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소설은 일반인이 거북해 할수 내용이 담겨 있을수 있습니다. BDSM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되돌아가기를 누르기를 바랍니다.
Daum 카페
지영공주V 카페(http://cafe.daum.net/yovng0423/)
게시판: ‥‥ 공주완결소설②〃
번호: 224
제목: 이태리의 살바체(1막-게임의 시작)
글쓴이: 지영공주V
조회: 2150
날짜: 2005/03/07
##수정인물이름수정. 명칭수정. 오타수정. 문법수정. 내용수정 (틀린곳은 꼬리말로...)##
-Prologue (프롤로그)
“오늘 뭐했지? 귀여운 고양이?”
살바체의 물음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희진의 턱선이 굳게 다물어 졌다.
살바체의 짙은 눈썹 한쪽이 올라가는 것이 무슨 뜻인지 희진은 알고 있었다.
살바체의 눈썹이 동시에 올라가면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산책“
“또?”
“잤어요.”
“또“
“식사 했죠.”
“또…”
희진은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서 이번엔 그를 놀려 줄까?
어떻게 복수해 줄까?
희진은 요즘 이 생각 밖에 하고 있지 않았다.
“당신 개 있죠?”
“제레미?”
희진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흥미롭다는 듯 살바체가 각진 자신의 턱선을 문질렀다.
“계속해.”
“그 개 임신 했더군요.”
“만졌나?”
“만졌죠. 예뻐서 한참 예뻐해 줬죠. 처음보다 이제 절 잘 따르더군요.”
살바체가 희진의 말이 우스운지 훗 하고 코웃음을 쳤다.
눈… 파랑색의 그 눈이 짙은 청색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
“너의 카나리아의 대한 복수인가?”
살바체의 긴 손가락이 희진의 턱을 앞으로 당기고 고집스런 검은 눈을 똑바로 응시 했다.
희진은 주눅 들지도 않고 맞받아 쳤다.
“죽여요. 내 카나리아처럼…”
“후후, 하하하하“
살바체의 은빛과 비슷한 금발머리가 고개를 젖히고 웃을 때마다 이마에서 가늘게 흔들렸다.
희진은 알고 있었다.
천사처럼 생긴 저 얼굴과 정 반대로 악마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복수. 복수할 테야. 두고 봐…'
희진의 눈빛이 반짝 빛날 때 살바체가 순간 웃음을 멈추고 한쪽 입술 선을 비스듬히 올렸다.
“내 작은 고양이가 내 애완견을 만졌다? 죽이길 원한다?”
희진은 살바체가 죽일 리 없을 거라 생각 했다.
이 저택에서 그의 사랑을 받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바로 그 스페인산 토종의 개 제레미 라는 것을…
살바체의 시선이 제레미를 볼 때 부드럽게 변한다는 것을 희진은 여러 번 목격 한 바가 있었다.
“쿡, 재밌어. 날 시험 하다니…”
살바체는 그 말과 함께 허리를 펴고 일어나 고급 탁자에 올려져 있는 전화기를 들고 말했다.
“제레미 가져와.”
단 한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은 살바체가 희진을 향해 천천히 유유히 돌아 섰다.
탁자의 비스듬히 기대 팔짱을 끼고 희진의 시선을 잡고는 살짝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살바체 때문에
희진의 미간이 저절로 좁혀 왔다.
“하루가 지날수록 날 더 닮아가는 건가? 아니면 원래 잔인한 여자였나.”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그의 물음에 희진 역시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내 잔인성을 당신이 끄집어냈겠죠.”
“쿡“
그때, 문이 열리며 듬직한 체구의 그을린 몸매를 하고 하인이 늑대만한 크기의 흰털이 풍성한 제레미를 데리고 들어섰다.
제레미는 주인인 프란체 살바체를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살바체의 내민 손을 핥았다.
제레미를 데리고 온 하인이 나간 후에 살바체가 여전히 제레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스럽다는 듯 주저앉아 자신의 어깨에 제레미의 머리를 올려놓고 안았다.
희진은 그 모습을 보고 코웃음 쳤다.
'당신은 죽일 수 없어.'
희진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프란트 살바체는 희진의 표정을 힐끗 보고는 다리를 피고 천천히 일어섰다.
희진의 시선이 그를 따랐다.
살바체는 구석의 고급 장식장 안에 취미로 모아놓은 구식 칼들이 즐비한 곳에서 잘 다듬어진 날렵한 칼집을 하나 꺼내 들었다.
'스르륵'
칼집에서 길게 뻗어 나오는 칼의 스침 소리가 희진을 소름끼치게 했다.
희진은 그 때만 해도 설마 하며 살바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잘 봐.”
살바체는 희진을 눈으로 한번 눈짓하고는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칼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을 만큼 날렵한 동작으로 제레미의 목안에 칼끝을 밀어 넣었다.
“캥, 캥!”
'헉!'
희진의 눈 안에 지금의 모습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다가왔다.
제레미의 작은 탄성!
뿜어져 나오는 제레미의 목에서 타고 흘러나오는 붉은 피…
조금의 양심도 없이 애정도 없이 제레미의 목을 뚫고 들어가는 그의 칼…
그의 입술의 즐거운 듯 올라간 입술 선까지…
희진은 할 말을 잃었다.
'스윽…'
'털썩'
목에서 빠져 나온 칼이 빠지자마자 바동거리던 제레미는 힘을 잃고 부르르 몸을 떨다 곧 움직임을 멈췄다.
희진 역시 숨을 멈췄다.
'너무 큰 도발이었어. 그를 또 얕잡아 봤어.'
살바체는 피가 묻은 칼을 들고 천천히 희진을 향해 걸어 왔다.
움찔하는 희진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살바체는 진지한 눈으로 희진을 보며 피가 묻은 칼을 희진의 목선에 갔다 댔다.
“조심해. 너도 저 꼴이 될 수 있어. 내게서 도망치면 말이야.”
희진은 살바체의 진지하고 자신만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을 보며 말했다.
“제레미의 뱃속의 새끼들… 어쩌면 살릴 수 있을 지도 몰라요.”
“훗, 살리고 싶나?”
“살려 줘요. 지금“
희진의 말이 우스운지 프란트 살바체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칼을 칼집에 넣고는 말했다.
“왜 그래야 하지? 넌 또 만질 텐데.”
“차라리 내 손목을 자르지 그래요?!”
전화기 쪽으로 가는 그의 등에 대고 희진이 소리 쳤다.
살바체가 피식 웃고는 칼을 소리 나게 탁자에 올려 두며 말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야. 원한다면 해주지. 원해?”
“…….”
희진의 말이 없는 모습을 보며 살바체는 전화기를 들고 말했다.
“제레미 데려가. 수의사 부르고.”
“…빨리요.”
“급하다는 군….”
남 일처럼 말하는 살바체는 그 말을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고 가늘게 분노해 떨고 있는 희진을 향해 유유히 걸어갔다.
-※1막-게임의 시작※
Giselle의 생사[1장]
이태리제 검은 정장의 살바체는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극장인 ‘몬체크루소’ 로 향했다.
은색의 긴 승용차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살바체의 얼굴이 지나가는 밀라노 거리 불빛에 음영을 만들었다.
“뭐 하러 가자고 하는지 모르겠군.”
무뚝뚝한 살바체의 심드렁한 목소리에 붉은 머리의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 실비아 로세니는
살바체의 팔에 풍만한 가슴을 내밀며 기대와 말했다.
“후원하는 곳에 가보지 않으면 돈이 아깝잖아요? 살바체?”
“별로.”
“지젤 1막만 보고 나오자 구요. 당신이 급한 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유혹의 강한 여자.
실비아 로세니…모델을 하고 있는 젊은 나이답게 미모의 아름다운 여자였다.
실비아는 살바체의 남성에 자신의 손을 갔다대고 유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기대하지.”
살바체는 적극적인 여자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항상 그 유혹에 지지도 않았다.
은색의 긴 승용차가 ‘몬체크루소‘에 도착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쏟아지고, 살바체는 실비아 로세니의 팔을 끌어 자신에게 팔짱을 끼어 넣고 꾸민 미소를 지었다.
실비아 역시 살바체의 볼에 살짝 키스해 애정을 과시 했다.
'프로군.'
또 어떤 면에서 프로일지 살바체는 자못 궁금했다.
극장 안 입구에서 오늘 발레 지젤의 안내 책자를 받아 들고 살바체는 극장 안으로 들어가 예약 석에 앉았다.
가장 잘 보이면서도 귀빈석보다도 한 단계 높은, 웬만한 사람은 앉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그런 좌석에 앉으면서도
살바체의 얼굴은 별 흥미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살바체. 이 여자 동양인 이예요. 지젤이 동양인 이라니… 어울리지 않게.”
자신의 코앞에 팸플릿을 들이대는 실비아를 살바체는 손을 치우게 하고 옆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언제나 최고의 삶인데도 살바체의 인생은 흥미와는 다른 무료함이다.
차라리 이럴 시간에 이 여자의 고성이 어디까지 높아질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게 더 짜릿할 것 같다.
무대 조명이 꺼졌다.
'꽈꽝!'
시끄러운 교향곡이 흘러 나왔다.
'지젤' 이젠 스토리와 몸동작까지 완전히 외워버린 발레…사람들은 똑 같은 스토리 몸동작에도 환호와 같은 갈채를 보냈다.
'지루하지도 않나?'
순간 지젤이 등장 했다.
지루하다는 듯 이마를 좌우로 만지던 살바체의 엄지손가락이 정지 했다.
처음엔 그저 잘하는 군. 정도의 느낌이었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가장 지젤다운 지젤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아함을 겸비한 힘이 넘치는 몸동작,
하나하나 움직이는 손동작까지 정확한 감정표현을 자아내고 있었다.
환하게 지젤답게 웃는 미소 또한 아름다웠다.
'뭐지? 저 발레리나?!'
자신만의 지젤… 똑같은 몸동작으로도 그녀는 자신만의 지젤을 무대에서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함성이 지젤의 움직임에 따라 호흡을 같이 했다.
“오! 굉장한데요.”
“조용히 해.”
실비아의 목소리가 방해 되는 것도 짜증난다는 목소리의 살바체는 줄곧 무대에서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실비아는 살바체의 눈이 반짝이며 무대에서 떠나지 않는 것에 괜히 심술이 났다.
살바체의 관심에서 벗어나는 것.
자존심 상 용납할 수 없었다.
예술이라 할지라도…
1막이 끝이 났다.
실비아는 살바체의 팔을 잡고 몸을 기대며 말했다.
“우리 막이 끝났어요. 살바체. 그만 가요.”
살바체는 그러나 1막에서의 여운을 즐기며 이마를 만지고는 의자에 반대로 실비아의 바램과는 반대로 몸을 깊숙이 묻었다.
“실비아. 우리 막이 아니야. 저 동양인 지젤의 1막이지. 가만있어. 이제 곧 막이 오른다고“
“살바체!”
그 후 실비아는 무대를 보면서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살바체를 힐끔 거리고 노려보았다.
오늘 그를 위해 꾸민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있었다.
'지젤. 저 여자는 지젤이 되기 위해 태어난 발레리나다. 백년에 한번 날까 말까한 지젤이다.'
살바체는 눈을 빛내며 지젤에게서 눈을 때지 않았다. 곧 지젤의 2막의 막이 올랐다.
* * *
'하아, 하아'
“굉장했어. 진! 최고의 지젤 이였어.”
희진의 눈이 빛났다.
해 냈다는 눈빛이 행복으로 넘쳐흘렀다.
꿈에 그리던 이태리에서 지젤을 해낸 것이다.
일생의 꿈을 이뤘다는 성취감이 희진의 온몸을 감쌌다.
“나가봐. 어서! 모두 지젤을 소리쳐 부르고 있어. 저 박수 소리를 들어보라고!”
단장 아르한의 말에 희진이 웃으며 무대 안으로 우아하게 뛰어 들어 갔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갈채와 함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Bravo!!”
“Wonderful! Bravo!”
희진은 눈물이 났다.
벅찬 감동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상대역을 맡은 발레리노 포체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파트너 중 가장 뛰어났어. 나의 지젤“
희진은 포체의 목을 끌어안고 볼에 키스하고 기쁨을 나눴다.
이 순간 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을 듯 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는 희진이 무대를 나와서도 계속 되고 있었다.
함께 무대에 올랐던 동료들도 얼싸안고 서로 기뻐했다.
특히 희진은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축하를 받았고 얼굴에서도 빛이 났다.
“진! 전화!”
무대에서 내려선 희진을 누군가 불렀다.
희진은 안아주며 격려하고 기뻐해 주는 사람들의 볼에 키스해주고 답례하고는 전화를 받으러 분장실로 들어섰다.
“하아, 여보세요?”
[끝났나?]
“시원 씨? 네. 끝났죠. 축하해 주러 전화 준건가요?”
[당연하지. 아니면 이 시간에 뭐 하러 전화 하겠어.]
“하하, 그러고 보니 거기 새벽 3시군요.”
희진은 전화 받는 와중에도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어떤 사람은 꽃을 가져다 주기도하고,
축하해 주려 방문한 동료들이 희진의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기뻐하고 웃고 서 있었다.
“어쩌죠? 지금은 전화를 길게 못할 것 같은데“
[최 희진씨. 당신이 축하 받으니 기분이 좋긴 하지만 말이야.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후후, 당신이 내 약혼자라는 것 말인가요?”
[아니, 네가 내 여자라는 사실]
희진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꽃다발을 건네는 동료의 볼에 재빨리 입을 맞춰 주고는 말했다.
“권 시원씨. 지금은 만인의 지젤이니까 잊고 싶군요. 그만 끊어요.”
* * *
가차 없이 끊어지는 전화에 권 시원은 이마를 만졌다.
지금껏 이런 식으로 자신을 대한 여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참아주는 이유는 이 여자가 가지고 있는 배경도 한 몫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여자의 열정, 길들여지지 않는 자유… 그것이 가지고 싶다.
“훗“
시원은 전하기를 내려놓고 탁자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가운을 벗어 던진 시원은 침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서 자신의 침대에 있는
흰 피부의 뽀얀 여자의 엉덩이와 매력적인 곡선을 쳐다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시원의 손이 여자의 곡선을 따라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따라 그려졌다.
“흐…음“
여자가 신음을 흘리며 시원의 가슴 쪽으로 몸을 이동했다.
'세상엔 의미를 부여 할 여자와, 의미 없는 여자… 두 종류가 존재 하지.'
* * *
다음날, 혜성그룹 실장실.
'꽝!' 하며 실장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최희진의 사촌 오빠인 최 수혁이 들어섰다.
수혁은 시원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거칠게 물었다.
“어제 희진이와 통화 했었나?”
“왜 그러십니까?”
다짜고짜 예의도 없이 벌컥 들어 온 것도 못 마땅한데 들어서자마자 뜬금없는 질문이 시원은 좋을 리 없었다.
수혁은 찌푸려진 시원의 표정을 보면서도 들고 있던 신문을 거칠게 시원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
“희진이 묵고 있던 호텔에 테러 사건이야! 당장 희진이 어느 층에 묵었는지 알아봐!”
“그럴 리 없습니다. 어제 오후에도 통화를 했었습니다. 제길! “
시원은 수혁이 던진 신문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말하면서 다급하게 희진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수혁 역시 인상을 쓰며 시원을 쳐다보고 거칠게 머리를 넘겼다.
“안 받습니다.”
“호텔에 전화 해봐.”
다시 시원이 전화번호를 누르고 한참을 기다렸다 전화를 '꽝'하고 내려 놨다.
“안 받습니다. 하, 갑자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예?!”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지금 우리 집안도 난리가 난 상태라고. 희진 그게 기어코 말리는 길을 가더니
일을 당했어. 젠장!”
“장관님도 아실 것 아닙니까?!”
“아직 통화해 보지 못했네. 어서 이태리 경찰서에 전화 해 보라고.”
그렇지 않아도 시원 역시 호텔 전화가 걸리지 않았기에 바로 이태리 경찰청에 전화를 넣고 있는 중이었다.
시원이 누군가 받은 목소리에 빠르게 영어로 쏘아대며 물었다.
“체르니 호텔에 묵고 있던 최희진의 행방을 조사해 주시오. 압니다.
사건 처리도 중요하지만, 생존의 대해 가족에게 먼저 알리는 게 그쪽 일 아닙니까?!
그게 가장 급한 것 아니냔 말이오!! 젠장! 알겠습니다.
여긴 한국… 번호는 02) 372- 1234번이오. 바로 연락 주시오.”
“뭐라나?”
“아직 실종 명단이나 사망자 명단이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길… 3층에 있었다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거란 소리나 하고…!“
신문의 사진 상으로도 3층은 쑥대밭 이였다.
“집중적으로 그 층만 노렸어. 큰일이군… 희진이 높은 층엔 잘 묵지 않는 것 자네 알고 있나?”
시원은 신문을 읽으며 입을 꾹 다물고 수혁의 말에 불안한 눈을 하고 기사의 사진을 노려보았다.
[오늘 새벽 5시경. 동이 트기 직전에 일어난 폭발음이 이태리 밀라노의 아침을 깨웠다.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이탈리아 마피아들의 소행으로 보고 있으나, 뚜렷한 물적 증거가
없어 고심하고 있다. 특히, 밀라노에서 예술인들이 많이 묵고 있는 체르니 호텔은 충격에
휩싸여 있으며, 폭파한 시간이 새벽 5시경 이였기에 자고 있던 투숙객들은 무너지는 건물에
속수무책 이었다. 아직 실종자 관련된 사망자, 부상자의 수는 밝혀 지지 않고 있으나
추정으로는 20명 남짓 다치거나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 현재 이태리는
이 일로 인해 이탈리아를 침묵과 암흑에 휩싸여 침통한 분위기로 가라 앉아 있는 분위기다.
- 현지에서 김 철민 기자]
“분명 문화부장관의 막내딸이 그 호텔에 묵고 있었다는 걸 안다면 여기도 시끄러워 질 텐데.
먼저 형님께서는 기자들 입을 막아 주십시오.”
수혁은 기사를 보며 희진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이 순간에 기사가 날까봐 조바심치는 시원인 것 같아 화가 치밀었다.
“희진이 죽었을지 살았을지 모르는 판국에 자넨 지금 그게 할 소린가?”
“죽지 않았습니다!”
시원은 그 말과 함께 신문을 내려놓고 수화기 버튼을 누르며 비서실에 말하기 전 수혁에게 먼저 말했다.
“제가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말입니다.”
“…!”
[네. 실장님]
시원이 비서의 목소리가 나오자마자 빠르게 말했다.
“이탈리아 밀라노 가장 빠른 비행기로 예약해. 지금!”
[예. 알겠습니다.]
그래도 자신의 약혼녀라고 바로 뛰어가려는 시원을 보자, 수혁은 속으로 아까의 일을 잊고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수혁의 얼굴표정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고, 나가려는 시원을 향해 말했다.
“자네가 가는 사이 무사하다는 희진의 전화가 올지도 모르지 않아?”
“네. 그럼 제 약혼녀의 얼굴을 하루 빨리 볼 수 있으니 더 좋겠죠. 뒷일 부탁드립니다.”
시원은 수혁을 뒤로 하고 바로 실장실을 나섰다.
* * *
- ‘체르니’ 호텔 테러 사건 7시간 전
희진은 알페르 발레단들과 함께 이틀 전에 단장인 아르한이 예약해둔‘세비니’(savini)로 향했다.
밀라노에서 100년 전통을 자랑하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식당이었다.
이틀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입장하기 힘든 식당이었고, 단장은 룸으로 예약해 ‘다빈치’ 발레단 모두를 초대 했다.
두 명의 잘생긴 웨이터들이 일일이 수발을 들었다.
“오늘의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에게 이 정도는 축하해 줘야지“
희진의 옆에 앉은 발레리노 포체가 아르한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웨이터가 1/3정도 따라 주는 포도주의 향기를 음미한 뒤, 포체는 희진에게 사랑을 고백하듯 속삭였다.
“오늘 지젤을 함께 공연하면서, 난 진에게 푹 빠졌다고… 책임져 진.”
“훗, 포체… 그렇게 귀여운 말도 할 줄 알았나요? 알프레히트의 거짓말을 배운 모양이군요.”
희진의 애교석인 그 말에 발레단 전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경쾌한 분위기가 저녁 먹는 내내 그들을 행복하게 했다.
“오늘 봤어요?”
한 여자 단원이 포체에게 기대앉으며 흥분하며 말했다.
“뭘 말인가요? 울라노바“
“오늘 우리 공연에 살바체 프란트가 왔었다는 것!”
올라노바라는 단원의 한마디로 사람들이 전부“오!”하는 탄성을 터트리며 올라노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희진은 밀라노에 와서 처음 듣는 이름이었기에 그저 흥미롭다는 표정일 뿐이었다.
“죠르지오 아르마니의 검은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고 해요.“
“아, 내 눈으로 봤으면 좋았을걸!“
아쉬운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희진은 순간 재밌다 는 표정을 했다.
무척 유명한 남배우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혼자 오진 않았겠죠?”
포체가 올라노바에게 이렇게 묻자, 올라노바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말했다.
“실비아 로세니와 함께 이었다는 군요.“
“오호~ 또 바뀐 모양이군. 실비아 로세니라… 그 여자 20대도 간신히 넘긴 것으로 아는데, 몸매하나는 예술인 여자지.”
포체의 말에 모두들 조금씩 포체를 흘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고 포체는 싱글거리며
앞에 있는 포도주 잔을 들고 실비아 로세니라는 여자를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었다.
“진~! 살바체가 이태리에서 얼마나 유명한 남자인지 잘 모를 거예요. 얘기해 줄까요?”
올라노바가 진의 얼굴을 보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희진은 그 말에 살포시 웃고는 말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제 약혼자에게 이런 말을 들었어요.”
모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희진을 바라보았고, 희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시원의 목소리를 따라하며 말했다.
“이태리에 가서 하지 말아야 할 게 세 가지가 있어. 예술, 쇼핑, 사랑…. 그 중에서 가장 주의할게 사랑이야.
알겠어? 진? “
“하하하“
“너무 낭만적인데?!”
희진이 잠시 뜸을 들이고“흠, 흠, “하고는 피식 미소를 짓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손짓을 하고 말했다.
“이태리 남자에게 빠지지 마. 그들은 정열적이다 금방 식는 사랑을 하니까“
“맞아! 이야… 정말 딱 맞는 말이야.”
“살바체가 그렇잖아? 여자가 두 번 이상 같은 여자 인적이 없었으니까“
여자들의 말이 마음에 안든 다는 듯, 포체가 강력히 자신을 필력하며 말했다.
“아니, 이탈리아 남자들이 전부 그런 건 아니라고!”
희진이 포체의 말에 앞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유혹하듯 포체를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포체. 당신은 남자가 아니잖아요? 낭만을 아는 발레리노 라고요.”
“하하하, 역시 진~! 당신 역시 여자가 아니지. 발레리나니까 말이야.”
야유가 터져 나오고 닭살이 돋는 다는 듯 저마다 이마를 찌푸렸다.
하지만 나중에 진의 말에 모두 박장대소 했다.
“아뇨. 전 여자랍니다. 이태리의 정열적인 남자들에게도 끄떡없는 지조의 한국 여자!
이태리의 남자들 올 테면 와보라고 해요.”
“하하하하“
* * *
- 테러 터지기 10분 전“체르니“호텔 3층
'삑! 삐이이이익!'
계속되는 벨 소리에 진이 침대에서 일어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4시 50분… 이 시간에 호텔 룸에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희진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실크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는 거실로 나갔다.
'쾅쾅쾅! 쿵쿵쿵!'
급하게 누군가 벨이 지겨운지 문을 두들겨 대고 있었다.
희진은 우악스럽고 매너 없는 처사에 더 느릿하게 발걸음을 하고 문도 천천히 열어 재꼈다.
“무슨 일이죠?”
“아, 죄송합니다. 지금 갑자기 최 희진을 찾는 분이 프론트에 오셔서 난동을 부리고 있어서 말입니다.
내려와서 확인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무슨 말이죠? 밀라노에 절 찾는 사람이라니?”
희진이 짜증이나 호텔 벨 보이를 쳐다보지만 계속 긴장을 하고 빨리 준비해 달라는 눈치를 주니,
어쩔 수 없이 기다리라 말하고 대충 옷을 갈아입고는 벨 보이를 따라 나섰다.
'오늘 발레를 보고 찾아온 광팬인가?'
밀라노에서 이런 경험도 하고 재밌네라는 표정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잠깐 희진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벨 보이가 눌러 놓았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검정 코트를 입은 은빛금발의 한 남자가 희진 보다 훨씬 큰 키로 서 있었다.
남자의 청색의 눈이 바로 희진에게 스쳤다가,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몸짓에 희진이 걸음을 옆으로 옮겨 비켜주는 포즈를 했다. 그때!
'꽝!'
갑자기 복도 저 끝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복도가 요란하게 흔들거렸고, 순간 희진은 기우뚱하며 옆에 지나치던 검은 코트의 남자에게 안기다 시피 넘어졌다.
'꽝!!'
아까보다 더 큰 소리가 더 가까이 들려 왔고, 건물 자체가 흔들리며 지진이 난 듯했다.
'구르르르르'
건물 무너지는 소리에 희진은 정신이 아찔해져 왔다.
그때 갑자기 한 남자의 힘 있는 손이 희진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빨리! 이쪽이야!”
희진은 남자의 도움에 고개를 끄덕일 틈도 없이 남자의 팔을 잡고 비상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거의 매달리다 시피 뛰어가고 있었기에, 희진은 남자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뒤로 벨 보이 역시 따르고 있었는지 뛰어 가는 발소리가 연달아 들려 왔다.
'꽝!!!'
다시 한 번 꽝 소리가 내려온 비상문 쪽에서 들려오고, 희진은 순식간에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희진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장신의 검은 코트의 남자가 자신을 감싸 안고 주저앉은 것이었다.
* * *
권 시원이 밀라노 '체르니'호텔에 도착했을 땐, 이미 호텔에 대한 모든 사건이 마무리를 치고 있을 때였다.
시원은 3층이 서울에서 보았던 신문의 사진보다 더 처참히 구겨져 있는 모습을 보며
답답한 마음에 옆으로 지나가는 경찰의 팔을 잡았다.
“사망자 명단이 나왔습니까?”
영어로 빠르게 묻는 동양의 남자를 젊은 이태리 경찰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한 경찰복 입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20분전에 나왔습니다. 저 경찰에게 가 보십시오.”
가르쳐준 젊은 경찰에게 고맙다는 말도 잊고 황급히 가리켰던 남자를 향해 시원은 사람들을 헤쳐지나 다가갔다.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그 이태리 경찰은 한손에 서류를 들고
앞에 있는 사고 가족들에게 빠르게 생사를 확인시켜 주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헬렌 비노… 아, 여기 있군요. 밀라노 병원 응급실로 가 보십시오.”
“많이 다쳤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부상자 명단에 계시는 군요.”
앞사람이 급한 얼굴로 뒤돌아서는 것을 보고 시원이 다른 사람들을 재치고 빠르게 희진의 이름을 불렀다.
“최 희진! 한국인입니다“
남자 경찰이 시원에 말에 서류를 한 장 뒤로 넘기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시원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이름을 확인해 물었다.
“여자 분이고, 동양인이시고, 최 희진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고개를 젓고 이마를 찌푸린 남자경찰이 긴장된 표정의 시원을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밀라노 병원 안치실에서 확인을 해주셔야 갰습니다.”
“그…그게 무슨 뜻입니까?”
“사망하신 것 같습니다.”
시원은 멍해 있는 상태로 누군가가 자신을 재치고 소리치며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류를 들고 있던 이태리 경찰이 안 되었다는 시선으로 시원을 쳐다보며 동정의 시선을 던졌다가
묻는 다른 사람을 향해 신경을 돌렸다.
* * *
오후 햇살이 창문을 통해 직선으로 희진의 얼굴을 때렸다.
눈을 찌푸린 희진이 '음' 소리를 내며 눈이 부셔 천천히 눈을 떴다.
“오! 일어 나셨군요.”
젊은 여인의 인자한 목소리와 함께 희진의 눈앞에 통통한 여자 형체가 검게 자리 잡았다.
희진은 그 형체를 잘 보려고 눈을 비비며 말했다.
“저기, 창문 좀 닫아 줄래요?”
“네. 그럴게요.”
젊은 여인은 그 말을 하자마자, 흰 커튼을 두 겹으로 쳐서 빛을 차단 시켰다.
그제야 통통한 여인의 얼굴이 또렷이 희진의 눈에 들어왔다.
인자하고 포근한 미소를 짓고 서 있는 여인이 먼저 자신을 소개 했다.
“안녕하세요? 전 이 집에 수석 가정부인 미얀 이라고 해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뭐든지 절 부르시면 된답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아가씨?”
“… 잘 모르겠어요. 그냥 멍하군요.”
“그러실 거예요. 우리 주인님 아니었으면 아가씨는 잿더미에서 찾았어야 했을 테니까요.
정말 용감하시지 뭐예요. 그 불구덩이 속에서 아가씨를 구해 나오셨으니 말이 예요.”
얼굴을 찌푸린 희진이 기억을 잃기 전을 생각해 내고는 그제야 여자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 검은 코트의 남자가 자신을 구해 주었다는 말 같았다.
“머리가 아파요.”
“아, 그래요? 잠시 후면 의사선생님이 오실 거예요.”
고개를 살짝 끄덕인 희진이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구해준 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미얀에게 말했다.
“절 구해준 분이랑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제가 아가씨가 깨어 나셨다고 말씀드릴게요. 잠시만 혼자 계실 수 있죠?”
미얀이 화색이 도는 얼굴을 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희진은 주위를 둘러보며 그제야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주변을 살폈다.
'응? 저 그림… 레오나르도 다빈치? 설마 진품은 아니겠지?'
방 정면에 위치한 다빈치 특유의 선이 그려진 여인의 모습은 모나리자의 초상화의 데생처럼 느껴지는 초상화였다.
그러나 이런 초상화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조품 그림들은 이태리 전역에 흔하게 볼 수 있는 소품이었다.
그래도 설마하며 희진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서려고 발을 디뎠다.
“아얏“
엎질러지는 다리에 희진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뛰다가 삔 모양이었다.
아니면, 의식을 잃은 후에 다쳤든지… 피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살짝 삔 정도로 보였다.
'그래도 다행이다. '지젤'공연 후에 사고가 나서…'
낙천적인 성격의 희진은 다리를 조심히 디뎌 보고 일어서서 천천히 한발로 지탱해 그림을 향해 다가갔다.
한발 한발 가까이 그림을 향해 갈수록 진품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모조품이라면 종이의 질이 저렇게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다빈치 특유의 데생에서 보이는 선들이 그림의 곳곳에 보이고 있었다.
그림만 신경 쓰는 희진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 방의 거의 모든 물건들이 골동품과 다름이 없었다.
심지어 들꽃을 꽃아 놓은 꽃병역시 100년이 넘는 진품이었다.
“1500년경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인 '이사벨라 데스데의 초상'이지“
갑자기 다빈치의 그림 액자를 손으로 만지려던 희진의 뒤로 굵은 남자의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움찔하던 손을 치우고 희진은 목소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진품 맞죠?”
“맞아“
남자가 희진의 옆에 서서 그림을 감상했다.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스킨향이 희진에 코를 자극 했다.
'음… 이 향기는 남성샤넬 향기인가?'
그리 짙은 향기는 아니었지만 남자의 첫인상을 강렬하게 해주는 데는 한몫 했다.
“이렇게 돌아 다녀도 괜찮아? 데리고 나오다 다리를 심하게 바닥에 부딪치고 말았지.”
“아, 그랬군요.”
희진이 그림에서 눈을 돌리고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고 인사했다.
“목숨을 살려 준 은인이세요. 가까운 병원에 데려다 주셨어도 되었을 텐데…
이런 친절까지 감사합니다.”
남자는 희진의 공손한 인사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인사를 받았다는 흉내만 냈다.
희진은 남자가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을 쳐다보는 순간까지 남자를 관찰 했다.
지금껏 봐왔던 이태리 남자들 중 가장 인상 깊게 잘생긴 남자라는 것에
희진은 한 점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슬쩍 미소를 지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보았던 데로 은빛금발이 섞여 묘한 분위기를 풍겨오고,
하늘거리는 머리가 앞이마를 살짝 가리고 있었다.
청색의 남자의 눈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빛의 음영의 따라 묘하게 색이 변하고 있었다.
“지내는데 불편한 게 있으면 저 벨을 눌러“
침대 옆 간이 탁자에 있는 조그만 버튼을 가리키며 남자가 말했다.
희진은 알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내일 까지만 신세 지겠습니다. 가까운 병원으로 가보면 되니까요.”
남자가 그 말에 희진을 향해 말을 하려고 쳐다 볼 때, 의사가 왕진가방을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굳게 다문 남자의 입 끝을 슬쩍 눈치보고 희진이 환자답게 침대에 앉았다.
의사가 희진이 절뚝거리며 걸어와 앉는 것을 보며 물었다.
“다리를 다치셨습니까?”
“네. 살짝 삔 것 같아요. 선생님“
희진은 의사와 대화를 하면서 남자가 턱을 만지며,
의사가 희진의 다리를 꼼꼼히 살피는 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구해준 여자가 얼마나 다쳤는지 궁금해 하는 것이야 살려준 사람으로서 알고 싶기도 하겠다 혼자 생각하고,
희진은 남자에게서 관심을 끊었다.
“음… 한 일주일 정도 힘을 주지 말고 움직임도 조심해야 갰습니다.
그런데 발의 모양을 보니 춤을 추는 모양입니다.”
“네. 발레를 해요.”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희진의 발목에 붕대를 겹겹이 돌리고는 처방을 내렸다.
“발레는 적어도 이주일 간은 금지해야 합니다. 아셨죠?”
무뚝뚝한 나이 많은 의사선생님의 말에 희진이 살포시 웃으며 “알겠어요.” 라고 공손히 대답했다.
의사가 그제야 기특하다는 표정을 하고 희진을 보며 눈으로 웃었다.
그때 희진은 갑자기 옆얼굴이 따끔거림을 느꼈다.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져 희진이 팔짱을 끼고 쳐다보는 남자를 눈을 들고 쳐다보았지만,
남자는 아까전과 똑같이 의사의 치료하는 손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 * *
시원은 기가 막혔다.
희진을 다시 보게 되는 모습은 이게 아니었다.
이런 모습은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최 희진 양이 맞습니까?”
가라앉은 목소리의 감시반의 경찰이 시원에게 물었지만, 시원은“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디 한 구석도 희진이라 단정 지을 만한 곳이 한군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곳도 없었다.
몸 전체가 불에 그슬려 있었다.
피부색도 동양인인지 백인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고, 심지어 머리카락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분명 1302호실에서 발견된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분명 처음 발견 위치를 알기 위해 적어 놓은 꼬리말이 여기 붙어 있지 않습니까?”
시원은 감시반 경찰의 지적한 곳을 향해 시선을 하고 발목에 붙어 있는 꼬리표를 보았다.
[성별: 여, 발견한곳: 1302호 객실]
하루가 지날 동안 희진에겐 연락도 오지 않고 있었다.
거기다 여기 희진이라는 증거가 존재 했다.
1302호… 몇 번이고 '체르니'호텔 장부를 보고 확인하고 또 확인한 객실 번호였다.
심지어, 1302호에서 나온 물품을 확인해 희진이 묵었던 것을 다시 확인도 했었다.
시원은 어쩔 수 없이 희진이 죽었음을 받아 들여야 했다.
앞에 그을려 있는 여자의 시체가 희진이라는 것을 시원은 믿을 수는 없었지만,
고개는 이성을 따라 끄덕여 졌다.
“그럼 확인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꺾어진 순결[2장]
희진은 미얀이 가져다 준 여성용 단순한 원피스를 입으며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깨끗하게 목욕을 하니, 살 것 같다는 생각에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체르니'호텔에서의 폭파사고는 어떻게 된 일일까?'
희진은 거울 앞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신의 분홍빛 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우선 이곳에서 전화부터 찾아서 집에 거는 게 우선 이었다.
24시간 연락이 되지 않으면 걱정부터 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아닌가.
거기다 체르니 폭파사고가 큰 사고였다면, 어쩌면 한국에 까지 그 소식이 전해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약혼자인 시원 역시 희진이 전화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집안끼리 맺은 정략약혼이었고, 약혼하지 않으면 발레를 그만두라는 아버지의 말에
억지로 한 약혼이기는 했지만,
지난 6개월 동안 시원이 자신에게 했던 행동들을 보며 희진 역시 자연스럽게 '저 정도면…'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었다.
그때, 미얀이 웃으며 노크를 하고 들어와 거울 앞에 서있는 희진을 보며 말했다.
“저희 주인님께서 함께 식사하시자고 하세요.”
“그래요?”
“저에게 기대세요. 아가씨“
미얀이 선뜻 희진 곁으로 와서 팔을 잡아 주고 기대라는 몸짓을 했다.
희진은 머뭇거리다 미소를 지으며 미얀의 부축을 받아 발을 조심히 디디며 밖으로 나갔다.
처음 보는 복도와 저택의 모습에 희진은 나가자마자 입을 벌렸다.
나선으로 죽 이어진 계단과 함께 복도와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고,
큰 박물관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세상에! 엄청 큰 집이군요.”
“예. 예전엔 교황님의 별장으로 쓰였던 곳이랍니다.”
희진은 미얀의 부축을 받으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구경하며 걸었다.
복도마다 곳곳에 배치된 그림들, 아름다운 들꽃들, 기사의 갑옷을 입은 동상들…
푹신푹신한 붉은 카펫이 이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어 이태리라는 것을 생생히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엄청난 부자인건 확실하네.'
사실 방안에 있던 다빈치의 그림만으로도 그의 재정 상태를 알게 하기엔 충분하긴 했었다.
이태리에서 이런 영향력 있는 남자를 알게 되는 것도 추억이라는 생각에 희진은 웃으며 미얀과 발을 맞춰 걸었다.
미얀을 따라 나선형 계단을 다 내려온 희진은 식당으로 보이는 큰 문 앞에 섰다.
미얀이 잠시 희진을 놓고 문으로 다가가 활짝 열어 재끼고 다시 희진을 부축해 주었다.
희진은 그 사이 바쁘게 오가는 이집 하인들의 모습을 구경하기도 하고,
괜히 주눅 드는 자신의 옷차림에 어깨를 피려고 노력 했다.
“여기서 한 번 더 들어가야 해요. 다 왔답니다.”
미얀이 넓은 식당을 지나 더 작은 문 앞에 서서 노크해 열고는 희진을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작은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 앞에 남자가 검은색 바지에 흰 세련된 와이셔츠를 걸치고 앉아 있었다.
희진이 미얀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자 의자에서 일어 서 남자가 다가왔다.
미얀에게서 희진을 받은 남자는 희진이 편하게 앉도록 의자를 끌어 주고 앉혀 주었다.
“고맙습니다.”
희진에 말에 남자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며 미소가 지어졌다.
웃으면 꽤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에 희진 역시 긴장된 표정을 숨기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자리에 앉고 미얀이 밖으로 나간 후, 어색한 침묵이 식탁에 자리 했다.
희진은 앞에 이태리 음식을 쳐다보는 척 하며 남자에게 말했다.
“처음에 소개를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전 최 희진 이라고 해요.”
처음엔 상황이 당황스러워 이름도 묻지 않았었다. 남자가 나가고 난 뒤에야 늦게 그 생각이나 바보 같다 후회하며
희진은 다음엔 먼저 자신을 소개 해야겠다 마음먹고 있었었다.
이제야 희진은 자신이 예의를 다 차린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며,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자가 와인 잔을 손에 가볍게 쥐고 입술을 가져다 댔다 띠고는 말했다.
“알아.”
“네?”
희진이 남자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이번 '지젤'에서 지젤 역을 맡았던 발레리나 아닌가?”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의 희진을 보면서 남자가 와인 잔을 내려놓고 덧붙여 말했다
“그리 놀란 토끼 같은 눈 할 것 없어. 공연을 보고 우연히 사고 현장에 있었던 것뿐이니까. “
희진은 그제야 남자의 말에 어느 정도 이해가 되어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 지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성함을 안 가르쳐 주실 건가요?”
남자가 희진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청색의 눈이 짙은 사파이어 빛으로 반짝이는 듯해 희진은 그 눈을 보며 다시 한 번 신기하다 생각했다.
“살바체 프란트라고 하지.”
희진이 깜짝 놀라 살바체를 쳐다보았다.
살바체가 피식 웃고 미소를 지으며 포크를 자연스럽게 거머쥐었다.
이태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모른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 하는 살바체였다.
그러나 그 예상을 뒤엎고, 희진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조심히 이렇게 물었을 때,
살바체는 포크를 접시에 부딪쳐 덜거덕 거리는 소리를 내야 했다.
“…저기, 혹시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배우 아니셨나요?”
살바체가 희진의 진지한 호기심 어린 눈을 보고 제 정신이냐는 듯 쳐다보지만,
진심으로 묻는 것이라 걸 그 눈을 보고 깨닫고는 헛웃음 소리를 내다 급기야 “하하“ 웃어 재꼈다.
“하하하하 배우라고? 내가?”
“실례되는 질문을 했나요? 아니신가 보네요?”
살바체가 고개를 절래 저으며 말했다.
“누가 아니라고 했던가. 어차피 인생은 다 연극 같은 연출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지.
그리고 그 주인공은 배우인 나고 말이야.”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는 살바체였기에, 희진은 그를 보며 말이 안 통하는 남자였어
속으로 생각하고 앞에 보이는 음식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식사 도중 가끔 자신을 보고 재밌다는 듯 고개를 젓기도 하고 한쪽 입술을 올리고
웃음을 참는 살바체 때문에 희진은 짜증이나 일부러 다문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쯤이죠? 밀라노 근교 같은데 말 이예요.”
“맞아. 시간상 한 시간 거리에 시골이지.”
“꽤 먼 곳인데 이곳까지 절 데려와 보살펴 주실 필요가 있었나요?”
도움을 받은 건 자신이었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희진이 살바체를 보며 무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살바체가 여유롭게 그 물음에 물 컵을 들어 마시며 희진을 보고 말했다.
“지젤 중에 지젤이라 생각했지. 그런 발레리나를 아무 곳이나 혼잡한 곳에 놔두고 오기엔
내 양심이 허락을 안 하더군.”
희진은 그의 칭찬에 마음이 흡족했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미모를 칭찬 받는 것보다 발레리나로 칭찬 받는 게 더 설레고 좋은 희진이었다.
“처음부터 절 알아 보셨다는 거네요?”
살바체가 희진에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한쪽 서랍장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아침신문을 들고 희진의 식탁을 치운 후 올려놨다.
“궁금해 할 것 같아서“
살바체가 말하고 난 뒤 희진의 뒤에 서서 앉아 있는 희진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희진은 괜히 긴장된 기분에 침을 삼키고 신문을 들고는 기사의 사진부터 죽 훑어 보다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했다.
자신이 있던 '체르니'호텔 3층이 종이 각처럼 처참하게 구겨져 있어 형태를 알아 볼 수도 없는 사진이 거기 있었다.
“세상에!”
희진이 세 된 비명을 지르며 놀라자, 살바체가 뒷짐을 쥐고 희진의 목 근처를 향해 얼굴을 내리고 속삭여 말했다.
“다섯 번에 폭발이 1분씩 간격을 두고 터졌지. 그 사고로 8명이 죽고 12명이 부상을 당했어.
그래도 다행이지 않아? 자신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니 말이야.”
희진은 기사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놀란 가슴이 쉬이 진정되지 않고 빠르게 뛰어 대고 있었다.
이 사고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는 것을 그제야 안 희진은 살바체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급하게 말했다.
“식구들에게 당장 전화해야 갰어요. 분명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거예요. 전화 어디 있죠?”
살바체가 몸을 일으키고 식탁 한편에 자리 잡은 전화기를 눈짓했다.
희진이 의자 끌리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전화기를 향해 절뚝이며 걸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통화음이 연결되지 않았다. 희진이 살바체를 향해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불통 이예요.”
살바체가 연극하듯 과장된 표정을 하고 이마를 두들기며 희진에게 말했다.
“이런… 저녁시간엔 연결을 끊어 놓도록 하지. 내가 싫어해서 말이야.”
“왜죠?”
희진이 말도 안 되는 살바체의 몸짓과 표정에 짜증이나 왜냐고 물었다.
“밤은 사랑을 하는 시간이지 전화를 받는 시간이 아니거든. “
살바체의 말투와 시선이 희진을 보며 저돌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희진은 당황이 되어 가슴이 쿵쾅 거렸다. 머리에서 살바체가 위험인물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희진은 이제 저녁식사를 끝낼 때가 되었음을 확신했다.
“좋아요. 할 수 없죠. 집주인은 당신이고 전화를 쓸 수 없다면 내일 까지 기다려야 갰죠.
하지만 내일 떠날 생각이니 그리 많은 신세를 지지 않겠어요.
지금 까지만 으로도 충분한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니까. 전 이만 자러 가겠습니다. “
희진은 떨리는 손을 숨기고 수화기를 내려놓고, 발을 힘차게 때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아얏“
순간 희진은 발을 때자마자 발밑에서 올라오는 고통스런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의욕만 앞섰다가 아픈 다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바체의 앞에서 바보처럼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살바체가 '훗'하고 웃고는 희진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굻고 주저앉았다.
살바체의 손이 희진의 발목을 살피려고 다가오는 순간, 희진은 자신도 모르게 살바체의 손을 쳐냈다.
'짝'
살바체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희진이 순간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생각에 슬금 살바체의 눈치를 살폈지만, 살바체의 올라간 눈썹은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천천히 희진을 쳐다보며 일어선 살바체가 갑자기 미얀을 큰소리로 불렀다.
“미얀!”
미얀이 황급히 식당 안으로 들어 왔다.
“예. 주인님“
희진은 미얀의 복종적인 몸짓과 '주인님'이란 호칭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주인님? 저 호칭 들을수록 적응 안 되네…'
“아가씨 모셔다 드려!”
“예.”
그 말만 한 뒤 성큼 성큼 살바체는 희진에게 뒷모습을 보이고 식당 문을 소리 나게 닫고 나가 버렸다.
희진은 미얀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서 꽝 닫힌 문을 쳐다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셨군요?”
“네?
미얀의 책망하는 목소리에 희진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미얀을 쳐다보았지만,
미얀은 이마만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시원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온 것 같은 허전함에 쉬이 잠이 오질 않고 있었다.
'그 여자가 정말 희진인가?'
시원은 서울에 희진의 식구들과 자신의 가족에게 희진의 사망소식을 알리고도,
자신은 믿고 있지 않은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순간 뭔가 잊고 있었던 게 그제야 생각나 시원이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맞아. 유전자 검식!”
왜 그 생각을 이제야 한 것인지… 시체를 본 충격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던 게 문제였던 것이다. 젠장!
시원은 서울에 도착하는 즉시 이태리 경찰청에 유전자 검식을 의뢰하기로 했다.
분명 시원의 식구들도 유전자 검식을 했는지 물어 올 것이었다.
지금은 그 집 식구들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시원은 빨리 가지 않는 시계를 보며 충혈 된 눈을 하고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가의 암흑을 응시 했다.
* * *
잠을 자려고 희진은 이불안으로 들어갔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혼자 눕기엔 너무 큰 침대와 밖에서 들리는 부엉이 울음소리가 방안의 분위기를 음침하게 만들고 있었다.
희진은 차라리 눈을 감고 자신이 발레를 하고 있다 생각하고 상상 동작 클라스(class)를 하기 시작했다.
'브리제… 드미-블리에…샹주망…아라베스크… 앙트리샤…푸에테…'
불안하거나 잠이 오지 않으면 희진은 곧잘 머릿속으로 이렇게 동작연습을 하곤 했다.
한 참 속으로 중얼 거리던 희진은 덥다는 느낌에 덥고 있던 이불을 치우고 편하게 누워
아예 손을 발레 동작을 해가며 연습에 집중했다.
한참 후, 땀이 흐르는 걸 느낀 희진은 샤워를 하고 자야겠다는 생각에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따뜻한 물을 틀고 면 잠옷을 벗었다.
“…휴“
희진은 벗어 놓은 면으로 된 흰 잠옷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실크로 된 잠옷의 부드러운 촉감이 그리웠다. 따뜻한 기운이 욕실을 메어 오고 거울에도 김이 서리기 시작했다.
희진은 욕조 안 샤워기 밑으로 들어가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쏴아아'
공연 후에 우레 같은 박수 소리에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이 순간만큼은 살아 있음이 감사했다.
하지만 아마도 이런 이태리에서의 자유는 이것으로 마지막일 가능성이 컸다.
자신이 묵었던 '체르니'호텔에 테러사건을 집에서 알고 있다면 희진은 아픈 다리를 하고도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탁'
갑자기 욕실에 불이 꺼졌다.
희진은 컴컴한 어둠속에 뜨거운 물의 감촉만이 느껴지자 어둠의 공포를 느꼈다.
오래된 저택이라 밤이 늦은 시간엔 곧잘 꺼지는 모양이야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을 눌러 보지만,
불은 다시 들어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희진은 물을 잠그고 천천히 욕실 벽을 잡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찰칵'
그때, 문손잡이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벽을 잡고 문 쪽으로 가던 희진은 그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소리 없는 비명이 터졌다.
희진은 입을 손으로 막고 인기척에 신경을 곤두 세웠다.
문이 그냥 열렸을 수도 있었지만, 다시 한 번 싸늘한 밖에 공기가 차단되는 '찰칵'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 왔기에,
희진은 누군가 들어온 것을 느끼고 뒷걸음 쳤다.
“누…누구예요?
희진이 속삭이며 물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인기척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희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노려보며 문 쪽이 어디쯤인지 짐작으로 생각하고는
불편한 다리로 뛰어 보려고 기회를 노렸다.
'탁!'
“악!”
움직이려고 몸을 움직인 순간, 힘찬 손이 희진의 팔을 잡았다.
희진은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그 손이 희진의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막았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희진의 팔과 어깨를 엇갈려 잡은 침입자는
자신에게 더 희진을 꽉 붙여 움켜잡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읍~ 읍!”
희진은 가슴이 급하게 뛰어대고,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침입자의 힘이 벗은 몸으로 고스란히 느껴져 옴짝달싹 할 수도 없었다.
꽉 잡은 침입자의 숨소리가 희진의 귓가로 다가왔다.
희진은 침입자의 숨소리가 자신과는 달리 조용하고 규칙적으로 들리는 것에 놀라서 저절로 동공이 커졌다.
귀 뒤로 계속해서 들리는 숨소리에 희진의 공포가 극에 달았다.
침입자의 얼굴이 희진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뒷목 근처로 이동해 왔다.
그때, 희진은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
'남성 샤넬 향기!'
살바체 프란트...!
희진은 확신 했다.
이 향기는 분명 그가 분명하다.
그걸 깨달은 희진은 무서우면서도 기가 막혔다. 자신을 구해준 남자가
자신을 겁탈하려고 욕실에 들어와 자신을 잡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희진이 반항을 멈춘 것을 느낀 살바체가 어둠 속에서 서서히 얼굴을 내려
희진의 젓은 머리카락에도 상관없이 매끄러운 살결에 느낌을 즐겼다.
부드러운 미소를 어둠속에서 짓는 살바체가 희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더 잘 느낀다고 하더군. 지젤… 당신도 그런가?”
단순한 실험이었다는 듯 평이한 살바체의 목소리에 희진은 눈을 깜빡였다.
누군지 알아도 상관없다는 살바체에 당당한 목소리에 당장 사이코 같은 자식이라고 희진은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현재 낼 수 있는 소리는“읍~” 이라는 소리뿐 이였다.
“쿡쿡“
살바체의 조용히 웃는 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오자 희진은 심하게 몸을 틀고 반항했다.
살바체는 희진의 그런 몸동작까지 즐기는 듯 능숙하게 희진을 다루고 있었다.
단번의 희진의 몸을 벽으로 밀어 붙인 살바체가 자신의 몸을 실어 희진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자유로운 한 손으로 희진의 은밀한 곳을 향해 천천히 어깨부터 손으로 쓸어내렸다.
닿을 듯 말 듯 한 그 손이 다시 희진의 히프의 곡선을 지나,
가슴 쪽으로 이동해와 가슴을 움켜쥐는 것을 느끼고 희진이 몸을 비틀며 반항했다.
맨살에 닿는 살바체의 촉감이 뜨거운 물에 데워 졌던 희진의 몸에 차갑게 닿았다.
벽의 딱딱한 감촉과 살바체의 힘 있는 육체 사이에 갇혀 희진은 꼼짝없이 살바체가 주는 굴욕감을 그대로 당하고 있어야 했다.
'미친 자식! 저리 비켜! 비키라고!!'
“읍~!읍!”
반항하는 희진을 벽으로 더 몰아붙인 살바체가 희진의 귀에 다시 속삭여 말했다.
“참으려고 했지. 최고의 지젤을 가지는데 그 정도 못 참을 것도 없었어. “
한 번 더 희진이 힘을 주고 살바체에게서 벗어나려고 요동치자, 살바체가 다시 몸에 힘을 싣고 반항을 멈추게 했다.
“…귀엽더군. 앙칼진 발톱을 숨긴 고양이 같아서 생각을 바꿨지.”
“읍!! 읍!
'쿵!'
“들 고양이에겐 먼저 주인이 누구인지 가르쳐 줘야 하거든.”
희진의 눈이 살바체의 말이 끝나자마자 커졌다.
갑자기 밀려드는 아픔에 소리 없는 비명이 속에서 부터 터져 나왔다.
살바체의 손이 희진의 여린 다리 안쪽을 손가락으로 단번에 파고 들어와 유린하고 헤집었다.
아픔에 힘이 없어져 다리에 힘이 풀리는 희진을 느낀 살바체가 입을 가린 손을 풀고
희진의 엉덩이를 잡아 당겨 자신에게 밀착 시켜 반항을 하려고 하면 힘을 더 주고 못하게 막았다.
희진은 자유로운 두 팔과 입으로“악“소리를 지르고,
살바체의 손을 때리며 할퀴기도 했지만,
살바체는 꼼짝도 하지 않고 희진의 배와 아랫배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자신의 것을 밀어 넣는 대만 집중했다.
“악! 으…읔“
한 번도 겪어 본적 없는 아픔에 비명을 희진은 질렀다.
아파서 몸을 비틀고 힘을 줘보지만 그럴수록 살바체가 희진의 배 안쪽을 단단히 잡고 도망가지 못하게 막았다.
“가만있어“
준비가 안 되어 나오는 비명소리에도 살바체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희진의 배를 더 잡아 당겨 자신에게 벗어나지 못하게 잡고 움직였다.
“으읔! 하지 마! 악! 싫어! 싫어!”
희진은 소리치고 싫다고 도리질을 쳐댔다. 서있을 힘도 없이 안쪽을 헤집는 그가 주는 고통에 눈물이 저절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살바체가 주는 굴욕감에 희진은 죽고만 싶었다.
살바체는 계속 빠르게 벗어날 틈도 주지 않고 희진을 가지는데 만 집중했다.
희진이 소리치고 때리고 할퀴어도 살바체는 자신의 행동과 희진이 주는 느낌에만 온 신경을 맡겼다.
'찰싹, 찰싹'
'쿵, 쿵'
살과 살이 맞붙어 나는 소리가 희진에 귀에 악몽처럼 계속해서 들려 왔다.
희진의 몸이 욕실 벽에 사정없이 부딪쳐 졌다.
소리 지르고 치고 발버둥 치는데도 지친 희진은 울음이 터지지 않게 참았던 자제력을 잃고 흐느끼며 울어 버렸다.
빨리 이 치욕스런 일이 이 굴욕적인 일이 빨리 끝나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희진의 울며 쳐지는 몸을 살바체는 한손으로 주저앉는 희진의 몸의 균형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희진의 가슴의 정점을 쓸면서 자신의 기분이 극에 다할 때까지 몰아 붙였다.
찰싹 거리는 소리는 희진이 흐느낌에 목이 쉬고 눈물이 범벅이 되어서야 살바체가 희진을 벽에 가두고
벽을 한손으로 짚으며 깊은 숨소리 같은 탄식으로 끝을 냈다.
희진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혼자 절정에 떠는 살바체를 향해 말했다.
“흐흑…나쁜 자식! 죽여 버릴 거야.”
희진이 입새로 말했다.
살바체는 희진의 말소리를 들으며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가냘프게 어깨를 떨고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는 상태인데도, 희진의 목소리는 살아 있었다.
살바체는 희진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래. 앞으로 기대해 보지. 귀여운 고양이“
살바체는 그 말을 하고 희진에게서 미련 없이 떨어져 욕실을 바로 나갔다.
희진은 어두운 욕실바닥에 힘없이 내려 앉아 무너졌다.
* * *
살바체는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방에 들어와 벗어 두었던 검은 가운을 집어 들었다.
'…!'
자신의 것에 적나라하게 묻은 피… 살바체는 가운을 입으려다 그 흔적을 발견하고 동작을 그대로 멈췄다.
'처음 이었던가?'
살바체의 청색의 눈이 짙어지며 닫힌 욕실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눈에 후회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만족스럽다는 듯 살바체의 입술에 살짝 미소가 어렸고, 잊고 있었던 가운을 살바체는 힘 있게 걸쳐 입었다.
'그렇게 슬퍼할 것 없어. 내 눈에 띈 순간 너의 운명이었으니까. ‘
살바체는 희진의 방을 나가 나선형 계단을 내려서서 1층에 마련된 자신의 방,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 서재로 마련된 방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서재 벽면에 나열되어 걸려 있는 살바체를 닮은 인물들의 초상화가 죽 나열되어 있었고,
안쪽에 마호가니책상에는 최신식 컴퓨터와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푹신한 의자에 털썩 앉은 살바체는 이마를 만지며 생각에 잠시 잠겼다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잠깐의 기다리는 시간동안 살바체의 눈은 컴퓨터 브라운에 나타난 주식 그래프를 향하고 있었다.
“어. 나야. 그래. 잘 처리 했더군. 만족스러워. 아, 내일 쯤 밀라노에 가봐야겠지.
하하하 아무리 그래도 내 일 이니 귀찮더라도 신경을 써야 하니까. 그래. 밀라노에서 보지.”
함정에 빠지다[3장]
-서울 (Seoul)
“유전자 검식하는데 얼마나 걸립니까? 그게 무슨 소리죠?! 화장시키다니! 제 정신입니까?!”
[저희는 유가족들에게 연락을 받고 한 일입니다. 빨리 보내는 방법으로 가장 쉬운 일이라
판단되었기에 유가족들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이제 문의하실 일은 이쪽 이탈리아 경찰청이
아닌 한국 경찰청으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보상 문제도 그쪽에서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럼 이만…]
“이봐! “
'꽝'
“제길!!”
시원은 소리 나게 내려 놨던 수화기를 바로 다시 들고 희진의 사촌오빠인 수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화장시켜 보내라고 했다니! 누구 맘대로 일이 이렇게 된 겁니까?!”
다짜고짜 소리치는 시원에 목소리에 수혁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가 맞는다고 하지 않았나? 거기다 기일을 끌어봐야 일만 더 커질 뿐이네. 매스컴도
냄새를 맡고 있고, 프리마돈나의 문화부장관 막내딸이 이태리에서 테러를 당해 숨졌다고
전국에 퍼지길 바라나? 그렇지 않아도 쑥대밭이 된 집안이야. 시끄럽게 굴지 말고 가만히
있게.]
“유전자 검식을 해 봤어야 했습니다! 그 방에서 발견된 여자 시체라고는 하지만 희진이라는
증거는 없는 거 아닙니까?!”
수혁이 흥분한 시원에게 말했다.
[자넨 우리가 그런 일도 처리 안하고 화장 시킨 줄 아나? 어제 팩스로 이태리 병원에서
유전자 검식 증명서를 받았네. 앞으로 2틀 뒤에 장례식이 있을 거니 그때 참석이나 하고
이제 자네도 추수려.]
시원은 수혁의 말에 허탈하게 머리를 넘기며 털썩 주저앉았다.
동시에 수혁의 말이 시원의 귓가에 들렸다.
[희진은…죽었네]
* * *
- 사르데냐 섬 (sardinia island)
희진은 침대에 쪼그리고 누워 있다 아침에 되는 소리가 나자마자 옷을 챙겨 입고
사람을 부르기 위해 간이책상위에 버튼을 힘 있게 연거푸 눌러 댔다.
“부르셨어요?”
미얀이 웃으며 들어와 한잠도 못자 피곤한 희진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택시 불러 주세요. 아니, 그전에 전화부터 하고 싶어요.”
희진이 미얀을 신경질 적이고,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며 빠르게 말했다.
미얀이 살포시 웃으며 희진에게 말했다.
“택시라고요? 어디 가시는데 택시가 필요 하시죠?”
미얀의 말에 희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답답해 소리치며 대답했다.
“어디긴 어디예요?! 밀라노에 가야죠. 아니, 여기 말고 아무 곳이라도 좋아요.
아무튼, 여기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지 않아요.”
미얀은 침착하게 서서 희진의 말을 다 듣고 난 뒤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뭘 원하시는지 잘 알겠어요. 하지만, 밀라노나 다른 도시로 나가려면 배나 비행기를 이용하셔야 가실 수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죠?!”
희진이 입을 벌리고 제대로 미얀의 말을 머리로 해석해 들은 건가 다시 생각하며 물었다.
“여긴 이탈리아 지중해에 있는 사르데냐 섬 이예요.”
“뭐, 뭐라고요?!”
미얀이 희진의 놀란 얼굴을 보며 사뿐히 걸어가 커튼을 쳐내고는 창문을 활짝 열고
멀리 보이는 바다의 푸른 선을 가리켰다.
“이탈리아 지중해에 있는 아름다운 섬 사르데냐 섬 말 이예요.”
희진은 머릿속이 정지하는 것을 느꼈다가 미얀에게 말했다.
“좋아요. 여기가 사르데냐 섬이건 어쨌건 전화는요?”
미얀이 웃으며 희진에게 말했다.
“전화는 주인님 서재에 하나, 식당에 하나가 있습니다.”
“지금 전화를 써도 되겠죠? 안내해 주세요.”
신경질 적인 몸놀림으로 앞장서 나가라는 희진의 몸짓에도 미얀은 가만히 서서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죄송해요. 아가씨… 지금 식당의 있는 전화는 불통 이예요.
아무래도 선을 쥐들이 갉아 먹은 모양이에요.
그리고 주인님 서재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답니다.
그냥 주인님이 돌아오시면 그때 밀라노에 데려 달라 청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희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미얀을 향해 기가 차다는 표정만 짓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이대로 물러날 수 없는 희진 이었기에 미얀을 보며 사정조로 부탁했다.
“이봐요. 미얀… 지금 가족들은 전부 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고 있을 거예요.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요. 거기다 당신의 주인이라는 사람! …”
희진은 거기까지 말하다 미얀의 눈을 보고 말을 끊었다.
도저히 겁탈을 당해 겁이 나고 무섭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다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희진은 이런 일이 처음 이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고, 지금은 우선여길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 이후는 차분히 생각해 그 놈의 자식을 법의 심판을 받게 하던지,
아니면 잊지 못할 복수를 해줄 건지 생각해 결정해도 늦지 않았다.
지금 여기는 불리하다.
희진은 생각했다.
“아가씨. 진정하시고 우선 아침 식사부터 하시는 게 좋겠어요. 얼굴이 많이 창백하세요.
식사를 올려다 드릴까요?”
“…”
희진은 이곳을 벗어날 생각을 하다 미얀의 말을 듣지 못했다.
미얀은 희진을 보며 인사를 하고는 식사를 준비하려고 밖으로 나갔다.
'사르데냐 섬이라고? 사르데냐 섬은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야.
분명 이 저택만 벗어나면 전화를 걸 수 있는 곳이 있을 거야.'
희진은 그 생각에 어제 미얀이 가져왔던 단순한 원피스를 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어차피 옷도 없고 가진 것도 없으니 몸만 나가면 되는 것이다.
문으로 걸어가는 희진의 눈에 각오가 서리고 욕실 쪽은 쳐다보지 않은 그녀는 방문을 미련 없이 열고 나갔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지금 아침상을 올려 드리려던 참이에요.”
복도에서 나선형계단을 내려서던 희진은 간단한 아침쟁반을 희진을 위해 올려오던 미얀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침은 필요 없어요. 그동안 미얀 고마왔지만, 지금은 고맙다는 말도 못하겠어요.
내 마음이 그렇거든요. 아무튼 전 지금 가겠어요.”
희진은 아침쟁반을 들고 있는 미얀을 지나쳐 얼굴을 들고 저택에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미얀이 쟁반을 지나가는 하인을 붙잡아 넘겨주고 빠르게 희진을 쫓아와 희진의 팔을 잡으며 말렸다.
“아가씨. 이런 발로 어딜 간다고 그러세요. 주인님이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
“미얀! 내 앞에서 주인이라는 말 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또! 나가려는 나도 잡지 말아요.
미얀까지 미워하고 싶지 않으니까!”
희진은 놀란 표정의 미얀을 보고 저택의 정문 앞에 서서는 큰 문을 확 열어 재끼고
몇 개의 대리석 계단을 밟고 내려와 주위를 둘러보며 우뚝 멈춰 섰다.
잔디, 끝없는 잔디가 펼쳐져 있었다.
'뭐, 뭐야?!'
끝도 안 보이는 잔디를 보니 희진은 신경질이 나 지나가는 하인차림의 여자를 향해 말로 붙잡고 물었다.
“여기 나가는 길이 어딘가요?”
여자하인은 희진을 말똥거리고 보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젓고 고개를 숙이고는 가버렸다.
이탈리아는 80%가 이태리어를 쓰고 있기에 말이 통하지 않는 곳이 많았다.
“나쁜 놈의 자식!”
희진은 살바체에게 욕을 퍼붓고, 입술을 꼭 깨물고는 정면을 노려봤다.
'그래. 여기만 벗어나자. '
앞에 보이는 푸른 선을 보며, 희진은 바다 쪽으로 나가기로 했다.
분명 해변 쪽으로는 마을이나 사람이 있을 것이다.
희진은 어제보다 조금 나아진 다리를 조심히 디디며 바다를 향해 고집스런 시선을 하고 걷기 시작했다.
* * *
-밀라노 (Milano)
“3층 전체를 복구하려면 시일이 얼마나 걸리지?”
살바체의 질문에 호텔 경영을 맡은 중년의 남자인 조슈아는 옆에 있는 여비서에게 서류를 받아 들고 살바체에게 말했다.
“3층과 2층 복도, 4층에도 손실이 커서 한 달 이상에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살바체가 그의 말에 파손된 3층 복도의 곳곳을 둘러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우뚝 멈춰선 살바체는 결정했다는 듯 조슈아를 보며 말했다.
“그냥 밀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짓도록. 어떤 손님도 한번 테러가 난 호텔에 묵으려고 하지 않을 거라고 봐.
나 역시 그러니까“
“그렇긴 하지만, 이 '체르니'호텔의 역사적인 건물이 사라진 다는 것은 밀라노의 큰 손실입니다. “
자신이 그것을 모르겠냐는 시선으로 조슈아를 보는 살바체의 시선이 매서웠다.
조슈아는 '흠…' 하며 시선을 비켰다.
“이곳보다 역사가 깊은 유적의 건물을 내가 몇 개나 소유하고 있다 생각하지?
한번 테러가 난 곳의 이미지를 다시 지켜 내는 것은 힘든 일이야. 내 말대로 해.
역사는 항상 진행하는 것이지. 지금 짓고 100년 후에는 역사가 되는 것…
그게 인생이야. 가장 훌륭한 역사를 만들어 보라고. 조슈아.”
“알겠습니다."
살바체의 뒤로 검은 양복을 입은 남 비서 세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살바체가 몸을 돌려 3층을 벗어나 호텔을 나올 때까지 그들도 뒤를 따라 움직였다.
“앞으로 개관까지 6개월 주지. 그 안에 밀라노에서 최고의 호텔로 다시 반듯하게 세워 놓도록. 믿어 보지.”
“네. 맡겨 주십시오.”
자신보다 한참 나이 많은 조슈아에게 살바체의 말투는 거리낌이 없었다.
운전사가 살바체의 검은 긴 차를 대기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차에 오르려던 살바체는 문을 열고 잠시 서서 생각하다 조슈아를 향해 다시 돌아서서 지시 했다.
“이번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과 부상자들의 사후처리는 국가에만 맡기지 말고,
합당하게 최선을 다해 처리하도록.”
“네. 부족하지 않도록 보상 문제를 처리하겠습니다.”
조슈아와 호텔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살바체는 그 자리를 검은 양복의 비서들과 두 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체르니' 호텔 사고 현장을 벗어났다.
살바체는 뒷좌석에 느긋하게 앉아 부착되어 있는 전화기를 들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아, 체논. 지금 가고 있는 중이야.”
살바체는 얘기를 나누며 비서가 건네주는 검은 파일을 받아 쳐다보며 넘기고 있었다.
“내 호텔을 멋지게 폭파 시켜 놨더군. 하하하. 그래. 어쩔 수 없었다는 건 나도 알아.
집에 잘 있지. 글쎄… 어제 내가 조금 건드려 놔서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울고 있을까? 아니면 화를 내며 이를 갈고 있을까? 그래. 지금 가서…”
갑자기 살바체의 좋았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살바체의 눈은 들고 있는 검은 파일 한곳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마를 좁히고 있는 살바체는 수화기 너머 남자의 목소리에도 아무 말 없이 파일을 노려보고 있었다.
' 약혼자라고?'
살바체의 눈이 파일 안에 있는 잘생긴 동양남자의 얼굴을 보며 가늘어 지다 재밌다는 표정으로 한쪽 입술선이 올라갔다.
“미안. 체논… 아무래도 오늘은 시간을 못 낼 것 같군. 아, 급한 일이 갑자기 생겼어.
사르데냐 섬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걱정? 걱정이 아니라 궁금한 거야.
당연히 그 정도 값어치는 있지. 그래. 뒷일은 네가 전부 맡아.”
전화를 미련 없이 끊은 살바체는 차를 돌리게 하고 차가운 눈으로 앞을 응시했다.
* * *
-서울 (Seoul)
저녁시간… 시원의 아파트로 한 여자가 들어섰다.
세련된 원피스를 차려 입은 여자는 시원이 앉아 있는 자리에 있는 양주잔을 보며 미간을 좁히고
피곤하다는 듯 시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소식 들었어. 너 약혼자 죽었다며?”
“… 말조심해. 양 소영“
다리를 꼰 소영은 시원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귀에 꼽은 진주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양주잔을 들고 단번에 마셔 버리는 시원의 동작을 눈으로 따라 갔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안 어울린다고 내가 말했잖아? 잘 되었어.
어차피 이제 죽은 거 없던 일로 치고 나랑 약혼 준비해. 시원 씨.”
“….야, 너 가라.”
“왜이래 잘 알고 있는 선수끼리… 시원 씨가 원하던 거 그 여자 배경 아니었어?
그 배경까진 못가도 나도 의원인 오빠가 둘이나 있어. 그 정도 배경은 해줄 수 있다고.”
시원은 소영을 쳐다보며 코웃음 쳤다.
배경… 그래 아깝긴 하다.
문화부 장관의 막내딸이고, 그녀의 집안 오빠들도 대단한 자리에 하나씩 있어 정치적으로
꽤 유명한 집안의 들어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그러나 시원은 코웃음 치고, 이렇게 희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이유를 생각 했다.
아름다운 얼굴 때문에?
그 도도한 성격 때문에?
그 정렬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 때문에?
“뭐야. 얼굴이 왜 그래? 내가 앞에 있는 데도, 죽은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시원 씨 이렇게 못난 남자였어? 설마 사랑이라도 했던 거야?”
그래. 어쩌면 그게 정답일 지도 모르지.
시원은 종알거리는 소영을 쳐다보지 않고 잔에 양주를 따라 놓고는 빤히 쳐다보는 소영을
같이 무심하게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안았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말이야? 뜬금없이.”
“사랑이라고 착각했냐?”
“시원 씨!!”
귀찮다는 표정으로 소영을 보던 시선을 내린 시원은 양주잔을 단번에 입에 털어놓고, 소영에게 말했다.
“그만 가. 지금은 욕구도 생기지 않는다. 넌 어딜 봐도 희진과는 닮은 곳이 없어.”
“뭐야. 그럼 지금까지 날 그 여자 대용으로 여겼다는 거야? 어?!”
갑자기 삿대질을 하고 벌떡 일어서는 소영 이였다.
시원은 말하기 귀찮아 양주잔과 양주만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영을 쳐다보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잠깐, 어딜 가려고. 말 끝내고 가“
“네가 이러니까 쉬워 보이고, 매력이 없는 거야.”
충격 받은 소영의 눈을 보면서, 시원은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자신의 책상에 술잔과 양주병을 올려놓고 털썩 의자에 앉은 시원은 앞에 놓인 한 여자의
발레복을 입은 모습의 사진을 향했다.
' 최 희진… 돌아와라.'
발에 토슈즈를 벗는 모습이 예뻐서 시원이 찍어 놓았던 단 한 장의 사진이었다.
순간, 시원의 눈에 희진이 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그 동안 찜찜했던 그 무엇, 놓치고 있었던 그 무엇을 발견한 시원의 눈이 계속해서
사진 속에 희진의 웃는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 * *
- 사르데냐 섬 (sardinia island)
살바체는 곧장 헬기를 타고 사르데냐 섬으로 넘어와 비행장에서 내린 후, 다시 차로 이동해 저택으로 왔다.
들어서기 전 비서에게 검은 장갑을 벗어준 살바체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곧장 저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미얀!!”
살바체는 저택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미얀을 소리쳐 불렀다.
집사 겸 이곳 일명 '교황의 별장'이라고 부르는 저택을 일괄해 관리하고 있는 미얀이
살바체를 보고 빠르게 걸어와 고개를 숙이고 살바체가 넘겨주는 코트를 받아 들었다.
“아가씨는?”
살바체의 말에 미얀이 말했다.
“아침 일찍 가시겠다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살바체가 그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미얀을 응시하고 다시 물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말했어?”
“예. 사르데냐 섬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살바체가 미얀을 쳐다보며 코웃음 치고는 한 달음에 희진의 방으로 나선형 계단을 빠르게 올라 활짝 열어 재꼈다.
아무도 없는 빈방을 확인한 살바체가 미얀에게 말했다.
“옷차림은?”
“원피스 차림이셨습니다.”
“멍청한 여자.”
살바체는 그 말만 하고 미얀이 들고 있는 자신의 코트를 빼앗아 다시 걸쳐 입으며 말했다.
“다음엔 옷 두껍게 입혀서 내보내. 알겠어?”
“아… 네.”
“다시 헬기 준비시키라고 해. 가봐야 해변근처에서 배회하고 있겠지.
이 조그만 섬에 갈 곳이 어디 있다고 나간단 말이야.”
살바체가 빠르게 나선형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것을 미얀이 따라 내려가며 말했다.
“사르데냐 섬이라고 말씀 드렸으니, 큰 섬이라고 생각 하실 거예요.
교황의 개인 섬이고 사르데냐 섬과는 조금 떨어진 섬이라는 말씀을 드릴 시간이 없어서….”
“그만! “
화가 난 표정의 살바체가 걱정스러워 미얀은 두서없이 종알거렸다가, 매서운 살바체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급히 고개를 숙인 미얀을 보며, 살바체는 들어왔던 저택 문으로 아까 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 * *
“아….”
희진은 무턱대고 앞 해변만 보고 걸어와 해변에 도착했었다.
오는 도중 길이라는 것을 찾아 두리번거려 봤지만, 어디에도 길을 닦아 놓은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 2시간 동안 걸었던 해변조차… 사람 발자국 하나 나 있지 않은 깨끗한 모래뿐 이였다.
“미얀… 여기가 사르데냐 섬 맞아?”
희진은 미얀이 옆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혼잣말을 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깨끗한 모레와 푸르다 못해 파란 바다뿐 이였다.
아무리 봐도 개인 섬으로 보이는 이곳이… 이탈리아 두 번째로 큰 섬 사르데냐 섬 일리 만무 했다.
저 멀리 보이는 저 큰 섬이면 몰라도…!
“개자식!”
희진은 모래를 들어 괜히 바닥에다 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 바람에 저리는 다리에 꼬꾸라져 털썩 주저앉고만 희진은 눈물이 나려는 것을
겨우 참고 입을 꼭 다물었다.
'다시 그 놈의 얼굴을 보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고 말겠어!'
이렇게 생각한 희진의 얼굴에 각오가 서렸다.
세상에 죽을 결심을 하고 그 용기로 못할 게 없다 하지 않던가?
' 그래. 더 가보자. 언젠간 끝이 있겠지!'
희진은 다시 무릎을 피고 일어섰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말라 왔지만 희진은 계속 흰 백사장을 걸었다.
아침의 찬 공기는 어느덧 오후의 햇빛을 받아 포근하게 해변의 모레를 데어오고 있었다.
얼마쯤 걷다 쉬고, 또 걷던 희진은 지쳐 더 이상 걷지 못할 것 같아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엊그제 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런 처지가 될 거라 생각도 꿈도 안 꿔봤던 희진 이었다.
이렇게 된 일이 전부 그놈의 살바체 때문이라는 생각에 희진의 눈이 매서워 졌다.
“개자식!”
벌써 몇 번째 인지도 모를 살바체의 대한 욕을 마구 던지면서, 희진은 전의를 불태웠다.
' 꼭 나가고 말거다. 너 같은 놈은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되는 놈이야.'
다시 힘을 내 일어서려던 희진은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투투, 투투‘' 소리에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해변의 반대편으로 검은 색의 헬리콥터 한대가 해변을 따라 선외하고 있었다.
희진은 반가움에 그 헬리콥터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누구 이던지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서 벗어나 자신의 말을 알아듣고 가까운 경찰서라도 데려다 준다면…
헬리콥터가 희진을 보고 넓고 가까운 백사장으로 헬리콥터를 세우려고 시도 하는 게 보이자,
희진은 절뚝거리며 그쪽으로 뛰어 갔다.
수도 없는 모래 바람이 희진의 머리와 몸으로 사정없이 내리쳐 졌지만,
희진은 눈을 감고 조금 더 그 쪽으로 걸어갔다.
'투투투….투…투….투…'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멈추는 소리에, 모래 바람도 곧 멈추었다.
희진은 얼굴에 부딪힌 모래를 털고는 헬리콥터에서 내리는 검은 코트에 남자를 쳐다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살바체 프란트...!'
힘차게 헬리콥터에서 내린 프란트 살바체가 어깨를 피고 희진을 노려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희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 어두워지는 청색의 눈을 쳐다보며 뒷걸음 쳤다.
다시 마주치면 얼굴을 할퀴어주고, 죽여 버리고 말겠다는 각오도 잊은 채,
희진은 검은 코트를 휘날리며 오는 살바체를 두려움에 응시하며 쳐다보다 급기야,
뒤로 돌아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살바체는 희진이 무턱대고 공포의 눈을 하고 뒤를 돌아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어이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한쪽 눈썹을 올리고 희진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살바체는 어느 순간 기회를 노리는 표범처럼
날렵하게 희진을 향해 뛰었다.
희진은 뒤에서 뛰어오는 살바체의 구두 소리에 집중하며 뛰었지만, 모래에 구두 소리가 날 리 만무했고,
열심히 뛴다고 뛰어 보았자, 이미 독안의 든 쥐라는 것을 자신도 자각하고 있었다.
희진은 알면서도 뛰었다. 모래에 발이 푹푹 파여 왔지만, 살바체의 손이 자신에게 닿는 것조차 거부하고 싶었다.
아니! 눈을 마주치고 싶지도 않다.
“오지 마!”
여자의 갈라진 음성이 인적 없는 백사장에 울려 퍼졌다.
살바체의 기척이 바로 등 뒤에서 느껴졌다.
“오지 마! 날 그냥 놔두라고!”
희진은 거의 사력을 다해 소리쳤다.
동시에 희진의 가냘픈 어깨가 힘 있는 남자의 손에 의해 저지당해 꼬꾸라졌다.
'푹'
바로 넘어진 희진이 모래에 얼굴을 파묻히고, 바로 살바체의 손에 다시 일으켜 세워졌다.
“놔! 이거 놔!”
살바체가 이런 희진의 외침에도 희진의 턱을 우악스럽게 한손으로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희진은 팔뚝을 꽉 잡은 살바체의 힘과 턱을 쥐고 있는 남자의 힘 때문에 몇 번의 도리질의
반항을 끝으로 살바체의 화난 눈을 마주쳐야 했다.
“이 멍청한 여자야. 다음부턴 이런 어설픈 장난은 하지 마. 도망치려거든 머리를 써.
그래야 나도 머리를 써 잡을 생각을 하지.”
“개. 자. 식.”
“그래. 차라리 그렇게 보면서 욕을 해. 그게 더 시간 낭비를 안 하는 일이니까“
희진의 증오가 가득 담긴 검은 눈을 응시하며, 살바체는 눈에 조롱기를 가득 담고 쳐다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화난기가 가시지 않은 살바체의 눈이 오묘하게 빛을 내자, 희진은 그 눈을 외면하고
팔을 빼내려고 다시 한 번 팔에 힘을 주었다.
“놔! 놔! 아악! 사람 살려! “
살바체가 팔목을 잡고 계속 반항하든 말든 끌고 헬리콥터 쪽으로 데리고 가자,
희진은 소리치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살바체의 눈에 짜증스럽다는 눈빛이 스쳐 지나가고 희진은 두 팔을 살바체에게 고스란히 잡혀
다시 청색의 찌푸린 눈을 마주봐야 했다.
“여기서 그런 작은 목소리로 소리쳐 봐야 아무도 안와.”
자신의 손을 다시 한 번 후려치는 희진의 손을 매섭게 부여잡고
살바체가 희진의 작은 머리를 단번에 돌려 바다 쪽의 큰 섬을 보게 했다.
엇갈려 희진의 어깨를 감싸듯 뒤에서 두 손까지 부여잡은 살바체는 희진의 귓가에서 갑자기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aiutilo!” (= help me! 같은 이탈리아어)
살바체의 목소리가 해변을 가르고 하늘로 치솟았지만, 잠시 후 고요한 적만 만이 주위에 가득 할 뿐이었다.
살바체는 희진의 멍한 옆 표정을 힐끗 눈여겨보며 그녀의 귓가로 입술을 내리고 작게 속삭여 말했다.
“내기 할까? 사람이 오는지… 10번 정도 더 외쳐주지. 그래도 안 오면, 오늘 저녁 두 번째 밤을…어때?”
“아아~악!”
악마의 속삭임보다 달콤한 살바체의 목소리가 곧장 희진의 귀로 파고들자,
희진은 도리질 치며 악 소리를 질렀다.
어제 저녁 살바체가 어둠속에서 자신을 겁탈하던 그 장면이 그 속삭임이 고스란히 되새김질 되고 있었다.
“나. 쁜. 자. 식! 사. 기. 꾼! 협. 잡. 꾼! 인. 간. 말. 종. 새. 끼“
“쿡쿡쿡…. 또 고양이 발톱인가? 이제 그만하지. 애교로 봐주기엔 도가 지나친데“
한손으로 희진을 부여잡은 살바체는 이제 별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무덤덤하게 말하고는 헬리콥터를 향해 손짓을 했다.
곧 두 명의 근육질의 이태리 남자들이 내려서 살바체에게 뛰어 왔고,
살바체가 몸을 틀며, 벗어나려는 희진을 부여잡고 말했다.
“반항하면 묶어서 라도 데려와.”
지친다는 듯 말한 살바체가 희진을 잡고 있는 팔을 놓았다.
희진은 자신에게 한발자국씩 다가오는 검은 머리의 이태리 남자들을 보며 뒷걸음질 쳤다.
“뭐, 뭐하는 거야?!”
갑자기 자신을 놓고 유유히 걸어 가버리는 살바체의 뒷모습을 보며 희진이 소리 쳤다.
살바체가 그런 희진을 돌아보며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말했다.
“험하게 끌려오고 싶지 않으면, 얌전하게 네 발로 헬리콥터에 올라. “
그 말에 입술을 깨물고 두 명의 남자를 노려보던 희진이 계속 뒷걸음치다 다시 뒤돌아 뛰었다.
“잡아!”
두 명 중 한명이 앞서가는 이태리 남자에게 말하며 뛰기 시작했다.
살바체는 헬리콥터로 유유히 걸어가며 얼마 못가 희진이 잡혀서 반항하며 울부짖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놔! 이 나쁜 자식들아! 놓으라고!”
고개를 휘휘 젓는 살바체는 헬리콥터로 올라 두 명의 남자에게 들려서 운반되면서도 끝까지
반항하는 희진을 보고는 조종사에게 웃으며 말했다.
“포기를 모르는 여자야. 그렇지?”
* * *
- 서울 (Seoul)
시원은 서울 경찰청 조사과 형사로 있는 자신의 친구 김 석수를 기다리며 휴게실에 앉아 자판기 커피를 들고 있었다.
반짝이는 시원의 눈이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고 있는지 초점이 없이 흐려 있었다.
“어이! 권 시원. 이게 얼마 만이냐?!”
“그래. 졸업하고 너 결혼식인가 한번 가서 보고 못 봤구나.”
“하하, 그래. 맞다. “
함께 두 남자가 악수를 하고 반가움에 어깨를 치며 남자들 만에 의리를 과시했다.
자판기 커피를 뽑으며 석수는 시원을 보고 커피 잔을 뽑아 들면서 안 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네 약혼자 얘긴 들었다. 이쪽에 있다 보니 그런 일은 훤하네. 어쩌다 그 호텔에 있었다니.
운도 없다. 젠장”
시원은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었지만, 석수가 자리에 앉아 이유를 물어 올 때까지
잠시 시간을 두고 침착하게 석수의 안부부터 물었다.
“강력계 쪽으로 간다더니, 어쩌다 조사과냐?”
시원에 말에 석수가 하하 웃더니 시원을 보며 웃긴다는 듯 이마 살을 찌푸렸다.
“나도 모르겠다. 하도 동료들이 강력계 가면 신혼재미도 없다고 난리치는 통에,
그런데 조사과도 별반 다르지 않아. 요즘 연쇄살인 때문에 조사과 아주 난리다.
이젠 아주 재미로 사람을 죽이니… 썩을 놈들. 완전범죄?
이 세상에 완전범죄가 존재한다 생각하는 미치광이 들… 조사하면 안 나올게 없는데 말이야.”
“후후, 그래 네가 하는 일이 뭔데?”
시원이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예의상 물었다.
“시체 보는 거, 조사 하는 거, 증거 챙기는 거… 외국에선 특정조사단이 다 하는 일을
우리나라에선 이것도 형사가 하니… 이제 나도 의사가 다 되었다.
이 일하고 일주일인가 있다가 악취 때문에 못살겠다는 주민 신고로 한번은 어떤 집에
들어갔었지. 거기 일주일동안 방치된 시체하나가 있었는데, 굶어 죽었는지 할아버지 한분이
돌보지 않아서 썩어 있는 거였어. 젠장. 그때가 여름이었으니 악취가 장난이 아니었지.
그거 보고 일주일은 밥을 못 먹고 입고 있었던 옷도 그 냄새에 휴지통에 버려야 했다. “
“하, 그 정도야?”
“말도 마“
석수가 그때를 생각하는지 고개를 절로 젓더니 커피 잔을 구기고 휴지통에 넣고는 시원을 보며 물었다.
“너 뭐 부탁하러 온 거 맞지? 뭐냐?”
시원이 피식 웃으며 석수를 따라 휴지통에 종이 커피 잔을 구겨 넣고, 진지한 눈에 석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맞다. 형사 되더니 눈치만 늘었네.”
“뭔데. 법에 접촉되는 일만 아니면 도와주마.”
석수의 말에 시원이 생각을 정리하고 이마를 만지며 말했다
“사진이 필요하다.”
“사진?”
무슨 사진을 말하는지 도통 모르는 석수를 보고 시원이 진지한 눈을 하고 말했다.
“내 약혼녀 최 희진의 사진… 분명 이태리 경찰청에서 이쪽으로 모든 자료를 넘겼다고 했으니,
시체의 사진도 함께 넘어 왔을 것 아냐.”
“글쎄. 그렇긴 하겠지만, 그 사진을 뭐하려고?”
시원은 석수의 말에 자신의 양복 주머니에서 희진의 사진을 꺼내 석수에게 보였다.
“이야… 이 여자가 최 희진?”
시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석수가 눈을 빛내며 사진에 몰두 했다.
“장난 아닌 미인이구만, 발레를 한다니 몸매에, 목선도 죽이고…. 배경도 장난 아니니,
완벽한 약혼녀였군.”
“얼굴 말고, 그 발을 봐.”
석수가 시원의 말에 따라 토슈를 벗고 있는 희진의 발을 쳐다보았다.
“어…엄지가 안으로 휘었군.”
“그래. 보이지? 5살 때부터 발레를 해서, 안으로 모아 들어간 거다. 걷는 데는 지장이 없고,
잘 보지 않으면 모르는 단점이지만, 분명 증거가 될 거다.”
“무슨 소리야?”
시원이 눈을 빛내며 사진을 들고 있는 석수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분명 내 기억으론 그 시체에 왼쪽 엄지발가락이 정상이었어.
내 눈이 정확한지 네가 다시 한 번 확인해 줘라.”
* * *
- 사르데냐 섬 (Sardinia island)
희진은 다시 방으로 돌아와 강제로 살바체에 의해 욕실에 처박혀 졌다.
“개자식! 나가!”
“모래투성이인 여자는 나도 사양이야. 담부턴 욕실 문을 꼭 잠그고 사용하도록!”
살바체는 비웃음을 남기고 희진을 욕실에 놔둔 채 닫고 나갔다.
희진은 벌떡 일어나 욕실 문을 잠그고 엉망이 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보며 한숨을 쉬었다.
눈에 오기가 서린 모습이 “지젤“이 아닌 마녀의 모습 같았다.
“으~!”
희진은 뜨거운 물을 틀어 놓고 분노를 토하며 이빨을 갈았다.
이렇게 화가 나고 누구를 증오해 본 것은 처음 이었다.
'똑! 똑!'
“누구야?!”
“아가씨. 갈아입은 옷은 앞에 두었고, 식사는 침대 위에 올려 두었어요.
다 씻으신 후에 식사하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시고요.”
희진은 재빨리 욕실 문을 열고 미얀을 보며 화난 눈빛으로 말했다.
“미얀! 분명 사르데냐 섬 이랬잖아요?! 어떻게 된 거죠?!”
“죄송하지만, 여긴 사르데냐 섬이 맞아요. 아주 조금 떨어진 '교황의 섬'이라 불리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에 불렸던 이름입니다.”
차분히 설명하는 미얀을 화가나 쳐다보던 희진은 미얀을 한 번 더 노려보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들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꽝' 닫았다.
“아가씨. 전 그만 나가 보겠습니다.”
희진은 미얀이 주눅이 들어 나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깨끗하게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찌 되었든 여기서 나가려면 건강해야 했고, 무엇보다 머리를 써야 했다.
'더 이상 놀림걸이는 되지 않겠어!'
희진은 욕실에서 당당히 나와 침대에 있는 식사를 꾸역꾸역 고픈 배에 밀어 넣었다.
식욕이 없어도 먹어야 했다. 그리고 복수 할 방법을…!
희진은 거기까지 생각하다 눈을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사벨라 데스데의 초상' !
희진은 눈을 빛내고 식사를 하던 포크를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이사벨라 데스데의 초상[4장]
한손에 포크를 쥔 희진의 눈은 계속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이사벨라 데스데의 초상' 으로 향해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문 희진이 포크를 찍어 이사벨라의 머리를 향해 내리 꽂았다.
푹 그림에 박힌 포크 끝을 보며 희진은 눈을 빛내고 쫙 내리 그어 버렸다.
'찌이익'
경쾌한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희진의 눈에 그제야 잠깐의 만족감이 스쳐 지가 났다.
점점 포크를 내리 찍는 속도가 빨라졌다.
'푹, 찌익, 찌이이익'
희진은 포크를 던져 버리고 액자 틀에 남아 있는 그림의 잔해를 손으로 북북 잡아 뜯었다.
' 날 겁탈한 값으론 이것도 모자라.'
희진은 그러면서도 액자 틀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이사벨라 데드데의 초상' 잔상을 보며 주저앉았다.
예술을 사랑하고 역사를 사랑하는 발레인 으로서 자신의 손으로 500년이나 지난 역사의 한 페이지를
휴지 조각으로 만든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어이없기 도해 희진은 눈물이 났다.
' 울 필요 없어. 이렇게 된 건 나 때문이 아니야. 괴로워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자식이야.'
희진은 눈물을 고집스럽게 손으로 닦아 내고 일어서서 구부러진 포크를 바닥에서 찾아 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먹다 만 음식을 보고 구부러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싸우려면 힘이 필요해. '
미친 여자 같아도 할 수 없었다.
희진은 지금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쨍그랑!'
그때, 희진의 방문이 열리고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미얀이“어머나!! 어머! 어머!” 하며 부산을 떨고 들어섰다.
계속 횡설 수설 이태리어로 빠르게 액자 틀에 그림 조각들을 쳐다보며 말하는 미얀을
희진은 거들떠도 안보고 식사에 열중 했다.
“왜 이러셨어요?! 분명 주인님이 아시면 가만 안 계실 텐데!
어쩌려고… 어쩌려고 이러셨어요? 네?! …. 헉! 주, 주인님….”
미얀이 희진에게 종잇조각을 손에 들고 격분하다, 갑자기 두려움에 떨며 방문을 쳐다보았다.
희진은 살바체의 충격어린 눈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입구에 서 있는 살바체를
포크를 든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살바체가 흰 바지와 흰 와이셔츠의 깨끗한 차림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은빛 나는 금발의 앞머리가 찰랑거리며 흔들리고 있었고, 미얀이 들고 있는 종잇조각,
그림이 없는 틀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가 천천히 잘못 없다는 듯 뻔뻔한 희진의 얼굴로 향했다.
살바체를 슬쩍 본 후, 우아하게 꾸민 동작으로 희진은 구부러진 포크에 있는 샐러드를 만족스럽게 입 안에 넣었다.
“풋!”
웃음을 참는 남자의 목소리…!
곧바로 희진의 고개가 살바체에게로 향했다.
살바체는 문에서 한걸음 들어오며 이마를 만지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하?! 웃어?!'
희진의 눈이 가늘어 졌다.
살바체는 그림에는 관심도 없고 깨진 찻잔과 널브러져 있는 쟁반을 보고 더 맘에 안 든다는
표정을 하며 미얀을 향해 말했다.
“미얀. 이거나 치워서 나가. 다치겠어.”
“아, 예!”
미얀이 허둥대며 두 사람을 번갈아 힐끔 눈치 보며 그릇들을 재빨리 주워 담고, 쟁반을 들고 치웠다.
희진은 계속 그릇을 치우는 미얀을 보는 살바체의 얼굴에서 만족스런 반응을 찾으려고 노력 했다.
미얀이 쟁반을 들고 희진의 방을 나가고 나서야, 희진은 살바체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
살바체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전혀 화났다는 흔적조차 엿보여 지지 않고 있었다.
쇼를 하는 희진이 웃긴다는 듯 미소가 입가에 잔잔히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미친 자식!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 있지?! 저 액자의 그림이 어떤 그림인데!'
살바체가 “하하하“하고 웃음을 흘리고 희진의 흔들리는 눈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배가 고팠나 보군. 샐러드 까지 몽땅 다 해치웠어.”
“으으…”
희진의 얼굴 근육이 분노로 힘을 줘 경련이 일고, 포크를 쥐고 있는 손이 심하게 떨려 왔다.
그때, 갑자기 변하는 살바체의 얼굴 표정에 희진이 숨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손!”
갑작스런 살바체의 빠른 움직임에 희진의 포크를 쥔 손이 살바체에게 잡혔다.
억지로 포크를 희진의 손에서 빼낸 살바체가 희진의 손바닥을 피게 하며 소리 쳤다.
“힘 빼!”
남자 두 손의 힘을 당할 리 없는 희진의 손이 맥없이 펴지고,
힘으로 꽃아 북북 찢어 대어 손에 상긴 상처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못 말리는 여자. 머리 좀 썼다 칭찬 해주려고 했더니 힘도 어지간히 준 모양이군. 가만있어.”
흰 바지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낸 살바체는 수건을 희진의 손에 동동 묶어 상처를 감싸 준 뒤 꼭 쥐게 했다.
“내일이나 의사가 올 텐데. 큰일이군. 나무가시라도 박힌 거 아닌가?”
천사 같은 달콤한 목소리로 살바체는 희진의 눈앞에서 희진의 손을 감싸 쥐고
하늘거리는 은빛금발머리를 살짝 밑으로 내리고 걱정스런 눈빛을 하며 말하고 있었다.
방에 환한 불빛으로 청아한 사파이어 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반짝였다.
희진이 그런 살바체를 보며 이빨 가는 소리로 물었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희진이 물음에 살바체의 입술 끝이 더 올라가며 아름다운 미소가 지어 졌다.
조심히 희진의 다친 손을 자신의 얼굴로 들어 올린 살바체가 희진의 눈을 잡고 들여다보며,
자신의 입술을 상처를 묶은 희진의 손에 갔다 댔다.
'움찔'
저절로 희진의 손이 움찔하고 움직였다.
“다른 건 다 상관없지만, 너 자신을 다치게는 하지 마.”
희진이 손을 빼내려고 힘을 주는 것을 느끼며, 살바체가 희진의 손을 더 꽉 움켜잡았다.
“넌 내 소중한 예술품이니까“
“…!”
희진의 놀란 얼굴과 충격 받은 눈에도 살바체의 눈은 선명한 청색을 띠고 반짝이고 있었다.
“사이코 같은 자식!”
희진은 무릎에 올려 있는 식판을 남아 있는 한손으로 잡아 살바체의 얼굴로 밀어 올려 버렸다.
'쨍그랑! 와…장창!'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접시들과 살바체의 힌 셔츠에 음식 찌꺼기가 지저분하게 널려 졌고,
동시에 살바체의 천사 같은 미소도 자취를 감췄다.
* * *
시원은 검은 양복차림으로 희진의 새어머니와 친 언니인 미진이 오열하며 울고 뼛가루를
뿌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 원 없이 이루고 갔으니 괜찮겠지? 희진이?”
꽉 잠긴 희진의 친오빠인 혁진의 얼굴을 수혁이 옆에서 지켜보며 어깨를 두들겨 줬다.
시원은 모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두 사람과 나란히 서서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럴 거야.”
“난 새어머니에게 가봐야겠다. 저러다 쓰러지겠어.”
문화부장관인 희진의 아버지는 오늘도 일로 출타 중이었다.
다행히 정정하신 분이라 딸의 죽음을 괴로우면서도 잘 참고 계셨다.
수혁이 덤덤하게 서 있는 시원 옆으로 한걸음 다가와 말을 붙였다.
“수고했어.”
“…형님.”
아무 말이 없다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시원의 목소리에 수혁이 시원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조만간 전 자리를 비울 것 같습니다. “
“그래… 어디 여행이라도 갈 건가? 그것도 좋겠지… 머리 좀 식히고 돌아와.”
“네. 그러겠습니다.”
자신의 어깨를 두들기고, 수혁은 자신의 작은 새어머니 쪽으로 걸어갔고,
시원은 수혁의 뒷모습을 보며 눈빛을 빛냈다.
그리고 어제 저녁 형사 친구 석수와의 전화통화를 떠올렸다.
[너 말이 맞았어. 사진 상으로 큰 차이는 아니지만 차이가 있더군. 그렇지만,
역시 사진이라 증거가 되긴 힘들겠어. 지금까지 희진씨의 연락도 없는 상태고…
살았다면 분명 연락이 왔었지 않을까?]
“유괴범이나, 테러범들에게 잡혔다면…”
[권 시원. 지금 소설 써? 테러범에게 잡히면 몸값을 요구하는 전화가 왔어야지.
안 그래? 아무튼, 이 단서 만으론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긴 힘들어. 시체가 남아
있었다면 모르지만 말이야.]
전화기를 들고 인상을 쓰던 시원이 무언가를 생각해 내고 석수에게 말했다.
“어쩌면 밀라노 병원에서 더 완벽한 증거를 가지고 있을 지도 몰라.
분명 내 느낌으로는 희진은 살아 있다고. “
석수는 한참 말이 없다가 생각 중인 시원에게 말했다.
[아, 좋아. 너 맘이 그렇게 확신을 못하겠다면… 내가 그곳 로마에 유학 중인 친구를 한명
소개해 주지. 그래도 현지에 사는 놈에게 도움을 받는 게 더 빠르겠지. 그리고 너 약혼녀가
죽었든지 살았든지 양단간에 확실한 결론을 내서 돌아오라고.]
시원이 로마에 살고 있다는 석수 친구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빠르게 수첩에 받아 적었다.
“고맙다.”
[그래. 행운을 빈다…. 아참, 시원아. 희진씨의 죽음에 관련된 걸 찾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너무 테러범들에 대해 케고 다니지는 말아라. 이태리의 마피아들은 그 곳 경찰들도 손 못
대는 인간들이야. 깊게 빠지지 말고 너무케고 다녀서 마피아들 눈에 띄지는 말아라. 알겠지?]
* * *
-사르데냐 섬 (Sardinia island)
암흑…
캄캄한 어둠에 희진은 갇혔다.
대 낮에도 창문을 나무로 맞대어 빛을 차단시켜 놓아 희진의 두려움을 조금도 감추어 줄 빛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음식을 들여올 때, 나갈 때만이 희진이 빛을 볼 수 있는 순간 이었다.
사각형의 8평 남짓한 다락방… 희진이 이곳에 갇힌 지 벌써 2일이 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살바체가 이렇게 분노 한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사벨라 데스데의 초상' 때문이 아니었다.
살바체가 두 눈썹을 올리고 낮은 목소리로 화를 무섭게 터트린 것은 희진이
살바체에게 식판을 끼얹어 버린 후였다.
곧바로 희진을 들쳐 맨 살바체는 희진을 저택의 꼭대기 층으로 데리고 올라가 조그만 문 앞에서
벽으로 밀어 붙이고 이렇게 말했었다.
“잘 들어. 여긴 미친 여자나, 환각 중독된 환자를 가둬 두던 다락 이였어.
여기다 가둬두고 치료 목적으로 회계 기도를 시키거나 귀신을 쫓아냈지.
그 잘난 교황께서 말이야.
어떤 미친 여자는 이곳에 들어가 머리를 벽에 부딪쳐 자살을 했다고 해.
그 후 부터 밤에는 '쿵, 쿵'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곤 하지.”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희진을 살바체는 다락방 문을 거칠게 열고 희진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희진을 내려놓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바로 이곳에서“
“아악!“
희진이 재빨리 문을 닫으려는 살바체를 쫓아가 소리치며 달려들었지만,
살바체는 희진의 코앞에서 문을 '꽝!'하고 닫아버렸다.
'꽝! 꽝! 꽝!'
“열어! 이 미친 새끼야! 열어! 열라고!”
문을 사이에 두고 살바체에 목소리가 문 뒤에서 들려와 희진의 귀로 울렸다.
“얌전해지면 내 보내 주지. 아니면 계속 소리쳐 보라고. 난 너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편한 잠을 잘 테니까“
“개자식! 야?! 이 나쁜 자식아! 열어! 내가 이런다고 얌전해 질것 같아?!”
“하하하하“
살바체의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희진은 계속 두들기다 지쳐 문에서 미끄러져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래. 차라리, 500년 전 예술을 파손한 죄로 갇혀 있는 것이라면 흡족할 수도 있었다.
그 만큼 살바체 그 자식에게 타격을 입힌 거라 생각하고 기꺼이 이런 어둠쯤은 견딜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 쿵쿵 소리만 아니라면…!
'…쿵, …쿵'
눈을 감아도 떠도, 떠나지 않고 떠다니는 여자 유령의 모습이 보이는 듯해, 희진은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갈수록 두려움이 커질수록 '쿵, 쿵'거리는 소리는 더 커져 가고 있었다.
빛! 조금의 빛이라도 있었다면…
“아빠…새엄마…오빠…언니….”
가족이 미치게 보고 싶었다.
희진은 3일째 되는 날 오후, 어둠을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파묻고는 흐느껴 울어 버렸다.
“흐으흑…”
* * *
'쿵! 쿵!'
살바체는 희진이 있는 다락 아래의 방으로 자신의 거처를 옮겼다.
가만히 서류를 소파에 편하게 기대 앉아 보던 살바체의 귀에 희진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서류를 보던 살바체의 이마가 자연히 찌푸려졌다.
“그만.”
살바체의 조용한 목소리에, 벽에 액자를 걸기 위해 못질을 하던 이태리 남자가 곧 '쿵, 쿵' 거리는 소리를 멈추었다.
“그만 하고 나가.”
남자는 그 말에 고개를 깊이 숙이고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살바체는 인상을 찌푸리며 들고 있던 서류를 신경질 나는 몸짓으로 침대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두고는,
흰 니트 위에 캐주얼한 아이보리색 잠바를 걸쳐 입고 방을 나섰다.
잠시 복도에 서서 희진이 있는 다락 쪽을 보던 살바체는 굳은 얼굴을 돌려 나선형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힘차게 내려갔다.
“어디 가시려고요? 주인님?”
미얀이 웃으며 살바체에게 곧 다가와 물었다.
살바체가 옆 남자 하인이 내미는 흰 가죽장갑을 손에 끼워 넣으며 미얀에게 말했다.
“이번에 들어온 스페인산 종마를 꺼내 놓으라고 해. 제레미도 같이.”
“예. 준비 시키겠습니다.”
나가려던 살바체가 무언가를 잊은 듯 다시 미얀을 돌아보며 물었다.
“준비시켜 둔 일은 다 잘 되어가고 있나?”
“예. 지금 한창 공사 중에 있고, 곧 오늘 중으로 모두 마무리가 될 거라고 했답니다.
또, 주문하신 물건들도 다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래. 갔다 와서 확인해 보지.”
“네. 그러세요.”
미얀은 빠르게 밖으로 나가는 살바체의 등에 대고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들어 배웅하고는
1층 부산스러운 공간으로 뛰어 들어 갔다.
10대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널찍한 1층 연회장을 연장을 들고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짝! 짝!'
미얀이 손뼉을 치자, 남자들이 전부 미얀을 쳐다보았다.
“자, 어서 서둘러 주세요. 오늘 안으로 마무리 꼭 지어 주셔야 합니다.”
여자 하인들이 곧바로 시원한 음료와 음식을 들고 들어섰고, 인부들은 그 모습을 보며,
자기들 끼리 농담을 하다가, 다시 부지런히 일을 끝마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로마 (Roma)
시원은 로마에 도착해 석수의 친구 하 지훈이라는 남자를 만났다.
초면에도 한국인의 같은 나이라는 것만으로도 둘은 금세 말을 낮추고 친해 질 수 있었다.
하 지훈이라는 남자의 싹싹함이 시원을 편하게 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로마에 와줘서 고맙다. 내일은 주말이니, 내가 시간을 내서 함께 밀라노로 가보자.
호텔 잡을 생각하지 말고 나랑 같이 지내. 알았지?”
“아니… 그렇게 까지 안 해도 되는데.”
“하하, 부담 가지지마. 내가 좋아서 그러니까“
생김새도 여자 같이 곱상하게 생긴 지훈은 말하는 투도 여자 같은 놈이었다.
시원은 조금 못미더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내색은 하지 않고 로마시내를 보며 차 창밖을 응시했다.
'석수 자식. 친구를 좀 가려서 사 겨라. ‘
“너 약혼녀 말이야. 나도 포스터를 본 적이 있는데, 발레리나 ‘지젤’ 이었다며? 굉장해.”
시원은 지훈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호모는 아니었나? 하고 한숨을 쉬었다.
“로마에 온 김에 보고 싶은 거라도 있어?”
“시원한 맥주나 마시러 가지?”
시원에 말에 지훈이 활짝 웃으며 운전하며 시원을 보며 말했다.
“아, 또 맥주라면 내가 잘 아는 곳이 있지. 하하하“
지훈이 안내한 곳은 로마의 젊은이들이 자주 애용하는 ‘스페인 광장’의 유명한 술집이었고, 시끄러웠다.
시원이 좋아하는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지만, 원래 사교적이고 이곳에 자주 오는 지훈은
이곳저곳에 아는 척을 해대며 시원 앞에 앉았다.
“그래서 여긴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지?”
“글쎄. 내 약혼녀를 찾거나, 아니면 죽었다는 것이 확신 될 때까지…”
거품이 인 맥주잔을 들어 한꺼번에 들어 마신 지훈이 시원에게 말했다.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면 받아들이기 힘들기야 하지.”
시원은 지훈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랑? 한 번도 사랑이라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옆에 두고 자신에게 맞는 당당한 여자라 생각 했을 뿐… 자신과 모자람 없이 어울리는 약혼녀…
결혼을 기다리는 게 좋았다.
그 여자를 처음 가지는 남자라는 것을 의심해 본적 없는 그저 내 여자라는 확신이었고
희진도 그가 약혼자라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생각 했다.
'당신이 많이 힘들지도 몰라요. 난 남자에 관심이 없으니까… 누구를 신경 써 본적도 없고,
챙기는 것도 못해요. 나에게 오직 사랑은 발레뿐이니까…
그래도 좋다면 난 당신에게 이것 하나만 약속하죠. 당신 하나에게만 충실 하겠다는 것.
그게 좋다면 약혼 받아들이겠어요.'
희진이 처음 만남에서 자신에게 던졌던 그 말…
단 한 번도 희진은 그 후, 그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약혼녀로서 할 도리를 다 해가면서, 최소한의 약혼자에게 지켜야 할 예의를 희진은 다 지켜 나갔다.
어쩔 땐 그 모습에 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다른 남자와는 분명하게 선을 긋는 희진을 보며, 시원은 우월감이 들기도 했다.
“사랑 했는지는 모르지만, 내 여자라는 확신은 있었어.
이 여자 말고 다른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
비록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해도 머리는 이 여자 생각뿐이었으니까…”
시원의 혼자 말 하듯 이렇게 처음 만나는 지훈에게 털어 놓았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자신도 우스웠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욕할 만큼 잘 아는 사이가 아니고,
이런 시끄러운 분위기도 말을 자연스럽게 나오게 하는데 한몫 했다.
'그래. 잘 먹던 사탕을 빼앗긴 기분… 그런 더러운 기분이다.'
시원의 말을 안 어울리는 진지한 얼굴로 듣던 지훈이 한참 말이 없다가 시원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 사랑을 못해 본 놈이구나. 잘 생각해 봐라. 죽은 여자를 잊지 못하고 이곳,
내 앞에 앉아 있는 너 자신을 말이야. 왜 여기까지 와야 했는지 잘 생각해 봐.”
* * *
-사르데냐 섬 (Sardinia island)
' 덜컹 '
자물쇠 벗겨지는 소리에 희진이 무릎에서 고개를 들고 문 쪽을 쳐다봤다.
곧이어 3일만에 처음 들어 보는 살바체의 목소리가 문 뒤에서 들려 왔다.
“얌전히 있어. 제레미. 곧 내 귀여운 고양이를 보여 줄 테니까 말이야.”
문을 긁는 소리와 함께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서서히 문이 열리며 밝은 빛이 희진의 얼굴로 쏟아져 들어 왔다.
살바체는 단정한 니트 차림으로 가죽 개 끈을 한손에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희진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살바체를 응시 했다.
옆에 희진의 앉은키만 한 흰색의 개가 희진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고,
살바체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레미에게 말했다.
“앉아.”
말을 알아들은 제레미가 엉덩이를 낮추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살바체가 제레미에 키에 맞춰 앉아서는 제레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희진의 시선을 읽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희진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제 얌전해 졌나?”
희진은 살바체와 눈을 맞추고 청색의 눈을 잡고는 단 한마디로 대답했다.
“내보내주세요.”
살바체가 희진의 말에 제레미를 잡고 있던 가죽 끈을 바닥에 내려놓고 다락방 안으로 들어와 희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희진이 그 손을 잡고 일어서다 휘청하고 균형을 잃었다.
살바체가 재빨리 희진의 허리를 잡아 자신에게 기대게 한 뒤 조심히 밖으로 데리고 나가며 말했다.
“먼저 목욕부터 해야겠군. 잿더미에서 나오는 신데렐라도 너보다는 낮겠어.”
희진은 살바체를 외면하고 그 말에 눈을 빛냈다가 그 눈빛을 금방 숨겨버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당신 말대로 머리를 써주지. 철저하게 복수해 줄 거야.'
“크…르르“
옆에 앉아 있는 제레미가 지나치는 희진을 보고 으르렁 거리며 이빨을 내보였다.
“먼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좀 씻으라고. 의사를 불러 줄 테니까“
“그러죠.”
살바체가 부축해서 희진의 방으로 데리고 오는 모습을 미얀이 보고는 웃으며 뛰어와 인사 했지만,
희진은 미얀을 거들떠도 안보고 살바체의 부축을 받으며 예전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
우뚝 서서 침대 맞은 편 벽을 보는 희진의 눈이 커졌다.
멀쩡하게 똑같은 그림의 '이사벨라 데스데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놀랐나? 쿡쿡… 네가 찢은 그 그림이 진짜 일지, 아니면 이 그림이 진품일지…
아니면 두개다 가짜일지…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겠지?
하하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봐야 결론은 나지 않을 거야.
어차피 모든 게 모순이고, 힘으로 안되는 게 없는 세상이니까… 모조품과 진품의 차이는 단 한끝차이지.”
희진은 잘난 척하며 거들먹거리는 살바체의 얼굴을 힐끔 노려보다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살바체를 깨닫고 재빨리 시선을 비켜 외면했다.
속으로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느라 희진은 모든 기를 소모해야 했다.
살바체는 외면하는 희진의 턱을 잡고 자신에게 돌려놓으며 말했다.
“귀여운 고양이… 언제까지 발톱을 숨기고 있을지 기대할까?”
희진이 눈을 빛내며 살아 있는 눈동자로 살바체의 청색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내 이름은 최 희진. 진이예요.”
바세론 콘티탄틴 1972 시계[5장]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내 이름은 최희진. 진 이예요.”
희진의 당찬 대답에 살바체의 눈이 밑으로 떨어뜨려지며 희진의 입술로 향했다.
노골적인 살바체의 시선에 희진은 숨을 들이마셨다.
살바체의 눈이 희진의 입술을 여전히 바라보고 작게 속삭이며 희진의 말을 따라 했다.
“…진“
조금의 간격…
그 격차 사이로 두 사람의 호흡이 번갈아 엇갈려 서로에게 전해져와 묘한 긴장감을 더 자극 시키고 있었다.
“목욕 물 준비 시킬까요?”
그때 미얀이 들어와, 두 사람의 긴장 선을 한순간에 끊었다.
살바체의 손이 자신의 턱에서 치워지는 것을 느끼고, 희진이 고개를 바로 돌려 살바체를 외면해 속으로 숨을 골랐다.
살바체는 미얀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미얀이 들고 있는 목욕제 향료를 쳐다보고는 가져오라는 손짓을 했다.
미얀이 유리병에 든 장미 꽃잎 단지를 들고 살바체에게 넘겼고, 물을 받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예쁘지? 당신을 위해서 샤넬에서 곧바로 가져온 물건이지… 이 향기 맡아 보겠어? 진?”
살바체가 꽃잎이 든 유리 단지를 열자 진한 장미향이 온 방안으로 요동치며 흩어졌다.
희진 역시 그 향기를 맡고 살바체에게 시선을 돌렸다.
달콤한 속삭임이 자연스럽게 살바체의 잘 그려진 입술에서 흘러 나와,
향기와 함께 희진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요동쳤다.
유혹…
강한 유혹이 시작되고 있었다.
희진이 그런 살바체의 달콤하고 유혹적인 눈빛을 한 얼굴을 보고,
피식 싸늘한 미소를 짓고는 유리 단지를 쳐다보며 바로 찬물을 끼얹듯이 말했다.
“잿더미에서 나온 신데렐라 보다 더 엉망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차라리 유리 구두를 한 짝 가져오지 그랬어요?”
“하하하, 재밌어. 내 말을 그세 인용하다니. 보면 볼수록 재밌는 여자야.”
살바체가 유리단지를 닫고 희진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치우며 한걸음 물러섰다.
과장된 몸동작을 하며 살바체가 희진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시종이 인사하는 포즈를 취했다.
희진이 살바체의 자신을 비웃는 동작과 웃음을 지켜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봤다.
“아름다운 지젤… 당신이 원한다면. 훗훗…하하하, 유리구두 보다 더 좋은걸 선물하지.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답… 어때?”
살바체의 한쪽 눈썹이 떠보듯 올라갔다.
희진이 놀란 눈을 했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 후에 보지. 진“
성큼 이 말을 하고 힘 있는 동작으로 희진의 방을 나서는 살바체의 등을 보며
희진은 살바체가 밖으로 나가 제레미를 휘파람 소리로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한순간에 모든 긴장이 풀리고 희진은 침대에 털썩 앉아 제레미에게 웃으며 던지는 살바체의 목소리에 문 쪽을 노려봤다.
'하, 왜 라는 내 질문에 대답을 아주 잘 해야 할 거야. '
잠시 뒤 미얀이 침대에 걸터 앉아 있는 희진에게 다가와 목욕물이 다 되었다 공손하게 말했다.
희진은 미얀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해 걸어가던 것을 멈추고 불현듯 든 생각에 미얀을 보며 물었다.
“미얀. 당신 주인이라는 사람. 나 말고 몇 명이나 이방에 데리고 있었죠?”
미얀이 희진에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저희 주인님은 아무나 이방에 들이시지 않아요.
하물며, 이곳에 이렇게 오래 머무신 적도 거의 없으셨어요.”
“그럼 어디에 있었죠?”
“…. 글쎄요. 어디라고 딱 집어 말해 드리기가 힘이 들어요. 바람 같으신 분이거든요.”
“훗, 바람이라고? 여긴 나 말고 다 미쳐 있는 것 같아.”
희진이 미얀을 보고 비웃으며 한국말로 말했다.
미얀이 무슨 뜻인지 몰라 머리를 갸우뚱했다.
상관없다는 포즈로 희진은 욕실 문을 열고 김으로 꽉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흰 수건을 가지고 서 있던 미얀이 갑자기 희진이 뒤돌아 자신을 쳐다보자 놀란 눈을 하고 희진을 응시했다.
“다락에 갇혀서 '쿵, 쿵' 소리를 들었어요. 그게 무슨 소리죠?”
“….쿵쿵 소리라고요?”
“그래요.”
미얀이 생각하는 얼굴을 갑자기 밝게 만들며 희진의 말에 대답했다.
“아래층이 지금 한창 공사 중이거든요. 그 소리를 들으신 게 분명해요.
그래도 다행이지 뭐예요. 그 정도에서 주인님이 아가씨를 용서해 주셨으니 말이예요.
그림 역시 아가씨가 상심해 하실 거라면서 똑같은 걸 갔다 걸으시고,
거기다 유명한 디자이너들에게 아가씨 옷이며 필요한 물품을 전부 사다 나르셨어요. “
“뭐라고요?”
“분명 주인님은 아가씨를 사랑하고 계신 거예요. 아, 얼마나 낭만적이신지….”
몽롱해진 미얀의 눈을 보고 희진은 “하“ 하고 한숨 비슷한 소리를 내고
미얀이 보는 앞에서 욕실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나쁜 자식. 어쩔 생각인거지? 날 여기 계속 둘 생각이야?'
그래도 위안을 삼는 것이 있다면, 내가 찢었던 그 그림이 진짜 였다는 것…
궁금증이 하나 풀렸다는 것… 희진은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밖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미얀의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희진은 복잡한 머릿속으로 따뜻함에 몸을 맡기고, 욕조 안으로 들어가 먼지와 두려움을 벗겨 냈다.
* * *
그날 저녁, 희진은 살바체와 함께 전에 왔던 의사의 진찰을 받았고, 잘 꾸며진 식탁에 함께 앉아 식사 했다.
살바체는 예전과 비슷한 검은색의 하얀 와이셔츠로 갈아입은 모습으로 희진 앞에 앉아
계속 희진을 사랑스럽다는 듯 응시하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희진은 살바체의 시선을 무시하고, 입속에 음식을 태연하게 집어넣었다.
“다행이야. 앞으로 일주일 이면 당신이 하고 싶은 발레를 실컷 할 수 있다니 말이야.”
“글쎄요. 실컷…이라는 말은 좀 모순 같은데요?
이곳에 발레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없을 뿐더러, 당신 앞에서 춤을 추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까.”
“왜지?”
희진이 살바체의 미소를 짓고 있는 천사 같은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젓고 말했다.
“왜냐는 질문은 내가 하기로 한 것 같은데… 아닌가요?”
“하하하, 그래 맞아. 좋아. 물을 준비가 다 되었다는 건가?”
희진은 곧은 자세로 살바체를 보는 시선을 치우고,
앞에 있는 냅킨으로 입가를 살짝 눌러 닦고는 살바체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뭘 물을지 궁금하군.”
살바체 역시 개구쟁이 같은 궁금증을 눈에 나타내고 앞 식탁에 두 팔을 대어 손을 맞잡고는
기대한다는 눈빛으로 희진을 응시했다.
희진은 그 모습을 보며 긴장기 하나 없는 살바체의 얼굴을 노려보고 말했다.
“왜… 날 보내주지 않는 건가요?”
“하하하, 먼저 묻는 게 그거였나? 아, 미안… 좋아. 또?”
“왜 전화를 못하게 하는 거죠?”
“후후, 또?”
“왜 내 자유를 박탈 한 거죠?!”
“크크…또?”
“왜! 왜! 나한테 이러는 건가요?!”
희진은 침착해 지려고 노력 했지만,
비아냥거리는 살바체의 비웃는 웃음소리에 자꾸만 목소리가 커져 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살바체는 목소리가 커져가며 흥분하는 희진이 못마땅해지자 자기 입술에 있는 미소를 지우고,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젓더니,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한걸음씩 어깨를 들썩이는 희진에게 다가왔다.
희진은 의자에서 살바체의 다가오는 모습을 정면을 응시하고 입을 굳게 다물고는 외면했다.
“나의 지젤… 진. 당신은 가장 중요한 “왜“ 라는 물음을 하지 못하는 군.
가장 처음에 해야 할“왜“라는 질문이 뭔지 알아?”
살바체가 희진에게 더 다가와 한손으로 희진의 고개를 자신 쪽으로 향하게 하고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여 말했다.
“왜… 내 눈에 띄었는가!”
“?!”
희진이 살바체의 말에 진의를 알지 못해 놀란 눈을 했다.
살바체는 희진의 아름다운 눈 속의 있는 두려움을 읽으며, 달콤하게 모든 진실을 쏟아냈다.
“처음 너를 본건 '몬체크루소' 극장에서였지. 내 옆에는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이 앉아 있었어.
그녀는 계속 날 보며 보챘지. 살바체, 우리 나가요…
난 계속 널 보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
'지젤' 2막이 끝이 나서도 말이야. 네가 무대를 나가는 순간까지 난 눈을 때지 못했어.
한순간, 내 인생에서 가장 무엇인가 꿈틀되고 없었던, 부족했던 무엇인가가 살아났다가,
네가 나가는 순간…. 펑“
살바체가 꿈을 꾸는 표정으로 한 손으로 동그랗게 말았다가,
사라지는 동작을 자연스럽게 연출했다. 희진은 살바체의 말을 들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살바체가 말하는 묘사들이 자신 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내 삶이 무료하게 변했지. 그런데, 웃겼던 게 뭔지 알아?
2막이 지나 모든 사람들이 너를 보며 Bravo를 외쳐 댈 때, 난 그 극장을 폭파시켜 버리고 싶더군.
그 안에 있는 사람들 눈을 다 파버리고 싶었지.
나 혼자 만의 지젤을 만들어야겠다. 오직 나만의 지젤! 그 순간 결심 한 거지.
'왜?' 라는 질문은 바로 거기서 부터 시작인거야. 왜 내 눈에 띈 거지? 지젤? “
희진이 입술을 꼭 깨물었던 입을 열어 이를 갈듯 살바체를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은 미쳤어.”
“그래. 너에게 미쳤지. 정확히 말하면, 너의 지젤에게 말이야.”
살바체는 이 말을 하고 희진에게 일어서라는 몸짓을 하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희진은 떨리는 다리를 들고 천천히 식탁에서 일어서,
살바체가 내미는 한쪽 팔을 보고 살바체를 응시하며 '뭐하는 짓이냐'는 물음을 보냈다.
“선물을 주고 싶어. 널 가둬두고 괴롭힌 일에 대한 사과도 할 겸 말이야.”
“선물은 지금도 충분히 넘치죠. 당신이 내 방에 가져다 놓은 그 물건들만으로도!”
“사양하고 싶지 않을 거야. 모든 진실이 그 안에 담겨 있는 '진실의 상자'니까… 알지? '판도라의 상자'라고 하나?”
희진은 마지못해, 살바체가 내미는 팔에 자신의 손을 끼고, 식당을 나와 그가 이끄는 데로 들어갔다.
서재로 보이는 곳에 들어선 희진은 가장 먼저 최신식 컴퓨터와
그 옆에 있는 전화기를 힐끔 쳐다보고 이곳이 바로 살바체의 전용 서재임을 인식 했다.
살바체는 희진의 팔을 자연스럽게 내려놓고, 책상 쪽으로 돌아서
닫혀 있던 서랍을 하나 열고 금속으로 된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제법 큰 상자는 여러 가지 꽃 그림이 금속으로 박힌 고풍스런 상자였다.
살바체는 그 상자를 들어 희진에게 안겨 주고는 말했다.
“앉아서 보도록 해. 네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궁금하니까 말이야.”
“값진 보석이라도 들은 모양이군요.”
묵직한 금속의 차가움과 무게를 느끼며, 희진이 싸늘하게 말했다.
살바체는 그 말에 “하하하“ 웃었다.
희진을 가죽 소파로 이끌어 앉히고 살바체는 맞은편 자리에 가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며
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만졌다.
희진은 그런 살바체를 의심하는 눈으로 쳐다보며 어서 열어보라는 살바체의 눈을 눈치 채고
침을 삼키며 천천히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희진은 떨리는 손으로 금속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열기 시작 했다.
조금씩 열리는 상자를 따라 살바체의 눈빛도 깊어졌고, 희진의 표정 하나 하나를
관찰 하는 살바체의 눈이 매섭게 변해 갔다.
태연히 다리를 꼬고 앉아 손을 입가로 가져가는 살바체는 완전히 열어 재낀 상자 안에서
시선을 때지 못하는 희진을 보았다.
천천히 흔들리는 희진의 손끝이 상자 안에 있는 반짝이는 금속성 물체를 꺼내 들었다.
살바체는 희진이 그 물체를 들어 확실히 확인하는 모습을, 비명을 터트리는 순간을 기다렸고,
정확히 희진의 눈동자가 커진 순간 외마디 외침이 희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헉! 이…이건!”
매서운 눈동자의 희진의 눈이 곧장 살바체에게 쏟아 졌다.
그러나 살바체의 눈동자는 희진을 응시하며 짙은 청색으로 반짝일 뿐이었다.
“맘에 드는지 모르겠어. 당신이 그 남자에게 준 물건을 내가 다시 찾아 왔지. “
“아냐. 못 믿겠어. 비슷한 물건 일거예요. 그렇죠?!”
희진은 바세론 콘티탄틴 1972라는 숫자와 상표를 보고 다시 확인 했다.
분명 이태리에 오자마자, 약혼자인 시원에게 선물로 보낸 그 시계가 분명 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 시계가 이 남자 손에 들어가 있는 것인가…?!
“혼란스럽다는 표정이군. “
살바체가 자리에서 태연하게 일어서 희진 쪽으로 걸어와 희진이 들고 있는 바세론 콘티탄틴
1972 남성용 시계를 받아 들고 자신의 손목에 채우고는
희진의 바르르 떠는 입술을 보며 손목을 찬 손으로 희진의 입술 선을 살짝 쓸었다.
“만지지마.”
곧 바로 희진이 거부하며 고개를 돌렸다.
살바체는 희진을 향해 싸늘한 미소를 짓고 희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네가 이태리에서 누구와, 어떻게 어떤 물건을 샀는지 까지 모조리 다 알고 있지.
그런 행적을 조사하는 건 나에게 일도 아닌 일이야. 그 보다 지금 걱정해야 할 건
이 시계가 아니라 당신의 약혼자 아닌가?”
“…! 그, 그게 무슨 말이죠?”
희진은 복잡한 머릿속에 살바체의 말하는 뜻을 다시 생각하고 눈을 크게 뜨며 살바체를 응시했다.
“서…설마, 시원 씨를!!”
“이태리에 와 있더군. 겁이 없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어.
그런 눈으로 쳐다볼 것 없어. 아직 죽이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당신이 …뭔데, 시원 씨를 죽인다 어쩐다 하는 거지?!
이런 식으로 협박한다고 내가 고분고분 할 거라고 생각 하면 오산이에요!
당신이 신이 아닌 이상, 누구도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막을 권리는 없어요!
시원 씨를 건드렸다간, 내가 당신을 죽이고 말겠어! 죽여 버리겠단 말 이예요! 알겠어요?!”
살바체는 말하면서 큰소리치며 악다구니 해대는 희진을 보며 조금씩 희진의 앉아 있는 소파에 등받이를 잡아,
천천히 몸을 숙여 희진을 자신의 사이에 가두고는 말했다.
“이태리에 온 이상, 네 약혼자는 내 덫에 걸려 든 거야.
난 그 놈을 미끼로 쓸 생각이지. 너를 붙잡아 둘 미끼로 말이야.
도망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다음엔 이 상자 안에 그 놈의 머리가 들어 있을 지도 모르니까.”
희진은 자신의 눈을 잡고 조용히 읊조리는 살바체의 입술을 쳐다보며 방금까지 화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살바체의 눈이 자신이 농담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희진은 그런 살바체의 눈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확인 시키듯 강요하는
살바체의 짙은 청색의 눈을 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여 긍정을 표시했다.
잠깐 동안 살바체의 사이에 갇혀 있던 순간이 길게 느껴져 희진은 살바체가 일어서는 순간
참았던 숨을 터트리고 가슴을 쓸었다.
냉정함, 잔인함, 그러면서도, 웃으면 천사 같이 보이는 남자… 순수해 보이는 남자라니…
“내게 원하는 걸 말해요. 이렇게 숨 막히게 하지 말고, 차라리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을 하라고요“
희진이 체념 하듯 한숨을 섞어 뒤돌아 선 살바체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렇게 갇혀 있는 순간이 언제까지 인지,
저 남자가 원하는 것을 주고 빨리 끝내고 싶은 심정에 희진이 애원하다시피 살바체의 등을 보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주겠다는 건가?”
“그래요. 당신이 원하는 게 대체 뭐죠?! 왜 날 가둬두고, 왜 못 살게 구는 거죠?”
“…내가 원하는 건“
살바체가 바로 뒤돌아 희진을 응시하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너의 자유, 너의 지젤, 너의 사랑, 너를 소유하는 것… 다른 건 생각해 본적이 없군.”
“미쳤군요.”
희진은 몇 번이나 살바체에게 말했던 그 말을 다시 했다.
정말 미친 남자가 분명해… 희진은 살바체가 한걸음 위험하게 다가서자, 움찔 하고 살바체의 눈을 보았다.
“난 가지고 싶은 건 꼭 가지는 사람이야.
나에게 걸린 예술품은 한 번도 내 손에서 빠져 나간 적이 없었지.
사람이란 예술품을 가지는 것도 재밌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
“진짜 미쳤어.”
“…그래서 말했잖아. 내 눈에 띈 게 잘 못 이라고 말이야.”
살바체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와 살바체의 손목에 찬 콘티탄틴의 시계를 보며,
희진은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숨기고, 차분하게 살바체에게 말했다.
“좋아요. 원하는 데로 해주겠어요. 대신, 시원 씨는…. “
희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살바체의 손이 희진의 어깨를 잡았다.
꽉 잡은 힘에 희진의 인상이 저절로 구겨져왔다.
“아파요.”
“그 남자를 사랑하나?”
“하, 날 예술품으로 가지고 싶다는 남자가 별 거를 다 묻는 군요.”
“말해.”
살바체가 위험하게 더 기대오며 희진의 팔을 움켜잡은 손에 힘을 더해오자,
희진은 살바체의 눈을 응시하고 독하게 입술을 열어 살바체에게 말했다.
“그래요. 사랑해요.”
희진의 눈동자가 바로 살바체에게 날카롭게 꽂혔다.
살바체의 눈이 깊어지고, 눈썹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희진은 아차 했지만, 벌써 말은 나가고 난 후였다.
살바체는 곧바로 다른 한손으로 희진의 얼굴을 잡고 입술을 갔다 댔다.
희진은 입술을 훔치기 전 읊조리며 자신에게 말하는 살바체의 싸늘한 목소리를 들었다.
“귀여운 고양이는 주인을 섬기고 사랑하지. 다른 주인을 섬기지 않아.
앞으로는 버릇없이 굴 땐 가차 없이 벌을 주겠어.”
곧바로 도망가지 못하게 희진의 얼굴을 잡은 살바체의 입술이 희진의 떨리는 입술을 덮쳐왔고,
희진은 덮쳐오는 살바체의 몸을 피하지 못하고 살바체가 끊임없이 요구하는 입술을 고스란히 내 주어야 했다.
* * *
- Roma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시원은 지훈이라는 친구와 엄청나게 취해 필름이 끊겼었다.
자고 일어나 머리가 몽롱한 시원은 시원한 물을 찾아 소파에서 일어서 머리를 흔들었다.
“어? 이제 일어났나?”
멀쩡한 듯 보이는 지훈을 보고, 시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제 많이 마신 것 같지 않은데… 벌써 저녁이야?”
“어. 초저녁. 시차로 피곤했던 모양이야. 요즘 잠도 못 잤어?”
“그래. 그래서 그랬나 보군.”
시원은 희진이 사고를 당한 후부터 하루에 한두 시간을 잤기에 피곤했던 자신을 이해하고는
지훈에게 시원한 물을 한잔 달라 부탁 했다.
지훈은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이태리 노래를 흥얼거리는 지훈을 시원이 쳐다보다 벗어 놓은 와이셔츠를 찾아 대충 걸쳐 입고 일어섰다.
“자. 여기 있어.”
“어.”
시원이 차가운 얼음이 든 유리 물컵을 들고 마시다 갑자기 이상한 생각에 물을 먹다 멈추었다.
“왜 그래?”
물을 먹다 갑자기 멈추고 물 잔을 내리는 시원을 보며, 지훈이 이상해 물었다.
“내. 시계…”
“응?”
시원은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다 물 잔을 내려놓고 아무 곳이나 벗어 놓은 검은 양복 주머니를 찾아 뒤지기 시작 했다.
“왜 그래? 지갑이라도 잃어 먹었나?”
“…지갑은 있는데, 손목에 찼던 시계가 없어 졌어.”
시원의 말에 지훈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글쎄… 난 못 봤는데. 어제 필름이 끊겼을 때, 누가 훔쳐 간 게 아닐까? 비싼 거야?”
시원은 희진이 이태리에서 사서 보내준 콘티탄틴 시계를 잃어버린 게 속상해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머리를 거칠게 넘겼다.
“젠장! 되는 일이 없군.”
지훈이 시원에 옆에 앉아 어깨를 탁탁 두들기며 말했다.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래. 비싼 거면 경찰에 신고해 두자고.
아, 그건 그렇고 언제쯤 밀라노에 갈 생각이지?”
“…내일은 가야지.”
“하하하, 그래. 난 저녁을 준비해 줄께. 손님이 왔는데도 변변한 반찬이 별로 없네.
금방 나가서 뭐라도 사와야겠어.”
시원은 지훈이 일어나 잠바를 걸치는 것을 보며, 혼란스런 얼굴로 계속 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잘 찾아보라고. 어제 술 취해서 술김에 벗어 놓고 잊어 먹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그래. 갔다 와.”
시원이 구부리며 바닥을 다시 샅샅이 찾는 것을 보며 지훈이 밖으로 나갔다.
지훈은 거리로 나와 잠시 주위를 살피고는 공중전화를 찾아 들어가 번호를 눌렀다.
이태리어가 자연스럽게 지훈에게서 흘러 나왔고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던 지훈이 말했다.
“내일 밀라노에 가겠다고 합니다. 네.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 * *
살바체는 희진의 입술을 열기 위해 손으로 볼을 눌러 그 안에 달콤한 체액을 음미했다.
다시 비참하게 희진을 가진다고 해서 달라 질 것도 없었다.
살바체는 희진의 입술을 빼앗으며, 안에 혀를 달콤하게 자신의 안으로 빨아들이고,
벗어나려는 희진의 얼굴을 붙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막았다.
희진은 막무가내로 자신의 안을 헤집고 들어오는 살바체의 혀를 느끼고, 물어 버리려고 했지만,
얼굴을 살바체의 손에 잡혀 어쩌지를 못했다.
손으로 살바체의 등을 쳐대며 발버둥 치지만, 기대오는 살바체의 몸무게에 반항은 미미했다.
“음…”
살바체의 짙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희진은 눈을 뜨고 지켜봤다.
그 몇 분의 시간이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져 희진은 눈을 크게 뜨고 살바체가 주는 느낌을 거부하고 발버둥 쳤다.
“남자는 저항하는 여자를 좋아하지. 정복하는 것 같은 쾌감을 주거든.”
“….나쁜 자식.”
희진이 발버둥치고 벗어나려고 요동쳐, 입술이 살짝 찢어져 피가 조금 방울져 맺혔다.
살바체가 희진의 입술의 피를 엄지로 쓸어주고 시선을 주며 미소 지었다.
“선물이 하나 더 있다고 내가 말 했나?”
“필요 없어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같이 방에 가보지. 미얀이 준비해 뒀을 거야."
반항하며 손길을 쳐내는 희진을 살바체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한걸음 물러나며, 따라오라는 시선을 하고 앞서 밖으로 나갔다.
희진은 살바체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따라 나가 나선형 복도를 지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살바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
미얀이 들고 있는 새장…
“…!”
“놀랐나?”
희진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노란색의 카나리아… '아리아'라고 이름 붙인 자신의 새였다.
이태리에서 외롭지 말라고 시원이 배달해서 보내준 카나리아…
그 카나리아가 미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름이 뭐지?”
살바체가 미얀이 든 새장 안에 입구를 열자, 희진이 움찔하고 살바체를 응시 했다.
조그만 카나리아가 살바체의 한손에 잡혀 꼼짝 없이 얼굴을 내주고 살바체의 엄지로 쓰다듬을 받고 있었다.
희진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이 그 안에 갇힌 것 같아 옴짝해 오는 것을 느끼고 한걸음 물러나 살바체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 도대체, 누구죠?!”
살바체 프란트 [6장]
“글쎄. 네가 보는 나. 그게 나겠지”
희진은 태연히 말하는 살바체를 노려보며 성큼 살바체에게 다가가 카나리아 '아리아'를 빼앗아 두 손으로 소중히 보듬었다.
작고 갸날픈 새의 깃털느낌과 따뜻함을 느끼며, 희진은 살바체를 외면하고 뒤를 돌았다.
살바체는 자신에게서 카나리아를 빼앗아 들고 뒤돌아서서 고개를 숙이는 희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움츠러든 어깨가 바들거리며 떨리고 있었으나, 살바체는 희진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때지 않고 말했다.
“미얀. 나가“
살바체의 명령 한마디에 미얀이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새장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밖으로 나갔다.
조심히 문을 닫고 나가는 미얀을 보지도 않고 살바체는 줄곧 희진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돌려놓고 자신을 보게 하려고 살바체가 희진의 어깨를 잡으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희진의 조용하지만 슬픈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 '아리아'가 여기 있다는 것, 내 카나리아가 무사 하다는 것…
그게 뭘 뜻하는 건지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해요?!
모든 게 처음부터 당신이 꾸민 일이었군요.
폭탄까지 터질 걸 미리 알고 날 데리고 나와 은인인척, 구해 준척, 선심 쓴 척 한 거였어요.”
갑자기 희진이 휙 뒤를 돌아 살바체를 타 들어갈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소리쳤다.
“살인자! 미친 자식!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죽여 놓고 양심의 가책 하나 없는 거지?!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 같아?!”
살바체는 흥분해서 눈물까지 글썽이며 소리치는 희진의 어깨를 확 붙들었다.
그만하라는 무언의 압력이 잔뜩 들어간 살바체의 힘에 희진이 입을 꾹 닫고 눈으로만 모든 원망을 살바체에게 쏟아 냈다.
“내가 왜 네게 그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그렇지만 말해 주지.
난 테러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어.
하지만 처음에 그들이 폭파할 예정지는 '체르니'호텔이 아닌, 명품 백화점이었지.
시간대도 새벽때가 아닌 대낮에 일을 낼 생각이더군.
확실히 위험부담이 큰일이기도 하고, 마피아를 몰아내려는 기민당의 항의에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한 일로
그리 큰 소동을 일으킬 필요도 없었지. 내가 장소와 시간대를 옮기라고 조언하고 단,
너를 빼내는데 도우라고 말했어.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일을 하고,
나 역시 그 일로 인해 너를 얻었지. 자, 이제 말해봐. 내가 잘못 한 건가?”
“그 딴 식으로 자신을 합리화 시키지 말아요. 동조한 당신도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니까“
희진의 찬 대답에 살바체는 희진의 잡은 팔에 힘을 빼고 손을 거두고 말했다.
“그래. 맞아.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이태리에서 마피아는 아무도 건들이지 못해.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
“그렇다고 당신 죄가 없어지진 않아요. 8명의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도,
날 억지로 납치해 잡아 가둔 것도, 내 약혼자를 들이밀고 협박하는 당신.
나 역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살바체는 희진의 분한 목소리와 차가운 눈을 보며 희진에게서 한걸음 물러나 피곤하다는 듯 이마를 엄지로 문지르며 말했다.
“좋아. 마음대로. 계속 할퀴기만 하는 여자를 상대하는 것도 지겹고 짜증스럽군.
카나리아와 외로움을 달래면서 있으라고, 용서 받을 필요 없는 이 인간은 사라져 줄 테니.”
살바체가 뒤돌아 나가는 모습을 노려보고 희진이 말했다.
“아예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살바체가 뒤돌아 희진을 보고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이마에서 손을 까닥이고 말했다.
“원한다면, signora (이태리어 = 여자) “
* * *
-밀라노 (Milano)
시원은 허전한 손목을 한손으로 문지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소매치기나 명품을 알아본 사람이 자신이 술에 취해 있을 때,
술집에서 훔쳐간 모양이었다.
“젠장!”
몇 번인지 모를 똑같은 욕을 시원은 하면서, 30분이나 넘게 들어오라는 소리가 없는 간호사를 쳐다보고 인상을 썼다.
간호사가 힐끔 시원을 쳐다보다 자신에게 성큼 걸어오는 잘생긴 동양남자를 보고는 긴장된 표정을 했다.
“아직 세잔 의사선생님의 식사가 끝나지 않았습니까?”
“예. 죄송합니다. 식사가 길어지시네요.”
시원은 인상을 피지 않고, 데스크에 기대 뚱뚱한 여자 간호사에게 물었다.
“여기서 '체르니'호텔의 사망자들의 부검을 전부 한 곳 맞습니까?”
“예. 맞아요.”
뚱뚱한 여 간호사는 힐끔 시원을 보고 안 되었다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저, 그런데 외람된 말이지만, 진이 양의 가족분이신가요?”
시원이 슬금 조심히 묻는 여 간호사를 놀란 시선으로 쳐다보고 대뜸 빠르게 물었다.
“희진을 압니까?”
“아름다운 동양여자가 이 병원에 많지 않으니, 기억 못 할 수가 없죠. “
“어떻게 아시죠?”
간호사가 시원을 보고, 보여줄게 있는지 차트가 늘어진 곳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뒤돌아서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시원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진이씨 차트를 여기다 두었는데, 치워졌네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과다 스트레스로 인한 감기와 두통으로 방문 하신 걸로 아는데…“
그때, 진찰실 불에 불이 들어왔다. 간호사가 시원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식사를 끝내신 모양입니다. 들어가 보세요.”
“고맙습니다.”
시원이 진찰실로 들어섰다.
한 대머리의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대머리의 의사가 시원이 들어서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앞 의자를 권했다.
“유가족 분이신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확인 차 들렸습니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부검의 사인이 적힌 서류를 시원에게 건넸다.
영어로 써 있는 서류를 능숙하게 읽어 내려가던 시원이 의사를 향해 물었다.
“착오가 있을 수는 없습니까?”
의사가 시원에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간혹 유가족 분들이 병원을 의심하고 믿지 못해 확인하러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거기 보시는 데로 최 희진 양의 동일한 DNA가 그 시체에서도 똑같이 일치했습니다.”
시원은 한참 서류를 쳐다보다 한 가지 이상한 느낌을 받고 의사를 쳐다만 보았다.
의사가 시원에 시선에 조금 당황하는 듯 느껴지자 시원이 한 가지 더 물었다.
“제 약혼녀인 희진이 가끔 공연 준비중 심한 스트레스로 머리가 아프고는 했었죠.
죄송하지만, 어느 병원에 다녔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태연히 서류를 향해 시선을 옮기고,
말하는 시원에 얼굴에는 연기하듯 겉으로는 아무런 의심의 흔적도 없었다.
“글쎄요… 밀라노에 병원이 한두 곳도 아니고 그건 알기 힘들겠습니다.”
“아, 그렇겠군요.”
시원은 의사를 보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을 굳혔다.
'분명 간호사의 말과 의사의 말이 틀리다. 간호사가 거짓말을 할리는 없고,
그렇다면 의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야.'
지금 다그쳐서 의사에게 사실을 털어 놓게 할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던 시원은,
조금의 물증이라도 더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닫고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 서류 다음번에 올 때, 한 장 복사해 가져가고 싶습니다만…”
“준비해 두겠습니다.”
“예.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시원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의사가 나가는 시원의 등에 대고 충고하듯 말했다.
“피해자나 유가족을 위해서라도 그만 잊어버리시고, 생활로 원활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시원은 뒤돌아 나가려다 들려오는 의사의 말에 차가운 눈을 하고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
간신히 자신을 자제하고 밖으로 나온 시원이 숨을 참았다.
그리고 아까의 그 여 간호사에게 다가가 품안에 있던 사진을 꺼내 보여주며 다시 확인했다.
“아까 말씀하신 사람이 바로 이 여자분 맞습니까?”
시원이 보여주는 희진의 사진을 손으로 들어 보면서 간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실물보다 사진이 더 잘나왔네요.”
시원은 간호사를 보고 희망에 심장이 거칠게 뛰어 대는 걸 느꼈다.
밖으로 나온 시원은 곧바로 일을 보고 있는 지훈에게 전화를 했다.
“나야. 유명한 사립탐정 알고 있는 사람 있어?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아.”
* * *
“시원 씨…”
희진은 이틀째 버릇처럼 새장 안에 카나리아를 쳐다보며 시원의 이름을 불렀다.
시원 역시 살바체의 손에 미치고 있다는 것을,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우선 살바체가 어느 정도의 능력이 있는지 알아야해. 난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희진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미얀이 방으로 들어서길 기다렸다 태연하게 말을 붙였다.
“미얀. 당신 주인은 뭐하는 사람이죠?”
카나리아를 쳐다보며 무심하게 묻는 희진을 놀란 시선으로 쳐다 보며, 들고 있던 꽃병을 미얀이 내려놓았다.
미얀은 그 동안 자신까지 외면하고 쳐다도 보지 않았던 희진이 말을 시키자, 반가운 마음에 냉큼 대답했다.
“이태리에서 '살바체 프란트' 라는 이름을 모르면 이태리 사람이 아니라고 하죠. 그만큼 유명한 분이예요.”
“그러니까 뭐가 말 이예요?"
희진이 답답하다는 시선으로 미얀을 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우선 살바체님의 가문인 프란트家는 이태리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중 하나지요.
거기다 살바체님은 프란트家의 유일한 직계손이시죠.
프란트家에서 무솔리니 집권시절에 유일하게 주인님의 증조부 한분만이 살아 남으셨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프란트家에서 유일하게 살바체님 만이 살아 계시는 거지요.”
“부모님은 언제 돌아가셨는데요? 거기 좀 앉아서 말해 봐요.”
희진이 기회를 잡고 전부 알아낼 생각으로 탁자 앞에 의자에 앉아 미얀을 응시했다.
미얀이 앞 의자에 앉으며 희진에게 말했다.
“음…그러니까, 살바체님의 새어머니는 가장 아름다운 분이셨는데 프랑스인이셨어요.
금발이셨죠. 살바체님 처럼… 그런데 워낙 몸이 약하셔서 살바체님을 낳자마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요?”
“살보네님은 아내가 죽자마자, 실의에 빠져서 방에 혼자 들어가…”
머뭇거리는 미얀의 표정을 보고 희진은 대충 눈치를 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얀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슬픈 눈빛을 하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살보네님에겐 돌아가신 헤지나님이 전부 셨어요.
옛날부터 프란트家 사람들은 단 한 번의 사랑을 하거든요.
절대로 놓치지 않는 사랑이요. 얼마나 낭만적인 가문인지…
전 이곳에 태어나 이곳에서 일한다는 게 항상 자랑스럽답니다.”
희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절대 놓치지 않는 사랑이라니… 그건 집착이고 구속이라고.
“전 확신해요. 분명 지금까지 살바체님이 많은 여자를 만나셨다고 하지만,
이번엔 분명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단 한 번의 사랑이 찾아 온 거라고요.”
희진은 미얀을 보며 짜증이 치솟아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한마디 그냥 안하고 넘어갈 수가 없어서 희진이 미얀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 사랑? 사랑이라고? 이봐요. 미얀. 난 갇혔어요. 납치 되었다고요.
그런데, 내가 지금 사랑 받는 걸로 보이나요? 미얀 눈에는?!”
“네. 전 그렇게 보이는 걸요.”
미얀은 노려보는 희진의 시선에도 꿈적도 않고 미소를 짓고 쳐다보고 있었다.
더 말해보았자, 입만 아프겠다는 생각에 희진은 화제를 돌리고 마음을 가라 앉혔다.
“좋아요. 내가 흥분했다고 치죠. 자, 다른 얘기해요.
그럼 살바체의 직업은 뭐죠? 어느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요?”
미얀이 희진을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며 겸손한 투로 말했다.
“이태리에서 살바체님이 원하시는 건 뭐든지 하실 수 있는 능력이요.
살바체님이 손 안 된 사업이 이태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시면 되어요.
심지어 마피아들도 살바체님을 건들이지 못하지요.”
“왜죠?”
“저, 저기 이건 비밀이라… 하긴 알 사람들은 다 알고는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거든요.”
희진이 궁금한데 계속 뜸을 들이는 미얀을 보며 말을 재촉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도 입을 꾹 닫겠어요. 빨리 말 해봐요.”
“음, 그러니까 … 마피아의 대부이신 알페르노님이 우리 주인님의 양부이시래요.”
“뭐…뭐라구요?!”
“이제 아셨죠? 살바체님에게 무서운 게 없어요. 그런 분이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행운이라고요.”
희진은 방금 들은 미얀의 말에 쇼크를 일으켜 앉아 있는 중에도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걸려도 잘못 걸렸다는 생각에 희진은 앞날이 캄캄해져 옴을 느꼈다.
* * *
“어서 와라“
알페르노의 무뚝뚝하던 얼굴이 반가운 사람의 얼굴을 보자 금방 자상한 얼굴로 바뀌었다.
살바체의 얼굴에도 가식 없는 미소가 어렸다.
“요즘 들어 얼굴보기가 힘들구나. 체논에게 듣자하니 이번 일 너가 도왔다면서“
체논이 알페르노에게 보고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살바체의 얼굴에 잠시 긴장이 스쳐 지나갔다.
“그저 장소를 제공해 준 것뿐이야.”
“장소를 제공하고 바라는 걸 얻었다고 들었다. 흥미롭게도 그게 여자라던데…?”
살바체가 짓궂게 반짝이는 알페르노의 눈을 보고 소파에 편히 기대고는 말했다.
“다 조사해 보고 손바닥 보듯 알면서 뭘 묻는 거지? 알페르노의 손에 나 역시 벗어나지 못하는 걸 알아.”
“하하, 그세 엄살이 늘었어.”
이렇게 허물없이 지내는 두 사람이었지만, 금세 알페르노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살바체의 눈썹도 올라가며 알페르노의 얼굴을 살폈다.
“앞으로는 도와준다는 명목으로라도 우리 일에 끼어들지 마라.
이번 일에 너의 명성에도 큰 타격이 왔다고 들었다.
어차피 기민당에 보여주기 위한 본보기에 불과했던 일이야. 네 손에 조금의 피도 묻히지 마라.”
살바체가 알페르노의 심각한 말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키고 두 손을 맞잡고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알페르노 대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고 한다면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거야.
어차피 빚을 지고 못사는 나라는 걸 알페르노가 잘 알고 있잖아? 내 뒤를 봐주는 것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었어.”
살바체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알페르노는 화제를 돌려 호기심을 들어내며 물었다.
“이번에 빼돌린 여자 이야기나 해봐.”
“알페르노. 모든 보고에 사진까지 봐놓고 얘기만 들었다니, 나보고 믿으라는 얘기야?”
'하하'웃어 재낀 알페르노가 살바체에게 말했다.
“그래. 좋다. 내가 묻는 건 잡아둔 여자에 대한 너의 생각이야.”
살바체가 무척 어려운 질문이라도 받았다는 듯이 이마를 문지르며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 처음엔 아름답다 생각해서 무작정 가지고 싶었어.
예술품으로 소장해 두고 보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거든.”
“그런데?”
살바체가 피식 미소를 흘리고 말했다.
“재밌어. 재밌는 여자야. 고양이 같은 발톱으로 자꾸 할퀴려고 들지.
절대로 수그러들지 않고 지려고 하지도 않아. 지금은 혼자 지칠 때를 기다리는 중인데…
벌써 좀이 쑤셔와. 후후“
살바체의 표정을 유심히 보던 알페르노는 이번엔 살바체의 무엇인가 틀리다는 것을 보았다.
프란트 家의 남자들의 집념과 욕망, 욕심… 그것은 언제나 화를 가져오고는 했다.
알페르노는 살바체가 여자를 생각하는 눈빛을 보며 말했다.
“그런 여자가 도리어 널 길들여 노예로 만들 수 있다. 조심해.”
알페르노의 말에 살바체가 “하하하“ 웃어 재꼈다.
웃을 때 마다 보이는 하얀 고른 치아와, 각지고 부드러운 윤곽이 남자다우면서도 아름다운 선을 이루어 한없이 아름다웠다.
'가브리엘…'
알페르노는 천사 가브리엘을 닮았던 한 여자를 기억하며, 살바체의 얼굴에서 그 흔적을 찾았다.
'사랑, 절망, 고통…집념, 그 소용돌이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자신도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었는가!‘
“알페르노. 날 길들일 수 있는 여자는 이 세상에 없어. 설사 그런 여자가 있다 해도 난 거부할 마음도 없지.
아니, 난 대 환영이야.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아니야?”
알페르노는 살바체가 '사랑'을 우습게 보는 것을 지켜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한 인간으로 약하게 만드는 살바체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여자에게 길들여 지지 않는 방법이 뭔지 알아?
그건 여러 여자를 만나보고 안아 보는 거지.”
알페르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살바체가 미소 지으며 따라 일어섰다.
“이번엔 어디로 갈 생각이야?”
“체논과 셋이서 '유페노'로 가자. “
“후후, 맘대로.”
* * *
지훈은 밀라노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술집인 '유페노'로 시원을 데리고 갔다.
예약해 놓기 전엔 들어가기 힘든 곳이라 지훈이 특별히 시원을 위해 아는 친구에게 부탁해 겨우 예약해 놓았다고 했다.
그러나 시원은 약혼자의 생사를 알아보러 온 자신을 굳이 이런 곳에 데리고 오는 지훈이
이해가 가면서도 속으로는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저 앞으로의 일을 상의할 겸 기분 좋은 척 따라 나선 것 뿐…
“이태리에 와서 이곳을 빼 놓으면 안 돼. 여기 여자들은 전부 끝내주거든.”
시원은 '유페노'로 들어가기 전 서 있는 덩치 큰 이태리 남자들을 보고, 저 들이 마피아의 일부 일거라 생각했다.
서 있는 폼이 잔뜩 거만한 모습이 서울에 조폭보다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신경 쓰지 마. 어디가나 있는 사람들이라고. 가장 위험한 인물들은, 저런 똘마니가 아니지.”
“그래.”
지훈이 시원을 데리고 '유페노' 안으로 들어가 둥근 탁자에 앉아 위스키를 시키고,
반나체로 춤추는 이태리 여자들을 구경하며 시원에게 말했다.
“여기 어때?”
“좀 시끄럽군.”
“하하, 좀만 기다려봐. 내가 아는 여자가 여기 있으니까“
사방 알고 있는 사람이 많기도 하군. 하는 표정으로 시원이 피식 웃으며 말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시끄럽고 어두운 조명 안에서 여자들이 춤을 추고 아름다운 젖무덤을 들어내고 있었지만,
시원의 시선은 줄곧 양주가든 유리잔에 가 있었다.
이틀이 지난 시간… 아직 뚜렷한 증거조차 찾지 못했다.
의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해도, 희진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내가 소개해준 사립탐정에겐 연락이 아직 없었나?”
“어. 그저 기다리라고 하더군. 의사의 뒷조사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조금 시일이 걸리겠지.”
“분명 살아 있다면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말라고.”
“그래.”
그때, 종업원 하나가 고급 위스키 병을 하나 들고 그들에게 걸어와 말했다.
“손님들께 저희 주인께서 무료로 서비스 해 주신 술입니다. “
지훈이 놀란 얼굴로 종업원이 내미는 위스키 병을 보고 말했다.
“인버하우스 25년산… 와우!”
시원은 그 위스키 병으로 손을 가져가는 지훈을 말리고 종업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우린 시킨 기억이 없는데, 이 위스키는 우리가 시킨 이 음식들보다 더 비싼 건데,
굳이 이러는 이유가 뭐지?”
“저도 잘 모릅니다. 그저 가져다주라는 말씀만 들었습니다.”
종업원은 고개를 숙이고 가 버렸고, 시원은 그 위스키 병을 보고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며 지훈에게 물었다.
“여기 사장이 누군데?”
“글쎄… 나도 잘은 모르지만, 아마 마피아 쪽 누군가의 것이겠지. 자주는 오지만 그것 까지 알아보진 않았어.”
“너와 친하지 않다는 거지?”
지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원의 이마가 더 찌푸려졌다.
이런 공짜 술은 찜찜하다.
]
아무 이유 없이 받는 술이라니….
시원은 병을 따려는 지훈을 말리고 종업원을 손짓해 불렀다.
“미안하지만, 이건 먹을 생각이 없어. 성의만 받겠다고 전해.
그리고 여기서 가장 좋은 위스키로 하나 가져오게.”
“발렌타인 30년산이 있습니다.”
“좋아. 그걸로.”
시원은 발렌타인이라는 말에 지훈의 입이 귀까지 찢어지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 무척 화끈한 놈이구나. 하하“
“그래. 지고는 못산다.”
* * *
살바체의 시선이 아래에 바 근처를 향해 있자,
체논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살바체의 시선을 따라 가며 물었다.
“누군데? 아는 사람이야?”
체논의 말에, 알페르노 역시 살바체를 보다가 아래층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 고양이의 옛 주인이라고 할 수 있지. 그 고양이를 못 잊고 배회하고 있는 녀석…”
“하하, 뭐야. 마지막 술잔이라도 권했다는 거야?”
체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알 페르노를 힐끔 보고 살바체에게 말했다.
살바체가 피식 웃고는 아래층에서 시선을 접고 알페르노가 따라주는 술잔을 들이켰다.
“내가 죽여줄까?”
“체논!”
자신의 두 번째 양 아들이자, 자신이 죽고 나면 뒤를 이를 체논이었다.
다행인 것은 체논과 살바체가 의형제처럼 잘 지내는 각별한 사이라는 것…
그러나, 빛과 어둠의 궁합처럼 저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묘하게 뒤섞이는 분위기를 냈다.
알페르노가 재밌다 는 표정의 체논에게 경고하자, 체논이 “쿡쿡“하고 살바체의 어깨를 쳤다.
살바체는 그저 피식 미소를 지을 뿐이다.
“체논 너 역시 살바체 일에는 끼어들지 마라. 조용히 있다 조용히 가도록 나두는 게 상책이야.
이건 국가적으로도 번질 수 있는 일이다. 명심해.”
“쳇, 저놈이 그렇게 대단한 놈이랍니까?”
그때, 아까 종업원에게 일을 시킨 살바체에게 다시 종업원이 다가와 조용히 귓가에 속삭여 말했다.
살바체가 “후후“하고 웃음을 흘리고는 아래층의 시원을 응시 하며 혼자 말 하듯 말했다.
“의심이 많은 동양인이군.”
살바체의 눈이 처음의 장난스럽던 눈에서 갈수록 깊어지며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을 알페르노는 앞에서 말없이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살바체는 그런 알페르노의 시선조차 신경 쓰지 않고 시원을 노려보았다.
그저 자신이 선물한 위스키를 거부한 것 뿐인데, 이렇게 미치게 화가 치미는지…
사진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잘생기고 남자다운 녀석이라서 인가? 아니면…
' 사랑해요.'
그래. 그거군…
살바체는 희진이 말했던 저 놈을 사랑한다는 말을 생각하고 있었던 자신을 보았다.
아직도 희진을 원하는 저놈의 자식이나, 갇혀있으면서도 시원을 사랑한다 말하는 희진이나,
저 놈의 목숨을 가지고 치졸하게 잡고 있는 자신이나…
이 순간 미치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복합적인 것이었다.
“대부… 이“
체논이 이런 살바체를 보고 처음 본다는 표정으로 알페르노에게 웃으며 말을 걸려고 했다.
알페르노는 그런 체논에게 한손을 들어 보이고 말을 막았다.
알페르노의 시선은 줄곧 아래층에서 시선을 때지 않는 살바체에게 가있었고,
체논은 이런 둘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고는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 * *
-사르데냐섬(sardinia island)
하루에 한 번씩 오는 일류 디자이너들의 옷, 신발, 구두, 액세서리… 그리고 항상 다른 메모…
희진은 방금도 선물해 들어온 페라가모 여성 구두와 함께 살바체의 힘 있게 쓴 필체를 보고 있었다.
지금 내 옆에 아름다운 여자가 방긋 웃고 있어. 그런데도 하나도 즐겁지가 않군. 왜일까?
“미친 자식! 이런 걸 신고 나갈 때라도 있을 거라 생각해?”
희진은 사라져 주겠다고 하고 일주일째 코 베기도 안보이고 있는 살바체를 향해 욕을 퍼붓고는
항상 그랬듯이 쪽지와 구두를 한쪽에 처박아 두고 창가로 다가갔다.
아름다운 명품 옷들과 구두, 핸드백… 그런 게 지금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 섬에서…
그때, 미얀이 희진에게 줄 점심을 들고 들어와 말했다.
“정말 안 가보시겠어요? 주인님이 성심껏 준비해주신 건데요…
완공한지 일주일이 더 지났는데, 주인이 없어 썰렁하기가 이를 때가 없어요.
그러지 말고 저와 함께 가 봐요. 네?”
오늘 아침 의사가 다녀간 뒤부터, 미얀은 계속 귀찮게 희진에게 조르고 있었다.
“별로 연습하고 싶지 않아요. 미얀.“
“가보면 틀리실 거예요. 정말 아름답게 꾸며 놨다고요. 최신식으로요“
“그 식사나 탁자위에 내려놔요. 배가 고프니까“
“아, 네“
미얀이 풀죽인 얼굴로 식사쟁반을 탁자위에 올려 두었고,
희진은 말없이 탁자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아서 빵 조각을 조금 잘라 카나리아에게 주기위해
새장을 휘진의 옆으로 가져오게 시켰다.
“식사하세요. 제가 카나리아에게 먹일게요.”
“아니, 내 카나리아는 아무도 못 만지게 할 거예요. 지금 내 유일한 친구이니까“
희진은 그 말을 차갑게 하고 나서, 미얀의 풀죽은 얼굴을 보며 조금 인상을 썼다.
벌써 일주일째 희진의 말벗이 되어 주고 있는 것은 미얀 한사람이었는데,
삐지면 곤란하지 않은가… 희진은 할 수 없이 미얀에게 말했다.
“좋아요. 오늘 식사하고 소화 좀 되고 나면 내려가 보죠. 댔죠?”
“하! 정말요? 기뻐요."
두 손을 맞잡고 좋아하는 미얀을 보고 희진은 졌다는 시선을 하고 카나리아에게 빵조각을 주었다.
콕콕 손에 있는 빵조각을 집어 먹는 카나리아가 사랑스러워 희진에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어렸다.
“아리아. 내가 여기서 나가게 되면 너에게 꼭 자유를 줄께. 우리 함께 자유로워지자. 알겠지?”
희진은 빵조각을 먹는 카나리아를 보고 한국말로 속삭였다.
* * *
식사를 끝내고 희진은 방긋 웃으며 앞장서는 미얀을 따라 붉은 카펫을 밟으며 우아하게 계단을 내려섰다.
저택에서 일하는 몇몇의 하인들이 희진을 보고 힐끔 거리고 쳐다보지만,
희진은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줄곧 미얀의 등 뒤를 응시하며 쳐다보는 시선을 외면했다.
곧곧한 동양여자를 바라보는 저택에서 일하고 있는 이태리 사람들은 희진을 보고
이태리 말로 'Donna arrogante' 라고 불렀다.
이 뜻은 '도도한 여자' 라는 말로 동양의 여자가 기죽지도 주눅 들지도 않고 무시하는 듯하자
그들이 별명의 말로 불러 생긴 말이었다.
그러나 희진은 그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이곳 자체가 다 싫었던 것 뿐,
말도 통하지 않고, 갇혀 있다는 생각에 더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보호본능 적인 행동이었다.
“여기예요.”
미얀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서자, 흰옷의 원피스를 입고 있던 희진이 미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가 우뚝 멈춰 섰다.
큰 공간에 마련된 흰색의 발레를 연습할 공간이 사방의 거울과 잘 닦인 마룻바닥,
최신식 CD 플레이어의 공간 전체에 음악이 흘러나오게끔 설계된 음양시스템에,
한쪽에 바를 잡고 연습할 수 있게 딱 맞는 위치로 배치되어 있었다.
미얀이 희진의 놀란 눈을 보고 행복해 하며 희진의 손을 잡고 설명하며 이끌었다.
“아름답죠? 여긴 아가씨만의 연습실이랍니다.
이곳에 계신 동안 부족함 없게 설계를 하라는 주인님의 분부에 단시간 내에 만든 거예요.
인부를 자그마치 10명이나 불러야 했고, 이태리에서 가장 유명한 거장들을 초빙해서 지었답니다.
이리 와보세요.”
희진은 미얀이 이끄는 곳으로 더 들어간 문은 제법 큰 캐비닛과 옷을 갈아입기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미얀이 희진을 돌아보고 웃으며 케비넷을 열어 재낀 순간, 희진은 다물고 있던 입을 다시 열고 탄성을 터트렸다.
“어?!”
“'몬체크루소' 극장에 '다빈치'단 연습실에서 주인님이 아가씨 물건을 다 가져오게 하셨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가져왔어요. 맞죠?”
캐비닛에는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 역을 맡을 때 썼던 백조의 튀튀 옷이나,
흑조의 튀튀 옷… '지젤'을 맡았을 때 입었던 발레복 등이 그대로 질서정연하게 걸려 있었다.
희진은 그 것들 중에서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연습할 때마다 신었던
그 분홍색 토슈즈를 꺼내 들고 가슴에 소중히 보듬었다.
“좋으시죠?”
미얀이 웃으며 희진에게 말했다.
그러나 희진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캐비닛의 아름다운 발레복을 보며 한국말로 말했다.
“좋지 않아. 화가나. 미치게 화가나.
내 소중한 인생을 자신의 자리에 끼어 맞춰버린 그 남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것들을 전부 옮겨다 놓은 거지?
정말 내 인생이 여기에 다 옮겨 놓여 진 것 같잖아…”
글썽이며 말하는 희진의 얼굴을 보고 미얀은 감동으로 울 것 같으신가 보다 속으로 생각하며 방긋 미소 짓고 있었다.
희진은 그런 미얀에게 조용히 부탁했다.
“미얀. 미안한데, 지금 혼자 두겠어요?”
“예. 편하게 계세요. 이곳은 아가씨만의 공간이니까요.”
미얀은 쓸쓸한 희진의 뒷모습을 쳐다보지 않고 흐뭇한 얼굴을 하고 희진을 두고 방을 나갔다.
* * *
이곳에 온지 10흘이 다 되어가는 동안 시원은 단 한가지의 실마리도 찾지 못한 상태였다.
거기다 사립탐정은 그저 기다려 보라는 말만 하고 있었고,
시원은 답답함에 밀라노의 한 고급 호텔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횟수가 잦아지고 있었다.
시원은 밀라노의 거리 곳곳에 이태리 풍경을 말없이 지켜보며 긴 담배연기를 내뿜고는
니트의 한 쪽 팔을 걷어붙이고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기 있던 간호사가 안 보이는데요.”
엊그제 밀라노병원에 복사본을 받으러 찾아 간 곳에서 시원은 저번에 일했던 뚱뚱한 간호사가 아닌,
날씬하고 미모의 간호사를 보며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었다.
“아, 베로니아 언니는 사정이 생겨서 그만 두셨어요. “
“그럼 혹시 연락처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음…글쎄요. 지금은 아마 집에 없을 가망이 높을 거예요. 여행을 간다고 들었거든요. “
시원은 난감한 얼굴을 하고 미모의 간호사에게 사정하듯 몸을 기울이며 부탁했다.
“꼭 중요한 일입니다. 연락처를 알고 계시면 알려 주십시오.”
난처한 얼굴을 한 간호사는 시원의 잘생긴 얼굴을 들여다보고,
위험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하나 적어 시원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적어 드리기는 하겠지만, 아마 연락이 되려면 다음 달 중순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데요.
그래도 상관없으신가요?”
시원은 전화번호가 든 메모지를 양복주머니에 넣고 그 간호사를 위해 명함을 한 장 꺼내 주고는
호텔번호를 간단하게 적고 자신을 설명하며 말했다.
“여행도중이라도 연락이 오면 바로 이리로 연락 달라고 말씀 좀 전해주십시오.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묻고 싶어서입니다.”
“네. 그럴게요.”
그 병원에서 희진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단 한사람이 사라졌다.
그리고 희진을 진찰했던 것을 어떤 이유로든지 없었던 것처럼 잡아 때고 있는 의사…
만약 그 간호사가 없다면 희진이 그곳에서 진료를 받았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게 그리 큰 증거도 되지 못하는 것 아닌가?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내려놓았던 재떨이에 비벼 끄고 시원이
호텔 룸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호텔의 전화기가 전화가 왔음을 알려 왔다.
전화를 건 사람이 그 간호사가 아닐까 희망을 품었던 시원은 그보다 다른 사람의 전화에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진이 자주 약혼자 얘기를 했었는데, 올리노바에게 들었습니다.
여기 와 계신다고 말입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희진과 함께 지젤의 상대역인 알프레히트 역을 맡았던 포체였다.
엊그제 병원을 들렸다 '다빈치'발레단원들을 만났던 시원은 잠깐 얘기를 나누었던
검은 머리의 올라노바라는 아름다운 여자에게 명함과 연락처를 주었던 것을 기억했다.
아마도 포체는 그 올라노바에게 시원 얘기를 듣고 명함의 전화번호를 보고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무슨 단서라도…?”
[아뇨. 그런 게 아니고… 저희가 그날 '세비니'에서 성공적으로 '지젤'을 끝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찬을 가졌는데, 거기서 찍었던 사진을 전해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괜히 전화 드린 건 아닌지]
“아닙니다. 어디십니까? 제가 바로 여기서 나가겠습니다.”
포체가 호텔에서 가까운 커피숍에 있다는 말을 듣고 시원은 바로 잠바를 걸쳐 입고 호텔을 나섰다.
포체는 검정색의 니트에 키가 크고 호리하면서도 다부진 남 발레리노로서의 체격을 가진 호남형의 남자였다.
두 사람은 서로 악수를 나누고, 웃으며 마주 앉았다.
포체는 희진을 닮은 듯도 보이는 큰 이목구비의 잘생긴 시원을 보며, 사진을 시원에게 내밀고는 말했다.
“그날 진이 저희에게 한 말이 있었죠. 약혼자가 말했다면서 말입니다.
그녀는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이고 최고의 발레리나였습니다.
이렇게 된 일이 이곳에 오게 만든 저희 '다빈치' 발레단의 욕심 때문인 것 같아,
요즘 저희도 분위기가 별로 좋지가 못합니다.”
시원은 활짝 웃고 있는 희진의 사진을 보며 눈을 때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희진이 뭔가 이상하다거나, 두려워한다거나,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보이진 않았습니까?”
“그럴 리가요. 그날 진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였습니다.
게다가 진에게 발레 말고 다른 관심사는 거의 없다시피 한 사람이라는 걸 저 역시 잘 알고 있고 말입니다.
연습벌레 아닙니까? 그럴 시간도 없었을 겁니다. “
포체는 이 남자가 희진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이해의 시선을 하며 말했다.
“진이의 캐비닛을 전부 정리 하셨길래, 사진도 드리려고 온 겁니다. 모두 고국으로 가져가실 생각이십니까?”
“…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캐비닛을 정리하다니요?”
“아, 제가 듣기로는 약혼자가 모두 챙겨서 가져갔다 들었습니다.
진이 그동안 썼던 발레복과 무대 소품들 모두를 챙겨 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적 없습니다.”
“네?!”
시원은 바로 종업원이 가져오는 '에스프레소 caffe' 두잔을 외면하고 바로 포체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지금 같이 '다빈치'단 연습장으로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겠습니다.”
“네. 그러죠.”
* * *
희진은 엊그제 미얀이 이끌고 온 연습장에서 계속 줄기차게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발을 다쳐 연습을 게을리 한 탓에 몸이 굳어 있는 게 느껴져 희진은 바로 연습모드로 돌입해 들어간 것이다.
노래 반주로 차이코프스키에 백조의 호수 노래를 틀어 놓고,
희진은 연습 때마다 신었던 토슈즈와 간단한 흰 편한 발레복만 입고 백조의 호수 2막에서
오데트가 왕자를 만나고 백조에서 인간으로 변하는 장면을 연습하며 푹 빠져 있었다.
백조 사냥을 나선 왕자는 인간으로 변하는 백조가 있다는 말을 신하들에게 듣고 그 백조를 잡으려고 활을 쏘려고 하는 순간,
흰 백조 오데트가 나타나 왕자에게 말한다.
“악마의 마법에 걸려 저녁에만 인간의 모습으로 살수 있답니다.
이 마법에서 풀려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왕자님의 진정한 사랑뿐입니다.”
희진은 애절한 오데트의 연기를 하며 그녀의 심정을 몸으로 절제된 동작으로 표현했다.
'아라 베스크…아티튀드 크루아제 드방…주테 앙 투르낭'
계속 반복으로 연결되는 아름다운 몸의 곡선이 혼자만의 연기로도 흰 공간을 백조의 호수로 보이게끔 보이고 있었고,
왕자의 존재조차 앞에 있는 듯 했다.
그때, 희진은 무엇인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고, 순간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응시했다.
'살바체 프란트!'
희진은 2막을 끝내놓고 살바체의 잔잔하면서도 반한 듯 보이는 시선을 보고 시선을 마주쳤다.
살바체가 희진을 정면으로 눈을 잡고 보며 한쪽 눈썹을 꿈틀하고 움직였다.
그때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제 3막 흑백조 오딜이 나오는 장면의 곡이 흘러 나왔다.
'32회전 푸에테!'
'푸에테' 의 원래 의미는 '채찍질하다'라는 뜻으로 여성 발레리나가 최고로 보여줄 수 있는 절정의 동작이었다.
발레리나가 한 다리로는 발끝으로 몸을 지탱하고 다른 다리는 마치 말채찍을 휘두르듯이
지탱한 다리 주위를 휘저으며 32회전을 하는 동작을 말했다.
희진은 두 번 생각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돌때마다 살바체와 정면으로 시선을 응시하고
32바퀴를 정확히 돌면서 살바체에게 화가 났다는 표시를 취했다.
다시 자신의 인생으로 걸어 들어오려는 살바체를 거부하는 동작…
그러나, 살바체는 그런 희진의 아름다운 푸에테의 동작에 다시 한 번 빠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음을
희진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지금의 화가 나고, 못 견디게 싫다는 표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을 뿐…
이렇게 지쳐서라도 살바체를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다는 생각…!
정확히 32바퀴를 돌고 희진이 멈추려고 했을 때, 살바체가 다가와 바로 희진의 멈추는 팔을 덥석 잡았다.
불과 불[7장]
희진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가슴을 들썩이고 멈춰 서서 살바체가 잡은 자신의 어깨의 힘 있는 감촉을 느끼며
살바체의 청색의 깊어지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눈을 피하지 않았다.
금방 32회전 푸에테와 그동안 무리한 연습으로 희진의 팔의 땀이 살바체의 손에 가득 만져졌다.
살바체는 그 땀의 촉감을 느끼면서 희진의 살아있는 강렬한 검은 눈동자를 쳐다보며 거칠게 팔을 자신 쪽으로 끌어 당겼다.
확 끌어당긴 동시에 숨을 헉 내뱉는 희진의 붉은 입술을 힘껏 머금고 살바체는 희진의 거친 숨결을 즐겼다.
살아있음…!
생동감 넘치는 여자의 달콤한 숨결, 땀 냄새, 놀라울 정도의 정렬이 살바체는 다시 한 번 심장의 뜀박질과 함께
미치도록 이 여자를 가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충동을 느낌과 동시에 희진을 가지는데 살바체는 주저함이 없었다.
거친 살바체의 입술을 느끼며 희진이 거칠게 저항하며 떨어지려 했지만 두 어깨를 잡고 자신의 머리보다 하나 더 큰 살바체의 몸이
희진에게 기대오다 시피 끌어당겨 키스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피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으…읍!”
급기야 희진은 살바체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마룻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바로 살바체의 몸이 주저 하지 않고 희진의 몸으로 올라와 가늘게 끈으로 된 연습용 무용복을 가차 없이 내렸다.
희진은 그 손길을 속수무책으로 큰 눈으로 지켜보며 속으로 울부짖어야 했다.
'미친 자식! 이거 놔!'
살바체는 계속 발버둥 치며 자신 아래에 깔려 있는 희진의 가냘픈 곡선의 목선을 매만지고
사랑스러운 쇄골근처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다 어깨의 굴곡을 따라 희진의 가슴 근처를 배회했다.
자신의 입안에서 외쳐대는 희진의 저항의 목소리도 다 먹어버리고 살바체는
이성의 조각을 날려 버린 채 희진을 가지는데 몽땅 자신을 던져 버렸다.
지금 가지지 않으면 미친다.
이유도 필요 없다. 그저 지금 …!
바로 지금 이 순간 미치도록 가지고 싶을 뿐이다.
계속 속으로 울부짖고 발버둥 치던 희진은 한순간 살바체의 엄지손이
자신의 가슴언덕 봉우리를 살짝 만지며 쓰다듬는 것을 느끼고 더 거친 반항을 시작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살바체의 손이 미치도록 진저리나게 싫었다.
그동안 육체적인 경지를 넘어서 자신을 뛰어넘는 연습의 연습을 했던 희진 이었기에,
이런 유혹도 정신으로 이겨내는 것은 간단했다.
싫으면 싫은 것!
희진은 언제나 분명했다.
'놔! 나쁜 자식! 놓으라고!'
희진은 아무 거침도 없이 침입 하고 더듬는 살바체의 손에 자신의 힘이 허탈하게 무너지고 어떤 저항도 소용이 없자,
깊은 눈동자에 억울해서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고, 흐느낌도 동시에 터져 나왔다.
“흑….”
“…!”
희진이 아무리 반항하고 발버둥치고 발로 때리고 손으로 쳐대도 꿈적 않던 살바체가
거짓말 같이 희진의 이 흐느낌 소리에 반쯤 이성을 찾고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서서히 입술을 땐 살바체가 엉망이 된 희진의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희진은 괴로움에 살바체의 얼굴을 외면했다. 울고 있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무용연습실에 밝은 조명으로는 무엇도 가릴 수 없다.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살바체를 외면하고 있는 희진의 슬픈 얼굴을 내려다보던 살바체가
가만히 희진의 가슴을 만지던 손을 치우고 희진의 옷매무새를 다시 정돈해 주고는
섬세한 동작으로 희진의 한 가닥 앞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귀 뒤로 살짝 넘겨주며 말했다.
“저번처럼 널 가질 수는 없지. 잊어버릴 뻔했어.”
희진은 아무 말도 없이 계속 살바체의 조용하고 달콤한 말소리를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살바체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달콤하게 희진의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네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 말이야.
처음인 줄 알았다면 널 그렇게 가지는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진… 내가 사과할 거라 생각하지는 마. 난 한번 지나간 일엔 후회는 하지 않으니까.”
희진은 익숙하지 않다.
라는 살바체의 말을 들은 후 발끝부터 올라오는 수치스러운 감정과 얼굴이 붉어지는 자연스러운 일을 막지 못했다.
그만큼 살바체의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은밀하게 희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살바체가 희진의 위에 있던 몸을 서서히 일으키고 일어섰고,
희진에게 예전 다락에서 손을 내밀었듯이 한 손을 내밀었다.
희진은 그 손을 노려보고 살바체를 한번 노려보고는 몸을 일으키고 일어섰다.
놀라서 후들거리는 다리가 조금 휘청거리게 했지만, 희진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아까 32회전의 푸에테 보다 방금, 살바체가 준 일이 더 다리에 힘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자신의 지금 꼴이 얼마나 비참할지 생각하느라 희진은 헝클어진 머리도 잘 넘기지 못하고
바로 옷을 갈아입는 방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때, 살바체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한걸음 뒤에서 들렸다.
“거의 열흘 만에 보는 얼굴이 반갑지도 않은가? 보고 싶지 않았어?”
가식 없이 조롱기도 없는 살바체의 눈동자가 희진에게 곧장 향했다.
희진은 천천히 뒤를 돌아 살바체를 무서운 눈동자로 노려보며, 손을 올려 뺨을 치려고 했다.
'탁'
어이없는 희진의 떨리는 손은 바로 살바체의 손에 고스란히 잡혀 버렸다.
다시 살바체는 희진의 그 손을 끌어 자신의 단단한 가슴으로 끌어 당겨 안았다.
조그만 희진의 턱을 손끝으로 잡은 살바체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희진의 화난 눈을 외면하고 땀으로 젖은 희진의 이마에 달콤한 키스를 남겼다.
“난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고…진“
“내 말 잘 알아들었는지 알았는데. 내 인생에서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요?”
“후후, 조금은 떨어져 있으면서 날 그리워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군. 이거 실망인데?”
“…당신은 미쳤어.”
살바체의 손에서 자신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희진이 거칠게 내뱉었다.
바로 살바체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며 희진의 잡아당긴 팔을 더 자신 쪽으로 끌어 당겼다.
“이제 알겠어. 거칠게 반항만 하는 사람은 혼자 놔둘게 아니라,
바로 옆에서 하나하나 가르쳐야 한다는 걸 말이야. 기대하라고 앞일을…쿡“
“미친 자식….”
바로 살바체의 손을 뿌리치고, 희진이 휙 돌아서서 옷 갈아입는 방으로 들어갔다.
살바체는 그런 희진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피식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때지 않았고,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미얀의 목소리를 들었다.
“밀라노에서 전화입니다. 주인님“
“곧 가지.”
* * *
시원은 포체 함께 '다빈치'단원이 있는 단원 연습실을 찾았다.
전에 보았던 올라노바와 단장인 아르한이 포체와 시원을 아는 체하며 반가와 했다.
포체가 시원을 대신해 올라노바에게 말했다.
“진의 캐비닛을 비울 때, 분명 약혼자의 심부름이라고 하지 않았어?”
“어. 맞아.”
올라노바와 단장 아르한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은 그들에게 빠르게 물었다.
“어떻게 생기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세하게 말해 주시겠습니까?”
올라노바가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설명했다.
“흔한 이태리 여자였는데, 평범한 스타일 이였어요.
자그마한 키에 보통 체구, 겸손한 이태리어를 쓰고 있었고,
제가 묻기도 전에 시원 씨가 묻고 있는 호텔이름과 주소를 말해 주며 심부름 중이 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니 전 당연히 믿었죠.”
“누굴까요? 전 그런 일을 시킨 적도, 희진의 물건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시원이 바로 말하자, 아르한 역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올라노바와 포체 역시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서로 시선을 교환했고,
단원장인 아르한이 한숨을 쉬며 뒤돌아 연습중인 단원들을 돌아보며 크게 박수쳤다.
'짝! 짝!'
“주목! 여기 좀 주목해 보겠어?!”
50여명의 단원들이 아르한을 보고 클라스(class)를 멈추고 시선을 모았다.
“누가 진의 물건을 가지러온 그 이태리 여자를 본 사람 있어?”
다들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어리둥절해 하며, 고개를 젓는데, 한 발레단원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제가 보았어요. 연습실 들어오는 중에 그 여자인지는 모르지만 처음 보는 여자가 나가 길래 돌아봤거든요.
그런데 이상한 게 한 가지 있었어요.”
“뭔데?”
“그 여자 생긴 거하고, 옷차림과 다르게 고급 스포츠카 뒷좌석에 타고 가던데요?”
모두들 정말 이상하다라는 시선으로 서로를 응시하고 술렁거렸다.
시원역시 여자단원의 말에 인상을 쓰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원이 빠르게 그 단원을 향해 물었다.
“혹시 색이나 번호판 기억합니까?”
“글쎄요… 음, 이탈리안 레드 색에 페라리였어요.
밀라노차량이었고, 번호판이… 처음에 11로 시작하더라고요. 특이해서 기억해요.”
“정말 고맙습니다.”
시원은 수첩에 빠르게 페라리의 대한 것을 적었다.
그리고 포체에게 바로 핸드폰을 빌려 사립탐정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여자의 인상착의와 차량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뒤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지금 누구에게 부탁하는 거죠?”
포체의 질문에 시원이 대답했다.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사립탐정을 한명 고용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렇지만, 사립탐정보다 그런 일에 빠른 건 경찰일 겁니다.
제가 아는 친구 중 경찰인 친구가 한명 있죠. 알아봐 드릴까요?”
“그래 주겠습니까?”
포체가 고개를 끄덕이고 전화기를 시원에게 받아 자신도 그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시원은 그런 포체를 보며, 자그마한 희망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 * *
희진이 산뜻하게 목욕을 하고 나왔을 때,
살바체는 떠날 때와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새장 안에 있는 카나리아를 보고 손으로 두들기며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살바체를 보며, 희진은 흰 가운을 더 꽉 조여매고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밖으로 걸어 나와 살바체에게 말했다.
“자신의 저택이라고 해도 계속 이렇게 숙녀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는 짓은 그만 뒀으면 좋겠군요.”
살바체는 희진의 싸늘한 대답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희진에게 말했다.
“거의 보름이 다 되어가는 동안 밖에는 나가보지 않았잖아? 오늘 함께 밖으로 나가 승마라도 해보지 않겠어?”
“…. 승마라고요?”
“그래.”
희진은 머리를 말리며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통해 카나리아를 쳐다보고 있는 살바체를 힐끔 쳐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곳이 섬이고, 바로 가까운 곳에 사르데냐 섬이 있다는 것만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어쩌면 이곳이 어떤 지형인지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희진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살바체에게 말했다.
“좋아요. 그동안 승마하는 법을 잊어 먹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혹시 여기 골프장도 있는 것 아닌가요?”
희진의 빈정거리는 말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바체가 새장을 툭툭 두들기던 손을 치우고 희진을 보고 말했다.
“골프장은 사르데냐 섬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지. 나중에 한번 같이 갈까?”
“그래요. 그래도 비슷한 취미는 있긴 한가 보군요.”
“후후, 알고 보면 나와 당신이 닮은 점이 많다는 걸 더 알게 될지도 모르지.”
“하하하하 간만에 재밌는 농담을 들은 기분이에요.”
살바체가 그만하자는 뜻으로 손을 젓고는 이마를 두들기며 희진의 뒤로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순간 수건으로 머리를 만지던 희진의 손이 정지했고, 긴장이 온몸을 통과해 뻣뻣이 저절로 굳어왔다.
“준비하고 있으라고. 바로 데리러 올 테니“
“좋아요. 기다리죠.”
진의 어깨를 한번 꽉 쥐고 나가는 살바체의 뒷모습을 거울을 통해 보며,
희진은 입술을 깨물던 것을 풀고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며,
신경질 적인 몸짓으로 빠르게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바로 복도에서 들려오는 살바체의 웃음소리가 희진의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 언제까지 좋아하나 보자고. 살바체 프란트'
희진의 눈빛이 다시 반짝이며 빛났다.
* * *
살바체가 희진을 데리러 들어왔을 때, 희진은 흰 승마복과 흰 긴 부츠를 신고 승마를 할 준비를 모두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살바체가 희진의 옷장 문을 열고 모든 물건이 어느 곳에 있는지 다 아는 것처럼 능숙하게 서랍 한 곳을 열었다.
한 번도 뜯지 않은 베르사체 흰 가죽장갑을 꺼낸 살바체가 희진의 손을 잡고 껴주며 말했다.
“승마는 할 줄 아나?”
“걱정 말아요. 날뛰는 말을 잡아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까“
“하하, 그거 다행이군. 달리는 말을 잡는 취미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아쉬운데, 같은 말을 타고 함께 가고 싶었는데 말이지.”
“이쪽은 제가 끼죠.”
희진은 말도 하기 싫다는 뜻으로 살바체가 들고 있는 한쪽 가죽장갑을 빼앗아 들고 신경질 적인 몸짓으로 장갑을 손에 끼웠다.
살바체가 흰 승마복 차림으로 희진의 얼굴을 미소 지으며 보며 팔짱을 끼라는 시늉을 했다.
희진은 마지못해 살바체의 팔에 자신의 손을 끼워 놓고 방을 나섰다.
성큼 희진을 리드해 걷던 살바체는 그대로 일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는 문을 대신 열어주는 미얀에게 이태리어로 뭐라고 명령한 뒤
고개를 끄덕이는 미얀을 두고 희진을 데리고 대기하고 있는 흰 페라리에 올라탔다.
“여기서 승마장 까지는 조금 거리가 있지. “
희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운전석에 앉은 살바체의 옆자리에 앉아
구름 한점 없는 하늘과 파란 끝없는 잔디를 보며 차가 출발하는 것을 느꼈다.
부드럽게 출발한 페라리는 전에 희진이 보지 못했던 저택뒤편쪽의 도로로 향해갔고,
잠시 뒤 희진은 두 대의 헬리콥터가 있는 헬리콥터 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저기 있었어. 내 방 반대편이라 보지 못했던 거였어.'
살바체는 희진의 옆모습을 힐끗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시선으로 쳐다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귀여운 고양이는 어떻게 하면 이 섬을 나갈 수 있을까를 궁리중이라는 게 눈에 훤히 보이고 있었다.
“물어보지 못했는데 뭐 더 필요한 거 있어?”
“훗, 왜요? 어디서 남자라도 하나 데려올래요?”
“쿠쿡…하하하 저택에 넘치는 게 남자들인데 더 필요하다는 얘긴가? 거기다 옆에 잘생긴 나를 내버려 두고 말이야.”
“하, 누가 그러던가요? 당신이 잘생겼다고.”
살바체가 다시 쿡쿡 거리며 웃고는 희진에게 운전을 하면서도 옆으로 몸을 기울이며 희진에게 말했다.
“진. 그런 말은 내 얼굴을 똑바로 보고 해야지.
지금껏 내가 방에 들어간 순간부터 한 번도 내 얼굴을 바로 본적이 없다는 것 아나?”
“난 보고 싶은 사람만 봐요. 꼴도 보기 싫은 사람에게 눈이 갈 리가 없죠.”
살바체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희진은 모른척하고 밖의 아름다운 파란 해변 쪽으로 시선을 가져갔지만,
뒤에서 머리 쪽으로 다가오는 살바체의 손길을 느끼고 움찔하고 살바체를 쳐다보아야 했다.
살바체가 희진이 뒤돌아 있는 사이 검은 머리끈을 잡아 긴 머리를 단번에 풀어 버리고
머리끈을 손에 쥐며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부드럽게 웨이브진 검은 머리가 어깨로 흘러 내려오자 희진이 인상을 쓰며 살바체를 노려보았다.
“왜 항상 머리를 올리고 있지? 부드러운 얼굴을 일부러 각 지게 보이려고 하는 건가?”
“내 맘이죠. 이게 편하니까. 거치적거려요. 끈 주세요.”
살바체는 희진의 부탁에도 피식 웃고는 페라리 창문을 열고 초원에 머리끈을 던져 버렸다.
“뭐하는 거죠?”
“내 얼굴을 보기 싫다면 보지 않아도 좋아. 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보겠어.”
“하!”
희진은 말할 가치가 없다는 듯 살바체를 외면하고 창가에 시선을 두었다.
살바체는 희진의 뒷모습에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들을 한손으로 운전하며
다른 손으로 머리카락을 만지며 장난쳤다.
희진은 뒤돌아 있었지만, 묘한 긴장에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빨리 빌어먹을 승마장에 도착하고 싶었다.
이런 좁은 공간에서 살바체의 남성 샤넬 향기는 자극적이었다.
그날처럼…!
“저기야“
살바체의 말에 희진이 언덕 위 흰색으로 꾸며진 목조건물과 울타리에 말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생각보다 많은 수의 말들이 울타리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살바체와 희진이 페라리에서 내려서자, 승마장의 인부와 관리인이 뛰어와 맞았다.
희진은 살바체가 무표정하게 말하며 스페인산 종마를 데려오는 한 남자를 바라보는 것을 보며
가만히 그들의 행동거지를 한걸음 떨어져 지켜봤다.
살바체를 존경하는 몸짓들이 그 사람들에겐 몸에 베인 일상인 듯 했고,
살바체 역시 명령의 익숙한지 데려온 검은 종마의 치아와 털을 살펴보며 눈 주위에 이마부분을 쓰다듬었다.
살바체가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서 있는 희진을 보고 말했다.
“가장 순한 놈으로 가져오라고 했어. 흰색 종마인데 진과 어울릴 거야.”
희진은 아무표정도 짓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흥분해 있었다.
승마는 아버지를 따라 몇 번 배운바가 있었지만, 이렇게 완벽한 종마를 타보는 건 처음이었다.
살바체가 자신의 종마를 끌고 와 희진 앞에 머리를 두고 희진의 손에 장갑을 벗겨내고,
검은 말의 머리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게 했다.
“어때?”
“부드럽군요.”
“그렇지?”
살바체가 활짝 웃으며 희진에게 말했다.
희진은 천사같이 밝아 보이는 살바체의 얼굴에 조금 놀랐지만 표정을 감추었다.
희진은 말을 쓰다듬다 살짝 닿는 살바체의 손을 느끼고 급히 손을 치워 버렸다.
살바체는 아무 말 없이 종마의 안장을 얹는 모습과 희진이 탈 말이 준비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희진이 말에게 다가가 다정히 말 시키는 것을 바라봤다.
처음 말을 탈 때는 어느 정도 그 말과 친해지는 것이 안전했다.
살바체는 희진이 올라타기 전 도우려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자신이 직접 희진에게 손을 내밀고 자신의 무릎을 밝고 올라가게 했다.
급히 한 남자가 살바체의 흰 바지에 흑이 묻지 않도록 수건을 깔았고,
희진은 사람들이 지켜보기에 어쩔 수 없이 살바체의 손과 무릎을 밝고 흰 종마에 올라탔다.
잠깐 왔다 갔다 시범을 해보던 희진은 생각 보다 더 순한 말이라는 생각을 하며, 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바체 역시 검은 종마에 올라타고는 희진 옆으로 서서 천천히 속도를 조절하며 앞장섰다.
희진이 그 뒤를 따라 속도를 조절해 흰 종마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했다.
“생각보다 안정적인 포즈를 잡는군. 균형 감각이 있어서 그런 건가?”
“고맙군요.”
희진이 새침하게 대답했다.
살바체가 “하하하“웃고는 희진에게 말했다.
“좋아. 그럼 조금 속도를 내볼까?”
“앞장서세요.”
희진은 살바체가 출발하며 앞서 달리는 것을 보며 뒤를 따랐다.
살바체의 오랜 균형 잡힌 말을 타는 모습은 어떤 귀족이나 승마사보다 기품 있어 보였다.
'싫어. 너무 완벽하고 도도한 남자야.'
희진은 자신을 돌아보는 살바체의 시선을 느끼면서 말에 박차를 가하고 더 힘껏 내 달렸다.
곧 조용한 해변이 나왔다. 희진은 살바체보다 앞서 나갔을 때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살바체를 이겼다는 만족감이 찾아 들었다.
그러나 살바체는 일부러 희진의 뒤로 빠졌다.
희진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원하는 데로 가게 해주고 잠깐이라도 자유를 주고 싶었기에,
오랜만에 나는 듯 자유를 만끽하고 내 달리는 아름다운 희진의 뒷모습을 감상하며
살바체는 잔잔한 미소를 짓고 희진의 뒤를 조금 떨어져 달리고 있었다.
해변을 따라 말들의 발자국이 긴 해변의 황금 모래사장에 그대로 찍혀져 오고,
하얀 종마와 검은 종마는 끝나지 않은 길을 계속 힘차게 내 달렸다.
* * *
[들어와야겠다.]
수혁의 전화를 받은 시원이 무슨 소리냐는 눈빛을 하고 인상을 쓰며 말했다.
“왜죠? 괜찮으면 일주일 정도 더 묶고 가려고 했습니다.”
[지금 회사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어.]
시원이 수혁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잘 들은 것인지 의심이 들고 있었다.
[누군가 우리 주식을 매입하고 있어. 엄청 빠른 속도로 수거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어딥니까?”
[어딘지 안다면 자네를 부를 필요가 없었지. 빨리 돌아와서 알아보게. 자네 아버지도 지금 무척 고심하고 있는 눈치야.]
시원은 알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고는 바로 회사 회장인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넣었다.
확인한 결과 수혁의 말처럼 회사의 지분을 누군가 사들이고 있었다.
'하필 이럴 때…!'
시원은 아버지에게 곧 들어가겠다 말하고 전화를 끊고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서둘러 호텔 가방에 짐을 챙겨 넣고 지훈에게 전화를 해 다시 올 테니
그동안 사립탐정에게 보고를 받아 자신에게 전해 달라 부탁했다.
일일이 전화를 걸어 희진에 대해 단서를 알게 되면 연락 달라는 말을 하고,
시원은 가방을 들고 바로 체크아웃 했다.
그때, 호텔을 나가려는 시원에게 프론트에서 호텔직원 남자가 시원의 이름을 부르며 전화가 왔음을 알려 왔다.
“여보세요. 권 시원입니다.”
[아, 전 포체입니다.]
“네. 아까는 전화를 안 받으시고 통화중이시더군요.”
시원이 시계를 보며 비행기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그 페라리 이탈리안 레드색의 소유주를 알아냈습니다.
내 경찰친구가 바로 알아봐 주더군요. 3대중에 두 대는 나이 많은 부호의 유부남들의 차였고, 마지막 한 대는…]
시원이 전화기를 다른 쪽으로 바꿔 들고 포체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알페르노 8번째 수하인 모로코라는 남자의 차였어요.]
“알페르노?”
[네. 알페르노가 누구인지 모르시진 않겠죠? 마피아의 대부인 알페르노 말입니다.]
시원이 수화기를 든 채 굳었다.
[권 시원 씨. 솔직히 이 일에 마피아가 낀 일이라면
아무리 진의 단서를 찾는 일이라고 해도 여기서 그만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 듭니다.
아무도 마피아가 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죠. 그들은 무서운 인물들입니다.]
“아직 확실하게 마피아가 한 일이라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포체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마피아가 한 일이라는 증거를 당신이 찾게 된다면, 당신은 이미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있을 겁니다.]
* * *
희진은 생각보다 이곳이 꽤 넓은 섬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이곳에 아주 작은 마을이 존재하는 것도 알았다.
아마도 그곳에 사람들이 전부 살바체를 위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희진은 살바체와 자신이 지나칠 때, 마주치는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거나, 아이들이 손을 흔드는 것을 가끔 쳐다볼 수 있었다.
“여긴 현대 같지 않은 중세 같은 곳이 예요.”
“맞아. 모두 시간이 갔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 살지. 나 역시 가끔 잊어버릴 때가 있어.”
“당신이 오만한 것도 이유가 있었군요. 저런 사람들이 떠받들고 살았으니 말이죠.”
“하하하, 난 원래 태어날 때부터 오만하지 않았을까? 당신의 말처럼 미친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죠.”
희진은 살바체와 자신이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다는 생각에 금세 얼굴을 어둡게 하고 말했다.
살바체가 검은 종마를 더 가까이 희진 옆으로 대고는 말했다.
“진. 갇혀있다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지내는 게 어때? 가끔은 지젤에서 보였던 그 환상적인 미소도 보여 주고 말이야.”
“웃기지 말아요.”
살바체는 희진의 말에도 “하하하“웃고는 다시 말했다.
“내일은 비행기를 타고 사르데냐 섬으로 갈 생각이야. 함께 가보겠어?”
“…정말 인가요?”
“그래. 난 어디든지 당신을 데려갈 생각이야. 단 나와 함께 말이야. 내 눈에서 사라지면 ….
내 악마적인 본성이 다시 끄집어 내질지도 모르지. 조심하라고.”
“좋아요. 그 약속 꼭 지키길 바라겠어요.”
살바체가 아까부터 흔하게 보이는 보기 좋은 웃음을 짓고 희진에게 약속한다는 시선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희진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술에 만족스런 미소가 그려지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 했다.
살바체는 그런 희진을 눈을 빛내며 지켜보다가 말을 앞장서 뛰게 하며 말했다.
“해가 지기 시작했어.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 내기 할까?”
“이봐요. 난 이쪽 길을 모른다고요. 이건 반칙 아닌가요?”
“하하하하”
희진은 살바체의 뒷모습과 웃어 재끼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살바체의 뒤를 따라 속도를 내며 따라 붙었다.
* * *
“날 언제까지 여기 있게 할 거죠?”
희진이 저녁식탁에 앉아 살바체가 검은 종마를 구한 경위를 자연스럽게 희진에게 설명하고 있을 때,
희진이 부드러운 분위기에 바로 찬물을 끼얹고 물었다.
“난 내 말을 끊는 걸 좋아하지 않아.”
“항상 웃으며 들어주는 인형 같은 여자들만 만났나 보죠.”
희진이 살짝 살바체를 비웃는 표정으로 입가에 조소를 숨기지 않고 코파와 이탈리코 치즈로 만든 쇠고기 요리를 한입 베어 물었다.
살바체는 우아하게 틀어 올린 희진의 머리아래에 가는 목선과 차가운 얼굴을 보고 '훗'하고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옆에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살바체가 희진에게 조금 몸을 기울이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다음 저녁 코스로 이탈리코 치즈가 묻어 더 맛있어 보이는 네 입술을 먹어 보는 게 어떨까?
아니면 조금 옷을 끌어 올려 아담한 가슴을 내보이게 한 뒤 한입 빨아 당겨 보는 것도 맛있을 것 같아.
진. 당신 생각은 어때?”
노골적인 살바체의 시선과 유혹적인 목소리에 희진은 잘 넘기고 있던 고기 조각이 목에 탁 걸리는 걸 느끼고 기침을 해댔다.
“콜록, 콜록… 나쁜 자식“
“하하하. 진…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굴이 붉어지는 걸 감추질 못하는 군.”
희진은 바로 물 한잔을 벌컥 마시고 탁 식탁에 내려놓자마자 살바체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상대 할 가치를 못 느끼겠어.”
바로 몸을 돌려 나가는 희진의 모습을 보며 살바체가 놀렸다.
“그렇게 빨리 도망칠 것 없어. 잡아먹으러 쫓아가진 않을 테니까… 좋은 꿈꾸라고.”
“당신은 처참한 악몽이나 꾸고 지옥이나 떨어져요.”
희진은 바로 식당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며 신경질 적으로 방에 도착하자 문을 꽝 닫아 버렸다.
“저질! 개망나니 같은 자식!”
희진은 살바체가 지금 자신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당근과 채찍 방법…!
동물을 길들이 듯이 선물의 사랑을 주었다가 심한 충격을 주고 실의에 빠뜨리고
자신에게 적절히 맞춰지길 끈기 있게 그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희진은 알고 있으면서도 오늘 살바체의 수법에 고스란히 당했다는 것을 느끼고 그제야 분통을 터트렸다.
'그래. 내일은 오늘 같지 않을걸? 두고 봐. ‘
희진은 내일 살바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궁리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 * *
살바체는 서재에서 느긋한 모습으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옛 고양이 주인이 돌아가셨다?”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던 살바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냥 끝낼 놈이 아닐 텐데. 계속 더 알아봐. 알페르노는?
그래? 훗훗… 자신보다 20살이나 어린 여자에게 너무 푹 빠진 거 아닌가?
그래. 내가 소개 한 거긴 하지만 실비아 로세니는 보통이 아닌 여자야. 잘 눈여겨보라고…
나? 나야 내 고양이의 발톱을 조심하고 있지. 어르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겠어.”
조금 더 상대방과 전화통화를 한 살바체는 전화를 끊고, 밀려둔 업무파악에 들어갔다.
주식과 그동안 보고 들어온 각 회사마다 쌓인 서류들을 훑어보고, 빠르게 모든 일을 마친 살바체는
산책을 할 겸 밖으로 나와 주방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제레미를 데리고 저택을 나섰다.
높은 하늘에 촘촘하게 떠 있는 별들과 달이 밝은 늦은 저녁이었다.
“제레미. 내 고양이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제레미가 '컹!' 하고 살바체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이 짖었다.
살바체가 주저 않아 제레미의 목을 끌어 당겨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자연스럽게 살바체의 시선이 희진의 방 창문 쪽으로 향했고,
황급히 들어가는 여자의 검은 머리카락을 본 살바체가 피식 미소 짓고 제레미의 귀에 말했다.
“엿보는 취미가 있는 도둑고양이였어. 열이나 식히고 들어오자 제레미.
저번처럼 강제로 가졌다간 날 산채로 잡아먹으려고 들 거야.
언제 호랑이로 변할지 모르는 여자잖아? 하하, 넌 맘에 안 드는 모양이구나. 난 좋은데.”
살바체는 꼬리를 흔들고 따라 붙는 제레미와 함께 천천히 들판을 걷기 시작했다.
* * *
희진은 살바체가 멀리까지 나가 사라질 때 까지 창문 커튼에 몸을 숨기고 지켜봤다.
그리고 멀리 보이지 않을 때 쯤 희진은 구두를 벗어 놓고 가운만 걸치고는 문을 살짝 열고 밖으로 나왔다.
'전에 분명 서재에 전화가 있었지?
희진이 붉은 카펫의 푹신한 감촉을 느끼며 최소한의 불만 밝혀 놓은 복도와 나선형 계단을 살그머니 내려와 서재 쪽으로 향했다.
저번에 봤던 대로 살바체의 침실인 듯 보이는 넓은 방 안쪽으로 문이 약간 열려 있는 서재가 보였다.
희진은 바로 종종 걸음으로 서재 문을 열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간 뒤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책상 위에 최신식 전화기와 컴퓨터가 화면이 켜진 채 놓여 있었고,
희진은 두 번 생각도 하지 않고 전화기를 들어 숫자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어디다 먼저 해야 할까? 경찰서?
알페르노의 양아들 살바체 프란트 페이시스에게 잡혀 있다 전화하면 분명 미친 여자라 생각 할 거야.'
희진은 빠르게 생각하고 익숙한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빠라면 분명 국제적인 문제로든 어떤 방법이든 자신을 찾아 줄 수 있을 것이다.
'뚜ㅡ. 뚜ㅡ. 뚜ㅡ. '
몇 번 신호가 가도 받지 않는 전화에 희진은 애가 탔다.
안 받을 리가 없었다.
집에 있는 가정부와 새엄마라도 분명 전화를 받아야 정상이었다.
희진은 잘 못 걸은 걸까? 생각하고 다시 전화를 하려다가 이번엔 직접 아버지의 핸드폰번호를 눌렀다.
미치게 뛰어 대는 가슴에 줄곧 시선은 닫혀 있는 문을 향하고 있었다.
'뚜ㅡ. 뚜ㅡ. '
긴 통화음이 한 번씩 넘어갈 때마다 희진의 숨도 넘어가고 있었다.
'제발… 제발 좀 받아요. 아빠.'
‘찰칵'
그때, 누군가 전화를 받은 '찰칵'음이 수화기를 타고 들려 왔고, 희진은 바로 속삭이며 빠르게 말했다.
“아빠? 아빠. 저 희진이예요. 저 좀 구해 주세요.”
[….]
상대방이 말이 없었다.
희진은 전화기가 이상한 걸까? 아니면 목소리가 작았나? 하고는 이번엔 좀 더 다급하게 큰 소리로 말했다.
“저 납치 되어 있어요. 아빠! 아빠 딸 희진이예요. 아빠?!”
희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희진은 익숙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차라리 나에게 그렇게 애원했다면 보내 줬을 지도 몰라. 진]
'헉! 살바체 프란트!'
희진이 수화기를 든 채 바로 얼어붙었다.
[그건 나만 쓰는 전용 전화라 다른 사람이 걸면 바로 나에게 전화가 연결이 되거든.
실망시켜 미안하군. 찾는 사람이 아니라서…]
“젠장! 나쁜 자식! "
'꽝!'
전화기를 노려보는 희진의 시선이 매서웠다.
살바체는 매사의 철두철미한 사람이 분명했다.
빠져 나갈 구멍을 허술하게 꾸민 것처럼 보이게 해 놓고, 즐기는 방법 까지…!
“나쁜 자식!”
분명 지금쯤 그 개와 함께 돌아오고 있는 중일 것이다.
희진은 바로 몸을 돌려 서재 밖으로 나가 방을 지나 하나의 문을 더 열고 나가려고 했다.
“?!”
문 앞에 정면으로 서 있는 살바체의 따가운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희진이 몸을 굳히고
문손잡이를 잡고 살바체를 노려보고 있었다.
“비켜요.”
“도둑고양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이런 일을 할 줄은 몰랐어. 진.”
“이…이!”
“물러서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진 당신 같은데…“
살바체의 눈이 자신 옆에 얌전히 앉아 희진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리는 제레미에게로 향했다.
희진은 자칫하면 바로 달려들 제레미를 보고 두려움에 한걸음 물러났다.
살바체는 제레미의 귓가를 쓰다듬고 말했다.
“도둑고양이를 잡는 건 개의 몫이지.”
살바체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제레미는 희진을 계속 노려보고 으르렁 거렸다.
살바체가 희진의 눈을 보고 피식 웃고 방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왜, 왜이래요. 나가게 해주세요.”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나가지 말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제레미가 문 밖에서 지키고 있는 건 나도 어쩔 수가 없잖아?”
싱글 거리며 즐기는 살바체의 얼굴을 보고 희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닫힌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살바체는 이런 희진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입고 있는 옷들을 하나씩 벗으며 침대 쪽으로 걸어가 이불을 확 걷어 냈다.
“이봐요!”
“살바체라고 불러. 이봐요 라는 호칭은 좀 그런데“
“좋아요. 살바체 프란트! 다 좋으니까 어서 문 앞에 당신 개를 치워 주세요.
당신 잠자는데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침대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바지만 입은 살바체의 모습은 단단한 복부근육과 가슴근육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었다.
희진은 그런 살바체에게서 시선을 치우고 인상을 쓰다가 용기를 내
문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화들짝 놀라 문을 다시 닫아야 했다.
“으르르릉…컹! 컹!”
“악!”
희진은 꽝 문을 닫고 놀란 가슴을 쓸어안고는 “훗, 훗“ 웃는 살바체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살바체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서 바지 혁대에 손을 대며 말했다.
“피곤하지 않아? 내 침대는 꽤 넓은데, 원한다면 함께 쓸 용의가 있어.”
“웃기지 말아요!”
“하하하, 마음대로 하라고. 도둑고양이처럼 침대 밑에서 자겠다면 말릴 생각 없어.”
살바체는 그 말과 동시에 정말로 바지를 벗어 던지고 이불안으로 들어갔다.
희진은 그런 살바체와 문을 번갈아 쳐다보며, 황당함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 * *
희진은 살바체가 정말로 그렇게 잠들어 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살바체는 희진에게 “잘자“ 라는 단 한마디를 하고, 불을 끄고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어 버렸다.
'저 악마 같은 자식'
문 앞에 있는 제레미와 똑같이 살바체 역시 사냥개 같은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고양이라고 말하지만, 분명 사냥개 중에도 독종인 혈통 좋은 개로 태어나면 딱 맞을 사람이었다.
산토끼든 꿩이든 주인이 잡아오라고 시킨 동물의 목을 놓지 않을 …
희진은 살바체가 잠든 침대를 노려보며 문 옆 벽에 주저앉았다.
큰 소리를 내 살바체를 깨우고 싶지도 않았다.
단 둘이 방에 있는 것은 위험했다.
특히, 이런 어둠 속에서는…!
희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에서 한참을 노려보다 제풀에 지쳐 고개를 다리에 묻어 버렸다.
어둠속에서 고르게 숨을 내쉬던 살바체가 눈을 떴다.
살바체의 청색 눈이 희진이 어둠속에서 쪼그려 앉은 공간을 향해 있었다.
살며시 흰 시트를 치운 살바체는 걸쳐 놓은 흰색의 가운을 입고 자리에서 일어나 레드 빛의 스탠드를 키고 희진에게 다가갔다.
하루 종일 자신과의 실강이에, 말까지 타고 났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거기다 아침에는 무리한 발레 연습까지 하지 않았던가.
“후후“
살바체가 불편하게 잠이 든 희진을 내려다보며,
자신도 쪼그리고 앉아 희진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잠든 모습은 앙칼지던 표정도 노려보는 시선도 아닌, 부드러운 선을 그린 여자의 얼굴이었다.
오만가지 색을 나타낼 수 있는 여자…
살바체는 희진의 모습에서 또 다른 얼굴을 보고 긴 손가락으로 희진의 볼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옆으로 살짝 치워냈다.
“진… 불편하지 않아?”
살바체가 희진에게 속삭이며 말하자, 희진이 “음“ 소리를 내며 눈을 뜨려고 했다.
“방으로 데려다 줄까? “
다시 속삭이며 다정한 살바체의 말에 희진이 눈에 잠이 꽉 든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서더니 말했다.
“하아암… 필…요… 없어“
살바체의 잡아주려던 손까지 뿌리치고, 희진은 잠결에 보이는 하얀색 침대로 향해 걸어가더니,풀썩 침대에 엎어져 누웠다.
보이는 침대 시트까지 목까지 끌어당긴 희진은 금세 새근거리며 잠에 빠져 버렸다.
살바체는 “쿡쿠쿠“ 하고 주먹을 쥐고 희진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꼬물락 거리며 시트를 돌돌 말고 자는 희진을 쳐다보던 살바체는 살며시 방문을 열고 앞에 엎드려 있다가
살바체가 문을 연 모습에 고개를 들고 쳐다보는 제레미에게 명령했다.
“네 자리로 가“
살바체의 말을 알아들은 제레미가 꼬리를 흔들다 자신의 자리로 어슬렁거리며 돌아갔고,
살바체는 문을 조심히 닫은 후 희진을 향해 침대로 걸어갔다.
* * *
'헉!'
희진은 잠깐 잠이 들었다가 발에 닿는 누군가의 맨살에 화들짝 놀라 숨을 들이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뭐, 뭐야'
조금 머리를 옆으로 돌려보던 희진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다. 살바체의 각진 잘생긴 얼굴과,
은빛 금발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 어떻게 된 거야. 아, 정말 미치겠네.'
벌떡 일어나려던 희진은 살바체가 깨기라도 할까봐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살금 거리고 다리를 하나씩 침대에 내려 놨다.
옷이 어제 입고 들어왔던 가운 그대로였고, 풀었던 흔적도 보이지 않아,
희진은 안도의 숨을 쉬고는 방문에 살짝 귀를 갔다 대며 문을 조금 열어 보고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제레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희진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바로 살바체의 방을 나서서 왔던 것과는 다르게 빠르게 뛰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살바체는 희진이 나가는 장면을 살짝 눈을 뜨고 지켜보며 희진이 나가고 나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누워 있는 상태에서 손을 이마에 대고 “하하하“ 웃어 재꼈다.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운 여자야 '
속으로 생각하고 흐뭇한 미소를 짓던 살바체는 희진이 나가고 난 뒤 고스란히 남은 체취를 들이마시며
그제야 못 잤던 잠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 * *
“약속을 지킬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
희진이 싸늘하게 말하며 헬리콥터에서 멀어지는 '교황의 섬'을 쳐다보았다.
살바체는 그런 희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난 약속은 꼭 지키지. 누구처럼…”
갑자기 말을 끊는 적이 없는 살바체가 바로 말을 끊고 딴청을 피자, 희진이 입술을 깨물고,
살바체를 노려보며 물었다.
“누구처럼 이라뇨? 누구 말이죠?”
“도둑고양이처럼 내방을 들어왔다 나간 사람 말이야.”
바로 고개를 돌리고 희진은 살바체를 외면하고 속으로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싸늘한 말로 살바체의 말에 대답했다.
“어제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후후, 내 침대를 기어져 올라온 건 내가 아니라 진 당신 이였어.
게다가 싫다는 여자를 억지로 계속 안는 바보도 아니지.
다음번 사랑을 할 땐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함께 즐기는 게 어떨까? 진?”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요.”
“하하하 절 대로라…”
희진은 굳이 머리를 옆으로 돌리지 않아도 살바체가 자신의 옆얼굴을 보며 턱을 만지고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살바체의 따가운 시선은 함께 있으면 언제나 따라 붙고는 했다.
'왜? 어제 종마를 보듯 이빨과 털을 검사해 보지 그래?
제대로 고른 종마인지 보는 그 시선 치워버리란 말이야.'
희진은 속으로 살바체에게 말하고 눈빛을 빛내면서 점점 다가오는 사르데냐 섬을 쳐다보았다.
살바체가 희진의 눈빛을 신경도 쓰지 않고 사르데냐 섬을 보며 말했다.
“우린 마르살라 포도주를 만드는 공장이랑, 가까운 치즈공장에 가볼 생각이야.
나도 근 1년 만에 가보는 것 같군.”
헬리콥터는 바로 마르살라 포도주 공장안에 있는 착륙장에 내려섰다.
올 때 보았던 사르데냐 풍경으로는 넓은 초원에 양들과 염소들이 자유롭게 방목하는 녹초지와 수산업이 발달된 곳으로 보였으나,
살바체의 설명으로 국가적으로 식품공업과 제조공업이 국가적 차원에서 뒷받침되어 꽤 꾸준히 발전되고 있다고 했다.
희진은 살바체 옆에 서서 '마르살라' 백포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공장안을 둘러보기도 하고, 살바체가 건네주는 백포도주의 맛을 보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수출되고 있는 '마르살라'의 강한 백포도주의 맛은 달콤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공장사람들과, 검은 정장의 비서들은 계속 살바체의 주위를 함께 걸으며 비유를 맞추느라 바빴다.
살바체는 계속 굳은 얼굴로 꼼꼼히 공장안을 살펴보기도 하고,
맛을 음미하며 포도주 공장 사장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걸으면서 희진에게도 신경 썼다.
“재미가 없는 표정이야.”
다시 치즈공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헬리콥터에 올라타 살바체가 희진을 힐끔 보며 말했다.
“당신은 재미있나 보죠?”
“하하, 지루했었나 보지?”
“글쎄요.”
희진은 재미보다 암담한 현실을 다시금 깨달았기에 기분이 별로 좋지 못했다.
줄곧 살바체와 사장의 대화는 이탈리아어였고,
희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가끔 살바체가 옆에서 통역해 주는 간단한 설명정도 뿐이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 역시 희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자신들만의 언어로 얘기해
희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도망갈 구멍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하긴, 그러니 날 데리고 왔겠지.'
치즈공장에 도착해서도, 비슷한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살바체의 뒤를 걷던 희진은 살바체와 공장사장이 대화하고 있을 무렵 한 치즈제조 과정 중에
일하고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흥미로운 시선의 검은 머리의 남자가 희진을 바라보자,
희진 역시 모른 척 하고 그 근처에 서서 남자가 일하고 있는 과정을 흥미롭다는 시선을 하고 쳐다보았다.
“이건 뭔가요?”
영어로 희진이 물었지만, 남자는 이탈리어로 대답했다.
“E Escalopes with Coppa“
이탈리코 치즈라고 말하는 남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희진이 한쪽 눈썹을 올리자,
남자가 치즈를 조금 때어내 희진의 입가에 갔다대며 웃었다.
“저 보고 먹어보라는 말인가요?”
희진이 웃으며 남자에게 묻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이던 희진은 남자의 두툼한 손에서 치즈 조각을 입으로 받아먹고 맛을 음미했다.
강한 이탈리아 치즈 맛에 희진이 약간 인상을 쓰자,
남자가 “하하하“웃었고, 희진 역시 오랜만에 가식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살바체는 치즈공장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다 희진이 뒤로 빠지는 것을 보고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얘기를 나누던 살바체의 시선은 가끔씩 희진에게서 떠나지 않았고, 비서들 역시 희진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호기심에 다가가는 희진이라는 생각에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살바체는
희진의 행동을 지켜보며 사장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가 내미는 치즈조각을 아무 저항도 없이 받아먹는 희진을 보자,
살바체의 눈이 커졌다가 반짝이며 화를 드러냈다.
한 번도 자신에게 보여준 적 없는 가식 없는 웃음소리와 남자를 보는 희진의 시선이 어느 때보다 즐거운 듯 반짝이고 있었다.
살바체는 바로 사장의 말을 끊는 손짓으로 손을 들어 올리고는 희진에게 단걸음에 다가가 팔을 붙들었다.
“왜요?”
희진이 방해가 된 게 무척 싫은 표정으로 살바체를 보며 인상을 썼다.
살바체의 청색 눈이 검은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지만, 희진은 신경도 쓰지 않고 살바체를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그 가식 없던 미소도 자신을 보는 순간 싸늘히 식은 것을 살바체는
기억하고 입을 굳게 다물고는 희진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바로 비서들에게 말했다.
“돌아간다.”
희진은 바로 살바체의 손에 끌려 나갔고,
그 뒤로 치즈공장의 사장과 일하는 공장 사람들이 힘 있게 나가는 살바체의 일행들을 보며 망연히 서 있었다.
* * *
살바체는 저택으로 돌아가는 헬리콥터 안에서도 계속 희진을 답답하게 했다.
얼굴에 웃음기 하나 없는 무표정하게 화난 눈빛으로
헬리콥터 안에서 계속 밖으로 시선을 주고, 희진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있었다.
희진 역시 살바체가 그러던지 말든지 하고는 시선을 외면하고 바다를 쳐다봤지만,
계속 옆에서 아무 말 없는 살바체가 신경 쓰이지 않을 리 없었다.
'종잡을 수가 없는 이상한 사람이야.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살바체의 이상한 행동은 헬리콥터가 착륙장에 도착하고 나서도 계속 되었다.
희진을 근육질의 검은 옷을 입은 비서들에게 팔을 잡고 건네주며 이태리어로 빠르게 말했다.
“E una via“
난폭한 남자들에게 두 팔을 잡힌 희진이 살바체를 노려보며 화가나 소리쳤다.
“무슨 짓이에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죠?!”
그러나 살바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희진을 외면한 채 헬리콥터를 타고 가버렸고,
희진은 마지막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살바체의 눈빛을 기억했다.
노골적인 적의…살기…
희진은 갑자기 저러는 살바체가 이해가 되지 않아, 가슴이 쿵쾅거렸다.
“놔! 이거 놓으라고!!”
그러나 남 비서들은 희진의 두 팔을 잡고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희진을 방에 두고는 어리둥절한 미얀에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E una via !”
미얀이 놀란 눈빛으로 남자들이 말하고 난 뒤 가고 나자, 희진을 돌아보며 가라앉은 말로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뭘 잘못하셨기에 이렇게 되신 거예요?
살바체님이 아가씨를 가둬두라고 하셨대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희진은 그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고 미얀을 쳐다봤지만, 미얀은 고개를 숙이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문을 닫았다.
곧이어 밖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에 희진이 화가나 소리 쳤다.
“살바체 프란트! 이 나쁜 자식! 지옥에나 떨어져!”
다행인 일은 다락이 아닌 자신의 방에 갇혀 있다는 것뿐이었다.
희진은 망연자실 문을 노려보며 서 있다 구두를 신경질 나게 벗어 던지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곰곰이 살바체가 화난 시점을 생각하며 생각에 잠겼다.
'뭐지? 분명 내가 놓친 뭔가가 있어.'
-다음 장에서...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지영공주V 카페(http://cafe.daum.net/yovng0423/)
게시판: ‥‥ 공주완결소설②〃
번호: 225
제목: 이태리의 살바체(2막-카르멘의 무대)
글쓴이: 지영공주V
조회: 676
날짜: 2005/03/07
##수정인물이름수정. 명칭수정. 오타수정. 문법수정. 내용수정 (틀린곳은 꼬리말로...)##
-※2막-카르멘의 무대※
무대에 오르다[1장]
-서울 (Seoul)
“찾았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알아낸 거라고는 외국자본 이였다는 것 밖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원을 보며, 수혁은 책상에 걸터앉은 몸으로 시원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래도 자네가 돌아와 일이 커지기 전에 끝내지 않았어?
우리 쪽에도 문제가 생길 뻔 했는데 말이야.”
같은 그룹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보니,
시원의 아버지 회사인 혜성그룹과 계열사 사장으로 있는 수혁의 ANG회사는 하나가 무너지면 같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제가 한 것은 없습니다. 제가 오자마자 저 쪽에서 먼저 풀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건 왜 손해 보면서 까지 내 놓았나 하는 겁니다.”
“그거야 자기들 사정이지. 경쟁자 쪽이 아니라 다행이야.
이번 일을 계기로 확실한 방책이 필요 해 졌어. 흩어져 있는 채권도 전부 수거할 방법을 모색해 보자고.”
“그렇지 않아도 저희 아버지는 본교동의 부지를 내 놓으실 모양입니다.”
“그래? 우리 쪽도 어른들에게 말씀 드려보지.”
책상에서 일어서며 수혁이 실장실을 나가려 할 때, 시원이 수혁에게 말했다.
“이번 일 마무리 지어 지는 대로 이태리로 다시 가 볼 생각입니다.”
시원이 눈을 빛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수혁이 멈춰 서서 시원을 보며 대답했다.
“열흘 가까이 있다 오지 않았나?
모두 자네 걱정을 하시는데 웬만하면 다음에 갔다 오게. 지금은 쓸 때 없는 일에 매달일 때가 아니야.”
시원이 피식 웃고 수혁에게 말했다.
“저희 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하시는 군요.”
“이제 그만 인정해.
어른들도 자네 혼사를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는 중이니까 서울에 붙어 있게. 어차피 계약 결혼 아니었어?”
시원이 말없이 침묵 했다.
수혁이 그런 시원을 보고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간 후에야 시원이 혼자 말했다.
“저에겐 손해 볼 일이 없다 이 말이군요.”
허탈한 말투의 시원은 책상 위에 있는 담배 각에서 한 개비를 꺼내 신경질 적으로 불을 붙였다.
과민한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한국으로 자신을 불러들이기 위해 조작한 일인 것 같았다.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들이 있는 재떨이에 재를 털면서 시원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상황이 짜증나고 답답했다.
* * *
-로마 (Rome)
체논은 로마로 돌아와 있다는 살바체의 소식을 듣고 5층 저택인 살바체의 저택으로 발걸음 했다.
'한 여자에게 빠져 있을 놈이 아니지…'
체논은 속으로 이렇게 비웃으며 집사의 인사를 받고 살바체가 있는 2층 응접실로 향했다.
“까르르~”
“하하하“
피식 미소 짓는 체논이 입가로 작은 주름이 생겨났다.
안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는 살바체의 웃음소리가 분명 했다.
응접실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간 체논은 여자 세 명에게 둘러싸인 살바체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여어~ 예전의 살바체 프란트, 카사노바 등장인가?”
“하하하하, 어서와. 체논. 소식도 빠르군.”
“우린 언제나 한 몸 아니야? 안녕. 아가씨들“
“호호호”
정열적인 붉은 머리와 검은 머리의 여자들은 잘빠진 몸매에 유혹적인 옷을 입고 있었다.
체논이 앉을 자리를 비켜 준 여자들이 체논과 살바체의 옆에 앉아 웃고 있었다.
“모델들이야?”
“신입생 들이지. 예쁘지?”
“그렇군.”
체논이 살바체가 여자 하나의 목을 끌어당기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뭐야. 이 자식. 분위기가 틀린데?'
한 여자가 건네는 위스키를 받아 들은 체논은 살바체를 떠보며 물었다.
“길들이던 여자는 포기 한 건가?”
살바체가 체논의 말에 피식 웃고 목을 잡은 여자의 목선과 반쯤 들어난 여자의 가슴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할퀴기만 하는 여자는 흥미 없어. 여기 손만 가닥여도 오는 여자들이 천지잖아?
그 여자 보다 예쁜 가슴, 더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 그렇지?”
반쯤 취한 살바체의 말에 체논이 우습다는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좋아. 그럼 나에게 넘겨. 확실하게 교육시켜 주지.
살바체 프란트가 포기한 여자라… 구미가 당기는데?”
체논의 말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살바체가 여자의 가슴 쪽으로 향하던 손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살바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다만 여자를 옆으로 밀쳐 떨어뜨리고 체논을 노려보며 말했다.
“진심이야?”
“물론. 이 체논이 진심을 말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
“악!”
“어머!”
갑자기 벌떡 일어선 살바체가 체논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여자들이 소리치며 한걸음씩 일어나 물러섰다.
그러나 체논은 여전히 재밌다 는 표정으로 살바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시 지껄여 봐. 그 여자는 내꺼야. 알아들어?!"
체논의 얼굴은 이런 살바체가 귀엽다는 표정이었다. 멱살을 잡은 살바체를 보며 체논이 말했다.
“살바체가 가지지 못할 여자가 있었나? 그 여자 콧대한번 대단하군.
그러니 알페르노도 관심을 보이겠지만 말이야.”
체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던 살바체는 체논을 잡은 손을 놓고 여자들에게 나가라는 고갯짓을 했다.
아쉬워하는 여자들이 뒤를 돌아보며 나가고 난 뒤에 살바체가 소파에 털썩 앉아 남아있는 위스키를 잔에 따랐다.
“알페르노가 무슨 이유로?”
“글쎄. 아무래도 동양여자의 배경이 마음에 걸리시겠지.
자네에게 조금의 해가 오는 건 용납하지 않는 분 아니야?
내가 질투가 다 날 정도로 말이야.”
체논 역시 언제 살바체가 지신을 잡았냐 하는 표정으로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럼 옛 주인을 돌려보낸 사람이 알페르노였단 말이야?”
“네가 하는 일의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고 있는 사람 아니야?
거기다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 놈이라 골치 아픈 일을 많이 만들어 놓았더군.
그 여자 언제까지 잡아둘 생각이지?
빨리 보내 버리는 게 어때?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말이야.”
살바체가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이마에 손을 얹으며 눈을 감았다.
허탈한 목소리의 살바체가 혼잣말 하듯 중얼 거렸다.
“그 여자를 보고 있으면 미친 듯이 화가 치밀어. 그러다 또 실없이 웃음이 나기도 하지.
차라리 고분고분한 여자였다면, 이렇게 바보 같이 굴 일도 없었겠지?
하, 이 살바체가 한낱 공장 직원에게 질투를 하다니…!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보자 둘 다 찢어 죽이고 싶더군. 미친 게 분명하다 생각 했어.”
“더 이상 빠지고 싶지 않으면 그만 두면 될 것 아니야? 알페르노가 걱정 하는 게 바로 그거 같은데…”
“쿡쿡, 이미 늦었다면 어쩔 건데?”
체논이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살바체에게 말했다.
“그래. 너에겐 나보다 밖에 있는 여자들이 더 필요하겠어. 탁월한 선택이야.자. 이거나 받아.”
체논이 건네는 봉투를 귀찮다는 표정으로 받아들며 살바체가 체논을 쳐다보며 눈으로 뭐냐는 표정을 했다.
“‘체르니’호텔 우리 덕분에 작살이 났잖아.
그거 보상하신다는 의미로 대부가 주신 거다.”
살바체가 보지도 않고 체논에게 다시 돌려주며 이마를 문질렀다.
“필요 없어. 가져가.”
“네 애완견. 옛 주인 놈의 목덜미인데도?”
살바체가 흥미를 느끼고 서류를 내미는 체논에게서 다시 받아 안을 들여다보며 피식 웃었다.
“난 할 일을 끝마쳤으니 나가보마. 즐기라고.”
여자들을 나가며 들여보낸 체논은 집사의 배웅을 다시 한 번 받으며 살바체의 저택을 나왔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검은 승용차에 올랐다.
한참 로마시내를 달리고 있는 차 안에서 체논은 부하에게 조그만 상자 하나를 받았다.
“뭐야?”
체논의 말에 뚜껑을 대신 열고 옆에 앉은 부하가 말했다.
“이번에 충성을 맹세한 증표로 보내진 카미안의 새끼손가락입니다.”
“…….”
아직 싱싱한 피가 묻은 새끼손가락을 보고 체논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 잘 포장해 두라고. 쓸 때가 생각났어.”
* * *
희진이 갇힌 지 이틀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일쯤엔 분명 주인님이 오실 거예요.”
“미얀. 어차피 이 저택에서 갇혀 있는 거나, 이 방에 갇힌 거나 똑 같은 거 아닌가요?
연습이라도 하게 부탁해요.”
“죄송해요. 나가지 못하게 하신 걸요.”
어두워지는 희진의 표정을 보던 미얀이 금세 웃으며 희진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선물을 보내신걸 보면 금방 오실게 분명해요. 이걸 보세요.”
희진에게 잘 포장된 각진 상자 하나를 보여준 미얀이 상자를 희진에게 주려고 했다.
“좋아요. 이번엔 뭐라고 적혀 있죠? 갇혀서 행복하냐고 써 있나요?”
“음… 쪽지는 있지 않은데요?”
미얀이 상자를 두리번거리고 살펴보자,
희진이 신경질 나는 표정으로 인상을 쓰고 포장이 된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럼 전 저녁 준비하고 올라올게요.”
미얀이 나가고 난 뒤, 희진이 카나리아 쪽으로 걸어가며 포장을 풀었다.
분명 상자 안에라도 쪽지가 들어 있을 게 분명했다.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살바체는 쪽지를 보내오지 않았던가! 자신을 놀리듯이 말이다.
한 꺼풀 한 꺼풀씩 포장이 벗겨지고, 마지막으로 희진이 뚜껑을 열었을 때, 방안에 희진의 비명소리가 가득 차올랐다.
“아아 아악!”
비명을 지른 희진이 바들바들 떨며, 카펫에 굴러 간 새끼손가락을 보고 얼어붙었다.
무서워서 방울방울 눈물이 맺힌 희진의 귓가로 살바체의 음성이 생각나는 건 그때였다.
'다음엔 이 상자 안에 그 놈의 머리가 들어 있을 지도 모르니까…'
공포로 얼룩진 희진의 얼굴이 사그라질 줄 몰랐다.
* * *
장미 꽃잎으로 된 목욕제 향신료가 뜨거운 물 안에 잔뜩 들어 있는 욕조 안에, 희진은 몸을 담그고 앉아 있었다.
희진의 눈빛이 어느 때 보다 반짝였다. 꽃잎에 떠 있는 검은 머리카락들이 부드럽게 물 수면에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날 확실하게 옭아맸다고 생각하겠지? '
또렷한 눈빛 아래 희진의 입가에 비웃는 미소가 어렸다.
'살바체 프란트… 날 얕봤어.
함정에 걸린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 될 거야. 난 오페라 '카르멘'에 나오는 빨간 옷의 집시여인이 될 거고,
당신은 여자의 미친 '돈 호세'가 되겠지.
그러나 소유욕, 집착에 죽는 사람은 마지막에 내가 아니라 당신이 될 거야. 두고 봐.'
언제나 희진은 바보 같은 카르멘이라 생각했었다.
돈 호세에게 멍청하게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들켜 끝내 사랑을 죽음으로 복수당한 바보 같은 여자… 도망칠 수 없다면,
도망칠 기회가 생길 때까지 희진은 살바체를 자기 손에 쥐어 둘 계획을 세웠다.
여자가 독하게 마음을 먹으면 못 이뤄낼 일이 없다 하지 않았던가?
어느 웃긴 책에서처럼 납치당해 슬프게 사는 여자들,
능욕당해 좌절하고 목숨을 끊는 여자들,
그런 시시한 결말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 후회하게 해줄게. 철저히 후회하게 해주겠어.
날 가둬두고, 아프게 한 만큼, 백배 천배 고통하게 해주겠어.
그리고 멋지게 탈출해 주겠어.
믿어. 거짓으로 놀아 줄 테니까.
그 소유욕, 집착으로 고통 받는 모습 꼭 봐 줄 테니까!'
물에서 천천히 나온 희진의 아름다운 곡선으로 장미 꽃잎이 하나 둘 묻어 나왔다.
거울을 보며 핑크빛 수건으로 몸을 닦는 희진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무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관객이 없는 무대, 갈채를 보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해도,
이곳에서 탈출 하는 순간, 무대에서 내려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 줄 것이다.
'내가 당신에 눈에 띄게 된 게 잘못이라고 했지? 후회하게 해주겠어. 날 택한 걸…!'
희진은 이곳에 와 처음으로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시작했다.
아버지를 닮아 크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화장을 해 더욱 뚜렷하게 살아났다.
“주인님이 오시고 계세요. 거봐요. 오늘 중에 돌아오신다고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문 앞에서 호들갑스럽게 희진에게 말하는 미얀을 거들떠도 안보고 희진은 마스카라를 든 손을 내려 놨다.
거울 속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눈에 카르멘의 눈빛이 일어났다.
* * *
살바체가 희진의 방으로 들어섰을 때, 희진은 긴 머리를 풀어 빗어 내리고 있었다.
희진의 표정은 전과 같이 반가운 표정도 좋아하는 표정도 없는 무표정이었다.
“내가 왔는데 반가운 표정도 지어주지 않는 건가?”
살바체 손이 희진의 어깨를 잡았다.
희진에게서 나는 장미향에 살바체의 눈이 반짝이고 더 가까이 희진의 목 언저리로 자신의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가 댔다.
“샤넬의 장미향… 맞지?”
희진이 살바체의 말에도 의자에서 일어나 손끝으로 살바체의 가슴을 자신에게서 밀어내 떨어뜨려냈다.
살바체가 자신에게 손을 댄 희진이 놀라와 눈썹을 올렸다.
“당신에게선 다른 여자들 향수냄새가 진동을 하겠죠?
깨끗이 옷을 갈아입고 왔다 해도 말 이예요.”
살바체가 눈 옆 미간을 엄지로 만지며 살피듯 희진에게 물었다.
“후후, 질투?”
“웃기지 말아요. 질투를 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 아니었나요? 곰곰이 생각해 봤죠.
왜 도망치듯 날 가두고 이 섬을 빠져 나갔는지… 말 해봐요.
나와 말을 했다는 이유로 그 남자를 죽이기라도 했나요?”
희진이 말 할 때마다 살바체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곡을 찌르는 희진의 말이 자신의 자존심을 긁어대고 있었다.
“말 다했어?”
“아직 덜 했다면요? 그 위대한 살바체, 마피아 대부가 양아버지고,
그 부족할 것 없는 당신이 나 같은 하찮은 발레리나에게 질투를 하다니 못 견디게 싫었겠죠?
이제라도 놔주는 게 어때요? 당신의 자존심을 이제라도 지키지 그래요?”
희진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살바체가 참지 못하고 희진에게 한걸음에 다가와 팔을 움켜잡았다.
눈과 눈이 만나 불이 튀었다.
희진의 검은 눈이 반짝이며 살바체의 깊은 청색의 눈을 직시했다.
“다시 들어온 지 5분도 안되어서 날 미치도록 화나게 만드는군.
위험하다는 거 몰라서 그래?”
“여기서 더 위험할 게 있나요? 강제에, 납치에, 협박에,
당신이 내게 한 짓에 더 보탤게 있다 해도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살바체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얼마만큼 분노했는지 적나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희진은 살바체가 자신의 함정에 걸려들었음을 깨달았다.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살바체의 가슴에 희진이 손을 들어 바닥을 갔다 댔다.
'움찔'
살바체가 곧바로 반응하며 움찔하는 것을 희진은 눈을 빛내며 지켜보며
지그시 바닥을 살바체의 오르내리는 가슴에 얹었다.
“살바체. 어르고, 때리고, 벌주고 다 해봐요. 내가 당신의 것이 될까요?”
살바체의 가슴이 조금씩 내려앉았다.
차츰 호흡도 정상을 찾아 가지만, 다른 쪽은 급하게 부풀기 시작했다.
살바체가 자신의 가슴에 댄 희진의 손을 꽉 쥐고 물었다.
“완벽하게 내 것이 될 용의가 있나?”
“내게 먼저 당신을 주는 건 어때요? 바로 여기.”
희진이 눈짓으로 살바체의 가슴을 향했다가 살바체의 눈으로 다시 향했다.
고혹적인 희진의 얼굴에 살바체는 저절로 침이 말라 옴을 느꼈다.
잘 감춰진 각본에 따라 희진이 연기하듯 행동하는 게 빤히 보이는 데도,
살바체는 알면서도 희진에게 빠져 들었다.
“저기 주인님, 저녁 식사가“
미얀이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나가“
살바체가 바로 미얀을 쫓아냈다.
싱글벙글 거리며 들어 왔던 미얀이 화들짝 밖으로 도망쳤다.
“이미 네가 다 가진 듯하다면?”
“못 믿겠군요. 여전히 당신 가슴이 여기 존재하는데… 어떻게 증명 할 거죠?”
“이렇게“
곧바로 살바체의 손이 희진의 잡은 손을 끌어당기고,
다른 잘빠진 손으로 희진의 아름다운 목덜미를 가볍게 잡아끌어 입술을 가져갔다.
깨끗한 샤넬의 달콤하고 진한 장미향이 살바체의 코끝을 자극하고,
부드럽게 열리며 살바체를 반기는 희진의 혀에 녹아들었다.
서로의 혀와 체액이 아낌없이 뒤엉켰다.
살바체는 희진의 달콤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놓고는 긴 목선을 손등으로 살며시 쓸면서
유혹하듯 반쯤 감긴 희진의 눈과 감촉에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제까지 이 연극을 계속 할 생각이지?”
호기심이 잔뜩 묻어난 살바체의 직선적인 물음에도 희진은 꿈적하지 않았다.
희진의 달콤한 숨이 섞여 나오며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
“내가 퇴장할 때까지“
화요일, 1월 20
(수위소설)이지영-이태리의살바체1.txt
오전 1:52
No comments
피드 구독하기:
댓글 (Atom)






0 개의 댓글:
댓글 쓰기