”

“.....”

“도대체 치약은 왜 갖고 다닌거야? 결벽증 있어?”

“이사올 때 가방안에 넣어둔 걸 미처 꺼내놓지 않았었나봐요.”

가희가 기가 푹 죽은 채로 중얼거리자 유현이 반짝이는 눈으로 계속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래서 적절히 무기로 활용하셨다?”

“그러길래 그렇게 정떨어지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래요? 그 당시에 정말 얼마나 밉살스러웠는지 알아요?”

“반했던 건 아니고?”

“미웠다니까.”

“반했던것 같은데?”

“전혀요. 정말 미웠어요. 어찌나 얄미웠으면 그런… 어쨌거나 유현씨 정말 무서운 인상이었어요.”

“잰틀했겠지. 오히려 밉상은 너였어. 망아지처럼.”

“네에?”

“또 노려보네. 무서워라. 그 가방안에 또 치약있는건 아니지? 내가 그 일 후로 은과 치약만 보면 얼마나 웃었게?”

“그만해요. 강유현씨.”

“우리 예물을 은으로 할 걸 그랬지?”

“정말...”

“이참에 차도 은색으로 바꿀까?”

“유현씨!”

자꾸만 능청을 부리는 그를 노려보려고 고개를 획 돌리는 순간 입술이 겹쳐져왔다.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지만 이미 그녀의 목선을 쓸어내리는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그가 입술을 벌려 그녀의 따뜻한 입안을 공략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반쯤 벌어진 틈을 타 밀고 들어온 혀가 부드럽게 움직여 그녀의 작은 혀를 탐했다.

“넌 그렇게 화내는 모습이 좋아. 귀엽고 도발적이야. 네 모습을 잃는다는 건 나로서는 좋은 일이 아니야. 니가 있는 그대로의 네가 되기를 바래.”

유현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가 뭐래도 난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다 안다는 듯 말하지 말아요.”

가희가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잘 나셨네. 그럼 어디 멋진 그대를 느껴볼까?”

그가 사악하게 웃으며 그녀의 목선을 따라 입술을 눌렀다. 숨이 차올라 옅은 탄성이 세어나왔다. 손을 뻗어 시트를 뒤로 젖히자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 틈을 타 커다란 몸이 그녀의 몸을 덮었다. 재킷을 벗어던진 그의 뜨거운 입술이 가희의 눈꺼풀과 코끝과 입술을 스쳐 목선을 타고 내려갔다. 겉옷을 통해 느껴지는 그녀의 봉긋 솟아오른 젖무덤에 온기를 불어넣은 그의 입술이 천천히 올라가 귓불을 물었다. 그녀의 낮은 신음에 반응하던 그의 뜨거운 몸이 멈칫했다. 그녀가 손을 뻗더니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 그의 몸이 일순간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피한 채 천천히 단추 열기에만 여념이 없는 가희를 내려다볼수록 그의 몸은 더 뜨거워져만 갔다.

허벅지를 통해 느껴지는 묵직한 반응을 일부러 못 느끼는 척하며 단추를 톡톡 여는 그녀의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드러난 그의 상반신쪽으로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곧 따뜻하고 간지러운 무언가가 그의 가슴을 쓸었다. 그녀가 조심조심 그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의 넓은 가슴 구석구석에 입술을 맞추었다.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거센 남성이 느껴지는 동시에 그가 가희의 양 어깨를 누르며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이후는 두 사람도 막을 수 없는 격렬함이었다. 낮은 탄식소리와 한숨소리가 섞인 차 안에서 서로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미친 듯이 상대방의 옷을 벗겨내렸다. 하나하나 허물이 벗겨지듯 거추장스러운 옷들이 떨어져나갈 때마다 입술이 닿지 않는 자리가 없었다.

힘차게 그녀를 끌어안은 유현의 팔 근육위로 무수히 많은 입맞춤이 쏟아졌다. 그녀의 작은 이마와 봉긋한 가슴두덩이 역시 쉴 새 없이 유현의 입술이 오갔다. 마침내 거친 호흡소리가 끊어지는가 싶더니 그의 몸이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다. 참을 수 없도록 유혹적인 가희의 숨소리가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부드러운 속옷을 그녀의 하얀 다리에서 마저 끌어내린 유현이 거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반쯤 벌어진 그녀의 붉은 입술로 향하는 순간 미친 듯 피가 끓어올랐다. 뜨거운 신음이 세어나오는 그녀의 입술을 혀끝으로 축여주었다.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녀의 낮은 신음이 음악처럼 유혹적으로 와 닿았다. 미치도록 소중한 나의...

“가희야!”

흥분한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몸에 꼭 맞게 자신을 고정시킨 그의 몸이 절정을 향해 내달렸다. 유현에게 가희는 더없이 정확히 맞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몸 전체에서 풍겨져 나오는 미친듯한 유혹이 그의 온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한바탕의 거대한 폭풍같은 사랑 후 유현이 차를 몰고 간 곳은 교외의 작은 호텔이었다. 마치 신혼여행이라도 온 듯 유현은 그녀를 소중하게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그 밤이 새도록, 까무룩한 잠의 문턱에 들어설 때까지 유현의 손길이 그녀의 온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졌다. 마침내 어스름한 새벽기운에 눈을 뜰 때까지도 그는 깬 채로 그녀를 부드럽게 쓸고 있었다. 잠을 깬 가희는 혼자서 잠든 것이 너무도 미안하고 안타까워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말았다. 엷은 미소를 입가에 띠운 그의 하얀 얼굴이 안쓰러워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마인(mine), 나만의 가희야.”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울렸다.

“사랑해.”

그의 말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말이 담겨진 작은 공기 하나마저도 품고 싶었다. 품고 품어도 모자랄 그 말이, 미치도록 손을 뻗어 끌어담고 싶은 그 말이 아리고 또 아려서... 눈물이 마치 비처럼 흘러내렸다.











서주의 생일을 하루 앞 둔 날 유현은 현수를 만나기 위해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혈색이 많이 좋아진 듯 얼굴은 밝았고 멋스러운 정장까지 환한 색을 띠고 있어 다소 경쾌해 보이는 그녀였다. 그럼에도 유현은 답답하기만 한 심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자네 왔는가. 앉게.”

“일행이 있다고 말씀하신걸로 아는데요.”

“아. 내가 일부러 시간을 조금 늦게 알려줬네. 아무래도 숙녀를 먼저 기다리게 하는 것이 실례같아서 말일세.”

숙녀라는 말에 유현이 현수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현수는 다른 표정의 변화없이 더없이 잔잔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 마음먹는대로 표정을 바꾸는 그녀를 이미 알고 있는 유현이었다.

“그래. 사돈어른들은 편안하시고?”

평소와 달리 평범한 화제거리를 꺼내는 그녀였다. 그 말은 지금 그녀의 마음이 지극히 평온하다는 뜻이였다. 무엇이 그녀를 저렇게 들뜨게 만드는 것일까.

“덕분에 편안하십니다. 가희도 잘 있고요.”

“그래. 그거 다행이군.”

잠시 흔들린 현수의 눈빛을 잡아낸 유현이었지만 현수는 이내 평정을 찾고 다시 미소를 만들어냈다. 유현은 그 웃음이 왠지 꺼름직하다.

“참 내일은 어찌하겠나. 아무래도 함께 출발하는게 좋겠지?”

의사를 묻고 있었지만 반 강제성을 띈 말이었다. 서주의 산소를 찾아가자는 뜻이겠지.
‘어머님은 왜 모르시는 겁니까? 사람의 마음이라는게 참 간사해서 당연히 신경써야하고 애틋한 서주이지만 그렇게 강요할수록 자꾸 멀어진다는 걸 정말 모르시는겁니까. 게다가...’

떠나고 나서 처음 찾는 서주이건만 유현의 머릿속은 온통 가희의 생각으로 가득찼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까. 그녀에게 과연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좋을까? 이미 알고 있다면 그녀는 하루를 어떤 생각으로 보낼까...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

그의 말이 멈췄다. 무언가가 불쑥 나타나더니 눈앞을 가렸다. 눈앞을 구름처럼 가린 안개꽃다발에서 꽃향기가 물씬 풍겨져왔다. 유현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안개꽃만큼이나 하얀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여자가 홍조띤 얼굴로 방긋 웃으며 서 있었다.

“희수?”

“반가워요. 유현오빠.”

희수가 안개꽃 다발을 불쑥 내밀었다.

“오빠. 아직도 안개꽃 좋아해요?”

“그, 그래. 고맙다.”

멋쩍은 얼굴로 꽃다발을 받아 옆자리에 놓아두고서 현수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말한 일행이 희수?

“일주일전에 귀국했다는구나. 서주일을 듣고 고맙게도 귀국한 모양이다.”

희수가 자연스럽게 유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랬니?”

“언니 일 듣고 많이 놀랐어요. 오빠 많이 힘들죠?”

희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희수라면 서주의 후배로서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다. 굳이 말한다면 친자매처럼 가까웠던 사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그녀는 유현의 대학후배이기도 했다.

“신경써주어서 고맙구나.”

“내일이 언니 생일이라서 함께 언니 만나러 가려구요. 많이 보고싶어요. 서주언니 불쌍해서 어떡해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 떨어져내렸다. 유현이 머뭇거리다가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오빠.”

“그 불쌍한 것 이야기는 그만두자꾸나.”

현수의 한숨섞인 목소리에 희수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죄송해요. 아줌마. 눈치도 없이.”

“아니다. 널 탓하는게 아니라 어차피 내일 만나러 갈거니까 오늘은 그만 얘기하자는 거란야. 이미 간 아이 들추어봤자 돌아오는 것도 아닐테고. 그렇지 않은가? 강실장?”

유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슴속이 갑갑해져왔다. 현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를 향하는 것 같아, 아니 가희와 그를 향해 무언가를 쏘아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희수라면 유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런 자리에서 만날 만큼 자연스러운 관계는 아니었다.

대학시절 그녀가 유현을 좋아하고 따라다녔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러나 관심을 두지 않는 유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식음을 전폐한 경력까지 있는 그녀였다. 그것은 일종의 시위였고 그 일로 그녀는 병원신세까지 졌다. 그 때의 사건으로 인해 한동안 떠들썩했었다. 부모님들끼리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기에 현수도 그 일을 모를리 없을 것이다. 그랬기에 서주와 유현을 연결시키기 원했던 현수에게 있어 곱지만은 않았던 희수였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 현수의 소개로 이 자리에 앉아있다. 희수의 마음은 오로지 서주의 산소를 찾고 싶어하는 순수한 마음일지 몰라도 현수는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의구심이 자꾸만 들었다.

어색한 자리였다. 그러나 다행히 밝은 희수의 성격 덕에 화기애애하게 끝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현수는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며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나간 후 잠시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곧 희수의 밝은 웃음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뜨렸다.

“정말 반가워요. 오빠도 그래요?”

“그렇군. 언제 돌아가니?”

“아이. 너무한다. 돌아갈거부터 물어요? 아직 온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서운해요.”

“그랬구나. 내 말뜻은 그게 아니라…”

“괜찮아요.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그리구 아직 잘 모르겠어요. 오랜만에 나온 거라 서두르지 않을 생각이에요.”

“그래.”

“오빠... 결혼하셨다구요?”

유현의 차가운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솔직히 조금 놀랐어요.”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는 그녀를 유현이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떤 분이세요? 엄청 궁금한 거 있죠. 나이도 알고 싶고 성격도, 그리고...”

“커피 다 마셨으면 일어나자.”

유현이 꺼내놓았던 담배케이스를 안주머니에 넣으며 차갑게 말했다. 무엇인가에 화가 난 것이 분명한 표정이었다.

“오빠...”

“내가 사랑하는 여자다. 호기심거리로 묻지 말아라.”

희수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그를 들여다보았다.

“전 그저...”

“아무 말도 못 들었을 리는 없을 테고.”

여전히 차갑기만 한 유현의 말에 희수가 곧 고개를 저었다.

“전 아무 말도 듣지 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오빠의 말뜻은 모르겠지만 추호도 호기심거리로 물은 거 아니에요. 정말 궁금했던 것 뿐이에요. 유현오빠를 사로잡았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구 부럽기도 해서...”

낭패로군. 유현은 속으로 자신을 향해 혀를 끌끌 찼다. 도대체 초등학생도 아니고 발끈하다니. 그런 자신을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만약 지금 이 모습을 현수가 보았다면 뭐라고 했겠는가. 자기 자신도 통제 못하고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향해 비난부터 퍼붓다니. 아니 가희가 안다해도 이것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당연히 그 당사자인 희수에게도 미안한 일이 되었다. 왜 자꾸만 이렇게 이성부터 흐려지는 것인지...

“미안하다. 피곤하구나. 오늘은 그만 들어가자.”

“저도 미안해요. 그렇지만 정말 다른 의미는 없었어요. 난 그저...”

“희수야. 그냥 그쯤에서 그만해줄래? 내가 정말 창피해서 그런다.”

“네.”

“밤잠을 설쳤더니 컨디션이 영 제로구나. 자 일어나자.”

그렇게 일어선 유현이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간 후 희수도 천천히 일어났다.

“호기심으로 묻지 말아라... 오빠 환영의 인사치고는 너무 잔인한거 아니에요? 그래봤자 아줌마 말대로 서주언니의 배다른 동생, 그것도 밖에서 낳아 온 화근덩어리일 뿐인 여자 아닌가요?”

그녀의 입가가 차갑게 말려올라갔다. 이미 현수에게 모든 말을 들은 그녀였다. 사실 그녀가 유현에게 집착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서주라고 해도 빼앗으면 되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외국으로 떠난 것은 어쩌면 현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현수가 그녀의 편이다. 딸에게 주지 못할 바에야, 그래서 자신이 갖지 못할 바에야 처참히 구겨버리는 것이 그녀의 성격일 것이다. 희수는 그것을 적절히 잘 활용하면 되는 것이다.

“오빠 마음이 어떻든 그런 여자 정도.”

희수가 픽 웃으며 천천히 백을 집어들었다.







“오빠. 결혼하신 그 분 많이 사랑하시나봐요.”

희수의 집 앞에서 차에서 내리려던 그녀가 몸을 돌려 말했다. 유현이 담배를 꺼내물고 피식 웃었다.

“얼른 들어가기나 해.”

“그냥 그런 느낌이었어요. 용납을 허용안하는 그런 분위기. 정말 놀라버렸는걸요?”

“들어가.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정말 부러워요. 그런데 저보다 어린가요?”

유현이 빙긋 웃으며 담배를 비벼끈 후 천천히 말했다.

“그러고보니 너보다 위구나. 우리 가희도 꽤 나이가 많네?”

희수의 얼굴이 잠깐동안 굳었다. 그가 쓴 우리라는 단어는 차치하고라도 그 말을 하는 유현의 표정이 너무나 부드러워 보였다.

“그래요? 그렇구나.”

“돌아가기 전에 한 번 소개시켜 주마.”

유현이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정말이죠?”

“안개꽃 고맙다. 그렇지만 사무실에 꽂아 둬야 할 것 같아. 이유는 알지?”

“어머. 설마 오빠 공처가 되신 거에요?”

“우습지? 서주 간지 얼마 되었다고. 그러나 감정이 그렇게 흘러가네.”

옅은 한숨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유현의 말에 희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라지 않으려고 해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나 반해서 따라다녔던 시절에도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감정표현이었다.

“자 이제 들어가라.”

유현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고는 곧 차를 몰아 사라졌다. 그녀가 쓸하게 웃었다.

“너무하시는 군요. 그렇게 티를 내다니. 오늘 느낀 거 뭔지 알아요? 아직 보진 못했지만 오빠의 달갑지 않은 신부, 생각보다 신경쓰이는 상대같다는 거에요. 짝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쩌죠?”

그녀가 유현이 간 자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 번 고향 내려갔다가 와봐. 하진이 자식 매일 술에 쩔어 산대.”

가희는 재성의 매장에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재성이 하진 얘기를 꺼냈다. 가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백번이고 찾아갔을거야.”

“무엇을 어쩌란 말이 아니라 우선 녀석부터 살려내자는...”

“시간은 어차피 흐르게 되어있어. 내가 지금 나서는 건 시간을 거스르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거야. 한달이면 괜찮을 시간을 자꾸만 늘리고 또 늘려서 뭘 어쩌려구. 그래서 난 하진이한테 가지 않을테야.”

“너도 참 냉정하기도 하다. 하진이가 너한테 고작 그 의미밖에 안된 녀석이냐?”

오랜만에 가희에게 맞서던 재성이 곧 움츠러들었다. 흰자위까지 드러낸 채 노려보는 가희의 시선과 맞닥뜨렸기 때문이었다.

“처음 이 결혼을 한 순간부터 내가 하진이한테 해 줄건 없었어. 가장 큰 배신을 한 내가 좋은 사람으로 남길 바랄 수 있어? 무엇을 어떻게 해 줄까? 그렇게 자신있으면 니가 말해 봐. 듣고 따를 테니까!”

오뉴월 서리발이 날릴 정도로 차갑게 소리치는 가희앞에서 재성이 머뭇거렸다.

“내,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저 하진이 녀석이 너무 불쌍해서...”

“하진인 불쌍하지 않아. 마지막까지 날 걱정해 준 애야. 내가 하진이 앞에 서서 다시 혼란을 주기를 바라니? 너 정말 내 친구고 하진이 친구 맞아?”

“알았으니 그만 해라. 무섭다. 정말.”

“앞으로 내 앞에서 하진이 얘기 하지마. 어떤 말도 하지마. 난 고개 돌리기로 결정했어. 이미 하진이도 아는거야. 친구로라도 남으려면 그 애를 보지 말아야 해. 그만 갈게.”

“지 할 말만 다 하고 잘 가라. 이 무서운 기지배야.”

“너도 그렇게 산속에서 수행하다가 온 차림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신경좀 써. 그래야 장가라도 갈 거 아냐!”

“얘가 왜 또 나한테 쌍심지냐. 내 모습이 어디가 어때서!”

“그 몰골로 사업성공한게 용하다. 팔푼이.”

“뭐. 뭐!!!”

“하진이도 너도 나도 언니 말을 들어야 해. 자신앞의 등불은... 자신이 켜는거야.”

“지금 병주고 약주냐?”

“그리고 여직원들 잘 봐. 불편하게 할까봐 하루이틀 가게 비우다보면 니 자리 자체가 위협받는거야. 도대체 니가 여기 사장이니, 아니면 일꾼이니. 정신 좀 차려.”

“어이쿠. 잘난 민가희양.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동안 저 성질 죽이고 어떻게 살았나 몰라. ”

“간다.”

가희는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한재성. 그렇지? 사람들이 참 재밌네. 나 모르긴 해도 그동안 길들여 졌었나봐. 강유현이라는 사람한테, 그 테두리안에 길들여 졌었나봐. 그러다보니 어느새 나 자체가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 어쩌면 유현씨가 보는 모습은 정말 내가 아닐지도 몰라. 가장 싫어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싶어 아등바등한 게 어쩌면 가장 유현씨를 솔깃하게 만든 모습인지도.

첫날밤 얘기했지. 머리를 쓰려면 그의 앞에서 슬립차림으로 섰을 거라고. 그렇지만 난 보이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었을 뿐이지 늘 그의 앞에서 슬립차림으로 섰던거야. 그렇게 그 사람의 눈을 막고, 귀를 덮고...

언니. 이제 언니가 한 말의 진짜 의미를 알겠어요. 내 앞의 등불은 내가 켜라는 것. 어쩌면 그것은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말이겠죠. 상황에 휘둘리지도 말고, 주위 사람에게 휘둘리지도 말고 그렇게... 그러다보면 언젠가 정말 진실한 감정이 솟아오를 때가 오겠죠.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는 것도 아니고 구해주는 것도 아닌, 안타깝고 힘겨운 마음이 아닌 진실한 마음으로, 지금 현재 내 앞에 주어진 일부터 해결하며 그렇게 나자신을 찾아가며 살고 싶어요. 그럴 수 있다면 언젠가는 유현씨를 부담의 대상으로만이 아닌 그 사람 자체로 보게 될 날이 오겠죠.”

가희는 어깨를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오래 방황하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랄까. 가희는 그런 홀가분한 마음으로 어느새 도착한 집 대문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되면 당신 앞에 선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스스로 사랑스러워서 당신에게도 당당한 그런 사람이 될 날이 오겠죠. 그렇겠죠. 유현씨. 아니 그렇게 오랫동안 진실로 대해 준 당신으로 인해 이미 조금씩 나 자신을 찾고 당신을 에누리없이 바라보기 시작한지도…”

가희는 빙긋 웃으며 대문을 밀고 들어섰다. 그 집 마당에는 언제나 커다랗고 위엄있는 파초가 서 있고, 그 파초에 생선살을 갈아 거름을 주는 인자한 아버님이 계시고, 배꼽티를 입고서 약간은 밉살스런 성격이긴 하지만 마음은 따뜻한 라미가 있고, 따뜻하게 웃어주어 마음까지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어머님이 계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 조금씩 천천히, 언젠가는 마음속으로 닿기를 바라는 유현이 있다.

맞지 않는 타국의 기후에도 그 꿈을 펼쳐 꽃을 피우는 파초를 지켜보듯 그렇게 유현은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나 언젠가는 그에게 예쁜 꽃한송이 피워줄 수 있을까. 길고 긴 기다림이 끝나 드디어 맺혀진 꽃봉오리를 그를 향해 열 수 있을까.







“언니. 왔어요?”

라미가 곰살맞게 그녀를 맞았다.

“아가씨. 일찍 들어왔네요? 아... 어머님. 안 나가셨어요?”

“오늘은 병원이 한가하구나. 그래. 점심은 먹었니?”

“네. 아버님은 퇴근 전이시죠?”

“지금 오시는 길이란다.”

“이렇게 일찍이요? 얼른 저녁준비해야겠어요.”

“두거라. 아버지께서 외식하자는구나. 라미야. 너 아버지 오시기 전에 그 배꼽티좀 어떻게 하렴. 또 혼나려고 그러니?”

“싫어. 나 이 티에 찢어진 바지 입고 갈거에요.”

“그러기만 해 봐라. 아버지가 차에 안 태우셔도 난 모른다.”

“아빠는 미적 감각이 없다니까.”

투덜거리는 라미와 흰눈으로 딸을 노려보는 새어머니를 보며 가희는 빙긋 웃을 수 있었다.

“새어머니. 저 올라갔다가 내려올게요.”

“그러렴.”

“그럼 유현씨도 함께 오는 길인가요?”

“아마 그럴 걸.”

“새엄마. 오빠는 지금 집- 읍-”

떠들어대는 라미의 입을 새어머니가 막으시더니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가희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이층으로 향했다.

“난데없는 외식에 뭔가 들뜬 것 같은 분위기가 이상해.”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던 가희의 눈이 커졌다. 붉고 희고 보드라운 비가 천천히 그녀의 머리카락위로 떨어져내려 바닥으로 사뿐히 가라앉았다. 보드랍게 그녀의 뺨을 스친 장미꽃잎이 간질이며 팔을 스쳐지나 그녀의 발등에 내려앉았다. 가희는 두근거리는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유현이 빙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장미꽃잎을 뿌려 비를 만들고 있었다.

“유, 유현씨?”

그녀가 붉은 장미만큼이나 상기된 빨간 뺨을 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이게 뭐죠?”

마저 남은 장미꽃잎마저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소복히 얹은 그가 빙긋 웃었다.

“방 어지르기.”

“네에?”

“네 일거리 만들기. 자. 이제 방 쓸어.”

그가 수북히 쌓인 장미꽃잎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가희는 이 기가 막히는 상황을 납득하려고 노력하며 애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대체...”

“로맨틱한 환영이야. 이제 흐드러진 장미꽃밭에서 그대의 입술을 훔치고 싶은데?”

유현이 빙긋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가희가 뒷걸음질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것보다 부탁이 있어요.”

“얼마든지 분부만 내리시지요.”

“나 이 비를 좀 더 맞고 싶어요. 이왕 치울거면 조금 더 비 맞게 해 주면 안되요?”

“너 특이한 거 좋아하는구나. 그거야 어려울 거 없지.”

유현이 몸을 숙이더니 티끌하나 없이 하얀 셔츠위에 빨갛게 번진 선명한 핏자국같은 빨간장미꽃잎을 들어올려 그녀의 머리맡에 그리고 어깨위에 살포시 놓았다. 그리고 분홍꽃잎을 들어 그녀의 눈앞에 천천히 뿌려주었다.

“예뻐?”

“너무 예뻐요.”

눈앞에 펼쳐지는 영상, 밀폐된 방안에서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는 낭만과 가득한 사랑. 그 흐드러진 장미꽃잎비로 가희는 지금 이 순간 너무 행복했다.

“어때? 준비한 이벤트가 맘에 들어?”

“너무 너무 맘에 들어요.”

“오랜만에 솔직하게 대답하네? 하룻밤새에 크리스마스 악몽이라도 꾼거야? 무엇이 널 이렇게 솔직하고 착한 여자도 만들었을까?”

“정말 예쁘니까, 정말 고마우니까…”

잠시 눈을 반짝 빛내며 빙긋 웃던 유현이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의 어깨에 앉아있는 꽃잎을 들어 그녀의 입술에 살짝 얹었다.

“그럼 이제 공을 치하해 주시겠습니까?”

유현이 짐짓 귀족인듯한 제스쳐로 인사를 하며 한쪽 팔을 가슴에 기댄채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 예쁜 꽃들을 이렇게 산산조각 낸 벌이 아니구요?”

“지독히도 비로맨틱한 당신을 로맨틱한 세계로 초대합니다.”

유현이 그녀의 턱을 들어올리더니 귓불을 어루만졌다. 머리카락위에 앉아있는 꽃잎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얹은 그가 천천히 몸을 숙여 입술로 그 꽃잎을 지긋이 눌렀다. 부드러운 꽃잎을 통해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그렇게 그의 입술이 옮겨질 때마다 꽃잎이 그녀의 귓불을, 콧등을, 뺨을, 그리고 입술을 덮었다. 깊고 깊은 입맞춤 후 두 사람은 지독히 어울리지 않는 뒷모습이긴 했지만 방을 치우기 위해 고생해야 했다.

이후 도착한 시아버지와 함께 가희는 가족과의 외식을 했다. 라미는 항복했는지 배꼽티를 갈아입고 점잖은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도란도란 이어지는 식사시간 후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희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가족들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아는 그들의 배려가 아닐지.

현수의 말이 메아리쳤다. 서주의 생일동안 그의 옆에 있지 말라고 당부하던 그녀의 모습, 유현은 아마도 또 혼자 속앓이를 했겠지. 따뜻한 이벤트를 준비한 그의 마음이 더없이 감사했다. 그날 밤 가희는 유현의 품에 안긴 채 잠이 들 때까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멈추지 않는 눈물을 그의 부드러운 손이, 따뜻한 입술이 밤새도록 쓸어주었다.

내일을 준비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오늘이 행복하기에 내일도 또 눈을 뜨리라. 눈물이 나올 때 원 없이 울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가희는 그날 밤 느끼고 있었다. 내일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웃으며 서 있을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눈이라도 마주 볼걸 그랬어.”

가희는 못내 안타까워 마음이 무거웠다. 아침 일찍 나가는 유현의 시선을 자꾸만 피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주었어야 했는데 그 눈을 차마 보지 못했다. 그렇게나 신경을 써준 그와 식구들인데 가희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까. 아니 억지로라도 웃으려고 했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억지웃음이 오히려 그를 곤란하게 할까봐 시선을 피한건지도…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느낀건지 유현도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그녀는 그를 보내고, 그는 그녀를 남겨둔 채 현관을 나섰다.

그 날 가희는 하루동안 잠시 집을 떠나있기로 했다. 유현의 곁에 있지 말라는 현수의 말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가희는 그 상황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따뜻한 눈으로 지켜주고 배려해 주는 가족들이기에 더욱 더 부담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그들에게, 그녀의 가족들에게 이 감사한 마음을 갚을 수 있을까…

서주가 가버린 날… 죄책감과 함께 밀려드는 그리움… 가희는 지금 미치도록 새엄마가 보고 싶었다. 고향으로 향하는 버스안에서 차창에 턱을 괸 채 멍하니 밖을 바라보며 차가 출발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옆자리가 부스럭거리더니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가희는 차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셔요.”

팔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와닿아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내 그녀의 눈이 공처럼 커졌다.

“현웅씨?”

“커피? 콜라?”

현웅이 양 손에 커피와 콜라를 든 채 의향을 물었다.

“당신이 여긴 웬 일이죠?”

다그치기만 하는 가희를 향해 현웅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답 좀 해줘요. 팔 떨어져요.”

“이런 취미 없으니까 사람 놀래키지 말아요. 감동스럽지도 않구요.”

냉랭하게 쏘아붙인 가희가 자리를 옮기기 위해 벌떡 일어났다. 현수와 연결된 그가 고울리 없는 가희였다. 비록 그가 어떤 진심어린 눈으로 그녀를 대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얼굴은 아니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남자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통로쪽으로 나가려는 그녀를 현웅의 무릎이 척하니 막았다.

“치워요.”

“매섭네요. 그냥 길동무한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우습군요. 길동무라니 말이 되나요? 도대체 내 뒤를 밟는 이유가 뭐죠? 아니 오늘같은 날은 갈 데가 새엄마 산소밖에 없다는 걸 누군가가 또 귀뜸해 주었나요? 그래서 이렇게 소름끼칠 정도로 내 행보를 아는 건가요?”

“나 당신에게 추적장치 달아놓을 만한 돈 없는 사람입니다.”

“능청 말아요. 당장 다리 안 치우면 가방으로 때릴거에요.”

“무섭기도 하셔라.”

“이런 무시를 당하면서까지 피하지 않는 이유가 뭐죠?”

“둘 다 안 마실거면 제가 다 마시죠. 배터져 죽더라도 억울하게 죽는 것 보다는 낫겠네요.”

“지금 장난하고 싶어요?”

“장난 아니에요. 사실이니까. 억울해서 죽고 싶을 정도네요.”

“당신이란 사람...”

“그래요. 당신 뒤를 밟은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의 언질도 섞이지 않았어요. 단지 당신과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따라다닌 것뿐이라면 또 화낼 건가요? 기회가 닿으면 커피숍에라도 잠시 들어갔으면 했는데 이렇게 시외로 향하는 버스를 타길래 오랜만에 바람소리도 느껴보고 싶고 해서 무작정 올랐습니다. 그래요. 정 내키지 않으면 중간에 내릴게요. 어디든 바람좋은 곳에서 내릴테니까 그냥 버스옆좌석에 우연히 앉은 정떨어지는 인간 정도로 여겨주십시오. 그래도 안 되겠습니까?”

그의 눈빛이 진지했다. 저런 눈으로 하는 말까지 거짓이라면 세상은 너무 삭막할 것이다. 가희는 그런 막연한 생각에 무작정 일으켰던 몸을 일단 앉혔다. 또다시 속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그의 눈빛은 뭔가 달랐다. 속고 화나는 것은 다음 일일 것이다.

“일단은 당신 말을 믿겠어요. 마음속에서는 무던히도 믿지 말라고 외치지만요.”

“아주 깊게도 찍혀버렸군요.”

“스톡홀름 증후군이 없는 이상, 날 납치한 남자를 좋게 생각할 리는 없는거 아닌가요?”

“저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납치한 여자를, 그것도 납치에 실패한 여자를 제 발로 찾아올 미친놈은 아닙니다. 그것도 콜라하고 커피까지 사서 말입니다.”

가희는 잠시 물끄러미 그를 들여다보다가 곧 입을 열었다.

“커피 안 마실거면 주세요.”

“정말요?”

현웅이 빙긋 미소지으며 커피를 내밀었다.

“그리고 해둘 말이 있는데요.”

“말씀하십시오. 무서운 가희씨.”

“커피랑 콜라 두 캔 정도 마셨다고 배 터지지 않아요. 오버하지 마세요.”

현웅이 자지러지듯 웃었다.

“그렇게 웃겨요?”

“글쎄요. 저로서는 당신 분위기가 풀린 것 같아 그냥 기분 좋으네요. 마치 이 버스가 냉동차처럼 느껴질 정도로 매서웠거든요. 그래서 일단 안심이에요.”

“변죽이 좋은 건지 원래 성격이 낙천적인건지 모르겠지만 당신이란 사람 정말이지 쉽게 이해가 가지는 않네요.”

“이해받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오해하지만 않으면요.”

그의 말에 상념이 묻어났다.

“사람들은 정말 이상해요. 본인이 가진 것을 왜 활용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걸까요.”

느닷없는 가희의 말에 현웅이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뜻인지 제깍제깍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당신은 충분히 단정하고 호감이 가는 외모를 가진 사람이 아닌가요? 그런데 왜 그렇게 배타적인 표정과 상처받은 듯한 미소를 짓는거죠?”

“게다가 사회통념상 죄라고 인식되는 짓까지 하고 말이죠.”

“일단 그 정도까지 긍정할게요.”

“글쎄요. 왜 그럴까요. 그냥 그렇게 되었네요. 가진 것도 없고, 특별한 능력도 없으면서 반반하기만 한 것은 오히려 약점이 아닐까요?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은 외모로서 상대를 평가하니까요. 그로인한 기대치가 높아서일까요? 타인들은 저에게 무언가 더 큰 것을 기대하더군요. 거기서 생긴 괴리감이 절 지치게 했습니다. 그녀조차도 그랬으니까요. 빚좋은 개살구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떠나버린 여자가 있었지요.”

누구든 상처는 있다. 가희는 그것을 느꼈다. 그러나 상처는 상처로 끝내야한다. 그러면 어느샌가 곧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아날 테니까.

“변명일 뿐이에요. 기대치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것을 갖고 출발할 수 있다는 뜻도 되는 것 아닌가요? 그래요. 기대치에 호응해주지 못할 일도 있겠죠. 그렇다 하더라도 남들보다 한두걸음 앞서서 시작할 수 있다면 뒤쳐져도 남들보다는 앞자리라는 걸 왜 모르죠. 왜 그 혜택을 부정적으로만 돌리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당신 패배자 같아요.”

“언제나처럼 독한 말을 툭툭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군요. 뭐 그 바늘같은 말이 더 듣고 싶어서 당신을 쫓아다닌 저니까 할말은 없지만요.”

“왜 이렇게 당신하고 있으면 쓸데없는 말까지 하게 되는지 모르겠네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여겨주세요. 당신의 보살핌을 받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으니까.”

“사양하고 싶어요. 당신처럼 이상한 남자.”

“제가 보는 한에서 당신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느새 출발한 버스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며 각각의 삶에 대해서 언뜻언뜻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중간에 내리겠다던 현웅은 결국 마지막까지 가희를 따라나섰다. 단순히 촬영을 위해서라며 바득바득 우겼지만 가희로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기에 내내 노려보아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동행이라는 단어 말이에요. 정말 좋은 단어 아닌가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잖아요.”

“그다지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데요. 뭉클해지기까지?”

“그럼 여정이라는 단어는 어때요? 동반인은? 지나가는 과객은?”

“다 맘에 안 들어요. 제발 그만해요.”

“당신의 말과 표정에서 나오는 벌침같은 분위기를 사진에 담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걸 담아서 뭘 어쩌게요?”

“당신은 마치 추녀 끝에 매달린 고드름 같아요. 혹시 고드름 밑에 서 있다가 죽었다는 사람 이야기 들었어요?”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에요?”

“물론이죠. 그건 그렇고 고드름이 정수리에 꽂혀서 죽은거래요. 끔찍하죠?”

“그래서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벼락맞아 죽었다는 건 알아요?”

“전혀 관계없잖아요.”

“울지 않아요?”

그녀가 한숨을 폭 내쉬며 현웅을 돌아보았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그라는 존재가 신기하기도 했지만 귀찮은 마음이 더했다.

“새엄마 만나러 간다면서요. 안 울어요?”

“당신 때문에 울 틈도 없잖아요. 도대체가!”

“그럼 더욱 더 떠들어야겠네요. 난 울고 있는 여자 달래줄 자신은 없거든요.”

“울더라도 당신한테 달래달라고 할 마음 털끝만치도 없으니까 꿈 깨세요.”

“그러니까 달래주고 싶어지는데요?”

“설마 산소까지 따라오지는 말기를 바래요.”

“어른을 뵈러 왔는데 그냥 갈 수야 없지요.”

“그냥 가셔도 되거든요?”

“그럴수야 없지요. 대지의 품에 안긴 새어머니를 바라보는 당신을 꼭 사진에 담고야 말겠어요.”

“그러기만 해봐요. 그 사진기는 내 손으로 끝장내줄테니까요.”

“무서워라.”

“그만 따라오라니까요!”

“경치가 참 좋죠?”

“이봐요!”

“하늘이 맑아서 다행이에요.”

짜증이 담긴 가희의 날카로운 비난소리가 들녘을 울렸다.









“나갔어요?”

“아침에 나갔는데 어디가서 바람 좀 쐬고 싶은게지. 너무 걱정말거라.”

“그렇지 않아요. 이런 날...”

“현아.”

새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뒤로 하고 유현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찾아야 했다.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할수록 가슴이 미치도록 답답해져왔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서주의 묘지 앞에서도 계속 이 모양이었다.

“새어머니. 저 그만 가보겠습니다.”

“강실장?”

“오빠.”

“희수야. 함께 와줘서 고맙다. 미안하지만 급한일이 생겨서 먼저 들어갈게. 어머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강실장!”

급하게 돌아서려던 유현이 우뚝 멈추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서주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잘 있어. 이런 마음으로 니 앞에 설 수 없어. 이제 정말 널 보낼게. 그러니까 날 미워해. 원망해 줘. 지금 내 마음속에는 오직 한 사람에 대한 걱정뿐이다. 미치도록 그녀가 걱정될 뿐이야.’

정신없이 달려가는 유현의 뒷모습을 두 여자가 제각각 어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현수의 눈에서 증오가 활활 불타올랐다. 그러나 희수의 입가는 희미하게 말려올라갔다.

‘아줌마. 열정일까요? 난 유현오빠의 저런 열정이 너무 갖고 싶어요. 이걸 어쩌죠? 그에게는 없다고 생각했던 저 열정이 너무 탐나서 조바심마저 나네요.’

분노에 찬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는 현수를 흘끗 쳐다본 희수가 이내 서주의 무덤을 향했다.

‘언니 정말 바보다. 저런 오빠 모습 언니조차 상상못한 모습이지? 언니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열정이지? 언니는 어떻게 그렇게 심심한 연애로도 만족했던 걸까. 저런 열정을 가진 남자와 말이야. 나조차도 놀랄 저런 모습의 유현오빠... 정말이지 언니랑 난 지금껏 무엇을 한걸까. 그렇지만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이든 무엇이든 핵심을 알아냈다는 거야. 그 대상을 바꾸는 것만 남았을 뿐이겠지.’

분노에 찼던 현수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뭔가를 생각하며 눈을 빛내는 희수의 눈동자가 느껴지자 희미하게 만족스러운 기운이 돌았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희수를 부른 이유였다.









“새엄마. 나 왔어. 잘 있었어?”

소담스런 하얀 국화를 묘비앞에 놓고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맑은 하늘에서 느닷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망울에서 시작된 빗방울이 뺨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비도 오고 바람도 불었을텐데 춥지 않았어? 밤이 되면 무섭지 않았어? 새엄마는 어떻게 지낸거야. 말 좀 해줘 봐.”

덩그런 흙더미로만 남은 새엄마라는 존재가 가슴을 울렸다.

“오랜만이지? 이렇게 오랜만인데 새엄마는 묻지도 않아? 내가 잘 지내는지, 아빠는 어떤지, 새엄마가 없는데도 잘 돌아가는 이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

새엄마가 좋아하던 생크림케익을 펼쳐놓았다.

“이거 봐. 새엄마 생크림케익 좋아했지? 그래서 사왔는데 새엄마는 먹을 수 없지? 내가 사 온 것도 모르는거지?”

하염없이 묘지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가희를 현웅이 묵묵히 지키고 섰다.

“유현씨하고 같이 왔었어야 했는데 이렇게 나 혼자 왔어. 오늘 서주언니 생일이거든. 그래서 나 그 사람 옆에 있을 수가 없었어. 무작정 새엄마가 보고싶더라. 나 참 씩씩했었는데 지금은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아. 세월이 많이 흐른것도 아닌데 난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새엄마는 그 안에서 그대로인거지? 아무것도 변하면 안돼. 그대로 새엄마 모습으로 있어 줘. 언젠가 새엄마 만나러 가도 알아볼 수 있게 그렇게 있어줘. 알았지?”

현웅이 천천히 묘지 주위를 돌며 뚫어지게 가희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새엄마의 무덤을 바라보던 가희가 결국 눈에 불을 켜고 그를 노려보았다.

“가만히 좀 있으면 안 돼요?”

화내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어? 저를 의식은 하고 있었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잖아요. 왔으면 적어도 방해는 말아야 할 거 아녜요!”

“좋아요. 다 좋은데 부모한테 만나러 간다는 둥 하는 말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불효에요. 불효.”

“지금 왜 당신이란 남자와 함께 있어야 하는지 정말 이해가 안가요.”

“실랄하군요. 그래요. 그렇다고 쳐요. 새어머니 앞에서 그렇게 싸우고 싶어요?”

“제발 저리 좀 가 있어요. 화난단 말예요.”

“나도 소개시켜줘요.”

가희가 기가 막히다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자 현웅이 어깨를 으쓱했다.

“싫으면 말고.”

“정말 신경질 나.”

그를 획 돌아보며 화를 내는데 불빛이 번쩍했다. 카메라 플래시였다.

“지, 지금 뭐해요!”

셔터를 가볍게 누른 그가 이내 카메라를 내리고 빙긋 웃었다.

“기념 촬영입니다.”

“당장이라도 당신을 저기 옆에 묻어버리고 싶으니까 당장 그 카메라 저리 치워요.”

가희가 낮은 목소리에 분노를 가득 담은 채 으르렁거리자 현웅이 웃었다.

“갈수록 더 거칠어지네요. 무서워라. 전 야생화나 둘러보고 와야겠습니다.”

“돌아가는게 좋을거에요.”

“걱정말아요. 당신에게 돌아올 테니까.”

가희는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봐주고는 고개를 돌려 새엄마를 향했다. 그렇게 싫은 표정을 지었지만 막상 현웅이 사라지니 인적없는 산속이 적막해 슬퍼졌다.

“새엄마. 요즘 나에게 일어나는 혼란속에 한 사람이 있어. 단 한사람으로 인해 이렇게 아팠다가 행복했다가를 반복하네? 말좀 해줘. 새엄마. 나 어떻게 해야하지? 오늘 언니 간 날인데 그런데도 벌써 그 사람이 미치도록 보고 싶으니 어떡하면 좋을까. 오늘만은 나 이래서는 안될텐데… 서주언니를 슬퍼해야 할 오늘 같은 날, 난 왜 그 사람과 내가 슬픈걸까? 왜 그럴까. 새엄마…”








“저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시면 됩니다.”

동네 노인이 일러준 길을 따라 바람처럼 달려올라갔다. 스치듯 떠오른 생각이었다. 마치 이 곳에 있을 것 같은 직감이 그를 끌었다.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유현은 쓰디쓴 감정을 삼켜야 했다. 왜 신경써주지 않았던걸까. 그저 그녀를 잡기에만 아등바등해서 한번도 찾지 않았던 그녀의 생모 산소였다. 어째서 그렇게 안일하게 살았던 것일까. 그녀의 시선만 붙들면 된다는 그런 유치하고 짧은 생각으로 가득찼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분노가 차 올랐다.

나무들이 꽤 우겨져 있다. 이리저리 양복이 긁혔지만 상관하지 않고 좁은 산길을 올라갔다. 얼마쯤 올라갔을까. 마침내 평지가 나타나더니...

‘가희야...’

그녀가 무덤에 뺨을 대고서 가만히 누워있었다. 마치 잠이 든 듯 고요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앞에 소주병이 놓여있다. 유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천천히 다가가던 그의 눈동자가 잠시 주춤거렸다. 그녀옆에 놓여진 술잔, 분명히 두 사람이 마신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젓가락도 두개... 다가서던 그의 발이 멈췄다. 그녀의 뒤에서 수풀이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인기척과 함께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의 눈이 커졌다.

“가희씨. 그만 일어나요. 아무리 새어머니가 있는 곳이라고 해도 흙과 풀이 축축해요. 몸에 안 좋아요.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래요?”

남자는 분명 그였다. 제주도에서 만나고 또 별장에서 우연히 만났던 백현웅. 유현의 가슴속에 알 수 없는 분노가 밀려들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미움이 그를 덥쳤다. 저 남자가 왜!

“그냥 둬요. 나 너무 편한 거 있죠. 이렇게 흙냄새 맡고 있으니까 너무 좋아요. 새엄마 품 속 같아.”

뺨에 흙이 묻었지만 가희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이슬에 젖은 풀이 조금 축축했지만 오히려 그 습기에서 나오는 기운이 그녀에게 온기를 전해주었다.

“그만 내려가는게 좋겠어요. 이러다가 날 저물겠어요.”

“먼저 내려가요. 난 오늘 여기서 잘 거야.”

“정신차려요. 그게 말이 돼요? 당신 혼자 두고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상관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난 여기가 좋아요.”

“소주기운이 오르는 모양이군요. 지금 몸이 나른해지고 따뜻해오죠?”

“어떻게 알았어요? 정말 그래요. 따뜻한 온기가 느껴져요. 새엄마가 전해주는 걸까요?”

“미안하지만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그 온기는 알코올의 기운일 뿐이에요. 술에 취해 잠들면 그대로 천당가요. 아니 워낙 사나운 성격이니 천당갈지는 확신 못하겠지만… 어쨌거나 술이 깰수록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니까 얼른 내 손 잡아봐요. 우선 내려가야겠어요.”

현웅이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뻗쳤다.

“당장 그 손 치워!”

















“당장 그 손 치워!”

현웅의 말대로 정말 취한 모양인지 현실과 꿈 사이를 오락가락 하고 있던 가희의 눈이 번쩍 떠졌다. 현웅 역시 놀란 눈으로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위태로운 모습으로 서 있는 남자, 유현이었다.

“유현씨?”

가희의 눈이 젖어들었다. 순간 움찔하던 유현의 몸이 그대로 굳더니 분노에 찬 얼굴을 들어 순식간에 현웅에게 달려들었다. 가희가 벌떡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늦었다. 유현의 주먹이 꽃힌 현웅의 몸이 뒤로 주춤거리며 밀려났다.

“그만해요!”

가희가 달려들어 유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유현은 그녀마저 뿌리칠 정도의 분노에 휩쌓인 채 오직 현웅만 독하게 노려볼 뿐이었다.

“이거 놔!”

“그러지말아요.”

현웅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가격당한 옆구리부근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두번째 주먹이네요. 여전히 맵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합기도라도 배워둘 걸 그랬습니다.”

“집어치워. 니가 왜 여기있어!”

“뭔가를 오해하신 모양입니다. 친구로서 따라왔을 뿐입니다.”

“하! 친구?”

유현이 서늘하게 웃었다 그러나 현웅은 차분했다. 그런 현웅의 태도에 가희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입을 막아야했다. 무슨 말을 어떤 식으로 할지 알 수 없는 인격이었다. 만약 그 날의 이야기를 하기라도 한다면...

“현웅씨. 그만해요.”

“우와. 영광인데요? 이름 불러준거 알아요?”

“뭐라구요? 당신 지금 제 정신이에요?”

“저 싸이코는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도 끝도 없이 이상한 말을 꺼내는 사람이 현웅이었다. 유현이 더 이상 상대할 필요도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가희의 손목을 획 낚아챘다. 순간 현웅이 달려들더니 가희의 다른 쪽 손목을 잡고 꾹 눌렀다.

“제 말은 듣고 가십시오. 이대로 갈 수는 없습니다.”

유현이 위협적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맞닿는 순간 서로를 향한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잠시간의 정적 후 현웅이 낮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가희씨를 따라온 쪽은 제가 맞습니다만 초조해하실 것까진 없습니다.”

기가 막힌 가희였다.

“겁이 없군. 내게 지금 초조해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건가?”

“그렇습니다.”

“좋아. 초조해하지 않을테니 당장 꺼져.”

“유현씨.”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마. 알아들었어?”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가희씨와 전 친구이니까요.”

“누구 마음대로.”
“누구 맘대로요!”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너무 냉정한 부부네요. 어떻게 그렇게 가슴 아픈 말을.”

“몸이 근질거리시는가보군.”

유현이 손가락 관절을 우두둑 부러뜨리며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어차피 한번은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현웅씨!”

가희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를 저지했다. 도대체 저 남자는 어떤 인격을 가진 사람이란 말인가.

“말하지 말아요!”

정말 말하면 가만 두지 않을테야.
현웅을 향해 다가서던 유현의 발이 멈췄다.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이게 무슨 말이지?”

이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이미 술은 깨어버린지 오래다. 가희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저 현웅이라는 남자를 쥐어박고 싶을 뿐이었다.

“현웅씨. 더 이상 말하면 정말 가만있지 않을거에요.”

“당신은 현실을 피하고 있어요. 그런식으로 고개를 돌려봤자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것만으로 모든 일을 덮어버린다고 덮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끄러워. 당장 본론이나 말해.”

유현이 흡사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으스스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위기의식을 느낄 정도로…

“유현씨. 가요.”

“움직이지 마. 이봐. 빨리 말해 봐.”

“그만 해요! 말하지 마!”

“민가희!”

가희가 격렬하게 현웅을 막아서자 유현의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두 분 모두 그만해요. 어차피 알아야 할 일입니다. 가희씨가 뭐라고 해도 난-“

“백현웅씨. 당신 정말 미쳤어요? 당신이란 사람 정말이지...”

“네. 미쳤습니다. 저는 그런 놈입니다. 그렇지만 가희씨. 당신은 어떻습니까? 아무것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귀를 막아버리고 있는 당신은 어떻습니까? 그런식으로 위태롭게 땅을 디디고 서 있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다그치는 것입니까.”

“당신이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어떻게 살든 당신과 관계없어요. 털끝만치도. 지금 이순간 당신이 얼마나 얄미운지 알아요? 생각같아서는-”

“가자.”

유현이 그녀의 팔을 거칠게 끌었다. 가희가 더 할말 있는데 왜 끄냐는 눈으로 유현을 돌아보았다.

“이거 놔요.”

“아무것도 묻지 않을거야. 그러니 가자.”

유현이 냉랭한 얼굴의 가희쪽으로 천천히 다가가 몸을 숙이고 중얼거렸다.

“정말… 묻지 않을거에요?”

“맹세라도 할까?”

“의심할거잖아요.”

“의심이든 뭐든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없어. 내 여자를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저 남자를 임의대로 죽여버렸으면 좋겠어? 그럴까?”

유현의 눈빛이 와 닿았다. 우선은 저 백현웅이라는 남자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같은 그였기에 불안했다. 그러나 현웅이 저렇게 나오는데도 더 이상 다그치기를 포기한 것 같은 유현의 속마음도 불안하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상심을 담은 유현의 눈동자를 말없이 쳐다보던 가희는 아무말없이 걸음을 뗐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현웅이 여전히 뒤에서 건들거리고 있었다.

“미친 놈.”

유현은 다른 말 없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앞만 향해 걸었다.

“그럼 쓰레기나 치울까?”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진 후 천천히 산소앞을 정리하며 현웅이 중얼거렸다.

“속시원히 터트려야 편할 것 같다면 그건 너무 이기적인 걸까? 나도 미쳤군. 이런 상황에서 나불대려고 했다니. 민가희씨.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하는게 대체 뭐지? 내가 희생양이 되어 대신 터져줄 의향도 있었는데 말야. 세상 살면서 희생양 구하기는 어디 쉬울 줄 알아요? 해준다고 해도 싫다니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지? 차라리 다 말하고 몇 대 치면 이 앙물고 맞을 생각이었는데 서운하군. 하여간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천지라니까.”

확실히 백현웅이라는 남자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형이라고 생각하는 가희였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들을 듣고 있으면 가슴이 후련해지기도 했다. 어쩌면 가희는 저 남자와 같은 수준의 정신세계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가희는 현웅의 이상한 성격이 묘하게 납득이 되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차분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녀를 끌고 있는 그라는 남자 역시 묘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유현이 가희를 끌고 간 곳은 시내의 한 포장마차였다. 우동과 꼼장어를 시킨 그가 소주잔을 채워 그녀에게 내밀었다.

“마셔.”

“겨우 술 깼어요.”

“더 마셔.”

그를 잠시 노려보다가 보란 듯 한숨에 들이켰다.

“멋진 원샷이군.”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거에요.”

가희가 다짐받듯 말하자 유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뭐래?”

“아니면 말구요.”

가희는 조금 머쓱해져서 애꿎은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콩콩 찍었다.

“말해주지 않아봤자 너만 손해라는거 알지? 고문을 해야 입을 열려나?”

“미안하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아요.”

“그 놈이 뭐라도 되는것처럼 으스대며 말하는 꼴을 내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도 입을 꾹 다물고 있겠다 이거야? 게다가 그렇게 침착하게 참았는데도 말이야.”

“침착하게 현웅씨에게 주먹을 꽂았겠죠.”

“그 새끼 이름 부르지 마.”

“그럼 뭐라고 불러요? 백씨? 백가? Mr.백?”

“소주 한 잔 마시고 취하는 재주 있나?”

“이상한 소릴 하니까 그렇잖아요. 뭐라고 불러야 하죠?”

“니 말대로 백가든 백씨든 맘대로 해. 뭐라고 부를지까지 일일이 알려줘야 하나?”

마치 아이처럼 심통부리는 모습의 유현이 낯설기도 했지만 은근히 기분이 좋은 것은 왜일까.

“어떻게 온 거에요?”

“묻지 마. 나도 어떤 말도 하지 않을테니까.”

그때 쯤 가희는 기가 막혀서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 남자가 그 강유현이 맞단 말인가? 이런 식의 대사를 치는 남자가...

“맘대로 하세요.”

“미치겠군.”

유현이 답답한 지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도대체 그 새끼랑은 왜 같이 있었던거야!”

“우연히 만났을 뿐이에요.”

“널 쫓아왔다는 소리를 내 귀로 똑똑히 들었어.”

“꼭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야 해요?”

“내 심장을 들여다 봐. 편할 것 같아?”

“보이지 않아요.”

“젠장.”

소주잔이 끊이지 않고 채워졌다 비워졌다를 반복했다. 그 순간 이후 아무말도 하지 않고서 마치 경쟁이나 하듯이 잔을 비우는 두 사람이었다. 그 자리가 이미 이차가 되는 가희가 취한 것은 당연지사였고 유현 역시 흥건히 취해있었다.

“민가희.”

유현이 가희의 잔을 채우며 그녀를 불렀다.

“말해보세요.”

“미안해.”

술잔을 들어올리던 가희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

“다음부터는 혼자 오지 마. 새어머니 만나러 오고 싶으면 말해. 혼자서 묘지 끌어안고 있는 모습 따위 보이지 마. 다음에는 함께 가서 편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드리자. 부탁이라고 해도 좋아. 이제 함께 오자.”

술잔이 눈물로 채워졌다. 일렁이는 맑은 액체가 알코올이 아닌 눈물같아 맛이 비릿했다.

“도대체 당신이란 사람. 이렇게 잘 해주는 이유가 뭘까요. 그렇지만 난... 부부로 맺어졌기에 받을 수도 있는 존중을 한참 넘어서는 당신의 마음이 부담스러워요.”

“왜 그렇게 의무로만 여기지? 내가 그렇게 심심하고 틀에박힌 사람같나? 남편의 역할만 내세우는 사람같나?”

“아니요. 당신이 좋은 사람이란 거... 당신이 정많고 따뜻한 사람이란거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럼 왜 넌 마음을 열지 않는거지? 왜 겁을 내는거야? 왜 빗장을 거는 것만도 모자라 그것을 붙들고 틀어쥐기까지 하는 거니.”

“바람이 두드린 것일까 겁이 나서요.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서립문을 흔들고 지나간 것을 반가운 손님이라 착각하여 버선발로 뛰어나갔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깨닫고 한없이 무너질까봐 겁이 나요.”

유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라는데 왜 오해하고 있냐고 항의해봤자 모습만 우스워질 뿐일 것이다. 그 앞에서 미친 듯 토로할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바람이 불어 문이 삐걱거리는 것을 그대가 아닌가 하고 착각하네요.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자꾸만 그대를 기대하게 하는 무심한 바람이 얄미워서 고개를 돌리고 있어요.

“바람이라면 그림자가 없을테죠?”

가희가 무심코 중얼거리자 유현이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응?”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거든요. 그 곳에...”

중얼거리는 가희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취기가 올라와 졸음이 밀려왔다. 유현의 모습이 두개씩 세 개씩 흔들렸다.

“한 잔 더 마셔요.”

취한 가희가 술병을 들더니 유현의 잔을 채우자 유현이 피식 웃었다.

“너 취했어? 지금 물병으로 따르고 있잖아.”

“네?”

가만히 쳐다보니 생수병이었다. 생수병을 소주병이라고 착각하고 따르다니... 확실히 취하긴 취한 모양이다. 앞이 흐려졌다. 천천히 테이블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니 고개가 떨어지는것일까. 그렇게 잠의 세계로 빠져들려는 찰나.

“민가희! 어머. 가희야!”

누군가가 세차게 가희의 등을 쳤다. 화들짝 놀란 가희가 본능적으로 눈을 치켜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등이 아릴 정도로 세게 친 불청객은.

“선영아!”

“가희야! 이 기집애. 내려온거야?”

선영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고향 친구들이 빙 둘러서있었다. 모두들 반가움과 놀라움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그녀를 집중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얘들아!”

“앉아도 돼지? 어머. 기집애. 이뻐졌다.”

“고마워. 연주야. 너희들은 잘 지냈어?”

“그냥 그렇지 뭐. 재성이는 만났니?”

“응. 재성이도 잘 지내.”

“어머. 기집애. 남편이니?”

“으. 응...”

모두들 유현을 넋이 빠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엄청 잘 생겼다. 기집애. 너 능력 좋다?”

선영과 연주가 그녀를 둘러싸고 앉아 소곤거렸다.

“아... 유현씨. 친구들이에요. 선영이, 연주, 종희, 상연이.”

“우와! 너무 반가워요.”

“네. 반갑습니다.”

유현은 갑작스럽게 up된 분위기에 다소 적응을 못하는 모습이었다. 유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하자 모두들 꽥 소리를 지르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 강유현도 여자들이 이렇게 불시에 한꺼번에 달려들자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가희는 그 모습이 재미었었다.

“우리가 방해한건 아니죠?”

“그, 그럼요.”

“어머. 너무 좋다. 술도 마셔도 되죠?”

“네. 그, 그러십시오.”

“꺄아~ 여기 소주 두 병 주세요!”

“얘. 얘들아.”

기잽애들. 그렇다고 두병이나 시키다니.

“근데 너 엄청 차분해졌다? 술 취하면 장난 아니게 놀던 애가.”

윽. 이 기집애들.

“선영씨라고 하셨나요? 가희가 그렇습니까?”

제발 참아주세요. 유현씨. 그러나 유현은 솔깃한 표정이었다.

“웬일이니! 가희래. 가희. 들었니?”

“너무 멋있다.”

호들갑을 떠는 친구들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가희였다. 게다가 유현이 마치 뭔가를 발견한듯한 표정으로 씩 웃으며 가희를 쳐다보고 있었기에 당황스러움은 더했다. 친구들을 만난 것은 너무 좋았지만 이런 식은...

그러나 그런 어색함도 잠깐이었다. 잠시 후 가희는 이미 친구들과의 해후에 더욱 더 취한 채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떻게 만나셨어요?”

“청혼은 어떻게 하셨어요?”

“우리 가희 잘 해주세요.”

친구들이 참새처럼 재잘거리며 분위기를 띄우는 통에 기뻤다. 그래서인지 그녀도 곧 친구들과 지내던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게다가 술도 한참 취한 상태였다.

“가희야. 우리 놀던대로 해볼까?”

“놀던 대로라면?”

연주의 말에 유현이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가희를 돌아보았다. 그때쯤 가희는 이미 술에 완전히 취해서 뭐든지 오케이였다.

“가희는요. 술 취하면 노래 불러요. 장소를 불문하죠.”

“그럼 노래 불러볼까?”

“니가 언제 하지 말랜다고 안 했니?”

“유현씨. 우리 노래 불러요.”

“뭐?”

유현이 황당함 반 흥미로움 반인 표정으로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유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희가 좁은 포장마차 안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제법 율동까지 붙여가며 노래를 시작하자 모두들 흥이 나서 박수를 쳐댔다.

“해~저~문~ 소~양~강~에~”

숟가락까지 척하니 들고서 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유현이 아연실색했다. 그가 알고 있는 그녀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유현은 더없이 부드러운 눈으로 가희를 쳐다보았다. 친구들과 티없이 맑은 미소를 주고받으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예뻤다. 사실 주사가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돌았다. 방글방글 웃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가희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유현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껏 보아온 어떤 모습보다도 더 예쁘구나.’

가희를 바라보는 유현의 깊은 눈이 그 밤 친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봐. 가수 아가씨. 아침이야.”

유현이 가희를 흔들어깨웠다. 가희가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죠?”

“어디긴 어디야. 여관이지.”

“네?”

가희가 화들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켜 주위를 획획 둘러보았다.

“세, 세상에.”

“속은 괜찮아?”

가희는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아직도 속이 쓰린 것을 보니 어젯밤 많이 마시긴 한 모양이었다. 어렴풋이 친구들을 만난 기억이 나고...

“나 시, 실수 안 했어요?”

큰 거울앞에 서서 새하얀 셔츠의 소매단추를 채우고 있던 유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곧 그의 입가에 유들유들한 미소가 감돌았다.

“글세. 기억 안나?”

“친구들하고 술 마신 건 기억나는데...”

“그래. 술 마셨어. 좀 취했고. 왜? 주사라도 있어?”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유현의 표정에 가희는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주, 주사라뇨. 그런 게 있을 리가 있어요?”

“걱정마.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정말이죠?”

“그렇다니까.”

내심 의심은 갔지만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왜? 취해서 고래고래 노래라도 불렀을까봐?”

그녀의 눈이 번쩍 떠졌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마, 말은...”

“소양강처녀라도 불렀을까봐 걱정 돼?”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장난하지 말아요.”

“취하면 노래 불러대는 주사라도 있을까봐 걱정되는건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를 향한 공격이었다. 열이 확확 올라와 얼굴이 온통 뜨거워졌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어쩔 줄 몰라하는 가희의 옆으로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얼른 씻고 올라가자.”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가희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가희는 고개를 들 자신이 없었다. 또 노래를 불렀나보다. 도대체 그가 어떻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안 놀릴게.”

그의 부드러운 음성이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녀가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살짝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치를 살피는 그 모습에 유현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가희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크게 웃는 그의 모습이 생소했다. 그러나 그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그 모습에 가슴이 설렜다.

“새어머니 아버지 기다리셔. 얼른 씻고 올라가자.”

“미안해요.”

“왜?”

“내 멋대로 내려와서.”

“아니.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해. 주사를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유현씨!”

그가 또 큰 웃음을 터뜨렸다. 새하얀 미소가 부서졌다. 마치 깃털처럼 포근해서 가슴이 따뜻해졌다. 유현이 가까이 다가와 턱을 들어올려 그녀의 눈을 마주보게 했다.

“세상 누구보다 예쁜 모습이었어. 취한 여자가 사랑스러워 보이긴 처음이었다.”

얼굴이 확 닳아 올랐다.

“노, 놀리지 말아요.”

그의 손을 밀듯이 쳐내며 고개를 돌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뻤어. 진심이야. 내가 봐온 그 어떤 모습보다도 예뻤어.”

“자꾸 왜 그래요.”

“진심이니까. 내 마음을 끊임없이 불어넣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거든.”

“얼른 씻어야겠어요.”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못해 벌떡 일어나는 그녀의 손목을 그가 지긋이 눌렀다.

“또 도망가는 거야?”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오지 말아요. 나한테 술 냄새 날 거에요.”

“내가 말했지? 넌 나한테 제일 어울리는 향수라고.”

“....”

“어제 널 보고 느꼈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니 모습을 되찾고 말겠어. 그렇게 사랑스럽게 웃는 니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어.”

“난 지금도 나쁜 상태는 아니에요.”

“금방 발끈하기는. 네가 날 만나서 더 예뻐지고 행복한 웃음을 지었으면 좋겠다는 말이야. 날 만나고 나서 어두워진다면 그건 나에대한 실례잖아. 안 그래?”

“잘났네요.”

“그렇게 톡톡 쏘아대봤자 이젠 나한테 안통해. 어제 널 봐버렸거든. 실은 참 사랑스러운 여자란걸 말이야. 계속 어제처럼 웃기를 바랄게. 나란 남자를 만난게 불행은 아니어야 하잖아.”

“불행일리… 없잖아요.”

유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신기하지? 나에게도 이제 자신없는 것이 생겼다. 난 니가 자신 없어.”

유현의 처진어깨가 천배는 더한 무게로 와닿았다. 이 남자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가희는 그것이 신기했다. 그의 처진 어깨를 보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유현씨. 그거 알아요? 나 취했다고 매일 노래부르진 않아요. 특히 기분이 좋을 때 툭툭 나오는 버릇이에요.”

유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어제는 참 기분이 좋았나봐요. 오랜만에 친구들도 만나고 새엄마도 만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다그치지 말아요.”

“그리고 뭐!”

유현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다그쳤다.

“말해줘. 그리고 뭐.”

“그리고... 당신과 날 부러워하는 친구들을 느껴서 막... 기분이 좋아졌나봐요.”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더니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친구들이 부러워하면 기분이 좋아?”

“그렇다기보다는... 당신이 옆에 있어서 좋았어요.”

“미치겠군.”

그의 힘이 느껴졌다. 그가 그녀를 바스러질 듯이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고마워. 날마다 네 말투가 이렇게 호의적이면 얼마나 좋을까.”

“미안해요.”

“미안했어요라고 하는거야. 이제는 그러지 않을테니까. 그렇지?”

“몰라요.”

“솔직하지 않은 여자는 벌을 받아야해.”

가희는 달려드는 그를 피해 재빨리 욕실로 도망가야했다.






“안녕하세요. 아줌마. 라미도 오랜만이야.”

낯선 여자가 찾아왔다. 크림빛의 밝은 시스루원피스차림의 여자가 함빡 웃으며 들어서자 모두들 반갑게 웃어보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희수 아니니.”

시새어머니가 반색을 하며 그녀를 반겼다.

“네. 그동안 건강하셨죠?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아요.”

“어머. 희수언니 그새 거짓말이 많이 늘었네?”

라미가 베시시 웃으며 다가가자 희수가 빙긋 웃었다.

“너도 여전하구나. 라미야. 학교는 재밌어?”

“늘 그렇지 뭐. 언니도 잘 지냈어?”

“나도 늘 그렇지 뭐.”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와. 정말 오랜만이구나. 아 참. 인사하렴. 가희야. 현이 후배이고 친구 딸인 희수란다.”

친절하게 웃으며 돌아보는 시새어머니의 말에 가희도 미소지으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반가워요. 민가희에요.”

“윤희수입니다. 너무너무 궁금했었는데 반가워요.”

“왜 궁금해? 오호라. 우리 오빠 좋아서 죽어라 따라다닌 장본인이니까 질투가 났었구나?”

“라미야!”

장소를 불문하는 라미의 철없는 말에 시새어머니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황한 듯 겸연쩍은 미소를 짓는 희수를 가희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라미가 어깨를 으쓱하며 머리카락을 어깨뒤로 넘겼다.

“왜? 하면 안되는 말이야?”

“너 오랜만에 봤는데 그렇게 태클걸기니?”

“태클은 무슨. 사실을 사실대로 얘기한건데. 이미 지나간 일인데 뭐 어떠우. 안그래?”

“라미야!”

시새어머니가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꾹꾹 눌러가며 그녀를 막았지만 라미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래. 니 말대로 난 괜찮아도 가희씨에 대한 예의가 아닌건 아닐까하는데.”

희수가 웃으며 가희를 돌아보자 난데없이 화제에 오른 가희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별로 웃어주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갑작스런 등장만큼이나 놀라운 사실이었다.

“에? 새언니 신경쓰여요? 그렇지만 우리 오빠 엄청 인기 많았던건 대충 알고 있지 않았나?”

“라미야. 그만하래두!”

“그래요. 아가씨말이 맞아요. 유현씨 매력이야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요.”

희수가 잠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필시 호의적인 빛은 아니었다. 가희는 예리하게 그것을 느꼈다.

“얼랄라? 우리 오빠 지원군 엄청 많네?”

“라미. 너 밖에 안나가니? 내가 너 때문에 심장이 툭툭 떨어지겠구나.”

“새엄마는 무슨 내가 천덕꾸러기나 되는것처럼 말하우?”

“얼른 희수한테 사과해라. 오랜만에 온 사람한테 그게 무슨 실례니. 새언니한테도 사과하고. 어찌 저렇게 철이 없는지. 미안하구나. 얘들아.”

오히려 당황의 기색을 보이는 두 사람앞으로 라미가 툭 끼어들었다.

“뭐 어쨌거나 인기가 많았든 말든 지금은 언니한테 푹 빠져 있으니까 다 지나간 얘기 아닌가? 희수언니도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니까 상관없을테고. 난 그런 생각에서 한 말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너무 구박하지 말라구요.”

“아이고. 골치야. 가서 차나 내와.”

“새엄마도 참. 내가 차나 탈 수 있으면 양반이게?”

“그럼 과일이라도 내 와.”

“나 바나나를 제외한 모든 과일껍질과 상극이란거 아직도 모르우?”

“자랑이다. 이것아. 널 낳고도 미역국을 먹었다니 삼신할머니가 기가 차실 노릇이구나. 철없는 이것을 어찌할꼬.”

“새엄마. 산부인과 의사잖우. 나 바꿔치기 한거 아니유? 안 그래도 오빠랑 나랑 의붓남매였으면 하고 바랄 때 많았는데. 그럼 결혼해도 되잖우.”

“뭐, 뭐라고!”

아연실색하며 소리치는 새어머니를 뒤에 두고서 라미는 한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결국 새어머니가 그녀의 귓불을 잡아 끌었다.

“말이라고 다 내뱉으면 다인줄 아니? 넌 어떻게 된 애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이지. 아얏. 아프단 말예요. 어차피 의붓남매라고 해도 오빠가 새언니한테 푹 빠져있데 말도 못해요? 새언니 새엄마 좀 말려줘요.”

“시끄러워. 이것아.”

새어머니가 정말 화가 났는지 라미를 질질 끈 채 이층으로 올라갔다. 가희는 기가 막힌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막말이든 아니든 우선 내뱉기부터 하는 라미도 라미였지만 저런 딸을 끌고가는 새어머니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확실히 골치아프기는 할 것이다. 한참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가 문득 희수의 존재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다를까 그녀가 가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차 드릴까요?”

가희가 웃으며 말하자 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시면 고맙죠. 근데 라미가 한 말 사실 좀 놀랍네요. 유현오빠 말이에요. 누구한테 보여질 정도로 가희씨를 사랑하나봐요.”

생각같아서는 무슨 상관이나며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게다가 그러나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차를 가지러 가기위해 일단 몸을 돌렸다.

“저 유현오빠 좋아한 거 사실이에요. 라미말대로 엄청나게 쫓아다녔구요. 창피한 일이긴 하지만 아직 그 마음 변함없어요.”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그녀가 지금 도전을 하고 있다는 것. 그런 에네르기가 뿜어져 나오는 그녀였다. 저렇듯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를 알수는 없어 헛웃음마저 났다. 주방으로 들어가려던 가희의 발이 멈췄다. 그녀가 희수를 돌아보았다.

“그런가요?”

“네. 가희씨 얘기 현수아줌마한테 들었어요. 어차피 그 쪽도 시작한지는 얼마되지 않은거 아닌가요? 단지 결혼을 했다는 입장만 다를뿐이지 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요. 저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하는 도중에 실례지만 아가씨 유현씨 후배라고 했죠?”

차갑게 되묻는 가희의 말에 희수가 제멋대로 쏟아붇던 말을 멈췄다. 가희의 눈빛이 싸늘했다. 직감적으로 쉽지 않은 상대라는 것을 파악했다. 어떻게든 무언가를 심어주고 싶어 되고말고 떠들어댄 경솔함이 조금 신경이 쓰이는 희수였다.

“그런데요?”

“유현씨 후배라면 동생과 같겠네요.”

“무슨 말이죠? 유현오빠가 저를 동생이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은건가요?”

희수도 대차게 쏘아붙였다. 기선제압이 중요하다면 지금이 그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사람 생각을 내가 뭐하러 상관하죠? 유현씨 후배이고 동생같은 존재라면 나보다도 어린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오빠한테 들었어요. 나보다 나이가 위라고요.”

희수는 도대체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모르겠다.

“그랬나요? 그럼 말해두겠는데 호칭을 조심해줘요. 나보다 어린 사람한테 가희씨 운운하며 이름불리고 싶지는 않네요. 난 유현씨 아내에요. 유현씨가 희수씨에게 오빠라면 난 언니가 되는거에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 그건...”

화가 치밀어오르는 희수였다. 유현의 아내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그 모습에서 알 수 없는 분노가 돌았다. 현수에게 들은 것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조금 짜증나는 스타일일 것이라 단정하고 있었는데 마주친 눈빛이나 사람을 대하는 분위기가 가볍게 보아넘길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었다. 게다가 유현에 대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했음에도 그것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혼자 조바심을 부린 것 같아 수치심마저 들었다.

“언니라고 부르던가 정 뭣하면 부르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말을 들어보니 그다지 들어야 할 말들은 아닌 것 같네요.”

“무시하겠다는 건가요? 그렇게 오빠에게 자신이 있어요?”

“희수씨.”

가희가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도전적으로 가희를 쳐다보았다.

“말해보세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의 프라이드로 살아요. 내가 자신있는 건 나에대한 그 사람 마음이 아니에요. 그 사람 자체를 믿는 것뿐이에요. 그것이 부부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거든요. 그럼 난 차를 준비하러 갈게요.”

쌩 돌아서는 가희를 희수가 벌겋게 닳아오른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화가 나 손마디가 새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그렇게 잘난 척 하지 말아요. 서주언니가 없는 지금 가희씨 아니... 언니나 나나 똑같은 위치 아닌가요? 아니 오히려 오빠 좋아하는 마음으로 치자면 내가 더 깊을테니까요. 어차피 오빠의 마음을 차지하면 그깟 부부라는 형식적인 틀 따위 차라리 우스운거 아닌가요?”

가희가 잠시 멈춰섰지만 이내 아무말없이 주방으로 사라졌다. 더욱 더 화가 난 채로 희수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층에서 내려오던 새어머니가 그런 희수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걸려있다.

“희수가 아직 그대로구나. 유난히 욕심이 많은 아이였는데... 그나저나 우리 새아기가 더 성숙해진 것 같아 다행이구나. 라미도 희수도 아직은 불안정한 어린애와 같아. 가희야. 사랑을 지키려면 그렇게 차분히 정리를 해야 하는거란다. 부딪혀서 흐트러뜨리는 것보다 정갈하게 가다듬고 정리를 하는편이 지혜롭지. 우린 늙은 사람들이라 젊은 사람들의 무모하기까지 한 사랑이 이해가 안 가기는 하지만, 한심스럽게 걱정하는게 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때밖에 할 수 없는 유치한 사랑이 조금은 부러운 거란다. 그러니 희수를 탓할수만도 없는 노릇이지. 그렇지. 가희야?”

그녀가 천천히 움직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희수야. 부모님들이 좋아하시겠구나.”

“네. 새어머니. 전에 백화점에서...”

그녀가 잔잔하게 웃으며 희수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당신의 열렬한 팬이 왔다가 갔어요.”

유현과 영화를 본 후 커피를 마시며 가희가 꺼낸 말이었다. 유현이 커피잔을 입에 대다 말고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열렬한 팬?”

“시치미 떼는 게 아니기를 바랄게요.”

“정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열렬한 팬이라니.”

“윤희수라고 하면 알아들으시겠어요?”

그가 피식 웃었다.

“아. 희수? 찾아왔었어? 오해하지마. 새어머니 친구분 딸이야. 대학 후배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는 건가요?”

“오. 민여사. 지금 질투하는건가?”

유현이 빙긋 웃으며 유들거렸지만 가희는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을 뿐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녀가 한 말들이 떠오르면 혈압이 오를 것 같았다. 말하는 타입은 대충 라미와 비슷했다. 그래도 라미는 그렇게 밉살맞지는 않았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심각하게 얘기하는데 장난식으로 받아들이지도 말구요.”

“요구사항도 많으시군. 나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야. 왜 오해하지?”

“만약 그 당돌한 아가씨가 당신을 노리는 매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옆에서 사냥꾼이 화살을 쏘아줘야지. 니가 해 줄거지?”

“상당히 턱없는 주문이군요. 내가 할 거라 생각해요?”

“하고도 남을 거라고 기대할게. 윤희수 이제 곧 박제되겠는걸?”

“재미있어요?”

“아니.”

유현이 빙긋 웃으며 커피잔을 내려놓고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희수가 이상한 소리를 했나보군. 그렇지만 니가 이해해. 뭐랄까. 희수는 감정표현이 심한 아이야.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려움 한 번 겪어보지 않고 유복하게 살아온 것이 원인일까? 가지고 싶은 것을 반드시 가져야 만족하는 타입이지.”

“당신이 그 구매대상리스트에 올라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나는 반품대상이야. 곧 흥미를 잃을테니까.”

“그렇지 않을수도 있죠.”

“아니. 절대 잃을거야. 왜냐하면 나는 지금 한 곳에만 정신이 팔려있으니까.”

“또 느끼한 소리 시작하려는 거라면 사양할래요.”

“내가 말했잖아. 끈질기게도 불어넣어줄거라고. 난 온통 너에게만 향하고 있어. 안 느껴지니?”

“점심은 무슨 일이 있어도 김치종류로 먹어야겠어요. 속이 안 좋아요.”

“내 사랑만 먹어도 배부르지 않나?”

유현이 지치지도 않는 듯 닭살행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소화불량이에요.”

“내 사랑으로 치료해주지.”

“차라리 아버님 병원으로 가겠어요.”

“정말 무드 없는 여자로군.”

툴툴거리는 유현이었다.










“카드?”

저녁 식사 후 방에서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유현이 가희를 돌아보았다. 다림질을 하던 가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돈 없으니까 유현씨가 카드 빌려줘요. 싫어요?”

“여기 있어.”

별 말 없이 카드를 내미는 유현이었지만 눈초리가 의심스러웠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까워요?”

“정작 카드 만들라고 할때는 고집피우면서 싫다고 하더니 이상하잖아.”

“그게 아니라 뭘 사려고 카드까지 달라는지 물어보고 싶은거 아니에요?”

“말 해주면 난 좋지.”

“차 한대 사려구요. 걸어다니기 귀찮아서.”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는 가희를 유현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일시불로 사도 되는거죠?”

유현의 눈이 커졌지만 가희는 여전히 쉽게 툭툭 말을 꺼내고 있었다.

“차 한대 뽑구 옷도 좀 사야겠어요. 당신한테 맞춰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요. 이번 기회에 명품으로 구색을 맞춰볼까해요. 괜찮겠죠?”

유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장난인지 아닌건지 그녀의 기색을 살피는 유현을 마주보며 가희가 씩 웃었다.

“왜요? 아까워요?”

“맘대로 하시지요. 무엇 때문에 돈을 벌겠습니까. 차도 사고 명품도 사고 돈 남으면 부동산도 사 두시지요.”

“정말 그래도 되요? 안 그래도 봐 둔 땅이 있긴 한데. 아무리봐도 노른자같더라구요.”

뻔뻔한 얼굴로 연극을 계속하는 가희를 바라보는 유현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다 사줄테니까 우리 한번만 더 술 마시자. 너 취한 거 또 보고 싶어. 소원이야.”

가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유현씨!”

“취해서 귀엽게 노래부르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 그 사랑스런 모습을 한번만 더 볼수 있다면 뭐든지 할테니까 술 마시러 가자.”

“놀리지 말아요. 장난한거란 말예요. 유현씨 고단수에요. 내가 정말 차 살까봐 연막전 쓰는 거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괜찮으니까 뭐든지 사. 대신 한 번만 더 보여줘라. 응?”

“그만해요. 꼭 써야 할 일이 있을 뿐이에요.”

“원하는 것 뭐든지 사라니까. 그럼 우리 노래방 갈까? 가서 술 마시지 뭐.”

“그만하라니까요! 정말 왜 저러지?”

“one more time"

티격태격 다투는 그들이었다.










“이걸 산다는거야?”

백화점 여성복 코너에서 유현이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그러나 가희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서 섹시 레이어드룩코너를 살폈다.

“그러니까 왜 따라오고 그래요? 바쁘지도 않아요?”

“내 마누라 옷 고를 시간은 충분해. 그나저나 넌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는거야?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감각이 없을수가 있지? 내가 골라주는 걸로 사.”

“왜 따라다니면서 명령이에요? 쇼핑도 자유롭게 못해요? 이럴거면 카드갖고 가요.”

“그래. 우리 타협보자. 니가 좋다고 하는 그 요상한 옷들 사든 말든 상관안할테니까 내가 고른것도 사자.”

“싫다니까요. 아가씨. 청바지는 어디있어요?”

“아. 됐어요. 스커트 보여주세요. 넌 스커트가 어울려.”

“청바지 살거라구요.”

“스커트정장 어디 있습니까?”

“이봐요. 강유현씨!”

노려보는 두 사람 사이에서 매장 종업원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가희가 이겼다. 끈질기게 자신이 내민 옷을 계산하고 싶어하는 유현을 저지한 가희가 유현으로서는 입이 쩍 벌어질 디자인의 발랄하고 자유스러운 스타일의 옷만을 계산한 후 매장을 나섰다.

“도대체 그런 옷 입지도 않을거면서 왜 산거야?”

“혹시 바람난거 아니야?”

“젠장, 사람 미치게 하는군. 바람만 나봐. 가만 안 둘 줄 알아!”

뒤에서 소리치며 따르고 있는 유현이 귀여워 가희가 슬그머니 미소지었다.

“정말 못 말리겠다니까.”

혼자 안달이 났는데도 전혀 신경도 안 쓰는 가희를 쳐다보며 유현이 담배를 꺼내물었다. 그녀를 굳이 자신의 스타일로 맞추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파격적인 변신을 계획하고 있다면 사양이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하지만 갑작스러운 여자의 변화는 심경의 불안정함을 뜻하는 것이라는 말을 어렴풋이 들었다. 그래서 유현은 지금 조금 민감하다 싶을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가희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 혼자서 변하는 것은 싫다. 함께 생각하고 싶다.

옷하나 사는것같은 작은 일에도 이렇게 민감해지다니 강유현 다 됐구나.
유현은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며 혀를 끌끌 찼다.

“유현씨. 커피 마시고 갈래요?”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서 기쁘다는건지 가희가 우호적으로 물어오자 유현은 조금 심통이 났다.

“도대체 갑자기 이상한 옷을 사는 이유가 뭐야? 무슨 일 있어?”

그녀에게만큼은 합리적인 사고가 통하지 않는다. 냉정하게 물러서 있을 수가 없다. 사랑을 하면 경솔해지는 것일까? 유현은 조그만 변화에도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이 낯설다. 그럼에도 막을 수 없다.

“유현씨 이상해요. 이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에요?”

가희가 쇼핑한 가방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모르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 싫어.”

“그냥 평범한 쇼핑일 뿐이에요.”

“그래도 싫어. 그런 것...”

가희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투정부리는 소년같아 그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조금은 귀찮기도 하고 그랬다.

“당신 정말 이해가 안가요. 정말 별거 아닌 일 갖고...”

“그게 별거 아니야? 라미나 입을법한 옷을 사들고.”

“맞아요. 아가씨 생일선물이니까.”

유현의 말을 잘랐다. 흥분조로 이어지던 그의 말이 멈췄다.

“뭐?”

“아가씨 생일선물 산 것 뿐이에요. 내일 생일이잖아요.”

그제서야 가희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확실히 그녀가 고른 옷은 라미가 좋아할 타입이었다.

“그랬어?”

“그렇다니까요. 어찌나 귀찮게 구는지.”

“진작 말하지 그랬어.”

언제그랬냐는 듯 유현의 얼굴표정이 풀리자 가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지? 이 남자?

“그건 그렇고 나도 몰랐는데 어떻게 알았어?”

“어머님께 식구들 생일이나 제삿날 같은거 여쭤서 미리 알아놨었거든요.”

유현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돌았다.

“우리 가희 야무지네.”

마치 상이라도 줄 듯 웃으며 다가오는 그를 기겁을 하며 피했다.

“사람들 봐요. 공공장소에서는 제발 이러지 말아요. 사람이 때와 장소를 구별해야지.”

“뭐 어때. 이렇게 착한 우리 색시 안아주겠다는데.”

“여기서 안기만 해봐요. 정말 가만 안 있을거야.”

“그래? 그럼 얼른 카페라도 가자. 으슥한 곳으로.”

“그만해요. 제발.”

“아니 술이라도 한잔 마실까? 갑자기 노래가 듣고 싶어.”

“못말려.”

가희는 자꾸만 포근해지는 유현을 엷은 미소를 띠며 바라보았다. 유현이 그녀의 손에서 가방을 받아들었다. 어쩌면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를...







유현이 회사로 돌아간 후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여니 라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님 아버님은 안 계세요?”

“약속 있어서 늦게 들어오신대요.”

“그래요? 아가씨 저녁 먹었어요?”

“나두 먹고 들어왔어요. 오빠는요?”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해서 먼저 들어왔어요. 아 참.”

가희가 들고 있던 종이백을 내밀자 라미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받아들었다.

“뭔데요?”

“열어봐요. 맘에 들지 모르겠어요.”

“응?”

라미가 종이백을 열어 안에 든 옷을 꺼내들었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거 나 주는거에요?”

“그럼 내가 입을까요?”

“설마. 언니 취향 아니잖아요. 정말 내 꺼에요?”

“그럼 어머님 드릴까요?”

“와하하하 웃긴다. 새엄마가 이런 디자인 입겠어요?”

“그러게요.”

가희도 함께 따라웃었다. 두 사람은 잠시동안 시새어머니가 옷을 입은 모양을 상상해보았다. 발칙한 상상이었다.

“고맙다고요?”

옷을 들여다보던 라미에게서 아무말이 없자 가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칫 고맙기는요. 생일선물이에요? 내 생일 알고 있었어요?”

“알았으니까 사왔겠죠?”

“꽃다발도 없이 선물 주는 사람이 뭐가 고마워요?”

툴툴거렸지만 그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역시 재미있는 아가씨라니까.

“안 그래두 새엄마가 옷 얌전하게 입으라고 하는데 언니 때문에 또 욕얻어먹게 생겼잖아요. 하여간 언니 때문에 못살아.”

라미가 툴툴거리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마지막까지 고맙다는 말은 안했지만 가희는 기분이 좋았다. 라미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 입을 열어 꺼내는 말들은 새초롬한 말들뿐이었지만 가희가 볼때는 귀엽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라미가 올라간 후 가희도 방으로 향했다. 겉옷을 벗어놓고 귀걸이를 빼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방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린 가희의 눈이 커졌다. 라미가 선물로 준 옷으로 갈아입은 채 들어오고 있었다. 가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거봐. 귀여운 아가씨라니까.

“어울려요?”

“생각보다 아니네요. 아무래도 잘못 고른 것 같아요. 매장에 걸려있을때는 예뻤는데.”

“뭐라구요?”

가희가 짐짓 후회하는 투로 말하자 라미가 발끈했다.

“농담이에요. 아가씨는 예쁘니까 뭘 입어도 잘 어울려요. 오빠 닮아 옷걸이가 좋잖아요.”

“흥. 남편 자랑하는걸로 들리는거 알아요?”

“바로 그거에요.”

“언니!”

라미가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요?”

“고, 고맙다구요.”

가희의 눈동자가 커졌다. 잠시 후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고맙다는 말을 그렇게 도전하는 식으로 해요?”

라미의 얼굴이 빨개졌다. 저토록 순진하다싶을 정도로 솔직한 모습이 그녀의 모습이었다. 가희는 라미나 유현의 마음씨가 새삼스레 고마워졌다. 어쩌면 이것은 시부모님들의 성품의 결과인걸까. 문득 유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주의 성품을 사랑했다는... 유현은 어쩌면 곧은 사랑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얼굴까지 빨개질 정도로 순진함을 드러내는 라미앞에서 말이다.

“나, 난 내일 선물 많이많이 받을거에요.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녀석들이 하나씩만 줘도 방이 가득찰걸요?”

“아. 그러세요?”

“그, 그래도 언니 선물이 제일 좋을거 같아요. 정말로.”

가희의 입가에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사람의 호의가 담긴 한 마디는 세상의 백가지 물질보다도 상대방을 따뜻하게 한다. 그래서 받는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한 것일까. 하나를 주고 열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좋아해줘서 고마워요. 아가씨. 그렇지만 이 선물은 오빠카드로 산거에요. 그러니까 그 말은 오빠한테 해요.”

“엥? 그럼 취소할래요. 칫. 그냥 고맙다고 하면 고맙구나 하구 넘어가면 되지. 칫.”

중얼거리는 라미를 향해 가희가 빙긋 웃었다.

“그래두 우리 오빠는 평소에는 선물이든 옷이든 잘 사줘도 생일같은건 잘 못챙겨요. 생각나면 그 때 그 때 하는 스타일이니까. 그래서 언니가 신경써준거.. 고맙다고 생각해요.”

“너무 그러지 말아요. 선물 한번도 못 받아본 사람처럼. 혹시 선물 줄 사람 많다는 거 거짓말 아니에요?”

“내기할래요? 얼마나 선물받는지?”

“농담이에요. 아가씨도 참.”

“늘 사람속을 박박 긁는다니까.”

“자기가 사놓고는 선물이라고 속일수도 있는데 어떻게 믿고 내기를 해요.”

“언니!”

“농담이에요. 농담.”

라미를 곯려먹는 것이 점점 재미있어지는 가희였다. 한참 씩씩거리던 라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테이블위에 툭 내려놓았다.

“언니거에요. 가져요.”

“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려던 가희가 돌아보았다. 테이블위에 비닐포장에 쌓인 작은 핸드폰고리가 들어있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오늘 친구랑 돌아다니다가 산거에요. 내거만 살려다가 언니휴대폰이 어찌나 촌스러운지 하나 샀어요. 어떻게 그 흔한 고리하나 없이 다니냐.”

툴툴거리는 라미를 뒤로 하고 핸드폰줄을 집어들었다. 작은 인형이 달린 것이었다.

“이왕이면 좀 비싼거 사주면 안되요? 이거 오천원도 안하죠?”

“어머나. 얼마나 말을 착하게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미안하지만 육천원이에요. 이거 왜 이래요?”

“다행이네요. 난 원래 오천원이하는 안 받거든요.”

“자꾸 그러면 뺏아갈거에요.”

“미안해요. 아가씨만 보면 자꾸 놀리고 싶어진다니까.”

“내가 심심풀이 오징어땅콩이에요?”

“비슷해요.”

“언니!”

“아가씨. 고마워요. 잘 쓸게요. 그리고 담부터는 좀 더 비싼걸로 사줘요. 용돈도 많이 받잖아요.”

“다시는 안 사올거니까 절대 기대하지 말아요.”

“아가씨. 내가 용돈 줄까요?”

“절대 됐네요.”

“그럼 생일파티해줘요? 친구들 불러요.”

“내가 무슨 초등학생이에요?”

“생일축하해요. 아가씨.”

“아직 내일 안 됐거든요?”

“참고로 내 생일은 두달 후에요.”

“앗. 아무것도 안 들리네.”

“참고로 나도 옷 좋아해요.”

“이 세상에 나만큼 뻔뻔스러운 사람은 언니가 처음이에요.”

“칭찬 고마워요.”








“전 원래 인물보다는 식물을 렌즈에 담죠.”

가희는 현웅과 식물원을 걷고 있었다.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 트여왔다. 며칠전부터 이상하게도 속이 안 좋더니 기운이 없어지고 가슴 한 곳이 갑갑했다. 마치 몸살감기에 걸렸다가 일어난 사람처럼 몸이 묵직하고 어지럽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푸른 잎들을 바라보니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 후에 권씨아줌마랑은 접촉이 없었어요?”

현웅이 현수를 권씨아줌마란다. 가희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쪽이야말로 더 만나지 않았나요? 두 사람의 비즈니스 문제에 차질이 생겨서 짤린 거 아니에요?”

“우리의 비즈니스야 제가 당신에게 반하는 바람에 무참히 깨지고 말았지요.”

“헛소리하려면 혼자 둘러봐요.”

몸을 돌리는 가희의 손목을 현웅이 잡았다.

“안 그럴테니까 화 풀고 주위를 봐요. 이렇게 편안한 숨소리들이 들리는데 화내기에요?”

“숨소리?”

“식물들이 광합성을 하는 소리 말이에요.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산소를 들이마시는 소리가 안 들려요? 엽록소가 반응하는 소리가 안 들려요? 뿌리가 삼투압작용으로 물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정말 안 들려요? 이상하네. 난 다 들리는데. 너무 잘 들려서 시끄러워 죽겠는데.”

“지루한 과학선생님 때문에 조는 소리는 들리네요.”

“정말 분위기도 없으셔라. 그런데 왜 그렇게 얼굴표정이 안 좋아요? 혈색이 꼭 시들어버린 이파리처럼 누렇네요.”

“시, 신경쓰지 말아요.”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뺨에 손이 갔다. 현웅도 눈치챌만큼 그렇게 컨디션이 좋지 않은걸까. 몸이 안 좋기는 했으니까.

“만나자는 말에 꿈쩍도 안하던 사람이 식물원 간다니까 별말없이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보고싶었던 것, 느끼고 싶었던 것만 느끼고 들어가요.”

툭 던지듯 말하는 현웅이었지만 그를 보고 있으면 꼭 동생같기도 하고 가끔은 아빠같기도 해서 편했다.

“파초를 보고 싶어요.”

“그럴까요?”

현웅이 그녀를 끌었다. 가희는 그 푸르고 넓은 입사귀를 바라보았다. 시아버지의 넉넉하면서도 위엄있는 미소를 대하는 것 같아 보고 있는 것 자체로도 좋아졌다.

“왜 내 전화를 피하지 않아요?”

현웅의 물음에 가희가 엷게 웃었다.

“굳이 피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냥 니 맘대로 해라 이 뜻이군요.”

“함께 새엄마산소에 가 줬잖아요.”

현웅이 피식 웃었다.

“그건 내가 고집을 피워 따라간거잖아요.”

“그래도... 내심 함께 있어주어서 고마웠어요. 유현씨가 오기 전에 당신이 잠시 사진찍으러 갔을 때 말이에요. 그 때 괜히 외로웠거든요. 혼자서... 새엄마 묘지 앞에 선다는 게 생각보다 더 외롭더라구요.”

“당신을 사랑해마지 않는 그와 왜 함께 가지 않은거지요?”

“그 날은... 그럴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 날은 그런 날이었어요. 나 사실 그 날 더 많이 울었어야 하는 날이에요. 새엄마를 만나러 가는일보다는 언니를 추억해야 하는 날이었어요. 나 대신 간 언니에게 미안해서라도 위로같은거 받아서는 안 되는 날이었어요.”

“가희씨.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건 해골에 키스하는거에요.”

가희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눈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뭐, 뭐라고 한거죠?”

“이미 떠난 사람의 영혼을 붙들고 눈물을 흘려봤자 그 사람에게 남은 것은 썩지 않는 해골뿐입니다. 그것을 도대체 언제까지 붙들고 살거죠?”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당신이 뭘 알아요!”

분노에 휩쌓인 가희가 미친 듯 소리쳤다. 현웅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내가 뭘 알겠습니까. 게다가 내가 무슨 자격으로 당신에게 말을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옆에서 보기에 권씨아줌마 정말 답답하고 이해가 안가요. 이미 죽은 자식의 영혼을 붙들고 놓아주지 못하는 모습이 역겹기까지 합니다. 그 분노를 당신이란 사람한테 쏟아내는 모습도 과히 보기 좋지는 않지요. 그런데 당신마저 계속 그럴겁니까? 솔직히 당신이나 권씨아줌마나 똑같습니다. 어차피 가버린 사람에게서 남은 것은, 이 세상에 남은 것은 뼈와 추억뿐입니다. 그 뼈는 땅속에 묻어두면 되는거고 추억은 가슴속에 묻어두면 되는 것입니다.”

“그만해요. 듣고 싶지 않아요.”

“새어머니 묘지 앞에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따뜻했지요? 그 흙에 뺨을 부비니 따뜻하지 않았어요? 온기가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따뜻한 흙들이 새어머니의 영혼을 잘 감싸주고 있으니까 가희씨는 나름대로 잘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언니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세상에서 떠났다면 그 영혼은 흙에 맡겨두고 당신은-”

쫘악!
날카로운 손끝에서 차가운 바람소리가 났다. 현웅의 뺨을 가른 가희의 손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돌아간 현웅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고인 눈물을 앙 다문 입술로 꾹꾹 참고 있던 가희의 고개도 떨궈졌다.

“미안해요.”

그녀의 손이 떨렸다. 힘없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러나 현웅은 빙긋 웃었다. 그는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희가 보는 현웅은 그런 사람이었다.

“뺨 한 대 정도의 응징으로 하고 싶은 말을 원없이 할 수 있다면 그다지 손해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뺨 한대 더 맞는 걸로 쇼부볼까요?”

“미안해요.”

가희가 손을 뒤로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현웅은 또다시 맑게 웃을 뿐이었다.

“당신 아프게 한 거 알면 그의 주먹이 또 날아올테죠. 그러니까 이제 그만 웃어요. 나 겁먹었습니다.”

“현웅씨.”

“네?”

“할 말이 더 있다고 하셨죠? 있으면... 더 말해줘요.”

가희가 고개를 들어 파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가희를 현웅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그녀를 훑었다. 저절로 카메라가 올라갔다.

“잠시만 그대로 있어요. 고개 돌리지 말아요.”

그러나 가희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카메라 셔터가 눌러지는데도 그녀의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에 빠진건지 파초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렌즈안에 들어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느낀 지금 당신의 색은 무채색이에요. 깨끗하기는 하지만 생동감이 없어요. 그렇지만 그 푸르디 푸른 파초앞에 서니 색깔이 느껴져요. 무채색은 다른 색의 농도를 조절해주잖아요. 당신이 다가가니 파초가 더 푸르게 보인다고 하면 과장일까요?”

“심각한 과장이네요.”

“지금 이 순간 가장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언니인가요? 아니면 그인가요?”

그녀의 눈이 흐려졌다. 고개도 안 아픈지 파초를 우러러보는 그녀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지기 시작하자 현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으로는 울고 있으면서 입은 웃는다. 그녀는 지금 행복해지고 싶어한다. 마음 속 깊이...

“그 사람이요. 언제나 그 사람이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어요. 눈물과 함께 그 사람이 올라와요. 그래서 온통 적셔버려요.”

“꾹꾹 누르기만 하니까 그런거에요. 그를 눈물로 만들어버리지 말아요. 충분히 기쁨이 될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모르겠어요. 이런 말을 당신에게 하고 있는것도 이해가 안가고 그 사람곁에 머물러 있어도 되는건지도 모르겠어요. 한자리에 뿌리내린 파초처럼 그렇게 자리를 지키라는 아버님의 말씀에 최면을 걸고 합리화를 시키고 있는건지, 도대체 무엇이 그 사람을 위한것이고 나를 위한건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그곳에 뿌리내렸다면 바로 그 곳에서 하늘에 맞닿고 싶은 것이 식물의 마음입니다. 식물은 움직이지 않아요. 오히려 주위를 움직이게 하지요. 벌이 찾아들게 만들고 공기가 흐르게 만들고 바람이 느껴지게 만들어요. 대기가 따뜻해지게 만들고 태양이 내리쬐게 만들어요. 그래서 그 주위를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자연의 위대한 힘입니다. 당신도 한 남자에게 뿌리를 내렸다면 스스로 흔들리는 것보다 그 사람을 품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래요. 그렇다면 그 자리는 당신의 자리가 되는거라고 봅니다.”

“사랑해요.”

가희가 중얼거렸다. 현웅이 힘없이 웃었다. 그 말이 향하는 곳을 알기에 그는 힘이 빠졌다. 그녀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결과를 생각하기는 싫다. 맹세코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랑해요. 그 사람의 미소를 푸르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쉴 새 없이 눌러지는 셔터, 그녀만이 지닌 분위기가 현웅의 렌즈안을 가득 메웠다. 기다림... 동경... 그녀의 눈빛안에 담겨진 수많은 감정들. 사랑... 소망... 그녀가 원하고 있는 것들이 렌즈를 채운다. 파초... 기다림... 그 푸른빛의 아름다움. 그녀의 가슴깊은 곳을 흔드는 것은... 그라는 남자.

“파초...”

그녀가 중얼거렸다.

“현웅씨.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의미가 되어버렸어요. 그 새벽 파초를 바라보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내 마음을 채우는 것은 한 사람이었나봐요.”

“알고 있는데도 망설이는 것은 기다리는 것인가요?”

가희가 희미하게 웃었다.

“글쎄요.”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며 하염없이 기다릴건가요? 잠시 등돌리면 바로 뒤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다림 자체가 행복이라면... 현웅씨는 비웃을건가요? 그 사람을 채곡채곡 마음속에 쌓는 지금 이 순간조차 행복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까요?”

큰 그림자가 다가왔다. 가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팟, 놀란 그녀가 다가온 남자를 밀쳤다. 현웅의 몸이 비틀거리며 떨어져나갔다.

“무, 무슨...”

“미안해요.”

쓸쓸하게 돌아서는 현웅의 등이 외로웠다. 그러나 가희는 그를 잡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만약 몇초인가 느껴졌던 입술이 꿈이 아니라면 이것은 시험일 것이다. 하늘이 내리는 시험일 것이다. 그렇게 애타게 느껴지는 현웅의 입술이었다. 뿌리치긴 했지만 차마 뺨을 올려붙일수는 없는...










“알았어요. 지금 갈게요.”

“그래.”

유현은 가희에게 건 전화를 끊고서 술잔을 채웠다. 그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돌았다. 낮에 희수가 사무실에 찾아왔다.

“무슨 일이야?”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럼 안되나?”

희수가 소파에 앉으며 약간 서운함이 베인 투로 말했다.

“가희 만났다면서?”

“가희씨 아니 언니가 그래요?”

유현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가희를 언니라고 불렀니?”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왜 쓸데없는 말을 한거지? 지나간 일을 들추는 이유가 뭐니.”

“혹시 그 말이 내가 오빠를 좋아했던 사실을 말한 걸 의미하는건가요?”

유현이 담배를 꺼내물고서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라미가 말한거에요. 오해하지 말아요.”

“그랬니?”

“나 오빠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서 왔어요.”

“해봐.”

“여기서 할 말은 아니지만... 나 미국있는동안 줄곧 오빠 생각만 했어요. 한시도 잊지 못했어요. 서주언니가 죽었다는 소식 들었을 때 언니보다 먼저 들었던 생각은 오빠는 어떨까... 오빠에 대한 걱정...”

“그만해.”

“오빠!”

희수의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그녀의 눈에서 진심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유현은 그녀의 눈을 마주보지 않았다.

“그만해라.”

“싫어요. 왜 항상 오빠는 날 무시하는 거지요? 옆에 아무도 없을땐 사랑할 마음이 없는것처럼 무시하더니 서주언니가 있을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안된다고 하고 이제는 잘난 부인 때문에 쳐다봐주지 않는거에요?”

유현이 눈빛이 싸늘해졌다.

“말 조심해라.”

“오빠!”

“가희. 너한테 무시당할 일 한 적 없잖아.”

“그렇지만 서주언니가 아니라면 나나 민가희씨나 같지 않아요? 나도 오빠 좋아했어요. 그런데 꼭 그런식으로 날 무시해야 겠어요?”

“누가 그래? 너와 가희가 같다고 누가 그러지?”

유현의 눈빛이 차가웠다. 희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오빠...”

그랬다. 그라는 사람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희수는 지금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의 냉정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가 변했다고 느껴지는 것은 가희라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 뿐이라는 것을. 그녀와 관계된 말을 할때뿐이라는 것을.

“볼 일 끝났으면 돌아가라.”

“너무하네요. 괜히 흔들지 말고 사라져라 이뜻인가요?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희수의 눈에 원망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래봤자 유현의 가슴을 흔들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그녀도 알고 있었다.

“네가 어머님과 자주 만나는거 안다.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네가 그 주위에서 배회하는 이상 나에게 곱게 보일리는 없어.”

“그건 서주언니 그렇게 가고 아줌마 쓸쓸하실까봐.”

“서주얘기도 더 이상 하지마.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 이름 꺼내는 것도 그만해. 그 이름이 심장을 멎게 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정말 모르니.”

“누구한테요? 오빠한테요? 아니면 그녀한테요?”

“대답하마. 그래. 가희한테 그래. 나한테는 추억의 이름이 될 수도 있지만 그녀한테는 아니야. 그렇게 될 수가 없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녀에게는 죄책감으로 남을 이름이야. 그러니 그만해라.”

“꼭 내가 일부러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어요. 오빠 그렇게 날 무시해도 되는거에요? 이렇게 기만할 수 있어요?”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다그쳐봤자 짜증밖에 돌아가는 것이 없다. 나도 더 이상 너에게 나쁜 소리 하기 싫구나.”

“다 했잖아요. 이미 아픈 말 다 해놓구서 그러면 난 그냥 이해하면 되는거에요?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왜? 그 언니가 도대체 뭔데. 오빠한테 뭔데요!”

“한대의 자동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 앞에 사람이 서 있어. 기억속의 서주가 그녀를 밀치고 죽음을 맞았다. 만약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다면 나라도 그럴 것이다. 그 앞에 선 사람이 가희라면 말이다. 대답이 되겠니?”

희수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오빠...”

유현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잊었어요? 나 오빠 때문에 목숨 놓으려고 했던 거 잊었어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병원에서 살았던 거 잊었어요? 나라도 그럴 수 있어요. 만약 그 차 앞에 오빠가 서 있다면 나도.”

“그만!”

“나도 오빠 사랑한단 말예요! 현수아줌마 때문에, 아줌마가 무서워서 오빠 포기했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오빠말대로 아줌마가 내 편이에요. 그런데도.”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니? 왜 새어머니가 니 편인 것 같니. 너 그 말도 안되는 증오에 동참하겠다는거야?”

“몰라요. 아줌마와 민가희씨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도 몰라. 나한테 중요한 건 나 뿐이야. 내가 오빠를 좋아한다는 것 뿐이란 말야.”

유현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희수가 달려들어 그의 목을 껴안았다. 눈물이 그의 목을 적셨다. 그러나 유현의 심장은 싸늘하게 식어만 갔다.

“이거 놔라.”

유현이 희수의 손목을 잡아 그녀를 밀어냈다.

“너무해. 오빠 어떻게 이럴수 있어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오빠 한 사람 때문에 왔어요. 아니 오빠 한사람 때문에 여길 떠난거에요. 오빠를 포기하기 힘들어서 도망쳤던 것 뿐이란 말예요. 내 마음은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아요? 이런 난 정말 괜찮아? 상처받아도 괜찮아요? 오빠는 그 민가희란 여자만 있으면 돼? 그래요?”

“지나간 일이야. 왜 넌 지나간 일로-”

“과거에 가장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오빠야. 들었어요. 그 결혼의 시작. 서주언니 때문에 민가희랑 결혼했다면서요. 그 여자 대신 죽은 서주언니를-”

“그만해!”

희수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녀를 밀친 유현이 무섭도록 차갑게 그녀를 쏘아보았다.

“한 마디만 더 하면.”

“말도 안되는 결혼이야! 어떻게 오빤 그런 여자를 사랑할 수 있지? 서주언니를 죽인-”

와장창. 전화기가 날아가 진열장에 부딪혔다. 엄청난 파열음을 내며 진열장이 부서져내렸다. 희수의 눈이 커졌다. 비틀거리던 유현이 테이블을 붙잡고 숨을 골랐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희수의 얼굴도 경직되었다.

“오빠...”

“가.”

“오빠!”

“가란 말이야!”

유현이 주먹을 내리꽂았다. 테이블이 울렸다. 본능적으로 뒤로 몇걸음 물러난 희수의 몸이 덜덜 떨렸다. 냉정하기는 해도 화를 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유현은 위협적이었다. 희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제발 가.”

유현이 무너지듯 테이블에 기대며 힘없이 소리쳤다. 한동안 유현을 노려보던 희수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문앞까지 다다른 그녀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물러서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민가희라는 그 여자. 듣기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죠? 뒤를 쫓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오늘 우연히 오빠 부인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봤어요. 그 남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사랑하던 사람이 아니라면 새로 사귄 남자인가요? 식물원에서 키스까지 하는걸 보면 보통사이는 아니란 얘기겠죠?”

유현이 천천히 몸을 곧추세웠다. 냉정한 그의 눈빛과 마주친 희수의 몸이 두 세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야? 아니면 어머님이야?”

“무슨 말이죠?”

“그녀를 쫓고 있는 사람이 너냐. 아니면 어머님이냐.”

“말했잖아요. 우연히...”

“두 번 다시 그녀를 쫓는다면 그냥 두지 않겠어. 내 마누라가 어딜가서 누구와 무슨 짓을 하든 신경쓸 사람은 남편인 나다. 그러니 그녀를 지킬 사람도 나다. 어머님께 가서 전해. 무슨 일을 벌이든 내 몸 하나로 막을 것이라고. 잘가라.”

결국 희수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서 문을 열고 나갔다.

낮의 일을 생각하며 잔을 채웠다. 또다시 한숨이 세어나왔다.

“백현웅인가.”

유현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가희야. 백현웅이니?”

술이 한잔한잔 더해질수록 질투도 한겹한겹 늘었다. 이래서는 안되었다. 빨리 그녀가 와야한다. 빨리 그녀의 얼굴을 봐야 한다. 질투로 눈이 멀어버리기 전에.








그가 알려준 bar로 들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실내 한 쪽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그가 보였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있는 모습이 그같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취기가 오른 목소리로 밖으로 불러낸 그였다. 무거운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유현씨.”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가희는 그라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솟았다. 사람이 사람을 동정할 수 있는 관계는 한 사람이 위에 있을 때 가능하다. 유현은 사랑의 힘으로 그녀를 윗자리에 놓았는가?

“많이 마셨어요?”

핸드백을 놓고서 그의 앞자리에 앉으려는 그녀의 손목을 유현이 순식간에 끌었다. 바람소리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옆자리에 그녀를 앉힌 그의 입술이 그녀를 덮었다. 술내음와 함께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놀란 것은 뒤로 하고라도 그녀는 잠시 얼떨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몇초간의 무의식후에 점차 정신이 돌아오자 가희는 기겁을 하고서 그를 밀었다. 그러나 집요한 그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조일 듯이 안은 팔의 힘이 더욱 강해질 뿐이었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온 입안을 배회했다. 결국 그녀의 몸에서 힘이 풀렸다. 소파의 등받이가 느껴졌다. 온 몸을 내리누르는 그의 하중과 함께 무겁도록 격렬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고 있었다.

아무것도 다그치고 싶지 않아. 그냥 흔적을 지우고 싶어. 내 입술로 지울 수 있으면 하고 바랄 뿐이야. 나만 기억해줘. 내 느낌만 기억해주면 좋겠어. 아무것도 니 입술위에 남길 수 없어. 나 아닌 다른 놈의 입술따위는...

마침내 그녀를 놓아준 유현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입맞춤의 여운이 남아 아직 상기된 그녀의 발그레한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눈이 그녀의 온 얼굴을 애잔하게 훑었다.

“의심과 질투는 달라. 그렇지?”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의심은 믿지 못하는거지만 질투는 믿어도 어쩔 수 없이 드는 감정이야.”

가희는 알 것도 같았다. 격렬한 입맞춤의 의미를... 저녁 내내 그녀를 무겁게 했던 현웅의 입술의 느낌이 금세 사라져버렸기에 더욱 알 것도 같았다. 그의 입술로 그녀의 마음이 정화되었다.

“이유가 뭔지 아니?”

눈물이 퐁퐁 솟아오르는 채로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알려줘요.”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가 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이 그제서야 환해졌다.

“정말 이해가 가?”

그녀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낮게 읊조리는 그의 노래소리가 귀를 울렸다. 함께 노래를 불러주고 싶은 밤이었다.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잔 마실래?”

그가 술잔을 내밀었다.

“또 노래 시키려구?”

“오늘은 내가 노래불렀잖아. 그러니까 안 불러도 돼.”

“그래요. 마실게요.”

그녀가 술잔을 받아들려고 하자 유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시지 마. 너까지 취하면 우리 알코올부부 돼.”

“당신 매일 술마시라고 다그쳤잖아요. 노래부를테니까 한 잔 줘요.”

“아니야. 그러지 마.”

“마신다니까요.”

“아니. 니 노래가 듣고 싶었던게 아니야. 취했을 때 밝게 웃던 모습이 좋았을 뿐이야. 그래서 결정했다. 취해서 웃는 모습을 바라는 짓 따위 하지 않을거라고. 취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웃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 그렇게 하고 말테다.”

“난 충분히 행복해요.”

그녀가 느닷없이 핸드폰을 들어올리더니 고리를 짤랑짤랑 흔들며 말하자 유현이 웃었다.

“의미가 뭐야? 갑자기 왜 휴대폰은 흔들어?”

“이 핸드폰줄 봐요. 라미아가씨가 사준거에요.”

“그래?”

“난 행복해요. 가족이 있으니까.”

유현의 눈매가 다정해졌다.

“가족중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지?”

“음... 어머님?”

“글세. 과연 그럴까?”

유현의 눈매가 사악해졌다.

“어머님이 멋진 키스를 해 줄수 있어?”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키스해야 가까운 건 아니에요.”

“아닐걸. 입맞춤이야말로 가장 친근한 의사소통이지. 자 말해봐. 누가 가장 가깝지?”

“글쎄요. 아버님?”

“계속 그럴거야?”

그가 손을 뻗어 가희의 귓불을 간질이듯 어루만졌다.

“그만해요.”

“말해주면 되잖아.”

“그래요. 당신이에요. 이제 그만해요.”

그녀가 유현의 손을 밀어내며 뒤로 물러앉았다.

“진작 그럴것이지.”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유현을 가희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파초를 대하듯 그렇게 하염없이...

“왜 그렇게 봐?”

유현이 눈을 들어 그녀를 마주보았다. 흘러내린 앞머리와 느슨하게 풀어헤친 타이가 묘하게 그를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불빛아래에서 본 그의 모습이 평소보다 몇백배는 더욱 멋지게 느껴졌다.

“당신이 멋져서요.”

그의 눈이 커졌다. 그가 실소를 터뜨렸다.

“뭐야?”

“남자도 조명발이란게 있나봐요.”

“미안하지만 난 원래 멋져.”

상냥한 사람... 여전히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생각했다. 상냥해서 고마운 사람.

“상냥해요.”

“사랑해요를 잘못 말한거 아니야?”

유현이 맥이 빠진다는 듯한 눈으로 물었다.

“아니. 상냥해요.”

“내 참. 남자보고 상냥하다니. 내가 무슨 기생오래비냐? 이상한 소리 그만해.”

그가 가희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심장소리가 들려요.”

“이상하지? 난 너만 보면 심장도 두근거리고 머리도 두근거리고 팔도 손도 다 두근거려.”

그가 팔을 내밀며 말하자 가희가 웃었다.

“그건 맥박이에요. 누구든 다 그래요.”

“맥박이든 심장이든 무조건 너만보면 떨려. 날 이렇게 두근거리게 만드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아니... 없었어. 토달지도 말고 의심하지도 마. 생각해보니 그랬어. 아무것도 묻지마. 너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알아.”

“누가 뭐라고 했어요?”

“어쨌거나 그렇단 말이야.”

괜히 겸연쩍어진 유현이 다소 높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그녀를 꼭 안았다. 너 하나밖에 없다는 말은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가. 한 사람에게 있어서 의미가 된다는 말은, 아니 유일의 의미가 된다는 말은 그래서 사람의 심장을 더욱 튼튼하게 하는 것인가 보다. 천천히 뛰던 심장박동수가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랑을 통해 선물받은 에너지로 더욱 더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사랑은 서로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 받고 되돌려주며 그렇게 끊임없이 서로를 지속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요즘 무슨 일 있어? 얼굴빛이 왜 그래?”

출근준비를 한 유현이 재킷을 걸치며 물었다.

“아니에요. 무슨 일은.”

가희는 내심 당황한 얼굴로 서류가방을 내밀었다. 유현이 예리하게 그녀의 표정을 훑었지만 가희가 눈을 맞추려 들지 않아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또 혼자서 끙끙대는 거니? 난 몰라도 돼?”

그러나 여전히 눈을 맞추지 않는 가희였다. 말하지 않아도 작은 변화를 알아채는 유현의 시선이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늦었어요. 얼른 가요.”

“사랑해.”

갑작스런 말에 가희의 눈이 커졌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쥐었다. 다가오는 숨결이 그녀의 볼을 간질였다. 천천히 그의 입술이 그녀의 윗입술에 닿으려는 찰나 그녀가 고개를 획 돌리더니 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허공에서 멈춘 그의 입술과 손이 갈곳을 잃었다. 가희는 내심 미안했지만 불안한 아침이었다.
어떻게 그의 눈을 봐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는데 그가 다행히 작게 웃었다.

“갔다올게.”

“다녀와요.”

“그래. 나오지 마. 다녀올게.”

천천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불안하게 서 있던 가희가 빠르게 욕실로 향했다. 문이 닫힌 후 유현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무슨 일인지. 그녀의 변화가 그를 아프게 한다. 무슨 일이 있는걸까? 말해주면 좋을텐데. 듣고싶은데... 결국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욕실로 들어간 가희는 까치발을 들어 수납장위에 놓아두었던 것을 끌어내렸다. 그녀의 손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천천히 그것을 꺼내든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내렸다. 선명한 분홍선이 그어진 임신진단시약.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알았다. 안 그래도 요즘 안색이 안 좋아서 한의원에 한 번 데려가려던 참이었어. 너무 걱정말거라. 그래.”

그날 오후 전화를 끊은 시새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유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걱정이 가득 담긴 아들의 목소리에서 사랑이 느껴져 그녀는 슬쩍 미소지었다. 그러나 확실히 며느리의 요즘 모습이 위태로워보이기는 했다. 얼굴빛도 안 좋았고 무엇보다 힘이 없어보였다.

“혹시...”

그녀는 무엇인가를 직감하고 있었다. 산부인과 의사인 그녀가 눈치못챌리 없다. 그러나 확실하기 전까지는 유현에게 가타부타 말할 수 없었다.

“한의원보다 병원에 먼저 데리고 가봐야 할 듯 한데...”

그 때 라미가 헐레벌떡 이층에서 뛰어내려왔다.

“새엄마. 언니가 이상해요. 열이 펄펄 나.”

“그래. 얼른 올라가보자.”

파랗게 질린 라미를 따라 이층으로 헐레벌떡 올라갔다.

“라미야. 넌 밖에 있어라.”

“왜요. 나도 들어갈래.”

“언니는 지금 아픈게 아니야. 그러니까 여기 있어.”

“무슨 말이에요?”

“그냥 그렇게 알아.”

라미를 뒤로 하고 방문이 닫혔다. 툴툴거리던 라미는 방으로 돌아가려다 말고 살짝 몸을 기울였다.

“아픈게 아니라니 무슨 말이지?”

호기심에 귀를 문 가까이 댔다.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님.”

가희가 몸을 일으키려 애쓰자 시새어머니가 다가가며 만류를 했다.

“그냥 누워있으렴. 어디가 아프니?”

“아니에요. 그냥 몸이 으슬으슬 춥고 그래요.”

“이유가 뭔지 아가 넌 알고 있지?”

자애로운 시새어머니의 미소를 대하자 가희의 굳은 마음이 눈녹듯 녹아내렸다. 불안한 생명, 아이는 안된다고 하던 현수의 외침, 유현을 향해 자꾸 커지는 마음, 그러나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서주의 잔상. 그 모든 것이 그녀를 덥쳐와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 자애로운 시새어머니의 미소에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상냥한 유현의 미소를 닮은 시새어머니의 미소가...

“죄송해요. 어머님. 알고 있었지만...”

“축하한다. 그리고 고맙다. 아가야.”

침대끝에 걸터앉은 시새어머니가 가희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그 손등 위로 눈물방울이 뚝 떨어져내렸다.

“불안하니?”

그녀가 가희의 손을 어루만지자 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불안하다고 생각하니. 우리 현이가 미덥지 않니?”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가희가 고개를 흔들며 울먹였다.

“그 아이는 현이의 아이야. 현이가 굳건하다면 무엇이 불안하니. 나의 아니 아버지와 나의 손주가 아니니. 우리가 이렇듯 서 있는데 무엇이 불안하니.”

“이런 말씀 죄송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인... 새엄마인 제가 불안해요. 제가 이렇게 불안정한데 어떻게 아기를 반갑게만 받아들이겠어요.”

“아이는 하늘이 내려주시는 거란다. 이 세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임으로 힘들어하는지 모르지? 가지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세상에는 많단다. 또한 낳은 후에 책임지지 못해 버려지는 아이들도 많지. 그런데 너와 현이는 고맙게도 아이를 가졌고 그 아이를 책임질수도 있는 사람들이야. 도대체 무엇이 불안한거니. 니 성품으로, 니 착한 마음으로 왜 불안해하는거니.”

시새어머니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머님. 전 라미아가씨가 좋아요. 유현씨를... 많이 사랑해요. 그렇게 곧고 상냥한 사람일수 없어요. 두 사람 다 그래요. 바른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는 것이 느껴져요. 그렇지만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불안한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유현씨처럼 라미아가씨처럼 그렇게 곧게 성장하도록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생각은 아이한테 좋지 않단다. 나는 이 집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네가 좋았다. 무엇보다 니가 변화시킨 우리 현이 모습이 좋았어. 그런 식으로 해주면 돼. 더 바라지도 않는단다. 네가 하던 대로만 해주면 세상 누구보다도 착하고 상냥한 아이로 키울 수 있을거야. 부족한 곳은 현이가 그리고 우리가 메꿔주면 되잖니. 그게 가족이란다. 너 혼자 아이를 가진게 아니듯 너혼자 부담을 떠안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란다. 생명의 탄생은 무조건 기뻐할 일이야. 그렇게 생각되지 않니?”

“전... 아이를 지우려고...”

“이런 못난 사람을 봤나. 어쩌자고 그런 말을 입에 올리니. 이제부터는 네 모든 감정이 아이와 연결되는 거란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말아라. 알겠지?”

“겁나요. 전... 겁이 나요.”

“무엇이 가장 겁이 나니?”

“서주언니... 아니 새새어머니가 좋아하시지 않을...”

“현이를 사랑하니?”

가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유현이라는 이름이 이제는 그녀의 눈물샘을 건드리는 전부가 되어버렸다. 강유현이라는 이름이.

“사랑해요. 많이... 사랑해요.”

“현이만 생각하렴. 서주가 가고 네 새어머니가 미움을 가졌을 때 그 애가 널 택한 것은 어쩌면 너만 바라본 결과가 아닐까 하구나. 그 순간 너만 눈에 들어온 것이 아닐까... 이따금씩 아버지와 나 그런 생각을 했었단다. 무엇이 인연인고 운명인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그렇게 현이를 맹목적으로 만든게 아닐까하고. 그러니 너도 그렇게 해보렴. 현이만 생각해라.”

“그럼 저... 아기 낳아도 되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이 아기... 우리 아기... 가진거 행복해도 되요? 그래도 되요?”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개를 끄덕이는 시새어머니의 인자한 미소앞에서 그녀가 아이처럼 웃었다.

“너무 기뻤어요. 사실은 너무 행복했어요. 가족이 또 늘어서... 너무 행복했어요. 유현씨 아이를 가졌다는게... 너무...”

“나도 고맙단다. 좋아하실 아버지 생각하니까 내가 다 좋아. 어찌나 기다리시는지.”

“어머님...”

“현이한테는 언제 말할거니? 쑥스러우면 내가 말해줄까?”

“제가... 말할게요. 제가 직접...”

“그래. 어디 두 사람을 동시에 안아볼까?”

시새어머니가 가희의 어깨를 포근히 끌어안았다. 문밖에서 천천히 라미가 돌아섰다. 그녀의 눈도 촉촉이 젖었다.

“조카래. 우와. 신기하다. 조카래. 조카.”

방문을 닫은 그녀가 신기함과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당장이라도 유현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되었기에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미영아. 나 조카생긴다. 조카. 그렇다니까. 우리 새언니가 임신했다니까. 뭐? 우리 새언니? 엄청 이쁘지. 그럼. 오빠랑 언니 두 사람 다 미남미녀니까 내 조카는 아마 백설공주나 윌리엄왕자 정도는 된 얼굴이 나올걸? 럭셔리말야. 럭셔리!”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시새어머니의 품에 안긴 가희의 입가에서도 똑같은 미소가 번졌다.



며칠을 말 할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가희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다른 뜻으로 해석한 유현은 어느날에는 꽃을 사오기도 하고 어느날에는 피자를 사 들고 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가희는 말해야지하면서도 왠지 쑥스러워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현은 그 나름대로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마는 가희의 모습에 조금씩 마음이 무거워졌다. 또 무엇인가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걱정스러워하는 마음이 조금씩 서운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게다가 밤이 되면 자신이 다가가는 것을 막연히 두려워하는 것같은 모습에 그런 생각은 더해갔다. 그래서 그 실제 이유를 모르는 유현으로서는 마음 한 쪽에 커다란 바위를 얹어놓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가 출근하고 나면 들뜬 라미가 자신의 새어머니를 향해 할머니라며 놀려대는 것으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유현이 갈수록 의기소침해지는 것을 깨닳은 가희는 아무래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싶어 그를 만나기 위해 회사로 향했다.







한편 유현은 사무실에서 무거운 마음으로 앉아있었다. 안주머니를 더듬어 담배를 꺼내는 그의 손이 떨렸다. 테이블 위에 소포가 놓여있었다. 그의 앞으로 배달되어온 소포, 그것을 바라보는 유현의 마음이 참담했다.

소포안에 든 것은 인화된 몇장의 사진, 큰 사이즈의 사진안에 담긴 가희의 모습. 너무도 아름다운 그 모습이 유현의 가슴을 흔들었지만...

파초앞에 선 그녀의 모습, 그 아름드리 파초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담은 아름다운 사진, 그녀의 매력을 너무도 적절히 이끌어낸 사진작가는... 현웅이었다. 손을 들어 사진속에 있는 그녀의 뺨을 쓸었다. 사진과 함께 동봉된 편지안에 현웅의 글이 있었다. 현웅의 참회와도 같은 그 글에 유현의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현수가 현웅에게 내린 지시, 그렇게해서 현웅이 그녀에게 다가간 이유. 그리고 결국 불발되었던 현수의 계획, 그 모든 것이 고백처럼 편지안에 담겨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말. 그가 이런 편지를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녀는 자신을 보호할지 모릅니다. 원망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표현했지만 제가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새새어머니와 어떤식으로든 화해를 원하고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디까지나 저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권현수여사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그녀가 또 다른 일을 벌이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입니다.
그렇죠. 저는 해 줄 것이 없는 사람이고, 또 그래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나쁜 마음이지만 저는 민가희라는 여자에게 호감이 있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것은 사랑의 시작은 호감이라는 것이고요. 그러나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에 저는 해 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비굴한 편지를 보냅니다. 그녀를 지켜주십시오. 당신이 사랑하는, 아니 당신을 사랑하는 그녀를 지켜주십시오. 이런 말조차 쓸모없을 정도로 당신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 완벽한 남자라는 것을 알기에 주제넘은 짓이라는 것 알지만 부탁드립니다. 이 사진속에 담겨진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주십시오. 주제넘은 참견과 제가 했던 나쁜 행동에 대한 벌이라면 받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유현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물었다. 한숨이 터져나왔다.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거니? 결국 난 너에게 무엇이니.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넌... 결국 한마디도 하지 않은거니.”

원망의 마음이 솟아올랐다.

“왜 내 여자의 이야기를 다른 남자를 통해 들어야 하는거지? 니가 조금... 밉다.”

담배가 너무 써 비벼 껐다. 오늘처럼 담배가 쓴 날이 있었을까. 요즘들어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듯한 그녀의 태도들이 떠오르자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또 무슨일이 있는건지. 언제까지 그는 그녀에게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건지.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없었던 적은 없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 그것은 유현의 아버지로부터 배운 긍정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모든 일에 그렇게 대처해왔다. 그러나 한 여자에게만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 이성보다 감정이 더 앞서는 것. 마음보다 몸이 더 앞서고 몸보다 마음이 더 앞서는 것. 그래서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리는 한 사람, 그 사람이 가희였다.

지금 그의 이성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마치 길들이지 않은 야생마처럼 그의 손에서 벗어나버렸다.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이것이 질투이고 분노라면 굳이 아니라고 손 저을 필요는 없었다.

착찹한 마음으로 사진을 챙겨넣으려는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지금은 들어가면 안되요.”

비서의 만류를 뒤로하고 희수가 들어섰다. 유현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한숨이 세어나왔다. 혼자 있고 싶은 그였지만.

“들어와.”

“고맙네요.”

흐트러진 모습의 희수가 들어섰다. 유현이 천천히 걸어가 사무실문을 닫았다. 언뜻 희수에게서 술냄새가 풍겼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술 마신거니?”

“그래요. 대낮부터 술마셨네요. 이렇게 망가졌어요. 이유가 뭐일거 같아요?”

희수가 비틀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머릿속이 복잡한 그로서는 그런 희수를 봐줄 여유가 없었다.

“그만하자. 지금 머리가 복잡해.”

“그래서 내 주정 따위는 받아줄 여유가 없다는 말이에요?”

그녀가 유현앞에 버티고 섰다. 원망의 눈길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눈을 하고 싶은 사람은 오히려 그 자신이었다. 희수든 가희든 현수든 누구에게든 원망의 마음을 쏟아내고 싶었다.

“희수야. 너 도대체 왜 그러니.”

“이유를 몰라요? 정말 몰라?”

“그만하자.”

유현이 몸을 돌렸다.

“왜 난 오빠를 사랑하면 안돼요? 누구보다 먼저 사랑했고 가장 많이 사랑했는데 왜 난 항상 뒤로 물러나야 해요? 왜 날 안 봐주는거에요!”

희수가 유현의 옷깃을 잡은 채 소리쳤다. 한숨이 세어나왔다. 그가 똑바로 희수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생각해봐. 그 이유가 뭐겠니. 넌 욕심으로 날 대하는 것 뿐이다. 갖고싶다는 마음이 사랑은 아니야.”

“하. 그래요? 그렇게 대단한 오빠는 민가희라는 여자를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는데요? 내 마음과 오빠마음이 틀린게 도대체 뭐죠? 오빠와 그 여자가 하는 것은 사랑이고 내가 하는 것은 욕심이고 집착이에요? 그런 이기적인 말이 어딨어요?”

“상대방을 살피지 않고 일방적으로 갖는 마음이 욕심이야. 아니… 그만하자. 너와 싸우고 싶은 마음 없다.”

“욕심이라고 누가 단정해요? 왜 그렇게 단정하는거에요. 사랑한단 말이에요. 이유는 오빠가 날 봐주지 않아서 그래요. 제발 나도 봐줘요.”

희수가 달려들어 그의 가슴을 안았다. 목석처럼 멈춰선 남자였지만 희수에게는 사랑이었다. 욕심이든 집착이든 그것도 그녀의 사랑이었다. 미친 듯이 일방적으로 향하는 마음의 아픔을 알기에 유현은 잠시동안 그녀를 내버려두었다. 어쩌면 자신이 가희에게 하고 있는 것이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열지 않는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그의 마음이야말로...

“사랑해요. 오빠. 처음 만났을때부터 오빠만을 사랑했어요.”

“가자. 바래다-”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희수가 몸을 곧추세우더니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그의 눈썹이 움찔하더니 희수의 팔을 거칠게 잡아 떼어냈다. 그러나 이미 이성을 잃은 듯한 희수는 막무가내였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입술에서 가희의 입술을 그리는 순간 문이 열리더니 거짓말처럼 그녀가 나타났다.

유현의 몸이 움찔했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미친듯한 갈등이 그를 휘감았다. 당장이라도 희수를 밀쳐버리고 싶은 마음과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가희에게 똑 같은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 그 갈등의 선상에서 희수의 입술이 더욱 옥죄어들어왔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하나였다. 천천히 희수의 어깨를 뒤로 밀었다.

“왜 왔어?”

그의 한 마디로 희수가 가희의 존재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녀가 가희를 돌아보았다.

“난 그냥... 할 말이 있어서...”

말과는 다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유현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은 커다란 아픔이었다. 가장 기쁜 소식을 들고 찾아와 아픈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죽도록 싫었지만...

“갈게요.”

가희가 몸을 돌렸다.
잡아야 했다. 그녀를 붙잡아 설명을 해야 했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를 붙잡는다 한들, 마음을 말한다한들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결국 마지막은 그를 믿지 않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결국 그는 그녀에게 이방인이었던 것을…
문이 닫혔다.

“왜 안잡아요? 아니 왜 탓하지 않아요? 내가 밉잖아요. 왜 아무말도 안해요!”

희수가 원망이 가득담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만해라.”

“오빠!”

“먼저 나갈게.”

천천히 문을 향해 다가갔다. 도어록에 손을 뻗치던 유현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소중한 한 여인을 상처주지 않기 위해 남은 사람을 무시해야 하는 것은 어떤 이론이란 말인가. 이유는 단 한가지,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세상은 이렇게 돌아간다. 과연 그래도 된다는 건 그 누가 정해놓은 법이란 말인가. 이성이 만들어놓은 법, 감정이 만들어놓은 법으로 사람들이 저마다 상처받고 있다.
희수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그의 눈이 흐려졌다.

“들어가라. 데려다 줘야겠지만 지금은...”

“민가희씨만 신경쓰이는거겠죠. 그렇게 오빠는...”

희수의 눈물 젖은 목소리가 밉지많은 않은 것은 어쩌면 그가 이제는 사랑을 알아버린 사람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사랑을 알아버린 후 상냥함과 따뜻함을 느껴본 그이기에 어쩌면 이제 냉정함만을 알았던 과거와 달라진 이유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고 있는 희수가 안되보였다. 비록 그가 위로해줄수는 없는 희수였지만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이 사랑에 빠져버린 사람의 관용이었다. 마음이 한없이 여려지는 것.

“미안하다. 널 사랑해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라.”

“오빠는... 오빠는 안돼요?”

“미안하다.”

“가요...”

“희수야.”

“가요. 가란 말이야.”

유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후 도어록을 돌렸다. 어쩔 수 없는 마음의 흐름, 신경이 쓰이는 곳은 오직 한 방향이기에… 탓해도 할 말이 없을테고 원망받아도 변명의 여지도 없다, 그렇게 사랑이란 일직선으로만 흐르는 감정이기에…

문을 나섰다. 그녀를 찾아야 했다. 마음이 한없이 여려지는 이유는 그녀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번 녹아버린 마음은 좀처럼 다시 냉정해지기 힘들다. 그를 그렇게 변화시켜버린 것은 그녀이다.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았다. 위태롭게 저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여자가 그녀가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미치도록 그녀이기를 바랬다. 숨도 쉬지 않고 달려가 가희의 손목을 낚아챘다. 각오는 했지만 돌려세운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그를 아프게 한다.

“이거놔요.”

“들어봐.”

“싫어요. 놔요!”

아프게 뿌리치는 그녀의 손목을 꼭 쥐었다. 온기로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오해하지마.”

“오해하지 않아요. 당신을 믿어요. 그렇지만... 아프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끊이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닦아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다가서는 순간 파초를 올려다보던 아름다운 사진속의 모습이 겹쳐왔다. 그렇게 한 여자의 얼굴속에서 천가지가 넘는 감정이 피어나고 사그러들기를 반복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왜... 왜 말하지 않은거니. 왜 말해주지 않은거야.”

그녀의 눈이 커졌다. 알고 있었던 걸까? 라미아가씨가 말해준것일까. 아기일을...

“어떻게...”

그의 눈빛이 희미해졌다.

“왜 말해주지 않은거야. 모든 걸 그렇게 함께하고 싶었는데 내가 미덥지 않았니.”

“그건 아니에요. 그건...”

“백현웅이 편지를 보내왔다. 용서하지 않겠어. 네 새새어머니란 사람도 백현웅 그 자식도.”

가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기 얘기가 아니었다.

“설마... 현웅씨가...”

손목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분노가 느껴졌다. 그 아픔 그대로 그녀에게 전해져왔다.

“모든 걸 다 말해주길 바라는 것은 이기적일지도 몰라. 그래도 꼭 말해줘야 할 건 있다고 본다. 도대체 내가 너에게 무엇이니. 난 무슨 자격으로 니 옆에 서 있는거니. 내가 해 줄 수 있는게 도대체 어떤거니.”

“단지 그건 내 일이고.”

말을 잘못했다. 멈칫하는 가희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가 허무하게 웃었다.

“그래. 니 일이겠지. 이런 내가 아주 작은 것이라도 너에게 해 줄 수 있는게 있을까. 제발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말해야 했다. 지금이라도 말해야 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해야했고 아기의 이야기도 해야했다. 그러면 지금 느끼는 유현의 상실감이 조금은 덜어질지도 모른다. 그가 덜 아플지도 모른다.

“유현씨.”

“가자. 데려다줄게.”

“유현씨. 나 당신한테 할 말이.”

“무슨 말을 해도 난 널 이해할 수 밖에 없어. 말했듯이 널 사랑하니까. 내가 용서못하는 것은 바로 나야. 너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나이고 희수를 다가오게 한 나야. 나 자신을 질책할 시간을 줘. 그 후에 얘기하자.”

멀어지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골목을 돌아돌아 겨우 가까이 다가선 그의 발걸음이 비껴갔다. 그렇게 허물어뜨리려고 노력했던 벽이 드디어 허물어지는 순간 이제는 그가 지쳐버린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부를 때 한번만이라도 대답해줄 것을. 아프도록 후회해도 지금 그의 등에 대고 변명을 할 수는 없었다.

“몸은 괜찮아? 많이 아픈 것 같더니.”

차안에서 천천히 핸들을 돌리며 그가 물었다. 다정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겨진 낯선 냉랭함이 그녀를 아프게 했다. 언제부터 그가 다정한 사람으로 느껴졌던 걸까. 언제부터 그의 냉정함이 낯선 것으로 바뀌어버린 걸까. 그는 원래 냉정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었는데 왜 지금은 저 다정한 말속에 조금 냉정함이 담겼다고해서 이렇게 민감하게 읽어버리는걸까. 저렇게 다정하게 말하고 있는데도... 참지 못하게 되어버린 걸까.

“괜찮아요.”

“병원에 들를까?”

“아, 아니에요. 그냥 집에 가요.”

“그래. 그냥 들어가자.”

그에게서 한숨섞인 바람이 흘러왔다.

있잖아. 나 질투하고 있어. 너의 예쁜 모습을 그렇게 담아낸 그 녀석의 시선을 생각하면 피가 역류하는 것 같다. 만약 내가 널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사랑했다면 오늘 희수를 내가 먼저 안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머릿속이 텅비었으니까. 그렇지만 도대체 어떻게해야 여기서 더 널 사랑할 수 있을까. 이 마음보다도 더... 과연 그럴 수나 있을는지.








- 조금 늦었습니다. 아... 쪽지 보내주시며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가면서... 정리할 것도 있고, 부족하다 싶은 부분도 많고 그렇네요.(웃음)
조금 속도가 느려질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날씨가 좀 선선해졌습니다. 모두들 좋은 주말 되세요~




긴 밤, 밤이 그렇게 긴 시간이었나?
불꺼진 방, 테이블에 앉아 천천히 타들어가는 담배만큼이나 까만 가슴과 눈동자로 창밖을 내다보며 유현이 앉아있었다. 같은 마음으로 등돌린 채 누워있는 가희의 가슴도 아팠다. 이런 마음이 아기에게 영향을 줄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일… 내일 아침에…

뜬 눈인 채로 밤을 세우다시피 하며 아침을 맞았다. 마음이 급했다. 빨리 유현에게 말을 해야… 그러나 텅 빈 방안에는 사람의 온기가 없었다. 언제부터 혼자 누워있었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있던 공간에 한 사람만 남았다는 것이 이렇게 서러운 일이었던가.
급한 마음으로 씻은 후 옷매무새를 거울에 비춰보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새벽부터 나갔는데요?”

아줌마의 설명에 무릎에 힘이 풀리는 것 같다.

“언니. 잘 잤어요?”

라미가 쾌활하게 웃는 바람에 걱정스러운 기색을 잠시 뒤로 했다.

“언니. 입덧 같은 것도 해요?”

“아니요. 아직 그런 건 없어요.”

“우와. 우리 조카 착하네. 언니. 뱃속에 있는 아기한테도 이름 지어준다잖아요. 우리도 이름 지어요. 아니 오빠한테 지어달래야겠다.”

“아가씨. 저어… 아직 오빠는 몰라요.”

“네?”

“그게 아직… 말하지 못했어요. 조금 쑥스러워서…”

“그래요? 에이. 실망이다. 난 얼른 조카이름 짓고 싶은데. 내가 조금 지어봐도 되죠? 어차피 나중에 오빠한테 골라달래면 되니까.”

“고마워요.”

“고맙긴. 엽기적으로 지으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뭘.”

라미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언니. 들은 어때요? 들, 산, 강 이런거 있잖아요. 들아~”

“들? 유들?”

“그래요. 유들유들.”

“아가씨. 아침밥 안 줄래요.”

“어머나. 태교하는 사람이 그렇게 나쁜 맘 가지면 안 되요.”

“아니요. 아기한테도 확실한걸 가르쳐야 해요.”

“엥. 언니. 미안해요~ 딴 이름 생각해볼게요. 정말루~”

가희가 빙긋 웃었다. 라미는 그야말로 함께 기쁨을 나눠주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렇게 그녀의 마음속에 하나씩 들어오는 사람들, 바로 유현, 그의 가족들… 그러나 이제는 그녀의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 흔들림은 이제 끝내야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이기 때문에, 더욱 감사한 것은… 사랑하는 가족이기 때문에, 가희의 눈가에 벅찬 기쁨과 안타까움이 밀려들어와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일주일이나 야근이 계속되고 있다. 유현을 만날 시간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마음만 먹는다면 쏟아내듯 유현을 붙잡고 말할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소중한 생명의 존재를 어떻게 하면 그를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로 말해줄 수 있을까.
냉랭한 유현의 분위기를 집안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을리가 없다. 가희는 무엇보다 시부모님께 미안했다.

“아가야.”

이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시아버지가 부르는지라 몸을 돌렸다. 유현은 아직 퇴근전이었다. 인자하게 웃고 있음에도 괜히 죄소러워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힘든 건 없니?”

“네.”

“아직 현이는 모른다고?”

“…네.”

“되도록이면 빨리 알았으면 좋겠구나. 내가 이것저것 사고싶은게 많은데 눈치가 보여 살 수가 있어야지.”

“아버님…”

“실은 내가 참지 못하고서 이것저것 샀단다. 사무실한쪽에 쌓아두기도 힘들구나. 이제 곧 말할테지?”

가희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상냥하고 속깊은 분이…

“죄송합니다.”

“뭐 먹고 싶은 건 없니?”

“아. 아직은 괜찮습니다.”

“먹고싶은 건 무조건 사 먹어야 한다고 하더구나. 자.”

그가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아니에요. 저 돈 있어요.”

“누가 모를까. 얼른 넣어두거라. 이번에는 아가 너보다는 손주한테 주고싶은 거란다.”

가희는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차고 넘치는 사람은 또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차고 넘치는 사람이…

새엄마, 아버지, 서주언니, 하진이, 친구들, 라미아가씨, 어머님, 아버님. 그리고 유현씨. 이 상냥한 사람들이 나에게 준 사랑을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늦은 외출을 하려던 현웅의 발이 멈췄다. 대문앞에 세워진 차의 헤드라이트 빛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드디어 응징의 시간인가?”

현웅이 피식 웃었다. 곧 라이트가 꺼지더니 차문이 열리고 그가 기다리는 남자가 내렸다. 건장한 체격의 유현이 차문을 세차게 닫고서 현웅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웃는 현웅의 앞으로 유현이 성큼 다가섰다.

“안녕하지. 자네 덕분에.”

유현이 차가운 미소를 띠며 그의 앞에 버티고 섰다.

“가희씨는 잘 있나요?”

“받아.”

그가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서류봉투는 분명 자신이 일전에 보낸 것이었다.

“다시 돌려주시는 겁니까? 전 분명히 필름까지 보낸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차피 제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는 사진 아닙니까?”

“아니. 여기 담긴 여자는 내가 아는 가희가 아니다. 단순히 네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일 뿐이지.”

“그렇습니까?”

천천히 봉투를 받아들었다.

“기분나쁘셨습니까? 아름다운 가희씨의 모습이 아닌지요.”

“말했을텐데. 그 모습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네 관점으로 만든 그녀의 이미지야. 내가 아는 가희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

“제 렌즈로 포착했다해도 그녀의 모습입니다. 생각보다 속이 좁으시군요.”

현웅이 도발하려는 듯 픽 웃으며 말하자 유현의 눈매가 차가워졌다. 젠장. 겁나는 군.

“고맙군 그래.”

“별 말씀을요.”

“고개 들어.”

현웅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주먹이 날아왔다. 타이가 바람에 날렸다. 현웅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러나 현웅은 차라리 편했다.

“한 대로 끝내시는 겁니까?”

그러나 한대 치고는 꽤 강도가 강했다. 그의 입가가 찢겨졌는지 피가 세어나왔다.

“재미있군. 이 주먹의 의미는 어머님의 하수인 노릇을 한 데 대한 것이다. 다른 것에 대한 원망은 없다.”

“가희씨를 좋아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비난은 없습니까?”

유현이 피식 웃었다.

“그것은 내가 뭐라고 할 부분이 아니지.”

“당신도 그런 것입니까? 서로 등돌린 채 기다리기만 하는 것입니까?”

“이 이상의 간섭은 주먹감이 된다고 보는데.”

“맞아도 두 사람에게 간섭하고 싶습니다. 어째서…”

“간섭은 간섭일 뿐이다.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마.”

차갑게 돌아서는 유현의 등에 대고 현웅이 외쳤다.

“가희씨는 왜 아무말이 없는걸까요? 제 주제넘는 간섭을 모를리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왜 아무말도 없는 것일까요?”

유현의 발이 멈췄다. 그의 등에서 천천히 흘러오는 소리에 현웅이 천천히 웃었다.

“그애는 용서하고 싶은거야. 너도 그녀의 새어머니도… 그것은 그녀의 성품이라기보다는 죽음에 근접했던 사람이 아니 자신의 죽음과 소중한 사람을 맞바꾼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관용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착한 것도 아니고 답답한 것도 아니다. 누군든… 죽음 앞에서는 초연해질 수 밖에 없다. 그녀가 그 모든 것을 이기고 견고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결국 그대로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한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회피로밖에 들리지 않는데요?”

죽으려고 환장했군. 현웅은 왜 이렇게 그녀의 일에 열심인지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러고 싶었다.

“다그치지 않으려고 한다. 애증이나 집착 모든 것을 떠나서 그녀를 기다려보기로 결정했으니. 그것이 바로 내 옆에서 평생 살아가야 할 내 여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현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쩌면 그는 흙이 되기로 결심한 걸까? 그녀의 기다림이 맺혀있는 파초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바쳐주는 곱고 든든한 흙이 되어주고 싶은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현웅도 그런 남자가 되고 싶다. 한 여자에게 그런 의미가 되고 싶다. 지금 미치도록 유현이 부럽다. 그만큼 그가… 고맙다.

“당신 같은 남자가 저를 이렇게나 상대해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저 흠씬 두들기고 다시는 주위에 얼쩡대지마라고 해도 당신을 탓할 사람은 누구도 없는 것 아닙니까?”

비틀어진 말이 나간다. 유현이 무엇이길래, 어떤 남자이길래 그는 되고 자신은 안되는 것일까. 그녀는 그를 보고, 자신은 그녀를 보는 것일까.

“네 손에 든 그것 때문이라고 해두지. 그녀가 안에 갖고 있는 것을 나 다음으로 많이 알고 있는 남자가 네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공유할 수는 없어도 이미 알아버린 것을 토해내게 할 수는 없겠지.”

“…”

현웅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돌았다.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랐지만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 밝은 햇살에 얼굴을 내놓고 활짝 웃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나? 그런데 지금 그렇게 따스한 햇살이 얼굴을 감싸고 있다. 자연이란 것은 그래서 경의로운 것, 그러나 그만큼 신기한 것은 어쩌면 사람의 감정…

“기다리십시오! 계속 기다려 주십시오!”

현웅의 외침에 유현이 여전히 돌아서지 않은 채 픽 웃었다.

“무엇을?”

“그녀를 기다려주십시오.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녀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를.”

“무언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군.”

그가 그제서야 천천히 몸을 돌리고서 현웅을 쳐다보았다. 현웅이 빙긋 웃고 있었다.

“이유가 없어도 그녀는 날 사랑해. 운명이니까.”

“운명이라…”

“그녀와 나 사이에 묶인 단단한 실이 보이지 않나?”

“저로서는 그것을 끊어버리고 싶은 사람입니다만. 제 눈에 보였다면 당장 끊어버렸을 것입니다. 고로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이죠.”

“서투르게 대든다고 끊어질 수 있는 실이라면 이렇게 아프지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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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격려해주시는 분들, 서운한 점을 말씀해주시는 분들...
공통적인 것은 가희와 유현을 안타까워해주시는 따뜻한 마음이겠지요.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합니다. 다만... 난 널 사랑해, 그 말 한마디로는 부족한...
어떤 마음이 있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한마디에 담긴것보다 행동으로, 마음으로 생각해주고 아껴주는 것을 그리고 싶은 것이 저의 마음입니다.
제가 부족해 그 과정을 잘 그리고 있지 못하다면... 너그러히 용서해주시구요^^
이제 날씨가 많이 선선해졌습니다. 모두들 저마다 시원한 바람에 행복 한 줌 실려오는 그런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릴케 드림.


가희는 결국 유현의 친구인 강훈의 도움으로 지금 유현이 있다는 곳을 알아낼 수 있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있다고 말해주는 그에게서도 걱정스러운 기색이 느껴져왔다. 몸이 좀 나른했지만 옷을 챙겨입고 유현이 있다는 바로 향했다.

“더 이상 이래선 안돼. 아기를 위해서라도…”

한편 유현은 머리가 지끈지끈거릴 정도로 술에 취한 채 앉아있었다. 며칠이나 가희의 눈을 피했다. 이제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을 정도로 그녀를 피했지만 마음속의 아픔과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안 그래야지. 그러면서도 그녀의 얼굴을 바로보기가 힘들다. 실은 이렇게 약하고 속좁은 남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건지도.

“그만 마셔.”

강훈이 유현의 잔을 빼앗아들자 유현이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다른 술잔을 주문했다.

“미치겠군.”

“나도 미치겠으니까 그만해.”

“그러길래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지 모른다는 속담이 딱 맞다. 니가 그 나이에 사랑 때문에 괴로워할 줄 누군들 꿈이나 꾸었겠냐. 역시 사랑이든 무엇이든 제 나이, 제 시기에 해야 해.”

“시덥지 않은 소리 마. 인마.”

“그렇게 아무말 안해주고 술만 풀거면 나는 왜 부른거냐?”

“그럼 가.”

“얼씨구.”

“오빠...”

갑작스러운 인기척으로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희수가 서 있었다.

“어라? 희수구나.”

“응. 반가워. 강훈오빠.”

“언제 들어왔어?”

“좀 됐어. 나 앉아도 돼?”

“어. 그게…”

강훈은 난감했다.

“앉아.”

유현의 말에 강훈은 조바심난 사람처럼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제 곧 가희씨가 올텐데…
그러나 유현의 옆자리에 앉은 희수에게 술잔을 건네는 유현이 강훈의 마음을 알리가 없었다.

“오빠.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요?”

“이유 없어. 한 잔 받아라.”

유현이 따르는 양주가 희수의 잔을 채웠다.

“나 이제 돌아가려고 해요.”

“그래?”

유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날은 미안했다.”

“정말 미안해요? 그럼 나 안 가라고 하면 안 돼?”

유현이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희수는 또 자존심이 상하다. 마지막까지 붙들어봐도 난 안된단 말인가.

“그냥 마셔. 지금은 술이 해결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네.”

차가웠다. 유현의 미소는 차가웠다. 희수는 느끼고있었다. 자신은 아니라는 것을.

“저어. 희수야. 아니 유현아. 이런 얘기 미안하지만… 실은 내가 가희씨를 불렀어. 곧 이쪽으로… 가희씨!”

강훈이 벌떡 일어났다. 유현의 시선이 강훈을 따라가다가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저기 앞에 가희가 서 있다. 그녀가 요즘들어 더욱 초췌해진 얼굴을 한 채로 서 있다. 그모습에 또 속이 상하다. 이유가 뭘까. 저렇게 아파보이는 이유가 뭘까. 가희의 시선이 유현을 지나 희수를 향했다. 그럼에도 유현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유현아. 가희씨잖아.”

“그래서?”

“……”

문소리가 들렸다.

간 거군. 붙잡고 싶지만… 따라가야 하지만, 따라가고 싶지만 그래봤자 해 줄게 없어. 난 네앞에 서면 무너지고 말아. 감각을 마비시켜 버리니까. 네 눈동자 하나, 손길 하나에도 온 몸의 감각이 마비되어버려. 제발 아프지 않았으면… 방법을 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데… 방법을 알려준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텐데.

“희수씨. 반가워요. 강훈씨도 오랜만이죠?”

유현의 눈이 커졌다.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간 거… 아니었어?

“네. 언니.”

“가희씨. 앉아요.”

희수가 유현의 옆자리에 앉는 바람에 강훈이 옆자리를 비우며 앉으라는 듯 일어났다. 그러나 가희는 희수를 쳐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희수씨. 미안하지만 남편 옆자리에 앉았으면 하거든요?”

희수는 기가막히다는 눈으로 가희를 바라보았지만 유현은 싱긋 웃을 뿐이었다.
고집하곤…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번거롭게 하지 말고.”

냉정한 유현의 말에 오히려 당황한 사람은 강훈과 희수인 듯 했다. 왠지 부부싸움에 휘말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유현이 가희에게 대하는 분위기가 거의 처음으로 냉랭하지 않나 싶은 것이…
강훈은 난감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이래서야 화해는 커녕…

“질투안할 자신 있어요?”

응? 갑작스런 가희의 말에 강훈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유현은 빙긋 웃고 있었다.

“워낙 질투가 많은 사람이어야 말이죠.”

“질투안해!”

말투는 차가웠지만 눈은 웃고 있다. 가희는 유현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그대로 앉죠.”

가희가 유현을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며 강훈의 옆자리에 앉았다. 유현은 갑자기 달라진 것 같은 가희의 태도에 눈쌀을 찌푸리면서도 두근거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요사이 이상하게 초췌한 얼굴빛은 다름이 없었지만 눈빛이 어딘가 달랐다. 무언가 도전적으로 쳐다보고 있는 저 빛은… 아마도 처음 만난날 저런 눈빛이었나?

“강유현이 질투가 많나요?”

강훈이 묻자 유현이 눈썹을 움찔했다.

“글쎄요. 본인이 알 걸요?”

“어이쿠.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도 안 드렸네요. 받으시지요. 재수씨.”

“저 자식.”

유현이 죽일 듯이 강훈을 노려보았다.

“왜? 술 주면 안 되냐?”

“형수님이라고 불러. 인마.”

켁. 강훈이 술이 목에 걸린 듯 켁켁거렸다. 하여간 이상한 데 집착하는 놈이라니까.

“미안하지만 술 마시면 안되요. 마시면 안 될 일이 있거든요.”

가희가 일부러 강조하며 유현을 노려보았다.

“마셔. 노래부르라고 안 할 테니까.”

상상력하고는… 가희는 맥이 쭉 빠졌다. 술을 마시면 안돼요. 아기 때문에… 이 말을 직설적으로 하기 힘들었던 가희로서는 큰 언질을 흘린 셈이었다. 그러나 유현은 다른 말만 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제가 드릴게요. 강훈씨. 한 잔 받으세요.”

가희가 강훈에게 술을 권하자 유현의 눈이 번쩍번쩍했다. 마치 앞에 있는 개구리를 노려보는 뱀처럼 두 사람을 주시하는 유현이었지만 강훈과 가희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서 화기애애하게 술을 주고받았다.

“나… 갈게요.”

결국 일부러가 아니어도 유현에게 외면받고 만 희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희라는 여자가 나타난 이후 유현의 신경은 온통 그곳으로 쏠려있다. 자신이 아닌 것을 깨닫고서 더 이상 할 것은 없었다. 일어나려는 그녀를 가희가 저지했다.

“그냥 가지 말아요. 한 잔 받아요.”

그녀가 내민 술잔을 희수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건 무슨 의미죠? 왜요? 내가 불쌍해 보이나요? 오빠. 나 이렇게 무시당하고 있어. 바로 오빠 한 사람 때문에.”

희수가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유현을 노려보았다. 유현은 아무 말 없었다.

“그래요. 위로주 맞아요.”

“뭐라구요?”

희수가 자존심이 상한 눈으로 가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가희는 빙긋 웃을 뿐이었다.

“옆에 앉은 남자를 사랑한 것 말이에요. 같은 이유로 저도 위로주를 마셔야 할 듯 하니까요.”

“민가희!”

유현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잘난척하지 말아요. 사람 비참하게 만들지 말란 말이에요.”

희수가 분노에 찬 눈으로 가희를 노려보았다.

“글쎄요. 희수씨가 그렇게 반응하니까 상대적으로 내가 더 기고만장해지는 것 같지 않나요?”

벌떡 일어났던 유현이 다시 의자에 앉아 다리를 척 꼬았다. 그가 [그래. 더 해봐.]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가희로서도 바라던 바였다.

“난 희수씨와 나쁘고 싶은 마음 없어요. 희수씨가 나에게 실수한 건 없잖아요.”

“그래요? 난 언니의 남편이란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때문에 미칠 것 같아요. 그런데도 잘못한 게 없어요? 그래요?”

“희수씨가 유현씨를 좋아한 건 벌써 전부터의 일이죠. 그걸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만 내가 유현씨에게 부족해보여 잊었던 마음을 다시 끄집어내는 거라면, 어떤 오기로 그런 마음을 먹는 거라면 그건 잘못이 될 수도 있겠네요.”

”단정짓지 말아요. 오빠를 당신보다 먼저 좋아한 것도 사실이고, 잊었던 마음을 다시 끄집어 낸것도 사실이에요. 적어도 당신이란 여자에게 지기는…”

“다시 말하지만 희수씨. 나 희수씨보다 한참 위에요. 당신이란 단어는 좋지 않아요. 미국에서 살다왔다고 해도 모든 사람을 YOU라고 치부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그래. 희수야. 그건 좀 그렇게 보인다.”

강훈이 거들자 유현이 뒤로 빠져있어라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래서요? 화해라도 하고 싶다는 의미인가요? 하! 설마!”

희수가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노려보자 가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꺼낸 단어는 위로였지 화해가 아니었다고 기억하는데요?”

희수의 얼굴이 빨개졌다. 도대체 이 여자 뭐야?

“내가 생각한 희수씨의 이미지가 있었어요. 좀 나빴죠. 그렇지만 희수씨.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참 마음이 넓으시네요.”

“아니. 사실 그렇지도 않아요. 그러니… 떠나줘요. 희수씨. 여기서 더 희수씨를 보게 되면 나 희수씨 미워할지도 몰라. 부탁할게요. 희수씨가 가주었으면… 좋겠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려고 했지만 목이 칼칼해졌다. 입안이 말라버려 술이 마시고 싶었다. 술잔을 들어올리는 유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강훈도 조용히 침묵한채로 가희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더 가기 싫은 거 알아요? 내가 밉지 않다구요? 밉지 않다면서 쫓아내요?”

“아니. 밉지 않아요. 세상에 나쁜 사람 정말 많은데… 희수씨는 나에게 나쁘게 한 거 없어요. 분명히 나쁘게 할 이유가 있었는데도 희수씨가 한 일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 뿐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해요.”

“싫어요. 가기 싫어. 좋아했는데… 나도 좋아했는데 왜…”

희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내 것이 아닌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은 죄가 아니에요. 그게 죄였다면 나도 이미 죄인이니까. 서주언니를 품에 끌어안고도, 안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유현씨를 이렇게 사랑하게 되어버렸으니까…”

눈물을 꾹 참았다. 그녀의 말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모두들 침묵했다. 그녀의 고백에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유현을 의식하며 가희가 천천히 일어났다.

“먼저 들어갈게요. 유현씨.”

유현이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자 가희가 말을 이었다.

“희수씨… 바래주세요.”

“넌?”

유현의 물음에 가희가 빙긋 웃었다.

“전 강훈씨가 바래다 줄테니까요.”

“뭐?!”

유현이 소리치며 가희를 노려보자 강훈이 벌떡 일어났다.

“걱정마. 내가 무사히 바래다드릴 테니. 가시지요. 형수님.”

강훈의 능청을 따라 가희가 몸을 돌렸다. 어깨를 들썩이던 희수가 외쳤다.

“아줌마! 언니 많이 미워해요. 어쩔래요? 그런데도 그렇게 잘난척할 수 있어요?”

유현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그는 막지 않고서 천천히 가희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도… 미워요.”










초인종이 울리자 라미가 문을 열어주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유현이 들어섰다. 라미의 눈이 커졌다. 그가 아름다운 장미 한 다발을 들고 있었다.

“저녁 먹었니?”

“와~ 오빠 드디어 들었구나?”

구두를 벗던 유현이 눈을 들어 라미를 쳐다보며 뚱하게 대답했다.

“뭘?”

순간 뜨끔한 라미였다.

“아, 아니. 그냥 헛소리야. 헛소리. 날씨가 덥네? 내가 어느새 더위를 먹었나?”

“언니는 방에 있니?”

유현이 답답한지 타이를 느슨하게 끌르며 묻자 라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 아까전에 오빠 전화받고 나갔잖아. 같이 들어온 거 아니야?”

유현의 표정이 굳었다.

“아직 안 들어왔다고?”

“응.”

그가 한손에 든 장미다발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현관으로 다시 나가는가 싶더니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이층으로 올라갔다.

“오빠. 저녁은 먹었어?”

“응. 얼른 자.”

“언니 들어오면 문 열어줘야지.”

“내가 열어줄 테니까 자.”

“알았어. 참 그런데 아까전에 뭘 들었다는 소리야?”

“응? 뭘? 내가 그런 말을 했어?”

“아니다. 자라.”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는 유현의 어깨가 왠지 쳐진 것 같다. 유현의 모습이 사라진 후 라미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직 말 안한건가? 언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걸까? 저러다가 우리 들이를 쓱싹 없애버리는건 아닐까?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두 사람이 사랑한다는 건 확실하니까. 아~ 우리 들이 얼렁 보고 싶다. 아기는 꼭 열달이 지나야 나오려나? 이참에 언니한테 한번에 세쌍둥이 낳아달라고 부탁할까?”










창문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떠나줘요. 희수씨. 여기서 더 희수씨를 보게 되면 나 희수씨 미워할지도 몰라. 부탁할게요. 희수씨가 가주었으면… 좋겠어요”

가희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생하다.

“내 것이 아닌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은 죄가 아니에요. 그게 죄였다면 나도 이미 죄인이니까. 서주언니를 품에 끌어안고도, 안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유현씨를 이렇게 사랑하게 되어버렸으니까…”

순간 심장이 멎어버릴뻔했다.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그 순간의 감정이란…
마음을 보인것이었을까? 침대위에 놓인 장미가 왠지 처량하게 느껴졌다. 이 방의 주인이 언제부터 자신이 아닌 그녀가 되어버린걸까.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계의 초침소리와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리는 작은 소리만이 들렸다. 마침내 그가 벌떡 일어났다.

“도대체 왜 안 들어오는거야!”

의자에 걸쳐두었던 재킷을 집어들고 문을 벌컥 열던 그의 몸이 주춤했다. 문앞에 가희가 서 있었다.

“이, 이제오는거야?”

“리하이”

가희가 싱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리하이?”

“채팅용어에요. 리하이. 다시 만나 반갑다 뭐 이런 말쯤 되겠죠?”

얼굴은 헬쓱해진 채로 싱긋 웃는 그녀가 괜히 얄미운 유현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얄미울 수 있을까.

“먼저 나갔으면서 왜 지금 들어와?”

“나가려던 참이에요?”

가희가 귀걸이를 풀어놓으며 유현의 손에 들린 재킷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찾으러 가려던 길이었어.”

“저 어린아이 아니에요. 그냥 강훈씨랑 한 잔 더 했어요.”

“술 마신 것 같지는 않은데?”

“전 술 마시면 안 된다니까요. 그냥 강훈씨만 한 잔 더… 와. 웬 꽃이에요?”

침대로 돌아서던 그녀가 장미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저 주려고 사온거에요?”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그녀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런데 왜 저렇게 혈색은 안 좋아 보이기만 하는건지. 유현은 괜히 심통이 나서 입을 삐쭉거렸다.

“화원 지나는데 주인이 버리길래 주워온거야.”

“흐응? 그래요? 이렇게 싱싱한 걸 버리는 화원이 있단 말이죠? 그것도 이렇게 예쁘게 포장해서?”

가희가 장미를 품에 꼭 안고서 유현을 돌아보았다. 마치 아이처럼 발그레진 그녀의 볼이 유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바스러지게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장미 따위 아무려면 어때. 말도 안 듣는 마누라한테 누가 돈 들여 꽃 사주고 싶을 것 같아?”

환하게 웃으며 장미에 코를 묻고 있던 가희가 그를 돌아보았다.

“미안해요. 그렇다고 삐친거에요? 화난게 아니라 삐치다니. 보기 흉해요.”

“흉해?”

가희는 괜히 그를 놀려주고 싶었다. 신기하게도 은근히 느껴지는 뱃속의 생명과 ‘그’라는 남자가 함께 동화되어 가희에게 묘한 사랑의 감정을 솟아나게 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랑해도 그렇게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던 강유현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살갑게 느껴지는 것이 정말 생명의 신비일까? 마침내 그녀만의 남자가 된 것 같은… 그런 느낌. 문득 가희는 아기의 애칭을 ‘열매’라고 짓고 싶어졌다. 사랑의 열매, 은혜로운 열매, 고마운 열매… ‘들’이라고 부르는 라미에게는 미안했지만 말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말할게요.”

가희가 장미를 품에 꼭 안은 채로 그에게 다가갔다. 유현이 비스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뭘?”

“어떤 일이든, 앞으로는 모든 걸 당신과 함께 할거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삐치지 말아라?”

“삐쳐도 좋아요. 무엇이든 다 당신모습이니까요.”

“너…”

“그러니까 이제 꽃, 주워오지 말고 사줄 수 있죠? 꽃 좋아하거든요. 많이…”

“선인장처럼 찔러대기만 하던 여자가 왜 이렇게 변했지?”

유현이 은근한 눈으로 가희의 뺨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가희는 눈을 감고서 그의 체취를 느꼈다. 유현의 눈이 온화해졌다.

“어리석은 여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요. 바로 옆에서 움직이는 바람을 느끼지 못하는 여자가 되지 않으려구요. 소심함으로 당신을 잃을까 걱정이 되어서요.”

“너는 바보다. 너는 이기적이야. 그렇게 거세게 항의할때는 돌아봐주지도 않더니 이제서야 겨우…”

“파초는 열매를 맺지 못한대요. 알아요?”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요… 사랑해요… 유현씨.”

유현의 눈이 커졌다. 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 정말 술 안 마신거 맞아?”

“사랑해요.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힐 정도의 힘으로 유현이 그녀를 와락 안았다. 다가온 사랑을 외면하지 말아라. 호소하는 그의 외침에 등돌리지 말아라. 흔들린다고 포기하지 말아라. 그의 숨소리에 늘 귀를 기울여라. 그러면 진심이 담겨 더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그의 사랑이 눈을 감아도 보일 테니…


“우리 라미가 오빠 일하는데 다오고 왠일이야?”

문을 열고 들어서는 라미를 유현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컴퓨터를 보느라 썼던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유현앞으로 캡소매니트와 데님팬츠를 발랄하게 입은 라미가 다가섰다. 그녀의 손에 종이가방이 들려있었다.

“아빠 사무실 쳐들어왔다가 들른거야.”

“아. 아버지가 보자고 하셨니?”

“응. 뭘 좀 가져가라더라구.”

“그래? 뭐 마실래? 주스?”

“아빠 사무실 들렀다 오는 길이라니까. 이미 마셨어.”

“앉아.”

유현이 소파에 앉자 라미가 그 앞에 폴짝 뛰어올라 앉아 양반다리를 척 꼬았다.

“좀 이쁘게 앉아라.”

“왜? 이쁘잖아. 난 무슨 짓을 해도 이쁘지 않우?”

“도대체 누가 그래?”

“누구든.”

“어느놈이 헛소리를 한지는 모르겠구나.”

“오빠도 내가 밉살스러워? 새언니가 그러더라. 내가 아주 밉살스럽다구.”

“가희가 그랬어?”

유현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오빤. 동생이 밉살스럽다는데 재밌어?”

“아니. 가희가 그런 말을 하는 모습이 상상이 가서.”

“그저 언니 얘기라면 좋아서. 우리 오빠가 저런 팔불출인줄 진즉 알았다면 브라더콤플렉스가 있다는 소리 따위 듣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누가 너더러 브라더컴플렉스래?”

“누가 그랬겠어? 새언니지.”

“가희한테 좋은 말들을 많이도 들었구나.”

“내가 언니한테 심통을 좀 부렸었거든. 그 때마다 언니한테 얼마나 당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살이 다 떨린다니까.”

“그러니까 덤빌사람한테 덤벼야지.”

유현은 첫만남에서 커피에 치약을 짜넣던 모습을 떠올리며 크게 웃었다.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알아?”

라미가 종이가방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무엇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꽤 크고 묵직했다.

“글쎄? 아버지가 옷 사주셨니?”

“족집게네. 옷은 여기 들었고 다른 것들은 이미 차에 실어놨어.”

“다른 것들?

“응. 장난감에 보행기에 유모차에 모빌에 블록까지 있다니까. 내가 미쳐.”

“뭐?”

유현이 담배를 꺼내들더니 눈을 깜빡였다.

“뭐가 있다고?”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러니 아빠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날 불러서 다 가져가라고 하지. 언니랑 오빠 믿고 있다가 사무실이 완전히 어린이방으로 전락할 뻔했다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알아듣게 설명해야 할 거 아니야.”

라미가 한숨을 폭 내쉬며 종이가방을 뒤적거려 예쁜 아기옷을 테이블위에 펼쳤다. 유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갸웃거리던 그의 눈이 커졌다. 무언가 감을 잡은 모양인가? 드디어?

“설마…”

“이제 알아차렸어? 정말 답답해.”

“그러니까…”

가슴이 두근거려왔다. 담배를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듣고 놀라지 마. 실은 아빠랑 새엄마가 늦둥이를…”

떨리던 유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허무해졌다.

“뭐?”

“늦둥이를… 낮는건 주책이겠지? 호호호호호”

웃어대는 라미를 유현이 뜨악한 눈으로 노려보며 외쳤다.

“라미야!”

“알았어. 농담안할게. 그게 아니구 언니가 아직 말 안한거 같아서 내가 말하는거야. 내 조카얘기… 아직도 못 들은거 맞지?”

유현의 표정이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묘해졌다. 마치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눈을 깜빡거리자 라미가 답답한지 가슴까지 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 옷이 바로 오빠의 이세, 즉 내 조카 옷이라구. 이제 알아들었어?”

“어, 언제…”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상하게 쉰 목소리가 나왔다.

“벌써 한 참 됐어. 언니도 참. 왜 그 얘기를 못할까? 답답해서 미칠뻔했네. 명이 십년은 줄었을거야. 아무리 미인박명이라지만-”

“라, 라미야. 나… 집에 간다.”

유현이 라미의 말을 끊고서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슬그머니 일어섰다.

“정신차려. 오빠.”

“저, 정신… 그래. 차려야지. 그래…”

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같았다. 도대체 기뻐하는건지 놀라기만 한건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라미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빠. 안 좋아? 표정이 뭐가 그래?”

자리로 돌아가더니 재킷을 걸치고 무언가를 챙기던 그의 손에서 자꾸만 미끌어져내리는 물건들을 쳐다보며 라미가 물었다. 그가 물끄러미 라미를 바라보았다.

“내, 내가… 아빠가 된다는 말이… 맞니?”

“그렇다니까. 왜 표정이 그래? 보통 남자들 이런 소식 들으면 뛸듯이 기뻐해야 하는거 아닌가?”

“강라미.”

“응?”

그의 눈초리가 엄해졌다. 라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쁜건… 기쁜거고… 이여자 정말… 날 미치게 하는군.”

유현이 더 이상 작업하던 서류를 정리하는 것을 포기했는지 그길로 뛰쳐나갔다. 아무래도 큰 사단을 낼 듯한 포즈였고 분위기였다.

“그러길래 진작 말하라니까. 언니. 나 탓하지 마시우. 나도 몰러.”

라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앙증맞은 아기옷을 쳐다보았다.

“아잉. 너무 귀엽다.”







가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해도 안정이 되지 않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수화기를 꼭 쥔 손에 땀이 차 올랐다.

“어떻게… 아셨어요?”

“사돈께서 친절하게도 알려주셨다. 내가 한 말을 잊고서 감히…”

머리를 어지럽히는 현수의 말에 가희의 호흡이 빨라졌다. 이상하게 앞이 흐려졌다. 마치 순식간에 방안에 있는 모든 공기가 사라진 듯 숨이 찼다.

“새어머니… 저 아기 낳고 싶어요.”

목소리에 눈물이 차올랐다.

“제발…”

“닥쳐라. 그런 아이 따위!”

“낳고 싶어요. 낳게 해주세요.”

“시끄럽다. 내가 말하지 않았어? 니가 아이를 낳아봤자 서주의 영혼이 쓰인 아이일게다. 무섭지도 않니? 무섭지도 않아? 이 끔찍한.”

“아기는…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서주라고 이름지을거에요. 언니가 다시 태어나는게 뭐가 나빠요? 만약 고맙게도 우리 자식으로 다시 태어나 준다면… 넘칠만큼 많이 사랑해주고 싶어요. 그러고… 싶어요.”

“지, 지금 니가 뭐라고 하는게야!”

“아니에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어요. 죄송해요. 언니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들먹거리면 안되는건데… 아니… 새어머니. 제발 아기를 사랑해주세요. 아기를…”

“당장 지워. 당장 지우래두!”

“어, 어떻게 그럴수 있어요! 새 생명이에요. 그러니 제발…”

참자, 흘려듣자, 하고싶은 말을 하자. 여자는 약해도 새어머니는 강하다고 했어. 널 가진 이유를 합리적으로 말하자. 널 사랑하는 마음을 모두에게 표현하자. 널 낳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어떤 이유에도 불구하고 널 낳을 수 밖에 없는 마음을… 아무리 두려운 새어머니라고 해도… 해야해.

“제발 허락해주세요. 제발 축복해주세요.”

“축복받을 생명이니? 그래? 입이 있으면 니가 말해봐라. 말해!”

“수화기 내려놔.”

무섭도록 낮게 파고드는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유현이 차가운 눈으로 서 있었다.

“유현씨…”

“당장 끊어.”

그가 무서우리만치 냉정한 눈으로 가희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마치 한마디 한마디 곱씹어 뱉듯 그렇게 무서운 어조가 이어지고 있었다. 분노가 가득찼다. 유현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난…”

“당장 끊으라고 했지!”

순식간에 가희의 손에서 수화기를 낚아챈 유현의 눈빛이 섬뜩했다. 가희는 풀 죽은 채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유현의 분노와 현수의 원한, 그 사이에 선 아기의 존재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새어머니. 유현입니다.”

그가 우뚝 선 채로 수화기를 귀에 댔다. 큰 그림자가 그녀를 덮었다. 이렇게 큰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가희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가 옆에 있어준다는 사실이 그렇게 위로가 될 수 없었다. 강유현은 그녀에게 쳐진 방어벽이었다. 미치도록 손 뻗고 싶은… 이제는 그녀 자신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의미가 되어버린 그였다.

“가, 강실장.”

“이만 끊겠습니다. 다시 전화드리지요.”

“강실장! 내 말 듣게.”

“말씀하십시오.”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던 그가 굳은 표정으로 다시 귀에 댔다. 그러나 그 눈빛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이는 절대 안 되네.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전에는 안돼.”

“끊겠습니다.”

유현이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가희는 기절할 것 같은 정신을 다잡으며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에게 너무 미안했다. 이런식으로 알리게 되었다는 사실 역시…
유현이 천천히 다가와 아무말없이 그녀를 안아 번쩍 들어올렸다. 그 숨결이 느껴지자 온갖 감정이 밀려왔다.

“유현씨. 미안해요. 말하지 못했던건…”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정도는 일도 아니야… 조금 늦게 안게… 뭐가 대수야.”

유현이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며 중얼거렸다. 그의 그 말 한마디로 가희는 모든 것을 알아들었다. 원망도, 분노도, 오해도 없다는 것을…

“식은땀이 심하게 난다. 추워?”

“조금…”

“일단 아무생각도 말고 자. 부탁이야. 내 부탁 들어줄 수 있지?”

유현은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원망하느라, 탓을 하느라, 누구 책임인가를 묻느라 낭비하는 시간을 오히려 사랑으로 채우는 사람이다. 그렇게 그는 가희의 영혼을 덮어주는 사람인 것이다.
침대위에 그녀를 눕힌 그가 이불을 끌어 목까지 덮어주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착해요? 정말 뭐라고 안해요? 또 혼자 아무말도 않았는데? 이런 큰 일을, 이런식으로 알게 되었는데도 어떻게…”

“개성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뭐든지 자기혼자만 알고 나한테 알려주지 않는거, 니 나쁜 개성이라고.”

눈물이 차오르려는 그녀의 이마를 그가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녀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이 남자를 나에게 주신걸까.

“세상에 그런 개성이 어디있어요?”

“아니면 컨셉이라고 해두든가.”

“유현씨…”

가희는 어쩔 수 없이 밀려드는 편안함과 따뜻함에 슬며시 눈을 감았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과정이 어찌되었든 네가 너무 소중한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너 하나만도 나에겐 소중한데 더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으니 난 이제 너에게 완전 케이오야. 뭘해도 미워할 수 없어. 뭘해도 탓할 수 없어.”

“유현씬… 이전에도 그랬잖아요. 뭘해도… 믿어주고 늘 기다려주고…”

“말했잖아. 너 자체로도 나에게는 소중하다고… 아기는 옵션이야. 너라는 소중한 존재에 달린 옵션.”

“세상에. 아기 들어요.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요?”

그를 곯려주고 싶은 가희였다. 너무 사랑스러워 앙 깨물어주고싶은 작은 생명처럼 그렇게…

“들으라지. 인마, 아니 여자아기일수도 있겠구나. 어쨌거나… 아기. 너 잘들어라. 너 참 소중해. 그렇지만 아빠…한테는 새엄마가 더 소중해. 그러니까 넌 옵션이야. 알아? 거 참… 되게 쑥스럽구만. 아…빠… 라니.”

유현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가희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그동안 그래서 얼굴빛이 그렇게 안 좋았던 거니? 이 나쁜 여자.”

유현이 그녀의 이마에 알밤을 콩 놓았다.

“날 나쁜 아…빠… 쑥스러워 미치겠군. 하여간 나쁜 아빠로 만들려고 작정한거지? 너 컨셉 좀 바꿔. 제발 좀 착하고 솔직한 컨셉으로 말이야.”

“안그래도 그러고 싶어요. 이젠 정말 지쳐서…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모든 걸 함께…”

“그렇게 말을 했잖아. 그렇게 눈빛을 보냈는데도 지친후에야 겨우 알아채다니… 정말 나쁘고도 나쁜 여자야. 이렇게 얄미울 수가 없네.”

유현이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미안해요.”

“그래도… 너 많이 노력해준거 알아. 그래서 한번만 더 봐주기로 했어. 사실 난 오히려 고마워. 새어머니, 아버지에게 좋은 며느리 해준것도 고맙고… 라미와 잘 지내주는 것도 고맙고… 무엇보다 아기… 고마워. 그래서 다 용서할 수밖에 없어. 서운했던 건 두고두고 살면서 갚아야 할 것 같다.”

“그럼 그 때마다 아기 가질 거에요. 그럼 뭐라고 못할테죠?”

“사양이야. 나는 너하고 여기 이 속에 있는 아기 둘만 키우면서 살거야.”

“미안하지만 난 안 키워줘도 이마 다 컸어요.”

“아니. 아직 한참 멀었어. 사춘기 소녀처럼 말안듣고 엇나가기만 하면서 다 큰거라고 생각하는거니?”

“그러는 본인은 아주 어른스러운가요?”

“그럼. 나는 널 지켜줄 만큼은 단단하다.”

긍정하지 않아도 그의 말은 사실이다. 가희는 드디어 다른 아무 방해없이 사랑의 의미가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가희야. 내일 회사 그만둘거다. 미리 말하지만 용서할 수 없어. 더 이상 새어머니를 용서할 수가 없다. 사실 참을 수가 없었어. 백현웅 그 자식에게 그 얘기 들은 이후, 사실 몇번이나 복수를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아버님 생각에 그만두곤 했지. 이젠 참을 수 없다. 모르겠다. 생각같아서는 도화선을 터트리고 나올 생각이지만…”

“유현씨!”

가희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세어나왔다.

“뭐라고 해도 난 귀를 막았어. 아무말도 하지마.”

“안돼요. 그런 일 하면 안돼요. 설마 나쁜 생각하고 있는건 아니죠? 그렇죠?”

“이미 계획중인 일이 있어. 내 방식대로 네 새새어머니에게 벌을 줄 테다. 참을 수 없어.”

“안돼요. 절대 안돼요. 새어머니에게 사업은… 그 회사는 서주언니만큼이나 큰 존재에요. 서주언니가 없는 지금은 새어머니에게 전부와 같아요.”

“바보야. 그만해. 그래서 모든 걸 용서하라고? 그런 일을 저질렀는데도 그냥 넘어가라고?”

“모든 걸 용서하기를 바라진 않아요. 나도 새어머니가 미워요. 마음 속 깊은 곳부터 미워서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그렇게 미워요. 왜 그렇게 날 미워하는지… 차라리 서주언니를 만난 사실조차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서주언니의 착한 성품조차 원망스러워질 정도로 그렇게 새어머니가 미워요. 잔인하고 미워서 가슴이 무너질 정도로 그렇게 미워요. 그렇지만 서주언니의 새어머니에요. 제 아버지의 부인이고, 새엄마가 아프게 한 여인일 뿐이에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상처를 입은 그녀도 여자라는 것을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 아이의… 할머니에요. 외할머니와 아버지가 반목했다는 오명을 주고 싶지는 않아요. 이 아이에게는 좋은 것만 주고싶어요. 제가 휘어지더라도 아이에게만은… 아이의 아버지인 당신에게만은…”

가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현의 깊은눈에 괴로움이 가득 담겼다.

“난 관용 같은 거 몰라요. 용서가 뭔지도 몰라요. 사람이 사람을 용서할 자격은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니까.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보호본능으로 다른 사람에게 금방이라도 칼을 들이댈 수 있는게 사람이니까. 다만 난 그 칼을 뽑고 싶지 않을뿐이에요. 용서라는 이름도 아니고, 관용이란 이름은 더더욱 아니에요. 그저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서는 안되는 것을 선별하는 능력 정도는 갖고 살고 싶어요. 조금 손해보더라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요. 더더욱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나쁜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유현씨… 아기를 봐서라도, 아니 절 봐서 새어머니를 떠나지 말아요. 마지막까지 지켜주어요. 마지막까지 노력해요. 그렇게 해 주세요. 아마도…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어머님, 아버님께서는 저에게 그렇게 말씀해주실거에요. 가희야… 니가 잘했다… 라고.”

잠시 유현은 아무말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처럼 배타적인 눈으로 가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희는 진심을 담아 그런 그를 마주보았다. 영혼이 통한다면 바로 이사람, 그렇기에 그는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으리라.

“제발 그래주세요.”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그래주세요. 유현씨. 제발…”

유현이 마른 한숨을 폭 내쉬었다. 결국 그가 할 대답은 하나일 뿐인 것을.

“그래. 알았어.”

할 수 없다는 듯 유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침내 가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고마워요.”

“아니. 그런 말 마. 난 정말 미워죽겠으니까. 새어머니가 미워죽겠으니까.”

“나도 밉죠? 내가 바보같아서 밉죠?”

“말이라고 해? 정말 미운건 너야.”

갑자기 가희가 서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아가야. 아빠가 새엄마를 미워한대.”

투정부리는 가희의 말에 유현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미, 민가희!”

“아빠는 관용이 없는 사람이로구나. 새엄마가 밉대.”

가희의 연극이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언제 그랬어?”

“이젠 거짓말까지. 금방 말해놓구서.”

“민가희. 너 정말 엄청난 지원군을 얻었구나?”

“주어진 환경을 백퍼센트 활용하며 살려구요. 더 얄밉죠?”

“정말 미워죽겠…”

내뱉던 유현이 곧 그녀의 얼굴과 배 사이를 오가더니 결국 항복의 백기를 들었다.

“세상에서 니가 제일 좋아.”

유현이 싱긋 웃으며 다가섰다.

“가장 사랑해.”

속삭이는 유현의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아가야. 바로 널 가장 사랑해.”

“유현씨!”

가희가 밉지 않게 그를 흘겨보았다.

“왜? 주어진 환경을 백퍼센트 활용하라며?”

“정말 미워.”

“아가야. 새엄마가 아빠가 밉단다.”

똑 같은 방식으로 나름대로의 복수를 하는 유현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잠이 든 가희의 이마를 쓸었다. 이미에 맺힌 식은땀이 안쓰러워 물수건을 얹었다. 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보고 난 후 방문을 열고 나가 서재로 향했다. 휴대폰을 꺼내들고서 번호를 눌렀다.

“새어머니. 유현입니다.”

“그래. 전화를 한다더니 늦었군.”

“가희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 그래서 몸상태를 봐주느라 늦었나? 강실장이 그렇게 따뜻한 사람인 줄 몰랐군. 서주에게도 그랬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유현의 무뚝뚝한 대꾸에 현수가 표정을 다잡았다.

“그렇겠지. 그러니 전화를 했겠지.”

“백현웅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잠시 현수의 몸이 움찔했다. 그러나 곧 그녀가 딱딱한 목소리를 내뱉았다.

“결국 그것이 입을 열었나? 그래. 내가 시킨 일이네. 어떻게 할텐가?”

유현은 실날 같은 기대가 허물어져버렸음을 깨닳았다. 그녀에게 인간적인 정을 기대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인가? 끝까지 가희에게는 아픔으로만 남을 이름이란 말인가.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따지고 항의할 일이었으면 벌써 했을 것입니다. 이미 지난 이 시점에서 제가 이 말을 꺼낸 이유를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화낼 사람은 날세. 아이도 가졌겠다. 그것이 기고만장해서 자네에게 술술 다 분게 아닌가.”

“결단코 가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백현웅이라는 자식에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 그 남자조차 진심은 알아줍니다. 가희의 참모습을 알고 자신을 탓할줄 압니다. 그런데 어머님께선 끝까지 그렇게 아집에만 둘러쌓여 계실것입니까? 정말 어머님은 백현웅이라는 남자보다도 못한 그런 사람이십니까!”

“지금 감히 날 훈계하는겐가!”

“원망의 마음이 커지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 제가 죽도록 싫습니다.”

“하! 모르지. 그것이 그자를 어떤식으로 유혹해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을지 말일세. 자네가 의심해야 할 곳이 내가 아니고 자네 옆에 있는 그 애라는 걸 모르는가!”

“그만하십시오. 정말 끝까지 이러실 것입니까?”

“그래서. 자네가 나를 질책하는것인가? 그래. 어디 고소라도 하게. 영창에라도 넣으란 말일세. 납치사주범으로 넣으란 말이야. 그러고 싶어 나에게 따지는 것이 아닌가!”

“말씀드렸습니다. 항의할 생각이었다면 벌써 했습니다. 그러나 가희가 말하지 않은 이유를 알기에 지금껏 무력하게 가만히 있었던 것입니다.”

“자네. 말을 웃기게 하는군. 그래. 가희 그것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그 말은 그 아이 때문이 아니라면 정말 날 어쩌기라도 하겠다는 듯 들리는군. 자네 정말 이럴것인가?”

“물어보겠습니다. 그녀에게 아기를 지우라고 하셨습니까?”

잠시 현수쪽이 조용하다. 유현의 숨소리에 분노가 실려있음을 가늠했으리라.

“지우라고 하셨습니까!”

“그랬네. 내가 그랬어. 정말 아이를 낳을 생각인가!”

현수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왜요? 왜 그러셨습니까! 왜!”

“그럼 내가 축복해주기를 바라나?”

“축복따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 사치 바라지 않아도 최소한 나쁜 말은 말아주셔야 하는것 아닙니까! 할머니이십니다. 아이의 할머니이십니다!”

“누, 누가! 그 애랑 나랑은 피한방울 안 섞였어. 그런데 누가 누구의!”

“서주의 동생이고 아버님의 딸입니다. 새어머니의 딸이고 제 아내입니다! 왜 그렇게 독을 뿜어내시는 것입니까! 어째서 그렇게 끝까지 변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지, 지금 자네가 내게…”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든 자기보호 본능이 있습니다. 누구든 공격받으면 움찔하고 주먹이 나갑니다. 그런데도 가희는 새어머니께 사정하지 않았습니까. 못 들으셨나요? 사정하는 말이 들리지가 않습니까?”

“자, 자네가 어떻게 감히 내게…”

“제가 회사에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머님과 저 역시 피한방울 안 섞인 남입니다. 그러나 제게 당신이 새어머니인 이유는 가희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어머님은 가희의 뒤를 쫒고 나쁜 계획까지 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도 가만히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모든 것을 알고도 나에게조차 아무말도 못한 사람입니다. 무엇 때문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가 어머님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을 헤하려한 사람조차도 핏줄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녀의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정말 조금의 관용도 없으신 분이십니까? 어머님이란 분은!”

“가, 감히 내게… 이 내게 탓을 하는건가? 자네가 나를 가르치려는게야!”

“감히 제가 어떻게 어머님을 가르치겠습니까. 어떻게 감히 제가 어머님께 탓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모든 것이 완벽한 어머님이시더라도 배우실 건 배우셔야 합니다. 어머님께서 마음속으로 무시해마지 않는 가희에게도 배우실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바로 말이 아닌 행동으로 하는 용서입니다.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온 몸으로 행동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말입니다.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을 끝까지 지키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말입니다!”

“이…”

“그렇습니다. 저는 많이 모자른 사람이라 제 아이에게 외할머니란 존재는 없다라고 말하고 싶은 인격이지만 가희가 결정했기에 따릅니다. 제 아이의 외할머니인 당신이, 조금이라도 좋으니 정이라는 감정을 가지신 분이시기를 바랍니다. 아이에게 외할머니를 언젠가는 소개시켜줘야 할 때 제발 웃는 눈으로 쳐다봐 주시기를 말입니다.”

“그 아이를 내가 볼 것 같은가? 그래. 말이 나왔으니 더 하지. 그 애가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아이의 이름을 서주로 하겠다고 했네. 그런 말을 감히 내게 내뱉을 수 있나? 그런데도 자네가 이상한 게 아닌가? 그것이 미치지 않았단 말인가!”

“만약… 서주의 영혼이 담긴 아이가 태어난다면 다행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더 이상 죄책감으로 자신을 망치는 일이 없을테니까요. 그렇게… 보상하며 살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행복하겠습니다.”

“미… 미쳤어. 둘 다 미쳤군. 감히…”

“안녕히 주무십시오. 예의에 어긋난 행동들 사죄드립니다.”

“지금 병주고 약주나? 자네 정말 내게 이럴텐가!”

“내일 계획이 있었습니다. 얼마전부터 주식시장을 잠시 조작했습니다. 그러나 내일 바로 풀겠습니다.”

“뭐,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나! 그렇다면 얼마전부터 회사의 주식을 매수하고 있는 그 인물이…”

“정상으로 되돌리겠습니다. 그리고 떠나려고 했던 마음도 잠시 접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럼…”

“가, 강실장. 강실장!”

그러나 유현은 냉정하게 폴더를 닫았다.

“이봐. 민가희씨. 그대 때문에 협박도 해보고 회유도 해보고 여러가지를 해보고 있어. 당근이든 채찍이든 다 사용해볼테니 가희야. 마음을 풀어. 이제부터는 너에게 향하는 모든 말을 중간에서 막아줄게. 아무리 작은 아픔이라도 내가 다 수용할테니까 너는 이제 제발 편해져. 지금처럼, 그렇게 곤하게 잠든 지금처럼만 행복하게 지내야 해. 제발 그렇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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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현재 [파초]를 전면적으로 수정중에 있습니다. 제가 봐도 부족한 점이 많아 보강하고, 채워넣으려다보니 내용상 바뀔 부분이 많네요. 아무래도 연재에 신경쓰다보니 깊은 생각없이 쭉 써내려간 글 같습니다. 많이 듬성거렸죠? 후후
그렇지만 지금 현재 완결 지은 내용으로 일단 연재는 마치도록 노력하겠습니다.(최대한)
[파초]를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보답할 방법이 없네요. 마지막까지 부탁드립니다.
(--)(__)





시간은 조용히 흘러간다. 끝을 알 수 없게 유유히 흘러가는 시간안에 가족간의 사랑이 있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에 대한 기다림이 있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점점 더 단단해져가는 믿음이 있다.

계절이 바뀌고, 나뭇잎들이 떨어져 정원에 소복히 쌓이고, 또 계절이 지나 하얀 눈이 지붕을, 장독대위를, 거리를 새하얗게 덮어버린다고 해도 사랑이 사람을 덮어주는 것만큼 신기하고 온화할까. 그렇게 또 계절이 지나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세상이 다시금 푸릇푸릇해지고 새로운 생명의 새싹들로 땅이 메워진다.

그리고 그런 계절의 변화속에 유현과 가희가 있었다. 이제는 서로의 얼굴만 봐도 미소가 번지고, 더 이상의 오해도 불신도 없을 정도로 단단해진 두 사람이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가희의 배는 점점 부풀어올라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인 새생명이 점점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은 영원을 만드는 것, 시간이 갈수록 남은 시간이 짧아지는 듯 하지만, 실은 하나씩 하나씩 서로의 시간을 채워가는 것이라는 것을, 남은 양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차는 양이 점점 더 늘고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유현씨, 잠시도 떠나면 안돼요. 떠나지 말아요.”

양수가 터져 막 아기가 나올 모양이었다. 생명의 탄생에 대한 각오는 했지만 겁에 질린 듯한 가희앞에서 유현역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가희만큼이나 식은땀에 온 몸이 젖은 그가 가희의 손을 꼭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마. 내 손으로 받을 테니까. 우리 아기… 내 손으로 받아 너한테 안겨줄게. 그러니까 아무 걱정마. 두려울 것 없어.”

“아파. 너무 아파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가희를 바라보는 시새어머니와 라미의 눈가도 촉촉히 젖었다.

“언니. 힘내요. 조금만 힘내.”

라미도 유현옆으로 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고마워요. 아가씨. 나… 이 말 아가씨한테 해야 했는데 하지 못했어요. 아가씨. 정말 고마워요. 아가씨가 얼마나 나한테 고마운 사람인지 모르죠? 얼마나 아가씨를 이뻐하는지 모르죠? 나… 정말 아가씨가 예뻐요. 심술맞은 말투도, 툭툭 내뱉는 감정도 다… 모두 다 사랑해요. 아가씨 때문에 정말… 편했어요.”

식은땀이 잔뜩 맺힌채 고해와도 같은 말을 끄집어내는 가희를 향해 라미가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언니… 언니… 나두, 나두 언니가 너무 좋아요. 이제 오빠를 뺏아간 사람이 아니라… 그냥 내 언니에요. 오빠랑 별개로… 이제 정말 언니가 좋아요. 미안해요. 첨에 심술부려서 정말 미안해요.”

“아가씨…”

그렇게 정말 작은 마음 한 켠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감사할 것 투성이인 것을, 가희는 이렇게 행복한 날, 현수가 그립다. 친새엄마보다 더욱 현수가 그립다. 그렇게 모질고 독하고 두려운 그녀가 왜 그리운 것일까. 그것은 새어머니라는 이름, 친정새엄마라는 이름으로 그런 것이 아닐지. 오늘 같은 날, 곁에 지키고 서서 손을 잡아주어야 할 새엄마는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율배반이다. 그런 새엄마가 미운 대신 견디기도 어려울 정도로 독을 쏘아대고 있는 현수가 그리운 것은 어쩌면 가희의 약한 마음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 역시 가희의 마음인 것을…
울먹이는 가희의 약한 마음을 알기에 시새어머니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꼭 쥐었다.

“아가야. 걱정말아라. 날 믿고, 알겠니?”

시새어머니의 말에 가희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가희가 자처해서 새어머니에게, 아이의 할머니에게 아기를 받아주기를 부탁했다. 산부인과 의사인 시새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수긍했다.

“우리 아기는… 행복할 거에요. 태어나자마자… 새엄마, 아빠, 할머니… 고모, 할아버지까지 많은 사람을 얻으니까요… 아기는… 행복할거에요.”

가희가 마른 입술을 축여 중얼거렸다. 너무도 갖고 싶었던 가족,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한꺼번에 선물받았다. 그래서 당장 아픈 것은 힘들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저 남자, 강유현이라는 남자… 그 사람의 아기를… 팔에 안아드는 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을 테니까…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그럴수록 유현의 얼굴도 사색이 되었다. 결국 라미는 울음을 터뜨렸고 시아버지마저 일을 하던 중에 병원으로 뛰쳐와 1층에서 서성였다. 한생명의 탄생, 그토록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 힘겨웠기에 이제는 편안하게 미소지을 수 있는 그녀의 가족들, 많이도 지켜보고 많이도 함께 서로를 다독여온 그들 가족에게 지금… 또 한명의 가족이 늘려하고 있었다.









“정말 뻔뻔하기도 하구나. 무서운 것, 널 보니 살이 떨린다!”

“어머님!”

유현의 외침에 현수가 두 사람을 동시에 노려보았다. 아무리 유현이 안으려고 해도 잠시도 자신의 팔안에서 떼어놓지 않으려는 가희의 고집으로 아기는 그녀이 품안에서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새어머니, 아기에요. 소야에요. 한번 보세요.”

그녀가 품안에 꼭 안은 아기를 현수에게 내보였다. 그러나 현수는 질겁을 하며 뒤로 피하며 소리쳤다.

가희와 유현은 아기의 이름을 소야(小野)로 지었다. 작은 들판… 아직은 작지만 그 안에 풀도 심고, 꽃도 심고, 나무도 심고, 바람도 심고 그래서 결국은 대지를 모두 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다.

“당장 저리 치워라. 네가 지금 나를 갖고 놀려는 속셈이냐!”

“보세요. 눈감고 있어요. 예쁘지 않나요? 자고 있는데 정말 예쁘시지 않아요? 이 뺨이 귀엽지… 않으세요?”

가희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그녀의 목소리가 눈물에 젖어 잠겼다. 가만히 곁을 지키던 유현이 참지 못하고서 가희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가자.”

가희가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눈물을 참으려는 듯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가자니까!”

유현은 가희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왜 하필이면 이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겠다는 건지, 현수와 부딪혀서 좋을게 뭐가 있다고, 집으로 간다면 너무도 소중하고 소중해서 이런 대접 따위 받지 않아도 될텐데, 부모님들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을텐데 왜 친정에서, 그것도 현수가 있는 곳에서…

“가자. 제발 가자니까!”

이제는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미워지기까지 하는 유현이었다.

“싫어요. 여기서 있고 싶어요. 아기랑…”

“민가희. 제발…”

“당장 데리고 가게. 그래. 도대체 니 고집의 의미가 뭐냐! 자네도 보지 않았나. 날 말려죽이려고 대드는 저 심보를 보란 말일세!”

현수가 죽일 듯이 노려보며 가희에게 소리쳤다. 유현의 굳은 얼굴이 더욱 경직되었다. 그의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몸이 떨리고 있음을 가희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힘든 길을 선택했다.

“새어머니. 전에 제가 쓰던 방을 쓸게요.”

“그럴 필요 없어. 갈테니까.”

유현이 아기를 받아안으려는 듯 그녀에게 손을 뻗쳤다. 그러나 가희는 그를 노려보는 것으로 대신하고 천천히 이층으로 올라갔다. 뒤에서 현수가 소리쳤다.

“나가래두! 도대체 네 의도가 뭐냐. 응? 뭐냔 말이야!”

“어머님!”

으애앵. 갑작스런 소란에 잠에서 깬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현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현의 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획 돌려 유현을 노려보았다.

“당장 데리고 가게! 왜? 사부인께서 손녀뒤치닥거리 해주기 싫으시다던가?”

유현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의 눈에서 섬광이 일었다. 현수가 잠시 뒤로 주춤했다.

“지금은 저로서도 이해가 안 갑니다. 분명 귀하게 여겨줄 사람이 서 있는 저쪽을 두고 왜 가시밭길에 원망으로 가득찬 사람이 있는 이 곳으로 오려고 하는지, 어머님께서는 혹시 그 이유를 모르시겠습니까? 아신다면 알려주십시오.”

아무말도 하지 않는 현수를 두고 유현이 천천히 이층으로 향했다.









“새어머니. 가희가 많이 아파요. 미치겠습니다.”

유현이 전화에 대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걱정과 분노, 원망이 묻어나오는 것을 시새어머니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차분해야 했다.

“우선 병원으로 데려오거라.”

“지금 다른 병원이에요. 새어머니한테 걱정끼칠까봐 다른 병원으로 가고 싶다고 합니다. 저 요즘 가희를 이해할 수 없어요. 왜 그렇게 다 자기 고집대로만 하려는 건지, 저렇게 아파하면서도 왜 그러는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현아. 그냥 두거라. 조금만 지켜보자꾸나. 네가 믿어줘야지 너 아니면 누가 그 아이를 이해하겠니.”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저러다가 어떻게 될까봐 걱정이에요. 미치겠습니다.”

유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젖몸살같니?”

“네.”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니?”

“유선염같다고 합니다. 파상풍 주사를 맞고 있어요.”

“저런… 유선염은 아무나 걸리나. 내가 보기에는 그냥 젖몸살같은데 말이다. 많이 아플텐데 이걸 어쩌면 좋니.”

“지금 집으로 데려갑니다. 그렇게 아세요.”

“아니. 현아. 조금만 템포를 늦춰라. 너는 남자라 모를게야. 젖몸살이 얼마나 아픈건지 당사자가 아니면 모르지. 그런데도 참고 있지 않니. 제 몸이 끊어지는데도 그렇게까지 하는데에는 이유가 있을게야. 현아. 조금만 생각해보렴. 이유가 뭔지. 어미 전화 끊겠다.”

“새어머니. 새어머니!”

그러나 이미 전화는 끊겨 있었다. 늘 속깊은 그의 새어머니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새어머니의 여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괴로움이 느껴질 정도로 힘들면서도 끝까지 현수의 집을 고집하는 가희도, 조금만 더 지켜보자는 그의 새어머니도 유현은 다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중 가장 미운 사람은 현수였다. 외손주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멸시와 냉대를 지속하고 있는 그녀의 비인간적인 면에 질리고 질려버렸다. 차라리 구박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그런 멸시를 어떻게 가희는 그렇게 참을 수 있을까.

서주가 죽던 순간이 떠올랐다. 현수는 그때만큼이나 독하게 가희를 구박하고 있다. 그 때, 모진 학대속에서 그녀를 건져내야겠다고 결심했던 자신을 떠올려보았다. 한갖 아무관계도 없던 그녀였다. 조금 눈길을 끈다싶었지만 단지 서주의 배다른 동생일 뿐이었고 가여운 여자일뿐이었다. 그런 여자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동정으로 결혼을 결심하는 바보는 없다. 그리고 그는 바보가 아니다. 게다가 아무리 죽은 사람이라도 서주의 부탁만으로 결혼을 결심할 정도로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말이다.

그런 그가 가희를 선택했다. 아니 어느순간 눈떠보니 그녀를 책임지고 있었다. 말릴세도 없이, 생각할 새도 없이 그렇게…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인지 몰라도 그녀를 사랑하게까지 되어버렸다. 그것은 필연인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나. 아니 그것은 마음의 끌림이 아니었을지… 그냥 지나가는 여자가 아닌, 내 여자였기에 그렇게 눈이 가고, 마음이 가고, 동정이 샘처럼 솟아오른게 아니었을지…

그런 가희가 지금 또다시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그녀와 아기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기대하고 기다리던 생명이었는데, 얼마나 사랑하는 아내이고 분신인데… 입안이 타들어갔다. 속이 쓰리고 심장이 떨렸다.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다 부숴버리고 싶었다. 지금은 가희조차도 미웠다. 답답한 가슴을 부여쥐고 병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링거바늘이 그녀의 애처로운 손목에 꽂혀 있었다. 식은땀에 온 몸이 젖은 채로 여전히 고통을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눈물이 새어나온 그녀에게 다가간 유현이 미친듯 소리치며 간호사를 불렀다.

“이봐요! 당장 뽑아요!”

유현의 난동에 간호사들이 달려왔다.

“아직 환자분이…”

“됐어요! 그만 뽑아요! 얼른!”

미친듯 소리치는 유현의 옆에서 간호사들이 겁을 집어먹은 채로 분주히 바늘을 뽑았다. 가희가 힘없이 눈을 떴다.

“유현씨…”

“집으로 가자. 제발 부탁이야. 이렇게 부탁할게.”

유현이 그녀의 손목을 쥔채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가희의 눈도 흥건히 젖었다.

“유현씨. 나 너무 아파요. 너무…”

“그러니까 가자. 응? 새어머니한테 가자. 제발.”

“아니… 집으로 갈래요.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일주일후에… 그때 가요. 정말… 그땐 갈게요. 정말로… 미안해요. 미안해요. 유현씨.”

유현의 눈에 빛이 사라졌다. 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안아들었다.

“미안해요. 유현씨.”

“몰라. 니가 너무 밉다.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아. 지금은 정말 니가 미워. 널 이해하기도 싫고.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니 말 들을게. 일주일이야. 딱 일주일이야.”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

“일주일간이야. 딱 일주일. 더 이상은 없어. 아니면 나 미쳐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아니 분명 무슨 일이든 저지를거야. 이거 협박 아니야. 알아?”

“알아요. 정말 미안해.”

“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는 가지 않지만 기다려줄수는 있어. 넌 끝까지 내게 기다림의 과제를 주는구나. 그렇지만 그거 알지? 내가 이렇게 무기력한 남자가 되기 위해 너와 소야를 만난게 아니란 것을, 너와 소야에게 이런 힘겨움을 줄만큼 어리석은 인간이라는게 정말 싫다. 정말…”

가희는 눈물을 꾹꾹 눌러담기 위해 다시한번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이기적인 행동이다.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이기적인 것을 떠나 무모하기 그지 없는 짓이었다. 그것은 그대로 유현을 구속하고 유현에게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지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새어머니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현수의 집에 가겠다는 그녀의 말에 시새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가 준 말미가 한달이었다. 이제 일주일이 남았다. 일주일이…








“괜찮겠어?”

현관문앞에서 그녀를 향한 유현의 물음에 가희가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닦아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아파?”

유현이 그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며 묻자 가희가 힘겹게 미소지었다.

“정말… 내 몸이 원망스러워요. 안 그래도 유현씨 걱정이 태산인데 아프기나 하구…”

“그런 말 하지마. 미우니까 미워할거야. 아주 많이 미워할거니까 착한 말 하지마.”

토라진듯한 유현의 말에 그녀의 가슴이 쓰리다. 평생을 담고 담아도 모자를… 이 남자의 마음이 오늘 더 쓰렸다.

“소야는?”

“일하는 아줌마가 봐주고 계셔. 아버님도 일찍 퇴근하셨고. 그래도 아버님께서 너무 좋아하신까 다행이다.”

“응. 그래요. 소야는… 우리 소야는 그래서 행복한 아이에요.”

“일주일이야. 너도 소야도 더 이상 둘 수 없어. 안 그러면 나 정말 미쳐버리고 말아. 다시 말하지만 이거 협박 아니야. 과장도 아니고, 알지?”

고개를 끄덕이던 가희가 이내 입술을 꼭 깨물며 울상을 지었다. 유현의 눈빛이 다급해졌다.

“계속 아파?”

“잠깐… 괜찮다가 너무… 아파요.”

가희의 입에서 신음이 세어나오자 유현이 다급하게 그녀를 안아들었다.

“들어가자.”

그의 이마에도 어느새 식은땀이 맺혔다. 함께 아파해주는 것, 이 남자는 어디까지 그녀의 고통을 분담하려함일까.

현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던 유현의 걸음이 멈췄다. 현수가 외출을 하려던 참이었는지 깔끔한 정장을 갖춰입은 채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또 온게냐?”

“어디 나가십니까?”

가희를 안아든 유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대답했다.

“참 보기 망측하네. 얼른 올라가던지.”

현수가 탐탁치 않은 눈으로 두 사람을 훑어가며 소파위에 놓아두었던 백을 집어들었다.

“저 아이는 왜 저렇게 우니? 원 내 집이라고 시끄러워서 살수가 있나.”

느껴졌다. 가희를 안아든 유현의 팔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가희는 눈을 꼭 감았다. 제발 유현이 말을 말로 흘리기를… 더이상의 의미를 지우지 말기를, 소중한 아기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느게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슬펐지만 제발 며칠만 더 참아주기를…

“다녀오십시오.”

유현의 갈라진 목소리가 가희의 귀를 파고들었다. 아니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가슴에 물이 고였다. 또한번 그녀를 이해해주는, 그녀의 마음에 닿아있는 유현의 그 깊은 마음이 느껴져와 그녀의 가슴에 일렁이는 물이 고여버렸다.

“상관하지 말게. 도대체 그 애는 어디가 어떤데 그렇게 들쳐안고 그 모양인겐가. 여기는 어른도 없는 집인가?”

“죽어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유현의 목소리에 칼날이 선다. 가희는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겨드랑이의 고통을 참아가며 입술을 꼭 깨물고서 그의 팔을 쓸었다. 그러지 말아요.

“끝까지 제 고집 세우는 걸 보니 그렇게 보이지는 않네만.”

“정말 너무하십니다. 한번도 살펴봐주시는 못하실지언정-“

“당장 데리고 올라가게. 나한테 그런 걸 왜 기대해? 애초부터 싫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엉겨붙어 있는 것이 그렇게 귀하게 안고있는 그애가 아닌가!”

“귀해서 안고 있겠습니까? 아니 귀합니다. 그래요. 너무 소중해서 바람도 맞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유현씨. 올라가요. 제발 그만해...”

“넌 시끄럽다. 그래. 자네 어디 말해보게. 고집 피우며 날 괴롭히는 그애가 나쁜건가 아니면 자꾸만 날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이 지경이 나쁜건가? 어디 말해보게!”

현수가 얼굴에 열이 바짝 오른 채로 쏘아보며 물어왔다. 가희는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겨드랑이에 또 통증이 밀려와 눈물이 세어나왔다.

“올라가요. 유현씨.”

“소야가 소중한 이유는 핏줄이고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소중한 것은 제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곳에 있는 것입니다. 똑 같은 이유로, 어머님이 제 아내의 새어머니고 제 아이의 외할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유…유현씨…”

한참 마주보며 쏘아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갑자기 가희가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유현의 시선이 다급하게 그녀에게 옮겨졌다. 가희의 온 몸에서 열이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가희야!”

“제발… 날 좀 살려줘요. 유현씨… 너무 아파 죽겠어요… 아파…”

그녀의 눈에 온통 물이 고였다. 괴로움에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눈앞에 둔 유현의 가슴이 타들어갔다. 미친듯이 뛰어올라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아기를 재우고 있던 아줌마와 그녀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났다.

“강서방, 가희는…”

다가서던 아버지의 발이 우뚝 멈추고 말았다. 고개를 푹 숙인채 그녀를 안아 든 유현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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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 작은 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왠지 소주안주 같다는... 그런 어감으로 읽지 말아주세요.(웃음) 이제 완결까지 한편이 남았습니다. 담편이 완결일듯 싶습니다. 부족한 완결이 말입니다. 끝까지 지켜봐주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우선 물을 따뜻하게 데워서 물수건을 준비하렴. 더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가슴을 풀어주거라.”

“이, 이렇게 아픈에요?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아프게 아기를 키워요?”

유현이 전화기를 붙든 채 오열을 토해냈다. 죽어가는 것 같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죽어가고 있는 것 같아 온 몸에서 분노가 뿜어져나왔다.

“현아. 진정하거라. 답을 하자면 누구든지 그렇단다. 한 생명의 탄생이라는 것이… 한 생명이 세상에 자리잡기까지 그보다 더한 시련이 있어. 그래서 부모인 사람은, 누구든 그렇게 힘이 든거란다. 그렇게 힘겹게 아이를 낳고 키우지. 하나의 식물이 크는데도 엄청난 공과 노력이 들거늘, 사람이야 오죽할까. 그러니 네가 이해해라. 사부인이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네가 흥분하면 안돼. 당장 네 사람이 가엾다고, 네 아기가 불쌍하다고 하지 말아야할 경솔한 행동을 해서는 안돼. 사부인도 그렇게 힘들게, 힘겹게, 정성을 들여 딸을 키워오신게야. 그런 딸을 보낸 사람이잖니. 세상 어떤 슬픔도 자식을 먼저 보낸 슬픔에 비할바가 안된단다. 그렇게 이해하고 네가 자리를 잡아주렴.”

“모르겠어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참을 수 없어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가희가 참고 있잖니. 몸과 마음의 고통, 그 큰 고통을 온 몸으로 참고 있잖니.”

“끊을게요.”

“그래. 현아 너도 고생이 많구나. 어떠니? 그렇게 좋아하기만 하더니 조금쯤은 후회가 되니? 자식을 낳았다는 것이, 힘겨운 여자를 아내로 맞은 것이… 후회가 되니?”

새어머니의 목소리에 장난이 섞여있다. 유현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일이 있어도 제 몸으로 지킬 것입니다. 후회스러운 마음으로는 절대 그럴수가 없겠지요. 어떤 흔들림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게 저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그만 끊자쿠나. 이제 일주일후면 우리 손녀 마음껏 볼 수 있는거지? 우리 가희에게 이 어미가 무엇이든 해 줄 수 있겠지.”

“네. 주무세요.”

“그래라.”

“새어머니!”

“응?”

“…고맙습니다.”

“원 애도…”

그러나 새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더없는 미소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좀 괜찮아?”

어느새 호흡이 많이 안정된 가희가 살짝 미소지었다. 그녀의 핏기없는 하얀 얼굴에 그의 가슴이 아프다.

“어머님께서 알려주셨어요?”

더운 물수건으로 찜질을 해서 그런지 지금 현재는 감쪽같이 고통이 가셨다.

“응. 아무리 의학이 발전했다고 해도… 무조건 링거바늘 꽂는게 중요한게 아니라고 하시면서 알려주시더라. 아프면 말해.”

“아니. 정말 많이 살 것 같아요. 너무 아팠는데.”

“그래서 살려달라고 한거야? 내가 그 말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죽고 싶었는지 알아?”

“너무 아파서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했어요. 나 살고 싶은가봐. 너무도 간절히…”

“당연하지. 넌 내가 이 준수한 외모에 홀아비가 되서 소야 들쳐업고 회사 다녔으면 좋겠냐?”

가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만 해도 재미있는 모습이었다.

“왜 옛날에 보자기만들 때 쓰던 반질반질한 초록색 천 있잖아요. 그색으로 꼭 업고 다니세요.”

“장난하는거 보니 살아났다 이거지?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놓고 이런 나쁜 여자. 으… 정말 아픈 여자를 쥐어박을 수도 없고. 너 정말 그렇게 얄밉게 굴거니?”

유현이 가희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고 있는데 소야가 깼는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소야가 배고픈가봐요. 이리 주세요.”

“녀석, 새엄마아빠의 로맨스를 방해하고 있어.”

유현이 툴툴거리며 소야를 안아들어 그녀의 팔에 안겨주었다. 아기를 받아든 그녀가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쓴 후 앞섶을 벌리려다 말고 유현을 노려보았다.

“유현씨. 잠시 돌아주실래요?”

“응? 왜?”

흐뭇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유현이 눈을 깜빡였다. 마치 소년처럼 천진난만해보여 가희는 헛웃음이 세어나올 정도였다.

“그럼 보고 있을거에요?”

“뭐 어때.”

“정말… 아기 울잖아요. 얼른요.”

“싫어. 볼테야.”

“유현씨!”

결국 유현은 쫓겨나다시피 하며 방을 나섰다. 미역국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오던 아줌마가 그를 쳐다보며 웃었다.

“쫓겨나셨어요?”

“네. 못 보게 하네요.”

유현이 쑥스러운 듯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럴거에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데 말입니다. 아 참. 아버님은 아래층에 계신가요?”

“네. 안그래도 장기판을 펼쳐놓고 기다리고 계세요.”

“아. 그럼 내려가야죠. 또 살짝 져드려야 하나?”

유현이 싱긋 웃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줌마가 빙긋 웃으며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기 아빠 쫓아낸거니?”

모유를 먹이고 있던 가희의 뺨이 밝그레졌다.

“차, 창피해서요.”

소야의 뺨을 부드럽게 쓸며 가희가 대답하자 아줌마가 싱긋 웃었다.

“우리 가희가… 어떻게 그런 연으로 저 분을 만나서… 저렇게나 사람 자체를 변화시켰는지 모르겠네. 예전의 저 분은… 나와 말을 나눌 성격이 못됐거든. 물론 회장님이나 사모님께도 형식적으로만 대하는 그런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달라요?”

“그러네. 많이 달라진 느낌이야. 두 분 바둑 두시는거 못 봤지? 마치 아들처럼 어찌나 살갑게 대하는지 몰라. 지금도 참 온화하게 웃고 있어서 딴 사람같단 생각이 들 정도네.”

“유현씨는… 원래 좋은 사람이에요. 마음 속 깊은 곳부터 따뜻한 그런 사람이에요.”

“행복해보여서 참 좋아. 행복하지?”

“그럼요.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나저나 사모님께서 계속 저러시는데 괜찮아?”

가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환하게 웃음지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기를 보고 있을수록 그런 생각이 들어요. 누가… 내 소중한 아기를… 대신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준다면 그 사람에게 평생을 빚지고 살 것 같다는… 똑 같은 이유로… 언니 대신 살고 있는 제가 평생 빚지고 사는 사람이 새어머니에요. 그래서 차라리 감정을 드러내고 분노를 쏟아내는 것이 새어머니를 편하게 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조금이라도 속죄를 하지 않을까하는…”

“이제 그만 마음을 강단지게 먹어. 가희도 이젠 새엄마잖아.”

아줌마가 기저귀를 개주면서 말했다. 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새엄마니까… 내 아이에게만은… 미움이라는 단어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만 모든걸 완벽하게 주길 바라는건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있는그대로를 주고서… 극복하는 법을 가르치는것도 좋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제… 욕심은 그만 접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그만 죄책감에서도 벗어나려고 해요. 이제 그만 서주언니에게서도, 새어머니에게서도 벗어나려구요. 소야와… 그 사람을 위해서…”

빨래를 개던 아줌마가 측은한 눈을 들어 가희를 바라보았다. 아기를 내려다보며 눈에 눈물을 글썽이는 가희의 하얀 얼굴이 안쓰러웠지만 강인해보였다. 그것이 새엄마라는 이름인지도…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아직 온 몸이 욱신거려 팔을 들 힘이 없었다. 소야가 배가 고픈지 칭얼대고 있었다.

“미안, 아가야. 잠깐만…”

가희는 몸을 일으키려 애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유현은 출근을 했고 아줌마는 잠깐 슈퍼에 갔다. 집은 그야말로 적막했다. 소야의 칭얼거림이 점점 커졌다. 잔뜩 몸에 힘을 주고 일으키려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잠깐만…”

온 몸에 힘이 풀려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라, 라미 아가씨라도 부를걸 그랬지? 아가야… 잠깐만 기다려… 새엄마도 힘들단다.”

겨우 몸을 일으켜 아기를 안아들려는데 팔에 힘이 없어 그것조차 힘들었다. 괜히 눈물이 고였다.

“이래서… 새엄마가 되는게 힘이 든 거구나.”

가슴이 아파왔다. 눈물이 뚝 떨어지는데 방문이 열렸다.

“아줌마. 아기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던 가희의 눈이 굳었다. 방문 앞에 버티고 선 사람은 아줌마가 아닌 현수였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아기를 안아들었다.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힘이 아기를 지키려는 보호본능으로 강해졌다. 현수의 싸늘한 시선에 놀란 가희가 힘없는 팔로 아기를 꼭 끌어안았다.

“죄, 죄송해요. 배, 배가 고파서 그런가봐요.”

“정말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구나!”

싸늘하고 냉랭한 현수의 말에 가희의 가슴에 또 물이 고인다. 고개를 돌려 아기에게 젖을 물렸지만 소야는 젖을 물지 않고 울어대기만했다.

“배고픈거 아니니? 어디가 아파? 쉬했니?”

기저귀를 만져도 축축하지 않았는데 아기는 계속해서 무엇이 불만인지 울고 있었다.

“울지마. 어디가 불편하니? 울지 말아. 아가야…”

힘없는 팔로 아기를 달래는것도 한계가 있었다. 현수가 신경이 쓰여 머리속이 어지러웠다.

“대체 언제 갈 생각이니!”

“이제… 곧 가려구요. 죄송해요. 그리고… 받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끝까지 나만 냉정한 사람으로 만드는구나. 너란 애가 그렇게 독하다는 걸 누가 또 알겠니!”

현수의 탐탁치 않은 말에 가희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아기는 계속 울고 있었다.

“울지 말아. 아가야. 어디가 아파? 응?”

아기를 안아들어 그 뺨에 얼굴을 대보았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당황하고 있는데 천천히 그림자가 졌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현수가 그녀앞에 다가와 버티고 서 있었다. 가희의 눈이 겁에 질린 채 커졌다.

“어, 새어머니…”

“이리줘봐라.”

그녀가 냉랭하게 소리치며 손을 내밀었다. 가희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으로 본능적으로 아기를 감싸안았다.

“가, 갈게요. 아기… 아파서 그런가봐요. 죄송해요. 새어머니. 그러니…”

“말이 많구나. 얼른 이리 줘라. 빽빽 소리치니 골이 다 아프다!”

“새어머니!”

소리치는 가희에게서 그녀가 아기를 안아들었다. 겁이 덜컥 난 가희가 그녀를 바라보는데… 그녀의 눈이 커졌다. 현수가 아기를 조심스레 안아든 채 천천히 얼르고 있었다. 가희의 머리속이 텅 비었다. 어, 새어머니?

“아직 한참 멀었구나. 왜 우는지도 못 알아차리면서 그것도 에미라고. 쯧.”

현수가 아기를 안아든 채 천천히 방을 오가며 아기를 얼렀다. 가희의 가슴에서 울컥하고 무언가가 올라왔다. 기대한 적 없는… 기대한 적 없지만…

“안아달라고 우는게 아니냐. 요것도 참 영악하구나. 아직 잠만 자도 될 것이 벌써부터 손을 타서 안아달라고 울어대니.”

신기하게도 그녀말대로 아기는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조용해져 있었다. 가희는 그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복잡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희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새어머니… 죄송해요. 고집을 피웠어요. 너무 죄송해서, 용서를 바라게 되었어요. 그렇게 욕심을… 부렸어요.”

가희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이불을 적셨다.

“죽은 듯 지냈어야 했는데… 과분한 사랑을 받는걸로 만족하며… 그렇게 지냈어야 했는데…”

“서주를 낳고도 네 아버지는 나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아니 네 아버지와 나는 처음부터 안 맞는 사람이었다. 그런 네 아버지앞에 네 에미가 나타났다. 나는 그래서 서주마저 미웠다. 네 아버지라는 인간의 피가 흐르는 서주조차 미웠다. 평생을 그렇게 모두를 미워하며 살았다. 그런데 너란 애는 끈질기게도, 도대체 나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는거냐. 왜 너란 애는 자꾸만 내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죽도록 드러내고 있는거냐. 도대체 너와 나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길래 서주를 보내고, 내 남편을 빼앗고 거기다가 나마저도 이렇게 하늘도 못 쳐다볼 정도의 악한 마음을 갖게끔 만드는게냐!”

사람은 그런 것,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자신에게 나쁘게 대하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자신에게 좋게 대해주면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는것이다. 시작부터가 가희와 현수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게 출발했다. 그래서 서로를 미워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릇된 관계를 만든 그녀의 새엄마와 아버지의 업을 가희가 모두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고독속에 있었던 사람은 그녀만이 아니었던 것, 바로 권현수라는 여인도 그 안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니가 원하는 바는 들어줄 수 없다. 나는 네가 밉다. 너무 싫다. 보기만 해도 온 몸의 털이 다 솟는다. 그러니 이 아이도 고울리가 없어.”

“알아요. 용서받기를 원했지만 아니라는 걸 깨닳았어요. 세상에는 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요. 아무리 해도 안된다는 게 있다는것을요.”

가희의 목소리에 눈물이 묻어났다. 칭얼거리던 아기는 어느새 편안하게 잠들어있었다.

“나는 네가 불행해지기를 바란 사람이고 지금도 그렇다. 아무리 네 아버지가 내 남편이라고 해도 나는 너를 절대 자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네.”

“지금껏 너에게 한 행동도 후회하지 않는다.”

“네. 새어머니…”

“너에게 새어머니라는 소리를 들을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네…”

“일주일후에 가겠다고?”

“네.”

“내가 더 이상 해줄 수 없다는걸 깨닳은 것 같으니 내일이라도 가라.”

“새어머니… 그렇지만…”

가희가 고개를 들어 외쳤다.

“그렇지만…”

“첫아이를 낳은 후 하는 몸조리가 여자한테 가장 중요하다. 나중에 그런 원망까지 듣기 싫다. 사부인이 오죽 잘 해 주실까. 그 양반이야 나와 달라 마음 넓기가 바다와 같으니 원망이야 하겠냐만 강실장 쌍심지 켤까봐 오금이 저린다!”

“죄송해요. 새어머니. 유현씨는…”

“두거라. 내가 그런 사과받자고 했니? 강실장한테야 내가 니 친어미도 아니고하니 싫은 감정 다 표현해도 될 사람이겠지. 그렇게나 소중한 너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람이 나이니 말이다.”

가희는 죄스러운 마음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그녀에게 더 이상의 미움은 없었다. 평생을 미움으로 살아온 그녀로서도… 지금 많이 다가서는 것이라고, 그것으로 감사하다고…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을 테다.”

“새어머니…”

“그러나… 백현웅을 사주한 일은… 내안의 추악한 감정이다. 그것만은… 이 아이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할정도로… 그렇게…”

착각일까? 현수의 눈에 눈물이 맺힌 것으로 비춰진 것은…
흔들리는 가희의 눈동자 안으로 그녀가 등을 꼿꼿이 펴는 것이 보여졌다. 그녀가 곧 다시 냉랭한 표정으로 소야를 내밀었다.

“받아라. 아줌마가 곧 올 테니.”

아기를 받아들었다. 쌕쌕 잠이 든 그 얼굴이 편안하다. 그녀의 품으로 옮겨지던 아기가 쉽게 현수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알고보니 아기가 현수의 엄지손가락을 꼭 쥐고 있었다. 현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포동포동한 손가락을 살짝 밀어 자신의 손을 빼냈다. 가희의 품에 아기를 안겨준 현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참 이상하구나. 서주가… 저렇게 내 손가락을 꼭 쥐었었는데…”

가희의 눈이 커졌다.

“아…”

돌아서려던 현수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 애는… 너만큼은 밉지 않구나.”

천천히 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가희의 눈에 퐁퐁 눈물이 세어나왔다.

“고마워. 고마워. 소야야… 사랑스럽게 태어나줘서… 정말 고마워.”

소야를 꼭 안은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문을 닫고 나서던 현수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흠칫 뒤로 몸을 뺐다. 유현이 서 있었다.

“자네… 이제 일도 팽개친건가?”

냉랭한 현수의 말에 유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뭐가? 무엇이!”

“가희는… 충분히 행복할 것입니다. 이제… 짐을 덜 거에요.”

“그 애가 짐을 덜라고 한 말이 아닐세. 들었지 않았는가. 나는 아직도 저애가 싫네. 너무 밉고 화가 나.”

“미워해도 좋습니다. 싫어해도 좋습니다. 지금처럼 그렇게 살아있는 사람취급만 해주시면, 함께 눈을 보며 말씀을 나눠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히 감사합니다.”

“그렇게 독하게 소리치더니 그렇게 저 애가 소중한가!”

“죄송합니다.”

“보기싫네. 당장 회사로 돌아가게.”

현수가 싸늘한 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돌렸다.

“어머님!”

현수가 우뚝 멈춰섰다.

“듣고 싶지 않네. 화해의 말 따위 바라지 말게.”

“괜찮습니다. 다만… 오늘 소야가 외할머니가 되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현수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꼿꼿이 등을 편 채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유현은 급하게 몸을 돌려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그의 눈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가희를 향해 달려가 으스러질 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사랑해. 가희야.”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쉴새없이 세어나왔다. 그 눈물을 입술로 눌러가며 유현이 쉴 새없이 외쳤다.

“사랑해. 사랑해. 가희야.”

베이디 파우더 향이 진동하는 그 방에서 가희 역시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고마워요. 유현씨.”

“사랑해.”








사랑이 사람을 채워줍니다.
믿음이 당신을 내게로 끕니다.
소망이 내몸을 당신께 보냅니다.
절망이 희망의 이름으로 바뀌는 순간순간마다 그대가 베어납니다.

푸릇푸릇 돋아나는 새싹과 함께 그대 사랑 피어나서
아름드리 그늘 드리울때 그대 사랑 커집니다.
탐스러운 열매 맺힐때 그대 사랑 완성되고
흰눈이 온 세상 덮을때 그대 사랑 나를 덮습니다.

내 앞에 누은 아기의 땀에 젖은 뒷머리를 식혀주며 쓸어줄때
내 뒤에 누은 그대가 포근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쓸어줍니다.
내 품에 안긴 아기의 토실토실한 뺨을 감싸며 입맞춤할때
그대 나를 품에 안아 내 입술에 입맞추어 줍니다.
아기의 느닷없는 경기로 까만 밤이 하얗게 타들어갈때
벼랑에서 떨어질 것 같은 내 몸 그대가 감싸줍니다.

고비 고비가 삶을 더욱 단단하게 해주고
하루 하루 지날때마다 그대와 나, 삶의 연결고리가 하나씩 늘어갑니다.
이음새마다 연결된 고리가 때로는 쇳소리를 내더라도
곧 다시 들려오는 맑은 웃음소리가 우리를 덮어주리라는 것을...

그대와 나, 우리가 세상에서 바라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아가야....
넓은 팔을 벌려 하늘을 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국땅에서도 멋지게 피어 마지막까지 당당한 저 식물처럼, 서로 다른 환경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이라도 자꾸만 뿌리를 내리고 적응해간다면 그것이 바로 제 나라고 제 집이란다. 그러니 한 번 내 정원에 뿌리를 내렸으면 그 정원을 밝게 비춰주든 아니든 그 자리가 영원한 자리가 되는 것이란다.
열대지방인 제 나라를 떠나 날씨도 맞지 않는 이국땅에서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말라죽더라도 꽃을 피우는 그 거대한 기다림을 보는 사람들마다 느끼기를.]

가끔씩 정원을 내려다보면 아버님이 해주신 말씀이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여전히 그 곳을 지키고 있는 위엄있는 파초, 가슴은 젖되 옷은 젖지 않는 그 기운을... 그 거대한 기다림을 오늘도 가슴에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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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나마 완결이 났습니다. 제 방식으로 쓴 글입니다. 그러나 릴케의 향기라고 칭해주신(쑥스럽사옵니다) 시아님, 그리고 파초가 있기까지 마음의 기둥이 되어주신 레이나 언니(사랑해요) 감사드립니다. 물론... 많이 격려해주시고 힘을 주신 모든 분들, 가슴속에 하나하나 기억하고 살겠습니다.

파초... 그 아름다운 식물을 여러분들께 그리고 저 자신에게 소개시켜 줄 기회가 되어서 기쁘구요, 어느날, 가족들간의 사랑이 감사한 날 그냥 제 글을 스쳐지나가듯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 시원서섭하군요. 이제 여기에서 부족하나마 파초를 접겠습니다. 그동안의 시간... 정말 소중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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