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봐요. 연주 씨! 헛물 키지 마. 지금 재원이 눈엔 헤라 씨 밖에 안보여요. 아무리 연주 씨가 걔 눈앞에서
알랑거려도 '당신 누구냐' 는 소리 한마디 안 나올걸!"
윤석의 빈정거림에 몸을 돌린 연주가 그를 쏘아 봤다.
" 덩치 씨야 말로 헛물 키지 말아요. 난 덩치 씨한테 손톱만큼도 관심 없으니까."
" 그래요? 나도 재원이 못지않은 부잔데. 왜 싫어요?"
그가 화장실 문에 한쪽 손을 짚어 연주의 눈높이와 맞춘다. 190의 장신 이었지만 연주 또한 170이 넘는 여자치고는
큰 키였으므로 그가 비스듬히 서자 얼추 시선을 맞출 수가 있었다.
" 거울도 안 봐요? 그럼 지금 당장 화장실로 들어가서 거울 좀 보시죠. 재원 씨랑 뭐가 다른지!"
순간, 팩 하는 성미가 헤라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 윤석은 친구 간에 끼리끼리라는, 어쩌면 헤라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 푸~ 연주 씨 성격도 누구 만만치 않네요. 하지만.......여기에 따라온 이상 더 이상은 나한테 도전하지 말아요. 난
내 친구를 위해서 이 여행을 계획했고 그 계획대로 충실히 이행 시킬 건데, 누가 방해라도 하면.......음~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입가에 웃음을 걸고 말을 하는 윤석의 눈은 그러나 웃지 않고 있었다.
물론 연주는 헤라와 재원이 단 둘이만 있게 되는 걸 최대한 방해 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그럴 능력도 계획도 서
있지 않았었다.
" 협박 이예요?"
" 무슨~ 그런 섭한 소리를 !피차 선수 끼리 서로를 잘 알아보자 그거죠. 순진한 내 친구 연애 사에 끼어들지 말고."
덩치는 둔해 보이는 그였지만 사람의 꿰 뚫어보는 눈이 뛰어난 사람이 그 라는 걸 늦게야 알게 된 연주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 곧 착륙해요. 자리로 돌아가죠!"
공항을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호텔 리무진 두 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석이 앞에 서 있던 리무진에 헤라와 재원을 먼저 태우고 헤라의 뒤를 따라 타려던 연주의 팔을 붙잡아 암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어 보였다.
" 날씨가 정말 좋아! 대학학교 때 수학여행 왔을 땐 3박 4일 내내 비만 줄창 와대서 정말 우울 했었는데."
열대 나무의 가로수를 지나 공항을 빠져 나가며 서귀포 바다 위로 펼쳐진 맑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본 헤라는 들뜬
목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재원의 멀미 때문에 에어컨을 끄고 차창을 최대한 내린 채로 부드럽게 달리는 리무진은 편하고 아늑했다.
차량이 드문 해안 도로로 들어서자 상쾌한 풀 냄새와 조금은 뜨거워진 공기가 코 속을 파고들었고, 바람은 한 없이
부드러웠다.
헤라는 옆에 앉아 몸을 늘어트린 재원의 손을 잡는다. 정말 좋다! 제주도라서 그런 건지, 이 사람이 함께 라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손끝이 저릿해 질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린다.
" 아프리카 식 룸 이에요."
3층 건물이 말굽 모양으로 둥글게 둘러선 호텔 건물 외관은 하얀색 구조물로, 건물 사이사이에 울창한 나무숲이
있어서인지 지중해식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고 있었다.
" 연주 씨하고 헤라 씨는 가 이 방을 쓰세요."
2층에 있는 방 앞으로 벨 보이가 짐을 들여가고 윤석과 재원은 방 앞에 서서 그녀들을 들여 보낸다.
그러나 재원의 이마엔 검은색 장막이 드리워져 기가 차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신 윤 석! 너....... 날 왜 여기로 데려 왔냐?"
당연히 헤라와 한방을 쓰리라 예상을 하고 있던 그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 미안! 사실은 룸을 네 개 비워 뒀었는데! 아침에 VIP 하나가 급하게 룸을 구하는 바람에 두개 나 넘겨줬어. 아마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 중으로 한두 개 비는 데가 생길거야."
" 그래서........오늘밤을! 내가 너랑! 한 방을 써야한다! 그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불편한 배를 문지르며 그는 한 단어 한 단어 마다 힘을 실어 언짢은 내색을 드러냈다.
" 뭐.......그런 불상사가 아주 안 생긴다고 보장은 못하지!"
제법 심각한 얼굴을 윤석이 하는 통에 재원의 얼굴에 기어코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 어쨌든 이왕 왔으니까.......짐들 놓고 나와요. 점심 먹어야지. 난 사장실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 올 테니까 1층에
있는 'Le- Jardin'에 가서 기다려요 헤라 씨랑 연주 씨도."
윤석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흐물 거리는 재원의 팔을 잡아 당겼다.
3층의 아메리카 식 스위트룸으로 올라 온 그들은 멍 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 얌마! 나.......월요일에 뉴욕 지사에 가야 돼!"
재원이 침대 위로 몸을 쓰러트린다.
" 그래?"
" 그래. 그 열흘이 아니, 어쩌면 보름이 너무 불안하다."
커다란 베란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 빛에 팔로 눈을 가린 그가 고백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 헤라.......랑 떨어져 있을 시간들이 정신 나간 놈처럼 무서워!"
솔직하게 친구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심장이 가득히 밀려드는 감정을 그렇게라도 털어내지 않으면 자신의
심장이 그 감정을 감당하지 못할 것만 같아서였다.
" 자식! 정신 나간 놈이네 정말!"
" 그러니까 네가 다른 호텔 가서 자. 내일 룸 나올 때 까지.아님 우릴 다른 호텔 잡아 주든지."
간단한 결론!
" 성수기라 남아도는 방 없어. 임마!"
" 그럼 어쩌라는 거야?"
드디어 재원이 몸을 일으켜 윤석을 노려봤다. 그러나 윤석은 그런 재원의 시선을 받으며 실룩실룩 얼굴 근육을
움직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 걱정 마. 책임지고 헤라 씨 이 방으로 들여보내 줄 테니."
" 그럴 필요 없어. 너만 없으면 헤라는 내가 알아서 데리고 와."
퉁명스럽게 그러면서도 굳어졌던 얼굴을 풀며 재원이 웅얼거린다.
저렇게 여자에게 몰두하는 친구의 모습에 낯설음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외로움에서 벗어날 기회가 주워 진
것 같아 기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함이 밀려드는 윤석은.......그 복잡 다양한 감정에 커다란 한숨을 한번 내
쉰 뒤. 방을 나왔다.
그 시간 헤라는 연주 보다 먼저 방을 내려와 호텔의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닌다. 그녀는 속옷 shop을 찾고 있었다.
1급 호텔 이상에서는 대게 속옷이나 귀금속 따위의 shop이 몇 개 정도는 있기 마련인데, 특 1급 독특한 구조의 이
호텔에서는 여~엉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재원이 처음 그녀의 집에 왔던 날을 기억해 냈다. 침대위에 널려 있던 고양이 무늬의 싸구려 면
팬티.......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것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오늘이 결전의 그날! 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 앞에서 이런 유아 틱 한 속옷을 벗을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린 그녀다.
그 판단 하에 30분을 호텔을 뒤지고 다닌 헤라는 건물의 서쪽 지하 1층에서 겨우 속옷 매장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했다.
연 살구 색에 흰 색 레이스가 달린 우아한? 아냐 너무 공주 풍인가? 위아래가 세트로 된 그 속옷을 들고서
이리저리 돌려보던 헤라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리고 연두색의 다른 것도 분홍색도.......남자들이 어떤 속옷을
좋아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그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 난 이게 좋아!"
등 뒤에서 다가와 하야색의 레이스가 전혀 없는 심플! 그 자체의 실크 속옷의 들어 보인 재원이 웃고 있었다. 아까
방 앞에서 헤어졌을 때보다 한결 얼굴색이 나아 보인다.
" 어떻게 찾았어요?"
" 네가 갈 만한 곳을 짐작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아."
그가 같은 속옷 몇 개를 더 골라 계산대 위로 가져간다.
" 난 이게 더 좋아요."
제 맘대로 골라 계산을 치르려는 그에게 반항심이든 헤라는 그가 어떻게 이곳을 찾아 왔는지 따위는 잊고 짙은
자주색에 보석이 장식된, 팬티가 T 자형인 속옷을 골라 같이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재원이 헤라의 심중을 파악하지 못 할 때 주로 짓는, 한쪽 눈을 찡그리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 진심이야?"
" 당연하죠. 내가 공주야? 그런 속옷만 입게. 재원 씨 취향이 연주랑 같은 줄 몰랐네요."
재원의 카드가 인증되는 소리를 들으며 헤라는 자기가 정말 그 속옷을 입어보고 싶었단 생각을 했다.
돈이 없어 못 샀지........저런 섹시 발랄한 속옷을 못 입을 건 뭐람!
" 그~래? 좋아.......그럼 오늘 밤 속옷은 반드시 네가 고른 걸로 입어."
" 흥! 기대 하시죠."
그녀가 턱을 치켜들고 눈동자를 내려 그를 깔아 봤다. 내가 못 입을 줄 알고! 흥 이다! 흥!흥!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튀어 오르는 그녀가 귀여워 견딜 수 없어진 재원은 계산대의 여종업원을 의식하지도 않고
헤라의 손을 잡아 당겨 그 볼에 키스를 했다.
" 무지 기대돼!"
그런 재원과는 달리 열정으로 달아오른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깊어져 가는 그의 열정이 두려워 지기
시작한다.
자신 뿐 아니라 그 까지도 같이 상처 받을 수 있다는, 윤석의 걱정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 점심 먹고 수영 하러 가자! 여기 골프장 옆쪽으로 사장이 쓰는 개인 풀이 있는데 온천수라 물도 미지근하고 아직
해도 강렬하지 않아서 딱 좋은 시기야."
헤라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그가 쇼핑백을 다른 쪽 어깨에 멨다. 멀미가 다 가라앉은 것인지 그의 기분은 썩 좋아
보였다.
그와 나란히 속옷 매장을 나오며 그녀는 주변의 다른 shop을 둘러본다.
복도 양쪽으로 있는 서너 개의 매장 중엔 공방이 하나 있었고, 기념품 매장과, 크리스털 제품을 전시해놓은 매장,
그리고 제법 큰 베이커리도 있고, 그 안쪽으로는 커피 shop이 자리해 있었다.
커피shop 창가 쪽으로 어디선 본 듯한 남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헤라는 고개만 갸웃 할 뿐 신경을
곤두세우진 않았다.
점심은 약속대로'Le-Jardin 에서 이태리 요리를 풀코스로 먹고, 오후의 수영을 위해서 와인은 생략을 했다.
방에서 수영복을 갈아입고서 소매가 없는 오렌지색 원피스를 걸친 헤라는 재원과 윤석 그리고 연주 네 사람 모두와
함께 풀로 향했다.
풀에 도착한 그녀들은 거침없이 겉옷을 벗어 비치벤츠 위로 올려놓는다.
연주는 가녀린 몸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연한 하늘색의 비키니에 무릎 아래로 오는 랩 스커트를 입고 있었고,
헤라는 그와는 절대 대비가 되는 강렬한 선셋 오랜지색 비키니 자체만을 입고 있었다.
" 히야~ 역시 죽이는구만! 정 재 원!"
윤석도 재원과 같이 옷을 벗으며 헤라의 몸을 훑어본다. 친구의 여자지만 눈이 가는 건 어쩔수 없는 일 이었다.
" 눈깔아~ 자식아!"
그러자 재원이 험악한 인상을 하고 윤석의 머리를 손으로 눌러 내린다. 그 힘이 어찌나 세던지 힘으로는 한번도
재원에게 져 본 역사가 없는 그는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헤라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두 남자에게 다가온다.
" 시합 할래요? 왕복 50 미터 쯤 되겠는데."
그러나 윤석의 재원에 대한 황당함도 잠시! 그놈의 내기 병이 또 도진 헤라가 재원에게 도전장을 던지자 그는 아예
말을 잃어버린다.
" 헤라 씨! 실 수 하는 건데요."
그래도 그는 한마디 한다. 그녀의 어리석은 선택에 경고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을까 했다.
" 조용히 해!......"
그러나 재원이 바로 제지에 나섰다.
" 나도 재원 씨 처음 만난 날, 스쿼시로 게임 하면서 그 소리 했지만, 졌어요."
재원에게는 다행히도 그녀는 윤석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 뭘 걸 거야?"
" 아무거나 재원 씨가 원하는 거 있음 말 해봐요."
결전의 날은 왔고, 그것 외에 재원이 뭘 그녀에게 요구할 만한 게 없을 거라 판단한 헤라는 시원스럽게 대답을 한다.
" 흐~응, 그래? 좋아 그럼........."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문지르며 무슨 궁리를 하는 듯 했다.
" 이긴 사람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 무조건 Yes 라 말하기! No 는 안돼. 무슨 말이 됐건 대답은 YES 이어야 되고,
꼭 지키기."
반짝 반짝 어린아이 같은 눈을 빛내며 그는 좋아라 했다.
" 너무 추상적이야. 구체적이지 못하잖아요. 광범위하고 넓어서 함정 있을 것 같단 말이야."
헤라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연주가 끼어든다.
" 그래야 재밌지! 상대가 뭘 요구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아야 게임의 묘미가 살아나는 것 아냐?"
윤석이 아군인지 적군이지 파악되니 않는 말을 하고나서는 그녀를 뭐야? 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아군도, 적군도, 뭐 그런 판단 없이 그냥 똑똑한 척 한번 나서보고 싶었던 것 뿐 이다.
똑똑! 영민함! 그것들은 헤라와 같이 다니는 한, 항상 그녀의 몫 이었기에 연주는 자신의 다른 모습을 두 남자에게
보여주길 원했던 것 이었다.
" 그렇게 되는 얘긴가?"
헤라는 입 꼬리를 좌우로 올렸다 내렸다 하며 볼에 보조개를 만든다. 연주가 무슨 생각을 하던 그녀는 항상
무관심으로 일관해야했다.
그래야 그녀와의 관계가 유지 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 심판! 정확히 봐."
재원이 몸을 풀고 준비 운동을 하며 윤석에게 승리를 확신하는 웃음을 띤다.
헤라는 그 웃음과 그의 길게 뻗은 팔 다리 근육에 어쩐지 불길함 예감이 들었으나, 이왕 벌어진 일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상황 이었다.
5분 정도. 두 사람은 열심히 몸을 풀고 나서 출발점에 섰다. 6월의, 불과 며칠 사이 한층 따가워진 햇살 아래서 두
사람은 소독약 냄새가 없는 온천수의 풀을 노려본다.
" 준비!"
윤석이 소리쳤다. 헤라는 긴장한다. 그리고 재원도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무슨 게임이든 진지하게 임하는 그녀에겐 당연한 긴장감 이었지만 늘 장난으로 그런 그녀의 내기를 받아들이는
재원이 긴장하는 것은 웬 일인지! 이상하다 여겨졌다.
" 출발"
거의 동시에 풀로 뛰어든 두 사람.......재원의 팔이 쭉쭉 물을 가르고 앞으로 뻗어 나갔다. 마치 소리 없이 물과 물
사이를 미끄러지듯 매끄럽게 그의 팔과 몸이 그녀를 지나쳤다.
물론 재원에게 질 것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15 센티미터나 더 큰, 그것도 남자를 이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란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더구나 물 속을 텀벙거리는 지금에서야 느낀 것이지만 그의 수영 실력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래도 수영내기를 건 것은 그저 단순히, 그와 단 둘이 풀로 뛰어들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였을 뿐 별로 이기자는
욕심이 든 게임은 아니었다.
그러나~! 거침없이 앞으로 쫙 뻗어나가는 재원의 몸을 보자 그녀의 투지가 불타오른다. 사력을 다해 그를 따라
갔다.
그러자 어느 정도 나란히 그와 몸을 붙일 수가 있었다. 사력을 다해서? 아니 재원이 속도를 늦춘 것이다.
25미터 턴을 하고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길.......그는 앞서나가지 않는다. 헤라와 나란히 몸을 띠우고 부드럽게 팔을
젓고 있었다.
그리고 출발점에 터치 하는 순간 그의 손가락이 0.1초 차이로 먼저 벽에 닿는다.
" 하~ 하~ 하~ 뭐야? 왜....... 속력을....... 늦춰요?"
물 속에서 얼굴을 들자마자 헤라가 소리쳤다. 묶어서 틀어 올린 머리카락에서 물이 흘러 내려 정확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거칠게 눈가의 물을 닦아내며 그녀가 재원을 쏘아본다.
진 건 용납할 수 있지만.......그가 불성실하게 게임을 한 것 같아 헤라는 자존심이 상하고 있었다.
" 헤라 씨. 재원이 High school까지 수영 선수였어요, 그것도 학교 대표."
머리위에서 들리는 윤석의 목소리........뭐? 수영 선수? 이런~ 어쩐지!
" 내가 하~.......너무 앞으로 나가면.......네가 재미없어 지잖아. 너도 날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한 게임은 아닐
테고........재미라도 있어야지!"
그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헤라의 머리를 툭 하니 친다.
" 이~ 정말!"
그녀는 손으로 물을 몰아 재원의 얼굴에 끼얹었다. 장난!
역시나! 재원이 맞받아 응수 하고 그들은 물 속에서 유치한! 아~주 유치한, 한편의 20세기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 차~ 놀고들 있네."
비치 벤츠에 앉아 '트로피칼 버뮤다 로즈'를 마시며 연주는 코웃음을 친다. 심사가 꼬이고 있던 참이다.
윤석의 말대로, 재원은 그녀에게 눈길 아니! 정말 그녀를 유령 취급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비참해지기 일보
직전 이었다.
" 놀러 온 건데 노는 건 당연하죠. 연주 씨처럼 폼만 재고 앉아 있으려고 온건 아니니까."
풀에 두 사람을 남겨두고 파라솔 밑의 그녀에게 다가온 윤석이 말을 받는다. 그러나 연주는 생뚱맞은 표정으로
빨대를 입에 문채 그를 외면했다.
" 그만 포기 하고, 이젠 나랑 놀지?"
윤석이 갑자기 반말로 나온다. 그녀가 그를 노려봤다.
" 뭘 하고 놀자는 말이야?"
이에는 이! 반말 에는 반말! 그녀가 암고양이처럼 갸르릉 대며 되물었다. 윤석이 그제야 본색을 알았다는 듯 웃는다.
" 네가 평소 하고 놀던 대로. 어때?"
" 내가 평소에 어떻게 뭘 하고 놀았는지 당신이 알아?"
" 무주에서 업고 내려 올 때부터 알았는데!"
연주가 겉모습처럼 순진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은 진즉에 안 윤석이다. 그가 노골적으로 그녀를 유혹했다.
즐기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재원과 헤라를 방해 하고 싶지 않아서 이기도 하다.
" 하여간~ 남자들이란."
연주가 윤석과 마주하던 눈을 돌려 웃기지도 않다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칵테일 주스 컵에 날아든
'퐁'하는 소리! 거기에 바로 이어지는'찌지직! 하는 유리컵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 뭐 뭐 뭐야?"
놀란 그녀는 가슴을 쥐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윤석도 놀라긴 마찬가지.......그가 깨진 컵 속에서 주워든 것은
하얀색의 조금 흠집이 생긴 골프공 이었다.
" 이런~ 옆에 골프코스에서 날아든 모양이네."
그가 공을 눈높이로 들어 보이며 겸연쩍은 얼굴을 해보였다. 그리고 아득히 멀리 너무 멀어서 점처럼 보이는 녹색의
잔디밭 위를 걸어오는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박는다.
" 도망쳐 봐야 소용없어!"
물을 가르고 재원의 반대방향으로 헤엄쳐 가는 그녀의 다리를 그가 잡아 당겼다. 발목을 잡힌 헤라는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떴다가를 반복하고 물을 있는 대로 들이켰다.
꼭 수영을 할줄 모르는 사람처럼 허우적대는 그녀를 재원이 물 속에서부터 안아 올린다. 물에 뜬 그녀의 몸은
가벼웠다.
" 발목을 잡는 게 켁! 어딨어? 켁!"
물을 들여 마신 그녀가 컥컥거린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를 안은 재원은 천천히 둥둥 하는 걸음으로 풀의
가운데 지점 벽 쪽으로 섰다.
" 내려줘요. 켁!"
" 다시 도망 안 간다고 하면....... 내려줄게!"
그는 헤라를 내려다보며 빙글거리고 있었다.
" 알았어.하~하~ 그쪽 옆에 잘! 아주 얌전히 서 있을게. 됐어요?"
" 그래."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알았다는 대답을 하자 그가 헤라를 내려놓는다.
발을 풀의 바닥에 딛고 서자, 물은 가슴 위까지 차올라 왔다. 그녀는 풀의 벽을 잡아 몸을 물에 띄웠다.
그제 서야 재원과 어느 정도 시선이 맞는다. 헤라가 바로 서고 시선을 맞추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다.
" 게임 전에 한 약속 지켜야지?"
" 불공평한 게임 이었어요."
" 처음 너랑 스쿼시 할 때도 불공평한 게임이었어. 네 실력이 나보다 한 수 위였다는 걸 부정 하지는 않겠지?"
" ....... "
" 헤~ 그러니까 이번 게임도 유효 한거야."
그녀가 더는 대꾸하지 않자 그는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게임의 승리를 자축하는 듯 했다.
재원이 물에 젖어 그녀의 볼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치워주며 뜨거운 손바닥으로 입술을 쓸어 내린다.
" 무조건 Yes. 그거면 되는 거야?"
헤라는 게임의 약속을 확인 한다. 그가 무엇을 요구 할지 짐작가는 바는 없었다.
" 응......"
" 좋아요. 뭔데?......말해봐."
그녀가 들을 자세를 하고 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했다. 시선이 부딪힌 재원의 눈이 뜨거웠다.
" 도망 가지마!...... 숨지마!....... 내가 다가 갈수록 자꾸만 움츠러들지 마!"
밑도 끝도 없이 그가 도망가지 말라는 말로 시작을 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헤라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가 진지한 눈빛을 줄때마다 애정 섞인 말과 키스를 해 올 때마다 머뭇거리고, 주춤하는 그녀를 말하는 것이었다.
" 지금 당장 나 하고 같은 마음이 되어 달라고는 안할게. 대신.......뒷걸음치지 말란 말이야. 네가 그럴수록 난
미친놈처럼 일 할 때마저도 널 머리 속에서 몰아내지 못해! 정상적인 생활이 안 된다고. 제발.......그대로만 있어. 네
곁에 내가 꼭 붙어 서 있어도 네 마음이 날 받아 들일 때까지 뒤 돌아서 내빼지 말란 말이야."
" ........ "
비행기에서 그 비좁은 화장실에서 그의 눈에 서렸던 불안감을 헤라는 이제야 이해했다.
" 대답해.Yes 라고.......그러기로 약속 했잖아."
조르고 있었다.
" 제발!.......부탁이야."
애원한다. 이 자존심 강하고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던 남자가! 그녀에게 애원하고 조르고 있었다.
" 나 난......."
하지만 헤라는 상처 받을 일이 두렵다.
" 다른 말은 하지 마! 무조건 대답은 Yes 뿐 이라고 약속 했어."
낮게 속삭이는 그의 입술이 다가온다. 풀은 미지근한 온천수였고 6월의 태양은 따가 왔지만 바람은 한 여름보다
서늘했다.
따뜻한 그의 입술이 헤라의 차가운 입술에 겹쳐졌다. 온천수에서 철분 맛이 난다. 미네랄 인가?
물에 둥둥 몸을 띄우고 받는 재원의 키스는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기에, 그녀는 생각한다. 이 사람은 키스 못하고
죽은 귀신이 들렸나봐! 라고.......하지만 그건 그를 거부해야한다는 이성의 마지막 외침일 뿐 저항을 힘을 만들지는
못했다.
그가 입술을 뗐다가 다시 겹쳐왔다. 이젠 그 눈빛처럼 뜨거워진 입술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물고 애무해
나갔다.
위험수위다. 그는 자신을 통제 하지 못하고 있었다. 헤라는 이렇게 트인 공간에서 그것도 작렬하는 태양아래 다른
사람의 시선 속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재원의 입술을 떼어 내려 그녀가 살짝 그의 가슴을 민다.
" 너무 진한데~ 재원이."
그때 바로 머리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윤석의 것이 아니었다.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이면서 독특한 비꼬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불길함의 예감 속에 헤라는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송 상무.......송 석 훈!
순간 석훈과 헤라의 시선이 엉키어 들고 그의 입 꼬리엔 웃음이 걸려 있었다.
" 내 공이 여기로 날아들어서....... 코스 밖으로 나간 공이라 그냥 두려고 했는데.......얼마 전에 홀인원을 기록한
특별한 공이라서 포기 할 수가 있어야지!"
이곳에 온 이유를 재원도 헤라도 묻지 않았지만 그는 술술 얘기를 푼다. 물론 그의 핑계는 거짓말 이란 걸 두 사람
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 두 사람이.......이런 사이였어? 지난 번 모임에서 봤을 때는 별로 안 그런 것 같았는데. 내 착각 이었나보군!"
헤라는 눈을 내려 재원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재빠르게 상황 인식을 해 보려 한다.
송 상무를 아는 척 해야 하는 건가? 재원은 송 상무와 내가 그때 그를 클럽에서 때려눕혔던 그 일만 기억 할뿐.
비즈니스 상으로 얽혀 있는 일은 알지 못한다.
더구나, 자기네 그룹 내부의 연구원과 기술을 빼내려는.......석훈의 의도와, 내가 그에게 섭외 받고 있는 써치
펌이란 사실도 모르고 있다. 아니 아예 내 직업 자체도 알지 못하는......뭐야? 도대체......!
아아!! 이렇게 되는 상황 이였어? 근데 왜 난 지금 까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거야? 뭐 직접적으로 재원 씨하고
상관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는 鄭씨 패밀리고.......그렇다는 건!
헤라는 복잡하게 얽히어 드는 머리를 살짝 흔든다. 그리고 재원의 굳어진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석훈을
경계하고 있었다.
왜지?
" 아무튼 반가워. 나도 이 호텔에 머무는데. 저녁때 한잔 할까?"
석훈은 헤라에게서 시선을 옮겨 재원에게 물었다. 재원이 풀 위로 올라선다. 그리고 석훈과 마주 섰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 곧고 시원한 이마를 드러냈다. 그는 석훈보다 키가 약간 더 컸다.
" 좋아요. 8시 보죠. 코파카바나로 와요. 송 이사님."
재원은 기꺼이 석훈의 제안을 받아 들여 장소까지 정한다.
" 8시! 좋아.......그때 봅시다. 진 헤 라 씨."
석훈이 헤라에게 다시 시선을 옮기고 의미 있는 웃음을 던진다. 재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의아하다는 눈으로 헤라의
이름을 입에 담는 석훈을 노려본다.
" ....... "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물 속에 묻고 석훈의 시선을 고스란히 맞받았다. 송 상무! 당신 왜 이래? 그녀가 속으로
묻는다.
그러나 그는 차가운 웃음을 거두고 손에 들고 있던 골프채를 흔들며 풀장을 나간다.
축구장 잔디보다 조금은 길게 깎인 골프장을 걸으며 석훈은 손에 든 골프채로 잔디를 내리친다.
뒤 따르는 캐디는 그의 차가운 얼굴에 주눅이 들어 코스의 이동 방향과는 반대인 코스의 바다 쪽 끝으로 가는
그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석훈의 표정은 풀장을 나오면서부터 굳어질 대로 굳어지고 한 겨울 찬바람보다 싸늘했다.
재원보다! 녀석보다! 한 발 늦어 헤라를 만났다는 사실을 그는 마음이 아닌 머리로 화를 내고 사고하고 있었다.
또 한발 늦었다는 자괴감이 그의 머리를 엄습해 온 것이다.
그 자식에겐! 절대 그 무엇도 다시는 빼앗기지 않는다! 석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앞에 보이는 바다를 향해
골프채를 던져 버리고 그대로 뒤 돌아서 호텔을 향해 빠른 걸음을 옮겼다.
32.
" 아침에 방 내줬다던 VIP가 송 석 훈 이었어?"
재원은 파라솔 밑에 앉아 타월로 물기를 닦아내며 윤석에게 물었다. 딱딱해졌던 표정은 풀려 있었지만 말투는
차갑기 그지없다.
" 아~그래. 네가 신경 쓸까봐 말 안했는데.......이렇게 마주 칠 줄 알았으면 귀띔이라도 해줄 걸 그랬네."
" 아침에 급작스럽게 예약 한거야?"
" 어. 일년에 한두 번 골프 치러 오기는 했었는데, 이번엔 좀 이르네. 본래 매년 9월쯤에 왔었거든."
" ....... "
재원은 물기를 닦아내고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헤라는 그런 재원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석훈과 회사일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얘기 할 수도, 또 그 일을 그대로 입 다물고 있을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와의 일은 기밀이었고, 그녀의 신용이 달린 일이다. 하지만 재원의 회사와 관계가 있는 이상 말 하지 않는다면
엉뚱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는 상태였다. 더구나 재원은 석훈과의 관계가 매우 껄끄러운 것 같다.
지난번 클럽에서도 오늘도 두 사람이 서로 교환하는 시선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 기억 나? 송 석 훈."
재원이 옆에 앉아 말이 없는 헤라를 향해 물었다. 기억하느냐........
" 어.......응. 물론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트로피칼 망고 로 손을 뻗는다. 눈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 헤라 씨가 송 석 훈을 알아?"
윤석이 희한한 일이라며 물어왔지만 재원은 대답대신 헤라에게 다시 물었다.
" 쇼핑 할래?"
그녀의 손을 잡 일어선다.
" 쇼핑? 갑자기 무슨........"
" 나가자. 옷 갈아입고 정문 로비로 내려와."
그리고 대답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듯이 앞서 걸어가 버린다. 헤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윤석을 돌아봤다.
" 송 석 훈 하고는 좀 맺힌 게 있어서.......기분 전환이 필요한가 봐요. 다녀와요. 연주 씨 걱정은 말고."
그가 뭔가를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턱을 문질러 댄다. 헤라는 찜찜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하며 재원을 따라 방으로
돌아갔다.
재원과의 낭만적인 데이트를 꿈꾸며 챙겨온 옷이 작은 여행가방 하나 가득! 그 중 하얀색 카프리 팬츠와 노란색에
녹색 고양이가 그려진 면 티를 골라 입었다. 그리고 머리는 자연스럽게 풀어헤쳤다.
이 정도면!.......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지만 석훈과의 마주침으로 깨닫게 된 사실로
인해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은 나아지질 않는다.
호텔 정문 로비로 나오자, 재원은 블랙 '아우디 TT 쿠페(스포츠카)'의 옆에 팔짱을 끼고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터쇼의 컨셉트 카가 연상 될 정도로 앞선 디자인의 차와 그는 지독히도 잘 어울려, 순간이지만 헤라는 주눅이
들었다.
" 굉장한 차네요."
매끄럽고 광택이 나는 그 우아한 몸체의 아우디를 쓰다듬으며 헤라는 감탄으로 눈을 빛낸다.
" 타."
그가 뒷좌석이 없는 쿠페의 조수석 문을 열고 그녀를 태운다.
양 쪽 차창을 모두 내리고 해안 도로로 들어섰다. 재원이 속력을 130 Km 까지 올렸지만 엔진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고 차체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이 윙 하니 귀를 울렸다.
음악은 틀지 않는다. 바람 냄새와, 그가 도로의 급커브에서 속력을 줄일 때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가 전부였다.
" 차는 멀미 안 해요?"
바람을 즐기던 헤라는 문득 그게 궁금했다.
" 내가 운전 할 때는 안 하지."
" 아!"
" 왜! 남자가 멀미 하니까 우스워?"
" 아니.......그렇다기보다는. 그냥 재원 씨 무척 건강해 보이는데 멀미는 심하길래 어째서 그런가 하는 그런 생각 좀
했어."
" 별 쓸데없는........"
그가 씁쓸하게 웃는 것이 뭔가 있는 것 같았지만 이내 입을 다물어 버리기에 헤라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차가 서귀포 시내로 들어서고 거리에 상점들이 드문드문 나타났다. '목화 백화점'이라 써진 글씨가 보이고 재원의
차는 그곳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매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재원은 헤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꼬옥 힘을 준다. 그 조이는 힘에 손가락
사이가 아프긴 했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뭐 살 건데요?"
이렇게 작은 백화점에 그가 살 만한 물건이나 있을까 싶은 노파심에 그녀가 물었지만 그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고서 그녀의 팔을 잡아 당겼다.
5층의 가전제품 매장에서 내린 재원이 간 곳은 핸드폰 매장 이었다. 그는 뭔가 작정 해 놓은 것처럼 서슴없이 PDA
폰 하나를 고른다.
" 네 휴대폰 줘봐."
그리고 헤라의 바지 뒷주머니에 꽂힌 전화기를 꺼내 진열대 위에 올려놓았다.
" 여기 있는 번호 이쪽으로 옮겨 줘요."
직원이 뭐라 다른 설명을 할 틈도 없이 그는 대뜸 필요한 물건을 고르고 필요한 서비스를 요청한다.
" 아.......네. 손님."
여 직원이 상냥한 미소로 재원에게 웃어보였지만 그는 헤라를 향해 돌아섰다.
" 뭐 하는 거야? 재원 씨. 갑자기 왜 휴대폰은 바꾸라는 건데? 저거 바꾼 지 2년 밖에 안 된 거야."
" 카메라 없잖아. 메일 확인도 안 되고."
" 카메라는 없어도 메일 확인은 돼. 하지만 요금이 비싸서 안하는 것 뿐이야."
헤라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카메라 폰이 왜 필요 한지.......메일 확인은 왜 해야 하는지.
" 저기요. 그럼 그거 신규로 등록해서 이거랑 같은 명의로 해줘요."
그러나 재원은 헤라의 말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다시 직원을 불러 자신의 휴대폰을 내민다.
" 내 명의로 하면 요금은 내 앞으로 나오니까......... 메일 확인해. 그럼 돼지?"
진열대에 팔을 대고 비스듬히 기대어선 재원에게 헤라는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 이유 좀 대봐요. 갑자기 왜 카메라 폰이 필요하고 메일 확인이 필요 한지."
그녀는 작은 한숨을 한번 쉬고 검지손가락을 들어 자신이 입술에 가져다 댄다. 스스로가 흥분하지 않기 위함 이었다.
괜한 일에 발끈해서 그와의 데이트를 망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번엔 참을 忍(인) 자를 세 번 허공에 그린다.
" 너무 재원 씨 멋대로야. 휴대폰 두개는 낭비라구요. 그리고 내 통화료를 왜 재원 씨가 내요?"
언성이 높아지지 않게 최대한 목소리를 깔았다.
" 나........모레 뉴욕에 가야해. 가면.......최소한 열흘에서 보름인데."
뉴욕! 열흘에서 보름......!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진열대의 유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친다. 흰색에 파란색의 커다란 나뭇잎 무늬가 들어간
셔츠를 입은 재원의 목 깃 사이로 백색의 줄이 가는 목걸이가 보였다.
하지만 매달린 메달은 셔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 그동안.......네 얼굴 보려면 이게 제일 좋은 방법 같아서 그러는 거야."
진열대 안의 나란히 누워있는 휴대폰들에 눈을 둔 그가 가벼운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고 있다는 걸 헤라는 느낄 수
있었다.
" 보름씩이나........혼자 가요?"
" 아니. 할아버지 모시고 다녀 올 거야."
" 아! 그 할아버지란 혹? 鄭 명예 회장님?"
헤라는 아무 생각 없이 얼결에 물었다. 그러나 바로 후회한다. 확인하지 않아도 될 사실을
확인해 봤자 괜히 그와 공유 할 수 없는 세계를 실감할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 흠........그렇지 뭐."
대답은 회피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재원은 헤라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있었다. 자신의 대답에 그녀가 도망갈
준비를 하려는 건 아닌지 알아보려는 것 이었다.
" 번호는 뭘 로 해드릴까요?"
그때 직원이 돌아와 가입신청서류를 내밀며 묻는다.
" 내 번호하고 끝자리만 다른 걸로.......있으면 해줘요."
직원이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컴퓨터 앞으로 갔다. 그 사이 재원은 서류를 작성 한다.
" 재원 씨.......그래서 제주도.......온 거야? 삼일이나 밤샘하고 무리해 가면서?"
그녀의 물음에 재원은 놀리던 펜을 멈추고 뚫어지게 서류만 들여다 본다. 어제부터 계속해서, 재원은 헤라에게
애정공세를 펴고 자신의 사랑을 끊임없이 알려주려 노력해왔다. 차 안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풀장에서도........
그런데 지금 그녀의 질문은....... 확신이 필요한 걸까? 묘한 어감 속에 헤라가 어떤 대답을 기다리는 지 재원은
생각해야만 했다. 사실대로 시인 한다면 도망칠까? 너무 부담스럽고 혹은 내 마음이 두려워서?
" 응."
대답의 결과가 두려웠지만 이미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알 것이라 여긴 재원은 아주 짧게 긍정을 했다.
그는 멈추었던 펜을 다시 놀려 서류를 끝까지 작성 한 뒤, 헤라를 돌아본다. 그녀는 재원의 반대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고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다.
" 여기 있습니다. 번호는 손님이 요청하신 대로 끝자리만 다르구요. 번호이동성제도에 따라 앞 번호가 011이 아니라
010 으로 가입 됐습니다."
" 고마워요."
그가 계산을 치르고 휴대폰을 그녀의 손에 쥐어 준다.
" 잘 받아. 딴 놈한테는 가르쳐 주지 말고."
" ........ "
그녀는 새 휴대폰을 받기는 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우울해 보이는 헤라의 옆얼굴을 보던 재원이 그녀의 손에서 다시
휴대폰을 빼앗아 든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렌즈를 맞추고 사진을 찍어 메인화면 으로 등록해 놓았다.
" 아~ 낯 가지려. 너 땜에 내가 스물 막판에 들어서 별짓 다 한다."
다시 헤라의 손에 휴대폰을 쥐어주며 그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런 재원을 보며 그녀가 풋~ 하는 작은
실소를 하고.......그 웃음에 그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 진다.
손을 잡고 백화점을 나서는 재원의 발걸음은 다소 가벼워져 있었다.
'코파카바나' 이름도 정열적인 이 호텔의 나이트클럽! 하지만 골프클럽의 갖추고 카지노를 인근에 둔 호텔이라
그런지 분위기는 서울 시내의 그곳들과는 사뭇 달라, 고급스럽고 열대의 이미지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어두운 조명아래 클럽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블루 글라스Bar가 있었고,Bar의 맞은편으로는 춤을 추는 어두운
플로어와 플로어의 왼쪽으로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좌석이 열개 정도 있었다.
Bar에도 손님들이 예닐곱 앉아 있었으며 테이블도 거의 빈 곳이 없었다. 플로어에는 느린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커플 몇몇이 있다.
낮에 입었던 오렌지색 원피스로 갈아입은 헤라가 하늘색의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연주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은근한 남자들의 시선이 쏟아진다.
블루 글라스Bar에 윤석과 석훈이 먼저와 앉아 있고, 재원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녀들이 다가오자 남자들이 일어서고 헤라가 윤석의 옆으로 앉으려 했지만 석훈이 재빨리 헤라 옆으로 윤석을
밀치고 앉는다.
" 며칠 만인가? 우리가."
낮은 음악 속에서 그가 헤라의 귀에 대고 묻는다. 그녀는 화들짝 하는 마음으로 주춤주춤 몸을 뒤로 뺐지만 윤석은
벌써 이상하단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 왜 이래요?"
헤라가 석훈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바텐더에게 '준 벅'을 주문 한다.
" 왜 라니.......며칠 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당신이 이럴수록 더 재미있어진다고."
" 상무님은 제 의뢰인 중 한분이실 뿐 이런 곳에서 재미를 따질 관계가 아니라고 보는데요. 전."
그녀는 여전히 눈을 마주 하지 않고 연주의 옆자리에 앉은 윤석을 의식하며 낮고 빠르게 중얼 거렸다.
" 나도 우리가 비즈니스 중 인건 알아.......그리고 그건 아주 기밀 사항 이니까 재원이가 눈치 채길 바라지 않고,
그러니까.......내가 당신한테 재미를 느끼는 게 오히려 다행이 아닐까싶은데.......자연스런 위장 아닌가?"
그는 앞에 놓은 '데킬라 선라이즈'를 눈높이로 들어 올려 두 자리 건너 자신을 바라보는 윤석에게 건배를 해보였다.
헤라는 더는 대꾸하지 않는다. 도무지 석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과 이 자리를 빨리
모면 하고 싶은 생각 뿐 이었다.
" 벌써들 한잔 하는 거야?"
그러나 그녀의 등 뒤에서 들리는 재원의 목소리.......조금 갈라져 있었다. 연주가 옆으로 한 자리를 물리고 재원이
헤라의 옆으로 앉는다.
석훈과 재원의 사이에 끼어 앉은 헤라는 악몽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뭐야? 준 벅 이네.......그럼 난 속이 좀 불편하니까 깔루아밀크 로."
재원이 헤라의 칵테일을 보고 자신의 것도 주문 한다.석훈도 남아 있던 '데킬라 선라이즈'를 비우고 한전 더
주문했다.
" 골프 치러 오신 겁니까?"
석훈을 향해 재원이 먼저 말을 건넸다. 두 남자는 Bar에서 몸을 돌려 옆으로 앉아 헤라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 음~ 겸사겸사."
낮은 음악 소리와 두런두런 하는 잡담소리만 들리고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 낮에 보니까 수영 여전히 좋아하더군."
" 좋아한다.......송 이사님은 요샌 안하나 보군요."
" 어~ 요샌 별루."
그들의 과거와 연관 된 대화들이 몇 마디 오가고 헤라는 그 사이에서 여전히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잠깐 이라는 말을 재원에게 남기고 자리를 뜬다.
" 저 여자.......계속 만나던 거야? 그때부터?"
헤라의 뒷모습에 시선을 준 석훈이 물어 왔다. 재원은 그가 헤라에게 갖는 관심이 불쾌했지만 티 내지 않는다.
석훈은 현 상황의 재원에게 경계대상 1호인 인물이니만큼 사소한 감정의 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 하긴.......좀 별나 보이는 여자도 데리고 놀기엔 괜찮지!"
석훈이 큭큭 하는 웃음과 함께 데킬라를 입에 가져간다. 재원은 깔루아밀크를 쥔 손에 살짝 힘을 주고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 저 여자 하고는 어디까지 갔어? 너.......본래 한번 잔 여자하고는 두 번 안 만나는 주의 인걸로 아는데."
재원을 훤히 알고 있다는 말투로 석훈이 얘길 하자 그는 욱하는 성질에 발동이 걸린다.
" 너.......라니요. 송 이사님. 너무 친근한 존칭 아닙니까? 우리 사이에."
" 훗~ 그랬나? 미안.......정 본부장. 직함으로 부르는 것 보다는 이런 사석에선 예전처럼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랬는데. 불쾌했나 보지?"
" 당연 한거 아닙니까? 자기 목숨을 위협했던 사람한테 친근한 존칭을 듣는 건 왠지 섬뜩 하거든요."
재원이 석훈의 도전에 응수를 하듯 번뜩이는 두 눈을 마주 했다.
" 그 일은.......사고야.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다니........정 본부장답지 않아."
" 저 꽁한 놈입니다. 그런 일 절대 안 잊지요."
" 그래?"
두 남자의 시선이 부딪히고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하는 그 속엔 과거의 실타래가 엉기어 들고 있었다. 그렇게
노골적인 경계의 시선이 오가고 1~2분 쯤 지났다.
화장실 쪽에서 헤라가 돌아오는 게 보이자 석훈이 몸을 일으킨다.
" 정 본부장이 데리고 놀던 여자지만, 오늘밤 잠깐 나 좀 빌려 주라."
그리고 재원이 그의 말을 다 이해하기도 전에 그는 헤라에게 다가서 그녀의 팔을 잡아 플로어로 들어섰다.
" 춤 춰."
" 뭐 뭐요? 놔요."
그녀가 석훈에게 잡힌 팔을 비틀며 빠져 나오려 했지만 그의 억센 힘이 그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 재원이한테 일부러 접근 한건가?"
억지로 헤라의 손과 어깨를 잡아 자신의 몸으로 밀착 시킨 석훈의 억양은 고조되어 있었다.
"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 아냐? 그럼........뭐야? 당신이 어떻게 재원이 같은 놈하고 만나고 다니는 거지?"
그 말은 마치 너 따위의 미천한 여자가 정 재 원 같은 거물과 어떻게 함께 여행까지 왔느냐고 묻는 말 같았다. 고
석 준 건으로 일부러 접근 한 것이 아니면 말이다.
" 상무님 하고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녀는 다시 몸을 비틀어 석훈의 몸을 빠져 나오려 애쓰고 있었다.
재원은 석훈에게 억지로 잡혀있는 그녀가 몸을 트는 것을 보면서 이를 악문다.
당장에 달려가 주먹을 날리고 그녀를 끌고 ?럽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이지만 석훈에게 그런
감정을 달래지 못하는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그렇지 않을걸! 당신이 내가 의뢰한 써치펌이란 걸 재원이가 알면......생각해봐."
" 그건 기밀 아니었던가요? 상무님 쪽 요청에 의한? 그런 걸 스스로 까발리시겠다니 웃기지도 않네요."
등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헤라는 열 받아 달아오르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입으로 연신 이마에 바람을 날려
댔다.
" 재원이가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야. 아무리 우리가 기밀을 유지하려 해도 고 석준 하고 당신이 시간을 끌수록
재원이 쪽에서는 그걸 캐낼 시간을 버는 샘이니까."
재원 씨가 캐내다니? 뭘 캐낸단 말이지?
" 나도 나름대로 GH 쪽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는데.......이번 고 석 준의 이적에 대한 그쪽의 움직임은 재원이가
중심이더라구."
" 무슨?"
헤라는 시선을 들어 석훈의 눈을 마주봤다. 그의 말이 정확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 재원이가 지금은 미디어 사업본부를 맡고 있지만, 사실상 GH 그룹 장남이자 실질적 후계자인 저 녀석이
핵심사업인 통신 사업본부에 책임을 두기 시작했다는 말이야. 정확히 말하자면.......고 석 준하고 TDMA 기술
유출을 막는 책임에 재원이 에게 있단 얘기가 되는 거지."
헤라는 머리가 빙 하니 돈다. 그럼........
" 설마 재원이 아니 정 본부장한테 진지했던 건 아니지?"
눈을 감고 현기증을 제어하던 헤라는 등의 따끔거림이 팔과 배로 퍼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석훈이 헤라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댄다.
" 당신 속셈이 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알려주지! 재원인........한번 잔 여자하고는 두 번 다시 안 만나. 지금껏
헤라 씨하고 저 자식이 만나고 있다는 건 아직 둘이 갈 데까지 가지 않았다는 말인데.......좀 더 튕기라고. 목적이
이루어질 때 까지."
웃음이 섞인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그에게 잡혀진 손에 주먹을 쥔다.
재원은 미동도 하지 않고 헤라와 석훈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까지 느끼던 질투하고는 차원이 다른, 헤라의 몸을
안고 있는 석훈의 저 손을 뒤틀어 부러뜨리고 싶은 욕구가 치솟는다.
그는 헤라가 마시던 '준 벅'을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오늘 밤, 맨 정신으로 헤라를 안을 계획이던 그가 계획을
수정한다.
우선은 술김에 석훈을 쳐 버린다는 핑계를 만들고 그녀를 그의 손에서 빼내올 계산을 한 것이다.
다시 한잔.......재원을 향해 올 테면 와봐! 라는 눈을 하고 있는 석훈의 얼굴을 향해 그가 턱을 치켜들었다.
" 온 더 락! 한 잔."
(술에 얼음만 넣은 것)
단숨에 잔을 비우고 재원은 한잔 더 주문한다. 뜨거운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가 그의 빈 위장에 다다르자 질투에
불타오르던 몸이 한층 더 열이 오름을 느꼈다.
데리고 논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송 석 훈? 웃기지마! 잘못 짚었어. 내가 그런 놈 아닌 거 모르진 않을
텐데!
난 저 여자 외에 한번 이상 만난 여자 없어. 민 수연을 제외 하고는.
재원이 ' 온 더 락' 다섯 잔을 연거푸 비우고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플로어에 있는 그들을 향해
기세등등한 발걸음을 옮긴다.
" 당장 내 귀에서 얼굴 치워요."
헤라는 참을 수 없었다. 재원과 뭐가 어떻건 간에 지금 온몸이 따끔거리고 간질거리기 시작하는 것이 그녀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 이거 왜이래.......재원이는 나중에 상대해주고 오늘밤은 내 방으로 오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하려던 참인데."
웃음이 사라진 무거운 말투로 석훈이 헤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는 석훈의 가슴을 거세게 밀어내고 그를
노려본다. 잡혀진 왼손은 아직 자유롭지 않았지만 늘어트리고 있던 반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냅다 후려친다.
" 철~썩."
하는 통쾌한 소리가 낮은 음악을 가르고 재원의 귀에 울려 퍼진다. 다가서던 재원은 놀란 가슴에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지만, 서로 노려보고 플로어의 중앙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해 곧 움직인다.
" 내 여자에요. 송 이사님. 무례를 범했다면 너그러이 이해하시죠. 원래 성깔이 좀 있는 여자라.......두 번씩이나
실례를 합니다."
헤라의 팔목을 잡은 석훈의 손가락을 억지로 펴내며 재원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뭐야?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던
거야? 역시 진 헤 라 군!
" 같은 여자한테 두 번이나 맞다니.......재밌어. 헤라 씨."
석훈이 순순이 그녀의 팔을 놔준다. 그리고 재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 정 본부장 여자야? 이 여자가?"
" 네."
" 鄭 회장님이 뭐라 하실지 궁금하군."
" 송 이사님이 상관 하실 일이 아닙니다."
" 큭! 재밌어. 너 네 둘 다."
석훈의 마지막 말에 헤라는 움찔 한다.
이 인간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거야? 재원 씨와 내가 꼬여있는 이 상황을? 나쁜 자식!
" 가자."
분노로 바들바들 손을 떨고 있는 헤라의 손을 재원이 잡는다. 그리고 플로어를 나가 클럽을 문을 열었다.
낮과는 다르게 차가운 바다 공기가 확 하니 헤라의 코 속으로 달려들자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긴장하고 있던
정신과 육체가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를 들여 마시자 또 다시 현기증이 몰려들었다.
" 왜 그래? 괜찮아?"
비틀거리는 헤라를 부축하며 재원이 허리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밤이라서 잘 볼 수는 없었지만 표정이
어두웠고 창백할 것이라 그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순간 그의 머리를 번뜩 하고 스치는 것이 있다.
설마........헤라한테 내가 데리고 놀았다는 둥 그따위 소리를 지껄인 건 아닐 테지?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석훈이
왜 헤라에게 한단 말이야?
뭐지? 헤라가 이렇게 부들부들 떨 정도로 흥분했다는 건.......분명 석훈이 그녀에게 해선 안 될 말을 했다는 뜻인데!
그날.......모임에서 자신을 때려눕힌 여자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녀를 플로어로 데리고 나간 거라고 짐작을 하고 있던
재원은 석훈의 태도가 이해가지 않는다.
" 올라가자 방으로."
우선은 석훈을 머리에서 접기로 한 재원은 헤라의 어깨를 부축해 3층의 방으로 올라갔다.
헤라를 베란다 있는 간이 소파에 앉히고 재원은 물을 가지러 간다. 그리고 윤석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와 방에
올라와있으니 알아서 하라고 귀띔을 해준다.
" 마셔. 물."
" 어.......고마워요."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재원이 무릎을 꿇고 헤라의 발아래 앉는다.
" 그놈에 손버릇. 정말 고약하다 너."
그리고 웃음을 머금은 채 석훈의 뺨을 친 그녀의 왼손을 들어 입을 맞춘다.
" 새삼 왜요.......내가 남자한테 주먹질 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헤라는 그의 다정한 눈에서 시선을 돌려 검푸른 바다를 향했다.
이 남자.......날 한번도 의심해 본적이 없는 걸까? 정말로! 정말로! 우연히 운명처럼 그렇게 만났지만.......혹시 그
만남이 우연을 가장을 의도적 접근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을 걸까?
자신과 전혀 속해있는 세계가 다른 날.......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이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믿고 있는 거지?
재원은 아까 풀장에서도, 지금도, 헤라에게 석훈과의 묘한 분위기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윤석 마저도 눈치 채고 있는 그 분위기를 재원이 모르지 않을 텐데.......그는 오히려 더 다정하게 굴고.......더
사랑스럽다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믿는 건가? 날? 왜? 아무것도 모르면서.......왜지?
" 뭐야.......얼굴이 왜 이리 어두워? 송 이사가 무슨 이상한 소리해?"
혼란함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재원은 걱정이 된다. 정말 석훈이 헤라에게 자신이 그녀를
데리고 놀고 있는 거라는 말 따위를 했다면 하는 그런 걱정이었다.
" ....... "
헤라가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 아~ 씨! 그런 모양이네."
그가 헤라의 표정을 살피며 짜증이 섞인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여전히 무릎을 꿇은 상태로 그녀의 얼굴로
손을 뻗는다.
" 그 인간 말.......곧이듣지 마. 나.......물론, 한번 이상 계속 해서 만나본 여자 없는 건 사실이야.
근데........넌.......아니 이제 당신 이라고 부르자. 당신 그렇게 여겨 본적 없어. 데리고 논다거나.......혹은 한번
잠자리하고 차버린다는 뭐 그런."
그는 좀 전에 마신 술이 장으로 뜨겁게 흡수 되는 것을 느끼며 술기운이 퍼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 헤라.......내가 당신을 믿는 것만큼 당신도 날 믿어줬으면 좋겠어."
재원의 얘기.......믿는다. 그렇구나! 이 남자 날 정말 믿고 있었구나! 헤라는 좀 전 가진 의문에 대한 답을 들으며
가슴 가득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석훈과 아니 MTN과 엮이지만 않았어도 뛸 듯 기뻐해야할 그의 말에 가슴이 저릿저릿 아려왔다.
" 재원 씨......."
얼굴을 쓰다듬는 그의 손이 따뜻했다.
" 아~ 거지같은 인간 땜에 기분 꿀꿀해 졌네. 술도 안 마시려고 했는데 그 인간이 당신을 놔주지 않는 바람에
술기운으로 한대 치려고 온 더 락을 다섯 잔이나 마셨어........취한다."
자신이 한말에 수줍은 얼굴이 된 그가 일어서서 헤라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시선을 박은 헤라는 갈등을 한다.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내가........취해야 할 처신이 뭘까?
" 이리와 봐."
그가 조그만 한숨을 쉬고 그녀를 부른다. 헤라는 몸을 일으켜 재원에게로 다가갔다.
" 여기 앉아."
자신의 무릎을 가리키며 그가 헤라의 팔을 끌어 당겼다. 다리를 옆으로 모으고 재원의 무릎에 앉은 그녀는 재원의
턱을 만진다.
수염이 조금 길어진 그의 꺼끌거리는 턱의 감촉을 느끼고 싶었다.
" 뉴욕 다녀와서.......우리 집에 인사가자."
인사........말도 안 된다........
" 그리고.......애초에 너랑 사귀기로 약속 할 때는 결혼 같은 말은 하지 않기로......"
" 수염 밑에 상처가 있어. 제법 긴데.......4센티도 넘을 것 같아. 언제 생긴 상처야?"
" 말 자르지마."
" 혹시 어릴 때 넘어지거나 그래서 생긴 상처야?"
" 진 헤 라!"
" 아니면 누구랑 싸우다가 생긴 상처 인가?"
" 후~~ 아냐.......수영하다가 찢어졌어. 풀 밖에서 누가 던진 쇳조각에 긁혀서."
" 그래?"
재원의 말을 자르고 엉뚱한 곳으로 화제를 돌린 그녀가 무릎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이번엔 그녀가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어앉는다.
" 아팠겠다........"
거뭇한 수염이 자라난 턱의 상처에 입술을 가져다대며 헤라가 작은 소리로 중얼 거렸다. 그녀는 그의 모든 고백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혀를 내밀어 그의 상처를 핥고 다시 키스 한다. 너무도 유혹적인 그녀의 행동에 재원은 고개를 돌려 그 입술을
피한다.
" 헤라.......진 헤 라."
" 오늘.......약속 지켜줄게. 재원 씨."
" 내 얘기 먼저 들어."
" 나중에.......나중에 얘기해요."
" 당신 왜 이래?"
재원이 헤라의 얼굴을 잡아 턱을 애무하는 입술을 떼어 낸다.
" .......재원 씨가 원하는 거.......그거 하자구! 왜 이러다니?"
달빛이 비추어드는 베란다엔 잠시 파도 소리만이 쉬쉬 거렸다.
" 지금은.......지금은 아냐! 우선 내 얘기 먼저 들어줘."
" 싫어."
헤라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 재원을 외면했다. 재원이 의자에서 내려와 그녀와 바닥에 마주 앉는다.
" 왜 싫은데?"
" ....... "
" 내 눈 봐. 나랑 얘기 할 때 시선 피하지 말라고 했지!"
" ........ "
헤라가 고개를 들어 무릎을 꿇고 마주 앉은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 알았어. 한 가지만 얘기 할게. 결혼 얘기도 아니고. 인사가자는 말도 아냐. 그러니까 들어줘. 응?"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고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라의 얼굴을 감싸 쥐고 그녀와 똑 같이, 달빛이
비쳐드는 눈동자를 응시하던 재원이 마른 입술을 적신다. 그가 몹시 긴장 하고 있음을 그녀는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 .......사랑해........"
또박또박 정확하게 그가 말한다.
절묘한 타이밍! 재원의 입에서 그런 고백이 나오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헤라는 머리가 하얀해 지고 있었다.
" 사랑해........더 오래!........ 당신 마음이 나와 같아질 때 까지 속에 담아 두고 있으려고 했는데........도무지 안
되겠어. 내 심장이 말야.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너무 무거워서 자꾸만 자꾸만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구. 이렇게
사랑한다는 말로 고백이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무서워."
석훈에게 재원과 자신이 놓인 현재의 또 다른 관계에 대해 언급 받은지,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그녀는 재원에게
사랑한단 고백을 듣고 있었다.
" .......못 들은 걸로 할래!"
얼굴을 쥔 그의 손을 떼어내며 헤라가 일어서려 한다. 재원이 다급히 다시 팔을 잡아 당겨 그녀를 앉혔다.
" 어째서?...... 왜?....... 날 사랑해달란 말이 아니야. 내가! 내가 일방적으로 널 사랑한다구. 넌 나에 대해 단순히
호기심 아니면.......아니면."
" 아니면 뭐!"
" 돈 이나.......배경 그런 것 때문에 날 만나는 거라도 상관없어."
" 차~ 그런 건 아니라는 거 알잖아."
헤라는 이말 만은 반드시 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절대절대! 정 재 원이란 남자 외에 그 어떤 것도 그녀는 보지
않았다는.......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서.
" 아아 그래! 알아........알고 있어. 그래서 당신을 믿는 거구. 그냥 내말은 다만, 다만 도망가지 말라 그런 소리야.
당신 몸이 나에 대한 반응이 다르잖아.......그치? "
" 그건 내 몸이지! 마음이 아니에요."
" 몸이 오면.......마음도 올수 있어."
그는 당황해 하고 있었다.
연애하는 게 사랑하는 건가? 사귄다는 건! 그냥 만나고, 영화보고, 밥 먹고, 섹스 하고, 뭐 그런 거 아니었어?
헤라는 그답지 않은 이 일련의 모든 행동에 혼란스럽고 가슴이 아파왔다.
" 뉴욕 출장 때문에 재원 씨........감정이 고조 된 것 같아. 마음 가라앉히고.......지금 한 말 다시 잘 생각해 봐요."
헤라가 다시 일어서려 하자 재원이 거칠게 그녀를 잡아 앉혔다. 그리고 차가운 베란다의 대리석 바닥에 그대로
그녀를 눕히고 깔고 앉아 버렸다.
그러나 헤라는 저항 하지 않는다? 아니다. 저항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옳다.
" 널 가지면.......네 마음이 올 거니?"
" 몸하고..... 마음이...... 항상 같이 다니지 않는 다는 건....... 재원 씨가 더 잘 알잖아."
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헤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끊어진다. 재원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녀가 자신이
마음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그동안 했던 다짐들이.......그녀의 마음을 얻은 뒤 그녀를 갖겠다던 다짐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던 순간
이었다.
" 그럼.......오늘밤 내가 널 안아도.........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소리야?"
" 약속! 우리가........처음 만난 날 했던 그 약속! 그걸....... 지키는 거예요."
그녀는 아무 쓰잘대기없는 그 괴상한 약속 얘기를 끄잡아 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를 끊을 수 있다면 하고 말이다.
" 약속! 약속! 약속!..........여태껏 그따위 것에 매달려 내 주변을 맴 돈 거야? 그런 것 다 잊어버리자고 했잖아."
그러자 재원이 깔고 앉아있던 헤라의 몸에서 일어나며 버럭! 소리 지른다. 그러나 일어남과 거의 동시에 배를 쥐고
무너지듯 다시 내려앉았다.
" 재 재원 씨!"
" 으......윽!"
" 왜 그래? 왜 그래요? 재원 씨!"
" u uk!.......snakes!"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무릎을 꿇은 채로 몸을 구부렸다. 헤라는 퍼뜩 머리에 스치는 게 있다.
" 아까 '온 더 락' 다섯 잔 마셨다고 했어요?"
그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쥐어짜는 듯한 위의 경련이 이마에 식은땀을 흐르게 하고 있었다.
" 비행기에서부터 속을 뒤집은 사람이 저녁도 안 먹고 빈속에 왜 술을 마셔요!!!! 제 정신 이야?"
"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상관.......하지 마! 남이야.......빈속에 무슨 짓을 하든!!!!"
재원은 고통으로 이를 악물고도 헤라의 잔소리에 대꾸 했다. 사랑한다고 괜히 고백했다 하는 후회가 그의 위를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 정말 미쳐! 재원 씨.......윤석 씨한테 전화 할까? 병원 가요?"
헤라는 위경련의 고통을 안다. 새엄마가 그랬다. 아빠가 술을 마시고 사고를 칠 때마다 새엄마는 위경련을
일으켰고.......병원에 실려 가서 몰핀을 맞아야만 그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 호들갑.......떨지.......마! 가벼운.......위경련이야."
" 땀 좀 봐......."
그녀가 재원의 옆에 주저앉아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원피스 자락으로 닦아냈다.
" 저리 가!"
그러나 화가 날대로 난 재원은 그녀의 손을 뿌리 쳤다.
헤라는 무서워진다. 물론 위경련으로 죽었다는 사람을 보지는 못했지만, 고통으로 이를 악무는 그를 보고 있자니
아침에 비행기에서 그의 심장박동을 듣고 있던 생각이 났다.
어느 날........이 남자의 심장 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날이 온다면........!
" 병원 가요!"
그녀는 재원의 팔을 잡아 일으키려 한다. 하지만 재원은 바닥에 팔을 짚고 엎드린 채로 꿈적 하지 않았다. 그의
팔이 바르르 떨려왔다.
" 재원 씨!"
헤라의 목에서 울음 섞인 소리가 나온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그가 어떻게 잘못 되는 건 아닌지.......이젠 정말로
무서웠다.
새엄마처럼 고통스런 신음도 내지 못하고 묵묵히 경련을 이겨내려 하는 재원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 전화.......할게. 윤석 씨한테."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전화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다. 그러자 재원이 헤라의 팔을 잡는다.
" 놔.......놔둬! 1~20분 있으면.......으.......괜찮아 질 거야."
" 그.......치만! 흑!흑!"
자신의 팔목을 잡은 그의 손등이 하얗게 변하는 걸 보면서 그녀는 흐느꼈다.
" 너........병원 가는 거........죽기보다 싫어.......하잖아........됐어."
재원이 차가운 바닥에 몸을 옆으로 뉘여 그녀의 다리위에 머리를 올린다.
" 야~ 씨!.......울지.......마! 누가.......죽기라도.......하냐?.........쫑 난 .......사이에.......무슨!!!!"
그는 어린 아이처럼 삐져 있었다. 쥐어짤 듯한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정작 그가 힘든 건 헤라가 거부한
자신의 마음 이었던 것이다.
" 뭐가 쫑 난 건데? 그냥.......못 들은 걸로 한 댔지. 언제 다시 안 만난다고 그랬어?"
" ........ "
헤라의 말에 재원은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의 다리를 베고 손을 잡고 위경련이 멈추기를 기다리기 10분 쯤........서서히 그의 손에 힘이
빠지고, 이를 악문 턱에서도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 재원 씨.......침대로 가자. 이젠 좀 움직일 수 있겠지?"
그녀가 재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울음을 멈추고 물었다.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재원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오른손은 아직 배를 움켜쥐고 있었지만 옆의 의자를 의지하고
일어서 룸 안으로 들어온 그는 침실로가 침대에 몸을 다시 눕혔다.
헤라가 욕실로 가 깨끗한 타월을 들고 나온다. 재원이 누운 침대 옆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가지고 나온 타월로 그의
이마와 목 줄기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 아파?"
" ....... "
자신의 몸에 흐른 땀을 닦아내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면서도 재원은 대꾸가 없다.
" 우리.......새엄마도 자주 이랬어. 그때마다.......병원으로 실려 가셨는데.......어찌나 고통스러워하시던지!.......정말
무서웠어요......... 지금처럼."
헤라는 드문드문 말을 했다. 그리고 그의 몸을 닦던 손을 멈추고 뚫어질 듯 쳐다보는 재원의 눈을 마주한다.
" 취소야........아까 한 고백.......취소할게."
그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뒤로 내빼지마. 지금처럼만 옆에 있어."
가래가 끼어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지만 재원은 말을 잇는다.
" 네가 부담스러워 할 만한 말.......다시는.......안 할 테니까........도망가지만 마........약속했지? 아까........지켜!.......
쓸다리없는 그 괴상한 약속 따위.......끄잡아 내지 말고."
모로 누워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재원의 손을 잡아 헤라는 손바닥에 입을 맞춘다.
" 소리 질러서........미안해!"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다시금 눈물이 나고 목이 메여와 말을 할 수 없어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훔쳐냈다.
그를 받아들 일수 없는 상황이 슬프다.......너무나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는 것도, MTN과 엮여 있는 것도, 그저
슬프기만 했다.
" 이리 올라와."
눈물을 닦아내는 헤라의 손을 잡아 그가 침대위로 잡아끈다.
" 나........아픈 것보다 지금 무지하게.......졸리거든. 근데........네가 없어 질까봐 불안해서 눈을 못 감겠어.
그러니까.......옆으로 올래?"
재원은 뼈저리게 후회 한다. 계획에 없던 충동적 고백! 석훈이 헤라에게 말한 그 쓸데없는 소리 때문에 그녀가
오해하고 있을 까하는 불안감에 해버린 사랑한단 말을 그는 주워 담고 싶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바보같이!
침대로 올라온 헤라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고 팔을 둘러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땀 냄새가 그녀의 체위와 섞여 그의 코로 들어온다. 하지만 그 냄새조차도 앞으로 열흘 혹은 보름간 떨어져 있는
동안 그리워질 것 같아 그녀의 냄새를 맡고 또 맡았다.
얇은 시폰 원피스 위로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감촉이 몽롱하게 느껴진다.
얼마가 지났을 까? 갑자기 그녀가 몸을 뒤튼다. 움찔 움찔.......
" 왜.......그래?"
선잠이 들던 재원이 물었다.
" 아냐........신경 쓰지 말고 자요."
" 네가 움찔거리는데.......어떻게 자?"
" 저기, 사실은 간지러워서. 두드러기가."
드디어 헤라는 못 참겠다는 듯 배와 등을 긁기 시작했다.
" 또?"
뉘였던 몸을 일으킨 재원은 긁어대는 헤라를 보며 석훈과 춤을 추던 그녀를 생각해 냈다.
" 미안! 먼저 잘래요? 찬물로 샤워 좀 하고 오면 가라앉을 거야."
" 헤라 야."
막 침대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등을 껴안은 재원이 다정하게 이름을 부른다.
몰려드는 잠 때문에 아직 정신은 몽롱했지만 그런 중에서도 자신 외에 다른 남자에게 보이는 그녀의 반응!
그것만으로도 아직은 다른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샤워 하고 올게요.......먼저 자."
그녀가 살며시 팔을 풀고 욕실로 가버리자 재원은 다시 몸을 누인다. 2~3분 간격으로 뜨끔거리는 경련의 작은
통증을 느끼며 그는 잠이 들고 있었다.
33.
찬물 샤워를 마치고 재원의 잠이 든 얼굴을 내려다보던 헤라는 머뭇머뭇 그의 턱에 난 수염 속의 상처를 다시 한번
더듬어 봤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상처는 깊어 찢어졌었는지 꿰맨 자국이 8발이나 됐다.
수영장으로 쇳조각이 왜 날라들었을까? 그것도 이 사람을 향해서?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까 재원의
대답으로 봐서는 그리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에 그가 깨더라도 묻지 말아야겠다고 다짐
한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룸을 살며시 빠져 나왔다.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너무나 심난한 마음에 머릿속은
뒤죽박죽으로 엉망진창 이었으며 눈물을 흘린 탓에 골치까지 딱딱 아파왔다.
호텔의 뒤편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작은 테라코타 벤치를 발견한 그녀는 차갑고 이슬이 맺힌 그곳에 몸을
앉힌다.
포기해야 하나? 둘 중 하나는? 거금이 걸린 MTN과의 거래와 정 재 원 이란 남자........둘 중 하나는 역시 없었던
일로 해야 하는 걸까?
석훈이 했던 말들을 되 뇌이며 그녀는 간단하지만 쉽게 결정지을 수 없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그녀가 MTN의 제안을 받아들인 다는 건 재원의 뒤통수를 치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어쩐지.......처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던 이번일이.......단순히 합법적인 일이 못 되서 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헤라는 무슨 숙명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거창하게.......숙명 이란 단어 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혼자서 픽 하니 웃어 버린다.
" 야심한 시각에, 왜 이런 곳에 혼자 나와서 웃고 그래요?"
갑자기 나타나 옆으로와 앉으며 말을 건넨 목소리의 주인은 윤석 이었다.
" 아~ 윤석 씨!"
" 재원이 자요? 안자면 헤라 씨 옆에서 떨어질 애가 아닌데."
얼굴에 편안한 웃음을 걸고 그가 농을 했다.
푸르스름한 근대 유럽의 가스등을 연상시키는 모양을 한 가로등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짧게 바닥에 드리우고
바다엔 안개가 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 네.......피곤하잖아요. 며칠 제대로 잠도 못자고."
" 하긴.......그렇겠네요."
조용했다. 파도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헤라와 윤석은 그 끝이 없을 것 같은 고즈넉함 속에
머리를 정리 하고 있었다.
" 재원 씨.......위경련 일으켰었어요. 한 시간 전 쯤."
안개가 낀 바다의 왼 쪽으로 등대 불의 움직임에 눈을 주며 헤라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 어어 그랬어요? 놀랐겠네. 헤라 씨가."
" 음.......좀 많이. 자주 그래요?"
윤석이 그다지 놀라지 않는 반응으로 봐서 그녀는 짐작해 물었다.
" 녀석이 술을 꺼리는 이유가 그거에요. 보기랑 다르게 좀 예민한 구석이 있거든요. 그래도 매년 5월에서 6월
사이엔 지도 어쩔 수 없이 술을 푸니까.......일년에 한 두 차례씩은 꼭 그렇게 탈이 나네요. 올해는 헤라 씨 덕에
무사히 넘어 가나 했는데."
" 아까.......거기서 온 더 락을 다섯 잔이나 마셨데요. 빈속에."
" 멍청한 놈! 아마 헤라 씨한테 몸이 달아서 그랬을 거예요. 송 이사가 집적대니까 지 성질에 못 이겨서."
" 그러게요.......처음 봤을 때부터 다혈질이라고는 생각했었지만.......몰랐네요. 저렇게 예민한 사람 인줄은."
" 그래서? 그래서 재원이 싫어요?"
그의 목소리에 불안이 묻어 있어서 헤라는 바다를 보던 눈을 윤석에게로 돌렸다.
" 아뇨.......그저 걱정이 돼서요."
진심 이었다. 저렇게 예민한 사람이 만약 자신과 석훈의 비즈니스 내용을 알게라도 된다면 어떻게 될지.......상상
하기조차 싫었다.
" 뒤통수치지 말아요. 재원이 자식 그런데는 특히 민감 하니까."
윤석이 이슬에 젖은 바지의 물기를 털며 일어선다. 역시 그는 눈치 채고 있었다. 석훈과 그녀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과 헤라의 어두운 표정에서 무엇이 있다는 걸 감지해 낸 것이다.
" 연주는 요? 윤석 씨랑 같이 있었어요?"
헤라가 그를 따라 일어서며 화제를 돌린다. 그가 그런 그녀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동안 응시를 하다가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 지금쯤.......침대 속에서 스스로를 욕하고 있을 걸요. 괜한 짓 했다고."
그리고 웃음! 그녀는 그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의 의미를 더듬었다.
" 어서 들어가요. 재원자식 깨서 헤라 씨 찾으러 다니기 전에."
" 그럼 윤석 씨는 어디서 잘 건데요?"
" 하~하~ 나야 당연히.......헤라 씨한테 방을 내줬는데 어디서 자겠어요?"
" 아 네. 그렇지만 연주가.......좋다고 할까요?"
" 뭐.......벌써 나랑 할 짓 다했는데 새삼.......가릴게 있나요?"
그의 되물음에 순진한 헤라는 조금 오랫동안 생각을 해야만 했다. 할 짓? 할 짓. 할 짓!
" 어.......그랬.......그랬군요. 괜한 걸 물었네~"
" 하하하하~ 들어가요. 걱정 말구."
윤석이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의 등을 밀었다. 헤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에게 떠밀려 호텔 뒷문으로 걸음을 뗀다.
" 자요?"
문을 열고 들어서며 윤석이 침대에 엎드려 있는 연주에게 물었다.
" 침대는 내 거에요. 윤석 씨는 소파에서 자라구요. 알았어요?"
" 왜 심통이에요? 내 키에 소파에서 잔다는 게 가능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 그럼 3층 당신 방으로 올라가든지!"
저기압의 연주가 이윽고 번개와 천둥을 동반했다.
" 하~ 소리 지르지 마요. 재원이한테 맞아 죽는 다구요. 지금 올라갔다가는~ 그러니까 말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하고 한 침대 쓰기 싫으면 연주 씨가 소파에서 자요. 난 죽어도 침대 양보 못하니까."
" ?! 진짜! 난 하루에 두 번은 안한단 말이야!"
베게가 윤석을 향해 날아든다. 그 날아든 베게는 윤석의 팔에 맞고 맥아리 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 뭐요?"
그가 침대 곁으로 다가가 연주 앞에 서자 그녀가 그를 올려다봤다. 두 눈엔 제법 그럴싸한 눈물이 그렁그렁 걸려
있었다.
" 누가 또 한대? 착각 하지 마. 아까 얼마나 좋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난 그냥 그랬거든! 그러한 이유로 당신을 또
건드릴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하시지!"
그가 배배꼬인 말투와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본다. 연주는 기막히다는 눈을 지우지 못하고 그를 째려 봤다.
" 나도 당신 같이 서투른 남자는 처음이야. 섹스 파트너를 교체함으로 오로지 스스로가 남자라는 것을 확인 받고
싶어 하는! Y염색체라는 천연자원을 본능적으로만 활용할줄 밖에 모르는 단세포 동물 그 자체였단 말이지!"
그녀가 조금 어려운 말을 쏟아냈다. 그리고 스스로도 자신의 박식함에 놀라고 있었다. 보름에 걸쳐 졸음을 참아가며
간신히 중간 까지 읽었던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영향이 큰 듯 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잠시 멍해 있던 윤석이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연주에게 허리를 숙여 얼굴을 들이민다.
" 노력이 가상하네.......재원이 꼬실라고 그런 어려운 책도 다 보구!"
허걱!!!!!! 모 모모야??? 연주가 윤석의 얼굴을 피해 허리를 뒤로 재꼈다.
" 그 책에 있는 얘기들이 유용하기는 한데 말이야. 난 당신이 거기 써있는 대로 복잡 미묘한 남자를 그리 잘
이해하고 받아 들여 줄 여자로 안 보이거덩~ 어쩔래? 계속 덤빌래? 밤새도록 나랑 그 책 얘기 한번 해 볼까?"
이런~~ 연주는 헤라 못지않게 스스로 무덤을 파버렸다. 그녀는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다.
윤석이 절대, 이제까지 그녀가 만나던 그녀에게 얼빠져 있는 남자라 아닌 것을.......연주는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불쌍한 연주! 제주도 까지 따라와서 헛물 키고! 원하지 않는 남자와 엮여 무식함을 만천하에 드러내야
하다니.......됐어~거기까지~!
자신의 비극에 스스로를 불쌍하다 여기고 있던 연주는 이제 윤석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이 밤 안에 그를 정복하리라 별 효력 없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 침대 옆 협탁의 시계를 본다. 7시 30분 이었다. 헤라는 재원의 품에 파고들어 곤하게 잠이 들어 있다.
어제 입었던 바지도 티도 벗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베란다 문을 열어 놓아서인지 그녀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울었나? 모로 누운 그녀의 얼굴에 하얀 눈물 자욱이 흘러 있다. 재원이 살짝 몸을 들자 헤라가 그의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며 품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왔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린다.
어쩔 수 없이 재원은 다시 몸을 눕혔다. 어젯밤 몸을 뒤척이다 잠시 눈을 떴을 때 헤라가 옆에 없는 걸 알았지만
그는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그래서 불안을 지우지 못하는 마음으로 떨어지지 않는 피곤함에 잠 속으로
빠져들었었다.
그런데.......아침에 눈을 뜨니 그녀가 품속에 있다. 그는 즐겁다. 그녀가 달아나 버리지 않아서.......
그렇게 눈을 뜬 채로 헤라의 숨결 속에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러다 궁리를 해본다.
뉴욕에서 돌아와 청혼을 할까? 아니면....... 다시 고백을 하고 스토커처럼 매일 달라붙어 있어 볼까?
그것도 안 되면....... 집으로 쳐들어가서 부모님에게 무조건 인사를 해버릴까? 헤라를 달라고 졸라볼까?
그래도........이것저것 다 안 먹히면....... 납치라도 해서 외국에라도 나가볼까? 혹시......?
가능하던, 가능치 않던 재원은 할 수 있는 생각을 모조리 해봤지만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정말 이 여자에게 미쳐버렸다는 것만을 확실히 알게 될 뿐 어디에도 답은 없는 게 현실 이었다.
더구나 외사랑 이라니! 헤라 앞에서 무너진 자신의 카리스마를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까지.......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 깼어요?"
정말로 한심한 처지다. 라 생각하던 순간, 느릿느릿한 헤라의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 아까 깼어. 넌 더 잘래?"
" 으음.......아니."
그녀가 고개를 젓는다.
" 그럼 일어나자. 난 샤워 하고 싶은데.......네가 먼저 할래?"
재원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헤라가 그의 가슴을 눌러 다시 눕혔다.
" 조금만 더........이러고 누워 있으면 안돼요? 아직 일어나고 싶지가 않아."
" 누구 덕에 지금까지 30분 째 뜬 눈으로 누워 있었어. 허리 아프단 말이야."
재원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퉁명스럽게 목소리가 나왔다.
" 내가 키스 해줄게. 그 대신 10분 더 이러고 있어요. 우리! 응?"
그러나 이게 뭔 일인가? 헤라는 전에 없던 애교가 섞인 표정과 목소리로 그를 유혹해 오는게 아닌가.......
" 너. 너 왜 이래? 갑자기 왜 안하던 짓이야?"
놀란 재원이 달라붙는 그녀의 몸을 손으로 밀쳐 두 눈을 들여다본다. 생글생글 거리는 검은 눈동자엔 그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이는 재원의 머리! 진 헤 라! 너 왜 이러는 거야?
그는 헤라가 들이미는 입술을 손바닥을 들어 막아버린다. 다가오던 그녀의 입술이 그의 오른 손바닥에 부딪혔다.
재원은 버릇대로 한쪽 눈을 찡그리며 가늘게 뜬 채.
" 필요 없어. 자고 싶으면 너나 자!"
라 느긋하게 말하고 침대를 내려왔다. 그렇지만 심장은 말과는 반대로 촐랑거린다 싶게 소리를 높여가고 있었다.
" 날 거부해요? 지금?"
헤라가 획 하니 돌아서 침대에 몸을 세우고 앉아 한껏 목소리를 높인다. 재원은 뒤 돌아보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옷을 벗고 샤워기 물줄기에 머리를 댄 그는 주책없이 뛰어 대는 가슴에 손을 얹는다.
단순히, 그녀가 먼저 유혹을 해왔다는 이유로 인해, 희망을 품게 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초라하다.......한번도 가져 본적 없던 그 느낌이! 낯설고........ 아팠다.
아침부터 여러 가지 감정이 오간다. 즐거웠다가 한심했다가 이젠 아프다니.......말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심기가 마구 불편해 지고 말았다. 엇 저녁 거절당했던 사실이 존심 상했다.
거기다, 헤라로 인해 불안에 떠는 자신이! 천하의 정 재 원이 이가! 이 무슨 짓 인가? 하는 자책까지 들고 있는
중이었다.
10시 쯤 윤석의 차로 연주와 재원, 헤라는 성산으로 갔다. 서귀포의 해변과는 다른 모레가 검은 성산의 해변을 걷고
아침 겸 점심으로, 근처의 흑 돼지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재원은 지글거리며 익어가는 삼겹살은 눈요기만을 만족하고 전복죽으로 배를 채워야만 했다.
식사 후 가벼운 산책이라며 일출봉으로 향한다. 윤석과 연주가 앞서 걷고 재원은 좀 뒤쳐져 걷기 시작했다.
헤라와 재원은 아침 이후로 계속 냉전 중이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을 거부하는 재원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재원은
비참한 기분을 맛보게 한 그녀에게 당분간만 조금 거리를 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 힘들면.......올라가지 말아요. 가봐야 별것 있나? 그냥 분화구 인데."
아침 겸 점심을 죽으로 때운 그를 생각해, 이어지는 냉랭한 기운을 뚫고 먼저 말을 건 쪽은 헤라였다. 하지만
재원은 뒤에서 말을 건네 오는 그녀에게 대꾸하지 않는다.
" 뭐야? 나랑 말 안하기로 한 거예요?"
일출봉의 정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는 그녀는 따가운 6월의 햇살에 짜증이 났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녀의
지금 기분은 완전 제로였다.
" 왜 삐졌는데? 어제 다 풀고 넘어 간 것 아니었어?"
아무것도 결정짓지 못했지만 같이 있는 동안만이라도 즐겁게, 재원에게 마음이 가는 그대로 모두 표현 하고
싶었는데.......그가 틈을 주지 않자, 그것이 더 그녀의 기분을 우울 하게 만든다.
" 누가 삐져?"
삐진다는 말에 그가 겨우 한마디 던진다. 그러나 다음은, 여전히 반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묵묵히 계단을 오를
뿐 이었다.
30분을 오르자 정상에 다다르고 정상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비좁은 그곳엔 사람들이 넘쳐났다. 뾰족뾰족한 화강암 바위들 위에 사람들이 위태한 모양으로 올라서서
기념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분화구 정상의 까마득한 아래로는 잡풀과 잡목이 제법 진한 녹색을 띈 우거진 숲이 보였다. 그 짙은 녹색이
발아래의 그것들을 더 작게 보이게 만들었다.
어지럽다. 떨어짐을 방지하는 난간도 없었다. 고소공포증은 없었지만 이렇게 아무런 안전장치도 되어 있지 않은
높은 곳에 올라서니 헤라는 눈앞이 까매지며 아주 작은 별이 보였다.
" 잠시만요."
그리고 재수 없게도 하리 그때, 남자 하나가 헤라의 옆을 지난다. 디카를 들고 비좁은 바위 위를 몸을 비틀어
스쳤다.
강한 바람과 좁은 공간, 현기증 이 세 가지가 합치어져 그녀의 몸을 기울게 만들었다.
분화구 아래를 향해 고꾸라질 듯 비틀거리는 그녀. 순간이었다. 스쳐 지나가던 남자가 어어! 하는 비명 가까운
소리를 내며 그녀의 팔을 잡아당긴다.
" 헤라 씨!"
헤라의 옆에 있던 재원을 대신에 그 옆으로 서 있던 윤석이 날쌔게 달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안아 기울던
몸을 안정시킨다.
사고가 날 뻔 한 것이다. 분화구는 화강암 정상 아래로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헤라는 윤석의 양 어깨를 꼭 붙들고
눈을 질끈 감았다.
" 큰일 날 뻔 했어요. 어지러웠던 거예요?"
삐~ 하는 현기증의 경고음이 머리에서 내려와 그녀의 귀를 울린다. 아득하게 들리는 윤석의 묻는 소리에 헤라는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 얌마! 넌 옆에 있던 자식이 뭐야? 못 봤어?"
이어 들리는 윤석의 고함! 헤라는 살포시 눈을 떠 옆에 서있는 재원을 쳐다봤다. 그는 무표정 했다. 남의 일이라는
듯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내려가자!"
헤라와 눈이 마주치자 재원이 돌아선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윤석이 기막히다는 얼굴로 헤라를 봤다. 왜 그러냐는 눈 이었다. 하지만 헤라는 입을 다물었다.
아침부터 퉁명스러워 지고, 말이 없어진 그가 왜 그러는지.......나름대로 짐작이 가지만 그녀는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출봉에서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시간은 2시 반을 조금 넘겨 있었다. 차 안은 무거운 공기로 가득 찼다.
윤석이 에어컨 대신 창문을 열었지만 그 공기는 차안에서 빠져 나가지 않았다.
" 7시에 '그랜드 볼륨' 호텔 마에스트로에서 '카지노 나이트 데이'라고 파티 열거든.......오늘 저녁은 거기서 하자."
윤석이 입을 연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에 구름이 끼기 시작하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공기가 습해져 있었다.
" 우리 카지노에 있는 딜러들이 와서 게임도 진행 할 거니까.......블랙잭이나 할래?"
그가 운전석에서 백미러를 통해 재원에게 말을 건넸다.
" 그러든지!"
그러나 재원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대답을 했다. 슬슬 화가 치민다. 헤라는 열 받고 있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기로.......자기 입으로 취소한다 해놓고........부담주지 않는다고 옆에만 있으라,
해놓고서는.......저 태도라니! 하고 말이다.
" 소심남!!!!!"
화를 삭이지 못하는 헤라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중얼 거렸다. 운전을 하던 윤석과 연주가 흠칫 하는 모양이
보인다.
" 쫌생이!!!!!"
한 번 더!
" 밴댕이 소갈딱지!!!!!"
그리고 세 마디 째!
강도가 높아져 가는 그녀의 비유에 재원이 그녀에게 드디어 시선을 준다. 뒤 좌석에 함께 앉아 헤라에게 거리를
두고 앉아 있는 그였다.
" 나한테 하는 소리냐?"
그가 눈을 내리깔고 있는 대로 목소리를 깔아 내린다.
" 그럼 그쪽 말고 그런 소리 들을 사람이 여기 누가 있나요?"
"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런 말을 들어야 하냐? 것 두 너한테?"
" 몰라서 물어요? "
" 몰라! 그러니까 말해봐. 내가 왜 밴댕이니, 쫌생이니, 소심남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지."
다시 창 밖으로 얼굴을 돌린 재원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헤라는 보지 못했다.
" 나한테 화내고 있잖아. 아침부터 쭉~"
" 화내는 거 아냐. 네가 원하는 대로 하고 있을 뿐 이지."
" 찻~"
재원의 대답에 그녀가 혀를 찼다. 원하는 대로?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예전처럼.......무시하고 깔보라고.......아니 막 대하라고였던가?
아무튼 그런 뜻의 말을 하기는 했었지만 그땐 욱 하는 감정에서 한 소리였었다.
" 아~ 그래요! 무지 고맙네요. 내 소원 들어줘서."
" 고맙긴! 당연 한걸."
헤라가 한껏 비꼬았지만 재원도지지 않는다. 그로부터 차 안은 계속 적막했다. 제주 민속촌에 가서도 분위기를 띄워
보려는 윤석의 노력은 허사였다.
그 곳에서 헤라는 새엄마에게 드리려 영지버섯을 샀다. 요 사이 들어 부쩍 수척해진 새엄마가 마음에 걸렸다.
남편 잘못 만나 이날 까지 마음이나 몸이나 한번도 편해 본적이 없던 새엄마다. 재원과의 냉전으로 헤라의 붕 뜬
기분이 잠시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 촌스럽긴~"
차로 돌아와 보자기에 싸인 영지 두 상자를 보고 재원이 해선 안 될 말을 해버렸다. 가뜩이나 둘의 다른 처지와
배경에 갈등하고 고민하던 그녀다.
그도 모르는 바는 아니면서도 그만 심술이 도를 넘어섰던 것이다.
재원은 아차! 하는 생각에 입을 다물고 헤라의 눈치를 살폈다. 차에 오르려던 그녀의 움직임이 일순 멈칫 했다.
" 헤라야.......나도 샀어. 아빠 드리려고."
조수석에 먼저 앉아 있던 연주가 재빠르게 뒤 돌아 본다. 그리고 분홍 보자기에 싸인 영지 상자를 들어 보였다.
" 잘했어. 이왕이면 새어머니 것도 사지 그랬니?"
헤라가 시큰둥한 말투로 연주의 말에 대꾸를 했다.
" 그러게.......내 꺼를 이것저것 사느라 돈이 모자라서."
연주는 재원과 헤라의 눈치를 보며 다시 앞을 향해 돌아앉았다.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윤석과 연주는 조잘대기도
하고 재원에게 말을 시키기도 했지만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 속은 좀 어떠냐?"
BAR' 마에스트로'의 블랙잭 테이블에 앉아 윤석은 재원의 심기를 떠본다.
" 괜찮아."
" 그래? 그래도 술은 안 되겠지?"
" 음. 내일을 위해선 아무래도 조심하는 편이 낫겠지."
딜러가 와 인사를 하고 손을 들어 보인다. 그리고 워싱을 시작 했다.
" 그런 것 까지 생각하는 놈이, 헤라 씨한테 왜 그래? 갑자기?"
미모의 딜러에게 눈길을 주며 윤석은 웨이터가 내미는 조니 워커 블루가 담긴 잔을 받아 들였다.
" ........"
그 미모의 딜러가 워싱을 하고 커팅을 해, 사플을 마치고 카드를 슈(카드 6벌을 넣는 상자)에 넣기 까지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7시를 조금 넘기고 있는 시간, 룰렛 테이블도 바카라 테이블도 손님이 가득 차 있었다.
연주와 헤라가 화장실을 다녀와 두 남자에게로 돌아 왔다.
" 헤라 씨도 할래요? 할줄 알죠?"
윤석이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 재원의 뒤에 서있는 헤라에게 물었다. 그는 검지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며 시작된
게임에 Hit(카드를 받겠다는 의사표시)을 한다.
" 아뇨. 전 그냥 구경 할래요."
컴퓨터 블랙잭이라면 심심풀이로 몇 번 해본 적 있지만 한번도 카지노에 가본 경험이 없는 헤라는 거절했다.
칩스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약지를 지나 새끼까지 손등 위로 이동시키는 재원의 익숙한 손놀림에 한층 더
그와의 거리감을 느꼈다.
딜러의 카드가 다이아몬드 2였고, 재원의 카드는 스페이드 2와 10, 그리고 윤석은 다이아몬드8과 클로버8을 받았다.
딜러의 두 번째 카드는 하트 10. 블랙잭은 물 건너갔고, 버스트가 되지 않는 한, 수가 제일 높은 사람이 이기게 된
게임 이었다.
윤석은 버스트가 될 공산이 컸으므로 서랜더(게임 포기)를, 재원은 Hit을 한다.
재원의 석장 카드는 2,10,9 = 21을 만들었고. 딜러는 확률대로 2.10.10 으로 버스트가 됐다. 그가 이겼다.
'마에스트로' 카지노가 아니었으므로 칩스는 있었지만 나중에 현금 교환이 아닌, 상품 교환 이라 했다.
" 여어! 여기서 또 보네."
딜러로부터 1.0배의 pay를 받고 다시 게임이 시작 될 때, 윤석과 재원의 등에 손을 얹는 남자가
있었으니.......불청객 석훈이 나타난 것 이었다.
그가 재원의 옆으로 앉는다. 술을 주문하고 술 값 만큼의 칩스가 제공 됐다. 석훈의 눈은 이 밤도 음침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딜러가 카드를 돌린다. 재원, 윤석, 석훈 세 사람 모두 게임에 열중 하지 않고 있었다. 습관처럼 Hit 이나 Stay를
손으로만 표시하며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들 있었다.
헤라는 다시 마주친 석훈 때문에 자리가 몹시 불편하다. 안 그래도 재원과 의 냉전 상태에 감정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그녀에게 석훈의 등장은 속이 뒤집힐 정도로 짜증이 나고 있었다.
" 딜러하고만 하는 게임이라 시시하군. 어때? 같은 생각 아닌가?"
석훈이 술잔을 들어 윤석에게 건배를 해보이며 긴 침묵을 깼다.
" 자극 적인 걸 즐기시는 군요. 석훈 형님."
윤석이 대꾸 한다. 재원은 술도 마시지 않고 말도 없었다. 석훈의 칩스는 애초 받은 30만원 보다 많이 늘어나
있었다.
" 칩스 30개에서 다시 출발하지. 그래서 한 슈가 다 끝날 때 까지 누가 더 칩스를 많이 남기는지 우리끼리 내기를
거는 거야.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으스스한 웃음, 으스스한 내기 제안 이었다.
" 하시죠. 어차피 나도 시시해지고 있던 참인데."
쭉~ 말이 없던 재원이 석훈의 내기에 망설임 없이 응하고, 윤석은 그런 재원 때문에 마지못해 그 게임에
끼어들었다.
게임을 하던 석훈은 틈틈이 헤라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재원은 한번도 뒤에 있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윤석이 헤라를 향해 음흉한 눈빛을 쏘아대는 석훈을
가끔 경멸 찬 눈초리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재원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석훈이 일부러 '고 석준 건' 때문에 자신의 동정을 살피러 제주도 까지 따라 온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봤지만.
그런 목적이라 하기엔 그는 지나치게 헤라에게 추파를 던져 댔다.
" 내 칩스는 24개가 남았군. 이제 거의 한 슈가 다 끝나 가는 것 같은데. 안 그래요?"
석훈이 딜러에게 묻는다.
재원은 그런 석훈을 힐끔거리며 다시 생각을 이었다.
수영장에서부터 돌이켜 본다. 석훈이나 헤라나 서로를 대하는 시선이 왠지 두 번째 만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또 함께 있을 때면, 강도 높은 긴장감이나 묘한 경계심 같은 것을 서로에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지금도 석훈이 모습을 나타내자 헤라는 자리를 옮겨 버렸고, 석훈은 계속해서 그런 그녀에게 미소 날리고 있지
않은가!
뭘까? 둘 사이에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괜한 질투 인가? 석훈이 그녀에게 직접 대니까.......갈 곳 없는 질투가
이런 의심을 만들어 내는 건가?
재원이 그런 생각으로 게임에 집중 하지 못하는 사이, 세 사람 모두 하우스에 지고 있었다.
만 원짜리 칩스를 열 개씩 쌓아 놓은 재원에게 남은 칩스는 15개. 윤석은 20개. 석훈이 제일 많은 25개를 남겨
두고 있었다.
" 내가 이기면 뭘 해줄래?"
역시 앞서 가는 건 내기를 시작한 석훈 이다. 그렇기에 그는 내기의 상품에 대해 묻는다.
" 오늘 술 값 모두, 제가 계산 하지요. 석훈 형님."
윤석이 얼른 대답을 한다. 그와 재원이 부딪히는 일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석훈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 윤석이 넌 빠져. 난 지금 재원이한테 묻는 거야."
윤석의 빤한 의도에 그가 아예 직접적으로 나서버렸다.
" 뭘 원해요?"
저기압이던 재원은 석훈의 직접적인 도발에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단도직입 적으로 물었다.
" 알텐데......"
석훈이 연주와 함께 뒤 쪽의 낮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헤라를 턱짓으로 가리킨다.
" 저 여자! 두 번이나 맞았는데.......보답할 기회가 영 없었던 말이야."
그리고 그의 소름끼치는 목소리에 재원의 얼굴에선 핏기가 가셨다. 윤석도 몸이 굳기는 마찬가지!
" 오늘 밤 내 방으로 보내줘. 다른 건 필요 없으니까."
카드가 윤석을 시작으로 한 장 씩 돌아가다 슈가 빈다.(6벌의 카드가 모두 끝났다는 뜻임)
딜러가 카드를 다시 워싱을 하고 커팅( 카드를 고루 섞는 작업)을 한다. 다시 샤플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딜러는 세장을 더 받고, 손님들은 각각 두 장 씩만 더 받는다면 석훈이 제안한 게임은 끝이 나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승리가 눈에 보이는 게임에서 석훈은 재원에게 무리한 주문을 한 것이다.
" 내 여자라고 말 했을 텐데요. 그새 잊으셨습니까?"
재원이 칩스로 테이블을 두들기며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 내 여자란 말은 애매모호한 의미잖아? 결혼 할 여자라면 약혼녀라든가 그렇게 표현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알기론.......저 여잔 그런 상대 까지 되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틀린가?"
딜러의 첫 번째 카드는 하트 에이스였다. 그러나 세 사람 중 그 누구도 에이스를 받은 사람은 없었으므로 만약
그녀의 다음 카드가 J,Q,K 중 하나라면 게임의 승리는 석훈이 되는 것이다.
" 결혼 할 여자는 아니래도, 현재 함부로 굴리고 싶은 여자는 아닙니다. 송 이사님."
재원이 딜러의 손에 시선을 고정 시키고 말했다. 그 순간 그의 등 쪽에는 헤라가 다가와 서 있었지만 세 남자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석훈의 카드는 8 과 8 이었으므로 버스트가 될 확률이 높아 서랜더를 하고 싶었지만, 딜러가 에이스를 쥐고
있었으므로 불가능 했다.
재원의 카드는 7과 10 이었다. 4 이상의 하이 카드가 나온다면 그도 버스트다. 그러므로 제일 유리한건 윤석 이었다.
5와 9를 가지고 있는 그가 딜러를 이길 수 있는 확률이 크다.
그러나 이번 게임은 석훈과 재원의 승부였으므로 윤석이 딜러를 이기는 건 별 의미가 없었다.
세 남자 모두 자신이 갖고 있는 칩스를 다 걸고 시작한 판 이다.
" 그런가?"
석훈이 되묻는다. 조금 전, 재원의 대답........! 그건 석훈이 오늘 원하는 바로 그 말 이었다.
" 결혼은 생각이 없지만.......지금은 나한테 넘기기는 싫은 여자라! 뭐 대충 그런 얘기가 되는 거로군."
그렇기에 그는 제 멋대로 말을 풀이하고 단정 짓는다. 그를 걸려들게 하기 위해!
" ....... "
" 그럼 정 본부장하고 끝나면 내가 데리고 가도 되는 여자란 말이지?"
재원이 딜러의 손에 주던 시선을 돌려 석훈과 마주 했다. 눈가엔 웃음을 가장 하고 있었지만 눈동자엔 냉기가 돌고
있었다.
" .......끝나면."
재원이 끝나면.......이란 말에 힘을 주어 석훈의 말을 받는다. 그는 헤라가 결혼을 거부해도 그녀와 끝을 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 있게 끝나면 이란 말에 힘을 준 것이다.
허나 그 등 뒤에서 재원과 석훈의 대화를 듣고 있던 헤라의 입장에선 다른 뜻으로 해석이 되는 말 이었다. 그녀도
석훈과 똑같은 뜻으로 그의 말을 곡해 하고 있었다.
딜러의 두 번째 카드는 다행히 블랙잭이 아닌 10. 그녀가 세 번째 카드로 10 이나 J,Q,K를 받는 다면 21 이 된다.
석훈은 세 번째 카드를 받기 전에 인슈런스를 했다.( 건 금액의 반만큼만 지급받고 혹은 주는 것)그의 카드는 8.8.3
합이 19.
" 내가 지면 오늘 이 자리에서 이만 사라져 주지."
석훈이 자신의 카드를 받고 재원을 향해 만족한 미소를 보냈다.
재원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Hit을 한다. 그의 세 번째 카드는 정확히 4. 21 이 됐다. 딜러가 19이상만
만든다면 인슈런스를 한 석훈 보다 재원의 칩스가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윤석의 카드는 5.9.6 으로 20 되었다.
딜러의 마지막 카드!.........그녀의 세 번째 카드는 9였다. 에이스와 10 그리고 9를 가진 딜러의 카드는 합이 20이
된 것이다.
최종 Win은 21인 재원. 그의 칩스는 30개가 되었고, Lose인 석훈은 인슈런스를 했어도 칩스의 반을 내줘야 하므로
그의 칩스는 12개였다.
윤석은 Push (동점) 이므로 20개의 칩스를 확보 했다.
" 끝났군요."
윤석이 제일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다 재원의 등 뒤 에 서 있는 표정이 돌처럼 굳어 버린 헤라와 마주
쳤다.
" 이런 말이 씨가 된 다구 내가졌네........ 고로, 진 헤 라 얘기는 없던 게 되는 거로군. 적어도 오늘은 말이야."
블랙잭 테이블의 높이에 맞추어 높이가 높은 의자에 등을 기댄 석훈이 술을 한 모금 입에 문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칩스를 만지작거리는 재원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했다.
" 대답 할 겁니까?"
수 초 후 그가 석훈에게 묻는다.
" 뭘?"
" 헤라를 넘보는 이유. 아무래도 두 번의 손 지검 말고도 뭔가 다른 이유 때문에 집착을 하는 것 같은데........ 혹시
내 생각이 오버 인가요?"
재원이 달그락거리던 칩스 30개를 탑처럼 쌓는다.
" 훗~ 물론 이유야 있지. 하지만 아직 말해 줄 때는 아니야. 다음에 언제 또 내기를 하게 되서 정 본부장이 이기면
그때 얘기해 주지."
석훈은 재원의 질문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질문에 답은 하지 않고 빠져 나갔다.
" 그나저나 진 헤라 하고 결혼 같은 건 안한 다고 했지? 그럼 역시 놀다가 때려치운 다는 말인데.......얌전히 데리고
놀아. 만만치 않은 여자라 아직 손도 못 댄 것 같던데. 이왕이면 너무 흠집 내지 말라 그 말이지. 그래야 내가
나중에 재미있잖아."
석훈은 헤라를 그렇고 그런 여자로 말했다. 재원이 탑을 쌓아 놓았던 칩스를 와르르 무너 트린다.
" 송 이사님은 내가 가지고 놀다 버린 여자 주워 담는 게 취미이십니까?"
그의 말엔 가시가 한 길은 돋아 있었다. 그리고 석훈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더불어 헤라의 얼굴은 돌처럼
굳은 것도 모자라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져 버린다.
더 이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 하에 윤석이 헤라의 팔을 잡아끌고 '마에스트로'의
입구를 향해 걸었다.
" 주워 담는 게 아니라.......빼앗는 거야. 예전 에도 이번에도 말이야. 명심해! 정 재 원! "
석훈의 눈에 증오가 흐르고 재원은 원인모를 그 증오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 헤라 씨. 지금 말은 모두 못 들은 걸고 해요. 송 이사가 재원이 성격을 알고 긁어서 그런 말들이 나온
거니까........잊어요. 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하의 '마에스트로'를 나와 분수대와 정원이 있는 호텔의 뒤 뜨락엔 사나운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 정 재 원 이란 남자!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장난 인지 모르겠어요. 결혼 같은 건 나도 원하지 않고
그렇다고 말 해놓기는 했지만요......... 날 무슨! 발정 난 암케 취급 하네요.......한 남자랑 끝나면 다른 남자가
가져라 뭐 그런........."
분명 재원이 말한 의도와는 다르지만 그녀의 입장에선 그렇게 해석이 가능한 말 이기는 했다. 그래서 너무도 단순한
헤라는 그렇게 상처를 받았다.
" 오해에요. 오해야 헤라 씨."
윤석은 그런 그녀에게 오해라는 말을 해보지만 그다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말 이었다.
몰아치는 비바람에 헤라의 머리가 귀신 같이 날린다. 윤석과 헤라는 정원으로 나가는 로비에 서 있었지만
들이닥치는 빗줄기에 몸의 반은 젖어 있었다.
" RRR......RRR"
휴대폰이 비바람소리를 뚫고 힘차게 울려 댔다. 윤석이 자신의 휴대폰이 울리는 것인지 확인을 하고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헤라는 2층의 방으로 돌아 와 버렸다.
연주도 돌아오지 않은 방 안에서 그녀는 불도 켜지 않고 멍 하게 앉아 있다.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바다엔 어제
보다 조금 거칠어진 파도가 일고........하늘은 시커먼 것이 바다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 바다처럼 송 이사의 속을 그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를 써치 펌 이상으로 대하고
있었고, 노골적인 흑심을 숨기지도 않았다.
이곳에 온 목적도 재원의 동정을 살피기보다는 왠지 자신을 따라 온 것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재원을 자극하기위해 그가 일부러 더 흑심을 드러내는 수도 있었지만 왜 그래야 할까? 그리고 재원은 꼭 그렇게
반응을 했어야만 했던 걸까?
헤라는 베란다를 향한 소파에 앉아 정리되지 않는 생각에 깊이 빠져 들고 있었다.
" 여기 있었어? 찾았잖아. 방으로 돌아 올 거면 말을 하고 가야지!"
어두컴컴하게 앉아있던 그녀의 옆으로 재원이 들어와 있었다. 그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스탠드를 킨다.
" 진 헤라! 입이 붙었어? 말 좀 해봐."
그녀 옆으로 앉으며 그가 조금은 화가 난 투로 말했다. 그러나 헤라는 탁자 위에 있던 타월을 들어 젖은 머리를
털기 시작한다.
" 지금은 나도 너랑 얘기하기 싫어. 근데.......내가 지금 서울로 먼저 돌아가야 되거든. 그러니까 말하기 싫어도
인사정도는 하고 헤어지자."
그가 소파의 팔걸이에 오른 팔을 올리고 머리를 받힌다.
" 발정 난 암케 하고 무슨 인사까지 하나요? 바쁘신 분이 개하고 인사를 나누려고 찾아 다니셨어요?"
'탁탁탁'신경질 적으로 머리를 털며 헤라가 있는 대로 말을 꼰다.
" 하~ 암케 라니 건 또 무슨 소리야? "
재원의 언성이 높아져 버렸다. 석훈으로 인해 신경이 긁힐 대로 긁힌 그는 시위를 당긴 손을 살짝만 건드려도
날아가는 새를 떨어트릴 화살과 같았다.
" 그런 취급 한 사람이 모르면 누가 알까?! 웃겨."
하지만 자신도 주체 하지 못할 정도로 심사가 뒤틀어진 그녀에게 재원의 그런 사정이 눈에 들어 올 리가 없다.
그녀가 소파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한다. 그러자 곧 바로 화를 누르기 위해 숨을 고르던 재원이 거친 동작으로
소파를 박차고 일어섰다
" 누가 암케고, 누가 그런 취급을 했는데?"
하지만 목소리만은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야 할 그녀와 이런 식으로 헤어지는 것이 정말이지 너무도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오늘
하루 내내 그녀에게 퉁퉁거리던 속 좁은 스스로가 한심할 지경 이었다.
" 당신네! 돈 많고 권력 튼튼한 족속들이요."
열던 욕실 문 앞에 선 헤라가 이를 악물고 말을 뱉었다. 재원이 그녀의 팔을 억세게 잡아 당겨 몸을 돌린다.
" 무슨 소리야? 혼자 오해하고. 혼자 이상한 쪽으로 몰아가지 말고, 똑바로 얘기해."
" 관둬요. 우리 사이에 오해 랄 것이 있나요! 데리고 노는 여자가 오해를 하던, 당신 말로 죽을 쑤어 먹던 대수
인가요?"
헤라의 말에 재원이 눈을 감는다. 그랬다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비스듬히 해 미간을 찌푸린다.
" 송 이사 하고 하는 얘기 들었어? 그랬던 거야?"
베란다 유리문에 가는 나뭇가지 하나가 날아와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이어 대리석 바닥을 치는 빗소리가 볼륨을
더해 간다.
차갑게 내리 꽂히는 빗소리가 두 사람의 갈등을 고조 시켰다.
" 못 들었다면 큰 일 이었겠죠. 바보같이.......어제 일로 당신이 상처 받은 줄 알고, 내가 멍청한 짓을 했을 테니까."
헤라는 재원에게 잡힌 팔을 빼내며 다시 욕실 문을 향해 돌아 섰다.
" 상처? 누가 그딴 걸 받는데? 착각 하지 마!"
신랄하기 그지없는 헤라의 말에 이윽고 재원의 팽팽하게 당겨졌던 시위는 활을 날린다.
" 그리고 너야 말로 송 석 훈이랑 무슨 사이 아냐? 내가 알기론 너랑 그 작자랑, 내가 데려간 모임에서 딱 한번
만난 적 밖에 없는 걸로 아는데. 그 인간이 네 이름은 아는 것 하며, 너나 그 인간이나 이렇게 마주 치는 것이
서로한테 너무 익숙해 보이는 게 꼭 자주 만나는 사이 같았다구. 알아? 내가 그런 것도 눈치 못 채고 있는 줄
알았다면 오산 이지! 안 그래?"
낮게 그리고 빠르게 그가 할말을 했다.
헤라는 그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화가 났지만 너무 방심하고 있었던 자신의 탓도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이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궁지에 몰린 것은 그녀가 되었다.
" 처음부터 다 들은 거지? 그럼 송 석훈이 룸 번호 알려줘? 올라갈래? 너도 내심 바라고 있던 일 아냐?"
궁지에 몰린 그녀를 재원은 더더욱 몰아친다. 억지소리까지 보태가면서 말이다. 헤라가 목만 뒤로 돌려 재원을 째려
봤다.
" 그래! 알려줘. 약혼녀 있는 너 보다는 그쪽이 훨씬 가능성 있어 보이니까. 그 사람한테 암케 노릇 하게 알려
줘봐."
고양이 앞의 쥐가 되어버린 그녀가 소리 쳤다. 쥐가 되어 버린 것에 화가 났다. 아니 암케 인가?
헤라와 불꽃이 튀기는 시선을 주고받은 그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고 방을 가로지른다.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아 버리고, 화려한 무늬의 카펫이 깔린 낮은 계단을 올랐다.
3008호. 어제 재원과 헤라가 쓰던 방에서 반대 편 방향으로 두 번째 있는 방.
재원이 초인종을 신경질 적으로 아주 여러 번 누른 다음에야, 목욕 가운에 머리에 물기가 흐르는 석훈이 문을
열었다.
" 자! 들어가."
재원이 헤라의 등을 세차게 떠밀어 그녀를 석훈의 방으로 집어넣는다. 그의 심장이 태풍에 일렁이는 제주의
바다보다 더 울렁이고 있었다. 석훈은 양 눈썹에 힘을 주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재원은 방문을 닫고 성큼성큼 발길을 돌린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 야! 어디야? 빨리 내려와. 비행기 시간 다 됐단 말이야."
윤석이다. 내일 아침 서울로 가는 항공편이 모두 취소가 됐다. 오늘 새벽에 제주로 들이닥치는 태풍으로 인해서
이다. 그렇기에 간신히 좌석 하나를 확보한 9시 마지막 비행기를 놓치지 말아야 했다.
그는 대답 없이 전화를 뚝 끊어 버리고 계단을 황급히 내려간다. 머리와 가슴은 석훈의 방으로 들어간 헤라에게
향해 있었지만 그의 몸은 윤석이 기다리는 로비로 향했다.
" 재밌네. 둘이 개그 하는 거야?"
석훈이 스위트룸의 거실에 멀뚱히 서 있는 헤라에게 담배를 권한다. 헤라는 무의식적으로 받아 들었다.
" 싸웠어? "
그가 가죽으로 쌓인 라이터로 그녀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헤라는 대학에 입학 하면서 끊어 버린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 들였다.
어지럽다. 오랜만에 몸으로 들어온 니코틴에 정신마저 가물거린다.
" 흥! 뭘 로? 나 때문 인가?"
석훈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그러나 연기는 위로 오르지 않고 그의 머리위에서 흩어 졌다.
새하얀 가죽 소파에 그가 몸을 앉힌다.
" 당신 의도가 정확히 뭐예요? 송 이사님."
헤라는 다시 한번 담배를 빨고 날아가는 연기에 시선을 줬다. 최대한 냉랭한 목소리로 그에게 따진다.
" 글쎄 뭘까?"
" 뭔지는 모르지만 절 희생양 삼지는 마세요. 당신네가 그러지 않아도 난 지금 충분히 불쌍한 여자거든요."
약 올리려는 그의 의도를 안다. 하지만 할말은 해야 했다.
" 하긴 조사해보니 당신 처지가 그렇긴 하더군! 그러니까 내가 한 제안을 수락 하면 그 불쌍한 신세를 어느 정도는
면하지 않을까 하는데. 왜 시간을 끌지? "
조사.......역시나! 그랬군. 그러나 지금 그런 것 따위를 문제 삼고 싶지 않았다.
" 아신다니.......너저분한 얘기 할 것 없이 말이 되겠네요. 당신 말대로 경제적으로 힘들지만 산업 스파이 노릇은
지금 이 자리에서 거절 하죠. 뭐...... 고 석 준 씨와는 아직 얘기를 끝내지 않았지만, 다른 써치 펌을 통해 얘기를
마무리 시키고 싶으시다면 그러시구요."
지금 해야 할 일은........그와의 거래를 완전히 무산 시키고 재원에게 어디로 보나 떳떳한 상태로 끝나도 끝나는 것!
그녀에게 현재 제 1순위의 목표는 그 것이었다.
" 호오! 당신 재정 상태가 말이 아닌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디 숨겨 놓은 돈이라도 있나 보지? "
물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석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 어느 모로 보나 정당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돈이 급해도 남에게 피해 주면서까지 챙기고 싶지는 않아요."
타들어 가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헤라는 자신의 앞에 바짝 다가선 석훈을 향해 고개를 올렸다.
" 그렇다면 더 파격적인 제안을 하나 할까!"
헤라의 턱을 잡고 석훈은 위험한 숨소리를 내뿜었다. 그 숨소리가 어찌타 탁한지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고
있었다.
" 오늘 밤 나하고 섹스 해! 그럼 큰 것 한 장 주지!"
그의 의도는 재원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었다. 내 여자라고 두 번이나 힘주어 말하던 여자를 홧김에 승냥이의
방으로 밀어 넣은 그가 뼈저리도록 후회 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그의 손에서 턱을 빼내며 헤라는 비실비실 뒤로 물러섰다.
공항으로 향하는 호텔 리무진은 빗길 이지만 속력을 내고 있었다. 8시 35분을 지나는 시각이 급했기 때문이다.
재원은 차에 타서부터 엄지손가락으로 차문 손잡이를 빠르게 두들기고 두들겨 대고 있다.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다혈질에 성질 더러운 그였지만 돌이키지 못 할 행동을 해버린 적은 없었다. 소리치고 물건을 부수는 것 정도는
해봤지만. 이번처럼 어리석은 짓을 한 적이 단연코 없었던 그였다.
그는 이런 자신의 낯선 모습이 몹시 당황스럽다. 헤라를 만나고부터 그는 처음 가져보는 감정과 처음 해보는 행동들
투성인 자신을 받아들이려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잘 되어가고 있다 생각 했었지만.......오늘 아침부턴 모든 게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얽혀 들고
있었다. 스스로가 비참해지고 자존심 이란 걸 의식 하면서부터였다.
더구나 석훈과 그녀와의 묘한 감정의 흐름을 감지하면서부터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앞뒤 분간을 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고 만 것이다.
뒷좌석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재원은 황급히 바지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낸다.
윤석의 단축 번호를 눌렀다.
" 나. 부탁 좀 하자."
" 마침 전화 잘 했다. 야! 헤라 씨 어디 있냐? 아무리 찾아도 없어!"
전화를 받은 그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아마 이 폭우 속에서 연주와 같이 그녀의 행방을 찾고 있었던가 보다.
" 헤라....... 지금 송 이사 방에 있거든. 가서 데리고 나와라."
재원이 서두 없이 말을 꺼냈다.
" 뭐? 왜?....... 왜 거기 가 있는데?"
윤석의 목소리가 커졌다.
" 아무튼 거기 있어. 얼른 가서 데리고 나와. 송 이사 그 자식........ 너도 알잖아."
".........."
재원의 말에 윤석은 잠시 말이 없었다.
" 올라 간지 한 10분 됐거든. 그러니까"
" 대답먼저 해라. 헤라 씨가 이 밤중에 어째서 송 석 훈 방에 가 있는 건지 물었잖아!"
그러다 그는 재원의 말을 끊고 대답을 다그쳤다. 하지만 재원은 할 말이 없다.
" 너.......설마! 야! 이 미친 새끼. 너 제정신이야?"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른 윤석이 전화를 먼저 끊어 버린다.
그의 망설임에 눈치 빠른 윤석은 단번에 상황을 알아챈 것이다. 20년을 알고 온 친구를 너무도 잘 아는 그였다.
재원은 폴더를 접지도 않은 휴대폰을 손에 쥔 채로 창 밖으로 눈을 준다.
그래! 나 제 정신 아냐 임마! 질투 때문에 꼭지가 돌아 버렸어!!!
.
34.
" 집 내놨지?"
작은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구들은 심각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헤림은 새엄마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 집 팔아서 헤라 돈 갚고, 우린 전세로 옮기자."
하지만 딸들이 대답을 하건 말건 새엄마는 당신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 새엄마.......헤라 돈 나중에 천천히 갚으면 돼요. 그렇게 급할 것 없잖아요."
헤미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새엄마가 천천히 눈을 들어 작은 딸 헤미의 눈을 마주 한다.
" 그리고 너희들.......헤라한테 결혼해라 어쩌라 그런 말 다시는 꺼내지 마. 지금 그 남자하고.......헤라가 어떤
선까지 발전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미는 안쓰러울 뿐이야. 막내는 결혼 같은 거 못한다. 아마도 말이야."
그 목소리는 단언을 하고 있었다. 부모로 인해 상처 입은 막내딸을 생각하면 새엄마는 가슴이 항상 그렇듯 가슴이
미어진다.
" 새엄마가 못 봐서 그래. 그 남자하고는 달랐다니까! 다정했다고, 러브러브 모드였단 말예요."
헤미가 다시 한번 반박하고 나섰다.
" 그러니까........더 그 남자하고는 못 만나게 해야 한단 말 아니냐. 난 우리 막내가 지 스스로한테 칼 자국내는
거.......보고 싶지 않아. 부모한테 받은 걸로 충분해."
다른 얘기는 듣기 싫다는 듯 새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느 때와는 다르게 엄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당부를 한다.
" 집.......어서 빨리 부동산에 내놔! 막내한테는 중요한 돈이다. 이미 결혼한 헤림이 너나, 앞으로 결혼할 헤미
너하고 헤라는 달라.......그 애가 결혼이란 걸 하긴 힘들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말자. 우리.
형부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아는 얘기........그러나 누구도 지난 11년 동안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얘기.......새엄마와
아빠와 헤라의 상처.......그리고 언니들은 상상으로만 그 상처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던.......그 일!
그래서 그녀들은 새엄마처럼 헤라의 남자 기피증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었다.
" 내일 아빠 병원 갈 건데.......같이 갈래?"
방으로 들어가는 새엄마에게 눈을 주던 헤림이 헤미에게 물었다.
" 아니! 이번 주 토요일에 헤라 하고 셋이서 가는 게 낫지 않겠어? 계집애 벌써 석 달째 면회 한번도 안 갔잖아.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겠어. 아빠가 많이 보고 싶어하시더구만! 물론 정신 있으실 때뿐 이지만 말이야."
헤림도 헤미와 비슷한 생각이긴 했지만.......헤라에게 원하지 않는 일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그녀가 아빠를 원망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
원망하고 싶지 않아도.......헤라에겐 대상이 필요할 테니까.......그리고 가장으로써의 책임이 필요한 절대적 순간에
역할을 하지 못한 아빠를 헤림도 아주 가끔은 원망을 했었으니까.......어느 정도 헤라를 이해 할 수는 있는 큰 언니
헤림 이였다.
새엄마가 언제나 헤라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당신이 상처보다 그로인해 막내가 받은 상처를 더 아프게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신.......내일 아침에 부동산가서 집 내놔요. 가격은 중개사 하고 잘 상의해 보고."
딸 지민과 장난감을 갖고 놀던 남편에게 헤림은 작은 한숨을 짓는다. 어째 저리 천한 태평인지.......알콜 중독에
치매까지 겹친 아빠와 다를 바가 없었다.
거세어 지는 비바람이 베란다 창문을 덜컹거리게 하고 있다. 석훈의 손으로부터 멀어진 헤라는 비뚤어진 웃음을
입에 물고 그를 향해 비뚤어진 시선을 보낸다.
" 큰 거 한 장이요?"
거의 필터까지 혼자서 타들어간 담배를 마지막 한 모금 빨았다.
" 왜.......적어? 그 정도는 벌써 재원이한테 받았나?"
그가 그녀의 자존심을 밑바닥까지 긁는다. 헤라는 석훈이 아무래도 사람성질 긁는데 타고난 꾼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 받았든 말든 그것 또한 송 이사님 하고는 관계가 없는 일이지요."
" 당신은 관계가 없겠지만 나는 아닌데."
석훈이 거실의 TV 맞은편에 있는 미니 BAR로 가 와인 한 병을 딴다. 병째로 입에 가져간 그는 꿀꺽 꿀꺽 물을
마시는 것처럼 들여 마셨다.
목을 약간만 젖히고 와인을 단숨에 마시는 그의 모습에서 그녀는 재원이 떠올랐다. 냉장고 앞에 서서 생수 병째로
들고 물을 마시던 재원과 어찌 그리 비슷한지.......이상한 기분이 됐다.
" 재원이가 들여보낸 거잖아. 그럼 당신하고 그 녀석이 끝났다는 말인데.......녀석이 준 것 보다는 더 주고 싶어서
그거는 거지!"
" 푸~ 돈이 차고 넘치니 쓸데없는 곳에 쓰고 싶어 하시는 군요. 하지만 어쩌지요? 전 어떤 남자한테도 몸을 준
적이 없어서 돈 에도 그다지 몸을 내어주고 싶은 유혹이 안 생기는데요."
낮은 탁자로 다가가 석훈이 비벼 끈 재떨이에 담배를 던진 헤라는 문으로 향했다. 룸의 문손잡이에 손을 대는 순간
어느새 뒤로 온 석훈이 그녀를 몰아 부친다.
" 녀석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알게 해줘야겠다는 생각 안 들어? 나한테 당신을 밀어 넣은 일을 후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의 팔 사이에서 몸을 움츠린 헤라는 당당하게 석훈의 눈을 마주봤다.
" 그런 일을 그 사람이 후회 한대요? 아닐 걸요. 두 사람 다. 날 발정 난 암케 취급하는데 새삼 후회라니! 단어
선택을 잘못 하셨네요."
긴장으로 떨려오는 손을 뒤로 해 손잡이를 돌렸다. 하지만 안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는 문은 석훈의 팔이 누르는
힘으로 열리지 않았다.
" 암케라........그럼 나도 개가 되는 거로군.......그럼 더 이상 당신과 의사를 타진하지 않아도.......되는 거고."
그의 말이 점점 느려지고 입술이 헤라를 향해 다가 왔다. 병째 마신 와인 냄새가 그녀의 코로 달라 들고 뜨거운
입술이 목을 더듬었다.
헤라는 갖은 힘을 다해 석훈의 가슴을 밀쳐 냈지만 욕망에 사로잡힌 남자의 몸은 단단한 빗장을 건 견고한 대문과
같았다.
정 재원! 죽여 버릴 거야! 날.......날.......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 되지 않는 석훈의 몸을 계속해서 밀어내며 헤라는 재원을 원망했다. 사랑한다고
해놓고.......아무리 화가 나도 아무리........내가 미워도 날 다른 남자에게 밀어 넣다니.......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손이 헤라가 입고 있던 남방셔츠의 단추를 풀지 않고 뜯어내기 시작했다. '투두둑'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방
전체에 울리는 것만 같다. 입술을 탐하는 석훈의 입술을 피하며 그녀의 손톱이 그의 등을 파고들었다.
물론 그가 낮은 비명을 지르긴 했지만 그의 폭주를 멈추게 하기엔 미약했는가 보다. 범하듯 다루어지는 자신에게
혐오감이 드는 헤라는 이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남자가 털끝 하나만 건드려도 주먹을 날리던 그녀는 남자의 완력과 욕망이 이렇게까지 무서운 것인 줄 재차
깨닫게 됐다.
남방의 단추가 다 뜯기어 나가고 속옷이 드러나자 석훈은 헤라의 몸을 자신의 가슴으로 누르고 손으로는
브래지어를 파고들었다. 서서히 공포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 송 석 훈.......당신 죽여 버릴 거야. 정 재 원도, 너도.......다 죽여 버릴 거야."
그리고 공포에 의식이 젖어버린 헤라는 악에 바쳐 소리를 질러 댔다. 그리고 자신의 입가쯤에 위치한 그의 어깨를
물어 버렸다.
이번엔 적절타 였는지 그가 본능적으로 몸을 떼어 냈다. 작은 비명이 있었고, 헤라의 뺨을 갈기는 소리가 후끈하고
습한 공기를 갈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벨 소리........집요하게 울렸다.
헤라가 곧 팔을 뒤로 돌려 문의 손잡이를 돌리자, 뒤에서 문을 밀고 들어온 사람 윤석 이었다.
" 헤라 씨!!!!!"
벌써부터 벌렁거리기 시작한 심장이 강력한 힘으로 피를 품어내자, 입안이 마르기 시작했다. 눈이 타는 듯이
뜨거워지고.......목의 근육이 수축되는 느낌이 든다.
이어 바로 숨이 막힌다. 뜯어져버린 단추를 여미지도 못하고 그녀는 숨을 쉬려 노력 하고 있었다. 후두 뒤쪽으로
기도 근육이 수축 되면서 호흡에 장애가 왔다.
협박적 사태에 대한 처리를 할 수 없어진 헤라는 어느 시절엔가 형성된, 공포의 조건 반응에 대해 무의식 적으로
극심한 자극을 받았고........그 자극이 공포가 되어 그녀의 육체를 집어 삼키고 있었다.
" 헤라 씨! 숨 쉬어요. 숨이요.......헤라 씨!"
여자를 강제로 범 하려한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진 석훈은 꺽꺽거리며 숨을 쉬지 못하는 헤라의 모습에 붉어졌던
얼굴이 파랗게 질려 버렸다.
" 에이 씨발! 119에 전화해!!!. 보고만 있을 거야?"
다급해진 윤석이 헤라를 안고 소리를 질러댄다. 그제 서야 이성이 돌아온 석훈은 더듬더듬 전화기를 찾아 119에
신고를 했다.
그리고 다음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호텔 프론트로도 인터폰을 해 상황을 설명한다.
3분쯤.......세 사람 모두에게는 억겁처럼 느껴졌을 그 짧은 시간 안에 먼저 구원을 손을 뻗은 것은 호텔 측의
구급요원.
알루미늄 통의 휴대용 호흡기를 그녀의 코와 입에 씌우고 산소를 공급했다. 하지만 수축된 기도는 열리지 않았고
호흡기의 산소는 그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촌각을 다투는 또 다른 1분.......폭우를 뚫고 119구조대가 도착했다. 그들이 기도 확장제를 투여하고 난 다음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을 시켰다.
응급실로 들어간 헤라는 산소 호흡기를 달고 진정제를 주사 받은 후 잠이 들었다. 연주는 헤라의 옆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의사가 윤석을 불러 이것저것 물러보지만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 그래요........일단 병적 징후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주 건강 하신 분인데.......무슨 심리적 발작 증세 같기도
하고........아무튼 오늘 내일 지켜보는 게 좋겠군요."
젊은 의사는 말과는 달리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하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혼수상태로 빠질 만한 상황 이었습니다. 적절하게 대처를 잘 하셔서 그나마 나쁜 상태는
면한거지요."
차트에 기록을 하던 손을 멈춘 의사는 윤석을 향해 조그맣게 웃어보이고는 다른 환자에게로 이동했다. 밤의
응급실은 대체로 한가했다. 태풍이 근접하고 있었지만 사고가 없는 모양 이었다.
병원으로 들어오면서 진동으로 해 놓은 그의 휴대폰이 5분 간격으로 울리고 있다. 윤석은 누구인지 뻔히 아는 그
전화를 받지 않는다.
만약 받았다가는 재원이 저지른 어리석은 실수에 대해 고스란히 쏟아 놓을 테고, 그럼 녀석은 뉴욕 출장을 재껴두고
달려 내려올 것이다.
기분 같아선 전화통에 대고 욕이라도 박박 해주고 싶었지만 그는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윤석은 연주 옆으로 왔다. 그녀는 헤라의 침상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 연주 씨. 일어나봐."
" 어 어? 응. 네."
입가에 흐른 침을 얼른 닦아 내며 그녀가 졸음에서 깨어났다.
" 헤라 씨 집에 전화 좀 해. 내일 못 올라간다고. 우선은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못해서 그렇다고
말하고........생각 좀 해 보자.
" 그거야......헤라가 전화해서 그렇게 말하면 몰라두, 내가 전화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그냥 내일 헤라가
깨서 하면 안 되나?"
졸음에 겨운 눈을 비비면서도 연주는 제법 생각다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생각해 보니 그러네. 그럼 일단 입원실 있나 봐서 옮겨 달라고 해야겠다. 여기 좀 있어봐 연주 씨."
그녀의 대답에 윤석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을 하다 간호사 테이블 쪽으로 발을 돌렸다.
뉴욕 행 11시 비행기에 몸을 실은 재원은 꺼 놓은 휴대폰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직전까지 헤라도 윤석도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설마 하는 불안감이 커지고 그는 점심으로 나온 기내식에 입조차 대지 못하고 있었다.
옆으로 앉아 있던 수연이 안절부절 못하는 그를 유심히 지켜본다.
" 재원 씨. 똥 마린 강아지 같네요. 아님 멀미 하나? 어머님 말씀이 비행기 멀미 심하다 길래 걱정
했는데.......그래요?"
뉴욕 세미나 때문이라며 재원과 鄭 회장 사이에 묻어가는 수연은 재원이 이미 자신이 같이 가는 의도를 눈치 챘을
것이라 생각했다.
" 상관 마요."
그런 그가 이렇게 무뚝뚝하게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퉁명스런 그의 대답에
웃음을 흘린다.
" 어떻게 상관을 안 해요. 정혼 자가 불안에 떨고 있는데."
그리고 정혼 이란 말을 썼다. 재원이 기내식으로 나온 T본 스테이크에서 눈을 들어 수연을 마주 했다.
앞으로 앉은 鄭 회장과 그 비서의 눈치를 살핀다.
" 정혼 자라니? 나도 모르게 내가 수연 씨랑 뭘 했다는 거야?"
앞에 앉은 두 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그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 약혼식은 안했고, 결혼은 하기로 내정 되어 있는 상대니.......정혼 자! 라는 호칭이 맞지 않나요?"
수연은 되물었다. 결혼은 이미 결정 되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인식 시켜주어야 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갑자기, 이 정 재 원 이라는 남자에게 필이 꽂힌 것은 아니지만 돌아보지 않는 남자를 얻어야겠단 어리석은 욕심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져 가는 수연 이었다.
" 난 감각 없는 여자는 질색인데. 웬만하면 그 옷 입는 센스나 좀 공부한 다음 덤비지 그래. 민 수 연."
재원이 어이없는 표정에 적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 보였다.
당연히 수연 자신도 감각이 떨어지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는 외적인 차림새에 의미를 두지 않고
사는 여자다.
그렇기에 재원이 잡은 꼬투리는 그녀에게 별 타격이 되지 않는다.
" 재원 씨가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줄은 알았지만, 흠.......내게 까지 그런 줄은 몰랐네요. 뭐.......지금
데리고 노는 그 여자 정도로 족해야 하지 않아요? 외모에 혹 하는 상대는?"
그리고 그의 허를 찌른다.
" 지금 까지는 새어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신을 만났는데. 이젠 그것도 끝내야 할 때가 된 것 같네. 난 주제파악
못하는 여자는 질색이거든."
당하고만 있을 재원이 아니다. 가뜩이나 헤라의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예민한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서
있는 그였다.
그는 더 이상 수연을 상대하기가 귀찮아져 입에 대지 않던 스테이크로 손을 움직였다.
그로부터 14시간 후, 오전 7시 뉴욕 공항에 내려 할아버지를 모시고 지사를 방문하고 늦은 저녁 호텔로 들어갈
때까지.......그는 헤라도 수연도 머릿속에서 일단은 지우고 일에 몰두 했다.
1년 만에 지사 방문에 그는 수도 없는 인사를 받고 해야 했다. 그러나 막상 지사를 살피러 여행을 온 할아버지 鄭
회장은 뉴욕 지사장의 업무보고에 무반응 하기만 했다.
호텔 로 들어온 재원은 먼저 헤라의 휴대폰과 PDA폰으로 전화를 했지만 전원이 꺼져있다는 안내 멘트만이
반복되고 있었다.
윤석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는다. 재원은 결국엔 그의 회사로 전화를 했다.
" 아! 나 GH 정 재원 인데, 신 실장 나왔어요?"
" 아뇨. 오늘 출근 못하시고.......모레쯤 나오신다고 연락 받았는데요."
나긋나긋한 비서의 목소리가 오히려 재원의 신경을 건들고 있었다. 그는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린다.
재원은 계산을 해본다. 최소한 어제 저녁 비행기로는 서울에 왔어야 했다. 지금 한국 시간은 오전 10시........아침
비행기라도 돌아왔어야 하는데 내일도 아니고 모레라니........제주의 상황을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기에 답답하기만
했다.
" 에이 씨! 이 자식 뭐야!!"
그가 성질에 못 이겨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침대로 던진다. '그리고 퍼걱'하는 소리와 동시에 방의 벨이 울렸다.
문을 한참 노려보고 있던 그는 서너 번인가 벨이 더 울린 다음에야 그 문을 향해 걸었다.
" 뭐야?"
냅다 신경질적으로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재원은 짜증 잔뜩 배인 목소리를 냈다.
" 샤워 하던 중 아니었죠?"
수연이 자연스레 문을 밀치고 들어온다. 손에는 와인병과 글라스 두개가 들려 있었다.
" 한 잔 하려구요."
그녀 딴에는 재원과 분위기를 내보려는 시도였으나 실수 다. 그는 앞으로 적어도 한 달 이상은 금주를 해야 했다.
위경련의 후유증은 약간의 알콜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 센스 없는 건.......외모 뿐 아니구만. 안됐지만 난 금주 중이야. 속이 안 좋거든. 기내에서 식사 하는 거 보고도
몰랐어?"
재원이 그녀에게 매몰차게 등을 돌린다.
그동안 수연에게 이렇다할 적대감 같은 걸 갖지 않았던 그였다. 하지만 그녀가 다가오려는 기세를 보이자 점점 더
오만 정이 달아나는 재원 이었다.
말을 가리지 않는 재원의 태도에 수연은 얼굴이 붉어진다.
" 그래요?....... 그럼......... 혼자 마셔야겠네요."
침실로 들어가는 그의 등에 대고 수연이 드문드문 말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원은 할아버지와의 동행에 차려입은 정장과 목을 조르는 넥타이를 푸는데 정신을 쏟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벗어 아무렇게나 타이와 셔츠를 풀러 던져 놓는다. 발을 누르는 정장 구두와 양말도 벗어 버리고 그가
욕실 문을 연다.
" 샤워.......같이 할래요?"
그때 등 뒤에서 들리는 수연의 얼토당토 안은 소리! 재원은 기가 찼다. 미국에서 여자 혼자 유학 생활 6년
이면.......뭐 순진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예상 하고 있었지만.......이건.......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 민 수 연! 변태야?"
헤라를 처음 만난 날 재원도 호텔에서 그녀에게 이 말을 들었었다. 그가 그녀에게 같이 샤워를 하겠느냐 물었었던
걸로 기억된다.
"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랑 같이 샤워를 하겠다니......."
욕실 문에 기대어 선 재원의 얼굴엔 귀찮아하는 표정이 역력 했다.
수연은 물러서지 않는다. 그의 모친이 어떻게 마련해준 기회인데, 놓칠 수 없는 시간들 이었다. 뉴욕에서의 시간은.
" 나 재원 씨 좋아해요. 아무리 무디고 센스 빵점인 여자라도 좋고 싫은 것 정도는 구분 하니까."
그녀가 손에 든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입안에 와인 향기가 베어들게 하기 위해서다. 재원과의 첫 키스를
오늘 밤에 성사 시키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었던 것이다.
" 그럼 지금 나랑 침대 까지 같이 가겠다는 얘기야?"
짧은 물음 이었지만 그 속엔 많은 의미가 함축 되어 있었다.
" 물론 이지요. 센스는 없지만 헛소리는 안 하는 주의 에요 난."
이제야 봤지만, 재원에게 다가서는 수연의 차림은 가벼운 원피스 하나 뿐 신발도 신고 있지 않았다.
" 하~ 당신 생각보다 과감하네. 그런데 어쩌냐? 난 내가 원하는 여자 외에는 같은 침대 안 쓰는 주의 거든! 당신이
헛소리 안 하는 주의면 난 내가 먼저 원하는 여자만 안는 주의 다 그런 말인데........더 설명 할까? 그래야 이방에서
나갈래?"
갈수록 노골적으로 그녀를 밀어내는 재원의 태도에 수연은 자존심이 구겨졌다.
원래가 말을 함부로 하는 인간이라는 건 소문으로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그는 수연에게 예의를 벗어난 말이나
행동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더는.......내 자존심 긁지 말아요."
고개를 떨어트린 그녀는 이를 물었다.
" 그게 싫으면 나가. 이방에서.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을 동안 내 주위에 얼씬도 하지마."
어둡고 무거워진 재원의 말투에 수연이 다시 고개를 든다.
" 좋아요. 하지만 내가 떠나도 당신은 그 여자랑 결혼 못해요. 알죠? 鄭 회장님 생각!"
" 당신이 언제부터 우리 노인네를 그렇게 잘 알았는데? 까불지 말고 당신 방으로 돌아가 ."
수연이 엄포를 놨지만 재원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 한 가운데 덩그러니 그녀를 남겨둔 후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린다.
뉴욕에 와 삼 일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특별하게 할아버지가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바쁘게
일을 몰아갔다.
그러다 짬을 내서 헤라에게 전화를 해보지만 여전히 불통 이었고, 윤석도 통화가 되지 않고 있었다. 피하는 것
같기도 한 친구의 행동에 그는 불안이 가중 됐다.
뉴욕에 온 삼일 째 되는 날 저녁 8시. 브룩클린에서 제일 잘나가는 레스토랑 'Grocery'에서 지사의 임원들과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할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내일 점심.......비행기로 니스에 가자."
염색을 하지 않은 백발의 머리를 가지런해 빗어 넘긴 이 노신사는 손자를 향해 탁한 눈을 마주 하지 않고 말했다.
" 니스.......요?"
" 음. 내일 가서 이틀 정도 지내다가 서울로 돌아가는 걸로 스케줄 잡아 놨으니까 그렇게알아라."
일방적인 통보. 누구에게나 그렇게 하는 것처럼, 장남이 남겨놓고 간 하나뿐인 손자 재원에게도 노인은 늘 그랬다.
아들은 그런 그의 처사에 항상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 했지만 손자 녀석은 달랐다. 미국에 있던 지난 14년을
포함해서 가끔 보는 녀석 이었지만 성질 하나는 알아줄만한 녀석이라 평가 하는 노인 이었다.
그러나 일 처리는 늘 깔끔했으며 실수도 하기는 하지만 그 실수를 덮으려거나 하는 음흉함이 없는 손자이기에
노인은 재원을 높이 샀다.
" 갑작스레 니스는.......왜 가시려는 건데요?"
건방진 목소리! 다들 이 노인네 앞에서 소리를 죽이고 머리를 숙이지만 그는 항상 이렇게 건방지게 이유를 따져
물었다.
" 보고 싶다. 죽기 전에. 아들놈하고 네 생모가 간 곳. 한번은 서 봐야 할 거 아니냐."
재원과 꼭 같은 성격의 노인도 결코 말을 돌려 할 줄 모른다. 상대의 상처를 덧나게 할지라도 그는 피해가는 법을
택하지 않는다.
" 혼자 가세요. 전 싫어요."
" 노인네가 거기 혼자 가서 심장발작 이라도 일으키면 나중엔 그 후환을 어찌 할라고 그러는 거냐? 잔말 말고 내일
떠날 준비 해 놔라."
반항하는 손자에게 혀를 끌끌 차던 노인은 창 밖을 시선을 돌린다. 아들과 아들의 연인이 함께 가버린 그 순간부터
그는 이 날을 계산해 왔다.
언젠가........세상을 뜨기 전에라도 니스의 절벽에 서 보겠다고........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들 녀석을
이해해 보겠노라고........그게 이 세상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하고가야할 일이라고 노인은 결심 하고 또 다짐
했었다.
재원을 대동한 이번 여행의 본래 목적은 그것 이었던 것이다.
니스는 맑았다. 일년 삼백 육십오일 흐린 날이 드문 그 곳의 태양은 아직 떠오르는 중 이었지만........맑은 코발트
바다를 투명하게 비추기엔 부족함이 없는 듯 했다.
프롬나드 데 장글레의 번화함을 빠져 나와 마르셀로 가는 해안도로의 가장 높은 정상에 재원은 차를 세웠다.
鄭 회장은 손자의 도움을 받으며 뒷좌석에서 빠져 나왔다. 지독히도 푸르고 투명한 바다가 발 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지금은 세발로 걸어야만 하는 노인은 젊은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내려 해본다. 그러나 까마득하게 먼 시간
속으로 지나가 버린 그 시절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 네 아비가 양심은 있었구나! 이런 곳에 널 떨어뜨려놓고 가다니.......그래! 아름답지만 고독한 곳이구나!"
세월 속에 묻어두었던 당신의 아픔과 손자의 아픔을 꺼내어 보는 노인의 얼굴엔 깊이를 가늠하지 못할 니스의
바다보다 더 깊은 회한이 파도치고 있었다.
" 재원아........이제 생모는 잊어라. 네 어미가 평생 내색은 안하지만........힘들 거다. 널 키운 건 지금의 어미야.
더는 아프게 하지 마라. 아마도 나와 친정 아비를 원망하느라 그 가슴이 남아 있지도 않을 터 이지만........그래도
네게 준 가슴은 남아 있지 싶다. 널 얼마나 아끼는 줄은 네가 더 잘 알지?.......네 유년의 생모에 대한 기억도
지우고, 아비도 다 지워라."
지우라는 한 마디만 재원의 귀를 맴돌고 있었다. 지금의 모친을 위해.......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 그것이라도
되는 양 노인은 그렇게 말했다.
" 네 아비가 볼 모였다고.......그렇게 말 한다. 네 어미가. 혼탁한 정경유착의 희생양이라고.......네 생모나 네
아비나......."
" 사실 이지요."
묵묵히 바다만 바라보던 재원이 긍정을 한다. 할아버지나 그 누구를 원망한 적은 없었지만 모친이 생각에 동의는
갔다.
" 그러냐? 그럼.......내가 너 또한 볼모로 써야만 하겠다면.......어쩌겠느냐?"
노인의 누렇게 탁해진 눈동자가 재원의 총기어린 눈을 응시 했다.
" 할아버지답지 않게 돌려 말씀하시지 말고 본론만 하세요. 결론이 뭡니까?"
역시 녀석 답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 민 총장 여식 하고 결혼 할 생각이 없다면.......내가 정해주는 상대하고 맺는 게 어떠냐고 묻는 거다."
" 제 대답 뻔히 아시면서........왜 그런 걸 물으세요? 제가 언제 할아버지 생각대로 모든 걸 움직였습니까? 아닌
적이 더 많았던 걸로 아는데요."
결혼! 근래 들어 부쩍 자주 거론 되는 얘기였다. 그렇다는 건 할아버지의 심중에서 뭔가가 결정이 되고 있다는
얘기인 것이다. 가령 후계자 지목 문제라든지.......혹은 기업합병 이라든지 하는.......!
7월말의 정기 이사회.......종착지는 그곳인가?
재원의 머리가 빠른 계산으로 회전을 했다. 하지만 그 계산속에 결혼을 상호 이득을 챙기는 관계로 이용하는 일은
용납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의 두뇌회전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헤라........!라는 성능 좋은 ABS 브레이크가 작동한 것이다.
" 그 말은 민 총장 여식도 아니지만 내가 정해주는 상대도 마다하겠다는 말로 들리는 구나! 맞니?"
" 네."
망설임 없는 대답을 하는 손자를 노인은 진중한 눈으로 바라봤다.
" 오냐! 알았다. 대신 다가오는 정기이사회에서 어떤 결정이 나도 넌 번복을 요구하지는 말아라. 알겠니?"
" 당연하죠. 저도 지저분한 건 딸 질색입니다."
여자를 이용해 그룹의 머리에 서고 싶지도 않고........헤라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이미 재원에게는 자신이 행사
할 수 있는 경영권이나 상속 받을 재산보다도 그녀가 중요순위 상위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 음~ 좋아. 그렇지만 내가 정원이를 통해서 내린 일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물론 정원이가 이사회 어쩌고 이미
들먹거렸을 테지만.......널 평가하려는 의도 보다는 네 입지를 굳혀주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널 믿는다는."
鄭 회장은 자신과 손자 사이에 신뢰 회복을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그리 서로를 믿지 못하고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이제 너무 늙어버린 노인은 마음의 버팀목이 필요 한 모양 이었다.
" 네......."
" 그래........하지만 결혼에 대해서는 네 어미에게 맡겼으면 한다. 어미한테는 네가 아들이자 남편 아니냐! 웬만하면
거스르지 마라."
이것이 니스에서 정 회장의 마지막 말 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서울로 돌아오는 날까지 노인은 무슨 깊은 생각을
해야 했는지 거의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재원은 그런 할아버지에게서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父情(부정)을 느낄 수 있었다.
" 헤라야.......아직 자니? 오늘도 출근 안 해?"
그제 저녁 9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헤라는 오자마자 짐이 한 가득한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틀째
말이다.
예정보다 삼일이나 늦게 돌아와 그런 행동을 보이는 그녀를 식구들은 불안한 심정으로 지켜봐야만 했고 기다려야만
했다.
" 가서 그 남자랑 그런 일이 있었나? 그래서 충격 먹은 거야?"
헤미가 방문에 귀를 대고 있는 헤림에게 속삭인다.
" 정말 그런 건가? 그 남자한테 말해 줄걸 그랬나? 서두르지 말고 눈치 잘 살펴서 덤비라고? 아니면.......싸운
건가? 혹시 헤어진 거야?"
머리에 대고 조바심을 쳐대는 자신을 흘겨보는 언니.
" 넌.......지금 그게 문제니? 애가 이상 한데!"
그리고 이어지는 헤림의 한심하다는 말투에 헤미는 입을 삐죽거린다. 그래도 그녀에게 있어 현재의 가장 큰 문제는
헤라와 재원의 관계가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 하는 일 이었다.
하지만 큰 언니 헤림의 걱정은 좀더 깊은 곳에 있었다. 역시나 새엄마의 우려대로 막내가 남자와의 관계를 플라토닉
외의 형태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플라토닉 러브란! 말만 그럴싸하지 실제로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얘기라는 걸 익히 알고 있는 유부녀 헤림 이다.
물론 에로스 러브가 사랑의 형태에 전부는 아니지만 그건 무지무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헤라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녀는 영영 외기러기 신세를 면할 길이 없는 게 세상의 이치였다.
" 똑똑똑. 헤라야."
조심스레 헤림이 노크를 해본다. 잠시 기다렸지만 대답도 없고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헤미도 헤림을 따라 문에
귀를 대고, 어린 지민도 그런 새엄마와 이모를 따라 귀를 문에 대본다.
방안에서 고요함을 깨는 부스럭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어느새 그들이 문에서 귀를 땔 시간도 없이 그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 뭐 하는 거야? 잠 좀 자려는데!"
문에 귀를 대고 있던 두 언니는 열리는 방문 안으로 딸려 들어가지 않았지만, 어린 지민은 문으로 딸려 들어가
헤라의 발길에 채였다.
언제나 씩씩한 지민은 울지 않는다. 그리고 넘어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헤라의 다리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 아아~ 언니 지민이 좀 떼어내. 나 기운 없단 말이야."
허리를 넘는 그 긴 머리를 삼발로 풀어헤친 헤라가 우는 소리를 한다. 지민이 그런 헤라를 올려다봤다.
" 히잉~~귀신 이야.......헤라 이모 아니야."
그리고 누가 미쳐 떼어낼 필요도 없이 아이는 저절로 헤라의 다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헝클어져 엉덩이까지 흘러내린 머리와 그녀의 창백한 안색에, 여름 특집 공포 만화를 너무 많이 본 지민의 눈에
착시 현상이 일어났는지.......아무튼 아이는 겁을 먹고 있었다.
" 내가 처녀귀신이면 넌 꼬마 강시야. 배만 볼록해가지고. 메롱~~~"
" 꺄아~~~~~아~~~~~~귀신~~~~~~귀신."
헤라가 엉망인 머리카락을 흔들어 귀신 흉내를 내며 손톱을 세웠다. 그녀가 달아나는 지민을 쫓아간다.
순간, 날카로운 헤미의 눈에 헤라의 왼 팔목 안쪽으로 남은 주사바늘 자욱이 언뜻 스쳐지나갔다.
그녀가 명랑을 가장하여 지민과 좁은 집안을 뛰어 다니고 있기는 했지만, 언니들과 새엄마는 평소보다 과장 되게
행동을 하는 그녀라는 것을 금방 알아 챌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헤미는 새엄마에게 헤라의 주사 자국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이틀 만에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홀로 식탁에 앉은 헤라의 얼굴엔 건강한 붉은 혈색 대신 청색
기를 띈 다크 서클이 자리해 있었다.
" 회사는 안 나가냐?"
미역국을 퍼 식탁위에 올리며 새엄마가 물었다. 헤라는 눈동자를 좌우로 몇 번 굴리더니 생각하는 표정을 해보였다.
" 옮겨 볼까........생각 중이야. 다른 써치 펌으로."
미역국에 밥 한 숟가락을 말아 푹푹 젓던 그녀가 갑자기 밥공기를 들어 모두 국에 말아 버린다.
" 회사를 옮겨? 지금 다니던 데서 다른 디로?"
" 응........그럴까 생각 중이라고 아직 정한 건 아니고."
되묻는 새엄마의 눈을 피해 그녀는 입안 가득 국과 밥을 떠 넣었다.
" 갑자기 왜? 회사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겨?"
" 뭐 특별히 그런 건 아니고.......좀 마주치기 껄끄러운 사람이 생겨서.......그런 생각이 들어."
새엄마가 언제나 빠트리지 않고 식탁에 올리는 노란 계란말이와 노란 치자 단무지 한개 씩을 입에 넣는다. 그녀는
아삭거리는 단무지의 씹히는 느낌에 정신을 집중 해보려 하지만 아직도 목 안에서 이물감이 느껴져 먹는 일이
고역스럽게 느껴졌다.
" 그.......만나던 남자. 그 사람 때문이여?"
인상을 찌푸리며 밥을 넘기는 딸에게 새엄마가 조심스레 물어 왔다. 헤라는 새엄마의 걱정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챘지만........웃어줄 용기는 나지 않는다.
정확히 재원 때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자 이유이기는 했고.......더구나 새엄마가 걱정하는 문제와도 그리 멀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자식이 마음을 먼저 배려하는 새엄마는 대답이 없는 헤라에게 대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아마도
잠정적으로 새엄마가 어떠한 생각이 결론에 도달한 것 이 아닐까하고 편할 대로 생각해 버렸다.
식사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그녀가 집에 있는 오전 내내, 식구들은 헤라의 눈치만 살폈다. 그녀는 그런 가족들이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그들의 눈을 피해 느지막이 회사로 나갔다가, 석준을 만날 계획을 세우고 집을 나섰다.
회사근처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캄캄한 창을 응시 하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눈에 익은
번호........재원의 번호였다.
그러나 헤라는 받지 않는다. 그가 사준 PDA폰도 가방에 들어 있기는 했지만 그건 계속 방전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날의 충격은 아직도 헤라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석훈의 행동보다도 자신의 기도가 목을 조여오던 공포를 그녀는 더 잊을 수가 없었다. 딱히 재원이나 석훈의 행동을
원망하기 보다는 정작 헤라 자신이 무서웠던 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반응 이었던 것이다.
재원과의 사랑이 익어갈 수록 헤라는 그를 더 원할 것이지만 무의식 속에서 그녀를 지배하는 몸이 어떻게 나올지
무서웠다.
새롭게 발견한.......재원에 대한 몸의 반응이 다른 남자들과 확실히 다른 것에 대해 그녀는 지난 한달 간 쭉, 분명히
설레고 기뻤다.......그러나 이젠.......그것마저도 장담 할 수가 없었다.
그의 품에서만은 안전할 것이라는.......석훈과의 불미스런 일에서 다시 튀어나온 공포! 그것을 육체가 극복 할 수
있을지! 자신감을 상실한 것이다.
" 신 실장 있어?"
점심시간을 지난 윤석의 비서실 문을 거칠게 여는 사람이 있었으니.......그건 지금 막 예정보다 일찍 서울로 돌아온
재원 이었다.
" 아.......네. 계시긴 한데. 지금 업무 보고를"
재원의 기세에 토끼 눈을 한 윤석의 비서가 다른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재원은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그의 방문을 열어젖힌다.
" 야이 씨! 신 윤 석 너 죽을래?"
그리고 방안에 누가 있거나 말거나 문 앞에 서서 버럭 소리부터 지른다. 며칠은 제대로 면도도 하지 않은 것 같은
얼굴에 핏대를 세운 재원의 표정은 말 그대로 살벌했다.
윤석이 업무 보고서에 사인을 마치고 부하 직원 들을 물려 보내자 재원이 윤석의 책상 뒤로 돌아와 멱살을 잡는다.
" 내 피를 말려 죽일 작정 이었어? 도대체 뭐야? 휴대폰은 폼이야? 고장이라도 났었어? 둘이 같이 일부러
고장이라도 냈던 거야?"
원래 다혈질 이긴 한 재원 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윤석에게 화를 낸 일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재원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윤석의 심기 또한 만만치는 않다는 걸 그는 몰랐다.
" 놔! 너 잘한 것 하나도 없으니까........조용히 이거 놓고 내 얘기나 들어."
재원에 비해 성격이 온순하고 침착한 윤석은 쉽게 흥분하지 않고 자신의 타이를 거머쥐고 있는 친구의 손가락을
풀어낸다.
" 그날........네 놈이 그 더러운 성질에 못 이겨서 무슨 일을 쳤는지 소상이 말해 줄 테니까 마음에 준비나 단단히
하라고."
조여진 타이와 셔츠의 위 단추를 풀며 윤석은 순간이지만 얼굴이 굳어진 재원을 노려봤다.
" 설마........송 석 훈 그 새끼가........"
굳어진 얼굴에 떨리는 음성으로 재원이 설마 하는 말을 했다.
" 설마? 너 지금 설마 라고 그랬냐? 정 재 원? 그럼 송 이사가 그럴 거라는 거 짐작까지 했으면서 그렇게 멍청한
짓거리를 한거야? 그런 거야?"
설마라는 그의 말에 윤석의 언성이 높아지자 재원은 거의 무너지듯 옆의 소파에 몸을 앉혔다. 그리고 아연실색한
얼굴은 오래된 그림처럼 색을 잃어 가고 있었다.
" 헤라........괜찮아?"
" 하~ 물론 죽지는 않았다. 아마 내가 몇 초만 늦었어도 어쩌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윤석이 책상 의자에 그 커다란 덩치를 앉히며 코웃음을 친다. 그의 말에 하얗게 주먹이 쥐어진 재원의 손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만약 헤라가.........무슨 일이라도 당했다면.......하는 두려움이 그의 심장을 통째로 하얀 사무실 벽을 향해 곤두박질
쳐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 이었다.
" 제주 병원에서 삼 일이나 입원 했다가 올라 왔다. 그제 밤에."
그렇게 말을 시작한 윤석의 얘기!.......재원은 친구의 질타와 욕지거리에 변명할 말 조차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 너 네 입으로 헤라 씨가 네 여자라고 송 이사한테 두 번이나 말했어. 그런데!.......그래놓고, 그날의 네 처사는
도무지........이해해 주기도 싫고 이해가 가지도 않는다. 얌마 정 재원!.......질투라는 건 말이야. 언뜻 사랑한다는
감정하고 혼동 할 수도 있는데, 내 경험상으로는 둘은 다른 거다. 잠시 서로에게 자극을 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표현 하면 표현 할수록 상대한테도 스스로에게도 독이 되는 거야. 근데........근데 난 네가 그런 감정을 그런
방식으로 터트리리라곤 정말 예상 못했다."
감정의 선배를 자청하고 나선 윤석의 마지막 설교가 끝나고 긴 침묵의 시간 속에서.......재원은 절감 해야만 했다.
질투! 그 어리석은 감정의 결말을 겪어본 그가........같은 실수를 해버린 어쩔 수 없는 아버지의 아들 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생모의 전 남편에 대한 아버지의 질투! 혹은 아버지의 아내, 즉 지금 재원의 모친에 대한 생모의 질투로 두 사람은
한 날 한 시에 남겨진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세상을 등져야만 했다는.......친척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자란
그였는데.
그런데........姑(고)인들의 명복조차 제대로 빌지 않은 자신이 그들을 닮고 있었던 것이다.
재원은 두 손 바닥 안에 얼굴을 묻는다.
무슨 낯으로 헤라를 찾아 간다는 말인가.......뻔뻔스럽게도 변명이라도 하고 싶고 보고만 싶은 마음은 가눌 길이
없는데.......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은데.......어떤 얼굴로 그녀앞에 서야만 할지! 그는 열 살 이후 처음으로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어린 사내아이로 돌아와 있었다.
" 헤라.......집. 알아?....... 네가 태워다 줬을 거 아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윤석의 방을 나서던 재원이 죄인처럼 머뭇거리며 물었다.
" 생일 축하해! 진 헤 라.......건배 하자."
늦은 저녁 연주와 석준과 헤라는 맥주 집에 마주 앉아 그녀의 스물일곱 번 째 생일을 축하 하고 있었다.
" 고마워, 생일인건 나도 잊고 있었는데.......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이 미역국 이었는데도 몰랐었네."
배시시 느린 웃음을 웃은 헤라는 연주의 걱정 어린 표정에 시선을 석준에게로 옮겼다.
" 그래. 생일 인데 그걸 다 잊어먹고 네가 심난하기는 했나보다."
석준이 잔을 부딪혀오며 헤라를 위로한다. 그러자 연주는 그녀를 향해 묻는 눈을 해보였다. 제주도의 불상사를
그에게 얘기했느냐 묻는 것 같았다.
" 첫 직장 이었는데 옮기자니 좀 그렇기는 하네."
헤라는 골뱅이 소면 한 가닥을 집어 오물오물 입에 넣는다.
" 그래서 내가 미안하다. 괜히 내 일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아서."
" 아냐. 전부터 접촉해 오던 써치 펌 이었어. 연봉도 천만 원이나 더 대우해주겠다고 계속 유혹을 해오던 펌
이라.......나도 갈팡질팡 하던 참 이었거든."
석준은 그녀가 회사를 옮기는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송 석 훈의 제안을 거절 하는 이유로 헤라가
회사를 옮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준, 헤라 뿐 아니라 그녀의 회사에게도 만만치 않은 거액이 걸려 있던 일을 엎어버린 그녀의 입장이 회사에서
난처해 진 것이라고. 석준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 MTN에서 다른 Search(서치)를 통해 다시 시도해 와도.......난 석준이 네가 거절 했으면 좋겠어."
맥주 컵에 젓가락을 넣어 휘젓던 헤라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주는 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알아듣지 못하고
심심하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헤라의 어두운 표정에, 그녀에게 재원이 예정 보다 훨씬 일찍 돌아와 있다는 사실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망설이고도 있었다.
그렇기에, 맥주를 마실 때마다 젓가락을 넣고 휘휘 저어 거품을 내는 헤라의 버릇에 매번 고개를 젓는 연주였지만
오늘만은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석준과 헤라의 대화에서 소외되어 있던 연주는 시끄러운 맥주집의 잡음 속에서도 자신의 휴대폰 소리를 들었다.
윤석 씨 일까? 기대감으로 그녀는 황급히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윤석의 이름이 뜨길 고대하며 확인한
발신자는 놀랍게도 재원 이었다.
" 아! 네. 안녕하세요."
헤라의 눈치를 힐끔 보며 그녀는 몸을 돌려 전화를 받는다.
[ 헤라.......혹시 같이 있어요?]
전화기 넘어 그의 목소리는 음울하게 들렸다.
" 네........오늘 생일이거든요. 석준이랑 셋이서 축하 하고 있었어요."
[ 아! 그랬군요.]
" 여기 홍대 앞인데 지금 오실래요?"
[ 아뇨.......됐구요. 지금 헤라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너무 늦지나 않게 들여보내 줘요. 내 얘기는 하지
말고.]
" 네.......알았어요. 한 삼십분 정도 있다가 일어날 거니까 기다리세요."
[ 네. 그럼.]
그렇게 간단한 말 몇 마디를 헤라의 기색을 살피며 하던 연주가 전화를 끊자 석준이 이상하다는 얼굴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헤라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이번엔 맥주에 사이다를 섞어 젓가락 두개로 휘젓는 일에 몰두를 하고 있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재원은 아파트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좀 떨어진 어두운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었다.
" 재원 이예요. 오 비서님.......뭣 좀 부탁드릴게 있어서요. 사람 좀 조사해 주세요. 이름은 진 헤 라 구요. 여자에요.
나이는 스물일곱, 정확한 생년월일은 몰라요.......주소요? 주소는 잠실 XX동 XX아파트 109동 1013호인데요........네
아는 게 그것뿐이에요. 오래 걸리겠어요?.......그래요! 네 알겠습니다.........네."
방금 연주와 통화를 마친 그는 헤라의 생일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진저리를 쳤다.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지금이 싫어진 재원이다.
그녀에 대해 조금 더 많은 지식이 있었다면........그 따위 유치한 질투 따위도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까지 들고 있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도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고........맞는 생각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헤라의 뒷조사를
부탁한 것에 대한 합리화이기도 했던 것이다.
35.
한 시간 가까이 아파트 입구를 서성였다.
입국하자마자 윤석의 사무실로 달려갔던 재원은 아직도 말쑥한 회색 양복 차림 그대로였는데.
목에 묶였던 핑크색 타이는 푸른지 오래지만 그래도 정장은 불편 하고 답답하다. 하얀 셔츠의 윗 단추를 세 개나
풀어보지만 어깨에 걸쳐진 재킷은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는 재원의 몸을 누르고 있었다.
재킷을 벗어 차에 가져다 놓으려는 찰나........다가오는 불빛이 있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헤라였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연주가 잠시 내려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좌우로 몇 번 두리번거린 후 사라졌다.
그녀가 무거운 걸음으로 아파트 건물의 현관으로 걸어 들어간다. 재원은 호흡을 가다듬고 헤라 앞에 나설 준비를
했다.
" 저기."
뒤에서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 어?......뭐 뭐예요?"
불쑥 나타난 손과 목소리에 놀란 그녀가 본능에 가까운 동작으로 손에든 커다란 숄더백으로 날린다.
" 퍽!!!!!"
" 이~~~~! 아직 초저녁 인데.......뭐야 넌!"
그리고 여전히 기운차고 용감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재원은 가까스로 헤라의 주먹을 피하면서 그녀의 날아든 팔목을
잡아챘다.
하지만 그녀의 숄더백에 맞은 코는 얼얼했고 눈앞엔 작은 별들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 재.......원 씨?"
허리를 숙인 채 한 손엔 그녀의 팔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코를 쥐고 있는 그를 헤라가 알아 봤다.
" 야~아 진 헤 라.......너무 셌어."
" 미 미안! 괜찮아요?"
그녀가 허리를 숙인 채 펴지 못하는 재원의 맞은편으로 허둥지둥 돌아와 그의 허리를 일으킨다.
" 몰라......."
재원이 고개를 흔들어 회전목마처럼 머리 주위를 빙글거리는 별을 쫓아내며 헤라의 얼굴에 눈을 고정시키려
노력했다.
" 어머! 어째?"
헌데, 그와 마주 선 헤라는 순간 미안함으로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마주본 재원의 코에선 한 줄도 아닌,
쌍코피 두 줄이 나란히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 코 코피야. 기 기다려요."
그리고 곧 그의 하얀 셔츠의 소매위로 피가 흘러 뚝뚝 떨어진다. 그녀는 황급하게 가방을 뒤져 휴지를 찾아냈다.
먼저 인중과 턱으로 흐른 피를 닦아내고 휴지를 반으로 조각내서 돌돌 말아 재원의 양 콧구멍에 꽂아 넣는다.
" 야! 야........"
재원이 팔을 내저으며 뒤로 물러난다.
" 쪽팔리게 이게 뭐야? 거기다 양쪽 다 막아버리면 어떻게 숨 쉬라고!!!!"
흘러내리는 피에 다급해진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양쪽 콧구멍을 다 막아 버리자 어처구니가 없어진 재원이 언성을
높였다.
" 잔소리 마요. 말 하는 시간에 입으로 숨쉬면 되겠네. 뭐!"
하지만 헤라는 코를 막은 휴지를 잡아 빼려는 재원의 손을 저지하며 오히려 그를 나무랐다.
작은 핏방울로 얼룩진 그의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려 주며 그녀는 자신의 왼 팔목에 꽂히는 그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 며칠 사이 더.......난폭해 졌네."
툭 하니 뱉어낸 그의 말투에는 말과는 다른 안심이 배인 소리가 섞여 있었다.
" 코피 더 터지고 싶어요? 진짜 난폭한 게 어떤 건지 보여줘?"
양 팔이 소매를 차곡차곡 팔꿈치 아래까지 접어 올린다음 그녀가 재원을 쏘아 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몸이 바짝 긴장을 한다.
" 어디 가서.......한잔 할래?"
마른 입술을 적시고 그 입술을 살짝 깨문 그가 시선을 피한다. 어두운 곳에서 보는 얼굴이지만 한눈에 봐도 안색이
매우 안 돼보였다.
아마도 자신이 전화를 받지 않자 뉴욕에 있는 내내 노심초사 했던 것이리라 그녀는 생각이 들었다.
" .......아파트단지 나가서 포장마차가 몇 개 있는데 거기 가서 할래요?"
그렇게 묻자마자 헤라는 재원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재원이 큰 걸음으로 그런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어린 강아지가 새 주인을 따라나서는 모양새가 이럴까? 머뭇머뭇 두리번두리번 재원은 얼핏 보기에도 불안에 겨운
몸놀림으로 헤라를 따라가고 있었다.
거기에 양 콧구멍에 끼어 있는 휴지 하며.......스타일 구길 대로 다 구겨진 그 지만, 지금 재원에겐 그딴 것들은 별
의미가 되지 못했다.
포장마차의 밝은 불 아래서 보니 재원의 그 고급스런 밝은 회색의 슈트 바지에도 피가 한 방을 떨어져 있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와 불편한 의자에 어색하게 앉아 콧속에 있는 휴지를 끄집어낸다. 선홍색으로 물든 하얀 휴지가
바닥에 버려졌다.
" 아줌마! 여기 소주 두병하고 계란말이 주세요."
헤라가 알아서 주문을 하고 재원은 제법 규모가 있는 포장마차를 조금 놀란 얼굴로 둘러보고 있었다.
" 요새 면도는 왜 자꾸 안하고 다녀요? 그렇게 시커멓게 기르고 다니면 누가 Beckham(베컴) 이라도 닮았다고
할까봐 수염에 미련을 못 버려요?"
어색하게 앉아 있는 그를 향해 헤라가 의미 없는 트집을 잡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그녀의 눈에는 재원이 Beckham(베컴)보다 훨씬 잘 생겨 보였다. 감숭감숭 자라있는
수염도 훨씬 섹시했고, 수염 가운데 자리 잡은 입술도 Beckham(베컴)의 것보다 몇 배는 키스를 부르는 입술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키스를 부르는 입술.......어느 립스틱 광고 슬로건이었던.......멘트다.
" 마시지 마요. 나 혼자 할 테니까."
재원이 소주잔을 들자 헤라가 그 잔을 낚아챘다. 그는 소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혹시나 또 위경련을 일으키지나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어서였다.
그녀가 자작을 한다. 재원이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잔을 빼앗아 들어 그 역시 자작을 했다.
" 마시지 말라니까."
그러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거센 동작으로 그의 잔을 다시 빼앗아 버렸다. 축 쳐진 어깨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재원은 그 속에서 초조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 말해요. 할 얘기 있어서 온 것 아니었어요?"
연거푸 석 잔의 소주를 들이키는 그녀를 가만히 보고만 있던 재원에게 헤라가 퉁명스레 물었다.
계란말이 한 귀퉁이를 잘라 집어 들어 이리저리 모양을 살펴보던 헤라가 약간 인상을 찌푸린다. 롤 케이크만한
크기의 계란말이에는 다진 파를 비롯해 햄과 부추, 명란 등이 들어 있었다.
" 저녁이나 먹었어요?"
묵묵함으로 일관하는 그에게 그녀가 묻기를 반복한다. 그 물음에 재원은 점심은 물론 저녁 까지 걸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젓가락을 들어 그녀가 자른 계란말이의 귀퉁이 반대편을 자른다.
" 이런 거 먹어 본 적이나 있어요?"
문득 헤라는 궁금했다. 속해 있는 세계가 천지 차이인 그와 이런 사소한 것에서도 교감을 나눌 수 있는지 말이다.
그녀에게 있어 계란말이는 새엄마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음식 이었다.
음식이라기엔 정말 보잘 것 없는 메뉴지만 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 포장마차를 하던 새엄마를 찾아가 저녁밥
대신으로 끼니를 때워주던, 그녀의 주식 노릇을 하던 계란말이였다.
" 어렸을 적 미국에 가기 전엔 몇 번.......할아버지가 가끔 찾으셨으니까."
시장 했었던지 그는 우적우적 계란말이를 맛있게도 먹는다.
" 후후.......부자들도 먹는구나! 계란말이."
헤라는 맛있게 먹는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작은 웃음소리에 재원이 먹던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본다.
웃다니.......괜찮은 건가? 사과를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섣불리 미안하단 말 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던 그는
희망을 품었다.
" 저기.......이 이거!"
그녀가 헤어지자거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바람 말이다.
" 뭐예요?"
그가 주머니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왼손을 꺼내 주먹을 쥔 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헤라의 눈은 셔츠의 단추가
세 개나 풀어진 사이로 그의 목에 걸린 얇은 백색의 목걸이를 보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봤을 땐, 메달이 보이지 않아 지금껏 그 줄에 달린 매달이 뭘까 궁금하던 그녀였다.
" 니스에서 사 왔어."
" 내 꺼요?"
그의 목걸이로부터 시선을 돌려 그의 쥐어진 주먹을 내려다 봤다.
" 됐어요. 필요 없으니까 민 수연 씨한테나 줘 버려요."
하지만 그녀는 본채도 하지 않고 내용물을 확인 하려 하지도 않았다. 비어있는 잔에 소주 병을 기울이던 그녀가
얼굴을 들어 그를 마주 본다.
" 내 생일 몰랐잖아요. 뭐 물론 내가 가르쳐 준 기억도 없었지만, 재원 씨가 물어본 적도 없고.......아까 연주랑
통화하면서 들었나본데, 됐어요. 받아도 별로 기쁠 것 같지가 않아."
그리고 솔직한 지금의 심정을 얘기 했다. 재원의 얼굴이 굳어진다.
" 생일 선물 아니야. 니스에 갔다가 생각나서 사온거야. 그러니까 그냥 여행 기념선물 쯤으로 생각하고 받아."
그가 아무렇게나 하늘색 플라스틱 탁자위로 던져 버린 물건은 '촤르륵' 하는 금속성의 소리를 냈다.
하얀 채인 사이사이에 코발트블루의 사파이어가 세팅 된 청초하면서도 화려한 팔찌. 헤라는 그 아름다운 팔찌를
보는 순간, 꿀꺽 침을 삼켰다.
자신이 팔에 걸릴 아름다운 보석에 대한 상상이 아닌, 팔면.......얼마나 나갈까? 하는 지극히 현식적인 생각에서
말이다.
진짜 사파이어에 진짜 금이라면.......알도 제법 굵어 보이는 사파이어는 하나당 1캐럿은 족히 됨직 보였고, 개수도
열 몇 개 이상은 박혀 있는 것 같았다. 그럼.......적어도 몇........ 몇 백???
헤라는 눈을 질끈 감는다. 저 화려한 물건에 혹해서 별 의미 없는 선물을 받아버린 다면 왠지 지금의 비참함이 증폭
될 것 같아서였다.
현재의 재정난에 굴복해 버리는 것 같아서.......
" 시 싫어요. 여행기념 선물 치고는 너무 고가로 보이네. 도로 집어넣어요."
" 정말?"
어느 틈엔지 팔짱까지 끼고 여유로워 보이는 태도로 돌아와 있던 그가 헤라의 진의를 따져 묻는다.
" ........ "
그녀는 갈등이 되기 시작했다. 어찌해야 할까.......아무래도 제주도 일에 대해 뉘우치는 의미도 있는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그런 뜻이라고 한다면.......눈 딱 감고 받을까? 하지만 갖게 되면 분명 팔아먹게 될지도 모르는데.......더욱이
형부 눈에 뜨이기라도 하는 날엔 팔찌의 안전은 절대 보장 받을 수 없는.......터였다.
" 뭐........생일 선물.......아니고, 제주도.......일 사과하는 뜻 이라면 바.......받을게요."
팔찌에서 눈을 돌린 헤라는 애꿎은 계란말이를 쿡쿡 쑤셔 대며 마지못해 받는다는 듯이 말을 했다.
" 내가 그날 일을 왜 사과 하는데? 네가 그렇게 바락바락 기어오르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어. 반은 네
책임이라고."
그러자 재원이 눈을 깔아 예의 그 건방진 표정으로 대꾸를 한다. 기분이 틀어져 버린 것이다. 필요 없다는
말에서부터.......받아도 별로 기쁘지 않을 것 같다는 말까지!
설마! 선물을 받으면서 까지 튕기리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하고 말이다. 단순한 성격의 그는 선물이라면 껌벅 죽는
여자들에게 익숙해져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어째서 헤라가 보석 선물 하나에 금세 미소라도 지을 것이라 기대를
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 사과를 그렇게 밖에 못해요? 내가 언제 밀어 넣어 달라고 그랬어? 그냥 알려달라고만 말했어요 분명히!!!!!"
잔에 들은 소주가 튀어 오르도록 세차게 잔을 내려놓은 헤라가 재원의 말을 바로 잡았다. 재원은 찌뿌드드한 표정을
하기는 했지만 그만 말을 접는다.
미안하다고 골백번을 빌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책임을 전가하는 말을 한 그는 머쓱해져 버렸다.
열이 오른 것인지 아니면 귀 빠진 날을 맞아 술 발이 받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헤라는 혼자서 소주 한 병을
뚝딱 비웠다. 반병이 주량의 한계인 그녀가 이번에도 치사량을 마셔 버린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잠들지 않는다. 이미 연주와 석준과 함께 1차로 흑맥주 한 병을 마신 그녀였지만 잠은 오지 않고
가뜩이나 센 기운이 더 세차게 뻗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취할 대로 취한 헤라의 주사가 시작이 된 것이다.
" 왕자님.......당신의 애견이 지금 좀 취했습니다. 그러니~ 딸꾹.......좀 집에 데려다 주시지요! 다른 잡종견들이
와서 또 찔벅거리기 전에....... 딸꾹~"
술주정은 제주도의 암케 이야기와 이어지고 있었다. 헤라는 앉은 자리에서 가방을 챙겨 벌떡 일어서며 포장마차
안을 휘 둘러 본다.
" 봐요........여기 온갖 잡종들이 우글우글 개떼처럼 몰려 있잖아. 아~~안녕 하세요.......멍멍멍. 변견
여러분~~소개해 드릴게요.......딸꾹~ "
그러더니 느닷없이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재원이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고 개 얘기로 서두를 떼는 그녀를
올려다봤다.
" 이 사람이 제 주인인데요. 보시다시피 세상에 자기 밑에 사람이 없는 인간 이라........딸꾹~절 지 애견이라고
떠들고 다녀놓고, 지랑 비슷한 종류의 인간한테 절 막 빌려주고 그러거든요? 근데요 .딸꾹~"
가만히 있어도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그녀가 일어서 서 주정을 해대자 수컷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 갈채를 보내왔다.
" 아~~~네네. 박수는 무슨~~~후후후."
그러자 그녀는 쑥스럽다는 듯이 허리를 숙여 과장된 인사를 한다.
" 근데요........제가 그 주인 친구를 물어버렸거든요~~딸꾹~ 그럼.......보상을 제가 해줘야 하나요? 아니면
주인님이 해줘야 하나요? 사실은 제가 광견병 예방 주사는 맞은 기억이 없걸랑요? 그쵸? 주인님???"
" 와 하하하하"
그녀의 능청스런 주사에 사람들이 와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술에 취해 떠들어대는 헤라는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얼굴은 붉어져 있었지만 사실 그녀는 취한 사람이라고 하기엔 눈이 부실 정도로 예뻤다.
굵은 컬이 들어간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은 그녀가 웃을 때마다 살랑 거렸고, 풍만한 볼륨의 가슴은 올라오는 취기로
인해 가쁜 숨을 쉴 때마다 기분 좋게 들썩거렸다. 그리고 나긋한 허리는 육감적이었으며, 근육질의 엉덩이와 미끈한
다리는 다행히도 베이지색의 카고 팬츠 아래 얌전히 감추어져 있었다.
그녀는 너무 눈에 튀는 여자였다. 건강하고 밝은 육체는 어떤 옷을 걸쳐도 그 안에서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원은 그런 헤라에게서 눈을 돌려 포장마차안의 사람들을 훑어본다. 그녀의 유쾌한 주정에 모두들 웃고는 있었지만
몇몇 남자들의 눈은 본능의 빛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위험하다! 재원은 생각이 그곳에 머물자, 자리를 일어나 전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헤라의 어깨를 잡아 부축을
하고서 계산을 마친 후, 열기라 후끈한 포장마차를 서둘러 나왔다.
헤라의 손에는 사파이어 팔찌가 어느 틈엔가 쥐어져 있었다. 재원은 그녀를 보는 뭇 남자들의 시선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물건을 만취한 그녀가 챙긴 것이다.
" 재원 씨! 택시........택시 잡으러 가자."
밖으로 나온 헤라는 도로를 향해 뛰어들었다. 재원이 미쳐 말릴 틈도 없었다.
" 정지!!!!!일단 정지야."
그녀가 허공에서 두 팔을 저어 도로에 서자 택시가 선다. 기사가 창문을 내리고 행선지를 물었지만......... 그녀는
정말이지 헛힘 빠지는 소리를 해댔다.
그녀의 주사 형태는 '일단정지 형' 이었나 보다.
" 아저씨! 지금 몇 시에요?"
기사가 12시가 좀 넘었다고 말을 하자, 헤라는 고맙습니다. 하며 꾸벅 절을 한 뒤 택시를 뒤로 하고 걷기 시작했다.
택시 기사가 재원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욕지거리를 해대며 사라진다.
그가 저 만치 앞서 갈 지자걸음으로 몸을 움직이는 헤라에게로 뛰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열 번도 넘게 택시를 세워
시간을 물었다.
" 야! 집은 반대 방향이잖아."
재원이 그녀를 막아선다. 무작정 옮기던 걸음에 앞을 막아선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콩 하니 받은 헤라는 잠시 그
상태로 가만히 서 있었다.
" 몇 시야? "
그리고 다시 시간을 묻는다. 그녀의 팔이 재원의 허리를 감고 가슴팍에 이마를 부비며 애처롭게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멀쩡한 정신의 재원은 자신의 심장이 이대로 녹아 없어져 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한다.
그녀가 이렇게 종종 어리광을 피울 때마다 그는 눈물겹도록 행복함을 느끼고 있었다.
" 12 시 45분........"
거리에 드문드문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재원은 헤라의 등을 꼭 껴안아 주었다.
" 아~ 큰일이네.......4시 전에 들어가야 하는데......."
취기로 인해 시간관념을 상실 한 것인지 그녀는 겨우 자정을 넘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새벽 4시를
걱정하고 있었다.
신데렐라는 마법이 풀리기 전인 자정을 걱정했지만 새벽 4시라는 시간은........도대체.......의미를 알 수가 없는 시간
이었다.
재원은 택시를 정지시켜 시간 묻기를 포기한 헤라를 들쳐 업는다. 잠들지 않은 헤라는 순순히 그의 등에 몸을 의지
했다.
세 번째 만났을 때........그때도 지금처럼 엉망으로 취해버린 그녀를 들쳐 맨 날 이었다. 그때는 고작 차에서
엘리베이터까지 가는데도 무겁고 힘이 들었는데.......지금은 등에 업힌 그녀의 온기가 더 없이 좋고 사랑스러워서
재원은 힘들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 그녀의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키가 큰 플라타너스가 가로등에 비친 투명한 초록의 잎을
바람에 흔들어 댔다. 그녀의 숨결에서 소주냄새가 풍긴다.
" 재원 씨!"
그녀가 부른다. 조용하기에 잠이 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 나........이 팔찌 팔아머글 겅뎅. 어마 주고 샀어? 사 가격을 알아야 제대로 바고 파수 있잖아.......어토다토않은
가격에 팔아머면.......넘 어구랄 것 같단 말이시!.
혀가 꼬여 버린 것인지 아니면 등에 얼굴 묻고 말하고 있어서인지 아무튼 그녀의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 팔찌의 가격을 묻는 다는 건 알 수 있었다.
" 달러로 오천 육백 불 줬어. 들어오면서 세금도 오백불이나 냈고. 그러니까 잘 간수해."
재원은 가격 따위를 얘기해줘도 그녀가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며........사실대로 말해줬다.
그러면서 그녀 외에 어떤 누구에도 이런 고가의 선물을 전혀 아깝게 생각지 않고 주기는 처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자꾸만 따라붙게 만드는 여자! 진 헤라!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먼저 똑똑히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고 그는 다짐을 했다. 제주도에서와 같은 얼빠진 짓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 무지.......비싼 거네........근데.......나 갖고 싶은 거 따로 있어. 이 팔찌는 생일 선물 아니라며........나 생일 선물
받고 싶단 말이야. 지금까지 한번도 그런 거 받아 본적 없거든!!!"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던 헤라가 머리를 들어 중얼 거렸다. 그래서 인지 비교적 정확한 발음으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 내려.......줘요."
아파트 입구에 이르자 그녀가 몸을 틀었다. 재원은 조심스레 그녀를 입구의 계단에 앉히고 그 맞은편으로 쭈그려
앉는다.
" 뭐가 갖고 싶은데? 네가 원하는 건 다 줄게........말 해봐."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되로 넘겨주며 재원은 사랑스러움이 배인 손길을 멈추지 못했다. 볼을
쓰다듬고.......립스틱이 지워져 버린 옅은 산호색 입술을 매만져 본다. 그녀의 뜨거운 입술이 그의 손가락을 물었다.
" 지금........내 아파트로 갈래?"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대로 들여보내고 싶지 않았다.
품에 안고 밤이 새도록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고 싶었다. 미안하다고.......용서해달라고.......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매끄러운 등과 엉덩이를 쓰다듬고 그렇게 품에 안고 잠들고 싶었던, 지난 일주일간의 억눌려 왔던 욕망이
고개를 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왼 속목에 퍼렇게 멍이 든 채로 남겨진 주사바늘 자국으로 시선이 닿자, 욕망은 순식간에 죄의식을
불러왔다.
" 아냐.......아냐 관두자."
이기적인 수컷의 욕망에 속으로 욕을 퍼부은 재원은 몸을 일으킨다. 헤라가 그를 따라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 당신........목걸이.......그거 나 줘요. 그럼.......사과하지 않아도 용서해 줄 테니까."
재원의 양팔을 붙들고 흔들리는 몸을 의지한 헤라가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뭔가를 알아내고 싶어 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목걸이........재원은 자신의 목에 매달린 하얀 매달에 손을 가져갔다. 엄지 손톱만한 마름모의 얇은 판........그
중심에 0.3 캐럿의 다이아몬드가 장식 된........그 목걸이! 지난 19년 동안 한번도 몸에서 떨어져 본적 없던 그것을
그녀가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 미안. 이건 안돼!"
재원이 헤라의 시선을 피하며 잘라 말했다.
" 푸~~~~~ 그럴 줄 알았어.......됐어요. 농담이야. 어떤 물건인지 몰라서 한번 떠본 것 뿐이니까........미안할 것
까지는 없어요."
잡았던 그의 팔을 놓으며 헤라는 아니라는 손짓을 흔들어 보였다.
뭘 그럴 줄 알았다는 것일까? 재원은 뭔지 모른 것을 들킨 것 같아 가슴이 뜨끔 거렸다. 굳어져 서 있는
재원에게서 몸을 돌려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던 헤라가 멈추어 선다.
" 헤라야........."
그녀가 몇 걸음 떼지 않아 엘리베이터 앞에 선 새엄마의 목소리가 그녀를 맞았기 때문이다.
" 어~~~~~새엄마!"
언제부터였는지.......새엄마가 그 곳에 서 있었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새엄마가 다가와 부축한다.
" 미안........술 마셨어요. 과음이야.......누구처럼."
그녀가 웅얼대고 있었다. 새엄마의 눈이 재원을 향한다. 재원은 머뭇머뭇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잠시 후,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나고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헤림 이었다.
" 헤라 데리고 먼저 올라가라......."
새엄마는 그녀를 헤림에게로 안겨 주며 재원을 향해 돌아 섰다. 헤림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동생과 그를 번갈아
보더니........이내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진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헤라의 새엄마는 재원의 얼굴과 차림새를 찬찬히 뜯어보는 듯했다. 그는 아무런 준비 없이 마주친
그녀의 모친과의 만남으로 긴장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 우리 헤라.......그런 애 아니에요."
헤라와 비슷한 목소리.......비슷한 억양으로 입을 뗀 모친을 재원은 당당하게 마주했다.
" 한 겨울 눈 보다 더 희고 깨끗한 아이가 내 딸입니다. 청년은 우리 애를 잘 몰라서 좀 전 같은 유혹을 했는지
모르겠지만요........저 앤.......순결하고........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그럴 겁니다. 그러니까.........우리 애.......다시는
만자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을 그는 얼른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 혹시.......제주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면........저 애 팔에 난 주사 자국 봤어요. 그리고 예정보다 사흘이나 늦게
온 것도 그렇고.........어쨌든........난 청년을 신뢰 할 수 없구.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습니다. 돈이 얼마나 많은 부자
인줄은 내 모르지만.......우리가 이렇게 산다고 딸을.......아 아무튼 만나지 말아요. 그럼."
횡설수설.......정리가 되지 않은 말들을 쏟아낸 헤라의 모친은 만나지 말라는 당신의 의사만은 확실히 전달하고 종종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하지만 재원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 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무슨.......무슨 말이지?
헤라와 자신을 가로막는 일이, 그녀의 마음을 다 얻어내지 못한 것 말고도. 그녀의 새어머니라는 복병이 있었다는
것에 그는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녀의 마음만 얻으면.......가족들은........당연하리라 생각했었는데........그녀 새어머니의 싸늘한 시선과 정리가 되지
않은 말들이 그를 혼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큰 언니에게 부축을 받아 집으로 들어온 헤라는 과음으로 인해 불편해져 오는 배를 쓸어내리며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변기에 얼굴을 들이대고 먹은 것을 토해낸다.........그리고 십 분 정도 식구들의 눈을 피해 욕실 바닥에 멍 하니
앉아 있었다.
뭐든.......다 준다.......? 하지만 안돼는 것도 있다? 그녀는 재원의 대답을 곱씹고 있었다.
사랑한다고........하지만 부담스러워하니까 취소한다던........모순투성이의 그 말과 함께 되뇌어보고
되짚어보고.......그녀는 아려오는 가슴에 가만히 손을 얹어 눈을 감았다.
그런 거구나! 그런 거.......그래서 날.......송 이사의 방으로 밀어 넣을 수 있었던 거구나.......!
역시 남자란........다 같은 거야. 원하는 건 내 몸이었겠지.......그걸 얻기 위해서 스스로도 모르는 달콤한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착각하면서 말하고, 맹세하고.......유혹하고.......안되면 폭력을 써서라도 갖는........종족. 남자!!!
뇌에 이른 알콜에 의해 정상적인 생각들을 할 수 있건 없건 간에 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존심 상하게!!!
눈에서 나오는 뜨거운 액체에 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다.
36.
"똑똑똑......"
" 들어와요."
민 대표의 방에 들어선 헤라는 우뚝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송 석 훈! 저 작자가 무슨 낯짝으로 날 불러들인 거란 말인가! 하는 생각에 그녀는 그 부리부리한 눈에 잔뜩 힘을
준다.
" 그럼.......얘기 나누시지요."
민 대표가 석훈과 마주 앉았던 소파에서 일어서며 헤라의 표정을 살핀다. 그리고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며 손에
건네는 하얀 봉투는.......그녀가 어제 제출한 사직서였다.
민 대표가 방을 나가고,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팔걸이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석훈은 헤라에게 바른 시선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진한 회색의 광택이 도는 슈트로 몸을 감싸고 있는 그는 무척이나 도도해 보이고 진중한 무게감까지 느껴지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민 대표가 자리를 피해주고서 한참동안이나 벌쭉이 서 있던 헤라와 석훈 중,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헤라였다.
" 내가 무서워요? 입 잘못 놀려서 당신 망신살 뻗히게 할까봐....... 그래서 입막음 하러 온 건가요?"
팔을 꼬고 방문에 기대어 선 헤라가 석훈을 내려다 봤다.
그녀는 망가진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싶었다. 이성을 상실한 그깟 완력에, 겁을 집어먹었던 스스로의 정신을
재 무장 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 그렇다면 괜한 걸음 하셨네요. 나한테 올게 아니고 신 윤 석 씨한테 먼저 가서 입막음 당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던데요."
그리고 비아냥거릴 수 있는 만큼, 최대로 비아냥 거려주고 싶었다.
" 당신네 동네에 소문이 나지 않아야 할 일이잖아요. 아직 미혼인 대그룹의 상무이사가 거래처 여직원이나 농락하려
들었단 얘기는 수준 떨어지는 얘기잖아요. 아니.......성희롱 인가요?"
그러나 석훈은 인상을 쓰지도 그녀를 올려다보지도 않고 온 몸에 석고본이라도 뜨는 것인지 눈꺼풀 하나 깜박이지
않고 고정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헤라는 석훈에게서 시선을 돌려 가는 비가 떨어지는 창밖을 바라봤다.
균일하게 시멘트를 발라 놓은 것 같은 하늘이 음산하고 우울했다.
" 당신 계좌에 큰 거 두 장 넣었어. 확인 해 봐."
그 하늘만큼이나 음산하고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석훈이 밑도 끝도 없는 돈 얘기를 한다. 헤라는 큰 거 두장이라는
의미를 헤아리고 있었다.
도대체 저 인간이 제주도에서부터 말하는 큰 것 이란 돈은, 0 이 몇 개나 붙은 것을 뜻하는 걸까?
하늘색 수표를 말하는 것인지.......노란색 고액 수표를 말하는 것인지.......하긴 노란색이라고 다 액수가 같은 건
아니지만........하여튼 큰 거 두장 이라는 소리가 이백만 원이라는 소리로는 들리지 않았다.
저런 인간들에게 하늘색 수표는 큰 것이 절대 아닐 테니 말이다.
" 후~~~ 정말! 큰 것 두장 이라는 게........얼마를 지칭하는 건가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저한테 왜 그런 걸
주시는지부터 알아야 겠네요. 뭐예요? 큰 거 두장!"
네이비 색의 재킷을 힘주어 여민 헤라는 점점 그와 함께 한 공간이 초조해 지고 있는 중 이었다.
짜증이 난다. 남자 따위에게 겁을 먹어야 하는 현실에 화가 돋우는 중 이었다.
입마저도 석고로 붙어 버렸는지 한 일자로 꾹 다물고 있던 석훈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그녀를
향해 등을 돌린 채 그가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5분 정도의 침묵이 이어진 다음 이었다.
" 고 석 준 건에 대한 선금 지불 이야. 애초에 제시한 금액의 배를 주는 거요."
그가 헤라를 향해 돌아 섰다. 시멘트 색의 하늘 이었지만 정오가 다가오는 창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꽤 강했는지,
창가에 선 석훈의 표정은 보이지 않고 그의 몸체 실루엣만이 검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 그 건에 대해서 이미 고사 했을 텐데요. 더구나 전 이미 사표도 제출해놓은 상태입니다. 그 건을 이행 할만한
책임도 행사권도 없는 사람이라구요."
이 인간 무슨 속셈이야? 선금 이라니........어째서.......어쩐지 석훈에게 발목이 잡힌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헤라는
그가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사실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지만, 그건 허망한 메아리 일뿐 별 효력이 없는 말 인 듯
했다.
" 사표는 조금 전 민 대표에게 돌려받았을 테고, 책임에 대한 건.......아마 다시 한번 생각을 해봐야 할 거요."
역시나 그는 천천히 그녀가 석준의 스카우트 건을 맡아야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 왜 그래야 하지요? 송 석훈 이사님?"
헤라는 가슴을 펴고 고개를 빳빳이 들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준비를 갖춘다.
" 당신........형부가 진 빚 말이야. 아직 다 해결이 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지? 아마! "
형부?
"........."
" 내가 그 채권을 인수 했어. 잠실 집과 당신 언니 가게에 가압류 신청도 해 놓은 상태 인데, 그냥 두면 적어도
앞으로 한두 달 안으로 두개 부동산은 물론 가제 도구 일체까지 차압이 들어갈 거야.......만만치 않은 현실이지?
하지만 지금 당신 계좌에 있는 돈이면 그런 지저분한 일들 겪지 않고 모두 해결 될 것 같은데........어떤가? 진 대리.
당신 생각은?"
형부!!!!!망 할 놈의 인간! 헤라는 석훈을 쏘아 봤다. 그가 이런 일로 뻥을 친다거나 공갈협박을 할 인물이 아니라는
건 처음 제안을 받은 그 술집에서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그러나.......왜? 왜 이렇게까지 해서 자신을 엮어 넣으려는 것인지 그녀는 계산이 되지 않았다.
재원은 아침 일찍 부평의 공장을 들려오는 길이라 10시가 넘어서야 사무실로 들어 올수 있었다.
부평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헤라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그녀는 그제 밤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 통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할아버지 정 회장과 본사 이사진의 갑작스런 공장 방문 일정에 재원은 어제 하루 종일, 정신없이 공장을 둘러보고
책임자들에게 오폐수 정화 시설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했다.
정부의 환경 방침에 따라 강화된 대기업의 대규모 공업 시설에 대한 환경 정책에 정 회장이 부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원이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그의 비서가 아침 일찍 오비서가 다녀갔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자신의 책상위에 놓여진 하얀 색의 서류 봉투에 눈을 두며 입고 있던 아이보리색의 재킷을 벗어 올 걸이에
걸어둔다.
봉투위의 메모지 한 장! 오비서가 남겨 놓은 것이었다.
신상 추적 중 중요한 사항이 포함 돼 있기에, 급하게 가져다 드립니다. 라는 간단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재원은........헤라의 신상조사과정에서 오비서가 중요 사항 이라 할 만한 것이 뭐가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첫 장.......생년월일 에서부터 가족 사항과.......가족 하나하나의 학력과 재정 상태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조사가 되어
있었다. 알콜 중독센터에 입원 중인 그녀의 부친과 형부에 이르기까지........그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정밀한 조사에
재원은 잠시 놀란다.
그러나 정작 그의 몸이 휘청거린 사항은, 일부러 맨 마지막 장에 놓아 둔 것인 듯 헤라의 직업과 소속 회사에 대한
조사결과였다.
재원은 서류에 주던 눈을 감는다. 오해하거나 부풀려 생각하지 않고 냉정하게 생각을 하기 위한 노력 이었다.
아직 그 어떤 섣부른 예상을 해서도 안 된다. 서류상의 사실들과 정황증거들로 뜯어 맞추면 제주에서 그가 이상하게
여겼던 일들이 설명되기는 하지만, 아닐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는 헤라는.......그런 여자가 아니다. 미인계를 이용하는.......그런 것을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
재원의 머리는 그렇게 생각을 하려 했지만 사실, 아랫배에서부터 올라오는 울컥하는 무엇인가를 억누르기엔
정황들이 너무나 잘 들어맞았다.
그는 방금 벗어놓은 재킷을 도로 집어 들고 사무실을 나선다.
" 오후 스케줄 모두 취소시켜. 나 지금 나가면 안 들어 올 거야."
책상머리에 앉아 자신들의 상사가 거친 숨을 내쉬며 사무실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던 비서들은 저 성질에
누구하나 또 다치는 구나! 하는 예감들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 문을 제대로 닫지도 않고 큰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는 재원은 휴대폰을 꺼내어 손에 쥔 서류의 전화번호를
꾹꾹 누른다.
[ 네. 에이밀리언입니다.]
맑은 여자의 음성이 들려 왔다. 재원은 망설 일 것 없이 헤라의 이름을 댔다.
" 진 헤 라 씨 부탁 합니다."
[ 아.......Search (써치) 팀 진 대리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맑은 목소리의 여자가 되묻는다. 재원은 다시 한번 서류에 눈을 내려 헤라의 직급을 확인한다.
" 네."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Search (써치) 팀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
뚜뚜뚜 하는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다시 전화를 받는 목소리는 남자였다. 재원은 짜증이 난다.
휴대폰은 며칠째 불통인 그녀........그녀의 직장을 알아내고 직장으로 전화를 했지만 통화는 쉽지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은 마음이 급하다. 확인이 필요 했다. 그녀가 고 석 준의 스카우트 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석준과는 단순히 친구이고, 송 이사는........자신이 데려간 파티에서 만났던 것 뿐 이라는, 그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 '전부' 라는 확인을 해야 했던 것이다.
" 진 헤 라 씨 부탁합니다."
[ 진 대리님 지금 자리에 안계신데요. 메모에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휴대폰은 ]
" 아뇨. 메모 필요 없습니다. 진 헤라씨 지금 회사 내에 있기는 합니까?"
그가 신경질 적인 어조와 권위주의적인 말투로 묻자 상대는 잠깐 동안 이지만 말이 없었다.
[ 네.......잠시 대표님 방에 올라갔는데요. 어디시라고.]
" 회사 위치 좀 정확히 말해줘요."
재원이 다시 말을 자르고 자기 할말만 한다. 상대가 작은 소리로 한숨을 짓는 것 같더니 차근차근 위치를 설명해
주었다.
그는 인사도 없이 휴대폰 폴더를 닫아 버렸다. 재원에겐 지금 전화 받는 얼굴도 모르는 상대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있지 않았다.
오직! 그녀가 '에이밀리언'의 익큐티브 서치란 사실과, 고 석준과의 관계, 송 이사와의 의미심장한 분위기 등이 그의
머리를 뱅뱅 돌며 짐작들이 그 크기를 부풀려가고 있을 뿐 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가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지 않고 바로 확인 작업에 착수 했다는 것이다.
헤라는 석훈이 정말 원하는 일이 뭔지 궁금했다. 그걸 안다면 그가 처 놓은 이 그물에서 빠져 나올 방도가 떠오를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 점심시간 이네. 식사 하러 갈까? 더 자세한 얘기가 듣고 싶다면 밥 먹으면서 천천히 해줄 수도 있는데. 어때?"
처음과는 달리 그는 자신감을 회복 한 것 같았다. 헤라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던 석훈이 예전의 모습대로
능글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었던 것 이다.
헤라는 대답을 하지 않고 먼저 문을 나서는 석훈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는 헤라의 한쪽 팔을 잡아
당겨 자신의 옆을 붙어 서게 만들었다.
그녀가 고개는 돌리지도 않고 눈만 돌려 몸에 손대지 말라는 신호를 하자, 그는 '아차'하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실수를 인정한다.
의외다. 뻔뻔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그래도 역시 그날 일은 생각할수록 역겹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헤라는 동료 직원인 김 대리를 만났다. 그가 석훈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쭈뼛거리며 입을 연다.
" 진 대리.......30분 쯤 전에 자기 찾는 전화 왔었는데, 그게....... 남자야!"
그 딴에는 소곤거린다고 했지만 석훈의 귀는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석훈의 눈이 묘한 흥분으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헤라는 놓치지 않는다.
18층에서부터 내려오던 엘리베이터는 점심시간이라서인지 거의 층층 마다 서기를 반복하고, 헤라와 석훈과 김
대리는 안쪽으로 점점 밀려들어 가고 있었다.
한편, '에이밀리언'이 있는 20층 건물의 로비로 들어선 재원은 벽에 붙은 인포메이션을 훑어본다.
'에이밀리언'이 쓰는 층은 16~18층까지로 세 개의 층을 쓰고 있었다. 그는 인포메이션에 아래 책상 뒤 쪽으로 앉아
있는 남자에게 '에이밀리언'의 안내 데스크 위치를 물었다. 그리고 곧장 건물의 중앙에서 왼쪽, 세 대의
엘리베이터가 나란히 붙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가 로비의 중앙을 막 지나는 찰나, 세 대중 한 대의 엘리베이터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쏟아져 내린다.
꽉 들어찬 사람들의 제일 안쪽에 타고 있던 헤라와 두 남자가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의 뒤로 줄을 서 내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헤라는 어정쩡한 자세의 석훈과 김 대리를 뒤로 하고 얼른 먼저 내리려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때! 그녀의 눈
속을 얇은 면도 칼날처럼 파고드는 사람이 있었으니! 재원 이었다.
히~익!!! 저 남자가 여길.......왜?
그녀는 먼저 나서려던 몸을 돌려 김 대리 등 뒤로 날쌔게 숨는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김 대리의 신장은 헤라의 키를 약간 웃도는 169에서 170 정도. 정장을 하고 힐을 신은 헤라의
키를 감안 한다면 그의 머리는 헤라보다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젠장!!!!!!
그녀가 무릎을 구부리고 김 대리의 등에 붙자 석훈이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헤라를 내려다 봤다.
김 대리가 몸을 튼다.
" 진 대리? 왜 이래?"
" 가만 좀 있어봐. 얼른 문이나 닫힘 버튼 눌러."
헤라가 고개를 트는 김 대리의 얼굴을 바로 잡았다. 하지만 그의 손이 닫힌 버튼으로 가는 순간 석훈이 선수를 쳐
열림 버튼을 눌러 버렸다.
" 어차피 한번은 부딪힐 일 아니었어요? 진 대리?"
한 손은 허리에 얹고 발을 꼬고 서 있는 석훈이 낮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소름이 끼치든지 헤라의
목덜미에 난 부드러운 솜털이 일제히 몸을 세웠다.
" 이것도 당신 계획의 일부 인가요?"
그녀는 숨을 죽이며 석훈을 노려봤다.
열려진 채 멈추어 서있는 엘리베이터를 발견한 재원이 서두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급하던 차에 멈추어 진
엘리베이터에 누가 있는지도 확인을 하지 않고 발을 들여놓은 그가 석훈을 보자, 아직 밖에 있던 나머지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
" 안 타?"
여유 있는 웃음인지 교활한 웃음인지 하여간 그는 이죽거리는 입술로 재원을 당당하게 마주봤다.
" 자주 보네요. 송 이사님."
나머지 발을 들여놓은 재원이 웃음기 하나 머금지 않고 인사를 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재원은 그제야
안쪽에 서 있는 키가 작은 남자와 그리고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여자의 존재를 인식했다.
뒷모습만 봐도 안다. 여자는 헤라였다.
" 진 대리.......정 본부장 알지? 근데 인사도 안 해요?"
석훈이 노골적인 놀림의 말투로 그녀를 부른다. 그녀는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고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재원이 1층 버튼을 누른다. 지하 2층의 주차장 까지 내려갔던 엘리베이터가 다시 상승 한다.
1층 로비에서 문이 열리고 재원이 헤라의 손을 잡아 거칠게 끌고 내린다. 그러나 곧 석훈이 다시 헤라의 다른 팔을
잡아당기자 그녀는 두 남자 사이에 걸린 줄다리기용 밧줄이 되어 있었다.
" 나랑 점심 선약 있어. 어딜 끌고 가는 거야? 정 재 원."
어느새 석훈의 목소리엔 노여움이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헤라는 그가 왜 노여워해야 하는지.......정말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송 이사의 모든 행동이 상식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 웃겨 정말! 둘 다 이손 놓지 못해요?"
헤라가 붙들린 양 팔을 심하게 흔들어 두 남자의 손을 떼어 버렸다.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노여움에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두 남자는 어딘가 모르게 닮아 보인다고 그녀는 혼란의 순간에도 잠깐 생각을 했다.
" 끼리끼리.......친구만 유유상종 인줄 알았더니, 경쟁자들끼리도 닮나보네. 한 인간은 사탕발림에다가 보석으로 날
자빠트리려고 하고, 또 한 인간은 약점을 잡아내서 날 함정에 빠트리려고 하고. 당신네 둘 다 진짜루~ 재수 없는
것 알아요?"
앙알앙알 헤라는 앙칼스런 소리를 냈다. 이미 재원에게도 반 이상은 자빠트려진 몸 이었고, 석훈의 함정에도 반
넘게 빠져 버린 상태였다. 열 받는다. 내가 어쩌다.......남자 따위에게!!!!!!!
돈에 농락당하고 돈이 만든 수렁에 빠져 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화를 주체 하지 못했다. 그것도 남자에게.
하지만 그건 어쩜, 재원에게 줘버린 마음을 돌이켜 보려는 헤라 최후의 노력 인지도 모른다.
" 아무튼 재수야 있든 없던 간에. 나 제주도에서부터 당신네 둘 다 죽여 버리고 싶었거든~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누구도. 내 앞에서 얼쩡거리지 마! 절대!!!!! Never!!!! Forever!!!!! Whenever!!!! Understand???"
마지막!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열리려는 뚜껑을 억누르며 말을 했다. 가슴에서부터 시작되어 올라오는
수증기는 머리를 뜨겁게 달구고 극기야 그녀의 뚫어진 입에서 스팀이 새게 만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머뭇머뭇 서 있던 김 대리는 얼빠진 표정을 하고 그런 헤라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다.
두 남자로부터 등을 돌린 헤라는 그 김 대리의 팔짱을 성큼 끼고는 빙글빙글 도는 회전문을 향해 힘차게 걸음을
걷었다.
" 지.......진 대리!"
" 입 닥쳐. 김 대리. 아무것도 물어보지 마. 나 지금 무지 열 받았거든. 머리에서 김 올라오는 것 보이지? 그럼 입
다물고 조용히 나 따라와."
무언가를 물으려는 김 대리의 입을 거친 몇 마디로 봉해 버리고는 헤라는 무작정 인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 나중에 봅시다. 송 이사님."
재원은 회전문 밖으로 나가버린 헤라의 뒤를 쫓으며 석훈에겐 나중을 기약했다.
석훈과도 해결 봐야할 일이 두 건이나 남아 있었지만, 삼일 만에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던 헤라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 이었다.
얼마나 빠른 걸음 인지 그녀는 벌써 인파들 속에 섞여 저만치 50 미터 쯤 앞에 그 매혹적인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재원이 뛰기 시작했다. 흐린 하늘아래 습기를 잔뜩 머금은 7월의 대기는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지 않아도 충분히
끈적거리고 있었다.
" 헤라.......진 헤라!!!!"
뒤에서 그녀의 팔을 잡은 재원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50미터를 전력 질주 했지만 인파들을 피해 뛰는 일은 그
배의 힘을 소진시키는 일 이었다.
" 내말 알로 들었어요? 왜 따라오고 난리야?"
하지만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는 그의 팔을 거칠게 뿌리친다.
아이보리색 재킷 안에 입은 분홍색의 핀 스트라이프(가는 줄무늬)남방이 땀에 젖어 그의 가슴 근육에 달라붙어
있었다.
팔을 뿌리치면 서도.......그의 남성미를 감상하는 자신에게 헤라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제주도 사건 이후로 전 보다
더 남자가 싫은데.......무서운데.......소름끼치는데! 어째서 이 남자는 또 다시 예외의 대열에 첫 타자가 되는 걸까?
" 하~~하~~ 얘기 좀 해."
숨을 몰아쉬느라 실룩거리는 그의 강한 목선에서 그녀는 어느덧 그의 품에 안겼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이 속마음 이야 어떻든 간에. 재원은 자신을 피해 앞으로 나가려는 헤라를 막아서서 애가 타는 목소리로
매달린다.
김 대리가 그런 재원의 눈을 피해 슬그머니 팔짱을 낀 헤라의 팔을 풀어냈다.
" 후~~~~·삼일 동안 하루에......... 스무 번도 넘게 전화 했어."
그녀는 은근슬쩍 달아나는 김 대리를 느끼며 방금 전 머리를 점령한 재원과의 지난 시간들을 부정할만한 핑계들을
찾아냈다.
" 그래서요? 그래서 당신도 송 이사처럼 내 뒷조사 했나보죠? 그래서 다 알아냈어요? 알아내고 나니까 이게 뭔가 !
내 생각에 반은 맞았네! 비싼 팔찌 괜히 준 것 같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침대로 자빠트릴 수 있었는데! 팔찌
돌려받아야지! 달라 는 것 줬으면 큰 일 날 뻔 했네! 뭐, 그런 생각하고 온 거 아니에요?"
그녀가 속사포 같은 속도로 다다다 쏘아 대는 틈에 김 대리는 자리를 떴고, 재원은 난처한 얼굴과, 그 잘난 눈썹을
잔뜩 찌푸린 못 마땅한 표정 두 가지를 동시에 짓고 있었다.
" 너.......이 자리에서 네가 말한 개처럼 끌려갈래? 아니면 얌전한 고양이처럼 내 품에 안겨 갈래?"
그러다 문득 그의 입에서 나온 거친 말에 헤라는 필요이상으로 움찔했다. 물론 그녀도 재원에 대해 화가 나 있었다.
그렇지만 회사 까지 알고, 쫓아 까지 온 걸로 봐선, 아마 그는 헤라 이상으로 화가 났을 것이라는 것을 그녀의 뇌가
다시 한번 자각 시켜 주었던 것이다.
" 따라와. 너 네 회사 근처에서 망신살 뻗히지 말고."
그가 몸을 돌려 다시 그녀의 회사 방향을 걸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꼼짝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혼자 걷던 걸음을 멈춘 재원이 되 돌아온다. 그리고는 헤라의 어깨를 꽉 껴안아 자신의
옆구리에 접착시켜 발걸음을 떼게 했다.
그의 몸에선 무주에서처럼 시큼한 땀 냄새가 났고, 야릇한 향수 냄새도 섞여 나고 있었다.
37.
주차장으로 내려와 그녀를 자신의 벤츠 안으로 밀어 넣은 다음에야 재원은 안심이 됐다. 원하는 많은 것들을 골고루
갖고 있는 그다. 하지만 헤라는 늘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오히려 점점 멀어지기만 하는 아쉽고 애가 타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재원은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서류를 들이밀며 석훈과의 비즈니스를 다그쳐봤자 결과는 뻔했다.
지하 주차장을 나오자 굵은 빗방울이 차 유리를 두들긴다. 하늘은 찌뿌드드한 회색을 넘어서 시커먼 구름을
솟아오른 빌딩에 걸 정도로 낮고 빠르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차 전체를 힘차게 두들기는 빗소리에 재원이 작게 틀어놓은 '김건모'의 목소리가 그 소리에 묻혀
간간이 들려왔다.
비 그친 오후 같은 피아노 소리와.......건모의 달콤하고 나른한 우울.......그리고 토도독 토도독 벤츠의 천장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재원과 헤라 사이의 냉랭함을 풀어내고 있었다.
한 시간 가까이 한차 속에 있는 두 사람은 전혀 말을 하지 않는다. 재원의 차가 시내를 빠져나와 벌건 흙탕물이
번진 한강을 따라 양평으로 들어 설 때까지.......건모의 목소리만이 리-와인드 되고 리-와인드 되어 같은 음률과
같은 소리로 차안을 맴돌고 있을 뿐 이었다.
야트막한 산 아랫자락에 걸려 흐르는 뿌연 구름들.......와이퍼를 흔들며 빠이빠이를 하고 지나가는 맞은편 차도의
차들.......앞서 가는 차의 오렌지색 안개등.......빗속에 흐려진 시야처럼 헤라는 모든 것이 몽롱 했다.
운전을 하는 재원의 옆모습에 눈을 둔다. 하지만 시각보다도 후각이! 재원의 냄새가!.......눈을 감고 지우려 애쓸수록
강력하게 밀려들어와 그를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도록 했고,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도 없도록 만들었었다.
그 만의 냄새........새엄마의 냄새처럼 좋았다........하지만 그의 냄새는 두 가지 감정을 일으킨다. 안심과.......평온
혹은 위로 같은.......안온함과 두근거림 설렘 그리고 충동 같은 반사적 본능적 감정.
지금은.......두 가지 모두 그녀의 맘속에 일렁이고 있었다.
" 팔찌는 돌려받을 생각 말아요. 벌써 팔아먹었으니까."
창 밖으로 얼굴을 돌려 그녀는 의미와는 다르게 멍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일렁이는 마음의 파도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마음에 없는 얘기들을 쏟아내 그를 질리게 만들 필요가 있다 생각을 하고 있는 그녀였다.
" 어차피 준 물건, 하수도 구멍에 던져 넣든, 팔아먹든 상관 안 해."
앞을 향한 고개도, 눈도 돌리지 않은 그는, 비가 내리는 도로를 똑바로 직시 하고 있었다. 목소리는.......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하지만 재원의 말은 헤라의 오해를 부추기기엔 충분했다.
" 하~ 역시 의미 따위가 없는 선물 이었나 보네. 그렇게 말하는 것 보니! 설마 했던 나만 멍청해 진 거야."
팔짱을 껴 풀어지려던 마음의 근육을 다시 단단히 조인 그녀! 실망이 되고, 가슴에 끼었던 얇은 얼음막이 쩌~억
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내는 듯 했다.
가평까지.......두 사람은 서로를 외면 한 채로 각자의 창으로 흐르는 풍경에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탄 벤츠가, 키가 어른 허리까지 오는 이제 제법 연녹색이 선명해진 억새풀이 우거진 청평호의 어느
기슭에 세워졌다.
서울을 출발했던 2시간 전보다 비는 더 굵고 사납게 내린다.
재원이 팔을 뻗어 에어컨의 바람을 줄이고,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뒷좌석으로 던져 놨다.
에어컨의 냉기에 헤라는 팔을 감싸 안고 몸을 움츠린다.
" 딱! 한 가지만 묻자."
볼륨이 준 건모의 목소리를 비집고 재원이 입을 열었다.
" 지금 이전이야 어찌됐건.......현재 너.......송 이사하고 고 석준 사이에 끼어 있니?"
간단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질문. 그는 정확히 요점을 집어 그녀에게 물었다.
핸들에 두 팔을 다 올리고 허리를 굽혀 그 팔위에 턱을 걸친 재원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에 떠는 모습을
헤라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차의 앞 유리에 내려 꽂히는 빗줄기가 0.001초 사이로 수십 수백개이 왕관을 만들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순간들.......재원은 그 빗줄기의 수를 헤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것들에 정신을 집중 시킨다.
" 사직서 냈어요."
집중 시키던 정신이 확 하니 돌아오게 만드는 그녀의 대답.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헤라를 바로 쳐다봤다.
" 어째서?"
" 상황들이 그랬으니까.......석준이의 이적문제는 내가 포기해도 다른 Search(써치)가 다시 진행 시킬 테고, 난 그
일이 그다지 온당치 못한 일인데도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해야만 한다는 걸 납득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재원의 시선 속에서 헤라는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온 몸에 바짝 힘을 줬다.
" 회사 뿐 아니라 너 개인에게도 돌아가는 이익이 적지 않았을 텐데. 어려운 결정 아니었어?"
이 남자.......다 알고 있구나!
자신을 떠보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포기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인지 모를 그의 물음에 헤라는 재원을
마주 봤다.
약간은 이마를 찌푸리고 미간에도 작은 찡그림이 담긴 그의 표정은.......조금은 거만했고, 다소 초조해 보였으며,
그를 훨씬 성숙하게 느껴지게 했다.
" 돈.......중요한 거지만, 내 영혼을 팔정도로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헤라는 재원이 모든 사실을 다 알고도 화를 내지도 다그치지도 않는 모습에, 그 에게 서운하고 응어리졌던 일들을
조금이나마 덮어 둘 수 있는 상태에 다다른다.
" 영혼.......까지는 아니지 않아? 양심 정도만 얹어주면 되는 일 이었던 것 같은데."
운전석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은 재원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턱에 난 수염을 문지르며 자신의 질문에 초조하게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헤라는 재원이 원하는 대답을 알 것도 모를 것도 같다. 영혼까지 팔고 싶지는 않았단 그녀의 말........에 대해 그는
그 의미를 확인받고 싶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지, 그의 진심이 무엇이든 오해를 사는 것은 피하고 싶은 것일 뿐.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는 없었다.
" 윤석 씨가 그러더군요. 재원 씨 뒤통수치는 일만은 말라고........만약 처음부터 당신이 누군지 알았더라면.......그런
바보 같은 게임! 걸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때, 이미 난 석준이 일을 의뢰받은 상태였었으니까.......당신이 엮여있단
사실은 제주도에서 처음 알았어요......."
어쨌든, 자신의 말을 다 믿어줄지 알 수는 없었지만 헤라는 간단하고 명료하게 설명을 했다. 재원이 원하는 대답을
살짝 피해가면서, 그가 더는 묻질 않기를 바라면서.
차창의 유리에 부딪히는 빗물은 피아노 소리를 따라 흐르고.......청평호는 건모의 달콤한 목소리를 따라 하류로
밀려가고 있었다.
선명한 녹색의 억새풀은 바람을 타고 흔들흔들.......그리고 그들이 탄 벤츠는 흔들리는 억새풀 사이에서 비를 맞았다.
차안의 두 사람은.......빗소리와 청평호와 억새를 바라보며.......건모의 목소리에 젖어 들고 있다.
그런 풍경과 노래 탓이었을까? 헤라는 눈물이 난다. 하지만 훌쩍이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을 조용히 손으로 훔쳐
낼뿐, 흐느낄 수는 없었다.
재원은 아무리 그녀가 원해도 가질 수 없는 남자였고, 그녀 또한 아무리 재원이라도 그를 남자로써 진정 받아들일
수 있는지.......제주도 일 이후로 자신감을 잃은 상태였다.
" 믿어.......널 믿는다. 진 헤라."
창 밖으로 얼굴을 돌린 재원이 한참만에야 낮게 중얼 거렸다. 자칫 차를 두들기는 빗소리와 노래 소리에 묻힐 뻔한
그 말을 헤라는 용케도 알아들었다.
기쁘면서도.......서글픈 말. 믿는다.......는 그 말!
" 그래요? 근데 난.......왜 당신의 그 믿는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을까요?"
그녀는 반문한다. 대답을 원치 않는 물음 이었다.
" 네가 날........못 믿는다면, 그건 내 책임 이겠지. 내가.......행동을 그렇게 했으니까."
그는 제주도에서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재원의 마음을 믿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 일과 함께
그제의 목걸이 사건이었다.
확실히 제주도 일은 그녀에게 지독한 상처를 남기긴 했으나.......언뜻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목걸이 일은 헤라가
그의 마음을 가늠하는 가장 큰 척도가 되었던 것이었다.
" 제주도 일은.......당신 말대로 내 책임도 어느 정도는 있었어요. 당신이 알아내기 전에 사실대로
말했다면.......괜한 오해도 사지 않았을 테고. 뭐 물론 그렇다고 재원 씨 책임이 없다는 건 아니에요. 남자답지 못한
행동인건 인정 해야지요. 안 그래요?"
" 응......."
하지만 그의 마음을 가늠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되랴.......헤라는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목뒤로 넘기고 말았다.
엘리베이터에서 석훈과 셋이 마주쳤을 때만해도 정말 둘 다 주먹으로 몇 대씩 두들겨 패도 풀릴 것 같지 않던
마음이었는데........지금은 묘하게도 물에 젖은 종이배처럼 마음이 빗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듯 했다.
" 아우~ 추워. 에어컨이 너무 센가봐."
자신의 실수를 묵묵히 인정하는 재원에게 헤라는 딴청을 피웠다.
" 추워? 에어컨 제일 작게 틀었는데."
재원이 어깨를 감싸 안는 헤라를 향해 몸을 돌렸다.
" 뒷좌석에 내 겉옷 있는데.......잠깐."
그리고 그가 몸을 틀어 뒷좌석을 돌아다봤다. 좌석 위에 있어야할 옷이 헤라가 앉은 조수석 뒤쪽으로 떨어져 있었다.
조수석 등받이에 왼손을 짚고 떨어진 겉옷을 주우려던 재원이 손이 닿지 않는지
" 의자 좀 당겨 볼래?"
하고 말을 했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 손으로 더듬더듬하며 좌석을 앞으로 당길 레버를 찾는다. 그리고 바로 손에 걸린 좌석의
옆쪽의 작은 레버를 잡아 당겼다.
허걱~! 하지만 그 레버는 좌석을 이동시키는 레버가 아니라 좌석의 등받이를 뒤로 재끼는 레버였던 것이다.
순식간에 뒤로 재껴진 의자에 누워버린 헤라.
그리고 그 바람에 조수석에 왼손을 짚고 몸을 의지하고 있던 재원의 몸이 헤라의 가슴위로 그대로 쓰러진다.
두 시간 동안 리-와인드 되던 건모의 '야상곡'이 처음 시작으로 다시 돌아왔다. 벤츠의 천장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볼륨이 높아진다.
재원은 새삼스레 긴장을 했다. 한번도 헤라를 이렇게 깔고 누워 본적이 없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얇은 셔츠사이로 가슴과 가슴이 닿아 느껴지는 그녀의 감촉은 그의 손에 땀이 배이게 만들고 있었다.
멈칫멈칫 망설이는 동작으로 왼손을 들어 헤라의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그녀가 뿌리친다면 당연한 처사라 그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뿌리치지 않았다. 고르지만 조금은 빨라진 숨소리를 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재원의
눈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을 뿐 이었다.
그는 용기를 낸다. 그녀를 안는 일에 용기가 필요한 날이 오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지만........그리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아니.......오히려 가슴 전체가 저릿할 정도의 설렘을 선사하는 지금 이 순간이 그는 미치도록 소중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옅은 핑크색 립글로스가 발린 헤라의 입술을 향해 그가 얼굴을 숙였다. 그리고 서서히 첫 키스를 하던 십대시절의
감성으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달콤한 딸기 향을 음미하며 혀를 집어넣는다. 에어컨 바람에 싸늘해진 그녀의 볼과는 다르게 입술과 혀는 뜨겁고
보드라웠다.
재원의 입술이 닿자 헤라의 심장이 점점 더 세차게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그리웠던 그의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자
그녀의 본능적 충동이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불안하다.
부드럽게 시작한 그의 키스가 격렬해지고, 셔츠를 파고드는 그의 손에 그녀는 기도가 좁아지던 제주도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가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몸을 더듬는 순간이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공포는 몸 스스로가
숨통을 조여오던 그 순간 이었다.
격렬해지는 심장........뜨거워지는 눈과 뇌로 피가 몰려드는 듯한 느낌.......비슷했다.
" 하지.......하지 마!"
겹쳐진 재원의 입술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쓰던 헤라는 무의식적으로 차 문의 열림 장치를 잡아 당겼다.
그러자 벌컥 열려버린 문틈으로 그녀의 몸이 곤두박질친다.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비와 물이 고인 차갑고 질퍽한
흙바닥이 헤라의 몸을 맞았다.
놀란 재원이 조수석으로 뛰듯 건너와 차에서 뛰어 내린다.
" 괜찮아? 헤라야. 진 헤라."
그녀의 허리를 안아 흙바닥위에서 일으키며 재원은 정신이 아득해져 옴을 느껴야 했다.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며 가슴을 쥐는 그녀를 보자 윤석이 얘기해주었던 그날의 일이 눈앞에서 재생되는 것처럼
보였다.
" 미안. 정말 미안.......미안해. 그러니까 숨 셔봐. 숨 쉴 수 있지? 응?"
진흙탕 속에서 헤라와 마주 앉은 재원은 정신을 가다듬어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다. 헤라가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에 헤라의 긴 머리카락은 붉은 흙과 잔풀이 묻어 엉망이 되어 있다. 하지만 재원은 그 엉망인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인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촤아아 하는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헤라가 재원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와 눈을 마주했다.
내리는 빗속에서도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은 볼 수가 있었다.
" 나........흑흑! 재원 씨가 원하는 거 흑!.......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아무 것도.......흑흑흑~ 결혼은
물론이고, 같이 잠자리를 해주는 것조차도 해줄 수가 없다구~ 근데~ 허엉엉~ 난, 난 왜? 어째서? 당신 마음이
갖고 싶은 거니? 응?.......흑흑~ 재원 씨! 허어엉~ 엉엉."
그리고 곧 그녀는 대성통곡을 했다. 어린아이처럼........ 흙탕물 속에 주저앉아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그녀는 울고
또 울었다.
" 송 석 훈이 움직임 요새 어떤가? 오비서."
정 회장은 태풍이 몰고 온 굵은 빗줄기에 눈을 고정시키고 등 뒤에 서 있는 오비서에게 묻는다.
" 그게........"
말을 망설이는 20년 충정의 비서, 정 회장은 덥수룩한 하얀 눈썹아래의 눈을 치켜떴다.
" 우리 연구원 빼내는 일 말고, 다른 무슨 일이라도 벌리고 있는 거야? 녀석이?"
그리고 좋지 않은 예감 속에 다시 물었다.
" 네.......아니,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 본부장 하고 송 이사 사이에 여자가 끼어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나! 오비서의 발언에 정 회장은 입을 다물었다.
" 얼핏 보기엔 정 본부장 여자를 송 이사가 집적거리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애매한 것이........ 여자가 비즈니스
상으로도 얽혀있어서 송 이사가 일부러 접근 시킨 뒤, 무슨 일을 꾸미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예감은 좋지
않습니다."
오비서의 짧은 설명에 정 회장이 가만히 눈을 감고 머리를 의자에 기댄다. 오비서는 그런 회장 앞에서 그의 시름을
짐작이라도 하는 듯 무거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 송 석훈이 그 녀석이.......한쪽 핏줄이지만, 그래도 제 동생인 것을! 아주 확실히 밟으려 드는구먼! 우리
재원이를."
회장의 걱정스런 목소리......! 노여움보다는 걱정과 한숨이 섞인 그의 목소리가.......찻잔을 들고 문 밖에 서 있던
재원 모친의 귀를 울렸다.
38.
" 3시다. 회사로 들어가긴 옷 꼴이 그러네. 그 모양으로 너 네 집에 그냥 보내기도 그렇고, 내 아파트로 가자."
벤츠의 핸들을 잡으며 재원이 중얼 거렸다. 두 사람 모두 머드레슬링 이라도 한판 치르고 난 몰골 이었다.
한 차례의 발작 아닌 발작 때문 이었는지 헤라는 곧 잠이 들었다. 재원은 좌석 뒤에서 주은 자신의 재킷을 그녀에게
덮어주고 에어컨을 끈다.
젖은 몸에 냉기가 스며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운전을 하고 가는 동안 재원은 복잡한 지금의 상태를 머리 속에서 정리하기 시작한다. 헤라.......무언가 의도가
수상한 석훈의 비즈니스에 그녀가 엮여있는 상황부터.......제주도의 일까지 그는 석훈의 목을 쥐고 흔들어버리고
싶은 기분 이었다.
헤라가 일부러 자신에게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은 믿고 싶었다. 믿는다. 사랑하니까. 하지만 설령 거짓이라 해도
이제 그 사실에 대해서는 절대 묻지도 캐지도 않으리라 그는 다짐했다.
때론 진실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린 시절 이미 뼈저리게 배우고 살아 온 재원 이었다.
그러나 그냥 넘어 갈수 없는 일은 있다. 송 석 훈! 헤라의 의도는 아닐지라도, 석훈의 의도가 그녀를 이용해 자신을
괴롭히려 하고 있는 것에 있다는 이 느낌! 누가 봐도.......적의가 한눈에 느껴지는 그의 행동은 짚고 넘어가야 할 일
이었다.
비가 오고.......4시가 넘어서자 교통 상황은 악화가 됐다. 구리를 빠져나오는 길이 제일 어렵고 오랜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래도 다행 인 일은 옆에 앉은 헤라가 깊은 잠에 빠져 제법 세근 거리는 숨을 안정되게 쉬고 있는 것이었다.
아까 빗속에서는 정말 그녀가 잘못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재원은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었다.
멍청한 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보이냐? 정 재 원? 송 석 훈 그 개새끼 보다! 네가 더 한심한 놈이라구.!!!!
알아?
그는 자책감으로 험악해진 얼굴로 운전을 하고 있었다. 차 유리에 성애가 차오르기에 반쯤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맞은편 차선으로 지나가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수연은 순간 재원의 얼굴을 다시 확인 했다. 분명 그의 벤츠였고, 옆에 탄 여자는 헤라 같았다.
그런데 두 사람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어디서 씨름이라도 하고 온 것인지 조난이라도 당했다가 살아나온
것인지, 하여간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게 사실 이었다.
서로의 차 안, 교통정체로 지체된 도로에서 그와 눈이 마주친다. 수연은 숨을 멈추었다.
그의 눈이 마주치기는 했지만 재원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차창에 왼 팔을 얹어 머리를 받치고 한 손으로 운전을 하는 그는 무척이나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재원의 벤츠와 엇갈려 지나는 그 짧은 순간.......수연은 그녀가 정 재 원 이라는 남자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불행한 현실을 깨닫게 됐다.
휴대폰이 울린다.
" 네. 어머님.......거의 다 왔어요. 도로 사정이 좀 그래서요.......네.......아직 30분 정도 더 걸릴 것
같은데........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네.......네. 그럼 조금 있다가 뵈어요....... 네 어머님."
재원 모친의 부름을 받고 연구소를 나와 그의 본가로 들어가는 길! 그 길에서 수연은 그녀를 거부하는 정혼 자와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마주쳤던 것이다.
뉴욕에서.......그 에게 당한 모욕은 잠시 그녀를 주춤하게 만들었었다. 돌아보지 않는 남자에게 매달리는 건
자신답지 않다 생각하던 그녀였다.
그러나 이젠 늦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재원을 갖고 싶은 수연 이었다. 지난날 그와의 만남을 시큰둥하게 여겼던
시간들이 절실한 후회를 만든다.
6시가 다 되서야 아파트로 들어온 두 사람. 재원은 헤라가 먼저 뜨거운 샤워를 하게하고, 그는 따뜻한 커피를 받아
몸을 풀고 있었다.
젖은 셔츠를 벗어 놓고 청바지만 걸친 채로 그는 소파에 등을 묻는다. 따뜻한 커피가 빈속으로 넘어가자 그는 그제
서야 헤라와 자신이 점심 식사도 걸러버렸단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시장기가 돌기보다는 물기로 인해 차가워진 몸이 뜨거운 커피로 덥혀지는 느낌에 그는 큰 숨을 내쉰다.
" .......샤워해요."
욕실에서 커다란 타월 한 장으로 몸을 가린 헤라가 나왔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건강한 혈색대신 창백해진 그녀였다.
" 어. 방에 들어가서 한 숨 자라. 8시쯤 깨워줄게."
재원이 일어서 욕실 앞에 서 있는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샴푸냄새와 따뜻한 습기가 그녀의 몸에서 올라왔다.
잠시, 10센티도 안되는 거리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재원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몸보다 눈과 고개를 먼저
돌려 욕실로 들어갔다.
헤라는 침실의 벽장을 열어 언젠 가처럼 그의 새하얀 면 티셔츠 한 장을 꺼내어 맨몸에 걸친다.
비를 맞은 뒤, 뜨거운 샤워 때문인지 온 몸이 노곤해지고 있었다.
재원의 냄새가 가득 베인 부드럽고 차가운 감촉의 침대 속으로 몸을 눕히며 그녀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만 했다.
송 이사의 함정! 어떻게 지나가야 할 것인가? 재원은 송 이사가 새로 파놓은 함정을 제외하고는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석준이 만났다던 회사의 고위 간부라는 사람도 아마 재원 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무주에서 석준이 재원이 어떤
사람인줄 아느냐 물었던 것이 란 걸 헤라는 이제야 알았다.
송 이사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가족 모두 길거리로 나 앉는다. 그것도 당장 한두 달
안으로.......그렇지만.
" .......잠들었어?"
거기까지 생각. 샤워를 끝낸 재원이 들어오는 소리에 헤라는 모로 누운 채 잠이 든 척 했다.
침대로 올라오는 그의 무게가 느껴졌다. 재원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지 않았다. 그냥 이불 위로 누워 헤라의 잠든
등에 가만히 이마를 가져다 댈 뿐........껴안지도.......몸을 붙여 오지도 않는다.
그의 따뜻한 입김이 등에 느껴진다. 로즈마리 향내의 비누냄새가 그의 체취와 섞여 헤라의 코를 간질였다.
" 믿어.........널 믿어."
차 안에서 한 말........그는 마치 스스로에게 주문이라도 걸 듯 계속 그렇게 중얼거렸다.
" 네가.......날 배신해도, 널 믿어. 내 뒤통수를 쳐도.......그건 네 뜻이 아닐 거야. 그래서 난 널 믿는다. 진 헤 라."
모순 된 말들을 하면서도 그는 계속 믿는다는 말을 반복했다.
" 다만, 새엄마처럼........그렇게 날 버리지만 마라. 바람 몰아치는 벼랑 끝에....... 남겨두지만 마. 그럼 돼. 네가 뭘
해도 널 용서할거다."
아이같이.......그는 헤라 앞에서 모든 경계를 풀어놓고 가슴 가장 안쪽에 아프게 매달려 있는 이 영 란의 얘기를
했다.
그녀가 듣거나 말거나.......상관없이,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매 하루하루 그의 24시간 모두를 점령해 가고 있는
헤라에게 그는 모든 관용과 사랑을 허락하고 있었다.
다시는 질투라는 이름의 어리석은 감정에 농락당하지 않길 바라며........
그러면서도........석훈에 대한 적의감은 그 농도가 짙어져 가고 있는 것을 재원은 불안으로 느껴야 했다.
재원이 조용해지자 헤라는 눈을 떴다. 그리고 송 이사의 돈을 모두 돌려줘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가족 모두가 고생을 해야겠지만, 불쌍한 새엄마가 고생을 해야겠지만.......그건 가족들의 몫 이었다. 그리고 지금
헤라가 재원에게 줄 수 있는 것은........그것 뿐 이었다.
그가 뒤통수를 쳐도 된단 말을 했지만, 그건 아마도 그녀가 자신을 배신했을 때를 대비한 마음의 준비, 각오 같은
것이 아닐까 나름대로 짐작을 했다.
잠에 빠진 척하고 있었던 걸까? 재원의 팔이 이불 위로 헤라의 허리를 안는다. 그의 향기가 폐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순간이지만 행복하게 했다.
.......그와 접촉하는 매 순간마다 그렇듯이 심장은 기분 좋은 속도로 펌프질을 해대며 혈액을 몰아 뇌로 이동 시키고
있었다.
그로인해 뇌의 신경세포를 자극하는 PEA가 분비되고.......헤라는 사랑의 한쪽 면을 절감하기 시작 했다.
그의 냄새가 행복했지만 기관지를 중심으로 양쪽 가슴을 조이는 뻐근한 통증이 엄습해왔다. 그녀의 머리보다 가슴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넌 정 재원이란 남자를 벌써부터 사랑하고 있었다고....... 헤라는 뻐근하다 못해 알싸해지는 가슴을 쥐고 통증을
참아보려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감정이 몸을 아프게 하다니.......사랑이란 만만치 않은 놈이구나! 그래도 사랑........넌 너무 아프다........공포보다
더........더 내 가슴을 조이는 구나!
재원이 눈을 뜬 건 현관의 자동 잠금장치의 번호판이 눌리는 아주 미세한 소리에 의해서였다.
이불을 덮지 않고 잠이 들었었던 탓인지.......목 안쪽이 따끔거리는 것이 그리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누구인지.
짐작이 가는 재원은 몸을 일으켜 깊이 잠이든 헤라를 두고 거실로 나왔다.
침실 문을 살짝 닫고 방문자를 맞이하기 위해 나온 시간은........8시를 약간 넘기고 있었다.
" 오셨어요?"
습관대로 위통은 맨몸인체로 하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상태로 그는 모친을 맞았다.
" 잤니? 저녁 약속은 잊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취소시킨 스케줄에 모친과의 저녁 약속이 있었던 것을 그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근엄한 표정의 모친이 현관에 놓여진 헤라의 정장 구두를 봤다. 그리고 잠시 낭패인 듯한
얼굴이 되더니 재원을 향해 묻는 눈을 해보였다.
" 지난번 그 여자니?"
" 네."
그가 모친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당당하게 대답을 했다. 지난번처럼 당황스러워 하거나 하는 기색이 없는
아들의 얼굴에 오히려 모친이 당황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뭔가 각오라도 되어 있던 것처럼 당황함을 쉽게 누르고 평소의 표정을 되찾고 있었다.
" 어미는 안다. 네가 한 여자하고 오래가지 않는 다는 것........그래서 네가 아무여자나 만나고 다녀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이번 여자는 혹시나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웬만하면 즐기는 건 호텔로 가서 해. 집으로 끌어들이지
말고."
모친은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진심어린 충고를 했다. 부와 명예를 지닌 아들에게 여자가 꼬이는 일은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그녀였다. 그녀의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아들도 같은 것이라 그렇게 생각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친의 말을 받아들이는 재원의 입장은 달랐다.
끌어들이다.......또 저 표현! 이번에는 더더욱 모친의 그런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재원이었지만 헤라가 자고
있기에, 시끄러운 소리를 삼간다.
" 즐기는 거 아니에요. 새엄마."
대신 간단하게 말을 바로 잡았다.
" 아니야? "
" 네. 그런 여자 아니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 그럼........왜 집에 데리고 오는 거니? 그런 것도 아니면서 어째서 네 침대에 같이 있는 건지 난 이해할 수가
없구나!"
도저히 아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고개를 저으며 모친은 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 수연이 같이 왔다."
그리고는 무슨 통보라도 하는 양 수연의 동행을 알린다. 재원의 미간에 주름에 잡힌다. 입을 꾹 다물고 어떤 말도
하지 않는 그의 행동에 모친은 놀라움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아들의 다른 모습.
그녀는 직감적으로 시아버지 鄭 회장의 방에서 엿들은 얘기를 떠올렸다.
송 석 훈과 사이에 여자가 있다는........그 여자가 지금 재원의 방에 있는, 저번의 그 여자라는 예감을 모친은 했다.
" 어머님........"
어색한 침묵 사이로 수연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재원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주방으로 걸어 들어간다.
여과기에 올려진 커피를 따른 그는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다른 한 손은 트레이닝복의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식탁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수연은 재원을 따라 들어와 들고 온 꾸러미를 풀었다.
" 이번 주 토요일로 양가 상견례 날짜 잡았다. 2시 그랜드 호텔 한식부야. 오늘처럼 약속 잊는 일 없도록 해라.
수연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수연과 재원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시간에 모친이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아들의 침실에 있는 헤라가 듣길
바라며 한 말 이었다.
재원이 커피가 든 잔을 식탁 유리에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고 거실로 나온다.
" 가세요! 새엄마."
그리고 다짜고짜 모친의 가방을 집어 들고 현관문 앞으로 나와 섰다.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수연이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뛰어 나오고, 모친은 굳어진 얼굴로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헤라는 밖에서 들려오는 두런두런한 말소리에 잠을 깼다. 재원이 누웠던 옆 자리엔 온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이미 한참 전에 깬 모양이라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무슨 TV 소리를 저렇게 크게 틀은 거지? 하며 그녀는 침대를 빠져 나와 닫혀 진 침실 문을 열었다.
눈을 부시게 하는 거실의 밝은 불빛........과 현관 앞으로 서 있는 재원........켜져 있지 않은 TV. 헤라는 얼굴을
가리는 헝클어진 그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잠에서 덜 깬 머리를 흔들었다.
" 제대로 된 차림새를 하는 날이 없는 아가씨구먼!"
이어 그녀의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있었다. 헤라는 재원을 향하던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오는
소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 가세요!!!"
재원이 소파로 다가와 모친의 팔을 거칠게 잡아 일으킨다. 그의 목소리가 좀 전 보다 더 격앙 되어 있었다.
" 버릇없는 녀석! 이 손 떼지 못하겠니?"
다른 사람에겐 다혈질의 성격을 감추지 않는 그였지만 모친에겐 단 한번도 큰 소리를 낸 적 없는 아들 이다.
그런데.......지금 그는 모친의 눈을 마주하지도 않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목소리는 고압적이기 이를 데가 없었다.
" 민 수 연 너도 얼른 나가."
그가 수연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모친은 흠칫 하는 마음으로 아들을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 표정.......19년 전 니스에서 홀로 돌아온 열
살짜리 사내아이가 하고 있던 그 표정을 지금 아들은 다시 하고 있었다.
모친은 바로 본 것이다. 재원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을 채우던 모든 것이 빠져나가 버리고........기대하던 모든
것이 허물어져 버리는 것 같았던 그 막막함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그였다.
헤라를 잃는 순간이 그때와 같은 상실감을 안겨 줄 것이라는 걸 그는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예감이 그를 분노하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 버렸다.
" 내일 집으로 갈게요. 지금은 가 주세요. 새엄마."
모친의 흔들리는 두 눈에 재원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모친의 팔을 거세게 잡아 쥔 손에서도 힘이 빠져
나간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당신의 아들이 될 수 없는 재원을 늘 갈망해 왔다. 곁에 붙들어두고 당신만의
자식이 되어주길 간절히 바래왔다.
그러나 무성한 소문들을 피해 그런 아들을 뉴욕으로 보내야만 했고, 15년을 띄엄띄엄 1년에 6개월씩 아들과
함께하기 위해 지극정성으로 미국을 제집 안방 드나들 듯 다닌 그녀였다.
그런 모친의 마음을 헤아리기에 한번도 모친을 실망시킨 적 없는 재원이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노력하고 있었고,
모친에게 보내는 애정에도 틈을 보인 적 또한 없었다.
하지만........헤라를.......그녀를........잃게 하는 일은........절대! 절대로! 용납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외면하는 아들의 손에서 가방을 받아 들은 모친은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녀는 현과 문을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헤라를 다시 한번 쳐다봤다.
" 수연아 먼저 나가 있을래?"
수연을 먼저 밖으로 내 보낸 모친이 재원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묻는다.
" 저 아가씨가 MTN 송 석 훈 이사 하고 사이에 끼어있는 아가씨 맞니?"
헤라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창백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침실의 문기둥에 등을 의지해야만 했다.
재원이 대답을 하지 않는다. 모친은 아들의 태도에서 긍정임을 눈치 채고 더는 다른 말을 묻지 않았다.
대신 헤라를 향해 모진 말을 해댔다.
" 첫 인상 보다 질이 떨어지는 아가씨로군요. 재벌 家(가) 아들이라면 가리지 않고 껄떡대다니 .......다음에 다시는
이곳에서 마주치는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요. 뭐, 뭔가가 정 궁하다면 송 상무 한 사람한테나 다리를 걸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회장님이나 나나, 아가씨 일을 안 이상 우리 재원이 앞에 얼쩡거리게 놔두지는 않을 테니까."
" 새엄마!!!"
재원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모친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녀의 등을 열려진 현관문 밖으로 밀어냈다. 문 밖에서 마주 선
모자는 잠깐 동안 할말을 잃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던 모친이 그를 돌아본다.
" 넌........내 아들이야.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가며 내가 키운 내 자식 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물 섞인 목소리로 모친은 재원의 맘을 흔들어 놓았다. 그는 그런 모친의 얼굴을 외면하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도 전에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
집안 이리저리 헤라를 찾아다닌 재원은 주방 안쪽의 세탁실 안에서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는 이제 막 건조가 끝난, 구기적구기적 거리는 정장 스커트를 걸치고 허리의 후크를 채우는 중 이었다.
재원은 지금 일어난 사태에 대해 뭔가 변명을 해줘야 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스커트를 다 입고 소라 색 셔츠의 단추를 채운 그녀는 옆에 선 재원에게 단 한번의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정장 재킷을 손에 쥐고 세탁실 문 앞에 선 그를 스쳐 거실로 나왔다. 재원이 다급한 걸음으로 그녀를 쫓아온다.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가방을 챙겨든 헤라는 지체 없이 현관으로 향했다.
" 잠깐.......기다려. 데려다 줄게."
재원이 그녀의 팔을 잡아 서둘러 나가려는 그녀를 제지했다. 헤라는 뒤 돌아 보지 않는다.
" 됐어요. 그리 늦은 시간 아니야. 버스도 있고, 지하철도 있어요."
잡혀진 팔을 뿌리치며 헤라는 현관문의 손잡이를 돌린다. 그러나 재원의 손이 헤라의 손위로 겹쳐지며 열리던 문을
도로 닫히게 만들었다.
삐리릭~ 하는 전자음이 나고 문이 다시 잠긴다. 헤라는 재원의 양팔 안에 갇혀 잠겨진 문을 등으로 기대고 그를
올려다봤다.
" 창백하다. 혼자 가는 거 위험해!"
그녀를 내려다보는 재원의 눈은 어둡고 지쳐 보였다. 당연하다. 헤라에게도 그렇지만 그에게도 오늘 하루는
감당하기 힘든 일투성이였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녀와는 달리, 재원은 미쳐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로 석훈과 헤라에 의해서
혼란의 바다에 던져져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면서도 헤라는 모진 말을 한다.
" 이제 다시는 서로 볼일 없는 사이에.......그런 걱정은 오버에요."
얼굴을 내려 그의 눈을 피했다. 침대에 누워 등에 얼굴을 묻고 그가 하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버리지만 말라는........남겨두지만 말라는........그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만 있으라는 뜻이란 걸 알고 있는
그녀였다.
" 그 따위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재원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눈동자는 어둡다 못해 암울하게 변해갔다.
" 나 같은 여자가 당신한테 무슨 쓸모가 있다고 이래요! 난 이제 무용지물이야. 당신이 모든 걸 안 이상 석준이를
빼가는 것도 그렇고, TDMA 기술을 빼내는 것도, 물 건너 간 일 이라구! 더는 날 붙들어두지 않아도 당신이 피해 볼
일은 없어 이젠!"
헤라는 방어막이 필요했다.
그에게 가 버린 마음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믿는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던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서라도,
그의 마음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다면........어쩜 그와의 모든 일이 정리되지 않을까! 하는, 궁핍한 도피처를
마련하기 위한 이기적인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기로 했다. 그가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달콤한 말들로 유혹했던 것이라고. 억지로라도
그렇게 믿기로 헤라는 결심 한다.
" 입 다물어 진 헤 라. 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그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려 왔다. 그 떨림이 전해진 것인지 상의를 입지 않은 재원의 목에 걸린 그 얇은 백색의
목걸이 매달도 덩달아 흔들린다.
흔들리는 매달에 시선을 고정 시킨 헤라는 재원의 자격 없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사실이라서 더욱 가슴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 그래! 자격 없어. 그러니까 지저분하게 날 붙잡지 말아요. 피차 서로 이용해 먹고 이젠 그 가치가 다 됐다는 걸
인정 하자 그 말 이야."
그녀가 먼저 언성을 높였다.
" 닥치라고 했잖아!!!!!"
그러자 헤라의 억지소리에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재원이 소리를 지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왼 주먹이 강철의
현관문을 내리쳤다.
그 힘이 어찌나 셌던지, 지~잉 하는 쇠의 떨림이 그녀의 등줄기를 따라 느껴졌다.
헤라는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수습하려 한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친 숨소리.......부들부들 떨고 있는 주먹. 감아버린 눈. 헤라는 재원으로부터 몸을 돌려 잠겨진 문을 열었다.
등 뒤로 다시 한번 삐리릭~ 하는 전자음과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헤라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재원은 뒤따라 나오지 않는다.
헤라가 나가고.......재원은 한동안 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그녀가 가버린 것을
확인 했으면서도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생각을 해야 했다. 아직은 냉정함이 남아 있을 때,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수천 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鄭(정)씨 일가의 5대 장손으로써 물려받은 자리이고 능력이지만,
노력 없이 얻어진 자리는 아니었다.
그러므로........풀 수 있다. 그녀를 잃지 않으려 노력 한다면........얻어질 것이다. 얻어질........그러나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걸 뼈저리게 경험 하지 않았던가.......이미 열 살 때.
희망과 절망감이 교차하다 결국 절망감이 그의 가슴을 타고 흐물흐물 머리 속으로 흘러들었다. 재원은 힘없이 발을
옮긴다.
언제부터 인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고 휴대폰을 찾아 윤석의 단축 번호를 눌렀다.
" 나야. 송 석훈이 자식 뒷조사 좀 해줘.......... 모조리 다........티끌만한 것 하나도 남기지 말고 샅샅이 뒤져서
가져다 줘........알고 있는 신상명세부터.........사적인 자금거래나 자금 운용까지 몽땅!....... 여자관계하고 宋(송) 씨
패밀리들 움직임 까지 다."
오 비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헤라의 얘기를 모친이 알고 있는 걸로 봐서는 이미 할아버지의 귀에까지 그 얘기가
들어간 것은 확실한 사실 이었다.
그가 석훈을 뒤지는 것을 만약 할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일이 더 꼬일 지도 모른다. 아니 꼬이는 선을 넘어 헤라가
다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걱정마저 일었다.
할아버지나 석훈의 생각을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재원으로써는 그렇게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 이었다.
39-1
" 아!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연구소의 직원 휴게실에서 만난 석준과 재원은 먼저 악수를 했다. 왠지 두 달 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여위어
보이는 재원의 모습에 석준은 일주일 전 만난 헤라를 떠올렸다.
지나치게 눈이 부신 정오의 햇살이 커다란 창으로 들어와 휴게실 안은 건물 밖의 정원보다도 밝았다. 그리고 그
밝음의 지원을 받아 석준은 재원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볼 기회를 갖았다.
재원의 얼굴을 왜 뜯어보는가.......그건, 그의 첫사랑 여자가, 사랑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머릿속에 새겨
넣기 위함 이었다.
그는 안 되는 것에 집착하는 성미도 아니고 끊고 맺는 것도 확실한 성격 이었다. 정 재 원과 자신이 경쟁이 될
것인지 그는 지금부터 따져볼 참 이었던 것이다.
" 미리 연락 주셨으면 밖에서 뵈었을 텐데요. 직원 휴게실이라.......불편하지 않으실지."
자판기에서 음료수 두개를 뽑아온 석준이 재원에게 음료수를 건넸다.
" 아니요.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괜찮아요."
" 네."
나란히 음료수의 캔을 딴 두 남자는 어색함을 느끼면서 차가운 음료수를 목으로 넘겼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지 않고 나란히 앉은 것에 안도를 하면서 말이다.
" 지난번 무주에서 뵀을 때.......아는 척 하지 말라 그러시는 것 같아서 인사드리지 않았습니다."
석준이 먼저 말을 시작했다. 재원은 음료수 캔을 든 손을 깍지 끼고 허리를 숙여 무릎에 팔을 의지 하고 있었다.
" 아.......그래요."
그 모습엔 망설임이 있는 것 같기도 한 것이, 재벌가의 후계자라기 보단 그저 평범한 한 남자로 보이게 했다.
" 제게 뭔가 물을 것이 있으십니까?"
" 물론........"
" 그럼. 어서 물으십시오. 본부장 님."
창 밖으로 쏜살같이 날아가는 까치 한 마리에 시선을 주던 석준이 재원의 말을 재촉한다. 그는 이미 30분전,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재원이 찾아온 이유를 대충 짐작 하고 있는 터였으므로 대답은 준비 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
가지였다.
" 헤라.......지난주에 만났을 때, 무슨 말 없었나요?"
재원이 허리를 일으켜 석준을 보며 묻는다.
석준은 예상하고 있던 질문에 약간이지만 대답에 뜸을 들였다. 재원이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대답을 해야 할 것인지를 판단하고 있는 중 이었다.
" 헤라가 하는 말이, 다른 search(써치)가 접근해 오더라도 제가 이번 스카우트 건에서 빠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더군요. 자기도 다른 회사로 옮길 거라면서.......아시죠? 사직서 낸 것."
그러나 석준은 이유는 말하지 않고 애매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재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다.
말을 삼가는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 고 석 준 씨. 우리 GH 직원 아닙니까? 헤라의 친구이기 전에 고 석 준 씨는 내가 관리하는 직원이에요. 솔직해
집시다."
헤라와 함께 있을 때의 장난 끼가 배어 있던 표정과는 180도 딴 판으로 그의 표정은 딱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석준은 캔에 남은 음료수를 비우고 잠시 말을 끊었다.
" 헤라한테........진심이십니까? 솔직해지자고 그러셨죠? 헤라 친구로서 라면 그러겠습니다."
석준의 도전에 재원의 표정이 꿈틀거린다. 그는 헤라와의 사이에 또 하나의 난제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 왜? 내가 진심이 아닐 거라 생각을 하는 겁니까?"
재원이 자리에서 일어서 분리수거함 쪽으로 걸어가 빈 캔을 던져 넣는다.
" 우리 같은 서민들은.......그렇게 생각합니다. 본부장님 같은 분 주위엔 굉장한 여자들이 줄을 섰을 거라 뭐 그런
식으로 알고 있는 거지요. 헤라가 눈에 띄는 여자인건 두 말하면 잔소리 이지만........재벌가의 기준에는 미달이지
않습니까?"
비죽거리지는 않았지만 과히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닌지라 재원은 심가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꾹 다문 입술에서 석준은 그가 고집스런 사람일 거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런 유형의 사람은 집착이 대단히 강해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상처를 입는
그런 타입인 것이라 그는 결론을 지었다.
" 기준 미달의 여자라.......그게 누구의 기준에 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야."
본래의 내용에서 벗어난 대화였다. 재원은 마무리를 짓는다.
" 송 이사.......아니 송 상무를 직접 만나본적 있습니까?"
재원이 듣고 싶은 내용의 대화로 돌아갔다.
" 아뇨. 헤라를 통해서만 세 번 정도 얘기가 오갔습니다. 저나 헤라나 쉽게 달라 들 수 없는 내용이었던 지라
시간을 좀 끌었었습니다. 덕분에 본부장님도 시간을 벌게 되셨겠지만 요."
석준도 자리에서 일어나 재원의 옆으로 가 선다. 자신보다 약간 위에 위치한 눈을 정면으로 올려다 본 그는 헤라가
송 석 훈의 제안의 거절한 이유를 확인하고 싶었다.
" 헤라가.......MTN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본부장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었습니다. 제가 듣기론 헤라.......지금
상당히 어려운 걸로 들었거든요. 그 유혹! 뿌리치기 힘들었을 거란 것만 알아주십시오."
석준의 손에 들려 있던 캔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분리수거함에 던져 졌다.
" 저도, 다른 search(써치)가 다시 대시를 한다고 해도 거절 할 생각입니다. GH 와의 신의를 돈에 던져버리는 일이
찝찝하기는 했으니까요........ 성공하셨습니다. 본부장님."
그리고 마지막 말, 성공 하셨습니다, 는 어감엔 어쩐지 가시가 돋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재원은 달리
받아치지 않았다.
" RRR.......RRR"
재원의 휴대폰이 울린다.
" 응."
[ 회장님께서 부평 공장에 2시간 이내로 도착 하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비서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 알았어. 나도 곧 출발 할 거야."
무뚝뚝하고 극히 간단한 통화! 석준은 이렇게 딱딱한 남자가 헤라 앞에서는 어떻게 그리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을
치고 웃음을 짓는지 신기했다.
두 남자는 악수로 인사를 마치고 동시에 등을 돌렸다.
하얀 복도를 따라 연구실로 돌아가는 길.......석준은 휴대폰을 꺼내어 헤라에게 전화를 한다.
" 석준이다. 회사니?"
7시 30분.......헤라는 퇴근길에 석준을 만나러 신천에서 지하철을 내렸다. 여름 해는 정말로 길 다는 걸 실감하며
그녀는 약속장소로 천천히 걸어간다.
재원의 전화는 어제 하루 종일 그녀의 휴대폰을 울려댔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에 한번 오고는 지금까지 조용하다.
벨소리가 울릴 때마다 불안했다. 받아야만 할 것 같은데........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강한 이성이 그녀를 잡아당겨
받질 못했다.
하지만.......전화가 없는 오늘은, 한편으로는 그런 갈등을 겪지 않아 다행이다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벨이 울리던 순간보다 휴대폰의 침묵이 더더욱 무서워지고 있는 헤라였다.
" 일찍 왔네?"
그런 무거운 생각들로 머리를 가득 채운 채로 카페에 들어서니 석준이 먼저 와 앉아 있었다. 차가운 안경 너머로
밝게 웃는 그의 눈이 다른 날과 사뭇 달라 보였다.
석준이 무슨 말인가 여러 가지 화제들을 꺼내 헤라에게 말을 시켜보려 했지만 그녀는 통 집중을 할지 못했다.
캔디가 되어 버린 휴대폰을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고, 옅은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테이블에 놓인 과일 빙수는
그녀가 젓는 숟가락에 녹아 버린 지 오래다.
팥과 과일이 녹은 얼음과 우유에 둥둥 떠 있는 모양새가 홍수가 난 농가에 돼지와 소, 오물들이 떠다니는 뿌연 흙탕
물 같았다.
" 오늘........낮에 정 본부장이 날 찾아왔더라."
그렇게 산만하기 그지없는 헤라를 지켜보다 그녀의 주의를 끌만한 얘기라 생각돼 꺼낸 석준의 말.
" 재원 씨가?"
적중! 예상대로 그녀는 정 본부장 이라는 한 마디에 눈에 생기가 돌고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 음.......다 알고 온 것 같던데? 맞지?"
" 뭐.......그런 것 같아. 내 뒷조사를 하다가 알게 된 건지.......아니면 이미 MTN 쪽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하더라."
그녀는 차라리 시원하다는 투로 말을 하고 있었는데, 표정은 그다지 시원해 보이지 않았다.
" 그래서.......정 본부장 하고는 이제 어쩔 건데?"
석준은 말을 돌리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의 그런 태도에 헤라는 잠시 이상하다는 눈을 했지만
별 다른 걸 묻지는 않았다.
" 애당초부터 가능성이나 있는 관계였니? 그 사람하고 내가. 어쩌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어!"
눈을 내려 다시 흙탕물 같은 빙수를 저어 대기 시작한 헤라는 다른 손에 쥔 휴대폰에 힘을 주고 있었다.
" 그 사람.......너한테 진심인 것 같던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 푸~~~~너 부전공으로 심리학까지 공부했니? 안되긴 뭐가?"
진실을 외면하려는 그녀.......석준은 알 수 있었다. 대학교 시절 그가 먼저 대시를 하고 마음을 보여줬던 순간에도
그녀는 지금과 같은 반응을 했었다. 상대의 마음을 부정하고, 그 마음으로부터 도피 하려던 그 모습.
변한 것이 없었다.
" .......사실. 나 지금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
" ........ "
아니 변한 것이 있다. 그녀는 성숙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16살의 중성적 매력의 그녀는 이제 여성적 매력을
주체하지 못 할 정도로 뿜어내고 있는, 마력을 지닌 여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 송 상무가........널 데려오지 않으면 우리 집을 뭉개버리겠다고 협박 했어."
헤라의 심각한 발언에 과거와 현재를 오가던 혼미한 정신이 되돌아온 석준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 뭘 가지고? 어떻게 협박을 했는데?"
" 연주한테 어느 정도 들었지? 우리 형부 얘기."
" 응."
" 아직 갚지 못한 빚이 더 많이 있었는데, 미루고 있었거든. 근데 송 상무가 어떻게 찾아 냈는지 빚쟁이들을 죄다
찾아내서 채권을 인수했대. 그리고 내 계좌에 2억이나 이체 시켜 놓고 받으라는 거야. 널 데려오는 선수금
이라면서."
석준의 국가대표 급 머리가 회전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어딘가 이상했던 접근.......목표가 정확하고 확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적거리는 헤라와 자신을 다그치지 않았던 태도, 분명 기술을 빼내는 일은 촌각을 다투는 일인데도
MTN은 한가했다.
" 처음부터 목표물이 나나 기술이 아니었던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든다. 헤라야."
그가 습관적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다.
" 무슨 소리야?"
헤라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석준의 얘기에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 내 이적 문제나 산업 스파이 따위의 의뢰가 송 상무나 MTN의 본래 목적이 아니란 말이지. 진짜 목표물이 따로
있다는 말이야."
" 왜? 왜 그런 생각을 하는데?"
" 이미 정 본부장이 다 알아버린 일을.......어째서 널 강제로라도 끌어들여서 해보겠다는 것인지 이상하지 않아?
더구나 다른 search(써치)한테 넘겨버리면 될 일을 왜 채권까지 인수해 가면서 널 엮어 넣는 거냐구. 안 그래?"
헤라는 송 상무의 그런 행동이 예전에 클럽에서의 일이나 얼마 전 제주도에서의 일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진 놈의 유치한 복수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석준의 일이 의뢰된 건 그 훨씬 이전........처음부터 목표가 석준과 기술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것은,
확실히 석준의 말처럼 뭔가 다른 꿍꿍이가 숨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 정 본부장한테 말했니? 송 상무가 널 협박 한 것?"
헤라는 생각에 잠겨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 도움을 청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 정도 돈은 얼마든지 해결해 줄 수 있잖아."
석준은 진심 이었다. 그녀가 어려워지고 고통 받길 바라지 않았다.
" 안돼!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러나 헤라는 다른 말이 끼어들 여지도 없이 단호하게 잘랐다.
재원이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주제에 그에게 돈을 해결해 달라고 말한다는 건, 뻔뻔스러움의
극치였으며 그의 모친의 말대로 질 떨어지는 여자의 소행으로 간주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보다 더 큰 불안이 헤라를 덮쳐 왔다........송 상무.......당신!!!!
중금속 오염 폐수 처리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고 설명을 듣는 鄭 회장 옆에서 재원은 헤라의 일을 잊고 현재의 일에
집중을 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폐수 처리 과정의 15단계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정 회장은 유독 응집 과정과 플록 생성 과정, 그리고 침전(부상)
과정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농도에 따라 생략이 되어도 되는 마지막 두 단계가 비효율적으로 가동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탈수기에 이르러 鄭 회장이 재원에게 무언가 질문을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이사진들 다섯 명과 공장을
돌면서도 재원의 정신은 자꾸만 헤라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머물고만 있었다.
" 정 본부장. 어제 잠이라도 설친 게냐?"
세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는 손자에게 鄭 회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다그쳤다. 설명을 하던 공장장이 말을 멈추고
이사진들도 발길을 멈추었다.
제서야 재원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할아버지의 눈을 마주했다. 덥수룩하고 하얗게 새어버린 눈썹 아래의 눈동자가
처진 눈꺼풀 아래서 험악해져 있었다.
" 죄송합니다."
재원은 고개를 숙이고 실수를 인정한다. 아무리 할아버지와 맞짱을 뜨는 그였지만 실수는 실수였다.
정 회장의 질문은 호기성소화시설 앞에 혐기성소화시설을 설치하여 병행처리 시설을 한다면 어떻겠느냐는 물음
이었다.
재원은 그 동안 조사한 자료와 공장 시설 관계자로부터 보고 받은 내용을 토대로 그의 생각을 간단하게 얘기 한다.
현재 가동 중인 처리 시설과, 병행처리 시설의 폐수정화 효율성을 비교하고, 경제적 효율성에 역점을 둔다면 어느
것이 더 나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다.
다행히 재원의 요점만 간단하지만, 정확한 브리핑이 맘에 들었던지 鄭 회장은 노여움을 누그러뜨리는 듯 했다.
오후 4시 쯤, 공장 순시를 마치고 鄭 화장과 이사진들이 먼저 서울로 돌아가려 주차장으로 나왔다.
" 간단한 회식이 있습니다. 먼저 올라가십시오. 회장님."
재원이 차 에 오르는 鄭 회장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다. 정 회장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다 니스에서 돌아온 이후로
부쩍 꺼칠해진 손자의 안색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탐색했다.
머지않아 송 석 훈의 존재를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받아들여야 할 손자를 그는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鄭 회장은 재원이 전 보다 더 강해지길 바랐다.
그러나 지금 손자가 석훈과의 사이에 있는 여자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는 중이라면.......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자를 떼어 버려야겠다는 계획을 잡고 있었다.
여자가 누구든, 뭐하는 집 여식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다만 재원이 세상 모든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현실에 부딪쳐 깨어져 버릴 환상.......'열정'이라는 함정에 빠져드는 것만을 막고 싶을 뿐 이었다.
아들처럼 되지 않길 그는 간절히 빌고 있었다.
" 본부장님. 한곡 하시지요."
공장 간부들과 함께 온 술 자리. 2시간 째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간부들은 재원의 노래를 재차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요구한다 해서 맘에도 없는 일을 할 그가 아니었다. 그는 옆에 앉은 요란한 차림의 여자가 만들어 주는
온더 락을 묵묵히 마셔댈 뿐, 간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마음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형식상 하는 술 자리였고, 그는 빠져 나갈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재원이 멋대로 굴지 않고 이들의
눈치를 보는 이유는 그들은 본부 사람들하고는 다르기 때문 이었다. 노조가 있었고, 지금 자리엔 노조 위원장도
함께 다.
근로자들이 힘을 뭉치면.......얕볼 수 없는 힘을 가지는 집단 이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온통 헤라에게 가 있는
머리지만 거기까지 생각할 용량은 남아 있는 그였다.
" 어~ 본부장님.......여기서 제일 연소자면 연소자이신데.......그런 의미에서 노인네들한테 딱 한곡만 헌사 하십시오.
네~~~~~"
이미 술에 절을 대로 절은 그들은 상하 관계를 떠나 나이까지 들먹이며 재원의 노래를 계속해서 요구했다.
재원이 머리를 쓴다. 이들이 그토록 원하는 노래 한곡을 해주고 자리를 뜨는 것으로 합의를 보는 것이었다.
천천히 일어나 마이크를 잡는다. 반주는 필요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낮은 저음의 완벽한 발음을 구사한 팝송이 흘러
나왔다. "only a woman's heart"
허나,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쩍~하고 깨지는 룸 안의 분위기. '오빠는 잘 있단다.'내지는 '자옥아'그것이 안 되면
'남행열차'라도 나와야 할 자리에 그윽한 팝송 이라니.......
나이 지긋한 간부들의 얼굴에 찬물이 끼얹어 지고, 여자들은 키득거렸다.
이미 술이 오른 재원은 까닥하지 않는다. 앉은 이들이 어떤 얼굴들을 하고 있건 간에 그는 벌써 노래 자체에 빠져
있었다.
가슴이 아프다.......감미로운 곡이지만, 헤라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재원의 가슴은 불에 대인 것처럼 뜨거운 열감이
올라오고 쓰라렸다.
그 뜨거운 열감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보고 싶었다. 앙알앙알 대는 그 목소리가 그리웠다. 헤라의 부드러운
등을 쓰다듬는 환상이 보였다. 키스 할 때마다 묻어나는 그녀의 립스틱 향이 코끝을 스쳤다.
제길!!!!!! 제 정신이 아냐! 정 재 원.
그는 쥐고 있던 마이크를 던져 버리고 그대로 룸을 빠져 나온다.
그가 술집에서 나오자 할아버지가 남겨 두고 간, 김 기사가 재원을 맞았다.
" 아파트로 모실까요?"
자신이 벤츠 C클래스 뒷좌석에 몸을 묻은 재원은 고개를 젓는다.
" 잠실.......잠실로 가요."
머리를 흔드는 술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그는 눈을 감았다.
" 큰 언니 어디 갔어?"
밤 11시를 넘긴 시각. 헤라는 노트북 앞에 앉아 가압류 등에 관한 법률 상식을 검색 중 이었다.
열어놓은 베란다 문으로 습기가 잔뜩 묻은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헤미는 베란다 화분의 돌을 고르고 있는 중
이었고, 다른 가족들은 잠들어 있었다.
" 언니 슈퍼 갔어. 파하고 무가 없다고."
" 그런 걸 꼭 오밤중에 사러 가야해?"
" 그렇게 됐어. 낮에 아빠한테 다녀오느라 시간이 없었거든."
아빠 얘기가 나오자 헤라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혜미는 동생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 .......어떠셔?"
약간의 틈을 두고 헤라가 물었다.
" 별루야. 워낙에 합병증이 많이 온데다가, 치매가 그렇잖아. 너 보고 싶단 말씀은 자주 하셨었는데.......오늘은 그
말씀도 안하시는 게. 기억력이 거의 가 버렸나봐."
헤미는 태연한 것처럼 말을 하고 있었지만, 헤라는 그 안에 숨은 포기 혹은 절망을 엿 볼 수 있었다.
" ........ "
헤라는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맞은 편 아파트의 불빛의 수를 센다. 축축한 바람에 불빛이 흔들리고 아직 비가
내리지 않는데도 비릿한 흙냄새가 밑으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39-2
" 노래 소리네.......잘 부른다. 취한 것 같아."
베란다에서 화분 돌 고르기를 하던 헤미가 밑을 내려다본다. 아파트 건물에 부딪혀 울리는 남자의
노랫소리.......바람에 실려 들어 왔다.
저음의........감미로운 곡조의 팝송. 고성방가 하지는 않고 속삭이듯 들려오는 그 노래는 부르는 이가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 누군지 보여?"
베란다로 나온 헤라가 헤미에게 물었지만 밤 인데다가 층수가 11층인 관계로 남자의 모습은 그다지 잘 보이지
않았다.
20분 정도 노래는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집에서도 시끄럽다 고함을 치는 사람은 아직까진 없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녀들처럼 남자의 노래를 감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라고 헤라는 생각을 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부스럭거리는 시장 가방 소리와 함께 큰 언니 헤림이 들어왔다.
" 헤라야."
신발도 벗지 않고 헤림이 헤라를 작은 소리로 부른다.
" 왜?"
베란다에서 거실로 들어서며 헤라는 언니의 긴장한 표정에 이유도 모른 채로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 밖에 그 사람 와 있어."
헤라는 잠시 멍한 얼굴로 있다가, 뭐? 하고 헤림에게 되물었다.
" 정 재 원 씨. 그 벤츠랑 BMW 말이야."
" 정말?"
헤미가 폴짝 방으로 뛰어들며 반가운 기색을 나타낸다. 헤라는 가슴이 뛴다..
" 이 노래.......그 벤츠 BMW 소리야. 취했더라."
" 술 마신 것 같았어?"
취한 것 같다는 헤림의 말에 헤라는 망설임 없이 신발을 신는다.
" 응. 많이 마신 것 같던데! 나도 못 알아보고."
" 아아~ 이런. 술 마시면 안 되는데 그 사람."
마치 애인 같은 말투로 걱정을 하는 헤라의 행동에 헤림과 헤미는 두 눈을 마주 했다.
" 나갔다 올게."
하지만 헤라는 언니들의 반응 따위는 눈치 채지도 못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헤라는 재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을 했다. 그날 그렇게 그의 집을
나와.......이틀 동안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의 모친으로부터 모욕을 받아 화가 나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재원과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헛된
결심을 하고 또 하는 그런 단계에 있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건물의 입구에 이르자 낮은 계단에 앉아 있는 재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낮은 노래를 부르는 그.......소름이 돋을 정도로 듣기 좋은 완벽한 영어 발음으로 'Eleanor' 가 부르는 " Only
A Woman's Heart"를 아파트 온 주민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남자의 저음으로 듣는 " Only A Woman's Heart"는 'Eleanor' 보다 훨씬 더 센티하고 달콤했다.
" 음악 서비스 종료 시켜요. 경비 아저씨 달려오겠네."
재원의 옆으로 나란히 앉는 헤라.......그가 부르던 노래를 뚝 하니 멈춘다.
" 노래 부른지 한 시간 만에 나오냐?"
술 냄새가 나고.......그의 말투는 느리고 나른해져 있었다.
" 술 왜 마셨어요? 마시면 고생만 하는 사람이 술이 들어가요?"
" 직원들 하고 회식 있었어."
그가 주변에 떨어져 있는 가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바닥에 끼적인다.
헤라는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해야겠다. 결심을 해보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한다.
재원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 헤라의 손을 잡아 당겼다. 그의 눈이 무언으로 그녀에게 손을 뿌리치지 말아 달라
말을 하고 있었다.
재원은 헤라의 손을 꼭 잡고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오면서 위치를 기억해둔 놀이터로 간다.
발이 빠지는 모래밭을 걸어.......시소를 지나고.......그네를 지나쳐 미끄럼틀 앞으로 왔다.
목재로 만든 빨갛고 노란 미끄럼틀.
작은 성 모양을 하고 있는 그 미끄럼틀은 어른 몇이 올라가 서있어도 오두막 정도로 느껴지는 공간이 있었다.
사방 중 삼면이 1.2미터 정도의 나무 벽으로 둘러싸이고, 길이가 2.5미터 쯤 되는 플라스틱 소재의 미끄럼이
동쪽으로 나 있는, 꼭대기로 올라 왔다.
" 여기.......좋다. 아늑하고."
모래가 지금거리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은 재원이 우두커니 서있는 헤라를 올려다본다. 옆에 앉으라는 뜻이었다.
재원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른 다리는 쭉 뻗은 아주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 대학학교 다닐 때.......이런데 숨어서 나쁜 짓 많이 했었는데."
별이 사라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 나쁜 짓.......? 기준이 뭔데요? 나쁜 짓이라는 기준이 어느 정도 인지 되게 궁금하네."
헤라도 하늘을 올려다봤다. 남색 어둠에 회색 구름이 깃든, 도시의 오렌지 빛이 비쳐든 밤하늘....... 참! 오묘하기도
한 빛을 띠고 이었다.
" 내 기준에서는 나쁜 짓 정도지만. 진 헤라 네 기준에서는.......푸~.......당장 교도소에 처넣어야 한다고 방방 뜰
짓일걸."
그가 목에 매달린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웃는다. 맥 아리 없는 그 웃음에 헤라는 가슴이 싸해져 왔다.
" 뉴욕에서 좀 안 좋은 동네로 가면, 거긴 어린 애들 유치원 같은 뭐 그런 종류의 탁아 시설이 많거든.......근데
그런 시설엔 꼭 이런 놀이터가 아주 후미진데 방치 돼 있단 말이야. 밤에는 전혀 인적도 없고, 또 어둡고 ......."
풀어진 넥타이를 헤라에게 넘겨주며 그는 목을 조이는 셔츠의 단추도 풀어냈다.
" 집엔 가정부도 있었고, 사촌 동생들도 있었어.......가끔 새엄마도 계셨지, 나도 양심은 있었던지 집은 좀
그렇더라고.......그래서 주로 그런 후진 놀이터에 숨어서 헤로인이나.......코케인. 엑스터시, 따위를 닥치는 대로
했었다. 아마 10학년 때였을 거야."
생각지 못한 고백에, 그녀는 방방 뜨는 대신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을 꿀꺽 삼킨다. 헤라를 향해 재원이 다시
푸~ 하는 김빠진 웃음을 웃었다.
" 10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6월 초 쯤 이었나? 수영 연습이 있어서 수영장으로 가는데 송 석 훈이 수영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더라고, 바지 주머니 속에 뭔가를 숨기고서 말이야. 그 자식은 그때 졸업반 이었는데.......나랑 늘 사이가
그랬어."
재원이 팔을 들어 헤라의 어깨를 껴안았다. 헤라는 이야기 속의 낮선 재원을 상상하며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 그 전날에 약의 강도를 좀 높여 해서 그런지.......여기가 좀 많이 멍했거든!"
그가 헤라의 어깨를 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검지로 자신이 이마를 톡톡 친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짠하고 서글퍼
보이던지 헤라의 눈에 17살 그 당시 재원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 턱에 난 상처........ 그날 난 거야. 송 석 훈 자식이 나이프를 부러트린 조각을 물속에서 속력을 내는 날 조준해서
던졌던 거지."
그녀는 재원의 턱 밑에 난 그 상처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어둠 때문에 상처가 보이지는 않았다.
" 뜨끔! 하고, 젖던 팔을 멈췄는데. 빨간 피가 물에 퍼지는 게....... 꼭 공포영화 같은데서 나오는 어두운 기운의
혼령처럼 날 감싸는 거야. 피가 말이야. 정말 무섭더라. 처음으로 공포라는 걸 느껴봤어. 뭐.......약 따위에 취해있지
않았다면 그 보다는 낫게 대처 했겠지만."
잠깐, 말을 멈춘 그가 후~~~~~~~하는 긴 숨을 내쉬었다. 속이 울렁거리는가보다 라고 헤라는 생각을 했다.
놀이터 안쪽으로 사람들의 말소리가 가까워지다 다시 멀어 져 간다.
" 그때.......난 물속에서 그대로 멈추어 있었어. 이 목걸이 주인이.......내게 이리오라는 손짓을 하는 환각이
보였거든."
재원이 목에 걸린 그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 그리고........자고 일어났더니. 병원이더라. 삼일 만에 정신이 돌아 온 거라던데, 난 까매. 아무것도
없었어.......그렇게 정신이 돌아오고 여기가 맑아지니까.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을 했지. 내가 저기로 갈 뻔 했다는!"
그가 흐느적거리는 팔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헤라는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재원이 만약 그때 잘못
되었더라면.......그녀는 영원히 사랑 따위를 해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으리라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약만 아니었으면 그다지 큰 사고는 아니었을 거야. 그래서였는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지금처럼 계속, 이렇게
약에 절어 살다가는, 내 인생이 정말 시궁창에 처박힌 쭈글거리고 썩어가는 헌 구두 짝보다 더 비참해 질 거라는
생각.......인생을 포기하진 않았던 거지. 정말 다행스럽게.......도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만약에........ 그때 그런
사고가 없었다면.......난 널.......못 만났을 거야.......그치?"
재원의 얘기도 결론은 헤라와 같은 곳에 도착한다.
" 병원에 2주정도 입원해서 약을 끊었어. 사춘기의 '질풍노도의 시간'이 막을 내리는 시점 이었지. 좀 이른 감이
있기는 했지만!.......그리고 지금까지 많이 노력하고 살았다. 뭐 싸가지 없는 거야.......가진 게 좀 많다보니 그렇게
된 거라, 그건 앞으로도 고치려고 노력 안할 거지만."
이야기를 들으며 헤라는 손에 쥔 그의 넥타이 모서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카페에서나 술을 마실 때나 뭔가를
휘젓는 행동처럼 말이다. 생각에 골몰할 때면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산만한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불안한 어린
시절의 상징처럼.
" 송 상무가.......당신을 그렇게까지 미워하는 이유가 있어요?"
헤라의 질문.......그녀는 석준과 했던 얘기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원이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움직임으로 몸을 일으켰다.
낮은 미끄럼틀의 벽이 그의 허리 아래에 위치했다. 그래서 인지 비틀거리는 재원은 한층 더 위태해 보였다.
낮은 벽 위에 손을 얹은 그는 아늑한 공간을 벗어나 미끄럼틀 아래를 내려다본다.
" 글쎄.......뭘까? 지금까지는 쭈~욱 무시하고 살았었는데 말이야.......이제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아."
헤라도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새벽으로 넘어가자 축축한 안개가 끼기 시작했는지 가로등 주위마다 뿌옇게
연기처럼 흐려져 있었다.
" 그만 들어가요."
그를 위로해야 되는 건지.......난감해진 헤라가 미끄럼틀의 계단을 먼저 내려섰다. 재원이 아래를 내려다보던 몸을
돌려 헤라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 네 말대로.......나, 네 뒷조사 했다."
헤라를 붙잡을 방도가 필요했다. 항상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 그제 모친과의 맞닥트림도 석훈과의
비즈니스를 알게 된 사실도 그녀가 뛰기 시작하는 구실을 준 것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내려가던 계단에 뒷모습 그대로 멈춰 선다.
" 힘들면.......말해. 송 상무하고의 거래....... 깨져서.......더 난처해 졌다는 사실 알고 있으니까. 돈.......필요한 만큼
도와줄 수 있어."
망설이며 말했다. 과연 돈 으로 저 여자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확신이 들지 않는 채로 말이다.
처음 그녀와 게임을 해서 이겼을 때.......돈 으로 여자를 얻지 않았다는 사실에 흥분 했던 그였다.
온전히 자신만의 노력으로.......여자를 얻었다는 그런 수컷으로써의 자부심, 뭐 그딴 것 따위에 기뻤던 그 순간을
뒤로 하고 그는 결국 비겁한 수에 손을 댄 것이다.
코케인 이나 헤로인 따위를 도피처로 삼았던 사춘기 시절같이 그는 자신이 다시 비겁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 외엔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 네가 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솔직히 난 모르겠다. 어느 순간 네 행동에서 날 사랑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일기도 하는데.......근데......."
빗속에서의 그 고백을 떠올린 재원은 혼란하다.
" 한 순간 돌아서는 널 보면 정말 착각이었나 싶기도 하고........"
" 돈.......정말 줄 수 있어요?"
여전히 뒷모습을 보인채로 재원이 기대했던 반응을 보이는 그녀, 그 기대가 비뚤어진 것이든 아니든 우선은 그녀가
그의 미끼를 뭉개 버리지 않았단 사실에 재원은 놀라면서도 다행스레 여기고 있었다.
" 당연해.......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줄게."
"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다시 말하는데 재원 씨한테 나........아무것도 줄 수 없는 여자에요."
재원은 물론 기억한다. 잊을 수 없는 말 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원한다던 그녀의 고백에 섞여 있던 말을 어찌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그 말의 뜻은 너무도 애매모호 했다. 다가왔다 싶으면 어느새 돌아서버리는 그녀의
태도처럼 그를 혼란스럽게 할 뿐인 말에 불과했던 것이다.
" 너한테 마음 외에는 바라는 것 없어. 진 헤라. 그 것도 너무 서둘 라고는 안 해. 기다린다고.......기다릴게. 다만
그러는 동안 전화도 받고, 만나주기도 하고, 그러란 말이야."
" 겨우 전화 받고 만나주는 대가로 돈을 주겠다는 말이군요. 뒷조사를 했다니 지금 나한테 필요한 돈이 꽤 큰
액수라는 것도 알 텐데 말예요."
헤라에겐 구원과도 같아야할 재원의 제안.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겨우 전화 받고 만나주는 대가라고 말을
했지만.......그건 말이 가진 의미보다 훨씬 큰 대가를 치루는 일 이었다.
그를 안고 싶고 품고 싶은 자신의 욕망과 그의 욕망을 동시에 잠재워야 하는 고통을 치러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었다.
감히 그와의 결혼 같은 건 꿈꾸지 않는다. 아주 잠깐, 민 수연의 약혼녀 행세에 속이 상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헤라에게 닥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와 남성 혐오증을 어떻게 분리 시켜 극복해야 하는 것인지! 그제 가평에서의 일 이후로 명확하게 떠
오른 그 문제가 그녀를 재원으로부터 도망가야 한다고 설득시키고 있었다.
" 그래.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좋아. 돈이 수억이 들어도 기꺼이 준다."
" 하~ 그러세요. 돈이 차고 넘치시는 재벌가의 사람은 보통사람하고 그릇이 달라도 아주 다르시군요."
어차피 그의 돈을 받으나 받지 않으나 마음이 아픈 것은 매한가지, 그녀는 차라리 짧고 굵은 아픔을 선택한다.
그를 사랑하며 그를 안지 못하는 긴 아픔을 겪느니 차라리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짧은 아픔을 견뎌내는 것이
나리라. 더불어 그 쓰잘대기 없기로 유명한 자존심까지 지키리라 마음먹는다.
" 필요 없어요. 당신 돈!!! 그러니까.......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요. 정 재 원 본부장 님."
결론을 낸 그녀가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에서부터 하기로 마음먹은 말을 결국 해버렸다. 통속적인 표현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몰려왔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게........이런 거구나! 책에서나 읽었던 표현들이 정말 육체적으로 일어나는 고통이라는 걸
그녀는 체험한 그녀.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고인다. 스스로 내린 결정에 스스로가 가장 큰 상처를 받고 있다는 것을 헤라는 알지
못했다.
" 진 헤 라. 진짜 너!"
40.
재원의 고함에 헤라는 그의 주먹이 날아드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줄 알면 뭐 하나........주먹이 오는 줄
알았으면 피해야지 될 것을, 그녀는 오히려 재원을 향해 몸을 돌려버렸다.
하지만 착각은 자유. 고함 소리 뿐 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단 위에 지금거리던 모레에 발이 미끄러지면서 그만
중심을 잃는다. 아주 짧은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귀를 울리고 몸이 허공에 뜬다 느끼자마자 1.5 미터 정도
아래, 모레위로 엎어져 버렸다.
이런~~~스타일 구기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하긴 이제 재원 앞에서 구겨지려야 구겨질 스타일도
없었지만.......말이다.
어쨌든, 귀 와 입 속으로 밀려드는 젖은 모레는.......비릿하고 거칠했다. 아프다기보다는 쪽팔리고, 쪽팔리기 보다는
옷 속으로 파고드는 모레의 감촉이 축축하고 차가운 게 먼저 느껴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축축한 모레에 마음이
젖는다.
그래서 헤라는 몸을 일으키고 싶지가 않다. 그가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어쩜 이다지도
변덕스러울까........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니 그건 변덕이 아니었다. 이성과 감정의 줄다리기 일뿐이다.
재원의 페라가모 구두가 그녀의 얼굴 앞에 선다. 구김이 생긴 그의 밝은 회색슈트 바지도 눈에 들어왔다. 요즘 그는
정장슈트를 자주 입는 것 같았다.
" 야.......너 그걸 낙법이랍시고 하는 거~냐? 요즘 낙~법은 얼~굴부터 떨~어지는 방법도 있나보지~~~~?
재원의 혀가 아까보다 좀 더 꼬여 있었다. 그래서 인지 그는 손을 뻗어 그녀에게 내밀지 않았다. 대신 놀리는
느낌의 말과는 달리 모레 위로 같이 몸을 뉘였다.
" 축축하네."
좀 전에 지른 고함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다. 헤라는 엎드린 얼굴을 약간 틀어 재원의 옆모습에 눈을
둔다.
불행히도 오늘의 재원은 그가 갖고 있는 페로몬을 그녀에게 마음껏 뿜어내고 있었는지 그녀는 그의 유혹 없이도
그를 안고 싶어졌다. 가슴이 절절 하도록 그의 품에 파고들고 싶어져 그녀는 그를 향한 두 눈을 감아야만 했다.
" 안고~~~싶다.......키스는 하지 않아. 그냥 안아만 보자."
동병상련.......은 아니었지만 재원의 마음도 헤라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안고 싶지만 맘 놓고 안을 수 없는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몸과 마음은 지옥 그 자체였으니까.
재원이 몸을 모로 돌려 헤라를 마주 봤다. 술기운이 번진 그의 눈은 맑지 않았다.
그 긴팔을 뻗어 헤라의 등을 껴안는다. 헤라도 재원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땀 냄새가 나는 그의 목에 코를 묻었다.
" 요정 아스테리아.......그게 너냐?"
아스테리아! 제우스의 구애를 피해 메추라기로 변해 날아간, 제우스의 분노로 불모의 섬이 되어버린 요정. 헤라의
남성혐오증 기원을 모르는 그로써는 다분히 할 수 있는 생각 이었다.
" 그럼 당신은 파렴치한 제우스야?"
" 당근 아니지........제우스처럼 난잡하지 않으니까."
" 그래.......아니지. 나도 아스테리아는 아냐."
" 하하~~~~ 맞아. 넌 헤라야. 질투의 여신 헤라."
저보다 나은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질투. 열쇠였다.
" 헤라.........내 이름이잖아."
" 알긴 아는군.........그렇게 자~알 알면서........어째서 자꾸만 도망을 가냐?"
제주도에서부터 이어지는 돌고 도는 대화........그는 쫓고 그녀는 달아난다는........
헤라는 입을 다문다. 그의 등에 돌려 안은 팔에 힘을 주고 얼굴을 가슴에 묻었다.
그녀를 안은 재원의 팔에도 힘이 들어갔다. 숨쉬는 가슴을 들썩이기 조차도 힘들 정도로 그는 헤라를 꽉 껴안고
있었다.
모로 누워 서로를 안고 엉겨 있는 재원과 헤라........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얼마간을 단지 그렇게 안고만 있었다.
" 새엄마.......헤라 들어 왔어요. 지금 샤워 해."
헤라가 나가는 소리를 안방에서 듣고 있던 새엄마는 언니 둘을 나무라는 눈으로 바라보다 그녀를 찾기 위해 나갔었다.
그리고 헤라가 들어온 한 참 뒤에야 돌아왔다. 헤미는 거실에 핀 이부자리에 누워 말없이 주방으로 들어가는 새엄마의
뒷모습에 눈을 박았다.
지처보이는 새엄마의 등.......아빠의 치매가 시작된 3년 전부터 새엄마는 부쩍 말이 없어지고 침울해지는 시간이
늘어갔다.
냉장고에서 반 병정도 남은 소주와 김치를 꺼내어 식탁에 놓은 새엄마는 병을 가만히 노려보기를 한 참 하더니 물
컵에 남은 소주를 다 따라 벌컥벌컥 단 숨에 들이켰다.
욕실에서 나오던 헤라가 맞은편으로 보이는 식탁에 앉은 새엄마의 그런 행동에 놀라 달려간다.
" 새엄마!!! 뭐야? 이게 물 인줄 알아?"
새엄마의 손에 쥐어진 컵을 빼앗아 그녀는 개수대에 남은 소주를 쏟아서 버린다. 그러나 이미 3분지 2이상을
마셔버린 상태였다. 새엄마가 눈을 들어 헤라를 바라본다.
" 내가 어린애야.......? 뭣하고 찾으러 나오고 그래요."
퉁명스런 말을 뱉으며 그녀는 새엄마의 눈을 피해 냉장고를 연다. 물병을 꺼내어 컵에 물을 따라 새엄마 앞에
내려놓았다.
" 마셔요. 속 버려."
돌아서려는데 새엄마가 그녀의 손을 잡는다.
" 아가........우리 헤라......."
목이매이는 소리를 내는 새엄마, 헤라는 그런 새엄마를 돌아봐야 했다.
" 왜 그래.......새엄마."
" 우리 아가......."
말을 잊지 못하고 뚝뚝 눈물만 떨어트리는 새엄마를 헤라는 외면한다.
흐느끼지도 않고 어깨를 들썩이지도 않고 딸의 잡은 손에 눈물만 떨어트리는 그녀는 헤라를 찾으러 나간 길에서 두
사람을 본 것이다.
놀이터의 모레위에 누워 성인 남녀가 할 수 있는 어떤 애정의 행각도 벌이지 못한 채로 부둥켜안고만 있던 딸과
딸의 남자를 보며 그녀는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아야만 했다.
하다못해 인적이 없는 이 깊은 밤에, 키스라도 나누는 딸을 봤더라면 차라리 안심이 됐을 것을........왜 그렇게 30분
이상을 안고만 있어야 했는지 이유를 짐작하는 그녀로써는 안타깝고 측은한 맘을 가눌 길이 없었다.
" 이~ 울 새엄마 왜 이래~~~ 말만한 처녀보고 아가 라고 부르면 다들 비웃어. 내가 아직 새엄마 젖도 못 땐 마마 걸
인줄 안단 말이야."
헤라는 새엄마의 눈물을 얼버무려 버린다. 눈물의 이유를 정확히 짚어내지는 못하겠지만 새엄마가 괜스레 혼자서
센티해져 흘리는 눈물이 아니란 것은 느낄 수 있었다.
" 주무셔 새엄마. 나 내일 바쁘걸랑! 나도 자야 되는데, 새엄마가 이렇게 어리광 피면 내가 못 잔단 말이쥐!"
자신의 우울함과 새엄마의 우울함을 동시에 떨쳐내기 위해 헤라는 명랑함을 가장했다.
" 회사 옮기는 일 때문에 바쁜 거여?"
눈가에 흐른 눈물을 소매 깃으로 찍어내며 새엄마가 묻는다.
" 음! 그것도 그렇고........거기 다녀 온지도 오래돼서........회사 옮기는 동안 며칠 여유가 생길 테니까 갔다
오려고."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꾹꾹 짜내며 헤라는 대답이 건성으로 들리도록 애썼다. 아빠에게 간다는 말을 하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자식으로써의 당연한 도리가 그녀에겐 책임감에 마지못해 하는 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새엄마에게 그것이
미안했던 것이다.
" 가기 싫으면 억지로 가지 않아도 돼! 새엄마가 가잖여. 언니들도 가고."
" 그래도........나........보고 싶다고 그랬다며.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하물며 산 사람소원이야......"
딸들에게 조차 싫은 소리 한마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새엄마는, 지질이도 무능력하고, 책임감 박약의 남편에게도
의지할 수 있는 아내이자 어질고 착한........ 여자! 였다.
어질고 착한 여자........새엄마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시달려 온 걸까?
착한 여자! 그건 싫다. 희생을 강요당하는 의미가 농후해 보이는 그 말이 헤라는 정말 싫었다.......그러므로 당연히
아빠를 향한 새엄마의 태도는 이해 할 수 없는 그녀였다.
아침 6시. 재원의 집 자동응답기가 전화를 받는다.
[ 아직 자니? 그제부터 휴대폰도 안 받고 회사로 연락해도 통 연락이 안 되는 구나!......그래서 휴대폰에도
응답기에도 메시지 남긴다. 오늘 2시 점심약속 잊지 않았지? 할아버지도 나오실 거다. 민 총장님 부부는 물론이고
그쪽 형제들까지 온다니........늦지 않았으면 좋겠어........네가 어미한테 화가 난건 알겠다만.......전화는 받아라.
알았지?]
문을 열고 막 현관을 나서던 재원은 모친의 목소리에 발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음성을 확인한다.
모친의 말대로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있었다. 잠시 그는 손에 들려있는 자신의 휴대폰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가던
문을 돌아서 들어와 거실의 소파 위에 휴대폰을 던져 놓고 집을 나선다.
아침 7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재원은 잠실의 아파트단지 내에 들어와 있었다. 토요일인 지라 출근을 서두르는
차량은 거의 없고, 학교를 가는 학생들만 간간이 눈에 띄었다.
하늘은 참 오랜만에 맑았다. 며칠동안 습기를 잔뜩 품고 공기도 오늘은 상쾌해져 있었으며, 바람도 제법 선선하게
불고 있었다.
헤라의 집 앞을 어슬렁거린 지 두어 시간. 아파트의 통로에서 사람소리가 날 때마다 귀를 곤두세웠다. 9시 30분을
약간 넘긴 시간에.......드디어 헤라가 모습을 나타냈다.
무릎까지 오는 베이지색 면 스커트에 핑크색 가로 줄 무늬가 들어간 하얀 색 티를 입고 역시 하얀색의 스니커즈를
신은 그녀는 갓 스무 살을 넘긴 상큼한 대학생 같았다.
거기에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늘씬한 다리는 재원의 심장을 멋대로 조정하고 있었다.
아파트 통로의 입구에 서서 작은 손가방을 뒤적이고 있는 헤라를 향해 재원이 성큼성큼 다가간다.
" 일찍 나왔네. 어디가?"
그녀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순간보다 앞서 재원이 그녀의 손을 낚아채 잡았다.
이른 아침에 코앞에 있는 그의 얼굴에 해라는 할말을 잃는다.
" 어디 가는데? 같이 가자."
그녀의 시선을 피해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눈을 둔 재원은 뚫어져라 자신의 옆얼굴로 쏟아지는 또 다른 시선을
느낀다.
" 아! 안녕하세요."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재원이 얼굴을 돌리자 헤라의 두 언니 헤림과 헤미가 곁에 와 서 있었다.
" 아.......네."
그가 어색하게 인사를 받는다.
" 벤츠 씨도 같이 가기로 했던 거야?"
헤미가 의외라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헤라는 어이없음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재원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허우적대 보이지만 두 언니들에겐 의미 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들은 재원이 이 이른 시각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단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헤라와 그이 의사가 어떻건 간에
자신들의 갈 길에 기꺼이 그를 동행 시킬 요량이었던 것이다.
" 네.......가시죠. 차는 저쪽에 있습니다."
그런 언니들의 심중을 눈치 챈 것인지 그는 조금은 여유 있어진 얼굴로 차를 향해 먼저 걷기 시작했다.
"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그의 손에 끌려 차를 세워둔 곳으로 걸어가며 헤라는 재원이 뒤통수를 노려봤다.
" 6시 반."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하는 그의 대답에 헤라는 다시 한번 아연실색했다.
" 뭐요? 꼭두새벽부터........왜요?"
" 스토커! 이제부터 네 스토커 되기로 작정 했으니까."
" 스 스토커 요?"
" 그래, 별수 없잖아! 전화도 안받아주고 만나주지도 않는데, 이렇게 무조건 기다리고 붙어 다니는 수밖에 더
있냐?"
아~주 당연하다는 투로 말을 하는 재원은 스마트키를 눌러 자신의 BMW에 시동을 건다.
뒷좌석의 문을 열어 두 언니들을 먼저 태우고, 다음엔 조수석의 문을 열어 그에게 기막히다는 눈빛을 쏘아대는
헤라의 머리를 밀어 넣었다.
운전석에 몸을 앉힌 재원이 헤라를 마주본다.
" 어디로 갈까?"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웃음을 머금고 있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굳어있지도 않은 그의 얼굴은 진지 그
자체였다.
" 춘천이요. 춘천국립 병원에 가는 길이에요."
야무지게 다문 입으로 암 말도 하지 않는 헤라를 대신에 헤미가 행선지를 말한다. 재원은 백미러를 통해 마주친
헤미의 눈에 알았다는 끄덕임을 보이고 차를 출발시켰다.
한동안 차 안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무뚝뚝하기로는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재원이 먼저 입을 땔 리도
만무고, 머릿속이 복잡한 헤라도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이 도저히 아니었다.
헤림은 걱정스러움에 가득한 한 얼굴로 창밖만을 바라보았고, 신이 난건 헤미 뿐 이었다.
" 헤라가 요즘은 오렌지 색 립스틱을 안 바르지요?"
뜬금없는 헤미의 립스틱 얘기에 헤라도 재원도 백미러를 통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봐야했다.
" 네? 무슨."
재원이 바로 반문한다.
" 헤라가 요즘은 옅은 색 립 그로스만 바르더라고요. 벤츠 씨 때문에!.......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어요?"
" 네. 모르겠는데요."
헤미의 놀림에 돌아오는 짤막하고 당당한 대답. 이런 놀림엔 당황하거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게
보통 남자들의 반응인데 헤미나 헤림이 본 재원은 확실히 달랐다.
" 정말요? 뭐.......내가 우리 헤라처럼 눈에 팍 띄는 얼굴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억 하실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무디시네요."
이제 점점 더 웃음이 실리는 헤미의 목소리가 헤라는 불길했다.
" 죄송합니다. 전 여자얼굴을 잘 기억해두는 편이 아니라서요."
그 딴에는 깍듯한 사과를 한다고 한 것이지만, 여자에게는 안하는 편이 나았을 말을 하는 재원, 헤라만큼이나
자존심 강한 헤미가 과연 그냥 넘어갈 것인지.......손이 저절로 이마를 짚는다.
" 어머~ 그러세용~? 저도 남자 얼굴을 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때 벤츠 씨의 화장이 재미가 도를 넘어선지라
도저히 잊혀지지가 않던데요."
" 진 헤 미. 입 다물어."
신랄해지는 헤미의 말투에 헤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 죄송합니다. 기분 상하셨다면.......전 다만."
그러자 재원이 자신의 말실수를 눈치 채고 다시 사과를 한다. 헤라가 놀란 토끼 같은 눈을 재원에게 돌렸다.
사과를 하다니.......미안하단 소리를 몇 번인가 들은 적은 있지만 죄송하다는 말에 존칭 까지 붙여 두 번이나 사과를
하는 재원의 모습이 그녀는 상당히 낯이 설었다.
하지만 재원에 대해서, 얼굴과 그가 가지고 다니는 두 대의 차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헤미는 그 사과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 코엑스 비상구 문 앞에서 마주 쳤었는데, 벤츠 씨 입가에 잔뜩 묻은 오렌지 색 립스틱이 무지 강렬했었거든요."
기분이 풀린 헤미의 나머지 말에 재원과 헤라는 동시에 얼굴을 마주 봤다. 두 사람의 첫 키스였던 코엑스!
재원은 그제야 비상구 문 앞에서 마주쳤던, 자신의 얼굴을 보고 기묘한 웃을 떠올렸던 여자를 생각해 냈다.
그리고 화장실 거울에서 입술에 번진 헤라의 립스틱 자국에, 여자의 미소에 의미를 깨닫고 복수를? 다짐했던 그
일까지.
" 아!......그때........네."
앞으로 끼어드는 차를 여유 있게 피하던 재원이, 그 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는 것 같다고 헤라는 생각을 한다.
더불어 스토커가 되겠다는 이 남자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도 그가 그녀의 자매를 대하는 태도에서 엿 볼 수 있었다.
경춘가도에 들어서기까지 정체는 생각보다 심했다. 토요일이기 때문에 병원의 면회시간도 짧아 일부러 아침 일찍
나선 길이건만. 계산처럼 그리 일찍 도착 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지루해지는 차안에서 다시 헤미가 입을 열었다.
" 직업이 뭔지 물어도 돼요?"
언니의 질문에 헤라는 하~ 하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재원이 은근슬쩍 헤라의 눈치를 살핀다.
" 직장에 다닙니다."
그리곤 망설이는 투로 대답을 했다. 지금까지 헤라를 제외한 누구도 그에게 직업 같은 것을 물은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난감했던 것이다. 그런데.......그녀의 언니가 또 묻는다.
" 뭐 하는 직장인데요?"
" 전자 제품........ 회사요."
" 어머. 홍홍홍~~~~ 그럼 대 기업에 다니시나 보네요."
참 내~ 홍홍홍 이라니!!! 헤미의 과장된 웃음에 기가차지도 않는 헤라는 혀를 찼다.
" 네."
" 홍홍홍~~~~~와~ 그럼 연봉이 얼마인지 되게 궁금한데 혹시.......얼마나 되요?"
또 과장된 웃음과 속 보이는 질문들.
허나, 전혀 속내를 숨기지 않는 헤미의 질문들이 재원은 그다지 부담스럽거나 싫지 않았다. 헤라의 자매들이 그런
것들을 묻는다는 것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 차~ 언니~ 언제부터 이 연주 과였어? 홍홍홍 이라니! 그게 웃는 거야? 그건 연주같이 생 내숭 까는 애들이나
웃는 소리야! 언닌 남의 연봉 따위를 물으면서 그런 웃음소리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응?"
하지만 재원의 대답을 가로막은 헤라가 헤미에게 빈정거렸다.
" 이 가방 속에 타월 잔뜩 들었거든! 재갈 물리기전에.......알지?"
그러자 돌아오는 헤미의 말은 이를 앙다물고 내는 으르렁거림뿐이었다.
" 홍홍~~ 연봉이 얼마나.......아직 대답 안하셨는데요."
그리곤 재차 묻는다. 만약 재원이 그냥 얼버무린다면 차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물을 기세였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 온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고, 그는 자신의 연봉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월급이 없어도
쓰는 일에 지장이 없었고, 연봉 보다는 그의 재산이 얼마인지 묻는 게 더 명확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일 이었다.
" 글쎄요........별로 많지는 않습니다. 대략 1억 5천억에서 2억.......인가? 뭐. 네.......아무튼."
재원은 한두 번 심심풀이로 들여다본 컴퓨터상의 월급명세 내용을 재빨리 떠올리며 대충 계산을 해서 말해줬다.
" 하하~~ 농담 마시구요. 너무 과하게 쓰시네. 아무리 농담 이래두 그렇지. 홍홍홍~~~~"
헤미가 웃음을 머금은 눈으로 그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다. 헤림도 얼토당토않은 액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략으로 말하는 재원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헤라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린다. 재원은 세 자매의 석연치 않은 반응에 다시 한번
실수임을 깨달았다.
" 아.......네. 농담은 아닌데요."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차 안에서 이마에 땀이 맺힌 재원! 누굴 상대로 얘기하면서 이렇게 고군분투 하기는
처음이었다.
재벌가의 사람임을 굳이 숨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헤라의 표정으로 보아, 지금 그의 배경에 대해 확실히 해두는
것은 별루 좋은 일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든 재원이 입을 다물어 버린다.
자신의 배경에 기가 질린 헤라처럼 그녀의 자매들도 현재의 이 우호적인 감정이 변해 버릴까 걱정이 서기도 한
그였다.
그로인해 대화가 끊기고.......다시 침묵이 생겨났다.
헤미는 그가 말한 액수를 밑바탕으로 그의 신분에 대해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고, 헤림은 이 돈 많은 남자가
동생에게 과연 진심인가를 따지는 중이었으며, 재원은 그녀의 가족들에게 어떻게 어필해야 그녀를 얻을 것인가를
계산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헤라는.......그녀의 가시밭길 인생에 회의를 품는 중 이었다.
오후 1시쯤이나 되서야 춘천의 병원에 도착을 했다. 서울에서부터 꼬박 4시간이나 걸려서 온 샘 이었다.
" 안녕하세요?"
헤미가 BMW의 창문을 내리고 익숙하게 정문의 경비에게 인사를 건넨다.
" 이번 주엔 새어머니는 안 오시네?"
경비도 친근하게 인사를 받는다.
" 네. 대신 저희가 두 번 오잖아요."
" 그래.......근데, 막내는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더 예뻐졌어!"
그리고 조수석의 창문을 열고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건네는 헤라에게도 아는 척을 했다. 재원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경비의 마지막 멘트 때문이었다. 하지만 벌써 7년간이나 그녀들을 봐온 경비에겐 별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32병동. 22병동의 알콜 치료 병동에서 이곳 32병동으로 옮긴 지 2년이 지났다. 32병동은 만성 정신 질환자들만이
있는 병동이다.
알콜 중독으로 인해 진행된 아빠의 치매는 재활치료에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가끔 정신이 돌아 올 때도
있기는 했지만 갈수록 그 간격은 벌어져 가는 중 이었다.
헤라와 재원의 앞에 걸어가는 두 언니를 두고도 재원은 차에서 내린 순가부터 그녀의 손을 놓지 않는다.
그녀가 손을 뒤틀고 눈짓을 해보지만 그는 까닥하지 않았다. 그녀는 재원의 손을 뿌리치는 일을 포기하고 심호흡을
하기 시작한다. 아빠를 볼 때마다 몰려드는 가슴의 답답증은 때문 이었다.
" 아빠?"
토요일 오후 인지라 치료 프로그램이 없는 한가 한 시간 이었다. 침대에 누워 멍 하니 창 밖을 바라보던 아빠는
헤림의 부름에 반응이 없었다.
담당 간호사 말이 어제부터 당신의 병실에 도둑이 들었다고 주장하는 아빠는 소지품들을 모두 발치 아래 놓아두고
있다고 했다.
역시나 침대의 발치에는 칫솔에서부터 타월과 새엄마가 읽던 책 그리고, 추팝춥스의 빈 상자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
" 아빠. 막내 왔어요."
헤림이 창 밖을 향한 채 반응이 없는 아빠의 등을 두들겼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아빠는 눈을 감고 있었다.
" 도둑이 들었어. 내 사탕 다 가져갔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과 어눌한 발음.......몇 달 전 마지막으로 헤라가 아빠를 봤을 때보다 더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감정을 담지 않고 차갑기만 했다.
아직도 손을 놓지 않은 재원은 헤라의 표정을 힐끔거린다. 뒷조사를 통해 그녀의 부친에 병증을 알고는 있었지만
냉랭하기만 한 헤라의 눈빛에 그는 약간 긴장을 한다.
" 응.......그랬어요? 걱정 하지마세요. 제가 사탕 한 상자 또 사왔으니까."
헤림이 다정하게 아빠의 팔을 어루만지며 안심 시킨다. 치매 환자 치고 아빠는 성격은 온순한 편 이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감고 있던 눈을 뜬 아빠는 침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는 헤라를 봤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있는 재원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 오늘이 무슨 요일 이지?"
시선을 재원에게 꽂은 아빠가 요일을 물었다. 불안한 감정이 들 때 자주 묻는 질문 이었다.
헤미가 침대의 맞은편에 걸린 커다란 달력을 가리키며 오늘이 토요일 이고, 7월 며칠이라고 또박또박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아빠는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아빠가 재원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헤라는 다시 한번 재원에게 잡힌 손을
뒤틀었다.
아빠의 눈에서 기특해 하는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치매에 걸린 사람에게서 어떻게 그런 눈빛을 읽을 수 있는지
스스로도 설명을 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재원은 뒤트는 헤라의 손에 더욱 힘을 줬다. 그녀의 표정에서 그녀가 부친으로부터 상처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그였다. 상처 받은 사람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모르는 그 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은 확실했다.
" 나 목욕 할래."
발치에 놓인 물건들을 제 자리에 갖다 놓던 헤림이 우뚝 움직임을 멈춘다.
거의 모든 치매환자가 그렇듯 목욕하기를 싫어하는 아빠 입에서 난데없이 스스로 목욕을 한다는 소리가 나오자
모두들 놀라고 있던 중이었다.
" 저 사람이 시켜 주면 한다. 허허."
그리고 폭탄! 어눌한 동작의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재원을 가리키는 아빠의 한마디! 헤라와 재원 헤미, 헤림 모두가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맞는 기분이 들었다.
" 아빠....... 저 사람은.......간호사 아니에요. 헤라 친구야."
헤림이 먹힐 리 없는 설명을 해본다. 치매 환자의 고집은 대단하다.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여간해서는
꺾이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 나가요. 재원 씨."
표정만큼이나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며 헤라는 재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 헤라가 누구야? 저 사람은 내 친군데. 허허."
그러나 아빠의 다음 말에 재원은 문의 손잡이를 트는 헤라의 동작을 저지했다. 헤라가 험악한 얼굴이 되어 그런
재원을 노려본다. 어쩔 샘이냐고 묻는 눈이었다.
" 간호사 하나만 대동하게 해주세요. 제가 시켜드릴게요."
헤라의 부릅뜬 눈을 무시하고 재원이 전혀 예상 밖의 얘기를 한다. 그 대답에 헤림은 당황했지만 헤미의 눈엔
흉계를 꾸미는 빛이 스쳐갔다.
재원이 헤라의 손을 놓고 침대로 다가가 부친을 부축했다. 헤미가 재빨리 간호사 하나를 부르러 간다.
간호사가 오고 욕실로 들어간 아빠의 옷을 벗기기 위해 문이 닫혔다. 재원이 욕실로 들어가기 바로 전 헤미는
그에게 BMW의 스마트키를 받아냈다.
차에 놓고 내린 물건이 있다는 핑계로 말이다. 그리고 욕실 문이 닫히자, 입을 꼭 다물고 청동으로 만든 동상보다
더 얼굴근육이 굳어진 헤라를 남겨둔 채, 헤미는 헤림의 손을 끌고 병실을 나왔다.
따뜻한 욕조에 부친을 앉히고 간호사가 샤워기를 틀어 머리를 감기기 시작했다. 재원은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다만 헤라의 부친이 그의 손을 놓지 않고 잡고 있었으므로 샤워기의 물이 튀는데도 불구하고 옆에 서 있는 일을
해야 했다.
" 우리 막내가 날 미워하지?"
머리를 감고 간호사가 몸에 비누칠을 시작하자, 헤라의 부친이 재원에게 물었다. 처음 그는 지금 이 말이
제정신에서 한 소리인가 하는 생각에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간호사를 바라봤다.
그러나 간호사는 그저 웃는다.
" 그땐 그 수밖에 없었어. 내가 힘이 없어서 남편은 못하고, 아빠 밖에 할 수가 없었다구."
어눌함이 사라진 말투로 밑도 끝도 없이 말을 시작했다. 헤라의 손을 잡고 있는 재원이 딸에게 어떤 의미의
존재인지 짐작이라도 하고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 잠깐 제정신 인거 같네요."
간호사가 놀라하는 재원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 그 덕에 우리 마누라야가 많이 아팠지만........내가 우리 막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고작 그거였던 거야."
재원은 다시 헤라의 부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 속엔 니스에서 마지막으로 재원의 아버지가 보여줬던
미안함과 죄책감이 정리되지 않은 감정으로 엉겨 있는 것 같았다.
" 그 나쁜 놈들한테서 우리 막내를 지키는 최선이었어. 그 당시 나한테는 말이야. 허허."
제정신이 아닐 때 웃던 그 허탈한 웃음. 자식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을 재원은 헤라의 부친을
통해서 미세하게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아마 아버지도 지금 하늘에서 이런 웃음을 웃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말이다.
헤라의 부친은 그 허허 하는 웃음 뒤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목욕이 다 끝날 때까지 재원의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재원이 헤라의 손을 꼭 잡고 있던 것처럼.
그 덕에 재원의 얇은 흰색 바지는 허벅지 아래로부터 발목 까지 흠뻑 물기를 먹어버렸다. 그러나 가슴은 뿌듯했다.
이제야말로 헤라의 인생 속에 자신의 한 발을 진정한 의미로 디딘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잘 잡아봐."
헤미는 어수룩하게 펜치를 잡고 고개를 멀리 띠운 헤림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 못이 흔들리잖아. 꽉 잡아야지."
" 몰라~ 네가 해. 그럼."
" 나 혼자 할 수 있었을 것 같았으면 언니를 데려왔겠어?"
못을 치는 팡팡 하는 소리는 요란한데, 못은 타이어에 들어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헤미와 헤림은 지금 재원의 BMW 타이어에 못을 박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망치로 타이어에
못을 박으려는 깜찍하다 못해 끔찍한 생각을 했는지 어이없기가 그지없다.
"팡팡팡" 몇 번이고 망치로 못을 내리쳐 보지만, 못은 트램플린이라도 탄 듯 제자리에서 튕겨 오르기만 할뿐 바늘
구멍하나 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엔 그 못이 펜치를 빠져나와 공중으로 튀어 오르고, 시멘트 바닥에 챙그랑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나둥글려 버렸다.
" 아이! 진짜! 야~ 진 헤 미! 이게 애초부터 말이 되냐? 망치로 타이어에 못을 박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 얘기냐고,
응!"
참다못한 헤림이 나둥그러진 못을 보며 신경질을 부렸다.
" 야 봐바!!!! 저기! 저기 지나가는 똥개가 웃는다. 니들 뭐 하냐고!!!!머리가 지 아이큐도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말이야. 차라리 송곳으로 뚫어버리면 안돼?"
그리고는 주차장 주변을 어슬렁대는 변견의 견해까지 얘기 한다. 사실 헤림은 헤미의 이 어처구니없는 계획에
그다지 맘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 바보냐? 송곳으로 구멍 내면 여기서 바람이 다 빠져 버리잖아. 그럼 보험사나 견인차에 연락해서 타이어 갈면
되는데......... 구멍 내는 의미가 없지! 못을 박아서 서서히 빠지게 해놔야 눈치 못 채고 가다가 산중에서 오도 가도
못할 거 아니냐구."
헤미가 답답한 가슴을 치며 머리가 안 돌아가는 언니를 나무랐다. 헤림이 인상을 박박 긋고 마음에 안 드는
계획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래도 머리를 굴려 본다.
1분이라도 빨리 못을 박아 놓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 그럼.......저기 가서 굵은 나뭇가지 하나만 꺾어 와봐."
몇 분인가 머리를 쥐어짜던 헤림이 주차장 가에 심어진 나무를 가리킨다.
그러자 헤미가 아! 하는 표정이 되더니 방긋 반가운 웃음을 짓고 얼른 손목 굵기 만한 나뭇가지를 꺾어왔다. 힘도
좋게 말이다.
그런 다음 바닥에 뒹군 대 못을 다시 집어 나무에 박는다. 못이 나뭇가지에 튼튼히 박혔는지 흔들어 본 헤림은
나뭇가지를 잡고 박혀 있는 못을 세워 타이어를 향해 힘껏 휘둘렀다.
" 퍽!!!!!!"
세상에 이보다 기분 좋은 소리가 있을쏘냐!
" 빙고!"
못은 그녀들의 계획대로 타이어에 통쾌한 소리를 내며 박혀 들었다. 그렇지만 다음엔 못과 함께 타이어에 들러붙은
나뭇가지를 떼 낼 일이 남아 있었다.
손으로 잡아떼는 것은 어림도 없었고. 그녀들은 궁리를 한끝에 재원의 차를 약간 움직여 보기로 했다.
그러나 재원에게 받은 스마트키를 제대로 다룰 줄 몰라 한 참을 헤매던 자매는 티격태격 한끝에, 키를 차에 꼽고
시동을 거는 일에 성공하는 데만 무려 10분이나 허비했다.
어찌됐건 나뭇가지를 타이어와 못으로부터 분리시키는데 성공한 그녀들은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으니 스페어타이어다.
그냥 꺼내서 버리자니 이 고가의 차에 달린 타이어가 수 십 만원을 호가 하리란 것은 뻔한 사실인데.......그게 너무
아깝단 말이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궁리 끝에 헤미는 못과 망치를 빌려준 경비 아저씨를 떠올린다. 그 에게 타이어 보관을
부탁하면 될 일이었다.
여기까지 그녀들의 계획이 착착 진행이 됐다. 이제 남은 일은 헤라와 재원을 병원에 늦게까지 붙들어 두는
일.......그리고 연락을 취할 수 있는 휴대폰을 빼내는 일과 깊은 시골로 유인하는 일, 세 가지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두 남녀가 인적이 드문 이 강원도 산골 어딘가에서 차를 멈추고 같이 밤을 보내게 만드는 일이
그녀들의 최종 목표였다.
이미 몇 번인가. 같이 밤을 지낸 재원과 헤라의 경력을 모르는 순진한 언니들의 순진하지 않은 황당한 계획 이었던
것이다.
헤림은 헤라가 재원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그렇기에 혹시 재원이라면 헤라의 남성혐오증 으로
인한, 어린시절의 안 좋은 기억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을 완화 시켜 줄 수 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로 헤미의 계획에
동참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새엄마의 걱정처럼 더 상처만 남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서는 것도 사실 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더 깊은 속마음은.......재원이 부자라는 것에 있었다. 아직 그가 얼마나 부나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헤라가 그와 결혼하게 된다면........현재의 처한 최악의 경제적 난황에서 어느 정도 빠져 나갈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현실적인 계산에서 한 행동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죄책감이 드는 것을 밀어낼 수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 아빠는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헤라는 재원의 흠뻑 젖어버린 바지를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병실 밖으로 나와, 복도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헤라의 냉랭함은 그
냉기가 아직도 만만치 않았기에 재원이 섣불리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용한 복도에 선선하게 불어드는 바람을 가르고 헤라의 휴대폰이 울렸다.
" 네. 진 헤 라입니다."
조용함을 가르는 벨 소리에 헤라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전화를 받은 그녀의 얼굴은 더욱
찌그러들고 있었다.
[ 나요. 송 석 훈. 돈이 돌아왔더군.]
" 네. 당연 한거 아닙니까? 이미 얘긴 다 끝난 걸로 아는데요."
[ 그래? 그럼, 내가 채권자로써 권리를 행사해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
" 맘대로 하시지요."
[ 흥! 맘대로 하라니.......가족들 안위보다 정 재원 이가 더 중하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맞나? ]
" 그것도 맘대로 생각하시지요."
최대한 짧게 말을 받은 헤라는 옆에 앉은 재원에게 혹시나 석훈의 목소리가 들릴까 자리를 일어선다. 그리고 열려진
비상구 안으로 들어가 계단의 손잡이에 등을 기대어 섰다.
[ 정확히 대답해요. 진 대리. 당신 대답에 따라 내 다음 행동이 바뀔 테니까.]
이것도 협박인가? 가뜩이나 아빠로 인해 언짢은 마음에 석훈이 기름을 붓는다.
" 쳇~~이보세요. 송 석 훈 상무님."
역정이 오른 헤라가 콧방귀를 끼며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던 참에 어느새 옆으로 온 재원이 그녀의 휴대폰을
거칠게 낚아챘다.
" 끊어. 네 돈 따위! 이 여자 필요 없어. 내가 너보다 더 돈이 많다는 건 알지? 송 석 훈. 알면 다시는 전화 하지 마.
한번만 더 내 여자한테 전화 하고 수작 걸면 선전 포고로 간주 할 거다."
소리치지는 않고 그러나 노여움이 가득한 그는 일방적인 할말만 마치고는 휴대폰의 폴더를 신경질 적으로
덮어버렸다.
" 뭐야? 왜 남의 전화는 낚아채고 그래요?"
헤라는 잠시 재원의 성난 얼굴에 주춤하기는 했지만 그의 태도가 월권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가 거칠게 덮어버린
휴대폰을 다시 거칠게 잡아 당겼다.
그러나 헤라가 거칠게 잡아당긴 휴대폰이 뜻밖에도 재원의 손에서 쉽게 빠져나오는 바람에 전화기는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그것도 모자라 계단 아래로 처절하게 몸을 굴려 버린다. 그녀가 구르는 휴대폰을 따라내려 갔다.
배터리가 분리 된 것은 기본이고, 액정도 나가고 안테나도 부러져버린 헤라의 2년 쓴 휴대폰은 그렇게 그녀와
작별을 고했다.
" 내 휴대폰......."
발끝에 체이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헤라가 중얼거렸다.
" 잘 됐네. 이제 PDA 폰 써. 그 전화번호는 나밖에 모르니까 그 개자식 전화도 다신 안 올 거야."
계단 위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재원이 속 시원하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 헤라는 그런 그에게 뭐라 화를
내야겠다. 생각을 해보지만 아직 마르지 않은 바지를 입고 잔뜩 삐진 얼굴이 되어 있는 재원을 보고 있자니 그럴
마음이 사라져버린다.
하늘아래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남자가 치매환자의 목욕을 시키고 족히 몇 십 만원은 넘겨줬을 옷을 물에 불린
모습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삐져있는 재원의 모습은 귀여웠다. 아주 가끔 어린애처럼 구는 그 모습에서 마음 따뜻해짐을 느끼는
헤라였던 것이다.
병실로 돌아와, 박살이 난 헤라의 휴대폰을 본 언니들은 스물 스물 번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느라 혼이 났다.
거기다 재원은 휴대폰을 집에 놓고 왔다 한다. 이것은! 필시 하늘의 계시야! 를 마음속으로 연중 외쳐 대며
그녀들은 헤라와 재원에게 계획대로 아빠의 저녁 시중을 맡기고 청평으로 11시까지 데리러 와 달라는 어이없는
부탁을 한다. 그리고 서둘러 병원을 나갔다.
저녁 시중을 마치고 재원의 손을 잡고 놓지 않는 아빠를 재우고 나온 시간은 저녁 9시를 훌쩍 넘겨 있었다.
헤라는 오랜만에 파김치가 됐다. 그만큼 감정의 소모가 많았다는 의미였다. 차에 올라 조수석에 몸을 묻기가 무섭게
그녀는 졸기 시작했다.
무슨 급한 일인지, 청평까지 데리러 오라는 언니들의 부탁에 따라 피곤함을 무릅쓰고 운전을 해야 하는 재원을
의식해서라도 눈을 뜨고 있으려고 노력을 해봤지만 허사였다.
그렇게 졸기를 한 시간여 정도, 그러다 문득 덜커덩 덜커덩 하는 심상치 않은 소리와 승차감에 잠이 확 달아났다.
" 이상한데."
어두컴컴하고 가로등 하나가 없는 속초로 가는 44번 국도에서 그가 차를 세웠다.
" 차가 좀 기우는 것 같지 않아?"
재원이 고개를 갸우뚱 하며 물었다. 하지만 차에 타자마자 계속 졸기만 했던 그녀로써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차에서 내려 기운다고 생각했던 조수석 쪽 뒷바퀴로 간다. 몇 번인가 발로 타이어를 차는 소리와 진동이
느껴지고 그가 다시 운전석 쪽으로 와 트렁크를 여는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그러다 이내 들리는 재원의 욕설!
" 에이 씨!!!!!뭐야!!!! 제기랄!"
헤라가 차에서 내려 어두컴컴한 곳에 후레쉬 빛이 비쳐드는 차의 후미로 걸어갔다.
" 왜 그래요? 무슨 일이야?"
" 진짜! 미치겠네."
허리에 손을 얹은 재원의 표정이 어스름한 달빛에 비친다. 화가 난 것도 같고 포기한 것도 같은 표정의 그는
스페어타이어가 사라진 트렁크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산중에서 타이어는 바람이 빠지고 스페어타이어는 없었다. 그리고 휴대폰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갇힌 것이다.
국도 변에서 말이다.
게다가 이곳은 부대 주변이라서 지나가는 차도 극히 드물었다.
" 어쩔 수 없네요. 여긴 부대 주변이니까 걷다보면 인근에 시설 같은 게 있는 마을이 있을 거야. 공중전화도 있을
거고. 그럼 거기서 어떻게 해봐요."
헤라가 먼저 재원을 다독였다. 같이 짜증을 낼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피곤해 보이는 재원이 영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 가요."
재원의 손에 깍지를 껴잡고 그를 재촉한다. 그가 차 문을 잠그고 그녀의 손에 이끌려 걷기 시작했다.
작은 불빛 하나도 없는 산중 국도엔 소쩍새가 우는 소리가 들리고 별은 서울과는 달리 무수했다. 희미하게 은하수가
지나가는 자리도 구름이 덮인 것처럼 길게 하늘에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동쪽 하늘엔 먹구름이 서서히 다가와 은하수와 큰 별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차가운 시골의 밤공기, 그와 잡은 손은 따뜻했고, 아빠를 씻길 때 묻은 비누냄새가 미약하게 그의 몸에서 풍겨나고
있었다.
그 냄새를 더 코 속 깊게 들여 마시고 싶어졌다. 허리에 팔을 둘러 가슴팍에 코를 묻고 가슴을 절이게 하는 그의
향기를 욕구대로 자신의 몸속에 채워 넣어 주고 싶었다.
어느 때보다도 더 강인하게 그런 욕구가 생기는 것은, 자신의 치부를 보이고 묵묵히 그 치부를 받아들여주는 재원에
대한 헤라의 믿음에서 기인한 것 이지만 그녀는 아직은 모르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를 걷자 남색 하늘을 하얗게 물들인 불빛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군부대 2개를 지나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서였다.
자정을 앞둔 시간이었지만 토요일인 오늘 현리의 밤거리는 현란했다. 외박을 나온 군인들과 면회자들이 넘쳐났고,
그 속에 섞인 헌병들이 거리 질서를 유지한답시고 한껏 목에 힘을 주고 박자를 맞추어 지나갔다.
" 전화 먼저 해야지요. 언니들한테. 데리러 못 간다고."
헤라가 공중전화를 찾아 언니들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는 언니들이 별로 당황해하는 기색이 없는 것이 왠지
찝지름했지만 그녀는 따져 묻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견인차는 불러봤자 이미 카센터들이 문을 닫은 시간 이었으므로 별 소용없는 일이 되었고, 보험사로 전화 연락을
해놓았지만 그들이 언제 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왔다는 연락조차 받을 휴대폰도
없었으니.......이 밤중에 그들이 서울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숙소를 알아봤지만 주말 외박을 나온 군인들로 들어찬 여관이나 모텔 어느 곳도 여유가 없었다.
현리 삼거리에 있는 커다란 편의점으로 들어가 커피 한 잔씩을 앞에 놓은 재원과 헤라는 이제 하룻밤 이슬을 피할
곳을 찾아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 어떻게 하냐?"
재원이 커피를 한 모금 목으로 넘기며 방법을 묻는다. 한번도 이런 오지도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본적 없는
그로써는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슬슬 빗줄기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마철인 요즘은 종일 맑다가도 밤이 되면 비가 오는 일은 흔한 일
이었다.
빗줄기가 굵어지자 몇 대 있지 않은 시골 마을의 택시도 모습을 감추어 버려, 재원과 헤라는 택시를 타고 서울로
돌아갈 마지막 방법마저도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했다.
" 노래방 가요. 거기서 하룻밤 보내지 뭐."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헤라는 결심을 한 듯 말했다. 재원이 빙그레 웃음이 섞인 얼굴로 그녀를 향해 진심이냐고
묻는 눈빛을 해보였지만 그녀는 커피 잔을 휴지통에 던져 버리고는 씩씩하게 빗줄기 속으로 뛰어 들었다.
" 기다려야 돼요?"
편의점에서 제일 가까운 노래방으로 들어간 헤라가 주인에게 묻는다. 주인은 마침 빈 룸이 하나 있다며 노래방의
제일 후미진 안쪽에 위치한 방으로 두 사람을 데려갔다.
" 여기가 노래방이야?"
빙글빙글 도는 천장의 조명과 조잡한 꽃무늬 벽지. 그리고 커다랗고 멋대가리 없게 생긴 TV와 구식 노래방 기계,
3인용 레자 소파 두개와 테이블.......딱 시골의 노래방 그 정경 이었다.
" 노래 불러요."
헤라가 기계 옆에 꽂힌 마이크를 뽑아 재원에게 내밀었다. 재원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받아 들기는 했지만
그는 노래방 책자를 뒤적이는 헤라를 보고만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 너나 해라."
그러다 마이크를 테이블위에 소리가 나도록 던져 놓고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보는 일을 계속 한다.
헤라는 단둘만의 공간에 있게 되자 등에 땀이 흐를 정도로 재원을 의식 하고 있었다. 한번도 이렇게 까지 바짝
긴장을 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참으로 별일 이었다. 거기에 아까 손을 잡고 걸어 올 때 했던 생각이 떠오르자,
헤라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고 아무 노래나 최신 곡을 찾아 번호를 누른다.
반주로 나온 노래는 조 PD와 인순이의 '친구여'였다. 제대로 불러 본적 없는 노래를 그냥 소리만 질러댔다. 음도
박자도 맞지 않는 그 곡을 연거푸 3번을 불러대자.......마지막엔 소리 지를 힘도 사라져 버렸다.
" 그걸 노래라고 하냐?"
3번째 '친구여'가 끝나자 재원이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아주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자세로 웃고 있었다.
" 그럼 재원 씨가 하면 되잖아."
그녀가 팩하니 쏘아 붙인다.
" 안 하면 되지. 꼭 노래해야 되는 거야?"
그가 지지 않는다. 거기다 맞는 말이었다.
" 내일 아침까지 여기 있을 건데, 그때까지 계속 노래 부를래? 그럴 거면 난 나갈 거다. 내 청각이 예민한 편이라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거든."
빙글거리는 웃음을 웃는 재원은 처음 그녀의 집에 그를 들여놨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 나가든지! 누가 말려요?"
토라지지 않을래야 토라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재원 특유의 약 올림! 것 두 오랜만 이다.
노래 반주가 다시 흘러나오고 헤라는 또 노래를 불러댔다. 노래방 주인이 빠끔히 문을 열고 쟁반에 맥주 두 캔과
주스 두병을 가지고 들어왔다.
재원이 지갑을 꺼내 수표 두장을 건넨다. 주인은 알겠다는 웃음을 웃고는 바로 룸을 나갔다.
" 아침 7시까지 있는 다고 했어. 노래 부르다 졸리면 소파에 쭈그려 자야지 뭐."
그가 헤라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질러 설명했다. 허나 그 설명과는 무관하게 재원의 입김이 귀에 닿는 순간 헤라는
움찔한다. 너무도 민감했다. 너무나 예민하게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 서투른 반응을 하는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 왜 그래?"
그녀가 어깨를 움찔거리자 재원이 그녀를 세심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꼿꼿이 세운 허리와 등은 긴장을 하고
있었고, 노래를 하는 머리는 가사에 집중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 표정은.......묘 했다.
굳은 것도 아니요, 풀어진 것도 아닌 그렇다고 어두운 것도 아니었고, 들뜬 것 같지도 않은, 담담한 표정은 더욱이
아니었다.
재원이 처음 보여 진 헤라의 알 수 없는 태도에 그녀를 더 자세히 보기위해 맞은편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의
옆으로 앉는다.
묵어놓은 지 오래된 머리가 많이 빠져 나와 있었다.
" 진 헤 라.......너! 지금 되게 이상한 거 아냐?"
광대뼈 위를 지나는 헤라의 머리카락을 치워주며 그가 물었다.
" 응! 알아."
하던 노래를 멈추고 그녀가 재원을 돌아본다. 그리고 재원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그가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입술을 겹쳐왔다.
먼저 키스를 해오기는 정확히 두 번째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재원이 입술을 다물고 헤라의 키스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솔직히 그는 어떻게 해야 될지 갈등하는 중 이었다.
그녀가 먼저 덤벼온 이상 이 키스를 받아들인다면 절대 멈추지 못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혀가 재원의 입술을 열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들고, 재원은 그런 헤라가 너무도 걱정스러웠다. 아직 어떤
상황에서 그녀가 과민 반응을 일으키는지 겪어보지 못한 그로써는 당연한 걱정 이었다.
" 헤라.......진 헤라. 멈.......춰봐. 멈.......춰."
재원이 달려드는 헤라를 떼어내며, 그녀의 두 손목을 잡아 쥐고 두 눈을 마주 했다. 숨을 몰아쉬는 그녀는
어리둥절한 눈을 좌우로 굴리며 그의 눈동자를 파고들었다.
서서히 눈물로 흐려진 헤라의 두 눈이 재원을 가슴을 후빈다. 그는 잠시 그녀의 시선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눈을
감았다.
" 갑자기, 왜 이래? 이유를.......말 해봐! 너.......이러는 거 위험하지 않아? 가평에서, 차 안에서도 그래서 그랬던 거
아니었어?"
그가 감았던 눈을 뜨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린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그녀는 어깨에 문질러 닦았다.
" 까짓 것! 죽으면 죽지 뭐! 숨통이 막혀서 뒤로 넘어간다고 해도, 재원 씨 앞에서 끌어 올라오는 내 욕망을 더는
누를 힘이 없어!.......알겠어?....... 알겠냐고 정 재 원!!!!그래서 이러는 거야!........당신이....... 내 앞에서 영원히
사라지던지, 아니면........ 내가 목숨을 걸고........ 당신을 안아 보던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단 말이야........ 이젠!"
'H' 의 '잊었니'의 반주가 흐르는 사이로 헤라는 더듬더듬 지금의 행동에 대해 이유를 설명 했다.
언제나 재원에 대한 욕망은 가득한 그녀였다.
하지만 사라질 줄 모르는 기억이 그녀를 중요한 순간 마다 억눌렀고, 급기야 숨통을 조여오자 포기해 버리려던 그에
대한 본능의 외침은 이제 가두어지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 왜.......목숨을 걸고 싶어졌니? 나 하고 섹스 하는 것에 왜? 지금 갑자기 네 목숨을 걸고 싶어진 거냐고. 난 그게
알고 싶다."
차분한 재원의 목소리에 헤라는 고개를 떨구어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댄다. 터질 듯 아우성 치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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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가: 애플그린(casino92@hanmail.net)
창작실: 30대 plant.1
제 목: 러브써치 펌.
편 수: 1-49(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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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잊었니'의 반주가 다 끝나고 예약해 놓은 다음 곡 'Sg워너비'의 'Timeless'가 나올 때 까지 그녀는 재원의 가슴에
이마를 댄 채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자신도 이유를 생각해 봐야만 했다. 어렴풋이 알 것 같기는 했었지만 정리가 되지 않은 상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마른 침을 삼킨다. 목에 복숭아씨가 걸린 것처럼 침은 굵은 통증과 함께 넘어갔다.
" .......믿어. 재원 씨 믿어. 남자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존재도 믿어본 적이 없었는데.......재원 씨는 예외야.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믿는 남자가 정 재 원! 당신이야...아마도 그래서........그래서 이러는 걸 거야! 유일한
존재인 당신한테........날 걸어보고 싶어서."
말로써 그녀는 상념을 논리화 시켰다. 그가 수긍을 하건 말건 어쨌든 논리적으로 정리를 시켰고, 그녀는 더 이상
다른 생각들은 하고 싶지 않았다.
본능 앞에서 이유를 대라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 아닌가 말이다. 사마귀가 목숨을 내놓고 신이 만든 섭리에 충실해
암컷에게 달려드는 것처럼, 그녀에게 그런 신의 섭리가 정말로 간만에 제대로 적용되는 것 뿐 이었다.
믿는 다는 것! 그것은 그녀가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여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원하는 대답은 아니다. 그래도.......됐어. 일단은......."
실망감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그의 목소리.......그리고 됐다. 라는 그의 다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헤라는 재원의 목에
팔을 감고 다시 입술을 부딪혀갔다.
이번엔 그가 그녀의 혀를 받아 들였다. 재원은 깨닫는다. 지금은 키스는 예전의 서툴렀던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능숙하진 않아도 그녀의 타오르는 감정을 표현 할 수 있을 정도까지엔 이르러있었다는 것을.......진심으로 자신과의
관계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헤라의 키스를 음미하던 그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를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앉히고 그 자신은 바닥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았다. 거추장스런 상의를 벗기고 젖가슴을 가둔 속옷을 들추어 손을
집어넣는다.......여기까지 서너 번인가 반복했던 과정 이었다.
문득 젖가슴을 쥔 그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고 헤라의 표정을 살핀다. 재원의 손이 멈추자 헤라도 그의 눈을
마주봤다.
그녀의 눈동자엔 수줍음 따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고, 수줍음이 있던 자리엔 목마른 이가 물을 찾는 듯 한
'갈망' 이란 표현이 대신하고 있었다.
" 멈추지 마......."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짜내며 헤라는 그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 당겼다. 재원이 옅은 산호색으로 물들어
있는 그 곳에 입술을 가져다대자 그녀의 탄력 있는 허리 근육들이 일시적이지만 수축 한다.
그러자 재원의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즉시라도 멈추어야 한다면 멈출 준비를 하고 있던
온몸의 감각들이 촉수를 곤두세운 것이다.
탐스러운 그녀의 가슴에 입술을 묻고, 이런 순간이 오길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지를 절감하며 매끄러운 목과
어깨와 허리를 지나, 스커트를 들추고 속옷을 파고들어 보드라운 피부 속에 숨어있는 엉덩이를 쓰다듬자, 자신의
손바닥에 느껴지는 감촉에 그의 온몸이 감전이 된 듯 찌릿해져 왔다.
헤라의 손이 셔츠 속으로 들어와 등을 어루만진다. 어색하게.......순간, 재원은 픽! 하는 자조적인 웃음을 살짝
웃어야 했다.
너무나 서툰 그녀의 손톱이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근육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애무만으로도 그녀는 너무나 많이
달아올라 있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를.......첫 만남에서 침대로 끌어 들이려 했던 스스로가
우스웠고,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를 안지 못해 우스꽝스런 게임에 끌려 다녔던 지난 일들이 유쾌했다.
그리고 그렇게 원하던 그녀를 안을 수 있는 현재는....... 이상하게도 불안했다.
재원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충분히 준비가 된 그녀의 몸 위로 재원이 올라간다. 첫 관계에 정신이 산만한 그녀는 재원의 옷을 벗길 줄도 몰랐다.
그가 스스로 바지의 벨트를 푸르고 지퍼를 내린다.
스커트를 걷어 올리고 허벅지 안쪽을 손으로 밀어 그녀가 다리를 벌리게 만들었다. 그녀의 감겨져 있던 눈이 떠진다.
얼어붙은 듯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 속엔 갈등이 서려져 있었다. 멈추지 말라던 갈망이 사라져 버리고
말이다.
왜? 재원은 그녀의 혼란한 눈 때문에 잠시 멈칫하지만.......때는 이미 늦었다. 그의 것은 벌써 그녀의 안으로 서서히
침입해 들어갔고 그녀는 막지 않았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는 아픔이 강렬하게 몰려들자 헤라는 숨을 멈춘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재원의 얼굴을 확인해야만 했던 것이다. 자신의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그 라는 것을 머릿속에 새겨 넣고 겹쳐지는
영상과 그의 얼굴을 맞바꾸어야 했기 때문이다.
흥분한 그가 그녀에게 입술을 겹쳐오려 하지만 헤라는 거부한다. 키스를 하게 되면 그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망막에 비쳐드는 영상이 그를 대신 해 자신의 몸에 올라탄 이 남자가 재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돼버리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또 숨통이 조여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존재를 확인하기라도 하듯 자신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는 그녀 때문에 재원의 몸은 본능과 이성이 반반씩
지배하는 희한한 상태에 머물렀다.
흔히 관계를 가질 때에는 거의 이성을 상실한 채로 상대의 몸속에 들어 간 그것의 감각에 온 정신이 지배가 되는데,
그는 지금 폭발할 듯 달아오른 욕망에도 불구하고.......이성을 발휘 시켜 그녀의 반응 하나하나에 마음을 졸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재원은 지금의 섹스를 중단하고 싶지는 않았다.
" .......괜찮아?"
고통으로 표정이 일그러지는 그녀를 향해 재원이 묻는다. 그러자 그녀가 등을 안고 있던 손을 옮겨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를 확인 하고 또 확인하고 싶었다.
" 견딜 만해요."
그녀의 대답에 재원은 헤라 안에서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좁고 불편한 소파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노래방의
조명 아래에서, 헤라는 처음으로 남자를 느꼈다. 그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었다.
몸의 일부가 된 그를 느끼며 육체의 아픔과 리-와인드 되는 영상을 지우려 애쓰면서도 재원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떠야 했다.
그의 움직임이 속도를 내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든다. 낮은 신음 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온다.
그러나 헤라는 아픔으로 인한 신음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막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다.
그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거칠어진 숨을 고르는 것 같았다. 이마에서부터 광대뼈를 타고 흐르는 그의 땀이 헤라의
볼 위에 떨어졌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빼내 흐트러져 얼굴을 가리는 긴 머리카락을 치운다.
" 무섭니?........뭐가........뭐가 널 내게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거니?"
숨이 가쁜 목소리로 그녀의 혼란과 갈등의 정체를 재원이 물어왔지만 헤라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는 것 외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 널 안고 있는 남자는....... 나 정 재 원 이다. 그것만 생각해........"
의미를 짐작 할 수 없는 재원의 말에 헤라는 눈을 들어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입술이 다가오고 그가 좀
전에 없었던 격렬한 키스로 그녀를 정복하려 한다.
다시 그의 허리가 움직이고 그녀는 20%의 고통과 10%쾌감, 그리고 그가 강조하듯이 정 재원 이라는 남자를
받아들인 50%의 충만감과, 남자의 몸 아래에 깔린 20%의 수치심을 동시에 맛보았다.
욕망이 커질수록 움직임이 거세지기는 했지만 그는 그녀를 최대한으로 소중히 다루기 위해 노력 하고 있었다.
원하면서도, 받아들였으면서도........주춤거리고, 갈등이 끝나지 않은 그녀의 눈은 그의 마음을 쓰리게 했다.
절정을 향해 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랫입술을 깨물고 아픔을 참는 그녀가 눈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재원의 욕구가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다른 여자였다면 오히려 그런 표정에 더 흥분 상태로 이끌려갔을 텐데........그녀의 표정은
다른 감정을 일으켰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헤라의 얼굴을 팔 안에 품고 재원은 그녀의 일부가 되었던 자신을 서서히 그녀가 아프지 않게
배려를 하며 빼낸다. 그러면서도 그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자신이 섹스 도중 이런 식으로 여자를 배려하리라곤
상상해 보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 자라......"
그녀를 만나곤 모든 것이 새로운 것들 투성이다. 그래서 였을까? 첫 경험의 고통을 감수 하는 그녀 안에서 그는
절정에 다다르기 위한 지금의 욕심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처음으로 깨닫게 되고 그 이기가 부끄러워 졌다.
더구나 자신이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불안한 눈을 하고 있는 그녀를 이대로 계속 안는 다는 것이 그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전혀 즐기고 있지 않았다. 처음엔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랬다.
그렇기에 재원은 이쯤에서 절제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쏟아내지 못한 욕망을 억누르며 그녀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는 그 욕망을 잊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테이블을 밀어 치우고, 맞은편에 있던 소파를 옮겨 와 두개의 소파를 나란히 붙이자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가 헤라의 옆으로 다시 몸을 눕히고, 그녀의 목 밑으로 팔베개를 만들어 그녀를 가슴에 안았다. 다 풀어내지 못한
욕구에 아래가 불거져 있었지만, 그녀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온몸을 뒤덮고 있었지만, 머리가 관두라
소리를 치고 있었다.
" 자.......내가 보초 서줄게."
그리고 뭔가에 쫓기는 눈을 한 헤라에게 잠을 권한다.
반주가 끝난 기계는 조용했고, 대신 다른 방에서 새어나오는 노래 소리가 소음으로 들려왔다. 오렌지색 등이 켜져
있는 방은 연두색 바탕의 꽃무늬 벽지를 노란색으로 중화시키고 있었다.
재원은 잠에 빠져든 헤라의 숨소리를 들으며.......원하고 원하던 그녀와의 육체적 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쁨보다는 오히려 그녀가 멀어진 것 같은 생각에 불안이 엄습해왔다.
그리고 낮에 그녀의 부친이 중얼거리던, 사실인지 치매환자의 상상에서 나온 말인지 모를 말들을 떠 올려 본다.
다른 여자들 같았으면 벌써 스무 번도 더 넘어 갔을 그 유혹을 몇 번이나 뿌리친 그녀였다. 단지, 버진을 지키기
위한 버팀 이라하기엔 의지가 너무 강했던 것은 사실이다.......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더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뇌의 회전은 그곳에서 머문다. 피곤으로 지끈거리는 머리와 중단시켜 버린 섹스의
불만족이 더는 생각하는 일을 거부하는 듯 했다. 그리고 이어, 몰려드는 노곤함에 재원은 어쩔 수 없이 눈을 감는다.
잠실의 아파트에 현리에서부터 온 택시가 선 시각은 점심시간을 조금 넘기고 있었다.
" 들어가. 그리고 전화.......켜 놔라. 꼭 받아. 알았지?"
문을 열고 내리는 헤라를 향해 재원이 다짐을 받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시선을 피해 아파트 건물
안으로 달아나듯 들어갔다.
아침에 눈을 뜬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무척이나 수줍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 가끔 그가 그녀의 몸을 더듬을 때
짓던 표정 이긴 했지만, 아침엔 재원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새벽의 일을 생각해 그런
얼굴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첫 만남에선 그녀가 자신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지을 날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해 보지도 못 한 일이었다. 싸우고 욕을
하고 발로 걷어차며 만난 사이 아니던가 말이다.
어떻게 보면 그야말로 불쑥 나타난 사랑이다. 그러나 시작부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진실 이었다.
처음으로 여자를 먼저 유혹해 봤다. 그녀는 그를 바람둥이라 말하지만.......그는 헤라를 제외하곤 어떤 여자도
일부러 침대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 한 적이 결코 없었다.
그가 헤라에게 예외적 남자이듯이, 그녀도 재원에게 예외적 여자였던 것이다. 첫 만남에서부터........!
아파트에 도착해 도어의 비밀 번호를 누르던 그는 강철 문 안쪽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누군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선 그는 주방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도 모른 척 무시하고 자신의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입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를 하기위해 허리를 묶는 하얀색의 트레이닝 바지로 갈아입었다.
"똑똑똑"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린다.
" 지금 들어오는 거니?"
" 네."
"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는 안 묻는다. 근데........어제 약속에 대해 그런 식으로 행동한 것에 대해선.......엄만 너무
화가 난다."
얼굴을 보자마자 모친은 그가 무시한 어제의 약속 얘기를 했다. 화가 나 있었지만 아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그녀는 노력 하고 있었다.
" 제가 잡은 스케줄 아니에요. 약속에 나가겠다고 말씀드린 적도 없구요."
그러나 되돌아오는 아들의 차가운 목소리. 그녀는 겁이 난다.
" 할아버지도 오셨고, 민 총장님 부부도 오신다고 말했다. 아무리 못 마땅한 약속이라도 그렇게 펑크를 내는 건 내
아들답지 않은 처사였어."
부드럽게 말아 올린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모친은 '내 아들' 이란 말에 힘을 주었다.
" 새어머니 아들다운 처사가 어떤 겁니까?"
뒷모습을 보이고 벽장에서 상의를 꺼내어 입는 모습에 눈을 두고 있던 모친은 바뀐 아들의 말투에 두 눈을 크게
뜬다. 가슴을 조이던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 것 같은 생각에 잠시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 저 결혼 생각 없다고 몇 번 말씀 드렸어요."
면 티를 머리로부터 둘러쓰며 그가 말한다.
" .......다 당장 결혼 하라는 건 아니지 않니......! 그저 인사나 나누고 필요하면 약혼식만 해두고서 결혼은 2~3년
뒤에 해도."
" 정확히 말씀 드려요? 저, 민 수 연한테 관심이 없다는 얘기 에요. 걔랑은 결혼이고 약혼이고 그딴 것 할 생각
없다는 그런 말 이라구요."
더듬거리는 모친의 말을 중간에서 가로챈 재원이 짜증을 냈다. 피곤했다. 헤라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벅찬 머리에 민
수 연과의 일을 집어넣는 것은 용량 초과였다.
그런데도 모친은 아랑 곳 하지 않는다.
" 내 마음은 결정 됐다. 난 수연이 말고 다른 여자는 며느리로 볼 생각 없어. 할아버지 까지도 허락하신
일에.......네가 어떻게."
" 그건 제가 원하는 여자가 없을 때 얘기에요. 새어머니나 할아버지 결정에 따라 결혼 따위를 하는 건! 제가 사랑하는
여자가 없을 때에 한한 얘기 였다구요."
고집스런 모친의 말을 다시 자르고 나선 재원은 그녀의 곁을 스쳐지나 욕실로 향한다. 주방에선 동반해온 도우미
아주머니가 일을 보고 있었다.
" 재원아!"
모친이 욕실로 들어가려는 그의 팔을 잡는다.
" 저 피곤해요. 씻고 자고 싶어요."
소리를 죽여 말하는 재원은 모친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다스리는 사람 앞에서 그녀에게 큰 소리 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네가 원하는 여자가 누구니? 있기나 한거야?"
아들의 눈을 그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할 것처럼 들여다보며 그녀는 시선을 마주하는 재원에게 묻는다.
" 보셨잖아요. 두 번이나."
잡혀진 팔을 빼내며 재원은 한풀 꺾인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시 욕식을 향해 돌아선다.
" 그걸 말이라고 하니? 말이 되는 소리야? 안돼! 그 여자는 절대 안 된다."
아들의 뒤에 대고 단호하게 말을 한 모친은 그가 돌아서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왜 안 되느냐고 물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멈칫거리지도 않고 뒤 돌아서지도 않고 그대로 욕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모친은 혼란스런 눈을 굴리며 머리를 돌아 내려오는 현기증에 벽을 의지한다. 본래도 무뚝뚝하고 다혈질인
아들이었지만, 대어든 적은 없었다.
거의 모든 사적인 결정들은 모친의 의사에 맡겼었고, 더군다나.......처음 사귀던 여자를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자 그 다음날로 연락을 끊어버린 아들 이었다.
그랬는데.......달라졌다. 언제부터 인지 정확히 계산이 되지는 않지만 점점 가희동 집에 들르는 횟수도 줄어 있었고,
표정도 변해 있었다.
" 아줌마.......다 됐으면 가요."
생각이 아들이 변했다는 사실이 도달하자, 그녀는 심하게 고동치는 심장에 손을 얹고 벽에 의지했던 몸을 일으킨다.
재원은 욕실에서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고 자동 잠금장치가 잠기는 소리를 들었다. 샤워기의 물은 잠긴지 오래지만
그는 욕실을 나가지 않고 모친이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친을 그렇게 보내고도 그는 모친이 마음에 걸리기보다, 헤라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벌거벗은 몸에 자신의
무기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녀를 안았던 순간 하나하나가 기록된 영상처럼 눈앞을 지나가기까지 한다. 정말 중증
이었다.
따져보면 지금 까지 나누었던 관계 중 제일로 형편없던 관계였음에도 헤라의 일부가 되었었단 것만으로도 그는
스스로의 무기가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참으로 남자란 동물은 별 쓰잘대기 없는 것에 뿌듯해한다.
" 병신!"
그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향해 욕을 한마디 하고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다시 거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 안에는....... 사랑에 빠져 넋이 나갔던 부친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열 살 때 마지막으로 본, 생전 부친의 얼굴은 별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진으로는 수도 없이 기억회로에
저장해놓은 그 얼굴 이었다.
재원은 거울 속의 얼굴을 살짝 주먹으로 쳐본다. 그리고 쓴 웃음을 한번 짓고는 욕실을 나왔다.
머리를 적신 물기를 털어내고 주방으로 갔다. 아침을 먹기 위해 현리에서 식당에 가기는 했었지만 음심이 입에 맞지
않아 거의 손도 대지 못했다.
메뉴는 해장국 이었다. 헤라는 콩나물 해장국을 시켜 한 그릇을 뚝딱하고 국물까지 훌훌 마셔버리는데 비해 그는
콩나물 건더기 몇 개를 건져 먹은 것이 전부였다.
그런 그를 헤라는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입술을 몇 번 실룩거리고는 숟가락으로 밥을 떠 재원의 입에 떠 넣어
주었었다.
그러다 먹는 모양이 영 시원치 않은 그를 향해' 진짜! 먹는 건 꼭 계집애 같네.'라고 핀잔을 준 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재원은 왠지 창피한 생각이 든다.......그녀 앞에서 남자답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억지로라도 먹을 걸 하고
후회도 됐다.
하여간.......식성까지 바꾸고 싶게 만들어! 하며 그는 냉장고 문을 연다. 그때 주방의 미니 바 옆에 걸린 인터폰이
요란스레 울려댔다.
1년 동안 살면서 한번도 울려 본적이 없는 인터폰이 소리를 내자 재원은 괜스레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 네."
그가 신경을 거슬리는 수화기를 얼른 집어 들어 벨 소리를 멈추게 한다. 경비였다.
[ 경비실입니다. 저기.......사모님께서 사고를 당하셔서요.]
불길함이 바로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재원은 인터폰을 내팽겨 치고 주방을 뛰쳐나갔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헤라는 하루 종일 이부자리에 누워있었다. 몸도 쑤셔왔고, 더 힘이 든 건 양쪽 골반이 꼭
토끼뜀이라도 뛰고 난 것처럼 아프다는 것이었다.
5분? 10분? 하여간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때문에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러 대는 것에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일요일이라 쉬는 헤미언니는 눈치를 보며 새엄마 방에 누워있는 그녀를 몇 번 씩 들여다봤고
새엄마는 춘천 병원에 갔다가 어째서 연주네 집에서 자고 온 것인지 물었다.
그리고 헤라는 새엄마의 질문에 어렴풋이나마 어제의 일들이 언니들의 흉계가 아니었을까 짐작을 할 수 있었다.
" 저녁 안 먹을래?"
헤미가 아까부터 PDA폰만 노려보고 있는 헤라를 들여다본다. 헤라는 멀뚱히 헤미를 쳐다보다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절로 오만상이 찡그려 졌다. 무릎을 굽혀 일어나는 일은 고역 이었고.......그의 입술이 닿았던 가슴의 그곳은 옷깃이
스칠 때마다 쓸데없이 민감해 졌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이미 스물일곱이나 먹은 처녀에게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헤라는 가족들이 알게 될까봐 가슴이 조마조마 한다. 특히 새엄마가.
큰 언니 헤림을 제외한 가족들이 오랜만에 저녁 식탁에 모여 앉았다. 보기 싫은 형부도 같이 말이다.
헤라는 언짢은 얼굴로 꾸역꾸역 밥을 떠 넣었다. 하지만 입맛이 없는 이유는 형부의 면상 때문이 아니라, 벌써
왔어야할 재원의 전화가 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화기 켜 놓으라고, 꼭 받으라고 했던 게 누구인데! 그녀의 멍청한 자존심은 먼저 전화를 해보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기에 전화를 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 이번 주 수요일엔 내가 춘천에 갈 건데, 박 서방 같이 갈려?"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는 헤라를 힐끗 살피던 새엄마가 형부에게 물었다. 형부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력서 낸 곳에
연락을 기다린다는 말로 가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역시나 하는 생각에 헤라는 형부를 흘겨봤다. 무능력한 인간이 게으르기까지,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엄만! 어제 언니들이랑 내가 다녀왔는데 수요일에 뭘 또 가! 피곤하게 그러지 말고 토요일에 헤미 언니랑
다녀와요."
헤라가 퉁퉁 맞은 소리를 했다. 새엄마는 국그릇에 담가 둔 숟가락을 들어 입에 국을 떠 넣으며 거의 혼잣말 하듯
중얼 한다.
" 아빠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식탁에 찬물이 끼얹어 졌다. 다가오는 현실에 모두들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새엄마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입을 다문 채 모두들 밥그릇에 시선을 떨구고 젓가락이 오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 와중에 헤라의 귀를 희미하게
울리는 소리가 있었으니........새엄마 방에서 나는 휴대폰 벨 소리였다.
헤라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간다.
" 여보세요."
그리고 PDA폰을 냉큼 들어 목소리를 깔아 받는다.
[ 전화 기다리고 있었나보지? ]
그러나 상대의 목소리는 재원이 아니었다.
" 누구세요? 전화 잘못 거신 것 같습니다만."
그녀는 고개를 갸웃 하며 재원 밖에 모르는 이 번호로 온 첫 전화가, 잘못 걸린 전화라니.......하며 재수 없어! 라는
욕을 속으로 했다.
[ 이런~ 내 목소리를 못 알아듣다니. 서운한데? ]
하지만 끊지 않고 이죽거리는 기분 나쁜 목소리는.......누구인지 영 모르겠지만 은 않았다.
송 상무........그였다.
[ 이 번호 찾는 것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 재원이 번호 뒤지니까 금방 나오더구먼.]
" 용건만 말씀하세요. 또 무슨 볼일 이 남으셨나요?"
헤라는 냉정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 모레쯤.......시간 좀 내요.]
다짜고짜 시간을 내라 하는 석훈의 말에 헤라는 비위가 틀렸다.
" 하~ 웃기시네. 난요, 채권자한테 사정 봐 달라 따위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런 내가 왜 송 상무 님
당신한테 귀중한 시간을 내 주어야 하는지 이해가 전혀 안가거든요. 그러니까"
[ 나도 봐줄 생각은 없어. 근데........재원이랑 관계된 얘기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은데. 어때? ]
헤라의 말을 자른 석훈이 그녀가 거절 할 수 없는 구실을 달았다. 그녀는 목을 넘어오려는 욕설을 삼키며 열을
식히기 위해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입으로 불어 날린다.
" ....... "
[ 뭐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의외인데! ]
" 아뇨. 시간 하고 장소 말씀하세요."
[ 좋아.......진즉에 그렇게 나오시지. 뜸은 왜 들이나? 점심시간이 좋겠지? ]
" ....... "
[ 화요일 오후 1시 반, 남산 하얏트 호텔 정문.]
" 네. 그때 뵙죠."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헤라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하필, 약속 장소가 호텔 이라는 사실이 찜찜했지만, 그런
인사들이(재벌들)아무 카페나 드나들지 않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뒤통수를 당기는 찜찜함을 접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새벽 3시가 넘어 잠이 들 때까지 헤라는 재원의 전화를 기다렸지만 야속하게도 휴대폰은 울지 않았다.
42.
" 잠드셨어?"
" 어........신 윤 석."
" 수술은 잘 된 거야? 얼마나 입원해 계셔야 한대? 원래랑 똑같이 회복은 되는 거래?"
" 정신없어. 자식아~ 한 가지씩 물어봐."
병실 밖으로 나온 윤석이 줄 창 물어재낀다. 재원은 자신보다 더 흥분한 친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약간의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윤석은 파리해진 재원을 얼굴을 보며 그가 어젯밤부터 한 숨도 자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 이 병원이 성형 팀이 젤루 좋은 데냐?"
병원 복도의 벽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는 재원에게 윤석이 물었다.
" 윤 박사님 계신 곳이니까 일단은 여기로 왔지. 우선은 좀 지켜봐야겠다."
피곤으로 목소리까지 갈라진 것이 아마도 어제 하룻밤 사이의 피로는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 윤석은 재원의
어깨에 팔을 얹어 그를 위로한다. 물론 헤라가 있다면 더 확실한 피로회복제가 되겠지만 말이다.
" 정확한 상태는?"
" 코뼈랑 광대뼈가 같이 주저 않기는 했는데........코는 2차 수술 한 번 더 해야 본래 모양대로 복원시킬 수 있고,
광대뼈는 조각난 것들 묶어서 일단은 고정 시켜놓은 상태야. 거긴 좀 두고 봐야겠대."
재원이 바닥에 쪼그려 앉자, 윤석도 따라 앉는다.
" 아파트 자동 유리문에 끼셨던 거야?"
" 응.......센서가 오작동 했었나봐. 변호사한테 연락해 놨으니까.......그 부분은 알아서 처리 하겠지. 새엄마만 고생이지
뭐."
" 가시는데 바래다 드리지도 않고 뭐 했냐? 너랑 같이 계셨으면 센서가 말썽 부렸어도 이렇게 큰 사고는 아니었을
텐데."
전후 이야기를 모르는 윤석이 나무란다. 하지만 그 대목은 재원도 가슴에 떡 하니 씹지 않은 인절미가 걸린 것 같은
부분 이었다.
" 그러게........근데........사실은 좀 그랬어. 결혼 문제로."
무릎 위에 걸친 팔을 축 늘어트린 그가 속을 털어 놓는다. 그리고는 마주 보며 씩~ 하니 웃어 보이는 재원의 뺨을
윤석은 톡톡 두들겼다.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뜻 이었다.
" 헤라 씨나, 새어머니나........민 수연이나....... 아주 겹겹이 산 중 이구나! 자식아."
윤석도 웃는다. 재원이 헤라에게 진지해지면서부터 예상된 일이긴 했지만, 사고는 정말 뜻 밖의 일이었다.
" 잠깐 집에 들어갔다 와라. 내가 병실에 있을게."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은 안색의 재원을 살피며 윤석이 말했다.
" 아냐. 옆집누나 올 거야. 간병인도 있고."
" 그래? 그럼 너 차 안가지고 왔지? 아파트에 데려다 줄게. 누님 오시면 같이 나가자."
그는 재원을 데리고 나가, 잠을 좀 재워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가능 하다면 헤라를 불러서 옆에 놓아 주고
말이다.
" 그럴까?"
재원이 벽을 집고 몸을 일으킨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간병인이 얼굴을 내민다.
" 저기.......본부장님. 사모님이 찾으시는데요."
잠이 든 걸 보고서 나왔는데 그새 깬 모친은 재원을 찾고 있었다. 재원이 다급한 동작으로 병실 안으로 들어간다.
" 찾으셨어요? 윤석이 와서 잠깐 복도에 있었는데."
아직 말하기가 거북한 모친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고는 재원의 손을 잡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잠이 든 듯 한참을 눈을 감고 있기에, 슬쩍 손을 빼보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모친의 손에는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하는 수 없이 재원은 집에 들어가는 일은 포기 해야만 했다.
그제도 어제도, 이틀을 기다렸건만 재원으로부터의 전화는 고사하고 문자하나 날라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는 단순히 화가 났지만, 어제는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하는 걱정이 앞을 가렸고 오늘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중 이다.
그 배신감의 모태는 제주도에서 석훈이 한 얘기였다. 재원이 한번 같이 잔 여자를 두 번 만난 일은 결코 없었다는
그 말이, 머릿속에서 활자가 되어 둥둥 떠다니다 못해 눈앞에 집채 만한 크기로 왔다리 갔다리 하기를 반복하는
상태였다.
" 나가니?"
점심을 먹으러 들어온 헤림이 화장대 앞에서 거울 속을 노려보고 있는 헤라에게 물었다.
" 응."
헤라는 언니를 돌아보지도 않고 성의 없는 대답을 했다. 그런데 헤림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방문에 디민
고개를 빼지 않고 어색한 얼굴을 한다.
" 뭐야? 할 말 있어?"
헤라가 립스틱을 바르던 손을 멈추고 묻는다.
" 저기."
그녀가 아는 척 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헤림이 방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주뼛주뼛 헤라 옆으로 다가와
괜찮니? 하고 물어왔다.
" 뭐가?"
헤림의 물음이 무슨 뜻 인지 알지만 헤라는 고개를 돌려 다시 립스틱 솔을 든다.
" 그 사람.......하고, 무슨 일 있었잖아. 너........아무리 숨겨도 다 표시나."
"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물어? 보는 그대로야. 머릿속도 복잡해서 터질 것 같고,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 있어. 지금도
걷기가 불편 하다고."
헤림의 눈을 마주 하지 않고 거울 속의 얼굴도 외면하며 그녀는 화장품을 챙겨 가방에 넣는다.
" 몸이야.......뭐. 내말은 네가 혹시."
" 그런 것까지 생각했으면서 그런 일을 꾸몄어? 근데 어쩌냐? 나 그 사람하고 같이 밤 보낸 거 벌써 몇 번째야.
언니들이 그렇게 땀 빼면서 기회를 만들어주지 않아도 됐다고."
헤라는 화장대 앞에서 일어나 새엄마의 장롱 손잡이에 걸어놓은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을 하고 있었고, 헤림은 그런 동생에게 놀라고 있었다.
" 저.......정말이야?"
순진하긴. 헤라는 쓴 웃음을 삼키고 언니를 향해 돌아선다.
" 바보! 믿냐?...... 같이 밤은 여러 번 보냈지만. 그제까지는 분명 처녀였었어......."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순간, 울컥 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 그 근데. 왜 재원 씨 안 만나니? 전화도 안 하고 오지도 않는 것 같고."
옷을 갈아입는 헤라에게 바짝 다가선 헤림은 걱정이 잔뜩 묻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원피스의 옆 지퍼를 올리던
헤라가 손을 멈춘다. 그리고 헤림을 똑바로 마주 했다.
" 채 인 것 같아. 아냐.......채였어. 내가 영 시원치 않았거든. 그 사람하고가 처음이라, 나.........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무서웠고. 그리고........그래서 아무튼 집중 할 수가 없었어. 모르는 내가 생각해도 아주 웃겼다고.
그러니 그 사람은.......!"
언니 헤림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그녀는 횡설수설 하고 있었다. 눈은 냉랭한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 냉랭한 눈에서 눈물이 뚜욱! 떨어졌다. 창피하고 비참해져서였다.
" 그거 할 때 .......그 사람이 널 소중하게 여긴다는 느낌 없었어?"
떨어지는 눈물을 숨기고, 잔뜩 입술을 내민 동생을 다잡는다.
헤림은 간접적으로 돌려 묻지 않았다. 동생이 그녀들이 바라고 고대하던 일을 치러냈는데.......그 뒤가, 여~엉
깔끔하지 않은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있었다.
" 모.......몰라."
" 모르다니?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전화는? 전화는 해본거야? 그 쪽에서 안 오면 해봐야 될 거 아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 되지도 않는 거냐고!"
헤림이 다그치자 헤라는 잠시 머리를 굴려본다. 심장이 튀어 나아 발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가슴이 내려앉았다.
결론은, 그는 우리나라 6대 재벌 중 한 그룹의 후계자라는 사실과 .......그런 그에게 무슨 사고라도 일어났다면
틀림없이 뉴스에 났을 것이라는 굉장한 현실 이었다.
늘 염두에 두고 있던 사실이건만 어찌 이다지도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지....... 새삼 신분? 혹은, 계급? 의 차이를
절감하게 되고 헤라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 아냐. 채인 거 맞아. 확실해!"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확신에 찬 말투가 되어버렸다. 아연실색하는 헤림의 얼굴을 뒤로 하고 헤라는 입던 원피스의
지퍼를 올린다.
" .......그래 그래도, 전화 해봐."
PDA 폰을 집어 들고 헤림이 전화 걸 태세를 한다.
"0번 눌러."
고개를 숙이고 있던 헤라는 결심이 선 듯 재원의 단축 번호 0을 알려 줬다. 그리고 헤림의 표정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표 내려 하지 않지만, 절망의 빛이 지나는 언니의 눈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 이~씨! 싸가지 없는 계집애. 지가 뭔데 전화를 받을 수 없다 어쩌다 지껄이는 거야!!!!!!"
전에 없던 욕설을 하고 신경질 적으로 PDA폰의 종료 버튼을 누른 헤림이 씩씩거렸다.
" 뭐 뭐야? 여 여자가 받은 거야?"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던 심장이 멍청하게 되살아나 쿵쾅 되기 시작한다. 계집애라니? 민 수 연이 전화 받았나?
" 지 멋대로 소리샘으로 넘기긴 왜 넘겨! 지가 마누라야 새엄마야?"
헤림은 엄한데 화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 소.......소리샘!!!!!! 하지만 흠칫 놀라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만 듣고 있던 헤라야말로 아연실색 일보 직전 이었다.
우씨! 정말!!!
" 이리 내놔!"
헤림의 손에 쥔 폰을 거칠게 낚아채며 그녀는 가방을 주워든다.
정오를 훨씬 넘긴 시간, 석훈과의 약속은 1시 반 이었으므로 약속시간까지 빠듯했다. 그럼에도 약속에 대한 걱정
보다는 전원이 꺼져있는 재원의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버렸다.
눈앞을 아른거리던, 망막 깊은 곳에 맺혀버린 영상 때문에 재원에게 집중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그래도 그를 받아들였는데.......어째서?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다다른 생각은.........!설마 송 상무의 말이 사실이었던 건가? 난 예외적인 여자가
아니었던 거야?
결론은 오지 말아야 할 곳까지 와버린다. 어제부터 머리 속을 온통 휘젓고 다니던 그 말........천하의 협잡꾼! 석훈의
말을 믿는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연락이 두절된 지금으로써는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날 감히!!!!! 정 재 원!!!! 내 손에 걸리기만 해봐!
맞물린 이가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헤라는 턱에 힘을 준다.
" 윤석아.......잠깐만."
모친이 놓지 않은 왼손을 벌써 2시간째 잡고 있는 재원이 소파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는 윤석을 손짓으로 불렀다.
" 귀 좀........"
그리고 다가온 윤석의 귀에 재원이 속삭인다.
" 알았어. 침대 위에 있다고?"
" 응.......다른 얘기는 하지 말고, 급하게 출장 갔다고만 해라. 휴대폰도 놓고 가서 전화 못 했다고."
" 믿겠냐?"
" 우선은........그렇게 말해. 제대로 얘기 했다가는 괜히 또 겁먹는다. 그 녀석."
녀석이라.......윤석은 재원이 헤라를 부르는 호칭에서 세월을 느꼈다. 만난지 서너 달 밖에 되지 않은 사이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같이 지내온 사람 같은.......그런 느낌이 드는 정다운 호칭.
아마도 그녀를 여자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이 들자 윤석은 재원이 부러워진다.
" 그래.......그건 그렇고, 내가 나가면서 진정제 같은 거 좀 드릴 수 있는지 물어보고 갈게. 만약 된다면 그때
들어가라."
허나 부러운 건 부러운 것이고, 윤석은 재원을 들여보낼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한달 가까이 업무와 연애사업에
치인 재원은 '초췌'란 단어 그 자체였기 때문에, 더는 그의 모친 옆에서 벌을 서는 것은 무리라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친이 누워 있는 현재, 재원을 챙겨줄 사람이 자신 외에는 아무도 있지 않다는 걸 너무도 잘 아는 윤석
이었다.
간호사에게 진정제 투약에 대해서 의사에게 처방을 받을 것을 당부하고 그는 병원을 나왔다.
막 차에 오르는 찰나 휴대폰이 울린다. 처음 보는 번호라 귀찮은 생각이 든 윤석은 벨 소리를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재원의 아파트에 도착 할 때까지 그의 휴대폰엔 같은 번호가 다섯 번 이상은 뜨고 있었다.
왠지 머리가 당기는 느낌이 들고 윤석은 그 느낌이 끌려 전화를 받는다.
" 네."
[ 신 윤 석 실장님이시죠?"]
전혀 모르는 목소리였다.
" 그런데요. 누구십니까?"
저도 모르게 거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재원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의식 하지 않아도
모르는 사람은 절로 경계가 든다.
[ 고 석 준 입니다. 일전에 두어 번 뵀었는데요.]
고 석 준.......? 석준.......!
" 아.......네. 기억 합니다. 반가워요........근데, 무슨 일로 제게 전화를?"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이 되자 그는 경계를 풀고, 연주와 같이 술을 마실 때 그와 나누었던 얘기들을 떠 올리며,
그에 대한 느낌을 잡아보기 위해 노력한다.
이번 장마는 게릴라 성 폭우로, 비가 멈춘 듯싶다가도 이삼십 분이 채 되지 않아 어른 손가락만한 굵기의 물줄기를
쏟아내길 반복 하고 있었다.
물론, 우산을 가지고 나왔다. 그렇지만 퍼 붇다시피 내리는 장대비에는 당할 재간이 없는지라 헤라의 하얀색 시폰
원피스는 물기를 먹어 몸에 착~ 하니, 달라붙어 그 아찔한 몸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쏟아지는, 비 보다 더 무수히 꽂혀드는 남자들의 시선.......그 놈의 소리샘으로 넘어가는 재원의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 날씨에 안 맞는 옷을 선택했던 것이다.
억수로 쏟아지는 빗줄기에 달랑 작은 우산 하나에 몸을 피한 헤라가 하얏트 호텔의 정문에 도착하니 송 상무는
이미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휘~~~ 에헤? 진 대리.......아니 진 헤라 씨! 옷 죽이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나이 값도 못하게끔 휘파람을 휙~ 하니 불어대는 석훈. 헤라는 그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을 뿐
달리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 꼴이 그러니.......커피숍으로 들어가면 에어컨 바람에 감기 들겠는 걸! 어쩌지?"
그리고 먹히지도 않는 속 시커먼 소리를 한다. 제주도에서 그렇게 겪고도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니.......헤라는 기가 막히다 못해 대꾸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만다.
" 하~ 송 상 무님 신체 나이가 장난이 아니신 모양이네요. 아니면 알코~올 중독이든가. 치매 기운이 있는 것 아닌
다음에야 저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헤라가 젖은 우산을 그를 향해 탁탁 털어내며 입 꼬리를 올린다.
" 어이~ 너무 신랄한데. 뭐 지금은 맘껏 비꼬라구. 하지만."
그가 값비싼 양복과 얼굴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을 피해 허리를 뒤로 재끼며 그녀의 말을 받아 똑 같이
이죽거리는데 마침, 헤라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 PDA폰으로 걸려올 전화는 석훈 아니면 재원이라 는 걸 알 고 있는 헤라는 눈앞에 있는 석훈이 아닌 다음에야
재원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가방 속을 조급한 손길로 뒤적였다.
" .......실례."
그리고 석훈에게 고갯짓을 해보이고는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는다.
" ....... "
헤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열이 소리가 되어 튀어나올 것만 같아 입을 다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 여보세요? 헤라 씨? 뭐야........잘못 걸린 건가?"
하지만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재원이 아니었다. 헤라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뭐? 자기만 아는 번호라고?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녀놓고 뭐라.......?
" 잘못 걸리지 않았어요. 윤석 씨죠?"
윤석한테 감정이 실린 목소리를 내며 헤라는 이마를 짚었다.
" 아아~ 헤라 씨. 왜 암 말도 안 해요? 잘 못 건 줄 알았잖아요."
" 이 번호 그 인간이 가르쳐 줬어요?"
" 네? .......아 네네!"
화를 억누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전화선 너머의 윤석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다.
" 그래요? 그 사람 아직 살아 있단 말이죠?"
" 아하!.......하하하. 헤라 씨 열 받았구나! 연락 안돼서. 그 게요 재원이가 갑자기."
" 됐어요. 믿을 수 없는 변명 같은 거, 윤석 씨가 애써 해줄 필요 없구요. 그 사람 오늘 집에 있을 예정인지 없을
예정인지 그거나 알려줘요."
헤라의 단호한 목소리에 윤석은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으리란 걸 직감했다.
" 지금은 없는데, 한두 시간 안으로 들어갈 거예요. 근데요. 그보다 지금 절 좀."
" 알았어요. 근데 혹 저보다 먼저 보게 되면 이 말 좀 전해 줄래요?......지금까지 살아 있었단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윤석의 말을 자르고 그녀는 자기 할 말만 하고는 휴대폰의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온갖 상념들이 지나간다. 지난 삼일동안 졸이고 묶어놨던 감정 들이 일시에 터져 나올 것 같아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마음을 진정 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나쁜 자식!
" 재원이랑 싸웠나?"
그리고 그런 그녀를 현실로 불러내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옆에서 통화내용을 듣고 있던 석훈 이었다.
헤라가 석훈을 쏘아 본다. 그러다 몸을 돌려 정문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 앞으로 걸어갔다.
정문의 도어맨이 택시의 문을 열어주고 그 택시 안으로 한쪽 다리를 집어넣던 헤라가 석훈을 향해 말한다.
" 제가 오늘내일 중으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급한 볼일이 생각났어요."
그녀는 최대한도로 냉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했다.
" 그래? 그럼 좋은 대로. 우리 얘기는 내일 시간을 갖고 좀더 천천히 하는 게 낫겠군. 지금 상황을 보니."
그리고 의외로 석훈도 그녀의 말을 순순히 받아 들였다. 뭐 그 뒤에 숨은 저의야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헤라에게는 뻔하디? 뻔 한 석훈의 협박을 듣는 것보다는 재원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를 몇 대 쥐어 패주고
싶은 마음이 우선 이었다.
그녀가 택시에 몸을 다 싣고 그 택시가 출발을 하자 석훈도 주차장에 대기시켜 놓았던 자신의 차를 부른다.
그 차가 헤라가 탄 택시의 뒤를 쫓았다.
재원의 아파트 입구에서 내린 헤라는 우선 로비의 경비에게 재원이 들어왔는지부터 확인을 했다. 그리고 그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단 걸 안 그녀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차에서 내린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녀의 생각처럼 채인 것이라면 그가 일부러 그녀를 피할지도 모른다는 참 한심한 오해에서였다.
하지만 주차장엔 재원의 차, 벤츠 S 클래스와 BMW 7 시리즈가 나란히 서 있었고, 타고 나갔던 흔적조차도 없었다.
아직 들어오지도 않았는데.......차가 있단 말은 차를 가지고 나가지 않았었던 말이라 판단을 내린 헤라는 다시
급하게 아파트 1층 로비로 올라갔다.
그리고 재차 경비에게 재원이 그 사이 들어왔는지를 확인 한 다음, 정문 밖에 서서 그를 기다리기로 한다.
남산에서 내렸던 비는 잠시 소강 상태였다. 젖어서 몸에 붙어 버렸던 하얀색 시폰 원피스도 어느덧 부는 바람에
하늘거릴 정도로 말라 있었지만, 헤라의 마음만은 아직도 곧 터져버릴 가스통처럼 감정이 압축된 상태 그대로였다.
몇 대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나가고, 택시 몇 대 에서도 사람이 내렸다. 헤라는 그 때 마다 심호흡을 했고,
마음을 다 잡았다.
우스운 꼴 보이지 말고 이성적으로 행동하자! 행동하자! 를 반복 적으로 되 뇌이면서 말이다.
그렇게 30분 이상을 기다렸다. 기다림에 몸은 지쳐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지칠 줄은 몰랐다. 보고 싶은 마음과
분노가 서로를 엇갈리며 그녀의 맘을 오고갔다.
정말 채인 거라면.......그런 거라면....... 그날 노래방에서 믿는다는 말을 했을 때 재원이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까를 생각하자 이젠 전의마저 불타오르고, 커다란 숄더백을 들고 있는 손에는 힘이 들어간다.
이윽고 또 다른 모범택시 한대가 아파트 정문 앞에 서자, 헤라는 목을 빼고 택시에서 내리는 사람을 기다린다.
뒷문이 열리고 천천히 여유 있는 몸짓을 하고 내리는 사람은 남자였고, 트레이닝 복 차림 이었다.
뭐 차림새야 어떻든 머리통 모양만 봐도 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재원 이란 것을. 그는 자동문 옆에서 숄더백을 쥔
손에 시퍼런 핏줄이 보일 정도로 힘을 주고 서 있는 헤라를 발견 하지 못했는지 계단에 시선을 떨 군 채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헤라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가누며 그가 자동문 앞에 서 길 기다렸다. 몇 초간의 마지막 기다림의 순간이
끝나고, 마침 문 앞에 서서 멈칫멈칫 자동문의 센서를 올려다보는 그의 등을 향해 헤라의 숄더백이 인정사정없이
날아간다.
" 정 재 원!!! 죽을래?"
건물을 울리는 고함 소리. 재원은 등을 맞은 충격과 날아든 목소리에 몸을 비틀거렸다. 그러다 정신을 가까스로
수습해 뒤를 돌아다본다.
귀까지 붉어지고 높은 굽의 샌들 때문에 균형을 잡기위해 양다리를 벌리고 서서 씩씩대는 헤라의 모습을 눈보다
머리가 먼저 받아 들였다.
" 연락을....... 끊어? 정 재 원 너!"
" 아아! 헤라 야."
재원이 피곤함으로 욱신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그녀의 이름을 천천히 부른다. 그러자 헤라는 콧방귀를 낀다.
"허~ 헤~라~야? 왜 난처하셔? 이렇게 문 앞에서 죽치고서서 주먹 날리는 여자가 그동안은 없으셨나보지? 근데
어쩌셔? 난 성질 더럽다 못해 폭력적 성향까지 무척 농후하신 몸이시라 이대로는 도저히 못 넘어 가겠는 걸~"
그녀는 얼굴에 비웃음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표정 관리는 그리 수월하게 되지
않았다.
거기다 한쪽 눈에는 뜨거운 것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고, 다른 쪽 눈은 벌써 그것을 얼굴위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 야~ 망신살 뻗히지 말고 들어가서 얘기해."
그녀의 눈물에 재원은 애가 탄다. 하지만 말은 그다지 곱게 나오지 않았다. 간단히 미안해! 라는 말 한 마디만 해도
그녀의 화가 약간은 누그러질 수 있었을 텐데........그는 그러지 못했다.
헤라의 팔을 잡아 당겨 화살처럼 날아드는 시선들을 뚫고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다행히도 엘리베이터는 1층에 머물고 있었고 문이 바로 열린다.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헤라는 잡혀진 팔을
뿌리치고 반짝 반짝 잘 닦여진 문에 비친 재원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는 무표정 했다. 잠시 난처한 얼굴도 보였었지만, 지금은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녀의 가슴 한쪽이 덜커덩
하며 소리를 낸다.
순간 그녀는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제자리에 서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 만큼 그녀는 두려웠다.
" 뭐해? 넋 나간 사람처럼. 내려!"
멍해진 그녀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재원은 도어의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 그가 침실로 들어가고 나서도 헤라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 점심 먹었니?"
옷을 갈아입고 나온 재원이 욕실로 들어가며 묻는다. 헤라는 그의 뒷모습을 아직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만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저렇게 차가운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는 그였는데.......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분노가 치밀었던 마음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꼬리를 감추고 있는 중 이었다.
" 아니. 아직."
손톱을 깨물며 그녀가 중얼거린다. 그 바람에 말은 그 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거실 안을 뱅뱅 돌고 있었다.
재원이 뒤돌아본다. 혼란스런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거실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헤라의 모습이 눈으로
꽂혀들자, 울컥 하는 뭔가를 배 아래쪽 에서부터 치밀어 올라왔다.
언제부터 인지.......그녀에게 미안하단 말만 반복하게 되는 상황들이 자꾸만 생겨나고, 그는 이제 그런 사실들이
죄책감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모친의 병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연락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의사 밖의 상황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헤라를
그렇게 안았던 상황들까지도 자기 실수 인 것 같은 생각.......미안 할 수밖에 없는 현재가 싫었다.
" 이리 와."
재원이 헤라에게 다가서 입에 물려있는 손을 끌어 내리고 눈을 마주 하게 했다. 그를 올려다보던 헤라가 입을 연다.
" 나.......채인 거야? 정 재 원 당시한테 채인 거 맞아?"
그녀의 말을 들은 재원은 귀가 의심스러워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채여? 그게.......
" ........그 채인 다는 말! 말이야........나 좀 어려워서 못 알아듣겠거든? 그러니까 그걸.......그 말을 좀 풀어서
설명해 주겠냐? 그럼 대답 할게 네 질문에. 내가 아는 채인다 뭐 그런 건, 자물쇠 수갑 뭐 그런 걸 잠근다. 대충
그런 뜻으로 아는데....... 그건.......아니지?"
중요한 대목에서 의사소통 두절! 재원은 헤라의 손을 쥔 채로 정말로 난처한 얼굴을 해보였다.
평소라면 아무문제 없이 알아들었을 단어다. 하지만 지난 토요일 현리 에서부터 4일 동안 2시간 이상 잠을 잘
수없었던 그의 뇌는 제 구실 불능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헤라가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녀의 얼굴에 비뜨름한 웃음이 떠올랐다.
" 나 참!.......잠그다. 라는 뜻은 '채운다.'그리고 내가 말한 건 '채이다!' 발로 찼다. 그 뜻 이라구요. 내가 정 재
원씨한테 버려졌냐! 그걸 물었어요. 알아들어요?
또박또박 힘을 주어 단어 풀이를 해준 헤라는 그의 얼굴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정말! 자존심도 없지! 남자 집으로
쳐들어와서 그런 말을 따져 묻다니!!!! 하며 비참한 기분이 든 그녀는 재원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재원은 연락이 되지 않던 지난 3일간 그녀가 그런 생각을 했을 줄은 미처 모르고 있던 터라, 더욱 채이다. 라는
단어의 뜻을 혼란했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들었다.
" 그래.......말뜻은 알아들었는데? 왜? 어째서? 네가 나한테 차였다고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 참~내.......그럼 그것도 내 입으로 설명해 줘요? 그러면 인정 할래요? 아님 다른 변명 이라도 하시던지! 단 윤석
씨가 해주려던 변명은 하지 말아요. 안 믿으니까."
비아냥거리는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 해봐. 날 믿는 다고 해놓고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납득이 가게 설명 해봐라. 그럼 나도 지난 3일에 대해 변명
해주지."
여전히 욕실 앞에서 마주 선채로 두 사람은 서로의 얘기를 기다리고 있다.
" 좋아요. 당신 제의 수락 하지요."
잠시 틈을 두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잡혀진 재원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낸다.
" 난요.......솔직히 인정해요. 내가 그날! 노래방에서 괴 굉장히 서투르고, 또........당신한테 거의 집중 하지 못해서
그쪽이 실망 했다는 거......."
침을 한번 삼키고 재원을 올려다봤다. 그는 여전히 표정이 없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다시
가슴이 덜커덩거리는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말을 잇는다.
" 나도.......당신을 느껴보려고 노력을 했어요. 근데요. 정신이 자꾸만 산만해 지고 시간도 너무 짧았던 데다가, 또
사실 조금 무서워서........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내가 갖고 있는 어떤 거지같은 기억 때문에 많이
무서워서........거기다 처음이라 너무 아프고........또 장소가 노래방 인지라 내가 먼저 달려들긴 했어도 막상 옷이
벗겨지니까 누가 보지는 않을까........그런.......제대로 정리가 되지는 않지만, 아무튼 내가 잘못 한건 알아요. 그래도
난 정말 재원 씨가."
손을 내젓기도 하고 스스로도 정리가 되지 않아 잠깐 씩 말을 멈추는 등 무척이나 횡설수설대고 있었지만 총명한
재원은 요점은 알아들었다.
" 그만! 됐어. 대충 알아들었거든. 그러니까 이제 옷 벗고 나랑 샤워나 하자."
" 뭐........요?"
알아들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그는 난감했다. 그래서 딴청을 피운다. 그녀의 원피스 지퍼를 찾아 몸
여기저기를 기웃대던 재원은 왼쪽 옆에 달린 지퍼를 보는 순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 지퍼를 내려버렸다.
" 무슨 짓이에요? 누가.......누가 당신이랑 샤워를 해!"
헤라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재원의 딱딱하던 얼굴에 비로소 장난스런 웃음이 번지는가 싶더니 어느 틈에
그녀의 허리를 안고 다리로부터 원피스 자락을 들추어 올리고 있었다.
" 뭘 그래? 이미 할 건 다 한 사인데. 누가 들으면 내가 숫처녀를 유혹 하는 줄 알겠네~"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뒤로 뻗혀 대는 그녀를 향해 그가 능청을 떨었다.
" 3일이나 연락 두절시켜 놓은 주제에 뭘 잘했다고 이러는 거예요? 게다가 난 아직 숫처녀나 다름없어요. 딱 한
번이었단 말이야."
그러자 그녀가 앙칼지게 소리를 지른다. 한번의 관계에 가치를 절하 시키는 듯한 그의 발언이 그녀를 불끈 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몇 번을 한다 해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 사정이 있었어. 전 에도 말했지만 난 너 차버리거나 그럴 마음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이야."
" 그럼.......지난 3일간의 행동은 뭔데?"
" 같이 샤워하고 나오면 말해주지! 지금은 몸 구석구석이 너무 간지럽고.......또 피곤해서 못 하겠거든?"
그녀는 원피스를 들추는 재원의 손을 저지시킨 자신의 손에서 스르르 힘을 뺐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떠 그를
노려본다.
의중을 살펴야 했다.
" 하지만 위로가 되는 말을 해준다면.......그날! 노래방에선 네 잘못 없어........내가........내가 실수 한거야."
오메나! 이건 또 무슨 소리래? 헤라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아주 그럴듯하게 짓고 재원을 똑바로 바라봤다.
" 무슨 소리에요? 당신이 뭘?"
" 지금 이거! 이게 우리 관계의 정상 이야! 내가 널 유혹하고 널 먼저 안고, 제안하고, 넌 그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하고.......그러다 내가 참지 못해 널 가지려고 안달하는.......근데 그날은 반대였잖아. 내가 괜시리 진지
모드 잡아서.......널 다그치고.......생각하게 만들고.......그래서 네가 겁을 먹게 했단 말이지."
일리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괴변이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 그의 말에 헤라는 논리가 서지 않는다.
" 이상해요.......이상해."
" 생각 하지 마. 그날은.......잊어버려. 앞으로 얼마든지 만회할 기회가 있을 테니까. 오늘은 그냥 나랑 샤워나 하고
같이 침대에 누워서 잠이나 자면 돼!"
그녀의 팔을 들어 올려 머리 위로 원피스를 벗겨낸 재원이 달콤한 목소리로 귀에 대고 속삭였다.
" 샤워나 하고.......잠이나 자자 구요?"
그리고 서서히 그의 유혹에 넘어가는 헤라.......재원의 입술이 다가와 땀과 비에 젖어 쉰내가 풍기는 그녀의 목을
탐했다. 하지만 그는 상관치 않는다.
" 어떻게.......생각해보니.......확실히 이게 정상인 것도 같긴 하네........재원 씨."
심장이 가볍게 떨려오고........그녀는 노래방에서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흥분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아주 익숙한
흥분과 떨림 이었다.
" 정상이야.......모든 게."
낮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도취되어.......그녀는 지난 3일간의 생각과 불안을, 잘도 잊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자신이 재원의 유혹에 길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그런 생각을 한다.
원피스와 같은 색의 하얀색 슬립 차림의 그녀와 막 바지의 허리끈을 풀려는 재원에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진원지는 주방 이다.
" 미안! 본의 아니게 또 보게 됐네. 여기서 더 이상 멈칫거리면 못 볼 걸 봐야 할 것 같아서........갈게.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구."
그리고 목소리와 함께 모습들 드러낸 윤석, 그가 손을 흔들며 현관 쪽으로 빠르게 걸어간다. 헤라는 어째서 집안에
윤석이 있었던 것인지를 생각하느라 슬립 차림의 몸을 숨기지도 못하고 있었다.
" 신 윤 석!"
재원이 그를 불러 세운다. 윤석이 신발을 신다 말고 재원을 쳐다봤다.
" 내 휴대폰 놓고 가. 가져다 달라고 했지! 가져가라고는 안했어."
윤석의 손에 들려있는 그의 휴대폰! 지금 상황에서 휴대폰을 챙기다니........헤라는 어이가 없어진다. 그러면서도
그가 전화를 받지 않았던 이유는 알게 됐다.
" 아하! 이런, 나답지 않게 당황을 해서."
웃음으로 상황을 얼버무린 윤석이 현관 옆에 놓여 있는 키가 큰 조명등의 갓 위에 휴대폰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얼른 몸을 돌려 도어의 잠금을 해제한 뒤 문을 열었다. 하지만 바로 닫혀져야할 문은 소리를 내지 않았고,
윤석은 문을 열고만 서 있을 뿐 나가지 않는다.
" 야.......빨리 가."
재원이 나무처럼 서 있는 윤석의 등에대고 소리쳐 보지만
" 저기.......지금은 그냥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윤석은 알았노라 는 대답대신 누군가가 문 안쪽으로 들어오려는 걸 저지하려는 듯이 그 길고 굵은 팔을 들어 문에
바리게이트를 쳤다.
하지만 그의 팔을 젖히고 당당하게 들어서는 이가 있었으니! 불청객 민 수 연이 그 주인공 이었다.
항상 괴상한 옷차림이 취향인 그녀였지만 오늘은 더 엽기적이다. 녹색의 주름치마는 그 비쩍 마른 다리의 허벅지
중간까지 와 있었고, 배꼽을 들어낸 오렌지 색 탱크 탑의 끈 옆으로는 속옷 끈이 나란히 줄을 같이 하고 있었다.
제정신인가? 헤라는 당황하기에 앞서 의문이 들었다. 도무지 정상적인 감각을 가진 여자라면 절대로 입을 생각도
하지 않을 옷차림 이었다.
재원이 헤라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두 사람을 우습지도 않다는 눈으로 보고 있는 민 수 연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 우린 지금 바쁜데.......그래서 윤석이도 돌아가려던 참이고."
그가 먼저 말을 했다. 수연은 그 마른 다리처럼 비쩍 마른 웃음을 입 꼬리에 걸고 어깨를 핀다.
" 그래요? 그럼 저도 이것만 전해 주고 갈게요. 뉴욕에서 같이 갔을 때 못 다 마신 와인........재원 씨와의 특별한
밤을 생각해서 샀던 건데, 그날 밤 호텔에서 미처 다 마시지 못한 일이 생각나서.......속이 아프다고........어쨌든
추억이나 되새기려고 가져왔던 거니까 도로 가져가기는 그러네요. 놓고 갈게요."
윤석의 팔에 와인을 안겨놓고 수연은 거침없이 돌아섰다. 그녀의 몸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고, 그 숨소리가
사라지기까지, 재원과 헤라, 윤석은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켰다.
뉴욕........헤라는 재원의 뉴욕 출장에 관해서 물어본 적이 없었다. 누구와 동행했는지.......무슨 내용의 출장
이었는지!
그건 그의 비즈니스였고........그렇기에, 출장에 대해 물었다간 괜한 오해를 사지 않을까 해서 피했던 것인데, 그
것이 뒤통수를 맞게 되는 결정타가 될 줄이야.......!
" 웃기는 여자네. 누가 그런 거 알고 싶댔나?"
머리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도 헤라는 태연한척 말을 했다. 그리고 재원의 팔을 풀고 그의 폼에서 빠져 나온다.
" 배고파요. 점심 먹어. 윤석 씨도 같이 먹고 가요."
윤석을 향해 소리를 친 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재원도 피곤으로 인해 안압이 높아진 눈을 지그시 누르며 헤라의
뒤를 따라 들어간다.
냉장고에서 뭘 찾는지 가지런히 정돈 된 찬 통이란 찬 통을 죄다 뒤지는 헤라......그리고 냉장고를 뒤진 지 10분여
만에 그녀는 김치가 든 작은 통 하나와 고추장 통 하나를 꺼내어 조리대 위에 올려놓는다.
" 김치가 이것 밖에 없어요?"
가시 돋친 목소리로 물어왔다. 재원과 윤석은 식탁 의자에 마주 앉아 그녀를 지켜볼 뿐 대답은 하지 않는다.
가스 오븐을 켜고 그녀는 작은 찬 통 가득 거의 손도 대지 않았지만 폭삭 쉬어버린 김치를 프라이팬에 붓는다.
그리고 전기밥통 안에서 누렇게 색깔이 변한 밥을 폭삭 쏟아 넣고, 고추장을 큰 숟가락으로 다섯 숟가락이나
집어넣은 뒤, 다시 냉장고를 열어 무언가를 찾더니.......
" 마요네즈 같은 것도 안 먹고 살아요?"
라고 툴툴거린 다음에, 올리브유에 마늘과 파슬리 따위를 다져 넣은 야채용 드레싱을 꺼내어 콸콸콸 지글거리는
밥과 김치 위에 부었다.
그리고 밥을 뒤적이며 볶기 시작했다. 고추장의 매운 내와 쉰 김치의 시큼한 냄새.......거기다 마늘냄새와 올리브유
특유의 알싸한 냄새가 한데에 섞여 요상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 자! 볶음밥은 이렇게 통째로 놓고 먹어야 맛이에요. 먹어요."
프라이팬 채로 식탁위에 김치 볶음밥을 만들어 올려놓은 헤라가 숟가락 세 개를 들고 와, 재원과 윤석의 손에 손수
쥐어 준다.
" 이걸.......지금 나보고.......먹으라는 거야?"
폴폴폴 김을 내며 김치 쉰내를 팍팍 올리는 밥을 보며 재원이 설마! 하는 억양으로 물었다. 남자들은 익은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김치 볶음밥은 먹기는 하지만, 삭았을 정도의 김치는 아무리 볶거나 다른 조리를 해주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게 남자다. 왜 그럴까?
" 도대체 이렇게 쉰 김치를 안치우고 왜 놔둔 거야!"
아무 말 없이 숟가락을 프라이팬에 꽂는 윤석과 달리, 재원은 한 마디를 안 할 수가 없었다. 헤라가 먹는 것에 대고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왜? 먹기 싫어요?"
의자에 앉지도 않고 숟가락을 세워 들고 있던 헤라가 무겁다 못해 속에 납이라도 채운 것 같은 목소리를 낸다.
" 당연하지! 이런 잡탕밥을 어떻게 먹냐?"
겁도 없이, 재원은 수연으로 인해 심사가 아주 틀어져 버린 헤라의 심사를 바로 잡아 주지 않을 모양인지 그녀의
말에 항의를 했다.
그러나 윤석은 밥숟가락 끝에 밥풀대기 몇 알을 묻혀 열심히 입에 떠 넣는 척이라고 하고 있었다.
" 지금 반항해요? 아하~ 그래. 어차피 차 버릴 여자한테 새삼 잘 보일 필요 없다 그거로군! 정 재 원 씨 앞에서 내
머리가 늘 이 모양이야. 머리 구실을 잘 못하거든."
그녀가 숟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을 꼰다.
" 당신 식성이 보통 까탈이 아니라는 건 아는 바 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먹어요."
헤라는 밥 한 숟가락을 푹 퍼서 재원의 코앞에다 들이밀었다. 고추장과 마늘의 매운내가 솔솔솔 그의 콧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유난히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재원에겐 그 매운 향마저도 치명적 이었다. 결국에는 그가 참지 못한 제채기를
해대고........코앞에 있던 숟가락 위의 볶음밥은 알알이 그 몸들을 날려 식탁과 맞은편의 윤석의 얼굴에까지 그
영역을 굳혀 버린다.
" 진 헤 라......."
재원이 화를 억누르는 듯 두 눈을 감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이름 부르지 마. 내 기분이 지금 이래! 아무도 먹고 싶어 하지 않는 잡탕밥이 돼버린 느낌이라고, 그 촌 발
날리는 엽기 걸! 민 수 연은 프랑스산 고급 와인이고, 난 쉰내가 철철 나는 당신이 먹다 남긴 잡탕밥이 된 것 같다
그 말이야!"
헤라가 이를 앙다물고 자신의 기분을 말한다........윤석은 스리슬쩍 자리를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재원이 의자에서 일어나 헤라 앞에 마주 선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 시선을 붙들었다.
" 진 헤 라.......너! 나 사랑하니?"
그 답지 않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43.
헤라의 어깨를 잡은 손에 잔뜩 힘이 실리고, 눈빛은 투명하고 시원했다. 그런데도 그는 피로해 보였다.
" 지금 그런 걸, 물을 분위기라고 생각해요?"
헤라가 어깨를 누른 재원의 손을 밀치며 씽크대로 걸어가 개수대 위에 손을 집고 몸을 의지 한다.
그 눈빛.......!초록의 산비탈을 내려와 땀을 식혀주는 바람 같은 재원의 그 눈을 그녀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싱그러운 그 눈이 숲의 공기를 몰고 오는 것 같았다. 시원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그 바람.......그러나 머물지
않고 스쳐지나갈 뿐인 그 바람처럼 그가 지나가버릴 것만 같아서........
사랑하느냐 묻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해버리면 안될 것 같았다. 아마도 그를 믿는다 말했던 그 말은 정말로 구실에
불과 했던 모양 이었다.
" 어쨌든 당신이 잡탕밥 보다 와인을 더 선호 하는 건 사실 이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내 대답이 의미나 있어요?"
개수대의 수도꼭지에 물을 틀어 놓은 헤라는 한 손으로 그 물을 받아 이마를 적셨다. 남산의 하얏트에서 윤석의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달아오른 열은 민 수연의 등장으로 고지에 다다라 있었다.
" 어떻게 그렇게 장담해?"
" 흥~ 민 수 연이랑은 와인 잔 부딪혔다면서요. 하지만 내가 만들은 잡탕밥엔 숟가락을 담금질도 하지 않았잖아요.
그거면 장담할 만한 거 아닌가?"
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올라왔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윤석을 부른다.
" 야! 신 윤 석. 밥 먹자."
재원이 식탁 의자에 앉는다. 거실에서 도망갈 기회만을 엿보던 윤석이 비실비실 주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 먹어. 이 만큼은 내 몫, 나머지는 네가 먹는 거야."
재원이 프라이팬의 김 볶을 3대 2로 가른다. 그리고 더 많은 쪽을 윤석의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 정말.......먹을 거야?"
" 당연하지! 내가 이걸 안 먹으면 저 멍청한 여자가 자기를 내가 차버릴 거라고 믿게 될 거거든. 그러니까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해! 잡탕밥도 먹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안심 할 거라구."
밥에 숟가락을 넣어 푹푹 몇 숟가락을 먼저 떠먹어 보이는 재원을 윤석이 오만상을 찡그리고 바라보았다.
" 근데.......왜 내가 더 많으냐?"
윤석이 불만을 터트리자, 재원이 그에게 눈을 흘긴다.
" 새끼! 말 많네 거참! 너 몇 킬로그램이야?"
" ....... "
" 너 100킬로그램 넘지? 난 80 킬로 밑돌아........그런데.......불만 사항이 돼?"
윤석은 재원의 논리에 고개를 몇 번 갸웃하더니 이윽고 숟가락을 들어 밥을 떠먹기 시작했다.
" 물 먹어요."
헤라가 물 컵 두개를 가져다놓고 재원의 옆에 앉는다. 그리고 그녀도 배를 채우기 위해 프라이팬에 숟가락을 담갔다.
그리고 용감하게 한 숟가락 가득 떠 입에 넣었다. 그런데.......윽!!!! 이건 좀 심했다. 짜다 못해 쓴맛까지 나는 밥이
아니란 말인가!. 고추장을 너무 많이 넣어서 그런 것인지 아님 김치가 진짜 넘 쉬어버린 것인지 아무튼 소금밭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재원과 윤석은 꾸역꾸역 잘도 먹고 있었다. 비록 맛을 다시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헤라는 먹는
걸로 두 남자를 고문하는 일이 이쯤 되면 좀 잔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민 수 연으로 인해
일을 벌인 것인데.........그건 아닌 듯싶다.
처음부터 결혼은 싫다고 했던 것 도 자신이고, 연애만 이라 못 박은 것도 자신인데 그가 약혼녀와 뭘 했건 화를 낼
권리는 없었다.
헤라는 아직도 두 남자가 번갈아 가며 숟가락질을 해대고 있는 프라이팬을 통째로 집어 들어 개수대 안에 집 넣어
버린다.
" 그만해요........ 이렇게 짠 걸 다 먹었다간, 내일 아침엔 온 몸이 퉁퉁 불어 맞는 옷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두 남자를 외면하고 개수대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재원은 그런 헤라의 뒷모습에 팔짱을 낀 채로 한참을 눈을 두고 있었다. 침묵이 돌고 윤석은 다시 한번 슬쩍 자리를
일어났다.
헤라가 설거지를 했지만 재원은 말리지 않는다. 그녀가 손을 움직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길 바랐다.
" 나 샤워 한다.......그 새 몰래 가버리면 알아서 해!"
그는 그녀가 잠시 혼자가 되어 화를 누그러트리고 얌전히 자신의 옆에 누워주길 기대했다. 지난 3일간의 연락
두절이나 방금 민 수 연의 등장으로 그녀가 얼마나 상처 받았을지 알지만.......그래도 이기가 욕심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3일 모친 옆에 붙들려 있으면서도 재원은 헤라만 생각했다. 수술이 이어지고 뚱뚱 부어오른 모친의 얼굴에
가슴이 쓰리면서도 그 쓰린 가슴을 달래주는 얼굴은 헤라였던 것이다.
미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 다치고 아픈 모친 옆에 서서 여자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무리 사랑한다지만.......정말 배은망덕이 따로 없지 않나! 라는 갈등을 하기도 했던 건 사실이었지만, 아파트
앞에서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그런 고민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그저 그 따뜻하고 보드라운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체취에 묻혀 잠이 들고 싶은 욕망 뿐 이었다.
재원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헤라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 수연이 놓고 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 맛있네. 비싼 거라 그런지 몰라도."
그리고 재원을 향해 와인 잔을 치켜들어 보인다. 그가 성큼성큼 걸아와 헤라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반 정도 남아
있든 자주색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 나 잘 거야.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거든. 어떻게 할래? 옆에 와서 얌전히 누울래? 아니면 내가 억지로 안고 갈까?"
헤라가 흥~ 하는 코웃음을 쳤지만 재원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미쳐 저항할 틈도 없었다. 그녀를 안아 올리는 그의
동작이 어째나 날쌔던지 그녀가 눈치 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몸은 벌써 공중에 떠 있었던 것이다.
" 정 재 원씨! 난 아직 연락이 두절되었던 사유를 듣지 못했어요."
헤라는 별 다른 저항 없이 침대에 눕혀지면서도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으려 안간힘 썼다.
" 한 숨 자고 일어나서 얘기 하면 안 되겠냐? 토요일부터 2시간 이상 자보지 못했어. 지금 안자면.......나 죽을 지도
몰라! 그래도 지금 들을래?"
역시나 목적은 중요하기도 하고, 그의 말이 과장된 엄포라는 것도 생각은 들었지만, 파리하고 지친 얼굴을 보니
더는 다그치기가 그랬다. 헤라는 튀어나온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감는다. 지금의 기분으로써는 그것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헤라의 허리를 안아 자신의 몸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그녀를 모로 돌려 눕혀 가슴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헤라는 움찔 한다. 비도 많이 맞았고 땀도 많이 흘렸는데! 샤워도 하지 않았다.
" 너한테 쉰내 난다......."
" 그러게 누가 침대로 억지로 끌어들이래요?"
그녀가 작은 소리로 쏘아 붙였다. 그가 키득키득 낮은 웃음을 웃는다.
" 그래도.......바디 젤 냄새보다 이 냄새가 더 좋은데 어쩌냐!"
그도 헤라와 같았던 것이다.........헤라가 재원의 땀내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도 마찬가지라는 걸 그녀는 알게 됐다.
" 좋다........"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재원은 이내 잠이 들어버린다.
그녀는 샴푸 냄새가 나는 그의 검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쓰다듬으며, 가슴의 계곡에 코를 묻고 잠이든 그를
내려다 봤다.
반듯하고 약간 각이진 이마에서 코를 타고 내려오는 선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숱이 제법 되는 눈썹과 그 밑의 얇은
속 쌍꺼풀이 진 눈을 매만지고.......여느 때처럼 꺼칠할 정도로 자라나 있는 수염과 턱을 지났다.
종착지인, 크고 두께가 적당한 흐린 선홍색을 띠고 있는 입술에 손가락이 머물자, 헤라는 참을 수 없어진 키스의
욕망으로 그 입술에 입술을 겹쳐버리고 만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선잠이 들었던 재원이 입술을 움직여 헤라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와인의 향긋한 포도 내음이 그의 혀에 묻어 있었고........그 냄새로 헤라는 그가 더욱 사랑스러워 졌다.
자신의 혀를 스치는 그의 혀와 입안 구석구석을 휘젓는 그 부드러운 느낌에 그녀의 심장이 터질 듯 힘차게
뛰어댄다. 5분 이상을 이어가던 롱~키스........정작 키스를 시작한 그녀보다 더 정열적으로 키스를 해대던 재원이
버릇대로 헤라의 아랫입술을 무는 것으로 긴 키스를 아쉽게 끝낸다.
그런 다음, 잠이 덜 깬 몽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을 쉬며 그녀의 머리를 안았다.
" 사랑한다........사랑한다. 사랑해........"
제주도에서의 취소 시켜 버린 고백에 대해 한이 맺혔었던지 그는 사랑한단 말을 수도 없이 되풀이해 헤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사랑해.........너 아니?....... 이 말이....... 가슴에 묶여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할 때마다 내 심장이 오그라들고
그만큼 지쳐간다는 거! 그래서....... 이러다 내가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문득 겁이 나기도 한다는 거
말이야!.......이젠.......정말 못 참겠다. 가슴이 아려서 더는 사랑한다는 말을 삵일 수가 없어. 어떻게 하니? 널
처음으로 가진 그날부터, 그 형편없던 섹스 이후로 전보다 더 널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 같은데.......네가 도망가면
지옥이라고 따라 가야할 것 같은데.......어떡하냐?.......네가 날 사랑해주지 않으면.......숨 쉬는 것도 싫어질 것
같은데.......나........어떻게 하니? 헤라야.
아마도 그가 감정적으로 약해져 있나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안타까움이 가득 베인 그 말소리에 헤라는 자신이
그를 얼마나 애태우고 있었던지 비로소 알게 됐다.
이 사람이 이다지도 간절히 원하는 그 말을 왜 아까도 대답을 해주지 못했는지.......그녀도 가슴이 아프다.
배신감에 치를 떨게 했던 연락두절에 대한 해명이야 어찌됐건........민 수 연과 뉴욕에서 어떠한 밤을 보내고 왔던
간에........지금 이 순간엔 재원의 사랑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 졸린데........널 먼저 안아야 개운한 기분으로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아."
슬립의 끈을 내리고 브래지어의 호크를 푸는 재원의 손은 뜨거웠다. 헤라는 망설이지 않기 위해 그의 바지 끈을
잡아 당겨 풀고 그의 속옷에까지, 그녀로써는 다소 과감하게 손을 댔다.
" 왜 이래? 불안하게.......전처럼 해. 괜히 오버하지 말라구."
그러자 그가 느린 말투로 헤라의 손을 저지한다. 슬립을 발밑으로 벗겨내고.......그 안의 속옷도 다 벗겨 버린 그가
스스로 바지와 속옷을 벗고, 반드시 누워 있는 헤라의 눈을 내려다 봤다.
" 시작한다."
무슨 게임이라도 하듯 그는 시작을 알려왔다. 하긴 처음부터가 그렇지 않았던가........그의 말대로 이런 식이 두
사람사이에선 정상이었다.
" 아프면.......말해. 참지 말고."
그 봉긋한 아름다운 가슴에 입술을 가져다대며 그가 말했다........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에게 진한 애무를 받은
경험이 있었지만.......새삼 헤라는 느꼈다. 이 사람은 너무나 능숙하고 너무나 자연스런 애무를 할줄 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여자에 대한 배려까지.......너무나.......잘 알고 있었다........ 싫다! 이 입술로 이 손가락으로.......다른 여자를
만지고 탐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가슴이 내려앉는 일이었다.
머리가 지 멋대로 상상이 나래를 편다. 민 수 연과 호화로운 뉴욕의 호텔에서 재원이 그녀를 안았을 영상이
펼쳐졌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댔다. 첫날밤 그녀를 어수선하게 했던 그 영상보다 더더욱 강렬하게, 민 수연의 비쩍 마른
나신과 그녀를 애무하는 재원의 얼굴이 눈앞을 가렸던 것이다.
재원이 헤라의 행동에 놀라 어깨 부근에 키스마크를 새기던 얼굴을 들었다.
" 재원 씨! 한 가지만 나랑 약속해."
무턱대고 약속을 하라는 헤라의 말에 그가 하던 행위를 중단한다.
" 뭘?"
" 나 말고 다른 여자는 절대로 안지 않는다고 약속 해달란 말이야. 그 민 수연이랑 결혼 따위를 해도 나 외에
당신이 안는 여자는 없을 거라고 약속하라구. 응? 그 여자 만질 것도 없잖아! 얼굴만 희멀건 하지.......가슴은
과당이 잔뜩 말라붙은 곶감 같을 거구! 허벅지는 말린 오징어 같을 거란 말이야! 당신이 더 잘 알거 아냐!!!!!!
나....... 안다가 그런 여자 안고 싶은 맘이 생기기나 하는 거야? 그래?"
눈을 크게 뜨고 재원을 똑바로 본 그녀는 거의 매달리듯 말하고 있었다. 수연의 몸에 대한 갖은 험담을 늘어놓으며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그러마.'란 그의 답을 얻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뭐 자신은 모르지만 말이다.
" 야~ 그건 무리한 요구란 생각이 안 드나? 남편이 아내를 거부하는 행위는 즉각적인 이혼 사유가 되는 건데~
나보고........여자한테 이혼 당하라 그 말이야? 지금? 거기다 그런 사유로 이혼을 당하면 날 발기부전증 환자내지는,
성 불감증 환자 정도로 세상에서 여길 텐데........그건 좀 그렇다,"
하지만 재원은 여유작작한 웃음을 입 꼬리에 가득 걸고서 불가한 일이라 단번에 거절을 했다.
" 그렇지만! 싫은 걸 어떡해! 마음이 없더라도 재원 씨 입술이랑 손아래서........나처럼."
그녀는 단변에 항변을 시작했지만 금새 하던 말을 멈춘다. 지금하고 있는 말이 거의 고백이나 진배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원의 눈은 이미 깊고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녀가 다음 말을 함구해 버렸음에도 그는 벌써
짐작하고 있는 듯 했다.
" 너한테........한 것처럼은 안할게. 내가 갖고 싶은 여자는 세상에 너 말곤 없으니까."
웃음이 사라진 진지한 얼굴과 목소리........재원의 입술이 헤라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가 가장 은밀한 곳은 탐했다.
민망해진 헤라가 손으로 가려보기도 하고 다리를 오므려보기도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녀의 발언에 후끈
달아올라 버렸고, 그녀도 점점 그 애무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중 이었기 때문이다.
" 그.......여자는 안지 마........그럼 용서 안 해. 재원 씨는.......내거니까."
흥분된 그녀의 입에서 재원이 예상치 못하던 말이 나왔다. 그러자 그의 섬세하던 동작들이 과감해져 간다.
그가 혀끝으로 건드리는 모든 곳의 감각이 민감해지다 못해 뇌의 모든 세포들이 일제히 정렬해 그의 입술과 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가끔 애를 태우기도 하고, 불 같이 거세게 타오르기도 하면서 재원은 애무의 완급을 조절 했다.
산호색의 그곳을 물고 유린하는 그의 입술에 전율하는 순간을 수도 없이 느끼게 했고........척추를 따라 키스해 가는
입술안쪽의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등줄기로부터 머리끝까지 짜릿해져 오는 쾌감도 안겨주고 있었다.
그 때문 이었을까?삽입의 순간은 처음처럼 고통스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쾌감을 느낄 수조차 있었다.
그녀가 허벅지를 조일 때마다 재원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가 깊은 곳으로 들어올 때마다 그녀도 참지 못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이렇게 기쁠 수 있을 까! 어쩌면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갈수록 거세게 그녀의
안에서 왕복 운동을 하는 재원을 안고 헤라는 이런 것이 사랑하는 남자와 관계를 맺는 다는 것! 이라는 걸 몸으로
받아들이고, 머리는 넘쳐나는 쾌락으로 아득해져 갔다.
서투른 헤라의 몸짓에 재원의 숨소리는 계속해서 거칠어졌다. 노래방에서 그는 자신을 다스리고 억누르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번엔 절제하는 듯한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고, 거기에 가끔 내는 그 허스키하고 낮은 신음소리는 헤라의
심장을 통째로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 하고 있었다.
" 아!!!!! 사랑해......."
절정에 오른 그가 헤라의 귀에 사랑한다. 속삭인다. 그의 몸 아래서........아무런 수치심 없이, 태어나 처음으로
여자임을 감사하게 된 감동은 그녀를 눈물짓게 했다.
그렇게 .......1시간 동안 사랑을 나누었다........장난스럽지 않게.......아주 진지하게 서로의 몸을 나누어 가졌다.
그로부터, 아주 긴 시간동안 그의 체취가 온몸 구석구석 남아 있었고, 관계 후의 여운이 그녀의 몸을 간질이고,
마취에서 깨어날 때처럼 기분이 붕 뜨게 만들었다.
" 사랑해요."
잠이 든 재원이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내자 헤라는 조그맣고 작게 중얼거린다. 그가 듣지 말길 바랐다. 사랑을
나누기 전 그의 말처럼, 그녀도 가슴 가득 차 오른 사랑 한단 말을 뱉어 내지 않으면........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입 밖으로 내어 본 것뿐 이었다.
그러나........땀에 젖어 이마를 가리는 재원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헤라는 결혼 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했다.
과연 연애가 연애로만 끝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비관적이 되어가고 있었던 그녀였다.
거기에 + + +! 틈틈이 그 관계 갖는 순간의 흥을 깨는 영상들........민 수 연과.......그 보다 더 오래되고 빛이
바랬지만 아직도 선명한........기억! 그것들이 그녀가 완벽하게 재원과 함께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음을 아쉬워해야
했다.
헤라의 뒤를 쫓아온 석훈은 재원의 아파트 맞은편 도로에 차를 정차시키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와 재원이 만나고.......어느 틈엔가 익숙해져버린 헤라의 폭력에 잠깐 웃음을 짓기도 하며 석훈은 계획을
확정한다.
계획! 중간에 포기할 뻔도 했지만, 鄭 회장이 석훈의 농간에 걸려들음으로 인해 수월해지기도 하고 이젠 조력자까지
확보 했다.
뭐.......헤라와 재원의 예상치 못한 만남이 걸림돌이 되기도 했지만........그로인해 석훈은 훨씬 확실한 치명타를
재원에게 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경제인으로써의 생명력을 끊어놓을 뿐 아니라........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가슴에 상처를 새겨 줄 수 있는 방법을
얻어 낸 것이다.
이 음흉하고 뒤틀린 사내가 재원에게 바라는 것은.......유치하게도, 빼앗겼다 생각하고 있는 모성애에 대한 복수였다.
치사한 놈.......!!! 그렇지만 불쌍한 인간 이다. 모친이 없는 외가에서 갖은 눈치와 모진 수모를 받아가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정계에 몸을 담고 있는 친가로부터는 외면 받고 자라왔으며, 부친에게조차 아들 대접을 못 받고 산 사람이 송 석 훈
그란 인물인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근원을 한 배에서 나온 재원에게 돌려놓고, 그를 향해 적의를 불태워야만 스스로를 지탱 할 수 있었던
남자다.
그리고 이제 그는 지난 20년간 쌓아온 적의와 질투와 원망에 결론을 내려 하고 있었다.......파멸의 길이 누구 앞에
놓여 있는지.......재원과 자신을 양분 시켜놓고 그 흔들리는 외줄의 가운데 어릿광대처럼 서 있던 것이다.
헤라는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 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재원을 남겨두고 거실로 나왔다. 시간은 7시를 넘어 서서히
날이 저물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 깜깜 밤이 다가오려는 거품들이 몰려와 있었고, 그 거품들은 곧 굵은 빗줄기를
땅에 내다 꽂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슬립을 대충 끼고 나와 멍 하니 소파에 앉아 있던 그녀는 자신이 참 아무렇지도 않게 재원의
집에서 그의 침대에서 잠을 자고 사랑을 나누었단 사실에 새삼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의 여름 방학 때부터 시작한 남자 알러지가 어찌 이다지도 간단하게 정리가 되는
것인지.......미쳐 그를 사랑한다는 걸 깨닫기 훨씬 전부터 어째서 정 재 원 이라는 남자는 예외였는지........운명이란
게 이런 것인지........그럼 그녀는 그를 붙들어 두기 위해 무얼 해야 하는 것인지.......결혼이란 걸 한다면 그를 곁에
둘 수 있는 것인지.......과연 저 굉장한 남자와 결혼 따위를 할 수나 있는 것인지.......말 그대로 수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기위해 뱅뱅 도는, 멍청한 Dog처럼 머리를 돌고 돌았다.
헤라는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머리에 한가운데 혀를 내밀고 헥헥 거리며 꼬리를 흔드는 우스꽝스런 Dog 의 영상을
지워버리고, 엉켜드는 머리를 비우기 위해서였다.
리모콘을 집어 TV를 튼다.
채널 여기저기를 돌려보지만 십대 위주의 오락프로그램과, 몇 번 씩은 아무생각 없이 본 영화들이 나올 뿐 이었다.
그러다 홈 시어터의 DVD 가 눈을 잡아끌었고, 그녀는 채널을 바꾸어 DVD를 작동 시켜본다. 물론 그 DVD 가
작동을 하기까지는 20분 이상의 꽤 오랜 시간 그녀가 복잡한 리모콘과 씨름을 해야 했다.
영어로 된.......다소 그래픽이 떨어지는 자막 이 나오고.......영화가 시작된다. 처음엔.......입어도 별로 입은 것 같지
않은 옷을 걸친 여자가가 등장했다. 그녀는 멋진 차를 몰고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그러다 순찰 중인 경찰에게
딱지를 떼이자, 여자는 경찰을 유혹했다.
줄거리는 거기까지다. 그 다음부터는 아예 이야기 자체가 없었다.
그러다 바로 행위로 들어가는 영화........ 차의 보닛 위로 올라간 여자가 입으나 마나한 옷마저도 벗어 던지고
경찰의 바지 지퍼를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하고 있다. 정말 요상한 소리 잘도 질러대는
여자와.......게걸스런 남자를 보고 있자니 그녀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과히 가학적이라 말할 수 있는 자세로 미소를 짓는 여자나, 경찰 신분은 제복뿐인 남자나 어이가 없었어지기까지
했다.
근데........재원도 이런 것을 본다는 말인가? 뭐 남자들이 이런 것을 즐긴 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충격적이기도 하고.......더욱이 재원의 DVD에 이런 CD가 걸려 있었다는 사실도.......헤라는 약간 이지만
경악스러웠다.
그럼에도 그녀는 화면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배워야 했다. 너무 서툴러서 재원이 자꾸만 실망하기 전에
배워서 그를 잡아야 한다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생각의 태도가 그녀의 시선을 화면 앞에 고정 시켰다.
근데! 왜! 하필! 포르노 영화를 보고! 배울 생각이 떠 오른 것인지.......역시 헤라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 공
이었다.
" 재밌냐? 잘도 찾아보네."
몰입을 해서인지 헤라는 재원이 나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소파 뒤로 다가와 그녀의 귀에 대고 낮게 묻는 그의
목소리를 듣기 까지 그녀는 하나라도 더 배우고 눈에 넣어 두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 이게.......아직도 걸려 있었나? 윤석이 자식이 보다가 간 건데."
재원이 어린사내아이처럼 손 등으로 눈을 부비며 헤라의 옆으로와 앉는다. 한쪽 팔로 헤라를 껴안으며 그는 그녀의
볼과 턱과 목 줄기에 키스를 퍼부었다. 끝으로 입술을 탐하던 그는 DVD에서 나오는 신음소리가 귀에 거슬렸는지
TV의 전원을 아예 꺼버린다.
" 왜! 왜 꺼요? 남은 진진하게 보고 있는데!"
그러자 헤라는 엉겁결에 아쉬운 고함을 내질렀다. 재원이 키스 하는 입술 사이로 내지른 그녀의 고함에 눈을 크게
뜨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들어 그녀를 바라본다.
" 너.......저런 거 취미 있었냐?"
헤라는 뜨끔 하는 한줄기 섬광이 가슴을 가로지는 것을 느꼈지만 태연한 척 시치미를 뗀다.
" 취 취미라기보다는 신기해서. 그래서 열중해서 감상하는 중 이었다구요."
날아드는 재원의 시선을 피해 그녀는 다시 TV의 전원을 킨다. 재원이 약간 상체를 멀리해 그런 그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물이라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 신기하다. 라고!........포르노가! 그래서 감상씩이나 하고 있었단 말이지?"
재원이 되물었지만 헤라는 대답이 없었다.
" 58인치 벽걸이 TV로 저런 걸 감상하는 기분이 꽤 좋은가 보네~~~~~그러고 보니 Sound effect(음향효과)도
죽인다. Surround sound(콘서트홀의 음향효과)로 헥 헥 소리가 제대로 들리는 것이 말이야!~~~~~그래도 침은
닦아 가면서 봐라. 아주 줄줄 흐른다."
왠지 심술을 부리고 싶었지만 말의 반은 농이었다. 그런데 헤라는 흠칫 놀라 손으로 입술을 훔쳐내는 것이 아닌가!
" 진짜 몰입하고 있었나 보네! 너........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걸 보고 있는 거냐?"
10분 째 그 장면만 나오는데도 그녀는 지루해 하기는커녕 옆에 앉은 재원은 관심도 없다는 듯 화면에만 코를
들이밀고 있는 것이야 말로 신기했다.
여자들은 포르노를 경멸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말이다. 그래서 재원도 화면에 시선을 돌린다. 왜? 어째서?
그녀가 그렇게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야 했다.
여자 주인공은 그냥 그랬다. 흔한 금발에.......비적 마른 몸과 다리 그리고 갈비뼈가 아른거리는 가슴에 매달려 있는
물 실리콘 두개가 전부인 여자였다.
뭐 헤라가 여자이므로 거기다 주인공 보다 더 빵빵한 몸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여자는 아마도 그녀의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그럼 남자인가? 이번엔 남자를 눈 여겨 봤다.......헌데 남자의 몸은 전혀 볼 것이 없는, 최소한의 근육과, 내공이
쌓였는지 불룩 부른 배가 인덕이 넘쳐 보이는 그런 몸을 하고 있었다. 하긴, 남자배우가 근육 맨
이라도........포르노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에 반했단 여자는 한명도 못 봤다.
" 너 마니아 구나!"
도무지 알 수 없어진 그는 그녀를 떠보기로 한다.
" 무슨 소리!"
역시나 단순한 그녀는 '마니아'라는 한 마디에 발끈! 반응을 보인다. 재원의 입 꼬리에 얄팍한 웃음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감추어졌다.
" 재원 씨 만나기 전엔 '베티 블루' 나 '나인 하프 위크' 같은 걸작들도 보지 않은 나에요."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톡하니 쏜다.
" 아~~~ 그러셔? 난 또 윤석이처럼 마니아 인줄 알았지! 그럼 지금 이 태도는 뭔가?"
재원이 잔뜩 걸린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에 바짝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댔다. 하지만 헤라가 귀찮다는 듯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밀어내 버린다.
" 치워욧! 가뜩이나 용량 부족인데!!!!! 복잡하단 말이야."
그러면서도 여전히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녀는
" 으~~~정말! 저 여잔~~~ 왜 저렇게 어려운 방법으로 하는 거야? 저렇게 안 해도 저 배불뚝이는 충분히
좋아하는 것 같구만!"
하고 짜증을 낸다. 이 대목이 중요했다. 재원은 그제야 아하! 하는 표정을 짓더니.......헤라가 왜 그렇게 열심이 저
웃기지도 않은 화면에 정신을 집중 하고 눈을 모으고 있었는지 이해가 됐다.
정말이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녀가 조금 모자라거나 혹은 덜 떨어진 여자가 아닐까 생각하고도 남을 일이란
생각이 들자 재원은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어졌다.
" 와 하하하하하하!!!!!! 너 때문에 내가 진짜!"
배를 움켜지고 키득대는 재원을 헤라가 잔뜩 인상을 쓴 채로 바라본다.
" 웃지마요. 기분 나쁘게. 이 CD 재원 씨 거야."
" 아하하하! 아.......내거 아니라니까. 근데 그건 그렇고, 너 말야.......하하 너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어."
재원은 나오는 웃음을 안으로 집어넣으며 헤라에게 제대로 된걸 알려주어야겠다. 생각을 했다.
" 뭐 뭘요?"
" 난.......저런 식으로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눈에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그가 말했다. 헤라는 움찔하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재원에게 들켜 버린다.
어 어떻게.......내 생각을.......!
" 저건 너무 일방적이잖아. 저 남잔 여자가 뭐 체조 선수라는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저래서야 상대가 너무
힘들지 않겠어? 여자가 마조이스트가 아닌 다음에야.......하하 저 건 좀 그렇다. 난 사디즘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말이야."
마조이스트니.......사디즘이니.......하는 말들을 섞어가며 웃어대는 재원을 헤라는 뚜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저게 사디즘 이야? "
그리고 짧게 묻는다.
" 하하하 뭐? "
" 저런 게 사디즘이냐고? 나도 사드 소설은 좀 읽어봤지만."
" 야~하하 읽을 필요 없어! 사드 따위!"
심각해지는 헤라를 껴안으며 재원이 말을 막는다. 그는 웃었지만 헤라 딴에는 제법 심각한 고민을 했었다는 것을
재원은 알 수 있었다.
그가 헤라를 소파에 눕히고 그녀의 몸 위로 자신의 몸을 겹쳤다.
" 무거워!!!!! 내려가요."
갑작스런 재원의 행동에 버둥거리며 팔을 휘젓는 헤라. 하지만 재원은 빙그레 하는 웃음을 웃는다.
" 뭐가 무거워! 내 무게는 내 팔에 의지 했는데."
" 당신은 존재만으로도 내게 버거운 사람이니까요. 정 재 원씨!"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로 샐쭉 해져 있는 그녀는 퉁퉁 거렸다. 하여간 상냥한 법이 없는 여자다!
그런데도........그에게 헤라는 사랑스런 여자 그뿐 이었다.
" 그래! 모든 면에서 내가 너보다 우월하기는 하지! 외모로 보나 체력으로 보나 또 테크닉으로 따져도 내가 훨씬 위
인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말인데........외모는 어쩔 수 없지만 체력이나 테크닉은 자꾸 연습하면 극복이 되는 거거든!
어때? 이제부터 하루에 두 번씩 나한테 특별레슨을 받는 게. 그럼 저기에 나오는 여자들한테 열등감 같은 거 안
느껴도 될 것 같은데."
슬립 사이로 들어오는 재원의 손을 잡으며 헤라가 눈을 흘긴다.
" 열등감은 누가!!!!! 그리고! 맨 날 출장에, 연락도 두절시키는 사람이 누굴 가르칠 여유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혼자 열 받은 그녀가 꽥꽥댄다.
" 하긴.......그건 그러네."
의외로 재원은 그녀의 고성에도 순순히 긍정을 했다. 그리고 장난 끼 서린 표정을 거두고 진지하다 못해 심각한
표정을 한다.
" 그러니까 해결 방안은 딱 하나다........결혼 하는 거! 결혼 하면 출장가도 널 데려 갈거구. 연락은 내가 못하는
상황이 되도 회사나 아님 다른 가족들이 해줄 테니까. 요즘 같은 일은 없을 거야."
" ....... "
" 결혼 해줘. 이렇게 청혼 받는 게 억울한 생각이 들면, 일주일 후 쯤 이라도 제대로 해줄게. 지금은 싫다고만
하지마라."
작아지고 자신감이 없어진 재원의 목소리가 헤라는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입안에서 맴도는 좋아요 란 대답을
가두고 베란다 창으로 보이는 하늘로 시선을 돌린다.
해가 저버린 하늘엔 검은 구름이 드문드문 흘러가고 있었고 잘려진 손톱처럼 가녀린 초승달이 여린 빛을 낸다.
그리고 홈 시어터는 여전히 야릇하고 요상한 소리를 거실 가득 울리고 있는 것이 정말 괴상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44.
" 청혼을 그렇게 했단 말이야?"
" 조용히 좀 얘기 할 수 없냐?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사무실 책상에서 심각한 얼굴로 자신이 한 청혼해 대해 말하는 재원을 보며 윤석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 그래그래. 벌써 몇 달을 질질 끌려 다니며 네 생애에 처음으로 공 들인 여자한테 청혼을 그따위로 했다는 건
창피할 만한 일이지. 아니까 다행이다."
고개를 절래절래 하며 윤석은 한숨을 내쉰다. 늘 헤라에 대해 불안에 떨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말을 그런 식으로
해버린 친구가 한심하기 짝이 없게 생각되는 그였다.
" 그래서 시간 되는 대로 정식으로 하겠다고 말했어. 그 날 그 자리에 싫다고 하지 않은 것 보면 가능성 있는 거
아닐까?"
책상머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낸 재원이 물을 마시다 말고 윤석을 바라본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대신에, 초조하거나 긴장을 할 때면 물을 마시는 습관이 있는 재원이었다.
" 초조하냐? "
" 뭐?"
" 헤라 씨가 그냥 튀어버릴까? 초조하냐고."
윤석의 질문에 재원은 마시던 생수 병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뚜껑을 닫아 버린다. 그리고 책상으로 돌아가 서류
이것저것을 뒤적이는 척 하더니 이내 동작을 멈추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별루 잘 해준 게 없어서 초조해. 처음엔 계속 싸우기만 했고, 고백하고 나서도.......그걸 안받아 주니까 늘
화만내고........상처만 준 것 같아서, 그리고."
" 자식! 신파 하고 있네. 다 그런 거야. 상처주고 받고 그러다 정들고 사랑하고, 하지만 항상 그러면 안 되지. 헤라
씨가 곧장 Yes 할 것 같지 않으면 쳐들어가! 집으로 말이야. 가서 책임질 행동 했으니까. 네가 책임진다고
말해버려."
무얼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재원에게 윤석은 고전적인 방법을 권했다.
" 책임?"
하지만 재원의 관념으로는 책임 이라는 단어의 뜻이 모호했다. 도대체 책임질 행동이란 것이?
" 아이~ 새끼! 너나 나나 미국에서 살다온 햇수는 비슷한데.......어째 그러냐? 야! 우리나라는 말이야.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갈 수도 있다는 거 다 알면서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곳이란 말이야. 네가 헤라 씨랑
결혼도 하기 전에 할거 다 했다고 하면 뭐.......그 쪽 집안에서 주먹이 날라 들 수도 있고, 나쁜 놈 소리 들을 수도
있지만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을 거라구. 그러다 결국엔 헤라 씨를 네 품안으로 보낼 거라 그 말이지. 이해돼?"
윤석의 설명에 느리게,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재원이 생각에 잠긴다.
" 아! 아 그래.......Understand."
딱 한번 헤라의 모친과 마주쳤던 때를 떠올리는 중 이었다.
' 우리 애 그런 여자 아니에요........' 라던 말의 의미 그리고 만나지 말라 말했던 의미가 아마도 윤석이 말한 것과
뜻이 통하지 않을 까 생각이 든 것이다.
헤라에 한에서 재원은 허 다리 집는 일이 허다했고, 이번에도 그랬다. 그러나 결과는 두고 봐야 하는 것 이다.
" 헤라 씨 집에 있는지 확인하고, 가족들 모두가 집에 있는 시간을 택해라."
윤석은 과감하게 밀어 붙여야 할 때라 생각했다. 뜸을 들일만큼 들인 두 사람 사이지만, 헤라에 비해 재원은 너무
애가 달아 있는 지경이라, 재원의 모친이 지금 병상에 있는 중이긴 하지만 더 뜸을 들이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 뭐? 그걸 왜 이제야 연락해. 점심 때 주문 받았다며.......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응. 알았어. 지금
갈게........택배 회사에 연락 해 놨어? 응 그래~.....잠깐 저녁 먹으러 들어왔던 거야. 응!"
식탁 앞에 둘러앉은 가족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헤림을 일제히 쳐다본다.
" 무슨 일이야? 밥 먹는데."
형부가 콩나물국에 고춧가루를 넣으며 별일 이냐는 듯 물었다. 헤림은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 하길 여러 번
반복하더니 입술을 내밀고 정신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 낼 모레면 문 닫을 가게지만.......그래도 기분은 좋으네."
그리고 다시 숟가락을 들어 밥을 한 숟가락 떠 넣으며 중얼거린다. 모친도 헤라도 헤미도 지민까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한 언니를 가만히 바라보다, 설명을 해주지 않는 헤림에게 관심이 사리진 모양으로 다들 밥을 먹는데 정신을
돌렸다.
" 누가 골든 하베스트를( 수선화의 한 품종) 만개 주문했대. 우리 가게에...... .화분으로 말이야. 그리고 돈도
선금으로 다 지불 했대"
콩나물국에 형부처럼 고춧가루를 넣는 헤림은 공중에 시선을 두고 고춧가루가 든 병을 계속 흔들어대고 있었다.
" 만개........도대체 얼마야? 계산도 안 되네."
그리고 다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물론 가족들 모두 화분 만 개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에 먹던 숟가락을 놓고
헤림의 다음 말을 기다려야 했다.
" 그것도 한 사람이 주문 한거라던데. 8시 까지 그곳으로 배달해 달라고 그랬대. 호텔이나 예식장도
아니고.......아파트라던데......."
" 뭐야? 나르시스라도 되는 거야? 수선화에 미쳤나?"
헤림의 말에 헤라가 뚱한 표정으로 도대체 수선화 화분 만 개를 주문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일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도 아파트가 얼마나 넓길래 만 개를 들여 놓겠다는 것인지.......
" 헤림이 빨리 나가봐야 겠네. 설거지는 내가 할 텐게, 얼른 나가봐."
제일먼저 먹던 숟가락을 놓은 사람은 헤라의 모친 이었다. 그리고 그릇들을 걷어 개수대에 넣기 시작했다.
찌는 여름.......에어컨도 없는 집은 가만히 있어도 몸의 구석진 곳곳에서 땀이 흐르게 만들고 있었는데, 가족들 모두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이젠 다들 앞으로 직면 하게 될 집 없는 설움에 준비를 하고 있는 것 이었다.
오늘 헤라는 재원을 만나러 나가려던 저녁약속이 그에 의해 일방적으로 취소가 되자, 머리도 감지 않고 세수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로 방바닥을 굴러다니며 온몸으로 청소를 해댔다. 뭐 하루에 한번씩 모친이 청소기도 돌리고
물걸레질도 해 놓은 방이라 그렇게 온몸을 굴려 댔어도 특별이 옷에 더러움이 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그래도
그녀의 차림은 그다지 깔끔하지 않았다.
허름한 빨간색 트레이닝복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하얀빛이 바라 아이보리 색이 된 커다란 빨간 색
하트무늬가 너덜너덜한 면 티에,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머리는 꽂은 핀에서 거의 다 삐져나와 말갈기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는 터였다.
그런 차림으로 베란다에 나와 저녁 바람을 맞으며 얼음을 동동 띠운 냉커피 한잔에 여유를 즐기는 그녀의 눈에 낮
익은 차가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차가 누구의 것인지 판단을 내릴 때쯤 울리는 현관의 벨 소리.......막 집을 나서려던 헤림이 문을 열었다.
" 진 헤라 씨 댁 이죠? 택배입니다. 싸인 좀 해주세요."
택배맨 의 목소리에 헤라는 마시던 커피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택배라........홈쇼핑에서 주문한 것도 없는데 뭐지?
라며 문을 기웃거리던 그녀의 눈에 들어 온 것은 노랗다 못해 진한 황금색의 가진 수선화 화분 이었다.
" 어디로 들여 놓을까요? 제 생각엔 하도 많아서 베란다에서부터 놔야 할 것 같은데."
손바닥만한 화분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던 택배맨이 집으로 들어오고 그 뒤를 이어 남자 서너 명이 더 수레 가득
수선화 화분을 가지고 들어왔다.
" 뭐 뭐예요? 저한테 온 것 맞아요?"
놀란 헤라가 택배맨 하나를 붙잡고 묻는다. 남자는 진 헤 라 씨 댁 맞죠? 하고 확인을 한 뒤 그럼 이 화분은
이곳으로 배달 온 것이 맞다 말을 했다.
헤미가 그런 헤라를 돌아보며 무슨 일이냐 눈으로 물었다. 그러나 헤라는 영문을 모르겠다. 수선화 화분이
베란다에서 시작해 거실과 주방을 거의 다 채우고 있을 때 쯤 헤라는 급히 베란다로 나가 화분들을 피해 주차장을
내려다본다. 아까 그 차는 역시 재원의........차 였다.
화분이 다 들어와 주방까지 몽땅 꽃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겨우 발 두개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통로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 진 헤 라........뭐라고 설명 좀 해봐. 아님 언니가 하던지."
허리에 손을 얹은 헤미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새엄마와 지민은 수선화가 내는 향기에 취해 해롱거리고
있었고........형부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 짐작 가는 구석이 있기는 한데......."
들고 있던 컵 속의 얼음을 꺼내어 입에 문 헤라는 언니의 꽃집에 화분을 주문한 사람이 재원임을 짐작 한다.
" 안녕 하세요."
그렇게 식구들 모두가 수선화 화분 만개의 등장에 넋이 빠져 있을 때, 열어 놓은 현관 문 안으로 인사를 하며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으니.......재원 이었다.
" 아! 벤츠 씨!"
헤미가 뛰듯이 수선화 화분 사이를 건너가 재원을 맞는다. 모친은 헤라와 재원을 번갈아 보며 뛰는 심장을
안정시키려 가슴에 손을 얹고 있었다.
헤미와 인사를 나눈 재원은 아주 말끔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밝은 연회색의 슈트에 흐리고 채도가 낮은
핑크색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chic(쉬크) 한지 헤라는 얼음을 문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재원을
바라보고만 서 있었다.
" 정식으로 청혼 하러 왔습니다."
멀뚱이 서있는 헤라에게 시선을 주던 재원이 헤라 모친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하고 말 했다. 그러나 그 당당한
눈빛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가늘게 떨고 있음을 그녀는 알 수가 있었다.
" 청혼이라니요........? 미안하지만........그건."
헤라 모친은 재원의 청혼 이란 말에 얼굴이 그새 납빛으로 변하며 목소리가 암울해 진다.
" 어.......새엄마. 그러니까 헤라가 이제는 말이야. 아니 저 벤츠 씨 하고는."
" 우리 헤라.......만나지 말아달라고 부탁 했던 것 같은데요. 청년이 무슨 생각으로 우리 헤라를 얼마나 알아서 지금
이런 일을 벌이는지 난 모르겠어요."
끼어드는 헤미의 말을 자르며 헤라 모친은 재원과 마주한 시선을 돌린다.
" 채 책임 질 일을 했습니다........그것도 두 번이나! 아니 세 번! 아니 횟수는."
그러자 그 시선을 붙들려는 재원의 입에서 불쑥 튀어 나온 말.......물론 재원은 윤석의 권유에 따라 이 말을 스무
번도 넘게 연습을 하고 왔다. 하지만 뒤에 '두 번이나' 서부터는 실수였다. 입을 다물고 얼굴이 붉어진다.
재원의 당황함에 형부는 실소를 터트리고, 헤미와 헤림은 한번이야 억지 춘향이로 일을 만들어서 그렇게 됐다
했는데........설마! 하는 얼굴을 하고 헤라를 돌아봤다.
" 그게 무슨 소리에요? 정.......말.......우리 막내가........그러니까 우림 헤라랑 청년이 만리장성이라도 쌓았다는
그런........그런 말이에요? 지금 하는 말이?"
잠깐의 침묵을 깨고 헤라 모친의 들뜬 목소리가 공기를 가른다. 재원은 어떤 욕지거리가 날아오든 아니면 화분 몇
개가 날아오든 간에 모두 각오를 하고 왔던 지라 헤라 모친의 반응에 약간은 얼떨떨해졌다.
" 저기.......어머님 말씀을 제가 잘 못 알아들어서 그럽니다만.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게.......혹시........"
" 그래요. 같이 잤느냐구요! 우리 헤라가 청년하고 정말 합방을 했느냐고 묻는 거예요. 아무 탈 없이!"
흥분한 헤라 모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재원은 좀 전 보다 더욱 당황 한다. 해라 모가 그런 일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으리라 고는 상상을 하지 않고 왔기 때문이다. 그가 헤라를 돌아봤다.
" 아아~ 망신살이야 진짜!"
입에 문 얼음을 아작 소리가 나도록 씹은 헤라는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기 위해 컵 속이 얼음에 아예 얼굴에 부어
버렸다.
" 헤림아........헤미야........믿어도 되는 거니? 흑흑!....... 정말 이렇게 기쁜 일이 사실 인거야? 저 청년하고 우리
헤라하고 같이 잤다는 게........그런 경사가 정말 우리 집에 생긴 거야?"
헤라 모친은 늘 무겁게 마음을 짓누르던 헤라의 남자혐오증 때문에 막내의 결혼을 거의 절망으로 인식하고
살아오던 터라.......재원과의 합방 소식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 시절 보지 못할 것을 보고서부터 처음 사귀던 남자애와의 키스가 숨 막힘으로 인해 불발이 되고, 그 이후로
접근해 오는 남자들을 쳐다보지도 않던 헤라가.......거기다 가끔 남자와 악수라도 하고 오는 날 엔 밤새 몸을 긁어대
잠을 설쳤다는 얘기에.......가슴을 치던 모친 이었던 것이다.
경사!.......경사?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 오버 된 헤라 모친의 행동과 다른 가족들의 전혀 예상 밖의 반응들에
재원은 어찌해야 될 줄을 몰랐다.
윤석의 말로는 책임질 일이라 말하면 주먹이나 욕설이 날아 들 것이라 했는데.......아니면 적어도 '아이고 어떻게
혼전에 그런 일이' 라며.......땅이 꺼질 듯한 통탄의 한숨이 나올 것이라 했는데.......이건 빗나가도 한참을 빗나간
것 같았다.
" 청혼 받아 주십시오."
아무튼 재원은 정신을 수습하고 청혼을 마무리해야 했다. 상황으로 보아 오히려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팍팍 오기도 했지만.......헤라의 표정은.......난감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이야 어떻든 재원은 신발을 벗고 수선화 화분 사이로 난 좁은 통로로 헤라에게 다가갔다.
" 청혼.......제대로 다시 한다고 했지? 그 말 지켰어. 받아 줄래?"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투명한 크리스털 케이스에 담긴 반지를 보여 줬다. 반짝이는 하얀 링 위에서 고고하게 빛을
내는 다이아몬드가 헤라의 눈 속으로 광속 299,792,458m/s로 빨려 들어 왔다.
" 당연하지! 받아. 껴. 헤라야."
첫 번째 만남에서 만나지 말아 달라 부탁하던 헤라 모가 두 번 재 만남에선 재원에게 완벽한 조력자가 되어 있었다.
재원의 모친의 반응이 얼른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 거란 생각은 막연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 상황에 그가 그런 것을 따질 형편은 아니었다. 오로지 헤라를 잡는데 총력을 다 해야 했고.......그녀의
Yes란 대답을 받아내는 것이 최고의 과제 였다.
" 네 거야."
도무지 얼어붙어 움직일 줄 모르는 헤라의 손을 잡아 재원이 무작정 반지를 끼어 줬다. 헤라는 재원의 손길에
처음엔 약간 움찔 했지만.......손을 빼지는 않았다.
아니 뺄 생각도 없었다. 포르노 영화의 신음소리가 요란했던 그 밤 헤라는 이미 그의 청혼을 수락하기로 맘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대답을 하지 못 했을 뿐 이었다.
" 나........차림새가 너무 웃긴데........이 반지랑, 재원 씨하고 너무 안 어울려서 속상해!"
손에 끼워 진 반지를 내려다보며 헤라가 울먹인다. 그녀가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옷차림 때문
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재원은 헤라의 말에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 기쁘면서도 그녀의 차림을 확인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입고 있는 옷 자체로 보자면 절로 웃음이 나오는 차림새였다. 늘 자신이 아파트 아니면 밖에서 만났던
그녀였기에 이런 모습의 그녀는 정말 처음 이었다.
하지만 재원의 눈엔, 걷어 올린 트레이닝 복 안의 미끈한 다리와, 허름한 티 아래 얌전히 들썩이는 육감적 가슴과
탄력 있는 허리........그리고 목을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머리카락만이 보일뿐 겉에 붙어 있는 옷 따위는 상관없었다.
" 넌........뭘 입어도 훌륭해. 하물며 그 천박한 빨간 반짝이 원피스를 입었을 때도 넌 고고하고 아름다웠어."
헤라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닭살 멘트를 날리는 재원을 보고도 식구들은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황금색 수선화가 온 집안을 노란 빛으로 채우며.......재원의 청혼은 대 성공을 거둔 것이다.
하지만.......'.好事多魔'(호사다마)라 하지 않았던가.......좋은 일에는 나쁜 일이 끼어든다는. 재원과 헤라에겐 아직 꼭
넘어야할 고비가 남아 있었으니........재원 모친과 민 수연.......그리고 송 석훈 이 있었다.
병실에 인형처럼 누워 있던 모친은 소파에 앉아 책에 눈을 두고 있는 수연을 불렀다. 벌써 침대에 누운 지
일주일이나 지났건만 모친은 통 말을 하지도 않았고, 일어나 앉으려 하지도 않고 있었다.
재원은 점심시간에 병실에 들러 그녀의 밥 시중을 들고 갔으며, 퇴근 후에도 1시간 이상씩은 꼭 모친 곁에 붙어
있으려 노력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수연의 등장으로 재원이 불편한 심기를 감추기 위해 점심시간에 잠시 얼굴만 비추었을 뿐 10분을
앉아 있지 못하고 나가 버렸다.
그러자 모친은 점심도 거부한 채로 눈을 꼭 감고 침대에 누워만 있다. 결단의 순간이 온 것이라! 실력행사의 순간이
옷 것이라. 그녀는 판단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 ........그 여자전화 번호....... 아니? 재원이 집에서 본 그 애 말이야."
아직 말하기가 불편해 입을 열지 않고 있는 줄 알았던 재원 모친의 입에서 술술 말이 나오자 수연은 조금 놀랍기는
했다.
" 아니요. 하지만 필요하시면 알아내 드릴 수는 있어요."
그러나 영리한 수연은 티 내지 않고 그녀의 의중을 떠 본다.
" 그럼 빨리 좀 알아봐 주겠니? 그래서 나랑 통화 좀 하게 해라."
역시나. 재원 모친이 이제야 실력 행사로 들어가려 한다는 눈치를 챈 수연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달고는
'네'하는 대답과 동시에 급히 소파로 돌아가 휴대폰은 열었다.
" 석준 씨. 나에요. TDMA 팀 민 수 연. 뭣 좀 물어보려고요........네 .......석준 씨 친구 헤라 씨요........네. 전화
번호 좀 가르쳐 줄 수 있어요?.......아!.......최근에 바뀌었다구요.......네.......아뇨.......그럼 알아봐 줄 수는 있는
거예요?.......무슨 일인지는 알 필요 없구요. 그냥 여자들끼리 볼일 이니까........음 좋아요. 네........연락
기다릴게요."
석준의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에 수연은 가슴이 뜨끔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양심 따위를 찾을 처지가 아니란 걸
알기에.........모른 척 했다.
수연의 통화 내용을 듣던 재원 모친은 다시 눈을 감고 기다리는 듯 했다. 그녀에게 주워진
마지막 카드를 쥐고서, 아들의 비위를 최대한 상하지 않는 방법으로, 헤라를 가장 효과적으로 떨쳐 낼 수 있는
방법을 되새기며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수연과 재원 모친은 별 대화 없이 두 시간을 그렇게 같이 앉아 있었다.
정통부와의 공동 연구로 인해 연구실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요즘, 수연은 재원에게 정신을 빼앗겨 자신의 일을 거의
내팽기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그로인해 연구소로부터의 그녀의 위치는 점점 그 존립이 의심을 받기 시작 하던
터였으며, 석준도 그런 수연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동료였다.
물론, 수연은 그 점을 간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헤라의 전화번호를 석준이 알려 줄 것 이라는 걸 그녀는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두 시간하고 27분 후, 석준이 헤라의 전화번호를 알려 왔고, 수연은 지체 없이 번호를 눌렀다.
" 민 수 연이에요. 재원 씨 번호하고 끝자리 하나만 다르네요!"
민 수 연과 재원 모친의 전화를 받고 헤라는 망설이고 망설이던 끝에 지금 초콜릿색의 병실 문 앞에 5분 째 서
우두커니 있다.
무슨 얘길 할지는 뻔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요란한 청혼을 받고 이틀이 지난 오늘.......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란 생각으로 그녀는 재원 모친을 부름을
받아들였다.
분명 그의 모친은 당신의 아들 정 재 원 이란 남자는. 재벌 3세에, 그룹의 총수 후계자며,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제차 확인 시킬 테고, 그러니 너 같은 여자는 상대가 아니다. 고로 넌 사라져라.......란 그런 내용의 말들을 할
것이다. 그러면서 혹, 운이 좋다면 돈 봉투가 던져지던지.......반대로 지질 나게 재수가 없다면 협박성 발언을 듣고
쫓겨 날 것이란 걸 예상했다.
" 자주 보네요."
헤라가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수연이 떨떠름한 얼굴로 재원 모 옆에 서 있었다. 헤라는 고개만 까딱 인사를 하고
반드시 누워, 부른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는 모친의 침대에서 멀찍이 떨어져 섰다.
긴장이 됐다.
" 내가 놓고 간 와인은 어땠어요? 뭐 드레스나 그런 옷에 어울리는 기품 있는 와인이라.......슬립 차림의 헤라
씨한테는 좀 그랬겠지만."
수연이 선재 공격을 시작 한다. 물론 그녀가 하고 싶은 얘기는 와인이 아니라 헤라가 재원의 집에서 또 속옷
차림으로 있었단 말을 재원 모 에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도 촌스럽기는 했지만 지난 번 그 녹색치마나 탱크 탑처럼 엽기적이지는 않았다. 짐작컨대, 그 날은 재원에게
잘 보이기 위해 평소보다 더 무리한 모양 이었다.
헤라가 삐죽 새어나오는 웃음을 그대로 웃으며 수연을 발끝에서 머리끝 까지 훑어본다.
" 마른 오징어 다리에 엽기적인 탱크 탑 보다는 싸구려 슬립에 내 미끈한 다리가 더 나았으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줘도 되요. 그리고 와인은 아~주 잘 마셨어요. 재원 씨랑 분위기 좋게~ 누구 덕에 말이죠."
어차피 재원 모도 아는 사실. 새삼 정숙한 척 내숭을 떨 필요가 없다고 생각됐다. 분명히! 재원을 만나기전엔
정숙하다 못해 정조대를 하고 다니지 못하는 것에 안달내고 살던 그녀였지만 말이다.
" 하여간 머리 나쁜 여자들이 꼭 몸으로 승부를 걸어요. 하지만 최종 승자는 몸이 아니라 머리에요. 그래서 동물
세계와 인간 세계가 다른 거니까요."
한껏 치켜든 턱 아래로 주름이 두 겹이나 쳐져 있는 수연의 목이 드러났다. 헤라는 픽 하는 실소를 한다.
그녀의 목에 새겨진 저 참혹하게 쳐진 주름은 필시 갑작스럽고 무리한 다이어트의 흔적 일 것이다. 그런데 몸이
어쩌고 머리가 어쩌고 하며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꼴이라니! 우스웠다.
유난히 비쩍 마른 몸을 아무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것도 다이어트의 성공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한 것 같았다.
" 그래요.......확실히 야생 동물 세계에선 다이어트 같은 것은 없지요. 걔네들은 인간처럼 과한 욕심은 부리지
않거든요. 근데, 몸으로 승부를 안 거시는 분이 다이어트를 심하게 하시다니........아이러니네. 식탐이 보통이
아니었나 보지요?"
" 수연이.......잠깐 자리 좀 비켜 줄래?"
서로의 말꼬리를 잡고 실랑이를 하는 그녀들의 대화 사이로 드디어 재원의 모친이 입을 열었다. 헤라는 움찔 한다.
아무리 그의 모친과 감정이 있는 상태라 해도, 아픈 사람 앞에서 벌일 필요 없는 입씨름을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연이 헤라를 향해 눈을 부라리다 역시나 아이러니 하게 사뿐한 걸음으로 병실을 나간다. 재원도 언제가 그녀가
황당한 여자라 말한 적이 있었지만, 헤라가 보기엔 모순 덩어리의 여자였다.
" 아가씨.......MTN 송 석 훈 상무 하고 아직도 연락 하지요?"
아직 재원 모의 침대에 거리를 둔 채 머뭇머뭇 서 있는 헤라에게 모친이 드디어 말을 걸었다.
" 일 때문이었지만, 이젠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는 일입니다."
예상한 질문 이었다.
" 과연 그럴까? 그건 아가씨 생각일 테지. 송 상무 측에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가능성이 없는 얘기야.
몰랐어요?"
부은 얼굴 이었지만 발음도 또박또박 했고, 억양엔 강한 경계심마저 들어 있었다. 처음보다 훨씬 더 말이다.
"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비즈니스 적인 일 뿐인데.......그 비즈니스가 불발로 끝났다면 다 끝난 얘기라
생각 했었는데요."
" 송 상무......."
헤라는 재원 모의 망설임이 든 말을 기다린다. 뭔가 뒤에 커다란 것을 감춘 듯한 억양 이었다.
.
" 재원이 형이에요. 성이 다른 형. 우리 재원이가 그 사실을 모르는지, 알고도 모른 척 지내고 있는 것인지는 나도
알지 못하지만, 아무튼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아가씨.......난 싫어요. 아마도 송 상무가 괜히 아가씨를 집적대는 것
같지는 않단 말이라 그 말이에요. 분명히 계획이 있어.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우리 재원이가 아가씨 때문에 다칠
수도 있다 그런 뜻 이라구요........그래서 싫어. 우리 재원이 내가 금지옥엽 키운 아들 인데, 아가씨, 같은 여자
때문에 생채기 생기는 것 두고 볼 수 없어요."
확실히 느낌대로 망설임 뒤엔 폭탄 이 날아든다. 아주 대수로운 일을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헤라는 그나마
서서히 충격을 받고 있었다.
민 수 연이 재원과 헤라사이에 나타나 좋은 분위기를 늘 썰렁하게 만드는 오발탄 자체라면.......재원의 모친은
2차대전부터 사용된, 일단 터지면 반경 30미터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네이팜탄을 떨어트리는 비행기 인 샘
이었다.
당연히 네이팜탄은 송 석 훈과 재원이 형제라는 사실 이다.
" 인정하기 싫어도 생모가 같은 형제 에요. 그 형제들 사이에서, 아가씨가 뭔 일을 벌이는지는 몰라도, 잘못하면
가십 거리로 세상에 오르내릴 수도 있는 일이에요. 그렇게 되면 난 아들을 잃는 거고......... 그건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어요. 나한테."
이번엔 불길이 본격적으로 번진다는 신호탄 인지 병실 문이 벌컥 열리고 들어선 사람은.......수연이 아닌 재원
이었다.
" 네가........ 여길 어떻게 알고 왔어?"
뒤 따라 들어선 수연이 멈칫거리고 있었고, 재원은 정말로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지 그가 모친의 말을
들어 버린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긴........재원 모의 말대로 알고서도 모른 척 할만한 성격이라면.......지금 한 말을 들었대도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헤라의 입장을 배려해 모친이 병원에 있다는 것조차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라면........아무리 아파도 주변에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다 나을 때까지 혼자서 끙끙 소리도 못 내고 앓는
사람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헤라는 생각이 그곳에 오자 재원의 얼굴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를 만나는 동안 자기애에 빠진 그녀 자신이 전혀
그를 배려하지도 생각해 주지도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 잡혔기 때문이다.
" 나가자."
재원이 모친 앞에서 헤라의 손을 잡고 병실 문을 나섰다. 수연이 두 사람을 따라 나온다. 오늘은 오발탄도 모자라
유도탄 역할까지 하고 싶은 모양 이었다.
" 기다려요. 재원 씨. 이렇게 나가면 어머님이."
" 수연 씨 새어머니야? 아니지! 그럼 똥 쌀 자리 오줌 쌀 자리 못 가리지 말고 참견 하지 마."
수연의 붙잡음에 재원은 뒤 도 돌아보지 않고 야멸치게 대꾸한다.
" 지금은 아니지만, 곧 내 어머님이 될 거예요. 그러니 똥오줌 못 가리는 개 취급은 하지 말아요."
돌아오는 그녀의 대답에 재원이 헤라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민 수 연?"
" 만만하게 봤다면 당신하고의 결혼 같은 거에 이렇게 비굴하게 굴지 않아요."
" 그럼 그렇게 자신만만한 이유가 뭔데?"
" 궁금해요? 하지만 조금만 참아요. 알기 싫어도 조만간 알게 될 거니까. 그것도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말이에요."
휠체어에 탄 사람들과 간호사들 의사들이 지나다니는 병원 복도에서서 말씨름을 하고 있는 재원과 수연을 사람들이
흘끔거리지만 헤라만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 대신 그녀의 머리에는 이미 석훈을 찾아가 목을 비틀어 버려야겠단 생각이 속을 꽉 채우다 못해 용암을
분출해내는 화산처럼 철철 흘러넘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넘치다 못해 시커먼 재 까지 날리며 폭발해 버린 화산 헤라는 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병원을 달려 나간다.
병원의 정문 앞에 선 택시를 잡아타고, 그런 그녀를 향해 뛰어오는 재원을 보지도 못한 채로 헤라는 휴대폰을 열어
석훈에게 전화를 했다.
" 저에요. 진 헤 라. 며칠 전에 할 얘기 있다고 그러셨지요? 그 얘기 지금 들어야겠으니 까 만나요."
날이 선 그녀에 목소리에 석훈은 자신의 집 주소를 가르쳐 주며 환영한다는 말을 덧 붙였다.
담장들이 성벽처럼 견고 하고, 그 끝이 어디인지 한참을 봐야 할 정도로 길게 둘러쳐진 집들이 즐비한 동네 어귀로
들어선 택시는 잘 정리된 번지수를 따라 언덕을 올라갔다.
올라온 언덕배기의 머리에 택시가 멈추어지고 헤라는 심호흡 따위를 할 것도 없이 문을 박차고 내린다.
오는 택시 안에서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지만, 본래 불같은 성격의 헤라는 앞뒤 생각없이 불을 향해 뛰어든
나방이나 다름이 없는 상태였다.
45.
석훈의 목표물이 재원이라는 사실과 그 목표를 향해 겨눈 총에 있는 탄환이 자신이라는 걸 눈치 챈 헤라는 이
삼복더위에 온몸에 소름을 돋을 정도로 진저리가 쳐 졌다.
그리고 재원이 놀이터에서 들려준 얘기가 떠올려본다. 수영장에서의 사건. 지금 생각에 보면 석훈이 그를 그토록
미워했던 이유에 대해 재원은 어쩜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육중해 보이는 흑단 색의 대문 앞에 선 헤라는 초인종을 잠시 노려 보다 가운데 손가락에 힘을 주어 꾹 하니
버튼을 누른다.
나이 지긋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높게 이어진 돌계단과 그 옆을 따라 심어진 구상나무의 진녹색에
시선을 주며 헤라는 기분과는 달리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현관 앞에서 노란 색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그녀를 안내한다.......집 안에는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실을 통과해 건물의 반대편으로 안내 되니.......작은 규모의 풀이 있었고.......석훈은 파란색 파라솔이 달린 테이블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져 가는데 말이다.
" 왔나? 생각처럼 빠르게 달려 왔군."
석훈이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그녀를 맞았다. 그 모습에 헤라는 가방을 든 손에 힘을 주고 당장이라도
뻗어나려는 팔을 억제시켜야만했다.
" 앉지. 마실 거라도 줄까?"
여유작작한 그의 목소리........약이 올라.......그가 재원의 50% 형 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되새겨야 했다. 문득 문득
그의 얼굴에 재원이 겹쳐 보이던 까닭을 이제야 알 것 같기도 했지만.......그녀에겐 아직 받아들이기 너무 갑작스런
사실임은 틀림이 없었다.
" 본론만 말하지요. 고 석 준을 빼내는 일은 분명 제가 고사 했고, 그쪽에서도 싫다는 의사 표명을 한 걸로
아는데요. 그런데도 재원 씨 일로 날 보자는 게 "
" 내 얘기 들으러 온 거라며. 진 대리. 묻지 않아도 내용은 다 알아. 그러니까 일단 앉지. 그렇게 서 있지 말고."
헤라의 말을 가로채며 석훈이 미소를 짓는다. 알고서 보니 그런지 웃는 모습도 재원과 많이 닮아 있었다.
헤라는 입을 다물고 석훈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고 싶지는 않았다.
" 고 석 준은 진 대리가 하자고 하면 할 사람이야. 돌아가는 액수가 만만치 않거든. 거기에다 아주 합법적인 절차를
밟기 때문에 그 사람한테는 전혀 밑질게 없는 거래인데.......포기하기가 쉽지는 않지.......정리 하자면 진 대리가 고
석 준을 스카우트 하는데 끼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일은 될 거라 그 말이야."
아직도 빙글거리는 웃음을 웃던 석훈은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내려다 봤다. 그리고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다음 얘기를 생각 하는 듯 했다.
" 그럼 그렇게 하면 되지. 왜 자꾸 날 끌어 들여요?"
헤라가 물었다.
" 알텐데........내가 왜 그러는지. 재원이가 진 대리한테 뒤통수 맞는 시나리오가 내가 쓰고 있는 각본 이라는 걸."
" 내가 할 것 같아요?"
" 물론 안한다고 그러겠지. 하지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내 입에서 듣는다면 할 수 밖에 없는 거야."
그의 얼굴이 진지해 진다. 아니 무서워 졌다.
" 고 석 준을 데리고 중국으로 취업 형식으로 나가게 될 거야 일단. 진 대리가 말이지. 중국에 있는
OEM(주문자생산표시) 공장으로 가는 거지. 거긴 지금 인수 합병이냐, 아니면 연구개발(R&D)법인 설립이냐 양쪽을
놓고 우리 MTN이 고민 중인 공장이거든. 뭐 거의 인수 합병 쪽으로 얘기가 가고 있지만."
그가 앞에 놓은 얼음이 담긴 물 컵을 들어 헤라 앞에 놓는다. 그리고 자신의 컵에도 물을 채우고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제주도에서도 느꼈던 것 이지만 물 마시는 모습도 재원과 너무 닮아있었다.
" 하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공장의 인수자는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그리고 내가 아닌 다음엔........
기술을 빼내기 위한 스카우트와 인수합병으로 국정원에 찔러 넣을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가 되는 거구."
" 미수에 그치거나 예비음모자에 대한 처벌 규정은 없는 걸로 아는데요. 재원 씨를 그런 식으로 엮어 넣는 건
불가능해요."
헤라는 제발 불가능하기를 바라며 그렇게 말했다.
" 하하.......이미 서류는 다 갖추어 졌어. 내 명의로 된 서류와 재원이 명의로 된 서류 다 말이야. 진 대리의 행보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어떤 서류가 중국으로 보내지고 국정원으로 보내지는지는....... 당신이 이 비밀을 지키고, 또
고 석 준을 데리고 중국으로 가버리면 재원이는 무사해."
" 송 상무님이 재원 씨를 그렇게 엮어 넣는다고 해도, 말씀대로 합법적인 절차라면서요. 고 석 준을 빼내는 일도
해외취업 형식이고, OEM 공장을 인수하는 일도 말예요. 국정원에 흘려 넣은들 그게 무슨 효과가 있나요? "
분명 다른 게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뭔지 안다면.......그럼
" 당연히 효과는 있어. 그것도 아주 많이. 하지만 그건 GH그룹 내부 사정과 관계가 있는 것이니까 설명해줘도
당신은 못 알아들어."
그가 다시 시계를 봤다. 초조해 보이는 동작은 아니었다. 그럼 왜 자꾸 시계를 보는 걸까?
헤라는 그의 말과 동작 하나하나를 빼놓지 않으려 노력 한다. 그 속에서 그가 얘기하지 않은 그 무엇인가를 발견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 이제야 나타나셨네. 진 대리를 그렇게 놓쳐서야 쓰겠어?"
석훈이 시계를 확인하며 헤라의 등 뒤로 누군가를 맞았다. 헤라는 흠칫 놀라 뒤 돌아봐야만 했다. 그 곳엔 차갑고
굳은 얼굴의 재원이 서 있었다.
" 이 여자는 끌어 들이지 마. 송 상무 당신하고 나 사이의 일이야."
차가왔다. 그래서 오히려 더 감정이 묻어 있는 그의 목소리였다.
" 비즈니스야. 재원이 너야말로 제 3자니까 빠져."
참으로 뻔뻔하게도 석훈은 그 에게 제 3자라는 말을 썼다.
" 비즈니스를 집으로 불러들여서 까지 하나?"
재원이 웃기지도 않는 다는 투로 물었다.
" 내 맘이지."
석훈이 다시 물 컵으로 손을 뻗었다. 재원은 헤라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반지를 낀 손에 깍지를 끼워 잡는다.
" 가자......."
그리고 조금 전의 석훈에게 날리던 차가운 목소리는 온데 없이 다정하게 그녀에게 가자 라 말을 했다.
" 그 비즈니스........내용이 뭔지는 몰라도 이젠 없는 일로 해요. 송 석 훈 씨. 그리고 경고 한 번 더 경고
하는데....... 다시는 이 여자 건드리지 마. 마지막 경고야."
헤라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가며 재원이 석훈에게 던진 말이었다. 그때 석훈의 얼굴이 어땠는지는 헤라도 재원도
모른다.
다만 그 경고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리란 것만 어렴풋이 짐작 할 뿐이었다.
" 제멋대로에 싸가지가 없기로 유명한 건 미국에 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형한테 예의를 갖추어 말해야지! 정
재 원. 송 상무 까지는 들어줬는데.......송 석 훈 씨가 뭐냐?"
석훈 특유의 이죽거림. 언제나 상대를 열 받게 하고 도전하게 만드는 그 말투였다. 그러나
재원의 말에 석훈의 반응에 어떠했던 간에, 재원은 석훈의 말에 그 답지 않은 반응을 보인다.
" 나중에 조용히 얘기 합시다. 지금은 내가 참고 넘어 가지."
차분하고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반응에서 그가.......이미 석훈의 존재의 의미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거나
혹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왜?....... 왜? 참는데?.......네 여자 앞에서 그 웃기지도 않게 비극적인 가족사를 꺼내 보이기 싫다는 그런 뜻
이야?"
오히려 석훈이 흥분하고 그가 재원의 어깨를 잡는다. 돌발 상황이었다.
" 나, 돌면........어떻게 되는 줄 알지? 송 석 훈. 내 주먹에 나가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지금 내 어깨에서 손 떼.
당신을 봐 주는 건........수영장 일 이후로는 다시는 생기지 않을 일이니까."
아직은 재원은 이성적으로 대화? 를 하고 있었지만 언제 바닥을 보일지 헤라는 불안했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일단
폭발하면 감정에 휩쓸려 그야말로 물불 못 가리는 재원의 성격을 경험 했었으니까 말이다.
지금은 재원이 석훈에게 함부로 굴어서는 안 되는 시점 같았기에 헤라는 이 자리에서 얼른 그를 데리고 나가야겠단
생각을 했다.
" 아! 그래?.......그럼, 내가 제주도에서 네 여자 건드린 건........왜 봐 주냐? 비록 반쪽이라도 형제끼리니까 나누어
가질 마음이라도 생기셨던 거야? 그때 잠깐?"
하지만 석훈은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를 건드리기로!
어쩐지 헤라가 왔을 때부터 시계를 연신 들여다보는 폼이 이제 보니, 재원을 기다리고 있었단 뜻 이었던 것이다.
석훈의 그 이죽거림이 끝남과 동시에 재원의 어깨가 움찔 했다. 그리고 헤라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이 빠져 나가려
하는 찰나, 그녀는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의 손을 잡아 당겼다. 현 상황에서 석훈과 재원의 난투극은 도움이 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재원이 몸을 돌려 팔을 뻗으려 하는 힘과, 헤라가 잡아당기는 힘이 부딪히며 반동을 일으키고, 그 반동이
그녀를 풀 장 쪽으로 튕겨 나가게 만들며 재원의 손에서부터 그녀의 손은 미끄러지게 한다.
일은 언제나 이렇게 의도하지 않는 방향으로 풀려가 버리는 것이다.
" 아!!!!!"
.......풍덩!!!!! 하는 요란한 물소리와.......처절하게 튀는 물의 파편들.......! 하필이면 세 사람이 서 있던 장소가 풀
옆 이었다니.......!
재원과 석훈, 성이 다른 두 형제 사이에 끼어 피를 보는 사람은 이번에도 헤라였다.
머리를 울리는 물소리에 재원이 뻗어나가던 주먹을 멈추고 풀을 바라본다. 다음, 그가 거의 본능적으로 풀을 향해
뛰어 들었다.
헤라는 수영을 잘 한다. 하지만 무방비 상태에서 물 속으로 내쳐진 거라면.......얘기는 다르다.
꼬르르륵.......가라앉는 그녀! 재원은 헤라를 향해 필사적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그러나 물에 젖은 청바지가 그를
쉽게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집안에 있는 작은 풀이지만 다이빙대가 설치되어있는 꽤 깊은. 아마도 수심이 4미터 50센티 이상은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강렬했던 햇살이 수그러진 풀엔 어느새 어슴푸레한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고 그 어슴푸레한 푸름 속으로 가라앉는
헤라는 손에 잡히지 않을 듯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재원은 눈을 감은 채로 밑으로 가라앉는 헤라를 향해 팔을 뻗는다.
그리고 그의 손이 헤라의 손에 가까스로 닿았다 생각하던 순간.......그녀가 눈을 떴다. 그를 향해 손을 뻗는
헤라.......빠른 속도로 물의 표면으로 올라온 그녀는 재원의 목에 매달려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재원은 침착성을 가장해 그녀의 가슴에 팔을 둘러 천천히 풀 밖을 향해 헤엄쳤다. 석훈이 풀 밖에서 헤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내미는 손의 의미를 알고 있는 헤라는 그 손을 잡아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연신 기침을
해대면서도 수 초 동안 갈등을 했다. 그러다 결국에 그 손을 외면한다.
절대! 절대! 재원에게 상처 주지 않으리라! 결혼을 결심한 그 순간부터 자신의 남자로 정한 그에게 가는 길을 누가
가로막더라도.......반드시 이겨내리라! 헤라는 오늘 석훈의 협박 속에서 그 결심을 확고히 굳힐 수 있었다.
" 하.......하.......미안.......미안해! 괜찮은 거지?"
재원은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헤라의 얼굴을 들어 안색을 이쪽저쪽으로 살피며 초조하게 물었다. 그런데 만약
상황을 모르는 다른 누군가가 봤다면, 그 얼굴이 어찌나 창백하던지 꼭 물에 빠진 사람이 재원이고 구조한 사람이
헤라 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헤라는 그런 재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은 석훈을 향해 치켜뜨고 무표정으로 동요하는 감정을 숨기는
석훈의 눈을 마주했다.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고의적이든 우발적이든. 석훈으로 인해 목숨에 위협을 당한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 아냐........재원 씨.......탓.......아니야....... 누가 당신....... 코를 그렇게.......쑤셔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니까.......사과 할 사람은 따로 있지 뭐!"
헤라는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고.......그 말에 석훈은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얼굴을 한대
쳐 주어야만 속이 풀리겠지만........지금 총을 든 사람은 석훈 이었고.........겨누어진 사람이 자신과 재원이라는 것을
아는 헤라는 재원의 주먹을 막은 것처럼 스스로의 주먹 또한 다스려야 했다.
숨을 고르던 헤라가 몸을 일으키자, 재원이 부축을 한다. 그리고 그의 팔 안에 안기어 석훈의 집을 나왔다.
" 집에 데려다 줄게."
차에 타자마자 재원은 시동을 걸고 바로 차를 출발 시켰다.
" 아니야. 재원 씨 집으로 가. 내가 저녁 해줄게."
그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오늘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그에게 얼마나 힘겨울 것인지! 헤라는 가슴이 아팠다.
" 무리 하지 마. 내일 또 보면 되잖아."
" 무리 하는 거 아니야.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운전을 하는 재원을 향해 헤라는 마음 그대로 말을 했다. 그것도 정말로 다정스럽게 애교 100% 충전해서 말이다.
신호등에서 차를 멈춘 재원이 그런 헤라를 보며 웬 일이냐는 웃음을 말없이 웃는다. 이럴 땐 원래 '너 왜이래?
불안하다.'라고 말을 해야 하는 게 정상적 반응인데 역시........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헤라는 더 가슴이 아프다.
" 나한테 만날 치이면서........뭘 같이 있고 싶어?......."
아직 신호등이 바뀌지 않았건만 그는 헤라를 외면하고 신호등을 바라본다. 목소리가 걸걸하고 풀장에서 먹은 물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이 앞 유리 창을 통해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황당한 표정들로
지나갔다.
" .......당신한테 치이다니.......그 그런 적 없어. 내가 오히려 당신을 휘둘렀지! 내 맘대로.......그래서 나야말로 미
미안해요........ 감히 정 재 원 이란 인물을........말이야.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은 같이 있어주고 싶어."
늘 진심과는 다르게 튀어나오던 말을 제대로 전달하려니 괜스레 긴장이 되고 떨렸다. 왠지 닭살이 더 돋는 것도
같고 말이다.
" 게다가.......오늘은 갑자기 쳐들어 올 사람도 없으니까.......벌거벗고 춤 출수 있는 절호의 찬스잖아요."
그래서 마무리로 한 농담.
딴에는 그 전에 한말의 어색함을 중화시켜보려 한 농이었지만 썰렁했다. 그런데도 재원은 웃는다.
" 푸~~~ 정말 스트립 쇼 라도 해줄 요량이야?"
거기다 기대에 부푼 표정까지 곁들이자, 다른 때 같았으면 화들짝 했을 헤라의 마음엔 안도감이 돌았다.
분명 화가 나고 그녀에게 물을 것이 많을 것임에도, 재원은 감정의 표출도 질문도 자제를 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 새엄마.......나 헤라. 응.......아직........저기요. 나 여기 그 사람 집이거든. 근데........저기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갈게.......아니.......그 사람이 오늘 좀 그래서. 같이 있어줘야 될 것 같아.......응........알았어. 아침에 일찍 갈게.
네."
헤라는 욕실에 들어와 새엄마에게 살짝 전화를 했다. 새삼 재원의 집에서 자고 간다. 보고를 할 필요까지야 없었지만,
이젠 왠지 당당해 진 것도 같고, 재원이 자신의 사람임을 가족들이 인정해 주는 가운데 그 사실을 확인 받고 싶어진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시작 보다 더 불안해진 그와의 관계에서 유일한 희망은 바로 가족이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민 수 연도 산 이었지만 재원 모는 국립공원 수준 이었고, 석훈은 그야말로 국내를 벗어난
에베레스트 수준 이었다 표현하면 맞으려나?
샤워기의 물줄기는 맞는 내내 헤라는 재원 모의 두려움에 떨던 목소리와 석훈의 협박이 귀룰 맴돌았다. 아직은
석훈의 협박 내용이 실현가능성 있는 내용인지 더 알아봐야겠지만.......만약에 진짜로 빠져 나갈 길이
없다면........하는 생각이 들자 헤라는 아플 정도로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욕실을 나와 보니 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타월로 젖은 머리를 눌러 짜며 언제나처럼 헐렁했으나
허벅지만을 간신히 가려주는 그의 면 티를 걸치고 헤라는 소리가 나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 뭐 해요? 저녁, 내가 해준다니까."
등을 보인 그가 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오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 라면 먹으려고."
뒤 돌아 본 재원이 씨-익 하고 웃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하얀색 포장지의'너구리' 세 개가 놓여 있었다.
" 나 샤워 하는 동안 사 왔어요?"
'너구리'를 보자 반가운 마음에 헤라가 물었다. 재원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 대신 싱크대의 상단의 가로로 기다란
장을 열어 보였다. 그 속엔 하얀 색 '너구리'와 빨간 색 '너구리'가 3층으로 열을 지어 장 가득 쌓여 있었다.
" 라면 장사 하려구요? 아님 사업 분야가 바뀌었나? 식품부로?"
재원의 마음을 아는 헤라는 가볍게 농을 했다. 무뚝뚝한 것 같으면서도 그는 늘 그녀에게 세심 했다는 걸 너무도 잘
아니까 말이다.
" 내가, 라면 집 주인 이었으면 좋겠지!"
재원이 라면 봉지를 뜯어 제법 익숙한 손놀림으로 라면과 스프와 다시마를 분리 했다. 헤라는 옆으로 다가가 그의
솜씨를 구경한다.
오늘따라 재원은 유난히 커 보였다. 같이 옆으로 나란히 서본 적이 한번도 없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커다란
아름드리의 느티나무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릎을 덮는 베이지색 반바지에 고급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나는 연회색 부드러운 촉감의 면 티를 입은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무채색에 쌓여 그런 것인지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를 풍겨내고 있었다.
분명 그렇지 않을 텐데.
" 정말로.......라면 집 주인 이었으면 좋겠다. 그럼.......재원 씨 이렇게 힘들지 않아도 될지 모르잖아."
" 헤~ 그럼 내가, 라면 집 주인이래도 너.......나 좋아 할래?"
" 아니! 좋아 안 해."
" 거봐! 그러면서 뭘. 난 말이야. 힘들어도 네가 좋아해 주는 편을 택할 거야."
재원이 옆에 서서 냄비의 끓는 물을 쳐다보고 있는 헤라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녀가 재원의 옆 가슴에 머리를
기댄다.
" 재원 씨가 물건이야? 좋아하게.......좋아한다는 말은 물건한테나 쓰는 말이랬어. 울 새엄마가........그래서 난 재원 씨
좋아 안 해!........사랑하지!"
사랑한다는 말이 입으로 나온 건 아마도 처음 이지 싶었다. 그럼에도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그 말을 해버린 것을
헤라는 그새 후회 했다.
" .......라면.......더 맛있겠다."
재원은 헤라의 입에서 나온 사랑한다는 말에, 가슴이 덜커덩 하고 내려앉을 정도로 심하게 동요가 일었다.
너무도 반갑기만 했어야할 그 말이........어찌 이리 가슴이 아픈지.......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급작스런 그 말에 목이 메여온 그는 달리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끓는 물에 라면을 집어넣는 일을 했다.
" 사랑해.......재원 씨! 그동안 애태우고 속상하게 한 것 모두 용서 해줘요. 응?"
그런 맘도 모르는 헤라가 재원의 앞으로 돌아와 그의 시야를 막아선다. 혹여 너무 늦지나 않았을까 염려가 담긴
그녀의 눈에 재원은 또 다시 가슴이 덜커덩거리고 있었다.
" 좋아!....... 용서 한다.......대신."
" 대신?"
" 지금.......키스 한다. 라면 먹기 전에."
그는 덜커덩 소리를 내는 가슴을 잊기 위해 헤라의 입술을 찾았다. 능숙하게 그의 키스를 받아내는 헤라를 안으며
재원은 서툴렀던 그녀의 키스가 이렇게 자신의 입술에 적응하는 것에 문득 놀라고 있었다.
그만큼의 시간들이 둘 사이에 쌓여 있었고, 그 시간보다 더 빨리 자라난 사랑이 그 안에, 그녀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 라면.......불겠어."
집요하다 싶을 만큼 입술에 매달리는 헤라를 재원이 떼어내며 라면의 불을 끈다. 헤라는 그런 재원의 태도가 못내
서운했지만.......오늘은 무조건 그를 이해해 주고 싶었다.
" 계란은......?"
다 끓여져 식탁으로 옮겨지는 라면 냄비를 들여다보며 헤라가 물었다.
" 아아~ 이런. 미안 깜빡했어."
그가 주섬주섬 사과를 한다. 이젠 헤라에게 미안하다는 말이 베어 버린 그였다.
" 오늘은 내가 하기로 했던 날인데.......재원 씨가 대신 했으니까 봐 줄게요."
시원하게 웃는 그녀! 쏘아대지도 안고 퉁퉁거리지도 않고 상냥했다. 그럼에도 재원의 표정은 그리 밝아지지 않았다.
다만, 라면에 젓가락을 찔러 넣던 그는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 오늘.......병실에서 들은 얘기들.......다 잊어.
참으로 낮선 말투로 낮선 표정으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한마디 후, 찔러 넣었던 젓가락을 들어 라면을
훌훌 입으로 들이밀고 있었다. 아마도 더는 생각하기도 떠 올리기도 싫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헤라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들은 얘기를 잊으라는 것은.......기억을 지우라는 것과 같은 것인데.......기억이란
놈은 그렇게 쉽게 사라져 주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체험하고 산 사람 이었다.
" 영화 볼래?"
그가 DVD 리모콘의 전원을 누르며 물었다. 헤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소파에 다리를 올려
웅크려 앉는다.
돌이켜 보니 재원과 영화 한편 같이 본 적이 없었다. 그 흔한 데이트 코스인 놀이 공원에 같이 간 적도 없었고,
카페에서 다정히 차를 마시거나 커피를 마신적도 없었다. 백화점을 쇼핑 한 적은.......제주도의 그 작은 백화점에서
PDA폰을 산 것이 전부였다.
평범한 연인들이 하는 것들 대부분 어느 것도 한 것이 없었다. 하긴.......평범한 강요하기에 정 재 원 이란 인물은
굉장히 범상하지 못 했다.
그래서 그를 감당하지 못 할 거라 겁내며 뒷걸음치느라........시간을 낭비했던 것 아닌가!
" 빅 피시?"
" 아.......다른 거 볼래?"
" 아니........못 본 영화야. 그냥 둬요."
" 씻을게. 보고 있어라."
재원이 욕실로 들어가고 헤라는 화면에 눈을 박았다. 몽롱하고 뿌연 영상들이 밝고 맑은 색채로 눈앞을 떠다녔다.
조금은 기괴하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지각하는 토끼를 따라 환상의 나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드는 그 영화에
순간순간 눈은 머물렀다.
허나 그건 시각의 자극 일뿐, 그녀의 뇌는 자극에 반응하는 사이사이에 석훈의 협박을 거듭해서 끼워 넣고 있었다.
" 뭐야.......수선화잖아!"
그런 중에도 화면 가득 채우는 골든 하베스트는 시선을 잡았고 헤라는 픽 하니 작은 웃음을 웃었다.
그! 거한 청혼이 여기서 나온 거네! 하며 말이다. 그리고 그럼....... 그런 호화스럽고 시끄러운 청혼을 한 것에 대한
보답을 내가 해줘야 할 차례네.......라며 그녀는 제법 대담한 상상을 한다.
아니 어쩌면 엉뚱하기로는 세상에 따라올 자가 없는 그녀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동안은.......그녀의 그런 끼가 잠을 자고 있었을 뿐 일지도.
소파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헤라를 두고 재원은 서재로 들어갔다. 벽면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은빛 투명한
책장 사이에 끼워 둔 하얀 색 표지의 서류철을 꺼낸 그는 그 서류를 책상위에 던져둔다.
책상에 걸터앉아 들고 들어온 생수 병을 입에 물고 그는 열려진 방 문 사이로 보이는 헤라의 머리 꼭대기에 시선을
멈추었다.
석훈이 자꾸만 그녀를 끌어들이고 주변을 맴도는 이유를 이제 인정해야 했다. 서류로 확인을 하기 전 까지는
막연했던 일들이 선명해지면서.......위험 신호는 볼륨을 높여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빠진 것 없이 조사했어. 한 실장 시켜서 조사한 거니까 아마 누가 알고 있는 것보다 자세하고, 틀림이 없을 거야.
근데.......난 네가 몰라도 될 것을 괜히 캐내는 것 같아서 이 서류 너한테 넘길지 말지 고민 많이 했다. 이
비밀.......세상에서 아는 사람은 너 하고 나 한 실장, 그리고 MTN 송 회장님이 전부야. 만약 너 네 집안에서 알게
된다면.......그 파장은 굉장 할거다.'
헤라에게 청혼을 하고 돌아온 그날 밤, 윤석이 늦은 시간임에도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와
와인 서너 병을 해치우고 앉아 있었다.
' 미국에 있을 때 6년 전쯤, 너 DNA 프로필 검사하고서 보관서비스 했지? 아마 송 회장 쪽에서 그걸 근거로 한 것
같은데.......나머지는 네가 직접 봐라.'
그리고 서류를 건네며 조사가 늦어진 이유는 서류를 보면 알 것 이라 말라며 덧붙인 말이었다.
처음 한번, 서류를 훑어보던 그 순간엔 머리 속이, 마치 워드 프로그램의 새 파일을 연 것처럼 하얗게 광채를
내더니........이내 서류의 글자 들이 하나하나 눈을 통해 뇌 속으로 들어와 그 내용들을 저장해 갔다.
그만큼 그 내용은 그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고.......혼란스럽게 만들었었다. 지금도 그 혼란은 가시지 않는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내용을 받아들이기엔 그는 너무도 오랜 시간동안 잘못된 정보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재원은 다시 한번 더 보려던 서류를 책장에 도로 꽂아 놓고 걸터앉았던 책상에서 일어났다. 복잡한 머리는 터질 듯
했고 가슴은 답답했다.
서재의 불을 끄기 위해 스위치로 다가가간 그는 열려진 문틈으로 보여야 할 헤라의 머리 꼭대기가 없고.......거실이
컴컴하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 한다.
그리고 천천히 거실로 나왔지만 그녀의 모습 보이지 않고 침실 문틈으로 옅은 빛이 새어나오는 것만이 눈에 띠였다.
" ........자는 거야?"
45-2
살며시 침실 문을 열어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야시시한 조명 앞에 서 있는 낯선 차림의 뒷모습 아니
아니........우스꽝스런 뒷모습이 맞겠다. 하여간 그런 그녀가 있었다.
재원은 뒷모습의 그녀를 빙 돌아, 침대로 가 엉덩이를 걸쳤다.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아 헤라의 괴상한 차림을
아래위로 훑는다. 하지만 그런 재원의 입가엔 슬며시 미소가 번져나고 있었다.
자신의 하얀 셔츠에 핑크색 타이를 리본 모양으로 묶고, 그녀의 몸에는 버거운 커다란 회색 슈트의 재킷을 입을
헤라는 그녀의 의도대로 충분히 도발적 이었다. 재킷과 셔츠 아래로 드러난 재원이 너무도 사랑하는 그 다리는 더
그랬다.
그녀가 입술을 뾰족 내밀고 새침한 표정을 하더니 손에 쥐고 있던 리모콘을 거실을 향해 누른다.
미리 걸어 놓은 듯한 CD에서 기다리듯 나오는 노래는' Black Eyed Peas' 의 'Sexy'! 헤라는 천천히 부드러운 듯
강렬한 힙합리듬을 타고 몸을 흔들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번쩍이는 레이저 조명은 없었지만.......그녀의 춤은 역시 현란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살짝살짝 흔드는 힙과
다리.......수줍은 듯 묘한 표정의 그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 팔을 뒤로 짚어 몸을 젖힌 그의 감상하는 눈빛을 받아내며 그녀는 과감해 져갔다.
제일 먼저 리본으로 묶은 핑크 타이를 풀어내고, 회색 슈트의 재킷을 벗어 재원에게로 던졌다. 그리고 셔츠의 윗
단추 하나를 풀고 두개를 풀어 드러낸 맨 살의 어깨를 힙합리듬에 따라 은근한 동작으로 움직인다.
엉덩이를 덮는 긴 머리카락은 가지런히 등 뒤에서 흔들렸고........은은한 조명 이었지만 헤라의 육감적 몸은 그 빛이
통과하는 셔츠 안에서 매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재원을 향해 유혹적인 자태로 한발 한발 다가오는 헤라를 향해
" 푸~우~~~~"
하고 재원이 참던 웃음을 새어 보냈다........하지만 그 웃음에 멈출 알았던 헤라는 오히려 여유 만만한 웃음으로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다시 셔츠의 단추 두개를 더 풀자 가슴의 계곡과 배를 가로지르는 근육이 드러났다. 그녀가 힙합 리듬을 타고
허리와 힙을 흔들 때마다 살짝 살짝 날리는 셔츠 자락은 은밀한 유혹이란 말의 어원인 것 같았다.
재원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멈추어 지고 꼴깍 하는 침을 목으로 넘긴다.
그러자 헤라의 눈빛이 장난 끼로 빛이 나는 것 같더니 1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추어선 그녀가 드디어 입고
있던 셔츠의 모든 단추를 풀어 버렸다. 가장 밑의 하나만 남겨 두고서.
어쨌든 노래의 분위기 탓 이었을까? 갈수록 대담해진 그녀가 한 손으로 어깨에 걸쳐진 셔츠를 끌어내리자 가슴의
반쯤이 드러났다.
얇은 하얀 레이온 셔츠 아래로 비치는 봉긋이 솟아 있는 그곳에 재원의 시선이 머물렀다.
OK!......헤라는 속으로 환호성을 울렸다.
" 나이스! 멋진 스트립쇼 야!"
그러나 그가 긴장 했던 얼굴을 풀고 슬며시 웃어 버린다. 이런~ 그건 헤라가 원한 반응이 아니었다.
좀더 호탕하게 웃는........아님 자신의 유혹에 넘어와 어수선한 현 상황을 그가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그런 순간이
되길 .......뭐 그런 것들을 기대 했던 것인데!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반응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갑작스레 불끈 하는 마음에, 이대로 포기 할 수는 없지! 하며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셔츠를 벗어 던지고,
섹시함을 유지하려는 몸짓을 멈추지 않은 채로 재원을 향해 크게 한발을 내딛었다.
허나 내딛었다는 건 순전히 그녀의 착각이다. 침대 발치에 깔린 두꺼운 면 러그를 보지 못한 헤라는 그만 그 러그
밑에 발이 끼어 침대 옆으로 보기 좋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섹시 도발이. 순식간에 코미디가 되어 버리는 순간 이었다.
" 와 하하하하하~~~~~"
그때 터져 나오는 재원의 그 호탕한 웃음소리! 당연히 무안하고 창피한 순간 이었지만 헤라는 벌떡 일어나 재원의
품에 뛰어 들었다.
" 그래! 그렇게 웃어요."
기다렸던 웃음소리.......차라리 싸가지 없고 막말을 내 뱉는 그가 그리웠을 정도로 오늘 재원은 종일 힘이 없고
우울했다. 겨우 웃는다는 것이 그런 우울을 감추기 위한 소리 없는 미소정도가 전부였던 재원을 헤라는 웃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 뭐야.......겨우 나 웃게 해주려고 너 답지 않은 짓을 했어?"
그녀의 의도를 안 재원은 품에 뛰어든 헤라를 꼭 껴안았다. 사랑스런 그녀.......천박한 여자들이 추었을 스트립쇼를
해도 천진함을 가득 담고 있는 헤라의 모습이 그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사랑스러웠다.
" 겨우 라니! 재원 씨 웃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재원 씨가 아프면.......난 그 두 배로 아파요. 몰라?"
" 아프지 않아. 괜찮아. 그러니까........이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돼. 네가 이렇게 대담한 짓을 하는 거, 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단 것! 나 이해한다. 그 속 내용이야 모르지만. 그리고 넌 두 배가 아프다고 했지?
난 말이야. 열 배 스무 배가 아플 것 같아. 네가 아프면.......그러니 너 야 말로 조심해."
귀를 대고 있는 그의 가슴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헤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한동안 그의 품안에서 닥쳐오는
불안을 잠재운다.
46.
7월 정기 이사회. 재원은 이사회 참석을 위해 아직 일어나지 못한 헤라를 두고 먼저 집을 나왔다.
자신의 사무실에 먼저 들를까 하다, 오늘의 안건이 어떤 것인지 이미 잘 알기에 그는 본사로 바로 사는 방향을
택했다.
회의는 10시부터다. 꼭대기의 회의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법무법인 변호사 '김 광 일' 이사를 만났다.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건네어 오는 김 이사 에게 재원도 허리를 숙였다.
" 일찍 오셨군요."
먼저 말을 건네는 김 이사에게 재원은 '네' 하는 딱딱한 대답을 했다.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다시 멈추고 이번엔
생산 노무 총괄사장 '천 진 수' 이사가 탄다.
그와도 무뚝뚝한 고개 인사를 나누고 재원은 엘리베이터의 맨 앞에서 뒷짐을 쥐고 서 있었다. 나이 많은 이사들에게
재원은 부담스런 존재다.
넓은 회의실에 모인 이사진은 총 9명.
대표이사 이자 회장인 鄭 회장을 비롯, 부회장 '김 동 수' 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두 명의 이사, 그리고, 회계 이사
'박 일병' 비스비씨 상사 집행이사 '이와세 마사오'그리고 명목상 판촉 이사인 재원과, 영업이사인 사촌 형 정원.
'GH 정보 통신 사업부 '를 재원에게 넘기기 위한 경영진 선임 건이 이번 이사회의 중요 안건이었다.
정원은 여전히 능글거리는 웃음으로 鄭 회장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재원은 회의 테이블의 제일 끝 쪽에 앉아 그런
정원을 관찰한다.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제일 먼저 그의 목에 칼을 들여댈 인물이 그였기 때문이다.
회의 내내 재원은 아무런 의사 발언을 하지 않았다.
통신 사업부를 재원이 맡는 다는 것의 의미는 곧 GH 그룹의 핵심 사업체인 GH 전자 자체가 몇 년 안에 그의
손안에 넘어 올 것이라는 걸 예고하는 일이기에 이사진들에게 있어 이번 경영진 선임은 굉장히 부담스럽고 그만큼
신중해야할 일들이었다.
그러나 재원을 총수로 하는 GH 통신 사업부 경영진 선임에 대한 이사회의 반응은 그다지 회의적이지 않았고,
걸림돌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여겼던 정원은 예상 밖으로 아무런 반대 의사를 표명 하지 않았다.
" 무슨 꿍꿍 이야? "
이사회 후 회장실에 딸린 식당에서 이사진들과 식사를 하던 중, 재원이 옆에 앉은 정원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 뭐?"
" 꿍꿍이가 뭐냐고. 난 형이 제일 먼저 반대하고 나설 줄 알았는데."
" 내가 왜?.......바보냐? 내가 뭣 하러 노인네 미움 살 짓을 해. 노인네가 결정 한 일에 허튼 소리 했다가는 나만 피
보는데."
정원의 말은 옳았다. 할아버지 鄭 회장에게 정씨 집안의 장손인 재원은 절대적 존재였다.
하지만.......이대로 넘어갈 인물이 아닌데, 차라리 반대 손을 들고 나왔다면 정원의 행동이 덜 불안했을 것을, 왠지
재원은 그런 그의 행동이 더욱 불길하게 느껴졌다.
" 주총(주주총회)에서 보자. 이사진이 아무리 이번 경영진 선임 건에 다 찬성을 했다고 해도, 주총에서 승인이 나지
않으면 물 건너가는 거니까."
하지만 숟가락을 놓고, 냅킨을 집어 입을 닦으며 정원이 넌지시 던진 말에서 재원은 그가 왜 반대 의사를 접고
있었는지 대충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물론 주총에서 어째서 승인이 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이 가는 바가 없었지만 말이다.
" 있긴 있는 거군. 꿍꿍이가."
" 꿍꿍이? 하~ 꿍꿍이라........참 편한 말이네. 차라리 흑심이라고 하는 게 어때? 아니면 계획이라던가. 꿍꿍이라는
말은 애들 장난 같잖아."
재원의 꿍꿍이란 말 꼬리를 잡고 정원은 갈수록 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 날 어쩔 샘 이야?"
" 어쩌긴.......세상일이 되는대로 맡겨두는 거지. 내가 힘이 있나? 나이 많은 사촌들이 죽죽해도 어차피 실세는 네가
될 텐데. 노인네 유언장이 그렇잖아. 장손! 장손! 뭐......다 죄책감에서 우러나온 일이기는 하다마는, 노인네가
망령이 나지 않는 한, 유언장이 바뀔 리는 만무고, 이번 결정이 바뀔 리도 없는 거 아니야?"
긴 테이블에 띄엄띄엄 앉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정원은 신랄하게 비꼬고 있었다.
그의 말은 재원이 장손이기 때문에 나이 많고 더 능력이 있는 다른 사촌 형제들을 재치고 할아버지 정 회장의
총애를 받는다는 뜻이었다. 정말 단순히 장손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재원이 늘 찜찜하게 여기는 부분이기도 했고........윤석이 가져다준
조사서류를 본 지금에선 더더욱 뒤통수를 당기는 부분 이었다.
그럼.......할아버지 鄭 회장의 맘을 바꿀 도리가 없다면, 도대체 주총에서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재원도 하던 식사를 멈추고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기분 나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정원을 가만히 노려봤다.
" 송 상무 언제 만났어?"
밖의 공기와는 온도 차이가 심하게 나는 카페에 앉은 헤라는 석준의 질문에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봤다.
"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니? 네 진짜 마음을 말해 봐. 정말 내가 하자고 하면 할 거야? 송 상무가 너한테
그렇게 어마어마한 액수를 제시 했어?"
복숭아 주스의 빨대를 입에 문 석준의 얼굴은 무표정 했다.
" 문제는 그게 아니지. 헤라야. 내가 하지 않아도........이미 일부 기술은 중국으로 빠져 나간 것 같은 낌새가 보여.
우리 연구진 내부의 누군가가........벌써 송 상무의 농간에 걸려들었단 말이지."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심장을 저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듯 했다.
" 뭐? 잘 못 알아듣겠어. 좀 쉽게 얘기 해봐."
" 내 생각에........송 상무가 노리는 건 정 본부장이야. 기술보다는.......맞지?"
그는 알고 있는 걸 확인 하는 것 같았다. 헤라는 고개를 끄덕인다.
" 그래.......그러니까........널 중국으로 보내려는 송 상 무의 의도는 널 정 본부장에게서 빼앗겠다는 계산이 되는
거구. 그것도 맞지?"
" 아마도.......어떻게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것도 자기 동생한테."
말끝에 헤라는 합 하고 자신의 입을 막았다. 재원의 가족사를 함부로 떠들어대다니........하며 그새 죄책감이 든
것이다. 그의 아킬레스건을 너무 가벼이 여긴 것 같아서 말이다.
" 그랬구나!......"
" 어떻게 해야 해? 내가 중국으로 가지 않으면.......그 사람을 기술 유출로 엮어 넣을 거라고 협박했어. 다
합법적이라면서........어떻게 그게 가능 한지.......그게 그 사람한테 어떻게 치명타가 된다는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고. 그 사람한테 얘기 할 수도 없고. 시간은 없는데.......미치겠어. 송 상무가 원하는 건 내가
재원 씨 뒤통수를 치는 거야. 내가 그 사람한테 상처 주길 원하는 거지.......왜 그러는지 이유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아. 지금상황에서는 그런 게 나한테는 의미가 없다구. 다만.......내가 그 사람한테......"
석준에게 상황을 얘기하며 그녀는 점점 감정이 격앙되어 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머리 속에서 정리 되지도 않고 파악
되지도 않는다.
석훈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그 후환이 어떻게 재원에게 돌아가는 것인지 조차도 파악되지 않고 있었고, 그녀는 절대
재원의 뒤통수를 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랑하는 남자의 뒤를 친다는 말인가?
이미 재원이 한번, 묻지 않고 넘어간 일 이었다. 다 끝난 일이라고 여기고 있던 일이 그녀의 발목을 잡아 수렁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 너 그 사람 사랑해?"
아무도 묻지 않은 것을 석준이 물었다.
" .......응. 내 마음보다....... 내 운명이 먼저 허락한 사람이야. 나한테 허락된 유일한 남자."
" 로미오와 줄리엣이니?"
웃지 않고 물었다. 농담 같은데........그게 아니고 의미 있는 물음 이었나보다.
" 그 말은........뭐야? "
" 희생 할 각오가 되어 있냐고. 정 본부장을 위해서."
" 희생? 그런 걸해야 해?"
" 지금으로써는.......일단은 그 방법 밖에 없다고 봐. 송 상무가 너한테 언질 해준 것보다 일이 더 많이 진행 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 OEM 공장을 인수하고 거기로 핵심 브레인을 데려가는 일은 다 합법적이기는 한데, 만약
인수했다가 다시 중국 내의 다른 회사로 팔아버린 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정 본부장이 꼼짝 없이 걸려든단 얘기야."
헤라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부분을 그가 정리해 주기 시작했다.
"거기에 요즘 GH 사 내부적으로 지배 구조 변환의 움직임이 있다는데.......아마, 거기에서 정 본부장이 이번일로
타격을 입게 될 거야. 것도 심각하게. 아예 경영 일선에서 밀려나게 될 수도 있다 그 말이지. 한마디로 앞으로 그
사람에게 주워 지기로 내정됐던 모든 것들을 다 잃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야. 돈.......권력, 일.......우리나라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다는 그런 뜻이 되는 것일지도 몰라. 국정원에서 어떤 법적 제제를 받지 않는다 해도.
경제인으로써 회상 불량이 되는 거지."
석준의 눈은 빛이 나고 있지도 않고 암울해 져 있지도 않았다. 처음 그 표정처럼 무감정 할 뿐 이었다.
" 그 그럼.......내가 널 데리고 중국으로 가기만 하면.......그렇게 하면 송 상무 그 작자가 그 일을 멈춘단 말이야?
내가 재원 씨 뒤통수를 치는 일로 그걸 막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 거냐구!"
" 정 본부장이 널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거라면, 그리고 그 사람 가치관이 어떠냐에 따라 ........그렇게 될 수도
있는 얘기겠지! 송 상무의 목적은 그 사람한테서 가장 중요한 걸 빼앗고 싶은걸 거니까."
헤라는 머리가 멍해진다. 로미오와 줄리엣 이냐. 물은 석준의 물음이 어떤 의미 인지 이해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시 선택의 순간이 왔다. 대학교 여름 방학 그 때처럼........자신이 고통 받을 것인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보고 있을 것인지를 선택해야하는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 사실 닷새 전쯤에 정 본부장하고 통화 해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가 안 되서, 신화 그룹 신 윤 석 실장한테 전화
했었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좀 알아보려고. 송 상무가 뭔가를 꾸미고 나 하고 널 유인하는 것 같은데........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알게 된 건.......아~ 말 안하려고 했는데."
무표정하기만 하던 석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송 상무 하는 말, 공갈협박이 따위가 아니었다는 거야. 정 본부장 이 갖고 있는 계좌 중 한 개에서 OEM 공장
인수 대금으로 보이는 돈이 입금됐다가 그저께 중국으로 송금 된 걸 확인했대. 신 윤 석 실장이. 그 돈도
문제야.......그것도 정 본부장을 꼼짝없이 옭아매는 올가미가 되는 거라고."
이런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줄은 전혀 상상도 해보지 못했었다. 그냥.......기술을 빼내서 그를 조금 곤란하게
만들려는 정도로 여겼었는데.......헤라는 탁자위에 얹은 양팔 속에 얼굴을 묻는다.
" 헤라야......."
가방 속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얼굴을 팔 속에 묻은 채로 그녀는 한 손으로 가방을 뒤져 전화기를 찾았다.
" .......네."
[ 나야. 집이야? ]
재원 이었다. 눈물이 난다.
" 으응.......네."
[ 저녁은 먹었어? ]
" 네. 재원 씨는?"
[ 난 아직, 만날 사람이 좀 있어서.]
" 그럼....... 오늘 못 보겠네?
[ 왜.......보고 싶어?]
" 으응. 너무 많이."
석준이 앞에 있었지만 헤라의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울어?]
" 울긴.......코가 막혀서 그래."
[ 코가 왜? 감기 걸린 거야? 어제 자다 깨서 이불 몇 번 이나 덮어 줬는데. 그 공도 없이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해?]
" 아냐.......감기 안 걸렸어. 물 마시다가 고개를 너무 재꼈더니 코로 물이 들어가서 그래."
[ 아하! 진짜. 진 헤 라.......내가 옆에서 물 마시는 것 까지 감시해야 제대로 마실래?]
" 재원 씨 올 때까지 물 안 마실게. 일찍 와. 아파트로 가서 기다릴 테니까."
[ 어제도 우리 집에서 잤는데.......오늘 집에서 안자도 되겠어? 어머님이 나 욕하실 것 같은데.]
" 당신답지 않게 무슨 그런 걱정을 해?"
[ 하~ 그러게. 근데 내가 언제 네 앞에서 나다운 적이 있었냐? 없었잖아. 네 앞에서는 나 항상 미친놈이야. 너한테
정신 나간 미친놈. 큭~]
그렇게 말 하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행복해 하는 것 같았다.
" .......일찍 와. 나 그냥 잠들지도 몰라."
[ 그래. 노력 해볼게. 근데.......자지 말고 기다려. 너 잠들면 네 옷 벗기기 힘들단 말이야.]
" 아예 다 벗고 잘 테니까 걱정 마."
[ 하하하. 너 지금 혼자 있냐? 정말 갈수록 대담해 지네. 네가 나랑 처음 이란 거 아무도 안 믿겠다.]
호탕하게 웃는 재원의 웃음소리에도 헤라는 기쁘지 않다. 오히려 가슴이 심하게 아려와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 ....... "
[ 기대 한다. 아! 근데 스트립쇼는 할 생각하지마라 이젠.]
" ........끊어. 새엄마 왔어."
[ 어! 그래.]
그리고 툭, 헤라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헤라는 테이블 위에 엎드려 팔에 묻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재원 외에 어떤 남자 앞에서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석준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다
알고 있겠지만.
" 유일한 남자란 의미가.......그거야?"
석준은 얼굴을 들지 않는 그녀를 바라보며 남아 있는 주스 컵을 들었다.
" 그거....... 라니?"
여전히 얼굴을 묻은 그녀가 되묻는다.
" 너도 충격이었겠지만, 나도 충격이었어. 나한테도 첫 키스였다고.......근데 네가 그렇게 숨도 못 쉬고 쓰러져 버린
일, 아주 오랫동안 상처가 됐다."
컵에 있는 빨대를 빼내 버리고 석준은 남은 주스를 들이켰다.
" 아아.......미안."
" 그런데.......정 재 원이랑은 괜찮다 그거잖아. 너한테 허락된 유일한 남자란 말은!"
" ....... "
" 나.......너 다시 좋아 할 거야. 정 재 원 이랑 게임도 안 될 것 같아서 물러나려고 했었는데........한 입으로 두말
하는 일되지만, 네가 원하면 중국!....... 같이 갈게."
헤라가 간과 하고 있던 부분을 석준이 상기 시킨다. 재원을 위해 그가 절대 필요하다는 사실을.
" ....... 하루 아니 이틀 정도만 더 생각해 보면 안돼? 결정되면 전화 할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 카페의 유리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무표정한 그 사람들의 얼굴이 부러웠다.
" 시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더라. 오늘 내일 까지만 생각해. 나도 준비 하려면 시간이 필요 하니까."
그리고 석준이 먼저 일어났다. 그녀가 상상 하지도 못 할 정도로 일은 어마어마했고, 빠져 나갈 구멍은 없었다.
bar는 어두웠다. 석훈이 먼저 와 잔을 채우고 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 한 잔 받아."
재원이 옆에 앉아 석훈이 그이 잔에 술을 채운다. 재원은 그가 채운 술잔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을 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르고 움직이지 않았다.
" 이사회 어땠어?"
" 남의 회사 이사회 일정 까지 꾀고 있었습니까?"
" 나 철두철미한 사람 이야. 알잖아."
" 푸~"
" 웃지 마. 너 웃는 거 오늘로 마지막 될 거야."
" 어떻게?"
" 정 이사가 말 안 해? 네 사촌형 말이야."
얼굴을 마주 보지 않은 두 사람은 짧은 말을 이어갔다.
" ........ "
" 말 안했나 보군."
" 들어야 할말 있으면 당신한테 듣지. 사촌형 보다는 당신이 더 가까운 사람이니까."
재원이 손가락을 튕겨 바텐더를 부른다. 그리고 물을 주문했다.
" 흥~ 개 소리 하지 마. 네 놈 목에 걸려 있는 그 목걸이를 보는 순간, 내 머리는 돌아버렸으니까."
재원의 물을 따르던 손이 멈칫 한다.
" 목걸이가.......왜?"
" 그 목걸이 원래 주인은 나거든. 내가 이 영 란한테 선물 한거야. 근데.......그게 네 목에 걸려 있는 걸 본
그날부터.......이번 일을 꿈 꿔왔어."
석훈이 얼음을 채운 술을 벌컥벌컥 물을 마시듯 들이 켰다. 목소리는 침울했지만 얼굴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재원은 목에 걸린 목걸이를 아프게 잡아 당겼다. '투두둑'하는 소리를 내며 끊어지는 목걸이.......그리고 그것을
석훈의 술잔에 던져 넣는다.
" 그럼, 너 가져."
" 상황 파악이 전혀 안됐구만. 하긴.......몇 개월을 여자한테 빠져서 허우적댔으니 그럴만도하지. 근데 어쩌냐? 이미
상황 종료 거덩. 늦어도 꽤 늦었다 그 말이야."
" 헤라만.......건들지 마. 다른 건 다 참는다. 그 여자만 놔둬."
" 아무것도 모르니 그런 태평한 소리가 나오지.......뭐 태평이건 뭐건 간에 난 상관없지만. 하지만 그래도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면 난 그 여자를 더 괴롭히고 싶다."
" 내가 가만 안 둬. 보고 있을 것 같애? "
" 보고 있고만 싶지 않겠지. 하지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을 걸. 그런 걸 보고 강 건너 불 구경 이라고 하는 거거든.
강 건너의 불은 꺼주러 가고 싶어도 못간 다는 의미도 있어. 상관없는 불이니 그냥 둔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 말장난 하러 온 거 아냐. 핵심을 얘기해."
" 핵심은 네 측근한테 들어라. 신 윤 석 이가 다 알고 있을 테니.......부하 직원은 하나같이 멍청한데 친구 하나는
잘 두었더군. 여자한테 정신 나간 친구 놈 뒤치다꺼리도 잘 해주고. 헤퍼 보이는 그딴 계집년 어디가 좋다고!
부전자전이야."
" 너! 이 자식 죽여!"
재원이 석훈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석훈은 생모와 부친과 재원의 여자 헤라까지 셋을 싸잡아 모욕했다.
" 그럼 지금 죽여라. 그래야 네가 사니까. 하지만 여기서 날 죽이지 않고 나가면 넌.......끝이야. 네 여자도 덩달아서
부록으로."
파랗게 빛나는, 칼끝보다도 더 날이 선 석훈의 눈은 재원의 등줄기에 소름이 서게 했다. 지금까지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 하는 어떤 사촌들의 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증오의 흔적.......!
바보 같은 인간.......! 불쌍한 피 붙이.......!
재원은 석훈의 멱살을 쥐었던 손에서 힘을 푼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bar를 나왔다.
47.
황금색 액체 속에서 황금색 빛을 내는 하얀 목걸이......몇 분인가 그 것을 노려보고 있던 석훈은 컵을 들어 바닥에
내던져 버린다.
그리고 산산이 조각난 크리스털 조각들 속에서도 하얗게 빛을 발하는 목걸이를 석훈은 발로 밟아 버렸다.
이 영 란의 사랑을 재원이 모두 가져간 것처럼 그는 자신이 선물한 목걸이도 재원에게 이미 가버린 물건이라
여겼던 것이다.
부정한 여자! 자신의 부친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가버린 여자! 석훈은 그렇게 이 영 란과 성이 다른 동생
재원을 증오 했다.
부친을 버림과 동시에 자신도 그녀에게서 버려졌다 믿고 있는 석훈 이었다.
헤라는 재원의 침대에 누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도 끄고 조용히 음악도 없이 잠들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그렇게 혼자서 재원을 기다림에도 눈물로 배게 깃을 적실 수는 없었다. 아직 포기 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허락된
남자를........바로 어제 서야 사랑한단 고백을 할 수 있었던 남자를.......뒷걸음질치다 이제야 겨우 한발 그를 향해
디뎠던 것인데.......그대로 포기하기엔 헤라는 억울하고 화가 났다.
너무나 먼 곳에 있는 재원이기에 망설이고 뒤로 물러섰던 스스로가 밉고 원망스럽기만 했다. 진즉에 좀 더 용기를
낼 걸! 하는 후회로 가슴이 미어져 온다. 그의 모친이 아무리 사정하고 협박하고 반대해도 헤라는 지금 그 모든
것을 헤쳐 나갈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석훈의 협박은 달랐다. 그녀가 힘들고 괴로운 선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고,
재원의 모든 인생이 걸린 협박 이란 걸 석준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몸을 뒤척이지도 않았다. 가만히 어둠 속의 한곳을 노려보며.......용기를 북돋아야 했던 것이다.
" 잠들었어?"
문소리도 듣지 못 했는데 재원은 어느새 침대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 어.......들어오는 소리 못 들었는데."
" 그런 것 같더라. 그래서 잠 든 줄 알았지."
옷도 벗지 않고 침대 속으로 들어온 그는 모로 누운 헤라를 뒤에서 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 오늘 하루 종일 뭐했어?"
그의 목소리가 귀 뒤에서 아득히 들려왔다. 더운 날씨 탓에 끈적이는 목 위로 재원이 숨결이 닿았지만.......짜증나지
않는다.
" 그냥.......당신이 가져다 놓은 수선화 화분 언니 가게로 옮기는 일 도와주고.......새엄마가 그거 들고 아파트
입구에서 파는 거 도와줬지."
헤라는 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일상을 상상하지 않고는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눈물을 보이게 되면
재원은 무슨 일이지 물을 것이고........그럼 그에게 말 하지 말라던 석훈의 협박을 잊게 되는 것이었다.
" 그걸........팔았단 말야?"
" 우리 집은 가난해요. 거기다 좁단 말이야.......파는 건 당연해."
" 아아~ 그래 어차피 네 물건인데. 뭐. 후후."
재원의 웃음에 기운이 없었다. 그도 석훈에게 협박당하고 있는 걸까? 이대로 그가 당하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인가? 내가.......말해야 하는 걸까?
순간 헤라는 이 복잡하고 무서운 모든 일을 얘기하고 재원이 그 일들을 처리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 재원 씨........뭣 좀 묻자."
" 뭘.......?"
헤라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몸을 붙여오는 그가 조용히 되물었다.
" 당신.......지금 당신이 갖고 있는 것들.......다 소중하지? 나만큼!
재원은 헤라의 질문에 그녀의 목에 묻었던 얼굴을 든다. 그러나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있었다.
"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우리 새엄마 협박에 날 다시 포기 하고 싶어 졌니? 아니면 송 이사가 뭐라고 해?"
그리고 그는 곧 정확히 핵심을 찾아냈다.
" 나 이기적인 여자야. 그래서 지금까지 당신한테 사랑한단 말도 못했던 거구. 근데......
그건 새발의 피였어. 나 당신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든 갖고 싶어. 그러니까 세상에서 당신이 나만
필요하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어. 돈도 권력도 당신 새엄마보다도 내가 제일로 중요하다는 소리 듣고 싶다구. 알겠어?"
자신이 뭘 확인 하려는지 그녀는 안다.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더라고 자신만을 선택한다는 것을 확인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걸 확인하고 석훈의 협박을 뭉개버리고.......재원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무섭도록 이기적이고 끔찍하게 자기애 적인 발상 이란 걸 알지만........그러고 싶었다. 재원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가 망가지더라도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하는, 어이없게도 그런 생각들을 그녀는 하고 있었다.
" 너만 사랑해! 세상 모든 걸 다 줘도 너랑 바꾸지 않아. 하지만 널 지키기 위해서 난 힘이 필요하다. 그건.......너
만큼이나 중요한 거야."
그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재원의 답은 그녀의 선택을 돕는다. 참으로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자신이 그녀는
혐오스러웠다.
그를 절름발이로 만들어 놓고 사랑 이었다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지도 않는 농담 인지.......말이다.
재원이 오기 두어 시간 전쯤 석훈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재원을 만났다는 전화. 마치 무슨 보고라도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그가 헤라에게 한 협박을 재원에게 말하지 말라는 재차 거듭되는 협박성 전화였던
것이다.
사랑과 공포가 머리와 가슴을 가득 짓누른 그녀에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이 판단을 내릴 기회를 석훈의 전화로
쫓아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헤라는 결심한다. 줄리엣이 될 것이다.......하지만 재원이 로미오가 되길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석훈의
농간에 잠깐 장단을 맞추어 주고, 그 뒤를 치리라! 헤라는 계획을 한다.
그렇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녀의 뒤통수를 친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뒤를 치는 일 따위는 허락하지 않는 세상
이었던 것이다.
바보가 되지 않으려 아무리 발버둥쳐도 세상은 그렇게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기 일수라는 걸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옷을 입은 채로 재원은 그대로 잠이 들고.......헤라는 그가 안은 팔 안에서 그의 모든 것을 기억해 두려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과 몸 곳곳을 더듬었다. 헤라를 사랑에 빠트린 재원의 체취와, 그를 살아 있게 하는 심장소리와, 온 몸
구석구석에 키스를 해주던 그 관능적인 입술과, 세련되고 단정한 얼굴 모두를.......머리 속에 차곡차곡 접어 넣었다.
잠든 재원의 입술을 헤라는 저도 모르게 탐한다. 언제부터인지 재원의 모든 것을 먼저 탐하는 건 헤라였다. 손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고 단단하고 아기의 피부처럼 매끄러운 그의 가슴을 더듬자 그가 눈을 뜬다.
" 너........피임 했니?"
갑자기 그런 걸 왜 묻는 걸까? 헤라는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리고 대답도 하지 않는다.
" ......?"
" 아니야 대답 하지 마. 근데.......하지 마라. 절대루."
" ........ "
뭘까? 이 뒤가 당기는 느낌은........이미 불안의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헤라는 또 다른 종류의 정체 모를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날 밤, 재원은 그녀를 몇 번이고 품었다. 그녀라는 샘이 내일이면 다 마르기라도 할 것처럼.......밤 새 헤라를
놓아 주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그녀 안에 쏟아 내고 쏟아 냈다. 그러다 지쳐 잠이 든 것은, 이른 여름의 해가
하늘 첫 자락을 붉게 물들일 때 쯤 이었다.
헤라에겐 태어나서 처음 겪는 길고도 짧은 밤 이었다.
" 국정원에서 전화 왔어."
" 벌써? 하긴.......네 계좌 확인 해보니.......이미 움직일 건 다 움직여 놓은 것 같더라. 할아버지 아시니?"
" 당연하지! 정 정 원 이가 가만히 있었겠어? 아마 오후쯤이면 이사회도 소집 될 거다."
" 그럼. 내부에서 송 상무를 도운 것도 정원 형 소행이야?"
" 그렇겠지 싶다. 심증 뿐 이지. 물증은 없어. 아직은.......그래서 말인데 부탁 하나 하자. 내 계좌에 있다 중국으로
나간 돈 추적 좀 해줘. 내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 할만한 것 말이야."
" 그거 가지고 될까? 국정원에서는 널 처벌할 규정이 없어. 문제는 언론하고, 주주들이야. 만약 정원 형이 송
상무를 도왔다면, 그 새끼가 노리는 게 있을 거 아냐. 그걸 알아야 된다고 뭘 노리는지 말이야. 그래야 우리가 앞서
가서 이 상황이 반전 되지 않을까 싶어."
" 이미 반전은 늦었어. 이사회 소집되면 내 권한은 모두 중지 되고, 계좌도 다 막아놓을 거야. 그리고 한 달 이상은
국정원에 불려 다니느라 정신없을 테고........"
사무실로 찾아온 윤석과 함께 재원은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고 대비를 해야 했다. 석준의 전화로 미리 정황을
파악해놓은 윤석 덕분에 그래도 그는 조금 여유 있게 지금의 위험사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재원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을 석준은 윤석에게 말하지 않았다.
" 4시까지 국정원 조사실로 들어가기로 했어. 정신없다."
" 송 상무 새끼! 죽여 버렸으면 좋겠다."
까칠한 얼굴의 재원을 보며 윤석이 그 답지 않게 흥분 했다.
" 놔둬.......이번만 당해 줄 거야. 그 인간도 맺힌 게 많으니까.......하지만 이런 식으로 마냥 당하지는
않아........그건 그렇고, 당분간 언론 쪽만 통제가 되도 좋겠는데 말이야."
허나 그답지 않은 건 재원도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침착 했다. 석훈과 정원의 음모에 빠진 사람 치고 그는 너무나
여유로와 보였다.
책상에 걸터앉아 빌딩 아래로 시선을 주고 있던 재원은 생각에 잠겼다. 윤석도 석훈과 정원의 함정에 허점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본다.
"RRR RRR RRR"
얼마간의 침묵 속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헤라였다.
" 아~ 헤라. 마침 잘 했어. 전화 하려던 참 이었는데."
[ 그랬구나!.......그럼 내가 전화 잘했네. 그치? ]
" .......응."
[ 근데 혹시 바빠요? 지금? 안 바쁘면 ]
" 미안. 나 지금 많이 바쁘다. 앞으로 일 주일 정도 출장도 다녀와야 할지 몰라.......그러니까 나 없는 동안 밥도 잘
먹고, 잘 자고, 기다려라. 전화 자주 못해도 삐지지 말고. 이상한 생각도 하지 말고 말이야."
헤라의 말은 끊은 재원은 조급하게 말을 했다. 각오하고 여유로와지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막상 헤라의 목소리를
듣자, 그는 불안지고 있었다.
[ 어.......응! 그 그래요?......그 그럼.......오늘 밤에도 못 보는 거야? ]
그녀의 목소리가 왠지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출장이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왜지? 뭔가 지금의 일을 알고
있는 걸까?
재원은 헤라의 말 더듬에........더더욱 가슴 한 편의 불길함이 크기를 불려가고 있었다.
" 그래. 미안해. 그 대신에 다녀와서 계속 같이 있어줄게."
약속을 한다.
[ 아........응. 알겠어요. ]
기운이 빠진 그녀의 목소리에 재원은 당장이라고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휴대폰을 쥔 손이 하얀 해
지도록 힘을 주고 있었다.
" 그리고 당부 할 거 있는데, 나 없는 동안 송 상무한테 전화와도 받지 마. 절대 받으면 안돼. 그 인간이 비즈니스
뭐 그따위 얘기해도 귀 닫고 있으란 말이야. 알았어?"
윤석을 등에 두고 재원은 창가로 걸어갔다. 빽빽한 빌딩 숲 아래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개미 같이 작아 보였다.
혹시 저 속에 헤라가 있지 않을까.......재원은 눈을 부릅떴다.
[ 응. ]
"지금 어디야? "
[ 어.......여기요? 여기.......집 근처에 나왔어요. 잠깐 뭣 좀 사러.]
" 그럼, 거기서 사진 찍어서 지금 내 휴대폰으로 보내."
[ 지금요?]
" 응. 지금 당장."
[ 그래요. 알았어.]
" 끊는다........참! 그리고 나 없다고 자기 전에 라면 먹고 자지 말고. 살쪄도 예쁘기는 하지만 라면 몸에 안 좋아.
내 말 알아듣지?"
이상한 당부를 곁들이는 재원을 윤석은 놓치지 않았다.
[ 별 걱정을.......재원 씨나 먹는 것 잘 챙겨 먹고 다녀요. 술 마시지 말구.]
" 그래. 정말 끊는다."
[ 응........저기, 재원 씨]
" 왜?"
[ ........아냐. 그냥 목소리 한 번 더 들으려구.]
" 싱겁긴.......나도 사진 찍어서 보내줄게. 그 거 봐."
[ 그래요. 그럼 끊어.]
휴대폰의 종료 버튼을 누른 재원은 바로 자신이 얼굴에 대고 카메라 방향을 조종해 사진을 찍었다.
어설프게 웃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며 몇 컷 을 찍어 바로 그녀에게로 보낸 후 재원은 윤석을 돌아다 봤다.
" 걱정 돼......."
재원은 윤석과 마주친 시선을 돌려 다시 휴대폰을 내려다 봤다. 진심을 말 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 이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눈을 마주 하기가 어색했다.
" 알아. 네 녀석 얼굴에 그렇게 써 있다. 송 상무 때문이지?"
" 음. 자꾸만 헤라한테 추파를 던지는 게.......그래. 더구나.......지난번 병원에서 헤라가 그렇게 송 석 훈 이한테
달려간 것도 영 걸리고. 물어봤어야 했는데.......일이 너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못 물어 봤다."
" 치사한 새끼니까......."
재원은 석훈을 너무 얕보고 있었다. 그가 단순히 헤라를 탐내는 정도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사무실 전화기가 울리고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 윤석과 재원의 대화는 중단이 됐다.
" 본부장님.......국정원에서 나오셨다는데요."
그리고 그 목소리에 재원의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의 준비를 다시 한번 한다. 시작인지 끝인지 모를 그 곳으로
재원은 가야만 했다.
" 새엄마.......나 내일 중국 출장 가."
모친과 단둘이 누운 이불 위에서 헤라는 천장을 보고 중얼거리듯 얘기했다.
" 중국? 얼마나 걸리는 건데? 그 사람한테 말은 하고 가는 겨?"
" 그럼.......말했지."
" 그래........"
중국으로 들어가면 언제 한국으로 돌아 올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모친을 걱정 시키고 싶지 않았다.
" 새엄마.......나, 그 사람하고 결혼 안 할지도 몰라."
하지만.......마음의 준비를 어느 정도는 시켜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헤라는 어려운입을 열어야 했다.
그럼에도 예상 밖으로 모친은 별로 놀라지 않는다.
" 너한테.......새엄마가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디, 지금이 그때 인거 같다."
헤라와 같이 어두컴컴한 천장을 올려다보던 모친이 슬그머니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두 손을 마주
잡아 깍지를 낀 채 잠시 동안 고개를 떨구고 말이 없었다.
" 왜 그래? 갑자기 심각해지고, 내가 그 사람이랑 결혼 안한다니까.......걱정돼서 그래?"
헤라도 모친을 따라 일어나 앉는다. 창을 통해 비쳐 드는 어스름한 달빛에 모친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 그 날, 말이야.......아빠로써는 가장 현명한 판단을 하신 거야." "
그날........그날.......!
" 물론, 술에 취하지 않았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건........이미 그 상황 이전에 결정지어진 아빠와 새엄마의 운명
이었던 거고, 그 주워진 상황에서 아빤 널 위해서 그리고 새엄마를 위해서 가장 옳은 일을 했던 거라고 새엄마는
믿는다."
갑작스레 모친은 그 날에 대해 말을 꺼냈다. 처음 이었다. 그날에 대해 모친이 입을 연 것은.
" 아마 그때 아빠가 새엄마를 구한답시고 발이 얼어붙은 널 두고 뛰어 들었으면, 그 놈들한테 너까지 몹쓸 일을
당했을 건 너무 뻔한 일 아니었을까? 아빠가 그러지 않고 널 억지로 끌고 풀숲으로 숨은 건........그 당시 아빠로써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한거야. 제일 현명한 판단을 내린 거라구. 알겠니? "
" ....... "
" 아빠를 이해 해드려라. 그래야 네 자신이 벗어 날 수 있는 거야. 아빠한테 화풀이 한다고 너나 내가 겪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그치?"
달빛이 있었지만 헤라는 모친이 어떤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어쩜 모친은 헤라가 재원과의
결혼을 망설이는 것이 자신의 탓 이라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그날을 얘기 하는 것이리라.......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 그리고 아빠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건, 네가 너 자신을 용서하는 거야. 아빠도 구하지 못한 새엄마를 네가
도와주지 못했다는 그 죄책감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말이지. 만약 그날 네가 다쳤다면.......엄만.......평생 나를
용서하지 못했을 거다. 그런 면에서 넌 효도 한거야........알겠니? 우리 막내."
눈물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헤라는 달빛에 비치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얼굴을 돌려 그 눈물을
훔쳐 냈다.
그리고 훔쳐낸 눈물 사이로 포장마차를 끌고 들어오던 그 새벽의 산동네 비탈길이 지금 이 순간처럼 하얀 달에
부서지고 있었다.
상처는 흔적이니 당연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상처를 볼 때마다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겠지만 상처도 자신을
구성하는 일부인 이상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란 걸 헤라는 알아야 했다.
받아들이고 그 상처와 화해를 해야 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던 것이다.
" 새엄마......."
" 아빠한테 그 사람 보여 드렸다며?.......정말 잘했다."
잘했다 말하는 모친은 헤라의 등을 토닥이며 하릴없이 쏟아지는 달빛을 바라봤다.
그 편안해진 모친을 얼굴을 바라보며 모친이 부친에게 보여준 관용과 사랑이.......딸을 지켜준 아버지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는 것을 헤라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부부는........한 평생을 같이 사는 동안 아무리 서로가 못났어도 적어도 몇 가지는 서로에게 빚을 지고
서로에게 감사 하며 살아가는 것이란 걸.......언젠가 헤라도 알게 되리라.......모친은 나름대로 그런 생각을 하며,
딸이 결혼 이라는 것에 대해 더 이상 겁먹고 도망가지 않길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헤라는 새엄마의 품에 파고들어 쳐지고 말랑말랑 해진 젖가슴에 볼을 부빈다. 세월의 흔적.......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흔적이 존재해 있었다.
" 새엄마.......그럼 내가 그 사람을 지켜 줄 수 있는데.......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 다치는데.......내가 날 위해서
그 지켜줄 기회를 놓아 버리면........그럼 그 사람도 새엄마처럼 날 이해해 줄까? 나중에 내가 날 용서 할 수
있을까? "
재원과 그녀에게 남을 사랑의 흔적들을 어떻게 상처가 되지 않게 남길 수 있을지.......헤라는 두려웠다.
" 뭔가 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만들었나 보구나!......하지만 선택은 늘 후회를 남긴다. 헤라야. 그러니까 어떤 걸
선택해서 후회하지 않을까를 생각하지 말고, 네가 지금 있는 위치에서 최선이라 생각되는 걸 택해라.......뭔가를
선택해야 할 때 미래를 따지고 선택 하는 것은 선택을 불가능 하게 한다. 꼭 해야 하는 선택이라면 현제에 충실한
게 낫지 않겠니?"
아무것도 묻지 않고, 더구나 이렇게 현명한 대답을 해주는 모친은 처음 이었다.......무엇이 모친을 이렇게 자신감
있는 그녀로 바꾸어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떠나는 마당에 헤라는 모친의 한결 강해진 모습에 안심이 됐다.
불안한 그녀의 미래는 잠시 접어 두고 말이다.
그리고 그날 밤.......새엄마와 같이 보던 그 하얀 달이 시야를 벗어날 때까지 헤라는 뜬 눈으로 새벽을 지샜다.
" 어.......연주 씨."
윤석은 아침나절부터 재원의 사무실로 나와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 오늘 저녁 약속 취소해야 될 것 같아서요.]
" 어? 그래? 하긴 나도 좀 그렇던 참이었는데.......근데 연주 씨는 왜? 또 양 다리 시작 된 거야?"
마침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재원에게 가봐야 할 것 같다 생각하던 윤석은 연주와의 져녁 약속이 부담스럽던
참이었다. 그는 한손엔 휴대폰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열심히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 뭐요? 웃기셔 정말! 내가 언제 양 다리 했다고.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전화기 너머의 연주 목소리가 카랑카랑 했다.
" 에이~ 괜히 삐지고 그래.......조크야 조크! 화 내지마."
그래서 윤석은 대충 그녀를 달래보려 노력을 하려 하는데
[ 몰라요. 하여간 난 오늘 기분 그래. 인천 공항에 가야 한단 말이야.]
그녀의 공항 이라는 말에 그는 왠지 뜨끔 하는 무엇인가가 머리를 치는 느낌을 받았다.
" 공항?.......갑자기 공항은 왜? 어디 놀러가?"
[ 아뇨. 재원 씨한테 얘기 못 들었어요? ]
" 뭘?"
[ 헤라.......석준 이랑 같이 중국 가는 거요. 가면 꽤 오래 걸릴 거라던데. 재원 씨랑 그런 얘기는 안 해요?]
연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원이 찜찜해 하던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직감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배웅 나가려구요.]
" 몇 시? 어디 행 비행기야?
[ 네? 아.......그게 저녁 7시 비행기던가? 상하이 요.]
연주의 목소리가 윤석의 반응이 심상치 않을 것을 눈치 챈 듯 가늘게 떨려 왔다.
" 알았어. 그리고 연주 씨, 공항 나가서.......내가 다시전화 할 때까지 헤라 씨 출국 못하게 붙들고 있어. 눈치 못
채게 말이야."
[ 네? 그게 무슨.]
" 이유는 묻지 말고. 하여간 꼭 그렇게 해. 부탁이야. 알았지?"
[ 뭐.......노력이야 해보겠지만 나 왠지 불길한 생각 드는 거.......허다리 집는 거 아니죠?"]
그런데 이 연주 란 여자! 윤석의 심각을 오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순간 윤석은 핏대가 올랐다. 아무리 그녀가
상황을 모르고 있다고 해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받는 오해는 그를 열 받게 하기에 충분했다.
" 아! 진짜! 거 쓸데없는 상상 좀 그만하구! 시키는 대로나 해. 안 그러면 연주 씨 당신 친구 평생 못 보게 된 다구!
알아?"
휴대폰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지른 그! 머리가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 그리고 고 석준 이도 눈치 못 채게 해. 그 자식도 못 나가게 하라구."
그러다 곧 마음을 진정 시키고 윤석은 재차 당부를 한다. 물론 머리 나쁜 연주를 완전히 믿을 수 는
없지만.......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했는데........그나마 그녀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볼멘소리로 알았다 대답을 하는 연주의 전화를 끊고 윤석은 털썩 자리에 주저 앉는다.
헤라와 석준이 출국해 버리면 그녀 뿐 아니라, 재원의 현 상황까지 더욱 꼬이고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걸 알게 된
윤석이다.
아무런 출렁임이 없던 바다가 한 순간에 해일을 몰고 온 이유는, 아마도 석훈과 정원이 계획해 놓은 일을 한꺼번에
진행시켜 순식간에 재원을 죈 올가미를 잡아당기기 위함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을 해본다.
정보를 유출시켜 국정원을 움직이게 하고 그 틈을 타 헤라와 고 석준을 중국으로 보낸다면
석훈의 계획은 일석이조가 되는 것이었다.
재원을 사지로 몰아넣고, 여자까지 빼앗는.......!
형 이란 놈이!
윤석은 책상 위에 흩어져 있던 서류를 챙겨 들고 재원의 사무실을 나섰다. 재원의 갑작스런 부재로 얼이 나가 있는
비서실을 직원들이 급하게 나가는 윤석을 향해 인사를 하는 순간 비서실의 다른 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사람은 정원
이다.
" 어이! 윤석.......주인도 없는 사무실엔 어쩐 일인가?"
사촌 동생이 그 고초를 격고 있는 데에 비하면 그의 태도는 너무도 여유 만만 이었다. 정상적인 관계라면 그는 지금
국정원 여기저기를 뛰어다녀야 할 인물 이었던 것이다.
확실히 재원의 추리가 맞는 것 같다는 심증을 윤석도 갖게 되는 순간 이었다. 물론 이젠 물증까지 확보한 상태지만
말이다.
" 피차일반 이지요. 정 정원 씨!"
싸늘한 눈으로 정원을 바라보던 윤석은 그 큰 덩치의 팔로 정원의 어깨를 부딪쳐 그를 휘청이게 했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문을 나선다.
내곡동에 위치한 국정원의 주차장에서 윤석은 재원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4시
20분.......재원이 밤샘 조사를 마치고 나오기로 한 시간보다 벌써 40여분이나 지나가 있었다.
핸들의 잡은 손가락을 쉼 없이 톡톡거리며 연신 시간을 확인 하던 윤석........그는 석훈과 정원의 주식 거래서를
확인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뿌득 소리가 날 정도를 이를 갈았다.
재원이 나름대로 조사해놓은 사채업자의 명단을 기본으로 그의 계좌에 입금되어 있던 자금의 경로를 추적해본 결과.
암 달러 상을 거쳐 사채업자의 손에 두어 번 세탁되어 들어 온 돈 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밖으로 드러나
있는 사채업자에서부터 역추적 해 들어가, 암달러상을 추적하자, 계좌 안의 자금 출처는 생각보다 쉽게 드러났다.
" 똑똑똑"
윤석이 확인된 내용들을 다시 한번 머리 속에서 정리 하는 사이 그의 차창 유리를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 재원아!"
" 자식! 뭘 마중 까지 나오고 그러냐. 오 변호사님 계신데."
꺼칠한 재원의 모습을 확인한 윤석은 아주 잠깐 동안 머리가 하얀 해 졌다. 헤라........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 타! 급하게 가야 할 데가 있다."
그리고 팔을 뻗어 뒷문을 열어주었다. 재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런 윤석을 향해 한쪽 눈썹을 꿈틀해 보인다.
" 오 변호사님도 함께 가시죠. 가면서 보여드릴 서류가 있습니다."
담담한 듯 그러나 확고한 의지를 담은 윤석의 말에 재원과 할아버지 정 회장의 심복 오 변호사가 윤석의 차에 몸을
실었다.
48.
" 이렇게 된 거군요. 어쩐지 이번 이사회에서 정 이사님이 반대 손을 들지 않은 것을 회장님께서도 좀 수상 적게
여기고는 계셨습니다."
" 송 상무가 발행한 해외 전환사채를 미국 시장에서 거기 펀드를 통해 사들였더군요. 송 상무는 그걸로 OEM 공장
인수자금을 마련 했구요. 자칫 간과 하고 넘어 갈수 있는 부분 이었습니다."
" 네.......그것도 송 상무나 정 이사 둘 다, 이사회나 회장님께 아무런 동의도 없이 자금유용을 한 게 되는군요."
서류를 살펴보는 오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석과 오 변호사의 대화를 들으며 재원은 창 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예상대로 사촌형 정원이 자신을 내 몰려다가
오히려 사자 새끼를 끌어 들여 버린 격이 되었다는 사실에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석훈에게 이번만은 당해 주리라 마음먹었던 그는 확실히 사촌 형 정원을 이번 사태를 정리하는 재물로 삼아야 겠다,
결심을 굳힌다.
" 어디로 가는 거야? 나 많이 피곤한데."
굉장한 속도로 날듯이 달리는 윤석의 차를 인식한 재원이 물었다. 스피드를 즐기지 않는 친구가 차를 이정도 속도로
몬다는 것에 대해 그는 다시 불안 해졌다.
" 인천 공항. 송 상무 자식이 널 완벽하게 엮어 넣으려고 별 짓을 다 했더라."
그리고 윤석의 대답은 재원의 심장이 오그라들 정도로 만든다. 짐작 되는 바가 있어서 였다.
" 헤라 씨. 7시 반 상하이행 비행기로 출국한다. 고 석 준이하고."
" .......뭐?"
납빛으로 변하는 재원의 얼굴. 오 변호사를 의식한 그는 감정을 죽이려 노력 했지만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눈은
험상궂어 지고 있었다.
" 병원에서 송 상무 집으로 쳐들어갔다던 그날........무슨 얘긴 가가 있었던 것 같아. 짐작 가는 거 있지?"
" ........응."
개자식! 헤라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 처음 일의 연속이 아닌가 싶다.......협박당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이 가는데. 맞냐?"
" 그렇겠지."
당해주리라 했는데........헤라를.......그녀를 건드리는 일은 용납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예상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이렇게 빨리, 그런 식으로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을 줄을.......미처
생각지 못한 자신을 재원은 책망했다.
책망 다음엔........분노였다. 한번의 고초 정도야 봐주리라 결심을 했었던 것을....... 어차피 모두들 재원의 몫이라
여겼던 것들이 사실의 그의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재원은 석훈에게 당해주리라 했던 마음에 다시 분노가
서기 시작한다.
" 더 빨리 갈 수 없냐? 벌써 6시야."
조급해진 마음을 누를 길 없는 재원이 윤석을 다그쳤다. 막히지 않으면 한 시간 반이면 갈수 있는
길이었지만.......퇴근시간이 겹친 길은 곳곳에서 정체가 시작되고 있었다.
" 나 이제 들어갈게. 다들 잘 있어."
나오지 말래도 굳이 따라 나온 언니들과 연주의 배웅을 받으며 헤라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망설임이 잔뜩 서린
얼굴로 넓디넓은 공항을 휘 하니 둘러본다.
지금쯤 묻지 않은 어딘가로 출장을 갔을 재원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와서
잡아주길.......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이기심에 혀를 내두르며 헤라는 고개를 돌렸다.
" 잠깐.......잠깐 헤라야."
그녀를 다급히 붙잡는 연주. 그녀가 배를 쥐고 얼굴을 찌푸렸다.
" 나 배 아파."
" 뭐?.......그럼 화장실 가."
연주 에게 잡힌 옷자락을 빼내며 헤라는 몸을 뒤로 뺀다. 왕 공주 연주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내숭쟁이가 이렇게
사람이 벅적거리는 곳에서 배를 쥔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 화장실 배 아니야.......서 석준아! 나 약 좀 사다줄래? 진통제."
그리고 멀뚱히 서있는 헤림과 헤미를 놔두고 그녀는 석준에게 부탁을 했다.
" 얜~! 내가 사다줄게. 석준이랑 헤라는 지금 나가야 하는데."
그러자 헤미가 나선다.
" 안돼!!!!!!"
공항을 울리는 고함소리! 모두들 연주의 그런 행동에 화들짝 한다. 오늘도 나풀거리는 연노랑색의 시폰 원피스로
한껏 자태를 뽐내던 그녀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 .......그게.......그러니까.......아~ 나 지금 어지럽단.......말이야. 언니들이.......옆에 있어줘. 헤라랑."
머리를 짚으며 헤라의 품으로 쓰러지는 그녀. 순간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연주를 받아 안은 헤라는 몸을 기우뚱
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 야 !! 연주. 뭐야 너~"
눈을 감은 연주의 뺨을 치며 헤라는 황당해 했다. 이건 뭐란 말인가? 얘가 도대체 왜?
" 너 진짜 아파? 혹시 .......그거야? "
대학학교 때도 체육시간에 곧잘 지금 같은 쇼를 벌리던 연주였기에 헤라는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 그거라니......?"
살며시 눈을 뜨며 묻는 연주는 뜨끔 한다. 눈치 챈 걸까? 쇼 라는 걸?
" 너........진짜냐구!"
허걱! 잊지 않고 있었구나!
" 무슨.......소리인지......."
삐질삐질 이마위로 땀이 흐른다. 윤석의 엄포가 있었기에.......절대 헤라를 보내면 안 된다기에 써 먹었던 수법을 또
쓰는 것인데 역시 헤라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주는 머리를 굴려 본다. 뭔가 믿게 만들어야 했다. 그 머리에서 나올게 뭐가 있을랴 마는 그래도 뭔가를 해야
했던 그녀다.
" 나.......나 임신 했어. 그래서 그래.......그래서 빈혈이 일어난 거야."
그래서 해낸 생각!
" 이 임신?......."
역시 헤라는 놀라자빠지기 일보 직전의 표정을 했다.
" 윤석 씨 아이 인데. 아직 말 못 했어."
헤라는 눈이 가늘어 진다. 연주는 어라?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한다.
" 배 아프다며? 근데 빈혈이야? 임신을 했어?"
아뿔사! 배 아프다고 해놓고서.......연주는 헤라와 마주한 눈을 질끈 감았다. 바보같은.......하며 몰래몰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 혹시 자연 유산이니?"
근데 언제나 도움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오기 마련인 것! 헤림 언니의 질문이 그녀를 도왔다.
" 어디 봐! 피가 비치는지.......화장실에 가서 보자 응?"
도왔다? 아니 무덤을 팠다! 라는 편이 낫겠다싶어진다. 헤림이 연주의 치마를 슬쩍 들추며 다리로 흘러나온 피가
있는지 확인을 한다.
우씨! 이게 아닌데.......핀트가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연주는 이제 헤라를 윤석이 올 때까지 잡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이 위기를 어떻게 모면 할 것인지에 정신이 몰려 있었다.
" 언니.......여기선."
헤라가 치마를 들추는 헤림의 손을 저지 한다. 그리고 석준의 도움을 받아 연주를 안아 일으켜 세웠다.
" RRR RRR RRRR. "
순간 반갑기 더 할 나위 없는 휴대폰 벨 소리! 연주는 축 늘어트렸던 몸을 바짝 새워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구원의
종소리가 따로 없는 순간 이었다.
" 네. 어디에요? 왔어요? 네. 몰라요. 탑승구역 이동 직전 이라구요."
몸을 돌리고 신경질 적으로 빠르게 속삭이는 연주를 다들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정말 이상한 행동들 이었다.
원래도 좀 엉뚱한 그녀였지만 그건 내숭에서 비롯된 것 이었는데 오늘의 행동은 그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 어디요? 뭐요? 나 보고 손 흔들어 보라구요? "
그녀가 갑자기 팔을 높이 들어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헤라는 정말이지 방금 전까지 임신 어쩌구 하며 쓰러지던
친구가 손을 흔들어 대자, 아연실색한 얼굴로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머리보다 눈이 먼저 찾아낸 사람!
어? 어라?........어어.......아!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뛰어오는 남자.......헤라는 몸이 굳어 움직 일수가 없었다.
재원....... 이었다. 부딪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단 고개 짓 하나 없이 무서운 얼굴로 그들 사이를 헤치고 다가오는
사람!!!!! 그러나 헤라가 머리로 달려오는 남자가 재원임을 확인하는 순간 석준이 그녀의 팔을 잡아 당겨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엉거주춤 석준에게 끌려 뒷걸음질치며 탑승구역으로 들어선다. 눈은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재원을 향한 채,
그 순간이 꼭 영화에서 슬로우 화면으로 처리되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머리가 판단을 정지한 상태에서 석준을 향해 날아드는 주먹!
퍼걱!!!!!! 석준이 쓰러지고 같이 넘어지는 그녀를 지탱해 준 손은 재원의 뜨거운 손 이었다.
" 고 석 준씨! 그날 나한테 빼 놓은 말이 있었지!!!!"
석준을 깔고 앉은 덩치는 윤석이다.
" 그러려면 아예 입 다물고 있지 그랬어."
" .......실수야. 당신한테 전화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헤라가 놀란 눈으로 석준과 윤석을 번갈아 봤다. 무슨 소리인지........
" 그것 말고도 실수는 또 있어. 정 본부장 벌써 국정원에 들어가서 밤샘 조사 받고 나왔다. 당신이랑 헤라 씨 중국
땅을 밟는 순간, 다신 우리나라에 못 돌아올 수도 있었다는 것! 그건 몰랐지? 송 상무한테 당신이고 헤라 씨고 다
속은 거야."
헤라는 눈을 감고 상황을 정리해 보려 애쓴다. 그러다 재원이 국정원에 불려 들어가 조사를 받고 나왔다는 윤석의
말에 그 큰 눈을 번쩍 부라려 떴다.
" 재 재원 씨.......괜찮아? 어디 다친데.......없어? 봐 좀 봐봐."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쥐고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재원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어 봤다. 꺼칠하게 자라 난
수염.......구겨져 있는 하얀 색 셔츠.......가 그가 지난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아 헤라는 더 애가
탔다. 혹시 어디 핏 자국이나 멍 자국은 없는지.......멍청한 걱정이 눈을 가린 그녀였다.
" 다친데 없냐고? 말 좀 해봐? 응 ?.......재원 씨!"
한 번 더 다그쳐 묻는 헤라.
" 내가 간첩이냐!!!! 고문당하게!!!!!."
하지만 재원은 마음과는 달리 소리를 버럭 지르며 헤라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순진한 그녀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지만........그런 얼토당토않은 걱정에 대답을 하는 것보다는 그녀를 늦지 않게 잡았다는 사실에 밀려든 안도감이
눈시울에 뜨거운 열감을 몰고 왔다.
" 바보같이! 왜 말 안하냐! 왜 너 혼자 끙끙 거렸냐구."
격해진 감정에 재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헤라는 숨쉬기조차 힘겨울 정도로 꽉 안고 있는 그의 품에서 스르르
온 몸에 힘이 빠져 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당신을 지켜주고 싶었으니까........그 방법 밖에 없다기에........당신이, 당신이 가진 걸 잃지 않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이건 줄 알았어."
" 세상에서 내가 가진 건 네가 전부야!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걸 몰라서 이런 짓 한 거니?"
재원은 그녀의 얘기 한마디 한마디에 석훈과 정원에 대한 분노가 치솟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까지 날 철저히
망가트리려 계획 한 것인지.......! 용서할 마음이 사라진다.
" 미안하다. 네가 날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하지만.......이젠 그런 생각 다신 안하게 할게.
약속한다."
석준이 윤석의 커다란 손에 잡혀 일어나는 동안 재원은 헤라를 안을 팔을 풀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윤석과 오 변호사가 석준의 처리를 놓고 얘기를 나누는 동안 재원은 점점 더 석훈을 향한 분노가 가슴을
치고 올라와 가라앉히기가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다.
눈을 감고 감정을 삭이려던 그가 마른침을 삼킨다.
" 헤라야.......나.......잠깐 다녀 올 데가 있다."
헤라를 품에서 떼어 낸 재원은 고개를 까닥여 오 변호사를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아파트 서재에 보관 해둔 DNA
검증 서류와 차 안에서 확인한 주식거래 동향서.......전환사채 매입 서류 등을 할아버지 정 회장에게 가져다주고,
긴급 이사회를 소집해 그 서류들을 제출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헤라를 윤석에게 부탁한 재원은 싸늘해진 얼굴로 공항을 나섰다.
" 뭐야? 남의 사무실로 이렇게 함부로 쳐들어 와도 돼? 국정원에 한번 다녀오더니 대담해 졌나보네~"
차갑다 못해 입술은 굳어지고 눈마저 감정을 잃은 재원을 향해 석훈은 이죽거렸다.
" 그래~ 조사는 받을 만 했나?"
책상머리에서 일어나 담배에 불을 붙이는 석훈은 예상보다 일찍 나온 재원을 보며 가슴 한쪽이 쿵쿵거리고 있었다.
" 좋았어. 아~쭈 말이야. 평생 안 해도 될 경험을 쌓은 것 같아서 뿌듯한 데 뭘."
" 그래? 여유롭구나. 정 재 원. 하지만.......그렇게 내 앞에서 호기를 부리는 것도 얼마 가지는 못할 거다."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아 연기를 내뿜는 석훈은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 당신 하고 정 정원이 계획! 정말 완벽 할 뻔 했어."
재원이 석훈에게로 다가가 천천히 손을 올려 그의 입에 문 담배를 빼어 냈다. 그의 눈은 얼음막이 각막을 대신한 듯
차갑게 번득 이고 있었다. 그리고 석훈의 명패가 올려진 책상위에 그의 입에서 빼어낸 담배를 비벼 끄며 명패에
쓰인 '송'이라는 성을 손가락을 들어 쓰다듬는다.
" 그런데.......날 너무 얕봤어.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도 간과 했구."
" 무슨 소리야? 넌 어차피 예비 음모론자로 조사 받은 거야. 법의 심판은 받지 않겠지만, 언론과 이사회,
주주총회의 심판은 피 할 수 없어."
너무도 당당하고 냉정한 재원의 몸짓에 석훈은 자신이 계획한 상황 설정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 두 사람의 계획대로라면 그렇겠지! 하지만.......당신 성이 '송' 씨가 아니라 '정'씨로 바뀐다면.......달라지는
얘기들이야."
느린 재원의 말.......석훈은 그의 말 하나하나를 충분히 알아들었음에도 이해는 가지 않았다.
"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내가! 천하의 정 재 원이가! 사촌과 친형에게 무참히 짓 ?힐 뻔 한 거라! 그 얘기야!"
어느새 석훈의 이름 석 자가 쓰인 명패를 손에 쥐고 있는 재원이 그를 뒤 돌아 봤다.
" .......헛소리.......집어 쳐!"
주춤주춤 머리 속에 섬광이 스치는 석훈은 그렇게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 내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나와 당신 외할아버지한테 확인해봐. 이 회장은 벌써 알고 있었을 테니까."
" 무슨........"
" 못 알아듣는 척 하지 마!"
재원이 소리 지른다. 그래 차라리 정말 몰랐어라........알면서 나한테 그런 칼을 들여 댄게 아니라고 제발 말해라!
그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 새엄마가........새엄마가 나한테 그 목걸이를 왜 주었을 것 같애? 네가 준 그 목걸이가 하찮아서?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멍청하게? "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이 영 란을 새엄마라 불렀다. 석훈의 앞에서.
" 마지막 날 준 거야. 니스에 가서 날 차에서 내려놓았던 그 순간에 준 거라구. 너 하고 내가 친 형제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라구! 알아? 네가, 배신했다고 믿는 네 아버지가 네 친아버지가 아니라 그 뜻이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재원은 말을 쏟아냈다. 그 목걸이가 석훈이 생모에게 걸어 준 것이란 걸 안 그날.......그는
생모가 석훈과 자신을 어떻게 해서든 친형제임을 알려 주고 싶어했단 걸 깨달았다.
MTN그룹의 이 회장. 자신의 외할아버지에의 지시에 봉해져 버린 그 사실들.......이 회장은 석훈이 정치 권력자 '송'
씨 가문의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했던 절실한 이유가 나름대로 있었던 것이었다.
재원의 주먹이 석훈의 턱을 쳤다. 충격적 사실에 멍 해져 있던 석훈은 재원의 주먹에 그대로 나가떨어진다.
" 가만히 있었으면 됐을 것을.......넌.......송 씨 가문에서 떨려 날 거야. 그리고 그렇게 증오해 마지않던 정 씨
가문으로 오게 될 거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예비 음모란 자가 내가 아니라 너 하고 정 정 원 이란 사실도 같이
밝혀 질 거야. 자신이 정씨 가문의 장남이란 사실을 알고 경영권 장악을 위해 당신네 둘이 날 엮어 넣으려 한 걸로
말이야."
재원은 휘둘러 석훈을 친 주먹에 찌르르하게 전달되는 통증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석훈이 그런 재원의 얼굴을 멍
하니 바라본다.
" 내가 없어져도 정 정원은 정식 후계자가 못돼! 그 자식도 뭣 모르고 일 벌려서 엿 먹게 된 거지! 후~ 어쨌든 정
씨 집안 장남은 송 석 훈 너니까.......하지만, 음모의 전말이 드러난 이상.......할아버지께서 널 어떻게 받아 들이
실지는 모르겠다.......어쩌면 넌........여기도 저기도 적을 둘 곳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나 새엄마나
아버지를 원망 하지는 마라. 원망 하려거든 이 회장이나, 날 뭉개버리려고 한 너 자신을 원망해!"
" ........언제부터 알았냐.......그 사실."
듣고만 있던 석훈이 입을 열었다. 피가 고인 입에서 침을 뱉는다.
" 네가 자꾸만 헤라를 집적대기에.......네 뒷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됐다. 얼마 안돼!"
재원은 이 정도는 대답해 줘도 됐지 싶었다. 그의 바람대로 석훈은 전혀 재원과 자신이 친형제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그걸.......믿어야 되냐?"
자조적 웃음을 섞어 석훈이 물었다. 재원은 대답하지 않는다.......그가 인정하고 싶든 그렇지 않든........진실은 그것
이니까.
그리고 재원은 쥐고 있던 명패를 벽에 등을 기대고 쓰러져 있는 석훈에게 던진 뒤 그의 사무실을 나갔다.
모친이 있는 병원으로 들러야했겠지만 재원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왔다. 헤라가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엘리베이터의 벽에 지친 몸을 기대어 선 그는.......지난 일주일 사이 숨 가쁘게 진행된 일들에 정신이 멍해져 있었다.
그리고 멍해져 있던 머리 덕에 헤라를 잃을 뻔한 생각을 하자, 그는 자신이 한 없이 초라해짐을 느껴야 했다.
" 병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연다. 거실엔 불이 켜져 있었고........문이 닫히는 소리에
뛰어나오는 사람은 그의 바람대로 헤라였다.
" 재원 씨!"
품에 안겨드는 헤라. 돌이켜 보면 만나고 지금까지 언제나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 있어준 그녀. 그녀를 안자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를 안고 현관 앞에 서서 재원은 이를 악물고 소리를 죽여 울음을 토한다. 지난 20여 년간 한번도 소리 내어
울지도, 눈물 한 방울 마음 놓고 흘려 보지 못한 그는,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야 쌓인 감정의 보따리를 풀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 내가 사랑해 줄게.......다른 사람들이 당신한테 상처 준 거 내가 다 소독해주고 약 발라주고 붕대 감아
줄게.......내가 그 흔적이 희미해질 때까지.......매일매일 그렇게 해줄게........울지 마 재원 씨."
재원의 묻혀진 울음소리 속에 헤라의 진심이 담긴 위로가 섞인다.......그러나 그런 위로를 하는 그녀도 재원의
울음에 가슴이 찢어 질 것만 같았다.
이미 가족들에게 너무 많이 상처받은 재원을, 어리석은 자신이 같은 상처를 줄 뻔 했다는 사실이.......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 나 좀 봐봐."
헤라는 재원의 얼굴을 손으로 들어 그의 눈을 억지로 마주 한다. 누적된 피로로 인해 초췌해 질대로 초췌해진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 미안해.......정말 미안해........내가 바보 같아서.......그래. 나.......재원 씨 뒤 통수 치려고 그런 거 정말 아냐! 내가
석준이랑 중국에 가지 않으면.......당신을 기술 유출 혐의로 엮어 넣을 거라고 그래서.......그래서."
재원도 다 알고 있었을 사실이지만 헤라는 다시 한번 확인 시켜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절대로.......그를
배신 할 생각이 아니었다는 그 말을 말이다.
" 바보!........말 안 해도.......내가 더 잘 알아."
흐느낌을 그친 그가 웃는다. 언젠가도 그가 소년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지금의 그도 그랬다.
아픈 가슴을 쥐고, 상처 난 눈을 들어 웃는 그 모습이 사춘기 소년의 방황이 막 끝난 그 시절의 웃음 같았다.
" 그럼.......내가 재원 씨........얼마나 사랑 하는 지도 알지?"
" ........아니.......그건 몰라. 그러니까 지금부터 확인 시켜줄래?"
눈물이 맺힌 그 웃음 뒤. 순간 그는 표면상으로는 평소의 그로 돌아 온 것 같은 장난을 쳤다. 하지만 헤라의 입술을
찾는 재원의 입술은 애절했다.
" 이제.......곧 다 정리가 될 거야. 한 달 정도 시간이 걸리겠지만.......조금만 참아 줘. 그리고 10월에 우리 결혼
하자.......대답해. 네 대답 듣지 않으면 나 미칠 것 같다."
눈을 감고 헤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재원이 속삭인다. 부드럽고 달콤 하다기 보다는.......애틋하고 간절했다.
" 으응.......뭐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 애틋함에 울컥해진 헤라는 진심을 다해 대답해 줬다. 더 이상은 그를 애 태우지도.......자신을 위해 앞뒤를
제지도 않으리라 다짐을 하면서.
49. (완결)
" 신문.......봤다. 네 입으로 들었어야 하는데........신문으로 먼저 보게 되서 에미는 마음이 아프다. 재원아."
병원에서 퇴원할 준비를 하는 모친을 찾은 재원에게 그녀는 눈을 마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꼬박 한 달 만에 보는
아들의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할아버지께서는 어떻게 하신 다니? 그 송 상무.......아니........뭐라 불러야 하는지.......하여간 그 일 말이다."
그리고 석훈의 일을 물었다.
" 할아버지께서는 새어머니 결정에 따른 다고 하셨어요. 물론 당연히 새어머니께서 받아들이신다는 가정 하에 하신
말씀이겠지만요."
멀뚱히 서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재원은 어색했다.
" 그러니.......? "
모친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석훈이 친형제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 그랬던 것 같다. 간간이 하던 전화
통화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일 이었다.
" 새어머니.......저 헤라랑 결혼해요. 날짜도 다 잡고.......주변에도 다 알렸습니다. 다음달 7일 이에요."
그리고 결혼을 통보하는 아들.......이번 사건으로 중국에 설계도를 유출 시킨 혐의로 구속 수감 중인 수연을
생각하며 모친은.......쓴 웃음을 지었다.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 오히려 아들에게 해를 입히는 여자를 짝으로 지어줄 생각을 한 스스로에 대해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그래......."
" 제가 아버지 아들이라서.......새어머니가 절 그렇게 사랑해 주신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그냥 조건 없이 절 사랑해
주신 거라 믿습니다. 하지만.......그렇게 사랑해주셨으면 그 만큼 제 사랑도 믿어 주세요. 이 영 란 씨! 아니
새엄마.......그리워 한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새어머니께 죄책감이 들어 잊어보려고 노력도 많이 했구요.
하지만요.......이젠 안 그럴래요. 저 성인이에요. 제 부모님들 모습.......그 사이에 놓인 제 모습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그리고 그렇기 때문에.......제가 새어머니 아들이라는 사실엔 한 치의 변함이
없을 거구요."
" 재원아........"
헤라를 얻고, 30년을 키워준 모친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모친을 잃지 않는 대가를 헤라를 잃는 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길이기에.......재원은 모친에게 화해를 청한다.
" 제 말.......믿으시죠?"
본래도 완강한 성격이 아닌 모친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재원이 작은 한숨을 쉬었다. 한번에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여기지는 않았지만 모친이 반응이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 그 아가씨.......예쁘기는 하지. 꼭 네 새엄마처럼 말이야. 산토끼 같이 말간 눈이 영란이 하고 참 많이 닮았더구나!"
그런 실망스러움도 잠시.......모친은 그녀답게 아들의 화해 요청을 받아 들여 주었다.
" 새어머니........"
" 사랑한다. 내 아들.......하지만.......이제 어미는 그 사랑을 네 형에게 나누어 줘야 할 것 같다."
재원을 껴안으며 모친은 품안을 벗어난 아들을 인정해야 했다. 완벽한 자신의 아들로 소유하려 했던 지난 시간들을
접어 두고서.......그녀는 사랑해줘야 할 아들 하나를 더 얻은 것에 만족을 해야 했다........만족을......?
10월 7일. 날씨는 더 할 나위 없이 화창하다. 신부는 그 보다 더 화사 했고. 식장은 가을 하늘 만큼 천장이 높고
화려 했다.
" 역시 우아한 걸로 택할걸 그랬어. 이건 너무.......너무.......섹시 해!"
거울을 보며 헤라는 연신 걱정을 해댄다.
" 재원 씨가 이게 제일 잘 어울린다고 해서 했는데.......아아! 너무 야해! 재원 씨 집안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울상이 된 헤라는 연주를 붙들고 하소연을 해댄다.
" 야!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소리 하지 말고, 부케나 잘 들어."
그러자 날아드는 연주의 심통 맞은 소리. 헤라는 역시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친구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어 댄다.
그리고 약간 이지만, 갈색의 우아한 원피스 아래로 불거진 연주의 배를 보며........심통 맞은 소리를 해대는 그녀를
이해해야지 마음을 다잡았다.
" 방법 좀 생각 해봐."
" 야 진 헤 라! 식이 10분 남았어. 그런데 방법이 있을 것 같애?"
드레스는 괜찮았다. 그녀의 멋진 몸을 한껏 드러내게끔 몸에 피트 했으며, 우아한 광택을 지니고 아이보리 색으로
빛나고 있었고.......목을 브이넥으로 처리한 가슴 선은 단조로 왔지만 화려한 헤라의 얼굴에 어울렸다.
그런데 헤라가 문제 삼는 부분은.......드레스 끝단에서부터 길게 허벅지 까지 터진 절개선 이었다.
재원은 그 미끈하고 멋진 다리를 감추는 드레스는 입을 필요도 없다며, 디자이너에게 의뢰한 디자인에서 한 치의
수정도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 아~~~~~정말 미치겠네. 그냥 결혼식을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될까?"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하는 헤라를 향해 연주는 콧방귀를 꼈다. 넓은 신부 대기실엔 헤라와 연주 뿐 이었다.
식이 임박했음에도 이유가 있었지만 헤라의 친구들은 신부 보다 그녀를 맞으러 이미 식장에 나와 있는 신랑에게
관심이 더 많았던 것이다.
" 게다가.......제일 문제는 드레스가 너무 배를 꽉 조인다구."
이번엔 한층 더 심각한 목소리였다. 연주는 그런 헤라를 째려본다.
" 살도 별루 안쪘구만, 뭐가 불편 하다고 그래?"
" 불편한 게 문제가 아니야."
"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젠데?"
도끼눈을 한 연주를 외면하며 헤라는 입을 뾰족인다........
" 아기.......아기가 숨쉬기 불편 할지도 몰라."
수줍게 작게 속삭이는 그 말을 연주는 하마터면 알아듣지 못할 뻔 했다. 그녀는 놀란 눈을 크게 뜨고 헤라를
돌아본다.
" 뭐? 너.......지금......."
" 나도 어제 밤에 알았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 재원 씨는 알아?"
" 아니........나 말고 네가 처음이야. 창피하게 누구한테 말을 하니?"
헤라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 쉬었다.
" 너 지금 나 들으라고 한 소리냐? 누구 땜에 내 결혼식이 11월로 밀렸는데. 내가 이 부른 배를 안고 너보다 늦게
드레스를 입는 게 너 때문인 줄 모르고 하는 소리야?"
이크! 헤라는 연주의 부른 배를 보며 잘못 놀린 입을 가린다. 윤석이 친구끼리 같은 달 결혼은 불가능 하다고
우기는 바람에 연주의 결혼이 밀려난 것이었다.
" 차~~~~! 하긴.......너 애 낳을 때 까지 어디 가서 그 얘기 하지 마라. 친구 간에 재벌 집으로 시집가면서 혼수
할 돈 모자라니까 애를 품목에 껴서 가져간다는 소리 듣기 딱 안성맞춤이니까."
하지만 눈을 부라리던 연주는 포기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정말 오랜만에, 그 머리에 나온 옳은 소리를 했다.
언론에서 알면 딱 기사화되기 좋은 소문 아니던가.......!
" 신부님 준비 하세요."
그때 들리는 신부를 부르는 소리.......이제 배는 떠났다. 신부 대기실을 나와 식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탄
그녀는 긴장으로 떨려오는 손을 부케에 고정 시키고 심호흡을 했다.
검정색의 날렵한 디자인의 턱시도를 입은 재원이 기다란 꽃 길 저 끝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웨딩마치가
울리고 헤라는 아빠를 대신한 형부의 손을 잡고 사랑하는 남자를 향해 한발 한발 내딛는다.
길의 끝에 다다른 그녀는 손을 인계 받는 재원을 향해 가늘게 웃어 보였다. 전혀 긴장의 기색이 없는 그는 씩씩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 주례가 기다리는 단상위로 올라간다.
그런데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결혼식이 아무래도 허전했는지. 주례가 시작되고 5분 쯤
후부터.......헤라는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긴장으로 아침도 거른 그녀에게 뱃속의 아직 10주밖에 되지 않은
아기가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새엄마! 배고파!!! 하고 말이다.
" 재원 씨. 나 배고파."
앞에 서있는 주례가 무슨 말을 하는지 헤라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깟 허기 쯤이야. 하고
넘어갔을 텐데.......말은 생각할 틈도 없이 나와 버렸다.
" 뭐?.......아침 안 먹었어?"
재원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헤라를 흘낏 쳐다본다. 그리고 주례의 눈치를 살피며 낮게 묻는다.
" 응."
" 참아. 곧 끝날 거야. 끝나고 폐백하고 나면, 근사한 저녁 사줄게."
" 저녁?"
재원의 저녁이라 속삭이는 말에 헤라는 절망스러웠다. 아기가 배 속에서 영양분을 넣어 달라 호소를 하는 것
같은데.......점심까지 거르고 저녁 이라니.......!
" 안돼! 나 배 무지 고프단 말이야."
" 그럼 어떻게 해?........식 하다말고 밥 먹으로 갈 수는 없잖아."
하지만 이유를 모르는 재원은 답답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 난 괜찮은데. 배 속에 있는 그게.......그러니까......."
" 뭐? 좀 크게 얘기 해봐."
헤라가 더듬거리고 뜸을 들이자, 남의 속도 모르고 재원은 주례 앞에서 크게 얘기 해보라 한다. 미칠 노릇 이었다.
속삭이는 것도 다 들릴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말이다.
" 화장실 급해? 큰 거 마려운거야?"
거기에.......창피한 오해까지........헤라는 울컥하는 마음에 툴툴거리듯 진실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 그런 게 아니고.......아기.......우리 아기가 배고프다고 난리 치는 것 같단 말이야. 그래서 어지럽기도 하고."
" 뭐?"
헌데 앞에 선 주례가 놀랄 정도로 재원은 큰 소리로 되묻는다. 몸은 헤라를 향해 반쯤 돌아선 상태였다.
" 재원 씨. 뭐야? "
헤라가 속삭이며 당황한 얼굴로 그를 나무라며 얼른 주례에게로 몸을 돌리라고 부케 아래서 손짓을 해 보인다.
" 너 지금 아기라고 그랬어?"
그러나 재원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표정은.......기쁜 것인지 아니면 황당해 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 아이~ 진짜. 그래 그러니까 소리 좀 죽여."
헤라가 인상을 찌푸리는 주례의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그녀가 미처 어떤 대처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재원은 헤라의 허리를 잡아 안고........키스를 퍼 붓고 있었다.
처음엔 놀란 가슴에 재원의 입술을 떨쳐 내지 못했고,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리고 그
후엔.......헤라도 정신없이 재원의 입맞춤에 응하고 있었다.
식장이 술렁이고. 헤라는 새엄마의 눈물짓는 얼굴도 보지 못했다.
" 아아.......네 이런! 만장하신 하객 여러분! 죄송합니다. 신랑이 미국 물을 너무 오래 먹은 탓으로 사회자가 주문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신부에게 키스를 퍼 붓는 군요. 네......뭐 아주 서두른 감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이해하십시오.
그리고......오늘 보셔서 느끼셨다시피 자제 분들 너무 오래 외국에 유학 보내지 마시길 바랍니다.......지금 같은 일을
미연에 방지 하시려면 말이죠. 네 하하하."
두 사람의 결혼식 사회를 보던 윤석의 황당해 하는 목소리가 귀를 울렸지만........재원의 키스는 멈추어지지 않았다.
아아~~~~정말 키스에 한 맺힌 남자야!
그의 키스에 정신을 놓은 헤라는 다시 한번 그 생각을 했다.
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쇼콜라-러브써치펌2.txt
오전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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