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소설은 일반인이 거북해 할수 내용이 담겨 있을수 있습니다. BDSM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되돌아가기를 누르기를 바랍니다.
1.
호텔 스카이 라운지에 들어선 수현은 어깨에 걸첬던 붉은 니트 가디건을 벗어 손에 들었다.
레드 벨벳 드레스는 가녀린 몸선을 따라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자연스럽게 늘어지는 네크 라인은 그녀의 우아한 목선을 두드러지게 했다. 기다란 생머리는
그녀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어깨 아래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악세서리는 귀에서 반짝이는 작은 다이아몬드뿐이었다. 그녀가 웨이터의 안내를 받으면서
걸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최지혁은 수현이 라운지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를 쓸어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만이 갖는 독특한 몸짓이었다.
그녀가 머리를 쓸어올릴 때면 지혁은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허리는 자신의 한 손에 다 들어올 정도로 가늘어 보였다. 남자들의 시선에 초연한 듯한 모
습으로 침착해 보였다.
지혁은 갈증이 났다. 그녀를 볼 때면 언제나 갈증으로 목이 말라왔다. 탁자 앞에 놓인 컵을
들어 차가운 물을 단숨에 마셨다.
어두운 실내에는 부드러운 피아노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밝힌 촛불들이 조용
히 타오르는 실내지만 지혁의 날카로운 눈에는 라운지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였다. 귀에 꽂
은 이어폰에서 전성진 경위의 목소리가 들렀다.
「비둘기가 둥지로 들어 왔다.」
지혁은 가벼운 고개 짓으로 맞은 편 테이블에 앉은 전성진 경위에게 신호를 보냈다.
수현이 웨이터에게 안내되어 지혁이 앉아있는 곳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다가 가자 50대
남자가 일어 섰다. 송학규였다. 지난 3개월 동안 특별 수사국의 감시를 받아온 무기 거래 밀
매상이었다.
특별 수사국의 최지혁 국장은 송학규임을 확인하자 마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비밀 요
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제 남은 것은 이수현 경위가 송학규를 밖으로 끌어내는 것 뿐이
었다.
송학규에게 수현이 접근한지 벌써 일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하는 송
학규의 약점을 이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지혁 자신이었다.
지난 두 달 전 국내에 대량으로 밀수 되고 있는 무기 거래선의 움직임 포착된 후 특별 수사
국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국내의 무기 밀매 총책이 송학규라는 사실을 알아낸 후
그를 중점적으로 조사하고 있는 특별 수사국은 한 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결정적 단서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를 검거할 기회를 놓치곤 했던 수사팀은 결국 수현을 다
시 한 번 송학규에게 접근 시키는 방안으로 결정을 내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현에게 이 임무를 맡기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경찰대학을 수석으
로 졸업한 수현을 특별 수사국으로 발탁한 사람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보면...
일주일 전 우연을 가장한 접근에 송학규가 의외로 아무 의심없이 수현에게 넘어오자 지혁은
더욱 조바심이 났다.
활짝 웃는 송학규의 품에 자연스럽게 안기는 수현을 지혁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24살의 나이로 처음 맡기는 임무를 훌륭하게 해 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혁은 상황실에 앉
아 있지를 못하고 직접 지휘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때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3초 정도였지만 지혁은 그녀의
눈빛을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아직도 절 못 믿으세요?」
자신을 노골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지혁의 얼굴을 보고는 무심한 듯 다시 시선을 돌려 송
학규에게 밝은 미소를 보냈다.
20분쯤 지나서 수현이 송학규 빰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계
획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가 여자 휴게실 가기 위해서 걸어나가자 지혁도 자리에
서 일어섰다.
수현이 여자 화장실에 나오자 지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지나치게 접촉하지는 마.」
지혁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에게 감기었다.
「정보를 얻기위해서 그를 유혹하는게 제 임무잖아요.」
그는 지나가려는 수현의 팔을 움켜잡고 이를 물고 말했다.
「조심해.」
「걱정마세요.」
수현은 지혁의 팔을 뿌리치고 라운지 안으로 걸어 들어 갔다.
2.
수현이 지혁을 처음 만난 것은 졸업을 한 달 정도 앞 둔 때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
업을 마친 수현은 체육관에서 뛰고 있었다.
흘러 내리는 땀방울로 셔츠가 흠뻑 젖은 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멈춘 그녀가 무릎에 두 손
을 짚고 허리를 숙여 가빠오는 숨을 고르고 있었을 때 값비싸 보이는 검은 색의 수제화가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허리를 편 그녀의 앞을 넓은 가슴이 가로 막고 있었다. 168cm의 키를 쭉 펴고도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올려 보아야 했다.
그녀의 머리가 그의 턱에 간신히 닿을 정도로 컸다. 그러나 키가 큰 사람들이 보통 갖는 휘
정거림의 느낌은 전혀 없었다. 많은 운동으로 다져졌음이 분명한 근육이 큰 키와 멋진 조화
를 이루고 있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예리한 눈빛을 한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힘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풍기는 자신감과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날카로움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육감적인 입술이 수현에게 각인되었다. 그가 타
올을 던지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받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흘러 내리는 땀방울이 목을 타고 내려가 몸에 달라붙은 셔츠 속으로 들어
갔다. 그의 시선이 땀방울을 따라서 천천히 내려가더니 셔츠 위로 들어난 수현의 가슴에 머
물렀다. 가녀린 몸에 탄력적인 가슴은 도드라져 보였다.
그의 시선이 머물자 후끈거리는 열기가 온 몸을 감싸 안는 듯 했다. 남자의 노골적인 시선
을 받았는데도 불쾌한 기분보다는 이상한 전율이 흘렀다. 스포츠 브래지어 속의 가슴이 팽
팽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수현은 처음 겪는 낯선 감정에 당황하면서 타올을 목에 둘러 가
슴으로 늘어뜨렸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달리는 것은 운동이 아니지.」
「네?」
「내가 보기엔 자기 도피처럼 보이는데.」
수현은 자신이 달리는 이유를 단 번에 알아챈 그의 날카로움에 놀랐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그를 바라보는 자신의 자세에 불리함을 느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왠지 자신의 모든
것이 간파 당하고 있는 듯한 두려움이 생겼다.
「아하. 겁이 나는 모양이군. 생각보다 의외로 소심 한 건가」
「이봐요.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서 분석 받고 싶지 않군요. 그만 비켜주시겠어요?」
「난 당신을 막고 있지 않은데.」
수현이 고개를 저으면서 옆으로 비켜서 걸어 가려 하자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걸음을 멈추
게 했다.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군. 도전을 받고도 피하려 하다니.」
그녀는 고개를 들어서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건 도전이 아니라 불쾌한 치근덕거림이라고 하는 거예요. 상대할 필요가 전혀 없
는.」
「음. 발끈 하는 성격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는데.」
「도대체 당신 누구예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척이나 무례하군요.」
「이수현. 경찰 대학 졸업반으로 이번에 우등 졸업이지 아마. 난 특별 수사국장 최지혁이
오.」
그녀는 그가 자신을 특별 수사국장이라고 소개하자 잠시 당황했다. 특별 수사국장이 자신에
게 무슨 볼 일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요?」
「잠깐 시간 좀 낼 수 있을까?」
「이야기가 길어진다면 먼저 샤워를 하고 싶은데요.」
지혁은 팔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검은 피부의 강인해 보이는 팔뚝이었다.
「그럼 20분 후에 학장실에서 보도록 합시다.」
「30분요. 최소한 30분은 필요해요」
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샤워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로 지혁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복을 입도록. 외출을 해야하니까.」
그녀가 돌아보자 그는 한 쪽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녀를 바라보는 있었다. 수현의
뒷 모습을 보면서 지혁은 생각했다.
도발적이긴 하지만 경박하지는 않군.
섹시하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고상함이 느껴지는 여자는 흔하지 않았다. 수현이 바로 그 흔
하지 않은 여자였다. 땀으로 얼룩지고 붉게 상기되었지만 지혁은 그녀의 맑고 투명한 피부
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조각한 듯한 광대뼈, 그리고 대패로 깍은 듯 한 얼굴형이 그녀의 훌륭한 유전자를 잘 드러
내 주고 있었다. 그녀의 목은 아주 길어서 왠지 가날퍼 보이는 인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
다. 어깨도 좁고 동그스름한데다 허리마저 날씬해서 경찰이라기 보다는 모델이 더 어울려
보였다.
그러나 지혁의 예리한 눈은 그 연약해 보이는 팔다리와 몸의 곡선은 가늘면서도 강인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무시 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곡선의 가슴은 성적 흥분
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강인하고 대담한 여자.
젠장.
지혁이 원한 것은 훌륭한 성적만큼이나 뛰어난 능력을 지닌 요원이었지 정신을 산란하게 만
들 트러블메이커가 아니었다.
수현이 학장실로 도착한 것은 정확히 30분 후였다. 굵은 골이 들어간 터틀 네크 스웨터와
일자형의 화이트 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단정한 화이트 코트를 입은 그녀는 노크를 한 후 지
혁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혁은 쇼파에 앉아 파일을 들고 읽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가 서 있는데도 고개를 들지 않
았다.
「앉아요.」
수현이 자리에 앉자 지혁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카롭지만 차갑지 않은 시선
이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수현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자신을 둘러싼 공기의 밀도가 높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귀 밑에서부터 열기가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손에 든 파일을 덮고 탁자 위에 놓았다.
「지난 4년 동안 아주 뛰어난 성적이었더군.」
수현은 탁자 위에 놓인 파일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신상 기록인 것 같았다.
「졸업 후 특별 수사국으로 발령을 받게 될 거요.」
「2년동안 의무적으로 순환보직을 맡게 되는 것을 알고 있는데요.」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이번은 특별한 경우라고나 할까.」
수현이 미처 질문을 하기도 전에 지혁이 일어섰다.
「나갑시다. 외출 허락은 내가 이미 받았으니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혁은 성큼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따라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수현은 입술을 깨물며 그를 따라 나갔다.
대리석 건물인 본관을 나오자 BMW Z-3가 은빛 차체를 빛내며 그녀 앞에 섰다. 매끄러운
선이 아름다우면서도 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컨버터블이였다. 지혁이 운전석에 앉아서 수현
을 바라보았다.
「갑시다.」
「공무원이 이런 차를 타고 다녀도 되는 거예요?」
「글쎄 안 되는 건가?」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저 개인적 취향일 뿐이오.」
수현은 오천여 만원이 넘는 값비싼 차를 개인적 취향이라는 남자에게 혀를 내밀어 놀리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저 참을 수 없는 자만감으로 똘똘 뭉친 남자 같으니라구.
수현은 운전석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한 겨울에 오픈 카라 인상적이긴 하지만 너무 노골적이군요.」
「노골적이라구?」
운전대에 왼팔을 얹고 몸을 돌려 수현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미소를 지었다. 그 가벼운 미
소에 그녀는 뼈 속까지 떨리는 것을 느꼈다. 단호하고 냉정해보이던 얼굴이 갑자기 너무나
매력적이 모습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노골적인 자기 과시. 못 말리는 동물적인 욕구죠. 남자라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과시욕이란 드러내지 않곤 못 배기죠.」
「남자의 동물적 욕구에 대해서 얼마나 경험했지?」
「그런 건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바보라도 알 수 있게 얼굴에 분명히 쓰고 다니니
까.」
「생각보다 성차별적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군.」
「전 분명한 성차별주의자예요. 여성이 언제나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보통은 성 평등을 부르짖지 않나? 모순적이긴 하지. 남자와 동등한 기회와 대가를 요구하
면서도 그에 따르는 능력이 없다면 말이야.」
「국장님이야 말로 성차별주의적 발언을 하시네요.」
수현이 열심히 반박을 하자 지혁이 미소를 깨물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열심히 이야기하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보였다. 그리고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그런 자신에게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이런 이젠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그가 갑자기 그녀에게 몸을 숙이자 상큼한 내음이 풍겨왔다.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까진 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야지. 난 합리적인
좋아하거든.」
지혁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그녀의 안전 벨트를 매어주었다.
차가 거칠게 출발하자 수현의 머리가 의자에 부딪쳤다. 그녀가 그를 노려보자 지혁은 웃음
을 터트렸다. 가슴 저 밑에서부터 작은 떨림이 전해져 오게 만드는 그런 웃음 소리였다.
오른 쪽으로 대운동장을 끼고 달리자 삼각 첨탑모양의 상징탑이 보였다.
겁이 날 정도 빠른 속도를 내고 달리는 차 안에서 긴장감을 풀기란 쉽지가 않았다.
진리의 문을 여는 열쇠 구멍과 국가 동량의 징표인 원통 기둥이 어우러진 육중한 백색 교문
을 빠져 나와 진입로를 달리자 어느덧 그녀의 어깨에 잔뜩 들어 갔던 힘이 빠졌다.
차가운 바람이 더 할 수 없이 상쾌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방금 감은 머리카락을 마구 휘날리기게 했지만 수현은 개의치 않았다.
조수석 문에 팔을 올리고 턱을 고였다.
발 밑에서 나오는 따뜻한 히터 바람과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차가움이 너무나 좋았다.
잠시 후 머리 위로 차의 지붕이 덮어지고 유리창이 소리 없이 올라왔다. 수현은 고개를 돌
려 지혁을 바라보았다.
「자기 과시의 욕구가 넘쳐나도 결국 추위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나보군요.」
「난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했을텐데. 머리카락이 얼겠어.」
서둘러 샤워를 마치는 바람에 제대로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이 벌써 굳어져 있었다. 따뜻한
차 안의 공기 때문인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3.
침묵 속에서 달리는 차 안의 분위기도 그리 썩 나쁘지 않았다. 스포츠 카였지만 의외로 승
차감이 좋았고 잔잔하게 흐르는 첼로 독주곡도 괜찮다고 수현은 생각했다.
다만 옆에 앉아서 여유롭게 운전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녀를 긴장 속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긴장된 흥분이 불쾌하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하자 마자 지독한 교통 체증에 걸려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부드럽
게 움직이고 차는 엄청난 에너지를 분출하고 싶어하고 있는 듯했다. 저음으로 울리는 엔진
소리가 왠지 수현의 귀에는 낮게 으르렁 거리는 야수의 소리로 들렸다. 금방이라도 엄청난
속도로 뛰쳐나가고 싶어하는 그런..
그리고 그 차를 운전하는 지혁 역시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강열함이 내재되어 있는 위험한
사람. 차에 탄 후 그는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고 수현도 한 번 물어 본 후 가 보면 안다는
짧은 대답에 다시 묻지 않았다.
그가 데려간 곳은 경찰청 내에 있는 체육관이었다.
기본적이 격투 실력을 테스트를 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
하는 수준에서 끝내려 했지만 수현의 강한 승부욕에 이끌려 결국은 그녀가 지쳐 떨어질 때
까지 계속 되었다.
「나쁘지 않군.」
매트 위에 누워서 헐떡이는 그녀를 보고 그가 말했다. 처음 위력적인 발차기를 한 후 계속
적인 방어 밖에 못한 그녀는 그를 노려 보았다.
이 남자는 숨도 가빠지지 않았다구.
지혁이 내민 손을 잡아 몸을 일으키면서 헛점을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그녀는 그의 품
안에 갇혀 있었다.
「눈에 보이는 공격이야.」
뒤에서 그녀를 꼼짝 못하게 안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수현의 두 팔은
그의 팔에 꼭 붙들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의 머리에 턱을 대자 그녀는 머리로 그 턱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너무 꼭 안겨
있어서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강하게 몸을 흔들면서 빠져나오려 하자 지혁은 그녀의 귀에 입술을 가져갔다.
「쉬. 패배를 받아들여야지.」
「자기 몸무게의 반 밖에 안 나가는 여자한테서 이긴게 자랑이예요!」
수현이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소리치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끝내 자신이 진 것을 인정하지 못하시겠다?」
「대등한 대결이 아니었다구요!」
「그 정도면 잘 한 편이야. 그렇게 화낼 필요 없어.」
귀가에서 울리는 저음이 작은 전율을 만들었다.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 하나가 커다란 파문
을 만들 듯이 그 전율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제서야 자신의 몸이 그의 가슴에 빈틈없
이 밀착되어 있는 것을 느꼈다.
그 때까지 그녀 안에 가득 차 있던 승부욕이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다. 온 몸의 세포가 일
시에 깨어나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두려웠다. 그런 자신이 너무나 두려웠다.
처음 본 남자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이 그 동안 경멸해 왔던 새엄마와 똑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알았으니까 그만 놔주세요.」
지혁은 자신의 품안에 있는 그녀의 몸이 갑자기 굳어지면서 목소리가 차가워지는 것을 알았
다. 그때까지도 잡고 있던 그녀의 팔을 풀어 어깨를 잡고 돌려 세웠다. 뒤로 물러서려는 수
현의 어깨를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려움이란 막상 그 실체를 알고 나면 얼마든지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혁은 턱을 올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수현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갑작스런 행동에 수현의 눈과 입이 모두 동그랗게 커졌다.
「이런 걸 예상했던 것 아닌가? 그래서 그렇게 몸을 사리고」
「뭐, 뭐라구요?」
「사실 겪어보면 실망스럽기도 하지. 기대가 크면 원래…」
수현은 그의 급소를 무릎으로 있는 힘껏 걷어찼다. 방심하고 있던 지혁이 신음 소리와 함께
허리를 숙이자 그의 뒷머리를 팔꿈치로 내리쳤다.
몸을 돌려 뛰어 가려 했지만 두세 걸음도 가기 전에 뒤에서 덮친 그의 몸에 깔려 매트리스
에 납짝하게 눌렸다.
「내게서 도망갈 수는 없어」
위에서 내리 누르는 엄청난 힘 때문에 수현은 헐떡였다.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귀가에
서 들렸다. 힘차게 몸부림을 치던 그녀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추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이 그
녀의 머리 속에 각인되었다.
그녀의 움직임이 멈추자 그가 몸을 일으켰다. 수현은 재빨리 매트에서 일어나 긴장된 모
습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열기가 몸을 휘감고 있었다. 잠시동안이지만 아니 어쩌면
단 몇초의 순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짧은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강렬하게 부딪쳤
다.
그러나 마법에 걸린 것 같은 그 순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혁의 눈빛이 부드러워지면서
미소를 짖자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미소를 지으면 그의 분위기가 너무나 갑자기 변해버렸
다. 냉철하고 빈틈없는 남자에서 밝고 부드럽고 남자로.
수현은 그 갑자스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겁낼 것 없어. 좋아, 테스트는 이것으로 끝내지.」
먼저 체육관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긴 한 숨을 내쉬었다. 몸 뿐만 아니라 마음마
저도 지쳐버려서 수현은 기진맥진했다. 갑작스런 그와 만남이 준 육체적, 정신적 자극으로
인한 신경의 날카로움이 그녀를 더욱 지치게 했다.
그녀은 그의 눈빛을 생각하면서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의 눈빛이 자신의 몸에 닿은 순간부터 그녀를 가득 채운 자극적인 떨림이 되살아고 말았
다.
온몸을 채우고도 모자라 터져버릴 것 같은 그런 기분. 달콤하면서도 분명 아픔이 될 것이라
는 것을 알고 있지만 두려운 기대감이 커져만 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존재조차 알 지 못했던 감각들이 일제히 깨어나 그녀의 피부에 뜨거운 열기를 불어 넣었
다.
절대로 알고 싶지도 않고, 누구에게도 알게 하고 싶지도 않았던 육체적 갈망이 혐오스러웠
다. 처음 만난 지혁에게서 그런 욕망의 실체를 알게 된 수현은 그런 자신을 너무나 싫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난 새엄마와 같지 않아!
4.
「테스트는 이것으로 끝내지」라고 하던 지혁의 말은 결국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그에게 시험 당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감정으로부터 도망
치면 칠수록 그의 시선은 그녀를 붙잡고 놓지를 않았다. 그를 만난 후 매일 밤 수현은 꿈
속에서 가슴 떨리게 하는 눈빛을 만나야만 했었다.
그래서 인지 경찰 대학 졸업식이 끝난 늦은 오후, BMW에 기대고 서 있는 그를 보았을 때
는 오히려 놀랍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빼져나간 졸업식장은 방종한 파티가 끝난 뒤의 허무감이 도는 황량한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숙사 방을 돌아보고 나오던 수현은 어쩔 수 없는 외로움에 싸여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짙은 베이지 색 트렌치 코트 깃을 세우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발견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이수현 경위라고 불러야겠지? 졸업 축하해.」
성큼 다가온 그는 걸음을 멈춘 채 커다란 눈을 들어서 자신을 올려 보고 있는 그녀의 볼을
가만히 만졌다.
「차갑게 얼었군.. 차에 타.」
수현은 그의 팔에 이끌려 차 안에 앉을 때까지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따뜻한 차안에
앉자 그 때서야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지혁은 운전석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능하면 졸업식에 맞추어 올려고 했는데, 갑자기 긴급 상황이 생겨서. 괜찮겠지?」
수현은 고개를 숙여 마주 잡은 두 손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감정적으로 약해져 있는 모습
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 부드러운 저음이 들려오자 자신도 모
르게 눈물이 차 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으려고 했다.
「절대로 울지 않을 거야. 절대로」
그러나 오늘만큼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웠다. 자신의 졸업을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워하실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누군가 자신을 생각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외로
움을 더욱 커지게 했다.
지혁은 기다란 손가락을 마주 잡은 손등 위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수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다른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얼굴
을 들어 올렸다. 또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리자 지혁은 수현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안았
다.
그는 잊고 싶은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는 것 같았던 그녀를 보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아니 자신이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도전적이고 강인한 모습 뒤에는 상처 받고 아파하는 그녀가 숨어있다는 것을.
그리고 도발적인 섹시함으로 자신을 사로잡은 그녀보다 섬세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강하게 그를 매혹시키고 있다는 것을.
넓은 가슴에 안기자 수현은 넘처나는 눈물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트렌치 코트 깃이 눈물
로 젖어들었다. 아무말 없이 그렇게 수현을 안고 있던 지혁은 그녀의 흐느낌이 잦아들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젖은 눈을 들어서 바라보는 수현의 눈빛에 도저히 자신을 더는 억제하지 못했다. 그는 뜨거
운 자신의 입술로 차갑게 얼어붙은 수현의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녀의 냉기를 몰아내고 싶
었다. 뜨거움으로 가득찬 자신의 열망을 그녀가 가져가지 않는다면 미칠 것만 같았다.
수현의 입술에서 나온 작은 신음 소리가 지혁을 더욱 몰아 부첬다.
떨고 있는 수현의 입술을 가르고 그 달콤함을 마음껏 탐닉했다.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치고 항상 맛보고 싶었던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혀를 강하게 밀
어넣었다.
처음에는 그저 위로의 가벼운 입맞춤 정도로 끝을 내려고 했는데 저항하리라고 생각했던 그
녀가 자신의 품에 안겨오자 페이스를 잃고 말았다.
지혁의 입술이 닿자 받아들일 수 없어 억눌러 왔던 욕망이 터져 나왔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에서 달콤함을 마음껏 맛보자 작은 전율이 그녀의 몸 속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입술이 주는 뜨거운 정염의 불꽃은 졸업식 내내 그녀를 떨게 했던 외로움의 얼음을 녹
여버리고 그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한 없이 떨게 만들었다.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그녀는 작은 항의의 신음 소리를 내었다.
낮은 지혁의 웃음 소리와 함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 그가 작은 귓볼에 입을
맞추자 수현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거친 숨소리와 귓볼에 닿는 지혁의 이빨이 느껴지자
날카로운 전율이 수현의 비밀스런 곳까지 치달았다.
그의 따뜻한 손이 수현의 코트 깃을 헤치고 안에 입은 니트 속으로 파고 들었다.
자신의 손위로 브래지어 위로 솟은 작은 젖꼭지가 만져지자 지혁의 입술에서 만족스러운 한
숨이 나왔다.
엄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원을 그리자 더욱 단단하게 솟아올라 브래지어를 압박했다. 처음
그녀를 보던 날 시선을 뗄 수가 없었던 그 아름다운 가슴이었다.
성급한 손이 수현의 니트 단추를 풀어 내렸다. 브래지어의 앞 단추를 풀어자 아름다운면서
도 단단한 가슴이 드러났다. 그는 자신의 손안에 꽉 차는 가슴을 감싸 쥐고 입술을 가슴으
로 미끄러트렸다.
그가 작은 젖꼭지를 입안에 머금자 수현의 작은 신음이 터져나왔다.
격렬한 빨아들임으로 수현의 몸이 뒤로 휘어졌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입술이 주는 뜨
거움이 이제는 그녀를 태울 것만 같았다.
지혁은 억지로 그녀의 가슴에서 입술을 떼고 수현을 가슴에 안았다. 이대로 가다간 이 차
안에서 그녀를 갖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한 없이 떨고 있는 수현은 맥없이 그에게 안겨 있었
다.
그가 손으로 턱을 잡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수현은 얼굴을 붉히면 눈을 떴다.
지혁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휩싸였다. 아직도 지혁의 손안에 있는
그녀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나오면 멈출 수 없을 지도 몰라.」
지혁의 쉰 듯한 목소리에 수현은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는 몸
을 똑바로 세우고 의자에 바로 앉았다. 수현이 자신의 가슴을 잡고 있는 지혁의 손을 세게
내리치자 그는 마지못해 손을 뗐다.
「한 번의 입맞춤을 지나치게 과장하는군요. 난 언제든지 멈출 수 있어요」
「그래? 그렇게 경험이 많은 것 같지 않던데.. 거의 정신을 잃었잖아」
수현은 놀리는 듯한 지혁의 말투에 이를 물었다. 자신이 그렇게나 완벽하게 간파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남자의 자만심이군요. 뭐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어요. 그렇다구 정신을 읽을 정도는 아니였
다구요.」
「그렇게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후에 그런 말은 의미가 없지. 단추나 잠가」
지혁은 낮은 웃음을 터트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수현은 치미는 화를 참으며 서둘러서 단추
를 잠갔다. 미소를 짓고 있는 그가 너무나 미웠다.
5.
경찰청 특별 수사국에 발령 받은 후6개월동안 단 한 번도 현장에 배치되지 못하자 지혁에
대한 수현의 미움은 이제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그 동안 한 일이라곤 그로부터 받은 지독한 테스트와 지겨운 조사 업무 뿐이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료를 찾고 그 연관성을 추적하고 나면 퇴근 시간 무렵에
현장에서 들어온 지혁이 내린 테스트를 빙자한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릎의 힘이 빠져서 주저앉을 것 같은 수현을 보고 그가 미소를 지을 때면 가슴 속에서부터
그에 대한 적의가 샘솟았다.
특별 수사국장으로서의 그의 능력에 대한 느끼는 경외감과 더불어 그가 내뿜는 남자로서의
자극이 하루하루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수사국내에서는 냉혹하리만큼 가차없이 대하는 그가 수현과 단 둘이 있을 때면 더 할 수없
이 유혹적으로 변하자 그녀의 스트레스는 더해만 갔다.
더군다나 졸업식 후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함께 살았던 집을 처분하고 혼자 살기에 적당한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한 다음날 일요일 아침부터 그녀의 집을 찾아온 지혁이 이제는 제집
처럼 그녀의 집을 마구 드나드는 것을 참는 것도 한계에 오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졸업식 날 그 입맞춤이 있은 후 지혁이 한 말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예민하더군. 쉽게 반응을 보이는데.」
수현의 분노어린 시선을 보고 웃음을 터트린 것은 더욱더 증오할 일이었다.
6.
수현은 커피를 탁자 위에 놓으면서 다른 동료들에게 눈으로 인사를 했다. 특별 수사국의 전
용 회의실에게 흥분어린 긴장감이 감돌았다.
지난 3 달 동안 추적하던 무기 밀매단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잡히자 모두들 흥분한 것 같
았다. 최지혁 국장이 회의실로 들어오자 모두들 긴장한 모습으로 그를 맞았다.
성큼 들어서는 그를 보자 수현은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6개월이나 되었는데도 그를 볼 때
면 처음처럼 가슴이 떨렸다. 190cm에 가까운 키와 다부진 몸매에서 내뿜는 위압감 다른
남자 동료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가 들어설 때면 남자들은 모두들 긴장감에 허리를 세우는 것이었다. 무시할 수 없는 뛰어
난 능력과 동물적인 육감으로 경찰청에서도 그의 초고속 승진을 인정하고 있는 터였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과는 대조적으로 관능적인 입술에 그녀의 시선이 머물었다. 그러자 몸
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졸업식 이후 수현은 그가 자신에게 키스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쉽게 그의 손에서 허물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그런 일
이 또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잔뜩 몸을 사리고 있는 수현을 바라보는 지혁은 작은 사슴을 바라보는 맹수의 여유로움으로
같았다. 지혁은 느긋한 모습이었다.
지혁은 회의실에 들어서자 마자 수현을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수현은 지혁의 시선아
래에서 숨을 멈추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로 가서 다리를 꼬고 앉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송학규의 움직임을 추적한 결과 그가 오늘 밤 이태원에 있는 [댈러스]
라는 나이트 클럽에 나타날 것이라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지혁은 가져온 서류을 탁자 위에 던지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러시아에서 밀수입되는 다량
의 무기를 추적하던 특별 수사팀은 부산항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화물선에서 수십억 대에
이르는 무기를 찾아내는데 성공했었다.
인터폴과 연계해서 수사를 벌이던 수사팀은 결국 한국 총판의 책임자로 용의선상에 오른 송
학규의 소재 파악에 총력을 기울여 왔었다. 지리한 도청과 미행으로 너구리처럼 숨어 있던
송학규의 소재가 드디어 잡히게 되었다.
수 십잔의 커피를 소모한 끝에 내린 결론은 송학규의 약점인 여자를 접근시켜 그가 늘 소지
하고 다니는 전자 수첩을 손에 넣는다는 것이었다. 확실한 물증이 없어서 그를 검거할 수
없었던 수사팀으로써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수현은 지혁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제가 하겠어요.」
「그게 좋겠습니다. 이수현 경위라면 송학규도 분명 넘어올 걸.…」
수현의 말에 찬성을 하던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의 전성진 경위는 지혁의 날카로운 눈빛
에 말 끝을 흐렸다.
「이번 일은 아주 중요하고도 위험한 일이야. 초심자에게 맡길 수는 없어.」
「그렇지만 저희 수사팀에 있는 여자 요원은 이수현 경위 뿐이잖아요.」
「능력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이런 일을 다른 팀에서 지원 받을 수는 없어요. 경찰 내부에
송학규와 연관이 있는 자가 있다는게 분명하다고 결론이 났잖아요.」
「그동안 우리의 기밀이 새 나간게 벌써 두 번입니다.」
차분한 말씨의 강진욱 경위가 지혁에게 설명하는 동안 수현은 지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전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믿을 수가 없다면 왜 저를 이 팀에 넣으신거죠. 컴퓨터나 만지려
고 경찰대학을 나온게 아니라구요.!」
「이수현 경위에겐 무리한 일이야.」
「저를 발탁한 자신의 믿음에 확신이 없다면 그건 자기 기만이죠.」
「지나친 자신감은 바보들의 전유물이지.」
지혁은 수현에게 가차없이 내맽었다. 수현은 도전적인 눈빛으로 지혁을 쏘아보고 있었고 그
는 냉정한 말투와는 달리 이글거리는 눈으로 수현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특별 수사팀의 정예 요원 6명은 이들의 말다툼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언제나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한 국장이 이 신입 요원에게 유독 눈을 번뜩이며 몰아세우고 있다는 것이 6개월
동안 확인한 사실이었다.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국장님. 우리의 마지막 희망은 그 전자 수첩에 적힌 무기밀매 거래
에 대한 증거이라구요.」
전성진 경위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수현은 고개를 돌렸다.
「좋아. 다른 대안이 없다면 이수현 경위에게 맡길 수 밖에.」
수현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마지못해 임무를 맡긴다는 지혁의 말투에 상처 받은 자신이 싫
었다.
자신은 남이 조사해온 자료나 검토하려고 경찰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게 아니었다. 훌륭
한 경찰이셨던 아버지의 뒤를 따라서 직접 현장에서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세부적인 상황에 대한 회의가 계속 진행되자 그녀는 점차 침착해져 갔다.
전성진 경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송학규는 어제 일본에서 귀국한 후 자신이 묶고 있는 플
라자 호텔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회의 끝에 수현이 플라자 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송학규에게 접근하기로 했다.
서둘러 서류를 정리해 일어선다고 했는데 다른 동료들은 벌써 회의실을 빠져나간 뒤였다.
지혁의 심상치 않은 표정 덕분에 모두들 서둘러서 나가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겠지」
지혁의 낮은 목소리가 회의실을 나가려는 수현은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어요.」
수현은 뒤돌아서 회의실 탁자에 걸터 앉아 있는 지혁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의 중요성은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 이수현 경위도 그 정도쯤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이 수사팀의 정식 요원입니다. 국장님. 사건의 중요성은 파악하고 있어요.」
「송학규를 만만하게 보면 안돼. 위험하다고 생각이 들면 바로 빠져야하는 것 잊지말아.」
수현은 지혁이 들고 있는 사진을 보려고 책상 가까이 다가왔다. 방원 렌즈로 찍은 송학규의
사진이었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송학규는 50대 중반의 남자로는 안보였다.
「잘 생겼군요.」
수현의 말에 그는 사진을 책상 위에 놓았다. 팔꿈치를 허벅지에 올려 놓으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런 타입의 남자가 취향인가?」
그녀는 책상 위의 사진을 들어서 자세히 바라보았다.
「아직도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 자제력이 강한 남자인 것 같군요. 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취향도 고급스럽고.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가 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
지만.」
「이런 위험한데. 그를 유혹해 증거물을 확보하는 게 우리의 목적인데…. 이수현 경위는 그
에게서 느낀 개인적 매력 때문에 이일을 하고 싶어했군.」
「뭐. 어때요. 이왕 유혹해야 될 남자라면 마음에 드는 타입인 게 좋지 않겠어요? 그래야 그
도 자연스럽게 느낄거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혐오스런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처럼 행동
하겠어요?」
수현은 턱을 올리면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유혹적이라고 생각되는 미소를 지었다.
지혁이 자신의 턱에 손을 대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미소로는 유혹할 수 없을 걸. 눈에 보이게 어색해.」
그는 수현의 허리를 가슴으로 바싹 당기면서 그녀의 입술 바로 위에서 속삭였다.
「전에 내게 보여주었던 눈빛을 해야지. 욕망으로 어두워진 그리고 갈망으로 깊어진 눈빛.
그래야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구.」
「난 그런 적 없어요.」
「증명해 보일까?」
노려보는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고 지혁은 수현의 입술에 과감하게 뜨거운 혀를 밀어 넣었
다.
얼굴을 흔들면서 뒤로 몸을 빼려는 수현의 머리를 한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그녀를 놀리려던 입맞춤이었는데..
달콤한 입술이 살며시 벌어지는게 느껴지자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최후의 마지막 한계선까지 견디어 왔던 자신의 자제심이 선명한 소리로 끊어지는 것을 지혁
은 들었다. 지혁은 수현의 턱을 잡고 허기진 혀를 강하게 밀어넣었다.
거친 입맞춤으로 입술에 멍이 들 것만 같았다.
수현은 두 손으로 지혁의 가슴을 밀면서 그의 품에서 빠져 나오려 했다. 허기진 그의 혀는
수현의 저항에도 아랑곳 않고 마음껏 달콤함을 유린했다. 그에게 점령당했던 입술이 해방되
자 작은 헐떡임이 새어 나왔다.
지혁의 그 헐떡임을 다시 삼키려 입을 맞추었다.
거칠었던 지혁의 입술이 어느덧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의 입술이 수현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면서 혀로 감싸자 수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가늘게 떨고 있는 그녀의 허리를 타고 내려오던 그의 손이 수현의 엉덩이 머물렀다. 두 손
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고 자신의 몸에 밀착시켰다.
책상에 걸터 앉은 지혁의 다리 사이에 갇힌 그녀는 욕망으로 굳어진 그의 몸을 선명하게
느꼈다.
지혁의 입술이 목에 짧은 키스를 퍼붓자 그녀는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욕망의 한가운
데서 신음하고 있었다.
너무 뜨겁고 그리고 너무나 차가운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지금도 부정할 수 있어?」
지혁의 목소리가 울리자 수현은 갑자기 차가운 얼음물 세례를 받은 사람처럼 경직되었다.
그의 품에서 서둘러 빠져나와 뒤로 물러선 수현은 지혁을 노려보았다.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참을 수 없어요.!」
수현이 회의실 문이 부서져라고 닫고 나가자 지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7.
[댈러스]는 고급스런 나이트 클럽이었다.
로마시대의 원형 경기장처럼 계단식 구조로 되어 있어 중앙에 원형 스테이지가 있고 계단
식으로 주위가 올라가면서 테이블을 배치해서 춤을 추는 사람들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귀청을 때리는 강한 비트의 음악소리와 함께 현란한 조명이 클럽을 가득 메운 많은 사람들
을 비추고 있었다.
지혁은 스테이지에서 두 계단 위에 위치한 테이블에 전성진 경위와 함께 앉아 있었다. 클럽
내에는 지혁과 성진 외에도 입구 쪽과 비상구 쪽에 수사국 요원들이 앉아 있었다.
그가 앉은 자리에서는 스테이지는 물론이고 입구와 비상구가 한 눈에 보였다.
송학규가 경호원으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와 함께 [댈러스]로 들어 온 자 지혁의 눈빛이 빈
틈이 없어졌다. 지혁의 신호를 받은 다른 요원들도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수현의 말대로 50대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기 관리가 잘 되어 있는 남자였다. 자신이
갖은 돈의 위력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송학규가 모습을 드러낸 지20분 정도가 지나도 수현이 모습은 보이지를 않았다.
지혁은 시계를 보면서 수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너무 늦게 나타난다면 송
학규가 다른 여자를 선택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왔습니다」
전성진 경위의 말에 고개를 든 지혁은 웨이터의 안내를 받으면서 들어서는 수현과 김성희
형사를 보았다. 여자 혼자서 나이트 클럽에 온다는 게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아서
김성희 형사와 동행하도록 한 것이었다.
검은 색의 몸에 달라붙는 원피스는 수현의 가녀리면서도 볼륨있는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얀 미니스커트를 입은 김성희 형사와 대조적이어서 더욱 눈에 띄었다.
계획한대로 수현 일행은 송학규의 테이블을 마주보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수현이 자리에 앉아 웨이터에게 뭐라고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은 원피스에 걸치고 있던 얇은 가운을 벗고 수현이 성희와 함께 스테이지
로 내려갔다.
그 들을 보면서 물을 마시던 전성진 경위는 갑자기 숨을 들여 마신 탓에 사래가 들고 말았
다.
스테이지의 현란한 불빛 속에서 엉덩이 바로 위까지 파져서 빛나고 있는 수현의 등이 하얗
게 빛났다. 등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곡선이 뿐만 아니라 움직일 때마다 스커트의
슬릿이 벌어져 탄력있는 허벅지가 보였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유혹적으로 빛나는 허리 선을 보면서 지혁은 자신이 그녀의 몸이 움
직일 때마다 뜨거운 열기가 묵직하게 퍼지는 것을 느꼈다.
수현이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면서 몸을 돌리자 비틀어진 허리와 엉덩이의 육감적 움직임에
여기 저기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송학규의 시선도 수현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것을 확인한 지혁은 클럽 안의 남자들의 시
선이 그녀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알았다.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던 남자들은 노골적으로 그녀
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혁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차가운 표정으로 수현과 송학규를 주시하는 겉 모습과는 달리 그
의 마음 속은 광폭한 회오리 바람 한 가운데 있었다.
수현의 도발적인 아름다움이 지혁을 뿌리 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자신의 입술 아래에서 떨
고 있던 그녀의 붉은 입술이 얼마나 부드럽고 달콤했는지에 대한 잔상이 되살나자 몸이 굳
어져왔다.
수현이 허리를 움직이자 굵은 웨이브를 준 머리카락이 흔들리면서 고스란히 드러난 등을 애
무하듯 쓸고 지나갔다.
음악이 바뀌어서 자리로 돌아와 술잔을 든 수현에게 웨이터가 다가와 명함을 내밀며 송학규
를 가리켰다. 수현이 고개를 들어서 송학규를 바라보자 그가 손을 드는 것이 보였다.
「걸려들었습니다.」
전성진이 나직이 중얼거리자 지혁은 턱을 고이던 손을 내리면서 수현에게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받은 수현은 웨이터의 귀에다 속삭였다. 잠시 후 송학규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수
현의 테이블에 와서 그녀의 손을 잡고 스테이지로 내려갔다.
수현의 등에 닿은 송학규의 손이 거침없이 허리로 미끌어지는 것을 본 지혁은 차가운 분노
가 이성을 마비시키지 못하도록 자신을 억제했다.
당장에 내려가 송학규의 탐욕스런 더러운 손에서 수현을 끌어내고 싶었다.
송학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수현이 그에게 밀착되자 지혁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자신이 만든 덫에 스스로 갇힌 꼴이 되고 말았군.」
지혁은 쓴웃음을 짓었다.
송학규와 동행한 두 명의 경호원 중 한 명이 핸드폰을 받으면서 클럽을 나가는 것을 주시했
다. 입구 쪽에 앉은 수사원에게 신호를 해서 그를 미행하도록 했다.
잠시 후 지혁이 귀에 꽂고 있던 무선폰으로 연락이 왔다.
「전화를 끊은 뒤 송학규의 차를 클럽 앞에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잠시 후 뒤돌아온 경호원이 스테이지를 내려 온 송학규에게 다가가 귀속말을 하는 것이 보
였다.
송학규는 수현의 손을 잡고 무엇인가 이야기를 한 후 자신의 명함을 그녀에게 건내 주었다.
수현이 그 명함을 받고 난 다음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 주는 듯 했다.
송학규가 두 명의 경호원과 클럽을 나가자 지혁은 대기하고 있던 요원들에게 신호를 보내
미행을 시켰다.
8.
수현은 아파트로 들어서자 마자 에어컨을 켰다. 8월의 늦더위가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가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들어올리자 땀에 젖은 목덜미에 시원한 공기가 닿아서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
았다. 수현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차가운 물을 따라 단숨에 마셨다.
잔을 들고 거실로 나가 물빛 커튼을 열었다.
어둠이 깔린 도시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낮 동안의 추악한 모습이 어둠이 내리면 아름다운 불빛으로 가장하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수현은 이마에 잔을 대었다.
송학규의 시선이 아직도 몸에 달라 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세련된 외모 밑에 보이던 잔혹
성이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그의 손이 등을 타고 내렸을 때 그녀는 떨쳐버리고 싶은 심정
을 억지로 눌렸었다.
노골적으로 탐욕스럽게 헐떡이던 송학규의 숨소리가 아직도 귀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댈라스]에서 봤던 지혁의 차가운 눈빛이 떠오르자 수현의 입술에서 작은 한 숨이
새어나왔다.
아무래도 그녀가 생각만큼 잘 해내지 못했나 보다. 송학규가 그렇게 빨리 자리를 뜨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자신이 그에게 인상적이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만약 송학규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수현이 그에게 직접 접근을 해야하는 위험부담이
생긴다.
송학규가 의심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그를 유혹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
쪽에서 그녀를 유혹하도록 해야 훨씬 수월하다고 수현은 생각했다.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사실대로 말한다면 국장는 분명 냉소적으로 말하겠지.
현관 벨이 울리자 수현은 생각에서 빠져 나왔다. 아직도 들고 있던 잔을 탁자 위에 놓고 문
을 열러 나갔다.
수현이 문에 손을 대기도 전에 현관문에 열렸다. 놀라서 뒤로 주춤하는데 지혁이 성큼 들어
섰다.
「어떻게?」
놀라서 묻는 수현의 눈에 지혁의 손에 든 열쇠에 시선이 갔다.
「집 열쇠를 갖고 있었단 말이예요!」
소리치는 수현을 보면서 지혁은 열쇠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지혁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자 수현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명백한 주거 침입이예요!. 어떻게. 어떻게 내 열쇠를…」
지혁은 얼굴이 상기되어 소리치고 있는 수현의 허리를 잡아 끌어당기면서 입술을 내리 눌렀
다. 짧은 신음 소리가 나오는 입술 속으로 거침없이 뜨거운 혀를 집어 넣었다.
송학규가 자신이 묶고 있는 호텔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수사요원을 잠복시킨 후 지혁은
결국 수현의 아파트로 오고 말았다.
송학규에게 안겨 있던 수현의 모습이 지워지지를 않고 그를 괴롭혔다. 분명 일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뒤흔드는 분노를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
지혁은 뒤로 젖혀지는 수현의 머리를 움켜 잡고 터져 나오는 욕망을 자제하지 않았다. 그의
손은 수현의 등을 미끌어져 내려가 [댈러스]에서부터 그를 끊임없이 자극시키던 엉덩이를
움켜 잡았다.
수현은 수천 개의 작은 화살이 자신의 온 몸에 박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혁의 혀가
주는 짜릿한 전율은 송학규에게서 느꼈던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씻어내고 있었다.
자신의 배에 닿는 지혁의 단단한 몸을 생생하게 느끼면서도 두렵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트러블 메이커라는 이성의 경고를 무시하고 결국 그녀를 자신의 부서에 받아들이기로 결정
한 그 순간부터 지혁은 자신이 만든 덫에 스스로가 걸린 경우가 되고 말았다.
한 손안에도 다 차지 않을 것 같은 그녀가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점점 거대해지는 것을
지혁은 무기력하게 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
감정의 거센 줄기를 그 자신도 막을 수가 없었다.
깊은 입맞춤으로도 지혁의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두 눈을 빛내면서 가쁜 숨을 몰아 쉬는 수현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이제 더 이상의 초연함이 보이지 않았다.
지혁은 뜨거운 욕망으로 단단하게 굳어진 몸에 밀착된 수현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이쯤에서 멈추길 원해?」
허스키한 목소리로 지혁이 수현에게 낮게 속삭였다.
자신의 가슴 속에서 점점 자라나 이제는 폭발할 것처럼 터저 나오는 열정으로 목이 잠긴 수
현은 지혁의 이글거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멈출 수 있어요?」
「원한다면」
수현는 손가락을 들어 그의 육감적인 입술선을 살며시 만졌다. 이처럼 부드러운 입술이 어
떻게 그렇게 거친 열정을 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현의 손가락이 자신의 입술에 닿자 지혁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지면서 엉덩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허기진 입술이 자극적인 내음이 묻어나는 그녀의 목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지혁의 허
기진 혀는 흔적을 남기며 수현의 가슴으로 내려갔다.
수현은 자신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곳을 한 걸음 내딛은 것을 알았다.
지혁에 대한 감정의 진실을 이젠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한 멈출 수 없는 갈망 앞에서
수현은 가늘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진실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수현은 그저 사랑을 간절히 바라는 여자였
다.
지혁은 수현을 들어 올려 쇼파로 걸어가 쇼파에 앉으면서 그녀를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수현은 팔을 들어 지혁의 목을 안았다.
처음으로 수현이 스스로 자신에게 안겨오자 지혁의 자제력이 급속도로 사라져갔다.
초인적인 절제로 지난 6개월을 보냈지만 그녀에 대한 거센 갈망의 목마름이 그를 뿌리 채
흔들어 놓았다.
수현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려서 수현의 어깨에서 옷을 천천히 아래로 끌어내렸다.
지혁의 따뜻한 손이 가슴을 감싸자 그녀의 두 눈을 감겼다. 자신의 가슴에 와 닿는 엄지 손
가락의 감촉에 수현은 신음 소리를 냈다.
전화벨 소리가 울렸지만 두 사람 모두 그 소리를 무시했다.
수현의 작은 젖꼭지가 지혁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그녀의 머리 속은 텅 비었다. 견디기
힘든 갈증이 온 몸을 흔들어 놓았다. 두 손에 지혁의 머리카락을 감으면서 그녀는 의식의
마지막 결쇠를 풀어버렸다.
「수현아」
자동 응답기에서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가 몽롱한 수현의 머리 속을 파고 들자 그녀의 몸이
경직되었다. 숨을 삼키며 그녀의 몸이 굳어지자 지혁이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창백한 얼굴의 수현은 충격을 받은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집에 없는가 보구나. 한 달 전에 미국에서 나왔다. 한 번… 한 번 볼 수 있을까?」
수현은 허리까지 내려온 옷자락을 올리면서 탁자 위에 놓인 수화기를 움켜잡았지만 결국 수
화기를 들지는 못했다.
수화기에서 손을 뗀 수현이 자신의 무릎에서 일어나려 하자 지혁은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안으면서 소파에 기대었다.
수현이 일어서려고 거칠게 움직이자 지혁은 수현의 몸을 더욱 강하게 안았다. 자신의 가슴
을 밀어내려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대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쉬. 진정해. 잠시만 이렇게 가만히…」
잠시 후 수현은 지혁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결렬하게 뛰던 지혁의 심장 소리가 규칙적인
리듬으로 바뀌자 수현의 경직되었던 몸도 차츰 가라앉았다. 뜨거운 눈물이 차올라 흘러내리
는 것을 수현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한 번 경계를 풀어버린 마음은 그렇게 쉽게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지혁은 어깨를 떨면서 숨죽여 우는 수현의 머리에 얼굴을 대었다. 울음이 잦아드는 것을 보
면서 수현의 턱을 들어 올렸다.
젖어 있는 커다란 두 눈을 보면서도 고통스러울 정도로 굳어져버린 자신의 몸을 경멸했다.
눈물로 얼룩진 볼에 입술을 살며시 대면서 지혁은 심호흡을 했다. 아릿한 고통을 참으면서
초인적인 노력으로 고삐 풀린 열정을 다스렸다.
물기 어린 수현의 커다란 두 눈에서 볼 수 있는 깊은 상처의 상흔이 지혁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의 눈에 어린 상처를 모두 씻어주고 싶었다.
눈빛을 반짝이면 자신에게 도전하는 그런 수현으로 남아주길 지혁은 진심으로 원했다.
전화의 내용에 대해서 묻지 않고 그저 자신을 안아주는 지혁이 배려에 가슴 속 깊이 파고
들었다.
「긴 하루였지? 좀 쉬도록 해」
수현에게 지금의 자신은 힘만 들게 할 뿐일 것 아는 지혁은 마지못해 수현을 일으켜 세웠
다. 아무 말 없이 현관문 앞까지 따라 나온 수현의 어깨를 잡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런닝 머신에 매달려 있지 않겠다고 약속해」
고개를 끄덕이는 수현을 안아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은 지혁은 그녀가 숨이 끊어질 정도로
달릴 것이 안타까웠다. 그녀가 자신에게 그 아픔을 덜어 줄 때가 너무 멀리 않기를 만을 바
를 수 밖에 없었다.
닫히는 문 소리를 들으면서 수현은 그를 다시 붙잡고 싶은 마음을 억눌렸다. 뼈 속까지 파
고 드는 냉기가 너무나 추웠다. 그의 따뜻한 품이라면 이 냉기를 쫓아 낼 수 있을 것 같았
다. 그렇지만 이 외로움은 자신만의 굴레임을 수현은 알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수현은 다리를 끌어 올려 두 팔로 감싸 안은 무릎에 얼굴을 대었다. 은빛 전화
기는 메시지가 있음을 알리는 불빛을 깜박이고 있었다. 한 참이 흐른 후 수현은 자동 응답
기의 재생버튼을 눌렸다.
6년 만에 듣는 새엄마의 목소리였다.
새엄마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서 있는 것을 본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아버지가 잠복 근무로 일주일 넘게 집으로 돌아오시지 못했던 어느 날 밤 독서실에서 돌아
오던 수현은 집 앞 어두운 골목에서 낯선 남자와 입을 맞추고 있던 새어머니를 발견했었다.
두 손으로 그 남자의 머리를 잡고 열정적의 숨을 삼키던 새어머니.
그 날의 충격과 새엄마에 대한 혐오감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애원과 간청도 수현의 새엄마를 돌이키지 못했었다. 결국은 아버지와의 지리한 싸
움 끝에 이혼을 하고 그 남자와 미국으로 떠났었다.
학교로 찾아 온 새엄마를 만나는 것을 끝내 거부했던 수현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교정을
나가는 새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나서 화장실로 달려가 심하게 토하고 말았다.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추악한 육체적 욕망인지를 알고 있다고 소리치
고 싶었다.
자신이 새엄마를 얼마나 경멸하고 증오하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새엄마에게 말하고 싶었다.
자신과 아버지를 제발 떠나지 말아달라고..
심한 배신감에 절망하던 아버지가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수현은 지켜보아야만 했었다.
병원에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새어머니를 그리워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자 수현은 침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운동복으로 갈아 입었다.
서재 겸으로 쓰고 있는 작은 방에 놓아둔 런닝 머신에 올라가 자신을 덮쳐오는 과거의 기억
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듯 달리고 또 달렸다.
9.
「왔습니다」
지혁이 특별 수사국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강진욱 경위가 수현의 핸드폰과 연결된 헤드폰을
지혁에게 주면서 말했다. 지혁은 수현에게 눈짓을 하면서 헤드폰을 머리에 썼다. .
핸드폰을 받고 있는 수현의 어깨가 잔뜩 굳어져 있었다.
수사국내의 다른 수사원들도 모두들 긴장한 채로 수현의 대화 내용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수현씨 때문에 지난 밤에 고통스러웠어」
송학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요?」
「수현씨의 아름다운 모습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아서.」
「그렇다면 그 고통스런 밤이 계속되지 않도록 해야겠군요.」
「지금 내가 사업 때문에 부산으로 내려와 있거든. 지금 서울로 출발하는데. 오늘밤 만날 수
있을까?」
수현은 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송학규의 청을 받아들였다. 챌린지 호텔의 스카이 라운지
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는 수현은 긴장감으로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
다.
「잘 됐어. 이수현 경위. 오늘 밤에 꼭 증거물을 확보하자.」
활짝 웃고 있는 전성진 경위를 바라보면서 미소를 짓는 수현의 눈밑은 검은 그림자가 져 있
었다. 3시간 정도 겨우 잠이 들었던 그녀는 따가운 두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
질렸다.
「이 경위. 국장실로.」
수현은 고개를 들어 국장실로 걸어가는 지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전성진 경위는 얼른
따라 가 보라고 손짓을 하면서 수현을 재촉했다.
수현이 국장실로 들어섰을 때 지혁은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밝은 햇살이 창 문으로 들어와 지혁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창 밖을 바라보는 지혁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창틀에 어깨를 기대고 있던 지혁은 수현이 국장실의 문을 닫자 수현을 바라보았다.
「몇 시간이 잤지?」
「충분할 만큼 잤어요」
어제 밤 내내 자신이 결국은 새엄마처럼 육체적 욕망의 늪에서 빠져버린 것을 후회하면서 자
기 모멸감에 빠져있던 수현은 그 원인 제공자인 지혁을 노려보았다.
「제 일에 관심 두는 것 이제 그만 두세요. 업무 외의 일까지 간섭 받고 싶지 않군요.」
지혁은 한 쪽 눈썹을 올리면서 피로로 창백해진 수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편안해 보이는 박스 스타일의 반팔 풀 오버에 크림 베이지색의 와이드 팬츠를 입은 수현은
옷차림과 달리 극도로 날카로와 보였다.
「그 전화 때문인가. 예민해졌군.」
지혁의 예리한 눈이 정확하게 짚어내자 수현은 마치 현미경으로 낱낱이 관찰되고 있는 느낌
이 들었다.
「그런 일 없습니다. 국장님. 제 일에 대한 불필요한 관심은 부담스러워요.」
지혁은 창틀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수현에게 다가왔다.
「이수현 경위. 뭔가 오해하는군. 내가 걱정하는 것 바로 오늘 밤의 일이야. 그렇게 창백한
얼굴로 송학규에게 어필 할 수 있을 것 같아?」
「걱정하지 말아요」
「그럼 걱정이 되게 하지 말아! 이건 장난이 아니야. 지난 6개월 동안 공들여 놓은 사건을
망치지 말라구.」
수현은 주먹을 쥐었다.
「그런 일, 없을거예요.」
「그럼 믿을 수 있게 해봐!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사생활 때문에 중요한 사건을 엉망으로
만든다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수현의 눈동자가 적의로 불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지혁은 만족스런 미소를 마음 속으로 지었
다. 창백했던 두 볼은 붉게 상기되어 반짝이는 두 눈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렸다.
슬픔으로 지친 창백한 수현의 얼굴은 그녀에게 맞지 않았다.
「전 아마추어가 아니예요. 제가 맡은 일은 분명히 해 낼꺼예요.」
수현은 문이 부서지게 힘껏 닫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국장실을 나왔다.
10.
호텔 스카이 라운지에 들어선 수현은 어깨에 걸쳐던 붉은 니트 가디건을 벗어 손에 들었다.
레드 벨벗 드레스는 가녀린 몸선을 따라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악세서리는 옷깃에서 반짝이는 작은 다이아몬드뿐이었다.
어두운 실내에는 부드러운 피아노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밝힌 촛불들이 조용
히 타오르는 실내지만 지혁의 날카로운 눈에는 라운지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였다. 귀에 꽂
은 이어폰에서 전성진 경위의 목소리가 들렀다.
「비둘기가 둥지로 들어 왔다.」
지혁은 가벼운 고개 짓으로 맞은 편 테이블에 앉은 전성진 경위에게 신호를 보냈다.
수현이 웨이터에게 안내되어 지혁이 앉아있는 곳을 스처 지나갔다. 그녀가 다가 가자 50대
남자가 일어 섰다. 송학규였다.
활짝 웃는 송학규의 품에 자연스럽게 안기는 수현을 지혁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24살의 나이로 처음 맡기는 임무을 훌륭하게 해 내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3초 정도였지만 지혁은 그녀의
눈빛을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아직도 절 못 믿으세요?」
자신을 노골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지혁의 얼굴을 보고는 무심한 듯 다시 시선을 돌려 송
학규에게 밝은 미소를 보냈다.
20분쯤 지나서 수현이 송학규 빰에게 가벼게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가 여자 휴게실 가기 위해서 걸어나가자 지혁도 자리
에서 일어섰다.
수현은 여자 화장실에 나오자 지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지나치게 접촉하지는 마.」
지혁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에게 감기었다.
「정보를 얻기위해서 그를 유혹하는게 제 임무잖아요.」
그는 지나가려는 수현의 팔을 움켜잡고 이를 물고 말했다.
「불안하게 만들지마.」
「걱정마세요.」
수현은 지혁의 팔을 뿌리치고 라운지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지혁의 태도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사실 불안감이 더 크게 그녀를
내리 눌렀다.
송학규에게 가장 밀접하게 접근한 이번 기회를 특별 수사팀이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기회라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에 불안감이 더욱 커져 갔다.
그런 불안감을 지혁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가 좀더 자신을 신뢰할 수 있다면...
수현은 머리 끝에서부터 천천히 내려가는 송학규의 시선을 간신히 참아냈다. 밝게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로 다가가자 송학규는 일어나 수현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나가지.」
수현은 자신의 시야 끝으로 지혁의 모습이 잡히는 것을 느끼면서 송학규의 품에 안겼다.
송학규의 커다란 손이 수현의 등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엉덩이에 머무는 것을 보는 지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지혁은 이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자식. 너무 노골적인데.」
귀에 꽂은 무선폰으로 전성진 경위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카이 라운지에서 송학규와 수현이 걸어나가자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 층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차에 전성진 경위와 지혁은 올라탔다.
「송학규가 차에 탔습니다.」
강진욱 경위가 지혁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놓치지마」
운전석에 앉아 있던 강진욱 경위가 차를 출발시키면서 지혁에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국장님.」
송학규의 벤츠 승용차는 비가 내리고 있는 도심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수사팀의 예
상으로는 그는 자신이 묶고 있는 호텔로 수현을 데리고 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혁은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수현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수현의 드레스에 꽂힌 작은 다
이아몬드 핀은 사실 도청 장치였다.
「서두르지 말아요. 아직도 긴 시간이 남아있어요」
수현의 거부하는 낮은 목소리가 지혁을 긴장시켰다. 아무래도 송학규가 차안에서 벌써 수현
에게 손을 대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잠시의 침묵 뒤에 송학규의 커다란 한 숨 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기다림은 좋은 흥분제지.」
송학규의 차가 플라자 호텔 쪽으로 달리자 지혁은 미리 호텔에 대기하고 있는 수사팀에게
연락을 했다.
호텔 정문에서 멈추어선 차에서 내리는 수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레드 벨벳의 드레
스가 물기어린 불빛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검푸른 머리칼에 맻힌 물방울이 불빛에 반
짝였다.
선명한 붉은 색이 창백한 얼굴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얼굴을 돌린 수현의 눈에 어린 긴장감이 지혁에게 선명하게 느껴
졌다.
송학규가 차에서 내리자 앞 좌석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따라서 내렸다. 세 사람이 호텔 로
비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한 지혁은 차에서 내렸다.
로비로 들어서자 수사요원이 뛰어 왔다.
「6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수사원을 배치시켜 놨지?」
「확인했습니다.」
지혁과 전성진 경위, 강진욱 경위도 15 층에 있는 객실에 설치한 임시 본부로 들어갔다. 송
학규는 16층의 스위트 룸에 묵고 있었다.
지혁은 객실에 들어서자 마자 수사원이 건네는 헤드폰을 머리에 썼다. 송학규의 객실에 도
청장치를 할 수만 있다면 더할 수 없이 좋겠지만 항상 경호원이 상주해있는 송학규의 객실
에 몰래 도청장치를 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객실 청소를 위해 들어오는 직원마저 철저히 감시하고 있는 경호원 때문에 섣부른 행동은
할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수현의 옷에 꽂힌 마이크 핀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음질이 깨끗하지 못합니다.」
강진욱의 말을 손을 들어서 막으면서 지혁은 집중하고 있었다.
11.
수현은 스위트 룸으로 들어서면서 재빨리 주위를 파악했다. 두 개의 침실 중 주 침실을 송
학규가 사용하고 있는 듯했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두 남자가 다른 침실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커다란 거실을 가운데 두고 각기 전용 욕실이 달린 두 개의 별도의 침실이 있는 스위트 룸
은 호화스러웠다.
송학규가 김실장이라고 부르는 남자가 자신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수현
은 송학규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아무래도 쉽게 일이 진행될 것 같지가 않았다.
송학규의 시선이 몸에 달라붙는 끈적임으로 불쾌감을 준다면 김실장의 시선은 척추가 떨리
는 잔인한 차가움으로 수현을 긴장시켰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사의 눈과도 같은..
「오늘은 더 이상의 외출은 없을 것 같군」
송학규가 수현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가면서 김실장과 운전을 하던 미스터 박에게 던진 말이
었다.
그는 수현의 목덜미에 입술을 밀어 붙이면서 침실 문을 닫았다. 수현은 달려드는 송학규의
입술을 참아내면서 그의 목을 두 손으로 감았다.
「먼저 샤워를 하세요」
「같이 하는게 어때」
「기다림은 좋은 자극이 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지나치게 빼는군.」
「그 기다림에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수현은 그를 욕실로 밀어 넣자마자 벗어 놓은 양복 저고리에서 작은 전자 수첩을 꺼냈다.
수첩은 열고 내용을 확인하자 수현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됐어요.」
수현은 옷깃에 꽂힌 다이아몬드 핀에 대고 말했다. 만족스러워하는 수사팀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친 송학규가 가운을 입고 욕실을 나왔을 때 수현은 소파에 비스듬이 누워 있었다.
레드 벨벳 드레스의 가는 어깨 끈이 흘러내려 크림색 어깨가 어두운 조명 속에서 유혹적으
로 빛났다.
그녀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송학규을 바라보면서 잔을 들어올려 차가운 샴페인을 입안 가득
머금었다.
그가 자신에게 몸을 숙이자 섬세한 팔을 들어 올려 송학규의 머리를 잡아당겨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면서 입안에 있던 샴페인을 그에게 전해주었다.
성급하게 밀고 들어오려는 그의 혀를 피해 머리를 돌린 수현은 그에게 잔을 건넸다.
송학규는 수현이 준 잔의 술을 단숨에 마셨다.
소파에서 수현을 가뿐하게 들어 올린 그는 침대에 그녀를 눕혔다. 짙은 초콜렛빛 시트 위에
누운 수현은 가운을 벗어 던지는 송학규를 바라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50대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운동으로 단련된 건장한 몸이 수현을 덮치듯 내리 눌렀다.
그녀는 송학규의 손이 드레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치솟는 구역질을 참았다. 적
어도 5분은 지나야 약효가 날 것 같았다.
송학규의 체력과 몸집으로 보아서 더 많은 양을 넣을 걸하면서 생각하던 수현은 송학규가
머리를 흔들면서 눈을 깜박이는 것을 보았다.
순간 그의 머리가 수현의 가슴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수현은 송학규의 몸을 천천히 옆으로 옮겨 놓았다. 생각보다 빨리 약효가 나타난 것 같았다.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으면서 그녀는 침대에 어지려운 흔적을 남겨 놓고 나서 침대에
서 일어났다.
침대 위에 엎드려 있는 송학규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소파에 앉았다.
과연 약효가 얼마나 갈 것인지. 그리고 확실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지 불안했다.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그의 체취를 당장에 씻어내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시게를 바라보았
다.
적어도 30분 정도는 있다가 방을 나가야 할 것 같았다.
그녀의 바람대로 김실장과 운전사가 잠이 들거나 아니면 밖으로 나갔다면 더 할 수 없이 좋
겠지만 그들이 결코 호텔 방을 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수현으로부터 증거를 확보했다는 말을 들은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더 이상의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은지 30분이 지나자 지혁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송학규는 약에 취해 쓰러진 것 같았지만 더 이상의 교신은 없었다.
「너무 오래 걸리는데.」
전성진 경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면서 지혁을 바라보았다. 침착해 보이는 지혁
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을 전성진 경위는 눈치 채지 못했다.
「룸 서비스를 시켰습니다.」
전화를 도청하고 있던 강진욱이 지혁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경호원 중의 한 사람이 술과 과일을 시켰습니다.」
지혁은 미리 직원으로 위장시켜 투입한 수사팀에게 연락을 해 지시를 내렸다.
「이수현 경위의 상태를 파악해.」
초조한 가운데 몇 분이 흘렸다. 지혁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창 밖을 바라보았다. 지금 까
지 수 없이 많은 사건을 다루었지만 지금처럼 초조한 적이 없다는 것이 선명하게 인식되었
다.
그런 생각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초조한 감정을 이성을 마비시켜 신속한 결단을 내리
는데 방해만 될 뿐이었다.
잠시 후 들어온 수사원의 보고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스위트 룸의 거실에 한 명의 남자만이
술을 마시고 있었고 수현과 송학규는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약 수현이 곤란한 상황에 빠진다 하더라도 그래서 결국에는 수사팀이 그녀를 빼내와야 하
는 상황이 된다하더도 지혁은 그런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현을 빼내오는 과정에서 어렵게 확보한 증거물은 물론이고 송학규마저 날아가 버릴 수도
있을 확률이 너무나 높았다.
무력적인 충돌만큼을 절대적으로 피해야 했다. 비밀스럽게 접근하기 위해서 그 동안 들인
노력을 헛된 것을 돌릴 수는 없었다.
「국장님」
전성진 경위가 지혁의 지시를 기다리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방 안의 수사원들의 긴장된 시
선이 지혁을 바라보면 모두들 침묵하고 있었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그의 신속한 판단이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했다.
수현으로부터의 연락이 두절된 후로 모두들 눈에 띄게 긴장하고들 있었다.
「앞으로 30분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면 제2 작전으로 가도록 하지」
수현이 침실 문을 열고 나오자 창가에 서 있던 김실장이 몸을 돌렸다. 술잔을 탁자 위에 내
려 놓은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수현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녀는 피부에 달라 붙는 끈적임을 느꼈다.
언제나 송학규를 그림자처럼 경호하는 그의 위치가 단순히 경호원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감지하고 있었다.
실제적인 지시나 결정이 결국은 그를 통해서 내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 가 볼께요.」
「사장님은?」
수현은 고개 짓으로 침실을 가리켰다. 침실 문을 열어 송학규가 잠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
한 김실장은 걸어 나가려는 수현의 손목을 움켜 잡았다.
「벌써 가시려고?」
수현은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면서 자신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그가
모르길 간절히 바랬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움켜 잡고 있는 커다란 손을 차가운 시선으
로 바라 보았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넘보는 것은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것을 모르나 보죠?」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아보았지. 저런 늙은이한테 만족할 수 없는 여자라는 걸」
「실수하는 거야」
「뭐라구?」
수현의 차가운 말투에 김실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쯤에서 그만 두지. 난 당신 같은 조무래기와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건방지게 굴다가 다치는 수가 있지.」
수현의 손목을 움켜잡은 손에 힘을 가하면서 김실장이 수현의 허리를 바싹 당겼다. 손목이
타는 듯이 아파왔다.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는 커다란 손의 강한 압력에 한 쪽 눈썹을 올리면서 수현은 이를 물고
말했다.
「여기서 내가 소리를 지르면 당신 무사할까?」
「그럴 기회조차 없을 걸.」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의 입술을 덮쳐오는 김실장의 급소를 무릎으로 걷어 차 올렸다.
순간 비틀거리며 김실장의 새끼 손가락을 잡아 관절을 꺽어 버렸다.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그가 손을 놓았다.
「경고 했을텐데. 송학규가 과연 이 자신의 것을 당신 같은 사람과 공유하려 할까?」
수현은 이를 물고 나직이 내뱉었다.
신음 소리를 내면서 손을 움켜잡는 김실장의 이글거리는 눈을 보면서 한쪽 입술 끝을 올리
면서 미소를 지었다.
「내일 그가 나를 찾아오면 내가 무어라고 말할까?」
「까불다간 그 얼굴이 무사하지 못 할거야!」
「당신 걱정이나 해!」
수현은 그에게 일별을 던지고 방을 걸어 나왔다. 스위트룸을 나온 뒤 엘리베이터로 걸어가
는 그녀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이라고 김실장이 나와서 그녀를 잡을 것만 같았다.
「좋아. 들어가도록 하지.」
지혁이 시계를 보고나서 권총을 점검하면서 말하는데 문이 열리면서 수현이 들어 왔다.
「저 왔어요.」
모두들 깜짝 놀라 얼굴을 보면서 수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전자 수첩을 가
볍게 흔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아무런 연락도 없었던 거야? 어떻게 빠져 나왔지?」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 수현은 지혁을 바라보았다.
다들 안도의 한숨과 커다란 웃음으로 그녀를 맞는 동안에도 지혁은 아무말 없이 그녀를 바
라 보고 있었다.
「예상보다 너무 늦었어. 왜 연락하지 않았지?」
지혁의 낮은 목소리에 일순간 다들 조용해졌다.
「마이크가 망가졌어요」
송학규가 그녀를 침대에 올려 놓을 때 빠져 버린 마이크 핀은 망가져 버렸다.
「불안하게 하는 요원과는 중요한 사건을 함께 할 수 없어!」
지혁은 두 손으로 그녀를 잡고 흔들어 대면서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느냐고 소리치고 싶
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주머니에 넣은 손은 당장이라도 그녀가 무사한지 직접 확인하고 싶
어 안달을 했지만 그는 초인적인 힘을 참았다.
그녀를 그토록 무방비 상태로 몰아 넣은 자신의 무능력함이 견디기 힘들었다.
수현이 건넨 전자 수첩을 수사원에게 넘기면서 빠른 시간 안에 증거를 확인하도록 했다.
「강진욱 경위 팀은 여기에 남아서 계속 송학규의 움직임을 주시하도록」
지혁은 수사팀에게 신속하게 지시를 내리다가 수현을 처다 보았다.
침착하게 상황 보고를 마친 수현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동료가 건네준 커피를 마다하고 차
가운 생수 잔을 이마에 대고 있는 그녀의 볼은 핏기가 없었다.
「일어나.」
지혁은 수현을 내려다 보면서 말했다. 지혁을 올려다 보는 그녀의 눈은 긴장감으로 팽창 돼
있었다.
사건이 마무리 되는 것을 확인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수현을 반 강제로 데리고 나온 지혁
은 비 내리는 밤 길을 운전하면서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창 밖을 바라보는 수현의 얼굴
위로 자동차 불빛이 스쳐갔다. 그녀의 신경은 너무나 팽팽하게 조여져 있어서 조금만 더 힘
을 가해도 당장에 끊어질 것만 같았다. 지혁은 수현의 아파트 앞에 차를 세우면서 그녀을
돌아보았다
「들어가」
「제가 참여한 사건이예요! 그 결과를 확인하는 게 뭐가 이상해요?」
「고집 부리지마. 더 이상은 무리야. 그런 신경을 가지고 어떻게 견딜 수 있다고 하는 거
야.」
「그건 내 문제예요.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러겠다는 거예요」
「이수현 경위」
지혁의 차가운 말투에 수현은 지혁을 돌아보았다.
「이수현 경위의 히스테릭한 모습은 안 좋은 영향을 준다구! 잔말말고 들어가!」
수현은 차 문을 거칠게 열고 나왔다.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 보고 아파트로 뛰어들어 갔다.
어차피 사실은 한 순간도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도 힘이 들만큼 머리가
아파왔지만 자신이 나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가 않았다.
완전한 수사팀의 한 일원으로서 제대로 제 몫을 해내고 싶었던 거였다. 그런데 지혁이 자신
의 상태를 한 눈에 알아챘다는 것이, 아니 자신이 그렇게 허술한 모습이었다는 것이 몹시도
싫었다.
12.
섬뜩한 손길의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뜨거운 손길의 차가움은 섬뜩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슴 선을 따라 움직이는 손가락
끝을 쫒아서 공포도 더해갔다.
그러나 마음 속의 극심한 회오리바람을 그녀는 온 힘을 다해서 드러내지 않았다. 상대에게
자신의 두려움을 알리는 것은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는 손 끝의 매끄러운 살갗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자신에게 강한 성적 자극을
느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배에 닿는 그의 남성이 느껴지자 울컥 구역질이 올라왔다. 극심
한 공포가 손 끝을 아리게 했다.
땀방울이 척추를 따라 흘러내렸다. 이제 손 끝은 수현의 배꼽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에게
잡힌 손목이 타오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수현은 헐떡이면서 몸을 뒤틀었다. 기다란 머리카락은 땀으로 얼룩진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
다. 악몽을 깊은 늪처럼 그녀가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을 칠 때마다 더욱 깊이 그녀를 빨아
드리고 있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목이 너무나 아파왔다.
갑자기 몸을 일으킨 수현은 숨을 거칠게 내 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방이라는 것
을 확인하고 나서도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이 한 동안은 계속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괜찮아. 다 끝났어」
그녀는 나직이 중얼거리면서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침대 옆 탁자에 놓
인 시계는 이제 막 오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수현은 힘이 풀린 두 발을 침대 밑으로 내려 놓았다. 잠옷으로 즐겨 입는 경찰 대학 티 셔
츠는 땀에 젖어서 몸에 감기고 있었다. 몸에 감기고 있는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갔
다.
샤워 부스로 들어가 얼음처럼 차가운 물줄기를 온 몸에 맞았다. 머리카락을 머리 뒤로 넘기
고 벽에 두 손을 짚고 고개를 젖혔다.
얼굴에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에 두 눈을 감았다. 악몽으로 끈적해진 온 몸을 깨끗하게 씻
어내고 싶었다.
그 때 갑자기 샤워 부스 문이 열렸다. 수현은 너무 놀라서 잠시 동안 그저 두 눈을 크게 뜨
고 지혁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어둡게 불타오르는 지혁의 두 눈이 천천히 내려갔다. 가슴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젖꼭지에
맺히는 것을 보면서 그는 넥타이를 풀었다.
반쯤 감긴 눈은 젖꼭지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져 동그란 가슴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것을 따
라 천천히 내려갔다. 날씬한 배를 가로질러 잠시 옴폭한 배꼽에 머물렀던 물방울은 다시 급
속한 속도로 작은 숲으로 달려내려 갔다.
그의 시선은 그 곳에 머물러 있었다.
수현은 뜨거운 열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의 시선은 수현의 깊은 곳을 떨게 만들었다. 손가
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작은 헐떡임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만으
로도 그녀의 지쳐갔다.
샤워 부스로 들어선 지혁은 샤워기를 잠갔다. 수현은 그제서야 자신이 아직도 쏟아지는 물
속에 있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성큼 들어선 지혁을 올려다 보면서 등에 닿는 타일의 차가움
을 느끼면서 수현은 뒤로 물러섰다.
지혁은 그녀의 머리 옆 벽에 두 손을 짚으면서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수현은 귀가 멍해
지는 이상한 느낌을 떨쳐버리려고 헛된 노력을 하면서 지혁을 올려다 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모습인데?」
지혁의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두려운 듯 그를 바라보는 수현을 보면서 지혁은 미소를 지으면서 허리를 숙여 물방울이 매
달려 있는 머리카락에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지혁의 입술이 수현의 귀 볼을 살짝 깨물며 부드럽게 빨아드렸다. 귀가에서 움직이는 지혁
의 뜨거운 숨소리는 날카로운 전율을 일으키면서 그녀를 흔들어 놓았다. 차가운 피부에 닿
은 그의 뜨거운 입술은 그녀를 빠른 속도로 흥분시켰다.
허리를 안으면서 지혁은 수현의 목덜미에서 쇄골까지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감미로운 입
맞춤은 그녀의 마음 속에 스며들어 버렸고 그의 행동을 막을 수 없게 만들었다.
작은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 지혁은 수현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그녀를 가볍게 들
어 올렸다. 부풀러 오른 가슴 위로 지혁의 뜨거운 입술이 닿는 것을 본 수현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예민해진 젖꼭지가 지혁의 입속을 빨려 들어가자 수현은 지혁의 머리카
락을 움켜 잡았다. 등에 닿은 차가운 타일의 감촉과 터질 듯한 젖꼭지의 아련한 고통이 몸
속을 치달으면서 수현의 은밀한 곳을 뜨겁고 촉촉하게 만들었다.
그의 입술이 자신의 가슴을 탐할수록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더해만 갔다. 샤워 부스는 그
들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차고 있었다.
지혁은 고개를 들어 욕망으로 어두워진 그리고 갈망으로 깊어진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
다.
「말해. 당신도 나만큼 원하고 있다고.」
지혁은 수현의 물기 어린 눈동자를 보면서 속삭였다.
「갈망으로 뜨거워지는 기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고.」
지혁은 수현의 입술에 닿을 듯이 입술을 대면서 욕망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수현은 지혁의
머리를 잡아 당기면서 그에게 깊은 입맞춤을 했다.
지혁이 자신처럼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알자 그 동안 부정해왔던 지혁에 대한 갈망어린 사랑
은 억눌려 있던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거친 야생마처럼 그 갈기를 휘날리면 달리기 시
작했다.
수현의 열정어린 입맞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지혁은 그녀가 자신의 입술을 마음껏 맛
볼 수 있도록 했다. 언제나 수줍게 떨면서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던 그녀의 입술이 거침없는
열정으로 다가오자 지혁은 매혹당했다.
떨리는 손길로 지혁의 옷깃을 젖힌 수현은 근육으로 덮힌 지혁의 가슴을 만지면서 입술을
그의 귀로 움직였다. 그가 한 것처럼 그의 귀 볼에 입맞춤을 하자 지혁의 입술에 거친 숨소
리가 났다. 그의 반응은 독한 와인처럼 자극적이었다.
달콤하면서도 거친 욕망의 신음 소리.
수현의 손이 그의 바지의 벨트를 풀어버리고 지퍼를 밑으로 내렸다. 더 이상 흥분하는 것
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지혁은 수현의 입술이 자신의 젖꼭지를 살짝 깨물자 자신의 생각
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녀의 차가운 손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굳어진 자신의 남성을 살며시 잡자 지혁은 수현의
머리를 움켜 잡고 거친 입맞춤을 했다.
마치 영혼의 저 편에 닿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강한 입맞춤이었다. 지혁은 수현의 다리
를 버리고 자신의 몸을 그녀에게 밀착 시켰다. 수현은 두 팔로 지혁의 목을 감으면서 그의
입맞춤에 빠져들었다.
지혁은 수현의 허벅지를 잡아 올리면서 한 손으로는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지혁은 수현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이미 촉촉해졌지만 지혁의 뜨거운
불길이 거침없이 자신 속으로 들어오자 몸을 가르는 고통으로 수현의 몸이 굳어졌다.
고통어린 신음 소리를 들은 지혁은 수현의 입술에 깊숙이 혀를 밀어 넣었다. 입속에서 움직
이는 지혁의 혀가 주는 짜릿한 달콤함이 굳어졌던 그녀의 긴장감을 서서히 풀었다.
수현의 몸이 풀리면서 자신을 부드럽게 조이자 지혁은 강한 쾌감을 느꼈다. 수현의 입술을
깨물면서 지혁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그의 움직이 거칠어질수록 수현은 밝은 섬광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몸 속에서 움직이는 지혁의 단단한 남성이 주는 달콤한 고통이 너무나 좋았다. 그리
고 그가 자신에게 주려는 무엇가를 두려우면서도 강하게 원하게 되었다.
지혁이 주려는 그 순간은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순간 그녀의 몸이 경직되면서 한 번도 경험
한 적이 없는 강렬한 불꽃이 그녀를 감싸고는 함께 터져버렸다.
수현은 자신의 세계가 파괴되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더 이상의 예전의 그녀가 아님을 아니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알 수가 있었다.
수현의 열정어린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 지혁은 그녀가 절정에서 나약하게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생생한 절정을 보자 가슴 가득차는 남성적인 만족감이 그 어떤 것보다도 자
극적이었다. 수현이 자신을 강하게 조이자 지혁은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은 손에 힘을 주
면서 자신을 강하게 그녀 속으로 밀어 넣었다. 거친 움직임이 멈추면서 지혁은 수현의 입술
을 강하게 빨아 들면서 자신을 그녀 몸 깊숙이 쏟아 부었다.
기분 좋은 포근함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새엄마가 계셨을 때는 언제나 느꼈던 포근함이.
천천히 눈을 뜬 그녀의 눈에 처음 들어 온 것은 강인해 보이는 남자의 턱이었다. 수염이 거
뭇한 턱에서 시선이 머물렀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인식한 것은 자신의 얼굴이 남자의 가슴
이 밀착되어 있다는 거였다. 엎드린 자세로 남자의 가슴에 몸을 반쯤 올려 놓은 채 얼굴을
묻고 있었다. 묵직한 남자의 팔이 자신의 허리를 안고 있었다.
힘차게 뛰는 지혁의 심장 소리가 바로 귀 밑에서 들려 왔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느꼈던 기분 좋은 포근함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당혹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눈을 깜빡이자 그녀의 속눈썹이 지혁의 가슴을 스쳤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수현
은 잠들어 있는 지혁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몸을 휘감고 있는 다리를 살며시 움직였다.
허리에 감긴 그의 팔에서 빠져 나오려는 수현를 다시 안으면서 지혁이 중얼거렸다.
「좀 더 자.」
「일어날래요.」
몸을 움직이려는 수현의 머리에 얼굴을 묻은 지혁의 입술이 움직였다. 산뜻한 내음이 나는
머리카락을 애무하던 그의 입술이 수현의 감긴 눈으로 내려왔다.
「고집불통」
반박하려 입을 연 수현의 입술을 지혁의 입술이 내리 눌렸다. 달콤한 입술을 마음껏 탐닉면
서 수현의 작은 숲을 헤치면서 떨고 있는 욕망을 만졌다. 수현은 또다시 그 열정의 한 가운
데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 날 이후 그녀는 자아가 분리되는 것만 같았다. 이성적인 자아는 육체적 욕망 앞에 속수
무책인 그녀를 끝없이 경멸하고 질책했다. 새어머니로부터의 더러운 욕망이 그녀에게 그대로
전해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결코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허락하지 않으리라
고..
그러나 지혁이 어둡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면 그녀의 이성적 자아는 침
묵하고 말았다. 장소가 어디인지 시간이 언제인지는 의식 속에서 멀어져 갔다. 그의 입술이
주는 느낌만이 그녀의 의식 속에 새겨졌다.
갑작스런 호출로 그의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지혁이 예의 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서 문
을 잠가도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몇일 전 그의 차 안에서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허벅지에 자국
을 남길 때도, 그리고 그의 아파트 문을 닿기도 전에 그가 현관문에 그녀를 밀어붙이면서
스커트를 올려 버렸을 때도.
그의 눈빛에 사로잡히는 순간부터 작은 파문처럼 온 몸에 퍼지는 전율을 막지 못하고 서 있
었다. 그의 손이 허리를 감싸 안자 수현은 두 눈을 감았다. 욕망으로 굳어진 그의 입술이 옷
깃을 젖히고 가슴을 아리게 빨아 들여도 작은 헐떡임만이 입술을 가르고 나왔을 뿐이었다.
떨리는 수현의 손가락에 지혁의 머리카락이 감겼다.
지혁의 숨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전성진 경위에게 미소를 짓는 수
현을 본 순간부터 참아왔던 지혁은 퇴근 시간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강한 자제심으로
억눌렀던 갈망의 사슬이 한 번 풀리자 지혁은 수현에 대한 욕망은 그의 통제력을 벗어나 있
었다. 냉철한 자제력을 자랑하던 그 자신도 그 욕망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는 30
분조차도 영원 같았다. 수현을 이렇게 거칠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허기진
그의 입술은 섬세한 그녀의 피부에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입 속에서 단단해지는 그녀의 젖꼭지는 너무나 달콤했다. 그녀의 작은 신음 소리만
큼 자극적인 소리들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지혁은 고개를 들어 수현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열정으로 흐트러진 그녀의 시선이 그의 가슴 속에 들어왔다.
의자에 앉은 지혁은 수현을 안아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수현의 청바지 지퍼를 내리면서 지
혁은 수현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촉촉히 물기를 담고 있는 그녀 속으로 손가락을 넣자
수현의 몸이 한껏 뒤로 휘어졌다.
「조용히. 소리내면 안 돼.」
국장실 밖에서 들리는 동료들의 소리가 수현의 의식 속으로는 들어왔다. 수현은 입술을 깨
물며 지혁의 이마에 빰을 대었다. 그의 손가락이 마법 같은 전율을 일으키자 수현은 그의
손가락의 리듬에 맞추어 천천히 움직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지혁은 수현의 입술을 벌려 뜨거움 입맞춤을 하면서 속삭였다. 그녀의 머리를 움켜잡고 갈
망으로 뜨거워진 그녀의 몸 속으로 거침없이 깊숙히 돌진했다. 터져나오는 수현의신음 소리
를 삼킨 지혁의 리듬은 더욱 빨라졌다.
지혁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갈증이 왜 이렇게 끝없이 생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를 마
음껏 음미한 후에도 충분하지가 않았다. 그녀의 몸 뿐만 아니라 영혼마저도 소유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더욱 커저가고 있었다. 수현이 꼭꼭 감추고 있는 아픔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
기도 전에 그녀를 갖은 자신을 수없이 책망하고 후회도 했지만 그도 그저 한 남자일 뿐이라
는 것을 그도 인정해야만 했다. 그것도 강한 욕망 앞에서 더 이상의 어떠한 자제심도 남아
있지 않는...
그녀가 자신의 사랑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날까지 견딜 수가 있을 자신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을 알았다.
13.
수현은 어둠이 내린 창 밖을 바라보면서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따뜻한 커피 잔을 쥐고 있
지만 손가락 끝의 차가움은 여전했다. 실내 온도가 낮은 것도 아닌데 그녀는 정체모를 추위
에 떨고 있었다.
아니 분명한 이유를 그녀는 부정하고 있었다.
지혁에게서는 아직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전화할께」
경찰 총감님의 호출로 총감님과 저녁식사를 하러 나가면서 말하던 지혁에게서 새벽 한시가
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시계의 바늘이 원을 그릴 때마다 수현은 조금씩 추워지기 시작했다.
바보 같아.
수현은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위험한 사건 현장에 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총감과 저녁을 먹으러 갔을 뿐인 걸 알면서도 기다려지고 또 기다려졌다.
송학규의 사건이 해결된지도 벌써 2달이 되어가지만 그 후로 그녀가 혼자서 잠이 든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처음 얼마동안은 그녀의 계속되는 악몽 때문이었다. 송학규의 더러운 손길은 꿈속에서도 너
무나 생생했기 때문에 수현은 매번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숨을 몰아쉬곤 했었다.
그 사실은 안 지혁은 자신의 품 속에서 그녀를 잠들게 하기 시작했다. 그후로 수현이 혼자
서 잠이 드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한 숨을 쉬면서 커피 잔을 탁자에 올려 놓았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그리 쉽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침실 문을 여는 순간 현관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들어서는 지혁을 보자 수현은 얼어붙은 손가락에 온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아직 안 잤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지혁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머리칼에 묻었던 입술을 목덜미
를 미끄러뜨리면서 지혁은 작은 숨을 내 쉬었다.
「음. 좋은데.」
짙은 욕망의 베일이 그녀에게 휘감쌌다.
그의 미소가, 그리고 자신의 몸에 와 닿는 그의 숨결에 중독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자
숨이 막혀 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수현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듯한 깊은 눈빛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녀가 의식 저 깊이 숨
겨왔던 사실.
지혁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갈망.
나는 그를 사랑해.
지혁은 자신의 품 속에서 수현의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지혁의 품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창백해진 수현의 얼굴을 보면서 지혁은 그녀가 자신을 밀어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언
젠가 걸려왔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녀의 표정이 떠올랐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에 부딪쳤을 때의 두려움이 가득 차 있던 얼굴.
지혁은 수현의 턱을 잡아 외면하려는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녀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듯한 강한 시선 앞에서 수현은 이를 물었다.
절대로 그가 알게 해서는 안돼.
그녀는 감정의 끝자락이라도 그에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새엄마에 대한 지독한 사랑 때문에 서서히 무너져가던 아버지의 영상이 떠올랐다.
난 견딜 수 없을 거야. 멈추어야 돼.
수현은 지혁의 시선을 마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요. 우리의 관계를 끝내는 것에 대해서요.」
「끝내는 것?」
지혁의 목소리는 불길할 정도로 낮고 부드러웠다. 수현은 뒤로 물러나면서 말했다.
「그래요. 끝내는 것.」
「왜 끝낸다고 결론을 내린거지?」
그의 차분한 말투가 수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남자는 헤어지자는 말에도 아무런 반응조차 없어!
「당신에 대한 일시적인 성적 흥분이 매력을 잃었다고 해두죠.」
「일시적인 성적 흥분.?」
「그래요. 이젠 지루해졌다구요. 그게 얼마나 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창백한 얼굴의 수현을 보면서 지혁은 마음 속으로 크게 한 숨을 내쉬었다. 이 번만큼은 그
녀에게 가깝게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자신과의 사이에 벽을 쌓고 있었다.
지혁은 그 벽을 용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 겁에 질린 듯한 그녀에게 자신의
강렬한 감정을 내 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완전히 공포감에 빠져버릴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아하. 그렇군 지루해진 성적 흥분이라.」
가늘게 내려 뜬 그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지혁은 한 손으로 수현의 목덜미를
잡아 강하게 입맞춤을 했다.
수현의 입술을 억지로 가른 지혁의 뜨거운 입술은 거침없이 그녀의 달콤함을 빨아드렸다.
자신의 가슴을 밀고 있는 수현의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한 손으로 움켜 잡았다. 한껏 젖혀
진 가느다란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말하는 지혁의 목소리는 그가 내뿜는 뜨거운 숨결과는
달리 어둡게 가라 앉아 있었다.
「일시적인 성적 흥분?.」
그가 목덜미에 짙은 자국을 남기자 수현은 자신의 은밀한 곳이 벌써 촉촉해지는 것을 느꼈
다. 옷 속으로 들어간 지혁은 손은 단단하게 솟아오른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만지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봐. 지루하다고.」
「비겁한 사람.」
수현은 터져나오는 신음 소리를 삼키면서 그를 노려 보았다.
「겁쟁이.」
지혁은 나이트 가운 밑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숲을 헤치고 있었다. 촉촉히 젖어 있는 것을
확인하자 나지막하게 웃음 터트렸다.
「당신의 머리보다는 몸이 더 정직하군.」
그의 손가락이 작은 욕망의 중심을 문지르자 수현은 억눌렸던 열정 속을 빨려 들어갔다.
14.
수현은 지혁이 총감실로 올라간 것을 확인한 후에 빈 사무실 책상 위에 사직서를 놓았다잠
시 동안 그 하얀 사각형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 국장실을 나왔다.
「그가 지적한대로 난 겁쟁이야.」
헤어지자는 자신의 말을 들은 척도 안하는 지혁이나 언제나처럼 끌려 들어가 버리고 마는
자신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비록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라는 것
을 생각했다.
그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너무나 두려웠다.
아버지처럼 잃어버린 사랑은 자신을 천천히 말라 버릴 것이 분명했다.
지혁이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자신의 사랑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성적 탐닉과 소유욕이 얼마나 갈지 알 수가 없었다.
총감님의 호출이 있는 날은 거의 예외없이 국장실에 들르지 않고 바로 총감님과 함께 퇴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일까지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부드러운 브라운 체크 무늬 코트를 입은 수현은 경찰청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벨벳 팬
츠가 기다란 다리를 더욱 길게 보이게 했다. 창백한 표정으로 로비문을 밀려던 수현은 자신
을 부르는 소리에 멈칫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한 여자가 로비 가운데 서 있었다.
「수현아.」
언제나 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새엄마였다. 수현의 시선은 얼어붙어 버렸다. 차가운 얼음물 세
례를 받은 것처럼 그렇게….
새엄마가 천천히 다가오자 수현은 쉬는 것을 잊어버렸던 숨을 가만히 내쉬었다.
「너무나 예쁘게 자랐구나. 난…」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수현의 굳은 얼굴을 보자 수현의 새엄마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
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날 보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보
고 싶어서」
로비 문을 움켜잡고 있던 수현은 로비 안으로 들어오려는 남자가 문을 잡아 당기자 손을 놓
고 옆으로 비켜섰다.
「우리 잠시만이라도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수현은 두 눈 가득 눈물을 머금고 있는 새엄마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의 가슴 속에 수 많은 가
시가 와 박히는 아픔을 느꼈다. 목이 메어와서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새엄마가 머뭇거리며 그녀의 손을 잡자 수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간이 별로 없어요. 바쁜 일이 있어서.」
「그래. 잠시면 돼. 그냥 여기서 가까운 어디라도.」
수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새엄마의 손에 잡힌 손을 뺐다.
「가요. 그럼.」
지혁은 총감님과 함께 로비를 걸어 나오다 수현이 한 여자와 경찰청을 나가는 것을 보았다.
창백한 표정의 수현은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보였다. 무기력함과 두려움이 가득한 그녀를
보자 지혁은 걱정이 되었다.
함께 나간 여자는 누가 보아도 수현의 새어머니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정도로 그녀와 많이 닮
았다.
「아버지. 오늘은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요.」
지혁은 총감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최상준 총감을 보면서 말했다.
「방금 나간 사람이 이수현 경위인 것 같은데?」
「네. 오늘 정식으로 인사드릴려고 했는데 이 경위가 다른 약속이 생겼나봐요.」
「국장님」
지혁은 흰 봉투를 들고 뛰어오는 전성진 경위를 돌아보았다.
14.
아파트 문을 닿은 수현은 그대로 잠시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두 눈을 감고 그대로 서 있
던 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거실로 들어서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커다란 형체를 보고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지혁은 소파에서 일어나 실내등을 켰다.
자신에게 다가가는 지혁을 바라보는 수현의 커다란 두 눈에는 생기라고는 한 가닥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지혁은 차갑게 얼어붙은 그녀의 두 볼을 두 손을 감싸 쥐었다.
「저녁은 먹었어?」
고개를 가로 젖는 수현의 두 눈에 눈물이 부풀어 올랐다.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에 맺혔던
눈물이 볼 위로 떨어졌다.
수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혁의 시선을 받으면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버렸다.
짧았지만 너무나도 힘겨웠던 새엄마와의 만남 이후 차가워진 커피 잔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겨우 일어서 커피숖을 나왔다.
새엄마는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았던 아버지와의 결혼 생활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고 했
다. 그나마 그 때 까지 참았던 것 수현이 있어서라고. 그리고 자신이 찾은 단 하나의 사랑을
놓칠 수가 없었다고. 차마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저 수현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고.
입술을 깨물고 있는 수현을 가슴에 안으면서 지혁은 그녀의 슬픔이 짙어가는 것을 느꼈다.
「참지마.」
지혁은 수현의 머리 위에 입술을 묻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수현은 지혁의 가슴에 얼굴을 묻
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셔츠가 흠뻑 젖어올 때까지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고 있던 지
혁은 수현의 흐느낌이 잦아들자 그녀를 안아 소파에 앉았다.
지혁은 수현의 머리카락을 한 없이 만지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따
라 흘러내리는 반복적 움직임은 그녀의 상처 난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힘차게 뛰고 있는 지혁의 심장소리 역시 그녀를 진정시키는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무런 질문도 없이 그저 그녀의 아픔을 그대로 보듬어 주고 있는 그가 너무나 고마웠다.
지혁의 무릎에 앉아 단단한 팔 안에 안겨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자 수현은 가슴을
아프게 했던 멍울이 서서히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혁은 차츰 진정이 되어가는 수현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눈물로 얼룩져 있는 그녀의 얼굴로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흐느낌이 남아있는 입술에 입을 맞추면서 그녀의 슬픔을 자신이 모두
마셔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은 수현의 눈물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이렇
게 가슴 아프게 흐느끼도록 만들지 않을 작정이었다.
「새어머니였지?」
지혁은 입술을 살며시 떼면서 수현에게 물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지난 6년 동안 한 순간도 날 잊은 적이 없다고. 너무나 가슴 아팠다고.」
지혁은 그 말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수현의 신상기록에서 이미 아버
지는 경찰 근무 중 순직한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의 새어머니와는 이혼한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수현이 그토록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이 그 이유가 아닌가 하고 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 이상은 수현이 그런 아픔을 혼자서 감내하게 하지 않겠다고 지혁은 다짐했다.
「사표냈더군.」
지혁의 갑작스런 말에 그녀의 몸이 굳어졌다. 수현은 숨을 죽이면서 지혁의 말을 듣고 있었
다.
「곧 수리가 될거야.」
차분한 지혁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수현은 새로운 슬픔이 자신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사직에 대해서 그가 화를 내리라고 왜 생각했을까
새엄마의 외면보다도 지혁과의 관계가 이제 끊어진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수천 조각으로 갈라
지는 것 같았다.
「알았어요」
그래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거야. 새엄마와 마찬가지야. 나를 생각하기는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
는거야.
굳어진 표정으로 일어서려고 하는 수현을 지혁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힘겹게 일어선 수현
은 코트를 벗어 쇼파에 놓았다.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지혁의 시선을 피했다.
「잘 됐군요. 걱정했는데.」
「그래. 잘 됐어」
방금 전까지 더할 수 없이 포근하고 자상했던 지혁이 이처럼 잔인하다는게 믿어지지 않았
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저녁 안 먹었다고 했지. 뭐 먹으러 나가지. 얼굴이 너무 창백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바라보는 지혁을 보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상처난 가슴에
서 얼마나 피를 흘리는 것을 보려는 것일까, 이 남자는.
「싫어요. 너무 피곤해요. 이제 그만 가세요.」
지혁은 두 눈에 분노를 가득 담고 자신을 노려보는 수현의 상기된 표정을 보면서 웃음을 터
뜨렸다.
「쫒아버리는 건가? 싫은데」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터져나오는 비명을 깨물며 고개를 돌리려는 수현의 얼굴을 지혁은 두 손으로 감싸 안고 그
녀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혼자서 모든 걸 참으려고 하지 말아. 아파하지도 말고」
물기어린 수현의 눈동자에 다시 뜨거운 눈물이 차 올랐다.
「이런. 울게 만들려 한게 아닌데.」
지혁의 부드러운 눈빛은 수현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가 이처럼 어루만지면 그녀는
어찔 할 바를 몰랐다.
지혁은 물기 어린 수현의 얼굴에 입술을 가만히 맞추었다.
「난 절대로 떠나지 않아.」
지혁은 수현의 입술에 힘차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낼 때까지 그의
뜨거운 혀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수현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의 입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지혁은 천천히 입술을 떼고는 수현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안으면서 말했다.
「사랑해.」
수현이 놀라서 고개를 들자 지혁이 미소를 지었다.
「몰랐어? 이 바보. 매 순간마다 사랑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는데도.」
「난, 난 그저 한 순간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했어요.」
「고집부리느냐고 제대로 보지를 못했군.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
어. 결혼하는거야.」
수현은 지혁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면서 참았던 숨을 내 쉬었다. 힘차게 뛰는 지혁의 심장소
리를 들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나 모든 것이 소용돌이치고 있어서 어지러웠
다.
자신의 입술로 파고드는 지혁의 뜨거운 혀를 받아들이면서 수현은 작게 헐떡였다. 거침없이
옷깃을 젖히는 그의 손길에 아득해지면서 수현은 그의 갑작스런 사랑 고백은 다음에 차분히
음미하리라 생각했다.
****************************The end************************
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라니]아름다운탐닉.txt
오전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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