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이트는 비공개 처리되었습니다.

비매너, 파렴치 행위 없는 조용한 성향카페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수 있습니다.

새 사이트 바로가기




Smiley

새 사이트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수 있습니다.

SM 성향테스트 | Contact

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미수]뚱띵이의사랑.txt

#아래 소설은 일반인이 거북해 할수 내용이 담겨 있을수 있습니다. BDSM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되돌아가기를 누르기를 바랍니다.


뚱띵이의 사랑...[미수님 作]

우리 학교에는 갓 대학을 졸업하고 오신 젊은 선생님이 한분 계셨다. 대학교에 갓 들어온 새내기인 우리들처럼 그 선생님의 첫
발령지는 여자 대학교 였다. 불행중 다행으로 그 젊은 총각 선생님은 우리 1학년의 담임을 맡게 되었고 자연적으로 시간이
지날 수록 그 선생님을 남몰래 동경하고 짝사랑하는 여학생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 김초희도 숨어서 짝사랑을 하는
순진한 학생중 한명이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보내는 동안 학생들은 부지런히 교무실에 들락거리면서 그 선생님과 눈이
라도 마주치길 바랬다. 초희역시 그 친구들처럼 교무실을 내 집 드나들듯이 들락거렸지만
그 친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 많은 여학생을 그 선생님이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싶은 생
각이 퍼뜩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부터.. 그녀는 귀여운 말썽꾼이 되어버린 것이다.

수업시간 내내 어떻게서든 그 선생님에게 주목을 받아야 했고, 그 곁을 지나치더라도 은근
한 유혹을 던졌던 순진한 학생.. 그게 바로 나였다.. 하지만.. 이별의 아픔이 너무 쉽게 그리
고 너무 빨리 다가왔다. 가슴에 처음으로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꽃을 피우기도 전에 그 젊
디 젊은 대한의 남자인 그 선생님께서.. 국방의 의무로 잠깐 동안 우리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말이 잠깐이지 그 선생님이 다시 이곳에 왔을 때에는 난 이미 그 학교를 떠나곤 난후
가 되겠지?
그 가슴 아픈 이별에 말 한마디 건네보지도 못한 체 난 그렇게 선생님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세월이 그 선생님에 대한 풋풋한 감정까지 가져가 버린...지금. 열네살의 옛된 대학
생 대신.. 나이 살이라 우기는 두툼한 뱃살이 붙어버린... 스물 다섯이 되어버린 지금...난 아
주 가끔씩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선생님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 당시 나와는 열살정
도의 나이 차이가 있던걸로 기억하니까.. 지금은 아마도 서른 다섯살의 중년 아저씨가 되어
있겠지?
하지만.. 한번만 볼 수 있다면.. 그 시절 그때로 돌아가 그 선생님 앞에서 얼굴을 붉힐 수 있
는 그 나이가 되돌아 온다면.. 그 말을 하고 싶다.

선생님, 절 기다려 주시면 안돼요? 선생님의 신부가 되고 싶어요...

"야!! 그만 자고 일어나. 너에겐 그 달콤한 잠마저도 살이 된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냐?"
잔인한 말로 깊은 잠에서 일어나게 하는 집안은 아마 우리 집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
쩌겠는가.
시집가기 전까지 마음 붙이고 살아가려면 그 정도 말쯤이야 한귀로 듣고 세개의 귀로 흘려
보내야 하는걸. 난 새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되기도 전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뛰어들
어갔다.
칫솔에 치약을 묻히고 입안에 집어넣는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새엄마가 들어섰다.
"어라.. 일어났네."
"그랴. 그러니까.. 아침부터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마. 동네 창피하게 그게 뭐야. 아예 광고를
하지 그래. 우리 집 딸내미는 뚱띵이라고."
난 또 다시 그렇게 새엄마에게 대들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새엄마
는 툭하고 말 한마디 내뱉고 방을 나가셨다.
"그러니까.. 살 빼라구.. 새엄마도 이 소리는 정말 하기 지겨워 졌으니까."
치이... 그렇게 지겨우면서 하루도 안빠지고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뭐야.. 스트레스만 쌓이
게..
하긴 이제와 말하지만 내 살은 아마도 스트레스성 살인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이 (고상한
취미를 가진 분들...) 스트레스가 쌓이면 음악을 듣는다던가 아님 빨래, 집안 청소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난... 밥통을 내 품에 고이 품고 밥숟가락의 속도로 스트래스를 푼다. 물론 엄지와 집
게 손가락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 새엄마는 그럼 집안 청소나
하면서 스트래스를 풀라고 하지만.. 그건 내 생각과 맞지 않는다.
내 나이 스물 다섯. 좋은 혼처가 들어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집갈 나이. 그런 내가 뼈빠
지게 집안 청소를 한다면.. 남의 집에 파출부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 난 지금 아주
잠깐동안 이 친정이라는 곳에 얹혀 살고 있는 처지니까. 회사에서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일하고 난 후 월급 봉투는 고스란히 새엄마의 주머니로 들어가 버리니까... 그런 생각을 안
할래야 안할수가 없다.
내 돈을 돌리도!! 내 청춘을 돌리도!!

"야. 밥을 또 먹냐?"
밥 그릇을 들고 밥통 앞까지 온 난 식탁에 둘러 앉아 있는 식구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곤
오늘도 어김없이 물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난 후에 출근을 해야 했다.
"이씨.. 이게 뭐야. 이러다간 다이어트는 커녕 요요 현상으로 전보다 10킬로그램은 더 찌겠
다."
"뭐라구?"
새엄마의 앙칼진 목소리가 나의 투덜거림을 잠재운다. 안타까운 시선이 군침도는 반찬위로 떨
어졌지만 난 두 주먹 불끈 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야 했다.. 그랴.. 쫌만 참자.. 이
번 주 토요일날 숙영이를 만나면.. 그때가서.. 왕창....쩌~~업!!!!!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인가!! 글쎄 믿었던 친구 녀석마저 새엄마의 손아귀에 포옥 싸여 있는게
아닌가!!
이럴수가... 드디어 기다리던 토요일이 왔을 때 난 아주 기쁜 마음으로 친구를 마중하기 위
해 터미널에 도착했다. 친구가 오기를 기다리며 터미널 안에 널려 있는 음식점들을 훓어보
며 친구와 같이 먹을 메뉴를 손수 정하기까지 하는 그런 정성을 들였는데.. 차에서 내린 친
구가 하는말.
"너의 새엄마가 전화왔더라. 네 다이어트에 동참하면... 중신을 해 주겠대."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아니.. 파란 하늘에 잔뜩 먹구름이 몰려왔다. 그럼 난? 하고 반문했지
만 친구의 말에 또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널 믿고 결혼을 안한다는 건 내가 너무 손해인거 같아. 아직 금값인
때에 결혼을 하던 연애를 해야 좋다는 옛 어르신 말씀을 따르기로 했어. 아마도 넌 지금
당장 남자가 생긴다면.. 내 생각 조금도 하지 않을거 아냐."
아 ~~!! 어쩜 친구라는 녀석이 저리도 옳은 말만 하다니... 난.. 그날부터 내 다이어트 작전에
수긍하기로 했다. 백기를 든 셈이지....쩌~업!! 친구와 같이 먹을 거라 기대했던 통닭 한마리
가 날라가는 군.

쿵쾅!! 우당탕탕!!
"악!!"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난 황급히 고개를 돌려 방문쪽을 바라보았다. 방문은
이상없다.
"이런, 놀랬잖아."
새엄마의 기습이 시작된 줄 알았다. 모처럼 맞는 휴일. 요즘 난 그 휴일이 지옥되어버렸다.
낮잠을 반환했기 때문이다. 두둑하진 않지만 뱃속의 허기는 떼운 후에 자는 낮잠.. 그 잠을
새엄마가 빼앗은 것이다. 세상에... 이런 독재가 어딨어. 이건 완전히 내 맘대로 할 수가 없잖
아.. 라고 몇번이나 투덜댔지만 소용없었다. 사오정이라도 되신 걸까? 왜 딸내미의 말에 귀
를 기울이지 않는거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 우렁찬 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다.
"에잇!! 정말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방문을 벌컥 열고 거실로 나온 난 텅빈 거실을 보고는 황당했다. 아무도 없었다. 아, 참!!
모두 교회에 갔구나...쩌업.
"이게 뭐야. 잠이나 더 잘걸."
하지만 그 시끄러운 소리가 나의 잠을 뺏고 있었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 소란스러운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알아봐야 했다.

"아저씨. 누가 이사오나요?"
난 체육복만 걸친 체 대문을 나섰다. 대문 앞에 길게 늘어선 이삿짐들이 보였다. 아하, 이
게 내 잠을 빼앗은 범인이구나.. 난 어슬렁거리며 이웃집으로 들어섰다. 지난 2년 동안 텅비
어 있던 집이다.
아무도 살지 않던 이 곳에 사람이 살게 되다니..우선 반가운 생각에 난 주인을 찾아 집에 들
어섰다.
물론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서 이웃을 외면한다
는건.. 솔직히 너무 냉정한 거 아니겠는가.?!
"이봐요."
난 바삐 움직이는 사람을 붙잡고 누가 주인인지 물어볼 사이도 없이 커다란 이삿짐에 밀려
방안까지 들어선 후였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어떤 남자가 오더니 내 손에 큰 보따리를
하나 쥐어주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보따리를 나르는 난 그후 한 시간동안은 완전히 심부름
꾼이 되어야 했다.
더러운 바닥을 닦기 위해 걸레도 빨아야 했고 흙발로 얼룩진 방에 먼지를 쓸어내야 했다.
그리고 점심 시간이 되자 이젠 내 존재가 필요없어지게 된 것이다.
"이봐. 점심에는 짜장면을 먹지? 모두 몇 그릇 시켜야 돼나 인원 파악 좀 하자."
그 짜장면만 아니었다면 난 얼른 이 어수선한 집에서 벗어났으리라. 하지만.. 그 짜장면이
내 귀를 잡고 놔주질 않는게 아닌가.. 이런.. 입안에 벌써 부터 침이 고이는 군.

"어라, 아줌마도 우리 직원이예요?"
아. 줌. 마 ~~!? 눈 앞에서 짜장면이 폭삭 엎어지는 소리였다. 아니 아침에 먹은 밥알이 곤
두서려 했다. 난 나에게 치명적인 실수를 한 남자를 올려다 봤다. 그리곤.. 그대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아~~. 선생님. 대학교 졸업한 후에도 잊혀지지 않던.. 그 그리운 얼굴이 바로 내 앞에 있는게
아닌가.
"예? 네.."
엽기적인 대답이 나에게 흘러나왔다. 난 이삿짐 일꾼이 모여 앉아 있는 자리로 내 몫으로
나온 짜장면을 들고 가 앉았다. 그리곤 되도록이면 선생님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체 서둘러 먹기 시작했다.
"하하.. 그래도 오늘은 아줌마가 계셔서 집안이 깔끔하네요. 고마워요."
선생님의 말에 난 입에 짜장면 면발을 문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난 지금 남자들의 천
국에 갇혀버린 것이다. 오직 여자라곤 나 혼자였다. 아.. 난 두눈을 질끈 감고 늘 해오던 거.
짓. 말을 내뱉었다.
"그래요.. 여자 손길이 닿아야죠.."
허억!! 내가 와 이러노.. 내가 와 이러노... 미쳤지.. 내가 미쳤지.. 짜장면에 내.. 인격을 날려
버리다니.
아줌마가 뭐여.. 아줌마가... 기가 막힌 노릇이지만 난 꾹 참고 마지막 양념장까지 모두 먹었
다.

우씨..이게 아닌데..
난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서 생각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
는 나 자신에게 화를 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무거운 짐을 옮기면서 투덜대기는 커녕 자신
을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상상을 하면서 부지런히 이삿짐을 옮기려는 데 그 선생님
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제기랄!! 이럴순 없다구. 왜 하필 내 곁으로 오는거야!!
"저어.. 아줌마 한가지 부탁을 드려야 겠는데.."
"부..부탁요?"
"네. 제 방 가구 배치좀 해 주시겠어요? 혼자 살다보니... 너무 삭막해질것 같아서요."
뒷 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부탁을 하는 선생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체 난 고개
만 끄덕였다. 그리곤 서둘러 그 곁을 떠났다. 에잇, 쪽 팔리게 이게 뭐야... 나중에..내가 아줌
마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면?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꾸욱 참고 선생님을 따
라 방으로 들어섰다.

"정말 혼자 살아요?"
난 깔끔한 가구와 잘 정돈이 된 책들을 보며 물었다. 소녀적에 보았던 그 미소...아..난 탄성
을 삼키며 선생님의 근사한 미소에 넋이 나가고 말았다. 완전히..
"아줌마. 제 얘기 듣고 있어요?"
이게 무슨 쪽팔림..?! 난 아예 침을 흘리며 그 선생님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화끈 거리고 딴청을 부리며 시선을 돌렸지만 날 보고 웃는 선생님의 그 표정 그리고
목소리.
"아..네."
선생님과 단둘이 방 정리를 한고 있다는 게 정말 꿈만 같았다. 몇년을 같이 살아온 부부 마
냥 서로의 의견을 물으며 가구 배치며 벽지 색깔에 대해 나누는 대화만으로도 난 충분히 엉
뚱한 상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어머, 자기야.. 그곳에 침대를 두면 어떨까? 아침 햇살을 맞으며 눈을 뜬다면.. 좋겠어. 자기
는 어때?"
"그래? 나야 뭐. 자기가 좋다면.. 나도 좋아. 자기야 이 컴퓨터 여기에 둘까? 그러면 자기랑
같이 오락을 해도 자리가 넉넉하잖아. 하하.."
후~~우!! 몸서리 쳐지게 행복한 상상이다..나의 자기라.. 나의 자기!!
"아줌마는 늘 그렇게 웃으시나봐요."
곁눈질로 선생님의 얼굴을 본 난 또 다시 얼굴을 붉혀야 했다. 그게 좋은말로 해서 늘 웃는
거지, 그 표정은 다른 말을 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아줌마, 이 근처에 정신병원이 있나봐요..
라고 묻는 듯한 얼굴.
"아..전 그게.. 어휴, 짐이 참 많네요.. 총각."
마지막 말은 정말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실실 웃기만 하는 선생님을
보며 난 고개를 푹 숙인체 짐 정리에만 정신을 쏟았다.

만화 책이나 로맨스 책에서 보면 첫 사랑과는 멋진 모습으로 재회를 하는 걸로 아는데. 뚱
뚱했던 여주가 날씬한 모습으로 남주 앞에 나타나거나, 아님 가난했던 남주가 어마어마한
부자가 된 후에 재회하던지. 나 처럼 펑퍼짐하게 퍼진 모습으로 첫 사랑을 만나는 대목은
정말 없었던 걸로 안다.
내가 잘못 본걸까? 아님.. 나에게 지금 운명의 신이 장난을 치고 있는건가.
먼지를 뒤집어 쓰고 무거운 이삿짐을 끙끙거리며 나르고 있는 내 모습을 아직 선생님이 알
아보지는 못했지만.. 날 알아보는 건 시간 문제일 것 같았다. 대학교 때.. 허구헌날 교무실에
서 벌을 받았던 날 기억못한다는 건... 코앞에 있는 고추장을 못알아보는거랑 같으니까. 내
비유가 맞나?
하여튼 난 복도 지지리도 없는가 보다. 체질적으로 배터지게 먹어도 살이 안찌는 울 언니처
럼 나도 밥알이 곤두설 정도로 밥을 먹어도 살이 안찔거라 자신 했는데.. 대학학교 졸업하고
보니... 이처럼 돼지의 모습을 갖출줄은 정말 몰랐다. 그리고... 옷 가게에 들어가서 몸에 대
어보면 약간 넉넉할 거라 생각해서 한치수 작은 걸로 옷을 사오면.. 그 옷은..즉시 언니의 옷
장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 정말 사는 재미라고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 내 인생아....

한숨을 푹푹 내쉬며 짐 정리를 마친 내가 막 허리를 펼 때 침대에 앉아 있는 선생님의 모습
이 눈에 띄었다. 낡은 앨범을 무릎에 올려 놓은 체 사진을 들여다보며 웃음 짓는 그 모습..
지금까지도 눈에 선한 그 낯익은 모습에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음을 알아차린 난 긴 호흡을
내쉬었다.
의자에 앉아 교과서를 무릎위에 올려놓고 책을 읽고 계셨던 내 사랑..난 물끄러미 서서 그
동안 잊고지냈던 선생님의 그 모습을 바라보기로 했다.
"난.. 아직도 모든 걸 기억해요. 너무나도 생생하죠."
갑자기 선생님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나와 반대로 점점 입가의 미소가 번
져가고 있는 선생님. 순간 심장이 멈추었다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김 초 희. 설마 내가 널 못 알아봤을 까봐?"
이런 제기랄!! 오, 하나님!!

이게 뭐야!! 이게 뭐냐구!! 정말 나에겐 이런 운도 없단 말인가.... ㅠㅠ
하늘이 무너져 내려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는데.... 이건 아니었다.
하지만 절망적인 내 기분은 관심없고 이 남자...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늙은 총각은... 반가움
에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난 눈물만 펑펑 쏟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절 알아봐요?"
"그럼.. 자식이 말이야. 네가 언제쯤 날 알아볼까 싶어 기다렸는데.. 이것이 그냥 도망갈 방
법만 찾고 있는것 같아서..하하.."
아.. 선생님. 정말 변하지 않으셨군요... 난 시원스럽게 웃는 선생님의 모습만 바라보는 것만
으로 이렇게 가슴이 뛸줄은 미처 몰랐다. 그 예기치 못한 나의 반응 탓일까? 난 그만 말 실
수를 하고 만것이다.
"나 많이 변했는데도 날 알아봤단 말이예요?"
이런..젠장!! 아예 살찐 나좀 보소.. 하는 것 같잖아. 난 선생님의 살피는 듯한 시선앞에서
몸둘바를 모르고 서 있는데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야,야. 여자는 말이야. 결혼하고 얘 하나둘 나으면 모두 아줌마로 변하는게 우리 나라의 현
실인데.. 넌 우리 나라 여자 아니야.. 그래, 얘는 몇이 뒀니?"
으악!!! 으악!!
난 말도 못한 체 완전히 넋 나간 표정으로 선생님을 뚫어지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슨 말
을 한단 말인가.. 우리 나라의 남자들은 뚱뚱한 여자는 모두 아줌마로 치부하는 현실앞에서..
내가 두손 두발 다 드는 수밖에... 으~~!! 괴롭다 괴로워... 이 살들아.. 잠깐이라도 외출좀 하
지 그랬니...

"저..."
"벌써 10년 쯤 지났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내 모습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선생님 혼자서 먼 과거로 여행
을 떠나가고 있었다.
"그래.. 아마 그쯤 됐을 거야.. 내 나이 스물 다섯에 그 학교에 갔었으니까... 흐음.. 하하.. 정
말 믿기지 않아. 네가 이 동네에 살다니.. 벌써 결혼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
"저..그게.."
"그래.. 이게 바로 너와 나 끈질긴 인연이지 뭐냐.. 아니, 어쩜 네가 나에게 퍼붓은 저주탓인
지도 몰라. 하하...맹랄한것 같으니라구.."
회상에 젖어 있는 선생님의 눈동자에 촉촉히 물기가 서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 자신도 선생님 처럼 과거속에 묻혀가고 있는 듯했다.
"저주요?"
"그래. 네가 그랬잖아. 나 군대 갈때던가? 교무실로 찾아와 던진 말 있잖아. 생각안나?"
왜.. 생각이 안나겠어요.. 단지 외면할 뿐이지.. 쪽팔리니까.. 난 아예 침대에 앉아 과거속을
헤메이고 있는 선생님을 보며 체육복으로 감춰진 나의 살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선생님과 함께 그 때 그시절의 철없던 10대 초반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한학기도 체 끝나기도 전에 선생님은 입영열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그 엄청난 슬픔 때문에
우리 학교는 한바탕 뒤집어지고 있었다. 3학년 선배 언니들까지 꽃다발에 선물 꾸러미에...
정말 엄청난 양의 사탕이 선생님 책상도 모자라 교무실 바닥에 까지 깔리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작은 선물을 준비는 했지. 하지만.. 그 작은 선물이 제대로 보이기나 할까 싶어 난 수
업도 빼먹은 체 교무실 앞을 서성였다.
수업으로 인해 교무실이 텅 비기만을 기다렸다고 보면 될 것이다.
반쯤 열려진 문틈으로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몇분의 선생님도 계셨지만 모두 멀리 떨어
져 있기에 선생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저어.."
"어, 초희야. 수업시간에 왠일이니? 출석부 찾으러 왔어?"
오늘도 어김없이 반갑게 맞아주는 내 사랑.. 난 두눈을 크게 뜨고 선생님의 얼굴을 가슴깊이
새겨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 했다. 코를 훌쩍이면서 건넨.. 이별의 손수
건.
"어라. 이런것까지 준비했어? 고맙다. 초희야.. 다음에 휴가 나오면.."
"선생님.. 우리 언젠가 꼭 만날거예요. 제 기도가 담긴 선물이예요.. 우린 꼭 만나야 해요..
아셨죠?
다시 만날때까지 선생님.. 결혼하면 안돼요.. 꼭 그렇게 되길 기도할거예요."
그땐 정말.. 순진했지.. 그 기도가 꼭 나에게 선생님을 보내줄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이
런식으로는 아니었다.

"야. 네 기도가 담겼다는 그 손수건 때문에 어쩌면 내가 아직도 총각신세지 몰라.. 하여튼
이렇게 우연이 만나게 될줄은 정말 몰랐다."
이제야 겨우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총각이라니?! 그럼.. 설마?
"정말 총각 맞아요?"
대뜸 나온 나의 질문에 선생님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거.. 쑥쓰럽구만.. 이젠 아줌마 앞에서 얼굴이나 붉혀야 되다니.. 그래. 맞다. 난 정말 오
리지날 총각 맞아!!"
나 아줌마 아니예요!! 열번도 넘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난 찍 소리도 못하고
그 집을 나섰다... 선생님의 엽기적인 말을 뒤로 한체..
"초희야. 언제 네 아기들 좀 보자. 너처럼 귀엽게 생겼겠지?"

"초희야, 밥 먹자!!"
밥? 지금 이 상황에서 밥이 넘어갈까? 내가 그렇게나 보고싶어하던 선생님을 봤는데... 각
본대로라면.. 지금쯤 난 그 선생님과 우아한 장소에서 향 좋은 커피를 홀짝이며 지나온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한참을 얘기중일텐데... 하지만 현실은? 뭐? 나중에 우리 얘 좀 봤으면
좋겠다구?
이게 뭐야!! 동화같은 스토리를 꿈꾸긴 했지만 이 정도로 내가 비참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다.
그런 내 맘도 알지 못하는 엄만 지금 밥을 먹으라구 소리나 지르구 있구.. 아~~ 세상 살 맛
않난다..
"야!! 몇 번이나 불러. 밥 먹어. 네가 기다리던 시간이 왔잖아."
은근히 놀리는 언니의 말투도 싫었다. 여느 때 같으면 기분좋은 넉살로 넘길 말일텐데도 기
분이 확 잡치는 걸로 보아서.. 난 지금 정상이 아니다.
"됐어!! 내가 무슨 식충이냐!! 밥에 환장하게?"
이불을 머리까리 뒤집어 쓰고 악을 썼지만.. 도통 우리집에선 진지함이라곤 없다. 나의 이런
악바리도 먹히지 않는 걸로 보아서..
"지랄.. 니가 언제부터 밥을 굶었다구.. 이따가 배고파서 밤 늦게 먹지 말구 떳떳하게 차려준
밥상에서먹어라.."
아.. 하나밖에 없는 언니인데... 너무 하는군.. 하지만 도저히 정말 죽어도.. 입맛이 댕기지 않
았다.
한끼만 굶어도 세상이 뒤집히는 줄 알고 있는 나에게.. 굶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안 먹어.. 언니나.. 많이 먹고.. 살이 쪄!!"
그렇지. 고운 말이 나올리가 없지.. 아예 두눈을 질끈 감고 선생님과의 만남을 되새김 해보
았지만...
한숨만 나왔다. 이런 비참한 기분 정말.. 옷 가게에서 겪고 처음 있는 일이다.

"야. 그만 자고 일어나. "
밤에 잘때 문을 잠고 잤는데 열쇠로 열고 들어와 곤히 자는 딸내미를 깨우는 걸로 보아 급
한 일인가 싶어 마지못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으그.. 내 정말 너 때문에 못살아. 이 시간에 자고 있는 사람은 너 밖에 없을거다. 제발 취
직도 하고 하다못해 친구들이나 만나. "
아침 부터 새엄마의 그칠줄 모르는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백수 생활 3 개월이 지났으면 지칠
대도 됐는데.. 이상하네..
"알았어.. 그 동안 재 충전을 해야지. 금방 취직하면.. 재미 없어. 질리도록 놀고서 심심하면
취직할테니까 기다려. 엄만. 나 아님 우리 식구가 굶어죽기라도 하는 것 처럼 말해.."
투덜대며 옷을 입는데 새엄마가 옷 장에서 체육복 말고 다른 평상복을 꺼내 침대에 던지셨다.
"그 지긋지긋한 체육복이나 벗어. 너 때문에 창피해서 동네 슈퍼도 못가. 아줌마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 너 시집가서 애 낳고 해산간 하러 온 줄 알고 있더라. 으그~~!! 이제 겨우 스
물 다섯 먹은 처녀가 그런 말이나 듣고.."
휴... 깊은 한숨이 나왔다. 아니.. 눈물이 고였다.. 새엄마는 속상해서 나에게 퍼 붓는 그 말이
내 가슴에 얼마나 큰 비수가 되어 꽂히는 지 알고 계신걸까? 오늘도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새엄마가 시키는 집안일을 마칠 뿐이었다.

"초희야, 요 앞 슈퍼 좀 갔다와. 김치 담글려구 하는데 미원하고.. 설탕이 떨어졌어."
걸레를 빨아 물기가 있는 손을 대충 옷에 문지르며 집을 나서는 데 옆 집 대문도 동시에 열
렸다.
그리곤 선생님의 모습이 나타났다. 빌어먹을.. 아직 충격이 체 가시지도 않았는데..
"어라-. 초희야. "
나보다 더 반갑게 날 맞는 우리 눈치없는 총각 선생님.. 예전엔 안그런 것 같은데..
친구들의 표정 하나만으로도 그 친구의 생각까지 맞추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 기억이 잘
못 됐나?
"아, 선생님..."
"어디 가니?"
"네.. 슈퍼에..김치 담그려구.우리...."
"김치? 우와~~!! 잘 됐다. 김치 담그면 선생님도 조금만 줄래? 혼자 살다보니까.. 김치가 제
일 아쉬운거 있지."
"하지만.."
난 차마 새엄마가 김치를 담그려고 하신다는 말은 꺼내지 못한 체 슈퍼까지 선생님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변함없는 선생님의 재치있는 말투로 인해 그 먼 거리가 지루하지 않아 좋았
지만 우릴 힐끗힐끗 쳐다보는 동네 분들의 시선이 자꾸만 내 뒷목을 잡아당기는 것만 빼고
는 즐거웠다.
"남편은 뭐해?"
"예?"
하마터면 쌕쌕이가 목에 걸릴 뻔 했다. 간신히 목안으로 음료수를 안전하게 넘긴 난 선생
님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 남편은 뭐하내구 물어본 것 뿐인데.."
"저..."
"말하기 곤란하니? "
"아, 아뇨.. 그게...저..남편 없는데요?"
선생님의 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그러더니 정말 놀랐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순간 난
그 얼굴을 비웃고만 싶었다. 하지만 이내 선생님의 얼굴이 어둡게 그늘졌다.
"그래.. 미안하다..난 그런 줄도 모르고... 고생이 많겠구나.."
아니 이게 무슨 소리여? 고생이라니? 내가? 무엇을 고생한단 말인가? 설마.. 이 선생님 혼
자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건 아닐지..

"저어 그게 아니고.."
"그래. 그저 네 삶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미안하다. 선생님이 눈치도 없이.."
내가 무슨 말도 꺼내기도 전에 선생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
다.
황당해 하는 날 두고 선생님은 혼자 생각만으로 나의 상황을 짐작한 체 말이다. 이런 젠
장!!
"우씨.. 우씨.."
사가지고 온 설탕과 미원을 싱크대에 던지며 부엌을 나서는 데 새엄마와 정면으로 부딪히고
말았다.
"아얏!! 아프잖아."
"난 안 아픈줄 알아? 그 엄청난 살과 부딪힌 새엄마도 아파."
"으씨... 또 듣기 싫어하는 말 했어!!"
"넌 자극 좀 받아야 살 좀 빼지."
더 이상 어떤 자극이 필요한 걸까? 난 그동안 수없이 많은 다이어트를 했다. 밥도 굶어 봤
고 헬쓰에 에어로빅에.. 정말 이 지긋지긋한 살을 빼기 위해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했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동안은 정말 놀랄 정도로 살이 빠졌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도로 원
래 상태로 돌아왔다.
얼마전에 봤던 개그 우먼 이 누구도 무려 30 킬로그램 가까이 살을 뺐다고 들었다. 정말 독
한 여인이다. 세상의 모든 남아들이여... 여자의 넉넉함도 감당하라... 여자는 남자의 단순함
을 감당하니까.

발길이 끊긴 골목길에 서 있는 내 손에는 작은 통 하나가 들려있었다. 아까 낮에 들었던 선
생님 말이 생각나서 고민고민 하다가 뒤뜰에 둔 김치 항아리에서 새엄마 몰래 퍼 담은 김치가
들어 있다.
하지만 선생님 댁 앞에서 서서 서성이고 있었다. 차마 초인종을 누를 용기가 나지 않아서
불켜진 거실만을 바라보며 애태우는 내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그냥 상투적인 말뿐이었는데 그 김치를 가지고 늦은 밤에 찾아온 생각까지 하다니.. 쩝!~~
근데 어쩌랴.. 지난 번에는 너무 당황해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 참에.. 선생님 얼굴
한번 더보는건데..

"초희야!! 이 밤중에 뭐하니?"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뒤에서 나타날줄은 생각도 하지 않았던 난 하마터면 너무 놀라 선생
님 앞에서 김치를 쏟을 뻔했다.
등골이 오싹하면서 본능적으로 김치통을 움켜잡은 난 얼굴이 달아올르지 않았기를 바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저.. 그게.."
"어? 그거 혹시 김치 아냐?"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가면서 김치통이 무겁게 느껴졌다.
"눈치챘어요? 놀래켜 드리고 싶었는데.."
"그랬어? 우~~!! 미안해 지는데.. 그럼 조금만 더 일찍 갖다주지."
그 말에 난 시선을 선생님 손에 들린 검정 봉투에 던졌다.
그 봉투를 높이 치켜들며 머리를 긁적이는 선생님의 모습에 난 얼른 고개를 숙였다.
"김치.. 필요없난요?"
이런 젠장!! 할말이 그렇게 없었다니..
창피하고 손에들린 김치통이 부끄러워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선생님이 김치통을 빼앗아 가는 게 아닌가.
"도로 가져갈라구? 실은 지금 슈퍼에서 김치를 사가지고 오거든.."
"김치를 사요?"
갑자기 금전적인 문제가 내 머릿속을 스쳤다. 이래봐도.. 회계과 출신이 아닌가...
"응.. 내일 아침에 당장 먹을 게 없어서.. "
궁색한 변명을 하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난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선생님에게.. 작은 도움
을을 줄 수 있다는 게 ..마냥 행복했다. 물론 내 애정을 듬뿍 담은 김치지만..

"초희야!1"
집으로 들어가려는 데 선생님이 불렀다.
"왜..왜요?"
"남편은 아직 안들어왔니?"
"아.. 그게.. 저기..."
말을 못하는 내 처지를 눈치를 못챘는지 선생님이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아직.. 안들어 왔어요."
"그래?"
"네.."
설마 이 늦은 시간에 날 안으로 초대하는 건 아니겠지?
"남자는 기다리는 게 아니야.. 걱정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
무엇을 기대했던고.. 이 못난 아줌마처럼 생긴 얘가 무슨 매력이 있다구.. 나오는 한숨을 팍
팍 내쉬고 있는 데 동생이 오는 게 보였다.

"일찍 오네?"
"응"
대학생인 막내 녀석을 바라보는 내 시선엔 부러움이 실려 있었다. 나보다 키도 훨씬 컸고
무엇보다도 늘씬했다. 그래서 늘 새엄마의 한탄 어린 소리를 듣지만 .
"너와 네 옆집누나하고 바꿔 태어났어야 해. 남자인 네가 옆집누나처럼 퉁퉁해야 했는데.."
난 안으로 들어서는 남동생을 따라 들어가려는 데 선생님의 목소리가 담 너머로 들려왔다.
"우~~ 초희신랑 잘 생겼네."
뭐시라? 신랑? 아니, 이 선생님이 지금 무쓴 소리를 하고 계신거야?!!

어둠속에서도 엽기적인 내 동생의 표정만큼은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기가막혀 웃어야 하
는데 졸지에 옆집누나의 남편까지 되어버린 상황인지라 동생도 표정관리가 힘든 듯 했다.
하지만 나보다 더 하랴.. 난 완전히 기절직전내지 아님 당장이라도 동생의 입을 막을 만반의
준비를 취해야 했으니까.
"저..."
난 입을 열려던 동생의 입술에 손바닥을 갖다댔다. 눈으로 힘껏 동생을 째려보며 간사스런
목소리로.
"자기야.. 힘들었지? 하하...얼마나 기다렸다구.."
이웃집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문이 닫히는 소리뿐이었다. 그때서야 비로서 동생이 사태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옆집누나의 손을 뿌리치면서 큰 키로 아래에 있
는 옆집누나의 눈을 노려보고 있는게 아닌가.. 입술을 뒤틀면서 간신히 웃음 참고 있는게 보였
다.
"옆집누나.. 무슨 일이야? "
"뭐..뭐가? 야. 어서 안으로 들어가."
"어허.. 어딜 그렇게 도망치시려구? 설마 날 속이는 게 아니지?"
"무쓴 소리..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니까."
"근데 왜 이렇게 불안해 보여? 내가 알면 안되는 비밀이라도 있는것 같아.. 옆집누나가 자꾸 그
러니까."
난 곁눈질로 선생님의 집을 바라보다가 동생을 한대 쥐어박았다. 짜식이 이젠 다 컸다구 누
나에게 대들기나 하고 말이야... 하면서.
"으씨.. 폭력은 인격 모독죄에 속해!!"
"그래. 너 잘났다. "
대학에서 법률 무슨과인지 뭔진 하는 걸 배우는 동생의 입에서 긴 연설이 나오기 전에 난
서둘러 동생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야,너 나 좀 잠깐 보자. 부엌으로 와."
방으로 들어가는 동생을 부른 난 서둘러 부엌 문을 닫았다.

"왜 그래, 옆집누나? 설마 라면이라도 끓여주려구?"
"입 다물어. "
"그럼 뭐야..그럼 나에게 아까 그 남자의 비밀에 대해서.."
"스읍!! 너 지금 부터 내가 하는 말 잘들어. 너 옆집누나 성격알지?"
역시 어린 놈은 협박이 최고라니까... 쯧쯧 가엾은 것... 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옆집누나에게 당
하는 협박이 얼마나 무서운지 ..한번 경험해 보시라...
"그럼.. 잘 알쥐.. 대단하지.. 대학학교 때 선배 옆집누나랑 싸워 교무실에 까지 가서 반성문 썼잖
아. 그리고 또 교내 학생 클럽의 우두머리였고.. 그래서 대학도 간신히 들어갔잖아."
이 자식 평소에 나랑 무슨 원한 맺힌게 있나.. 과거의 일까지 들먹이고 있어.. 이걸 한입
에~~!!
"좋아..네가 누구보다 내 성격을 알고 있으니까 하는 말인데... 너 절대로.. 방금 들었던 말에
대해서는 입도 열어선 안돼!! 알았지? 안그러면... 너 학교 다니기 힘들어 지는 줄 알아."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너도 알것 아냐..내 충직한 심복들이 네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거..."
역시 말은 대학생이지만.. 아직은 초등학생 같은 정신연령을 지닌 동생이다.. 짜식.. 그래야
이 옆집누나가 널 이쁘게 봐주지...

여기서 봤듯이..내 과거는 심히 찬란했다.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얌전하고 세상 물정 모르던
내가 갑자기 대학에 들어서면서부터.. 어쭙잖게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교문을 지키고 있
는 선도부들의 잘못된 행동들.. 예컨대.. 실내화 신고 가게에 갔다고 목숨을 걸고 사온 간식
거리들을 가로챙기는 선배들의 만행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터져버리고 만 것이다. 수업이
끝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나인데.. 신발까지 챙겨신고 가게에 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고
시간이 없었다. 단 몇초도 아까운 마당인데.. 실내화면 어떻고 실외화면 어떠랴,, 그렇게 무
대포로 가게까지 갔다오는데.. 씨X . 선배의 선두부 조직이 교문을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선배의 손가락질에 몇번 고개가 까닥였고.. 내 손에 들린 거금 5천원어치의 간식거리가 순식
간에 그들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머리가 홱 하고 돌아버리고 만것이다. 죽을 힘을 다해 대
들고 때리고 맞고.. 정말 최선을 다해 내 간식을 지키기로 마음 먹은 나였다.
그 계기로 인해... 전 학교가 떠들석 했고..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 것이다. 비록 며칠동
안은 부모님 몰래 학생과로 반을 옮겨야 했지만.그래도 반성문을 쓰면서도 그날 내 간식을
되찾은 일은.. 정말 자랑스럽기 그지 없었다...

지난 날을 회상하며 웃던 내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집안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곳..
바로 그곳에 서 있는 게 아닌가... 빌어먹을 전신 거울 앞에 말이다.
대학때보다 무려 10킬로그램이나 찐 내 몸매를 눈으로 확인할때마다 수만번도 넘게 다이어
트를 결심했지만 오히려 스트레스 때문에 먹고 싶은 음식들이 눈앞에 아른거리기만했다.
그런 내가 내린 결론... 바로 이 빌어먹을 전신 거울만 피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것이다...

똑똑!!
늦은 밤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읽고 있던 로맨스 책을 베
개밑에 감춘 난 책상위로 손을 뻗어 자격증 문제집을 집어들었다.
볼펜을 오른 손에 쥔체 방문을 여는 순간 시커먼 그림자가 내방으로 불쑥
들어오는 게 아닌가..밉살스런 웃음을 띈 체..
"네가 왠일이냐.."
"헤헤... 그냥.. 어라? 옆집누나 공부하고 있었어?"
동생의 시선이 침대에 놓인 문제집으로 향했다.
"어. 용건이나 말해. 자기전에 한문제라도 더 풀어야 하니까."
동생의 눈썹이 올라가는 게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난 온몸을 긴장시켰다.
그리곤... 몸을 날렸다. 침대로.그리고.. 베개를 온몸을 던져 눌렀다.
한 덩치를 하는 동생의 힘을 막을 도리는 없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지킬 힘
은 있었다. 동생과 옥신각신 하고 있는 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엄
마가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야.. 밤 늦게.. 넌 또 왜 여기에 있어? 옆집누나 공부방해 하지 말
고 어서 나가!!"
"아이 참.. 엄만 옆집누나가 공부를 하고 있을거라 생각해요?"
든든한 후원자인 새엄마를 믿고 어린 것이 감히 옆집누나의 비리를 고하려고 하
고 있다... 무섭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옆집누나의 시선을 무시한 체..

"그럼?"
고개를 돌리고 베개를 꼭 누르고 있는 날 보는 새엄마가 의심쩍은 표정으로
보고 계셨다..
"이 자식이 장난치는 바람에.. 오히려 공부에 방해받고 있어. 새엄마도 어서
나가구."
"옆집누나!! 하늘이 무섭지도 않아? 그런 거짓말이나 하고!!"
"이게 !!"
"아이구.. 난 모르겄다.. 늬들끼리 싸우던지 말던지.. 하여튼 일찍 자."
아이들 싸움에 괜히 말려들면 골치아프다는 걸 사 남매를 키우면서 터득하
신 현명하신 새어머니가 나가자 싸움이 시작되었다.

"너 이자식, 자꾸 까부는데..."
"그러길래.. 누가 로맨스 책이나 보고 있으래? 그러니까 매번 취직 시험에
서 낙방하는 거라구. 어느 상사가 그딴 만화책이나 읽고 있던 한심한 직원
을 채용하겠어.. 안그래?"
"너 자꾸 그딴식으로 말대꾸 하면..."
"헤헤...옆집누나..."
징글맞은 동생이 내게 눈웃음을 칠때는 이유가 있다...
"옆집누나. 옆 집 아저씨 좋아하지?"
"아니.. 이것이?!"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했던가? 난 동생의 질문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좋..좋아하긴.. 넌 몰라도 되는 그런 게 있어.어린게 함부러 나설려구 그
래..버릇없이!!"
"에잇!! 아닌 것 같은데... 솔직히 불라구... 혹시 알아? 내가 옆집누나의 사랑
의 전녕사가 되어줄지.."
"누가 네 시커먼 속을 모를 줄 알고?"
"이거 왜 이러시나..난 그 동안 짝 사랑만 해오던 옆집누나에게 진실한 사랑에
불을 지펴줄라고 하는데...."
이 어린 것 때릴 곳도 없고...아예 무시하자니.. 솔직히 동생의 말에 자꾸
만 마음이 끌려가고 있긴 하다.

"어떻게 할건데?"
관심없는 척 최대한 무심한 척 동생을 떠보기로 했지만..이 녀석이 쉽게 넘
어오고 있지 않았다.
"옆집누나.. 이것도 사업적으로 보면.. 동업과도 같은거야.. 내 아이디어로 누
나가 사랑에 빠지고.. 사랑이 완결되어 결혼까지 하게 된다면..."
동생은... 알고 있다.. 내가 벌써 그의 말에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원하는 게 뭔데?"
"헤헤.. 뻔한거 아니겠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고 있는 행동으로 봐선...물으나마나한 질문이었다.
"도...돈을 달라구?"
"그럼.. 그럼. 사업에 들어가기 전에... 계약금을 거는 거지..이름하여 사
랑의 계약금."

내가 만약 이 녀석을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패준다면... 하나님은 날 용서해
줄까? 살인이 아니니까....
"옆집누나.. 돈을 주면서 아까워 하는 사람은...자고로 큰일은 하기 힘...이게
뭐야? 겨우 만원가지고.. 내 산뜻하고 계획적인 아이디어에 욕심을 부린단
말이야?"
"에라.. 인간아.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누난 지금 백수 생활에 10원도 아
까운 마당인데... "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를 꺼내는 손이 파르르 떨려옴이 느껴졌다.
"고마워.. 그럼.. 어디... 여기 앉아 봐."
책상 의자를 침대쪽으로 바짝 끌어당겨 그 위에 앉는 녀석은 너무너무 얄
미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근데... 희안하단 말이야.. 로맨스 책을 손에 달고 다니는 누난데 왜 제대
로 된 사랑한번 못해보지? 혹시 그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노
처녀들이 아닐까? "
"입닥치고..네가 생각하고 있는 계획이나 말해."
"이런.. 우선 누난 그 거친 말투부터 고쳐야 돼."
"야!!"
동생을 향해 주먹 쥔 손을 날리려는 데 감히 그 손을 막는게 아닌가.
"그리고.. 그 더러운 성격도."
"조용히 하랬지."
아예 이를 악물고 치밀어오르는 화때문에 이를 갈면서 동생에게 주의를 주
었다..

"알았어.. 알았다구..하여튼... 옆집누나도 노처녀 되면 골치아프겠어. 그전에
내가 먼저 장가가서 이 집을 뜨던지 해야지..."
"너 정말 까불래?"
"좋아... 말하면 되잖아. 옆집누나 귀좀 잠깐만 줘봐.."
난 머리를 동생의 입까지 바싹 대었다. 동생의 손이 귓불을 잡아당겼다.
그리곤....속삭였다.
"옆집누나가... 그 아저씨랑 어떻게 해볼려면....말이야.....살부터 빼!!"
녀석이 달아났다.. 기가막힌 얼굴로 동생에게 한방 당한 나...여기서 가만
있으면 안되지...암!! 너 이녀석 내 손에 잡히는 순간 제삿날이다!!
각오해!!

"야!! 너 거기 안서? 너 죽을래? 감히 누굴 가지고 놀라고 그래? 야!! 너
잡히면 죽음이야!! 죽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동생방으로 쳐들어간 난 동생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꽉 움켜진 주먹으로 사정없이 튼튼하게 생긴 넓은 등판을 사정없이
날렸다. 이래봐도.. 싸움에선 막을 자가 없었으니까..
"아얏!! 옆집누나!! 아파.. 알았어..알았다구.. 말할테니까.. 그만때려!! 장난
좀 친것 같구.. 옆집누나!!"
"당장 돈 내놔!! 내가 니 놈말에 속은 게 잘못이지.빨리 돈 내놓으라니까!!
"옆집누나...성질 죽이라고 했지? 그리고 소리좀 지르지마.. 옆집 아저씨 듣겠
다..."
목소리는 나오진 않았지만..난 입을 벌린 체 동생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동생의 말에...한마디로 얼어붙은 거지..
"헤헤... 그럴줄 알았어..."
"닥쳐!! "
"자자..진정하시구.. 1단계 계획을 말해 줄테니까 잘들어둬.."
"싫어!! 그딴 거 다 집어치우고..빨리 가져간 돈이나 내놔!!"
"어허..말로한 계약도 파기할려면 손해라는 거 알잖아.. 이건 엄연히 사업
이라구.. 그러니까..."
"이게..."
"쉿!! 옆집아저씨가.. 옆집누나의 그런 목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럼 내 계획도.. 물거품이 되고 마는거지..암..."
이 녀석이랑 이렇게 마주보고 앉아 있다가는 아마도 난 숨쉬기 대회로 기네
스에 오를지도 모른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터져나오려는 목소리를 삼켜
야 하니까...
"말해.. 더 이상 소란은 없을테니까.."
"좋아..그럼...옆집누나.. 내일 저녁을 기다려봐..내일 저녁에 분명 좋은 일이
생길테니까.."

동생이 기다리라던 내일이 왔다.. 하지만.. 이게 뭐야..난 집에서 쉬고 있는 생활을 한다는 이
유로..
완전히 집을 지켜야 하는 개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걸 그냥 팍!!
"새엄마!! 어떻게 그러실수가 있어요!! 나도 엄연한 인격체로서...마땅히 누려야 할 특권이라는
게 있는데... 이틀동안이나 집을 지키라구요? 새엄마랑 아빠는 신나게 관광을 즐기고 계시는
동안..이 집에만 있으라구요? 저도 어떻게 안될까요? 저 그냥.. 얌전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
어도 좋아요? 네?"
그렇다..난 지금... 무릎만 꿇지 않았지 거의 새엄마에게 사정하고 있는 중이다. 이틀동안의 엄
마의 부재동안 산더미같은 집안일을 맡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백수라는 이유만으로...
"얘가 너 미쳤냐? 네가 몇살인데.. 부부동반 모임에 낄려고 해? 집이 잘 지켜!!"
"엄만!! 딸이 무슨 집지키는 개야? 그 동안 직장 그만두고 내가 어디 여행한 번 가봤수?
그러니까.. 새엄마 아빠 모임에 살짝... 그냥.. 덤으로 얹혀주라구..."
"네가 덤으로? 안돼!! 넌 오늘 저녁에 할일이 얼마나 많은 지 알기나 해?"
"으그.. 내가 못 살아!! 내가 부엌데기야? 언니도 있잖아!! 왜 맨날 나만시켜!! "
"이게.. 한대 맞기 싫으면 조용히 해.. 우선.. 밤늦게 들어오는 오빠랑 동생 저녁 챙기구. 언
니 오면 언니가 벗어놓은 빨래 있을거야. 내일 출근 할때 입어야 하니까 깨끗하게 빨아놓고
다름질 해놔."
"새엄마!! 내가 무슨 콩쥐야? 나만 다리 밑에서 주서 왔어? 허구헌날 나만 시켜!!"
"길게 말할 시간 없어. 그리고.. 아참, 이것 받아."
새엄마에게서 건네받은 건 반상회 회원들 명단이었다.
"이건 또 뭐야?"
"오늘 반상회 있는 날이거든. 그러니까... 네가 대신 마을 회관으로 가서 모여. 우리 옆집에
새로 이사온 사람하구 같이 모여. 새엄마가 반장이니까.. 빠지면 안돼. 그 뒤에 적혀 있는 데로
만 하면 돼.알았지?"
엄만 그렇게 여행을 떠나셨다.. 이럴때를 대비하여 그 동안 열씸히 날 부려먹은 것일거야..
파출부 대용으로 말이야.. 얼만 절약이 되겠어.. 공짜에.. 밥만 먹여주면 그만인...아주 저렴한
딸이 있으니까..

"옆집누나!!"
동생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나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동생이 신발을 벗기도 전에 난
동생방으로 끌고 갔다.
"네가 말한 계획이라는 게 고작 이거냐?"
난 동생 얼굴앞으로 새엄마에게 받은 반상회 회원 명단을 내밀었다.
"허!! 옆집누나 이제보니까 머리가 정말 좋은데~!! 어떻게 그렇게 금방 눈치챌 수가 있지? "
"이게.. 딴 소린 집어치우고 당장 어제 갈취해간 돈이나 내놔!!"
"아무래도 옆집누나가 갈 수록 눈치만 늘어나는 것 같아.. 옆집누나.. 코 앞에 있는 기회도 보이지 않
아?"
"기회? 무슨 기회? 새엄마 대신 반상회 이끌어 갈 반장이 된거? 이게 누굴 놀리려구 해!!"
화가 난 내가 막 소리를 질러댔지만 동생은 편하게 웃고 있는 꼴이다. 아예 열받아 씩씩대
고 있는 내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볼 심산이었다.
"옆집누나.. 기회를 잡아!! 이 기회를!!"

내가 약간 바보인가? 아님.. 너무 순진하고 착해서 남을 의심할 줄 모르는 걸까...
난 지금 동생이 말한 기회를 잡기 위해 선생님 집앞에 서 있는 중이다. 초인종을 누르기 전
에 열번도 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 기회라는 게 무엇인지를 모를 지경이었다.
"에잇!! 선생님!! 선생님!! "
초인종 대신 난 크게 선생님을 불렀다. 어쩌면 이편이 덜 어색하지 않을 까 싶은게..
"누구세요?"
늦게서야 선생님이 듣고 나오셨다.
"저예요. 초희.."
"어.. 초희 왔구나.. 어서 와."
대문을 열어주시는 선생님을 보는 순간 난 말문이 탁 하구 막혀버렸다.. 큰 키에... 양복을
입고 계신 그 모습이..너무너무...예잇!! 몰라.. 그냥.. 좋다.
"어쩐 일이니?"
"저..그게.. 말이죠..."
"아.. 반상회 때문에 왔구나."
"네? 어떻게..."
"네 손에 들려 있잖아."
정말 내 손에는 새엄마가 전해주신 전단지가 들려 있었다. 얼굴이 또 달아오름이 느껴졌다.
"그래서.. 말인데요.. 오늘 꼭 참석하셔야 되는데요..."
"오늘? "
"네.. 오늘저녁에요.. 제가 ...그러니까..제가 말이죠.."
"네가 반장이구나... 이럴수가..이 동네에서 네가 정말 파워가 쎄구나.... "
이게 무슨 만화책 같은 상황이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그대 앞에서만 서면... 나는 왜 작
아지는 가... 갑자기 어떤 가수의 노랫말이 생각났다...
"하여튼 꼭 참석하셔야 돼요.. 아셨죠?"
"하하..그래.. "
웃는 선생님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다 흠칫 놀란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리 집으로 돌아
왔다.

"옆집누나 만났어?"
현관 앞에서 동생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아마도 내 얘기를 다 들었을 테지...
"그래."
"온대?"
"그래."
"하하... 옆집누나 근데 그 아저씨 앞에서면.. 제리가 된 것 같더라... 톰과 제리에서 나오는 그 쥐
말이야!!"
"이 쥐새끼같은 X 이 ...."
동생이 내 주먹을 피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내 앞에선 고양이 톰이 되고 말이야... 하하...옆집누나 하여튼 성공해라.."
분하지만..난 화를 눌러야 했다.. 가뜩이나 선생님 앞에서 얼굴이 빨개진 체 어쩔줄 모르고
당황했던 나지만.. 반상회때 확실한..새엄마의 파워.. 그러니까.. 대리인 내 파워를 보여줄 필요
가 있으니까...

"초희야.. "
어떤 아줌마의 부름에 퍼뜩 정신이 든 난 그제서야 출입구쪽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네?"
"새엄마가 이것만 전해주셨니?"
"아..네.이것만 전해드리라고 해서요.."
나만을 바라보는 다섯명의 아줌마들을 보며..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다. 눈빠지게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렸지만... 회의한지 1시간이 지나도록 선생님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참, 초희네 옆집 말이야.."
슈퍼집 아줌마가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으셨다.
"빈집?"
"무슨.. 지난 주에 이사왔던데?"
"그래?"
"그럼.... 아직 그집 아저씨밖에 못봤지만... 그래도 사람이 드나드니까.. 기분은 좋습디다.. 늦
은밤에 그 집앞을 지나칠때는 등골이 오싹하더니만... "
소라 새엄마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을 마치자 아줌마들의 고개가 움직였다.
"맞아.. 꽤 오랫동안 빈 집이었지?"
"한..3년 쯤 됐나?"
"맞아.. 그 정도 됐을거야..그러고 보니까... 이사온 양반이 보이질 않네.."
눈치빠른 시형새엄마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 저..그게..."
"신혼부부 같던데.. 그래서 저녁 시간이 아까운 걸까?"
주책없는 아줌마의 수다가 시작될 판이었다. 시집도 안간 처자앞에서..찐한 농담이라도 나올
태세였다. 하지만.. 요즘 처자들이 누구인가.. 어쩌면.. 아줌마들보다 성에 대하여 더 많은 것
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당인데.. 내가 가만있을 수 있으랴..
"혹시 또 모르죠.. 숟가락 팽개치고... 일이 벌어졌을 수도.."
홱 하고 고개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입을 딱 벌린체 나를 바라보는 아줌마들의 표정
이...
오히려 더 당황한 듯 하다..
"하긴.. 요즘 아가씨들이 뭔들 모르겠어..."
삐죽거리기를 좋아하시는 동호 새엄마였다. 그 아줌마 말에 동의라도 하듯 일제히 고개를 끄
덕이면서.. 순식간에 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갈 찰라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문을 반쯤 열고 고개만 내미는 낯익은 얼굴...그분이 오셨다. 반가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
던 난 아줌마들의 시선을 더 이상 끌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자리에 도로 주저 앉았다. 그리
곤 내 옆자리로 그분의 자리를 만들었다.
"여기 앉으세요.."
"어..그래..요"
선생님은 말끝을 흐리며 마지못해 존칭을 써 주셨다. 더 이상 내쪽에 쏠리던 시선은 없다.
청일점인 선생님쪽으로 아줌마들의 시선이 모아진 것이다.
"왜 이렇게 늦었수?"
"부인은 어쩌고?"
"아이는?"
아줌마들의 질문 공세에 뒷전으로 물러난 난 선생님을 바라보며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
다.
"저..그게..말이죠.."
"됐수다.. 우리도 뭐.. 다 알고 있는 데 뭐.. 누군 신혼 시절이 없었는 줄 아시우? 그만들 하
자구"
역시 슈퍼집 아줌마였다. 동네의 소문이란 소문은 죄다 알고 있는 아줌마는 그 넉넉함으로
선생님을 위기로 부터 구출해 주셨지만.. 여전히 선생님은 아줌마들의 시선앞에선 고양이 앞
에 놓인 생선꼴이었다. 이 표현이 맞나? 하여튼... 예전에.. 그 분앞에서 졸지에 아줌마가 되
었던 날 보는 듯해 기분은 좋았다..하하...

"그래..결혼한지 얼마나 되었수?"
"아직 결혼 하지 않으셨어요.."
내쪽으로 고개가 쏠렸다.. 나도 모르게... 그만...
"그럼 총각이우? 오리지널?"
약간의 진한 농담이 오고갈 분위기였다.
"그럼요.. 아줌만...."
이런.. 아예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하하.. 그럼.. 직업은?"
"학교 선생님이세요.."
이런 주책 바가지..왜 내입은 가만있질 못하지.... 이런 젠장!! 이런...
"어떻게 잘 알아?"
"저...저.."
"아... 예..반상회 반장님이라는 감투 덕분에.. 이사오는 날 저희집에서 이삿짐을 날라줬거든
요"
"반상회 반장?"
이건.. 아예 합창이었다.. 그리고... 내게 쏠렸던 시선이 일제히 선생님쪽으로 향했다..
이런 젠장~~!! 이런 아이디어를... 낸 동생..넌 이젠 죽음이다..넌 정말 끝이라구!!


"헉!! 흠~~"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나오는 딸꾹질은 멈추지도 숨기지도 못했다.. 아줌마들이 선생
님과 나를 번갈아가면서 보고 있는 와중에 주책없이 딸꾹질이 시작된 것이다..바부...바부 초
희~~
"그러니까...총각은.. 초희가 반상회 반장으로 알고 있단 말이지?"
"저..그게..."
등줄기로 식은땀이 쫘악 흘러내리고 있었다.. 변명을 하기위해 진땀을 흘리고 있는 나와는
달리 선생님은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말도 안돼...그게 어떻게...."
"그러게 말이야..반상회는 말이야..총각..."
"저처럼.. 젊은 여자는...반장이 될 수가 없다는 거죠..그쵸? "
역쉬... 한발 앞선..나의 승리였다. 아줌마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말에 동조하는 동안 선생님
은 내가 건네준 프린트 물을 읽고 있었다.. 떨리는 심장을 끌어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라에..슈퍼집 아줌마 대뜸... 눈치없이..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엄만 언제 오신대? 아빠랑 같이 가셨지? "
비록 백수 생활을 하고 있는 나지만.. 집에선 밥먹을 때 빼고는 눈치한번 받아본 적이 없던
나인데..
오늘은.. 땀을 흘려가면서 눈치를 살피고 있다..이쪽저쪽 아줌마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작은
틈새조차 차단하고 있는 마당에 갑작스런 질문은.. 날 정말 환장하게 만든다..
"내일..오신다고 연락왔어요..."
"하긴.. 초희 새엄마는 걱정이 없지 뭐.. 얘들 다 컸지.. 살림해주는 초희 있지.."
"헉!!"
왜 진작에.. 수다쟁이 아줌마 1호인.. 소라새엄마를 견재하지 않았을까...
이번에는 어떤말로 위기를 넘길까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복병은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정말....대단하대요.. 그날 이사오던 날.. 손놀림도 빠르구... 살림 잘 하겠더라
구요.."
선생님의 말에 아줌마들이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 동안 아줌마들의
본격적인 수다가 시작되었다. 남편 흉에 시댁 흉을 덧붙이고.. 자식 자랑에.. 집안자랑을 맛
보기로 드러내놓는 아줌마들의 긴 입담에 지루해진 난 눈치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자연스럽게 선생님과 함께 이 자리를 뜰까 싶어 눈치만 살피고 있는 나랑은 정말 다른 선생
님..
지금 그분은... 한 아주머니에게 붙들려 그 아줌마의 고민을 상담중이었다.. 흠~~ 역시.. 선생
님이시라.. 지름길을 제시해 주겠지... 그러고 보니까..나 혼자 외톨이었다..
"저.. 그러면.. 반상회는 그만 끝낼까요?"
모기만한 내 목소리는 순식간에 어수선한 회의장을 정돈했다. 할 얘기가 아직도 많이 남은
아줌마의 안타까워하는 표정앞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두사람.. 몰래 꿀을 훔쳐먹다 걸
린 아이마냥 우린 웃음을 터뜨렸다.
" 학교 다닐 때 한번도 반장을 해 본적이 없던 녀석이.. 결혼하고 나니까..반장자리도 꿰차는
구나 싶었지 뭐야.."
집으로 돌아오면서 선생님이 해준 말이었다.. 다행히.. 나의 정체는 아직 비밀이었다..
"집은 어디야?아까 어떤 아줌마 말이..친정 부모님.. 여행가셨다면서? 그래서 대신 와 있다는
걸로 들었는데.."
"집요? 그게...말이죠...그냥.. 같이 살죠..."
"처가살이?"
"네? 처가살이요?....하... 어떻게 보면..그렇죠..."
능력없는 남편 만나... 처가살이를 하는 구나...라는 식으로 날보는 선생님 앞에서...난 왜 고
개를 숙이는 걸까....이런 바부..이런 바부...


"나다..."
"왠일이냐.. 이 시간에.."
"그냥... 했다...뭐하냐?"
"누워있지.. 근데.. 목소리가 이상하다.. 너 우냐?"
뒤늦게 심각성을 깨닫는 내 친구....
" 올려다 보지도 못할 나무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무슨 소리야... "
"너무 푸른 잎을 가진..나무가 가까이 있어..햇빛에 반짝이는 열매도 보이지만.. 감히 난 손도
못대고
바라만 보고 있다.. 나무에 올라서.. 그 열매를 따 먹고 싶지만..겁이 나. "
친구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오고 있었지만.. 난 친구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가슴 깊이 파고드는 슬픔으로...자꾸만 눈물만 나오려 했다.
"뭘 걱정해.. 그냥..올라가서 따 먹으면 돼지.. 너 바보냐?"
"차라리 그랬음 좋겠다..바보라면.. 그렇게 쉽게 생각했을 테니까...정상이기에..너무도 정상이
기에..
그 나무에 올라가서도..그 열매를 따 먹어서도 안된다는 걸 아니까..미치겠어..바라보면 안되
니까..
사랑해선 안되니까...자꾸만.. 욕심이 나니까..보고싶어서...사랑하고 싶어서...힘이 드니까..."
"야!! 김 초희!!"
"아주 오래 전부터...잊혀지지 않았던..사람이었어..세월이 지났지만.. 그래도 가끔은..아주 가
끔씩은,, 생각이 났던..사람이었어..하지만..시간이 지나니까..전처럼..예전의 나처럼..될 수가 없
는거야."
"너.. 설마 사랑에 빠지기라도 했단 말이야?"
"사랑? 그게 사랑이었니? 집착이 아니라? 그리움이...사랑이 되어버린 거니?"
"야!! 너 지금 소설 쓰냐? 네 얘기면서도..."
"그래서 더 힘들다는 거야..차라리 소설이라면...그럴 수도 있구나...스승과 제자..사랑해도 되
는 거구나.. 그랬겠지..하지만.. 이건 현실이잖아..보고 있어도 자꾸만 보고 싶은 건...지금 내
마음이잖아."
"설마...설마...너... 유뷰남 좋아하고 있는거냐?"
이렇다니까...내 친구는... 정말..둔하다. 친한 친구인 내 마음도 읽지도 못하는... 친구..

"넌 내가 진짜 드라마라도 찍기를 바른 거냐? "
"그렇잖아..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선생님이라면서? 그러니까.. 당연히 유부남이 아닐까.싶어
서.."
"됐다.. 끊어라.. 잠이나 잘란다..."
"야!! 김 초희!! "
"시끄러.. 갑자기 졸려서 그래..."
친구에게 털어놓으면..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은 되찾을 거라 생각했었는데..오히려..
더 복잡하기만 했다...그냥.. 예전처럼.. 가벼운 사랑이라면 좋을 텐데..그냥...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그런 외사랑 같으면 좋은데..
잠을 이룰 수 없어 난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정원을 걸으며 난 문득 옆집을 바라보았다..
불 켜진 단 하나의 방..그 방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선생님 마음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아니.. 최소한.. 뚱뚱한 내 모습 그대로 자신있게 다가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 더 이상 결혼
한 여자가아닌.. 아줌마가 아닌... 진짜 나로 선생님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자연스럽게..아주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선생님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똑똑!!
"옆집누나. 자?"
"그래..자니까 그냥.. 가."
"자면서 말하면 안되지.. 문 열어봐.."
"됐어. 지금 너랑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니까...내려가라.."
하지만 동생은 내가 문을 열때가 계속해서 방문을 두들겼다. 결국 그 지겨운 소음을 견디다
못해 문은 열었지만 동생이 들어오는 걸 막았다.
"여기서 얘기해.."
"옆집누나 울었니?"
"용건이 말해.."
내가 목소리를 깔았다면 그건.. 꽤 심각하다는 걸 아는 동생이었다. 장난기 어린 웃음이 사
라지더니 동생의 눈에서 어렴풋이 안타까움이 비쳤다.
"잘 안된거야? 그런거야? "
"그래.. 그냥.. 가까이에서 봤다는 거 밖에 없었어.."
"미안해..난 그냥.. 그 기회에 옆집누나를 새롭게 볼줄 알았지.."
"됐어.. 남자 네가 내 마음을 이해할리는 없었지.."
"나...돈 다시 돌려줘야해?"
"그냥..가져.. 그만 가라. 옆집누나 피곤하다.."
"옆집누나... 내가 있다는 거 알지? 옆집누나의 든든한 신랑 말이야.."
"이자식이..."
동생은 눈치있게 잽싸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동생이 가자 갑자기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듯 했다.
정처없이 방안을 배회하던 시선이 방 구석에 가 꽂혔다.. 그곳엔 지난 몇 년동안 외면당하고
있었던 거울이 있었다.. 작지만 전신을 모두 비쳐주는 거울이었다.

불꺼진 방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는 은은한 달빛 조명으로 빛이나고 있었다. 난 천천히
거울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한발한발 그쪽으로 가고 있긴 했지만..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도저히...날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안에 비쳐지고 있는 내 모습을 확인 할 수가 없
었다..
초라한 김초희....자신감이 사라진...날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자..봐...이게 너야...이게 너라구...사랑조차..제대로 할 수 없었던.. 초라한 네모습이라구..."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난... 이제껏 외면해 왔던 진짜 나를 봤다. 커다란 박스형 윗도리에 가
려진.. 뱃살과.. 도저히 아가씨라고는 믿기힘든 피부상태... 이게 진짜 나였다.
아무렇게나 빗어넘긴 머리와..무릎이 튀어나온 바지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여자의 자존심은 보이지 않았다.. 퍼질때로 퍼진 나만 있을 뿐이었다...제대로 사랑받고 싶
고..그 사랑을 지켜가고 싶지만... 자신이 없어하는 나만이 보이고 있을 뿐이다..
새엄마의 심한 잔소리에 스트레스나 받고.. 뚱뚱한 외모때문에 외출조차 꺼려하는 내 모습이...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드러날줄은 몰랐다.. 어디서 부터가 잘못된 걸까..내가 왜 여기까지 오
도록...깨닫지 못했을 까....억눌린 신음이 터져나왔다....너무 늦은 걸까...날 되찾기에 너무 늦
은 걸까....

"난 말이야.. 뚱뚱한 내 모습까지도 사랑해 줄 사람이 생기면.. 다이어트를 하려했거든. 그
사람에게만큼은 여자로서 아름다움을 과시할 생각이었지.. 근데.. 그러면 안될것 같아.. 그렇
지? 당장 내일부터 운동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너도 내일 새벽에 나랑 같이 뛰
는거야."
"나두?"
출출한 밤에 야식으로 라면을 먹으면서 난 동생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면을 다 건져
먹구 숟가락을 입에 문체 동생을 보았다.
"그럼.. 새벽에 이 옆집누나 혼자 운동가리?"
"옆집누나 혼자가도 되잖아.. 요즘은 해도 일찍 뜬단 말이야.."
"시꺼!!"
이 자식은 내가 꼭 소리를 질러야만 고분고분해진단 말이야...
"너도 날아 같이 운동가면 좋잖아. 돈주고 헬쓰장 갈 필요도 없구,, 얼마나 좋니?"
"왜 하필 나야? 새엄마도 있구.. 아빠도 있잖아..그리고 난 아침잠이 많단 말이야.."
징징거리는 동생을 노려보며 화를 꾹꾹 누르며 남은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 먹기 위해 식탁
에서 벗어난 나~~ 주걱을 드는 순간 동생이 소리치는 게 아닌가.. 아휴~~
"옆집누나~~ 정말 다이어트는 할거야?"
"놀랬잖아.. 소리는 왜 지르고 그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을 퍼 국물이 출렁이고 있는 대접에 넣는 순간 동생이 손바닥
으로 이마를 쳤다.

"다이어트 한다는 사람이.. 라면에 밥까지... 옆집누나..그냥 다이어트 포기해라.. 옆집누나처럼 먹던
사람이 나중에 다이어트를 해도 요요 현상이 심하게 나타난대.. 오히려 살이 더 찔수도 있다
고 하던데.."
동생의 말에 난 군침도는 밥과 동생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잠시. 아주 잠깐 동안 고민에 빠
졌다.
"요요현상?"
"그래.. 이늦은 시간에 라면 먹었으니 내일이면 얼굴도 퉁퉁 부을거 아냐. 안그래?"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동생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위에 대접을 내려놓았다.
"그렇겠지.."
"살찐 사람은 부은게 곧바로 살이 된다는 거알지?"
동생의 말에 난 다시한번 밥을 보았다. 벌써부터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어떡하지?"
"그냥 버려. 내가 잔인해질 수밖에 없는 건 모두 옆집누나를 위해서니까 참아."
이 자식이... 밥을 앞에 두고 날 시험에 들게 하네.. 라면 국물에 말아 먹는 밥이야 말로 ...
그위에 알맞게 숙성된 김치를 걸치면.. 스읍~~
빨갛게 담아진 김치와 밥 사이를 정신없이 헤매이는 내 시선을 눈치 챈 동생이 다짜고짜 내
앞에 놓인 그릇을 가로채는 게 아닌가.. 간발의 차이로 동생의 손에서 무사히(?) 내 밥을 지
킨 나.. 한가지 생각이 머리속에 감돌기 시작했다.

"잠깐~~!!"
"옆집누나, 설마 먹을려구?"
"헤헤.. 야. 너 생각좀 해봐라. 인도에서는 쌀이 귀해 밥조차 구경을 못하고 가까운 북한에서
도 해마다 기아 아동이 늘어나고 있는 판국인데.. 이밥을 버려서야 되겠니?"
"그건 핑게야.. 옆집누나 걱정말고 그 밥 이리줘. 나라도 먹으면 되니까.."
"어허~~!! 넌 위장병까지 있는 녀석이 늦은 밤에 뭘 먹으려구 그래. 참아."
"지금 누가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야? 옆집누나, 설마 옆집 아저시 잊은거야?"
하지만 아직까지는.. 선생님보다 밥이 조금 아주 조금은 좋은걸... 난 동생의 구박과 핍박속
에서 숟가락을 집었다. 동생의 커다랗게 뜬 눈을 애써 외면한체 뜨끈한 국묵과 함께 밥을
떴다. 그리고 그 위에 김치를 올려 놓았다..아~~

"옆집누나..아직 기회는 남아 있어.. 제발 그 숟가락 내려놓고.. 다시 생각해~ 어!! 옆집누나!!"
마지막 순간.. 난 눈을 감아 버렸다. 귀도 막아 버렸다. 오직 살아있는 감각은 입안 뿐이었
다.
몇 분만에 후딱 먹어치워 깨끗해진 그릇을 내려다 보며 난 트름을 했다.
"먹는 거 앞에서 고민은 하지 말라.. 이게 내 철칙이지.. 잘자라.. 막내야. 설겆이 깨끗이 치
우고.."
한잔의 물까지 완샷으로 끝내버린 내가 부엌을 빠져 나가는 데 작게 투덜거리는 동생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뚱띵이..뚱띵이..."

끈질기게 들려오는 소음이 나의 단잠을 깨우고 있었다. 눈도 제대로 떠지지 않았는데도 머
리맡에 놓인 시계의 알람 버튼을 눌렀다. 평온이 찾아왔다.
"휴~~ 쩝쩝.."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끌어 당기려는데 또 다시 반갑지 않은 소음이 내 잠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우씨.."
"옆집누나. 운동가자.."
아니 이녀석이 벌써...
"너나 가.."
"옆집누나.. 빨리 일어나.. 살 빼야지.. 빨리 나와."
"저리가..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야 돼..."
"어후~~ 이 뚱띵아~~ 그만 일어나라..!!"
짜증섞인 녀석의 말투보다 더 큰 무언가가 날 일으켜 세웠다.. 뚱띵이..뚱띵이.....
옷을 갈아입고 문을 확 열어젖힌 난 앞에 서 있는 녀석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내
주먹을 피하는 못된 X ...
"우씨.. 왜 때려~!!"
"이게 어디서 옆집누나에게 그런 소리를 해~~!! "
"사실이지 뭐.. 최소한 어제 밤 늦게 먹은 라면이라도 빼야 할 거 아냐.. 누군 옆집누나때문에
아침잠까지 포기했는데.."
큰 키에 마른 체격인 동생은 결국 내 주먹의 맛을 봐야 했다.. 감히..하늘같은 옆집누나를 놀
려~~!!

"야!! 야!! 그만 뛰자.. 힘들어.. 헉헉~~"
헥헥 거리며 동생의 보조에 맞춰 학교 운동장을 돌던 난 결국 도중에 쳐지고말았다.. 거의
두 바퀴는 돌았던 같았다..
"옆집누나 그러면서 어떻게 살을 빼냐!! 빨리 뛰어와~~"
훈련 교관처럼 군기를 잡은 녀석을 째려보며 아파오고 있는 배를 움켜잡고 간신히 발걸음을
떼어봤지만.. 힘들어 죽기 직전이었다.. 거친 숨소리가 운동장에 퍼지면서..난 아예 산소호흡
기를 끼고 달리고 있는 것 처럼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녀석은 벌써 반바퀴나 빨리 달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 녀석과 보조를 맞춘다는 건.. 미친짓
이다..
그러다가.. 빈혈이라도 생겨서 쓰러지기라도 해봐~~ 웅.. 약값이 더 들지..
땀으로 빠져나가는 영양분을 어떻게 해...안되지... 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도 호흡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는 걸 반복했다. 언젠가 방송에서 이렇게 하면
지방이 연소된다는 걸 들은 기억이 나서였다.
아랫배가 특히 더 나온 나에겐 그 방법도 좋을 듯 싶었다..

"옆집누나!! 마치 인공호흡기 단 사람 같아.. 하하.."
녀석의 웃음은,.뭘까.. 저 녀석은 뭐가 그리 웃긴걸까.. 설마.. 날 비웃는 건 아니겠지? 이걸
콱~~!!
녀석의 웃음이 의심스러워 째려보던 난 교문쪽으로 갑자기 시선을돌렸다.
누군가 운동장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우~~ 우리만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을 경계하며 어느 덧 동생이 곁에 와 멈췄다.
"야. 더워 떨어져."
"옆집누나..난 지금 정체불명의 사나이로부터 누날 보호하려는 거야.. 이렇게 눈치없어서야.."
믿기힘들었다.. 이 녀석이 날 보호해? 덩치로 보면.. 내가 널 보호해야겠다.
깡 마른 녀석이 무슨 수로 날 보호해? 허긴 내 친구녀석들도 보니까 마른 녀석들이 맷짐은
좋더라..
지금 뛰어오는 사람은 키도 크고 덩치도 있고만..
"어? 옆집누나~~ 저 사람..."
놀라며 손가락으로 그쪽을 가리킨 동생은 입을 쩌억 벌렸다.
"옆집 아저씨네.."
"호~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다행히 선생님은 우릴 아직 못 본 모양이었다.

"야. 후문쪽으로 가자."
"왜?"
선생님이 우리 쪽으로 오기만을 기다리듯이 동생은 멍청하게 서서 선생님을 쳐다보고 있었
다.
애가 타는건 나 혼자였다. 녀석의 팔을 잡아 끌고 다른 쪽으로 가려고 팔을 잡았는데.. 녀석
은 실실 웃으며 선생님을 반갑게 아는 척을 하는게 아닌가..
"하하.. 안녕하세요?"
동생의 인사에 오히려 당황한 건 선생님이셨다..선생님은.. 이 철없는 녀석이.. 내 신랑인줄
아니까..
허걱~~

눈치없는 동생을 둔 덕분에 난 침 조차 맘대로 삼킬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선생님은 어떤
인사를 해야할 지 고민하는 게 얼굴에 모두 나타나 있었다. 그렇다고 뜸금없이 제 동생이예
요 라고 말해버리면.. 더 당황할 터였다.. 하지만.. 그런 눈치조차 모르는 동생은 내 어깨에
손을 턱하니 올려놓는 게 아닌가.. 이 자식을... 밟아야 하나.. 아님.. 찍 소리도 못하게.쥑여버
려야 해....
"하하... 운동 나오셨봐요..."
선생님의 시선이 내어깨에 올려져 있는 동생의 손에 닿았다. 그리고 입가에 보일듯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환경이 바뀌면서..갑자기 잠이 오지 않더라구요... "
"그럴겁니다.. 워낙에.. 시끄러운 이웃을 만나서리.. "
의미심장한 눈짓으로 날 내려다 보는 동생의 시선과 알것같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선
생님의 모습에 나.. 점점 할말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괜찮습니다..하하.."
두 사람 모두 넉살좋은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홀로 외톨이가 되어버린 난 얼른 어깨위의
동생의 팔을 뿌리쳤다. 이녀석이 날이 갈수록 맞을 짓을 자초하고 있는 게.... 이를 갈면서
동생의 팔을 잡은 난 선생님께 억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학교 운동장을 빠
져나갈 생각이었다.

"근데... 선생님.."
"네?"
"내일부터는 혼자 운동하지 마세요.. 저희랑 같이 하시는면 어떨까요? "
"같이요?"
"같이?"
갑작스런 동생의 말에 당황한 나와 선생님.. 아니 선생님보다 더 놀란 거 나였다. 이 녀석의
꿍꿍이 속이 어떤지 전혀 예측할 수 없기에 난 더 더욱 신경을 세우고 있었야 했다.
"옆집에 사시는 데.. 같이 하면.. 지루하지도 않고..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을까 해서요...하하.."
도대체 이 녀석 뭐가 좋다고 이렇게 실실 대는 거야.. 이 누난 지금 속이 바짝 타들어가고
있는데...
하지만.. 난 선생님의 눈치까지 살폈다. 솔직히 선생님도 동생의 제의에 귀가 솔깃한 것 같
긴 했다.
"그..럴까요?"
"그래요..이... 살좀 빼야하니까요.."
동생도 내 호칭을 부르기가 약간 껄끄러웠는지 또 다시 눈짓으로 날 가르켰다.
하지만.. 내가 더 황당하고..화가난 건.. 선생님이 동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는 거다..이씨..
순간 이를 악 물었다. 눈에 힘도 들어갔다... 그래..뺄거야..이 남정네들아.. 살빼면 될거아냐..
우씨... 열받아...
"그럼.. 선생님.. 저희 먼저 갈께요.. 오늘 좋은 하루 되세요... 하하..."
어설프게 동생의 팔에 팔짱을 낀 난 서둘러 동생의 팔을 잡아당기며 재쵹했다.
"이 사람이 이렇다니까요... 먼저 갈께요...하하..."
이녀석이.. 자꾸만.. 까분단 말이야..... 동생의 넉살에 이젠 웃음으로 받아칠 자신이 없었다.
이미 내 한계를 넘어섰으니까...

"야~!! 너 제 정신이야? 네가 뭔데 그분을 아는척해!! 감히 나이도 어린것이... 확 그냥~~!!"
집에 돌아오는 내내 동생을 구박한 난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주먹을 날렸다.
"어어..옆집누나, 왜 동생의 깊은 속뜻은 알지 못해..난 진심으로 그 아저씨랑 옆집누나랑 잘 엮어줄
려고 하는데. 노처녀라는 말은 듣지 말아야 될 것 아냐..."
"무시라? 노처녀? 이것이 그냥... 너 죽고 싶어? 내가 어딜봐서 노처녀란 말이야~!!"
"헤헤..옆집누나.. 첫 키스는 해봤어? 남자친구는 있었봤어? "
이 자식이 아침부터 누구 염장지를 일 있나..
"그건.. 모두 이 옆집누나가 순결주의자이니까..."
"순결주의자.. 좋아하시네.. 지금의 옆집누나 모습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어.. 제발.. 거울 좀 보고
살아!!
내가 확실하게.. 옆집누나를 완벽한 여자의 조건으로 만들어 줄테니까 말이야...."
나..이녀석 어떻게 해야해...핵심만을 골라 내 가슴을 콕콕 찌르는 말만 해대는 이녀석.. 그
리 밉지만은 않았다..
"좋아,너 네가 말한대로.. 하지 않으면.. 죽음이야...그땐 동생이고 뭐고 없어...나에게 죽는 날
이니까."

드디어.. 부모님이 여행에서 돌아오셨다. 밤 늦게서야 집에 도착하신 부모님은 말할 기력도
없으시다면서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그 바람에 난 또 다시 부모님의 여행가방을 정리해야
했다.
어차피 동생마저도 늦게 들어올 모양이었다. 아까 학교 갈때 있는 멋 없는 멋 부리고 나간
동생이 10시가 지나도록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이녀석이.. 누날 무슨 문지기로 아는거야...
다용도실에 있는 세탁기에 빨래를 집어넣는 데 아빠가 방에서 나오셨다.
"어.. 아빠.. 안 주무셨어요?"
"음... 목이 말라서...넌 여태 안자고 있었어.."
"네.. 빨래 좀 할려구요.. 근데..아빠.."
어두운 부엌의 조명아래에서 얼핏 피곤에 지쳐 보이는 아빠의 옆모습에 난 아빠를 불렀다.
"응?"
"아빠..어디 편찮으세요? "
"그래 보이니?"
"네..혹시... 당이 더 심해지신건가요?"
"아냐.. 그냥.. 기운이 없구나..여행이 너무 힘들었나봐..."
"머리는 안 아파요?"
아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오늘 첨으로 아빠의
어깨를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아빠의 넓은 등에 업히곤 했던 나인데..왜 그동안.. 아빠의
등이 굽어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을까... 근육의 탄탄해 보였던 아빠의 팔뚝이..점점 앙상
해지고 있다는 걸..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난 살며시 아빠의 등뒤로
가 아빠를 안았다.
"아빠...우리..결혼하고..손주 안겨드릴때까지.. 건강하셔야 돼요...아빠.."
사랑해요..라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하지만 난 있는 힘을 다해 아빠를 꼭 끌어안았다.
예전에.. 힘들어 하던 날 안아주셨던 아빠처럼..나도 지친 아빠를 꼭 안아드렸다.
"그래야지..."
"아빠..잊지 마세요..저희들이.. 곁에 있다는 거요...아셨죠?"
"그래...고맙다.."
아빠는 웃으셨지만.. 난 아빠의 지쳐보이는 미소에 가슴이 아팠다..언제 저렇게 늙으셨을까...
내가 이렇게 자라오는 동안.. 젊으셨던 아빠는 점점.. 주름살만 느시는데....
"일찍 자.."
"네..안녕히 주무세요.."
방으로 들어가시는 아빠의 뒷 모습에서 쉽게 눈이 떼지지 않았다. 아빠의 뒷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불안감을 갖다주고 있었다...

띵똥~~~~ 띵똥~~~~
짧지만 굵은 벨 소리가 들렸을 땐 이미 자정을 훨씬 넘은 후였다. 동생이 올 때까지 거실에
서 책을 읽고 있던 난 대문을 열기 위해 현관을 나서고 있었다.
"헤헤... 옆집누나..안잤어?"
"야~!!"
늦게 들어오는 동생에게 한 마디 해줄 생각으로 문을 연 순간 동생이 비틀거리면 들어서는
게 아닌가.
이녀석이... 어디서...
"헤헤.. 우리 뚱띵이 옆집누나..동생 때문에 잠도 못자고 고생이 많수당.그래도..이 동생 미워하지
마잉~~"
술에 취해 갖은 아양을 다 떠는 동생.. 별 짓을 다하는 군...
"야야!! 정신 차려. 오늘 새엄마 아빠 여행에서 돌아오신다는 걸 아는 녀석이 이렇게 늦게 들
어오면 어떡해. 그리고 어디서 술이 이렇게 마시고 들어오는 거야. 차라리 술이라도 깨고 들
어오던가..."
"으씨.. 또 시작되는 우리 뚱띵이의 잔소리...헤헤... 누난 모를거야.. 오늘 얼마나 엄청난 일이
있었는지...헤헤...드디어 이 멋진 동생에게도 그에 걸맞은 어여쁜 여자친구가 생겼쥐...헤헤...
그래서 친구녀석들이 술을 사준거야...알지도 못하면서...."
엄격하신 아빠가 혹시라도 술에 취한 동생을 볼새라 난 녀석을 부축하면서 방에 데려다 침
대에 눕혔다. 헉헉 거리면서 내뿜는 숨결에 역겨운 술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야~!! 얼른 자. 낼 아침에..해장국 끓여달라고만 해봐~!! 가만 안둘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
려!!"
"아...음....쩝쩝~!!"
큰 베개를 끌어안고 연신 입맛을 다시는 녀석을 보며 난 잔소리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어떤 의미의 한숨인지.. 방을나서는 나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옆집누나~~~앙!! 옆집누나~~"
이른 새벽부터 나의 단잠을 깨우는 악마같은 녀석이 있다....못들은 척 하고 다시 돌아눕는데
악마는 끈질기게 날 부르고 있었다.
"뭐야!! 이 자식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난 이불을 바닥에 팽개치곤 방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하늘로 높게 뻗친 머리카락은 둘째치고 내 시선은 동생의 얼굴로 향했다. 개스치레한 눈과
퉁퉁부은 얼굴.. 어젯밤 숙취로 인해 거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너 왜그래? "
"옆집누나.. 속이 아파..죽겠어..."
녀석이 배를 움켜잡은 게 그제서야 보였다. 위장병 때문에 고생하는 녀석이었다.
"그러게 누가 미련맞게 술을 먹으라니.. 몰라. 해장국은 새엄마한테 부탁해. 이 녀석아~~!! 그
리고 내가 무슨 가정부냐!!! 이 꼭두새벽부터 니 해장국이나 끓이고 있게..."
"옆집누나.. 나 정말아파서 그래..미칠 것 같아.."
목이 많이 갈라져 있었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듯 녀석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이리와!! 꿀물이라도 마셔야지.. 넌 왜 허구헌날 나만 찾냐!! 큰 언니도 있잖아!! "
녀석과 언니는 나이가 7년 정도 차이났다. 그래서인지 녀석은 어릴 때부터 내 뒤만 졸졸 따
라다녔다.
귀찮아 녀석을 떼어 놓고 놀러갈려구 하면.. 막내의 특기인 울음으로써 날 항복하게만들곤
했었다.
근데.. 커서도..이녀석 나한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언제쯤.. 가능할까....

"자, 마셔!!"
꿀물이 있는 그릇을 소리나게 식탁에 내려놓고 난 냉장고에서 콩나물을 꺼내 다듬기 시작했
다.
"아~함..."
하품을 하면서 겨우겨우 콩나물을 다듬는데 녀석이 실실대고 있는게 아닌가..
"왜 웃어 임마!!"
"헤헤.. 그냥 웃음만 나오네... 헤헤..."
"너 때문에 내가 무슨 고생이냐.. 새엄마 안계실 동안만은 내가 살림은 했지만... 이젠.. 그 살
림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너 때문에..이게 뭐야.. 잠도 못자구.."
"옆집누나옆집누나... 이딴걸로 짜증부리면 어떡해.. 나중에 옆 집 아저씨랑 결혼이라도 해봐..술에 취
해 들어온 남편을 위해.. 이 정도쯤 아무것도 아닐거면서..왜 동생에게 구박을 하는거야.."
"됐어!! 어제 있었던 소개팅 얘기나 해봐,, 보니까 그거 말하고 싶어서,, 그렇게 실실대고 있
는 거 아냐."
"오호~~ 갈 수록 눈치가 빨라지네..."
방금전까지 아파서 죽는다는 녀석이 이제 편하게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꾀병을
부렸구나.. 생각을 하는 순간.. 난 동생의 엄살에.. 속고 만것이다..
이 녀석을 그냥~~~

"옆집누나.. 그녀는 예뻤다.. 라는 노래 알지?"
"박진영꺼?"
"그래..정말.. 그 노래처럼.. 그녀는 예뻤어.."
"그래봤자.. 그림의 떡이었겠지..."
"그림의 떡? 근데... 어쩌지? 그 그림이 내것이 됐는걸.."
"뭐야?"
"헤헤... 이 멋진 동생에게도..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는 걸 말하는 거지... 난 말이야..
옆집누나만 봐오다가 말이야...그렇게 완벽한 여자도 있구나 싶은거 있지.."
"뭐야!! 이 자식이..."
콩나물 국에 넣기 위해 대파를 썰던 난 부엌 칼로 힘껏 도마를 내려쳤다. 그 소리에 놀라
동생이 입을 다물었지만.. 그것도 잠깐 녀석의 입가에 또 다시 느끼한 미소가 드리워지고 있
었다.
"근데.. 옆집누나.. 내가 그 여자를 보는 순간.. 굳은 각오 같은게 생긱는 거 있지.."
왠지 묻기가 꺼려졌지만.. 난 그 딴것을 무시하고 무슨 각오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녀석의
입가에 더 큰 미소가 걸리는 게 아닌가... 왜..녀석의 미소에..등골이 오싹해지는 걸까...
왜...why????
"헤헤... 난 말이야..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보고는 말이야... 누날 생각했다는 거 아냐..헤
헤...
정말.. 옆집누나가 아른거렸어.. 웃기지? 왜 옆집누나가 생각났을까 왜 하필 옆집누나일까.."
사람의 인내심에도 한계라는 게 있다는 걸 난 녀석을 통해..깨달았다.. 그리고.. 때론 그 인내
심이라는 것도.. 폭발할 수 있다는 것도...
" 그녀를 보면서 말이야.. 우리 뚱띵이 옆집누나를 확실하게.. 살을 빼놔야 겠다는 각오같은 게
생긴거지.
그래야.. 나중에 그녀가 우리 집으로 인사왔을 때.. 옆집 아저씨같은 일이 안 생길거 아냐..안
그래?"
넌.. 말이야...죽었어....이 자식아!!

"우~ 얼큰하다...."
뜨거운 콩나물 국물 을 마시며 동생이 내지른 탄성에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 을 되찾긴
했지만.. 그래도 녀석의 말이 너무 괘씸했던 탓인지... 난 이층으로 서둘러 올라가고 있었다.
"옆집누나, 어디가?"
"잘거야!! 이젠 깨지마!! 내가 너 땜시에...귀한 잠을 포기했다니.."
"옆집누나..운동 안가?"
"됐어!! 짜증나니까.. 나 깨울생각 하지마.!! 다시는 너랑 운동 안할거야!! 그리고.. 그리고...너
다시는 내 일에 신경쓰지마."
"갑자기 왜 화를 내? "
"...."
녀석이 바짝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게 느껴진 난 뒤를 확 돌아봤다.
"짜증나서 그러니까. 신경꺼~!! 자식이 말이야... 감히 누날 놀리려 그래..."
"헤헤.. 화났수당? 그럼.. 화 푸슈...내가 화끈하게 해줄테니까.."
"화끈? 웃기지마.. 너랑 있음.. 내가 화병 나게 생겼으니까..저리 꺼져."
"옆집누나.. 그럼.. 후회할 지도 몰라..."
방문을 열려 손잡이를 잡았던..나 또 다시 녀석의 말에 멈칫했다.
"뭘?"
"정말 몰라서 그래? "
"뭔데..뭘 어떻게 할건데?"
"나 혼자..운동 가야지..어제 옆집 아저씨랑 약속했잖아...같이 하기로..우릴 기다릴텐데..누난
잔다고 했으니까..나 혼자라도 가야할 거 아냐..."
"...."
녀석의 얼굴이 바로 내 앞까지 다가왔다. 허리를 굽혀서 날 보는 녀석의 눈길이 ...수상한 나
심장이 그대로 멈추고 있음을 알았다.
"아저씨가.. 옆집누나가 안나온 이유가 궁금할 거 아냐? 뭐.. 나야 워낙에 거짓말 하는 성격은 못
되니까..사실대로 말해줄 수 밖에 없지 뭐.."
"이 자식이!!!"
"빨랑 준비하고 나와.기다리고 있을테니까.. "
내가..너무 단순한걸까..아님..녀석이 고단수인걸까... 왜 난 늘 녀석에게 질질 매는거야...

"옆집누나.. "
"왜 불러,."
쌀쌀맞게 대답했다. 녀석이 금새 얼굴을 찌푸렸다.
"조금 나긋나긋 해질 수 없어? 어제 만난 그녀는 정말...부드러운..솜사탕 같았어.. 물론 옆집누나
가 그정도로 변하기를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막대 사탕 같았음 좋겠어."
"막대 사탕? "
"그래..지금 누난...뭐랄까...교관 같단 말이야.. 뭘 그리 꿍하고 있는지... 입술을 툭 튀어나오
고..."
"너 지금.. 내가 붕어같다는 소리하고 싶어!!"
"헤헤.. 그냥,, 다이어트를 하면서..성격도 약간 수정하면 좋다는 걸 말해주는 거지.. 완벽한
여자는 아니어도.. "
집을 나서는 내내 녀석의 잔소리는 내귀를 피곤하게 하고 있었다. 녀석의 입을 막을 생각으
로 대문을 활짝 열어제치는데 군청색 운동복을 입고 나서고 있는 선생님과 마주쳤다..
훤칠한 키가 너무 돋보였다..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가볍게 고개짓을 하신 선생님은 내 뒤에 있는 동생에게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럼.. 뛸까요?"

아침 운동을 하면.. 정말 녹초가 다 되어 집에 들어온다.. 녀석과 선생님은 뭐가 그리 좋은지
달리면서 내내 웃기만 했다. 그뒤를 졸졸 따라 가며 뛰고 있던 내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옆집누나. 왜 그냥 왔어?"
"졸려서.. "
난 이미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땀을 흘리며 운동복 차림 그대로 방에 들어선
동생이 헉헉 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옆집누나.. 그 아저씨 말이야.. 집이 대전이라는 거 알았어?"
"그래..언젠가 들었던 것 같아..."
그래..기억하고 말고..군대가는 그날 아침.. 우리 교실이 마지막 수업이 들어었지.. 벌써부터
울먹이는 친구도 있었으니까..난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는걸. 교탁 앞에서서 아쉬운 웃
음을 짓던 선생님을..넓은 칠판 가득 커다랗게 선생님의 이름과 함께 집 주서를 적어주셨던
선생님의 모습을...
"그건 왜 물어.."
"아저씨의 직업이 선생님이셨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 선생님이..누날기억하고 있
었다는게 신기하더라구..정말.. 벌써..거의 11년 정도 지났잖아.."
난 조용히 동생의 수다를 듣고만 있었다.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걸까... 뭐가 그리 신이나는
걸까...
옆집누나의 깊은 사랑앓이는 관심도 없으면서...

"그 아저씨.. 정말 좋은 사람 같았어..참..성격이 원만해..부드럽고..남자인 내가 봐도 정말..."
"나도 그 정도는 알아..그러니까 나가. 어서.."
"그럼..이것도 알아?"
"뭘?"
"그 아저씨..6대 독자라는 것 말이야..."
"뭐라구?"
"아무래도.. 그래서 따로 나와 사는 것 같아. 많이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집안에서 정해준
정혼자가 있다고 하던데? "
"정말?"
"응.. 곧 결혼해야 하나봐.. 병중에 계신 할아버지가 계시다고...이런... 늦었잖아."
"야야!! 너 어디가!!"
"옆집누나.. 나 데이트 약속이 있단 말이야..나중에 얘기 해 줄께.. 기다려.."
부리나케 방을 뛰쳐나가는 동생을 놓친 난 허탈함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제서야..우울
한 빛이 감돌던 선생님의 모습이 생각났다.. 왜 진작에 그걸 몰랐을까...

"초희야.. 초희야!!"
"우씨..또 뭐야..."
언제 잠이 들었을까.. 새엄마가 심하게 어깨를 흔들면서 잠을 깨우고 계셨다.
" 새엄마 계 하러 가니까.. 집 지키고 있어."
"누가 집을 업어가기라도 해!! 그냥 가면되잖아.. 왜 날 깨워..."
"아래층에 내려오란 말이야. 누가 오기라도 하면 어떡할래? 다큰 처자가 혼자 있다는 걸 이
동네에선 다 알고 있을텐데..."
"우씨..몰라...그냥 가.. 전화코드도 뽑아놓고 가고.."
"알았어..새엄마 금방 올테니까.. 청소라도 대충 해 놓고 있어."
"...으씨..."
정작 잠이 깬건.. 조용함 때문이었다. 아침겸 점심으로 대충 떼운 후 청소기를 들고 거실을
밀고 다니는 데 새엄마가 돌아오셨다. 근데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새엄마..왜 그래?"
"으그.. 속 터져!! "
뭐가 그리 속이 상하셨는지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주전자 체 벌컥벌컥 마신 새엄마가 거칠
게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새엄마..."
조심스럽게 새엄마를 부르자.. 갑자기 새엄마가 날 홱 하고 노려보는 게 아닌가..
"으그... "
"왜 그래? 갑자기 잘 놀다와 놓구선..."
"잘 놀아?넌 이 새엄마가 얼마나 속이 터졌는지 몰라서 그래.. 세상에나.. 네 친구 진희 결혼한
다면서?
넌 그 나이가 되도록 뭐했어!! 남들은 결혼한다 선본다 하는데.. 엄만 명함도 꺼내보지 못했
잖아.
결혼은 고사하고.. 애인이라도 있어야지!! 네 언니는 공부한다고 결혼에는 아예 관심도 없
지..
그나마..너는.. 그게 뭐냐!! 네가 무슨 아줌마야!! 확 퍼져있으니까.. 다들 네가 결혼한 줄 알
고 선보라는 소리도 없잖아!! 아이구~~~ 속이야!!"
이럴 땐 슬금슬금 눈치보며 빠져나가야 한다는 걸 아는 나.. 집을 나섰지만 갈 곳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집을 보니까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게 아닌가..이시간에..
선생님은 학교에 계실텐데...불안한 마음과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들어서는 데 현관문도 열
려 있는 게 아닌가..

"이게 뭐냐!! 이게 뭐냐구!! 도대체 언제정도 되야.. 정신을 차릴거야!!"
현관까지 왔을 때 안에서 들려오는 나이든 여자의 목소리가 내 발길을 막았다..
"왜 찾아오셨어요.. "
선생님이셨다. 근데.. 왜 목소리가 힘이 없지?
"네 아버지 쓰러지셨어.."
"그건.. 저때문이 아니잖아요."
"아니 그래도..."
"전 형이 아니예요..전 형이 아니라구요.. 형 처럼 사업 수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학
교를 그만두라니요!! 그건 제 직업입니다.."
"이젠 너 밖에 없다는 걸 알잖니..."
"모릅니다.."
"기석아!!"
"돌아가십시오..그만.. 저두 학교 출근해야 합니다."
여자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난 서둘러 몸을 구석진 공간에 숨겼다. 여자가 나오는게 보였
다.
대문앞에서 집쪽으로 돌아섰을 때에는 그야말로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그녀는.. 텔레비젼에
서 자주 봐오던... 탤런트 였다...그 여자가 선생님의 새어머니????

우당탕~~!!!
둔탁한 소리를 내며 마루바닥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유리깨지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작게 욕설을 퍼붓는 선생님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쨍그랑~!!
무슨 일인가 싶어 안으로 들어서는 데 갑자기 꽃병이 날라와 내 발밑에서 박살이 났다.
"어.."
막 집어던지려 했는지 선생님의 손에는 두터운 책이 몇권 들려있었다.
"선생님...."
날 보는 선생님의 눈에서 분노가 사라지기까지 몇분이 흘렀다. 들고 있던 책이 힘없이 바닥
에 떨어졌다. 바닥에 정신없이 흐트러져 있는 물건들을 발끝으로 치우며 거실로 들어선 난
우선 깨진 꽃병의 유리 조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냥 둬..."
"하지만..."
"됐어... 커피 마실까?"
"네? 네..."
부엌으로 선생님이 가신 다음에야 비로소 거실을 둘러보던 내 시선이 책장에 가 멈췄다.
빽빽히 채워져 있어야 할 책장의 책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미안.. 정신이 없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책을 줍는 선생님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나도 모르게 선생님에게 다가가 그 눈가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
렸다.
이게 무슨짓일까...이게...무슨..... 눈을 감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선생님의 곁에서 물러섰다.
"이렇게..물건을 마구 집어던지면.. 말이야..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게 느껴져... 답답한
안에 갇혀 있는 또 다른 나...."
"후우~~"
우린 아무말도 하지 않은 체 바닥을 치우고 있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도 선생님은 입
을 열지 않았다. 나 역시 그 침묵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초희야.."
"네?"
"사람은 말이야...그러니까... 사람은 말이야...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을 때가 아주 많아..그
래서 화가 나는 거지..그래서..내 안에 다른 내가 존재하는 건지 몰라... 그래야만이...살 수 있
거든....."
"선생님... 아까 그분..어머님이세요?"
"봤니?"
"네..탤런트...같았는데...."
"그래..맞아..우리 새어머니셔....."
선생님의 생각에 잠겨 있는 얼굴에는 수만가지의 얘기들이 담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선생님은 침묵을 지켰다.... 나 처럼...
"선생님...저기요..."
"응?"
"결혼은 말이죠.....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행복해요....아시죠?"
난 아까 우연치 않게 들었던 말을 기억해 내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내 말에 선생님이 환하
게 웃으셨다. 하지만.. 이내 그 웃음을 사라졌다.
"떄론...말이야..그게 내뜻대로 되지 않을 떄도 있어.. 정말.. 그럴때가 많지.."
"하지만.. 선생님은..이젠....그러니까....."
어른이잖아요...그말을 할뻔했다...만약 그 말을 하는 순간..난 또 다시..철없는 대학교 시절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다..내가 사랑하며 기다려 오던 그분 앞에서..나...철없는 10대로 돌아갈
것만 같아..겁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초희는 행복하니?"
"뭐가요?"
"결혼 말이야..."
"어....네.."
그럴거예요..내 신랑이 선생님이라면..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 제 곁에 있다면... 그럴거예
요..
지금처럼 외롭지도 않을거구요...텅빈 느낌이 들었던.. 가슴이 따뜻하게 느껴질거예요...
가난해도...슬프지 않을거구요..배가 고파도..그걸 느끼지 못할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낀다면..말이죠.. 이건..제 바램뿐이겠죠... 하지만..말이죠..그 생각만으로도 전 행
복해요....
"초희야?"
"네?"
"네가..행복해 보여서 정말... 선생님도 기쁘다구...정말로..내가..아끼는..제...사람이니까.."
"선생님...."
난 처음으로 선생님의 시선을 피했다..그분의 시선에..나도 모르게 끌려갈 것만 같아서...

"어라? 옆집누나 표정이 왜그래?"
늦게 들어오는 동생을 기다리며 마당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던 내 앞에 그녀석이 떡 하니 버
티고 서 있었다.
"저리비켜!!"
"왜그래?"
"너 때문에..달이 보이지 않아..."
"헉~!! 옆집누나!! 드디어...머리에..이상증세가 보이는구나..이런..사랑하면...."
"닥쳐!! 저리 비켜.."
"내가 옆에 앉아 있을까? 외 사랑은 말이지...무지하게 외로움을 탄다고 하던데....외로움에
취해 청승맞게 울고 있는거라면.. 말이야..."
"좋은 말 할때 가라..이젠..너 때리는것도..염증을 느끼고 있으니까..."
살벌한 분위기..그리고 싸늘한 말투에....당연히 녀석이 물러날 줄 알았다..하지만 녀석..오히려
내 옆에 앉아 어깨에 턱 하니 손을 얹는게 아닌가..이 자식이 미쳤어!!!
"옆집누나... 정말 그 분 좋아하고 있는거야?"
"어린 놈은..몰라...그 감정의 깊이를.."
"옆집누나!!"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녀석을 보니 녀석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있다.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이 동생을 늘 어리게만 보고 말이야...그러기야???"
피식 허기진 웃음을 터뜨리곤 시선을 돌렸다.
"시끄러.. "
"옆집누나.. 진실은.. 언젠가는 통하게 된다는 말이 있잖아..."
녀석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가슴 속 깊이 숨겨져 있는 허탈감을 쓸어내는 한
숨은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넌..너의 그녀와 잘 되고 있니?"
"그럼.. 시간이 갈 수록 말이야...히히... 나에게 점점 빠져들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쥐..."
"네가 그런게 아니고?"
녀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깨에 걸쳐져 있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툭 하고 떨어졌다.
"왜 그래?"
"겁이나.."
처음엔 내가 녀석의 말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녀석의 눈을 보는 순간..녀석도 나와
같은 심정으로 쓸쓸한 달빛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가까이...가고 싶지만...손을 잡고 싶지만...그럴수가 없어..마음을 열고 싶지만...겁이나..나중에
있을 이별은..모두 그녀의 몫이 되고 말테니까..."
"이별??"
"그래...누난 몰라..남자의 기분을 말이야...코 앞에 입대날이 다가와 있는데..여자친구라니..그
것도..놓치고 싶지 않은 그녀를 만났을 때의..심정이 어떤건지를..."
이번에는 내가 동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누가먼저랄것도 없이 동시에 무거운 한숨이 새
어나왔다.
"그녀가 그러니?"
"뭘?"
"놓치고 싶지 않냐구..."
"응.. 그래. "
동생의 진지함을..비웃고 싶었다. 예전에 녀석이 그랬던것 처럼... 짝 사랑에 괴로워 하고 있
는 날 비웃던 녀석처럼... 나도 놀리고 싶었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녀석이 갖고 있는 불안감이 무언지를 아니까...그것 때문에..나 역시 아파하고 있으니까..
"야야.. 우리 그만 들어가자.. 술이나 한잔 할까?"
동생의 팔에 팔짱을 끼우며 안으로 들어서던 난 고개를 돌려... 외롭게 혼자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았다. 그리고..난생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했다.
이 세상에서..나와 같은 슬픔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모두에게 희망을 주소서...

"야!! 일어나..운동가야지.."
베개를 끌어안고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녀석을 흔들며 깨우는데 녀석은.. 손으
로 귀를 막았다.
"옆집누나..나 도저히..일어날 수가 없으니까..옆집누나 혼자갔다와.... "
"이 자식이!! 이 새벽에 옆집누나 혼자 뛰라구?"
"옆집 아저씨 있잖아....아이!! 빨리 불끄고 나가!!"
"이 자식이!!"
나도 녀석처럼 질기게 녀석을 깨우라면..정말 깨울 자신이 있다..녀석에 나에게 했던 말..뚱띵
이..
와 비슷하게... 녀석의 단점을 찾아 부르라면...부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 힘없이 동생방
을 빠져 나왔다. 벌써 선생님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어..왜 혼자 나와?"
"그게...말이죠... 어젯 밤에..취해가지고서니..."
"그럼..해장국이라도 끓여야 하지 않아? "
"그냥 둘거예요... 그딴 거 다시는 하지 않기로 했거든요!!"
너무 완고하게 말을 했던 탓인지 선생님이 피식 웃었다.
"우리 초희가 속이 많이 상했나 보다.."
"속이야..엄청나게 상했었죠..그 동안.. "
"그래?"
"네.. 허구헌날.. 녀석의 잔소리를 들을때마다..."
아차!!
"녀석?"
"헤헤..그러니까요...제 말은 말이죠..."
"내 친구도 그렇더라..남편 흉 보는게... 유부녀들의..재미라면서... "
눈치를 못챈걸까.. 근데..기분은 왜 이모양이니...어쩌면..내심 선생님이 더 많은 걸 묻기를 바
란 건가.
먼저 뛰고 있는 선생님을 보며 난 한숨을 내쉬고는 선생님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남편은 무슨 일해?"
"학생이예요.."
"학생?"
"네.."
"어..이상하네..어제는.. "
"하하..야간 대학에..다니고 있죠.."
"...."
"결혼한지 얼마나 됐니?"
"결혼요?"
"응..."
"학교 졸업하구..바로 했어요..."
속으로 동생이 선생님에게 해줬던 말과 일치하기를 바랬다.어제 혼자 집에 오는게 아니었는
데....
다행히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으셨다.
"저..선생님.. 우리 이제 집에 가죠.."
"어..그래..."
집앞까지 와서야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초희야..오늘 하루 잘보내.."
대문을 들어서는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선생님을 보려 돌아봤을 때에는 이미 옆집은 대문이
굳게 닫혀져 있었다... 선생님도요....

"야야.. 너.. 그만 해라..보기가 역겹다..."
헤어스프레이로 곱슬머리를 잠재우는 동생의 모습을 보며 핀잔을 주자 동생이 웃어넘겼다.
"옆집누나..연애는 말이야..뭐든지 공을들여야 하는거야..옆집누나 보기에는 역겹게 보일지 몰라도..나
의 그녀에게..아마 내가 최고로 멋져 보일껄.."
"그래..저 잘났다."
"그나저나..옆집누나 오늘 아침은 어땠어?"
"뭐가?"
"선생님하고 같이 뛰면서..무슨 일 없었어?"
"무슨일?"
"그래.. 옆집누나가 화끈하게 접근을 했다던가..아님.. 영화처럼.. 일부러 넘어지면서 선생님을 불
렀다던가.."
"시끄러워!! 빨리 나가기나 해!!"
"그러지 뭐..."
동생이 나갔다..난 서둘러 내 방으로 들어와 잠을 자기 시작했다..
꿈속에서라도..내 바램들이 이루워질 수만 있다면.. 날씬한 내 모습과 함께..내 어꺠에 살포시
올려진 선생님의...손...을 꿈꾸며....난 미소를 지었다.


"초희야!! 여기야 여기!!"
조용한 커피 숖에서 호들갑스럽게 날 불러대는 친구들 덕분에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
이 집중됐다.
"뭐야!! 창피하게 왜 그렇게 소리치고 그래.."
"야야~!! 됐어. 그 보다 너 우리에게 해 줄말 없어?"
"해줄말이라니?"
곤히 자고 있는 날 불러댄 게 누군데... 푹신한 쇼파에 몸을 파묻고 앉아 있는 두명의 친구
를 바라보며 눈만 깜박였다. 두 명다 중대학학교를 같이 다닌 동창들이었기에 유별난 우정
을 과시하고 있었다.
"왜 이래? 벌써 들은 얘기가 있는데.."
"맞아~!! 지지배!! 혼자 꿀떡 숨겨놓고 야금야금 먹더니만.. 입이 붙어버렸나봐."
진희의 말에 수경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얘들이 왜 그래? 니들 무슨 소리하는 거야?"
"김 기석 선생님.. 너희 옆집으로 이사왔다면서?"
"캑캑!!"
물이 제대로 넘어갈리 없었다. 사래가 들려 정신없이 기침을 해대는 데 친구녀석들은 잠자
코 지켜보기만 했다.
"어디서 들었어?"
겨우 기침이 가라앉자 한모금의 물을 더 마셨다.
"듣긴.. 진희가 우연히 봤다고 하더라. 왜 얘기도 하지 않은 거야!! 내가 얼마나 좋아헀었는
데..."
이래서 세상에는 영원한 비밀은 없는가 보다.. 나만의 선생님이신줄 알았는데.. 벌써 친구들
이 알고 있다니..
"봤어?"
"그래. 설마설마 하고 뒤따라 가봤지.. 나원래 그짓 잘하잖아. 근데.. 세상에나.. 바로 너네 옆
집으로 들어가시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니? 넌 봤을 거 아냐.. 지지배.. 다른 소식은 쏜살같이 알리면서 왜 그건
그렇게 굼겼냐!!"
친구들의 비난에 난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게..."
"됐어!! 너도 그 선생님좋아 했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었겠지."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도 않는 수경을 보며 가슴이 따끔거렸지만 난 침묵을 지켰다.
그 어떤것도 선생님에 대한거라면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결혼 했겠지?"
"그렇겠지.."
"보고싶다. 시간이 지나서 보니까.. 뭐랄까..예전의 설레임 같은 게 되살아나는 거 있지."
"그럼.."
두 친구의 대화를 들으며 난 잠자코 앉아 커피만 마셔댔다.
"야~!!"
"응?"
"그러지 말고 너 선생님하고 만나게 해줘."
"뭐? 너희들.. 그분 만나려구?"
"그분?? 하하.. 그래. 만나야 할 것 같아."
"우씨..뭐야.."
"뭐긴. 제자가 스승을 만나는데.."
"근데.. 선생님이 널 알아봤니?"
헉~~!! 단전 호흡을 배우든가 해야지...
"어..그래"
"하~!! 그럼 우리도 기억하겠네.. 널 알아봤으면 말이야.."
"하지만.."
"됐어!! 날 잡아서 너에게 알려 줄테니까 넌 그동안 선생님에게 우리에 대해 자세히 알려
드려야 해."
"맞아.. 혹시 기억 못하고 계실지도 모르니까.."
역쉬.... 난 힘이 없다.. 우리 새엄마 말처럼..덩치 값도 못하지..난 친구들의 협박에 못 이겨 고
개를 끄덕이고 말았던 것이다...이씨....

친구를 만나고 들어와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음악을 듣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면서 동생이
들어왔다.
"우씨.."
"왜 그래?"
동생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성난 황소마냥 씩씩 거리는게 아무래도 녀석의 그
녀와 문제가 있는 듯 했다.
"옆집누나.. 그 아저씨 왜 그래?"
"뭐가? 누구?"
"옆집누나의 첫 사랑!! 내 데이트를 완전히 망쳐 놓고.. 아름다운 그녀.. 화가나서 가버리고.."
화가 난 상태일텐데도 여자친구 앞에 붙는 수식어는 빼먹지 않는 이상한 녀석...
"어떻게 했길래 그래?"
"아니. 그녀와 함께 차 마시려고 요 앞에 있는 커피 숖에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선생님을 봤
거든. 근데 날 무섭게 째려보는 거야!! 그 시선을 생각하면..."
녀석이 부르르 몸을 떨면서 손으로 턱을 만지는게 아닌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녀석에게
선생님이 떄렸냐구 물었더니 녀석이 콧 방귀를 뀌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게.. 그냥 째려 보기만 하는거야.. 얼마나 무섭게 쨰려봤으면 내가 쫄아
서 그녀랑 얘기도 못했을까... 그 바람에 내 태도가 이상하니까 그녀가 일어나서 그냥 가버
렸어!! 이~~!! 이게 뭐야!! 옆집누나 책임져!!!"
"이 자식이 어디서 떼를 써!!"
소리를 버럭 질러서 녀석의 투정은 잠재웠지만 기분은 묘했다. 왜 녀석을 설마.... 아냐..혹
시...
"설마.. 선생님이.. 무슨 오해를 한게 아닐까?"
"무슨...오해?"
"널..바람피우는 남편으로.....알고 있는게 아닐까.."
"오~!! 이런 젠장!! 순식간에..날....옆집누나!!"
절규어린 탄성을 내지르며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는 녀석을 보니 통쾌한 기분을 들었다.
"자자..진정해.... 그렇게 흥분한다고..바람 피웠던게... 가려지는 건 아니니까.."
이왕이면.. 동생을 더 놀릴 생각이었다.
"우씨...이게 뭐야...옆집누나 연애 사업 도와주려다가..혹하나 붙인 꼴이잖아!!책임져 옆집누나!! 내 그
녀 돌리도~~~~!!!"

"안녕하세요.. 선생님."
초희의 밝은 모습에 난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녀의 어깨에 턱 하니 손을 올려놓고
있는 초희의 남편... 할 수만 있다면 그 자식의 면상을 날려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마저도 들
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그래."
난 초희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혹시 어젯밤 무슨일이라도 있지 않았나 싶어서였
다.
"선생님.."
"어..미안...우리 뛰어갈까요.."
초희 신랑이 나와 나란히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도저히 이..자식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난 어제 오후 자신의 외도를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저렇게
태연하게 내 곁으로 다가올수있다니..
"저..선생님."
초희의 신랑이 불렀을 때 이미 초희는 뒤에 한참이나 뒤쳐져 있었다. 반갑지 않은 상황이
닥쳐온것이다.
"네."
"어제일은.."
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른 초희가 쫓아오기를 바랬다.
"오해였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남자의 뻔뻔스러움에 정말 할말을 잃어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오해였다는 남자의
말에 기가 찬 난 눈쌀을 찌푸리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니. 거의 노려보고 있었다.
"오해라뇨? "
"그녀는...그러니까 제말은...."
"됐습니다.. 못 들은걸로 하겠습니다. 하지만...전 제가 본 것을 믿습니다.."
난 얼른 말을 마치고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오해라니.. 내가 본 그들은 정말 다정한 연인이
상이었는걸.. 초희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옆집누나!!"
"왜 그래?"
"나 좀 어떻게 좀 해봐!!"
"뭘 말이야?"
정신없이 방안을 휘젓고 돌아다니던 녀석이 머리를 움켜잡은 체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다.
"아침에... 그 아저씨에게 말좀 해달라구~~!! "
"난 몰라.. 그러게 조심하지 그랬어!! 넌..내 남편이란 걸 잊었단 말이야?"
나 역시 녀석이 약간 불쌍하긴 했지만.. 솔직히 동생이 처한 상황에 어떻게 대치해야할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구조요청을 하면... 무슨 수로 도와준단 말인가... 이미 사
실대로 말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게 아닌가...불쌍하게도..녀석은 당분간 바람피우는 남편의
역활을 해줘야 한다..
그래야만이...통쾌한 복수가 되지...뚱띵이의 복수~~!!!
"아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냉정하게 내 변명도 듣지 않고 가버리는데 찬바람까지 불었
다구~!!"
"어떤 변명을 하려구?"
"그게...에잇 나도 몰라!! 답답해 죽겠네.. 아름다운 그녀역시 나에게 화가난 상황인데...."
"그건 네 일이야!!"
"옆집누나!! 그렇게 굴거야!! 나도 그러면.. 인정사정 볼 것없어!! 나도 그녀에게 모두 말해버릴거
야!! 모두!! 뚱뚱한 우리 옆집누나 도와주려다가 덫에 걸렸다구~!!"
타~~악!!
드디어 참고 있던 내 손이 먼저 행동했다. 뒷통수를 맞은 녀석이 날 째려보고 있다.
"너 자꾸 그러면.. 사태가 더 심각해질 수도 있어!! 그러니까 조심해!!"
"옆집누나!!! 그렇게 나가면 어떻게~~"
통곡하는 녀석을 남겨두고 혼자 방을 나온 난 화장실로 들어갔다.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기
엔 이보다 더좋은 장소는 없을 듯 싶었다...
그래..이렇게 시작하는 거야... 녀석이 잘만 해준다면... 선생님의 반응만 끌어낼 수만 있다
면....
어쩌면 사랑의 여신은.. 내 가까이에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웃음이 자꾸만 나왔다.

"야~!! 너 어디 또 나가?"
"그녀 만나러.. 안되겠어. 옆집누나때문에 그녀를 놓친다면..나 이 사나이 가슴에 한을 품고 지낼
것 같단 말이야!!"
나가는 동생을 막을 길은 없었다. 하지만.. 녀석의 그녀가 녀석의 말을 믿기만 해주길 바랬
다.
그게 무슨 말이었던...

소란스럽게 울려대는 벨 소리에 컴퓨터에서 물러나 현관으로 향해갔다. 방문자 확인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어이~. 형~!! 잘 지냈어?"
두개의 여행가방이 방문자 보다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낡은 청바지에 하얀색 셔츠를 입고
웃음짓고 있는 사촌 동생을 보는 순간~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어릴
때 부터 이녀석은 그런 존재였다.
"여긴 왠일이야?"
긴 여행에서 막 돌아온 듯한 녀석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었다. 녀석은 대뜸 날
밀치고는 자신이 들고 온 짐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체 거실 쇼파에 널브러졌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고는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는 게.. 불안하다..
"형~!!"
"왜?"
"당분간 신세 좀 지자. 괜찮지?"
또 다시 무언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야? 너 오피스텔 있잖아!!"
"아~! 거기. 이미 처분했어."
"처분하다니? 너 그럼 어디서 지내려구? 왜 팔았는데?"
"형 나 배고파. 우선 저녁이나 먹으면서 천천히 말할께.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녀석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대학로에 있는 작은 식당이었다. 시끌벅적한 이곳에서 무슨 얘
기를 한다고.....

"우와~!! 이런 맛이 아직도 살이 있었다니!! 캬~~~ 술맛 좋다!!"
부대찌개에 밥 한공기 소주 한병까지 거뜬이 해치운 녀석이 배가 불렀는지 담배를 꺼내 입
에 물었다.
"형-. 나 드디어 미국가."
"미국? 거긴 왜?"
"그냥 가는거지 뭐.. 공부도 하고..놀기도 하려구.."
"경영쪽으로?"
"아니. 이젠 그쪽은 싫어.지겨워졌어."
쓸쓸한 담배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얼마전에 담배를 끊은 난 나도 모르게 그 연
기를 맡고 있는 걸 알고 얼른 물잔을 집었다.
"기찬이 형이 왜 죽었다고 생각해?"
기찬이는... 내 형이었다. 불혹의 나이로..저세상으로 가버린 우리 형이었다.
"...."
"형은 성공했어. 잘 나가는 법률 회사에.. 외삼촌의 기대까지 한몸에 받으며.. 변호사로서 이
름을 날렸으니까.. 조금만..더 살았다면...아마도 판사 정도는...됐을거야.."
녀석의 말 속엔 보이지 않는 적대감이 서려 있는 듯 하다.
"기찬이 형은.그게 전부인줄 알았을거야.. 성공이 모든걸 대신 해준다고 믿은 사람이니까..
형?"
갑자기 녀석이 날 쳐다보았다.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왔을 텐데도 눈빛만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왜.."
빈 소주잔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녀석의 시선을 피했다.
"알고 있었어?"
"뭘?"
"기찬이 형..형수랑 이혼수속 중이었어."
뒤에서 누군가 뒷 통수를 세게 친 것 마냥 정신이 몽롱해졌다. 자신에게 작은 결점을 만들
지 않게 모든것에 있어서 완벽을 추구했던 형이..이혼을 결심했었다구??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형의 죽음하고 무슨..."
"형수가.... 집을 나갔었어. 아이를 데리고..."
"형수가 가출을 했었다고? 하지만 왜?"
내 질문에 녀석이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곤 공중으로 하얀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그 연기안에... 씁쓸한 기분마저 담아 쓸어낸 것 마냥...녀석은 그런 표정이었다.
"형수는 알았던 거지... 인생에 있어..성공은...다른 걸 잃어야만이...그게 실현된다는 것을.."
"...."
난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녀석의 말을 기다렸다. 손짓으로 식당 아줌마를 부른 녀석은
술을 더 시켰다. 비워진 소주잔 가득 술을 따른 녀석은 완샷으로 가볍게 술잔을 비웠다.
"그 형은...앞만 보고 달렸어..뒤에 쳐져 있는 가족들을...보지도 못한체..앞만 향해 달려갔지..
그래야만이..외 삼촌의...기대를 져버리지 않으니까..."
녀석의 말에 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한 아버지 역시 변호사에서..검사로.... 명성을 떨쳤
던 분이셨다. 그분은 자신의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이 완벽하길 바라며 두 아들이
법률쪽으로 나아가길 바라셨다. 하지만.. 난..그 쪽하고 정 반대의 성격이다.. 너무 완벽하면
숨이 막힐 것만 같은데...
어떻게..딱딱한 직업을 가진 체 평생을 저울질 하며 살라는 건가... 하지만 나와 달리 형은..
아버지의 뜻을 져버리지 않았다. 물론 6대 손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니고 있어서..어쩌면 더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모른다...
"뒤늦게 혼자임을 알았지만..이미 너무 늦은 후였어.. 형수는 이미 형에게 온갖 정이 모두 떨
어진 후였거든... 형은...누구한테도 하소연 할 수가 없었어..자신을 그렇게 완벽주의로 만든
외삼촌에게도...
나약한 외숙모도..형을 이해할 수 없었을 테니까... "
불현듯 병원 영안실에서 본 형의 시신이 떠올랐다... 입가와 눈가에 서려있던 우울함.....
형은... 어떤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약을 먹었다.. 집안 어딘가에 두웠던 농약으로..완
벽한 자신의 인생을 막을 내린것이었다...
"그랬겠지..."
사촌 동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우연히 문가 쪽을 보았다. 정말 우연이었다...
젊은 남녀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커플이구나 하면서 고개를 돌리려는데..남자의 얼
굴을 다시 보는 순간..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초희의 남편이었다.!!
눈에서 불이 확 켜지면서 시끄럽게 떠드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하면
서 남자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기 시작했다... 수줍게 남자의 팔에 팔을 끼우며 웃고 있는 여
자는 저번에 보았던 그여자였다..이럴수가...남자의 외도가 확실해 지는 순간이었다....

"형~!! 왜 그래?"
심각한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지면서 살 얼음이 얼고 있는 마당이었다. 난 가까스로 화를
가라앉히며 자리에 앉았지만 그들 두사람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일을 어쩐담~~ 이일을....

"형!! 왜 그래?"
난 녀석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그들쪽만 바라보며 술잔을 넘기고 있었다. 초희의 남편은
이젠 느긋하게 여자의 어깨에 손까지 올려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는 사람이야?"
"그래."
녀석도 그들을 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가 불륜인지 모르는 동생은 담배만 피
워댈 뿐이었다.
"누군데 그렇게 째려보고 있는거야? 저 여자 알고 있어?"
"아니. 남자를 알고 있지..그것도..아주 잘...."
그들이 내 시선을 의식할때까지 계속해서 노려보고 있을 작정이었다. 집에서 남편이 오기만
을 기다리고 있을 초희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녀석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주고 싶지
만...
" 형.. 우리 그만 나가자. 갑자기.."
"안돼!! "
남자가 손을 들며 주문을 하려 하고 있었다. 난 몸까지 그쪽으로 돌린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예 숨까지 죽이며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남자가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놀란 남자가 서두러 여자의 어깨에 둘렀던 팔을 내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
했다.
"형!! 그만 봐! 그러다가 저 남자 심장마비라도 일으킬 것 같아.."
"넌 가만히 있어. 저 자식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가 있다고!!"
난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에게 무턱대고 소리부터 질렀다. 놀란 동생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
곤 그 녀석도 그쪽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 정말못된 놈일세... 비열한 놈!!"
남자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도 않은 체 우리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
기만을 기다리가다 벌떡 일어나 다짜고짜 녀석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댓자로 바닥에 쓰
러지는 남자..
그 통쾌함도 잠깐 남자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나자 더 이상 속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된거.. 끝장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나쁜 자식~!!"
"저..이건.. 정말..."
말을 더듬으면서 잡힌 멱살을 풀려고 바둥거리는 녀석을 밀쳐내고는 손을 털었다. 이 자식
에게 손을 댔다는 그 자체마저도.. 불결한 마음에서였다.
"정신차려!! 가자."
동생이 나오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난 성큼성큼 가게를 빠져나갔다. 소란스러웠던 가게안에
정적이 감돌면서 남자의 투덜대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지만 난 빠른 속도로 그곳을 빠져나
왔다.

"초희야!!"
"네?"
방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던 난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미 잠옷으로 갈아입고 쇼파
에 누워 동생이 오기를 기다리시며 텔레비젼을 보고 계셨던 새엄마가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
켜 세웠다.
" 얘가 또 늦네.. 새엄마 잘테니까.. 동생 들어오면 문 열어줘."
"알았어..."
리모콘을 찾아 TV 전원을 끈 후 난 밖으로 나왔다. 11 시가 넘어섰다. 녀석의 그녀와 잘
되었나 보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멀리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생인줄 알고 대문을 열고 나섰는
데.. 가로등 불빛 아래 나타나는 두명의 남자.. 어둠속에 몸을 숨긴 체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
다리는 데 그들의 발길이 그녀의 집앞을 지나가려 했다.
"어? 선생님!!"
"초희니?"
"네.. 어디갔다 오세요?"
"응.. 사촌 동생녀석이 와서.. 술 한잔 하고 오는 길이야.."
그제서야 선생님 곁에 서 있는 키가 큰 남자쪽을 보았다. 선생님처럼 키가 컸지만.. 덩치는
훨씬 좋았다. 헉~~ 내가 선생님에게 마음만 빼앗기지만 않았어도...스읍~~~

초희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아까 술집에서 보았던 그녀의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또 다시 화
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초희가 불쌍하기까지 했다.
"남편이 아직 안 들어왔니?"
"네.. 좀 늦네요... 오늘... 모임이 있다고 했거든요.."
모임? 여자와 단둘이 갖는 모임을 말하는 거겠지... 예전에 초희에게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남자는 기다리지 말라고..했던 말이...
"기다리지 말고..그냥 자...그래봤자...아무 소용없으니까.."
"네?"
"아니다. 그만 들어가라.."
그녀에게 말해줄수 없음이 답답했다..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초희가 안쓰러웠다.
그녀의 사랑을 무시하는 남편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
었다.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으니까..비록 내가 주는 상처가 아니지만... 그녀가 상처받는 건
싫었다.
행복하기만을 바랬다...그래줄거라 생각했다....

초인종 소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엉뚱하게 핸드폰이 울렸다. 늦은 시간에 전화 걸 친구들을
떠올리며 플립을 여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야!! 빨리 문 열어!!"
화가 나 소리치는 걸로 보아 녀석의 그녀랑 잘 되지 않은 듯 싶다.
"야. 벨을 눌러야 할 거 아냐!!"
"빨리 문이나 열어!!"
역시 소리만 버럭 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감히 누구한테 화풀이를 해 --- 속으로 녀석에게
퍼붓을 말들을 생각하며 대문을 여는데 녀석이 손으로 입가를 가린체 날 밀치고 안으로 들
어섰다.
"야, 너 누구한테 화풀이 하려구 그래, 응? 귀엽다고 봐주는것도...야, 너 얼굴이 왜 그모양이
냐?"
동생이 대뜸 입가를 가린 손을 치웠다. 희미한 조명아래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멍자국~~
오만가지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너 싸웠니?"
"쳇~!! 그 쪽은 싸운거겠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무슨 말이야? 누가 너한테.."
"다짜고짜 한대 얻어 터졌어. 그 한방에 나가 떨어져 엉덩 방아도 찧고.. 간신히 달래 놓은
그녀 앞에서 완전히 묵사발 됐어. 오늘나.."
"헤헤.. 완전히 새 됐어?"
"옆집누나--!! 지금 웃을거야?!!"
대놓고 웃을 수도 없고해서 고개를 돌린 체 웃고 있는데 녀석이 또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이---!!"
난 동생의 뒷 통수를 한대쳤다. 버릇은 확실하게 고쳐놔야 하니까..
"어디다 소리를 지르고 그래!! 옆집누나가 네 화풀이 대상인줄 알아?"
나 역시 동생못지 않게 침까지 튀겨가며 소리를 질러댔다.
"요 며칠 손을 안대니까... 까불고 있어!!"
"아이구---!! 나 죽갔네..."
아니 이녀석이 갑자기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팍팍 때리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나도 입
을 다물었다.
"울고싶어!! 정말 울고 싶다구!!"
한참을 날 내려다보던 녀석이 갑자기 자신의 방으로 쏙 들어가는 게 아닌가.. 다른 때 같으
면 나 못지 않게 한바탕 퍼붓을 녀석인데..

괜한 호기심으로 녀석을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등을 돌린 체 옷을 갈아입은 녀석이 등을
돌리는 순간 내 입에서는 짧은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왔다.
"야!! 너..."
입술이 퉁퉁 붓고 피가 맺혀 있었다. 입술 끝 주위에는 시퍼런 멍자국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고소할거야.. 젠장!!"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심한 상처에 화가 난 동생이 씩씩 거렸다.
"누구한테 맞은 거야? 싸움에 말려든거야?"
그제서야 난.. 어느 정도 심각한 척은 할 수 있었다.
"......누난 몰라도 돼.."
입을 다문체 생각에 잠겼던 녀석이 한참후에 내뱉은 말이었다.
"야. 말해봐. 얘들 풀테니까.."
주먹 쥔 손으로 손바닥을 탁탁치며 으름장을 놓자 녀석이 피식 웃었다.
"정말?"
"그래.. 말만 하라니까.. 이옆집누나의 파워를 아직도 모르는 인간이 있었다니..."
"진짜로.. 옆집누나의 그 아저씨 패줄수 있어?"
능글맞게 웃는 녀석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머리회전이 느린 난 그제서야 녀석의 말이 이
해갔다.
"내... 그분? 너 그러면...."
"젠장~!!"
"너... 설마 그분한테 시비라도 걸은거야? 그래서 맞은 거야?"
"옆집누나!!"
엉뚱한 상상에 동생이 소리쳤다.
"말해봐..왜 그분이 널 때려? 그분처럼 순한... 양 같으신 분이.."
"하~!! 나중에 아예 하나님이라고 부르겠네?"
녀석이 잔뜩 비뚤어진 말로 선생님을 비꼬았다.
"하여튼.. 다음에... 또 이런 상황이 있다면.. 나도 참고 있지만은 않을거야.. 두고봐~!!"

"형..."
침대에 누워있던 녀석이 날 불렀다.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체 녀석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녀석이 또 다시 불렀다.
"왜.. "
"아까..그녀석 말이야..."
"응..."
"형 한테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여자랑 관련이 있는거야?"
"...."
녀석의 말에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이 멈췄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
며 있었다.
"형이 그렇게 이성을 잃은 모습은 처음 본 것 같아.. 그 여자랑 무슨 .."
"제자였어.. 11년 전에 교사로서 첫 발걸음을 했던 학교에서....가르쳤던 제자."
녀석이 헛된 생각을 갖기전에 난 제자라는 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래? 제자라구?"
"....."
"그랬구나...어쩐지..."
말꼬리를 흐리는 녀석때문에 난 몸을 돌려 녀석을 보았다. 팔베개를 한 체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는 녀석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뭐가.."
"형이..무척 아낀다는 느낌이 들었거든...단순히...제자라면.. 그럴수도 있구나..싶어."
"그만 자라..피곤할텐데.."
난 겁이 났다. 녀석이..나도 모르는 어떤 말들로 날 당황스럽게 할지 몰랐다.
"형.."
"또 왜?"
나도 모르게 그만 짜증을 냈다. 그 바람에 모니터에 잘못된 글이 올라갔다.
하지만 정정을 못한체 녀석이 빨리 자기만을 기다렸다.
"그여자에게서..무언가를 느낀 것 같아..나..형!! 어디가?"
그만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방안이 답답해져 오고 있었다...아마도..혼자 생활
하다 보니까... 혼자있는게 익숙해져서...다른 이가 곁에 있는게 ...답답해진 탓이겠지..
절대로..절대로...다른 게 있는 건 아니겠지...절대로....

"운동가자."
동생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동생은 아직도 자고 있었다. 흔들어 깨울까 하다가 그냥
혼자 집을 나섰다.이미 선생님은 나와 계셨다. 인사를 막 하려는 데 또 다시 대문이 열리며
어제의 그 남자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헤헤.. 반갑습니다. "
선생님보다 호의적인 태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남자는 덥석 내 손을 잡고는 악수
를 했다.
"손이 무척 곱네요.."
"네?"
"손이..."
"그만 갈까?"
선생님의 무뚝뚝한 말에 남자가 눈쌀을 찌푸리며 잡았던 내 손을 놓았지만 이내 윙크를 해
보였다.
"원래 저래요?"
먼저 뛰고 있는 선생님을 가리키며 남자가 물었다. 그 바람에 난 또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요..."
"아침에 무리하게 뛰면 안되니까..우린 천천히 걸어갈까요?"
"네??"
어떻게 하기도 전에 남자가 내 손을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붙잡힌 손을 빼내려구 노
력을 해봤지만 남자는 모르는 척 힘차게 손까지 내두르며 걷고 있었다.
"저어..."
"남자가 가장 절망할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손을 놔 달라구 입을 열었는데 남자가 대뜸 질문을 던지는 바람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 옆에서 누군가 같이 걷기는 첨인지라 당황스럽고..약간은 설레임이 있는 지금 난 어떤 말
도 하지 못한 체 고개를 저었다.
"느낌이 좋은 여자를 만났지만.. 그 여자가.. 결혼했을때예요..그때가 남자가 가장 절망하는
순간이예요."
이렇게 말을 마친 남자가 날 보고 싱긋 웃는 그 순간.. 잠깐이지만 내심장이 움직임을 멈추
었다.
"그럼.. 여자가 절망했을 때는요?"
"여자가??"
골똘히 생각하는 남자를 바라본 다음 멀리 뛰어가고 있는 선생님의 뒷 모습을 보며 말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랑을...보지 못했을 때예요.."
"하하...그렇구나!!"
"우리도..그만 뛸까요?"
"그러죠."
상쾌한 아침 공기를 가슴깊이 들이마시며 땀을 흘리며 달린다는게 이렇게 기분이 좋은 줄
몰랐었다.
그리고... 낯선 남자가 이렇게 친근해질수 있다는 것도 첨 알았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
지 못했다. 선생님 얼굴에 보이는 어두운 그림자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옆집누나, 운동갔다 왔어?"
"응.. 갔다 왔어. 넌 지금 일어난거니?"
샤워를 하고 나오자 녀석이 쇼파에 앉아 있는게 보였다.
"옆집누나 체중은 어떄? 좀 빠졌어?"
"그건 왜 물어?"
당연히 좋은 말이 나올리 없었다.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꺼낼때면 은연중에 나도 모
르게 목소리톤이 높아진다.
"아니..옆집누나 모습이.. 며칠 전보다 훨씬 날씬해진 것 같아서."
"으그.. 며칠이나 갈까 싶다. 다이어트 중이면 그냥 포기하고 빨리 밥이나 먹어."
부엌에서 우리 말을 다 들은 새엄마가 소리쳤다. 그 말에 동생은 내 눈치를 살피는게 보였다.
늘 그랬지만 엄만... 좀 뭐랄까...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종종 하시곤 했다. 이젠 그 말
에 익숙해질때도 됐지만.. 오늘도 난 새엄마의 말에 속이 상했다. 그걸 알고 있는 동생은 내
곁으로 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옆집누나 괜찮지?"
"그렇지 뭐..."
씁쓸한 웃음을 짓고 부엌으로 들어선 난 여느때 같으면 밥사발 가득 담긴 밥을 맛있게 먹었
겠지만.. 이상하게도 밥맛이 없었다. 밥 공기를 들고 밥통으로 가는 데 새엄마가 그 모습을 보
고는 코 웃음을 쳤다.
"아서라.. 그렇게 하고 나중에 밥 많이 먹으면 오히려 역 효과가 날테니까.."
"새엄마!! 이젠 그만해!! 지겨워죽겠어!! 새엄마는 뚱뚱하다고만 말했지만 한번도.. "
이게 아닌데..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새엄마의 말에 벌컥했던 난 그만 밥 공기를 소리나
게 식탁에 내려놓는다는게..그릇이 깨지고 만 것이다...
그 소리에 놀란 새엄마와 난 서로의 얼굴만 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눈이 따끔
거리면서..
목안이 아파왔다. 눈물이 주르르 내 뺨위로 흘러내리고 있음을 알았지만 난 닦아내지 않았
다.
"새엄마..미안해.."
"됐어.저리가. 새엄마가 치울테니까..."
새엄마의 목소리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어쩔줄 모르며 서성이는 데 동생이 옷깃을 잡아당겼
다.
"옆집누나 나와..."
"그래..."
동생과 함께 정원으로 나온 난 눈물을 훔치며 의자에 앉았다.
"속상하지?"
"조금...이젠..익숙한걸."
"나도 예전에는..몰랐어..새엄마와 옆집누나가 티격태격 할때마다 뒤로 물러서지 않는 옆집누나가 이해
가 안됐는데..지금은...미안해 옆집누나... "
동생의 사과에 난 눈가를 훔치며 동생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됐어.."
"새엄마가 너무 고지식해서 그래...이상하게도..옆집누나한테만 더 야단이신게...흠이지만.."
"..."
"옆집누나..옆집 아저씨랑..잘 돼서...시집가라..옆집누나가 살찌는건 어쩌면 새엄마가 주는 스트레스때문
일지도 모르니까.."
"그런게 어딨어..."
"옆집누나..그 선생님...정말로 옆집누나를 아끼는 거야...어제 날 떄리면서..화를 내는모습을 보고 느꼈
어.
어느 남자가 자신과 아무상관도 없는 여자때문에..그렇게 이성을 잃겠어? 날 때리는 그분의
눈을봤어..진심이었어..옆집누나..조금만 기다려...아직 확인해야 할께 더 남아 있거든.."
진지한 표정의 녀석을 볼떄마다...난 왜 소름이 돋는걸까. 특히 저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을때
는..더 그랬다.

"형. 나 심심해 죽겠다. 오락좀 하자."
"됐어!! 너 함부러 컴퓨터 건드리면 안돼.. 보통 비싼게 아니니까. "
"형!! 그럼 하루종일 나 혼자 집에서 뭐하라구??"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출근하기 위해 대문을 나서는데 초희의 남편도 나오고 있었다. 날 보자 남자가 입가로 손을
가져갔다. 어제 내가 떄린 곳에 시퍼런 멍이 나 있었다. 약간의 죄책감 비슷한 감정은 들었
지만.. 어젯밤 내가 한 행동은 정당 방어와 같은 행동이었다.
"안녕하세요."
".."
친근한 웃음을 짓는 초희의 남편을 무섭게 쨰려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어젯 밤의 숙취가 아직도 남아있는 듯 해요..."
남자는 일부러 입가를 문질렀다. 하지만 난 남자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체 묵묵히 내 갈
길을 걷고 있었다.
"선생님.."
남자가 날 불렀다. 그냥 지나칠수도 없고 해서 난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남자를 쳐다보지
는 않았다.
"언젠가는..어젯밤의 일들이 엉뚱한 오해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과연...그럴까요?"
난 주차되어 있는 차에 올라탔다. 멍청하게 서 있는 남자를 외면한체 차를 출발시켰다.

"초희야...새엄마야..들어가도 되겠니?"
평소답지 않게 예의를 갖추는 새엄마였다.
"네..들어오세요."
들어오셨지만 나와는 전혀 시선을 마주치지 않던 새엄마가 내 앞에 하얀 봉투를 내미셨다.
"이게 뭐야?"
"용돈 좀 넣다...너 돈 떨어졌을 거 아냐.."
"..."
"아침마다 운동한다고..종선(동생)이게 들었어...시간도 있으니까..헬쓰장에도 다니구..우리 초
희 이번만큼은 꼭...성공했으면 좋겠다.. 아까는..새엄마가 미안했어..."
"새엄마..."
"엄만 말이야...속상했었어...집안이 넉넉치 못해서...계절마다 옷도 못해주는 것도 그렇구.. 다
른 아가씨들처럼.. 이쁜 옷을 입지 않는 네...기분이 어떠할지를...알고 있으니까..속이 상해서
그런건데..
새엄마 딸 초희는.. 상처를 받았구나...미안하다...적지만.. 네 맘에 드는 옷도 사 입고.. 운동도
시작해."
새엄마의 품이...이렇게 포근하고 따뜻한지..몰랐다.. 한번도...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고마워요..새엄마.."
"....고맙긴... 새엄마 잠깐만 나갔다 올께.."
"응.."
돈 봉투에서..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헤헤..근데 밥을 안 먹어서 그런가.. 배가 고픈데..."
냉장고를 뒤졌지만.. 입맛이 당기는 음식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새엄마가 주신 돈을 들고 슈
퍼로 갔다.
"어.. 여기도 뵙네요.."
뒤에서 들려오는친근한 목소리....

"아.. 네.."
남자의 웃음에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나도 환한 웃음을 보였다.
"어떻게 오셨어요?"
내 손에 들린 장바구니에는 인스턴트 식품 몇개가 자리잡고 있는 반면 남자의 바구니는 시
금치, 당근 계란, 햄등이 들어 있었다.
"그냥...한끼 때우려고 왔죠..뭐... 근데 김밥 만들려구요?"
"아..네. 갑자기 김밥이 먹고 싶어서요..."
뒷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 남자를 보며 그 미소가 선생님과 닮았음을 알았다.
"아직 점심 안드셨죠?"
"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미소가 걸려 있는 입술을 보다가 남자의 물음에 놀라면서 고개를 돌
렸다.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걸 알았을까...
"아뇨..."
"그럼 저희 집에 가서 같이 드실래요? 어차피..그쪽을 보니까.."
서둘러 장바구니를 등뒤로 감추었다. 남자의 제안에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했지만.. 난 단순
했다.
"좋아요."
"됐어요!! 그럼 본격적으로 장보기를 할까요?"
남자는 내 바구니에 들었던 인스턴트 식품을 제자리에 모두 놓고는 마지막으로 과일을 사고
는 가게를 빠져나갔다.

"혹시.. 계란 부칠수 있어요?"
"계란요? 넓게요?"
"네.... 계란에서는.. 자신이 없거든요.,. 그거 뒤집는게 힘들어요..잘못 하면 반으로 찢어지거
든요..."
"저두 그래요.. 하지만 새엄마가 알려준 방법이 있지요..."
"어떤거?"
"어..그러니까..에잇~!! 그걸 어떻게 말로 해요? 직접 시범을 보여야죠..."
"참.. 그렇지.."
집에 도착할때까지 남자는 넉살좋은 웃음을 보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집에 들어서자 마자
부엌으로 직행한 봉투안에 있는 물건들을 식탁 위에 올려놨다.
"햄, 계란, 당근, 시금치...김...치즈..깻잎....그리고....그리고..."
남자는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재료를 꺼내다가 갑자기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이럴수가~!!"
남자의 굳어있는 얼굴에 가슴을 졸이며 남자를 보던 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계속오면서 뒷끝이 개운치가 않았어요....이럴줄 알았다니까요...이럴줄..."
"뭔데 그래요?"
"하하.. 단무지가 없잖아요..단무지가.."
"네? 정말요?"
재료를 다시 확인해봤지만.. 김밥의 제일 중요한 역활을 하는 단무지가 보이지 않았다.
난감해 하는 남자와 달리 난......그래도 백수중의 백수가 아니었던가... 요리에는 일가견이 있
는 만큼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뭐 찾아요?"
"오이요."
"오이요? 그건 왜요?"
"단무지 없어도 오이만 있어도 맛있는 김밥이 될 수 있거든요.."
"헉~!!"
남자는 냉장고 옆에 서서 지저분한 냉장고 안을 뒤지지는 날 지켜보고 있었다.

"근데요..."
"네.."
야채실을 뒤지면서 썩고 있는 양배추를 꺼내고 있는데 남자가 또 다시 말을 걸어왔다.
"전...김밥을 .."
"어라.없네..안되겠어요. 슈퍼에 가서 사와야 겠어요."
허리를 펴고 일어나는 데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미적거리고 있었다.
"왜 그래요?"
"저 그게.. 말이죠.."
"네. 말해보세요."
"하하.. 전 김밥을 어떻게 만드는 지 몰라요.. 한번도 해 본적이 없어서요...하하,,,"
이 남자의 미소가.. 무기였던 것이다..미소가 이쁜 남자들에게 속으면 안되었는데..
"네? 김밥을 만들줄 모른다고요?"
되물으면서 난 식탁위에 있는 재료들을 쳐다보았다.
"하.. 어떻게...저 재료들을 살 수 있었어요? 만들줄도 모르면서..."
"한심하죠..하지만... 전 저 재료들만 있으면..그냥..만들줄 알았죠.."
"집에서 한번도 본적도 없어요?"
"네."
뭐든 그렇게 자신있게 대답해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난 한숨으로 대신했다.
"좋아요. 제가 만들테니까요. 슈퍼에 가서 단무지 사와요."
"하하.. 그건 제일로 자신이 있죠. 금방 갔다 올께요.."

"잘 봐요.. 계란을 부칠때에는요... 이렇게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는 화장지로 한번 기름
을 닦아내줘요...그리고 불을 중불로 줄인다음에.. 후라이팬을 달궈요.."
남자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메모지를 들고 내가 하는 말들을 자세히 적기 시작했다.
"다음은... 맞다.. 계란을 풀때에는 한스푼 정도 물을 넣고...."
"하하.. 그럼 되는 거예요?"
"네..."
"반쯤 익었을 때 뒤집어 주면..이렇게..."
첨에는 좋았다.. 하지만.. 이게 뭐야.. 막 뒤집으려 하는데 계란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게 아닌
가..
당황한 난 수습을 하려 허둥대고 남자는 웃으면 뭔가를 열심히 메모지에 적고 있었다.
"우씨..이게 아닌데...'
"하하.... 괜찮아요.어차피 우리가 먹을건데요..뭐. 나중에 제가 한번 해보죠."
당황한 내가 남자에게 뒤집기를 건네고 자리를 피했다. 햄을 썰고 있는데 남자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와.. 이렇게 하면 돼죠?"
완벽한 둥근 모양의 계란이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그걸 보며 웃는 남자의 눈에는 승리감 비
슷한게 서려 있었다. 날 놀라게 한건 그 눈빛이었다. 첨 해보는 낯선 일이었는지 남자는 기
쁨으로 눈이 반짝이 고 있는 것이었다.
"하하.. 생각보다 쉽네요.."
뭐야~~ 열이 확 올랐다...
"됐어요!! 그럼 단무지 썰어요..이런모양으로.."
남자는 내가 시키기가 무섭게 빠르게 해내고 있었다. 마치 여러해동안 김밥만 전문으로 해
왔던 사람마냥.. 신이 나 있었다.
"우리.. 김밥 먹은 다음에 오목을 둘까요? 어때요?"
"오목요?"
"네.. 전 그게 좋거든요.. 단순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생각을 집중시켜주잖아요."
"하지만.. 그건 게임이잖아요..우리집에서는 500원씩 내기를 걸던데.."
"남편하고요?"
남자의 입가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어색한 침묵이 잠깐 동안 흐리고 있었다.
뭐때문인지 모르지만 마음속 한켠이 껄끄러워졌다..
"네..그래요."
"그럼.. 우리도 해요. 하지만.. 진실 게임으로 하죠. 어떄요?"
"진실게임요?"
"네. "
"...."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밥을 말면서 난 어떤식의 물음이
오고갈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와우~!! 제가 이겼어요!!"
바둑알을 튕기며 내가 소리치자 남자가 짐짓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어째 제가 불리한 쪽으로 기울고 있는 듯 한데요?"
"하하.. 내기는 잊지 않았겠죠?"
사실 내 머릿 속에는 선생님에 대한 질문이 가득 차 있었다.
속 마음을 감춘 난 먼저 남자의 이름부터 물어보았다.
"정말 그게 궁금했어요?"
"네. 솔직히 제대로 소개받지 못했잖아요."
"실망인데요. 전 초희씨가 좀더...사적인 걸 묻길 바랬는데.."
"사적인거요?"
"뭐 그런거 있잖아요. 제가 유부남일지도 모르니까.."
"유부남이세요?"
"음... 질문은 한가지씩 받기로 하겠어요. 제 이름은 기현이예요."
이름을 밝힌다는게 쑥쓰러웠는지 기현씨는 빠르게 말을 마쳤다.
"나이는요?"
"스물 아홉이예요."
"어, 생각보다 젊네요. 전..선생님보다 한두살 아래일 거라 생각했어요."
"제가 그렇게 늙어보여요?"
기현씨의 말에 웃음을 지으며 바둑알을 놓았다.
"자. 또 시작해 볼까요?"

"얏호~!! 드디어 제가 이겼어요. 초희씨.. 긴장하셔야 될거예요. 저 엉뚱한 질문을 할지도 몰
라요. 대답을 회피한다거나.. 뜸을 들이면.."
"뜸은 밥지을때 하는거 아닌가요?"
"하하..역시!!"
후식으로 마시던 냉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난 편하게 다리를 뻗었다.
"초희씨.....음 첫눈에 사랑에 빠진 적 있어요?"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신입생때 큰 키에 검정 뿔테 안경을 낀 젋은 선생님의 순수해 보이는
인상에 마음을 빼았겼으니까...교복을 입은 나처럼 그 선생님도..깨끗하게 손질되어 있는 양
복을 입고 있었다. 교단에 올라서면 선생님 얼굴을 보기 위해 난 고개를 뻣뻣이 들어야 했
으니까..50명의 아이들 모두 그렇게 선생님을 봤지만 난... 특별해지고 싶었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초희씨.."
"아~! 미안해요..딴 생각을...뭐라고 했어요?"
"그 첫사랑이 지금의 남편이냐구 물었어요."
난 남자의 시선을 피할수도 있었다. 하지만...그 검정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뇨.."
"왜 그렇게 일찍 결혼했어요..? "
"........."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고민중인데 기현씨는 내 망설임에 여유있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헤이.. 이거 무슨 벌칙이라도 만들까요? 뜸은 밥 지을때 하는거라면서요?"
"하하... 그래야만... 했어요......이걸로 됐나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둑판에 바둑알을 놓았다.연속해서 내리 두판이나 난 지고 말았다.

"와우~ 이거 쉽네요? 전 맨날 ... 졌거든요.."
"이씨.. 한번도 이렇게 망신당한 적이 없었는데... "
"음.. 이번에는 뭘 물어볼까..."
남자가 뚫어지게 날 보는게 느껴졌다.
"왜 그래요?"
"훗~!! 그냐요...귀여워서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시선을 어디에 두워야 할지 몰라 애꿎은 바둑알만 만지작 거리
는데
남자의 미소가 사라지는게 보였다.
"왜...그렇게 뚫어지게 보는거예요?"
"아직도...얼굴이 빨개져요... 신기해서요..그 동안 제가 만나온.. 그러니까...한번도..그런 모습
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남자의 말에 난 아예 고개를 푹 숙였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우리...그만할까요?"
"아뇨~!! 지금이 시작인데.. 여기서 멈추면.. 재미없죠."
어째 좀 불안했다.. 남자는 이젠 웃지 않았다. 바둑알을 놓을때마다 날 쳐다보는게 불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초희씨...첫 키스 해 봤어요?"
"네??"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이 내손을 벗어나 거실 바닥에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이젠 신중하게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사뭇 진지했다.
"그...건왜요?"
"하하..그냥요.. 당연히 했겠죠?"
남자의 웃음이 부자연스러웠다. 숨통이 이제 조금씩 조여오기 시작했다. 땀이 흘러내렸다.
"저...."
"해봤죠? 누구였어요? 그 첫사랑과 였어요?"
"아뇨!!..전... 그러니까...한번도...해 본적이 없어요!! 아니.. 그러니까요..당연히 해 봤겠죠.. 하
하.."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당황한 모습을 감추려 했지만 바둑알을 줍는 척하며 고개를 숙이는데
남자의 질문이 계속되고 있었다.
"만약에..말이죠...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면..어떻게 하시곘어요.?"
"........"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에는 바둑알이고 뭐고 간에 뛰쳐 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야...저도..맞 바람을 피면.. 되지 않을까요?하하....하.."
"음...좋은 생각이네요... 나중에..그 상대가 제가 되어드리면 안될까요?"
"그런 일이...생기면요...전 이만 갈께요..."
"그러세요."
완전히 게임에는 흥미를 잃은 모습이었다. 때론 편한 상대가 될수도 있지만... 어느 순간에
는.. 정말 사람을 긴장시키는 힘을 가진.. 남자였다. 선생님의 사촌 동생은....

"옆집누나, 어디갔다와?"
"어..어? 왔어?"
"우..땀봐!! 운동갔다 오는거야? 이 더위에?"
"어...아니... 옆집에 갔다왔어. 넌 근데 이시간에 왠일이야?"
"응.. 더워서.. 수업 땡땡이 치고 왔지.. 옆집누나 우리 수박 먹자."
"그녀는 안 만나니?"
"저녁에 약속이 있쥐.. 옆집누나,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샤워라도 해.. 더워 보여.. 얼굴도 빨갛게
익은게.."
녀석의 말에 거울을 보았다. 정말 내 얼굴은 빨갛게 익은..토마토 같았다...
자꾸만 남자의 눈빛이 걸렸다.. 나에 대해 대한것을 알아낸 듯한.. 그런 시선이.. 날 긴장시켰
다.

"야!!"
멍청하게 앉아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뒷 통수를 때리며 곁에 앉았다.
"아이구....이렇게 서럽게 할수가 있어.. 얹혀 산다구 구타까지 당하구..."
녀석의 능청에 웃음만 나올뿐이다. 그래도 퇴근 후 텅빈 집에 들어오는 것보다 녀석이라도
있으니까 기분은 괜찮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냥... 세상에서..가장 순진하고 청순한 여자를 내가 만났다면.. 형은 아마 웃겠지?"
"청순하고 순진한 여자? 너 낮에 뭐했는데 그런 여자를 만나니?"
"헤헤.. 김밥쌌지.. 물론 내가 만든건 아니지만.."
"네가 만들지 않으면?"
마지막 하나 남은 김밥을 입속으로 넣으며 녀석을 보았다. 하긴.. 녀석이 만들었다고 하기엔
맛이 정말 죽여줬다.. 선생이.. 이런 말투를 써도 될라나?
"그 여자가 와서 만들고 갔지.. 물론 나랑..은밀한 게임도 같이하고..."
"그여자가 직접?"
"응.."
또 다시 녀석이 몽상에 잠겼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표정이 심각했다. 그런 녀석을 흔들어서
그 몽상에 나도 끼워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요즘들어...나두 자주 저런 표정을 짓곤했다.
이상하게도 말이다.. 그 몽상의 중심엔 항상..그녀가 있었다.. 편안한 웃음으로 날....반기는 그
녀의 모습이..
"너무...오바하지마.. 그럴수록..거짓말 같거든."
"형!!"
"씻고 있을 동안 부엌 좀 치워라.. 전쟁터 같더라.."
"으그~~ !! 완전히 파출부 부리듯 하네... 지겨워~!!"
죽는 소리를 하며 끙~ 하고 뒤로 넘어지는 녀석을 보며 난 욕실로 들어왔다.
시원한 물줄기가 땀에 절어 있는 몸에 쏟아지는 순간 아까의 몽상에서 벗어나고 있었다.서
서히...

"옆집누나. 왜 그래?"
저울 앞에서 멍하게 서 있는데 동생이 어깨를 툭 쳤다.
"아이구~ 놀라래.."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데 녀석이 저울의 눈금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걸 발견하곤 서둘
러 저울서 내려섰다. 그리고..
"아야~!! 왜 때려!! 우씨..."
"짜식이..여자의 몸무게를 그렇게 유심히 들여다 보는 게 어딨어!! 넌 더 맞아봐야.. 그런 버
릇을 고치지.."
"그러다가 동생 맞아 죽겠다!! 근데.. 여자 몸무게가 그게 뭐냐!! 얼굴 살만 빠졌나봐!! 허긴..
몇년동안 쌓아온 뱃살을 어떻게 하루 아침에 뺄수가 있겠어.. 그러지 말고..옆집누나도 누구처럼
지방 흡인술을 해 보지 그래? 놀라보게 효과를 볼수 있을...으씨~!! 왜 말보다 주먹이 먼저
냐, 옆집누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헛 소리를 해대는 녀석을 한대 패 준 난 쇼파에 그대로 뻗어버렸다.
"옆집누나.. 나 정말 심각해..그러다가 웨딩 드레스도 못 입겠어.. 내 제의를.. 어어.. 또 때릴려
구?"
"미친 소리를 할때에는 매가 바로 잡아주는 법이지..."
"그게 어떻게 미친 소리냐!! 우리 집 형편을 생각하는 거라구 난 . 경제적으로 맞춤 드레스
가 어마어마한 가격일텐데... 옆집누나의 대형 웨딩 드레스는... 하하..."
말을 끝내지도 않고 녀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약간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난
그대로 쇼파에 누운 체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안되겠어... 그 남자를 조심해야지.."
"그 남자? 누구? 선생님?"
"넌 몰라도 돼..."
"누군데? 응? 누구야? 누가 옆집누나 좋아한대?"
"으씨~!! 넌 몰라도 돼!! "
녀석이 알면 분명.. 엄청난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옆집 남자에 대한.. 생각이 잠
시도 날 가만두지 않고 있었다.
"동생아~!!"
"네 누님."
"만약에.. 우리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난 어떡하지?"
"누구? 우리의 비밀?? 설마...."
"아냐.. 왠지 불안해... 조심해야겠어..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자칫 하다간.. 나 정말 완전히
새가 될 수도 있겠어.."
난 동생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리곤 목욕탕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어머 초희왔구나!"
수건으로 벗은 몸을 제대로 가리기도 전에 아줌마는 벌써 곁에 서 계셨다.
가린 수건 사이로 삐져 나오는 살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숨을 들이마신 상태에서 난 서둘러
인사를마쳤다. 하지만 방금 목욕을 끝내고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으신 아줌마는 나의 지
금 심정을 알지 못한 체 자꾸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래. 새엄마는 안녕하시고?"
지난 몇년동안 잦은 왕래를 가졌던 아줌마 였는데 남편의 직장이 옮기는 바람에 갑자기 동
네를 떠나셨던 탓인지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이젠 아랫 배가 땡기고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호흡을 내뱉으며 다시 한번 힘껏 숨을 들이마
시는데 아줌마가 갑작스레 손으로 배를 가리고 있는 수건을 툭 치는게 아닌가~~!!!
"초희는 ... 살이 많이 쪘구나..언니는 날씬했지, 아마?"
살을 숨기기 위한 노력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졌다. 날씬하고 예쁜 언니와의 비교가 시
작되었을 때에는 난 자폭할 결심이 섰다.. 그래..더 이상 숨길필요가 뭐있나... 살들아~~ 내
살들아~~ 아줌마께 인사라도 해야지......
무엇이 그리 궁금한게 많은지 아줌마의 수다는 끝날 기미가 없었다..

"참, 초희 애인있니?"
"네?"
아줌마의 늘씬한 딸 자랑에 잠시 딴 생각을 하던 차에 깜빡 하고 그 질문을 제대로 듣지를
못했는데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이는게 아닌가..
"그래.. 나이가 얼만데 애인이 없겠어.."
"어..그게 아닌데..."
"그럼 올 가을에 초희 결혼하는거 볼수 있겠네? 그치?"
나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신 아줌마 드디어 옷장 앞으로 다가가셨다.
서둘러 욕탕 안으로 들어선 난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줌마의 말이 마음에 걸렸지
만.. 이내 잊고 말았다.. 어차피 같은 동네에 살지 않으니까..
으씨... 이 놈의 뱃살~~!! 나들이 할때에는 따로 보관할 수 있다면....

"어? 형.!! 냉장고에 맥주가 없네?"
"벌써 다 떨어졌나?"
"뭐야~~!! 살림 좀 하면서 살아. 당장 내일 먹을 양식도 없더구만.. 파출부 아줌마도 없어?"
"파출부는 무슨.. 네가 있는 동안은.. 필요없을 것 같더라..넌 어차피 자취 생활 많이 해 봤을
테니까."
"형!! 자꾸 서럽게 그러기야?"
"조금만 기다려.. 내가 사올테니까."
툴툴 거리는 녀석을 남겨둔 체 집을 나섰다. 여름의 긴긴해가 서서히 지울고 있었지만 더위
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푹푹 찌는 밖에서 슈퍼 안으로 들어가자 냉방기기의 바람
이 상쾌하게 몸에 닿았다. 그 시원함을 즐기며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는데 초희의 옆 모습이
보였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뺨위로 내려와 있었다.
무엇을 사려는 지 음료수 진열대 앞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수 많은 과자 앞에서 무얼 먹을 까...라는 고민에 빠져 있는 아이 같은 천진함이
숨어 있었다.

"초희야!"
어깨를 살짝 건드린 것 뿐인데 그녀가 펄쩍 뛰면서 놀랐다. 그 모습이 날 웃음짓게 했다.
"여기서 뭐해? 뭘 사려구?"
"아.. 모르겠어요.. 갈증이 나는데.. 뭘 먹어야 할지..."
초희가 서둘러 무언가를 감추는게 보였다.
" 뭐야?"
"그게.. 아무것도 아니예요.. 근데 선생님은 왠일이세요?"
"응.. 맥주나 사갈까 하고.."
"맥주요?"
"응.. 녀석이 맥주를 찾잖아...."
"근데 손수 사러 나왔어요? 우리는 자신이 먹고 싶은건.. 직접 하는데.."
"그러게... 에잇~!! 녀석에게 당한건가?"
"훗훗~"
고개를 돌리는 그녀에게서 상큼한 비누 향이 느껴졌다.
"나도.. 맥주를 살까요? 갈증날 때에는 그게.. 좋다고 하던데요."
"목욕하고 난 후에는 그게 정말좋지.."
얼핏 오른 손에 들려 있는 목욕가방을 보고 한 말에 초희의 얼굴이 빨개졌다.
"헤헤.. 보셨어요?"
"뭐 어때.. 이 근처에 대중탕이 있었다니.."
"요 앞 큰 길 건너에 있어요.."
"그래? 그럼.. 우리 근처 공원에 가서 맥주 마실까?"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초희를 보는 순간 하마터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 했다.
자신도 모르게.. 향기가 나는 그녀의 머리결을 만지려 했다는게..충격이었다...

"선생님?"
멍한 시선으로 날 보는 선생님을 불렀지만 선생님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캔 맥주와 마른
안주를 챙기시고 카운터로 가시는 동안 선생님은 아까의 웃음을 보여주지 않으셨다.

공원은 이미 더위를 피해 나온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빈 나무 그늘을 찾아 주위를 두
리번 거리던 선생님이 손가락으로 커다란 은행 나무를 가리켰다.
"저기가 좋겠다."
그늘 아래 마련되어 있는 긴 의자에 앉은 선생님은 봉지안에서 캔 맥주를 꺼내 내게 내밀
었다.
"시원한 맛이 가시기전에 얼른 먹자."
톡 소리와 함께 김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하얀 맥주 거품이 올라오면서 손을 타고
거품이 뚝뚝 아래로 떨어졌다. 그 거품을 혀 끝으로 살짝살짝 핧던 난 벌컥벌컥 맥주를마시
고 있는 선생님을 보았다. 맥주가 목안으로 넘어가면서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이는게 신기했
던 난 시원한 맥주 캔에 손끝이 얼얼해지는게 느껴질때까지 쳐다보고 있었다.
"어? 왜 안마셔?"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낸 선생님이 내손을 바라보았다.
"마셔야죠.. 근데 선생님... 맥주를 정말 시원하게 마시네요.."
"하하.. 시원하고 화끈하게 마셔야 하는게 맥주가 아닐까?"
"왜요?"
"글쎄.. 술을 그리 잘 마시지는 않지만... 소주랑은 끝 맛이 다르잖아.. 소주는 목안을 넘어가
면서..
씁쓸한.. 정을 남기지만.. 맥주는.. 오히려 그 씁쓸함을.. 쓸어내려 주니까..."
나 역시 선생님처럼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손등으로 입가를 쓱싹 문질러 버렸
다.
"헤헤.. 정말요... 뭐랄까... 맥주는...그 씁쓸함에서..짜릿함이 전해지는 것 같아요."
"하하... 초희야.. 그러다가 애주가가 되는거 아니야?"
"그럼 뭐 어때요.. 개운하고..시원한 맛만 있다면.. "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맥주처럼.. 톡 쏘지만 목안을 넘어가면서.. 개운한 맛을
느낄수 있는.. 그런 사랑이 될 수 없음이.. 가슴이 아팠다. 그럴수가 없기에.. 난 선생님을 볼
수가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붉은 노을을 남기며 사라지고 있는 해는 마지막으로
뜨겁게 내리쬐고 있는듯 날이 푹푹 찌고 있었다. 그 따가운 햇볕를 가려주고 있는 나무가지
의 어느 한곳에 숨어 정답게 울어대고 있는 매미소리만이 그 침묵의 무거움을 덜어주고 있
었다.
"선생님?"
"응?"
"아직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어요?"
"크리스마스? "
"네.. "
그 침묵을 통해 과거의 일들을 꺼낸 난 편안하게 등받에 몸을 기대었다. 한손에는 맥주를
들고 시원한 바람에 머리를 나부끼며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난.. 교복을 입고 교실에 앉아
있는 착각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언젠가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며칠 전에야 우린 선생님의 군 입대를 접하게 되었다. 선생님
을 좋아하던 반 아이들의 훌쩍임 속에서 선생님이 밝게 웃으시면서 반장을 불렀다.
선생님의 갑작스런 호출에 울고 있던 반장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
다.
"반장, 달력 있어?"
"달력요?"
"응..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남았는지 따져보려구.."
선생님의 황당한 말에 나를 비롯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치고 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고 선생님을 보았다. 달력이 있는 벽에 한손을 짚으시고 천천히 달수를 세던 선생
님 갑자기 11월 중반께로 손가락을 가져가셨다.
"아마..이때쯤이면.. 너희들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게 될지도 몰라. "
"...."
반 아이들의 침묵속에서 선생님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는 사이에..너희들.. 머리에 가슴에 남아있던 나의 모습이..점점 흐려가고 있겠지? 겨울
에 뜨거운 여름을 기다리는 심정처럼... 여름에..차가운 눈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난 지금
너희 가슴에.. 크리스마스가 되어... 그렇게 기다리게 되겠지? 그 날을 기다리며..설레임과...
그날이 지난 후...다음 크리스마스가 올때까지... 기억에 남을테지? 그게..얼마나 오래 지속될
지 나도 너희들도 모를거야..
우리...그냥.. 그렇게 기다리기로 하자..우리가 다시만날때에는.. 여러번의 크리스마스가 지나
갔을 거야..어쩌면 누구는 그 크리스마스를 평생 옆에 두고 살지도 모르고.....교복을 입은 너
희들을 만날지..
아님.. 곱게 화장한 어여쁜 숙녀를 만나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크리스마스 트리
의 불빛이 되어 있을.. 그날을 위해..우리 이렇게 가슴에 묻어두고 살자..."

"그 때 선생님이..그러셨어요...크리스 마스가 기다려 진다고요.."
난 초희의 말에.. 눈을 감았다.. 지금도,,그때의 이별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젠 시원한 맛이 사리진 맥주를 들이키며 그 민민한 맛에 눈쌀을 찌푸렸다. 내가..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이...이러했다면... 톡톡 쏘는..그런 맛이..없었던 그녀였다면.. 이렇게...혼란스럽지
않았을것이다.. 과거 그녀를 만났고.. 스승과 제자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결혼을 하지 않았더
라면..
그녀 남편의 외도를 직접 보지만 않았어도..난 그녀에게 이런 죄스런 감정을 갖지 않았을 지
도 모른다...
"그래...아직도..그 크리스 마스를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 하지만..이번엔.. 그 의미가 다른...."
제대로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깨달았을 때에는 내 손에 있던 빈
맥주 캔이 찌그러져 있었다.

"근데.. 선생님. 저녁 드셨어요?"
"저녁?"
"네. 식사 하셨어요? 전.. 빈 속이어서 그런지.. 속이 쓰리내요."
"난.. 녀석이 김밥했다고 해서.. 먹었는데."
"김밥요? 그 김밥 드셨어요?"
초희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는건.. 내착각일까?
"응..."
"맛있어요?"
"그럭저럭.... 솔직히.. 정말 맛있는데.. 녀석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야지.."
난 몸서리를 쳤다. 몇년 전 녀석이 해준 김치 볶음밥이 맛있다고 하니까 며칠을 그걸로 때
운적이 있었다. 그 다음에는 절대로 녀석이 해준 음식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게 상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습니다.. 그 김밥 제가 한거였어요."
"뭐?"
"그거 제가 만들었다구요..선생님 몫으로 남겨두었었어요..전 혹시나.. 사촌 동생분이 모두 다
드셨을 줄 알았죠.."
가만...가만...
세상에서..가장 순진하고 청순한 여자를 내가 만났다면.. 형은 아마 웃겠지?
그럼... 녀석이 말했던.. 그 여자가...초희란 말인가?? 이럴수가... 이 자식이 어쩌려구....
그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젖힌 체 눈을 감고 있는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난 숨 소리초자 죽여야만 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손만 뻗으면.. 만질 수 있는 이 정도의 거리에서..선생님을 볼수 있다는
게..
행복함과 더불어.. 못난 미움이 깃들고 있었다.
이게 뭘까.. 이게 뭘까.. 하고 고민할 틈도 없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초등학교 티를 갓 벗은... 아직은 사춘기라 말할 수 없는 열 네살의.. 어리지만.. 예민한 감정
을 갖고 있는 소녀에게.. 선생님은.. 빠르게 다가와 있었다.. 그땐 정말.. 눈으로도.. 그분을 봐
서는 안되는 줄 알았다.. 선생님을 향한.. 내 감정은... 그냥 지나가는 소나기에 불과할 줄 알
았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그래야만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이젠 어른이 되고.. 한 여인이 되
어 그분을 다시 만났을 때에는.. 그때보다 더 심한 절망감이..올줄은 몰랐다.
전에는 그랬다.. 만약에..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되면.... 웃으며 인사해야지...
날 기억하지 못한 다 해도...내가 누군지 모른다 해도...난 아니까..난 선생님을 알고 있으니
까..
그렇게..인사하고..지나쳐도 되겠지? 그렇게.. 간단하게 선생님을 외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
다.
하지만...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난 선생님을 향해..환하게 웃어보일 수가 없었다.
이빨이 없는 할머니가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끼어넣은 틀니가 빠질까봐...웃을
수 없는.. 할머니가...되어버린 것 같아...미칠 지경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 선생님을 향해.. 아무리 애틋한 시선을 보낸다 해도.. 그건.. 나에게 다시 되
돌아오고있을 뿐이었다..
난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배 근처에 놓인 손을 보았다..
헐렁한 셔츠에 가려진...살...한번도... 살찐거에 대한 혐오감같은 걸 느껴본적이 없었다.
난.. 여전히 나니까..날씬했던 대학교 때부터.. 살이 통통하게 붙은.. 지금까지.. 난 있는 그대
로의 나만을 보여주었으니까.. 근데 지금에 와서..왜 지금에 와서... 날 보여줄수 없는걸까..
왜????
난 또 다시 뱃 살을 감추기 위해 헐렁한 셔츠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 해
야했다.
턱을 위로 향하게 하고... 배에 힘을 주며 앉아 있어야 했다.. 이런게... 고작 이런것이.. 날 초
라하게 만들다니.... 고작 이런 것 때문에..당당하게 날 밝힐 수 없다니...

"흠흠~~"
작은 헛 기침에 난 눈을 떴다. 옆에서 초희가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촉촉히 젖어 있는 눈동
자가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나 역시 눈으로 그쪽을 쫓아갔다..그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녀의 남편이었다... 심장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물 맺힌 그녀의 눈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어떻하지? 내가 먼저 봤어야 했는데...
"초...희야."
그녀를 부르는 데 목소리가 떨려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건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내가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리고 있었다.
돌발 상황이었다. 한번도 우는 여자를 달래본적이 없었다.. 아니.. 어느 누구도 내 앞에서 눈
물을 보인적이 없었다...
"초희야... 우리...그만 일어나자.."
그녀가 날 보았다.. 눈물이 가득 맺혀 있는 아픔이 서려 있는 눈동자가...날 보고 있었다.
"초희야..그게..."
"우리..이제 가요."
목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어떡해야 하나...달려가서 남편이라는 사람의 멱살이라도 잡아야
하나...
아님.. 더 두려운 상황이 닥치기 전에.. 이 자리를 떠야하나.... 고심하던 중에 난 후자를 택했
다.
"우리.... 이런~!!!"
마른 하늘에서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정신없이 그녀를 감싸안고 달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난 남편과는 반대 방향으로 뛰어야 한
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콰 쾅쾅쾅~~!!
천둥소리와 함께 가늘던 빗줄기가 더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난 선생님의 옷깃을 잡
고 그분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옷은 이미 흠뻑 젖은 상태였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정
도로 세차게 쏟아붓고 있는 빗줄기 사이로 허름한 정자가 보였다.
"선생님!! 저기요!!"
거센 빗줄기를 맞으며 우린 정자쪽으로 빠르게 뛰어가고 있었다. 이미 사람들은 비를 피해
모두 공원을 빠져나간 후였다.
"와우~~ 이런 비를 직접 맞다니....하하..."
"하하... 갑자기 쏟아지다니...으흐.. 춥다."
몸을 부르르 떨며 난 선생님곁에서 한발 뒤로 물러났다. 팔에 소름이 돋아있었다.
"춥니?"
"네..약간요... 근데. 참을만 해요. 언제쯤 비가 그칠까요?"
"글쎄... "
어느 사이에 우리는 낡은 정자의 바닥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가슴께로 끌어당기고 앉은 난
한참동안이나 빗줄기를 바라보고 그렇게 앉아있었다.
" 산성비는 어쩌지? 대머리가 될지도 모르는데..."
선생님이 걱정이 되는지 손으로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하하.. 선생님.. 그깟 비 조금 맞았다고 머리카락이 왕창 뽑히나요?"
"그런가?"
땅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더 커지고 있는 걸로 보아서 쉽게 그칠 것 같지는 않았다.

콰쾅쾅!!
"악~!!"
초희의 비명소리와 함께 내 등에 무언가 찰싹 달라붙었다. 초희였다. 등에 얼굴을 파묻고 귀
를 막고 있었다.
"초희야.."
"무서워요.. 선생님... "
"초희가 지은 죄가 많은 가 보다.. 죄가 많은 사람이 천둥치면 도망간다고.."
"치이..선생님도 놀란거 다 알아요.. "
토라진 목소리에 난 웃었다. 그녀가 골이 잔뜩 난 얼굴을 하고는 내옆에 앉았다.
"내가?"
"네. 선생님도 원래 무섭잖아요.. 심리 테스트에 보면.. 강한 척 할 수록 겁이 많은 남자가
많대요. 선생님도 그런거 아니예요?"
"하하... 원래 부드럽고.. 연약해 보이는 남자일수록.. 강한거야.. 내가 그런 타입이 아니냐...하
하.."
"으그... 또 시작이네요... 선생님의 왕자병.."
"이러다가.. 정자까지 물이 차오르겠다."
골이 파진 땅에 흐르는 물줄기를 보며 이내 걱정스런 얼굴이 된 초희를 보니 더 이상 놀릴
수가 없었다.
"아까 말이야..."
"언제였을까요...비오는 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기신 선생님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저렇게 슬퍼보일까....그땐 그런 생각을 하며 생각에 잠기신 선생님
을 한참을 보았어요...근데..지금..내리는 비를 보며..나도 그때의 선생님 처럼.. 생각에 잠기게
돼요..제 미래에 대해서...제 과거에 대해서....그리고..슬픔에 잠겨요..내가 왜 여기에 있나... 근
데..지금은요.. 이런 생각을 해요...저 비를 보며..선생님도..나랑 같은 생각을 하겠구나...나랑
같이...같은 장소에서..같은 비를 보고 있으니까요..."
우울한 빛이 초희의 얼굴에 서려있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팔에 턱을 괴고 힘차게 내리
꽂는 듯한 빗 줄기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빗물이 고여 있었다...곧이어 그녀의 얼굴위로...
이슬비가 내리기시작했다..아까 보았던 남편의 외도에... 상처를 받은 것이다..
"초희야.."
"나도 알아요....그래선 안되겠지요...하지만... 자꾸만 자꾸만..."
나도 모르게 초희의 얼굴에 손을 댔다.. 눈물 맺힌 그녀의 눈동자에.. 내모습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흔들리고 있는 그녀의 눈을 보며...난 눈을 감았다 떴다... 슬픔이 깃든 눈동자...무언가를 묻
고 있는 듯한... 눈동자가...내 눈동자를 채우고 있었다.
"선생님...."
또르르 눈물이 흘러 내렸다...가슴치는 듯한 슬픔이..나에게 전해지고 있었다..이젠 빗방울이
바람에 날려 우리를 공격하고 있었다..
난..그녀의 눈물을 볼 수없어 눈을 감았다.. 그녀의 슬픔을.. 외면할 수 없어..눈을 감았다...
가슴 아픔을 얘기하려는...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향해...점점..난 고개를 숙여갔다...
그녀의...입술에 맺혀 있는 슬픔이..내개로 다가왔다..애틋함이...입술 가득 묻어나오고 있었
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부드러운..입맞춤... 꿈속에서 조차..
느껴본적이 없던... 강력하면서도...섬세한 이 느낌에.. 난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아찔하면서도... 위험한.. 불꽃이 튀고 있었다. 난..그 불꽃을 꺼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뜨는 순간.. 이 모든 게 꿈일까봐... 이 모든게.. 단지 내 상상에 불과할까봐... 선생님을
붙잡았다. 내 팔을 꽉 움켜잡고 있는 선생님의 뜨거운 손의 열기가 내 몸에 전해지고 있었
다..
쾅쾅~~~!!
또 한번의 천둥소리가...날 깨웠다...아니.. 어쩌면...우리를 깨웠는지 모른다..
그 소리에 놀라 뒤로 물러나는 선생님의..온기에..난 눈을 떴다..이럴수가....
선생님이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난...사랑하는 사람의..키스가 어떠한지를 알게 되었다...
그게..첫 키스의 느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옆집누나~!! 새엄마!! 새엄마!! 빨리 좀 와보세요.. 옆집누나가 이상해요!!"
어떤 정신으로 집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그저 내가 기억하는 거라곤... 문을 열어주는 동생
을 보는 순간 기절을 했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내방 내 침대에 누워 눈을 떴다는 게 전
부였다.
"초희야..이제 정신이 들었니?"
침대 곁을 지키고 있던 새엄마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엄..마."
"아이구~~ !! 이젠 살았다.. 이젠 살았어. 이것아~!!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무슨 목욕을 그
렇게 오래하는 거야~~!! 얼굴이 빨갛게 익었더구만..아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깐 새엄마는 화를 내시며 일어나셨다.
"죽 끓인거 있으니까.. 가지고 올께. 열이 좀 많긴 하지만.. 괜찮을 거야.. 이따가 해열제 먹
고 자."
"네.."
새엄마가 나가시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녀석이 들어왔다.
"옆집누나.. 무슨 일이야?"
뭔가를 캐내려는 듯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일은 무슨... 그냥..."
"옆집누나.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그래..없었어.."
녀석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난 고개를 돌린 체 눈을 감고 있었다.
"근데.. 아까 밖을 나가려는 데 옆집 선생님이...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데?"
꼭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걸 알고 난 이불을 뒤짚어 썼다.
"옆집누나.. 정말 아무일도 없었어?"
"나가!! "
"옆집누나!!"
"나가라니까!! 내 말 안들려? 당장 나가라구!! "
소리치는 날 보는 동생의 시선에 담긴 의혹을 외면한 체 난 돌아누웠다.이어서 문닫히는 소
리가 들렸다. 참았던..울음도 같이 터져나왔다....

우린 아무런 말도 없이 힘차게 퍼붓고 있는 빗줄기만을 바라본 체 앉아 있었다. 내어깨에
올려 있던 선생님의 팔도... 천둥번개에 소름이 끼칠정도로 무서웠지만... 난 꿋꿋하게 앉아만
있었다.
"선.."
"초희야.."
동시에 입을 열었던 우리.. 난 곧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보지
도 않은 체...그렇게..앉아만 있었다.
"우린... 이래선 안되는 거였어..우린..그러니까... 넌 .."
"선생님.. 전.."
"초희야.. 네 남편이 바람 피운다고 해서..내가 너에게 이런 행동을 했던 게 아니란것만 알아
줘..그리고..이일은..없었던 일로 하자. 어차피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어...내가 왜 이랬
는지 모르겠다."
거칠게 비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던 선생님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선생님.. 전...전...."
사실을 말하려 했다. 죄책감에 쌓여 있는 선생님에게..유부녀가 아닌.. 처녀라는 걸.. 아직 미
혼이라는 걸 말하려 했다... 그래야 했다.. 그래야만이..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 치
고 있는 이 격한 감정에 대해..더 떳떳하니까.. 그래야만이.. 선생님이 날 온전한 눈길로 바라
보니까...
하지만..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만약..네가 미혼이었다 해도..우린 이런식으로...이렇게 만나면 안되는 거였어...넌...넌...."
말을 잇지 못하는 선생님...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고 있는 나... 제발.. 선생님.. 그런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난 선생님의 제자였다는...제자니까.... 우린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말하지
마세요..
애원의 눈빛으로 선생님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체 난.. .선생님이 내 시선을 알아채기를 바랬다.. 내마음이 어떤지 알아주기를 바
랬다.
하지만...
"넌...내 제자니까...그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거니까..우리가 이렇게 만난 건..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미친듯이 퍼붓고 있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달려
갔다.
뒤에서 날 부르며 쫓아오고 있는 선생님의 발소리를 들으며 난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그게 전부가 아니잖아요...저를 향한 감정이 연민이 아니잖아요...
만약 그렇다면...그런 키스는 하지 말았어야죠....그런 키스로..절 착각속에 빠뜨리지 말았어야
죠...
전... 사랑을 담았는데....전.. 선생님을..사랑하는데...그러면 안되잖아요!!

"형!!"
현관에 들어서는 데 기현이가 달려나왔다.
"이게.."
"건들지마..."
목이 잔뜩 쉬어있었다.. 차가운 비를 맞았지만 내 몸의 열기는 꺼지지 않고 있었다.
비에 젖은 옷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고 난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찬물을 세게 튼 샤워기 밑으로 들어가 섰다...
시원한 물줄기가 내 온몸을 적시며 아래로 흘러내렸지만... 그래도... 내 마음만은 씻겨내리지
못했다.
답답함에 가슴을 주먹으로 세게 쳐봤지만 그것도 소용없었다.
"아~~~악!!! 아~~~악!!!!"
물줄기를 맞으며 힘껏 소리쳐 봤지만.. 감은 두 눈에는.. 아직도 눈물을 흘리며 뛰어가고 있
는 초희의 모습이 아른거리기만 했다....
똑똑~~!!
"형!! 괜찮아?"
녀석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샤워기 밑에서 나온 난 문을 벌컥 열었다.
녀석을 보는 순간 참았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분노가..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체.. 난
녀석의 얼굴로 주먹을 날렸다. 마치.. 그녀의 눈물이 녀석의 탓인 것마냥...
"두 번 다시...초희 곁엔 가지마!!"

"형!! 왜 이래?"
또다시 녀석을 향해 날라가던 주먹을 녀석이 잡았다. 녀석이 화가 나 씩씩 거리고 있었다..
난 녀석이 날 치기를 바랬다... 아니 녀석이 아니라도 좋았다.. 그저 누군가가 날 흠씬 두둘
겨 팼으면 했다.. 이 미칠것만 같은.. 고통을 잊게 해준다면...
"형!!"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날 부축하며 녀석이 날 불렀다...
그제서야..난 울고 있음을 알았다...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지 말아야 했어... 그렇게...아프게 하지 말아야 했어...내가 지켜줘야 했었는데...내가 그
래야 했는데...그러지 못했어...녀석이...울고 있었어...난..아아악!!!"
"형!! 무슨 말이야??"
날 부축하고 있는 손을 뿌리친 체 난 방으로 들어왔다. 젖은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 체
침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냥...키스였을 뿐이야...아무것도 아니야.....아무것도...흔히들... 하는
그런..거였잖아... 수없이 많은 목소리가 날 위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 그녀의 눈을 봤잖아.. 그녀의 시선에 담긴 언어가 무엇인지 넌 알고
있었잖아..
네가 그런거야.. 네가 그녀를 울렸어...네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을... 넌 보고 말았던 거야...
헉~!!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충격으로 메트리스가 출렁댔지만.. 난 그 출렁거림에
몸을 맡긴 체 넋이 나간 상태였다..방금 사랑이라 했니? 너..지금.. 사랑이라 했니?? 이럴수
가~~!!

"초희야!!"
새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이 온것이다.. 몸을 일으키려던 그녀는 현기증에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어서 방문을 열고 들어선 새엄마가 이마에 손을 얹고는 옆에 있는 약병을
집어드셨다.
"아직도 열이 많네..어제 약은 먹고 잔거니?"
"네.."
"혹시 다이어트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거 아니야? "
기분이 착 가라앉고 있었지만 난 억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지 말고.. 밥 먹어.. 밥이 보약이라면서 한끼도 거르지 않던 녀석이 며칠 째 젓가락으로
끼적거리기만 하고... 그러니까 병 나지!! 새엄마가 밥 갖고 올테니까..."
"새엄마..입맛이 없어..그러니까.."
"됐어!! 조금만 기다려."
새엄마는 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빠르게 나가신 새엄마의 뒷 모습을 보고 있던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으로 인해 방바닥이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는 걸 느꼈지만
한없이 누워있기만 하기엔 내 자신이 너무 바보스러웠다.
"옆집누나!!"
"소란떨거 없어.. 답답해서 내려온거 뿐이야.."
윗층으로 올라오던 동생녀석과 마주치자 녀석이 호들갑스럽게 내 옆에 서서 날 부축하려 했
던 것이다. 녀석의 팔을 거칠게 뿌리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거실 쇼파에 앉아 신문을 읽
고 계신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
유난히도 막내딸을 좋아하신 아빠가 읽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으신 체 내 앞으로 다가오셨
다.
"아이구... 우리 딸내미... 어디보자... 아이쿠!! 아직도 많이 아프네...아빠가 업어줄까?"
"응..."
어리광을 부리며 아빠의 등에 업혔던 난..내 볼에 닿는 아빠의 체온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에
눈물이 고이는 게 느껴졌다.. 눈을 꼭 감고 아빠의 목에 팔을 두른 체 아빠가 불러주는 자장
가에 슬픔을 달래려 노력하고 있었다...
"자장자장.. 우리 아기 잘도 잔다...자장자장...우리 딸내미 잘도 잔다..."
"아이고~~!!! 다큰 딸내미 등에 업고 있는 사람이 어딨어? 나도 한번 그렇게 업어주면.. 당장
오늘 저녁 반찬이 달라지지.."
앞치마에 손을 닦던 새엄마의 투정에 아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그래도..난 우리 딸내미가 더 좋은 걸? 우리 딸내미... 부자집에 시집보내야지...암..
그래야지...."
"징그러우니까.. 얼른 내려!! 초희 내려왔으니까.. 밥 먹고."
"네.."
아빠의 등에 내려 아빠가 머리를 쓰다듬을 동안 난 어제의 아픔은.. 생각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내가 갈곳은...한곳 뿐이니까..내 마음이 닿는 ..그곳뿐이니까...

"형!! 형!!"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겨우 눈을 뜬 난 잔뜩 헝클어진 머리로 양치질을 하고 있는 녀석을
보며 눈쌀을 찌푸렸다.
"뭐야..."
"오늘 학교 가야지.. 얼른 일어나.. 나도 오늘은 바쁘단 말이야."
"으으..."
"어휴~!! 이게 뭐야.. 형!! 바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옷 가지를 치우고 있는 녀석을 보며 난 그대로 누워있었다.
손가락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그냥..이대로 있고 싶었다..아무것도 하지 않은체...
어젯 밤 날 한대 후려치고 달아나 버린.. 진실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형...나 형차 빌려도 돼?"
"내 차?"
"응.. 오늘 대전 가봐야 하거든... 괜찮지?"
"알았어...조심해서 타.."
"땡큐~~!!"
억지고 몸을 일으키고 출근준비를 마치고 대문을 나선 난 문득 옆집을 보았다.굳게 닫힌 대
문을 보자...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어떨까...괜찮은걸까...

겨우 아침을 먹은 난 쇼파에 쓰러지다시피 누워버렸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녀석이 옆
에 와 앉는 게 느껴졌다.
"옆집누나.."
"오늘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게.. 너 사는 길이야.."
"헉~!! 그렇게 살벌한 말을...."
"귀찮게 하지말고..저리가."
녀석이 고분고분하게 내말을 듣기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기력이
없었다...
가슴이 따끔거리고 있었다..금방이라도 시한폭탄이라도 터질것만 같이 두근거리고 있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애써 아무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자꾸만 내입술에 닿았던 선생님의 감촉과...시선이...날 가만두질 않았다....
"초희야.."
"네 새엄마."
"새엄마 심부름좀 해야겠다.. 슈퍼에 가서..."
겨우 몸을 추스리고 집을 나서는 데 옆집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깜
짝 놀라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는 데 벌써 옆집남자가 밖에 나온 후였다.

"안녕하세요, 초희씨."
"네...안녕하세요.."
"어디 아파요?"
"아..뇨.."
"슈퍼에 가는 길이면..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그러세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체 길을 걷고 있는 나와는 달리 남자는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는 듯
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뇨... 형이... 감기에 걸린 것 같은 표정으로 출근을 헀는데... 초희씨도 똑같은 증세를 앓
고 있는 것 같아서요.. 감기 걸렸어요?"
남자의 예리함에 뜨끔 했지만 이내 웃어버렸다. 태연한 척 고개를 드는 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게 아닌가... 선생님도...나랑 같은 증세를 보였다는....그말이.

"어머, 초희야~!!"
슈퍼안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내 곁으로 달려오는 아줌마... 어제 목욕탕에서 만난 아줌마였
다.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치려고 하는 데 아줌마에게 붙잡힌 팔을 빼낼 수가 없어 결국 아줌마
의 긴 얘기를 들어야만 했다. 얼마나 지났을 까 갑자기 아줌마의 고개가 내 옆에 서 있는
선생님의 사촌동생에게로 쏠렸다.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남자를 바라보는 아줌마가 이번에
는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아닌가...
"저... 누구니?"
"옆집에 사는.... 아저씨예요."
"그래? 난 또...네....남자..."
"어..저기요.. 아줌마 저 빨리 가야하거든요.. 다음에 또 뵐께요... 안녕히 가세요."
"어어... 그래..할 수 없지..다음에 또 만나요..젊은 남자..호호호.."
아줌마의 내숭에 남자가 기가막히다는 듯 얼이 빠져 있었다.
"누구예요?"
"신경쓸 거 없어요... 장이나 봐요..오늘은 뭐해 드실건가요?"
"오늘은.. 살게 없어요.. 음료수나 몇개 살려구요..맥주랑.. 어제 맥주 사라고 했더니... 비만
쫄딱 맞고 왔지 뭐예요..형이...."
"...."
"근데.. 제 이름 몰라요?"
"갑자기 이름은 왜요?"
"아니.. 옆집 아저씨가 뭡니까? 결혼도 하지 않은.. 총각한테.. 이거 정말..."
"미안해요."
난 점점 남자의 수다에 질려가고 있었지만 냉랭하게 사과의 말을 하고선 계산대 앞으로 갔
다.
하지만 남자는 슈퍼에 나오는 순간까지도 쉴세없이 떠들어 대고 있었다.
"제가 언제 초희씨한테 아줌마라고 한 적 있습니까? 이거 너무 서운한데요?"
"제가 어딜봐서 아줌마라는 거예요? 기현씨도 보통 남자들처럼 뚱뚱한 여자를 보면 무조건
아줌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펑퍼짐 한 옷이나.. 편한 스타일을 즐기면 모두 아줌마처럼
보이나 보죠?
여자의 외모부터 보는 남자가 여기도 한명 또 있었군요."
"초희씨?"
갑작스럽게 퍼붓는 내 말에 얼이 빠진 남자는 우두커니 서 있었지만 난 빠른 걸음으로 집으
로 향했다.

"어머!! 초희야!!"
놀라는 새엄마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은 난 부엌 문앞에 서계신 새엄마의 표정을 보고는 들고있
던 숟가락을 놓았다.
"어..새엄마." "너 밥하고 무슨 원수졌니?"
"아니..그냥 밥맛이 좋아졌네...앓고 나니까..밥힘이 딸리잖아.."
"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밥통째 그렇게 먹으니까..새엄마가 겁이 나잖아..우리 딸 잘못
된 게아닌가...싶은게.."
"냅둬!! 밥은 이렇게 먹어야 하니까.. 걱정말고 들어가 보세요.."
다행히 새엄마는 더이상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내이런 행동때문에 놀란것만은 분명
했다. 난 정말 무식할 정도로 밥에 집착하고 있었다.
"옆집누나~~ 나 왔어... 어? 옆집누나!!" "어 왔냐.. 음.. 맛있다...역시 새엄마 버섯 무침은 알아준다니
까...너 저녁 먹었니?"
"옆집누나 지금 몇신줄 알아? 거의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는 늦은 밤이란 말이야..어쩔려구 그
래? 다이어트 안해? 또 포기한거야?"
"닥쳐!! 잔소리 할거면 나가! 밥맛 떨어지니까."
"옆집누나!!"
동생이 화를 낼 수록 이상하게 밥 먹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입안 가득 밥과 반찬들을
넣고 우거적 먹는 모습에 거의 동생은 기절직전인가 보다. 무슨 오기가 생겼는지 나 자신도
밥 먹는 속도를 줄일수가 없었다. 이젠 밥통속의 밥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끄억~!! 잘 먹었다...나 잘래.. 잘 자라."
멍하니 서 있는 녀석의 어깨를 치며 내 방으로 올라가는 데 쿵쾅거리며 동생이 따라오는
게 들렸다.
"옆집누나!! 지금 제 정신이야? 그렇게 한꺼번에 먹으면.. 위에 얼마나 무리가 가는 줄 알아?"
"난 몰라.. 지금부터 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거야. 아무것도. 난 변할 수가 없어!! 이게
바로 내 모습이야.. 그렇게 바라보지 마.. 너도 알고 있잖아. 작심삼일이.. 내 별명인거. 그만
자. 배가 부르니까 잠이 더 쏟아진다.."
"하지만.."
"잘자."
짤막한 인사를 마친 난 부리나케 내방문을 잠갔다. 이어서 동생의 발소리가 멀어지기 시작
했다. 주위에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어두운 방안으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체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내 머리결을 스
치고 지나갔다.
"나..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거야..이게 나니까..이런 게 내 모습이니까.. 내가 본...사랑도,..어
차피 이런 모습일테니까.."

"형?"
"왜?"
"내가 속물일까?"
"무슨 말 하려구?"
요즘들어 녀석의 질문에 일일이 답해주는 게 귀찮았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었다. 멍하니
정신을 놓고 앉아만 있고 싶었다..
"누군가..나도 속물같은 남자래..아니 그 비슷한 얘기를 했어.. 여자의 겉 모습만으로 쉽게 판
단하는 남자래..나보고.. 그게 무슨 뜻일까?"
"초희얘기니?"
"어?어... "
"내가 경고했지..그녀 곁에 가지말라구. 이번이 마지막 경고야. 다음엔 너와나 혈육지간일지
라도 용서없어."
살벌한 경고에 녀석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내 녀석이 내 곁에 앉았다.
"이상해...시간이 지날 수록..내 의심이..확신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
"그만 자자.."
"형!!"
"왜?"
나도모르게 짜증을 부렸다.
"형 요즘 어떤 모습인줄 알아? 안절부절 못하고 있어. 밥먹을 때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에도 어김없이 생각에 잠겨 있어. 멍해 있다구!! "
"난 너보고 내 표정을 살피라구 하지 않았다. 내가 마치 내 주치의라도 되는 듯 말하지마."
"형.. 사랑은..혼자만 하는게 아니야."
녀석의 그말에 나도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미 내 손에는 녀석의 목덜미가 잡혀
져 있는 후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냐구!!"
"쾍쾍!! 형!! 이 손놓고 얘기..."
"방금 어떤 의미로 꺼낸 말이니?"
"아니...난..난 말이지.."
"그래 넌? "
"초희씨하고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서..."
"넌... 그런 거에 신경쓰지마.. 내가 한 말에나 신경써."
힘없이 녀석의 멱살을 놓았다. 녀석이 비틀거리면서 쇼파에 앉았다. 손으로 옷깃을 매만지는
녀석을 잠시 내려다 본 다음에 난 방으로 들어왔다.. 잠을 이루기는...틀린 것 같았다..방안의
뜨거운 열기때문인지 아니면.. 몸 속 깊은 곳에서 치솟고 있는 분노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끈질기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비비며 문을 여니 옆집 남자가 반바지 차
림으로 서 있었다. 당혹스런 난 얼른 손으로 뻗힌 머리를 만지는 데 남자가 당황스런 얼굴
로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저..저기요.."
"네. 무슨 일이예요? 이른 아침에?"
"실은...흰죽을 어떻게 만드는 지 몰라서요.."
이게 뭔 소리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처럼 황당한 남자의 말이었다.
"흰죽은 왜요?"
"아뇨..그게 말이죠...."
"네."
뜸을 들이는 남자의 태도에 답답함을 느끼며 기다리고 있는데 남자가 큰 한숨과 함께 말을
마쳤다.
"형이 많이 아파요..전 오늘 대전 가야하는데... 형 때문에..."
"선생님이...아프다구요?"
"네.. 도와주세요... 흰죽을 끓여야 되는데..."
"잠시만요... 제가 곧 갈께요..."

"그저께 부터 이상하더라구요... 비맞고 들어온 날 저녁은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어제 퇴근
할 때에는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서 들어오라구요... 금방이라도..."
남자의 장황한 설명을 뒤로 한체 선생님이 누워계신 방으로 들어갔다. 큰 대형 침대에 누워
있는 선생님의 얼굴위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약은 먹였어요?"
"약요?"
"네.. 이런.. 열이 많잖아요!! 여태까지 약도 못 먹였단 말이예요?"
"저기..그게 말이죠..."
"됐어요!! 요 아래로 내려가면 일찍 문열은 약국이 있을거예요. 해열제랑... 일단은 열부터
내려야 하니까... "
"네네.. 알았어요."
당황대던 남자가 나가자 난 차근차근 선생님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학교 때 간호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어서.. 기본적인 거 알 수 있었다.
"으...."
찬 수건을 이마에 올려놓는 순간 신음소리와 함께 선생님이 눈을 번쩍 떴다.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뒷 걸음질 치는 데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살피던 선생님의 시
선에 내게로 와 꽂혔다.
"초...희야.."
"아프는 얘기를 듣고....흰죽도...만들어야 하고.....또또..."
구차한 변명을 둘러대고 있는데 선생님이 고개를 돌렸다.
"그만.. 집에 가.. 넌 여기 있으면 안되니까.."
"하지만....전.."
"집에 가라니까!! 네가 뭔데 여기에 있는거야? "
"선생님!!"
"그냥 두고 집에 가.어서!!"
이마에 올려졌던 수건을 바닥으로 내팽겨 치는데 약국에 갔던 남자가 돌아왔다. 상황을 눈
치챈 남자가 선생님에게 다가가려는 데 선생님이 갑자기 남자의 얼굴을 쳤다.
"넌 왜 쓸데없는 일을 한거니? 엉?"
"형..."
"됐어!! 다 필요없으니까.. 다들 나가!!"
선생님의... 거부에.. 난 눈을 감았다...그리고..다시 밀려들고 있는 아픔을 잊기 위해 속으로
열까지 숫자를 세며 눈을 떴다.
"좋아요..갈께요. 어디 선생님 혼자...아파봐요!! "

쾅!! 집안을 울리는 문닫히는 소리에 녀석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형 왜 그렇게 속이 꽉 막혔어? 제자가 스승이 걱정돼서..."
"그게...전부가 아닐때도 있어...다시는 허튼 짓 하지마. 나가봐라."
"형!! 왜그래? 초희씨하고..무슨일이라도 있는거야?"
"아니. 없어. 그러니 나 좀 놔두고 나가!!"
"알았어! 대전 가있는 동안 초희씨에게 병간호좀 부탁하려 했을 뿐이야!! 어차피 그 상태로
는 출근도 못할테니까..."
"시끄러워!!"
"좋아, 알았다구!! 어디 혼자 힘으로 잘 살아봐!!"
심한 현기증에 도로 자리에 눕자마자 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모두 나간 텅빈 집에서 난 안절부절 못하며 서성이고 있었다. 부엌에는 선생님 드리려구 만
들다 만 전복죽이 냄비에서 끓고 있었고..
"몰라..몰라....내 방식대로 할거야..아파 죽는 사람을 그냥 놔둘 수는 없잖아!!"

몇번을 망설이던 끝에 초인종을 누르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선생님이 받을 때
까지 끈질기게 초인종을 누르는 데 퉁명스런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들려왔다.
"누구요?"
"선생님 저예요."
"초희?"
"네.. "
"....."
"빨리 문 좀 열어봐요!! 뜨거워 죽겠단 말이예요!!"
전복죽이 가득 담긴 그릇을 품에 꼭 끌어안고는 죽는 소리를 해댔다. 이판사판 공사판이라
는 식으로!!
삐~익!! 드디어 문이 열렸다. 난 혹시나 선생님이 마음을 바꿀까 겁이나 서둘러 안으로 들어
섰다.
초췌한 모습으로 현관앞에 서 있는 선생님을 무시하고 부엌으로 쑥 들어간 난 식탁위에 그
릇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곤 두 손을 비비며 호호 불어댔다.
"뜨거워 죽을 뻔 했지 뭐예요... 헤헤.. 저건 전복죽이거든요? 이래봐도 요리에는 자신이 있
기에.."
"초희야.. 우린..."
선생님의 심각한 얼굴을 외면한 체 난 선생님의 등을 밀며 방으로 몰았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 누워계세요. 이런..집안 꼴이 말이 아니네요. 잠시만요...우선 죽부터 한
술 뜨셔야 될거예요."
씩씩하게 말을 하며 선생님 주위를 빙빙 돌며 바닥에 널려 있는 옷가지를 치우면서 선생님
의 시선을 무시하고 있었다.
"초희야!!"
"선생님.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요. 전 제일만 끝나면 곧 갈테니까."
"하지만...난.."
"자, 어서 누우세요. 그래야 제가 일을 빨리 끝내고 집에 가죠?"
마지못해 침대에 몸을 눕히는 선생님을 보며 내가 이겼음을 알았다. 선생님이..다시는 날 거
부하지 못하게 할거야... 이번 기회에...확실하게... 내 자리를 만들고 말거야!!

부엌에서 들리는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선잠에서 깨어났다. 기현이가 벌써왔나 싶어 방을
나서려는 순간 여자의 목소리에 놀랐다. 그녀가 왜 여기에.....
"선생님!! 일어나셨군요!!"
멍해있던 내가 어찌해보기도 전에 난 초희의 손에 끌려 다시 부엌으로 가고 있었다.
"언제 쯤 일어날까.. 기다리고 있었어요. 죽은 식기전에 먹어야 하거든요. "
"난..."
난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초희의 자그마한 손이 내 이마를 짚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내이마에 올려지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시선을 어디에 두워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 하고 있는 데 드디어 초희의 손이 멀어져갔다. 순간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
다.
"음.. 열은 많이 내렸네요? 약 드셨어요? 기현씨가 아침에 약 사온거 알죠? 이따가 오면 고
맙다고 꼭 해야 할 거예요. 아까처럼 심술꾼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굴지 말고요."
"심술꾼 할아버지?"
"네. 아깐 꼭 그랬어요."
밝게 웃는 초희의 모습을 넋 나간 모습으로 바라보다가 내 앞에 놓인 그릇을 내려다 보았
다.
죽이 담긴 그릇 위에는 잣이 올려져 있었다.
"헤헤.. 그거요? 저희집에서 몇개 가지고 왔죠. 어서 드세요. 전 그동안 방을 쳐야겠어요. 감
기 환자일 수록 집안공기가 쾌적해야 거든요."
그녀가 가자 갑자기 부엌에 냉랭한 기운이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방에 들어선
초희는 창문을 열고 있었다.
"선생님?"
"어어?"
"방걸레 어디에 있어요?"
"욕실에..."
이어서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난 숟가락을 들고 천천히 죽을 먹기 시작했다..그녀의 콧
노래를 들으며...

나 여기서 포기할 수 없어요.. 선생님이 제게 올 수 없다면.. 제가 갈거예요. 절..외면하지는
말아주세요..외면하는 그 순간..전 아마 평생 선생님을 볼 수 없게 될지 몰라요...아셨죠, 선생
님?


"초희야..."
분주하게 거실과 방을 오가며 청소를 하고 있는 초희를 불렀다.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초희
가 부엌 식탁의자에 앉았다.
"우리..이러지 말자..우린 이러면 안되잖니.."
"왜 안되는돼요?"
초희의 맑은 눈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볼때마다 느껴지는 이 답답함을
지울수 있다면.. 내 가슴 가득 터질듯한 격한 감정들을 외면할 수 있다면.. 그녀를 한없이 바
라보고 싶은 내마음을 어떻게 말해야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요 며칠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있었다.
수업도중에도 학생들 틈에 섞여있는 초희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무슨일이 저지르고 말것만 같아 겁이났다.
"다른 사람들은.. 말이지.. 우리의 사이을 오해할 수도 있단 말이야.. 너와 나의 사이가 어떤
지 모르는 사람들은... 말이지...그러니까.."
"선생님 말처럼 우린 사제지간이잖아요. 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거죠?"
"초희야!!"
내말뜻을 충분히 알고 있는 초희였지만 무슨연유인지 몰라도 그녀는 계속해서 말꼬리를 늘
리고 있었다.
"넌...결혼했고..나 아직이잖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다른이들의 이목을 끌수 있단..."
"선생님. 전 결혼..."
"그래.. 어쩌면 내가 너무 민감해있는지 몰라.. 하지만 그날 이후로는.. 선생님은 널 보는게
부담이 된다. "
"선생님.. 제말 좀들어보세요!!"
난 거의 미쳐죽을 위기에 처했다. 선생님은 아예 내말에 귀를 기울일 생각조차 없는 것 마
냥 말을 끊지 않고 계셨다. 차라리. 귀라도 막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눈을 돌리수만 있다
면.. 그랬다면 선생님의 시선이 무엇을 느꼈는지 선생님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
했을 텐데...
"선생님...만약..만약에..제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결혼을 하지않고... 지금 이모습 그대로
선생님께 다가갔다면... 우리..어떻게 되었는데요? 선생님도 제 마음과 똑같나요? 선생님을
보고 싶어도..
눈이부셔서 제대로 볼 수 없었던..철없는 10대가 아닌..한 여자로서 선생님을 사랑한다면...제
사랑 받아주실 수 있나요? 그럴 수 있나요?"
"초희야!!"
"그렇게 바라보지 마세요..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세요.. 안된다는 말은 듣기 싫어요...타이
르지도 말아요..전..더 이상 선생님의 제자가 아니예요..떠난다는 선생님 붙잡지 못했던.. 그때
의 그 소녀가 아니라구요..더이상...제자가 되고싶지 않은...여자란 말이예요!! 이게 무엇인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는 여자라구요!!"
난 울면서...선생님의 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눈을 똑바로 뜬 체 선생님의 눈을 보면서..입
을 맞추었다. 세상이 요동친다는 걸..우리의 키스는 단순한 입맞춤이 아니란 걸..선생님도 보
길 바라면서...그걸 느끼는 선생님의 눈동자에 떠오르는 감정을 읽기 위해서 난 눈을 감지
않았다.
처음엔 뒤로 빼려던 선생님은 이젠 내 몸을 꼭 끌어안고 키스에 몰입하고 있었다. 아주 달
콤하고...혀끝에 닿는 또 다른 맛에 몰두하면서..서서히 선생님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오...."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누구의 소리인지 신경쓰지 않은 체 우린.. 그렇게 하나
가 되어가고 있었다...

띵똥~~~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우리 두사람은 긴 마라톤을 끝낸 사람들마냥 헐떡이면서 서로에
게 시선을 떼려하지 않았다.
"절...거부하지 말아요...난..이미 선생님이 무엇을 갈망하는 지 아니까."

현관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난 기현씨를 제체고 달려나갔다. 오늘은 그때처럼 울지 않을거
야..
그때처럼 당황하지도 않을거야..내가 사랑해서 한거야..후회는 하지 않을거야...
절대로..절대로..

그녀가 그렇게 나간후 난 완전히 넋이 나가있었다. 가슴은 풀어버리지 못한 갈증에 심하게
뛰고 있었고 숨을 토해내고 있는 입을 통해 가늘게 떨리고 있는 뜨거운 숨결이 나오고 있었
다.
그녀를 안고있던 손은 전기라도 감전된 것 마냥 파르를 떨려오고 있었다...
"형!! 나왔어.."
동생의 소리도 이제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천만볼트
짜리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것 마냥 온 몸이 욱씬거리며 아파왔다. 한기조차 느껴지고 있었
다.
"형?"
"어?어....왔니?"
"무슨 일이야?왜그래?"
"아니...괜찮아..근데 그거 뭐야?"
그제서야 녀석이 들고 온 짐이 눈에 들어왔다.
"응.. 외숙모가 보내신거야. 형 아프다니까... 이것저것 싸 주셨어.. 그리고 집으로 전화 해달
라고 하셨어."
"그래..."
난 머리도 식힐 겸 밖으로 나왔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차디찬 냉기가 흐리고
있었다.
저 이글거리는 태양에..내 마음을 바짝 말릴수 있을까... 그녀에게 진실을 밝힐 수없는 내 양
심을...태워버릴 수만 있다면.. 이렇게 답답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인
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잊을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형!! 전화왔어!!"
"그래...네."
녀석의 손에서 수화기를 건네받은 난 방으로 들어섰다. 혹시..초희가 전화를 했다면...
"나다. 그래, 어디가 얼마나 아픈거니?"
"새어머니?"
"그래. 넌 어째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니? 넌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니? 이 어미를 이렇게
아프게 해야하겠니? 네 아버지처럼 이 어미는 잔인하지 않잖니!!"
"새어머니.."
"넌 항상 그랬어. 곧죽어도 힘든 내색한번 하지 않았던 녀석이지...하지만.. 그게 이 어미 가
슴을 더 아프게 했다는 걸.. 한번쯤 알아주면 안되겠니?"
"죄송합니다."
"휴~!! 또 시작이구나...네가 그렇게 말하면..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구나...기석아, 이번주 토
요일날 대전에 한번 다녀가라."
"대전을요?"
"그래..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구나. 선이라도 봐야지.. 이 어미 죽을 때까지 손주한번 안
아주질 못할 것 같으니까. 대신 내가 서두르기로 했다."
"새어머니!!"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이 없다면. 당장 내려와. 이만 끊는다."
"새어머니!! 새어머니!!"
전화는 이미 끊긴 상태였다. 침대에 수화기를 집어던진 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머릿속에 갑자기 복잡한 미로가 생긴것 마냥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날 느꼈던 것이다...
제가 만약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요? 그래도..절 여자로 보아줄수 있어요? 그래줄수 있어
요?
그녀의....소리만이.. 그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는..열쇠인 마냥 들려오곤 했다...

선생님 만큼이나..나도 힘들었다... 선생님만큼이나..나도 걱정이 되었다... 자신때문에 내가 상
처받을까 겁이나 있는 선생님 처럼..나로인해.. 선생님이 힘들어 할까봐..나도 겁이 났다...
한번만이라도...우리 두사람..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하지만.. 결코 그
럴 수가 없었다.. 이 엄청난 오해부터 풀어야 했으니까..이게 미로의 열쇠니까..그것만...밝혀
지면..쉬운 길이 나타나니까..

"넌 대전에 왜 갔다 온거니?"
"음.. 집에 갔다 왔지, 뭐... 형 몸은 좀 어때? 아까 초희씨가..."
녀석이 말끝을 흐리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녀석의 시선을 외면한 체 천장만을 바라보
고 누워 있는데 녀석이 발끝으로 몸을 툭툭 쳤다.
"형, 그거 알아? 무심코 던지 돌에..상처받는 개구리가 있다는 거.."
"그래..알아.."
"초희씨는 유부녀야. 너무 들락달락 거리면.. 안 좋잖아. 내가 보기에 초희씨 분명 형에게 특
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던데. 아냐?"
대답대신 한숨이 새어나왔다. 담배를 물고있던 녀석도 따라서 한숨을 내뱉었다.
"만약에 말이지.. 형..정말 이건 진짜 만약인데... 내가 생각했던대로라면.. 말이야..나..아마도
형하고 싸우게 될지도 몰라. 그게 밝혀진다면 말이야.."
"무슨 소리니?"
"아냐..아무것도."
녀석은 알 수없는 말만 남긴 체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이마에 흘러내려온 머리칼을 쓸어올
리던 중 우연치 않게 손이 입술을 스치고 갔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아까 낮에 초희에게 받
았던 키스가 떠올랐다.
서툴지만.. 온 마음을 다해 입맞춤을 했던 초희의 모습이..그녀는 알고 있을까..그 모습이 얼
마나 아름다웠는지를....아..

"우와~~ 날이 무지 덥다.더워!! 아예 우리 집 정원에 조그맣게 풀장을 만들면 어떨까요, 아
버지?"
"하하.. 풀장? 좋지..."
"아빠 그러면 저 녀석 방을 확 허물고 풀장을 들여놓죠."
"옆집누나!!"
"왜? 이 좁아터진 정원에 풀장 타령을 했으니까 당연히 네방을 쓸어야 그게 가능할거 아니
야. 안그래요?"
열받는 지 녀석이 크게 수박을 깨물었다. 입을 우물주물하는 게..불안하긴 했지만..
"퇴데데퇴!!!!"
"야!!!! 너...너...."
녀석의 입안에 있던 수박씨가 갑자기 내 얼굴에 하나씩 달라붙는게 아닌가!! 기습공격 사이
렌도 없이!!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는건데.... 넌 죽었다.
"옆집누나.. 옆집누나..이성을 찾고.. 다시한번...우왁~~~~!!!!!!!!!!"
난 녀석의 얼굴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더군다나 하나는 비명을 지르는 사이에 수박씨가
입안으로 쏙 들어갔던 것이다.분개한 녀석이 수박을 먹는 사이에 난 비명을 지르며 대문을
향해 달려갔다.
"아빠~~ 시원한 아이스크림 좋죠? 제가 사올께요~~~!!"
"아..돼...(안돼!!!)"
수박을 입안가득 먹은 녀석이 우물거리며 내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녀석에게 붙잡히기
전에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온 난 슈퍼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옆집누나!!! 거기 안서!! 그러기가 어딨어!!! 옆집누나~~~~!!!!!!"
간발의 차이로 슈퍼에 도착한 난 서둘러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아줌마!!"
"어.. 초희왔구... 어라? 네 동생 왜 저러니?"
"아~!!! 무시하세요. 저녀석 원래 엉뚱하잖아요."
아직도 수박씨를 찾기위헤 우물거리고 있던 녀석이 캑캑 거리면서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놀란 아줌마가 재빠르게 물을 갖다 녀석에게 주었지만 녀석은 계속 기침을 해대며 날 노려
보기만 했다.
"왜그래??"
"누...나...죽겠네..켁켁~!!! "
"하하.. 감히 누구한테 까불고 있어~!! 확~!!"
"아이고... "
그때까지 난 계산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지 못한체 동생과 옥신각신 다투고 있었다.
"어쩜 오누이가 그렇게 사이가 좋누... 우리 얘들은 무슨 원수지간마냥.. 노려보기만 하는데...
어라, 총각 벌써 다 골랐어?"
동생과 난 동시에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자역시 놀랐는지 눈
을 크게 뜨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현씨?"
"형...제였어요? 두사람...???"

눈을 크게 뜬체 나와 동생을 바라보는 기현씨의 얼굴이 차츰 굳어가기 시작했다. 딱딱한 입
매는 평소에 그가 잘웃는다는 걸 무색하게 할 정도로 찬 기운이 감돌았다. 따뜻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던 눈동자역시 차갑게 느껴졌다.
"누..나 나 먼저 갈께."
녀석이 비겁하게 날 혼자두고 가버렸다.
"형제였나요?"
다시 묻는 질문은 이제 확신에 가까웠다.
"네..하지만..."
"그래요? 정말 그래요?"
"하지만...그건.."
"됐어요.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무런 표정없이 차가운 대리석 같은 얼굴로 돌아서는 기현씨를 난 붙잡았다. 무슨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닌..그저 이렇게 보내면 안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근데 그는 날 돌아보지도
않은 체 걸음을 멈추었을 뿐이었다.
"내말좀 들어보세요...이렇게..가면.."
"저에게 애써 설명하려 하지 마세요. 지금 전 초희씨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안고 있으니까
요."
"기현씨..들어야 해요..그래야만이.."
"제가 듣고 싶은 말은...차라리 초희씨가..형과 내가 보았던..그 모습이 진짜였음해요..아니..그
것도 거짓이니까...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모르겠네요."
싸늘한 남자의 말투에 내 손은 그를 붙잡고 있던 팔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남자는 움직
이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가 내게 할말이 있다는 의미라면..그게 선생님과 관련된 거라면....
"진심이 뭔지 아는 여자라 생각했어요..그게 얼마나 소중한건지...아는 여자인줄 알았어요..형
이..아픈이유가..뭔지 아는 줄 알았어요..형이 무엇때문에..괴로워 하는 지 아는 여자인줄만 알
았어요..그래서..나도..나도..초희씨를 좋아했어요...초희씨가..유부녀라는 거에 관계없이..."
그 말에 나도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발...제발.. 선생님께는..말해주지 말아요...기현씨가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게 두려운가요? 지금 초희씨가 걱정하고 있는 건 그건가요? 한남자의... 마음이 어떠할지
는 관심이 없나요?"
"그게 아니란 말이예요!! 그게...아니라구요...그게..그게..아니란 말이예요!! 흑흑~"
한번쯤은 TV 드라마 속의 여주인공이 되고싶었던 적 있었다. 아니 그런 가슴아픈 사랑을
동경해 본적이 있었다..그게 어떤 느낌일까.. 진실을 밝힐 수 없어 괴롭다는 게 어떤건지...
왜 여주인공은 저렇게 울기만 하는 건지 답답하게 지켜본 적이 있었다..근데...그게..현실로
나에게 다가올줄은 몰랐다.
닦아도 멈추지 않는 눈물이 어떤건지...이젠..알 것 같았다.

밖에 나갔던 녀석이 어깨가 축 늘어진 체 집으로 들어왔다. 무거운 한숨과 함께 쇼파에 쓰
러지듯이 앉더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쓱쓱 문지른 게 아닌가.
"너 왜그래?"
"..."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난 하던 일을 계속했다. 물론 곁눈질로 꿈쩍도 않고 얼굴을 잔뜩 찌
푸린체 앉아 있는 녀석을 살피면서 말이다.
"나 말이야...나..채인것 같아."
"채였다니? 누구한테....설마..초희에게??"
녀석의 입가에 보일듯말듯한 미소가 서렸다. 하지만 이내 그 미소도 사라지고 다시 입가에
냉기가 맴돌았다.
"응. 솔직하게...다가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영원히..그럴 기회가 없어진것 같아. 형. 나..
이번주에...떠날께."
말을 마친 녀석이 자신의 방으로 사라질때까지 난 멍하니 녀석이 앉아 있던 쇼파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초희의 남편이... 정신을 차리고..초희의 곁으로 다시 돌아온 걸까..
근데...왜 자꾸...가슴이 답답해지는 걸까...좋은 일인데..아니 당연한 일인데...

"옆집누나!! 그만 좀 울어라.. 그러다가 우리집 물난리 나겠다..아니지 눈물바다 되겠다."
"엉엉엉... 난 말이지...쉬울거라 생각했어..예전처럼..그렇게..갑자기 떠나지 않을테니까..선생님
이..그렇게 가버리지 않을테니까..하지만..하지만..이럴줄은 몰랐어..아무리..내 겉 모습이 변했
더라도..선생님은...그럴 분이 아니라 생각했어. 다른 남자들처럼 겉모습으로..여자를 판단하는
분은 아니실거라 생각했어..근데..근데..이게 뭐야...날.. 아줌마로 본 사람은 선생님이었어..엉
엉...근데...기현씨는 나보고 나빴댔어..나보고 그러면 안된다고 했어..나도...선생님을 좋아해...
나도 미칠것 만 같단 말이야..그때처럼...갑자기 떠나실까봐....이젠...겁이난단 말이야...어쩌면
좋아..나 어쩌면 좋아..."
몸부림 치며 동생을 붙잡고 울어봤지만...풀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울어서 꽉 막힌
코를 풀기 위해 화장지를 집는데 눈물이 자꾸만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옆집누나. 정말 청승맞게 이럴래?"
"넌..몰라..지금 내가..얼마나...무서워 하고 있는지...아니..11년 전 내 맘이 어땠는지 넌 몰라.."
"아니, 난 옆집누나가 왜 이렇게 바보처럼 울어야 하는 지 모르겠어. 당장이라도 가서 사실을 말
하면 될것 아냐. 안그래?"
"지금 가서 선생님.. 저 결혼하지 않았으니까. 저 선생님 좋아할래요.. 아니 사랑할거예요..
라고 소리라도 쳐야 되니? 아니.. 그게 통할수만 있다면...내가 그렇게 소리쳐서 선생님이..이
해한다면...날..사랑한다면...그렇게 할거야..하지만 그게 아니잖아...선생님은...나한테 이용당한
느낌이 들거 아냐.
나 한테 등을 돌릴거아냐...그게 겁이난단 말이야..두번다시...만나지 못할까봐...겁이난단 말이
야."
그분은... 하늘이 보내주신.. 내 연인인걸...그렇게 믿고 지내온..난 어쩌라구...
"아이구~~!!! 이렇게 바보처럼 우는 것보다는 낫겠다. 이게 뭐냐. 휴지값도 안나오겠다."
"나가!! 나가라구!! 누가 너보고.. 나 우는거 보면서 가슴치랬어??!!빨리 나가!!"
"알았어.. 나간다구. 나가면 될 것 아냐. "
녀석이 나가자 난 아예 이불을 뒤집어 쓰고는 울어댔다.
선생님도 그런거예요? 여자의 외모부터 사랑에 빠진다음에...마음을 보는건...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예요?

마지막 논문을 끝내고 컴퓨터 전원을 끄려는 데 기현이가 차가운 맥주캔을 건넸다.
"밤중에 웬 술?"
"속이 답답하네... "
"채기가 있는 거 아니야?"
"훗~. 형, 형은 여자를 보는 기준이 뭐야?"
"여자를 보는 기준? 그런 것도 있냐?"
시원한 소리를 내며 맥주 캔이 열렸다.
"응..요즘은 여자의 첫째 조건이 외모라네...그래서.. 우리 집안의 고지식한 핏줄이 아직 남아
있는 형은 어떤가 하고.."
할일도 없고 해서 난 녀석의 말에 장단을 맞추기로 했다.
"어쩌면.. 모든 남자들이...그런거 아닐까?"
"그럼 형도 모든 남자들 속에 낀다는 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
" 하지만... 난... 여자의 모든 것이 중요해. 외모야 나중에 살다보면.. 질리겠지만.. 마음이야
어디 그렇겠니? "
"난..말이야. 형이 그렇게 말해주길 바럤어...그래야만이.. 되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음...그런게 있어."
어김없이 두서없이 말을 마친 녀석은 또 다시 침묵속에 잠겨버렸다.
"형... 난...두 사람 모두...잘 되었으면 좋겠어."

"야야~!! 정신차려~!! 초희야?"
거칠게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난 고개를 들었다. 눈이 감겼다가 다시 떠지는게 반복되는 가
운데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어? 정옥아? 너..여기 왠일이야?"
"야~!! 너 취했어. 빨리 일어나!! 집에 가야지...."
"집? 아하~!! 내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집~!!"
"얘가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거야?"
"헤헤..너 모르냐? 나..남편 생겼어.. 헤헤... 가짜 남편이지만.. 그래도..넌 없잖아..가짜 남편..."
"얘가 점점...."
"이거 놔~!! 나 혼자도 갈 수 있단 말이야~!! 잘가~!! 안녕~~ 친구야~~!!!"
정말 오랫만에 기분이 좋았다.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뺨에 닿는 밤 공기도, 정신이 몽롱한
것도 좋구... 내 앞에 다가오는 전봇대도...좋구...정말 기분이 좋았다..정말..기분이...
"초희씨?"
이게뭐야~~!!! 어라?? 왜 한쪽 눈만 보이는거지??
"이씨... 누구야? 이거 놔~!! 나 혼자서도...딸꾹~!! 갈 수 있단...말이야..쩝쩝.."
날붙잡는 방해물을 치우려고 손을 털어봤지만 소용없었다. 내 손을 꽉 잡고 떨어지지 않으
려 했다. 귀찮게 시리... 하면서 힘껏 상대를 밀어봤지만 오히려 내가 앞을 고꾸라지는게 아
닌가...
무언가 딱딱하지만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게 내 머리에 부딪혔다.
"아얐!!"
아프지도 않았지만 그 충격에 비틀거리면서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찰나에 누군가 날 단단하
게 안아 올렸다. 어라?? 왜 내 몸이 둥둥 뜨는거야???헤헤...기분 좋네... 잠도 오고......잠이온
다...잠이 와....

"이봐요~! 초희씨?"
차가운 물이 내 뺨에 흘러내리고 있어. 비가 오나? 어라? 제법 쏟아지는데? 우리 집 비가
새나?
근데...이건 또 뭐야~!! 이 자식이 또 날 깨우려고 하네.....너 죽었어~!!
"아얏~!!"
헤헤... 녀석이 쓰러졌군...잠자는 사자의 코털을....건드리면..안돼..짜식이...
"초희씨? 이젠 일어나 봐요~!!"
싫어..왜 자꾸 날 깨우는거야... 이 자식이... 아직 덜 맞았군.... 나..깨우지마...선생님하고...같이
있단 말이야...날 안고 계신걸...아..따뜻해...
난 따뜻함을 찾아 몸을 더욱 구부렸다.
"가지 말아요...내가...보내지 않을거예요...힘없이....그렇게..보내지 않을거란 말이야...."

"흠~!!"
찬 바람에 몸을 떨던 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로등 불빛만이 어둠
을 밝히고 있는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가로등???? 그게 왜 내방에....
"아악~!!!"
비명과 함께 날 안고 있는 남자의 팔을 뿌리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아니..... 이게 어떻게 된거예요? 제친구는요?"
"초희씨??"
눈을 부비며 기지개를 피던 남자가 갑자기 한쪽팔을 움켜잡은 체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아.... 팔 저려....."
아마도 내가 기대고 있던 팔인가보다.... 그 생각이 들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지만.. 어둠속이
니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 어서 설명해 봐요. 왜 내가 댁하고 여기에 있는건지."
"자...잠깐만요..."
아직도 아픈지 남자는 팔을 쫙폈다가 구부리는 동작을 여러번 해댔다. 그리고나서야 하품
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난 뒤로 한발 물러서야 했다.
"이젠 애기 해봐요. 내가 왜 기현씨랑 같이 있는지.."
"정말..기억 안나요?"
"기억이라뇨?"
"술 먹은거 말이예요"
물론 기억나지.. 단지 술 자리에는 친구 정옥이랑 나 단둘 뿐이었다는 거지만.. 어떻게 이 남
자랑 같이 공원 벤취에 앉아 있는지를 기억못하는게 문제였다.
"무슨 소리하는 거예요?"
자초지경을 얘기하던 남자는 나에게 얻어맞았다고 우기면서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무슨 여자가 때리는게 그렇게 매워요? 턱이 날아갈뻔 했잖아요."
"미...미안해요.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요. 아무짓도 안했으니까.. "
어이없는 내 행동에 놀라 난 도로 벤취에 앉았다.
"초희씨... 힘들어요?"
".....할말 없어요. 이젠 집에 가야겠어요."
"초희씨.?!"
일어나려는데 남자가 내 손을 잡았다. 어둠속이지만 남자의 눈동자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말해봐요..혹시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할말이 없다니까요!!"
"하지만..."
"나에게 화를 낸 사람은 기현씨였다구요. 그런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해요!! 어떤 말을 하냐구
요."
"미안해요...난...나..초희씨 많이 좋아해요..그래서..화가났던 거예요..최소한..우린 친구라고 생
각했으니까...."
남자의 말이..날 도로 자리에 앉혔다.

"형에게 말해야 하지 않아요?"
"......."
"자꾸 미루다 보면... 저처럼... 뜻하지 않게 알게 될 수도 있어요..그런 생각 안해봤어요?"
"왜 그런 생각 안해봤겠어요..차갑게 날 바라보는 선생님의 시선을 꿈에서 여러번 봤어요..그
럴때마다 겁이 났어요...아직은...선생님 마음이 어떤건지를 모르겠어요. 아직도..난 그분의 아
끼는 제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때마다 뒤로 한발 물러서게 돼요. 날 보는..선생님의 눈
은 사랑을 말하고 있는것 같은데..나에게 보여주는건...그렇지 않거든요.."
아직도 술기운이 남은걸까.. 난 감추고 있던 비밀을 하나씩 꺼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그
는 친구처럼 편안한 말 상대가 되어주고 있다. 때론 같이 분개하며 씩씩대기도 하고 또 어
떨때에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힘을 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는데.. 지금 저 혼자 선생님을 잡아당기고 있잖아요...사랑은..그런게
아니잖아요..그렇게 하면 안되잖아요..."
".....그래요..정말 그럴거예요...초희씨.. 힘내세요..제가 옆에서 많이 도와줄께요~!! "
남자의 씩씩한 말투가 날 웃음짓게 했다.
"저도 언젠가... 초희씨 같은 여자 만나...사랑하고 싶어요..정말..."
"고마워요...기현씨..."
"그럼.. 이젠 혼자 아파하지 않기로 해요. 알았죠? 제가 곁에 있으니까요. 형이 초희씨를...
제대로 볼때까지.. 곁에서 힘이 되어줄께요.. 아셨죠?"
남자의 말이 약간은...마음에 걸렸지만 난 웃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으으.. 이젠 그만 집에 가야겠어요. "
"그러게요..좀 춥네요. "
우린 걷는 동안 재미있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형에대해서도...선생님에 대해서도..그 어떤 질
문도 하지 않은 체...

"다음 주 토요일날 대전에 한번 내려와라."
"새어머니!!"
"그쪽에서 널 만나려고 하니.. 이번기회에..."
"새어머니!! 왜 자꾸 이러세요!! 몇번을 말씀드려야 해요!!"
"기석아~!!"
새어머니의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수화기를 붙잡고 있는 손이 파르를 떨려왔다.
"넌...나에게 하나뿐인 자식이잖니..."
또 시작이심니까...죽은 형에 대한 애착을 왜 또 저한테... 돌리시는 겁니까. 왜??
"새어머니..."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아니 온 몸에 힘이 없었다. 나약해져만 가는 새어머니를 느낄때마다..완
고한 아버지의 억압에 억눌려 지내시는 새어머니를 볼때마다 느껴졌던...사춘기때의 반항같은
게.. 또 다시 용솟음 치고 있었지만...난 그걸 억누르며 참고 있었다.. 한때 이름 하나만으로
도 귀한 대접을 받으셨던 새어머니였다. 그런 새어머니를 누르시려 했던 아버지.....난 조용히 수
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답답함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었는데.... 마당에 나와 서 있는데 멀리서 남녀의 정다운웃
음 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남자의 웃음소리가 귀에 많이 익은 소리였다..
"아니....너..."
녀석에게 문을 열어주기 위해 대문을 열었을 때....여자를 보았다..녀석의 곁에서 서서 즐겁게
웃고 있는 초희를 보았다..

"형...그게.."
"너 이자식~!!"
반쯤 풀린 초희의 눈동자를 보자 순간 피가 바짝 말라 버리는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이렇게 늦게까지 초희랑 같이 있었단 말이야? 그런거야?"
"아이... 선생님.. 알지도 못하면서... 딸꾹~!!"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내 앞으로 다가온 초희를 보자 화가 더 났다. 그녀의 상기된 얼굴에
서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웃음이 피어나 있다는게.. 그 미소를 이 녀석이 봤다는 그 한가지
만으로도 유치한 감정이 날 괴롭히고 있었다.
"음.. 이 남자.. 기현씨, 오빠라 불러도 돼죠?"
"어..그러세요. 초희씨.."
녀석을 째려보자 녀석은 금방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초희는 아직도 분위기 파악이 되지 않
는 모양이었다.
"초희야..."
"아이.. 선생님.. 우린.. 딸꾹~ 요 앞에서 만났어요.. 그래서 제가 집 앞까지 데려다 주려고...
그렇죠, 오빠?"
"하하..초희씨....그만 해요..아직도 술이 덜 깼나봐요...그러니까..."
"술이 덜 깼다구요? 그럴리가요.. 저 남자가 제 앞에 서 있잖아요. 화난 황소마냥 씩씩대면
서..딸꾹!!"
"그만 들어가 , 기현이는.. 초희야..."

무슨 충동에서였을까? 난 대문안으로 들어서려는 기현씨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곤.. 그의 뺨
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 정말로 고마웠어요..진심으로.."
"어어...초..희씨...."
기현씨가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며 당황대고 있었다.
"어서 들어가라니까!!"
선생님이 소리를 버럭 지르는 바람에 깜짝 놀라 선생님을 바라보는데 선생님이 대문을 세게
닫고는 내 팔을 꽉 움켜잡고는 왔던 길을 다시 걷는게 아닌가..
"아파요. 선생님.. 이 손 놔요!!"
"...."
"선생님!!"
"입 다물어.."
인적이 드문 외진 골목길에 접어들자 갑자기 선생님이 손을 홱 뿌리치듯이 손을 놓는 바람
에 난 비틀걸렸다.
"선생님... "
"어떻게...어떻게 그럴수 있니? 어떻게.. 그 자식과 같이 있는거야!! 내가 지난 일 주일동안
어떤 기분이었는지 넌 알고 있어? "
화를 내며 서성이는 선생님이 소리를 질러댔다. 미친듯이 머리를 쓸어올리는 선생님은 아
예 등을 돌린 체 서 계셨다.
"난.. 난...말이지.. 네가 그 자식과 같이 있는게 싫어..아니 좀더 솔직하게 말하면.. 네가 다른
누구와 함께 있는게 싫어. 지난 일주일동안.. 내 머릿속에는 온통 네 생각뿐이었어..혹시나
너와 네 남편과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었어..네가 다치는게 싫어..그건 정말...싫어.그래서..."
갑자기 등을 돌려 날 바라보는 선생님의 시선을 보는 순간..아찔한 충격이 찾아왔다..드디어
나에게..마음을 열은 것이다..드디어..내 마음을... 받아들이신거다....
"하루에도 수십번이나 생각해 봤어. 너에 대해서...그리고 솔직한 내 감정에 대해서...결론은..
하나뿐이었어...널 다시 만나서..좋았다는거...하지만...넌.결혼을 해 있었어...지금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아..그저..그저..너와 나..이렇게 만나야 될 운명이었다는거...그 운명에..모든 것
을 맡겨야 한다는 것 밖에..."
"선생님....난..."
사실을 말하려는 순간 난 선생님의 품에 와락 안겨버렸다. 날 안는 선생님의 따뜻한 품에
서.. 그가 내뱉는 나직한..중얼거림을 듣고 있었다.
"사랑해...사랑할거야...."

내 평생 소원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손 잡고 바닷가를 걷는 아주아주 단순한 소원이었
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소원은 꿈에서 조차도 이룰수 없을거라 생각했었다. 근데.. 지금 난
선생님의 손을 꼬옥 잡고 밤새 차를 타고 온 바닷가에...와 있다. 하얀 파도가 칠때마다 거기
에 바닷물이 있다는것을 알 수 있을정도로 어두운.. 새벽녘.. 미친듯이 우린... 그 동네를 빠
져나왔다. 거기를 빠져나오면서 선생님은 내 손을 꼭 잡으셨다. 그리고 말했다.
"다시는.. 이손을 놓치는 일은 없을거야...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어떻게 더 많은 걸 바랄까...어떻게..더 많은 걸 탐낼까....지금은.. 선
생님의 손 하나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숨을 쉴때마다 느껴지는 짠 맛. 내뱉을 때마다 느껴지는.. 행복함..
우린 신발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적시며 걷고 있었다..
"대학교 때 이곳으로 MT를 온 적이 있었어요.. 그땐..저기에 앉아 멍하니 바다만 바라본적
이 있었어요. 밤 바다가 너무 예뻐서..눈물을 흘렸어요.근데.. 지금은... 여기에 그냥 앉아서..
바다가 아닌.. 선생님을 하루종일 봤으면 좋겠어요...그래도...눈물이 나올 것 같아요.."
말없이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리곤 한팔을 내어깨에 올려놓으셨다.
"고마워..초희야.."
"우리...이젠 들어가요.."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를 뒤로 한체 우린 계단을 올라 바닷가를 빠져나왔다.

"와.. 이렇게 쉽게 방을 구할 수있어요?"
호화스럽게 꾸며진 홀을 지나 엘리베이터에 오른 난 당황대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했다. 거
울에 비친 내 뺨에는 붉은 홍조가 내려앉아 있었다...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어느 새 우
린 어느 방 앞에 와 멈춰있었다.
"저..저기요...."
"응?"
"음....같이...자야죠?"
"흐음.... "
선생님의 고개가 약간 비틀어졌다. 날내려다 보는 선생님의 눈동자엔 장난스런 웃음이 떠올
라 있었다.
"어떻게 할까?? 난... 초희 옆에 있고 싶은데...그러면 안될까?"
"아이....난........"
순식간에 선생님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려왔다. 그리고..달콤한 키스가 이어졌다. 방에 들어가
지도 않은 체 복도에 서서 난 그 키스에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강요하지 않을거야...절대로.."
등뒤로 문이 열리는 게 느껴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또 다시 긴 키스가 이어졌다. 아
쉬움을 남긴체 입술이 떨어질때마다 간간히 흘러나오는..고통에 찬 소리들...
망설이듯..그의 손이 내 귓불에 닿았다.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내 눈가득 그의 모습이 담
아졌다.
그의 눈 가득 내가...있었다. 그의 중심에..내가 보였다...그걸로 됐어....그것만으로도...충분해....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내손을 자신의 가슴께로 이끌었다. 손바닥을 통해 그의 심
장 박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내...마음은..미칠것만 같아..이게 꿈일것만 같고...불안해...눈을 감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건..."
"불안함을.. 없애야죠...."
그를 응시하면서 부드럽게..입술을 가져다 댔다..그리고 살짝 그의 아랫입술을...물었다.
"난...사라지지 않아요....난....사라...."
열의 찬 그의 눈동자가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다가온 입술은 이젠 성난 바다와
같았다.
험한 파도를 치며 입술을 덮치는 그의입술이 어느 새 그녀의 긴 목선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
다.
"아....아.."
만족스런 신음이 터져나왔다. 내손은 아직도 그의 가슴을 배회하며 길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바짝 끌어안았다.. 서로의 몸에 꼭 맞추었다는 듯이..우리 앞엔 한치의 틈도 없었다.
"목이.....목이...말라...."
나직히 탄성을 지르며 내지른 그의 목소리가 드디어 내 자제력을 앗아가버렸다.
온몸이 부르르 떨면서 그를 더 꼭 끌어안는데 갑자기 그가 몸을 빼냈다.
그리고 열기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눈으로 날 내려다 보며 묻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살며시 벌어졌다.촉촉하게 젖어 있는 그녀의 입술이..날 초대하기 시작했다.
그녀가...날 향해 손을 벌리고 있었다...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그녀는...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바로..내 여자였으니까...그녀를 처음 보고...눈을 마주쳤을 그때...그녀는... 더 이상
누구의 것이 아니었다.
이미..내 여자였다...그 순간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날봐...날 보라구..."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욕망을 보는 순간
또 다시 입을 맞추려 했다..하지만.. 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돌렸다.
"난...초희 눈에서...다른 사람을 보기 싫어...다른..사람이 끼어드는 게 싫어...오늘은... 완벽한..
너여야만 해....그리고..완벽한..나여야만해...내말 무슨뜻인지 알지?"
그녀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지마...울지마...미안해...정말..미안해...."
너무...했다...그녀에겐.. 그녀에겐...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누군가 있는데......
"사..랑해요...사랑해요......"
그녀는.. 지금 내 앞에 떨면서 서 있었다... 그녀는 그저 그렇게...서 있었다.
"더..이상은..안돼."

그의 목소리에 담긴 고통을 감지하는 순간 우리의 키스는 더 열렬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마음을 정했다...어떻게든 그에게 깃든 불안함을 없애고 싶었다.. 난 발꿈치를 들어 그
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의 입술이 정확한 위치에 포개졌다.
어느 순간 몸이 붕 뜬다는 느낌과 함께 등에 푹신한 쿠션이 느껴졌다. 두손으로 그녀의 머
리칼을 잡고 그녀의 눈 깊은 곳을 응시하는 그의 눈이 보였다.
"멈추지 않을지 몰라....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지도..몰라....내가...널 포기 하지
않을 지도 몰라.......내가...내가...너보다 더 많이..사랑하게 될지도 몰라.....내가...."
"예..예.....예.....예....."
길고 긴 키스가 이어졌다. 난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내 작은 품에 푹 쓰러지는 그를 안
았다.
그의 긴 손가락이 내 몸을 스칠때마다 난 참기 힘든 신음을 내뱉으며 그를 더욱 더 끌어안
고 있었다.
마지막 장애물이 사라졌을 때...그가 고개를 들었다. 땀에 젖은 그의 이마위로 머리칼이 달라
붙어 있었다.
"더는 물러서지 않을게...더는... 아프게 하지...않을게...."
그가...들어오고 있었다...그가..느껴지려는 그 순간..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나왔
다.
"아~~~악!!!!"

"선...생님..."
그가 굳어진 얼굴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리곤 자신의 눈이 확인한 결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불안감이 언습해왔다. 방금까지만해도
꺼지지않을듯이 타오르던 열기가 어느새 푸르르 꺼져버렸다. 이젠 알몸으로 그의 몸 아래에
있다는게 창피해졌다.
이불로 벗은 몸을 감싼채 그를 밀쳐내 일어나려는 순간 그의 억센 손이 내 어깨를 움켜잡았
다.
"이...이게 뭐야...설마....설마...."
시트위의 얼룩을 똑바로 쳐다볼수가 없었다.그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서둘러 손을
놓고는 욕실로 뛰쳐들어갔다. 이어서 샤워기에서 물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나올때까지 난 꼼짝도 하지 않은 체 침대에 앉아만 있었다. 그가 나와 여기저기 흩어
져 있는 옷가지를 집어들고 옷을 입을 때까지 난 미동도 하지 않은 체 넋 나간 모습 그대로
였다.
가슴께에 여민 이불자락만 꽉 움켜잡은체...
"가자."
짧은 그 한마디에 정신이 들었다. 그는 이미 옷을 다 입고 내 쪽으로는 시선을 두려하지 않
은 체 서성이고 있었다.
"선생님..."
"가자니까!!"
"이럴 수는 없어요.. 이럴 수는 없다구요!!"
"........"
내 울부짖음에도 선생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저 차가운 시선만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
을 뿐이었다.
"넌....그 동안 날 가지고 장난한거니? 그런거니?"
"어떻게..그런 말을...."
"그럼.. 저건 뭐라 설명할거니? 저걸 설명해봐.!!"
그는 마치 더러운 오물이라도 있는 듯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체 손가락으로 시트를 가리켰
다.
"넌.. 결혼했어..그게 무슨 뜻인지 알거야...저건...저런건..있을 수 없는거야!!"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치던 그가 언제 내 앞에 왔는지 날 일으켜 세웠다.
"왜그랬니? 왜 나에게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던 거야!!!"
"선..생님..."
그의눈을 보는 순간 그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의 눈에...서려 있는 고통을 보는 순간 말
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몇..번이나 말하려구 했어요..근데...근데...자신이 없었어요..겁이 났어요..선생님처럼 저도 겁
이나고..무서웠단 말이예요.!!"
그의 손이 툭하고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방문이 크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그가 가버린
것이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체..그를 잃을까봐 겁이 나 떨고 있는 날 혼자 놔둔체..그는 떠나 버린 것
이다.
"선생님!!"
바닥에 주저 앉아..소리내어 울었다.. 목이 가라앉을 때까지.. 더 이상 그를 부를 수 없을 때
까지....한참을 그렇게 소리없이...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뭐라구요? 그래서..형이 알게 됐다는겁니까? 그런거예요?"
충격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던 기현이는 카페안의 사람들의 시선에 머리를 긁적이며 쑥
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도로 자리에 앉는 기현이는 냉수를 들이켰다.
어떻게 알게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얼굴을 붉히며 말을 하는 내 얼굴
만 봐도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였구나...갑자기 형이...대하기 힘든 사람으로 변한게...난 또...어떻게 할거예요?"
"그건..더 이상 저한테 묻지 마세요...끝인지..아님...시작인지는...모두 선생님한테 달렸으니까
요."
"초희씨!!"
나의 말이 답답했는지 남자는 가슴을 팍팍 치면서 날 불렀다.
"이대로...끝이라면 어쩌려구요? 정말 이대로...끝이라면요? 형 내일 대전에 간단 말이예요.
새어머니 성화에 못이겨...선이라도 본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금방 사그라질미소였지만.. 남자에겐
괜찮다는..식으로 보이길 원하는 마음이었다.
"하..는 수 없죠..."
"아이구...속터져!!"
분통터져하는 남자와는 달리 기분이 착 가라앉은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체 자리를 지켰
다.
"이대로..두 사람 헤어지려구요? 사랑하는 사람이...이별을 하면.. 그게 얼마나 평생 한이 되
는데요..."
"그럼.. 그럼 저보고 어떻게 하라구요!!"
목이 메이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두줄기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억제할 수
없는 슬픔이 또 다시 터져나오려 하고있었다. 그걸 참기 위해 이를 악 물어봤지만 턱이 가
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런..젠장!! 울지 말아요..초희씨..제가 형한테 ...말 해볼테니까요."
"그러지 말아요...그러지..말아요....제가..할거예요..."
남자의 한숨과 함께 또 다시 내 눈에서 눈물이 넘쳐 흘러내려왔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어두운 골목길을 밝히며 들어서고 있었다. 어둠속에 몸을 깊이 묻고
그 차에서 내리는 남자를 기다렸다.
"선생님..."
차에서 내린 선생님을 불렀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 쪽으로 등을 돌린체 가만히 서 계실 뿐
이었다.
"이시간에 무슨일이지?"
그가 딱딱하게 물었다. 떨리는 한숨을 겨우 내쉬고 그의 곁으로 다가가려는 데 선생님이 한
발 뒤로물러나는게 보였다..나에게 거리를 두려해...그런거야....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뒤로
한발 물러섰다가 용기를 내어 다시 한발을 내딛었다.
"설명하려구요...아니...선생님이 들어야 할 말이 있어요."
"왜? 왜 나에게 할 말이 있는거니?"
그의 말에 가슴이 너무 아파 하마터면 고개를 돌릴 뻔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대로 외면
하면...정말 끝이라는 걸 예감할 수있었다.
"선생님을....사랑하니까요."
"...."
냉소가 흐르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난 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미동도 하지 않은 체 날 외면하
고 서 있는 그의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터질듯이 아파오고 있었다.
그가 어이없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그날 이후 처음으로 날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랑? 너...참... 대책이 안서는 얘였구나."
"선생님!!"
그가 던진 그 말에 드디어 울음이 새어나왔다.
"미안..해요...하지만..."
"...."
"정말..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선생님.."
그는 말이 없었다. 날 보는 그의 눈에는 예전보다 더 싸한 감정이 감돌기 시작했다.관대함조
차 찾을 수 없는 그의 시선앞에서...난 싸늘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설명할께요... 아니 꼭 들어야 한단 말이예요!! 선생님.."
"내가 본게..전부라면 어떻게 하겠니? 네가 나에게 보였던...그게 진실이라면.. 어떻게 하겠냐
구!! 아니. 차라리 그게 진실이었다면 좋겠다.그러면...그러면 난 쉽게 널 취하고...버리면 되
었겠지."
짜악~!!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게....진심인가요? 제가...결혼을 했다면...선생님이 농락하기가...더 쉬었을거라는게...진심이
었냐구요!!"
고통스런 체념과 아픔이 같이 찾아왔다.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어 한참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떨고 있는 손을 내려다 보며 난... 후회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런거였군요...결국...그런거였군요...저에게 보였던.. 선생님의 흔들리는 모습이..고작 그런거
였군요!!"
이젠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뭘 하든지...상관 없었다. 이 아픔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런지
모르지만..이젠 내 아픔따윈...버려야 할 때인것 같았다.
"난...선생님을..다시 만난 것으로도...축복이라 생각했었어요..그저..스승을 다시 만난 제자처
럼..그렇게..편하게...지내려 했어요..하지만 선생님한테 자꾸만 다가가려는 제 마음은..그렇지
못했어요.그래서..그래서...많이 고민했었어요..근데...절...잘못 보신건 선생님이셨어요..제 외모
하나만으로..절 판단하신 분은...선생님이셨다구요...뚱뚱한.외모를 착각하신 분은...선생님이세
요..."
"내가 알고 있던...넌...솔직한 얘였어..네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똑똑한...아이였단 말이
야..근데..갑자기..너의 어느 모습이 진짜인지..모르겠다..아니. 저에게 철저히.. 무시당했다는
게..화가나 미칠 것 같아. 넌 내 감정을 가지고...장난쳤던 거니까...너 때문에 괴로워하는 날
보며...넌 네 동생과 함께 날 기만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진실을 밝히지 않았던게 잘못이었는지 모른다..하지만....하지만.....
"그럼..한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제가..만약....처음부터 사실을 말했다면..선생님 곁에..쉽게 다
가갈 수 있게 했을거예요? 제가 선생님 사랑해도 되었어요?"
선생님이..고개를 젓는 게 보였다. 천천히..고개를 움직이는게 보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그럴줄 알았다구요...그래서...모두..제가 잘못한거로...되네요...전 결국 사
랑하지 말아야 될 사람을 사랑했고..그 사람을 속였으니까요.하지만...이것만은 알아줘요...선
생님을 속이는...그 시간이 저에겐 고통의 연속이었다는걸..그 시간속에서...저라는 인간은...조
금씩 죽어가고 있었으니까요. 훗~~ ..이젠...선생님때문에...가슴 아파 우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젠..예전에..절 찾았으니까요."
그의 얼굴에서는 싸늘한 기운마저 사라졌다. 그리고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그래...잘 되었어..."
하~!! 잘됐다구? 이게 잘됐다구? 난 찬 바람을 일으키며 그를 외면한 체 집으로 들어섰다.


"형!! 형!! 지금 제정신이야?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그럴 수가 있어!! 형!!"
녀석이 옷 소매를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그 바람에 출발이 늦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 어떤건데? 너랑 초희..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형!! 초희씨 저렇게 놔 두고..선을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해? 그녈 사랑하잖아!! 사랑하는데..
정말 그럴 수가 있어?"
"이거놔!!"
큰 소리에 녀석이 놀라면서 손을 떨구었다. 난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시동을 걸고는
차를 출발 시켰다. 녀석이 크게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저 녀석 조차도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까. 나쁜 녀석 같으니라구!!
속력을 높여 빠른 속도로 서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기석아!!"
목소리만으로도 새어머니는 기쁘신 모양이다. 현관문을 열고 반갑게 맞이하시는 새어머니를 보
자 그 동안 무심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이거 받으세요..새어머니 좋아하시는 포도 사왔어요."
"뭘 이런걸.... 그래.. 학교는 어떠니? 재미있지? 아이들은?"
자상하게 물으시는 새어머니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드리워 있었다.
"모두..좋아요. 근데 아버지는요? 아직 회사에 계신가봐요."
"어?어..그래. 오늘 좀 늦으신다고 연락이 왔었어..."
"네..새어머니..저 피곤하네요.잠깐 눈 좀 붙이고 내려올께요."
"어어...그래. 그래라...새엄마가 보약이라도 해 줄까? 여름이라..몸이 많이 축난 모양인데..."
며칠 사이에 까칠해진 피부를 만지시며 안타까운 시선을 바라보며 난 눈을 돌렸다.
"괜찮아요...."
"그래..어서 올라가 쉬어...내가 깨울테니까.."
오랫만에 난 내 방에 들어왔다. 벌써 2년만에 들어온 방이었다. 가장 아끼던 물건들은 이미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옮겨져 있어 약간은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그 동안의 피로를
풀기엔 편안한 방이었다.

"초희씨!! 내 말 듣고 있는거예요? 형 오늘 선보러 대전에 갔단 말이예요!!"
"그렇게 소란떨것 없어요.. 우리 끝났으니까요. 선생님이...끝이라구...그랬으니까...더 이상 그
분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아요."
"초희씨!! 형이 끝이라고 해서 그런거예요? 그래서 우리 형 붙잡지 않고 다른 여자에게 줄
거냐구요!!"
열을 내면서 씩씩거리는 기현씨를 보며 난 고개를 돌렸다. 이젠...더 이상 화를 낼 기운도 없
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체 어젯 밤을 꼬박 새운 결과...끝이라는 결론을 내린 나였다.
선생님이 선 본다고 저렇게 화를 내는 기현씨와는 달리 난 차분하게 그의 모습만을 지켜볼
뿐이다.
"그는....물건이 아니잖아요..그 사람이 선택하는 여자예요.. 저처럼 솔직하지 못한 여자는 아
닐거 아니예요."
" 초희씨의 말을 듣고도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형을....아이구 답답해!!"
"그러지 말아요...자꾸만 기현씨가..그러면... 저 더 힘들어 져요..이젠..선생님 잊을 거예요! 선
생님을 사랑했다는 거..잊고 살아갈거예요. 저도 다른 사람 만날거예요. 저도... 선생님 처럼
선봐서...결혼할거라구요.. 아무 남자나...선생님만 아니면 이젠 상관없어요. 그러니 기현씨도..
그만 포기해요.."
남자는 속이 타는 지 계속 얼음이 띄어져 있는 냉수만 들이키고 있었다.
"좋아요. 나도 이젠 포기할거예요. 두 바보가 어떻게 살아가든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죠..평
생 원치 않는 사람과 살아가며 고통속에서 지내던지말던지...나도 몰라요!!"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먼저 커피숖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자 곧바로...눈물이 주르륵 흘
러내려왔다.
정말..그럴거예요? 정말....나 놔두고..선볼 생각이예요? 그런거예요? 선생님!! 어떻게...어떻
게..그럴 수가 있나요?난 지금도....가슴이 찢겨지는 고통속에 있는데....어떻게 아무렇지도 않
게..그럴 수가 있나요?

"네..여보세요?"
늦은 시간에..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설마.... 가만히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이실
까?
"하하.. 뚱땡아~~!!! 오빠야!! 잘 지냈냐?"
"누구? "
"하하... 치킨헤드다~~!! 그래도 모르겠냐?"
"설마.. 연철이 오빠? 정말 오빠 맞아?"
대학 선배였던 사람에게 걸려온 전화다.. 하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빠!! 왠일이니?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어? 우와~!! 정말 뜻밖이네... "
"하하..어떻게 알긴.. 내 소식통이 있는걸... 이 시간에 안자고 뭐하고 있어?"
"그냥.... 있지뭐.. 근데 오빠 지금 어디있어? 취직 했어?"
졸업하고 처음으로 전화통화가 되었기에 반가움이 몇배나 더 했다.
"그럼.. 오빠 서울에서 일해..옆집누나네 집에서 같이 살고 있지.. 넌 어때? 취직했니? 아니지..결
혼했니?"
"하하..오빠도...나야..물론....아직이야....오빠는?"
"나도..그렇지 뭐..우리 이렇게 전화에 대고 말하지 말고.. 내일 만날까?"
"내일?"
"응? 그냥... 얼굴도 보고..갑자기..네가 생각이 났어.. 그래서 보고 싶어진다."
"아이.. 오빠도 여전하네..그 기술."
"야야..내가 변하면 재미 없어. 내일 저녁 먹을까?"
"그래요..오빠 내일 봐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그녀의 집 앞에서 차를 세웠다.
"정말 즐거웠나요?"
여자의 질문에..난 할말을 잃었다.
"저 혼자만 실컷 떠들다 온 기분이 드네요. 한번도 절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었어요. 그거
알아요?"
그제서야..난 안전벨트를 풀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긴..생머리였구나.....
"그렇게 놀랄 거 없어요. 마음에 없는 자리였다는 거...짐작 했었으니까. 하지만... 어쩌죠?
전. 기석씨앞으로 만났으면 좋겠는데... "
수줍어 하던 그녀의 첫 인상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아니 그녀가 수줍어 했던가 싶은 생
각이 들었지만 난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편한...만남이라면....."
"아하... 선을 긋겠다는 건가요?"
"......."
"흠..좋아요. 하지만.. 그 선은 언제든지 지워버릴 수 있는 선이었으면 좋겠네요. 이건 제연락
처예요.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당돌하지만 그 당돌함이 전혀 당혹스럽지가 않았다. 대문앞에 서서 손을 흔드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한 난 서둘러 그 곳을 빠져나왔다.
띠리리리...띠리리리...
"여보세요?"
"형!! 지금 시간어때? 전화 받을 수 있어?"
"그래..말해. "
무겁게 목소리가 내리깔렸다..
"선 본건 어땠어? 맘에 들어?"
녀석의 질문에... 한숨이 새어나왔다.
"스파이 노릇을 할 작정이라면.. 관둬. 너에게 해 줄 말은 없으니까."
"스파이라니? 그냥... 형이..알았으면 해서..."
왈칵 짜증이 솟구치는 바람에 난 소리를 버럭질렀다.
"뭘?"
"초희씨...말인데.....그녀도..선을 본대..어쩌면.. 그 사람하고..결혼까지 할 생각인가봐... 형... 이
만전화 끊어야겠네... 찌개가 다 타고 있어... 형..내일 보자~!!"
기분이 멍해졌다...이미 통화가 끊난 수화기에서 신호음만이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선을 본다구?"

"옆집누나, 어디가?"
유일하게 있는 구두를 꺼내 신는데 녀석이 들어왔다.
"응. 누구 좀 만나려구. 넌 근데 왜 이렇게 늦게 다녀? 학생이 말이야..공부도 하고..."
"으그...옆집누나나 잘해!! 근데..옆집누나..살이 좀 빠졌어? 아님 옷이 큰거야?"
"너도..그렇게 보이지? 그치? 이상해...저번에 꼭 맞는걸로 샀는데...이상하게....옷이 큰 것 같
더라구."
"뭐냐....그럼..살이 빠졌다는 거 아냐?"
어라..이자식의 표정이 엽기적이었다. 믿지 못한다는 얼굴로 입까지 턱하니 벌린체 날 보는
녀석...
"야야..파리가 제 집인줄 알고 들어가겠다. 어여 입 다물고. 집이나 잘 지키고 있어."
"옆집누나 남자 만나러 가지? "
"응. "
"누구야? 선보는 거야? "
"글쎄....넌 몰라도 돼. 나간다."
"옆집누나~!!!!!!!"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녀석이 붙잡았다.
"옆집누나...오늘 정말 예쁘다..잘 하고 와..알았지?"
"아냐..선 안본다구..."
"히히..그래도 오늘 정말 예쁘다....잘해..뚱띵이 화이팅!!"
"이자식이 팍!!"
까부는 녀석앞에서 문을 닫았다. 택시를 타기 위해 길을 걷는 데 마치 구름위를 걷는 것 마
냥...기분이 묘했다... 그냥.. 선배일뿐인데...

"아니...기석아!! 벌써 가려구? 어제 그 아가씨 한번 더 만나고...기석아!!"
"바빠요... 그럴 시간이 없어요...새어머니 다음에 다시 올께요. 전화 드리구요."
서둘러 현관을 나서는 데 새어머니가 뒤따르고 계셨다.
"아니 뭐가 그리 바빠서 그래? 같이 점심이라도 했으면..좋겠는데..."
"새어머니..점심을 안먹어도..날 배부르게 해줄 사람이...지금..선을 본대요..그래서 빨리 가야해
요..
그 사람 놓치면.. 평생 허기진 듯한 기분으로 살아가게 될 지 몰라요...새어머니..죄송합니다."
"기석아!! 얘!! 그게 무슨 말이니?"
유리 창문에 얼굴을 바짝 대고 물으시는 새어머니의 얼굴에 순식간에 뽀뽀를 하고 말았다.
"새어머니 아들이...드디어..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겁니다. 하하하...새어머니... 다음주에는 꼭 그녀
랑 같이 올께요!! 안녕히 계세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계신 새어머니께 손을 흔들고는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 바보같이....."

"초희야!! 여기야 여기!!"
북적거리는 사람들 너머로 손을 흔들고 있는 덩치 큰 연철이 오빠가 보였다.
"오빠!!"
"하하.... 이야~~!! 근사한데?"
오빠의 익살스런 표정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말? 근데 오빤 어째 배가 더 나온 것 같아....역시..나이는 못 속이나봐.."
"뭐야?너 또 시작이다...."
넘실거리는 술잔을 단숨에 들이킨 난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꽉 막혀있던 게 한방에 뚫
려버린 듯한 기분이 감돌았다.
"하하...오빠 만나니까 정말.. 반갑다..졸업하구 처음이지?"
"그래.자식이 말이야..연락 좀 하구 지내지..."
"헤헤.. 내가 원래 그런 방면으로는... 둔치잖아."
빈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르며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넌 정말 둔치였어..내가 너 좋아하는 것도 모르고...늘 까불기만 했었지."
오빠의 표정을 보고는 그냥 장난으로 넘기려 했다. 하지만 그 눈만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정말? 에잇. 그럼 진작에..나 좀 붙잡지 그랬어...그러면..내가 눈 딱 감고 오빠한테 시잡갔잖
아."
"그럴걸 그랬나 보다...하하...자식...여전하구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덥석잡았다.
"뭘.... 근데 갑자기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오빠가 뒷 머리를 긁적였다.
"나 결혼해...다음 달 초에...."
"뭐? 결혼? 정말? 정말 결혼해? 우와~~~~ 오빠 진짜루 많이많이... 축하해. 그럼.. 이 손 놔야
겠네.
이참에 손도장이나 팍 찍을라구 했는데......"
"녀석도....근데 넌 어때? 네 동기들 몇명은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따끔거리는 눈을 껌벅이며 눈에 힘을 주었다. 요즘은... 툭하면 눈물이 쏟아진다..
"뭐 그렇지....이 놈의 살이 빼면..남자친구가 생길려나.....자자..오빠 내잔 받아야지.. 정말 축
하해. "
빈 잔 가득 술을 따라놓기가 무섭게 벌컥벌컥 들이마시는 데 갑자기 오빠가 내 잔을 빼앗았
다.

"술도 못 마시는 녀석이..뭔 술을 그렇게 먹냐!! 됐어. 그만 마셔."
"이상하네...마셔도 마셔도..이놈의 갈증이....사라지지 않는게..."
"너...혹시....사귀는 사람있니? 뭐..그것도 아님..."
"하하...최근에.. 짝사랑이 끝나서 그래. 빈병에 물을 가득 채웠더니...누군가 그 병을 가져가
버렸거든. 그 병을.. 돌려줄 생각도 없네..아마 그 병을 깨트렸나봐..그래서 돌려줄 수 없는
가봐...."
"초희야.."
"하하하...오빠 만나니까..참..편하다..정말 오랫만이네...이런 식으로 마음이 편해진게.."
"그래...오빠도 마찬가지야..."
또 다시 내 술잔에 술을 따라주고는 오빠 역시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주말이었던 탓에 차가 많이 밀렸다.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불꺼진 초
희 집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차안에 앉아 있었다. 어떤식으로 그녀에게 말해야할지 몰랐다...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너무 늦기전에..그녀에게 사과를 해야될 것 같아서였다... 그녀의 번호
를 누르려는 데...검정색 승용차가 내 차 앞에 멈추었다..그리고...그녀가 내렸다...상기된 얼굴
로...

"오빠...결혼 축하해..."
"고맙다..."
내팔을 툭 치면서 수줍게 인사를 하는 오빠를 보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오빠...그거 알아?"
".........."
"나도...그때는 정말 많이 오빠 좋아했다는거... 하지만..그게 사랑은 아니었다는게..내가 오빠
곁에서 한발 뒤로 물러선 이유라는거...."
"초희야...."
"헤헤.... 나 지금 어렵게 고백하는거야... 나중엔.. 오빠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때문에... 말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잖아.."
"...그래...어서 들어가..너무늦었잖아.."
"응.. 오빠 결혼식장에서 보자... "
"그래...잘 지내."
"응....."
오빠의 차가 사라질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아쉬운.. 작별이었나 보군."
어둠속에서 그가 나올때까지는...

"초희야!!"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날봐!!"
"다시는 선생님 보지 않을 거예요..다시는 선생님 제 눈에 담지 않을거란 말이예요!!"
"초희야..."
"선생님도.. 절 보지 않잖아요!! 선생님도 제대로 절 보지 않았는데...왜 저 혼자만... 선생님
을 봐야해요? 이젠..싫다고 했잖아요..."
"그래서..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선을 본거니? 그래서 였니? 그래서...선을 본거냐구!!"
초희가 강한 손길로 내 팔을 뿌리쳤다.
"하!! 기가 막혀... 정말.. 기가 막혀요..왜 저에게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네요..왜 저한테 이러
는 지 모르겠네요.. "
"정말 그런거냐구!! 정말 저 남자랑 선을 본거냐구!!"
그녀의 상처입은 시선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날 열받게 하는건..날 철저히
외면하려는 그녀의 태도였다. 그녀의 모습에서 더 이상 나에 대한 사랑을 볼 수 없어서..화
가 났다..
"절 원망하시는 건가요? 어떻게 절 그런 눈으로 볼 수 있는거죠? 어떻게...절 탓하실수 있냐
구요!! 지금 선생님 역시...선을 보고 오는 길 아닌가요?"
"난...난...."
입이 바짝 말랐다. 그녀의 비난어린 시선을 탓할 수는 없지만... 이대로 그녀가 사라져 버릴
까봐 그것도 겁이 났다.
"됐어요..구차하게 변명하려 하지 마세요.. 어차피..끝을 낸 건 선생님이시니까."
막막했다. 눈 앞이 깜깜해져왔다.... 집으로 들어가려는 그녀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
귓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잔인하게 내뱉었던... 지난날의 내 목소리였다...

"사랑해...사랑해 초희야..."
초인종을 누르려는 내 손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끝이 아닌...새로운 시작이면 안될까? 나로 인해 멍든 가슴.. 내가 평생 보듬어 주면서...너의
곁에 있으면 안될까? "
"........."
"널 다시 만날 수 있어서...얼마나 행복했었는지 몰라...비록..네가 결혼을 한 유부녀였지만...
엉뚱하게..알게된 진실이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딴건..상관없었어..그냥..그냥 아무 생각없이
널 다시 만나서 좋았을 뿐이었어..근데..시간이 지나면서..겁이나고 무서웠어...널..널...사랑하게
될까봐."
나직하게 시작된 선생님의 고백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난 눈물을 보이지 않았
다.
"내 옆에 있는 넌 내가 감히 넘봐서는 안될 아주..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네 남편.그러니까
네 동생이 너를 향해 미소지을때마다...수십번이나 더 나를 달래야 했으니까. 그를 보는 네시
선에... 미칠지경이었어...다른 여자랑 같이 있는 네 동생을 보는 그때는.. 차라리..안도감까지
있었으니까..너에 대한 내 감정..더 이상은.. 떳떳치 못한게 아니라는... 그때까지는 정말 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그렇다고 해서 널거부할 수 있는 자신도 없었어.그저..네가 내 곁에
오기만을...나만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모습만으로도 행복했으니까...근데...근데.....정말..날 힘들
게 하는게 뭔지 알아? 바로..너의자신감이었어. 나만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는 널 보는게..겁
이 났어... "
이젠 눈물이 마구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참고 있는 게 한계에 다다랐
기 때문이었다.

"네 남편에게..다시 돌아갈까봐..날 다시 만나..너의 인생이 잘못된다면...그렇다면...만약 그렇
게 된다면... 난 어쩌지? 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수십번이나 되풀이 했지만...결론은 하나였
어...널 사랑한다는 거...다시는 내 시야밖으로 사라지게 할 수 없다는거...그것뿐이었어..물론...
기현이 자식이..내 질투에 불을 붙여주었지만... 말이야..초희야...다시 날봐주면 안되겠니? 나..
다시 네 마음속에 들어가면 안될까? "
그의 간절함이 묻어있는 목소리에....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넓은 어깨가...흔들리고 있었
다.
"널... 사랑해...미치도록...너만 보면...너만 보면...나도 어쩔수가 없어..너만 쫓는 내 시선...내
마음..이젠..어쩔수가 없어...다른 거 다 필요없어..너만 있으면 돼..너 하나만.. 내옆에 있어주
기만 한다면..그걸로도 충분해..."
"제...외모가...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어요..선생님처럼..."
그가 손을 뻗어 날 잡아당겼다.
"난..너 하나만을 보는거야..너 하나만...너의 외모는... 더 이상..문제되지 않을거야...너의..뚱뚱
한 외모속에..내 사랑만으로 꽉 채울테니까...사랑해 초희야...사랑해 초희야...."
절박한 그의 입술이..내 입숙에 겹쳐졌다.... 살포시 닿는 그 입술에서 짠맛이 느껴졌다.
"울지 말아요...선생님....더 이상 울지 말아요.......잘 됐잖아요...모두..."

"이거 한번 입어보실래요?"
점원이 건네준 옷을 집어들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건...좀 작지 않을까요?"
여전히 자신이 없는 말투였다. 물론... 65킬로를 나갔던 몸무게가 이젠 거의 55킬로정도를 유
지하고 있지만.. 아직은.. 살이 빠졌다는거에..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손님.. 걱정말고 어서 입어보세요.."
점원의 권유에 마지못해 옷을 입어보고 나온 난 거울 앞에 서기가 두려웠다....
"어머!! 어쩜...이쪽으로 와 보세요..거울 한번 보세요... 색하고 디자인이 손님하고 딱 맞네
요..."
점원의 손에 끌려 거울앞에 선 난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와우!! 정말...저예요?"
"어때요? 이쁘죠?"
점원의 말을 무시한체..난 천천히 손바닥으로..허리를 만져보았다...절구통 같은 허리때문에...
늘 박스형 티셔츠만으로 사계절을 보냈던...나인데...언제 이렇게 가늘어 졌을까...싶은 게 믿
기지 않았다.
"손님..?"
"아아..네.....이 옷으로 하죠...."
가격표를 떼고 옷값을 계산하려는 데 선생님이 들어왔다. 훤칠한 그의 모습에 점원의 얼굴
이 빨개졌다.
"어서오...."
선생님은 점원의 얼굴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체 한곳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체 걸어오고 있었
다.
드디어 그의 눈동자에 내 모습으로 가득찼다.
"와우~~ 너무 아름다워...."
"선생님도....멋있어요..."
"그럼..이만 갈까?"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난 그손을 꼭 쥔체 그를 따라 나섰다.

선생님의 가족들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대전으로 향하면서 내내 선생님은 손을 놓지 않았
다.
운전에 방해된다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럴 수록 선생님이 힘을 꼭 주며 손을 놓지 않으려
했다.
"선생님...."
"이러고...대전까지 가자....거기 도착하면.. 놓을께..."
"하지만..."
"내가...오늘 말했던가?"
"아뇨..."
"흠.. 그럼 안되지......"
선생님이 잠깐 내 눈을 바라보셨다.
"사랑해...초희야...당신을...사랑해...."
그의 눈 가득 내 모습이 들어갔다. 난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며...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
다.
"이젠... 다이어트 하지 않을래요.....다시는...."
"그래..하지마.. 난..있는그대로의 너의 모습을 사랑하니까..."
"내가 대머리라고 해도?"
"하하하하........"

~~~~~~~~~~~~~~~~~~~~~~~~~~~~~~~~~~~~~~~~~~~~~~~~~~~~~~~끝~~
~~~~~~~~~~~~~~~~~~~~~~~~~~~~~~~~~~~~~~~~~~~~~~~~~~~~~~~~~~
저요..진짜루..마지막은.. 자신이 없네요...처음부터 자신없는.. 글이었는데....끝까지 자신이 없
는 작품으로 남겨지게 됐네요....죄송합니다.....^^;;;;;;;;;;
그저 끝까지 읽어주신..분들께... 고마움을 전해드리고 싶어요.....고맙습니다.....ㅜㅜ












0 개의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